월간이리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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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백림서신 - 18. 하나됨 / 글. composer B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마작 영웅전 체니 사이드 - 4. 과나 4 / 글. 사진. 장수양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사진. 철민 가을인데 어디갈까? - 김중업 다이얼로그 Ping Pong - 08. 창조 / 글. 황정운 이훈보


월간이리에서는 늘 새로운 필진을 찾고 있습니다. 차분 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림, 사진, 음악, 영화, 여행, 식믈, 곤충, 의학, 각종 기술정보 등등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이것이 될까 싶은 연재들도 가능한 연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니 연재와 관련해서 문의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친절 안내 드립니다. 이달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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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8. 하나됨

잘 지냈어? 얼마전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지. 독일에서는 국내 정치 뉴스에 밀리기도 했고 이번이 세 번째 정상회담인 만큼 예전처럼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국제 뉴스의 첫 꼭지로 다루긴 하더라.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독일도 한때 분단국가로서 냉전의 최전선의 서있던 국가였던 만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남북관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는 편이야. 공영방송에서는 남북관계나 한반도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고, 평창올림픽 이후로는 한국 문화나 사회에 대해 다루기도 했어. 사실 한국에서 독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나라’ 라고 쉽게 이야기는 하지만 자세히 파고들다 보면 우리와는 다른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다른 부분들이 모이고 모이면 전혀 다른 케이스처럼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예를 들면? 동독도 그 시절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폐쇄적이고 국민들을 감시하는 나라이긴 했지만, 적어도 북한만큼 국가 시스템 자체가 엉망이지는 않았지.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역량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가 나잖아? 공산주의에서 경제 체제에 기반했던 국가들이 결국에는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동독은 폐쇄적인 체제를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졌지.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통일로 인한 문제점은 무시할 수가 없는 모양이야. 전쟁의 상처를 빠르게 극복하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강국으로 거듭난 서독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금전적 부담과 정서적 괴리감은 통일 30주년을 맞게 되는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서 잡음을 일으키고 있고, 지금도 구 동독지역과 서독지역 간의 갈등과 경제적 격차는 저녁 뉴스와 다큐멘터리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슈이기도 해.

1. 냉전의 중심지라 단절된 곳이 많았던 베를린도 여전히 많은 곳이 공사중이야.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도 이런데, 다른 소도시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한반도의 분단 기간보다는 짧겠지만 그래도 몇 십년 간의 세월을 성별과 직업에 따른 평등이 (형식적으로라도)강조된 공산주의 사회에 익숙해진 구 동독 사람들에게는 자유 시장경제 분위기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해. 또한 구 동독 정부의 심각한 부정부패로 인한 사회간접자본(SOC)의 부실, 통계와 실사결과 간의 괴리가 심했던 산업 구조 문제 등이 통일과 함께 알려졌고, 이는 서독으로 하여금 막대한 금액의 지원이 불가피하게 만들었어. 이러한 통일 국가(독일 연방 정부)의 ‘균형 맞추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구 동독 주민들은 심리적인 박탈감과 혼란을, 구 서독 주민들에게는 제대로 된 설계 없이 선심성 정책으로 예산을 퍼주는 것 아니냐는 불만을 일으키기도 했지. 그런데 사실, 국가 경제나 정치 같은 상대적으로 큰 담론들 보다 독일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부분은 정서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어. 통일 덕분에 ‘자유’라는 소중한 선물을 얻은 구 동독 지역 사람들이지만, 통일 독일의 주축이 된 서독의 분위기에 아직까지도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는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굉장히 1)

크다고 해. 또한 낙후된 시설들과 도시 인프라가 아직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곳들이 많다보니 구 동독 지역 주민들의 마음은 더더욱 착잡할 수 밖에 없겠지.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도 늘어났고, 최근 독일에서 새롭게 대두되는 남북간 경제 격차와 난민 문제까지 가세하면서 꽤 골치 아픈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어. 우리에게도 정치, 제도, 경제적 통일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겠지. 하지만 그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조건은 ‘심리적 통일’ 아닐까 싶어.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던 두 국민들-그 중 한 쪽은 인류 역사에 기록될 폐쇄적인 국가에서 살았고-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가 된다라? 나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통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리고 독일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우리는 풀 수 있기를 또한 바라며.

우리보다 더 기반이 탄탄했던 독일이 어려움을 겪었으니, 우리 에게도 쉬운 일은 분명 아닐 거야. 하지만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과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닫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옛 동독의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케겔(Herbert Kegel)’의 음악을 같이 들어보자. 견실하고 깊이 있는 소리를 들려준 지휘자였지만, 안타깝게도 통일이 된 지 얼마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새롭게 다가올 세상에서, 누군가는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야.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Johann Sebastian Bach-Air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마작영웅전 (1981) 감독 이패권 남들이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 해서, 굳이 영화를 찾아보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 에 고의로 <마작 영웅전>을 골랐다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마작을 다룬 콘텐츠를 게임, 영 화, 만화 가리지 않고 즐겨보기 때문에 자연스 럽게 이번에도 <마작 영웅전>이라는 영화의 제 목 을 골랐다고, 그리고 필자의 취향에 걸맞은 유치한 포스터에 눈이 갔다고 솔직하게 시인할 뿐입니다. 하여 이 영화의 완성도와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 했을 때 결론을 먼저 말씀 드리자면 보지 마세요. 절대 보실만한 영화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영 화냐 궁금해하시더라도 네이버에도 정보가 나오 지 않을 겁니다. 안 나와도 될 정도의 영화입니 다. 일단 저는 충분한 경고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소중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인생의 험한 길을 걷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마작 영웅전>을 보시면 됩니다. 이야기 구조는 권선징악에 가깝지만 딱히 속 시원하다고 할만한 이야기도 없는 대결구도와 영웅들 의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작 영웅전>의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은퇴하려는 마작 고수가 소요 및 운영하고 있는 도 박장을 물려 받아 운영할 사람을 결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남편의 곁에서 머물며 일을 배웠던 젊은 숙모와 별 연관없이 해외에서 공부를 하던 마작 무지렁이 사촌이 3판 2선 승제 승부를 펼친다는 내 용입니다. 마작을 모르는 사촌이 승부에 나서려면 으로 당연히 연습을 해야겠지요? 사촌이 승부에 나서기 위해 구 마작의 영웅들을 만나 마작을 배워가는 과정이 조금 나오는 정도입니다. 이 영화의 문제라면 우선 연기가 시원치 않고 연출이 심심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동인이 되는 사 건의 스케일이 크지 않습니다. 마작방 9개 남짓을 물려 받기위한 탐욕이나 욕망이라고 해봐야 생명 이 오고가는 강력한 갈등이 일어날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더해 마작 영웅들의 능력이 이렇 다 할 것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몇가지 마작 속임수를 사용하면서 약간의 호기심을 끌지


갈등의 양대산맥. 숙모와 주인공

만 그것도 아주 기기묘묘한 수준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 그나마 영화를 보게 만드는 배우들 의 연기 또한 크게 뛰어나지 않습니다. 개그와 카리스마를 담당할 대본 또한 매력이라고 할 것이 없 는 수준입니다. 1981년 홍콩의 색감과 의복이나 도시의 느낌을 느끼고 싶은 분들을 제외하면 장점이라고 할 게 없 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야말로 망작을 즐기는 저와 같은 이들은 한 씬도 빼놓지 않고 보게 되지요. 망함을 곱씹어보는 시선에서 <마작 영웅전>을 본다면 어떨까요? 대체 이 영화는 왜 망했을까? 왜 네이버 검색에도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본다면 영화 대부분의 장면이 학습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왜 이렇게 연출을 해? 왜 여기서 이런 대사가 나와? 왜 고수 들의 교육법이 이렇게 유치하고 말도 안 되지? 긴장감을 유발하는 주인공의 고난은 왜 이렇게 가볍고 단순한 걸까? 찾으려고 들면 씬 단위로 찾을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 이 유로 저는 <마작 영웅전>을 추천하고 있는 것이고요. 혹시라도 지금까지 이 코너를 읽어왔고 슬쩍 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분이 있으시다면 어지간한 수준의 재미없는 영화를 생각하고 보시면 안 됩 니다. 클릭한 자신의 손가락을 힐난하게 될 것임을 자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점은 도박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는 점 스승을 찾아가 배운다는 부분 에서 영화는 <타짜>의 여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영향을 받았을지 안 받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엇?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 만으로도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에 남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


글. 사진. 그림. 철민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4 과나 4

나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마지막 세입자가 나간 후 집주인인 할머니가 월세 계약을 하려고 들어서였다. 집이 나가지 않자, 시기가 맞아 이사할 집을 구하고 있던 나를 동생이 설득했다. 그 때 고모를 처음 보았다. 고모는 나와 동생을 따로 불러 할머니 연세도 있으니 이럴 때 재산을 정 리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만난 그 날로 지긋지긋해진 사람이었다. 할머니와 고모는 이 문 제를 두고 긴 시간을 싸웠다. 그 집은 동생과 나의 공동명의로 떨어졌다. 동생의 주장이었다. 늦은 군입대를 한 동생이 휴가를 나오는 날 말고는 할머니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반년 간 나는 짐을 제대로 풀지 않았다. 미련이 가시지 않아 집 구하는 사이트에 접속하기도 했다. 때 로는 동생에게 울화가 치밀었지만 군대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대고 소리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꺾였다, 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래서 더 할머니와 싸우지 않도록 노력했다. 갚아줄 수 없는 거였다. 할머니가 내 피와 살을 만들었으니 갚아주려면 결국 내 피와 살을 깎아야 했다. 할머니 는 그 몸으로 성당 미사를 빠지지 않았다. 내가 동반해야 했다. 병원에 모시고 가는 것도 내 일이 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더욱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화를 내?

한 번 도저히 견딜 수 없던 날에 나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따져 물었다.

―왜 이렇게 화를 내냐구. 도대체 나한테 왜!

할머니는 나를 보지 않았다. 비스듬히, 할머니의 눈이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더듬었다. 할머 니는 주먹으로 당신 쇄골 밑을 소리나게 쳤다.

―야고보야…….

할머니가 곡을 하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낯선 이름이 아버지의 세례명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이렇게 미운데도 내가 할머니의 눈주름이 젖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유난히 힘든 한해였다.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 싫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나는 할머니 의 장례를 치르면서 낯설고 싸늘한 사람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접해야 했다. 군복을 입고 머리를 밤톨처럼 깎은 동생이 식장의 한 켠에 정승처럼 서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지만 동생은 내 앞 에서 울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울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튀 어나와서 나를 마구 때리는 것 같았다. 이마를 바닥에 내려놓고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누나, 미안해.


아마 나는 동생에게 무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딘가에 눌러 놨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지 는 것 같았다. 모두 망가진 말들이어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동생은 묵묵히 들었다. 나는 붉고 추 한 얼굴로 부조금을 세고 장부를 정리했다. 우습지만 장례가 끝나고 나는 이제야 동생과 한 배 를 탔다고 느꼈다.

고모가 가끔 집에 찾아왔다.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모의 애인이 만들었다는 화과자를 명절마다 받았다. 고모는 자주 애인 자랑을 했다. 주로 동생이 맞장 구를 쳤다. 나와 동생은 고모에게 애인과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서 다큐멘 터리를 보던 고모는 자주 ―저애 내가 입양하고 싶다.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방송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에도 몇 번인가 내 보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블로그를 관리 했고, 그 와중에 새로 아이디를 파서 내 일상과 글을 업데이트하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포털 사 이트 메인에 내 포스팅이 오른 적도 있었다. 새벽에 물 마시러 간 부엌에서 동생이 깨어 있는 것 을 보았다. 동생은 식탁 위에 노트북을 놓고 내 블로그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일을 모른 척했다. 미국에서 Q가 엽서를 보내왔다. 미용 가위를 입에 물고 있는 장난스러운 사진도 함께 왔다. 여전히 멍하고 앳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단단해 보였다.

돈이 많아졌어요. 여기서는 미용사들 시급이 엄청 세요. 헤어디자이너를 한 명의 아티스트로 대우해 주거든요. 꼭 저한테만 머리하려고 하는 손님들이 많아요. 미국 사람들은 동양인들이 섬 세한 일에 강하다고 생각을 하나봐요. 재밌죠. 근데 저 진짜 섬세해졌어요. 제가 봐도 머릴 잘해 요. 제 이름으로 헤어 샵을 내면 놀러오세요. -답장 안해도 이상 무-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적혀있는 sns주소로 접속해서 사진을 보긴 했다. Q는 내가 아무 응답 이 없어도 계속 엽서를 보냈다. 그 끈질김에 결국 Q와 교양시간에 낙서했던 공책들을 미국으로 부쳤다. 내가 자주 읽던 공책이었다. 밤에 나는 그 공책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지만 이미 미국 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 사실 -를 엄청 사랑하는구나.” 성유 언니가 말했다. 나는 라디오를 껐다. 언니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 다. 발갛게 부은 발에는 구두가 그대로 신겨 있었다. 나는 언니의 구두를 벗겨주고 똑바로 눕혀 주려고 다가갔다. 우리는 불꽃 축제에서 오래 걸었다. 성유 언니는 서울 하늘이 처음으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다음 주말에는 아이의 졸업식에 가기로 했다. 나는 그런 미래를 본다. 처음부터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잠이 들기 전에 나는 침대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감마였다. 나는 그를 매우 반 겼다. 나는 눈을 감았다. 망각은 모든 것을 반짝이게 해주었다. 끝



서울을 돌아다니는 동안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목포에서도 그런일이 있었고 휴가차 떠 난 부산의 어느 방에서 창문을 열었을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을 본 일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다 뭔가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김중업 다이얼로그>라는 전시에 가보니 그것들이 모두 건축가 김중업의 결과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호기심을 가졌던 것들을 한사람이 만들었을까 싶더 군요. 제가 찬사를 한다고 해서 세간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결 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저는 세상의 찬사와는 별개로 저만의 치켜세움을 주고 싶습니다. 비록 저와 살아가는시대는 다르지만 한 사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결과물을 보다 쉽고 깊게 접근할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합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점에서는 8월 30일부터 12월 16일까지 <김중업 다 이얼로그>라는 전시를 진행하고 있습 니다. 우선 전시 소개를 일부 옮겨봅 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한국 현대 건축의 신화적 인물인 건축가 김중업 을 조망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동 안 김중업에 관한 피상적인 진단과 신 화화된 측면과는 거리를 두고,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매개로 그동안 논의되 지 않았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작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전시다. 김 중업의 타계 3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전시는 한국 현대 건축 전시 를 꾸준히 기획해온 국립현대미술관 이 김중업건축박물관과 공동으로 준 비했다.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 전반을 조망하는 첫 대규모 전시로서, 김중업 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국립현대미술 관의 아카이브, 그리고 건물주로부터 대여한 자료들과 사진 및 영상 신작으로 구성했다. 1922 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실무를 한 뒤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하고자 한 건축가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 를 기반으로 한국 문화예술계 중심에서 활동하며 예술가 들을 후원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오랜 기간 진행했 다. 한국에서 최초의 건축 전시회를 열기도 한 김중업은 전시라는 문화양식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실천한 사 람이다. 그는 건축을 건물로 한정하지 않고 담론의 문제로 보고 예술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했 다. 그러한 사유의 흔적은 그가 남긴 이미지 아카이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전시의 의미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앞의 소개글에서 볼 수 있듯 여러 전 시 자료를 모아 생애 작품 전반을 조망할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건축은 예술의 일부이긴 하지만 보통의 작업들과는 다르게 작가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각 작품들이 드문 드문 떨어져 있어서 건물들 사이의 연 관 관계를 직관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것을 생각하면 이것들을 모아놓고 볼 수 있는 자리는 무척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습니다. 흔한 전시라면 이것은 이렇다 할 것이 없는 작가 인생의 전반을 볼 수 있는 전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건축은 조금 이야기가 다르죠. 그래서였는지 이번 전시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가의 일생의 작품들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예술가 한명을 돌아보는 의미 뿐만아니라 여느 예술 작품들과는 달리 건 축물이 갖고 있는 필연적인 숙명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건물은 소모되고 결국은 수명을 다하니까요. 전시를 하고 있는 김중업의 작품도 그렇습니다. 일부 건물은 부식되어 수선을 해야 하기도 했 고 주인의 경제적인 이유로 부숴져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동시대의 건축가를 다룬다면 아마 이런 감각이 절절히 와닿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김중업은 이미 세상에 없고 그의 작품은 새롭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작품들은 노천에 노출된채 서서히 소모되어 갑니다. 보통의 예술 작품들이라 면 가치를 인정받는 순간 더욱 훼손을 입지 않기 위해 격리되고 감춰지지만 건축은 그럴 수 없는 것이기 때 문에 아무리 소중히 다뤄도 소모되고 스러지기 마련입니다. 일부는 물리적인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맨 땅 을 이용하기 위해 부숴지기도 합니다. 건축이 의뢰를 받아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건축물은 이미 완성되기 전부터 작가의 손을 떠난다 는 이야기 이기도 하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세간의 명성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 고 스쳐간다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남겨진 건축물은 저처럼 도시를 떠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기도 하고 주인의 자부심이 되기도 하고 또 공간을 공유하는 지역 단위의 사람들에게 흡족함을 주기도 합니다. 시작부터 공공의 영 역을 안고 가는 셈입니다. 단순히 공공기관에서 돈을 지불해서 만 드는 공공건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건축은 국가의 토지라는 공공의 자산을 점유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공공의 성격을 갖고 있 는 것이죠. 김중업의 작품들과 인터뷰를 보고있다면 그것을 이해하 는 것이 건축가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시는 개별 건축물들이 훌륭 해서 걷다가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 일부러 찾아가 볼만도 하고 또 회자될만한 것과는 별개로 한 건축가의 작품이 공공의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되어 오랜시간 마을의 정서를 구축해 간다는 측면을 생각해 봤을 때 건축가의 역할 은 무엇인가를 곱씹어보기에도 좋습니다. 전시를 즐겨보고 또 추천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전시는 분명 볼만 합니다. 꼼꼼히 볼 만 합니다. 글 e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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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弄談)’ 황정운

이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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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신간 도서 중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 것인데, 모두가 책을 향해 감탄과 찬사를 보낼 때 그 행렬에 끼어 걸어가는 제 모습이 어딘가 무서워 보였습니다. 신 간도서 인기가 잠잠해지면 그제야 서점을 찾아, 읽어 볼만한 책인지 아닌지를 가늠합니다. 그 래서인지 요즘 열풍이었던 유시민 <역사의 역사>, 정재승 <열두 발자국>의 책은 표지만 훑어 보고 아직 손에 잡아보지도 않았네요. 나쁜 버릇이 하나 더 있군요. 특정 작가의 책을 읽을 때 대표작이 아니라 주변 책부터 읽어보는 겁니다. 이 역시 남들과 같은 행렬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겠죠. 때문에 체코를 대표하는 밀란 쿤데라 작가의 책을 읽을 때 그의 대표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 그의 데뷔작 <농담La Plaisanterie)>을 먼저 읽었던 기억이 납 니다. 어제 퇴근 길에 리커버북으로 다시 출간된 밀란 쿤데라의 책을 보았습니다. 이번 호의 주 제, 농담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농담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저에 대해 조금 설명을 드리지 않으면 안되겠죠. 2년 전 점심 시간 이 생각납니다. 걷기에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이 오면 점심시간에 한 시간 회사 주변을 걷곤 했는데요. 그 날은 직장 동료와 함께 종로 직장에서 출발해서 광화문을 지나 영추문을 지 나 청와대 앞 효자동 삼거리까지 걸어 갔다가 돌아왔어요. 다시 돌아 내려오는 길. 국립고궁박 물관 근처 횡단보도에 서서 그 즈음 고민하던 걸 서로 이야기했어요. 저는 액션과 리액션에 대 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의 아이디어를 편집해서 그럴싸한 보고서로 만드는 것은 잘 할 수 있는데, 내가 먼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액션은 하지 못하고 남의 액션에 리액션을 보이는 것이 꼭 누군가에게 기생( 寄生)하는 것 같다는 자조감이었어요. 회사에선 잘 듣는 편이었어요. 왜냐하면 먼저 꺼낼 말이 많지 않았거든요. 반작용의 삶. 직장 7년차 당시의 고민이었습니다.

직장에서의 고민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을 무렵, 회사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 람들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을 하며 안면을 텄지만 사사로이 만난 적이 없었는 데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대화가 또 기억납니다. 광통교를 지나는 데 누군가 ‘제가 의 외로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러니까 언뜻 보기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데 대화를 나 누어보면 의외로 재미있다는 뜻이겠죠. 이런 문장이 저에게만 허락될 만큼 제가 특별한 성격 은 아님을 알겠습니다만. 저는 스스로 한 번도 재미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고 오히려 재미없 는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낙인을 찍어왔던 것 같아요. 반면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제 자신도 일


할 때의 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재치 있는 농담을 꺼내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는 못했지만, 누군가 재치 있는 말을 꺼냈을 때 몇 마디 말을 보태어 그 농담이 더욱 풍성해지 게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농담도 누군가의 농담에 기생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시간이 좀 더 흘렀습니다. 직장에서의 고민은 이제 완연히 없어졌습니다. 먼저 아이디어를 내 고 사람들을 이끌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지는 못해도, 누군가 내놓은 아이디어를 섬세하게 다 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문서를 잘 만들어주는 것도 나름대로 필요한 것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반작용은 작용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방향이 다 를 뿐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진하는 그 나름의 작용이라고 믿었습니다. 농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농담에 기생하여 나의 농담을 건네는 것 역시 그 나름대로는 어떻게든 어디로든 발산하려 는 무의식의 작용 아닌가 싶습니다. 아, 그렇게 보면 농담만큼은 제 안에서 작용과 반작용이 끊 임없이 격돌하며 마찰하는 전장 터군요. 큰 재미가 없더라도 진중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살아 가고 싶다는 작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재미없는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싶진 않다며 농담을 건네는 반작용. 뉴턴의 세 번째 운동법칙은 제 정신 세계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볼까요. 밀란 쿤데라의 책을 보며 농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고 했습니 다. <농담>은 1948년 체코 공산혁명 직후 혁명적 낙관주의가 강요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 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여자 친구 마르케타에게 혁명을 비꼬는 농담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가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죠. 농담 한 마디 했다가 ...... 문장이 떠오르는 삶입니다. 농담(弄 談). 사전적으로는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말입니다.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어떤 결과를 초 래할 것인지 두려워하거나,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어떤 위트를 시의 적절하게 꺼낼 것인지 늘 재단해야 한다면 슬프기만 할 겁니다. 의미로 가득한 삶에서 의미 없는 공백을 갖자는 것. 그것이 농담의 실체라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담을 꺼내는 나뿐만 아니라 농담을 듣고 웃어줄 당신들 모두 한없이 마음이 풀어진 채 무심코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 죠. 나와 타자 둘 다 말이죠. 작용과 반작용이군요. 쿵하면 짝하는.

한 아이가 뛰어간다

하늘은 늘 회색이었다

건성건성 누군가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한 세기가 무심코 웃고 있었다

- 최승자 시인의 <한 아이가>

황정운 글을 읽고 씁니다.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https://marill00.blog.me/ 에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돌아온 공

정운님께.

안녕하세요 정운님.

농담이라는 주제를 받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보니 문득 과거에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가 떠오르더군요. 당시에는 네이버 블로그 초기여서 홍보용으로 쓰기보다는 각자가 주절거리는 용도로 썼던 것 같습니다. PC통신 시기를 지나 게시판이 아닌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었죠. 싸이월드 미니홈피와도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얀 노트를 열어두고 뭔가는 쓰고 싶은데 아는 것은 없고 그렇다고 딱히 노력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몇 장 올리거나 그럴싸한 리뷰 따위를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무래도 금방 지루해지죠. 딱히 알아주는 이가 없는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은 쓸쓸하기도 하고 잘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어서 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 또 블로그라는 것은 열어두었고 몇 되지 않는 블로그 이웃들도 있었으니 뭔가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농담 코너를 운영했었습니다.

당시 제 블로그에서 농담을 담당했던 게시판 이름은 ‘오늘의 농담’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자못 유치한 말들. 지금이라면 트위터에 지나가는 말처럼 한 두 줄 끄적거릴 이야기를 남겨 놓곤 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재미있고 또 어떤 것들은 심심한 그런 글들을 매일 적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콘셉트를 잡고 운영하는 이가 별로 없어서 게시판을 재미있게 봐주던 분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농담이라는 것이 보통 커뮤니케이션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런지 집에 혼자 앉아서 블로그 업데이트를 하면서 농담을 하는 게 쉽지는 않더군요. 한 3개월 정도 하니까 재미도 없고 의무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리기는 잘해도 수습이 약한 저로서는 언제 끝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코너명은 여전히 마음에 들었지만 콘텐츠를 채울 여력과 열의가 부족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흐지부지 운영을 하다 말았는데 그만두고 한참 뒤에도 애착은 남아서 그것들을 모아서 오늘의 농담이라는 소책자로 만들기도 했었으니 나쁘지는 않은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오늘의 농담을 연재하던 시절의 재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스트레스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게시판 이름을 가진 정식 코너인 만큼 어느 정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재미있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서 농담이라고 느낄만한 날카로운 한 줄을 뽑아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젊으시절이라 밖에서 조금 놀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버려 오늘의 농담을 채우지 못한 죄책감도 있었습니다. 웃자고 시작한 일이 죽자는 마무리로 수렴하고 있으니 막판에는 울며 겨자먹기로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뜬금 없지만 그런 경험을 반복해서 하다보니 오래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더군요. 농담도 여유를 가지고 즐기고 나누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이나 정서적 평화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지속가능한 배경을 만드는 것에 보다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일을 진행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편리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관여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적은 수고를 들이면서 농담처럼 오래 할 수 있는 구조를 짜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무슨 이익이 남는 일들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겠죠. 돈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때는 작은 스트레스도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게 어쩌면 저의 오랜 농담의 결론일 수도 있겠네요. 겪고보니 그렇게 재미있겠다. 할 수 있겠다 마음먹었던 즐거운 일도 고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말 즐겁기만 한 것은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아니면 조금 괴로운 것은 참아야 진정 삶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죄송합니다. 이제는 제가 본래는 엄청 가벼운 사람인데 글만 쓰면 이렇게 겉멋이 들어서 진지해지고 마네요. 이달에도 좋은 주제 감사드립니다.

ps. 저도 베스트셀러는 잘 읽고 있지 않습니다. (아, 다른책도 안읽고 있네요 ㅜㅜ )

이훈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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