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컨퍼런스북_체인지온@미디토리_반딧불들의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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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8일 (금)

반딧불들의 접속

발행일 2022년 12월 20일 발행처 미디토리 협동조합

녹취 원고 : 김영 디자인 : 박정원

이 책은 체인지온@미디토리 강사 발표문과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비매품입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이미지는 미디토리협동조합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다음세대재단, 카카오임팩트,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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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폭풍우에 잠길 물방울들:

발터 벤야민의 ‘실패’에 대하여

이수경 (부산대 철학과 강사)

미디어로 기록하고 연대하며 살아가기 김설해 (생활교육공동체 ‘공룡’ 활동가)

농성장 다이어리

배성민 (<현장의 힘> 저자)

수정하는 ‘삶, 쓰기’

이소영 (글쓰기 강사)

00의 집, 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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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드러나기,
이상석,
반딧불들의
지역에서
8 20 32 46 58 70 42 주제발표 사례발표
사례발표 2부 반딧불들의
(우만컴퍼니 대표)
나아가기
서홍석 (송국클럽하우스)
‘요즘고민’
활동하시면서 고민되거나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1부
접속
작고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일지라도 반딧불들이 모이면, 캄캄 한 숲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작지 만 선한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 콘텐츠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지 고 있습니다. 2022 체인지온@미디토리의 주제는 ‘반딧불들의 접속’입니다. 크고 작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영리 미디어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느낀 미디어의 힘과 그것이 만들어내 는 화학적 변화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산 지역 반딧불들이 접속하며 서로의
벤야민의 말처럼 우리의 끝없는 ‘실패’가 땀과 눈물로 다시금 ‘부활’하여 어 딘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미디토리도 곁에서 함께 하겠 습니다.
체인지온@미디토리 PM 박지선 드림.
빛으로 재충전한 시간이 되었 길 바랍니다.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강연내용과 현장의 질의 응답을 정리하였습니다. 반딧불들이 서로를 향해 내뿜는 빛의 향연으로 온기 가득했던 그 날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대학교 여성연구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최나현입니다. 저는 이번 체인지온@ 기획을 함께 하고 오늘 사회까지 맡았습니다. 본격적으로 행사 시작하기 전에 체인지온 행사 취지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체인지온 컨퍼런스’는 공익적 활동을 하는 비영리 단체들이 미디어를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 고, 사회 변화의 원동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과 정보를 나누기 위해 다음세 대재단이 준비하는 컨퍼런스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음세대재단은 지역 활동가들의 지원에도 힘쓰고 있 습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영리 기관 및 단체에게 체인지온 컨퍼런스의 운영 노하우와 비용을 지원 하여 지역의 활동사례와 고민이 꾸준히 논의되고 발굴될 수 있도록 지역 세미나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부산의 시민운동지원센터에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부산에서 비영리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과 공익 활동가들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디토리는 여러 기관의 지원을 토대로 2011년부터 매년 부산비영리미디어컨퍼런스를 개 최하고 있습니다. 부산이라는 지역, 비수도권이라는 공간에서 미디어를 활용하고 대안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과 활동가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체인지온@ 행사 제목을 “반딧불들의 접속”이라고 정했는데요. 반딧불은 아주 큰 빛이 아니라 희미하고 깜빡깜빡 거리지만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 볼 수 있는 빛이죠. 아주 작은 빛이지만 모이면 지금처럼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요.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우리는 멀리서도 반딧불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불빛들이 모여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작은 빛들이 서로 접속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으로 “반딧불들의 접속”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반딧불들은 대안미디어 활동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공익적인 단체에서 일하고 계 시는 분들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주류 미디어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고 싶어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사례 발표는 노동, 환경, 장애, 여성,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듣게 될 텐데요. 지금 말씀드 린 키워드들은 여기 계신 분들은 중요하게 여기는 키워드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내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지?’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주제들입니다. 우리가 관심이 없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너무 제한적이어서 몰랐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다양 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들을 수 있는 이 자리가 너무 소중합니다. 1부에서는 당사자가 아닌 내가 중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신 분들의 사 례라면 2부에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말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분들의 사례 입니다.

주제발표
부산대 철학과 강사 며칠 전 빈곤철폐의 날, 거리에서 들었던 말들을 외우며 지냅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들과 거리의 이야기를 잇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내 폭풍우에 잠길 물방울들: 발터 벤야민의 ‘실패’에 대하여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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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들을 부활의 술책이라 말하는

벤야민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명성 없는 명예에 대해/광휘 없는 위대함에 대해/보상 없는 존엄에 대해 벤야민, 독일인들 -일련의 편지들(선집12)의 제사

안녕하세요. “반딧불들의 접속”에서 문을 여는 역할을 맡은 이수경입니다.

각자의 현장에서 길러낸 귀한 이야기들을 들을 생각에 기쁨과 설렘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반딧불들의 만남을 여는 첫머리에 “실패”라는 말을 두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럼에도 이 글의 제목에 실패라는 말을 붙인 것은 제가 오늘 소개해드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이라는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면모 가운데 ‘싸우는 자’로서, 또한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싸우는 자’로서 벤야민을 소개하고 그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100년 전 사람이고 독일 유대인이었습니다. 청년 대학생 시절, 벤야민이 싸워왔던 것은 “영구하는 정신의 혁명”이었어요. “정신의 혁명”은 그 당시 19세기 말 산업혁명으로 철도가 놓이고 상 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산업이 굉장히 발달하고 삶의 속도가 지금의 현대의 속도를 갖추게 되는 때였 는데요. 아버지 세대, 자수성가한 세대, 산업적으로 붐을 일으킨 세대들이 제도를 통해서 자녀들을 통제 하고 시민들을 길러내는 여러 가지 제도들을 만들어냈죠. 학교라든가 감옥이라든가 병원 등 현대식 구 조를 갖춘 근대적인 제도들이 갖춰지는 때였어요. 이때 대학생들은 어떤 것에 분노하고 반항하기 시작 하였을까요? 발표자료 :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2547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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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가 살겠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통제에 대해 분노하게 된 이들에게 “비순응주의”는 혁명의 원칙이었어요. “나는 순응하지 않는다. 이 제 도와 이 부(富)와 이 찬란한 문화들에 순응하지 않겠다. 그리고 스스로 내가 책임지는 내면의 참된 삶을 살겠다.” 이것이 벤야민이 처음으로 한 운동입니다. 그러다가 1914년에 1차 대전이 일어났고 전쟁을 겪은 독일은 패망하여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겪습니 다. 실업률이 하루하루 100%씩 올라갔고 굶주림도 굉장히 심했어요. 이 때 독일도 한 번의 기회가 왔었 어요.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사람과 더불어 1919년에 독일 혁명이 일어났지만 실패로 끝나고 독일은 점 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1920년대 이 후 사람들이 “못 살겠다”며 거리로 뛰어나왔어요. 시위가 매일같이 있었고 그중 일부가 히틀러였어요. 히틀러도 “못 살겠다”고 외치는 세력 중에 하나였는데요. 이들의 논 리는 그때도 반유대주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상점을 부수거나 거리에서 유대인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 지요. 하지만 벤야민이 활동하던 192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세력은 굉장히 소수였어요. 히 틀러가 폭력을 행사할 때 사람들은 그걸 제지했고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이들 을 구금하는 게 가능했던 때였거든요. 하지만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히틀러 세력의 주장 에 동의를 하게 되고 그 세력을 불려가기 시작해요. 그래서 1920년대에도 벤야민의 많은 유대인 친구들 은 독일을 떠났어요. “더 이상은 여기에서 있을 수 없다. 너도 위험하다 떠나자”고 했을 때 벤야민은 늘 “ 나는 떠나지 않고 여기서 싸울 것이다.”라고 얘기 했어요. “내가 독일의 국민이어서도 아니고 독일의 어 떤 민족성 때문도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 내가 애증 했던 것, 내 삶을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다 여기 에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싸울 거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하지만 1932년 히틀러 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결국에는 추방이자 탈출인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게 돼요. 그리고 자신이 생을 스 스로 마감했던 1940년까지 독일로 돌아오지 못해요. 발터 벤야민의 두 가지 전략 :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힘

1) 새로운 매체인 ‘영상’

벤야민은 자신에게 부를 준 부모들 세대가 살았던 19세기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쓴 책이 두 권인데요. 벤야민은 망명을 다니면서 원고를 씁니다. 그래서 출간이 쉽게 되지 않았어요. 두 권 중『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만이 1930년대에 출간이 됐어요. 이 책은 아우라의 붕괴, 예술의 가치가 19세기 영상 예술이 등장하면서 어떻게 변하였는가, 무엇을 바꿨는가를 말하는데요. 이 책에서 벤야민이 가장 주목했던 것은 “대중”이었어요. 예술을 향유할 수 없었던 자들, 이름 없는 자들, 권력을 줄 수 없었던 사 람들이 기술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 예술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대중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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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지점에 주목한 벤야민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예전에 는 왕이나 권력자의 얼굴을 우리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마주치게 되더라도 고개를 숙여 야 하잖아요. 그런데 사진이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보기 싫어도 매일같이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죠. 이런 지점이 민중들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 책에서 말합니다. 권력자의 사진을 찢어 버릴 수 있는 것, 그 사진을 떼어버릴 수 있는 것, 이 힘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했죠. 그것을 굉 장히 중요한 힘으로 여겼습니다. 그 당시에 러시아가 시도하고 있는 영화들, 사진 예술들을 보면서 글을 쓰게 되었는데요. 이것이 첫 번째 전략이었습니다. 최신의 미디어, 최신 매체인 영상이 민중들에게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2) 오래된 매체인 ‘편지’

벤야민이 싸웠던 적: 전쟁과 자본주의 그리고 파시즘

벤야민의 친구

『독일인들』이란 책은 독일에 보내는 두 번째 이야기예요. 독일 사회에 남아 있던 독일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글을 썼습니다. 이 책은 18세기~19세기 독일에 있던 아주 오래된 편지들을 선정하여 25편을 실었습니다. 히틀러 나치가 게르만족을 표상하는 독일인 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이 책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세력의 말을 믿지 않고 그것을 뿌리칠 수 있 는 용감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독일인의 태도를 담았어요. 25명의 편지에는 투쟁하는 사람들 의 태도가 담겨 있고 이를 하나하나 선택한 벤야민은 논평을 달았습니다. 벤야민은 독일에 남아 싸우려 는 이들에게 꼭 닿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썼고『독일인들』이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썼다 고 합니다. 벤야민은 이렇게 싸움을 해왔습니다. 벤야민이 싸웠던 ‘적’은 바로 전쟁과 자본주의 그리고 나치즘(파시즘)이었습니다. “실패”라는 말은 이 적의 이름 앞에서 ‘억압받은 이들’이 겪었을 일들을 뼈아프게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실패라고 말하는 한, 결코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역시 기억하게 합니다.1) 실패는 단 한 번의 이기지 못한 싸움 이 아니라 적에 맞섰던 이들의 ‘수천 번의 저항’, ‘수천 번의

시에 적힌 말들을 따라 읽다가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그 는 모든 길이 늪을 향해 나있던 자신의 시대를, 나무에 대한 이야기조차 그것이 수많은 참상에 대한 침 묵을 의미하기에 범죄였던 시대를, 사라지라는 절멸의 목소리에 맞서야 했던 이들의 일상을 기억해 달 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1) 브레히트의 시,「후손들에게」살아남은 자의 슬픔 2)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17a.(미카엘 뢰비, 터 벤야민: 화재경보, , 양창렬 옮김, 난장, 2017,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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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2)
인 브레히트가「후손들에게」보내온 편지이자

그 물음은 뼈를 수습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상북도 경산에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코발트 광산이 있습니다. 수직의 갱도가 아파트 20층 정도의 깊이로 아주 깊은 동굴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 갱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3000명이 넘는 이들의 뼈가 뒤엉킨 채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70년이란 영원과도 같은 시간동안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뼈들을 수습할 수 있을 까요? 그 뼈를 수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실질적으로 이를 수습하는 것은 우리의 행정 제도의 일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예산 편성의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에서 뼈를 수 습하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가장 멀리 있습니다. 예산을 편성 받지 못하면 작업은 중단됩니다. 다행히 예 산과 행정이 닿아 동굴의 얕은 곳에 있던 뼈들은 수습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습된’ 뼈 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뼈들은 여러 군데 나누어져 어느 대학 박물관 창고 한 켠에 또다시 가두어 져 있습니다. 그 뼈를 가두는 말들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말이 아니기 않기 때문입니다. “집값을 떨어뜨리는 혐오시설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2014년〈그것이 알고 싶다> 에서 다 뤘던 이야기로 뼈는 아직도 수습이 되지 않고 있다) 다시 뼈를 수습하는 일을 생각합니다. 뼈를 주워 거두는 일. 수습이라는 한자는 매듭들이 묶인 줄의 모 양에서 나온 글자라고 합니다. 수습은 작은 줄들을 엮어 닿아 보듬어 거두는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 습니다. 얼마나 많은 매듭들을 엮어야 뼈에 닿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제도와 말들이 바뀌지 않 는 한 영영 그 뼈에 닿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작은 매듭들을 엮어야만 뼈에 닿을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작은 생활들을 엮어야만 뼈에 담긴 이야기들이 놓일 자리가 생겨난다 는 것 입니다. 수습은 발터 벤야민의 ‘구제비평(rettende Kritik)’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제비 평’은 비평의 대상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비판하는 칼질의 글쓰기가 아니라 그것을 구제하는 보듬고 되 살리는 글쓰기입니다. (독일어 retten은 살리고, 구조하고, 해방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벤야민 의 말처럼 과거를 떨치고 나아가는 것을 발전으로 여기는 진보의 시간, 진보의 역사 속에는 뒤엉킨 뼈 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이 놓일 자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수습과 구제라는 손길과 눈길 속에서 확보 되는 것일 테지요. 벤야민은 그 시대 누렸던 부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기 위해서 19세기로 향합니다. 그래서 벤야민 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몸이 연루되어 있는 과거를 향해서 뒤로 돌아볼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등 뒤에 있 는 사라지고 잊혀진 이름 없는 이들의 기억, 실패한 투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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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과 구제
싸움들을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띠고 힘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없다.”
억압받은 이들의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들과 실현되지 못한 약속들, 지는
‘현재화’(Aktualitaet: 현재성을

비밀스런 힘들이 담겨 있는 아카이브는 ‘혁명의 원천’

매년 75km씩 늘어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이야기들에 대한 작업입니다. 아카이브들은 결겹한 현장들, 그 현장들을 이어서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에게 닿고자 하는 수많은 발신지 들. 현장의 힘들, 지혜와 꾀와 술책들이 담겨있거든요. 그래서 비밀스런 힘들이 담겨 있는 아카이브들을 벤야민은 ‘혁명의 원천 (quelle, arche)’이라 불렀습니다. 비밀스럽다는 말은 벤야민의 말인데요. 내면 에 있기 때문에 비밀스럽다는 게 아니라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가 은폐시키고 추방하고 삭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비밀스럽게만 전달되고 있는 힘들을 의미합니다. 이 비밀스런 힘들, 즉 아카이브들을 혁명의 원 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천이란 말이 독일어로 두 가지인데 크웰레(quelle)라는 것과 아르케(arche)라 는 게 있어요. 아카이브라는 것의 어원이기도 한 아르케(arche)를 벤야민도 혁명의 원천, 샘, 우리의 꾀 와 실패한 투쟁들, 그리고 사람들의 소망들이 담겨 있는 원천이라고 들었습니다.

을 줘서 불러일으켜지는 것들)하기 위해서입니다. 곧잘 인용되곤 하는 벤야민의 유명한 문장 “동시에 야 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 기록은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찬란한 문화의 기록이 소수의 천재들 이름만을 기억할 때 그 이름 곁에는 언제나 누락되고 삭제되고 비가시화 되는 “이름 없는 이들의 노역”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문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야기하는 구체적인 생생한 사례 발표에서 느낄 수 있을 텐데요. “기억투쟁”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글들, 카메라에 담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야만의 기록’과 다 른 역사기술과 아카이브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작업들은 대항 역사(counter history : 주 먹을 쥐고 때리는 것, 찬란한 문화들의 기록을 부수는 것), 대항-기억, 대안기억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쉬이 가시화되지도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들에 대한 기록들은 남김없이 우리에게 주고자 합니다.『아 카이브 취향』의 저자인 아를레트 파르주(18세기 형사재판 문서를 통해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말처럼 아카이브가 매년 75km씩 늘어난대요. 우리의 기록이 그만큼 쌓여가지만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잖아요. 그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계속 늘어나는 이야기들을 마주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실패는 이내 부활의 술책들이 가득한 힘들의 장소가 됩니다.

됩니다.

아직 무엇도 끝나

것은 승자들의 전리품이 될 수 없는 “정신적인 힘들(확신, 용기, 유머, 기지, 불굴의 의지, 투쟁 에 임하는 이들의 태도들)”이 투쟁의 현장들 가운데 있다는 걸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3) 그리하여 실 패는 대항-역사의 이야기들이 비로소 역사가 되는 날까지 ‘다시’ 수천 번의 ‘다시’의 장소가 됩니다. 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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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부활의 술책들이
실패는
가득한 힘들의 장소가
실패로 불리는 가운데,
지 않은

민에게 실패란 승리(현실을 지배하는 힘)를 의문시하는 힘들이 조직되는 현장, 그러니까 ‘부활’과 ‘다시’

의 현장인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하루의 뒤를 돌아봅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하루를 돌아봅니다. 나를 있게 만들었 던 이야기들과 그것을 들려준 이들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여전히 그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데 무수히 많은 것들이 사라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벤야민의 말을 따라서 뒤로 돌아가서 사 라짐 속에, 덧없음 속에 있는 우리의 원천들(quelle)’을 기억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반딧불들의 접속도 그러한 만남이리라 생각합니다.

“자연의 원천은 버려진 개울로부터, 이름 없는 습기로부터, 거의 메말라 버린 수맥으로부터 공급된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의 원천들 또한 그러하다. 그것들은 숱하게 불려지는 ‘영향력’으로는 살 지 않으며, 씨앗과 피가 솟아나는 큰 열정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또한 고단한 나날의 땀과 감격하여 흐 르는 눈물로 살아간다. 이내 폭풍우 속에 잠길 물방울들” 4) 저는 벤야민의 이 글을 읽으면서 ‘남세균’이 생각났는데요. 지구에 산소가 없었던 시절에 산소를 제일 처음 이제 일으켰던 세균을 ‘남세균’이라고 하는데요. 굉장히 멋진 모양으로 아직까지 산소를 만들어내 고 암석화로도 남아 있더라고요. 최초에는 아주 작은 세균이 지구의 산소로 만들어낸 거거든요. 메말라 버린 수맥으로부터 자연의 원천이 공급되는데 벤야민이 봤을 때 이와 꼭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것의 원 천들은 숱하게 불리는 영향력, 문화에 있는 찬란함, 빛들을 말하는 이야기인데요. 이렇게 고단한 나날의 땀과 눈물이라는 게 사실은 제목에 있는 물방울들을 의미해요. 거기야말로 우리의 혁명의 원천이 있는 곳이고 투쟁에 임하는 그들의 태도와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접속하는 것만이 사실은 우리가 ‘다시’ 무엇 보다도 ‘다시’ 할 힘을 주는 곳입니다.

3)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테제4번.(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양창렬 옮김, 난장, 2017, 80쪽)

4) 벤야민「독일인들 –일련의 편지들(선집12)」임석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22, 121쪽. 번역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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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들을 보면서 연사님에게 의미 있었던 거리 현장은 어디였나요?

A. 예전부터 발터 벤야민에 대한 관심은 많았지만 전공을 하고 있지는 않았었거든요. 부산 “만덕5지구 재개발 투쟁”을 제가 곁에서 보면서 발터 벤야민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벤야민을 읽을 때 이 곳과 연결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만덕 5지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 떤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는 사람이었죠. 벤야민이 19세기를 돌아볼 때 파시즘과 자 본주의를 연결시키거든요. 제가 만덕5지구 투쟁을 보면서도 아직도 우리가 싸워야 될 고리도 거기에 있 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는 하이데거를 전공했어요. 하이데거는 그 자체만으로 아주 심오하기 때문 에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요. 하지만 벤야민은 제가 거리에 있을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것과 연 결하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Q. 연사 소개 글에 “어떤 말들을 외우고 다닌다” 하셨는데

지금 기억하고 있는 문장 말을 소개해주세요.

A. 저는 혼자서 힘을 내는 타입이기 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기대어서 일어나고 공부하고 하거든요. 제가 빈곤 철폐 투쟁에 정말 오랜만에 갔는데 거기에서 들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하나는 “존엄한 죽 음의 존재는 존엄한 삶이다.” 이 말을 하신 분이 시설에서 사는 장애인이었는데요. 제가 학교에서 논리 학을 가르치면서 전제, 근거 이런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논리학을 부수 는 느낌에 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였어요. 또 하나는 “타인은 지옥이었지만 관계는 구원이었 다.” 인데요. 이 말은 노동투쟁을 하고 있는 서면 거리에서 투쟁 이야기를 할 때 들었는데요. 이 말이 잊 히지가 않더라고요. 이렇게 현장에서 들은 말들을 외우고 공부랑 연결하면서 질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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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A. 사건에서 누가 죽였는가, 누가 했는가에 대한 측면의 접근은 저도 모르게 제가 그 사실을 다 안다고 여기게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을 죽인 정권이 있고,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났고, 어떤 사람들을 잡아서 학 살했는가? 이런 것들에 묻혀 제가 이미 “다 안다”라고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 뼈들은 여전히 수습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요. 진상이 규명됐고 기념비가 세워지고 기사로 쓰고 영화로도 만들고 그러 면서 나도 모르게 뭔가 다 해결됐다는 느낌을 가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 뼈에 대해서 ‘안다’는 것과 ‘수 습’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거죠. 심지어 수습된 뼈들도 제대로 보관되지 않는 상태 그리고 아직도 수습되 지 못한 뼈들이 있다는 것은 ‘앎’이라는 것이 ‘수습’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수습’에 좀 더 중 점을 두고 이야기했습니다.

걷다가 잠시 기대앉았던 벽이 생각나네요. 같이 읽었던 책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메리칸 타운의 영자 언니에 대한 자서전 내용이었어요. 영자 씨는 1970년대 살해당했던 언 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한다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놓은 구절이 있었거든요. 그것에 대한 항 의로 언니들이 들판에서 옷을 다 벗고 같이 달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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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산 코발트 광산에 대한 이야기에서 ‘수습’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보통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접근을 할 때 “누가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나?” 원인, 진상 규명 이런 이야기들을 흔히들 하게 되는데요. 이제 ‘수습’이라는 표현, 측면에서 이야기한 이유가 있나요?
Q. 발터 벤야민에 관련된 내용 중 “도시는 걸어야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라는 표현이 있던데요. 자본주의 도시에서 연사님에게 스티커처럼 붙어있는 도시의 모습이 있는지요? A. 지금 딱 기억나는 길은 ‘완월동’이라는 부산 성매매 집결지 길인데요. 거기 친구들과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을 했었어요.
이야기를 나눈 그 순간이 기억나네요.
교 때 학교 관리하시는 아저씨가 말했던 “너네가 가고 나면 학교에서 웃음소리가
밤이면 나온다”는 이야기를 그 때 그 벽 앞에서
그리고 중학
난다. 벽에 소리가 들 어갔다가
나눴던 기억도 나네요.

사례발표

생활교육공동체 ‘공룡’ 활동가 청주에 있는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이라는 단체에서 농사도 짓고 커피도 볶으면서 미디어제작과 교육, 연대활동 등을 하고 있습니다. 미디어로 기록하고 연대하며 살아가기 김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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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기록하고 연대하며 살아가기

“현장이 원하는 미디어와 현장에 필요한 미디어에 대해 늘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 록이 의미 있는 연대의 순간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공룡의 활동 속에서 그리고 또 다른 여러 사람들과의 공동 제작 경험 속에서 발견해 온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김설해 라고 하고요 충청북도 청주에서 왔습니다. “생활 교육 공동체 공룡”이라는 단체는 2009년 청주시 사직동이라는 마을에서 공부방 교사 모임으로 시 작된 단체입니다. 당시 공동체 미디어 교육을 진행하던 미디어 활동가와 공방을 운영하던 지역 활동가 들이 지역 마을사람들과 겹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교육 공간 +카페+도서관으로 구성한 공간 이었고 우리가 직접 공사하며 손수 꾸몄습니다. 지역 활동가, 미디어활동가 그리고 수업을 받던 친구들 도 합류하면서 공룡(공부해서 용 되자!)이라는 단체가 시작되었고요. 저도 도와주러 왔다가 공룡이 좋아 서 눌러 앉은 지 12~13년째 됩니다. 발표자료 :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25474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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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같이 해결해보자는 취지로 만든 단체이구요. 그리고 자본주의적 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해보자, 그래서 활동의 분야나 방식은 다양합니다. 철학이나 인문학을 교육하고 사회적 작업으로 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연대활동을 다양하게 합니다. 미디어 제작도 하고 요 리를 하거나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도 합니다. 음악, 드로잉, 책 등 할 수 있는 장기들을 발휘하여 콘텐츠 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사회단체로서 대책위에 소속되어 활동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현장의 기록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사수]

한 단체는

영상에 대한 수요가 가장 컸기 때문에 영상미디 어가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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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 공동체성/ 반자본주의
처음부터 미디어를 주요도구로
아니었지만
활동이 되었습니다. 저희 단체가 만들어진 지 1년 정도 된 2011년 부산으로 오는 한진중공 업 희망버스에 탑승하였고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미디어를 할 줄 아

는 공룡이란 새로운 단체가 생긴 것을 알리게 되었고, 우리와 무언가를 도모해보자는 만남이 이어졌는 데요. 그 곳에서 충북 영동에 공장이 있는 유성기업 노동자들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유성기업 사측은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술책을 부리고 있었는데요. 이에 맞서 싸 우느라 노동자들이 트라우마와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인연으로 우리는 노조 사무실에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카메라 교육도 하구요. 농성장도 같이 꾸미고 그림자 연 극도 만들어 보는 활동을 했었는데요. 선전영상, 속보영상, 용역경비 폭력 영상, 국회 발표 영상 등 영상 이 필요하면 저희를 찾으셨어요. ‘만들어주세요’하면 뭐든 작업하다 보니 기록이 차츰차츰 쌓이더라고 요. 특별히 의도를 가지고 찍은 건 아니었지만 이분들과의 관계가 기록에 남게 되었어요. 그러다 유성기 업 노동자 한분이 정신적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일이 발생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해 2018년에 [사수]라는 제목의 장편 다큐멘터리 제작하게 되었습 니다. 현장 기록들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겪으면서 나의 정체성이 다큐멘터리 감독이 아 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연대가 될 수 있구나, 현장에서 열심히 찍어놓으면 언젠가는 이렇게 쓰일 수 있구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디어 운동 & 공동체 교육의 도구 & 연대 및 사회적 발언의 매개체

미디어교육은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을 수 있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사회문제를 주제로 저희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활동가들이 연대해서 영상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4대 강, 밀양 송전탑 핵 발전, 노조 파괴 등의 현장에 결합했습니다. 만들어진 영상 공유를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SNS나 온라인 플랫폼에도 공유하지만 투쟁현장에 서 당사자와 연대자 들과 함께 보는 시간을 꼭 가집니다. 문화제를 개최하거나 이야기 마당을 같이 열어 상영을 진행합니다. 영상을 볼 곳이 없다면 게릴라 상영회를 열기도 합니다. 길거리에서 스크린을 실은 트럭을 준비하고 간이의자나 돗자리를 깔고 상영회를 진행합니다. 퍼블릭 액세스라고 시청자 참여프로 그램이 있는 지역 방송국에 우리가 만든 노동자 이야기를 보내기도

파행 운영에 대한 항의 시위도 합니다. “반딧불들의 접속”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큰 영향력이 있거나 파급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지는 않 지만 활동을 쭉 이어갑니다. 미디어를 공동체 교육의 도구이자 연대와 사회적 발언의 매개체로 계속 사 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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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가끔 너무 편향적이라서 못 틀어주겠다는 처분을 받기도 하는데요. 그러면 방송국 앞에 가서

“현장과 연대하는 미디어 운동 자체가 힘을 잃어서는 안 되겠다.” “미디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고 그들이 모이는 판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으로 네트워킹과 미디어 운동에 관한 일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지역 풀뿌리 미디어 공 동체 팟캐스트’라는 개념으로 “복지갈구화적단”이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운영했는데요. 1주일에 한 편 씩 지역의 영상 소식으로 방송을 편성했어요. 하지만 팟캐스트 구독자 수와 조회 수는 낮고 함께 참여 한 지역 단위의 미디어단체들도 지쳐가더군요. 방송국들도 우리 영상을 틀어주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할 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미디어로 행동하라”를 시작합니다. 직접 만나서 공통의 사안을 같이 경험하고 연대 활동을 통 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류하며 미디어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요.

2014년 삼척 - 핵발전소

2015년 밀양 - 송전탑

2015년 영덕 - 핵발전소

2016년 충복 - 노조파괴

2017년 성주/김천 - 사드

2018년 평창 – 올림픽

2019년 제주 – 난개발

위와 같이 연행사로 진행하였습니다. 전국의 미디어활동가들이 현장으로 모여 일주일 동안 기획, 촬영, 편집 작업을 하고 주민과 투쟁 당사자들을 모시고 지역 상영회로 마무리합니다.

2014년 첫 번째 미디어로 행동하라는 삼척으로 25명의 미디어활동가가 모였습니다.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핵발전소 건립의 문제를 주민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기록하고 알리는 것을 목 표로 삼았습니다. 주민투표일을 기점으로 현장에 찾아갔는데요. 투표과정도 기록하고 주민들의 생각도 담아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 4편과 한 편의 라디오 콘텐츠를 제작했습니다. 미디어제작 활동과 더불어 서로 성장하자는 취지로 핵문제에

26 미디어로 행동하라!!
대한 학습과 영상 제작 기술 워크숍도 열었습니다. 굉장히 촘촘한 4 박 5일 동안의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현장에서 활동해 본 경험들은 참가자들에게 짜릿함을 선 사합니다.

그 힘을 받아 내년을 기약하였고 2015년 밀양으로 향합니다. 송전탑 설치로 인한 행정대집행 반대 투쟁 을 하고 있던 밀양에 45명의 활동가가 결합합니다. 행정집행 후 1년이 지난 시점이라 우리가 결합한 때 는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기록하는 활동을 합니 다. 영상, 잡지, 소리-라디오, 그리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가사말로 만드는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밀양 이후 영덕, 성주 등에 결합했습니다. 현장에 폐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기록으로 도움을 드리는 활 동을 합니다. 영덕에서는 방송국에서 투표를 기록하듯이 우리가 주민투표를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페이 스북 라이브로 방송하고 투표 생중계 방송을 했는데요. 방송을 본 주민이 자전거를 타고 오시더니 “내가 안에서 방송 듣다가 가슴이 뜨거워져서 나왔어.”라고 하시더군요. 우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민분과의 생중계 토크 대담을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제주도 현장에는 난개발과 군사기지, 신 공항 건설 문제를 가지고 결합했는데요. 코로나로 인 해 30~40명씩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현장에 가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미디어로 행동 하라’가 중단되었습니다. 지역의 코디 역할을 하는 단체를 새롭게 만날 수 없다는 이유도 한 몫 하게 됩 니다. 그동안 ‘미디어로 행동하라’ 프로젝트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단체와의 연계 활 동이었습니다. 지역의 미디어 활동 단체들은 지역 현장으로 미디어 활동가들을 초대하고 그 지역의 현 황을 알려주며 활동가들이 기록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현 장에 찾아가면 오히려 폐를 끼칠 수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쓰레기 문제, 소음 문제를 일 으킬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현장의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한데 기존의 관계가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태 에서 생자로 진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기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오더라도 그 기록이 현장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주는 단체가 있어야 프 로젝트가 의미 있게 진행될 수 있는데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단위들을 새롭게 만나는 것 도 어려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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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깊이 연결되어 있는 현장과의 고리를 어떻게 찾고 연대할 것인가?

- 이슈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어떻게 곁에 서는 사람들이 될 것인가?

- 밀려나고 잊혀지는 투쟁을 어떻게 다시 불러낼 것인가?

‘미디어로 행동하라 프로젝트’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장과 연대하는 미디어 활동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현장에 찾아가서 치고 빠지는 느낌이 아닌 지속적 연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현장의 당사자들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서 활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고민이 쌓여갈 때 군산의 [지역 연대 미디어 프로젝트 난리 법석]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오래 활동하고 곁에 서는 사람으 로서 우리의 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지 실험적으로 군산을 택했습니다. 제주와 성주 소성리 군사기지문 제를 접하면서 군산의 미군기지 문제에도 관심을 둡니다. 군산에서 이 문제로 오랫동안 싸우고 계신 분 들과 연결이 되어 군산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군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군사시설이 미군정을 지나 그대로 주한미군이 주둔을 하게 됩니다. 현재 옥서면의 60%이상을 미군 기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옥서면을 찍은 사진을 보면 평화로운 농촌 처럼 보이지만 전기가 깔려 있는 곳이 미사일이나 폭탄을 저장하는 탄약고입니다. 10년 사이 644세대 마을 주민들을 이주시켜 5개 마을이 아예 통째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한 번에 많은 세대를 옮기면 티 가 나지만 10년, 20년 사이에 천천히 부대를 넓혀가고 있으니 주민들은 실감을 못하는 거죠. 지금도 헬 기부대, 드론부대가 들어오면서 미군 기지가 계속 넓어지고 있는데요. 군산에 사는 분들도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있어요. 천천히 부대를 넓혀가고 있으니 주민들은 실감을 못하는 거죠. 격납고 앞 넓은 철조망이 펼쳐져 있는데요. 철조망 바로 코앞까지 가서 주민들은 파도 심고 양파도 심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한 편 미군기지 정문 앞에는 여전히 미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시는 주민 조직들도 남아 있습니다.

644세대의 가구가 다 이주하고 현재 두 가구밖에 남지 않은 하재 마을. 그 마을에는 600년 된 팽나무가 있습니다. 한 사진작가가 이 팽나무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엽니다. 마을과 관련된 기억과 기록들을 나누 는 시간을 가집니다. 사람들이 다시 주목합니다. 이를 계기로 더 이상 기지가 넓어지지 못하도록 우리가 이야기를 발굴해서 공유하자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탄약고 확장과 새만금 사업으로 철거가 진행된 큰 마을이 지금은 싹 다 없어졌어요. 하지만 이 빈 마을에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러 찾아옵니다. 어디에 돼 지감자 있고, 어디에 두릅이 있는지 주민들은 알고 있었어요.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사라지는 이 마을이 그냥 빈터가 아니라 아직도 그들에겐 삶의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8 2020 군산
지역연대 미디어 프로젝트 [난리법석]

잡지팀, 음악팀, 영상팀, 행사팀/농사팀, 팟캐스트팀으로 나누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듭니다. 영상팀은 미 군 기지를 주시하고 감시한다는 마음으로 미군기지 둘레를 걷기도 합니다. 팽나무 탁본을 뜨기도 하구 요. 주민들이 오디가 많다고 알려주신 장소를 찾아 오디를 따서 [전쟁을 끝내 잼!]을 만듭니다. 캠핑하면 서 [영원히 길어먹는 샘] 영길샘도 파구요. 마을 분들을 취재하면서 보여주신 사진이나 기록들을 잡지에 싣기도 합니다. 마을이 점점 쇠락해가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팽나무 아래에서 팟캐스트도 방송하고 이 제는 사용하지 않는 버스 정류장이나 빈 집 담벼락에 전시를 합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주어온 물건 과 기록, 사진을 붙여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하게 문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문제, 새만금, 신 공 항 문제 등 이슈를 나누어 공연도 하구요. 추석에는 송편을 나눠먹고 김장도 같이 하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군산 분들과 평화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 마을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취재 & 연대활동 :

소성리, 제주 강정마을, 평택 대추리 군산에 가서 활동을 하면서 성주 소성리, 제주 강정마을, 그리고 미군기지 때문에 주민들이 강제 이주 를 당했던 평택 대추리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취재 연대 활동’으로 현장에 계신 분들과 함께 할 수 있 는 뭔가를 가지고 연대활동을 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기록도 하고 요리 해서 나눠먹고 공연도 하고요. 아침 선전전과 시위도 함께 하구요. 군사 기지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들은 다들 투쟁이 오래 되었어요. 아직도 문제는 여전하구요. 국가가 우리에게 주었던 폭력과 상처를 씻지 못하고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주민들의 고통을 생생히 느낄 수 있 어요. 평택에서 안내해주시던 활동가가 현장에 꼭 가야한다고 하셨는데요. 미군 부대가 보여주는 풍경, 그리고 굉장한 소음들을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정보이고 기록할 만한 가치 가 있는 것들 그리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들이죠. 거기에 우리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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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요! 난리법석]
성주

세상을 잇는 현장 미디어 프로젝트 [봄바람]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프로젝트는 올해 봄에 진행한 [현장 미디어 프로젝트 봄바람]입니다. 봄바람처럼 미디어로 순례를 하자는 취지에서 투쟁하고 있는 전국 38개 지역, 95개 현장을 방문했습니 다. 노동, 기후문제, 평등, 그리고 평화와 같은 주제로 순례를 했어요. 21명의 미디어활동가들이 각자의 현장 이야기를 단편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이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현장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전해진다.’라는 의미는 순례라는 활동을 통해서 담아냈고요. 투 쟁의 시간, 맥락, 그리고 더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미디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미디어로 순 례를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미디어활동가들이 현장에 가서 기록을 하고, 자기가 해왔던 기록의 결 과물도 냈는데요. 각자의 분야나 영역이 다르지만 순례단의 활동은 현장에 있었고 우리가 만나야만 우 리가 무언가를 바꿔낼 수 있다는 취지로 출발했습니다.

전문가가 되지 말자. 문턱을 낮추자

미디어는 경계를 넘는 만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미디어의 힘도 이런 데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현장에서 현장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고 조금씩 넓어지면서 활동을 계 속 이어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전문가가 되지는 말자’고 생각해요. 다양한 현장, 다양한 활동들을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려면 너무 잘하면 안돼요. 너무 잘하면 문턱이 높아져서 어렵다고 생각 하거든요. 할 수 있는 것들로 조금씩 함께 할 때 그것들이 모여 모자이크처럼 결과물이 나오고 이를 시 기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또 현장에서 여러 활동으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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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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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발표

<현장의 힘> 저자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사무국장 198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뒤 직업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당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2020년 부산일반노조 상근 활동가로 취직했다. <현장의 힘: 신라대 청소노동자와 함께 한 114일>을 썼고, <성매매 안하는 남자들>을 여럿이 함께 썼다. 농성장 다이어리 배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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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다이어리

“책이라는 매체를 통한 파업 투쟁 사유하기”

저의 사회운동은 고등학생 때 두발 문제에 반발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사회 운동을 시작해서 2013 년 4년제 대학에 들어가 완전 끝물에 접어든 학생운동을 하려고 용을 썼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하나 씩 떠나가면서 동아리가 10년 만에 문을 닫는 슬픈 단계를 겪었습니다. 2018년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구의원후보로 출마했는데 언론에도 노출도 안 되고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아 구의원에도 떨어졌습니 다. 저는 계속 실패의 역사를 살아가는데요. 계속 실패를 거듭하다 보니 제가 모자라다는 걸 느꼈습니다. 현장에서 아무런 경험 없이 학생 운동하고 바로 정치인이 되려고 했던 욕심을 내려놓고 부산 일반 노조 현장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노동조합 활동가로 취직했습니다. 발표자료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25473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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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속 승리의 경험이 오늘 발표할 내용인데요. 제가 쓴 책은『성매매를 안하는 남자들』과『현장의 힘』이라는 책인데요. 오늘은『현장의 힘』이라는 책 을 왜 쓰게 되었는지, 왜 책이라는 매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라대 청소노동자 사건’ 들어보신 분 있으신가요? 신라대학교에서 청소 노동자를 전원 해고한 사건 인데요. 교직원들이 알아서 청소하겠다며 청소노동자 51명을 전원 해고했습니다. 이에 청소노동자들이 114일 동안 농성투쟁을 하고 직접 고용을 쟁취한 사례가 2021년 신라대 청소노동자 투쟁입니다. 왜 ‘책’으로 기록했는가?

예전에는 드라마나 TV를 함께 보고 함께 얘기하고 토론하는 문화들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하지만 최 근에는 각자 폰이나 패드로 TV나 영상을 혼자서 보죠. 지금은 양극단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정치적 문제, 사회 문화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나 싸우고 있고, 갈등이 생기고 사이가 벌어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갈등 속에서 더 나은 변증법적 결과가 남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이유가 사람들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개인적인 선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 들이 알고리즘이 딱딱 추천해주는 내가 원하는 영상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잡학다식한 사람 을 선호했는데 지금은 전문분야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걸 선호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 는 다양한 논의들과 담론이 형성되는 보편적인 시대였다면 지금은 개별적이고 특수성의 시대인 것 같습 니다. 개인들의 개성을 선호하는 시대라 매체들을 접하는 방식도 그렇게 변모해 온 것 같습니다.

사유하기 위해서

신라대 청소노동자들 투쟁에 대해서 유튜브 영상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회 수가 저조 하더라고요. 그리고 유튜브는 자신의 생각과 같은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은 강하게 하지만 반대자 들과 토론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책이라는 매체를 선택했습니다. ‘책은 자기가 원 하지 않는 것도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죠. 아이히만(독일 군인, 유대인들을 학살한 전범)이 재 판장에서 “나는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증언하는 것이 자기는 사람을 죽이는 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악이다”라고 한나 아렌트는 규정하죠.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이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 악은 다름 아닌 사유하지 않는 것에서 생겨날 수 있다고 말 하는데요. 복잡한 세상에서 자기가 생각하고 검토할 수 있는 것을 사유화하는 행위는 책을 읽었을 때 가 능하다고 생각해요. 책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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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을 반대하는 학생들과의 갈등

투쟁 중 신라대 학생들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연세대 청소노동자 고소 사건도 알고 계시죠? 우리는 작 년에 고소당했거든요. 그 이유는 앰프를 사용한 연설 방송, 방송차가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 학생들의 학 습권을 방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시끄럽게 한다고 학생들이 우리 집회 농성장 앞에 와서 현수 막을 커트칼로 자르고 화형식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학생들이 쓰레기네 라고 욕했다면 이 책은 의미 가 없었을 겁니다. 저는 학생들이 그 당시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았습니 다. 그 중 하나가 학생들이 386세대가 하는 운동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 를 들면 학생들은 우리가 왜 총장실을 점거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대화로 하면 되지 왜 점거를 하느냐?’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대화가 안 되기 때문에 총장실을 점거하는 거잖아요. 그걸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학생들과 공청회나 간담회 같은 걸 열어 소 통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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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제
읽 고 나면 학생들이 단순히 진보적인 가치에 대해서 무시한다고 얘기하지 않고 학생들과
통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책을
어떻게 하면 소

노동자들 간의 갈등

노동자 투쟁들은 사측 자본이랑만 싸우는 거 아니냐고 얘기를 많이 하지만 사실 노동자들 간에도 갈등 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한국노총과의 복수 노조가 있으면 그 두 개 노조 중에 하나가 교섭을 하거든 요. 민주노총이 다수 노조이긴 했지만 한국노총이 있음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투 쟁에는 동참하지 않고 집에 갔지만 두 달 뒤에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도 직접 고용을 시켜달라고 요구하 기도 하구요. 그 외 이야기는 책을 보세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갈등

뉴스에 많이 나오죠. 요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한다 는 이야기요. 우리도 투쟁당시 대학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 투쟁에 많은 비판을 했었습니다. 그 래서 노동자 투쟁 현장을 단지 자본과 노동자의 대결로만 볼 게 아니라 노동자들 간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책이라는 매체입 니다.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 학생들만 탓할 것도, 단순히 자본만 탓할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 간의 단결 이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지방대학교의 처지

제 책을 보고 난 후기 중에 지방대학교 사무처장이었던 교수님의 글이 있습니다. 그 분은 대학교 경영 요체를 아는데 얼마나 이게 힘들었을지 그리고 자기 결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학생들의 입장, 학생 처의 입장 등을 살피게 되어 다양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은 답답하셨대요. 학력 인구가 감소 하고 학과도 없어져서 학교에 있는 노동자들이 잘릴 위기이고 지방대학교는 계속 죽을 수밖에 없는 환 경이라는 거죠. 학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답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다양한 생각들이 폭발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을 쓰기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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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장의 기록을 알려내는 것

신라대 투쟁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선 조합원들과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요. 처음에는 정당이나 학생운 동 출신 일명 ‘학출’이라고 현장에서 저를 안 좋아하셨어요. 학출은 현장 경험도 없으면서 지도하듯이 명령한다고 경계를 하셨거든요. 심지어 저는 위 식도염이 있어서 믹스커피를 안 먹었는데 지회장님은 “ 내 스타일 아니다”라며 멀리하셨죠. 저를 밀어내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쥐 죽은 듯이 있고, 농성 들어갔 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조합원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조합원들 과 식사를 늘 함께 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늘려갔습니다. 식사시간의 수다에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유인물 뿌리는 시기까지 논의하게 되었고 제가 결혼한 후 겪는 어려움에 대해 조언도 해주셨어요. 그러 다 한국노총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얘기도, 10년 동안 투쟁한 역사도 듣게 됩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커 피 취향은 달라도 치즈 피자에서 입맛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회장님과 화해하고 제가 하는 모든 말에 웃어주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기록을 시작하게 된 것은 들은 얘기를 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우리 투쟁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잊혀지는 거예요. 단체교섭은 잘 안되고 한국노총도 고용한다고 하고, 심지어 지방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보니 관심도 떨어지는 거예요. 중앙 방송국은 말할 것도 없이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하는 한겨레, 경항신문에도 기사가 나오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관심과 비교가 되었지 요. 지역의 투쟁은 주목도 못 받고 관심도 덜 받습니다. 그래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은 현장의 기록들을 알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신라대 청소노동자 투쟁을 인터넷 검색 1순위로 올리기 위해 오마이뉴스, 여성신문에 제가 기고를 했습 니다. 스트레이트성 기사가 아닌 조합원들과 식사하면서 나눈 대화, 신라대 10년 투쟁의 역사, 지회장님 인터뷰도 실고 우리 투쟁의 다양한 소식과 세부적인 이야기, 그리고 우리 투쟁의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연대와 후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라대 투쟁을 기존 언론에서 아무도 알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알리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정 현실 전 지회장님 인터뷰를 할 때 “나는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고 하셨는데요. 투쟁현장에서 가장 페미 니즘적인 면모를 보여주셨어요. 조합원들은 투쟁을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문제, 노동, 성 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실천으로 보여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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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 안 될 정도로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였습니 다. 청소노동자라는 이유로 사회에 배제되어 있고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밖으로 알 려지지 못한 현실을 알리고 싶어서『현장의 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했습니다.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 노력했 던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얘기는 제가 책으로 쓰지

편견을 깨고 상상력을 높이기 위해 사진을 뺀 『현장의 힘』

마지막으로 우리가 찍은 농성장 사진을 보면 모두 굉장히 즐겁습니다. 투쟁 현장에 가면 즐거운 몸짓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뉴스에는 이런 사진이 안 나오죠. 농성장에서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이나 굉장히 과 격한 구호를 외치는 모습만이 농성 투쟁의 전부인 것처럼 보여줍니다. 기존의 노동조합 이미지 대부분 은 빨간 조끼와 과격한 구호잖아요. 노동운동의 현장을 좀 더 다양하게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현 장의 힘』책에는 사진을 넣지 않았어요. 편향적으로 보이는 노동조합의 측면 말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설득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노동조합 투쟁은 힘과 힘의 대결이거든요. 사측 과 교섭을 하고 쟁의 행위를 하고, 힘을 통해서 투쟁을 하는데 노동조합 활동 이외에 대중들에게 노동조 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노동조합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출생하면 출생신고! 취직하면 노동조합 가입!”

Q. 활동가로서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하나요?

A. 유퀴즈에 출연한 유해진이 자기가 수상소감으로 “북한산 국립공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더 군요. 자기가 힘들 때 북한산 국립공원에 가서 위로도 받고요. 스스로 거만해졌을 때 산에 올라 겸손한 마음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활동가로서 어려움이 있고 힘든 과정 에 있다면 주변 사람들과 1차적으로 풀어야겠지만 자기만의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 는 달리기를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 가보는 것,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내가 사는 게 전부가 아니구 나 라는 마음과 함께 겸손함을 느끼고 돌아옵니다. 번 아웃이 안 되도록 조절을 잘 하는 것이 오래 활동 할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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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들의 ‘요즘고민’

지역에서 활동하시면서

활동의 지속성 / 역량강화

활동의 지속성, 활동가 역량강화, 지원 시민사회단체에서 살아남기

지속적인 연대, 자유롭고 창의적인 콜라보

저연차 활동가들이 오랫동안 비영리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 활동가들의 지속가능한 업무환경

지역의 프리랜서 활동가들을 위한 지원 부족 개인 활동가들의 활동 저변을 넓혔으면 함 조직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문제 3040 여성 조직사업, 청년 여성 조직사업 단체 내 동년배가 없어요. ㅠㅠ 마을공동체 안의 이기적인 사람들을 끌어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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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되거나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홍보/ 기록 / 글쓰기

현장을 기록하는 마음과 태도

도서관의 일상 기록

홍보 글쓰기, 자료집 편찬, 활동기록

혼자서 꾸준히 글쓰기 훈련을 할 수 있는 방법

사회복지 실천현장을 미디어로 표현하고 홍보하는 방법

시민사회활동이 더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방법 도시아카이브 기록 및 보관방법

노동, 난민 인권 소수자, 약자의 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여성 인권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운영 비수도권 평화교육

작은도서관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면 함

작은 것이라도 쉽게 나눌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고 싶다 참신하고 효율적인 캠페인 기획

지역 인권운동 단체/활동가/현장의 가시화

지역주민과 협력하여 지역 맞춤형 사업 진행 방법

ESG 지역사회 활용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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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내로남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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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정치를 싫어하지만 다 정치임 책임지는 사회 청년들이 살고 싶은 정주환경

사례발표

글쓰기 강사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문학 작품 속 방언과 주변화 되고 사멸하는 언어에 관심이 많습니다. 언어 내셔널리즘과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양산 지역 시립미술관, 노동민원상담센터,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정하는 ‘삶, 쓰기’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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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는 ‘삶, 쓰기’

“글쓰기라는 ‘연결’, 그 접속과 변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글쓰기가 있는 곳에서 서성이고 배회하는 사람, 그래서 계속 떠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양산 지역 은 산을 하나 두고 이쪽 양산, 저쪽 양산이라고 부르는데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글을 쓰고 싶다 하 셔서 저쪽 양산으로 산을 하나 넘어 다닙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주워 모으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고립되지 않고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얘기 나누면서 여러분들과도 연결될 수 있 는 고리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발표자료 :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254739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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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를 쓰려면 마련되어야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글쓰기 현장에 있으면서 제가 알게 된 것은 “어떤 자리가 필요하고 또 제가 어떤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인데요. 그 첫 번째 자리가 바로 “마련되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이야기를 쓰려면 마련되어야 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자기 서사 쓰기의 진입 과정 같은 거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아까 성민 님께서 “청소노동자들이 언어가 없어서 제가 쓰게 됐다.”고 하셨는데요. 저도 사람들이랑 모여서 그 언 어 없는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쓸 것인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1) 글쓰기는 얼어붙은 말을 깨뜨리는 과정 글쓰기는 얼어붙은 말을 깨뜨리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외할머니의 입말을 틈틈이 기록하 는 작업을 하고 있거든요. 마을을 떠도는 소문, 귀신 이야기들로 존재하던 것이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할 머니의 것이 되었던 건 아닙니다.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보도연맹의 생존자, 살 아남은 자로서 이야기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었는데요. 할머니는 한 번도 자신의 생에 대해서 글을 써보신 적도 없을 뿐더러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조차 공포스러워 하셨어요. 같이 밥 먹고, 같이 밭에 나가 고구마도 캐고 깨를 털고 열무김치를 담그면서 할머니와 아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할머니 랑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건네어드리고 할머니가 겪었던 일들이 지금은 역 사로 어떻게 쓰이는지, 요즘 친구들은 그것을 어떻게 배우고 있는지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남은 것이 나 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아주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할머니한테는 ‘얼어붙은 침묵’이 라는 시간이 있었어요. 할머니가 스스로 그 시간을 깨뜨리고 벗어나야지만 자기 얘기를 할 때 할머니만 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제가 보게 된 거죠. 2) 글쓰기는 경험에 내재한 고유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 장애인 자립생활 센터에 글쓰기를 하러 갔습니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려고 할 때 그냥 탁하고 다가와 서 글을 쓸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기존에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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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방식과는 다른 리터러시가 필요했어요.
문해력 같은 방식이 아니라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리터러시가 필요했습니다. 글쓰기라는 것은 자기 가 쭉 경험해 온 것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고유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인데요. 삶을 쭉 관통해 오다 보 면 자기가 구축하는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들이 생겨나요. 아까 말한 “얼어붙은 말을 깨뜨리는 과정”의 자리가
마련되었고요.
자리가
것을
읽고 쓰는
먼저
마련되는 자리와 상관없이 마 련하지 않아도 마련되는
있다는
장애인 생활센터에서 발견하게 되었어요. 글쓰기 수업하는

모든 자리에서 가지는 시간이 있는데요. 다 같이 모여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는 자리를 항상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얘기를 하다 보면 어떤 공통의 이야기들이 생기게 돼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영희 씨 글인데요. 이날 공간을 주제로 ‘자기만의 어떤 장소’에 대해서 글을 썼어요. 마음먹고 동래에 새로 생겼다는 서점을 갔다. 언어 장애가 있는 나는 말을 어눌하 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계십니 까? 아저씨 안녕하세요.”라고 인사 했는데 갑자기 중 년 아저씨가 나와 동전 오백원을 주면서 “나가! 오지마! 이제 는 안 줄 거야.” 라고 했다. “아니, 아저씨 책 사려 왔는 데요.” 하니까 “안 팔아. 오지마!” 하셨다. 눈물 이 났다. 너 무 황당해서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그 아저씨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정신을 차리 고 다시 문을 열었다. “저는 손님인데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 용소> 한권 주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책은 서점에 없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얼마 동안은 서점에 못 갔다. 지 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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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고 책을 사지만 한 동안 서점을 멀리했다. 지금은 당당하지만 그때 는 뭔가 억 울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을 하는 건 모순이 많다. 그렇지만 외모지상주의에서는 겉모습이 전부인 것만 같다. 다음엔 정우성으로 태어나야지~ -양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조영희-

그런데 전혀 다른 경험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서점을 갔었어요. 영희 씨는 언어 장애가 있고 또 휠체어 를 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순간 거부당한 경험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그 때의 경험으로 얼 마간 서점을 못 갔고 서점을 멀리했다. 겉모습만 판단하는 이 세상이 싫고 다음에 정우성으로 태어나야 지” 라고 글을 썼어요. 그런데 영희 씨뿐만 아니라 기현 씨도 기창 씨도, 여러 사람들이 병원이나 일상생 활에서 만나는 공간들에게서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아는 공간이 그들에겐 차별의 공 간이었던 거죠. 치료받는 병원이 아니라 감금되는 공간이기도 했고요. 거부당하거나 쫓겨나거나 아니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집에 대한 이야기가 막 나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떤 자리를 굳이 마련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이 생기게 됐어요. 이를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성이나 소수자의 위치 같은 것들을 같이 얘기할 수 있었어요. 글을 쓰는 이 공간에 서 같이 글을 쓰는 동료, 동무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내가 하는 이 마련 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구나.’ 글쓰기 공간에서 자기의 얘기를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인식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쓰는 글들은 이전에 그냥 썼던 글들과 전혀 다 른 글들이 쭉 나온다는 거죠. 우리 할머니에게도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과 같이 한 공간에서 이야기 를 나누고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글쓰기 현장에 갈 때마다 함께 모여서 마련되는 자리가 없이 혼자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문을 여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두 번째 사례는 제가 서게 되는 응답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고립감 같은 걸 느낄 때 떠올리는 한강 작가 가 쓴 글인데요. “쓰는 사람이 아주 깊이 내려가서 뭔가를 쓰면 읽는 사람도 같이 깊이 내려가 그 글을 읽는다. 발화되는 공간에 있는 (듣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든 거기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 에 우리 연결이 있다.”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의『환희의 인간』에서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라고 했는데요. 글을 쓰는 사람이 문을 하나 그려요. 그러면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일단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깊이 내려가서 쓰면 그 글을 읽기 위해서 깊이 내려가서 들어갑니 다. 그러면 글 쓰는 사람은 그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게 됩니다. 들어갔던 사람들이 나오려면 다시 한 번 문을 열고 나와야 되죠. 이것이 고립되지 않고 연결될 수 있는 어떤 고리라고 봅니다. 글쓰기 참여자들 이 문을 하나 그리면, 저는 거길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다수자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돼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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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는 자리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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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뱅 『환희의 인간』

[나의 나선] 교육현장에서 매번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음성 중심의 소통 방식이었다. 나와 같이 청력 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고통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나의 문제라고만 생각했기에 묵묵히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소통방식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수업의 진도를 따라가기가 많이 어려웠고 이해하기 힘들었 다. 속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이, 혹은 방송실에서 흘러나오는 스피커 속 음성에 도대체 뭐라 고 하는 걸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같은 생각만 수 없이 했다. 21살이 될 때 까지 나는 늘 그렇게 배제 되었던 것 같다. 21살이 되 고 나는 동료상담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동료상담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 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참여하면서 한가지를 알게 되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처럼 배제와 무시와 거부와 분리를 당해봤 던 사람들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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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우리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힘들게 하였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기창-

시에서 여는 장애인 행사에 매달 참석하는 기창 씨는 무대 끝에 있는 분이 수어통역사라는 걸 알게 됩

니다. 그 분이 기창 씨 곁으로 쓱 오더래요. 주최 측에서 수어통역사를 부르셨구나. 하지만 기창 씨는 청 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수어를 쓰지 않아요. 필담을 선호하세요. 그 날 글쓰기 주제는 살아오면서 받았던 도움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참여자 대부분이 많이 받고 있는 도 움에 대해서 쭉 쓰셨어요. 그러다 기창 씨가 쓴 글을 발표합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 지 한번만 물어보 면 좋겠다. 주최 측은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이 참여한다고 하면 수어 통역사를 배치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항상 행사가 끝난 후 그게 너무 아쉽다고 이야기했다.” 그 공간에 서 기창 씨 이야기를 같이 들었던 분들이 다음 글을 쓸 때 자기 얘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원치 않거나 드 러내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글을 쓰고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어요. 저 또한 ‘내가 가지고 있던 장애 스펙트럼이 되게 넓은 줄 알았는데 어떤 스테레오 타입에 딱 갇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어요. 글을 쓴 사람이 글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인식하는 것처럼 거기서 응답했던 사람들 –저나 활동 보조 선 생님, 다른 사람의 글을 듣는 글쓰기 동무들- 도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성찰하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 는 거죠. 다 같이 글을 쓰고 그것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즉각적인 어떤 변화들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 나 중요한가라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글쓰기 현장에서 이루어진 접촉을 통해 자신만의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문제가 범위를 벗어나 자기가 놓인 사회나 환경의 변화와 같은 총체성을 보게 되는 눈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기창 씨의 경험처럼 계속되는 글쓰기 현장에서는 연결 고리를 계속 만들고 지속적인 연결이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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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는 삶, 쓰기 : 이야기 속에서 생성되는 정체성

리쾨르는 ‘이야기 정체성’을 말하며 주체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기를 인식, 그 이야기 속에 서 새로운 ‘나’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해체되면서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했는데요. 저는 주로 에세이나 생애사 위주의 글쓰기를 진행하는데요. 그곳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자기 자신을 보 는 거죠. 글쓰기 공간에서 공통의 것을 경험한다고 얘기했는데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뿐만 아니라 도 서관 수업에서도 재미있는 경험을 해요. 오전 10시 개인 에세이 쓰기 수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참석하 는 10명이 다 중년여성이었고, 8명이 경력단절여성이었어요. 자기 얘기를 쓰고 발표를 하다 보니 공통 점을 찾게 되고 그 이야기가 새롭게 자기 이야기로 써지더군요.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글을 쓰면 자 기가 믿고 싶은 이상적인 것들이 담기게 되는데요. 그러다보니 나머지 삶은 원하는 삶으로 편성하게 되 는 것 같아요. 그렇게 실천적인 자신을 형성하고 내면의 회복을 거치며 긍정적인 관점으로 나아가는 부 분이 있어요. 글쓰기라는 미디어의 특성과 힘 글쓰기라는 미디어는 영상과 차별화 되는 점이 있어요. 형식이 다르면 발화 내용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요. 글쓰기는 표면적으로 탁하고 담길 때 드러나지 않거나 초점을 두지 않았던 부분들을 되게 자세하게 표현하죠. 그러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거나 중요한 것을 찾아내게 되는 것 같아요. 글쓰기 현장에서 서사에 서로 접속하면서 상대방의 ‘자기서사’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자신의 ‘자기서사’도 변화,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데요. 이것이 글쓰기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가 내면을 충실하게 서술하는 것, 기록하고 발화할 수 있는 환경은 정말 필요합니다. 계속되는 글 쓰기 실천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작업 결과물의 공유입니다. 제가 글쓰기 수업하는 곳들은 다들 출판과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글쓰기 현장에 있었던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고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이야기되고 생각되어지 는 계기를 마련해야할 것 같아서요. 할머니 얘기를 제일 처음 했었는데요. 다 같이 글을 쓰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장소, 시간, 각자의 문들을 만들고 서로 드나들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많아져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지 우리가 오늘 얘기했던 소수자 들의 이야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의 언어가 계속 만들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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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수업하셨던 활동 결과물을 따로 자료집을 만들거나 아니면 출간을 하신 게 있을까요. 그 기록물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그런 창구를 따로 운영하고 있나요?

A. 네 공공적으로 출판되지는 않고요. 도서관이나 센터에서 책 만들어서 나눠 드려요. 장애인자립생활 센터는 공유행사를 크게 열었어요. 전시도 하고 출판 인쇄부수를 많이 뽑아서 주변 지역 사람들이랑 나 누고 있습니다.

Q. 시작하는 게 있다면 문을 그리라고 하셨잖아요. 점부터 찍어야 할 텐데 문을 그리는 시작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고 그게 가장 어려운 지점인 것 같아요.

A.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살아오면서 만들었던 고유한 나 의 주체라든지 구축된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쓰는 것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일단 나 자신 에 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하구요. 그 뒤 나오는 글들이 있어요. ‘글쓰기를 잘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 ‘꾸 준히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여쭤보시는데요. 우선 부지런하셔야 돼요. 일단 문장을 어떻게 시작하든 상관없어요. 기록을 한번이라도 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지금은 생업에 치여 글을 쓸 여유 가 없다고 하시는데 그 분들은 평생 글을 못 쓰세요. 치열한 와중에도 일단 뭐든 쓰겠다고 시작해야 하구 요. 그리고 계속 수정하는 작업을 하면 되요. 소개해드린 글들도 다 6번, 7번 수정 작업을 한 글인데요. 처 음 썼던 글이랑 많이 달라지죠. 글 쓰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이나 어떤 변화를 받았느냐에 따라 글이 또 바 뀌거든요. 글을 쓰면서 수정한 것들이 내 삶에 반영이 되고, 삶이 바뀌면 그다음 쓰는 글은 또 달라지죠. 할머니들이랑 글 쓰면서 재미있었던 게 이분들이 한 번도 자기 책상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거든요. 처음 으로 글을 쓰게 되면서 책상이 필요하게 된 거죠. 근데 책상이 없으니 책상이 될 만한 식탁을 찾게 되고 식탁과의 고군분투가 생활이 되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면 글을 쓰는 주체가 되어 집중해서 잘 쓸 수 있는 장소를 찾게 됩니다. 식탁을 거실로도 내보고 침대 앞에도 둬봅니다. 거실에 햇빛이 너무 쨍해서 그날 글이 제대로 안 되더라, 침실로 옮겼더니 이부자리에 계속 눕고 싶어서 안 되겠더라, 그러 면서 자기만의 장소를 계속 찾아다니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버지니아 울프의『자기만의 방』을 소개 하며 글을 쓸 때는 자기 공간,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작가라고 알려드 렸어요. 그 이야기를 엄청 재밌어 하셨어요.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글로 쓰신 적 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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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혼자가 아니라 같이 글을 쓰고 말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가져보세요. 각자의 문을 만들고 서로 드 나들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 글을 수정하게 되고, 내 삶에 반영이 되고 나의 글은 또 달라집니다. 센터 의 영희 씨도 같은 고민을 하셨어요. 내가 살아온 생을 솔직하게 쓰더라도 읽는 사람한테 어떻게 받아들 여질지 걱정이고 편견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요. 나 스스로도 이 글을 쓸 때 마음의 괴로움이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혼자 쓰면 안 되고 같이 써야합니다. 비슷한 점들, 공통의 삶을 인식하고 난 뒤 쓰는 글에서 솔직함이 나오는 것 같아요. 함께 쓰고 이야기 나누고 수정하는 작업들이 같은 공간, 동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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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글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사례발표

우만 컴퍼니 대표 “우리가 만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 됩니다”-‘00의 집, 그 집’ 프로젝트 전시 ‘영화로운 개복’ 프로젝트 <우만플러그, 군산> (2021) 출판 영화 <이태원> 외 다수 공동체상영 00의 집, 그 집 김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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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의 집, 그 집

“<00의 집, 그 집>은

한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고령 여성의 삶을 살펴보며

집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프로젝트입니다.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발표자료: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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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군산에서 온 우만 컴퍼니 김나은입니다. <00이 집, 그 집>이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기

에 앞서 제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우만 컴퍼니는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할게요. 우만은 왜, 무엇을?

저는 경상도 출신이에요. 경상도에서 태어나서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에서 일을 하고 이제 전 라북도 군산에 이주를 해서 자리를 잡게 되었어요. 군산에서 산지 7년이 되었는데 항상 이런 질문을 했 던 것 같아요.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다 수도권에서만 진행될까?

‘지방’ 사람들의 삶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가는 걸까?

‘지방’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힘들까?

비-수도권 지역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커뮤니티 장은 ‘지방’에 없을까?

각자의 지역을 지방으로 호명하며 낙후된 분위기로 문화가 형성되지 않는 걸 당연시 여기는 것에 의문 을 가졌고요. 나 또한 3시간이란 시간을 들여 서울에 가서 문화를 즐기는 것만이 문화생활인 것처럼 느 끼고 있었어요. 이 당연함에도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저는 여성주의와 관련된 문화기획을 하고 있 는데요. 군산에서는 페미니즘 문화 기획을 하면 ‘페미니즘은 너무 어려운데’라고 해요. 하지만 ‘여성주의’ 라고 하면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군산에서 말하는 페미니즘과 서울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의 온도 차는 왜 다를까? 란 “왜”에 대한 물음을 달고 다녔어요. 지방에는 왜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군산에서 해볼 생각 없이 서울이나 대전으로 다녔어요. 군 산에서 퇴근하면 5시 30분, 대전으로 가서 7시 30분 글쓰기모임을 해요. 첨삭의 시간을 마치고 뒤풀이까 지 끝나면 새벽 2시, 친구 집에서 3-4시간 겨우 자고 군산으로 출근을 해요. 일주일에 2번, 1년 정도 이 런 생활을 했는데요. 새만금의 해 뜨는 장면은 무척 아름답거든요. 톨게이트를 막 지나 군산에 들어서는데 그 햇빛이 너무 눈부신 거예요. 그 때 든 생각이 ‘난 삶도 경제생활도 군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왜 문화생활을 다른 곳 을 쫓고 있지?’였어요. 저는 그때 군산에 살지만 집근처 10분 거리도 내비를 찍지 않으면 못 갔거든요. 내가 사는 군산을 걸어보지도 돌아보지 않고 어떤 곳인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군산을 사랑하지 못 했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여기서 내가 해보자. 내가 작게라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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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만 : 우리가 만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년 정도는 페미니즘 영화 책 독서 모임을 만들었어요. 공동체 상영으로만 볼 수 있는 <이태원>영화를 보려고 사업자를 내게 됩니다. 공동체상영신청을 해야 하니 내 돈을 써야하고 사업자를 내면 비용을 증 빙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2020년 5월에 사업자를 냅니다. “우만”이라는 회사이름을 말하면 여성주의, 페미니즘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우먼이냐, 여성이냐 하는데 요. “우리가 만났을 때 이야기가 시작 됩니다”의 준말입니다. 우만은 영어로 표기할 때도 그 외래어 표 기법을 그대로 따릅니다. “우만하다”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검색해보니 순수 우리말로 “덧없고 헛헛하 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어요. 앞의 시간에 강사님이 벤야민의 말에 따라 “사라짐 속에 덧없음 속에 있 는 우리의 원천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려 한다.”고 하셨는데요. 벤야민은 헛헛함 속에서 원천과 어떤 의 미를 찾으려고 했다면 저는 만남이라는 것에 굉장히 의미를 둡니다. 만남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흩어지거나 때로는 덧없기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생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우만 컴퍼 니”를 만들었습니다. 문화 기획을 해야 하는데 어떤 문화?

저는 영화를 정말 좋아하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영화 현장에서도 일을 했었어요. 그래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꾸준히 영화 상영을 했어요. 주로 페미니즘이나 여성 문제 의제를 다루는 영화를 주로 상영 했고요. 올해는 [개복여성영화제]를 열었습니다. 개복동이라는 곳은 군산에서 여성들에게 유의미한 공 간이고 2002년 발생했던 개복동 화재 참사 20주기여서 그것을 기리는 큰 프로젝트를 열었습니다. 3편의 장편 영화와 1편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4편의 단편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2020년에는 [접시 깨는 여자들]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예전부터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 깨진다.” 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 말이 너무 싫었어요. ‘웃다보면 접시가 깨질 수도 있지, 성악 하 는 사람들은 그릇이 깨지나 안 깨지나 실험도 한다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란 생각을 했었어요. 그 러면 우리 제대로 접시를 한번 깨보자는 생각으로 1박 2일 캠프를 기획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으로 돌렸지만요. 2021년에는 [우만 플러그, 군산]이란 책을 출간했습니다. 군산이라는 지역과 여성주의를 결합해서 우리 의 이야기를 기록했는데요. 군산은 관광지로 되게 유명하잖아요. 그 관광지에서 여성들의 탈 코르셋 모 습을 담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이제는 죽어버린 공장이 있는데요. 그곳에서 여성이 사진을 찍어요.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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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부터 여기 위까지 가슴 수술을 한 친구인데요. 여성들은 흉터 하나 없이 뽀얀 피부여야 한다고 목욕 탕 가면 “아가씨, 이거 레이저로 지울 수 없나?”는 말을 들어야 했던 친구가 흉터를 드러내고 사진을 찍 습니다. 이 친구를 비롯하여 6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고요. 저희가 갔던 관광지 중에 설해 활동가 님이 가셨던 팽나무에서 촬영한 사진도 있습니다. 군산은 다들 아시죠? 일제강점기 때 쌀 수탈 지역으로 유명한대요. 그 당시 수탈을 당한 것이 쌀 뿐만 아 니라 많은 여성들이 착취를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군산의 유곽이 너무 유명해서 일본의 유곽지도 에 군산 지역이 관광지로 표기될 정도로 성매매 산업이 활발했었습니다. 2000년도, 2002년에 성매매 업 소 화재 참사가 있어 성매매 특별 방지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기도 한 지역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 쳐 아메리칸 타운으로 미군을 상대하다가 현재까지 한국 남성을 상대로 성행하고 있는데요. 이 모든 변 곡점, 일제강점기, 미군정, 그리고 현대까지 단순히 역사로뿐만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볼 필 요가 있다는 생각에 [군산 역사 여성으로 다시 읽기]를 기획 했습니다. 오늘 참가자 신청 때 주신 질문 중 “개인 활동가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싶다. 그리고 활동가들의 지속 가 능한 업무 환경 지속적인 연대에 대해서” 물음을 주셨던 분들이 계신데요. 우만 컴퍼니는 1인 사업자여 서 이런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항상 함께할 친구를 수집했습니다. 매 프로젝트마다 함께 하는 친구들이 달랐고 저를 비롯하여 모두 다 회사원입니다. 직장인들이 본업으로는 내 생각과 가치를 발현하기가 힘 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숨통 좀 트일 곳 좀 찾자”해서 평일 저녁에 모였어요. 대전에서 익산에서 군산 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숨통 트이기 프로젝트]라는 책을 냈습니다.

만복 | 여성 X 스포츠 , 영화로운 개복 올해는 좀 프로젝트를 크게 세 가지를 했습니다. 첫 번째로 [만복|여성× 스포츠] 라고 여성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원래 여성×스 포츠였는데 여성×운동으로 변화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도 하나의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여성 들의 목소리를 더 밝히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확대하자는 의미를 담아 전시까지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까 말씀드렸던 [영화로운 개복] 프로젝트인데요. 개복동은 20년 동안 죽어 있는 거리, 무 서운 동네로 여겨졌어요. 저는 그것도 편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거리를 우리가 다시 바라보 자,” “새로운 시각으로 보자”는 마음으로 10명을 아카이빙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다큐멘터리 제 작, 사진전, 영화제, 그리고 내년에는 책으로도 연결하여 북 페어를 시범 사업으로 진행했습니다. 개복동 영화제를 열었던 건물은 20년 동안 비어 있었던 유휴 건물인데 저희가 영화관으로 변경시켰어요. 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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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 고화질, 고음질의 영화 환경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개복동 프로젝트를 하는데 관객 들이 그런 환경을 보고 행사장에 올 것 같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개복동의 공간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복동에 있는 건물은 황폐화되어 있지만 굉장히 견고하고, 방치되어 있 지만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에요. 되게 모순적이지만 이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우리가 찾은 2층으로 탁 트여있는 건물을 밀어 이 공간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00의 집, 그 집 마지막으로 [00의 집, 그 집]이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할게요. 이 프로젝트의 요점은 간단해요. 집이라 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고요. 20년 이상 한 집에서 사셨던 고령 여성을 인터뷰를 해보고 싶어 서 시작했습니다. 1인 사업자, 1인 기획자니까 제일 좋은 점은 내가 생각한 걸 그냥 추진하면 됩니다. 누 구와 회의를 거칠 필요도 없고요. “이거 괜찮지 않나?”하면서 주변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이건 좀 별론 데”라는 반응이 나오면 “왜 별로지? 아니야 들어봐” 오히려 설득을 하며 밀어붙입니다. 이것도 그런 일 환으로 시작했습니다. 강연과 인터뷰 그리고 전시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였습니다. 무턱대고 할머니를 인 터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빈곤, 지원체계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강연 을 먼저 열었습니다. 왜 집과 고령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였는가? 제가 31살인데요. 작년에 거의 모두가 영끌 해서라도 부동산 투기를 한다, 아파트를 산다, 주식을 한다, 비트코인을 한다고 했었죠. 관심이 없으면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이 되었죠. 저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나서 너무 큰 도시는 싫었어요. 군산에 왔을 때 너무 작지도 크지 않은 도시라서 너무 좋았어요. 저 한테 집은 오래 머물수록 더 가치가 있는 공간이에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내가 알고 있고 집에 들어가 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주는 곳이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동산이 과열되면서 차액을 남기 고 파는 수단의 집이 되면서 2~3년만 살다가 팔고, 차액 챙겨서 더 비싼 집을 사고 또 팔고 집을 재테크 수단으로만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집이란 뭘까?”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저는 40까지만 회사를 다니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프리랜서가 될 생각으로 살았는 데요.

보니 4월에 지원금 받아서

미친 듯 이

진행하고 12월에 회계 정산을 하고 나니 1년이 훌쩍 지나있는 거예요. 그러다 문득 이런 지원 사업의 쳇바퀴를 10번만 반복하면 마흔이 된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 거예요. 마흔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건지, 내 인생을 컨트롤 못하면서 엄마한테 의존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끔찍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르신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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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처음으로 청년 지원 사업을 받았어요. 그러다
11월까지
사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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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이상 한 집에서 거주한 65세 이상의 고령 여성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집”과 “고령 여성의 삶”을 엮어 “한 집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신 고령 여성들은 어 떤 삶을 살고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았는지”를 보는 프로젝트가 된 거죠.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인문학 강연을 먼저 열었습니다. <할머니의 먼 집> <사당동 더하기33> <ㅅ ㄹ, ㅅㅇ, ㅅㄹ> 영화를 먼저 봤고요. 마지막으로 생애연구소 ‘옥희살롱’ 김영옥 활동가님을 모셔서 “나 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라는 주제로 우리의 미래를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후 할머니들과의 인터 뷰를 진행했습니다. 처음으로 경자님을 뵈었는데요. 나는 이미 “집은 오래되어야 안락한 곳이다.”는 답을 정해놓고 한 접근 이었어요. “오래된 집에서 사는 고령 여성의 삶은 어떤지 보고 싶다”라며 열린 것 같지만 방향성을 정해 놓은 접근을 한 거죠. 경자님과 2시간 동안 대화를 하면서 내가 굉장히 편협한 생각으로 잘못된 접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봐야하는데 어떻게 보 면 이 분들을 대상화 할 뻔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분의 인터뷰를 기점으로 조금 더 지역 과 연관 지어 봅니다. 경자님이 사는 신흥동은 고지대에 빈민촌 마을을 꾸려놓은 마을로 군산 사투리로 ‘말랭이 마을’이라고 합니다. 부산처럼 관광지로 만들겠다고 1도시 1재생 사업을 하는 곳인데요. 경자님은 이 한집에서 60년 이상을 사셨어요. 그동안 집을 3번 고쳤는데요.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집으로, 이후 벽돌집으로, 지금 은 헐었다가 다시 지은 집에 살고 계신데 이 분의 삶을 들여다보니 이 지역과 떼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할머니 여기서 되게 오래 사셨는데, 혹시 이 집을 떠나고 싶지는 않으셨어요?”란 질문을 드렸어요. 제 가 기획할 당시처럼 “집은 오래 사는 게 가치가 있다”라는 명제로 접근하면 할머니의 답은 “아파트 필요 없어. 오래 산 이 집이 좋아.”라고 대답하셔야 하죠. 하지만 할머니는 “아파트 가고 싶다. 주택은 문 닫고 다녀야하고 이런 게 피곤하다. 아들이 여기 식당하고 싶다하니깐 여기 인수하면 나는 아파트 갈 끼다.” 라고 답하셨어요. 그래서 경자님과의 첫 인터뷰를 마친 후 이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바꿨죠. - 내 마음대로 가치 판단을 하지 말자. - 인터뷰 대상자들을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구술식으로 정리하자. - 여성주의와 집의 가치들을 보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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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터뷰를 정하면서 지역성이 드러나는 분을 인터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군 기지가 있는 군 산, 새만금이라는 포인트가 있는 군산의 지역적 특성을 담아 인터뷰할 분을 찾으러 다녔는데요. 그 와중 에 “우리 할머니 옥서면에 산다. 미군, 공항 때문에 되게 시끄러워 하신다.”라고 말하는 이를 만나요. 바 로 전화번호 따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옥서면은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갯벌이 도로가 되었고, 미군 기지와 군산 공항이 들어선 곳이에요. 그 옥서면에서 미군기지 옆 5분 거리에 사는 갑례 할머니를 인터뷰하게 되었어요. 60년 동안 이 집에 사셨 고 원래는 김 양식을 하다가 보상받았어요. 이제 농사를 짓는데 기지 소음 때문에 집에 TV도 못 두는 상 황이신 거예요. 그리고 주변 마을 분들도 대부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화학 물질 때문이라는 증명을 못 해 피해인정을 못 받고 있었어요. 대신 집에 소음 측정기를 두고 데시벨을 측정해서 소음 피해에 대한 보상만 받는 상황이었어요. 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든 생각이 지역의 변화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게 굉장히 독립된 개체로 나의 길을 가는 것 같지만 나를 속한 지 역이 어떻게 개발되느냐,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내가 어떤 구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굉장히 달라진 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지역이라는 것이 하나의 펼쳐져 있는 공간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 같지만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죠. 내가 어떤 지역을 고른다는 것은 내가 어떤 인생을 살지도 지역성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흥미로웠던 것은 한 분은 남편이 살아 계시고 다른 분은 사별하셨는데요. 두 분의 하루 생활 패턴이 크 게 달랐어요. 경자님은 남편 분이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거동이 불편하시다보니 남편을 보살피는 시간이 대부분이고 남편이 주간 보호소에 가야만 친구를 만난다고 하셨어요. 하루 생활 패턴과 나의 인생을 구 성하는 것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인터뷰를 기반으로 사진전을 열었고요. 사진전에 오는 관객에게 “당신에게 집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했어요. 공통적으로 집은 자신의 가치와 생활권과 그리고 안정된 나만의 쉼터를 원한다는 것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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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저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나의 시야도 바뀌고 발전한다는 생 각에 술자리를 좋아해요.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거예요. 술자리에서 나랑 이야기가 통하고 여성주의에 대한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다 싶으면 12월쯤에 꼬십니다. “내년에 이런 프로젝트 할 건데 혹시 되면 같이 할래?” 매번 이렇게 모집을 하는 편이에요. 12월이 되면 내년에 뭘 할지 키워드를 3개 정도 정리합니다. 내년에 뭘 할지 그려보고 거기에 맞는 동료로 누구를 초대할지가 이미 다 정해져 있어 섭외를 하러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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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프로젝트마다 함께 할 동료를 어떻게 모집하시나요?

사례발표

송국클럽하우스 회원 송TV에서 홍PD로 유튜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해운대구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서 동료의 회복을 지원합니다. 송국클럽하우스 사회복지사 송국클럽하우스에서 직원으로 송 TV에서 홍PD와 함께 유튜브를 운영 현재 정신건강의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삶을 도와 지역사회에서 존중받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드러나기, 나아가기 서홍석 이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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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기, 나아가기

“우리는 왜 사회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만의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할까요?”

이상석

안녕하세요. 송국클럽하우스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고요. 이상석입니다. 송국클럽하우스에서 운영하 는 유튜브 채널 송 TV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건데요. 우리는 특별하게 저와 서홍석 님이 함께 발표합니다. 홍석님은 송국에서는 홍PD로 불리는데요. 송TV 를 운영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분이에요. 송TV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설명해주실 거구요. 저는 사회복지사로서 송TV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이것이 사회복지 실천 현장에서 저에 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그리고 송TV는 어떤 지금 고민하고 있는지 설명을 드릴 겁니다. 발표자료 : https://www.slideshare.net/changeonat/22-254739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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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국클럽하우스, 정신재활시설 저희 기관 이름을 보시면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제가 일하는 복지시설을 복지관, 생활센터 가 아니라 “클럽하우스”라고 하면 사람들이 골프 치는 클럽하우스 또는 대화로 소통하는 앱으로 오해 를 하세요. 클럽하우스 인터내셔널 (Clubhouse International)이라고 하는데요. 전 세계 30개국에서 300개 정도 의 시설이 클럽하우스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1996년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분들이 지역사회에 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곳으로 시작했습니다. 1966년 정신보건법 제정이 되면서 그 당시에 는 정신재활시설이 아니라 사회복지시설이었는데요. 지금 현재는 2017년에 정신보건법이 정신건강 증 진 및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정신재활시설이라고 운영됩니다. 저희 시설은 예전에는 정신분열병이라고 했었던 조현병이나 우울증 또는 조울증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지역에서 존중받는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정신재활시설입니다. 클럽하우스라고 하니까 다들 어떤 시설인지 많이 궁금해 하세요. 송국클럽하우스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시죠. 영상을

내가 이 회사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표시,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회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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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듯이 다른 시설과의 다른 점은
다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점심 식사를 만드는 일도 이용하시는 회원들과 함께 직원들이 돌아 가면서 준비합니다. 이용하시는 분들을 저희는 회원이라고 합니다. 다들 멤버십 카드 하나씩은 들고 계시죠? 멤버십 카드는
등 록하신 분은 송국클럽하우스 운영에 필요한 부분들을 자신의 권리로서 행사할 수 있는 회원 제도를 갖 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원과 회원이 함께 송국클럽하우스를 운영하는 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Y0ktDs6MDc
정신질환자 복지 서비스를 위한
보면
이용하시는 분들이 송국클럽하우스 운영에 필요한 활동들을

우연히, 어쩌다 영상을 만나다

먼저 저의 일과 관련된 부분을 말씀드리고 송TV의 역사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회복지사로 2011년 11월에 송국클럽하우스에 입사를 합니다. 입사 후 연말 성과 보고 영상을 만들게 되는데요. 그 때 처음 해본 영상 작업이었지만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오히려 밤새 효과 작업을 넣는 게 재미있어서 과 도한 욕심을 부려 혼나기도 했었죠, 2012년 9월에 강남 스타일이라는 싸이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1억 뷰를 찍었는데요. 서울에서 아시 아 클럽하우스 컨퍼런스가 열리고 저희가 웰컴 영상으로 강남 스타일을 오마주해서 만들었습니다. 30 개국 300개가 시설이 연합을 하는 클럽하우스다 보니 많은 외국인들에게 영상을 보여줬고 상당히 인기 가 많았습니다. 어쨌거나 이 영상이라는 작업 자체가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는 저한테는 새로운 사업성 과 정도였던 거죠. 지원 사업을 기반으로 미디어 사업 확장 그 후 미디어를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질환 편견 개선 활동의 새로운 도구로 활용되어 선임이 경제 지원 사업을 받아 옵니다. 사랑의 열매라는 부산 사회복지공동모금에서 돈을 받아 오프라인으로는 당사 자 수기 강연을 하고, 온라인으로는 저희가 영상을 만들어서 배포 했습니다. 하나의 영상으로 만들어 배 포했다는 사업 성과로 대표활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2016년에 미디토리를 만나면서 시나리오를 바탕 으로 영상도 찍고 다큐멘터리를 찍는 작업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2017년에는 편견 개선 캠페인 영 상을 제작합니다. 당사자 분이 용기를 내주셔서 제작이 가능했는데요. 지하철 역사에서 “제가 환청이 좀 들려서 설명을 못 들었는데 여기서 덕천역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돼요?” 라는 질문을 하는 몰래 카메 라 형식의 영상을 찍습니다. 이 영상으로 부산 MBC 방송국 기획 보도에 출연하게 되고 부산시에서 정신 건강 우수 사업으로 표창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2018년에는 평생학습 프로그램으로 영상 촬영 작업 을 했는데요. 부산 사회복지협의회에서 여는 “051 영화제”가 있습니다. 그 영화제에서 저희가 최우수상 을 받습니다. 300만원 상금을 받아 회원들 이름으로 사랑의 열매에 기부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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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사업을 기반으로 유튜브 채널 오픈

2019년에도 미디토리와 함께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회원의 개인 유튜브 채널 운영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정신 건강,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당사자들이 직접 당사자의 정신 건강을 이야기 하는 채널, 그리고 “모금의 달인”이라는 채널을 정규 콘텐츠로 오픈합니다. 모달이라고 해서 모금의 달 인의 주인공도 우리 회원이신데요. 우리 시설이 해운대 쪽에 위치하고 있어요. 이분이 주변에 있는 가게 를 다니면서 사장님을 직접 설득해서 동전 넣는 모금함을 직접 40개를 운영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 이 야기를 유튜브로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오늘 발표자인 홍PD님은 당사자로서 상당히 화면에 많이 나오세요. 본인 정신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취업에 대한 이야기, 약물 복용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얘기들을 많이 하세요. 사실 유 튜브에 나온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에게 본인이 비춰지는 부분이라 상당한 용기를 가지고 하는 겁니다. 코로나 19의 확산과 미디어 제작 활동의 확대 : 정보접근권 보장

2020년에 코로나가 터집니다. 모금의 달인 영상을 하려면 직접 사장님을 찾아가서 찍고 촬영 섭외도 받 아야 되는데 코로나로 찾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모금의 달인 코너는 중단되었습니다. 국내 첫 확진자가 발생하고 학교가 다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복지관도 다 문을 닫았습니다. 4월 초 학 교가 온라인 개학을 하게 되는데 이때 송TV가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비대면 서비스를 열었습니다. 재 난 상황 안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가장 큰 힘듦이 정보접근권 보장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 당시 마스 크를 사려면 생년월일의 끝자리를 맞춰서 가야 살 수 있었죠. 그런 정보를 회원들이 어떻게 잘 알 수 있 느냐? 특히나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는 상황에서요. 그래서 저희가 공적 마스크를 언제 살 수 있고 약국에 언제 가서 줄을 서야 된다는 정보를 알리는 콘텐츠를 만들고 유튜브 링크를 보내드렸습니다. 미 디어는 만들면 기록이 되고 콘텐츠가 남기 때문에 언제든 필요하면 꺼내볼 수 있어요. 집에만 있어야하 는 상황에서 “집에서의 생활, 어떻게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지” “가족과 건강하게 의사소통하는 법” “스트레스 없이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미디어로 담아냈습니다. 회원들이 “재난지원금으로 담 배만 사서 피워도 되냐?”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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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권리 협약 안에서도 장애인의 정보접근권에 대한 부분들을 해결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요. 저희 송국에서
그래서 어떻게 더 건강하게 재난지원금을 사용할 것 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CRPD라고 유엔
하고 있는 게 바로 정보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이었어요. 미디어를 찍어서 그냥 보여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이 없는 회원들과 스마트폰이 있어도 사용하기 힘들어 하는 분들도 지원해드려요. 지금은 KT 직원들이 오셔서 회원들의 스마트폰 사용 능력 향상을 위한 프로 그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제작 활동의 지속 가능성 : 서비스 이용자인 동시에 제공자로서 함께하는 회원

코로나 덕분에 송TV 프로덕션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실시간 영상 그리고 녹화영상을 거 의 한 200건 정도 제작했습니다. 송TV 프로덕션 공동체는 홍석님을 비롯하여 회원들이 기획 촬영 편집 업로드 모니터링 등 영상제작 전 과정에 다 같이 참여하세요. 댓글 관리도 회원들이 직접 참여하시는데 요. 댓글 답변을 하기 어려우면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면서요. 지역에서 저희 채널을 보시고 전화가 옵 니다.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 혹시 이용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혹시 내 친구와 자녀 중 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이용할 수 있냐”는 연락들이 옵니다. 그리고 송국클럽하우스에 대해 궁금 한 것을 물어보세요. 그러면 이제는 아까 보셨던 영상을 보여드립니다. 한 번에 끝나죠!!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 이분들의 마음 회복도 상당히 중요하잖아요. 이런 내용의 영상도 저희가 담고 있습니다. 이런 비대면 서비스가 계속적으로 미디어를 통해서 확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화가 진짜 필요한 이유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어 정신건강의학과 병원 외래 치료를 받으시는 분들도 송국클럽하우스라는 이름 을 낯설게 받아들이시지만 유튜브를 보고 왔다는 분들이 이런 말을 하세요.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운동하다 다리를 다치거나 어디 부상을 당하면 병원에서 뚝딱하고 뼈를 붙이기도 하지만 재활이라는 것을 하잖아요. 운동도 해야 하고 쉼도 필요하고 마사지를 하는 과정을 통해 치료하는 것이 낯선 게 아 니잖아요. 이것처럼 마음 건강에도 재활이 필요합니다. 다리를 다치면 당연히 다리를 잘 쓰기까지 회복 이 필요한데 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회복은 낯설게 느껴질까요? 그래서 우리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될 때까지 송TV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홍PD와 송TV프로덕션 공동체가 있어 가능한 일 송TV 프로덕션

회원들이 그냥

제공받는

아니라 송TV를 기획하고 편집하고 모니터링하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으로서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드러나기 나아가기”라는 제목을 받고 저도 낯설었는데요. 이제 보니 “가려 있거나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다. 그리고 앞으로 향하여 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송TV가 그런 방향으로 회 원들과 함께 꾸준히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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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는 혼자만의
작업이 아닙니다. 홍PD와 회원들이 함께 작업을 계속하고 있기 때 문에 지속 가능한 일이 됩니다.
서비스를
사람일뿐만

“홍 PD와 함께 만든 송국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서홍석

반갑습니다. 저는 송TV의 서홍석이라고 합니다. 저는 2018년도에 처음 송국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고요. 대학 전공이 경찰행정이라서 대학교를 마치고 대형마트, 건물, 은행 등에서 보 안팀 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교대 근무다 보니까 신체의 밸런스도 무너지고 컨디션 관리가 되지 않 아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송국클럽하우스에서 다시 경제활동에 대한 준비를 더 해보기로 결심했 었습니다. 2019년도에 부산인재평생교육진흥원에서 유튜브 제작 프로그램에 참여했었습니다. 모바일로 유튜브 영상을 만들었는데요. 제가 항상 사랑했던 만두 찌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일주일 만에 3000 회가 나왔습니다. 저도 많이 놀랐고요. ‘요리하는 남자 홍TV’라고 요리 콘텐츠를 했는데 지금까지 송TV 를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2019년도에 미디토리랑 유튜브 채널 프로그램을 만들 때 제가 조연출을 담당해서 촬영 기술도 배우고 영상 기술을 배웠습니다. 송TV 영상을 제작할 때 영상이 많이 풍부해져 보람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 다. 송TV는 저 혼자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석 씨가 하는 것도 아니라 송국클럽하우스 회원들이랑 다 같이 하는 겁니다. 사전 기획 회의를 통해 회원들의 의견도 담아내고 촬영도 같이 하는 송TV라서 함께 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아까 방금 보셨던 기관 안내 영상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좀 어색하고 많이 떨기도 했는데 영상 제작 하고 나서 결과물이 나오고 댓글도 달리니 자신감이 많이 붙더라고요. 수동적인 나에서 능동적인 나를 만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동료지원가로 일을 하기도 하는데요. 동료지원가란 정신 장애인 당 사자가 같은 당사자의 회복을 지원하는 일을 말합니다. 해운대구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활동하고 있고요. 최근에 2022년도에 청년 정책 제안 활동도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정신 장애인들도 이 제 지원이 필요하다 빨리 지원을 해달라는 의견을 국제신문에도 기고를 했었습니다. 저희 송TV의 킬러콘텐츠는 “동료지원가에게 들어봐”입니다. 동료지원가가 직접 지역사회에서 겪은 인 권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낸 영상입니다. 이 영상이 현재는 교육 영상으로도 재생되기도 한다 더라고요.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카메라 앞에서 선다는 것은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 드 러나기가 싫을 수 있는데 드러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구요. 저희를 이제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지역사회에서 도전하는 청년이라고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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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들의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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