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ize Life 01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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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生活硏究

● 목차

[창간사] 제호 "Seize Life"에 대한 변명(辨明) / 지성근 _ 2 [격려사] Seize Life 창간호에 부치는 글 / 김중안 _ 5 일상에 대한 묵상 / 강영안 _ 6 일상이 신앙이다 / 김기현 _ 14 은혜의 논리와 삶의 의미 / 권연경 _ 21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 하창완 _ 30 일상생활의 영성 – 참된 기독교적 영성 / 이대경 _ 36 어거스틴과 국가권력 / 이상규 _ 42 샬롬(Shalom)과 웰빙(Well-being) / 강연정 _ 49 한국 교회의 내적 성숙과 영성 훈련 / 노종문 _ 60 서평 / 홍정환 _ 73


창간사

_ 제호 "Tfj{f Mjgf"에 대한 변명(辨明)

● 지성근(일상생활사역연구소 소장)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의 연구지를 창간하면서 우선 연구지의 제호에 대해 공감 을 얻고자 합니다. 전도서 9장 7절부터 10절에서 우리는 인생을, 삶을 어떤 태도 로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전도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오늘날의 일상용어로 풀어 쓴 성경 Message는 이 본문을 마치 제목을 달듯이 "Seize Life!" 라고 시작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Message 로 읽게 되었을 때 "삶을 붙잡으라!" " 일상생활을 붙잡으라!"라고 외치는 전도자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는 느낌을 받았 습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찌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 님이 해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 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강조하던 가르침이 교회의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곤 했 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사도바울은 "심하다!"라고 말할 만큼 단호하게 이렇게 정 죄하고 있습니다.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입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 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 이니라 (딤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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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일상생활연구


명백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원론적 사고 속에서 일상생활은 저 열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심지어 죄악의 현장으로 치부해 버 리려는 가르침들이 우리 주위에 사실 난무한 실정입니다. 비록 타락의 영향을 일 상생활의 모든 영역들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또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 기자의‘일상생활을 붙잡으라!’ ,‘일상생활을 누리라!’ 라는 외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외침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일상을 긍정하는 "Seize Life!"의 외침이 잘못 이해되면 통속적 Carpe Diem식1) 정서로 연결되기 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일상을 강조하는 사회과 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일상성’속에는 인간을 노예화 하고 해방 시키지 못하는 측면이 분명 있으며, 성서 역시, 피조세계의 일부로서‘일상생활’ 도 구속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조건 일상을 부정하거나 혹은 무조건 일상을 긍정하는 그 어떤“미혹하는 가 르침” 도‘아니라!’ 고 말하는, 그리고 더불어 성서가 말하는 균형,“바른 가르침” 을 추구하는 것이 본 연구소의 취지입니다. 그리고 본 연구지 Seize Life 「日常生活硏 究」 는 이런 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국내에서는 최초의 성과의 장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창간호는 일상생활사역(Everyday Life as Ministry 일상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이웃을 섬기는 섬김이라는 의미에서 사역이란 단어를 사용하였 음)의 신학적인 단서들을 신학의 각 영역으로부터 맛보기 위해 각 영역에서 한 분 이상의 글을 모아 보았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글을 써 주신 연구위원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강영안 교수님은‘일상생활사역’ 에 관한 글을 쓰시다가 우선‘일상’ 을 정의하 는 글을 쓰셨고 앞으로 여러 번 더 글을 쓰실 필요를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김기 현 목사님, 권연경 교수님, 하창완 목사님, 이대경 선교사님은 각각 조직신학, 신약 1)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 에서 키팅선생으로 나오는 로빈 윌리암스가 학생들에게 도전한 말, 라틴어 Carpe Diem 역시 seize the life 혹은 enjoy the life로 번역될 수 있다. 간혹 그 원래의 의미보다 현재의 삶을 즐기려는 이들에게 매혹을 던져주는 어구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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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구약신학, 영성신학의 입장에서 일상이란 주제를 다루어 주셨고, 이상규 교 수님과 강연정 교수님과 노종문 목사님은 각각 역사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영성 훈련의 입장에서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에서 두드러진 주제인 폭력과 평 화, Wellbeing, 영성훈련의 문제를 다루어 주셨습니다. 아울러 국내에 발간된 일상 생활사역 관련 책들에 대한 소개와 짧은 서평을 홍정환 연구원이 해 주었습니다. 연2회 발간되는 본 연구지를 널리 알려 주시고 또한 글을 나눔으로 동역해 주 시고 무엇보다도 이 연구지를 통해 한국교회의 연약한 부분이 새 힘을 얻도록 기 도해주시기 바랍니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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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일상생활연구


격려사

_ "Tfj{f Mjgf"창간호에 부치는 글

● 김중안(한국기독학생회 IVF 대표)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돕고 세우는 목적을 가진 교회병행단체로서 한국기독학 생회(IVF)는 지난 50여년 동안 성경공부운동, 제자훈련, 소그룹운동, 세계관운동 과 같은 콘텐츠로 한국교회를 섬겼습니다. 최근 이런 제반 영역에서는 한국교회 가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여전히 주되심을 공간적 으로는 교회 건물 안에서, 시간적으로는 주일과 예배가 있는 시간에만 제한하는 경향이 있어서 신앙과 일상생활이 통합된 그리스도인을 찾기가 쉽지 않고 결과적 으로 기독교 전반이 사회 안에서 폄하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 인식 속에서 IVF는 50주년을 맞는 시점인 2006년을 전후로 하 여‘일상생활사역’ 을 통해 한국교회를 섬겨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신앙과 삶 의 통합 혹은 모든 생활에서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제자의 삶과 같은 주제는 지난 50년간 한국기독학생회(IVF)가 캠퍼스 사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캠퍼스의 대학생 들과 그 졸업생들인 학사들 속에서 끊임없이 강조해 왔던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서, 이웃을 섬기는 봉사로서 강조하는 성경적 이해를 대변하고, 동시에 시공간 속 존재로서 우리 인간의 삶 전반이 우리 의 신앙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모습으로 구현할만한 운동을 하는 기관인‘일상생활사역연구소’ 를 만들어 이를 통해 한국교회를 돕고 성도들을 구비하려 하였습니다. 본 연구지는 이런 의도의 초기 결과물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IVF일상생활사 역연구소가 창간하는 본 연구지는 일상생활 혹은 일상생활사역의 측면에서의 학 문적인 성과를 정리하고 일구어 내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학문적인 글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과 신앙에 도움이 되는 성격의 묵상적인 글도 함 께 실려서 현학적이기 보다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연구지가 되면 합니다. 아 무쪼록 본 연구지를 통해 한국교회가 균형과 진정성 있는 신앙으로 온전케 되기 를 바랍니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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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대한묵상 ● 강영안(서강대학교 교수) 성도의 삶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성도라고 해서 일상을 떠난 삶을 살지 않는다. 성도는 일상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 고 다시 일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드린 이른바 ‘대제사장적 기도’ (요한 17장)를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일상의 삶이 진행되는 이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소유, 예수 그리스도 의 소유로 삼으셔서 세상으로 다시 보냄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 상에서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서 일상적 삶의 여러 계기와 여러 모습을 말씀을 통하여 묵상해 보는 것이 성도에게는 유익하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 곧 하나님 의 사람으로 성도를 온전히 구비(具備)시키는 일(엡 4장)이 목회의 본질이라 이해 한다면 일상적 삶에 대한 묵상은 목회자에게도 대단히 유익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 삶은 여러 계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람은 예컨대 먹고, 마시고, 숨쉬고, 잠잔다. 무엇을 좋아하고, 판단하고, 행 동한다. 물건을 만들고, 사고팔고, 말을 주고받는다. 사람은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 하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한다. 사람이 하는 이런 일상적 행위들은 삶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 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란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주되심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자면 우리의 일상적 삶 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 을 생각해 보고 따져 보기 전에, 우리가 앞서 물어보아야 할 물음은 도대체 일상이 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상에 만일 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 가 생각해 보는 일이 결코 무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일 상(日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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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일상생활연구


일상은 문자 그대로 따라 하자면“늘 같은 하루” 이다.“하루하루가 늘 같다” 는 말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고, 먹고, 일하고, 타인을 만나고,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 고, 예배드리는 일, 이렇게 동일한 행동이 반복되는 삶. 때로는 파안대소할 정도로 즐거운 일이 있는가 하면, 절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슬픈 일이 있기도 한 삶. 그러 나 대부분은 크게 즐거워 할 일도, 크게 슬퍼할 일도 없이, 그렇고 그렇게 하루하 루 지나가는 삶.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사람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필연 성), 진행되는 일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비슷하고(유사성), 반복되고(반복성), 특별히 드러난 것이 없으면서(평범성), 어느 하나도 영원히 남아 있지 않고 덧없이 지나가는(일시성) 삶. 이것이 일상이요, 일상적 삶이다. 좀 더 자세하게 일상적 삶 의 성격을 살펴보자. 일상적 삶은 사람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현세적인 삶의 조건이다. 이것을 일 컬어 나는‘일상의 필연성’ 이라 부르고자 한다. 잠을 자야하고, 먹어야 하고, 타인을 만나야 하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감정의 변화를 겪어야 하고, 결정해야 하고, 이것 과 저것을 구별하여 판단하고, 때로는 침묵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없다면, 일상적 삶은 없고, 일상적 삶이 없다면, 현세적 삶이 없다. 따 라서 일상적 삶의 여러 모습은, 각각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와같은행위를하고, 경험을하는것은삶을구성하는필연적조건이다. 어떤 결함 때문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일상적 삶을 중단할 수 있다. 예컨대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가 있을 때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한다. 신체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병과 같은 질병 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슬픈 일을 보거나 안타까운 일을 볼 때, 감정 표현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는 의도적으로 일상적 삶의 여러 모습을 거부하거나 중단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단식을 한다든지, 타인을 만나지 않고 홀로 거처한다든지, 침묵으로 일관할 수 있다. 일상 적인 것을 떠남으로써 일상과 다른 현실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경우, 일상적 행위 를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수도 공동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상의 필연 성을 말하자면‘필연적이 아닌 것’ 으로,‘우연적인 것’ 으로 만듦으로써 일상을 초 월하여, 일상과는 다른 삶의 차원, 삶의 실재를 맛보고자 한다. 그러나 수도자의 삶조차도 결국에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먹지 않고, 말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과의 접촉 없이는 삶이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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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는 점에서 일상의 필연성을 얘기할 수 있다. 이 세계 안에서 타인과 더불어 몸 으로 살아가는 이라면 일상의 필연적 조건들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창조의 모습이다. 천국도 일상인가? 나는 천국도 우리가 경험하는 일 상의 필연성을 벗어난 곳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에도 먹고 마시며, 그곳에도 생각하고, 얘기하고 찬송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그곳에도 몸으로 움직이며 몸으 로 하는 것들을 경험할 것이다. 현세의 우리 일상적 삶에 여러 결함이 있고 문제가 있더라도, 일상적 삶의 조건 자체를 천국은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다. 천국 의 삶은 우리의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혀 상관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 님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자연은 자연으로, 각자 자신의 자리 가운데 자립성과 고

나는천국도 우리가경험하는 일상의필연성을 벗어난곳이라 생각하지않는다.

유성을 인정받으면서 삶의 충만과 나눔과 누림을 아무런 소 외 없이 함께 나누어 가지는 그런 장소, 그런 방식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상적 삶이 지닌 두 번째 성격은 유사성이다. 무엇을 먹 는가, 어떤 옷을 입는가, 어떤 거처에서 사는가는 사람에 따 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피자를 즐겨 먹

는 나라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처럼 된장국을 즐겨 먹는 나라 사람도 있다. 아파 트에 사는 것을 즐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단독 주택을 선호하는 나라 사람도 있 다. 그러나 땅 위에 사는 사람이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입든지, 어떤 처소에 거 하든지,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보름달을 보면 즐거워하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 누구나 웃음을 보인다. 힘든 일을 하게 되면 얼굴을 찌푸리고, 일 없이 한가 하게 지내면 얼굴이 맑고 밝다. 가진 사람이든, 가지지 못한 사람이든, 배운 사람 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북방 사람이든, 남방 사람이든, 일상 적 삶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비슷하다. 비슷함,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 가운데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 는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처소에든지, 사람이 거처한다는 점에는 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은 부족함이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비바람을 염려해야 한 다. 어떤 사람은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게조차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달마다, 주마다 음악회 를 찾아가 즐기고 누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예술에 아예 담을 쌓고 산다. 어떤 사람은 즐겨 책을 읽고, 책과 함께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책과 전혀 무관하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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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일상생활연구


가는 사람도 있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앙에는 전혀 무관심 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에서 생기기도 하고,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이나 삶의 지향에 따라 생기기도 한다. 어떤 차이는 삶 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차이는 살아가는 당사자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 을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떤 차이는 없애려고 노력해야 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 떤 차이는 더욱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조장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일상의 유사성으로부터 다음 두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먼저, 누구나 사람으로 서 비슷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거처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할뿐 아니라 타인과 더불 어, 각자의 은사대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삶의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 람이라고 천대받고 부자라고 우대받는 사회,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 특권을 누리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일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으로 존중받는 점에서 비슷해야 한다. 이와 다른 면, 곧 차별을 조장하는 일은 제거되어야 한다. 일상의 유사성으로부터 두 번째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차별은 없애지만 다양성으로 인한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별을 없앤다고 해서 모든 사람을 꼭 같이 살게 한다면 그것 또한 견딜 수 없는 삶이 될 것이다. 모두가 축구를 해야 하고, 모두가 자전거를 타야하고, 모두가 음악을 청취해야 하고, 모두가 교회를 가 도록 강제화된 일상을 생각해 보라. 이런 면에서는 다양화가 인정되고, 조장되어 야 한다. 삶은 하나의 빛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빛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통일성이 있으면서도 그 안에 다양한 것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와 모습을 유지하고 펼칠 수 있는 세계이다. 일상의 세 번째 성격은 반복성이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삶이 날마다 다름이 없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어제 했던 일을 오늘 하게 되고, 오늘 했던 일을 내일 또 하게 된다. 오늘 고심했던 일을 내일 또 고심한다. 저 아이를 키우느라 한 수고와 비슷한 수고를 또 다른 아이를 키우면서 반복한다. 어제 학교 가느라 걸어 간 길을 오늘 또 걸어가고 내일도 다시 걸어갈 것이다. 오늘 밥을 먹고, 내일도 밥 을 먹는다. 모레도 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이다. 먹는 밥, 하 는 일, 만나는 사람, 곧 반복의 내용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반복의 형식은 동일하 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은 이렇게 끊임없는 반복으로 구성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 을 것이다. 반복하면서 익숙해지고, 익숙해짐으로 인해, 모든 일이 쉽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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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먹는 일, 자는 일, 사람들과 만나는 일, 타인과 더불어 사는 일이 전혀 반복이 없이, 그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일이라면 그 때마다 새로운 학습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새롭게 긴장을 해야 할 것이다. 반복은 약간의 학습 과정과 약간의 긴장으 로 삶을 쉽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복은 또한 일정한 취향을 형성하고 습관을 만들어낸다. 전혀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은 책에 대한 취향을 얻을 수 없고 전혀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취향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을 떠나 보내고, 다시 만 나기를 반복하면서, 기다림이 일종의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된 기다림은 또한 인내 를 만들어 낸다.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존중하는 행동을 반복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결국 겸손이라는 덕으로 빚어진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에 관심을 두면서, 같은 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 사이에는 그렇 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정이 생기며, 그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을 민감하 게 교류할 수 있는 감수성이 일정한 성품으로 형성된다. 기도를 꾸준히 하는 사람 은 기도로 인해, 예컨대 수용성이라든지, 신뢰라든지, 낙망하기보다 언제나 희망 을 가진다든지, 기뻐한다든지 하는, 일정한 성품이 형성된다. 갑자기, 한번 행하는 일로, 습관이 되지 않을뿐더러 성품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내라든가, 겸손이라든 가, 감수성, 희망이라든가, 즐거워함이라든가 하는 미덕은 반복된 생활을 통해 형 성된 성품의 결과들이다. 일상의 반복 없이 성품 형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의 반복성은 그러나 타성을 만들어내고 지루함의 감정을 생산한다. 타성은 그 때, 그 때의 일을 새롭게 대하기보다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다. 긴장이나 책임, 사려나 되새김, 새로움이 이 가운데는 없다. 모든 것은 명백하 고, 당연하고, 별다른 감정 개입 없이 진행된다. 병원 진료실에서, 관공서의 민원 실에서, 심지어는 교실의 지식 전달에서, 밥을 하는 부엌에서, 이런 타성은 작동한 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일정부분은 타성을 필요로 하고, 타성을 바탕으로 신경을 곤두세움 없이, 쉽게 일들을 처리한다. 이것의 대가는 지루함이다. 일상의 반복은 지루함을 낳는다. 반복 가운데는 새로운 것, 관심을 끄는 것, 피 를 뜨겁게 하는 것, 신경을 곤두세워 몰두할 수 있는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함이 발생한다. 지루함은 시간이 없거나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있 되, 너무 많이 있고, 일이 있되, 정신의 촉각을 세울 만큼 관심을 요구하는 일이 아 니기 때문에 생긴다. 삶의 과정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처리되기는 하되, 열정 이 없고, 고통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지루함이다. 그래서 간혹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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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천국’ 보다‘신나는 지옥’ 이 좋다고 말한다.‘지루한 천국’ 이란 사실은 형 용사 모순이다. 마치 네모난 원이 원이 아니듯이 지루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좋 은 것은 많되, 관심과 사랑과 정열이 없다면, 따라서 지루하다면 그곳이야 말로 지 옥일 것이다. 평범성은 일상의 또 다른 특성이다. 일상의 삶에는 눈에 크게 두드러진 것이 없 다. 통상적이고, 보통의 것이고, 공통적인 것이다. 한자 술어로 말하자면 그야 말 로 범용(凡庸)이 일상성의 특성이다. 누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평범 이란 말도 이런 뜻이다. 일상적인 것의 이러한 특징을, 영어로는‘오디너리’ (ordinary)라고 이름 붙인다.‘엑스트라 오디너리’ (extraordinary), 곧 비상(非常) 하고 특별하고, 독특한 것과는 달리‘오디너리’ 한 삶, 오디너리 라이프(ordinary life), 이것이 일상이다. 그런데 보라. 범(凡)의 경우든,‘오디너리’ 의 경우든 누구에 게나 적용되는 공통의 질서가 이 속에 표현되어 있다. 일상을 어떤 정체(整體)가 없는 무질서로 보면 그것은 큰 오해다. 일상이 일상인 것은 평범하면서 그 가운데 질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은 모든 사람의 삶의 장(場)이요, 삶의 통로일 수 없다. 땅에는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고, 물에는 배들이 다닐 수 있는 뱃길이 있다. 돌은 쪼개면 일정한 방향으로 쪼개지고, 바람은 한번 불기 시작 하면 어느 순간까지는 대체로 일정한 방향으로 분다. 누구에게나 통용되고, 누구 에게나 공통적일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질서는 일상의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며 그 골격을 유지하게 하는 뼈대 같으면서 도 동시에 소통을 가능케 하는 통로와 같다. 일상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와 맞닿아 있으면서 자연의 질서를 초월한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자야하고, 입어야 한다. 이것들은 자연에 적용되는 일정한 법칙에 종속된다. 먹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자 연에 정해준 법칙을 따라 생산된 것들이다. 입는 것도 자연에서 취해 가공한 것들 이다. 자는 것도 자연에서 취한 재료를 가지고 일정한 공간을 만든 결과 가능하다. 타인과 맺는 관계, 물건을 사고파는 일,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일정한 질서로 소통이 가능하고 또한 일정한 질서의 제한을 받는다. 법과 공권력 을 가진 국가의 존재, 사회 조직, 우리의 의식과 사고와 관습을 통제하는 문화는 일상적 삶을 평범하게 유지하고 통제하는 질서들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사회적 통제와 소외도 이러한 평범성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질서들에서 올 수 있다. 일상의 평범성은 반복성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삶을 도피대상으로 만든다.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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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 때 일상의 탈출을 꿈꾼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 날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일 을 떠나, 좀 특별하고 좀 신기하며, 좀 짜릿하고, 혼을 흔들어줄 수 있는 일을 기대 한다. 뭐, 좀 재미나는 일이 없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정한 궤도, 일정한 질 서, 일정한 길을 벗어나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알거나 경험하고자 하는 호기심, 기존의 관념이나 질서와 배치되는 행동이나 사고 양식의 추구나 표현, 낯선 곳으로의 여행 등은 모두 일상의 평범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 력이다. 누구나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평범한 일상의 삶에 숨 통을 터주는 기능을 할뿐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수정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일상의 다섯 번째 특징으로 우리는 일시성(一時性)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늘 같은 것이 반복되므로, 같은 것이 늘 머물러 있는 듯하지만,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돌아보면 모든 것은 순간으로 존재할 뿐 결국 지나가고 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온 종일 땀 흘려 일한 것, 밤을 지새우면서 읽고 생각 하고 쓴 것들, 그토록 애달파하며 정을 쏟아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들, 박장대소하 며 즐거워했던 일, 이 모든 것들은 잠시 잠깐 주어졌을 뿐, 결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 지고 만다.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모든 것은 바람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처럼 헛되고 헛된 것이다. 모든 것은 마치 아침 안개와 같다. 눈 앞을 잠시 가리지만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사라지듯이, 그 존재가 무상한 것이 일상적 삶이다. 일상의 무상성, 일시성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물의 질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해 아래 어느 것도 늘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하고, 모 든 것은 흐른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늙어 가고, 병들고, 쇠하고, 기억에 서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은 죽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류는 일상의 무상성의 원천인 죽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하기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어 불순종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두 려움은 문화를 낳게 한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성 을 쌓은 일이다(창 4:17). 그렇게 하여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무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고, 악기를 만든 것도 모두 삶의 일 시성에 대한 투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이나 예술은 삶의 일시성, 무상성을 잊는 수단이거나 아니면 무상성에 대항해서, 그럼에도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 음을 보여주는 행위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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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일시성, 무상성은 사물의 질서뿐만 아니라 인간이 망각할 수 있는 존재라 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만일 모두가 모두를 기억한다고 해보자. 내가 쏟 은 땀과 노력, 내가 경험했던 참혹한 일들, 내가 읽은 것들을 나뿐만 아니라 타인 들도 모두 하나도 잊지 않은 채 모두를 기억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삶은 더욱 의 미 있고 아름다울까? 나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망각하고 사라지고 스러 져 가기 때문에 새로운 기억이 축적되고, 새로운 것들이 옛 것을 대신해서 자리 잡 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성장은 쌓은 것들을 허물어 내고 모은 것들을 무의식 적으로 버리기 때문에 가능하다. 없앰이나 비움 없이 성장은 없다. 그러나 성장조 차도 결국은 현세의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볼 수 있을 것 이다. 삶의 일시성, 삶의 무상성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 삶의 가치를 매김 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셔서 천국이나 지옥에 두지 않고 이 땅에 두셨다. 다른 식 물과 동물과 함께 존재하는 이 땅이란 공간이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곳이다. 동시 에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시간적 존재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땅이란 공간 축 과 탄생에서 죽음까지 진행되는 일생(一生)이라는 시간 축에 따라 타인과 만남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 존재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당신의 모 습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사물을 불러내시고, 만드시 고, 명령하시고, 복 주신 분이다(창 1장). 인간은 무엇보다도 그 말씀을 듣는 자로, 반응하는 자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로, 남자와 여자 로 함께 삶을 나누는 성적 존재로(창 1장), 땅을 보존하고 가 꾸며 노동하는 존재로,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로, 서로에게 책 임지는 존재로(창 2장) 지음 받았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일상적 삶은 이렇게 지음 받은 피조 물의 삶을 감사하므로, 순종하면서 책임 있게 사는 삶이다. 삶이 지닌 필연성, 유사성, 반복성, 평범성, 일시성은 하나님

성도의삶은 이일상을회복하고 거룩하게하는 삶이다.

의 창조 질서 속에서 주어진 것들이다. 이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인 하나님의 구 속의 은혜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시며 회복하시는 역사 가운데 순종하면서 살아가 는 성도의 삶을 통해 새롭게 다시 성화될 수 있는가 하면, 의미를 상실하고 소외된 채 버림받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의 삶은 이 일상을 회복하고 거룩하게 하는 삶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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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신앙이다 ● 김기현(수정로침례교회 목사)

구별은분리가아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다. 우리더러 소금이요 빛이라 하 신 말씀의 본뜻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엄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부르신 것, 이 스라엘을 애굽에서 10가지 이적으로 구출하신 것,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의 실패와 심판, 다시 바벨론 생활과 귀환이라는 일련의 드라마와 교회를 새로운 가족 공동 체로 규정한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와 사명은 다름 아닌 세상과 구 별된 제사장 공동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대번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과 담쌓고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건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속하신 다는 성서의 내러티브가 잘못된 건가? 변화산 위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는 베드 로의 횡설수설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주님은 산 아래 간질하는 세상의 고통에 귀 막지 않으셨는데, 죄 많은 이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주의 제자된 우리 가 왜 세상과 동떨어진 소종파(sect)나 게토화된 소수 집단을 자처하려는가? 여기서 구별은 분리 혹은 차별이 아니다. 다르다는 뜻이다. 구별이‘다르다’ 를 의미한다면, 차별은‘틀리다’ 를 뜻한다.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은 구별될 뿐 차 별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 사는 분리주의도 아니고, 세상 자체를 거룩하게 하려 는 일치주의도 아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살면서도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과 가치 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살던 바벨론이나 약속의 땅 가나안도 또 다른 이름의 바벨론에 지나지 않는다. 고로,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요 17:16) 그래서 주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주의를 주셨지만, 세상을 떠나 하늘로 데려가기를 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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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고, 살고 있다. 그래서 곧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 다.“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 다.” (17:18) 두 구절 사이에 있는 말씀은 이렇다.“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 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서로 엇갈리는 듯이 뵈는 이 구절들을 종합해 보자. 우리의 신분과 신원은 세상 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를 목이 빠져라 하늘만 쳐다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의 사명과 사역은 세상에 있 다. 우리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시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계획, 선택이 아니다. 주 님의 부름이다. 당신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와 정체는 거룩함, 곧 구별됨 이다. 세상과 어울리되 섞이지 않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일상을 거칠게 정의한다면 몸으로 살아내는 모든 것이다. 우리 몸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와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육화와 십자 가, 부활이 첫 번째요,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두 번째요, 영지주의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였던 초기 교회의 역사가 세 번째요,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네 번

일상은 몸으로살아내는 모든것이다. 우리몸으로구별된 삶을 사는것이다.

째요, 주의 만찬이 다섯 번째요, 생활 즉 예배라는 것이 여섯 번째요, 위의 모든 것들이 최종적으로 집약되는 직업과 사명이 일곱 번째이다.(여기서는 세 번째와 네 번째만 다루도록 한다.)

역사: 영지주의는일상을부정한다. 영지주의(Gnosticism)는 참 낯익은 듯하면서도 낯설다. 신약 성경과 초대 교회 사를 읽고 공부할 때나 스치듯 지나가는 이름이다. 그것이 케케묵은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댄 브라운의‘다빈치 코드’ , 최근 알려진‘유다복음서’ 를 통해 대중적으 로 알려졌다. 기원은 복합적이다. 지역적으로는 페르시아에서 그리스, 유대까지 걸쳐 있고,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 그리스철학, 유대교, 심지어 기독교의 영 향을 받았다. 어원은‘지식’ 을 의미하는 헬라어‘그노시스’ 에서 유래되었는데, 신령하고 신 비한 지식을 말한다. 영적인 지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맞은편에 대립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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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또 다른 지식을 전제로 한다. 육적인 지식이다. 골자는 영과 육의 상충이다. 유 물론과 관념론이 마음과 육체에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하거나 더 기초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측면을 전면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단언한다.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 영은 고상하고, 육은 열등하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근 발굴, 공개된‘유다복음서’ 이다. 이 문서에 나타난 구원과 해방은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악한 물질세계로부터의 탈출 이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일상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 자체를 악으 로 규정하고 세계를 탈출해야 할 사악한 장소로 간주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영혼 을 가두고 있는 인간의 몸이야말로 원죄이다. 어찌하든지 고단한 세상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더 없는 안식이고, 최고의 자유다. 이 세상에서의 일말의 책 임과 의무란 말장난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세계 이해는 곧 신 이해와 맞닿아 있다. 물질적 세상이 악하다면, 당연 그 세상을 창조한 신 또한 악하다. 영지주의자들이 명명한 신의 이름 중,‘사클라 스’ 는‘바보’ 이며,‘네브로’ 또는‘얄다바오스’ 는“피로 더럽혀진 신이며 그의 이 름은 반란자” 를 의미한다. 세계의 창조와 더불어 온갖 악과 죄, 고통들, 예컨대, 추위와 더위, 가뭄과 홍수, 태풍과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살인과 전쟁, 폭력과 테 러, 질병과 갈등이 난무하니 그런 신이야 말로 악의 원천이요 악한 신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 복음은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에는‘보시기에 좋았다’ 는 문구가 도합 7회나 등장한다. 나는 다른 곳에서‘좋다’ (good)를 두 가지 의미라고 하였다.( ‘가룟 유다 딜레마’ 149-50) 하나는 존재론적 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창조주를 닮아서 선하다. 다른 하나는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다.(엡 2:10)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미적으로도 선하다. 아름답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최고의 디자이너다. 보기에도 너무 멋지다, 세상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지었을 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다름 아닌 몸의 긍정이다. 성서와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를 경시한 적이 없다. 인간은 천사와 달리 육체를 가 지고 있으며, 동물과 달리 영혼이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그것은 시 체일 테고, 육체가 없다면 귀신이다. 칼 바르트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다.“인간 은 영혼을 가진 몸이요, 몸을 가진 영혼이다.” 하여, 일상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것 은 불가피한 차원을 떠나서 죽고 사는 문제다. 구원의 본질이요, 사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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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육체와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인간이 육 체와 영혼의 결합인 양 호도하는 측면이 있다. 루돌프 불트만은“인간은 몸을 가 진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이다” 라는 유명한 테제를 공표했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구 원의 희망은 감옥인 육신으로부터 탈출이 아니라 몸의 부활에 있다. 구원은 몸의 부정이 아니라 몸의 변화이다. 몸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나님 을 예배하는 삶이다.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몸을 긍정한다고 몸을 탐닉하거나 숭배하지 않는다. 타락의 관점에서 보면 몸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 몸의 각 지체가 언제든지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 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 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롬 6:13) 몸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도 덕 폐기론에 함몰한다면, 몸을 긍정하는 기독교인은 도덕 적 선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로부터 봉사와 구제를 강하게 강조 했다. 한국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학교, 병원, 고아원 과 양로원 등의 사회복지 시설은 선교적 도구라는 것을

몸을긍정한다고 몸을탐닉하거나 숭배하지않는다. 타락의관점에서보면 몸또한변화되어야한다.

간과할 수 없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복음의 근본 요구라는 점이다. 육체를 떠 나는 구원이 아니라 육체 가운데 거하는 삶(갈 2:20)이 진정한 구원의 실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가난한 자, 눈 먼 자, 병든 자,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모든 재물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예수를 결코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존 스토트의 말은 깊이 경청할 만하다. “순전히 내적이고, 추상적이고 신비적이기만 한 예배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 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몸으로 수행하는 구체적인 봉사 행위로 표현되 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제자도는 소극적으로 우리 몸의‘행실’ 을‘죽이 는 것’ 과 (8:13) 적극적으로 몸의 지체를 하나님께‘드리는 것’ 둘 다를 포함할 것 이다.”( 로마서 강해 IVP, 430) 그럼에도 곳곳에서 몸으로 사는 것을 폄하하거나 아니면 구별된 몸으로 살아내 지 못하는 것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기독교는 영지주의를 거절했고,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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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도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것은 치열한 사상 투쟁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 하였다. 지금도 그러하다.

교리: 모든신자는제사장이다. 아직도 많은 교회와 교우들이 입버릇처럼‘성직자’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 다보니 목사와 성도 사이의 이중윤리가 발생하고, 계층 구조도 형성되기도 한다. ‘성직자’ 도 ‘평신도’ 도 없는 것이 성서와 개신교의 종교개혁적 이상에 부합한다. 목사는 단연코 성직자가 아니다. 아니면 목사도, 교인도 모두 성직자라고 하거나 아니면 성도라고 해야 마땅하다. 목사는 교인들과 다를 바 없다. 목사라고 특출할 것 없다. 목사와 교인은 존재와 신분이 아니라 기능과 역할이 다를 뿐이다. 하는 일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교회를 바울은‘몸’ 과‘집’ 으로 비유하였다. 하나는 동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적이다. 유기체라는 점에서 같다. 너 없이 나 없 다.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 모두가 몸의 지체요, 집의 일부이다. 상하도, 우열도 없다. 어느 하나 없으면 시쳇말로 병신이다. 장애자란 말이다. 그렇다고 나 없으 면 너 없다고 자기 과시하면 완전한 오해다. 이용해 먹으면 안 된다. 어찌되었건, 존재론적으로 같은 신분이나 기능적으로는 역할이 다르다. 종교개혁자들의 전 신자 제사장 교리는 가톨릭과의 투쟁 속에 재발견한 진리이 다. 중세 가톨릭주의는 중재와 매개의 체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구 체적인 물질의 형태로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사제의 중재와 만찬을 매개로 드 러난다는 논리이다. 반면 개신교는 사제의 중재나 매개 없이도 모든 신자가‘직 접’ 하나님 면전에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나님이 친히 모든 신자의 아버지 가 되시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와 중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는 그분의 은총과 공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모두가 제사장이며, 모두가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한다. 제사장의 직무가 여럿 있 지만, 딱 하나만 고른다면 단연 제사, 곧 예배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세상이 화 목하게 되고, 제사장은 그 예배를 인도한다. 그리고 예배가 행해지는 곳은 성전이 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몸이 성전이다. 그리고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예배 이다. 예배 아닌 것이 없다.“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 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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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성경번역선교회 소속 선교사님을 모셔서 말씀을 들었다. 주일오전 예배 였는데, 이분이 강단에서 던진 첫 마디는 이랬다.“신학교도 나오지 않아서 안수 받지 않은 제가 강단에, 그것도 주일오전 예배에 서 있다는 것이 참 이상하네요.” 그분의 설교가 끝난 다음 나는 이렇게 말했다.“우리 교회에서 목사가 아닌 성도 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도 할 수 있고, 간증도 할 수 있는 것은 강단이 거룩하지 않 아서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외 없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라 면 누구나 설 수 있고,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의 제사장적 삶은 비단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또 그래서도 안 된 다. 전 신자 제사장을 외치며 교인들을 훈련하고 양육하는 것은 언제라도 환영해 야 할 일이다. 그러나 훈련에만 매몰되어 훈련받느라 온 종일, 일주일 내내 교회 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전 신자 제사장 교리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악용하고 왜곡하는 처사다. 이는 마치 등불을 켜서 어둔 곳을 비추지 않고 누가 누가 밝게 빛나나 경연하는 것이다.“등잔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 어 그 빛을 온 집안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마 5:15, 우리말성경) 디트리히 본회퍼는‘나를 따르라’ 에서 마르틴 루터가 수도원으로 갔던 것과 다 시 세속으로 돌아온 연유를 풀이한다.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한 열망 자체 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수도원은 그것을 소수의 특별한 몇 사람의 행위 로 제한했다. 그리하여 루터가 나중에 강력히 근절하고자 했던 가톨릭적 자기 공 로 사상이 수도원 깊숙이 침투하여 있었다. 그렇다면 루터에게는 수도원도 세상 이고, 경건의 모양을 한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마지 막 남은 자기애를 버리기 위해 루터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본회퍼는 종교개혁의 핵심을 이신칭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종교 개 혁적 선언은 죄 사유에 의한 세상의 의인도 성결도 아니다.”그러면 무엇인가? 곧 바로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세속적 직업이 의롭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루터에게 있 어서 오직 그 직업에 의한 세상에의 항의가 아주 날카로울 때 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속적 직업을 예수를 따름으로 수행할 때 그것은 복음에 의하여 새 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30) 간단히 말하면 세상이 교회요,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 성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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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고, 그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내몸을 하나님의성전으로삼고, 그몸으로하는모든일이 예배가되게하는것이 전신자 제사장교리의 속뜻이다.

되게 하는 것이 전 신자 제사장 교리의 속뜻이다. 본회퍼의 루터 해석처럼 자신의 직업과 소명 속에서 의롭다 함을 받 는 것이 진정한 칭의론의 요체이며, 전 신자 제사장의 정신 이다. 루터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야 했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일터와 쉼터, 직장과 가정,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 예배 처소로 삼는 것, 그래서 모든 일이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아직 달성

하지 못한 미완의 종교개혁적 과제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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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논리와삶의의미 ● 권연경(안양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은혜와 믿음은 기독교 복음의 두 기둥이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의 머릿속에서 이 두 개념은 나름의 독특한 향기를 상실한 채 그저 행위라는 말의 반대 개념으로 고착되고 말았다. 물론 은혜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고, 믿음은 예 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들 고백이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나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의 표현으로서 그 본래의 속내를 울려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느 표현을 고르든, 이들이 나의 의식 속에 남겨놓는 결과란 구원이 나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내가 늘어놓는 은혜와 믿음의 수사 란 많은 경우 내 어설픈 행위가 내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을 확인 하려는 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만들어 내는 삶의 족적 을 행위라 부른다. 따라서 행위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 니 구원이 행위와 무관하다는 신념은 사실상 구원이 삶과는 무관하다는 신념인 셈 이다. 점수가 별로 좋지 못한 삶을 사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삶과 구원의 분리가 더 없이“반가운 소식” (福音)으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오직”은혜와“오직” 믿음을 역설하며, 별 볼일 없는 우리 삶과 화려한 구원 사이의 고마운 별거를 거듭 거듭 확인한다. 행위를 말하는 유대교와는 달리, 혹은 수행을 통한 해탈을 역설하 는 불교와는 달리, 그래서 기독교 복음은“복된”소식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은혜와 믿음의 논리로 구원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구원의 궤도에서 분리된 우리의 삶은 설명 불가능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우리 삶 이 그럴듯하지 못해 이 삶을 구원의 궤도에서 배제했지만, 그렇게 배제된 삶 자체 는, 제 수명을 다해 우주 공간으로 분리되어 나간 발사체처럼 무의미의 허공을 떠 다닐 뿐이다. 구원은 확실해졌을지 모르지만, 그 확실함을 위해 우리는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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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값으로 치렀다. 이제 우리가 가진 것은, 확실한 구원과 그 구원에 이르기까지 살아야 할 무의미한 삶의 덩어리다. 여기에 우리 삶의 역설이 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은 죽음이고, 그 죽음 너머엔 구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원은 우리 의 삶, 곧 그 종착역까지 이르는 긴 여정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구원을 희구하며 살아가지만, 그 구원을 열망하는 나의 오늘 자체는 내가 바라는 미래와 관계가 없 는 것이다. 구원을 향한 우리의 삶은 땀 흘리며 산을 올라 그 정상을 밟는 과정이 기보단, 나의 기다림 없이도 어차피 올 버스를 서성이며 기다리는 무료한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의 걸음으로 계단을 밟는 것이 아닌 마당에, 구원을 향한 우리의 현재는 에스컬레이터 위의 시간처럼 무료하거나 엘리베이터 속의 시간처 럼 어색하다. 이 시간이 거창하게“삶” 이라 불리든, 보다 소박한“일상” 이라 불리 든,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어쩌면 구원의 현재성을 말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구원 이 단지 미래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이 구원을 머금은 시간으로서 우리의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 리는“나는 구원 받았다” 는 확신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의 논리는 선명치 않다. 구원이 본질상 나의 행위, 곧 나의 삶과 무관한 마당에 지금 내 삶이 구원의 삶이라는 말은 멋지지만 실속 없는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정류소에 좀 일 찍 도착한 버스가 출발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처럼, 그리고 그 버스의 존재는 그 버스의 출발을 기다리는 나의 기다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어 쨌든 내 삶과 무관한 구원이 그냥 일찍 와 있을 뿐이라는 말일까? 그렇다면 현재 내 삶의 손이 닿지 않는 어디에 구원이 숨어 존재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현재 내 삶이 이미 구원의 내용 혹은 결과라는 말일까? 하지만 구원에 이르기엔 역부족인 내 삶의 생김새가 구원 자체의 내용 혹은 그 결과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여 전히 별 볼일 없는 수준인 내 삶이 이미 주어진 구원의 열매라면, 이는 구원 자체 가 별 볼일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닌가? 오늘의 내 삶이 해명되지 않는 마당에, 그 삶을 구원이라 부른들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내 삶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주신 구원을 감사하여 오늘의 삶 을 의미 있게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다. 성경에는 주 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문맥에서 오늘의 삶을 설명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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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라도 (자주 언급되는 소위“감사의 윤리” 를 신약성서에서 발견하기는 어렵 다), 구원이 최종 목적일 수밖에 없는“구원의 복음”속에서“구원 그 이후” 를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이미 결승 테이프를 끊고 난 후 메달을 목에 걸기까지의 텅 빈 시간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구원받 는 자로서, 주어진 삶을 신실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은 의미 있는 삶을 더 열심히 살라는 격려는 될 수 있어도, 없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알찬 논리는 아 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의미 없는 삶을 그래도 의미 있는 것 처럼 살라는 주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잠시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할 수련회 구 호로는 몰라도, 우리의 삶을 지탱하기엔 턱없이 약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나의“일상생활” 이 의미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때의 의미란 복음의 빛으 로 빚어진 그런 의미를 말한다. 나의 사소한 일상이, 그 일상 속의 몸짓발짓 하나 하나가 복음의 흔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삶, 나의 행위가 근본적으 로 구원과 무관한 상황에서, 그 삶을 구성하는 내 소소한 일상이 의미 있기를 바 라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내 믿음이, 내 신앙적 열 정이 내 일상 속으로 쉽사리 침투하지 못한다는 고민은 내 삶이 내가 고백하는 “오직” 의 체계 속에 편입되지 않는다는 보다 근본적인 사태의 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문제는 일상 이전에 삶 자체다. 우선 나의 삶 자체가 의미를 얻 어야 그 의미가 삶의 소소한 구석 속으로 스며들지 않겠는가.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사람은 누구나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물론 기독교인들 은“예수가 해답이다” (Jesus is the Answer!)를 외치며 살아간다. 물론 그는 구원 이라는 궁극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있어 구원 문제는 구원 이라는 추상적 물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시간, 그 리고 그 시간 속에서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구원의 탐색을 향한 우리의 출발점은 지옥의 공포가 아니라 삶 자체의 무의미성이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이 현재 우리의 삶 자체를 해명해줄 수 없다면,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복음은 하나의“동문서답” 으로 들릴 것이 다.“Jesus is the Answer!” 라고 외치는 범퍼 스티커를 보고“Jesus is the Answer. But what is the problem?” 이라고 묻는 패러디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우리의 삶에 영향 받지 않는 구원 개념이 삶의 의미를 묻는 물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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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해답이 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기독교인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삶 너머의 영생에 관한 해답은 확보해 두었지만, 정작 오늘 나의 삶의 의미는 해명되지 않는다. 아

우리는 이삶자체가구원과 무관하다는신념이 무언가근본적인오해에서 연유한것이라는 느낌을갖는다.

니, 구원과 상관없다는 말로써, 이미 삶의 궁극적 무의미성 을 선언한 마당에 삶의 의미를 찾는 일 자체가 우스꽝스럽 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삶이다. 이 삶이 내 구원과 관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은 나에게 이 삶을 주셨고, 이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삶이 하 나님이 주신 것이 분명하다면, 분명 여기에는 어떤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물음을 물으면서 우리는 이 삶 자체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신념이 무언가 근

본적인 오해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하나님이 주신 이 삶과 역시 하 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무언가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서로 얽히는 것이 정상이 아닐 까 싶은 것이다.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이다. 삶이 구원과 무관하다 하지만, 기독교 서점에도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서적들 이 차고 넘친다. 소명 이라는 책이 인기를 끌기도 하고, 목적이 이끄는 삶 이라는 책이 대한민국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기도 한다. 삶의 마지막인 구원 문제를 이미 해 결한 마당에, 우리가 이토록 현재 삶의“목적” 에 목말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 쩌면 이는 내일의 문제는 쉽게 해결하면서도 정작 오늘의 문제를 답할 수 없는“내 가복음” 의 역설적 가난함을 드러내는 현상은 아닐까?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 면서도, 아니 올바른 삶에 관한 성경의 명령을 들으면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어찌 보면 불가피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구원 여부와 무관하게, 지금내삶의의미는 풀어야만하는불가피한숙제로내앞에있기때문이다. 인간이 삶의 의미에 목말라 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자생적(自生的)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태어남이 나의 선택이 아닌 것처럼, 그 삶의 의미 역시 나의 내 부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지성의 몸짓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몸 짓이 축구 경기라는 더 큰 움직임 속에 있을 때이다. 이처럼 우리 역시 내 작은 삶 의 몸짓이 나보다 더 큰 움직임의 일부임을, 그 큰 움직임을 만들어 가는 한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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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확인하려 한다. 그것이 확인될 때 우리는 내 삶이 의미롭다고 느낀다. 사실 이 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놀랄 만큼 단순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일 때,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의미 있다는 말은, 하나님 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내 삶이 지울 수 없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구원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그려 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큰 드라마 속에서 한 의미를 차지할 내 삶이 그 구원과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의 구원 계획 속에서 내 작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는 일은 내 삶이 구원론적으로 의미있는 것임을 어떤 형태로든 긍정하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성경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신자들 에게 심어주려 했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필자가 행위없는 구 원? 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두 번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과 같이 자신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냈다고 말씀한다. 한 번은 제자들을 향한 대화에 서, 그리고 한 번은 아버지를 향한 기도 속에서다. 부활 후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 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 를 보내노라” (20:21). 이는 마태복음과 같은 승천기사가 없는 요한복음에서는 사 실상“가서 ... 제자를 삼으라” (마 28:19-20)는 명령에 해당한다. 이보다 앞서 제 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적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한다.“아 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7:18). 물론 이 두 말씀은 제자들의 지상적 삶이 주님이신 예수의 파송을 받은“선교적”삶임 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신적 파송의 결과라면, 우리 삶의 의미 는 이 파송의 목적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제자 파송 이야기에는 항상“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 이”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지만, 이 파송은 애초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메시야적 파송의 연장선상 에서 이해된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받은 파송의 의미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생각했던 파송의 의미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파 송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마당에(13: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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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어 자신의 역할을 계속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예수의 파송이 제자들의 파송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삶의 의미와 방향을 묻는 물음은 예수께서 사셨던 파송적 삶의 의미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살아가셨던 메시야적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한복 음은 이 메시야적 파송을 성육신(成肉身),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아들이 사람 의 하나로 오셨다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위에 계시던 하나님이 아래로 내려오셨 다는 것은“계시” (啓示) 곧 인간을 향한 신적 소통의 시도를 의미한다.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예수께서 살았던 삶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세 상”곧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소통의 몸짓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무지가 단 순한 지적 깨달음의 결핍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알림 역시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정보의 전달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하나님의 자녀처럼 살지 못하는 세상을 향 해 하나님의 참 모습을 선포하고 그분의 자녀된 삶을 받아들이라는 하나의 도전 이었다.“아들의 이름을 믿는다” 는 것은 그를“영접하는”것을 의미하고, 바로 이 런 자들에게“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가 주어졌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런 삶을 영생이라 부른다. 따라서 영생은“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를 아는 것” 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땅에서 그의 존재는“길”혹은“문” 으로서의 삶 이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요14:6). 아버지께로 갈 길이 없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통해 길이 되었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도리가 없는 곳에서 그리고 들어가는 “문” 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소통과 만남을 가능케 하기 위해“양 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선한 목자의 삶, 아니 죽음을 자처하였다. 그는 우리의 생 명을 위한“떡” 이요“물” 로 존재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보고 믿으 며”바로 이것이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방식이었다(요6:40). 우리가 받은 파송이 아들의 파송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리고 아들의 삶의 의미 가 아버지를 알리는 계시적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면, 이는 우리의 파송 역시 동일 한 계시적 사명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마태복음에서 이 땅에 와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며 제자들을 만드셨던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며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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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향해“너희가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 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계시적 사명을 마감하면서 예수께서는 이제 그 제자들을 향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 던 것처럼, 이제 나도 너희들을 세상에 파송한다” 고 말씀하신다. 곧“내가 내 삶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드러내고 그 분의 사랑을 알린 것처럼, 이제 너희들이 나와 아버지를 이 세상에 알리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기도에서 당시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들을 통 해 믿게 될 사람들까지도 기도의 수혜자로 포함시키셨던 것이다(요17:20). 그렇다 면 우리 삶의 의미는 다음의 질문을 통해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나의 삶은 얼마 나 충실하게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일까?” “나는 이 세상에서 이런 계시적 사명, 곧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 는 것일까?” 요한복음이 말하는 계시적 사명을 마태복음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세상의 빛” 이라는 말이 된다(마5:14). 우리는 이를“빛이 되자” 는 권유로 읽는데 익숙하지만, 실상 이는“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는 일종의 은유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빛에 비 교함으로써 제자도의 본질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물론“제자 = 빛” 이라는 등식의 의미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잘 밝혀진다. 산 위에 있는 동네(본뜻은 도시)는 숨겨 지지 않는다. 그리고 등불이란 것은 켜서 말 아래 숨기지 않고 등대 위에 올려놓 는 법이다(마5:15). 빛이라는 이미지와 이 설명들 간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곧 노 출이다. 빛이란 사람들 앞에 노출되었을 때라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 에서 제자들은 빛과 같다. 곧 사람들에게 노출됨으로써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마15:16). 너희 빛을“비추 라” 는 말 대신“비치게 하라” 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강조가 적극적 비춤보다 는 노출에 있음을 시사한다. 제자들을 비춘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자들의 선한 행 실을“보고”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품질은 둘째 치고, 일단 사람들 앞에 드 러나고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계 속에서 제자들의 삶은 가능해진다. 물론 노출되어도 보여줄 것이 없는 비극적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혹은 보 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처참한 상황도 그려볼 수 있다. 소금으로 치자면 “맛을 잃은”상황이다(마 5:13). 사람들이 우리들의“착한 행실” 이 아니라 나쁜 행 실을 보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보고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리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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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를 떠올리는 경우다. 우리의 삶이 아버지와 아들의 본성에 서 멀다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유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 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는 계시적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요한복음의 예수께서 자신과 아버지의 하나됨(8:16, 29, 42; 17:4, 21-25)과 자신의 행보가 철저히 아버지의 의중에 합한 것임(6:38; 7:16; 8:26, 28, 38; 17:11)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것이 참된 드러냄의 전제 조건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아버지 품 속에 있는”독생자, 곧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었다(1:18). 우리가 세상이 본 적이 없는 아버지와 아들을 세상에 드 러내는 것 역시 하나님과의 온전한 하나됨을 전제하며, 바로 이 하나됨이 세상이 믿음에 이르게 되는 필수 조건이 된다(17:21, 23). 물론 이 때의 하나됨의 한 핵심 은 의중의 합치다. 아들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듯, 우리들 의 생각과 삶 역시 삼위 하나님의 의도에 합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 혹은 유사성이 없다면, 세상이 우리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을 알기는 어렵 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우리는 밥값을 하 지 못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식으로 말하면, 맛을 잃은 소금은 이미 소금이 아니다. 맛을 잃은 제 자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숨겨진 등불이 무용지물인 것과 마찬가지 다. 예수님은 이런 삶, 본래적 의미에 값하지 못하는 삶에 대해 심판을 경고한다 (마 5:13). 삶이 구원과 무관하니까 무의미한 삶을 살아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 다. 복음서의 종말 비유들에서 확인되듯,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 버림을 받 는다. 예복을 입지 않으면 잔치 자리에서 추방당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마귀와 그 부하들을 위해 준비된 형벌에 처해진다. 삶이 무의미하 면, 그 삶 뒤에는 구원도 없다(갈 6:7-9; 롬 6:19-23; 8:13). 앞에서 언급한 목적 이 이끄는 삶 에서도 이 사실이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포착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일상적 삶의 의미를 묻는 노력은 불가불 우리 삶의 구원론적 의미를 확인하는 일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소중하다. 내 소소한 일상의 조 각들이 결국은 구원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해 가는 요소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소중하다. 퍼즐 조각이 많을수록 잃어버린 하나의 조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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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듯, 내 삶이 길게 반복된다고 해서 내 작은 일상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이든, 어는 자리 든, 그것이“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일구어 가라” 는 말씀의 한 실천임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사실상 구원의 소망에 의해 이끌리 는 삶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지금의 내 하루하루가, 그 하 루 속의 온갖 작은 몸짓들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몸짓이라

우리의삶은소중하다. 내소소한일상의조각들이 결국은구원이라는 큰그림을완성해가는 요소들이될것이기 때문이다.

면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일상생 활 사역” 이라는 것은 결국 구원사역을 세밀하게 확대해 놓은 표현이라 할 수 있 다. 부디 이 사역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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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속에서하나님과동행하기 ● 하창완(부산 맑은물교회 목사) 얼마 전 성도들과 창세기를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요셉을 공부하던 중 한 성도 가 말했다. “요셉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기록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이집트로 간 것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나 요?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궁금해요. 요즘 우리들 하고는 많이 다를 거 아 니에요?” 물론 많이 다르다. 어쩌면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우리들보다는 더욱 생활 가운데 깊숙이 들어와 있을 것이다. 눈만 뜨면 거대한 공장과도 같은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한 부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주일이 되어야 찾는 하나님과는 정말 다르다. 1. 창세기의 성경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과 야곱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의 이야 기가 성경기록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삭과 야곱의 아들들의 기록에서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기록한 내용이 없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 곳곳에 나타난다.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 그리고 총리대신이 된 다음에도 그 상황을 이끄신 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관 계를 맺고 살아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성 경이라는 기록물이 존재하지도 않던 시대에 이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살아왔을까? 고대인들의 일상에서 신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기록들을 살펴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고대인들 에게 일상은 모든 게 신과 관련되어 있다.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풍우신)은 그들의 농경, 목축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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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고 있었다. 풍우신에게 제사 드리는 관습은 고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된다. 풍우 신들은 몽둥이나 도끼, 번개를 표장으로 손에 들고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풍우신은 다산과 밀접한 연관을 맺기 때문에 풍산제의의 주 신이 된다. 또한 각종 질병 퇴치를 위해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고대인들은 일상생 활 속에서 모든 삶의 문제들을 신들의 도움을 입어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다 양한 신들이 생활 속에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태양신, 달신, 모든 위험 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신, 운명의 신, 곡물의 신, 밤과 낮의 신, 하계의 신 등등.. . 한편 사회생활 전반에도 이런 역학이 적용되었다. 국가의 조약이나 법령에서부 터 개인들 간의 계약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신들은 항상 증인의 역할을 해왔다. 성경의 인물들도 이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나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개인과 부족의 신으로 함께 하기 시작한 여호와 하나 님은 유목민의 삶을 살아온 이들과 함께 여행했고, 인도했으며, 위험 가운데서 그 들을 보호해주었다(창28:15; 31:35; 46:4등). 특히 옮겨 다니는 그들을 각 지역마 다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 에도 나타나고 있다(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 엘의 얼굴이라는 브누엘, 브엘세바 에서는 엘 올람, 남쪽의 다른 곳에서는 엘 로이 등). 한편 일상적 계약 속에서도 하나님은 증인의 자리를 지켜주었다(야곱과 라반 사이의 협정, 31:53). 일상의 잔 잔한 일들에서 도움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하였다(엘 사다이, 창17:1; 28:3; 35:11 등). 야곱에게 이스라엘(엘은 싸우시는 분이시다)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 이 성경 인물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인 역할들을 해 오셨다는 것의 결정판 이다. 고대 사회 속에서 살아온 창세기의 인물들의 일상은 모든 면이 하나님과 관련 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의 일과와 인생의 주요한 순간들은 모두 하나님 께 알리지 않고 진행되는 법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요셉의 이야기 에서 그가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서 베냐민을 구류시킨 사건이 나온다. 이 때 등장하는 은잔은 요셉이 점을 칠 때 사용했다고 말한다(창44:5). 잔에 물을 채 우고 그 속에 맺히는 상을 가지고 신탁을 듣는 경우가 고대에는 일반적이었고, 요 셉은 이 은잔을 사용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의견을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의 일상사에 세세히 관여하시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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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고대사회처럼 생활의 곳곳에서 신을 찾는 일은 거의 없 다. 대신 우리들은 생활 구석구석에 필요한 돈을 헤아려보는 것이 일상이다. 생활 을 꾸리기 위해,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우리들은 더 많은 돈의 도움이 필 요하다. 또한 현대인들은 기술에 대한 신뢰가 믿음의 기초이다. 고대사회의 믿음을 계 몽되지 못한 미신으로 치부하고 우리의 일터와 일상을 더욱 편리하게 할 기술력 의 향상을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기술 앞에서, 컴퓨터 앞에서, 사실상 모든 사람이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며 머 리를 숙인다. 우리의 시간과 상상력을 지배하고, 통제력과 지식을 주겠다고 터무 니없는 약속을 하고, 우리 삶에서 신비와 경탄과 경의의 감각을 모두 짜내 버리는 비인격적인 사물에 머리를 숙인다.” ( 현실 하나님의 세계 , IVP, p231) 정리하면 이렇다. 신과 더불어 일상을 살아가는 면에 있어서 현대인들은 고대 인들과 달라진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고대인들이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인간과 비슷한 신과 더불어 일상을 같이 살아왔다면, 현대인들은 경제력과 기술이라는 신과 더불어 일상을 같이 살아간다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돈과 기술을 신으로 섬기며 사는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현대

신과더불어 일상을살아가는면에 있어서현대인들은 고대인들과달라진게없는 삶을살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따라다니며 개입하고 도와 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자. 적어도 우리는 머 리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산다. 하지만 생활의 구체적 일들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개입을 느끼거나 혹은 그의 인도를 구 하는 시간과 행동들을 하고 사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우리 들의 일상을 이끌고 있는 핵심 역시 경제적 이익과 효율의

원칙, 과학적 합리성이 아닐까? 하나님이라 불리는 존재의 자리는 어디일까? 일상을 이끌고 있는 돈과 기술이 라는 신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도와주는 보조자일까? 사후 보장을 위한 연금 보험정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유진 피터슨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들어가게 된‘모든 새로운 것’ 에 우리 일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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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출구를 찾아본다.... 그리스도 안 에서 얻은 새로운 삶을 확인하고 가꾸어 갈 방법을 일터 밖에서 찾아보는 것이 다.... 북미에서 우리의 그런 필요와 환상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거대한 종교 시 장이 세워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적 흥분을 주기 위해 맞춤 재단된 수양회와 집회들이 있다. 책과 비디오와 세미나들이 우리가 삶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이 무엇이든-재정적 안정, 말 잘 듣는 아이들, 체중 조절, 황홀한 섹스, 성지 순 례, 신나는 예배, 유명한 선생들 등-그것을 해결해주는 기독교의‘비밀’ 로 안내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머지않아 우리는 그런 상품 중 하나를 사려고 줄을 서게 된다.” ( 현실 하나님의 세계 , IVP, p229-230) 3. 창세기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일상 전체가 하나님과 톱니바퀴 돌 듯 맞물려 돌 아가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맞물려 돌아가는 톱 니바퀴는 분명 하나님은 아닌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상숭배로 밖 에 볼 수 없는 이 현상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우선 유진 피터슨이나 마르바 던, 제럴드 메이 같은 영성가들은 한결같이“멈춰 서기” 를 권한다. 일상의 리듬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멈추는 순간이 있어 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멈추는 것과, 일주일 중 하루를 멈추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출애굽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해보자. 홍해 앞에 장막 을 치고 있던 그들에게 바로의 군대가 자기들을 추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를 빠져나오기까지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순식간에 없어지고 곧바로 평소대로의 삶의 태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모세를 원 망하였다. 이 때 모세가 말하였다. “두려워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 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출14:13) 가만히 서서 바라보면‘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달려가는가?’ 라는 게 보인다. 그 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뒤돌아 서 보면 거기에 나를 이끄시고 같이 걷고 계시 는 하나님이 보인다. 그래서“멈춰서기” 가 중요하다. 돈과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 이 이끄시는 삶의 원리를 이 순간 우리는 배우게 된다. 아래의 이야기가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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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기”가 중요하다. 돈과기술이아니라 하나님이이끄시는 삶의원리를이순간 우리는배우게된다.

바를 생각해보자. “남아프리카 유목 부족 가운데 일 년 중 일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몇 달 동안 길을 떠나는 부족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몇 날 며칠을 터벅터벅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며칠 을 한 곳에 머물다 간다고 한다. 이 부족을 관찰하던 한 인 류학자가 그들에게 왜 가던 길을 멈추고 쉬며 가느냐고 물 었다. 그랬더니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우리 영혼이 육

체를 따라 오도록 쉬어 가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이동원 목사, 영성 의 길 , p51.)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멈춰서기를 시도해보면 대부분 일종의 충격부터 받는 다. 워낙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얼마동안 살아 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증언이 바로‘충격 받음’ 이다. 사회의 모든 움직임이 일순 간 멈춰 서서 하루 동안 침묵하는 것을 매주의 리듬으로 만나는 것은 경제적 효율 성과 과학적 기술에 의지해서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생 소하고 낯선,‘충격적’경험일 수밖에 없다. ‘멈춰서기’ 의 리듬이 내 삶 속에 자리하기 위해서는, 이 충격을 경험하기 위해 서는 훈련이 필요하다.‘관상(觀想)적 삶(contemplative life)’ 을 사는 훈련이다. 관상이란‘하나님을 바라본다’ 는 뜻이다. 삶의 매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 가는 것, 먹고 마시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며 사는 것이 관상적 삶 이다. 멈춰 서기의 리듬 훈련을 통해 우리는 관상적 삶을 배우고 살아가게 된다. 이동원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 훈련의 예를 제시한다( 영성의 길 , p62).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먼저 약속한다. •천천히 걷는 기도의 산책 시간을 갖는다. •집이나 직장 가까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에서 자주 자연을 응시하는 습관을 들인다. •관상적인 음악이나 시, 혹은 예술작품을 가까이 한다. •음식을 천천히 먹는다. •이웃과 대화(전화)할 때 천천히 말하고 천천히 듣는다. •TV나 컴퓨터, 핸드폰 등의 소음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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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심호흡을 하고 그때마다 호흡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짧은 기도를 한다. •삶의목적못지않게과정을중시하는삶, 순간순간을중시하는삶을추구한다. 4. 우리가 멈춰 섰다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 세상의 리듬이 다시 우리를 조여 온다. 그렇다고 항상 멈춰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 가는 평생의 장거리 달리기를 놓고 본다면, 멈춤과 움직임의 반복 속에서 때로는 치우치기도 하겠지만 그 치우침마저도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가는 흐름 속에 있음 을 믿고 오늘 이 순간 이 곳에서의 삶을 하나님과 더불어 충실히 살아가려 노력하 는 게 중요할 것이다. 전해지는 한 토막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한 산꼭대기 수도원의 원장을 맡고 있던 때의 이야기 다. 한 청년이 이 수도원장의 명성을 듣고 수도사가 되고자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왔다. 베르나르도를 만난 그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원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내가 원장이오.”베르나르도가 대답했다. 청년은 풀썩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원장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진리를 찾는 수사가 되고 싶습니다.” “수사가 되고 싶다고? 음... 그래, 내 한 가지 질문을 함세. 자네는 이 산을 오르 며 뭘 보았나?”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 뭘 보다니요? 저는 원장님을 뵙고 싶은 마음에 그저 열심히 뛰어 오르느라 아무 것도 볼 틈이 없었답니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여유로움,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속 삭이는 이야기들, 다람쥐가 낙엽을 구르는 경쾌한 움직임도 못 보았단 말이야? 자네는 산을 오르며 수많은 진리들을 다 놓쳐버렸는데 이 곳에서 더 이상 뭘 찾겠 다는 게야? 내려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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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영성

_ 참된 기독교적 영성

● 이대경(이철규 이대경 치과의원 원장)

서론 오늘날의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많은 발전과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다 른 한편으로 몇 가지 왜곡된 모습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의 왜곡된 현상 중 대표적 하나는, 신령한 사람일수록 현실의 삶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다. 신앙이 강한 사람일수록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느라 세상의 일을 가볍게 여긴 다. 그러나 세상을 완전히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신령한 삶을 추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삶을 떠나지는 못하는 이중적 생활 속에 서 방황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이중적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떠 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중적 생활에 교묘하게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또 어 떤 사람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해결하느라 수고하는 가운데 완전한 행위를 추구한 나머지 율법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 어느 것도 참된 기독 교의 모습은 아니다.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한 나머 지, 모든 삶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시키는, 삶과 신앙이 일치된, 율법적이지 않은 자발적 순종을 드리는 고품격의 삶이다. 그러나 이렇게 삶과 신앙이 일치하 는 생활을 모두가 원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어려워진데에는 이유가 있다.

1, 일상생활 속에서의 영성이 약화된 이유들 첫째, 현실의 삶을 저급하게 여기는 이원론적 현상의 뿌리에는 헬라철학의 영 향이 자리잡고 있다. 초기 발전단계에서 유럽의 헬라문화권으로 들어간 기독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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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사상의 영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영적 삶과 눈에 보이는 저급한 육 신적 삶을 구분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서양에서 발전된 기독교는 물론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 역시 헬라철학 바탕의 이원론적 전통을 계승했다. 이원론적 기독 교는 일상생활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 가도록 돕기 위해, 그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 선택 자체 가 기독교는 세상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둘째, 수도원 운동이 기독교신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육신의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하고 싶 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 속에는 삶은 육신적인 것이요, 교회봉사는 영적인 것이라 는 이분법적 생각이 들어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생기기 전의 유대교에는 영과 육 을 나누는 것이 없었다. 하나님 안에 사는 모든 것이 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로 마제국에서 Anthony에 의하여 세상의 일을 포기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추구하 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후로, 종교개혁 이전 약 일천 오백년동안 기독교는 수도 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삶과 하나된 신앙보다는 신앙 자체로서의 신앙을 추구 한 수도원 운동의 결과로,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 인간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잊 어버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요, 삶에 매여사는 것은 육신적이 라고 구분하며 일상생활의 영적인 가치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에서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될 때 많은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경건을 찾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 맥락을 같이해서, 경건을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일수록 세상의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물론 한때 육신을 너무 무시한 채 경건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노동과 기도를 균형있게 추구하는 일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을 가져왔다(일례 로 영국의 청교도들이 직업, 가정생활, 복지 등의‘삶의 문제’ 를 다루었다) 1). 그러 나 그 당시 기독교의 주류는 여전히 일상생활을 육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셋째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의 성경해석관점이 너무 쉽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나누는데 있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육신과 영, 율 법과 은혜, 이신칭의 등의 간략화된 공식으로 복음을 설명해왔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장점을 가진다. 하지만 육과 영을 구분하는 간 단한 공식으로 복합적인 신앙생활을 설명하는 것은 복음 안의 삶을 충분하게 설 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무리한 설명을 하려다가 비복음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는 1) Ferguson, S. B. and Wright, D. F., New Dictionary of the Theology , IVP, p.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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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을 나누는 듯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2) 하지만 바울이 우리들 안에 있 는 죄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육신과 영을 구분하면, 육적 영역의 일상생활이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다. 우리들의 삶이 여러가지 배경, 사상, 문화가 얽혀서 이루졌듯이 우리들의 신 앙도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된다. 그러므로 육 아니면 영이라는 간 단한 공식으로 신앙생활을 분석하는 단순한 관점은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제한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넷째,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의 기독교에 대한 영향은 일상생활의 중요 성을 약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에 서양사회는 분업이 이루어지고 각 분야의 전 문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신앙의 분야에서도 전문가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직자는 전문가이며, 성도는 비전문가로 구분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문가의 영역인 교회는 중요하며 본질적인 영역이라고 여겨지며, 성도들의 영역인 일상생 활은 덜 중요하며 비본질적인 영역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된 종인지 아닌지 를 구분하는 것만 있을뿐이다.

2, 일상생활영성의회복 세상과 분리된 곳을 말할 때 수도원이나 교회를 대표적으로 일컬을 수 있다. 이 에 반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곳은 marketplace라고 할 수 있다. 이 러한 의미에서 교회와 marketplace는 대비되는 장소다. 과거 2,000년동안 경건 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marketplace를 등지고 수도원 또는 교회로 모였다. 더욱더 영적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는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 여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으며 급기야 2002년부터는 공식적인 안티-기독교운동 이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사회적 폐해를 줄이겠다는 것이 이 운동의 핵심이다. 이 2) 로마서 8:5-6“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 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 입니다.” 로마서 8:13“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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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폐를 끼치고 있다고 판단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가 삶의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그동안 교회는 일상생활에서 신앙이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써오지 않았 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가볍게 여긴 결과로 안티-기독교운동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과거 2,000년 동안 추구했던 방향을 수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첫 인류 를 창조하시고 명령하셨던“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 는 명령을 다시 상기하면서 참된 변화(Transformation)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는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경건을 추구할 수 있다. 일 상생활의 순간순간마다 경건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골방이나 기도원에 가더라 도 참된 경건을 추구할 수 없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일상생활에서 세속적인 생각 과 행실로 지내다가 갑자기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조차 없지 않았던가? 일상의 현장에서 경건을 추구하는 삶 자체가 참된 경 건을 추구하는 참된 기독교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삶의 현장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 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고, 재산을 관리하고, 유산을 남기고, 종들을 지휘하고, 아내의 무덤을 준비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살았 다. 야곱도 경쟁, 유산의 상속, 결혼, 재산, 자녀 출산 및 양육 등 삶의 현장에서 하 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았다. 다윗도 사회적 위치, 경쟁, 복수, 애증의 관계, 우정, 성공 등으로 가득차 있는 삶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살 았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 라는 것이다.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이 말해주듯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인생의 문제들은 신앙을 훈련시키는 도구다. 그렇기에 성경은 참된 영성이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경쟁관계, 갈등관계, 또는 애증의 관계속에서 하 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신앙인격이 성숙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3)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재산관리와 경제생활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할 3) Cranfield, C. E. B., Romans, T&T Clark, p.180. 에베소서1:4“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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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일상 생활의 영성훈련을 통하여,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들의 내면의 삶이 변화를 경험 하고 죄로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때때로 사도바울 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고 권하고 있는데,4) 일상생활의 현장이야말로 구원을 이 루어가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영성은 교회 안에서나 수도원 안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얻어진다.

참된기독교영성은 교회안에서나 수도원안에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삶의현장에서얻어진다.

일상생활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보 다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구원의 신학(Salvation Theology)이 천국의 신학(Kingdom Theology)으로 전환되 어야 한다. 구원은 우리들이 받는 것이라기 보다, 도래한 천 국을 받아들이고 천국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천국의 통치는 우리들의 심령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임하 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의

첫 외침은“천국이 가까왔다” 였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외쳤던 내용도“천국이 가까왔다” 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도“천국이 가까왔다” 였다.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초대교회의 성 도들의 복음전파의 제목도“천국이 가까왔다” 였다. 그러므로 천국은 우리들이 죽 은 다음에나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 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비록 이 땅에서 살지만 사실은 천국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천국에서 살기 시작 해서 영원한 천국에까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생활의 모 든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어떻게 하면 전도하고 선교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믿게 하겠는가? 천국을 직접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천국의 통치를 받고 사는 삶을 보여 줄 때 사람들은 천국을 이 해하게 될 것이며 그들도 천국백성으로 인도될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들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Transformation)가 있다면 천국이 증거될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천국의 통치를 보여줄 수 있는 일상생활의 영성이야말로 참된 신 4) 빌립보서 2: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 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데살로니가후서 2:13“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 게 하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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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들이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니라 도래한 천국의 통치 를 받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영성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천국의 도래를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들의 영성이다.

결론 기독교의 역사는 이천여년에 이르지만, 아직도 기독교 는 소수의 종교이며 믿는 이들의 삶속에서 충만하게 꽃피 우지 못하고 있다. 왜곡된 기독교의 모습 중에 하나는 일

일상생활의영성은 예수님이전파하신 천국의도래를증거하는 예수의증인들의 영성이다.

상생활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오늘날 이러한 모습 을 가지게 된데에는 앞에서 살펴보았듯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영성을 회복한다면 참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의 현장은 영적인 훈련의 장이며 신앙의 성숙을 일구어내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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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과국가권력 _ 이단척결을 위해 국가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정당한가?

● 이상규(고신대학교 교회사학 교수)

1. 교회사에서 어거스틴의 위치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430)은 라틴 기독교를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세 천년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고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신학적 논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그는 은총 의 교리를 확립하여‘은총의 박사’ (Doctor gratiae)라는 칭호를 얻었고, 예정교리 를 취급하여 오늘의 칼빈주의 신학의 원조로 지칭되기도 한다. 사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칼빈주의 신학은 이미 어거스틴의 신학 속에 드러나 있으므로 워필드(B. B. Warfield)는 그를“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자” 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그는“역사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릴 만큼 역사의 의미를 정신사적으로 파악하는 혜안을 지 니고 있었다. 20세기 저명한 교부학자인 알타너(B. Altaner)는 어거스틴에 대해 말하면서,“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창조적 정열, 오리 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푸리아누스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킨 분이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 용적 감각을 그리스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는 교부시대의 가장 위대 한 철학가이며, 전 교회의 가장 주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라고 평한 바 있다.1) 그래서 그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nas, 1225-1274)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되어 왔고, 하르낙은 어거스 틴을“사도바울과 16세기 루터 사이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 라고 불렀다.2) 어거스틴은 다양한 주제에 관한 광범위한 논설을 전개하였고, 그가 남긴 저술 은 엄청나게 많다.3) 흔히 그의 작품은 자서전적 저술, 성경주석에 관한 것, 변증론 1) 한국교부학 연구회, 「내가 사랑한 교부들」 (분도출판사, 2005), 218-9. 2) 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4),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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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저술, 교리논쟁적 저술, 경건문학류 등으로 구별되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거 스틴은 자아 인식에서 시작하여 존재, 진리, 사랑,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의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역사, 섭리, 정의, 행복, 평화 등 철학적인 분야는 물론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 다양 한 신학적 주제를 취급했다. 어거스틴의 사상 중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은 가장 많은 관심의 주제였다.

2. 어거스틴과국가권력, Compelle intrare의문제 그러나 그도 한 인간이었고 한계와 제한이 없지 않았다. 그는 동서방의 신학을 천착하고 이를 종합한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가 헬라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동방신학을 접하고 이해했을까? 그 도 번역에 의존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학자 였고 역사철학자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중세 기독 교, 곧 로마 카톨릭 교리 발전에 유효한 근거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는 개신교 와 로마카톨릭 양자에 의해 존경과 칭송을 받아왔다. 그런데, 어거스틴이라고 해 서 모든 주장이 다 정당하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필자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것 이 바로 국가권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거스틴은 이단 징벌에서 국가권력이나 경찰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는 이단 투 쟁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구속력과 강제력을 교회에 적용코자 했다. 이 이론을 꼼 뺄레 인뜨라레(Compelle intrare)라고 하는데, 신약성경 누가복음 14장 23절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즉“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 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에 근거하여 이 논리를 폈다.4) 즉 어거스틴은 누가 복음 주석에서 두 동사를 사용한다. 즉 'coge intrare'(들어오라고 강제하라. 아프 3) 어거스틴의 사망 직후인 431-439년에 「어거스틴 전기」 를 쓴 포시디우스는 어거스틴의 1,030개의 저서명을 열거한 바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말년에 쓴 「재고론」 (Retract)에서는 427년까지 저술 한 93개의 저서목록을 열거했다. 이 저서들은 교부문헌의 최대 총서인 「민녀 라틴어 문집」 32-47권 에 수록되어 있으며, 500쪽의 책으로 환산해도 수백권의 분량이 된다. 이상규,「초대교회사」 (미간 행 연구집, 고신대학교, 2005), 111. 4) 마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c. 1275-1342)는 콘질리아 운동의 한 인물로서 중세 시대 가장 주목할 만한 저서중의 하나인「평화의 수호자」 (Defender of the Peace) 라는 책을 썼는 데, 그는 이 책에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강제권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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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 텍스트)와‘compelle intrare'(들어오라고 강요하라, Vulgate)를 사용하면서 억압의 이론을 발전시켰다.5) 이것을 보면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5세기 당시 교회 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 이후 황제는 교회와 신앙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했고, 공의회를 소집하고(325) 정통과 이단 시비를 가리기도 했다. 이단자들 에 대한 벌금, 재산몰수, 고문, 사형 등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 하고 있었다. 핍박받았던 도나티스트들(Donatists) 조차도 이단을 반대하는 법과 강제력에 도전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법이 자기들의 집단에 적용되는 것을 반대 했을 따름이다. 교회 규율문제(권징의 문제)에 있어서만 정통 신앙과 다르다는 입 장이었고, 그 결과로 분리주의적인 자기들의 집단이 이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의이입장은 종교적관용이 인정되지못한그시대에서 발현된억압의 이론이었으나후세에 위험한유산이되었다.

어거스틴의 이 입장은 종교적 관용이 인정되지 못한 그 시대에서 발현된 억압의 이론이었으나 후세에 위험한 유산 이 되었다. 이 점은 그의 언어적 한계 외에도 어거스틴의 사 상에 나타난 한계이다. 이 사상을‘위험한 유산’ 이라고 말 하는 것은 후일 이단박멸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권력의 폭력 행사의 전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거스틴이‘정의에 근거한 경우에’ 라고 한정하였으나, 국가권력을 통해 이단 을 억제할 수 있다는 사상은 이단 박멸에 있어서 국가권력

의 무력행사를 정당화했다. 이단자 색출과 종교재판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이 근거에서 후일 루터는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을 강조하였고, 칼빈도 이 근거에서 세르베르투스 처형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3. 강제권사상의역사적배경 그렇다면 어거스틴의 이런 사상은 어떤 배경에서 형성되었을까? 그 배경은 4세 기 카르타고와 그 주변도시에서 도나티스트와의 대결에서 형성되었다. 304년 로 마제국의 당국자는 후일 도나티스트로 불리는 아비티니안 기독교인들(Abitinian

5) 게리 윌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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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s)을 체포했고 투옥했다. 관습대로 투옥된 그들을 위해 동료 그리스도 인들이 면회를 신청하고 음식을 공급해 주고자 했으나 카르타고의 감독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카르타고의 감독은 이들 투옥된 이들에 대한 면회를 금지시키 고, 그의 부제인 케실리아누스(Caecilianus)를 보내 이를 저지하게 했다. 케실리 아누스는 면회 희망자들을 심하게 대하고 이들이 준비해 온 음식을 뒤엎어 버리 기까지 무례하게 대했다. 아마 이것은 죄수들에게 음식공급을 금지한 법률 때문 이었을 것이다. 아비티니안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에 보면 케실리아누스는 독재자 보다 더 무자비했고, 처형관들 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6)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인 311년 케실리아누스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다. 카르타고의 그리스도인들은 7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그의 감독 취임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를 감독으로 안수한 자 중 일부는 변절자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디오 클레티안 황제의 박해 하에서 많은 감독이나 성직자들은 기독교문서를 자진 반납 하고 불사르거나 많은 평신도들이 신앙을 버린 일이 있었다. 그 후 이들은 합당한 회개 없이 교회로 돌아왔는데, 이들 변절자들을 받아들인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 니라고 주장하고, 특히 배교한 전력이 있는 압툰자의 펠릭스(Felix of Aptunga) 가 캐실리아누스를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안수한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는 맨사리우스(Mansarius)를 새 감독으로 옹립하였다. 그런데, 맨사리우스는 곧 사망하고 도나투스(Donatus)가 감독직을 계승했다. 이것이 소위 도나투스파의 시원이 되는 동시에 아프리카 교회의 첫 분열이었다. 케실리아누스를 지지하는 이들과 도나투스를 지지하는 이들 간의 대립은 심화 되었다. 콘스탄틴은 회심 이후 이들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호소하였다. 그러나 도나투스를 따르는 도나티스트들(Donatists)은 제국이 뒷받침된 교회를 거부했 으므로 이들은 심각한 박해에 직면했다. 317년에서 321년, 그리고 346-348년 동 안 도나티스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독은 추방되고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카르타고에서 한 교회 구성원 전원이 동시에 피살된 일도 있었다.7) 말하자면 기독 교가 이교적 상황에서 박해 받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공인 이후 동료 기독교인 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제국의 공권력이 다른 신앙에 대해 경찰력을 동원했다

6) Tripp York, The Purple Crown (Herald Press, 2007), 72; Maureen A. Tilley, Donatist Martyr Stories: The Church in conflict in Roman Africa (Liverpool Universitry Press, 1996), 45-6. 7) Tilley, 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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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다.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361-363)이 통치하는 짧은 기간 동안 도나티스트들에 대한 관용의 기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미디아 (Numidia)는 도나티스트들의 거점이 되었고, 이곳에서는 도나티스트들이 주도적 인 집단이었다. 어거스틴이 있는 히포(Hippo)는 기존의 교회인 카톨릭이 도리어 소수 집단이었을 만큼 도나티스트들의 세력이 우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과 대립하였고, 논쟁하게 된다. 도나티 스트들은 탄압을 받았고, 탄압받던 저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의로운 자들이라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온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형벌의 이유가 순교자를 만든다.” 는 말이었다. 이 말은 고난 받고 박해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의로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8) 도나티스트들은 박해 하는 자가 아니라 박해 받는 자라는 점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를 계승하는 의로운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고, 선지자나 사도들이나 초기 기독교는 의를 위해 박해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고난(박해 받음)이 기독교 적 의의 무오한 표식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9) 이런 과정에서 배태된 어거스틴의 이론이 Compelle intrare, 곧 이단척결에서 의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비 카톨릭 (non-Catholics)에 대한 제국의 강제력에 대해 기독교적 타당성을 인정한 첫 신 학자였다. 어거스틴에 의하면,“예수를 대적하던 바울이 예수에 의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듯이(행9:1-9), 마찬가지로 이단들에게 매를 아껴서는 안 된다.” 고보 았다. 또 예수를 부인했던 바울이 육체적 징벌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앞을 보게 되 었듯이, 이단들도 이런 징벌을 통해 회심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어거스틴 이 이단 징벌에 있어서 경찰력의 동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한 것은 교회의 대적 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었 다. 말하자면 국가권력의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바르지 못한 신앙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영원한 형벌을 받기보다 낫다는 생각이었다. 실제적으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이 실제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원리적으로 말할 때 어거스틴은 사형제도는 회개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는 이유에서 사형제도를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단징벌에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후일 카톨릭 8) Paolucci, Political Writings of St. Augustine, 216. 9) Paolucci,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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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발전한 것은 불행한 열매였다.10) 이단이 계속적으로 그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면 다른 이 에게 이단사상을 전파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4. 그이후의경우 어거스틴의 강제권 사상은 후일 교회사에서 거듭 대두되었고, 이단 척결의 정 당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존 후스를 비롯한 중세교회가 범한 갖은 탄압의 근거였 고, 16세기에도 동일했다. 그 한 경우가 제세례파에 대한 탄압이었다. 1521년 신 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는 재세례파(Anabaptist)를 척결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물 론 이것이 재세례파에 대한 최초의 거부선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특별 한 구속력이 있었다.“우리의 모교회인 거룩한 교회의 계율을 보호하기 위하여” 찰스 5세의 휘하에 있는 모든 관리들은 이 칙령을 즉각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모든 처소와 경계지에서 저주받은 재세례파 집단으로부터 오염된 모든 이들은 생명과 재산을 잃게 될 것이며, 지체 없이 최고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즉 저들의 악한 신앙과 목적에 완강하게 남아 있거나 그 악한 신앙을 계속 고집하는 이들은 화형을 당할 것이다. 또 재세례를 받는 모든 다른 이들도 ... 재세례파에게 동정을 베풀거나 숙소나 음식을 제공해도 제국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처벌이 불가피했다. 이와 같은 형사상이나 민사상 범죄행위가 없이 단순히 다른 신앙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게 하는 종교문제에 있어서의 국가권력의 간섭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16세기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또 재세례 파에 대한 문제만도 아니었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을,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를 향해서 칼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회는 재세례파를 향해서 증오의 칼을 쓰기 시작했다. 낭트 칙령이 있기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행해진 개신교도들에 대한 살상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within the Christian body) 행해진 증오가 얼마나 깊었던 가를 보 여준다. 그 모든 일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10) Peter Brown, Augustine of Hippo (Dorset Press, 1986),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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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교회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그리스도인들을 대항한 처절 한 대결과 피흘림은, 그들이 어거스틴의 이론을 인식했던 인식하지 못했던 상관 없이, 어거스틴에게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

5. 맺는말: 해결책은없을까? 오늘우리의대안은 초기기독교회가견지했던 평화주의전통을 회복하는길이라고믿는다. 이념,사상,신앙,혹은신조가 다르다는이유만으로 우리는폭력을 행사할수없다.

2천년의 긴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양심과 이념, 신앙과 신 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이런 국가권력의 강제력, 그리 고 그로 인한 폭력은 한 가지 원인에서 기인하였다. 초기 기 독교의 평화주의 전통을 버렸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는 비폭력의 비전(非戰)의 평화공동체였다. 그러나 4세기를 거 쳐 가면서 기독교는 절대평화사상을 버리고 상대평화주의 를, 상대평화주의를 버리고 의로운 전쟁론을 받아들이기 시 작했다.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pacifism), 그리고 평화주 의적 이상으로부터의 이탈은 폭력과 전쟁을 수용했고, 기독 교회가 동료 기독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그리 스도인들을 향해서 국가권력의 강제력을 사용하고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대안은 초기 기독교회가 견지했던 평화주의 전통을 회복하는 길이 라고 믿는다. 이념, 사상, 신앙, 혹은 신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단이라 하더라도 그 이단사상만으로 국가권력의 제재를 받을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저들을 바른 교리로 일깨우고 설득하고 바른 신앙을 회복하 도록 도와주어야 할 뿐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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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Shalom)과 웰빙(Well-being) ● 강연정(고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

I. 들어가며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목적을‘행복’ 으로 꼽았던 것처럼, 인 간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추구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만큼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 서는“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 진다” 는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이 시대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웰빙(Well-being)’열풍을 보면 얼마나 사람들이 행복하고 만족한 상태로 살아 가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데, 한국 사회의 이러한 개인적, 사회적 분 위기는 한편으로는 이 시대 한국인들이 얼마나 행복하지 못한가를 반증하는 것이 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훈구, 1997). 이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 요로워지고, 육신적으로 편안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 그 중에서도 특히 한 국인들이 느끼는 행복의 지수나 삶의 만족도의 정도가 OECD 국가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입증될 수 있다(국민일보, 2006; 통계청, 2006). 심리학과 상담학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가장 행복하고 만족한 상태를 의미하는 안녕과 전인건강과 관련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안녕과 전인건강의 핵심적 요소로 ‘영성(Spirituality)’ 을 꼽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기독교 영성만이 아니라, 타 종교 영성 및 일반적인 영성을 포함하는 다소 포괄적 인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인간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초월 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지는 영성의 차원은 갈수록 전인건강과 주관적 안녕, 그리고 행복의 중요한 측면이 되 고 있다(Chandler et al., 199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김혜성 외 공역, 1990)의 대, 소 요리문답 제 1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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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존 재라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는 전인적인 행복과 안녕을 누리며 즐 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최고 목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 다. 즉,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기초로 생의 최고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영성 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전인적으로 건강하며, 최 상의 만족감과 삶의 질을 느끼게 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는 영성을 핵심적인 요소로 하는 인간의 안녕과 전인건강, 즉 인간의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며 충만한 상태인 샬롬을 계발 하도록 도와주며, 전인적인 영역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이 시 대의 개인과 가정, 사회 모두의 건강과 행복 및 안녕을 증진하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II. 안녕(Well-being)과전인건강(Wellness) 1. 안녕(Well-being)의 의미 안녕(Well-being)'이란 ① 안전하고 태평함 ② 평안, 건강 ③ 인사말 등으로 사 용되는 용어로서,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뜻하며(우리말 큰 사전, 1992), 영한 대사전(1997)에는 ① 만족할만한 좋은 생활상태 ② 건강하고 행복하 며 번영하고 있는 상태, 행복, 안녕, 복지, 복리 등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학문 적으로는 사회학에서는 복지(Welfare), 생활만족(Life Satisfaction), 삶의 질 (Quality of Life) 등과, 심리학에서는 전인건강(Wellness), 행복(Happiness), 몰 입(Flow),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 등과, 간호학에서는 전인적 건강 (Holistic Health) 등의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주관적 안녕, 심리적 안녕, 영 적 안녕 등과 같이 세분화하여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어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1949)의 창립 헌장에는“건강이란 육체적인 질병 뿐 아니 라, 정신적, 사회적 질병도 없는 온전한 상태이다(Health is a complete state of physical, mentel and social well-being not merely absence of disease 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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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irmity)” 라며, 전인건강과 안녕의 개념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 고, 이후 1998년 WHO 집행이사회에서 건강의 정의에 영적인(spiritual) 요소를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건강(Health)이란‘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사회적이고 영 적인 웰빙 상태’ 라고 정의함으로써, 전인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잡힌 행복하고 만 족한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로서‘안녕(Well-being)’ 을 정의하고 있다. Chapman(1986)은 영적 안녕(Spiritual Well-being)에 대해‘인간이 신과의 바 른 관계를 설정하고, 사랑과 기쁨, 평화를 누리며 성취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최대한의 잠재성을 성취하도록 하는 능력을 갖는 것’ 이라고 하였 고, Fish와 Shelly(1983)는“영적 안녕이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이며, 인간의 영 적 기본 욕구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충족될 수 있으며, 이 욕구들이 충족될 때에 개인의 안녕감과 온전함을 성취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여 기에서“영적(spiritual)” 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포함한 일반 신(god), 또는 인간의 영적 본성 등을 의미하는 개념이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영적 안녕을 접근함에 있어서는 이 개념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설정하는 개념 정 립의 작업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며, 안녕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Chandler 등(1992)도 영적 안녕은 영적 발달(Spiritual Development)을 추구 하는 영적 안녕의 수직적 차원(Vertical Dimension)과 균형잡힌 개방성(Valanced Openness)을 추구하는 영적 안녕의 수평적 차원(Horizontal Dimension) 등 두 가지의 차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바람직한 영적 안녕의 상태란 균형잡힌 개방성 을 통하여 영성의 범주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영적 발달을 추구함으로써 영성의 깊이와 넓이를 증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Ellison 등(1982)이 영적 안녕 척 도를 개발하면서, 하위 척도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측정하는 종교적 안녕 척도 와 자신과의 관계성을 측정하는 실존적 안녕 척도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데, 즉, 영적 안녕의 수직적 차원인 하나님과의 관계 성, 곧 영적인 내연을 잘 정립하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영적 안녕의 수평적 차원 인 영적인 범주, 곧 외연을 확장시켜가는 것이 한 개인의 영적 안녕상태를 증진시 켜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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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기독교적 관점의 영적 안녕이란‘인간의 영적 본성(자원, 측면, 특성, 능 력 등)이 최대한으로 개발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 이웃, 공동체, 자연 등 과 바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삶의 통합과 질서, 조화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전인적 건강과 안녕의 상태’ 라 하겠다. 즉, 영적 안녕이라는 것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수직적, 수평적 안녕이 삶의 관계성 가운데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갈 때 극대화되며, 영적 안녕의 주요 초점은‘균형있는 관계성의 증진을 통한 안 녕’ 에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2. 전인건강(Wellness)의 의미 장혜경 등(1999)은 안녕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인건강(Wellness) 의 의미를 안녕(Well-being)과 적합성(Fitness)의 두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 로 설명하고 있는데, 안녕이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으며, 평안한 상태를 일컫는다면, 적합성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떤 생활 기능과의 적합성 여부와 관 련된 개념이므로, 전인건강은‘한 개인이 삶의 전 영역에서 생의 다양한 측면들의 기능을 증진시킴으로써, 전인적으로 건강하고 평안한 상태를 이루어가는 것’ 으 로 정의할 수 있다. Witmer와 Sweeney(1992)는 생애 예방과 전인건강을 위한 전인적 모형(A Holistic Model for Wellness and Prevention over the Life Span)을 통해, 전인적 으로 건강한 개인의 특성은 전인성의 바퀴에 연결되어 있는 생의 5가지 전인건강 의 과제들 - 바퀴의 중심인 영성과 함께 자기조절, 일, 사랑, 우정 등의 증진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제들은 가정, 공동체, 종교, 교육, 정부, 매체, 산업 등 의 7가지 생의 집단들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전인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섯 가지 생의 과제는 영성을 중심으로, 자기조절의 하위요소들과 바깥에 일, 우정, 사랑이 원형을 이루어 둘러싸고 있는 바퀴 모양의 모형으로 표현되어지며, 다섯 가지 생의 과제를 7가지 생의 집단(forces)들이 둥글 게 둘러싸고 있는데, 지구와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식들이 그 모든 것을 아 우르고 있는 전인적인 모형을 통해 전인건강은 증진되어진다고 보았다. Clinebell(1992)은 그의 책『전인건강(Well-Being)』 에서 영성, 마음과 인격,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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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일, 놀이, 세계 등의 전인성의 일곱 가지 차원을 증진시켜가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사랑이 없이는 인간의 전인성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랑을 전인건강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의 전인건강에는 첫째,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둘째, 타인을 사랑하는 것, 셋째, 자신의 일과 놀이를 사랑하는 것, 넷째, 지구를 사랑하는 것, 다섯째, 성령을 사랑하는 것 등이 포함되 어진다고 보았다. Chandler 등(1992)의 전인적 안녕 모형(Holistic Wellness Model)을 살펴보면, 영적 안녕은 전인건강의 6가지 차원(지적, 정서적, 사회적, 신체적, 직업적, 영적)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영적 차원을 제외한 5가지 차원은 차례로 원을 이루고 있는데, 영적 안녕의 동심원에 속하는 영역은 영적인 요소 또 는 영역이며 나머지 영역은 인간적 영역 또는 요소인데, 전인적 안녕은 전인건강 의 각 영역의 영적 요소에 집중하여 이루어지며, 영적 안녕의 수평적인 차원을 통 하여 확장되어질 뿐 아니라, 수직적 차원인 영적 발달을 추구하면서 확장되어진 다. 이 외에도 Archer 등(1987)은 전인건강을“신체, 정신, 영혼을 포함하는 인간 기능의 극대화를 위한 진술이며 과정” 으로 정의하였으며, Ardell(1988)은 심리적, 영적, 신체조절, 직업만족, 관계, 가정생활, 여가시간, 스트레스 관리 등의 8가지 차원으로 전인건강을 설명하였고, Hettler(1984)는 지적,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직업적, 영적 건강의 6가지 측면의 전인건강 모델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전인건강 이론의 공통점은 영적 요소를 전인건강의 각 요소의 중심에 배치하는 원형 또는 바퀴모형으로 설명하면서, 각 요소에 영적인 영향력을 미치 면서 전인적 영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 한 영성을 중심으로 한 전인성(Wholeness)와 관계성(Relationship)을 기초로 하 여 전인건강의 각 척도들이 세분화되어지고, 상호연관을 맺어 상호작용하고 있음 을 이들의 연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III. 성경적웰빙, 샬롬(Shalom) 1. 샬롬(Shalom)의 의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김혜성 외 공역, 1990)의 대, 소요리문답 제 1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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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을‘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정립하고 살 아가는 영성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존재라는 것과 아울러, 하나 님을 통해 공급받는 전인적인 행복과 안녕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최고 목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영성의 삶이 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전인적으로 건강하며, 최상의 만 족감과 삶의 질을 느끼게 하는 삶이라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 즉 샬롬(Shalom)의 상태를 누리는 삶(사 11:6-8)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샬롬을 감정적 차원의 느낌 정도로 생각하거나, 만족스 럽거나 행복한 감정 상태 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샬 롬이란‘혼돈(chaos)과 소외(alienation)가 극복된 상태’ 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 게 부여하시는‘구원의 상태’ 이며, 동시에 인간의‘삶의 궁극적 목표’ 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 나타난‘에이레네’ (eirene)는 히브리어 샬롬의 헬라어 번역어로써, 전쟁이나 무질서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며, 더 나아가 화해와 메시야 적 구원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메 시야를 통한 진정한 화해로 이루어짐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외교상의 샬롬의 개념은‘전쟁 부재 상태’ 로 규정하는 전쟁없는 평화의 보전상태 정도의 단순하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신영순, 2004). 그러나 샬 롬은 이러한 이해를 넘어서‘모든 인간이 어떠한 상해도 받지 않는 건강하고 온전 한 상태’ , 즉 완전함, 질서, 복지, 축복, 정의, 사랑, 해방, 구원과 같은 행복과 번 영, 건강과 안정 등과 같은 어떤‘상태’ 를 의미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의‘관 계’ 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샬롬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세계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 적인 차원으로 평화를 이해할 때에는 이에서 더 나아가‘구조적인’폭력의 부재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배, 예속, 착취 등 구조적 폭력상태 가운데 인간의 실 존을 지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윤응진, 2001). Wolterstorff(1983)는 이러한 개념들을 훨씬 뛰어 넘어 성경적인 샬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소극적이며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의 개념을 모두 수용하 면서도, 즐김(Enjoyment)의 차원에서 평화의 개념의 차원을 확장시켜,“평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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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Wolterstorff(1983)는 샬롬을 하나님, 타인, 자연,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네 가지 관계에서 올바르고 화목한 관계를 가지 며, 그 관계 속에서 사는 삶으로 이해한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정의(Justice)라는 조건을 샬롬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보는데, 이는 샬롬 은 윤리적 공동체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샬롬이 구현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법이 지켜져야 하므로 샬롬은 윤리적 관계를 넘어 책임의 관계로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샬롬은 동 료 인간과의 윤리적 관계에서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창조세계를 향한 책임의 세 계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기쁨을 향유하는 즐김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 구 조를 갖는다. 이러한 Wolterstorff의‘샬롬’ 의 사상은 Clinebell의 전인건강 (Well-being)이론의 전인적 관계성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Clinebell은 전인건강을 통해‘성장’ 을 도모하며,‘성장’ 을 상담의 목표로 두고 있 다는 점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2. 안녕과 샬롬의 핵심 개념 1) 영성(Spirituality) 영적 존재로 창조되어진 인간(창 2:7; Benner, 1998)의 영적 측면은 신체적, 정 서적, 인지적 측면 등 인간의 모든 측면을 통합하는 근본적인 힘으로써, 개인의 영적 안녕 상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른 측면의 핵심적 요소가 되 고 있다(Banks & Rebecca, 1980). 개혁주의 영성학자인 Rice(1995)가“영성이 없 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고 했을 만큼, 영성은 하나님의 ‘Spitritus'(생기, 입김, 영)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의 본질과 속성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진영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경건’ (Piety)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 앙의 본질을 잘 표현한 성경적 용어임에 틀림이 없지만, 성경 신학적이며, 다소 무겁고 성별된 의미를 나타내는 측면이 있기에, 예전에서 문화, 성도의 삶의 양식 까지 망라하여 사용되고 있는‘영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포괄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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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적절하다 여겨진다(이경섭, 2005). 경건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 계성을 강조하는 행위와 태도 중심의 다소 배타적인 용어로 이해될 수 있는 측면 을 가지고 있다면, 영성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관계-영성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용 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으로서의 영성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영성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노영상, 2001). 경건(Piety)을 포괄하는 용어로서의 영성의 의미를 칼빈 신학을 통해서도 발견 할 수 있는데, 칼빈(1967)에게 있어 경건은 철저히 수직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데,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인간의 삶의 스타일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인간은 선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이 지상에서의 이웃에 대한 사 랑의 행동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이웃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발 현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인데,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 경건은 자연스럽게 이웃 을 향한 수평적 사랑으로 뻗어 나가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부를 포괄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의미라고 할 것이다. 2) 전인성(Wholeness)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 또는 영혼과 정신과 육체 등 두 세 부분의 복합체가 아니라, 서로 분할할 수 없는 복합적 통일체로 이해되어진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어떠한 이원론적 개념도 배제하며, 두 요소 간의 위계적 구성 개념도 배제하고 있다(Vander Walt, 1997). Dooyeweerd의 양상이론(Facet theory)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다면적 구조(multidimensional structure)를 가진 전인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15가지 양상(facets : 수적, 공간적, 운동적, 물 리적, 생물학적, 심미적, 미적, 논리적,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 경제적, 법적, 윤 리적, 신앙적 등) 모두에 참여해 있으며, 이 모든 양상에 있어서 통합적으로 주체 적 역할을 하며 다면적인 통합적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아울러 인간 존재의 모든 양상은 인간의 종교적 응집점이라고 하는 마음(Heart) 혹은 자아 (Ego)에 응집되며, 인간 몸의 구조와 현세에서의 삶과 행동은 마음에서 응집되거 나 마음에서 통합되고,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통전성을 드러내고 있다(조 성국, 2000). 이러한 인간의 통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와 반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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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의 종교적 존재가 되게 하므로, 인간은 그 어떤 초월적 존재를 지향하는 종교 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될 때, 진정한 통전적 존재로서의 생을 살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 간 상호간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성 가운데 통전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아울 러 인간 존재의 종교적 중심으로서의 마음은 인간의 모든 생활이 통합되는 종교 적 중심인 동시에 인간의 근본적인 통전성의 원리가 되는 곳이므로, 전인적 존재 인 인간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다면성의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통합된 전인적 존재로서의 통전성을 마음의 종교적 지향과 삶의 전체성을 통하여 보여줄 수 있 어야 할 것이다. 3) 관계성(Relationality) ‘인간 영혼의 좌소’ 라고 일컫는 마음(Heart)으로부터 인간 삶의 모든 것이 통 합되고, 구성되며, 작용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영성은 마음을 통하 여 하나님께 반응하며 순종하는 관계성(Relationality)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 래서 Hoekma(1993)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또는 구조적 측면이 아니 라, 전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고 주장하였고, Calvin(1967)은“나의 마음 (Heart)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라고 하면서 영성과 경건을 토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순종, 그리고 헌신을 표현하였을 만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 기는 영성의 실천은 관계성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창 1:27; 9:6; 약 3:9)은 인간이 책임적, 반응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반응적 삶을 산다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적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김성수, 2001)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항상 자신 과 동료 인간, 공동체, 환경,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타락과 파괴로 오염되어있는 피조세계와 관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될 수 있도록 관계를 회복해가는 노력들을 하며 살아야 한다. 전인성을 가진 인간이 피조세계 가운데에서 삶의 전 영역에서 관계성을 잘 맺 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창조세계의 문화적 명령의 수행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삶이 될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가장 본질적인 관계를 기초로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타인(가족, 이웃)과의 관계, 사회(공동체)와의 관계, 세상(자연, 일)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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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전인적 관계성 가운데 전인적 영성과 안녕을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김광률, 2002).

IV. 맺으며 이 시대 한국 사회와 교회, 가정,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사회적

전인적이며성경적영성과 관계성에기초한 안녕과샬롬의삶을통해 일상생활속에서자신의역할을 잘수행하는건강하고행복한 그리스도인의삶을살도록 도와야할것이다.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개인적 요구와 필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화두의 하나인 영적 안녕과 전인건 강 등의 주제는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과 유리된 내 용이 될 수 없다. 이제 성경적 웰빙인 샬롬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 교회는 성경 적 웰빙이란 무엇이며, 전인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추구하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 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답을 줄 수 있어야 하며,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성경적 웰빙 이란 더 이상 잘 먹고 잘 사는 데 국한되는 활동이 아니며,

기 수행, 명상이나 요가 등 초월적 정신활동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님을 가르치고 일깨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등 전인적이며 성경적 영성과 관계성에 기초한 안녕과 샬롬의 삶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건강하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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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순(2004). 니콜라스 월터스톨프의 기독교교육 사상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고신대 학교 대학원. 영한 대사전(1997). 서울: 금성출판사. 우리말 큰 사전(1992). 서울: 어문각. 이훈구(1997). 행복의 심리학-주관적 안녕. 서울: 법문사. 이경섭(2005). 개혁주의 영성체험. 서울: 예루살렘. 장혜경, 이숙자(1999). 안녕의 개념분석. 성인간호학회지, 11(2), 55-76. 조성국(2000). 기독교 인간학 : 하나님의 형상인 전인적 인간. 부산: 고신대학교 부설 기독교 교육연구소. 통계청(2006). 한국의 사회지표. 서울: 통계청. Ardell, D. B. (1988). The history and future of the wellness movement. In J. P. Opatz(Ed.). Wellness promotion strategies : Selected proceeding of the eighth manual National Wellness. Dubuque. IA: Kendall/Hunt. Banks, R. & Rebecca, A. (1980). Health and spiritual dime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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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내적 성숙과 영성 훈련 ● 노종문 (IVP 총무) 지난해 12월, [뉴스앤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윌로우크릭 교회의 진솔한 자기 고백” 이라는 부제가 달린 한 기사가 나왔다.1) 이 기사의 내용은, 미국의 대표적인 초대형 교회 중 하나인 윌로우크릭 교회가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자신들의 사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조사 결과 를 보고하는 웹사이트에서는 자신들의 중요한 발견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2) 첫째로, 그들은 교인들의 교회 활동의 양과 그들의 영적인 성장이 비례할 것이라 고 예상했으나, 둘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둘째 로, 그들은 교인들의 영적인 성장이 네 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셋째로, 설문 조사에 응한 교인들 중 25%가 교회 생활 속에서 자신들 의 영적인 성장이 벽에 부딪혔거나, 교회 생활이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오히려 방 해가 된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조사는 비록 미국의 초대형 교회의 현실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회자들 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 즉, 교회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신자들을 교회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교회 활동 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영적인 성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이 연구 결과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주목해야 할 몇 가 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윌로우크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첨 단을 달리고 있는 한국의 대형 교회들도 사역이 뭔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고 느끼 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연구는 바로 그 부분과 관련하여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이‘뭔가 벽에 부딪힌 느 낌’ 을 가지면서, 그에 대한 돌파구로서 두 가지 방향을 추구했다고 판단한다. 첫 1)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06. 2008년 6월 13일 접속. 2) http://www.revealnow.com. 2008년 6월 13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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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는 선교 운동이며, 둘째는 성령 운동이다. 첫 번째 운동은 우리의 시선을 자신 의 영적인 성장이라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망으로부터 외부로 돌려, 복 음이 긴급히 필요한 외부 세계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시선의 전 환은 일면 성경에 명확히 드러난 선교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서 건전한 측면이 있 지만, 해외 선교에 열심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 곧 교회의 내적인 성숙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오늘날 여러모로 확인하게 된다. 최근에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장 로 대통령을 낳기는 했지만, 여전히 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빛과 소금의 건전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한국인 선교사들이 양적으로 증가하기는 했지 만, 그 선교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결여 되었던 차원인 영적 성숙을 여전 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운동인 성령 운동은 교회 성장의 돌파구로 종종 사용되고 있으며, 실제 로 복음 전도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교회들의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2000년 대 이후에 성령 운동은 특히 치유/은사 집회나 알파(성령 체험을 프로그램의 일부 로 도입한 전도 운동)와 같은 운동과 연결되면서, 방언 체험에 지나치게 기울었던 지난 세기의 오순절 운동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 의 핵심도 여전히 과거의 오순절 운동과 마찬가지로 성령 체험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영적인 각성(awakening)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성령 체 험은 (좀 대담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신앙 성숙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이 글의 본론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지만, 90년대에 IVF의 캠퍼스 간 사로 활동했던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보면, 각성의 체험 이후에 제자훈 련이 이어지지 않을 경우,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각성은 열매 없는 허무한 체험들로 끝나고 만다. 초자연적인 성령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의 초보 단계에 서‘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내가 정말 죄인이었구나’ 하는 인식을 일으킬 수는 3) 선교운동, 성령운동과 함께 90년대 이후 복음주의권 내에서 진행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흐름 은 80년대 이후 청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 참여에 대한 관심이다. 이 흐름은 70년대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주화 운동 그룹의 사회 참여와는 성격이 다르다. IVF를 비롯하여 80년대 학생 자발성이 강조된 복음주의 학생 운동 그룹들은,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가 동 반자 관계라고 선언한 1974년 복음주의 로잔 언약을 고백적 근거로 삼고, 교회의 사회참여를 적극 적으로 추구해 나가려고 했다. 이들은 보수 교회들의 근본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신앙 행태를 비판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수 기독교로부터 분리시켰지만, 진보적인 신학을 받아들이기보다 는 경건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신학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복음주의적’특징을 가지고 있 다. 이 운동은 시민운동 단체와 비영리 단체들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한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을 침투시켰지만, 그들도 현재까지는 한국 교회를 내부로부터 갱신하는 데 눈에 띄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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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그런 각성 자체가 반드시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 즉, 일상 속에서 하나님 과 동행하는 삶으로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3) 이 글은 한국 교회가 벽에 부딪힌다고 느꼈던 상황의 핵심이,“일상생활의 영 성” 을 길러내지 못함으로써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교

한국교회가벽에부딪힌다고 느꼈던상황의핵심이, “일상생활의영성”을 길러내지못하여서신자들이 삶의현장에서빛과소금이 되기보다는교회주변만을 맴도는생활을하는데있다.

회 주변만을 맴도는 생활이 되었던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 한다. 그리고 이 글의 목적은 한국 교회 안에서 일상생활의 영성을 길러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영성 훈련을 도입하 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먼저 한 개인의 영적인 성장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이 어서, 이런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영성 훈련이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영성 훈련을 담아낼 수 있는 구조로서 일대일 영성 지도와 소그룹 영성 지도의 개념을 소개하려고 한다.

영적인성장의네가지단계 16세기 이후의 개신교 전통에서는 한 개인의 영적인 성장의 과정을 세부적인 단 계들로 논의하지 않고, 칭의와 성화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해 왔지만, 종교 개혁 이전의 중세 전통 속에서는 영적인 성장을 일련 단계들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많 이 있었다.4) 오늘날에 와서 그러한 단계들과 각 단계에 대한 설명을 지나치게 표준 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조심스러운 관찰을 통해 그와 유사한 성장 단계들을 찾아보는 것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 급한 윌로우크릭 교회의 연구팀도 자신들의 광범위한 조사의 결과로 신자들의 영 적인 성장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네 가지 단계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각성(Awakening), 정화(Purification), 조 명(Illumination), 일치(Union)의 4단계 체계와는 그 기원이나 세부 내용이 다르지 만,5) 오늘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좋은 단계 구 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제시하는 네 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4)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 (장신대출판부) 54-65쪽을 참고하라. 5) 이 전통적인 네 단계에 대해 잘 정리해 주는 자료로서는, 로버트 멀홀랜드, 영성 여행 길라잡이 (Invitation to a Journey, 살림) 8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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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기독교를 탐구하는 단계(Exploring Christianity) 2단계: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단계(Growing in Christ) 3단계: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경험하는 단계(Close to Christ) 4단계: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사는 단계(Christ-Centered) 나는 이 네 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조금 변형된 모습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단계: 새 신자 단계 – 각성(awakening)이 일어남,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신앙생활에 입문함, 복음의 메시지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임 2단계: 제자훈련 단계 –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배움, 성경적 가치 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그 내용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함 3단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단계 –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변화됨, 자신의 삶 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함 4단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단계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충만하게 경 험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양식이 형성됨 윌로우크릭 교회 팀은 이렇게 네 단계의 발전과정을 살펴본 결과, 다수의 신자 들이 (응답자의 약 25%) 2단계에서 3단계로 진행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혀 있거 나, 또한 3단계에서 4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교회가 제시하는 활동들이 자신들에게 도움보다는 방해가 된다고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 다. 이 내용은 한국 교회가 80년대 제자훈련 운동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둔 후 에 뭔가 답답한 장벽을 느끼고 선교 운동, 성령 운동으로 돌파구를 찾았던 시기를 돌아보게 한다. 위와 같은 영적인 성장의 네 가지 단계들을 인식한다면, 당시의 해결책이 근본적으로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체험을 통해 영적인 각성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시도는 2단계 후에 다시 1단계로 돌아가는 것일 수 있다. 영적인 각성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체 험적으로 느껴보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즉 3단계로 나가도록) 돕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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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성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데 도움이 되고, 결과 적으로 영적인 신생아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런 일들을 이미 한두 번 반복적 으로 경험해 본 기존 신자들에게는 지난해 배운 저학년 과목을 반복 학습하는 것 과 같은 일이다.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위에서 제시한 신앙 성숙의 네 단계 모두에서 놀랍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1단계로 돌아가 그 시 절의 경험을 반복 체험해 보는 것은‘정서적으로’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은 더 놀라운 은혜의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는 신앙의 모험은 아니다. 오히려 앞으 로 나아가라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는 퇴행적 응답으로서, 익숙한 공간, 익숙 한 경험, 안전한 장소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나 는 한국 교회가 지금‘부흥’ 을 갈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부흥은 그 본질적 내용이 영적인 각성(awakening)이며, 신앙의 입문 단계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 교회는 이미 1970년대에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부흥을 경험했고 영적 인 유아들이 교회마다 가득하다. 그러므로 지금은 다시 초보단계로 돌아가려 하 지 말고 성숙을 향해 발돋움하려고 애쓸 때이다. 한국 교회는 70년대 가파른 양적 성장을 경험하는 영적인 각성의 단계를 지나, 80년대 제자훈련을 광범위하게 보급함으로써 내적인 성숙을 향하여 올바른 걸음 을 내 디뎠다. 그 결과로 사랑의 교회와 온누리 교회 등 제자훈련 중심의 교회들 이 한국 교회의 주도권을 획득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들로 새롭게 등장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위의 신앙 성장의 네 단계는 이 부분에서도 유익한 통찰을 제시한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신자들의 내면 가득한 열망에 응답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열망을 담아낼 방법을 제시하는 교회는, 제자훈련 다음 단계의 커리큘럼을 제시하지 못하는 기존의 대형 교회들로부터 신자들을 흡수하며 성장하게 될 것이 다. 이러한 열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영성’ 이라는 키워드가 한국 교회 전 반에 나타난 것을 통해 충분히 확증된다. 이미 대형 교회들 안에는 제자훈련을 마 치고 여러 가지 강의들을 섭렵한 성도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어떤 교육이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느끼는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초보적인 것을 반 복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건전한 경우에는 이들이 교회의 평신도 사역 그룹으 로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선교에 헌 신하여 해외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도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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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신앙 성숙의 다음 단계로 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내면적 갈증은 여전히 해결 되지 못하고 남는다. 이때에도 1단계로 돌아가거나 (예를 들어 성령 체험 집회, 치 유 집회에 참여하는 등) 2단계를 반복 강화하는 선택은 (예를 들어 더‘강한’제자 훈련을 다시 받거나, 어떤 문제들에 대한 더 전문적인‘지식’ 을 습득하거나 하는) 방향착오이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3단계로 나가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나 는 이 길이 영성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교회의 대형화는 여전히 힘을 발휘하겠지만, 상대적으로 그 의미가 축 소될 것이다. 새로 나타나는 (영적 성장의 세 번째 단계에 초점을 맞추는) 영성 훈 련 중심의 교회들은 각자 그들의 목표에 적합한 규모의 교회를 추구할 것이기 때 문이다. 교회의 대형화는 제자훈련(영적 성장의 두 번째 단계)을 위해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제자 훈련은 상당한 전문성과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한 사역이 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차원만을 보면 전문성이나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대형 교회들이 효과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가 영성 훈련 사역을 잘 감당하는 데는 대형 교회의 규모가 특별히 유리한 조 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차 살펴보겠지만, 영성 훈련은 제자훈련에 비하면 상대 적으로 컨텐츠 중심이 아니라 체험 중심이며, 커리큘럼 중심이 아니라 상호 관계 중심이며, 영성 훈련의 장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영성훈련이란무엇인가 위에서 나는 신앙 성숙의 세 번째 단계를‘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을 사는 단계’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이러한 삶을 촉진하는 방법이 ‘영성 훈련’ 이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일상생활 과 영성 훈련이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성 훈련이라는 말은 종종 일 상생활과 분리된 수도원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점에서 영성 훈련은 일상 6) 제자훈련은 기본적으로 컨텐츠 중심의‘학습’ 이다. 그것은 복음은 무엇이며, 경건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며, 교회생활에서 신자들의 기본적인 의무는 무엇이며,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신자 로서 가정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전반적으로 빠짐없이 그리고 효과적으로‘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자훈련의 핵심은 (물론 제자훈련이 일대일과 소그룹을 통해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도 있지만) 내용 전달에 있다. 그리고 그런 훈련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들을 양성하는 데는 상당한 전문성과 자원이 투자되어야 한다. 또 일대일과 소그룹 외에도 대그룹 차원 에서 유능한 강사가 탁월한 강의를 통해 전문적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하면 제자 훈련의 폭발 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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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는 동떨어진 활동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더욱 심각한 문제 가 있다. 그것은 영성 훈련이 종종 엘리트주의와 결합하여 소수의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의 활동이 되어버리곤 한다는 점이다. 즉, 영성 훈련을 위해 고도의 자기 통 제를 요구하는 훈련 방법을 제시한 다음,‘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좌절하게 될 것이며 결국 평범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심각하게 손상시키 는 것이다. 최근에 영성 훈련이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 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유익을 맛보고 있고,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 유익으 로부터 소외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영성 훈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영성 훈련은 무엇이 아닌지 생각해 보자. 무엇보다도 영성 훈련은 영적인 근육 강화 훈련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성 훈련을 운동

많은사람들의생각속에서 일상생활과영성훈련이 자동적으로 연결되는것은아니다.

선수의 훈련과 비교한다.7) 아마도 훈련이라는 말을 가장 많 이 사용하는 그룹이 운동선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선 수들은 훈련을 통해 고도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데, 그런 기량을 발휘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혹독 한 절제와 금욕이 필요하다. 영성 훈련을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을 어떤 규칙 속에 둠으로써 영성 훈련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영성 훈련의 핵심 내 용은 몸의 통제나 금욕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영성 훈련은 내면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며,8) 몸은 그 욕구에 보통‘자동적 으로’봉사한다. 그러므로 몸이라는 요소가 영성 훈련에 필수적으로 개입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극복의 대상이나 통제의 대상으로 지나치게 부각시킬 필요는 없 다. 영성 훈련을 영적인 근육 강화 훈련으로 이해할 때, 영성 훈련은 종종 은혜의 복음과 대치되는 율법적 요구가 되거나, 영적 엘리트주의를 낳게 된다.9)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영성 훈련을 영적인 습관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은 습관 형성의 중요성과 효과를 7) 대표적인 예로서 달라스 윌라드의 영성 훈련 (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은성)을 보라. 8) 애들 칼훈, 영성 훈련 핸드북 (Spiritual Disciplines Handbook, IVP) 26쪽 이하의 내용이 이를 잘 기술하고 있다. 9) 영적인 엘리트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는 유진 피터슨의 현실, 하나님의 세계 (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 IVP) 35-48쪽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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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설명해 주었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영성 훈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심리학 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어떤 행위를 21일 이상 반복하면 그것이 하나의 습관 으로 자리 잡는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영성 훈련도 처음에는 힘들지만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접근 도, 영성 훈련의 외적인 요소인 몸의 움직임이나 습관 형성에 대해서는 뭔가 말해 주지만, 영성 훈련의 내면의 역동은 전혀 포착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개인 기도 중에 조는 사람은 일정시간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안 되어서 조는 것일 수도 있지 만, 더 많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작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10) 그러므로 습관 형성의 관점에서 영성 훈련에 접근하는 것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실패의 경험으로 몰아넣는다. 탁월한 기량을 발휘 하는 운동 선수는 언제나 소수이다. 마찬가지로 습관을 통해 자신을 잘 다스리는 사람도 언제나 소수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영성 훈련을 제자훈련을 대치하는 새로운 훈련 방법 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신앙 성숙의 4단계에 비추어보면 그 오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자훈련은 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부분을 건너 뛰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큰 그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 의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다는 사 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즉 제자훈련 이전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신앙 생 활에 대한 이런 이해는 포괄적이고 통전적인 커리큘럼을 가진 제자훈련 단계를 거쳐야만 생겨날 수 있다. 영성 훈련은 이러한 가르침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전제로 그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제자 훈련 속에도 영성 훈련의 일부 내용이 필연적으로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전공 공 부가 졸업 후에는 사회 속에서 현장 중심의 실천적 지식으로 재형성 되어야만 하 듯이, 제자훈련과 영성 훈련은 각각 그 목표와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내용 중심 이라면, 후자는 적용 중심이고, 전자가 지식 중심이라면, 후자는 경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성 훈련은 무엇인가? 영성 훈련(spiritual discipline)은 하나님의 은 혜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내는 신앙 실천의 10) 영적 체험에서 일어나는 저항에 대해서는 제럴드 메이, 영성지도와 상담 (Care of Mind Care of Spirit, IVP) 5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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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다.11) 예를 들어 침묵기도는 침묵을 통해, 우리의 내면의 열망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귀를 기울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영성 훈 련은 우리와 하나님이 만나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며, 우리에게는 은혜에 의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 내 적인 역동을 들여다보면, 1) 우리의 열망, 2) 우리의 열망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 3) 하나님의 임재, 4) 그 임재에 노출됨으로써 일어나는 우리 자신의 변화 등이 관 찰된다. 이런 내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활동은, 수고와 노력 끝에 결실을 얻는 행 위가 아니라, 전통적인 신학 용어로 말하면‘은혜의 도구들’ 이다. 은혜의 도구들 은 의무로 강요되는 사항들이 아니라, 넘치도록 풍부한 은혜를 우리가 다양한 방 식으로 맛볼 수 있도록 제공되는 선물들이며, 그 자체가 은혜의 표현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기도 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라는 설교를 들은 나머지, 기도와 성경 읽기가 은혜의 도구들임을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인지도 모른다. 애들 칼훈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교회 역사에서 등장한 영 성 훈련들 62가지를 수집하여 영성 훈련 핸드북 (IVP)을 펴냈다. 영성 훈련을 새 로운 의무들의 목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책에 나오는 60여 가지의 훈련들 을 보는 순간 가슴이 탁 막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훈련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내면의 열망들을 충족시키도록 하나님이 다양하게 마련해 주신 메뉴들이다. 이런 은혜를 공급받는 도구들을 익숙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익 히는 것이 바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의 목적이다. 영성 훈련의 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 두 가지를 더 언급해야만 한다. 첫째 로, 영성 훈련은 우리의 내면의 열망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12)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열망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사람마다 때에 따라서 다른 열망을 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지적으로 알고자 하는 열망도 있고, 하나님을 주위의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열망들 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진정한 열망들이라면, 그 열망은 성령님께서 우리 속 에서 일으키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열망을 따라서 그 열망을 적절히 표현할 수 11) 애들 칼훈은 영성 훈련 핸드북 26쪽에서 이와 같은 의미로 영성 훈련을 설명한다. 12)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별로 열망이 없다고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들의 열 망 없음은 강렬한 열망들이 좌절된 이후에 생겨난 실망감과 환멸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들 의 열망이 좌절된 것은, 그 열망이 피상적 수준의 열망, 하나님을 향한 진짜 심층적 열망을 덮어버 리는 가짜 열망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열망을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 열망의 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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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영성 훈련을 찾을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이 이렇게 많고도 다양한 영성 훈련들을 제공해 주신 것은, 우리 가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결코 은혜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 함이다.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 초병이나, 밤늦게 퇴근하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지 하철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월급쟁이나, 일주일 내내 하루도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그 상황에 알맞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 다. 그것이 바로 영성 훈련들이 이렇게 다양하고도 풍부한 이유이다. 교회는 신자 들이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공급 받을 수 있도록 다양 한 영성 훈련들을 가르치고 연습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영 성 훈련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은혜의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영성훈련을담는구조로서의영성지도 오늘날 교회들은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돕는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현재 상황 을 돌파할 올바른 방향은 성령운동이나 선교 운동이 아니다. 각각은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영적 성숙의 세 번째 단계를 담아낼 수 있는 교회 내의 구조이다. 나는 이 구조가 바로 영성 지도 (spiritual direction)라고 믿는다. 아래에서는 영성 지도의 개념을 설명하고, 교회 의 사역에서 영성 지도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간략히 제시하려 한다. 영성 지도란 간단히 말하면 피지도자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며 피지도자로 하여금 그에 응답하도록 격려하는 대화이다.13) 영성 지도에서 대화의 초점은 삶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임재다. 이 대화의 전제는 하 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온통 가득 채우고 있으며, 우리가 그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눈이 어둡기 때문이라는 인식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늘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기 몰두 상태에 있기에 우리 삶을 충만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피 지도자의 체험을 실마리 삼아 함께 피지도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 13) 데이비드 베너는 개신교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영성 지도를 설명한다. 이 책은 영성지도에 대한 개 론서로서 매우 유용하다. 특히 거룩한 사귐에 눈뜨다 4-6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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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나가며, 그 하나님의 임재에 피지도자가 응답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하지만 영성 지도는 한 두 마디 말을 통해 즉시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영 성 지도는 상담이나 신학적ㆍ윤리적 조언과는 달리, 어떤 질문에 대해 바람직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 지도는 해결책이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 는 대화가 아니라,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함께 하나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며 피지도자의 삶 속에서 일어난 성령님의 움직임을 분별해 나가는 과정이다. 또한, 영성 지도에는 어쩔 수 없이 심리적인 역동들이 많이 개입한다. 이런 면에서 지도 자는 어느 정도 영성 지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심리적 역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14) 그렇다면, 영성 지도와 영성 훈련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성 훈련은 피지도자가 하나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다. 영성 훈련을 통해 형성된 공간 안에서 피지도자가 하나님의 임재 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 피지도자에게는 하나님 체험이 일어난다. 영성 지도의 대화 속에서 주로 다루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체험들이다. 형성 훈련은 하나님 체험을 일으키고, 이러한 하나님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피 지도자는 자신의 삶을 그 하나님 체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전통적으로 영성 지도는 주로 일대일 관계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20세 기에 소그룹 역동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소그룹 영성 지도 (Group Spiritual Direction)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 소그룹 영성 지도 는 한국 교회가 구조적으로 수용하기에 가장 알맞은 영성 지도의 방법이라고 생 각된다. 소그룹 영성 지도는 그룹원들이 서로에 대하여 영성 지도를 제공하기 위 해 소그룹으로 모이는 것인데, 보통은 2주에 한 번 정도 두 시간 정도 모임을 가지 게 된다. 이 모임에서 멤버들은 2주 동안 한 가지 영성 훈련을 실행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면, 멤버들은 매일 20분간 침묵기도를 드리고, 그 기도 중에 일어난 체험 을 노트에 기록해 오기로 약속할 수 있다) 그 실행 결과를 함께 나눈다. 이 소그룹 모임을 통해 멤버들은 서로의 체험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나눔 시간에 성령님이 서 로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를 함께 발견해 나간다.15) 이러한 영성 지도를 통해 신자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로, 영 14) 이런 내용을 다루는 기본적인 자료가 제럴드 메이의 영성 지도와 상담 이다. 15) 소그룹 영성지도의 실제 사례를 세부적으로 기술한 내용으로서는 데이비드 베너의 거룩한 사귐 에 눈뜨다 6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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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지도는 각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도전한다. 자신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경험이야 말로 일상생활 영 성의 출발점이요 토대이다. 신자들은 이런 체험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배우게 된다. 이것은 성경 공부 후에 보통 따 라오는‘삶의 나눔’시간과는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런 삶의 나눔 시 간에는, 사람들이 종종 자기가 경험하고 느낀 내용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그러 나 그런 모임에서는 삶의 경험을 나눌 때에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영성 지도는 바로 그 질문을 중심에 둔다. 둘째로, 영성 지도는 성경 공부 시간처럼 지식이나 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체험을 다루므 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 성경 공부는 소수의 사람 들이 발언 기회를 독점하기가 쉽다. 반면 소그룹 영성 지도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 기의 이야기를 쉽게 나눌 수 있다. 각 사람이 모두 독특한 하나님 체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영성 지도는 제자훈련을 통해 배운 객관적 지식을 인격적 으로 내면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제자훈련이 없다고 영성 지도가 불가능한 것 은 아니겠지만,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하나님 체험이 동시에 상호작용할 때 하나 님과의 관계가 더 잘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 훈련으로 좋은 기초를 다진 교회는 영성 지도를 통해 더 좋은 신앙 성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나가는말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교회는 1970년대에 놀라운 부흥 을 경험했고, 80년대에는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정착시 켰다. 앞으로도 교회의 사역에서 부흥과 제자훈련은 여전 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겠지만, 한국 교회가 한 걸음 더 성숙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 을 온전하게 내면화하여, 신자들이 각자 그들의 삶의 자 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한걸음더성숙의길로 나가기위해서는,우리가 지금까지배운것을온 전하게내면화하여,신자들이 각자그들의삶의자리에서 하나님과동행하는삶을살도록 격려해야한다.

학자들은 각자의 학문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 하고 밝혀내야 하며, 직장인들은 직장생활 속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 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하며, 전업 주부들은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의 과정에서 하 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해야 하고, 학생들은 교실에서 인격적으로 지성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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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준비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 님과 동행하는 충만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일상생활의 영성이다. 일상생활 의 영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한국 교회는 영성 훈련과 영성 지도에 특별히 관 심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에 몇몇 선구자들과 대학생 선교단체들을 통해 제자 훈 련이 보급되면서 한국 교회 전체 그림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이제는 영 성 지도가 한국 교회에 좀 더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수용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 과 삶이 온전하게 통합되는 내적 성숙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X

부록: 교회에서 영성 지도와 영성 훈련을 시작하기 위한 자료 소개 영성 지도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나, 소그룹 영성 지도를 시작하기 위해 개론 적인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데이비드 베너, 거룩한 사귐에 눈뜨 다 (Sacred Companions, IVP)를 보라. 이 책은 영성 지도를 소개하는 책들 중에 서는 드물게, 개신교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해설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영 성 지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신적 역동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는, 제럴드 메이, 영성지도와 상담 (Care of Mind, Care of Spirit, IVP)을 보라. 이것은 영성 지도 자 훈련 과정에서 이 분야의 필독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다양한 영성 훈련들을 소개하고 소그룹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하는 자료로서 는, 애들 칼훈, 영성 훈련 핸드북 (Spiritual Disciplines Handbook, IVP)이 유 용하다. 영성 지도나 영성 훈련에 관한 더 많은 자료 소개를 보려면, 데이비드 베 너와 제럴드 메이가 각각 그들의 책 끝 부분에 제공하는 간단한 설명이 덧붙여진 도서목록들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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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1세기를위한평신도신학」 폴 스티븐스 저/홍병룡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ISBN-10 : 8932830169 본서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는‘한 백성의 신학’ 이 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사용함으로 평신도직의 폐지를 주장한 다. 또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 공동체 내부의 삶과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인 삶을 살게 한다고 주장하며 소명과 일과 사역에 대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일’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일’ 과의 협동작업이라고 말한다. 본서는 평신도의 사역을 전도나 선교 분야에 한정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며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을 통해 하나님에 의 해 보냄 받은 백성으로써 세상 속 하나님 백성의 삶을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ANCIENT-FUTURE TIME : Forming Spirituality through the Christian Year)」 로버트 E. 웨버 저/이승진 역/CLC(기독교문서선교회) / ISBN-10 : 8934109378 로버트 웨버는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반복되는 삶 속에 서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으로 고대 교회 성도들의 영적 리듬을 계승하는 것을 제시한다. 즉 일 년에 걸친 영적 순례로서 교회력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과 공동체의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 책에서 로버트 웨버는 교회력의 각 절기에 맞는 성경적인 주제들과 예전적인 전통을 다시금 복원하고 소개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유용한 도표들과 기도문들, 숙고를 위한 질문들, 그리고 참고 자료 목록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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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만이내집은아닙니다」 폴 마샬 저/김재영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ISBN-10 : 8932820422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동시에 인간의 모든 업적과 더불어 세상이 앞으로 멸 망할 것임을 경고하는 가르침이 극단적으로 득세하는 세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에서 성도의 지위를 축소시킨다. 본서는 그러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탱하고 양분을 주고 새롭게 해주며,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신성한 책임을 기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지녀야 할 영적인 방향성에 대한 간략한 개관을 제공하고 있다.

「월요일을기다리는사람들」 윌리엄 딜 저/이종태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ISBN-10 : 8932820341 철강회사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후 평신도 운동 단체인 Coalition for Ministry in Daily Life Riverbend Resource Center의 대표로 활동한 저자는 오랜 직장 생활 경험을 토대로, 사람들을 사로잡 고 있는 일중독, 탈진, 안정 및 권력에 대한 집착 등의 문제와 그 배후에 존재하는 ‘정사와 권세’ 의 실체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또한 경쟁, 타협, 생활양식, 시민의식 등 평신도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평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련회와 사역 모임을 위한 지침도 소개한다.

「일과예배」 벤 패터슨 저/김재영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SBN-10 : 8932820260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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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하며 근심하는 사람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일’ 과‘예배’ 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일이 세상에서 하나님 을 섬기는 것이라면, 예배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고 말한다. 본서는 이 두 행위가 모두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 임을 역설하면서, 직업과 소명 의식, 안식일, 성례, 성육신 등 일과 예배와 연관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모략」 달라스 윌라드 저/윤종석 역/복있는사람 / ISBN-13 : 9788995101414 이 책에서 달라스 윌라드는 예수의 가르침의 참된 본질을 파 헤침으로써“불 가운데 구원 얻는”식의 사고방식을 논박하며 (그토록 내세로만 귀속시키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이, 실제로 지금 맛볼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만족스런 내생은 보장하지만 지금 여기서의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믿음은 피상적인“소비자 기독교” 와“광고문 신앙”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여하심을 설득력 있게 역설함으로써 신앙관과 제자도, 인생의 목적에 대해 성 경적 원리와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준다.

「일상생활속의그리스도인」 로버트 뱅크스 저/한화룡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ISBN-10 : 8932820155 본서는 저자가 신학과 일상생활을 접목시키겠다는 의도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의 연구 모임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신앙은 과연 생활의 어느 영역에까지 뿌리내려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신앙과 삶의 온전한 통합이 가능할까?’ 와 같은 질문 에 저자는 업무, 출퇴근, 쇼핑, 스포츠 등 일상적인 활동은 물론 수면과 같은 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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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적인 상태까지도 신앙과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일반 성도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문제들 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라고 촉구한다.

「현대인을위한생활영성」 폴 스티븐스 저/박영민 역/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ISBN-10 : 8932820228 본서는 저자가 다른 책에서 다루었던 다양한 주제들을 영성 이라는 관점으로 재조명한다. 저자는 삶 속에서의 일곱 가지 주제(노동, 가정, 이성 관계, 형제 관계, 홀로 있음, 이웃 관계, 안식)를 다루면서, 각 영역에서 영적으로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 과‘영성’ 이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결합하여, 가장 평범 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길을 보여준다.

_ 홍정환(일상생활사역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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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사역연구소사역소개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요 사역(service)” 이라는 관점과 보냄받 은 곳이 어디든지 사역의 현장, 선교의 자리라는 보냄받은 존재의식(missional identity)을 고취하기 위해 ① 일상생활사역을 위한 신학적인 틀을 다지고 일상생 활에 대한 제학문간 연구를 섭렵 통합하며 ②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주되심 과 예배하는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영성훈련을 연구 발굴 제공하며 ③ 실제적인 삶으로서 사역의 사례를 발굴하고 나누며 개별 생활영역의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도전과 격려를 함과 동시에 지역교회나 주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관점을 갖고 살도록 도전하는 연구소입니다.

I. 연구소 비전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의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앙과 삶이 통합된 그리스도인 2. 생활 현장에서 선교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3. 평일의 삶을 구비시키는 성경적 교회 4. 일터, 삶터, 교회, 사회전체의 변화와 하나님의 통치 II. 연구소 사역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사역을 합니다. 1. 연구사역 ① 일상생활 신학 연구, 강연, 세미나 ② 일상생활 관련 학제간 연구 ③ 정기연구지

(日常生活硏究) 연 2회(6월, 12월) 발간

2. 교육・훈련 사역 ① Missional Life Tra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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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ETT(Experiencing The Trinity) 신학훈련 ③ Marketplace Ministry Training 3. 자문・협력 사역 ① 일상생활 사역 관련 자문 제공 ② 유관 단체 및 운동과의 협력 4. Missional Church Movement 5. Action Group Movement - TGIM 운동(평일의 영성을 선언하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임) 6. Glocal & Network Ministry - 지방과 지역 중심의 수평적 네트워크 사역, 국제적 네트워크 사역 및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네트워크 사역을 통하여 일상생활사역 신학, 영성, 운동 확산 III. 연구소 조직

[ 부산오피스 ] 1. 소장: 지성근 2. 기획연구위원: 정한신 3. 연구원: 김종수(자료개발부) 4. 웹메니저: 엄태영 5. 객원연구원: 홍정환, 이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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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生活硏究 「

원고투고안내

(日常生活硏究)」는‘일상생활사역’ 에 대한 학문적 성과를 결집

하고 이를 확산, 보급하기 위한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의 정기연구지입니다. 1. 원고 투고 자격 (日常生活硏究)」(이하‘정기연구지’ 정기연구지「 )에 원고를 투고 할 수 있는 자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이하‘연구소’ )의 연구위원 및 연구원을 원 칙으로 하되, 본 연구소의 비전과 사역취지에 동의하는 자 중 연구지 편집위원회 의 승인을 얻은 자도 원고를 투고할 수 있습니다. 2. 연구지 발간 일자 정기연구지는 연 2회 발간하며, 발간일은 매년 6월 30일, 12월 31일입니다. 3. 원고 투고 기간 원고제출자는 원고파일을 원고마감일까지 연구소로 제출해야 합니다. 4. 원고의 분량 원고의 분량은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여, A4 편집용지 기준 상하여백 각각 20, 15, 좌우여백30, 글자크기10point, 행간160으로하여4-6매내외로합니다. 5. 원고 작성 방법 원고의 작성방법은 원칙적으로 투고자의 자율에 의합니다. 다만, 논문 형식의 원 고를 작성할 때에는 소정의 각주를 표기하여야 합니다. 이 때 각주의 표기방법도 투고자의 자율에 의합니다. 6. 원고의 심사 투고된 원고는 연구지 편집위원회의 소정의 심사를 거쳐 게재여부를 정할 수 있습 니다. 본 연구소의 비전과 사역취지에 상반되는 원고는 편집위원회의 결의로 게재 를 유보하거나 수정 게재를 요구하거나, 반려할 수 있습니다. 7. 전자출판 정기연구지의 출판은 인쇄본과 전자출판을 병행합니다. 원고제출자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가 정기연구지에 게재한 논문 기타 원고를 인터넷, CD-ROM 기타 모든 전자적 매체에 의한 전송 및 배포할 권리를 보유함 을 인정하며 이에 관한 별도의 금전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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