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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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달빛자취생 @wonwook


휴가 땐 역시 여행을 가야한다. 작년과 똑같은 배낭을 메고, 똑같은 역 앞 광장에 섰다. 평일인데도 북적였다. 더위를 쫓으려 사방에서 물을 뿌려대는 통에 바닥이 흠 뻑 젖어있었다. 젖은 광장을 가로질러 마른 계단을 밟는 데 물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운동화 바닥은 이미 말 라있었다. 계단을 올랐다. 아이들이 가랑이를 힘껏 찢어 가며 한 번에 두, 세 계단씩 올랐다. 훕훕, 아이들의 기 합 소리가 계단 위 차양을 타고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노인이 지팡이에 몸을 싣고 계단을 내려오 는데 자꾸만 한쪽 발이 질질 끌려 두 걸음에 한 계단씩 내려와야 했다. 난 한 걸음에 한 계단씩, 계단 중앙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아가며 계단을 올랐다. 2


광장은 밝은데 커다란 역사驛舍 안은 그늘졌다. 서늘하 고 약간 어두웠다. 눈이 편했다. 선글라스를 모자 챙 위 로 올렸다. 배낭을 한 번 추켜올리고 매표소로 걸었다. 배낭에는 특별히 든 게 없었다. 작년과 똑같은 날짜에, 똑같이 이틀 휴가를 냈다. 주말에 휴가를 붙여 사 일 동 안 쉴 수 있었지만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인 오늘 에서야 겨우 나왔으니 옷가지도 별로 넣을 필요가 없었 다. 주말에도 쉬지 못한 지 오래였다. 내년이면 초등학 교 들어갈 딸애와 놀아주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아내 는 평일 내내 이십사 시간, 도합 백이십 시간을 연속으 로 일했다며 주말 내내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딸애가 태어난 뒤로 주말마다 같은 말이었다. 애가 요람 에 있을 때나 맞는 말을 무덤갈 때까지 하려했다. 집안 풍경은 어느 집이나 비슷할 것이다. 아이는 자고 있고 아내는 침대에 누워있고 식탁은 밥과 반찬을 머리에 이 고 있고 파리가 황급히 자리를 뜨고 알아서 켜지는 등이 발치를 밝힐 때쯤 퇴근한 내가 구두를 벗곤 했다. 생각 하지 말자, 나는 역사에 와 있다. 여름휴가 중 이틀을 썼다. 오 과장, 회의 잡아놨어, 신사업 짜야지, 부장이 그렇게 말하는데 나흘을 내리 쉴 수 없었다. 생각하지 말자, 나는 역사에 와 있다. 여름마다 오는 곳이 이 역사다. 매표소로 걸었다. 늘어 진 줄의 맨 뒤에 섰다. 집과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주 3


변을 꼼꼼히 살폈다. 우동이 맛있었던 돈까스집을 시작 으로 식당들이 오른쪽에 늘어서 있었다. 왼편에는 파란 의자에 붙어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눈이 많았다. 텔레비전의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간간히 방청객 웃 음소리가 스피커에서 터져 나와도 누구 하나 웃지 않았 다. 재방송이었다. 웃지 않으면서도 눈은 기어코 텔레비 전을 보고 있었다. 변함없어 편안했다. 물기 없는 대걸레가 바닥을 문지르고 다녔다. 파란 의 자와 텔레비전을 잇는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바닥 에 붙어있던 다리들은 대걸레를 피했다. 대걸레는 발밑 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의자들의 옆을 지날 뿐이었다. 형식상 슬쩍 들어가는 시늉만 했다. 의자 주변을 재빠르 게 훑어낸 대걸레는 탁 트인 바닥 위를 달렸다. 벽에 닿 기 전에 방향을 틀었다. 대걸레가 멈춰야할 곳은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이어야 했다. 그곳에 신발이 있었다. 낡 은 등산화였다. 뒤축이 벽을 향해 있어 잘 보이진 않았 지만 발등에 묻은, 아니 새겨졌다고 해야 맞을 얼룩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발 코는 닳아 큰 검정 무늬 를 이뤘는데 주변의 때도 같은 색이라, 사이좋게 신발을 좀먹었다. 끈은 보풀이 잔뜩 일어나 솜을 꼬아 만든 듯 했다. 냄새는 굳이 가서 맡지 않아도 뻔했다. 대걸레는 신발을 피해 크게 몸을 틀었다. 얼마나 지독하면 대걸레 가 피해갈까. 대걸레는 정해진 순서를 따라 텔레비전을 4


보고 있는 눈들을 향해 달렸다. 등산화 옆에는 벽에 붙 어 엉켜있는 옷더미가 있었다. 청소부도 치우지 않는, 등산화와 비슷한 행색의 옷가지. 옷은 모두 흔히 볼 수 있는, 색깔과 색깔 사이의 색깔이었다. 희지 않지만 검 지 않은, 가장 되기 쉬운 검은색에 가까워지려하지만 그 도 되지 못한, 버림받은 색이었다. 무슨 색깔이라 말할 수 없듯 그 옷들도 무슨 옷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다 만 그 옷더미를 부르는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점퍼의 팔부분이 벽을 타고 올랐다. 손을 점퍼 밖으로 내밀었다. 놀랍지 않게도 점퍼와 손은 같은 색이었다. 그것이 움직이자, 피해야한다고 느꼈다. 표를 사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매표소의 줄이 줄질 않았다. 벽시계를 봤다. 꼭 이럴 때 시계를 보게 된다. 열한 시가 넘어가 고 있었다. 늘어선 음식점에서 갖가지 냄새들이 앞 다투 어 뛰쳐나왔다. 코가 냄새를 들이마셨고 눈은 텔레비전 을 보았다. 냄새가 대합실을 지배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았다. 엉덩이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점 으로 향했다. 옷더미도 그 꼭두각시 중 하나일 것이다. 충실한 종일 것이다. 줄은 아직도 줄질 않았다. 평일이 라, 점심시간이라 창구는 하나만 열려있었는데 그 앞에 서 새카만 웃옷을 팔에 걸치고, 아랫단을 미처 바지에 다 넣지 못했지만 넥타이는 제대로 맨 셔츠가 질러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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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무심코 듣다가, 아니 이걸 들을 때가 아니지 싶 었을 때 시큼한 냄새가 났다. 음식점에 있는 식초 통에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옷더미가 옆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불꽃이 타오르다 재가 되어 굳은 듯했고, 얼굴은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뛰 어가야할 만큼 찡그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 표정인지 얼 굴 주름마다 때가 끼어있었다. 옷처럼 검은 얼굴이었으 나 흑백 등고단채마냥 높낮이에 따라 명암이 달랐다. 집 생각이 났다. 집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현관을 열었을 때마다 보였던 풍경이 떠올랐다. 거실에서 텔레 비전이 깜박거리는 사이사이에 어둠이 끼어있었다. 어 둠이 아내를 덮치는 건가. 구두를 벗을 때마다 흠칫 놀 라곤 했다. 어둠은 어디나 있었다. 이 옷더미는 신발 코 에, 옷 사이에, 얼굴 주름 사이에 끼워 다니는구나. 어 둠을 뭉쳐 머리를 틀어 올렸구나. 어둠을 안고 빛 사이 에 서 있구나, 이 사람은. 그런 생각 끝에 그가 너무 가 까워, 아, 하고 한숨을 뱉었을 때, 그는 나를 지나쳤다. 음식점에 손님을 뺏긴 파란 의자에 앉았다. 신발을 벗어 발을 얹었다. 의자가 텔레비전을 향해 있어, 앉으면 집 체 교육 받는 듯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보게 되지만 그 는 보지 않았다. 허리를 쭉 빼서 의자 좌판 끝에 엉덩이 를 걸쳐, 등받이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었다. 그의 머리 가 뒷자리를 침범했다. 뒤에 앉아있던 엉덩이가 벌떡 일 6


어났고, 잇달아 손이 내려놓았던 배낭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다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했다. 엉거주춤 서 있었 다. 조용해졌다 싶었더니 창구에서 넥타이를 제대로 맨 셔 츠가 물러나 있었다. 입을 다물고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해결된 모양이었다. 뭘 얻어냈을까. 분노 또한 항상 제 값을 받는다. 받기 위해 행동하고, 받았으면 줘야 한다. 줄은 이제 말없이, 분노 도, 정열도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왔다. 창 구 안으로 돈을 들이밀었다. 항상 가던 곳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난 알고 있 다. 목적지를 말하려고 내 입이 벌어지고 창구 안의 귀 가 들으려고 가까이 오고 돈을 건네려고 내 손이 뻗어 나오고 받으려는 손이 다가올 때 시큼한 냄새가 났다. 창구로 들어가는 돈을 검은 손이 가로막았다. 차라리 날 주시오. 그 사람이다. 말을 하다니. 처음 들었다. 다른 사람에 게 말 거는 것도 못 봤는데, 말을 했다. 내 손에 얇은 두 께의 감촉만 남았다. 그 자의 뒷모습은 그림자를 업은 것처럼 어두웠으나, 아이의 솜사탕처럼 탐스럽게 지폐 를 들고 있었다. 그의 뒤를 쫓았다. 돌려주세요. 그 자 의 발이 바닥에 끌리는 건지, 늘어진 바짓단이 끌리는 건지, 신발 밑창이 벌어져 끌리는 건지, 그 밑에 그림자 7


가 끌리는 건지 알고 싶었다. 이봐요. 짐짓 큰 소리를 내보았지만 그 자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빠르진 않았 지만 확실하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 을 내가 따라 밟고 있었다. 내 돈이오. 소리를 더 크게 냈다. 역사 안이 내 목소리로 둥둥 울렸다. 주변에선 여 전히 창구 앞에 줄을 서서 한 장씩 표를 샀고,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고, 음식점에서 식사를 주문했다. 역 사가 세워질 때부터 이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움직이는 사람은 나와 그 자뿐인 듯했다. 그 자의 걸음걸이는 도 망치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지르박처럼 경쾌하게 바닥 위를 미끄러졌다. 따라잡았다. 그 자의 어깨를 잡으려다 지폐를 낚아챘다. 조금 빨리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솟았다. 맨손으로 이마를 쓸어 땀을 버렸다. 돈을 빼앗 긴 그 자가 뒤로 돌아 나를 봤다. 웃었다. 잇몸이 보였 다. 검게 물들인 건지, 피가 안 통하는 건지 알 수가 없 었다. 그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히히 라고 분명한 발음을 내며 웃었다. 대체 이 자는 어디서 왔나. 일단 지폐부터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 자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를 등지고 다시 줄을 서기 위해 걸었다. 그러 다 돌아봤다. 그 자는 그 자리에 있었다. 돌아본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다시 줄을 섰다. 그가 내 뒤로 올까, 주머니에 갑자기 손을 넣진 않을까 두려웠지만 시 선을 또 돌려 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할 순 없었다. 주머 8


니에 한 손을 넣어 지폐를 꽉 쥐었다. 줄은 금세 줄었고 이번엔 아무도 가로막지 않아 작년처럼 표를 샀다. 기차 는 삼십분 뒤 출발이었다. 창구에서 표를 산 다음,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 가 앉았던 자리를 봤다. 그 자는 없었다. 음식점에도, 텔레비전 앞에도 구석에도 없었다. 잔돈을 바지 주머니 에 넣었다. 텔레비전 앞 파란 의자에 앉았다. 텔레비전 에서 개그맨들이 단체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 맛있겠다, 매운 고추도 풀어져 있으면 시 원하고 개운할 텐데, 단체줄넘기를 보며 생각했다. 몸이 더워져 티셔츠의 목을 잡아 펄럭였다. 텔레비전 너머로 보이는 벽시계를 봤다. 개찰구에서 구멍뚫이 소리가 맥 박처럼 들렸다. 손이 구멍뚫이를 악력기 다루듯 쥐락펴 락했다. 지루해보였다. 주위에서 밥을 먹든, 텔레비전을 보든, 걸어오든, 뛰어오든, 넘어지든 관심없어 보였다. 누가 표를 내밀지 않아도 구멍뚫이는 허공을 열심히 씹 었다. 나는 배낭을 다시 메고 일어났다. 주머니에서 동전이 빠져 바닥에 떨어졌다. 동전에서 그 자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내 동전을 주워야한다는 생각보다 그 자가 어디 있는지, 이 소릴 들었는지, 이 광경을 보고 있는지, 노 리고 걸어오는지, 달려오는지 확인해야 했다. 고개를 쳐 들고 올빼미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한 눈에 들 9


이켰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동전을 내려다 보았다. 대 충 꿴 신발이 내 뒤에서 튀어나와 내 동전을 밟았다. 먹 구름에 가린 해처럼 동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는 내 뒤에 있었다. 내 뒤에서 의자 좌판 끝에 걸터앉아 허리 를 빼고 힘껏 다리를 뻗어 예의 삼각형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 검은 발등부터 눈까지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그 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내게 돈을 빼앗기던 맑은 웃음과 이 처연한 태도가 내 안에서 엉켰다. 과연 이 남자가 내 돈을 원하는 걸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돈을 뺏긴 남자가 그렇게 맑 게 웃을 수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고서야 돈을 밟고서 이렇게 태연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수 있을까. 하다 못해 아쉬워하거나, 하다못해 발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 려 하지 않을까. 동전을 그의 발로 굳건히 밟고 있는 지 금, 만약 그가 나를 향해 위협하는 표정만 지어보여도 나는 쉽게 그 돈을 포기할 텐데, 이 남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체 목적이 뭔가.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눈을 보고 있는데, 그가 발을 움직였다. 동전을 끄는 게 아 닌, 벌레 등을 밟았다 놔주며 장난치는 고양이처럼 슬쩍 발을 들어 옮겼다. 동전이 바닥 위에서 다시 번쩍거렸 다. 집었다. 밑창 자국이 동전 위에 뚜렷하게 남았다. 나는 동전을 닦지도 않고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10


그가 보고 있던 것은 텔레비전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음식점에 갔다가 다시 텔레비전을 보러 돌아오 는 무리들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쭈그 러 들었다. 입에서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이 미 동전을 밟고 있던 그 자가 아니었다. 그는 텔레비전 과 음식점 사이에서 자유로웠다. 나는 김치냄새를 밟고 어묵 냄새를 두르고 된장찌개 냄새에 휘청였다. 벽시계를 봤다. 열차가 출발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에 열두시가 지날 것 같았다. 열두시엔 점심을 먹어야 한다. 다들 그렇게 한다. 열차가 떠나기 전에 먹어두어 야 했다. 배낭을 다잡고 여태 북적이는 음식점 중 한 곳 으로 들어갔다. 이 식당에서 가장 많이 팔린다는 우동을 주문했다. 배낭을 벗어 옆 의자에 내려놓자 의자가 삐걱 거렸다. 탁자도 그리 튼튼해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고개 를 돌려 그가 앉아있을만한 곳을 쳐다보려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통에서 한 벌 꺼냈다. 알루미늄 컵에 물을 따 라 마셨다. 우동이 나왔다. 김치를 씹자 초침 소리가 났 다. 다 먹었다. 배낭을 다시 들쳐메면서 방금 뭘 먹었더 라 생각했다. 식탁 위에 놓인 동그란 사발 안에 남은 국 물과 김가루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계산을 치르고 나왔 다. 그가 있음직한 곳을 보지 않고 그대로 개찰구로 걸 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텔레비전 뒤를 지났다. 그는 분 명 나를 보고 있으리라, 다른 것들 보듯 나를 보리라, 11


고개를 더 숙였다. 땀이 솟았다. 표, 표. 입술 사이로 터 져나오는 날카로운 단음이 귀를 울렸다. 구멍뚫이가 허 공을 되씹는 소리였다. 주머니에서 표를 꺼냈다. 손톱을 짧게 깎은 손이 표를 받아 구멍을 뚫었다. 다시 돌려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옆에 놓인 바구니에 넣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왼손의 구멍뚫이는 아직도 표표 거렸고, 금색 띠를 두른 모자의 짧은 챙은 텔레비전을 향해 있었다. 난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철로가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열차는 예정된 시각에 왔 다가 사라진다. 뚝배기를 달구는 불꽃처럼 태양이 철로 를 긁어댔다. 어찌나 긁었는지 철로가 맨들맨들해서 시 원해보였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벽과 승강장이 마주봤 다. 벽에는 철로를 따라 커다란 광고판이 가득 걸렸는데 여러 해 비와 눈을 맞아 낡았다. 광고판은 색깔이 바랬 지만 여전히 광고였다. 나는 승강장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걸 보고 있었다. 곧 땅밑으로부터 두근대는 소리가 들 렸고 열차가 광고를 가렸다. 눈 앞에 서서히 열차의 형 체가 분명해졌고 내부가 들여다보이더니 이내 멈춰 문 이 열렸다. 승강장 기둥에 걸린 벽시계를 봤다.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왔다. 난 배낭을 메고 열차에 올랐다. 빈 자리를 찾아 선반에 배낭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 로 앉았지만 창밖을 보려는 건 아니었다. 매년 별 변하 지 않는 풍경인데다 터널을 지나기 일쑤였다. 다른 곳으 12


로 향하는 열차도 논밭이 있는 풍경을 지날 것이고, 어 두운 터널을 지날 것이다. 난 눈을 감았다. 미리 터널로 들어선 셈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뱃속에서 출렁였다. 우 동 국물이겠지, 밥을 말아먹었다면 좋았을껄, 공기밥은 천원 추가였나, 이런 밥 먹을 시간에 식당에서 할 법한 생각을 하며 배 어디쯤이 허전한지 손으로 짚어 가는데, 시큼한 냄새가 났다. 눈을 떴다. 그다. 그가 옆자리에 앉은 건 당연했다. 벽과 벽이 만나는 구 석이 그와 어울리듯이, 그의 코와 신발 코가 어울리듯 이, 그와 기차는 썩 잘 어울렸다. 그는 어느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어느 계단 위에 웅크리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어느 나무 위에서 도시락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어느 거리에서 가 로등에 대변을 봐도 어색하지 않을 테고, 어느 강가에서 돌을 쌓거나, 어느 절에서 풀을 다듬거나, 어느 군에서 총을 닦거나, 어느 집에서 박을 썰어도 어색하지 않을 텐데 기차를 탄 것쯤이야. 그에게는 떠났기에 돌아가야 할 집이 없을 테고, 지났기에 가야할 길이 없을 테고, 받았기에 줘야할 돈도 없을 테니 언제나 기차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다른 자리의 옆자리에도 그가 앉았을 것이다. 나는 눈을 떴는데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행태가 익숙해지자, 냄새도 익숙해진 듯 거슬리지 않았 다. 13


어디 공장에서 만들었는가. 그는 물음도, 단정도 아닌 어투로 툭 말을 던졌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었다. 고개 는 내 쪽으로 틀었지만 등받이에 푹 기댄 그대로였다. 뭐요, 내가 되물었으나 알지 못할 대답만 돌아왔다. 어 디 공장 출신이냐고. 난 공장에서 온 사람이 아니오. 여 행자 아닌가. 그래요. 어느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이렇 듯 영문 모를 소리가 몇 번 오가자 내 쪽에서 먼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더만. 난 대꾸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웃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만들 어, 그래, 안그래. 공장에서 만들지 않아요, 무슨 사람 을 공장에서. 난 힘없이 저항했다. 그가 힉힉대며 숨소 리로만 웃었다. 그리고 도로 눈을 감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며 내뱉었다. 아니긴, 거 물청소 전날마다 우르르 몰려오더만. 그는 점퍼를 벗어 무릎을 덮었다. 나는 창밖을 봤다. 열차가 역을 지나치고 있었다. 차창 옆으로 우두커니 선 그림자들이 지나갔다. 열차 앞을 보 는 것도 아니고, 뒤를 보는 것도 아니고, 누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광고판이 보이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열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승강장이라 서 있는 거겠지 짐작했다. 아직 도시를 못 벗어났구나. 나 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샜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혼자 민망하여 주변을 둘러봤다. 의자 두 개가 내 앞에 무뚝 14


뚝하게 등돌리고 버텼고, 옆에는 마른 그가 시야에 가득 차 그 너머를 볼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였다. 눈을 감 고 있었다.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열차는 매번 다른 역을 들락댔다. 전기줄과 전 기줄 앞뒤에는 전봇대와 전봇대가, 역과 역 사이에는 건 물과 건물이 자라지 않는 키를 쟀다. 집에서도 창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잠들어야 했다. 눈이 창밖을 더 보고 있으면 더 생각하게 되고 곧 표값이 아까워지게 된 다. 그 전에 자야했다. 내가 어디서 떠난 건지 묻기 전 에. 왜 여행을 떠났는지 고민하기 전에 자야했다. 오직 표값을 어떻게 치렀는지, 아내가 기념품으로 뭘 사오라 고 했는지 기억하면 된다. 숙박을 할 돈과 내일 점심 식 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 계산하면 된다. 나에겐 계획이 있다. 지갑이 있고 배낭이 있다. 모자와 선글라스도 갖 고 있다. 고어텍스 소재인 티를 입었고 통풍이 원활하다 고 자랑하는 긴 바지도 입었다. 마사이 운동화도 신었 다. 난 저 남자와 다르다. 여기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눈을 감았다. 나는 다르다. 정강이에 솟은 털 사이로 바 람이 밀려드는 듯했다. 나는 다르다. 이 바지 안으로 개 미가 올라올 순 없으니 그냥 한 때 이는 바람이거니 했 다. 나는 다르다. 무엇보다 내가 입은 바지는 통풍을 중 시한 과학적인 소재로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다르 15


다. 과학적 분석은 모르겠지만 전문가가 개발하고, 전문 기관이 보증한 딱지도 있었고, 무엇보다 비싸게 값을 치 렀다. 약간 몸에 붙어 움직이기에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그게 피부와 하나가 되는 거라고,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매일같이 이 상품을 파는 직원이 말하지 않았나. 나는 다르다. 여기 오는 동안 이 바지는 한 벌도 못봤다. 비 슷한 상품도 있었지만 엄연히 내 것과는 달랐다. 나는 혼자다. 당연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때마침 손수레 덜컹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손을 흔 들어 손수레를 세웠다. 지갑에서 돈을 주섬주섬 꺼내 건 네려다 그를 봤다. 눈을 뜨고 있었다. 옆좌석인데 그냥 지나치진 못할 거란 눈빛인가. 먹을거요? 내가 물어도 그는 말이 없었다. 지폐 몇 장을 떼어 그에게 내밀었다. 창구에서 번개같이 낚아채가던 그가 이번에는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먹을거요, 말거요. 지폐를 그의 눈앞 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때가 모였 다. 그리고 말했다. 먹을 걸 줘야지. 삶은 달걀 열 개, 맥주 두 캔을 샀다. 달걀이 담긴 비닐 봉지를 풀어 그와 나 사이의 팔걸이에 놓았다. 소금이 든 조그만 봉지를 뜯어, 구겨진 비닐봉지의 오목한 부분 에 부었다. 캔 맥주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받긴 했지만 탐탁치 않아보였다. 달걀을 하나 집어 껍질을 깠다. 하 얀 속살이 모두 드러나자 소금을 찍었다. 한 입 물었다. 16


싱겁고 퍽퍽했다. 남은 반쪽에 소금을 더 많이 찍어 입 에 넣었다. 캔 맥주의 꼭지를 젖혀 열었다. 마셨다. 거 품이 목구멍에서 일어나 답답했다. 달걀을 또 집었다. 껍질을 깠다. 속살이 모두 드러나자 소금을 찍었다. 그 는 나를 보고 있었다. 짧게 말을 걸었다. 드쇼. 절반을 베어물었다. 소금이 입안에서 침을 일으켰다. 그러나 역 시 싱거웠다. 퍽퍽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소금을 더 많이 찍었다. 비닐이 부스럭 흔들렸다. 소금이 흐트 러졌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 었다. 짜고 식도가 답답했다. 맥주를 마셨다. 위 속으로 뭔가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기차가 흔들렸다. 소금이 비닐 위에서 흐트러졌다. 달걀을 하나 집었다. 달걀은 아직 일곱 개나 남았고 그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달걀 껍질이 들어섰다. 껍질을 깠다. 흰자가 훤히 보였다. 손톱을 박아 단단히 붙잡고 흐트러진 소금 을 달걀 끝으로 그러모았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봉 긋해진 소금산을 달걀로 쳤다. 소금산이 무너졌다. 승리 한 장군이 칼을 들어보이듯, 난 달걀을 들었다. 달걀 끝 엔 전리품처럼 소금이 잔뜩 묻었다. 혀를 내밀어 소금을 핥았다. 짰다. 침이 입에 고였다. 흰자를 씹었다. 잇자 국이 노른자에도 남았다. 부서진 흰자 모서리로 소금을 더 찍었다. 노른자가 소금 위로 떨어졌다. 황급히 집어 올렸다. 노른자에 소금이 많이 묻었다. 노른자를 입에 17


넣고 흰자도 마저 넣었다. 짰다. 몹시 짰다. 맥주를 들 이켰다. 입안에서 탄산이 뒤척였다. 거품과 달걀로 입속 이 가득찼다. 몽땅 넘겼다. 입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 다. 가득 차 있다가 아무 것도 없어졌다. 허전했다. 검 은 비닐로 다시 손을 뻗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맛있는가. 아직 열차는 달리고 있었다. 기차는 심장과 엇박으로 덜컹거렸다. 내 심장은 어딜 향 해 가고 있는가. 나는 그를 보았다. 그리고 곱씹었다. 맛있나. 달걀이 맛있었나, 맥주가 맛있었나, 소금이 맛 있었나. 난 아까 호기롭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드쇼. 전과 같은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는 캔 맥주도 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맛있 는가. 드셔보심 알 거 아뇨. 자네 입맛에 맞냐고. 네, 맞 네요, 맛있네요, 아니, 그냥 먹는거죠, 꼭 맛있어서 먹 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왜? 이렇게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맥주를 앞좌석 등에 붙은 주머니에 넣고 눈을 감았 다. 부아가 치밀었다. 달걀을 집었다. 힘차게 이마에 부 딪혀 껍질에 금을 내고 손톱으로 그 틈을 비집어 열었 다. 껍질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달걀을 소금에 문질 렀다. 베어물 필요도 없이 한 입에 넣었다. 씹을수록 볼 이 찢어질듯 부풀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렇듯, 조금 더 뭔가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금을 손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털어넣었다. 물 한 방울 들어갈 틈도 없었지만 18


난 깡통을 손에 쥐었다. 입에 부었다. 꿀꺽 삼켰다. 맥 주가 일으킨 거품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목을 넘어갔 다. 우렁차게 트림을 내지르자마자 달걀 하나를 더 쥐었 다. 치고 찢고 씹어 박살냈다. 손수레가 지나갔다. 달걀 하나 더 집어 똑같이 부쉈다. 맥주를 마시고 트림을 뱉 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내 바지 위에도, 의자 옆에도, 발 밑에도 달걀 껍질과 흰자와 노른자 부스러기가 흩어 져 있었다. 허벅지부터 무릎께를 털었다. 부스러기가 바 닥으로 떨어졌다. 신발 위에도, 마사이족 건강의 비결인 과학적인 신발 위에도 부스러기가 있었다. 몸을 굽혀 털 었다. 발 주위에 너저분하게 깔린 부스러기들이 지난 밤 꿈처럼 아득했다. 창밖을 보았다. 논두렁과 논물과 파란 벼와 나무가 햇 볕에 흠뻑 젖었다. 길도, 들판도 공원처럼 녹색으로 치 장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열차 바로 위로 해가 지 나는듯, 객차 안은 터널을 지날 때처럼 그늘로 가득했 다. 눈에도 그늘이 차서, 태양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빛 이 가득한 창문과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맥 주가 아직 남았지만 충분히 취했다. 어둠이 푹신하게 눈 을 덮고 귀를 막았다. 간단없이 덜컹이는 기차만이 아직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었다. 덜컹거림이 멎었다. 눈을 떴다. 배낭이 선반 위에 아직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퍼 한 벌만 들고 있 19


었다. 캔 맥주는 앞좌석 주머니에 그대로 두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엔 부스러기가 남았다. 비닐 봉지에 아직 달 걀이 남았지만 그대로 두고 그의 뒤를 따라 열차에서 내 렸다. 역이라고 해도 광고판도 개찰구도 없다. 역 이름을 걸 어놓은 작은 독립문 같은 건물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그가 내 앞에서 걸었다. 그가 너무나 커보여 자연스레 위로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가린 천정도, 건물도 없었 다. 비가 올 거야. 그가 말했다. 먹구름이 조금 끼어있 긴 했다. 일기예보엔 그런 말 없었소. 내가 작게 말하자 그가 코를 만졌다. 바람이 코끝을 살살 간지럽혔다. 곰 팡이 냄새가 났다. 더웠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고 그는 역 너머로 나갔다. 배낭을 움켜쥐고 그를 따라 나도 나 갔다. 참기름 냄새가 나는 방앗간, 전구와 형광등과 나 사를 파는 철물점, 농기계 수리소 등이 역의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이곳엔 식당이 없다. 처음 왔을 때는 꽤나 당황해서 굶어야 했다. 어디에서도 밥을 팔지 않는다. 전에 숙소에서 사람들이 모여 밥 먹는 모습을 몇 번 보 긴 했다. 그러나 그들이 몇 시에 먹는지, 무얼 먹는지도 모를 뿐더러, 그들이 먹는 밥을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 지 몰랐다. 길이 포장되지 않아, 간간히 부는 바람이 흙을 얼굴에 날렸다. 그는 농기계 수리소 앞에 서더니 말했다. 비 올 20


텐데, 잘 곳은 있고? 잘 곳이라니, 그가 내게 숙소가 있 냐고 묻는 건가? 난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숙소는 예약 을 받지 않는다. 여러 곳에 전화했지만 받지 않거나 그 냥 오라는 말 뿐이었다. 그래서 지시대로 매번 예약 없 이 와서, 방을 잡아 하루를 보냈다. 정해진 곳은 없었 다. 그 때 경운기 한 대가 모퉁이를 돌아 우리 앞에 섰 다. 그가, 짐칸으로 올라탔다. 말리려고 했지만 너무나 재빨랐다. 그가 꾀죄죄한 손을 너울너울 앞뒤로 흔들었 다. 어서 타게. 나를 공범자로 만들고 있었다. 신기하게 도 경운기는 나를 기다리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경운기 가 으르렁대는 소리를 오래 듣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바퀴와 난간을 차례로 밟고 탔다. 짐칸의 밑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요란한 철판 소리가 났다. 바닥에 앉자 크 게 한 번 격한 울림이 올라오더니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 다. 처음으로 탄 경운기가 처음 가는 길로 진입했다. 손이 심하게 떨려 배낭을 놓칠 것만 같았다. 해가 구름에서 벗어나 빛에 피부가 드러났다. 따가웠다. 배낭에서 자외 선 차단제를 꺼내고 싶었지만 경운기의 흔들림에 적응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선글라스를 내려쓰고, 모자챙으로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려 했다. 그는 여유롭게 다리를 뻗 고 난간에 팔을 올리고 눈을 감고 해를 정면으로 마주했 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햇빛이 그 21


검은 잇몸을 죄다 비췄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웃어서 웅크려진 얼굴 주름마다 까맣게 햇빛이 고였다. 바람에서 비 냄새가 나는구만. 그 또한 잘못 알고 있었 다. 그건 비 냄새가 아닌 곰팡이 냄새였다. 비가 내릴 때 올라오는 곰팡이 냄새를 사람들은 비 냄새라며 곧잘 착각했다. 굳이 그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비가 오네요, 평소엔 안오더니. 그을린 얼굴이 눈을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 다. 무슨 소린가, 평소에 비 오는데 어쩌다 맑은 거지, 여름이니까.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자 때 문에 내 머리에서 열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듯했다. 간지 럽기도 했고, 찝찝하기도 했지만 모자를 벗을 순 없었 다. 모자를 벗으면 다음은 신발을, 그 다음은 바지를 벗 어야할 테고 그럼 정말 저 사람처럼 되어버릴 것 같았 다. 경운기가 논둑으로 들어섰다. 경운기는 기차보다 한참 느리면서 훨씬 더 흔들렸다. 논두렁에서 아직 꼬리가 남 은 개구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전기줄이 전봇대를 따라 오르내리는 모양이 육지로 끌려와 마지막 숨을 뱉 는 고래의 배 같았다. 나무는 모두 전봇대보다 높았고, 산은 파란 지붕보다 우람했다. 이런 곳은 와본 적이 없 었다. 예정과 달랐다. 역으로부터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돌아갈 때는 지하철, 버스나 22


택시를 이용해야 할 텐데 콜택시라도 들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길은 구불거려 좌회전과 우회전을 몇 번이나 했 는지 셀 수 없었다. 행정구역 명칭이 무엇인지, 어디를 기준으로 가늠해야 할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길을 꺾으 면 미닫이문처럼 산이 닫혔고 논밭이 열렸다. 똑같아 보 이는 산과 논과 밭이었다. 논과 밭은 다른 거라 알고 있 었지만 어느 쪽이 논인지, 논과 밭이 정말 다른 것인지 도 분명치 않았다. 산과 들이 모두 지겨운 녹색 일색이 었다. 길이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어 배낭과 무릎을 감싸안았다. 뭐하러 왔는가. 뭐하러 오다니, 보면 모를까, 당연히 여행이 아닌가, 나는 무릎을 안은 채로 눈을 들어 말없 이 그를 보았다. 뭐 있다고 여길 다. 과연 아무 것도 없 었다. 보이는 건 태양 아래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녹 색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사람에게 갈 곳이 있는 걸까, 이 깊은 곳에 집이 있는 걸까, 그보 다 이 부근에 사람 사는 곳이 있는 걸까. 그는 대체 어 디서 왔나. 안에서 밀려드는 의문들 때문에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입을 다물고 하늘을 봤다. 나 도 하늘을 봤다. 그를 따라 본 건 아니었다. 갑자기 주 변이 어두워졌고 뭔가 번쩍거렸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짙은 먹구름이 머리 위에 떠있던 해를 가렸다. 먹구름은 코 앞에 있는 듯 가까웠고 이쪽 산부터 들을 건너 저쪽 23


산까지 걸쳐 있었다. 지나온 길 위를 몽땅 덮고도 가야 할 길까지 덮으려 움직였다. 고 녀석, 어느 바람이 불렀는지 참 실하구만. 그가 말 하고 천둥처럼 웃었다. 아니 천둥이 쳤다. 짐칸 바닥에 한 방울씩 비가 떨어져 쇳소리를 냈다. 급히 배낭을 뒤 졌다. 경운기의 움직임이 몹시 불규칙했다. 배낭 끈을 간신히 풀어 손을 집어넣었다. 우산을 잡았을 때 빗방울 이 꽤나 굵어졌다. 한 쪽면에 예식장 이름이 박혀있는 군청색의 삼단우산이었다. 우산을 펼치자, 비는 시야를 빼곡이 채웠다. 바닥이 군데군데 움푹 패여, 고이는 비 를 내보내지 못했다. 한 손으로 우산을 잡고 다른 손으 로 난간을 잡았다. 몸을 일으켜 쪼그려 앉았다. 중심을 잡으려면 난간을 꼭 잡아야 했고, 비를 맞지 않으려면 우산을 꼭 잡아야 했으며, 배낭을 흘리지 않으려면 몸통 과 허벅지를 한껏 붙여야 했다. 난 이리도 위태롭게 온 몸의 근육을 동원해 균형을 잡고 있기에, 그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야를 가린 우산을 살짝 들 었다. 도시 중심에 설치된 분수처럼 비는 시야를 뿌옇게 했다. 그 물보라 사이에 그가 있었다. 한쪽 팔을 난간에 올리고, 고개는 들어 하늘을 향하고, 다리는 바닥에 던 져 쭉 뻗은, 아까와 다름없는 그 자세 그대로, 비가 내 리는 족족 다 맞고 있었다. 그가 입은 티와 바지가 흠뻑 젖었다. 흙빛 피부가 보였다. 비는 그의 몸 구석구석을 24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그는 받아들였다. 햇빛이 고였 던 검은 주름 위를 빗물이 강처럼 타고 흘렀다. 얼굴에 흐르는 강이 가슴을 지나 명치를 타고 아랫배를 거쳐 다 리를 휘돌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길에 빗물이 얼마 나 몸에 스미었는지, 혹은 흘러내렸는지 모르지만 그는 웃었다. 우산을 든 내 왼손과 난간을 잡은 내 오른손과 쪼그려 앉은 내 다리가 비의 충격을 견뎌내려 부들부들 떨었다. 경운기는 여전히 달렸고 먹구름은 여전히 해를 가렸으 나, 비는 멈췄다. 우산을 든 팔이 오래 버티느라 쉽게 펴지지 않았다. 바닥이 몽땅 젖어 편히 앉을 곳이 없었 다. 우산을 걷었다. 멀리 언덕 아래 길이 끝나는 곳에 언뜻 집이 보였다. 그러나 곧 그것은 집이 아니란 생각 이 들었다. 비가 내리면 짐승들은 어디로 갈까. 아직 덜컹이는 짐칸에서 경운기 뒤로 점점 멀어지는 땅 이 내려다보였다. 지렁이가 흙 위로 막 나왔다. 집앞 공 원의 지렁이들도 비가 오면 흙 위로 올라오곤 했다. 지 렁이들은 비오는 동안 비를 맞으며 흙 위를 거닐다가, 해가 나오면 아스팔트 위에서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 죽었다. 이 길은 아스팔트가 아니니 해가 나올 때 쯤이 면 지렁이는 흙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발자국과 그림자 가 스민 땅 밑에서 목적 없는 굴을 팔 것이고, 그 곳에 지렁이와 상관 없는 새싹이 뿌리내릴 것이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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