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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통신 >

2015.11.1. 일요일

이준열사 묘적지 풍경 Prologue

“헤이그의 메아리”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울고 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슬퍼서 울고, 북한 동포들은 속으로 울고 갔습니다. 일본 사람들도 이곳에 와서 사죄의 눈물을 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날 만은 인생의 참(眞實)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나 ?!.......... 그리고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영생하는 참 삶의 진리(眞理)를 깨닫고 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 되여 “세상의 참”을 생각했습니다. 나라는 무엇이고, 정의(正義)는 무엇인가? 그리고 평화(平和)는 또 얼마나 소중한가를........ 크게 그리고 깊이 깨닫고 갔습니다. 민족수난기를 살았던 한 위대한 한국인, 이준열사의 참 삶과 큰 죽음을 보고 느낀 많은 사람들의 감동들이 긴 메아리 되어, 아직도 이곳에 와 보지 못한 더 많은 이들의 가슴까지 울러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이상은 지난 11 월 1 일(2015) 이준열사묘적지를 찾아온 160 명의 한국의 해군사관생도들 앞에서 낭독한 이준열사 영전에 올린 필자의 헌시(獻詩)이다.

160 여명의 해군사관생도. 제독. 함장. 장병 등에게 이준열사 묘적지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이기항 원장

사진 좌로부터 함장.송창주관장.장군.김종삼제독 흉상 우측 최종현 대사.이기항 원장.함장


이준은 왜, 이곳에 묻혀야 했나? 그리고 해군사관생도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왔나? 1907 년 7 월 14 일 (일요일), 이준열사는 그의 숙소 Hotel De Jong (현 Yi Jun Peace Museum)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시고, 이틀 후 7 월 16 일 이곳 공동묘지 지하 안치실로 옮겨져 50 일 정도 머무시다가 9 월 5 일 정식 장례식을 거행하고 이 네덜란드 땅에 묻히셨습니다. 1963 년 9 월 26 일 본국정부의 훈령에 의하여 그 당시 불란서 대사 백선엽 장군이 네덜란드 겸임대사의 자격으로 이곳에 와서 이준열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본국으로 모셔갔습니다. 56 년 만에 본국에 돌아간 유해는 10 월 4 일 만 명의 시민들이 모인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한 국민장을 치루고 서울 근교 수유리 국립묘지에 모셔졌습니다. 1962 년 대한민국정부는 열사님의 공훈을 기려 국가 최고훈장인“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1977 년 순국 70 년을 기념하여 헤이그의 묘적지를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56 년 동안 묻혀 진토가 된 이곳을 찾아오는 후예동포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이상은 위 헌시에 연이어 필자가 설명한 묘적지 약사이다.

묘적지에 낙엽을 쓸어 담는 생도들과 최종현 대사

이준열사에 대한 경례

장소를 Rotterdam 으로 옮겨 하루 전 이들이 도착한 모습을 아래에 적어본다.


2015.10.31. 토

역사상 처음 Rotterdam 항구를 방문한 한국의 군함 “광복 70 년과 6.25 한국전쟁 65 주년을 기하여, 한국 해군의 강감찬 함과 대청함 두 함대가 ‘2015 대한민국 해군순항훈련전단으로 지난 8 월 한국을 떠나 전 세계 15 개국 16 개 항구를 순차적으로 방문하는 중, 오늘 네덜란드의 Rotterdam 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중요한 목적은, 첫째 108 년 전 네덜란드에 와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애쓰시다가 순국하신 이준열사의 업적을 공부(이준열사기념관 관장을 강사로 모시고 강감찬 함에서)하고, 그의 묘적지(헤이그)에서 정화작업을 하며, 그를 추모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두 번째 목적은 1950 년 우리나라가 북한의 남침을 당했을 때 UN 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120 여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네덜란드의 생존 노병들을 찾아 감사의 례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상은 144 명의 사관생도들을 포함 도합 630 명의 해군장병들을 인솔하고 이곳에 온 김종삼 단장(제독)이 네덜란드 입항 환영식장에서 최종현 대사의 환영사에 이은 답사의 요지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군함이 Rotterdam 항을 방문했다(위, 강감찬 함)

송창주 관장이 함상에서 ‘1907 년 헤이그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이준열사’ 제목으로 75 분 동안 강의했다.

4,500 톤의 최신예 강감참함을 둘러보면서, 조선강국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이 함대와 함께 이곳에 온 해군사관생도 144 명의 늠름한 모습을 보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감격 뒤에 아마 필자만이 알지도 모르는 108 년 전, 바로 이 Rotterdam 에서 벌어졌던 고사(古事)가 기억에 떠올라 마음이 우울해졌다. 왜 일까?

이야기를 1907 년 즉 108 년 전으로 옮겨본다. “오늘 아침 일본 군함(쯔꾸바함과 몬바우스함)의 사령관 고로이준 (부)제독 및 그의 부관들이 로테르담에 있는 에이드 용 일본 영사의 손님으로 로테르담 항구를 방문했다. 일본인들은 도시의 서부지역을 돌아본 후 10 시 30 분에 유람선 “W.


F. 르망”호에 승선하여 도시국장, 항만청장, 근위대장 및 장교들, 로 테르담 기병대장 등의 영접을 받았다.”

이상은 1907 년 7 월 9 일자 “일본의 함대” 와 7 월 13 일자 “Rotterdam 의 일본 함대”이란 제목의 네덜란드 신문 Telegraaf 기사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7 월 14 일 우리의 이준열사는 헤이그 그의 숙소 Hotel De Jong(현 이준열사기념관)에서 쓸쓸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위 108 년 전 일본의 위용(偉容)과 조국의 슬픈 역사 그리고 오늘의 영광 대한민국을 동시에 상념(想念)하는 필자의 감회는 말로 표할 수가 없었다.

<사진> 위 두 척은 1907 년(108 년 전) 일본 군함. 바로 이 Rotterdam 항구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이다.

일본은 사방(四方) 물로 둘러 쌓여있는 해양국이면서도, 서양에 비하여 해양(海洋) 진물에 뒤쳐져 1854 년 미국 페리 제독(C. Perry)이 이끌고 온 포함의 위력에 의하여 강제로 개항(開港)을 하게 되는 수치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을 통하여 내정을 안정시킨 후 그 기세로 1876 년 (그들이 미국한테 당한) 그들의 ‘운양호’를 이끌고 한국에 다가와 강제로 소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세계 최대 해운국(海運國)인 영국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최신 함정들을 도입하는 등 계속 해군력을 증강하다가, 드디어 세계에 과시하기 위하여 자국의 함선을 평화회의(平和會義) 기간을 이용하여 네덜란드에까지 파견하는 위세(威勢)를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때의 이준열사는 헤이그에서 원통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지막으로 이준열사기념관을 방문했다.


이준열사기념관 Yi Jun Peace Museum 이 집은, 이준열사(李儁烈士)가 1907 년 7 월 14 일 순국하신 역사의 현장입니다. 열사께서는 그 당시 헤이그에서 개최 중인 제 2 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 종 두 분과 함께 한국대표로 이곳에 오셨습니다. 세 분은 당시 ‘Hotel De Jong’ 이던 이 집에 머무시면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려고 애쓰셨으나,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냉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의분을 못 이기신 이준열사께서는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란 호소문을 발표하고, 이 집에서 홀연히 순국하시니 2000 만 동포의 가슴에 한을 남기고 항일 독립운동에 불을 당겼습니다.

우리는 유럽에 하나밖에 없는 항일독립운동유적지(抗日獨立運動遺蹟地)인 이 집 에 이준열사기념관 Yi Jun Peace Museum 을 1995 년 8 월 5 일 개관하였습니다. 이 기념관의 설립목적은, 이준 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릴 뿐만 아니라, 민족후대와 더 나아가서 세계인들을 위한 정의(正義)와 평화(平和) 사랑정신을 함양하는 교 육장(敎育場)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상은 기념관에 대한 설명이다.

끝으로, 헤이그 중심가에 있는 유럽 유일의 독립선열기념관인 동시에 네덜란드 속 한국문화영토(韓國文化領土)인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 을 관람한 해군사관생도들 일부가 기념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Epilogue

역사의 발자취는 지울 수 없다. <역사를 사랑하자> 만약에 지난 세기 초, 이준열사와 같은 독립선열들의 결사투쟁이 없었다면, 설사 1945 년 일본이 2 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였어도, 자동적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겠는가?!........ *대전 후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1943)과 포츠탐 선언(1945)은 1907 년 헤이그에서의 독립운동과 1919 년 3.1 운동 등 한국의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만약에 1948 년 세계적인 안목과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진 특출한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면 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났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의 끈질긴 도전을 뿌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은 과연 탄생했겠는가?!......... 만약에 1950 년 6.25 한국전쟁 시 미국을 비롯한 UN 21 개국의 지원(전투지원 16 개국, 의료지원 5 개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강력한 정치지도자와 세계를 누빈 “Made in Korea” 의 Sales 엘리트들의 억척같은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세계경제 10 대 강국으로 부상한 오늘의 부강한 대한민국은 있었겠는가?!....... 역사는 가정이 아닌 필연의 산물이라면, 위에서 열거한 독립선열. 건국의 주역. UN. 그리고 세계가 우러러 보는 경제 강국 대한민국을 건설한 유공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에 수반하는 합당한 예우는 후예동포들의 도리이며 이를 또한 후세에 올바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오늘을 사는 지식 및 지도층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역사 바로 세우기.. 라는 이름 아래 오늘의 영광스런 대한민국을 있게 한 우리의 선대(先代)들의 공적을 부정 내지 증오하는 모습을 보면서 탄식을 해오다가 이번 이준열사묘적지를 찾아와서 친히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祖國의 사관생도들의 때 묻지 않은 역사사랑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크게 감명을 받고 동시에 조국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았다.

2015 년 11 월 11 일, 이기항.송창주 헤이그, 사단법인 이준아카데미.이준열사기념관

헤이그통신  

이준열사 묘적지를 찾아온 160명의 한국의 해군사관생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