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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연의 선택 '나는 나를 경영한다' 지은이 : 백지연 출판사 : 다우 봉사자 : 김도형 그날, 하늘도 눈부시게 푸르렀다! 2000 년 2 월 2 일 10:10am 서울지방법원 민사합의 25 부 백지연 승소! 서울지법 민사합의 25 부는 2 일 "루머와 관련한 인터뷰를 동의 없이 보도해 명예를 훼손 당했다"며 MBC 전 앵커 백지연 씨가 '스포츠투데이'와 C 모 기자 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백씨에게 쪄 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공인이라도 사생활을 보호받을 정당한 이유가 있는 만 큼 이를 보도하려면 본인의 명시적 혹은 묵시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며 PC 통신 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있는 소문성의 내용을 언론사가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해명의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보도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2000.2.3. 중앙일보/조선일보/한국일보 등의 보도 중에서 이겼다. 악몽의 먹구름이 마침내 물러나고 있었다. 소문의 누명을 벗은 데 이 어 언론사와의 소송 중에 빚어진 누명도 벗게 된 것이다. 서울지법은 진실을 밝 혀냈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다. 한번 눈물이 터지면 쓰러질까 봐서 그 동안 마음껏 흘려보지도 못했던 눈물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지막한 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난 7 개월의 고통스런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머리와 가슴속에 많은 생각과 감정이 뒤엉킨다. 진실이 통한다면 당연히 승리해야 하는 재판이었다. 진실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가 너무나 고마웠다. 이유도 없이 당해야 했던 소문 의 악몽과 힘든 소송 과정을 겪으면서 쌓였던 분노와 원망, 아픔, 연민, 해방감 등 그 모든 감정이 녹아나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옆에 있던 아들이 엄 마의 눈물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내 얼굴을 감싸쥐며 묻는다. "엄마! 왜? 왜 우는데?" "응, 엄마가... 기뻐서 우는 거야, 엄마 축하해줘야 해."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살짝 미소지으며 깜찍한 입맞춤을 해준다. "엄마, 축하해!" 아이를 꼬옥 껴안는다. 이 아이를 아픔 없이 품에 안아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오랫동안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피곤과 긴장이 일순 녹아 내린다. 아이를 내려놓자 전화가 쏟아진다. 신문, 방송, 통신 등을 통해 나의 승소 소 식을 들은 지인들의 축하 전화였다. 고통이 시작될 때부터 나와 함께 하며, 기 도해주고 일으켜주던 분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지연씨 축하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울먹였다. 함께 고통을 나눈 사람만이 흘릴 수 있 는 눈물이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는 그 말에 나 역시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어이, 백지연 씨! 승소 소식이 통신에 떴더군. 축하해. 그런데 말야. 뭔 여자 가 그렇게 힘이 세. 언론사를 상대로 혼자 싸워 이기다니, 허허. 하여튼 좋은 일 이야. 뉴스거리를 또 만들었군. 거 말야, 우리도 언론사라서 신문사가 소송 에 졌다는 기사를 쓰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기사 가치가 있어서 오늘 보도하기 로 했어요. 다시 한 번 축하해요. 내, 밥이나 한끼 사지. 이제 몸보신해야 다시 일할 것 아니야." 한 언론사 국장님의 전화였다.


"아직 완전한 축하는 이르죠. 그러나 축하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기쁜 마 음으로 점심 약속 기다리겠습니다." 어느새 내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낭랑하게 올라가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인 가? "축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그리고 내 얼굴에 구름 없는 환한 웃음이 다 시 떠오른 것이. 1 심에서 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기쁜 건 그들의 패배가 기쁘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진실을 쥔 사람이 이긴다는 당연한 사실을 입증한 것이 기 뻤다. 이 날 판결을 내린 재판장은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소문 같은 명예훼손의 위험이 있는 내용을 보도하려면 당사자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동의를 받아 야 한다"며 C 기자와 신문사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인터뷰는 물론 나의 묵시적 인 동의조차 없이 PC 통신에 오른 소문을 기사화한 사실과, 내가 기사화를 용인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소송이 시작될 때 기자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뭘 믿고 소송을 내느냐고요? 진실을 믿죠. 내가 말했었죠? 진실을 쥐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승리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세요." 내가 소송을 제기하자, '스포츠투데이' 지에는 나에 대한 참으로 많은 기사 가 실렸다. 좋은 내용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아니, 못했다. 우선 나는 그들처럼 마음대로 이용할 지면이 없었다. 싸움의 조건상 나 는 약자였다. 무기 없이 싸우는 것은 억울하고 힘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진실이 살아 있다면 결국 이렇게 밝혀지리라 믿었기 때문이 다. "지켜보라"고 한 내 말은 힘겨운 투쟁의 과정을 겪긴 했지만, 결국 이루어 졌다. 패소한 그들은 항소했다. 그러나 일단 법의 판결이 내려지자 내 분노의 감정 은 측은함으로 바뀌었다. 그 동안의 싸움은 기자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싸움 이 아니었다. 거짓이 통하는, 거짓이 진실보다 힘을 얻는 세상과의 싸움이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이었다. 한낱 쓰레기 같은 소문이 힘을 얻게 하고 전국민의 입에 마치 진실처럼 회자 되게 하는 데는 일부 언론의 상업주의, 이 사회에 만연한 불신 풍조, 남의 험담 좋아하는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그 근본에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과 왜곡, 약자에 대한 하이에나 속성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 모든 것과 의 싸움이 무척 힘겨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고통을 딛고 일어나려 고 노력했고 결국 싸움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2000 년 2 월 2 일, 그날 하늘은 맑았다. 며칠 동안의 강추위가 잠시 물러나고 청명하고 맑은 공기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며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어온다 푸른 하 늘을 푸르게 볼 수 있는 것, 이 또한 대체 얼마 만인가 사건의 시작은 코미디였다 1999 년 7 월 11 일은 다른 날과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요일이었다. 1999 년 초 프리랜서를 선언한 이래 방송과 CF, 강의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중이었다. 그날은 매스컴 개론을 들은 130 명 학생들의 성적을 재점검하 느라 밤을 새우고 제법 늦잠을 잔 다음, 교회에 갈 준비를 하며 모처럼의 여유 를 즐기고 있었다. 잠시 후 평온한 내 일상을 송두리째 깨뜨릴 전화가 오리라고 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화는 잘 아는 후배로부터 왔다. "선배, 통신 보셨어요?" "아니, 나 조금 전에 일어났어. 왜... 뭐 났어?" "아휴, 기가 막혀 어떤 작자인지 말로 옮기기도 민망하네요."


후배의 음성은 왠지 불길했다. 대체 뭐가 났기에 이러는 걸까? 커피잔을 쥔 내 손이 약간 떨렸다. 얼른 전화를 끓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컴퓨터의 통 신 접속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백야'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 기하고 그 자세한 내용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누가 이따위 소문을 믿을까 싶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글을 올린 사람의 이름은 배부전이었고, 글의 내용은 내 이혼 사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배부전? 뭐 하는 사람이지? 미주통일신문? 보면 볼수록 황당하고 어이없는 내용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는 없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라도 전화를 걸어 조치를 부탁해야 할지, 아니 면 법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할지 알아보아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일요일 이었다. 아무런 공식적인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 우선 평소 알고 지내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을 했다. 그의 대답은 간 단했다. "웬 정신 나간 사람이군요. 내일 날 밝는 대로 조치를 취하시죠." 그와 통화를 하고 나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어 머리가 휑했 다. 아침부터 때아닌 소란을 떠느라 늦긴 했지만 그래도 교회에 갔다. 교회에 오니 조금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를 냉정히 생각해보아야 했다. 당장 고소한다면, 그런 가십만을 쫓아 다니는 언론 매체가 어떤 식으로든지 기사화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모든 언론 의 추종 보도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문의 확대 재생산만 부를 것이다. 배부전의 행위는 괘씸했지만 그렇다고 고소로 맞대응 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닌 듯했다. 통신 공간이라는 곳이 익명성이 있다 보니 사실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때로 는 당사자에 대한 배려나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은 글이나 정보가 오르는 일이 종종 있다. 대응할 필요조차 못 느낄 만큼 무책임한 글도 많이 오르지 않던가. 그러므로 고소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스포츠투데이' 지의 C 기자였다. 그 기자는 이전에도 나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고 전화도 자주 거는 편이었다 내가 MBC 를 그만두었을 때는 '백지연 앵커 프리 시대 첫 주인공 될 까(1999. 3. 17)' 라는 제목으로, 프리랜서로서 첫 프로그램인 백야를 맡게 되었 을 때는 토크쇼 기획(1999. 4. 17)에서부터 백야라는 이름을 짓는 것, 그리고 타 이틀 촬영, 첫 초대 손님(1999. 5. 7) 등에 대해 기사를 썼다 심지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셈 영 리더스 포럼(ASEM Young leader's Forum)' 등 국제회의에 참 가했을 때(1979 7. 21)까지 릴레이식 기사를 썼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나 와 의 인터뷰 없이 쓰여졌다 해도 나쁜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백일 제 작 진 사이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백지연 씨한테 관심이 많아?"라는 질문이 농담처럼 오가기도 했다. 그 기자는 내가 진행하던 백야 프로그램의 회의실로 전화를 걸어오거나 매주 목요일에 있던 백야 녹화 때 분장실로 찾아와 "인터뷰 좀 해주세요. 아니 면 사 진이라도 한 장 찍죠" 하고 요청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거절했고 그러면 그 쪽에선 "뭐가 그렇게 까다로워요 7 백지연 씨는 인터뷰도 싫다.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싫다. 그렇게 까다롭게 구니까 기자들이 싫어하죠. 그러지 말고 인터뷰 좀 하시죠"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요청은 직업상 할 수 있는 요청이었고 나쁜 의도는 아닐 수도 있었겠 지만, 어쨌든 나는 몇 개월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 한 번도 응하지 않았고 간단 한 사진 한 장 찍어두자는 것도 계속 거절했다. 그래서 '스포츠투데이'는 나에 대한 기사를 자주 썼는데도 자사에서 직접 촬영한 내 사진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문제가 된 7 월 17 일 기사의 사진 역시, 내 사진을 1 면 전면에 대대적으로


실으면서도 자료 사진을 썼다. 내가 그들과 인터뷰를 했다면 직접 촬영한 사진 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난 그 기자의 인터뷰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여성지의 인터뷰도 가능한 한 사양해왔다. 특별한 까닭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고 여기저기 나서는 것은 언 제 나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에는 이혼, MBC 사표, 프리랜서 선언, 앵커의 첫 ☞출연, 한양대 겸임교수 출강 등으로 인터뷰 요청이 많았는데 어떤 명목으로 인터뷰를 한다 해도 자칫 흥미 위주(특히 이혼과 관련한)의 호기 심 충족 용 질문에 치우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더욱 사양하고 있었다. 몇 년 전 한 여성지의 인터뷰 요청에 일과 삶에 대해 두 시간여 동안 진지한 답변을 해주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그 얘기는 뒤 쪽 말미에 살짝 나왔다. 인터뷰 도중에 기자가 "그래도 사랑이 빠지면 섭섭하잖 아요" 하길래 "사랑이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으면 행운이죠"라고 한마디했 는데, 며칠 후 나온 그 여성지 광고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매달 말이면 온 일간지의 하단을 가득 채우는 여성지 광고에는 이런 제목이 있었다. (백지연 사랑고백) "???" 매달 나오는 이런 광고들을 보면 풀 스토리 '단독'공개, '최초'심경 고백이 여 기저기에 왜 그렇게 많은지... 지난해 소문의 와중에 시달리던 몇 달 동안 일간지마다 여성지 광고가 등장 하는 매달 말 즈음이면 나는 신문을 펴들기조차 겁이 났다 일일이 나열하고 싶 지 않은 '대단한' 제목들이 내 이름을 걸고 사람들의 호기심만 원초적으로 자극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아무리 정중하게 인터뷰를 거절해도 일단 거절당하는 사람은 불 쾌함을 느끼는 법. 그런 불쾌함을 주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친절하게 거절하려 애썼다. '저 사람도 직업이 기자인 죄로 나같이 인터뷰를 거절하는 사람 찾아다 니느라 나름대로 고달프겠다'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C 기자는 끈질 긴 사람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도 간혹 전화를 걸어 "백지연 씨, 뉴스거 리 있으면 제게 먼저 좀 알려주세요" 하거나 "좋은 소식 있던데요..." 하며 은근 슬쩍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녀의 부지런함(?) 탓에 나중에는 그녀의 "여 보세요" 하는 목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계속 되는 인터뷰 요청에 대한 내 대답은 늘 '정중한 거절' 이었다. 역시 그날도 그 기자가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PC 통신의 글을 보셨나요?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보았습니다. 워낙 저질스런 내용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라고 간략히 대답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그녀가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 다. 소문의 글을 보고 기자가 계속 전화를 한다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배씨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고소 안 하시나요?" 말도 안 되는 글 때문에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데 이런 질문까지 받아 야 하다니!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소문을 창조한다? 처음 PC 통신에 오른 글을 보았을 때는 너무나 황당해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 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보니 우선 은 그냥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겠다 싶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 의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C 통신과 인터넷의 영향력이 ���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1997 년 7 월 당시, 공중 파 방송이나 제도권 신문의 파급 효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공 식 대응을 하게 되면 소문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제도권 언론까지 기사화하


게 되고 또 다른 보도들이 뒤따라,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갈 게 뻔했다. 그리고 일단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해명조차 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다. 특히 소문이란 게 불특정 다수를 대상 으로 하기 때문에 이미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간 다음에 진실을 밝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듣는 사람이 "설마..." 하더라도 "아니 땐 굴뚝에 연 기 나는 것 봤어?"하는 말 한마디에 금방 진실로 둔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가. 그래서 나는 PC 통신의 헛소문이 제도권 언론에 기사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 각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배씨를 고소하고 싶었지만, 배씨의 글에 관심을 보 이는 기자의 전화를 받은 후에는 고소만이 능사는 아니겠다는 판단이 오히려 굳어졌다. 일단 변호사를 통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연락을 했다. 배씨가 헛소문을 통 신에 올려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니 삭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배씨가 똑같은 글을 다시 올릴 때는 제재할 수단이 없 었던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사회정의 구현 차원에서 글을 올린다'라고 '선포' 하는 글까지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배부전의 정체라도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배씨에 대한 신원 파악은 쉽지 않았다. ID 의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 연락 처 등등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미주통일신문의 발행인으 로 명명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전에 통신에 올렸던 글들을 검색해보니 다 음과 같은 내용 일색이었다. 신상옥. 최은희는 김정일과 합의하에 북한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 리기 위한 작전으로 위장 탈출했고 내(배부전 본인을 말함)가 그 사실을 그들의 책을 읽다가 7 시간만에 분석해내 LA 에서 파견 나온 안기부 요원에게 제보했더 니 그도 동의했고 이로 인해 미국 정보요원이 나에게 달려오고 헬기가 우리 하 숙집 위에 떴다 '로태우 일당 이 미국에 와서 내가 반공 신문을 한다는 이유로 '미주통일신문 '을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 사인을 백지화시키려고 내가 입주한 빌 딩 주인을 매수하여 신문사를 파산시키고... 내가 권총 휴대 허가 신청을 LA 경 찰에 했더니 내가 무서운 신문사의 발행인임을 알아보고 LA 경찰이 공청회에 불렀고, 거기 나가서 북한 테러리스트의 상황을 브리핑하니 시의회 심사위원들 이 놀라고... 나 때문에 미국에 빨갱이가 침투하지 못했고 나는 평소 미국 첩보 요원들과 만 났고, 김일성이 위독해서 주치의가 치료하려고 헬기를 탔을 때 김정일이 그 헬기를 폭파시켜 결국 김일성이 죽은 것이고 북한에서 나를 비난하는 방송이 쏟아지며, 국가에서 내게 지원하는 자금을 안기부에서 착복했고, 신문을 100 만 부씩 발행하고 있고... 그의 게시물을 본 나는 배씨를 고소할까 말까를 놓고 고민했던 나 자신이 오 히려 우스워졌다. 정상적인 사고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부전이 나에 대한 소 문을 올린 글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전에 올린 게시물의 수준으로 보아 '또 이상한소리 하는군' 하고 웃어넘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런 내 생각은 빗나갔다 '사실'보다 힘센 소문 배부전에 대한 1 차 조사를 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고소를 재고해야 한 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고소했다가는 괜히 언론에 가십의 빌미만 제공하 고 별것 아닌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 일만 확대시키는 꼴 이 될 수 있었다 언론 에서 내 허락 없이 소문을 기사화하면 명예훼손이 되지 만 일단 내가 배씨를 고소하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모든 언론은 내가 고소했다는 사실(fact)을 보도하면서 소문 의 악의적인 내용 또한 전문 그대로 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소 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의 명예만 실추될 것이 분명 했다(실제로 제도권 언론에서 처음으로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간 다음 내 가 배부전을 고소하자 여러 언론들이 고소 사실을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했던 대로 소문의 내용이 더 부각되었다. 거의 모든 여성지들이 몇 달 동안 내 얘기로 소문잔치를 했고 심지어 KBS 9 시뉴스에까지 소문의 내용이 아 주 상세히 보도되었다). 당시로서는 소문의 확대 재생산을 막기 위해 어떤 언론도 그 내용을 쓰지 않 게 하는 것이 우선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PC 통신에 오른 글의 조회 건수는 평균 몇백 건, 수십 만의 독자들이 읽는 일간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배씨는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고소 당한 후 국외로 도주할 경우 기 소 중지가 될 가능성이 컸다. 또한 배씨는 거주지 불명에 주민등록번호, 본명 등도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장을 작성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 선 배부전의 신원을 파악해 만약의 경우 고소할 준비를 갖추되 당분간은 고소 를 보류하자는 쪽으로 잠정적 인 결론을 내렸다. 배씨의 글이 PC 통신에 뜬 다음 정작 신경 쓰이는 사람은 배씨보다 C 기자였 다. 그녀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서 '배씨를 고소할 준비를 하셨나요? 왜 안 하시죠?", "모 일간지 가판에 작은 기사가 났던데 보셨나요?" 등등의 질문을 던 지며 대화를 시도했다. '스포츠투데이'와 인터뷰를 하면 소문이 불식될 것이라며 계속 인터뷰 요청을 했다. 이전부터 나에 대한동정기사를 많이 써서 그녀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다 기사화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해야 했기에 일단 전화를 받기는 했다. 제도권 언론에 소문이 기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기자들의 생리상, 이런 경우 전화를 매몰차게 끊어버리면 기자들이 오히려 나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었다. 나는 기자가물을 엎질러버리기 전에 "절대로 물을 쏟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계속되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였 다. "절대로 기사화하면 안 됩니다. 아이까지 관련된 일입니다. 이게 인터뷰할 내 용입니까? 의혹이 해소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은 고맙습니다만 통신에 오른 저 질스런 소문을 기사화하지 않는 것이 저를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PC 통신의 글이 제도권 언론에까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기사화하면 안 되는 이유를 최선을 다해 설명했고, 특히 아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로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정도로 인간적인 호소를 하면 당연히 기사화하 지 않으리라 믿었다. '백지연 모함, 사이버 테러' 그러나 7 월 17 일 아침, 전날 밤을 새우고 새벽 기도를 다녀와서야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오전 10 시쯤 걸려온 기자의 전화에 화들짝 깨어 일어났다. 전화를 받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느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기자는기사화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기사를 쓰다니요? 인터뷰도 안 했는데 뭘 갖고 쓰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소문이 신문에 나가면 왜 안 되는지 설명한 것 외에 무슨 내용 이 있나요. 흥분과 당혹감으로 나는 30 여 분이나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그 때문에 그 날 오후 녹화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목이 다 잠겨버렸다. 나는 "소문은 사 실이 아니다, 신문에 나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퍼 져나갈 것이다, 게다가 이


것은 아이가 걸린 문제다. 아이가 성장한 후 신문에 남은 기록을 어떻게 할 것 이냐?"라고 거듭 말했다. 절대로 기사를 쓰면 안 된다고 차근차근 설명하기도 하고 만약 기사를 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강경한 경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 자 그녀는 "오늘 백야 녹화가 있으시죠? 몇 시인가요? 그러면 오후 4 시쯤 MBC 로 찾아가 뵐게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은 밤 9 시 넘어서 녹화가 있었다. 그러나 PC 통신의 글을 기사화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대로 주저앉을 듯 힘이 빠졌다. 하지만 예정 된 녹화에 차질을 빛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경고하고 기본적인 양심에 호소한 이상 적어도 오늘은 기사화하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특히 나는 회사 로 찾아오겠다는 그녀의 말을, 적어도 오늘은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 들였다(순진했던 건지, 바보 같았던 건지...). 우선은 녹화를 마치고 나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녹화를 하기 위해 미용실에 간 시각이 오후 2 시쯤. 평소와 다름없이 의자에 앉았는데 잘 아는 미용사가 내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언니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다는데 뭐예요?" '기사' 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라고요? 무슨 기사?" "방금 내 동생하고 전화 통화를 했는데 그 애 하는 말이 가판대에 언니 사진 이 대문짝 만하게 났대요." 스포츠 신문의 가판이 정오에 나온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독자들 은 내일자 스포츠 신문을 오늘 정오에 가판대에서 미리 사보는 것이다). 가판대 에서 스포츠 신문을 사본 적이 없었던 나는 전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보통 일간지는 3~4 시에 마감을 하고 가판에는 오후 7~8 시를 넘어야 나온다. 그 래서 그녀가 오후 4 시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난 적어도 그날은 기사를 쓰지 않 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용실 직원에게 신문을 사오도록 부탁했다. 충격으로 쓰러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그때 알았다. 정말 실신할 것 같았다. 신문 1 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활 자의 내 이름 석 자와 커다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사진과 이름, 제목이 신문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미터 거리에서도 충분히 보이고 남을 만한 크 기였다. 제목은 '백지연 모함, 사이버 테러.' 그들은 나중에 내가 '명예훼손'으로 제소하자 '스포츠투데이' 지면을 통해 이 렇게 주장했다. "우린 백지연을 변호하려 했다. 그런데 제소하다니 적반하장이 다(1999. 7, 22)." 지금도 난 묻고 싶다. 난 그들에게 변호해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는 "돕고 싶다면 기사화하지 않는 것이 돕는 것입니다"라 고 명확히, 거듭 이야기했다. 과연 이 기사가 나를 도와주는 기사였는가? 추운 겨울, 심장마비 환자를 찬물 속에 밀어 넣고 "더우신 것 같아서 시원하게 해 드 리려고요..." 하는 격이 아닌가? 나를 변호하려 했다는 그들의 주장이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그 기사 속에 소 문의 치명적인 내용이나 나의 실명, 사진은 담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 가? 그것도 1 면 전면을 할애해서? 배부전도 내 실명을 쓰지는 않았다. 나는 끔찍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나와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아들이 생지옥 으로 끌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 이후, 차라리 숨이 넘어가 버리는 게 나을 듯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분노 속에서 얼어붙다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간 1999 년 7 월 15 일 목요일은 백야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녹화 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프로그램 회의 실로 들어섰다. PD 와 작가들은 내 표정을 살피느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책상 위에 '스포츠투데이'가 놓여 있었다. 담당 PD 는 내 충격을 짐작한 듯 녹화를 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오늘 녹화 펑크 나는 것 아닌가? 백지연 씨 할 수 있겠어요?" "해야지요, 일은 일이잖아요." 의외의 내 대답에 용기가 생겼는지 PD 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말야. 난리야, 난리. 기자들이 MBC 제작국, 회의실, 간부 사무실에까 지 들이닥치고 전화하고..."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가자 내가 갖고 있는 휴대전화 두 개에도 들 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집 전화통에도 불이 났었다고 한다. 굳이 받지 않아도 무슨 전화인지 알 수 있었다. 방송국 회의실과 녹화장 주변에 이미 기자 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간단히 밟아서 끌 수 있는 불씨가 온집안을 태워버릴 기세로 활활 타오르는 것이 눈앞에 보였다. 불길은 나를 집어삼킬 듯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장을 하는 둥 마는 둥 하 고 가까스로 녹화장에 갔다. PD 의 말대로 기자들이 녹화장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다 PD 는 기자들에게 녹화하는 동안만이라도 스튜디오밖에 나가 있어 달라 고 부탁했지만 몇몇 기자들은 녹화장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토크쇼를 진행하 며 가끔 방청석을 쳐다보면 거기에 앉아 있는 기자들이 눈에 들어와 생각의 맥 이 끊기곤 했다. 밝은 표정으로 진행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차마 웃을 수 가 없었다. 녹화는 세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안간힘을 쓰며 녹화를 하긴 했지만 자주 정신이 아득해졌다. 방청석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기자 들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터질 듯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1999 년 7 월 15 일, 한여름 더위 속에 스튜디오의 조명은 MC 인 내 얼굴 위로 뜨겁게 쏟아지 고 있었지만 내 가슴속은 차가운 분노로 얼어붙고 있었다. 마음은 지옥... 그러나 웃어야 했다 한편 7 월 17 일 기사가 나간 후 백야 회의실에서는 대본회의 대신에 대책 회의 가 열렸다. 기자들이 몰려와 있으니 MC 가 어떤 경로로 스튜디오까지 들어 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방송국에 들어가야 분장도 하고 리허 설도 하는데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방송국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건지... 기가 막혔다. 오후 6 시 10 분경 C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의실이 있는 건물 로비에 와 있 다는 것이었다. 기사를 본 내가 전화를 걸어 격분해 항의하며 아침판에라도 빼 라고 하자 찾아온 것이다. 나에 대한 기사 때문에 대본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차에 그 전화가 오자 PD 는 회의실로 올라오게 해서 자초지종을 들어보자 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이 폭발한 내 모습을 PD 나 작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인 문제로 공적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뒷말을 듣는 것도 염 려되었다. 그래서 나 혼자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스스로에 게 주문을 외듯 다짐���다.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다 잡느라 굳게 팔짱을 낀 두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어깨까지 아파왔다. 엘리베이 터 문이 열렸고 순간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누르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겨우 첫마디를 뱉어냈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내 목소리는 오히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PD 는 로비로 내려가는 나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 지 말아요. 물은 이미 엎질러졌어 우선 화를 가다듬고 사태를 최소화할 수 있도 록 해봐요. 그나마 아침 신문에라도 뺄 수 없을까?" 그 PD 는 나중에 법정에 서 직접 증인으로 서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나와 내 아이는 그 기사가 쏟아낸 물살에 휩쓸려 익사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내


도, 소리쳐 항의를 하고 욕을 쏟아낸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다 이미 몇 만 명, 몇십 만 명이 그 기사를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껏 소리라도 지르고 주저앉아 엉엉 울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 관념과 일을 악화시키지 말아달 라던 PD 의 말, 이 상황에서 방송까지 펑크냈다가는 불필요한 오해까지 살지 모 른다는 압박감에 짓눌려 나는 차가운 분노만 가장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때 감정이 허락하는 대로, 뺨이라도 한 대 후려치 고 마음 내키는 만큼 화를 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적어도 제)자가 보기에는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속은 지옥이었는데도 말이 다. 오히려 미련한 참을성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송사는 가급적 피하라는 것이 인생을 더 사신 어른들의 말씀이다. 지난여름 나는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을 치르면서 내가 감당한 소송은 네 가지였다. 소송은 정말 힘들었다. 소문과 싸우는 일도 괴로웠고, 죄 없이 받아야하는 의혹의 눈초리도 끔찍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마음대로 말하는 사람들과 언론의 행태를 참아내는 것만으로도 극기시험을 치 르는 것처럼 견디기가 버거웠다. 내가 소송을 시작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말렸다. "3 일 이상 가 는 남의 말 없다", "우리가 너를 아는데 무슨 상관이니?" 하며 내가 더 큰 상처 를 입을까 걱정하며 말리고 나선 것이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들의 우려를 모르 는 바 아니었고 특히 마음 약한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는 것은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절대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 괴소문이 내게는 생명과 도 같은 아이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소송은 물러설 수 없는 나의 선택이었 다. 네 건이나 걸려 있는 소송은 내 일상 생활과 사고까지 마비시키기에 충분했 다. 더욱이 나는 해오던 일도 계속해야 했다. 내 이름을 건 프로그램인 백야를 진행해야 했고, 약속했던 대학 강의도 계속해야 했으며 아이도 돌보아야 했다. 사는 게 완전히 지옥이었다. 내 용량의 한계치까지 물이 차 올라 넘쳐나 기 일 보 직전이었다. 일단 신문에 기사가 나간 이상 "사실이 아니니까 저의 결백을 믿어주세요" 하 는 식의 태도는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봐야 오히려 세간의 의혹만 부추기 고 혐의(?)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서상 배부전을 먼저 고소해야 했다. 형사 고소였다. '배부전'이라는 유령을 찾아서 우여곡절 끝에 우선 검찰청에 배부전에 대한 형사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그 다음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형사 고소를 하면 다른 일간지에서도 기사를 쓸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시민권자인 배부전이 고소된 사실을 알고 해 외로 나가버릴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출국 금지 신청이 이뤄지도록 추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려면 먼저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명예훼손의 경우는 처벌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소문이 사실일 경 우, 다 른 하나는 소문이 허위일 경우이다. 소문이 사실일 경우는 명예훼손이 인정되더 라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에 그치지만 소문이 허위일 경우에는 처벌이 무거워지 고 인신 구속도 가능하다. 더구나 배부전이 PC 통신에 올린 글은 아주 악의적인 내용이었다. 따라서 소문이 허위라는 것이 입증되면 구속이나 출국 금지도 가능 했다. 형사 고소를 접수시키면 먼저 고소인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루어진다는 사 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러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소문


의 허위 여부에 대해서는 검찰이 자체 조사할 부분이었다. 전 남편에 대한 조사 등을 통해 소문이 허위라는 것을 파악한 검찰은 곧바로 배부전의 소재지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난항이었다. 그의 신상 정보가 제대로 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사는 그의 주민등록번호부터 조회해보았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로도 그를 찾아낼 수 없었고 통신 ID 등록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주소나 소재지 모두 허위였다. 검사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부전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 사람은 미국 시민권자인 듯했습니다 만에 하나 출국해버린다면 기소중 지가 될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는 소문이 허위라는 사실을 밝 힐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평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합니다. 유일한 연락 처인 그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도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계속 절박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더구나 내일부터 연휴입니다(내가 고소장을 접수시킨 것은 7 월 16 일. 그 다 음 날인 7 월 17 일은 제헌절이었고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이틀을 그냥 기 다릴 수밖에 없는데 그 사이에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기사라도 나고, 그 기사 를 본 배부전이 혹시라도 출국하면 어떡합니까?' 내 말이 타당하게 들렸는지 검사는 출입국사무소에 의뢰해 최근의 입국자 명 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가명이라 해도 성씨는 그대로 쓰는 것을 고려 해 검사는 최근 입국자 중에 배' 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 한 명씩 검토했다. 다행히 배씨 성의 입국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검사는 그 중에 한 사람의 이름 을 살폈다. 출발지가 LA 였고 입국 목적을 '취재' 라고 기재해놓고 있었다 여권 상의 이름은 '사이먼 배.' 검사는 그 이름을 주목했다. 얼마 후 출입국사무소에 서 전화가 걸려오는 것 같았다. 입국 서류에 '사이먼 배'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 다는 것이었다. 조회해본 결과 배부전이 다른 사람의 명의로 갖고 다니던 휴대 전화 번호와 일치했다. 그가 틀림없었다. "찾았다!" 검사의 수사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차라리 불쌍한 사람... 배부전에 대한 출국금지가 내려지는 순간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 간, 내 속은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검사의 민첩한 조사가 매우 큰 도움이 되었 다. 그들은 물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내 결백을 입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구세주 같았다. 극적으로 배부전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가 취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배부전이 붙잡히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국외로 나갈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어쩐단 말인가. 검찰 이 알 아서 하긴 하겠지만 워낙 놀란 가슴인지라 혼자 별 걱정을 다 하고 있었다. 더 구나 그의 휴대전화만으로 그의 소재지를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일정 한 사무실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녔기 때문이다(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사무실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글은 동네 PC 방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올린 것이었다). 드디어 연휴가 끝나고 7 월 19 일 아침이 밝았다. 검찰로부터 전 화가 왔다. "검찰청에 한 번 더 나오셔서 몇 가지 서류 보충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배 부전과 통화가 됐습니다. 출두를 통보했고 오후 2 시까지 나오기로 했습니다" 나는 검찰청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범인을 잡아 진실을 밝힐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오후에 녹화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스 케줄이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지만 그 당시 내게는 검찰에 나가는 일이 가장 중 요했다. 검찰청에 나간 나는 출입문을 등지고 검사의 책상 앞에 앉아 보충 질문에 답


변하고 있었다. 그때 등뒤로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순간 검사의 얼 굴을 쳐다보았다. 직감적으로 배부전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뒤 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홈페이지에 그려져 있던 캐리커처가 생각나 바로 '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내 얼굴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안으로 들어서던 그가 놀란 듯 멈추 어 섰다. 내 눈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저, 나가 서 기 다릴까요?"하고 물었다. 내가 노려보자 주춤하며 뒷걸음질치던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라 리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무 기억도 안나요" 소문의 악몽이 시작된 후 반년 넘는 시간 동안 혼자 힘으로 그 모든 일을 처 리하느라 때로는 넘어졌고 좌절했으며 때로는 막연한 적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싶기도 했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나를 검다 해도 나만 희면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접고 본 연의 일을 다시 시작할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소송에 착수한 첫날, 그 기막힌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스포츠투데이' 지의 기 사가 나간 이후 두 번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소송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변호사와 통화를 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배부전에 대한 형사 고소를 바로 접 수시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C 기자에 대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했다. 형사 고소까지 병행하라고 조언하는 변호사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는 않았다. 변호사 사무실에 가면서 수임료를 찾기 위해 은행에 들렀다. 소문의 악몽 때 문에 정신적 괴로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모든 업무가 엉망이 되었다. 변호사 수임료만 해도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은행 창구에 섰는데 비밀 번호가 생각나지를 않았다. 펜을 굴리며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숫자란 숫자는 아예 지워져버린 것 같았다. 은 행 창 구의 직원은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한 일이었다. 남의 통장을 훔쳐온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에겐 충분히 의심스러워 보일 만한 행동이었다. 서둘러 가방을 뒤져 다른 은행의 현금카드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현금카드기 앞으로 갔다. 카드를 집어넣었는데 이게 또 무 슨 장난인가. 그 카드의 비밀번호 역시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바로 엊그 제까지 사용했던 카드이고 통장이었는데도...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번호를 눌러보았다. "비밀번호가 틀렸습 니다" 다시 시도해보았다 역시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하는 소리뿐. 그 소리 는 또 왜 그리 큰 건지.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 보기가 민망해 서둘러 자리를 내주었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아무리 서 있어도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변호사와의 약속 시각에 맞추기엔 이미 늦었다. 그런데도 통장 두 개의 비밀 번호가 까맣게 생각나지 않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 렸단 말인가? 순간 눈물이 솟구쳤다. 내가 왜 이런 사건에 휘말려야 하나? 무 슨 죄를 졌다고 이런 고난을 치르는가? 애매한 사람을 이렇게 처박아도 되는 것인가? 소리내어 실컷 울고 싶었다. 마냥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었다. 끝내 비밀번호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이었는지도 모 른다. 나중에 의사에게 물어보니 극도의 분노와 당혹감, 스트레스로 인해 그 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당 시 내가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기억까지 순간적으로 정지했을까 싶 다. 고통의 몇 개월을 보내며 내 심신이 얼마나 타격을 입었는지... 소문을 만든 사람과 기사를 쓴 사람들, 그들 모두는 결코 보상할 수 없는 것을 내게 서 빼앗 아간 것이다.


악몽의 그 날, 다행히 은행 직원 한 분이 현금카드기 앞에서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나를 알아보고 도와준 덕에 돈을 찾을 수 있었다. 요즘도 현금카드기 앞 에 설 때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입안이 쓰다. "엄마, 고통이 뭐야?" 지난여름을 지나면서 무척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는 아이 앞에서 표정을 관 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표정은 그렇다 치고 마음속까지 아무 일도 없는 양 가 장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엄마의 감정 상태가 아이에게 전이된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마음이 더 쓰였다. 특히 아이는 그 사이 더 자라서 눈치가 빨라져 있 었다. 아이 앞에서는 사건과 관련된 전화를 하는 것도 꺼려졌다. 어느 날인가 변호사와 긴 통화를 하고 난 후였다. 아이가 내게 다가와 물었 다. "엄마, 고통이 뭐야?" "뭐? 으응... 아주 아프고 힘들다는 거야." 겨우 대답은 했지만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아이가 통화 내용을 듣고 있 었던 것이다. "엄마가 왜 고통스러워?" "으응...? 나쁜 사람들 때문에. 그런데 아가, 엄마는 괜찮아 아프지도 않고 아 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마" 하며 아이를 안아주자 아이는 한마디 더 거든다. "엄마 아프게 하면, 나쁜 사람들 내가 다 혼내줄 거야!"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이런 말까지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하 는 생각에 무심결에 아이 앞에서 통화를 했던 것인데, 그 말을 아이가 다 알아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알게 하 고 싶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방문 을 걸어 잠가야 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 내내 아이 앞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로 있어 야 했다. 내 감정을 아이에게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제야 마음의 긴장을 풀어 놓을 수 있었고 눈을 편하게 뜰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엉엉 울곤 했다. 나는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도대체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도 억울합니다. 하 나님은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제발 이 아이만은 상처받지 않게,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시고 영혼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온전히 보호해주옵소서."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새벽 날개 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 편중에서 밤이면 밤마다 하루 내내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내 흐느낌 에 잠을 깬 듯 문밖에서 어머니의 인기척이 느껴질 때면 나는 서둘러 울음을 삼켰다. 어머니는 문밖에 서서 문을 열까 말까 많이도 망설였을 것이다 어머니 와 딸이. 얼마나 많은 밤을 그렇게 지샜는지... 과연 이 세상의 그 누가 알았겠 는가? 하루에 한 번씩 죽음을 연습했다 내 이혼 사유에 대한 해괴망측한 소문이 제도권 언론에선 처음으로 '스포츠 투데이'에 다루어졌을 때 난 온몸이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눈앞이 캄캄해지면 서 숨이 멈출 것 같았다. '하나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아가야, 이 일을 어쩌니...'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다시 깨어나지 않았으면... 침도 넘어가지 않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심호흡을 했다. 터져 나오려는 절규를 꾹꾹 누르느라 목이 다 아파왔다. '아니에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구요. 제발, 제발 내 아이한테만은 이러지 말 아주세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한참 뒤에야 겨우 일어섰다. "자식이 죽었는데 도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요"라며 울던 어느 엄마처럼 찢어진 가슴을 안고 일터 로 나갔다. 녹화장엔 '스포츠투데이'의 기사를 본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있었다. 녹 화내내 빚쟁이처럼 지켜보던 그들은 내가 녹화를 끝내고 인터뷰를 거부한 채 로비로 걸어나가자 앞뒤로 따라오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중죄를 짓고 검찰에 조 사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카메라기자들이 쫓아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제발 이러지들 마세요. 전 피의자도 피고인도 아닙니다." 북새통을 뚫고 차에 오른 나는 풀 무더기처럼 쓰러졌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어찌 할지 몰라서 나는 머리를 싸안고 소리내 울었다. 나와 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극심한 무기력증과 고통 속에서 쓰러졌다. 허수아비 같 았다. 속은 새까맣게 타 없어지고 겉은 무표정하게 걸어다니는... 그 와중에서도 절대로 놓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내 아이와 진실이었다. 나는 그 끈만 은 놓을 수 없었다. C 기자와 '스포츠투데이'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진실을 밝히고 내 아이의 장 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 다. '내일은 오늘보다 견딜 만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안간힘을 써서 나를 다시 추 스르고 일어났지만 날이 새면 내 희미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나를 단 한방에 넘어뜨릴 또 다른 고통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소송을 내자 !스포츠투데이'는 자사 지면을 통해 나의 상처를 정말 여러 차례 덧들였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나는 괴소문의 주역인 것도 모자라 거짓말 쟁이인데다 배은망덕한 사람이며 말 바꾸기 선수였다 아들을 사지에 떨어뜨릴 만한 소문에 관한 기사를 보고도 만족해하는 정신 이상자이며 그 와 중에 자신 의 사진이 이쁘다고 기뻐하는 천하의 바보인 것이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때 눈만 뜨면 나를 매도하고 모함하는 기사가 신문의 지면, 방송에까지 올라왔다. 매일매일 죽음을 맛보는 듯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웠 지만 그들처럼 공격의 장, 아니 최소한의 방어의 장조차 없었던 나 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당신이 이런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당신도 나처럼 이렇게 힘 겨운 싸움을 선택했을까? 싸워보았자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그냥 포기했을 까?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무시하고 웃어넘길 여유가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리한 판단이라는 주 변의 만류가 있었고, 나 또한 처음엔 그냥 덮어둘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지금껏 나름대로 성실하게 내 삶을 꾸려왔고 소문이야 어떻든 내가 떳떳한데 무슨 상 관이랴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 아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도 세상의 모든 엄마 들처럼 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이번 사건은 내 아이 의 장래까지 위협할 만한 일이었다. 날벼락처럼 씌워진 누명과 훼손된 내 명예 는 그 다음 문제였다.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간 이후 모든 신문, 방송, 잡지 등에 '기록'으로 남아버린 더러운 소문이 내 아이의 인생에 먹구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엄마로서 거꾸러지는 심정이 되었다. 먼 산의 불 보듯 하며 앉아 있을 수 가없었다. 내 아이가 불길의 뜨거운 김이라도 느끼기 전에 아이를 구해내야 했 다. 나는 끝도 모를 고통의 싸움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자 개인이나 일개 스포츠 신문과의 싸움이 아니었다. 일이 터지기 시작하면 서 이미 그들은 내 시야에 들어올 여유도 없었다. 나의 눈엔 아들만 있었다 '엄 마의 이름'으로 선택한 내 아이의 장래와 진실을 향한 절박한 발걸음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아이만은 보호해달라'는 절절한 보도 자제 요청 을 언론사에 수도 없이 했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있었다. '스포츠투데이'는 내가 소송을 내자 여러 차례에 걸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 는 자사의 지면을 통해 나를 비방하는 기사를 서슴지 않았다. 이미 충 분히 상 처를 받은 우리 모자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해야 했고, 진실은 짙은 안개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증거'들을 이 책에 쏟아놓는 오만을 부리거나 상대를 적으로 지목 해 곤란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몇 개월을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나는 내가 가진 '증거' 들을 공개한 적이 없다. 그저 법정에만 가져갔을 뿐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배부전도 실형을 선고받고 '스포츠투데이'와의 재판도 1 심에 승리했으니 모두 끝난 싸움이 아니냐고. 그렇다. 투쟁 끝에 승리는 있었고 진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언론에 기사가 난다는 것은 '쏟아진 물'이다. 무슨 일을 해도 잘못된 그 '기록'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모자의 비극이다. 그렇다면 훗날 내 아 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기록에 대한 정정은 단 한 번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 겠는가? 이것이 어쩌면 아이를 가진 엄마의 못난 미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내 입 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진실을 한 번이라도 알릴 수 있기를 허락 받고 싶다. MBC 앵커우먼 출신 백지연 씨가 21 일...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스포츠 투데이 C 자를 상대로 5 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C 기자는 '백씨 의 억울함을 변호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백씨가 최근 취한 일련의 행동으로 '스포츠 투데이'와 기자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기 때문에 민 형사상 법적 맞대응을 준 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C 기자는 "수차례의 전화통화를 통해... 기사를 언제쯤 싣는 게 좋을지 게재 시점을 놓고 서로 의견을 나누기까지 했다. 하 지만 전화 통화중 '기사화하겠다', '기사화하지 않겠다' 등의 어떤 약속은 전 제하지 않았 다"고 말했다..." C 기자는 " '스포츠투데이' 7 월 16 일자 초판 신문이 나간 후 15 일 오후 6 시께 MBC 근처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난 백씨는 신문을 펼 쳐놓고 제목과 기사 내용 중에 몇몇 어휘 수정을 요구했다. 가능하면 요구대로 고쳐주 겠다고 하자 내일 아침판을 기대하겠다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백씨는 "사진은 예쁜 것을 써주어 마음에 든다"고 말한 데 이어... 특히 커피숍에서 헤어지기 전에 C 기자가 행여 나중에 이런 말 한 적 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라고 하자 백씨는 "저도 양심은 있습니다"라고 대 답했다고 강조했다. 1997. 7. 22. '스포츠투데이' 기사 일부 인용 억울함을 변호해줬다? 변호는 본인이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변호는 궁극적으로 당사자 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스포츠투데이'나 C 기자에게 변호를 요청한 적이 없다. 오히려 "돕고 싶다면 소문 따위를 기사화하지 않는 것이 돕 는 겁니다"라고 거듭, 명확히 말했고 기사가 나온 7 월 17 일 아침까지도 C 기자 와의 통화에서 "기사화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이와 관련된 일이에요. 내가 무 슨 사기를 쳤다는 소문이라면 말을 안 하겠어요. 이건 내 아이의 일생이 걸린


문 제예요. 기사화하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법적 대응할 겁니다"라 고 목이 쉴 정도로 말했었다. 그런데 "변호해주기 위해서"라니? 신문 기사가 나 를 변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평소 신뢰하던 다른 지면에 부탁했을 것 이다. PC 통신에 있던 소문이 '스포츠투데이'에 기사화되자마자 타사의 모든 기자들 이 달려와 나를 심문하듯 대했다. 그들 주장대로 나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면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아하, 소문이 사실이 아니구나. 백지연이 사이버 테러 로 생고생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어야 한다. '스포츠투데이'로 인해 소문이 사 실이 아니고 백지연이 억울한 피해자라는 내용의 변론이 이루어졌다면 사건은 거기서 막을 내리고 다른 기자들이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온 뒤에야 뛰어온 기자들은 과연 PC 통신 에 떴던 배부전의 글을 이전에는 체크해보지 못해서, 순발력이 떨어지는 기자들 이라 그 동안 기사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 게다가 그 기사가 나간 후 우리 모자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소 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의 명예와 함께 가족 모두가 생매장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들을 상대로 소송을 낸 직후부터 '스포츠투데이'는 자사 지면 을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나를 파상적으로 괴롭혔다. 억울함을 '변호'해 주기 는 커녕 그 기사들로 인해 나의 억울함만 천근 만근의 무게로 쌓여갔다. 커피숍에서 만났다/안 만났다? 만난 시점이 중요하다. 내가 C 기자를 만난 것은 신문에 이미 기사가 나간 다 음이었다. 위의 기사를 자세히 보면 "7 월 16 일자 초판 신문(15 일 정오 배포)이 나간 후 15 일 오후에 만났다"고 되어 있다. 언뜻 보면 날짜를 착각하게 썼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기사에서 '스포츠투데이'도 자인하듯. 내가 기자를 만난 시점은 소문 이 기사화된 신문이 이미 가판대에서 판매되고, 그 기사를 본 타사 기자들이 몰 려와 북새통을 치른 후라는 것이다. 그것도 '기사화를 항의하기 위해' 만난 것 이다. 신문에 문제의 기사가 나간 것은 15 일 정오이고 기자가 나를 찾아와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약 6 시간 후인 15 일 오후 6 시 10 분 경이었다. C 기자는 기사화에 항의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백? 회의실이 있는 여의도 MBC 근처 한 빌딩 로비로 찾아왔고, 그곳에 서서 내가 기사화에 항의하자 "어디 잠깐 앉아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 라고 요청했다. 내가 건물 로비에서 흥분해 따져 묻고 사 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자 기자는 "잠깐이라도 장소를 옮겨 얘기할 수 있겠느 냐"고 재차 요청했고 그래서 건물을 나와 처음 보이는 아무 찻집에나 들어갔는 데 그곳이 그쪽에서 '대단한' 증거인양 제시해온 '커피숍'이라는 곳이다. 신문이 나가기 전의 만남이라면 조그만 의미라도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C 기자와 내가 마주한 것은 신문이 발행은 물론 이미 판매된 다음이다. 기사로 인해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후 항의하기 위한 만남을 가지고 지면과 방송을 이용해서 수차례에 걸쳐 '만났다' 고 강조하는 것은 마치 내가 기 사 인 터뷰를 하기 위해 기자를 만나놓고 나중에 딴소리를 하는 것처럼 모함하는 것 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언론사로서 독자들을 호도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별 설 득력도 없는 너무도 궁색한 주장이 아니었을까? 기사 게재 시점을 놓고 의견을 나누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사화하겠다' , '기 사화하지 않겠다' 등의 어떤 약속은 전제하지 않았다? 이 두 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소가 나온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 이다. 기사 게재 시점까지 논의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창해놓고는 곧바로 기사 화 여부에 대한 전제는 없었다니? 만약 그의 주장대로 '기사게재 시점, 즉 기사화하는' 시점까지 논의했다면 그


것은 C 기자와 백지연 사이에 기사화에 대한 합의가 이미 있었다는 강한 전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둘 사이에 "그래, 기사화하기로 하자. 그런데 언 제쯤 기사를 실으면 좋을까"를 의논했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 기사화하겠다', '기사화하지 않겠다'의 합의도 안 해놓고 기사 게재 시점부터 논의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C 기자는 바로 연이은 다음 문장에서 '기사화하겠다, 안 하겠다' 하는 어떤 약속도 전제하지 않았다며 앞 문장에서의 주장을 스스로 뒤집고 있다. 논리적 오류를 빚고 있는 두 문장을 좀더 쉽게 분석해보면 이렇다 그는 "기 사 게재 시점을 놓고 의견을 나누기까지 했다(즉, 기사화에 대한 논의는 이미 있었다. 그런데 백지연이 인터뷰를 안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라 고 했다가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기사화하겠다,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즉, 기사화 여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그런데 백지연이 C 기자에게 기사화하 지 말라고 요청했는데도 기사화해 고통을 줬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은 무슨 말 이냐? 백지연이 허락을 하든 안 하든 기사를 쓰는 것은 기자 마음이다)"라고 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상반된 주장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가? 이 렇듯 계속 횡설수설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의 주장은 일치되는 한 가지뿐이다. 나는 기사화를 용인하지 않았고, 인터 뷰를 거절했다. 기사화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대응할 것이니 기사화하지 말 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기사 게재 시점까지 논의했다는 것은 도 대체 무슨 말인가? 기사화를 용인하고 시점까지 의논했다면 7 월 15 일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가 그렇게 경악할 수 있는가? 인터뷰를 해달라는 기자의 끊임없는 요구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소 문 갖고 누가 인터뷰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문제만 확대시킬 뿐입니다. 기사화 되지 않게 하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상책입니다 굳이 인터뷰를 해야 한다면 소 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됐을 때, 그때가 인터뷰할 시점입니다"라고 이야 기했다. 인터뷰 시점에 대해 내가 한 말은 그게 전부다. '스포츠투데이'에 기사가 나간 이후 결국 나는 이 사태를 법정으로 가져가야 만 했고 예상했던 데로 모든 언론들의 추종보도가 잇따라 나의 생활은 파괴되 기 시작했다. "신문에 났대"라는 말로 대중은 소문에 심증을 두기 시작했고 사 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3 류 잡지 기자들까지 진을 치듯 찾아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유전자 검사 같은 극단적인 '처방을 쓸 생각은 없었다. 단 지 제도권 언론에까지 올라온 소문을 어떻게 진화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매체들이 소문을 기사화하고 나선 이상 언론과의 인터뷰를 무조건 거부할 이유도 없어졌다. 때문에 차라리 어느 한 매체를 택해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1999 년 8 월 9 일에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만약 '스포츠투데이'의 기사화로 인해 법정 소송이 시작되고 다른 제도권 언론 의 추종 보도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그 인터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언론들의 추종 보도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8 월 18 일, 소문에 패한 내 용은 KBS 9 시뉴스에까지 보도되는 기막힌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재판부 에 유전자 검사를 요청하는 고통스런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1999 년 11 월 24 일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고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었을 때 나 는 법원 기자실에서 합동 기자회견에 응했다. "인터뷰 기사를 통상 언론 풍토에서 허락을 받고 싣습니까? '저는 '스포츠투 데이' C 기자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이 인터뷰 아닌 가요?" SBS '한밤의 TV 연예'가 C 기자와 가진 인터뷰(1999.7.22.방송) 중에서 여기서 다시 C 기자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 는 7 월 22 일 '스포츠투데이'기사에서는 '기사화하겠다' 등의 약속을 전제 한 적


이 가 해 한

없다고 주장했다가 같은 날 TV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소속을 밝혔는데 통화 된 것 자체가 인터뷰가 아니냐("인터뷰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다시 말 이미 기사화를 전제한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라며 다시 스스로 말을 부정하고 있다. 더구나 이 인터뷰에서 C 기자는 '백지연이 기사화를 용인했다'고 하던 자신 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스스로 명백히 인정하고 만다. "인터뷰 기사를 통상 허락 받고 싣습니까?"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터뷰 기사는 보통 언론 풍토에서 허락 받지 않고도 쓴다, 즉 백지연의 허락 없이 썼 다는 말 아닌가? 쉽게 말해 백지연의 기사화 용인은 없었다'고 스스로 시인하 고 있는 셈이 아닌가? 내가 전화를 받고 "설마 이런 저질스런 헛소문을 기사화하려는 것은 아니시 겠죠?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어느 기자한테 당하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 때 기자 아닙니다"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의 전화 통화에서 "기사화하 지 말라"고 더욱 분명히 이야기한 것이다. 또한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새삼스럽게 소속과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다. 왜? 그녀는 이미 이전에도 내게 수 차례 전화를 걸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를 그나마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인터뷰를 왜 하면 안 되는지, 왜 이런 기사가 나가면 안 되는지 설명해주기 위해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제목과 기사 내용 중에 몇몇 어휘 수정을 요구했다? '스포츠투데이'는 7 월 22 일자 기사에서 조목조목 번호까지 붙여가며 백지연이 요청해서 바꿔 기사 내용'이란 장문의 기사를 썼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지적' 한 것은 백지연이 엄청난 말바꾸기 선수이자, 거짓말쟁이라는 모함이다 그 중의 몇 가지만 보도록 하자. 그들은 백지연이 기사 제목 가운데 '운다, 고백, 고통' 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 지 않는다고 수정을 요구, 이에 따라 '최초 고백은 '전화 통화로 고쳤고 헛소문 에 운다'는 헛소문 난무'로 수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C 기자를 만나자마 자 기사화에 대한 항의를 하면서 신문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 '이혼 배경 헛소문에 운다'라고 했는데 내가 언제 울었느냐? 소문이 사실도 아니거니와 나는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에 당당하다. 그런데 내가 언제 울고 불 고라도 했다는 말이냐? 오히려 나는 이 기사 때문에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또, " '본보에 최초 고백'이라고 했는데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이죠? 내가 언제 무엇을 고백했나요? 무슨 죄가 있어야 고백을 하죠?" 라고 따져 물었다. " '고통의 백야'는 또 무엇이냐? 왜 남의 프로그램 이름까지 먹칠 을 하느냐"며 낱낱이 항의했던 것이다. 수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지적'한 것 이다. 내가 거세게 항의하자 C 기자는 머뭇거리면서 " '고백'이 싫으시면 인터뷰라 고 하면 어떨까요? 인터뷰가 아니면 전화 인터뷰는요?... 그러면 저... 전화통화 라고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 대화가 7 월 22 일 신문에는 위와 같이 희한하게 왜곡되어 대서특필된 것이다. 7 월 15 일자 '스포츠투데이' 초판 신문의 제목에는 백지연 본보에 최초 고백이 라고 되어 있던 것이 7 월 16 일 아침판에는 '백지연 본보와 전화통화'라고 바뀌 어 있다. 그들은 내가 요구해서 아량을 베풀어 '수정해준 것'처럼 주장하지만 당시에 아량을 베풀어야 할 주체는 그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문 1 면 전면에 대대적으로 낼만큼 비중 있게 다룬 기사의 제목을 남의 요청대로 쉽게 바꾼다는 말인가? 그들이 백지연을 대단히 생각해줘서 바꿨을까? 신문 1 면에 대대적으로 내는 기사의 제목까지 스스로 철회하거나 고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 있지 않았을까? 나를 생각해서 제목을 바꿔줄 정도라면 애초에 그런 저질 소문을 내용으로 하는 기사가 나가지 않았어야 했다.


사진이 예쁘다고 좋아했다? "사진은 예쁜 것을 써주어 마음에 든다"고 했다는 기사는 가뜩이나 괴로웠던 나를 더욱 거꾸러지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기 자식에게 치명적인 소문이 신문 1 면 전면에 기사화되도록 하는 인터뷰를 하고 기사화를 용인하겠 으며 만족스런 표정까지 짓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해서 나온 사진이 예쁘다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 기자를 만난 나는 신문을 기자 앞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이렇게 이쁜 사진을 실어줬으니 참 고맙기도 하네요! 새빨간 옷 입은 사진을 이렇게 크게 박아놓으니 가판대에서 눈에 확 띕디다. 신문 많이 팔아서 좋겠네요"라며 분통 섞인 비아냥거림을 토해 냈었다. 그러자 기자는 "저기... 말 나온 김에 백지연 씨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뭐라구요? 이 와중에 나보고 사진을 찍자구요? 도대체..." 그런데 이 상황이 "사진은 예쁜 것을 써주어 마음에 든다"고 말한 것으로 180 도 와전되어 신문과 방송에까지 보도된 것이다. 소문을 기사화해 타격을 입힌 것을 넘어 나를 천하의 저능아로 만든 심각한 인격 모독이었다. 저도 양심은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 내 입에서 7"저도 양심은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어 불성설이다. 당시 내가 C 기자를 만난 것은 소문의 글이 처음으로 '스포츠투데이 '지에 기사화되고 나서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방송사와 회의실 등으로 찾아 와 북새통을 치르고 난 다음이다. 그리고 나는 항의하기 위해 C 기자를 만났다. 나는 누가 보더라도 엄청난 곤 욕을 치른 상태였고 C 기자는 소위 '특종'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도 양심은 있습니다"라는 말이 갑자기 내 입에서 어떻게 나오 겠는가? 이런 말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할 말이 없을 때 고개 숙이고 하는 말이 다. 피해자가 "저도 양심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가? C 기자는 내가 기사화를 용인했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그 주장이라도 '사실'로 유지하고 싶었다면 내가 양심 운운하는 발언을 했다는 주장은 하지 말았어 야 했다. 기사화를 용인하고 특종 인터뷰를 준 사람의 입에서 양심 운운하는 소리 가 나을 리 또한 없을 테니 말이다. 다시 한 번 C 기자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음 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함과 매도가 끝을 모르는 듯했다. 당시 커피숍에서 나오면서 C 기자는 "저... 방송사 스튜디오에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하는데 어디어디 신문사 기자가 왔던가요? 혹시 다른 기자들 만나 서 인터뷰하실 건가요 뿐, "혹시 다른 기자들 만나면 제가'인터뷰 안 하고 기사 를 썼다고 말씀하실 건가요...긴 그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했다. 무엇을 걱 정하고 하는 말인지 알았기에 나는 다시 화가 치밀었고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 었다. "도대체 양심이 있어요? 내가 지금 그 기사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 는데 정말 끝까지 자신 생각만 하는군요. 대단한 특종' 이 빛을 바래기라도 할 까 봐 걱정이 되나요?" 라고 말하고는 뒤돌아 섰다. ' 백지연 씨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해준 '스포츠투데이' C 기자가 '백지연 모함, 사이버 테러' 기사와 관련해 백씨를 만났는지 사실 여부를 75 '생방송한밤의 TV 연예' 가 집중 방송했다... C 기자는 한밤'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7 월 17 일 오후 백씨와 만난 장소가 여의도 MBC 근처의 모커피숍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히며,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데도 왜 백씨가 그렇게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있 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C 기자는 백씨의 거짓을 밝힐 모든 증거를 확보해놓았다. 백씨가 이처럼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면 법정에서 증거를 공개할 수밖에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1999. 7. 23. '스포츠투데이'(www.stoo.com) 기사 일부 인용


백씨의 거짓을 밝힐 모든 증거를 확보해놓았다? 이 기사를 보니 순간 가슴에 화산이 얹혀진 것 같았다. 증거란 무엇인가? 나 만큼 이 사건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가? 거짓만 갖고 있는 사람이 거 대 언론사를 상대로 전국이 알게 될 송사를 벌이겠는가? 무엇이 확실한 증 거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백씨의 거짓을 밝힐 모든 증거'를 법원에 제 출했는데도 서울지방법원은 1 심에서 그들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고 내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말인가? 소송의 상대편에 대한 배려로 지금껏 공개하지 않았 지만 내가 갖고 있는 확실한 증거' 중에 극히 일부만 적어보자. 법원에 증거로 제공한 녹취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1999 년 7 월 19 일에 녹음된 내용의 일부이 다). 백지연 : "우리 분명히 짚고 넘어갑시다. 기사 낸다고 할 때부터 제가 얘기 안 했어요? 절대로 기사 쓰면 안 된다고 얘기했죠? 인터뷰를 안 했으며 기사화 되면 안 된다고 분명히 얘기했죠? 안 했어요? 제가?" C 기자 : "그 말씀은 하셨죠." 백지연 : "했죠 기사 쓰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제가 얘기했죠?" C 기자 : "..." 백지연 : "(전략) 말도 안 되는 기삿거리를 1 면으로 기사를 만들어서 백지연 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피해를 받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보 세요 (중략) 그런 기사를 써놓고 저한테 전화 한 통 없었어요... 가판에 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아침판에라도 예의가 있다면 기사를 빼든지 조치를 취하라고, 그리고 그 결과를 전화로 알려달라고 했을 때 그것마저 안 하지 않았나요? (후 략)" C 기자 : "..." 이것이 확실한 증거' 아닌가? 이 대화에만도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모 든 '진실'이 있지 않은가? 백지연은 기사화를 용인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거절 했다', '절대로 기사를 쓰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c 기자스스로도 인정한 확실한 증거' 이다. 자고 새면 신문과 방송 등에 당신을 모함하는 기사가 나온다면 당신은 어떻 게 하겠는가. 어릴 적 옆자리 앉은 짝꿍이 다른 아이한테 내 흥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화가 나지 않았던가? 전 국민이 보는 신문과 방송에, 그것도 (제도권 언 론 중에) 처음으로 PC 통신에 오른 헛소문의 내용을 기사 화한 당사자가, 사과 는커녕 오히려 매일 당신에 대한 인격 모독에 모함까지 계속한다면 당신은 어 떤 기분이 들겠는가? '스포츠투데이' 신문(주)과 '스포츠투데이' 연예부 C 기자는 27 일... 회사와 기 자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MBC 백지연의 백? 진행자인 백지연 씨를 상대로 각각 3 억 원과 2 억 원, 모두 5 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 동부 지원 에 냈다. 스포츠투데이 측은·. 백지연이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원고측 명 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1999. 7 30. '스포츠투데이' 기사 일부 인용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원고측 명예를 훼손했다?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한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앞으로도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해주기 바란다. 내가 갖고 있는 확실한 증거를 이미 말했으니 '사실 보? 에 대 한 판단, 나아가 '진실 에 대한 판단은 법과 일반의 상식이 할 것이다. 그런데 원고측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누구 앞에서 '명예가 훼손 당했 다' 는 말이 나오는가? 그 기사로 내 명예는 전국민 앞에서 땅바닥에 떨어졌었 다. 그것도 헛소문의 누명을 쓰고 나의 아들까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내 모든 삶이 마비되었고 방송과 강의도 중단해야 했다. 그로 인한 손실과 상실은 계산


할 수도 없는 부분이며, 심신이 마모되어 난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25 부는... '스포츠투데이'와 C 기자를 상대로 백지연 씨가 낸 8 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들은 연대하여 1 억 원을 배상하라" 며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스포츠투데이'측 변호사는 "재판부의 공인이라도 이혼이나 그 배경을 보도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 볼 수 없다"는 결정은 최근 고등법원의 '공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 선한다'는 판결에도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띠자는 백씨는 맨 처음 소장에 서 C 기자를 만난 적도 없다'고 주장하다가 만난 장소와 시간 등을 제시하자 만 난 사실을 인정하는 등 계속 말을 번복해왔다... 오히려 백씨가 신의를 저버리고 진실을 외면했다"고 말했다. 2000. 2. 3. '스포츠투데이' 기사 일부 인용 백씨가 계속 말을 번복한다... 백씨가 신의를 저버렸다? 나는 또 한 번 말 바꾸기의 도사로 전락했다. 그러나 나는 말을 바꾼 적이 없 다. 백지연 모함, 사이버테러 기사와 그 속에 포함된 소문과 관련해, 그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나는 C 기자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기자를 만난 것 은 이미 기사화가 되고 신문이 판매된 이후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두고 그들은 내가 '안 만났다고 했다가 만났다고 한다'며 말을 바꾼다고 비난 한 것 이다. 그리고 내가 '진실을 외면했다' 고? 진실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싸우지 못했을 것이고 1 심에서 승소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반년 넘는 고통을 견딜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의를 저버렸다? '신의'라는 좋은 말을 남용하고 싶지 않다. '신의를 저 버 렸다'는 말은 구렁텅이에 처박힌 사람이 등을 밀어 넣은 사람에게 외치는 말 아니던가? 공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다? '공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다' 라는 이전 판결을 강조 한 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우선하기 위해서 공인(백지연) 의 사생활 보호(이혼 사유에 대한 헛소문에 관련된 PC 통신의 글을 기사화해서 백 지연이나 그 아이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것에 대한 보호)는 뒷전이었다' 라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에 C 기자나 스포츠투데이 측이 백지연의 억울함을 변 호해주기 위해 기사화한 것인데 적반하장'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을 스스로 뒤집는 것 아닌가? 국민의 알 권리는 물론 중요하다. 공인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국민이 알 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공인이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켰다거나 마약을 복용했다거나 병역을 기피했다거나 하는 공익에 위배된 행동을 했다면 언론은 이를 공개하고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기사화에 포함된 소문이 그 내용상 과연 '국민의 알 권리' 에 해 당하는 내용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 소문이 사실인가? 허무맹랑한 헛소문이었는 데다가 나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귀중한 장래까지 송두리째 빼앗 을 만큼 치명적인 내용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상태의 글을 실명까지 처음 써서, 당사자가 그렇게 기사화를 거부하는데도 신문에 내는 것이 국민의 알 권 리를 위한 신성한 직무였는가? 만약 '그렇다' 면 나의 주장은 간단하게 접겠다. 신성한 법원과 건전한 양식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마녀'가 되고 '투사'가 되었다 내가 이번 소문으로 당한 피해는 도저히 측량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떤 사 과나 위로, 금전으로도 보상 불가능한 것이다. 아들이 죄 없이 받은 타격에 대


해서는 나 스스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운 일이다. 유전자 검사라는 극단 처방까지 감수하면서 일대 격전을 치른 끝에 소문이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신문사 기자와의 소송에서도 1 심의 승소를 거두었지만 내가 당한 고통이 정 말 끝난 것인지... 아직도 두렵다. 악몽의 가위눌림이다. 나는 1999 년 소문의 악몽을 내 머릿속에서, 특히 나의 아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고통이 끝났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남았다는 컷, PC 통신에 오른 소문이 '스포 츠투데이' 지에 기사화된 이후 모든 언론에 남게 된 소문에 대한 '기록'은 앞으 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어떻게 책임지고 보상할 것인가. 내가 1 심에서 승소하고 1 억 원 배상 판결을 받자 '스포츠투데이'와 C 기자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2000 년 2 월 21 일 항소하고, 오히려 백지연이 '스포츠투데 이'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내게 )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들은 정말 내 가 흘린 피눈물을 모르는 것인가? 1 억 원이 아니라 억만 금을 준다 해도 보상 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내게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피해(?)를 보상하라고 주장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자는 진정 1999 년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항소했다. 결국 나는 다시 소송의 지난한 과정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 다. 나는 그들과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내 이름 석 자를 그들의 지 면에 올리는 것조차 싫다. 이미 나는 너무나도 아까운 나의 시간과 건강, 물질 을 낭비했다. 그 시간에 나는 정말 창조적인, 다른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악몽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상적인 삶 을 되찾고 싶다. 모 든 송사를 접거나 덮어두고 싶었고, 할 수 있다면 모두 용서하고 싶었다 "너의 싸움은 끝났으니 이제 모든 송사를 접고 새 출발하라", "홀로 싸우느라 아까운 삶을 소모하지 말고 너만 위해 살아라" 하는 조언도 많다. 어차피 진실이 밝혀 지고 누명을 벗은 이상 잔용'의 미덕을 베풀라는 주변 어른들의 조언과 '용서' 의 필요성에 대한 내면의 울림도 있다. 그런 주변의 목소리가 없더라도 누구보 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 나와 내 아이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송사가 나의 부전공도 아니거니와 천성이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배부전은 용서한 지 이미 오래이다. 차라리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죗값을 치렀고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면 그를 용서해주라고 재판부에 요청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너무 지쳤고, 그들에게 내 발목을 그만 붙들라고 말하고 싶다. 애초에 언론사를 상대로 한 힘든 싸움을 시작한 것은 한 기자를 주적으로 한 분풀이나 되갚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상업적 언론주의와 과다 경 쟁의 폐단에 휩쓸린 희생양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들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 어붙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 싸움은 한 개인을 파탄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그것도 한 아이의 삶 자 체를 위협할 만한 소문까지도 호기심 충족의 대상이 되는 세태에 대해 경종 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리하여 다시는 나 같은 제 2 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 게 하고 싶다는 나름대로의 처절한 몸짓이었다. 애초 내가 모든 소송을 감행한 결정적인 이유, 그리고 정말 통탄할 정도로 분 노했던 것은 악몽 같은 소문이 아이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나의 아 이가 아니더라도, 법적 논리 싸움을 떠나더라도 아이와 관련된 소문, 그것도 그 런 정도의 살인적인 소문을 소재로 한 기사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투데이' 측은 계속 내가 '기사화를 용인했고 만족해했다'고 주장했다. 내가 기사화를 용인하지 않은 것은 굳이 증거를 대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자 명한 일이다. 1799 년 7 월 10 일에 PC 통신에 배부전의 글이 떴을 때 바로 고소하 지 않고 '스포츠투데이'에 그 글이 기사화된 바로 다음날인 7 월 17 일 배부전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시킨 것만 보아도 너무나 분명한 일 아닌가? 게다가 세상의


어느 엄마가 자신의 소중한 아이가 관련된 악소문에 대한 내용이 신문 1 면 전 면에 대문짝 만하게 나는 것을 용인하고 좋아하겠는가? 흔히 사람들, 언론들은 인권 문제가 나오면 모둔들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아 이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모두가 휴머니스트가 되어 더욱 강도 높게 말한다. 유 괴범 같은 경우는 아예 법정 최고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799 년의 소문은 나와 아들에게는 정신적 살인행위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설령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언론이 쉽게 기삿거리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었다. 하물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악몽의 광풍이 휩쓸고 있을 때, 나는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소문이 허위임 이 명백히 밝혀질 때까지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다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또다시 어떤 고통을 치러야 한다고 해도, 그래서 세상과 불화하게 된 다 하더라도 감내하겠다고 선언했다. 나 스스로도 10 년 넘게 언론사에 몸담고 일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한 언론이 죄 없는 한 아이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저당 잡을 만큼 오만한 권력이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어떤 부모나 어떤 아이도 언론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여주고 싶다.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다시 투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잘못에 대한 시인과 명백한 사과가 없다는 것은 제 2 의 희생자를 부르거나 또 다른 누군가의 불행 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싸움이 아닌, 진실을 위한 싸움이라 면 나 역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 누 가 거짓을 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시 싸우겠다. 내 아이와 다른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분연히 일어설 것이 다. 투쟁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길엔 처절한 외로움이 있다. 이 골목 저 골목에 서 회의가 고개를 쳐들고 앞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문득 '끝은 어디인가' 라는 의문이 후려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채 다시 그 길에 들어서려 니... 창 밖은 봄인데 마음속엔 다시 겨울이 온다. 천국보다 멀고 지옥보다 험한 노고단 가는 길 내가 모델로 등장한 대우 누비라 자동차 광고는 광고계에서 작은 얘깃거리가 되었었다. 앵커가 등장한다는 것, 뉴스 포맷의 광고라는 것 등이 찬반 논란을 낳기도 했다. 두 편을 찍었는데 첫 번째 CF 는 책상 앞에 앉아서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이라 촬영은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리산 정상에서 촬영했던 두 번째 CF 는 만만치 않은 고생 끝에 나온 작품이다. 우선 새벽 동트기 전에 찍어야 한다는 콘티 때문에 촬영이 새벽 4 시 부터 시작되어야 했고 나는 새벽 1 시에 일어나 분장 등 준비를 해야 했다. 더구 나 일기가 고르지 않고 비가 많이 내려 촬영은 3 일 동안 진행되었다. 정상까지 타고 올라간 차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비가 잠깐 그친 것 같아 카메 라 앞에 자리를 잡으면 잔뜩 운무가 몰려와 다시 자리를 옮기고, 그러다 보면 또 비가 내려 하나도 못 찍고 다시 차안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촬영 마지막날은 봉고차 안에서 꼬박 15 시간을 갇혀 있어야 했다. 이런 고생 덕 분인지 두 번째 광고가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 는 그 광고를 마음 편히 볼 수 없었다. 악몽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누비라 CF 를 찍던 날... 누비라 CF '지리산노고단편'은 1999 년 8 월 19 일에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 날은 마침 '백야'의 녹화 날이기도 해 스케줄을 잡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다른 날 보 다 녹화가 일찍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녹화가 끝나자마자 방송국 을 떠나면 지리산까지 새벽 촬영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다소 무리하게라도 일정을 잡았다. 녹화 전날인 8 월 18 일. 백야 녹화에 CF 촬영 출장까지 겹쳐짐을 챙기고 있었 다. 끔찍한 마음고생이 계속되고 있었던 터라 그 동안 죽 해오던 일에 예전처럼 편한 마음으로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이 바빠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 던 참이었다. 당시에는 자고 나면 신문과 방송 등에 나에 대한 핵폭탄 같은 기 사들이 펑펑 터져서 주변에서 누가 "신문 봤어?", "뉴스 봤어?" 라고 묻기만 해 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날 밤 9 시가 넘자 갑자기 전 화에 또 불이 나기 시작했다. "KBS 뉴스 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가 쭈뼛했다. 신경이 모두 곧추 서는 느낌이었다. "왜? 또, 뭐가 났는데?" "오늘 배부전 재판 내용이 나갔는데... 아휴, 내가 속이 뒤집어졌어." 그날은 배부전에 대한 1 차 공판일 이었다. '소문' 에 대해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을 KBS 1 TV 가 9 시뉴스에 리포트로 내보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9 시뉴스의 주요 뉴스로 예고까지 했고, 9 시 10 분대에 방송되었다는 것이 다. 게다가 9 시뉴스뿐만 아니라 저녁 7 시, 저녁 11 시뉴스에도 주요뉴스로 보도 했다. 다음이 당시의 보도 내용이다. 민모 기자 : MBC 문화방송의 앵커를 하다 최근에는 광고 모델로 그리고 심 야 방송의 진행자로 활발히 활동중인 백지연 씨. 백씨는 자신의 아들이 전 남편 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는 글이 컴퓨터 통신에 실리자 이 글을 올 린 미주통일신문의 발행인 배부전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오늘 첫 공판이 열렸습니다 배씨는 오늘 공판에서 자신의 글은 사실에 입각한글이라고 주장하며, 지금은 이혼한 전 남편의 부모를 증인으로 채택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전 남편의 부모 는 손자가 진짜 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배씨는 그 근거로 전 남편의 가족이 문제의 아이가 당시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친자부존재확인 소송을 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부는 배씨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당사자인 백지연 씨를 다음 공 판에 불러 진술을 듣기로 했습니다. 백씨는 자신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사를 실은 한 스포츠 신문과 맞소송도 진 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백씨의 사생활과 관련된 소문의 진위 여부가 조만 간 법정에서 가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1999. 8 .8 KBS 1TV 9 시뉴스 보도 중에서 점입가경이었다. 살인 용의자라 하더라도 살인자임이 명백히 밝혀지기까지는 피의자의 얼굴과 본명을 보도할 수 없다. 만약 용의자가 진범이 아닐 경우, 미 리 보도가 나가 신원이 밝혀짐으로써 피해를 입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내가 소 문의 누명을 쓰고 그 소문의 내용이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동 안 소문이 '분명한 사실' 이라고 떠드는 사람의 주장은 여과 없이 보도되었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 말하는 나의 주장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악몽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 가족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11 시뉴스를 기다려 보도 내용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했다 1 분이 넘게 리포트 되는 동안 내 얼굴 자료 사진이 빠른 컷으로 수도 없이 나왔으며 내가 등장하는 CF 화면까지 나왔다. 심장이 약한 어머니만은 못 보게 하고 싶었지만 이미 친척의 전화를 받고 어 머니도 알고 있던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들만은 TV 화면에 엄마의 얼굴이 계속 바뀌면서 나오자 "엄마다, 또 엄마네"하면서 연신 소리를 지르며 신나 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었다 어머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뉴스를 보면서 몸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병약한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실 까 봐 애써 몸을 가누었고 행여 아들이 좋지 않은 내


용이라도 알아들을까 해서 두 귀글 장난치듯 막아주어야 했다. 악몽이고 지옥이 었다. 그날 밤 나와 내 가족은 끔찍한 밤을 보냈다. 분노와 절망 속에 뜬눈으로 밤 을 지샜다. 재판에 대한보도라 하더라도 결국 소문의 내용이 먼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 것이고 나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 따위 소문에 관련된 내용을, 고소인인 내가 아니라 피고인의 일방적 주장만 을 담아 그것도 9 시뉴스에까지 보도한단 말인가.' 분노와 의문으로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온 가족의 지옥 체험 다음날 나는 일찍부터 일을 해야 했다. 녹화와 CF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상실에 들러 의상도 점검해야 했고, 일찌감치 방송국 회의실에 나가 대본 회의도 해야 했다. 아침 7 시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을 위해 만 나야 하는 사람은 수십 명, 그들 모두에게 밤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 야 했고 아무리 속이 무너져도 밝은 얼굴로 대해야만 했다. 더구나 카메라 앞에 설 때는 토크쇼의 진행자답게 환한 얼굴로 게스트를 맞 아야 했고 녹화 내내 웃음을 잃지 말아야 했다. 소문의 내용이 지난밤 7 시뉴스 에 적나라하게 보도된 것을 생각하면 금방 토할 것 같아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지만 초상 치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없는 힘까지 짜냈다.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버텨낸 것이다. 토크쇼 녹화는 보통 3 시간 정도 계속되는데 대화에 집중하고 얘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그날은 무척 힘에 부쳤다.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등에서 진땀이 흘 렀다. 중간중간 갈이 진행하던 이영자씨의 얼굴이 가물가물해지기까지 했다. 공 교롭게도 항상 굵직굵직한 '사건'은 꼭 녹화 당일이나 녹화 전날에 터졌다(모든 재판이 매주 수요일에 있었고 '백야'의 녹화는 목요일이었다. '스포츠투데이' 지 에 기사가 나온 것은 목요일. KBS 가 소문과 관련된 재판 내용을 보도한 것은 수요일이었다). 9 시뉴스에 소문의 내용이 나간 것은 당시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나를 한방에 거꾸러뜨릴 만큼 위력적이었다 때문에 그날의 녹화는 더욱 힘에 겨웠다. 가까스 로 녹화를 한 것만 해도 나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겨우 녹화를 마치자 숨돌릴 틈도 없이 CF 촬영을 위해 지리산으로 가야 했 다. 지리산에 자정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바로 떠나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차에 몸을 실었다. 분장사와 미용사도 한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자마자 잠시라도 집에 들르고 싶었다. 아들의 얼굴을 2~3 일 동안 못 볼 것 이기 때문에 잠시라도 보고 싶었고 어머니의 상태도 궁금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급했다. 우선 전화를 돌렸다. 그런데 모르는 아주머니의 음성이 들려 왔다. "잘못 걸었나봅니다'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또 그 아주머니의 목소리 였다. 잠시 당황해하는데 상대편에서 급히 말을 이었다. "얘기 엄마 아니에요? 나 앞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희 집엔 웬일로?"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네? 언제요? 무슨 일이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날 따라 아이를 봐주는 아주머니도 안 오는 날이어 서 어머니와 아들만 뒤로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어머니가 쓰러 졌다니. '딸 잘못 둔 죄로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속을 끓이시더니...' "할머니는 조금 전 구급차에 실려 가셨어요. 아이는 내가 데리고 있어요. 그 런데 낯설어서 그런지 엄마하고 할머니만 찾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네요. 지금 빨리 오셔야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이를 잠시만 봐주세요."


나는 차를 집으로 돌렸다. 촬영 일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의 우는 얼굴과 쓰러진 어머니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너무 당황해 아무 감각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밖에는.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니 다행히 언니에게 연락이 되었는지 언니가 와 있었다. 형부는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 있다고 했다.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물 에 콧물이 뒤범벅되어 이모 품에 안겨 있었다. 할머니랑 둘이만 있다가 할머니 가 갑자기 쓰러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평소 같으면 나를 보자마자 "엄마!" 소 리를 지르며 달려나왔을 텐데 그날은 나를 보고도 이모 품에 안겨서 한동안 가 만히 있더니 이모한테 작은 목소리로 "엄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것이었 다. 아이를 안자 가슴이 미어졌다 온 가족이 도대체 무슨 수난이란 말인가! 평소 어머니를 돌봐주시는 담당 의사에게 전화를 거니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 져 충격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어머니가 밤새 토사를 한 탓에 탈 수 증세까지 함께 온 것 같다고 했다. 그 의사는 어머님께 무슨 걱정스러운 일 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었다. "있었죠, 많이 속상하셨을 겁니다." 어젯밤의 KBS 뉴스 보도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어머니는 차마 나에게 표현도 못하시고 밤새 속앓이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 고 쓰러진 것이다. '내 속도 속이지만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 훤히 아는 어머니 가 딸이 겪는 누명과 소란을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스포츠투데이'를 보시 고 한 번 쓰러졌는데 KBS 의 보도 후 다시 쓰러진 것이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담당 의사도 알고 있었던 듯 "온 가족이 생고생을 하시는군요. 백지연 씨도 힘 들겠지만 어머니의 마음도 많이 타실 겁니다. 게다가 어머님은 병력이 있으셔 서 건강을 조심하셔야 하잖아요. 하여튼 경과를 두고 보죠. 우선은 마음이 편 하셔야 되는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러기도 어렵겠고..." 의사에게 감사 를 표하고 내 품안에 강아지처럼 안겨 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데로나 떠나버리고 싶었다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아 이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이에게 상 황을 설명해주었다. "아가. 할머니가 배가 아야 하셔서 쓰러지신 거래. 할머니 금방 나으신대, 많 이 놀랐어?" "할머니 삐요삐요 차가 와서 데려갔어 할머니 어디로 데려간 거야?" "응, 병원에." "할머니, 그럼 언제 와?" 아이는 할머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손자 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워낙 알 뜰살뜰 아이를 보살펴주셨다 그래서 아이도 잘 따랐다. 그런 할머니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 옆에서 혼자 울고 있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으랴. "할머니 금방 오셔. 할머니가 너 보고 싶으시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 아이를 씻어주고 먹을 것을 좀 챙겨 먹였다. 그제야 아이는 조금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시간은 마냥 흐르고 있었고 대우 측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CF 고 뭐고 다 취소하고 싶었 다 아이를 도저히 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리산 정상 노고단에서는 CF 촬영을 위해 온 스태프들이 며칠 간 준 비 촬영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원된 정식 스태프만 해도 60 명. 차량 10 대가 지리산 노고단까지 올라가 천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 서 못 가겠다고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사정을 잘 모르는 그들로서는 공과 사 를 구분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언니는 아이가 웬만큼 진정이 되었으니 우선 일을 하러 가라고 했다 언니 집 에 데려가면 사촌형도 있고 누나도 있으니 장난감과 컴퓨터를 갖고 놀아주면 금방 잘 놀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런 말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


다. 멀리 부산에 살고 있는 언니도 이미 연락을 받고 알고 있었는지 전화를 걸 어와 우선 지리산으로 출발하면 언니가 날이 새는 대로 서울로 올라와 아이와 어머니를 보살펴주겠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내가 아이를 늦게 낳은 편이었기 때문에 내 아들은 우리 집에서는 오랜만에 등장한 막내둥이였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 이모들로부터 유별난 관 심과 사랑을 받았다. 언니들은 이번 일로 아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유독 아 이 에게 많은 신경을 써주었고 내가 일이 바쁠 때면 아이를 녹화장에 데려와 주거 나 수영장이나 눈썰매장, 동물원 등에 데려가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런지 라 아이도 이모들을 무척 좋아하고 따르는 편이었지만 그 날 밤은 놀라서인 지 나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대우 CF 기획사측과 통화를 시도했다. 어머니 가 갑자기 편찮으시다고만 설명하고 촬영을 연기할 수 없는지 물었다. 기획사 측은 사정은 알겠지만 CF 촬영 일정이 이미 내 스케줄 때문에 일주일 정도 연 기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기는 어렵다면서 난망한 상황만 얘기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리산으로 가야만했다. 언니들은 괜찮을 것이라며 계 속 위로 를 해주었건만 어떠한 말로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아이의 옷가지를 챙겨 이 모 집에 데리고 가면서 아이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엄마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금방 가서 빨리 끝내고 올게. 할머니도 금방 오실 거야. 알았지? 형이랑 누나, 이모랑 재미있게 놀고 있어. 또 할머니도금 방 오신 댔어(아이는 보모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엄마보고 싶으면 핸드 폰으로 전화해달라고 해. 엄마가 가서 미안해." 아이를 이모네 차로 옮겨 태우자 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이 되더니만 이내 차 창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탄 차가 출발하기 시작해 자꾸 뒤를 돌아보 는데 아이의 우는 얼굴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울음 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우는 모습을 보며 내 세포 하나 하나까지 일어나 울고 있 었다 전날 9 시뉴스를 보면서부터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아이의 우는 얼굴을 본 순간 온몸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차안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눈물을 도저히 주 체할 수가 없었다. 뒷좌석에 앉아 소리를 죽이며 끝없이 울고 또 울었다. 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도 가슴 아팠고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울던 아이의 모습과 울음소리가 눈과 귀에 밟혀 가슴이 미어졌다. 평소에는 이모를 그렇게 도 잘 따라나서던 아이였건만, 쓰러진 할머니 옆에서 도대체 얼마나 혼자 운 것 인지.... 그 날 이후 아이는 할머니와 엄마가 없으면 어디에도 가려고 하지 않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지리산까지는 5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 전날 뉴스 내용 때문에 한숨도 못 잔 데다가 아침부터 녹화 준비를 하느라고 하루 종일 뛰어다녔기 때문에 무척 피 곤했다. CF 를 어떻게 찍을지 걱정이 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아이가 걱정이 되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가 많이 울며 엄마와 할머니만 찾는다고 했다. 이제라도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전화 너머로 들려온 아이의 울음소리에 미칠 것만 같았다. 당장 KBS 로 달려가 고 싶었다. 재판에 계류 중인 사건을 보도할 수는 있다 해도 고소인과 피고소인, 원고와 피고의 주장이 보도 내용에 공히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그 날의 보도에 담당 검사가 이미 전 남편의 친자임을 확인하고 소문의 허위성이 입증되었기 때문 에 배부전이 구속된 것이며, 일산으로 가는 좌석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말하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 배부전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고, 전 남편 가족이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는 배부전 주장과 달리 법원 어디를 뒤져도 그런 소송이 제기된 적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공정하게 포함시켰다면 나는 아무 리 억울해도 KBS 를 상대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소문에 심증을 두는 시청자도 없었을 것이다.


KBS 조직 안에는 양식 있는 기자들이 많을 것이고 그들 중 상당수가 '소문' 따위에 관련된 일을 보도하는 것에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 날, 당 시 책임자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그런 보도를 한 '진정한 이유' , 그것도 소 문이 사실이라고 떠드는 피고인의 주장만 담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과연 그 보도가 '품위와 공정성'을 자랑하는 9 시뉴스에서 내보낼 만한, 그리고 그도 모 자라 저녁 7 시와 11 시뉴스에서까지 재탕, 삼탕할 만큼 대단한 중대사였는지, 그 보도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소위 공영방송의 책임자라면 그 보도와 관련된 아이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 웠는지· 그들이 그런 보도를 할 동안 내 아들은 놀라 울고 있었고 내 어머니는 쓰러 졌다. 만에 하나 병약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면, 내 아이가 그 일로 정서불안이 될 만한 상처를 입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끝나지 않은 숙제 노고단에서 CF 촬영이 끝나자마자 난 새벽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우선 아이 와 어머니가 걱정이었고 KBS 뉴스 보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도 고 심해야 했기에 마음이 바빴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터졌기 때문에 나홀로 처리해야 할 일과 관련해서 생각과 능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그 일들이 아무 죄없이 누명에 누명으로 이어져 발생한 것이었는지라 내 속에선 억울함만 쌓여 갔다. 우선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 보도 요청 중재 신청을 냈다. 피의자의 주장만 나가 오히려 고소인인 백지연이 오해를 받게 되었으니 백지연에게 반론 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청구 취지였다. 1979 년 9 월 1 일 중재위원회가 열렸다 나와 변호사, KBS 의 담당 책임자가 그 자리에 나왔다. 그는 '국민의 알 권리'와 보도 가치 판단에 있어서의 '편집인의 자유'를 들면 서 그 날의 보도가 진실에 입각한 사실 보도라고 답했다. 반론을 하면 시청자들 이 정정으로 오인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반론보도를 내기가 힘들다는 말도 덧 붙였다(그날 중재위에서는 그 보도가 KBS 뉴스에 나가게 된 실제적 경위에 대 한 핵심적 이야기가 오고갔으나 이 책에 담지 못하는 한계가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결국 중재 불 성립 결정으로 끝이 났다. 프레스센터를 나서면서 내 마음은 납덩어리에 눌린 듯했다 '무엇이 진실에 입각한 사실 보도인가. 그 좋은 '진실'이라는 말, 언론보도의 필수조건인 '사실 이라는 말은 여기저기 난무하는데 누가 진실을 찾아줄 것인가? 반론 보도를 한 다 해도 내게는 회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반론 보도조 차도 거부되었다 나는 다음의 법적 대응의 수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론중재위원회가 열렸던 1799 년 9 월 1 일은 공교롭게도 내가 배부전 재판과 관련해 고소인 진술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언론중재위원회에 나갔던 나는 당 일 오후에는 고초인 진술을 위해 법정에 나갔고 바로 그 자리에서 유전자 검사 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일부 TV 뉴스는 당일에, 일간지들은 다음날 아침에 백 지연, 진실 밝히기 위해 유전자 감식 요청'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다. 아들을 생각하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내려앉게 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법정에서 고소인 진술을 통해 정말 비통한 심 정으로 유전자 검사를 요청하고 KBS 와의 중재위원회가 열렸던 바로 다음날인 9 월 2 일 KBS 7 시뉴스에는 다음과 같은 리포트가 나갔다. 내 자식 맞나요? 라 는 제목이었다. 나로서는 무감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모 기자 : 친자확인을 위한 유전자 추출 작업이 한창인 서울대 법의학 교실 입니다. 지난 77 년 한해 120 여 건이던 의뢰 건수가 올 들어서는 이미 130 건을 넘었습니다. (중간에 서울대 의대 법의학과 교수의 인터뷰가 나온다 : "심한 해는 40%까


지 '아니다' 라고 나오고 보통은 30% 정도 '아니다' 라고 나와요") 예전에는 부인이 재산 상속 등을 위해 자녀의 친자확인을 많이 요청했지만 요즘은 남편이 부인을 의심해 이뤄지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다시 친자확인 의뢰자와의 전화 녹취가 나온다. "부인이 잠자면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고 애를 잘 키우겠다고 그래서 의심하게 됐죠") (그 다음엔 남성의 전화 상담원과의 인터뷰가 나온다 : "여성들의 사회생활이 늘면서 개방적이 되고 아내의 외도나 불륜을 의심해 친자까지 의심...") 이처럼 친자확인 검사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전문 검사업체까지 나타났습 니다. 검사방법도 신속하고 간편해졌습니다. 특수 종이 위에 손바닥만 찍어 보 내면 검사가 하루 만에도 끝납니다. (다시 또 인터뷰가 나온다. 친자확인 전문회사 담당자와의 인터뷰다 : "특징이 배우자 몰래 할 수 있기 때문에, 또 입속의 점액을 면봉에 묻히는 것만으로 검 사가 이뤄집니다") 최근 확산되는 성 개방 풍조에 따라 이같은 친자확인 검사 의뢰는 더욱 늘어 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1999.9.2. KBS 1TV 9 시 뉴스 리포트 내용 전문 순간, 내가 지금 무슨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볼 수록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지금도 당시 KBS 의 보도로 인해 겪었던 나와 가족의 정신적 피해에 대 해 응당한 법적 절차에 착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끝나지 않은 숙제이다. 당시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내게 주변에서는 '더 이 상 소송을 확대시키지 말아라. 네 가지 소송만 해도 혼자 감당하기에는 버겁다, 명예회복이 되면 소송은 접도록 해라"라는 말들을 많이 했다. "프리랜서인 데 방송사에까지 소송을 걸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결정적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말은 이것 한 가지였 다. '너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신문사에 이어서 방송사에까지 소송을 걸면 사람들은 '저 사람은 여기저기 송사만 일으키나' 또는 '명예회복 이 되니까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니야 라는 식의 오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주 변의 우려였다. 진실이 곡해되는 것에 대해 질릴 대로 질려 있던 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는 나의 '진실'마저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솥뚜껑보고 놀 란 가슴' 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고민한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일인가를. 지금 내가 취해 야 할 가장 옳은 행동은 무엇인가를.

최악의 순간에 만난 한 줄기 빛 법정에 앉았다 입이 마르고 가슴속이 타 들어가는 듯했다. 내가 왜 이런 데 와서 많아 있어야 하나? 고소인 진술을 시작한 나는 소문이 명백한 거짓임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간 단한 상황이 아니었다. 객관적 사실보다 오히려 소문을 더 믿으려 하는 사람들 이 있었고, 나는 확실한 증거를 대야만 했다. 아니, 그렇게 강요받았다. 결국 증 인 석에 앉은 나는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다. "재판부가 가장 확실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명백히 밝혀주시길 청하는 바입니다. 아들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요구합니다. 소문을 믿는 세상, 엄마로서 이러한 결정까지 내리게 하는 세태가 원망스럽습니다만 아 이와 본인의 명예 회복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 눈물이 쏟아졌다. '네가 사람을 죽였지? 아무도 네 결백을 증명할 사람이 없 으니, 네가 죄가 없다면 죄가 없다는 증거를 대봐" 하고 덮어씌우는 형국이었 다. 막무가내로 덮어씌우는 데야 내가 아무리 결백하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


다. 하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증거를 내밀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DNA 검사라는 최후의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내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소문이 나 오 기 시작할 즈음엔 그 누구보다도 나부터가 DNA 검사' 라는 말만 나와도 펄 쩍 뛰었었다. 주변의 지인들이 DNA 검사 같은 확실한 검사를 해서 빨리 누명을 벗으라고 조언해주면 '내 아들이 분명한데 도대체 내가 왜 소문 따위에 장단을 맞춰 그런 험악한 검사를 목숨과 같은 아들에게 시켜야 하느냐"며 흥분했었다. 그러나 소문은 내 생각과 달리 마른풀에 불붙듯 번져나갔다. 줄 이은 언론의 보도에 대중도 소문에 심증을 두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들은 당사자인 내가 인 터뷰를 거절하자 떼지어 아이의 친가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심증을 잡았 다'는 표정으로 내게 다시 찾아와 인터뷰를 졸라댔다. 아이의 친할머니라는 분이 "친자확인 소송을 냈느냐?"는 질문에 "아들에게 물 어보라", 소문의 진알 여부에 대해 '내가 어떻게 압니까.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 겠습니다. 하늘은 알 것입니다(1999. 8. 여성동아/주부생활/레이디경향, 한밤의 TV 연예, MBC 섹션 TV...)"라고 했다며 오히려 내게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었 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사실이라면 기막힌 일이었다 믿지 못하겠다 는 나의 반응에 한 기자는 답답하다는 듯 "자기 방어를 하세요. 가만있지만 말 고. 그런 반응에도 백지연 씨가 침묵만 하니까 더 오해를 받는 거예요!"라고 말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아이를 위해서 침묵하는 것이 내가 아는 한 최선의 도리이고 상식이었기 때문 이다 또한 분노에 떨고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었다. 당연히 나서서 아이 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뒷짐만 지고 있었다 내 아이를 보호할 사람, 보호하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결국 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밝혀야만 했다. 아들을 보호한다고 검사를 안 시켰다가는 도리어 아이의 장래를 막는 불 행을 방조하는 꼴이 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결국 결단해야만 했다. DNA 검사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힘든 결정을 내리자, 현실이 정말 기막 혔다. 하지만 곧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희망을 만들어 나 자신을 위로할 수밖 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을 갖는 것도 잠시. 산 넘어 산이었고 일단 시작된 고통은 더 세차게 나를 후려갈겼다. 벼랑 끝에서 꺼내든 마지막 카드 전 남편이 법정에 나와 진술하는 것은 물론 DNA 검사에도 응하지 않았다. 답답했다. 소문은 더욱 우스운 꼴로 번져가고 있었다. "DNA 검사에 응하지 못 할 이유가 있다.", '백지연이 전 남편에게 재판정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뒤로 부 탁 을 해놓고는 공개적으로는 검사를 하겠다며 큰소리를 치는 쇼를 하고 있다" 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소문은 잔인하고 흉측했다. 끝없이 난무하는 소문에 나 는 진저리를 쳤다. 진실은 잡힐 듯 잡힐 듯 안 잡히는데, 나는 하루라도 빨리 소문이 사실이 아 님을 밝히고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싶었다. 이런 내 간절한 희망과는 달리 속절없 는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결국 나는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카드를 뽑 았다 친권상실선고 신청을 낸 것이다. 전술도 전략도 아닌 분노와 절망의 벼랑 에서 꺼내든 마지막 카드였다. 결국 DNA 검사가 이루어졌다. "검사를 하게 해주십시오'라는 눈물 섞인 요 청이 재판부에 전달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루를 버티는 게 지옥 같 던 당시로서는 두 달은 평소의 2 년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애초에 나는 배부전만 구속시키면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엉뚱하게 스포츠 신문에 보도되고 TV 7 시뉴스까지 나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번져나갔고 마땅히 진실 을 밝혀줄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면서 사태는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그렇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검사를 어쩔 수 없이 선택했건만 그 또한 난관이었다.


결과만 나오면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만천하에 증명할 수 있건만 검사가 이 루어지기까지의 그 긴 시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한다니. 검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이제야 진실을 밝히게 됐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안고 판사 방에 들어서는 순간, 난 세상에 태어난 후 최 악의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를 안은 내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험한 세 상에, 맹수로 가득한 세상에 내 소중한 아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만 같아서 본 능적으로 방어하게 되는 것이었다. 소형 재판부처럼 마련된 방에는 재판장과 검사, 양측 변호사, 서울대 법의학 과에서 나온 교수들, 그리고 문제의 인물 배부전이 포승줄에 묶인 채 경찰 두 명의 호위 속에 앉아 있었다. 배부전의 얼굴을 보자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의 얼 굴을 가렸다. 아이에게 그의 얼굴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재판부는 나중에 검사 결과에 대해 배씨가 딴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검사 현장에 입회하게 한 것이었다. 배부전은 내가 자리에 앉자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사과할 기회를 달 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그에게 화를 낼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그런데 그 후 배부전은 검사 결과 가 나 오자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다). 채혈을 위해 당도해 있는 의사를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를 안고 다 시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배부전, 언론들, 소문으로 아이의-인격까지 유린한 비뚤어진 세태를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눈물만 보면 질겁을 하 는 아이가 걱정되어 겨우겨우 눈물을 삼키며 억지 웃음을 지어야 했다 가슴에 는 통곡이 갇혀 있었다. 나는 세부적인 검사과정에 대한 묘사는 이종에서 멈추고 싶다 기록으로 남기 고 싶지 않은 가슴 쓰리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이런 불행한 일은 일어 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나마 써 내려왔던 것은 거짓과 편견 에 찌든 세상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쓰레기 같은 소문'을 기삿거리로 만들어 상업 주의 언론들이 배를 채우고 세상이 소문을 재미 삼아 이야기할 동안 죄 없는 모자가 어떤 기막힌 불행을 강요당했는지 세상에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아서 이 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 머릿속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의 생각을 다 른 데로 돌리기 위해 울음을 삼키면서 웃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이것저것 얘기 를 해주느라, 그리고 아이를 위한 기도를 하느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 지금 이 순간 이 아이를 붙잡아주세요. 행여 무의식 중에라도 이 일 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이 아이를 온전히 지켜주십시오.' 내가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 한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 편중에서 바닥에서 한 간절한 기도가 그대로 하늘로 전달된 걸까. 악몽 같은 검사가 끝 난 뒤 아이를 껴안고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라고 말하자(마음속으로는 "아가야 미안하다"라는 통곡이었다) 아이는 뿌듯한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놀랍게도 아이 는 울지 않았다. 아이가 눈물을 조금이라도 비쳤다면 나의 가슴은 갈가리 찢어 졌을 것이다. 나로선 최악의 불행 중에 본 빛과 같은 기적이었다 나는 아 이를 안으며 다시 기도했다. "아이가 이 일을 기억조차 않게 해주세요." 검사를 끝내 자마자 나는 아이와 함께 롯데월드에 갔다.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놀면 서, 행여라도 무의식중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기억까지 다 남김 없이 없애버리 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또래 친구들을 모두 데리고, 좀처럼 지칠 줄 모르 는 아이들이 자진해서 그만 놀자는 소리를 할 때까지 아이들과 뛰어 놀다가 집 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몸살기가 돌았다. 악몽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기 시작


하는 밤이었다. 기도를 하며 아이를 씻겨주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잠을 재웠다. 아이는 롯데월드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하며 쉴새없이 조잘거렸고, 까르르 웃으 며 즐거워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2 주에서 4 주가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유 일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애태우며 기다리던 검사가 끝났기 때문 에 이제 걱정할 일은 없었다. 모처럼 긴 잠을 잤다. 검사를 한 날이 11 월 12 일. 다음 재판은 11 월 24 일. 검 사 결과만 나오면 '소문 잔치 는 드디어 끝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서울대 법의학과에서 검사 결과가 나오면 재판부가 전화로 사실을 확인하면 될 것 같았지만 검사 결과는 봉인을 해서 재판부에 우편으로 보내지게 되어 있 다 그리고 재판이 있는 11 월 24 일 이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검사 결과를 알려주 지 말라는 재판부의 강력한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기자들은 재판이 있기 며칠 전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가 일찍 나왔다면서요? 백지연 씨는 전달 받으셨겠죠?" "아닙니다 제가 당사자이기는 하지만 재판 당일 전에는 제게도 알려주지 않 는답니다. 그러나 저야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다만 소문이 증거를 대 라고 하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 드디어 11 월 24 일 결심 공판.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이번 사건의 와중에서 법 정에 몇 차례 나갔지만 이 날만은 마음이 가벼웠다. 짐을 벗기 위한 의식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배부전의 변호인이 법정에 늦게 나타나 재판은 예정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시작되었다. 그 날은 양재동 특검 사무실에서 김태정 전 법 무부장관이 옷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자청해 검찰청과 법원에 뉴 스거 리가 많은 날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사건 관련 재판정에 기자들이 많이 와 있었다. 일간지, 잡지사 기자들에 방송사 카메라까지 겹쳐 몸싸움들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방송사의 카메라가 못 쓰게 부서지는 사고까지 나는 등 북새통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알 권리가 고작 유명인의 헛소문에 관련된 해프닝에 관 한 것이라니' 하는 씁쓸한 생각도 스쳐갔다. 그러나 이 날만은 많은 기자들이 모인 것이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일부 언론들이 6 개월이여 동안 이나 헛소문을 사실처럼 떠들었으니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려면 그 에 상응하는 양의 보도가 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불행하게도 상당수 언론들 은 소문이 났을 땐 신나게 떠들다가, 정작 사실이 밝혀지고 나자 그에 대해서는 이전과 같은 열정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진실 확인에 대해서는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는 잡지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결국 소문의 피해자만 이중 삼중의 피해 를 입는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피고인,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검사 결과가 나 온 것 아시죠?"하며 친자가 확인된 검사 결과에 대해 발표했다. 굳이 말할 필요 도 없는 당연한 결과였다. 드디어 나와 아들의 악몽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소 문을 사실처럼 말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자들의 요청으로 합동 기자회견을 했다. 한 기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축하합니다 명예를 회복하게 되셨는데 소감부터 말씀해주시죠." "오히려 슬픕니다. 당연한 진실이 밝혀진 것뿐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했었죠? 일부 언론에 의해서 쓰레기 같은 소문이 '전국민적 관심사'처럼 사건 화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애초 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 '축하'라니 과연 이게 축하하고 축하 받을 일인가 쓴웃음이 나왔다 물론 반년 을 넘게 헛소문과 일대 격전을 치르느라 고생했고, 이제 과학적인 증거로 명백 히 진실을 밝혀 소문에서 해방되었으니 그것은 축하 받을 만한 일일지도 모르


겠다. 그러나 그래도 '축하'라는 말의 순수한 의미가 전하 어울리지 않는 상황 이었다. 애초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이번 사건은 나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측면을 단적 으로 드러내는 경우였다. 소문이 기사화되고 시중에 나돌 때 나는 이 사회의 건 전한 양식이 소문을 이성적으로 차단해주리라 믿었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배 반당했다. 악몽이 아예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건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나는 맞 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엄연한 진실이 허위에 가려져 매도 될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번 싸움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다행히' 라는 표현 이 적합하리라 생각한다) 진실은 밝혀졌다. 이유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에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지만 그 와중에 나는 세 상을 배웠고, 진실의 중요성과 진실의 힘을 절실히 깨달았으며, 잘못된 것에 맞 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의 TV 뉴스와 일 간 신문들은 일제히 백지연, 유전자 감식 결과 친자 확인' 이라는 내용을 보도 했다 명예 회복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운 외로 운 투쟁은 헛되지 않았다. 고통의 끝은 분명 있었다. "백지연 씨 명예훼손 배부전 씨 2 년 구형" 서울지검 공판 부는 7 일 백지연 씨의 이혼 배경과 관련한 허위 사실을 유포 한 혐의로 기소된 미주통일신문 발행인 배부전 씨에게 징역 7 년을 구형했다. 배 씨는 지난해 7 월 확인 안 된 소문을 PC 통신과 인터넷에 띄운 혐의로 구속 기소 되었다. 2000. 3. 9. 경향신문. 중앙일본 세계일보, 조선일보 등의 보도 중에서 "백지연 씨 명예훼손 배부전 씨 징역 1 년 선고" 인터넷상 명예훼손 첫 실형 인터넷을 이용한 명예훼손 사범에게 첫 실형이 선고되었다 서울지법은 17 일 백지연 씨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징역 2 년이 구형된 배부전 피고인에게 명예 훼손 죄를 적용해 징역 1 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소문에 대 한 검증 없이 인터넷에 글을 올려 깨끗한 이미지를 생명으로 하는 여성 앵커와 그의 가족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만큼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인터넷을 이용한 명예훼손 사건에 이례적으로 '중형'을 선고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중략) 현행 헌법은 허위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자는 7 년 이하의 징역이나 10 년 이하의 자격 정지 또는 1000 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2000 3.14. 한국일보 경향신문 중앙일보, YTN 등의 보도 중에서 발자국이 쌓여 길이 된다 소문이 허위로 밝혀지자 언론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역전되었다. 흥미로운 것 은 대중의 호기심만 자극하는 소문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던 '점잖은' 일간지 들은 DNA 검사 결과가 나오고 진실이 밝혀지자 일제히 박스 기사로 비중 있게 다룬 반면 말도 안 되는 소문에 대해 '의혹' 운운하며 반년여동안 '충실히' 떠 들던 일부매체, 3 류 잡지들은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진실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다문 채 단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번 사건을 겪으면 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소문이, 그리고 언론의 잘못된 판단이 한 개인을 어떻게 매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위험한 힘'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진실이 밝혀진 후 만난 한 일간지 부장이 한 말은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 다. "진실이 밝혀져서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솔직히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면 우 리 편집회의에서는 친자 확인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섭섭했죠. 이제 무 슨 얘깃거리로 회의의 지루함을 덜까 해서요. 죄송합니다. 기분 상하시지는 말 고 요. 하하하."


솔직한(?) 농담이었기에 불쾌감을 표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그 동 안 소문을 다루던 언론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임에 분명하다 '일간지 의 부장급이 저런 얘기를 할 정도이니... 한 스포츠지 기자는 이런 말도 농담처 럼 했다. "소문이 들끓던 동안은 백지연 이름 석 자 들어간 기사만 써도 가판대 의 판매 부수가 달랐어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소문을 호기심 차원 이 아니라 '진실 규명'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언론이 드물었다는 것이다. 아니, 없었다. 건전한 상식으로 조금만이라도 정황을 분석한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간 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아이가 관련된 일이니 자중해야 한다는 글 이 나을 법도 했건만 그것이 오히려 과욕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좌로 향해 가!" 라는 구령에 맞춰 걷듯이 소문에 경도되어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했다. 누구하나 '진실을 밝혀보자!' 하는 깃발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한 개인을 '도와주기 위해 서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 보도' 라는 언론의 사명과 한 아이의 인권을 생각해 볼 때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소문의 와중에서도 "세상이 모두 까만 안경을 썼는데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라며 진실에 접근해보려는 분석 보도를 실은 언론이 단 하나 있기는 있었다. 제도권 언론이 아닌, '딴지일보'였다. 당시 나는 '딴지일보 '의 기사를 보고 다소 놀라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자료가 별로 없었을 텐데 도 비교적 정확한 정황 분석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이런 일을 제도권 언론이 먼저 시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던 것이다. '딴지일보'를 본 많은 네티즌들이 내게 격려의 글을 보내주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그 들의 격려는 정말 내게 따뜻한 힘이 되었다. 여기에 무려 30 여 페이지가 넘는 '딴지일보'의 전문을 실을 수 없어 아쉽다. 대신에 그 기사의 결론 부분을 발췌하기로 한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의 명쾌한 생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으리라 본다. (전략) 백지연 사건은 여태 본지가 추적한 그 어떤 사건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관련 소송이 무려 4 건 아니 최근에는 5 건이 되었고, 당사자들 외에 배부전이란 기상 천외한 인물이 가세했고, 신문사와 언론사까지 등장하고, 다루고 있는 것이 명 백한 (사건)이 아니라 (루머)였기에 더욱 그랬다. 게다가 백지연이 남자였다면 애초 시작도 되지 않았을 이 사건을 (사건)이 되도록 방조한 우리 사회의 남성 권력까지 숨어 있는 주연으로 맹활약했으니. 그러나, 몇 주간의 추적 끝에 본지 드디어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겨우 코미 디에 불과했던 배부전 게시물을 전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사건의 발단 으로 키워낸 것은 바로 그런 코미디의 허구를 파헤치고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 는 언론들 자신이었다. 철저히 언론이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사건 자체가 ' 사건' 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기에. 무엇을 보도해야 하고, 무엇을 보도하지 말아야 하는지, 공인으로 희생해야 할 사적 부분이 무엇이며, 어떤 것들이 보호되어야 하는지... 가장 기본적인 룰 과 기준조차 망각한 채, 한 개인의 사적 삶을 상업적으로, 또 한편으론 보복의 수단으로 xx 언론들이 이용해먹은 결과물이 바로 (백지연 사건)인 것이다. 자, 바로 당신이 백지연이라 생각해보시라. 그 루머와는 털끝만큼도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관련된 사실을 공 개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치욕을 겪고, 거대한 언론사와 혼자서 자기 돈으로 써 가며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보시라. 도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런 악몽을 강요 할 권리가 있느냔 말이다. (중략) 진정 법의 심판을 받고 건강한 사회의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은, 배부전 같은 피라미가 아니라, 국민들이 위임해준 막강한 권한을 지들 xx 로 휘두르고 있는


거대한 언론사들, 바로 그들이다.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이 싸움에 나섰다고 말하는 엄마 백지연. 언론들과의 전쟁, 반드시 끝까지 승리하시라,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마시라. 그 동안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며 나름대로 결론에 도달한 본지 이 싸움에서 철저하게 그대편이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도 그대편이다. 백지연 꺾이지 말고 힘을 내라. 으라차차, 화이팅 ! 1999. 11.8. '딴지일보' (백지연 사건을 까발려주마)중에서 어처구니없는 사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 뒤늦기는 했지만, 진실이 밝혀진 후 몇몇 언론이 그간에 내가 겪은 고통에 대 한 의미 부여를 하는 논설을 실은 것은 내 상처를 조금은 어루만져주는 것이었 다 나는 그들의 기사를 소중히 오려놓았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 거가 법정에서 공개된 다음날 아침 '한겨레신문'은 1999 년 11 월 27 일자 (백지연 씨가 지킨 명예)라는 제목의 사설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방송인 백지연 씨의 아들이 전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린 배부 전의 명예훼손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이 백지연 씨 승리로 마무리되게 봤다. 비 록 사실일지라도 어떤 개인에게 불명예스러운 일을 공공연하게 퍼뜨리는 것은 명예훼손이 될 수 있거니와, 유전자 감식을 통해 백씨의 아들이 전 남편의 아이 임이 확인됨으로써 그가 퍼뜨린 소문이 거짓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배씨는 타 인의 명예를 훼손한 탓에 응분의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재판이 진행중인 스포츠신문 등에 대한손해배상 청구 소송에도 유전자 감식 결과는 결정적 영 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선정적 보도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던 백씨의 사생활에 대한 갖가지 소 문도 일단 수그러들게 됐다. 우리는 백씨가 자신의 사생활이 온통 세인의 화제 가 되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선 용기에 박수를 보낸 다. 백씨의 이런 '투쟁'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기에 하 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유전자 감식이라는 이례적인 수단 을 무릅쓰고 이에 응하지 않던 전 남편을 상대로 아들 친권상실 확인 소송까지 제 기했다. 이번 재판은 백씨 자신과 아들의 명예를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생 활을 함부로 다루는 선정적 언론과 사이버 폭력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우 리는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본다. 검찰이 배씨에 대한 명예훼손의 정도 가 심하며 도주 우려가 있다고 구속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생활, 특히 유명인사의 사생활이 선정적, 상업적 언론에 의해 함부로 까발려지고 훼손되는 일이 다반사로 있어왔다. 그런 일들을 묵인하 고 확대 재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각자가 개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폭력에 가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이번 재판 이후 연예인이나 알려진 여성들에 대한 사생활 침해. 명예 훼손 이 어느 정도 견제되는 효과를 내리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개���의 인권과 사생활 보호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 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백지연 씨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전략)백지연 씨의 '진실'이 밝혀진 이상 그 동안 소문을 사실인 양 떠들었던 사람들은 속으로 좨 뜨끔했을 것이다. 소문은 형태도 모양도 없지만 일단 사람


들 의 입에 올려지면 소문의 주인공을 인정 사정없이 공격해 초토화한다 소문 에 굴복 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 나 백씨는 이에 맞섰다. 그의 당당함과 용기를 인정해야 한다. 여성, 특히 '성공한 여성'을 둘러싼 이런저런 악성루머에는 대개 남성 우월적 시각이 깔려 있다.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여성의 경우 능력보다는 외모와 이 혼 경력 등 사생활에 관심이 집중되고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즉각 '설친다'는 소리를 듣는다. 허황된 소문을 의심하기보다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기정사실 로 만들려 한다. 여자로서 성공하기도 힘들지만 성공을 '유지'하기도 힘든 곳이 우리 사회 다. 성공한 사람을 인정하고 장점을 치켜세우기보다는 근거 없는 소 문을 퍼뜨려 깎아 내리고 헐뜯는 경우가 많다. 소문보다 무서운 것이, 잘못된 소문이 모두에게 그럴 듯하게 먹혀드는 사회 분위기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는 이렇듯 일그러지고 뒤틀린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숨겨져 있음을 본다. '대한매일신문'은 1999 년 11 월 26 일자 칼럼에서 (백지연 씨의 명예)라는 제목으 로 다음과 같이 썼다 결국 이 사건은 백씨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개인의 사생활을 함부로 다루고 인권을 침해하는 선정적 언론과 사이버 폭력에 대한 경종도 울리게 됐다. 성공 한 여 성에 대한 남성 우월적 시각과 횡포, 연예인의 사생활 침해 및 명예훼손 에 대한 반성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신과 아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만신창 이가 되는 것 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서 이겨낸 백씨가 대견하다. 아마도 백씨 는 창창한 미래 가 남은 아들을 위해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시사저널'은 12 월 16 일자 특집 기사에서 (백지연 사건)을 다루면서 다음 과 같이 서두를 꺼냈다.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라는 소설이 있다. 올 들어 한국 사회에서 진행 된 일련의 사건, 박세리 귀화소동 ,O 양 비디오 사건 등을 따져보면 한국 사회는 어처구니가 사는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는' 사회이다. 지난여름에 불거져 5 개월이나 끌었던 백지연 사건'은 '어처구니가 살지 못하는' 그곳을 보여주는 결정판이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사건이었다. 유력 언론들이 지적한 대로 한낱 소문이 '사건'이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신 문의 사설처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반영되어 불거진 것이다. 그 배 후에는 여러 주역들이 있었다. 상업적 언론의 부채질이 컸고 대중의 맞장구가 주효했다. 언론의 분석대로 성공한 여성에 대한 깎아 내리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근저에는 여성, 이 사회의 약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또아리를 틀 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왜곡, 특히 이혼한 여성에 대한 폄하, 사회적 약 자에 대한'집단적 폭력이 이 사회에 잠재해 있다.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이번 소문처럼 학력 불문하고 계층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문은 없었던 것 같다"며 인터뷰의 말문을 열었다. 정말 그랬다 그만큼 내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 다. 못다 쓴 이야기 통신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발달하는데다가 인터넷 매체의 등장으로 21 세기 매스미디어의 구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변화 속에서도 계속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매스컴의 영 향력이다. 7 영향력은 힘이고 권위며 때로는 권력이 되기도 한다. 언론의 영향력 만큼 책임도 무겁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한때 언론중재위원회는 대충 이런 내용의 TV 광고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언 론에 의해 억울한 피해를 당하신 분이 있다면 연락해주십시오. 저희가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매일 수십 개의 채널에선 엄청난 양의 정보와 뉴스가 쏟아 진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그 정보를 알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테고 고마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 그 책임을 소홀히 하고 권한을 잘 못


사용할 경우, 사회의 한 편에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사람도 생겨난다 영향력만큼이나 피해도 크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스에 나을 만한 일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일 뿐,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피해는 곳곳에서 일어났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공무원 한 분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백지연 씨는 오랫동안 앵커를 하셨죠. 나는 정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해왔습니 다. 가끔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정부에서 일하는 모든 공무원을 싸잡아 매도하 는 듯한 보도가 나을 때마다 흥분해 항의하곤 했죠. 아세요? 평생을 열심히 일 해온 공무원이 뉴스에 나간 보도 7 하나 때문에 오명을 쓰고 불명예 퇴진하는 일 도 있다는 것을? 그럴 때마다 백지연 씨처럼 일선에서 뉴스를 전하는 사람들이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런데 백지연 씨가 언론사에 서 나오자마자 언론 과의 투쟁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참 아이러니컬한 일 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현실에 헷갈리기도 하구요. 어쨌든 '진실'을 위해서 라면 열심히 싸우십시오." 그렇다. 아이러니일 수 있다. 십 년 넘게 앵커로 일하며 나는 수천, 수만 건의 뉴스를 전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시라도 피해자를 낸 일은 없었을까 돌아보곤 했다. 내가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라 하더 라도 언론이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행해진 횡포가 있었다면 그 책임을 지어야 하는 집단의 한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언론의 관행이나 속성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던 나이지만, 지난 몇 달 동안은 나 자신이 직접 언론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보았고 직접 그 피해자가 되어보았다. 양쪽을 모두 보고 '실전으로 체험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것을 느꼈다. 잘못된 자식 한 명이 온 집안을 먹칠하듯이 잘못된 소수의 행태가 전체 집단 에 욕을 먹이는 경우가 많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소수의 잘못된 매체와 언론 인이 있기야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나름의 사명감과 직업정신을 갖고 있 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언론의 책임과 윤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며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서도 분별력과 사명감을 갖고 있다. 점점 더 첨예 해지는 매체간의 경쟁과 언론의 상업주의로 인해 올곧은 언론인까지 집단의 이 름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고뇌하는 양식'을 가진 언론인이 전체 구성원 가운데 얼마나 되느냐 에 있을 것이다. 언론 내부에 고뇌하는 양식이 없을 때 언론의 자유와 영향력은 위험한 '무기'가된다. 고뇌하는 양식의 사냥감은 '진실'이겠지만 '사실'에 접근 하기만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대다수 기자들은 하루하루 처리해야 할 기사와 정보의 양에 치여 언론 윤리 나 인권 문제, 개인의 사생활 보호 문제 등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을지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특종보다는 누가 더 빨리 기사거리를 잡아채느냐 하는 '시간의 특종' 에 힘을 쏟기만도 바쁜 현실 때문이다. 데드라인에 훈련된 기자들은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정확하게 특종을 잡아내느냐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따라서 기삿거리 를 보면 눈이 번뜩이고 오감이 바짝 곤두서는 것이 그들의 훈련된 본능이다. 그러나 기자들의 본능이 먹이를 쫓는 동물의 본능과 다른 것은 아무리 먹이가 탐나더라도 공략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이성, 인권에 기초한 최소한 의 양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최소한 그러한 양식을 가지고 이성적 인 판단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책임과 권한 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을 '진실의 파수꾼' 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 기자들도 종종 보게 된다 때때로 그들은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하기도 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내야 하


는 경우를 맞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오보죠뽁로 인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기자는 기자직 자체를 포기해야 하고 언론사는 거액의 배상금 때문에 문을 닫 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취재를 집요할 정도로 요구받는 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한 개인이 오보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도 언론 사나 기자는 건재한 경우가 많고 명확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정정은커녕 반론 조차 거부된다. 피해자가 명백한 증거를 통해 소송에 이긴다 해도 상처뿐인 승 리가 되기 쉽다. 보통 소송은 몇 년이 걸리는데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 은 "네가 감히 우리에게..." 하는 식으로 자사 지면이나 전파를 통해 피해자에 게 오히려 제 2, 제 3 의 피해를 입히는 보복적 성격의 보도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소 송을 제기했던 피해자는 제풀에 지쳐 소송을 취하하거나 끝까지 싸운다 하더라 도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고뇌하는 양식이 없을 때 이런 폐단 이 난무하고, 죄 없는 한 개인은 비극에 빠진다. 그렇다면? 언론의 영향력이 파수꾼의 힘이 되느냐 횡포가 되느냐를 두 눈뜨고 견제할 수 있는 것은 언론중재위원회도 아니고 법적 규제도 아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다. 나 스스로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내부 기제를 터득 했기에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에게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견제가 될 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정답은 독자와 시청자, 우리들 각자 각자의 깨어 있는 판 단력과 감시이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시민들의 힘이다. 시민들의 힘이야말로 언론의 영향력이 혹시라도 잘못 행사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견제 인 것이다 시민의 견제가 있을 때에만 언론 내부의 양식 있는 기자들도 비로 소 힘을 얻을 수 있다. 지난 1999 년 나는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었다. 나는 이 책에 그 상처의 일 부를 묘사했다. '내가 이만큼 상처받고 아팠다고요!"라고 응석을 부리거나 하 소연할 생각은 없다. 내게 이런 상처를 준 사람들의 만행을 폭로하겠어' 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원죄자격인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그들 하나하나를 나의 적으로 지목하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그들 또한 오늘의 언론과 이 사회의 잘못 된 풍토로 인한 피해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99 년 내가 목격한 언론엔 인격이 없었고 인권은 더더욱 없었다. 피해자가 오히려 인격의 매질을 당했고, 여러 매체의 지면과 전파는 몇몇 책임자들에 의 해 남용되고 오용되었다. 결국 소수 몇 명이 전체 언론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편의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인권을 생각할 능력조차 없어 보였다. 언론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것은 너무도 버거운 싸움이었지만, 나는 거기서 ' 진실의 힘'을 체험했다. 너무나 관념적이고 희귀한 것이어서 잘 와 닿지 않던 단어, '진실.' 나는 그 힘을 처음으로 몸소 경험했다. 이 책의 탈고를 하기도 전에 나는 '개정증보판을 생각했다. 계류중이거나 제 기할 소송 문제로, 또 다른 법적 문제 혹은 당사자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 못 다 쓴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탈고를 하고도 몇 날 며칠 동안 이 책의 원고는 내 책상서랍 속에서 겨울잠을 늘이고 있어야 했다. 명백하지만 못다 쓴 기막힌 이야기, 가슴 아픈 이야기, 일부 언론의 치부가 그 대로 드러나는 어록들, 꼭 밝혀야만 할 이야기들을 쳐내고 솔아내야만 했다. 여 기에 못다 쓴 이야기가 언제 빛을 보게 될지, 행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 라도 (어차피 나의 필력으로는 그 많은 일들을 완벽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 말 한마디만은 꼭 당부하고 싶다. 제발, 나 같은 희생자를 다시는 만들지 말 라고. 이젠, 그 고통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사태가 일단락 된 지금 나는 생각한다. 생을 알차게 일구려는 사람들이, 성실


히 살아온 한 개인이 단지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핍박받거나,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 사회의 누구도 그런 일을 그냥 두고보지 말아야 한다고. 한낱 '소문' 때문에 치러야 했던 나의 개인적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정면 대응을 선택해 투쟁한 것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편견을 깨뜨리는 몸짓이 되었 다면 내가 이유 없이 당한 고통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쯤은 소문에 젓가락을 따라 올렸던 사람이 왜 있을 것이다. 진실이 밝혀 진 후, 혹 소문에 동참했던 것에 머쓱해진 사람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주었으면 감사하겠다. 그래준다면 나는 그 모 습에 내 '투쟁'의 의미를 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같은 제 2 의 희생자가 나온다면 그때 나는 내가 '세상과 맞서 싸웠던 그 방법대로 그들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탤 것이다. 그것이 고통의 파도에 맞서 투쟁하고 승리한 끝에 찾아낸 '고통의 진정한 의미' 가 될 테니 까 말이다. 이제 지난 악몽에 대한 기록의 마침표를 찍으며 난 진정 지난해의 사건에서 해방되고 싶다. 그 고통을 제발 잊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투쟁의 과정에서 '적' 으로 분류되었던 사람들, 섭섭하기 그지없던 세상 모두에 대해 한번 씨익 웃고 훌훌 떨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세상과 화해하는 순간, 나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 하느니라 -요한복음 17 장 21 절 나는 지금 극심한 해산의 고통을 치른 느낌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다시 태어 나게 하는 해산의 고통이었다. 내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악몽 이전의 삶의 기 쁨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이 모든 고통을 잊���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또 백지연으로 태어나고 싶은 이유 성경에 '염려'라는 말이 365 번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이라면 사 회 변화의 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완만했을 유목민 사회의 기록물이 아닌가. 이 런 성경에 '염려' 라는 단어가 1 년 날짜와 똑같은 365 번이나 나온 다니... 예나 지금이나 매일매일 하나씩의 걱정을 안고 살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는 뜻일까? 새로운 소식과 정보가 넘쳐나고 혁신적인 기술개발이 가능해진 2000 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과거보다도 훨씬 크고 깊은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 다 예전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폭넓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기 가 힘들고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 또한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아닐까?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마약과 환각제 등을 통해 이 불안감과 고통을 잊으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비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며, 극단적으로는 타 인과의 관계를 거부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어쨌든 고통이나 걱정, 불안 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초대받지 않은 이 손님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주눅들게 만든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쓰러뜨리 기도 한다. 그리고 쓰라린 상처와 피해의식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나 역시 내 삶이 항상 '영광과 환희' 의 순간이기만을 바랐다. 실제로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그리고 방송인으로서 내 이름 석 자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까지는 이런 바람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물론 순간순간 크고 작은 걱정과 시 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작년의 사건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들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는 말을 가르쳐주려는 듯 고통은 나를 그 극단으로 몰 아갔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며 신을 원망하기까지 했고, 세상과 사람들 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너무 힘들어 삶에 회의를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릴 시간조차 없었다 직업상 해야 할 일들과 사 건과 관련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이곳저곳 을 바쁘게 오가면서 가끔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저 사람들 은 좋겠다. 저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지금 나만큼이나 기막힌 고통을 겪고 있 을까?' 단지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차창 밖의 사람들은 모두들 나보다 행복해 보였고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다. 세상 사람 다 행복한데 오직 나 혼자만 불행에 빠진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날도 방송국과 재판정을 오가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 었다.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체구가 자그마한 할머니가 파 한 단을 신문지 위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싶어 나는 일부러 차에서 내렸다. "할머니, 이 파 얼마예요?" "다해서 천 원에 가져가우." 순간 나는 할머니의 하루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졌다. "할머니, 여기서 이렇게 앉아 계시면 하루에 얼마나 버세요?" "색시 같은 사람이 좀 팔아주면 만 원어치도 팔고, 안 그러면 이삼천 원어치 팔기도 힘들어," "자식들은요...?" "에이그, 지들 살기도 힘든 걸 뭐." "..." "그나저나 색시는 참 곱게도 생겼네. 신수가 훤하구먼." "...?" 할머니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파를 정성스레 싸주셨다. 파를 들고 집으로 가 는 내 기분은 좀 묘했다. 신수가 훤하기는커녕 매일매일 끔찍한 전쟁을 치르느 라 고통과 분노에 휩싸여 있는 내 처지를 안다면 뭐라고 할까 싶었던 것이다. 하루에 오천원 벌이도 힘겨워 생계 자체가 문제인 그 할머니는 "소문이야 저 만 아니면 그만이지. 내일 쌀 살 돈도 없는 내 처지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지"라 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파를 냉장고에 넣으려다 말고 당장에 반찬으로 해먹 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왠지 정성들인 음식을 해먹고 싶어 파강회를 하기 위해 파를 데치고 마는 동안 내내 할머니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통, 그 절대적인 무게감... 사건이 터지고 난 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나만 고통을 당해 야 하는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또 나 자신이 절대적인 고통 속에 빠져 있었 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은 물론이고 타인의 존재 자체가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 었다. 고통에 '자가 발전의 메커니즘' 이라도 있는 것인지 내 상황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기 시작하면 더 큰 고통이 해일처럼 '나'를 휩쓸어버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절망의 늪 속에 깊이 빠져들고는 했다. 왜 그 할머니는 자식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연세에 겨우 파 한 단을 팔기 위해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을까? 그 할머니인들 왜 내가 이런 처지 가 되어야 하느냐는 원망이 들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은 편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럴까?"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할머니의 현실을 있 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날마다 변함없이 채소를 팔러 나


올 수 있지 않았을까? '타인의 고통은 나의 행복' 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남의 고통과 비교한 다고 해서 내 고통이 덜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그 자체가 절 대적인 무게로 덮쳐오는 것임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단지 남의 고통을 통해 서 내 고통은 잠시 잊거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왜 내가 이 세상에 하필이면 그때 태어났는지 그 이유(생물학적 의미가 아닌) 를 알 수 없듯이 고통도 그 발생 원인을 알 수 없다. 게다가 위기나 고통은 갑 자기 닥쳐오기 때문에(고통은 대부분 갑자기 찾아온다. 고통이나 위기에 예고편 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들은 당황하고 원망하며 좌절한다. 그리고 고 통은 괴물처럼 그 사람의 이성과 영혼을 갉아먹게 마련이다. 그날 저녁 파강회를 먹으면서 나는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혔던 사건에 대한 집착과 내가 왜 그런 헛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따지는 일이 무의미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아이도 뜨거운 것이 있으면 얼른 손을 치운다. 뜨거운 것이 있으면 손을 치우고 무거운 것이 있으면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손이 델 정도의 뜨거움조차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뜨거워서 어 쩔 줄 모르면서도 내려놓기 싫은 마음의 '집착'과 '오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고통이나 시련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역사적으 로도 '개방' 이라는 이름의 서구 열강의 압력을 중국과 일본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현저한 국력 차이를 낳지 않았던가. 고통이나 시련을 받아 들이는 모습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내적 기제로 활용하 느냐에 따라 고통은 암적 존재가 될 수도 있고, 항암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고통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내느냐가 문제이다. 이 런 의미에서 고통은 그 사람의 용량을 실험해볼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도 하 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힘든 싸움을 끝낸 직후에 열린 한 강연회장에서 어떤 참석자가 내게 물었다. "여성으로서 성공하셨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놓쳤다고 생각해보 지는 않으셨나요?" 아마 이전의 나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니오. 둘 다 가질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여성으 로서의 행복보다는 성공을 택할 거예요." 하지만 그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통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면 같은 값이면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택하겠지요. 물론 고통을 견디는 동안에는 불의 시련을 겪는 듯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 터널을 빠져 나온 지금 전 어느 때보다 만족합니다. 나 자신이 자랑 스럽기 때문이죠. 고통을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 내부에 단단한 힘이 생겼 고 정신의 키가 훌쩍 자라났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건 성공보다 훨씬 값진 것입 니다. 예전에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볼 줄도 알 게 되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좀더 완 숙해졌으니 고통을 당한 게 마냥 잃은 것만은 아니지요. 고통을 이겨내는, 쉽지 않은 일을 해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충만해진 것을 느낍니다. 다시 태어나 서 또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전 다시 저 자신으로 태어나고 싶 습니다." 물에 빠져도 고개만 돌리면 기슭이다 '물에 빠져도 고개만 돌리면 기슭이다.' 기슭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물에 빠져 당황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을 비유해 고통이나 위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 군상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사면초가 의 위기 상황에 놓였더라도 큰 숨 한번 쉬고 주위를 잘 살펴보면 의외의 살 길 이 우리 가까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하거나 이겨내기 힘든 고통을 만 나게 되면 당황하거나 자포자기하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여유를 잃게 된 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돌아본다면 그 문제란 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도 있다. 한 젊은이가 사업에 실패하자 삶을 비관한 나머지 자살을 결심했다. 그는 자 신이 떨어져 죽을, 그 도시에서 가장 높고 가장 화려한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 다. 그는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도시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네온사인, 질주하는 자동차 물결, 정답게 오가는 사람들... 자신만 빼고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죽어야 해!' 그때 한 노인이 다가왔다. "젊은이, 거기서 뭐 하고 있소?" 그는 생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생각에 처음 보는 그 노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대략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나는 이 건물의 주인이오. 그러나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가진 재산이 아무 리 많아도 소용이 없소. 그런데 젊고 건강한 당신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고 하오?" 노인은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옥상을 내려갔다. 순간 그는 비록 자신이 사 업에는 실패했지만 아직 최고의 재산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젊음과 건강,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만을 믿고 따르는 아내와 자식이 있 다는 그 사실을... 고통과 마주보기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다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가 오열하고 있었다. "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통을 제게 안겨주십니끼?" 그 옆에 있던 수녀님이 그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왜 당신만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 니까?" 수녀님이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핀잔을 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주 본질적인 위로의 말이었다. 암환자들은 처음엔 암이라는 사실을 수용하지 않다가 일단 상황을 받아들이 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왜 내게말 이런 몹쓸 병이?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난이 닥쳤을 때 고난 자체보다 사람들을 더욱 고통 스럽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왜 내게만 이런 일이' 하는 원망과 분노의 감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 런 감정의 흐름을 끊어주기 위해 이 수녀님은 보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고통' 을 정의 내려준 것이다 시카고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게이츠 스패포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1873 년 그 는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의 권유로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계 획을 세웠다. 그런데 온 가족이 떠나기 직전 그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우 선 아내와 네 딸만 먼저 떠나보내고 그는 며칠 후 가족의 뒤를 따라가기로 하 였다. 그러나 가족이 탄 배는 망망대해에서 영국 선박과 충돌하여 12 분만에 침몰했 다. 안타깝게도 스패포드 부인만 구조되고 네 딸들은 모두 익사했다. 부인이 홀로 웨일즈의 카디프에 도착한 후 보낸 "혼자 구조됨"이라는 전보를 받은 남 편의 충격이 어땠을 지는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직접 당해보지 않은 이상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내 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계획한 여행으로 자녀 모두를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운명 에 대한 원망, 분노, 자책 등의 감정이 뒤엉켜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구조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길에 비극의 사고 해역을 지나면서 찬송 시를 하나 지었다. 자녀들을 삼켜버린 바로 그 해역을 지 나면서 말이다. 그가 지은 이 시는 몇 년 후 아름다운 곡이 붙어 '내 평생에 가 는 길(When peace like a river attended my way)' 이라는 찬송가가 되어 지금 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선사하고 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가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듯 그는 오히려 독하다 싶을 정도로 자기 자신의 고통을 내면의 평화로 승화시켜냈다. 물론 신앙이 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 을 것이다. 스패포드의 이야기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의 삶까지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엔 크고 작은 고통이 늘 따라다닌다. 고통을 피해 도망 다닐 수도 있고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삶에 행운만 있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요행 을 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고통스런 나날 속에서 그의 찬송가를 부르며 나도 내 마음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었다. 삶의 진정한 행운이나 행복은 고통을 넘어선 사람만이 만끽할 수 있 는 것이라고, 고통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삶의 의미도 알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지금... '성공'보다는 '감동'의 대상이 되고 싶다 나는 ���통을 이겨낸 사람이 좋다. 아무 어려움 없이 산 사람 특유의 해맑음도 좋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닥친 운명의 고난을 헤쳐 나온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 이 더 쏠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스토리는 내게 늘 감동과 위안을 준다. 미국의 방송인이자 사업가인 오프라 윈프리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집에 있을 때면 그녀의 토크쇼를 시간 맞춰 꼬박꼬박 볼 정도로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결코 미인이라 할 수도 없고 날씬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윈프리는 그 런 것을 능가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어떤 얘기 든지 끌어낼 수 있는 순발력과 기지, 그리고 독특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방송인인 그녀는 미국 출판계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가 진행 하는 TV 프로그램인 '오프라의 북클럽' 에서 소개된 책은 어김없이 베스트셀러 가 된다. 바로 윈프리의 영향력 때문이다. 그녀가 "이 책을 읽고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두들 그 책을 읽고 싶어하고 그녀의 '감동'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저자들이나 출판사들로서는 '오프라의 북클럽 에 단 한 번이라도 소개되기 위해서 안달이 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재클린 미처드라는 사람의 '바다의 저 깊은 끝'이라는 책은 윈프리의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 판매 부수가 60~70 배나 뛰어올라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윈프리 덕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그녀 덕에 예상 외의 매출을 기록한 출판업자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면 출판계에 대한 윈프리의 영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가 유 명한 방송인이라서? 그녀의 인기 때문에? 인기 있는 유명 방송인이 비단 윈프 리만은 아니지 않은가 윈프리는 늘 "독서가 내 인생을 바꿨어요"라고 말한다. 즉 사람들은 독서광인 윈프리의 감동과 느낌을 신뢰하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녀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만은 아니다. 윈프 리가 왜 독서광이 되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즉 그녀가 지나온 고통의 기록 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난한 흑인으로 태어나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 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인간 승리의 결정판 같은 휴


먼 스토리 류의 책을 편애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가난한 흑인으로 태어난 오프라 윈프리는 어린 시절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 로 남루하게 살았다. 늘 맨발이었고, 목초지의 소떼와 돼지우리를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그리고 외할머니에게 쉴새없이 매질을 당했다. 얼마나 많이 매질을 당했는지, 그녀는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백인들은 매질이 아닌 말로 다스려진 다. 그래서 나는 백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할 정도이다. '옥수숫대'로 만든 인 형을 갖고 놀았고, 가축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 외롭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 만, 책읽기와 말솜씨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서 매우 똑똑한 아이로 인정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마치 사생아와 같았다 이곳저곳 옮겨다녔고 자 주 가출했으며 주변의 여러 남자들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 누가 봐도 견디 기 어려운 고통이었고, 그런 경험을 통해 실제로 오프라 윈프리는 10 대를 방황 하며 보냈다.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임신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상처의 후유증으로 언젠가부터 밖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게 된 그녀는 방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방안에서 다양한 책들을 통 해 세상과 만났다. 그녀가 오늘날 토크쇼의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는 것 은 그녀의 이런 독서량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조차도 토크쇼에 활용했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간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 그랬거든 요"라고 말함으로써 토크쇼의 분위기를 보다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만든 것이다. '나도 알아요"라는 그녀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흑인으로서 겪은 인종 차별과 가난, 남성에게 당한 성적 학대라는 생 의 위기를 잘 극복해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흔히 택하기 쉬운 환락이나 타락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를 통해 결국 성공을 거머쥐었 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우뚝 섰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토니 모리슨은 윈프리의 영향력을 '혁명'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녀는 인종의 벽과 계급의 벽, 성의 벽과 관습의 벽, 그 모든 벽을 뛰어넘었다. 윈프리가 자신의 고통을 뛰어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가고 있을까? 가장 현명하게, 그리고 가장 강인하게 고통을 밟고 일어선 그녀에 겐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는 미국 방송계에서 윈프리가 다른 여느 스타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녀가 부러움의 대상, 성공의 대 상이라기보다는 '감동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의 빛은 오래 가지 않지만 진정한 삶이 주는 감동은 사람들 속으로 스며 들어 오랫동안 흔적을 남긴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넘고 모든 벽을 허물어서 자신이 나아갈 곳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문까지 열어주고 있 기에. 이제, '감동의 대상'이 될 만한 삶을 살길 소망한다. 친구, 마음의 지팡이 어떤 사람이 친구가 많음을 아버지 앞에서 자랑했다. 아버지가 잠시 아들의 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난 친구가 단 한 명밖에 없다. 넌 친구가 많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중에서 진정한 친구는 몇이나 되느냐?" 아들은 여전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친구들 모두가 저와 목숨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하나의 실험을 제안했다. 돼지를 잡아 가마니로 둘둘 말은 다음, 아들에게 그토록 자랑하는 친구들 집을 돌며 이렇게 호소해보라고 했다. "여보게 도와주게.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네. 이 시체를 잠시만 숨겨주게."


아들은 뭐 그 정도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함께 죽고 함 얘 살자던 친구들은 하나같이 당황하면서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국 그 모든 친구들에게 거절당한 아들은 몹시 실망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섰다. 그리고 단 한 명밖에 없는 진정한 친구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여보게 어 쩌다 이런 일을...?"하더니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어서 들어오게, 누가 보겠 네. 이건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 자네는 빨리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게." 아버지 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런데 친구, 자칫 자네에게까지 누가 돌아갈지 모르는 데 괜찮겠나?"하고 물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런 염려는 하지 말게.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라고 대답하며 오히려 아버지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이를 한쪽 옆에서 지켜본 아들의 눈에 그만 눈물이 맺혔다. 이 동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진정한 친구란 누구인가. 어려울 때 함 께 할 수 있는 친구,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당신은 몇 명이나 갖고 있는가. 내게는 나와 인생의 길을 동행해주는 귀한 친구가 몇 명 있다. 그 중엔 10 년 죈 친구도 있고, 20 년이 된 친구도 있다. 오래 된 친구가 특히 좋은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와 내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또한 그 친구의 기억 속에 사진처럼 간직되어 있는 나에 대한앨범'이 그 무엇 못지않게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너 그때 생각나니?" 하며 오래 전 얘기를 나누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이 상의 감동이 그 친구의 추억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물론 오래 된 친구만이 진정 한 친구란 법은 없다 우정을 나눈 지 몇 년 안 된 친구라도 베스트 프렌드가 될 수 있다. 이해와 교감의 폭이 시간을 뛰어넘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오래 된 친구든 아니든 간에, 내 좋은 친구들의 공통점은 나와 어려운 시간을 함께 했다 는 것이다. 우리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서 진정한 친구라는 진주조 개를 얻는다. 누군들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지 않겠는가 마는, 앞서 소개한 동 화에서처럼 진정한 친구 단 한 명을 얻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크나큰 위기를 겪으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은, 내 곁 에 진정한 친구들이 언제나 함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의 존재는 내가 어려울 때 비로소 그 빛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 같다. 평소 별로 마 음에 두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내가 너무나 힘든 순간에 내 곁에서 생각지 못한 위로와 격려, 힘을 주었을 때 나는 나이를 뛰어넘는 진정한 친구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대로 평소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남보다 못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 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분명 나의 동료였다. 십 년 넘게 한 공간에서 함께 일했 고 비슷한 일을 했기 때문에 무언의 동지애도 느꼈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항 상 마음속으로부터 그를 후원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평소 그와 남달리 친하게 지낸 편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 능하면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흔히 방송국 바깥 에 있는 사람들이 방송인을 평가할 때에는, 내부 사람들의 평가에 더 무게를 두 고 듣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적어도 외부 인 사 들에게는 같은 방송인에 대해 좋게 말해주는 편이고, 그것이 동료와 선후배로서 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지난해 내 아들과 관련된 헛 소문이 나를 괴롭힐 때였다. 이런 소문에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조직 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물었던 모양이고, 특히 그 사람 에게 그런 질문이 많이 쏟아졌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실제 사실과 는 상관없이' 소위 정통한 소식통이 되어버렸다. 가끔씩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얘, 그 사람이 너에 대해 말을 심하게 하고 다


니더라. 원래 가까운 데 있는 사람 중에 꼭 그런 사람들이 있는 법이니 조심해" 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처음엔 "설마, 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서 그런 말을 하겠어요?"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가 너무나 많은 모임에서 '정통한 소식통이 되어 정말 믿고싶지 않은 발언들을 심심찮게 내뱉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지연 씨 이혼 사유가 그거...였다면서요?" "에이, 설마 소문이 사실이겠어? 그게 사실이라면 당사자가 고소까지 하겠어? 재다가 유전자 검사라도 받아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다는데..." 대충 이런 식으로 대화가 전개되곤 하면, 그 순간 바로 그 사람이 나서서 번 번이 결정타를 날렸다는 것이다. "집안 건너 잘 아는데, 전 남편이 검사를 못 받을 이유가 있다잖아요. 소문이 확실하대요." 남에 대한 소문에 한 번쯤은 재미 삼아 동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 남의 말을 너무 심하게 하다가는 나중엔 자신이 오히려 욕을 듣지 않 던가? 그 사람은 결국 자신이 분린 씨를 스스로 거두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졌다. 소문이 거짓으로 판명되자 '확실하다"고 주장한 만큼 그 스스로 확실 하게 민망해진 것이다. 이번에는 주위에서 그 사람에 대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 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면서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게다가 본인도 애를 키우면서 왜 그렇게 말했을까?" 순간적으로 혹은 무심코 아무런 근거 없이 남을 깎아 내렸던 것이 그 사람에 게 어떤 만족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속내' 만 드러내 보인 꼴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평생을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지까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소문의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무책임한 입방아에 상처받을 때마다 나를 위 로해주고 분노를 녹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나의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거 의 매일 나를 둘러싼 '카더라' 통신이 새로운 버전을 업데이트(update)하고, "소 문에 대해 누가 어디서 뭐라고 했다더라" 등등의 이야기로 마음이 지옥이었던 어느 날 밤, 아끼는 친구가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지연아. 잘 있어?" "어머! 여정이구나." "..." "..." 우리는 전화기만 붙잡은 채,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탓 에 그와 연락을 한 지가 좨 오래 되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사정이나 마음을 굳 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친구란 그래서 좋은 것 아닌가. "잘 있어?"라고 묻는 그녀의 한마디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다 봤어. 정말 별 일도 다 있더구나. 한국엔 그렇게 뉴스거리가 없다든? 기가 막혀서." "다 봤구나. 그래, 내가 요즘 그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긴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친구는 서로 마음을 읽는다더니 그녀는 이미 내 마음을 다 읽고 있는데... "그런데 지연아!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난 네가 자랑스러워. 난 널 알거든." 친구의 마지막 그 말은 결국 날 울리고 말았다. 꼭꼭 쌓여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답답하게 막혀 있던 눈물이 터져 버린 것이다. 많은 말이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난 네가 자랑스러워"라는 말이 철옹성처럼 막아놓았던 감정의 문을 열 어 젖힌 것이다. 날 모르고 떠드는 세상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의 한마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힘을 준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20 여 분을 그렇게 함께 울었다. 이억만리로부터 전화 선 한 줄을 타 고 친구의 진한 사랑과 위로가 전해지면서, 그날 밤 나는 절망 속에서 나와 또 한 번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내게 귀하고 아름다운 친구들은 그 외에도 많다. 새벽예배를 함께 보며 기도 해준 친구들, 나보다 더 진심으로 기도해준 그들이 나를 지탱해준 지팡이였다. 소문이 거짓으로 판명되던 날, 그들은 가장 먼저 달려와 나와 함께 뜨거운 눈물 을 흘렸다. 그들이 나에게 베푼 사랑의 빛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진실한 위로와 격려로 난 몇 번이나 무너질 뻔했던 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내 등에 비수를 꽃은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있 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함으로 마침내 긴긴 터널을 뚫고 나와 빛을 볼 수 있었 다. 내가 어떻게 그 빛을 다 갚을 것인가. When I dream 우리 나라 성인 세 명중에 한 명이 보았다는 영화 '쉬리' 한국 영화사를 다시 썼다고 까지 평가받는 이 영화의 삽입곡 'When I dream'은 내게 독특한 버릇 을 만들어주었다. 그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을 볼 때마 다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며 혼자 엉뚱한 생각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특히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라는 구절에 이르면, 과연 사람들이 이 가사를 듣거나 부르면서 두 눈 지긋이 감고 생각하는 'you' 가 누 구일까, 무엇일까 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당신의 꿈만큼 당신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유명 잡지에 실렸던 광고 카피이다. 카피 옆에는 어린이가 먼 곳 을 쳐다보는 가운데 우주선이 발사되는 모습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정신이 가리키는 곳으로 성장은 따르게 마련이다' 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원대한 이상을 가진 만큼 성장할 수 있다는, 꿈을 크게 간진 자가 성취도 크다 는 설명일 것이다. 꿈은 미래시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꿈' 이라는 말은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하 지만 사실 꿈은 우리의 현재까지도 붙잡아준다. 꿈이 있으면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도 즐겁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기 때문에 머리와 몸이 건강 하게 움직인다. 꿈이 현재를 붙잡아주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경우는 위기나 어 려움에 봉착했을 때이다. 지난해 여름, 괴소문에 시달리느라 악전고투하던 나를 위로한다며 선후배 몇 명이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다. 우리는 함께 저녁 을 먹 은 후 갑자기 마음들이 일치해 일행 중 한 선배의 남편을 초대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아담한 장소로 옮겼다. 그 자리에서 내가 평소에도 늘 챙기고 아끼는 후배가 바로 그 'When I dream'을 불렀다. 후배의 노래를 들으며 역시 참 아름다운 노래구나 하고 생각 하고 있는데 웬일인지 노래를 부르는 후배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끝내 눈물까지 비치는 것이 아닌가. "얘, 너 왜 그러니?" "... " "너 또 그 사람 생각한 거니?" "응, 선배... 알잖아요... " "알긴 뭘 알아! 네가 저 노래 부르면서 생각한 'you'가 또 그 사람이었어? 나 참... " 후배는 내 핀잔에 후다닥 감정을 수습했다.


"선배, 미안해. 내가 지금 누구 앞에서 한탄이래... 선배 요즘 속이, 속이 아닐 텐데." "괜찮아. 남의 암보다 내 감기가 더 아프다더라. 다 자기 고통이 가장 힘겨운 거야" "그나저나 선배 참 용하다. 어떻게 그렇게 견뎌요. 나는 별것 아닌 일에도 두 고두고 눈물짓는대." "어떻게 견디느냐고? 나는 너랑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너와는 다른 'you'를 생각하거든." 그렇다. 내가 그리는 'you' 는 따로 있었다. 절제절명의 순간, 그 수렁 속에서 나를 건져내고 내게 투쟁할 힘을 주었던 것은 바로 나의 꿈, 내일을 향한 나의 비전이었다. 꿈을 이룬 미래의 내 모습이 최후의 순간에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준 것이다. 그 꿈은 절망에 빠진 나의 현재를 희망에 찬 미래로 이끌어주는 존 재이다. 고통과 맞서느라 모든 힘과 에너지, 정신이 다 고갈되고 소진되는 듯할 때마 다 나는 내 꿈을 생각했다. 늘 꿈꾸던 나의 미래가 있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생각을 되새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절망을 이기 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매순간 재확인해야 한다. 내 미래의 꿈 과 비전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기 확신'은 현재의 고통을 결국은 이겨 낼 것이라는 보증과 같다 그런 보증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지난여름, 나는 절망이 아무리 커 보여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당장의 고통을 견디는 것은 분명 힘들다. 하지만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이 고 통은 지나간 고통이 될 것이고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래, 어차피 지나갈 것 어디 한번 부딪쳐보자' 하는 오기가 생기곤 했다. 그러면 현재의 고통을 이길 힘이 나도 모르게 다시금 솟구쳤다. 나의 'you' 는 나의 미래이고 꿈이고 비전이다.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버리는 선택이 '나'를 채워준다 누구에게나 유난히 힘든 해가 있다는데 나 역시 그런 해가 있었다. 상황도 달랐고 사안도 달랐지만 1797 년과 1992 년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고통 의 시간 들이었다. 두번 모두 무고하게 고통을 당했다는 점에서 비슷한데, 시간이 좀 걸 리긴 했지만 다행히 나는 그 두 번의 힘든 싸움을 모두 이겨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견뎌냈나 싶고, 나 스스로를 용하게 여길 만큼 그 당시에는 수렁처럼 깊은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강하고 독 해서라거나 주어진 고통을 거뜬히 이겨낼 만큼 내공이 쌓여 있었기 때문은 아 닌 것 같다 무엇이 날 지켜주고 지탱해주었을까? 살면서 가장 곤혹스럽고 힘든 순간 중의 하나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을 때이다. 그나마 이 길로 가도 좋고 저 길로 가도 좋은, 이 떡도 놓치기 아깝고 저 떡도 놓치기 아까운 행복한 양자택일의 순간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삶에는 그런 순간보다는 그 반대의 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떤 길을 택하든 간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결국 잃을 것밖에 없는 그런 최악의 상황 말이다. 지난 1992 년이 내게는 그런 한 해였다. 우리 나라 방송사 초유의 장기 파행을 가져온 MBC 파업 사태 속에서 나는 '나 홀로 고통'을 치러야 했다. '기득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버린다! 1987 년부터 우리 사회 곳곳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언론사에도 노조 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권력의 시녀이기를 거부하고 이제는 민주 언론으 로 거듭나겠다는 뜻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편집권의 독립과 낙하산 인사


의 중지 등이 노조의 요구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조의 민주화 요구는 끝 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MBC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9 시뉴스를 진행하고 있던 나는 9 시뉴스에서의 상징성 때문에 파업에 동 참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회사와 노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아 야 했다. 게다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이 MBC 파업의 상 징으로 나를 전면에 등장시켰기 때문에 양쪽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졌고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불과 스물 일곱 살 나이의 여성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 무나 버거운 상황이었다. 회사 경영진이나 노조원 모두 내 소중한 동료이자 선배들인데 본의 아니게 그 둘 사이에서 내가 싸움의 정점이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리고 방송인으로서 방송 민주화에 대한 내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그 토록 사랑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갈등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내 고민을 대신해줄 수 없었고 마땅히 의논할 상대도 없었다. 나와 똑같은 상황에 있어본 선험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량한 사막 위를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라고 할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 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결국 난 아무 것도 얻을 게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경영진의 요구에 따라 방송을 진행할 경 우 나는 노조와 시청자로부터 방송 민주화를 가로막고 나 혼자 살기 위해 동료 를 저버린 배신자' 라는 원성을 들을 게 뻔했으며 그것은 언론인의 한 사람으 로서 내가 갖고 있던 소신과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또 반대로 파업에 동참하면 앵커라는 공인으로서 책임을 유기하고 시청자와 약속을 어기는 셈이 될 뿐 만 아니라 회사로부터 앵커직을 박탈당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의 목표 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고, 방송 활동을 통해 내 소신을 펼칠 장(논)을 아예 잃 게 될 수도 있다. 당시 MBC 경영진은 백지연이 방송을 거부하면 앵커로 복귀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는 이미 내가 방송 거부에 참여한 다음에도 "다음주 월요일까 지도 복귀하지 않으면..." 하는 위협적인 말을 일주일 단위로 반복했다. 경영진 의 위협 자체는 어떻게 보면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 역시 모두 가 내 고참 선배라는 데서 판단의 어려움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과 성을 다해 쌓아온 앵커로서의 내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다는 것 때문에 기가 막혔다. 주변에서는 '몇 년 동안 고수하던 자리를 쉽게 포기하겠느냐'는 성급한 추측 을 하기도 했다. 9 시뉴스의 앵커라는 자리를 대단한 기득권으로 생각했던 모양 이다. 그러나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9 시뉴스 앵커'라는 자리가 아니었다. 내 가 그토록 사랑한 일과 그 동안 열심히 해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커리어를 한순간 에 포기해야 한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정답 없는 문제로 인한 갈등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잃을 것밖에 없는 선택,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라면 남들이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래서 끝까지 방송 거부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파업이 끝나 다른 모든 노조원들은 제자리에 복귀했지만 나는 2 개월의 정직 과, 방송 출연 금지 7 개월, 9 시뉴스 앵커 박탈이라는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사 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방송인에게 있어서 방송 출연 금지' 는 거의 사 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정직 기간 중에 미 대사관으로부터 미 대통령 취 임식과 관련한 초청장을 받았을 때도 회사는 "근신중인 사원이 어딜·.." 하는 말로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기는 했지만 그 사이 한국에서는 더욱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앵커로 복귀하기 위해 청와대에 로비를 했다는 근


거 없는 모함이 몇몇 노조원 사이에 퍼지고 일간지 한 켠에까지 보도된 것이다 (당시에도 그 일간지를 제소해 소문이 허위임을 밝혀냈다). 이해가 안 가는 일 이었다. 내가 로비를 했다면 회사로부터 왜 그런 압력을 받았겠으며 왜 앵커 자 리를 박탈당했겠는가? 더구나 나는 한 달 동안 미국에 가느라 국내에 있지도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헛소문이 일간지에까지 보 도되고 또 사실처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 던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1992 년의 지독한 홍역을 치르고 나서 나는 흔히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언가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문제' 라는 이 치 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무엇을 취할 것이냐 하는 선택보다 훨씬 더 어 려운 문제이다. '버리는' 선택을 감행할 경우 결국 '기득권'을 버려야한다 는 것 인데, 기득권을 버리면 당연히 '기득권'에 부가된 권위와 행복뿐만 아니 라 물 질적 영위까지도 잃게 된다. 남는 것이 있다면, 자신과 타인 모두에 대한 당당 함,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겠다는 '초심'뿐이다 하지만 남들이 기 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면 기득권 은 물론 이고 명분이나 신의, 명예까지 한꺼번에 잃게 된다. 당연히 떳떳함도 사라지고 초심마저 없어진다. '버린다'는 선택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뭔가를 '버려야하는 선택' 은 단순히 '포기하는 것'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는 데 그 어려움이 있다. 현재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을 하는 것 인데 선택 자체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물욕이나 명예욕 등으로부터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는 보 통 사람이다. 따라서 뭔가 버린다는 것, 그것도 기득권을 버리는 것은 남모르는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때의 선택은 어쩌면 고통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 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작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이다. MBC 노조 파업이 나 지난해 여름 사건으로 인해 내가 내린 선택과 결단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고 통 을 잉태했다. '고통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법 1999 년 세간에 떠도는 괴소문에 대해 내가 이례적으로 법적 대응이라는 강수 를 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7 일 이상 가는 소문 없다'는 말대로 가만히 앉아 소문이 가라앉기 만을 기다리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자초하는 선택 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일을 또다시 접어야 했다. 기득권을 버릴지 언 정 진실을 선택하겠다는 나의 고집 아닌 고집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문과의 싸움도 힘들었지만 정말 힘든 건 바로 나 자신과 의 싸움이었다. 사회적 이슈였던 MBC 노조 파업과 달리 작년 여름의 사건은 당사자인 나 혼자 거대 언론과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편견과 맞서 싸워야 하 는 것이었고, 아이까지 연루된 문제여서 싸움이 더욱더 어려웠다 그래서 순 간순간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흉내낼 정도였다. 그때 내가 겪는 고통을 안타까워했던 한 선배는 이렇게 위로했었다. "지연 아, 지금은 물 속에 빠져 아무 것도 안 보이겠지만, 고개만 돌리면 뭍이 바로 코앞에 있어," 선배의 말이 맞았다. 숨이 끊어질 듯 고통이 극에 달해, '이러다 내 가죽겠구나' 싶을 때마다 신기하리 만치 그 고통의 끝은 반드시 찾아왔다. 작년 여름 그 몇 개월 동안, 밀물과 썰물처럼 한 고통이 서서히 밀려와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다시 빠져나가면 또 다른 고통이 이내 덮쳐들곤 했다. 하 지만 나는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느덧 고통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처음엔 헤엄치는 법을 몰라 허우적대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고


통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허우적거림을 멈 추고 차츰 헤엄을 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통 속에서 나 자신을 띄울 수 있게 되었다. 쉽게 타협하기보다 차라리 고통이 수반된 선택을! 1992 년,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했던 선택은 당장에는 내게 또 다른 상처를 안 겨주었지만, 결국 나를 7 시뉴스 앵커라는 원래의 자리로 당당하게 복귀시켰다 그리고 1999 년 나는 또다시 힘든 선택을 했고 고통을 자초했지만 '진실'을 밝혀 냈고 아들과 나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쉽게 타협하는 선택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런 갈등 상황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러나 어차피 살이 즐 겁고 유쾌한 선택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면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기득권 을 버리는 선택, 그래서 고통을 껴안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 선택이야말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길일뿐만 아니라 궁극적 승리와 진정한 성취를 가져오는 길임을 경험으로 깨달 았기 때문이다. 얄팍한 계산과 눈속임으로 기득권을 챙기고자 하는 선택은 잠시 잠깐의 성공 을 줄뿐이다. 세상이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득권을 과 감히 포기하는 선택을 통해 고통 속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웠고, 헤엄을 치면서 나처 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나의 자존심을 높여주었고 웬만한 일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하고 심지 굳은 내면의 세계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버리는 선택이 오히려 나를 채워준 것이다. 나는 이제 고통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선택이 내 면의 두려움을 없애주었기 때문이다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손안에 확 움 켜쥐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초심의 원동력이 되 살아났다. 이는 무엇보다도 약하고 부족한 나, 적당히 타협하고 싶어하는 또 다 른 나와의 싸움에서 거둔 진정한 승리였다. 나의 '위기관리' 매뉴얼 5 가지 작년 말 친하게 지내는 방송인 친구들이 오랜 마음고생이 끝난 것을 축하한 다며 한턱 내겠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약속 시각보다 일 찍 도착한 1 과 나는 근처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 물건 하나를 고른 다음 지갑 을 꺼내려 는데... 앗, 이게 웬일이람! "어? 지갑이 없네?" 옆에 있던 L 이 나보다 더 놀라며 내 가방을 뒤져보기 시작한다. "언니, 집에서 안 갖고 나온 거 아니야?" "아니, 아까도 썼잖아. 아이고 또 소매치기 당했나 보다. " "어쩌지? 언니." "할 수 없지, 뭐. 그런데 그 도둑 웃긴다. 돈 많게 생긴 네 지갑은 놔두고 왜 내 걸 가져가냐? 안 그러니?" "언니는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 지갑 잃어버려놓고는 속도 안 상해?" "상하지, 왜 안 상해. 하지만 어쩌겠어, 잃어버린 것은 기정 사실인데 속상해 한다고 뒤집어져?(말은 이렇게 우아하게 했지만 속쓰린 건 물론! 그 돈이면 스 웨터? 가방? 구두?)" 나는 잠깐한숨을 내쉬었지만, 재빨리 전화를 걸어 카드 분실 신고부터 냈다. 그리고 지갑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해내서는 종이에 꼼꼼히 적어두었다. 카드 외에 잃어버리면 안될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더 큰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니. 우리 오늘 저녁 약속 취소하자. 지갑도 잃어버렸는데 기분 상하잖아." "지갑 잃어버린 것과 저녁 약속이 무슨 상관이니? 가자!" 그날 난 지갑을 잃 어버린 덕분에(?) 저녁을 거하게 얻어먹었다. 위기도 관리될 수 있다 '행복의 뒷면은 불행이다' 라는 말처럼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위기를 피할 수 는 없다. 지갑을 잃어버리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실직이나 질병, 사고 등의 개인 적 위기, 더 나아가서는 IMF 와 같은 국가적 위기에 이르기까지 그 위기란 것 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다. '갑자기 찾아온다'는 속성 때문인지 사람들은 위기를 재난에 비유하곤 한다. 엄청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았던 1999 년, 나 역시 그 위기로 몸살을 치렀다. 그래서 가끔은 위기를 예방하는 백신을 발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만화 같은 공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피하려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게 위기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매도 많이 맞으면 맷집이 생긴다는 말처럼 위기를 져다보면 나름대로 위 기 극복 노하우, 위기관리 능력이 생긴다는 점이다. 평생에 걸쳐 찾아올 위기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듯했던 작년 여름, 나 역시 처 음에는 자신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사건과 부딪쳐나가면서 점차 위기 도 관리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 그리고 관리 능력에 따라 위기를 더 빨 리, 더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위기의 실체를 파악해라 우선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위기의 실체부터 냉정하고 정확하게 파 악하라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특히 여성들은 위기가 닥치면 울고불고하면서 감정을 분출하거나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자신이 당한 불행을 하소연함으로써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냥 잊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위기를 더 큰 위기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얄 한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아무리 따지고 억울해해도 문제해결 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기 자신을 연민과 피해 의식에 빠뜨려 위기 극복에 필요한 자신감과 용기만 잃게 만든다. 위기라는 녀석에게 아무리 화를 내보았자, 그 녀석에겐 별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난여름의 사건은 내게 '초특급' 위기였다. 사건의 발단은 PC 통신에 오른, 기 사라고 하기도 어려운 글이었다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글 의 내용과 그 글을 올린 사람의 신원, 그의 글이 게재된 홈페이지의 성격, 몇 명의 네티즌이 그 글을 보는지, 그 글을 삭제하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는 지 등등을 면밀히 검토해보았다. 그리고 변호사와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상의 했다. '이런 사람은 혼을 내야 돼' 라는 생각에 당장 고소하고 싶었지만 그 당 시로서는 고소가 상책이 아니었다. 고소를 하는 순간 지하에 잠복해 있던 헛소 문이 지상의 모든 제도권 언론으로 불거져 나와 소문을 모르던 사람(혹은 소문 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알려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단 소문이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하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의미도 없어 진 채 나 홀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게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배부전이라는 사람을 찾아내 대응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혹시나 제도권 언론이 기사화 할 것을 대비해 추후의 법적 대응책도 미리 검토해두었다. 배부전을 곧바로 고소하지는 않았지 만 그의 신원도 파악해두었다.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 다.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일사천리로 처리했다는 말은 아니 다. 분노와 억울함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내게 닥친 위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종이에 적다 보니 차츰 생각이 정돈되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소문의 근원이 되었던 이야기, 즉 결혼과 이혼 모두가 나 스스 로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기에 이혼 사유를 둘러싼 헛소문에 대해 다른 사람에 게 하소연할 필요도 없었고 동정이나 위로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내겐 전 혀 거리낄 것이 없었으니까. 사실 모든 위기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따라서 타인의 위로나 동정 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위로나 동정을 받다 보면 자신이 처한 불행의 무 게만이 더 크게 느껴질 뿐이다.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 같다 는 착각에 빠지면, 계속해서 엄청난 힘으로 달려드는 위기에 점점 잠식당할 뿐 이다. 그러므로 위기가 닥쳤을 때 감정을 어떻게 추스르느냐가 위기관리의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생각보다 일은 훨씬 수 월하게 해결될 수 있다. 문제해결 범위를 분석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하라! 위기의 실체를 파악한 후에는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문제해결의 범위를 알 아보고 분석해야한다. 이때도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이 일 을 어쩌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극단적인 위기 상황이 닥치 면 보호 본능 때문에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평소 엔 자신의 잠재력을 모르고 있다가도 위기에 부딪치면 숨어 있던 자신의 잠재 능력을 표출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순하기만 하고 세상 물정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성들이 남편을 잃거나 파산 위기가 닥쳤을 때 마치 아마조네스 라도 된 것처럼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종종 보지 않는가. 결국 내가 우려했던 대로 소문이 기사화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까지 대응 할 것인지 생각했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기사를 쓴 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내 가 기사화를 용인했으며 그 기사에 대해 만족해했다는 주장까지 여러 매체 에 실었다. 애초에 배씨를 고소하지 않은 이유는 소문이 기사화되고 확대 재생산되 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소문이 기사화된 이상 소송 을 미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배씨에 대한 신분 조사와 소문을 기사화한 매체에 대한 법적 대응의 수준을 검토해두었기 때문에 고소와 소송은 즉각 이루어졌다. PC 통신에 글을 올린 배씨는 형사 고소, 그 글을 처음 기사화한 제도권 언론 사 기자는 민사 소송이었다. 형사 고소도 검토했었으나 그럴 경우 기자 개인에 게 치명타가 될 수 있고 어차피 개인적 처벌이 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수준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사실 고소와 소송은 이성적 대응책이고 감정적 대응이 그보다 앞서 나갈 수 도 있었다. 예를 들어, 뺨 한 대라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사건 해결에 1%의 도움도 주지 못한다. 겨우 뺨 한 대 때 리는 것으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뺨을 때리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 해소밖에 되지 않는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법적인 방법으로 응당한 대 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물론 "소송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언론사를 상대로 어떻게 싸우느냐'는 걱 정 어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내 마음은, 있는 돈을 다 잃는다 하더라도 또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인 싸움일지라도 결단코 싸우겠다 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명예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 문이다. 더구나 아들의 장래가 걸린 일인지라 나는 어떤 것이든 감수했다. 나에 게 그것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 이 확실해지면 돈이나 일상적인 평화 등


나머지 모든 것은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위기관리의 두 번째 단 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이다. 주저하지 말고 행동하라. '돌격 앞으로!' 세 번째로, 위기의 실체를 파악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되었 다면 주저하지 말고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 머릿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하 면서 뜨뜻미지근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그만큼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워 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들어서면,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장군처럼 대 담하게 달려들 필요가 있다. 단, 이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위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온 신경과 역량을 한꺼번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싸워야 할 상대 중에 언론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 이 나를 말렸다. 게다가 내가 방송인이기 때문에 언론과 싸움을 벌여서 이득 될 게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 역시 그 말에 수긍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는 한 번쯤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고, 나로서는 아이와 내 명 예가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연예인은 물론이고 유명인들에 대한 소문이 기사화될 경우, 나중 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당사자가 이에 항의해 제재를 가하는 일 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소문을 기사화해도 해 당 언론은 사과 기사는 고사하고 다른 소문이 있을 경우 또 아무 문제 의식 없 이 기사화하는 악습을 반복해왔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나 역시 언론과 싸움을 벌여나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 다. 뒤를 돌아보면 볼수록 주춤거리는 내가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느 순 간,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것보다 과감한 결단이 더 필요하 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쨌든 무모하리 만치 저돌적으로 덤벼들자 결국엔 이 기지 않았는가. 위기와 마주치는 연습을 자주 하라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위기 관리법은 유비무환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평상 1 자신의 내부에 늘 위기관리시스템을 작동시켜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평 소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일수록 위기가 닥쳤을 때 쉽게 주 저앉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반면에 웬만한 일에는 잘 흔들리지 않는 삶 의 가치관이나 안정적인 심리 기제를 가진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도 쉽사리 흔들리 지 않는다. 언젠가 일본 여객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추락한 비행기에서 한 남자의 유서가 발견되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절제절명의 순간에 그는 가족들에게 유서를 쓴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 었을까? 처음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시시각각 으로 덮쳐오는 죽음 때문에 비행기·안이 아수라장이었을 텐데, 그 속에서 펜 과 종이를 챙길 수 있었다면 그는 지독하게 냉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족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자신의 할 말을 남기는 그의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정 리되어 있는 그 모습이 사람이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로봇 같다는 느낌이 들었 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내가 그 남자를 지독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절제된 삶의 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 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우리는 늘 사건과 사고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평소에 다른 사람의 위기관리 대처법도 눈여겨보고 차를 타고 오갈 때 나에 게 만약 무슨 사고가 일어난다면 무엇부터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다 보면 정말 위기가 닥쳤을 때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우스


운 얘기지만 나는 작년 여름 이후 없던 버릇이 생겼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성 수대교를 건널 때마다 만약 이 다리가 내 눈앞에서 또 무너진다면 무엇부터 해 야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어떻게 대 처하면 좋을지 머릿속에서 비상 대비 훈련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죽음 을 연습하며 살면 잘살 수 있다고 했는데 이와 비슷하게 나는 가능한 많은 순 간 에 '위기와 마주치는 연습' 을 해본다. 벼랑 끝에서도 하늘을 향해 난다! 신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안겨준다는 말이 있듯 아무리 큰 위기의 순간에도 빠져나갈 방법은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강 조하고 싶다. 흔히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마지막 카드는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일 뿐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작년, 나는 소문을 유포시킨 배부전이 구속되면 문제가 일단락 될 줄 알았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소문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발 없는 소문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심지어 배씨가 구속된 것은 내 가 사법부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이었다. 갑자기 내 영향력 이 어떻게 그렇게 커졌는지... 그래서 피눈물을 쏟아내는 심정으로 유전자 검사를 요청했다 그런데 문제 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당연히 적극적으로 나설 줄 알았던 전 남편의 태도였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이때가 되자 지금까지 숱한 난관을 비교적 냉철하게 바 라보던 내 감정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 도 이제 한계를 넘은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유전자 검사 를 해야만 했다. 아들에게 그런 검사를 시키는 것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 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 소문의 진실을 밝혀야 했고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정공법밖에 없었다. 결국 난 친권상 실 선고 신청을 내기에 이르렀다. 괜히 해보는 제스처가 절대 아니었다. 더 이 상 물러설 곳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나도 기막히고 절박한 심정으로 꺼낸 최후 의 카드였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절대절명의 끝에서 최후의 방법을 꺼내 들자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드디어 진실은 밝혀졌고 나와 아들 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 끔찍했던 지난여름, 자고 일어나면 강도를 더해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나는 무엇으로 그 순간 순간들을 버티었던가? 물론 잃은 것도 많은 싸움이었다. 귀한 시간도 잃었고, 지루한 싸움을 치르느라 구상 중이던 사업도 미루어야 했다. 무 엇보다도 '백야' 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했으며 몸도 상할 대로 상했다. 그러나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위기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 내 안엔 위기를 만났을 때 내가 무엇을 먼 저 버려야 하는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인지,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가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한 나름의 노하우가 남아 있다. 아마 내겐 앞으로 또 다른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전보다 더 슬기롭게, 내 호흡과 에너지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그 끔찍한 녀석을 멋지게 물 리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비상구는 열려 있는가?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누군가 날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너무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 시련에 처했을 때, 위기에 처했을 때, 고통에 허덕일 때, 연약한 존재인 인간 들은 눈앞에 놓인 고난과 위기, 고통을 안겨준 원인(대부분의 경우, 사람들 또 는 물질이 그 대상인 경우가 많다)만 바라보기 쉽고 싸움의 본질을 망각한 채 그 대상을 향해서만 무조건 돌진하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소문을 퍼뜨린 배부전과, PC 통신의 글을 기사화한 '스포츠투 데이'지의 C 기자를 재판정으로 불러내면, 유전자 검사를 하고 나면 진실은 밝혀 질 것이고 내 고통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배씨와 C 기자를 상대로 한 재판과 전 남편을 법정에 불러내는 데 내 모든 힘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소송 기간 내내 그들을 수도 없이 미워하고 원망했다. 인간을 향한 분노 와 미 움이 얼마나 극단까지 갈 수 있는지를 체험했다. 이렇게 우주를 집어삼킬 만큼 넓고 깊기만 한 분노와 억울함을 주체하기가, 나 자신을 추스르는 일이 너무나 힘겨웠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백야를 계속 진행해야 했고 학교 강의도 해야 했으며 법정에까지 쫓아다녀야 했다 또 한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다. 속으로는 통곡을 하고 있는데 겉으로는 웃어야 하니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따 로 없었다. 지금도 백야에 개그맨 남희석씨가 출연했을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바로 '스포츠투데이' 지에 PC 통신의 글이 처음 기사화된 날이었다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들었고,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희석씨와 이영자씨가 장단을 맞춰 방청석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했지만 나 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이영자씨가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해 "백지연 씨가 원래 창백해요. 그래서 농담을 해도 창백해요. 여 러분, 시원하시죠?" 등의 농담을 하면서 슬쩍 넘어가 주었다. 그날 방송을 본 시청자 중에서 예리한 분들은 내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썰렁한 말을 하거나 아 니면 남들 다 웃을 때 웃지도 않는 등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내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방송에서 프로로 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 아쉬운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유는 배부전도, C 기자도, 전 남편 때문 도 아니었다. 아무리 분노가 치민다 해도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나 자신이 문제 였다. 헛소문을 통신에 올린 배부전은 법정 구속을 시킴으로써, PC 통신에 오른 헛 소문을 양지로 끌어올려 기사화한 C 기자에게는 법적 소송을 함으로써, 법정 진 술을 끝까지 거부한 전 남편에게는 친권박탈 소송이라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결 국 난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흔들릴 때 극단적인 감정의 아노미에 빠 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실제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수많은 시 청자를 눈앞에 둔 공인으로서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장 어려운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교훈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싸워야 할 실체가 천하무적의 골리앗이라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 의 주체인 내가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해서 쓰러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극한 상황에서는 평소 나를 지키고 붙잡아주었던 신앙도 힘을 잃었고 기도도 할 수가 없었다. 용서와 화해의 마음이 담겨야 할 기도는 분노 와 절망의 무게에 짓눌리고 말았다. 이렇듯 고통이나 절망, 나태, 포기, 두려움 등의 감정들이 나를 침몰시키려 들 때는 기도마저 안 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보내는 통신 마저 끊고 마음의 벽, 정신의 감옥에 갇혀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조차 도 나


의 신은 늘 내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것 같다. 너무 지치고 두려워 서 나를 지탱하고 있던 내 손을 놓아버렸을 때 문득 길을 가다가, 혼자 영화를 보 다가 나도 모르게 기도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평소 좋아하던 성경 구절이 입 밖 으로 터져 나오기도 했다. 안간힘을 써도 물러가지 않는 고통에 지쳐 있을 때 날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의 힘이 내 등을 다시 밀며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조금씩 '본연의 나'를 되찾게 되었고, 원망과 분노로 들끓는 용 광로 속에서 내 마음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고통이나 시련은 없다.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고통 과 시련도 거저 극복되지는 않는다. 고통에 침몰하면 최후를 맞게 되지만 고통 에 침몰하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어떤 고통도 다 극복할 수 있다. 고통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거는 싸움이자 그 싸움을 평화로 이끄는 과정 이기도 하다. 나는 내게 달려드는 고통을 향해, 내 신념을 강화시키는 기 도로 맞섰다. 고통이나 위기가 닥쳐오면 누구나 두렵다. '잘해낼 수 있을까?, '이겨낼 수 있 을까? 하는 우려와 걱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마음속은 두려움이 점령해버린다. 먹구름이 짙게 끼면 동터 오르는 태양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먹구름 뒤에서도 태양은 반드시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순식간에 마음속 평화와 안정을 앗아가듯 '잘할 수 있어' 하고 생각 하는 자신감은 마음속 두려움을 단번에 쫓아버릴 수 있다. 두려울 때 내 신념을 되찾아주고 강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즉, 기도는 위기를 극복해 내는 나의 고유한 기제인 것이다. 기도 속에서 나는 다시금 나를 단단하게 세 울 수 있었다. 기도로 미래에 대한 신념을 다지는 것은 고통에서 탈출하는 문이고 미 래에 도전할 힘을 주는 에너지원이다.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는, 즉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내면의 평화를 얻어내 는 당신만의 기제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그 기제를 얼마만큼 잘 활 용하고 있는가? 마음은 나의 발전소 2000 년 1 월 1 일 0 시. 새 천년이 시작되던 그 시각, 사람들은 모두들 분주했다. 여느 연말 연시와 달리 묵은 천년이 가고 새 천년 이 시작되기 때문인지 전세 계가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 전부터 그 시각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 다. 그만큼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들떠 있었다. 그런 환희로운 새 밀레니엄의 첫날, 난 이 책의 원고를 쓰느라 집에서 씨름 을하고 있었다. 그날은 좀처럼 내 곁에서 떼 놓지 않는 아들까지 할머니와 이 모들이 동행하는 신년 가족여행에 떠나보내고는, 아이를 가진 이후 처음으로 나 홀로 집에' 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자정에는 교회에 가서 송구영신 예배를 보 며 기도로 새해를 맞이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새 천년을 맞는 사람치고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도 조용하게 보냈다. 일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데, 문득 지난해 새해맞이는 어떻게 했지, 하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지난해 첫날 역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던 것이다. 2 년 연속, 컴퓨터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다니. 단지 다른 점은 지난해에는 집이 아니라 학교 연구실에서 책 원고가 아닌 논문 을 만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두 해 모두 새해 첫날을 너무나도 조용하고 학구적으로(?) 혼자 보낸 셈이었다. 남들이 보면 좀 불쌍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만은 그렇게 생각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 새 천년을 맞는다고 한강변에 나가 불꽃놀이 하는 것도 좋지만, 조용히 집에 앉아 새해 계획을 세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야. 그렇지? 지연!' 하고 스스로에게 확인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 데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하는 내 의지를, 갑자기 울린


전화벨이 여지없이 뒤흔들어버렸다.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한 친구였다. 딴 에는 새해 인사를 한다고 전화한 그녀, "얘는 무슨 청승이니? 새 천년이 밝았는 데 '웬 나 홀로? 우리 집에라도 와서 저녁 먹고 가!"했다. "아니야. 일하려고 일부러 아들까지 떼 놓고 가족여행에도 안 갔는데, 너희 집에 가서 놀 시간이 어디 있니? 일없어. 그나저나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친구 와 몇 마디 나누고 제법 씩씩하게 전화를 끊었는데, 왠지 마음 한 편이 시큰했 다. 물론 친구에게 한 말은 한 점 보탬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껏 잡아둔 평정심과 혼자서라도 씩씩하게 일하겠다는 의지가 갑자기 그 친구의 말대로 ' 청승'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청승은 무슨 청승. 나는 지금 할 일이 많다구!' '정말, 새해부터 혼자 이러는 게 청승은 아닌가? 머릿속에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하면서 몇 백 매의 원고 라도 단숨에 써 내려갈 듯 자신만만했던 태도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새 천년이 온다고 저렇게 호들갑만 피우면 실속이 없지' 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에 어느덧 갑갑함이 찾아들었고, '여행이나 갔다올 걸' 하는 후회까지 고개를 쳐들 기 시작했다. 항상 옆에 붙어 있던 아들이 없어서 그런지 아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면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이 너무나 커 보였다. '그래, 우선 비디오를 한 편 보자. 편안하게 쉬면서 마음을 정리한 후에 다시 신나게 일하는 거야!' 결국 휑해진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컴퓨터를 꺼버렸다 평 소에는 잘 가지도 않던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를 하나 골랐다. 신 정 연휴에는 모두들 집에서 비디오만 보기로 작정했는지, 재미있어 보이는 테이프 는 모두 빈 케이스인 채로 거꾸로 꽂혀 있었다. 결국 빌려온 테이프라는 게 남 들은 이미 다봤다는 '쉬리.' 그런데 내가 그 테이프를 집어들 자주인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 힐끔 쳐다본다. '왜 쳐다보지? 이 영화를 아직도 못 보았냐는 뜻인가? 영화는 그런 대로 재 미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다 끝나 가는데도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그 영화의 한 장면에 얽힌 추억 하나가 떠올라 기분이 더 엉망이 되는 것이다. 더욱 코미 디 같은 일은 영화를 다 보고 비디오를 끄자 TV 에서 바로 그 '쉬리'를 방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설날 특집이었다. 그제서야 비디오 가게 주인 아저씨가 힐끔 쳐다보던 게 생각났다(아저씨도 참, 말 좀 해주지...). 거짓 ���정에 속지 마라 애써 마음을 잡고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지만 기분은 계속 찜찜했다. 외로워 서만도 아니고 짜증나서만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나를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마음이 그러니 글이 잘 써질 리가 있겠는가. 내 숨소리만 쌕 쌕 들리는 적막이 사람을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에 섰다. 거실 유리창 밖으로 한강의 풍경이 펼쳐 져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다른 때는 저 풍경이 굉장히 근사해 보이더니만, 이 순간엔 한강의 전망 좋은 아파트는 우울증이 있는 여자한테는 오히려 해롭 다'라는 말부터 떠오른다. '어휴, 내가 왜 이러지.' 결국 나는 원고를 쓰겠다는 야심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날은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음날 아침, 그 전날 괜한 청승(?)을 떨고 일찍 잠자리에 든 덕분에 새벽같 이 눈이 떠졌다. 하루를 공치고 나니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 눈을 뜨자 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창밖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하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기분 이 무척 상쾌해진다. 책상을 거실로 옮겼다. 비가 내리는 한강을 보며 글을 쓰면 잘 써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책상을 옮기고 노트북을 올려놓은 뒤 커피 한 잔을 만들어 자리를 잡았다. 어제 하루 종일 나를 휘감았던 까닭 없는 외로움과 우울한 기분은 온데간데없


다. 한강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듯했고, '아! 이런 날 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빗줄기가 흘러 약간 뿌옇게 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변의 모습은 고즈넉하 고 아름다웠다. 문득 헛웃음이 새나온다 어젯밤, 정확히 말하면 몇 시간 전, 바 로 이 자리에 서서 '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면 우울증이 도진다던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강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보면 글이 잘 써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똑같은 장소, 똑같은 상 황이건만 내 감정 한 올에 내 전체가 무너졌다 일어섰다 하는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마음속의 아주 작은 감정의 씨앗 하나가 마른 나뭇가 지에 불이 번지듯 급속히 나 자신을 사로잡곤 한다. 영화 한 편 보고 괜히 센티 멘털해져서는 옛날에 만났다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면서 혼자 우울해하고 외로 워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 사람이 현재 내가 외롭다고 느낄 만큼 그렇게 매력 적인 남자도 아니었고, 우리가 사랑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 스스로 괜 히 감상적이 되어서는 마음속에 생각할 대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점점 더 거 대 하게 키웠을 뿐이다. 또 어떤 경우, 갑자기 나 스스로 짜증이 나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 들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곁에 있는 사람만 이유 없이 내 화풀이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노력한 다. 이런 감정들은 사실 나만 경험하는 건 아닐 것이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이 런 감정에 많이 시달린다. 난 이것을 '거짓 감정'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외로 움, 걱정, 분노, 미움, 그리움 같은 아주 작은 감정의 씨앗 하나가 마음속에 던 져지면 급속히 번져 마음의 평정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만다. 자신도 모르게 '자 가 증식' 하는 이런 감정들은 종종 사람을 휘청거리게 할만큼 강력하다. 그런 거짓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재빨리 헤어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 만 한번 흔들린 마음은 의외로 오랫동안 제자리를 잡지 못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나도 가끔은 이런 거짓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 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속에 거짓 감정이 퍼지려고 하면 가위로 자 르듯 감정의 흐름을 싹둑 끊어버린다. 어떤 이들은 감정이란 게 가위로 자르듯 그렇게 단번에 잘라지는 것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사실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 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뿐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신 말고 누가 그런 거짓 감정의 싹을 자를 수 있겠는가! 별것 아닌 생각이나 감정에 속아넘어가게 내버려둔 것은 자신이니, 거짓 감정을 끊어버리는 일도 바로 자신이 해야 한다 내 마음은 나의 발전소이다.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으면 안 될 일도 잘 풀 리게 만들만큼 의욕이 치솟는 반면, 괜히 기분이 나쁜 날이면 모든 일이 꼬이고 자잘한 사고도 잦아진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나의 용량은 펜티엄급이 될 수 도 있고, 반대로 286 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 할 일 많은 세상, 내 마음 다스리기부터 먼저 훈련하자. 그리고 거짓 감정에 속지 말자. 에스프레소 커피보다 진한 외로움 기억을 더듬어보면 처음으로 신문에 내 이름 석 자가 난 것은 초등학교 5 학 년 때였다. 당시에 KBS TV 에서 '누가 누가 잘 하나' 라는 어린이 동요 경연대 회를 방송했는데, 신문의 TV 프로그램 안내 기사에 내 이름이 난 것이다 "오늘 저녁 6 시에 방송되는 '누가 누가 잘하나'에서는 초등학교 5 학년 백지연 어린이가 장원을 했습니다. " 어린 마음에 신문에 난 내 이름이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 던지 그 조그마한 기사를 오려놓고 꽤 오래 간직했었다 그때 는 알 수 없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가 소문에 시달리고 있을 때 방송가에서 알게 된 몇몇 친구들과 저녁을 함 께 할 자리가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소위 연예계 스타들이었다. 먼저 도 착한 나와 한 친구는 약속한 카페의 구석진 칸막이 공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 얼굴이 일반인들에게 노출된 신분이라 이렇듯 함께 자리를 할 때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택하는 것이 편했다. 약속한 친구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다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 하나 눌러 쓴 편한 차림이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이는 부담 없는 자리이기도 하거니와 모 처럼 방송이 없는 날이리만큼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놓치기 싫어 서였을 것이다. 제일 늦게 도착한 한 친구가 자리에 들어서면서 나를 보고는 서 둘러 입을 연다. "언니 왔구나. 어떻게 지냈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세상에 참, 어떻게 그런 소 문이 기사랍시고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고 난리야! 정말 기본도 없어!" 평소의 화끈한 성격대로 만나자마자 분위기를 압도한다. 평소 입심 좋기로 소 문난 선배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소문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지 평생 유명인 괴롭히는 걸 낙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나 봐. 그나저나 너 힘들까봐 내 속 터지는 일 있어도 연락도 못했 다." 옆에 있던 후배도 덩달아 말했다. "그래그래. 나도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생겨 언니한테 의논 좀 하려고 했는데, 언니 코가 석 자인 것 같아 전화도 못했어." 그때 상황에서는 내가 가장 큰일에 시달리던 터라 모두들 나에 대한 안부 인 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럭저럭 모두의 수다가 한차례 지나가고, 나도 한마디 해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왜 그랬어, 연락들 하지.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내 생활은 내 생활이지. 우 리 서로 안 보면 눈에 가시가 돋잖아 " 나의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린다 당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내가 여 유를 부리자 함께 있던 사람들의 힘겨움도 그 순간만큼은 한결 가볍게 느껴지 는 모양이다. 분위기가 밝아지면서 웃음소리가 칸막이 너머까지 전해지자 유리 칸막이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힐끗힐끗 우리 쪽으로 눈길을 보내곤 했다. 모두들 한바탕 웃고 마음이 가벼워지자 본격적으로 '맛있는 것'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사람들이 TV 에 나오는 얼굴들 맞아? 하는 의문이 들만 큼 미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음식들만 골라서 마구마구 시켰다. 생크림 들어간 온갖 종류의 케이크를 종류대로 시키고, 팬케이크도 생크림 잔뜩 얹은 걸로, 토스트 도 생크림에 아이싱 슈거까지 듬뿍 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주문이 하 나 더 추가된다 레귤러 커피가 아닌 진한 커피로. 주문 받는 사람의 눈이 휘둥 그레진다. 그리고 순간 누군가의 말이 걸작이다. "우리 이건 에피타이저지? 저녁은 개운한 걸로 먹자!" 물론 아무도 이의가 없다. 입이 즐거워진 우리들의 대화는 생크림만큼 부드럽 게 계속된다. 나의 질문으로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 언니부터 말해 봐. 언니는 얼굴엔 항상 웃음을 머금고 살면서 입으로 는 고민 고민 하니까 안 어울려, 고민의 주제가 뭐야?" 그러자 그녀는 특유의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 보면 고민도 아니지 그냥 늘 허전해. 일이 많아서 눈코 뜰 새 없 이 바빠 딴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마음은 항상 휑해. 너희들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겠니? 내가 뭘 바라고 지금 이렇게 뛰어다니는지... 가끔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 도대체 이렇게 해서 그 끝이 무엇인지... 결론도 없는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기만 해. 그러다 그것도 잠깐 또 발등 에 떨 어진 불 끄느라 튀어나가야 되니... 그러다 정말 가끔은 '에이, 결혼이 나 해버


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 뭐니?" 다들 공감한다는 듯 그녀의 말에 빠져든다.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에 급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나였다. "결혼이나라고? 아이고 이 언니가 큰일 날 생각하네. '결혼이나'라니! 혹 떼려 다가 혹 붙이려고 그래요? 보니까 언니의 고민은 또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이야." 그날 우리들의 주제는 외로움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가끔씩 자리를 함께 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에 대한 하소연을 마음 편히 들어주고 공감해줄 벗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도 각자 하소연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았고, 자신과 친 구들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었다. 차라리 외로움의 바다에 빠져버려라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가족이 있는 사람도, 남편이 있는 아내도, 아내가 있는 남편도. 도리어 같이 있어서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 친지 모른다. 외로움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상 떨쳐낼 수 없는 본능적 감정이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 외로움을 담아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을 해 결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더군다나 일반일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유명인들은 그 해결 방식이 일반인과 아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외로움의 문제는 보다 더 심 각할 수 있다. 유명인들은 유명하다는 이유로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식에서까지 상대적으로 제약을 받는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도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불편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짜증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그들의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 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친구들마저도 그들이 자신을 예전의 평범 했던 친구가 아닌 유명인으로 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때는 정말 '외로운 섬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그 '외로운 섬'은 평범함을 반납하면서 얻은 유명세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날우리들의 대화는 각자가 안고 사는 '외로운 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나마 '외로운 섬' 에서 느끼는 그리움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다. 그러나 대화의 끝은 절대로 '외로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외로운 섬'을 탈 출하려는 바람도 불지 않았고, 외로움의 어두운 자취를 남기려고도 하지 않았 다. 모두 외로움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예의 그 밝은 모습이 되어 다시 각자 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이 십수 년 동안 대중의 스타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 었던 힘이고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유명세를 치르면서 또래가 겪을 수 없 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견뎌내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남보다 일찍 스타 자리를 차지하면서 많은 것을 얻고 부러움도 샀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들이 거머쥔 것에 대해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떤 사람은 쓰러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살 아 남은 사람에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내공이 쌓였을 것이다. 간혹 오 랜 동안 스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명인들을 보면 그 나이 또래들에 비해 성숙한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외로움에 단련된 내공의 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통해 내가 배운 외로움의 해결 방법은 이렇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 게 외로움이 몰려오면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여기저기 힘과 시간을 낭비하 지 않고 차라리 그 외로움의 바다에 푹 빠져버리는 것이다.


만약, 지금 외롭다면 이렇게 해보라. 누가 옆에 있든 없든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새삼 확인시켜라 그리고 외로움의 바다에 빠진 자신과 똑바로 마주하고 대화하라. 고독은 시련 이 아니라 또 하나의 훈련이다. 외로움은 당신을 휘청거리게도 하지만 단단히 세워줄 힘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손을 뻗으면 언제나 가장 먼저 두 손을 내미는 든든한 친구를 얻게 된다. 바로 당신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외로울 때 필요한 것은 망각을 위한 술이나 잠시잠깐의 위안을 줄 떠들썩한 모임, 혹은 도피를 위한 수면이 아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날 에스프레소 한 잔이다. 나는 나를 경영한다 티벳에는 '내일이면 집지리' 라는 이름의 새가 있다고 한다. 이 새는 날씨가 따뜻한 낮에는 실컷 놀고먹다가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고 추워지면 오들오들 떨면서 '날이 새면 당장 집을 지어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러다 날이 밝아 햇볕 이 나서 다시 포근해지면 바로 지난밤추위에 떨며 했던 결심을 새까맣게 잊고 놀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또 날이 어두워지고 밤이 되면 그제서야 '아이고, 추워라. 내일은 날이 새자마자 바로 집부터 지어야지' 하 고 후회를 한다. 그러 나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낮에는 놀고 밤엔 달 달 떠는 생활을 계속 한다. 인간의 게으름과 편의에 따른 망각, 의지 부족을 풍자하는 이야기���다. 내일이면 집지리 새 와 완전히 반대인 새가 있는데 내일은 추우리' 라는 이 름의 새이다. 이 새는 열대 지방에 사는 새인데, 다른 새들은 모두 놀기 바쁜 대낮에 뜨거운 햇볕을 등지고 내일은 추울 거야 라고 걱정하며 집만 짓는다 그 렇게 걱정을 태산처럼 짊어지고 집만 짓느라 생을 즐기지도, 여유 있게 보내지 도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밤이 되어도 집이 필요할 만큼 날씨가 추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새 역시 몇 차례의 헛수고 경험에도 불구하고 해가 뜨면 또 '내일은 추울 거야'라고 걱정하며 하루 종일 쓸모 없는 집짓기에 여념이 없다. 머리에 온갖 걱정만이 꽉차 있는, 계획 없이 부지런만 떠는 인간의 전형을 꼬집는 새 이름이 다. 한 새는 너무 게을러서 탈이고, 다른 한 새는 쓸데없이 부지런해서 탈이다 그 러나 정반대인 이 두 새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두 새는 '전략 부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일이면 집지리 새'는 목표를 자주 잊어버리거나 방황하는 인간 유형을 가 리킨다. 어떻게 보면 목표가 없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목표를 잃어버린 채 그냘 하루하루 주어진 대로 즐기기 바쁜 이러한 사람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삶에서 그 어떤 새로운 성취감도 찾을 수 없고, 사회적으로도 생산적인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늘 남에게 의존 하며 기생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다. 재벌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던 패, 한 대기업 회장의 딸에 대한 얘기를 들었 다. 그녀는 돈 많은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로 인해 존재해오던 것을 향유하며 살았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사는 법을 깨닫지 못했다. 물론 그런 환경에서 도 목표가 있고 근면한 사람이라면 조건을 이용해서 더 많은 성취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의 급(?)을 맞춰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하나 낳았지 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혼을 했다. 설상가상 그 즈음 아버지의 회사까지 무너 졌다. 그녀는 그때 친구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산까지 다 날렸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 겠어.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데. 애 키우고 살려면 재혼밖에는 대책이 없는 것 같아."


기가 막힌 말이다. 멀쩡히 대학까지 나와놓고도 자신과 자식을 책임질 아무 런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재혼하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생계 대책이라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 후 그녀가 재혼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가 예전의 패션 고감각(?)을 찾기 위해 외국 브랜드를 찾아다닌다 는 얘기도 함께 들려왔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안주한 그녀는 목표가 없는 게으른 베짱이였다. 다시 출 발할 기회가 왔을 때라도 그녀는 내일을 준비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만약 그년가 재혼에 또 실패한다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조선시대라면 모 를까, 그녀의 의식 속에는 21 세기라는 현실에서는 휴지통으로 보내 삭제해야 할 내용물로 꽉 차 있다. 무엇보다도 구제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타는 그년가 아무 런 목표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경영하라 21 세기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 21 세기는 초고속의 시 대이다 목표가 있어도 따라가기 힘든 고속열차인데 목표마저 없다면 눈동자 만 굴리다가 도태되고 만다. 더욱 겁나는 사실은 변화의 속도가 빠른 만큼 한번 도 태되면 악순환의 반복으로 영영 도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일이면 집지리 새' 의 게으름이 용납될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나의 지적, 육체적 노력을 대신해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이 모든 것을 대신해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지식 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목표가 없는 배는 항로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고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된다. '내일은 추우리 새' 의 인간형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이라면 일단은 자신 안에 있는 조바심과 천재적인(?)준비성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소기의 목표를 달 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앞서서 내일에 대한 걱정과 초조 함,근심에 빠지기 때문에 시야가 좁다는 단점이 있다. 단견에 시야가 가려져 장 기적인 계획을 세우기가 어렵고 그나마 단기적 시각마저도 한정적이고 폐쇄적 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이러한 유형의 사람에게 있어 삶은 언제나 '고통의 바다' 일 수밖에 없 다. 그래서 이러한 유형의 인간이 갖는 가장 결정적인 단점은 그 무엇과도 바 꿀 수 없는 삶의 과정, 그 삶 자체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목표에 사로잡혀 과정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삶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 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목표라는 것도 제대로 설정된 목표인지가 불확실하다 따라서 이러 한 유형은 자신의 목표부터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자 신의 삶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선로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점검 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사람은 자신의 시선을 내일보다는 우선 '오늘'로 돌려야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충실한 현재가 있을 수 없 듯이 장밋빛 미래만으로 현재를 담보할 수는 없다. '내일이면 집지리새'와 '내일은 추우리새'는 극단적인 두 가지 인간 유형을 보 여준다 물론 모든 사람을 이 두 가지 유형만으로 이분법적으로 분류할 수는 없 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 두 가지 유형의 성격을 조금씩은 갖고 있을 수 있 다. 내 경우는 '내일은 추우리 새' 쪽에 좀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려서 부터 다음날 책가방을 미리 챙겨두어야만 밖에 나가서 놀 수 있을 정도로 다음 날에 대한 준비에 마음이 바빴다. 열심히 일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문득 '이것이 행복한 삶인가? 라는 썰 렁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이다. 그리고 행복은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실 난 성취하는 삶이 좋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하나하나 축적해나가는 삶이 좋다. 그 성취를 위해 내 몸과 마음이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 도 나는 그 성취 속에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목표가 분명하고, 순간순간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기제를 찾는 삶은 내 일은 추 우리 새' 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 않은가? 당신은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 자기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돌아보고 '삶의 전략 을 점검해보는 것이야말로 자기 경영의 시작이다 삶에 'if'는 없다 가끔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둘이 있다. 둘 다 결혼해서 토끼 같은 자식과 늑 대(?) 같은 남편과 함께 아옹다옹 살아가는 전업주부다. 물론 그들도 결혼 전에 는 나름대로 전문직을 가진 커리어 우먼이었다. 결혼하면서 자의반 타의반 직장 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지 몇 년이 지났다. 애들이 유치원 갈 나이만큼 자 라자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계속하는 나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얘, 너는 좋겠다 애 갖고도 네 일이 있으니. 도대체 우린 뭐니?" "그래, 여자도 결혼했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자기 일을 해야 해. 뭐 거창하게 경제적 독립 까진 아니더라도 자기를 개발할 수 있어야할 것 아니니?" 이렇게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그러지 말고 지금도 안 늦었으니 뭐라도 해봐." "얘는 이 나이에 윌 하니? 누가 우리 같은 아줌마를 써준대?" "할도 마. 남편이랑 애들이 내가 일한다고 하면 무슨 난리나 나는 것처럼 야 단들 칠 텐데." 둘 다 남편과 애들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투덜댄다. 그러다 이야기 는 '결혼만 안 했다면, '그런 남편만 안 만났다면 심지어 '아이만 안 낳았더라 도 라는 가정으로까지 확대된다. 최근에 세 사람이 또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우리 대화에 변화가 생겼다. 한 사람은 여전히 갖가지 가정을 세우며 신세타령만 늘어놓는데, 다른 한 친 구 는 조그만 자기 일을 시작했단다. "어쩌겠니? 남편과 헤어지겠니, 아니면 귀여운 새끼를 버리겠니? 아무리 부정 하려 해도 현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인데." 그 친구는 요즘 유행하는 소호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컴퓨터를 배우 러 다닌단다. 뭐 대단한 사업을 벌이겠다는 건 아니지만, 하루하루가 그렇게 재 미있고 신날 수가 없다는 거다. 시무룩해져서 삐죽 나온 입으로 한숨 만 쉬던 그녀가 손짓 발짓, 별 재미없는 에피소드까지 다 곁들이며 컴퓨터 배우는 이야 기랑 앞으로 할 일에 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내가 볼 때는 공상에 가까운 얘기 도 많았지만,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말하는지 나 역시 입을 벌리 고 그녀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다른 한 친구의 얼굴엔 그늘이 더욱 짙어지 고... 행복은 '느끼는 만큼' 커지고, 불행은 빠지는 만큼' 더해진다는 말을 어느 소 설에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행복은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배가되고 불행은 현실 에서 도망가는 만큼 깊어진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두 친구의 조 건과 환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한 친구는 해결할 수 없는, 아니 해결할 의지가 없는 현실만 한탄했고 또 한 친구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기 나름의 대안 을 찾 았다. 그 결과 현재 두 친구는 행복한 길과 그렇지 않은 길로 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주제가가 있다면 '~가 내 게 있다면','~한다면' 하는 가정법 메들리가 아닐까? 우리는 내가 갖고 있지 않 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속상해한다. '나도 무엇무엇을 갖고 있었다면' 또는 '나도 어떠어떠하다면' 하고 가정을 한다. 엄연한 사실은 회피한


채, 뭔가를 바라기만 하느라 실제로는 시간 낭비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거나 그러한 조건을 새로 만들 수 있다면 모를까 외모나 출생 등 고정 불변의 것만 붙잡고 한탄한다고 해서 무엇 이 달라질 것인가? 현실을 변화시킬 의지도 없이 주어진 조건에 대해 '~가 있 다면', '~한다면' 하는 식의 메들리만 부르고 있는 것은 불행을 심화시키는 행위 일 뿐이다. 엄연한 사실, 변화할 수 없는 조건이 존재하건만 여기저기에 가정법 공식을 대입하며 불행을 회피하려 하거나 잊으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고 미련한 짓이다. 몇 년 전 과학부 기자로 있을 때 '키 크는 수술'이 유행한다고 해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그 수술 방법이라는 것이 다리에 있는 멀쩡한 뼈를 톱으로 나무 자르듯 잘라 철심으로 뼈를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끔찍하지만 사 진을 보면 더 소름이 돋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키를 10 센티 정도 키울 수 있는 데, 이 수술을 받고 나면 최소한 1 년 동안은 걷지 못할지도 모르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비용도 엄청났지만, 나중에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 다. 기형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이 고육지책으로 한다면 발달된 의술의 혜택을 본다고 축하라도 해주겠으나 미용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사의 설 명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미용의 목적으로 그런 위험한 수술을 자 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들은 나는 왜 이렇게 '키 가 작지?', '키만 크다면' 하는 식의 신세타령을 했을 것이다. 또 키 큰사람 만 바라보며 '저렇게만 된다면' 하는 희망으로 1 년을 침대에 누워 있고, 평생 뼈 속에 철심을 박고 사는 인생을 감내했을 것인데... 글쎄, 과연 그렇게 키를 늘린 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이 갑자기 행복한 인생으로 바뀔까? 그러한 대수술을 감내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그 동안 '키' 문제로 얼마나 귀한 인생을 낭비했을 까? 그 사람이 '키가 작은 것도 매력이다', '키는 인생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라고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키를 늘리기 위해' 들인 공을 다른 데 쏟았 다면 그는 지금쯤 훨씬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때론 단호하게 '생각중지' 명령을! 만나기만 하면 '이혼해야 되겠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한 동료가 있 었다. 같은 직장에 있어 식사나 차를 함께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 다 그녀의 입에서는 '이젠 이혼해야겠어. 더 이상은 못 참겠어'라는 푸념이 어 김없이 흘러나왔다. 한 직장에 있으면서 그녀의 푸념을 들은 지 몇 년이 지났건 만 그녀는 그런 대로 아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처음 그녀의 푸념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라 '아, 이 친구가 이혼문제로 고민 에 빠졌구나.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 수 있게 할까?'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충실하게 그녀의 문제를 귀담아듣고,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해서 상담도 해주었 지만 허구한 날 같은 주제, 같은 타령만 늘어놓으니 언젠 가부터는 '또 그 소리 '하는 생각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게 되었다. "내가 그 작자랑 결혼하지만 않았다면... " "애초에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꽃필 수 있었을 텐데... " 얼마 전에 다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의 입에서 또 이런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잠자코 듣고 있는데 그날은 그녀가 입밖 에 내서는 안 될 소리까지 했다. "아휴, 내가 아이만 낳지 않았더라면 당장 이혼인데!"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이미 태어나 잘 자라고 있는 아이를 두고! 자기네 부부 사이가 나쁜 거야 자기들 불행으로 끝나야지 귀한 애한테 무슨 소리야." 순간 내 목소리가 커졌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과 안 할 말은 가려야 한다 는 생각 때문이었다.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했는데, 특히 어린애를 두고


하는 말은 항상 조심해야 하지 않는가. "얘, 내가 네 이혼 타령을 들은 것도 벌써 몇 년째인데, 애 이야기까지 할 바 엔 당장 이혼해라, 이혼해." 보다 못해 한 소리를 퍼부었다. 그러자 그녀는 머쓱해진 듯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말이 쉽지, 어떻게 이혼을 하니? 혼자 살 대책도 막막 하고..." "그럼, 다시는 이혼하네 마네 하는 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마. 이혼할 의지도 없으면서 이혼 타령은 왜 해? 허구한 날 이혼 타령만 하느라 잘 살 것도 못 살 겠다. " 한 구���화가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교통사고로 전신을 쓸 수 없는 최악의 장애를 얻었다. 온몸은 자기 것이 아닌 양 마비되었고, 오래 누워 있어 서 자신이 마치 고깃덩어리 같았다며 죽을 결심도 많이 했노라고 했다 선천성 장애도 아니고 한창 사회생활을 하다가 당한 사고이니 더욱 극복하기가 힘들었 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림 그리기가 너무 힘들어 한 시간 동안에도 몇 번이나 붓을 내던졌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위로 의 말 을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도 뜻밖의 말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하나님께 감 사한다고 했다. 생명이 있다는 것과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만으 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준수한 얼굴엔 진정한 감사와 평안 히 있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한 번이라도 창가에 내 다리로 서서 하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하고 말하며 웃었다 "안 되겠지요 그래도 이젠 괜찮아요." 정작 그를 바라보는 사람인 나는 차마 위로 7 차 전해 줄 수 없 었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진정한 미소와 감사가 어려 있었다. '그날 내가 그 교 차로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집에서 조금만 늦게 출발했더라면, 나한테 이런 사 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등등의 회한도 들법한데, 그런 부질없는 생각은 저만 큼 제쳐놓은 듯 그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그는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불행을 만났지만, 그 현실을 인정했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핀 그가 그린 그림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육신이 건강한 사람들에게까지 새로운 도전의 메시지를 주었다. 절망이나 고통에 처한 사람은 우선 그 고통을 피하고 싶고, 그래서 마음속에 수많은 '가정'들을 키우며 산다. 어찌 보면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가정'이 라는 기법을 써서 그 현실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 뿐더러 자신만 더욱 더 멍 들게 할뿐이다. 그래서 나는 반성이 아닌 자기 연민, 후회, 원망 등 현실의 시간 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감정들은 우리의 정신에 독극물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도 여러 가지 가정법적 사고가 꿈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난 단호하게 '생각중지' 명령을 내리고 뇌와 마음을 쉬게 한다. 머릿속을 맴도는 온갖 가정법'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주어진 현실을 하나하나 챙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혹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려 애쓴다. 그러면 깜깜하던 길도 점차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하고, 옴짝달싹 못하던 발걸음이 조금씩 떨어진다. 잊지 말자. 이 세상에 한쪽이라는 이름의 가정법으로 괴롭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다만 누가 먼저 현실을 인정하고 재빨리 달려나가느냐 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린다는 사실을. 커리어 개발을 위한 키워드 전문 직업인으로 일하다 보니 학교 강연 요청이 많다. 외부 기관의 요청은 거


의 고사하는 편이지만 학교의 강의 요청은 가능한 한 거 절하지 않으려 노력한 다. 꿈 많은 학생들, 길게 보면 나의 후배가 될 사람들에 게 내 경험을 빌어 몇 마디라도 도움이 될 말을 들려주고 싶어서이다. 사실 이것은 그들의 선배로서 내 의무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이 기도 하다. 물론 이런 강의를 하자면 반나절은 족히 비워야하기 때문에 스케줄 이 바쁠 때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마 주하면 잠시나마 '강의 요청을 거절할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지곤 한다. 학생들의 자세가 퍽 진지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에 들어서면 늘 작은 웅성거림이 귓전을 간지럽힌 다 "이야, 되게 길다", "TV 에서 볼 때보다 더 말랐다"등등, TV 밖에서는 처음 보는 내 인상에 대해 옆자리의 친구와 불평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 만 그런 수런거림도 잠시, 학생들의 눈망울은 다시금 반짝이고 강의 내용을 하 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표정도 이내 진지해진다. 나는 주로 방송과 관련된 내용의 전문과목 강의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커 리어 디벨로프먼트(career development)와 같은 시대 변화를 반영한 실용적인 강연도 맡게 된다. 직업이 세분화되고 산업화의 역사가 깊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개념이 정립되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커리어 디벨로프먼트'라는 개념 자 체가 생소한 것 같다. 커리어 디벨로프먼트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직업(평생 직업)을 통해 자기만의 능력과 경력을 쌓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커리어 플래닝(career planning)' 이라는 개념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바다로 나아가는 배가 방향도 없이 항해하는 것과 방향을 정하고 항해하는 것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결과 차이가 크다.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 서 커리어 플래닝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더구나 이제 '평생 직장' 의 신 화 가 깨지고 있지 않은가. 직장 내의 문화 또한 연공서열 식이 아닌, 경력과 능력 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최 고로 끌어올리기 위한 커리어 디벨로프먼프는 사회 진출을 앞둔 학생들에게 더 욱더 관심 있는 주제이다.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내 강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나는 하나 의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 꿈이 있습니까? 자신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놓았나 요?"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하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흔히 요즘 세대를 자기 표현이 뚜렷하고 자의식이 강하다고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그리고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 저절로 되는 통과의례'쯤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인지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한 에고(ego)가 부족하다. 여전히 부모가 하라고 하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왠지 멋있어 보이는 것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거기에 자신의 꿈과 비전 을 의탁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직업을 갖고 싶다는 대략적인 희망 과 바람'만 갖고 있을 뿐 그 직업을 향한 '절실한 욕구'가 별로 없다. "자신과 대화를 해본 적이 있나요? 자기 안의 에고(ego)와 진지한 대화를 해 본 때가 언제인가요? 아직도 자신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면 한 번쯤 시간을 내서 조용히 자신과의 대화에 들어가 보십시오. 대화는 다른 사람하고만 하는 게 아닙니다. 나와의 대화가 많아야 내면을 채워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삶 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질문해보십시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 인지부터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커리어 플래닝의 첫 단계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진입해버리는 내 공격적인 질문에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바로 이 시점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렇게 그들 내부에 자문이 생기면 내 강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가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대답이 나오면 이제 스스로를 진단해 보십시 오. 타인 진단이 아닌 자가 진단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 자 신이 삼각형인지 타원형인지 다면체인지 분석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미래가 어떤 것이고 현재 내가 가진 능력이 어느 정도이며 내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러 한 자가 진단이 커리어 플래닝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 내 이야기는 계속된다. "자가 진단이 끝났다면 자신이 원하는 커리어에 대한 정보 조사를 하십시오. 그 커리어를 쌓기 위해 필요한 능력도 알아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자질 을 비교해보십시오. 그래서 자신이 보충할 것과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꼼꼼 히 알아보세요. 이렇게 해서 미래의 방향이 설정되면 보다 구체적인 설계에 들 어가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주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세요. 자신이 원 하는 커리어를 앞서 실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 봐야 그 누구도 여러분의 입에 떡을 넣어 주 지는 않으니까요." 커리어 개발의 핵심, '어떻게 일할 것인가' 이 부분쯤에서 나는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있다. 흔히 커리어라고 하면 '무 엇을 했느냐하는 결과를 중시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일할 것인가가 커리어 개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아이템을 갖고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 라 그 결과물이 천양지차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는 그 출발선에서의 모습은 엇비슷하다. 그런 데 1 년, 2 년이 지나고 점차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앞서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에 분명한 차이가 생긴다. 바로 '어떻게' 일했느냐에 차이 때문이 다. 어 떤 직업을 택하든 간에 타인과 세계를 향해 얼마나 정신의 눈이 '열려 있느냐' 에 따라 커리어 개발의 내용은 아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또 요즘에는 '전문가가 되어 살아 남으려면,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정보를 파 야 한다' 하는 식(사실은 그거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식으로 사람 겁주 는 듯한 말)의 논리가 만연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되기에 앞 서 우선 종합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영화와 음반, 출판과 영화의 크로스 오버 등 매체와 매체간의 결합이나 반도 체 기술의 발전이 첨단 의학이나 검사 장비 분야에 미치는 영향과 파급 효과만 봐도 한 분야에 국한된 정보나 지식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는 자명하다. 그래 서 나는 후배들에게 컴퓨터나 토익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다양한 독서와 영화, 만화, 음악, 미술 등의 예술 작품 감상에도 시간을 내라고 적극 권한다. 전문가 는 한 가지 일에만 유용할 뿐이지만, 종합가는 주어진 정보를 취합하여 보다 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커리어 개발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바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 냐'이다. 흔히 어학능력이나 해당 분야에 대한 실무능력이 커리어 개발의 전부 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나 명예, 책임감 등 이 그 사람의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 서 뼈저리게 느꼈다. 신의와 책임감이 높은 사람이 하는 일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신뢰를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대단한 커리어가 된다. 커리어 디벨로프먼트에 대한 내 강의가 마무리될 쯤이면, 강의실 안에도 훈훈 한 기운이 돈다. 열심히 내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을 다잡기 때 문일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열기가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서 느껴진다. 바 로 그때, 나는 '자존과 자애' 라는 개념을 꺼낸다. 이 대목에 이를 때면 제법 빨 랐던 내 말소리가 갑자기 느려지고 더 딱딱해진다.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다


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만은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겉으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적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평 가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집안의 수치가 되고, 괜찮은 직업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도 결국은 타인의 시선에 달려 있지요. 언젠가 저는 하버드 대학을 나와 소위 '딴따라'로 살겠다고 선언한 한 젊은 청 년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소 엉뚱한 진로 선택에 대해 부 모님들과 친인척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왜 하필 딴따 라냐고,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군요'라고 대답했습 니다. 그러면서 그는 딴따라보다 백수가 더 낫다는 어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현재 부모의 도움과 지원, 소위 말하는 좋은 학벌 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 강의 시간에 이 청년의 예를 드는 이유는 그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따르며, 스스 로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청년을 보면서 난 그가 분명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 가는 과정 속에서 '뭔가'를 발견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 다. 미국에서도 호평을 받은 뮤지컬 '명성왕후' 의 주연 배우는 한 인터뷰에서 이 렇게 말했다 "저는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일을 하 면서부터 제가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결국 저 자신을 인정 하고 사랑함으로써 저의 능력과 자질을 계발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커리어 개발의 출발점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 자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결국 자신이 내린 결정과 선택에 대해 스스로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또한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채워나가게 만든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기 개발 을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시련과 마주했을 때도 절망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안돼', '내 주제에 뭘... '하는 식의 자기 비하나 자기 학대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내팽개치는데 대체 누가 나를 아껴주겠는가. 강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준다. 그리고 선생이라기 보다는 삶의 선배로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말을 쏟아낸다. "자애나 자존심은 스스로를 존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켜나갈 수밖에 없는 '심지' 같은 것입니다. 즉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어떤 것이지 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대학에 가고 특정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학을 가든 혹은 어떤 직업을 택하든 간에 나 자신, 나 스스로를 만족시 키기 위해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도 존재 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남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존과 자애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자존과 자 애의 기반이 단단해질 때 여러분의 커리어가 더 힘을 얻고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기댄다 하버드 대학교의 스탠리 호프먼 교수는 21 세기라는 이 시점까지 미국이 체제 상의 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미국 국민의 경제적 마인드를 꼽 았다. 특히 그들의 '자기의존(self·reliance)' 정신을 들었다. 미국인들은 정부에 바라고 원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를 얻게 되


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어릴 때부터 타인은 물론 심지어 부모에게조차 기대지 않고 자 신의 힘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하는 독립적 성향을 교육받는다. 그들의 이러한 자기의존정신에서 도전과 개척 정신이 나왔으며, 바로 여기서 21 세기에까지 '팍 스 아메리카나' 가 계속될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새 천년이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남들은 새 천 년이라고 들떠서 난리인데 그녀는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다. 그 후배 역시 새 천년을 부르짖는 소리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무슨 일 있니? 연초부터 목소리가 왜 그래? 젊은애가..." 후배는 새해 인사를 하는 등 마는 등 신세 한탄부터 한다. "여기저기 난리예요. 나만 빼고 남들은 다 잘 되는 것 같아요. 게다가 저 회 사와 계약이 다 되어가니까 더 불안해요." "왜 불안해? 계약이야 다시 하게'되는 것 아냐?" "계약직이라는 것이 원래 불안한 거잖아요. 잘릴지도 모르고... 나, 다른 데 알 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런 생각만 하면 기운도 없고 밥맛도 싹 가셔 요. 나, 한끼도 안 먹었어요, 오늘도." "계약이 얼마나 남았는데?" "3 년 계약이었으니까 이제 1 년 남았죠." 나는 그날 후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내가 그에게 한 말은 "1 년이 나 남았다"는 것이었다. 그 1 년 동안 '잘리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만 하면서 시 간을 죽이면 진짜 내몰리게 된다, 그러니 누구도 너를 자르지 못할 너만의 무기 를 만들기 위해 1 년을 잘 써먹을 생각이나 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속이 비 면 더 우울해지는 법이니까 맛있는 것 찾아 먹고 잠 한숨 푹 잔 뒤에 다시 이야기 하자고 덧붙이며 전화를 끊었다. 최근 들어 이 후배와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제법 많아졌다. 나 또한 때로는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과도함을 느끼곤 한다.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의 즐거움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다. 하는 일이 있으면서 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있는가 하면 잘 될 수 있는 일인데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며 사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우리의 불안은 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생기는 이유 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과욕 아니면 자신감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망과 과욕은 다르다. 야망에는 발전이 있지만, 과욕에는 자기 파괴의 위험만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과욕은 현실 속에서 제어가 될 수도 있고 스스로 문제를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불안을 야기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감의 부재이다 그런 데 이 자신감의 부재는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자신감이 서 있지 않으면 언 제 어디서나 남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당장의 문제는 임시방편으로 대 충 넘어갈지 모르지만, 마음의 불안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조금이라도 벅찬 일이 닥치면 나 대신 이 일을 해줄 누군가'를 반사작용처럼 떠올린다. 또 어떤 일이든 결정할 순간이 되면 나 대신 답을 찾아 줄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그가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때는 이 방법 저 방 법 다 써본 후 포기상태에 이르렀을 때쯤이다.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남에게 더 의존하려는 것은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을 대체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래 서 사람의 성숙도를 자기의존(self-reliance) 정도로 가늠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려서부터 별로 남에게 기대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 내가 조숙하 고 잘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거 나 천부적으로 독립심이 강한 성격을 타고났기 때문도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일찌감치 주변으로부터 받을 도움이 전혀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


문이다. 소위 '기댈 언덕' 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기댈 언덕'이 없었던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세상에 영원 불멸의 '기댈 언덕'이란 어차피 없는 것 아닌 가? '기댈 언덕이 없다고 생각하니 믿을 구석이라곤 나밖에 없었고, 그래서 나 는 나 스스로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나에게 '기댈 언덕' 이 있었 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에 대한 신뢰가 지금처럼 강하지는 못했 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고 그 신뢰를 나의 신을 믿는 신앙으로 강화했 다. 내가 MBC 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뭔가 기댈 언덕을 마련해 두었겠 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건대 '기댈 언덕은 없었다. 오직 나 자신 을 믿었고, 그래서 스스로를 안정된 직장에서 허허벌판으로 내몰았다. '난 할 수 있다. 내가 유일하게 기댈 언덕은 나를 다시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항상 그 지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고, 더 나은 무언가를 채워왔다. 간 혹 어깨가 시리기도 하고 가슴 깊이 가느다란 떨림이 있기도 했지만 난 내 안 깊은 곳에서부터 샘솟는 무언가를 느끼곤 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자기의존(self-reliance)이 내게는 가장 확실한 '기댈 언덕' 이었고 그 결과 내가 이룬 성과와 오류 모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 고 그 과정 속에서 아마 내 정신의 키는 한층 더 자라지 않았을까? '나와의 약속'을 위하여 작년 말 증권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한 친구와 저녁을 먹는데 자연스 레 화제가 주식으로 모아졌다.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두둑한 보너스를 챙긴 그 친구를 일행 중의 한 명이 부러워하자 그 친구는 증권사 객장에서 벌어지는 흥 미진진한 풍경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벼락부자가 된 사람의 그늘엔 얼마 안 되는 전 재산마저 날린 사람이 더 많다는, 흔히 듣던 얘기를 비롯해 갖가지 에 피소드가 많았다. "그런데 말야. 한심한 사람들도 너무 많아. 모자, 부녀가 함께 와서 하루 종일 객장에서 죽치는 사람들도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앉아 있는 걸 까?" "아니, 경제학 개론이라도 가르치려나? 보나마나 한탕주의만 가르치겠군." 다른 친구가 걱정된다는 듯 말을 받는다. 증시 객장에서 대단한 실물경제(?) 라도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하루 종일 시황 판의 빨간 숫자만 들여다보게 한다면 그 아들의 머릿속엔 도대체 무엇인 남을까? 삶의 좌표가 행복을 만든다 내가 아는 방송작가 모씨는 방송작가 일을 왜 오랫동안 해서 제법 이름도 알 려지고 경력도 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작가가 최근 바로 그 증권시장의 돈 벼락 세례를 맞았다. 경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방송사 작가 월급이 그렇게 넉넉한 편은 못된다. 그 작가는 결혼해서 살림도 하면서 한푼 두 푼 아껴 2 천만 원 정도를 여유 자 금으로 모았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가 전해준 정보를 듣고는 한 벤처기업 의 주식을 샀는데 남의 일로만 알았던 돈벼락이 그녀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식 이 몇 배, 몇십 배도 아닌 몇백 배급 상승해 본인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거 금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그녀가 무척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한동안 일 에 심드렁하고 자신의 삶에 짜증스러워하는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이상한(?) 증 후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돈벼락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나가던'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한 달쯤 후 예상과 달리 그녀에 대한 행복하


지 않은 풍문이 들려왔다. 그녀가 갑자기 돈벼락을 맞자 그녀 주변에 웬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들었다나? 갑자기 돈 필요한 사람들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원하는 대로 다 퍼 주자니 좀 그렇고 거절하기도 그렇고... 결국 시어머니의 준엄한 요청에 상당 부 분을 헌납(?)한 그녀는 나머지 돈을 가지고 사업이나 해볼까 하고 구상중이라고 하는데, 그것 역시 말처럼 쉽지만은 않아 고민이라고 했다. 그녀가 갑자기 생긴 종자돈으로 사업을 해서 몇백 배, 몇천 배의 열매를 거 두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순식간에 십수 억 원을 벌었다는 말 에 "좋겠다"며 다들 부러움을 금치 못했지만, 그녀는 갑자기 생긴 돈을 감당하 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방송작가 일을 그만둔 것은 왜일까? 갑자기 더 전망 좋은 사업이 생겨서 작가 일이 시시하게 보였을까? 아니, 일이 시시해졌다기 보 다는 작가가 받는 쥐꼬리만한 월급(돈벼락 맞은 액수에 비하면 정말 쥐꼬리처 럼 느껴졌을 것이다)이 한심하게 느껴졌을까? 그 전에는 보람있던 밤샘 작업도 '내가 이 월급 받자고 이 고생을 해?'하는 생각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래서 돈벼락은 짜릿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좌표가 분명할 때에만 돈의 행복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얼마 전 우리 나라의 기부 문화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 나라에도 요즘 한창 벤처 열풍으로 떼돈을 번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덩달아 벤처를 하겠다는 야심에 찬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물론 반가운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돈을 번다'는 수준에서만 벤처가 이야기되고 있어 아쉽 다. 미국에서는 벤처 열풍이 '벤처 자선(venture philanthropy)'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국의 최대 개인 기부자는 빌게이츠로, 그가 한 해 동안 낸 기부금은 160 억 달러였다. 하긴 빌게이츠야 워낙 거부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 기사가 내 눈길을 끈 것은, 미국에서는 빌게이츠 등 이른바 큰손들 '빅 40' 이 내는 돈이 전체 기부금의 5%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부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뭔가를 기부하는 문화가 생활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서 기부의 '큰손'들은 누구인가? 부끄럽게도 주로 할머니 부대'이다(이상하게도 할아버지들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그 할머니들이 한 유산 물려받은 알부자들 도 아니다. 주로 폐품을 주워서, 삯바느질을 해서, 떡볶이나 김밥 장사 등을 하 면서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피와 땀으로 모은 돈을 미련도 없이 쾌척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 대학에 폐품을 모아 1 억 원을 기부한 어느 할머니가 그 대학의 기 부자 중에서 1 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나 자신부터 부끄럽게 만드는 얘기였다. 이런 할머니 큰손부대'는 배움이 많은 것도 아니고 평생 동안 무슨무슨 '님'하 는 자리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했지만 그 어떤 지식인이나 높은 자리에 않아 있 는 사람들보다, 그리고 빌게이츠 같은 큰손들보다 더 분명한 삶의 좌표가 있었 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돈만 따라다니는(money-seeking)' 삶을 산 것 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value-seeking)' 삶을 산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단신으로 제 3 세계의 오지에 들어가 봉사 활동을 하는 한 여학생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초봄에도 새벽엔 영하 10 도까지 내려갈 만 큼 추운 그곳은 몸을 씻을 곳이라고 해봐야 동네 우물밖에 없다고 한다. 한창 멋 부리기에 신경 쓸 나이인 20 대 중반의 그녀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씻기 위 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얼음 같은 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다. 난방시설 이 없는 탓에 다른 사람과 함께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잠자리의 온기를 만든 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현지인과 함께 먹으면서 그렇게 그녀는 가난한 고 아들을 돌보고 있다. 왜 이런 열악한 환경의 힘겨운 삶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중학교 2


학년 때 저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막연하게나마 잠깐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라고 의외의 소박한(?) 대답을 했다. 아니, 내가 듣기엔 대단한 대답' 이었다. 그렇다. 그녀에겐 분명한 삶의 좌표가 있었기에 열악한 주변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와의 약속' 이라는 그녀의 말이 오랫동안 내 귓전을 때렸다. '배움'과 '축적을 넘어, '베풂'의 삶을 향해! 20 세기 마지막 해는 내 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가끔씩 머리를 털고 내 삶을 돌아보았고, 내 삶 의 방향과 좌표가 무엇인지 재확인했다. 20 대 때 나는 야망에 가까운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30 대 가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삶을 살았고 그런 삶에 내 모 든 힘과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리고 40 대에도 나는 20~30 대와 다름없이 열심 히 일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40 대엔 축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이름 석 자를 꾸미기 위한 삶 이 아닌, 창조와 축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인지 방송 외의 다른 일에 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린다. 그리고 50 대가 되면 축적과 나눔이 공존하는 삶 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20 대에는 배움, 30 대 에는 축적, 40~50 대에는 베풂의 삶이 되어야 한다던... 그러나 과연 내가 말 그 대로의 나눔'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이 또한 허위의식은 아닌지 아직 자신은 없 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근접하는 삶과 목표 자체가 없는 삶은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목표를 자주 확인하곤 한다. 지난 한 해는 물론 크 나큰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그런 위기 역시 내 삶의 방향을 굴절시키지는 못했 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바꾸어주기는 했다. 한때 고통이 최고조 에 달했을 땐 세상이 증오스럽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시련은 나로 하여금 각 자의 아픔'에 대해 생각하게 했��� 그리고 나눔'이 없는 성공과 축적, 자신만을 위한 성공이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깊이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요르단강에서 이어지는 갈릴리바다와 사해 같은 강에서 이어지면서도 물이 맑은 갈릴리는 물고기도 많이 살고 주변의 식물도 번성하지만 사해는 물 이 더 럽고 소금기가 많아 생물이 살지 못한다. 또 갈릴리는 상류에서 받은 물 을 다 시 요르단강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늘 맑지만, 죽음의 바다 사해는 요르단강의 물을 받기만 하고 아래로 흘려보내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물이 되었다 고 한다.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창조와 축적을 쌓아 저절로 흘러 넘 치는 갈릴리바다. 그 물은 늘 살아 있는 맑은 물이며 나눠주는 물이다. 그 바다 를 내 삶의 좌표로 삼고 싶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반년 정도 지긋지긋한 소문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 로 밝혀지자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과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솔직히 그 당시 나 는 정신적으로 워낙 피폐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요청들에 일일이 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뜻 있는 사람들의 특강 요청은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고 수용 하려 했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헝클어진 나 자신을 재정리하고 새롭게 시작 하는 힘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초대해주는 것은 언제나 고마웠다. 그 즈음 하버드 케네디 스쿨 한국 동문회에서 '여성' 을 주제로 강연을 해달 라고 부탁해왔다.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그들 역시 새 천 년의 화두가 '여성' 이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깊이 공감한 나는 그 강연 요 청을 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 사회 의 정신적, 물질적 기 반으로 볼 때 새 천년의 화두가 진정으로 여성인가에 대 한 회의감도 없지 않


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 싶기도 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지난해 터무니없는 소문이 사회적 사건(?)의 하나로까지 비 화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나는 '과연 이 나라에서 여성 문제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21 세기의 화두이기나 한 것인지, 대체 여성들의 기본적인 문제조 차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진정한 여성의 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멀고 도 험한 길이 남아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강연회를 통 해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강의가 시작되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열성적으로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고 있 었다. '여성' 에 관해 말할 때마다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경험이 더 큰 추동력 으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 내가 몸소 겪은 그 사건이 자연스레 하나의 사례로 등장했다 나는 그 일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의 견해를 묻기도 했고 그들의 생각을 듣기도 했다. 그때 외국에서만 25 년을 살다가 6 개 월 전쯤 우리 나라에 왔다는 한 변호사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저도 한국에 와서 당신에 관한 소문과, 당신이 거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소문이 사실처럼 둔갑하게 된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나라의 가부장적 사고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모임에 가든 당신의 얘기를 가장 먼저 화제에 올리고 그 소문을 확대 재 생산하는 사람은 바로 부인들, 그러니까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여성의 적은 여성' 이라는 말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당신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내 눈썹이 약간 찡그려졌다 받기 싫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구 나 '소문잔치'였던 내 사례를 통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불쾌한 공식을 인 정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닌가 싶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답변하기 가 어려웠다. 그런데 정말 '여성의 적은 여성'인가? 수면 위 현상은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러나 내 대답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이다("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이기도 하 다). 우선 '여성의 적은 여성'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이 말을 하 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흔히 "여성들은 같은 여성 중에 좀 잘 나 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봐주질 않고'발목을 잡고 늘어진다"는 말을 하곤 한 다. 그러면서 여성의 적은 바로 여성이 아닌가, 하고 꼬집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깊이 따져보자. 과연 남성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없는가? 이것은 비단 여성의 세계에서만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남성의 세계에서도 누 군가가 군계일학으로 치고 나가면 꼭 돌아서서 그를 씹거나 욕하거나 모함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 누구도 그런 남성들을 향해 '남성의 적은 남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어느 집단에서든 특출 나게 잘 나가는 소수가 있으면 뒤에 처진 대부분 의 다수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법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더라 도 그런 일이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에는 분명하 다. 어떤 면에서 인지상정이라고나 할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도 있듯 이 뒤로 처진 다수는 잘난 소수를 씹는 맛에 살고, 또 그 맛에 자기를 위안하고 합리화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심리가 어째서 여성에게만 유별나게 적용되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괴상한 공식(?)까지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처럼 보통 사람의 문제를 굳이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한정하여 옭아매는 데는 여 성에 대한 또 다른 음모(?)가 숨어 있던 것은 아닐까. 즉 여성 스스로가 상대 적 열등 집단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려는, 가부장적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여성의 적은 여성' 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항


상 변하려고 할 것이다. "좋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라고 치자. 그런데 남성과 비 교하여 상대적으로 여성의 세계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려지는 이유는 어떻게 설 명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물론 남성의 세계와 비교하여 여성의 세계에서 그런 심리와 행동이 빈번하게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결론 적으로 말하면 어느 사회에서든 주류 집단과 비주류 집단, 다수 집단과 소수 집 단간의 사회 관계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지, 남성과 여성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경쟁은 존재한다. 그러나 주류 집단 내 경쟁과 비주류 집단 내의 경쟁은 그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주류 집단 내 경쟁에는 상대적으로 가진 자의 여유' 가 존재한다. 그러나 비주류 집단 내의 경쟁은 그 속에 다분히 신분 상승을 위한 뼈아픈 목적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경쟁의 관문이 좁고 따라서 훨씬 치열한 양상을 멀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집단 내의 경쟁 이 과열되다 보면 서로를. 물고 뜯는, 약간은 아름답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선 누가 뭐라고 하든 남성이 주류 집단이고 여성은 비주류 집단 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그랬고, 현재에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따라서 '남성의 적 은 남성' 보다 '여성의 적은 여성' 의 노출 빈도와 정도가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이다 한때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에 대한편견이 얼마나 심했는가? 흑인 들 사 이의 알력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흑인만의 문제가 아닌, 결국은 소수 집단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내가 강조했던 점은,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공식이 과연 누구 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말이 사회 속에서 회자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일부 언론매체가 상업적 목적 혹은 여성을 비주류로 고착 시키기 위한 의도로 확대 재생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이러한 말을 여론화시킨 것은 그 공식(?)의 정당함이나 타당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의 소 기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인가, 하는 질문은 그 말 자체로 우문 이다. 그 공식의 배경 에 도사린 잘못된 남성 우월주의와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메커니즘 을 도외시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도 아니고 또한 남성도 아니 다. 남성의 적 역시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최근 21 세기는 '여성의 시대' 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따지고 보자면 그 것 도 그다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1 세기는 여성의 시대도, 남성 의 시대도 아니니까. 굳이 이름 붙인다면 '여성성의 시대' 라고 할 수 있을 뿐 이다.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을 가르지 않는 것, 지구의 절반이 행복해지는 것, 곧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세상이 좀더 나아지는 길이 아닐까? 21 세기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나아가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제 남자가 총리를 하나요? 사양화되는 탄광을 폐쇄하는 영국 정부의 방침에 맞서 눈물겨운 생존권 싸움 을 벌이는 탄광 노조의 투쟁을 그린 영화 '브래스드 오프' 에는 "대처가 있는 한, 교회에서 예배 드릴 마음도 없다"는 식으로 대처를 비꼬는 대사가 나온다. '철의 여인' 이라고 불리는 마거릿 대처는 남성을 능가하는 강력한 카리스마 와 리더십으로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 번 연속 승리를 거둔 유일한 총리라는 기록을 남겼다 대처는 남성들 일색인 정치권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각료들을 두손들게 했고,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르 헨티나령인 포클랜드 를 공격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대처가 보수당에서 축출되었을 때 대처 재임 중에 출생한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에게 "그럼 이제 남자가 수상을 하나요?"라고


물어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녀의 영향력은 많은 이들에게 뿌리깊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여성이었던 대처는 막상 영국의 진보주의 여성들로부 터 맹공격과 비판을 받았다. 대처의 보수 성향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인데, 이 들은 대처가 재임 기간 중 한 명의 여성 각료도 임명하지 않은 것을 결정적 증 거로 들면서 "대처는 여성들의 친구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또 대처의 재임 기간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그녀 의 독선적인 성품과 대단치 못한 집안환경, 남편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소문, 대 처의 아들이 어머니의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받았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그녀에 대한 갖가지 비난과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 한 편을 갖고 있다. 9 시뉴스 앵 커로 일하고 있던 1991 년 무렵 나는 '세계 정상과의 대화' 인터뷰를 기획, 추진 했다. 각국의 대통령과 수상, 석학 등을 섭외해 대담하는 프로였는데 대처는 섭 외 1 순위였다. 당시 그녀는 현직 수상이었는데 각국의 수반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녀의 인터뷰 섭외는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공문을 보냈지만 답장을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 한 나라의 수상 정 도면 인터뷰를 못할 상황이라 해도 격식을 갖춘 거절의 답신을 보내오는 것 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쪽의 거절 방식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대 처가 직접 인터뷰 섭외 공문을 챙기는 건 아닐 것이기 때문에, 결례를 탓한다면 1 차적으로 보좌 진들을 탓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거절을 당하면 기분이 상하는 법이지만 사실 대처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무성의를 탓하면 탓했지 그녀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인터뷰 거절에도 덤덤했던 나였지만, 일언반구 응답이 없던 대처와의 대담 섭 외가 갑작스레 성사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기분이 좀 씁쓸했다. 그때는 대처 가 수상직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그리고 그녀가 대표로 있는 대처 재단은 인터뷰 사례비를 요구했다. 사례비를 요구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다. 우리는 인터뷰 사례비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지만 세계적인 석학들도 거의 인 터뷰 사례비를 받고 있다. 인터뷰이(interviewee)는 사례비를 요구할 권리가 있 고 당연히 인터뷰를 요청한 쪽에서는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한 퇴임 후 재단을 설립한 대처에겐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대처의 갑작스 런 인터뷰 수락에 기분이 씁쓸했던 이유는, 무려 1 년여를 애써도 정식 응 답이 없다가 퇴임 후 갑자기 '사례비와 함께' 인터뷰가 성사되자 허탈하고 허 망했기 때문이다. 극히 이성적이고 관례적인 대처 재단의 결정을 내가 감정적으로 해석해 혼 자 기분 찜찜해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대처에 대한 개인적 호감까 지 반감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나 의 평가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녀가 인정받아야한다는 생각 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처와 같은 거목은 그녀의 '업적'을 중심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국 유학 중 내가 만난 영국의 저널리스트들 몇 명은 대처가 공식 석상에서 는 정통 영국식 액센트를 쓰지만, 화가 나면 저급 액센트가 튀어나온다며 그녀 를 희화화하고 비아냥거렸다. 액센트는 곧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되곤 하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정통 액센트가 필수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골 출신이었던 버틀런드 러셀이 정통 옥스퍼드식 액 센트를 익히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는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고작 그녀의 액센트를 꼬집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남을 평가하는 데 인 색한 그 사람들의 열등감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이란 누구나 좋고 싫은 것을 갖고 있으므로 대처의 성격과 태도를 싫어 하는 사람은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룬 업적과 능력, 고리고 영국 현대사에 미친 그녀의 존재 가치 자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처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말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이름이 알려진 베스 트셀러 작가 페기 누넌은 대처에 대해 "그녀는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것을 보 여준 위대한 여성이다. 대처는 바로 그녀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여성들에게 더 개방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주었다"라고 평했다. 이와 같은 누넌의 평가에 나 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여성도, 아니 어떤 남성도 자신의 존재���으로 집단 이나 조직의 폐쇄성이나 한계를 극복하는 상징이 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 다. 나는 대처가 개인적으로 오만 방자한 성격이든 아니든, 그녀의 남편이 성공한 부인의 그늘에 밀려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런 얘기에는 관심이 없다. 설령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난 영국의 어린이들이 이제 남자가 총리를 하는 거냐고 질문할 정도로 그녀 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그것도 부모의 후광이나 혈연 관계의 덕을 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우뚝 선 대처에게 박수를 보내 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액센트를 트집잡지만, 그녀가 자신의 액센트를 고치기 위해 들인 노력이 오히려 더 대단하게 여겨져야 하지 않을까. 난 그녀가 세기에 남을 거목으로 일어서기까지 홀로 싸웠을 고독한 투쟁의 시간에 경의를 표한다. 대처가 자신의 존재와 업적 자체만으로 여성 각료 몇 명을 입각시키는 것 이 상의 여성 운동을 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우리 나라의 예를 든다면, 물론 호주제나 동성동본금혼법 폐지, 여성의 재산권 인정 등 여 성 전체의 권익과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싸우는 여성운동이 여성의 삶의 질 을 향상시켜왔다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실천적 운동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나 또한 이런 운동에 일조하고 싶다 하지 만 나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여성의 문을 넓혀주는 대처 같은 대단한 여성' 이 많이 나올수록 여성운동에 더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 고 우 리 나라에도 그런 거목이 많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큰 나무는 그만큼의 큰 그늘을 드리운다. 그리고 길을 가다 지친 나그네들이 그 그늘 아래서 쉬어 가는 법이다. 우리는 혹시 자신의 이해에만 충실하고 자신 의 성취에만 도취되는 '이기적인(?) 여성'은 아닌가.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 뤄 큰 나무가 된 여성, 그 존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여 성 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너무 인색한 편은 아닌가 넓기만 한 바다는 어느 계곡에서 흘러온 물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 을 껴안고 말없이 흐를 뿐이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일하든 결국 계곡의 물은 바다로 흐르게 마련이다. 계곡을 흐르는 한 줄기 물살인 나는 오늘도 바다를 향 해 흐른다. 다른 계곡에서 흘러온 물살과 만날 설렘에 들떠서... 우리 모두는 바 닷가 되어 세상을 담는다. 21 세기에는 여성이 없다 몇 년 전부터 여러 사회학자, 미래학자들이 새로이 시작될 21 세기를 점쳤다. 21 세기는 디지털시대다, 정보화의 시대다, 지식의 시대다 등등 그 중에서 내 귀 를 가장 먼저 잡아당긴 것은 '여성을 화두로 올린 예견, 21 세기는 여성의 시대 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그러한 예견에 고무된 여성이 어찌 나뿐이겠는 가.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던 우리 사회에서 언 젠 가부터는 할이 더 좋아'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되고, '부인한테 잘해 하는 농담 아닌 농담이 오고가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을 일이다. 내가 여 성이라서가 아니다. 그 동안 억압받던 계층인 여성이 사회적 소외에서 벗어나 비로소 공평한 사회가 되려는 출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여성의 시대는 오는 것일까? 아니, 그런 예견은 타당한 것일까? 장밋빛 환상은 금물이다. 새로운 시대에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임승차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 역사적으로 아무런 노력이나 투쟁 없이, 존재 적 조건으로만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계층, 계급은 없다. 그러므로 여성의 시대가 된다는 그 예견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미래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다음 세기가 여성의 시대라는 것을 이렇게 설 명하고 있다. 21 세기 유망 직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보통신 분야이다. 미래 사회는 물리적인 힘보다는 소프트하고 섬세한 마인드가 필요한 시대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여성 고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앞 으로 는 힘의 논리보다 융통성과 조화로운 마인드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문화의 부가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미에 대한 감각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 로 높은 여성이 유리할 것이라는 접근도 있다. 미래 유망 직종이 주로 컴퓨터 네트워킹 전문가, 쇼핑 호스트, 관광 기획자 등으로 꼽히면서 이들 직종에 서 활약하는 데는 여성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미래의 국가경쟁력은 여성 인력 의 활용에 달려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견들에는 하나 같은 공통점이 있다.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 라는 이유들의 공통 분모가 e-비즈니스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축은 정보통신인데, 거기에 필요한 재능이라는 것이 여성들이 많이 갖고 있는 섬세함, 진득함 등등의 감수성과 특유의 감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21 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아니라, '여성성'의 시대인 것이다. 21 세기는 여성성의 시대이며, 여성적 사고가 각광받는 시대다. 여기서 굳이 ' 여성' 이 아니라 '여성성' 이라 하는 것은, 21 세기가 요구하는 것은 성별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감각과 사고로서의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성성을 꼭 여성 들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 또한 여성적 감성과 사고, 즉 여성성을 가 질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여성이라 해도 여성적 감성과 산고를 활용하지 않는 한, 21 세기가 아무리 여성성의 시대라고 해도 어부지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성들이 더 유리할 것이다 여성은 그렇게도 중요한 '여성 성'을 이미 본능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21 세기는 여성성의 시대 미국의 저명한 마케팅 컨설턴트인 페이스 팝콘 또한 71 세기는 여성성의 시 대' 라고 힘주어 말하며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우선 21 세기는 감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논의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남녀 불평등 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다름' 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성 과 남성의 정보처리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뇌의 활동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신경학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감각적 식별 능력이 탁월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관찰력이 더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다고 말한다. 여성들의 이러한 성향은 감성 의 시대라는 21 세기에 맞아떨어지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21 세기는 연대와 네트워크의 시대라고 그는 말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네트워킹에 더 능하다는 것이 관련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은 어떤 만 남 에든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고 거래보다는 인간적으로 좀더 의미 있는 관계를 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가면 여성은 대화를 원하고 남성들은 먹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 남성은 자신의 독자성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사 용하지만 여성은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니 네트 워킹 사업에 여성성이 더 필요하다는 방증이 된다. 또한 앞으로의 비즈니스는 경쟁을 통해 적을 물리치고 밀어내야만 하는 전쟁 이 아니라 네트워킹 속에서 효율과 효과를 높이는 관계를 지향한다는 예측 도 여성성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미래의 기업은 사회적 기관이다. '좋은 물건 만


들어 잘 팔면 된다'는 생각은 구시대적 사고이다. 고품질만으로 승부하는 시대 는 지나갔다. 온라인(on-line) 거래가 오프라인(off-line) 거래보다 더 활성화되 면 고객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기업만이 승리한다. 인터넷은 습관성이 있어서 한번 클릭한 곳에 지속적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고객이 일단 클릭해 들어갔다가 그 기업의 서비스와 배려에 만족하면 다시 찾 아가게 되고 나중엔 그 기업의 사이트에 고정적으로 들어가게 되는 충성도가 생기게 된다. 이제 이런 충성도 높은 고객을 확보하는 기업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연대와 네트워킹이 필요한 미래 세계에서는 무조건적 인 경쟁보다는 배려와 나눔이 필요하게 되고, 따라서 여성성이 각광 받게 된다 는 것이다. 세 번째로 여성의 내성, 즉 끈기는 20 세기에도 그랬듯이 21 세기에도 계속해 서 적극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여성의 내성'과 '끈기'는 구시대에 여성에 대 한 편견과 억압을 끊임없이 참아오면서 강화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여 성 특유의 끈기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면 남성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어떤 역사 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여성성의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 꼭 여성일 필요는 없다'는 말은 많은 여 성에게 도전이 될 수 있다. '여성의 시대' 라는 말만 믿고 무임승차하려는 여성 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 여성들은 21 세기는 여성의 시대' 라는 추상어에 매몰되지 말고, 21 세기는 여성성의 시대' 라는 구체어 속 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여성성을 21 세기에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럴 때에 21 세기는 비 로소 진정한 '여성의 시대' 가 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나는 요즘 'e-월드(e-world)' 에 빠져 있다. 나는 그곳에서 제 2 의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10 년 간 남성들과 의 이분법적 대응에 맞서느라 퇴화되고 녹슬었을지도 모를 내 여성성을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보고 있다. 21 세기, 여성성이 각광받는 시대가 우리의 기대보다 다소 늦게 진행된다 하더 라도 난 걱정하지 않는다. e-월드에서 기술은 여성에게 최상의 동맹군이 되어주 기 때문이다. e-월드에서 기술은 계급적 서열도 가리지 않고 학력의 서열도 가 리지 않으며 지연, 학연의 구분도 없다. 더구나 e-월드에 들어가면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나 ' 일 뿐이다. 드디어 공정한(fair)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성의 시대에서 캐릭터의 시대로 여성이 역사상한시대의 주체가 된 적이 있었을까? 먼 옛날 모계사회를 제외 하고는 없었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안사람이라 부르며 여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 어가서는 안 된다고까지 했다. 아예 집 밖, 사회로의 진출을 봉쇄해버렸다. 그러 다 보니 주체는커녕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다만 곶간 열 쇠만은 안주인에게 세습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주체가 될 맹아가 되었 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사회 · 문화적으로는 무조 건 "네" 하는 순종이 여전히 미덕으로 여겨지고, "왜요?"라고 되묻는 것은 금기 시되었다. 소비의 주체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생산이 강조되었고 소비는 비생 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물건만 잘 만들면 잘 팔린다'는 사고가 변하기 시작했다. '잘 만든 물건보다 잘 팔리는 상품' 이 부각되면서 소비의 주체인 여성에 대해 서도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든 생산자들이 소비의 주체인 여성의 관심과 기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시대의 주체가 되어보지 못한 채 객체로만 살아온 여성이 서서히 시대의 주체로 등장할 기회


를 얻게 된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화 사회가 열리면서 오프라인에서 의 이러한 변화는 온라인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올해 초 정보통신부와 한국전산원이 공동으로 조사한 국내 인터넷 이 용 실태에 대한 기사 중에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는 통계가 있어 내 눈 길을 끌었다. '인터넷 인구 1000 만 시대' 가 제목이었다. 국민의 4 분의 1 이 인터 넷을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터넷 이용자의 주축은 역시 신세대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인터넷 이용자의 성별 분석 내용이었다. 남성이 66.9%, 여성이 33.1%. 또한 직업별 분류에서는 학생과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은 각각 약 40%정 도를 차지한 반면, 주부는 5.1%에 불과했다. 인터넷의 전자상거래 사업자들도 여성을 주 소비자로 삼고 있는데, 정작 여 성의 인터넷 이용 비율이 남성의 절반도 채 안 된다고 하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다. 최근 들어 여성들의 인터넷 이용 인구가 급증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성들은 정보화사회에서도 여전히 주체가 아닌 객체로, 소외집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 또한 없지 않다. 통계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여성은 수적으로도 열세이지만 질적인 면에 있 어서도 주로 문화 상품이나 쇼핑 사이트 등에만 한정적으로 클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행여 인터넷을 이용하는 여성이 남성을 수적으로 앞선다해도 그러 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소비의 주체로 나서지 못한 채 객체의 자 리에 서만 맴돌게 되고, 결국 앞으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 면 21 세기 첨단의 시대에 와서도 여성은 곶간 주인과 소비 객체 사이에서만 왔 다갔다할 뿐 아무런 발전도 없지 않을까. 특히 소비의 주체로서, 시대의 주체로서 등장할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이용에 있어 여전히 소외된다면, 또한 그 이용이 공급자의 일 방적 릴리스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강산이 아 무 리 바뀐들, 세상이 요동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저 곶간 주인의 붙박 이 신세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여성은 영원히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소비 '대상'이 아닌 소비 '주체'가 되자 우리 여성들이 인터넷 시대의 주체로 동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선, 똑같은 소비자라도 보다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이 돌아가려 면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있어야 하는데, 여성이 소비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무슨 불만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소비자로 남아도 좋다. 그러나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어야 한 다는 것이다. 허구한 날 "소비자는 왕이다" 라고 생산자들이 떠들어대지만, 실상 어수룩한 소비자는 영원히 생산자의 봉이다 따라서 같은 소비를 하더라도 똑똑한 소비자 가 되자는 ���이다. 똑똑하고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는 하나의 예가 경매이다. 요즘 인터넷 사이트 를 살펴보면 전세계적으로 경매 사이트가 많다. 들어가 보면 안 다루는 상품이 없고 품질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영악한 소비자는 뛰어난 품질의 상품과 서비 스를 가장 싼 가격과 확실한 보증으로 구입할 수 있다. 모르고 앉아 있는 사람 만 손해이다. 정말이지 무지가 죄인 세상이다. 그런데 그 경매 사이트 내용 중에 '역경매' 라는 것이 있다. 경매라는 것이 상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사려는 사람들 간에 경쟁을 시켜 가능한 높은 가격에 팔려 한 데서 시작된 것인데 역경매란 소비자가 생산자간에 경쟁을 붙이는 것 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이런 상품을 사고 싶으니 너희 생산자들이 한번 물건을 내놓아보아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전거 하나를 구입하고 싶다고 역경매를 신청하면


자전거를 팔려는 사람이 "이런 가격에 이러한 성능의 자전거가 있다"고 경매 참 가 신청을 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앉아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사면된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가 아니더라도 소비의 주체가 되려면 이쯤은 되어 야 하는 것 아닐까. 이쯤 되면 소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주체적 소비자라고 불 러주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 객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 의사 표현을 연습, 훈련, 체득해야 한다. 어디에서? 물론 인터넷상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데 있어서 온라인은 가장 좋은 연습장이 다. 인터넷의 강력한 힘과 장점은 그 매체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상에 서는 남녀 차별도, 학력 차별도, 지연이나 학연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 수시로 드나들면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뿐이다. 인터넷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면 그것이 바로 네트워크의 주체로서 일어서는 방법이 된다. 구체적인 예로 냉장고를 하나 구입한다고 하자. 전자 대리점에 가서 냉장고를 구입할라치면 써먹을 수도 없을 것 같은 기술과 받아볼 수도 없을 것 같은 서 비스공세로 '눈뜨고 코 베이듯' 강매 당하기 일쑤이다.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해 도 잘 차려입고 말도 잘하는 판매원의 얼굴을 보면 말문이 안 열린다. 조금이라 도 의심스런 표정을 지으면 아주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확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이런 끔찍한 상황은 온라인으로 들어오면 통하지 않는다. 온라인 상에 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 오히려 생산자들이 소비자들의 할도 안 되는 트집 같은 ' 추궁에 대해서도 고분고분하다. 만일 깔보는 듯한 태도나 무례한 발언을 했다 가는 그 한 사람의 소비자에서 문제가 끝나지 않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 천 수만 명의 잠재 소비자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프라인에서는 품질에 하자가 생겨 따지려면 거인과의 싸움을 각오 해야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수천 수만 명의 네티즌들이 동맹군이 되어 싸워 주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결국 온라인 세계에서는 생산자가 소 비자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다. 이처럼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소비자가 되 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인터넷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쥘 알아야 하며, 네트워크를 동원할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다. 어느 역사에서 나 그랬듯이 시대의 주체가 되려면 이 정도의 자기 발전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 니까 우선은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급선무이다. 세 번째, 가장 강력한 방법이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바로 소비자가 아닌 생 산자가 되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이다 대단히 큰돈을 벌거나 규모가 큰 사업 체를 벌여야만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터넷상에서는 방안의 컴퓨 터 하나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한 성공한 여성 기업인 은 부엌의 식탁에 앉아 구상한 아이디어가 성공의 씨앗이 되었다. 국내의 한 주부 는 자신의 결혼 생활 경험을 살려 통신에서 '부부 갈등 클리닉'을 열어 짭짤한 수익을 보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여성의 섬세한 감성에서만 나을 수 있는 탁 월한 발상이다. 남자들의 발상법으로는 이런 아이디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이 것만 보더라도 여성적 감각이 21 세기 여성 특유의 힘이자 21 세기에 성공을 잡 을 수 있는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여성용 인터넷 사이트 개설 경쟁에 불이 붙었다. 현재 미국 인터 넷 시장에서는 기존 미디어들이 자매회사 설립이나 유사 기업 인수 합병을 통 해 최고 소비층이자 여론 주도층인 인터넷 여성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격렬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 사이트들은 여성이 주고객인 개인용품, 가정용품에서 부터 건강, 섹스, 돈, 미용, 육아 등 여성이 관련된 모든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적으로 의견이 분명한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내용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아이 빌리지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해 네티즌들이 힐러리 클린턴과 채 팅할수 있는 '일렉션 2000 타운홀' 프로그램을 열어 대단한 반응을 얻기도 했다.


국내에도 이미 잘 알려진 'www.oxygen.com'이나 'wow.Ivillage.com', 'www.women.com' 등 여성 전용 사이트는 오프라 윈프리나, 클린턴 대통령 직 속 전국여성기업위원회 회장으로 알려진 케이 코플로비츠 등 주로 미국 내의 걸출한 여성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여성이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주고 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있는 분명한 조짐은 이미 보이고 있 다.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사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 하면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사이트가 여성성(여성적 사고를 하는 경영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왜? 21 세기 정보화사회는 수평적이고 감각적이며, 유연한 사고방식이 강조되는 시대이고 따라서 여성 특유의 감성적인 리더십과 유연한 경영방식이 인정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여성이 시대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1 세기는 여성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역사상 최초로 맞이한 기회이다. 다만 여성 스스로 가 그 동안 갖고 있던, 내가 감히 하는 소극적, 자기 비하적, 체념적, 혹은 노예 적(!) 선입견만 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인터넷 시대는 최근 유행하는 가요 제목처럼 '바꿔'를 요구하는 시대다. 그 리고 과거로부터의 결별과 도전을 요구한다. 이제 아날로그적 사고법에 디지털 적 사고법을 통합하라. 그리고 컴퓨터 앞으로 가라. 그 세상 안에서 당신은 더 이상,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설 수 있다. @는 성을 묻지 않는다 여성이 주고객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인터넷 쇼핑몰에 대한 최근의 한 분 석자료는 여성 이용자가 아직 20%를 채 넘지 못한다는 결과를 내 놓았다. 네티 즌 가운데에서도 여성의 비율은 )0%가 조금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나 정보화 인구의 비율이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 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벤처 여사장의 비율이 최근 2 년 사이에 )0 배나 늘 었다. 이들의 업무 처리 능력 또한 남자 사장들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는 다. 고급공무원 시험이나 의대 합격생, 혹은 대학 수석 합격자의 비율에 있어 서도 여성의 수는 놀랄 만큼 증가되었다. 올해 초 신입사원을 공채한 한 대기업 의 인사 관계자는 "남성도 뽑아야 하는데 여성지원자들의 성적이 너무 좋아 채 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사실, 이게 문제 될 일은 또 무엇인가?)고 말할 정도 이다. 이제 전문성과 실적, 능력만 있다면 취업이나 사회 참여에 있어서 여성이 제 외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아직도 인터넷 이용자나 대기업 입사 비율에서 여성들이 전체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다(여성이 인구의 절반이고, 성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어디에서든 여성의 참여 비율이 50%는 되어야 하 지 않겠는가?). 21 세기는 정보화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을 누누이 들어왔지만 여성들, 특히 주 부들은 정보화사회에서 또다시 소외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어 찌 보면 '소외를 자초'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우리 여 성들에겐 네트워크나 정보화에 대한 잠재적 능력이 있다. 하지만 '시작' 하지 못해서 그냥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수천 년간 우리 여성들은 죄 없이 소외당해왔다 남성들이 사회구조적인 제도를 통해 평등의 문 을 완전히 닫아놓은 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문을 여는 것은 '계란으 로 바위 치기'와 같았고 세대를 앞서가던 여성들은 '마녀'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1 세기에 들어서면서 조금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정보의 바다' 라는 e-월드는 어느 누구에게도 빗장을 내걸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누 구에게나 열려 있고, 따라서 누구나 그곳을 찾아가 즐기고 탐험할 수 있다. 그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 것은 물론 소외당하는' 것이 아니다. '왕따'를 자초하는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 결과에 관해 과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21 세기는 자본사회이다. 쉽게 말하면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이 돈과 권력을 모두 갖는 사회라는 이야기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는 가고 지력이 있 는 사람만이 살아 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젠 정보가 힘이다. 과거에는 경제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보의 빈익빈 부익 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예전에는 경제력과 권력을 남성이 가지고 있었고 그 래서 여성은 늘 사회적 약자였다. 그러나 21 세기에는 정보를 가진 사람과 정 보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여자, 남자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 지 않다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 정보 산업에 유리한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우위에 있을 뿐이다. 지난해 말 각계의 전문가들이 모이는 한 부부 동반 송년모임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물론 혼자 갔다. 조금 늦게 도착해 보니 이미 다들 와 있었는데,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자리하고 있었다. 남편은 남편들끼리 모여 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고, 부인들은 부인들끼리 모여서 아이들과 살림살이에 대한 얘기를 하 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어느 테이블에 앉힐 것이냐를 놓고 잠깐 얘기들이 오 갔다. "백지연 씨는 남자들 쪽에 앉으세요. 같은 동문이고 어차피 일 얘기 할 거니 까." 가장 연세 많은 한 부인이 권유했다. '일하는 여성이 뭐 대수인가 하는 생 각도 들고 혹여 건방져 보일까 싶기도 해서 부인들 쪽으로 자리를 잡자, 다른 한 분이 또 거든다. "우리야 남편 따라 동반해왔지만 백지연 씨는 참석자니까 저쪽에 가 앉으세 요." 그러나 나는 굳이 부인들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보다 두세 살 많아 보 이는 젊은 부인도 있었고, 왠지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 은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젊은 부인이 입을 열었 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분이었다. "유학간 애들에게 전화를 자주 하니까 통화요금이 만만치 않아요. 남편은 e메일로 하니까 괜찮은데... 아무튼 전화 거는 걸 줄여야겠어요." 그보다 나이가 좨 지긋해 보이는 다른 분이 조언한다. "그럼 e-메일로 한번 해보지 그래요. 나는 e-메일을 사용하니까 훨씬 좋던데 해주고 싶은 말도 조리 있게 정리해서 하게 되고, 아이들과 더 많은 얘길 나눌 수 있고..." 젊은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옆에 있던 다른 젊은 부인도 놀라며 묻는다. "사모님, e-메일 할 줄 아세요?" "그럼. 요즘은 많이들 하잖아." 순간 몇몇 젊은 부인들의 얼굴에 여러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순간 e·메일을 한다는 그 나이 든 부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젊은 부인의 어깨가 약간 처지는 듯했다. 그때 그녀는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그 녀에게 다가가 "e-메일 별 것 아니에요. 편지 쓰듯 쓰고 나서 자판 몇 개 두드 리면 컴퓨터가 다 알아서 처리해요.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보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21 세기 가 여성의 시대라고! 정보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중의 소외자로 전락할지도 모르 는 판에!' 일단 컴퓨터 앞에 않아라 예전에는 사회 활동을 하는 남성들이 아무래도 정보를 얻어내기가 쉬웠다. 회사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구체적인 업무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 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보를 활용하는 법에 있어서도 여성보다 우위에 있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정보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장벽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이라는 획기적인 횡적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그 어떤 정보든 원하기만 하면, 그리고 접속만 하면 모든 사람이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아무리 집안 일에 매인 주부라 할지라도, 컴맹이라 할지라도 손쉽게 정보를 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W 를 보듯 컴퓨터의 전원을 켜 고 인터넷 세계에 접속만 하면 정보의 바다에 빠질 수 있다. 더욱이 좋은 정보 를 골라내고, 축적하고, 정리하고, 가공하는 데 있어서는 섬세하고, 눈치 빠르며, 감각적인 여성의 능력이 더 유리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가장 시급한 문제 는 '지금 당장 컴퓨터 앞에 앉는 것' 이다. 언젠가 언론에 보도된, 인터넷 활용 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한 주부 의 경험담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아마 이 얘기는 컴퓨터에 대해 이유 없 이 겁먹고 있는 많은 주부들에게 힘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주부가 하루는 남편에게 e-메일 보내는 법을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국보 급 넷맹' 이라고 놀려댔고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당장 컴퓨터 앞에 앉기 시작했다. 그녀가 독학으로 인터넷에 재미를 붙 여가던 즈음 남편이 실직을 당했다. 남편은 한 달 동안 인력알선센터를 전전했 지만 직장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인터넷을 활용하게 된 그녀가 나섰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회 사에 남편의 이력서를 올렸고 그로부터 단 6 일 만에 남편은 새 회사에 취직을 하게 췄다. 남편에겐 그 사실을 ���밀로 했지만, 사실 '국보급 넷맹'이라는 놀림 을 받았던 부인이 남편을 구한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호 창업에 까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컴맹이었고 처음엔 그녀 도 다른 많은 주부들처럼 겁부터 집어먹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일단 컴퓨터 앞에 앉자 그녀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하는 테헤란밸리에 가보면 그곳도 남성 일색이다. 그 곳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소수이다. 그러나 소수이면서도 여성은 강한 면모를 보 이고 있다. 코스닥시장의 신데렐라로 통하는 한 업체의 여사장은 1994 년 에 회 사를 설립한 후 약 6 년만에 회사를 6 천억 원이 넘는 회사로 키워냈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에서 근무하는 어느 여성 또한 사업 다각화를 위해 실리콘밸리 해외지원센터에 자원하는 등 격무를 가리지 않고 있다. 테헤란밸리의 강남지역 은 이런 여성들의 빛나는 의지로 나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렇다. 이제 정보의 바다가 열려 있다. 그곳은 성의 장벽이 없는 새로운 기 회의 땅' 이다. 그 자유로운 바다에 들어가 서핑 할 사람들을 싣기 위해 저 멀 리 서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어서 몸을 실어라! '컴퓨터? 인터넷? 아휴! 내가 어떻게 21 세기의 거창한 세계를? 하는 생각은 집어치워라. 당신이 머뭇거리는 사이 남들이 먼저 달려가고 또다시 당신은 소외될지도 모른다. 21 세기에도 여성은 없다?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두지 말자! 그 동안 소외 받아온 여성들, 이제 한 번쯤은 기지개를 켜고 나래를 펴고 싶지 않 은가? e-월드라는 멍석을 깔아주고 여성의 시대라고 나팔을 불어주는 사람들도 있다. 타고나면서부터 글을 깨치고 구구단을 외는 사람이 있던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면서 글도 깨치고 고등 수학도 깨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일단은 컴퓨터 앞에 앉자. 구구단보다 더 쉬운 세상이 열려 있다. 지금 당신을 막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디지털로 사고하고 아날로그로 느끼자! 나는 디지털이 좋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세상의 편리함이 좋다. 나처럼 본성은 게으르지만 늘 바빠야 하는 사람들에게 '디지털 월드'는 천국이 다. 오후 4 시 20 분에 정신없이 뛰어들어간 은행. 그러나 바쁠 수 록 밀려 있는


번호표를 받아들고 난감해하는 일이 다반사인 내게 홈뱅킹은 구세주이다. 홈쇼 핑과 인터넷 경매는 얼굴 알려진 죄로 빼앗긴 시장 다니는 재미를 다시 채워준 다. 편지 쓸 시간은 있어도 우체국 갈 시간이 없는 내게 e-메일 은 우체부만큼 이나 반갑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쏟아지는, 아들의 "엄마, 그게 뭔데?"라는 질문에 "몰 라" 라는 대답은 절대로 하기 싫은 나로서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은 '고마운 수호천 사' 이다. '포켓몬' 이라는 검색어만 쳐넣으면 '꼬북이, 라이츄, 파이리, 야도란 등등의 풍부한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해주는 덕분에 아이에게 엄마는 '만물박사'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인터넷의 효용 가치는 끝이 없다.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할 때 지방에 있 는 대학은 물론 영국, 독일에 있는 사람들까지 찾아내 아쉬운 소리 해가며 자료 하나를 찾기 위해 신세지곤 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인터넷 검색 엔진은 비 여러 명을 둔 것과 진배없다. 또한 아이의 사진을 즐겨 찍는 나에게 순간 포착된 모 습을 바로바로 보여주고 필름 갈아 끼우는 수고까지 덜어주니 기계치에 가깝던 나는 '디지털이 좋아'라는 소리를 안 할 수가 없다. 디지털 세상이 내게 준 '휘황찬란한' 선물들 한때 컴맹임을 자부하던(?) 내가 컴퓨터를 시작하자마자 빠져든 곳은 인터넷 이었다. 인터넷은 내게 '정보 성역' 에 들어갈 수 있는 출입증을 주었다. 이것저 것 자료를 많이 보아야 하는 내게 인터넷은 정보의 금광과도 같다. 그곳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아무런 자격증도 필요 없고 신분 차별도 없다. 국경도 없고 물리 적 거리도 뛰어넘는다. 내가 어디 있든 케이블과 컴퓨터만 있다면(요샌 TV 로도 인터넷을 할 수 있으니...)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 고 내 손안에 정보를 쥐어준다. 더구나 검색엔진만 이용하면 그 정보가 있는 곳 까지 친절하게 데려다주고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은 의외의 정보까지 보너스로 챙겨준다.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돈까지 아껴주니 그야말로 금 캐다가 다이아몬 드까지 줍는 격이다. 얼마 전 한 선배의 딸이 졸업 후 진로문제로 고민하며 나를 찾아왔다. 전공을 살리기는 힘들고, 할 수 있다면 수공예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눈썰 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는 아이라 흔쾌히 동의했는데 문제는 어디에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느냐였다. 물론 많은 공방과 각종 문화센터가 있었지만, 취미가 아 니라 아이의 평생 직업에 관한 문제라 처음부터 제대로 살펴서 시작해야 했다. 여기저기 알만한 곳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잘 모르는 일인데다 수공예 종류가 왜 그리 많은지 중구난방이었다. 우리는 인터넷 세상에 들어가 보았다. 컴퓨터를 켤 때만 해도 이런 정보까지 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너무 많은 정보가 상세하게 준비되어 있어 오히려 그 중에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안을 정도였다. 정보를 다운 받아 검토한 후 서로 비교하고 의논하니 웬만큼 가닥이 잡혔다. 아이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잘해보라며 등을 두드리는 내 마음도 흐뭇했다. 이렇듯 디지털은 쓰는 사람에 따라 자신의 기회를 무한정으로 확대할 수 있는 매우 쓸모 있는 선물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의 선물은 인간관계를 확대해준다는 것이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취미 가 같고 화제만 통한다면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10 대 소년과 50 대 아주 머니가 서로 채팅 친구가 될 수 있고, 아프리카의 페인트공과 한국의 카메라맨 이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인종과 신분,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획기적이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나라처럼 직업, 학연, 지연 등의 아날로그적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수직적인 관계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닫히게 한다. 그러나 e-월드에서의 관 계는 철저히 수평적이고 열린 관계이다. 신분의 권위와 힘이 일방적으로 작용하


지도 못한다. 한 편에선 e-월드의 확산이 인간관계의 단절과 소외를 심화시킨다 는 우려 또한 없지 않다. 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아직은 아 날로그 친구가 더 뜻깊다. 하지만 e-월드에서 만난 사람은 친구가 아니 라고 말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 관계를 무조건 거부할 수만도 없다. 반드시 얼굴을 마주보아야만 친구가 된다는 것은 편협한 생각일 수 있다. 아날로그적 만남과 디지털의 만남을 비교하거나 경중을 가리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다 새로운 대화 방식과 더 넓은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들어나가려는 자세가 이 시대에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디지털 세상이 내게 전해준 가장 큰 선물은 빠른 속도로 '업무 효율성'과 '삶 의 질'을 높여주었다는 점이다 21 세기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빌게이츠 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속도의 시대를 몸소 경험하고 있다. 각종 인터뷰 요청과 방송 자료가 실시간으로 내 메일박스에 들어와 있고, 필요 할 때마다 해외 뉴스를 살펴볼 수 있으니 가히 '원더풀 월드 (wonderful world)' 이다. 예전에는 방송 대본을 주고받고, 조그만 수정 하나에도 모든 스태프들이 모 여야 했다. 그야말로 복잡하게 꼬인 스케줄을 잘 풀어나가기 위해 몸이 세 개라 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방송인에게 시간은 곧 생명과 같고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는 것은 생명을 연장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요즘처럼 커뮤니케이션 ? 이 쉽고 빨라진 것은 얼마나 큰 혜택인지 모른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예전 엔 전화나 팩스로 할 수 없었던 일, 즉 송수신 자료를 보존하고 컬러 화상을 주고 받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e-메일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의 원고는 완성될 때 마다 곧바로 출판사에 e-메일로 보내졌다.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는 즉시 약간 의 교정을 마친 후 바로 필름 상태로 전환하여 책으로 인쇄하게 된다. 원고를 주고받기 위해 왔다갔다하지 않아도 되고, 저자의 원고를 새로 타이프 할 필요 도 없어졌다. 편리한 건 둘째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이 절약될 수 있는가? 속도 의 창제' 디지털 기술덕분에 우리는 하루 24 시간을 쓰면서 과거의 48 시간의 효율 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우리 삶이 세이브 되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바로 컴퓨터를 켠다. -하루의 일정을 살펴보고, 메일박스를 열어본 다음 그날의 주요 기사를 두루 살펴본다. 그리고 운동을 하 러 한강변으로 나선다. 나는 하루의 계획을 그때그때 일일이 메모를 하는 편인데 일정이 워낙 수시 로 바뀌는 직업의 속성상 두세 개나 되는 수첩의 앞뒤를 뒤적여야 하고 정확치 않은 메모를 다시금 기억해내느라 고생도 했다. 나중엔 수첩의 지운 자국과 새 로 쓴 메모가 뒤엉겨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젠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질구레하게 수첩에 메모하는 시간을 수정과 삭제가 편한 컴퓨터 메모장으로 대치시켜 놓으니 그만큼 쓸데없 이 소모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그 시간은 또 다른 일을 하는 데, 혹은 여유를 부리는 데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선물은 가히 눈부시다. 하지만 이런 선물 을 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월드에서 행복을 만끽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왜일까? 디지털을 '도구' 로서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 문이다. 디지털은 도구다! 어떻게 보면 요즘 사람들은 디지털에 짓눌려 있는 듯하다. 인터넷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자고 나면 거창하게 새로 등장하는 '무슨무슨 닷컴 (∼.com)'을 볼 때마다 상대적 박탈감과 지적 열등감을 느낀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386 세대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서 컴퓨터 배우랴, 디지털 속도 따라가랴, 젊은 세대와 경쟁하랴... 가 련할 정도다. 이런 걸 보면서 가끔은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도 든다. 컴퓨터니 인터넷이 니 디지털이니 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삶에 행복을 주는 '도구'에 불과한데, 그 도구가 우리 삶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 다. '도구'와 가치' 가 자리를 바꾼 듯이 보이는 것이다. 정작 우리가 빠른 속도를 따라가야 하는 '진짜 이유는 모른 채 무조건 "Click!"을 외쳐대는 것이다, 또한 빨라진 속도로 내게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사 용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그저 앞에 가는 사람들 뒤통수 쫓아가기에 바쁘다. 이런 게 디지털 세상의 참모습일까? 물론 디지털 자체는 무죄이다. 앞서 말했듯이 디지털이 우리 삶의 질을 한껏 높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최대 가치가 무조건 '디지털로 대변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삶은 매우 복합적이 지 않은가? 디지털이 주는 기쁨이 있다면 또 다른 측면에선 '아날로그적인 코 드가 주는 기쁨도 무시 못할 만큼 크다. 우리는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을 가 진 다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을 이용해서 삶의 패턴을 한 차원 끌어 올릴 수는 있지만, 오감의 완벽한 충족, 감정의 미 또한 현을 맞추는 것까지 디 지털화 할 수는 없다. 얼마 전 TV 에 나오는 한 광고를 보면서 좀 싫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 이 저렇게 바뀔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다른 한편으론 소름이 돋 았다 광고의 내용은 이렇다. 광고모델이 나와서 봉지 속에 든 뭔가를 식탁 위에 쏟아 붓는다. 마치 과자를 쏟아내듯이. 그런데 봉지에서 쏟아져나 온 것은 맛있 는 과자가 아니라 디지털 칩이다. 광고의 주인공은 그 중에 하나를 집어 과자를 먹듯이 입속에 넣는다. 그리고 불쑥 내민 혓바닥 위에 놓여 있는 디지털 칩이 보인다. 마치 디지털로 사람의 모든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그 CF 에는 제작진의 의도가 따로 있겠으나 난 그 느낌이 싫다. 디지털 세상의 욕구충족과 행복이 그런 거라면? 글쎄 그런 세상에선 별로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소박한 내 생각이다. 난 디지털 세상에서 편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지 만 아날로그적인 아름다움과 느낌 또한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아날로그적으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생활 방식 이 디지털 프로세스화하고, 웹 사이클에 의해 움직일수록 좋은 이유는, 그만큼 세 이브된 시간과 에너지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고 덕분에 삶의 질을 '높일' 수 있 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이 만든 디지털 바람을 보면 마치 고 3 수험생들이 '4 당 5 락'을 외치 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디지털은 거의 신 종교와도 같다. 모든 사 람들이 그 앞에서 굽실거리며 나를 그 종파 속에 편입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하 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기계적 모습이 과연 디지털이 제대로 구현된 '아름다 운' 미래의 삶일까? 진정한 디지털 세상은 인간이 충분 수면시간인 8 시간을 푹 자고도 나머지 시 간 동안 4 시간 잔 사람 못지 않게 효율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해도, 인간은 '디지털 부품' 이 될 수 없다. 디제라티들이여, '아날로그'라는 적과 동침하자!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 방식이 공존하도록 만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어떤 부분을 디지털화해야 하고 어떤 부분을 아날로 그로 남겨두어야 할지를 아는 게 아닐까? 나는 아날로그의 시간을 남기기 위해 디지털로 일한다. 예컨대 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최대한 찾기 위해서는 무조건 인터넷 세상으


로 들어간다 금융 정보를 훌고 싶을 때나 거래를 하고 싶을 때도 사이버 월드 를 뒤진다. e-메일은 훌륭한 메신저가 되고, 뉴스를 볼 때도 디지털 월드가 필 요하다. 하지만 새벽녘 교회에 다녀온 후 샤워를 하고 상쾌한 아침을 시작할 때 난 어김없이 한강이 보이는 창을 마주하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쇼팽을 들으며 진한 블랙 커피를 마신다. 그 시간만큼은 그 어떤 디지털도 침범하지 못하게 한 다. 그리고 열흘에 한 번 정도는 '종이책'을 파는 서점에 나가 책을 고른다. 스트 레스가 쌓일 때는 채팅을 하는 대신 친한 친구와 좋아하는 카페에서 만나 아이 스크림 듬뿍 얹은 와플을 먹으며 한두 시간 실컷 수다를 떤다. 그리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생일에는 e-메일보다는 '종이카드'를 직접 골라 펜으로 축하의 마음을 써보낸다. 그것이 내 삶에 자유와 숨결을 주는 나만의 고유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에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아날로그시간!' 그것은 바로 내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나는 다른 모든 시간을 '디지털 화하는 것이다. 우리집 주변엔 이런저런 아이스크림 가게가 서너 군데나 있다. 양이 많으면 배달해 주기도 한다. 사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맞춤형'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가끔씩 아들의 손을 잡고 일부러 아이스크림 집에 찾아 들어간다. 어떤 경우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려고 시내 백화점에까지 나가기도 한 다. 아이와 내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려면 우선 둘 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아무래도 인터넷에 들어가 클릭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양말 하나를 고르면서도 아이와 나는 옷 색깔과 무늬에 대해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게 된 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점점 더 흐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아날로그가 주는 즐거움의 하나이다. 아이가 직접 단추를 채우고 신발을 신도록 훈련시킬 수도 있고, 아이와 마주보며 웃을 수도 있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게 느껴지는 시 간이다. 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걸어가는 동안 아이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우리 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학습 대상이 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조잘대고 질문을 던 진다. 나는 일일이 아이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며, 걷다가 지친 아이를 안아주기도 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해서도 엄마와 아이의 달콤한 데이트는 끝나지 않는 다. 진열장에 손이 닿지 않는 아이를 안아 올려주며 하나하나 무슨 맛인지 말 해주며 아이가 직접 고르게 하면 아이는 "음... 음, 무얼 먹을까요" 하며 어리광 을 피우기도 한다. 아이와 엄마는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떠먹을 때마다 열 마디 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아이는 아이스크림 한 스푼마다 엄마의 사랑을 두 스푼쯤 받아먹는다. 아이 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그것보다 몇 배나 더 맛있는 엄마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다. 이런 맛과 이런 분위기, 그리고 엄마와 아이 사이의 교감은 디지털로 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만져지지 않는 즐거움이다. 과연 이런 일도 디지털로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글쎄 그건 인터넷에 누군가가 복제해놓은 가짜 행복' 이 아닐는지, 나는 이런 아날로그적인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디지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한마디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조화롭게 운영되는 삶을 살자 는 것이다. 디지털로 생각하고 사고해서 얻어낸 시간을 아날로그적으로 느끼는 것, 그리고 아날로그적인 정서를 통해 내 안에 쌓인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다시 디지털 세계로 들어가 열심히 일하는 것, 난 그런 삶을 꿈꾼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 내 삶이 완성되고 행복이 충족되기를 기대한다. 다시 한번, '디지털로 일하고 아날로그로 느끼자."


'일등주의' 에서 '유일주의'로 21 세기에 들어서면서 'The war for Talents'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인재 를 찾는 것을 전쟁에까지 비유하는 것이다. 사실 조직의 사활은 누 가 먼저 인 재를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경영자들은 실감하고 있다. 조직이 인재 확보를 위해 외부인을 영입하는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상식화되어 있다. 지난 1979 년 미국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사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켄 쉐노에게 CEO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휴렛팩커드 사는 칼리 피오리나라는 여성을 CEO 로 영입해 세계 여성계를 떠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외국인 수혈을 과감히 진행해왔다. 닛산은 프랑스 르노의 카를로스 곤 부사장을 최고 운영 책임자로 영입했고, 일본 텔레콤은 영국 브리 티시 텔레콤 출신의 크라이브 안셀을 상무로 앉혔다.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 라면 인종, 국적, 성별뿐만 아니라 '아군'과 '적군'의 구분도 사라지고 있다. 하 루에도 전세계에서 14 억 명의 인구가 인터넷을 통해서 국경을 넘나들고 있으니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다. 2000 년 현재, 당신이 속해 있는 조직은 어떠한가? 조직에서 당신의 모습은 어 떠한가? 몇 년 전부터 세계화와 경쟁력을 외쳐온 터라 우리 조직 문화에도 많 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출신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누구는 '성골'이고 누구는 '육두품'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 다. 웬 때아닌 골품제? 새 천년을 건너온 우리에게 아직도 천년 전 신라시대의 폐습이 남아 있다니! 21 세기 우리의 미래를 키워낼 대학조차 아직도 편가르기에 익숙하고 발전을 거부하듯 동종교배만 고집한다. 그 극명한 예가 국내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 의 자기 대학 출신 교수 비율이 74.7%라는 점이다 '우리 편' 이 아니면 능력이 고 업적이고 평가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국내 최고의 대학이 세계 대 학 중에 경쟁력 700 등이라는 자존심 상하는 결과가 나을 수밖에 없지 않은 가. 또한 지난해 스위스 국제 경영대학원이 실시한 대학 교육이 국제 경쟁력 에 미 치는 공헌도 평가' 에서 한국은 평가 대상 47 개 국 중에 최하위였다. 그렇게 입시 지옥을 거쳐 사회에 나와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또 한차례의 줄서기뿐이다 윗사람들은 '친위부대'를 만들기 위해 학연과 지연을 찾고, 아랫 사람들은 튼튼한 동아줄을 잡기 위해 눈치보기와 줄서기에 여념이 없으며, 일단 줄서기를 끝내면 중세식 충성을 다짐한다.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조직 내 에서 그런 줄 하나 잡지 못하면 왕따 신세가 따로 없게 된다. 그러나 작년부터 국내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정보통신 분야에서 벤처 열기가 일어나면서 대기업 직원들이 대거 이직하는 사 태가 벌어지고 있다. 80 년대 '현대맨', '삼성맨' 이라는말이 있을정도로 명문 대 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인재들의 안착지였던 대기업에서 '젊은 인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올 초 한 재벌기업의 .인터넷 관련 계열사에서는 전직원 의 10%가 한꺼번에 사표를 제출해 업무가 일시적으로 마비되기까지 해 회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신규 채용 인원의 폭을 놓고 큰소리를 치던 대기업들은 인재들의 엄청난 이 직 사태로 당황하고 있는 반면, 반대로 벤처기업의 이직률은 제로에 가깝다. 물론 일부에서는 벤처에서 대기업으로의 역이동도 나타나지만 젊은 인재들은 동맥경화에 빠진 조직에서 숨막히는 안정을 택하기보다는 리스크는 있으나 '꿈' 과 '돈'을 한꺼번에 거머쥘 수 있는 야심찬 목표를 향해 대이동을 시작한 것이 다. 21 세기의 화두는 유일성이다 국제사회나 국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공통분모는 '이동'이다. 더 낳은 인재


와 더 좋은 기회를 향한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1 세기의 문명이 정 착을 떠나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라는 예측에 설득력을 더 하는 현상이 라 할 수 있다 뿌리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앞으로 30 년 후 에는 인류의 10 분의 1 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유목민이 될 것이라는 프랑스의 학 자 자크 아탈리의 예언은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휴대폰과 노트북처럼 사물이 유목화되고 기업 또한 계속 이동함에 따라 일 자리도 같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이곳저곳을 떠 돌아다니며 더 나은 가치'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 우 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러한 이동을 권력이동(power shift)으로 해석하든 유목 (nomadism)으로 해석하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이동이 수직적 이 동이 아닌 횡적 이동이라는 점이다. 이제 사회는 '아군과 적군' 또는 '나 와 너' 의 경쟁보다는 횡적인 연대, 네트워킹을 통한 협력을 중시할 것이라 는 예측이 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조직의 논리에 희생되거나 힘의 논리에 순응하기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으로 주변의 동료들을 경쟁자로 의식하는 것도 버려야 할 20 세기의 모습이다. 영 원 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시대가 21 세기이다. 오히려 나의 발전을 위해 그들과 연대해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살수 있다. 서열을 매기는 경쟁이 아니라 나의 '절대 치'를 높이기 위해 나 자신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높이 는 것, 그것이 21 세기의 나의 과제라는 것이다 자신의 핵심역량을 개발하라 언젠가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우량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한 교포 여성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쉰 살을 넘긴 그녀는 남의 나라에서 그것 도 실리콘밸리에서 혼자 힘으로 많은 성과를 일구어냈다. 국내 굴지의 재벌 회 사들의 신용장이 증명해주듯 그녀의 사업은 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태권도 도장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단자인 그녀 자신이 그 도 장에서 코치로 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국인을 입양해 키워 결혼까지 시켜 양아들, 며느리를 여 러 명 거느리고 있다. 일년에 몇 번씩 그들을 불러모아 한국식으로 명절을 보내 기도 한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성공한 여자 특유의 당찬 힘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녀가 일구어낸 모습은 오래 전부터 남다른 '자기 가치 '를 개발한 결과임을 알 수 있었다. 과장된 화장과 의상을 하긴 했지만, 중년 한국 여성의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 다. 이글거리는 눈빛, 에너지와 열정이 넘쳐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한 모 든 말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질 것처럼 느끼게 만들 정도로 힘이 넘쳐 났다. 쉰 살을 넘긴 여성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대부분 '컴맹 아줌마'로 취급되기 십 상이다. 그런데 그녀는 컴퓨터 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 정도의 열 정이 라면 컴맹이었더라도 단시간 내에 컴퓨터 박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또 그녀가 컴퓨터 사업을 한다니 컴퓨터는 확 잡고 있을 거일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 는 컴퓨터를 잘 알지 못한다고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컴퓨터 회사 사장인 그 녀가 말이다. 그녀의 대답이 걸작이다. "이 나라 성인의 대부분이 승용차를 운전하고 다니지만 차의 엔진이나 구조 를 알고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운전만 할 줄 알면 되는 것 아닌가 요? 나는 컴퓨터를 잘 몰라요. 하지만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만들 줄 아는 최고의 기술자를 부리면서 일해요. 내 머릿속엔 끊임없이 아이디 어가 샘솟고 있어요. 나는 내 아이디어로 운전을 하고 기계는 다른 사람이 알 아서 하는 것이죠."


그녀는 자신이 컴퓨터의 달인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전혀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비록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기술에 대해서 는 잘 모르지만 남다른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는 점에 집중한다고 했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고 일단 아는 것부터 개발하자,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핵심역량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아웃소싱함으로써 자신의 유일 성을 키운 것이다. 대단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도와준 사람도 없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본래 갖고 있는 능력을 훨씬 뛰어넘어 수억 달러의 외형을 자랑하는 사 업체를 이끌고 있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자신의 핵심역량 개발과 아웃소싱이 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끝내며 "들판의 풀 한 포기까지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하 겠어요"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객관적으로는 현실 가능성이 없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허황된 말로 들리 지 않았다. 그 인터뷰를 보던 나로 하여금 그 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그녀의 파워이다. 그녀는 자신의 핵심 역량 및 커리어개발 능력, 아울러 네트워크 및 아웃소싱 능력까지 한마디로 21 세기적인 무기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사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모두 1 등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1 등을 향해 열심히 뛰었고, 그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시기와 질투를 하기도 했으며, 1 등 자리를 차 지한 다음엔 그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수백 수천 명이 마라 혼을 해도 1 등만이 월계관을 썼다. 똑같은 한 가지 과제를 놓고 수천 명이 경쟁 해왔다. 물론 그것은 단순 경쟁이었고, 결과는 항상 서열화 될 수밖에 없었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였다. 그러나 21 세기의 최대 가치는 창조성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명 도 없으며 나와 똑같은 뇌를 가진 사람 역시 한 명도 없다. 서열은 필요 없게 되었고 존재하지도 않게 되었다. '창조성' 에는 등수가 없다. 그러므로 과거에 일등을 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꼴찌였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단지 20 세기의 가치일 뿐이다. 21 세기의 화두는 유일성이다. 그녀는 아름답다 인류 역사 이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본능 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머리 나쁜 건 용서받아도 못생긴 건 용서 받을 수 없다 ' 는 농담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유행될 정도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 정되는 외모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꽤 많다. 그래서 인지 예전과 달리 성형수술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은 오히려 촌스러운 사 람 취급을 받는 상황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 역시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구한다. 다행히 혐오감을 주지 않는 외모를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앵커로 데뷔하게 되면서 부 터는 '예쁘다'는 말에 약간의 저항감을 갖게 되었다. 젊은 여성에게 "예쁘다"고 할 때 그 말은 능력과 상관없이 예쁜 얼굴 하나로 한몫보고 있다는 식의 뉘앙 스를 풍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쁘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좋다. '예쁘다'는 말은 어쩐지 젊음이 동반되는, 20 대 미만에 한정된 표현 같아서 찰나적이고 가벼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말은 외모뿐만이 아닌 그 사람의 내면까지 포함하는 표현 같아서 그윽하고 품위 있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예쁘다' 는 말은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타고난 외모에만 중점을 두는 표현 같아서 조 금 섭섭하게 느껴지고, '아름답다'는 것은 외모와는 다른 뭔가를 포함한 말 같 아서 좋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사실 예전엔 '예쁜' 얼굴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름답다'는 것과 '아름다운사람',그리고 '아름다운여성' 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고 그런 사람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촌스럽게 살지만 그 삶에서 향기가 난다 우리 집은 딸만 넷이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분명한데도 우리 자매들 은 키와 몸무게, 얼굴 생김, 성격, 결혼한 나이, 결혼 생활에 대한 적응력(?) 등 등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제각각일 수가 없다. 자매들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 키가 160cm 도 채 안 되고 체중도 40kg 언저리 에서 왔다갔다해서 가련하기(?) 그지없던 큰언니는 미국에서 커리어우먼이 되 어 당차게 살고 있고, 외모가 가장 뛰어나 주변에서 모두들 탤런트가 될 것이 라고 예상했던 둘째 언니는, (내가 한때 촌스럽다고 생각했던)현모양처가 되 어 있다. 가장 리버럴하고 쾌활하며 소위 여러모로 '튀었던' 셋째언니는 미대를 졸 업한 뒤 저돌적으로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해서 활발하게 운영해 몇몇 호텔의 수주까지 받더니만, 이게 웬일? 사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가 우리 자매 중 가장 촌스러운(?) '부산댁'이 되어 있다. 한편 어릴 적 별명이 벙어리였을 정도로 수 줍음 많고 겁 많던 막내인 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힘이 솟는 방송인이 되어 있다 정말 사람일은 알 수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실감난다.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에 역행(?)하는 삶인 듯한 현모양처의 길을 택한 둘째 언니의 삶과 생활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삶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반추해보 게 되었다. 둘째 언니가 결혼할 당시에 다른 세 자매는 학생(졸업 후 꼭 사회 활동을 하 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학생이었다)이거나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었던 터라 ' 나는 좋은 아내가 될 거야"라고 선언하는 그녀에게 이구동성으로 "생각 잘해 봐 " 하고 충고했었다. 하지만 그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로 당당히 입문한 그녀는 결혼한 지 15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엄마이자 아내로서 그림처럼 살고 있다. 남 보기에만 좋은 그림처럼 사는 게 아니라 자 기 스스로도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다. 결혼한 지 몇 년쯤 지나면 보통의 부부들은 서로 간에 권태감을 느낀다고 한 다 그래서 남편이 늦게 들어온다고 전화라도 할라치면 겉으로야 어떻든, "아, 오늘도 한끼 때웠구나" 한다던데 둘째 언니는 권태기는커녕 아직도 남편이 사 랑스럽다고 한다. 둘째 형부가 한 달 정도 장기 출장을 갔을 때였다. 모처럼 동생 노릇 좀 하려 고 안부 전화를 걸어서는 병부 안 계시니까 편한 것도 있지만 하고 은근슬쩍 떠보았다. 그런데 웬걸! 언니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는 말, "아니야. 다음장기 출 장 때에는 내가 따라가든지, 못 가게 하든지 해야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앗! 나의 실수' 싶으면서도, 동시에 닭살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동생으로 하여금 닭살이 돋게 할만큼 결혼 후 십수 년이 지나도 변하 지 않는 둘째 언니. 아무튼 언니의 남편 사랑은 빈말이 아닌 듯싶다. 근교에 주 말 농장을 꾸며놓고 주말이면 새벽부터 남편과 함께 나가서 각종 농산물을 가 꾸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고는 김치며 장아찌, 과일 꾸러미를 거두어들여서 는 친정과 동생네, 이웃사촌들에게 돌리느라 바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편 친구들의 모임이 열릴 경우 거의 매번 장소를 제공하 겠다고 스스로 나서며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저 "내가 좋아 서..."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 대목에서는 정말이지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언니는 아이들 시간 맞춰서 스케줄 챙겨주고 틈나는 대로 가족과 여행을 가 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등 무척 재미나게 산다. 신혼도 아니고 중년에 접어들면 서도 여전히 행복하게 사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세 자매는 머쓱해진 지 이미 오래다. 처음에 나는, 내가 재미없게 생각했던 삶에 대해 둘째 언니가 아무런 문제 의 식도 없이 행복해하며 사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왜? 성취가 없는 삶인 것처


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고 내게도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언니 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니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해하면서 살 수 있 는지 그 비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언니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했고 그녀가 선택한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에게서 주부들이 흔히 하는 말, "하루종일 애들과 씨 름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어"라는 식의 불평을 들어본 적 이 없다 심리학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서 내가 여러 각도로 유도 심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언니는 형부나 전업주부의 삶에 대해서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단순히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평을 만들지 않고 늘 자족하고 감사하며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간혹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언니의 집에 들르곤 하는데, 현관문을 열면 늘 온기가 느껴지고 향기가 흘러나온다. 아, 이런 것이 행복이구나 싶은 분위기가 집안 가득 넘쳐난다. 그런 언니의 현재 모습은 주변에서 모두들 미스 코리아 감이라고 추켜세우던 20 대 초반의 모습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 도로 아름답다. 둘째 언니는 '예쁜' 것을 뛰어넘어 물리적인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운명을 이겨낸 사람이 아름답다 내가 아는 어느 유명인의 삶 또한 독특하고 아름답다. 그 자체가 예전에 인기 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아들과 띨 을 연상시킬 만큼 소설 같고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책임감 없는 아버지와 아들밖에 모르는 어머니, 그리고 여러 남매 들 속 에서 성장했다. 물론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녀의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들처럼 헌신적이기는 했지만 그 헌신은 오직 아 들에게만 향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딸들에게도 자신이 그렇듯이 아들 에 대한 헌신을 강요했다. 당연히 가족 전체가 희생해서라도 아들은 대학 에 꼭 가야 했지만 딸들은 '각자 알아서 할' 일이었다. 따라서 집안의 대들보인 아들 이 서울로 유학을 갔을 때 딸들은 그 아들에게 밥과 빨래를 해줄 가정부 아닌 가정부 역할을 하러 따라가야만 했다. 아들에게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학비는 물론 두둑한 용돈을 올려 보내왔지만 딸은 공부를 하고 싶으면 자신이 벌어서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드라마에서 흔하디 흔하게 보는 결과가 이 집안에서도 일어났다( '저런 일이 세 상에 어디 있어,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나 나오겠지' 하는 일은 현실에서도 생각 보다 자주 일어난다. 너무나 처절하고 불행해서 '에이, 어떻게 저런 일이!' 하는 일이 현 실 속에서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 세상사인지 어머니가 그렇게도 공에 공을 들인 아들은 정작 제 밥벌이도 못하고 곁길로만 나갔고 딸은 자신의 힘으로 굳 건하게 자신의 앞길을 열어갔다. 그녀는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집안의 귀한 아 들 시중을 충실히 들면서도 자기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버는 등 주경야독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맞섰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 힘으로 공부만 마친 것이 아니라 사업까지 일구어내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대들보인 아들이 하지 못 한 일을 하고 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의 성장 과정과 가족사를 알게 된 나는 어머니와 그 아들 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설움을 받고 자랐는데 어머니와 오빠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그녀는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그들 탓이 아니잖아요. 물론 자라면서 속상하고 남몰래 울었던 적도 많아 요. 원망도 했고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시대의 잘못이고, 잘못된 관습 때문이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원망할 대상은 부모님이나 오빠가 아니에요. 그 들 또한 잘못된 관습과 편견의 피해자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부모님이 아니라 시대와 관습, 편견, 내 안의 끝없는 절망과 싸운 것 같아요. 그 리고 무엇보다 세상에 순응하려는, 주어진 운명에 체념하려는 나 자신과 싸웠다 고 생각해요." 만약 그녀가 세상에 대해, 자신이 처한 운명에 대해 순응했다면 그녀는 현재 어떤 모습일까? 흔들리기 쉬운 사춘기를 잘못 넘겨 가출소녀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공부를 중도에 포기해 만족하지 못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결혼해서 는 멈출 수도 있는 불행을 평생토록 연장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헛소문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지연 씨.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마세요. 이해는 하지만, 사람들 원망 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러면 지연 씨 마음만 거칠어져요. 환경이 좋아서, 아니면 부모의 도움 덕분에 성공한사람들도 많이 있죠. 하지만 난 그들이 별로 부럽지 않아요. 남들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 그 속 에 숨어 있는 엄청난 투쟁과 노력이 제가 이루어낸 성공 못지 않게 자랑스럽거 든요." 그 순간 그녀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빛나는 얼굴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흔들림 없는 자신감과 꼿꼿함, 그리고 무엇 보다 최선을 다해 운명을 이겨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웠 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는 진주조개들 내 경우 30 대가 되면서 일을 대하는 태도나 목표가 20 대 때와는 사뭇 달라진 점이 많다. 우선 20 대에는 나의 성공과 일, 그리고 나'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런데 30 대가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나' 이외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 공 자체만 꿈꾸었을 때는 '무엇이 성공' 인지 정확한 개념도 없이 앞으로 달려 가기만 했던 것 같다.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끝없이 일만 하면서 어느덧 30 대를 훌쩍 넘긴 탓인 지 아직도 '무엇이 성공인지' 그 개념이 혼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성취하길 갈망하던 성공과 잘 사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있 었다. 몇 해 전, 방송과 관련해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하시는 한 수녀님을 만 나게 되었다. 나이가 나보다 적거나 약간 많아 보이는 분이었는데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무척 해맑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한센병 환자가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아마 어른들에게 무서운 얘기를 많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당연히 그들에게 가까 이 다가간다는 것도 꺼려졌다. 물론 철이 들면서 이런 생각은 없어졌다. 하지 만 만약 누군가가 내게 그들을 위해 일할(감히 봉사라고 하지 않겠다. 그들 이 오히려 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 꺼이 응하겠느냐고 질문한다면 여전히 선뜻 '하겠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더더군다나 '평생토록'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나는 내가 그 동안 해오던 일의 성과, 별것 아닌 그 자리가 못내 아쉬워 포기하지 못 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질문에 망설임 없이 삶 전체를 바치겠다고 선 택한 어떤 사람을 그때 보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본 그. 수녀님 외에도 그런 삶을 선택한 분들이 좨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20 대에는 내가 다른 사람보 다 무엇인가를 잘하고 앞서가는 삶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30 대가 되니 자


신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성취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삶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 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룬 성취가 내 것이 될지는 모르지 만 세상을 위해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 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 쏟아 부은 나의 노력이 제아무리 크고 넓다고 해도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삶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을 만큼 중증인 환자들을 그녀 는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전혀 거리낌없이 다가가 상처를 싸매 주고 어루만져 주었고, 장애의 정도가 심해 누워 있는 사람들의 욕창을 아침저녁으로 닦아냈으 며, 그들의 이부자리를 매일매일 봐주었다. 이런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그 수녀님을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마치 세상의 미물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떨 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뭔가 이루었다고 하는 것, 앞으로 이루 겠다고 하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되었다. 수녀님의 얼굴은 너무나 순수했다. 잡티가 있는 그 얼굴이 화장한 내 얼굴보 다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달리 할 말이 없어 난 그저 수녀님의 행동 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내게 헤어질 때 그 수녀님이 던진 말은 결정적으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인사말마저 잊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내가 그분들을 위해 일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분들이 내게 주시는 것이 더 많아요.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그들의 정신이 오히려 나보다 맑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지요. 세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어서 그런지 그 들의 영혼이 우리보다 깨끗하답니다. 고통을 안고 사는 그들의 웃는 얼굴에 서, 작은 것에서 감사하는 모습에서, 전 진정한 삶을 배웁니다. 세상은 공평해 요.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안고 있지만 우리에게 없는 행복을 그들은 이미 갖고 있 는 것 같아요. 제가 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과 저는 평등한 관계 지요. 우리들은 서로 많은 것을 주고받는답니다. " 이 수녀님의 아름다움을 세상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있으랴. 그녀의 아름다 움은 그녀 자신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로 세상을 아 하는 파워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수녀님과의 만남 이후, 나는 먼 훗날 자주 내가 죽음의 문 앞에 섰을 ? 뭔 가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며 '이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데' 하 는 후회를 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지' 하고 다짐하곤 한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너무나 다양한 삶이 있고, 그 삶이란 순간순간: 선 택이 어우러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아름다운 삶은 어떤 것인가? 진정 아름다 운 사람은 누구인가? 진정 아름다운 여성은 누구인가? 나는 내가 열심히 일했고 성실했으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다 그리고 아직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사실 난 부족한 사람이다 부족』 이 많 은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나: 성실과 노력은 이미 보상받았는지도 모른다. 때때로 내가 여성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발언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내 가 모르는 곳에서, 사람들이 잘 살펴보지 않는 곳에서 나보다 더 열심히, 성실 하게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빛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신이 보기엔 그들이 세상의 주연이고 나는 조연에 불과한 지도 모른 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혹은 가혹한 운명과 싸우며 이 세상 을 향해 자신을 던지면서 살아가는 여성들, 그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박수를 보낸다.


행복한 이혼의 조건 누구든 사랑하니까, 혹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니까 결혼하겠지만 순식간에 원수 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갈라서는 것을 보면 인간의 감정이 얼마 나 속기 쉬운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내 경우, 결혼한 후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깊어지면서 '저 사람에게 차라리 나말고 좋은 사람이 생기기라도 해서, 내 곁에서 떠나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문제가 있긴 한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한 채, 소극적인 해결책이 나와주기만을 막연히 기대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강변도로에서 멍하니 앞만 보고 자동차를 운전 하다가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으로 들어가는 진출로를 놓쳐버린 게 아닌 가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였기 때문에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자 내친 김에 죽 달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낮 시간이라 길도 안 막혔다 한참을 달리 다 이 대로 끝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 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이? 이건 내가 아니야. 나를 되찾아야해.' 더 이상 시간을 끌 일이 아니었다. 며칠 후 난 그 동안 머릿속으로만 수없이 생각해오던 이혼을 행동에 옮기기 로 결정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인간인지라 나 또한 결혼할 때 내 가 이혼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백지연이니까 이혼했을 거 야. 백지연이야 뭐, 이혼 후에도 사회 활동을 할 수 있고 충분히 경제적으로 자 립할 수 있으니까 주저하지 않고(?) 이혼할 수 있었던 거 아니겠어" 하고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백지연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빨리 할 수도 있었을 이 혼을 늦춘 감도 없지 않다. 보통 사람의 이혼 7.1 라면 두 사람만의 일로 끝나겠 지만, 내 경우엔 이혼 후에 겪을 언론 공세 등의 통과의례가 불 보듯 뻔했기 때 문 71 다(결국 정도를 지나친 통과 의례를 겪었지만 말이다). 즉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결정했을 일을 백지연이었기 때문에' 더 어렵게 결정했다는 것이다. 흔히 유명인들은 이혼을 식은 죽 먹듯 한다는 편견이 있지만, 유명인이기 때문에 오 히려 이혼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혼을 결정할 때 가장 갈등했던 점은 세 가지였다. 아이가 있는 경우 는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아이 때문에 이혼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혹시 장래에 받을지도 모를 상처가 가장 두려웠고, 무엇보다도 만약 이 혼을 한 뒤 사랑하는 아이를 내가 직접 키울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웠다. 아이 없 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개 이혼을 하게 되면 친권이 아 버지 쪽에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스레 이것저 것 열심히 알아보았다. 그나마 내 경우는 직업이 확실하다는 것을 따로 증명하 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결혼을 깨야 한다는 사실 역시 적지 않은 갈등 이었다. 또한 우리 사회의 관습상 십수 년 간 쌓아온 내 커리어가 이혼으로 인 해 타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기에 이혼을 결심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도 계속해서 커져갔다. 그렇다고 갈등이나 반목이 해소될 예감이나 조짐도 보이 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 때문에 이혼을 망설이고 있지만 부부간의 계속되 는 불화가 아이에게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 쳤 다 차라리 이혼해서 혼자 아이를 키우더라도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안정된 환경 을 만들어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혼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우선 아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


도 아이만은 내가 키우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이혼 때문에 아이 의 장래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은 기우일 것이라고, 긍정적인 쪽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혼 후에도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니 아이를 위해 더욱 더 열심히 살 것이고 아이를 위해 아이 옆에 든든히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종교와 관련된 고민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기도로 해결하 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내 커리어에 대한 염려는 이혼해야겠다는 결정이 분명해지자 더 이상 갈등 요인이 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혼을 앞두고 나를 갈등하게 했던 몇 가지 문제를 종이에 써놓고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쓰고 나니 선택은 보다 명확해졌다. 나는 이혼했다. 하지만 난 지금도 부부간에 갈등이 있는 선후배들에겐, "결혼 했다면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사실 '이혼'은 훈 장도 아니고, 권장할 만한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갈등이 있고 좀체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나와 상대방, 그리고 자녀까지 포함한 모두를 위해서 이혼은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게 흔들림 없는 내 생각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혼은 차선이 될 수 있으며 이혼 후 자신의 삶을 얼마나 책임감 있게 꾸려 가느냐에 따라, 특히 자녀의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 쌍방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협조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이혼은 차선을 넘어 또 다른 의미의 최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인생과 내 인생이 걸린 이혼문제에 대해 나는 충분히 심사숙고했고 차선의 방법으로 이혼을 선택했다. 결혼이 하나의 선택이라면 이혼 역시 또 하 나의 선택이다. 만약 '결혼' 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함을 느낀다면 불행에 ? 빠진 자기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혼으로 불행의 연장을 막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여 평생 불 행하게 살 바에야 그 삶에 대해 냉정하게 재고해보는 것이 보다 이성적인 삶의 태도가 아닐까. 이혼을 결정하기까지는 나 역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 이 또 다른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고 이혼에 대해 편견 과 오해가 심한 우리 사회의 시선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사랑 하는 아들의 웃는 얼굴이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 염려와 달리 이혼 후의 삶은 문제의 삶도, 어려운 삶도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과 '내 삶'을 되찾았다. 결혼한 후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기도 했었는데 막상 이혼하고 나니 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예전의 당당함이 다시 솟아 났다. 결혼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난 불행했다. 그러나 이혼으로 불행의 연 장을 막았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 선택한 이혼, 그로 인해 빚어진 모 든 문제에 대해 혼자서라도 최선을 다해 책임졌고, 변명 한마디하지 않았다 이 유야 어찌 되었든 잘못된 선락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이혼 후 큰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지금 나는 아무 이상 없이 살고 있고 사랑 하는 아들은 내 품안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잃었던 행복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이혼에 '자격증'은 필요 없다, 그러나 '자격'은 필요하다 흔히 요즘세상은 '이혼하는 게 쉬운' 시절이라고들 말하지만, 딱히 그렇지만 도 않은 것 같다. 현대 사회를 일컬어 자격증 시대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래서 일까? 이혼하는 데도 왠지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사회 분위기를 요즘 들어 많이 느낀다. 특히 여성의 경우에 더 그렇다. 작년 말한 칠십대 할머니의 이혼소송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젊었 을 때 교사로 일했다는 그 할머니는 부자인 할아버지와 살면서도 경제적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노년에나마 자유를 찾겠다며 돈을 들고 가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절도죄로 고소했고 할머니는 더 이상 같이 살기 싫다며 이혼 소송을 냈다. 문제는 법원의 판결이었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이제 와서 버리는 것은 결혼할 때 했던 혼인 서약에 어긋나기 때문에 할머니의 이혼을 허락할 수 없다 는 것이 판결의 주요 내용이었다. 노년에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할아버지 를 계속 보살피라는 것인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할머 니가 이혼하고자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이혼을 하기란 이렇듯 쉽지 않다. 그리고 설령 이와 같은 사법부의 이혼 자 격증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했다고 해서 문제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이혼이 결정된 다음부터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혼을 고려할 때 이혼에 대 해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먼저 꼼꼼히 따져보고 나서 결정하라 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수시로 남편 흥을 보면서 '내일이라도 당장 이혼해야 지 이렇게는 더 못 살아" 하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편인 나는 그녀가 정말로 내일 당장 이혼하는 줄로만 알 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와 함에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음식이 좨 맛있었는데 이것저것 음식을 먹고 있던 그녀, "이거 좀 싸 갈 수 없나? 우리 남 편이 잘 먹는 건데" 하는 게 아닌가. 사실 이혼이란 화풀이가 아닐 뿐더러 일반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가 혹한 현실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남편이라는 적당하게 편안한 그늘을 박차고(물론 그늘을 거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을 용기, 그늘 속에서 누리 던 안락함을 버릴 자신감, 그리고 세상과 부대낄 만한 독립심이 없다면 차라리 불 행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산다고 누가 비겁하다 고 욕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행복한 이혼'을 하려면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을 자신감, 스스로 어려 움과 문제를 해결하고 버텨낼 용기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즉 남편이라는 존재 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는 한 이혼은 꿈도 꾸지 말고 입에도 을 리지 않는 것이 좋다. 이혼이 무조건 누구에게나 차선의 방법이 되는 건 아니니 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을 경우엔 이혼을 고려해봐도 좋다. 대개 이혼 을 생각하게 되면 가까운 친인척과 의논하는 경우가 많은데(이혼을 창피하게 여겨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힘들어한다), 사실 가족은 객관 적 태도를 견지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감정적인 말로 당사자가 이성적인 판단 을 하는 데 방해를 줄 수 있다. 따라서 그보다는 전문가와 상의해보거나 개인 적으로 신앙이 있다면 자신의 내면 속에 침잠해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부부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내가 상대방의 어떤 점 을 가장 못 참아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는 것이다. 충분한 고민과 상담을 통해 이혼을 결정했다면 다음에는 이혼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냉 정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혼은 한 남자(또는 여자)와 같은 지붕 아래 살 지 않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굉장히 골치 아프고 귀찮은 숙제,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가 이혼에 뒤따른다. 이혼? 공부하고 해라 우선 상대방과 협의 이혼이 가능한지 아니면 소송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인 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물론 상대방과의 충분한 의논을 통해 협의 이혼을 하는 게 좋다. 또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지, 혼자 처리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아 야 한다.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누가 아이를 키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부 모의 입장보다는 '아이를 위해서' 누가 맡는 것이 더 좋을지 객관적으로 냉정하 게 결정해야 한다. "아빠니까 내가" 혹은 "엄마니까 내가"라는 식의 발상은 금 물이다. 누가 키우든 양육권과 양육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돈 문제까지 끼어 그렇 지 골이 두 사람 더욱 결국 막 판까지 몰아가기 쉽다. 그래서 아이를 여자가 맡 을 경우 '치사해서 안 받고 만다'는 생각을 하기 쉬운데 경제력이 부족하다면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권리를 주장하는 게 낫다. 사실 협의 이혼의 조건에 별 문제가 없다면 변호사가 없이도 이혼은 가능하 다. 그러나 이혼 수속을 밟기 전에 먼저 변호사를 만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얻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에도 역시 아는·것이 힘이다. 만약양육권 을 갖지 못한다면 접견 권은 어떻게 보장받을 것인지, 재산분할은 어떻게 보장 받을 수 있는지, 양육비는 실제로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등등 알아두어서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알다시피 양육권과 양육비는 상대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아이가 어릴 때엔 아무래도 아빠보다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여성의 친권자 주장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혼에 관한 한 법이 약자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예를 들 어 아버지 쪽 7i 서 양육비를 부담한다 해도 법적으로 보장된 액수가 아이를 키우 는 데 턱도 없이 모자랄 뿐 아니라 그나마 주기로 해놓고 안 주면 애를 양육하 는 어머니 쪽만 골탕을 먹게 되는 상황이다. 법이란 것이 이렇듯 여성에겐 여러 모로 불리하지만, 그럴수록 더 자세히 살 펴보고 알아두는 것이 상책이다. 일례로 이혼한 여성은 다시 복적(친정집의 호 적에 다시 올리는 것)해야 하는데 복적을 할지, 일가창립(자신이 호주가 되어 한 가계를 세우는 것)을 할지도 미리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호적법은 고칠 것 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재산분할문제 역시 여성에게 불리하다. 대부분의 경우 재산이 남편의 명의로 되어 있는데 평소 네 돈 내 돈 따지지 않고 호탕한 듯이 굴던 남자들도 정작 이혼을 앞두면 태도가 돌변해 여성의 재산분할 요청에 대해 거품을 무는 경우 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재산분할은 이혼과 동시에 하는 것이 좋고 의견이 조 정되지 않아 재산분할에 대한 소송을 내려면 이혼 후 2 년 내에 해야 한다는 것 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전업주부라 할지라도 재산분할은 당연한 권리이므 로 변호사를 선임해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여성의 경우 이혼 후 경제력이 없으 면 아이조차 보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위자료, 특히 양육비는 협상의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수행해야 할 기본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혼을 하더라도 공동의 자녀를 키우는 것이기 때문에 위자료와 양육비는 지불하는 것이 상식이다. 양육비를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여성이 상대적 으로 경제력이 적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면 불합리한 것 아 닌가? 그렇지만 이렇게 당연한 일이 너무나도 여러 곳에서 이행되고 있지 않다 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불 합리이고 비극이다. 그렇다면? 법이 나서서 보호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권리는 찾아야 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행복한 이혼이 되느냐 마느냐를 가름하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아이 문제이다. 아이와 어느 정도 의사 소통이 가능해지면 가능한 한 사실에 의거(상 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험담과 비방은 아이에게 상처와 불신을 안겨주니까 조심 해 서 말해야 한다)해서 하루라도 빨리 부모의 이혼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 이 좋다. 이를테면, "너도 친구와 다툴 때가 있지? 엄마와 아빠도 도저히 함 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서 헤어졌어"라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주 는 것이다. 이때 아이에게 "그러나 나는 절대로 너를 떠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덧 붙여주어야 한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엄마와 아빠가 헤어졌다면, 나한테서도 떠나버릴 수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 다고 한다. 별로 좋지도 않은 소식을 꼭 아이에게 설명해주어야 하느냐며 불필 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의 이해력은 부모가 예단 하는 수준을 훨씬 뛰 어넘는 경우가 의외로 많으므로 성실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하지만 무조건 참지는 마라 상당수의 여성들이 이혼후의 생계가 막막해서 '당하면서도 참고 사는' 경우 가 많으며 양육권 또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 현실이 이 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말하면 결혼 당시부터 준비되어 있어야만 행복한 이혼 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경제적 자립 없이 자아의 독립은 7 없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은 결혼할 때보다 이혼할 때 몇백 배 더 중요 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혼하는 당사자가 '자신의 이혼'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받아들여야한다는 점이다 이혼 당사자조차 이혼을 '이상한 것'으로 생 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추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혼은 죄가 아니 라 개인 적인 사건이자 삶의 변화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혼 당했다'거나 '이혼해버렸다', '이혼하고 말았다'는 식의 수동적이고 즉흥적인 표현은 삼가고 차라리 '이혼에 성공했다' 고 생각하는 것 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인데도 이혼조차 할 수 없는, 안 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너무도 불행한 결혼이었다면 이 혼 에 '성공'한 것은 사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게 좋다. 이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이혼은 아예 하지 않 는 편이 낫다. 그런 식의 태도는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아이에게 이혼한 부모는 '인생의 패배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비쳐져 또 다른 상처를 안겨줄 뿐이다. 주변에서 묻기 전에 이혼한 사실을 먼저 얘기하라. 당신이 공개적으로 당당하 게 말하면 그 누구도 함부로 당신을 대할 수 없다. 물론 그 중에는 기본적인 예 의도 모르는 사람들이 끼여들어 이러쿵저러쿵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말을 내 뱉는 경우도 있지만, 무시하라.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당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 지 않으니까. 나는 이혼을 하자마자 기자들을 제외하곤 친지나 친한 친구들에게 그 사실 을 알려주었다. 물론 축하(?)까지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내가 내린 결정을 이해 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헛소문에 시달릴 때 기꺼이 든든한 바 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행복한 가정이 최상이다. 그러나 그래도 이혼이 필연 일 때는 행동하라. 그리고 용감해져야 한다. 더불어 현명해져야 한다. 그러면 행 복을 되찾을 수 있다. 최후의 순간까지 따져라 우리 나라의 많은 여성, 남성들이 결혼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중의 하나는 '결혼 적령기' 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혼 적령기 가 따로 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조차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것 아니 겠는가. 20 세기초만 해도 여성의 경우 늦어도 20 세 전후에는 결혼해야 했다. 하 지만 지금은 그 나이에 결혼하는 여성이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듯한 취급을 받 지 않는가, 도대체 결혼 적령기라는 것을 누가 만들었는가. '적령기'에 대한 객관적인 기 준이 있기나 한 것인가? 20 세엔 결혼하면 안 되고, 30 세 전후로 하면 괜찮다 는


생각의 옳고 그름을 과연 무엇으로 판단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솔직히 말하면 결혼 적령기라는 지뢰밭을 무사히 통 과하지는 못했다. 30 세를 넘기면서부터 외부에서 시도 때도 없이 결혼 운운하며 압력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왜 그 나이까지 결혼을 안 하세요? 따로 만나는 사람은 있나요'''라고 묻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았다. 잔뜩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결혼 안 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불 쾌해지기까지 했다. 직업상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런 식의 질문과 시선 으로부터도 완전히 초연해질 수가 없었다. 많은 여성 스타들이 부족한 것 없이 독신 생활을 즐기면서도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저 웬만하 면 대충 결혼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갑작스레 결혼을 서두르는 계기는 상당 부 분 바로 그런 식의 눈초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 바로 함정이다. 일단 이 함정에 걸려들면 마음이 초조해지 고 다급해진다. 그래서 지나치리 만치 신중히 생각해도 모자랄 중요한 결혼 문 제를 앞에 두고도 대충대충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과 사귀는 동안에도 그 사람 을 좀더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지 못한다.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더라도 '사람이 다 그렇고 그렇지. 결점 한 두가지 없는 사람 있겠어? 하는 식 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넘어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려면 어떤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결혼을 눈앞에 두 었을 때도, '사랑' 한다면 당연히 일과 결혼 생활을 충분히 조화시킬 수 있을 거 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 함정만 잘 벗어나도 잘못된 선택을 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결혼 적령기라는 고정 관념에 얽매여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보다는 정말로 자 신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따져보고 분석 해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의 경우 자신이 결혼을 한 후에 어떤 생활을 원하는지에 따라 배우자의 타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쁘게 집을 꾸미고 아이를 손수 키우며 뛰어난 요 리 솜씨로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삶을 꿈꾸는, 즉 '전업 주부형' 의 여성이라면 무엇보다 가정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깊이 갖고 있는지가 선택의 최우선 적 인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모름지기 사람이란 결혼하고 나면 연애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 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연애할 때는 "결혼하면 당신이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 여놓고 나를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던 남자도 결혼 후엔 온갖 집안 살림을 군말 없이 척척 해내고, 심지어 친인척들 뒤치다꺼리까지 도맡는 아내에 게 "다른 집 여자들은 돈도 잘 벌어오더구만" 하고 푸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은근히 처가 덕을 보고 싶어하는 남성들도 의외로 많다. 따라서 전업 주부를 꿈꾸는 여성이라면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의 책임감과 생활력을 꼭 체크해봐야 하고, 할 수 있다면 테스트를 해볼 필요도 있다. 또 여 성운 여성대로 자신이 애들 키워놓은 다음에 딴소리를 할 가능성은 없는지 스 스로에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 대학 동기동창 중에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결혼해 함께 유학까지 다녀온 친 구가 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전업주부를 자청했다. 결혼한 지 10 년이 넘도록 그녀는 후회는커녕 남편이 나가서 일하라고 할까 봐 겁난다고 말할 정도로 자 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집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아 내가 좋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는 정말 찰떡궁합이다. 이와 달리 결혼을 해도 자신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정과 일을 병행하겠다는 '


자아 성취형' 의 여성도 있을 수 있다. '자아 성취형' 의 여성이라면 그 동기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든 결혼 전에 오 고가는 말은 '절대, 결단코,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점을 강조하고싶다. '서로 '를 위해서 검증의 검증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일하면서 자신을 성취해나가는 여성이 좋아. 결혼하면 아줌 마처럼 팍 퍼지는 여자는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 도 내가 밖으로 나가라고 떠밀 거일'라는 남편의 말에 도취되어 정말 멋진 남 자를 만났다고 흥분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말이 앞서는 사람 은 오히려 더 못 믿을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하듯이 확인 또 확인 을 해도 결혼하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단번에 바꿔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은 아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한 사 람도 있다. 단지 서로 생활을 공유해보지 않은 연애 시절의 얘기와 일상적인 모 든 것을 함께 부딪치고 같이 해결해야 하는 결혼 생활 속에서의 얘기는 판이하 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결혼 전에는 할 수 있는 한 의심하고, 두드려보아야 하지만 결혼 후에는 두 눈 질끈 감아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가사 업무, 육아 분담 등 가족 내의 실제적인 일이나 지금 당장 해결해야만 하는 온갖 문제들과 부딪치다보면 연애 시절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전투가 시 작된다. 사실 학력과 빈부 격차를 막론하고 부부가 거대담론이나 추상적인 문 제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가령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살 림 부숴가며 싸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수를 한 다음 비누를 물에 담가놓는 다 든지, 명절 때 부인은 부엌에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는데 남편은 하루 종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는 등 사소한(?) 문제를 놓고 한바탕 큰 싸움이 벌어 지곤 한다. 그래서 모두들 '내가 이렇게 유치한 문제 때문에 싸우게 될 줄은 꿈 에도 몰랐다"는 한탄을 하곤 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양귀자 씨의 '모순'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가 결혼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진진'은 무슨 일을 벌일지 예 측할 수 없는 스타일의 남자, 그래서 너무나 달콤하고 낭만적인 남자인 '장 우' 에게 마음이 끌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시계추처럼 모든 게 정확한, 그래 서 재미도 없고 사는 게 숨막힐 것 같은 남자 '영규'를 선택한다. 아마 결혼 전의 여성이 이 소설을 읽었다면 진진의 선택에 배신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재미없고 지루한 현실(영규)보다는 드라마틱하고 사는 재미를 짜릿하게 느낄 수 있는 이상적인 삶(장우)을 선택해 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경 험을 갖고 있어서인지 나는 주인공과 작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도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진진의 선택이 보여주듯 냉정하고 지루한 현실보 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없다. 현실은 낭만적인 감정이나 환상을 허락하 지 않을 만큼 잔인하다. "너보다 잘난 남자랑 결혼해!" 자아 성취형의 여성인 경우에는 아내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만큼 중요시하며 아내가 내조하듯 자신도 외조할 수 있고, 아내의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남부럽지 않 을 만큼의 확고한 자신감(나는 바로 이 부분에 밑줄을 좌악 긋고 싶다!)과 우주 를 품을 만큼의 포용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유!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맞다. 없지는 않겠지만 무척 드물다. 자아 성취형의 여자, 그것도 이미 상당한 성취를 이룬 여성이(여성의 사회 진 출 시기가 대부분 남성보다 빠르기 때문에 동갑으로 비교한다면 여성이 앞서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감 없는 남자, 자신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결여된 남


자를 만나게 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자신감 없는 남자가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남자의 열등감은 끝없는 부부 싸움의 원천이며 백약이 무효한 고질병이다. 아내가 독자 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남편을 우습게 봐서이고, 반대로 침묵을 택하면 남편 을 무시하는 게 된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이런 남편은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 사 로잡혀 모든 일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또한 그는 아내가 사회적으로 인 정받아도 아내를 라이벌로 생각해 '아무리 잘난 척해도 소용없어. 내 말한 마디 에 꼼짝 못 하잖아' 하는 식으로, 매우 권위적인 방식으로 아내를 억누른 다. 과잉반응으로 폭력까지 난무할 수 있다. 그런 말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열 등감 을 방어하고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주변의 일하는 여성 가운데 이러 한 불행을 겪는 경우를 왜 자주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일하는 여성 가운데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은 친한 사람들 에게 너보다 잘난 사람이랑 결혼해. 그런 사람이 없으면 아예 혼자 사는 게 나 아 라고 냉정한 조언을 해주곤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거답지 않다. 너마저 여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거니?" 하는 반격의 화살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남자의 열등감이 얼마만큼 부부 관계를 악화하는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케이스 스터디를 종합 해주면 모두들 " 결혼하지 말라는 소리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여성 중에 '신데렐라 콤플렉스' 라는 말에 거부 감을 갖는 여성이 패 많다. 그런데 이런 여성은 자신이 혹시 '평강공주 콤플렉 스' 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강공주 콤플렉스는 그 자체 로는 문제가 안 되지만 온달다운 온달을 만나지 못하면 더 이상 평강공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 역시 결혼 전에는 소위 조건 따지는 결혼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가 졌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픽었다. 그래서 후배들이나 친구들에게 "결혼 하려면 결혼 선서를 하기 직전까지 조건을 따질 수 있는 한 최대로 따져봐 라. 꼭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은지를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는 게 좋다"고 충 고한다. 결혼을 하려는 사람의 지적 수준과 사회적 성취 정도, 가치관이나 삶에 있어서의 우선 순위 등에 대해 끝까지 캐보고 따져보고 저울질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한 가지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약혼을 했 든, 청첩 장을 보냈든 간에 다시 한 번 신중히 재고해보라고 권한다. 대부분 양가 집안끼리 인사하고 날짜잡고 예식장을 정하면 '아니 세상에! 이 사람한테 이런 점이 있었나? 할 정도로 깜짝 놀랄 문제점을 발견하고도 '이제 와서 어쩌겠어? 행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결혼하면 괜찮아지겠지' 라 고 가 볍게 생각하거나 '결혼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걸 거일 하 고 여 유 있게 넘어간다. 그렇게 하면 우선은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나중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결혼 전에 살 짝 엿 보이는 작고 사소한 문제가 결혼 후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24 시간 지뢰밭 이 되어 가정을 불화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지뢰가 언제 어떻 게 터질지 모른다는 사실은 결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연애를 10 년씩이나 하고 결혼한 내 친구는 자신의 남편에 대해 "지연아, 나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인 줄 몰랐어"라고 말하곤 한다. 10 년이나 사귀었는데 어떻 게 모르는 면이 있었을까 놀랄 수 있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좋아하는 사 람 둘만 있을 때는 웬만해선 단점을 볼 수 없다 관심이 있는 이성에게 자신 의 나쁜 점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상대방이 친구들이나 회사 집단 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의외로 결혼에는 실패하는 이유 중 하 나는 그들이 직업상 자유롭게 데이트를 하지 못해 공개 검증의 기회를 갖지 못 한


채 결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한 대학의 어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성간에 불타는 사랑이 유지되는 기간은 길어 봐야 3 년이라고 한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 다. 그런 측면에서 나이를 먹을수록 부부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불타는 사랑' 이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과 슬픔, 기쁨과 행복을 같이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관계' 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사람이 사람을 고르는 일이겠지만 결 혼을 앞둔 여성들이여, 부디 꿈 깨고(?) 현실적으로 열심히 잘 따져서 정말 자 신에게 맞는 사람을 고르기 바란다. 그래서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말기를! 아이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엄마!" 매일 수십 번씩 듣는 말이지만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 다 난 가느다란 떨림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전율 속에서 내 존재를 새삼 깨닫는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아이와 엄마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가 세상에 나온 다음부터는 엄마와 아이가 사랑의 탯줄로 연결된다는 게 내 생각 이다. 아이의 작은 웅얼거림이나 숨결 속에서도 엄마는 아이의 모든 것을 직감 적으로 안다. 코가 막혔는지, 편도선이 부은 건 아닌지, 아니면 아주 편안히 자 고 있는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잠귀가 어두운 사람이라고 해 도 아이의 신음소리가 들리면 화다닥 잠이 깨는 것을 보면 엄마와 아이 사이에 는 분명 신이 만들어놓은 본능적인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휴대폰이 있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아이의 앙증맞은 음성은 내겐 언 제나 뽀빠이의 시금치와 같다. "엄마! 우와, 엄마! 어디야?" "응, 엄마 지금 우리 아기한테 가고 있지. 조금만 기다려." "엄마. 빨리 내게로 와." 못 말리는 고슴도치 엄마인 내게는 아이가 서툴게 사용한 조사마저도 너무 나 귀엽게 느껴진다. 엄마의 목소리를 확인한 아이는 금세 어리광을 부린다. 요 귀여운 것을 어쩐담! 아이의 아양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니... 사실 빨리 오라 고 재촉하는 아이보다 더 급한 것은 엄마인 나다. 하지만 아 무리 급한 마음으 로 집을 향해 차를 몰아도 아이가 좋아하는 물건을 파는 가게 는 어쩌면 그렇 게 눈에 잘 띄는지... 다른 때는 건망증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도 아 이가 부탁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는 법이 없다. 예전에는 구두를 좋아해서 예 쁜 구둣가게만 눈에 띄더니만 이제는 아이들 옷가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다. 보통 내가 집에 들어서면 아이는 날 한번 껴안아본 다음, 재빨리 내 손을 쳐 다본다. 그런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풍선껌이라도 사들고 가는 재 이제 는 일상이 되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괜찮다가도 집이 가까워지면 불현듯 아이 가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 에 힘이 가해지고, 아이의 통통한 두 볼이 손끝에 느껴지면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1 층, 2 층, 3 층... 딩동! "우와, 엄마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오는 아이의 모습 이 눈에 선하다 할머니가 문을 여는 그 잠깐 동안을 못 참고, 못 말리는 엄마와 아이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발을 동동거린다 드디어 이산가족의 상봉과도 같은 모자의 만남! 문이 열리면, 아이는 강아지처럼 내 품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아이, 엄마 냄새 너무 좋아."


하지만 오히려 엄마가 아이의 냄새에 취한다. 몇 시간 동안의 짧은 이별이었 는데도 아이와 엄마는 서로 한참 동안 안아줘야 갈증이 해소된다 서로 사랑의 급유를 해주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아이를 보면 일과 중에 쌓인 피로와 스트레 스, 긴장감이 눈 녹듯 없어진다. '요 이쁜 것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하 고 생각하며 아이를 더욱 꼬옥 껴안는다. 아이와의 눈 높이를 제대로 맞춰라! 가끔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들을 만큼, 사랑스러워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나 역시 보통의 엄마들처럼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매일같이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책도 찾아보 고 나보다 육아 경험이 오래 된 엄마들 얘기에 귀를 종긋 세우기도 한다. 하지 만 점점 더 자신의 실제 경험만큼 좋은 선생은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아이가 세 돌을 넘기면서 난 육아에 있어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흔 히 '육아를 이야기할 때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아이에게 부모의 눈 높이를 맞추라는 것이다 아이의 낮은 눈 높이에 어른들의 높은 눈 높이를 맞추어주어 야 한다는 얘기인데, 나는 그게 아이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우선 부모의 눈 높이부터 조정하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싶다. 왜냐 하면 사실 아이들은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예민한 지각과 예민한 감성을 갖 고 있는데 어른들이 그걸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하는 어려운 세상 이야기를 아이들은 전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많은데 그러다가 큰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오히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온몸 으로 '느끼는' 육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아이의 어투를 따라하거나 대화의 수준을 형편없이 낮추어서도 안 되고 대충 대충 쉽게만 대 답해주는 것도 금물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모르는 내용을 함부로 떠들지 않고 조심하는 어른들끼리의 대화보 다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이와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아이와 좋은 대 화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아이의 질문이나 말에 대해 엄마의 생각을 최대한 설명해주어야 한다. 내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에는 아이나 나나 입을 쉬지 않는다 끊임 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왜?"라는 질문에 비교적 '성실히' 대답하다 보니 대화 가 끊어질 수가 없다. 또 외출했다 들어와서는 내가 하루 종일 한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또한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 차안에서 나누는 모자간의 대화는 다른 어느 곳 에서의 대화 못지 않게 고농축성 대화이다. 차안은 아이와 나만이 있는 공간인 데다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차창 밖의 풍경이 아이에게는 TV 만큼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고 또한 훌륭한 교육 현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의 질문은 집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많아진다. 나 역시 처음에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아이의 수준에 맞춰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쉬운 어휘로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설명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예전에 한 번 들은 비교적 어려운 말을 무심결에 내뱉는 것을 보고 '아!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대하는 내 눈 높이를 조정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 터는 아이에게 다소 어려운 듯한 표현이나 어휘도 그냥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천천히 또박또박 반복적으로 말해주기만 하면 그런 말도 어느새 곧잘 했다. 아이는 엄마가 말하는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를 집어낸다. "엄마, '보관이 뭐 야?' , '나뭇잎과 낙엽은 어떻게 달라?' 어른들이 말할 때 옆에서 그냥 얌전히 앉아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나중에 어른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하는 것 을 보면 과연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의 눈 높이를 제대로 측정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는 아이와 눈동자를 맞추기 위해 아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내 무릎을 세우고 무릎 위에 아이를 올려놓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 고 항상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 눈을 쳐다봐. 엄마 눈동자에 네가 들어 있 지?" 하고 말한다. 아이는 한참 내 눈을 들여보다가 "응!" 하고 대답하면서 신 기해한다. 그러면 나는 "엄마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네가 엄마 마음에 가득 하기 때문에 눈동자에 나타나는 거일'라고 말해준다. 아이들은 어른만큼이나 사랑의 표현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런 표현이 반복되 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귀찮을 만큼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고는 "귀찮니?" 하고 물으면 매번 "아니!"라고 대답하튼 것을 보면 사랑은 아무리 많이 줘도 결 코 넘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지 안다. 그래서 눈동자를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면 아이의 영혼과 교류하는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는 특히 아이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해주곤 한다. "네가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안 되었을 때는 널 이렇게 무릎에 앉혀두어도 고개를 못 가누었단 다 ", "엄마가 이렇게 쭈까쭈까 해주면 네가 참 좋아했어," 이런 말을 들을 때마 다 아이는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그래서? 그래서?" ���며 더 자세히 얘기해달라고 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 없는,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더 궁금해하는 것 이리라. 아이에게 추억의 보물창고를 만들어주자 방송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나는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말과 동시에 아이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이로 하여금 이 야기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어떤 정보나 개념에 대해 아이 스스로가 오디오 와 비디오 모두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의 성장과정을 캠코더로 열심히 찍어놓는 부모들이 많다 물론 그것도 좋 지만 풍부한 추억을 아이의 머릿속에 살아 있는 그림으로 남겨주는 것이 더 낫 지 않을까.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아시절에 어떤 버릇이 있었으며, 무엇 을 좋아했는지, 한 살 때는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음식을 좋아했으며, 엄마와 어 떤 놀이를 했는지 등등을 기억날 때마다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해준 말이었는데 아이가 무척 좋아하고, 한 번 들려 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며 "엄마, 내가 어렸을 때 이렇게 했지"라고 얘기하 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의도적으로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성장과정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준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도 좋지만, 또한 아이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기억을 직접 넣어준다는 면에서 도 좋 은 것 같다 아이의 머릿속에 직접 비디오 한 편을 녹화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 다. 아이가 수동적으로 캠코더에 찍히기만 하는 것보다 아이 스스로 가 오감(표 떳)을 동원해 자기 머릿속에 어린 시절을 상상하고 입력하게 하 면, 그것은 다 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추억과 사랑의 '보물창고'로서 아이에게 남을 것이 다. 이런 방식으로 엄마가 아이와 마주하다 보면 내 아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일 반론이 적힌 육아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내 아이만의 특성 이 파악된다는 것이 다. 내 아이만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아이에게 맞는 교육법과 사랑 법을 찾 을 수 있지 않을까. 아이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엄마는 영재 프로그램이나 값비 싼 육아 교재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값진 교육법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밤도 아이의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 사 랑하는 아이를 발견하고 싶어서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사랑스런 아이 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 엄마가 가장 잘 알고 싶은 소망 때문이다.


나를 붙잡아준 아이의 작은 손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 때 난 하나님을 찾는다. 결단이 필요할 때 기도를 한다. 고통에 자지러질 때는 홀로 실컷 울 곳을 찾는다. 슬픔이 밀려올 땐 맥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 절망이 찾아을 때면 종이에 나의 꿈을 적는다. 외로울 땐 요리를 만들어 리처드 기어가 나오는 비디오를 본다. 그래도 외로우면 성장을 하고 외출을 한다. 살이 찌기 시작하면 재미있는 책을 사러 간다. 얼굴에 나이가 드는 것 같으면 가장 비싼 립스틱을 산다. 피곤하면 수영을 하고 뜨거운 녹차를 마신다. 나태해지면 이름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때, 난 늘 나의 아들을 생각한다. 1999 년 여름 소문의 악몽에 시달리던 때, 더구나 그 소문의 주인공이 나와 하 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었을 때, 머릿속엔 화산이 들어앉아 있는 듯했고 마음속 엔 납덩어리가 얹혀 있는 듯했다. 소문의 진원지는 물론이고 이 얘기를 심심풀 이 땅콩처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을 향해 실컷 욕이라도 해대고 싶은 충동이 수 시로 찾아들 만큼 내 마음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지내다 보니 자연 몸은 중병을 앓는 듯 지쳐갔고 기력도 없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상시처럼 할 일을 해야 했고 여전히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소문의 희생양인 아들과 더 많은 시간 을 함께 보내기 위해 특히 애썼다. 어쩌다 시간이 나면 육체적, 정신적인 힘겨 움 때문에 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누워 있고만 싶었다. 머리 손질 하고 옷 차려입고 나가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아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다녔다. 놀이동산에도 문턱이 닳도록 갔고, 동물원, 미술관, 교외 산책로에도 아들 과 단 둘이서만 찾아다녔다. 아들이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주기 위해 아 이스크림 가게를 찾아다니고, 에스컬레이터(아들 또래의 아이들은 에스컬레이터 라면 사족을 못 쓴다)를 타며 재미있어하는 아들을 위해 백화점에도 수시로 갔 다. 아들이 무의식 중에라도 쓸데없는 소문 따위로 상처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아이의 마음속을 정신없이 간지르고 싶었고, 나 또한 아들과의 시간을 가짐 으로써 분노에 찌든 마음을 정화하고'싶었다. 언젠가 헛소문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한다며 평소 친하게 지내는 방송인 친구 들이 찾아와서 식사를 함께 했다. 그날도 나는 아들과 백화점에 갔다가 아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오느라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아이와 외출하느라 약속 시간에 좀 늦었다고 말하자 한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세상에, 넌 이 와중에 아들을 데리고 그 사람 많은 백화점에 가니? 사람들 이 쳐다보면 짜증나지 않아? 나는 아무 일 없어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알아보 고 쳐다보면 싫던데... " "쳐다보는 거야 나도 싫기는 하지만 내가 뭐 죄졌니? 못 갈 데가 어디 있어? 아이가 가고 싶다는데... 할 수만 있으면 아이가 원하는 곳 어디든 데리고 갈 거 야. 그리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더라도 무슨 상관이야.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남의 말 함부로 한 그 사람들이 오히려 창피할 거야." "네 말이 맞긴 하다만, 나 같으면 소문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수군거 리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편하게 못 다닐 것 같아. 아니면 화병이 나서 뻗어 버 리든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고 내 아이가 훌륭하게 잘 커주면, 그때 사람들이 뭐


라고 할 것 같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히려 아들 잘 키운 비결이 뭐냐고 물 을 걸? 세상 인심이 다 그런 거지 뭐, 난 그날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참아."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늘 꿋꿋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검 사와 변호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며 내 가 아이의 양육권을 그토록 주장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 도 있었다. 그만큼 이번 싸움은 내게 무척이나 힘겨웠다. 벼랑 끝에서 한 손으로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만을 붙잡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소문과 싸우는 동 안, 특히 나 같은 방송인 한 사람쯤은 얼마든지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언론사를 상대로 싸우면서 이제 그만 그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들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진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되새기면서 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심정 으로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진실을 밝히겠다고 스스로에게 거듭 다짐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연한 의지와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없이 무너 져야 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나 홀로 울면서 지샌 밤이 숱하게 쌓여갔다. 어느 날, 그날도 힘겨운 싸움을 마치고 아주 지친 몸으로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혼할 당시에 한 예언자가 찾아 와 당신이 지금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고집하면 몇 개 월 후에 혹독한 구설수에 시달리게 될 것이오. 그러니 애를 포기하는 게 나을 것이오"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미리 알게 되었다면 그때 난 어떻게 했을까? 과연 아이를 포기했을까? 대답은 오래 걸리 지 않았다. 내가 받을 고통에 상관없이 아이는 분명 내 목숨처럼 소중한 아이 이고 나는 그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결단코 아이를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 때문 71 눈물을 훔쳐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 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내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아 이를 생각하면 절망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이 힘든 싸움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상처와 들끓는 분노가 행여 아이에게 전염될까 봐 억지로라도 웃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말로 웃음 짓고 있는 나,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와 있는 나, 그런 본래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 그 동안 수없이 쓰러진 나를, 아이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들의 웃음과 아 들의 희망이 나를 당당한 어머니로 세상에 나아가게 한 것이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고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해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아들이 나'를 지킨 것이다. 부족한 게 많아서 '그'에게 의지한다 땅농사도 사람 뜻대로 안 된다는데 하물며 사람 농사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 가. 부모가 아무리 노심초사해도 자식 농사만큼은 부모 뜻대로 되 는 게 아닌 듯싶다. 게다가 늘 오류를 저지르는 실수투성이인 불완전한 인간이 부모가 된다 지 않는가. 인격적으로 아직 미완성인 나 역시 늘 이런저런 갈등과 유혹, 이기 적인 생각에 시달린다. 얼마 전 밖에서 일을 보는데,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 실로 옮겨졌 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전갈을 받았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모습은 충 격적이었다. 늘 당신의 건강을 자랑하시며 무병장수를 장담했건만, 병과 나이에 는 장사가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한 노인의 모습으로 쓰러져 계신 모습 을 보자니 더없이 측은하고 가슴이 아팠다. 지난해 여름 소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 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던 것처럼 아버지도 화병이 깊었나 싶기도 해


더욱 가슴이 쓰라렸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몸의 반이 마비되었고 어머니가 병수발을 드셔야 했다. '저러다 어머니까지 쓰러지시면.....' 하는 생각이 미치자 하늘이 아득했다.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는 어머니의 밤샘이 며칠 동안 이어지자 나는 두 분 모 두가 걱정이 되었고 밤샘 간호를 내가 교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늘 내 아이가 걸렸다. 엄마 없으면 잘 자지도 못하는 아이, 지나가는 감기건만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가 먼저 걱정이었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부모의 병 앞에서도 내 자식 걱정이 먼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렇듯 난 여전히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사람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이 문제에 있어서도 육아책이나 교육 이론서보다 절대자인 신에 게 의지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하나님에게 떼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인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들을 절대자가 대신 처리해주길 바라 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자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위한 축복 기도만은 빠뜨리지 않는다.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나 아이를 재울 때,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새 아 침을 맞을 때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이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기도 한다. 매일 듣는 축복 기도건만 아이는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지루해하는 기색 이 전혀 없다. 그리고 엄마의 기도가 끝나면 귀여운 목소리로 "아멘" 한다. 일 때문에 외출하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할 때도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해 주면 아이 표정이 훨씬 편안해지고 밝아진다. 아이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는 많 은 엄마들은 아이를 등뒤에 놓고 집을 나설 때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럴 때, 기도는 아이뿐만 아니 라 엄마의 불안한 마음에도 큰 힘이 된다. 아이들이 빨리 조숙해지는 탓인지 예전에는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는데 요 새는 미운 네 살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아이가 말을 알아 듣는 경우가 부 쩍 늘었다. 밥을 먹어야 하는 때에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경 우가 하루걸러 한 번씩 일어난다. 그럴 때도 나는 '너, 도대체 왜 밥을 안 먹니! 밥 안 먹으면 때찌한댔지!" 하고 혼내기보다 "엄마랑 약속했지? 밥 잘 먹고 튼 튼한 사람되겠다고!" 하면서 엄마와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러고는 함께 손 을 잡고 기도한다. "우리 예쁘고 착한 아이가 엄마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 게 해주세요"라고. 그러면 아이는 어느새 배시시 웃으며 숟가락을 든다. 회초리나 야단, 훈계보다 더 큰 효력을 기도가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기도 는 아이가 엄마의 말을 한순간만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영 혼에 지속적으로 되새기게 한다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부모가 매일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는 것은 아이 에게 나는 부모님에게 소중한 아이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잠재적으로 심어준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에 따라 어떤 식의 삶을 살겠다는 구체적인 꿈도 꾸게 만들어준다. 축복 기도는 그 내용 자 체가 미래 지향적이고, 부모의 소망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통 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울 수가 있다. "공부 열심히 해라. 싸우지 마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등과 같은 부모의 훈 계는 자주 할수록,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잔소리처럼 들리게 마련이 다. 차라리 아이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에겐 더 이상의 말 이 필요 없는 정신적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또 축복의 기도는 아이와 함께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화일 수 있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기도를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아이와 부모가 함제하는 기도 시간은 부모 입장에서도 "제가 이 아이를 이 렇게 키우겠습니다" 라고 신 앞에 고백하고 그러한 교육 신념을 강화하는 순간 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아이는 내 책상 옆 침대 위에 잠들어 있다 요즘 은 아이가 먼저 "엄마 나 잘 거야. 기도해줘야지"라고 한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 면 "엄마, 공부 열심히 해! 나는 꿈으로 들어갈 거니까 엄마도 좀 있다가 내 꿈 속으로 들어와앙"하고 애교 섞인 ���사를 한 뒤 이내 숨을 고르게 쉬며 쌔근쌔 근 잠이 든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릴 만큼 유창한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 한 대로 아이에게 다 베풀어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나 자신이 부족하고 불완전 하기에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위한 소망이 담긴 기도를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기도란 것이 단지 자식에 대한 나의 바람을 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부모의 욕심을 쏟아 붓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테 니까 말이다 진정한 기도란 부모의 욕심을 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닌, 순수하게 아이를 위한 기도여야 한다. 그래야 그 기도가 축복의 힘을 가질 수 있다. 그 런 믿음으로 나는 오늘도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기도한다. 이 아이를 눈동자같이 지켜주소서. 이 아이의 키가 자라는 것처럼 지혜가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성품으로 성장하게 하소서. 어떠한 악의 세력에도 물들지 말게 하시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해주옵소서. 저는 이 아이를 온전히 지킬 수 없사오니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늘 인도해주옵소서. "세상이 널 기다린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시내 중심가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한다. 우리 나 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 지, 연 인과 함께 성탄을 즐기느라 자신의 행복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변의 그늘진 이웃을 잊지 말자는 나눔의 종소리' 가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 늘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빛이 되고 있는 구세군은 월리엄 부스라는 사람 에 의해 만들어졌다. 언젠가 아는 분으로부터 월리엄 부스에 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부스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늘 아들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렇게 말했다고 한다. "월리엄! 어서 크렴. 세상이 널 기다린단다. " 이 말은 내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아마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축복대로 월리엄 부스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다. 교육을 그리 많이 받지 못 했던 평범한 어머니였지만, 그녀는 자식을 위해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축 복과 가르침을 준 것이다. 내 주변엔 아이를 집에 그냥 놔두면 국가적인 손실이라는 소신(?)으로 아예 아이를 차에 태워 하루에 대여섯 군데의 학원을 돌아다니는 어머니들이 드물 지 않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가 TV 에 나와서는 당당히 한글을 읽는 CF 를 보면서 나도 여느 부모들처럼 나만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 로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엄마는 어떻게 하는지, 무엇을 가르치는지 기웃거리기도 했다. 책도 많이 읽어보았다. 아동심리학자의 책이나 EQ 니 PQ 니 하는 식의 신육아 법,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사람들의 경험담, 유태인의 자녀 교육법 등등의 정 보가 담긴 책을 특히 유심히 보았다. 하지만 나처럼 초보 엄마들에게는 그 방법 이 너무 제각각 이라 오히려 헷갈릴 때도 많았다. 또 책을 읽고 나름대로 깨달 은 바를 적용시켜보느라 애쓰는 것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리고 원 래 하던 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돌아오게 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모자라는 엄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순간기운이 쏙 빠지기도 하지만 '사람이 다 제각각 인데 책의 저자가 내 아이를 어떻게 알겠 는가. 엄마인 내가내 아아는 가장 잘 알지' 하는 생각으로 '그냥 하던 대로하지 뭐' 하고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남들 다 하는 특별한 교육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시대에 뒤떨 어진(?) 부모가 되어버렸다.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나 는 월리엄 부스의 어머니를 생각하곤 한다. 내 주변엔 부모에게 한 재산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지키고 관리할 줄 아는 능 력이 없어 결국 수십 억의 재산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사람이 있다. 아직 젊은 그는 책임져야 할 처자식도 있었건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커녕 생활비가 필 요하면 주변의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하곤 했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유태인식 교 육법이 호응을 얻은 것이리라. 하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너무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에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 또한 가변적이라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당연히 부 모들은 점점 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어떻게든 한 자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애쓰게 된다. 하지만 자식에게 돈도, 재능도, 권력도 물려줄 수 없는 상황이라 면? 그런 경우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 그리고 반드시 물려주어 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스의 어머니가 그러했듯 바로 삶에 대한 꿈 과 비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반듯한 가치관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런 교육은 부모가 그것들을 먼저 갖고 있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 다. 만약 부모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교과서나 영화에서 배울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는 셈이 아닐까? 그런 부모의 삶 자체야말로 세상의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실제적 이고 드라마틱한, 생생한 교육서가 될 것이다. 돈이 있는 부모는 돈을, 명예가 있는 부모는 명예를, 권력을 쥔 부모는 권력 을 물려주고 싶어한다. 또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채워나갈 꿈과 비 전이 삶의 원동력인 사람이라면 불가능의 세계와 맞설 수 있는 용기, 그 꿈과 비전을 자녀에게 물려주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 쳐주고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은 현재 부모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으며 삶 속 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인 나 역시 돈을 좋아하고, 명예는 더욱더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시련과 위기를 통해서 어려움을 견디게 해주고 끝내 희망을 잃지 않게 이끌어주는 원천은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니라 내 꿈과 비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그랬듯이 내 아이 역시 삶 속에서 불가피한 시련과 위기에 직면하게 될 지 모른다. 아마 그때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연 꿈과 비전일 것이다. 그 래서 나는 부스의 어머니처럼 원대한 삶의 비전과 가치관을 아이에게 심어주 고 싶고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아들아, 어서 크렴! 세상이 널 기다린다. " 엄마는 라이프 컨설턴트 내가 아마 초등학교 2, 3 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뒤늦게 다시 공 부할 계획을 세우셨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딸 넷을 낳아 다 키우고 난 후에는 알 수 없는 허전함도 느꼈을 테고 자아 실현에 대한 갈증도 났을 것 같다. 당시 어머니는 단단한 결심을 하고 어학원에 등록해 집안일 을 하는 와중에서도 노트를 들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게 열심 히 공부했지만 어머니는 유학길을 떠나지 못했다 바로 나, 막내딸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외국으로 유학 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나는 어린 나이에 큰 충격 을 받았다. 그 나이의 내게 어머니란 언제든 부르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존


재였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 외국으로 유학을 간다? 내가 불렀 을 때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감지한 나는 어머니에게 매달려 "엄마! 아무데도 못 가" 하면서 울 고불고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꼭 안고는 "그래, 그래. 알았 어" 하며 달랬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나는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어머니가 행여 외국으로 가버리실까 봐서 학교가 파하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집밖으로는 나가지도 않고, 어머니 옆에만 붙어 있었다. 어머 니가 어디로 가버릴까 봐 감시(?)를 한 셈이다. 어머니의 유학 결심은 당시로선 그렇게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던 만큼 오래 준비했을 테고 그때는 거의 실행 단계에 있었다. 그런데 어린 내가 막무가 내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으니 결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식이 이겼다. 아직은 어린 막내딸이 마음에 밟혔는지 어머니는 오랫동 안 준비해온 '원대한' 계획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어린 딸의 한줄기 눈 물에 어머니는 한 바가지 눈물을 더 흘리고는 그 꿈을 포기했다. 그후 어머니는 당시는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네 딸 뒷바라지하느라 허리가 휘었고, 그도 모자라 나중엔 딸들의 아 들, 딸까지 순서대로 손수 키워냈다. 그리고 이제 여섯 번째 손자인 내 아들까 지 몸바쳐 키워주고 계신다.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고 뼈에 사무치도록 감사한 일이다 요즘은 시어머니는 할 것도 없고 친정 어머니마저도 손자 안 키 워준다고 선언하고 나서는 분위기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내가 일하는 엄마가 되고 보니 당시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좀 다른 생각도 든다. 인생의 선택이란 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선택이 가장 올바른 선택인지는 그 누구도 판단 할 수 없다. 어머니는 막내딸 때문에 당신의 길을 포기했다. 하지만 만약 그때 조 막 만한 막내딸이 치맛자락을 부여잡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머니의 삶은 지 금쯤 어떤 모습일까? 지금에 와서 이런 자문을 할 때마다 나는 솔직히 어머니 에게 죄스런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나만 아니었다면, 대단한 일을 한답시고 잘 난 척(?)하는 이 딸보다 더 훌륭한 커리어 우먼이 되었을지도 모를 어머니가 아 닌가. 물론 지금 어머니는 자식 농사 잘하고, 손자 농사까지 하는 당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지금 어머니에겐 어떤 생각이 들까? 혹시 당신 의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다 컸다고 이젠 자기 일이 먼저고 너무 나 송구스럽게도 부모보다 제 자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딸에게 섭섭하진 않을 까? 그렇다면 나를 위해, 나에 의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바꾸신 어머니를 바라 보는 내 모습은 어땠는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내 모습을 반추한다. 내가 어 렸을 적에는 엄마에게 윌 기대했었지' 하고 회상해보곤 한다. 그리 고 그런 생 각이 나중에 좀더 컸을 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다. 내가 내 아이에게 어떤 어머니가 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참고하기 위해서이다. 유학을 떠나려는 어머니를 부여잡았을 때, 초등학생인 내게는 그 무엇보다 말 그대로의 ·엄마· 가 최고였다.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 하고 소 리지르며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어머니가 안 계시면 그렇게 심통이 나고 속 상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집에서 기다리다 나를 반기며 "뭐야, 내 새끼 왔어 배 고프지? 뭐 해줄까?" 하면 실컷 어리광을 부리고 볼을 비비며 좋아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어머니와 외출하는 것보다는 친구와 놀러 가 는 것을 더 즐기게 되었고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전혀 아쉬워함 없이 친 구들을 집에 불러와 밤새 놀기도 했다. 또 어릴 적엔 학교에 갔다오면 라디오라도 틀어놓은 듯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입 아픈 줄도 모르고 떠들곤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는 어머니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제가 알아서 할 게요"라고 말하기 시작했 다. 그랬으니 머리가 더 커진 대학생 때, 그리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 어떻 게 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사람은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바라는 것이 달라지는 듯하다. 머리가 제 법 커진 다음부터는 맛있는 것 해주고 보살펴주는 어머니보다는 내가 하는 일 을 이해해주고, 나만큼이나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아는, 그래서 대화 가 통하고 때로는 상담과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어머니를 더 필요로 하게 된다 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누구 때문에 유학을 포기했는데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 망덕이 없다). 만약 내가 어머니를 부여잡지 않았거나, 어머니가 막내딸의 애원에도 불구하 고 결심을 굳혀 유학을 다녀왔다면 어땠을까? 물론 내 어린 시절 몇 년은 좀 외로울 수 있었겠지만 대신 어머니는 확실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을 것이고, 머리가 커진 딸들과 동등한 대화도 나누고, 토론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바 로 그 나이의 딸들이 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일하는 엄마가 좋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우리 딸들을 위해 바친 노력에 눈물겹도록 감 사드리고 있다. 즉, 나는 어머니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오늘날 어머니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그리고 나처럼 일하는 여성이나 일을 하려는 여성이 어떤 모습의 어머니로 살아야 할 것인지, 일 과 양육을 어떻게 병행할 것인지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늘 것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들은 성장과정에 따라 필요로 하는 부모의 역할이 다 르다. 일하는 엄마의 경우, 절대적 시간으로만 따지면 아이가 어렸을 때는 그 아이가 원하는 것에 100%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일하는 엄마들은 늘 안타 깝고 일과 양육 사이에서 갈등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마다 난 내 어릴 적 경험을 반추하며 생각한다. 아이가 성장한 후에는 같은 사회에서 자기 와 함께 일하는 어머니를 더 필요로 하게 되리라고... 어느 날 아이가 갑자기 도화지와 볼펜을 들고 와서는, '백지연 쌔 사인 좀 해 주세요" 해서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워낙 아이와 외출하는 것을 좋아 해 이곳저곳 자주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사인을 해달라며 다가오곤 했다. 그 때마다 아이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딴청을 부렸었는 데 이미 엄마가 하는 일을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나는 아이에게 비쳐지는 부모의 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 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점점 성숙해가면서, 그 성장단계마다 어머니에 게 다른 기대를 가졌던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은 일하는 엄마의 자기 위안일 수 있고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러 나 나는 분명 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를 위해 일하고, 아이 앞에 당당하기 위 해 일한다. 아이는 내 양심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방부제와도 같다. 아이를 바라 볼 때마다 이기적인 나, 때로는 적당히 살고 싶어하는 나를 바로잡게 되기 때문 이다. 그래서 나는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이 줄 어들어 안타까울 때마다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아들아,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열심히 일하고 더욱 노력할 게. 네가 무럭무 럭 자라듯 엄마도 계속 성장하마. 그래서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땐 더 든든 한 엄마로 서 있을 게. 우린 말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고 의논하는 멋진 모자가 될 거야." 그런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그리며 나는 다시금 힘을 낸다. 일하는 엄마는 나 쁜 엄마? No!


백야가 준 선물 '백야'는 내가 프리랜서가 된 이후 처음 진행한 프로그램이다. 정확히 말하면 백지연의 백야였다 방송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 진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가장 신경이 쓰이고 애착이 가는 프로그램이 된다. 10 년 넘게 방송일을 하는 동안 나는 앵커이자 전문 인터뷰어가 되는 것을 꾸 었다. 내가 늘 진행해오던 정통 시사 프로그램과는 다른, 편안한 분위기 토크쇼 를 진행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직업에 상관없이 각계각층의 여러 사 들을 초대 해서 얘기를 이끌어내고 싶었고, 그런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 로 백야를 맡았다. 그렇지만 백일 진행이 쉽지는 않았다. 뉴스에서는 주로 대통령이나 수 등 정 치인을 인터뷰했었고 따라서 주된 화제가 정치, 경제, 사회 문제였다. 그런데 백 야 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대부분 연예인이었다. 그들로부터 어떤 주나 화제를 이끌어내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은 연인 위주 또는 소위 잘 나가는 스타 위주의 섭외에서 벗어나 게스트의 영역을 넓히고 싶었지 만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제작진은 스타가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출연시키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내가 초대하고 싶어했 던 컴퓨터 계의 귀재 A 씨, 클래식 음악의 달인 J 씨, 여성 사업가 L 씨,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았지 만 너무나도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던 P 씨 등은 모두 백야에 초대받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점은 '백야'가 시작되 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저질 소문에 휘말려 네 건의 소송을 치르느라 내 이름 을 내건 그 중요한 프로그램에 100%의 역량을 쏟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 는 "당분간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송사에 전념해 해를 넘기기 전에 명예를 회복한 다음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고 백일 는 막을 내렸다. 최선을 다해 최상의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할 처지라면 차라리 잠시 일 을 쉬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당시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백야'도 나만큼이나 좨 구설수에 올랐다. 내 이미지와 맞지 않아 영 어색하다는 지적도 있었고 내가 이영자 씨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 도 했다. 게다가 백야 가 막을 내린 것이 시청률 저조 때문이라는 기사까지 나 오기도 했다(나중에 그 기사를 쓴 기자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백일 의 시 청률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추측으로 쓴 것이라며 사과했 다). 어쨌든 '백야'는 그리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기록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 나 개인적으로 나는 백야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백야는 그간의 내 편견을 깨뜨려주었고 좀더 넓고 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 해서 10 년 넘게 방송국을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던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도 많은 대화를 할 기회를 얻었고, 그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과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나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그들로부터 나는 책을 읽고 간접 경험을 하듯 삶의 반경을 넓히는 계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란 것이 말 그대로 '편견' 일 뿐임을 깨닫기도 했 다. 소위 '자고 났더니 스타가 되었더라' 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대 부분은 스타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고된 노력을 기울이는 등의 '대가를 톡톡 히 치러낸 사람들이었다. 탤런트 차인표 씨는 반짝 스타를 뛰어넘는 겸손과 의지가 있었고 최진실 씨 는 그녀의 브랜드를 인정하게 만드는 단단함이 있었다. 개그맨 이홍렬 씨는 특 유의 까다로움까지도 프로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 하면 최화정 씨는 남의


나이까지 잊게 만드는 명랑함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그리고 이영자 씨, 그녀는 누가 보아도(내가 보더라도) 나와는 도저히 잘 안 맞을 것 같았지만 우리는 백 야를 함께 진행하는 동안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그녀는 나보다 한참 어 리다. 어려도 한참 어리다고 꼭 밝혀달라는 것이 그녀의 장난기 어린 부탁이 다). 토크쇼, 그것도 내 이름을 건 프로그램에 나와주는 게스트는 모두 귀한 손님 이자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는 사실 내게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고 갔 다. 그들은 내게 방송인이 인간미와 푸근함을 갖추었을 때 얼마나 위력적일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었다. 사실 나는 그런 점에서 부족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백인 에 나온 대부분의 게스트들은 방송을 하기 전에 나와 인사를 나눌 때마 다 상당히 경직되고는 했다. 그리고 토크쇼를 마치고 나서 친근감이 조성되면 왜 내 앞에서 경직되었는지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들 말했다. "백지연 씨가 너무 딱딱해 보여서 나도 딱딱해져요." 미국에서 만난 박세리 선수는 거듭되는 내 농담에 "어머! 백지연 씨도 농담 을 하네요" 하며 박장대소하기도 했고 개그맨 남희석 씨는 처음 만나 인사를 한 다음 "그런데요. 백지연 씨도 웃을 줄 아시네요"하며 능청을 떨었다. 그는 내가 '웃을 줄 아는지'가 진짜로 궁금했다고 한다. 백야에 나온 게스트들은 대부분이 나보다는 이영자 씨에게 시선을 두려고 했 다. 나보다는 이영자 씨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 게스트는 방송이 끝나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어젯밤 녹화를 앞두고 잠이 안 오더라구요. 백지연 씨가 눈 똑바로 뜨고 갑 자기 '그런데 말이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 세요?' 하면서 때아닌 시사 문제라도 질문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는 거 있죠?" 또 어떤 사람은 "백지연 씨는 평소에도 뉴스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네요. 그냥 우리랑 똑같이 얘기하네요"하며 의아해하기도 했다. 토크쇼의 진행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게스트를 편 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대화를 잘 풀어낼 수 있는 심리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 은 둘째치고라도 우선 편안한 마음을 전달해줄 수 있어야 초대된 사람과 어떤 얘기든지 풍부하게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게스트들에게 뉴스에서 본 모습으로만 인지되어 있었고 그런 탓에 게스트들은 '백지연은 딱딱 하고 차가운 사람' 이라는 강한 선입견을 가지고 나를 대했다. 나 역시 그들을 좀더 편안하게 이끌지 못했다.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서 적어도 그들이 그런 인상을 받았다면 토그쇼의 진행자로서 내 모습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런 점이 백야의 게스트들로 하여금 진솔한 얘기를 털어놓지 못하게 말 들었던 게 아니었을까. 더구나 게스트가 '진행자가 어려운 질문을 할지도 몰라' 하는 생각 때문에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조차 두려워했다면 더더욱 곤란하지 않 겠는가. 미국에서는 댄 래더와 톰 브로커, 피터 제닝스가 남성 앵커 트로이카로 손꼽 힌다. 지난 1980 년대에는 이들 중에서 댄 래더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그런데 1990 년대 후반엔 피터 제닝스의 인기가 그를 앞지르게 외었다. 이와 관련해서 언젠가 한 신문에서는, 예전과 달리 요즘 시청자들은 현안하고 부드러운 앵커의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는 분석을 하면서, 그래서 요즘 댄 래더는 '미소짓는' 연습 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덧붙여놓기도 했다. 앵커든 MC 든 진행자로서의 실력이 우선이지만 시청자나 출연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는 것 또한 그 능력에 포함될 것이다. 꽤 오랫동안 앵커를 해오면서 나도 모르게 지니고 있었던 허위의식이 있었다면 그것마저 깨뜨려버려야 한다는 적 극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 것도 '백야'가 내게 준 특별한 선물의 하나이다. 어떻게 보면 '백야'의 포맷은 내가 이전에 진행하던 뉴스와는 극단적으로 다


른 프로그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내게는 잘 맞지 않는 프로그램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뉴스에서처럼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듬직하게 존재하면서도 또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포근한 대화 상대 같은 방송인이 되는 게 '백지연의 백야'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MBC 에 들어갈 무렵 내겐 '똑 앵커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10 년 넘 게 몸담았던 MBC 를 그만두는 중차대한 결단을 내렸을 때에는 내게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정보나 뉴스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 가가는 앵커, 따뜻한 방송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나는 '함께 대화하 는 방송인'이 되고 싶다. 먼 미래에 나의 방송생활을 정리한 앨범을 열었을 때, '백지연의 백야'는 더 큰 곳을 행해 나아가기 위해 한 발걸음을 내딛은, 내 '실 험과 도전의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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