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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깊은 골짜기 깊은 비밀 지은이 : 임춘남

----- 차 례 ----작가 소개 프롤로그 식물인간 마타도어 욕망의 사슬 속으로 연결고리 화폭에 숨어 있는 지리산 당선 축하 살인 숲속에 갇힌 미녀 빛 바랜 사진 일곱 장 중산리의 비밀을 찾아서 정체모를 노신사 세석평원 철쭉의 바다 풀리지 않는 중산리의 비밀 이젠 너무 늦었어

⊙ 작가 소개 임춘남 ·LUTHER RICE 신학대학원 졸업 ·크리스천 신문 신인문예상 수상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 ·크리스천 시인협회 이사 ·민족문학작가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회원 ·장편추리소설 {바람의 딸들(상, 하)} {사람의 딸} {여자는 한번으로 죽지 않는다} {마지막 희망을 훔친 남자} {인간의 사랑} ·중편소설 {벽을 향하여} {안개꽃 사랑} ·시집 {부활꽃} {나의 사랑 숲의 여자} ·칼럼집 {절반의 기독교} {CBS 방송 칼럼집} ·희곡 {순교자의 발자취}


프롤로그 그해 가을 어느 날. 소녀는 아버지를 따라 산골 마을로 잠입해 들어갔다. 아버지가 태어나 자랐다는 아버지의 고향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마을로.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사람은 커녕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아버지를 따라 빈 초가집 안으로 들어섰다. 중산리(中山里)는 지리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잡은 펴오하로운 산골 마을이었다. 적어도 38 선이 그어지기 전, 남과 북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아주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깊은 산 깊은 골짜기 중턱에 자리잡고 있기에 외지인의 출입은 거의 없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1945 년 해방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부터 중산리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마을이 되어갔다. 신비에 둘러싸인 지리산이 빨치산의 거점이 되면서부터 중산리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해발 1,915 미터의 천왕봉 아래 첫 동네인 중산리의 낮은 짧았다. 거대한 산그늘을 타고 땅거미가 빨리 몰려왔다. 바람과 구름과 골짜기의 물소리가 밤을 재촉하는 전령이었다. 그날 밤 그 골짜기에는 대나무 숲의 울음소리가 유난스러웠다. 흡사 귀신의 울음처럼 괴기스럽게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이 울어댔다. 달빛은 차가웠다. 은은한 달빛 아래 계곡이 반짝이고 있었다. 계곡의 차디찬 물로 세수를 하고 난 소녀는 아름다웠다. 소녀에게는 아버지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소녀가 다섯 살 되던 해 일경들에게 끌려간 후 돌아오질 않았다. 소녀는 한때 아버지와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소녀는 자기를 낳아 준 아버지를 끔찍히 사랑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각과 아버지의 일까지도 다 사랑하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기꺼이 치료해 주는 의사였다. 생고구마와 생밤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의 일이었다. 달빛이 고고하게 스며드는 창호지 문 옆에 앉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인희는 내일 아침에 하산하는 게 좋겠어." "왜요?" 소녀는 의아해서 물었다. 소녀의 검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무래도 하산하는 게 좋겠어." "그럼 아빠는요?" "난 산으로 들어가야 해.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어." "저도 위생대원으로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소녀는 아버지의 눈을 어둠 속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어제는 내가 그런 말을 했지.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 "오늘 낮에 들은 라디오 방송 때문인가요?" "응, 그래." "그 라디오 뉴스를 믿으세요?" 그 뉴스란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뉴스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평양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어둠속이었으나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침통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는 아빠를 따라 가겠어요. 혼자 하산하기는 싫어요." "그렇게는 안 돼." 아버지의 음성은 낮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단호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여기까지 올라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데리고 입산할 수는 없다." "왜요? 전쟁에 지고 있기 때문인가요?" "난 이미 죽을 각오가 돼 있어. 하지만 너는 달라. 오래오래 살아야 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죽는 건 별로 무섭지 않아요." "그래도 안 돼." 이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소녀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아빠하고 헤어져 살기 싫어요. 그 동안도 너무 많이 떨어져 살았잖아요." "내 말대로 하산해. 너하고 난 이제 헤어져야 할 운명에 놓였어." "아빠가 늘 그러셨잖아요. 운명보다 강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예요." "그래, 바로 그거야. 운명보다 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하산해야 해." "그럼 아빠도 함께 하산하시면 되잖아요." "난 안 돼." "왜 안 돼요?" "난 이미 낙인이 찍힌 몸이야." "아빠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놈들은 믿어주지 않아. 내가 친일파 놈들을 싫어 한다는 이유로 놈들은 나를 빨갱이로 취급하고 있어." "빨갱이가 아니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는 정부 요인들도 계시잖아요." "하지만 나를 위해 변명해 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간첩 용의자로 취급받고 있는 나를 변호했다가는 자기 무덤을 파게


될는지 모르니까." "......." 잠시 할 말을 ㅇ었다. 소녀는 얼른들의 세계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형제처럼 친한 사람들조차 아버지를 위해 변명 한 마디 해줄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혼자였다. 그리고 소녀 역시 아버지와 헤어지면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대를 잘못 만난 사람이야. 하지만 인희 너한테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넌 참고 기다려야 해." "아빠도 그날까지 참고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나는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지리산에 들어가 살 생각이야. 지금도 산에는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아." "저도 아빠 곁에서 위생대원 노릇을 하겠어요."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는 위생대원이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총살당할 수도 있어." "초, 총살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응, 그래 . 위생대원이란 빨치산이 쓰는 말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큰일난다. 알겠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총살까지 시키는 곳으로 내려가기 싫어요. 저도 산으로 데려가 주세요." "산 속도 마찬가지야. 거기서도 사상이 불투명하면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야." "지리산은 희망의 산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산 속도 그렇게 무서운 곳인가요?" "산 속 역시 저 아래 세상처럼 무서운 곳이야. 성분이 신통찮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니까." "성분이 뭐예요?" "그 사람의 출신과 사상 같은 걸 말하는 건데, 공산중의 사상이 투철하지 않은 사람은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하는게 빨치산의 특색이야." "그럼 아빠도 성분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들은 내가 사회주의자란 걸 모르고 있어.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럼 그땐 어떻게 되죠?" "그래도 죽이진 않을 거야.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니까." "환자들 때문인가요?" "응, 그래. 지금도 부상병들이 무척 많은 모양이야."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찢어진 창호지 문 틈으로 찬 바람이 쉴새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잘까?" 한참 만에 아버지가 침묵을 깨뜨렸다. 덮을 것이라고는 차가운 방바닥에 깔아 놓은 허름한 이불과 담요 한 장 뿐이었다.


"아빠!" "응." "약속해 주시고 주무세요." "무슨 약속?" "입산하시지 않고 저하고 하산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건 안 돼." "왜요?" "하산하다가 붙잡히면 총살형 당하기 안성맞춤이야." "빨갱이가 아니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친구분들과 선후배들 가운데 유명한 분들의 이름을 대고 그분들에게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 보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지금은 그런 말이 통할 만큼 좋은 시대가 아니야. 일제시대 날뛰던 친일파 놈들이 여전히 설치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설 땅이 없어." "그럼 저도 아빠를 따라 입산하겠어요. 살아도 아빠와 같이 살고 죽어도 아빠와 같이 죽겠어요." "그 마음은 고맙다만, 그래선 안 돼. 그건 오히려 불효야."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드리려고 공양미 삼백 섬에 팔려 가서 인당수 푸른 물에 몸을 던지기까지 했어요. 아무리 고생스럽다 해도 아빠와 같이 입산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어요." "고생스러울 정도가 아니야. 지리산 속엔 지금 굶주린 사내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일단 입산하면 아버지도 널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해." "그래도 괜찮아요."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만, 여자의 길은 따로 있어. 내가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몰라. 쫓겨 다니느라고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아." "여자의 길이란 게 어떤 건가요?" "쉽게 말하자면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여자의 길이지. 하지만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는 날에는 여자의 길은 다 막히고 말어." "저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아니잖아요."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를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어." "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에요. 아직 결혼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인희 넌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옛날 같으면 시집을 갈 수도 있는 어엿한 처녀야. 그런데 그런 처녀를 데리고 아버지란 사람이 입산할 계획을 세우다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 아빠하고 헤어져 살 순 없어요." "인희야, 내 말 잘 들어." "예." "내일 아침 하산할 때도 큰 길을 따라 하산하지 말고 오늘


올라왔던 대나무 숲 샛길을 타고 하산해야 돼. 그리고 하산하다가 인기척이 나면 대나무 숲속에는 몸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굴이 꼭 있으니까 되도록이면 굴 속에 숨어 있다가 나와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왜 대답이 없어?" "아빠! 전 정말 혼자 하산하기 싫어요. 죽어도 아빠 품에 안겨서 죽겠어요." 순간, 소녀는 와락 아버지 품에 안겨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녀를 안아 주지 않고 소녀의 어깨를 무정하게 밀었다. "다 큰 처녀가 바보처럼 울면 어떡해.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 길을 찾아야지." "......." 소녀는 말없이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에 비친 소녀의 눈동자는 산정의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조용히 마주보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투명한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온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뜨끔했다. 소녀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 일경들에게 끌려간 아내의 청순한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친 몸이었지만 금방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사람하고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인데, 어떻게 이 소녀에게서 아내의 모습이 엿보이는 걸까? 알듯 하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엉뚱한 생각을 억누르려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소녀가 결혼하기 전 아내의 청순한 모습으로 보였다. 괴로웠다. 머리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그리고 소녀의 투명한 눈동자를 피하기 위하여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아빠?" "아무것도 아니야." "인민군대가 다시 이길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배후에 소련과 중공이 있으니까 다시 역전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를 데리고 산에 들어갈 수는 없어."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하루를 살아도 아빠 곁에서 살다가 아빠 곁에서 죽겠어요." "그렇게 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야. 너에게는 너의 삶이 따로 있고 너의 길이 따로 있어." "애국하는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런 이야기를 했지. 그런데 지금은 살아 남는 길이 애국하는 길이 되고 말았어. 그러니까 살아 남아야만 해. 전에는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어." "그럼 아빠는요?" "나의 길은 따로 있어. 그리고 이런 말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겠어. 난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야." "치, 친아버지가 아니라고요?" 인희의 눈동자가 더 크게 확대되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난 인희를 낳아 준 아버지가 아니라 인희를 돌보아 준 아버지야." "......미, 믿을 수가 없어요." "난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인희의 부모님은 인희가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간도에서 돌아 가셨어. 마적들에게 대항하시다가 목숨을 잃으였어." "......." 소녀는 얼얼했다. 뭔가에 머리를 강타당한 듯 정신을 가다듬기 어려웠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희를 죽음의 골짜기로 데리고 갈 수가 없어. 내가 인희를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지리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면 구천(九泉)에 계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 "하나밖에 없는 남의 소중한 딸을 그런 곳에 데리고 들어간다고 노여워 하시지 않겠어?" "이, 인희는 남의 딸이 아니예요. 아빠의 딸이에요." "물론 내가 키운 내 딸이지. 하지만 낳아 주신 부모님은 다른 분들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널 데리고 갈 수 없어." "......." 소녀는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를 낳아 준 부모님들이 따로 계시다는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난 끝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비밀에 부치려 했지만, 죽음의 골짜기까지 따라 나서겠다는 통에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어." "그래도 저는 아빠를 따라 가겠어요. 죽음의 골짜기보다 더 깊은 골짜기라도 아빠만 계시면 무섭지 않아요." "인희야, 내 말 잘 들어. 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살아 왔어. 그런데 이제 그 희망이 사라져 가고 있어." "아빠가 늘 그러셨잖아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예요." "응,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지. 인희 넌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돼. 넌 네 이름값을 해야 돼." "그런데 왜 아빠는 희망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시려고 하세요?" "지금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죽음의 골짜기밖에 없어. 그곳엔 조금만 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수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어."


"하산하여도 아빠처럼 훌륭한 의사선생님이 일하실 곳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넌 아직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하니까 이제 그만 자자." 아버지는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누웠다. "담요 덮고 주무세요." 인희는 배낭에 매달려 있는 담요를 풀어 아버지의 가슴에 덮었다. "난 괜찮아. 인희 너나 덮어." "전 잠이 안 와요." "그래도 자야 해." 소녀는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살려낼 방법은 없을까? 아버지를 영원히 살게 할 방법은 없을까? 예수쟁이들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永生)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죽음에서 살려낼 수 있을까? 소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속으로 소리없이 부르짖었다. 하느님께 기도해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묘수가 떠올랐다. 그것은 번개처럼 강하게 뇌리를 스치는 한줄기 빛이었다. 소녀는 미션계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유황불에 멸망당한 소돔성에서 빠져 나온 두 딸이 배필을 구할 길이 막연해지자 아버지의 씨를 받아 종족을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소녀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밤이 깊어 갔다. 찬 바람이 찢어진 창호지 문 틈으로 세차게 몰려 왔다. 소녀는 온몸에 한기를 느꼈다. 한없이 따뜻한 가슴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서 당신의 생애를 전부 바치려는 분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담요를 가만히 들추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바다 같은 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흡사 심청이가 공양하는 마음으로 인당수 푸른 물에 몸을 온통 맡기듯이 그렇게 아버지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멀고 먼 중산리까지 숨어 들어오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아버지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살리는 길은 이 한 몸을 보시(布施)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인희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가슴에 안겨 있는 소녀의 무게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코를 골고 있었다. 골짜기 바람소리와 계곡의 물소리와 가을 밤의 풀벌레 소리


속에 소녀가 가슴을 태우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식물인간 빗발이 어둠을 휘저으며 거세지고 있었다. 요염하게 화장한 윤락녀처럼 번쩍이던 네온의 요사스런 불빛도 하나 둘 꺼져 가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날씨 때문인지 몰라도 거리의 상점 문들은 거의 닫혀 있었다. 술취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손을 흔들어댔으나 택시는 그냥 지나갔다. 비에 흠뻑 젖은 그 사내 앞에 정지하는 택시는 한 대도 없었다. 총알처럼 질주하는 택시이 수효도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밤이 더욱 깊어갔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비를 맞고 걸었다. 택시 잡는 일은 포기하고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횐설수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걸었다 하지만 사내의 욕설을 귀담아 들어 줄 행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내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숙박업소 간판을 찾았다. 그러나 사내가 찾고 있는 간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서울 바닥에 날 편히 재워 줄 호텔은커녕 여인숙도 없단 말이야. 개새끼들 같으니라구! 류정현이가 맹물인 줄 알아? 맹물인 줄 알았다간 큰코 다칠 날이 올걸!" 제멋대로 지껄이며 숙박업소를 찾기 위하여 사내가 골목길 한복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나타난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에 사내는 움찔하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사내의 동작은 민첩하지 못했다. 사내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기 때문에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재빨리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사내의 몸은 승용차 범퍼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순간, 사내는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승용차 운전기사는 차를 세울 생각도 하지 않고 어둠에 잠긴 빗속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시간이 흘러갔다. 차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마침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개인택시 운전기사였다. 심야영업을 하다가 장대비가 쏟아지는 통에 집으로 돌아가던 중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서초경찰서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사내는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부분이 심하게 함몰되어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밖에 하퇴부에 상처를 입었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사내는 신분이 확실했다. 때문에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진 지


두 시간 후에 뇌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사내는 광역의회 입후보자 김철(金哲) 선거 관리사무실의 홍보실장 류정현(劉正賢)이었다. 류정현은 수술 후에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해서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 했다. 뒤통수가 심하게 함몰되었을 뿐 아니라 내출혈(內出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식물인간처럼 산소호흡기를 의지하고 병실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뇌수술을 담당했던 의학박사도 류정현이 언제 의식을 회복할는지 현재로써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답답했다. 피해자에게 질문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경찰은 초등수사 과정에서부터 벽에 부딪쳤다. 장대비가 내리는 심야에 일어난 뺑소니 교통사고인지라 목격자도 차량 바퀴 자국도 찾을 수가 없었다. 증거가 될만한 물증이나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류정현의 하퇴부 부상 부위가 그를 치고 달아난 뺑소니 차량은 승용차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승용차에 치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문제의 뺑소니 차량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서울에 차적을 둔 승용차라면 택시와 자가용 승용차까지 포함하여 수십만 대에 이르는데, 그 많은 승용차를 일일이 조사할 능력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에서 운행되는 여러 도시에 차적을 둔 차량도 서울에서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류정현을 들이받고 달아난 차량이 소형 트럭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수사는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늪속에 가라앉은 작은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일이 더 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본격적인 선거철에 선거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뺑소니 차에 치이다니....... 아무래도 골치 아프게 생겼군 그래." 부하 형사로부터 사건 경위를 들은 수사과장 박성길(朴聖吉) 경감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방금 보고를 마친 남현우(南賢祐) 경사는 말없이 박 경감 앞에 서 서 있었다. "김철 후보를 만나 보았나?" "네." "뭐라고 하던가?" "예상했던 대로 아주 강하게 나오는 통에 입장이 곤란했습니다." "어느 정도 강하게 나오던가?" 박 경감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는 아직 김철 후보를 만나 보지 못햇기 때문에 그쪽 반응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김 후보측의 주장은 십중팔구 계획적인 뺑소니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 친구들 괜히 엉뚱한 속셈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니야?" "그쎄요, 하지만 그 사람들 주장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홍보실장이라면 당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비중 있는 핵심 참모 중의 한 사람이니까요." "그럼 그쪽 사람들의 알리바이에는 문제가 없었어?" "네, 거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입증되었습니다." "거의 완벽이라니?"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지만, 그쪽 사람들의 거주지가 사고현장에서 반경 10 킬로미터 이내에 있기 때문에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선거사무실 사람들 모두 서초동에 산다 그 말인가?" "네, 선거를 앞두고 몇 개월 전에 모두 서초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모양입니다. 김철 후보와 선거본부장인 김훈은 서초 2 동에 살고 나머지 실장급 간부들은 모두 서초 3 동에 살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홍보실장의 거주지는 어딘가?" "서초 3 동입니다. 하지만 류 실장 부친은 서초 4 동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그날 밤 술을 마신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건 아니군 그래." "네." "그 밖에 선거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선거요원들의 알리바이는 조사해 보지 않았어?" "네, 실장급 간부들의 알리바이만 조사했습니다." "그럼 주차장에 세워 두었다는 류정현 씨의 자가용은 조사해 보았어?" "네, 자가용 앞유리창이 박살나 있었습니다." "주차장 관리인은 뭐라고 하던가?" "그날 밤 열한시 삼십분 경에 류정현 씨가 차를 찾으러 왔기 때문에 주차비를 받고 열쇠를 돌려주었는데, 류씨가 금방 되돌아와서 야단을 치기에 함께 가 보았더니, 앞유리창이 박살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앞유리창이 깨어졌으면 제법 큰소리가 났을 텐데, 관리인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던가?" "네, 텔리비전을 시청하느라고 미처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국 차는 주차장에 맡겨 놓고 걸어갔다. 그 말인가?" "네, 때마침 비도 오고 술도 과한 것 같아서 차를 맡겨 놓고 가면 유리창은 끼워 놓겠다고 했답니다." "그것 참 일이 묘하게 꼬여 들었군 그래. 그날 밤따라 비까지 왔는데 정면 유리창이 박살이 나다니, 그게 바로 고의성이 있는 적신호가 아니었을까?" 박 경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류정현 씨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 신호를 못 느깼던 것 같습니다." "차 유리창을 깨뜨린 물체는 무엇이었지? 돌멩이였나?" 박 경감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낸 듯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남 형사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엇으로 유리창을 깨뜨렸는지 현장에 남아 있는 증거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더 이상하군 그래. 증거물을 남기지 않고 유리창을 깨뜨렸다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을 꾸민 거 아니야?" "네, 어느 정도 고의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 형사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게 그의 성품이었다. "차종(車種)은 무엇이었나?" "은회색 로얄 살롱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좋은 차를 굴리고 다녔군 그래." "새 차였다고?" "네." "수입이 괜찮은 모양이지?" "글쎄요." "선거사무실에서 얼마 받는지 한번 알아봐." "선거사무실에서 받는 수입만으로는 그런 차를 굴리기 어려울 겁니다." "하긴 그렇겠군 그럼 다른 수입이 어느 정도였는지 한번 알아봐." "네." "그리고 그날 밤 류정현 씨와 술을 마셨다는 아가씨는 만나 보았어?" "아직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 아가씨를 한번 만나 봐. 그리고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자네가 알아서 빨리 처리해 줘야겠어. 쓸데없이 질질 끌지말고 말이야." "네." "나한테는 최종 보고만 해주면 돼." "네, 알겠습니다." 남 형사는 박 경감의 지시를 받고 경찰서 정문을 나섰다. 뺑소니 교통사고 한 건에 여러 명의 수사요원을 한꺼번에 투입시킬 만한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남 형사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사건은 날로 흉폭화해 가고 두 달 전에 일어난 관내의 살인강도 사건도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는 형편이었다. 혼잡했다. 거리도 혼잡하고 남 형사의 머리 역시 혼잡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피워 물고 천천히 걸었다. 차도에는 온갖 종류의 차량이 홍수처럼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 형사에게는 자가용이 없었다. 고물 승용차라도 한 대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게 없었다. 경찰생활 10 년이 되었으나


자가용을 굴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타고 방배동 카페 골목으로 달려갔다. 영계 호스티스가 많기로 소문난 서울의 명물 카페 골목에 네온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하반신을 거의 노출시킨 싱싱하고 예쁜 아가씨들이 아직도 홀아비 신세를 면하지 못한 남 형사의 눈을 어지럽혔다. 요즘 세상이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눈에 알 만했다. 돈 그리고 섹스. 예술에까지 돈과 섹스로 얼룩진 세상.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얻을 수 있다는 풍조가 개탄스러웠다. 남 형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화려한 골목을 걸었다. 남현우라는 인간도 한때는 순수하게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때가 있었지. 하지만 돈도 없고 실력도 없어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지. 젊고 발랄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릴 때마다 생각나는 첫사랑의 아픔이 남 형사의 가슴에서 새삼스레 도지고 있었다. 어쩌자고 아주 괜찮게 생긴 어린 처녀들이 이런 곳으로 자꾸 들어오는 걸까? 역시 돈 때문이겠지. 쉽게 벌어서 한때나마 멋대로 즐기고 살고 싶어서겠지. 하지만 오래지 않아 후회할 걸. 남 형사는 속으로 자문자답해 가며 카페 '은하수'를 향하여 천천히 걸었다. 그는 일부러 골목 입구에서 하차하여 카페골목의 분위기를 음미하며 걸었다. 두뇌회전을 위해서였다. 암담한 벽에 부딪친 사건을 다룰 때 시도해 보는 일종의 버릇이기도 했다. '은하수'는 방배동 카페골목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은하수는 조그마한 카페가 아니라 제법 규모가 큰 고급 카페였다. 남 형사는 손님으로 가장했다. 그 방법이 가장 쉽게 통할 것 같아서였다. 안내하는 남자 종업원에게 칸막이 룸을 부탁하고 7 번 아가씨 미스 윤을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후 미스 윤이 룸에 나타났다. 그녀는 초면인 남자가 자기를 지명하여 부른 점을 의아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저를 어떻게 아세요?" 미스 윤을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물었다. 갓스물 정도 되었을까. 콧날이 오똑하고 눈동자가 아주 매혹적인 아가씨였다. "윤옥주(尹玉珠)씨 맞죠?" "어, 어떻게 내 이름까지......." 미스 윤은 여전히 선 채로 말끝을 흐렸다. 큰 키가 돋보이는 아가씨였다. "어떻게 미스 윤의 본명까지 알고 있느냐 그 말이로군요. 천천히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


"경찰이세요?" 조금 전과는 달리 야무지게 물었다. 남 형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손바닥을 내밀어 앞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윤 옥주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오리발부터 내밀었다. "맥주나 한 잔 합시다." 남 형사는 서둘지 않았다. 조개의 입을 열게 하려면 성급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안주는 뭘로 하시겠어요?" "마른 안주가 좋겠어." "최하가 삼만 원이에요." "그래도 괜찮아." "그만 두세요. 경찰 아저씨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데 와서 술을 마시려 하세요. 최하 십만 원은 있어야 한 잔 하실 수 있는 곳이에요." "그렇게 비싼가요?" "아저씨는 아직 숙맥이시군요." 어린 아가씨가 아주 당돌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주머니 걱정을 해 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하여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대신 제가 음료수 한 잔 대접하겠어요." 윤옥주는 벽에 걸린 인터폰을 통해 콜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래도 영업하는 집인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대접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이 몇 마디 주고 받기도 전에 종업원이 콜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져왔다. "류정현 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콜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남 형사는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윤옥주는 두 눈을 내리깔고 콜라잔을 만지작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 술값 이야기를 할 때의 당돌함과 명랑함은 엿볼 수조차 없었다. "미스 윤의 본명이 류정현 씨의 수첩에 적혀 있었어요. 전화번호하고 본명이 있을 정도면 보통 사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요?" "단골 손님이었어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윤옥주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날 밤 몇 시까지 함께 술을 마셨지요?" "열한 시경까지 계시다가 가셨어요." "술은 얼마나 마셨지요?" "국산 양주 작은 것으로 두 병 마셨어요." "둘이서 말입니까?" "아니예요. 처음엔 어떤 손님하고 두 분이 마시다가 그 손님이 가신 후에 저를 불렀어요." "그 손님은 어떤 분이었지요?"


"잘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나이는 어느 정도 들어 보였습니까?" "글쎄요, 서른다섯 살 정도 잡수신 분 같았어요."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네." "인상은 어떻게 생긴 분이었습니까?" "글쎄요, 그저 평범한 인상이었어요." "얼굴에 무슨 특징 같은 것도 없었습니까?" "눈썹이 조금 짙은 것 같았어요." "그 밖에 특징은 없었습니까?" "네, 두 분이 들어오실 때 그 분의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뿐이라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어요." "그럼 그 손님이 나갈 때는 얼굴도 못 보았단 말입니까?" "네." "그런데 어떻게 나이는 짐작할 수 있었지요?" "글쎄요, 정확한 나이를 말씀드린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군요." 남 형사는 질문이 날카로웠던 점을 속으로 시인하고 엷은 미소를 띄었다. "키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중키처럼 보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윤옥주는 형사한테 말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 손님은 몇 시쯤에 나갔어요?" "아마 열시경에 나갔을 거예요." "혹시 류정현 씨와 그 손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미스 윤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 혹시 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말해 줘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야무지게 시치미를 때는 모양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 줘요. 보너스를 타면 내가 술 한 잔 살 테니까." "그 말씀 정말이에요?" "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야." "보너스 탄 돈으로 비싼 술을 마셔도 부인한테 혼나지 않아요?" 술 이야기가 나오니까 윤옥주는 다시 명랑해졌다. "아직은 날 혼내킬 여자가 없어요." "그럼 아직 미혼이세요?"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남 형사는 나이 어린 누이에게 하듯이 반말투로 말했다. 오늘 처음 만난 아가씨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뭔가


인간적으로 끌리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농촌에만 나이 많은 총각이 있는 줄 알았더니, 서울에도 그런 사람이 있군요." 윤옥주는 스스럼없이 고운 미소까지 띄었다. "정말 술 한 잔 살 테니까 협조 좀 해 줘요." "술은 사시지 않아도 협조해 드리겠어요." "정말?" "네, 아저씨는 형사처럼 보이지 않고 동네 아저씨처럼 보여요." "미스 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혼인길 막히겠어. 아무튼 고마워요." "하지만 그 손님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그럼 혹시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압니까?" "글쎄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미스 윤은 어디에 있었어요?" "바로 옆방에 있었어요." "그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이야기하는 소리는 났어요." "그럼 천천히 한 번 생각해 봐요." "요즘 손님들의 대화는 주로 선거 이야기인데, 두 분 역시 선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떠오르는 게 없어요?" "네." "선거 이야기말고 다른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어요?" "얇은 벽이지만, 벽이 가로막혀 있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어요." 윤옥주는 기억을 더듬느라고 미간까지 모았으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스 윤 생각에 두 사람이 밀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나요?" "중요한 이야길 하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그런 느낌이 들었지요?" "아가씨를 부르지 않고, 두 분이 때때로 목소리를 낮추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래도 보통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닌 것 같았어요." "미스 윤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도 좋군요." "공연히 종이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머리가 좋으면 뭣 하러 이런 곳에서 일하겠어요." "그래도 수입은 괜찮을 텐데요." "수입은 괜찮아 보여도 남는 게 없어요. 미용기술만 배우면 그만둘 거예요." "그럼 미용학원에 나가야겠군요." "나가고 있어요." "그래서 더 세련돼 보였군요."


"천박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다행이에요." "류정현 씨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지요?"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하나요?"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둬요." "일 년 정도 되었어요." "보통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 형사는 말끝을 흐리며 멋쩍게 눈으로 물었다. 윤옥주의 약점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역시 잔인하시군요." 윤옥주의 음성은 차가웠다. 커다란 눈망울 역시 차갑게 반짝거렸다. "미스 윤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직무상 어쩔 수 없다 그 말씀이시군요." "미스 윤, 이해해 줘요." "아주 인간적인 척하는 게 남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이란 걸 저도 알고 있어요." "난 오늘 미스 윤을 처음 만났지만 어쩐지 처음 만난 사람같지 않아요." "그런 말도 많이 들었어요. 헤어진 옛날 애인 같다느니, 이웃에 살던 여동생 같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물론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형사 아저씨한테는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어떤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카페골목에서 일하는 여자가 정숙하면 얼마나 정숙하겠어요. 류 선생님하고는 결혼까지 약속한 깊은 사이였어요."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고요?" "네, 하지만 모두 거짓말이었어요." "류정현 씨한테 부인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지요?" "이혼한 후에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하지만 류 선생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어요." "그 중에 미스 윤이 아는 여자도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걸 알았지요?" "느낌으로 알았어요." "그럼 그날 밤 류정현 씨와 술을 마셨던 손님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겠군요?" "한 번밖에 못 보았는데 어떻게 기억할 수 있어요." "서른다섯 살 정도 먹은 남자라는 걸 기억하는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 아닙니까?" "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걸 어떡해요." "그럼 그 손님을 다시 보면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지금으로썬 자신이 없어요." "그럼 그날 밤 미스 윤은 어디 있었습니까?"


"은하수에 있었어요." "그럼 여기서 주무셨단 말입니까?" "네, 그날 밤 비도 오고 취하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서 잤어요." "그날 밤 영업은 몇 시에 끝났습니까?" "열두시에 끝났어요." "혹시 바깥에서 류정현 씨를 만나기로 약속한 건 아닙니까?"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대개 남자들은 술에 취하면 끝장을 보려고들 하는데, 그날 밤 류정현 씨는 추근대지도 않고 그냥 돌아갔단 말입니까?" "네." 그러나 윤옥주의 대답은 힘이 없었다. 남 형사는 그녀의 풀이 죽은 대답에 의혹을 품었다.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자치고는 대단한 신사로군요. 평소에도 그렇게 얌전히 돌아 갔습니까?" "네." 역시 힘없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그날 밤 류정현이 술에 취해 술자리에서 욕망을 채우고 돌아 갔다는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요." 남 형사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일단 의문의 꼬리가 엿보이기만 하면 그 꼬리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 그의 특기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발끈했다. 윤옥주는 형사에게 신문당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싫어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한 번 생각해 봐요. 미스 윤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와 단둘이 술을 마시다가 그냥 얌전하게 돌아가는 술꾼이 어디 있겠어요. 성직자라면 또 모르지만, 소문난 바람둥이가 그렇게 얌전하게 돌아 갔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절 의심하고 있는 건가요?" "의심하는 게 아니라 이상한 점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가령 내가 미스 윤하고 술을 마셨다 해도 술에 취하면 미스 윤의 미모와 매력에 현혹되어 추근거릴 가능성이 농후한데, 류정현 씨가 마감시간 한 시간을 앞두고 얌전하게 돌아 갔다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란 말입니다." "나 아니래도 이웃 술집에는 예쁜 아가씨들이 많아요. 그 애들 중에 누굴 만나러 갔는지도 모르잖아요." "평소에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글쎄요, 대부분의 남자들은 새로운 아가씨를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그날 밤만은 류정현 씨가 다른 술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어요." "그러고 보니, 그날 밤 류 선생님이 빨리 돌아간 이유가 있었던 것 같군요."


"그 이유가 뭡니까?" "......."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류정현이 즉석 서비스를 요구해 오기 전에 했던 말이 있었는데,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일찍 어디 가야 하기 때문에 빨리 들어 가야겠다고 했어요." "어딜 가야 한다고 했습니까?" "글쎄요, 듣긴 들었는데 취중에 들어서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요." "공연히 꾸며낸 이야기 아닙니까?" "아까부터 아저씨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만 하고 계시는군요. 그날 밤 제가 어디 있었는지 확인까지 하시면서 말예요." "원래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질문이 많은 법입니다. 미스 윤이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아저씨한테 의심받는 건 싫어요." "나 역시 미스 윤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류정현 시가 이튿날 아침 일찍 어딜 가야 한다고 했는지 꼭 알고 싶군요." 남 형사는 부드럽게 물었다. 상대방이 아직은 어린 여자이기 때문에 겁을 집어먹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산에 간다고 했는데, 산 이름이 머리 속에서 빙빙 돌고 있어요." "무슨 산인지 잘 생각해 봐요."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럼 내가 전국에 있는 산 이름을 아는 대로 말해 볼까요?" "글너 산이 아니예요." "그런 산이 아니라니, 어떤 산이라고 했어요?" "가운데에 산 이름이 있는 동네였는데....... 머리 속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군요." "가운데에 산자(字)가 들어가 잇는 동네라면 수천 개도 넘을 텐데....... 혹시 수원에 있는 매산동 아닙니까?" "동(洞)이 아니라 리(里)였어요." "리였다고요?" "네." "그럼 전국에 깔려 있는 그런 동네가 수천 개도 넘을 텐데......." "가운데가 중....... 이제 알았어요! 중산리에 가야 한다고 했어요." "중산리가 틀림없어요?" "네, 높은 산 밑에 있는 동네라고 했어요." "그 높은 산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남 형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있는 중산리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더 알고 싶었지만,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어요." 남 형사는 아무런 대꾸없이 수첩에다 '높은 산 밑에 있는 동네 중산리'라고 적었다. "혹시 그 밖에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줘요." 수첩을 집어 넣고 명함을 한 장 꺼내어 윤옥주에게 내밀었다. "네." 윤옥주는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아 쥐고 미소를 머금었다. 해맑은 미소와 상큼한 몸짓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남 형사는 목례를 하고 일어섰다. "인간적으로 대접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워요. 아저씨 같은 형사는 처음이에요." 윤옥주는 뒤따라 일어서며 조금 전보다 더 진하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난 아저씨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총각더러 아저씨, 아저씨하면 곤란하잖아요."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뵐 땐 뭐라고 부를까요?" "아저씨보다는 오빠라고 부르는 게 낫겠는데....... 하지만 공적으로 만났을 땐 오빠라고 부르기가 거북하겠지요?" "그럼 사적으로 만나면 되잖아요. 전 정말 오빠가 없거든요." "실은 나도 여동생이 없어요." "말씀을 낮추세요. 어린 동생처럼 여기시고 말예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자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공사(公私)가 아주 분명하시군요." "그게 서로 편하니까요." 남 형사는 끝까지 반말을 쓰지 않았다. 나이로 따진다며 몇 째 동생뻘밖에 되지 않는 윤옥주였으나 공무 중이였기 때문에 말을 낮추지 않았다. "제가 언제 남 형사님에게 점심 대접을 해도 되겠어요?" 윤옥주는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남 형사의 가슴이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릴 만큼. "점심을 산다면 내가 먼저 사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약속이라도 받아내고 싶었지만, 체면상 남 형사는 말끝을 흐렸다. "내일......모레 점심은 어떠세요?" "글쎄요." "아무리 바쁘셔도 점심은 잡수실 것 아니예요?" "그럼 모레 점심은 내가 사지요. 그대신 미스 윤이 내가 정하는 다방으로 나와 줘야 해요." "정말 점심을 사 주시겠어요?" "서초경찰서 앞에 있는 초원다방으로 나와요." "몇 시에 나갈까요?" "열두시에서 열두시 삼십분 사이에 나오세요."


"네, 꼭 나가겠어요." 두 사람은 칸막이 룸 밖으로 나오기 전에 다시 만날 약속을 한 후 헤어졌다.

마타도어 광역의회 입후보자 김철 선거관리본부에서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두 시간째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김철의 친동생이요 선거본부장인 김훈(金勳)과 기획실장 조민혁(曹民赫)과 김철이 지혜와 모략을 총동원하여 최종 선거 전략을 짜고 있었다. 부족한 선거자금을 동원하는 문제에서부터 효율적인 홍보를 위하여 홍보실장을 다시 뽑는 문제, 가장 강력한 여당 후보측의 중요 정보를 입수하는 문제와 일급 비밀인 선거전략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의논한 후 최종적으로 김철 후보가 직접 확인하기 시작하였다. "강 후보측의 그 사람과 접촉하는 일은 계속 본부장이 맡을 수 있겠어?" "네." 본부장 김훈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김철의 입에 떠오른 '강 후보'란 여당의 공천을 받은 강경호(康京浩) 후보였다. "본부장이 그런 사람을 만날 시간적 여유가 있겠어?"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제와서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김 후보님. 달리 믿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기획실장 조민혁의 말을 듣고 김철은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기획실장이 맡으면 안 되겠어?" "안 됩니다. 본부장이 맡아야 합니다." "왜?" "이제와서 제가 그 임무를 맡게 되면 그 친구가 의심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친구일수록 보통 사람보다 의심이 많은 법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 그래. 그대신 본부장은 신중하게 대처해야 해." "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친구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선거 당일까지 최대한 끌어 보겠습니다." "아무리 밤에 만난다지만, 외출할 땐 변장을 하고 나가야 해." "네, 알겠습니다."


김훈은 선거본부 본부장답게 김철을 형으로 대하지 않고 입후보자로 깍듯이 모시고 있었다. "홍보실장은 어떻게 할까? 적임자를 골라서 빨리 일을 맡겨야 할 텐데, 그 아가씨말고 다른 사람은 없을까?" 김철이 회전 의자를 돌려 잠시 창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람이 귀할 때인데, 갑자기 어디서 적임자를 구하겠습니까? 먼 데서 구할 필요없이 가까운 데서 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민혁이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철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류미란인가 하는 그 아가씨밖에 적임자가 없단 말인가?" "제 생각에도 류미란이 적임자일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류미란(劉美蘭)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류정현의 여동생이었다. 아까부터 선거본부장과 기획실장이 류미란을 오빠대신 홍보실장으로 기용하자고 하였으나 김철 후보는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말괄량이로 소문난 류미란을 새 홍보실장으로 기용해도 될까? 김철 자신도 그랬지만, 그의 아내 오세정(吳細晶)도 류미란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머님만 아니었으면 애당초 류정현도 홍보실장으로 기용하지 않았을 텐데....... 그건 사실이었다. 류정현의 부친 류상규(劉相奎)와 김철의 모친 김인희(金仁希)는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류정현이 홍보실장에 기용된 것이었다. "김 후보님."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기획실장 조민혁이었다. 차갑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는 듯했다. "부담없이 말해 봐."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로 삼으려면 류미란을 앞장 세우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다고?" 김철이 호기심을 나타내 보였다. 오늘날 모든 사업의 승패가 홍보에 달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처럼 선거에 있어서도 홍보는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 후보가 관심을 보일 만도 했다. "빨리 말해 봐." "류미란을 내세워 여당 후보 쪽에서 우리 홍보실장을 제거시켰다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겁니다." "그건 흑색선전이거나 유언비어 아닌가?" "그렇잖아도 이미 온갖 흑색선전과 유언비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하긴 그래. 선거가 무서운 것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요즘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


"김 후보님한테도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다간 쓴 잔밖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음, 그래. 기획실장 말이 옳아. 사업만 하고 있을 때는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축첩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어머님이 형수님을 선거본부에 내보내셔서 직접 뛰게 하신 거 아닙니까?" 김훈이 한 마디 거들자 김철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걸 보면 내가 여러 사람한테 못할 짓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아." "김 후보님. 우리 두 사람 앞에선 몰라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심약한 말씀은 삼가하셔야 합니다. 후보자가 심약한 면을 보이면 선거에서 이길 가망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항상 자신감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말씀만 해 주세요." "알았어. 앞으론 그렇게 하겠어." "김 여사님의 말씀을 선거 끝나는 날까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김 여사님은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습니다." 조민혁은 기획실장답게 김인희 여사가 당부한 말까지 동원시켜 김 철 후보를 부추겼다. "기획실장 말이 맞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청춘을 다 바치신 어머님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강하게 부딪쳐 봐야 해. 그런데 정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류 실장한테는 좀 안된 얘기지만, 우리가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이용해도 괜찮겠어?" "우리 두 사람한테 맡겨 주십시오. 제갈공명처럼 교묘한 역수(逆手)를 사용하여 당선이라는 작품을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갈공명처럼 머리를 쓰겠다고?" "네, 그러니까 류미란을 등용만 시켜 주십시오. 그 다음 일은 선거본부장과 제가 은밀히 진행시키겠습니다." "그런데 류미란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 줄까?" "기술적인 문제는 우리 두 사람한테 맡겨 주십시오. 이제 투표일이 겨우 8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응, 알았어. 홍보실장 기용문제는 기획실장하고 선거본부장한테 맡기겠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는데, 김 후보님께서는 이 문제도 우리 두 사람에게 맡겨 주시고, 내용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문젠데?" "강경호 씨 부친이 친일파였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대로 은밀하게 사람을 사서 그 사실을 유권자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어떻게?" "운동권 학생들을 끌어 들이지 못하면 재수생들이라도 끌어 들리겠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 쪽에서 그런 술책을 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 점에 대해선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암암리에 자금이 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미리 보고 드리는 것뿐입니다." "정말 괜찮겠어?" "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 손으로 전단을 만들어 그들 손으로 집집마다 전단을 뿌리는 박쥐작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기획실장은 신이 나서 지껄이고 김 후보는 듣고만 있었다. 아무리 권모술수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게 정치판이라고들 하지만 30 여 년 만에 부활한 시의회 의원선거에서까지 상투적인 선거수법이 동원될 줄은 모르고 있던 김 후보였다. 그런데 어머님은 왜 이런 악랄한 정치판에 나를 밀어 넣었을까? 김철은 어머니 김인희의 깊은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시의원 같은 건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데, 공천도 받지 못한 나를 무소속으로 선거판에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은 아들 훈이의 장래를 위하여 나를 시험대에 올려 놓은 건 아니실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만든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동생 훈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약혼녀 정지영(鄭知英)은 거물급 정치인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 지망생이기 때문이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이번 시의원 선거에는 훈이가 출마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낙선을 하더라도 정치 지망생으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는데, 왜 나를 정치판에 뛰어 들게 만드셨을까? 기획실장의 선거전략을 듣는 둥 마는 둥, 창 밖을 바라보며 김철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노크소리가 났다. 잠시 후 비서실장 오세정이 선거본부장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삼십대 초반의 지성미가 넘치는 여인이었는데, 바로 김철 후보의 아내였다. "서초경찰서에서 나온 남 형사라는 분이 본부장님을 찾으십니다." 오세정은 깍듯이 허리까지 숙여 보이며 시동생인 김훈에게 선거본부장 예우를 다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회의 중이라고 전해 주세요." 김훈의 대답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으나 오세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네." 하고 돌아섰다. "남 형산가 하는 그 친구 꽤 귀찮게 구는군 그래. 그 친구가 아까부터 본부장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 만나보지 그래." "남 형사가 기다리고 있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조민혁이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남 형사가 들어오는 걸 창문으로 보았어." "그랬었군요."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네." 회의를 끝낸 후. 김훈이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은 남 형사가 선거본부장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기 때문에 악수를 나누고 장방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방문객인 남 형사 쪽에서 일부러 입을 열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었다. 김훈도 뒤질세라 입을 다문 채 일어나서 소형 냉장고에서 청량음료수 캔 두 개를 꺼내어 왔다. "목이나 좀 축이세요." "고맙습니다." 남 형사는 캔 뚜껑을 따고 시원한 음료수로 목을 축인 후 질문을 던졌다. "6 월 8 일 토요일 밤에 어디서 주무셨다고 하셨죠?" "우리 집에서 잤다고 했잖습니까!" 김훈이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남 형사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우리 집이라니요?" "서초 2 동 장미 아파트 우리 집에서 잤습니다." "김인희 여사님이 사는 장미 아파트 8 동 303 호에서 주무신 게 사실입니까?" 남 형사의 질문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김훈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보기에 따라서는 비웃으면서 대답하고 있는 듯했다. "정말 토요일 밤 거기서 주무셨습니까?" "도대체 몇 번이나 대답해야 알아 듣겠습니까?" 김훈은 일류대학 출신의 엘리트답게 그 얼굴에 오만의 그림자가 맴돌고 있다. "그날 밤 아파트엔 몇 시에 들어 가셨습니까?" "아마 열한시경에 들어갔을 겝니다. 정 의심스러우면 어머님께 확인해 보시면 알 것 아닙니까?" "김 여사님에게는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김 선생님하고 똑같은 대답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김 여사님의 답변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뭐라구요? 어머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다구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겝니다." "우리 어머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그 분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김인희 여사님이 훌륭한 분이신 것은 지면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 밤 아드님이 집에 와서 주무셨다는 증언은 액면 그대로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토요일 밤, 김 선생님의 자가용은 어디에 주차시켜 놓았습니까?" "글쎄요, 그날 밤 비가 왔기 때문에 8 동 주차장에 주차시켰는지 7 동 주차장에 주차시켰는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김 선생님철머 머리가 좋으신 분이 불과 나흘 전에 주차시켜 놓았던 장소도 모르신다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8 동 주차장에 주차시켰을 겝니다." "그게 확실합니까?" "네." 하지만 김훈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웬지 모르게 기어 들어가는 대답이 흘러 나왔다. "이튿날 김 선생님의 자가용을 주차장에서 뺀 사람은 누굽니까?" "내가 뺐습니다." "그런데도 정확한 주차 지점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8 동 주차장에 주차시켰다고 말했는데, 더 이상 뭘 말하라는 겁니까?" "8 동 주차장 어느 지점에 주차시켰습니까?" "그렇잖아도 복잡한 일이 많은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어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으실 텐데, 실망이 큽니다."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내 차를 직접 조사해 보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상이나 증거를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을 의심하고 괴롭히는 겁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범행을 저지를 계획만 세웠다면 다른 차를 이용하여 범행한 후 멀쩡한 자기 승용차를 타고 돌아올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런 증거도 없이 비약이 너무 심하시군요." "김 선생님이 그날 밤 장미 아파트에서 주무시지 않았다는


증거는 거의 확보했습니다." "정말 왜 이러십니까, 남 형사님?" 김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 형사의 표정을 살폈다. "장미 아파트 관리인 두 사람 모두 김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것도 못 보고 이튿날 나가시는 것도 못 보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반드시 관리인들의 눈에 비쳐야 출입이 가능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못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김 선생님은 지금까지 진실을 감추려고 헛수고를 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리 수사관이지만, 그렇게 함부로 넘겨짚지 말아요." "그럼 토요일 밤 열한시에서 일요일 새벽까지 어디 계셨는지 말씀해 보세요." "장미 아파트 8 동 우리 집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후회하셔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김 선생님이 하신 진술이 다 녹음돼 있으니까 번복하셔도 소용이 없다 그 얘기입니다." "외모와는 달리 사람 겁주는 데 도통하신 분이시군요. 하지만 김훈이는 그 정도 일에 겁먹을 인간이 아닙니다." 김훈은 조금 전 힘없는 대답을 할 때와는 달리 선거관리 사무실 본부장답게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남 형사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김인희 여사님을 한번 더 만나뵌 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어줍잖은 일로 우리 어머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어줍잖은 일이라니요? 류정현 씨가 뺑소니 차에 치여서 식물인간이 되어 입원해 있는 일이 어줍잖은 일입니까?" "괜히 말꼬리를 잡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말아요. 우리 류 실장은 곧 깨어날 겁니다." "병세가 호전돼 간다 그 말입니까?" "네,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바쁜 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마시고 류 실장이 깨어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세요."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사고를 당했던 사람이 깨어난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그렇잖아도 홍보실장이 사고를 당하여 선거운동에 큰 차질을 빚고 있는데, 남 형사님까지 사람을 괴롭히시면 선거전략은 누가 짜고 선거운동은 누가 합니까?" 김훈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통에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선거본부장인데다 본격적인 선거철이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도 고려해 줘야 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남 형사는 일어나 목례를 남기고 선거본부장실을 나섰다. 김인희 여사는 장미아파트에서 남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전화로 약속이 되었기 때문에 남 형사는 어렵잖게 김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김인희는 오십대 초반의 품위있는 여성이었다. 젊었을 때는 미모를 자랑했을 만큼 아직도 시원한 눈매와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 미소를 담고 있었다. 첫눈에 젊었을 때는 빼어난 미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만 37 세나 되는 아들을 가진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김철 후보가 만 37 세라고 하는데, 도대체 몇 살 때 아들을 낳았길래 아직도 팔팔한 중년여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까? 남 형사는 김인희 여사가 김철 후보의 친어머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는 가꾸기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김인희 여사와 김철 후보는 열서너 살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친모자 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오늘 두 번째 만날에서도 남 형사의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김철 후보와 닮긴 닮았는데, 김인희 여사가 김철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결혼한 큰 아들 김철의 집에서 살지 않고 작은 아들 김훈과 장미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것도 무슨 사연이 있기 때문일 것 같았다. 김 여사는 소중한 손님을 접대하듯 유자차를 끓이고 과일을 깎아 내놓았기 때문에 남 형사는 나름대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잡수시지 그래요." 김인희는 자기 아들보다 나이 어린 남 형사에게 존대어를 썼다. 그것도 한없이 부드럽게 미소까지 머금고서. "네, 감사합니다. 작은 아드님 때문에 다시 찾아 왔습니다." "알고 있어요." "죄송스럽습니다만, 솔직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6 월 8 일 토요일 밤에 작은 아드님이 여기서 주무셨습니까?"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나흘 전날 밤 말씀인가요?" "네, 그날 밤 비가 많이 왔었지요. 기억하시겠습니까?" "네, 그날 밤 훈이는 집에 들어와 잤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김인희 여사는 미동도 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아파트 관리원들은 그날 밤 김훈 씨가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나가는 것도 목격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남 형사님, 아파트 관리원들은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아파트 경비까지도 도맡고 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도 있고 피곤해서


졸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다른 데 신경이 팔려 있을 땐 누가 출입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어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라 열한시경에는 근무를 철저하게 섰다고 진술했습니다." "그 분들은 항상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사흘 전에도 우리 장미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어요." "어느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까?" "몇 호에 도둑이 들었는지 나는 잘 몰라요. 소문만 들었으니까, 관리실에 가서 확인해 보세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김훈 씨가 그날 밤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관리실 근무자들한테 확인했습니다." 남 형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김 여사의 안색을 살피면서. 그러나 김 여사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 분들에게 가셔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네." "그럼 이만 실례하겠어요. 선약 때문에 나가 봐야 해요." "네." 남 형사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약속이 있어 주인이 나가겠다는데 혼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03 호 아파트에서 나온 남 형사는 관리실로 내려왔다. 머리가 훌렁 벗겨진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 하룻밤 사이에 관리인의 진술이 전혀 달라진 것부터 이상했다. 어제는 분명히 그날 밤 김훈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관리인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고 교묘하게 발뺌했다. "분명히 들어오는 걸 못 봤다고 했잖습니까?" "글쎄요, 그렇게 말한 것 같긴 한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화장실에 다녀 오느라고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확실치가 않습니다." "아저씨말고 다른 관리인 한 분은 어디 계십니까?" "몸살이 나서 조금 일찍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분 집은 어딥니까?" "돈암동 산동네입니다." "전화는 있습니까?" "긴급 연락처에는 전화가 있지만, 그 양반 집에는 전화가 없습니다." "사흘 전, 그러니까 일요일 날 이 아파트에 도둑이 들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네." "몇 동 몇 호에 도둑이 들었더랬습니까?" "8 동 502 호에 도둑이 들었었는데 잃어버린 물건은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고는 했습니까?"


"네, 파출소에 신고했어요." "도둑이 자주 듭니까?" "가끔 듭니다." "그럼 관리인들의 눈을 피해서 아파트에 침입한다 그 말입니까?" "네, 지키는 열 사람이 도둑 한 사람 감당하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 김이 샜다 더위를 무릅쓰고 달려온 수고에 소득이 없었다. 소득은커녕 아파트 관리인이 어제 했던 진술을 교묘하게 번복하는 통에 배신감을 느꼈다. 김인희 여사가 손을 쓴 게 아닐까? 그렇잖고서는 하룻밤 사이에 아파트 관리인의 진술이 달라질 수가 없는데....... 남 형사는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 뒤에 감추어져 있는 교활함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증거가 될 만한 자료가 없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가시가 있긴 있는데, 그 가시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관리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 층으로 올라갔다. 502 호 출입문 앞에 다가서서 벨을 눌렀다. 기척이 없었다. 벨을 연거푸 눌렀으나 반응이 없었다. 남 형사는 동작을 멈추고 출입문을 노려보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어제는 분명히 실마리를 잡았다고 자신했었는데....... 오늘은 잡았던 그 실마리마저 놓치게 되다니....... 허탈했다. 수사는 늘 그랬다 고독하고 쓸쓸했다. 문득 카페 은하수에서 만났던 윤옥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계통에서 살아 남으려면 비정한 형사가 되어야 하는데, 뱀처럼 차갑고 독수리처럼 날쌘 수사관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래 왔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싫어지고 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경찰에 투신한 지 10 년 동안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열심히 뛰고 또 뛰었지만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결혼도 하지 못했고, 계급도 겨우 경사밖에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주기는커녕 젊은이들은 대개 형사를 기피하는 쪽에 서 있었다. 나 역시 젊은이인데, 왜 젊은이들이 젊은이의 마음을 몰라주고 높은 벽을 쌓아 놓고 살아가야 할까? 아니, 이제 서른이 넘었으니 젊은이가 아닐는지도 몰라. 젊음이 다 가기 전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매혹적인 미소를 뿌리고 있는 윤옥주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내일이면 만날 수 있겠지.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해야지. 남 형사는 그녀에게 은근히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욕망의 사슬 속으로 곗돈 오십만 원이 필요했다. 류정현의 애인 노릇을 해주는 대가로 매월 들어가는 곗돈은 그가 책임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곗돈을 타낼 수가 없었다. 윤옥주는 곗돈 때문에 고민하고 잇었다. 내일 남 형사를 만나는 일보다 내일 곗돈을 넣어야 할 일이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남 형사를 만났을 때는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그에게 마음이 쏠렸으나 지금은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왜 내가 진작 곗돈 걱정을 하지 못했을까? 이 달엔 그 사람한테서 곗돈을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건데....... 곗돈 오십만 원이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갑자기 구하기는 어려운 돈이었다. 카페 주인에게 빌릴 수는 있겠지만, 돈을 빌려 쓰기 시작하면 발목을 잡혀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하고 감시까지 받게 마련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에게 빌려 쓰는 돈은 이자가 비싼 달러 빚이어서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돈이었다. 괜찮은 손님에게 몸을 팔아도 하룻밤에 삼십만 원 벌기는 어려웠다. 선거철이라 돈이 많이 깔렸다고들 하지만, 한 자리에서 십만 원 이상 팁을 주는 손님은 만나기 어려웠다. 곗돈을 제때 내지 않으면 손해가 많은 뿐 아니라 신용이 떨어지고 욕까지 먹게 돼 있었다. 그리고 곗돈을 탈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구멍이 뚫리겠지. 윤옥주는 독한 마음을 먹고 출근을 서둘렀다. 168 센티미터의 큰 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야하고 화려한 옷을 골라 입었다. 화장도 여느 때보다 진하게 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윤옥주가 거리에 나섰을 때,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늘씬한 각선미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 행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초록빛 미니스커트에 체리빛 블라우스의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어느 패션모델 못지않은 늘씬한 키에 풍성한 가슴과 예쁜 얼굴이 거리의 시선들을 끌어 모으고도 남을 만했다. 윤옥주는 거리의 뜨거운 시선들을 의식하며 걸었다. 그녀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사내들의 옥정이 꿈틀거리는


시선을 몸으로 느낄 줄 아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림자처럼 날 따라오고 있는 저 남자가 봉이었으면 좋겠는데....... 더도 말고 삼십만 원짜리 봉만 되면 오늘 밤에 이십만 원 더 벌어서 내일 곗돈은 해결되는데....... 어느새 그녀의 엉큼한 머리 속에서 프로의식이 발동하고 있었다. 아니, 십만 원만 내면 잠시 놀아 줄 수도 있어. 십만 원짜리도 다섯 명이면 오십만 원이 되니까. 급할 땐 조금 싸게 놀 수도 있는 거야. 그렇잖아도 섹시한 몸매를 더욱 섹시하게 보이려고 그녀는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걸었다. 조금 전 시민아파트 자췻방을 빠져 나와 거리에 접어 들었을 때부터 자기를 따라오는 사내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의식하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을 때였다. 뒤따라 오던 사내가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어, 아가씨! 잠깐만 실례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되도록 비싼 여자가 되고 싶어서였다. "혹시 모델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바싹 뒤따라 오는 사내의 말에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윤옥주는 돌아서서 뒤따라 온 사내를 바라보고 물었다. "혹시 모델이 되고 싶지 않으시냐고 했습니다." 이상한 검은 가죽모자를 쓴 삼십대 후반의 사내였다. 한눈에 예술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괜히 사람 놀리지 말아요." 차갑게 굴었다. 그것도 일종의 모략이라 할 수 있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나 역시 바쁜 사람인데, 아가씨한테 농담하고 다니겠습니까?" "그럼 정말이에요?" 윤옥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난 사진작가입니다." 눈이 깊숙하고 눈썹마저 진한 사내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윤옥주는 명함을 읽었다. 그러나 한문으로 인쇄된 명함이었기 때문에 작가(作家)라는 것과 성(姓)이 한(韓) 씨라는 것밖에 읽을 수 없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한문 실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글자 앞에 사진(寫眞)이라는 한문이 인쇄되어 있었으나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무식이 드러날까 봐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같은 게 어떻게 모델이 될 수 있어요?" "아가씨 정도면 얼마든지 일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모델이 되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계약하기 나름입니다. 그리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모델이 되려면 공부부터 해야 하잖아요?" "물론 공부도 해야지요." "전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요." "계약하기 나름이라니까요."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이렇게 더운 데 서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저쪽 나무 그늘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요." "네, 그러죠." 윤옥주는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서 순순히 사내를 따라 플라타너스 그늘 밑으로 갔다. 두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행인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삼일 동안만 모델이 돼 주시면 모델료로 백만 원 드리겠습니다." "어떤 모델인데요? 모델도 여러 종류잖아요?" "여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는 모델입니다." "저더러 나체 모델이 돼 달란 말씀이신가요?" "요즘 일본에선 일류 탤런트도 나체 모델이 되어 여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체 모델이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일본이니까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여자의 마음은 다 마찬가집니다. 우리 나라 주부들 중에도 젊었을 때 자신의 싱싱한 나체를 찍어 두지 못한 걸 후회하는 주부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주부들도 없잖아 있겠지요." "예술은 아름다운 겁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 "혹시 음란 비디오물 같은 거 찍으시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포르노와 예술사진은 전혀 다른 분야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 선생님은 예술사진만 찍는 분이세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난 얼굴을 정면으로 찍지 않습니다." "그래도 삼일은 너무 길어요." "최소한 삼일은 걸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부도 해야 하고 쉬기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어디서 찍어요?" "창 밖에 호수가 보이는 아늑한 별장에서 찍습니다." "선생님의 별장인가요?" "아닙니다. 아버님의 별장인데, 아버님도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럼 그 별장에 아버님도 계시겠군요?" "가끔 들르실 때도 있지만, 작업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굴은 정면으로 찍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는 아주 예의가 바르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모델이 되어 드리면 제게도 사진 한 장씩은 주실 수 있어요?"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모델이 탐이 나기 때문에 그렇게 해 드리지요." "그런데 모델료가 너무 싼 것 같아요. 오십만 원만 더 주세요." "초보자로선 많이 드리는 건데, 섭섭하다면 오십만 원 더 드리지요." "실은 돈이 좀 필요해서 그러는데, 선불로 주세요." "좋습니다. 백만 원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그대신 무리한 요구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어요." "무리한 요구라니요?" "섹스 비슷한 거 말예요." "알았어요." "선불은 언제 주시겠어요?" "영수증만 써 주시면 지금 당장 지불할 수 있습니다." "멋쟁이시군요. 근처 은행으로 가시지요." "은행엔 왜요?" "제 통장에 입금도 시켜야 하고 송금할 곳도 있기 때문에요." "좋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벤치에서 일어섰다. 윤옥주는 몇 발 자국 옮겨 놓기도 전에 흡사 연인에게 하듯 사내의 왼쪽 팔을 가볍게 붙잡고 걸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만, 그 날이 바로 오늘 같았다. 사진 모델도 되고 돈도 벌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마음이 날아갈 것 같으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모델이 되는 꿈을 꾼 적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이 났다. 거리에서 사진작가 한주용(韓紬蓉)을 만난 지 한 시간 후. 윤옥주는 고급승용차 그랜저에 몸을 싣고 경춘가도(京春街道)를 달리고 있었다.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운전대를 잡은 하주용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윤옥주는 그 미소 뒤에 숨겨져 있는 음모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별장은 어디 있어요?" "양수리에 있어요." "그럼 경치가 좋겠군요." "아주 좋은 곳이지요." 그랜저 승용차는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6 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숲이 우거진 좁은 산길로 접어 들었다. 별장은 깊은 곳에 있었다. 붉은 벽돌의 아담한 이층


양옥이었다. 별장 정면은 아름다운 호수였다. 두 사람은 별장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윤옥주는 마치 신데렐라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 별장엔 관리인이 따로 없는 모양이군요." "얼마 전까지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그럼 청소 같은 건 누가 해요?" "우리가 하지요." "우리라니요?" "나하고 우리 아버지가 못 할 때는 사람을 사서 해요." "그래도 되겠군요." "샤워부터 하세요." "샤워는 왜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땀을 씻어 내어야 윤활유를 바를 수 있어요." "윤활유라니요? 몸에 기름을 바른단 말예요?" "네,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서 올리브 기름을 적당히 씁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배가 고파요." "작업 직전에 식사는 금물입니다. 배가 나온 모델을 봤어요?" "알겠어요." "샤워는 오분 안에 끝내세요." "네." 한주용은 작업을 서둘렀다. 옥주가 샤워를 마치자마자 촬영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촬영실은 별장 지하에 있었다. 조명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피사체(被寫體)만 있으면 언제든지 활영이 가능하도록 카메라도 준비되어 있었다. 윤옥주는 옷을 벗었다. 한주용이 시키는 대로 손바닥만한 꽃무늬 팬티마저 다 벗었다. 눈부신 몸매였다. 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에덴의 선악과처럼 탐스러운 알몸이었다. 연꽃망울처럼 풍성하게 솟아오른 유방과 육감적인 엉덩이와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 사이의 무성한 검은 숲이 신비로웠다. 윤옥주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고 몸을 약간 움츠렸다. "천천히 한 바퀴 돌아 봐요." 한주용은 여자의 알몸을 감상하기 위해 명령했다. 옥주는 그 명령에 따랐다.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쉽게 돈 버는 법과 돈 버는 재미를 알고 있는 여자였다. "좋아요. 거기 의자에 앉아요." "네." 촬영용 의자에 앉았다. 한주용이 다가왔다. "두 다리를 약간 벌려요. 얼굴은 왼쪽으로 약간 돌리고." 말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표정을 바꾸어요. 너무 굳어 있어요." 옥주는 대꾸없이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요." 부드럽고 섬세한 한주용의 손이 윤옥주의 유방에서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올리브유의 감촉이 성감을 엷게 자극했다. 촬영에 들어갔다. 눈부신 조명 아래 포즈를 바꾸어 가며 촬영은 계속 이어졌다. 사진작가는 차츰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자세를 요구했다. 가랑이를 삼각형으로 크게 벌리게 하고 깊은 골짜기까지 찍으려 들었다. "이건 너무 야하잖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즘 일본의 쇼걸들은 수많은 손님들이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기의 거기를 찍게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야한 건 싫어요." "예술은 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곧 예술이니까 보통 사람들 눈에는 야하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야한 포즈로 찍을 줄 알았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미스 윤은 아직 풋내가 물씬거리는 풋내기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요즘엔 우리 나라 배우들과 탤런트들도 자기 알몸을 비디오에 담아 두려는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어디선가 나도 그런 말을 듣긴 들은 것 같아요." "요즘 시중에는 일류 탤런트의 알몸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나돌고 있는데, 수집가들은 그 테이프를 구하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어요." "그럼 탤런트는 돈도 많이 벌었겠군요." "물론이지요. 미스 윤도 내 말만 잘 들으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한 모델도 될 수 있어요." "정말 유명한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가능성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가능성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어요?" "먼저 작가와 모델이 하나가 돼야 합니다." "하나가 되다뇨?" "마음과 몸이 깊이 통할 수 있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몸까지요?" "네, 사진예술은 피사체가 있어야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피사체인 모델의 몸이 작가와 하나가 될 때 작가의 영감이 담긴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감독들과 미모의 여배우들 사이에 스캔들이 많은 모양이군요." 윤옥주는 제법 아는 척했다. 사진예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으나 바보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가 쑥스러워서였다. 한주용에게는 그만큼 다루기 쉬운 풋내기였다. 엉터리 사진예술론 몇 마디에 저절로 넘어가는 그녀는 결코 어려운 여자가 아니었다. 한주용은 여자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알몸으로 앉아 있는 윤옥주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입술이 다가왔다. 여자는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세차게 껴안았다. 혓바닥을 서로 깊숙이 주고 받았다. 달콤하고 감칠한 과일맛보다 훨씬 진한 맛이 났다. "선생님 나 배 고파요." 뜨거운 키스가 끝난 후 윤옥주가 뱉은 첫마디였다. "주방에 올라가서 무엇 좀 먹게 옷 입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배 고픈데 많이 찍어서 미안해요." "말씀은 낮추세요." "응, 그래. 그게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어?" "네." 윤옥주는 벗어 놓았던 옷을 입고 한주용을 따라 주방으로 갔다. 주방 냉장고에는 먹음직한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물론 칠면조고기와 달걀과 통조림과 과일과 야채와 식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날 밤. 하나되기 작업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오후 8 시경에 촬영을 끝낸 두 사람은 샤워를 하고 거실에다 술상을 마련하여 술을 마셨다. 저녁식사는 오후 5 시경에 했기 때문에 술과 안주만으로도 충분했다. 계란형 탁자 위에 놓인 여러 종류의 양주와 먹음직한 과일 안주가 윤옥주의 입맛을 돋구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답고 식욕이 왕성한 여자였다. 독일제 쌍둥이 형제 상표가 붙은 날카로운 과도로 짐승의 불알처럼 생긴 양다래를 맛나게 깎아 먹었다.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황홀한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초여름 밤 아늑한 별장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꼬냑과 진빔을 몇 잔 마신 후 한주용이 춤을 청해 왔다 마침 은은한 블루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난 아직 춤을 못 춰요." "블루스는 어려운 춤이 아니야. 리듬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돼." "하지만 선생님의 발을 밟으면 어떡해요?"


"발을 밟지 않도록 내가 가르쳐 주지." "그럼 부탁해요." 윤옥주는 한주용이 이끄는 대로 거실 한가운데로 나갔다. 거실은 제법 넓었기 때문에 서너 쌍은 충분히 춤출 만했다. 한주용은 잔잔한 블루스에 몸을 띄우며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찔레꽃같은 싱싱한 여자의 냄새가 그를 자극시켰다. 두 사람은 블루스의 애수어린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흐르면서 마주보고 웃었다. 여자의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가 유난히 곱게 반짝거렸다. "잘 추는데." "못 추어요."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이에요." "정말?" "네." 윤옥주는 거짓말을 했다. 순진한 처녀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처음인데 이 정도로 잘 추면 조금만 배우면 도사가 되겠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애한테 배운 적은 있어요." "그러면 그렇지." "고 3 때 스탭을 밟아 보고 실습 한 번 못 해 봤어요." "옥주는 정말 멋쟁이야." "종이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생각했던 것보다 몸도 잘 빠졌기 때문에 희망이 있어." 한주용은 스탭을 멈추고 여자를 꼬옥 껴안았다. 싱싱한 여체의 감미로움이 가슴으로부터 허리를 타고 짜릿하게 하복부로 전달되어 내려왔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상큼하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혀를 서로 깊숙이 주고 받았다. 뜨거운 키스의 폭풍이 지나간 후, 한주용의 오른손이 윤옥주의 미니스커트 사이 깊숙한 골짜기로 치달았다. "거긴 안 돼요." 윤옥주는 선 채로 깊숙한 곳을 애무하려는 한주용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느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싫어서였다. 느낌은 좋았다. 거의 환상적일 만큼 좋았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거부반응을 보여야 자존심이 설 것 같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입술은 단번에 허락하였지만, 여자의 깊은 곳은 단번에 허락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왜? 싫어?" "네." "그럼 술이나 마셔야겠군 그래." "미안해요." "아니, 괜찮아."


한주용은 사진작가답게 아주 신사적이었다. 약간의 완력만 썼더라면 그녀의 깊은 골짜기로 쳐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술상 앞으로 돌아와 마주 앉았다. 양주병에 술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윤옥주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하여 앉자마자 술을 권했다. "응, 고마워."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내세요." "응, 그래. 옥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해." "네, 선생님." "자아, 우리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브라보!" 두 사람은 어울려 축배를 들었다. 작은 유리잔의 노르스름한 액체를 겁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이번엔 무슨 술로 행운을 빌까? 죠니 워커도 있고 킹즈램섬도 있고 체리브랜디도 있어." "아무거나 좋아요." "응, 그래." "그런데 이 양주들은 선생님이 다 사 오셨어요?" "아니, 내가 사 온게 아니라 그 분이 사 오셨어." "그 분이라니요?" "우리 아버지 말이야. 내가 그 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나?" "네." "그 분은 박사님이셔." "무슨 박사님이신데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돈 많은 박사님이셔." 한주용은 제법 취한 모양이었다. 두 눈에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세상에 아버님이 무슨 박사님이신 줄도 모르는 아드님이 있을 수 있어요?" "바로 여기 있잖아." "농담하시지 말고, 무슨 박사님이신지 말씀해 보세요." "그건 비밀이야." "그게 무슨 비밀이 될 수 있어요?" "글쎄, 그냥 비밀이야." "정말 이상한 비밀도 다 있군요." "글쎄, 나도 모르는 비밀이야. 그러니까 이젠 그런 말 그만하고 술이나 더 마셔." "술이 과하신 거 아니예요?" "옥주는 멀쩡하잖아?" "저도 많이 취했어요." "그럼 잘 됐군. 조금만 더 취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오늘 밤은 안 돼요." "왜?" "너무 빨라요." "작품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결코 빠르지 않아." "우린 서로 아직 잘 모르잖아요."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돼 보아야 알 수 있어. 자아, 내 술 한 잔 받아." 윤옥주는 두 손으로 작은 유리잔을 받았다. 웬지 모르게 오늘 밤은 흠씬 취하고 싶어서였다. 몇 잔이나 더 주고 받았을까. 한주용이 윤옥주 곁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 기분좋게 취해 있었다. 윤옥주의 초록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뽀얀 허벅지가 사내의 시선을 빨아들일 듯 강하게 끌어당겼다. 의자에 앉은 자세일 때의 미니스커트는 입으나마나인 듯했다. "정말 옥주는 아까운 여자야." "아까운 여자라니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그렇게 느꼈을 따름이야." 한주용은 어느새 그녀의 뽀얀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선생님답잖게 손장난이 심하시군요." 점잖게 타일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밤업소 생활 1 년의 관록이 그녀 자신도 모르는 새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옥주, 우린 하나가 되어야 해. 우리 주변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 한주용의 말은 술을 확 깨게 하는 데가 있는 말이었다. 윤옥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되물었다. "뭐, 뭐라구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옥주와 하나가 되고 싶은 생각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 봤을 따름이야." "조금 전에 분명히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해셨잖아요." "사진작가들은 여자의 깊은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무성한 숲을 사랑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게 바로 음모란 말이야. 음부에 난 털이 음모 아니겠어?" "......." 알쏭달쏭했다.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이상한 낌새를 물고 늘어졌을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두뇌는 이미 술에 마비되어 있었다. "작가 선생님이 사람 놀리시는 거예요, 뭐예요?" "미안해, 미스 윤! 아니, 옥주 씨. 난 그저 미스 윤이 정말 아름답고 좋은 여자이며 숲이 우거진 여자라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다니요? 어떻게요?" "내 방식대로 하나가 되고 싶어. 작품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좋아." "그럼 작품이 끝나면 날 헌신짝처럼 버리시겠다 그 말씀이신가요?" "그게 아니야." "그럼 뭐예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우린 오늘 오후 두 시에 처음 만났어요." "그래, 맞아. 우린 운명적으로 오늘 처음 만났어. 하지만 이 세상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작품을 했어. 평생 걸려도 하지 못하는 작품을 했단 말이야." "작품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작품은 나의 인생이야." "선생님이 작품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여자는 많아요." "물론 그럴 테지. 하지만 만나기가 어려워. 세상 많은 사람들이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어." "그래서 계속 헤어지는 건가요?" "그래, 맞아. 내 친구 녀석은 칠 년을 함께 살던 아내와 헤어졌어.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도 말이야." "그럼 선생님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으셨어요?" "결혼했지만 두 달 만에 헤어졌어." "너무 빨리 헤어지셨군요." "어차피 헤어질 바에야 빨리 헤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선생님다우시군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아니, 술도 좋지만 난 당신이 더 좋아." "정말이세요?"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당신을 갖고 싶어." "하나가 되고 싶으세요?" "응, 진정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안 돼요." "왜?" "저도 모르겠어요." "정말 경험이 없는 모양이지?" "네." 윤옥주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오직 한 가닥 자존심을 위해서는 '네.'라고 밖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럼 밤새도록 술을 마셔야겠군 그래." "그건 안 돼요." "왜?" "주무셔야 해요." "건강을 위해서?" "네." "그럼 작별의 키스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주용은 윤옥주를 세차게 끌어 안았다. 뜨거운 키스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입술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키스는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한주용은 키스가 끝나기도 전에 윤옥주의 팬티를 벗기기 시작했다. 미니스커트 속에 감추어진 손바닥만한 꽃팬티는 결코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 돼요." 말로는 거부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은근히 그의 도전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정말 안 된다니까요." 그러나 사랑의 행위에는 익숙해져 있는 그녀였다. 말로만 거절했을 뿐 몸을 비틀거나 두 손으로 상대방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었잖아요." 발목 아래로 삼각팬티가 내려갈 때까지 거부반응을 보였을 뿐 실제로 거센 반항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체험이란 정말 무서운 것 같았다. 이미 여러 남자를 체험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본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도 괜찮은 남자라고 느껴지는 그를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윤옥주도 처음엔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약 3 년 전, 여고 2 년 때였다. 밤 늦게 돌아오는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가 동네 유지인 최씨에게 당할 대는 사력을 다해 반항했었다. 최씨의 팔뚝을 물어 뜯고 절대로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옆구리를 강타하는 주먹 한 대에 거의 정신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폭군이요 색마였던 최씨와는 달리 사진작가는 그래도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매몰차게 거부할 수도 있었다. 난폭하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 한 여자가 안 주려면 끝까지 주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게 여자의 성(城)이라고 믿어온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 밤은 이상했다. 한주용이 팬티를 발목 밑으로 내려놓고 허벅지 사이에 무릎을 밀어넣어 가랑이를 벌리게 만들었을 때, 그녀는 못 이긴 척 다리를 벌렸다. 사내의 용암처럼 뜨거운 물건이 몸 속 깊숙이 파고들어 온 것은 잠시 잠깐 후의 일이었다. 흡사 강간을 하듯이 바지도 제대로 벗지 않고 애무도 전혀 없이, 벌어진 하체 사이에다 자기의 것을 처박고 담금질을 계속하는 한주용이 얄미웠다. 하지만 원망의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었다. 창녀처럼 음탕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당할 도리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내는 오랜 동안 굶주린 듯 그녀의 깊은 곳을 흥건히 적셔


놓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미안해, 옥주. 억지로 해서." 한주용은 탁자 밑에서 타월 한 장을 꺼내어 건네주며 멋쩍게 웃었다. 아쉬웠다. 아니, 안달이 났다. 양주로 무르익은 몸에 느닷없이 점화만 시켜 놓고 물러난 사내가 원망스러웠다. "미안해. 너무 오래 못 했기 때문에 소낙비처럼 쏟아 놓고 말았어." 가랑이 사이의 흥건한 액체를 닦아낸 후 카펫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사내는 겸연쩍게 웃었다. "옥주, 화 났어?" "......." "왜 아무 말이 없어? 다시 시작할까?" "사람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니야.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천천히 다시 시작하고 싶어." "자신 있으세요?" 윤옥주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뭔가를 애타게 갈망하는 빛으로. "자신이 있어. 여섯 번까지 세운 기록도 있어." "정말이세요?" "응, 그런데 오늘 밤은 그 기록을 갱신하고 싶어." "그럼 오늘 밤 저는 죽어나겠군요." 이상했다. 부끄러움 같은 게 없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깊은 골짜기를 흥건히 적셔 놓기만 하고 중단했기 때문일까. 안달이 났다. 욕망은 꿈틀거렸다. 한껏 타오르고 싶은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싱싱한 몸 어디에선가 사내의 공격을 갈망하는 욕구가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기막힌 섹스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본능적으로 일어났다. 오늘 밤은 생애 최고의 광란의 섹스 파티를 벌이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침실로 자리를 옮긴 후 알몸이 되었다. 술기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알몸은 잘 익은 과일처럼 탐스럽고 아까 촬영실에서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옥주는 정말 멋져!" "사모님은 그걸 아주 좋아하시는 모양이죠?" "사모님이라니?" "선생님의 부인 말예요?" "두 달 만에 헤어졌다고 했잖아." "정말이세요?" "응." "그럼 누구하고 여섯 번씩이나 했어요?" "질투하는 건가?" "아니예요. 그저 궁금해서 물어 보았을 뿐이에요."


"끝내주는 모델이 하나 있었어.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럼 저도 시집갈 희망이 있겠네요." "물론이지." "예뻤어요?" "아니, 옥주보단 못 했어. 옥주는 정말 일품이야. 늘씬한 몸매에 골짜기의 무성한 숲이 아주 매혹적이야." 어느새 한주용의 섬세한 손가락이 윤옥주의 깊은 골짜기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 섬세한 손가락의 유희에 오금이 애무되어 애액이 솟아났다. 옥주는 눈을 감았다. 전류처럼 짜릿하고 달콤하고 뜨거운 성감이 하복부를 파고드는 듯했다. 샘에서 꿀이 솟아났다. 입술을 찾았다. 입술이 포개어졌다. 목을 휘감고 달콤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깊은 골짜기를 애무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황홀했다. 그녀는 하복부에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너무 맛이 좋아 미칠 것만 같았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사내는 미끈하게 빠진 알몸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둔부를 어루만졌다. 윤옥주는 비스듬히 누운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한주용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제 몸매 어때요?" "일품이야, 일품!" "정말이에요?" "응, 정말이야." "그럼 씨에프(CF) 모델을 하면 안 될까요?" "안 되긴 왜 안 돼. 충분히 될 수 있어." "정말이에요?" "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하지만 씨에프 모델이 되려면 로비 자금이 좀 필요해." "떡값 같은 거 말인가요?" "잘 아는군 그래." "얼마쯤이면 될까요?" "적어도 한 오백은 가져야 할 거야." "오백이라뇨? 오백만 원 말인가요?" "한 번 나가면 천만 원 이상 받는 인기 직업인데, 5 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곗돈을 타면 몰라도 아직은 그만한 돈이 없어요." "곗돈은 언제 나오는데?" "아직 일 년 정도 더 부어야 해요." "그건 너무 늦어서 안 되겠군." "그럼 어떡하죠?" "정말 씨에프 모델이 되고 싶어?"


"네, 꼭 되고 싶어요. 씨에프 모델이 되면 예능계 대학에 들어가기도 쉽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 말인가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럼 선생님이 어떻게 해 주실 수 없으시겠어요?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는데......."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어린 그녀의 가슴을 타게 했다. "그게 어떤 방법인데요?" "아까 내가 말했었지.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네." "우리가 하나가 되면 오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내는 자세를 바로잡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윤옥주는 상대방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몸이 하나가 됐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어떻게 하나가 돼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먼저 옥주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줘. 약속할 수 있겠어?" "네." 그녀는 힘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뭔가 의심쩍어하는 자신감이 없는 태도였다. "혹시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들어 봤어?" "네." 역시 힘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먹이를 포착한 매처럼 파고 들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윤옥주는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는 류정현 씨한테 들었어?" "한 선생님이 그 분을 어떻게 아세요?" "조금밖에 몰라. 그래서 지금 옥주한테 묻고 있잖아. 중산리의 비밀이 뭐지?" "그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중산리의 비밀만 알려주면 내가 책임지고 씨에프 모델이 되게 해 주겠어." "그래도 모르는 걸 어떡해요." "류정현 씨한테 들었다고 했잖아?" "듣긴 들었어도 다 잊어 버렸어요." "잘 생각해 봐." "중산리는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마을로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있는 마을이란 것밖에 몰라요." "씨에프 모델이 되고 싶거던 숨기지 말고 말해 봐." "지금은 그 분이 무슨 이야길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아요." "그럼 오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하지만 꼭 생각해 내어야 해." 두 사람은 누군가가 침실에다 고성능 도청장치를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옥주는 틀림없이 인기 정상의 씨에프 모델이 될 수 있어." 한주용은 허영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여자의 마음을 부추기며 다시금 그녀의 탐스러운 알몸을 세차게 껴안았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사내의 활화산 같은 욕정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섯 차례 몸을 섞었는지 일곱 차례 몸을 섞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곤죽이 되도록 여러 차례 격렬한 게임을 치르고 곯아 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털이 무성한 검은 손이었다. 인간의 손 같기도 하고 짐승의 손 같기도 했다. 숨이 막혀 금방 죽을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목에 감긴 검은 손을 떼내려고 해도 떼낼 수가 없었다. 두 눈을 뜨려했지만, 이상하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 땀에 후줄근히 젖어 있었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려고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 윤옥주는 자기 손에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둠 속이라 확실하지 않았으나 피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얼른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침실이 밝아졌다. 윤옥주는 자기 손바닥부터 펴 보았다. 검붉은 피투성이었다. 끈적끈적한 액체는 응고돼 가는 피였다. 기겁했다 두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확대되었다. 공포에 질려 얼굴빛도 어느새 납빛처럼 창백하게 변해 갔다. 술을 마시고 섹스를 즐긴 기억밖에 없는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을 때, 윤옥주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한주용은 피투성이였다. 그의 가슴에는 칼이 꽂혀 있었다. 독일제 과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바로 그녀 옆에서 잠들었었는데, 언제 어떻게 칼을 맞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누워 있는 게 이상했다. "한 선생님! 한 선생님!" 윤옥주는 한주용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심장 부근에 깊숙이 꽂혀 있는 칼은 어젯밤 과일을 깎으면서 사용했던 바로 그 과도였다. 누가 죽였을까? 나는 아닌데,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했을까?


공포가 몰려왔다. 윤옥주는 한동안 옷을 챙겨 입을 생각조차 못한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덜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빨리 별장에서 자취를 감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공연히 누명을 뒤집어쓰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윤옥주는 허겁지겁 팬티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브래지어는 걸치지도 않고 블라우스를 입었을 때였다. 바로 침실 문 앞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그녀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그리고 두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혹시 잘못 들은 소리는 아닐까? 그러나 그 기침소리는 결코 환청이 아니었다. 사람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다음 순간, 침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누, 누구세요?"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러나 윤옥주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노크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다급해졌다. 그녀의 말은 입 안에서 맴돌았을 뿐, 전달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노크소리는 멎고 그대신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세요?" 이번에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음, 사람이 있었군. 난 이 별장 주인이오. 당신은 누구요?" "......." 얼른 대답할 말이 나오지 않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냐고 묻고 있지 않소? 내 말 안 들려요?" "소, 손님이에요." "손님이라뇨? 난 여자 손님을 초청한 일이 없는데......." "모, 모델이에요." "음, 그럼 우리 주용이 손님이로군. 근데 우리 주용이는 어디 갔어요?" "......." 다시 할말이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주용이는 나갔어요?" "......."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무, 무서워요." "무섭다뇨? 아가씨 혼자 있어요?" "주, 주용 씨는 죽었어요! 하지만 제가 죽이진 않았어요!" "뭐,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누가 죽었다고


했어요?" "네. 주, 주용 씨가 죽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전 절대로 죽이지 않았어요." "빨리 문 좀 열어 봐요." "자, 잠깐만요." 윤옥주는 삼각팬티 위에다 미니스커트를 걸친 후에야 비로소 침실 문을 열었다. 건강한 체구에 체크무늬 잠옷 차림의 노인이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윤옥주는 거의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우뚝 선 콧날과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짙은 눈썹이 인상에 남을 만한 노신사였다. 머리카락은 거의 백발이었으나 눈썹만은 검정 일색이었다. "우리 주용이가 죽다니?" 침대 위에 반듯이 누운 채 칼에 맞아 죽어 있는 한주용을 살펴본 후 노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고 마약을 계속 하더니만, 결국 이런 처참한 꼴을 당했군 그래." "......." 윤옥주는 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겁먹은 눈동자만 껌벅거렸다. "누가 그랬어? 아가씨가 그랬지? 아가씨가 우리 주용일 죽였지?" 산짐승처럼 두 눈에 불을 켜고 노인이 다가섰다. 윤옥주는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서며 내뱉었다. "제, 제가 죽이지 않았어요!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뜨고 불을 켜보니 주용 씨가 칼에 찔려 있었어요." "방금 악몽에 쫓기다가 눈을 떴다고 했었지?" "네. 저, 정말 무서운 악몽에 쫓겨 다녔어요. 그, 그러다가 눈을 떴어요."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당신이 몽중살인(夢中殺人)을 했군 그래." "저, 전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제발 믿어 주세요." 윤옥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 모아 빌면서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무겁게 가로 저었다. "어젯밤 주용이하고 함께 술을 마셨지?" "네."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즐겼지?" "......." "왜 대답이 없어?" 노인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매서운 눈빛으로 윤옥주를 금방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실컷 즐겼지?" "네." 윤옥주는 모기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다 마약을 탄 양주를 마셨기 때문이야." "저, 전 그런 양주인지 몰랐어요." "물론 몰랐겠지." "전 모델이 되어 달라기에 따라 왔을 뿐이에요." "얼마 받기로 하고 따라 왔어?" "백오십만 원 받기로 했어요." "그럼 아직 한 푼도 안 받았어?" "백만 원 선금으로 받았어요." "그러고 보니 보통 계집이 아니군 그래."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노인은 육옥주가 변명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야. 경찰에 넘길 수밖에 없어."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동네 중산리의 비밀을 파헤치려 할 때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중산리의 비밀에 접근하려 할 때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증거물이 있어. 과도와 마약이 섞인 양줏잔이 있어. 그리고 당신의 그 피묻은 손이 증거가 되고도 남아." "저는 주용 씨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제가 주용 씨를 죽이겠어요." "환상살인도 살인이야." "저는 그런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마약이 무섭다는 거야. 마약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에 마약을 못 하게 하고 있단 말이야." "전 마약이 뭔지도 몰라요." "거짓말 말아." "저, 정말이에요." 윤옥주의 목소리는 떨렸다. 태연하게 말하려고 정신을 가다듬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 아들을 죽여 놓고도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뻔뻔스럽게 거짓말만 하다니, 내 손으로 당신을 작살내고 말겠어!" 노인이 성큼 다가왔다. 노인의 큰 체구가 흡사 악몽 속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내 손으론 당신을 없애 버리는 게 속시원하겠어!" 노인의 큼직한 두 손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겨냥하고 다가왔다. "바, 박사님! 요, 용서해 주세요!" 윤옥주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등을 벽에 기댄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꿈 속에서 당신이 이 칼로 내 아들을 죽인 거 맞지?" 노인은 한주용의 가슴에 꽂쳐 있던 피묻은 과도를 뽑아들고 다가섰다. "왜 대답이 없어?" 노인의 두 눈에는 괴기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네 년이 죽였지?" 윤옥주는 대답대신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는 칼에 찔리고 말 것 같아서였다.

연결고리 경찰서 앞 초원다방에서 30 분을 기다렸으나 윤옥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 형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다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여자한테 바람을 맞은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카페에서 일하기에는 아까운 아가씨였는데....... 인간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아가씨였는데....... 은하수는 보통 카페가 아니었다. 밀실이 여러 개 마련돼 있는 고급 카페였다. 그리고 그런 카페에서는 때에 따라 음란행위가 벌어진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왜 만날 약속을 했지?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는 돈밖에 모르는 여자일 텐데.......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는 여자도 아닌데, 정숙하지도 못한 그런 여자를 만나려다가 바람까지 맞다니 한심한 놈이군 그래. 남 형사는 갑자기 비애를 느꼈다.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노총각이지만, 카페에 나가는 아가씨에게 바람을 맞고 앉아 있는 자신의 꼴이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 여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도 있는 여자인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머리 속에서 윤옥주를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번 떠오른 그녀의 모습은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원래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은 걸까? 윤옥주가 그런 여자 같지는 않았었다. 진실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남 형사는 그녀의 눈빛을 기억해 냈다.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진 아가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을까? 그녀의 호수같은 눈빛에는 그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그 무엇이 배여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그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그 무엇이 분명히 깔려 있었다. 잠시나마 어린 그 아가씨에게 내가 마음을 빼앗겼던 게 아닐까? 그녀의 눈언저리와 입가에 떠오르던 잔잔한 미소가 생각났다. 그 눈빛은 거짓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아니었는데, 호감을 가진 눈빛이었는데 왜 나오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윤옥주를 찾으러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오후 남 형사는 꼭 만나 봐야 할 사람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 한 사람은 강남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류정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알리바이에 냄새가 나는 김훈이었다. 남 형사는 다방을 나섰다. 초여름이었지만, 오후의 햇살은 무더위를 몰고 다닐 만큼 따가웠다. 그래도 병원 안은 시원했다. 건축한 지 1 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병원이라 냉방시설이 잘 돼 있었다. 중환자실 환자 면회시간은 오후 2 시부터 2 시 30 분까지였다. 남 형사는 면회시간이 15 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아 서둘렀다. 류정현이 입원해 있는 중환자실 앞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철 선거사무실에서 만난 기억이 있는 조민혁이었다. "날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럼요. 기획실장 조민혁 씨 아니십니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류정현 씨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기적적으로 많이 회복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만나 볼려고 왔습니다." "이제 겨우 사람을 알아볼 정도입니다." "그럼 아직 말을 못 합니까?" "한두 마디는 하지만, 의사소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일단 한 번 만나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조민혁이 손을 들어 남 형사를 제지시켰다. "지금 여동생이 면회 중입니다. 중환자는 면회시간에도 한 사람밖에 면회할 수밖에 없다고 해서 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병원 당국의 허락을 받고 들어 가겠습니다." "좋도록 하세요." 조민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앞으로 물러섰다. 남 형사는 담당의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대신 수간호사의 허락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류정현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류정현은 두려운 눈빛으로 남 형사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 형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오빠가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류미란의 말은 차가웠다. 중환자실에서 나가 달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경찰에서 나왔다고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직은 소요없는 짓이에요. 나한테는 한두 마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직 입을 열지 않아요." "하지만 소개만 해 주세요." 남 형사는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졌으나 류미란은 차갑게 거절했다. "산소호흡기를 착용시킬 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럼 아직도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습니까?" "네, 아직 일주일 이상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잘 알겠습니다." 남 형사는 중환자실에서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나와 대기실로 갔다. 그는 거기서 다시 조민혁을 만났다. "환자하고 무슨 이야길 나누었습니까?" 흡사 빈정거리는 질문 같았으나 남 형사는 기분나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많이 회복되진 않았더군요." "아주 가까운 사람만 알아볼 뿐 아직 말은 잘 못 하더군요." "하지만 언젠가는 회복이 되겠더군요. 그때까지 좀더 기다리지요."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범인을 꼭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근데 선거본부장은 바쁘신 모양이지요?" "네, 선거날이 박두했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실례지만, 본부장은 어딜 가면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솥 밥을 먹는 사람이지만, 각기 맡은 일이 다르기 때문에 어디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정도 간부회의는 하실 것 아닙니까?" "아제부터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실장회의도 이틀에 한 번 하기로 결정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고 있습니다." "그럼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 잘 모르신다 그 말씀입니까?" "네." "실례지만, 조민혁 씨는 언제부터 김철 후보님을 알게 되셨습니까?"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십니까?" "그저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것뿐입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남 형사는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데


명수였다. "김 후보님의 가정과 우리 가정은 내가 어릴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그럼 혹시 고향 사람이십니까?" "네, 쉽게 말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모님들끼리 지금도 왕래가 있으시겠군요?" "네, 김 후보님의 모친과 우리 어머님은 친형제처럼 지내고 계십니다." "그럼 아버님은요?" "두 분 모두 남편을 일찍 여의셨습니다." "그래서 더 친해지셨겠군요." "글쎄요." "그럼 혹시 중산리를 아십니까?" "네." "어떻게 아십니까?" "우리 어머님의 고향이 거기라 가본 적이 있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는 마을 중산리가 어머님의 고향이라 그 말씀이신가요?" "네." "그럼 혹시 조민혁 씨는 유명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님의 후손이신가요?" "글쎄요, 난 조상이나 족보 같은 건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민혁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남 형사는 물러서지 않고 파고 들었다. 그 동안 중산리가 어떤 곳인지 둘러보고 왔기 때문에 나름대로 아는 게 있었다. "원래 남명 선생님의 고향은 경남 합천(陜川)인데, 산청군(山淸郡) 시천면 중산리에 터전을 잡으시고 개혁가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중산리 쪽에서 유명한 분이 되셨더군요." "글쎄요, 그 분이 어디서 어떻게 유명한 분이 되셨던 나하고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깁니다." "그럼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은 아니신 모양이죠?" "남 형사님, 난 족보나 따지고 있을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히 다른 용무가 없으면 돌아가 주세요." "미안하지만, 류미란 씨도 좀 만나 보고 가야겠습니다." "남 형사님, 만약 우리 김철 후보님이 여당 후보자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사람을 이렇게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조민혁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항의해 왔다. "사건 수사에 여야가 따로 있겠습니까? 적어도 난 그런 형사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린 피해잡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홍보실장을 잃은 우리한테 와서 시간을 빼앗고 사람을 괴롭히는 저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방금 말씀드렸잖습니까?"


"정말 저의가 없으면 선거를 마친 후에 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면 경찰서장님에게 정식으로 항의문을 발송하겠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시면 시경 국장님에게 항의문을 보내고 동시에 각 언론사에 항의문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다고 물러설 남 형사가 아닙니다." "우리 식구들 중에 도망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고 선거를 치룬 후에 찾아 오세요." "김훈 씨는 지금도 나를 피하고 있습니다." "피하는 게 아니라 너무 바빠서 만나지 않고 있을 따름입니다." "김훈 씨한테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무슨 냄새가 난단 말입니까?" "그 분이 내세우고 있는 알리바이는 십중팔구 조작된 알리바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본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열 길 물 속은 헤아릴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본부장의 마음은 내가 압니다." "그럼 증명해 보세요." "때가 되면 증명이 되겠지요." 바로 그때 류미란이 다가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 실장님, 죄송하지만 류미란 씨에게 물어볼 말이 있는데......." "알겠습니다. 그대신 시간을 많이 뺏지 마세요. 류 실장도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조민혁이 남 형사에게 부탁하고 류미란에게 다가섰다.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곧 내려와요." "왜요? 함께 내려가면 안 되나요?" "류 실장한테 물어볼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 분이요?" 류미란은 오륙 미터 앞에 서 있는 남 형사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고, 조민혁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기실은 한산했다. 중환자에게는 자유스런 면회가 허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조민혁이 떠나고나자 남 형사는 류미란과 단둘이 긴 의자에 비스듬히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오라버님대신 홍보실장을 맡으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소문이 빠르군요." 류미란은 아까 912 호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밝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으나 섹시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오라버님하고는 어떤 이야길 했습니까?" "아직 대화를 나눌 만큼 회복되진 않았어요."


"그래도 무슨 말이든 몇 마디 했을 거 아닙니까?"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인사 정도 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인사를 했습니까?" "아버님 안부를 물으셨고 그 다음엔 제 안부를 물었을 정도예요." "그 밖에 다른 말은 하시지 않았습니까?" "선거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띄엄띄엄 물었어요." "그럼 정신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로군요." "네, 그런 거 같아요." "의사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정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했어요." "그거 정말 잘 됐군요. 그런데 언제쯤 회복되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까?" "글쎄요, 박사님도 정확한 시기는 모르시는 모양이에요." "아무튼 오라버님이 회복되신다니, 나도 무척 기쁩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왜 따로 사십니까? 혹시 며느님 되는 분이 모시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글쎄요." "류미란 씨도 따로 사시죠?" "네, 얼마 전에 독립했어요. 하지만 그런게 우리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일은 묻지 말아 주세요." "사건을 해결하려면 피해자 주변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물어본 것 뿐입니다." "오빠에 관한 것만 물어 주세요." "얼마 전에 오라버님께서 중형 승용차를 뽑으셨던데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오빠하고 같이 살지 않기 때문에 몰라요." "그럼 오라버님이 이혼 직전에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시겠군요." "올케하고 사이가 나빴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이번에 의식을 되찾으면서 올케를 찾진 않았습니까?" "네, 찾지 않았어요." "그럼 혹시 윤옥주를 찾았습니까?" "윤옥주가 누군데요?" "그런 아가씨가 있습니다. 찾지 않았습니까?" "네, 오빠가 찾은 사람은 아버지하고 저뿐이었어요." "정말이십니까?" "네." 류미란의 대답은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 짧고 간단한 대답 속에 냉담한 반응이 내포되어 있음을 남 형사는 읽고 있었다. "오라버님이 선거사무실에서 일하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출판사를 했어요." "그럼 선거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서 출판사 문을 닫았습니까?" "아니예요. 지금도 출판사를 하고 있어요." "그럼 김철 후보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고 선거운동에 뛰어 드신 셈이군요." "글쎄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럼 김철 씨와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습니까?" "글쎄요,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였을 거예요." "류미란 씨는 언제부터 김철 후보를 알게 됐습니까?" "대학 다닐 때 오빠가 소개해 주어서 알게 되었어요." "그럼 적어도 몇 년은 되었군요." "네, 아마 사오 년은 되었을 거예요." "미안하지만, 류미란 씨 고향은 어디세요?" "하동이에요." "경남 하동 말입니까?" "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군요." "두 살 때 서울로 이사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혹시 중산리라는 동네를 아십니까?" "중산리라고 하셨어요?" "네." "글쎄요, 어디서 듣긴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류미란이 말을 약간 느리게 하면서 뜸을 들이는 것을 남 형사는 놓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왜 갑자기 중산리라는 동네가 튀어 나오는 거예요? 무슨 사연이 있는 동네인가요?" "네, 6.25 동란 때 뼈아픈 사연이 많았던 동네입니다." "호호호, 아저씨가 사람을 많이 웃기시는군요, 저는 6.25 때 태어날 꿈도 꾸지 못한 사람이에요." "나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왜 6.25 까지 들먹거리면서 사람을 웃기세요. 난 아저씨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예요." 류미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류미란 씨, 잠깐만요!" "미안해요, 아저씨! 난 더 이상 아는 게 없어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류미란은 복도 중간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남 형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관능적인 엉덩이를 흔들며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저 여자처럼 저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으면 좋겠는데....... 남 형사는 매사에 자신감이 없었다. 전에는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선거철이 접어들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활기를 띠면 띨수록 자기 자신은 쪼그라들고 오므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하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을 올드 미스가 나더러 아저씨라고....... 류미란이 아저씨 어쩌고 저쩌고 했던 말도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아직 장가도 못 간 놈이 얼마나 늙수그레하게 보였길래 올드 미스한테 아저씨란 소리를 다 듣게 되었을까? 남 형사는 힘없이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람을 기다리다 바람을 맞는 통에 점심을 건너뛴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남들은 자가용에다 젊은 아가씨들을 태우고 젊음을 만끽하고들 있는데, 난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애인도 하나 없이 이게 뭐야?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때때로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곤 했었는데, 오늘따라 자신의 인생이 더 초라하고 더 무상하게 느껴졌다. 경찰에 투신할 때만 하여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유능한 수사관이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없었다. 쓰레기같은 인간들을 잡아 들이는 일이 결코 한심한 짓거리는 아닌데....... 그러나 사회정의를 구현할 만큼 실속이 있는 일도 아니잖은가. 쓰레기같은 못된 인간들은 치우고 또 치워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죽을 고생을 다해 몇 놈 잡아 들이고나면 쓰레기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날뛰고 있는 추세였다. 그리고 그 한계도 모호했다. 어떤 때는 쫓기고 있는 인간보다 쫓고 있는 인간이 더 쓰레기같은 인간일 때도 있었다. 앞으로 더욱 유능한 형사가 되려면 로보트 같은 형사가 되어 청소기계처럼 인간 쓰레기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야 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남 형사는 지금 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전에는 윤옥주처럼 밤업소에 나가는 여자는 쳐자 보지도 않았다. 실제로 싱싱한 몸을 아무런 조건없이 선물로 내놓겠다고 해도 받지 않았던 그였다. 그렇고 그런 곳에 나가는 여자는 아무리 예쁜 여자도 쓰레기같은 인간으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쓰레기같은 인간의 한계가 이미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법의 보호를 철저하게 받고 있는 사회적 명사 가운데도


쓰레기같은 인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밤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들 가운데도 아주 인간적인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 난 그녀를 만나야 해. 그리고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도 그녀와 한 잔 해야겠어. 실속없는 월급쟁이지만, 내게도 두툼한 은행통장이 있어. 몇십만 원 정도는 아낌없이 뿌릴 수 있어. 사랑의 모험을 위해선 그 정도는 아낌없이 뿌릴 수 있는 배짱이 있어야 해. 자신감이 생겼다.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감이 생기고 미소가 떠올랐다. 윤옥주의 맑고 부드러운 눈동자와 잔잔한 미소를 생각하며 힘차게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두고 봐. 나는 꼭 윤옥주처럼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고 말테니까. 정말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았다. 조금 전 류미란에게 '아저씨'란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하여도 늙은 수탉처럼 힘이 빠졌었는데, 윤옥주처럼 젊고 아름답고 늘씬한 아가씨와 사랑할 마음을 굳히자 저절로 힘이 솟아났다. 남 형사는 병원 앞 한식집에서 갈비탕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부스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여러 군데 다이얼을 돌렸으나 김훈의 행방은 알 수가 없었다. 일부러 경찰을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 형사의 육감이 그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 형사는 전화부스에서 빠져 나오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류정현의 아버지 류상규(劉相奎)는 마침 집에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남 형사를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사 나으리를 만난다로 해서 우리 아들이 금방 나을 것도 아닌데, 만나서 뭣 하겠어요. 범인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말이오." "만나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아무래도 이번 사건에는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류 사장님을 꼭 만나뵈야 하겠습니다." "모종의 음모라니, 어떤 음모가 있었단 말이오?" "죄송하지만, 전화로는 말씀드리기 곤란한 내용이기 때문에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좋도록 하시오." "그럼 지금 곧 댁으로 가겠습니다." 겨우 승낙을 얻어낸 남 형사는 택시를 잡아타고 서초 4 동에 있는 백조아파트로 달려갔다. 류상규는 5 동 301 호 아파트에서 파출부의 도움을 받으며 혼자 살고 있었다. 석 달 전까지만 하여도 딸과 함께 살았지만 류미란이 독립하는 통에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우리 정현이 때문에 수고가 많군요." 류상규는 남형사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두 눈에 총기가 감돌고 어깨가 튼튼해 보일 만큼 단단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남 현사는 냉장고에서 노인이 꺼내온 청량음료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아드님이 이제 사람을 알아보고 한두 마디 하실 만큼 회복되셨더군요." "나도 어제 만나 보았어요." "정말 불행 중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직 호흡에 곤란을 느낄 정도니까 안심할 수가 없어요." "평소에도 폐가 좀 나빴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이제 곧 완쾌되시겠지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노인은 아까 전화로 통화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해 주어서 마음이 편했다. "실례지만, 사장님 고향이 어디십니까?" "본적은 경남 하동이지만, 이제 서울 사람 다 됐어요." "서울엔 언제 올라 오셨습니까?" "약 30 년 정도 됐을 겝니다." "그래서 사투리를 거의 쓰시지 않으시는군요." "원래 하동(河東)이란 고장이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어울리는 고장이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편이지요. 그리고 난 어릴 때부터 객지로 돌아다니면서 컸어요." "그래서 표준말을 쓰게 되셨군요. 그럼 혹시 산청에도 가 보신 적이 있으세요?" "산청이라니?" "경남 산청 말입니다." "그쪽도 서부경남에 속하기 때문에 가 보긴 가 보았지요." "그럼 혹시 중산리라는 동네에도 가 보셨습니까?" "중산리라니?" 노인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조금 전 '산청이라니?'하고 되물었을 때에는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 중산리를 모르시는군요." "하동에 있는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노인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중산리를 모르십니까?" "글쎄, 어디서 듣긴 들어본 동네 이름 같은데......." "어디서 들어보신 동네 이름인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글쎄, 잘 모르겠어. 환갑이 지난 늙은이라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어요. 근데 왜 그 동네 이름을 아느냐고 물어보는 거요?"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서 혹시 아시는가 한 번 여쭈어 본 것뿐입니다." "이상한 소문이 떠돌다니?" 노인의 눈빛이 빛났다.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남 형사는 궁금해 하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선거철엔 으레 이상한 소문이 나돌게 돼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상한 소문이 어떤 소문인지 나한테 알려줄 수 없겠어요?" 노인이 노골적으로 궁금증을 나타내었지만, 남 형사는 노련하게 피해 갔다. "아직 근거를 잡지 못한 소문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도 없고 구태여 아실 필요도 없는 소문입니다." "조금 전에 전화로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음모라는 건 또 뭐요?" "사장님이 중산리라는 동네에 대해서 자세히 아신다면 수수께끼를 한 번 풀어 볼려고 했는데, 전혀 모르신다니 수수께끼를 풀 도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 동네에 무슨 수수께끼가 있다 그 말이오?" "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비밀이 있는 것 같아 현재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 수수께끼인가 비밀인가 하는 게 우리 정현이가 당한 교통사고하고 무슨 연관이라도 있단 말이오?" "글쎄요, 현재로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잡히면 수수께끼도 자연히 다 풀릴 것입니다." "그럼 범인이 잡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요?" "네, 있습니다." "그럼 빨리 잡아 줘요." "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드님이 누구한테 무슨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없어요." "아드님이 이혼하려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그럼 사돈댁하고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까?" "합의이혼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쉽게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는 것 같더군요." 노인은 남의 집 이야기를 하듯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김철 후보하고는 아주 가까운 사이 같으신데, 그 댁하고는 언제부터 가깝게 지내시게 되었습니까?" "글쎄, 한 20 년 이상 됐을 거요." "그럼 김인희 여사를 먼저 알게 되셨겠군요." "물론 그렇게 해서 김 후보를 알게 된 셈이지요." "그럼 조민혁 기획실장의 모친 되시는 홍희숙 여사도


아시겠군요?" "김인희 여사하고 가까운 친구라서 자연히 알게 되었어요." "그럼 그 분들의 고향이 경남 산청이라는 것은 모르셨습니까?" "그렇게 듣긴 들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이 나이에 남의 고향까지 외우고 다니겠어요." "하긴 그러시겠군요. 그런데 두 분과는 요즘도 왕래가 있으십니까?" "전화는 가끔 하지만, 만나본 지는 오래 됐어요." "아드님이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에 어떤 사람에게 중산리에 다녀 와야겠다는 말을 했다는데, 혹시 그런 말을 들으신 적이 없습니까?" "난 그런 말 들은 기억이 없어요." "잘 알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범인을 빨리 잡아 줘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 형사는 노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백조아파트를 등졌다. 수확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수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류 노인은 뭔가를 숨기고 있어.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를 속일 순 없어. 그러나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남 형사는 곤충의 촉각처럼 예민한 자신의 육감을 믿는 편이었다. 증거 제일주의를 채택하는 과학수사 시대에 접어 들었다지만, 수수께끼처럼 뒤엉킨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 수사관의 육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그였다. 김인희와 홍희숙의 고향은 중산리다. 그런데 두 사람과 20 여 년 전부터 가깝게 지내온 류상규가 중산리를 모른다는 건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다. 뭔가 숨기고 있는 이유가 미심쩍었다. '중산리'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의도적으로 태연한 표정을 짓던 일도 마음에 걸렸다. 직접 중산리에 다녀 왔지만, 거기선 아무것도 의심쩍은 것이 없었다. 김철, 김훈 형제의 모친인 김인희와 조민혁의 모친인 홍희숙의 고향이 중산리라는 것밖에 알아낸 것이 없었다. 의혹의 먹구름이 일어났다. 중산리와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류정현이 중산리에 다녀 오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류정헌과는 달리 오히려 거의 같은 세대이며 두 여인과 친분이 있는 류상규 노인은 중산리를 모른다고 발뺌하는 이유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중산리를 모른다고 발뺌을 하는데, 아들인 류정현은 왜 중산리를 다녀 오겠다고 했을까? 굉장히 바쁜 선거사무실의 일도 제쳐놓고 선거본부장의 허락도 없이 지리산 밑에 있는 멀고 먼 중산리까지 왜 다녀 오겠다고 했을까? 중산리는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그곳을 다녀 올려면 최소한 이틀은 걸리는


곳이었다. 오늘 밤 윤옥주를 만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혹시 류정현이 무엇 때문에 중산리에 다녀 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는지는 모르니까. 류정현의 입에서 중산리라는 동네 이름이 나온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던 윤옥주의 모습이 남 형사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폭에 숨어 있는 지리산 조민혁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서초 4 동 개나리아파트 3 동 입구에 멎었다 그러나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류미란은 차에서 얼른 내리지 않았다. "차 한 잔 하시고 가세요." "벌써 열시가 넘었어." "차 한 잔 하시는 데 몇 시간 걸려요?" "다음 기회에 마시지." "숙녀의 호의를 그렇게 무시하실 수 있어요?" "미안해. 다음 기회에 선물을 사들고 방문하지." "만약 내일 선거에서 우리가 지면 우리는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그건 왜?" "선거에서 졌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만나겠어요." "최선을 다했으니까,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나는 지금까지 기획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심지어 유언비어에 가까운 근거없는 말도 퍼뜨리고 다녔어요. 웬지 아세요?" "그거야 김철 선배님의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뛴 거 아니겠어." "아니예요." "아니라니?" 조민혁은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류미란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 "왜 대답이 없어?" "여기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 "몇 가지 궁금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궁금한 일이라니?" "남 형사가 나한테 어떤 질문을 던진 줄 아세요?" "잘 몰라. 말해 봐." "민혁 씨가 오빠하고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기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정현이보다 고집이 더 세군 그래."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못 내겠다는 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겠어요." "응, 알았어. 내가 졌어." 조민혁은 자동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시킬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남 형사의 끈질긴 방문으로 그러잖아도 몇 가지 의문이 생겼는데 바로 그 의문점을 류미란이 들먹거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7 층으로 올라갔다. 류미란의 아파트는 깨끗하고 아담했다. 아파트 주인이 미술을 전공하기 때문인지 거실 벽에 서양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두 개의 산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그림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이름뿐인 건달 화가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그림이 아주 좋아 보였다. 류미란이 주방에 들어간 사이 조민혁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산골짜기를 화판에 옮겨 놓은 인상적인 그림 앞에 서 있었다. 푸르름이 진하게 감돌아 흐르는 깊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림에 얼마나 몰입되어 있었을까. 류미란이 다가와 "칵테일 준비됐어요." 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란이를 다시 봐야 겠어. 그림이 아주 좋아." "고마워요, 칭찬해 주셔서.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이 산이 어디 있는 산이지?" "민혁 씨도 가 보신 산일 텐데......." "글쎄, 어디서 본 산인 듯한데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 "중산리에서 본 지리산 골짜기예요." "역시 화가의 눈은 다르군 그래." "민혁 씨는 중산리에 가보지 않았어요?" "가보았지만, 캔버스에 지리산을 옮길 수 없는 사람이잖아." "지리산은 정말 좋은 산이에요." "지리산은 산의 바다이기 때문에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정말 그래요.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산의 바다예요. 그러잖아도 지리산을 더 그리고 싶었는데, 민혁 씨가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셔서 고마워요. 선거가 끝나면 캔버스를 짊어지고 산의 바다를 만나러 가겠어요." "좋은 생각이군 그래." "민혁 씨도 동행해 주시겠어요?" "글쎄, 그건 좀 어렵겠는데.......아무튼 차나 한 잔 주시지 그래." "네, 준비해 놓았어요. 이리로 오세요."


두 사람은 거실 한켠에 마련돼 있는 응접용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빨간 체리를 넣은 칵테일이 두 잔 놓여 있었다. "차가 아닌 것 같은데....... " 제법 큼직한 유리잔에 담긴 노르스름한 액체와 빨간 체리를 보고 조민혁이 의아하게 여겼다. "벌주예요. 숙녀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시지 않고 억지로 올라오신 데 대한 벌을 받으셔야 해요." 류미란은 화사한 꽃처럼 요염하게 웃었다. 매혹적인 그 모습에 조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고 있었다. "이거 마시고 가다가 교통순경한테 걸리면 어떻게 하지?" "미란이가 마시라고 해서 마셨다고 하세요.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말할게." "민혁 씨의 잘래를 우해서 축배를 들어요." "미란의 작품을 위해서......." 두 사람은 마주앉아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칵테일 잔치고는 술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오분의 일도 비우지 못하고 잔을 내려 놓았다. "맛이 없어요?" "아니, 맛있어." "그런데 왜 내려 놓는 거예요?" "양이 너무 많아." "그 정도는 마셔도 괜찮아요." "알았어. 그런데 남 형사가 미란이한테 뭐라고 그랬어?" "느닷없이 중산리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어요." "왜?" "글쎄요, 안다고 하면 귀찮게 할까 봐 모른다고 했어요." "그 양반이 왜 그런 질문을 하고 다닐까?" "그럼 민혁 씨한테도 같은 질문을 했어요?" "응, 그랬어." "그것 참 이상하군요." "이상하다니?" "정현이 오빠 입에서도 중산리라는 말이 몇 번 나왔기 때문이에요." "정현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다치지 전에 그런 말을 했어?" "다치기 전에 중산리라는 말을 했으면 이상할 게 없잖아요." "하긴 그래." 조민혁은 칵테일 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미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중환자실에 누워서 중산리라는 말을 했단 말인가?"


"네, 이따금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더듬거리면서 '중산리의 비밀'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더듬거리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다른 사람에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한테는 그런 이상한 말을 했어요." "분명히 중산리의 비밀이라고 했어?" "네." "헛소리가 아니었어?" "네, 헛소리는 아니었어요. 날 알아보고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오빠의 진지한 눈빛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어요." "정현이가 날 알아보면서도 나한테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나한테는 했어요." "음, 그래." 조민혁은 다시 한 번 유리잔의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그만큼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갈증을 느꼈다. "민혁 씨는 그 말의 뜻을 알고 계세요?" "그 말의 뜻이라니?" "중산리의 비밀 말예요." "글쎄, 난 처음 듣는 말이야. 중산리라는 동네는 알지만, 중산리의 비밀은 뭔지 몰라." "그런데 민혁 씨도 모르는 중산리의 비밀을 우리 오빠가 왜 들먹거리는지 모르겠어요." "글쎄 말이야. 아무튼 정현이가 빨리 회복하도록 노력해야겠어." "하긴 그래요. 오빠가 정상을 되찾으면 그 말의 뜻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빨리 중환자실 신세부터 면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호흡장애까지 생기는지 모르겠어." "그게 모두 내출혈 때문인가 봐요." "그래서 뇌수술이 무섭다고 하는군 그래." "네, 그런데......." 류미란은 말끝을 흐르고 유리잔의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심기가 불편한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봐." "그런데 훈이 오빠는 왜 남 형사를 피해 다니는 거예요?" 류미란은 김훈을 '훈이 오빠'라고 불렀다. 전에는 조민혁에게도 '민혁 오빠'라는 호칭을 썼는데, 지금은 미란이 두 사람을 부르는 게 달라져 있었다. "......." 조민혁은 대답대신 유리잔의 칵테일을 입 안에 쏟아 넣었다. "그 이유가 뭐예요?" 류미란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정말 모르세요?" "응, 정말 몰라." "남 형사한테 무슨 말을 듣지도 못했어요?" "들었어." "오빠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훈이 오빠의 알리바이가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았다면서요?" "남 형사한테 그런 말을 듣긴 들었어." "그리고 김인희 여사께서 작은 아들의 알리바이를 조작하려고 하셨다면서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 "민혁 씨는 여전히 훈이 오빠 편이시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민혁 씨가 미란이 편이 아니라 훈이 오빠 편이시라 그 말이에요." "내 편, 네 편이 어디 있어. 난 그렇게 옹졸하게 살고 싶지 않아." "왜 없어요. 민혁 씨의 말과 행동이 훈이 오빠 편이시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데....... 하지만 오늘 밤 미란이는 민혁 씨를 미란이 편으로 만들어 놓고 말겠어요." 미란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고 매혹적인 미소가 흘러 나왔다. 조금 전에 보였던 진지하고 차가운 그녀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 이젠 돌아가야겠어." 조민혁이 소파에서 일어서자 류미란도 덩달아 일어섰다. "돌아가지 마세요. 생각보다 많이 치하신 것 같아요." "그래도 돌아가야 해." 정말 생각보다 취기가 훨씬 많이 감도는 듯했다. 아무리 큼직한 잔에 마셨다 해도 칵테일 한 잔에 취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얼굴이 너무 붉어요." "어머니가 기다리시기 때문에 안 돼. 들어가야 해." "그럼 택시를 불러 드릴게요." "염려하지 마. 사고는 내지 않을 테니까." "누군 사고를 내고 싶어서 내겠어요. 혹시 사고를 내면 미란이 책임이기 때문에 안 돼요." 류미란이 앞을 가로막았다. 간격이 불과 오륙십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불룩한 앞가슴이 민혁의 몸에 금방 닿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기다리신다니까." "어머님한테는 전화를 드리세요. 약주 한 잔 하셨다고 하면 어머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안 돼. 큰일날 소리 하지 마." "칵테일을 세게 타지도 않았는데 왜 그럴까?" 류미란이 능청을 떨었다. 칵테일을 강하게 만든데다 흥분제까지 첨가시켜 놓고도 모른 척했다. "어머, 비틀거리시기까지 하시네." 어느새 류미란은 두 팔을 뻗어 민혁의 허리를 감싸다시피하여 소파에 다시 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민혁의 품에 살짝 안기며 요염한 미소를 뿌렸다. "숙녀를 취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미, 미란이도 취했어?" 조민혁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도 두 다리 사이의 남성이 강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네, 칵테일이 너무 강했나 봐요." "날 취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강하게 만들었지?" "아마 그랬나 봐요. 오늘 밤 민혁 씨를 붙잡아 두려고 말예요." "깍쟁이 같으니라구!" "하지만 미란인 깍쟁이가 아니예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걸 아끼지 않는 여자예요. 아꼈다 무엇에 쓰겠어요?" "하긴 그래." "민혁 씨도 날 좋아하시죠?" "응, 조금." "깍쟁이!" "그림이 많이 좋아졌어!" "저 그림 민혁 씨한테 드릴까요?" "정말 주겠어?" "네, 미란이하고 함께 드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란은 조민혁의 넓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었다. 다음 순간, 뜨거운 포옹과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감칠맛이 감도는 달콤한 키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게 기묘한 남녀관계인 듯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았다. 민혁은 미란의 미니스커트 밑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한 꽃무늬 팬티부터 제일 먼저 벗겼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 사이 깊숙한 골짜기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촛농처럼 끈적끈적한 애액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가슴으로 묻어 왔다. 미란은 민혁의 손가락이 자신의 수려한 골짜기 깊숙한 곳에 피어 있는 분홍빛 꽃술을 나비처럼 애무할 수 있도록 다리를 약간 벌려준 채 한 손을 뻗어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바지 속으로 쳐들어가 꿈틀거리는 그의 그것을 손바닥으로 꼬옥 감싸 쥐었다. 민혁의 성난 그것은 살아서 파닥거리는 싱싱한 생선처럼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사로잡은 그 싱싱한 생선을 그녀는 통째로 회쳐 먹고 싶은 짜릿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민혁은 서둘렀다. 거실에서 그냥 시도하려 했다. 그만큼 그는 흥분해 있었다. 미란의 꽃팬티가 거실 양탄자 바닥에 떨어진 이상 얼마든지 그녀의 깊숙한 골짜기로 쳐들어 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란은 달랐다. 그녀는 결코 서둘지 않았다. 서둘면 서둘수록 재미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잠깐만요!" 미란은 약간 벌리고 있던 두 다리를 오무리며 사내의 손을 미니스커트 밖으로 끌어 내었다. "왜 그래, 갑자기?" 민혁이 멋쩍은 듯 정색을 하며 물었다. 오늘 밤은 평소의 미란이답지 않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조금 전에 그림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죠?" "응, 그래. 정말 좋아졌어." "갑자기 그 말의 뜻이 궁금해졌어요. 그 말이 무슨 뜻이죠?" "무슨 뜻이라니?" "그럼 아무런 뜻도 없이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에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느낀 대로 말했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란의 그림이 전보다 눈에 선하게 들어올 만큼 좋아졌거든." "그림이 좋아졌다는 그 말이 내 그림이 섹시해졌다는 말처럼 들리는 걸 어떡하죠?" "미란인 확실히 타고난 예술가야. 실은 그림이 아주 대담해졌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알고 있었으니 천재라고 할 수밖에....... 아무튼 그림이 대답해진 것은 나쁜 현상이 아니야." "조금 전에 본 그 그림, 무엇을 보고 그린 그림인 줄 아세요?"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신비스런 대나무 숲 같던데, 아닌가?" "맞았어요, 중산리의 대나무 숲이에요. 하지만 단순한 대나무 숲이 아니에요. 비극이 서려 있는 대나무 숲이에요. 흡사 매혹적인 여자의 깊은 골자기를 감싸고 있는 검은 숲처럼 작은 바람에도 소리 내어 흐느끼는 그런 대나무 숲 말이에요." "그거 정말 매혹적인 숲이군 그래. 근데 왜 하필이면 중산리의 대나무 숲일까. 다른 고장의 대나무 숲도 많은데 말이야." "글쎄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천왕봉 아랫마을 중산리의 대나무 숲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 올해도 벌써 세 번이나 중산리에 다녀 왔어요." "그럼 경남 산청까지 세 번이나 내려갔다 왔어?" "네." "정말 열정이 대단하군 그래. 류미란은 역시 타고난 예술가야." "처음에 내려갈 때는 좋은 소재를 얻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전혀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지?" "중산리의 비밀을 캔버스에 담고 싶어졌어요." "그럼 그 비밀을 알게 되었단 말인가?" "1950 년대, 6.25 동란 전후 중산리에는 대나무 숲이 지금보다 더 무성했대요." "음, 그래." 민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그 당시 중산리 대나무 숲속에선 젊은 여자들이 많이 당했대요. 그래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중산리의 대나무 숲은 흐느껴 운다는 거예요." "많이 당하다니? 왜 많이 당했는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젊은 여자들이 당하는 데 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요. 구태여 이유를 밝히자면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당했었던 거죠. 빨치산에게도 당하고 국방군들에게도 당하고, 마구 짓밟혔던 거죠." "그때는 전시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 "반드시 전쟁 때문이라고 할 순 없어요. 남자들은 밥은 굶어도 그것만은 굶지 않으려고 안달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오호라, 숙녀가 못 하는 소리가 없군 그래."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요." "그럼 미란이는 오빠가 궁금해 하는 중산리의 비밀에 많이 접근했군 그래." "글쎄요, 많이 접근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알게 됐다고 할 수 있겠죠. 우익과 좌익, 사랑과 증오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들 하니까요." "그건 또 무슨 이야기지?" "6.25 당시 중산리 부근에 살았던 사람들 얘기이기도 하고 김인희 여사와 우리 아빠의 얘기이기도 해요." "그럼 6.25 때 류 사장님과 김 여사님이 같은 마을에 사셨어?"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아빠는 중산리 사람이 아니예요. 그리고 김 여사님도 다른 곳에서 살았어요. 하지만 제 추리로는 두 사람이 중산리에서 만났던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두 분이 어떤 인연으로 만났을까?" "글쎄요." "아버님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 "언젠가 한 번 물어 봤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미란이는 그런 추리를 하게 되었어?" "오래 전부터 아빠는 김 여사님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세상에 그런 여자는 찾아보기조차 어렵다고 하시면서 말예요." "그게 정말이야?" "네. 정말이에요. 몇 년 전엔 청혼까지 했어요." "그런데 왜 결혼하시지 않았어?" "김 여사님 쪽에서 거절하셨어요."


"두 분 모두 홀몸이신데 왜 거절하셨을까?"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럼 그 일 때문에 두 분이 중산리에서 만났다고 단정할 순 없잖아." "물론 단정할 순 없어요. 하지만 추리는 할 수 있어요." "추리한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까?" "아니예요. 추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어떻게?" 민혁이 재촉했다. 마른 입술에다 혓바닥으로 침을 축이면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 오빠는 6.25 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중산리의 비밀 운운했어요." "6.25 동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반드시 6.25 를 아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중산리는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산골 마을이에요. 지금은 물론 지리산 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여러 자기 편의시설이 생겨서 제법 큰 마을이 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조용한 작은 마을이었어요. 그런 평화스런 작은 마을에 무슨 비밀이 있겠어요. 만약 비밀이 있다면 그 마을 사람들은 다 아는 비밀일 거예요.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라는 것까지 다 아는 마을인데, 마을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비밀이 어떻게 존재하겠어요. 안 그래요, 민혁 씨?" "그건 그래." "그런데 오빠는 중산리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어요. 분명히 누구에게 들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원인 제공자가 누구겠어요?" "그럼 바로 그 원인 제공자가 류상규 사장님이시란 말인가?" "오빠에게 그런 말을 전해 줄 만한 사람은 우리 아빠뿐일 거예요." "글쎄, 난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확실한 중거도 없는 말 몇 마디에 신경과민이 돼선 안 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난 중산리에 내려가서 여러 노인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결론은 6.25 때는 노인들도 모르는 고통스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미란이는 추리작가 버금가는 추리력까지 겸비했군 그래." "사람 놀리지 마세요. 난 그렇게 머리가 좋은 여자가 아니예요. 하지만 중산리의 고통과 지리산의 몸부림을 캔버스에 꼭 담겠어요." "미란이는 그 작업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미안해요, 연앨 하다가 괜히 엉뚱한 이야길 꺼내서." "아니,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아." 두 사람은 말없이 옷을 벗었다.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약속이나 한듯이 금방 알몸이 되었다.


매혹적인 몸매였다. 그녀의 깊은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신비스런 검은 숲은 중산리의 대나무 숲처럼 무성했다. 미란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풍만한 가슴이 크게 물결쳤다. 탄력이 넘치는 고혹적인 유방이었다. 설익은 버찌처럼 불그스럼한 작은 유두가 따먹고 싶을 만큼 탐스러웠다. 민혁은 싱싱한 여자의 유방에 매달렸다. 버찌철머 탐스러운 유두를 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돌기는 버찌 못지않게 새콤한 맛이 있었다. 미란은 어린아기처럼 젖을 빠는 민혁을 침대 위로 자연스럽게 끌어 들였다. 민혁의 알몸은 탄력이 넘치는 근육질이었다. 공부벌레로 소문난 명문대학 출신답지 않게 단단한 근육질이어서 담금질할 때마다 그녀를 흡족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만은 달랐다. 그녀의 깊은 골짜기에서 봇물이 터지기도 전에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성감이 급상승하던 여느때와는 전혀 달랐다. "제가 몸을 씻어 드릴까요?" 미란이 알몸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물었다. 그녀는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혁을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거기서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혁은 한 번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피로에 젖은 눈으로 그녀의 알몸을 훑고 나서 미소를 띠었다. "미안해, 난 돌아가야 해.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약속했었는데, 너무 늦었어." "누구하고 약속하셨어요?" "어머니하고 했어."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시면 안 되겠어요?" 미란이 아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안 돼. 돌아가야 해." "열두 시가 다 됐어요." "그래도 들어가야 돼." "운전하고 가실 수 있겠어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어머니한테 내일 아침에 들어 가겠다고 전화하면 안 될까요?" "안 돼." 민혁은 침대에서 내려와 벗어 던졌던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혹시 기분이 나빠서 돌아 가시려는 거 아니세요?" 미란이 대형 타월로 앞가슴을 가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안해, 어머니하고 약속은 지켜야 해." "효자시군요." "나 하나를 키우시기 위해 청춘을 다 바치신 분이니까." "그럼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어요?" "내일 아침 사무실에서."


민혁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옷을 입기에 바빴다. "그렇게 사무적으로 만나는 것 말구요." "글쎄." "결혼해 달라고 조르진 않을 테니까 부담은 갖지 마세요." 민혁은 대답대신 미소를 띠면서 웃옷을 집어 들었다. "언제 다시 뵐 수 있겠어요?" "내일 모레 아니면, 그 다음 날이 좋겠어." "여유가 있어서 좋군요." "내가 먼저 전화할게." "제가 먼저 전화하면 안 되나요?" "그래도 괜찮아." "고마워요." "안녕." 민혁은 앞가슴을 타월로 가리고 앉아 있는 미란의 볼에 뽀뽀를 하고 돌아섰다. 마음은 그녀의 알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내일을 위해서 그녀의 아파트를 등져야 했다. 류미란의 개나리아파트에서 조민혁이 사는 서초 3 동 청산아파트까지는 자가용으로 10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홍희숙(洪熙淑) 여사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평상복 차림인 것이 밤 늦도록 아들을 기다린 게 분명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제 들어 가셔서 주무세요. 전 샤워 좀 하고 자겠어요." "샤워하고 나와." "너무 늦었어요. 들어가 주무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샤워나 빨리 해." 저기압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흐트러진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홍 여사의 싸늘한 눈빛과 냉랭한 말투가 저기압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민혁은 샤워를 마친 후 어머니 방으로 건너갔다. 홍 여사는 그때까지 잠자리를 깔지 않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편히 앉아." 홍 여사는 무릎을 끓고 앉은 아들에게 한 마디 던지고 돋보기를 벗었다. 나이가 이미 오십이 넘었으나 얼굴 윤곽만은 갸름하고 뚜렷한 것이 젊었을 때는 미인 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일이 좀 생겨서 늦었습니다." "일이라니? 선거사무실 일 말인가?" "네." "아까 전화했더니 아홉 시 좀 지나서 퇴근했다고 하던데?" "네, 그 후 밖에서 사람 좀 만나느라고 늦었습니다." "물론 사내 대장부가 밖에서 친구를 만나서 한 잔 하고 늦게 귀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좀 일찍 들어오라고


그랬잖아." "죄송합니다, 어머니." "혹시 남 형산가 하는 그 양반 때문에 늦은 건 아니겠지?" "네." "그럼 누구 때문에 늦었어?" "친구들 좀 만나느라고 늦었습니다." "김 여사 댁에서도 전화가 두 번이나 왔어. 열한 시 전으로 들어오면 연락해 달라고 말이야."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선거인데, 도대체 어떤 친구들하고 어울렸길래 밤 열두 시 땡 치니까 들어와." "......." 민혁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류미란의 아파트에 들렀다 오느라고 늦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혁이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어?" "......." "늙었지만, 나한테도 아직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어." "......." 생전 거짓말을 해보지 못한 어머니 앞이라 적당히 둘러댈 친구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혁이가 착한 사람인 줄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 어떤 여자를 만나고 오느라고 이렇게 늦었어?" "......." "내가 알면 안 되는 여잔가?" "......." "혁이가 사귀는 여자가 누군지 이 에미는 알 필요도 없고 알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 그거지?" "아, 아닙니다. 어머니." "그럼 뭐야? 분명히 해. 난 못난 에미지만 널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어. 김 여사댁 아드님들 못지않게 가르치려고 피눈물을 흘렸어." "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민혁은 당황했다. 일이 이렇게 묘하게 꼬여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보통 어머니들하고는 달라. 김 여사도 마찬가지지만, 난 내 아들에게 내 희망을 걸고 살아왔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날 속여!" "소, 속이는 게 아닙니다."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일 거야. 혁이 너한테 해당하는 일이라면 말이야." "......." "이 에미는 그렇게 옹졸한 여자가 아니야. 사내대장부가


여자를 만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오입도 할 수 있지. 그 정도는 이해하는 여자란 말이야." "......." "얼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를 반석같이 믿고 있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밤 혁이가 만난 여자가 어떤 여자야? 호스티스 아니면 바람난 여대생이었어?" "호, 호스티스였습니다." "그럼 방배동에 갔었어?" "네." "누구하고 갔었어?" "혼자 갔어요." "그런 곳엘 혼자 갔어?" "선거란 게 너무 더럽고 작위적이어서 환멸을 느꼈어요." "환멸을 느끼다니?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심약해서야 되겠어?" "소위 기획실장이란 감투를 쓰고 있는 제가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홍보실장에게 넘겨주고 홍보실장은 사람을 동원해서 그걸 퍼뜨렸어요. 그게 선거전이에요. 중상모략을 교묘하게 하는 쪽이 승리한다는 풍토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홍보실장이라니? 정현이 여동생 미란이 말인가?" "네." "그 앤 질이 좋지 않은 여자라고 하던데......." "괜히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이에요. 미란인 그림을 아주 잘 그려요." "예술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렇지만, 화가들은 특히 더 개방적이라 조심해야 해." "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선거가 끝나면 미란이 같은 여자는 만나지 말어," "네." "김 여사가 혁이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규수 하나를 점찍어 놓았나 봐." "어떤 규수인데요?" 민혁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5 공화국 시절에 장관을 지내신 분의 딸인데, 인물도 좋고 성품도 좋은 규수래." "그렇게 좋은 규수가 나한테 시집 오겠어요?" "혁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일등 신랑감이지." "그건 너무 과대평가예요, 어머니." "아무튼 지금도 정계에선 막강한 막후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의 딸인데, 정치 지망생들이 탐을 낼 정도로 괜찮은 규수래." '어머니, 전 정치 지망생이 아니예요.'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민혁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우리 나라처럼 작은 나라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큰소리치며 살아가게 돼 있어. 그리고 나라를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일도 정치가들의 손에 달려 있어" "......." "내 말이 틀렸어?"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그리고 앞으로 꼭 정계에 진출하지 않더라도 그런 가문의 사위가 되면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처신을 잘해야 해. 괜히 말괄량이 같은 애들하고 어울렸다가는 혼삿길이 막히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건 그렇고, 남 형사가 왜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그 양반이 어머니까지 괴롭히고 다려요?" "나를 직접 괴롭히는 건 아니지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만은 사실이야.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 양반이 뭐라고 했어요?" "혁이가 주장하는 알리바이를 나 외에 또 누가 입증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고, 훈이가 주장하는 알리바이는 조작된 알리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거야. 그게 사실이야?" "글쎄요, 훈이의 알리바이에 대해선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심지어 내 자가용 범퍼까지 조사해 보고 갔어." "아무리 형사지만, 좀 심하군요." "남 형사의 말로는 훈이가 피해 다닌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네, 만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지 모르지만, 남 형사를 만나려 하지 않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공연히 의심받으려고 피해 다녀?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래. 훈이가 왜 그러지?" "글쎄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 형사 같은 사람한테 책잡히지 않으려면 혁이 너도 조심해야 해." "그런 사람한테 약점 잡힐 일은 하지 않아요." "암, 그래야지. 그런데 정현이는 좀 어때? 많이 회복되었다면서?" "네, 이제 사람도 알아보고 가족들한테는 한두 마디씩 말도 하나 봐요." "그것 참 잘 됐군 그래. 그럼 이제 중환자실 신세는 면했겠네?" "당분간은 중한자실에 더 있어야 하나 봐요." "그 정도면 산소호홉기도 떼었을 텐데, 왜 중환자실에 있어야 하지?"


"이따금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는가 봐요. 그래서 아직 산소호흡기를 떼진 않았어요." "그건 또 왜 그래?" "뇌를 다친 사람에게는 그런 특수한 증세가 나타나는가 봐요. 아주 드물긴 하지만 말예요." "젊은 사람이 빨리 회복해서 퇴원해야 할 텐데......." "글쎄 말입니다." "혁이도 정현이를 만나봤어?" "네." "혁이 널 알아봐?" "네, 하지만 나한테는 별다른 말을 안 했어요." "그럼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른 말을 했어?" "네, 미란이한테는 이상한 말을 했나 봐요." "이상한 말이라니?" "그러잖아도 어머니한테 한번 물어 볼 생각이었어요." "나한테?" "네, 어머니는 중산리 출신이시잖아요?" "그래." "중산리의 비밀이 뭔지 아세요?" "중산리의 비밀?" 홍희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혁의 눈빛를 살폈다.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어머니도 모르세요?" "글쎄 말이다. 근데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왔어?" "정현이가 여동생한테 그런 이상한 말을 했대요. 더듬거리면서 '주, 중산리의 비밀'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대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단지 그 말만 했대?" "네,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그저 중산리의 비밀이란 밑도 끝도없는 말을 서너 차례 했나봐요." "정현이는 중산리 사람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글쎄 말입니다. 그리고 남 형사 입에서도 중산리를 아느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음, 그래." "나한테만 그런 질문을 한 게 아니라 미란이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하더래요." "그래서 뭐라고 말했대?" "무조건 모른다고 했대요. 정현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미주알고주알 물었지만, 귀찮아서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했대요." "꼭 그렇게 숨길 필요도 없을 텐데 왜 그랬을까?" "글쎄 말입니다." "아무튼 혁이 너무 밤 늦게 다니지 말고 몸조심해야 돼." "네." "혁이 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해."


"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기회를 봐서 조금 전에 말했던 그 규수와 맞선을 봐야 하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다음 주 정도 선을 보도록 만들어 볼 테니까. 알았지?" "네." 민혁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공손히 대답했다. 20 대 초반에 홀몸이 되어 오직 아들 하나를 위하여 청춘을 다 바친 어머니였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당선 축하 살인 투표율은 저조했다. 30 여 년 만에 부활한 광역의회의원 선거라고 시민들의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정작 6 월 20 일 선거 당일 선거에 참여한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농어촌 지역보다 대도시일수록 투표율은 저조했고 대도시 가운데서도 중상류층이 많이 모여 사는, 소위 수준 있는 지역의 투표율이 더 저조했다. 오랫동안 쌓여온 정치에 대한 불신이 냉소주의 집단을 만들었고 무관심주의 시민을 양산해 낸 것 같았다. '정치하는 네놈들이 언제 우리 국민들 생각을 해 주었느냐? 네놈들끼리 치고 박고 싸워서 이기는 놈은 감투쓰고 잘 먹고 잘 살아라.' 라는 식의 냉소주의자들이 문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대도시 지역에 제일 많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컬 했다. 김철 후보 팀의 선거전략이 먹혀 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6 월 21 일 새벽 2 시경부터였다. 조직력이나 자금력에 있어서 상대하기 벅찼던 강경호 후보의 뒤를 간신히 뒤쫓아 2 위를 달리던 김철 후보의 득표수가 몇 표 앞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경호 후보를 앞지르는 그 순간 김철 후보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김훈 본부장을 비롯하여 선거요원들을 모두 개표장에 보내고 혼자 텔레비전 앞에 앉아 개표 상황을 지켜보던 김철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끓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소원을 허락해 주실 줄 믿고 감사드립니다. 김철은 속으로 거의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는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1 년 전부터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으나 신앙심은 거의 없었다.


김인희 여사도 신앙심이 없기로는 거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신앙심이 있다면 범신론적인 신앙심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김 여사는 자신이 먼저 교회에 출석하고 큰 아들을 인도했다. 그것은 아들을 정계에 진출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서울에는 교회가 많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서울 시민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란 소문이 떠돌 정도이다. 구미가 당기는 정보였다. 두 아들을 정계에 진출시키겠다는 야망에 불타 있는 김인희로서는 놓칠 수 없는 정보였다. 서울에서도 강남에는 큰 교회가 더 많고 기독교인이 굉장히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인희는 기독교인들의 표를 모으기 위해서 자신이 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참 두 눈을 감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다른 지방 득표상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은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철은 눈을 뜨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김 후보님, 접니다. 조 실장입니다." "응, 그래 수고가 많지." "희망이 보입니다, 김 후보님. 삼백 표 정도 리드하기 시작했습니다." "삼백 표나 앞서기 시작했다고?" "네, 하지만 삼백 표 정도 리드한 것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에는 겨우 다섯 표 앞선 것밖에 나오지 않았어." "한 시간 후에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응, 그래. 계속 수고 좀 해 주게." 김철은 송수화기를 내려 놓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단속부터 하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느님이 너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모양이구나. 하지만 아직은 너무 기뻐하지 말어." "네, 어머니. 집사람도 없는데, 문단속 잘 하시고 텔레비전을 보세요. 좋은 소식이 있으면 다시 전화 올리겠습니다." "철이 너도 사무실을 잘 지켜야 하겠다. 그럼 전화 끊겠다." "네, 어머니." 그 순간에도 김철은 앞서 나가고 있었다. 순간순간 강경호 후보측의 참관인들의 촉각을 곤두서게 해가며 앞질러 나아가고 있었다. 개표 전에는 여당 후보 1 위, 야당 후보 2 위, 그밖에 3 명의 무소속 후보가 표를 나누어 먹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유권자들의 예상은 무너지고 있었다.


김철 후보가 선두주자가 된 것은 여당을 싫어하고 야당을 믿지 못하는 풍토를 교묘하게 요리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라고 낙관하던 기호 1 번 강경호 후보를 뭍밑 작전으로 집중 공략한 게 주효했다고 할 수 있었다. 조직력과 자금력이 월등한데다 여당의 공천까지 받은 강경호 후보를 표면에서 공략하는 것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야당 후보는 어리석고도 무모한 짓을 일삼았지만, 김철은 표면에 나서서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사력을 다해 물밑 작전으로 밀어 부쳤다. 여러 종류의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친일파의 후예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한 악덕 기업주요, 관권을 동원하여 다른 후보자들의 선거운동을 암암리에 방해하는 자요, 사생활이 부도덕한 자요, 물량공세로 유권자들의 신성한 한 표를 매수하려 하는 자라는 점을 교묘한 수법으로 유권자들에게 전달했다. 전혀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여당 후보자를 바퀴벌레처럼 싫어하는 운동권 대학생 여러 명을 고용하여 유인물까지 만들어서 배포했는데, 그게 주효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류미란이 조민혁과 한 조가 되어 바람처럼 서초 4 동 일대를 누비면서 '우리 오빠는 선거운동을 하다가 누구에겐가 습격을 받아 식물인간이 되어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요.'라고 호소한 것이 동정표를 모으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새벽 4 시가 지나면서 김철 후보의 당선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서초 4 동의 투표함을 개표한 결과 김철은 2 위인 강경호 후보보다 무려 1 천 표 가량 앞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철 후보가 당선이 된다면 그의 승리는 조직력이나 자금의 승리가 아니라 선거전략의 승리요, 철저한 팀워크의 승리라 할수 있었다. 벽시계가 5 시를 알렸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철은 팔을 뻗어 얼른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매시간마다 텔레비전보다 앞서가는 개표현장의 득표수를 알려온 조민혁의 전화인 줄 알았으나 그의 전화가 아니라 동생 김훈의 전화였다. "형님, 아니 김 의원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말 고맙다! 정말 수고했어!" "약 한 시간 후면 당선이 확정될 겁니다. 압승입니다." "나보다 어머니가 더 기뻐하실 거야. 오늘 저녁엔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한 잔 하자꾸나!" "네, 형님. 그런데 저는 일단 남 형사를 만나 본 후에야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친구를 꼭 오늘 만나야 해?" "네, 그 양반이 지금 내 뒤를 미행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정말 끈질긴 친구로군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 연락이라도 해."


"네,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곧 돌아 가겠습니다." 김훈이 공중전화 부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을 때, 희미한 여명 속에서 불쑥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남현우 형사였다. 김훈은 아까부터 남 형사가 미행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명 속에서 불쑥 다가선 남 형사가 김훈의 앞을 가로막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김훈 씨, 미안하지만 나하고 서에까지 함께 갑시다." "6 월 8 일 토요일 밤 내 알리바이 때문입니까?" 김훈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놀라기는커녕 자신만만 하게 물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한 번만 더 도망치면 전국에다 수배할 테니까 알아서 해요." "이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 형사님도 보셨겠죠? 선거가 우리의 승리로 끝난 것 말입니다." "선거하고 뺑소니 교통사고하고는 별개의 일입니다. 자아, 함께 가시지요." 남 형사가 다가와 김훈의 왼쪽 팔을 끌어 당기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남 형사님도 인색한 사람이군요. 우리가 강적을 물리치고 선거에 승리한 걸 축하라도 해주면 무슨 탈이라도 생깁니까?" 김훈은 남 형사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보였다. "아직 개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축하를 드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사실상의 당선 아닙니까?" "그 점엔 나도 동감입니다." "그래도 축하의 말 한마디 못 해 주시겠어요?" "실은 나도 놀랬습니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형님대신 당선주 한 잔 낼 테니까 가까운 해장국집에라도 들어 갑시다."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다는 김훈 씨 명예를 걸고 할 수 있습니까?" "네." "그럼 그날 밤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어디 있었습니까?" "신사동에 있는 신사호텔 507 호실에서 잤습니다." "그런데 왜 장미아파트에서 주무셨다고 했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어머니한테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만한 이유라뇨?" "내 약혼녀가 알면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밝아오는 거리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김훈 씨의 알리바이를 입중할 만한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네, 신사호텔 숙박계를 조사해 보시고 프런트맨에게 물어 보세요. 그럼 내가 어떤 여자하고 투숙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남 형사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김훈의 옆얼굴을 살펴보며 물었다. "네." "선거사무실 본부장께서 그 바쁜 시기에 바람을 피우시다니, 얼른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남 형도 아직 미혼이라고 하셨죠?" "네." 두 사람은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남 형은 생전 바람을 안 피우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젊은 남자치고 여자 싫어하는 사람 봤습니까?" 김훈은 인간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형>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남 형사는 그의 말을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시느라고 그날 밤 집에서 주무시지 않았다 그 말입니까?" "네." "그날 밤 김 형을 포로로 만든 여자가 누구였습니까?" 남 형사도 뒤질세라 <형>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 형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군요." "때가 때였던 만큼 보통 여자에게 홀려서 외박까지 한 건 아니시겠죠? 어떤 여자였습니까?" "알리바이만 확인해 보면 될 텐데, 그런 건 왜 묻습니까?" "그 동안 김 형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느라고 고생한 게 억울해서도 그날 밤 김 형과 함께 있었던 여자가 누구인지 밝혀야겠습니다." "만약 안 밝히겠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고생한 만큼 김 형을 괴롭힐 겁니다." "과연 소문대로 끈질긴 형사 나으리시로군요." "어떤 여자였습니까?" "약혼녀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될 여잡니다. 비밀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 정도 매너는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남 형의 인간성을 믿고 그 여자의 정체를 밝히겠습니다. 그 여자는 강유미(康釉美)였습니다." "강유미라니요? 강경호 후보님의 따님 말입니까?" "남 형도 그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군요.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 여자를 만나 확인해 보세요."


"믿을 수가 없군요." "전화 한 통화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소문을 내면 곤란합니다." "......." 남 형사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김훈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 대결하게 된 후보의 딸과 다른 후보의 남동생이 호텔에서 한 방을 쓸 수 있는지 남 형사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해 보세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 동안은 왜 집에서 주무셨다고 우겼습니까?"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봐서 슬쩍 둘러댄 것뿐입니다. 만약 선거도 치르기 전에 약혼녀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가면 골치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한테 실망을 안겨 드리기 싫어서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직 이른 시간이라 행인이 거의 없는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이 그렇게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사이였습니까?" "아마 그날 밤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분위기 때문이라니요?" "그날 밤 비가 많이 쏟아졌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집에 들어가기 어려웠습니다. 술에 취했는데다 택시를 잡을 수 없어 호텔에 투숙했던 겁니다." "핑계가 좋군요." "처음엔 객실을 두 개 잡으려 했지만 객실이 한 개밖에 없어 함께 투숙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였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일 때문에 남 형한테 쫓기는 신세만 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럼 강유미 씨하고는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 조금 아는 사이였습니다." "조금 아는 사이인데,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짓궂은 질문은 그만하시고, 이제 날 해방시켜 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대신 다음 기회에 코가 비뚤어지도록 한 잔 사겠습니다." "그럼 그날 밤 누구하고 술을 마시다가 강유미 씨를 만났습니까?" "처음부터 유미하고 술을 마셨어요." "단둘이서 말입니까?" "네, 신사호텔 옆에 있는 '이슬'이란 카페에서 아홉 시경부터 마신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의심스러우면 카페에 가서도 확인해


보세요." "좋습니다. 만약 오늘 나한테 한 말이 사실이라면 김 형의 알리바이는 성립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꾸며낸 말이라면 각오하셔야 합니다." "남 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군요." "사람 웃기지 말아요."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입니까?" "우리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해줘야 겠습니다." "강유미 씨하고의 관계 말입니까?" "네, 만약 우리 어머니가 그런 사실을 알면 실망한 나머지 병이 생길는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대신 나도 궁금한 점을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아직도 궁금한 점이 있습니까?" "네, 그날 밤 강력한 라이벌의 딸인 강유미 씨를 만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무슨 좋은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만났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많이 했지만 좋은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역시 그랬었군요. 잘 알겠습니다." 남 형사는 좀더 캐묻고 싶은 질문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뺑소니 교통사고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질문이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초동 사거리에서 다정한 친구처럼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김훈이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남 형사는 골목길로 접어 들었다. 남 형사는 이따금 들리는 해장국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해장국집 앞에는 빈 택시들이 모여 있었다. 심야영업을 하고 돌아가는 운전기사들이 들렀거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새벽에 나온 운전기사들이 들른 것 같았다. 해장국집으로 막 들어서려 할 때였다.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무선 전화벨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담배갑만한 전화를 꺼내어 버튼을 올리고 귀에 갖다댔다. "서초동 부엉이." 남 형사가 암호명을 대자마자 박성길 경감의 굵은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남 형사, 병원으로 달려가 봐. 류정현 씨가 오늘 새벽에 사망했어." "왜요?" "잘 모르겠어. 질식사인 것 같애." "네, 알겠습니다." 남 형사는 소형 무선 전화기를 도로 허리춤에 차고는 해장국


집 안을 기웃거렸다.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운전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택시는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강남병원 912 호실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담당의사와 하얀 캡의 간호사 두 명과 류상규와 류미란과 조민혁이 중환자실을 거의 메우고 있었다. "당직 근무를 어떻게 섰길래 이런 엄청난 일이 생겼느냐 말예요." 류미란은 남 형사가 들어온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대머리인 담당의사에게 항의하다시피 따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볼 때 고의성은 전혀 없는 사고인 것 같습니다." "고의성이 전혀 없는 사고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민혁이 류미란을 대신하여 대머리 의사에게 따지고 들었다. "이를테면 환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산소호흡기를 벗겨 버린 사고일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류미란이 대머리 의사를 향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대머리 의사나 간호사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유가족들이 원하신다면 부검을 해서라도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두 손을 묶어 놓았는데, 어떻게 오빠가 산소호흡기를 뽑는단 말예요. 어젯밤 당직 의사하고 당직 간호사를 불러 줘요." "회복기의 환자이기 때문에 두 손을 느슨하게 감아 놓을 수도 있고 아예 풀어 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대머리 의사는 중환자 하나 죽은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자기 소견을 밝혔다. "그럼 모든 책임은 우리 오빠에게 있다. 그 말이로군요."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우리 귀에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조민혁이 그래도 류미란보다 훨씬 부드럽게 대머리 의사를 상대했다. 대화에 귀기울이면서 남 형사는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불룩하게 솟아 있는 얼굴 부분의 하얀 시트를 살그머니 들추었다. 류정현의 얼굴은 일그러진 채 납빛으로 굳어 있었다. 허망했다. 불과 13 일 전까지만 해도 윤옥주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의 애인 노릇을 했던 30 대의 건장한 사내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모습이 허무를 불러 일으켰다. 류정현의 측근들과 간호사들까지 912 호실 밖으로 내보내고 남 형사와 대머리 의사가 단둘이 남게 된 것은 약 30 분 후의 일이었다. 대머리 의사는 류정현의 측근들에게 시달린 후였기 때문인지 긴장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수고가 많으십니다." 남 형사는 부드럽게 말문을 열었다. 대머리 의사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병원이란 곳은 사람이 죽기도 하는 곳인데, 병원에서 사람이 죽기만 하면 큰 의료사고나 발생한 것처럼 환자 가족들이 항의를 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쓰는 통에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남 형사는 일단 깍듯하게 맞장구부터 쳤다. 대머리 의사의 연령이 40 대 후반 정도는 보였기 때문에 깍듯하게 대하는 게 예의일 것 같기도 했다.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사망 시간은 언제였습니까?" "확실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당직 간호사가 류정현 씨의 사망을 확인한 시각은 새벽 4 시 5 분경이었다고 합니다." "대개 중환자실에는 당직 근무자들이 상주하는 것 아닙니까?" "위독한 중환자를 위해선 상주하는 경우도 있긴 있지요. 하지만 대부분 두 시간 간격으로 중환자실을 돌아보게 돼 있습니다." "밤중에 그게 잘 지켜집니까?"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정확하게 잘 지켜지고 있는지 체크는 못 해 봤습니다." "역시 피곤한 업무이기 때문에 잘 지켜지지 않을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특히 류정현 씨가 입원해 있던 특실과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당직 근무자가 보초처럼 따로 병실을 지켜 주십니까?" "특실이라고 근무자가 특별히 지키는 건 아닙니다. 그대신 특실은 환자 가족이나 친척들이 번갈아 가며 상주하는 경우가 많지요. 류정현 씨의 병실만 해도 거의 매일 밤 간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랬었군요. 그런데 유독 면회시간에는 한 사람만 면회를 허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 병원 규칙이에요. 그리고 특실에서 간병하는 사람도 반드시 한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어요." "그럼 어젯밤에도 류정현 씨를 간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어젯밤엔 없었다고 합니다." "그거 참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하단 말입니까?" 대머리 의사가 되물었다. 그로서는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필이면 간병하는 사람이 없는 날 산소호흡기가 빠져 나가는 바람에 사망하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간병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런 불행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어젯밤뿐만 아니라 그저께 밤에도 간병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의 경우 외부의 침입자가 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을까요?" "외부의 침입지라니요?" "살인자 말입니다."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이야기로군요." "선생님이 보시기엔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까?"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면 벌써 말했을 겁니다." "그럼 산소호흡기를 스스로 제거하는 중환자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성한 사람도 자살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워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산소호흡기를 벗어 던질 수도 있고, 발작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가족들이 부탁했기 때문에 부검은 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외부의 압력을 받아서 질식사했다면 호흡곤란 증세로 질식사한 것과 부검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까?" "글쎄요, 아마 부검결과는 거의 마찬가지로 나올 겁니다." "그럼 부검은 하나마나 아닙니까?" "글쎄요, 만에 하나 수사에 필요하다면 사망시간을 정확하게 알아내기 위해서도 부검은 해야지요." "그건 그렇군요." "이제 됐습니까?" "죄송하지만, 어젯밤 당직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일 낮에 오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분들 연락처는 총무과에 가면 얻을 수 있겠지요?" "간호사들은 간호과에 가는 것이 더 쉬울 겁니다." "감사합니다. 시신을 살펴 보고 돌아가겠습니다." "좋도록 하세요." 남 형사는 대머리 의사의 허락을 받고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시트를 가만히 걷어내고 류정현의 시신을 살폈다. 이상한 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문제의 두 손도 팔을 벌린 채 자고 있는 사람의 손처럼 편안한 자세로 벌어져 있었다. 두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목에다 걸게 만들어 놓은 타원형의 손잡이처럼 생긴 끈은 풀어져 있었다.


대머리 의사의 말처럼 느슨하게 손목을 감아 놓았다면 원형의 손잡이처럼 생긴 끈은 환자가 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원형의 손잡이는 때때로 일으키는 환자의 발작현상 때문에 특수하게 만든 손잡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일어났다. 그 생각은 강남병원을 빠져 나온 후에도 남 형사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남 형사는 어젯밤 당직 의사와 당직 간호사 두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세 사람의 9 병동 당직 근무자에게서 얻은 수확은 전혀 없었다. 혹시 수상한 방문객이나 침입자가 없었는가 하고 집중적으로 캐물었으나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남 형사는 수사반장에게 보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수사에 진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박성길 경감은 남 형사의 수사 소감을 듣길 원했다. 당장 그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이었다. "병원측에서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뺌을 하지만, 제 생각에는 단순한 의료사고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이유라도 있어?" "네, 만약 범인이 류정현 씨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면 어젯밤이 제일 좋은 찬스였으니까요." "그 이유는?" "류미란 씨를 중심으로 며칠 동안 선거사무실 사람들이 차례로 류정현 씨를 간병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젯밤엔 개표 현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아무도 간병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젯밤이 찬스였습니다." "그럼 912 호 병실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게 개방돼 있었나?" "물론 그렇진 않았습니다만, 계획만 치밀하게 세운다면 얼마든지 침입할 수 있는 허점이 엿보였습니다." "그럼 병원측에선 뭐라고 하던가?" "담당 과장, 당직 의사, 당직 간호사 두 사람까지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도 없고 침입할 수도 없게 돼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네 사람이 단합한 인상마저 풍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보기엔 침입할 수 있는 허점이 있었다 그 말인가?" "네." "하기야 자기네 병원에서 골치 아픈 사건이 발생하면 병원 이미지도 구겨지고 당직자들은 문책을 당할 테니까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또 하나는 두 손목에 감아둔 타원형의 끈이 풀렸다는 점입니다. 정상적인 사람 같으면 느슨하게 감아둔 끈을 풀 수 있다지만, 류정현 씨는 아직 정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어떻게 풀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 손목을 왜 고정시켜 놓아야 했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대개 산소호흡기를 착용한 환자들은 두 손목을 고정시켜 놓을 필요가 없지만, 류정현 씨는 이따금 발작증세를 보였기 때문에 한밤중에 어떤 발작이 일어나더라도 안전하도록 그렇게 해둔 모양입니다." "그것 참 일이 묘하게 됐군 그래." "육감 수사는 금물이지만, 아무래도 심상찮은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번 선거하고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했었는데, 이제 선거도 끝났잖아." "네, 예상을 뒤엎고 김철 후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김훈 씨의 알리바이는 확인해 봤어?" "네, 류정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 신사동에 있는 신사호텔에 투숙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강경호 후보의 딸도 만나 봤어?"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사실이었나?" "네." "그런데 왜 그렇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으면서 그 동안 피해 다녔다고 하던가?"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그건 그럴 듯한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알고 보니, 묘한 삼각관계 때문에 강유미 씨를 만났던 사실을 숨겼던 것 같습니다." "묘한 삼각관계라니?" "김훈 씨의 약혼녀인 정지영이라는 아가씨가 알고 보니 강유미 씨의 친구였습니다." "그거 정말 괜찮은 삼각관계로군 그래. 그런데 남현우 자네는 하나도 못 구하고 뭘 해." "KS 마크가 붙은 김훈 씨 같은 양반하고 저하고 비길 수가 있습니까?" "하긴 그래. 하지만 실망하진 말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겠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강력한 형님의 라이벌인 강 후보의 딸과 그런 관계를 맺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저 역시 그 점이 궁금해서 추궁해 봤는데, 김훈 씨는 그날 밤 비도 많이 오고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그렇게 됐었다고 말하더군요." "학니 남녀관계란 하도 묘해서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뒤끝이 개운치 않군 그래." "이번 선거에서 강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떨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나쁜 소문이 그림자처럼 강 후보를 따라 다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반장님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까?"


"나도 들었어. 친일파 가문이라는 소문도 들었고, 첩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걸 들었어. 그런데 그런 유언비어성 소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김훈 씨가 강 후보의 딸을 유혹한 것 아닐까?" "그랬을는지도 모르죠. 선거전엔 온갖 유언비어와 권모술수가 판을 치니까요. 하지만 그런 데까지 우리가 손을 댈 순 없지 않습니까?" "글쎄 말이야. 무슨 음모가 있었더래도 거기까진 우리가 캐낼 수도 없고 캐내기도 어렵지. 뱀 지나간 자리하고 배 지나간 자리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잖아." "반장님도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제 마음을 떠 보시느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해. 그리고 내가 볼 때 김철 후보 팀은 패기가 넘치는 고단수 팀이었어." "명문대학 출신의 젊은이들이 똘똘 뭉쳤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산리라는 조그만 산골 마을 이름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습니다." "핵심 인물 모두가 중산리와 관계된 사람들이라 그 말인가?" '중산리'라는 마을 이름이 나오자 박 경감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류상규 씨 가족까지 합쳐서 모두 열 명이 중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모두가 류정현 씨와 깊은 인간관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잠깐만. 난 여덟 명인 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열 명인가?" "김인희 씨 가족 세 명, 홍희숙 씨 가족 두 명에다 류상규 씨 가족 세 명을 합하면 여덟 명에다 윤옥주 양과 은하수에서 류정현 씨를 만났던 남자까지 모두 열 명입니다." "김인희 씨 며느리는 왜 빠졌어?" "그분은 중산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윤옥주 양하고 그 남자는 아직 못 찾아냈어?" "네, 제 생각에 미스 윤은 실종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손을 뗄 수가 없겠군." "틀림없이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사건입니다. 미스 윤이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혹시 남 형사가 그 아가씨한테 홀린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왜 없어. 남녀관계란 묘한 것이라고 방금 내가 말했잖아." "비록 카페에 나가는 아가씨였지만 심성도 곱고 괜찮은 아가씨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건 그렇고,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강 후보측 선거사무실 사람들한테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날 밤 류정현 씨를 만나러 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다고 했습니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다시 한 번 알아 봐. 패배로 끝난 선거인데 숨길 게 뭐가 있느냐고 물고 늘어져 봐."


"네." "그리고 조금 전에 열 명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류상규 씨 부녀도 중산리를 안다고 시인했다 그 말인가?" "네, 시인한 거나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라니?" "오늘 아침 담당의사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두 사람이 서 있길래 지나가는 말로 '두 분 다 중산리를 아시죠?' 하고 물었더니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에는 중산리를 모른다고 대답했을까?" "글쎄요, 나름대로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럼 우선 윤 양의 실종 여부를 확인해 보고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 봐." "네." "다른 사람들은 임선화(任善和) 형사한테 미행하도록 해볼 테니까." "그럼 이번 사건에 미스 임까지 투입시키는 겁니까?" "아무래도 남 형사 혼자서는 역부족인 것 같아서 투입시켜 볼 작정이야. 하지만 미스 임이라고 부르다가 노처녀한테 당하기 전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남 형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흡사 도시의 외로운 사냥꾼처럼 혼자 방배동 카페골목으로 들어섰다. 초여름 작렬하던 태양이 기울자 카페골목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화려한 꽃불 속에 젊음이 넘치고 미니스커트들이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렸다. 남 형사는 이제 겨우 서른을 넘겼건만 네온이 만발한 카페골목에 들어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눅이 들곤 했다. 나도 이제 한물간 인생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들게 하는 골목이 카페골목이었다. 한물 완전히 갔으면서도 그 동안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이 없고 졸부처럼 벌어 놓은 돈도 없어 꽃다운 어린 아가씨와 즐길 수도 없는 신세로구나 하는 허무한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골목이 바로 '은하수'가 있는 골목이었다. 남 형사는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밟고 카페 '은하수'로 올라갔다.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누군가 '어서 오십쇼!'하고 탄력 있는 목소리로 그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손님이 아니라 형사라는 사실을 알아 낸 웨이터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지배인이 남 형사를 가장 작은 칸막이 방으로 안내했다. 지배인은 나비 넥타이에 정갈한 양복 차림의 30 대 남자였다. "혹시 미스 윤한테서 무슨 연락이 있었습니까?" "연락은 없었습니다만, 그날 곗돈 50 만 원은 온라인으로 입금시켰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날이라면 은하수에 처음으로 출근하지 않았던 날


말입니까?" "네." "그럼 곗돈을 누구한테 빌렸는지, 빌려준 사람은 모릅니까?" "네." "그거 참 이상하군요. 내가 미스 윤의 자췻방에 드렀을 때 아파트 주인은 미스 윤이 곗돈 때문에 다른 날보다 빨리 나간다는 말을 했다는데, 만약 곗돈을 빌리지 않았다면 그 돈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중에서 빌려준 사람이 있으면 금방 알 텐데, 친구들은 빌려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느 은행의 온라인으로 입금시켰다고 하던가요?" "계주의 통장은 중앙은행 삼성동 지점 것이라고 하더군요." "계주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민경자 씹니다." 지배인이 불러주는 이름을 남 형사는 수첩에 기록했다. 중앙은행 삼성동 지점에 들러서 계주의 통장에 50 만 원이 입금된 시간과 입금시킨 은행을 알아내면 윤옥주의 행방을 뒤쫓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혹시 전에도 미스 윤이 며칠씩 행방불명된 적이 있습니까?" "다른 애들은 가끔 하루 이틀씩 말도 없이 빠질 때가 있어도 미스 윤은 절대 그런 일이 없는 애였어요." "잘 알았습니다. 혹시 미스 윤한테서 연락이 오면 여기로 좀 알려 주세요." 남 형사는 명함 한 장을 지배인에게 건네 주고 일어섰다.

숲속에 갇힌 미녀 윤옥주의 하체는 약간 열려 있었다. 허벅지와 무릎 사이가 제법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깊은 곳을


공략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노팬티에 노브라였다. 별장에서는 노팬티에 노브라로 생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는 입어도 되지만 팬티와 브래지어만은 착용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고 있었다. 팬티와 브래지어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처음 별장에 올 때 입고 있었던 팬티와 브래지어는 없어졌지만, 그녀에게는 선물 받은 값비싼 팬티와 브래지어가 여러 개 있었다. 한 개에 십만 원 이상 나가는 고급 팬티와 고급 브래지어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입고 싶었다. 그러나 병장에서는 입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입을 수가 없었다. 윤옥주는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달빛이 은은하게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숲에서 날아온 나방 한 마리가 빛을 향해 뛰어 들려는 거친 몸짓으로 방충망에 달라붙어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바보 같은 녀석! 나는 이 별장에서 빠져 나가려 하는데 너는 이 별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뿐이었다. 아까부터 한 박사의 손가락이 그녀의 두 다리 사이 깊은 곳을 애무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으으......."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깊은 골짜기의 신비한 샘에서 달콤한 꿀물이 솟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옥주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한 박사가 마침내 양탄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그녀의 깊은 골짜기에 피어난 꽃싹과 민감한 돌기를 절묘하게 요리했기 때문에 그녀의 성감은 놀랍게 치솟았다. "그, 그만 하세요." 그러나 그녀의 싱싱한 몸뚱아리는 새콤달콤한 성감의 상승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해 주시지도 않으시면서, 미치게 만들지 마세요." 옥주는 늘씬한 허리를 꼬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농밀한 애무가 싫어서 내뱉은 불만은 아니었다. 누가 젊은 여자의 육체는 좋은 악기와 같다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아주 타당한 말 같았다. 한 박사는 연금술사처럼 절묘한 기술자였다. 윤옥주는 자신의 성감대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연주하는 노 신사의 실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노 신사의 탁월한 연주 능력에 의해 자기 자신의 몸이 명기(名器)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깊은 골짜기 빨갛게 익은 꽃술 사이로 봇물이 터졌다. 삼각지대의 검은 숲을 흥건히 적시고 줄줄 흘러 내렸다. 대형 타월을 준비했기에 망정이지 준비해 두지 않았다면 소파까지


적시고도 남을 봇물이 쏟아졌다. "저, 저를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면서 바, 박사님은 왜 하시지 않아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윤옥주는 무릎을 꿇고 구도자처럼 깊은 골짜기를 어루만지고 있는 한 박사를 내려다 보고 물었다. "나도 했어. 암, 했어도 많이 한 거야. 걱정하지 마." "어, 언제 했어요? 저만 쏟아 놓게 하셨잖아요?" "아니야, 난 옥주 때문에 기(氣)가 많이 살아났어." "하지만 실제론 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제가 나쁜 년이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런 건 아니야." "가까이 하시지도 않으시고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어요?" "육십이 넘은 노인은 먼저 기를 키워야 튼튼한 자식을 얻을 수 있어." "기가 뭔지는 모르지만, 박사님의 그것은 성능이 아주 좋은 것 같았어요. 그래도 기를 더 키우셔야 하나요?" "우물에서 물을 퍼내듯이 내 손으로 젊고 아름다운 옥주의 몸 속에서 단물을 퍼내면, 어느새 서로 진하게 마찰이 되어 내 몸에서도 기가 살아나게 되는 거야." "저는 박사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모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옥주도 노인이 되어 보면 노인의 고독을 알게 될 거야." "실은 저도 고독한 여자였어요. 지금까지 괜찮은 애인 하나없이 고독하게 살아 왔어요." "젊은 사람들에게도 고독은 있게 마련이지. 하지만 노인의 고독과는 다른 고독이지." "어떻게 다른 고독이에요?" "젊은이들의 고독은 세월이 지난 후에 생각하면 행복한 고독일 수도 있고 사치스런 고독일 수도 있지만, 노인의 고독은 소외감과 배신감에서 오는 죽음의 고독이지." "그럼 노인들의 고독은 무서운 고독이군요."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노인들이 너무 고독해서 죽어가고 있어. 그리고 그렇게 고독해서 죽어가는 죽음을 고독살인(孤獨殺人)이라고 부르고 있어." "그렇다면 고독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윤옥주는 여전히 가랑이를 약간 벌린 채 백치처럼 말간 눈빛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한 박사는 옥주의 그 백치미가 마음에 들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독해서 죽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옛날 이스라엘의 다윗 왕처럼 인기가 대단했던 왕도 늙어서는 고독을 못 이겨 밤마다 어린 여자를 가슴에 안고 잤어." "성경에 나오는 그 위대한 다윗 왕이 그런 짓을 했어요?"


"생기를 되찾기 위해선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을 거야." "남자들의 세계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까마귀 한 마리가 30 만 원씩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생기 때문인가?" "그게 다 비슷한 이야기지. 정력하고 생기는 일맥상통한 데가 있으니까." "정력에 좋다면 살아 있는 곰 쓸개즙까지 몇백만 원씩 주고 빨아먹는 남자들의 생리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여자들의 생리 역시 마찬가지야. 아니, 여자들은 더 신비스럽고 더 변덕스러워 그 생리를 전문가도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지."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옥주는 젊은 여성들이 왜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줄 알아?" "글쎄요, 각선미를 자랑하기 위해서 미니스커트를 입는 거 아닐까요." "그보다 깊은 골짜기가 있다는 걸 은근히 알려주고 싶어서 입는 거야. 산마다 골짜기가 있듯이 여자마다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 신비한 골짜기가 바로 스커트 밑에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미니를 즐겨 입는다 그거야. 그래야 골짜기에 바람도 잘 통하고 스릴도 있으니까 말이야."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아닌 게 아니라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바람도 훨씬 잘 통하고 삶의 의욕도 솟아나는 것 같아요." "옥주는 정말 괜찮은 여자야. 노인의 독을 충분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하지만 저는 자신이 없어요."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까 옥주는 날 고독하게 만들어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왜 대답에 힘이 없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만약 옥주가 날 고독하게 만들어서 병들어 죽을 지경에 빠뜨린다면 난 반드시 복수할 거야. 난 옥주가 저지른 환상살인을 용서했으니까." "최선을 다해 보겠어요. 하지만 혹시 제가 잘못하더라도 복수는 하지 마세요. 주용 씨를 제가 일부러 죽인 건 절대 아니예요." "그래도 난 복수하고 말 거야." "그럼 절 용서해 주시지 않고 죽이시겠단 말씀인가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나를 배신하면 난 옥주를 죽일 수밖에 없어."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세요. 무서워요." "잘 들어 둬.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은 배신한 인간이야. 그렇게 때문에 옥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어."


"저는 지금까지 박사님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박사님이 시키시는 대로 움직여 왔어요." "옥주가 죽인 내 아들대신 아이를 낳아 주면 약속대로 아파트 한 채와 5 천만 원을 주겠어. 그리고 그 후로는 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 전엔 서약서에 쓴대로 약속을 지켜야 해." "박사님이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어요?" "아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야. 오늘 밤 진짜 내 실력을 보여줄 테니까." "박사님만 믿겠어요." 어느새 거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녀의 선감은 사라지고 끈적끈적한 후유증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한 박사의 차가운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그녀는 잠시나마 그 눈빛을 피하고 싶었다. "박사님, 좀 씻고 오겠어요." "응, 그래. 빨리 씻고 와." "네." 윤옥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대형 타월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어쩌면 좋아요, 어머니. 도망을 치고 싶지만 도망을 칠 수도 없고....... 만약 도망을 쳤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살인범으로 쇠고랑을 찰지도 몰라요, 어머니. 욕실 거울 앞에 서 있는 윤옥주의 두 눈동자에는 말간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약 1 년 동안 방배동 카페골목의 은하수에 나가는 동안 공권력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법은 언제나 강자의 편에서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여기서 도망쳐 보았자 뾰족한 묘수가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어머니, 나는 절대로 사람을 찌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별장 주인은 칼에 맞아 죽은 사람 옆에 앉아 있는 내 얼굴을 카메라로 찍었어요. 아마 경찰은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예요. 이럴 땐 어떡하면 좋아요, 어머니? 그녀는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거울 앞에 서서 멀리 시골에 있는 홀어머니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별장 주인은 돈이 많은 모양이에요, 어머니. 내가 아이만 하나 낳아주면 아파트도 한 채 사 주고 돈도 많이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늙은이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상경만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이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어머니. 이윽고 두 눈동자에 고였던 말간 이슬이 그녀의 갸름한 두 볼을 소리없이 타고 내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변수가 많은 날씨처럼 예상 밖의 재주를 부리는 선거에서 패배한 강경호 후보는 상아호텔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이틀째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 형사의 공세는 끈질겼다. 세 차례 실패했지만 다시 찾아가 강경호 후보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강경호는 50 대 후반의 풍채가 좋은 사내였다. 혼자 술을 마셨는지 그는 약간 취해 있었다. "그렇잖아도 심기가 불편하실 텐데, 정말 죄송합니다." 남 형사는 응접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강경호와 마주앉게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인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강경호는 뜻밖의 패배에서 받은 충격 때문인지 약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거도 끝났는데,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혹시 비서실장님한테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이야긴 들었어요. 하지만 난 류정현 씨를 만나지도 않았고 그 사람한테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않았단 말이오." "사장님 말씀대로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말할 게 없는데, 무슨 말을 솔직히 하라는 거요." "방금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않으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랬어요." "바로 그 말씀 속에 류정현 씨와 모종의 접촉이 있었다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남 형사는 정곡을 찔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거물급 인사에게는 그런 방법밖에 순순히 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요? 접촉한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강경호는 금방 주먹이라도 휘두를 듯한 험상궂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남 형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제가 찾아온 목적은 선거 때 나돌던 친일파니, 뭐니 하는 악성 루머를 퍼뜨린 자들 중에 류정현 씨를 해친 자가 있을것 같아 사장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온 것이지 그 밖에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 강경호는 선거기간 동안 자신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던 악성 루머를 교묘하게 들먹거려 가며 협조를 구하는 남형사가 얄미웠다. 하지만 무조건 쫓아보낼 수도 없었다. "경찰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류정현 시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에 만난 30 대 중반의 남자가 있는데, 그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그 남자가 이쪽 선거사무실 사람이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 사무실 직원 중에 류정현 씨를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은 어떻게 류정현 시를 그렇게 잘 알고 계십니까?" "내가 언제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했어요? 사람 잡을 소리 하지 말아요." "그 사람을 잘 모르시면서 어떻게 사장님은 아들 또래밖에 안 되는 류정현 씨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혹시 강유미 씨 때문에 알게 되신 것 아닙니까?" 남 형사는 최근 이성문제로 말썽을 부리고 있는 강경호의 딸 강유미의 이름을 들먹거림으로 아픈 데를 찌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한 번 들은 사람의 이름을 잘 잊어먹지 않아요." "그럼 김훈이란 분도 아시겠군요?" "그런 사람은 몰라요." "따님 때문에 김훈 씨라는 사람의 이름을 분명히 들으셨을 텐데, 김훈 씨는 왜 모르십니까?" 남 형사의 집념은 극성스러웠다. 강경호의 아픈 데를 마구 찔러서라도 미궁에 빠질 염려가 있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볼 작정이었다. "......." 강경호는 아무런 대꾸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볼품없이 초라한 패배자로 만든 김철 후보의 동생 김훈을 모를 리가 없었다. 더욱이 약혼녀까지 있다는 김훈을 자기 딸 유미가 죽자사자 따라 다닌다는 말을 듣고 열통이 터질 지경이 되어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데, 불 난 집에 부채질하듯 하는 남 형사가 씹어 먹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사관에게 폭력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협조해 주십시오." 상대방의 약점을 찔러 놓고는 다시 정중하게 협조를 부탁했다. "남 형사는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남의 딸 이름까지 들먹거리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겁니까?" 듣기에 따라서 묘한 뒷맛을 남기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강경호의 완강한 자세가 한 풀 꺾여 있었다. "그날 밤 류정현 씨를 만났던 사람이 누군지 아시죠?" "......." "그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면 더 이상 사장님을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건 브로커인데, 내가 쓰던 사람이 아니예요." 강경호의 입에서 생각보다 쉽게 그 사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건 브로커라니요?" "법원 주변에서 변호사들에게 사건을 소개해 주는 브로커들도 모릅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브로커가 왜 류정현 씨를 은밀하게 만났는지 모르겠군요. 사장님은 그 이유를 아시죠?" "쉽게 말해서 나한테 무슨 정보를 팔겠다고 했어요. 그 정보가 무슨 정보인지 잘 모르지만 선거에 막대한 영항을 끼칠 수 있는 정보라고, 나한테 사라고 했어요." "실례지만, 얼마에 사라고 했습니까?" "석 장에 사라고 하더군요." "삼백만 원에 말입니까?" "아니, 삼천만 원에 사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무슨 정보인지 모르지만 터무니없이 비싸기도 하고 원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정보를 살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사장님 쪽에서는 살 생각이 없으시다고 하셨는데, 그 쪽에선 자꾸만 사라고 했군요." "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면서 계속 사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쪽에선 김철 후보를 강적으로 보지 않고 야당 후보를 강적으로 봤기 때문에 그런 정보엔 흥미조차 없었어요." "정말 흥미저차 없으셨습니까?" "흥미가 있었다면 아무리 비싸도 그 정보를 샀을 겁니다." "혹시 너무 비싸서 못 사신 것 아니십니까?" "다 지나간 일 가지고 사람 웃기지 말아요, 남 형사." "기왕에 웃긴 김에 한 번 더 웃겨 드려도 괜찮다면, 그 때 그 정보를 빨리 사 들이지 못하신 걸 후회하진 않으셨습니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남 형사?"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원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그 친구는 사기 전과가 몇 번 있는 친구라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남 형사는 어느새 사건 때마다 사용하는 수사 수첩을 펼쳐 놓고 물었다. "최문식이라고도 하고 최영욱이라고도 하는데, 본명이 뭔지 확실히는 몰라요." "나이는요?" "서른다섯 정도 되었을 거예요." "사는 곳은 어딥니까?" "글쎄요, 수원인가 부천에 산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럼 처자식도 있겠군요?" "결혼은 했지만 일찌감치 이혼하고 늙은 모친하고 단둘이 산다는 말을 들었어요." "실례지만, 사장님은 최씨를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사업을 하다 보면 별별 사람을 다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긴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그 최문식 씨란 양반의 인상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인상은 좋은 편이에요." "인상에 무슨 특징 같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글쎄요, 눈이 깊숙하고 눈썹이 짙은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 겁니다." 남 형사는 최문식의 특징을 수첩에 기록했다. 사건의 실마리가 최문식을 통해서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그 밖에 수사에 필요한 사항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젠 그 작자에 대해서 더 이상 털어놓을 게 없어요." "실례지만, 혹시 최문식 씨에게 착수금이나 계약금 같은 걸 주시지는 않았습니까?" "정보를 살 생각이 없었는데, 계약금을 왜 줍니까?" "그래도 그런 사람은 돈이 생기지 않는 데는 쫓아 다니지 않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불쌍해서 차비 정도는 주었어요. 그런 것까지 문제를 삼으려고 날 찾아온 것은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최문식 씨라는 사람 혹시 예술가 흉내를 내고 다니는 사람 아닙니까?" "사기꾼이 무슨 흉내는 못 내겠어요." "그럼 예술가 흉내를 내고 다니기도 한단 말입니까?" "그 친구는 시집 한 권만 있으면 시인이 되고 카메라 한 대만 어깨에 걸치면 사진작가가 되는 친구예요." "그러고 보니 그 방면에 천재성이 있는 양반이로군요." "좋게 보면 그렇지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류정현은 강경호 후보에게 어떤 정보를 팔아 먹으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사건 브로커인 최문식을 앞장세워 중요한 정보를 3 천만 원에 팔아 먹으려다 팔아 먹지도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 중요한 정보란 어떤 것일까? 남 형사는 그 정보가 십중팔구 중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정보라고 생각했다. 선거에 굉장한 영항을 끼칠 수 있는 정보라고 했는데, 그런 중요한 정보가 벽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리산 밑 중산리 마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 무엇이 사슬이 되어 연결되어 있을까? 안개였다. 현재로써는 얼마 전 중산리 마을에 갔을 때 중산리를 뒤덮고 있었던 안개와 같은 것이 남 형사의 뇌리를 뒤덮고 있었다. 아무튼 최문식도 중산리를 아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러니까 중산리를 아는 사람이 또 한 사람 늘어났어. 이제 사건의 실마리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탐문수사 결과 떠오른 예술가 타입의 30 대 남자와 최문식이 동일 인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옥주는 예술가 흉내를 잘 내는 사기꾼의 덫에 걸린 게


틀림없어. 윤옥주가 곗돈을 입금시킨 은행은 자췻방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중앙은행 잠실 지점이었고, 그녀는 은행에 오기 전에 검은 빵모자를 쓴 에술가 타입의 30 대 남자와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탐문수사 결과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옥주의 은행계좌에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에 오십만 원이 입금된 것을 보면, 예술가 타입의 그 남자에게 적어도 백만 원은 받았을 가능성이 짙었다. 그날 윤옥주가 자췻방을 나설 때만 하여도 백만 원은커녕 곗돈 오십만 원도 없어 쩔쩔맨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담녀 최문식은 무엇 때문에 윤옥주한테 백만 원이나 주었을까?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윤옥주를 유혹하여 인신매매를 한다면 몇백만 원은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만큼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고급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옥주한테 백만 원을 선불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강제로 끌고 가서 팔아먹을 계획을 세웠다면 백만 원을 선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마음에 걸리는 점은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는 점이었다. 만약 곗돈을 내기 위하여 선불을 받고 스스로 다른 유흥업소로 옮겨 갔다면 소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소식도 없고 자췻방으로 돌아오지 않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최문식이 윤옥주에게 백만 원을 주었다면 그 돈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최문식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건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혹시 최문식이 제 3 의 인물의 사주를 받고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제 3 의 인물은 누굴까? 제 3 의 인물 역시 중산리와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남 형사의 추리는 한계점에 도달한 셈이었다. 남 형사는 상아호텔 로비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수사본부에다 전화로 사기전과가 있는 최문식과 최영욱의 신원조회를 부탁했다. 용건을 의뢰하고 송수화기를 내려 놓으려고 할 때 박 경감의 굵은 목소리가 '잠깐만!'하고 남 형사를 불러 세웠다. "강경호 사장을 만나 봤어?" "네." "그럼 한 시간 내로 들어 와. 임 형사도 류미란을 만나 본 모양이야." "네, 알겠습니다." 남 형사는 전화를 끊고 호텔 로비를 나섰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상아호텔에는 대낮인데도 더위를 피해 찾아 오는 남녀 자가용족들이 많았다. 수사본부에서 박성길 경감과 임선화 형사는 남 형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재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한 군데 들렀다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더운데 수고가 많군 그래." 박성길 경감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수사회의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항상 부하 형사들의 보고를 신중하게 듣는 편이었다. "임 형사부터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봐요." "네, 아직 물증은 못 찾았지만 느낀 점은 몇 가지 있어요. 첫째 이번 사건은 복잡한 비밀이 배후에 깔려 있는 사건인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남 형사가 물었다. 그는 오늘따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굴었다. "류미란 씨의 진술에 의하면 류정현 씨가 죽기 전에 몇 번 이상한 말을 하더래요." "이상한 말을 하다니요?"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몇 번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류미란 씨도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음, 그래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박 경감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 나한테는 그런 소리를 아예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같은 여자라고 임 형사한테는 그런 말을 했군요." "같은 여자이기 때문에 털어놓은 게 아니라 방법이 달라서 털어놓은 거예요." "그럼 내 방법이 나빴다 그 말입니까?" "글쎄요." "다투지 말고, 임 형사가 계속 보고해 봐. 그리고 남 형사는 궁금한 점만 간단하게 물어 봐." "네." 박 경감이 남녀 두 형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묘한 논쟁의 불씨를 처음부터 꺼버렸기 때문에 수사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미란 씨 아버지한테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으나 그 분 역시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신다고 했어요." "그럼 류상규 씨가 지리산 밑에 있는 중산리라는 마을조차 모르신다고 하던가요?" "중산리에 가 보신 적은 있다고 하더군요." "언제 가 보셨다고 하던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전에 나한테는 류 씨가 중산리를 모른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아들이 숨진 후부터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아무래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남 형사의 말에 박 경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태도가 달라지긴 달라진 것 같아." "현재로썬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제 생각엔 제 3 의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임 형사 생각도 남 형사의 생각과 비슷하군 그래." "네, 비슷해요. 하지만 류미란 씨와 류상규 씨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김인희 씨 가족과 홍희숙 씨 가족으로 범위가 줄어든 셈인가?" "그 밖에 제 4 의 인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최영욱이 중산리의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럼 최문식의 본명이 최영욱이란 말입니까?" 남 형사가 물었다. 그는 윤옥주는 납치 또는 유혹해 갔을 가능성이 큰 최문식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조회 결과 최문식의 본명은 최영욱(崔英旭)으로 밝혀졌어. 사기전과 3 범이어서 정체가 쉽게 밝혀졌어." "거주지는 어딥니까?" "부천으로 돼 있어. 가족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어." "시민아파트 앞에서 과일행상을 하는 사람한테 재확인한 결과 윤옥주를 데리고 간 사람은 최영욱이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과일행상이 목격한 예술가 타입의 30 대 남자, 중키에 눈이 깊숙하고 눈썹이 짙은 남자는 강경호 후보가 말해 준 최영욱의 인상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음, 그래. 그런데그런 건달이 윤옥주한테 백만 원을 주었다는 건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최영욱은 그런 큰 돈을 가지고 다닐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윤옥주의 자췻방이 있는 잠실 시민아파트 근처에서 옥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윤옥주의 실종은 제 3 의 인물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럼 최영욱은 어디까지나 하수인이란 말인가요?" 임 형사가 물었다. 그녀는 여형사답지 않게 부드러운 눈빛의 소유자였다. "십중팔구는 하수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술가처럼 검은 빵모자를 쓰고 돈을 미리 준비하고 아파트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윤옥주에게 접근하여 감언이설로 유혹했을 가능성이 짙은데,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최영욱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배후에서 최영욱에게 돈을 대주고 그를 조종한 사람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요." 임 형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온 사람은 박 경감이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문제는 제 3 의 인물이 누구냐


이거야. 그 일 대문에 임 형사를 장례식과 당선 축하연에 보냈는데, 거기서 얻은 게 있으면 말해 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어요. 고인의 부친과 여동생 그리고 김철 의원의 가족 세 사람과 조민혁 씨와 홍 여사가 참석했어요. 그 밖에 선거사무실에 근무하던 사람 네 사람과 장의사에서 나온 두 사람이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 모두였어요." "류정현 씨의 부인은 참석하지 않았어요?"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이혼 수속이 끝났다고 하더군요." "요즘 여자들은 대부분 그렇다니까요." "남편이 생전에 잘했어 봐요. 모두 자업자득이에요." "그건 그래." "반장님은 남자 아니십니까?" "남 형사도 빨리 장가 들려면 임 형사한테 잘 보여야겠어."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저는 항상 본전도 못 찾는군요." "그러니까 엉뚱한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어." "네, 조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장례식에선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단 말입니까?" "네, 아시다시피 장례식에 참석한 분들 중에는 새로운 얼굴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조촐한 장례식이었군 그래." "네, 무덤도 마련하지 않고 한강에다 유해를 뿌리는 장례식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겐 알리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럼 부검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호흡장애 때문에 생긴 질실사였다고 하더군요." "그 밖에 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던가요?" "네." "혹시나 했는데, 부검 결과는 실망이군요." "반면에 이튿날 저녁에 열린 당선 축하연에는 거물급 인사들과 하객들이 너무 많아 특별히 떠오르는 얼굴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서초회관 대연회실이 차고 넘칠 만큼 많이 모였기 때문에 별도리가 없었어요." "대략 몇 명 정도 모였다던가요?" "주최측에 물어 보았더니, 삼백 명 정도 모였다고 하더군요." "삼백 명 가운데서 제 3 의 인물 한 사람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럼 이제 어떡하지요, 반장님?" "최영욱의 행방을 추적해서 그 자를 빨리 찾아내는 수밖에 없어." "네, 알겠습니다." "그 밖의 방법으로 전화 도청을 하면 안 될까요?" "그건 안 돼." "중산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선 중산리와 인간적 고리가


연결된 사람들의 전화를 도청하는 것이 지름길일 것 같아요." 임 형사의 의견은 그럴싸했다. 그러나 박 경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도청은 안 돼. 그건 위법이야. 그리고 시의원의 집 전화를 도청했다가 들통이 나는 날에는 모가지가 짤리고 말어." "그럼 김철 의원의 집은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집에만 도청장치를 설치하면 되지 않습니까?" 남 형사가 한 몫 거들었지만 박 경감은 역시 거부반응을 보였다. "우선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최영욱을 빨리 찾아 봐.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류상규 씨와 류미란 씨에게 기술적으로 접근해 봐." "오히려 두 사람은 피해자 가족이잖아요?" 임 형사는 뭔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박 경감의 태도는 확실했다. "두 사람을 조사대상에서 제외시켜선 안 돼. 그리고 현재로썬 두 사람에게 접근하기가 가장 용이해. 임 형사 말대로 두 사람은 피해자의 가족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점을 명심해 둬야 해.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류정현 씨의 죽음이 타살이라면, 처음 그를 죽이려 했던 방법에는 너무나 치졸한 점이 엿보였다는 걸 알아둬야 해. 예를 들면 비오는 날 자가용 승용차 앞면 유리창을 깨뜨린 것은 아마추어 냄새가 나는 치졸한 방법이라고 밖에 할 수 없어. 그러나 교통사고를 낸 차량을 수배할 수 없도록 머리를 쓴 점은 아마추어의 방법이 아니었어. 그리고 병실에서 산소호흡기를 제거하고 부검 결과 이상이 없을 만큼 적당히 그를 질식사시킨 점은 아마추어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 "정말 그렇군요, 반장님." "그리고 윤옥주를 감쪽같이 납치한 수법도 아마추어의 수법이 아니야. 반항은커녕 스스로 따라오게 만든 수법은 프로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두 사람도 시시껄렁한 화제로 말다툼하지 말고 머리를 짜내어 보란 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그 밖에 수사에 필요한 몇 가지 계획과 암호를 정한 후에 수사회의를 마쳤다.


빛 바랜 사진 일곱 장 회색 가루가 된 아들의 유골을 한강에다 뿌리고 돌아온 류상규는 탈진상태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김철 의원의 당선 축하연회에 초청을 받았지만 참석하지 않고 아파트에 틀어박혀 독한 양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류상규는 전화기 코드까지 뽑아 놓고 두문불출하고 있었지만 차츰 기운이 회복되자 속에서 울화가 치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거울을 바라보고 험상궂은 얼굴로 혼자소리를 해댔다. "설마 했었는데, 교통사고 역시 계획적인 것이었어."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소생할 기미가 보였는데, 어느 놈이 정현이의 몸에 손을 댄 게 분명해. 어느 놈이 그랬어?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에게 감히 어느 놈이 손을 댔어?" 선불 맞은 짐승처럼 충혈된 눈동자를 번뜩이며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는 다시 내뱉었다. "난 그 놈을 찾아내어 작살을 내고 말겠어! 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어! 한두 놈을 작살낼 힘은 아직 남아 있단 말이야!" 류상규는 66 세의 노인답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고 금방 거울이라도 작살을 낼 듯이 주먹을 흔들어댔다. 바로 그때 벨이 울렸다. 처음 벨이 울렸을 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거푸 벨이 울렸기 때문에 류상규는 현관으로 나갔다. 참새알만한 확대경에 비친 얼굴은 딸 미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미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빠, 저예요. 미란이가 왔어요." 노인은 딸이 출입문 밖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열었다. "전화까지 통하지 않게 해 두시고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빠?"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미란이 따지듯이 물었다. "글쎄, 어떻게 된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류상규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딸을 유심히 지켜보며 말했다. 미란은 오빠를 잃은 슬픔 같은 건 이미 씻어버린 듯이 화려한 여름옷 차림이었다. "아무리 화가지만, 그 옷 색깔과 그 옷 디자인이 뭐냐?" "이 옷이 어때서요? 요즘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옷인데 시원하고 촉감이 아주 좋아요."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죽은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그런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다녀서 되겠어?" "오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열흘이 지났어요."


"그래도 그렇지." "그럼 저더러 검은 상복을 입고 다니란 말씀인가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저는 옷보다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마음이 더 중요하지." "그런데 아빠는 왜 그러세요? 마음이 너무 연약하시잖아요?" "내 마음은 약하지 않어." "대낮에 술에 취해 계시는 건 마음이 약해지셨다는 증거란 말예요." "난 아직 취하지 않았어."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앉으세요." "응, 그래." "차 한 잔 끓여 드릴까요?" "차는 싫어. 차 대신 술이나 줘." "술은 안 돼요." "왜 안 돼?" "이따 밤에 주무실 때나 한 잔 더 하시고 주무세요. 쇠고기죽을 끓여 놓고 갈 테니까요." "그때까지 못 참겠어." "건강을 위해선 참으셔야 해요." 그러나 노인은 고집불통이었다. 딸의 말을 듣지 않고 직접 거실의 진열장에서 양주병을 들고 왔다. "안주도 없이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면 큰일나요, 아빠." "어차피 큰일은 터졌어." "큰일이 터지다니요?" "하나뿐인 내 아들이 죽었잖아. 그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어." "잠깐만요. 안주 좀 챙겨 올게요." 미란은 어쩔 수 없이 주방에 들어가 야채와 마요네즈를 버무리고 오징어를 구워서 간단한 안주를 마련했다. "역시 우리 미란이 최고야. 너도 한 잔 마셔." 노인은 진열장에서 꺼내 온 두 개의 작은 유리잔에다 노르스름한 양주를 채우고 딸에게도 술을 권했다. 예술인 기질이 농후한 류미란도 술이 센 편이었다. 그림이 제대로 안 되거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자기의 말을 안 들을 때는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노인은 장성한 딸과 마주앉아 술을 마시게 되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손수 작은 유리잔을 채우고 연거푸 잔을 비웠다. "그만 드세요, 아빠. 취하겠어요."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는 걸 미란이 너도 잘 알잖아?" "오빠 이야기나 해 보세요. 왜 그렇게 되었어요? 아빠는 그 이유를 아실 거 아니예요?" 위스키를 몇 잔 마셨기 때문일까. 미란은 집요했다. 당돌하리 만큼 질문 공세를 폈다. "내가 그 이유를 알면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겠어."


"정확한 이유는 모르신다 하더래도 짐작은 하실 수 있잖아요?" "너무 엄청난 일이라 짐작하기조차 어려워." "혹시 누구한테 원한을 사신 적이 있으세요?" "그런 적 없어." "정말 없으세요?"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며칠 전 신문에는 6.25 동란 때 자기 아버지를 빨갱이라고 밀고하여 처형당하게 만든 사람을 죽인 살인사건이 보도되었어요." "그 신문기사는 나도 읽어 봤어. 하지만 난 그런 비열한 인간이 아니야. 난 오히려......." 노인은 말끝을 흐리고 유리잔에 반쯤 남은 술을 마셨다. "말씀해 보세요. '난 오히려'하고 꺼낸 얘기를 방금 끊으셨잖아요?" "글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아무래도 좀 취했나 봐." "그럼 아빠는 6.25 동란 때 무슨 일을 하셨어요?" "그런 건 쓸데없이 왜 물어?" "아빠가 25 년생이시니까, 6.25 때 만 25 세 정도 되셨겠군요." "내 생일이 음력 시월이니까 그 정도 되었겠지. 그런데 6.25 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애가 그런 건 왜 물어?" "요즘 저는 지리산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지리산을 그릴려면 지리산을 좀 알아야겠지." "그림 때문이 아니라 오빠 때문에 공부하고 있어요." "오빠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하고 지리산이 무슨 상관이 있어." "지리산의 최고봉 밑에 있는 중산리라는 마을을 제대로 알려면 지리산의 역사를 알아야 하니까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래. 정현이하고 중산리 마을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 말을 하지?" "아빠도 중산리에 가 보셨죠?" "응, 가 봤어." "혹시 중산리에 아는 분이 계셔요?" "김 여사하고 홍 여사의 고향이 중산리지." "두 분을 언제부터 알게 되셨어요?" "서울에 와서 알게 되었으니까, 약 30 년 정도 되었을걸." "그럼 그 전엔 두 분을 전혀 몰랐어요?" "응, 몰랐어." "혹시 두 분 말고 그 밖에 다른 중산리 사람은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 없어. 그런데 갑자기 형사처럼 나한테 꼬치꼬치 캐묻는 이유가 뭐지?" "돌아가시기 이삼 일 전에 오빠의 입에서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이 몇 번 나왔어요."


"밑도 끝도없이 그런 말을 했다 그 말이냐?" "네. '주, 중산리의 비밀, 주, 중산리의 비밀'하면서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어요." "그 밖에 다른 말은 안 했어?" "네." "정현이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까?" "글쎄요, 그게 궁금해서 아빠한테 물어 보러 왔어요. 아빠는 중산리의 비밀이 뭔지 모르세요?" "응, 모르겠어." "아빠도 모르시는 중산리의 비밀을 오빠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 말이야." "그럼 지리산에 대해서 공부를 더 하든지 두 분한테 가서 물어 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겠군요." "두 분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중산리가 고향이신 두 분 말예요." "그럼 김 여사하고 홍 여사한테 가서 물어 보겠다 그 말이냐?" "네, 제 생각에 그 분들은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 같아요." "그, 그건 안 돼." 노인은 약간 더듬거리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두 눈이 충혈됐을 만큼 거나하게 술에 취했으면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미란의 마음에 걸렸다. "왜 안 ㄷ다고 하세요. 오빠가 죽은 원인이 거기에 있을는지도 모르는데 말예요." "글쎄, 마음대로 해. 난 잘 모르니까 말이야." 노인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방금 단호히 '그건 안 돼.'하고 잘라 말해 놓고, 1 분도 지나지 않아 태도를 바꾸는 게 이상했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다고 미란은 생각했다. "중산리는 평화스런 산골 마을이에요. 지리산 등산로를 개발하느라고 지금은 주차장이 생기고 상점도 여러 개 생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주 조용한 산골 마음이었어요. 전체 가구수도 이백오십 호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인데, 그 마을에 비밀이 있다면 그 마을 출신들은 대개 알고 있을 거 아니예요." "글쎄, 난 잘 모르겠어." 노인은 머리를 가로젓고 유리잔에 술을 채웠다. 미란은 말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많이 취하면 취할수록 마음 속에 감추어 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쏟아 놓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빠 생각으로는 중산리에 비밀이 있다면 어떤 종류의 비밀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비밀이 있기 마련이야." "왜 동문서답을 하세요. 저도 그 정도 상식은 있어요. 지금 제가 묻고 있는 건 비밀의 가능성을 말하는 거예요."


"비밀의 가능성이라니? 질문이 너무 어려워. 좀 쉽게 말해 봐." "쉽게 말해서 중산리는 펴오하스런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특별한 비밀이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마을이에요." "그런데 왜 자꾸만 중산리의 비밀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 "지리산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지리산의 비극을 알게 되고 지리산의 비극 속에는 중산리 마을도 포함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제 생각이 틀렸어요, 아빠?" "지리산은 보통 산이 아니야. 90 여 개의 산이 모여 있는 거창한 산이야." "저도 알아요, 아빠. 산이 워낙 깊고 거창해서 6.25 때 공비들이 자기네 천국을 삼으려다가 실패했다는 것까지 다 배웠어요." "많이 배웠군 그래." "지금은 차도도 생기고 많이 개발되었지만, 중산리는 여전히 지리산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에요." "그런데 그런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에 무슨 놈의 비밀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현이가 괜히 헛소리 했던 것 가지고 그렇게 신경 쓰지 말어." "오빠가 내게 한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어요." "몸이 약해지면 누구든지 몹쓸 꿈도 많이 꾸고 헛소리도 많이 하게 돼 있어." 미란은 화제의 초점을 다른 데로 돌리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졸지에 아들을 잃은 슬픔을 빨리 떨쳐버리기 위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빠 말씀대로 요즘처럼 평화로운 시절에는 중산리 같은 산골 마을에 특별한 비밀이 있을 수도 없고, 만에 하나 특별한 비밀이 있다고 해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6.25 사변 전후라면 중산리 같은 특수지역에선 참담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대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비밀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잖아요, 아빠?" "응,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정현이는 6.25 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야." "바로 그 점이 문제점이자 의문점이에요. 6.25 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빠가 어떻게 중산리의 비밀을 들먹거리게 되었는지 궁금하단 말예요." "모처럼 한 잔 하는데, 술맛 떨어지는 소리 그만해. 그런 얘길 한다고 죽은 그 놈이 돌아 오겠어?" "아빠는 그 점이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난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경찰이 조사를 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한테 맡길 수밖에." 노인은 또다시 유리잔에 양주를 채우더니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아빠는 6.25 때 어느 쪽이었어요?"


"난 남쪽 사람이니까 남쪽일 수밖에." "그 무렵 지리산에는 북쪽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쪽 동네에는 빨갱이들이 많았으니까 빨갱이 물이 든 사람도 없잖아 있었겠지." "그 당시 아빠도 지리산에 가 보셨어요?" "그 당신엔 못 가 봤어." "그럼 그 후에 가 보셨군요." "응, 그래." "아빠는 그 당시 군인이었어요?" "오늘따라 미란이가 여 형사처럼 왜 그러지?" "알고 싶어서요." "궁금한 것도 많군 그래." "설마 기피자는 아니었겠죠?" "내가 왜 기피를 해." "그럼 육군이었어요?" "응, 그래." "그럼 전투도 하셨겠군요." "응, 그래." "어느 전선에서 싸우셨어요?" "골치 아프게 그런 건 왜 물어. 다 물거품처럼 지나간 일들이야." "부상 하나 당하시지 않고, 아빠는 행운아셨던 모양이군요." "응, 그래. 행운아였어. 아아, 피곤해. 술을 좀 마셨더니, 피곤해서 한잠 자야겠어." "제가 국 끓여 드릴 테니까 잡수시고 쉬세요." "괜찮아, 배는 고프지 않아." "오빠가 한 달 전에 새 차를 뽑은 거 아빠도 아시죠?" "응, 알아." "그때 아빠가 얼마 주셨어요?" "난 정현이한테 돈 준 일이 없어." "그럼 새 차를 뽑을 돈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3 년짜리 할부로 뽑았다고 했어." "그래도 최소한 5 백만 원은 있어야 로얄살롱을 뽑을 수 있어요." "그 정도 돈은 있었겠지." "출판사가 적자운영이었는데, 어떻게 그만한 돈이 생겼는지 그것도 의문이에요." "의문도 많군 그래." "저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의문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미 죽은 오빠한테 섭섭하게 들릴 말을 해서 되겠어." "이제 오빠는 내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진실을 밝힐 수도 없기 때문에 제가 나서 보겠다는 거예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런 일은 경찰한테 맡겨." "경찰은 무능해요. 아직까지 물증 하나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멀잖아 수사를 종결하고 말 거예요." "아무튼 난 좀 쉬어야겠다." "네, 쉬세요." "미란이 넌 어떡할래?" "밑반찬 좀 만들고 쇠고기국도 좀 끓여 놓고 돌아 가겠어요." "열쇠는 가지고 왔어?" "네, 염려 마시고 쉬세요." "응, 그래." 노인이 소파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비틀거리며 걸어가자 미란이 얼른 뒤따라 가서 아버지를 부축하여 안방으로 모셔갔다. 그러나 류미란은 미행자가 밖에서 도청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아파트 안으로 잠입한 선글라스의 여인이 고성능 소형 도청기를 출입문 바닥의 틈새에다 부착시켜 놓은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류미란은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주방에 들어가 반찬을 만들고 쇠고기국을 끓이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녀는 자기 주변에서 무서운 음모가 전개되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채 그녀 나름대로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캐내려 하고 있었다. 마침내 방문 틈으로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미란은 인삼차 한 잔을 끓여서 쟁반에 받쳐들고 안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있었다. 미란은 텔레비전 옆에 인삼차 찻잔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아버지가 평소 서재로 사용하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책상서랍 속에 깊숙이 처박혀 있는 사진첩을 찾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란은 낡은 사진첩을 들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혹시 아버지가 일어나 그녀를 찾아도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진첩을 주방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미란은 식탁 앞에 앉아 낡은 사진첩을 펴 놓고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여고시절 우연히 아버지가 젊었을 때 군복 차림으로 찍은 빛 바랜 사진을 본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은 모두 일곱 장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 두 장은 미군과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입고 있는 군복에는 한결같이 계급장이 붙어 있지 않았다. 군모를 쓰고 찍은 사진이 네 장이었는데, 군모에도 계급장이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아버지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미군의 군복에도 계급장은 붙어 있지 않았다. 미군이 손에 들고 있는 모자에도 계급장 같은 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흑백사진인데다 외국인이라 미군의 정확한 나이는 측정하기


어려웠지만, 20 대의 아버지보다는 미군이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다. 육군이었다면 동료들과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할 텐데 동료들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고 나이 많은 미군과 찍은 사진밖에 없는 게 이상했다. 아버지는 일반 군인이 아니었어. 특수부대 특수요원이었거나 미군부대 통역원이었을 가능성이 짙어. 일곱 장의 흑백사진을 다시 한 번 세밀하게 훑어 보았다. 키가 큰 미군과 함께 찍은 사진에는 아버지의 허리춤에 권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 사진에서는 아버지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권총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권총을 차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미군과 관계 있는특수부대 특수요원이었어. 계급장이 없는 군복에 권총을 차고 미군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특수요원밖에 없어. 그런데 아버지는 왜 어물쩡하게 육군이었다고 얼버무렸을까? 그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자기 딸에게까지 감추어야 할 비밀은 아닌 것 같은데, 밝히지 않고 숨기는 게 꺼림칙했다. 오빠가 말하던 '중산리의 비밀'을 아빠는 알고 있을지도 몰라. 미란은 일곱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을 빼낸 후 사진첩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이튿날 오전 열한 시경. 수사본부의 임선화 형사는 강남병원으로 달려갔다. 9 병동에 근무하는 간호사 이창숙(李昌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류정현이 숨을 거둔 날 밤 당직 근무를 섰던 두 사람의 간호사 중 한 사람이었는데, 수사본부에 제공할 제보가 있다고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간이휴게소 등나무 그늘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러니까 6 월 21 일 밤 두 시경에 912 호실에서 간호사 한 명이 나오는 걸 봤어요." "얼굴도 봤어요?" 임 형사는 백의의 천사처럼 하얀 캡을 쓰고 있는 간호사의 눈동자를 지켜보며 물었다. "얼굴은 못 봤어요." "그럼 왜 그 당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 당시만 해도 언니인 줄 알았어요." "또 다른 당직 간호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두 시까지 언니의 근무시간이고 두 시부터 네 시까지가 제 근무시간이라 언니가 병실을 돌아보고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어요." "그럼 뒷모습만 보셨어요?" "병실 문을 닫고 나오는 옆모습을 조금 보았지만, 자다가 금방


일어났기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서 누군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저 언니이겠거니 했기 때문에 의심하지도 않았어요." "그럼 그날 밤 두 시경에 912 호실에서 나온 사람이 입고 있었던 제복이 강남병원 간호사들이 입는 제복이었어요?" "네. 확인은 못 해 봤지만, 캡도 우리 병원 간호사들이 쓰는 캡 같았어요." "그래서 의심도 하지 않고 언니인 줄 아셨군요." "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잠이 덜 깬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날 밤 912 호실에서 나온 사람이 당직 간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며칠 후에 일부러 언니한테 물어 봤어요. 그날 밤 두 시에 병실에서 나와서 화장실에 간 사람이 언니 맞느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알게 되었어요." "그럼 언니는 그 때 어디 있었다고 했어요?" "당직실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깜박 졸았다고 하더군요." "그 시간에 무슨 라디오를 들었다고 하던가요?" "언니네 친척 중에 광역의회 의원으로 출마하신 분이 계셔서 개표 실황중계를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럼 이 간호사님은 다른 데서 주무시다가 나왔어요?" "네, 그날 밤 마침 특실 하나가 비어서 거기서 좀 쉬다가 나왔어요." "실례지만, 그 특실이 몇 호실인가요?" "923 호실이에요." 임 형사는 수사 수첩에다 간단하게 몇 줄 기록한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에 어딘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언니한테 일부러 물어 보았다고 하셨는데, 어디가 어떻게 미심쩍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어요?" "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날 밤 912 호실에서 나온 간호사는 언니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이었던 같아서 일부러 물어 보았어요." "그럼 언니란 분도 키가 작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요." "네." "언니의 키가 어느 정도예요?" "164 정도 되나 봐요." "여자로선 작은 키가 아니군요." "네." "그런데 정체 모를 그 간호사의 키는 그보다 더 커 보였단 말씀이군요." "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어요." "그 밖에 미심쩍은 점은 어떤 점이었어요?" "글세요, 키가 크고 늘씬해 보였다는 것 외에는 미심쩍은 데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럼 늘씬하기도 했단 건가요?" "네." "그 언니라는 분 성함은 어떻게 되나요?" "곽민자라고 해요." 임 형사는 수사 수첩에 당직 간호사의 이름을 적는 일도 잊지 않았다. "혹시 우리 밥줄 떨어지게 하는 거 아니예요?" 비둘기 눈처럼 눈이 동그랗고 말간 이창숙이 겁먹은 눈빛으로 물었다. "수사에 협조해 주시는 분들에게 상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임 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이 간호사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윗분들이 아시면 근무태만으로 우리를 징계할는지도 몰라요." "아마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되고요." "만약 외부에서 엉뚱한 사말이 침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경비실 근무자들까지 징계당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은근히 걱정이 돼요." "종합병원에는 밤낮없이 외부인들이 출입하는데 몰래 숨어 들어오는 사람까지 어떻게 경비실에서 다 체크할 수 있겠어요." "정말 그래요. 그런 면에서 우리 나라 병원들은 아직 무질서하기 때문에 고칠 점이 많아요." "좋은 제보를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밤새도록 운행하나요?" "대개 밤 열 시 이후로는 비상용 엘리베이터 한 대만 운행하고 있어요." "그럼 엘리베이터는 밤새도록 운행되는 셈이군요." "네." "비상용 엘리베이터는 대개 누가 쓰나요?" "주로 당직 근무자들이 사용해요." "그럼 병동마다 당직 간호사들이 따로 당직 근무를 서겠군요." "네, 병동마다 당직 근무자가 따로 있어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 기회에 제가 차 한 잔 사겠어요." "수고하세요." 두 사람은 강남병원 간이휴게소 등나무 밑에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아직 물증은 잡지 못했지만, 남 형사 말대로 어떤 음모가 분명히 있긴 있었어. 남 선배는 역시 뭔가 느낄 줄 알고 냄새를 맡을 줄 아는 타고난 수사관이야.


임 형사는 강남병원 정문에서 택시를 잡았다. 서초 4 동에 사는 류상규의 아파트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데 그 비밀과 관계있는 류정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비밀을 들먹거렸던 두 사람이 행방불명 되었을까? 강남병원에서 서초 4 동의 백조아파트까지는 택시로 30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임 형사는 류상규 노인과 만나기로 전화 약속이 돼 있었다. 열두 시에서 열두 시 삼십 분 사이에 방문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 관리인에게 류 노인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늙수그레한 아파트 관리인은 조금 전에 노인이 외출했다고 대답했다. "경찰에서 나온 사람인데, 류 사장님과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어요." "그러잖아도 사람이 찾아오면 다음에 만나야 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믿을 수 없으면 올라가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죄송하지만, 인터폰으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나가신 지 십 분도 안 됐어요. 사람이 없는 집에 인터폰을 하면 뭣합니까?" "정말 나가셨어요?" "나갔다니까요. 그런데 아가씨도 경찰관입니까?" "네, 경찰관이에요. 신분증 보여 드릴까요?" "어제 온 경찰관도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어제 온 경찰관이라니요?" "어제도 아가씨처럼 예쁜 경찰관이 우리 아파트에 왔는데, 그런 말을 하더란 말입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저씨, 어제도 저 같은 여 형사가 다녀갔단 말씀이신가요?" "네, 아가씨처럼 키도 크고 날씬한 여 형사가 다녀갔어요." "어느 경찰서에서 나온 여 형사라고 하던가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 형사가 어제도 한 사람 다녀갔어요." "그게 정말이세요?" "네, 그 여 형사도 류 사장님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어요." "어떻게 생긴 여 형사였어요?" "아가씨처럼 수수한 여름 잠바 차림에 키가 큰 아가씨였는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얼굴은 어떻게 생겼다고 말하기 곤란하군요." "그래도 얼굴 윤곽은 기억하실 수 있잖아요?" "아무튼 젊고 잘생긴 여자였어요." "그런데 왜 사장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 갔을까요?"


"아드님이 죽은 후 사장님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도 아예 만나 주시지 않고 관리실에서 돌려 보내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어제 류 사장님을 찾아왔던 여 형사도 사장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말씀이신가요?" "네." "아무리 그렇지만 경찰관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보통 사람은 그럴 수 없지만, 사장님은 그럴 수 있는 분이에요." "그렇게 고집이 센 분이신가요?" "글쎄요.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는 사장님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장님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에요?" "어제는 그 여 형사가 찾아오기 직전에 사장님의 따님이 모처럼 오셨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류미란 씨 말인가요?" "네." 그 순간, 임 형사는 류미란의 아파트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인사를 남기고 걷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여 형사는 누굴까? 젊고 잘생긴 여자였다고 했는데, 그런 여 형사가 상부에서 파견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만약 시경이나 시경이나 검찰 쪽에서 수사관이 파견되었다면 미리 알려왔을 것이다. 상부에서 직접 수사관을 투입시킬 만큼 중요한 사건은 아닐 텐데, 어떻게 된 셈일까? 아무래도 이상했다. 선글라스를 낀 키가 큰 여가자 형사라고 사칭했을 가능성이 컸다. 왜 그랬을까? 임 형사는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나 정체 모를 그 여자가 형사를 사칭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류상규가 사는 백조아파트에서 미란이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개나리아파트까지는 걸어서 15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임 형사는 아파트 관리인의 허락을 받고 7 층으로 올라갔다. 류미란은 작업을 하느라고 화실에 있다가 뜻밖의 방문객의 방문을 받고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바쁘긴 하지만 찾아 주셔서 고마워요. 앉으세요." 류미란은 손바닥에 묻은 물감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말했다. "작업 중이신 모양인데, 정말 죄송해요." 임 형사는 거실의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나서 다시 한 번


사과하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냉방 장치가 가동 중이어서 실내가 아주 시원한데도 류미란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도 여고시절엔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네, 그랬었군요." "그래서 여류화가를 만나면 정말 부러워요." "말씀은 고맙지만 오늘은 내가 시간이 없어요. 용건만 간단히 얘기해 주세요." "네." "음료수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류미란은 약간 미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술가답게 감정의 변화에 예민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쁘신데 몇 가지만 물어보고 돌아 가겠어요. 오라버님께서 돌아 가시기 전에 말씀하셨다고 하신 '중산리의 비밀'에 대해서 좀 알아 보셨어요?" "못 알아 봤어요." "며칠 전엔 꼭 알아 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대는 그런 말을 했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짓 같아서 알아보고 싶지도 않아요." "부질없는 짓이 아니라 어쩌면 류정현 씨의 죽음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아주 중요한 말인지도 몰라요." "정신이 온전했던 사람이 한 말이라면 또 모르지만, 오빠는 그 때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어요."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경찰의 견해는 달라요.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깨어나서 여동생을 알아보고 한 말이 '중산리의 비밀'이란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니까요." "글쎄요, 우린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아무런 물증도 없는데 공연히 골치만 아프게 수수께끼 같은 말장난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요. 그 문제는 경찰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류미란이 며칠 전과는 달리 '중산리의 비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임 형사는 알 수가 없었다. "글머 그 문제는 우리 경찰이 알아서 처리하겠어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뺑소니 차 운전수를 잡을 수 있다면 빨리 잡아 주세요." "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일어나도 되겠죠?" "아니예요. 아직 질문할 게 더 있어요." "무슨 질문인지 빨리 해 주세요.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해요." "어제 낮에 백조아파트에서 아버님을 만나셨죠?" "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백조아파트에 계셨어요?"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하나요?"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마 오후 한 시경에서부터 오후 네 시 정도까지 백조아파트에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때 류미란 씨 외에 다른 방문객이 또 있었나요?" "다른 방문객은 없었어요." "경찰에서 왔다는 사람도 없었어요?" "네." "여 형사라는 여자가 아버님을 만나러 오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이 왔으면 내가 만났을 거예요." "그럼 벨을 누른 사람은 있었어요?" "내가 백조아파트에 있을 동안에는 방문객도 없었고 벨을 누르는 사람도 없었어요." "잘 알았어요."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류미란은 별걸 다 묻는다는 식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참고삼아 그저 한 번 물어 본 것뿐이에요." "그럼 이젠 다 끝났어요?" "네, 그런데 기왕 방문한 김에 화실을 좀 보고 갈 수 없을까요?" "아틀리에가 지금 엉망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얼른 세수하고 빨리 나가 봐야 해요." "그럼 다음 기회에 아틀리에를 구경시켜 주시겠어요?" "네" 류미란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바쁘기 때문에 돌아가 달라는 무언(無言)의 재촉이었다. 며칠 전에는 이렇게 박대하기는커녕 호감을 가지고 친절을 베풀었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흔히 예술하는 사람은 변덕스런 날씨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임 형사는 방문객을 몰아내다시피 하는 젊은 여류화가 류미란의 감정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해. 느낌이 그랬다. 수사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순간의 느낌이 중요하다는 점을 임 형사는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류미란의 아틀리에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임 형사는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했다.

중산리의 비밀을 찾아서


김인희 여사는 마음이 착잡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하더니만, 좋은 일 이후에 궂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아들 김철이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여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늘을 날 듯이 기쁜 일이요 통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은 아들 김훈에게는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선거 기간 동안 강경호 후보의 딸 강유미와 작은 아들이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약혼녀인 정지영이 돌아서는 통에 파혼당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김 여사는 강 후보의 딸 강유미가 싫었다. 작은 아들의 약혼녀인 지영은 유미의 친구였다. 그런데 약혼녀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작은 아들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같이 한 강유미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강유미는 약혼녀가 있는 아들에게 몸을 허락한 갈보같은 년이었기 때문에 싫었고,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기 위하여 친구를 배신한 년이었기 때문에 싫었다. 그런 년은 우리 집안에 들여 놓을 수 없어! 그런 년을 며느리로 삼기 위해 지금까지 내가 고생해 온 게 아니야! 강경호 후보 역시 싫었다. 어제의 적이었기 때문에 싫었고, 과거엔 친일파였기 때문에 싫었다. 여당 쪽에 든든한 줄이 있고 사업에 성공하여 돈이 많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김인희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지영이는 아주 좋은 며느리감인데....... 집안도 좋고 성품도 좋고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은 아이인데, 그렇게 좋은 약혼녀를 두고 그런 잡년에게 마음이 빼앗기다니....... 병신 같은 놈! 하나밖에 없는 제 엄마 마음도 모르는 놈! 생각할수록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배신자를 가장 싫어하는 어머니의 성품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친일파의 딸과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특하기도 했다. 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 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 속에 들어가야 하듯이 강경호 후보를 잡기 위해 강 후보의 딸을 손아귀에 넣은 것은, 큰 아들의 말대로 동생이 형의 승리를 위해서 마지막 카드를 뽑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여당 후보를 누르고 형을 당선시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그래도 마음이 많이 풀렸다. 하기야 훈이 아비도 그랬으니까. 그게 달린 사내들치고 열 여자 마다하는 사내가 없으니까. 그런 줄 알면서도 가랑이를 벌려 준 년이 나쁜년이지 사내 쪽이 나쁘다고 할 수 없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어느새 김인희는 자기 아들 편을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보다 더 난감한 문제도 잘 해결해 나왔는데, 훈이가 파혼당한다고 해서 여자가 없어서 결혼을 못


하겠어. KS 마크를 달고 있는 훈이한테 결혼문제는 어려울 게 없어. 양주로 손수 칵테일을 한 잔 만들어 마신 김인희는 자신감이 생겨 빙그레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손해배상까지 각오하고 파혼이야 당하면 당할 수 있을 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복잡 미묘한 사건 때문에 김인희는 경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날 밤 훈이가 그 여자하고 신사호텔에 투숙한 후 호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만약 호텔 밖으로 나왔다면 알리바이가 사라지기 때문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듯이 형제끼리도 서로 죽이는가 하면 아버지가 친딸을 사창가에 팔아 먹기도 하는 세상인데, 만약 우리 훈이가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그날 밤 정현이를 해쳤다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그럴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다. 가능성이란 항상 그림자처럼 사람을 따라 다니는 법이었다. 경찰이 생각하는 것처럼 류정현이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피살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류정현이 죽기 전에 '중산리의 비밀'이란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말을 남겼기 때문에 경찰은 중산리 출신인 김인희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 훈이와는 상관없는 사건이어야 하는데....... 거실의 벽시계가 오후 3 시 5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초경찰서의 남 형사가 방문하겠다던 시간이 5 분 지나고 있었다. 그 양반이 왜 나를 자꾸 귀찮게 만드는지 몰라. 김인희는 벽시계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남 형사의 방문을 박절하게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한 번 약점을 잡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류정현이 교통사고를 당한 그날 밤, 작은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집에 돌아와 잤다고 진술했다가 들통이 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남 형사의 방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병신 머저리 같은 놈! 사내대장부가 형님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비상수단으로 상대 후보의 딸을 건드렸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했어야지. 그랬어야 내가 실수를 안 하지. 아파트 경비원까지 매수하여 작은 아들의 알리바이를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망신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곤욕을 치를 뻔했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을까? 바로 그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김인희는 현관으로 나가서 방문객을 확인한 후에 출입문을 열었다.


7 월에 접어 들면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인지 남 형사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김인희는 방문객에게 앉을 자리를 권한 후 얼음을 띄운 냉커피 두 잔을 만들어 왔다. 하얀 모시 저고리 차림의 그녀는 50 대 후반의여자답지 않게 언제 보아도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갈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일 뿐 아니라 아름답고 우아하여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무척 더운 모양이군요. 더운데 수고가 많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 불청객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염치불구하고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난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예요." "김 여사님은 중산리 출신 아니십니까?" "호적상으로는 중산리 출신이지만, 내가 태어난 곳과 내가 자란 곳은 중산리가 아니예요. 만주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자랐어요." "그럼 중산리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으십니까?" "아버님의 고향이 중산리예요." "실례지만, 아버님은 언제 돌아 가셨습니까?" 남 형사는 김인희의 눈동자를 지켜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버님은 의사였는데, 6.25 동란 때 납치를 당하셨어요." "그럼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십니까?" "네." "어디서 어떻게 납치를 당하셨는지 아십니까?" "몰라요." "혹시 그 당시 기승을 부리던 지리산 공비들에게 납치를 당하신 건 아닙니까?" "글쎄요, 그런 소문도 떠돌긴 했지만 확실치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아버님이 북쪽으로 끌려 가셨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그럼 그 당시 아버님과 함께 살지 않으셨습니까?" "네, 떨어져 살았어요. 난 그 당시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그런데 까마득한 그 옛날 일은 왜 물어 보시는 거예요?" "혹시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보탬이 될까 싶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럼 중산리의 비밀이 6.25 동란과 관계가 있을 만큼 오래된 비밀일 수도 있단 말인가요?" "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찰이 조사해 본 결과 지리산 밑에 있는 중산리라는 작은 망르에 무슨 비밀이 있다면 6.25 전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과 관계된 비밀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나를 의심하게 되었단 말이군요."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중산리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난 중산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에 협조를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아버님의 고향이 중산리이기 때문에 그래도 중산리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요, 중산리는 천왕봉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이라는 것 정도밖에 중산리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김 여사님처럼 중산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중산리의 비밀 운운했던 류정현 씨가 죽었고, 중산리의 비밀 운운하는 말을 들었던 그 밖의 두 사람이 실종되었어요." "그 밖의 두 사람이 실종되었단 말은 처음 듣는 얘기로군요." "두 사람 모두 류정현 씨에게서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들은 사람인데, 실종된 지 이미 보름이 지났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들었다고 해서 실종이 되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이제 선거가 끝났기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류정현 씨가 강경호 후보측에다 중산리의 비밀을 팔아 먹으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당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경찰의 추리입니다." 남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단검을 들이대듯이 내뱉었다. 그러나 김인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경찰은 오히려 우리 쪽을 의심하고 있는 셈이군요." "어디서나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는 게 경찰의 생리입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더욱이 정현이는 우리 작은 애 친구예요. 난 정현이와 미란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있어요." "돌아가신 분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류정현 씨는 귀중한 정보가 있으면 다른 후보측에 팔아 넘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더군요." "정현이는 그렇게 나쁜 청년이 아니에요." "류정현 씨에게는 사기전과가 있더군요. 그리고 얼마 전에 구입한 새 승용차의 구입자금도 출처가 분명치 않은 자금이더군요." "그래도 명색이 출판사 사장인데, 그 정도 돈은 있었을 거예요." "출판사는 적자 운영으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나한테는 출판사가 잘 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어요?" "네, 그런데도 새 차를 뽑은 것이 이상해서 조사해 본 결과 지난 5 월에 새로 개설한 통장을 그의 사무실에서 찾아냈습니다." 남 형사는 박태섭이란 이름의 동화은행 통장에 5 백만 원이 입금된 사실과 입금시킨 사람은 심영수였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박태섭과 심영수, 두 사람 모두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령인물이란 사실도 덧붙였다. "경찰은 류정현 씨가 그 유령인물의 통장에서 뽑아낸 5 백만 원을 새 차를 구입하는 데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돈을 찾아 갔는지 은행에서 확인해 보셨어요?" "그 통장에서 류정현 씨의 지문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은행에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정현이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데, 믿어지지 않는군요." "실례지만, 류정현 씨의 부친은 언제부터 알게 되셨습니까?" "글쎄요, 아마 20 여 년 전부터 알고 지냈을 거예요. 류 사장님이 복덕방을 하실 때부터 우리가 신세를 좀 졌으니까요." "20 여 년 전이라면 부동산 붐이 한창 일어날 시기였군요." "네, 그때 강남 쪽에다 땅을 많이 사 둔 사람은 재미를 톡톡히 본 셈이죠." "그럼 그 후로 류상규 사장님과는 계속 가깝게 지내셨습니까?" "네." "같은 경상도 분들이라 더 가깝게 지내신 게 아닙니까?" "그런 점도 없잖아 있었겠죠. 하지만 난 경상도 사람이라 할 수도 없어요. 경상도에선 거의 살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조금이라도 살긴 사셨단 말씀이시군요." "네, 피난가서 조금 살았어요." "몇 년 정도 사셨습니까?" "1 년 남짓 살았어요." "그럼 중산리에서 사셨습니까?" "아니예요, 진주에서 살았어요." "제가 얼마 전에 중산리가 있는 산청군에 가 보았는데, 진주에서 가까운 곳이더군요." "네, 가까워요." "그럼 진주로 피난 가셨을 때에도 아버님을 못 만나셨어요?" "네, 못 만났어요. 아버님은 그때 이미 행방불명이 되셨으니까요." "류상규 사장님의 고향은 하동이라고 하던데, 진주에서 하동도 가까운 곳이지요?" "네,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김인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 형사가 일부러 신경에 거슬리는 질문을 던져도 그 질문에 휘말려들지 않고 평온을 유지했다. "실례지만, 부군과는 언제 사별하셨습니까?" "1954 년도에 사별했어요." "무척 빨리 결혼하셨던 것 같군요." "옛날엔 그랬으니까요. 결혼도 빨리 하고 사별도 빨리 했어요." "그럼......."


남 형사는 말끝을 흐렸다. 말하기 거북한 질문이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물어 보세요. 숨길 게 없으니까 훈이 아빠에 대홰서도 알고 싶으면 물어 보세요." 김인희는 남 형사의 가슴 속을 환히 읽고 있기라도 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숨길 게 없다고 했잖아요. 훈이 아빠하고는 63 년도에 헤어졌어요.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그곳에서 좋은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어요." "그래서 혼자가 되셨군요." "그래도 자식들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게 살았어요. 후회없이 말예요." "정말 훌륭한 어머님이십니다." "경찰관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생전 처음이에요." "경찰에게도 눈물이 있고 인정이 있다는 사실을 김 여사님이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남 형사님 같은 경찰관이 많아지면 인식이 금방 달라질 거예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네 분 모두 김(金) 씨 일색이군요. 물론 우리 나라에 김씨가 많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특이한 가문 같군요." "아들 못지않게 외동딸을 사랑해 주셨던 아버님이 김씨이기 때문에 일부러 김씨만을 택했어요. 같은 김씨지만 동본(同本)이 아니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김 여사님은 아들 몫까지 다하신 분이군요." "난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다 그럴 거예요.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제 생각엔 사건 수사도 그런 것 같아요. 류정현 씨가 죽고 최영욱 씨가 실종된 후에야 비로소 두 사람이 교도소 동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정현이는 몇 달 살지 않고 출소했어요." "그래도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과 음모를 꾸민 증거가 있는 걸 어떡합니까." "도대체 정현이가 무슨 음모를 꾸몄다는 거예요?" "현재로썬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어떤 음모를 꾸몄다는 것밖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계속하시는군요." "아직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도밖에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뭔가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실망했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최영욱 씨라는 분을 아십니까?"


"난 그런 사람 몰라요." "실종되기 전에는 경기도 부천에 살았던 사람인데, 때때로 예술가 흉내를 잘 내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 흉내만 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먹고 살아요?" "그래서 그런지 사기전과가 세 번이나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사진작가 흉내를 내면서 여자를 홀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한심한 양반이로군요." "그 양반의 이름이 최영욱인데, 혹시 이름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으십니까?" "네, 없어요." "그럼 혹시 김 여사님 주변 사람들 중에서 중산리의 비밀을 알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중산리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얼굴 없는 범인은 중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과 중산리의 비밀을 들먹거리는 사람을 노리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나하고 남 형사님까지 위험하겠군요." "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바로 그겁니다. 이 세상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신 이상자들이 훨씬 많고,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우습게 여기는 미치광이들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이 정현이를 해치고 두 사람을 납치했단 말인가요?" "네, 십중팔구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자의 소행일 것입니다." "아무리 경찰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수법이 대담하고 치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겐 모두 잠재적인 살인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의 심지에 한 번 불이 붙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쇄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범인에게 사람을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만한 적당한 이유나 구실이 있을 때는 파리채로 파리를 잡듯이 그 구실을 핑계삼아 사람을 마구 죽일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그 범인의 살인 이유나 살인 구실이 중산리의 비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단 말인가요?" "네, 그래서 중산리의 비밀을 들먹인 사람은 누구나 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 비밀을 알 만한 사람이 중산리엔 없을까요?" "글쎄요, 도대체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도


알고 싶군요." "김 여사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지금 중산리의 비밀에 수사력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곧 그 비밀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안 중산리의 비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위험하기 때문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합니다." "중산리의 비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 누군가요?" "아마 직접, 간접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닫고 있을 것입니다." "난 남 형사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기 때문일까. 김인희는 미동도 하지않고 대답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침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중산리의 비밀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얼굴 없는 범인의 무서운 살인욕구를 충동질하는 배후 인물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갈수록 범행이 치밀하고 완벽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범인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살인욕구를 부추기는 자도 있고 정보를 제공하는 자도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범행이 완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범행이 완벽해지고 있다뇨? 그럼 지금도 범행을 계속하고 있단 말인가요?" "지금도 범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범인들의 움직임까지 예측하고 계시는 걸 보니, 범인들을 곧 잡을 수 있겠군요. 언제쯤 잡을 수 있겠어요?" "글쎄요......." 남 형사의 대답은 애매했다. 그러나 김인희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깊었다. 50 대 후반의 여인답지 않게 신비한 그 무엇이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또 다른 질문이 있으세요?" "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홍희숙 여사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습니까?" "전에도 그런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또 대답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수첩에 적어 놓지 않아서 잊어버린 것 같군요. 30 년 정도 됐다고 하셨던가요?" "네." "그럼 류 노인보다 홍 여사를 먼저 알게 되신 셈이군요." "네." 김인희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인간관계가 류정현의 교통사고와 무슨 연관성이 있으냐고 되묻듯이 남 형사의 눈동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밖의 대화를 나누면서도 차가운 눈과 눈으로 소리없는 눈싸움을 계속하다가 헤어졌다. 베란다 창 틈으로 아파트 단지에서 멀어져 가는 남 형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김인희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건 안 돼. 그 비밀만은 절대로 안 돼. 그 비밀은 영원히 묻어 두어야 해. 김인희의 시야에서 남 형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녀는 커튼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중산리의 비밀을 들먹인 사람은 누구나 다 위험하다고? 김인희는 조금 전에 남 형사가 남긴 말을 속으로 뇌까리며 차갑게 웃었다. 이미 땅에 묻혀 흙이 되고 티끌이 된 비밀을 파내려 하다니, 천벌을 받은 거야. 천벌을 받은 게 분명해. 큼직한 유리잔에 꼬냑을 채워 안주도 없이 마시면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 골짜기는 깊기 때문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돼 있어. 그리고 그 골짜기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 김인희는 유리잔에 조금 남은 꼬냑을 들이키고 나서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어쩌다 불똥이 여기까지 튀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해 가을, 그러니까 38 년 전 열일곱 살 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그 해 가을에 일어난 사건 가운데는 두번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그 해 가을. 중산리의 어느 초가(草家)에서 이틀 밤을 묵은 후 인희는 아버지와 헤어져야 했다. 아버지는 산으로 올라가고 그녀는 아랫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아버지가 인희의 입산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만날 기약만 남기고 헤어져야 했다. "인희야, 정말 면목이 없구나! 이럴려고 널 데려다 키운 게 아닌데......." "저도 잘 알아요, 아빠! 하지만 전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끝까지 살아 남아서 아빠를 다시 만날 거예요." "그래, 끝까지 살아 남아야지." "아빠도 끝까지 살아 계셔야 해요." "응, 알았어. 그런데 혹시 인희한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김정섭이란 사람을 찾아봐. 바를 정(正)에다 화할 섭(燮)자를 쓰는 분인데,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군의관이야. 내 후밴데 아주 좋은 사람이야. 계급은 아마 대위일 거야." "네. 알았어요, 아빠." "김정섭이 인희 네 사진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틀림없이 널 기억하고 있을 거야." "잘 알았어요."


"그럼 내려가 봐." "네, 아빠. 몸 조심하세요, 아빠." 인희는 자기의 처녀를 아낌없이 바친 첫남자를 헤어지는 순간까지 아빠라고 불렀다. 김규식(金圭植)은 호적상으로는 인희의 친아버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천애고아가 된 어린 그녀를 호적에 입적시키고 양육시켜 준 아버지였으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나이 차이도 열여섯 살밖에 나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녀지간이라기보다 친척이나 형제지간으로 보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특히 인희의 여학교 동창생들은 '무슨 아빠가 저렇게 젊어?'하고 의아해 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사진첩 속에 소중하게 꽂혀 있던 허름한 옷차림의 낯선 부부와 그 부부가 안고 있는 아기가 어쩌면 자기 자신과 자기 부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다가왔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다소나마 감수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역시 그 분은 지혜로운 분이셨어.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그 사진을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셨던 거야. 인희는 지금 자기 나이보다 훨신 더 젊은 그 당시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두 눈에 눈물을 적셨다. 그 날, 인희는 아버지와 헤어진 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나무 숲속에 몸을 감추어야 했다. 난데없이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가까운 대나무 숲속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대나무 숲속에는 몸을 숨길 만한 작은 굴이 세 개나 있었다. 총소리는 근처 마을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따발총 소리와 엠원 소총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울리고 있었다. 인희는 겁이 나서 대나무 숲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간헐적인 총소리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굴 속에서 놀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가슴을 두근거리다가 어느새 인희는 잠이 들어 버렸다. 지난 밤에 밤새도록 너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첫날 밤은 보시하는 마음으로 인희 쪽에서 서둘러 한 번으로 끝냈지만 둘쨋날 밤인 어젯밤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때는 아버지와 딸 사이가 아니었다. 이미 부녀관계는 지난 밤에 허물어져 버리고 새로운 남녀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오랫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 삼십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와 처음 남자를 알게 된 숫처녀 사이에는 뜨거운 불꽃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게 마련이었다. 더욱이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헤어져야 할 마당이었기 때문에 두 남녀 사이에 타오르는 불길은 용암이 분출하는 활화산처럼 맹렬하고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잤을까. 인희는 인기척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여러 명의 발자국


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이미 대나무 숲속으로 여러 명이 들어선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바로 그녀가 숨어 있는 굴 입구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음, 생각보다 괜찮은 곳인데." "예, 그렇습니더. 이 대밭에는 굴이 여러 개 있기 땜에 먹을 것만 있으면 얼매든지 버틸 수 있는 곳입니더." "음, 그래. 그럼 낮에는 여기 숨어 있다가 밤에 활동을 재개하도록 해야겠군." "예, 그게 좋겠습니더, 군관 동무." "일단 굴 속을 수색해 봐." "예." 인희는 더 이상 굴 속에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발각되기 전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사람을 알리는 게 오히려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수색대원이 어두컴컴한 굴 속으로 들어왔다가 사람을 발견하고 적군인 줄 알고 발포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기 때문이었다. "화, 환자가 있어요!" 간신히 내뱉었으나 입 밖으로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화, 환자가 있단 말예요." 그때서야 비로소 굴 밖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안에 누구 있어?" 권총 노리쇠를 후퇴시키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있어요! 환자가 있어요!" "그럼 두 손 들고 나와." "네, 나가겠어요." 인희는 두 손을 들고 절룩거리면서 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의 오른쪽 발목에는 피묻은 붕대가 감겨 있어 정말 환자처럼 보였다. 그날 밤을 인희는 무사히 넘겼다. 이십대 후반의 눈이 음흉하게 생긴 군관 동무라는 사내에게 취조를 받았으나, 부상자들을 위해서 입산한 아버지 김규식 덕분에 능욕은 당하지 않았다. 대나무 숲속에 진지를 구축한 빨치산은 열두 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은 군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선가 두 명의 여자를 끌고 와서 차례로 욕을 보이는 모양이었다. 여자들의 얼굴은 직접 볼 수 없었지만, 비명소리를 듣고 두 명의 여자가 못된 놈들에게 윤간당한다는 것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둘쨋날 밤도 인희는 무사히 넘기는가 싶었다. 그러나 군관 동무는 아무도 몰래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한테 다가온 사내가 눈이 음흉한 군관 동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낮에 그녀를 다시 꿇어앉혀 놓고 취조하는 동안 사내는 그녀의 유방을 애무하면서 이미 경고했가 때문이다. "내가 달라고 할 때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그때는 끝장나는 줄 알아. 그러잖아도 군침을 흘리고 있는 내 부하들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널 내주고 말 테니까 알아서 해." 군관 동무의 그 경고는 무시할 수 없는 경고였다. 눈이 음흉한 사내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짐승같아 보였다. 어둠 속에서 인희는 소리없이 몸을 뒤척이다가 마침내 사내에게 몸을 열어 주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 군관 동무 뒤에 도사리고 있는 열 명이 넘는 짐승같은 사내들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동굴 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군관 동무는 밤마다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처음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부처님께 보시하듯 공양하는 마음으로 천애고아인 나를 키워주신 그 분에게 송두리째 드린 몸인데, 바로 그 몸으로 날강도 같은 사내를 받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군관 동무와의 관계는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엿새째 되던 날 오후, 국방군의 공비 소탕작전에 밀려 대나무 숲에 숨어 있던 일당 가운데 다섯 명은 전사하고 일곱 명은 도주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홍희숙을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기습을 당한 일당은 황급히 패주하느라고 굴 속에 가두어 놓았던 여자들을 끌고가지 못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굴 속에 갇혀 있던 세 여자는 국방군의 노획물이 되고 말았다. 당시 스무 살 안팎의 세 여인의 모습은 비참했다.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리면서 여러 사내를 상대해 온 두 여인의 모습은 인희 쪽보다 더욱 비참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때 이미 인희는 사내란 놈들은 모두 짐승같은 놈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방군들의 눈빛 역시 빨치산들의 눈빛처럼 암컷을 탐내는 수컷의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국방군의 노획물이 되어 아랫마을로 끌려 내려오자마자 인희는 국방군 장교에게 매달렸다. 기회를 놓쳤다가는 그날 밤부터 다시 국방군의 밥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장교님, 난 빨갱이가 아니예요." "그럼 왜 대밭에 숨어 있었어?" 허리에 권총을 찬 육군 장교가 아주 차갑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로 장교의 관심을 끌었다. "아저씨처럼 우리 오빠도 육군 장교란 말예요." "거짓말하지 말아."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김정섭 대위님이 우리 오빠란 말예요."


"그 말이 정말이야?" "네, 정말이에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제 이름이 김인희예요." "좋아, 육군본부 어디 근무하는 분인지 알아?" "네,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군의관이에요.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 분이 당신 친오빠란 말이야?" "네, 친오빠예요." 내친 김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 다음 일은 하늘에 맡기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확인해 보도록 하겠어. 하지만 거짓말일 때는 각오해야 해." "정말이에요. 확인해 보세요." "그럼 함께 있던 두 여자는 당신 친군가?" "아니예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알았어. 육군본부 군의관 김정섭 대위님이라고 했지?" "네." 그 장교는 육군 중위였다. 그 당시 인희는 장교와 사병을 구별할 줄은 알았지만, 계급장을 정확하게 식별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 바로 그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무려 38 년 전 일이었으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는 가슴 아픈 추억의 비디오를 전화벨 소리가 여지없이 지워 버렸다. 김인희는 전화기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여보세요? 장미아파트입니다." "김인희 여사신가요?" 아주 느려터진 기분 나쁜 목소리가 묻고 있었다. "네, 그런데요?" "김 여사, 나는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흐린 날 두꺼비 울음소리처럼 느리고도 쉰 목소리였다. "당신은 누구요?" 김인희는 침착하게 물었다. 결코 서두르거나 겁먹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중산리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잖소!" 여전히 비를 재촉하는 두꺼비의 울음소리처럼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미안하지만, 난 중산리의 비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전화 끊겠어요." 김인희는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상스럽게도 조금 전보다 전화벨 소리가 한층 더 음산하게 들렸다. 그녀는 녹음기부터 작동시켜 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왜 전화를 함부로 끊었어!" 역시 징그러운 두꺼비 울음소리처럼 느리고 쉰 목소리였다. "......." "한 번만 더 무례하게 굴었다가는 두 아들이 작살날 줄 알아."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蝗蟲)이야!" "당신의 정체를 밝혀요." "더 이상 까불면 중산리의 비밀을 폭로하겠어." 처음 전화했을 때와는 달리 아예 반말투로 협박해 왔다. "왜 대답이 없어?" "도대체 중산리의 비밀이 뭐예요? 뭔지 알아야 대답할 거 아니예요." "시치미를 떼도 소용이 없어. 당신은 애비 없는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어. 특히 시의원의 애비가 빨갱이였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면 아주 재미있어 하겠지!" "뭐, 뭐라구요?" "놀라는 걸 보니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군 그래." "나쁜 놈! 개 같은 놈!" 김인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전화를 끊었다. 50 여 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답지 못한 반응이었다. 금방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벨이 길게 여러 차례 울리는 동안 김인희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경고하겠어. 한 번만 더 무례하게 전화를 끊었다가는 당신의 두 아들을 제물로 삼겠어."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예요?" "음,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내가 원하는 건 돈이야." "그럴 줄 알았어요. 얼마를 원해요?" 김인희는 이성을 되찾고 침착하게 물었다. "3 일 이내로 10 억을 입금시켜." "뭐라구요? 10 억이 누구 애 이름인 줄 아세요?" "시의원의 명예와 목숨보다 10 억이 더 귀중하거든 마음대로 해." "10 억이 없어요." "구해 봐. 큰손이잖아." "3 억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3 억은 안 돼. 5 억 이하로는 한 푼도 깎을 생각 하지 말아." "알았어요.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거예요.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땐 당신이 다칠 거예요." "나는 원래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그대신 녹음을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날에는 끝장이 날 줄 알아야 해." "......." "알았어, 몰랐어?" 두꺼비처럼 느린 목소리가 약간 흔들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알았어요." "필기도구는 준비돼 있겠지?" 차츰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에 쫓기고 있는 듯했다. "빨리 적어." "네." "중앙은행 온라인 번호 122-02-0256-539 번 박영식." "다시 한 번 천천히 불러 주세요." "응, 알았어." 은행 통장번호 때문에 두 차례 같은 내용의 통화를 반복한 후, 얼굴 없는 상대방은 마지막 못을 박듯 말했다. "7 월 23 일 오후 3 시까지 입금시키지 않으면 두 아들이 제물이 될 줄 알아." "여보세요, 잠깐만!" 김인희가 소리쳤으나 유령의 목소리는 응답이 없었다. 흡사 뒤통수를 난데없이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머리 속이 멍했다. 현실같지 않았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인희는 골빈 사람처럼 멍하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아니, 어떤 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냐하면 기분 나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혹시 귀신한테 홀린 것이 아닐까? 5 억이나 되는 큰돈을 선뜻 입금시키겠다고 대답하다니,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인가 하는 그 귀신한테 홀린 것 같아. 귀신한테 홀리지 않고는 그런 엄청난 약속을 함부로 했을 리가 만무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귀신한테 혼린것은 아니었다. 5 억이 문제가 아니야. 우선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사건을 수습하는 게 급선무야. 사건개요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달 전부터 우리 가족들 주변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정말 그랬다. 류정현의 교통사고에 이은 호흡장애로 인한 질식사는 김인희의 가족과 전혀 무관한 사건은 아니었다. 도대체 중산리의 비밀이 뭐길래 나를 이처럼 곤경에 몰아 넣는 걸까? 알듯 하면서도 모를 일이었다. 김인희는 중산리에서 고통을 당한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설마 우리 철이의 아빠가 바로 그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중산리의 비밀' 운운하는 것은 아니겠지.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김철의 아버지는 6.25 때 전사한 김명호(金明浩)로 되어 있었다. 호적상 엄연히 혼인신고까지


되어 있었다. 하늘 아래서 김규식과 김인희의 깊은 관계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바로 김인희 한 사람밖에 두 사람의 깊은 관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고 그때 그 일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우선 돈부터 구해야 해. 그래야 시간을 벌 수 있고 명예도 지킬 수 있어. 중산리의 비밀을 알아내는 건 그 다음 문제요, 그 다음 일이야. 협박범의 통장에 입금시킬 5 억을 구해야 했다. 5 억을 입금시킨 후 극비리에 경찰에 알려서 돈을 찾아가는 범인을 체포하더라도 우선 입금은 시켜 놓아야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도 돈은 꼭 필요했다. 5 억이란 거액을 어디서 빌리지? 김인희의 수중에는 그만한 거액이 없었다. 두 아들 신변에 일어날 수도 있는 불행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슨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누구한테 융통해 달라고 할까? 몇몇 얼굴이 떠올랐으나 일이천만 원 정도면 몰라도 억대를 융ㅌ해 줄 만한 얼굴은 없었다. 김인희는 현재 진달래백화점 대표이사였다. 그러나 이미 큰 아들 김철에게 경영권 전부를 넘긴 상태였기 때문에 짧은 시일 안에 5 억을 융통하기란 불가능했다. 더욱이 선거가 끝난 지 한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자금으로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돈을 메우기에 바쁠 정도였다. 실제로 사업을 이끌어 나가던 현역시절에는 지하금융계의 대부(代父) 노릇을 하는 큰손에게 급전(急錢)을 얻어 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방법조차 쓸 수가 없었다. 3 억 정도만 융통할 수 있으면 2 억 정도는 철이하고 훈이한테 부탁할 수 있을 텐데....... 3 억을 누구한테 부탁하지.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3 억 정도는 융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지하금융계의 큰손들과는 통하는 사람이니까. 검은 돈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김인희의 뇌리에 떠오른 그 사람은 해성병원 원장 김정섭 박사였다. 38 년 전, 육군병원에 소속되어 있던 김정섭 대위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아 전화기 앞으로 다가섰다. 원장비서실 번호를 누르는 가늘고 긴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실례지만 누구시라고 말씀드릴까요?" 젊은 여비서가 물었다. 마침 원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인희라고 전해 주세요."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굵은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저 김인희에요" "오랜만입니다, 김 여사님." "부탁이 있어서 전화드리게 되었습니다." "부탁이라니요?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네, 돈이 좀 필요해서 전화드리는 거예요. 융통해 주시면 차용증을 쓰든지 어음을 끊겠어요." "얼마 정도 필요합니까?" "3 억만 융통해 주세요." "지금 당장 나한테는 그만한 돈이 없지만, 한번 구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선거 땐 빌려 드리겠다고 해도 끝내 사양하시더니만, 갑자기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네, 급하게 좀 쓸 데가 생겼어요. 내일 모레 저녁까지 융통해 주시면 한두 달 쓰고 꼭 갚겠습니다." "혹시 훈이 결혼비용 때문에 필요한 거 아니십니까?" "아니예요."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는지 궁금하군요." "갚을 때 말씀드리겠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김인희는 서둘러 먼저 전화를 끊었다. 3 억의 용도를 적당히 둘러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왕 빌리는 김에 5 억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할 걸 잘못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다시 2 억을 추가시킬 수가 없었다. 김인희는 나머지 2 억을 마련하기 위하여 큰 아들 김철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정체모를 노신사 살고 싶었다. 숲 속의 새처럼 살고 싶었다. 윤옥주는 죽고 싶지 않았다. 숲 속의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살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을 치려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한 박사가 아침 일찍 자가용 그랜저를 손수 운전하여 별장을 빠져 나가던 날 탈출을 시도했다.


윤옥주는 작은 가방에 그때까지 선물로 받은 귀중품을 챙겨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별장을 빠져 나가려 했다. 다행히 별장의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울창한 숲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현관문을 나섰다. 정원을 가로질러 별장의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육중한 쇠창살로 엮어진 대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바로 그녀의 등 뒤에서 산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돌아 본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아니, 심장은 금방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데도 두 발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느새 어디서 나타났는지 인상이 험악하기 짝이 없는 거인이 한 사람 그녀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애꾸눈에 곰보였다. 그리고 벙어리였다. 짐승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는 그의 우람스런 왼손에는 도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날 밤 윤옥주는 고문을 당했다. 한 박사는 그녀를 발가벗겨 놓고 가죽 회초리로 마구 때리고 담뱃불로 그녀의 등과 엉덩이를 지져댔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인간이라고 했어. 그런데 옥주는 약속을 어겼어." "요, 용서해 주세요. 다,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어요." 무릎을 꿇고 빌어도 소용이 없었다. 한 박사의 두 눈에는 독사의 독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날 배신하고 도망쳤다가는 피를 보게 된다고 미리 경고했어. 그런데도 넌 나를 배신했어. 배신자들은 모두 죽어야 해." "하, 한 번만 살려 주세요, 한 박사님! 아, 앞으론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어요."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독기가 머리 끝까지 오른 한 박사는 윤옥주가 기절할 때까지 고문을 계속했다.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당한 잔인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후, 윤옥주는 도망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때때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났지만, 더욱 강화된 감시 때문에도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한 박사가 외출한 후에는 좀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애꾸눈 곰보가 반드시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녀가 고문을 당한 다음날부터 어디서 끌고 왔는지 모르지만 셰퍼드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윤옥주는 포로였다. 별장 안에 갇힌 한 마리 작은 새였다. 숲 속으로 날아가고 싶어도 날개가 없어 날지 못하는 가련한 새였다. 나를 별장에 가두어 놓고 있는 한 박사는 도대체 무얼하는


사람일까? 한 달이 지났으나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사진작가 한주용은 아버지가 박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무슨 박사인지 자기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었다. 그저 돈 많은 박사님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말했던 걸 보면 한 박사는 한주용의 친아버지가 아닌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자기 아버지가 무슨 박사인지 모르는 아들이 있다는 게 이상하기 때문이다. 가짜 박사라면 또 모르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아버지가 무슨 박사님인지는 비밀이라고 말했었다. 그러고 보면 한주용은 아버지가 무슨 박사인지 알고 있으면서 그녀에게 알려주기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말을 했던 것이 그녀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한주용은 비록 술에 취해 있었지만, 분명히 이런 말을 했었다. '옥주, 우린 하나가 되어야 해. 우리 주변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라는 말을 분명히 했었다. 그녀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되물었을 때, 한주용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적당히 얼버무렸으나 분명히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그가 말했던 어떤 음모란 도대체 무엇일까? 혼자 있을 때, 여러 차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그가 말한 '어떤 음모'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반면에 거리에서 사진작가 한주용을 만나기 전 어디선가 그를 목격했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디서 보았을까? 어디서 한 번 보긴 본 사람 같은데, 어디서 본 사람일까? 한주용은 그날 밤 분명히 '우린 운명적으로 오늘 처음 만났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뭔가 감추어진 비밀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맞아. 우리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만났던 거야. 다시 말해 한주용은 이미 나를 알고 나한테 접근해 왔던 거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주용의 짙은 눈썹과 깊숙한 두 눈을 떠올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맞아! 한주용 씨는 바로 그 사람이야. 류정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 은하수에서 류정현 씨와 술을 마시고 먼저 나간 바로 그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라는 한주용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한주용은 한 박사의 지시에 따라 나를 유혹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나름대로 위험을 느꼈던 게 분명해.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어.'라는 한주용의 말을 되씹으면 되씹을수록 한 박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한주용은 한 박사를 아버지라고 했다. 직접 한 박사를


아버지라고 소개하진 않았지만, '별장 주인이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박사는 한주용을 자기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 아닌 것 같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아무리 아들답지 않은 아들이라 해도 자기 아들을 죽인 여자를 용납하고 그 여자한테서 아들대신 아기를 얻겠다는 발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환상살인 내지는 몽중살인을 했기 때문에 용납한다는 그럴싸한 구실을 붙이고 있지만, 그녀는 그 모든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한주용 씨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죽인 것처럼 누군가가 꾸며 놓았던 거야. 한 박사의 짓이 아니면 애꾸눈의 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이미 한주용의 시신은 사라져 버리고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는 사진은 윤옥주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었다. 한 박사는 한주용과 나를 철저하게 이용해 먹기 위하여 이 별장으로 끌어들인 게 분명해. 그러니까 이번엔 내 차례인지도 몰라. 그 사람처럼 나 역시 이용해 먹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잔인하게 죽일는지도 몰라. 공포가 엄습해 왔다.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나한테 또 어떤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가두어 놓고 있을까? 그녀는 지금까지 두 번 한 박사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히로뽕을 맞은데다 한 박사가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만약 도망치다가 붙잡히는 날에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반면에 뽕주사를 맞았기 때문인지 한 박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데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지 않아 그가 시키는 일을 대담하게 해낼 수 있었다. 한 박사는 왜 류정현 씨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하게 했을까? 과연 그의 말대로 고통스럽게 사는 것보다 안락사(安樂死)를 시켜야 좋을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류정현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하게 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백조아파트 5 동 303 호에 도청을 하게 만든 이유도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아파트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여형사라고 말하게 했을까? 여기자나 그 밖에 다른 구실을 얼마든지 붙이고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말이야. 실제로 한 박사는 그녀보다 이삼 분 정도 앞서 백조아파트에 들어가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날 여형사로 가장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한 박사가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면서 여형사 노릇을 하게 만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한 박사가 모든 일을 내게 뒤집어 씌우려고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 아닐까? 아들이나 딸 하나만 낳아주면 소원대로 다 해 주겠다고 나를 안심시켜 놓고 나한테 모든 일을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게 분명해. 한 박사가 그녀에게 아들을 낳아 달라는 요구도 진실성이 없는 요구인 것 같았다. 정말 내가 임신하기를 원하는 노인이라면 나한테 뽕을 먹이거나 주사하지 않을 텐데, 깊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서슴지 않고 뽕을 먹이는 게 자녀가 목적이 아니야. 윤옥주는 아들을 낳아 주려고 계약결혼한 어떤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이 많은 남편은 그 아가씨한테 뽕처럼 사람을 환각상태에 빠지게 하는 마약은커녕 술과 담배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임산부가 지켜야 하는 의학 지식이 많지는 않았지만,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게 당연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박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그저 노리개감으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뽕을 하고 섹스를 즐기는 데 몰입되어 있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 박사의 정체와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내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게 일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속절없이 하루가 또 지나가는데....... 여기 이 외딴 별장에 갇혀서 한 박사의 노리개 노릇이나 하다가 죽는 건 아닐까? 7 월의 태양이 서산에 장엄하게 기울고 있었다. 별장 2 층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장엄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윤옥주의 일과는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에어로빅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과라고까지 할 수가 없었지만, 한 박사는 그녀가 지루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오리지널 테이프로 비디오를 감상할 수 있으며 팬터하우스나 플레이보이와 같은 포르노 잡지도 많이 갖다 주었기 때문에 지루한 줄 모르고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급 양주와 먹음직한 과일이 항상 준비돼 있었기 때문에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어 고독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그날 밤. 한 박사는 기분이 좋은 얼굴로 나타났다. 두툼한 그의 입술 언저리에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이 기분이 좋다는 증거였다. 한 박사가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동안 옥주는 술상을 차렸다. 항상 식사는 밖에서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식ㅌ을 마련할 필요는 없었다. 술상은 간단했다. 세 종류의 양주와 과일 몇 개와 얼음 몇 조각과 글라스 두 개를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백색가루는 한 박사의 기분에 따라 양줏잔에 타기 때문에 옥주가 할 일이 아니었다. 윤옥주는 술상을 준비해 놓고 노브라에 노팬티 차림으로 한 박사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들게 되어 있었다. "스커트도 벗는 게 좋겠어." 7 월 하순에 접어 들면서부터 한 박사는 미니스커트마저 입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T 셔츠나 블라우스 같은 윗도리 하나만 걸치고 술시중을 드는 게 옥주의 임무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술상만 차려 놓았을 뿐 브래지어와 팬티와 스커트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왜 안 벗어?" 한 박사가 의아스런 눈초리로 물었다. "너무 잔인해요." 윤옥주는 침실의 반란이라도 일으킬 듯이 강경하게 맞섰다. "정말 잔인한 꼴을 보지 못했군 그래." 그래도 한 박사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너무 야만적이에요." 한 박사의 맞은 편에 앉은 채 윤옥주는 싸늘하게 쏘아 붙였다. "화를 내니까 더 섹시해 보이는데." 한 박사는 윤옥주의 토라진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절 언제까지 이렇게 가두어 놓을 작정이세요?" "우리 주용이 대신 아이 하나를 낳아줄 때까지 내 곁에 있기로 약속했잖아." "주용 씨는 박사님의 아들이 아니잖아요." "괜히 엉뚱한 소리 하지 말어. 한주용이는 내 아들이었는데, 윤옥주가 죽였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윤옥주는 환각상태에서 벌써 사람을 둘이나 죽였어. 처음엔 한주용을 죽이고 그 다음엔 류정현을 죽였어." "저는 박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따름이에요."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밀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 윤옥주가 사람을 죽였다는 증거가 있어." "그 사람이 류정현 씨인 줄 알았으면 그날 밤 병원에 따라가지 않았을 거예요." "류정현이는 배신자였어. 배신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락사 시켰던 거야." "류정현 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야. 만에 하나 옥주 너도 날 배신하면 어쩔 수 없이 모가지를 자를 수밖에 없어." "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요?" "애꾸눈은 백정 출신이라 그 방면에 전문가지. 보고 싶다면 주용이의 모가지를 보여줄 수도 있어."


"......." 윤옥주는 공포에 질려 말대꾸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난 이제 더 이상 욕심이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쌓아놓은 성을 무너뜨리려고 도전해 오는 놈과 나를 배신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어." 한 박사의 눈동자는 섬뜩할 만큼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그럼 한주용 씨도 배, 배신자였어요?" 윤옥주는 용기를 내고 물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라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놈은 나를 우습게 알고 배신했어. 그리고 옥주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약속만 하고 건드렸어." "그럼 아드님이 아니었군요." "그 놈은 오래 전부터 날더러 아버님이라고 불렀어." "그럼 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 "살려 주세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겠어요." "옥주는 이미 경찰에 노출이 된 사람이야."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왜 일부러 노출시켰는지 알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백조아파트에 갔을 때, 여형사라고 하지 않고 여기자라고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왜 여형사라고 말하게 했는지 그 저의를 모르겠어요." "남현우 형사한테 알려주기 위해서였어. 그 놈이 나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윤옥주를 내세워서 그 놈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는 거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남 형사는 지금 옥주를 찾으려고 혈안이 돼 있어. 쉽게 말해서 내가 하는 일을 돕고 있는 셈이지." "그러고 보니 제가 일종의 낚싯밥이군요." "낚싯밥이 아니라 나한테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트릭이지." "그럼 끝까지 절 감금시켜 놓을 작정이세요?" "내가 필요할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 줘. 몇 달 걸리지 않을 거야." "그 후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약속대로 아파트도 사 주고 대학에도 보내 주겠어." "정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요?" "옥주 정도면 얼마든지 예능계 대락에 진학할 수 있어. 돈이 좀 들긴 하겠지만 말이야." "대학에 진학하는 게 제 꿈이에요. 대학에 들어가 연극을 전공하고 싶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연극영화과에 진학시켜 주겠어." "형사들이 절 찾고 있는데, 진학이 가능할까요?" "내 말만 믿어."


"어떻게 하는 게 박사님의 말씀을 믿는 거예요?" "나를 믿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옥주의 장래는 내가 책임지겠어. 대학 진학을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옥주 자신의 생각에 달렸어." "경찰에 붙잡히면 끝장이잖아요?"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말아. 그들에겐 아무 증거물이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오리발만 내밀면 돼." "만약 경찰이 고문을 하면 어떻게 해요." "경찰은 고문을 하지 않아. 그대신 유도심문을 하겠지. 하지만 경찰은 믿을 것이 못 돼. 남 형사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그러나 윤옥주의 대답은 자신이 없는 대답이었다. "만약 체포된다 하더라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곧 나올 수 있어." "그럼 강남병원에도 백조아파트에도 간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란 말인가요?" "응, 그래. 그렇게 하면 곧 풀려 나오게 돼 있어." "남 형사가 이미 냄새를 맡았을 텐데요." "냄새 정도 가지고는 사람을 구속할 수가 없어. 그리고 남 형사는 옥주를 구속시킬 생각이 없을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남 형사는 옥주에게 빠져 있었어." "저한테 호감을 가졌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런 일까지 어떻게 아세요?" 윤옥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남 형사를 만난 것은 이곳 별장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 형사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지만 옥주를 대학에 진학시킬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이야. 최소한 1 억은 있어야 옥주를 쓸만한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을 텐데, 남 형사한태는 그만한 돈이 없어. 아니, 1 억이 있다 해도 1 억을 옥주한테 몽땅 투자할 만한 배짜이 없는 인간이야." "그, 그럼 정말 옥주를 대학에 진학시켜 주실 건가요?" "나를 믿고 내 말만 들으면 옥주는 은막의 여왕이 될 수 있어." 한 박사는 자기 앞에 놓인 유리잔에다 먼저 백색가루를 넣고 그 다음에 양주를 채운 후 단숨에 잔을 비웠다. "제가 정말 스타가 될 수 있을까요?" "후원자만 있으면 옥주는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어." "박사님이 제 후원자가 돼 주시겠어요?" "죽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어?" "네, 약속할 수 있어요." "만약 약속을 어길 땐 주용이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가는 줄 알아야 해. 약속할 수 있겠어?"


"네." "그리고 내가 말하기 전에는 한 박사가 누군지 알려고 해선 안 돼. 그저 옥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네." "애꾸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그가 누군지 알려고 했다간 불행한 일을 당하게 돼 있어." "박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지시하겠어. 만약 경찰에 붙잡히더라도 나와 애꾸에 대해선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해." "그, 그럼 경찰이 물으면 뭐라고 말할까요?" "그 점에 대해선 열려하지 말아. 내가 그럴싸한 각본을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럼 박사님이 만든 각본대로 대답하면 되겠군요." "은막의 스타가 되려면 각본을 제대로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해.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니까."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옥주는 연극에 소질이 있다고 했어요." "응, 그래. 옥주는 틀림없이 잘 해낼 거야. 무능한 경찰이 옥주의 연극에 틀림없이 넘어가고 말 거야." "박사님, 저도 한 잔 주세요." 윤옥주는 빈 잔을 한 박사 앞에 내밀었다. 그것은 술을 달라는 뜻이 아니라 백색가루를 잔에 넣어 달라는 말이었다. 한 박사는 옥주의 유리잔에 백색가루를 넣고 양주를 가득 채웠다. "저는 박사님만 믿겠어요." 윤옥주는 작은 유리잔의 노란 액체를 단숨에 들이킨 후 말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어." "무슨 문젠데요?" "경찰이 무능해서 옥주를 쉽게 찾아낼 수 없다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그럼 내년 봄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자수라도 해야겠군요." "역시 윤옥주는 보통 여자가 아니야.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여자야." "그럼 저더러 자수라도 하란 말씀인가요?"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일단 이 별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후에 각본대로 자수를 하든지 정보를 흘려 보내서 체포를 당하든지 하는 게 좋겠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각본대로 대답만 하면 경찰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경찰은 옥주가 범행에 가담했다는 걸 아무런 증거물도 확보하지 못했거든." "하지만 남 형사는 제가 범행에 가담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거예요." "증거물이 없기 때문에 구속영장이 떨어지지 않아." "정말 구속되지 않을까요?" "내 말을 믿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속당하지 않고 풀려 나올 수 있어. 걱정하지 말고 술이나 마셔." "정말 박사님만 믿겠어요." "옥주는 왜 내가 옥주한테 이렇게 신경을 많이 쓰는지 알아?" "글쎄요,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그 이유가 뭐예요?" "옥주를 평생 내 곁에 두고 은막의 여왕으로 키워주고 싶어서 그래. 옥주는 세석평원에 늦게 핀 진달래처럼 아름다운 여자야. 그 무엇보다 옥주의 그것은 진달래 꽃이파리처럼 상큼한 맛이 나거든. 옥주는 정말 그게 근사한 여자야." "그게 근사한 여자라니요? 그게 뭐예요?" "검은 숲 사이에 신비하게 뚫려 있는 여자의 비밀통로 말이야. 그래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 "이제 알겠어요. 그런데 세석평원에 늦게 핀 진달래처럼 아름다운 여자란 말은 무슨 말씀이에요?" "옥주는 머리도 좋군 그래. 옥주는 내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자와 모습이 많이 닮았어." "진달래처럼 아름다웠던 여자였나요?" "응, 그래. 그녀는 그렇게 아름다웠어."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응, 그래." "지금도 그 분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지금은 다 잊어 버렸어." "세석평원이란 어디에 있는 평원이에요?" "지리산 산마루에 있는 평원인데, 옥주가 대학에 진학하면 꼭 데리고 가겠어." "약속했어요, 박사님." "응, 그래. 이젠 벗지." "네, 벗을게요." 윤옥주는 요염하게 웃었다. 어느새 백색가루의 황홀한 효력이 전신에 번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뽕의 위력은 항상 빠르고 격렬하게 나타났다. 윤옥주는 아직 어린 여인답지 않게 대담하게 스커트와 팬티를 벗어 던졌다. "오늘 밤이 별장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것 같군." "그럼 내일 아침 별장을 떠나게 되나요?" "당분간 기도원으로 피신하는 게 좋겠어." "저 혼자서요?" "응, 그래. 허름한 옷차림에 환자처럼 꾸미고 기도원에 처박혀 있으면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그 후엔 또 어떡하죠?" "애꾸눈이 돌봐 주기로 돼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아." "그 아저씨는 무서워요."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연기자가 되기 어려워. 그리고 알고 보면 황(黃)씨도 좋은 사람이야." "그 아저씨의 성이 황씨인가요?" "응, 황씨야. 앞으로는 황씨라고 불러." "말을 알아 들어요?" "응, 들을 수는 있어." "그럼 벙어리가 아닌 모양이군요." "완전한 벙어리는 아니야." "그럼 대화도 할 수 있겠군요?" "손짓 발짓 다 동원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해." "얼마 동안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있어야 해요?" "여름철만 기도원에서 보내면 돼. 여름철에는 생각보다 기도원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별로 심심하지도 않을 거야." "박사님만 믿겠어요." "나만 믿어. 연극영화과에 입학시켜 줄 테니까." "그 약속을 꼭 지키셔야 해요, 박사님!"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야. 윤옥주 양의 진학을 위하여 건배!" "한 박사님의 행운을 빌며 브라보!" 두 사람은 미소를 띠며 축배를 들었다. 작은 유리잔의 노르스름한 액체를 한 입에 털어넣고 입술을 포갰다. 어느새 한 박사의 손가락은 옥주의 깊은 늪지대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의 능수능란한 전희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부드럽고 감미롭고 자극적이었다. 그녀의 성감은 순식간에 점화되어 활활 타올랐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며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허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황홀한 성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비등점을 향하여 직선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남자의 그것이 자기 몸 깊숙이 쳐들어올 수 있도록 가랑이를 힘껏 벌렸다. 그러나 사내는 그 진달래빛 황홀한 골짜기 사이에다 자기의 깃발을 갖다 꽂는 대신 얼굴을 파묻었다. 사내는 진달래 꽃이파리를 따먹듯이 검은 숲 사이에 진달래빛으로 황홀하게 피어 있는 여자의 꽃술을 따먹기 시작했다. 사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진달래빛 꽃술을 침을 질질 흘리면서 핥아먹는가 하면 멍게 속살처럼 쫄깃쫄깃한 그 꽃싹을 질겅질겅 씹어 먹는 시늉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의 꽃술이 사내의 이빨에 씹힐 때무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전신이 촛농처럼 질탕하게 녹아내리는 황홀한 비등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 바, 박사님! 버, 벌써!"


그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황홀한 비등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음탕한 신음소리로 여러 차례 호소했다. "바, 박사님은 정말 멋져요!" 짜릿한 쾌감이 폭죽처럼 밤하늘을 수놓는 광란의 섹스 파티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뇌리를 스쳐갔다. "아! 이,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어요! 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미, 미칠 것 같아요!" 그녀는 미끈한 두 다리와 매혹적인 엉덩이까지 쳐들고 자신의 깊은 골짜기에서 진달래 꽃이파리를 게걸스럽게 따먹고 있는 사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저, 전 정말 괴, 굉장한 분을 만난 시, 신데렐라예요." 그녀는 자신의 아랫도리 깊은 골짜기에 짜릿짜릿하게 꽂히는 희열을 참지 못해 쉴새없이 신음소리를 냈다. "사, 사랑해요. 박사님! 빠, 빨리 해 주세요." 그녀는 재촉했다. 사내의 그것을 갈망하며 귀엽게 앙탈을 부렸다. 그러나 한 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옥주를 미치게 만들어 놓으시고 말예요." 그녀는 노신사가 야속하다는 듯이 두 눈을 흘겼다. "옥주는 아직 내 마음을 몰라서 그래. 난 오늘밤 옥주하고 해선 안 돼." "왜 안 돼요?" "옥주는 젊은 날 내가 사랑했던 그 여자하고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첫사랑의 그 여자처럼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 "그럼 그 여자하고는 한 번도 하시지 않았어요?" "꼭 한 번 했었지. 철쭉이 흐드러진 지리산 세석평원에서 내 생애 최고의 사랑을 말이야." "그럼 그 후엔 한 번도 더 하시지 않았어요?" "난 그 여자하고 단 한 번 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영혼까지 사랑했어." "정말 멋진 사랑을 하셨군요. 하지만 믿어지지가 않아요.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단 한 번만 하고 그만 둘 수가 있어요?" "그래도 우린 그랬어. 철쭉의 붉은 바다 속에서 불태웠던 단 한 번의 그 사랑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죄, 죄송하지만, 지금 이야기가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쩌면 뽕 기운 때문에 용감하게 물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신사는 대답대신 가만히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날 밤 노신사는 끝내 꽃다운 나이의 윤옥주를 범하지 않고 쓸쓸한 모습으로 뒤돌아섰다. 그 옛날에 어떤 여자와 함께


올랐었던 지리산 장터목 근처 세석평원을 찾아 나서듯이 외로운 모습으로 옥주의 침실을 등졌다.

세석평원 철쭉의 바다 전화벨이 울렸다. 김인희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김정섭 박사였다.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리던 전화였다. "어떻게 되었어요?" "미안해요, 김 여사. 3 일만 더 기다려 줘요." "내일 오후 3 시까지 은행에 입금시켜야 할 돈이에요." "미안해요. 요즘 시중 자금 사정이 생각보다 나쁜가 봐요." "알았어요." "모처럼 부탁인데 늦어져서 정말 미안해요." "괜찮아요." "3 일만 더 기다려요." "잘 알았어요."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훈이의 일이라니요?"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3 일 후에 다시 전화하리다." 김정섭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에없이 퉁명스런 그 목소리의 여운이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일 년에 겨우 몇 번 정도 통화하는 사이였지만, 오늘처럼 서둘러 전화를 끊은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그였다.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이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어.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만한 일이 없었다. 3 억을 융통해 주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럴까? 건강 때문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일까? 그녀는 김 박사가 류머티즘 때문에 남몰래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명한 의학박사이면서도 자기 자신의 관절이 쑤시고 근육통이 생기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약물치료만 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건강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김 박사가 약물치료를 받고 있을 때는 이쪽에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 게 통례였다. 그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는데, 왜 그럴까? 김인희는 방금 주고받은 통화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지난 번에 전화했을 때도 '훈이의 일'을 물었어. 지난 번에 전화했을 때도 대화 중에 분명히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하고 물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쪽에서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하고 물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훈이의 일이라니요?' 하고 되물었는데, 그때 김 박사는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3 일 후에 다시 전화하리다.'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김 박사는 분명히 그랬어. 김인희는 자신의 기억력을 믿었다. 오래 전 통화 내용이라면 믿을 수 없겠지만, 이틀 전에 나누었던 통화 내용과 방금 나누었던 통화 내용은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다. 김 박사가 왜 두 번씩이나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하고 물었을까? 그 점이 궁금했다. 그는 김인희에게 쓸데없는 질문을 반복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훈이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든 탓일까? 김정섭 박사의 나이는 올해 예순여섯이었다. 혈육의 정을 그리워할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동안 오래 참아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인희가 눈을 감기 전에는 그 관계는 절대로 밝히지 않기로 하늘에 맹세한 관계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뭐라 확실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가시처럼 걸리는 게 있었다. 김 박사가 물어본 '훈이의 일'이란 도대체 무슨 일을 의미하는 것일까? 훈이가 정지영이와 파혼한 일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까? 김인희는 궁금해서 해성병원 원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비서실 직원도 퇴근한 모양이었다. 김 박사의 아파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류머티즘에는 술이 약이라더니만, 또 어디 가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그 순간 김인희의 뇌리에는 김정섭이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을 때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어느 술집엔가 옛날 어릴 때 나처럼 생긴 예쁜 계집애가 있다더니만, 그 술집에 술을 마시러 갔는지도 모르겠군 그래.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그 나이에 어린 아가씨하고 술을 마시려면 괄시를 받을 텐데, 환갑이 넘어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책을 부리는 노인네, 불쌍한 노인네같으니라구. 한 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에는 의학박사요 종합병원장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지위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정섭 박사는 이제 빈 껍데기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나이가 만 67 세인데다 고질적인 류머티즘 환자이고 부인과는 20 여 년 전에 이혼했으며 자녀라고는 미국에 사는 딸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고독한 노인이었다. 인생은 그 자체가 허무라더니만, 김정섭 박사의 생애도 허무하군 그래.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창가에 서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철의 전화였다. 그는 시의원이 된 이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돈은 마련했습니다, 어머니." "그래, 고맙다. 근데 왜 오지 않고 전화를 걸었어?" "훈이가 온다고 해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렸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아서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훈이 편에 그 돈을 보내려고?" "네, 오늘 밤 늦게까지 꼭 해놔야 할 일이 있어서 훈이 편에 돈을 보내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훈이는 모르는 일이니까, 훈이 편에는 보내지 마라." "그럼 제가 지금 가지고 가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안, 바쁜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내일 아침 열 시경에 내가 사무실로 가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머니?" "응, 그래도 괜찮아." "훈이한테 연락은 있었습니까?" "그 애는 요즘 보통 열두 시 땡 쳐야만 얼굴을 볼 수 있어." "훈이 녀석, 어머니 속을 태우고 있군요. 죄송하지만, 그 녀석이 들어오면 내일 아침에 저한테 전화 좀 하라고 일러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마. 큰 돈 구하느라고 수고했다." "수고는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응, 그래.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잘 자거라." 김인희는 전화를 끊고 거실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2 억이라는 큰돈을 급히 마련해 주면서도 어디에 쓸 돈이냐고 거액의 용도를 묻지 않는 아들의 효성이 고마웠다. 밤이 깊어갔다. 그러나 작은 아들 훈이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침실에 들어가지 않고 흔들의자에 기대어 앉아 작은 아들은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 해 5 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지리산 장터목 근처 세석평원에서였다. 젊은이의 피처럼 선연한 빛깔의 그 꽃잎 속에는 지리산 골짜기에서 죽어간 한많은 사람들의 넋이 새빨갛게 고여 있는 듯했다. 황홀한 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바로 그 산등성이에서였다. 가슴이 시리도록 눈부신 철쭉의 바다에 매혹되어 있는 인희를 갑자기 끌어안고 쓰러뜨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동행자였던 김정섭이었다. 그는 그때 이미 아내와 딸이 있는 몸이었다. 아저씨처럼 오빠처럼 인희를 돌보아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반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 역시 이미 남자를 알아버린 몸이었기 때문에 반항하는 척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녀를 덮쳤고 그녀는 철쭉의 황홀한 장막 속에 갇혀 그를 받아 들이고 말았다. 그는 그때 그녀의 가랑이 사이 깊은 골짜기에 얼굴을 파묻고 굶주린 벌처럼 그녀의 꽃술을 핥아댔다. 그러다가 그는 얼굴을 들고 속삭였다. "인희, 당신의 그것은 진달래 꽃이파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맛있어!" 그녀는 그 달콤한 속삭임에 깜짝 놀라 두 눈을 떴다. 꿈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흐드러진 철쭉의 바다 속에서 있었던 그때 일을 생각할 때나 꿈꿀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 그는 실제로 늦게 핀 진달래 꽃이파리를 따먹으면서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었다. 어쩌면 그렇게 잊혀지지 않고 그때 그 일이 의식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다가 꿈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주책이지. 이미 오십이 넘었는데 스물세 살 때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니. 그러나 그때 세석평원에서 체험했던 황홀한 철쭉의 바다는 김인희의 생애에 지울 수 없는 또 하나의 선명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3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묘비명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때 김 박사를 지리산에 따라오지 못하게 했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테고 훈이란 녀석도 햇빛을 보지 못했을 텐데....... 그런데 그게 그녀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결단코 운명은 아니라고 머리를 가로저으면 가로저을수록 자기 생애에서 잘라낼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나의 인생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나한테 돌을 던지려 하겠지. 하지만 누구든지 그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영역으로 들어온 수컷을 요리해 먹는 암사마귀가 되어야 떳떳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걸. 그래. 난 암사마귀야. 결과적으로 암사마귀처럼 돼 버렸어. 하지만 말세에는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이 요령껏 수컷을 잡아먹는 암사마귀가 도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해. 문득, 자기에게 암사마귀란 별명을 붙여 준 친구 홍희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웃으면서 '인희는 암사마귀보다 더 무서운 여자야.'라고 말했지만, 인희는 그 말을 예사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그녀는 인희에게 종종 암사마귀같은 년이란 별명을 사용했다. 나만 암사마귀가 아니야. 희숙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요, 너와 관계했던 여러 수컷을 지리산에


파묻은 년이니까. 그때 그 빨치산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희숙이 네가 그랬었지. 사람 구실을 못하는 수컷은 차라리 사마귀가 되어 짝짓기를 끝낸 후 암사마귀의 먹이가 되고 태어날 새끼들의 밥이 되는 게 낫다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난 암사마귀가 되고 싶어서 암사마귀가 된 여자가 아니야. 수컷을 잡아먹고 싶어서 수컷을 잡아먹은 암컷이 아니란 말이야. 나는 시대를 잘못 만났고, 부모를 잘못 만났고, 조국을 잘못 만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암사마귀처럼 살레 되었을 따름이야.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야. 왠지 몰랐다. 하필이면 밤중에 꿈에서 깨어난 후 그런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다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훈이 때문에 신경과민이 된 것 같았다. 밤 한 시가 지났건만 작은 아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김훈은 요즘 강유미와 어울리느라고 밤 열두 시에 들어오는 게 보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외박까지 하고 다녔기 때문에 김인희는 골치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 하필이면 강유미하고 붙어다닐 게 뭐람. 충격의 연속이었다. 지영과의 파혼이 충격이었고 유미와의 농도 짙은 교제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 마음을 십분의 일 알아주는 자식도 드물다더니만, 내 자식이 내 마음을 십분의 일도 못 알아주다니....... 김인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그제서야 잠자리를 안방으로 옮겼다. 그무렵. 조민혁은 서초 4 동 류미란의 개나리아파트에 있었다. 남녀관계란 묘한 것이어서 두 사람은 선거 전날 밤 한몸이 된 이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몸을 섞었다. 두 사람 모두 섹스에 탐닉 할 수 있는 한창 나이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더욱이 류미란은 개나리아파트 3 동 713 호에다 아틀리에를 마련해 놓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밀회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류미란은 지금까지 가까이 했던 어떤 남성보다 조민혁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그는 여류화가가 호감을 가질 만한 조건을 골고루 갖춘 사내였다. 181 센티미터의 장신에 용모가 준수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거기다 그는 일류대학 출신의 정치 지망생이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욕정을 불태웠다. 미란은 건초더미처럼 금방 타버리는 남자를 싫어했다. 그런데 그의 뛰어난 테크닉과 지구력은 그녀를 쾌감 덩어리인 화끈한 용암으로 녹아내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다 자신의 풍성한 엉덩이를 밀착시킨 채 사내가 담금질할 때마다


솟구치는 성감을 만끽했다. 침대 옆에 달린 대형 거울에는 수캐의 그것을 뜨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암캐와 같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한동안 암캐와 같은 자세로 사내의 뜨거운 철주를 받아 들이던 그녀가 갑자기 체위를 바뀌었다. 천장을 향해 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미란의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리가 앞뒤로 움직였다. 사내의 철주가 깊은 골짜기로 매몰되었다가 또다시 솟아오를 때마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더, 더 세게....... 더,더 세게 해줘요. ......아, 아아......." 마침내 그녀는 감동적인 신음소리를 흘리며 촛농처럼 녹아 내렸다. 황홀한 게임을 치른 후 두 사람은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왔다. "민혁 씨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면 난 어떡하죠?" 시원한 맥주로 목을 ㅊ이면서 미란이 웃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밖에서 가끔 만나면 되잖아." "그럼 다른 여자하고 결혼할 거예요?" "글쎄."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면 안 돼요." "처음부터 그런 부담 주지 않겠다고 했잖아." "처음엔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갑자기 왜 달라졌어?" "민혁 씨는 삼박자를 갖춘 남자니까요. 그게 센 남자들은 대부분 골이 비었다던데 민혁 씨는 그렇지 않으니까 놓치기 싫어졌어요." "괜히 술기운에 농담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에요." "미란이처럼 장래가 밝은 여류화가한테 이런 말을 듣는 건 영광인데!" "그럼 나하고 결혼할 수 있겠어요?" "응, 미란이가 원한다면 생각해 보겠어. 하지만 나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 "낳을 수 있어요." "작품 하는데 지장이 없겠어?" "한 둘 정도는 낳을 수 있어요." "정말? 전엔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했잖아?" "전에는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변했어요." "그건 또 왜?" "실은 느낌이 이상해요." "느낌이 이상하다니?" "그게 있을 때가 지났는데 없어서 느낌이 이상해요."


"그거라니? 매달 여자들한테 있는 그거 말인가?" "네." 미란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보려는 듯 민혁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거 참 잘 됐군!" 민혁이 기뻐했다.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미란은 속으로 안심했다. "정말 민혁 씨의 아기를 낳아도 괜찮겠어요?" "응, 괜찮아." 뜻밖의 반응이었다. 민혁의 좋은 반응을 지켜보고 미란은 미소를 지었다.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어머님한테 말씀드려도 괜찮겠어요?" "그러잖아도 우리 어머니는 빨리 손자를 보고 싶어 야단이셔. 아마 우리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그럼 민혁 씨가 어머님한테 말씀드려 주겠어요?" "응, 그래. 적당한 기회에 말씀을 드려서 허락을 받아 내겠어." "허락이라니요? 결혼 말인가요?" "응, 그래. 우리의 결혼 말이야." "정말 고마워요, 민혁 씨! 나도 민혁 씨를 기쁘게 해드릴 거예요." "그럼 최근에 그린 그림 나한테 보여 주겠어?" "보여 드리고 말고요. 지금 보여드릴까요?" "응, 그래." 두 사람은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십여 평 남짓한 미란의 아틀리에는 서양화 몇 점이 널려 있었다. 민혁은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그녀의 그림은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와 닿는 그 무엇이 있어서 좋았다. 특히 그녀의 그림 중에는 산을 그린 그림이 많았는데, 대개 지리산을 모델삼아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예술가의 눈은 확실히 다르군 그래. 그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산을 캔버스에 더 아름답고 신비하게 옮겨놓을 수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난 아직 멀었어요. 공부를 더 해야 해요." "내가 볼 때 미란인 타고난 화가인 것 같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한국화단의 보배로운 여류화가가 될 거야." "내 그림까지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민혁 씨만 내 곁에 계셔 주신다면 그림에 대한 내 열망도 더욱 뜨거워질 거예요." "난 미란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그 그림에 내 영혼이 스며드는 걸 느꼈어." "그래서 내가 민혁 씨를 더 깊이 좋아하게 됐나 봐요." "그런데 이 그림은 무슨 그림이지? 인물화도 아닌 것


같고........" 민혁은 91×73 센티미터 크기의 유화 앞에 서서 물었다. 그 그림에는 군복을 입은 서양인과 역시 군복을 입은 동양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으나 계급장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뒤에 야트막한 초가 지붕이 보이는 것이 한국의 시골 풍경을 배경삼아 그린 그림 같았다. "옛날 사진을 보고 그린 거예요. 누군지 알아맞춰 보세요." "글쎄,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6.25 직후 우리 나라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그럼 서양인은 미국 사람이고 동양인은 한국 사람이겠군 그래." "네, 맞았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나하고 가까운 분이에요." "그럼 미란이 아버님이신가?" "네, 우리 아버지도 총각 땐 미남이셨죠?" "정말 그렇군 그래." "하지만 이 그림은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린 그림이 아니예요. 내가 보관해 두려고 그린 그림이에요." "6.25 당시 아버님은 특수부대에 근무하신 모양이지?"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영어를 좀 하신 모양이에요. 브로커 영어지만 말예요." "CIC 같은 미정보부대에 근무하셨다면 실력이 막강하셨겠어." "CIC 가 뭐예요?" "글쎄, 지금의 보안사보다 더 센 수사기관이었을 거야. 나도 그저 그 정도밖에 몰라." "그래서......." 미란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당황한 듯 얼굴을 약간 붉혔다. "왜 말을 하다 말고 끊어? 나한테까지 숨길 사연이 있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민혁 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니 더 궁금해지는군 그래." "정말이에요. 민혁 씨하고는 정말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럼 누구하고 상관있는 일이지?" "......." "왜 말을 못해?" "그, 그건 비밀이에요." 미란이답지 않게 약간 더듬거리면서 말을 끊었다. "나한테까지 숨길 비밀이라면 무슨 비밀일까?" "민혁 씨하고는 상관이 없는 비밀이에요." "그래도 궁금해서 못 견디겠는데......." "그렇게 궁금하세요?" "궁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 "왜 섭섭해요?"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비밀로 접어 두니까 궁금하고 섭할 수밖에." "......." 미란은 다시 말문을 닫았다. 민혁한테 말꼬리를 잡힌 후 미란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요?" "난 적어도 미란이만은 나한테 마무런 비밀이 없는 줄 알았어." "이건 민혁 씨하고 나 사이의 비밀이 아니예요." "그럼 혹시 정현 씨의 죽음과 관계되는 비밀인가?" "......."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바로 오빠의 죽음과 관계되는 비밀이었군 그래. 그 비밀을 무슨 비밀이라고 했더라." "중산리의 비밀이라고 했어요." "응, 그래. 그 비밀 때문에 훈이가 지금도 곤욕을 치르고 있는 걸 알고 있어. 훈이한테는 절대고 말하지 않을 테니까,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려줘, 궁금해 죽겠어." "하지만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사실은 나도 그 내용을 몰라요." "나까지 못 믿다니, 이제 미란의 마음을 알았어." 민혁은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아틀리에를 빠져 나왔다.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난 가야겠어. 잘 있어." "지금이 몇 시인데 돌아 가겠다는 거예요?" 미란이 거실로 따라 나와 민혁의 팔을 붙잡았다. "난 그런 데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야. 돌아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어." "정말 내 마음을 몰라주는 쪽은 민혁 씨군요." "내가 언제 미란이 마음을 몰라줬어?" "지금요." "지금?" "네." "억지 쓰시는군." "정말 억지 쓰시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중산리의 비밀이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건 숨기지 않고 말할 테니까요." "......." 민혁은 여전히 서운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훈이 때문에 말하기 곤란하다 그거지?" "그게 아니예요." "그럼 뭐야? 솔직하게 말 못 할 이유가 뭐냔 말이야." "나 역시 중산리의 비밀이 뭔지 알고 싶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아버지는 그 비밀이 뭔지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 민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앞에 앉은 미란의 눈동자만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모르시는 중산리의 비밀을 오빠가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집요하게 아버지한테 물었더니 중산리의 비밀을 오빠한테 말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미란이 아버님은 중산리의 비밀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군 그래." "아마 아버지는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아까 민혁 씨 말대로 아버지는 6.25 때 특수기관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충분해요." "그런데 어떻게 정현 씨가 중산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그점이 의문이었어요. 하지만 오빠도 중산리의 비밀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할 수 있잖아요." "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래. 오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미란이한테 분명히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몇 번 했다고 했잖아." "네, 분명히 그런 말을 했어요. 하지만 오빠는 그 비밀의 내막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돈을 좀 뜯어냈다가 그쪽 사람들한테 당한 것 같아요." "그쪽 사람들이라니? 설마 훈이 가족들은 아니겠지." "십중팔구는 그 사람들일 거예요." "설마 했는데, 어쩌면 그럴 수가 ......." 민혁은 말끝을 맺지 못한 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훈 씨가 그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괜히 너무 빨리 단정하는 거 아니야?" "아니예요. 십중팔구는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 요즘은 내가 만나자고 해도 피하기만 하고 만나 주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 그래. 그런데 오빠가 어떻게 중산리의 비밀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게 이상하잖아. 설마 오빠가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은 어버지가 술김에 하신 말씀이라고 했어요." "술김에 하신 말씀이라니?" "언젠가 술김에 두 분이 장래문제 때문에 다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오빠가 아버지의 노후 생활을 책임지지 않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홧김에 아버지도 '중산리의 비밀만 알고 있으면 난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어. 6.25 때 나 때문에 살아남은 여자가


성공했으니까 말이야.'라는 말씀밖에 하지 않으셨대요." "그럼 오빠가 그때 들은 '중산리의 비밀'이란 말을 적당히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당했다 그 말인가?" "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하잖아." "물론 추리에 불과해요. 하지만 내 추리는 아버지가 수긍하셨으니까 믿을 만한 추리라 할 수 있어요." "미란의 추리를 아버님이 수긍하셨단 말이지?" "네." "그렇다면 맞는 추리겠군 그래." "민혁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그래. 그런데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자꾸만 궁금해 지는데." "글쎄 말예요. 아버지는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으셨어요." "아버님이 비밀로 해두고 싶으시다면 구태여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 말도 일리는 있어요." "피곤한데 들어가서 잘까?" "네." "한 번 더 해도 괜찮지?" "방금 피곤하다고 했잖아요." "당신 속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 오히려 피곤이 풀리는 체질이니까." "정말 임신이라면 3 개월까진 더 조심해야 한대요." "좋은 아빠가 되려면 지킬 건 지켜야지. 아무튼 들어가서 잡시다." "고마워요, 민혁 씨!"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소파에서 일어나 뜨거운 포옹에 몰입했다.

풀리지 않는 중산리의 비밀 아침 일곱 시 텔리비전 뉴스를 김인회는 거의 습관적으로 시청하고 있었다.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날도 이튿날 아침 일곱 시에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뉴스를 시청하는 게 일종의 취미이기도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작은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놓고 일곱 시에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국내외의 굵직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소련연방에 민주화 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쳐 독립국가가


탄생하고 있다는 뉴스가 토픽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젯밤 작은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관심은 거기에 쏠려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몸조심을 해야 할 나이인데, 누굴 닮아서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정현이의 죽음 때문에 아직도 경찰의 의심을 받고 있는 몸인데....... 훈이 걱정을 하면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데, 뉴스 진행자가 그녀의 귀를 번쩍 열리게 했다. "조금 전에 긴급 입수된 사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어젯밤 늦게 서초 4 동 백조아파트 근처에서 60 대의 노인이 흉기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피살당했는데, 노인의 신원은 백조아파트에 사는 류상규 씨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현재 정확한 사인(死因)을 조사 중에 있다고 합니다." 뉴스 진행자가 심각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가 태연하게 다음 뉴스를 전하기 시작했으나 김인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리모콘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죽였다. 더 이상 화면을 살려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류상규가 죽다니? 방금 그 노인이 어젯밤 늦게 피살당했다는 뉴스를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다시 작은 아들이 걱정스러웠다. 공교롭게도 주변에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김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노인이 피살당하다니? 도대체 누가 류상규를 죽였을까? 혹시 우리 훈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난 훈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소중하게 여기도록 키웠어. 그렇다면 누굴까? 노상 강도가 노인의 주머니를 털려고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을 리가 없는데 ....... 궁금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 형사 일행이 또다시 작은 아들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금방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혹시 누군가가 그 노인의 입을 막으려고 그런 끔찍한 짓을한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6.25 직후 류상규가 미 정보국 통역관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산리 대나무 숲속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퇴각한 후 세 여자는 국방군의 포로가 되어 아랫마을로 끌려 내려왔다. 그때 그녀는 군의관이었던 김정섭 대위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홍희숙(당시에는 서로 이름을 몰랐다)과 다른 한 여자는 미군 정보국으로 넘어갔었다. 당시 통역간이었던 류상규는 나를 포함한 세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 그는 나까지 미군 정보부대로 끌고 가려다가


실패했어. 그때 그녀는 여성 특유의 민감한 직감으로 통역관(당시에는 이름을 몰랐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홍희숙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군 정보부대로 넘어간 것까지는 알았으나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홍희숙을 다시 만난 것은 2 년 후 서울에서였다. 김인희는 그 때 어린 아들 철이를 등에 업고 행상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홍희숙을 다시 만난 곳은 을지로 3 가였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모습은 2 년 전 초라한 시골처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진한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홍희숙이 혹시 양공주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맞아. 그때 이미 홍희숙은 양공주가 되었거나 미국인과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그 후, 두 사람은 이따금 만나는 사이가 되었지만, 홍희숙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자기 집에 그녀를 데리고 간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당시 중산리 출신의 시골처녀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변신한 홍희숙의 외모에서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창 유행하는 퍼머머리, 진달래빛 립스틱과 철쭉빛 매니큐어, 무릎이 보일락 말락한 스커트와 원색의 블라우스, 하이힐과 핸드백이 홍희숙의 신분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중산리 아랫마을에서 헤어진 지 2 년 만에 을지로 3 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녀의 몸에서 진하게 풍기던 양공주 냄새를 김인희는 새삼스레 맡고 있었다. 벌써 삼십오륙 년 전의 일인데, 그날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김인희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날 이후 홍희숙은 이따금 그녀의 돈암동 판잣집에 나타나곤 했는데, 을지로 3 가에서 처음 만날 때와는 달리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일 때가 많았다. 방금 류상규의 피살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럴 때 홍희숙의 옛날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미군 정보부대 통역관이었던 류상규와 홍희숙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당시 홍희숙은 어린 젖먹이를 등에 업고 행상을 하는 김인희를 도와주곤 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찾아올 때마다 쌀 몇 되 값은 집어주고 돌아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약 2 년 만에 헤어졌다. 홍희숙이 소식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3 년 만에 홍희숙이 다시 나타났는데, 그녀는 그때 갓 결혼한


신부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그녀의 고향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반면에 김인희는 3 년 사이에 행상을 졸업하고 양장점 주인이 되어 있었다. 상냥하고 친절할 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좋은데다 빼어난 미모까지 갖춘 그녀의 '목화양장점'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뻗어가고 있었다. 동대문 근처에서는 '목화양장점'이라고 하면 모르는 여자가 없을 만큼 소문난 양장점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가슴에 큰 희망을 품고 날마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았으니까. 세월은 빨랐다. 홍희숙은 결혼한 지 3 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들(민혁) 하나를 남겨놓고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였다. 홍희숙은 그 후 몇 년 동안 '목화양장점'에서 기술을 배우며 김인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가고 있어. 내 생명을 담보로 삼고서....... 지난날의 숱한 사연이 김인희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난갔다. 민혁이와 훈이가 왕십리의 한 지붕 아래서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자라던 추억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가 포말처럼 꺼져갔다. 그런데 어젯밤 그 노인을 누가 죽였을까? 혹시 그 노인이 뜬 구름처럼 맴돌고 있는 '중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노인이기 때문에 노인의 입을 막기 위해 누군가 계획적으로 죽인 게 아닐까? 김인희는 다시금 류상규의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에는 해묵은 수수께끼와 같은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만약 류상규와 홍희숙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 고리란 도대체 어떤 고리일까? 나의 느낌대로 홍희숙이 한때나마 양공주 노릇을 했거나 미군과 동거를 했다면, 미군 정보부대 통역관이었던 류상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름이 끼쳤다. 중산리 아랫마을에서 기구한 운명적 만남이 있은 이후, 약 40 년 동안이나 서로 돕고 살아온 사이였는데,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한테 협박 전화를 걸어 5 억을 챙기려던 자가 바로 류상규였단 말인가? 그 노인한테는 그동안 베풀 만큼 베풀었는데, 나한테 협박을 다 하다니....... 설마했었다. 협박 전화를 받은 이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류상규 노인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인간의 탈을 쓰고는 그럴 수 없다고 제껴두었었다. 그 노인이 아직 칠십도 안 되어서 돈에 눈이 어두워 망령이 들다니, 불쌍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류상규의 죽음과 홍희숙의 과거사를 연결시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젯밤 집에 돌아오지 않은 훈이가 범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김훈도 지금도 쫓기고 있었다. 남현우 형사는 류정현이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의 알리바이와 정현이 질식하던 날 밤의 알리바이를 트집잡고 기회 있을 때마다 김훈을 추궁하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미가 처음에는 김훈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으나 나중에는 오리발을 내미는 통에 남 형사에게 시달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김인희가 염려하는 것은 작은 아들의 알리바이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정현은 죽기 이삼 일 전에 몇 번인가 여동생 미란에게 '중산리의 비밀' 운운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김인희한테 전해 준 사람은 작은 아들 훈이었다. 바로 '중산리의 비밀'운운했다는 그 대목이 김인희의 가슴속에 굵은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이제 겨우 서른서너 살밖에 안 된 류정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김인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중산리의 비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비아냥거렸거나 협박을 했다면 불같이 뜨거운 성격의 소유자인 훈이가 정현이를 작살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어떤 누명을 뒤집어쓰고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우리 훈이가 살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아직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전화 연락조차 없는 훈의 일이 걱정스러웠다. 그 순간, 김정섭 박사의 질문이 김인희의 뇌리를 강타했다. 김 박사는 지난번 전화에서도 물었고 어젯밤 전화에서도 물었어.'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하고. 도대체 '훈이의 일'이란 무슨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김인희는 전화기 옆에 얼른 다가가사 번호판을 눌렀다. 김정섭은 다행히 그의 아파트에 있었다. "저, 김인희예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기 여사가 아침 일찍 어쩐 일이시오?" "어젯밤 다시 전화를 드렸더니 나가셨더군요." "오늘 꼭 그 돈이 있어야 합니까?" "돈 때문에 전화드린 게 아니예요. 한 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린 거예요." "무슨 질문인지 말해 봐요." "박사님이 저한테 두 번씩이나 물으셨죠? 훈이의 일은 잘 되었어요 하고 분명히 물으셨죠?" "그래요, 그렇게 물었어요." "그런데 그훈이의 일이란 무슨 일을 의미하는 건가요? 혹시 훈이의 파혼문제 때문에 걱정이 돼서 하신 질문인가요?"


"........" "아, 여보세요. 왜 말씀이 없으세요?" "다, 당신, 정말 훈이의 일이 무슨 일인지 몰라서 나한테 묻는 겁니까?" "제가 알면 무엇 때문에 시간 낭비해 가면서 다시 물어보겠어요?" "김 여사가 지난 6 월에 훈이의 일을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제요?" "지난 6 월 16 일인가 나한테 훈이가 경찰에 쫓기고 있다면서 훈이의 일을 부탁해 놓고서 이제와서 다른 말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제가 전화로 박사님한테 그런 부탁을 했다 그 말씀인가요?" "그래요, 분명히 김 여사가 부탁했어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그럼 김 여사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다 그 말입니까?" "네, 하늘에 맹세코 없어요."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겠군요. 그럼 김인희 여사의 유령이 나한테 그런 부탁을 했단 말입니까?" "알겠어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박사님에게 그런 부탁을 한 여자가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날 박사님이 어떤 부탁을 받으셨는지 부탁받은 그대로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내가 듣기로는 분명히 김 여사의 목소리였어요." "부탁 받았던 내용을 빠짐없이 말씀해 주세요." "훈이가 경찰에 쫓기고 있어요. 훈이의 일을 부탁해요. 박사님이라면 강남병원에 입원해 있는 정현이를 쉽게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지난 6 월 16 일 밤에 틀림없이 그렇게 부탁을 받았어요." "혹시 박사님이 그 전화를 받으실 때 술에 취해 계셨던 건 아니신가요?" "......." 김정섭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때 류머티즘의 고통에 못이겨 히로뽕 주사를 맞은 직후였었다.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그래야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낼 수 있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내가 좀 취해 있었어요." "역시 그 류머티즘 때문이었던 모양이죠?" "다,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요. 그대신 훈이는 괜찮겠지요." "훈이의 일은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어요." "그 돈은 곧 마련해 드리리다." "돈은 천천히 구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혹시 오늘 아침 일곱 시 뉴스 보셨어요?"


"류상규 노인이 피살됐다는 뉴스를 나도 들었어요." "그 노인을 누가 죽였을까요?"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몸조심하세요." "고마워요, 김 여사."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었다.망연자실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없었다. 맑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었다. 류정현을 질식사시키는 일을 교묘한 수법으로 김 박사에게 맡기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나의 말투와 나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훔친 그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능수능란한 악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김정섭과 김훈이 남남이 아니라는 베일에 싸인 은밀한 관계를 아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득 지난 광역의회 의원선거 때 써먹은 음성 위조 수법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김철 후보의 목소리와 부인의 목소리를 닮은 사람을 여러 명 동원하여 전화공세를 폈던 일이 생각났다. 입후보자와 입후보자 부인의 집중적인 전화공세로 직접 유권자들에게 침투해 들어갔던 선거전략이 성공했기 때문에 당선이 가능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그 수법에 우리가 당하다니....... 바로 그 음성 위조 수법으로김정섭 박사를 절묘하게 하수인으로 끌어들인 여자는 누굴까? 입술이 바짝 탔다. 목이 말랐다. 김인희는 냉장고의 냉수로 갈증을 해소한 후 이동식 전화기를 들었다. 만약 류상규가 나한테 협박 전화를 걸었다면 홍희숙에게도 협박 전화를 걸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남의 아픔이나 약점을 이용하여 등쳐먹는 협박범들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이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하나 약점을 가진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구근거리기 시작했다. 홍희숙이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십중팔구 오리발을 내밀겠지. 자기한테는 아무도 협박을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할 게 뻔해. 한참 전화기 번호판의 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이동식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김인희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문객은 남형사과 임 형사였다. 그녀의 불길한 예감대로 달갑잖은 형사들이 찾아온 것이다. 황급히 달려왔기 때문일까, 남녀 두 형사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훈 씨는 어디 있습니까?"


남 형사였다. 메마른 음성이 거부반응을 몰고 왔다. "백화점에 있을 거예요." "전화를 걸어 봤는데 거긴 안 나왔다더군요. 김훈 씨는 어젯밤 집에 들어왔습니까?" "들어오지 않았어요." 김인희는 남의 일처럼 냉담하게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젯밤 어디서 주무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잘 몰라요." "어젯밤 류산규 씨가 피살당했다는 뉴스는 들었습니까?" "네, 들었어요." "그럼 김훈 씨가 최근 류상규 씨를 만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금시초문이에요." "죄송하지만, 요즘 김훈 씨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못했어요." "지난 6 월 8 일 토요일 밤, 그러니까 류정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 밤, 김훈 씨는 자가용이 있는데도 친구의 승용차를 빌려 타고 류정현 씨를 방배동에서부터 미행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보자가 누구예요?" "익명의 제보자였기 때문에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제보자로군요. 그게 다 우리 훈이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물귀신 작전 같군요." "어젯밤에도 김훈 씨가 사건 현장인 서초 4 동 백조아파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구요? 우리 훈이가 사건 현장에 있었다구요?" "사건 현장에서 150 미터 정도 떨어진 생맥주집에 밤 늦게까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글쎄요, 난 잘 모르는 일이에요." "류상규 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저 조금 아는 사이예요." "우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 여사께서 류상규 씨를 많이 도와준 걸로 밝혀졌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글쎄요, 어려울 땐 서로 돕고 사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어요." "류상규 씨와는 언제부터 아는 사이라고 하셨지요?" "글쎄요, 난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6.25 동란 직후부터 아는 사이 아니었습니까?" "글쎄요." "류상규 씨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잠깐만요."


임선화 형사였다. 여 형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다가 슬며시 끼여들었다. "제가 류미란 씨의 화실에서 그림을 보고 확인한 결과 규상규 씨는 6.25 직후 미군 부대의 통역관으로 근무했더군요. 그것도 보통 미군부대 통역관이 아니라 권총까지 지급받았던 점으로 미루어 봐서 정보대 같은 특수부대 통역관이었던 것 같아요." "난 류상규 씨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류상규 씨를 처음 만난 곳이 혹시 지리산 밑 중산리라는 마을 아니었습니까?" "아니예요." "좋습니다. 그럼 육군 군의관 출신 김정섭 박사님을 아십니까?" "네." "실례지만, 그분은 언제부터 알게 되셨습니까?" "글쎄요, 그 분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후배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아는 셈이지요." "그럼 아버님도 의사였습니까?" "네."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잘 몰라요." 김인희는 남 형사가 뭔가 알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네, 아버님은 빨치산들한테 끌려갔다가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실례지만, 아버님은 어디서 그들에게 끌려가셨습니까?" "중산리 고향에 내려가셨다가 끌려갔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럼 아직 확실히 돌아가셨는지 확인은 못 하셨겠군요." "네, 확인은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 주세요." "네, 그 이유는 혹시 '중산리의 비밀'과 이번 연관성이 없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혹시 우리 아버님이 월북하신 게 아닌지 알고 싶으신 게로군요." "아닙니다. 그런 뜻에서 물어본 건 아니기 때문에 오해는 하지 마세요. 다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류상규 씨가 피살당했기 때문에 중산리에 얽힌 인맥을 더듬어 봤을 뿐입니다." "그럼 남 형사님은 류 노인이 이번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죠?" "네, 아직까지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남 형사님, 도대체 '중산리의 비밀'이 뭐길래 그렇게 복잡하고 아리송한지 시원하게 말 좀 해 보세요."


"글쎄요. 우리도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김 여사님처럼 중산리와 괜계가 있는 분조차 모르는 '중산리의 비밀'을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때 남 형사 옆에 앉아 있던 임 형사가 남 형사의 허벅지를 세차게 꼬집는 통에 남 형사는 움찔했다. "실례지만, 해성병원 원장님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임 형사가 화제를 바꾸어 당돌하게 물었다. "글쎄요, 옛날부터 가깝게 지내온 사이예요. 그런데 그 분은 왜 난데없이 들먹거리시는지 모르겠군요." "며칠 전 김정섭 박사님에게 3 억을 빌려 달라고 하셨죠?" 당돌하고 날카로운 질문에 김인희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 형사보다 여자 형사 쪽이 훨씬 더 매서웠다. "왜 대답을 못 하시죠?" "경찰이 도청했군요." "그게 아닙니다, 김 여사님." 남 형사가 대화에 끼여들어 해명하려 했지만 임 형사가 가로 막았다. "남 형사님은 조금만 계세요." "남의 사생활을 함부로 침범해도 되는 거예요?" 김인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옹골찬 자세였다. "김 여사님, 김 박사님은 마약 상습 복용자예요." "뭐, 뭐라구요?" "김 박사님은 사회적 저명인사지만, 마약 때문에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 인물이란 말예요." "도대체 지금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거예요. 경찰이라고 남의 전화를 맘대로 도청해도 되는 거예요?" "우리가 도청한 게 아니라 시경 마약 전담방에서 도청했어요. 우리 사회에서 마약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당신네 경찰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갑자기 3 억은 무엇에 쓰시려고 부탁하셨죠?" "사업 자금으로 쓰려고 그랬어요." "그것도 오늘 오후 3 시까지 말씀이죠?" 젊은 여형사는 비아냥거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남 형사에 비해 아주 기분 나쁜 여 형사였다. "남이야 언제 어느 때 자금이 필요하든 경찰이 상관할 일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김인희도 만만치 않았다. 자기 자녀들보다 어린 여형사에게 호락호락 넘어갈 여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업 자금이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간섭하겠어요. 하지만 이번에 김 여자님이 갑자기 사용하려고 했던 3 억은 어딘지 모르게 범죄의 냄새가 나는 자금이었단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혀 말을 못 하겠군요."


"속직히 말씀해 주세요. 어디에 쓰려던 돈이었어요?" "사업 자금에 쓸 돈이었어요." "우리는 이미 큰 아드님에게 확인해 보았어요. 그래도 끝까지 꾸며댈 작정이신가요?" "큰 애 사업하고는 관계없는 일에 쓸 생각이었어요." "혹시 누군가의 입을 막기 위해 3 억이 필요했던 건 아니십니까?" "당치도 않은 말은 꺼내지도 마세요." "그럼 김 박사님하고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 듣겠어요. 옛날부터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잖아요." "우리가 마약 전담반으로부터 인수받은 두 분의 통화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두 분의 관계는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더군요." "사건과 관련이 있는 질문만 해 주세요." "지금 하고 있는 질문이 알고 보면 모두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질문이에요. 사건과 관계없는 질문을 왜 하겠어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예요. 핵심만 말해 주세요." "김 박사님의 은신처가 어딘지 알고 계시죠?" "은신처라니요?" "그럼 모르십니까?" "양수리에 별장이 있는 건 알고 있어요." "올 여름엔 그 별장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 주었더군요. 그 별장말고 다른 은신처를 모르십니까?" "몰라요." "어젯밤 류상규 씨가 피살된 사건 현장에서 김정섭 박사님과 비슷한 사람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아마 적당히 변장을 하신 모양이에요. 하지만 큰 키에 매부리코만은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럼 김 박사님을 직접 만나 보시지 왜 나한테로 왔어요." "김 박사님처럼 사회적 저명인사는 증거부터 확보해 놓아야 구속이 가능하거든요." "그럼 그 분을 구속할 생각이세요?" 김인희의 질문에 이번에는 남 형사가 나서서 설명해 주었다. "히로뽕 상습복용 건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속할 수 있지만,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보류하고 있습니다." "그럼 김 박사님이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단 말이에요?" "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지금 두 사람의 실종자를 찾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옥주라는 아가씨예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김 박사님이 애용하는 그랜저 승용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났어요." "그랜저 승용차가 어디 한두 대인가요?" "6 월 20 일 밤 열두 시경에 목격자가 본 승용차 번호가 김 박사님의 자가용 넘버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윤옥주라는 아가씨가 그 차에서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 목격자는 윤옥주의 고향 친구인데 처음인데 윤옥주가 실종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실종된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럼 벌써 한 달 이상이 지났는데 그 동안 김 박사님이 그 아가씨를 데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틀 전에야 그 목격자의 신고를 접수했기 때문에 조사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지난 6 월 20 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김 여사님도 기억하시겠지요?" "그 날이 바로 시의원 선거날이었잖아요." "큰 아드님 때문에 잊어 버리지 않으셨군요. 그런데 바로 그날이 류정현 씨가 입원실에서 죽은 날이기도 합니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날 밤, 두 사람의 당직 간호사 외에 정체불명의 간호사가 류정현 씨의 병실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간호사의 키가 윤옥주의 키와 비슷했다는 겁니다." "그럼 김 박사님이 그 아가씨를 간호사로 변장시켜 정현이의 병실에 들여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말씀인가요?" "네,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김 박사님의 해성병원에서 강남병원까지는 약 6 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다 김 박사님이라면 어떤 여자든지 쉽게 간호사로 변장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가씨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또 몰라도 그 아가씨가 그런 심부름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박사님에게는 히로뽕과 돈이 있습니다. 뽕도 주고 돈도 주면서 유혹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김 박사님처럼 저명하신 의사가 왜 사람을 죽여야 했는지 의문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 남은 일은 자수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자수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 될 것 같아서 부탁하겠습니다. 박사님한테 전화를 걸어서 자수하라고 권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 분에게 자수하시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김 여사님의 말씀이라면 김 박사님이 들을 것 같아서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그 분은 나름대로 철학이 있는 분입니다." "더 이상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사람의 희생을 막으려면 김 여사님이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나는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더러 그런 일에 나서라는 이유가 뭐예요?"


"베일에 싸인 피라밋의 비밀처럼 풀기 어려운 비밀이 바로 '중산리의 비밀'이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정말 '중산리의 비밀'이 신비에 싸인 피라밋의 비밀처럼 풀리지 않는 비밀이란 말인가요?" "네, 현재로썬 그렇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피라밋의 신비는 영원한 비밀로 남아 있잖아요." 김인희는 여유를 보였다. 젊은 형사들한테 상처를 입고 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사건에는 작은 아드님이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김 여사님이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남 형사님, 난 그런 부탁은 받을 수가 없어요." 김인희는 냉정하게 끊었다. 그리고 먼저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 달라는 신호였다. "작은 아드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남 형사가 따라 일어서면서 물었다. "나도 몰라요." "잘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남 형사 일행은 별다른 소득도 없이 장미아파트를 등져야 했다. 두 형사가 나간 후 5 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김훈의 전화였다. 김인희는 작은 아들의 전화를 받자마자 바짝 긴장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어머니." "난 요즘 훈이 너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어." "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잠시 방황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어떻게 염려하지 않겠어. 방금 형사들이 다녀갔어." "류상규 씨가 피살당한 것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훈이 너 혹시 그 사건에 관련된 건 아니겠지?" "네, 나한곤 상관없는 사건이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난 누가 뭐래도 훈이 널 믿어."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어젯밤엔 왜 안 들어왔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형사들의 말이 어젯밤 훈이가 사건 현장에서 150 미터 가량 떨어진 생맥주집에 늦게까지 있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네." "거긴 왜 갔었어?" "류 노인을 만나려고 거기 있었어요. 그런데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뭐, 뭐라구?"


김인희는 가슴이 철렁했다. 흡사 새까만 절벽 아래로 떨어지듯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류 노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럼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었단 말이냐?" "네, 전화로 약속했어요." "그게 사실이냐?" "네,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왜 만나려고 했어?"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었어요." "도대체 류 노인 같은 양반한테 뭘 물어 보겠다는 거야?" "꼭 물어볼 말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먼저 나한테 의논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지만, 어머니한테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어요." "이상한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한테 말 못 할 소문이 어디 있어?" "......." "왜 말을 못 해. 나한테 물어봐." "아버지에 관한 소문이었어요.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괜찮겠어요?" "그래, 물어보고 싶으면 물어봐." 김인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나서 허락했다. 다른 때 같으면 허락할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긴박했다. 작은 아들이 왜 방황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도 그의 질문을 받아 주어야 했다. "김정섭 박사님이 제 친아버지란 말이 떠돌고 있어요." "......."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어머니." "누가 그런 말을 했어." "누가 했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나한테는 문제가 되니까 묻는 거야. 도대체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 "왜 말을 못해." "강유미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모양이에요." "강 사장의 딸이?" "네, 어떤 여자가 전화로 그런 말을 해 주었대요." "전화한 여자가 누구래?" "이름을 밝히지 않았대요. 하지만 유미 생각으로는 정지영이 쪽 사람의 장난인 것 같대요." "지영이 쪽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돌죠?" "그건 나도 모르겠어."


"어머니가 모르시면 누가 알겠어요."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와! 경찰이 널 의심하고 있어." "조금 전에 저를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그 점에 대해선 저를 믿어 주세요." "그래도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 그걸 알아야 해." "걱정을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제 마음을 제가 잡을 수 없는 지경이에요." "사내대장부가 심약하게 되면 큰 일을 할 수가 없어." "어머니!" "왜 그래?" "어머니는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죠?" "그런 건 모른다고 했잖아. 난 중산리에서 산 적도 없어. 그런데 왜 쓸데없는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군." "저한테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예요, 어머니. 중산리의 비밀을 알면 베일에 싸인 제 출생의 비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류 노인과 만날 약속을 했던 거예요." "어젯밤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열한 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기로 했지?" "조용한 시간에 조용히 만나는 게 좋겠다면서 류 노인 쪽에서 밤 열한 시로 정했어요." "겁도 없이 그렇게 늦은 시간에 사람을 만나려 하다니, 스스로 무덤을 팠군 그래." "류 노인의 아파트 근처였기 때문에 그렇게 늦은 시간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아무튼 오늘바터는 밤 늦게 다니지 말고 빨리 들어와." "며칠 후에 들어가겠어요. 그리고 그 동안 중산리의 비밀이 뭔지 알아 보겠어요." "중산리의 비밀에 접근했던 사람들은 행방불명이 되거나 죽었다고 경찰이 말했어." "하지만 저는 그 따위 경찰의 말은 믿고 싶지 않아요." "제발 어미 속 그만 태우고 빨리 들어와." "알겠어요, 어머니. 되도록이면 빨리 들어가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후, 훈아!"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강유미의 입을 통해 훈이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가게 만들었을까? 김정섭 박사가 훈이의 아버지란 사실은 내가 눈을 감을 때 밝히려 했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또오르는 얼굴이 두세 명 있었으나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오랜 시간 비밀에 부쳐온 사실이었는데, 세상엔 비밀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훈이 방황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빨리 손을 쓰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그보다 훈이 때문에 살인사건에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김정섭 박사가 걱정스러웠다. 그 양반이 마약 상습복용자가 되다니, 거기다 교묘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안타까웠다. 아파트에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성병원 원장실에도 김 박사는 없었다. 결국은 내가 암사마귀처럼 김 박사를 덫에 걸리게 만들고 말았어. 어젯밤의 통화 내용과 오늘 아침의 통화내용이 마약 전담반에게 도청당했다면 김정섭 박사는 체포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젠 너무 늦었어 윤옥주는 벗어나고 싶었다. 기회만 있으면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마약의 힘을 빌려서 여자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정체 모를 노인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예능계 대학에 진학하는 일도 좋고 장래 스타가 되는 일도 꿈에 그리던 일이지만, 숲속의 기도원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기도원은 숲속에 있었다. 뽕주사를 맞고 몽롱한 상태에서 차를 타고 밤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기도원의 위치가 어디쯤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통 기도원이 아니라 정신병자 집단 수용소라는 점이었다. 윤옥주는 정신병자들이 집단적으로 깊은 산 속 허름한 블록집에 수용되어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무엇보다 자기를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꾸눈 황은 기도원 관리인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황이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인상이 험한 40 대의 남자 관리인은 윤옥주를 구제불능의 정신병자로 알고 있었다. 기도원에 오랫동안 갇혀 있으면 정말 정신병자가 될 것만 같았다. 죽음의 냄새와 같은 악취가 밴 방 안에 갇혀 있기가 죽기보다 더 싫었다. 호수가 눈앞에 반짝이던 숲속의 별장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음식도 형편이 없었다.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몇 조각과 소금맛뿐인 콩나물국이나 된장국이 전부였다. 기도원으로 옮겨온


이후 사흘 동안은 거의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을 정도였다.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간이 세면장에서 세수만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 그녀의 모습은 진짜 정신병자의 몰골을 닮아가고 있었다. 한 박사는 기도원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이었다.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기도회를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옥주는 독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동녘이 여명에 젖어 있었다. 이때다 싶었다. 애꾸눈 황은 보이지 않았고 관리인의 모습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옥주는 신발을 벗어 두 손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뒷굽이 높은 신발밖에 다른 신발이 없었다. 하이힐을 신고서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ㄷ자(字) 형의 블록집으로 된 기도원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빠져 나왔다. 일단은 성공이었다. 이제 산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스타킹 대신 양말을 신었으나 돌부리가 많은 산길을 걷기에는 거의 맨발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뛰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아픈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답게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였다. 문득 남 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곗돈 걱정은 제껴두고 남 형사와 만났더라면 이런 비참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저만치 차도가 보였다. 비포장 도로였지만 승용차 두 대는 간신히 비껴다닐 수 있을 만한 도로였다. 기도원에 올라올 때 저 아래 차도까지 그랜저를 타고 온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애꾸눈 황이 플래시를 사용하여 한 박사가 그랜저를 돌리는 일을 도왔지만, 밤이였기 때문에 희미한 기억밖에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방향을 확인한 당음 다시 뛰어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서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와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자기도 모르게 취한 행동이었다. 애꾸눈 황이 사나운 맹수처럼 부르짖으며 산길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대강 눈짐작으로 100 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기 아니면 죽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거의 탈진상태였다. 그녀는 돌부리에 걸려 몇 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뛰었다. 그러나 그녀의 뛰는 속력은 점점 느려졌으며 반면에 애꾸눈 황은 지칠 줄 모르고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넘어졌다. 그때 그녀는 발 옆에 뒹굴고 있는 팔뚝만큼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발견했다. 길이도 적당했다. 대략 1 미터 남짓 되어 보였다. 그녀는 그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사력을 다하여 적당한 은신처를 찾았다. 이삼십 미터 가량 올라갔을 때, 몸을 숨길 만한 큼직한 바위가 있었다. 그녀는 시꺼먼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두 손에 팔뚝 굵기만한 몽둥이를 움켜쥐고 때를 기다렸다. 속으로는 자기를 찾지 못하기를 기도하면서도 애꾸눈 황이 다가오면 공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러갔다. 몹쓸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등허리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두 손은 자기도 모르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애꾸눈 황이 시꺼먼 바위를 향하여 올라왔다. 성난 맹수보다 더 험상궂은 악마의 얼굴로 다가왔다. 바위 뒤에 여자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이미 짐작한 모양이었다. 옥주야! 살아남기 위해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정신 차려야 해!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아니, 지금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는 그 말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마다 어머니가 즐겨 쓰는 말이었다. 남 형사님,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요. 빨리 와서 구해 주세요. 그녀는 애꾸눈 황이 다가오는 쪽과는 반대 방향으로 바위를 돌았다. 황은 눈에 익은 날카로운 과도를 손에 쥔 채 곰처럼 어슬렁거리며 바위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밝은 아침이었다. 방금 솟아오른 태양에 칼 끝이 유난히 뾰족한 독일제 쌍둥이표 과도가 번뜩였다. 시꺼먼 바위를 거의 한 바퀴 돌았을 때 애꾸눈 황이 발을 멈추었다. 황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몽둥이를 들어 애꾸눈 황의 머리를 향하여 힘차게 내리쳤다. '툭'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애꾸눈 황의 거구가 시꺼먼 바위 옆으로 나뒹굴었다. 동시에 '욱!'하는 신음소리도 새어나왔다. 순간적으로 황을 때려잡는 데 성공했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녀는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어 끝장을 내려고 얼른 다가서서 피투성이가 된 애꾸눈의 얼글을 몽둥이로 내리쳤다. 하지만 허사였다. 애꾸눈 황은 피투성이가 된 채 그녀가 내리친 몽둥이를 피해 몇 미터 아래로 뒹굴었다. 참으로 놀라운 방어력이었다. 아뿔싸했다. 그녀는 사력을 다하여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오른쪽 귀가 처참하게 찢어져 덜렁거리고 있는 애꾸눈을 금방 작살내어 놓고 말듯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윤옥주의 공격에는 한계가 있었다. 굵은 나무몽둥이를 휘두르는 그녀의 두 팔에는 힘이 푹 빠져 있었다. 애꾸눈 황은 피투성이가 되어 흡혈귀처럼 싸늘하게 비웃고 있었다. 황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아주 쉽게 피하고 있었다. 마침내 애꾸눈 황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황은 그녀가 휘두르는 몽둥이와 엇비슷한 몽둥이 하나를 집어들고 그녀의 몽둥이를 내리쳤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몽둥이가 손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땅바닥에 떨어진 몽둥이를 다시 집어들 기력조차 없었다. 애꾸눈 황이 돌진해 들어왔다. 그녀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덮쳤다. 나, 남 형사님...... 구, 구해 주세요. 옥주는 죽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애꾸눈 황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의 가느다랗고 흰 목은 사내의 억센 두 손아귀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바람 앞에 촛불이 꺼져가듯 생명이 꺼져갔다. 윤옥주의 몸뚱어리는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애꾸눈 황은 젊고 싱싱한 여자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두 손목의 힘을 약간 줄이고 정신병자처럼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유, 윤옥주 너는 김인희 여사를 너무 많이 닮았어. 그, 그러나 마음만은 하나도 닮지 않았어. 김 여사는 마음 역시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였어. 김 여사는 나같은 병신, 나같은 흉물도 거둬 주시고 돌봐 주신 분이었어. 그러나 옥주 넌 나쁜 년이었어. 중산리의 비밀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려 한 년이었어." 애꾸눈 황은 두 손아귀에 다시 억센 힘을 넣으며 지껄여댔다. "그런데 그런 줄도 모르고 김 박사한테 내가 너를 소개한 게 화근이었어. 직접 소개한 건 아니지만, 은하수라는 카페에 김 여사를 빼닮은 젊은 여자가 있다는 걸 알려준 게 큰 실수였어. 아니,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우연히 류정현이를 발견하고 그 자식의 뒤를 밟았던 게 잘못이었어." 애꾸눈 황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의 탐스러운 유방 사이에다 얼굴을 파묻은 채 괴성을 발했다. 그 모습은 흡사 식인종이 여자의 유방을 뜯어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애꾸눈 황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다가 날카롭게 번뜩이는 과도를 집어들었다. "난 너를 먹어야겠어. 난 너의 못된 마음을 미워했지만, 젊고 아름다운 네 육체를 미워하진 않았어. 오히려 김 여사가 되살아난 듯한 네 모습을 보고 널 얼마나 사모했는지 몰라. 난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싱싱한 네 살코기를 먹어야겠어. 그래야 저 세상에 가서 너를 만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잖아." 애꾸눈 황은 짐승이 포효하듯이 두 손으로 허공을 저으며


괴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짐승의 괴성처럼 들리는 그의 말을 실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공을 향해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은 거의 알몸이었다.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는 이미 찢겨 나갔고 짧은 치마는 배꼽을 향해 들쳐진 채 치부를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백정 출신인 애꾸눈은 먼저 그녀의 두 팔뚝의 동맥과 두 발목의 동맥을 끊었다. 해머(쇠망치)로 소 대가리를 강타하여 소를 죽인 후에 소 모가지의 동맥을 끊어서 피를 뽑아내듯이 그녀의 몸에서 피를 뽑아냈다. 햇살 때문에 더욱 시뻘건 피가 그녀의 두 팔뚝과 두 발목에서 쏟아져 나와 풀섶을 흥건히 적셨다. 애꾸눈은 잔인했다. 예리한 독일제 과도로 그녀의 두 유방을 능숙하게 도려냈다. 다음에는 그녀의 음부를 도려냈다. 검은 숲으로 둘러싸인 부분을 완전히 도려냈다. 그 다음에는 비수처럼 날카로운 과도가 그녀의 뽀얀 허벅지 살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익숙한 솜씨였다.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여자의 살코기를 도려내고 있는 애꾸눈은 이미 이간이 아니었다. 애꾸눈은 입가에 괴기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치마를 발밑으로 벗겨냈다. 그리고 그 치마에다 도려낸 살코기를 주워 담았다. 검시결과 류상규의 사망원인은 후두부(後頭部) 함몰에 의한 뇌파열과 뇌진탕이 겹쳐서 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측정 시간은 7 월 27 일 오후 11 시에서 12 시 사이로 밝혀졌다. 이튿날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30 미터 떨어진 하수구에서 피묻은 쇠파이프를 수거하여 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경찰은 다음날 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감식결과를 통보받고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쇠파이프에 묻어 있는 피가 류상규의 피와 동일형인 AB 형으로 나타났으나 쇠파이프에서 지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용의선상에 떠오른 용의자는 두 사람이었다. 경찰은 김정섭과 김훈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두 사람은 류상규가 피살당하던 날 밤 사건 현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중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따. 특히 김훈은 그날 밤 류상규를 만나려고 사건 현장에서 150 미터 떨어진 생맥주집에 있었기 때문에 혐의가 짙었으나 구속수사를 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정섭 역시 비슷했다. 그날 밤 열한 시경에 가발을 쓰고 백조아파트 근처를 산책한 사실이 밝혀졌으나 그 밖에는 아무런 물증이 없었다. 옛날 같으면 범행 동기가 충분한 인물이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구속수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물증이 없이는 구속수사는커녕 임의동행도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경찰은 지금까지의 수사자료를 토대로 제 3 의 용의자로 김인희, 홍희숙, 조민혁을 꼽았다. 하지만 그들 세 사람은 알리바이가 완벽했다. 그날 밤 살인사건 발생시간에 김인희는 장미아파트 자기집에 있었고, 홍희숙 역시 청산아파트 자기집에 있었다. 그리고 조민혁은 류미란의 개나리아파트에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알리바이가 완벽했다. 류상규가 피살당한 후 한 팀이 된 남 형사와 임 형사는 조민혁이 류미한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녀관계란 하도 묘한 것이어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수의 딸도 사랑할 수 있는데, 따지고 보면 두 가정은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잖아요." 아무래도 사랑이란 달콤한 용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쪽은 올드 미스인 임 형사였다. 그녀의 말에 노총각인 남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가는 콧대 높은 올드 미스의 과민반응에 시달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남이야 사랑을 하든 말든 내버려두고 우리는 김 박사를 집중적으로 미행해 보는 게 어떻겠어요?" "그래요. 아무래도 김 박사한테 냄새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 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고 김 박사를 집중적으로 미행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었어요." "그러니까 옛 어른들이 한 우물을 파라고 했잖아요." "또 윤옥주 때문에 은근히 시비할 마음이 생기는 모양이죠?" "비싼 밥 먹고 내가 왜 그런 여자 때문에 시비를 걸어요." "그 이유는 단지 임 형사도 여자라는 점 때문이 아니겠어요?" "괜히 잠자고 있는 남의 신경 건드리지 말아요. 그 아가씨가 뭐가 대단하다고 숙직실에 누워서도 '옥주! 옥주!'하면서 잠꼬대까지 다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정말 내가 잠꼬대까지 했단 말입니까?" "사춘기 청소년도 아니고, 창피한 줄 아세요. 도대체 그 여자를 몇번이나 만났다고 그렇게 푹 빠지셨어요?" "푹 빠지다니, 내가 언제 빠졌어요?" "빠지지 않았는데 잠꼬대까지 하세요? 그렇다면 만약 빠지는 날엔 굉장하겠군요." "선배를 이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는 겁니까?" "제발 정신차리세요. 선배님!" 두 사람은 수사과장이 잘 해 보라고 은근히 결혼을 권유할 만큼 잘 어울리는 한 팀이었다. 두 형사가 한 조가 되면 수사실적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나이도 엇비슷하여 결혼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남 형사가 윤옥주의 미모와 젊음에 매료되어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통에 임 형사와는 틈이 벌어졌던 것이다. 남 형사와 임 형사는 이틀 만에 해성병원에 나타난 김정섭 박사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형사는 김 박사에게 접근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성능이 좋은 렌터카 한 대를 빌려서 김 박사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어디에 다녀 왔을까요?" 임 형사가 물었다. 그녀는 쏘나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 형사 옆에 앉아 있었다. "......." 남 형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해성병원 3 층에 자리잡고 있는 원장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앉아서 기다리지만 말고 한 번 올라가 볼까요?" 임 형사의 말에 남 형사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피서하는 셈치고 꾹 참아요. 수사란 숨바꼭질과도 같아요." "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나처럼 괜찮은 남자와 이렇게 좋은 차에 타고 있는데, 뭐가 답답하다고 그래요? 날 임시 애인이라고 생각하든지 애인 대리라고만 생각해도 답답한 게 다 사라질 텐데." "죄송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한 거예요. 자가용 한 대 굴릴 능력이 없는데다 뒷골목 여자나 넘겨다보는 사람이 괜찮은 남자일 수가 없으니까요." "비록 렌터카지만, 엄연히 이 쏘나타는 내가 빌린 차라는 사실을 잊으셨군요. 그리고 서울 바닥에서 나만큼 건전한 사고장식을 가지고 사는 젊은이도 드물다는 사실을 모르시는군요."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괜찮은 남자라고 인정해 줄 수가 없어요." "선글라스까지 빌려 쓰고 형사 냄새가 안 나게 차려 입어서 기대를 좀 걸었는데, 여전히 고리타분한 여형사 냄새가 나는군요." "냄새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모르지만, 선글라스는 빌려 쓴게 아니예요. 치사하게 선글라스까지 빌려 쓰는 여잔 줄 알았어요?" "바캉스용 선글라스까지 소유하고 계신 숙녀인 줄은 미처 몰라뵈서 죄송하군요."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입씨름을 하고 있는데, 남 형사의 허리춤에서 무선호출기가 금속성 삐삐 소리를 냈다. "반장님도 심심하신 모양이군요."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남 형사는 수사본부에서 남 형사의 전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예감대로였다. 수사반장 박성길 경감은 남 형사의 전화를 받자마자 지시부터 내렸다. "빨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영생기도원으로 가 봐.


설악우체국을 지나서 4 킬로미터쯤 더 가다가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야 돼. 보통 기도원이 아니라 정신병자 수용소인가 봐." "지금 김정섭 박사를 미행 중인데, 제가 꼭 거기 가야 합니까?"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윤옥주의 시체가 발견된 모양이야." "그럼 윤옥주가 죽었단 말입니까?" "아마 그런 모양이야. 그리고 기도원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김정섭 박사도 다녀간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반장님." 남 형사는 얼른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공중전화 부스를 빠져 나왔다. 윤옥주가 죽다니? 도대체 어떤 놈이 죽였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윤옥주 때문에 호를 냈다간 임 형사한테 또 당할 게 뻔했다. 김 박사가 데리고 놀다가 죽인 게 분명해. 늙은 곰같은 놈이 윤옥주를 죽이고 돌아온 게 분명해. 남 형사는 렌터카로 돌아오자마자 임 형사를 데리고 해성병원 원장실로 쳐들어갔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성난 짐승의 눈빛처럼 괴기하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임 형사가 등 뒤에서 물었지만, 남 형사는 아무런 대꾸없이 원장실 출입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다행히 비서는 심부름 중이었기 때문에 비서실을 거칠 필요도 없이 두 형사는 김정섭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사건 현장으로 함께 가시는 게 어떨까요?" 인사가 끝나자마자 남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류상규 씨 피살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을 텐데......." 김 박사는 미소까지 지으며 여유를 보였다. "박사님이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윤옥주 양을 모른다고 하진 못하시겠지요?" "그 앤 내 수양딸이야. 그런데 왜 내가 모른다고 하겠어." "뭐, 뭐라구요? 윤옥주가 박사님의 수양딸이라구요?" "그래요, 내가 그 앨 수양딸로 삼았어요. 그리고 대학에도 보낼 생각이에요." "윤옥주 양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박사님이 윤옥주 양을 정신병자 수용소인 영생기도원에 보낸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수양딸을 정신병자 수용소에 보낼 수 있습니까?" "카페에서 일하던 아이라 정신적인 수양을 위해 거기 좀 보냈을 뿐이에요.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윤옥주 양은 언제 만났습니까?" "아마 일주일 정도 됐을 겁니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양수리에 있는 별장에서 봤습니다." "영생기도원엔 가시지 않았습니까?" "......." 김정섭 박사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말이 없었다. 그는 한 달 전 남 형사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몹시 쇠약하고 피로해 보였다.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 탓도 있겟지만, 한눈에 비친 모습이 갑자기 늙고 병든 무기력한 노인이 되어 버린 듯했다. 한 달 전에는 66 세의 노인덥지 않게 패기가 넘쳐 흘렀었는데 지금은 전혀 딴판이었다. "실례지만, 지난 이틀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김정섭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임 형사가 물었다. 궁금한 점은 기어코 알고 싶어하는 그녀의 성미 탓이었다. "지리산에 좀 다녀왔어요." 김정섭은 뜻밖에도 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시선만은 여전히 창 밖의 가로수에 머물러 있었다. "정말 지리산에 갔다 오셨습니까?" 이번에는 남 형사가 물었다. "모처럼 세석평원까지 올라 갔었는데, 때가 너무 늦었어." "때가 너무 늦다니요?" "때가 너무 늦어서 진달래도 철쭉도 찾을 수가 없었어." 창 밖에 시선을 못박은 채 김정섭은 혼자소리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여름철인데, 진달래와 철쭉을 보시려고 세석평원까지 올라 가셨단 말씀입니까?" "한 달만 더 빨리 갔더라도 늦게 핀 진달래나 철쭉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때가 너무 늦었어." "그럼 박사님은 윤옥주 양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오, 옥주가 죽었다구요?" 김정섭은 회전의자의 위치를 바로 돌려 놓으며 다급하게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옥주는 지금 영생기도원에 있어요." 두 형사를 쏘아보며 김벙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영생기도원 관리인인 것 같습니다." "그 애는 예능계 대학에 진학하는 게 꿈이었어요. 죽을 리가 없어요." "박사님도 우리와 함께 영생기도원에 가 보시는 게 좋겠군요." "난 지금 운전할 힘이 없어요." "차는 우리가 준비했습니다." "옥주가 죽다니, 중산리의 비밀이 또 한 사람을 데리고 갔군 그래." 김정섭은 회전의자에 앉은 채 혼자말처럼 뇌까렸다. "그럼 윤옥주 양의 죽음도 중산리의 비밀과 관계가 있는


죽음이란 말입니까?" "누군가 그런 말을 했어요. 중산리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박사님,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굽니까?" 남 형사가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김정섭은 쓸쓸한 미소를 띠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밖에 아는 게 없어요." "박사님은 누구한테 맨 처음 그 말을 들었습니까?" "그 말의 진원지는 아무도 몰라요.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은 중산리의 비밀 어쩌고 저쩌고 하던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럼 윤옥주 양도 중산리의 비밀을 알아내려 했단 말씀입니까?" "내가 알기로는 옥주는 중산리의 비밀과는 무관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중산리의 비밀을 캐내려는 사람들과 자신도 모르게 어울린 여자였어요." "그럼 박사님은 중산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은 하고 계신 분이시군요." "바로 어제 중산리에서 택시를 타고 내려 왔지만, 중산리의 비밀은 짐작으로 말할 수 있는 성질의 비밀이 아닌 것 같아요." "대강 짐작은 하고 계시지만, 짐작으론 말할 수 없다 그 말씀이시군요." "생각은 자유니까 좋도록 생각해요." "피곤하시겠지만, 기도원엘 함께 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옥주가 죽었다는데 그냥 있을 순 없지요." 김정섭 박사가 일어서자 두 형사도 얼른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영생기도원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사건 현장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현장에는 관할 지서에서 파견 나온 순경 두 사람이 근무 중이었다. 시체는 산비탈 바위 옆에 하늘색 비닐로 덮여 있었다. 남 형사가 다가서서 허리를 굽히고 하늘색 비닐을 들추었다. 그 순간 메스꺼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흉칙한 시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너무 끔찍한 시체였다. 온몸에 소름이 확 끼칠 만큼 참혹했다. 세 사람 모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업상 시신을 많이 만져본 김정섭 박사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온전한 시체가 아니었다. 긴 머리카락만 온전했을 뿐 얼굴은 퉁퉁 부어 올라서 윤옥주의 원래의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와는 판이한 흉칙한 얼굴이었다. 두 개의 유방은 끔직하게 움푹 패여 있었다. 예리한 흉기로 유방을 몽땅 도려내어 버린 게 분명했다. 하복부의 음부 역시 도려 내어졌고 허벅지살과 엉덩이살도 깊숙이 도려내어져


있었다. 차마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참혹한 시체였다. 남 형사는 다시 한 번 몸서리치며 하늘색 비닐을 시체 위에 덮었다. 윤옥주의 시신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시체였다. 그처럼 아름답고 젊고 매력적이고 늘씬했던 여자의 시신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시체였다. 허무했다. 한때나마 애타게 사모하고 그리워했던 빛나는 눈동자의 윤옥주가 두 번 다시 쳐다보기조차 싫은 흉물이 돼버린 점이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훼파될 대로 훼파된 젊은 여자의 끔찍한 시체를 목격한 직후라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세 사람 모두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시신을 덮은 하늘색 비닐에서 웬만큼 떨어졌을 때 남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관리인부터 만나봐야 겠군요." "내 생각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김정섭의 말이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애꾸눈 곰보의 짓 같아요." "애꾸눈 곰보가 누굽니까?" "그 놈은 백정 출신이에요. 여자의 동맥을 끊어놓은 솜씨가 틀림없는 백정의 솜씨였어요." "그 사람 어디 사는 사람입니까?" "내가 데리고 있던 별장지기였는데, 지금쯤 청림장에 가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의 고기를 가져갔으니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갔을 것 같아요." 김정섭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빨리 청림장으로 가 봐야겠군요. 빨리 가시지요." 남 형사는 김 박사를 부축하여 산비탈을 내려와 쏘나타를 주차시켜 놓은 지점까지 빨리 걸었다. 세 사람은 쏘나타를 타고 청림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호수가 보이는 숲 속의 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 별장은 누구의 별장입니까?" 남 형사의 질문에 김정섭 박사는 "아는 사람의 별장인데, 마침 미국 여행 중이라 내가 좀 빌렸어요." 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윤옥주 양을 감금시켜 놓았던 곳이 바로 이 곳이로군요." "일주일 전까지 이 별장에 있었어요. 하지만 옥주를 감금시키진 않았어요." "최영욱은 어디 있습니까?"


"엉터리 사진작가 말입니까?" "네, 사진작가 흉내를 내며 윤옥주 양을 납치한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은 죽었어요." "누가 죽였습니까?" "애꾸눈 황씨가 죽였는지 옥주가 죽였는지 잘 모르지만,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죽인 것만은 분명해요." "최영욱의 시체는 어디 있습니까?" "애꾸눈 황씨가 숲 속 어딘가에 묻었어요." "그럼 김 박사님은 최영욱의 죽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입니까?" "글쎄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셈이지요." 김정섭은 남의 일처럼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류정현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죽인 게 아니라 안락사를 시킨 겁니다." "박사님이 그랬습니까?" "옥주가 제거했어요." "윤옥주 양 혼자서 그랬단 말입니까?" "그 일만 나한테 책임이 있어요." "무엇 때문에 류정현 씨를 죽였습니까?" "내가 손댈 사람이 아닌데, 어느 날 밤 악마의 지시를 받고 그런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 악마가 누굽니까?" "그건 나도 잘 몰라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정현 씨 살인교사죄로 일단 연행하겠습니다. 이의가 없으시죠?" 남 형사의 질문에 김정섭 박사는 체념한 듯 쓸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 밤. 서초경찰서 지하 취조실에서 남현수 형사가 김정섭 박사를 심문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민혁은 개나리아파트 3 동 비상계단을 이용하여 7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미리 6 층 비상구의 잠금장치를 풀어 놓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류미란은 캔버스 앞에서 작업을 하다 말고 조민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오빠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림은 잘 돼 가?" 조민혁이 미소를 머금고 묻자 류미란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생각처럼 잘 안 돼?" "네." 류미란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아직도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녁식사는 했어?" "조금 했어요." "태아를 위해서도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고 기운을 내야 해." "고마워요." "맛있는 피자를 먹으러 갈까?" "생각이 없어요." "마침내 김훈이 숨어 있는 하숙집을 찾아 냈는데, 전활 걸어 보겠어?" "민혁 씨가 그 사람을 만나 봤어요?" "일부러 만나지 않고 전화번호만 알아 왔어." "내가 그 사람한테 무슨 전화를 하겠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이리로 오라고 해 봐. 틀림없이 이리로 달려올 거야." "출생의 비밀이라니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출생 비밀을 나한테 알려 주셨다고 하면 당장 쫓아올 거야." "나는 그 사람의 출생 비밀을 몰라요." "김훈이는 사생아야. 호적에 있는 아버지는 가짜 아버지고 진짜 아버지는 김정섭 박사야." "어떻게 호적을 그렇게 만들 수 있어요?" "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아무리 그렇지만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해치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류미란은 달포 전까지만 해도 김훈을 친오빠처럼 생각하고 '훈이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는데, 지금은 김훈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 생각엔 미란이 훈이한테 전화를 걸어서 훈이가 여기 나타나면 인간적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자수를 시키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은데, 미란이 생각은 어때?"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심약한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그 사람들을 우리 가족처럼 생각했었는데....... 정말 그 사람들에게 배신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해. 그래야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어." "그럼 지금 그 사람한테 전화를 걸란 말인가요?" "훈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일단 한 번 전화를 해 봐. 만약 훈이가 나타나면 그 다음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럼 전화번호를 주세요." "번호는 내가 눌러줄 테니까, 훈이를 바꿔 달래서 훈이가 나오면 아까 내가 말한 대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한 시간 이내로 개나리아파트로 오라고 그래." "알겠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뒤책임은 민혁


씨가 지세요." "응, 알았어." 조민혁이 이동식 송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세 번째 떨어졌을 때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냐고 물으면 친구라고 해요." 조민혁은 상대방이 들을 수 없도록 수화기 표면을 손바닥으로 꽉 막고 말한 후에 미란에게 송수화기를 넘겼다. 미란의 전화는 효과가 있었다. 김훈은 출생의 비밀 운운하는 전화를 받고 신경을 곤두 세웠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이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아버님이 정말 미란이한테 그런 얘기를 해 주셨단 말이지?" "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전화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내 얘기를 듣고 싶으면 지금 이리로 오세요. 나도 김훈 씨한테 알아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알았어, 미란이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미란이를 한 번 만날 생각이었어." "그럼 기다리겠어요." 미란은 민혁이 시킨 대로 통화를 길게 끌지 않고 일방적으로 끊었다. "훈이가 뭐래? 이리로 온대?" 민혁이 물었다. 미란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어디 아파?" 민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미란은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김훈은 서초 2 동에서 택시를 타고 서초 4 동 개나리아파트로 달려갔다. 때마침 아파트 경비실에 앉아 있는 경비원은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기 때문에 김훈은 아무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7 층으로 올라갔다. 713 호 벨을 눌렀다. 세 번, 네 번 눌렀으나 기척이 없었다. 이상했다. 김훈은 되돌아가려다가 도어놉을 밀었다. 도어놉은 돌릴 필요도 없었다. 출입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김훈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류미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는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미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음 순간 김훈은 남녀의 대화가 텔레비전에서 흘러 나오는 대화인 것을 깨달았다. "이 집에 아무도 없어요?"


큰 소리로 물어 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텔레비전에서 슬러 나오는 대화만 요란스러웠다. "사람을 오라고 불러 놓고 도대체 어딜 갔지? 혹시 먹을 것을 사러 갔나?" 거실에 서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식탁 아래 반듯이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고 김훈은 가슴이 덜컹했다. 섬뜩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를 친오빠처럼 생각하고 따르던 미란이었다. "미란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쓰러져 있는 미란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른 손목의 맥박을 짚어 보았으나 맥박은 이미 멎어 있었다. 형광등에 드러난 미란의 얼굴은 이미 백납처럼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김훈은 경찰에 신고할 생각으로 거실의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송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류상규 노인 살인용의자로 지목을 받고 쫓기는 몸인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가는 오히려 누명을 뒤집어 쓸 것 같았다. 김훈은 거실을 등졌다. 그리고 출입문에 달린 손잡이의 지문을 지운 후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는 위험할 것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는 민첩하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 6 층 비상구를 이용하여 황급히 개나리아파트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비지땀을 흘리며 돌아온 김훈에게 강유미가 물었다. "......." 김훈은 대답대신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아까 전화한 여자는 누구예요?" "미, 미란이었어." "류상규 씨의 딸 류미란 씨 말인가요?" "응. 그, 그런데 두,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어."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김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다. 유미는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었다. "누군가 함정을 파놓고 당신을 끌어들인 게 분명해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하지?" "경찰에 신고했어요?" "신고하려다가 신고하지 않았어." "잘 했어요." "난 지금이라도 신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돼요. 당분간 용인에 있는 시골집에 내려가 계세요." "왜?" "난 당신을 알아요. 하지만 경찰은 당신을 몰라요. 한 번 걸려들면 빠져 나오기 어려워요."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경찰은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진범이 잡히지 않으면 당신이 진범이 되고 말아요. 진범이 붙잡힐 때까지 피신해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피신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상할 것 하나도 없어요. 음모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피신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군 그래." "혹시 누가 당신을 함정에 몰아 넣었는지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요?" "응, 없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으나 김훈은 그 사람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살인사건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먹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틀림없이 주변 인물 중에 당신을 함정에 몰아넣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있긴 있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기 싫어." "그러니까 빨리 피해야 해요. 경찰에 끌려가서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간 뒤집어쓰기 꼭 알맞아요." "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안 돼요. 함께 용인으로 내려가요." "난 이대로 좀 쉬고 싶어." "용인에 가서 쉬세요. 내가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꼭 그래야겠어?" "네." "샤워 좀 하고 떠나면 안 되겠어?" "지금쯤 경찰이 지명수배를 했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 아파트에 간 걸 본 사람이 없어." "그래도 몰라요. 당신이 우리 집에 숨어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누군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란 씨가 전화를 어떻게 했겠어요? 누군가 당신이 우리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겠어요?" "응, 그래. 그런데 난 그런 것도 생각지 못하고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갔어. 내가 바보였어." "그래서 내가 아예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무튼 샤워부터 좀 해야겠어." "빨리 하고 나오세요. 난 그 동안 용인으로 갈 준비를 해 놓을 테니까요."


"응, 알았어." 김훈은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속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배드를 틀었다. 소낙비 같은 시원한 물줄기가 땀에 젖은 그의 알몸을 감쌌다. 온 몸이 하늘로 솟아오를 듯이 상쾌했다. 김훈은 샤워를 마친 후 유미가 기다리고 있는 차고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에게 불쑥 다가서는 사내가 있었다. 수은등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은 남 형사의 얼굴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김훈 씨." "나, 남 형이 어떻게?" "신고를 받고 달려왔습니다." "시, 신고를 받다니요?" "아파트 주민이 신고를 했어요." "그, 그건 음모예요!" 어둠 속에서 유미가 소리쳤다. 그녀 곁에는 임 형사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난 사람을 죽이진 않았어요. 내가 갔을 때 미란이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그럼 오늘 밤 개나리아파트 3 동 713 호에 갔던 것만은 사실이군요?" "......." "누군가 김훈 씨를 개나리아파트로 끌어들인 거예요!" 유미가 다시 소리치자 곁에 서 있는 임 형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훈은 서초경찰서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그는 아까부터 쉬고 싶었으나 쉴 수가 없었다. 낯선 형사들이 번갈아 가며 밤새도록 심문을 계속하는 통에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거긴 왜 갔어?" 형사는 숫제 반말로 묻고 반말로 다그쳤다. "왜 갔었느냐고 묻고 있잖아!" "......." 김훈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답했지만 반복되는 질문에 나중에는 대답조차 하기 싫었다. 사실 그대로 말했지만, 낯선 형사들은 한 사람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유도심문을 계속했다. 이튿날. 검시결과 류미란의 사인은 질식사로 밝혀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 억센 팔로 그녀의 목을 졸라 질식사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홀몸이 아니라 임신 2 개월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증(物證)은 미란의 오른쪽 손톱 밑에서 발견된 깨알만한 살점이었다. 오른손 집게 손가락의


날카로운 손톱 밑에 박힌 깨알만한 살점과 혈흔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줄 열쇠가 될 수 있었다. 살점의 혈액형은 B 형이었다. 그리고 태아의 아버지도 같은 B 형이었다. 개나리아파트 713 호에서 감식반이 채취한 지문은 김훈의 지문과 동일했기 때문에 경찰은 김훈의 혈액형부터 조사했다. 그러나 그의 형액형은 B 형이 아니라 O 형이었다. 김훈이 아니라 조민혁이었다. 미란의 애인이 미란의 목을 조르기 직전 김훈을 교묘하게 끌어 들였던 것이다. 남 형사는 강유미의 진술을 받고 한 발 앞서 조민혁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조민혁은 류상규 씨를 살해할 때도 거의 같은 수법을 사용했었다. 김훈을 끌어들여 놓고 류상규 씨를 살해한 후 사건 현장에서 멀지않은 류미란의 아파트를 은신처로 삼았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류상규 노인과 김훈이 밤늦게 만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기회에 그런 수법으로 살해를 하고 류란의 아파트로 잠입했는지도 모른다. 남 형사는 서초 3 동 청산아파트 입구에서 조민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시간 이상 지루한 시간을 죽이고 기다렸을 때였다. 조민혁의 은빛 캐피탈이 오후의 햇살에 차체를 번뜩이며 아파트단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남 형사는 사냥개처럼 민첩하게 아파트 주차장으로 달려가 승용차를 세워 놓고 나오는 조민혁 앞을 가로막았다. "조민혁 씨, 오랜만입니다." "어허, 이게 누굽니까? 남 형사님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그 와이셔츠 소매 좀 걷어올려 주시겠습니까?" 조민혁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 월 초순인데도 줄무늬의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실까요?"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그 순간 남 형사는 재빨리 조민혁의 왼쪽 손목에다 수갑을 걸었다. 정말 감쪽같은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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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깊은 골짜기 깊은 비밀 지은이 : 임춘남 ----- 차 례 ----- ⊙ 작가 소개 작가 소개 프롤로그 식물인간 마타도어 "네." 하고 돌아섰다. "남 형산가 하는 그 친구 꽤 귀찮게 구는군 그래. 그 친구가 아까부터 본부장을 기다리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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