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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마지막 파티 지은이: 정태원 역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역자 소개 프롤로그 1 2 3 4 5 6 7 8 9 10 에필로그

⊙ 역자 소개 - 1954 년 서울에서 출생.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 광고 대행사 '오리콤'에서 7 년 동안 CF 감독으로 일했다. - 중학 시절부터 추리소설에 깊이 빠져 모은 책이 지금은 8000 여권에 달한다. - 지금은 추리잡지 <미스터리 매거진> 대표로 일을 하고 있으며 외국 추리소설을 소개하고 창작하는 일에 온힘을 쏟고 있다. - 주요 역서로는 <에드가 상 수상작품집 1, 2, 3> <러브 미스터리> <마지막 파티> <살인게임> 등이 있다.

프롤로그 그는 자신이 해낸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여섯번째 희생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전의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종류의 흉기에 의해 살해된 그녀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풀밭 위에 누워 있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멋진 갈색 머리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시체는 곧 발견될 것이고, 경찰은 그가 또다시 성공한 것을 뒤늦게 알고 그의 다음 행동을 막기 위해 부산을 떨 것이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아직도 한 번 더 살인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과의


약속일뿐더러 의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고, 그녀에 관한 상세한 자료까지도 모두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희생자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그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저항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유능한 연출가에 의해서 진행되는 리허설의 연기자처럼 그녀는 자신의 역을 훌륭하게 연기할 것이다. 그것은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의 희생자들은 모두 그의 계획대로 죽어 갈 뿐이다. 너무나 간단하다. 스펜서 크로스 웨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여섯번째 희생자의 사진을 내려다 보았다. 사건 해결의 열쇠는 무엇일까? 타개책은? 동기는? 이 살인 사건을 담당해 온 그를 비롯한 형사들의 수사망을 그 괴물은 어ㄷ게 용케 빠져나갔을까? 그는 살인자가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르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2 층으로 올라가 상관에게 새로운 피살자가 생겼음을 알리고, 뉴욕 시경의 수사가 제자리 걸음인 것을 머뭇거리며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굳게 결심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뉴욕 시경에서 냉정함과 침착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베테랑이지만, 이와 같은 막연한 사건은 그의 정열과 강박 관념을 자극해 정신을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뜨거운 정열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범인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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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와 마티는 센트럴 파크 웨스트가 내려다보이고 넓은 방이 다섯 개나 있는 고급 아파트의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푸른 눈을 가진 서른다섯 살의 사만다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8 개월째 접어드는 마티와의 결혼 생활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런 행복이 어떤 일로 인해서 동요된다거나 어떤 공포 때문에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생각은 아예 해볼 틈도 없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분명히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지속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마티가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가 말하는 뜻을 알고 있는 사만다는 미소를 지었다. [파티 말이죠?] [그래.] [아이 참, 당신도. 아직도 몇 주나 남았잖아요.] [하지만 마흔이 되도록 아내가 해주는 생일 파티는 이번이 처음이야. 그러니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 초대 손님 명단은 작성했지?] [그럼요. 당신한테 조금이라도 중요한 분들은 모두 초대할 거예요.] [그렇게 하면 굉장히 많을 텐데.] [미리 연락을 해놓을 예정이에요. 아마 거절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ㅔ멜 피어스는 빼야 될 거야. 그는 12 월 내내 아스펜에서 지내거든.] [그렇다면 전보를 쳐서라도 오라고 해야죠.] 사만다는 하얀 테이블보 너머로 상반신을 쭉 내밀어 마티의 눈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눈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정신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마티, 날짜는 정확하지요?] [틀림없어.] [12 월 5 일?] [바로 그날이 내 생일이지.] [목요일이에요.] 마티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샘, 전에도 여러 번 말했잖아. 나 역시 내 생일 파티를 정확한 날짜에 열고 싶다고. 12 월 5 일 목요일, 틀림없다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눈을 감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아마 파티 석상에서 하게 될 간단한 인사말을 생각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락이 끊긴 옛 친구들의 주소를 알아낼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사만다는 그를 바라보며 문득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1 년 전, 사만다는 조그만 광고 대행사의 카피라이터였다. 그 광고 대행사는 맨해튼의 초라하고 후미진 곳에 있었는데 임대료조차 제때에 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곳에 근무하는 남자들은 대개가 결혼 생활에 실패한 사람들뿐으로, 화젯거리라고 해봤자 고작 자기들의 견혼 실패담 정도였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행실이 좋지 않은 아내나 그 아내와 눈이 맞은 정부, 이혼 소송 변호사, 자주 싸움을 하게 되는 양부모에 대해 푸념하면서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열심히 찾았다. 사만다는 거의 매일 밤 그러한 남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동정 또는 수긍을 해주었고, 가끔은 아내와 이혼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어 괴로워하는 새로운 남자 친구의 고뇌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안돼.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상대가 필요해.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지 못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이상형의 남성이 나타나 주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그녀 주위의 남자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그들의 구혼에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러한 때에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살을 뺀다>라는 제목의 다이어트 책 출판 기념 파티에서 마틴 에버릿 쇼를 만나게 되었다. 사만다는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항공 회사의 고문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사만다는 선천적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외모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마티 쇼는 그 양쪽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성적인 흡인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마티에게 빠져든 것은 그가 단순히 키가 훤칠하고 축구 팀의 풀백같이 당당한 체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마티는 마루를 쿵쿵 울리며 걸어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그의 가는 방향을 막으려 할지라도, 기필코 가고자 하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그런 남자였다. 목소리는 무척 단호하고 크게 울렸으며, 그러면서도 거칠거나 우락부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박력있는 사나이였다. 사만다는 그런 느낌을 받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아침 시에 일어나서 하루 일을 준비하고, 필요하다면 밤 11 시까지라도 일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사실로 증명되었다. [오늘 점심에 무슨 중요한 약속 있어요?] 아침 식사를 끝낸 남편에게 사만다가 물었다. [아마 없을걸.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일이 생길지도...... 바쁘지 않으면 서점에 들러 볼 생각이야. 광고주가 될지도 모를 회사를 소개한 신간이 출판되었거든.] 그는 대답하면서 냅킨을 반듯이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늦어요?] [아마 제때에 오기 어려울 거야. 직접 회사를 경영하면 모두 자기 마음대로 되지만 시간만큼은 그렇지가 않아. 산처럼 쌓인 서류더미를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군.] [누구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나요?] [안돼.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마치 사만다의 아버지가 훈계하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 마티와 있으면 아버지와 같이 살아온 날들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한 점이 또한 마티의 신비한 매력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지만. 게다가 마티는 사만다가 어린 시절부터 부족하게 느껴 왔던 부분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녀가 태어나 자란 가정은 냉랭하고 쌀쌀한 분위기였다. 양친은 각자 독립된 생활을 영위했고, 서로 대화 7 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만다와 이야기하는 시간은 더더욱 적었다. 외동딸이었지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외동딸처럼 애지중지 응석을 받아 주는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버지를 무척이나 존경했지만, 항상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마치 생판 모르는 타인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티는 사만다가 동경해 오던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언제나 신경을 써줌으로써 그녀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었다. 고급 레스토랑에 갔을 때도 훌륭한 요리 같은 것은 뒷전에 두고 사만다의 표정이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사만다 자신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미국의 가정엔 아이가 필요하기 때문에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자라 왔던 것이다. 그녀는 마티에게 일체감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도 십대에 한쪽 부모를 잃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비슷한 경험이 둘 사이를 더욱 깊은 감정의 끈으로 연결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의지가 강하고 실천력이 뛰어난 남자에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 그녀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십대에 양친을 잃고 잡지 판매를 하면서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오고, 친척들조차 그를 무시할 때마다 자신에게 형제 자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날들을 이야기해 주었을 때에 느꼈던 충격을 사만다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상점, 작은 회사의 광고부 등에서 시시한 일을 하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였다. 웬만큼 돈을 저축해서 뉴욕으로 온 그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과 비슷하다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마티는 아내를 얻었고 가정도 꾸몄다. 이야기할 상대와 자신의일에 신경을 써줄 누군가가 있다. 사만다는 어렸을 때부터 대가족의 장남과 결혼해서 그와 함께 그의 생가를 방문해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과 마나는 일을 꿈꾸어 왔었다. 그러한 꿈은 마티 때문에 단념했지만, 그 꿈보다 더한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마티에겐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이 하나 있긴 있었다. 그것은 가끔 방어적으로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그 눈초리였다. 방심할 틈이 없는 눈초리여서 사만다는 어째서 저런 눈을 하는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여겼다. 냉정한 비즈니스 세계의 경쟁에서 선두로 덜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해온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고독의 그림자가 사만다의 모성애를 움직였던 것이다. 지금 그녀의 모든 신경은 남편의 생일 파티에 쏠여 있었다. 마티는 출장이 잦아서 미리 약속해 두지 않으면 생일 당일에 주인공이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생일 파티만은 비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만다는 커다란 비밀을 하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그날의 하일라이트가 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그에게 안겨 줄 것이다. 그러한 생가을 하며 즐거워진 그녀는 정말로 놀라운 파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티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더니 일어서서 여느 때보다도 더욱 진한 애정이 담긴 키스를 했다. [자, 다녀올게.] 그가 문을 나서자 곧바로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문이 열리고 곧이어 문이 닫히고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부드러운 하얀 카펫을 가로질러 응접실의 창가로 가서 센트럴 파크의 꾸불꾸불한 산책로와 도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을의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두 손을 상의 주머니에 넣고 5 번가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스무 살 정도의 남자 쪽으로 낙엽이 날아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원이나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매우 멋지긴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평안함을 난생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것은 아름다운 겨치가 아니라는 것을 사만다는 알고 있었다. 마티가 현관에서 바쁘게 나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에게 마음의 평안함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크 위에 얹은 달콤한 크림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만다와 마티는 이곳을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흰색으로 내부를 칠하고 일부에는 금속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방 안 구석구석에 레일로 매단 간접 조명등이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반세기가 흐른 건물의 외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회색 석재를 사용한 위엄있는 건물 정면에는 도어맨이 흰 장갑을 끼고 서 있었기 때문에 상류 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이 조금은 엿보이지만 그렇게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사만다는 수화기를 들고 재빨리 익숙한 솜씨로 전화 번호를


눌렀다. [린? 샘이야. 마티가 방금 출근했어.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곧 갈게.] 린에게는 생일 파티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오늘은 둘이서 준비를 상당히 많이 해낼 것 같았다. 마티는 지금쯤 택시를 잡아 사무실을 향해 도심 골목을 대여섯 불록 지났을 것이다. 린 굴드는 건장한 체구답게 식욕 또한 참으로 왕성했다. 그녀는 자선 단체를 위해 일하는가 하면 화랑을 경영하면서 꼬마 둘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짧게 자른 금발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해내는 린을 보면서 사만다는 린이 마법을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린 자신은 만사에 서투르다고 생각했다. 린은 복도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결혼하고 쇼 부부가 이사온 후 사만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사만다는 신장이 160 센티미터여서, 170 센티미터인 린이 마치 머리 위로 우뚝 솟은 거인 같아 보였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소박한 따사로움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위압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몇 분 후 린은 연필과 메모지를 들고 기운차게 뛰어들어왔다. [준비는 완벽해. 오늘은 오전 내내 마티의 수수께끼 같은 과거를 탐색해 볼 거야.] 린은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사만다는 그 전에 먼저 커피를 끓였다. [마티가 이 일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린은 모를 거야. 심심하면 말하거든. 오늘 아침에도 기쁨에 들떠 있었어.] [정말 지금까지 생일 파티를 열어 본 적이 없을 거야. 어른이 되어서는 더더욱.] 린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몰라. 가족이 없었으니까.] [나도 찰스에게 이렇게 해줘야 할까 봐. 케이크를 자르기 전에 그이를 집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내게 도움을 청해. 마티처럼 린의 남편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그리고 나서 사만다는 조금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게 좋은 아이디어일까?] 용기를 내서 그녀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최고야! 마티의 과거를 회상해서 신세를 졌던 사람들이나 교수님과 연락을 하고, 그의 생일을 위해 축사를 보내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멋진 생각이야. 그래, 나라면 그렇게 해주는 사람에게 키스라도, 아니 뭐든지 해줄 거야.] [하지만 나쁜 기억들을 긁어 내는 일은 없어야 될 텐데.] [바보 같긴. 샘, 마티가 옛날 일들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지 알면서 그래. 물론 괴로웠던 일도 있었겠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향수를 느끼고 있을 거야. 좋은 일이야. 샘이 하고 있는 일은 조금도 틀린 일이 아니야. 사랑하는 마티 쇼를 위해서, <이것이 당신의 인생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지.]


린은 마티가 살았다든지, 일했다든지, 학교에 다녔던 지역의 전화번호 안내에 전화해서 마티의 옛날 친지의 번호를 알아내고 그것을 사만다에게 전해 주는 일을 맡았고, 실제로 그들에게 전화를 하는 일은 사만다의 임무였다. 그렇게 해서 린은 사만다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덜어 주기도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만다에게 파티 준비의 좋은 정신적 상담자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잠시 후 사만다는 현관 홀의 작은 검정색 테이블 앞에 앉아 전화기를 들고 지역 번호 312 를 누르고 다시 전화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그 사이 전화기에서 울리는 수신음이 시시각각 그녀를 마티의 과거로, 그가 그렇게도 잘 이야기해 오던대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사만다의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그래, 린이 말한 대로다. 이것은 정말 멋진 계획이다. 최초의 사랑의 선물인 것이다. 사만다는 설렘으로 들뜬 채, 마티가 이야기해 준 노스웨스턴 대학 저널리즘학과 재학중에 그가 어렵게 보낸 시절을 떠올렸다. 질리지도 않는지 몇 번이고 사만다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나중에 광고업계에서 성공하는 데 발판이 된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그는 광고를 전공하는 친구와 함께 에번스턴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선물용 캔을 포장해 주겠다고 주문을 받았다. 스물세 군데에서 주문을 받았을 때, 학생부장에게 발각되어 주문을 한 사람들에게 사과하도록 명령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들의 사과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기 때문에 여섯 명이 또 주문을 했다고 하였다. 사만다의 전화가 연결되었다. [네, 메딜입니다.]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저, 잠깐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 도와주실 수 있을는지요?] [무슨 용건입이니까?]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곳에 재학했던 사람에 대하여 알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댁은 회사와 관계되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곳의 66 년도 졸업생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편의 생일 파티를 계획하고 있는데 추억이 될 만한 오래 된 이야기 같은 걸 수집하려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교수님들과의 추억거리 같은 걸.] [좀 이상한 주문이군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만다는 멋적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 폐가 된다면......] [아녜요, 천만에요. 남편의 성함을 말씀해 주시면, 그해의 졸업생 명단을 훑어보겠습니다. 졸업생 명단은 갖고 계시죠?] [아뇨, 저희들이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다더군요.이름은 마틴 에버릿 쇼예요. 수석으로 졸업했구요.] [쇼어(S-H-A-W)입니다.] [지금 알아보겠습니다.] 긴 시간이 흘렀다. 바야흐로 마음 설레는 계획이 실행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사만다와 린은 얼굴을 마주보며 생긋 웃었다. 사만다는 손바닥으로 수화기 입구를 막았다. [지금 찾고 있는 중이야.] 그녀는 린에게 속삭였다. 전화 저쪽의 상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메딜의 사람들한테서 축사를 받으면 마티는 얼마나 기뻐할까.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남편의 얼굴이 사만다의 눈에 어른거렸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졸업 연도가 정확합니까?] [네, 왜 그러시죠?] [마틴 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요. 마티는 언제나 66 년도에 졸업했다고 이야기하던데.]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학위 취득은 석사입니까, 아니면 학사입니까?] [학사입니다.] [미안합니다. 명단이 잘못되었나 보군요. 여러 가지 서류들이 마구 섞여 있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사만다는 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오른손으로 은색 크로스 볼펜을 탁자에 가볍게 두드리며 기다렸다. [네.] [남편의 성함은 학사 명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분명히 뭔가 잘못된 거예요.] 사만다가 의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해의 졸업생 명단과 정식 보존용 명단도 확인해 보았습니다. 마틴 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군요. 혹시 다른 대학의 저널리즘 학과와 혼동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컬럼비아라든지......] 사만다는 조금 초조해졌다. [남편이 어느 대학의 무슨 학과에 적을 두었던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야, 힘들여 알아봐 주는 사람에 대해 실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혹시 다른 연도에 잘못 기재되어 있지나 않은지요?] [졸업생 명단을 모두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컴퓨터에 입력된 회계 기록도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하면 수업료 납부 명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마틴 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66 년도에 데이비드 쇼라는 이름은 보입니다만 이분은 영국인이군요. 혹시 다른 이름으로 등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남편께서는 성을 바꾸셨습니까?] [아녜요. 줄곧 쇼였습니다.] [이 이상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군요.] 한숨 섞인 음성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사만다는 이 혼란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마티는 학교 신문의 편집 위원을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무언가 잘못되어서 이름이 명단에서 빠졌다


하더라도, 그가 서명한 기사는 있을 거예요.] [옛날 신문을 철해 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목소리는 점점 알 수 없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변했다. [미안합니다. 여러 가지로 성가신 일을 부탁드려서.] [아닙니다. 그런데 남편께서는 동창회보를 받고 계신지요?] 사만다는 잠깐 동안 생각했다. [글쎄요,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이는 주소를 자주 옮겨서......] [저희 학교 졸업생들은 저널리스트들입니다. 대부분이 빈번하게 주소를 바꿉니다. 하지만 사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무뚝뚝한 대답이었지만 사만다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화기 안에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66 년도 졸업생이 발행한 6 호분을 전부 체크해 보았지만 서명 기사를 쓴 사람 중에 댁의 남편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사만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솔직히 말씀드려도 좋을까요?] 느닷없는 질문에 사만다는 깜짝 놀랐다. [네, 말씀하세요.] [이런 일은 가끔 있는 일이지요.] [무슨 말씀이시죠?] [어쩌면 남편께 물어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동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왜죠?] [쇼 부인, 남편께서 본교에 재학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저희로서는 남편께서 유리한 직업을 얻기 위해서 저희 졸업생의 이름을 이용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밝혀진다면, 즉각......] [감사합니다.] 사만다는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향해서 으르렁댄 다음 린에게 물었다. [이런 일 믿을 수 있어? 마티의 이름이 없다니. 그것도 수석으로 저널리즘학과를 졸업한 사람을 말이야. 이런 엉터리 이야기가 어디 있어?] [있을 수도 있지.] 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엉터리 컴퓨터 탓이야. 그들은 아마 작고 보잘것없는 디스켓에 마티의 이름을 넣는 것을 잊어버렸을 거야. 하여간 그 여자가 알아봐준 것은 버튼 몇 개 눌러 준 일뿐이잖아. 기록이 없으니 모른다고 말했겠지 뭐.] [하지만 여러 가지 기록을 살펴봐 줬어.] [그것은 상대편 말이잖아. 샘, 대학의 컴퓨터에는 흔히 발생하는 일이야. 우리 오빠도 학적부가 몽땅 잘못됐었어. 최근에야 잘못된 것을 알았다니까.] [그건 나도 알아.] 사만다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어깨를 움츠리고 방금 전화한 내용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노여움과 의혹이 어우러져 착잡하기만 했다. 마티가 학력을 속였다고는 티끌만큼도 믿을 수 없었다. 마티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마티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알고 있었다. 직접 학생부장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말단 사무원이 아닌 사람에게서 원하는 자료를 꼭 입수해야 한다. 그러나 사만다가 전화를 하니 공교롭게도 학생부장은 회의중이었다. 다시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 다른 데 전화해 볼까? 동사무소의 전화 번호도 알고 있어.] [그이의 출생지에 전화하기 전에 대학 쪽을 우선 확실해 해두고 싶어. 먼저 파티의 진행에 대해서 의논하지.] [좋아.] 사만다는 테이블 서랍을 열고 <뉴욕 매거진>을 한 권 꺼냈다. 그녀는 뒤쪽의 광고 페이지를 펼쳐서 잡지를 린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 생일 파티를 비디오로 찍어 주는 광고가 나와 있어.] [그거 좋은 생각인데.] [비디오 찍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상관없어. 만약 싫으면 카메라를 안 보면 되니까.] 린이 자신있게 말했다. [찍기로 해. 그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아. 소리도 녹음될 테고 말야.] [전화해야겠어.] 사만다는 메모했다. [비용이 얼마나 드나 마티에게 알렸다가는 혼나겠는걸.] [샘, 남자들은 본인을 위해 쓰여지는 돈에 대해서는 절대로 화내지 않아. 우리를 위해 쓴다면 질책을 하겠지만, 당연한 일이지. 오빠가 가르쳐 줬거든. 이혼을 담당하는 전문 변호사야.] 사만다와 린은 의논을 계속하며 그날의 메뉴를 짜기 시작했다. 마티는 쇠고기와 감자를 제일 좋아하니까 메뉴는 그것으로 결정하고, 거실의 장식은 우아하고 로맨틱하게 꾸미기로 했다. 사만다는 초대 손님 명단에 두세 명의 새로운 이름을 추가했다. 마티가 뉴욕에서 사귄 많은 친구들 이름으로 이미 넘칠 정도였지만. 그녀는 또한 생음악 밴드를 부르고 싶었다. 그것 역시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마티는 브로드웨이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사만다는 줄리어드 음악 학교 출신의 작은 그룹에 전화를 걸었다. 파티에 출장다니며 클래식부터 팝 뮤직까지 무엇이든 연주해 주는 그룹이었다. [있잖아, 한번 더 그 학생부장에게 전화해 보는 게 어때?] 한 시간 후 린은 아까 보류해 둔 문제를 끄집어냈ㄷ. 사만다는 수화기에 손을 댔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학생부장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은 꿀뚝같았다.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메딜의 일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흘끗 린을 쳐다보니 가장 친구의 눈에는 기대와 호기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린은 마티가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린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녀는 다정한 내 친구야. 하지만 왠지 사만다는 자신이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린이 곁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인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이런 일이 원인이 되어 서먹서먹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학생부장도 마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린은 또 어떻게 생각할까? 린은 그녀의 남편에게 뭐라고 말할까? [지금은 별로 전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나중에 전화할게.] 사만다는 차갑게 말했다. 두번재 전화에 대비해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지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마티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금방 해결되겠지. 마티가 걱정하는 것은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었다. 평일의 점심때라고는 하지만, 어째서 마틴 에버릿 쇼가 퀸스에서 지하철을 내릴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티는 순간적으로 그럴싸한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마틴 쇼는 어떠한 경우에도 적절한 말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포리스트힐스의 혼잡을 벗어났다. 이런 날이 제일 싫었다. 몇 개의 이미지가 겹쳐서 머릿속이 흐려지고 그러한 기억이 점점 더 노여움에 불을 당겼다. 보도에서 내려 길을 건너려하다가 빨간 신호가 켜진 것을 보고 민첩하게 뒤로 물러났다. 머리를 맑게 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나간 기억들이 하나씩 뇌리에 되살아날 때마다 무서운 죄책감을 느꼈으나 끝마무리를 말끔히 해 제일 큰 철물점인 그랜빌이 보였다. 미리 전화해 두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주의를 끌어 나중에 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을 기억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구하려는 것이 그랜빌에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정도 큰 가게라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필요한 물건이 몇 개나 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줄무늬 넥타이를 똑바로 하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수상하게 보이면 안된다. 태연해라. 벌벌 떨지 말고 당당하게 보여야지. 나는 단지 많은 사라믈이 사는 물건을 찾고 있을 뿐이다. 현금으로 지불하자. 크레디트 카드를 써서는 안돼. 영수증에 서명할 필요는 없어. 그랜빌은 좁고 어두운 통로로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야 하는 평범한 철물점의 하나였다. 전구 소켓과 나사 등이 들어 있는 비닐 봉투, 현관문에 붙이는 현란한 숫자 등이 고리로 통로 양쪽에 매달려 있었다. 마티는 천천히 통로로 들어갔다. 손님은 적었지만 자기 혼자만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척하면서 콧수염을 기른 우스꽝스러운 얼굴의 점원의 주의를 끌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음...... 전구를 낄 소켓이 필요합니다.] [소켓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풀 체인이 달린 것을 드릴까요?] [예, 부탁합니다.] [이쪽입니다.] 점원은 등이 약간 굽었고 몸에 담배 냄새가 절어 있었다. 마티는 전기 부품 코너로 뒤따라갔다. 점원은 고리에서 소켓을 하나 꺼냈다.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그 밖에 다른 것은?]


[잠깐 생각 좀 해보고요.] 마티가 천천히 대답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전구 소켓은 주의를 딴데로 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티는 언제나 진짜 갖고 싶은 물건을 감추기 위해서 덤으로 다른 물건을 사곤 했다. [로버트 사의 택해머가 필요한데요.] 이렇게 주문하면서도 혹시 이상하게 말하지 않았나 싶어 간담이 서늘했다. [뭐라구요?] 점원은 건성으로 되묻고는 공구라면 자기가 아주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버트 사의 택해머라.] 점원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해머의 상표를 굳이 찾으시는 분은 손님이 처음입니다. 해머는 그냥 해머일 뿐이죠. 저희 가게에는 스탠리 것도 있고, 스킬도 있고, 그밖에도 무엇이든 있습니다만, 로버트랬죠? 그것은 없는데요.] [하지만 들어 본 적은 있잖소?] 마티의 커다란 녹색 눈에 강한 빛이 번쩍였다. [물론 들어 본 적은 있잖소?] 마티의 커다란 녹색 눈에 강한 빛이 번쩍였다. [물론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어디에 가면 구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아니면 안됩니까? 스탠리가 더 나은데. <소비자>를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도 스탠리가 훨씬......] [로버트가 필요하다니까요.] 점원은 질렸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베커 상점에 가보세요. 여기서 두 블록 떨어진 곳입니다. 거기라면 로버트가 있을 겁니다. 그 밖에 다른 건?] [자전거 체인을......] [네,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체인에 빨간 고무가 코팅된 것인데.] 점원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시는 김에 꽃이 붙어 있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티는 그 말을 무시했다. [빨간색이 아니면 안됩니까?] 점원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마티는 다시 생각했다. 그래, 빨간색이 아니면 안된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단호했다. [빨간색이라고 했잖소.] 점원은 자전거 부품 코너로 안내해 빨간색 고무로 코팅한 자전거 체인을 꺼내 주었다. 마티는 그것을 받아 손가락을 구부려 힘껏 애무하는 것처럼 붙잡았다. 그것은 무거웠다. 무겁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그것을 뱀처럼 오른손에 휘감고 축 늘어뜨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으로 사겠소.] 그는 전구 소켓과 체인을 갈색 종이 봉투에 넣고 가게를 나와


베커상점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종이 봉투를 가죽 서류 가방에 넣었다. [이것은 내 거야.] 바로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마틴 쇼는 내적으로 여러 가지 갈등이 많았지만 겉으로는 그 거리를 걷고 있는 다른 비즈니스 맨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사만다조차도 남편이 어떤 혼란에 빠져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팔목에 찬 롤렉스 서브매리너 시계를 보았다. 1 시 46 분. 3 시에 약속이 있어서 그때까지는 사무실에 돌아가야 했다. 시간에 늦지 않아야 한다. 쓸데없는 질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베커 상점이 바로 눈에 띄었다. 그랜빌보다 조금 큰 가게였다.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남자가 다가왔다. [뭘 찾으십니까?] [네, 택해머를 사고 싶은데요. 로버트 사 제품으로.] [로버트라면 있습니다.] [손잡이가 가볍고 헤드가 검게 칠해져 있는 것으로.] [그런 종류가 아니면 안되겠습니까?] [아들에게 줄 선물이거든요. 그것이라면 아들이 갖고 있는 다른 공구와 잘 어울리겠는데요.] [보여 드리죠. 이 근처에서 로버트 사 제품을 취급하는 곳은 저희 가게뿐입니다.] 마티는 긴장감을 느꼈다. 이 가게에 그 해머가 없었더라면 완전히 시간 낭비가 될 뻔했다. 남자는 상점 구석으로 사라졌다가 얼마 안 있어 두꺼운 종이에 접착된 플라스틱 커버에 싸인로버트 상표의 해머를 갖고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꼭 하나 남았군요.] 마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남자의 뒤를 따라 먼지투성이의 통로를 나왔다. 그리고 3 달러 98 센트와 세금을 지불하고 재빨리 가게를 나왔다. 그는 맨해튼으로 돌아갈 지하철을 타기 위해 퀸스 거리를 걸어내려갔다. 12 월 5 일까지 아직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더 있었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모형 기차를 만드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트는 시내 이곳저곳에서 조금씩 모으면 된다. 그러나 눈에 낯선 것을 아파트에 갖고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다. 사만다는 내가 말하는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이해심이 많고 불평을 하지 않았다. 마티는 난방이 너무 잘된 지하철을 타고 있는 동안 늙은 여인 옆에 앉아 있었다. 가방을 지나치게 꽉 쥐고 있는 바람에 주먹이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는 양다리 사이의 의자 위에 옮겨 놓았다. 전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며 하차 역인 록펠러 센터를 향하는 도중에도 그는 눈을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어쨌든 고급스럽게 보이는 가방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투자한 것이다. 전철이 닿자마자 성급하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는 손님들을 추월해서 5 번가로 나가는 역 계단을 올라갔다.


쇼 엔터프라이스는 아메리카스 거리 1290 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돌과 금속으로 지은 초현대식 빌딩의 12 층에 4 개의 사무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마티의 사무실은 마치 조촐하고 아담하게 지은 기능적인 아파트 스타일을 예술적으로 바꾸어 놓은 듯한 것이었다. 이곳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곡선미를 자랑하는 프랑스 식으로 디자인되어 사무실이라기보다는 미술관 같았다. 창은 묵직한 커튼으로 가장가리가 가려져 있고, 벽을 장식한 몇 장의 판화는 금색으로 칠한 나무 액자에 넣어져 있어다. 이것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그가 사만다에게 말했지만, 그것이 어떤 이유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마틴가 사무실을 문을 열기 전부터 엄숙하고 무게있는 발소리가 그가 돌아왔음을 직원들에게 알려 주었다. 커다란 오크 도어를 열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확신에 찬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해 왔었다. 확신에 찬 태도만이 성공을 가져오는 것이다. [별일 없나? 어디서 전화 온 데는?] 마티가 스무 살인 비서 로이스 캐롤의 책상 앞에 발을 멈추자 그녀는 즉시 네 장의 분홍색 메모지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서류 가방을 조심스럽게 책상에 올려놓고 메모지를 훌훌 넘겼다. [CBS 에선 뭐라고 전화가 왔나?] [새 미식 축구팀의 마스코트 걸 후보인 여자아이를 워너 울프와 만나게 하면 어떤가 하던데요. 그 팀의 에이전트는 저희니까요......] [그 이야기는 보류해 두기로 하지.] 마티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워너한테는 내가 전화해서 다른 통로를 타진해 보도록 하지. 그 팀은 그런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아.] 그는 다른 메모지를 봤다. [<뉴스 위크?>] [로르텍의 음료수 정화 장치 기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전하를 했습니다.] [제기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시사 주간지도 순수한 물의 위대함을 몰라 주다니. 이 <프린세스 패션>에서 온 메모는 우리 회사에서 대행하는 업무에 대한 것 같은데.] [물론이에요.] 마티는 그것을 무시하고 마지막 한 장을 봤다. [사만다가 뭐라고?] [돌아오시는 대로 전화해 달라는 것뿐이었어요. 단지 조금......] [조금 뭐?] [긴장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 같았나?] [아녜요. 차분한 평소의 사모님답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집으로 전화 좀 연결해 줘.] 마티는 급히 폭 6 미터, 길이 4 미터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엷은 갈색 벽에는 그가 잡지나 신문에 게재한 광고를 액자에 넣어 장식해 놓았다. 그가 책상에 앉자 로이스가 전화를 걸었다. 마티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서둘렀던 것이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은 마티가 찌든 도시 생활에서 사만다를 어떻게 보호하고 신경쓰이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만다에게 줄 선물에 대해서 항상 로이스에게 조언을 얻고, 어디에 가면 그런 것들을 살 수 있는지를 물었다. 광기에 가깝게 자기일에 미쳐야 하는 광고업계에서는 신기해 보일 정도로 헌신적인 애정이었다. 나도 마틴 쇼와 같은 멋진 남편을 만났으면 하고 로이스는 생각했다. [사모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로이스가 말했다. 마티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샘?] [당신이세요? 아까 전화했었는데 마침 외출하셨다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소?]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한데 그래.] 사만다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일이 신경쓰여서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마티.] [정말이야? 점심때 전화를 하다니 당신답지 않은데.] [그래요, 마치 선생님 같은 말투시군요. 단지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전화한 것은 파티 일로 약간 상의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파티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주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 반대하지 않으면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 내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돈이 얼마나 드는데?] [그건 비밀이에요, 미스터 쇼.] [그렇다면 좋을대로 하지 그래.] [미리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안돼요. 근무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샘.] [마티, 또 한 가지 멋진 생각이 있어요. 당신의 대학 졸업 증서를 액자에 넣어서 파티 때 장식하려고 해요. 당신은 한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고 해서......] [샘, 내가 그런 데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 [그래도 저는 마음에 걸려요. 마티, 저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고 싶어요.] [거부권을 발동할 권리가 나한테 있는 건가?] 미묘하게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가 물었다. 사만다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글쎄요, 쇼 엔터프라이스의 사장으로서라면 몰라도. 마티, 하지만 졸업 증서는 중요하게 취급해야 해요. 그런 것을 하찮게 여기면 안된다구요. 제가 잘 보관해 드릴게요. 어디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에도 말했지만, 어디에다 두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 사만다의 몸을 서늘케 하는 그 무엇이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가 바라던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마티를 의심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의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봐요, 천재 양반.] [하지만 느닷없이 그런 말을 들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요.]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선량한 사람이 다른 많은 세상 사람들처럼 학력 조작을 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마티가 탁 하고 손가락을 튀겼다. [맞아. 이사하느라 오래 된 서류를 모아서 정리해 두었어. 내 책상 파일 서랍에 쑤셔넣은 잡동사니 서류 뭉치를 알고 있지?] [설마 그런 곳에 쑤셔박혀 있는 것은 아닐 테죠?] 비난하는 어조로 물었다. [미안. 메딜 스쿨의 저널리즘 학생처장 로렌스 S.크리거 씨에게 심심한 사죄를 드립니다.] 마티는 별로 치열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지나치게 커다란 이를 드러내고 씽긋 웃었다. [좋아요. 제가 그것을 찾아보겠어요.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려서 미안해요. 이제 놓아 드릴게요.] 사만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7 시경에는 돌아갈게.] [그럼 그때 봐요. 안녕.] 전화를 끊고 마티는 조금 당황했다. 비디오 테이프 같은 일이라면 그가 귀가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왜 굳이 전화를 했을까? 그녀는 정말로 비디오 촬영 기사들이 12 월 5 일 목요일 밤에 바삐 움직일 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 게다가 졸업장 같은 데 신경을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샘은 언제나 느긋하기 때문에 안달과 성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처음으로 성대한 파티를 연다는 기대감으로 너무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티는 금방 그 일을 잊어버렸다. 사만다는 황급히 마티의 책상으로 가서 잡동사니 서류를 꺼내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노스웨스턴 대학의 마크가 새겨진 커다란 푸른색 폴더를 찾아냈다. 재빠르면서도 조심스런 손놀림으로 폴더를 열고서 얇은 종이로 보호된 한 장의 견고한 양피지를 살짝 꺼냈다.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말할 것도 없이 대학의 직원 말은 틀렸던 것이다. 여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엄연한 증거가 있지 않은가. 사만다는 주의깊게 졸업 증서를 확인하고, 그것은 손에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티의 과거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틴 에버릿 쇼 문학사, 수석 졸업 1966 년 6 월 16 일 그녀는 졸업 증서를 조심스럽게 폴더에 다시 넣고, 만일에 대비해서 내화성 캐비닛에 넣어 두었다. 그제서야 그 일을 마티에게 물어 본 것에 대해 후회했다. 두번 다시 그런 식으로 의심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두번 다시 결코. 그녀는 파티 계획을 좀더 세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그녀의 오른손이 자신의 배 위에 놓였다. 12 월 5 일날 성대한 파티뿐만 아니라 보다 커다란 기쁨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복받쳐 오는 것을 사만다는 애써 억제했다. 그것이 진짜라면 마티는 얼마나 기뻐할까? 그렇게 될 것 간은 조짐은 몇 가지 있었다. 즉시 주치의에게 진단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과 같은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마틴 에버릿 쇼는 천천히 자기 사무실 벽에 설치된 금고의 다이얼을 돌렸다. 다이얼이 18 에 고정되자 눈 높이에 있는 두꺼운 방화 문이 열렸다. 다갈색 봉투가 들어 있을 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마티는 조심스럽게 택해머와 체인을 안에다 밀어넣었다. 이전의 해머나 체인을 어떤 식으로 보관했으며, 어떻게 낡은 사진 케이스 밑에 감추어 놓았는가를 기억해 냈다. 마티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성스러운 유품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다갈색 봉투를 주시했다. 그리고 금고 속에 있는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출입문을 잠그고 커다란 창문에 커튼을 쳤다. 이렇게 해서 지켜보는 사람 없이 혼자가 되자 책상으로 돌아가서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고무 밴드로 묶인,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들이 들어 있었다. 마티는 인터폰 스위치를 넣고 비서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화가 오면 대신 받아 줘요] 뭉치 맨 위에서 오려낸 기사 한 장을 집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읽은 것이지만 그 어조와 문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광고 관계 일을 통해서 그 기사를 쓴 기자도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하나 음미해 가면서 한번 더 기사를 읽었다. [오늘 그리니치 근교 95 번 고속도로 옆의 풀숲에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나 코네티컷 주 경찰은 난감한 표정만을......]

2

사만다는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시 전화 거는 것을 또 연기했다. 그렇다, 꼭 필요로 하는 [탄약]은 마티의 졸업 증서라는 형식으로 손에 넣었다. 그러나 처음에 전화했을 때 상대방의 응답에 기분이 상했던 게 마음에 걸려 다시 확인 전화를 거는 것을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할 일이 없나 찾아보려 했다. 비디오 촬영 준비를 하고 나서 72 번가의 가트너 상점까지 걸어가서 성능이 좋은 토스터를 사고, 우체국에서 100 장짜리 우표 한 세트를 샀다. 파티 계획은 아주 성대했고 중비하는 동안 더욱 크게 부풀어 갔다. 다음날의 일정을 생각하고 그녀는 두근두근 가슴이 뛰어 자제하려고 애썼다. 아침에 마티를 출근시키고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진찰을 받으러 가는 것은 비밀로 했다. 구태여 그 사람을 흥분시킬 필요가 있을까?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기대를 갖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택시가 동쪽을 향해서 센트럴 파크를 지나 반대쪽으로 돌아 블루밍데일스, 앨릭잰더스 등의 백화점 앞을 통과하자 사만다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건물에 들어선다는 자체가 자신의 인생과 마티에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해줄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1 번가의 30 번지부터 몇 번지 분량의 부지를 점유하고 있는 대학 병원은 뉴욕 대학 벨뷰 의료 센터의 반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시설면에서 현대적이었다. 택시가 원형으로 된 차도에 다다르자 사만다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멀리서도 보이는 흰 탑의 출입구로 들어갔다. [프로머 선생님의 진료실은 어디입니까?] 회전문 안쪽에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수위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가 진료실을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5 층 16 호실입니다.] 둥근 얼굴의 수위가 대답했다. 사만다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지금은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이고 목과 위장까지 긴장되어 있었다. 프로머의 간호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45 분 이상 기다려서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해럴드 프로머는 50 줄 안팎으로, 둔하고 피곤한 모습에다 머리는 거의 빠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차분하고 친절해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의사였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거의가 자기보다 젊은 환자에게 자못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굳은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진찰이 끝나자 그는 아주 좁은 사무실로 사만다를 안내했다. 사만다는 그곳이 진료에 관계되는 장소라기보다는 기업 회계과의 은밀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책상 쪽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은 프로머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어떤 말을 기대하십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사의 질문을 받자 사만다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펄쩍 뛰며 웃거나 울게 되는 느낌보다는 일종의 정신적인 편안함이 그녀를 감쌌다. 필시 오늘의 진찰 결과로 마티와 자신이 더욱 가까워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티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가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얼굴을 밝게 한 사만다가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축하할 일이지요. 기쁘지 않소?] [물론 기뻐요.] [남편도 아기를 갖고 싶어했소?] [당연해요. 그이가 없었더라면...... 둘 다 아이를 원했어요.] 프로머가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가 웃으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임신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이상한 증세도 보이지 않고......] 그리고 나서 사만다가 이제부터 알아두지 않으면 안될 일이라든지 그녀가 경험하게 될 변화 등을 주의깊게 설명해 주었다. [제 느낌으로는 2 개월째 접어든 것 같은데요.] 사만다가 자신없게 말했다. [대충 맞아요. 초음파를 사용해 보면 좀더 정확한 것을 말해 줄 수 있지만, 벌써부터 아기의 성별을 알고 싶은가요?]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프로머의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


[알아 놓으면 이름을 하나만 생각해 놓아도 좋을 텐데요. 출산 준비하는 김에......] 사만다는 어깨를 움츠렸다. [저희들은 약간 구식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해온 방법이 좋다고 생각해요.] [역시.] 포로머는 민간을 약간 찡그리며 연필로 책상을 톡톡 쳤다. 사만다는 프로머가 오동통한 손으로 연필을 놀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뭔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뭔가 감추고 게신 일이라도 있나요?] 프로머가 물끄러미 정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만다는 약간 몸이 굳어졌다. [다른 때와는 달리 검사할 때 조금 긴장하시는 것 같았어요. 남편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약간...... 침착하지 못하더군요.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돼요. 만일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문제요?] [이를테면...... 혹시,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어요.] 사만다는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프로머가 선의로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만일 뭔가 있으면 카운셀링을 받아야 해요. 개중에는 부부 사이가 원만치 않으니까 아이라도 생기면 잘되어 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는 안돼요. 의사의 노파심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티를 위해서 성대한 파티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 일이 신경쓰여서요.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탓일 거예요.] [그래요. 어쨌든 항상 마음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처음 3 개월이 중요하니까.] 프로머는 책상에서 나와 사만다의 볼에 키스했ㄷ. 그렇게 하는 것을 산부인과 의사의 특권이라 생각했다. [축하해요. 만사가 순조롭게 될 거라 믿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언제 찾아뵐까요?] [한 달 후에. 그 다음부터는 매주 한 번씩 찾아와요.] 사만다는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가죽 가방을 손에 들었다. [저어...... 아직.] [비용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요?] [네.] 사만다는 의사와 금전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 서툴렀다. [모든 것이 이 장부에 쓰여 있어요. 의문이 있으면 염려 말고 물어보세요. 보험은 들어 있지요?] [네, 종합 의료 보험에요.] [그러면 됐어요. 돌아가서 남편께 알려 들여요.] 그들은 몇 분 간 더 잡담을 한 뒤 프로머가 사만다를 안내해 사람들로 붐비는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이르는 복도를 지나난 사이 프로머의 진료실에서 느꼈던 묘한 감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알 수 없는 희열이 몸 속에서 용솟음쳤다.


사만다는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른 사람들이 타기 시작해서 안이 꽉 차자 본능적으로 복부에 손을 갖다댔다. [축하할 일입니까?] 옆에 있던 의사가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으나, 바보같이 두번 다시는 부정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을 나와 택시에 올라타자 맨 처음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은 [저 임신중이에요. 천천히 운전해 주세요.]였다. 운전사는 못 들은 척하면서도 차를 천천히 몰았다. 린은 센트럴 파크 웨스트에 있는 그들의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몹시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임신이지?] 사만다가 택시에서 내려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는 아파트 출입구로 오자 린이 말했다. [응, 임신이야.] 사만다는 확신에 찬 언조로 대답했다. [임신일 거라고 생각했어. 살결을 보니까 알겠어.] [설마.] [의사들은 의사들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게도 나름대로 알 수 있는 방식은 있어.] 린은 깔깔대며 사만다의 팔을 잡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두 여인의 흥분된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갑도 끼지 않은 도어맨이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로비를 지나자 조용한 중앙 로비에 구두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곳은 거의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로비로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오늘은 한턱 내야 해.]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면서 린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왜?] [왜라니? 임신하면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거야. 영화에서 보지도 못했어? 그것이 미국식이란 말이야.] [마티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을래.] [말을 안한다고? 농담이겠지.] [택시 안에서 생각했어. 파티 석상에서 말할 거야. 모두가 있는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기절할걸.] [글쎄, 감격하겠지.] 그 장면을 생각하며 린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쵤영도 하고, 생일 파티에서 임신 발표를 하다니. 나는 친정에서 찰스에게 말했었지. 그것도 한바탕 다툰 후에 말이야.] [나는 단지 마티의 표정을 보고 싶을 뿐이야.] 린에게 말한다기보다 혼잣말하듯이 사만다가 말했다. [그 얼굴 표정만을.]


두 사람이 사만다의 아파트에 들어와 보니 나갈 때 예약 난방을 깜박 잊었기 때문에 실내는 냉장고처럼 차가웠다. 사만다는 난방 스위치를 넣고 코트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잠깐 누울래? 이것 역시 전통의 하나야.] [좀 움직이고 싶어.] 사만다가 대답했다. [아, 전화 번호를 몇 개 더 알아냈어.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시 전화해 봤니?] [아니, 나중에 걸겠어.] [좋아.] 린은 핸드백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이것이 마티의 첫 모교인 인디애나 주 엘크하트의 조지 브래든 국민 학교 전화 번호야.] 사만다는 자신이 다시 파티 계획의 궤도로 돌아온 것을 알고 방긋 웃었다.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브래든 국민 학교 사람들에게 물어 볼 항목들을 메모했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졸업생들에 관해서 꼬치꼬치 캐물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국민학교는 그렇지 않을 거다.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브래든입니다.] 쌀쌀맞은 중서부 지방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안녕하세요?] 약간 상기된 채 사만다가 말했다. [뉴욕에서 걸고 있습니다만.] [뉴욕에서요?] [네, 제 남편 일로 전화드렸습니다. 남편은 그 학교 출신이거든요.] [네, 그럼 꽤 오래 된 이야기로군요.] [네, 다녔던 시기는 40 년대 말부터 50 년대 초에 걸쳐서입니다.] [졸업 증명서가 필요합니까, 부인?] [아뇨.] 사만다는 시종 부드럽게 말했다. [사실은 남편의 40 회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아, 그러세요. 계속해 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옛날 친구분이나 선생님들의 추억담을 모으고 있어요. 남편의 은사님이나 교장 선생님의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만,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없으란 법도 없겠지만. 어쩌면 선생님들 중에는......] [돌아가신 분도 계시다는 말씀이군요.] [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정말이에요?] [코트렐 선생님이 교장으로 승진하신 건 이십대였어요. 아직도 건재하시죠.] [그럼, 선생님들은요?] [선생님들과 관련된 서류를 문서 보관 창고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50 년대 것만 보관하고 있고요.] [누군가에게 알아봐 주실 수 없을까요? 모든 비용은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마티의 과거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사만다는 린에게 미소지었다. [조사해 볼 수도 있어요. 비용은 10 달러입니다. 그 사이에 코트렐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시겠습니까? 마침 방에 계십니다만.] 사만다는 망설였다. 교장이라면 항상 무서운 존재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능동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말을 쉽게 할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번은 특별하다. 사만다는 소녀 시절의 공포감을 극복하고 부탁했다. [가능하면 꼭 좀 부탁합니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사만다 쇼입니다. 남편은 마틴 에버릿 쇼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만다는 찰칵찰칵 소리를 듣고 송화기 입구를 손으로 막았다. [지금 교장 선생님과 연결하고 있는 중이야.] 수화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루 코트렐입니다, 쇼 부인.] 아주 듣기 좋은 쾌활한 음성이 들려왔다. 교장 선생과 소아고 의사는 그들이 자주 상대하는 어린애들과 같아진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말대로였다. [남편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사만다는 흥분해서 물었다. [쇼 군은 굉장한 장난꾸러기였지요. 항상 개구장이 대장이었구요.] [과연 마티다워요.] [또한 말라깽이였지요.] [아뇨, 단단하고 야무진데요.] [아, 체격은 변하는 것이니까요. 틀림없이 부인께서 맛있는 음식을 듬뿍 해주시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마틴이 뉴욕에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야외 생활과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가끔은 여기에도 얼굴을 비춰 달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만나보고 싶다고.]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꼭 방문하도록 제가 부탁하겠어요. 될 수 있으면 둘이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그것 참 멋진 일이군요. 그런데 제 비서 이야기로는 뭔가 추억담을 듣고 싶어하신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좋고말고요. 여기저기서 모아 보도록 하죠. 저도 뭔가 추억거리가 있을 텐데. 댁에 녹음기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그럼 테이프에 뭔가 녹음해서 보내도록 하죠.] [멋지군요.] [우슨 주소가 어떻게 되지요? 마틴에게 옛날 일을 생각해서라도 한번 방문해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코트렐 선생님.] [루라고 불러요.]


[감사합니다, 루.] [감사드려야 할 사람은 접니다. 일부러 신경써서 전화해 주시다니, 쇼 부인.]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 사만다는 코트렐에게 주소를 가르쳐 주고 만일을 위해서 전화 번호도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남편에게 비밀로 해서 나중에 놀라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 말하고 테이프 녹음을 월요일에 해서 남편이 집에 없는 주중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세심한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그 다음 마티에 대한 깊은 애정의 증거로 몇 가지 더 알아볼 게 있었다. [코트렐 선생님, 마티의 양친에 대해서 뭔가 기억나시는 일이 없으신지요? 따뜻한 추억거리나 재미있는 일화라든가 그런 것들 말이에요.]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분 다 몸이 약해서 마티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 돌아가셨어요.] [가엾게도.] [마티에겐 괴로운 시기였지만 고학으로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했어요.] [과연 마틴답군요.] [네,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 여러 모로 감사했습니다, 코트렐 선생님.]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온통 거짓말 같기만 해.] 사만다가 린에게 말했다. [상당한 진척인데. 마침내 궤도에 올라선 거야.] [그래, 집에 있는 녹음기를 점검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지난 주에 고장이 났거든. 특별히 코트렐 선생님께 테이프를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12 월 5 일날 작동이 안되면 비극이잖아.] [수리점이라면 좋은 곳을 알고 있어. 내가 맡겨 줄게.] 그렇게 말하고 린은 디즈니랜드에서 산 미키마우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머, 벌써 이렇게 됐네. 이제 가야겠어.] 그녀가 재빠르게 말했다. [시내에서 어느 대가의 개인전 오프닝 파티가 있어. 따분한 부자들이 우르르 몰려들 거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간다는 말도 하는 둥 마는 둥 린의 모습은 문밖으로 사라졌다. 사만다는 그제서야 혼자 남아 자신과 마티의 인생에 대한 장미빛 예감에 젖어들었다. 오늘은 모든 일이 잘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프로머 의사가 준 팸플릿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임신의 경과를 체크할 때 프로머가 채택해 쓰고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5 개월째에 접어들면 모친은 태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담배나 마약은 절대 금물이었다. 반드시 병원에서 출산하여야 되는 이유들과 병원에 비치된 구급용 기구들도 자세히 열거되어 있었다. 사만다는 단어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면서 읽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출산할 계획이었다. 병원의 신생아실에는 부모가 갓 태어난 자그마한 아기를 돌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는 문장을 읽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마티라고 생각하며 사만다는 수화기를 들었다. [쇼 부인이십니까?] 그 목소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코트렐 선생님, 이렇게 빨리 전화를 걸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남편 일에 대해서 뭔가 아셨는지요?] [실은 전화드린 것도 그 일 때문입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메모지와 연필을 준비하겠습니다. 잘 적어 두지 않으면 안될 테니까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쇼 부인 제 입장이 난처하군요.] [난처하시다니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뭐라 할까,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가르채다 보면 무심결에 혼동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게다가 최근에 갑자기 기억력이 나빠졌어요. 제가 한 일조차도 어찌됐는지 멍청하게 모를 때도 있고요. 부인한테 전화가 왔을 때, 즉시 그 젊은이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어요. 그 아이의 이름을 마틴 쇼라는 식으로 기억해 버렸지요. 그러나 제가 아는 사람의 이름은 마틴 쇼가 아닌 것 같더군요. 멜빈이었어요. 멜빈 쇼였다구요.] [그러면 남편의 일은 기억에 없으신지요?] [분명히 남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지요? 그 젊은이의 모친은 생존해서 아직까지도 정정하십니다. 그래서 제 기억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죠.] 코트렐이 얼마나 자기 혐오감을 느낄까 생각하니 사만다 역시 동정이 갔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지요. 졸업생 전원의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어쨌든 전화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학적부도 있을 테고, 어쩌면 다른 선생님들께서 기억해 주실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게 또 문제입니다, 쇼 부인.] [무슨 말씀이신지요?] [기록을 조사해 보도록 했지요. 마틴 쇼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더군요.] [네에?] [저 역시 놀랐습니다. 아니, 어떤 해에 한해서 학생의 기록이 분실되는 일도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그러나 마틴 쇼의 기록은 전혀 없더군요.] 노스웨스턴의 일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갔다. 이 세상은 잘못투성이다. [마티는 브래든에 다녔어요.] 단호하게, 어떤 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단호하게 그녀가 말했다. [본인도 말했단 말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걸 모르겠습니다, 부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혹시 전에도 문의가 들어와 기록부를 꺼내 놓은 채로 방치해 놓지 않았나 하는 정도랍니다.]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사만다가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진의 설명은 어쩔 도리가 없어요.] [사진이라뇨?] [학급 사진 말이에요. 어느 학년이라도 매년 반드시 기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도 체크해 보았지만 마틴은 없었어요.] [결석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사만다가 되물었다. [계속해서 6 년간이나요?] 침묵이 흘렀다. 노스웨스턴에 전화했을 때 경험했던 것 같은 침묵이었다. 사만다가 침묵을 깨고 께름칙한 부분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듯이 물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코트렐은 웃었지만 그것은 별로 호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석연치 않은 웃음이었다. [글쎄요, 뭔가 잘못된 일이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선생님.] [꼭 설명해야 합니까?] 등골에 차가운 냉기가 흘러내렸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건 이렇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가끔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로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배경을 어느 정도 좋게 말할 수도 있는 거지요.] 그는 또다시 멋적은 웃음을 웃었다. [알겠습니다.] 사만다는 풀이 죽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쇼 부인. 엘크하트 주변에는 다소 외진 곳이 많습니다. 별로 유복하지 않은 지역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마틴이 아마 엘크하트에서 출생했다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을 수 없어요.] 사만다가 속삭였다. [만약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라도 전화해 주십시오.] 코트렐이 위엄있게 말했다. [그럼 이만.] 사만다는 망연자실해서 전화를 끊었다. 곤혹스럽게 전화를 끊는 모습을 린에게 보니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마티가 과거를 자신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 그는 브래든에 관해 항상 이야기했다. 그것도 상세하게. 뭔가 숨기려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에 술이라면 결코 화제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노스웨스턴의 일만 해도, 마티의 졸업장을 확인함으로써 저절로 해결되었다. 그렇다. 이것 역시 기록 보관의 허술함을 보이는 또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오래 된


기록이나 사진을 분실했기 때문에 코트렐은 학교 체면을 걸고 그것을 어물어물 덮어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을 게다. 몇 분이 지나자 사만다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혼란도 결국은 해피 엔드로 끝날 것이다. 이런 일 때문에 파티를 준비하는 재미와 흥분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마티의 일을 잘 기억하고, 그의 과거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 기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티는 이날 점심 시간에도 물건을 사러 갔다. 이번에는 브루클린 13 번가였다. 그곳에는 주부들과 유모차, 다양한 수법의 소매치기들, 보증서가 있는지는 몰라도 순금 오메가 손목시계를 단돈 29 달러 95 센트에 팔고 있는 노점상들로 북적거렸다. 그곳은 소규모의 개인 상점들이 밀집한 거리로, 소지주와 소목장주의 시대, 그리고 또한 이웃간의 연대 의식이 강했던 옛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리였다. 그곳은 산뜻하지도 않을뿐더러, 일종의 유기적인 혼돈이 지배하고 있어 마티는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퀸스에 갔을 때처럼 그러한 모습이 또 하나의 특징이었다. 이곳에는 누구 한 사람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인파를 헤치며 길을 걸었다. 또다시 찬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괴로운 기억이 몸 속에서 되살아났다. 찬바람에 몸이 으스스 떨려 오자 옛 기억 속에 새겨진 말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애들만 생각하는군요, 나는 어찌됐든!] 어머니는 금속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나는 쓰레기야. 나는 단지 청소나 하고, 아이들 더러운 입이나 닦아 줘야 하고...... 당신은 장난감 같은 걸 사다 주는 일이나 하다니, 나는 도대체 뭐예요?] [그만둬, 오늘은 이 아이의 생일이야. 일년에 한번밖에 없는 생일이라구, 앨리스.] [당신은 게으름뱅이예요! 장난감 기차나 갖고 놀아요!] [게으름 피운 적은 없어. 휴식이 필요한 것뿐이야.] [다른 남편들은 아무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씨부렁거리지 않아요.] 여러 말들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자기가 살아 있는 한 끊이지 않고 들려오리라는 것을 마티는 알고 있었다. 목표로 했던 번지에 도착하자 그는 유명한 윌슨 완구점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특별한 물건을 몇 개 사야 했기 때문에 미리 전화를 해놓은 터였다. 윌슨 완구점에는 대부분의 물건이 있었다. 무엇이든 갖추고 있는 가게는 옛날처럼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가까스로 식당과 세탁소 사이에 있는 윌슨 완구점을 발견했다. 감탄할 만한 상점이었다. 취미 전문점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비행기나 기차 모형이 오밀조밀하게 잘 배열되어 있었고, 지금은 구하기 힘든 재료 세트와 <철도 모형>이라는 낡은 잡지가 놓여 있었다. 가슴이 움푹 들어가고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이십대 초반의 점원은 라이오넬 트레인 사가 지금까지 제조해 온 기관차 전부와 그 발매 연도를 즉시 말할 수 있었다. 그곳은 토요일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들어 심오한 모혀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단골 손님들이 있었다.


윌슨은 그러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아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르쳐 주겠다는 표정으로 표정으로 젊은 점원이 물었다. [아까 전화했었는데요. 스티브라는 분과 말이에요.] 그 가게의 점원으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제가 스티브입니다.] 과연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움푹 팬 가슴에 맞춘 것 같은 체크 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디젤 기관차를 찾으신다구요?] [예, 맞습니다.] [이쪽입니다.] 스티브는 중고 기관차 매장으로 꾸며 놓은 먼지투성이 구석으로 마티를 데리고 갔다. 기억에 남아 있는 50 년대 초의 오렌지색과 푸른색이 배합된 라이오넬 기차 상자에 마음이 쏠렸다. 이러한 낡은 상자를 소중하게 보존하고, 때로는 한 세대가 지난 기차를 파는 곳이 있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이것입니다.] 점원은 오렌지색과 푸른색이 배합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산타페 철도의 마크가 붙은 검정색 기관차가 들어 있었다. [산타페입니다.] 스티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원하시는 것이 이거였지요?] [네, 틀림없어요.] 마티는 기관차를 손에 들고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체사픽과 오하이오도 있습니다만.] [아니, 이것이 좋아요.] [어떠한 문장이라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전문 아티스트가 있습니다만......] [아니, 산타페를 원합니다.] [상태는 좋습니다. 최상입니다.] [얼마지요?] [120 달러입니다.] [이걸로 하지요.] [알았습니다. 자석 장치는 알고 계시지요?] [네, 전에 갖고 있었어요.] [기관차를 레일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는 것은 자석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갖고 있었다니까요.] 마티는 반복해서 대꾸했다. 스티브에게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화를 내는 사람은 기억하기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유 운반용 화차를 희망하신 게 틀림없지요?] [예.] [있습니다만, 우유병이 다섯 개밖에 없어요. 그래도 움직이기는 합니다.] [움직이면 상관없어요.] [자동 선로를 갖고 계십니까? 자동 선로가 아니면 작동이 안됩니다.] [그것도 주십시오.]


마티는 옛날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의식이 활기를 띠었다. 어떤 식으로 자동 선로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렀는가, 어떤 식으로 사람이 우유화차에서 뛰어내려 은색 병을 플랫폼에 옮겼고, 어떤 소리를 내며 장치가 움직였는가를. [마음에 드니, 프랭키? 네가 갖고 싶었던 것이 이거였지?] 그렇게 아름답던 목소리, 쾌활한 목소리. [프랭키, 이것은 네게 주는 거야.] 마티는 다른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손님?] 스티브가 물었다. [아, 괜찮아요. 조금 피곤할 뿐이오.] [그러실 테지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인파로 거리가 혼잡하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물건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손님께서는 이 중고품을 선물하실 건가요? 멋진 선물이 될 겁니다.] [아니, 이것은 내가 필요해서요. 취미죠. 라이오넬의 기차는 뭐든지 좋아하지만, 오래 된 것이 더 좋아요.] [그렇게들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이 값으로도 팔리지요.] [다음엔 뭔가 있더라...... 오래 된 화물 열차용 기관차가 필요해요. 회색으로.] [있습니다.] [그것도 있습니다.] [전화로는 가축 운반용 화차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했는데, 그것은요?]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품절입니다. 입고되어도 곧바로 나가니 뭐라고 약속드릴 수가 없습니다.] 마티는 몇 개를 더 주문하고 손에 넣지 못한 것을 머리속에 메모해 두었다. 스티브가 물건을 포장하자 현금으로 371 달러 86 센트를 지불했다. 나중에 증거가 될 만한 서명은 남가지 않았다. 모형 기차를 안고 13 번가를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하자 마티의 가슴은 의외로 크게 울렁거렸다. 자기 손에 있었던 것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기차가 마음에 들었었다. 어쩌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자기에게 사주었던 바로 그 기차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윌슨 완구점에 팔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자기가 사용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선물용으로 포장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잘못한 것 같았다. 사무실 직원들에게는 거래처에 보낼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보여야 했다. 가게 이름도 알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카드 판매점에 들러 포장지와 테이프를 사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자 자신이 직접 기차를 포장했다. [당신은 게으름뱅이예요!]라는 말이 다시 마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차를 보고 있으며 옛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런 일은 가끔 있었다.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마, 앨리스.] 그것은 정말 기차가 원인이었을까? 아니다. 원인은 보다 깊은 데 있다는 사실을 마티는 알고 있었다. 지하철을 내려가면서


그는 옛 생각들을 머리에서 떨쳐 버리려 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세 명의 불량한 십대 소년들이 그가 들고 가는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짐을 느낀 마티는 시선을 피한 채 빠른 걸음으로 승차권 판매소로 향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소년 한 명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그들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고 가 버렸다. 저항하지 못할 노인을 상대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마티는 회전문 옆에 양철 컵을 들고 앉아 있는 수녀에게 신경이 쓰였다. 고아들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었다. 고아들에게는 동정이 많은 그는 컵에 1 달러를 넣었다. [선생님께 축복이 깃드시길.] 수녀가 축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지금까지 모아 둔 체인, 해머, 그리고 기차. 마티는 모든 준비물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12 월 5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지않아 자신이 어떤 충동감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것,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만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마티의 과거를 계속 추적했다. 하지만 확인하기 위해 노스웨스턴 대학에 다시 전화하는 것은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 코트렐과 옥신각신한 후였기 때문에 나쁜 결과로 끝날지도 모르는 전화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엘크하트에서의 마티의 소년기에 관해서는 계속 추적해 갔다. 중학교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교장은 일체 협력을 거부했다. 알고 싶은 사항을 명기하고 공증인의 증명을 첨부해서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학생의 기록은 개인적인 비밀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만다는 고등 학교에 전화를 했다. 그곳의 반응은 조금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마틴 쇼의 기록은 없었다. 아무리 졸업생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만다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으나 재빨리 안정을 찾았다. 어쩌면 기록이 대출되어 반환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코트렐의 말을 생각해냈다. 마티의 모든 기록이 일시에 대출되어 그대로 처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학급 기념 사진도 오리지널 필름이 없어서 보충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사만다는 엘크하트 시청에 전화해서 출생 기록을 청구했다. [없는데요, 부인.] 무뚝뚝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왔다. [마틴 쇼라는 분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의 출생이 등록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비장한 목소리로 사만다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극히 드문 일이죠. 다시 말해서 요즈음은 누구나 등록을 하는 시대이니까요.] 앞서의 불안함이 이 순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출생 증명도 없고 학적부도 없다. 마티의 흔적은 무엇 하나 엘크하트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등록]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그녀는 오래 된 징병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엘크하트 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마틴 쇼의 이름은 없었다. 한번도 등록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티의 40 회 생일 파티 계획은 한번도 등록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티의 40 회 생일 파티 계획은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를 찾아내는 공포의 여행으로 흐지부지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다는 그런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태를 설명해 줄 [무엇이] 있어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물어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이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다고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시선이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린의 눈초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마티뿐이며 물어 보면 대답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직접 물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마티의 과거를 더듬어 찾으려 했던 것이 밝혀지면, 그를 놀라게 해주려는 파티의 첫번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지 말고 유도 신문을 해서 궁금한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자. 잘만 하면 눈치채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 전에 전화를 해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결과야 어찌됐든 노스웨스턴에 전화해서 예의 그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믿음의 실마리, 즉 뭔가 밝은 전망을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티가 졸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인정머리없는 거절 아니면 비방 밖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지금은 전화를 걸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전화 번호를 찾아 대학에 전화를 걸어 학생처장인 샌퍼드 빌을 바꿔 달라고 했다. 복도에서 학생과 논쟁하고 있던 그를 찾는 데만 4 분 이상 걸렸고, 본인이 전화을 받을 때까지는 6 분이나 걸렸다. 사만다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기다렸다. [빌입니다.]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 선생님, 저는 사만다 쇼라고 합니다.] [네, 부인 얘기는 들었습니다.] 온화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목소리로 빌이 말했다. [제게 다른 용건이라도......] [네.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대학 기록에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마티는 확실히 졸업장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에 있습니다.] [하아, 그렇습니까!] 빌의 냉정한 음성을 듣고 사만다는 동요했다. [네, 남편이 보관하고 있었어요.] [부인, 그것은 가짜입니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 말에 대해서 도대체 무어라 반반박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거기에 계시면서 어떻게 그것을 억누르면서 그녀가 물었다. [이곳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겁니다. 부인의 남편은


노스웨스턴에 재학했던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우리 학교를 다녔던 사람은 반드시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겁니다. 만일 남편께서 가짜 졸업장을 이용하신 일이 있다면, 저희로서도 뭔가 손을 쓰겠습니다.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이 학교와 관련된 일로는. 괜찮으시다면 이것으로......] 엉뚱한 생각이 문득 사만다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만일 마티가 정부의 비밀 기관에 관계하고 있어, 어떤 이유로 남편의 기록을 모두 노스웨스턴에서 제거해 버렸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여기의 누군가는 그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 빌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남편의 노스웨스턴의 과거를 감추려고 했다면, 졸업장 같은 것을 신변에 남겨 둘 리 없겠지요.] 그것은 그럴듯했다. [남편과 상담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처음으로 인간다운 면을 보이며 빌이 계속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은 잊어야 할 겁니다. 졸업장을 위조한 것은 어쩌면 우발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르니까요. 본인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부인도 구태여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까지는......] 빌은 말을 얼버무렸다. 끝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빌과의 전화는 어색한 여운을 남긴 채 끝나 버렸다. 본능적으로는 사만다는 한번 더 마티의 [졸업 증서]를 확인하러 갔다. 말할 나위 없이 진짜처럼 보였지만 위조하는 것도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스웨스턴 대학이라는 글자 밑에 있는 가느다란 글씨를 읽으려고 할 때까지, 자신의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이것은 결혼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중대한 위기였다. 이제는 파티 그 자체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마티의 과거와 대면하게 될 줄은 사만다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제 두세 시간만 지나면 마티가 돌아오겠지.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 어떤 분위기로 대화를 하면 좋을까? 그것을 지금부터 생각해야 했다. 사만다는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옴을 느꼈다. 처음에 머리로 느끼던 긴장감이 지금은 위장까지 쓰리게 했다.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날, 그녀는 그 아이의 장래를 걱정하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티는 언제나처럼 허기지고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후내내 고객과 만나고, 그 중 한 사람한테서 자기 부인이 고안해 낸 체중 감량법을 <뉴욕 타임스>의 과학 칼럼에 실어 달라는 의뢰는 받고 지치도록 설득을 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뉴스거리가 아니면 받아 주지 않는다고 마티는 설명했다. 그러나 그 고객은 얼마든지 돈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마티는 뇌물로 신문을 움직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 고객은 돈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다가 거칠게 발소리를 내며 나갔다. 회사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마티는 광고주 하나를 단념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사만다가 변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점심때와 똑같은 회색 스커트와 푸른색 스웨터를 입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린 채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걱정거리와 임신 사실을 감추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러나 마티가 그녀를 보지 않을 때는 보통 때보다도 물끄러미 그를 계속 응시했다. 진상은 무엇일까, 어떻게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까? 저 눈, 저 탐색하는 듯한 눈이 저 사람의 과거에 대한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사만다는 해답이 나오는 것이 두려웠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결백하다. 그것이 틀림없다. [피곤해 보여요.] 그녀가 말했다. [응, 피곤해. 풀이 죽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사만다의 표정이 흐려졌다. [당신 같지 않은 말투군요.] 마티는 코트와 상의를 벗고 빠란 줄무늬 실크 넥타이를 풀었다. [제시 제임스를 고객으로 갖는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지.] 그는 검은 가죽의 바르셀로나 의자에 녹초가 되어 앉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두 발을 올리고 뇌물을 먹이려고 했던 광고주의 이야기를 사만다에게 했다. [그 바보 같은 놈이 말하는 것을 당신도 들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는 천천히 숨을 돌렸다. [비만증 여편네의 감량 체조법 기사를 <뉴욕 타임스>에 싣고 싶으니 백 달러짜리 지폐로 5 천 달러를 갖고 편집장에게 가 달라는 거야. 거절하니까 펄펄 뛰더군.] [뭔가 다른 방법을 말해 주었나요?] 마티에게 초콜릿 상자를 갖다 주면서 사만다가 물었다. [아니,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이제 그 사람과의 인연은 끝난 거야.] [잘됐어요.] [은행 구좌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지.]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에요. 그런 사람에게는 화낼 가치도 없어요. 그런 족속들은 사기꾼이에요.] 조금은 재미있다는 듯이 마티는 사만다를 보았다. [그래, 그런 녀석들의 대부분은 사기꾼이야. 그들이 세금을 어떻게 포탈하는가는 하느님밖에 모르실 거야. 그러나 그 친구는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더군. 필시 여편네가 돈을 갖고 있을 거야.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아.] [당신은 옳은 일을 하신 거예요. 자, 이제 그런 좋지 않은 이야기는 잊어버리세요.] 마티는 어느새 피로가 풀린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그는 가볍게 대답하고 눈을 반짝거렸다. [그런데, 테이블 위의 메모를 보았어. 오늘 프로머 의사와 약속이 있었어?]


사만다는 재빨리 갖다붙일 말을 생각했다. [네, 일년에 한번 있는 자궁암 검진이었어요.] [괜찮대?] [결과가 나올 때까지 2,3 일 걸려요. 하지만 저는 건강해요.] [그건 맞아.] 마티는 일어서서 두 팔을 사만다에게 감으며 말했다. 사만다는 그의 말에 애정이 깃들여 있음을 알았다. [당신, 100 살까지 살아야 해. 가능하면 나도 그러고 싶어.] [그렇게 될 거예요.] 사만다도 상냥하게 말했다. [이제 식사를 해야겠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손을 씻으러 갔다. 거실 창문 옆의 테이블에 하얀 식탁보를 깔고 촛불을 켜고 식사하는 것이 그들의 저녁 식사 습관이었다. 그들 나름의 우아한 취미였다. 그것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상징이었다. 매일 밤 그렇게 식탁을 꾸몄다. 그들의 결혼은 더러운 식탁에서 너무 구워진 핫도그를 먹는 데까지 타락할 수는 없었다.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창밖에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았다. 사만다와 마티는 그 풍경을 아주 좋아했다. 마천루의 불빛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런 생활을 계속하길 원하는 것은, 이런 꿈과 같은 현실 때문이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로 작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모든 것을 마티에게 직접 들어야 한다. [오늘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가볍게 말을 꺼냈다. [뭔데?] [프로머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 근처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길을 묻는 거예요. 당신과 비슷한 나이였어요. 어디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화성이겠지.] [가까워요. 엘크하트예요.] 마티는 얼굴이 밝아졌다. [엘크하트...... 인디애나의?] 그 밖에 또 어디가 있나요, 라는 표정으로 사만다는 마티를 보았다.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럴지도 모르죠. 조금 이야기를 했는데 브래든 출신이라더군요.] [이름은?] [윌슨, 프레드 윌슨.] 사만다는 주의깊게 그를 살피며, 이 거짓말에 마티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들어 본 적이 없어.] [당신 1 년 후배였어요. 당신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어요.] [무척 오래 된 이야기야, 엘크하트에는 다른 쇼가 있었던 것 같아.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곳 고등 학교를 나왔다고 했어요. 축구를 했었다고 말했어요.] [역시 모르겠는걸.] [엘크하트 팀은 강했나요?] 마티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저 그랬지.] 사만다는 긴장했지만 그것을 나타내지 않았다. 예비 지식을 얻기 위해 엘크하트 신문사에 전화해 보았던 것이다. 마티가 재학하고 있던 3 년 동안 축구팀은 무패의 연속이었다. [그저 그랬다구요?] 마티는 갑자기 사만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의혹이 떠올랐다. [왜 그러는 거지?] [그냥 생각이 나서요.] 그렇게 대답하고 나자 순간적으로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엘크하트 팀을 마치 뉴욕의 제츠 팀처럼 말하던데요.] 마티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축구에 관심이 없었어. 가족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서.] 서먹서먹한 침묵이 흘렀다. 사만다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니까 몇 년 동안 한번도 져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군.] [아까보다는 쾌활한 소리로 마티가 말했다. 그 말에 사만다는 곧 안심이 되었다. 마티는 알고 있었다. 기억해 낸 거야. [그걸 그 사람이 말해 줬어요. 당신들 둘이라면 반드시 이야기가 통했을 거예요.] 사만다는 마티의 눈에서 희미한 두려움을 보았다. 그는 먹는 것을 멈췄다. [설마 우리 전화 번호를 알려 준 것은 아니겠지?] [물론이죠.] 마티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전화 번호를 알려 주면 안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는 초조한 얼굴로 사만다를 보았다. [가끔 당신 일로 악몽을 꿀 때가 있어. 뭔가 일어나는 불길한 꿈을 꾸지.] [마티, 저한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 물론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주의는 해야 해. 나는 지금까지 온가 일을 보면서 살아 왔어. 여러 사람들에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말이야.] 그는 손을 뻗어 두번 다시 놓고 싶지 않다는 듯이 사만다의 손을 꼭 쥐었다. [어쨌든 주의해. 당신은 나의 전부야.] [그렇게 할게요. 우리 둘을 위해서.] 사만다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잡고 있는 손으로 마음을 연결하면서 꼼짝도 않고 1 분 가까이 그렇게


있었다. 사만다는 마티에게 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과거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있는 것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천천히 남은 저녁 식사를 끝냈다. 사만다가 예상한 대로 마티는 저녁 메뉴에 주의를 돌렸다. [맛있군. 이 스테이크 어디에서 샀지?] [다고스티노. 지금 세일중이에요.] [살림 하나는 잘하는군.] [누가 가르쳐 준 건데요?] [아, 나는 어떻게 하면 1 달러라도 절약할가 알고 있지. 가장 좋은 방법은 광고주와 싸워 헤어지는 것이고......]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사만다는 화제를 바꿨다. [마티,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 둘게요. 오늘 뉴스를 봤는데요......] [CNN 이었나?] [아마 그럴 거예요. 저널리즘학과를 마구 헐뜯는 보도가 나왔어요. 당신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 그리고 또 어느 대학을 비난하더군요.] [아마 미주리일 거야.] [대학이 사회로 내보내는 것은 직업인뿐이라고 말하더군요.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마티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방송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메딜의 생활은 당신한테 도움이 되나요?] [응, 여러 가지를 배웠지.]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어떤 사람이 말하더군요.] [그것은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야. 의대생은 개업의가 돼서도 학생때 배운 것을 다시 배우게 되지.] 사만다가 말하고 있는 TV 인터뷰는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마티는 모르고 있었다. [메딜에서 어떤 강의를 들었어요?] 그녀가 묻자 마티는 의자에 앉았다. [음, 그래. 뉴스 기사 작성법, 보도 실습, 편집 실무, 사진, 뭐 그런거지.] [저널리즘학과는 전용 건물이 있었어요?] [물론이지.] [학교에서 당신에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것이 이상해요. 동창회 정도는 알려 줄 만한데.] [그건 내가 주소 변경 때마다 연락하지 않으니 학교 당국에서도 어쩔 수가 없겠지.] 그는 사만다의 눈을 보았다. [뭐야, 오늘밤 내 과거를 모두 파낼 작정이야?] 사만다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과거에 흥미가 있어요.] [그 정도로 중대한 과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마티가 의심할지도 모르니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된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농담조로 얘기를 꺼냈다.


[좋아요. 당신의 과거는 덮어 두겠어요. 그러나 당신의 출생 증명은 액자에 넣어 장식할 거예요.] [그것이 발견된다면 말이겠지.] 증명서 얘기를 꺼내도 마티는 기분이 나쁜 것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저녁을 마치고 파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마티는 새로 몇 명의 손님을 추가하는 것은 승낙했지만,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만다는 그것을 고객을 한 명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티는 또다시 어린 시절의 기억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거실바닥에 놓여 있는 레일 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전기 기관차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생각나는 걸까? 그 원인은 모르지만 밖에서 들리는 트럭의 경적은 옛날 그가 갖고 있던 모형 기관차의 기적 소리와 거의 비슷했다. 다른 세계로, 끊임없이 그를 지배하러 다가오고 있는 다른 세계로 그를 몰아넣은 것은 경적이었다. 사만다가 보면 마티는 무엇엔가 홀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언제나 주의를 하고 있었다.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새로 알게 된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티가 엘크하트의 고등 학교 축구 기록을 알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과거를 숨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것쯤은 미리 알아 둘 수도 있다. 메딜의 강의 내용에 대한 그의 지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려고만 하면 간단한 일이다. 진짜 경험자만이 알고 있는 세밀한 것은 아무것도 물어 볼 기회가 없었다. 마티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신경 과민이니만큼, 앞으로도 물어 보지 못할 것이다. 마티를 적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 밤 그녀는 또 하나의 술책을 사용했다. 어쩌면 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거나, 적어도 진실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티가 잠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사만다는 우울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정말로 알고 싶어요.] 마티는 옷을 벗던 손을 멈추고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뇨,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마티는 관심을 보였다. [오늘 밤 당신은 과거에 너무 민감했어요.] 마티는 긴장했으나 웃었다. [그렇지 않았어.] [아니에요. 신경질에 가까웠어요. 제 생각이 부족한지 모르지만, 어쨌든 본심은 당신의 멋진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던 거예요.] [파티 자체가 최고의 선물이야.] [파티말고 다른 것으로요. 당신을 위해서요.] [당신은 멋진 여자야.] [들어 주세요. 제가 멋질 거라고 생각한 것인데, 당신에게, 아니 우리에게 비행기표 두 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휴가를 말하는 거야?]


[어떤 의미에서는요.] 그녀는 천진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된다면 중서부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엘크하트의 고향을 찾아가서 당신이 옛날에 살던 집을 방문하고, 그리고 당신의 모교 노스웨스턴에도 가보는 거예요. 당신이 여러 가지로 고생했던 곳이지만, 남자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하기야 그렇게 멋진 생각이 아닌지도 모르지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언제 갈 생각이야?] 마티가 조용히 물었다. [파티를 끝내고 크리스마스 정도가 좋겠지요. 좀 춥기는 하지만 축복의 계절이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정말, 엘크하트에? 노스웨스턴에도 가는 거지요?] [정말이야. 여행하기에는 좋은 계절이지. 회사도 좀 한가해지니까. 꼭 그렇게 하고 싶어.] 사만다는 몸 속에 흥분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래, 옛날 애인과 데이트하던 곳으로 당신을 안내해 주지.] [왕년의 격전지에요?] [자랑이 아니라 비밀 장소는 내가 제일 잘 알았지. 노스웨스턴에서 공부하던 방도 보여 주겠어. 그곳에서는 미시건 호가 한눈에 보이지.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당신이 살던 집도 보고 싶어요.] [작고 하얀 판잣집이지. 굴뚝이 두 개 달린...... 누구나 쇼의 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 새로운 희망이 사만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여행을 동의한만큼 마티는 자신의 과거를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 여행에 열성을 보였다. 왜 그런지 마티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여행 제안이 마티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상을 흔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마티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그것은, 과거를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여행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노스웨스턴이나 엘크하트에 전화해서 알게 된 기록의 분실과 혼란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티는 변변치 못한 학교 당국자들의 희생일지도 모른다. 또는 사만다가 생각할 수도 없는 이유로 재판소의 명령에 의해 기록이 모두 삭제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표는 제가 끊어 놓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유나이티드로 해. 시카고의 오하라 공항까지 비행기로 가서 노스웨스턴에서 출발하면 어떻겠어? 차를 빌려서 엘크하트까지 드라이브할 수도 있고, 학창 시절에는 언제나 그렇게 했지.] [에번스턴에 좋은 레스토랑이 있나요?] [있고말고. 게다가 주인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저널리즘학과의 동창생 가운데 요리 평론가가 되려던 친구가 있었어.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레스토랑을 개업했지. 그 친구를 만나면 서로가 무척이나 감격스럽겠지.] 사만다는 뛸 듯이 기뻤다. 바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마티는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사만다는 혼자서 스텝을 밟으며 침실을 한바퀴 돌았다. [아이스크림을 주문할까? 24 시간 배달해 주는 가게가 새로 생겼어. 초콜릿 칩이 괜찮겠지?] 사만다는 그런 그를 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좋아요.] 마티는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중서부로의 여행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3

[그럼 그 집은 아직 그곳에 있군요. 굴뚝이 두 개 있고, 참 멋져요. 현재 그곳에 살고 계시는 분의 이름을 가르쳐 주셔서 고마워요. 빨리 그분들에게도 연락을 해야겠어요.] 사만다는 기쁨에 넘쳐 수화기를 놓고 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전화는 정말 기분이 좋아.] [마티가 설명한 것과 똑같은 집이래?] 린이 물었다. [조금도 틀리지 않다고 서장이 말했어. 서장 말로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은 것 같대.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거야. 어쩌면 옛날 마티의 방을 볼 수 있도록 안으로 들어가게 해줄지로 몰라.] [좋은 생각이 있어. 이쪽에서 비용을 지불하면 파티 때 보여 줄 사진을 찍어 보내 줄지도 몰라.] [그들에게 물어 볼게.] 사만다가 대답했다. 지금 그녀는 긴장했다. 엘크하트의 마티가 살았던 지역의 파출소에 전화를 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파출소장은 마티가 그 지역에 관해서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사만다는 또 다른 곳에 전화를 했는데, 그곳도 역시 성공이었다. 마티가 여권을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해 내고, 국무성에 전화를 해 미국 시민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출생 증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출생 증명은 엘크하트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엘크하트 시청은 정학한 정보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마티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감은 어젯밤 본인의 말고 조금 전의 전화로 회복되었지만, 사만다는 여전히 본래의 목적-마티를 알고 추억을 서로 나눌 사람들을 찾는 일-에 몰두해야 했다. 파출소에서 마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15 년 이상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노스웨스턴에 전화하려고 생각했다. 학교가 마티의 경력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마티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티는 군대 이야기를 자주 했어. 그이는 자원 입대했지.] 사만다가 린에게 말했다. [알 만해. 마티는 용감한 사람이야. 우리 그이는 전쟁이라면 벌벌 떨거든.] 린은 대답하며 식탁 위에 있는 사과를 하나 집었다.


[군대는 마티를 장교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대.] 사만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는 일반병이 좋았대. 어딘가의 사무실에는 저널리즘 학사 학위를 가진 사병으로서 기록되어 있다고 했어.] [어쩌면 그 부대의 상관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는지도 모르지.] 린이 사과를 베어 물었다. [맞아. 상관들도 대등하게 대우해 줬다고 했어.] [군대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 사만다는 잠깐 생각했다. [보스라고 하는 하사가 한 명 있었어. 제일 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소식이 끊겼다고 했어.] 린은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고 일어섰다. [기적을 만들어내는 거야. 워싱턴의 국방성으로 전화해서 보스 하사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아보면 돼.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녀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사만다는 대답도 없이 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도 마티의 군대시절 동료를 추적해 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린이 그런 말을 하자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국방성의 전화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그녀는 군대식 관료 제도의 제물이 되어 이쪽 전화에서 저쪽 전화로 몇 번이나 헛수고를 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아홉 번 이상 전화를 걸고 나서 드디어 인사 담당 하사관과 통화하게 되었다. 그는 오래 전 근무한 군인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멀건 중사입니다.] [중사님, 저는 사만다 쇼라고 합니다.] 국방성 조직에 완전히 지쳐버린 사만다가 말했다. [네, 부인. 무슨 일입십니까?] 멀건의 음성은 문자 그대로 부동 자세로 앉아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제 남편인 마틴 쇼는 대학을 졸업하고 60 년대에 군대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에 근무하셨습니까?]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용건은 퇴역 군인의 특전에 관한 것입니까, 부인?] [아닙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제 남편은 지원병이었습니다.] [RA 이군요.]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규군으로 입대하신 것이군요.] [네, 그래요. 친한 친구가 몇 명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을 찾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주소를 알고 싶어하시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쇼 부인. 이런 일은 흔한 일이죠. 전우회에서 자주 이용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서 고맙습니다.] 사만다는 마티의 흉내를 내어 린에게 손가락으로 V 자를 그려 보였다. 린은 이미 코트를 입고 또 다른 모임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몸짓으로 곧 돌아온다고 신호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 멀건 중사가 말했다. [보스라고 합니다. 리처드 보스.] [육군입니까?] [네.] [근무 기록은 세인트루이스에 있습니다만 요즘은 모든 것이 컴퓨터로 되어 있지요. 보스란 이름이 입력되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멀건이 컴퓨터의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사만다의 귀에도 들렸다. 그리고 린이 나가고 아파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멀건이 알아보고 있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녀가 생각한 것은 생일 파티와 마티와의 여행뿐이었다. [부인?] [네?] [ 이 단말기에는 리처드 보스가 나타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남편 되시는 분을 입력하면 상호 조회가 가능합니다. 부대 이름도 알 수 있지요. 보스는 남편과 같은 부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이런 일로 시간을 빼앗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부인. 그런데 남편이 소속되었던 부대 이름을 알고 계신지요?] [그런 것까지는......] [그럼 군번도 모르시겠군요?] 사만다는 앉은 채 의자를 빙그르르 회전시키며 눈을 반짝였다. [군번은 알고 있습니다. 장난삼아 기억해 두었습니다. RA38567194 입니다.] [군번으로 조회해 보겠습니다.] 마티는 앉은 채 다시 기다렸다. 잠시 후 멀건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번호가 나왔습니다, 부인.]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사만다는 침묵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남편의 군대 시절 근무 기록입니다.] 멀건이 계속 말했으나 그 음성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아까보다 조용하고 침착했다. [지금 모니터에 전부 나와 있습니다만......] 사만다는 그 변화를 눈치챘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그녀가 초조한 듯이 물었다. [안됐습니다, 부인.] [안되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부인의 남편 말입니다.] [제 남편이 어떻게 됐습니까?] 멀건은 머뭇거렸다. 전화한 여자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베트남에서 전사하신 것을 무슨 말로 위로해야 좋을지요.


정말 안됐습니다, 부인.] 누군가가 미간을 망치로 친 것 같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멀건의 얼굴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 마티가 중서부로 함께 여행하자고 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었는데 또다시 혼란이 왔다. 그녀는 믿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은 것이다. 그 말은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도 가슴을 찍어 내렸다. 마티는 살아 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환풍기가 회의실에 가득 연기를 빨아내고 있었다. 마티는 긴 티크 테이블 상석에 앉아 새로운 광고주-여객 수송의 실적이 급속히 하강선을 그리고 있는 항공 회사-와 경영 전략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출석한 사람은 마티와 젊은 여직원뿐이었다. 항공 회사측에서는 변호사 두 명, 회계사 한 명, 그리고 승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조언하기 위해 고용된 심리학자 한 명을 포함해 여덟 명의 경영진이 참석했다. 마티는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앞에 두고, 전투 준비를 끝낸 남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연기였다. 이런 광고주들은 자기들이 고용한 광고 회사 사람들이 언제라도 맹렬히 돌진해서 경쟁 상대를 압도할 듯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미지 메이커의 이미지이며, 마티는 그런 인상을 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귀사의 문제는, 누구 한 사람도 귀사를 특출한 점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티가 일동에게 말했다. 항공 회사 사장은 원래 파일럿 출신으로 햇볕에 탄 건강한 얼굴과 균형잡힌 체격의 소유자였다. [당신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까?] 거의 군인 같은 말투로 그가 물었다. [먼저 귀사가 자랑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합니다.] 마티가 대답했다. 실내가 웅성거렸다. 마티는 항공 회사 중역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런 점이 없습니까?] [우리들은 델타도 루프트한자도 아니오. 그래서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거요.] 사장이 대답했다. [그 점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마티가 반격했다. [귀사의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는데도, 다른 큰 회사의 그림자에 가려 버리죠. 제가 얘기하기에 앞서, 귀사가 어떤 점을 자랑할 수 있나를 듣고 싶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얘기입니다.] 마티가 의자에 기대어 사장 쪽으로 몸을 돌리자 사장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곧 빠른 어조로 자기들의 우수한 기술진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장이 얘기하고 있는 사이에 마티의 마음은 다른 곳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가끔 있는 일이었으나 요즘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다른 해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12 월 4 일이 다가옴에 따라 정신이 일에 집중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애들에게 그 일을 알리는 게 두렵죠? 어째서 일자리를 잃었는지.] [당신 걱정이나 해! 어제는 어디서 잤어, 앨리스?] [내가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거예요?] 마티는 항공 회사 중역들이 얘기하는 것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억제된 태도와는 달리, 공포의 상징이었고 내부의 태풍이었다. [그렇다면 나를 갈보라 불러요!] [프랭키, 너는 네 방에 가 있거라.]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순간, 마티는 테이블 반대편에서 화살처럼 날아드는 질문을 들었다. [우리 회사로선 이 점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티?] 다행히 질문은 놓치지 않고 들은 것 같았다. 테이블 주위의 누구 한 사람도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 앞에 말한 것을 하나도 듣지 못한 터였다. 적당히 둘러대자. 마티는 기침을 했다. [다른 요소와 감안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나 강조해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항공 회사 부사장이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일단은 시도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마티가 대답했다. [저도 그 말에 찬성이오.] 모두들 동의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였다. [계속하십시오.] 마티가 말했다. 회계사가 메뉴를 대만에서 인쇄함으로써 회사가 얼마만큼 경비를 절약할 수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티는 또 다른 생각을 했다. 하나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형성되었다. 그것은 레일을 달리고 있는 모형 기차와 집 안을 가득 채운 그 철컥철컥 하는 소리였다. 회계사가 일련의 숫자를 읽어 가자 마티는 펜을 꺼냈다. 중역들은 자기들을 위한 메모를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가 쓰고 있는 것은 편지였다. 사랑하는 아버지께 또 그 때가 왔습니다, 지난해와 그 이전의 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께서 제 일을 걱정하고, 제 갈 길을 안내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걱정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올바르게 기억해 두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길 빌겠습니다. 다가오는 5 일데도 또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길 빕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프랭키


회계사가 중단했다. [됐습니까? 모두 적으셨습니까?] [네, 필요한 것은 모두 적었습니다.] 마티가 대답했다. 그 편지를 폴더에 집어넣었다.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면서 사만다가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시간을 빼앗아서.]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마티는 [샌디고 유니온]에도 근무한 적이 없었다. 마티가 경찰서니 재판소를 취재하러 다녔던 추억들을 그녀에게 얘기해 주었건만, 그들은 마티의 이름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회사 내에 보관된 입사원서에도 마틴 쇼는 없었다. 더욱이 편집자 누구 한 사람도 마티가 썼다는 기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자기가 접촉한 상대가 하나같이 기록을 보존해 놓지 않았다고는 믿지 않았다. 마틴 쇼라는 사람이 육군에 있었고 남편이 그 군번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확실히 마티는 전사한 사병임을 알고 뭔가 근거가 있는 신원이 필요해서 그 군번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왜? 그리고 왜 그렇게 기뻐하면서 함께 고향으로 여행하자고 했을까? 국가 기밀에 관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티는 자신의 행적을 감출 필요가 있는, 이를테면 제임스 본드 같은 사람이 아닐까? 뭔가 감추려고 하는 사람이 추억 여행에 동의할 이유가 없다고,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의심을 밟아 버렸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추억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티는 다시 의혹의 싹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이외의 가능성에 지레 겁을 먹었다. 마티는 정신에 이상이 있어, 그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불의의 사고를 당해 뇌에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러 가지 일을 공상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지금 정상 상태이고, 과거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면 왜 결혼한 나에게 밝히지 않는 걸까? 사만다 혼자 생각해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했다. 누구에게 조언을 받으면 좋을까? 린에게? 그녀는 너무 잘 아는 사이였고 너무나도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마티 친구 가운데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면 마티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약 이 수수께끼가 모두 해결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것이 의학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직접 마티에게 질문을 던져 결혼 생활을 파탄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문제-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멋진 남자와 결혼하고 있는 것-에 직면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이 또 있을까?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정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상담 전화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마티의 친구인 톰 에드워즈이다. 그는 탁월하고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만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톰은


마티가 가장 아끼는 둘도 없는 친구였고, 매일 그가 친절히 얘기를 들어 주는 상대였다. 톰과 마티는 생각도 느낌도 비슷해 보였다. 톰이 몇 살 아래였지만 그런 것은 그들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톰은 맨해튼의 부동산업자로, 아파트 전경 사진과 임대료 인상을 알리는 신문 기사를 더덕더덕 벽에 붙여 놓은 작은 사무실을 이스트 56 번가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마티처럼 딱 벌어진 체격이었지만 인품은 훨씬 조용하고 부드러웠으며, 마티처럼 사람 위에 서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은 보다 정서적인 무의식 상태에서 서로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회사일로 신경이 날카로운 마티에게 톰의 부드러움이 필요한 것이다. [톰 에드워즈입니다.] 사무적인 목소리로 톰이 대답했다. [톰, 사만다예요.] [아, 사만다! 영광이군요, 당신 전화를 받다니. 새로운 아파트라도 찾고 계십니까?] 사만다는 웃었다. [아니에요, 톰. 찾고 있는 것은 당신이에요.] [저를!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나쁜 일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단지 힘을 좀 빌렸으면 해서요.]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아니에요, 전혀. 참 바쁜데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마침 쉬고 있던 중입니다. 마티에게 전화나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톰은 나이에 맞지 않게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올렸다. [용건을 말해 봐요. 제게 어떤 부탁을?] [마티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파티에 대하여 알고 계신지요?] [물론입니다.] [이것은 비밀로 하고 싶은데요.] 이렇게 말하고 사만다는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말을 멈췄다. [그래요?] 톰이 말했다. 사만다는 잠자코 있었다. 계획했던 대로는 되지 않았다. 아무리 톰이라도 일어난 일 모두를 밝힐 수는 없었다. 충동적으로 생각한만큼 그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가지 말고 다른 얘기부터 시작하자. [사실은요, 톰.]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의외의 선물을 해서 그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요. 파티에 옛날 친구나 은사님을 초대해서 추억이라도 나눌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래서, 당신이 누군가를 알고 있지 않나 생각한 거예요.] [옛 친구나 선생을 말이죠?] [그래요. 누구 아는 사람 있어요?] [글쎄......]


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해럴드 타일러는 어떨까요?] [톰, 해럴드는 마티가 최근에 사귄 친구잖아요.] [옛날부터 사귀어 온 친구가 아닌가요?] [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현재 소식이 끊긴 사람들의 이름이에요.] [과연 그렇군요. 기다려 봐요. 음......그는 어떨까? 아냐, 지금도 알고 있지.] [예를 들어 노스웨스턴의 교수라든가 엘크하트의 선생님이라든가.] 톰의 반응을 보려고 사만다가 슬쩍 떠봤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아시는 바와 같이 마티와 제가 친해진 것은 5 년 전부터이니까요. 옛날 일은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아요.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사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마티의 친구들은 두세 명을 제외하곤 당신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톰, 마티가 당신에게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톰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옛날 여자 친구들의 이름 정도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좋아요. 그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샘.] 톰이 설명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뿐이에요. 그리고 어떤 여자였던가. 그정도입니다. 남자들끼리의 얘기는 대부분 그렇지요.] [그럼 제가 헛수고를 한 셈이군요.] 다소 실망을 느끼면서 사만다가 말했다. [마티의 지금 친구들의 이름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드리죠. 물론 당신이 모르는 친구들이지만.] [옛날 친구들이 필요해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다른 방법? 마티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요. 그의 과거와 연결되는 것은 거의 없어요.] [그거야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지요.] 사만다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시도해 보기로 했다. [당신은 군대에 근무한 적이 있지요, 톰?] [예, 있습니다.] [두 분이 전쟁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왜 이런 얘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군요. 잘 생각해 보면 마티의 과거를 파헤치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지도 몰라요. 추억이라는 것은 이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거야 뭐, 누구라도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지금 마티는 많은 친구들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지요.] [생각해 보겠어요. 너무 시간을 빼앗은 것 같군요. 이쯤에서 마쳐야겠군요.] [파티 준비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하세요.]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사만다에게는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러나 톰이 마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마티의 과거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떤 사정이든간에 남자가 둘도 없는 친구에게 자기의 과거를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톰과의 전화는 사만다에게 고통을 더해 줬을 뿐이었다. 사만다는 마티의 과거를 확실하게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될 수 있는 마티를 자극하지 않고 그의 과거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지난번 사만다가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는 기분나빠했었다. 저녁 식사 후 오래 된 험프리 보가트의 영화를 보면서 쉬고 있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말을 꺼냈다.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하는 동안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마티에게 다가갔다. [초대 손님 명단이 완성되었어요. 아직 주소가 확인되지 않는 분은 빼고요.] 마티가 당황하는 것을 사만다는 놓치지 않았다. [주소를 확인하다니?] [현재 서로 연락이 안되는 분들 중에서 파티에 참석할 만한 분들을 찾고 있어요. 주소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니 당신이 혹시 알고 있으면 지금 좀 알려 주세요. 초대장을 늦게 보내는 것도 실례니까요.]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마티는 코카콜라 광고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잘라 말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군대 시절 보스라는 분도요? 그 사람 얘기 자주 하셨잖아요.] [사만다, 그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야.] [그래도 그분이 참석하고 싶을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도 모르잖아. 바가지 긁는 아내가 있는지도 몰라. 과거의 사람들은 그냥 과거로 묻어 두는 것이 가장 좋아.] [알았어요. 이 문제는 이쯤에서 그만두죠.] 마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사만다 쪽을 보았다. [그렇게까지 신경써 줘서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사만다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이미 느끼고 있던 불안한 기분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문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마티의 말이 그녀를 완전히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마티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텔레비전 영화를 보다 말고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영화가 재미있어?] [마티가 물었다. [아뇨, 별로.] [그럼, 이리 와봐.] 사만다는 마티를 따라 침실로 갔다. 그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요?] 그녀가 물었다.


[방 안 구조를 바꾸고 싶어.] [어때서요?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데.] [나쁘지 않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 마티의 목소리는 사만다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사람을 경멸하는 투였다. 그녀는 마음에 걸렸지만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어떻게 바꾸고 싶어요?] 그녀가 물었다. [인테리어 잡지에 있는 대로, 마음에 들었어.] [그 잡지 갖고 있어요?] [아니, 버렸어.] 참고로 하려는 잡지를 왜 버렸을까? 사만다는 그 의문을 그냥 가슴에 묻어 두기로 했다. 마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좋은 것을 보여 주지. 이것을 여기에 이렇게 놓는 거야.] 마티는 서류 가방에서 싸구려 금속 액자를 꺼내 침대에 올려놓았다. [글쎄요......] 볼품없는 액자라 사만다는 어이가 없었다. [왜 그래?] [정말 그것을 여기에 놓을 생각이에요?] [응. 당신은 싫어?] 사만다는 점점 화가 났다. [마티! 물건을 살 때 우리는 언제나 함께 샀어요.] [당신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마음에 들어요. 멋져요. 하지만 방 안 구조를 바꾼다면 저한테도 좋은 아이이디어가 있어요.] 마티는 재빨리 사만다를 포옹했다. [물론이지. 당신은 무시하는 것은 아니야. 내가 좀 흥분했는지도 몰라. 당신이 언짢아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사만다, 미안해. 하지만 이것은 정말 멋진 레이아웃이야. 나에게는 중요한 의미도 있어. 당신만 허락한다면 꼭 하고 싶어.] [좋아요.] 사만다도 동의했다. 마티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사만다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갑자 방 안 구조를 바꾸는 데 흥미를 보이는 마티의 일보다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티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만다가 도와준다는 것도 거절하고 혼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 표정은 진지하고 아주 열심이었다. 사만다는 마티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티는 정확하게 그가 원하는 곳에 액자를 걸었다. 보기는 흉했지만 그는 그것에 특별한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침대를 옮기고 헤드보드를 라디에이터에 바짝 붙였다. 그 배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만다는 알고 있었다. 마티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옷장으로 창문을 가리면 안된다는 것도 마티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업이 끝났을 때 모든 것이 마티가 의도한 대로 되어 있었다. 더구나 코너 매트를


말려 올라가게 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사만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배치를 인테리어 잡지가 추천할 리도 없고 일부러 지면을 할애해 소개할 리도 없었다. [드디어 끝났군. 나는 이런 구조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마티는 작업을 끝내고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마티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때, 당신은?] 마티가 물었다. [글쎄요. 나름대로 장점은 있겠지요.] [이상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이 방이 이런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그러나 얼마 동안 이렇게 놔둬 보자구.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옮겨 놓으면 되니까.] [좋아요.] 사만다는 동의했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아주아주 기묘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파티에 필요한 것을 메모하기 위해 방을 나왔다. 마틴 쇼는 천천히 침대로 가서 누웠다. 그는 사만다의 베개를 끌어다가 인형처럼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입술을 움직였다. [키스해 줘. 프랭키에게 키스해 줘.] 그는 속삭였다. 그 가게는 허드슨 강 근처의 웨스트 15 번가에 있었다. 부근은 창고와 수입상으로 북적거렸기 때문에 사만다가 탄 택시는 도로 여기저기에서 짐을 싣고 내리는 몇 대의 트럭 사이를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길게 울리는 따분한 경적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때렸다. 이것이 웨스트 15 번가의 교향악이었다. 근처 주민들은 벌써 거기에 익숙해 있었다. 밖에 내걸린 간판에는 [사이먼 유리가게]라고 씌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만다는 실내에 떠다니는 아주 미세한 톱밥 먼지들을 보았다. 가게 안은 간단한 칸막이가 쳐져 있고 그 앞에 철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아무도 안 보여서 사만다는 녹이 슨 작은 벨을 눌렀다. 가게구조는 보잘것없었지만 사만다의 한 가지 절박한 의문에 대답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상관할 바 아니었다. 하워드 사이먼은 신장이 160 센티미터밖에 안되는 아주 키가 작은 남자로 나이는 지긋하여 여든 안팎이었으며 홀쪽한 얼굴 탓인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었다. 와이셔츠와 빨간 넥타이에 파란 작업복을 입고 칸막이 안에서 나왔다. 머리는 거의 대머리에 가까웠다. 사만다를 보고 살며시 미소지었다. 이 작은 유리가게의 액자 주문은 대부분 대형 백화점에서 하거니와, 주문서를 갖고 오는 사람은 멍청이 같은 잔심부름꾼들뿐이었다. 정감 있어 보이는 손님이나 유달리 매력적인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무슨 일로......] 좀 의례적이긴 하지만 점잖은 목소리로 사이먼이 물었다. [네, 졸업 증서가 있습니다만.] [그것을 액자에 끼워 넣으시려고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고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업 관계로 아는 사람 것이에요.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그 졸업증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어요.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겠고요.] 사만다는 아주 난처한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사이먼은 그녀의 의중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문제라면 얼마 전에도 여러번 있었기 때문이다.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사만다는 큰 핸드백에 넣어 온 졸업 증서를 꺼내기 위해 손을 집어 넣었다.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제가 누구에게 이야기할 것 같습니까?] 사만다는 천천히 졸업 증서를 꺼내서 사이먼에게 주었다. [노스웨스턴이군요. 좋은 대학이지요.] 그는 졸업 증서를 뒤집어 손으로 쓰다듬었다. [유감스런 일입니다만, 이분은 이 대학에 다닌 적이 없군요.] 사만다는 잔뜩 긴장해서 힐난조로 물었다. [무슨 말씀인가요?] 사이먼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대답했다. [이 증명서는 가짭니다. 저는 이 대학의 졸업 증서를 신물이 나도록 보아 왔습니다. 이것은 형편없는 인쇄 기술이군요. 이 신사는 아마 이런 것을 전문으로 하는 데서 만들었겠지만......] [그게 확실합니까?]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60 년이 넘었습니다, 부인.] [감사합니다.] 사이먼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물적 증거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아주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판단을 주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마티의 노스웨스턴 시절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만다는 아무 말 없이 사이먼의 가게를 나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비참한 생각을 하며 택시를 타보기는 처음이었다. 마티는 노스웨스턴에 대해 몽땅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제는 그 밖의 것들조차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그녀가 알고 있는 마틴 쇼가 아닌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분명하고, 결혼은 생각했던 것처럼 꿈만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꾸만 악몽으로 바뀌고 있었다.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공포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녀는 자신과 싸웠다. 만약 마티를 만나기 전 저 을씨년스러웠던 시절에 사만다가 배운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절망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방어 기구라고 부르는 거부 반응이 그녀의 내부에서 뭉클뭉클 솟아났다. 센트럴 파크를 택시로 지나면서 자신이 발견한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 보고 마티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는 이 감정, 이 두려움, 그리고 이 희망은 서로 모순된 채 남아 있겠지.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사만다는 마음을 굳혔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마티에게 어딘가 이상이 있다면 혼자서 그것을 진단할 수는 없다. 이런 문제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 가장 좋은 것이다. 누구에게 상담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심리학을 수강할 때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명석한 데다


학식도 뛰어나고 인품도 온후했다. 강의의 주제는 남성의 스트레스에 관한 것이었다. 코트를 벗자마자 사만다는 수화기를 들고 의학 박사인 S.레빈과 특별 면담을 약속했다. 레빈은 뉴욕 병원과 관계하고 있었지만 이스트 66 번가의 연립 주택에 작은 개인 병원을 내고 있었다. 사만다는 골목 어귀에 다다르자 택시에서 내렸다. 상대가 정신과 의사라 다소 긴장되었다. 색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레빈의 사무실 흰 계단을 올라갔다. 가까이서 보니 레빈은 사만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어림잡아 50 대 후반으로 보이고, 머리는 백발에 가까웠으며, 눈 주위는 움푹 꺼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정신과 의사답지 않다고 사만다는 생각했지만 환자들은 그를 신뢰했다. 그의 사무실은 붉은빛이 도는 나무 판넬로 내부 장식을 했으며 간접 조명이 되어 있었다. 불빛은 부드러워 사람들의 불안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상 옆 외과 수술용 의자에 앉아 마티의 증세를 사만다한테서 들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사만다가 그에게 말했다. [남편은 정직한 사람이에요. 업계에서도 존경받고 있어요. 그러나 남편이 말한 대부분이 사실과 달라요. 그런데도 본인은 아직도 그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해요.] [남편께서는 뭔가를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념편은 광고인이지요? 과장하는 것이 직업일 텐데요?] [그렇습니다만, 집 안에서까지 그러지는 않아요.] [부인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특별나게 대해 주진 않아요. 허풍을 떠는 사람도 아니고요. 되지도 않을 일을 할 수 있다고 억지부리는 성미도 아니에요.] [네, 알겠습니다.] 레빈은 사만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란 메모 용지에 메로를 했다. [곧잘 잊어버리는 편입니까?] 사만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끔 잊어버려요.] [어떤 식으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예를 들면 늘 기억하고 있던 친척들 이름을 잊어버린다든가,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돈을 지불할 날짜를 넘긴다든가, 녹음기에 건전지를 갈아끼우는 것을 깜빡 잊는다든가 하는 정도예요.] [결혼 후 남편에게 특별한 변화라도 있었습니까?] [별다른 변화는 없었던 것 같아요.] [건강상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건강도 별 이상이 없어요.] [경찰에는 알렸습니까?]


[예? 경찰이라니요?] [일단 경찰에 알려 두는 편이 나을 겁니다.] [본인이 이야기할 때까진 그럴 수 없어요.] [남편께서는 종종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습니까?] [아뇨, 저에게 숨기지 않는 한 결코 그런 일은 없어요.] 레빈이 입을 열었다. [뭔가 남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말하자면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자포자기하고 거짓말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어, 자기의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제 2 의 자기 자신을 탄생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는 겁니다.]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제 남편은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예,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늘 그렇지는 않겠지요.] [제가 마티를 만난 이후로는 쭉 그랬어요.] [이건 좀 어려운 질문인데, 남편께서 지금까지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도 없는데요.] [좋습니다. 그럼 가짜 졸업 증서에 대해 남편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음, 직접 얘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이란 추궁당하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면담은 두 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면담이 끝나자 사만다는 거의 녹초가 될 정도로 피곤했고, 레빈은 42 페이지가 넘게 면담 내용을 기록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메모 용지 가운데 몇 장을 꺼내 다시 훑어보았다. 의사는 사만다를 보며 말을 이었다. [부인, 오늘 말씀하신 것만으로는 남편은 지극히 정상적인 분입니다. 부인을 속여 왔던 과거라든가, 방을 이상하게 꾸몄다는 것은 별도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남편과 직적 얘기하지 않고 섣불리 결정짓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렇다고 오늘 부인이 말씀하신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는 일단 남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선생님, 조금 전에는 문제를 직접 본인에게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레빈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남편에게 밝힐 수는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든 바깥주인을 이곳으로 모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방법이라면......] [글쎄요. 부인께서 남편에게 슬쩍 말을 건네는 것도 좋겠지요. 다시 말해 사업 관계로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부인을 위해서라도 의사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부탁하는 겁니다.] 사만다는 레빈의 제안이 좋은지 어떤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는 아무래도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방법으론 안될 것 같아요. 남편은 적어도 일에 관한 한


유능하다고 믿고 있고 남들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거든요.] [어쨌든 부인, 바깥주인을 만나지 않고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마티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리고 오는 방법도 문제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레빈이 진짜 사만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쩐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만약 마티가 정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단지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때 레빈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사만다는 힘없이 레빈의 병원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타지않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센트럴 파크를 걸었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묘책은 무엇인가? 공원은 텅 비어서 사만다의 고독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톰 에드워즈와 케너스 레빈에게 도움을 청했고, 순진하게 마티를 떠보기까지도 했다. 아무 진전이 없었다. 이제 와서는 마티가 문제가 아니었다. 마티의 옛 친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조금은 후회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편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다. 마티의 과거가 거짓으로 포장된 것을 모르고 있다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마 행복한 결혼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겠지. 나는 지금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이 바보야.] 사만다는 스스로를 경멸하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힐책하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며칠 후 사만다는 한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고, 다음날은 또 다른 정신과 의사와 상담했다. 모두들 대답은 비슷했으며 레빈의 말과 거의 같았다. 본인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만다는 정신과 의사와 상대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체념해 버렸다. 그러나 레빈에게 들었던 말 중에 앙금처럼 가슴에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두렵게 하고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마티를 경찰에 신고했냐고 레빈이 물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경찰에 알리게되면 마티가 거짓 과거를 만들어낸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변호사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느 변호사를 만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서 고용하고 있는 고문 변호사를 찾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더구나 그는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마티의 개인 변호사였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당장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그런 종류의 문제를 다뤄 본 경험이 있는 형사 변호사였다. 사만다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11 월의 목요일, 아파트를 나와 택시를 타고 뉴욕 시립 도서관 신문 열람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지나간 신문을 펴놓고 재판에서 승소한 실적이 있는 변호사를 찾았다. 왜냐하면 마티와 재판까지 갈지도 모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고, 그때는 그에게 승소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엇을 했든, 내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어떤 경우라도 그를 이겨야 한다. 그녀가 필요한 것은 현대의 클라렌스 대로(1857-1938,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역주)였다. 사만다는 L. 더글라스 그라임스의 인격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그라임스는 월 가에 있는 훌륭한 사무실과 함께 웨스트 맨해튼의 갈색 벽돌 건물 안에 수수한 사무실도 갖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갖고 사만다는 갈색 벽돌 건물 안에서 상담을 요청했다. 작은 사무실은 바닥에 모노륨이 깔고 있고 구석에 원형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학대받는 사람들, 학대받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무대 장치였다. 책상 위쪽에는 시민 단체로부터 받은 16 장의 감사장이 걸려 있어 그라임스가 유능한 변호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배가 조금 나온 것 같았지만 평범한 얼굴과 걷어붙인 소매, 텁수룩한 머리, 낡아빠진 구두, 폭 넓은 멜빵이 달린 구겨진 바지 등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우한 계층을 상대]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라임스는 늘 하는 식으로 능숙하게 사만다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녀도 나름대로 열심히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녀가 이야기를 끝내자 그라임스는 잠시 기다렸다가 테 없는 안경을 벗고는 뒤로 돌아가 신중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한번 더 사만다를 보고 20 년간의 경험을 살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부인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지금까지 취급한 사건 가운데 가장 곤란한 것이로군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라임스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부인이라면 필시 변호인측의 좋은 증인이 되겠군요. 동정을 모으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니까요. 그런데 왜 남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게 불가능해요. 만약 이런 모든 일에 그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때론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알겠습니다.] 그라임스는 회전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모퉁이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아니시겠지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상을 알고 싶은 것이겠지요. 또 남편의 과거가 폭로되어 곤란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간에 여기까지 오셨으니까요.] 사만다는 그라임스의 얘기를 모두 인정했다. 어떤 불명예스런 과거를 갖고 있든, 그것을 포함한 어떤 일이라도 용서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만, 그보다 먼저 알 필요가 있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확인하시려면 사설 탐정에게 의뢰해서 남편의 과거를 추적해 보면 되겠지요. 그러자면 경비도 꽤 많이 들고, 전혀 소득을 얻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게다가 남편이 눈치챌 염려도 있지요. 사설 탐정 모두가 천재는 아니니까요.] [지금까지 이런 문제를 의뢰받은 적이 있으세요?] 그라임스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듯 만면에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셀 숭 없을 정도로...... 대개의 공통점은 복잡한 과거를 지워 버리기 위한 것이지요. 대부분 뭔가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밖에도 병역 기피자와 탈세자, 알코올 중독자, 이혼 남녀, 아이를 낳았으나 버렸던 무책임한 사람들......] 사만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라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라임스는 자기를 쳐다보는 사만다의 시선을 의식했다. [마지막 경우를 듣게 되면 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미혼모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마찬가지죠.] 사만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부인, 현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그라임스는 사만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되받아 말했다. 사만다는 한숨을 쉬고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라임스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는 분명 나를 도우려는 것이다. [저......아이를 낳고도 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남편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나요?] 그라임스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순식간에 결론에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능성은 그 밖에도 많이 있으니까요. 남편께선 어쩌면 어떤 영웅적인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사만다는 흥분했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일까요?] [범죄자를 체포한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의뢰자를 즐겁게 할 의도인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라임스는 변호사다운 걸음걸이로 사무실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는 보복이 두려워 자신을 기키기 위한 방편으로 새로운 자기의 신분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아시다시피 정부는 때때로 그런 일을 하니까요.] [확인할 방법이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는 본명을 사용하지 않을테니까요.] [경찰에 신고하면 어떨까요?] 그라임스는 걸음을 멈추고 시민 단체로부터 받은 감사장을 느린 동작으로 반듯이 고쳐 걸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귀찮아질 것이 뻔했다. [남편의 과거 진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입니다. 만약 남편이 도망자라고 할 때, 부인이 신고한다면 부인은 남편을 형무소에 집어넣는 격이 되고 맙니다. 남편이 정신 쇠약이나 심한 건망증이라면 부인은 남편을 돕는 결과가 됩니다. 어느 쪽인지 이 시점에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겁니다. 그들은 더 중대한 사건과 씨름하느라고 바쁘니까요.] 사만다는 모든 게 헛수고임을 깨달았다. 마티와 직접 이야기를


해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법률적인 측면에서 뭔가 주의해야 할 것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예, 만약 남편이 수상한 행동을 하신다면 거들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나중에 몰랐다고 해도 공범이 될 우려가 있습니다. 남편이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저에게 전화해 주십시오.] [이상하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금전적으로 갑자기 허세를 부리는 등의 경우를 말합니다. 여유도 없으면서 여행을 하자고 조르다면 절대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뇌물이거나 횡령한 돈일지도 모르니까요. 가계부에 어울리지 않는 선물을 사오면 그렇게 비싼 것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고 저에게 즉시 전화하십시오.] 그라임스는 사만다 곁으로 와서 겁먹은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집 안에서 무기를 발견하면 즉시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보통 때보다 훨씬 많은 전화 요금 청구서가 나온다든지 하면 그것도 체크하십시오. 만일 뭔까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곧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여자의 직감으로 말입니다. 그 점에선 여자가 민감하죠. 베테랑 탐정처럼......] 이 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그들은 헤어졌다. 사만다는 아파트로 향했다.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가 아파트에 도착하자 언제나 친절한 수위 알이 인사를 했다. 그는 그의 직업에 긍지를 갖고 35 년간이나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온 사람이었다. [아, 참. 쇼 부인.] 사만다가 엘리베이터 가까이 다가섰을 때 그가 불러 세웠다. [소포가 왔습니다.] [저에게요?] [바깥어른에게 온 것 같아요.] 알은 사만다를 수위실로 안내하고는 갈색 종이로 싼 작은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마티에게 보내온 것은 확실했는데 발신자의 주소와 이름은 없었다. 사만다는 그것을 만지는 순간 갑자기 두려워졌다. 하지만 뭐가 두려운 거지? 이것은 단지 작은 소포 꾸러미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소포가 무기나 이상한 일에 대한 그라임스의 경고를 생각나게 한 것이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기계적으로 인사를 하고 급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자기 집에 돌아와서 사만다는 고포를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얼마 동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티에게 온 우편물을 미리 개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무리 부부라도 우편물은 개인적인 것이라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스파이 영화가 생각났다. 등장 인물이 소포를 개봉하고 감쪽같이 다시 봉해 놓는 장면이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야, 내게 그런 재주는 없어. 그래도 혹시 할 수 있을지 몰라. 의혹과 불안과 공포가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어냈다. 안에 작은 상자가 보였다. 막상 뚜껑에 손을 댔으나 자꾸만 망설여졌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권총? 돈뭉치? 그렇지 않으면 폭발물?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보았다. 특별히 주의를 끌 만한 것은 없었다. 상자 안에는 메모와 함께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그것은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마티의 친구한테서 온 것이었다. 책은 메딜의 교수가 쓴 <미국 신문사>였다. 그녀는 그것을 다시 포장했다. 감쪽같았다. 몇 분 후 전화벨이 울렸다. 그였다. 사만다의 가슴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무언가 알았을까? 어디로 전화를 해서 정보를 얻은 것은 아닐까? 뭔가 진전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부러 전화할 리가 없었다. [의뢰하신 문제를 숙고해 보았습니다만, 부인도 지금은 별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가 이야기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부인만 괴로울 뿐입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해결 방법?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 사만다는 잠시 의자에 앉았다. 그라임스의 말투는 가정의 위기를 위로해 주기보다는 암흑가의 살인청부업자 쪽에 가까웠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혼하시는 겁니다.] [그건 말도 안돼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의뢰는 부인께서 하셨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말씀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이 한 가지 방법을 잘 기억해 두세요. 더 큰 문제로 골머리 썩히기 전에 말입니다. 사만다는 그라임스의 제안에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 사태가 더이상 악화되면 이혼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부정하면서도 머릿속은 이미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심각한 사태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게 잘되겠지. 그라임스의 전화 이후로 그녀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마티는 무죄 방면될 것이고 악몽을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만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아무 계획도 떠오르지 않고 골치가 아파 오고 감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오로지 이 암흑의 순간에서 빠져나오려고 그녀는 파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사만다가 그라임스를 만난 나흘 후, 마티는 모형 기차를 집으로 가져왔다. 사만다는 깜짝 놀랐다. 다 큰 남자가 모형 기차라니?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 있는 아파트에서? 어린아이도 없는데? 마티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모형 기차를 가져 본 적이 없어.] 마티는 소년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모형 기차는 멋있어. 이런 것을 갖고 있는 남자들도 상당히


있지. 세계적인 클럽도 있거든.] 그녀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보라구. 벽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만든 거야. 당신도 마음에 들 거야.] 지금 아기 얘기를 하면 어떨까? 강한 유혹에 사로잡혔지만 사만다는 자신을 억제했다. 의심나는 것이 너무 많았다.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차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 사만다의 관심을 끌려는 듯 마티가 애원조로 말했다. 그리고 옛날 모델을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중고품을 사게 되었다는 것도 덧붙여 설명했다. [당신은 중고품 같은 건 절대로 사지 않잖아요!] 사만다가 항의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야. 당신은 취미 생활을 통 모르는군. 모형 기차는 뭐니뭐니 해도 라이오넬의 옛 모델이 최고란 말이야.] 특별한 일이긴 했지만 그라임스에게 전화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사만다는 모형 기차와 마티의 과거에 얽힌 수수께끼를 관련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본 것이 없었다. 틀림없이 마티는 취미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그런 일로 소란피울 필요는 없었다. 걱정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편하게 갖자. 필요하다면 장난감이든 뭐든 갖게 하는 거다. 사만다는 격무에 시달리는 남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보고 모형 기차 일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톰 에드워즈가 와서 거실에서 마티의 모형 기차 조립을 거들었다. 두 사람은 하바탕 기차놀이를 하더니 이윽고 톰이 마티를 남겨 두고 떠났다. 사만다는 혼자서 기차에 열중하고 있는 마티를 바라보았다. 그의 긴장된 얼굴과 뭔가에 도취된 눈을. [당신이 그렇게 행복해하시는 건 처음 보겠어요.] 거실에 들어서며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사만다가 옆에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남자들은 뭔가에 열중하기를 좋아하니까. 축구니 월드시리즈 같은 것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것까지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녀가 물었다. 마티는 고개를 들었다. 별뜻 없이 물어본 것인데 마티는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정말이야?] [네.] 그러나 프랭키라면 허락하지 않을 거야. 하긴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마티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의심받을 만한 일은 되도록 피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좋아, 한번 해봐!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단, 잠깐 동안만이야.] 그는 사만다에게 윙크했다. [우리 남자아이들은 숙제를 하기 전에 좀 놀아야 한단 말이야.]


사만다는 마티 곁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오른손을 묵직하고 커다란 변압기의 스로틀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이것이 모형 기차의 작동 중심부였다.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장난감 세트 모두가 멍텅구리로 보였다. 마티는 사만다에게 디젤 차의 경적을 울리는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맙소사! 이 소리를 이웃 사람들이 들으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린이라도 들으면 어떡하나? 길고 검은 스로틀을 마티에게 돌려주었을 때 사만다는 기관차용 윤활유가 하얀 카펫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일까? 자기 소유물은 물론 자질구레한 것을 정리하는 데도 마티는 아주 세밀했다. 값비싼 카펫이 더러워져도 상관없을 정도로 모형기차가 중요하단 말인가? 어쩌면 모형 기차는 취미 이상의 것일지도 모른다. 마티에게 이것들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뭔가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 후 며칠간 그녀는 어떻게든 마티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보냈다. [경찰]이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경찰]에 대해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이유를 낱낱이 열거해 보았지만, 사실은 그 방법이 수수께끼의 유일한 해결책인지도 몰랐다.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확실한 해답을 줄 사람이 어디엔가 있을 텐데, 그가 누구며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사만다의 하루하루는 억측과 예감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린이 파티 준비를 도와주러 왔다. 사만다가 린에게 물었다. [경찰서에 가본 적이 있어?] 린은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왜?] [오늘 아침 밖에서 이상한 일이 있어서......] [아, 체크 무늬 셔츠 입은 남자 말이지?] [아니야, 체크 무늬 셔츠 같은 것은 입지 않았어. 검은 가죽 잠바에 녹색 스웨터였어. 경찰에 신고하려 했는데 아직 경찰서 같은 데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난 또 뭐라고. 이곳은 암흑가가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는. 가본 적이 있지.] 린은 사만다의 심각한 표정을 보았다. [그 남자가 진짜 무슨 짓이라도......] [아니야. 그냥 말로만 치근덕거렸을 뿐이야. 취한 것 같았어. 그래도 어찌나 무서웠던지.] [경관들은 모두 친절하지. 만일 갈 일이 생기면 같이 가줄게.] [조금 더 생각해 보고.]

4 사만다 쇼가 경찰서로 출두한 것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었으나 그는 물론 사만다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펜서 크로스 웨이드는 뉴욕 시경 본부의 자기 방에서 달력을 흘끗 보고는 사건 담당 이후 계속 느끼고 있는 심한 욕구 불만과 혐오감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12 월 5 일까지는 이제 겨우 3 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 3 주 안에 이 무서운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또 하나의 비극을 막아야 할 3 주일이면서 동시에 그의 경찰 생활을 마감하는 3 주일이 될 것이다. 그는 그 날짜에 검은 매직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검게 그려진 선 자체가 그 순간을 구속하는 듯이보였다. 어떤 기회가 올 것인가? 아니면 날벼락이라도 맞을 것인가? 그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으나 실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소한 몸집에다 대머리가 빛나는,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웨이드는 뉴욕 시경보다는 런던 경시청 같은 곳에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런던 경시청에 근무했었다. 그러나 웨이드는 2 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에 근무하다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미국 여자와 결혼해서 그대로 미국에 눌러살게 되었다. 부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는 없었다. 재혼도 하지 않았다.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이는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며 회한에 잠기거나 영국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몇 개월 뒤 정년 퇴직 후에 예정하고 있는 여행 계획 등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의 사무실은 산뜻할 정도로 깨끗했다. 철책상 하나에 손님용 의자 서너 개가 전부였지만 방 분위기를 화사하게 보이기 위해 자기 손으로 매일 꽃을 갈아 꽂았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뜰을 갖고 꽃을 가꿔야 한다]고 인정어린 눈을 반짝이며 동료들에게 몇 번이고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영국인다운 발상이지만, 거친 뉴욕 시경에 조금이라도 영국풍의 신사도를 심고 싶어하는 그 나름대로의 조용한 캠페인이었다. 인터폰이 울렸다. 그가 빨간 단추를 누르자 살인과 접수계 샐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감님, 로긴스 형사가 뵙자고 하는데요.] [그래,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곧 갈게.] 웨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서 로긴스는 기다리는 동안 접수 창구 옆의 철제 의자에 앉아 <뉴욕 포스트>의 스포츠란을 읽고 있었다. [아서!] 로긴스는 42 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티]로 통했지만 웨이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와줬군.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어.] 땅딸막한 키에 어울리지 않는 체구 때문에 어정어정 걷는 걸음걸이가 미련스러워 보이지만 미묘한 부분에 대해 날카로운 후각을 갖추고 있는 로긴스는 자신의 사무실을 향하는 크로스 웨이드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을 꺼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사건 하나를 해결하느라......] [다 그런 거야. 경찰이란 언제나 끝맺음이 분명해야지. 나는 그걸 중요시하고 있어. 런던 경시청에서는 한 사람이 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게 되지. 사건을 매듭짓기 전에는 이러쿵저러쿵 불평 따위를 늘어놓아서는 안돼. 그런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 [예.]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설교를 듣게 되자 로긴스는 어이가 없었던지 얼버무리면서 대충 말을 막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간 웨이드를 따라가 의자에 앉았다. [자네는 원예에 흥미가 있나?] 웨이드가 물었다. [아닙니다. 아내가 집 주위에 소일거리로 나무 몇 그루를 심어 놓고 있습니다만, 저야 뭐 야구 중계를 보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원예는 인간에게 창조의 즐거움을 안겨 주지. 하긴 스물두 명의 사내들이 서로 격돌하는 것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겠지.] 그는 윙크했다. 조롱을 할 때는 언제나 상대방이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떤 사건을 담당하기 위해 나와 같이 일하게 되었네. 이 사건에 대해 신문 기자에게 쓸데없이 지껄여서는 안돼. 그런 것쯤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극비에 속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로긴스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대중을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려면 이런 사건은 공개 수사를 할 수 없는 거야. <샘의 아들>과는 다르지. 이것은 로데오 경기와 같아. 자네가 선발도니 것은 끈기가 있고 세밀한 면에 뛰어나기 때문이야. 아무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네 같은 수사관이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웨이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달력에 동그라미가 그려진 12 월 5 일을 가리켰다. [이것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네.] 그가 로긴스에게 말했다. [이날이 우리들의 목표인 동시에 악몽과도 같은 날이지. 이날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면 여자 한 명이 또 살해돼.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기 바라네.] [잘 알겠습니다, 웨이드 경감님. 저도 지금 막 다른 살인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것은 연쇄 살인사건이네. 벌써 6 년간이나 12 월 5 일만 되면 북아메리카 어딘가에서 같은 수법으로 여자가 한 명씩 살해된 점에 유의해야 돼. 희생자들은 모두 머리를 둔기로 맞고 체인 같은 것으로 목이 졸려 있었어.] [희생자들에게 공통된 특징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로긴스가 물었다. [있지. 여섯 명 모두 다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네.] 웨이드가 대답했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없었네.]


[목격자는 어땠습니까?] [서너번째의 살인까지는 산발적으로 목격자가 있었지. 사건 현장 부근에서 몸집이 큰 남자를 보았다던가, 뭐 그런 것이었는데.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신체적 특징을 증언할 만한 것은 없었네. 담당자들은 최면술, 거짓말 탐지기 등 우리나 런던 경시청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사용해 보았지만 진전이 없었네.] [조금 전에 북아메리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지금 그것을 말하려던 참이었네. 최근 세 건의 살인 사건은 뉴욕 시내 또는 근교에서 일어났지. 우리가 이 사건을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야. 우리들이 뭔가 허점을 보인다면 틀림없이 12 월 5 일 또 한 명의 여자가 살해당하게 되네.] [용의자도 없습니까? ] [한 사람도 없어. 그러나 범인에 관해서 몇 가지 판명된 게 있어. 어쩌면 12 월 5 일이라는 날짜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부하들에게 50 년간에 걸쳐 매년 12 월 5 일을 체크하라고 지시했었네.] 웨이드는 책상 서랍에서 녹색 파일을 꺼냈다. [그 결과 뜻밖에 주목을 끌 만한 것이 있었다네. 이걸 읽어 보게나.] 그는 파일을 로긴스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또 경찰서 내 수사 연구소 심리학 전문가에게 이 사건에 대한 조언을 구했었다네. 한 가지 묻겠는데, 자네 혹시 <연례 흥분성 정신분열증>이라는 것 들어 본 적 있나?] [아뇨.] [앞으로는 자주 듣게 될 걸세. 나는 그걸 <캘린더 분열증>이라고 부른다네. 전부 그 파일 안에 기록되어 있으니 잘 읽고 나서 나중에 느낀 점을 들려 주게.] 로긴스는 사무실을 나갔다. 웨이드는 앞쪽을 응시했다. 또 한 명이 이 사건에 투입된 것이다. 로긴스가 아무리 유능하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선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예상되는 사건 동기나 다음에 일어날 사건 일자, 희생자의 신체적 특징 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자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경찰 생활을 시작한 이래 최고로 울화통 터지는 일이었다. 사만다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것은 매우 심각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마티의 과거를 알기 위해 걸었던 전화 명세가 전부 청구서에 기재된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전화 요금 청구서는 토요일에 배달되었다. 로비로 우편물을 가지러 간 것은 마티였다. 그는 즉석에서 전화 요금 청구서를 보았다. 노스웨스턴, 엘크하트, 워싱턴으로 전화. 도대체 사만다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 그런 곳에 전화를 했지? 마치 그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도 되는 듯이 마티는 청구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만다는 뭔가 눈치채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여자가 바람이 난 걸까? 이들 전화 내용에 대해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어 보는 그 자체가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전화 요금 청구서를 분실한 것처럼 모른 척하고 사만다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요금을


지불해 버렸다. 그러나 마티는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콘트롤해 왔으면 과거가 폭로될 위험을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만다가 이렇게 전화를 걸고 있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올해는 특히 중요한 해인데 불길한 예감마저 엄습해 왔다. 다음 월요일, 그는 월 가(街)로 볼일을 보러 갔다. 가는 곳은 증권회사도 은행도 아닌, 맨해튼에서 제일 큰 그리팅 카드 전문점이었다. 그 가게는 월 가에서 유명했다. 빈틈없는 주인은 금융가의 간부들이 고객이나 앞으로 고객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카드를 보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기념일이나 생일만 되면 앞다투어 카드를 보내기 때문에 상점은 일년 내내 문전 성시를 이뤘다. 주인은 엄청난 수입으로 코네티컷의 그리니치에 살고 있었다. 마티는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스무 살 가량의 여점원을 보고는, 이 여자라면 재고품에 대해 무엇이든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뭘 찾고 계신지요?] 그녀가 물었다. [예, 특별한 손님에게 보낼 카드가 필요합니다만, 좀 특별난......] [네, 적당한 게 있을 거예요.] 마티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목록표를 꺼냈다. [사내아이에게 줄 생일 카드가 필요한데, 말 그림이 있는 걸로.] [말 그림이라면 많이 있어요.] [갈색 말이면 좋겠어요.]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네, 있습니다]라고 아주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요트 그림이 있는 기념 카드도 필요하고.] [특별히 무슨 기념이라든가, 그런 것은 아닌가요?] [아니, 일반적인 것이면 돼요.] [그럼 됐어요. 요트는 늘 인기가 있으니까요. 마침 지금 요트 천으로 만들어진 카드가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3 달러입니다.] [보통 것이면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요셉과 마리아가 기도하고 있는 그림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또 은퇴하는 사람에게 보낼 카드인데 농부 모습이 있는 그림으로.] 여자는 갑자기 손놀림을 멈췄다. [농부 그림이라고 하셨습니까? 요즘엔 농부 그림이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꽃 그림은 어떨까요?] [안돼요.] 너무 무뚝뚝했다고 마티는 후회했다. [꽃 그림도 나쁘지는 않지만, 은퇴하는 내 친구가 얼마 전에 농장을 샀기 때문에 그 친구한테 보낼 걸로 필요한데......] [소가 풀을 뜯고 있는 풍경화 그림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좋을까요? 의식용으로 충분하겠지? 네드 아저씨는


만족하실까? ......그럼 그걸로 합시다.] 그는 목록표를 보고 여섯 종류의 카드를 주문했다. 한 가게에서 이렇게 만족스럽게 일을 끝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와 확실하게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카드 한 장 한 장에 [프랭키로부터. 사랑을 보내며......]라고 쓰고 봉투에 넣었다. 한 통은 집과 그레타 카먼에게, 또 한 장은 프레드 숙부와 밀 숙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도 친척들과 친구들의 이름을 썼다. 봉투에 수신자 주소는 썼지만 주 이름과 우편 번호를 쓰지 않았다. 수취인 또는 발신인 불명으로 결국 폐기 처분될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의식이며, 의식을 행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다음날 그는 택시를 타고 브로드웨이 116 번가의 컬럼비아 대학으로 갔다. 이것은 의식이 아니었다. 실생활이었다. 거기라면 사람 눈에 뜨일 염려가 조금도 없었다. 미드타운 주민 누구 한 사람도 이 컬럼비아 대학에 올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는 안심하고 잡다한 인종이 뒤섞여 있는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브로드웨이를 지나 여행 대리점인 레이디어스로 향했다. 레이디어스는 카메라 가게와 함께 낡은 벽돌 건물 2 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스페인, 모로코, 브라질, 페루 등의 할인 패키지가 항공사 이름 별로 창문에 붙어 있었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웨스트사이드 사람들이 어떤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있었다. 마약에 중독된 패잔병 같은 군중의 무리를 뚫고 그는 나무 계단을 2 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이 부근에선 어느 집이나 자물쇠를 이중으로 잠가 놓는 것이 보통인데, 그와는 달리 레이더스 사무실은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행 대리점 그대로였다. 서류와 시간표, 전보, 편지, 기타 우편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상이 몇 줄로 놓여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여행 예약을 맡고 있는 앤 셔먼이 마티를 보았다. 앤 셔먼은 컬럼비아 대학 졸업생으로 대학에서 중국사를 전공했고 키가 큰 편이었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실 겁니까?] 자기 책상 쪽으로 안내하면서 그녀가 물었다. [네......] 마티가 대답했다. 관리직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 근처에 오면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냥 잠깐 여행이나 떠나려는 평범한 남자로 보이는 것이 좋다. [로마행 비행기표가 필요한데요.] 마티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티가 손님용 의자에 앉자 앤이 대답했다. 그녀는 국제선 항공 회사의 시간표가 철해져 있는 두꺼운 파일을 꺼내 로마행 시간표를 찾았다. [왕복입니까?] [네.]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편도는 의심받을 위험이 있었다. [한 분이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한 에정입니까?] [12 월 6 일 아침.] 날짜를 말하는 순간 마티는 전신에 오싹할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꼭 아침이어야 합니까?] 앤이 물었다. [스케줄이 짜여 있어서......]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12 월 18 일.] [성탄절까지 안 계시다니 유감이군요. 로마의 성탄절은 정말 성대하니까요.] [알고 있소.] [돌아오시는 날짜를 2,3 일만 늦추신다면 할인을 받으실 수가 있는데요.] [얼마나 싸죠?] [2 백 달러 정도요.] [그걸 몰랐군. 이곳의 중요한 상담을 2,3 일 연기하겠어요.] [알겠습니다. 물론 논스톱이겠지요?] [물론.] [아침 9 시 출발. 오후 11 시 반 로마 도착 이탈리아 편이 있습니다만......] [됐어요. 그것으로 부탁합니다.] [호텔은 예약하셨습니까?] [그건 필요 없습니다. 개인적인 여행이니까.] [알겠습니다. 돌아오는 편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녀는 돌아오는 적당한 편을 알아본 뒤 예약 신청서에 기입하기 시작했다. [성함을 알려 주세요.] [스틸. 엘리엇 스틸.] 마티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여권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금고 안에는 엘리엇 스틸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완벽한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18 년 전 그가 마틴 에버릿 쇼라는 인물이 될 때 필요했던 모든 서류를 만들어 준 샌프란시스코의 위조 전문가의 작품이었다. 연락처로 그는 전화 서비스 번호를 앤에게 알려 줬다. 오직 12 월을 위해 스틸 명의로 전화 서비스를 계약해 둔 것이었다. 사만다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티의 과거를 알아내기 위해 다음에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거실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으나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순간, 호흡이 곤란해졌다. 사만다는 숨을 몰아쉬면서 자기가 공포에 떨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린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린, 나야. 질식할 것 같아......] 말을 마치자마자 사만다는 그대로 쓰러졌다. 관린인이 문을 열어 린이 방으로 들어갔을 때는 정확히 6 분이 지난 후였다. 사만다는 의식만 잃었을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12 분 후 앰뷸런스가 달려와 아파트 앞에 섰다. 의사와 간호원이


왕진 가방과 산소통 그리고 가구 상자를 들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간호원이 사무적으로 린에게 물었다. 린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곧바로 대답해 줬다. [질식해 있었어요.] 사만다의 안색은 양호한 편이었고 호흡도 비교적 정상이었다. 질식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의사가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진찰을 시작했다. [혹시 심장병을 앓은 적이 있습니까?] 의사가 린에게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저는 친구예요.] 각성제를 먹이고 마사지를 한 덕분에 사만다는 의식을 찾았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고는 린에게 눈길을 맞추고 말했다. [린, 미안해.] [무슨 소리야, 이만하길 천만 다행이지.] [아마 호흡 곤란이 좀 있었던가 봐.] 그녀는 본능적으로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오직......] [병원으로 가야지.] 린이 말했다. [아니야.] 사만다는 거절했다. 린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병원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마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마티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병원에 가게 되면 자연히 아이에 대해 알려 줄 수밖에 없게 된다. [내멋대로 상상하고 견딜 수 없어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머 의사에게 진찰받으러 가는 것만은 동의했다. 프로머는 쾌히 진찰해 주겠다고 했다. 진찰을 마치고 나서 그는 사만다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했던 린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사만다를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의학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임신 합병증도 보이지 않고.] 사만다의 얼굴은 안도감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뭔가 실신할 만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사만다는 단언했다. [그럼 폭음이라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술 못하는 것은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 밖에 다른 일은?] [전혀 없어요.] [확실하겠지요.] 프로머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때라면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이전에


부인께서 여기 왔을 때 스트레스를 받은 것처럼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게 더 심해진 것 같군요.] 사만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모두 말해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비밀이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아기 때문일 거예요.] 사만다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어리석게도 괜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알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개인적인 문제가 있으면 전문 카운셀러와 상담하십시오.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아기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점만은 분명합니다.] 사만다는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이 위기가 자신만이 아닌 또 다른 누구의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아이를 정말 원하고 있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이건 정말 끔찍한 사건이군요.] 캘린더 분열증 살인범에 관한 자료를 한아름 안고 크로스 웨이드의 방으로 들어오면서 로긴스가 말했다. [그렇다네.] 웨이드가 대꾸했다. [게다가 새로운 정보는 아무것도 없어.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아서?] [없습니다. 사건이 산발적이에요. 뭔가 단서를 잡으려면 과거의 살인 사건을 1 차 자료로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물론이네.] [그것도 큰 도움은 안될 겁니다.] [실은 작전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생각중이었다네. 나는 지금까지 무슨 사건이든 공개 수사를 되도록 피했었네. 괜히 큰 소동만 일어날 뿐이지 소득은 별로 없고, 나중엔 사건 자체보다 그런 소동에 말려드는 것이 아주 지긋지긋해져. 그러나 갈색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들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해둔다면 살인범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지 않겠나. 물론 그런 여자들이 몇천 명은 되겠지. 여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누군가가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말일세.] 로긴스는 어깨를 움칫했다. 썩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기능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이 또 한번 성공한다면 이쪽은 완전히 바보가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범인은 계속해서 범행을 저지르게 되고...... 공개 수사는 그야말로 도박이야.] 크로스 웨이드는 로긴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안되겠어. 공개 수사는 일단 보류하는 게 좋겠어.] 그는 결론을 내렸다. 12 월 5 일은 앞으로 17 일 후였다. 실신 소동 이후 하루가 지났다. 사만다는 고통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마티의 과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이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이 달리 없었다. 배 속의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지도 몰랐다. 마티에게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면? 자기 남편이 누구고 그 내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분만실로 옮겨진다면? 만약 진상이 밝혀져 아이에게 비극적인 충격을 안겨 준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사만다는 마티와 사교적으로 알고 지내는 친구 몇을 찾아가 문제의 일부만을 밝히고 마티의 과거에 대해 한두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을 질문했다. 모두들 하나같이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마티가 과거에 관해 이야기한 것을 사만다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남의 집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톰 에드워즈를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는 전에도 전화를 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내색하지 않고 애매하게 말했었다. 이제 와서 톰에게 이런 상황을 밝힌다는 것이 어쩐지 망설여졌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를 갖고 톰을 찾는 것이 그와 마티와의 깊은 우정에 상처를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힘이 될 만한 사람은 역시 톰밖에 없었다. 마티가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톰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사만다는 톰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약속을 하면서 마티에 관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 혹시 건강이 안 좋은 것 아닙니까?] 톰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사만다가 대답했다. 되도록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톰을 동요시켜 마음의 준비를 시켜 두는 것이다. 두 사람은 톰의 사무실 근처 작은 중국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톰이 지배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붐비는 홀에서 떨어진 조용한 방을 예약해 두었다. 톰은 사만다를 보고 한눈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늘 그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밝은 분위기가 긴장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뭔가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사만다에게 마실 것을 권하지도 않고 사교적인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샘, 무슨 일입니까? 탁 터놓고 얘기해 봐요.] 그가 말했다. [알 수 없어요.] 아직 코트도 벗지 않고 그녀가 대답했다. [마티가 죽기라도 했습니까?] [아까 병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사만다는 망설였다. 그녀는 한참 말을 끊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병도 특별한 병이에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겠어요?] [예, 좋습니다.] 그는 주문을 받으려고 서 있는 웨이터를 손짓으로 내보냈다. [마티는 어느 대학에 다녔나요?]


놀리는 게 아닌가 하고 톰은 사만다를 쳐다보았다. [노스웨스턴이죠. 샘도 알고 있을 텐데요.] [그래요.] [다음 질문은?] [그럼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죠?] 톰은 예의 그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엘크하트지요. 인디애나에 있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나요?] [어떻게 알았다니요?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톰, 말해 주세요.] [마티에게 직접 들었지요.] [국민 학교는?] [역시 엘크하트였어요.] [군대는 어디 있었죠?] [육군.] [그것은 틀림없나요?] [물론이죠, 샘은 얼마 전 전화로 마티의 옛 친구들에 관해서 묻던 것과 관계 있습니까?] [톰, 정말 틀림없나요?] [그래요.] [어떻게 알았나요?] [마찬가지로 마티에게 직접 들었지요.] [톰, 마티의 과거에 대해 뭔가 직접 알고 있는 것은 없나요?] [직접?] [그이한테서 들은 것말고요.] [없어요.] [그렇군요.] [사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이유를 말해 줘요.] 사만다는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엿듣고 있지 않나 어두운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톰, 파티 때문에 옛날 친구들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노스웨스턴 대학, 엘크하트, 육군에 전화를 했지요.]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무엇 하나 진짜인 게 없었어요. 톰, 마티는 노스웨스턴이나 엘크하트를 다니지 않았어요.] 톰은 소스라치게 놀라 거의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계속해요.] [몇 번이나 확인해 봤어요. 마틴 쇼라는 사람이 육군에 복무했지만 그는 전사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 채 톰은 사만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거의 그 말뿐이었다. [저도 그래요. 마티의 졸업 증서를 확인해 본 결과 그것도 역시 가짜였어요.] 마침내 톰도 긴장이 되는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요리를 주문하죠.]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그가 말했다. 두 사람은 간단한 요리를 주문했다. 웨이터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고조된 기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잠시 후 톰은 문제의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만다, 당신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예를 들면?] [어쩌면 마티의 졸업 증서는 복사한 것인지도 몰라요. 원래 것을 분실하고 복사된 것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톰, 마티의 기록은 없었어요. 노스웨스턴에도 엘크하트에도...... 기념 사진도 한 장 없었어요. 마티에게는 마치 과거가 없는 것 같았어요.] [샘,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까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 같군요.] [영화라도 이만은 못할 거예요.] [전부 조사해 보셨습니까?] [네, 모두......] 톰은 드디어 사만다가 하는 이야기를 수긍하기 시작했다. [잘 알겠어요. 아까 마티가 병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마음의 병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군요.] [네.] 사만다는 조용히 대답했다. 오랫도안 기분나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뭔가 알고 있군요?] 톰에게 대답을 기대하면서 필사적으로 사만다가 말했다. [아뇨,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가 웃는 것은 단지 이 일이 언젠가 모두 해결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샘, 마티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어느 누구보다도 정직하지요.] [만약 마티가 그의 과거를 거짓으로 꾸며서 말했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마티는 임신할 사실과, 그 때문에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마티에게 얽힌 의혹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톰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임신한 사실은 아직 마티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걸 다른 남자에게 먼저 알릴 수는 없었다. [톰, 경찰 관계로 마티가 얘기한 적은 없었나요?] [왜요? 그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제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점이에요.]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티에게 전과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마티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무도 모르니까...... 어쩌면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지요...... 아시겠지만 그가 젊었을 때는......] [마음만 먹으면 알 수는 있어요, FBI 를 찾아가면.] [잠깐, 만일 마티가 무슨 나쁜 일을 한 적이 있다면 이름을 바꾸지 않았겠어요?] [그렇겠지요.] 그라임스 변호사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병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마티가 건망증 같은 것, 즉 일종의 심리적인 질병에 걸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확인해 주세요.]


[제가요?] [변호사도 만나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요.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마티의 눈에는 애원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마티와 직접 얘기해 보지는 않았지요?] [네.] [당신은 아직도 마티를 사랑하지요?] [물론이에요.] [비록 마티의 과거에 유쾌하지 못한 일이 있어도 그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자신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든가, 마티에게 솔직히 물어 보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마침 주문한 음식이 왔기 때문에 톰은 잠시 말을 끊었다. 사만다는 별로 식욕이 없었다. [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모르겠어요.] 톰이 수프를 뜨면서 대답했다. [저는 결혼도 안했고, 여자도 아니고...... 그러나......] 그는망설였다. 그는 확고한 태도를 결정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제발 좋은 방법을 알려 주세요.] 그녀는 간청하다시피 했다. [제 생각으로는, 정면 대결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잘못하면 결혼 생활마저 깨어질 우려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로서는 알아 두어야 할 일이 아니겠어요?] 톰은 그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마티와 제일 친한 친구에게서도 사만다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의 조언은 이론적으로 타당해 보였지만 문제의 해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어떤 의미로는 다른 몇 명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톰도 마티를 감싸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어쩌면 그는 아내라는 입장에서 남편의 과거 따위를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내가 알아서는 안도리 것들이 분명히 있을지도 몰라. 나에게도 마티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나 알게 되면 곤란한 일이 있지 않을까? 아버지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다고 곧잘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녀는 한번 더 다짐해두고 싶었다. [톰, 당신에게 확인해 줄 수 있냐고 묻고 있어요. [샘, 저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의 과거를 어떤 식으로 파헤쳐야 할지.] 물론 그가 말한 대로였다. 그라임스 변호사의 말처럼 이것은 사설탐정에게 의뢰해야 할 문제였다. 사만다는 자신이 좀 경솔하지 않았나 후회했다. 그녀의 생각이 부족했던 것이다. 톰은 마티에 대해 그녀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이번 일로 마티에


대한 그의 태도가 바뀔 것은 분명했다. 나에 대한 태도도 바뀌겠지. 오늘 일은 톰에게 나에 대한 평가를 하락시켰을 뿐이다. 결국 톰은 마티의 과거를 파헤쳐 줄 것을, 그것도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을 제외하면 톰과의 점심 약속에서 얻은 성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만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친구들이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기대 이상의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다시 마티의 친구 두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전제와 함께 하나하나 문제를 설명했다. 그들은 아주 협조적이고 동정적이긴 했지만 이렇다 할 만한 정보는 하나도 제공해 주지 못했다. 그들의 대답은 지금까지 사만다가 계속 들어 왔던 패턴의 반복이었다. 만일 마티가 정말 그렇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느니, 어쩌면 정부 당국의 일에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느니. 게다가 그가 그렇게 좋은 남편이라면 부인으로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만다는 다시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12 월 5 일은 13 일 후로 다가왔다. 마티는 걱정이 되었다. 계획은 확실했다.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그러나 그 전화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만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고 있을까? 그렇다면 혹시 무엇을 알아내기라도 했을까? 배달부가 봉인을 한 편지를 들고 온 것은 오후 4 시였다. 그는 봉투를 보고 누가 보낸 것인지 알고 깜짝 놀랐다. 곧 문을 닫고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고는 손으로 쓴 그 편지를 읽었다. 그가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라 예감한 일에 대한 편지였다. 편지지에는 급히 휘갈겨 쓴 인쇄체의 경고가 보였다. 부인은 당신의 과거가 없는 것을 알고 있음. 그는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5 마티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만다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를 것이다. 알 리가 없었다. 눈치챌 수가 없을 테니까. 어쨌든 몇 가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아름답게 설계된 계획, 이 완벽한 의식 행위를 망칠 수는 없었다. 방금 배달된 편지로 확인된 그의 의문은 강철처럼 단단한 결의로 변했다. 그 정도 일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12 월 5 일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닭고기 요리는 처음인걸. 역시 당신이야.


요리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단 말이야.] 그날 밤 마티는 사만다를 한껏 추켜세웠다. 마티가 이렇게 들떠 보이기는 지난번 모형 기차 일이 있고 처음이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피곤한 표정도 아니었다. [파티 요리는 제가 일일이 감독할 생각이에요.] 사만다가 말했다. [안돼. 주방에서는 최고의 요리사일지 모르지만, 당신은 어디까지나 내 파티의 주빈이야. 주빈이면 주빈답게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곤란해.] [마티, 저는 감독을 한다고 했어요. 손가락 하나 안 댈 거예요.] [당신이 어떤 여자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 요리는 전문가들에게 맡겨 둬.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닐 텐데.] [실망했어요.] 마티는 웃었다. [좋아, 실컷 감독하라구. 그러나 가끔씩 나와서 손님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 돼.] [알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만다를 매료시켰던 그 이지적이고 위엄있는 얼굴로 마티는 미소지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 미소가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수많은 의혹이 가슴 속에 엉겨 있었다. 어떻게 확인하면 좋을까? [파티 준비는 이제 거의 끝냈어요. 나중에 케이크를 고르고 꽃만 준비하면 돼요. 꽃으로 장식을 해도 괜찮겠지요?] [괜찮고말고. 그런 건 왜 묻지?] [왜라니요? 남자들 중에는......] [나는 꽃을 무척 좋아해. 좀 센티멘털하다고 할까?] 사만다는 갑자기 웬 센티멘털 타령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파티 참석 여부를 알리는 회답이 오늘 왔는데 보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 [폴, 키스 해리스, 프레드와 매리언, 세이모어 로즈, 모두 온대요. 프레드의 메모를 읽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그리고 NBC 의 행크 버넘은 참석하지 못한대요.] [그거 유감이군. 행크는 좋은 친구인데. 같은 시기에 포트포크에서 근무했었지...... 그런데 서로 모르고 있었다.] 사만다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축구 시합 취재 때문에 인디애나에 가야 한대요.] 그녀가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슈퍼 볼 기념품을 당신에게 보내 준다고 했었는데.] 마티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했지?] [아무 말도 안했어요. 비밀이에요.] [그 친구는 멋있는 놈이야.] 그는 손목시계를 봤다. [영화 구경이나 갈까?]


[오늘 밤에요?] [미리 몇 개월 전부터 약속을 해두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할 수 없지만.] 사만다는 그러 기분이 아니었다. 머리가 너무나 혼란스러워 농담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음에 가기로 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몸이 안 좋은 건가?] 마티가 말했다. 사만다는 그의 얼굴에서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조금 피곤해요.] [다행이군. 그냥 생각나서 한번 해본 소리니까 신경쓰지 마.] 그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만다의 등뒤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요 몇 개월 동안 해주지 않던 일이었지만 사만다는 마티의 이런 행동을 무척 좋아했다. 과거 몇 년간 그는 다른 여자에게도 그렇게 했었다. [당신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당신은 알고 있어?] 그가 물었다. [예, 알아요. 그러나 한번 더 말씀해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좋아, 어디부터 시작할까?] 마티는 머리를 매만졌다.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배우인가 하고 그가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가 과거를 속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대화는 끊어지지도 머뭇거려지지도 않았다. 도대체 이 여자는 머리 속에서 뭘 생각하고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자신의 의혹을 숨길 수 있을까? 묘하게도 마티는 그런 사만다에게 일찍이 느끼지 못했던 감명을 받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를 인간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답하지 않으면 안될 질문이 던져졌고 연기를 끝내야 할 장면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멋지게 처리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래, 당신이 특별한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 나에겐 사랑스럽기 때문이야.] 마티가 말했다. [좋아요. 그리고는......] 사만다는 마티의 말에 적당히 응수했다. [아름답기 때문이지.] [계속하세요.] [그 다음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군.] [결국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요?]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하지. 정절을 중히 여기고, 친절하고, 신앙심이 두텁고......] [알았어요. 그만하면 됐어요.] 사만다가 마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자연스럽게 질문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마티, 포트포크에서는 뭘 하셨어요?] 마티는 긴장했지만 사만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영웅이었지.]


[설마.] [아니야, 정말이야. 비밀 작전을 보기좋게 성공시켰지. 그래서 표창도 받았는걸.] [마티......] [알았어. 솔직히 말하지.] 그는 사만다의 머리 만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사실은 행정반원이었어. 사고난 차량에 대한 보고서를 타이핑하는 일이었지.] 그는 웃었다. [이런 일로 내 주가가 하락하는 것은 아니겠지?] [천만의 말씀, 당신에게 장군을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들은 별 의미없는 대화를 몇 분 계속했다. 이윽고 마티가 손목시계를 봤다. [영화관에 가지 않을 거라면 잠깐 서류나 정리해 놓을까?] [그렇게 하세요.] 마티는 기장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고 말이 빨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그는 거의 매일 보는 [CBS 저녁 뉴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침실에 있는 책상에 앉아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뒤적이는 척했다.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그의 비뚤어진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단어들이었다. [프랭키는 착한 아이야, 그 애는 오래 기다렸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그래 봤자 어린애란 말이에요! 어린애가 그렇게 기다릴 리가 없다구요!] [프링캐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 아이를 기쁘계? 내겐 어떻게 해줄 수 있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언제요? 어제? 아니면 오늘 아침?] 아,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마티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의 광경은 아직도 그의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그는 또 하나의 특별한 날을 맞게 될 것이다. 그날은 추억이 고귀한 행위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는 손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기억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묘한 형태로 가구가 배치되어 있고, 이상한 액자가 걸려 있는 실내를 둘러보는 사이에 그것은 점점 강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랭키는 이것을 좋아했지.] 그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마티는 아예 시간을 잊고 있었다. 사만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중요한 문제라도 있어요?] [음......] 마티는 전혀 대답할 마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시간째 이러고 계셔요.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마티는 어깨를 움칫했다. [아니야, 메모와 청구서 따위의 잡다한 서류뿐이야. 정리하기에 좋은 기회지. 별 문제는 없어.]


[정말이에요?] [물론.] 사만다는 기회만 있다면 이 서류더미를 샅샅이 살피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어쩌면 여기에 마티의 과거를 알 수 있는 열쇠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사업상 뭔가 실마리를 흘려 놓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너무나 위험 부담이 컸다. 나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임을 잊어서는 안돼. [안 주무실 거예요?] [아직......좀더 있다가. 괜찮겠지?] 그녀는 웃었다. [늘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 밤은 특별히 봐드리겠어요. 하지만 내일 밤에 오늘 몫까지 두 배로 받을 거예요.] [약속하지. 장비를 손질해서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두지.] 마티가 대답했다. [그것을 다른 곳에 써 버리면 안돼요.] 그녀가 윙크했다. 티없이 맑고 매력적인 눈빛이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 같은 마음이 아니란 것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봐도 공허하고 바보 같은 윙크였다. 그녀는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남자와 말장난을 즐기고 있었지만 상대인 마티 역시 그 마음속에는 해머와 체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마티다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혼자서 먼저 잠들었다. 마티는 잠들어 있는 마티를 지켜보았다. 이 여자의 생명도 앞으로 12 일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날 사만다는 경찰서에 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공포심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충분히 근거있는 일이었다.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고 호기심은 이미 공포로 변혀 있었다. 마티에게 뭔가 나쁜 일이 있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자기 눈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서에 가는 일로 남편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경찰서에 감으로써 그를 파멸에서 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잡음을 피하기 위해 톰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에게 알릴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처음에는 집 가까이 있는 경찰서에 가려고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근처 경찰서는 아는 얼굴이 너무 많다. 경찰서로 들어가거나 나올 때 이웃 사람이 자신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경찰서에 가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는 싫었다. 그녀는 택시를 탔다. 맨해튼에 있는 경찰 본부는 현대적인 고층 빌딩이었다. 그곳에 실종자의 수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었다. 경찰서 광장에는 경찰차가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ㅜ자 그대로 푸른 제복의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 광경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겁을 먹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경직된 분위기였다. 적대감이 가득 찬 요시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경관들은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바쁘게 왔다갔다할


뿐, 대개는 긴장이 풀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몇 명밖에 볼 수 없는 맨해튼 경찰서와는 또 다른 광경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인?] 정면 현관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경찰이 물었다. 사만다는 그의 태도에 호감이 갔다. 본부라고 하는 곳은 언제나 최고의 엘리트만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다. [실종자 신고를 하고 싶습니다만.] [어린아이가 실종되었습니까?] [아니, 어른입니다.] [알겠습니다. 행방 불명된 것은 확실합니까?] [네, 얘기가 좀 복잡합니다만, 행방 불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지도 모르고요.] [저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지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4 층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십시오. 418 호실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만다는 몇 명의 건장한 경관과 수갑을 찬 범인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4 층에서 내려 칠이 벗겨진 금색 글씨로 [실종계]라고 씌어있는 418 호 쪽으로 갔다. 어쩐지 칠이 벗겨진 글씨와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주위의 현대적 감각을 살린 건물들이 오히려 그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경찰 직원 조합의 선전 포스터가 아닌 [지명 수배자]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고 여과기를 통해 공기를 정화시키지 않아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더구나 전동 타자기라든가 컴퓨터 같은 첨단 장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만다가 기대했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거기서 또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 쭉 무미건조한 대합실의 차가운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거의 가 여자라는 사실에 사만다는 깜짝 놀랐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일까? 여자들이 실종 신고를 내는 데 더 적극적이란 말인가? 이 사람들 모두 행방 불명된 어린이의 수사를 의뢰하러 온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만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마티가 있는 것일까? 가끔 닫힌 문 안쪽의 면접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만에 한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나오더니 부리나케 달아났다. 뭔가 나쁜 소식을 들은 것일까? 마침내 사만다는 대합실 테이블의 여순경에게 갔다. 젊고 날씬한 흑인 여자였는데 그녀는 예의바르게 사만다를 맞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사만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여순경이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다만 좀......] 사만다는 이런 것을 모르면 괜히 웃음거리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사만다는 결심한 듯 말했다. [어느 정도나 해결이 되는지 그게 좀 궁금해서요.]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순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어째서지요?] [그것은 담당관에게 물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는 잘 모르니까요.] 여순경이 말했다. 세부적인 사항이라니, 무엇이 세부적이란 말인가? 여기에도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관료적인 한계에 사만다는 초조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도 지금처럼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면 더욱 그렇다. 그녀는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키가 호리호리한 중년의 형사 부장이 면회실에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는 작은 핑크빛 카드를 보면서 사만다의 이름을 불렀다. [쇼 부인?] [네.] 사만다는 앉은 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공포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상대는 법을 집행하는 경찰관이다. 권총과 경찰봉과, 형무소로 보낼 수 있는 권한까지도 갖고 있는 남자였다.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부장은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사만다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고 그때 비로소 그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좀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찰리 창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녀가 동양인 경관과 관련지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고, 그것만이 유일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사만다는 방음용 판넬을 사용해 만든 몇 개의 작은 방을 지나 비교적 큰 사무실로 들어갔다. 검은색 명찰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영 형사 부장이었다. 양 형사 부장은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이번 의자는 쿠션이 있는 손님용 의자였다. [부인께서 살고 계시는 경찰서에도 실종계가 있을 텐데요.] [사실은......] [그곳엔 가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군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사만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저희 어머니는 미국인이지요.] 그가 설명했다. 그는 방문객 모두에게 그렇게 말했다. [눈은 아버지를 닮았어요. 대만 출신이었죠.] 양은 살짝 웃었다. 사만다는 그에게 호감이 갔다. [저는 동양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사만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무척 좋은 곳도 있다는 소리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만, 만약 가게 디면 친척들도 만나야 하고...... 그런 일이 어떤 것인지 아시겠지요?] 그는 사만다가 조금 전에 기입한 카드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환상의 과거로군요.]


[네.] [몇 명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셨군요?] [네, 여기 오기 전에 가능한 한 알아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저희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사만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은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핑크빛 카드를 책상 위에 놓고 언제나 결정되어 있는 해답을 전해 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얘기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씀해 두겠습니다만, 우선 우리들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납치나 유괴가 아닌 이상 실종자들 거의가 스스로 원해서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단순히 생활을 바꾸려는 결심 하나만으로 종적을 감추어 버리죠. 특히 결혼한 남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도 있겠지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만족한다 할지라도 정신적으론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나날이 계속되어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극도의 정신적인 압박을 견딜 수 없을 테고 쌓이는 청구서가 보기 싫겠지요. 그러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겁니다. 역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지요?] [네.] [언제나 기차역이지요. 대개가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만다는 자기가 얼마나 세상을 모르고 살아 왔는가를 개달았다.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실종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만다는 양 형사 부장에게 말했다. 양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 남편이든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댁의 남편은 실종된 것이 아니군요. 부인께서 걱정하고 계시는 것은 남편이 어디에서 실종되어 부인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거지요?]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일 댁의 냠편께서 어디선가 실종되어 왔다면, 자발적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자발적이 아니라면 정신적 장애의 결과로서 심리적 반응을 불러일으키 그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했을 겁니다. 자발적ㅇ라면 일상생활에 싫증이 났거나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행위 중 어느 한쪽입니다. 그것은 범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스캔들일지도 모르고, 어떤 오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또한 사업상 실패로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남편께서 부인이 알지 못하는 이름을 말한 적이 있습니까?]


[사업상 관계되는 이름뿐이에요. 그것도 그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었지요.] [잠꼬대를 합니까?] [아뇨.] [자기의 과거에 대해 고민했던 일은? 어떤 말을 하고 그것을 정정한 일은 없습니까?] [아뇨,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과거라면...... 본인이 자신의 과거라고 하는 것을...... 늘 이야기해 주곤 하지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중서부로의 여행 계획에도 찬성할 정도입니다.] [그것 참 흥미로운 일이군요.] 양은 여행이라는 단어를 메모하고 있었다. [행방 불명되는 사람은 대개 그런 경우가 드뭅니다. 하기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남편께서는 이미 방문지를 훤히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살았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남편께서는 어디 출신이라고 하시던가요?] [인디애나의 엘크하트입니다.] [거기로 여행하실 겁니까?] [네.] [이유는요?] [제가 얘기를 꺼냈으니까요. 실은 시험삼아 말해 본 건데 기뻐하면서 그러자고 하더군요.] [네, 그랬었군요. 무엇을 생각하고 그랬는지 알 수 없군요.] [그이가 왜 가고 싶어했을까요?] [부인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과거를 부인에게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부인이 남편의 얘기를 믿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사만다는 지저분한 사무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말은 아무래도 억측 같아요.] [말씀대로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전기를 쓰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무것도 도와주시지 않을 작저인가요?] 사만다는 부장의 마음을 떠보았다. [제 아버니 나라의 속담입니다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겠지요?] [네, 들어 봤어요.] [결국 우리들은 여기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남편께서 누구이며 어디서 오셨는지 금방 알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문제점을 좁힐 수는 있습니다. 이미 몇 가지 가능성을 얘기했습니다.] [그라임스 변호사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만다는 변호사를 만났던 일을 부장에게 말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것은 판에 박은 이야기이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묻겠습니다만, 남편의 목소리를 녹음해 놓은 것이 있습니까?] [테이프 말씀입니까?] [네.]


[남편 책상을 뒤져 보면 있으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러시죠?] [사투리를 조사해 보면 남편의 출신지를 알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사투리를 판별하는 전문가가 있으니까요.] [찾아보겠어요.] 사만다가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남편께서는 약을 상용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아뇨.] [그거 유감이군요. 전에 어떤 사건은 처방전이 단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양은 계속 메모를 했다. 왼손잡이인 그의 필적은 아주 달필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해서......] 그가 말했다. [뭐든지 손으로 씁니다. 타자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나 획일적이라서.....]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사만다는 갑자기 친근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만난 몇 사람 가운데 양이 가장 인간적이었다. 그라임스나 레빈, 마티의 친구들, 톰 에드워즈마저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 양 부장에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사람이라면 이야기가 통하겠다 싶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말씀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저는 임신중입니다.] [그것 참 축하할 일이군요.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저는 아이를 원합니다. 저의 아이인 동시에 저희들의 아이니까요.] 그녀는 말을 끊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원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무슨 듯인지 아시겠지요?] [괜찮을 겁니다. 잘되리라 믿어요.] 양이 말했다. [양 부장님, 믿어주세요. 지금 제 뱃속에 있는 아기는 마티의 아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예, 충분히.] 사만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얼굴을 가리고 뛰쳐나가던 그 여자처럼 그런 추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양은 앉은 채 울고 있는 사만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바탕 우는 것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양은 알고 있었다. 의사가 매일 피를 보면서 살아가듯 그는 매일 눈물을 보면서 살아 왔다. 그것이 그의 일과의 일부였다. 그는 사만다가 자제력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그 사이 마티에 관한 메모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몰인정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는 계속 사만다의 표정을 살폈다.


[죄송합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만......] 양이 건네준 화장지를 받아 눈 언저리를 닦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쑥스럽군요.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여기서 우실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양이 말했다. 린이나 톰 앞에서도 울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 사무실에서도 그러지 않았는데 어처구니없이 여기서 울어 버리다니. [저는 마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울음을 삼키면서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쭉 그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모든 걸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남편은 생각했던 대로 멋진 기사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아이를 갖고 있지만 아이에게 뭐라고 해야 좋을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마티는 그때 그 자리에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양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 스스로 결심하게 하는 것이다. 적당한 때가 될 때까지는 말하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편이 좋다. [다른 곳에 혼처도 있었습니다.] 사만다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본론을 벗어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은 해외 특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사람과 결혼했다고 지금보다 꼭 행복하라는 법은 없겠지요. 저는 그때 마친 에버릿 쇼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아마 저 같은 바보도 없을 것입니다. 한번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자기 일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누구나 다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요. 부인께서도 그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양은 충고 반 위로 반으로 사만다에게 말했다. 사만다는 양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비슷한 얘기를 하고 계시군요.] [비슷한 게 아니라 꼭 같은 얘기입니다. 저는 부인만큼은 다른 사람과 같은 케이스로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실종되거나 어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지 않나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지금 부인 마음속에도 그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문제는 남편에게 있지 부인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좋지 않은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부인과 관계 없는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만다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이해와 동정으로 가득 찬 남자를 만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그 첫번째가 마티였다. [계속하실까요?] 양이 재촉했다. [네, 미안합니다. 쓸데없는 데다 시간을 허비했군요.] [천만에요. 그런 부분도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자, 그럼 아까 아기 이야기까지 했던가요?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네, 별 문제는 없습니다.] 사만다가 대답했다. [부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양의 눈빛은 너무나도 성실하고 사려 깊어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만다는 약속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약속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찮으시다면 금전적인 문제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만.] [네.] [세금 신고서를 확인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늘 마티가 하는 일이예요.해마다 제가 혹시 숫자가 틀리지 않았나 체크합니다.] [남편께서 부인이 체크한 금액대로 신고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없어요. 그이는 누구보다도 정직합니다.] [수입은 설명할 수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를테면 거액의 돈이 없어진 일은 없었나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사만다는 생각했다. [실제로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남편께서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고 있어 그 협박자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준다고 가정하면 그 숫자가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설마, 그런 일이.] 사만다가 중얼거렸다. [성급한 결론은 내리지 마십시오. 가능하다면 남편 몰래 장부를 보고 싶습니다만.] [구해 보겠습니다.] 상담은 거의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고, 양은 내내 예의바르게 질문했고 이렇다 할 주요성이 없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는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만다의 설명으로는 마티는 불유쾌한 과거에서 탈출하여 자기의 흔적을 없애고 가짜 신분을 만들어 새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주도 면밀한 남자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국 네트워크로 연결된 중앙 컴퓨터에 조회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사만다에게 말했다. [거기엔 수많은 행방 불명자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단지 스냅 사진에 불과하지만, 괜찮으시다면 그 중 일부라도 보셨으면 합니다.] [일부라니요?] [분류되어 있습니다. 남편과 나이가 비슷한 남자만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린이나 80 세 이상의 노인을 보셔야 소용없으니까요. 어떻습니까?] [뭐라도 해봐야지요.] 양은 사만다를 데리고 민원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 있는 사진 보관실로 갔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다시 친절하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마티를 만나기 이전의 사만다의 생활에는 빠져 있던 요소였지만 그 부드러움이 그녀는 반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팔을 얹고 있는 키 동양인 양 부장을 다른 경찰과늘이 흘끔흘끔 보고 있는 걸 알았다. 이런 것을 보아 양은 분명 정신과 의사나, 아니면 목사, 또는 사회 사업가가 되고도 남을 훌륭한 인물이라 여겨졌다. 사진 보관실에는 행방 불명자들의 사진이 정리되어 있는 철제 서류함과 사만다와 같이 사진을 열람하는 사람들을 위해 테이블과 의자가 적당히 배치되어 있었다. 양이 마티와 비슷한 연령층의 파일을 꺼내주자 사만다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사진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잘 기억해 두세요. 남편께서 변장을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굴 윤곽이나 피부에 난 기미 같은 것을 주의해서 봐주세요. 헤어 스타일이나 귀의 크기에도 주의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사만다는 짧게 대답했다. 비관적이긴 했지만 일단 그를 찾는 작업에 들어가자 정신이 좀 맑아지는 듯했다. 적어도 나는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들과 탁상 공론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을 들여 전문가들과 추상적인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사만다는 20x25 센티미터의 인화지에 인화된 방대한 사진을 보고 질려 버렸다. 그것은 거의가 전국 경찰에 협조를 얻어 복사해 온 것으로 행방 불명된 사람들의 가족 사진이었다. 어떤 것은 가엾게, 또 어떤 것은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남자들에게는 그래도 한때나마 행복했던 시절에 처자식과 함께 찍어 놓았던 사진일 것이다. 남자들은 거의 평범하게 보였고, 증발해 버릴 만한 문제에 휘말려들 것 같은 남자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양의 설명에 의하면 대부분은 쉽게 가족을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남자들 거의는 틀림없이 새로운 가정을 꾸몄을 것입니다.] 양이 설명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똑같은 짓을 몇 번씩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우리는 한 남자가 세 번이나 가정을 꾸몄다가 증발해 버린 사건을 취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행방 불명자도 있지 않겠어요?] [물론이지요. 많은 어린이들이 없어졌어요. 이것은 국가적인 치욕입니다. 때로는 어른들도 실종되는 경우가 있어요. 강도를 당한 경우지요. 강도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처치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머리를 다쳐 기억 장애를 일으킨 경우도 있습니다.] 양은 약속대로 마티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 몇 년 전쯤 촬영된 것 중에서 현재 마티의 나이와 비슷한 젊은 남자들의 사진도 보여 주었다. 사만다는 묵묵히 한 장씩 사진을 훑어 내려갔다. 잠시 후 다른 경찰관이 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20 대 초반의 신부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시기에 남편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파산] [채권자] [고리 대금업자]라는 단어가 섞인 대화 내용이 듸엄띄엄 사만다의 귀에 들어왔다. 어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금전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남자들은


대개 도망치는 것이다. 그쪽 얘기에 신경쓰다 보니 사진이 침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사만다가 찾고 있던 사진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많은 사진을 뒤적여 보았지만 마티와 닮은 사진은 없었던 것이다.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지독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사실을 아는 편이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 괴로움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마티의 사진이 나오기를, 또 한편으로는 마티의 사진이 없기를 바라며 사진더미로 눈을 돌렸다. 특히 젊은 남자의 사진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냐하면 혹시 마티가 젊었을 때 찍었던 사진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10 년에서 15 년 전에 찍은 사진도 살펴보았다. 그 무렵 마티는 20 대 후반,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무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시기인 것이다. 사만다는 친구들 집에서 마티가 친구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어색하고 당혹한 것처럼 보였었다. 그렇다. 한때 가정을 가졌던 이 남자들 속에 마티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첫째...... 바로 그 순간 다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큰 식당 앞에서 두 남자아이와 함께 진 바지와 스포츠 셔츠를 입고 있는 남자 사진이었다. 사만다는 그 사진을 들고 두세번 눈을 깜박거려 피로에 지친 눈을 크게 떴다. 마티는 전원 속에 있는 식당을 좋아했다.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시골의 한적한 식당을 여름 별장으로 갖고 싶어했다. 어쩌면 그는 오래 전부터 이런 식당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옛날에 그런 곳에서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속의 얼굴은 확실히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양이 그런 사만다의 반응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러나 양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쓸데없이 암시르 ㄹ주거나 유도 심문을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그 사진과 또 한 장의 사진이 한 세트로 되어 있었다. 다른 한 장은 야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어떤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또다시 사만다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억눌렀다. 마티일까? 사진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두 선명하지 않았다. 1970 년에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 그 체격, 그 어깨선, 그리고 식당. 사만다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양은 조심스럽게 선반 위에 있는 확대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사만다에게 건네주었다. 사만다는 확대경을 가지고 두번째 사진을 더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주먹은 쥔 양손, 꽉 다문 입술, 그녀는 갑자기 칼에 찔린 사람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옴을 느꼈다. [마티......] 사만다는 속삭였다. [마침내 찾았군요. 당신을......]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양이 사만다에게 말했다. 사만다가 그 사진을 발견하고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는데도 양은 시종 무표정이었다. 그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양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녀에게는 번민이 계속될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이 될 것이며, 그 발견은 결국 그녀의 결혼 생활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녀로 하여금 어떤 무모한 짓을 저지르게 할지도 모른다. 좋아서 흥분할 때가 아닌 것이다. 민원인 입장에서는 무턱대고 좋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는 발견해낸 사진이 불행의 씨앗이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양은 다시 파일이 꽂혀 있는 선반 쪽으로 가서 방금 사만다가 발견한 사진과 같은 번호의 보고서를 꺼냈다. 그는 보고서를 꺼내면서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사진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득한 채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손조차 떨고 있지 않았다. 쇼크의 반응이라는 것을 양은 알고 있었다. 분명히 사만다는 어린이와 여자, 특히 여자를 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부정할 수 없이 자기에게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을 그녀는 지금 첫대면한 것이다. 사만다는 분노를 느끼기보다 갑자기 머릿속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꼬리를 물고 그녀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 여자는? 이 아이들은? 아직 살아 있을까? 어쩌면 벌써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슨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었는지도 모른다. 화재였을까? 교통 사고였을까?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게 옳은 일일까? 그런 사진 때문에 마티가......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들이 모두 죽었기에 마티는 무서운 과거에서 벗어나려고 나를 만난 것이 옳은 일일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건 잔인하고 부도덕하고 불쾌한 짓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걸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사만다는 주저하지 않고 이들이 더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가족이기를, 마티의 마음속 깊숙이에 살면서 끝없는 번민의 원인이 된, 하지만 영원히 사라진 가족이기를 은근히 바랐다. 양은 [브래넌 케너스]라고 씌어 있는 노란색 홀더를 갖고 사만다에게 왔다. [남편께서 은행 업무에 관해 알고 계십니까?] 양이 물었다. 사만다는 고개를 저었다. [금전 관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만, 은행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구좌를 개설할 때 정도였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은행원이었습니다. 이 부인과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위스콘신의 그린베이에서 살았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그곳은 프로 축구 팀이 있는 곳입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티도 가끔 축구를 보기 때문에......] [보신다고요?] [하지만 다른 팀 시합도 봅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그 사람은 1969 년 육군 예비역 모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행방 불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경리 부대에 근무하였습니다.] 사만다는 실망했다.


[그렇다면 그분이 실종되었을 때 가족은 별일 없었다는 의미신가요?] [예, 아마 그럴 겁니다. 무슨 변화가 있었다는 증거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사만다는 조용히 말했다. 양은 사만다가 마침내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했다는 무서운 현실 세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의 중요한 임무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사소한 감정에까지 신경쓰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남편께서는 군대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까?] [군대에 관해서는 제가 잘 모르니까요. 하지만 경리 관계 일을 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다른 곳에 근무했다고 했지만 결국 거짓이었구요.] [한 번 더 사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마티가 틀림없습니까?] 사만다는 확대경을 사진 속의 얼굴에 촛점을 맞추고 다시 한번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틀림없이 마티예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가 잘라 말했다. [지금의 마티와 조금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만큼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겠지요.] 그 순간, 정확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 그녀를 움켜쥐고 압도하기 시작했다. [마티가 틀림없어요. 이 여자가 그의 부인이고, 이 애들이 그의 아이들이지요. 정말 그는 명배우예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세요? 저에게 단 한번도 배우로서 실수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훌륭했어요. 이 마티는! 저의 남편은 말입니다! 도대체 마티는 이 여자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해주었을까요? 또 저에게는!] [진정하세요.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양은 조용히 사만다를 진정시키려 했다. [증거요? 바로 제 이 두 눈이 증거예요.] 사만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점점 이성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억제할 수 없는 감정으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울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직 그것만은 억제하고 있었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는 극히 일부입니다.] 양이 말했다. [불완전한 것이지요. 지방의 작은 경찰서에 맡겨 두면 흔히 있는 일이지요. 물론 그는 무거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가족을 유기했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이 만약 당신의 남편 마티라면, 위스콘신에 고발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만다는 갑자기 그라임스 변호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이런 경우를 경고했던 것이다. 경찰에 가게 되면 마티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런 데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가 그런 짓을 했다면 법정 최고형을 받아 마땅하다. [이 인물에 관해서 더 자세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즉 이 사람이 마티가 틀림없다고 하는 완벽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증언을 포함해서.] 양은 사진철을 들고 사만다와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곧 컴퓨터를 이용해서 브래넌 케너스의 전과 사실을 조회했다. 전과 사실은 없었다. 그가 그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옆방에서는 영어와 스페인 어가 섞인 대화가 들려왔다. 행방 불명된 자기 아들을 찾아 달라는 얘기였다. 일을 하러 맨하튼에 있는 아파트를 나간 뒤 모습을 감춰 버렸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외아들이며, 5 년 전에 부인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아들이 자기에게 전부라는 것이었다. 사만다는 그 남자가 측은했다. 자기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식을 잃었다는 것은 범죄자를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것보다 얼마나 더 불행할까? 컴퓨터에 의한 조사는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났다. 양은 컴퓨터 조회를 일단 포기하고 직접 위스콘신 주의 그린베이 경찰서로 전화를 했다. 전하는 11 ㅜ도 안돼서 연결되었다. 담당 경찰관은 브래넌 케너스에 관한 낡은 파일을 찾아냈으나 그것 또한 불충분했다. 많은 부분이 분실되어 있었다. 대출되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반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몇 개 있긴 있었다. [그 사람 왼쪽 무릎에는 수술한 자국이 있습니다.] 담당 경찰관의 탁한 목소리를 듣고 양은 메모를 하며 사만다를 쳐다보았다. [남편의 왼쪽 무릎에 수술한 자국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것 없는데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브래넌이란 사람한테는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성형 수술을 받아 자국을 없앴는지도 모르지요.] 그린베이의 담당 경찰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철도에 흥미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남편께선 철도를 좋아하십니까?] 양이 사만다에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뛰어오를 뻔했다. 모형 기차! 그 바보스런 모형 기차놀이!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푹 빠졌어요.] 그 남자가 마티라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린베이에서 온 정보는 그 밖에도 몇 가지 더 있었지만 그저 평범한 남자들 이야기에 불과했다. 브래넌은 스포츠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었다. 육군에 2 년간 근무했으며 주로 유럽에서 복무했다. 주일이면 항상 교회에 나갔으며 가족들에게도 그것을 권했다. 병원 기록은 분실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서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만다에게 알려 줘야 할 정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1982 년에 추가로 파일에 기입된 정보였다. 통상 7 년이 경과하면 공식적으로 남편의 사망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 후에도 브래넌 부인은 아직까지 재혼하지 않음. 서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멀베리 드라이브 웨스트에 살고 있음. 두 아들 모두 장학금으로 대학에 재학중. 고소인은 남편의 소식에 관해 정보를 구하고 있으며, 당시 남편이 소속해 있던


침목 클럽은 유력한 정보 제공자에게 5 천 달러의 사례금을 걸고 있음. 양은 사만다에게 이 내용을 읽어 주었다.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겠지요?] 그가 말했다. [그녀에게 조회핼 볼 수밖에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뭔가 확실해지리라 믿습니다. 과연 그 사람이 마티인지 아닌지.] 사만다는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확실해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런데 그녀가 협조해 주리라 생각하세요?] [그녀 또한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까요.] 양이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브래넌 부인이라고 해야 할까? 쇼 부인이라고 할까요? 저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여자에게도 정보를 얻으려고 할까요?] 양은 분명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전처와 후처가 같은 목적으로 서로 만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그가 말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녀 입장이라면 누구든 협조해 줄 거라고 생각되네요. 단지 염려스러운 것은, 그녀가 자기 남편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선언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벌써 보험금을 탔을 것이고, 만약 마티가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 판명되면, 보험 회사에서는 그녀를 상대로 고소를 할 것입니다.] [회사측이 승소할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요. 저는 변호사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사진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실제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겠지요?] 사만다는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신중하게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녀가 말했다. 양이 다시 그린베이로 전화를 걸려는 순간, 사만다는 양이 들고 있는 수화기를 낚아챘다.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사만다는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바보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성급하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녀와 직접 통화하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 남편의 전 부인, 그리고 합법적인 부인 미세스 브래넌과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진심입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고는 스스로도 자신의 냉정함에


놀랐다. 만약 내 인생이 산산조각 난다 해도 그것을 당당히 주워 모으는 거야. 어머니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기분 나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요.] 양이 경고했다. [상관없습니다. 각오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뭔가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만다의 확고한 결심을 헤아린 양이 허락했다. [여기 사만다라는 부인이 브래넌 부인과 직접 통화하고 싶다고 합니다만, 브래넌 부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가 말했다. 저쪽 경찰관이 쉰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 참. 이런 일은 전대 미문의 사건이군요.] [본인의 희망에 따른 것입니다. 부탁합니다.] 양은 사만다를 대변해서 대답했다. [해보지요. 일단 끊고 여기서 다시 걸겠습니다.] 상대편이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양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잠시 기다려 봅시다. 무슨 연락이 오겠지요.] 1 층에서는 크로스 웨이드가 달력에다 또 하루를 지웠다. 12 월 5 일까지 11 일. 그런데도 이렇다 할 새로운 단서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살인 사건에서 나타난 증거를 토대로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로긴스도 기지개를 켜며 손님용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또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뚝 떨구고 있는 그 모습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이것은 체면 문제야!]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내 화초들까지도 기운을 잃고 있어. 상부에서는 나를 멍청이라고 하겠지? 그 좋은 컴퓨터도 쓰지 않고 낡아빠진 방법으로 수사를 하고 있다고. 분명히 그럴 거야.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말이야.] [그렇겠지요.] 로긴스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뭔가 얻은 게 있나? 증인들과 면담을 했다더니 아직도 휘파람인가? 내가 말하는 뜻은 알고 있겠지?] [예, 작년 살인 현장 가까이에 있던 부인 말로는 누군가가 기관차기적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는 거예요. 휘파람이 아니라.] [하지만 그놈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없지 않은가?]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러나 그곳은 코티네컷의 그리니치 국도 85 호선 옆이었습니다. 그 부인 말로는, 미친 사람 아니고서는 그 길을 배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직접 가서 확인해 봤습니다. 더구나 그 소리는 범행 시간을 전후해서 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경찰을 총동원하여 기적 소리를 휘파람으로 낼 수 있는 놈을 찾자는 건가?]


로긴스는 대답이 없었다. 크로스 웨이드만큼이나 그도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모든 파출소에 연락을 취하고, 비밀리에 전국 미용실 주인에게 협조를 의뢰해서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감시하는 거야. 그러나 소문이 새어나가 범인에게 경고를 하는 꼴이 된다면 경찰 망신만 당하게 될 것이고, 걱정은 걱정이야.....] [예,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역시 그 방법은 안되겠어. 그런데 아서, 이놈 어렸을 때 사진이 한 장 정도는 남아 있을 텐데 말이야. 그가 어디에 살았었는지는 알고 있어. 사진을 몽땅 분실했다고는 할 수 없을 테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신문 사진밖에 없습니다. 신문 사진은 너무 흐려서......] [그랬었던가? 이놈은 평생 실수도 하지 않나! 단서가 될 만한 증거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말이야. 어쩌면 올해는 우리가 여기서 이러는 줄 알고 알래스카에서 범행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몰라. 지금쯤 벌써 살해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놈 스스로 자수를 하든지 실수를 하기 전에는 잡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샘의 아들>처럼 말예요. 기억하게 계시겠지요. 그때 그놈은 주차 위반 딱지를 떼여서 추적 끝에 체포할 수 있었지요.] 로긴스는 마치 자기 무용담처럼 말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지독한 시련에 지쳐 있는 몸을 의자에 던졌다. [물론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예측할 수 없는 운에 맡기는 격이지.] 그가 말했다. 방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의 수사 방법이 실패해서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가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 쓰지 않던 단어를 써가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는 그러는 자신이 싫었지만 명백한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우선은 말이야, 아서. 다음 살인에 대비해서 조치할 수 있는 행동계획을 세워 보세.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을 알아보고 어떤 순서로 처리해 갈 것인가를 서로 정확히 해야겠어. 목격자들의 증언은 모두 복사해 놓아야 하고.] [제가 해놓겠습니다.] 로긴스가 말했다. [그렇게 해주겠어?] 사만다는 기다렸다. 그린베이의 담당 경찰관이 브래넌 부인과 연락을 취할 때까지 양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지금 사만다가 무엇을 생가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남편을 잃었을 때와 같은 침통한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의 과거를 찾을 수 있는 구체적인 준비를 냉정하게 갖추어 놓은 뒤, 현실이 절박하게 다가옴에 따라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하복부를 쓰다듬는 것을 보고 양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금 통증이 있을 뿐입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프로머 의사의 경고가 생각났다. 스트레스를 조심하지 않으면 아기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괜찮을 겁니다.] [응급 간호사가 있습니다만...... 연락을 해드릴까요?] [아닙니다. 그럴 것까지 없습니다.] 병원에 가게 되어 마티의 전 부인과 통화할 수 없게 된다면 그야말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곧 나아지겠지요. 신경을 써서 그럴 겁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이 말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지금이야말로 양은 사만다와 일심 동체라는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한번 더 밸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양입니다.] 양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케이.] 상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보답할 기회가 있겠지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전화를 끊었다. [지금 그녀가 이쪽으로 전화를 건다고 합니다.] 양이 사만다에게 말했다. [다른 말은 없던가요?] [저쪽도 무척 혼란스럽겠지요.]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양이 손을 뻗었으나 사만다가 조금 빨랐다. 양은 제지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잡음이 섞여 있었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목소리였다. 사만다가 마티의 전 부인에게 기대했던 그런 목소리는 아니었다. [양 부장님은 안 계신가요?] 브래넌 부인이 물었다. [여보세요. 실례합니만 브래넌 부인이십니까?] 사만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저는......] 사만다는 주저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어떻게 자기를 소개해야 할지. 자기는 이제 제 2 의 여자다. 연애 소설이나 멜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제 2 의 여자. 바로 그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브래넌 부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내가 도망간 남편을 기다리며 두 아이를 데리고 그린베이에 살고 있다면 역시 같은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마틴 쇼의 아내입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사만다는 느닷없이 말해 버렸다. [아, 그래요.] 브래넌 부인이 대답했다.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한 남자를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만다가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지만 갑자기 브래넌 부인에게 친근감이 생겼다. 한 남자로 인해 불행을 맛보게 된 우리들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그 사람도 기차에 흥미가 있었겠군요?] 사만다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가 말하는 그 남자는 기차에 관심이 많았던가 봐요.] [작은 모형 기차도 가지고 있었겠네요?]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는 진짜 기차에 관심이 많았어요.] [진짜 기차에서 장난감 기차로 바뀌었군요. 부인께서도 기쁘시리라 믿습니다만......] 묘한 대화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서 서로 신원을 확인해야 좋을지 두 사람 다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좋습니다. 저는 화밖에는 아무것도 낼 게 없어요. 뭐한 얘기 같습니다만, 저는 그 사람에게 흥미없어요. 그 사람 일이니까요. 공식적으로도 사망을 선언한걸요.]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경찰서에 가시게 되었습니까?] [얘기하면 길어집니다.] 사만다가 대답했다. [그 사람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술도 그렇고, 다른 여자도 그렇고, 도박을 해도 그렇고, 눈만 해도 그렇고요.] [눈이라니요?] [그래요.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주 자랑삼아 이야기했었지요.] [뭐가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까?] [무슨 소리예요? 의안 말입니다.] 브래넌 부인이 말했다. [녜? 저야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사만다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훅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 남자 왼쪽 눈 말입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브래넌 부인은 사만다가 답답하리만큼 알아듣지 못하는 걸 보고 한마디했다. [잠깐만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자가 같은 사람일까요?] 사만다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사만다는 다시 한번 사진을 봤다. 그것은 분명 마티였다. 그렇지 않은가? 아마 브래넌 부인이 뭔가를 조작해 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댁의 남편 파일에는 의안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가시 돋친 목소리가 사만다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경찰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어째서지요?] [만약 그가 돌아오면 화를 낼 것 같아서 그랬어요. 자기 스스로는 자주 이야기했지만, 제가 어쩌다 그 이야기라도 꺼내면 화를 냈거든요.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이의 담당 의사 이름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알려 드릴까요?] 그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고 사만다는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사진은 마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웃지 못할 엉뚱한 착각이었다. 사진기가 거짓말을 했던 말인가? 내 눈이 이상한 걸까? 그렇지 않으면 남편을 찾고 싶은 내욕망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의사 선생님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가 결혼한 이는 댁의 남편이 아닙니다.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잠시나마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폐라니요? 죄송할 것 없습니다. 일년에도 몇 번씩 이런 전화를 받는걸요.] [그러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행운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네, 당신도 일이 잘 풀리기를 빌겠어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미안합니다. 꼭 그이라고 생각한 제가 바보스럽군요.] 사만다가 양에게 말했다. 또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더 확인해 보지도 않고 통화를 하시게 한 제가 자롯입니다.]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사만다는 아주 비참한 심정으로 얘기했다. 양도 동정이 갔지만, 지금으로서는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만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게 좋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좀 쉬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락은 계속 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괜찮으시겠지요?] [네.] 드디어 사만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고문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가슴 ㄱ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여기에 와서 자신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전화를 가리키며 사만다가 물었다. 그것은 양으로서 대답하고 싶지도, 대답할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수도 없이 보아 온 이런 비극적인 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린베이의 그 여자 문제는 거리만큼이나 멀리 느껴졌다. 그는 사만다가 일어날 때 사만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로 데리고 나왔다. [괜찮아요.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양은 잡고 있던


사만다의 손을 놓았다. 여자의 방어 본능이 되살아난 듯 그녀는 혼자서 갑자기 몸을 가누고는 똑바로 걸었다. 그러나 양은 여전히 사만다가 걱정스러웠다. [괜찮으시다면 경찰차로 모셔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사만다는 양의 호의를 거절했다. [예, 그 기분 이해합니다. 저라도 경찰차에 탄 모습을 남에게 들킨다면 좋은 기분이 아닐 겁니다. 그럼 택시라도 잡아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았다. 사만다는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와 부딪치게 되었다. [어머, 죄송합니다, 그만......] 그녀가 사과했다. [뭐, 괜찮습니다.] 크로스 웨이드였다. 사만다는 몹시 피곤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린에게는 백화점에 가서 아기에게 필요한 아기 용품을 보고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달리 핑곗거리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다. 경찰서에 갔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고, 아직 사설 탐정을 고용할 시간적 여유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마티에게 그의 뒷조사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게 할 위험성을 너무 많이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빈틈없이 그의 흔적을 철저히 은폐시켰다. 전문가도 찾지 못하도록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조금도 남겨 놓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양에게 찾아간 것만으로도 사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다. 만약 마티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다면, 남은 인생은 수수께끼에 파묻혀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앨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불행한 남자>라는 영화를 그녀는 기억해 냈다. 그 내용 중에 헨리 폰다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형무소에 들어갔다. 사만다 자신도 그 남자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틀에 갇혀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처리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어쩌면 더 악화됐는지도 모른다. 오후 내내 그녀는 울다가 지쳐 누워 있었다.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발작 증세를 일으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오늘 밤도 그의 밤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일은 또 그 남자를 위한 파티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헨리 폰다가 스스로 사형 집행인의 생일을 축복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쨌든 30 형 모델이 아니면 안되겠어요.] 록펠러 센터 지하의 후덥지근한 전화 부스 안에서 마티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것은 그의 사무실에서는 절대 걸 수 없는 내용의 전화였다. 비서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대용품 같은 건 흥미없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이렇게 쉽게 성질을 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긴장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억제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2 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한다. 아버지를 배신하면 안돼. 아버지는 한번도 [너]를 배신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곳도 잘 나와야겠지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잘 나오지 않는 것은 필요없어.] 마티가 대답했다. 그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건이었지만, 이 경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었다. 왜냐하면 마티가 사려고 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초창기 시댜, 그러니까 34 년 전 10 인치 RCA 30 형 텔레비전 수상기였기 때문이다. 1952 년 12 월 5 일 밤 그가 보고 있었던 것이 바로 30 형 텔레비전이었다. 그런 골동품은 전자 제품 대리점에도, 전기 용품점에도, 심지어는 골동품점에서도 살 수 없었다. 수집상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 미국을 상대로 동호인 잡지에 작은 3 단 광고를 내 자기들이 갖고 있는 골동품이나 희귀품을 서로 교환하거나 적당한 가격으로 매매하고 있었다. 마티는 전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또 10 센트짜리 동전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전화 부스 유리를 탁탁 두드리면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상대방은 자못 많은 종류를 갖고 있는 수집광 같은 말투였다. 그는 30 형에 사용되는 진공관 하나하나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수집광 같았다. [알겠습니다. 한번 찾아보지요. 짐작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만, 돈이 좀 듭니다.] [얼마 정도면 되겠나?] [3 천은 있어야겠지요.] [뭐라고, 3 천 달러?] [수리가 불간능한 것은 2 천입니다. 손님이 찾으시는 것은 30 형이잖아요. 여기에 있는 잡동사니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아주 귀한 겁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언제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겠나?] [손님은 언제까지 3 천 달러를 준비하시겠습니까?] [오늘 밤, 현금으로.] [그러시다면 저도 그때까지는 준비해 놓아야지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이 근처에 살고 있으니까요. 배달해 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가지러 가지.] [댁에서 오신다는 걸 어떻게 믿습니까?] [알았어. 한 시간 내로 돈을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자신이 흥분되어 있다는 것조차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답답한 전화부스 안에서 흥정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쉽게 꿈이 실현되다니......> [알았습니다.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이름을 주고받았으나 마티는 역시 가명을 댔다. 마티는 비디오 테이프를 갖고 있었다.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뉴스 해설, 1952 년 12 월 5 일 밤에 보았던 프로그램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에드워즈 아나운서를 좋아했었다. [프랭키, 오늘 밤은 한국의 겨울에 관해서야.] 그날 밤 에드워즈가 출연하자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너도 봐두는 것이 좋을 거야.] 프랭키는 그것을 보았고, 지금 또 그것을 보려 하고 있었다. 6

[프랭크 넬슨이 그놈의 이름이지. 우리의 추측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국내에 있는 프랭크 넬슨을 전부 조사해 봤는데 성과가 없었어. 사건은 1952 년 12 월 5 일, 네브래스카의 오마하에서 일어났어.] 크로스 웨이드는 자기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얘기하고는 잠시 말을 끊고 전화의 상대방이 질문하기를 기다렸다. [찾아내긴 했는데 확실한 것은 없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어릴 때 것까지 포함해서. 이유는 묻지 말아 줘. 우리가 쫓고 있는 사람은 한때 외국 생활을 한 것 같아. 알다시피 런던 경시청에서는 자주 문제시하는 것이지. 미국은 너무 많는 주가 하나로 묶인 나라가 되어 놔서 여권국에 조회해 보면 무엇인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고맙군. 보답하겠네.] 이야기는 끝났다. 정말 암중 모색 중의 암중 모색이었다. 국무성 여권국은 범죄 수사와는 인연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보기도 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이 걸려도 시간만 있다면 뭔가 도움이 딜 만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크로스 웨이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개월은 커녕 단 몇 주일의 여유도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며칠. 그 가운데서 또 하루가 지나갔다. 아무 성과도 없이. 그는 자기 달력에서 또 하루를 지웠다. 살인 예정일까지는 앞으로 9 일. 한뭉치의 서류가 그의 책상에 배달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크로스 웨이드는 실종자 보고서를 훑어보았는데, 거기서 캘린더 살인광을 찾는다기보다는 희생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에서 갈색 머리의 여자가 범인에게 속아서 행방 불명이 되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행방 불명된 갈색 머리의 여자들을 몇 명 체크해 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에게 살해되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든가 대체로 그런 종류들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보고서를 검토했다. 오후 3 시가 조금 지났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스하고 하늘도 맑았다. 본부 사무실 안은 더웠다.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맺혔으며 셔츠 자락에는 어느덧 땀이 촉촉히 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하마터면 보지 못하고 그냥 놓칠 뻔한 기록 내용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양 부장이 작성한 기록이었다. 양 부장이라면 그도 알고 있었다. 민원인은 사만다 쇼라는 여인이었다. 사만다의 육체적 특징에 관해서는 기술되어 있지 않았으며, 특히 그녀의 머리카락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웨이드의 시선을 끈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보다 흥미로운 곳에 있었다. 그는 즉시 양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 부장? 크로스 웨이드.] [아, 웬일이십니까?] 양 부장은 크로스 웨이드에게 군대식으로 안부를 물었다. [양, 자네 혹시 사만다 쇼라는 여자를 기억하나?] [네, 제가 맡고 있는 사건 중에서 가장 골칫거리 사건입니다.] 양이 대답했다. [음, 역시 그렇군. 그럼 하나 묻겠는데, 여기 씌어 있는 12 월 5 일에 관해서 그녀가 무슨 이야기라도 하던가?] [그냥 보고서에 씌어 있는 것밖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음, 그런데 좀 다른 것이지만, 그녀의 머리 색깔을 기억하고 있나?] 양은 잠시 생각했다. [잘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스카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민원인의 특징을 파악하기보다 실종자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그 여자가 찾아왔을 때 뭔가 위험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던가?] [아뇨. 그런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기 남편의 과거에 대해 걱정하더군요.] [그건 여기에도 적혀 있군. 훌륭한 보고서야. 난 지금 12 월 5 일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어떤 중요한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부인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좀 친절하게만 하신다면요.] 양이 말했다. [친절 하면 나 아닌가? 걱정 말게.] 크로스 웨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 인터폰 스위치를 눌렀다. [미안하지만 로긴스를 불러 줘.] 잠시 후 로긴스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 로긴스, 거기 앉게.] 크로스 웨이드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로긴스는 그 눈빛을 추측해 보았다. 대사건? 아니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남의 눈치를 살펴서 그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로긴스의 특기였다. 누구나 살인과에 들어오면 표정 뒤에 숨겨져 있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점쟁이에 가까운 기술을 터득하게 된다. [용의자라도 발견하셨습니까?] 로긴스가 성급히 말을 걸었다. [실종자 보고서야.] 크로스 웨이드는 양이 쓴 실종자 보고서를 로긴스에게 건네주었다.


[며칠 전 어떤 부인이 찾아왔는데, 그녀는 자기 남편의 마흔 살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거야. 뭐, 물론 흔히 있는 일이지. 그래서 옛날 친구나 은사를 찾으려고 생각했던 거지.] [흐뭇한 선물이 되겠군요.] [그런데 부인은 아무도 찾지 못했지. 즉, 남편의 과거가 없다는 거야.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해봤는데 남편이 말했던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지.] [재미있는 얘기군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지. 그 남편의 생일이 12 월 5 일이네.] [예?] [그렇다네. 살인범의 생일도 12 월 5 일이니까.]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야. 생일이 같고, 더욱이 증명할 만한 과거가 없으니까. 나이도 거의 일치하지 않나?] [신체적인 특징은 없습니까?] [음, 그는 체격이 큰 편이야. 우리가 생각했던 특징과 합치하는 부분이 많아. 그런 사람은 이 사람말고도 많겠지만 말이야.] [그 사람이 특별히 갈색 머리 여자를 노리는 여유라도 있는 겁니까?] [아직은 몰라, 아서. 이 부인을 찾아가서 사정을 직접 들어 보지 않겠나?] [좋습니다.] [오늘중으로 해야 돼.] 로긴스가 나가자 크로스 웨이드는 또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단서라는 것은 너무 막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한 행동에 만족을 얻기 위하여 사실보다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는 수사관들의 사고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사에서 단서가 중요한 의미를 갖다 주는 경우는 겨우 22 분의 1 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사만다 쇼에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로긴스는 지하철로 72 번가의 센트럴 파크 역까지 가서, 기차를 갈아타기 전에 <뉴욕 포스트>와 풍선껌을 샀다. 그는 그 껌에 조금 중독되어 있었다. 신문 1 면 머릿기사에 [2 명 살해. 1 명 폭행]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신문으로서는 특별한 것도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로긴스는 스포츠란을 폈다. 그는 사만다가 살고 있는 지역을 알고 있었다. 10 년 전만 해도 이 근처는 지금처럼 이렇게 호화롭지 않았다. 그는 살인과 형사로서 이곳 경찰서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다시 여기에 온 것은 3 년 만이었지만, 그 급속한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와 아이들, 깨끗한 복장의 사람들, 즐비한 상점들, 난생 처음 만져 보는 많은 액수의 돈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해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총총걸음으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동시에 미들에스트사이드에는 한때 예술가와 은퇴한 노인과 전문가들이 어우러져 지내고 있었다. 공원에 접해


있는 좁고 긴 구획은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도 그 부자들이 너무나 위세당당하기 때문에 모처럼 찾은 옛날 근무처였지만 로긴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로긴스는 미리 전화를 걸어 마티에게 부재중이고 사만다가 혼자 집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만다가 관리인에게 말을 해놓았는지 관리인이 순순이 알려 주었으므로 바로 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마침 그때 복도 끝 집에서 린 굴드가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로긴스가 온화한 얼굴로 살짝 웃자 린도 어색하지 않게 가볍게 인사를했다. 외판원? 수리공?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요리 강습을 하고 주방용품을 파는 요리사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누구세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만다는 습관적으로 물었다. [로긴스 형사입니다, 부인.] 그는 신분증을 꺼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도록 출입문 렌즈에 갖다댔다. 잠시 후 고리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조금 열렸다. 로긴스는 그 사이로 신분증을 밀어넣었다. 사만다는 신분을 확인하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아서 로긴스의 시선은 그녀의 갈색 머리에 고정되었다. [아니!] [네?] 사만다는 어이가 없는 듯 반문했다. 로긴스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실례했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헛소리가 나와 버렸군요.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부인?] [네, 들어오세요.] 로긴스는 안으로 들어섰지만 사만다의 긴 갈색 머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제는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서 그는 어색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태연하게 걸었다. 저 갈색 머리. 지금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으며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그가 좋아하는 말로 한다면 [동그란 피자]인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꿔 버리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며,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것에 하나의 고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사만다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부인.] [커피를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방금 마시고 왔습니다.] 로긴스는 방 안을 흘끔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실내 장식 하나하나가 모두 최상품으로 보였다. 그는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식탁 위에는 작은 메모지 몇 장이 반듯이 놓여 있었다. 사만다는 그것이 그의 주의를 끌었음을 눈치채고 해명하듯 말했다.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을 어떻게 배치할까 구상해 본 메모지예요. 양 부장님께 들으셨을 줄 압니만......]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부인. 그리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만다는 그를 안심시키고 나서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마티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만다는 놀랄 정도로 침착했는데 그것은 경찰서에 찾아가서 양 부장과 함께 남편을 찾느라 고생해서 얻어진 결과였다. 심리적인 압박감은 있었지만 모두 원만하게 해결된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몇 가지 확인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먼저 전화를 좀 빌렸으면 합니다. 본부와 연락을 해야 하기 때문에......] 로긴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일로 그러십니까?] 사만다가 당황해서 물었다. [업무상의 일입니다, 부인.] [전화는 이쪽에 있습니다. 저는 침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사만다로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경찰에게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만다는 떨고 있었다. 온화한 성품의 양 부장을 만나고 난 뒤에도 경찰에 대한 공포심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만다는 재빨리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로긴스는 갑자기 크로스 웨이드의 직통 전화 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 수첩을 꺼내야만 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마침 자리에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입니다.] [로긴스입니다.] [어떻게 됐나, 아서?] [믿을 수가 없어요.] [믿을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그 부인 집에 와 있습니다. 이 부인 역시 긴 갈색 머리입니다.] 순간, 두사람 모두 할 말을 잊었다. 이는 분명 신의 계시다. 크로스 웨이드는 굽혔던 어깨를 펴면서 고쳐 앉았다. 과거가 없고 생일이 12 월 5 일인 남자와 결혼한 갈색 머리의 여인! [아서, 어저면 우리가 바로 짚었는지도 몰라. 자네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게. 그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고 싶네. 가능한 한 빨리 갈 테니까 말이야.] [그러실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전화를 끊었다. 순찰차를 타고 가면서 크로스 웨이드는 감정을 억눌렀다. 과연 그녀의 머리는 갈색 머리일까? 혹시 붉은색에 가까운 것을 아서가 잘못 본 것일까? 남자들이란 색의 식별에 그렇게 민감하지 못하다. 단지 머리색만 일치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 이것은 분명 우연의 일치일 거야. 우연의 일이. 갈색 머리의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 중에 몇 퍼센트, 몇천 분의 일은 12 월 5 일에 태어난 남자와 결혼했을 것이다. 남편의 과거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인이 멍청하게 조사해 본 결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마 그녀의 주의력이 산만하고 똑똑치 못하여 남편의 과거 하나 제대로 캐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사만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복도를 한번 훑어보았다. 검은 우산이 꽂혀 있는 우산통이 하나 있었다. 캘린더 살인광의 보고서에는 우산에 관해서 언급이 없었던가? 기억은 없지만 나중에 조사해 보기로 하자. 그밖에는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것을 알고 마침내 벨을 눌렀다. 사만다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똑바로 크로스 웨이드를 주시했다. 어떤 의미로 그녀는 실망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건장한, 영화에 흔히 나오는 그런 인물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녀의 기대에 일치한 것은 크로스 웨이드가 입고 있는 코트뿐이었다. [크로스 웨이드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고 로긴스처럼 사만다의 머리를 봤다. 갈색 머리였다. [들어오세요.] 사만다가 말했다. 그는 거실로 들어가 로긴스에게로 갔다. [저까지 이렇게 갑자기 달려와서 놀라셨겠지요?] 코트를 벗고 의자에 앉으면서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불편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저에게 전화한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제가 직접 말씀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로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가 일방적으로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 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사만다도 크로스 웨이드가 앉은 자리 앞에 앉았다. 두 사람 모두 금방 긴장감이 고조됨을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입을 열 수 없는 뭔가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부인.] 크로스 웨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관해서 로긴스에게 뭔가 들은 것이 있습니까?] [제 이름을 본부에 계시는 양 부장님한테서 들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리고 전화하고 나서 저와 함께 보고서를 훑어보면서 사실과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경감님이 오셔야 한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뭔가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새로운 사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부인, 우리들은 지금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부인이 처해 있는 상황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만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도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긴스 씨 말에 따르면, 두 분은 살인과 소속이라면서요?] 그녀가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제 남편과 살인과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지요. 그렇지만 부인, 무척 충격적인 얘기가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각오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주인간 너무나 놀라운 일만 당해 와서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아요.] 사만다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신중하게 말을 하려 했다.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그러나 정확하게 핵심만을 말하고 싶었다. [부인, 블로일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정신 의학의 선구자입니다. 아주 유명한 학자지요. 이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은, 그가 정신 분열증으로 알려진 마음의 병에 대해 몇 개의 분류를 생각해 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열증에 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물론 들은 적이 있어요. 대학 다닐 때 심리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지만 정확히는 몰라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기적 흥분성 정신 분열증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처음 들으실 것입니다.] [네.] [아주 희귀한 병이죠. 어떤 특정한 날에만 동요를 일으키는 아주 특이한 정신병이지요. 보통 그것은 과거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무슨 뜻이지 알 것 같습니다. 누구의 기일날만 되면 기분이 우울해지는 현상과 같은 것이겠네요.] 사만다가 이해가 간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울한 상태를 벗어나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무슨 뜻인지>]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에는 살인도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사만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생 처음 살인이라는 개념이 그녀의 일상 생활에 부각된 것이다. 병이라면 이해하겠다. 아니 배신이나 사기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인? 그것은 다른 가족, 다른 세계에서나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물었다. [여기서는 하나, 즉 살인에 국한시켜 이야기합시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사실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살인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실 겁니다.] [네.] [아무튼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경찰에서 의뢰한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런 조건하에 놓이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뛰쳐나가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합니다. 편의상 그를 캘린더 살인광이라고 합시다. 그의 범죄는 매년 특정한 날에 일어나지요. 그 특정한 날이 12 월 5 일입니다.]


[마티?] 사만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순간,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정신차려! 이 순간을 견뎌야 해! 사만다는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잠시 후 사만다는 의식을 찾았다. 그것은 사만다가 그들에게 기대 이상으로 강한 여자라는 것을 알려 줬다. [그날은 남편의 생일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양 부장님의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가 착안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거기에 사라져 버린 남편의 과거, 그리고 또 한 가지.] [또 한 가지? 그게 뭡니까?] [부인, 저희들이 쫓고 있는 사람은 살인범입니다. 그에게 희생된 사람은 모두 여자, 그것도 갈색 머리의 여자들입니다.] [아, 안돼, 안돼......] 사만다는 울부짖었다. [모두 믿겠습니다. 하지만 안돼요. 제 남편, 제 남편이 저를 죽일 거라니요? 저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그 사람을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마티가......] 그녀는 말을 끊고 크로스 웨이드를 보았다. 그리고 로긴스와 크로스 웨이드를 번갈아 보았다. 이들에게는 자주 겪는 일일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발작에 가까운 흥분을 한다 할지라도 이들은 일시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기분은 잘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부인께서 생각하시고 느끼고 계시는 것과 똑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는 사만다의 얼굴에서 거부 반응이 점점 사라지고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말씀해 주세요.] 그녀가 다시 결심한 듯 말했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알 것은 알아야만 진상을 빨리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크로스 웨이드는 천천히 일어나 사만다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갔다. 걱정과 동정을 함께 나타내면서 그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런 살인 사건이 지금까지 6 년에 걸쳐 여섯 번이나 일어났습니다. 매년 한 명씩 둔기와 체인에 의해 살해되었지요.] 사만다는 다시 떨기 시작했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 주인께서 혹시 무기를 소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자전거 체인은?] [없어요. 자전거가 없는걸요.]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살인 사건은 모두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최근 3 년 간은 이 뉴욕 시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번 12 월 5 일에는 또 한 명의 여자가 살해될 것으로 우리들은 예측하고 있습니다.] [바로 마티의 생일 파티가 있을 그날 밤이 되겠군요. 그이가 어찌나 우기던지, 할 수 없이 그날에 동의했습니다.] [우겼다고요? [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이것 또한 묘하군. 크로스 웨이드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사건은 모두 한밤중에 일어났다. 만약 그가 범인이라면, 왜 파티를 밤에 열기로 했단 말인가? 물론 방법을 바꿔 낮에 범행을 계획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사만다가 목표라면, 낮에 그녀를 죽이고 그날 밤 그녀 없이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열 리가 없다. 모순된 일이지만 크로스 웨이드는 집착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12 월 5 일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 아닌지 우리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부하인 로긴스에게 과거의 살인 사건을 체크하게 했습니다. 생각했던 것이 눈에 띄더군요.] [마티군요?] 사만다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으나 크로스 웨이드가 손을 들어 그것을 가라앉혔다. [네,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그녀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2 년 12 월 5 일 오마하의 변두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희생자는 실업 상태에 있던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큰아이에게 모형 기차를 사주었습니다.] 사만다는 침을 삼켰다. [기차라고 했습니까?] [예, 모형 기차입니다.] [마티도 기차를 샀습니다.] [어떤 기차입니까?] [얼마 전에 모형 기차를 사 갖고 왔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조립하면서 카펫을 더럽히기까지 했어요.] 그녀는 윤활유 자국을 가리켰다. [왜 그렇게 기차를 좋아한다고 말하던가요?] [옛날부터 좋아했다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어요. 훌륭한 취미가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고요. 저한테도 해보라고 해서 잠깐 해보았습니다만......] [나중에 그것을 좀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이야기를 계속해야겠군요. 이번에는 그 배경을 말씀드리지요.] [부탁합니다.] 비로소 사만다는 어깨가 흔들릴 만큼 크게 숨을 쉬었다. 모형 기차 얘기는 크로스 웨이드도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설레는 마음을 눌렀다. 범죄 수사에서 우연의 일치는 오히려 재앙을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도리어 함정에 빠지는 수가 있다. 과신은 금물이다. [그 실업 상태에 있던 노동자는 모형 기차를 사 가지고 와서 그것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부인이 그 선물에 반발한 것이지요. 그러잖아도 살림이 쪼들리는데, 장난감


기차에까지 돈을 쓰는 남편의 무신경에 신경질이 난 것이지요. 부인은 해머로 남편의 머리를 후려갈겼고, 남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요. 그런데 그녀는 작은아들의 자전거 체인으로 죽어 가는 그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인 것입니다.] [아, 그럴 수가......] 사만다가 탄식했다. [큰아들은 그 광경을 시종 보고 있었지요.]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아이는 각각 다른 친척집으로 옮겨져 생이별을 하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곧 형무소로 가서 몇 년 후 옥사했습니다. 그 후 그 아이들을 맡아 기르던 그 친척집은 파산을 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아이들 소식도 모릅니다.] [그 아이들 이름은 뭐였습니까?] [넬슨입니다. 큰아들은 프랭크 넬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른 이름을 쓰고 있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예, 그 점을 지금 말씀드리려는 참이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갈색 머리였습니다, 부인처럼.] 사만다는 갑자기 어쩔 줄 몰랐다. [저희들은 그 큰아들이 캘린더 살인광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을 계속했다. [12 월 5 일이라는 날짜가 그의 마음속에서 억제할 수 없는 광기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가 갈색 머리 여자를 노리는 것은 갈색 머리 여자는 모두 자기 어머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마음속에서 갈색 머리의 여자들은 이유없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12 월 5 일이 아니면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왜 6 년 전부터 살인을 시작했는가가 아직 미해결 상태입니다만, 저희 수사에 협조해 주는 심리학자에 의하면, 이런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이유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경감님은 마티가 그 사람이라고 믿고 게신가요?] 사만다가 침착하지만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그러나 한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도 거의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이...... 남편의 원래 나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요? 12 월 5 일이라고 하는 날짜가 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꼭 그날에 파티를 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 그 증거지요. 게다가 부인은 갈색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것을 체크하시지 않습니까?] 사만다가 물었다.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부인.] [병원의 진료 카드나 사진이 있지 않나요? 프랭크 넬슨의 사진을 보면 마티가 그와 닮았는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사진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가족 앨범도 분실했습니다. 친척 중 누가 가져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시의 병원 관계자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고, 기록도 그와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벽촌이기 때문에 인심은 꽤 후했던가 봅니다. 재판때 채택되었던 증거는 일부 남아 있습니다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프랭크 넬슨은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을 나와서 사회로 진출했던가 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사진은 아버지 장례식날 사진 기자가 찍은 사진입니다. 프랭크와 그의 동생이 작게 찍혀 있지만 너무 오래 된 것이라서 보셔도 부인의 남편이라고 판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네, 무슨 말슴인지 알겠습니다.] [저희는 최근 입수된 정보를 토대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용의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부인께서 현명하게 경찰에 와주신 덕분에 용의자를 찾을 수 있었지요.] 묘하게도 사만다는 기분이 나빠졌다.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의 행동을 칭찬할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지만, 오히려 사만다의 아픈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결국 마티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당연한 일 아닌가? 남편을 배신한 아내. 그녀는 그것을 생각하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분명히 자기는 현명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사만다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불쑥 나타난 그 작은 수사관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며 또 그 사람의 아이까지 갖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자기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군가? 무슨 심보로 저런 멍청이 같은 조수를 데리고 와서 이런 엉터리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일까? 그녀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 표정에는 적의와 경멸의 빛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로긴스와 크로스 웨이드는 그런 표정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기분 충분히 알만합니다.] 마치 할아버지 같은 말투로 크로스 웨이드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드린 말슴에 반발하실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저희가 알고 있는 것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정을 듣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의 죄를 비난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부인께 사건의 배경을 알려 드리는 것이 중요했을 뿐입니다. 지금 저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부인의 안전입니다.] 크로스 웨이드는 수사관으로서 할 수 있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다시 그를 믿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기 감정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만다는 그렇게 물었다. [특별히 하실 일은 없습니다. 해야 할 쪽은 우리들이지요. 부인의 남편을 미행하고, 행동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남편께서 아무 일 없으시길 우리들도 빌겠습니다.] 사실 크로스 웨이드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자기가 쫓고 있는 남자가 범인이길 바랐다. 그 표정에는 사만다에 대한 진정어린 염려와 함께 결정적인 순간에 범인을 체포해서 영광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적당한


말을 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누군가 전쟁을 종합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사도 하나의 예술이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방 안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왜 그러시죠?] [첫째는 주인어른의 생활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섭니다. 어쩌면 뭔가 얻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두번째는 어린 프랭크 넬슨의 오마하에서의 생활을 생각나게 하는 뭔가가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부인이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해머나 체인 같은 것이지요.] [얼마든지 살펴보세요.] 사만다가 말했다. 나중에 법정에서 문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에게 가택 수색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서명을 하게 했다. 사만다가 적의에 찬 증인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희생자라기보다 공범자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문제가 의외로 발전하는 예를 크로스 웨이드는 빈번히 경험해 온 것이다. [함께 들어가실까요? 혹시 여쭤볼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크로스 웨이드가 사만다에게 말했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를 따라 들어가 방 안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크로스 웨이드에 대한 반감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기의 생명이 진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기차를 보여 주실까요?]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사만다는 마티가 모형 기차를 넣은 상자를 형사들에게 내놓았다. 크로스 웨이드는 그것을 하나하나 만지면서 꼼꼼히 살폈다. [굉장한 것이군요.] 마지막에는 그렇게 말하면서 로긴스 쪽으로 갔다. [아서, 이것이 어디 제품일까?] 로긴스는 기차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옛날 라이오넬이군요. 그 회사가 합작하기 전, 그러니까 50 년대가 되겠군요.] [남편께서 왜 하필이면 50 년대의 기차를 사오셨는지 말씀하시던가요?] [좀 고전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라이오넬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잘 만들어낸다고 그랬어요.] [바로 그렇습니다.] 로긴스가 사만다 말에 동의했다. [아서, 넬슨 부부의 치명적인 부부 싸움이 있었을 때, 기차에 관한 기록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기차에 관해서 읽은 기억은 없습니다. 모형 기차는 재판에서 증거물로 사용된 후 프랭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은 없습니다.] [영수증 같은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팔았던 장난감 가게는


몇 년 전에 없어졌습니다.] [빌어먹을.....]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에게 들리지 않도록 반대쪽을 향해 조용히 분통을 터뜨렸다. 역사가 그 장난감 가게마저 없애 버렸군. 마티의 기차와 프랭크의 기차를 비교할 수도 있었는데, 기록이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부인, 남편께서 이것을 최근에 사오신 것이 틀림없습니까?]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여기에는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여기에 없었다는 것은 저도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전에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한가 이 말입니다.] [그것은......] [사무실 어딘가 감추어 놓았을지도......] [무슨 말씀이시죠?] [어쩌면 이것은 어린 시절 프랭크 넬슨이 갖고 있던 기차일지도 모르지요. 생일날 아버지가 사다 주신 기차. 그것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고 두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요. 그런 걸 어떻게 함부로 없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사만다는 그 기차가 폭발물이라도 되는 듯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이런 것을 집에까지 갖고 왔을까요?] 사만다가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크로스 웨이드는 또 로긴스를 쳐다보았다. [아서, 중고 모형 기차를 팔고 있는 가게는 뉴욕에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리스트를 작성해 보게. 최근에 누가 이런 것을 사가지 않았나도 조사해 보게.] [알겠습니다.] 크로스 웨이드는 침실로 갔다. 그는 특이한 가구 배치에 깜짝 놀랐다. 특히 침대의 헤드보드가 라디에이터를 가리고 있고, 옷장이 창문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선이 액자로 옮겨졌다. [흥미있군요.] 그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군요. 좀 지나치지요?] 사만다가 말했다. [각자 개성의 문제지요.] [이것이 마티의 개성인걸요.]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이가 이런 식으로 배치해 놓자고 하길래 반대했지요. 얼마 전까지도.] [왜 그랬습니까?] [그가 시험삼아 해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인테리어 잡지에서 봤다고 하면서, 모형 기차 때처럼 고집하기에 농담이 아닌 줄 알았어요.] [가구 배열도 여러 가지고 있지요. 그런데 왜 이런 배치일까요? 이런 배치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모르겠어요.]


사만다가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그 밖에 바뀐 것은 없습니까?] [별로 생각나지 않아요.] [이것은 남편 책상입니까?] 크로스 웨이드가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좀 살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사만다는 몸짓으로 허락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책상을 조사해 봤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업상의 서류들뿐이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군요.] [그런 걸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겠지요. 자기 집 책상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을 갖다 놓는 바보는 없으니까요.] 그는 방 안의 좁은 공간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의심이 가는 것은 기차뿐이군요.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만다가 말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의 상황에 불과합니다. 좀더 조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사만다는 확실한 대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심, 그 의심 때문에 사만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크로스 웨이드가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는 사만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부인, 여기서 한 가지 협조를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겠죠.] 사만다가 말했다. [마음이 준비를 하시고 들어 주세요. 파티 준비는 예정대로 진행하십시오. 만약 변경하게 되면 남편께서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행동해 주세요. 여행 계획에 대한 이야기라도 꺼내세요.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경찰에 갔던 얘기를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은 아무에게도......] [좋습니다.물론 아래층에 있는 아파트 관리인은 알고 있겠지만,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우리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남편에게는 우리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12 월 5 일이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사만다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말했다. [예, 앞으로 1 주일이군요. 그날은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 이 건물 안에 경찰을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청 장치를 설치하겠습니다. 이 건물에 빈 집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렇지만 복도 맞은편 한 집이 한 달 동안 비어 있어요.] [그럼 문제없군요. 이 빌딩 주인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 부인과 남편의 대화는 우리가 모두 듣게 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일어날 때는 몇 초 내로 우리들이 달려올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크로스 웨이드는 마치 뉴욕 시경의 형사 같지 않았다. 그는 사만다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부인같이 정숙하고 교양 있는 분께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저로서도 힘이 생깁니다.] [저희들이 도울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그들은 경찰 본부로 돌아갔다. 사만다는 양 부장을 단 한 번 찾아간 것으로 살인 사건에 휘말려들게 된 것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그녀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살인범을 잡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녀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을 것이다. [믿을 수 없어요.] 사만다가 놀라서 말했다. [어때 굉장하지?] [참 훌륭해요. 그런데 마티, 골동품 가게라도 차릴 작정이에요?] [뭐라고?] [그렇잖아요. 처음에는 모형 기차, 그리고 이번에는 낡아빠진 텔레비전. 제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당신 나름대로의 취미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들은 낡은 30 형 텔레비전을 카펫 위에 올려놓고 거실에 서 있었다. 그 다갈색 캐비닛은 새로 칠한 니스로 번쩍번쩍 빛났고, 10 인치 화면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노랗게 물들어 있었으며, 고풍스런 진공관이 방금 먼지를 닦아낸 흔적을 자랑하듯 달려 있었다. [이것은 수집가라면 누구나 탐내는 진품이야.] 마티가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반 가정용으로는ㅁ 처음 시판된 것 중의 하나였어. 사실상 이놈은 텔레비젼 산업을 확고히 굳힌 주인공이지.] [산업 발전에 수훈을 세웠군요.] [엉클 밀티가 처음 나온 것도 이 수상기였지.] [감동적이군요.]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깨끗하게 잘 나와. 직접 틀어 보고 샀으니 틀림없어.] [멋지군요.] 되는 대로 대답은 했지만 지금 자기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 그것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 남자는 나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죽일 계획을. [그것을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녀가 물었다. [설치해야지. 자그마치 50 달러나 주고 산 거야. 틀림없이 화제가 될 거야. 누구나 탐내는 것이니까. 파티 때 틀림없이 호평을 받을 테니 두고 봐.] [파티]라는 말에 사만다는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 부르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 남자를 무서워하고 있나? 마티를? 그래, 자신은 지금 이 남자를 무서워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그녀의 내부는 일대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런 순간이 온다고 하는 것은


꿈에서, 그것도 악몽에서밖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티가 무서웠다. 달력의 날짜도 무서웠다. [그럴 거예요.]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두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사만다가 한마디했다. [재미있겠어요. 현대적 가구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 적당한 곳에 설치해 두세요.] [그는 미소를 지었지만 사만다에게는 그 미소조차 위장된 미소로 생각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사랑을 했다. 육체적으로는 전과 비교하여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사만다는 감정과 열기가 모두 식어 있는 상태였다. 항상 그랬듯이 마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마치 야수와 같이 사만다에게 돌진해 왔다. 이런 부부 행위에 빠져 있으면서도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될 수 있는 한 자연스럽게 행동해 주세요.] 그녀는 자기가 사랑 행위를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에게 전화해서 어제 사온 텔레비전에 대해 얘기했다. 전화를 끊자 곧 이번에는 크로스 웨이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전화 내용은 이러했다. RCA 30 형 텔레비전은 사건 후 넬슨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연관, 이것은 사만다엑 새로운 충격이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충고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30 형 텔레비전은 그 당신 널리 보급된 것이었다. 몇 백만의 가정에 보급되었다. 이것 또한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가 하나같이 우연하게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또 로긴스가 뉴욕 시내의 중고 모형 전문점을 체크해 봤는데, 마티가 최근 모형 기차를 사간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점원이 마티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외모상의 증언도 일치했습니다. 이 경우에 대해 우리는 성급한 결론은 피하고 싶습니다.] 마티의 사진을 캘린더 살인 사건의 여러 희생자의 친구나 친척에게 보이고 있는 중이라고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이 말이 사만다의 구토증을 자극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범죄자의 몽타주로 취급된다는 사실에 사만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의 조언에 따라 다시 용감하게 파티 계획에 몰입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단지 형식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았다. 주어진 임무랄지 그런 것이었다.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무서워하는 남자를 위해 파티를 열려고 하는 것이다. 서로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으로, 이를테면 잘 들지 않는 칼로 난도질을 하려는 것과 같은 꼴이 된 것이다. 톰 에드워즈가 파티 준비를 도와준다면서 찾아왔다. 2,3 일 시간이 남았는데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전에 말한, 마티의 과거를 조사해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자기 나름대로 알아는 봤지만 역시 성과는 없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파티 준비를 돕는 것이 오히려 제격일 것 같다고 말했다. 사만다는 그 말에 감사했다. 톰은 마티가 사업상 교제하는


친구들에 대해 자기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으며, 테이블 정리나 제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꾸미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가 파티의 전반적인 준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만다는 최종적으로 메뉴를 선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문제](사만다는 사건이라는 단어보다 문제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었다)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뭔가 발견한 것이 있어요?] 조심스럽게 톰이 물었다. 그 소박한 태도가 사만다의 호감을 산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뭐, 이제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그러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샘, 먼저도 말했듯이 잊어버리든가 대결하든가요. 설마 그와 대결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아니에요.] [잘 생각했어요. 그의 과거는 그의 것이죠. 당신은 좋을 대로 생각하면 돼요. 예를 들어 국가를 위해 위험한 일을 한 스파이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디저트는 아이스크림이 어떨까요?] [아이스크림은 조금만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비라도 내려 추워지면 아무도 손대지 않을 겁니다.] [밴드맨들이 연주할 곡들을 적어 보내 달라고 하던데, 무슨 곡으로 하면 좋을까요?] 사만다가 말했다. [팝송이 좋을 겁니다. 마티도 좋아하잖아요. 얼마 전에 어떤 파티에 갔었는데 거기서 훌륭한 곡이 연주되자 마티도 멋진 곡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목록을 입수하면 되겠군요.] 톰이 말했다.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간단한 일인데요 뭘.] [자꾸 수고를 끼쳐서 죄송해요.] 사만다는 톰이 마티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상냥하고 예리한 감각, 실리적인 취미 생활...... 그의 집 아파트나 코네티컷의 작은 별장에는 사람을 고용해 쓸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예술가 타이프]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그가 미혼이라는 사실은 감수성이 뛰어나고 섬세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만다처럼 극히 친한 친구일지라도 그의 기호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여자 문제를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기 때문에 사만다가 결혼 문제를 넌지시 말하기라도 하면 언제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바꿔 버렸다. 어떤 의미로 사만다는 톰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며 마티와의 결혼이 이런 상태로 빠져들자 점점 그 관심은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러나 사만다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신경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만다, 언제 마티와 중서부로 여행을 가지요?]


그가 물었다. [날짜는 아직 잡지 않았어요. 우리 둘이서 여행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 좋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좋은 생각이지요. 여행이라도 떠나게 되면 평소에 하지 못했던 자기의 비밀 같은 것을 상대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기 문제를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벌써 경찰에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톰에게 얘기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러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이 중대한 발표는 파티 석상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마티보다 먼저 톰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만다는 지금 톰에게 다시 한번 마티의 과거에 대해 물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톰.] 오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그녀는 톰을 불렀다. [마티와 저와 결혼했을 때, 톰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받은 톰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런 걸 묻습니까?] [그냥 알고 싶어서요.] 톰은 어깨를 움츠렸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충격으로 쓰러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만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마티는 사만다를 <호의적>으로 나에게 이야기했었어요.] [네, 상상할 수 있어요.] [게다가 마티도 혼자였기 때문에, 아이를 좋아할 거고요.] [알고 있어요.] 안된다. 아기에 관해서 어떤 얘기를 해서도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절대로 안돼.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만다는 마티가 청혼했을 놀랐었나요?]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어요.] [여자들은 항상 그런 예감을 갖고 있다지요.] [톰, 그가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톰은 갑자기 사만다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톰, 다른 뜻에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냥 묻는 거예요. 아내라면 누구나 알고 싶어하는 것이잖아요.]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말은 하지만, 톰에게만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걱정거리나 근심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제 처지로는 물을 수도 없고......] [사만다, 마티처럼 행복한 사람도 드물어요. 게다가 당신은 파티를 열어 그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잖아요.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행복한 남자요>라는 말뿐일 거예요. 그 덕분에 저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지요. 자,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둡시다.] 그가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재미없는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이 사람을 아십니까?]


부엌 의자에 앉은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183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비프 스튜가 냄비 속에서 끓고 있었다. 앨리스 카리오네는 눈물 맺힌 눈을 돌리고 신음하듯 [마리안]이라는 말만 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한참을 기다렸다. 절대 서두를 일이 아니다. 더욱 이 상대가 이런 샹태일 때는 상대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들과 같은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어머니. 행복.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어느 날 밤 갑자기 경찰이 찾아와서 알려 줬던 것이다. 댁의 갈색 머리를 한 딸. 당신의 외동딸이 퀸스의 빈 집 창고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그때부터 그들에게 덧씌워진 슬픔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슬픔은 점점 더해 가기만 했다. 범죄를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솟구쳤다. 기다리는 것이다. 필요한 시간만큼 충분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렇게도 젊고 예쁜 아가씨였으나 분노를 느끼는 것은 우리 경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짓을 한 놈을 어떻게 하든지 꼭 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 경찰의 의무입니다.] 그는 마리안 카리오네의 어머니를 찾아간 것이다. 이제 겨우 55 세였는데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그 얼굴은 깊은 슬픔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카리오네 부인은 안정을 되찾고 크로스 웨이드가 가지고 온 마틴 에버릿 쇼의 사진을 보았다. [다시 묻겠습니다만, 이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이 따님 앞에 나타났던 적은 없었나요?]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그녀는 눈물 젖은 손으로 사진을 집어들었다. [그 아이에게는 남자 친구들이 많았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알겠습니다.] [모두 훌륭한 청년들었지요. 누구 하나 뒤떨어지는 사람 없이 모두가 그랬어요.] [네.] [그런데 이 사람은 잘 모르겠군요. 물론 그 아이가 사귄 상대를 모두 집에 데려왔던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사업상 만나는 사람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들의 경력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나요?] [예, 모녀끼리 하는 얘기가 따로 있었죠.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장래성은 어느 정도이며, 성격 따위는 어떻고 그런 얘기들이었지요.] [그 가운데 누군가 광고 관계 일에 흥미가 있다고 하지는 않던가요?]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기차는 어떻습니까?] [기차라고요?] [그 가운데 기차에 취미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런 기억은 없는데요.] 따님께서 친구 가운데 저널리즘학과 출신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또는 인디애나 출신이라고......] 카리오네 부인은 잠시 생각한 뒤 어깨를 움츠렸다. [젊은 총각들은 거의 뉴욕 출신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우리 일가는 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탈리아였군요.] [그러나 그 중에는 다른 곳에서 온 사람도 있었던가 봐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군대 갔다 온 사람도 있었습니까?] [예, 거의가 그랬습니다.] [어디에서 근무했었는지 기억하시겠습니까, 부인?] [아뇨. 이 사람이 제 딸을 죽였다는 겁니까?] 카리오네 부인은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모릅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다시 한번 보여 주세요.] 그렇게 해도 수확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크로스 웨이드는 생각했다. 사진 속의 인물이 용의자라고 생각하고 나서 증인이 한번 보고 싶어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살인범을 체포하고 싶은 심리적인 명예욕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군요. 뭐라고 말씀드리 수가 없습니다.] 카리오네 부인이 말했다. 이렇게 해서 크로스 웨이드는 카리오네 부인과의 면담을 모두 마쳤다. 그는 면회 약속을 한 리스트를 갖고 있었다. 거의 희생자 친구나 친척들이었다. 그는 또 뉴욕 시 이외에서 일어났던 캘린더 살인 사건의 희생자 조사에 임했던 경찰관 앞으로 사진을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사진이 실제로 담당 형사에게까지 배달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리버데일에 있는 아파트로 갔다. 희생자 한 사람의 동생이 거기에 살고 있었다. 사체가 코네티컷의 그리니치 국도 옆에서 발견된 피해자였다. 실업자인 동생 스티브 루이스는 22 세의 건방진 젊은이로 맥주 캔을 한 손에 들고 상반신은 거의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크로스 웨이드를 맞았다. 크로스 웨이드와 루이스는 의자에 앉았다. [이 사람 본 적 있습니까?] 마티의 사진을 루이스에게 건네면서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루이스는 맥주를 마셨다. [아.] 루이스가 말했다. [어디서였더라?] [장소를 알고 싶은데.]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루이스는 다시 한번 사진을 보고 맥주를 크로스 웨이드에게 권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장소는 모르겠어요.] [누나와 함께 있지 않았었나?]


[그런 것 몰라요. 누나와는 좀처럼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물론.] [누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요. 아시겠습니까?] [알 것 같네.] [엄마 집에 있을 때는 가끔 만났지요.] [누나는 데이트 상대를 집에 데리고 오던가?] [예, 엄마가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죠. 고리타분한 분이었죠. 아저씨같이.] [그럴지도 모르지.]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렇지요.] 루이스가 말했다. 그는 한 눈을 찡그리더니 다시 사진을 봤다. [아! 요놈 알아요. 알아요. 생각났어요. 언젠가 누나가 이 사람하고 데이트한 적이 있어요.] [확실한가?] 크로스 웨이드는 프로답게 흥분하지 않았다. [질문하는 쪽은 당신이잖아요?] [그 사람 이름은?] [이름?]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불렀지?] [아, 아. 좀 기다려요. 어니라고 했던가?] [마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것 같아요.] [성은 뭐라고 하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혹시 쇼라고 하지 않았나?] [글쎄요.] 어쩌면 크로스 웨이드는 자기 누나와 데이트한 마틴 쇼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 만나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그 아파트를 나왔다. 복도를 걸어나오면서 그는 루이스의 이름을 리스트에서 지워 버렸다. 한순간도 그는 루이스를 신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스 같은 놈은 흔히 있는 상대다. 간혹 경찰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피해자의 친구와 친척들을 면화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렸지만 크로스 웨이드는 그것이 자기 의무하고 생각했다. 마티의 사진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대답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느낌]-작성된 보고서로는 느낄 수 없는-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렇다 할 수확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본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또한 마틴 쇼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도대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캘린더 살인광은 가짜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어쩌면 범인은 희생자의 이름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녀들을 미행하고, 갈색 머리라는 이유만으로 12 월 5 일에 그녀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11 월 28 일 추수 감사절. 사건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크로스 웨이드는 추수 감사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의혹과 우연의 일치 외에는 마틴 쇼에 관한 어떤 단서도 없었다. 마티와 사만다가 함께 보내는 최초의 추수 감사절이었지만, 마티도 사만다도 가까운 친척이 없었기 때문에 가련하게도 평소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린이 초대를 했지만 거절하고 센트럴 파크를 통과하는 축제 퍼레이드를 잠시 구경하고, 부페 식당에 가서 칠면조 고기를 먹고 조용한 휴일을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고 있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격한 갈등과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가정은 평화로웠다. 11 월 29 일 크로스 웨이드에게는 좌절의 날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는 넬슨의 아버지 장례식 때 어린 두 아들이 찍혀 있는 신문 사진을 일본의 미놀타 카메라가 개발한 기술을 도입한 뉴저지의 하이테크 현상소에 보냈다. 이 현상소에는 옛날 사진을 이용하여 미래의 이미지를 투영해서 성인이 외었을 때의 얼굴 모양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크로스 웨이드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가 보낸 사진은 너무나도 낡고 색이 바래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1 월 30 일 점심때 로긴스가 크로스 웨이드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감시 보고입니다.] 그는 상관에게 말했다. 오전중에 마티를 미행하고 오후와 저녁때의 미행은 다른 수사관에게 맡겼던 것이다. [뭔가 있던가?]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철두철미한 놈입니다.] [그럴 테지. 자네 말투 좀 고쳐야겠어. 놈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해. 여기는 본부야. 경찰서와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지. 좀 문화적으로 하자구.]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사무실로 나갑니다. 주소는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택시를 타고 가는 때도 있고 걸어서 갈 때도 있습니다. 날씨에 따라서.] [누구하고 같이 가지는 않던가?] [그런 기미는 없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대개는 점심 식사하러 나오는 12 시 30 분까지 사무실에 있더군요.] [대개는이라니?] [때에 따라 사업상 약속이 있어 외출할 때도 있습니다. 어디에 가는지 체크해 봤습니다. 행선지는 광고주 회사였습니다. 점심 식사는 혼자 할 때도 있고, 거래처 사람들과 함께 할 때도 있었습니다. 흔히 있는 패턴이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가게를 들여다보는 일도 있지만 우리가 흥미를 끌 만한 일은 하지 않더군요.] [곧장 집으로 돌아갑니다. 대개 그렇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우리는 쇼 부인한테서 입수한 정보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군.]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유감입니다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어, 아서. 이런 강박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보통 엄밀한 의식에 연연하는 법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살인자는 거의 안면이 없는 여자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유기했어. 지금 우리들의 추측으로는 그 살인자의 새로운 목표가 자기 아내가 아닌가 하는 것이지. 이덧은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이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를 용의선상에 떠으로게 하고 있어. 도망가지 않으면 안되는데도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거야. 왜 그가 이러한 짓을 할까?] 로긴스는 또 어깨를 움츠렸다.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이다. [어때, 아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어. 마티는 우리가 쫓고 있는 인물이 아닐지도 몰라. 하느님만이 아시지. 이러한 일은 전에도 있었어. 그래서 우리들은 때때로 엉뚱한 사람을 형무소에 집어넣는 거야.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어. 모형 기차, 12 월 5 일이라는 날짜, 갈색머리의 아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가 없어. 빈틈이 없는 살인범이야. 계속 지켜보는 것이 좋을 거야. 어느 살인 현장에서도 자신의 지문을 깨끗이 지워 버렸어. 머리도 좋고 생각이 깊어. 정신 분열증 환자일지는 모르지만, 그건 일년 중 하루뿐이지. 정말 우리들의 호적수야.] [경감님의 호적수겠지요.] 로긴스가 말했다. 크로스 웨이드에게는 지금 이런 용기를 일으킬 말이 필요했다. [곧 알게 되겠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앞으로 5 일밖에 남지 않았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5 일밖에.]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7 12 월 1 일 크로스 웨이드는 우울했다. [날짜 탓인가? 마치 나도 캘린더 분열증 환자 같군. 12 월 되니까 기분이 이상하군.] 그가 로긴스에게 말했다. 부원들은 수사를 계속하고 크로스 웨이드 자신도 손을 쓸 수 있는 데까지 다시 한번 희생자의 가족들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티에 대한 감시 보고는 두 시간마다 들어왔지만 보고된 내용은 언제나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의 행동뿐이었다. 그러나 조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은 그날 12 월 1 일 오후였다. 사만다와 만난 이래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근본적인 의문-마틴 쇼에 얽힌 진상은 무엇인가-에 최종적인 해답을 준 것이었다. 그는, 사만다에게도 말했듯이 어릴적의 프랭크 넬슨의 의료 기록이 영원히 없어졌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하마 경찰에게는 사태가 절박하므로 조사를 계속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12 월 1 일 속달로 큰 갈색 봉투가 본부에 배달되었다. 안의 편지에는 프랭크 넬슨의 의료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잘못 분류되어 형사 법정의 보관 창고에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료 기록 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재빨리 전문 경찰관이 마티의 주치의한테서 입수한 내용과 그것들을 비교 검토했다. 그들의 눈의 색깔, 피부의 반점, 외상의 흔적들을 조사했다. 기록은 일치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 명백해졌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할 수 있는 대답은 나온 것이다. 수사는 좌절되었다. 그는 절망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규율을 존중하는 우수한 군인과 같이 그는 수화기를 들고 사만다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가 걸려 왔을 때 사만다는 임신하여 무거워진 몸고 파티 준비, 위기에 바진 결혼 탓으로 피로를 느껴 자고 있었다. 벨 소리에 깨어난 그녀는 수화기를 잡았으나 미끄러뜨려 그것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머리를 들고 다시 한번 수화기를 집어 귀에다 갖다대었다. [여보세요?] [쇼 부인?] 크로스 웨이드는 그녀가 몽롱해 있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몰랐다. [네?] [크로스 웨이드입니다.] 사만다는 당황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네.] [쇼 부인,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만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마티의 일이다. 흔들리고 있는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나쁜 소식 같았다. [말씀하세요.] 태연하게 그녀가 말했다. [마틴 쇼는 우리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사만다는 당황해서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다가, 방금 들었던 말의 확실한 증거를 얻으려는 듯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그가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쇼 부인. 당신의 남편은 그 사건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걱정할 만한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간, 안도의 물결이 그녀를 감쌌다. 문자 그대로 어깨의 무거운 짐이 제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티는 살인을 하지 않았다. 연속 살인범이 아니다.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기쁜 뉴스다. 결혼 생활에 희망을 주고, 두 사람이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진실이 이 순간의 즐거움을 방해했다. 좋아, 마티는 크로스 웨이드 뒤쫓고 있는 무서운 살인범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의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가? [다소 안심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남편에 대해서 뭔가 들려 주시지 않겠어요? 결국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시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유감스럽지만 그것이 전혀 없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우리드은 가까스로 찾아낸 의료 기록에 의해서 그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만 알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남편에 대해서 새롭게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 상태로 되돌아 온 것이죠.] [네. 그런 것 같군요.] 사만다가 동의했다. [하지만 쇼 부인, 이렇게 생각해 봐 주십시오. 적어도 당신은 안전합니다. 다른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부인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네.]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저를 불러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내셔도 괜찮습니다. 살인관에 소속되어 있지만 상담에는 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실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마티가 범인이었다고 말씀해 주시기를 거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다면 말씀해 주실 것을.] [그것은 자연스런 감정이지요. 우리들은 누구든지 새로운 소식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끝매듭이 나쁘니까요.] [네, 맞아요.] [행운을 빕니다, 쇼 부인. 당신의 의문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전화를 끊었다. 사실 사만다는 더 이야기를 해 다시 한번 크로스 웨이드가 자신의 문제를 검토해 주길 바랐지만 지금은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살인범을 체포해야 한다. 그녀는 그대로 일어나서 파티 준비를 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한 대로였다. 처음 상태로 되돌아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크로스 웨이드는 마틴 에버릿 쇼의 수사를 끝냈다. 감시를 중단하고 다른 용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성공의 찬스를 거의 포기했던 것이다. 마티는 여전히 사만다가 걸었던 전화에 대해 걱정했다. 그녀는 아직도 전화를 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이것저것 캐고 있을까? 다음 전화 요금 청구서가 나오면 알겠지만 그것은 12 우러 5 일 이후에 나올 것이다. 전화 회사에 연락해서 기록을 체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의혹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그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이미 12 월 1 일이 되었으므로 그 의문에 조급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조그만 참자. 그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것이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참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프랭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너는 무슨 일이든지 할 것이다. 그는 록펠러 센터 근처의 보석점으로 들어갔다. 사투리는 강하지만 매력적인 억양으로 말하는, 러시아에서 이민 온


자그마한 부인이 산뜻한 잿빛 옷을 입고 계산대에 서 있었다. 그 차갑고 빈틈없는 눈이 진열 케이스로 향하는 마티의 모습을 뒤쫓았다. 거기에는 몇 개의 금목걸이가 진열되어 감색 비로드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목걸이를 하나하나 열심히 바라보았다. 보석점의 여자는 이 사람이 찾는 것이 중요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아서 로긴스가 살인 사건에서 범인이 취하는 행동을 잘 알고 있듯이, 그녀는 남자들이 진열 케이스 앞에서 취하는 행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것은 소중한 선물인 것이다. 결혼 기념일, 생일, 아기 탄생 기념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마티 쪽으로 걸어왔다. 성급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친절하게 대하는 거다. [특이한 것을 찾고 계시나요?] 주인 여자가물었다. 너무나 열심히 케이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므로, 잠시 마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펜던트가 있는 금목걸이를 원하는데요. 금으로 둘러싼 빨간 돌이 달린 것.] [알겠습니다.] 슬라브 어 특유의 [r]을 혀끝을 마는 듯하게 발음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런 거라면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분에게 드릴 선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지금 보여 드리겠어요.] 그녀는 케이스 아래 서랍에 손을 넣어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꺼냈다. 마티의 주문에 맞을 것 같은 것이 두세 개 있었다. [모두 멋있는 것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물론 우리 가게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품질을 보증합니다.] [알고 있어요.] 마티가 말했다. [전에도 여기서 물건을 산 적이 있어요.] 그는 몇 개의 목걸이를 주의깊게 음미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는 펜던트를 어머니에게 사주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돈을 저축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고마움의 표시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동생 것보다 크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목에 걸고 있었다. 그날 밤 12 월 5 일에도 하고 있었다 해머를 머리 위로 크게 휘둘렀을 때 목걸이가 어떻게 흔들렸던가. 그것은 가는 줄에 매달려서 미친 듯이 앞뒤로 흔들렸었다. 그 순간, 마티의 눈이 한 개의 목걸이에 고정되었다. [이것으로 하지요.] 마티는 그렇게 말하고 가격을 물었다. 보통 물건을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주인 여자는 그것을 받아 그녀의 통통한 작은 손 위에 올려놓았다. [125 달러입니다. 세금을 별도고요.] 그 선택에는 자신도 찬성이라는 듯 그녀는 마티에게 미소를


지었다. 100 달러 이상의 선택이라면 언제라도 찬성인 것이다. [좋아요.] 그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골드 카드를 꺼내 카운터 위에 놓았다. 어차피 대금은 지불되지 않을 것이다. 목걸이는 마티의 주문대로 하얀 상자에 넣어져 조심스럽게 선물용으로 포장되고 파란 리본으로 장식됐다. 그는 그것을 사만다에게 선물하고 파티에 목걸이를 하고 나오게 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되어 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이 의식의 게절이 되면 흔히 그랬듯이 마티는 문을 잠그고 모든 전화를 보류해 두도록 말해 두었다. 그리고 펜과 종이를 꺼내 40 년의 생애에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유일한 인물, 어디를 걷고 있어도 여전히 그 존재를 느끼는 인물에게 보내기 위해 또다시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아버님께 그날이 다가옵니다. 멋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하지만 샘으로 인해 조금 성가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제가 이야기한 것이 거의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꼭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프랭키 추신: 저는 기차를 구했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금고에 넣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놓고 인터폰을 눌렀다. 로이스가 들어왔다. [로이스, 가족이 많아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려면 힘들다는 거 알고 있어. 어때, 휴가 전에 2,3 일 쉰다면? 언제든지쉬고 싶으면 쉬도록 하지.] 로이스는 그 배려에 굉장히 감동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티는 겸연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인사는 됐어. 그리고 다른 것도 있어. 로이스, 지금까지 나를 아주 잘 도와주었어. 때로는 내 멋대로 말하곤 했는데......] [아니에요. 당치도 않아요.] 마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를 꺼내며 말했다. [아니, 정말이야. 무엇을 사야 좋을지 몰라서 그러니까, 스스로 사라구. 그리고 식구들한테도 좋아하는 걸 사주고.] 그는 로이스에게 지폐를 건네주었다. 백 달러짜리였다. 마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12 월 1 일이 지나갔다. 12 월 2 일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크로스 웨이드에게 지폐를 건네주었다. 백 달러짜리였다. 마티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12 월 1 일이 지나갔다. 12 월 2 일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크로스 웨이드가 좌절했던 수사에 고민하고 있을 무렵, 마틴 쇼는 결정적인 날에 거행될 마지막 중대한 의식의 준비를 이미 해두었다. 제 1 단계는 12 월 3 일 아침, 사무실에서 사만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절박한 목소리와 약간 유감스런 투로 말했다. [샘, 급한 일이 생겼어.] 사만다는 이미 도착된 파티용 테이블로 둘러보고 있었다. 마티의 그런 목소리를 그녀는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나쁜 뉴스, 붕괴의 예고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요, 마티?] 그녀가 물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작은 문제가 생겼어.] 마티가 대답했다.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하면서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우리 고객이 소송 사건에 말려들었지. 광고가 원인이라는 거야. 곧 가봐야겠어. 오늘 즉시.] [마티.] [괜찮아. 파티는 걱정하지 마. 24 시간 안으로 꼭 들어올께. 어느 광고주라도 나를 잡아둘 수는 없어.] [그 말을 들으니 일단 안심했어요. 꼭 돌아오세요......] [샘, 일보다 우선 순위가 당신이야.] 순간, 붙임성 좋고 센티멘털하고 애정깊고 동정심이 많은 옛날의 마티가 되살아났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주름 사이에서, 사만다가 어떻게든지 다시 한번 더 되살아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에 묵으실 거예요?] 연필을 집으며 그녀가 물었다. [아직 몰라. 어쨌든 오늘은 거의 연락을 못할지 몰라. 그 고객은 전화나 신문 기자를 피해서 호텔에 숨어 있어. 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다시 연락할게.] [네, 좋아요.] [그리고 샘...... 회사 직원들은 내가 여행하는 진짜 이유를 몰라. 잠시 덮어 두고 싶어. 알겠지만 소문이란 퍼지기 쉬운 거야. 거래처와 약속이 있다고 해뒀어. 사무실에 전화를 할 때에는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해줘.] [잊지 않을게요.] 사만다가 말했다. [그래도 파티가 눈앞에 있는데, 당신이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해야 하다니 유감이에요.] [아, 나도 마찬가지야. 알고 있겠지만 오늘 밤은 집에 돌아가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럼 정말로 즐거울 텐데. 그런데 세인트루이스의 바보들이 변호사 몇 사람을 고용하고 있어 이렇게 됐다니까.] 노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가 나 있는 목소리였다. [좋아요. 당신, 내일은 꼭 돌아와야 해요. 제가 모든 걸 다 준비해 둘게요.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그야 잘 알지. 너무 거창하게 하지 않도록 해. 듣고 있는 거야? 대통령 취임 축하 파티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알았어요. 우선......] 그녀는 머뭇거렸다. 하마터면 아기 이야기를 할 뻔했다. [우선 뭐야?] 마티가 놀란 듯이 물었다. [우선, 실질적으로는 연회 담당자가 무엇이든지 처리해 주겠다는 거예요.]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마티는 전화를 통해서 키스했다. 분별없는 짓은 하지 않는 거다. 감동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제스처다. 또다시 사만다는 뿌리깊은 낙천주의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마티의 비밀은 좋은 비밀, 정당한 이유가 있는 자랑할 만한 비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항상 어쩌면이란 가정 아래서 맴돌고 말지만. 사만다는 수화기에 대고 키스해 주었다. 유나이티드 항공의 정기편은 오후 일찍 세인트루이스 상공에 이르러, 이 대도시를 상징하는 번쩍거리는 거대한 아치가 마티의 눈에 들어왔다. 몇 분 후 그는 지상에 내려섰다. 뒤이어 터미널로 들어가서 기다렸다. 그는 시내로 나가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비서는 마틴 쇼의 이름으로 세인트루이스 행 비행기편을 예약해 두었었다. 그러나 라가디아 공항에 도착하자 그는 현금을 지불하고 추가 탑승권을 프랭크 넬슨 명의로 샀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자신의 가족 이름을 기리는 제물이며 아버지에 대한 경의였다. 그가 산 티켓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오마하로 가는 항공권이었다. 지금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그는 이미 오마하 시간으로 고쳐진 자신의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늘은 오후 1 시 55 분을 가리켰다. 오마하 행 비행기는 2 시 반에 있었다. 지금 그는 프랭크 넬슨이었다. 또다시 프랭크 넬슨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머지않아 집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는 선글라스가 상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만일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다. 그가 그곳에 살았던 것도 벌써 한 세대가 지났지만 오마하 행 비행기에 타고 있는 누군가각 자기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아메리칸 항공의 탑승구를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보잉 727 기에 올랐다. 제트 엔진이 기체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오마하를 목표로 서쪽으로 향하자 마티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좌석 너머로 다른 승객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없을까? 연속 살인범이 타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연례적인 의식이-뉴욕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죄없는 여자를 죽이는 의식이-거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뭐라고 말할까? [무얼 드시겠습니까?] 서비스 수레를 밀고 통로로 다가선 스튜어디스가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마티가 대답했다. 마실 것 따위를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도시의 회색이 전원 지대에 펼쳐지는 녹색 지대는 그가 자라나서 일생 동안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중서부 지방을 나타내고 있었다. [오마하에 사십니까?]


옆에 앉은 남자가 물었다. 손질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회색 콧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아, 아닙니다. 방문차 가는 길입니다.] 마티가 대답했다. [아아, 그래요.] 보잉기가 급격히 고도를 낯추었다. 그러자 노인이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으로 짧은 대화도 끝났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마티의 예상은 금방 빗나갔다. 노인은 그에게 다시 말을 붙여 왔다. [오마하에는 언제까지 살았나?] 마티는 안색이 변하면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걸......] [아니, 그저 그렇게 앉아 있길래 물어 보는 걸세. 한두 마디로 알수 있지. 사투리를 깨끗하게 없앨 수는 없지. 아마 지금은 동부에 살고 있나 보군.] [네.] [그것 봐, 동부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다 사투리를 없애길 원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야. 젊은이, 오마하는 훌륭한 곳이다.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마티에게 윙크를 했다. 꾸짖는 듯한 윙크였다. [충분히 자랑할 만합니다.] 마티가 대답했다. 웬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젊었으 때 그곳을 떠났기 때문에 사투리가 약해졌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쭉 여기서 살아 왔네. 딴 곳으로 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 이런 대화쯤이야 지금으로서는 괜찮은 일이라고 마티는 생각했다. 열광적으로 본고장 편을 드는 것도 당연하다. 좌석을 옮겨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설교조로 말하는 잔소리는 그만 두었으면 싶었다. [어느 지역에 살았는가?] 노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노인은 지금 마티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코올로 충혈된 눈과 역한 스카치 냄새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북쪽으로 떨어진 곳입니다.] 마티는 재빨리 대답하고 나서 앞좌석 포켓에서 잡지를 꺼냈다. [나도 그쪽이지.] 그 지역 후원회 회장이라고 소개한 노인이 반갑다는 투로 말했다. 마티는 날카롭고 차가운 것이 전신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잠깐, 이 노인은 나의 과거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의 어린 시절의 일을 알고 있는지도. 아마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건 아닐까?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알아볼지 모른다. [이거야, 원.] 잡지를 넘기면서 마티가 기사 내용을 보고 투덜댔다. [자네, 이름이 뭔가?] 마티는 순간 읽는 것을 중지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베이, 런 하베이입니다.] 마티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듀런트야.] [반갑습니다, 미스터 듀턴트.] 잘 생각해서 대답해야 한다고 마티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쫓아 버려야 한다. [아뇨, 금방은.] [그거 유감스럽군. 뭐하면 내 차를 보내서 쓰게 하고 싶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자네가 마음에 들었네.] [원, 별말씀을.] [언제든지 차를 보내 주고 싶네. 미안해할 필요없네. 오마하 사람들끼리의 인정이지.] [그런데 죄송합니다. 일 관계로 누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알았네.] 듀런트가 낮게 대답했다. [뭔가 도움을 주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곳에서 또 만나자구. 즐거울 걸세.] 마티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이 할아범이 취해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별로 특별한 위험은 아니라 할지라도. 설영 또 우연히 만났다 해도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아니다. 나를 괴롭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노인은 그럴지도 모른다. 이 노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자고 마티는 결심했다. 오마하에 착륙할 때는 요동이 심했다. 마티는 듀런트보다 한발 앞서 밖으로 나와 노인을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남겨 두고 힘차게 걸어갔다.듀런트는 수하물 계산대로 향했지만 마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틀분의 최소한 필요한 것만을 넣은 작은 여행 가방을 사무실에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것을 갖고 비행기에 탑승했던 것이다. 안녕, 미스터 듀런트. 앞으로 2,3 일은 정신없이 술에 취해 무엇이든 잊어 주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차를 빌리기 위해 마티는 렌터카 회사인 허츠의 카운터로 가, 그곳에서도 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사용했다. 청구서가 도착할 무렵이면 자신은 먼 곳에 있을 것이다. [어떤 차를 원하십니까?] 파란 제복을 입은 카운터 아가씨가 물었다. [뷰액 센추리.] 그녀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 차종은 다 나가고 없습니다. 크라이슬러의 르바롱이 있는데요.] [그것이라도 좋소.] 그가 대답하고 면허증과 크레디트 카드를 내보이자, 허츠의 버스가 그를 차량을 인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갔다. 차는 최신형 투 도어 푸른색 르바롱인데, 대시 보드의 재떨이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 지방의 지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찾아와서 이 길을 달렸으므로 인디애나의 엘크하트나 일리노이의


에번스턴-과거를 꾸며낼 때 사용했던 도시-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곳도 눈에 훤했다. 그는 천천히 주의깊게 운전해다. 지금은 사고를 일으키거나, 오마하의 교통 경찰의 주의를 받을 때가 아니다. 빗방울이 프런트 유리에 닿기 시작하자 갑자기 그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연료계를 체크했다.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머무는 동안 이 이상의 가솔린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눌렀다. 농사 정보에 대한 뉴스가 나오자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50 년대 노래 <사랑과 결혼>이 흘러나오자 향수에 젖어들었다. 지금의 기분과 딱 들어맞았다. 마티는 그 음악을 동행자로 삼아 그리운 추억이 담긴 곳까지 차를 달렸다. 그리운 추억이 있는 곳. 벽이 판자로 된 집들. 어떤 것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고 어떤 것은 고립되어 있는 마을. 정말로 시골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마하 중심부에서 겨우 11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바둑판 눈금처럼 반듯한 도로와 상점가가 있고 몇 블록씩 주택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마음의 상태와 같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는 마을이었다. 큰길 하나에 몇 개의 뒷골목, 가로등이 설치된 곳은 없다. 한 곳의 슈퍼와 철물점과 일과를 끝낸 비행기 부품 공장의 남자들이 많이 모이는 정해진 술집을 포함해 몇 군데의 가게가 있을 뿐이다. 그곳은 성실하고 야심적인 사람들이 도시로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아주 외진 곳 중의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결코 변하지도 않고, 시대의 흐름을 타지도 않고, 현대적인 삶과 어우러질 수도 없는 시골의 한구석이기 때문이다. 이름없는 땅. 마티는 어떤 집을 보았다. 딴 집들과 떨어져 민둥산의 작은 언덕 위에 우뚝 선, 핑크빛을 띤 녹색의 기묘한 판잣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집에 색을 칠했다. 버려진 집. 여기저기 판자를 댄 집. 우리 집. [돌아왔다, 지금 돌아왔어, 프랭키.] 마티는 그 목소리를 생각해 냈다. 그는 집 옆에 잠시 멈춰 섰다. 그때도 아버지는 버스로 돌아왔다. 차가 고장났는데도 그것을 수리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랭키, 어디에 있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밝았다. 아물 가난했어도 그 목소리는 언제나 밝았다. 지금 마티는 집 앞으로 향해 뛰어갔다. 마치 저 12 월 5 일에 그렇게 했듯이.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커다란 종이 상자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 프랭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프랭키는 금방 알았다. 그는 언제나 그것이 갖고 싶다고 말해 왔던 것이다. 기차, 기차, 기차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약속했다. [이다음 네 생일에 사주마. 만약 여유가 생긴다면.] 여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고 나가서 모형 기차를 사주었다. 망가진 자동차를 차고에 넣고 최신형 전기 기차를 두 팔에 안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아버지는 몽상가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자, 집으로 들어가자, 프랭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마티는 현관 계단을 올라갔다. 집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몇 년 전과 똑같았다. 살인이 있었던 집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사려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들여다볼 수는 있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좀도둑도 이 집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웃고 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모형 기차가 들어 있는 종이 상자를 보고 갑자기 화를 냈었다. [주책 좀 작작 떨어, 이 게으름뱅이야!]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었다.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를 그렇게 힐책했었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즐거웠던 한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와 동생 제이미를 상대로 베개 던지기 놀이를 하던 아버지를. 오래 도니 밴조를 치며 유럽의 전쟁 노래를 불러 주던 아버지를. 일할 곳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아버지. 전화기는 이미 없어졌지만 전화선이 아직 거실 벽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 되어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베개가 12 월 5 일 밤 뒹굴고 있었던 때와 똑같이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놓여 있다. 아, 모두가 똑같다. 정말로 오래 된 RCA 의 30 형 텔레비전까지 그대로다. 유령들은 이렇게까지 우수한 비호자, 경건한 밤의 파수꾼이었다. 좋아, 아버지가 만졌던 물건은 절대로 누구도 만질 수 없어.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뭘 찾습니까?] 마티는 홱 돌아보았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만 다가오는 차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것이다. 오마하 경찰의 순찰차가 서 있었다. 거기에 탄 경관이 선글라스를 낀 채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 호기심이 나서요.] 마티가 대답했다. 쓰고 있는 선글라스만이 유일한 방패막이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순간, 자기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근이 마음에 들어서요. 이 오래 된 집은 팔 집인가요?] 경찰은 어깨를 움츠렸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물어 보면 될 겁니다. 그 집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요.] [그래요?] [거기서 아내가 남편을 때려죽였지요.] [뭐라고요?] [대단한 소동이었다고 하더군요. 50 년대에 그랬다지요.] [별로 듣기 좋은 얘기가 아니군요.] [누구도 진심으로 그 집을 원하는 사람은 없어요.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저 도로를 1 마일 정도 가면 부동산 중개소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게 되어서.]


[천만의 말씀을.] 경관은 짧게 말하고 사라졌다. 마티는 곰곰이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가장 경건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을 때 9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까지 경관이 다가왔다. 그런데 상대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가를. 마티는 근처를 슬슬 거닐기로 하고, 축구의 기초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로 가득 찬 국민 학교의 잔디 운동장과 최고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던 에이버리 하우스와 마시 의사의 집 앞을 지났다.지금은 치과의사의 소유로 되어 있는, 나무와 벽돌로 지은 그집 앞에서 발을 멈추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마시 의사는 성심성의를 다해 주었었다.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개중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몇 사람 낯익은 얼굴도 만났지만 그들은 선글라스를 낀 마티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마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은 사람들이었다. 1952 년 12 월 5 일 이전의 옛날 일에 관해서조차 그들과 서로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후, 그들은 마티와 동생에게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않았다. 외면하고 멀리했다. 거리에서 프링크와 그의 동생을 만나면 피해서 지나갔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었지만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갑자기 마티는 목 안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지는 알았다. 모퉁이를 돌아서 바로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더욱더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영구차가 이 울퉁불통한 길을 올라오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집 창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식 행렬에 경찰차가 따라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는 ㅌ별했던 것이다. 살인 사건 희생자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유족을 괴롭히면 안되므로 경찰차가 따라왔다. 그래도 몇 사람은 다가와서 심술궂은 눈으로 보거나 손가락질을 해대기도 하였다. 그 중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굉장히 지독한 남편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을 프랭크는 들었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래 된 묘지는 손질이 안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마하에서 딴 곳으로 이사갈 때 관리비조차 지불하지 않고 떠나기 때문에 묘지는 방지된 채 그대로 있었다. 부모나 배우자, 자식들의 유골에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함에도, 교회의 관대함이나 관리자의 선의만을 바라는 행위였다. 다소의 경의는 표시되고 있지만 말끔히 단장하는 데는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풀은 마음대로 자라나 있었다. 축대가 허물어져 몇 개의 돌이 뒹굴고 있고, 묘비에 휘갈겨 쓴 천한 낙서는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마티는 화가 났다. 아버지는 이런 곳에 매장되어 있어야 할 분이 아니다. 좀더 좋은 장소에 묻혀 있어야 될 것이다. 주위에는 올리브 나무가 자라고, 골프 코스로 해도 좋을 정도로 잔디가 푸릇푸릇하고, 화단에는 산들바람이 부는 그런 언덕의 비탈진 묘지에다 모셔야 한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곳이 어울린다. 마티는 이를 갈며 분통해했다. 아버지를 옮겨 줄 만한


돈은 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묘지를 옮기려면 재판소의 허가가 필요하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게 하면 모두가 엉망이 될 것이다. 아버지 묘의 손질에 드는 비용을 익명으로 기부해도 의혹을 초래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지금은 현상태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곳에는 수위도 없었다. 마티는 녹슬어 망가진 문을 빠져나와 잠시 발을 멈추고 우울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해서, 1952 년 저 괴롭고 슬픈 날에 걸었던 똑같은 코스로 발길을 옮겼다. 발 밑에서 풀이 바삭바삭 소리를 냈다. 이 추운 날 묘지를 찾아온 사라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길의 잡초는 한 군데도 짓밟혀 있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묘석 뒤에서 검은 개가 뛰어나와서 짖기 시작했다. 마티는 감짝 놀라 얼어붙었다. 목걸이도 검사표도 없었다. 아주 무섭고 험상궂은 개였다. 마티를 개를 안심시키려고 웃기 시작하였다. 개는 계속 짖다가 나중에는 방향을 바꾸어 사라졌다. 마티는 또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한기를 느끼게 되자, 마치 사진처럼 정확히 1952 년 어느 날의 이미지가 되살아났다. 왼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앨 라이더의 묘가 있다. 1952 년 앨의 유해가 한국에서 돌아온 직후 그곳에 성조기가 세워져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그 수는 적었지만 아직껏 손질이 되어 있는 묘의 하나였다. 양친이 아직 건재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아버지다. 다른 묘지들 사이에 억지로 밀어넣어져 있는 듯한 상태로, 가장 싸고 얇은 묘비가 서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15 도 각도로 앞으로 기울어져 토대가 지면에서 빠질 듯이 보였다. 묘비명의 한 부분에 흙이 묻어 있지만 아직은 분명하게 알아볼 수있었다. [존 앨버트 넬슨, 1916-1952]짧은 시간을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일 지금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그는 묘비가 기울어져 있는 것을 무시하고 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누워 계실까? 나이가 들어서야 유해가 위를 햐해 자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도 아버지의 장례식 때와 똑같이 의아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장례 의식이 똑같아야 할 조항이라도 있는 걸까? 아버지의 관은 예배가 한창일 때 닫혔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누가 뚜렷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장례식 담당자가 땅 속에 묻히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아버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었을가 생각하며 마티는 먼 하느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표정으로 묻힌 것일까? [이 목재 운반차가 마음에 드니, 프랭키?] 마티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고 생생하게 들려 마치 묘지 위에 부는 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이것은 신형 목재 운반차란다. 자동시이지. 아버지는 가게에서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단다. 하지만 이 통나무를 한 개도 잃어버려선 안돼. 알았지?] 마티는 자신이 통나무를 한 개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했다. 목재 운반차 세트를 두고 회사에 나갈 때에도


통나무는 갖고 있다. 아버지가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어쩌면 저는 한동안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묘비를 바라보며 그는 속삭였다. [하지만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증명해 보일게요. 그런 짓을 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요? 틀림없이 제가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그는 바싹 다가가서 묘비를 똑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일은 표면의 흙을 깨끗이 닦아 주는 것뿐이었다. [안심하고 기다리세요, 아버지. 준비는 모두 되어 있어요. 저는 아직도 기차를 갖고 놀고 있어요. 아버지 대신 크리스마스 카드의 답장도 썼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RCA 30 형 텔레비전도 손에 넣었어요. 지금은 비디오 카세트 리코더라는 편리한 기계도 있어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기록한 테이프를 재생하는 기계지요. 저는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옛날 테이프를 손에 넣었어요. 아버지가 언젠가 그의 프로그램을 보시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것을 12 월 5 일 밤에 볼 생각이에요. 당신을 위해서요, 아버지.] 갑자기 사만다의 모습이 마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갈색 머리 아래오 겹쳐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 뿐이고, 들려오는 것은 마구 외쳐대는 어머니의 목소리뿐이었다. 그의 일그러진 마음속에서 사만다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저는 단 한 번 당신의 기대에 따르지 못하고 실패했어요. 1952 년 12 월 5 일에요. 저는 당신을 구해야만 했었는데 실패했어요. 절대로 또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않을 겁니다.] 그는 일어서서 한 걸음 물러났다.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다음에 올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을 테니까요.] 그는 묘지를 떠났다.

8 연회 담당 회사 사람들이 12 월 5 일 파티를 위해 의자와 테이블을 운반해 왔다. 사만다와 린은 그들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사만다는 파티 배치 도면을 한 손에 들고 때때로 물건의 위치를 지시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까? 중요한 파티는 내일로 다가왔다. 남편은 무서운 살인죄의 혐의가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남편이 머지않아 아버지가 된다. 테이블 위에 덮개가 덮이기 시작하자 자제심이 천천히 풀어지고 기대감이 생겨나면서 야릇한 심리 상태에 빠져들었다. 린은 뛰어난 치어리더였었다. 여전히 그녀는 수수께끼에 싸인 마티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만다는 그녀에게 마티의 옛 친구를 찾기가 힘들다고만 말해 두었다. 찾기가 너무 어렵고, 초청하는 데 돈이 너무 든다고 말했다.


린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이쪽이에요.] 사만다가 지시하자 작업원은 방향을 돌려 원형 테이블을 거실 입구 가까이 갖고 갔다. [저건 망가진 것 같은데......] 작업원 한 사람이 바로 서지 않는 테이블을 무리하게 놓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린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사만다가 그쪽을 보자 상대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을 다른 것과 바꾸어 놓았다. 가구 일부는 방의 벽에 붙여 놓고, 몇 개는 린의 아파트에 옮겨 놓았다. [업소처럼 보이지 않아?] 작업이 다 끝나자 사만다가 말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 나는 한 달에 네 번이나 화랑에서 파티를 열고 있어. 이만하면 최상이야.] [마티가 마음에 들어할까?] 사만다가 물었다. [마음에 드는 게 문제가 아니야. 자신을 위해서 파티를 연다면 누구라도 감격할 거야. 이것이 미국식이지.] 피티를 하루 앞두고 마티는 지금쯤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사만다는 알고 있었다. 어젯밤 세인트루이스의 호텔에서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신뢰를 얻기 위해 그는 그 호텔에 머물렀다. 마틴 쇼는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린이 말했듯이 마티는 이 파티를 마음에 들어할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이 특별한 밤, 12 월 5 일을 선택해서 자신의 중대한 비밀을 밝힐지도 모른다. 파티의 밤에 이 수수께끼가 밝혀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녀는 그런 방향으로 생각을 몰아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이야말로 마티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사만다의 생각과 달랐다. [쇼 부인?] 사만다는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20 세 정도의 작은 체격의 젊은 남자가 입구에 서 있었다. [네?] [디멘션 비디오의 닉 아워백입니다. 저를 파티에 초청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도어맨이 올라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아, 그래요.] 붙임성있는 미소를 띠며 사만다가 말했다. 이름을 듣고 이해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아워백이 파티의 비디오 촬영을 담당하게 되어 있어 촬영 장소에 대한 예비 조사를 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대로 구셩하세요.] 아워백은 아무 기재도 갖고 오지 않았다. 클립보드와 연필만 갖고 있었다. 사만다가 아파트를 안내하자 그는 간단한 스케치를 하고, 치수와 테이블의 배치, 벽 색깔을 적었다. 그 일이 끝나자 소파에 사만다와 함께 앉았다. [몇 가지 여쭤 볼 게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말씀하세요.] [간단한 기념식이나 선물 증정식 같은 것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것은 없는데요.] [실례하겠어요. 뭔가 빠진 것이 있지 않을까?] 린이 끼여들었다. 사만다가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린은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그런 중요한 것을 잊다니, 사만다는 어이가 없었다. [중요한 게 있어요.] 그녀는 아워백에게 말했다. [안쪽 테이블에서 제가 손님들에게 알릴 게 있어요. 특별한 것을요. 그때가 되면 신호를 할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아워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만다는 말랐지만 늠름한 몸매를 한 그가 젊은 데 놀랐다. 훨씬 나이 든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워백이 아직 학생이고 아르바이트로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는 다시 여러가지를 물었다. 클로즈업이 필요한 참석자들이 있는지 어떤지? 손님과의 인터뷰를 희망하는지 어떤지? 미리 피해야 할 것이 있는지. 화면에 나오면 안될 물건이나 사람이 있는지. 말만 들어도 사만다의 상상 이상으로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파티라는 것이 매우 정치적인 성격이 짙은 모임이기 때문에 비디오 카메라가 적절한 장면을 촬영해야 하고, 주인이 의도하는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을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아워백은 알고 있었다. 테이프는 결혼 기념 앨범의 현대판이고, 그 화면은 취사 선택되어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나쁘게 보이도록 조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경력 소개는 어떻게 하지요?] 마지막으로 아워백이 물었다. [경력 소개?] 마지막 테이블의 놓여지는 소리 때문에 정확히 듣지 못한 사만다가 되물었다. [네, 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때때로 주인공이 과거에 찍은 사진을 구해서 편집할 때 집어넣죠. 혹시 주인어른의 학생 시절 기념 사진이라든가, 앨범, 가능하면 8 밀리 영화가 있으면......] 사만다는 어뚱한 사람한테서 정통으로 아픈 데를 찔렸다고 생각했다. 경력 소개? 그런 것이 발견된다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뇨, 남편은 그런 것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에요.]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보류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좋아요. 타이틀만 갖고 진행해도 상관없겠지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요.] [화면에 자막이 나오고 말로 설명하는 것이지요. 태어난 고향의 거리라든가 대학이라든가 회사, 그런 것을요.]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아니면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표현해야 좋을지 사만다는 난감했다. [그것도 빼는 편이 좋겠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매우 멋없는 테이프가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이 그저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밖에 되지 않을지도.] [그렇게 된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만다의 목소리는 의기 소침해 있었다. [하지만 활기 넘치는 파티가 될 테니까 괜찮아요. 온화한 느낌은 충분히 낼 거라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아워백은 돌아갔다. 작업원이 테이블에 하얀 테이블보를 다 깔자 사만다는 거기에서 린이 말했던 우아함을 발견했다. 호화로운 스타일에 화려함이 곁들여져 아파트는 새로운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다른 것들이 준비되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놓인 식기 세트, 식탁 중앙의 장식물, 은그릇, 한쪽편에 설치한 자그마한 밴드. 평생 잊을 수 없는 파티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것이다. 그렇게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표시등을 밝히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경찰 순찰차가 맨해튼의 시가지를 맹렬하게 돌진해 달리고 있었다. 앞에 가는 차들은 순찰차가 통과하기 쉽도록 오른쪽으로 비켰다. 순찰차의 운전석에는 젊은 교통 경찰이 앉아 있었다. 스펜서 크로스 웨이드는 아서 로긴스와 함께 순찰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오른손에, 마치 거기에 국가적 중요 기밀이라도 들어 있는 듯이 커다란 갈색 봉투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말이 없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지금 방금 일어난 일을 어떤 식으로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것과, 앞으로의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여러 모로 생각하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캘린더 살인 사건의 수사가 암초에 걸렸을 때에 느꼈던 그런 당혹감과 자기 혐오를 느끼고 있었다. 차는 빠른 속력으로 센트럴 파크 웨스트에 당도하여 전속력으로 주택 지구 쪽으로 향했다. 지금 크로스 웨이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해야 할 것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당혹해하면서도, 한 가닥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만다의 심정을 생각하면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어맨에게 인터폰으로 자신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사만다는 처음에 그가 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사실 잠깐 사이였지만 정말로 그 사람인가 하고 확인했다. 그래서 크로스 웨이드는 인터폰으로 공무 때문에 꼭 만날 일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와 로긴스는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로 향했다. 사만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크로스 웨이드가 이렇게 창백한 얼굴로 동요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티와 관계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형사들이 들어왔다. 작업원과 린은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바쁘신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사만다는 자리에 앉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불필요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ㄲ라았다. 여전히 갈색 봉투를 단단히 잡은 채 크로스 웨이드는 곧바로 사만다를 보며 말했다. [쇼 부인, 우리를 보고 놀라셨을 겁니다.] [네.] 사만다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쩌면 우리가 모습을 감추고 두번 다시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지요?] [네, 어떤 의미에서는.]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그 고뇌를 느꼈다. [마티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시군요.] 그녀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사만다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비밀이 좋은 비밀이면 좋겠어요. 무엇을 했습니까? 돈이라도 훔쳤나요?] 크로스 웨이드는사만다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있는 데 낙담했다. 그녀는 단지 가벼운 죄, 용서받을 수 있는 도덕상의 과실이 발견된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해 주세요.] 그가 곧 대답하지 않자 사만다가 재촉했다. 그녀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파티용 테이블을 배치하고 있을 때의 즐거운 기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파티를 끝낸 다음 아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알아 두겠어요.] [쇼 부인.] 크로스 웨이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얘기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침실을 다시 한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사만다는깜짝 놀랐다. [왜요?] [중요한 일입니다.] 사만다는 아무 말 없이 크로스 웨이드를 침실로 안내했다. 입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틀림없습니다.] 대충 둘러본 후 그가 말했다. [역시 우리들이 생각했던 대로입니다.] [무엇이 생각했던 대로인가요?] 사만다가 물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대답하기 전에 사만다를 소파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자기도 옆에 앉았다. [부인, 알고 계시듯이 우리들은 이 의료 기록을 받은 후 남편에 대한 수사를 취소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이겠지요.]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취소했던 일이 자동적으로 진행되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일전에 저는 오마하 경찰에 프랭크 넬슨의 집을 사진 찍어 보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만, 내부의 사진을 잊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내부의 사진도 보내 주도록 다시 한번 재촉했었습니다. 그것이 드디어 오늘 도착했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는 갈색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요?] 사만다가 물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몇장의 8x10 인치의 광택 인화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사만다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보는 사만다의 눈이 커졌다. [아니, 뭐야 이것이?]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크로스 웨이드를 쳐다봤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의 반응을 인정하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진을 바라보다가 그 중 한 장을 집어들었다. 사진에는 마티가 배치를 바꾼 아파트의 침실과 정말 똑같이 배치된 옛날 넬슨의 집 침실이 찍혀 있었다. 한쪽 벽에는 마티가 걸었던 것과 거의 흡사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창문이나 라디에이터를 가구로 막고 있는 부분까지 똑같은 이상한 배치였다. 게다가 다른 사진에는 낡아빠진 채 먼지를 덮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RCA 30 형 텔레비전이 찍혀 있었다. 사만다는 이러한 모든 것에 쇼크를 받고 곤혹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보시는 대로 확실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하지만 으료 기록에는......]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생각했어요?]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에게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다가 다시 절멍적인 표정을 지었다. [쇼 부인, 저는 오랫동안 경찰 생확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들 동료 누구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확실히 우리들은 프랭크 넬슨 명의의 기록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남편 것과 비교해 보았습니다만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댁의 침실과 넬슨 집의 사진을 보자 진상은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어째서 의료 기록은 일치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라벨을 잘못 붙여서 다른 사람의 기록이 보내져 온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단순한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쇼 부인, 당신의 남편은 프랭크 넬슨입니다.] 사만다는 천천히 일어나 다시 한번 침실로 들어갔다.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사만다는 실내를 둘러보고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마티는 이런 일을 했을까요?] 그녀는 그렇게 묻는 것으로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했다. [어째서 방의 배치를 똑같이 했을까요?] [아마 어떤 의식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아마 여기에 그의 어린 시절의 집착이 반영되어 있을 겁니다. 즉 그 사건 이전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기 이전이라는 것이겠죠?] [유가므럽지만 그래요. 그 당신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사만다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살인자란 말이군요.] 그녀는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그장애물은 뛰어넘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남편이 살인자라니.] 정신이 아찔해지기 시작해서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 앉았다. [믿을 수 없어요.] [당연한 일입니다.] 진심으로 동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사만다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마티를 의심하게 하고, 다음엔 무죄 방면했다가 지금 또 고발하고 있으니,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잔혹한 짓을 한 것이다. [이것이 부인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오셨으니 얼마간 그 용기를 잃으시면 안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사만다는 잘 알았다. 오늘은 12 월 4 일이었다. [그럼 제가 목표군요. 그 사람의......] [그렇게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단순한 그의 아내가 아닙니다. 지금은......] 크로스 웨이드는 한참을 주저하다 말했다. 그는 마틴 쇼의 이상 심리의 애매모호함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지금 당신은 그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사만다는 넋이 빠져 그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멋지군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두 명의 아기를 얻었어요. 한 사람은 해머와 체인을 갖고 있지만요.]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는 서로 물끄러미 시선을 주고받았다. 가능하다면 사만다의 고통을 자신들이 모두 책임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요?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사만다가 물었다. [남편을 저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저에게? 그를 저지하라고요? 어째서 다른 살인범처럼 당장 체포하지 않는 건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아직 남편을 살인에 결부시킬 만한 확실한 증거를 하나도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은 상황 증거뿐입니다.] [그럼 저에게 그것을 손에 넣게 도와달라는 거군요.] [네, 쇼 부인. 지금의 기분은 잘 압니다. 이것은 결혼 생활을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전처럼 또 사만다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사만다가 처한 현실을 말한 것이다. [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가능한 한 이대로 방해하고 않고 싶습니다만...... 이런 슬픈 상황 속에서 당신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크로스 웨이드는 더듬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파티 전에 남편과 대결해서 죄를 고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결코 무엇 하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허사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지요?] [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파티를 열어 내일, 그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는 12 월 5 일에 본인 스스로 가면을 벗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죠?] [힘든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확고한 증거를 잡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부인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마티로부터 올 위험, 부인과 아기에게 닥쳐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말이 적중했다. 크로스 웨이드가 의도한 대로 사만다는 움직여 이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만일 마티가 저지되지 않는다면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금 그녀는 아기를 간절히 원했다. 설령 이 아기를 마티와 둘이서 키울 수 없다 하여도 기꺼이 낳을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기는 이미 그녀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기를 지켜야 했다. [아파트는 우리들이 완전히 보호하겠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곳에는 최신형 도청 장치를 설치합니다. 우리는 복도 끝 빈 방을 빌려서 그곳에 대기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몇 초 이내로 달려오겠습니다. 모든 대화는 테이프로 녹음합니다. 마티는 체포될 겁니다.] [저를 죽임으로서 말이군요.] 그 광경을 떠올리고 쇼크를 받으면서 사만다가 물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들은 유능합니다.] [파티가 한창일 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동감입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동의했다. [그가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손님들이 돌아간 후 한밤중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우리는 하루 종일 그를 감시할 예정입니다. 또 다른 방법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남편이 출군하기 전 회선 수리라는 구실로 전화 수리공이 댁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우리 동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만.] 사만다는 자신의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이 떨리고 땀방울이 촉촉히 솟아올라 있었다. [앞으로 32 시간 안에 모든 것이 끝나겠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깜쌌다. [마티는 제 인생에서 사라지는군요.] [저희로서도 조금도 기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협력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사만다는 안으로 파고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에 마티에게 혐의가 있을 때에 느꼈던 분노가 지금 다시 북받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나를 배신했다. 내가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나를 배신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당당하게 그녀가 말했다. [부인은 훌륭한 분입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들은 차분하게 몇 분간 더 이야기를 하다가 크로스 웨이드가 본부에 전화를걸었다. 그는 아파트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 마티가 돌아오는 대로 감시를 시작하도록 명령하고, 몇 명에게 12 월 5 일 하루 종일 사만다가 사는 아파트의 같은 층에서 지내고, 언제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중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사만다가 있는 데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로긴스와 함께 거실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카우치에 앉아 파티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 이미 의미가 없어진 축제의 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사진은 제가 맡아 두고 있는 편이 좋겠군요. 남편이 보게 되면 안되니까요.] 사만다는 자신이 아직도 사진을 쥐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사진을 건네받는 순간 사만다가 너무나 꼭 쥐고 있었기 때문에 봉투 끝이 구겨지고 벌어진 것을 알았다. [돌아가시게요?] 그녀는 그렇게 물었지만 실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서요.] [네. 그렇군요.] 사만다가 원망스럽게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쇼 부인, 직무상 지금까지 저는 갑자기 반려자를 잃어버린 여성을 수없이 방문해 왔습니다. 보통 그러한 상황에는 살인사건이 얽혀 있습니다. 그러한 여성들의 절망이나 허탈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상처가 완전히 아물 수는 없겠지만 아픔은 누그러질 겁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터 부인은 내일의 일을 생각해야 됩니다. 아기를 위해서라도.] 사만다는 그의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지금 받은 쇼크에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상냥하고, 이렇게도


동점심이 많았다. 거칠고 무관심한 평범한 경관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단 한 가지, 내일은 12 월 5 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요.] 크로스 웨이드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은 비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장치를 이곳으로 운반해야 합니다. 일단 시계가 12 월 5 일을 알리면 모든 것을 청취할 수 있게 해야 하니까요. 가령 부인이 주무시고 계실 때도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길 빕니다, 쇼 부인.] 그렇게 말하고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는 돌아갔다. 사만다는 천장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다시 모든 것이 바뀌었다.단 몇 분 사이에, 마티가 좋은 뜻에서 비밀을 감추어 왔으리라 빌었던 한 가닥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은 최악의 비밀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무서운 일들을 생각했다. 경찰에 연행되는 그를 지켜보고, 린이나 다른 친구와 이웃들이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는 것에 대답하고, 개인적인 일이나, 이 추악한 사건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험담까지 듣게 되고, 갖가지 억측을 부리는 사람들의 등쌀 때문에 어딘가로 이사를 가야만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몇 년이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다시고독에 직면해야 하고. 그녀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무엇인가 순조롭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기도 조금은 알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태아는 모체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일로 인해 아기가 상처받지 않을까? 여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후유증이 몇 년 뒤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지금 아기의 아버지에게 일어나려 하는 일에 대해서 아기는 결국 그녀를 비난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사만다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정말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마티가 자신의 어머니를 질책한 것처럼, 아기는 그녀를 질책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만다는 갑자기 자신의 아기를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되풀이해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희미한 불빛이 약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단지 어쩌면에 지나지 않지만...... 크로스 웨이드가 또 실수를 범하고 있을 가능서도 없지는 않았다. 이성은 이런 생각을 단 한순간이라도 믿지 않았지만, 자신과 아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될 처지였다. 그러다가 몹시 피곤해서 잠에 떨어졌다. 12 월 5 일 그날이 왔다.


만일 마틴 쇼가 뜻을 이룬다면, 그 날짜가 사만다의 묘지에 새겨질 것이다. 만일 크로스 웨이드가 뜻을 이룬다면, 그날이 연속 살인 사건을 해결한 그의 공적을 기리는 표창장에 기입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만다가 뜻을 이룬다면, 그날은 이렇다 할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악몽 전부가 사라져 줄 것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추웠다. 뼛속까지 스며들 것 같은 차가운 겨울비가 옆으로 세차게 들이치고, 그저 잠깐 밖에 나왔는데도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톰 에드워즈가 말한 대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준비할 만한 날은 아니었다. 마티와 사만다가 눈을 떴을 때, 비가 아파트 창문에 내리치고 있었다. 마티는 막 일어나 불안한 발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서, 하늘을 찌를 듯한 뉴욕의 고층 빌딩들을 완전히 뒤덮을 것만 같은 회색 바다를 바라보았다. [멋진 날인데!] 그렇게 탄성을 지르고 뒤돌아서서 사만다에게 웃어 보였다. 크로스 웨이드에게 부탁받은 대로 연기할 결심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이상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날씨 따윈 상관없어. 오늘은 우리 두 사람에게 아주 멋진 날이야!] 사만다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생일을 축하해요, 여보!] 그녀는 서둘러 침대를 빠져나와 그에게 키스하고, 어떤 남자라도 잊을 수 없는 포옹을 해주었다. 어찌된 일일까. 기분이 언짢아짐을 느꼈다. 이 남자는 괴물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나는 키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는 아직 마티에게 얼마간의 애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문이었다. 벨이 울렸다. 마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 멋진 날이 시작되었는데 재수 옴붙었다는 듯 그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도어맨은 어찌된 거야. 왜 우리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았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문으로 걸어갔다. [아, 잠깐 기다려요.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사만다가 가로막았다. [파티 일로 온 사람이야?] [아뇨. 어제 전화 회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우리 전화 회선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침 일찍 공사하는 사람이 갈지도 모른다고 여직원이 말했어요.] 마티는 어깨를 움츠리고 문으로 갔다. [누구세요?] 그가 물었다. [전화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목소리가 사만다의 말을 증명했다. 마티는 문을 열었다. 큰 키에 체격이 좋은 수리공이 전화 회사의 신분증을 내보였다.


[수리하러 왔습니다. 연락은 되어 있을 텐데요.] [들어와요.] 마티가 대답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와 거실에서 작업에 착수했다. 마티는 벨이 울리기 전의 즐거운 기분으로 돌아가려고 침실로 되돌아갔다. [이상해.] 그는 사만다에게 말했다. [나는 마흔 살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안 들어. 열다섯 살이야, 겨우.] 그의 얼굴에 장난기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마티, 부탁이에요. 파티에서는 주인공답게 행동하세요.] 마티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다. [어째서? 모두에게 조금씩 알려 주려고 생각했는데.] [마티...... 안돼요.] [알았어. 그만둘게. 생일인데도 남자아이는 좋아하는 것도 할 수 없다는 건가. 그렇담 울지도 몰라.] [울기 전에 물어 볼게요.] 사만다가 말했다. [아침은 뭘로 하실래요?] [스테이크.] 마티가 대답했다. [아침부터 스테이크예요?] [별로 나쁘지 않을 텐데? 밖으로 나가지. 이 시간에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어.] [그럴 필요 없어요. 곧 준비할게요.] [정말이지?] [전에 말했던 것 같아요. 아침 식사로 스테이크를 먹으면 완벽한 생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번엔 마티가 사만다에게 달려들어 키스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모르겠어.]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굶어 죽었을 거예요.] 그들은 서로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지만, 사만다는 정당한 이유로, 마티는 사악한 이유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사만다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만일 잘못하다간 순간의 폭력에 의해 계획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의 부하가 도청 장치를 하고 있던 한쪽 벽의 환기 구멍을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뭔가 꼴사나운 말을 해서 복도 건너 방에 있는 경찰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고 신경이 쓰였다. 생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 사람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니. [곧 요리를 시작할게요.] 마티가 잠옷 단추를 여는 것을 보고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마티가 다급하게 말했다.


[왜 그래요?] 마티는 단추 푸는 것을 중단하고 자기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서랍을 열고 보석점에서 산 선물 상자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사만다가 물었다. [글쎄, 뭘까?] 마티는 사만다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마티, 고마워요. 하지만 이런 것을 살 필요는 없는데.] [내가 원해서 샀지.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정말 놀랐어요. 너무 뜻밖이라서요.]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어서 열어 봐.] 순간적으로 사만다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공포를 잊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그녀가 알고 있는 고풍스럽고 로맨틱한 마티다운 행동인 것이다. 자신의 생일에 선물을, 그것도 나에게. 하지만 왜? 만일 나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다면, 왜 일부러 이런 것을 선물할까? 무엇이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까? 마티를 알고 난 이래 그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그랬듯이 그녀는 주의깊게 리본을 풀고 마치 그것을 받아 둘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대단히 소중하게 옆에 두고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얇은 종이를 옆으로 밀어냈다. 가는 금목걸이 앞에 매달린 펜던트를 그녀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티, 멋있어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에요. 너무 좋아요.] [정말?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른 것과 바꿔 올게.] 이 멜로드라마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경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시체가 될 운명의 아내르 위해 이 남자는 진심으로 선물 교환의 이아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다니,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목에 걸어 봐 주지 않겠어?] 마티가 부탁했다. [네.] 사만다는 거울 앞으로 가서 목에다 펜던트를 걸었다. 가만히 나이트 가운 위에 늘어뜨렸다. 잠시 둘 사이에 아무 말이 없었다. 들리는 것은 내리치는 빗소리뿐이었다. [정말 좋아요.] 사만다가 말했다. 마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만 사만다의 등뒤에 서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은 아주 희미한 미소였다. 사만다는 거울을 통해 그것을 알았다. 마티가 이런 식의 미소를 보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여느 때라면 그 미소는 힘있고 직접적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밖으로 표현하기보다 안으로 향하는 비밀스런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듯한 미소였다. 뭔가 풀리지 않는 단서라도 있는 것처럼 사만다는 그 미소를 계속 지켜봤다. 마티는 미소지으며 거울 속의 사만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저 모습은 어머니다. 틀림없이 어머니다. 갈색의 긴


머리와 목에 매달려 있는 펜던트. 어머니에 대해서는 생각할수록 노여움이 복받쳐 올랐다. 어머니가 그런 여자였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어머니가 벌을, 그것도 많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오늘 밤 이것을 목에 걸게요.] 사만다가 그를 보며 약속했다. [고마워, 당신에게 너무 잘 어울려.] 마티가 대답했다. [그럼 슬슬 스테이크를 드셔야지요?] [아, 그래.] 마티다 대답했다. 얼굴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만다는 팬던트를 풀어서 저녁때까지 상자에 보관해 두었다. 그리고 마티를 위한 특별 아침 식사, 파티를 결심할 때부터 계획하고 있던 아침 식사를 만들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복도 건너편의 아파트 안에는 크로스 웨이드의 부하 네 명이 도청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모두들 밤 사이에 경찰의 공작실에서 만들어진 사만다의 아파트 열쇠를 갖고 있었다. 수리공이 아파트 안에 있으므로 아침에 그럴 걱정은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면 25 초 이내로 그들은 사만다에게 달려가게 된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은 배관공의 도구를 갖고 있고, 다른 두 사람은 목공 도구를 갖고 있었다. 건물 안의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뭔가 수리를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마티는 옷을 갈아입으며 마음속으로 그날의 계획을 반추하고 있었다. 해머, 체인,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비디오 테이프, 그리고 다음날 아침 로마로 출발하기 위한 비행기표.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다. 지금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악마였다. 매년 이날이 되면 불타는 복수욕의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서는 날짜가 나오는 시계의 [5]란 숫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만이 비참하게 학대받은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날짜인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접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952 년 아버지가 죽은 이랴, 이렇게 가깝게 아버지를 느낀 적이 없었다. 물론 마틴 프랭크의 일면은 해마다 자행하는이런 것을 멈추고 성공한 뉴욕의 실업가로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고 늘 바랐다. 그러나 그 일면도 악마를-압도할 수 없었개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최초의 희생자를 회상하고 있었다. 저 상냥하고 갈색 머리를 한 필라델피아 교외의 도서관 사서는 어느 날 밤 도서관을 나온 후 두 블록 지난 울창한 나무 밑에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아버지에게 최초의 제물을 바치고 그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한두 번이 아니고 그런 살인을 되풀이해도 아무 이상 없이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했던가! 최근에 그는,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면 사만다를 살해하고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으므로, 6 년간 그를 지배해 왔던 직감이 로마로 가서 얼굴모양을 바꾸고 새로운 이름을


재출발하하고 알려 줬던 것이다. 24 시간 후면 그는 이미 마틴 에버릿 쇼가 아니다. [아, 이거야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데 가장 멋진 방법이군.] 주방으로 들어가서 스테이크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그가 말했다. [이런 것이라면 자주 마흔 살이 되어도 좋겠는데.]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나 1950 년대 영화에 나오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마티와 사만다는 아침 식사를 했다. 단 한 가지 오점을 남긴 것은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만다가 갑자기 커피가 가득 들어 있는 컵을 마루에 떨어뜨려 바닥을 온통 커피투성이로 만든 것이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나봐요. 파티 탓일 거예요.] 그녀가 변명했다. 절반은 거짓이었다. 신경이 흥분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사만다가 컵을 떨어뜨린 것은 파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머와 체인을 휘두르는 마티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 후 마티는 갈색 모직 코트를 입고 사무실로 나갔다. 밖에 주차해 있는 자동차 안이나 길 저쪽의 센트럴 파크 숲속에는 크로스 웨이드의 부하들이 잠복하며 감시하고 있었다. 낡아빠진 파란색 시보레를 타고 있는 몇 사람은 마티의 택시를 쫓아 중심가까지 미행했다. 그곳에서는 마티의 사무실 밖에 서서 감시하고 있던 다른 사복 경관들이 들어가는 그를 지켜보았다. 마티의 행동이 언제나와 다름없다는 보고가 본서의 사무실에서 진두 지휘를 하고 있는 크로스 웨이드에게 상세히 전달되었다. 마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까지 올라갔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복도를 지나 힘차게 정면 도어를 열었다. 순간, 평범한 아침의 기분이 바뀌었다. [놀라운데!] 그것은 이런 경우에 누구나 하는 상투어였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사무실 스태프들은 사내 사람들만은 대상으로 마티를 위한 파티를 열고 싶었던 것이다. 사무실 안은 색테이프와 풍선, 음식물이 놓인 테이블과 마틴 에버릿 쇼의 머리 모양을 조각한 커다란 얼음 조각 등을 배열해 놓고 활기에 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티는 비서들로부터 키스 세례를 받고, 좀더 격정적인 사원들로부터는 등을 툭툭 맞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불의의 기습을 받은 그가 소리쳤다. [도대체 뭣들 하는 건가?] [오늘 밤을 위한 워밍업입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그것이 이날의 나머지 분위기를 결정했다. 업무를 볼 수 없더라도 마티는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스태프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마티는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12 월 5 일이 지나가면 어차피 그는 이 사람들을 두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도로를 사이에 둔 빌딩 속의 경찰 감시 팀은 주의깊게 은폐된 망원경을 이요하여 마티의 회사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이 깜짝


파티를 크로스 웨이드에게 보고했다. 마티가 모두에게 웃어 보이자 매체 담당 부사장 레너드 로스가 말을 꺼냈다. [여러분, 잠시 조ㅎ히 하십시오. 파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저도 여러분과 같습니다. 그러나 1 분 정도 시간을 주십시오.]그는 마티에게 몸짓으로 자기 옆에서 떨어지지 말도록 했다. 여자 열 명과 남자 여덟 명의 스태프들은 말을 멈추고 로스를 주목했다. 그 반짝거리는 눈, 충분히 리허설을 한 매력적인 목소리, 게다가 사람을 지도할 때의 스타일은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해피 버스데이>를 부르기 시작하여 곧 모두가 따라 불렀다. 그것은 로스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지만, 이미 제지할 수가 없었으므로 솔선해서 노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그가 말했다. [잘했어, 너무 멋있어요. 그런데 전원 다 모였나?] 모두가 서로 마주보고 몇 사람인지 머리 수를 세기 시작했다. [다 모였군.] 마티가 말했다. [신사 전용 작은 방이라든가 숙녀 전용 작은 방에 있는 사람은 없겠지?] 로스가 물었다. [거기에 있다면 본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용건이지.] 마티가 농담을 하자 모두들 웃었다. 스태프 일동은 반원을 그리듯 모여서, 로스가 이야기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로스가 말을 시작했다. [당신이 깜짝 놀랄 것은 알고 있어요. 아침은 파티를 열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두가 원하길래.] [감사합니다.] 마티가 대답했다. 로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덧붙여서 우리드은 오늘 밤의 성대한 잔치에 앞서 이음식물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된다는이야기입니다.] [옳소!] 누군가가 외치자 모두들 다시 크게 웃었다. 로스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계속 말했다. [사만다, 당신에게 정의와 친애의 정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당신은 보스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사이좋은 친구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40 회 생일 축하에 한몫하려고 이 작은 파티를 연겁니다. 바라건대 당신이 앞으로도 40 번쯤은 생일을 더 맞길 빕니다.] 또다시 박수가 터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월급도 그 사이에 착실히 올라갈 것을 비는 뜻에서.] 모두가 웃었다. 그 중에서 누구보다도 크게 웃은 사람은 마티였다. 로스가 그 등을 두드리자 누군가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잠시 후 마티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를 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의리의 정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협조는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널리즘학과에서 군데, 게다가 생각하기도 싫은 많은 직업을 옮겨다닌 기간은 정말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그러나 저는 이 회사에 긍지를 갖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과 여러분들 모두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저의 40 회 생일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우리들의 성공을 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짧지만 멋진 연설이었으므로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몇 사람이 열렬하게 성원까지 해서 말한 내용이 적절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모두가 본격적으로 음식을 들기 위해 자리를 잡으려고 하자 또다시 로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우리 모두가 성의껏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그러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전원이 로스를 바라보았다. 마티는 또다시 놀라는 얼굴을 했다. 로스가 말했다. [마티, 친애의 정과 존경의 마음을 기념하는 영원한 표시로서 우리들 마음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캐롤......] 로스 밑에서 일하는 키가 큰 금발의 비서 캐롤이 재빨리 로스의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이내 한쪽 귀퉁이에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40 이라는 숫자가 씌어 있고 파란 리본으로 묶인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일부러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마티가 말했다. [마티, 당신 방에 걸어 둘 수 있는 좋은 기념이 될 만한 것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지요. 마음에 들면 좋겠는데.] 로스가 마티에게 선물을 건네주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 이 사무실에 뭔가를 걸어 두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거리는 것을 알면서 마티가 말했다. [풀어 봐요.] 누군가가 외쳤다. [그렇게 하지요.] 만면에 웃음을 띤 마티는 선물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짝짝 찢기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액자의 모서리가 보였다. 그리고 점차 액자가 보이고, 그림의 뒷면이 나타났다. 마지막 포장지를 풀었다. 보이는 것은 그림의 뒷면이었으므로 마티가 액자를 뒤집었다. [정말 멋지군!] 그는 탄성을 질렀다. 감동한 것처럼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걸작이야. 가보로 삼아야겠는걸. 평생 옆에 두고 소중히 간직하겠어요.]


그는 청초하고 우아한 목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사만다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평생 변하지 않을 행복과 사랑을 원하는 부드러운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화가에게 그리게 했어요.] 로스가 설명했다. [여행가셨을 때 사장님 방에서 사모님 사진을 갖고 있지요. 그것을 복사해서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멋진 작품이야.] [유화입니다.] [저말 멋있어.] 마티가 또 말했다. [빨리 이것을 벽에 걸어야지. 그리고 나중에 샘을 데리고 와서 보여 줘야겠어. 내일이라도. 아니, 파티가 끝난 다음에. 멋있는 클라이맥스가 될 겁니다. 샘도 분명히 마음에 들어할 겁니다.] [우리들도 그러길 바라요.] 로스가 말했다. 마티는 날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만다의 시체가 발견된 후 틀림없이 이것은 멋진 뉴스감이 될 것이다.-<살인범 남편, 살해 전에 아내의 초상화 입수> 이 초상화가 복사되어 신문에 게재될 것이라고그는 확신했다. 마티는 모두를 위해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마워요. 자, 즐겁게 놀아요!] 마티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그림을 높이 쳐들었다가 직원들이 음식이 놓인 테이블로 다가서자 성큼성큼 자시의 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등뒤로 문을 잠갔다. 빨리 그림을 장식한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벽에서 작은 모자이크를 떼어내고 초상화와 바꿔 걸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속삭였다. [아버지, 이것은 멋진 길조예요. 마치 어떤 힘이 밖에 있는 바보들에게 작용해서 사만다가 이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진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아요. 그럴듯한 장면이지요. 아버지,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요.] 마티는 다시 파티에 참가했지만 초상화의 얄궂은 운명을 뇌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그 떠나지 않는 생각이 그의 계획을 변경시켰다. [이봐, 로스.] 직원들이 블러디 메리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을 때, 적당한 시기를 봐서 그는 로스에게 말했다. [저 초상화 말인데, 오늘 밤 집으로 가져가려고 하네. 너무 멋져. 파티에서 모두에게 보이고 싶어.]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들로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요.] 로스가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들 기뻐할 겁니다.] 들떠 있던 기분이 가라앉자 마티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또 혼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오늘 밤에 있을 최후의 의식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금고를 열고


해머와 체인을 꺼내 서류 가방의 서류 밑에 넣었다. 그리고 더글러스 에드워즈 뉴스 쇼의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 해머와 체인 위에 놓았다. 마지막으로 12 월 6 일발 로마 행 비행기표를 꺼내 자물쇠가 달린 사이드 포켓에 넣었다.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고 가방을 들었다. 그림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떼어내려고 생각했다. 사만다를 즐겁게 하는 데는 이것을 집으로 갖고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시계는 남은 시간을 향해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어떤 것도 자기를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서류 가방을 사무실 구석에 두고 몇몇 직원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난 것은 정확히 오전 10 시 45 분이었다. [멋진 날이군.]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정말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리고 멋진 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고말고, 더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아마 틀림없이 멋진 파티가 될 거예요.] 젊은 비서가 말했다. [아, 물론 오늘 밤은 최고의 밤이 될 거야.] 사만다가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아파트는 떠들썩했다. 연회 전문점에서 나온 사람, 운송점에서 온 사람, 꽃집에서 온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 맨 아워백이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빌딩 관리인이 몇 번이나 와서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얼굴을 내보이면 틀림없이 나중에 팁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펜서 크로스 웨이드는 정확히 오후 1 시가 조금 지나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아파트를 둘러보고, 고상한 천으로 덮인 테이블과 그 중앙의 장식물과 식당이었던 곳에 설치된 밴드 스탠드와 컬러 전구로 바뀐 조명 기구 등을 보고, 잠시 우아한 이탈리아의 디너 파티를 연상했다. 이 파티가 살인의 전주곡이 된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크로스 웨이드는 출입하는 사람들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가 형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사만다뿐이었다. 그들은 둘이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대단한 준비로군요.] 어떤 말을 꺼내도 거북하고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만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것이 모두 허사로 끝난다니 정말 애석해요.] 상황을 고려하면 놀라운 정도로 태연자약하구나 하고 크로스 웨이드는 생각했다. 그녀는 핑크빛 실크 평상복을 입고 머리는 나무랄 데 없이 깨끗하게 뒤로 빗질하여 곱게 매만진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공포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겉모습은 보기 흉하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뭔가 좋은 결가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설령 그것이 한 남자를 심판장으로 끌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해도.] 사만다는 눈을 감았다. 왜 그 한 남자가 자신의 남편인 마티가 아니면 안되는 걸까.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주의드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어서 말씀해 보세요.] [도청 장치가 된 곳을 모두 알고 계십니까?] [네.] [우리들은 공원 저쪽 5 번가의 아파트에 비디오 촬영반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꽤 먼 거리라 영상이 흐릿해질 염려가 있습니다. 방의 커튼을 열어 놓은 것을 잊지 않도록 하세요.]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누구라도 바깥 풍경을 즐기길 좋아하니까요.] [좋습니다. 비디오반은 여기에 있는 동료와 곧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양쪽에서 이곳을 커버하게 되는 겁니다. 뭔가 듣거나 보게 되면 우리들은 곧 행동을 개시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사만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열심히 크로스 웨이드에게 주의를 집중하려고 했지만, 마치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그녀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라지길 바랐던 악몽이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ㅂ어 괴롭히는 것 같았다. [밤에는 누가 문을 잠그시나요?]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좋습니다. 파티가 끝나면 자물쇠를 열어 둔 채로 두세요. 잠그는 척만 하세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네, 충분히. 제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면 마티에게 의심받을까봐 그러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크로스 웨이드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계속 말했다. [잘 들어 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창 가까이 계신다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파티가 끝난 후, 만일 당신이 이 침실로 들어오시면 당연히 커튼은 내리시겠지요.] [네.] [게다가 남편은 꽤 조용히 행동할 겁니다.] [어떤 식으로요?] [그는 해머와 체인을 갖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꺼내도 큰 소리가 나지 않을을지도 모릅니다.] 한기가 사만다의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부인께서 도와주시면 됩니다. 흉기를 꺼내는 기척이 조금이라도 보이거나, 남편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이렇게 말씀해 주세요. <웬지 머리가 아파요>라고요. 물론 실제가 그가 흉기를 손에 들었다면 방 안의 무엇이든 잡으세요.우리가 뛰어들어갈 때까지 몇 초 걸리겠지요. 우리들은 이렇게 외칠 겁니다. <경찰이다. 움직이지 마!> 그러면 그는 동작을 멈출 겁니다. 그는 주의를 우리들에게 돌리게 될 겁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좋겠네요.] 사만다가 말했다. [부인, 확실히 그렇게 할 겁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만일 정말로 위험하다면, 저는 이런 것을 부인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인의 안전을 위해 이것을 갖고 왔습니다.] 크로스 웨이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바닥에 꼭 들어갈 정도의 가늘고 긴 것을 꺼냈다. [이것은 가스총입니다. 아마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름은 들은 적이 있어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이것은 최루 가스와 신경 가스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설명했다. [이것을 옷 안쪽에 보관하세요. 만일의 경우 이것을 남편 얼굴에 쏘세요. 상대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믿고 있어요.] 그런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사만다는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부인은 계속 남편을 감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모두 아시겠습니까?] [네, 확실하게.] [그리고 미리 말해 두지만, 만일 우리들이 방으로 달려오면 아무쪼록 바닥에 엎드려 주세요. 부인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부인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만일 이같은 상황에 극도로 긴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의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했을 것이다. [만일 체포하게 되면.] 크로스 웨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두세 가지 필ㅇ나 수속을 밟아야 됩니다. 아무쪼록 잘 하십시오. 증인이 되실지도 모르니까요.] 사만다는 당황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마치 남에게 조종되고 있는 로봇이 된 것 같아요.] [미안합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동정의 눈빛을 하며 대답했다. [만일 저의 방법이 강요하는 것 같다면......] [아, 아니에요.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에요. 선생님이나 로긴스 형사, 양 부장님이 해주시는 일에 대단히 감사하고 있어요. 만일 여러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말을 머뭇거렸다. 살해되는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내일 이맘 때는 틀림없이 부인은 자유의 몸이 되어 있을 겁니다. 그 후 부인의 인생이 정말로 행복하게 되길 진심으로 빌고 있습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만다가 대답했다. 크로스 웨이드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들은 침실을 나왔으나 크로스 웨이드는 여전히 사만다의 기력에 매우 감탄했다. 그때,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닥친 듯이 그녀의 양손이 하얗게 변하고 몸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을 그는 눈치챘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자신이 놓여진 괴로운 처지에 굴복한 것이다. 크로스 웨이드는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 이상 말할 필요 없이 그는 가만히 말했다.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앉을까요.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흐느낌과 분노를 억제하면서 그녀는 침대에 앉앗다. [왜죠?] 마치 모기가 날아드는 듯한 작은 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왜 하필 절까요?] 크로스 웨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입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

9

마티는 6 시 반에 집으로 돌아왔다. 사만다는 안정을 찾아서 그런대로 그를 현관에서 맞을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을 회복했다. 파란색의 긴 비로드 가운을 입은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가운과, 똑같이 아름다운 갈색 머리가 멋진 대조를 이루었다. 마티가 선물한 펜던트가 목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인 적이 예저에는 없었다. 그래, 아직은 연기인 것이다. 일생 일대에 온 정신을 다 쏟는 최고의 연기, 영원한 기념으로 선물하는 연기인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현관에 우뚝선 채 마티가 말했다. 사만다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쪽으로 비켜선 채 몇 주일에 걸쳐 준비된 중대한 모임을 위해 마법의 무대로 변신한 아파트를 마티에게 보여 줬다. 그리고 그녀는 가운의 주름이 잡힌 부분을 물그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 가스총이 숨겨져 있었다. [굉장하군.] 아직 발도 들여 놓지 않고 마티가 말했다. [마치 동화 나라에 와 있는 것 같군.]


그는 갑자기 사만다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만일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이들이야말로 진실한 애정으로 맺어진 부부이며, 두려움이나 어떤 심각한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지 않는 행복한 부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로서는 이것 역시 연기이고, 사만다가 그렇듯이 그 역시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당신이 즐거워하니 기뻐요.] 사만다가 말했다.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 같은 건 없어.] 마티가 말했다. 사만다가 아무것도 의심하고 있지 않은 거라고 그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당신에게 줄 좋은 선물이 있어.] 그가 말했다. 사만다는 놀란 얼굴을 했다. [저에게? 당신 생일에?] 그녀는 가슴의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또 말인가요?] [정학히 말하면 내가 주는 것이 아니야.] 마티가 말했다. 그는 돌아서서 다시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포장된 초상화를 바깥 벽에 세워 두었던 것이다. 그는 초상화를 안으로 들여왔다. [오늘 아침 회사 동료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 주었어. 이것은 그때 받은 선물이야.] 그는 문 밖에 있던 서류 가방을 마저 들여놓고는 문을 다고 오늘 아침에 했던 것처럼 초상화의 표장을 풀기 시작했다. 포장은 금방 풀어졌다. 사만다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면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마티, 회사 사람들이 이것을 당신에게?] [그래.] [비슷해요, 저랑?] [꼭 닮았다니까. 아주 잘 그렸어. 마음에 들어?] [물론이에요! 멋져요. 그런데 어디에 거는 게 좋을까요?] [내 사무실에다. 오른 밤엔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들고 왔어.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내 책상 뒤에 걸 생각이야.]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제대로 들었나? 복도 건너에 있는 크로스 웨이드나 로긴스와 다른 경관들도 정확히 들었을까? 마티는 정말로 내일 아침 이 초상화를 사무실로 가져가려는 것일까? 사만다는 구토증을 느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미쳐 버렸다. 도대체 이것은 뭘까? 사디즘의 일종일까? 아니면 자기 만족일까? [당신 책상 뒤엔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사만다가 물었다. [벌써 걸어 봤는 걸. 잘 어울렸어.] 마티가 대답했다. 이 얼마나 식은 죽 먹기냐고 그는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가벼운 농담일 뿐. [모두 볼 수 있도록 우선 저기 놓아 두면 어떨까요?]


사만다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회사 직원들에게 받은 선물 이라는 것을 모든 손님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요.] [좋아.] 마티는 사만다가 말한 곳에 초상화를 바르게 세워 두고는 서류 가방을 들었다. 그녀는 크로스 웨이드의 지시대로 하나하나 빈틈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서류 가방을 얼마나 힘주어 잡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아파트 어디에서도 살인용 흉기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티가 갖고 있는 서류 가방에 들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는 서류 가방을 눈여겨보다가 곧 마티가 눈치챌까봐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 가방 제가 갖다 놓을까요?] 귀기울이고 있을 크로스 웨이드가 그 뜻을 이해해 주길 기대하며 그녀가 물었다. [뭐야? 당신이 내 시중 드는 사람은 아니잖아. 물론 그럴 필요는 없어.] 마티가 대답했다. [생일을 맞이한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 가방이 무거워 보이기도 하고요.] [서류뿐이야, 샘.] 마티는 침실 문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만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군. 당신은 어때?] [저도요.] 그녀는 킥킥 웃었다. 마티는 가방을 침실로 갖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만다는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비슷하다. 만일 결혼에 파탄이 오지 않는다면 이 그림은 마티의 책상 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자리일 것이다. 얼마나 낭만적이겠는가! 아주 멋질 것이다. 마티는 사무실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그림에 대해 얘기해 줄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이야깃거리가 되고 대대로 물려줄 가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마티 최후의 날의 증거품의 하나로서 경찰의 압수품 창고에 던져질 가능성이 훨씬 많았다. 연회장의 스태프, 연주자, 비디오 촐영 기사 아워백, 그리고 바텐더들은 제각기 쉬고 있거나 저녁 식사를 하러 외출했다가 파티가 시작될무렵 한 사람씩 돌아왔다. 초대 손님들이 오기로 한 시간은 7 시 40 분부터였다. 사만다는 바쁘게 돌아다니며 준비에 소홀함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시들어 버린 몇 송이의 꽃을 부엌에 있는 예비용 꽃으로 바꿔 꽂았다. 요리는 이미 다 되었고 나중에 따뜻하게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 사만다는 마티의 기호에 맞춘 고기와 감자와 야채 샐러드를 준비했다. 마티는 언제나 그거면 그만이었다. 가벼운 음악이 연주되면서 드디어 파티가 시작되었다. 마치 이것이 [진짜로] 죽음을 위한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어 사만다는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거실에서는 이제 막 화려한 파티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침실에는 연속 살인마가 있고 그녀는 바로 그 희생자가 될 터였다.


아주 짧은 동안이긴 했지만 그녀는 아주 [특수한] 초대 손님들로 가득 차 떠들썩한 파티를 연상하고 있었다. 일련의 광기에 가득 찬 복수로 마티가 살해한 여자들의 친척들이 모여 있는 파티를. 그런 파티가 열리면 볼만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마티가 연행되는 꼴을 보게 할 수 있다면 보다 완벽한 파티가 되겠지. 벨 소리가 사만다의 상상의 잡목 숲을 뚫고 들려왔다. 시간은 아직 7 시 3 분이었다. 제시간보다 빨리 예의도 없이 찾아온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녀는 현관으로 나갔다. 초인종이 신호탄이 되어 오케스트라는 첫곡으로 뮤직 맨의 <개리 인디애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밴드 리더는 마티의 고향과 관련된 곡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사만다는 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만면에 웃음을 띤 톰 에드워즈가 있었다.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 해서 왔어요.] 그가 말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만다는 갑자기 즐거웠다. 만일 그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톰의 그 우직할 정도로 예스러운 솔직함과 그리고 톰의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기뻐요.] 그를 안으로 안내하며 사만다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아요. 그냥 편하게 계세요.] [역시 안되겠군요.] 마티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파티의 무대 장치에 큰 감동을 받았다. [와아, 굉장하군! 그야말로 상류 사회의 파티로군요!] 그가 말했다. [여왕이 등장하면 팔꿈치로 쿡 찔러서 알려 줘요, 알았지요?] [좋아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작은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거예요.] 밴드는 처음 곡을 다 연주하고는 이내 소리를 죽였다. 초대 손님의 도착 개시를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던 것이 틀려 버린 것이다.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곡을 연주할 필요는 없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톰은 거실 안을 돌아다니며 잘못 놓여진 나이프와 포크며 이름표가 비뚤어진 것을 바로잡거나 꽃의 배치를 조절하기도 하여 전반적으로 미비한 곳을 고쳤다. 사만다는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살피는 그를 기켜보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톰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마티는 기대에 부풀어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서류 가방은 침대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 그곳이라면 사만다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빗질하여 단정하게 넘기고 파란색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것이 그가 오늘 밤에 배려한 유일한 타협이라면 타협이었다. 사실은 그전처럼 카키색 바지와 체크 무늬의 셔츠를 입고 싶었다. 그것이 1952 년 밤 아버지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파티인만큼 그렇게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침실을 나오다 톰을 발견했다. [이봐! 뭘 하고 있어?] [괜히 간사를 흉내내고 있을 뿐이야.] 톰이 대꾸했다. [그 정도 하고 한잔 하지.] 마티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톰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둘도 없는 친구에게 대청소를 시킬 거라고 생각했나?] [잠깐 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사만다가 주방에서 나왔다. [덕분에 한결 도움이 되었는걸요. 톰이 없었더라면 훨씬 정신이 없었을 거예요.] [질투나는데, 그런 호의는 마음에 안 들어.] 마티가 말했다. 톰은 사만다에게 제스처를 보이며 윙크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일이 마티에게 탄로난 것 같은데요.] 세 사람은 박장 대소했다. 아워백은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갖고 온 JVC 비디오 카메라로 사만다와 마티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몇컷 찍었다. 7 시 28 분. 전화벨이 울렸다. 사만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아, 그래요? 유감스럽군요. 마티가 분명히 실망할 거예요. 하지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처음이고 유일한 약속 취소였다. 뉴저지의 신문 편집위원으로 마티의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핑계일 거야. 그 친구는 절대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 별로 기대하지 않았어.] 마티가 말했다. 많은 초대 손님들이 저마다 축하의 말을 던지면서비교적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거래처에서 바로 왔다네.] [도저히 더 기다릴 수 없더군.] 밴드는 코러스 라인에서 발췌한 메들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실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아워백은 한쪽 구석에서 손님 코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를 고용한 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7 시 45 분 정각. 마티의 친구들이 속속 도착하자 파티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티는 멋있었고 사만다는 화려했다. 누구도 그들의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음식과 와인이 놓인 대형 테이블 3 개가 놓여 있고 웨이터가 그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밴드는 열기를 더하며 비틀즈의 곡을 연주하였고 가끔 신청곡을 받아 연주하기도 해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선물꾸러미가 거실 한모퉁이에 가득 쌓였다. 마티는 손님들에게 사만다의 초상화를 일일이 보여 줬다. 마티의 중요한 고객의 부인은 유난히 그림 속의 사만다의 풍성한 머리에 반한 듯했다.


[멋있네요.]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사만다의 머리가 이렇게 빨간빛이 나는 줄은 몰랐어요!] [갈색입니다.] 마티가 말했다. 그 점에 관해서 오늘 밤은 특별히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군요. 갈색이군요. 아주 멋진 색이에요.] 그 부인이 말했다. 8 시 36 분. 아파트에는 70 명이 넘는 손님이 북적거리고 환기 장치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마티가 창문을 열어 담배연기로 탁해진 실내의 공기를 환기시켰다. [식사 준비가 됐습니다.] 요리사의 말과 함께 사람들은 필요한 음식물을 접시에 덜어내 들고 신변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아워백의 끈질긴 비디오 카메라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흥겨운 분위기였다. 그것은 확실히 마티를 위한 성대한 파티였지만 어쩌면 거실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일의 연장이고 매스컴 관계자나 홍보 관계자 그 밖의 여러 사람들과 서로 친교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보통때라면 마티는 최근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정치적인 대화에 끼여들거나 남의 환심을 사려는 행동, 마음에도 없는 아첨 따위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만다를 살해할 프로그램을 머릿속으로 복습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가 잠들면 시작하자.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가장 간단하고 신속하고 조용히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잇는 마티의 등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레너드 로스의 상냥한 얼굴이 다가왔다. [굉장한 파티예요. 정말 굉장합니다. 저렇게 초상화까지 들고 오다니. 그래 부인은 좋아합니까?] [아주 감격하고 있어. 그뿐이 아니야. 그림을 감상한 초대 손님마다 칭찬이 자자해. 덕분에 멋진 파티가 되었어, 레너드.] 로스는 다시 한번 마티의 등을 툭 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이번 일로 보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확신했다. 사만다는 마티 옆에 앉고 톰 에드워즈가 사만다 옆에 앉았다. 린과 그녀의 남편도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린도 자신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고 사만다가 고집했던 것이다. 모두 자리에 앉아 톰 에드워즈가 그의 와인 글라스를 스푼으로 두들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죄송합니다. 자, 여러분, 조용해 주십시오.] 마티에게는 마치 그날 아침의 깜짝 파티의 재현과 같았다. 순간, 실내가 조용해졌다. 이것은 관례였다. 아워백조차 될 수 있는 한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서서 마티의 테이블을 촬영했다. 톰은 일어나더니 와인 글라스를 높이 들었다. [자, 건배합시다! 마티의 40 회 생일을 축하하며.] 그가 선창하자 모두들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건배하자 모두 따라서 건배했다.


[그리고 또 사만다를 위하여.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 사람은 아마 별볼일없었을 겁니다.]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 다시 건배. 그리고 요란스러운 박수 소리. [나도 한마디하고 싶은데.] 마티가 말했다. [안돼요!] 누군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주 유쾌한 밤이었다. [나는 이 집의 주인으로서 조그마한 권리를 주장하고 싶습니다. 제발 들어 주십시오.] 마티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감사합니다. 저도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을 위해 건배드리고 싶습니다. 멋진 밤을 빛내 주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마티가 건배하자 자신들을 위해 건배하는 것이 다소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모두들 소리 높여 건배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제가 건배를 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마티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거두어지자 실내는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그가 심각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부모라든가, 괴로웠던 시절의 일이든가, 비밀로 하고 있던 은밀한 얘기를, 그러나 그는 천천히 사만다를 향해 글라스를 올렸다. [일 년 전, 저의 인생은 공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만다가 다가와서 그것을 메워 주었습니다. 사만다가 없었더라면 이 40 회 생일은 너무나 쓸쓸하고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겁니다. 사만다와 함께 있는 지금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당신을 위해, 사만다!] 그는 글라스를 더욱더 높이 쳐들었다. 사만다를 포함해서 몇 사람의 눈이 물기로 젖었다. 복도 건너에서는 스펜서 크로스 웨이드와 아서 로긴스와 양 부장과 다른 두 명의 경관이 잠시 빌린 아파트에서 값비싼 가구에 둘러싸여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단한 연기야. 저 친군 사만다를 마치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있군 그래.]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사만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로긴스가 물었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나? 남편은 그녀를 위해 건배하고 있지만 몇 시간 이내에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어. 이것은 그의 준비 운동에 불과해. 흉악한 살인자도 유쾌한 것은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렇군요.] 그러나 사만다는 마티의 건배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그러한 자상한 면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한 일면이 그에게 초상화를 집으로 갖고 오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시간이 흐르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지금 시각은 8 시 59 분. 앞으로 3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모든 것은 끝난다. 누군가가 <그는 좋은 친구>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내 모두가 따라서 합창했다. 아파트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안팎으로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식사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여러분!] 사만다가 말했다. 유난히 가냘픈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모두들 오늘 밤의 흥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서로 제지하자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 밤은 마티의 밤입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고, 지금 들으신 대로 남편으로서도 매우 특별합니다. 여러분이 알 수 없을 정도이지요.] 사만다가 말했다. 톰이나 마티와 달리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동 박수. [사실 그 정도로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티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아주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렇소!] 누군가가 외쳤다. [여러분이 성원해 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대해 뭔가 해줄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글라스를 들고 활짝 웃으며 마티 쪽을 보고 말했다. [당신 아기예요, 마티!] 순간, 실내가 더없이 조용해졌다. 사만다는 무언가 북받쳐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티는 어리둥절한 채로 무표정이었다. 아워백이 그 얼어붙은 표정을 포착하는 순간, 실내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실내는 갑자기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와! 멋져요!] [축하해요.] 온통 축하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멈출 줄 모르는 환호로 시끄러웠다. 마티의 얼굴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기쁘게 웃었다. 그는 사만다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좋은데! 다시 한번!] 레너드 로스가 외쳤다. 마티는 다시 한번 키스했다. 밴드가 <잘 자라 우리 아가>를 연주했다. 아름답고 따뜻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만다는 가슴이 아팠다. 이 순간도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될 아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마티는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애써 그것을 감추었다. 그는 누구든지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저주였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최악의 뉴스였다. [어머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기? 나의 아기? 이 여자의 뱃속에? 아니야, 잘못 들은 것일 게야. 아니, 잘못 들을 리가 없어. 내 귀로 분명히 들었지 않은가. 게다가 미소지으며 어머니가 될 여자에게 키스까지 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사람은 사만다만이 아니다. 아기도 죽는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기껏해야 밤톨만한 태아 때문에 이렇게 고민해야 할까?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직계의 최초의 자식 아닌가. 아이는 아버지의 피를 받아 아마 이목구비까지 똑같을 것이다. 눈은 아버지의 온화한 눈이고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일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자태, 아버지의 미소까지 닮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아버지가 관대했던 것처럼 아기도 관대한 성품일 것이다.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일지도 모른다. 캘린더 정신 분열증의 광기에 사로잡힌 이래 처음으로 마티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사만다를 죽여야 했다. 사만다는 어머니가. 그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이미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부여했던 역할-최후의 희생자 역에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12 월 5 일에 사만다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편지 내용은 물론 묘지를 방문했을 때 약속했던 것을 어기게 된다. 하지만 아기가. 직계 자식을 죽이는 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일일까? 아버지는 칭찬은커녕 화를 내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버지에게 대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것을 불가능했다. 결국은 자신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 등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 파티 손님들은 끊임없이 그의 등을 두드려댔지만 이제는 진짜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의자에 앉아 축하의 악수와 선의의 키스 세례를 부인들로부터 계속 받았다. [고마워요. 정말 멋있어요.] 마티의 내면은 계속 혼돈 상태였다. [고마워요. 아, 저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니, 특별히 이렇다 할 이름은 없어요. 아직 정하지 않았아요.] 아워백이 그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마티는 환하게 웃었다. [오늘 밤은 생애 최고의 밤이야.]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그는 아워백의 마이크를 향했다. 그는 사만다가 미웠다. 전엔 느낀 적이 없을 만큼 죽도록 미웠다.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그 몸에서 생명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피를 받은 아이를 갖고 있다. 모든 상황이 옛날과 다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일까? 지금 마티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빨리 이 파티를 끝내는 거다. 이 사람들을 쫓아내고 되도록 빨리 12 월 5 일의 최후를 맞이하는 거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사만다가 알려 준 쇼크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 하나 가득 웃음을 머금고 연신 인사하면서 속에 없는 말을 내뱉고 아이에 대해 농담까지 하고 있지만, 그의 눈길은 사만다의 복부와 자기의 금시계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었다. 레너드 로스가 몇 분 간격으로 시계를 보곤 하는 그를 보았다. [무슨 약속이라도 있습니까?] 마티는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시계를 보고 있을 뿐이야.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어.] 나중에 아기에게 얘기해 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겁니다.] 로스가 말했다. [좋아, 굉장히 감동적이야, 레너드.] 오후 10 시. [어쩌지요, 멋진 파티가 아니어서?] 여전히 자신의 역을 훌륭히 연기하면서 사만다가 물었다. 동시에 그녀는 꽃과 라디에이터와 조명 기구, 그리고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밑에 있는 도청 장치를 향해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멋진 정도가 아니오. 내 생애 최고야. 아기에게 들려 줄 좋은 추억이 될 거요.] 마티가 대답했다. 남의 대사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마티답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독창성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 아침에는 장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보자구.] 사만다를 향해 그가 말했다. [이 아이에게는 경제적인 고통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사만다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야말로 금전적인 계획을 빈틈없이 세워 두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자기처럼 목표도 없이 방황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겪어 온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훌륭한 환경과 안전한 직장,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자상한 배려를 해주는 아버지이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는 어머니를 닮았다 하더라도 몇 사람의 여자를 죽여야 하는 그런 인생을 걷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사만다를 죽이지 않고 아기가 무사히 태어난다면, 마티는 세계에서 제일 멋진 아버지가 될 생각이었다. 10 시 30 분. 그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단하지 않게 그저 이마가 조금 빛날 정도였지만 얼마 안 있어, 방금 조깅을 끝마치고 왔거나 운동 연습용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은 다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게 되었다. 그때까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만다가 마티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 마티에게로 갔다. [마티, 무슨 일이에요?] 사만다가 물었다. [너무 흥분했나 봐.] [기분은 괜찮아요?] [아,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몇몇 친구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모여들었다. [냉수라도 갖고 올까?]


한 사람이 물었다. [아니, 됐어. 괜찮아.] 마티가 대답했다. 그는 그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싫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는 사만다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건 어떻게 거꾸로 됐는걸. 내가 당신 기분이 어떤지 물어야 하는 건데.] [전 아주 좋아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그것 참 잘됐군. 이제 당신은 혼자 몸이 아니야.] 그녀는 미소지으며 마티 곁에 앉았다. 그는 의자를 가까이 옮겨 그녀를 팔로 감쌌다. [아기가 태어나도 여전히 나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겠지?]] 일부러 여러 사람에게 들리도록 그가 물었다. [아마 변할걸요.] 사만다가 놀려댔다. [그렇군.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지. 푸대접받은 것은 언제나 아버지니까.] [하지만 마티, 생각해 보세요. 당신도 권리가 한 가지 있다구요. 청구서의 금액을 지불할 권리가요.] 사만다가 말했다. [알고 있어. 만일 여자아이라면 부업이라도 해야 되겠지.] 마티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대답했다.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고 마티의 이마의 땀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10 시 53 분. [슬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티가 사만다에게 말했다. 다음날이 평일이기 때문에 교외에 사는 손님 몇 사람은 이미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도 피곤한 기색이었다. 파티를 끝낼 이유야 많았지만 최대의 이유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67 분만 지나면 12 월 5 일은 끝나는 것이다. 사만다는 정말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다들 돌아가고 마티와 단둘이 되면 그녀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손님과 얘기하는 체했다. 마티는 프랑스 와인에 대해 바텐더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톰 에드워즈에게 다가갔다. [톰, 이제 끝냈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자네가 모두 알 수 있도록 넌지시 말을 해주겠나?] [그렇게 하지.] 언제나 싫다고 말한 적이 없는 톰이었다. 하지만 방 건너 사만다를 흘끗 보고 여지껏 본 적이 없는 그녀의 표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피로 이상의 것이었고 임신의 피로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사만다는 평소보다 생각도 없고 초점도 없는 흐릿한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겁먹은 표정이었다. 그는 너무 흥분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괜찮을 거다.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11 시 1 분.


[멋진 파티였어요. 그러나 이젠 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일 아침을 생각해야지.] 코트를 팔에 걸면서 톰은 친구 한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전히 우물쭈물 늑장을 부리고 있었지만 해산을 넌지시 알리는 데에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모두들 파티가 끝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마티는 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에 흘끗 눈길을 주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선물을 개봉하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티의 템포가 빨라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누구도 선물 개봉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걱정으로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선물을 열어 보자며 또다시 눌러앉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딱 자랄 거절할 수 있을까? 그는 사만다와 함께 현관 입구에 나란히 서서, 거의가 5 번가의 최고급 상점 포장지로 포장된 선물더미에 손님들의 주의가 가지 않도록 했다. 그렇더라도 꼼꼼한 사람은 어디에도 있는 법이다. [이봐, 우리들은 선물 개봉을 하지 않았어!] 한 광고 회사 직원이 소리쳤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은 지쳐 있어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속속 돌아가는 손님에게 마티는 계속 인사했다. [오늘 파티는 일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연기를 계속했다. [저도 잊을 수 없어요.] 사만다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했다. 그녀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11 시 8 분. 악단이 철수하고 연회 담당 스태프들고 거의 돌아갔다. 테이블과 소도구는 다음날 아침에 갖고 가도록 사만다가 배려해 준 것이었다. 11 시 13 분. 엉덩이가 무거운 몇 사람만 남았다. 그 중에 레너드 로스도 끼여 있었다. 당연하다고 마티는 생각했다. 파티에 대해 아주 만족했으므로 그냥 가기 아쉽다는 거겠지. 누구에게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그의 수법이 점점 역겨웠다. 초상화의 아이디어도 그가 생각해 냈을 것이다. 사무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되면 분명 그 점을 강조하겠지. 마티는 그에게 다가갔다. [레너드, 마음 같아선 친구들 몇 명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은 심정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밤은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야. 이런 날씨에 자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겠나?] 로스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인지 마치 외교관처럼 한껏 과장된 제스처를 써서 마지막 찬사와 감사의 말을 늘어놓고는 겨우 물러갔다. 11 시 19 분. 톰 에드워즈만 남았다. 그는 아직 한 손에 술을 든 채였고, 지쳤는지 거실 한쪽 구석에 있는 바르셀로나 의자에 앉아 축 처져 있었다. 그가 왜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사만다는 알고 있었다. 마티에 대해서, 또 파티에 대해서 자기 일처럼 맡아


해주었다. 친구라기보다 가족처럼 느껴졌다. 사만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톰에 대해서는 전혀 거북살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옆자리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재미있는 일은 언제 시작됩니까?] 톰이 물었다. 사만다는 커다랗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아직 부족하다면 톰, 어딘가 다른 곳을 찾아봐야죠.] [시비를 거는 것 같군요.] 마티가 다가와서 합세했다. [혹시 다투고 있나?] [톰이 만족스럽지 못하대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마티는 사만다에게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유감이군, 만일 당신이 없었더라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톰이 돌아갈 때까지 이런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톰에게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된다. [멋진 파티였어, 마티. 손님들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네.] 톰이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 물론 공적이야 여기 계신 베테랑 설계가에게 있지만.] 소개라도 하듯이 그는 사만다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요. 톰과 린에게도 많은 신세를 졌어요. 혼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사만다는 마티에게 강조했다. [할 수 있지요. 사실 그렇게 했으니까요. 특별한 것은 모두 당신이 했어요, 사만다. 수훈자는 당신이에요.] 톰이 말했다. 마티는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한번 그것을 보았다. [그럼 나도 슬슬 물러나 볼까. 가지 않으면 싫어할 테니까.] [아니야, 시간을 확인했을 뿐이야. 아직 초저녁인데 천천히 좀더 놀다 가게.] 농담일 거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시간은 11 시 24 분이었다. [아니, 정말 피곤해. 단지 나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손님이고 싶었을 뿐이야.] 톰은 거리낌없이 큰 하품을 했다. 조금은 힘들어하면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일 아침 9 시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뉴욕으로 전근된 IBM 의 중역이지.] [어디에서 오는데?] 마티가 물었다. [덴버야. 자, 그럼 두 분 즐거웠어요. 당신들은 이제부터 하룻밤 걸려서 열어 봐야 할 선물이 있군요. 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되돌려주게. 내 마음엔 들었으니까.] [꼭 마음에 들 걸세.] 마티가 말했다. 톰은 사만다에게 키스했다.


[질투해도 상관없네. 여주인은 언제나 나에게 키스를 받게 되어 있어. 그게 아니면 무슨 재미로 파티에 오겠나?] [톰, 조심해서 가세요.] 사만다가 말했다. [어때, 이번 주말에 테니스라도?] 마티가 말했다. [아, 좋지.] 마티가 문을 열어 주자 톰은 현관을 빠져나갔다. [토요일에?] [알았어.] 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습을 감췄다. 드디어 사만다는 자기가 더없이 사랑하면서도 끔찍히 두려워하는 남자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복도 맞은편 아파트에는 크로스 웨이드와 그 동료들이 검은색의 작은 스피커 주위에 긴장한 채 모여 있었다. 공원 건너편에서 망원 렌즈로 마티와 사만다를 감시하고 있는 팀으로부터 크로스 웨이드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커튼이 내려지면 그 보고도 끝날 것이다. 톰이 가고 난 후 몇 분 간 마티도 사만다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마티는 지금까지 좋았던 시절에 대한 종말을 아쉬워하듯 아파트 안을 둘러보았다. 사만다는 그 일거일동, 눈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통해 지옥의 순간을 알리는 신화와 몸짓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티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계바늘은 이미 11 시 31 분을 가리키고있는데 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할지 살인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갑자기 그는 사만다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곧 마티의 얼굴에 피어난 온화한 미소와 눈물이 어린 눈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결혼식날 했던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떤 말을 하면 될까? 당신에게 어떻게 감사하면 좋지?] [마티, 아무것도 감사할 필요 없어요.] [아니, 있어, 사만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해준 사람이 없었어.] [지금은 있어요.] [물론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있어. 이 세상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ㅇ게 많지 않지만, 운좋게도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야.] 언제까지 이 상태가 계속될 것인가 하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최후의 최후까지 계속 연기할 생각인 것이다. [지난번에 약속한 여행은 꼭 가고 싶어. 당신 건강에 지장이 없다면 말이야.] 마티가 말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 보겠어요.] [딸이면 좋겠어.] [왜요?] [당신을 닮을 테니까.] [아들이라면, 왜 당신을 닮은 아들은 안되나요?]


[제 1 지망에 비교하면 그렇다는 얘기지.] 마티가 대답했다. 그의 눈망울은 여전히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 정말 놀랐어! 굉장한 밤이야! 나도 교육을 받아야겠군. 산모를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아버지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육 말이야.] [네, 자료를 모두 수집해 봐요.] 사만다가 말했다. [아, 이 기쁨을 함께 나눌 가족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티가 갑자기 우울하게 말했다. 사만다는 천천히 다가가 양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들은 가족을 만들 수 있어요, 이제부터.] 그녀는 속삭였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마티는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 것일까? 꼭 필요한 의식의 일부라도 되는 걸까? 살인 전에 꼭 해야 할 무의식의 행동일까? [그 말이 맞아. 우리들의 가족을 만드는 거야. 토요일에 톰과 테니스를 한 다음 유모차와 요람을 사러 가지.] [너무 일러요.] [어째서? 우리 아기인데?] [좋아요. 그렇게 해요.] 사만다가 동의했다. 11 시 35 분. [아무래도 아빠는 조금 자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내일은 중요한 일이 있어.] 또다시 시계를 보면서 마티가 말했다. [저는 잠깐 치우고 올게요.] 마티는 여전히 혼돈스러운 채 침실로 들어갔다. 아기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복수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결정해라!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 그는 자신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결정은 아주 어려웠다. 그는 침대 밑을 흘끗 보고 서류 가방이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서류 가방도 이 결정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11 시 38 분. 그는 습관적으로 옷을 벗고는 벗은 옷을 가지런히 의자 위에 정리해 놓았다. 잠옷을 입고 사만다가 오기를 기다렸다. 1 분쯤 후에 침실로 들어온 사만다는 마티가 잘 준비를 끝낸 것을 보고 섬뜩해졌다. 이것도 의식의 일부일까? [몹시 피곤한 모양이죠? 오늘 밤은 흥분되어 뜬눈으로 지샐 거라 생각했는데.] [잠은 안 와. 잘 수 없을지도 몰라.] [우유라도 데워 갖고 올까요?] [괜찮아.] 사만다는 마티가 침대로 가까이 가서 몸을 구부리는 것을 보면서 서류 가방이 침대 밑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마티가 가방에 손을 뻗치는 것을 보고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가방을 꺼내 지퍼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를 실내로 불러들이는 신호를 하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일 지금이 살인의 순간이라면 옷장 위의 램프를 흔들든지 가스총을 꺼내든지 할 참이었다. 마티는 가방 안을 만지작거렸다. 사만다는 서류와 클립을 만지는 소리를 들었다. 드디어 그의 손이 천천히 나오기 시작했다. 사만다는 무엇인가 검고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티는 빗을 꺼냈다. [목욕탕에 두었던 것이 보이질 않아.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사만다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안도의 숨은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공포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마티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아요.] [사만다, 앉아. 당신은 이제 홀몸이 아니야.] 사만다는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11 시 44 분이었다. 앞으로 16 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는 서류 가방을 침대 밑에 다시 밀어넣었ㄷ. [나도 빗은 보지 못했어요. 깜빡하고 윗옷 주머니에라도 넣은 것 아니에요?] [아,그럴지도 몰라.] 그는 거울 앞에서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빗질하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뒤돌아보고는 천진한 소년처럼 말했다. [내 생일도 이제 곧 막을 내릴 거야.] [그렇군요.] [정말로 끝내고 싶지 않아. 내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테이블 램프로 다가갔다. [왜 그쪽으로 가는 거지?] 마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한 기미가 배어 있었다. [그냥 걷고 있을 뿐이에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내 곁에 있는 게 언짢아서?]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재빨리 생각해 봤다. [마티, 다리에 쥐가 났나봐요. 조금만 걸으면 괜찮을 거예요.] [지금까지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잖아.] [아마도 아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다면 됐어.] 위로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기묘한 적대감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이제 다시 사만다의 몸 속에 공포가 되살아났다. 만약 그가 다시 서류 가방에 손을 댈 때는 빗을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도청 장치가 숨겨진 환기차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크로스 웨이드는 듣고 있을 거다. 마티의 상태가 변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1 시 46 분. [다리는 괜찮아?] [네, 별 이상은 없어요.]


[다행이군, 정말.] [좋아. 쳐들어갈 준비를 하자.] 크로스 웨이드가 일행에게 명령했다. 부하 한 사람이 방 입구로 가서 살짝 문을 열었다.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는 제각기 숄더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면서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끝나길 바랐다. [맙소사.] 크로스 웨이드가 중얼거렸다. [문은 자물쇠가 채워진 채로야.] 그는 열쇠를 갖고 있었지만 단숨에 뛰어들어가지 않으면 귀중한 몇초를 놓쳐 버리게 된다. 그는 걱정으로 판단이 흐려지기까지 했다. 반드시 사만다를 지켜 준다고 엄숙히 약속했는데 벌써부터 착오가 생긴 것이다. 그는 어쨌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티가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든가, 지금 뛰어들어가 범행을 미연에 방지하든가.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가 원하는 현행범으로 체포해서 유죄를 입증할 기회를 ㅇ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또 몇 분간을 스피커에 귀를 기울였다. [많이 좋아졌어요.] 마티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 살인극을 지연시킬 것인지 의심하며 사만다가 대답했다. [몸조심해. 당신은 보배를 품고 있으니까.] [알고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 11 시 47 분. 그녀는 느릿느릿 침대로 향했다. 그 순간, 그녀는 크로스 웨이드와의 약속을 기억해 냈다. [잠깐 기다려요. 문 잠그는 것을 잊었어요.] [내가 잠갔어.] [언제요?] [톰이 돌아간 후에.] [확인하고 오겠어요.] [샘, 내가 분명히 잠갔다고 했잖아.] [마티, 당신은 너무 흥분하고 있어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실래요?] [싫어.] [파티를 열기 바로 전의 일이라 말하지 않았는데요, 위층의 클라인 부인 아시죠?] [응.] [누군가가 그녀의 아파트에 침입했어요. 강도였어요. 아주 혼이 났나봐요. 자물쇠를 깜빡 잊고 안 걸었대요.] 명배우처럼 그녀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정 그러면 내가 확인하고 오지.] 마티가 말했다. [마티, 저를 환자 취급하지 말아요!] 마티가 놀라 경황이 없는 사이에 사만다는 선수를 쳐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를 달래 주기 위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뒤돌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단지 임신하고 있을 뿐이란 말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만다는 현관으로 나가 크로스 웨이드에게 지시받은 대로 잠금 장치를 일부러 철컥거리며 열어 두었다. 바깥에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크로스 웨이드는 그녀를 신처럼 생각했다. 11 시 48 분. 사만다는 침실로 돌아와 마티 옆에 앉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일이 터진다 해도 어떻게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의 자물쇠를 열어 두었으면 크로스 웨이드는 단 몇 초 만에 뛰어들어올 것이다. 마티는 무슨 생각에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이름을 생각하고 있어.] [아직 일러요.] [하지만 신나는걸.] [그래요. 만약 아들이라면 마틴 에버릿 쇼 주니어 어때요?] 사만다가 말했다. [나쁘진 않군. 적어도 그렇게 하면 우리 가문의 전통은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딸이면 어떡하죠?] [모르겠어.] [아무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요?] [아직까지는.] [당신 어머니 이름은 어때요?] 사만다가 제안했다. 마티는 긴장한 듯이 보였다. [싫어. 어머니의 이름은 안돼, 좋아했던 적이 한번도 없어.] 분명 하나의 징조라고 사만다는 생각했다. 마티의 어머니에 대한 굴레가 풀린 것이다. 한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 문제였다. 크로스 웨이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1 시 49 분. 크로스 웨이드와 로긴스와 형사 한 명은 복도로 나와 사만다의 아파트 입구 쪽으로 이동하여 언제든지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이름은 어때요?] 사만다가 물었다. 마티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갑자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꼭 누구의 어머니 이름이어야 돼?] [그런 뜻이 아니에요.] [루스 레노어는 어때?] [멋져요. 방금 생각해 낸 거예요?] [아버지가 그 이름을 좋아하셨어. 만일 여동생이 생기면 지어 줄 이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 루스 레노어. 참 좋아.] [저도요. 딸이면 그 이름으로 해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아버지가 알면 기뻐하실 거야.] 그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는 여자아이를 원했고 여자아이가 생기면 루스 레노어라는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이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사만다가 보기에 그것은 또 하나의 징조였다. 지금 마티는 아버지를 숭배하는 남자아이인 것이다. 11 시 51 분. [세상은 불공평해.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했는데.] [정말 일찍 돌아가신 게 안타까워요.] [그 여자아이에게는 아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는데.] 마티는 허공을 응시한 채 마치 넋이 빠져나가 버린 듯한 모습으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사만다가 알 리는 없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만다와 그 밖의 사람에게 이야기했던 꾸며낸 이야기 속의 아버지가 아닌 [진짜] 아버지, 프랭크 넬슨의 아버지였다. [여동생은 정숙한 여자가 되었을 거야.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을 테니까.] 한 곳에 못박힌 마티의 시선이나 어쩐지 기분 나쁜 독백에 사만다는 점점 으스스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가스총을 확인했다. 그리고 살짝 일어나서 다시 한번 테이블 래프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이번에는 마티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11 시 52 분. 복도의 는 이제 살인의 시각이 다가왔다고 확신했다. [여동샌에게 멋진 드레스와 리본을 사주셨을 거야. 훌륭한 아버지였어. 언제나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셨지.] 마티는 감정을 넣어 말했다. [그랬을 것 같아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마티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크로스 웨이드에게 들어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고 있었다. [나를 업고 유원지를 한 바퀴 돌아 주셨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아뇨.]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던 거야. 어머니는 따라오지 않았어. 어머니는 유원지에 간 적이 한번도 없었지. 아버지는 모형 기차라든가 전기 기관차를 매우 좋아하셨어. 그때는 그런 장난감은 살 생각조차 못했지. 알겠지만, 그 무렵은 그다기 풍족하지 못했어.] [그 얘기는 하셨어요.] 11 시 53 분. [그래도 아버지는 기차를 사주셨지. 지금 갖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야. 최고급이었어. 아버지는 언제나 제일 좋은 것을 사주셨어. 나를 대학에 보내고 싶어하셨지. 대학을 졸업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은 유감이야.] 그는 말을 멈추고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는 것처럼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이리 와.] 사만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 이리 오라니까.]


크로스 웨이드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약간 돌렸다. 여전히 사만다는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 마티가 물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사만다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등 뒤에 테이블 램프를 흘끗 돌아보았다. 마티는 그녀에게 다가가 양팔을 그녀의 몸에 둘렀다. 11 시 54 분.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11 시 55 분. [아버지는 우리들의 아기를 보고 싶어하실 거야. 틀림없어.] 그는 방향을 바꾸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실 문을 닫았다. 사만다는 잠시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 후 마티가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사만다는 그가 침대 밑의 서류 가방에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크로스 웨이드를 불러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11 시 58 분. 마티는 사만다에게 미소를 지으며 키스했다. [멋진 밤에 감사를, 그리고 아기에게도.] 11 시 59 분. 그는 아무 말 엇ㅂ이 침대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만다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12 월 5 일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틴 에버릿 쇼는 결정을 한 것이다.

10

사만다는 마티를 계속 보고 있었다. 옷장 위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0 시 1 분이었다. 끝난 것이다. 살인극은 끝난 것이다.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져 오는 것을 느겼다. 그리고 다시 몸이 거뜬해지며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포의 늪에서 빠져나옴으로써 그녀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막연한 희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티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마하의 가엾은 소년이 어른이 된 모습은 아니었다. 잘못된 의료기록을 받은 크로스 웨이드는 분명히 어떤 부분에선가 판단이 빗나간 것이다. 유력한 증거-오마하의 방과 이 침실과의 유사점이 있었지만, 그러한 증거들도 가끔은 판단을 빗나가게 한다는 사실을 사만다는 알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가 그것까지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혼돈의 순간에 그녀가 모든 모순과, 마티를 지목하고 있는 모든 징조를 모조리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12 월 6 일이 방금 시작된 이 시점에서 오직 그가 아버지가 될 날을 꿈꾸며 누워 있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로긴스와 또 한 명의 형사와 함께 아직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지금은 양 부장도 와 있었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사만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크로스 웨이드는 이번에도 캘린더 살인광을 놓쳐 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도무지 모르겠어. 모든 증거가 그를 확실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그가 형사들에게 말했다. 그들 모두 엉뚱한 사람의 집 밖에서 서성이는 자신들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된 거야.] 양 부장이 투덜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지금 죽이지 않고 1 년 후로 연기하기로 했는지도 모르지.]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아니면 그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로긴스가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오늘 밤 어디선가 젊은 여성이 죽어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것은 내 책임이지.]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오늘 밤 어디선가 젊은 여성이 죽어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것은 내 책임이지.]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양 부장이 말했다. [아니야.]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책임 문제야, 책임. 내일 모든 것을 다시 지가해야겠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크로스 웨이드는 손잡이가 찰칵 하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그들은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끝까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사만다가 눈앞에 서 있었다. 경관들이 문 밖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는 놀라지 않았지만 양 부장을 보고는 놀랐다. [뜻밖이에요.] 양을 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꼭 오고 싶었습니다.] 양이 대답했다. 사만다는 시선을 크로스 웨이드에게로 옮겼다. [해답이 나오지 않는군요.] 마티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죽이며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만다도 낮게 속삭이며 양팔을 벌려 크로스 웨이드를 껴안았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 시련에서 막 빠져나온 것을 알리는 포옹이었다. 그가 팔을 돌려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힘이 되려고 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다른 경관들은 이 개인적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뒤로 물러났다. [최선을 다해 주신 걸로 알고 있어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지금 어떤 기분이십니까?] 크로스 웨이드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다 알고 계시겟지만, 제 남편이 누구인지 여전히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아기가 태어나려고 해요.] [아무래도 해답은 이미 나온 것 같습니다. 그 해답이 부인에게 행복을 갖다 주길 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들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매번 말씀드렸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분간은 이 사건에 매달려 있겠지요.] [행운을 빌겠어요.] 사만다는 그렇게 말하고 가운 안에서 가스총을 꺼내 아무 말 없이 크로스 웨이드에게 돌려 주었다. [부인에게도요. 아기 탄생란을 주의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일 먼저 알려 드릴게요.] [영광입니다, 부인.] 사만다는 로긴스와 양 부장과 낯선 네 사람의 경관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과의 작변이 아쉬웠지만, 그것은 희생자가 자지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느끼는 연대감에 다름아니었다. 그녀는 현관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소리없이 실내로 돌아왔다. 사만다는 어두운 아파트를 둘러보며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을 파티가 시작될 때부터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텐데. 마티와 연결된 본래의 충실감,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느끼는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수수께끼에 싸인 과거가 있다 해도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문제될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침실로 돌아왔다. 복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으로 마티의 만족한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규칙적인 숨을 쉬며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마티는 꿈을 자주 꾸니까. 그것은 아마 아기의 꿈이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꿈이고, 어린이 놀이터의 그네와 모래사장의 꿈이며, 어린이가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하는 날과 학부형회의 꿈일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마티는 즐거워하면서 꿈꾸겠지. 마티가 언제나 동경하고 있던 가족이라는 확신을 그에게 안겨 줄 것이다. 설령 수수께끼에 묻혀 있었도 마티의 과거는 과거대로 소중한 것이고, 언젠가는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 모든 것을 밝히는 가슴 벅찬 순간이 찾아오겠지. 사만다는 어렵지 않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실내복을 벗고 마티가 좋아하는 밝은 파란색 나이트 가운으로 바꿔 있었다. 침대로 드는 순간, 갑자기 마티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사만다는 마티의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아 흰 메모지를 한 장 꺼냈다. 그 위에 [우리 두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썼다. 그리고 그 메모를 마티의 나이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틀림없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만다는 침대로 들어갔다. 곧바로 마티의 체온이 느껴졌다. 분주했던 오늘 밤의 일이 아직 머릿속에 가득 차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온기가 그녀를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안녕히 주무세요.] 마티가 자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만다는 그렇게 속삭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거리는 서서히 조용해져 갔다. 차의 왕래가 줄어들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사라지고 있었다. 사만다는 크로스 웨이드와 양 부장을 생각했다. 범인을 뒤쫓다 헛짚은 것을 알고 지금쯤 실망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만다는 아직 잡히지 않은 캘린더 살인광을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은 당연히 마티의 무죄 방면으로 되돌아가 있어, 그것과 연관되는 장래의 일을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었다. 0 시 16 분이었다. 사만다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0 시 35 분. 마틴 쇼는 눈을 떴다. 그는 자고 있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기다리면서. 정확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마티는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침실에서 나갔다. 사만다는 잠들지 않고 그 소리를 들었다. 사만다는 마티가 아마 부엌에 가서 출출한 배라도 채워 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때로는 그가 혼자서 생각하거나 기쁨에 젖거나 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는 그가 계단을 지나 계속해서 거실로 들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티는 모형 기차를 선반에서 꺼냈다. 그리고 타원형으로 길이가 4 피트 정도인 레일을 거실에 깔았다. 그는 기차를 레일 위에 얹고 플러그를 꽂았다. 사만다는 기차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 어쩌면 그도 ㄷ른 남자들이 책을 읽거나 우표 수집책을 뒤적이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같이 모형 기차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상한 생각은 들었지만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것을 좋은 징조로 보았다. 마티는 즐거워 하고 있다. 기차란 언제나 아기를 연상하게 하는 물건이다. 기차와 아기는 멋지게 잘 어울리는 소재이니까. 마티는 달리고 있는 기차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제 기차 마음에 들어요, 아버지?] 그가 중얼거렸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낮아서 사만다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 잘하고 있지요?] 그는 천천히 침실로 다시 돌아와 사만다가 자는 것을 확인했다. 사만다는 여전히 자는 척 척했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이 밤에 그에게는 소중할 것이라고 믿었으므로 잠을 자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마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티는 침대 밑의 서류 가방 안에서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뉴스 쇼 비디오 테이프를 꺼냈다. 사만다는 한쪽 눈을 뜨고는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종종 비디오 테이프를 산다. 그것이


어떻다는 건가? 마티는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거실로 나갔다. 그는 오래 된 30 형 텔레비전을 끌어냈다. 텔레비전은 비디오 기기가 넣어져 있는 캐비닛 위에 올려져 있었다. 사만다는 비디오 데크의 테이프 투입구가 찰칵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티는 종종 비디오를 즐겼다. 뒤이어 테이프 투입구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티가 비디오와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켜자 찰칵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 된 진공관이 충전되자 30 초 정도 지나서 서서히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일까? 사만다는 생각했다. 영화는 아니었다.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뉴스를 전달하는 소리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이고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하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더글러스 에드워즈! 그래, 그 사람이다! 그녀는 마침내 생각해 냈다. 1950 년대의 CBS 에서 그가 어떤 식으로 뉴스를 진행했었는지를 생각해 냈다. 친정 부모님께서 거실에 두고 보던 오래 된 흑백 텔레비전에서 종종 그를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마티는 왜 하필 오래 된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테이프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는 회고 취미가 없거니와 역사가 취미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텔레비전광이므로 어쩌면 텔레비전 초창기 시절을 보고 싶어 오래 된 테이프를 손에 넣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광고 기획을 위해 뭔가 연구하고 있는 걸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모형 기차를 달리게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일까? 사만다는 생각했다. 자신은 피곤해 있고 마티는 암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닌가. 마티는 찬찬히 비디오를 보았다. 그리고 그 무서운 밤, 더글러스 에드워즈가 어떤 스타일로 이야기를 했었는지 상기해 냈다. 조용하고 담담한 목소리, 꾸밈이 없고 솔직한 태도, 그러한 스타일로 그는 지금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기차가 달리고 있다. 오래 된 30 형 텔레비전에서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마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이제 없겠지? 사원을 대표해서 레너드 로스가 잘난 체하며 건네준 사만다의 초상화에서 그의 눈길이 멈췄다. 저런 걸 누가 거실에 걸까? 그는 그것을 들어 부엌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최후의 중요한 의식을 위한 준비는 다 된 셈이다. 0 시 48 분이었다. 마티는 침실로 돌아와 사만다가 자고 있는 침대 옆으로 갔다. 손을 뻗어 그녀의 나이트 테이블 위의 작은 시계를 잡았다. 사만다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가늘게 떠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마티는 탁상 시계를 손에 들었다. 그는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정학히 1 시간 전으로. 11 시 48 분으로.


다시 12 월 5 일로. 바로 그 순간, 소름끼치는 전율이 사만다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티는 자신의 책상 위 시계도 바늘을 되돌려 놓았다. 그 시계에는 날짜판이 있었다. [6]이 [5]로 바뀌는 것을 사만다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미래의 아버지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사만다는 공포로 몸을 떨면서 마티가 거실을 돌아다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저기 벽시계가 있는 곳마다 차례로 멈춰 서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놓고 있었다. 다시 12 월 5 일로......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사만다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다. 아무리 이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이가 없다.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유치한 어린이들이나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공포의 포로가 된 채 침대 속에 있었다. 어째서 요즘은 이렇게 이상한 일만 일어난 걸까? 마티는 거실에 잠시 서서 자신이 있던 일을 다시 둘러보고 만족해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1952 년 그날 밤과 똑같았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을 죽일 때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아버지.]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속삭이지 않았다. 사만다에게도 들렸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일까? [가능한 일은 다 했어요. 아버지, 보세요.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뉴스가 들리지요? 물론 들리겠지요. 그리고 저 기차 소리. 아버지가 사주셨던 것과 똑같아요.] 사만다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침대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거실 쪽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똑같아요. 이렇게 하기까지 무척 힘들었어요.] 마티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만다는 거실 끝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뭘하고 계세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사만다 쪽을 바라보았다. [얄려 줘요!] 그녀가 소리쳤다. 마티는 벽시계를 흘끗 보았다. 11 시 53 분. 그는 잠깐 동안 사만다를 응시하더니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기묘한, 호기심어린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리고 부드럽고 상냥하게, 거의 정중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을 찾고 있어.] [마티, 일이라면 하고 있잖아요. 당신은 회사를 경영하고 있잖아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이 아이에게 기차를 사주고 싶었을 뿐이야. 늘 원했으니까.] [누구, 마티?] [어린애 앞에서 그만두지 않겠어, 앨리스!] [앨리스? 앨리스가 누구예요? 마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프랭키는 기차를 아주 좋아해.] [프랭키?] 생각이 났다. 프랭크 넬슨은 오마하의 소년 이름이다. 크로스 웨이드의 말에 의하면 어른이 되어 캘린더 살인광이 되었다는 소년. 아아,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만다는 비로소 깨달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의심할 여지가 있을 리 없다. 프랭크는 마티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프랭크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여 1952 년 12 월 5 일에 마음이 사로잡힌 프랭크인 것이다. 그는 시계를 뒤로 돌려 날짜를 되돌아가게 했다. 지금은 [12 월 5 일]인 것이다. 그는 그녀를 죽이려 할 것이다. 사만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이미 철수했다. 방어할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마티와 단둘이 있는 거다. [일부러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때론 긴장을 풀고 잠시 쉬는 것도 필요해.] [물론이에요. 당신은 빈둥빈둥 놀지 않아요.] 사만다가 대답했다. 그 외에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달래는 척하는 거다. 어쩌면 그만둘지도 몰라. [물론 아무것도 안해요.] 어쩌면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마티가 움직일 것이고, 누군가가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와 줄 때쯤이면 모든 것이 끝나 있겠지. 밖으로 도망칠까? 현관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틀림없이 잡히고 말겠지. 안돼. 살아나려면 아무리 괴로워도 내가 나를 지킬 수밖에 없어. [너야말로 그 걱정을 하는 거야! 어젯밤 어디에서 잤지, 앨리스?] [마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젯밤 어디에서 잤지?] [여기예요, 마티. 여기요.] [어린애 앞에서 그만두지 못하겠어, 앨리스!] [괜찮아요, 마티.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갑자기 마티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침실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리 와!] 그가 명령했다. [왜요?] [따라오라고 말했잖아!] 사만다는 현관문을 보았다. 마티가 통로에 서 있었다. 도저히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그녀는 그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기차를 살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어.] 그가 말했다.


[물론이에요.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조금 전에 테이프를 꺼내느라 서류 가방은 이미 침대 밑에 있지 않았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 세워진 가방에서 마티가 순식간에 해머와 체인을 꺼냈다. [아, 안돼요, 살려 줘요!] 사만다가 외쳤다. 흉기를 보자 일시에 공포가 솟구쳤다. 현관까지의 통로에 장애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그녀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 쪽이 훨씬 빨랐다. 그는 다리를 걸어 사만다를 저지했다. 그녀는 두세 바퀴 굴렀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여기에 있어야 해요, 엄마!] 마티가 명령했다. [저는 엄마가 아니에요! 사만다예요. 마티. 저는 당신의 엄마가 아니라구요.] 마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휘둘렀다. 사만다는 비명을 지르며 램프를 집어 마티를 향해 던졌다. 그것이 명중해 그의 팔에 상처가 났다. 그는 그 피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착한 여자가 아니에요, 어머니. 좋은 어머니라면 프랭키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지요. 당신이 착했던 적은 한번도 업어요.] 그는 다시 사만다를 향해 다가왔다. 사만다는 가구 사이를 여기저기 도망쳐 다니다 마지막으로 탁상 시계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시간을 빠르게 하려고 했다. [12 월 6 일에요, 마티! 12 월 6 일이에요!] 그러나 마티는 상관하지 않고 해머를 휘둘러 그녀의 손에서 시계를 떨어뜨렸다. 시간이 바뀌기도 전에 그것은 마룻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사만다는 그 틈을 이용해 마티의 옆으고 빠져나갔다. 그가 붙잡으려 하자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그는 현관 쪽의 통로를 막았다. 그녀는 부엌으로 도망갔다. 거기에는 나이프가 있을 것이다. [나이프]가. 그는 사만다를 쫓아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린애 앞에서 그만두지 못하겠어, 앨리스!] 그말을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제 늦었어요, 마티.] 그녀는 애원했다. [이젠 12 월 6 일이에요. 어떤 짓을 해도 변하지 않은 거예요, 마티. 시계를 되돌려 놓아도 변하지 않아요. 너무 늦었어요. 당신은 저를 죽일 수 없어요. 규칙 위반이에요.] [어린애 앞에서 그만두지 못하겠어. 앨리스!] 사만다는 나이프와 포크가 들어 있는 서랍으로 가서 재빨리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나이프를 집으려고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깜짝 놀랐다. 나이프가 한 개도 없었다. 파티 때 다 사용하여 몽땅 설거지통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티의 옆에 있는 설거지통에. 아무것도 없다. 가스총도 되돌려주어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는 그것을 확신했다. 마티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만다는 너무나 겁에 질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카운터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갑자기 마티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버지, 이것은 당신에게] 하며 그녀의 머리 위로 해머를 크게 휘둘렀다.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돌진해 오는 소리가 났다. 아파트 문이 활짝 열렸다. 흐릿하게 아른거리는 물체와 번쩍이는 섬광이 사만다의 두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목이 터져 갈라지는 듯한 기분 나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마티의 엷은 미소가 쇼크를 받아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그는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끝났습니다.] 권총을 손에 든 채 동정어린 눈빛으로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이렇게 끝나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사만다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귀는 총성 탓인지 아직 멍멍했다. 몸과 마음 모두가 충격으로 짓눌려 눈앞의 크로스 웨이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몇 분 후에 자신이 크로스 웨이드의 부축을 받으며 공포의 방에서 빠져나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흘끗 아래쪽을 훔쳐보고 마티의 피가 튄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했다. 끈적끈적한 피가 얼굴을 가로질러 흘러서 마티의 강박 관념을 상징하는 갈색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자, 앉으세요. 안심하세요. 이젠 괜찮습니다. 위험은 없습니다.] 그녀를 부축하여 소파로 인도하며 크로스 웨이드가 말했다. 사만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크로스 웨이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기 모형 기차가 여전히 달리고 있고, 더글러스 에드워즈의 모습이 낡은 30 형 텔레비전을 통해 1950 년대의 영광의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기차를 멈추고 비디오의 스위치를 껐다. 마티의 과거의 잔해는 갑가지 소리를 죽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만다가 조용히 물었다. [형사의 직감이라고 말하면 되겠지요. 차로 돌아가는 도중 시계를 보았습니다. 순간, 여기서는 12 월 6 일로 바꾸었지만, 문제의 땅 네브래스카의 오마하에서는 아직 12 월 5 일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거예요. 그곳과 여기와는 한 시간의 오차가 있습니다. 마티는 여기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날에 한해 마음은 오마하 시간으로 역행하는 겁니다.] [그는 시계의 바늘을 되돌려 놓았어요.] 사만다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오마하 시간으로. 남편은 완벽한 복수를 원했던 겁니다. 될 수 있는 한 정확히 1952 년의 악몽의 밤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밤 저를 죽이려 한 사람은 마티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프랭크였어요.]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만다가 말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마티에 대한 저의 사랑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요, 언제나.] 크로스 웨이드가 대답했다. 그는 일어나 전화기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검시관의 사무실로 연락을 했다. 모든 것인 끝났다. 캘린더 살인광의 공포는 막을 내렸다.

에필로그

나흘 후 마티는 매장되었다. 사만다는 그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않았었다. 그 역시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사만다는 그가 정말 누구이고,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유체는 비행기로 오마하에 옮겨서 그가 자주 찾아갔던 작은 묘지, 즉 그의 아버지 무덤 옆에 묻혔다. 그의 원래 이름대로 프랭크 넬슨으로 묻히고 그 이름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게다가 사만다는 그의 아버지 묘가 잘 정돈되어 있는지, 묘비가 바르게 서 있는지도 확인했다. 그녀는 마티의 친구들에게 오마하에서의 장례식 안내장을 내면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스캔들 때문에 참석자가 적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과연 실제로 참석한 친구는 단 한 사람, 톰 에드워즈 뿐이었다. 그는 쉴새없이 사만다를 위로했다. 뿐만 아니라 장의사와의 일이라든가, 사망 신고를 낸다든가 하는 법률상의 문제까지도, 그리고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해 주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가 다 그를 사만다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생각했다. 마티가 죽고 몇 개월도 안되어 사만다는 친구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신문마다 상세하게 보도된, 전설 같은 캘린더 살인광 사건이 사만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린도 자기 남편한테서 귀가 아프도록 잔소리를 들어서인지, 예의는 갖췄지만 그전만큼 친하게 굴지 않았다. 그러나 톰은 감사할만큼 헌신적으로, 그야말로 자기 일처럼 돌봐 주었다. 게다가 날마다 사만다를 찾아와 저녁을 같이 먹으러 가고 때로는 영화나 브로드웨이에 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자 찬에 태워 산부인과에 검진하러 같이 가주었다. 사만다는 톰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그는 마티를, 아니 프랭크가 되기 전의 마티를 점점 닮아 갔다. 어쩌면 그는 마티를 흉내내며 마티를 우상화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만다는 그 일에 호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언제까지나 추억 속에 머물고 싶은 마티의 일면을 고집하고 있었기 ㄸ문이었다. 예정대로아기가, 그것도 사내아기가 태어났다. 사만다는 아기의 이름을 짓기 위해 톰에게 조언을 구했다. 톰의 대답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마틴 에버릿 쇼 주니어. 아기가 태어나자 사만다와 톰은 친해졌고, 톰은 일주일에 서너번 찾아와 사만다와 아이를 데리고 산책했다. 마티가 죽고 14 개월이 지나 톰과 사만다는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결혼식 직전 톰은 사만다에게 마티의 묘에 성묘라도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제일 친했던 친구로서 경의를 표하고, 그리고 가슴에 담아 두었던 뭔가를 밝히고 싶다고 하면서 혼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사만다는 감격했다. 그 때문에 톰에 대한 애정은 더할 수 없이 깊어졌다. 그녀는 톰의 사생활을 존중했기 때문에 그가 혼자 여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가 묘지의 문을 들어선 날은 천지가 꽁꽁 얼어붙는 듯한 춥고 음산한 날이었다. 그는 마티의 묘 앞에 섰다. 그리고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당신을 날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곧 그녀와 결혼하고 당신 대신 다시 활동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해낼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당신에게 엄숙히 맹세하겠습니다. 12 월 5 일은 반드시 옵니다. 이번에는 그녀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녀는 도망치지 못하겠지요. 편히 잠드세요, 사랑하는 형님.] 그는 묘지를 나왔다. 2 주일 후 사만다 쇼는 어느 교회에서 톰 에드워즈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다음날 톰은 지하철로 퀸스에 가서 해머와 체인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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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마지막 파티 지은이: 정태원 역 ----- 차 례 -----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역자 소개 프롤로그 1 눌렀다. [린? 샘이야. 마티가 방금 출근했어.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곧 갈게.] 린에게는 생일 파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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