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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칭찬하는 사람, 헐뜯는 사람 지은이: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1부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언뜻 보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인데 서로 반대되는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낙관적인 사람은 굉장히 활동적이고 적 극적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실제보다 쉽게 생각하여 위험한 길을 가거나 느 닷없는 모험을 하는 일이 있다. 이와 반대로 비관적인 사람은 지나치게 신중해 서 좋은 기회들을 허다하게 놓치곤 한다. 간단히 말해 이 두 가지 성질이 알맞 게 함께 섞인 경우가 이상적인 것 같다. 사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어려운 일과 앞일을 대하는 서로 다른 두 태도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이기도 하다. 먼저 비관적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비관적인 사람은 미래에 대해 부 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사람은 또 사람들에 대해 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최악의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사람들 관찰할 때 그 어디에서든 가장 나쁜 성질, 가장 이기적이고 타산 적인 행동의 동기들을 찾아 낸다. 비관적인 사람은 사회가 비열하고 더럽고 본 질적으로 사악하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 상황을 이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들, 도와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이다. 비관적인 사람에게 무슨 계획을 이야기하면 그는 곧 부딪히게 될 장애물들과 온갖 어려움을 열거해 보일 것이다. 그는 목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남는 건 괴 로움과 실망과 굴욕뿐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듣고 보면 기력을 잃고 허무한 생각에 빠지게 된다. 비관적인 사람에게는 특이한 전염력이 있다. 어느 날 아침 우연히 길에서 비 관적인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는 곧 당신에게 의기 소침하고 무기력한 태도 를 전염시킨다. 비관주의자는 우리들 모두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어떤 경향들, 잠에서 깨어나 힘을 얻기만을 기다리는 경향들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런 경향들 가운데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둘째는 게으름인데, 제자리 에 멈춰서서 껍질 속에 틀어박혀 있으려는 경향이다. 사실 비관적인 사람은 본 질적으로 게으름뱅이이다. 그는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습관에 길들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에도, 밥을 먹을 때도, 주말을 보 내는 방법에도 판에 박힌 습관을 따른다. 비관적인 사람은 대부분 인색하다. 이 세상이 탐욕스럽고 부패하고 남을 이용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무엇 때문에 너그럽게 굴겠는가? 마지막으로 비관적인 사람은 대부분 질투심이 많다. 비관적인 사람에게 한번 말을 시켜 보 라.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을 자화 자찬하며 떠벌릴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장애가 없었다면, 부정 부패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그럴 주제도 안되는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다면 더욱더 많은 일을 할 수 있 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제 낙관적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겨보자. 낙관적인 사람들은 비관적인 사 람들과는 달리 순진해 보인다. 그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러다가 위험에 처하기


도 한다. 하지만 좀더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실제로 그가 남들의 악의와 약점 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낙관주의자는 이런 장애물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점을 중요시하 며 그런 면을 일깨우려 애쓴다. 비관적인 사람은 자기 속에 갇혀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으 며 남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한다. 반대로 낙관적인 사람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게 내버려두고 시간을 할애해서 그들을 관찰한 다. 이렇게 그는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 그러니까 북돋아주고 꽃 피울 수 있는 성질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단결시켜 목표를 향해 가도록 이끈다. 유능한 관리자, 우수한 기업가, 뛰어난 정치가는 이런 능력을 지녀야 한다. 낙관적인 사람은 또 어려운 일을 쉽게 극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해결책에 대하여 한층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불리한 조건을 유리한 조건 으로 신속하게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어려움을 빨리 알 아채지만 그 어려움에 최면이 걸려 마비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 우, 약간의 환상을 갖는 것만으로 상황을 전환시킬 수 있는 법이다. 냉소적인 사람과 열광하는 사람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잿빛으로 본다. 그런 사람은 당신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든, 어떤 계획을 짜든 곧 그 일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찾아낸다. 그 는 자기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또 당신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에게는 믿는 마 음이 없기 때문에 당신의 믿음도 빼앗아버린다. 그가 만약 예술가라면 그림 장 수는 모두 도둑놈이고 비평가들은 썩어빠졌고 그림을 사들이는 손님들은 모두 무식하다고 말할 것이다. 무슨 겨연 대회가 있다면 심사가 속임수라고 확신할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움직일 만한 가치도 없고 애를 쓸 만한 가치도 없다. 계 획을 세우고 시간을 들이고 행동에 옮길 가치가 없는 것이다. 비관적인 사람은 자신의 상상력마저도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는다. 냉소적인 사람 역시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지만 비관적인 사람과는 달리 행동 을 한다. 그는 인간이라는 것들이 몽상에 빠져 있고, 철없고, 위선적이고, 야심 많고, 탐욕스럽고, 비열하고, 남을 이용하고, 은혜를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허영심이 강하고 아첨을 좋아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들의 이런 약점과 야비함을 모조리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냉소적인 사람은 자신이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해 언제든지 인간의 비열함과 결점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는 책략꾼 이다. 그의 기본적인 덕성은 교활함이다. 그는 참을 줄 안다. 청렴하고 정직한 인물에게는 항상 작은 결점, 약점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 다. 냉소적인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절대 헛된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들의 우정을 공공연히 널리 알리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며 상황이 그러 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냉소적인 사람은 온갖 열정을 마음대 로 조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의도대로 사람들을 이끌어갈 줄 안다. 몇몇 정 치 지도자들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그들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며 그런 세상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추종자들의 열등한 부분을 이용할 뿐이고 그들을 자신들의 냉소주의 속으로 끌어들일 뿐이


다. 그들을 부패한 사람들이다. 세번째 인간 유형은 열광하기 잘하는 사람, 열광자이다. 열광자는 지치지 않고 꿈을 꾸는 사람이고 계획을 짜는 사람이며 전략을 창출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꿈을 남들에게 퍼뜨린다. 그는 맹목적이지 않으며 분별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고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는 것 을 잘 알고 있다. 열 가지 계획 가운데 아홉은 실패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꺾이는 일은 없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다시 한번 더 되풀이한다. 그 의 정신은 풍요롭다. 끊임없이 큰길을 찾고 큰길이 없으면 오솔길이라도 찾는다. 그는 가능성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열광자는 인간이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 며 악이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인간의 야비함을 볼 줄 안다. 그는 금방 실망을 하지만, 선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지향하려고 마음먹 는다. 그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가장 창조적이고 관대한 부분에 호 소한다. 그 부분을 활용해 좋은 결과를 얻으라고 사람들을 재촉하기도 한다. 사 람들의 뜻을 거슬러가면서, 억지로라도 더 좋게 잘 살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렇 게 해서 사람들의 잠재력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게 해준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 고, 낙관적으로, 넓은 마음으로 행동하면 세상 모든 일이 다 가능하다는 것을 보 여주면서 사람들을 이끌어나간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 항상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의 형편이 좋지 못 한 때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순간에 그런 소식들을 전한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혜의 힘으로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불신해 왔다.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을 <재난의 예언자>라고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 신이 지혜롭고 이성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얘기에 어깨를 한번 으쓱해 버리 고 만다. 뿐만 아니라 종종 그들이 우리 일을 걱정해 주고 있다고 여기고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성실 하고 믿음직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 하는, 심리적 사회적으로 특이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틀림없이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릴 어떤 소식을 전해야만 할 경우, 당신의 친구라면 아주 신중해질 것이다. 그는 그 소식을 언제 전하는 게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이다. 친구라면 한밤중에 전화를 건다든지, 시험을 보러 들 어가기 직전에 당신을 붙잡고 소식을 알리지는 않는다. 운동 선수의 코치는 시 합을 시작하려는 운동 선수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극단의 단장은 배우가 차분하게 공연을 하길 바라기 때문에 공연이 끝날 때를 기다린 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평정이 필요한 사람의 마음을 어지 럽히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는 당신이 어떤 상 태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사람은 당신을 보자 마자 불쾌한 말을 전한다. 허물없는 사이라면 한밤중에 전화로 소식을 전한다. 아침에, 당신이 눈을 뜨자마자 그런 소식을 전해서 하루를 망쳐놓기도 한다. 당 신이 당황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면, 불쾌한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으면서 상황이 더 나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


한다. 우리는 그의 개인적 흥미에 속아 그가 자상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잘못 생 각하게 되고 흥분하는 그를 보고 진심으로 함께 걱정해 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런 소식을 당신에게 전하는 것을 즐기며,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 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한 험담을 전하는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신에게도 당신이 잘 되라고, 격려해 주느라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해 주는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당신을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이 야기 하고, 또 어디서는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듣고 전해 주는 건 바로 그 친구들이다. 그들은 그런 얘기를 아주 자세하게 전해 준 다. 남들이 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하는 것을 보면, 그 말을 했다는 사람과 어 떤 식으로든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말들을 어찌나 정확 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말하는 투마저 똑같게 여겨지지 않는가? 사실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 람의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말을 한 사람들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친구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화를 내며 당 신을 변호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다. 그렇게 침묵함으로써 남들의 험담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그쪽 편에 줄을 서는 것이 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 또는 험담을 전하는 사람은 그의 희생자에게 상처 를 주면서 한편으로는 그 희생자와 결속되어 있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고 당신 을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러니까 자신이 당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그의 능력이다. 나쁜 소식을 전해 듣고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정보와 도움과 충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정 보를 준 사람, 가까이에 있는 사람,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처럼 보 이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바로 나쁜 소식을 전해 준 장본인에게 매 달리는 것이다. 그 사람이 동맹자처럼, 구원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 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먹잇감을 자기에게 보다 더 종속시키기 위하여, 그 사 람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기 위하여 상황을 악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올가미에 걸려들어 꼼짝없이 감시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그들은 마치 환자의 불안감을 점점 키워나가는 정직하지 못한 의사의 노 예가 되어버린 우울증 환자들 같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자유 자재로 사용하는 또다른 수법은 죄의식을 만 들어내는 것이다. 희생자와 친밀한 관계일 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내나 남편,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과 같은 사람이 대상이 된다. 자주 볼 수 있 고 널리 알려진 경우로서, 남편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남편을 계속 긴장시키 는 아내가 있다. 남편이 멀리, 도쿄나 뉴욕 같은 곳으로 출장을 떠나자마자 아내 는 아이가 아프다고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말로는 별것 아니라고 말하지만 목 소리를 떨고 한숨을 쉬어서 원하던 대로 남편을 불안한 상태에 빠뜨린다. 남편 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는 긴장한 나머지 잠을 이룰 수 없고, 가엾게도 아내만 혼자 버려두고 왔다는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유형의 여자들과 매한가지인 남자들도 있다. 그런 남자는 일 때문에, 돈 때문에, 자신의 심장 때문에 항상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남자이다. 이런 남자는 입을 열기만 하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아내


는 자신이 멍청하고 쓸모 없고 무능력한 존재 같은 생각이 들고 그 문제의 책임 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며 인간을 믿지 않는 회의주의자이다. 그는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신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곳을 쳐다보든, 그곳에서 음모와 모략과 정직하지 못한 의도들을 찾아내고 만다. 당신 곁에 와서 불행한 소식과 험담들을 전할 때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할 뿐이다. 그러면서 당신을 향한 적의를 노출시키 는데 그것은 당신도 남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적당히 거 짓말을 하면서, 당신은 속아도 싸다고 생각한다. 선의를 낭비하는 사람 밀턴의 「실락원」에서 사탄은 신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의 이유로 끔찍하게 부담스러운 감사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주 관대하게, 사심 없이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들이 나중에 우리를 원망하고 비 난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머릿속에서 한번 실험해 보자. 우리가 아주 부자인데 길을 가다가 빈민가를 지나게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우연히 어떤 소년을 하나 골라 그를 공부시키고 그의 부모를 도와주고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사주고 어떻게든 소년이 성공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 소년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매번 이런 일들을 해주는 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에서 도와준다. 당신은 어 떤 결과가 오리라고 생각하는가? 큰 불행뿐이다. 자기 스스로 이룬 것과 당신에게 받은 것을 그 소년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은 마치 모든 걸 자신의 힘으 로 이룬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당신이 교육의 근본적인 규칙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 우리들의 욕망은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경향이 있다. 장애를 만나 그것을 뛰어 넘고 시련을 당해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비로소 그 욕망을 억제하는 방법 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바로 이런 장애와 시련들이 다. 어떤 물질의 가치는 우리가 그것을 얻으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에 토대 를 두고 있다. 견실한 전통을 가진 부르주아 가문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나 소 년들을 도울 때 아주 인색하다. 그들은 먼저 아이들에게 어떤 물건을 갖기 위해 서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와는 반대로 복권에서 거액이 당첨된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복권에 당첨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돈을 모두 다 써버리고 만다. 결혼식 때에도 똑같 은 일이 벌어진다. 돈이 많고 유명한 남자들, 그리고 또 유명한 배우들이 가난하 고 이름 없는 처녀들과 결혼하는 일이 있다. 이런 남자들은 처녀가 가난에 길들 어 있기 때문에 겸손하고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 녀를 그렇게 높은 위치로 끌어올려 준 게 바로 자기라는 점을 항상 기억하고 고 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개 예상과는 반대로 이런 결혼을 한 가난 한 사람들은 곧 미친듯이 돈을 써대기 시작하는데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른다. 만 약 남편이 그녀의 행동에 반대하고 이혼을 제의할 경우 그녀는 위자료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액수를 빼앗아갈 것이다. 남편은 그녀가 냉소적이고 잔인한 한 남자


때문에 망쳐버린 자기 인생 이야기를 스캔들을 퍼뜨리는 잡지에 팔아넘기지 않 은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런 뻔뻔하고 배은 망덕한 사람만이 잘못한 것이고 부도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순하고 충동적인 감정, 베푼다는 단순한 기쁨을 바탕으로 무엇인가를 준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다. 이것은 관대한 행동이나 사랑을 헐뜯자는 말이 아니다. 이타주의처럼 아름다 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탐욕스럽고 인색한 수전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하지만 너그러움과 별다른 이유 없이 돈을 쓰는 낭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돈 을 흥청망청 쓰는 낭비가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실제적 인 자선 효과 같은 것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무엇을 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칭찬을 받을 때 기쁨을 맛본다. 이런 낭비가들 중에는 쉽게, 교활하게, 속임수로, 위험한 도박으로 돈을 번 사 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공적과 그 가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아부하는 사람들, 익살스러 운 사람들, 그들이 흥청망청 써대는 돈으로 먹고 마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 다. 낭비가들은 그들에게 넘치게 친절을 베풀지만 그들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으 며, 속으로는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낭비가들은 자 기들의 과시에 끊임없이 굴욕감과 짓밟히는 기분을 느끼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 이 깊은 원한과 적의와, 상황이 허락한다면 곧 드러날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 사 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진실되고 깊은 감사의 마음, 덕과 같은 감사의 마음은 너그러움과 타당함을 기초로 한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이라면 정말 타인의 행 복을 염려해야 한다. 타당하게 받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들이 남들의 필요를 이해하고 남들이 하는 일을 제대로 평가하며 객관적으로 대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우리 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다. 니힐리스트 역사가 시작된 이래 문화나 정신 세계에는 항상 두 가지유형의 인간들이 존재 했다. 건설하는 사람과 파괴하는 사람이다. 땅을 일구어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 두는 사람이 있고, 남의 것을 빼앗아가는 약탈자들이 있었다. 도시를 건설하는 사람이 있고 초원에서 침략해 오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떠돌이들이 있었다. 중세에는 베네치아나 피렌체처럼 상업적으로 번성한 대도시를 증오하며 예술 작품을 불태워 버리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보나롤라처럼 어디 를 보든 악과 귀신들린 예술과 부패와 불결함만을 찾아내던 수많은 이단재판관 들과 똑같은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지난 세기에 니체는 그런 사람들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서 그들을 니힐리스 트(호무주의자)라고 불렀는데, (니힐)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그들은 원한과 증오에 가득 차 있으며 갑작스레 나타나 는 것, 제 기능을 잘하고 있는 것, 건강하고 유쾌하고 승리를 거둔 모든 것에 반 대한다. 그런 사람들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만날 수 잇고 속인들에게서만이


아니라 가톨릭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대하고 파괴하는 것이 그들이 능력이 고 정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파의 니힐리스트들은 유태인 배척론자들이다. 유 태인들은 똑똑하고 돈이 많고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좌파의 니힐리스트 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한다. 자본주의가 부와 풍요로움과 번영을 생산해 냈기 때 문이다. 파시스트들은 편안한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아니다!)라고 대 답한다. 니힐리스트들은 만족을 느끼고 행복해하며 평화로운 사람들을 보면 기분이 좋 지 않다. 그는 투쟁과 전쟁과 파괴를 찬양한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으며 파국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항상 자신의 적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들이 누가 되었든 말이다. 그 어떤 정치 진영이든지 속을 들여다보면,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정신 상태 를 지닌 사람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런 정신 상태가 하나의 사고 방식 이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시사 해설자들을 찬찬히 비교해 보라. 니힐리스트들은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건설적인 제안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독설 을 퍼붓고 목청을 높이고 분개하고 자신들의 잔인성을 자랑스럽게 내보인다. 혁 명이 일어났을 때, 전체주의 체제 내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런 종류의 사 람들은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는 이단자들과 마녀들을 박해하고 고문하는 사람들이며 파시즘 시기에는 비림 경찰의 스파이이고 소련에서는 정치 경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리는 비밀 경찰 요원이 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민주적이고 평화롭고 비밀 경찰이 없는 시대에, 니힐리 스트들은 찾을 수 잇는 것을 이용해서 박해자 역을 일삼는다. 어떤 사람들은 무 자비하고 가혹한 판사가 되어 자신의 감정을 분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금융 활동에 몰두하여 돈을 쓸어모은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는 기업의 계획들을 파 괴하고 산산조각내서 그 기업의 소유주들을 파멸시키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등 장한다. 니힐리스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암흑가에서 살고 있거나 암흑가와 관련이 있 다. 또 다른 니힐리스트들은 신문의 한 영역에 살면서 작가, 지식인, 예술가들을 가혹하게 공격한다. 어떤 작품이든 자기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말과 글로 흠집 내어 망가뜨리고 마는 몇몇 비평가들이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니힐리스트 들은 다른 사람들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가치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를 공격하 고 모욕을 주고 중상 모략을 한다. 화형으로 자신의 증오를 표출할 수 없기 때 문에 중상 모략으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의 주위에서, 당신의 동료와 가족과 친구인 체하는 사람들 속에서 니힐리 스트들을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전체적으로 당신 의 일, 당신이 공들여 헌신적으로 이루어놓은 것을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 한 마디로, 한번의 타격으로 그것을 송두리째 쓸어없애 버린 다. 그들은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행복을 느낀다. 타인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 우리들은 모두,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신을 존중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게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된다. 엄마가 아기를 가슴 에 안고 입을 맞춰주며(넌 정말 예쁜 아가야)라고 말해 주기 때문에 아기는 자 신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일평생 지속된다. 우리 는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해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높이 평 가해 주는 말을 정기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런 가치 있는 인정을 해줄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경우에 따라 다 르지만, 어떤 특정한 사람들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만 그럴 자격이 있다. 어린아이가 친구에게서 (너 똑똑하다)라고 애기 듣는 것은 별 쓸모가 없다. 선생님과 아버지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젊은 운 동 선수가 자신감을 갖게하는 데는 아버지가 별 도움이 안 된다. 그 선수에게는 트레이너의 판단력이 필요하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서 삶과 행복의 본질 그 자체를 직감 하게 된다. 이런 경우 사랑하는 사람의 판단과, 신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설 수 있게 하는 그의 사랑이면 족하다. 우리는 두 범주의 사람들에 의존해서 우리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특수한 전문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정과 회사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대부분 인정받고 싶은 데서 비롯된 것 이다. 온갖 권력들이 실은 몇몇 사람의 능력, 즉 좀처럼 사람들을 인정해 주지는 않으면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몸이 달게 만드는 능력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당신에게 만족을 주지 않는)사람들이다. 당신이 칭찬이나 상, 호의적인 평가 같은 것을 바라는 줄 눈치채자마자 그들 마음속에서는 그런 기대 를 꺾고 싶은 취미가 돌연 힘을 발휘한다. 때로는 어린아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장난으로 그럴 경우가 있다. 어 떤 아이가 상을 타고 뛰어난 점수를 받았을 때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를 칭찬하 는 게 아니라 놀린다. 또는 학교에서 아들이 좋은 점수를 받아왔을 때 아들에게 그저 네가 해야 할 의무를 한 것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사랑과 인정을 원하 는 그 사람들의 소망을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상대 에게 무관심하게 대하고 우월감을 즐기는 거짓된 우정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친구의 관심을 끌고 다정한 행동, 눈길, 칭찬을 얻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런 지배의 메커니즘은 가족 내부에서 자주 이용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인정받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 때문이다. 가끔 칭찬이나 감탄의 말을 전혀 하지 않는 남편을 볼 수 있다. 아내는 한껏 멋을 내서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완벽하게 머리 손질을 하고 남편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돈을 너무 많이 썼다고 나무라면서 자신의 지배권을 확인한다. 밖에서 인정받는 남편을 가정에서, 아이들 앞에서 무시하는 아내들이 종종 있 다. 직업 세계에서 그 남편은 성공한 남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경외감을 주 며 높은 평가와 찬탄을 받는다. 그는 아내에게도 똑같이 인정받기를 원할 것이 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가 아내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아내는 남편의 결점을 찾아낸다. 그녀는 자기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며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결점을 강조한다. 그는 밖에서는 중요 한 인물인지 모르나 가정에서는 무가치한 존재이다. 이런 식으로 아내는 남편을 손에 넣는다. 종종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별거중이거나 이혼을


간 경우, 상대방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경쟁을 한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방법은 예술 적인 삶, 전문적인 삶, 학문적인 삶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 성공할 가망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신랄하게 비평해서 명성을 얻는 비평가들이 있다. 기업에서 평가 절하의 메커니즘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한 기업을 소유한 가문의 힘을 모두 빼앗고 회사를 거의 손에 넣을 뻔했 던 이사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아주 어려운 시기를 잘 이용해 소유주 가 문의 호의를 샀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이사들과 고문들 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그는 언제나 엄격하고 항상 눈을 찌푸리고 완고했다. 그 는 누구에게서든 결점을 찾아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잔인하게 그 결점들을 공공연히 밝혔다. 몇 해가 지나도록 그의 입에서 감탄이나 칭찬의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유형의 간부들이 처음에 좋은 성과를 얻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 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 똑똑한 사람들과 재능 있는 사람들은 놀이의 내막을 파악하고는 떠나가 버린 다. 그런 간부들과 함께 남아 일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뿐이고 그렇게 해 서 차츰차츰 이런 간부들은 범속한 가운데 가라앉게 된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 의 가치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맞이하는 운명이다. 무 가치한 것만이 그들에게 남는다. 자신의 약함을 이용하는 사람 예의 범절은 가능한 한 남들이 우리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으며 말을 받아줄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걸기 전에 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 소개를 하고 허락을 얻고 용서를 구하고 감사의 인사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단히 신경을 쓴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을 연구한다. 우리 새 이웃은 어떤 사람일까? 내 동료의 진짜 생각은 어떤 것일까? 이 모든 경우에 우리는 까다롭고 엄격하게 군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판단을 유보하는 상황들이 있다. 어린이들, 청소년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을 대할 경우이다. 이때는 방어 자세 를 풀고 그들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너그러워진다. 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당하고 만다. 어디까지가 무지이고, 어디서부터 도발이 시작되는 것일까?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도발의 명수들이다. 아이들은 징징대고 울면 부모들을 화나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 우산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나쁜 귀신이 똑같은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인종 차별주의자처럼 보이게 하려고 날 흥분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닐까? 종업원 이 콧노래를 부르며 당신이 방금 산 윗도리를 태워놓고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 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결백할까? 약자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이용하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압력을 가할 수 있 다. 너그러운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약 중독자들의 경우가 그러한데, 그들은 매번 부모를 협박하며 돈을 달라고 강요한다. 마약 중독자는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일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만 마약이라는 끔찍한 알리바이, 엄청난 변명이 있다. 개개인의 힘만으로는 정신 적 도덕적으로 그를 당할 수가 없다. 도저히 안 된다. 같은 마약 중독자들의 집 단 속에서나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약자들은 대부분 다른 이의 관대함을 악용한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그렇게 한 다. 하지만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엄마들이 아들을 위해 온갖 노력 을 다 기울이지만 그런 뒤에는 마치 독점욕 강한 애인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엄마들은 딸의 죄의식을 이용한다. 그녀들은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 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다가, 그 후에는 딸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도와줘야 한다 고 주장한다. 우리는 언제나 힘이 없고 허약한 사람은 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 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약간 정신이 이상했던 여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혼자 살 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동정했다. 그런데 나중에 난 그녀가 정말 심술궂고 너무 나 잔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병 환자들이나 노인들은 공격적인 경우가 많 다. 그들을 실제보다 더 낫게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이다.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 모든 인간은 존중받으려 애쓴다. 아니, 그저 존재하고,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 고, 무시당하는 것을 막아보기만이라도 하려고 애쓴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같으면 울음으로 관심을 끄는 어린아이들에게서 그런 예를 금방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을 알리기 위한 다른 방법들을 배우게 된다. 한 학급에는 친절하고 공손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가 있고, 용기로 인기를 끄는 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농담과 익살과 경멸로 자신의 조재를 입증하는 아이가 있다. 단체 사진에서 손가락을 세우고 조롱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얼굴을 찡 그리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종종 시끄럽게 떠들거나 소동을 피우는 방법을 이용한다. 스스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남의 공간에 침입한다. 아마 작은 오토바 이의 소음이 계곡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그런 면은 성인이 되면 사라진다 성인은 이성적인 행동들 뒤에 전략을 숨기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자, 지금 병원에 있다고 해보자. 아침 여섯시에 간호사들이 도착해서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창 문을 열고 꽝 소리나게 문을 닫는다. 삼류 여관에서 종업원들은 복도에서 잡담 을 하고 소리를 지른다. 거리에 있는 석공들은 6 층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서로 의 이름을 부른다. 모두들 손님에게, 행인에게, 당신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 시킨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불평을 하면 성을 내며 대답한다. (난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오.) 일은 그들의 본심을 가려주는 덮개이다. 지금 들려주게 될 진짜 이야기처럼, 소름이 부부 싸움으로 번져 이혼으로 끝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편은 집에서 작업을 하는 지식인이었다. 아내는 활동 적인 여자로 항상 책에 파묻혀 사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데 진절머리를 냈 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엌에서 일할 때 화를 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접시와 컵을 계속 깼고 의자들을 시끄럽게 내려놓았다. 그 녀는 그런 소음을 통해 자신의 활동도 남편의 공부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전문가 기질은 사려 깊은 행동에서 나타난다. 숙련된 웨이터는 손님들 뒤로 조용히 다가와서 눈에 띄지 않게 컵에 물을 채워놓는다. 반대로 무능력한 하녀


는 자기가 무슨 희극에 나오는 시녀라도 되는 양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의 목적은 시중을 드는 게 아니라 자기 개인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너무나 친절하고 격식을 차리지만 단 한순간도 당신을 편안히 놓아두지 않는 여주인에 게 초대를 받아본 일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흥미로운 대화에 푹 빠져 있을 때 여주인은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것을 맛보라고 열심히 권한다. 아니면 대화를 함께 나누고 있던 어떤 사람을 빼내 다른 편으로 끌고 가버린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다시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파티에서 사람들은 배우와 관객으로 나뉘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는 역할 이 바뀐다. 처음에 말을 했던 사람이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남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계속 말을 하 거나 연기를 한다. 아니면 싫증을 내고 불안해하다가 그 자리를 떠나고 마다. 이 런 유형의 사람이 둘이 있으면 불가피하게 경쟁을 하고 만다. 그런 경쟁은 공정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번은 어떤 파티에 고상하고 유명한 시인이 초 대되었다. 그는 은근한 독설을 섞어 부인들에게 카드 점을 쳐주고 있던 교활하 고 심술궂은 골동품상을 경쟁자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들은 모두 흥 분해서 조그맣게 탄성을 지르며 시인을 에워쌌다. 승리였다! 말을 다 끝맺지 않는 사람 자기가 시작한 말을 다 끝맺지 않는 사람들을 눈여겨 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 런 사람들은 말을 시작하고 마치 무엇인가 꼭 할말이 있는 것처럼 구눈데, 잠시 후에는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이, 적절한 말을 찾기라도 하듯이 말을 중단한 다. 그 사이 어떤 몸짓을 하고 태도를 바꾸고 물건을 손에 쥔다.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며, 가끔은 이야기를 좀더 잘 들으려고 그들을 쫓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말을 안한다. 그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애기를 시작하고전혀 다른 말을 한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이르면 다시 부주의하게 하 던 말을 멈추고 또 전과 같이 행동한다. 이런 것은 화를 돋구는 태도로서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불만스럽게 만든다. 나는 불과 며칠 전 밤에야 겨우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채널이 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스포츠 해설가가 권투 중계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 <자, 챔피언이 분명하게 앞에 나섰는데 어떤 의도로...작년처럼 이 챔피 언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싸우고 있습니다만...챔피언 변함없이 링 한복판을 차지 하고 있는데, 여기엔...심판이 끼여듭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러니까 매번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면서 그때마다 뭔가 중요하고 흥미로운 어떤 말을 금방 덧붙일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아마 그가 아는 게 굉장히 많고 무엇이든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그 는 사람들이자신에게, 자신의 용기에, 자신의 능력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며 모두 들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하려는 말을 기다리게끔 강요한다. 말을 제대로 다 끝 맺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이런 이유로 그러는 것이다. 자기 개인에게로 관심을 끌 어들이기위해,무대의 중앙에 서기 위해서이다. 비슷한 경우로 내가 스페인 웨이터들에게서 여러 번 발견했던 태도가 생각난 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하고 손님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친절한 태도를 보이 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플라멩코를 추는 무용수 같은 자세로 거 만하게 테이블 사이로 지나간다. 그들은 시중을 잘 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


신들의 몸매를 과시하고 자신의 중용성을 입증하고 싶어하기만 한다. 하지만 말을 끝맺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 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고 싶어한다. 그들은 당신이 자기 말을 기다리도록 일부러 말을 멈추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당신이 먼 곳에 가 있을때 전화를 해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만 말하고 그 내용을 말 하려 하지 않아 당신을 되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 속한다. 또는 자 신을 찾게 만들 뿐 만나주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또 죄의식을 만들어내는 데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을 과시하거나 무 엇인가 빌미를 잡아 당신을 비난한다. 당신은 그럴 때마다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당신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고 당신을 조종하고 지치게 만든다. 말을 다 끝맺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수없이 많은 일들을 시작해 놓고 단 한 가지도 끝맨지 못하고 한다. 그들은 모든 일을 아주 세심하게 준비한다. 일을 시 작하기 위햇 책을 사고 도구들을 사고 공부를 하며 그 이야기를 하는등,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린다. 그들의 집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생활을 빽빽한 약속과 연기할 수 없는 일들로 빈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걸음과 리듬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 다. 그 누구도 그들이 만들어낸 혼란 상태에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모두 피할 수 있다. 또 벌인 일들을 단 한 가지도 끝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들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말끝을 흐리고 무질서를 불러와서 이성적이고 건설적인 사람들에게 영 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변덕스러운 방랑으로 사람들을 구속한다. 미숙한 사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 대한 의무를 지니 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우리를 위해 일하거나 우리와 함꼐 일하는 사람들, 우리 상관과 동료들, 우리에게 협력과 도움을 요구하는 사 람들, 우리를 도와주거나 우리가 감사를 표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이런 관계들 은 대개 아주 미묘하고 어렵다. 헤아림과 신중함과 능력과 힘을 요구한다. 우리 는 이 모든 관계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하며, 어떤 관계에 신경을 더 쓰고 다른 관계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성숙함이란 이런 복합성을 받아들이는 것, 이 런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들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에 책임을 진다는 성숙함의 개념은 그 반대의 것, 즉 미숙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미숙함을 삶을 자의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 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모든 것은 역할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역할이란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어떤 사회적 위치를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가지 역할만을 수행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어 린아이뿐이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벌써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부모와 선생님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는 없다. 이와는 반대로 어른들은 모두 수많은 역할들을 수행해야 한다. 한 개인은 의 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이자 아버지이고, 남편, 친구,동료이며 공동체의, 정당의, 클 럽의 회원이다. 각각의 역할은 ���와 관련된 도덕적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의사라


는 직업으로서는 감정에 휩쓸려서는 절대 안되지만 남편이라는 역할에서는 풍부 한 감정을 지니고 행동해야 한다. 운동 선수일 경우에는 자신의 팀을 편들게 되 지만, 지도자일 경우에는 냉정해야 한다. 주체의 도덕적 깊이라고도 말할 수 있 는 성숙함은 이 모든 역할들을 유연성 있게 운용하는 능력 속에 자리잡고 있다. 미숙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오로지 한 역할에만 자 신을 바치며 모든힘을 하나에 쏟아부어 그곳에서 최고가 된다. 이 단계에 이르 면 그는 자신이 다른 분야에서도,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줄모르는 분 야에서도 똑같이 최고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학을 뛰어나게 잘하고 컴퓨터의 마술사일지는 모르지만 아내와 자식과 동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모든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정신적으로나 감 정적으로 도덕적인 깊이가 전혀 없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있는 이런 유형의 천재들이 몇몇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된 경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숙함에도 종류가 많다. 오 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해 집에까지 일을 가져오고, 일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 서는 말을 할 줄 모르며, 일상 생활을 꾸려가고 자녀를 키우는 일은 아내에게 맡겨버리는 남자는 미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또 오로지 집안일밖에 모르며 남편 의 활동을 봐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의 습관과 관습에 갇혀 방해받 기 싫어하는 여자도 미숙한 살람이다. 이런 유형의 미숙함은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나기 도 한다. 아예 감사할 줄 모르거나, 다른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때에도 정말 표면적으로만 감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감사를 표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으며, 인사차 또는 식사에 초대하기 위해서나 은혜 를 입은 사람의 생일 같은 때 축하하는 전화를 걸어야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건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저 자신들이 받을 만해서 받았 다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다. 유년기를 벗어나 청년기로, 성인의 삶으로 옮아간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 복 잡한 형태의 도덕성을 향한 힘겨우 통과 의례를 거치는 것이다. 게으르게 제자 리에 멈춰서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대신 해주길 기다리는 건 그 누구에 게나 아주 쉬운 일이다. 2부 남을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 권력을 쥔 사람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인 칼리프는 사람들의 공상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평안 하고 복이 많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의 권력은 완전하다. 그는 정원 속에 자리 잡은 눈부신 궁전에 살며 무희들을 지켜보거나 후궁들의 처소인 하렘에서 소일 한다. 밤에는 하룬 알 라시드(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옮긴이)처럼 신분을 숨기고 궁 밖으로 나와 서민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모험 을 한다. 적에게 위협을 받지도 않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없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칼리프의 권력은 줄곧 아주 불안정했다. 이슬람 세계에 서는 왕위 계승권을 장자가 갖는다는 규정이 없어서 왕위를 차지하려는 형제들 이 내전을 벌여 왕위를 결정짓는 일이 허다했다. 권력을 손에 넣은 왕은 궁전의


음모와 외부의 적들에 대항하여 왕권을 지켜야만 했다. 권력이란 한번만 손에 넣으면 쭉 지속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계속 다시 정복 해 틀어쥐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정치 체제에서든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체 제에 따라 권력을 확득하는 방식, 위협의 종류, 그리고 권력을 지키기위한 도구 들은 다양화된다. 기본적으로 군사력에 권력의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체제 속에서는 외적으로는 전쟁, 내적으로는 물리적인 억압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것 을알 수 있다. 로마 황제들의 권력은 칼리프나 술탄, 또는 봉건 시대 국왕의 것 처럼 이런 종류에 들었다. 하지만 혁명에 의해 탄생한 권력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혁명이란 내전이고, 본디 폭력은 전쟁이나(나폴레옹과 호메이니를 생 각해 보자) 유혈 진압(스탈린을 생각해 보자)으로, 혹은 히틀러의 경우처럼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해 연장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은 불안정한 정치,선전, 설득과 음모를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다. 이런 권력이 부딪히게 될 위험은 똑같은 종류의 것이다. 리처드 닉슨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파멸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 대통령의 권력이 동양의 군주나 독재쟈의 것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부딪히게 될 위험, 빠져나와야 할 딜 레마의 종류가 다르다. 특히 미국의 대통령은, 어느 정도의 비밀 유지를 요구하 는 외교 정책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그러면서도 동시에 모 든 것을 다 밝혀야 한다는 딜레마에 항상 작면해 있다. 하지만 권력이 불안정한 것은 정치 세계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다 똑같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성공이나 명성 면에서 다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 우에도 사람들의 상상력은, 우리들이 칼리프에 관해 묘사했던 안정된 권력이라 는 바로 그 환상으로 기울어지는 경항이 있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우리들이 칼 리프에 관해 묘사했던 안정된 권력이라는 바로 그 환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요트를 타며 긴 휴가를 보내고, 젊고 아 름다운 애인이 있고, 늘어서서 대기중인 근면한 비서들에게 짤막하게 몇 마디 명령을 하는 귀족 같은 대부호를 상상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유명한 배우가 저녁이면 이파티 저 파티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연애 사건을 벌일 거라고 공상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호와 대기겁가들은 완전히 일에 빠져있 다. 이들이 휴가를 가는 일은 거의 없는데, 위험 부담이 높은 문제들을 다른 사 람의 손에 맡겨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배우들은 온갖 종류의 장애를 뛰 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바쁘게 일한다. 작가들은 창작 활동에 여념이 없다. 작가 의 일은 정해진 시간이나 밤 또는 주말이 되었다고 해서 끝나는게 아니다. 사실 우리가 평온하게 습관에 기대어 할 수 있는 활동은 아무것도 없다. 공부 를 하고 시험을 치고 일자리를 찾고 작은 사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아주 단순한 활동도 주의를 집중하고 특별하게 전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에 몰두할 경 우에만,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할 경우에만 세상 일들이 썩 잘 되어나가는 법이다.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 가 뭔가 실현시키고 싶은 목적을 갖게 되어서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료는 우리를 이 창구 저 창구로 떠넘기며 직원들은 타성적인 자기 리듬을 따른다. 이런 저항들을 극복하 고,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게 느껴질 정도까지 사람들을 흔들 어놓을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권력이다. 어려움을 뛰어넘고


복병을 피하고 느리적거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행동하는 게 바로 권력이다. 미국의 대통령에게도 기술자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칼리프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부호와 배우에 대한 사람들의 공상은 꿈이다. 복권에 당첨되기를 공상하는 사람들의 꿈과 똑같다. 갑자기 백억 리라가 생긴다 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던져보라. 대답은 어느 사람이 나 거의 비슷할 것이다. <당장 일을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하며 멋지게 살고 싶 어요.> 우리는 지쳐 있고, 그 때문에 휴식을 의미할 것 같은 부와 권력, 이상향 에 도착한 듯 모든 근심 걱정이 끝나는 순간이 있으리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이상향은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복권에 당첨된 사람 이 그렇게 살았다가는 금방 다시 가난뱅이가 되고 말 것이다. 움직이는 대신에 기다리고, 밤을 새는 대신에 잠을 자는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랫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사람 정당을 이끄는 지도자든 종교 단체나 회사를 이끄는 지도자든, 지도자들에게 는 어떤 공통된 능력이 있다는 인상을 자주받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 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들은 의미 있고 헌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확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 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그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뽐내며 몸을 아끼 지 않고 아낌없이 그 일에 온 힘을 쏟게 된다. 또한 변명을 하는대신 상사와 동 료들의 질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들은 공동의 사업이 성공을 거두 고 성장하기를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그리고 종종 이것이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많은 지도자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이런 확신을 전달하려 애를 쓰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도자인 자신이 깊이 확신하고 있 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인간사의 밑바탕 에는 항상 영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영감이 없을때, 의지력으로 영감을 만들어 내거나 영감이 있는 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고 없다. 이런 경우 일종의 영감 흉내내기 같은 것이 무대에 오른다. 그 결과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영 침착하지 못한 관리자가 나오게 된다. 또는 과대 망상증을 지닌 관리자가 나온다. 사실 진 짜로 영감을 얻은 사람은 의심스러워하고 겸손해하는 경우가 많다. 영감이 자신 의 자존심, 자만심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에 소용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영감에는 깊이있는 침착함이 깃들여 있다. 지도자는 이런 침착한 신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그럼으로써 무엇보다도 본보기를 보이게 된다. 강 인한 정신과 언제든지 도와주려는 자세를, 온 힘을 다하고 자신을 다 바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주는 가르침의 본보기이다. 이런 사람이 근무하는 회사에서는 모두들 실수를 할까봐 두려워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회사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칭 찬하는 소리가 훨씬 더 많이 귀에 들린다. 반면 창찬하는 소리가 한마디도 들리 지 않는 회사들이 있다. 그런 회사의 사람들은 칭찬을 하면 물러 보인다고 생각 한다. 관리자들은 취조하는것 같은 눈초리를 던지며 쌀쌀맞게 소리 없이 지나간 다. 그들은 비난하고 질책한다. 결코 칭찬이나 감사를 표하는 행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칭찬은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하다>라는 말은 당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감사한다는 것, 공동 작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칭찬을 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런 판


단을 내릴 능력도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사가 풀려 있는 회사에서도 칭찬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함께 일해야 할 공동 작업이 없고, 모두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 이다. 이런 회사는 중세 봉건 시대의 봉토들처럼 갈가리 나뉘어져 있다. 사람들 은 각각 중상 모략과 악담과 계략으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한다. 하지만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을 잘 안다면, 그리고 그 회사에 참여한 사람이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자연스럽게 칭찬의 말이 나오게 되며 감사의 말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누군가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는 마음을 가지 고 있으므로 이때 사장은 모두가 서로서로 보여준 감사의 표시를 칭찬하기만 하 면 된다. 어떤 사람은 어떤 일을 특별히 잘 해내고 사회에 이득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저 던순히 그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 때문에 칭찬을 받는 사람도 있다. 사장이 외부 사람에게 직원을 소개할 때, 칭찬받는 사람은아주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장은 그들을 소개하면서 공개적으로 칭찬한다. 적절한 형용사 하나, 몸짓 하나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회사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공표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회사가 수행하는 일의 가치, 회사가 보이는 본보기는 개인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유형의 회사에서는 사장이 야단을 쳐야 하는 경우, 절대 공개적으로 하 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질책한다. 직원들을 굴욕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 적대심과 시기심에 불을 지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공개 적인 질책은 시기심을 지닌 사람을 의기 양양하게 만들고 부추기며, 결국 앙갚 음의 악순환을 낳는다. 너무나 확신에 차 있고 강한 나머지 칭찬이든 엄중한 질책이든 공개적으로 해 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들어오면 아무도 숨을 쉬지 못한다. 모두들 벼락이 떨어지든가 은혜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인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원들 은 모두, 변덕스러운 선생님이나 폭군 같은 아버지 앞에 선 어린아이들처럼 변 한다. 이런 상황은 사원들을 퇴보시킨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공범끼리의 연대감 을 들어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나중에 사원들은 사장에게 날조된 정보아 거 짓 자료들을 제공하게 되고 사실을 은폐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 자신의 허영 심,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자만심을 과시하면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란 아주 힘들다. 자유 방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에 몰두하지 않고 사원들이 일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스스로 만족해서 꾸짖지도 칭찬하지도 않는 사장은 무관심과 절망감 을 생산해 낸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회사와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다. 그러므로 자만심이나 심지어 약간의 과대 망상까지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심 있어하는 것은 지도자가 아니라 모두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 는 공동의 작업이다.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중요 한 일을 하고 있다는, 무엇인가 실현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참여한다는 확신 을 주며 그들을 이끈다고 말했다. 역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야망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희생시키고 공동의 결과를 제 1 순위에 두어야 한다. 전제적인 사람


정치 계층이 권력을 상실하는 이유, 부패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을 규합하는 방법 및 지도자들이 그들과 맺는 관계에서 비롯한다. 어떤 정당이 출발했을 때, 다시 말해 아직 활발히 움직이고 있을 때는 아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참여가 이루어진다. 도처에서 열성적인 활동가가 달려 와 함께 뭉쳐 토론하고, 편견 없이 온 힘을 기울여 일한다. 그들 중에서 저절로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상해 원래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지배 그룹이 형성된다. 이 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도자는 동의에 말의해 지배를 한다. 새 지도자들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토론하며, 목표가 무엇인지를 일단 설명하고 인내심 있게 다시 설명하며, 공동의 결정이 나타나 모두가 솔직 하게 그 결정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직은 비대해지고 이상적인 자극은 점점 줄어들고 건력가 이해 관계에 따른 입장들이 생겨난다. 이 지점에서 위대한 민주적인 지 도자와 독재적인 지도자들 사이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체계에서만이 아니라 공적 사적인 모든 조직, 협회, 회사에도 적용되는 차이점이다. 민주적인 지도자는 권력을 손에 넣은 뒤에도 동의에 의해 지배하려고 한다. 누구라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협력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회합을 갖는 다. 이견을 보이도록 내버려두었다가 진정시키고 줄여나가고 조정한다. 민주적인 지도자는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알고 있으며, 모두와 개인적인 관 계를 유지한다. 사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의지해 몹시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통제한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능력 있는 사람들을 선별한다. 이와는 반대로 독재적인 지도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공동 기구들을 결속시키 는 데 더 이상 힘을 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설득하고 설명하는 데 시간을 허비 하지 않는다. 모든 결정권을 자기 수중에 집중시킨다. 그들 주위에는 눈치 빠르 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한때의 동료들, 특히 독립적인 판단을 하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끊어버린다. 이 지점에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독재적인 지도자들은 비판의 소지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도덕적인 감각은 변질되 고 결국 사람들(진짜 불량배들)의 도움으로 부정한 행동을 하고 만다. 뒤에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불량배들은 공갈 협박으로 권력을손에 넣게 된다. 독재적인 지도자는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떤 짓을 하든 그대로 내버려두 게 되고 그 불량배들은 도처에 부패를 퍼뜨린다. 아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도 만인이 인정하는 권력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동의로 지배하는 방법을 잊고 독재자의 방법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혼자서 결정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고 빠르고 별로 힘 드 안 드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독재자는 모 든 공로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아주 위대하고 높은, 최고의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지혜로운 협력자들, 감시하는 눈들, 널리 퍼진 정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목 적을 향한 모든 이들의 동가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업을 훌륭하게 이루어낼수 있 다. 지도자는 방향을 잡아주고 이끌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으로 사람들을 몰지만 실상 그 일에서 그 자신도 한 부분이며 표현인 것이다. 만약 자신이 그 일의 일 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높은 지 위에 있다 하더라도 현실과의, 즉 이성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이 미 나폴레옹, 히틀러, 무솔리니, 소련의 독재 정치를 통해 보아왔지만 조재 정치


는 최후에 가서는 항상 고독과 공기의 깃발을 치켜들고야 말았다. 동의를 이끌어내는 사람 책임 있는 위치나 지배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대립과 분쟁을 터뜨리는 사람들 이 있다. 그들은 삽시간에 모든 사람들과 충돌하고 다른 사람들끼리 싸움을 하 게 자극하며, 말다툼과 의견 충돌을 일으킨다. 그런 사람들이 합의를 통해 어떤 문제를 결정해야만 하는 회합이나 평의회의 의장이라면, 조만간 그 회의는 숨막 히는 분위기에 빠져든다. 어떤 사람이 어떤 제안을 하면 곧 다른 사람들이 그에 반대한다.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모두 다 말다툼에 휩싸인다. 나는 이런 종류의 대학 학과 회의를 기억하고 있다. 몇날 며칠 동안 꼬박 회의가 열렸고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나왔다. 이와 달리 싸움을 진정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누구와도 충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도 서로 싸우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의 지휘하에 있으면 회합이나 평의회는 오랫동안 토론을 한 뒤 대개 인간적인 결정 을 내린다. 무엇 때문에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파국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것일 까? 왜 문제들을 연구하지 않았을까? 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을까? 왜 열 심히 몰두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들의 실수는 정반대의 것인지도 모 른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책임을 지며, 모든 문제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며, 항상 자 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그 의견을 두드러지게 만들기 위해 싸운다. 이런 식으로 결국은 질질 끄는 논쟁과 속에 맺힌 원한 때문에 처음에는 이 사람, 다음에는 또 저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만다. 진짜 싸움이 벌어진다든가 하면 그들은 말리거나 타협에 나서지는 않고 곧장 한쪽 편을 들어서 싸움에 부채질을 한다. 그들에게 훌륭한 의지가 부족한 것도, 지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공 격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확인시키고, 매 순간 어느 관계에서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고 존중받으며 유용하고 중요한 인 물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할 필요성을 지나치게 느낀다. 그들은 자신이 그 자 리에 없고, 힘을 잃고, 사라져버리는 것을 겁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 없이 무슨 일을 해내고 의견 일치를 보고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어떤 결정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화와 효능을 창출해 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단체, 어떤 팀이 도달 해야 할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경우, 결국은 그 구성원들이 모두 힘을 합 해야 그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개개인은 그저 자기가 존중받기 를 원하고 자기가 한 역할을 강조하려고만 할 뿐이다. 그들은 기여도를 평가받 기만을 바란다. 지도자는 이런 자연스러운 성향을 이용해야 한다. 각자가 생각하 는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진지하게 그 말들을 경청하도록 모두에게 부탁해야 한다. 모든 사 람들이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그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좋지 않은 생각들은 스스로 사라져 버리고 뛰어난 생각들이 나타나게 된 다. 지도자가 제안을 하는 대신 힘을 합한 개개인들에게서 제안이 나오도록 하


는게 훨씬 좋다. 그러다가 좋은 해결 방안이 어렴풋이 나타날 때 그것을 다시 논의에 올려 평가하고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지도자가 할 일이다. 반대 의견이 너무 강하거나 오류가 발견될 경우, 결정을 연기하도록 제안한다. 독재적이지 않은 모든 조직에서 지도자는 근본적으로 목적과 명확성이 파벌보 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고도 강력하게 보장해 주어야 한다. 만일 지도 자가 사적인 이해를 초월해 있기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고 경쟁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 조직은 중심을 잃고 붕괴하고 만다.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 우리는 모두 남에게 계속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인정과 칭찬 은 음식과 물처럼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람들, 혹은 그런 일을 하도록 규정된 기관을 통해 그것을 받아야 한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는 엄마에게 <잘 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만, 엄마의 칭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선생님의 평가를 받을 필요도 있다. 어떤 일을 달성했을 때 우리는 항상 많은 심사 위원들의 평가를 기다린다. 그 런데 그 심사 위원들은 갖가지로 종류가 다르고 서로 틀린 평가를 내리는 경우 가 많다. 전력을 다해 일한 끝에 어려운 임무를 달성하고 성공하고 모두에게 박 수를 받아도,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일부러 칭찬을 하 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우리를 손에 넣기 위해, 또는 분노를 터 뜨리거나 무기력하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유명한 심판 한 사람이 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동안 그는 모든 이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자기 아들에게는 공손한 인사 한번 받아볼 수 없었다. 이 아들 은 아버지에게 여봐란 듯이 무례하게 굴었는데 아버지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전세계에 공장을 세운 뛰어난 사업가가 생각난다. 그는 사업상의 동 료들, 예술가, 정치가, 지식인들을 접대하기 위해 멋진 별장을 지었다. 하지만 접 대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별장에서 파티를 벌였더니 그의 아내가 자기 남편은 항상 출장만 다닌다고 불평하는 등 계속 남편을 비난하면서 손님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인정을 해주고 칭찬을 해주는 권력은 근본적으로는 부정하는 권력, 고통스럽 게 만드는 권력과 같다. 변덕을 부리는 이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재롱과 애교 를 기대하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발을 구르며 울고 뭔가 해달라고 떼를 쓰며 버 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기가 불쾌감과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 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아이가 노리는 것이다. 부모의 저녁 식사를 확실히 망쳐놓고 누나의 생일 파티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난꾸러기를 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런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 청소년들, 성인들 모두 마찬가지이다. 칭찬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고, 한마디 말도 건네주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복수심을 사는가. 쓸데없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탈리아 학교에는 1 년 동안 좀더 나아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어린이에게 <잘한다> 하고 단 한번도 말하지 않는,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지 않는 선생님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이런 행 동이 엄격하고 신뢰할 만한 태도라고 믿지만, 사실은 오로지 연약한 아이를 향 해 자신의 분노를 토해 낼 뿐이다.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잘 되어가는 일이 단 한가지도 없고, 모든 게 아주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힘세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악용되는 힘 과 규율 없는 권력과 시기심에 충동질당한 자유의지에 취해 있다. 이런 유형의 심술이 넘쳐난 나머지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던 불운한 시 대들도 있었다. 그런 시대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일 때문이 아니라 시기심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쓸데없는 전투 때문에 좌절하고 지쳐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아첨하는 사람 권력자들, 정치가들, 사업가들, 대학의 실력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간판 들 밑에서 평범한 인물들, 심지어 아주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 이 종종 있다.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이들을 믿고 중대한 임무를 맡기 고, 외부에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비춰지게 내버려두고, 자신들을 대표하게 내버 려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권력자의 개인적인 수행원으로 성공하는지 그 방법을 대학에서 잘 관찰해 볼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공손하고 아 부 잘하고 눈치 빠르게 복종하고 항상 <예>라고 대답하는 조교가 그 예이다. 교수는 항상 곁에 있어주는 조교에게 익숙해지고 아주 불쾌한 임무를 맡기는 일 에도 익숙해져 그 조교 없이는 생활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나중에 훨씬 유능한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그 조교에게 강의를 줌으로써 보상을 하게 된다. 정치가 주위에는 항상 청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로인이 없는 변호사들, 일이 없는 건축가들, 배고픈 지신인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들은 끈덕지고 고집스럽게 정치인의 주변에 머문다. 어느 날 정치인은 곤경에 처해, 딱 한번 도움을 청하게 되어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 중의 누군가를 찾게 된다. 그럴 경우 그들이 왜 도와 주지 않겠는가! 도움을 부탁받은 사람은 아무것 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불속에라도 뛰어 들 태세이다. 그렇게 관계가 시작된다. 정치가는 그를 존경하지 않지만 그를 이 용한다.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지만 결국은 차츰차츰 그에게 길들게 된다. 시간 이 흐르면서 그에게 의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그가 너무 많은 비밀을 알 아버렸기 때문이다. 또다른 경우도 있다. 권력자들 중에는 너무 똑똑하거나 자주적인 사람을 자기 밑에 불러들이기를 겁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권위적이어서 남에게 반 박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과대 망상증 환자여서 끊임없이 칭 찬과 찬사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신중해서, 아주 뛰어난 사 람들을 가까이했다간 결국 그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고 자신을 좌지우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자기 권력을 1 밀리그램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순 히 게으름 때문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문제를 토론하고 재토론하기를 꺼린다. 이런 식으로 궁정이 형성되었다. 궁정은 국왕의 집이다. 그곳에는 국왕의 가 족, 아주 은밀하게 국왕을 돕는 사람, 하인과 광대들, 그리고 아첨꾼들이 살았다. 오늘날에도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비록 작게라도, 궁정이 형성된다. 그 궁 정에서 당신은 권력자의 친���과 소소의 친지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언제나 일정 한 수의 아첨꾼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이들이 가장 해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각을 할 줄 아는데도 생각하 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위치와 조용한 명예직에만 관 심이 있을 뿐이다. 권력자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아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 는 것을 삼가고 언제나<예>라고만 대답한다. 현대의 기업은 궁정에 대항해, 정반대되는 조직 원리에 기초해서 탄생했다. 관 리자는 능력을 바탕으로 뽑히고 이익을 낼 때에만, 기업을 번영시킬 때에만 권 력을 유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전문가들은 모 두 이용한다. 그는 항상 최선을 추구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혐오한다. 불행하게도, 기업에서는 황금률이 항상 신봉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관리 자들은 똑똑한 사람, 비판하는 사람, 문화적인 활력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둔감하고 비굴한 직원, 대개 재치도 없고 재미도 없는 진짜 아첨꾼들에 게 둘러싸여 있다. 성과만을 중시하는 사람 직원드로가 일을 할 때 무엇보다도 생산품, 즉 결과만을 중시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반면에 그 일에 바친 시간만을 중시하는 지도자들도 있다. 첫번째 사람들 은 그 직원의 몸가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지, 책상 위의 서류에서 눈을 들지나 않는지, 커피를 너무 자주 마시지나 않 는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최상의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를 신속히 만들어내는 데 국한된다. 그들은 직원이 자주적이고 어려움에 맞설 능력이 있고 예기치 못한 일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해 나갈 수 있 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로 눈에 보이는 몸가짐과 행동을 중시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랫사람이 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으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피곤해하지 않으면, 가끔씩 자신들에게 와서 주의 사항을 물 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은 자신들이 일한 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지불기한을 정확히 지켜달라는 고객을 설득하느라 얼마 나 애를 먹었는지 이야기하거나 납품 업자가 부정확하고 엉망이라고 불평을 해 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두 가지 유형의 지도자들은 작업 활동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유형은 이 활동을 직업적 능력으로 인식한다. 그는 직원의 직업적 능력을 산다. 두번째 지도자는 이와는 달리 직원의 노동력을 산다. 첫번째 사람 은 직원이 여덟 시간이 아니라 여섯 시간 안에 일을 완수하는지 살펴보는 일에 는 전혀 관심이 없다. 두번째 사람은 노동자의 하루를 샀기 때문에 노동자가 여 섯 시간만에 일을 해내 다른 두 시간의 작업 시간을 남기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노동력으로서의 작업 활동 개념은 시대 착오적인 것이다. 지주는 <아침부터 밤까지> 농부의 노동력을 샀고, 지주가 고용한 감시자들은 노동자가 밭고랑에 몸을 숙이고 있는지, 정말 힘들여 일을 하고 있는지, 땀을 흘리는지, 일하는 척 만 하고 있지나 않은지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했다. 제조업도 이런 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소유주는 직공의 노동력을 모두 사서 최대한 그것을 이용하려고 애 썼다. 이번에는 생산성을 감독하기가 훨씬 쉬워졌는데, 제품의 숫자를 세거나 생 산 라인에서 생산 리듬을 측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전근대적인 정신 상태가 회사원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에서도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회사원들도 과거의 노동자처럼 가능한 한 힘을 아껴 쓰려고 애 쓴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낄 때에만 일을 한다. 문제의 처리를 내일로 미루고 지연되는 이유를 갖다대기 위해 계속 변명거리만 찾으며 진취적인 동료 들을 가로막는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ㅗ동자들은 항상 평균 생산력의 수준을 밑돌게 생산하려 애쓴다. 사실 평균 생산력 이상으로 생산을 해내면 일을 주는 사람은 그것을 기 정 사실로 받아들여 그 후에도 그 만큼을 원하게 된다. 이런 일들의 최종 결과 는 아주 저조한 생산성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생산성 및 혁신적이고 창으적인 활동을 존중하는 기업들이 있다. 연구소 광고회사 마케팅 부서 신문사 텔레비젼 방송국 을 생각해 보자. 이곳에서 일을 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일의 결과와 직원의 능 력을 산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직원이 여덟 시간 일을 하는게 아니라 에 시간 만 일을 하고 계약할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때에는 분명 봉급이 인상되고 승진하게 될 것이다. 하지 만 분명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적극성과 창으성을 발 휘해 계속 뭔가를 개선할 수 있을까. 지급 체계는 경직되여 있기 때문에 보상이 나 보수가 끝없이 높아질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경우 부하 직원은 독립성 책임 권한 개인적 신망이라는 것들로 보상을 받게 된다. 그는 회사 내에서 정말 존경 받는 전문가가 된다. 이런 경우는 보다 높은 언제나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생산성을 얻어 내려는 공동의 자극제가 된다. 지나간 시대의 농업형 또는 수공업형의 기업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노동력 으로 빚어진 회사에서 사원들은 가능한 한 조금 일하고 채무자처럼 회사 생활을 한다. 창으적인 기업ㅇ서는 사원들이 가능한 한 많이 일하고 자신들이 기업의 채권자가 되고 싶어한다. 돈이 나니라 무엇보다도 존경 자유 개인적 신용 자유 재량권이라는 것으로 지불 받는 개인적인 빚이다. 첫 번째 유형의 회사에서 성장한 지도자가 두번째 유형의 회사로 갈 경우 대 개 실패를 하게 된다. 그는 육체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 운 자세로 이루어 놓은 것을 자신이 해냈다는 듯이 굴어서 남들의 의욕을 없애 버리고 만다. 그런 이들은 종종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 남을 끌어주지 않는 사람 항상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오로지 자기 자 신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예들을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아니면 과학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 다. 우리는 엔리코 페르미(이탈리아의 물리학자, 1938 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음옮긴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요라나, 세그레, 아말디(페르미의 제자이자 협력자들, 역시 물리학자로 이름이 높음-옮긴이)같은 (로마 그룹의 젊은이들)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예술적으로 지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의 가치를 전혀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저 자기 자신에게 만 자신의 성공과 그 성공을 축하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공연에 관객으로 가서 는 무대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연 배우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 중 일부는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끌어 모으는 능력도 있 어서 하난의 학파 또는 효율적인 조직을 세울 줄도 안다. 하지만 협력자들 중의 그 누구도 그들의 개성이나 생각을 나타낼 수 없고 성공할 수 없게 만든다. 제 자들을 선택할 때 그들은 너무 똑똑하고 독창적이고 창으적인 제자를 고르지 않 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은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바로 그들 자신이 재능 있는 제자들의 그늘에 가릴 것을 두려워 했던 선생들의 범상한 제자들이기 때문 이다. 우리는 어렇게 이런 사람들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제일 중요한 요소를 파악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군가 자신보다 더 크게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 움이다. 그들은 젊고 능력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잠재적인 경쟁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유능한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그 들 앞에 장애물들을 놓든다. 만약 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려고 애쓰고 독립적으 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그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시장이 제 기능을 하는 곳 에서 이런 메카니즘은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는 예를 들면 연극계 라면 경쟁 상대가 될 젊은이들을 깡그리 짓밞아버리는 능력을 통해 족점 권력을 손에 넣는 신성한 괴물들이 있다. 대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일 뿐만 아니 라 질투심에 중독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가 된 채 숨어있 는 질투심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또 용기가 별로 없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 의 비겁함을 감출 줄 안다. 큰 소리로 의견을 발표하고 분개하고 격렬하게 비난 을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고 다른 사람들을 앞세운다. 그러다가 일이 잘 못되면 사라져 버린다. 만약 일이 잘 되면 그 공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겁 이 많은 사람이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비겁한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을 방패로 삼아 그들을 희생시키고, 그 뒤 관계를 끊어 버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다.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그저 다음에 할 말, 재치있는 대사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다른 사람들이 말을 중단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때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희망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개인, 자신의 능 력, 자신의 공적들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을 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알던 사람 하나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뒤에 그의 친구와 제자들에게 깊은 굴욕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이상 내게 관심을 갖지 말게. 자네 들은 과거의 사람들이야> 이런사람들은 대게 변장을 하고 자신을 숨기고 있다. 그런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한번 해 보도록 하라.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이 걸려야 5 분이 지나기가 무섭게 주제를 바 꾸어 자신에게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얘기를 돌릴 것이다. 아니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아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병에 대한 이야 기를 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병에 대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놀라운 모험들로 당 신의 이야기를 뒤덮어 버릴 것이다. 여행, 시험, 재난,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마


찬가지일 것이다. 비겁한 사람 용기는 시작의 미덕이다. 용기의 반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신을 숨기 는 것이다. 용기의 반대가 결코 두려움은 아니다. 용기있는 사람들도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세상의 불확실함에 맞서 앞 으로 자기 몸을 던진다. 도약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공포 때문에 이를 벌벌떠는 사람은 경멸이 아니라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파올로 빌라치오가 만들어낸 놀라 운 인물인 판토치는 애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가 현실 때문에 무너지며, 어린아 이처럼 그 현실앞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기 때문이다. 또 용기의 반대로 신중함도 있다. 신중함은 위험을 최소화시키고 싶어 한다. 신중한 사람은 현실을 다 탐색할 때까지, 세세하게 현실을 다 파악할 때까지 행 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친 신중함 앞에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중함덕 택에 실패를 피했을 때 우리는 신중함을 미덕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전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용기 부족, 즉 비겁함이 있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긴다. 두려움을 숨기고 이득과 권력을 얻어내 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이득을 얻기 위해 그것을 이용 한다. 비겁한 사람의 종류는 다양하다. 하지만 자세히 실펴보면 이런 사람들은 공통 적인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데 그 첫번째가 연극적인 성격이다. 위험이 없을 때,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비겁한 사람은 자신감을 과시한다. 자신의 성공을 자 랑한다. 성공을 과장하고 부풀린다. 자신의 힘과 위대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 서 대게 아주 영리한 사람들도 속일 수가 있다. 그러나 용기를 필요로하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닥치면 그들은 도망을 가고 몸을 숨기며 문제들을 과장하기 시작한다. 넘을 수 없는 장애물, 음모, 정 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주의해야 할 술책들에 대해 늘어 놓기 시작한다. 그 들은 현실을 바꾸어버리고, 당신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꾸며낸 다. 만약 그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야먼 할 경우, 절대 그 일의 완전한 모습을 당 신에게 전해주는 법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거둔 성공과 공적들만을 나열하다 가, 다른 사람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칭찬을 받고 비난을 피하는 것 같다.그는 언제든 자기 아버지, 아 들, 친구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 자신의 알리바이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일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자신의 공적을 증명할 일만 생 각한다. 비겁한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 아주 쉽게 약속을 하지만 그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그 일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당신에게 셀 수도 없는 장애물들과 무서운 장애물들만을 열거할 것이다. <이봐, 난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자넨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당신이 그에게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겨 주었다는 죄책감을 느낄 때까지 이런 말은 계속된다. 그와 함께 있으면 당 신은 언제나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가 된다. 그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아랫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고 그들의 품의를 떨어 트린다. 아랫사람을 도와줄 목적이 아니라 짖밟을 목적으로 그들의 실수를 강조


한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한다. 무대위에서 배우들에게 특 히 아니든 배우들과 반항을 할 수 없는 배우들에게 모욕을 주던 연출자가 생각 난다. 그의 주변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낸는 아첨꾼이 모여���었다. 그 연출자는 그 갈채를 즐겼고 점점더 잔인해졌다. 비겁한 사람은 박수 갈채를 필요로 하며 칭찬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자기 아랫사람을 짓밟는다. 아랫사람이 반항을 하고 그에게 대항하고 그를 비난하고 그의 가면을 벗겨낼까 두려워서이다. 비겁한 사람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는 겁쟁이이다. 권력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는 비굴해지며 스스로를 낮춘다. 실제로 그는 강한척하고 가치있는 사람인척하 는 역을 해서 사람들을 웃기는 코메디언과 똑같은 식으로 행동한다. 이탈리아 배우 알베르토 소르디는 약자에게는 거만하고 강자에게는 비굴한 이런 비겁한 인간을 가장 뛰어나게 연기해 보였다. 하지만 비겁한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가면이 벗겨지 는 것이다. 그는 끊입없이 노력하여 만들어 냈고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속임 수를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폭로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강한 성격의 사람, 정말 용기있는 사람, 외면이 아니라 결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겁을 낸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겁한 사람이 겁내는 또다른 사람은 아내나 남편, 그러니까 자기의 일상생활 을 통해서 그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 앞에서 그는 새끼 양처럼 순하다. 무질서한 사람 시작한 일을 절대 끝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일을 시작했다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앞의 일을 중단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일을 시작한다. 결국에는 해애할 일들을 모듀 눈앞에 손 닿는 곳에 고스란히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필요 성을 느낀다.공간을 모두 차지하고 다른사람이 그일에 손도 못대게 한다. 왜냐하 면 다른 사람들은 그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조리 흐트려 놓을 수 있고 그러 면 다시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과 사무실은 미완성품과 미결제 서류들의 창고가 되어간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미궁 같은 곳이 된다.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마치 불법 침입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해 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당황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무엇인가 를 건들이기만 해도 항의를 한다. 우리는 무질서한 사람이 대게 조용하지 않다 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무질서하게, 흥분해서, 열성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끊임없이 할 일이 너무 많고 일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인상을 준 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이 아닌 그 활동력에 충격을 받으며 가끔은 강한 체력에 감탄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를 방해하고 그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만들어 주 었다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면 사람들은 뒤로 후퇴해서 간섭하지 않 으며 좁은 공간으로 물러서고 만다. 일을 절대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주변에 대혼란을 만들어 내는데 이 혼 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 다. 그래서 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모있고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람 만이 재앙을 일으키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움직일 줄 안다.


아무리 사소한 결정이라도 결정을 내릴수 있는 사람은 그 혼자 뿐이다. 일을 절 대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집중시킨다. 이런일은 모든 단계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가정에서 비밀스러우며 잠정적인 자신만의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그녀가 계속 물건들을 올ㅂ기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파악할 수가 없다.남편, 자식들, 가정부는 야단을 맞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가정에서 존재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독재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사무실에서도 벌어진다. 서류들을 다른 사랍들이 전혀 이해 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특히 고용주가 이해할 수 없는 순서에 따라 정리해 놓 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여비서의 경우이다. 이런 미궁속에서는 아무도 자신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절대적으로 그녀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식으로 그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된다. 자신이 진행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없는 사장들이 있다. 그들은 한번도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일이 없으며 예고없이, 이상한 시간에 종종 한밤중에 회의를 소집한다.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정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사실 정식절차를 밟아 통보를 한 것은 아니다. 사장이 친절하게 대해주 고 우호적으로 행동해도 모든 사람들은 불안한 상태에서 생활한다. 이런 사장들 은 사실 독점력이 강한 폭군들이다. 무질서를 통해 자신들의 직원들 모두를 결 정에서 배제시키고 단순히 결정된 일을 집행하게만 만든다. <정돈>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맡아도 일이 완성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남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똑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잡성은 아무 관계가 없다. 복잡한 무엇인가가 있다해도 방법만 정돈되어 있 다면 언제나 해결점에 도달할 수 있는 분명한 순서, 모두가 따라갈 수 있는 길 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마도 가장 뛰어난 결정 방법은 일본인들의 방법인 것같다.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사람들이 모두 회의에 참석한다. 사장이 이미 어떤 방침을 정했다 하더라 도 모두 함께 그 결정을 나누고 만장일치로 결정되기를 원한다. 마침내 모두가 그 일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모두가 동의를 하게 되면 일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이 된다. 게다가 누구나 서로 위치를 바꾸어 일을 할 수도 있다. 이와 정반대되는 것이 이탈리아의 관료세계이다. 여기서는 중심부서에서만 어 떤 일을 결정할 수 있고 나머지는 거대한 집행기구로 기능한다. 하지만 결정에 서 제외된 관료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미궁에서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행 사한다. 이경우에도 완결되지 않은 일들 때문에 발생하는 성가신 문제들, 결제되지 않 아 뒤죽박죽 미궁을 이룬 서류들, 일이 늦어지는 데서 기인하는 무질서는 조직 망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권력이 된다. 이것이 이런 행정당국에 연채료가 싸 여가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일을 절대 완결짖지 않는 개인의 경우 연체료의 밀 림과 퇴적된 과거의 무질서가 혼자만의 힘을 멋대로 휘두르는 연습장이 되어주 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을 절대로 끝내지 않는 개인들, 지도자들, 사무실, 행정당국들을 의심의 눈 초리로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런 상태를 이용해 자신은 이득을 보고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훼방놓는 사람


서류 때문에 어느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유난히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을 만난 경험이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관공서에서 아주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반드 시 그곳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만은 아닐것이다. 사무실이 텅빈 경우도 종종있다. 직원은 무엇인가를 읽고 있다. 당신은 관심을 끌기 위해 서 헛기침을 한다. 그는 아까보다 더 읽기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실례 합니다. 실례합니다라고 말을 해보지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가 비난에 가득찬 듯한 눈을 들어 올릴 때까지 목소리를 높여 계속 말을 하게 된 다. 그는 당신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그런다음 일어나서 잠깐동안 당신의 말을 듣다가 어떤 서류가 빠졌으니 가서 그 서류를 해오라고 당신을 다른 사무실로 보낸다. 다시 그의 사무실로 동아와서 당신은 서류를 다시 자세히 살펴봐 달라 고 도와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당신은 문위에 적힌 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 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를 보이고 그의 능력에 호소를 하면 모든 일은 다 잘된다. 서류가 밖으로 나오고 그는 당신이 잘못 기입한 것을 설명하며 그것을 고쳐준다. 당신은 존경을 담아 인사를 하고 그는 다시 근엄하게 자기 서류를 검 토한다. 사실 이 사무원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당신의 잘못을 알 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때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무엇 때 문에 도와주지 않아서 당신이 실수를 하게 만들고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자기 일에 불만이 있어서 또는 짜증이 나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보다 단순하게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다. 자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우리 관심의 중심에 있기 위해서 자신이 중요한 삶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 존중받고 대접받기 위해서라 고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다. 존경을 얻기 위한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 두가지는 상반된다. 감탄과 감사 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아주 친절하고 유능해지는 것, 아니면 온갖 장애물과 방해요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첫번째 경우에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당신을 기 억하며 칭찬을 할 것이다. 두번째의 경우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당신을 기억할 것이고 당신의 존재와 힘을 헤아리게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행동 유형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일찌감치 찾아볼 수 있다. 착한 아이가 있고 말썽을 부려서 관심을 끄는 아이가 있다. 어른들, 즉 동료나 직원들 이, 전문가들이, 대학 교수들이 그렇게 똑같이 행동하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하 지만,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힘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장애와 방해와 지연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생겨난다. 아주 신중을 요구하는 조직에서 일하는 내 친구 하나는 미리 정해진 약속을 모두 파기하곤 하는 비서실 책임자를 데리고 있었다. 책임자인 이 여비서가 전 화를 했다 하면 약속된 사업이 없었던 일오 되어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여 비서는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어떤 어려움, 어떤 장애물, 어떤 불가능성을 항상 알렸다. 모든게 그녀의 입술에 달려 있었고 그 말은 두려울 지경이었다. 공공 기 관과 관련된 문제를 다룰 때 이 여자는 정당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는 존재다. 마침내 내 친구는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에게 꽃다발을 보 내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중요한 일들에서 그녀를 제외시켜 나갔다. 공공 기관에는 특히 다른 사람들을 방해함으로써, 기대할 만한 창의력을 모두


쓸모없게 만듦으로써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바치고 전 력을 기울이는 적극적인 사람들이 적은 수만 남게 되는 것이고 다수의 사람들은 반항하고, 제동을 걸고, 푸념을 늘어놓고, 음모를 꾸미고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 다. 부정적인 사람은 도처에 깔려 있다. 당신들은 파티나 저녁 만찬 같은 곳에서 도 그런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홀에 들어오는 그들의 태도에서, 의자에 앉는 방법에서 그런 사람들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응접실에 도 착하자마자 곧장 음료수 테이블로 간다. 아페리티프를 선택한 다음, 자기 컵을 들고 주위를 살핀다.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본 다. 자기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그런 사람들 주변을 배회하다가 한 곳을 골라 자 기 소개를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관 심이 집중되고 있는 사람에게 불쾌한 말을 한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모두들 깜짝 놀라 그 사람을 바라본다. 목표가 된 사람은 당황하게 된다. 지지 않고 그에게 응대를 해줄 수 있지만 그날 밤의 파티를 망 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설명을 하고 변명을 해보려고 애쓴다. 그는 공격을 한 사람이 판단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말을 한다. 하지만 공격을 한 사람은 고개를 흔들며 동의하지 않는다. 공격자는 다시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 애쓰며,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한다. 요점은 사람들이 공격적인 사 람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며 저녁을 보낸다는 것이 다. 놀랍게도 우리는 성가신 사람, 도전적인 사람, 훼방을 놓는 사람, 다른 사람을 비웃고 하찮게 보는 사람에게 많은 시간을 바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도와 준 사람,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을 위 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우리는 늘 너무나 시간을 내지 않는다. 남을 당황하게 하는 사람 아주 위대한 성악가나 경험이 풍부한 연사 또는 노련한 배우라 할지라도 맨 앞줄에 앉은 청중이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하품을 하고 불만의 표시를 보인다든지 하면, 아니 반발을 하지는 않지만 목석 같은 얼굴로 무감각하게 앉 아 있는 것을 보기만 해도 당황하고 동요된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 람을 마치 최면에 걸린듯, 그들의 노래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인정과 동의 박수를 얻고 싶어한다.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배우 에게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한 사람인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배우나 성아각는 무대 위에 올라서는 바로 그 순간 청중의 평가에 자신을 맡 기게 되는데, 그 누구도, 정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가장 뛰어난 사람도, 가장 유명한 사람도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제대로 해내 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겁을 낸다. 더욱이 그 순간에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정말 자신이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대답은 마지막 에 가서 우레 같은 박수 갈채가 터져나올 때에야 주어진다. 만장 일치의 박수 갈채만이 의구심을 해소시켜 주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 밤에도 난 해냈어.> 그러니까 맨 앞줄에 앉아 하품을 해대는 사람은, 무대위에 선 사람이 언제나


머릿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던 의심을 구체화해서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런 이 는 가장 위험스러운 순간에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게다가 그의 그런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될 수 있으며, 공연하는 사람을 향한 반란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잠재적인 리더가 된다. 이 때문에 무대 위의 사람은 ���를 무찔러야만 하고 도전에 응해야만 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이런 약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 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굉장히 무 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완전히 실망했다는 얼굴을 한다. 아니면 의견을 달리한 다는 것을 드러내고 논쟁을 시작한다. 상대방은 열심히 대답을 하는데 그럼으로 써 그런 사람들에게 신임과 중요성을 부여한다. 젊은 신문 기자들, 젊은 비평가 들, 젊은 정치가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격렬하게 중요 인물을 공격해서 자신을 인정받는 사람들이 많다. 주제, 사상들은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메커니즘은 성적인 차원에서도 특기할 만한 중요성을 지닌다. 바 람둥이로 이름을 날리는 많은 미남들은 명랑하긴 하지만 못생긴 아내들을 아내 로 맞는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자신을 숭배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받는 데에 익숙해진 그들은 결국 그들의 매력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여자나 철저하게 그들을 논박하는 여자들에게 시선을 보내게 마련이다. 무관심 또는 이의 제기의 기술은 널리 퍼져 있다. 한쪽에 잘 보이고 싶은 누 군가가 있고, 다른 한족에 양보하지 않고 훼방놓기를 즐기는 어떤 사람이 있기 만 하면 된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피곤한 줄 모르는 사람이고, 친절하지만 까다롭고 요구가 많고 불평이 많은 아 내에게 꽉 잡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사려 깊고 매력적인 아내들에게는, 나쁜 성 격 덕택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까다로운 남편이 있다. 가끔 집 안의 변덕스러운 독재자 마음에 따라 한 가정이 끝장나 버리는 경우가 잇다. 언 제나 불만에 가득 찬 여사무원의 불평에 흔들리는 사무실도 종종 있다. 메커니즘은 언제나 똑같다. 아주 뛰어나고,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 마음속으 로는 자신을 의심한다. 경쟁자들, 약탈자들은 이런 비밀스러운 약점을 눈치채고 숨어서 기회를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자신감을 잃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차츰차츰 그 사람을 파멸시켜 버린다. 어리석음으로 지배하는 사람 독단적인 사람들, 광신자들, 고집불통인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비논리적인 경우 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머리에 들어 있는 얼마 안 되는 생각들을 집요하 게 되풀이하면서, 모든 논리에 둔감하게 대항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항복시켜 버 린다. 경직된 정신 상태와 어리석음 덕택에 성공을 거둔 정치 지도자들이 있다. 신망과 찬탄을 얻어내는 또다른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체계 적이지 못하고 매사에 피상적인 사람들로서, 온갖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무엇을 읽든 대충 읽고 쓸데없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새로운 일에 대한 정보 를 갖고 있다. 유행을 열심히 신봉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그 유행을 퍼드리다가 그 뒤에는 가볍게 잊어버린다. 이와는 반대로 지적이고 성숙한 사람은 대개 일 관성 있고 논리 정연하며, 깊이 생각해서 얻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 의 한계를 의식하며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다 스러운 사람을 만나면 깜짝 놀라며 감탄한다. 말이 많은 사람들은 활기 있고 탁


월해 보인다. 많은 여자들이 이런 유형의 남자에게 매혹 당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또, 진짜 똑똑한 사람과 교활한 사람도 구별을 해야만 한다. 똑똑한 사람은 질 서와 조화를 만들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교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고 함정을 만드는 일만을 목표로 삼는다. 평범한 많은 사람들, 곧 멍청한 사람들은 교활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속임 수를 배웠다. 예를 들어 그들이 실수를 했고 그게 발각이 되면 그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데, 평범하고 분명한 사실조차도 아니라고 우기고 증거와 논증에도 뻔뻔스럽게 왼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아니면 둘러댄다. 그 일에 책임이 없는 사람처럼 자 연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한 거짓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거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겁 내지 않는다. 그렇게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 람에게 되는 대로 죄를 씌우는데, 너무나 태연하게 해치우기 때문에 비판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요컨대 질서를 이루는 경향이 있는 똑똑한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은 무질서와 혼란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말을 잊어버리거나 잊은 척하 고 거짓말을 하며 모순에 빠져 주제를 바꾸는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때까지 계속한다. 만약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그들이 하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어리석은 말에서 논 리를 찾아보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릴 것이다. 이런 기술들을 써서 자신들보다 훨씬 똑똑한 남편들을 다스리는 어리석은 아 내들이 있다. 또 자기 아내들에게 그렇게 하는 남편들도 있다. 무수한 말 많은 청치가들, 수다스러운 지식인들, 공격적인 재정가들이 지적인 혼란을 만들어내면 서 성공을 손에 넣는 이런 볼 것 없는 인간의 범주에 속한다. 3 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 회사와 연대하는 사람 이제 사람들에게 민족, 군대, 교회는 가치를 잃었다. 정당, 전체주의 이데올로 기 등등 한때 공동의 가치관과 목표를 통해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속시켰던 모든 것들이 중요성을 잃어가고 개인적인 자유와 자주적인 결정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 소속될 곳, 뭔가 추구할 만한 이상의 필요성 역시 점점 커진다.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고, 서로서 로 결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며, 경쟁 상대와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그 힘을 잃어가는 정당이나 교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까? 가정은 아니다. 가정은 점점 핵가족화되어서 자 녀도 기껏해야 한두 명뿐이며 그 자녀들도 자라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길 원하 기 때문이다. 친구도 휴가도 파티도 여행도 아니다. 즐거운 일들이기는 하지만, 진짜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런 영역은 사회적인 활동, 자발적인 행동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므로 다가올 미래에는 당연히 이런 활동 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또다른 사회적 현실이 있다. 바로 회사이다.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노동에 대하여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라는 개 념을 가졌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시각에서 노동은 노동자 대신 자본가가 이득을 보는 <노동력 매매>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노동 관계는 계약이 라고 생각되며 각자는 계약 사항을 충실히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생활을 들여다볼 때 우리가 일하는 자리, 우리의 노동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일에 바치고, 이레다 뛰어 난 에너지와 창의력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이란 우리가 중요한 파트를 맡아 참여하며 우리를 중요하게 만들어주는 현실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회사 시민권>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너무나 놀랐다. 그 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교활한 착취의 방법이자 계급 투쟁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계급이나 정당이 사라지고 그 밖에 연대감으로 결속할 수 있는 영역들 이 줄어들면, 우리가 인정받고 소속되고 연대하고 싶은 욕구와 경쟁심을 표출할 수 있게 해주는 장소는 바로 회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일까? 우리는 회사란 고용주를 불신하면서 월급을 타러 다니는 곳일 뿐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기업을 오로지 이윤 만을 생각하는 기업가의 사유물로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이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자본가들이 있다. 그에게 기업은 즉각 팔아 치울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업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과 회사를 동일시한다. 회사를 자기 자신의 구현물로 여기며 전쟁터의 장군처럼 회사 관리자들과 근로 자들 속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래서 단결력이 강해지고, 근무하는 사람들 모두가 회사가 잘 유지되고 성장하고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기업이 아주 잘되어 나갈 수 있다. 가끔씩 나는 지금과는 다른 사회적 규칙과 행동 모델, 다른 가치관들이 작용 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들만이 미래에 살아남아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도시 공동체나 종교 교파, 정다오가 아주 유사한 기업 말이다. 다시 말하 자면 이런 기업은 끈기 있고 유능하게 시장을 공략하는 기업이며, 이와 동시에 사람들이 도덕적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결속된 공동체 같은 기업이다. 자기 역할에 전문적인 사람 청소년기, 청년기, 성년기 사이의 단절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다. 옛날 에는 통과 의례가 있었고 오늘날에는 직업 세계로 들어가는 입문식이 있다. 그 순간까지는 모두들 청년에게 본질적으로 자발성과 정직함을 요구한다. 그는 집 에서, 학교에서, 친구들 가운데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도록 장려받는다. 충동 적인 기질이 오히려 좋게 평가되는 일도 종종 있다. 젊은이들은 생각한 것을 그 대로 말한다. 그들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들 사이에는 자발성과 투명함을 중시하는 나름의 행동 기준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거짓보다는 폭력적인 행동 을 좋아하고, 마지못해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분명하게 싫다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른들은 그들의 이런 특징들을 높이 평가한다. 너그럽게, 다정하게, 가끔 향 수에 젖어 그들을 바라본다. 어른들은 자발성과 정직성을 자신들이 잃어버린 순 수함으로 평가한다. 의무, 투쟁, 강제적인 노동이 존재하기 이전의 지상 낙원의


상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 세계로 옮겨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힘겨운 일이며 그 과정에서 흔히 상처를 입게 된다. 대개 청년이 직장이 나가기 시작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늦게, 스무 살이 넘어서야 일어난다. 그때 젊은이들 에 대한 성인들의 태도는 철저하게 냉담해진다. <직업 세계는 다르다>, <인생은 다르다>고 설명해 준다. 신뢰는 한 친구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고, 사랑은 가정 이나 단 한 사람에게서만 받게 될 뿐이라고 설명해 준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이런 사실의 폭로에 반항했다. 자신들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위선을 바로바로잡아야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모든 학생 운동은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항하는 진정한 반란이 었다. 이탈리아의 1968 년 학생 운동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소외된 노동에서 확인한 성인 세계의 위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위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젊은이가 역할, 가면의 이 점들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들은 변호사에게 중요한 것은 직업적인 능 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상담을 하기 전까지 변호사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친구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지속적으로 그의 이익을 책임진다. 놀이 친구의 관심은 지속되지 않는다. 변호사의 관심은 지속적이다. 유능한 변호 사는 그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며, 불필요하고 세세한 일로 짜증나게 만들지 않 으며, 불안한 소식을 전해 그를 동요시키지 않는다. 그를 안심시키고,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며, 더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해준다. 하지만 변호사가 그를 좋 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의 직업적 역할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에게는 탁월함과 직업 윤리의 모델이 있다. 이것은 의사의 경우, 그리고 어떤 사람의 정신 속으로 직접 들어가 가장 비밀 스러운 생각들을 식별해 내어 환자 스스로가 마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정신 분 석학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직업 세계에서 젊은이는 수없이 실망을 하다가 감탄할 만한 사람들을 만난다. 예를 들면 침착하고 민첩하게 지칠줄 모르는 굳건함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 는 관리자가 있다. 절은이는 휴가 이야기를 하든 일 이야기를 하든 그 관리자의 끊임없는 의욕에 충격을 받는다. 그런 의욕은 모두에게 전해지고 전염이 되어 일을 즐겁게 만든다. 젊은이들은 이런 경우 아주 예외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눈앞에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전체적인 성격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의 그 어떤 순간이라도, 어떤 관계에서라도 그 사람은 항상 그럴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그의 전공이라는 것을, 스스로 이루어잰 일의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때로는 위대한 사람을 관찰하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무엇 때문에 중요한 관리자가 그런 여비서에게 지배당하고 있을까 놀랍고도 의 아스러울 때가 있다. 교활한 여비서는 관리자의 정신 상태를 꿰뚫어보고 그를 교묘하게 다룰 줄 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아 내에게 그들의 관계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예리하고 사악한 여자는 자신이 바 라는 대로 그를 이용할 수가 있다. 여비서든 아내든 그녀들의 관심이 오로지 그 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모두 자기 역할을 세우는 데 쏟아붓는다. 그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작가, 위대한 과학자, 음악가를 아주 가까이에서 알게 되었을 때 대개 이런 경험을 한다. 사람들은 실망하고 위대한 사람의 어리석은 측면에 깜짝 놀란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생활의 모든 면에서 뛰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연구, 자기 직업, 예술 작품에 최선을 다하 고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친다. 그 밖의 일에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본주의를 살리는 사람 구소련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서운 시련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시장 경제 속에서 움직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이상 누구도 강철의 가 격을 결정해 주지않고, 상점으로 식품을 운반하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봉급을 책 정해 주는 사람도 없다. 개개인이 필요한 물건을 계산하고 상품을 구하는 구매 자를 찾고 가격을 검토하고 이윤을 계산해야만 한다. 시장는 수백만 명의 지식인들을 움직이게 하고, 얼마을 쓸 것인지, 얼마를 저 축할 것인지, 얼마를 투자하고 어디에 어떻게 투자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강요한 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신중함, 조심스러움, 자제심, 위협을 무릅쓰는 능력 같은 특별한 자질을 개발해야만 한다. 요컨대 중산층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확산되던 때에 부유층과 빈곤층이 형성되었다. 그 래서 마르크스 같은 많은 지식인들은 그런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 그들에게 시 장은 강자의 법칙만이 가치를 지니는 정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자본은 초기에 는 약탈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뒤에는 잉여 가치를 훔쳐내어 만들어졌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경제 발전이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도시 국가에서 시작된 것은 사실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계산에 밝고 강한 공동체의 산 물이다. 이것은 신용과 믿음과 약속 준수, 즉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바탕으로 한 다. 종교 개혁과 더불어 이들 중산층은 더욱더 자기 자신에게 가혹해지고 엄격해 졌다.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지 않고 돈을 모아 부를 축적해졌다. 여심히 일하고 소비하지 않고 돈을 모아 부를 축적했다.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는 개인에게 무서 운 압력을 가하고, 집에서, 일터에서, 사회 관계에서 지켜야 할 세세한 행동 원 칙을 마련했으며 청렴을 가르쳤다. 합리적인 생산과 경제적인 계산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였다. 자본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몇몇 위대한 모험가들, 악덕 자본가들이 아니라 개미처럼 재산을 모았던 장인들, 상인들, 종소 기업가들이었다. 그 뒤에 그들을 토대로 대기업의 높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모르타르 역할을 해주는 이런 근면하고 끈기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경제는 튼튼하지도 안정되지 도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표면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사회적 의무를 부과한다. 경쟁과 연대감이 그것이다. 관계 없는 사람들 은 경쟁이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받지만, 모두가 최고의 자리를 차 지하기 위해 싸우는 스포츠에서처럼 경쟁은 질서의 시작이다. 증오심이 없는 경 쟁, 장당하게 규제된 방법을 통한 경쟁일 때 이야기이다. 대기업도 기업 내부에 자율성, 책임, 경쟁, 회사 전체의 연대감 등의 존건이


마련되었을 때에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모든 관리자, 모든 사무장, 모든 팀 장들, 아니 모든 근로자와 사무원들이 자신들의 기업가적인 창의력을 표현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상을 받는 회사는 번영할 것이다. 인간들이 비굴해지도록 하는 권위적인 기업과 최선을 다하게 자극하지 않는 관료주의적인 기업들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근대 경제 체제의 견고성은 위대한 기업가들이나 정치가들을 근거로 하기 이전에 일반인들을 토대로 삼는다. 일반인들의 작업 능 력과 기술 능력, 배우려는 의지, 청렴함을 바탕으로 경제 체제가 튼튼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기업과 한몸이 되는 사람 1980 년대에 우리는 편견 없는 자본가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갓하지 못하는 채로 기업을 단계적으로 분할하고 해체시키는 마술사들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경기 침체, 실직, 그리고 힘겨운 국제 경쟁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최고의 품질에 낮은 가격, 최고의 서비스가 보장되는 유용 한 상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훌 륭히 해내는 기업가는 다름아니라 제품을 위해 살고 기업과 소비자와 자신을 동 일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떠올리게 된다. 생산된 삼품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그것을 손에들고 만지고 연구하는 태도에서 그런 기업가들을 알아볼수 있다. 당 신은 그런 기업가들이 제품의 모든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 다. 그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고통을 나누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그들이 직 접 제품을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비스킷이든 신발이든 오토바이든 그들 은 사랑과 애정으로 그것을 검사하며, 동시에 없애야 할 아주 작은 결점이라도 찾아낼 준비를 갖추고 불안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을 한다. 또 그와 똑같이 맹렬한 관심으로 감탄하고 모방할 준비를 한 채 모든 경쟁 제품들을 연 구한다. 예전에는 이런 태도가 수공업 수준의 기업에만 적합한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의 기업가는 총괄적인 전략과 재정 계획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다. 기술자나 생산 관리자들에게만 관련된 세부적인 일들에 신간을 허비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관리자들과 연구원들을 믿는다 하더라도, 기업가 는 자신과 기업을 동일시하고 계속 지칠 줄 모르고 최선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역 시 사실이다. 기업에는 신기하게도 기업가의 성격이 구현되어 남기 때문이다. 그 의 모든 장점, 모든 덕성, 관심, 정확성이 그대로 기업에 전달되게 되고 모든 결 점들과 부주의, 무관심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꾸며낼 수 없다. 자신의 제품을 사랑하는 기업가들은 대개 소비자들에게 대단히 신경을 쓴다. 그들은 소비자의 정신 상태와 반응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소비자의 비난을 두려 워하지 않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며 높이 평가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떻 게 해서든 투명한 관계를 구축하고자, 신뢰를 받고자 애쓴다. 상품의 배달에서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쓴다. 인간을, 그들의 반응을, 그들의 기분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런 기업가들은 대 개 거느리고 있는 관리직 직원들이며 근로자 개개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 다. 그는 모두에게 공동의 기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른 그 어떤


수단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 바로 보범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고무하는 것이다. 특히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든 정직한 얼굴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능력과 책임감과 성실함이 있는 것을 볼 때에만 안심하게 된다. 부정응을 인정하는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예기치 못했거나 과소 평가했던 난관에 부딪힌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은 그의 인간적인 자질 에 달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완전히 정반대 되는 반응을 보인다. 회사 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 있다. 대개 새로운 일응 시작할 때면 사람들은 그 일에 열광한다. 그들의 머릿속은 생각과 계획들고 꽉 차 있어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한다. 그런 다음 상사에게 그것들을 정리하여 내보이며 동의와 칭찬을 얻으려고 애쓰고 대개는 그렇게 된다.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는 동료들의 호의 어린 기대도 얻을 수 있다. 의욕과 호의가 혼합되어 밀월 관계를 만들어낸다. 미국의 대통령도 당선된 뒤 처음 몇 달 동안은 그런 밀월을 이용한다. 그러다가 의욕과 계획의 단계가 끝난다. 조직적인 구조에 통합되어야 할 순간 이 다가오며 무엇보다도 계획을 구체적인 행동에 옮겨 실제로 완성시켜야 할 순 간이 온다. 어려움들이 나타나고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겨워 보인 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하고 지쳐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두 성격의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정반대 방법으로 반을하는 두가지 유형의 인간들이 있다. 첫번째 유형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할 수도 없다. 반 대로 두번째 유형은 그것을 인정한다. 먼저 첫번째 유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무엇보다 먼저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유형이기 때문이며, 그 사람들이 대부분의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은 자신이 잘 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어떤 성 과를 올렸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어쩔 수 없는 곤 란한 입장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그에게는 실 패가 구체적인 형태를 갖는다. 곧 다른 사람이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그의 반응은 시기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거둔 성과들을 집요하게 관찰하며, 그 성과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어 안달한다. 자기 계획을 잊어버린 채 잡담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중상 모략에 유혹을 당한다. 그는 원한에 휩싸여 자기 비난 에 동의하는 공범자들을 찾는다. 그러다가 성공한 사람들을 가로막기시작한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거의 가학적일 정도로 그 일에 매진한다. 만약 이런 유형의 사람이 권력자의 위치에 있으면 부하들을 못살게 굴기 시작 한다. 잘못되어 가는 일은 모두 다 부하의 책임으로 돌려 비난한다. 잘못되어 가 는 일은 모두 부하의 책임으로 돌려 비난한다. 갑작스럽게 화를 내개도 하고 험 한 말이나 욕이나 상스러운 말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일이 잘 안 되면 안 될수록 점점 더 고통을 느끼며 공범자에게 둘러싸 여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차츰차츰 자신의 실패를 관념적으로, 공들여 정당 화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세상은 부패했고 마피아들이 우글거린다. 사람들은 마


피아와 서로 협력해 성공을 한다. 하지만 그는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한쪽에 서 있다. 그렇다. 그는 차별대우를 받고 박해를 받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 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부패하게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에 주위의 부패에 대항 해 싸운다는 얘기다. 회사마다, 그 어떤 곳에든지 남에게 죄를 씌우고 비난하는 데 자기 시간을 모 두 허비하는 이런 파괴적인 이론가들과 증오에 다득 찬 도독주의자들이 있다. 이제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앞서말한 사람들과는 반대로 자신이 상황에 대처할 만한 자질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 다. 시기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닌 그는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음모에 길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 주기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차츰차츰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외톨이로 만든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자기 탓으로 돌리고 의기 소침해 지기 시작한다. 자포자기해서 몸을 돌보지 않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여자라면 자신을 가꾸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파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직업을 바꾸어 볼 생각을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느 한 분야에 특별한 소질을 보이는 우리들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무능력 역시 어느 한 분야에서만 특 별히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역할에서 성공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아주 띄어나게 일할 수 있다. 유연성이란 바꿀 줄 아는 것이기도 한다. 전화 통화에서 성의를 보이는 사람 마샬 맥루언은 <전화는 한 개인의 완전한 참여를 요구한다>고 썼다. 전화로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소리, 목소리와 어조 에 담긴 미세한 뉘앙스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통화하는 상대방 의 정신 상태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그쪽 의도를 알아 차릴 수 있다. 전화할 때 는 우리도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맹인들의 특기를 어 느 정도 키워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무슨 경제적인 건을 협 상해서 해결해야 죄는 경우라든가 연애에문제가 생겼을 경우에 사람들은 상대방 을 직접 만나려고들 한다. 사람을 직접 대면하게 되면 수많은 기본적인 정보들 을 얻을 수 있고, 그것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속 태도와 의도를 재구성할 수 있 다. 멍하니 얼빠진 눈을 하고 있는지, 지루한 빛을 띠는지, 아니면 두 둔을 크게 뜨고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떨 때는 얼굴 근육의 움직임, 놀란 표정 하나로도 족하다. 그리고 몸이 있다. 상대방의 앉음새, 몸을 쭉 펴고 있느 니지 여부, 침착한지 아니면 금방 일어설 것처럼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지, 아니 면 불안하고 흥분해 있는지 등의 태도가 보인다. 만약 다리를 꼬고 있다면 그는 곧 일어설 것이다. 전화로는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전화를 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피우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 피우고 있는지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다. 가볍게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피우는지, 신경질적으로 계속 재떨이에 재를 털 면서 피우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지도 안 보인다. 신경을 써서 우아하게 옷을 입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를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전화를 받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직접 만났을 때에는 너무 자극이 많아서 자칫 놓치기 쉬운 정보들을


전화로 포착할 수가 있다. 상대방이 마치 조각가처럼, 아니면 단 한순간만 방심 하거나 딴 생각을 해도 공격당하고 마는 펜싱 선수처럼 오로지 한 부분에만 정 신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얼굴을 대하고 있을 때는 우리 말에 관심 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어떻게든 관심 있는 척할 수 있다. 하지만 전화로는 자동 적으로 집중력이 점점 떨어져 말한마디, 아니면 한 문장을 놓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이미 한번 당신에게 물어보았던 것을 또다시 물어보거나, 진행되는 대화와 는 전혀 상관이 없는 딴소리를 하게 된다. 게다가 전화로는 진심으로 느끼지 않는 감정들을 꾸��� 표현하기가 아주 힘들 다.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장례식에 직접 찾아간 사람의 경우에는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하게 몇 마디 말을 하고 관례적인 행동을 하기만 하면 된다. 더욱이 그곳 전체의 감정이 쉽게 전달되어 비록 무덤덤한 기분으로 갔더라도 분위기에 물들게 된다. 하지만 전화로 하는 일 대 일의 고독한 대화, 수화기의 완전한 정적 속에서는, 진심으로 감정을 느끼는 사람만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안다. 못소리의 떨림, 끊어진 말, 게다가 숨소리는 그 사람을 대변 해 준다. 선한 마음은 전화로 쉽게 드러난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갑작스런 전화를 받 았거나 몸이 좋지 않거나 아주 짜증이나 있었다 해도 잠시 후 놀라울 정도로 목 소리가 부드러워 진다. 그는 자신의 관심을 더 우위에 둘 수가 없다. 그는 전화 를 해줄 수 없었던 것이나 전화를 받고 있을 수 없는 것을 사과한다. 당신은 그 가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하고, 그렇게 할 수 없어 미안해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남을 방해하는 사람과 욕심 많은 사람은 전화를 할 때 당신이 무 슨 말을 하든 자기 할말만 하며 당신의 문제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기 주장만 한다.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하면 그들은 미안하다고 말을 한 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고 부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조급함, 불편함, 당혹스러움, 불안, 분노 같은 당신의 반응을 무시해 버린다. 그들 은 집요하다. 당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전화를 끊는 너그러운 사람들과는 다르 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해보았고 전화 통화를 통해 그들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기업들을 분석할 수 도 있다. 그 회사가 효율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발전할 것인지 파멸로 향해 가고 있는지, 그 회사의 건강 상태를 평가할 수 있다. 첫번째 접촉은 교환실을 통해 이루어진다. 운영이 원활하고 기운차게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에서 전화는 사업상의 기회와 같다. 전화를 건 사람이 고객이 될 수도 있으므로 항상 환영한다. 효율성은 벌써 전화 받는 사람 목소리의 높낮이 에서, 전화를 건 사람에게 보이는 관심에서 나타난다. 효율적인 회사의 교환실에 서 전화를 받는 사람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도 자기 일에 만족하고 있 고 열심히 그 일을 하고 있으며 봉사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전화 건 사람에게 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화는 불만, 권태, 무관심을 기민하고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전한다. 교환실과 접촉할 때 처음부터 거부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거나 화가 나 있는 경우이다. 상대방의 목소리 가 짜증스럽거나 화가 나 있는 경우이다. 상대방이 마지 못해 일을 하고 있고 우리의 전화를 귀찮아한다는 것을 그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공공 기


관의 교환 실에서 오만함을 느끼는 경우는 아주 잦다. 전화를 건 쪽이 힘이 없 고, 무엇을 필요로 하면 할수록 전화를 받는 사람을 우월감을 느낀다. 전화를 받 는 사람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 가 들리는 또다른 경우들도 있다. 교환실(또는 수위실이나 사무실)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경우이다. 전화가 그들을 방해한 것이다. 그들은 뭐라고 투덜거리다가 당신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한다. 그래놓고는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 을 쓰지 않는다. 비효율적인 회사는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것으로도 구별이 가능하다. 당신이 총지배인이든 사장이든 똑같은 사람에게 수십 번 전화를 걸 경우가 있다. 그때 마다 그들은 당신에게 누구냐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꼭 당신이 서로 아무 연 관도 없는 수십 명의 사람에게 전화를 건 처럼 말이다. 회사가 심각하게 침체되 어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대개 주요 고객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 하고 있고 목소리만으로도 그 사람들을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고위 임직원 의 개인 여비서들조차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무실에 차례차례 전화를 해봄으로써 그 기능을 진단해 볼 수 있다.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기분, 협동심, 정신 상태, 어떤 문제에 대한 정보 습득 정 도, 결정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 창조적으로 배우는 사람 어떤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오로지 그 일만을 할 줄 알고 몇 년이고 그 것을 계속하면 완벽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행동을 되 풀이하고 똑같은 리듬으로 똑같은 물건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의 손은 틀림이 없어서 능숙하게 물건을 쥐며 별다른 주위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쳐다보지도 않고 물건을 쥘 수 있다. 그를 관찰하는 사람은 그 탁월한 노련함에 깊은 인상 을 받고 그에게 감탄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관찰자도 실수한 것이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 과 겉모양에 미혹당한 것이었다. 관찰자가 몇 년 전, 그 작업자가 그렇게 침착하 지도 자신감이 있지도 않았을 때 만들 초기 물건을 본다면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처음 것과 비교했을 때 최근에 만든 물건에는 무엇인 가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근 것은 훨씬 더 특정이 없고 개성이 없 으며 평범하다. 어떤 경우에도 기술적으로 후퇴한 것도 있다. 기능적이지도 않고 균형과 조화도 잃어버렸다. 주의, 관심, 조심성과 끊임없는 창조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재생산을 할 때마다 정보가 조금씩 사라져간다는 것이 생명체의 기본 법칙이 다. 재생산을 할 때마다 실수는 누적된다. 내부에서는 실수를 알아낼 수가 없다. 실수는 외부에서만 보인다. 다른 사람이 그 실수를 찾아낸다. 아니면 당사자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졌을 때, 자신과 <무관해졌을> 때 볼 수 있다. 처음과 달 라졌다면 스스로 판단하고 고쳐야 한다. 물건들을 똑같이 재생산한다는 것은 사 실은 새롭게 그것들을 재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 사람, 창조하지 않는 사람은 잊어버리게 된다. 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아끼고 싶어하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데 그치는 사람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정보를 놓쳐버리게 되는 징후는 권태에서 나타난다. 이런 식 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금방 지치지는 않지만 권태로움을 느낀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금방 지치지는 않지만 권태로움을 느낀다. 권태로움은 지식 상 실의 신호이다, 20 년 동안 똑같은 교과서를 계속 사용하는 교사는 열의 없이 그 책을 반복하며 지루해한다. 그로 인해 학생들도 지겨워한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과 창조하는 않는 사람은 반복하는 일도 할 수 없다고 말 했다. 유명한 요리사는 수없이 많은 다른 요리들을 만들 수 있다. 그는 요리 기 술 전반에 관한 지식이 있다. 그는 특별한 재료들을 가지고 정확하게 그 맛을 내기 위해서는 정확한 분량의 재료가 필요하고 적당한 새기의 불과 적당한 시간 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토마토가 아주 잘 익었으면 신맛을 내기 위해 다른 것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 향신료가 신선하지 않을 때는 다른 풀을 조금 첨가할 줄도 안다. 매번 다르게 요리를 하기 때문에 그가 만든 요리의 맛은 항상 똑같 은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제에 대한 변주곡이다. 사실은 그것은 독창적인 산물이다. 하지만 조리법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서 똑같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이 모든 요소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요리사가 만든 것과 똑같은 음식 을 만들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되풀이해서 만들면 만들수록, 그것 은 원래의 본보기와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다가 매일 그 요리를 할 경우 어떨 때는 어떤 재료 하나가 빠진 채로 요리를 만드는 일에 훨씬 자신이 생기고 자신 에게도 훨씬 더 만족하게 되어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곧 자기 요리가 원 래의 요리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훨씬 더 못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은 오늘날 전문화의 필요성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 는 것과 대치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문화란 자신의 관심을 한 분야에 국한시켜 단지 몇 가지 일만 배우고 그것을 잘 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고 생각한다. 사실 전문화는 깊이 파고드는 것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을 의 미한다. 전문가는 경쟁이 되는 여러 가지 이론들과 다양한 방법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 분야에서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 러므로 그에게 고정된 것, 반복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대 사외에서 요구하는 또다른 한 가지는 종합이다. 하지만 종합 역시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시험 준비를 할 때 큰 실수를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책 을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부터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것들을 골라낸다. 그것에 밑줄을 긋고 요약을 한다. 다음에 책을 읽을 때는 중요 사항들이 더 줄어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시험 준비를 할 때, 그들은 자기가 밑줄 그은 부 분만, 표시를 해놓은 부분만 잠깐 훑어볼 뿐이다. 대개 결과는 비극적이다. 그 학생들은 어디서 잘못한 것일까? 정말 중요한 것을 이해가기 위해서 그들은 책 한 권을 모두 공부하고 또 여러 번 번복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주제를 완전 히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들도 읽어야만 한다. 종합은 모두 선택과 같아서 더 많은 정보들을 다시 요구한다. 변화 없이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계속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창조하지 않고 반복할 수 있는 사 람도 없다. 무엇인가를 단 한번에 배운 사람도 없다. 모국어조차도 마찬가지이 다. 십여 년 정도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은 단어와 동사들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말을 쓴다. 그와 같이, 정체된 것은 후퇴해 버린다. 양극의 미덕을 겸비한 사람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거대 조직이다. 공기업, 대기업, 다국적 기업 같은 것이다. 이런 조직들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미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 까? 우리가 조직에 공한하게 해주고, 동시에 조직으로부터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미덕들은 무엇인가? 어떤 형태의 사회이든지 각기 어떤 미덕들은 필요로 하고 어떤 다른 미덕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쟁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신체적인 용기가 높이 평가받 을 것이다. 궁정 사회에서는 우아함이,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는 신속함이 높이 평가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에서는? 어떤 사람은 거대한 조직에서는 정확성, 세심함, 체계성, 질서에 대한 사랑, 복종과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조직에 정통한 현대인들은 독창성, 창의력, 기업가 정신 같은 자질을 강조한다. 그들은 현대 조직은 관료형의 인물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경영인들을 필요 로 하며, 경영인은 근본적으로 기업가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영인은 특별한 유형의 기업가이다. 한 조직 안에서 일을 하고 보고 를 올려야 할 상관이 적어도 하나, 보통은 여럿씩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직접 만나는 인간은 과거에는 아주 정반대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자질과 미덕 들을 한 몸에 겸비해야 하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다. 여기 한 예가 있다. 경영인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새로운 문제들과 새로운 해 결책들을 분명히 밝혀내야 한다. 계속 새로운 것들을 제안해야 하고 돌진하고 의욕을 가져야 한다. 자기 계획을 승인받고 신뢰를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 다. 하지만 또 단념할 준비도 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도 역시 똑같이 중요한 점 이다. 대기업의 전략들은 먼 곳에서, 때로는 저 먼 외국에서 결정이 된다. 결정 을 할 때에는 무수한 요인들과 셀 수 없이 다양한 요구들을 고려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창조적이고 의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 여지지 않았을 때 의기 소침해지며 의욕을 잃고 폐쇄적이 된다. 거부가 좌절로 바뀌는 것이다. 차츰차츰 그는 제안을 하지 않으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경 영인이라면 그러한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계속 제안해야 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경영인의 미덕이 갖는 이런 이중적이고 양극적인 성질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 도 찾을 수 있다. 경영인은 야심과 경쟁심이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과 기업을 위해 성공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또한 동료들과 부하 직원들과 부하 직원들 과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호적인 분위기가 사내에 흐르지 않는 기업은 절 대 크게 성장할 수 없다. 경영인은 경쟁심이라는 재능과 함께 친절한 마음씨와 사과하고 화해하는 능력을 필수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스포츠 세계와 다소 비 슷하다. 경기가 끝난 뒤 두 운동 선수는 서로 화해하고 악수를 하고 친구가 되 려고 애쓰며 도전은 잊어버린다. 회사 내에서 생긴 우정은 깨질 때가 많고, 위선적인 경우가 종종 있다. 계속 야망에, 경제적인 이익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정은 그것이 없다면 건조하고 공허할 수도 있는 관계에 섬세함과 인간성이라는 빛을 비추어 주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주 소중하기도 하다. 여기 또 세번째로 양극을 이루는 미덕이 있다. 경영자는 한편으로는 이성적이 고 냉정하고 진행 과정과 엄격한 방법들을 결정하고 세세하게 장래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포착하고 매일 그에게 도착 하는 거대한 자료 더미 속에서 중요한 것을 구별해 내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수천 가지의 강력한 신호들 속에 숨어 있는 아주 미약한 신호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직관과 감수성을 요구한다. 새로운 것은 절대 요 란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리없이 몰래 나타난다. 그것은 아주 작은 미립자이고, 잔물결이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것을 잡아내려면 머리를 비우고 눈을 감고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양극을 이루는 또다른 것은 결정하 고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능력과 거래를 하고 설득시키는 능력이다. 현대의 기업은 한 라인의 위��� 체계로 짜여 있지 않고, 보고해야 하는 상관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컨설턴트, 전 문가, 신문 기자와의 관계는 재치를 요구한다. 협력자들 및 부하 직원들과 맺는 관계에는 인내심과 헌신과 끌어들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제 설명이 필요하다. 양극의 미덕은 중도, <황극 같은 중용>을 지키라는 게 아니다. 치우침이 없도록 이쪽에서 조금, 저쪽에서 조금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와 반대로 제안하는 능력과 포기하는 능력, 경쟁과 화해, 방법과 직관, 강인함과 재치 같은 양면을 다 포함한다. 이건 아주 힘든 일이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성격을 만들고 훈련시켜야 하지만 또 믿을 만한 인간적 섬세함과 도움을 주려는 믿음성 있는 태도가 자리잡을 수 있는 여백을 가꾸어나가야 한다. 기업 경제학을 철저히 공부한 어떤 젊은이들은 최상의 준비와 적극성만 있으면 충분 하다고 생각한다. 잘못 생각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변화가 아주 심하고 복합적 이다. 어떤 태도든지 경직되어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과신, 오만함, 권위주의는 모두에게 파멸을 안겨준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 왜 매주 일요일이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 까? 대체 축구 경기는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며, 무엇을 베풀어주며, 어떤 식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주는 게 없다고 주장하고 관람 스포츠와 실제 스포츠 를 대비시키는데, 관람 스포츠는 감정의 유희, 환상에 의한 도취, 충동의 분출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두들 일상 생활에서 오는 좌절과 증오를 쏟아내는 일종의 집단적인 오르가즘 같은 것이다. 이런 비관주의자들은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증거만을 찾는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은 아주 낙관적이다. 그들은 개인은 주기적으로 자기 실제를 잊고 집단과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편다. 경 기장에서는 모두 똑같다. 변호사, 의사, 근로자와 사장, 판사와 주부, 부자와 가난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특별한 자유로움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맛본 다. 광적으로 흥분하고, 소리치고, 서로 껴안고, 모두 함께 뒤섞여 개인을 뛰어넘 는 새롭고 힘 있는 유기체를 만든다. 그러다가 집으로, 각자 자기 자신으로, 매 일의 삶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축구 경기장은 수백만의 개인이 일상의 행동 규율을 잊어버리기 위해 찾아가는 자유로운 장소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치와 도덕을 가르쳐주는 원천이다. 축구 경기를 다시 생각해 보자. 선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수많은 장애를 극복하며 끈기 있게 조직을 짜기 시작한다. 장애를 하나 넘고 또다른 장애를 넘 었는데 골을 넣지는 못한다.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다시 처음


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서 절대 목표를 잊지 않고, 절대 긴장을 풀지 않고, 실패했다 해서 절대 의욕을 잃지 않는다. 삶이 모든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학교에서 진급을 하겠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더라도, 정해져 있는 수 많은 일들 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정리나 시를 배우고, 질문과 질문에 답하고, 학교 숙제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과도 결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절대 멈춰설 수도, 쉴 수도, 딴생각 을 할 수도 없다. 경기는 삶의 은유이다. 다시 말해 삶을 상징적으로, 전형적으로 종합해 놓은 것이다. 경기에서 성공하면, 골을 넣으면, 당신은 만족해서 그 자리에서 멈춰서 고 긴장이 풀어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다른 사람이 역습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과 기업들은 좋은 결과를 얻은 뒤 자 신들이 천하 무적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벌써 자신들의 움직임을 모두 연구했고 그를 통해 방법을 배웠다는 것을 잊기 때문에 패하고 파산하게 된다. 경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다른 도덕 규범은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쏟아부어야 하면서,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자기 제어 능력도 필요하다는 것이 다. 당신에겐 항상 상대편 선수가, 당신을 따돌리려는 선수가 따라붙는다. 하지 만 상대방을 발로 차거나 팔꿈치로 밀어붙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심판은 당 신을 실격시키고 만다. 심판은 확정 판결을 내린다. 그는 당신에게 시험을 내는 교수나 당신을 질책하는 관리자 같다. 그가 분명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소리를 칠 수도, 그에게 욕을 할 수도 없다. 당신은 이를 악물고 불공평한 처사 를 받아들이고 계속 앞으로 달려야 한다. 영웅은 동요하지 않아야 한다. 경기에서는,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개인 플레이어가 될 수는 없 다. 우리는 모두 정확한 패스를 필요로 한다. 경기의 위대한 챔피언은 아량이 있 다. 다른 선수들이 행동할 수 있게 배려하며 그들을 승리로 이끈다. 우리는 경기를 보면서 이 모든 가치들과 도덕 규범들을 배우고 또 배워 우리 것으로 만들고 우리 일상에 끌어들인다. 그것들은 우리를 지탱하고, 삶이라는 어 려운 노동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본보기이고 이상적인 모범이다. 참된 교양을 지닌 사람 우리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의 심리적인 통찰력에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그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알프레드 아들러, 칼 구스 타프 융 같은 이름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래 도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대한 심리학자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들은 생활을 통해, 그렇게 극복해 낸 위기 상황들을 통해 인생의 심리를 배운 독학 심리학자 들이다. 우리는 가끔 공동 주택의 여자 관리인이 보여주는 관찰력에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하며 속으로 이렇게 묻는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공부하 지 않은 이 여자가 어떻게 사람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행동의 동기들을 직관 할 수 있었을까? 가만히 살펴보면 그녀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그녀의 일을 통해서임을 깨달을 수 있다. 공동 주택에는 수백여 명의 사람들 젊은이, 노인, 사랑에 빠진 사람, 가난하고 병든 사람, 화를 잘 내는 사람과 복수


심에 불타는 사람들, 마음이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들이 산다.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부자처럼 보이지만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사람 들이 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세든 사람들을 관리인이 관리해 주길 바라는 집 주인들이 있다. 몰래 안으로 들어 가려는 행상인들, 배달하는 사람, 내부 사무실 의 고객들이 있다. 공동 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들, 중요한 사람과 불청객들 이 있다. 그리고 범죄자들과 마약 판매자들이 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식별할 수 있어야 하고 조그만 표식만으로, 그러 니까 걷는 방법, 옷을 입는 방법, 얼굴 표정,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서 성격을 직관해 내야 한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으려면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농담을 할 때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 할 지, 발끈하기 쉬운 부모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떤 아이를 어떻게 나무라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매일매일 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문제에 신경써야 하는 경영인들에게서 이와 유사한 경우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 역시 자기 부하 직원들의 심리를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행동과 태도에 대한 연구보다 는 이야기를 듣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부하들이 사무실에서의 관계들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 생활, 자기에게 벌어진 사건, 요구, 불행, 예상 외 의 일들도 얘기에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리자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 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 나아가 보편적인 문제까지 이야기한다. 나이 든 부모님 문제, 자식들 문제, 불성실, 신경 과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 때문에 평범한 경영인, 부장,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 민감하고 자신의 활동을 제대로 잘 해내고 있다면 인간 정신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 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불안한 일상 생활의 삶 속에서 배운다. 과학자처럼, 극 작가처럼, 아니면 위대한 소설가처럼 사건들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깊이 생각하 고 끈기 있게 서로 연관을 시켜보면서 배운다. 하지만 그들은 책을 쓰지도 않으 며,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며, 가르치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겸손하다. 그들의 태도, 그들의 존재는 <박식한> 사람들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곳에 있 다. 박식한 사람은 인생에서 배운 게 아니라 그저 책에서만 배운 것이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자기 머리로 판단할 수도 없고, 오로지 이미 다른 사 람들이 한 말만 되풀이한다. 이런 사람들은 오랜 관습에 의해 인정받고 신성시 되는 <권위자>이다. 박식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것이다. 어떤 문제, 사 건,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이 먹물들은 현상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책을 찾고 인 용을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인식하기가 아니라 귀신 쫓기이다. 그들은 진짜 메 커니즘을 찾아내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문제를 없애버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그 문제에 관해 이미 누군가가 써놓은 글이면 충분하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권위 있고 가장 인정 받고 가장 신성한 지 식의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지 때문에 겸손할 수가 없다. 옛날에 아리스토텔레 스 학파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모든 것을 다 말했기 때문에 그들, 제자들도 모든 것을 다 알고있었다. 이런 인용 능력, 박식함과 교양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자주있다.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똑똑한 교양인들 중 많은 수가 박식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무식하다고 느끼고 부끄러워한다. 그러곤 깊이 생각을 해보고, 현실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고, 교양이라는 게 공허한 것이고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며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유감스러 운 일이며 그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진짜 위대한 교양이란 삶에 충실하며, 셰 익스피어에서 괴테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에서 베르디에 이르기까지, 파스퇴르에 서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극작가들, 위대한 소설가들, 위대한 과학자들 은 모든 지식의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인간과 현상들에 접근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린아이 같은 놀랍고도 경탄할 만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지식의 보 따리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이해하는 데 이용되었을 뿐, 몸을 감싸는데 도움이 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관찰한것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특히 새로운 발견들을 계획하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이용되었다. 진정한 교양, 유용한 교얀은 언제나 축적된 지식과 실제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관찰을 종합하는 것이다. 4부 창조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 성공만을 추구하는 사람 참으로 큰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진짜 성공, 길이 남을 만한 성 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성공을 바라거나 추구해선 안 된다. 성공에 사로잡혀서는 성공할 수 없다. 성공에 대해 아예 생각조차 하지말고 오로지 완벽만을 추구하 고 작업의 잘만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말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교훈적인 말 같아 보인다. 진 가는 항상 인정을 받는다거나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참가하는 데 더 의미가 있다는 말과 비슷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적인 격언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관찰할 수 있는 현상에 대 한 이야기이다. 한가지 꼭 덧붙여야 할 것은 그것은 모순적인 현상이라는 점이 다. 성공하려면, 한편으로는, 성공을 손에 넣기를 갈망하고 추구하고 성공하겠다 는 동기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성공을 추구하지 않고 무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복의 경우와 약간 비슷하다. 우리가 행 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행복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번 일요일에 바로 이 휴가에서 확실하게 행복을 손에 넣길 바랄 경우 거의 틀림없이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욕망은 한없이 자라므로 조급해지고 장애물에 부딪쳐 결국 괴로움에 빠지게 되기 때문 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행복해 지려면 실패와 불운을 받아들일 줄 알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행복은 우 리앞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중요한 일에서는 성공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바로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것 도 다양한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성공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해놓은 일에 대해 토론하고 그섯을 평가하 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호의적으로 인정을 해주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 래서 많은 이들이 성공을 손에 넣기 위해 무엇보다 일반 사람등의 마음에 들고,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을 하고, 그들을 기쁘게 해주기에 온힘을 쏟는다. 정당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소설의 성공은 전혀 기 대하지 않았던 무엇인가에서, 독자들이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어떤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작가도, 그 어떤 독자도 상상 못 했던 혁신성과 창조성 때문이기도 하다. 성공은 완전히 새롭고 허를 찌르는 어떤 것을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이 성공냐 완전한 실패이냐를 결정한다. 새로움, 모헙ㅁ, 의뢰성, 그ㅜ러니까 불가지성이 위대한 작품들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그래서 대중의 취향을 따르고 대중의 호의를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 정보에 밝은 사람들, 비평가들의 조언만 따르고 상을 주는 심사 위원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만 따지는 사람은 절대 중요한 작품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또다른 동기는 대중의(의견)과 그들의(반응)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란 인정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만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고 질투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성공이다. 지나치게 남들의 의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피곤하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모든 것을 조금씩 작품에 넣어야만 하고, 나누고, 쪼개고, 수천 가지로 아첨을 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가치 있는 작품은 언제나 단일하고 결정적인 그 어떤 것이다. 그 러니까 선택의 결과, 타협을 모르는 배제의 결과이다. 마지막으로 공격성이라는 복잡한 놀이가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은 이따금 고의로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허 를 찌르는 현상인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충고를 해주고 신경을 써주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다. 질투가 심한 사람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상처를 내고 싶어하거나,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예사로 보아넘겼다는 것 때문에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은 항상, 그 리고 어디서나, 우리가 안 되길 바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위험은 다른 사람의 시김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김 심에서 비롯된다. 시기심은 모방 감정이다. 그것은 더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데에서 탄생한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쟁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와 우리 사이 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면 그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무엇인가를, 즉 본보기와 이상을 잃게 된다. 우리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것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자신 의 일에 몰두하는 대신에 경쟁자와 이미 성공을 거둔 사람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증오에 자신의 힘을 낭비할 뿐 만 아니라 눈이 멀게 된다. 가치 잇는 게 무엇인지도 더 이상 볼 수 없고 좀더 나아지기 위한 자극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고 배울 수조차 없게 된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 이 외의 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목표와는 동떨어진 것을 찾으려 애쓴다. 이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 직업이 어떤 것이든, 유일한 구원책은 완 벽하게 그 일을 해내려고 애쓰면서 그 일에 전념하는 데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미덕, 용기, 탁월함이라고 불렀다.


시험을 피하지 않는 사람 나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사용될 회사 광고를 공개하는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회사는 그 직업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먼저 의문 제기, 조사, 그 다음에 해결책 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온갖 방법들을 탐색해 보았고 많은 광고 대행업체와 상 담을 했다. 조심스럽게 한 업체를 선정했고 그 업체는 분명히 이 작업을 하는 데 가진 능력을 총동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대표 관리자에서부터 나와 같은 단순한 컨설턴트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모든일이 잘 되어갈 것인지 여부를 손에 쥘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기업 활동에는,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계획된 기업 활동에조차 믿을수 없는 위험의 여 백이 도사라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만든 사람이 개봉 후에 관객이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여 환호를 보낼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후에. 성공을 거둔 뒤에는 모든 게 아주 간단하 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그건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헤여 갖게 되는 착각의 논 리이다. 인생은 그 본질, 그 구조로 볼때 계획인 동시에 위험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만 히 때를 기다려야 할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수천 년 동안 민중과 문화의 운명 은 전쟁에, 종종 단 한번의 전투에 달려 있었다. 전투를 하는 양편 모두 모든 자 원, 인간들, 조직, 용기, 상징, 노래, 전통의 힘을 단 한 지점에 쌓아올렸다. 다음 날이면 그들 중 한쪽이 무너져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우리들 역시 개개인으로 무슨 일을 하든 이런 존재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학교에서 시험을 없애길 바라는 교육학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시 험은 교육을 보완하는 한 부분이다. 난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시험에 대한 스트 레스를 피하게 해주려는 부모들을 이해할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앞을 내다보고, 추정하고, 스트레스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에 직면했을 때에야 겨우, 우리가 얼마만큼 해낼 수 있으며 해내 야 하는지를 알게된다. 처음에는 환상 속에서 헛된 희망을 품고 우리 마음에 드 는 세상을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어떤 쪽에 나오는 문장에 대해 시험을 본다는 건 정말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시험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하고 덮어둔 다. 하지만 시험이 가까워지면 그의 머리는 아주 날카로워지고 점점 혹시나 하 는 마음이 생긴다. 그는 어떤 문제가 나오게 될지 보러 가고 점점 현실에 다가 서기 시작한다. 처음에 계획은 단순한 환상이나 꿈과같다. 그것을 실현 시키려면 우리는 우리 머릿곡에다 현실의 모든 행동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모든 함정들, 모든 단계의 여 정에서 세상이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부여할 모든 시험을 예측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통과하기 위해서 매번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지점에서 실수를 하 지 않았는지 특별히 중요한 것을 그냥보아 넘기지 않았는지, 열광에 끌려들어 가지나 않았는지, 객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전투를 시작하던 날의 정신 상태를 갖도록 애써야 한다. 우리는 현실, 현실의 불안, 현실의 불확심함을 될 수 있는 데까지 재현해 내야 한다. 이 때문에 거대한 조직들은 계획을 훌륭히 짠다. 모든 직원이 특수한 문제에 집중을 하기 때문이다. 조사, 컨설턴트, 테스트를 이용함으로써 현실을 더욱더 잘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립된 개인은 비록 그가 천재적일 지라


도 자신의 편견과 기호에 끌려다닐 수 있다. 이 때문에 독재자는 혼자 아무리 똑또ㄷ하다 해도 어느 순간에 실수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현실의 메시 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만나러 달려갈 때에만, 그 현실의 힘겨운 시험을 끝까지 치러낼 때에 만 우리는 미래의 위험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인내할 줄 아는 사람 당신이 만약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묻는다면 대개 일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참아내는 여자, 황소, 시간을 흘러 보내는 나이든 사람.) 이와는 달리 참을성 없음에 대해서는 이런 대답이 나올 것 이다.(활기 있는 젊은이,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상관, 아름답고 변덕이 심한 여 자.) 눈 색깔이나 코의길이처럼 인내와 성급함이 타고난 두 가지 성질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남편이나 아내의 참을성 없는 성질을 자랑하기까지 하다.(그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조금 늦어지는 것 도 참지 못한다니까요.) 마치 그런 성질이 지적인 활력이나 성격의 상한 면을 증 명하기라도 하듯 그렇게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인내심이란 가장 기본이 되는 미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먼저 말하자면 인내심은 결코 선척적인 게 아니다. 인내심은 습득되는 것이고 강인한 의지의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참을성이 없다. 배가 고프면 울고 엄마가 없으면 절망한다. 청소년은 참을성이 없어서 학교에 몇 시간 있어 도 좀이 쑤셔 안달을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도, 청소년도, 축구에서 낚시에 이르 는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곧 충동성을 통제해야 한다. 그들은 가만 히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정확한 순간을 포착해서,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닌 바로 그 순간에 튀어오를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 동작을 완벽하게 하 기 위해 수백번 같은 동작을 끈기 있게 되풀이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인내심과 게으름, 무관심, 무신경을 혼동한다. 이런 것들은 생 명력의 부족으로 특징지을수 있는 정신적인 상태들이다. 하지만 인내심은 생명 력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생명력을 선도해 가면서 통제할 수 있 는 능력이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도 우리는 끈기 있게 목적을 추구할 줄 알아 야 한다. 분노를 터뜨리고 문을 쾅 닫아 버리기는 얼마나 쉬운가! 힘이드는 것은 첫 실패, 두번째 세번째 실패를 견뎌내고 그때마다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길과 새로운 동맹자를 찾으면서 일을 다시 계획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연 대회나 사업, 질병뿐만 아니라 사랑과 같이 심각한 시련과 직면 할 때마다 진짜 어려운 일은 잔인할 정도로 불확실한 상태에서 몇 날 며칠, 몇 달을 버텨낼 줄 아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인내심에 용기라는 이름을 붙여 주게 된다. 용기는 시작할 줄 아는 미덕이다. 인내심은 다시 시작할 중 아는 미덕이다. 매 일 아침마다, 매시간마다, 매붐마다 다시 태어나야 하기때문이다.(끈기 있기) 위 해서는 끝없이 이것을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이 가정에 있을 때에는 참을성 없는 성질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니 까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의 순간은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무절제함을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그리 고 모든 실수의 대가를 자신들이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직업적인 발전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이란 동료들, 고객 또는 경 여자들일 수 있다.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말해야 할 순간이 와도 그들 은 자신을 통제하고 신중하고 끈기 있게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성급함은 항상 자기 주변 사람들을 당황스럽고 불쾌하게 만들고 결국은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 집에 돌아왔을때 무슨 일이든 늦어지기만 하면 버럭 소 리를 지르는 집안의 지배자인 아버지, 여비서에게 큰소리 치는 사무장, 직원들을 난폭하게 다루는 사장들이 있다. 이들은 성급함을 독재의 도구로 삼으며 다른 생활과 일에 해를 입힌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이런 변덕을 자신에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고객의 입 장에 서야 하는 판매자로 시작할 경우 라면 언제나 친절하고 끈기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위가 높은 경영인이라도 직원들의 동의를 얻고 싶다면 그들에게 진정 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싶다면 스포츠 팀의 코치처럼 그들의 말을 듣고 말을 하 고 설명하고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일에 몸을 바쳐 정말 전력 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집단의 창조성을 이해하는 사람 창조력이 인간성의 진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컸던 행복한 시기들이 민중의 역사에 있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특히 아테네와 피렌체에서 그런 일이 나타났다. 그 당시의 두 도시는 지금과 비교해 보면 아주 작았지만 지성과 특별한 재능들은 수천 배 더 풍부했다. 사람들은 종종 생물학적이거나 유전적인 어떤 것으로, 예컨대 특별히 똑똑한 민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 사실을 설명하려고 생각한다. 하짐만 실제로는 사회 환경, 문화, 최선을 다하고 의외의 모험과 불가능한 도전에 맞서게 그들을 자극 한 인간 관계의 원형이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상인들은 새로운 항로를 탐 사했고, 도시들은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고, 새로운 기술들이 연구되었고, 스포 츠,학문, 예술 모든 분야레서 경쟁이 허용되었다. 시민들은 모두 두드러진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필요로 했다. 후원자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예술가 들이 다른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들게 자극했다. 지적인 질문이 지적인 대답을 만들어 냈고 천재적인 요구가 천재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전세계의 과학적인 발견의 대부분은 몇 개 의 주요 주요 대학들이나 소수의 연구 센터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는 모두들 토론하고 의견을 대도하고 서로 자극하고 협력하고 경쟁자는 과학 공동체가 형 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냉혹하고배타적인 공동체로서 그 안에는 그 누구 도 자신이 펴범해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공부 한다. 전세계가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에게 중요한 의문들을 제기하기 때문에 그 들은 옳은 답을 주기 위해 공부한다. 또 황금기의 할리우드 역시 비상식적인 방법들을 시도해 보려고 하고 불가능 한 것들을 요구했던 미치광이와 과대 망상증 환자들의 공동체였는데, 이 속에서 는 가장 혁신적인 생각이 그보다 더 기발한 다른 생각을 만들어내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곳은 혼돈 상태의, 표현되지 않은 세계의 모든 요구들을 지각하고 세 계의 꿈들에 호응하는 공동체 였다. 그 누구도 혼자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개인적인 창조가 아


니라 집단의 창조만이 존재할 뿐이다. 집단만이 미래의 신호들을 감지할 수 있 는 수천의 눈과 기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창조하는 사람도 공동체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했다. 그는 교차로에 자리를 잡고 정보의 흐름 속에 몸을 던졌다. 그는 친구들과 적들을 통해 배웠다. 고독한 그의 독백은 실제로는 대화이자 논 쟁이다. 그가 은신처에 고립되어 살고 있다고 해서 광장을 버린 것은 절대 아니 다. 그는 수천 명 타인들의 노력과 그들이 이룬 결과를 조합하고 이용할 줄 아 는 기업가나 정치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창조성은 집단적인 긴장, 탁월함을 향 한 자극이 늦추어질 때 끝나버린다. 사람들이 멀리 보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 만을 볼 때, 미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안주할 때, 남을 본받아 더 좋 은 것을 만들고자 하지 않을 때, 꿈꾸기를 포기하고 무덤덤해질 때 창조성은 끝 나게 된다. 조심스레 주의를 기울이고 재빨리 뛰어오르기를 멈춘 생물과 같다. 이러한 ���물은 게을러지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국가에 도, 정당에도, 도시에도, 기업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팽창단계가 지나고 나 면 침체와 쇠퇴기가 뒤를 잇는다. 도전이 실패를 하게 내버려두며, 전략적 전망 은 전술로 대체되며, 관료들이 개혁자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면 개인의 창조 성도 힘을 잃고 만다. 너무나 많은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이해를 받지 못하며, 평범함에 흡수되어 버린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사람 젊은 시절에 위대한 창조적 시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청년기에 평생의 뛰어난 일을 다 해버리고, 그 결과로 성공을 손에 넣어 그 뒤에는 그것 을 유지하며 산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 이르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급속한 쇠퇴가 시작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생애에 걸쳐, 노년에 이른 뒤까지도 훌륭한 일들 을 해낸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젊은 시절「범죄와 처벌에 대하여 」라는 중요한 작품을 쓰고 나서 그후에는 전혀 글을 쓰지 않은 체사레 베카리 아의 경우가 생각난다. 정반대로 칸트는 일흔 살이 되도록 불후의 명작들을 썼 다. 문학, 음악, 심지어 사업이나 운동 분야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기 자 신, 곧 자신의 가치를, 자신의 작품과 생각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능 력,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서 그런 차이가 나온다. 그 근원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 활동 그 자체의 성질과 관련되어 있다. 생명활동은 어느 생물학적 수준에서 보아도 모험 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먹이를 마련하고 포식자, 기생충, 미생물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생물들은 죽는다. 계 속 새로운 문제들을 터득하고 풀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이 일은 세포 하나하나 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풀어야 할 문제를 떠난 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성이란 문제를 보고 거 기 직접 맞서 해결해 내는 능력이다. 창조성이란 똑같은 것을 더 정밀하게, 더 과감하게, 더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천재는 그의 인생과 그가 사 는 사회의 산물이다. 사회가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 문학적 환경이 그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면, 그는 천재적인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최고의 시인이면 언어의 창조자인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 셰익스피어 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고 민중 전체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기다리 고 있던 초기에 비로소 등장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후원자들이 있고 그것을 요구하는 고객들이 있기 때문에 탄생한다. 위대한 발견과 발명은 문화와 과학적 환경이 특별한 것을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키워나가야 한다. 좀더 높은 목표를 설정해 놓아야 한다. 개인 에게나 대중에게나 평범함에 물들어버리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다. 개인이 자기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 되는 것보다 10 퍼센트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로 미끄러지 고 만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일을 하기 때문이다. 기억력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계속 전에 알고 있던 사실들을 잊 어버린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저울은 균형을 유지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성장하고 싶어한다면 그때는 말 그대로 우리를 밖으로 던져버리고 모르는 것에서 오는 충격에 맞서야 한다. 언어를 배울 때 시행하는 집중 훈련은 이 원 리에 기초한다. 아는 것만 되풀이하면서 어떤 기술이나 기법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더 나아지려면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다른 길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창조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정기적으로, 그리 고 진정으로 변모한다. 우리들은 모두 학교에서 예술가들은 어떤 단계, 어떤 시 기들을 경험한다고 배웠다. 피카소는 인상주의자로 출발했다가 흑인 예술을 공 부하기 시작했다. 칸트는 인생의 중반을 넘어 완전히 변했고「순수 이성 비판」 을 썼다. 그러다가 도덕과 미학에 전념하면서 다시 변했다. 종종 이런 식으로 이행해 가는 것은 고통스럽고 극적이다. 게다가 이런 변화 들은 언제나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잘 모르는 새로운 분 야에 몸을 던졌을 때, 거기엔 항상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모험이 현실화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창조적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도덕적 자질, 즉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성공했을 때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을 이용해 그것을 되풀이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상과 메달을 쫓아 가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새로운 것, 변화, 성장에 대 한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과 과거, 자기 집, 안락함, 습관 속에 틀여박혀 버렸다. 마치 은퇴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들은 금방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진정한 여행을 하는 사람 여행은 한 개인이 자신을 찾고 정체성을 세우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는 긍정적인 힘이다. 서양의 역사는 접촉, 투쟁, 교역과 여행에서 탄생한 새로 운 관계들의 결과이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면 여행을 통해 얻는 창조적인 능력 과 풍요로움이 역설적으로 상실과 고통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율리시즈나 길가메시(수메르 신화의 영웅―옮긴이)의 신화적인 여행에서 그것


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율리시즈는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고 전리품과 동료들을 모두 잃고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된다. 신에게 부름을 받은 길가메시 는 자기 왕궁을 버리고 세상 끝에 도착했지만 불멸도 젊음도 얻을 수 없었다. 중세에 떠돌이 기사들은 궁정을 떠나 혼자서 괴물과 거인과 고통과 공포가 기다 리고 있는 신비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용기와 성장을 보이기 위한 여행은 마음 든든한 모든 것들, 즉 자기 집, 잘 알려진 일상의 관계들이 주는 확실성에서 완 전히 떨어져 나오기를 요구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사회적인 정체성을 잃고, 당황하다가 다시 자신을 찾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더 나은 사 람으로 태어나길 요구받는다. 따라서 서양의 전통에서 여행은 표면적이고 불확 실한 자신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탐하는 것이다. 진정한 가치에 도 달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알기 위해 자신의 결점, 자만심, 허약성, 편견을 정화 시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보편적인 계획된 휴가 여행은 이러한 이상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 다. 물리적인 이동은 있지만 모험, 불편함, 다양한 것들과의 접촉, 정처 없이 떠 도는 일은 극히 줄어들었다. 휴양지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문명과 안락함밖에 없다. 발견은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관광으로 바뀌고, 경쟁은 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행의 이상적인 의미는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 하나는 이민을 가거나 먼 곳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 우리 이탈리아에 온 다국적 기업의 관리자들 및 전세계에 뻗어나간 그 다국적 기업에 파견된 우리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습관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다른 이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몇 년이 지 나 세관의 장벽이 무너지면, 이런 시련에 맞설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유 럽의 건설을 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유형의 여행도 있다. 이것은 공간적인 여행이 아니라 지식 세 계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이다. 나는 장기간 외국의 주요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간 학자들, 경영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 때처럼 책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특권, 지위, 안정성을 포기했다. 이것 역시 정화와 겸손 의 훈련이다.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오만함을 벗어버린 채 모든 것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 회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여행의 진짜 효능은 여행하면서 만나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익숙해져 있는 우리 자아에서 탈피하는 데에서 우러나온다. 새 로운 것들을 보는 것만 중요한게 아니다.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배 운다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 사회적으로 인정을 잡아 비대해지 고 탐욕스러워진 우리의 자아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가장 진실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고독한 순간이다. 꿈꿀 줄 아는 사람 예술가의 위대함은 그들을 후원해 주는 사람의 위대함에 달려 있다. 미켈란젤 로는 조각가였다. 그에게 화가가 되라고 부탁하고 그를 초빙해서 시스티나 성당 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한 사람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 자신도 모


르고 있던 재능을 직감했고, 그에게 도전을 던졌고, 그 도전을 뛰어넘도록 자극 했다. 창조적인 시대에는, 그리고 한 시대의 창조성이 놀라울 정도로 집중되는 그런 장소에서는 모두들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요구한다. 이미 알려져 있고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특이한 것, 또는 불가능한 것까지도 전부 해내도록 요구한다. 상식, 습관, 평범함과 충돌하는 그 어떤 것, 보통을 넘어선 뭔가를 요구한다. 창조적 과정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그들은 그것은 과대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울 계획을 했던 교황들은 세상의 그 어떤 성당도 견줄 수 없는 그런 성당을 원했다. 피라미드처럼 높지만 그보다 수백 배 아름답고 건축 과정 역시 수백 배 복잡하고 힘든 성당을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이런 요구는 미켈란젤로에게 도정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들과 완전히 새로운 구성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문제들이 그의 창조성을 자극했다. 우리가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 을 해결하는 능력이다. 창조적인 시대에는, 그리고 창조성이 집중된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현재 능력 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가 풀리면 거기서 풍요로움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잉여물이 생기고 잔고가 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 열심히 일하고 전력을 다하며 자시 자신 및 다른 사람 들과 겨룬다. 기존의 지식이나 과거에 이루어 놓은 것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다. 가능성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능력은 설정된 목표와 비례해서 커진다. 우리 세기는 미국인들의 창조성에 지배받아 왔다. 소비재의 거의 전부가 미국 에서 발명되었거나 미국에서 대량생산되었다. 기업가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환상과 욕구를 해석해 내려고 애썼다.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엘리트들 은 변화를 두려워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동차를 주려는 포드의 생각은 한때 미친 생각이거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간주 되었다. 오랫동안 위대한 기술 혁신들은 <미국적인 것>, 유치한 것으로 생각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애니메이터 팀들에게 일을 시켜「백설공주 와 일곱 난쟁이」를 만화 영화로 만든 월트 드즈니의 생각도 마찬가지 취급을 당했다. 지식인의 관점에서, 정치가의 관점에서, 유럽경제 학자들의 관점에서 보 았을 때 그것은 낭비였다. 할리우드가 엄청난 스펙터클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 을 때, 인기 스타들을 만들어냈을 때도 유럽 사람들은 똑같이 비웃는 태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할리우드를 <꿈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부를 때 은근히 경멸하 는 감정을 보태서 말한다. 배우들은 꿈속의 인물이므로 스크린 밖에서도 동화나 신화처럼 살아야만 했다. 할리우드가 신경을 쓴 것은 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 은 집이었다. 그들을 위해 의상, 집, 자동차, 적절한 연인들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것은 대중들이 동일화를 할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곳이 바로 소비의 모델이 쏟아져 나온 것이며, 이 모델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중적인 것이 되어갔다. 미국인들은 꿈을 자원으로 생각했다. <꿈꿔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미국의 슬로건이 있다. 유럽에서 우리는 이처럼 중심점을 옮겨 꿈을 강조한다는 것이 독특한 신호이자 창조적인 시대의 상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창조성이 우리 시대를, 대중을, 기업을 버리고 떠났을 때 우리는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곧 사


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믿음은 인간의 꿈에 대해, 그 가능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다. 그 뒤를 이어 조심스럽고 믿지 못하고 의심 많고 탐욕스러운 자세가 따랐다. 각자 될 수 있는 한 조금만 베풀고, 마찬가지로 남들에게 기대하 는 것도 적다. 원대한 계획을 마음 속에 그리지도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고, 그런 계획을 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기업가와 창조적인 인간 대신에 의심 많고 회의적인 관료가 자리를 차지한다. 지식인들은 창의적인 것들을 반대하고, 사람들이 훨씬 정직하고 훨씬 단순하고 낭비도 별로 하지 않았던 지나간 시절을 회상한다. 이탈리아의 창조성도 언제나 이런 정체된 비관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1950 년대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다. 1960 년대에는 컬러 텔레비전에 반대했다. 라 말파 패거리들은 컬러 텔레비전 방영을 연기시켰는데, 그게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영화의 주역들이 전세계 사람들이 꿀 수 있는 꿈을 생산해 내기를 포기 했을 때 이탈리아 영화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놀라울 정도로 지적이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당연히 뛰어난 성과를 거둘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들은 괜찮은 결과를 거두고 성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떤 제도 안데 자리를 잡고는 잘 알려진 길을 따라가고 만다. 새로운 형식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별로 지성적이지도, 똑똑해 보이지도, 능력 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실제로 비범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사람 들이 있다. 이런 경험은 학교에서의 1 등이 인생에서도 1 등은 아니라는 말의 근거가 되기 도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실제로 학교에서의 성공은 직업적 성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형태의 지성이 이미 학교에서 모습 을 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는 체계적인 지성인데 이런 지성을 지닌 사 람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순응 주의자이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반대로 내부에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다. 그는 항상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한다. 이런 학생은 자기대로의 내적 리듬이 있기 때문에 절대 선생님들의 리듬을 완벽하게 따라갈 수가 없다. 그는 이해할 수 없게 지체하다가 어지러울 정도로 속력을 낸다. 이것은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그 성질상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창조성 은 언제나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 하지만 창조성에도 처음에는 동조하고 믿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 하다.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사람은 거의가, 절대 의심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의 깊고 기꺼이 남을 도우려고 하며 꾸밈이 없다. 그리고 속으로 불협화음과 모순을 찾아낸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그래서 주제로 되 돌아가 거듭 다시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다른 가능성이 그의 머리에 떠오른다. 이런 과정에 있는 그를 보면 무감각하고, 생각에 잠겨 있어 멍해 보인다. 그는 그러다가 갑자기 해결책을 찾아낸다.. 창조적인 사람은 생활 속에서 환멸과 회의, 불확실함과 혼란에 맞닥뜨린다. 질 서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미리 정해진 방향을 따라 움직이고, 어디서 출발해 어 디서 끝나는지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불확실함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우연, 모험,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여지를 주지 않고 모든 요소들을 통제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이 예술가라면 공인된 양식을 따를 것이다. 신문 기자 라면 대중들이 기대하는 것을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학구적인 학자라면 흥분하 지 않고 동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번 계획을 세워 놓 으면 외부 상황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디까지나 그 계획을 따를 것이다. 모든것이 그 언제든지 질서 정연해야만 하니까. 하지만 창조성을 위해서는 자신 안에 혼란과 무질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창 조적인 사람은 책을 쓰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을 쓸 수 있다. 창조적인 기업가는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장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계산을 모두 다시 하고 필요하다면 계획을 수정한다. 이것은 끈 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끈기는 충분하고 넘치게 있지만 절대 타성에만은 굴복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이미 결정된 것을 존중하기 위해서만 일하지는 않 으리라는 것이다. 창조성은 또한 모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용기를 필요로 한다. 모험은 현 실적인 위험을 의미한다. 실수 할 위험, 길을 찾지 못할 위험 말이다. 결과가 정 말 불확실할 수도 있고 좋지 않게 끝날 수도 있다. 창조적인 기업가는 실제로 자신의 운명을 모험에 건다. 이 때문에 계속 나타나는 끝없는 문제들을 풀기 위 해 완전히 자신을 바친다. 도덕적 지적 자원을 남김없이 모두 다 써버린다. 창조성의 핵심은 아주 강한 질서 성향과, 질서를 지배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질 서를 재구성하기 위해 혼란과 무질서에 맞서는 능력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있다. 그저 단순하게 똑똑하고 무질서하며 표면적인 사람, 가짜 창조성을 내세우는 사 람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차이점은 그가 질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철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별이 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깊이 들어간다. 깊이 들어가면서 모순과 부족함을 찾아낸다. 이와는 반대로 표면적이고 얄팍한 사람은 끊임없이 정신을 딴 데로 돌린다. 그는 새로운 유행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성공한 사람을 흉내내고 상투적인 말들을 사용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대로 되풀이 한다. 계속 변하지만 그 변 화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질서한 사람은 창조성을 서투르게 흉내낸 사람이다. 창조성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솟아나게 한다. 그것은 전체, 조화, 통합을 지향한다. 무질서한 사람도 통 합을 꿈꾸지만 세부 사항 속에 빠져 계속 길을 잃는다. 그는 분주하지만 아무것 도 하지 않는다. 또다른 유형은 가짜 창조자는 비판을 위한 비판가이다. 그가 보기에는 그 무 엇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다. 그는 자기 의견을 표명하고, 맹렬히 비난하 고, 폭로하고, 쓰러뜨린다. 그는 결점을 발견하고자 그릇된 행위를 폭로하고 모 순을 증명할 때에만 기쁨을 느낀다. 그 역시 건설할 줄은 모른다. 뭐든 조각내 버리고 산산히 부서뜨린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부수는 것이니 그에게는 아무 런 위험이 없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새로운 것을 꺼리지 않는 사람 1967 년 가을, 밀라노 카톨릭 대학에서 이미 몇 년 전부터 일어나던 것과는 약 간 다른 동요가 일어났다. <야간>학생들 옆에서 주간 학생들도 움직이고 있다. 흑인 영가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 몇몇 조교들은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이전의 소요와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한 사람은 아주 적었다. 이것이 전국에 불붙을 대


규모 학생 운동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도 아주 적었다. 1960 년대 중 반에 이탈리아 경제는 무릎을 꿇어버린 것 같았다. 정치 체제는 붉은 여단의 뜻 대로 돌아가고 마르크스주의는 패매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마르크스 주의의 전세계적인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희미하 게 나타나는 조짐들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조짐 가운데 이란 혁명이 있 다. 1950 년대에 처음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그 헤게모니를 잡은 것은 마르크스 주의가 아니라 이슬람교였다. 1991 년에는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의 연립으로 크 락시-안드레오티 체제의 정점어 섰던 새니가, 표면적으로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 이지만 국민적 합의를 불러일으킨 국민 투표를 약속한다. 새로운 것, 커다란 사회적 변화는 처음엔 모두 사람이 다 알 수 있을 만큼 명 료하게 나타나는 법이 절대 없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모양으로, 묘하고 해괴 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보지 못하며 보았다 하더라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움은 예기치 못한 어떤 것, 있을 법하지 않은 뭔가 이다.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러 다닌다면 그 사람들 은 눈으로 본 것, 신문에서 읽은 것, 자신들이 토론한 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서 당신에게 말해 주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 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최소한의 공통 분모를 찾 으려고 하면 할수록 편견과 잡담, 즉 과거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새로움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처음 수줍게 얼 굴을 내미는 것에서 새로움을 포착해 낼 수 있을까? 이건 누구나 갖고 있는 문 제이지만 특히 소비자와 경쟁자의 새로운 성향을 알아채고 시장의 변화를 읽어 야만 하는 기업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험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해준다. 첫번째 길은 각각 그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들에게서 조언을 듣고 그들의 의견으로부터 어떤 총체적 유형이 나오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사실, 사회적 변화의 대부분은 과학적 발견이나 기술 혁신의 결과이다. 그런 발견이나 기술 혁신 중의 몇가지는 전문가들에게 잘 알려져 있 다. 뿐만 아니라 어떤 지역에서는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기술 이 가장 많이 발달한 나라와 기업들이 무엇을 해냈는지 알면, 전세계의 나머지 국가와 여기 이탈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앞날을 잘못 예측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나라에는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규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다 른 사람이 해놓은 것을 흉내내고 그 방법을 받아들여 사용한다. 기술이 더 많이 발전하고 있고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겸손하게 지켜본다면 우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두번째 방법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사실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 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가 보수적이며 기존의 세계관이나 분류 체계들을 재검토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그런 예측할 수 없는 것일 뿐 아 니라 웃기는 것이고 괴상한 것이며 정신 나간 짓거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로 움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상궤를 벗어난 것이며 뛰어나면서 추한 것이 기더 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새로움을 뭔가 당황스러운 것, 불편함을, 흥분을, 종종 불 안의 그림자를 그리고 때로는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어떤 것으로 느끼고 있 다. 우리가 새로움을 인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과 장벽들이 바로 이것이 다.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장애물, 감정적인 장애물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감


정들을 잘 이끌고 나가면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인가 당황스럽거나 불 안감을 주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 언짢은 감정이나 일탈이라는 느낌을 주는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만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찾 고 있는 희미한 신호이다. 혼자 도전하는 사람 살아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길, 탐험해 본 적 없는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 있다.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할 때나 대도시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날 때가 그런 순 간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 안정된 직장을 떠날 때, 사랑에 빠져 새로운 사람과 함께 살게 될 때도 마찬가지이다. 또 우리가 정치나 종교 또는 예술의 길을 가 기로 결심할 때도 그렇다. 이런 모든 경우에 우리는 일상적이고 평온하고 예측이 가능한 과거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한다. 그런데, 그 판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항해하고 잘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알 수가 없다. 판돈이 크면 클수록 시도는 더 위험하고 불확실해진다. 그래서 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거기에 송두리째 쏟아부 어야만 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잠깐 느슨해져도 큰일이다! 가끔씩 어려 움이 커질수록 목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가장 놀 라운 것은 어려움의 반 정도는 바깥 세계에서 오지만 나머지 반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우리 곁에, 우리편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점 이다.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 낯선 땅에서 싸움을 할 때 사실 우리는 거의 혼자이다. 가까운 사람들, 부모, 자식, 남편이나 아내, 아주 친한 친구와 친지들은 당혹스러 워하며 한쪽에 물러서서 우리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우리를 믿지 않고 의심 의 눈초리를 보내며, 우리를 비난하고 경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그들 그룹에서 빠져나와 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룹이 라는 것, 다시 말해 가족, 친지, 친구들의 통합체는 완전한 하나의 조직이며 그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은 뚜렷한 위치가 있다. 그리고 다양한 위치들이 조합되 어 하나의 모자이크를 형성한다. 이제 우리가 역할을 바꾸면서 과거의 역할을 저버리고 그 모자이크를 흐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모 습이라고 생각하던 것을 뒤흔들어 놓고 그들의 평온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룹의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가 된 개인이라면 우리를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다시 그 사람들에게 돌아가 이야기를 하면 생각이 바뀌고 그룹의 반발에 전염되고 만다. 우리와 헤어질 때까지는 우리에게 열광해 있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냉담해져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는 쉽다. 머리 손질 방법 을 바꾸어 보고, 수염을 기르거나 머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여 보라. 당신이 화가 가 되기로, 아니면 성악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해 보라.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때, 새로운 길을 택하고 싶어할 때의 반 응은 아주 심각하다. 그러면 비록 그룹에 속한 사람들 중 아무도 분명하게 말하 지는 않지만 모두가 당신을 거부한다. 갑자기 당신은 혼자가 된다. 그들의 눈에 서 비난과 불신을 감지한다. 누군가 당신을 홀린게 아니냐고, 정신에 이상이 있 는 건 아닌지 살펴보라고 미심쩍은 듯이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남자가 그럴 경우 사람들은 그가 돌았다고 말하고, 여자일 경우 별로 질이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당신은 혼자서 기어 올라가야만 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노 력과 고민을 일부러 모르는 척한다. 당신을 도와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개 자 신들의 문제를 당신에게 떠 넘기고 당신이 그들을 위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모르는 사람에게, 외부의 구원자에게 도움을 받기가 훨씬 더 쉽다. 혁신적인 시도가 실패하게 되면 흠 잡는 사람들이 의기양양해지는데, 자신들 생각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혁신하는 사람은 승리한다. 거칠게 몸을 던지기 때문이며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승리를 하고 나면 그룹은 축 제 분위기에 들떠 그와 그의 성공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려고 한다. 먼곳에 살던 친지들이나 고향 사람들까지도 그를 만나러 오고 모두들 이렇게 될 줄 알았���고 말한다. <내가 그랬잖아, 생각나지?> 그들은 이렇게 치근거리며 과거를 다시 꾸 며낸다. 외로움 때무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 혁신자는 이제 이런 집단적인 거짓 말로 위로 받는 것이다. 한계와 실패를 인정하는 사람 어려운 사업에서 성공을 하려면 꼭 해내야 한다는 강한 동기와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다. 몇 달 몇 년을 약해지지 않고, 쉬지 않고, 주의 깊고 겸손하게 목표에 관심을 기울이며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둔게 너무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학생이 매번 좋은 성적으로 진급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시험은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졸업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목표에 완전히 빠져들어 전력을 다하고 전념하고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승부를 걸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든 때려치울 준비가 되어 있고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설 수 있다면, 성공에 필요한 강인함과 주의력을 절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경쟁 체제에서는 다 른 사람들과 맞서야만 하고 이기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매전 실패할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원시 사회에서 남자들은 사냥꾼이자 전사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명을 걸었 다. 오늘날에는 그런 식으로 피흘리는 일은 없지만 경쟁은 경제, 정치, 심지어 예술과 문화 조직의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경쟁에서 우리는 모두 박수 갈채와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우리의 탁월함을<인정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 피할 수 없는 이런 법칙들을 현실이라 인정한다 하더라 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런 것들에 빠져든다면 정신적 균형을 잃고 말 것이라 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가치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성 공에, 타인들의 박수 갈채에 맡겨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서운 일은 없기 대문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고 우리는 우연, 행운, 불운에 좌우된다. 수맣은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죽고 난 뒤에야 인정을 받았다. 함정에 빠져서, 훨씬 못한 사람들의 음모에 걸려서 파멸한 위대한 사람 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한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 자신을 바치고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는 한편으로 영혼의 깊숙한 곳에 보호 구역을 두고 초연할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것,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공적을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납득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


을 예상해야 한다. 가장 뛰어난 전사라 하더라도 결투를 앞두면 그게 마지막 시 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죽는 때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킬레스는 자신이 젊은 나이에 죽으리 라는 것을 알았다. 한계와 실패를 인정하는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는 것, 불안정한 게 당연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비록 불 안정하다 하더라도, 결과가 실패일지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행동을 하는 바로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리스 인들의 위대한 힘 은 용기와 성공이 아니라 완벽을 탐구하는데 있었다. 유태인들의 위대한 힘은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데 있었고, 유복함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루터 에게는 구원이나 천국조차도 우리 인간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공적과 관계 없 이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특별한 무엇일 뿐이었다. 종종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도덕적인 기반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하곤 한다. 아니면 도덕 같은 것은 이제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게 웬 말같지 않은 소리인가? 우리중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의견, 판단, 그들이 무책임하게 또드는 소 리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도덕적인 행동의 차원에서만 도덕의 기반을 찾을 수 있다. 실패와 부당함과 고통으로 타격을 받은 우리는 도덕적으로 고무된 행동을 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것이 우리를 구하게 될 것이다. 영감을 발견하는 사람 영감, 곧 내면의 충동이 더 중요할까, 아니면 질서 정연하고 열의 있고 체계적 인 실제 연습이 더 중요할까? 한 미국인이 내게 편지를 써서 웅변가가 되는 법 에 관해 자기가 쓴 소책자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기 책이 40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기적을 이루었다고 했다. 아마 사실일 것이다. 기 술을 배우면 누구나 웅변가가 되고, 조각가, 화가, 작가, 음악가가 될 수 있다. 하 지만 어떤 수준의? 나 같으면 어릴 때부터 음악에 전념해 연습했다 해도 최악의 음악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끈기 있는 연습은 해가 갈수록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잠재적인 능력을 일깨워 주고 좋은 결과를 얻게 한다. 우리는 사실 생각보다 훨씬 더 우연한데, 게으름이 나 습관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극적인 필요성이 생기면 우리는 깨어나서 비상한 일들을 해낼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런 상황들이 새로운 에너지를 솟아나게 하고 놀라운 동기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처음 말을 꺼낸 곳으로 되돌아왔다. 의지, 실제 연습, 방 법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경우는 먼저 동기, 직관, 계시, 영감이 있었을 때뿐이 다. 그런데 의지력과 끈기 있는 연습을 통해 스스로 영감을 부여할 수 있을까? 이 것은 인간들이 각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문제들에 따라 다양한 용어로 언제나 제 기되었다. <의지력으로, 정신적인 노력으로 참된 신앙과 성스러움을 얻을 수 있 는 걸까, 아니면 하느님의 영감과 그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예수 회는 첫번째 것이 해답이라고 주장했다. 추터나 칼뱅 같은 프로테스탄드들에게 는 두번째 것이 해답이었다. 이 두 가지 태도 뒤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목적이 있다. 예수회는 길 잃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정복하고 재정복하고 싶었다. 그들은 군대, 의용군을 중요하


게 생각했다. 불굴의 군대와 더불어 완벽하게 훈련된 지휘관처럼 목표를 향해 행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와 반대로 하느님을 찾아갔고,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길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놓칠까봐 불안해했고 구원을 받을지 영벌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런 태도의 차이가 오늘날에도 나타난다고 믿는다. 아까 말한 미국인,「 웅변가가 되기 위한 연습」을 쓴 그 사람은 예수회의 전통을 계속 따르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끈기 있게 규칙적으로 그것을 고집하면 목 표에 도달할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게 미합중국 문화의 본질일 것이다. 질문으 로 머리를 어지럽히지 말고 선택하라! 그러고 나서는 방법, 방법, 방법이다! 그렇다면, 칼뱅주의 문화를 가장 많이 상속받은 미국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 회의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말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예수 회의 사고 방식이 자본주의 기업에 훨씬 더 적합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업 은 그 구성원의 변덕이나 기분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조직이다. 목표를 제시하고, 그것을 확고하게 지키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그 것을 실현시켜야만 한다. 미국 문화는 기업의 범주를 개인으로 옮겨, 개인에게 자기 자신을 기업처럼 생각하라고 권한다.<당신의 감정을 잘 관리하고 이미지를 만들라. 당신을 비싸 게 팔아라.> 자신과 타인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한 책들이 수천 권씩 출판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자신의 길과 목표와 진정한 소질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에게 이런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경우 필사적으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의지력으 로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인생에는 겸손하게 기 다려야 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는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잊 어버리고 우리의 진정한 성질이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스스로의 소리에 귀를 기 울여야 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낄 때까지 의구심 속에 가라앉게 내버려두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가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공간과 침묵 속에서 우리의 소질을 낮게 이야기해 주는 목소리가 울려나와 특별한 길을 알려준다. 영감이 강렬하게 말을 건제오는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이다. 그것을 포 착해 쫓아갈 수 있는 사람은 운 좋은 사람이다. 깊이 있는 인식을 하는 사람 최근에 나는 다음 학년도 사회학 강의 계획을 짜야 했는데, 그러다가 오래된 문제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기본 지식을 가지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 사회학에 대한 기본 개념들, 고전적 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지식 과 기본적인 연구 방법들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그들에겐 훌륭한 기본서 한 권과 사회학 사상사 한 권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것을 두고 옳 은 길로 간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프로그램에 따라 공부한 학생들은 시험을 볼 때, 저자, 이론, 최근의 발견 등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 은 본질적인 것,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리학이나 철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사회학 이론은 지성과 환상과 천 재의 열정과 한 시대의 정신이 구체화되어 들어 있는 정신적인 세계, 거대한 건


물이다.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곧바로 원전을 읽어야 하고 그 책에 몰두 해서, 끈기 있게 저자의 언어를 꿰뚫어보아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저자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ㅗㄹ 수 있고 그가 보았던 것처럼 깊이 있게 똑같은 감동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된ㄷ. 거기서 우리가 전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관계들이 밝혀지고 우리가 눈으로 보았어도 항상 달아나기만 하던 의미들이 드러난다. 우리의 정신 세계는 널ㅎ어지고 우리 의 감각은 예리해진다. 그래서 「신곡」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위대한 예술 작품들을 가까이하 듯, 중요한 이론서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있다. 힘들지만 감동적인 개인적인 경 험을 입문서 한쪽, 요약된 줄거리가 대신할 수는 없다. 「신곡」의 요약본에서, 또 니체, 하이데거, 프로이트 사상의 요약본에서는 숭고한 사상들이 조잡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면서 듣는 사람이 그 곡을 이해한다고 주 장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정보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들은 작가 와 저자들을 알고 그들 사상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정보 는 진정한 지식에 도달하기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생각 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용된다. 우리는 신문과 주간지를 읽고 텔레비전을 보고 토론회를 보며, 이런 식으로 유용한 많 은 것들을 알게 되고 의견을 갖게 되고 <정보에 아주 밝은>사람이 된다. 하지 만 20 여 년 동안 계속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해하고 생각하는 능력에서 겨우 한 발짝 이상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영상들, 일관성 없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에 폭격을 당해, 우리는 그것들을 질서 있게 정리할 수가 없고, 그것들에 좌우되어, 모든 유행과 미신에 좌우되어, 종이배처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게 된 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폭풍처럼 달려드는 이 자극 들은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지각하는 능력까지 감소시 키며,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불안해지고, 이해할 수 없게 된 세계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혼돈 상태를 다스리고 경험들을 쌓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일에는 종교가 도움이 된다. 어쩌다 하는 기도 같은 게 아니라 신학적이 고 도덕적인 명상이라든가, 영성과 자기 희생의 위대한 본보기인 사람들과 하나 가 되는 경험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위대한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는 것도 도 움이 된다. 그것은 묻혀 있던 지적 감정적 에너지들을 다시 찾는 데, 시적이며 사색적인 능력을 일깨우는 데,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을 둘러싼 벽을 깨는 사람 외부를 바라보기, 현실을 관찰하기란 종종 힘들고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다.현 실은 믿을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정 신적인 도식을 가져 세상을 단순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를ㄹ 바로 세워야 한다. 과학자도 그렇게 한다. 그들은 관찰을 통해,사실들 한복판에서 방향을 잡을수 있 도록 도와주는 이론을 세운다.하는 그러다가 어느 날 사실들이 더 이상 도식에 들어맞지 않고 도식을 부정 하는 일이 벌어진다.그러면 과학자는 확보해 놓은 기반을 버리고 다시 불확실함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 건 기분좋은 일이 아


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벽을 쌓아 자신을 보호한다. 자신의 성벽 안에서는 고민,의 심,불확실함을 만들어내지 않는것들과 접촉할 뿐이다.매일 밤 이 집 저 집으로, 아니면 클럽이나 바에 모이는 친구들이 바로 이런 경우이다.여기서 그들은 이야 기를 나누고 오랫동안 잡담을 한다.하지만 대화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나 판단을 통해 세상을 아는 게 아니다.그들은 오로지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할 뿐이다.자신들도 세상도 변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평상시 처럼 계속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세대와 접촉하기를 기피하는 사 람이 있다.나이든 세대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진다.한번은 외딴 휴양지에서 일주일을 보낸적이 있다.그 마을에서 사람들은 나이별로 뚜렷 이 갈라지는 세 집단,오십대,삼십대,그리고 청소년 집단으로 끼리끼리 뭉쳐서 다 른 연령층의 사람들과는 서로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지냈다.모두들 식물의 단 계로 퇴보한 것처럼 단조로웠다. 우리 역시 책을 읽을 때나 영화��� 텔레비젼을 볼때 우리가 좋아하는것 즐기는 것만 찾음으로써 비슷한 결과를 빚는다.하지만 대체 누가 나하고 다른 의견을 가질수 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본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자신을 괴롭히 지 않는 프로그램만 본다면 그는 오로지 자기자신과 자기 친구들과만 함께 지내 는 것과 같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이세상이 얼마나 믿을수 없을 정도로 다른지 이해하지 못한다. 차이점이나 소외감은 모두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이해를 하고 생각을 할수 있게 해주며 우리를 풍요롭게 만든다. 난 우리가 우리의 확신을 포기해야 한다 고 믿지는 않는다.하지만 언제나 세상이 우리가 보잘것없이 표현해낸 것보다 훨 씬 더 풍요롭고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만 한다.만약 모든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현실과 관계를 끊어버렸 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는 모든 게 똑같았다. 똑같은 관청에 들어가,똑같은 사무실로 들어갔 고,똑같은 공무원을 만나면 ,그 공무원은 똑같은 말을 했다. 이런 체제는 외부 세계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할수 있다. 모든 전체주의 체제와 독제 체제는 변화 를 최소화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위해 적을 공격하고 모든 죄를 그 에게 덮어씌운다. 변화를 가져오는 내적 긴장들은 밖으로 방출되어 중화되어버 린다. 현실과의 힘든 관계를 피하기 위한 마지막 도구는 권력이다.이해를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자기 기업속에 몸을 숨기고 오로지 주변사람,비서나 아첨꾼들과만 관계를 갖는다.이 세상이 변하고 있고 자 신들이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감지 하게 되면,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나 일 로 인해 자신이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길 원치 않는다.이탈리아의 첫번째 공화정부 정치가들이 파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모여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한 말들을 나누고 이었기 때문이다. 질투심을 넘을수 있는 사람.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일반적으로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성 공을 추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교육학자들은 학교에서 비교와대결을 조장하


는 모든것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의견이 점수를 대신했다. 우리는 성적표를 만들 지 않고 상을 주지 않는다. 1960 년대와 1970 년대에 많은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이 능력주의, 곧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돈을 더많이 벌고 성공해애 한다는 원칙을 비난했다. 그 당시에는 모든 무슨일을 하든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이 우세했다. 반대로 미국인들은 경쟁은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자신 의 몸을 바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더 많이 벌고 더 대접을 받는게 우익하다 고 생각한다.한편, 미국인들은 평등의 개념에 아주 민감하다. 모든 이들에게 경 쟁의 가능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불이익을 안고 출발한 사람들을 도와주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경쟁을 피해서 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와 같은 선택에는 분명 이로운 점들도 있다.우선 삶이 평온하게 흘러간다. 많은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확실한 장소를 찾을 수있다. 개인 관계들은 대개 아주 투명하다. 하지만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횐는 역설적이게도 질투의 위협을 받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렇다. 질투는 동일시에서, 감탄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너무 다른 사람, 전혀 다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질투할 수는 없다. 가장 잔인한 질투심은 동료들 사이에서, 한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 지 못했을 때 태어난다.배우는 다른 배우를, 신문기자는 다른 신문 기자를,조각 가는 다른 조각가를, 그리고 사냥꾼은 다른 사냥꾼을 질투한다.여자들은 자기들 끼리 질투를 느끼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질투는 같은 수준에 있던 사람에게 추월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타낸 다. 질투는 경쟁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그 순간 우리 앞에는 두개의 길이 놓여 있다. 그의 성공을 인정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느냐, 아니면 그의 실패와 파멸을 원하기 시작하느냐이다. 이제 우리는 성공을 칭찬해 주는 사회가 질투하는 경향 이 적은 이유를 이해할수 있다. 경쟁을 자극하듯이 그 성공을 인정하도록 자극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질투 때문에 행동하기를 포기하고 곧바로 목표를 포기한다. 우 리는 그저 그가 실패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질투는 우리 스스로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이런 태도는 마음속으로 더 나은 사람인 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무너뜨 리고 싶은 욕망과 결부된다. 질투심이 많은 사람은 위험스러운 경쟁에 직면하면 자신의 이상을 파괴해 버 리려고 애쓴다. 아름다운 영화「아마데우스」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살리 에르는 모차르트가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모차르트 죽 이고 싶어했다. 그와 맞설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개 질투심 많은 사람은 정의의 가면으로 자신의 질투를 가린다. 니체와 막 스 셸러는 그런 사실을 아주 훌륭하게 묘사했다. 원한을 품은 인간은 아름다운 사람들, 강한 사람들, 승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에게는 덕 이 있는게 아니라 결점만이 이다고 믿는다. 진정으로 덕망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받고 뒤로 물러서 있는 사람, 패자, 즉 자신이라고 믿는다. 이른바 원한의 윤리 속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항상 처벌을 받아야 한다. 불행 한 사랍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만이 순수한 마음을 가졌고 그들이 바로 구원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톨릭이든 마르크스주의이든 분명하게 이런 행태의 확신을 강화시켰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 질투가 정말 사회적인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문학 영화상의 심사 위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 두지도 못하고 외국으로 팔려나가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작가를 골라 자기들 뜻 대로 상을 준다. 그리고 그들은 질투심이 작용해서 이런 결정을 한 게 아니라 예술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비슷한 일들은 많은 범속한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휠씬 뛰어나 사람을 심사해 야 하는대학 시험에서도 벌어진다. 회사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무능한 관 리인들은 사업적 능력과 혁신적 능력을 지닌 사람을 고립시켜 버린다. 심지어 신문사에서도 벌어진다. 국장은 자기보다 휠씬 유명해질 수있는 기자를 괴롭히 는 것이다. 질투심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전통이 길게 이어져 오는 나라 에서는 경쟁과 시합의 가치를 평가하고 공적을 인정하고 성공에 박수 갈채를 보 내면서 질투심을 중화사키려고 애쓴다. 이런 나라의 문화는 자신 속에 틀어박히 려는 개인을 가로막고 그를 떠밀어 활동하게 하고 최선을 다하고 다른길을 찾고 훌 하게 하고 최선을 다하고 다른길을 찾고 훙륭한 사람을 칭찬하게 만든다.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최근에 우연히 강연회에 참석하여 청중의 질문과 강연자의 답변을들을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확실히 알게 된것은 많ㅇ느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한다는 것 이다. 그감정을 일종의 불쾌 한 방해, 성가신 혼란, 존재의 고통스러런 불안정으 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의심, 슬픔, 걱정, 가슴 두근거림이 없는, 울고 싶 은 마음, 분노, 탄식, 죄의식이 없는 변함없이 늘 평온하고 한결같은 기분 상태 를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날때 이유도 없이 슬픈 기분이나 어떤 불안한 예감을느 끼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녁에 왠지 알수 없는 그리움으로 괴로워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친구가 죽으면 그 슬픔으로 마음에 상처가 된다고 느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병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모든 경험은 사람을 <의기 소침>하게 만 드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또 사람들은 시험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무례한 일을 갑자기 당하고 방구석에 클어박혀 괴로워하는 일을 지긋지긋해 한다.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애석해한다 든지 10 년, 20 년전에 한 행동 때문에 후회하는 것을 어리석고 불합리한 일로 여 긴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항우울제나 안정제나 망각하는약을 먹으려고 할 것이 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감정들은 우리의 천성에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며 인식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도구라고 늘 생각해 왔다. 우리는 우리가 원 하는것, 사랑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만을 보고 느낀다.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다 그렇다. 갈매기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 개가 고프기 때문이다. 알을 품은 암탉은 하늘의 매를 본다.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둑에서 놀고 있는 내 아들을 본다. 그 아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성에는 상징하고 조합할줄 아는 뛰어난 능력이 있다. 사람은 그것으 로 아주 다양한 목적에 쓰이는 놀라운 개념적도구와 물리적 도구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목적, 동기, 이상, 희망, 꿈이 필요하다. 인간이 하는 위대한 일은 모두 깊은 동기와 정열이 있을때에만 일어난다. 거 의 같은 신체 조건과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 가운데 누가 경기에서 이기는가? 동 기가 더 강한 쪽이 이긴다. 이것은 권투에서 흔히 볼수 있다. 챔피언들은 사회의 밑바닥, 빈민가에서 나온다. 그들은 그곳의 폭력과, 구원에 대한 갈망을 실체화 시킨다. 그리고 과학에서도 발견은 연구자가 목표에 매료되어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 고 오로지 거기 몰두할 때에만 이루어 진다. 저 너머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 며 현실이라는 철책을 기적처럼 열린다. 예술가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일지라도,자신의 감정 그깊은 바닥까지 들어가서 체험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술, 음악, 문학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알수 없는감정들을 두려워했더라 면 단테는「신곡」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그 수많은 작품들을 쓰 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 사회, 정치에서도 큰 일은 이끄는 자가 자신의 목표에 사로잡혀 그 목표 의 도구가 될때에만 이루어진다. 그러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이 그에게 말, 행동, 모범을 불어넣어 주고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생각, 야심, 한을 픔은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같은 목표를 향해 가도록 끌어 들이게 해준다. 살아 있는 것은 뭔가를 향해 가도록 끌어 들이게 해준다. 살아 있는 것은 뭔가를 향해 움직여가 거나 뻗어나가는 굴성과 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 은 유연하고 살아남아 적응하면 창조하는 것이다. 진화의 높은 단계에 있는 우 리 인간은 가장 높은 수준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서는 그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를 포용하는 사람 살다 보면 평소 가졌던 자신감을 잃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럴때면 당황스럽고 방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까지는 분명한 생각들과 확신들을 가지 고 있었다. 지금은 의심만 가득하다. 옳은 선택을 했는데도 이젠 알 수가 없다. 자존심만 세워주던 어떤 결과들이 이제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 온갖 다른 길 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며 다른 사람들이 택한 길들이 머리에 떠오르며 그 들이 어쩌면 지금은 우리들보다 휠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쓸데없이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떠올리고 양심의 가택을 느낀다. 이것은 위기, 혼란, 방향, 상실, 허무감을 느끼는 때이다. 발작적인 우울증이거 나 신경 과민이라고 누군가는 우리에게 말할 수있다. 이것을 지나가게 하려면 휴가나 여행, 또는 간단한 치료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그것과 싸우다 피하는 꼴 이 되는게 아닌가? 차라리 그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가 르침을 이용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했을 때는 의심에 사로잡히고 불확실함의 독이 퍼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들만 신경 쓰게 된다. 우리가 잘하고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한편 어떤 방법을 따랐을때 성공을 하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계속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어떤 식당에서 손님들이 특히 어떤 음식을 좋게 평가하 면 요리사는 계속 그 음식을 존비하게 된다. 어떤 화가가 자신이 실현시킨 표현 양식을 비평가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면 기꺼이 그 양식에 자신을 맡긴다.


공들여 이론을 만든 과학자는 그 이론의 대안을 찾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어떤 현상에 부딪히든 그 이론을 적용해 보려고 할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에 우리와 새로운 창조성을 표현하기 위한 양 식이엇던 것이 차츰차츰 습관적이고 의례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요리사는 기계적인 방법으로 똑같은 음식을 만드는 일에 길들여 진다. 더 이상 새로운 것 을 만들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예술가는 되풀이 하고 자신의 작품을 모방한 다.과학자는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새롭고 다양한 현상에 자기 이론을 억지로 적용한다. 처음에 그의 이론은 인식을 위한 도구였지만 이제는 현실을 못 보게 하는 눈가리개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처음에는 세상으로 들어 가는 입구이자 세상을 맞이해 들이기 위해 내뻗은 팔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 이 수없이 되풀이되다 보면 공허한 의례로 변해 버린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며 우리를 삶과 접속시켜 주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정기적으로 위기를 맞을 필요가 있다. 대개 우리는 실 패의 결과이고,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현실이 우리들의 습관에 가하는 잔인한 충격의 결과이다. 하지만 또다른 경우에 위기는 우리 내 부에서 성숙의 단계에 이른다. 우리 자신이 단단하게 굳고, 뻣뻣해지고 꼭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에 성공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불만을 느꼈다. 베르길리우스도 「아에네이스」��� 곧바로 없애버리고 싶어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했던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해놓은 일을 초월해야 할 필요성이 갑자기 나 타낸다. 그것은 새로움의 신선함의 필요성이며 앞서 현실화시킨 구조들로 남아 있는 것 전부를 깡그리 치워버릴때에만 시작될수 있는 재시도의 필요성이다. 개 선하고 재구성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황폐한 그 순간이 바로 위기의 순간이다. 정신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해놓은 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근 본적으로 토론할수 있게 해주는 이런 행동 중지 없이 진정한 발전이란 있을수 없다. 우리들이 소유한 것들, 우리들의 확신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는 근원적인 혼돈 을 만들어내는데, 그속에서는 모든것을 새롭게 생각할수 있고 모든게 가능해진 다. 그때에만 우리는 새롭게 변화할수 있게 된다. 가벼워지고 순수해지고 겸손해 졌기 때문이다. 정열적으로 사는 사람 강렬하게 바라고, 꿈꾸고, 계획을 세우고, 좌절과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계획들을 실현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자신에게 만족하고 포기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은 걸까? 격렬한 감동을 맛보고, 그래서 영광과 함께 절망을 만날 가 능성도 무릅쓰는 게 더 나을까, 아니면 무관심하고 무감각해지는게 더 나은 것 일까? 열정을 받아들여 한 사람을 완전히 의지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신중하게 몸 조심을 하는 게 나을까? 아름다움, 완벽, 조화를 열망하고 세상의 추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 아니면 습관에 길들어 완고해지고 통속성을 받아들이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개인, 대중, 문화, 종교 모두 청년기에는 첫번째 것, 열망, 정열, 모험을 선택한


다. 호메로스의 영웅들은 사랑하고 증오하고 즐기고 절망하고 전투와 죽음을 준 비한다. 그 후 철학자들,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와 회의론자들은 욕망과 정열을 버리라고 가르친다. 초기 기독교 신앙은 확신에 차서 천년 왕국의 도래 를 기다렸고 순교를 준비했다. 무르익은 기독교 신앙은 귀족적이고 외교적으로 변하였다. 탄생할 당시의 움직임들은 모두 순수한 희망과 열정과 열의와 믿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차츰차츰 합리적이 되며 신중해진다. 모든 기업들이 처음 시작할 때 는 유연하고 대담하지만 그 후 경직된다. 하지만 그 기업들이 계속 살아남고 싶 다면 개혁하고 젊은이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내부로부터 찾아 야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항상 열망과 정열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것 자체가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삶의 역동적인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열렬히 무엇 인가를 바랄 능력이 없는 개인은 더 이상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 꿈꿀줄 모 르는 사회는 의례주의 속에서 경직되고 쇠퇴하게 된다. 그래서 완벽을 목표로 삼는 강렬한 삶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위험과 고통이다. 이런 위험과 고통은 우리가 완벽한 그 무엇인가를 실현해 가면 갈수록, 목표 에 가까이 도달하면 할 수록 더 커진다. 의도했던 것을 거의 성취해 가려고 하 는데 갑자기 이루어놓은 일을 망가뜨리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눈앞에 나 타날 때 우리는 아주 쉽게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장애물은 병, 사고, 경기 변동 같은 게 될 수 있다. 경쟁자의 적의나 질투일 수도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그 마지막 몇 미터가 가장 어렵다. 훨씬 더 많은 정신력을 요구한다. 중요하고 어려운 일들이 그것을 해내려는 사람들과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 없는 사람의 방해로 실패할 수 있다. 완벽한 모든 것은 바로 완벽이라는 높은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통속적인 사 람들에 의해 더욱더 상처를 입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두 가지 선택의 여지 중에서 포기보다는 열광이, 냉소주의보다는 믿음이, 무미 건조함보다는 정 열이 더 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야만인들이 파괴해 버릴 수 있는 것일지 라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게 훨씬 더 낫다고 믿는다. 이게 바로 문화가 갈 길이며 그 가치라고 생각하며 절대 항복해서는 안 되고 다시 시작하고 계속 싸 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첫인상을 꿰뚫어보는 사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나 어떤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곧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통찰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전에 먼 저 나타나기 때문에 비이성적이라고 간주되는 즉각적인 인상들이다. 이런 인상 들은 대개 그 만남이 중요하면 할수록 더 생생하게 남는다. 어떤 파티에서 소개 받은 사람에 대해 우리는 대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파티에서는 짧고 인위적인 접촉들을 의도적으로 하게 된다. 모두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연기를 하고, 그래서 흠 하나 없고 신경써서 꾸민 가면을 쓰고 자신을 소개한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할 때, 작업을 함께 하고 공동으로 사업을 해야 할 때에는 이런 인상들이 강하게 우리를 휩싼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과 편견에 휘 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평가하기 위해 그런 인상을 멀리 하려고 애쓴다.


이 순가 남자들은 자기들이 여자들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더 객관적이 되어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여자들이란 별 의미도 없는 세세한 일을 가지고 호감이 간다느니 기분 나쁘다느니 평가를 내려버린다고 비난한다. 남자 들은, 특히 경영 책임을 맡았거나 정부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을 시간과 객관적인 증거에 맡긴다. <너무 비굴한 태도야>, <남을 속일 눈이다>, 또는 <저런 지루한 말투라니, 사람들이 못 참아주겠군>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누구보다 이성적인 경영인도 현명한 정치가도 자신들을 깊이 실망시 킨 사람과의 첫만남을 생각하면서, 그때 너무나 분명한 경고의 느낌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많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기억들을 사후의 정당화로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가 실망 을 했기 때문에 우리 기억이 이미 지나가 희미해진 그 사람의 행동 속에서 뒷날 행동의 징후를 찾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게 잘되어 갔다면 똑같은 징후가 정반대로 해석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기억보다 더한 사기꾼은 없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나 현재 우리 행동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것만을 기억한다. 친구와 관계를 끊었을 때, 갑자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그 친구의 못된 행동들이 머리에 떠오 른다. 이혼을 한 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나간 세월이 참을 수 없고 수치 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불쾌한 사건들만을 기억하고 함께 맛보았던 기쁨이나 행 복같은 것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 과거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기억을 하거나 잊을 수는 있어 도 기억을 수정할 수는 없다. 서로 헤어진 연인들이 과거 속에서 발견했던 부정 적인 면은 이전에도 존재했고 보았던 것이지만 사랑과 기쁨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머릿속에서 저만치 밀어냈던 것이다. 오로지 이성만이 해석을 할 수 있고 행동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성만이 변형시키고, 위장하고, 가면을 쓰 고, 속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성이 만들어낸 적당한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 앞에 나선다. 우 리의 연기는 다른 사람이 중요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우리가 깊이 알고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신중해지고 완벽해진다. 이게 바로 역설적인 사실이다. 처음 만난 사람보다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속이기가 훨씬 더 쉽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상대방에 대해 전혀 모른다. 우리는 환영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재치 있게 굴어 야 할까, 생각이 깊다는 것을 보여야 할가? 쾌활하게 행동해야 할까, 신중한 모 습을 보여야 할까? 수줍어해야 하나,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야 하나? 사람들은 처음 만났을 때, 다른 때엔 그다지 확신할 수 없었던 우연한 레퍼토리를 상연한 다. 그건 아주 깨어지기 쉬운 방벽이고 실체가 없는 가면일 뿐이다. 구석구석까 지 미치는 시선은 그것을 꿰뚫어보며, 우리가 모두에게 숨기려고 했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잊고 있던 우리의 모습들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즉각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 는 색깔을 바라보거나 소리를 들을때처럼 분명하게 다른 인간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가면의 속임수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행동의 의미를 잘못 파악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소는 기쁨을 의미하고 교활한 시선은 불신을, 야비한 언 행은 폭력을, 부주의는 관심 부족을, 이해 불능은 우둔함을, 항상 <예>라고 대답 하는 것은 우유 부단함을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취하는 행동은 탐욕을 의미하고,


틀어쥐고 있는 것은 인색함을, 불안스러운 시선은 질투를, 악의 있는 관찰은 시 기를 의미한다. 처음 만남에서는 모든 것이 물처럼 투명하다. 첫인상은 초고감도 필름으로 우리와 대화하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찍어놓은 사진이다. 물론 그것을 해독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이성에 밀려 우리는 그 사람이라기보 다는 그 사람의 한 모습을 선택하게 된다. 관계를 계속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면 우리는 불안스러운 희미한 기억은 지워버린다. 동시에 우리와 알게 된 다른 사 람 역시 우리에게 맞추어 태도를 만들어낼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를 기분 좋게 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이다. 시간이 흐르 면서 둘 다 각본대로 연기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함께 있는 게 썩 흥미로울 경 우 불쾌한 면들이나 씁쓸한 기억들을 다른 한편으로 미루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오랫동안 함께 걸을 수 있고 첫인상은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위기가 발생하면, 그때는 둘 다 가면과 타협적인 태도를 집어던진다. 그러면 바로 그때 과거 첫 인상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사실 상대방은 처음부터 계 속 그런 모습이었고 그 동안에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 우리가 경험한 속임수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종종 과장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이 바로 망각의 공범 자였다. 대가를 구하지 않고 베푸는 사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착하고 올바르고 관대하고 의욕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하 는 걸까? 무엇 때문에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하고, 전력을 다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하면 뭔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결구 보상을 받게 될까? 정직한 대답은 딱 하나, <아니다>. 공적을 세운 대가로 상을 받고 훌륭한 사 람들이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관대한 사람들은 이기주의자들에 게 이용당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도둑들에게 강탈당하고, 온순한 사람은 참을성 없는 사람들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남에게 준 사람은 그에 상응할 만한 보답을 받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천연두를 몰아낸 제너는 고통스럼게 죽 었다. 근대 화학의 아버지인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가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 산후병에서 여인들을 구해 준 젬멜바이스는 미치고 말았다. 과거의 일들이라고? 천만의 말씀! 정치계에서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감탄의 대상이며 텔레비전에서는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토론에서는 위압적인 사람이 감탄을 받는다. 누군가 아주 똑똑한 사람이 오면 평범한 사람들은 시기심 때문 에 그를 마구 욕한다. 마음속으로 그를 놀랍게 여기면 여길수록 더욱더 그를 비 방한다. 일에 전력을 다하여 당신의 귀중한 지성과 인내심을 모두 쏟아넣어 본 경험이 당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아주 굉장한 일을 완성했을 때, 당신은 인정 을 받는 대신 경멸의 눈초리와 비웃는 말만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런 비난 뒤 로 당신이 너무나 훌륭히 해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미움을 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다시 질문을 해보자. 무엇 때문에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 런 무서운 질문은 성경과 탈무드에도 울려퍼진다. 유태인들은 서로 물었다. 이렇 게 온순하고 국법과 율법을 잘 지키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난폭한 자들에게 억


압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것일까? 왜 옳은 사람은 고통을 받고 잔악한 인간들은 평온하게 사는 것일까? 그들은 대답을 종교적 믿음 속에서 찾았다. 하느님은 마 침내 선한 사람에게 보상을 내릴 것이며 심판에 따라 악한 자들을 벌 줄 것이 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모든 시대마다 이런 질문이 되풀 이 되고 답을 찾으려 애를 쓸 수밖에 없었다. 지옥도 천국도 믿지 않는, 꿈에서 깬 이 시대에 우리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옳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여주고 과 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손익 계산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착하게 살아서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유일한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착한 행동을 선물 로 주는 것이다. 우리 아들, 내 친구, 우리 도시, 자연, 찾아오게 될 사람을 도와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근원적이고 자유롭고 아무런 동기도 대가도 없는 이 <사 랑>이 없다면, 우리들의 인간성과 자유에서 곧바로 생겨 나오는 이 선물에는 그 어떤 도덕성도 들어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선물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인간의 진보는 이루어졌다. 이 세상 의 모든 도덕성은 이기주의적인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더 많 이 활동하고 갖기보다는 더 많이 주도록 인간들을 이끌어간 원초적인 에너지에 서 나온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본능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 본능으로 자연은 그 자신과 자신의 법칙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과 개인 및 집단의 이기주 의에 대항한다. 그것은 저 너머로 나가는 것, 초월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제너, 젬멜바이스, 그리고 일을 하고 창조를 하며 자신의 목숨을 잃은 수백만의 사람 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유태 전설에 따르��� 세상은, 서른여섯 명의 올바르고 겸손하며 이름 없는 사 람들이 이 세상을 파괴하려는 악과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한 다. 실제로 올바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 서른여섯 명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건 다 행스러운 일이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 집에서나 직장에서, 그리고 친구들끼리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나 출판물, 텔레 비전에서도 갈수록 한 개인의 정신적 도덕적 자질을 묘사하지 않는 빈곤한 언어 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질들에 관하여 말할 줄 모른 다면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능력을 되찾으려면 말의 속도를 늦추고 옛말들이 다시 빛을 보게 해야 한다. 옛말 하나를 찾아내 보도록 하자. 옛 표현들 중 <고귀한 영혼> 같은 말을 하 나 골라보자. 이 말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까? 그 사람들과 동화되어 보고, 그들을 묘사해 보고, 편협한 영혼 의 사람들과 구별해 보도록 하자. 고상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의 자아와 관심거리에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책임질 수 있는 내적 에너지와 풍요로움을 지닌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 고 몰두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관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착하고 정직하긴 하지만 정신적 영역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이 최고이고 자신들의 종교가 최고라고 믿으며, 언제 나 좋은 게 무엇이고 나쁜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일방적인 자기 관점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이와는 달리 지적으로 관대하고 정신적으로 열려 있고 자신의 우주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도 이해하는 능력 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 자신을 상대적으로 바로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이 있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않으며 배울 줄 알 고 감사할 줄 안다. 영혼이 가난하고 편협한 사람은 자신의 목표만을 바라본다. 정의와 자신의 이 익을 혼동한다. 누군가 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면 그를 증오하고 욕하고 비방하 고 그러기 위해 그 어떤 부당한 일, 그 어떤 사악한 일이라도 저지를 태세를 갖 추고 있다.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지도, 경쟁자를 증 오하지도 않는다. 그를 존중하고 그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해 준다. 경쟁이 끝 나면 분노를 잊고 마음속에 복수심을 키우지 않으며 용서한다. 자만심과 위엄이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만심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 위에 두는 것이다. 위엄은 어떤 성질이든 가치가 있고 보호되어야 함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엄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낮춰 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는 다. 다를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고 비굴해지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어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 굴욕과 증오와 폭 력 사이에서 겁을 먹고 동요하는 불안정한 인물들이 생각난다. 소련의 역사는 공포가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주변에 자유롭게 모이는 것을 원한다. 분명하게 자기 계획을 제시하고 개방적으로 반대 의견 듣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고 설득하고 이끌어 나가면서 동의를 통해 지배한다. 그들 주변 에는 신뢰감이 생겨난다. 놀이의 규칙이 명확하기 때문에 속임수나 함정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그런 규칙을 지키는 최초의 사람들 이다. 그들은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할 줄 알고 상을 받을 만한 사람에 게 상을 줄 줄 안다. 이 모든 것은 내면적인 균형과 내적 조화로 전환되는 훈련 과 연습을 요구한다. 영혼의 고귀함이라는 말은 강인함, 외로움과 역경 속에서 저항할 줄 아는 도 덕적 용기,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힘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쯤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점 얼룩도 두 려움도 없는 기사 이야기에나 나오는 인물들인지 자문해 볼 수 있다. 다행스럽 게도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 사회 그 어느 계층에나 그들이 존재한다. 큰 권력과 경쟁이 있는 높은 곳에도 있다. 우리가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우리 삶이 즐거운 것은 다 그들 덕택이다. 분노를 극복하는 사람 유명한 문장이 있다. <사람들은 나쁜 일을 당하면 대리석에 새겨두고, 좋은 일을 당하면 먼지에 써둔다.>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이며 사악한 특징 중 하 나인 것 마치 원죄의 성혼이라도 되는 양 우리 내부에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매일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매스컴을 통해 그것을 본다. 주의깊게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보고 모든 단어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라. 찬사의 말, 감


탄, 칭찬하는 형용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예술 분야에서는 조금 찾아볼 수 있는데 항상 똑같은 사람들, 거의 신성시되는 몇몇 작가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이 아주 좁은 분야를 벗어나면 제목으로 뽑히고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비판, 비난, 비방이다. 모든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며 비난한다. 비난당하거나 탄핵받는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아무말도, 전 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과거에 그가 훌륭하게 해냈던 일이 있어도 그에 대해 서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는다. 나치에 대항해 자기 나라와 전유럽을 승리로 이 끈 처칠에게도 그랬고, 내전에서 프랑스를 구한 드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인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베트남의 비극을 해결한 닉슨의 공적을 절 대, 단 한순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인정을 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심판의 날에 천칭 저울을 사용할 것이라고들 한다. 한쪽 접시에는 공적들을 올려놓고, 반대쪽 접시에는 모든 인간의 죄를 올려놓은 것이 다. 하지만 우리의 저울은 고장이 나서,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먼지 한톨만 올려놓아도 영원히 악의 편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어떻 게 행동해 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몇 년 동안 한 상점을 드나들었고, 그 상점 에서는 물건을 집까지 배달도 해주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잘해 주었다. 우리는 그 상점에 들러 허물없이 수다도 떨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건, 계산 서의 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오해를 했다거나 뭐 그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고집을 부리다가 문을 쾅 닫고 거기서 나와버린다. 화가 난 우리는 상점을 바꿔 버리고 지금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불같이 화를 낸다. 이런 일은 그 관계가 표면적이기 때문에, 거래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것일까? 상점에 가서 서비스가 좋으면 물건을 살 뿐이지 가게 사 람과 다른 관계를 맺지는 않는 건가? 아니, 아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계속 사 귀어온 친한 친구의 경우에도 똑같이 냉혹하게 반응한다. 때로는 무례한 언동, 몰이해, 망각, 또는 남편이나 아내와 접촉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회 복할 수 없는 관계 단철로 이어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렇게 과거는 지워지고 황폐해진다. 그러면 연인끼리 싸울 때, 이혼할 때는 어떻게 될까? 그 둘이 함께 맞았던 모든 좋은 일, 함께 나누었던 기쁨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기억은 끝없 는 건망증으로 삶의 절반을 꿀떡 삼켜버리는 심연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잘못만을 기억한다. 그것을 과장하고 잊지 않고 대리석에 시긴다. 긍 정적인 부분을 원상태로 되돌리고 아직도 살아 있는 기억의 잔해에서 그것을 뽑 아내는 일은 아주 힘들다. 그러려고 해보면 기억 속에서 잘못된 행동들과 증오 에 찬 말들이 와르르 달려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이 기 억의 횡포, 이 사악한 정신의 메커니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자문하게 된다. 한때 도덕 신학은 그것을 잘 인식했다. 그것은 분노이다. 치명적인 악습이 되 어버린 분노이며 용서와 완전 대립되는 것이다. 용서 속에서는 현재의 악의가 과거를 왜곡한다. 그러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공정함은 아무 관련이 없다. 공 정함은 알리바이다. 그것은 커다란 우산으로, 그 밑에서 공격성을 이성적으로 왜 곡하고 스스로 문화인이 되고 고상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양심을 굳게 지키는 사람 몇 년 전 클라우디오 마그리스가 아주 멋진 글을 썼는데, 그 글에서 그는 파 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


다. 이제는 절대 가치와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선 과 악이 양쪽으로 정확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악마와의 계 약이 제의되는 어떤 순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의 영혼과 양심 을 큰 이익 또는 우리가 열렬히 바라던 어떤 것과 교환하자는 제의를 받는 순간 이 있다. 사랑, 부, 성공, 권력 같은 것, 어쩌면 우리 정당의 성공, 우리 재판의 승리 같은 것과의 교환일 수 있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맡은 미국판사를 연기하는 오래된 영화 「승자와 패자」가 기억난다. 피고인은 독일의 판사로 박해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던 아주 정직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치즘 초기에 그는 유태인들에 대한 최초의 허위 재판에 가담했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강제 수용소나 거기 서 죽은 사망자들에 대해 전혀 몰랐고 사람들이 죽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할 때, 늙은 미국인 판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당신 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사람에게 죄를 내렸던 바로 그날, 그것을 상 상할 수 있었을 거요.> 그에게는 바로 이게 악마와의 계약이었다. 좀더 분명히해 보자. 우리는 실수나 경솔함 때문에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소 질과는 정반대 되는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곧 그 사실을 깨닫고 이크 하는 생각으로 실수를 바로잡는다. 내가 말하는 결정은 훨씬 더 심오한 것 이다.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그 선택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일관성 있게, 용기 있게 그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와 는 반대로 우리가 포기해 버리리라는 것도 안다. 그 길은 가장 쉽고 편해 보여 택한 것이다. 아니면 야심이나 욕심 때문에, 기회를 보느라고 택한 것일 수도 있 다. 처음에 우리는 명쾌하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일에 휘말리게 되고 유혹에 빠 지게 된다. 초기에 도덕적인 문제가 정말 도덕적인 문제였고 농담이 아니었다면, 이제는 딜레마로 변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게 된다. 한쪽에 선이 있고 또다른 쪽에 악 이 있는 게 아니다. 아니, 그것들은 언제나 둘 다 선하고 둘 다 중요해 보이는 선택 사항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을 때에만, 우리 자신에 대해 지독할 정도의 확신을 가졌을 때에만 더욱 진실되고 더욱 올바른 것을 포 용할 힘을 갖게 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광적으로 빠져드는 것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허 약해졌을 때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기만을 허용한다. 나치들은 유태인들 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 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참았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처음부터 폭력과 혁명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학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그를 변명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 부패 사건도 악마와의 계약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정의, 개혁, 정직에 대한 이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실 현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법 자금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것 말 고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 다른 방법 이 없었을까?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가 아주 어렵고 힘들었다. 악은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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