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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프롤로그 태아연구활동에 대한 금지조치 의학연구에 관한 새로운 규정 - 해롤드 발로우 뉴욕 타임즈 특약 워싱턴 1974 년 7 월 12 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오늘 국가연구법의 통과를 인준했다. 이 법안은 생명과학 및 행동과학의 연구활동에 있어서 인체를 실 험대상으로 사용하는 일체의 행위를 감시하기 위한 국가위원회의 조직을 규 정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 어린이, 지진아, 죄수, 불치 환자와 특히 태아에 대한 연구활동에 있어서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 데 내려진 조치이다. 이 법안은 간염의 진행과정을 연구하기 위하여 다수의 지진아들에게 간염 균을 주사한 사건, 수개월 전 보스턴 병원에서 유산된 후 사지가 절단된 채 발견된 태아 등 최근 들어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충격적인 인권 침해 사례 들이 차후에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세부조항의 첫 부분은 '태아의 생명보전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를 제외 한, 미합중국내에서의 태아에 대한 연구활동'을 무기한 유보하도록 규정하 고 있다. 이러한 태아에 대한 문제는 최근 들어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로 등 장한 낙태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법안에 대해 의학계는 여러 갈래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코넬 메디 컬 센터의 조직 C. 마스턴즈 박사는 새로운 법안에 대해 환영의 뜻을 나타 내며 '인체 실험에 대한 윤리적 지침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내려졌어야 했다. 획기적인 연구성과의 창출을 향한 경제적 압력이 인권 침해가 불가피한 상 황을 조성해왔다'고 말했다. 아롤렌 제약회사의 클라이드 해리슨 박사는 마스턴즈 박사의 의견에 반대 했다. '반낙태 정책이 과학을 인질로 붙들고 있다. 우리는 필수적인 보건연 구에 강한 제재를 받고 있다.' 해리슨 박사는 태아연구가 그동안 많은 과학적 성과를 가능하게했다고 부 언하였다. 그가 드는 중요한 예의 하나로서 당뇨병 치료법이 있다. 췌장에 주사된 태아의 조직이 인슐린을 생성하는 섬세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태아의 조직은 지금까지 치료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 겨져왔던 외상에 대한 척수마비 환자에게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증명되었 다. 상해 부위에 주사된 조직은 새롭고 건장한 세포의 성장을 촉진시킴으로 써 자연적인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법안이 규정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위원회 조직이 캐스퍼 와인버거 장관


에게 정식으로 보고되기도 전에 이 법안의 영향력을 판단한다는 것은 시기 상조로 보인다. 태아 조직의 공급을 전면적으로 차단시킴으로써 새로운 법 안은 이 연구분야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조직은 주 로 미리 계획된 낙태시술을 통해 얻어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이 의사의 낙태 여부 결정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84 년 11 월 27 일 뉴욕시 줄리안 클리닉 날카롭고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바늘이 캔디의 등 아래쪽을 찌르고 들 어왔다. 벌에 쏘인 듯한 아픔은 잠시 후 사라졌다. "지금 국소마취제를 주사하고 있는 중이에요, 캔디." 닥터 스테픈 번햄의 말이었다. 가무잡잡하고 훤칠한 용모의 이 마취의사는 캔디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라며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캔디는 분명히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닥터 번햄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캔디는 잠들어버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번 햄 박사는 경막외마취(Epidural Anesthesia : 척추마취의 일종으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하반신만 마취된다)가 안전한 방법이며 낙태와 불임 수술이 끝난 후의 기분도 훨씬 나을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캔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또 다른 고통이 등을 파고 들어왔다. 이번 것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36 세의 캔디는 이전에는 병원에 와본일도, 수술을 받아본 일도 없었다. 그녀는 닥터 번햄에게 여러번에 걸쳐 두려운 심정을 털어놓았 었다. 다시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등을 곧게 폈 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번햄이 경고조로 말했다. "죄송해요." 잘 협조하지 않으면 수술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겁이 났다. 그녀는 지금 수술실 바로 옆에 붙은 작은 방의 운반용 침대 위에 걸 터앉아 있었다. 간호사 한 사람이 앞에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커튼이 쳐져 방과 수술실 복도 사이를 막아주고 있었다. 커튼 뒤로부터 나지막한 음성과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맞은편으로는 작은 창문이 달린 문이 수 술실로 통해 있었다. 캔디의 몸을 가려주는 것이라고는 얇은 병원 가운밖에 없었다. 가운이 위 로 젖혀진 등쪽에서는 의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 었다. 번햄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었지 만, 그녀의 집중력은 주위 환경 때문에 극도로 흐려져 있는 상태였다. 모든 것이 생소하게만 보였고 겁게 질리게 했다. "투호이 바늘." 번햄이 말했다. 캔디는 투호이 바늘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 다. 어감이 좋지 않았다. 셀로판 봉투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번햄은 3 인치 길이의 바늘을 유심히 살펴본 뒤 끝부분의 탐침이 자유롭게


움직이는지 앞뒤로 밀어 확인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발을 옮겨 캔디가 등 을 곧게 펴고 앉아 있는지 옆에서 확인한 후, 국소마취제를 주사한 부위로 바늘을 향했다. 번햄은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 캔디의 등으로 바늘을 밀어넣었다. 그의 숙 력된 손가락 끝에 바늘이 피부를 통과하여 요추 돌출부 사이로 미끄러져 들 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척추관을 보호하는 요추황색 인대의 바로 바로 앞부 분에서 바늘이 멈추었다. 경막외마취 시술은 대단히 까다로운 작업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닥터 번햄은 오히려 이 방법을 즐겨 사용해왔다. 이 방면에 자신만큼 뛰어난 의사가 흔치 않다는 사실이 그를 항상 뿌듯하게 했다. 과 장되게 화려한 동작으로 그는 바늘의 탐침을 뽑아냈다. 예상대로 탐침의 끝 부분에는 치수액이 전혀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탐침을 다시 원위치시키 고 투호이 바늘을 1 밀리미터 가량 더 전진시켰다. 바늘이 황색인대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손을 통해 느껴져왔다. 일정량의 공기가 바늘을 타고 쉽게 들어갔다. 모든 과정은 완벽했다. 번햄은 바늘을 통해 캔디에게 소량의 테 트라카인(Tetracaine : 국소마취제의 일종)을 주입시켰다. "발쪽에 이상한 느낌이 오는데요." 캔디가 걱정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도달했다는 뜻이지요." 노련한 손놀림으로 번햄은 테트라카인이 든 주사시린지를 빼고 대신 플라 스틱 카테터(Catheter : 체내의 일정부위와 외부를 연결하기 위해 집어넣는 도관)를 투호이 바늘을 통해 밀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늘을 제거하고 바늘구멍 자리에 종이 테이프를 붙여주었다. "자, 다 끝났어요." 번햄이 소독장갑을 벗은 후 캔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그녀에게 누우 라는 지시를 했다. "이젠 더이상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마취가 된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걸요." 캔디는 그들이 마취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시작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아직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캔디는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간호사가 발을 들어올려 눕는 것을 도운 후 얇은 면직 담요를 덮어주었다. 캔디는 보호를 구하는 듯한 태도로 담요 를 가슴위로 꼭 끌어올렸다. 번햄은 캔디의 등으로부터 뱀처럼 뻗어 있는 작은 플라스틱 튜브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여전히 불안합니까?" "점점 더해요!" "진정제를 조금 놓아드리지요." 번햄이 캔디의 어깨를 격려조를 눌러주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정맥주사선을 통해 약물을 주입하였다. "됐어요. 자 이제 갑시다!" 캔디가 누운 운반용 침대가 조용히 수술실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안은 대 단히 부산했다. 수술실의 벽은 누부시게 하얀 타일들로 둘러쳐져 있고 방음 장치가 된 천정 역시 하얀색이었다. 엑스레이 장비들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고 또 반대편에는 전자 장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자, 캔디." 번햄이 돕고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건너오셔야겠는데요." 간호사가 수술대 반대쪽에 서서 수술대를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잠시 캔디 는 자신이 명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 지만 그런 감정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캔디는 18 주 된 태아를 몸 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태아'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했다. 그건 '아기'나 '아이'같은 단어보다 말하기에 좀 거리낌이 덜했다.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며 캔디는 자리를 옮겼다. 다른 간호사 한 명이 캔디의 가운을 들어올리고 가슴에 자그마한 전극을 부착시켰다. 삑삑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신의 심장박동 에 맞춰 나는 소리라는 것을 캔디가 깨닫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수술대를 기울이겠어요." 번햄이 이렇게 말하고 나자 캔디의 머리가 위로, 발이 아래로 움직였다. 캔디는 골반에 자궁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뱃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캔디가 이런 것을 느낀 지는 일주일 정도 되었으며 태아가 자궁 속으로 움직이려 하는 것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 었다. 고맙게도 움직임은 곧 멈추었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더니 닥터 로렌스 폴리가 등을 돌린채, 물이 떨어지는 손을 위로 하고 들어왔다. "자." 그가 특유의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가씨는 좀 어떠신가?" "마취가 전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캔디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닥터 폴리의 등장에 그녀는 커다란 위안을 받고 있었다. 크고 마른 체격을 가진 그의 길고 곧은 코가 수술용 마스크 위에서 뚜렷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캔디가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녹회색 눈뿐이었다. 그의 은백색 머릿결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들은 마스크 뒤로 숨겨져 있었다. 닥터 폴리는 캔디가 가끔 찾아가던 산부인과 병원의 담당의사였으며 캔디 는 항상 그에게 호감과 신뢰를 느껴왔었다. 임신하기 18 개월 전부터 캔디는 검진을 받지 않고 지내왔었는데, 몇 주 전에 찾아갔을 때 닥터 폴리가 전과 너무나도 달라 보여 깜짝 놀랐다. 캔디는 그를 외향적이고 좀 메마른 듯한 유머를 간직한 남성으로 기억해왔었다. 캔디는 그의 '새로운' 성격이 드러 나게 된 것이 자신의 혼전 임신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폴리는 헛기침을 해대는 닥터 번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캔디 양에게 8 밀리그램의 테트라카인을 주사했습니다. 지속형 경막 외마취법을 사용했지요." 그는 수술대 끝으로 내려가 담요를 들어올렸다. 캔디의 발이 엑스레이 판 독상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밝은 형광불빛으로 인해 아주 창백해 보였다. 번 햄의 손이 가슴 바로 아래까지 올라올 동안 캔디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 다가 순간 가슴 부위에 바늘로 찔리는 통증을 느꼈고, 그에게 그것을 말해 주었다. 그가 웃음지으며 말했다.


"완벽해!" 잠시 동안 닥터 폴리는 움직이지 않고 수술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 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닥터 폴리를 응시하며 캔디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진료실에서 만났을 때도 같은 모습을 보였었다. 마침내, 그가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 가장 훌륭한 마취의가 한 시술이니까! 자 이제 긴장을 푸 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술은 끝나게 될 테니까요." 캔디의 머리 위에서 잠시 부산한 소리와 함께 라텍스 장갑을 요란하게 벗 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번햄이 자신의 머리 위로 철제틀을 고정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호사 중 한 명이 수술대를 덮은 천으로 캔디의 왼팔을 옆구리에 댄 채 감쌌다. 번햄은 오른팔을 수술대에서 직각으로 뻗어나온 받 침대에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쪽은 정맥주사가 연결된 팔이었다. 닥터 폴리가 캔디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가운과 장갑을 착용한 채 로 간호사가 캔디에게 커다란 수술용 소독포를 덮어씌우는 것을 도왔다. 캔 디의 시야가 대부분 가려지고 바위 위쪽에 정맥주사병이 매달려 있는 것만 보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뒤쪽에 서 있는 번햄을 볼 수 있었다. "자 모두 준비되었나요?" 닥터 폴리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번햄의 대답이었다. 그는 캔디를 굽어보며 눈을 찡긋했다.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번햄은 다시 한번 캔디를 안심시켜주었다. "압박감이나 뭔가 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만, 절대로 고통스 럽지는 않을 겁니다." "확실한가요?" 캔디가 물었다. "그럼요." 캔디는 닥터 폴리를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 다. "스칼펠." 스칼펠(Scalpel : 수술용 메스)이 장갑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캔디는 고통이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감사하게 도 고통은 오지 않았다. 감지할 수 잇는 것이라고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몸 을 기대어오는 듯한 느낌뿐이었다. 처음으로 그녀는 이 모든 악몽이 이제 곧 지나가게 될 것이라는 사치스런 생각에 젖어들 수 있었다. 캔디가 피임약을 끊기로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9 개월 전이었다. 그녀는 데 이빗 커크패트릭과 5 년 동안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작가 활동에 전념해왔듯이 캔디 또한 춤에 인생을 건 여자로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서른네 번째 생일을 지내고 나서 캔디의 태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데이빗에게 결혼을 졸랐고 가족을 갖기를 원했다. 캔디가 임신하기 로 결심한 것은 데이빗이 그녀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였다. 캔디는 그렇게 함으로써 데이빗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캔 디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석과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만일 캔디가


아이를 낳으려 했다면 데이빗은 틀림없이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을 터였다. 열흘동안 눈물을 흘리며 야단법석을 떨고 난 뒤에야 결국 낙태수술에 동의 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 몸 속 깊은 어딘가에서 강렬한 고통이 찌르는 듯 엄습해왔다. 그것은 마치 치과의사가 충치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때 나타나는 그러한 아픔과도 같 았다. 다행히도, 고통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번햄은 마취 기록부를 다시 훑어본 뒤 수술 부위의 에테르 스크린을 쳐다 보며 말했다. "지금 소장을 건드렸나요?" "수술 부위에서 소장을 걷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닥터 폴리가 대답했다. 번햄은 뒤로 물러앉은 다음 캔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참아주었어요. 소장을 건드릴 때 고통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 만 이젠 더이상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괜찮으시죠?" "괜찮아요." 캔디가 대답했다. 모든 일이 예정대로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는 격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사실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로랜스 폴리의 태도가 이전의 따뜻함을 잃어버렸다 해도, 여전히 그에게 최대의 신 뢰감을 쏟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캔디에게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었었다. 이해심 깊고 도움이 되려고 항상 애쓰던 그는 특히 낙태수술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폴리는 여러 차례의 진료 시간을 그저 캔 디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만 보내며, 홀어머니로서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과, 16 주나 지나버린 경우지만 낙태수술이 어렵지 않음을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캔디는 자신이 낙태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닥터 폴리와 줄리안 클리닉의 다른 여러 사람들이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스로 내린 유일한 결단은 불임시술에 관한 것뿐이었다. 폴리는 불임에 대해서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캔디의 나이는 이제 서른여섯이었고 가까운 장래에 결혼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에 임심으로 다시 생리주기를 깨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키드니 접시." 폴리의 말이 캔디를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오게 했다. 쇠붙이끼리 서로 부 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뱁콕 겸자." 캔디는 눈을 위로 굴려 번햄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의 눈뿐이었으며 얼굴의 다른 부분은 모두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캔디는 깊은 잠에 빠졌고 번햄의 말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캔디." 있는 힘을 다해 캔디는 눈을 깜박거리며 시야에 들어오는 물체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텔레비젼의 화면이 천천히 나타나는 것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잡음과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러다 서서 히 그림과 그 의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수술 장 보조원이 수술실로 운반용 침대를 끌고 들어왔다.


"폴리 박사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캔디가 물었다. "회복실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수술은 아주 잘됐어요." 번햄이 정맥주사병을 운반용 침대쪽으로 옮기며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캔디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도, 자신이 영 원히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몰두할 여유를 가지기 전에 간호 사 중 하나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캔디. 이제 운반용 침대로 옮기겠어요." 옆에 이어져 있는 수술보조실에서 폴리는 흰색 수건으로 반듯이 덮여져 있 는 스테인레스 스틸 용기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표본이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수건의 한쪽을 들춰보았다. 폴리는 만족 한 표정으로 용기를 들고 복도를 가로질러 병리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레지던트들과 테크니션들을 무시한 채 수술장 중심부 를 지나 아주 긴 복도로 접어들었다. 복도끝에 다다라 아무런 팻말도 붙어 있지 않은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표본이 든 용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균형 을 유지하며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문을 열었다. 방은 매우 좁았고 창문 이 전혀 없는 실험실이었다. 폴리는 천천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놓았고 문을 닫은 후 용기를 내려놓았다. 잠시 동안 마비된 것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관자놀이에 날카 로운 고통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는 벽 모서리로 팔으 뻗어 균형을 잡으 려 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분침이 5 분을 훌 쩍 뛰어넘어 가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빠르고 조용하게 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난 그는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목재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보다 작은 절연 용기가 들어 있었다. 걸쇠를 풀고, 폴리는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여러 개의 다른 표본들을 채워져 있었다. 폴리는 조심 스럽게 새로운 표본을 드라이아이스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20 분 후, 흰 셔츠와 파란 바지 차림을 한 병원보조원이 짐수레를 밀고 실 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드라이아이스가 든 용기를 들어 올려 나무상자 에 집어넣은 후,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적재 창고로 내려갔다. 그리 고는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에 상자를 실었다. 그로부터 다시 40 분이 지났다. 나무 상자는 차에서 내려져 뉴저지주의 텐 터보로 공항에 계류중인 걸프 스트림 사(社) 제트기의 화물칸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


아담 숀버그는 어두운 침실에서 눈을 떴다. 어디선가 커다란 재난이 생겼 음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경찰차인지, 소방차인지, 아 니면 전혀 다른 것인지 모르는 무언가가 멀리 사라져가면서 서서히 사이렌 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뉴욕 시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담은 따뜻해진 담요 속에서 손을 꺼내어 안경을 더듬어 찾고 시계 라디 오를 그를 향해 돌려놓았다. 오전 4 시 47 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5 시로 맞춰져 있는 알람스위치를 껐다. 침대에서 몸을 끌고 나와 냉기가 서 린 화장실로 가야 하는 시간까지 아직도 15 분의 여유가 있었다. 보통, 그는 다시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람을 미리 꺼버린다든지 하는 무모 한 짓을 삼가해왔었지만, 오늘처럼 활력이 넘치는 날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옆으로 몸을 굴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제니퍼에게 몸을 기대었다. 23 세의 제니퍼와 결혼한 지 일년 반이 지났다. 그녀의 가슴이 리듬감 있게 오 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담은 손을 아래쪽으로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손 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올렸다. 매일매일 무용 연습으로 미끈하게 다져진 다 리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녀의 피부는 보드라웠으며 흠집 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끄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남부 유럽 출신처럼 섬세한 올리브의 색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제니퍼는 영국인과 아일랜드 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독일인과 폴란드인 사이에서 태어난 어머니 를 두고 있었다. 제니퍼가 다리를 곧게 뻗으며 크게 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려 돌아누으면서 아담을 밀어내려 하였다. 아담은 미소를 지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제 니퍼의 거친 성격은 여전했다. 종종 그녀의 강한 성격은 아담에게 골치아픈 완고함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었으나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4 시 58 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바라보며 아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 다. 방을 가로질러 가다가 제니퍼가 탁상 대신으로 사용하기 위해 천을 덮 어둔 낡은 트렁크에 발가락을 찧었다. 아담은 이를 앙다문 채 욕조 가장자 리로 절름거리며 걸어가 상처난 부위를 확인하였다. 그는 고통에 대한 인내 력이 대단히 부족했다. 아담이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끔찍스러울 만치 짧았던 그의 고등학교 풋볼 선수 경력을 통해서였다. 그의 체격이 큰편에 속했고 세상을 떠난 그의 형 데이빗이 마을의 스타였다는 특별한 이유로, 그 자신을 포함 한 모든 사랆들이 그가 팀에 들어가기를 원했었다. 아담에게 볼이 주어지고 배운 대로 움직이도록 지시를 받을 때까지 모든 일은 잘 풀려가는 듯싶었 다. 그러나 태클을 당하는 순간 아담은 고통을 느꼈고, 모든 선수들이 다리 를 붙들며 덮쳤을 때 풋볼이란 걸 통해서는 형의 명성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옛 기억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아듬은 급히 샤워를 마치고 짙게 자란 수염 을 밀어버린 후 굵고 검은 머리를 빗어넘겼다. 그는 자신의 검고 훤칠한 용 모를 잊기라도 한 듯이 거울을 흘끗 들여다보며 옷을 재빨리 걸쳤다. 침대에서 일어난 지 10 분도 채 되지 않아 아담은 너비 2 피트, 길이 4 피트 짜리 부엌에서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좁은 초라한 아파트의 내부를 훑어


보며 아담은 의과대학을 마치자마자 제니퍼에게 깔끔한 생활공간을 마련해 주리라 다짐했다. 그는 커피를 들고 거실의 책상으로 다가가 지난밤에 훑어 보던 자료들을 다시 점검하였다. 불안감이 한차례의 파도처럼 아담의 몸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앞으로 네 시간 뒤면 내과 과장 테이어 노튼의 당당한 풍채를 마주하고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담의 주위에는 내과 실습을 함께 도는 다른 3 년차 의대생들이 빙 둘러서게 되고 찰스 핸슨과 같은 소수만이 그에게 성원을 보내줄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녀석들은 그가 바보 취급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며 그 렇게 될 가능성은 다분했다. 아담은 언제나 여러 사라들 앞에서 자신을 갖 지 못했고, 그것은 각광받는 연설가였던 그의 아버지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내과 실습을 시작할 즈음에 아담은 자기가 맡은 중요한 환자 발표를 실습 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미루어오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감에 서게 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고 있었으나 여 전히 불충분했다. 오늘은 대단히 어려운 날이 될 것이며 그것이 해가 뜨기 도 전에 일어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자료들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기로 했다. 아담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뉴욕 아침의 번잡한 소음들을 틀어막아 버리려 는 듯, 발표 내용을 다시 한번 낭독하기 시작했다. 닥터 노튼의 바로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가지 일만 없었다면 제니퍼는 10 시까지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첫 째로 9 시에 의사와 시간약속을 해두었었다. 둘째, 7 시 15 분을 경과하면서 침실의 온도가 적도지방 수준으로 올라섰다는 사실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제니퍼는 담요를 걷어차 버리고 어제 발견한 사실에 대한 충격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제 -- 가능성을 부인하며 한달을 보낸 끝에 -- 마침내 제니퍼는 가정용 임신 테스트 기구를 샀었다. 생리를 두 차례나 건너뛴 제니퍼는 아침마다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구역질 증세가 나타나자 테스트 기구를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제니퍼는 확신이 서기 전까 지는, 지난 몇 달 동안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여온 아담을 자극하고 싶지 않 았다. 집에서 한 임신 테스트 결과는 양성으로 나왔으며, 오늘 산부인과에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조심스럽게 침대를 나서며, 무대에서의 그 유연함과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침에는 항상 뻣뻣하고 쑤시는 증세의 고통받는 댄서들을 사람들이 과연 이해하고 있을까 생각해봤다. 다리 근육을 뻗으며 제니퍼는 공포가 엄습하 는 것을 느꼈다. "아, 하느님!" 제니퍼는 혼잣말을 내밷으며 신음을 했다. 만일 정말로 임신이 되었다면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한단 말인가? 제니퍼가 제이슨 콘라드 댄싱팀에서 벌고 있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수입이었고 따로 있다고 해보아야 그녀의 어 머니가 아버지와 아담 모르게 쥐어주는 용돈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어떻게 아기를 키울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테스트 결과가 잘못된 것인지도 몰라. 제니퍼는 피임약 다음으로 강력한 피임기구라고 일컬어지는 IUD(intrauterine device : 자궁내에 넣어둠으로써 임신을 방지하는 피임기구)를 사용하


고 있었다. 어쨌든 닥터 반데르머가 이 긴장된 상태의 결말을 지어주겠지. 제니퍼는 그 의사가 자기를 꽉 찬 스케줄에 억지로 넣어준 이유가 단지 아 담이 의대생이라는 것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니퍼는 어머니에게서 설물받은 소니 시계 라디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담은 점점 제니퍼 부모들의 호의, 아니면 그의 표현방식대로 하자면 간섭 에 민감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제니퍼는 이 선물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원인이 실제로는 그의 아 버지의 비정함 때문이었다고 제니퍼는 추측하고 있었다. 아담의 아버지 데 이빗 숀버그 박사가 아담과 그녀의 결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아 담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자 그의 상속권을 박탈해버렸다는 것을 제니퍼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 늙은 의사가 알아서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나름대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내키 지 않는듯이 뻣뻣한 관절을 주욱 뻗은 뒤, 제니퍼는 윤기흐르는 긴 갈색 머 리를 빗질하며 자신의 불안감 심리상태가 얼굴과 눈동자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지 주의깊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벌써부터 아담의 감정을 자극할 필 요는 없었다. 억지로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니퍼는 아담이 열번째로 발표문을 연 습하고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 "혼자 중얼거리는 게 치매(Dementia : 뇌의 이상으로 인한 지능저하 연상) 의 초기증상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니퍼가 빈정거렸다. "역시 똑똑해! 잠자는 공주님이 정오까지는 사고능력을 회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발표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 제니퍼가 팔을 감고 아담의 얼굴을 향해 입술을 가져가며 물었다. "요구한 대로 15 분 길이까지 줄여놓았다. 그 이상은 해놓은 게 없어." 그가 고개를 숙이며 제니퍼에게 키스했다. "아담!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저기 말이죠. 그 발표문을 내앞에서 한번 읽어보는 게 어때요?" 제니퍼는 커피를 잔에 따른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자는 무슨 병인가요?" "가장 최근 진단에 의하면 만발성운동장애(Tardive Dyskinesia)로 보이는 데." "도대체 그게 어떤 병인데요?" "무의식적인 행동을 동반하는 신경학적 증상이야. 이것은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특정한 약품과 관련된 것으로......"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있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담 이 발표를 시작한 지 일분도 채 되지 않아 그녀의 마음은 임신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가 있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2 닥터 클라크 반데르머의 사무실은 파크 애비뉴 36 번가에 있었다. 제니퍼는 렉싱턴 로(路)에서 지하철을 타고 33 번가에서 내려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제복을 입은 경비원이 정문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빌딩으로 들어갔 다. 사무실로 통하는 입구는 정문 오른쪽에 있었다. 제니퍼는 문을 열고 들 어섰다. 희미한 알코올 냄새가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되었다. 특히 이번 방문은 자신이 임신 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제니퍼는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따라 걸어 내려가며 문에 붙어 있는 금색 푯말들을 읽었다. 치과 두 곳과 소아과 한 곳을 지나친 후 산부인과 클리닉 이라고 쓰인 문 앞에 다다랐다. 그 아래쪽에는 이름들이 쭉 적혀 있었는데, 클라크 반데르머의 이름은 두번째에 올라 있었다. 제니퍼는 소호의 중고품 시장에서 35 달러를 주고 구입한 코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코트 속에는 어머니가 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사준 캘빈클라인 블 라우스를 깔끔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제니퍼는 사무실이 이전에 찾아왔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입구 맞은편의 유리창 뒤에 접수 직원이 앉아 있었다. 개기실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니퍼는 애써 세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열 두어 명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말쑥한 옷차림을 한 채로 책을 읽 고 있었다. 접수를 받은 창구의 계원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자기로서는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니퍼는 창문에 가까운 쪽 의자를 택해 앉았다. 그리 고는 커피 테이블에서 뉴요커지 최근호를 펼쳐들고 좀 읽어보려 하였으나, 아담의 반응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시간 15 분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제니퍼의 이름을 불렀다. 제니퍼는 간 호사를 따라 진찰실로 들어갔다. "옷을 모두 벗으시고 이걸 입으세요." 간호사는 제니퍼에게 종이로 된 옷을 건네주었다. "잠시 후에 제가 다시 오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곧 들어오실 거예요." 제니퍼가 미처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간호사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10 평방피트 정도 넓이의 진찰실은 한쪽이 커튼으로 막혀 있었으며 오른쪽 에 또 다른 문이 나 있었다. 쓰레기통의 휴지는 꽉 차서 넘쳐버릴 것만 같 았다. 방에 있는 기재들로는 등자(Stirrup : 산부인과 진찰대의 끝에 달려 있는 것으로 진찰시 발을 올려놓는 곳)가 달린 진찰대, 간이 옷장, 그리고 싱크대가 있었다. 결코 마음을 편하게 해주지 못하는 방이었다. 제니퍼는 닥터 반데르머의 무례해 보일 정도의 무뚝뚝한 성격을 떠올렸다. 아담은 그 가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라는 사실 때문에 제니퍼를 이곳으로 보냈지만, ' 최고'라는 것에 환자 머리맡에서의 매너에 대한 평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았다. 간혹사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제니퍼는 서두르기로 했다.


코트의 가방을 바닥에 놓아두고 나머지 옷들을 옷장에 챙겨 넣었다. 벌거벗 은 채 제니퍼는 종이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한참을 궁리해야 했다. 머 리가 앞쪽의 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뒤쪽인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앞쪽을 선택했다. 이제 그녀는 다음 행동을 어떻게 취해야 할 지 망설이기 시작했다. 진찰대에 누워 있어야 하나 아니면 서 있어야 하나? 그녀의 발이 타일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로 차가워져 있었다. 결국 제 니퍼는 진찰대 위로 몸을 얹어 한쪽 구석에 앉았다. 잠시 후 간호사가 서둘러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밝은 어조로, 그러나 서두르는 듯이 말했다. "갈수록 일이 많아지는 것만 같아요. 새로 베이비붐이라도 일어났나 봐요. " 그녀는 재빠르게 채중과 혈압을 측정한 뒤 소변검사를 위해 제니퍼를 화장 실로 보냈다. 제니퍼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닥터 반데르머가 도착해 기다 리고 있었다. 제니퍼는 언제나 잘생긴 산부인과 의사들을 보면 괜한 경계 심리가 생겼었 는데 반데르머 역시 그런 기분을 되살리게 했다. 그는 정말 의사라고 하기 보다 의사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큰 키에 관자놀이 부분에서 은빛 으로 변하는 짙은 검은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얼굴은 날카로운 턱과 곧은 입을 가진 사각형 모양이었다. 반데르머는 코 끝에 걸친 독서용 안경 너머 로 제니퍼를 바라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가 대화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의 푸른 눈이 제니퍼의 얼굴과 차트를 휙 지나갔다. 간호사는 문을 닫은 뒤 싱크대 옆에 놓인 스테인레스 스틸 용기를 챙기느라 바빴다. "아, 숀버그 부인이시군요. 의대 3 학년인 아담 숀버그의 부인되는." 제니퍼는 반데르머가 한 말이 질문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었으나 고 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아담의 아내라는 말을 해주었다. "지금은 아기를 가질 만한 적당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숀버그 부 인." 닥터 반데르머가 말했다. 제니퍼는 그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만일 자신이 벌거벗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에게 대단히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제니퍼는 오히려 방어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임신이 아니기를 바래요. 그래서 1 년 전에 박사님이 IUD 를 넣어주셨잖아 요." "IUD 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직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다니요. 확실히 모른단 말인가요?" "오늘 아침에 점검을 해보았어요. 연결줄이 그대로 있던 걸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데르머는 제니퍼가 결코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 않았 음을 암시했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독서용 안경을 벗어들었다. "작년에 기록한 병력에 보면 태어나서 몇 주 만에 사망한 동생이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래요. 몽고증(Mongolism :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선천성 질환으로 유전


성 질환은 아님)이었어요."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서른 여섯쯤 되었을 거예요." "그걸 확인해보셔야 합니다." 닥터 반데르머는 분노를 가볍게 억누르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확실한 나이를 알아보세요. 그 기록이 차트에 적혀 있어야 합니다." 펜을 내려놓은 후, 반데르머는 청진기를 꺼내 빠르고 면밀하게 제니퍼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제니퍼의 눈과 귀를 들여다본 뒤 가슴과 심장의 박동을 청진하고 무릎과 발목을 두들겨보는 등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진찰을 하는 동안 반데르머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제니퍼는 마치 자신 이 아주 노련한 푸줏간 주인의 손 아래 놓인 고깃덩어리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니퍼는 반데르머가 뛰어난 의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좀더 따뜩한 태도를 원하고 있었다. 진찰을 마치자, 반데르머는 의자에 앉아 진찰 소견을 빠른 속도로 차트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제니퍼의 월경주기와 마지막으로 있 었던 때가 언제인지를 물어보았다. 제니퍼가 미처 질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반데르머는 그녀를 눕도록 지시한 뒤 골반쪽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긴장을 푸세요." 닥터 반데르머는 환자가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 달은 듯이 말했다. 제니퍼는 어떤 물체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노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고통은 전혀 없었 으며 단지 언짢은 팽만감이 느껴질 분이었다. 닥터 반데르머가 간호사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다.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고 간호사가 방을 나갔다. 반데르머가 몸을 일으켰고 제니퍼의 시야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IUD 는 제자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좀 처진 것 같군요. 제거하는 게 좋겠 는데요." "어려운 건가요?" "아주 간단해요. 낸시가 기구들을 가지러 갔습니다. 몇 초밖에 거리지 않 는 일이에요." 낸시가 무언가를 가져왔으나 제니퍼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날카로운 고 통이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닥터 반데르머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나선형의 플라스틱을 들고 일어섰다. "임신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책상에 앉아 차트에 새로운 소견을 적어나갔다. 제니퍼는 가정용 임신 테스트가 양성으로 나왔을 때 느꼈던 공포감을 다시 한번 체험하고 있었다. "확실한가요?" 제니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닥터 반데르머는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 았다. "검사실의 결과를 봐야 정확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확실합니다." 낸시는 채취물이 담긴 시험관에 라벨을 모두 붙이고 나서 제니퍼가 등자에 서 발을 떼는 걸 도왔다. 제니퍼는 몸을 일으켜 진찰대 한쪽 구석에 엉덩이 를 붙이고 앉았다. "다른 잘못된 것은 없나요?"


제니퍼가 물었다. "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닥터 반데르머가 확언했다. 그는 차트 작성을 마치고 제니퍼를 향해 둘러 앉았다. 그의 표정은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계속 무표정했 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설명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니퍼가 손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물었다. "물론이지요. 낸시 구엔테르 양이 당신의 담당 간호사가 될 겁니다." 닥터 반데르머가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낸시 양이 모든 문제들을 상담해 드릴 겁니다. 저는 처음 여섯 달 동안은 한 달 간격으로 다음에는 산달 전까지 2 주 간격으로, 마지막 기간에는 특별 한 사정이 없는 한 1 주 간격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닥터 벤데르머가 몸을 일으켜 더날 준비를 했다. "제가 올 때마다 선생님을 뵐 수 있나요?" "대개 그렇지요. 경우에 따라서 제가 분만실에 들어가고 없을 수도 있습니 다. 그럴 때는 제 동료의사나 낸시가 보게 되지요. 어떤 경우에라도 결과를 제가 직접 보고받게 될 겁니다. 다른 질문이 있으신지요?" 제니퍼는 물어볼 것이 너무도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종잡을 수 가 없었다. 자신의 삶이 반족으로 갈라져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닥터 반데 르머는 진찰이 끝났으니 서둘러 나가야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제가 분만을 할 때는 어떤가요? 정기 진찰 때 다른 사람이 보게 되는 건 괜찮지만, 분만에 관해서라면 좀 다르게 생각되는데요. 제 예정일 근처에 휴가를 계확하거나 하시진 않겠지요?" "숀버그 부인." 닥터 반데르머가 입을 열었다. "난 지난 5 년 동안 휴가라는 걸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가끔 학회에 참석 하기도 하고 두 달 후에는 세미나에서 강의를 맡도록 되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출산 예정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들입니다. 이제 더이 상 궁금한 게 없으시면 낸시가 대신 돌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만 더요. 제 동생에 관해서 물어보셨는데요. 어머니가 병이 있는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건가요? 나도 같은 경우를 당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닥터 반데르머는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어머님을 담당하셨던 의사의 이름을 낸시에게 남겨주시면 저희가 자세한 것을 전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동안 당신에게 간단한 염색체 검사를 실시 하려고 합니다만 절대로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양수 검사는 하지 않으실 건가요?" "현재 상황에서 그런 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필요하다고 해도 1 6 주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그만 실례해야겠군요. 한 달 뒤에 다시 뵙지요." "낙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흥분된 목소리로 제니퍼가 물었다. 그녀는 닥터 반데르머가 떠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만일 아이를 낳지 않기로 저희가 결정하게 된다면, 낙태수술 받는 것은 쉬울까요?" 닥터 반데르머는 문 손잡이를 노혹 다시 제니퍼를 향해 다가섰다. "낙태를 생각하고 계셨다면 저를 찾아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전 수술을 원한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제니퍼가 그의 빛나는 눈동자에 위축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까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갖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란 말을 한 것뿐이예요. 전 아직 아담에게 이야기를 전하지도 못했고 또 그 사람이 어 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겠어요. 우리는 제 수입에 의존해서 살고 있거든요." "의료적인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낙태수술은 안 합니다."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데르머는 낙태 문제에 대해 완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 일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전 무용수예요.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요?" "낸시가 그런 문제를 상담해드릴 겁니다." 닥터 반데르머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낸시가 나보다 그런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요. 자, 이제 다른 문제 가 없으시다면......" 닥터 반데르머가 진찰대로부터 멀어져갔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아침마다 구역질 증상이 있는데요. 그건 정상적인 건 가요?" "네." 닥터 반데르머가 진찰실의 문을 열어젖히며 대답했다. "그런 구역질은 임산부들의 절반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낸시가 식이요법을 통해서 증상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설명해드릴 겁니다." "약을 먹을 필요는 없나요?" "산모의 영양상태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심각하지 않는 이상 구토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쓰지는 않습니다. 그럼 한 달 뒤에 뵙겠습니다." 반데르머는 제니퍼가 ���음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문 밖으로 서둘러 나가 버렸다. 진찰실에서 제니퍼와 낸시만 남겨진 채 문 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식이요법은 임신 기간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요." 낸시가 제니퍼에게 인쇄물 몇 장을 넘겨주며 말했다. 제니퍼는 한숨을 내 쉬며 닫혀버린 문에서 시선을 떼 손에 들린 종이 위로 가져갔다. 그녀의 마 음은 온갖 갈등으로 송요돌이치고 있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3


아담은 12 번가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걷 기 시작했다. 7 시 30 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있 었다. 이제 반 블럭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가진 우산의 상태가 좋지 않았 기 때문에 아담은 우산이 바람에 뒤집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의 몸 은 싸늘하게 젖어 있었으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대단히 지쳐 있는 상 태였다. 그렇게도 중요했던 발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닥터 노튼은 두 번 이나 그의 문법적인 실수를 지적하였고 그 때문에 아담의 기억이 끊겨버렸 던 것이다. 결국, 아담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미처 소개하기도 전에 발표를 끝내야 했다. 끝날 무렵에 닥터 노튼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수석 레 지던트에게 다른 환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아담은 의사의 손이 모자라는 응급실로 호출되어 자실 미수 소녀의 위장을 세척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런 일이 전혀 경험이 없 었던 아담은 소녀의 구토물을 가슴에 뒤집어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만으 로도 충분치 않았던지, 실습이 끝나기 바로 15 분 전에 아주 복잡한 52 세 췌 자염 환자를 맡게 되었다. 그 환자를 보느라 아담은 이토록 늦게 집에 돌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져나온 환기구가 연결된 골목을 지나며 아담은 보 건국이 일주일에 세 차례씩 법석을 떨며 비우곤 하던 스레기통들이 즐비하 게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쓰레기통이 모두 꽉 차 있었고, 두 마 리의 앙상한 고양이가 비바람을 무릅쓰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아담은 아파트의 문을 등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서서 고물우산을 접었다. 잠시 동안 고풍스런 로비의 타일바닥에 물을 떨어뜨린 채 가만히 서 있었 다. 그리고 나서 안쪽 문을 따고 그의 방이 있는 3 층을 향해 계단을 걸어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 첫번째 자물쇠에 열쇠를 꽂으면서 동 시에 초인종을 눌렀다. 지난 1 년 동안 이곳에서 살림을 꾸려오는 동안 두 번이나 강도가 들었었지만 잃어버린 물건은 전혀 없었다. 강도들은 낡은 가 구들을 보는 순간 자신들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니퍼!" 아담이 문을 열며 소리쳤다. "보ㅜ엌에 있어요. 곧 나갈게요." 아담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병원실습 시간이 항상 불규칙했기 때문에 제니 퍼는 그가 집에 올 때까지 저녁식사를 미루는 게 보통이었다. 향긋한 냄새 에 코를 킁킁대며, 아담은 침실로 들어가 자켓을 벗었다. 거실로 돌아왔을 때 제니퍼가 그를 맞이했다. 아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얼핏 보기에 제니퍼 는 에이프런만 두른 채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드싱 보였다. 벌거벗은 다 리가 에이프런의 끝에서부터 높은 뒤축의 슬리퍼까지 뻗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뒤로 빗어 넘긴채 빗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달걀형 얼구링 속으로부 터 광채를 발하는 듯이 보였다. 팔을 들어올린 뒤 고전 발레의 동작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임벼, 제니퍼는 천천히 한바퀴를 돌았다. 그녀가 도는 동안 에이프런 밑에 숨겨져 있던 레 이스가 달린 라벤더빛 란제리가 아담의 눈에 들어왔다. 아담이 미소를 지었다. 열정적인 자세로 그는 에이프런을 벗겨내려고 손을


뻗었다. "어머, 안돼요!" 제니퍼가 그의 손길을 피하며 놀렸다. "더 잽싸게 해야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완전하 ㄴ여자가 되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중이라구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구했지?" "이건 란제리라고 하는 거예요." 제니퍼는 에이프런의 앞부분을 살작 들어올리고 다시 한번 회전을 시도했 다. "오늘 오후에 본위트에서 샀지요." "웬 바람이 불어서?" 아담은 대체 그 물거느이 가격이 얼마나 나가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아 담으로서는 제니퍼가 사고 싶어 하는 것을 사지 못하도록 막고 싶지는 않았 지만 그들 살림의 수지를 맞추는 일에 있어서는 항상 주의를 필요로 했다. 제니퍼가 춤동작을 멈추었다. "전 그저 당신에게 매력적이고 섹시하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에요." "지금보다 더 매력저기옥 섹시해진다면 난 절대로 의대 과정을 마칠 수 없 을 거야. 그런 요란한 걸 입고 나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구. 그냥 그대로도 당신은 충분히 섹시해." "마음에 안 들어하는군요." 제니퍼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아냐, 좋아." 아담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단지 그런 걸 입을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말을 한 거야." "정말 맘에 드세요?" 아담은 자신이 살얼음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멋져. 꼭 플레이보이 지 모델을 보는 기분이야. 아니지, 펜트하우스 지 모델 같아." 제니퍼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래요? 곡 그렇게 보이고 싶었어요. 자, 이제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 세요. 당신이 나오시면 제가 저녁을 대접해드리고 왕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드리겠어요. 어서요!" 제니퍼는 억지로 아담을 화장실로 몰아넣었다. 아담이 미처 무슨말을 꺼내 기도 전에, 제니퍼는 그의 면전에서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샤워를 마친 뒤 아담은 거실의 모습이 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테이블에 부엌으로부터 옮겨져 저녁식사가 준비되고 있었고 빈 포도주병 두 개에 꽃 힌 양초가 유일한 조명으로서 식기들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식 기 세트가 두 종류밖에 없었는데 각각 결혼일과 첫 결혼기념일에 제니퍼의 부모가 선물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항상 호일에 포장된 채로 선반에 놓여 있었다. 아듬은 부엌으로 건너가 문에 몸을 기대었다. 뒤축이 높은 슬리퍼가 무척 불펀해 보였지만 제니퍼는 열정적인 태도로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담


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엌을 비트러리며 왔다갔다 하는 여인이 그가 알던 제니퍼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제니퍼는 아담의 존재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담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니퍼,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제니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단지의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을 휘젓기 시작했다. 아담은 제니퍼가 옆에 던져놓은 국장을 보고 그것이 야생 쌀요리 라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담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그는 조리대 위에서 식혀지고 있는 오리구이요이를 발견했 다. "제니퍼!" 아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제니퍼는 몸을 돌려 아담의 팔에 포도주병과 코르크 따개를 안겨주었다. 병과 따개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제니퍼가 주는 대로 받아 들고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전 지금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에요."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포도주병이나 다두세요." 놀란 채로, 아담은 포도주병을 거실로 가져가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포도 주를 잔에 따른 뒤 촛불이 있는 쪽으로 잔을 들었다. 포도주는 깊고 풍부한 루비빛을 띠고 있었다. 아담이 미처 맛을 보기도 전에 제니퍼가 그를 부엌 으로 불러들였다. "여기 외과의사가 필요해요." 제니퍼가 아담에게 커다란 칼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오리를 반으로 자르세요." 아담이 몇 차례 칼질을 시도해보았으나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그 는 젖먹던 힘을 다해 칼을 내리쳤고 오리는 둘로 갈라졌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이야기를 좀 해봐." "그저 당신이 피로를 풀고 멋진 저녁을 즐기시길 바랬어요." "이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냐?" "그래요.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이 있어요. 하지만 만찬을 마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만찬이 시작되었다. 콩요리와 야생 쌀요리가 좀 타버린 듯했지만 오리와 포도주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식사가 계속되면서 아담은 점점 졸음이 쏟 아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흔들며 다시 아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제니 퍼는 촛불 밑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제니퍼는 에이프런을 벗어버 렸고 이제 도발적인 라벤더빛 란제리만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영상이 잠시 흐릿해지는 듯싶더니, 아담은 테이블 옆에 앉은 채로 깜박 잠이 들고 말았 다. "여보, 몸이 안 좋아요?" 제니퍼가 물었다. 그녀는 지금 막 임신 테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중이 었다. "아냐, 괜찮아."


아담은 자신이 잠깐 잠들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 "그래서." 제니퍼가 말을 계속했다. "설명서대로 해보았지요. 그랬더니 결과가 어땠는지 아세요?" "어땠는데?" "양성이었어요." "뭐가 양성이었다 말이야?" 아담은 자신이 중요한 부분을 놓쳐버렸음을 깨달았다. "여보, 지금 내 말을 듣고 있어요?" "물론 듣고 있어. 잠간 내가 딴 생각을 했나 봐. 미안해. 처음부터 다시 얘기해봐." "여보, 난 지금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어요. 어제 집에서 임 신 테스트를 해보았고 오늘 아침에는 닥터 반데르머를 만났아요." 잠시 동안 아담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농담하는 거지." 마참내 그가 입을 열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제니퍼가 아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녀의 가슴이 빠른 속 도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저긍로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농담이 아니라고?" 아담은 지금 자신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진담이란 말이지?" "그래요. 믿어줘요. 진담이에요." 제니퍼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담이 행복한 표정을 지 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신이 가져오는 문제들애ㅔ 관해서라면 나중 에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제니퍼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아담에게로 다가 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여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 제니퍼." 아담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야." 아담이 일어서며 제니퍼의 손길을 떨쳐버리려 했다.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제니퍼는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아담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그녀는 무엇보다도 따뜻한 손기로가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될 거라는 위로의 말 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IUD 는 어떻게 된 거지?" 아담이 물었다. "이상이 있었나 봐요. 아담, 이 아이는 기적으로 얻은 아이예요." 제니퍼는 웃음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아담은 좁은 방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아기라고! 그들이 어떻게 아기 를 기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겨우 물 밖에 머리만 내놓고 사는 형편이 었다. 그들이 진 빛만 해도 벌써 2 만 달러 가까이 되었다. 제니퍼는 묵묵히 아담을 바라보았다. 닥터 반데르머의 사무실을 떠난 이후


계속 아담의 반응이 어떨지만 생각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축하만찬을 준비 했던 것이지만 이제 식사는 끝났고 현실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신은 임신을 했고 남편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있었다. "전부터 아기를 갖기를 원했잖아요." 닳아 헤진 카페트 한가운데 멈추어선 채, 아담은 아내를 마주보았다. "내가 아기를 갖고 싶어하느냐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물론 갖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안 돼. 이제 어떻게 살지? 당신도 곧 춤을 그만두어야 하 잖아. 안 그래?" "조만간에요." "그래. 그럼 말야! 이제 뭘로 돈을 벌지?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서 신문 이라도 돌릴까? 오, 하느님. 이게 무슨 꼴이람.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하지만 제 부모님이 있잖아요." 제니퍼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아담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술이 좁아들었다. "제 부모님이 대해서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아 이가 생긴 이상 문제가 다르잖아요. 그분들은 도움을 베푸는 데 주저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 물론이지!" 아담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니퍼가 말을 계속했다. "오늘 오후에 집에 가서 말씀을 드렸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잉글우드에 있 는 그분들 저택에서 사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얼마나 좋아요. 아주 큰 집이에요. 그리고 내가 춤을 다시 시작하거나 당신이 레지던트 과정을 시작할 때 그 집을 나오면 되잖아요." 아담이 눈을 감더니 주먹을 휘둘러 머리를 쳤다.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엄마는 우리가 가면 아주 반가워 하실 거예요. 전에 아기를 잃으신 일이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걱정이 보통이 아니에요." "그건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아담이 말을 가로챘다. "그분이 30 대 후반에 아이를 낳으시려 했기 깨둠넹 다운증후군(몽고증)에 걸린 아이가 태어난 거야." "엄마도 그건 알고 계세요. 하지만 아는 거랑 느끼는 건 다르잖아요. 아담 !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에요. 거기로 가면 집도 충분히 넓고, 당신은 다락 방을 공부방으로 슬 수도 있어요." "안 돼!" 아담이 소리쳤다. "고마운 일이지만 당신의 부모로부터 적선을 받을 수는 없어. 그분들은 벌 써 우리 생활에 충분히 간섭을 했어. 이 쓰레기장 같은 집에 있는 것들 모 두가 당신 부모님이 놓가 간 거잖아." 그가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니퍼는 불안한 느낌 속에서도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종종 아 담은 짜증날 정도로 완고하거나 무심한 태도를 보일 때가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시작된 때부터 제니퍼 부모의 관심에 대한 아담의 거부감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제니퍼로서는 아담의 트겹ㄹ한 민감성을 잘 알고 있었 기 때문에 항상 아담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여왔지만, 이제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된 이상 그 태도는 자기 중심적인 것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내 부모님들은 간섭을 해온 게 아니에요. 이제는 내 부모님들이 도우려고 할 때마다 화를 내는 당신의 그 자존심을 조절할 필요가 있어요. 지금 우리 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라구요." "당신이 뭐라고 하든, 그건 간섭이었어. 그리고 난 그런 걸 절대 거부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말이야!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을 해야 해." "좋아요." 제니퍼가 맞받았다. "내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당신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 세요. 그분도 뭔가 해야 할 때가 아닌가요?" 아담이 걸음을 멈추고 제니퍼를 바라보았다. "일자리를 구해보겠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당신이 어떻게요? 일어나서 공부하고 병원에 가는 것 말고 무슨 짬이 있 어요?" "휴학으 하면 되잖아." 제니퍼의 입이 벌어졌다. "휴학은 안 돼요. 내가 다른 일자리를 구해보겠어요." "그래? 무슨 일자리를? 술집 웨이트레스? 진정하라고 제니퍼. 아이를 가진 채로 일하게 할 수는 없어." "그럼 아이를 떼지요, 뭐." 제니퍼가 반항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담은 몸을 돌려 제니퍼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으 ㄹ들 어올려 집게손가락을 제니퍼의 코 앞에 갖다댔다. "아이를 버릴 순 없어.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도 마." "그럼 아버지에게 가보세요." 아담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아이를 갖지만 않았다면 아무한테도 갈 필요가 없는 것 아냐." 그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 제니퍼의 뱜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건 당신과 내가 함께 한 일이에요. 그걸 몰라요? 나 혼자 한 일이 아니 라구요." 제니퍼는 말을 마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당신이 내게 아기 문제 같은 건 걱정말라고 했잖아." 아담은 눈물 따위는 상관 안 한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햇잖아. 그래, 그래서 일 한번 참 잘해 놨군!" 제니퍼는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훌쩍이면서 침실로 뛰어나 문을 세차게 닫았다. 잠시 동안 아담은 제니퍼가 사라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속이 메스거워짐을 느꼈다. 방금 마신 포도주 때문에 입이 무척 건조해져


있었다. 그래서 먹다 남긴 것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테이블 위를 바 라보았다. 부엌 안은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그곳 역시 어떤 상태인지 아 담은 잘 알고 있었다. 아파트 안 전체가 엉망이었고 그 풍경은 마치 자기 인생의 상징처럼 두렵게 보였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4 닥터 로렌스 폴리의 차가 길고 구불구불한 주차장 진입로로 들어섰다. 그 가 주차장 문의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거대한 석조 저택은 아직 시야에 들 어오지 않고 있었다. 느릅나무들이 심어진 정원을 통과한 뒤에야 밤하늘을 배경으로 솟은 탑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1929 년에 전재산을 다 날리 고 코끼리 사냥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해괴한 백만장자가 20 세기 초에 세운 신고딕 양식의 성이었다. 위층의 응접실에 앉아 있던 로라 폴리는 재규어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발 아래에서는 살구빛 털을 가진 푸들 진저가 머리를 드록 마치 자기가 집 지키는 세퍼트라도 된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로라는 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밀어놓고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10 시 10 분 전이었고 대단히 화가 나 있었다. 8 시에 맞추어 저녁을 준비해놓았지 만 래리(로렌스의 애칭)는 늦겠다는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았다. 이번 달에 들어 이런 일이 벌써 여섯번째였다. 매일 아침 로라는 백 번도 넘게, 늦을 경우에는 전화를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남편에게 부탁하는 말이라곤 그 게 전부였다. 로라도 의사들이 급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만, 전화거는 일은 1 분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소파에 앉은 채로, 로라는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 해보았다. 그대로 안장 래리가 손수 저녁을 차려 먹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 었으나, 그건 이미 써먹은 방법이었고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로라의 기분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 런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4 개월전 의학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후 부터 지금처럼 차갑고 몰인정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부엌으로부터 뒷계단을 통해 잡음이 들려왔다. 래리가 뭔가 먹을 것을 찾 고 있는 모양이었다. 로라는 쿠션에서 몸을 일으키고 발가락을 슬리퍼에 끼 워넣었다. 그리고 나서 금테가 둘리워진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56 세의 나이치고는 썩 괜찮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난 여덟 주 도 안 래리는 로라에게 전혀 성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의 학문적인 열정에 다시 불이 붙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까? 래리와 반데르머가 지금처럼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 산과(Obstetrics : 산 부인과는 임신과 관계되는 것을 다루는 산과와 여성생식기 질환을 다루는


부인과로 구분되며 분만을 맡아야 하는 산과가 부인과보다 아무래도 피곤하 고 힘들다)보다는 주로 부인과(Gynecology) 진료에 치중할 수 있게 되기에 는 20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 모든 것을 던져버린 것이었다. 그 의학 모임에 다녀온 이후에, 래리는 침착한 어조로 산부인과 합동 클리 닉을 그만두로 줄리안 클리닉에서 봉급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로 라는 망연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줄리안 클리닉에 몸을 담은 이후, 그의 작업량과 봉금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 고 래리는 점점 산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섬뜩한 생각이 로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래리는 주의력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라는 래리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는 것이 아닌 가 궁금해 하였다. 이제 남편과 직접 맞부딪쳐볼 때가 되었음을 확신하며, 로라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뒷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저가 그녀의 발끝에 쫓아왔다. 래리는 키친 카운터에 안장 커다란 샌드위치를 씹으며 의학잡지를 보고 있 었다. 그의 자켓은 의자 뒤에 걸쳐져 있었다. 로라가 들어서자 래리는 시선 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호기심에 찬 듯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최근 몇 주 동안 이런 현상은 점차 심해져가고 있었다. "안녕." 래리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인사했다. 로라는 계단 아래쪽에 그대로 선 채, 화가 북받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남편은 잠시 눈길을 주는 듯하더니, 다시 잡지로 시선을 롬겨버렸다. "왜 전화를 안 했어요?" 남편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로라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래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아내에게 돌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지금 당신에게 묻고 있잖아요.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늦게 되면 전화를 해달라고 스무 번도 넘게 당부했을 텐데요." 래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려요?" 로라는 좀더 가까이 다가서서 남편의 눈을 바라다보았다. 동공이 커다랗게 열려 있었으며,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봐요." 로라는 래리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억하겠어요? 나 당신 아내예요." 래리의 동공이 오므라들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이제야 아내를 알아보겠 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 못해서 미안해. 이웃사람들을 위해서 저녁진료를 편성했는데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거든." "래리. 당신 정말 괜찮아요? 무료진료를 해주기 위해서 9 시까지 병원에 남 아 있었단 말이예요?" "아무 문제도 없어. 난 괜찮아. 오늘은 정말 뿌듯한 날이었어. 성병 환자 세 사람을 찾아내어 치료해줬지."


"대단하시군요." 로라는 두 손을 허공으로 던져올리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래리를 바라보며 가쁘게 숨을 쉬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뭔가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당신 아 니면 나 둘 중에 하나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요." "난 괜찮은데."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전과 달라졌다는 걸 아세요 ? 몇 주일 동안 한잠도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 보인다구요. 그동안 쌓아올 린 진료기반을 몽땅 포기해버린다는 결정도 미친 짓이었어요. 미안한 말이 지만, 인생을 바쳐 해온 일을 그렇게 포기한다는 건 미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 거예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얼마씩 받고 치료해주는 짓은 이제 진력이 났어." 래리가 계속 했다. "줄리안 클리닉에서 일하는 게 훨씬 즐겁다구. 그리고 거기에선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가 있어." "그건 아주 훌륭한 생각이예요. 하지만 문제는 당신에게는 가족이 있다는 거예요. 당신 이름과 딸이 지금 학부과정에 있고 또 다른 딸은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등록금이 얼마나 되는지 새삼 들먹일 필요는 없겠죠. 10 년 전에 당신이 우겨서 산 이 공룡 같은 집도 돈을 얼마나 잡아먹고 있는지 아 세요? 이제 아이들도 다 떠나고 없는데 방이 왜 서른 개나 필요해요? 당신 이 줄리안 클리닉에서 벌어오는 돈은 음식값밖에 안 된다구요." "그럼 집을 팔자구." 해리가 무심하게 말했다. "집을 팔 수도 있지요. 하지만 아이들 학비를 대기엔 저축해놓은 돈이 너 무 부족해요. 래리, 합동 클리닉으로 다시 돌아가셔야 해요." "이미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렸는걸." "클라크 반데므러 씨는 당신을 환영할 거예요. 그 사람은 오랜 동료잖아 요. 당신이 실수를 했다고 말하세요. 당신의 직업환경을 바꾸고 싶다고 아 이들이 학교를 마친 다음에나 하시라구요." 로라는 말을 멈추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래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로라는 다시 일어서서 남편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래리는 미동도 않은 채 마치 명상에라도 잠긴 듯했다. "래리." 로라는 남편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남편의 몸이 이상하리만큼 굳어 있었다. 다시 래리의 깜빡이더니 아내에게 향했다. "래리. 당신 잠간 정신을 잃었었다는 거 알아요?" 로라는 손을 남편의 어깨에 얹은 채, 그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폈다. "아니." 래리가 대답했다. "난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 좀 도움을 청해야겠어요. 클라크 반데르머 씨에게 연락해


서 당신을 좀 봐달라고 해야겠어요. 바로 세 집 건너 살고 있잖아요. 그분 이라면 꺼리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내친 김에 합동 클리닉으로 돌아가는 문제도 상의하고요." 래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동공이 다시 커졌고 시선은 다시 초점을 잃고 있었다. 로라는 남편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 뒤, 부엌의 전화기 로 다가갔다. 로라의 불안감이 점점 커져가ㄱ 있었다. 코르크로 만든 게시 판에 걸린 전화번호부에서 반데르머의 번호를 확인한 후 다이얼을 돌리려는 순간 래리의 손이 수화기를 가로챘다. 몇달 만에 처음으로 멍한 표정이 사 라져 있었다. 대신 이빨을 드러내며 얼굴을 기묘하게 찡그려 보였다. 로라는 비명을 질렀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터져나오는 놀라움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로라는 뒤로 물러나며, 의자 하나를 쓰러뜨렸다. 구 가 마구 짖어대며 으르렁거렸다. 얼굴에 나타난 끔직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래리는 로라의 비명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고통에 찬 느린 동작으로 머리의 양 옆에 움켜쥐고 괴로운 신음을 입술 사이로 흘 렸다. 로라는 공포에 질린 채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위층에 올라서서, 그녀는 응접실을 지나 복도를 계속 달렸다. 이 거대한 저택은 H 자 모양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들의 침실은 부엌 반대편 쪽의 거실 너머에 있었다. 침실로 들어선 후, 로라는 자물쇠를 걸었다. 그리고는 침대로 다가가 모퉁 이에 앉았다.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또 다른 전화번호부가 놓여 있었다. 로라는 V 자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반데르머 의 전화번호 위에 손가락을 짚은 채, 수화기를 귀에 갖다대고 다이얼을 돌 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화가 채 연결되기도 전에 아래층의 수화기가 들리 는 소리가 났다. "로라." 래리락 차갑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어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요. 다른 사람을 부르는 건 원치 않아." 로라는 두려움에 휩싸여 목구멍이 죄어드는 듯했다. 수화기를 들고 있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딸각 소리와 함께 반데르머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쪽에서 수화기 드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로 라는 허망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래리가 전화선을 끊은 게 틀림 없었다. "오, 하느님!" 로라가 혼잣말로 속삭였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마음을 가다듬으 려 애썼다. 흥분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생각을 해 야 했다. 지금 자신에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 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침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웃집의 불이 켜져 있었다. 만일 창문을 열어 소시를 지 르고 그걸 누가 듣는다면, 과연 대답을 해줄까? 로라는 자신이 지금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래리 가 말한 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함께 도움을 청하자고 설득하는 게 옳은 일인지도 몰랐다.


문에서 쿵하는 소리에 로라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귀를 기 울이던 그녀는 진저가 짖어대는 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으로 다 가가 문에 귀를 바짝 대어보았다. 진저가 칭얼대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 다. 급히 자물쇠를 열고 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 순간 문이 활짝 젖혀지면서 로라의 몸이 벽에 가서 부딪쳤다. 래라가 복도에 서 있엇다 진저가 로라에게 다가가 깡총거리며 안아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로라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래리의 얼굴은 여전히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 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래밍턴 12 구경 산탄총이 들려 있었다. 극한 공포감에 휩싸인 채, 로라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은 후 자물쇠를 걸었다. 진저가 따라 들어와 발 밑에서 떨고 있었다. 로 라는 오들거리는 강아지를 안아 올린 후, 뒷걸음질을 치며 문을 주시했다. 화장실 문이 훌륭한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타일 바닥으로 울려퍼지며 문이 조각조각 찢겨져 나갔다. 파편 중 하나가 로라의 얼굴을 맞혔고 강아지는 기어 들어가는 소 리로 짖어대고 있었다. 화장실에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진저를 내려놓고, 로라는 그 문의 걸쇠 를 제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대로 실신해버리려는 순가 문이 열렸고 의상 실로 뛰쳐 들어갔다. 이곳은 다시 침실로 통하게 되어있는 방이었다. 고개 를 돌리자 래리의 손이 산탄총으로 생긴 구멍을 통해 불쑥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침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로라는 래리가 화장실 안으로 사라져 들어가 는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몇 발 앞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 라는 복도를 향해 절력질주하기 시작했다. 반은 뛰고 반은 넘어지다시피 하 며 계단을 내려왔다. 진저가 발끝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로라는 가까스로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이 저택 은 설계한 노인은 대단한 편집광이어서 모든 문을 양쪽에서 걸어잠글 수 있 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엇다. 현관의 옷장 어딘가에 열쇠가 있었지만 지금으 로서는 그것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로라가 가지고 다니는 열쇠는 부엌에 있는 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래리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 으며, 로라는 일층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보통, 그녀는 부엌의 전화기 아래에 지갑을 넣어두곤 했었다. 하지만 그곳 에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뒷문을 열어보았으나, 그것 역시 잠겨 있었다. 공포에 휩싸인 채, 이제 로라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엇다. 래리가 산탄총으 로 화장실 문을 날려버리던 모습이 로라의 가슴을 마구 뛰게 만들었다. 진 저가 그녀의 팔 안으로 뛰어들었고 로라는 강아지를 가슴에 안았다. 래리의 구두 뒷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하실 문을 열고 불을 켠 뒤 안으로 들어서서 문 을 닫았다.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경사진 계단을 내려 가기 시작했다. 지하실에는 출구가 또 하나 있긴 했지만 그것은 자물쇠 대 신 오크 통나무로 빗장이 질려 있었다. 저택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하실을 사용할 일은 여지껏 없었다. 지하실은 먼지와 전 주인이 남기고 간 갖가지 잡동사니들로 꽉 차 있었다. 안은 대단히 비좁았으며 껌벅대는 전구들만이 희미하게 내부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진저를 꼭 끌어안은 채 길을 더듬어가던 로라는 그만 발부리에 뭔 가가 채이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제 출구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순간 지하실의 불이 꺼졌다. 암흑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로라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그 자리에 얼 어붙고 말았다. 심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로라는 왼손 을 앞으로 휘저으며 벽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거친 나무 표면 을 건드렸다. 구르다시피 하며 로라는 벽을 따라걷다가 어떤 방문 앞에 다 다르게 되었다. 뒤쪽에서 래리가 지하실 계단을 내려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래리의 발소리 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불빛이 갑자기 번쩍거렸다. 그가 전등을 가져온 모 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출구를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음을 깨달은 로라는 미친 듯이 숨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잡동사니들과 미로처럼 뻗은 여러 개의 방 들로 봐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로라의 손에 벽에 기대어놓은 창문틀이 잡혔다. 그 옆을 돌아가다가, 그녀의 발이 나무로 된 물체를 걷어찼다. 구 석에 버려진 커다란 나무 상자였다. 상자가 비었는지를 확인한 뒤, 로라는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가 진저 와 함께 몸을 숨겼다. 이곳이 숨기에 적당한 장소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로라가 움직임을 멈추기도 전에 래리가 복도를 따라 걸 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자가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가 비추는 전등의 불빛이 점점 밝게 비치기 시작했다. 래리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로라는 숨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다 했다. 전등의 불빛이 방 안을 비추었고 로라는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진 저가 으르렁거리며 짖시 시작했다. 산탄총이 장전되는 소리에 로라의 심장 은 한 순간 멈추어지는 듯했다. 래리가 상자를 걷어찼고 상자는 거꾸로 뒤 집어졌다. 진저가 짖어대며 바깥으로 달아났다. 로라는 몸의 균형을 바로잡 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5 워싱턴으로 향하는 이스턴 항공사의 셔틀기 안에서 아담은 지난밤 이후 처 음으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제니퍼가 침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뒤, 아담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빅 토리아 풍의 소파 위에서 잠을 청하려 노력했었다. 그는 췌장염에 관한 내 용을 찾아보려고도 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기란 아주 힘들었 다. 제니퍼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결국 끊겨버린다면 그가 의과대학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두 시간가량 선잠을 청하는 동안 새벽이 되고


말았다. 그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그의 담당 인턴에게 오늘은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는 메세지를 남겨놓았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해결책을 얻어내야만 했다. 아담은 창문 밖으로 펼쳐진 뉴저지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기장이 비행기가 들라웨어 강 위를 지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제 워싱턴 까지는 20 분 가량 남은 셈이었다. 8 시 30 분에 비행기가 착륙할 예정이었고, 9 시쯤이면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는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 : 미 국 식품의약국)에 도착하게 될 것이었다. 아버지와의 만남은,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있어서는 전혀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의대 1 학년생이었던 시절의 마지막 만남 이후로 그는 아담 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포기해버렸다. 당시 아담은 그 노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제니퍼와 결혼하고 말겠노라고 선언했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의 회전문으로 들어서면서도, 아담은 여전히 말문을 어떻게 터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담이 아버지의 사 무실을 자주 찾아간 편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혐오감에 찬 표정을 잘 기억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아담이 귀찮은 존재라는 듯이 행동했다. 아담은 모든 면에서 그보다 뛰어났던 형 데이빗과 가족의 귀여움을 한 몸 에 받은 엔렌의 사이에 끼여 태어난 둘재 아들이었다. 데이빗은 대단히 활 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겠노라고 결 심한 아이였다. 아담은 한번도 무엇이 되겠다고 마음을 정해본 적이 없었 다. 한동안 그는 농부가 되면 어떨까 생각한 일이 있긴 했다. 아담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8 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데이빗이 의 대에 다닐 때 함께 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던 때가 기억 속에도 형이라기보 다 아저씨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가 데이빗을 그의 동료 의사들에게 소 개시키러 간 동안 아담은 대기실에 홀로 남겨지곤 했다. 아담은 8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나와 오른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무실 이 커지고 멋있어질수록 비서들은 더 못생겼다. 이 말을 그에게 해준 사람 은 바로 데이빗이었다. 중역들을 위한 사무실 입구에서 머뭇거리며, 아담은 데이빗이 베트남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해 했 다. 당시 전사한 군의관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데이빗은 그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형은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성격이었다. 그 가 전사한 해에 전쟁은 끝났다. 아담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그 사건으로 가족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아담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 달리게 되었고 충격요법(정신병환자에게 시행하는 전기자극요법) 치료를 받 기도 했다. 이제 어머니는 전과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아담의 아버지 는 사고의 충격을 잘 견뎌냈다. 몇 달째 침묵만을 지키던 아버지에게 아담 이 찾아가 의사가 되겠다는 소망을 밝혔을 때, 기뻐하는 표정을 보이기는 커녕 눈물을 흘리며 아담을 외면해버렸다. 아버지의 사무실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선 아담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마가 렛 웨이트롭의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회전의자에 푹 가라앉은 그녀의 살집 은 대단해 보였다. 마가렛은 꽃무늬가 수놓은 뻣뻣한 면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편, 살집이 접혀버린 윗팔뚝과 비교해서, 아래팔은 비교적 날씬 해 보였다.


그러나, 몸무게를 접어두고 생각한다면 썩 깔끔한 용모를 갖고 있었다. 마 가렛은 아담에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은 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 했다. 아담은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악수를 받으며 웃어 보였다. 그들의 사이는 항상 좋은 편이었다. 아담이 기억할 수 없는 시절부터 아버지의 비서직을 맡아온 그녀는 항상 수줍어 하는 태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어딜 갔었어요? 정말 오랜만이예요."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녀가 말했다. "의대생이 시간 한번 낸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버지가 마가렛에게 숨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아담이 그동안 찾 아오지 않은 이유를 분명이 알고 있었다. "아버님은 지금 전화를 받고 계세요. 잠깐이면 될 거예요. 커피나 차라도 하겠어요?" 아담은 고개를 흔들어 보이고는 코트를 놋쇠 옷걸이에 걸었다. 그는 플라 스틱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지는 정부가 결코 편안한 소파 같은 겉치레에 시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는 분 이었다. 사무실 전체가 대단히 검소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닥터 숀버그에게 있어 서 그것은 하나의 철칙이었다. 같은 이유로, 그는 사무실에 할당된 차와 운 전사를 거절해버리기도 했다. 아담은 앉은 채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도무지 아버지를 설득 할 자신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일찍 전화를 걸었을 때, 아버지 는 마치 아담이 돈을 구하러 올 줄 알고 있었다는 투로 거친 태도를 보였었 다. 부저가 울렸다. 마가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아담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마가렛이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아버님은 아직도 데이빗의 죽음을 슬퍼하고 계세요. 그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요. 당신을 사랑하신다구요." "데이빗이 죽은 지 9 년이 지났습니다." 마가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담의 팔을 두들겼다. "그분이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얘기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담은 문을 열고 아버지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잘 가 꾸어진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각형 모양의 널찍한 사무실이었 다. 창문 쪽을 제외한 다른 벽들은 책꽃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으며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오크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양족 옆에는 도 서관을 책상이 각각 직각으로 붙여져 U 자형의 작업공간을 마련해주고 있었 다. 그 한가운데 아담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담과 아버지는 누가 보아도 부자관계임을 짐작할 만큼 닮아 있었다. 닥 터 숀버그 역시 두꺼운 곱슬머리였으며, 다만 그의 머리는 관자놀이 부분에 서 희끗해져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 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키였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5 인치는 작았다. 아담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 닥터 숀버그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제


자리에 가만히 꽂아넣었다. "안녕하세요." 아담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이전보다 많이 늙어 보였다. 그의 이마에는 새로운 주름살들이 많이 생겨 있었다. 닥터 숀버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아담은 아버지의 무겁게 깔린 눈을 바라보며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아버 지의 표정은 아무래도 풀어지기 힘들 것 같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거니?" 닥터 숀버그가 물었다.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아담의 예감이 적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순조롭지 못했 다. "질문 한번 잘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주 안 좋아. 다시 충격요법을 받 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소식으로 너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다. 특히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더 악화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말이다. " "그 여자 이름은 제니퍼입니다, 아버지. 1 년 반이나 지났어요. 이름 정도 는 기억해주시길 바랬는데요. 그리고 어머니의 우울증은 저 때문에 생긴 게 아닙니다. 형의 죽음 때문이었죠."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거야." "그냥 여자가 아니라 제니퍼라구요! 그리고 형이 죽은 지 벌써 9 년이 지났 어요." "9 년이든 10 년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종교에 위배되는 결혼을 하는 게 네 어머니에게 어떤 결과를 미칠지 생각해보았냐?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이 나 해보았냔 말이다. 그리고 난 뭐라고 했니? 의학공부를 막 시작하는 상황 에서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충고했지 않니. 하지만 넌 가족들에 대해선 조 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 네가 원하면 그게 다였다. 하긴, 그래서 원하는 걸 얻긴 했지." 아담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이런 비이성적인 태도앞에서 맞 서 싸울 기력이 없었다. 1 년 반 전의 마지막 만남 때도 노력을 했었지만 아 무런 성과없이 수포로 돌아갔었다.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아담은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요. 아무래도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우리가 서로 재정적인 구 속력을 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전 이제 충분한 시간이 지났고 아버지께 그 걸 말씀드려도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 이제 돈 얘기를 하고 싶다 이거냐!" 손을 위로 흔들어올리며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그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아들을 노려보았다. "네가 만약 그 계집애와 끝끝내 결혼해버린다면 상속권을 박탈해버리겠다 고 분명히 경고를 했었지. 그때 내가 농담한 줄 아니? 2, 3 년이 지나면 없


었던 일로 해줄 줄 알았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 결정을 번복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담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으며 제니 퍼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아버지를 귀찮게 할 필요가 전혀 없음 을 깨달았다. "아담. 이제 너는 스스로 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렸다 할지라도 그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거야. 의학의 길에 지름길이나 타협이란 없는 법이야.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아담은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강의 감사합니다. 언젠가 도움이 될 때가 오겠지요." 닥터 숀버그가 책상을 돌아 걸어왔다. "넌 언제나 잘난 체하는 데는 뭐가 있었지. 하지만 결정에 따르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건 내가 FDA 의 이 부서를 움직이는 방법이기도 하지." 아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마가렛이 어색한 자세로 뒤로 물러 섰다. 그녀는 자신이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아 담은 코트를 향해 걸어갔다. 닥터 숀버그가 그를 따라 대기실로 걸어 나왔 다. "난 내 개인적인 삶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살아왔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했 었고, 이제 너도 그 길을 따라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오늘 정말 감사했 습니다." 아담은 복도 쪽으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버튼을 누른 후,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마가렛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담은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에게서 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없었다. 제니퍼가 아파트 문을 나섰을 때, 하늘은 대단히 찌푸려 있었다. 어느 면 에서 보나 3 월은 뉴욕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달일 것이라고 제니퍼는 생각했 다. 절기상으로는 봄이 시작되는 때였지만 겨울 추위는 여전히 도시를 얼어 붙게 만든 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코트로 몸을 더 세게 감싸안으며, 제니퍼는 7 번가 도로 위를 걷기 시작했 다. 코트 속으로 제니퍼는 리허설에 필요한 무용복과 타이즈와 토시, 그리 고 소매를 잘라버린 회색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사실, 제니퍼는 자신이 춤을 출 수 있게 될는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제이슨에게 임신했 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이슨이 킴과 함께 몇 달을 더 일할 수 있게 허락해주는 것이 제니 퍼의 희망사항이었다. 자신과 아담에게는 돈이 너무나도 절박했고, 아담이 의대를 그만두게 된다는 건 정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으로부 터의 도움을 아담이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7 번가를 걷던 제니퍼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러시아워의 군중들속을 헤집 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선 채, 아담이 아버지에게서 어 떤 대접을 받았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침 제니퍼가 잠에서 깼 을 때, 워싱턴으로 간다는 아담의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늙은 악당


이 도움을 준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될 수 있으리라. 사실 덕터 숀버그가 그 동안 도움을 베풀어왔다면 아담도 제니퍼 부모님들의 손길을 외면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제니퍼는 길을 건너 그리니치 빌리지로 들어섰다. 그리고 몇 분 뒤, 카페 세잔느 입구로 들어가 계단 세 개를 한번에 뛰어내린 후 에칭으로 장식된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안은 곤로와 담배 연기와 커피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 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대었다. 발끝을 올려세우며, 제니퍼는 군중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저만치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캔디 할리였다. 그 옆에 는 한때 제이슨 콘라드 무용단의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경리일을 맡아보고 있는 세릴 테데스코가 앉아 있었다. 흰 점퍼 차림의 세릴은 오늘따라 유난 히 창백해 보였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에 이 세 사람은 항상 한자리에 모 여 커피를 함께 하곤 했다. 제니퍼는 코트를 벗은 다음 커다랗게 돌돌 말아 벽 바로 아래쪽의 바닥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그 위로 옷가방을 던졌다. 제니퍼가 자리를 잡고 앉자 마자 오스트리아인 웨이터 피터가 다가와 보통 때와 같은 걸로 들겠느냐고 물었다. 제니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카푸치노 커피와 버터와 꿀을 바른 크로와상이 그녀의 단골 메뉴였다. 캔디가 제니퍼를 향해 몸을 기대어오며 말했다. "좋은 소식하고 나쁜 소식이 한 가짔기 있어. 뭘 먼저 듣고 싶니?" 제니퍼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은 농담하고 싶은 기분 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릴 역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된듯한 표정으로 에스프레소 커피가 담긴 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제니퍼가 알고 있는 세릴은, 최근에 급격히 늘어난 몸무게 때문에 걱정이 대단한 감상적인 스무 살 소녀였다. 그녀의 높게 솟구친 작은 코와 커다란 눈망울은 장난꾸러기 요정과도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금발 머리는 마 구 헝클어진 채 항상 더러워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캔디는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발 버리를 곱게 땋아 뒤로 늘어뜨 리고 있었다. "좋은 소식을 먼저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제니퍼가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CBS 에서 우리를 위해 특별 프로를 찍겠대. 제이슨 콘라드 무용단은 이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거야." 제니퍼는 흥분된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음은 임신에 대 한 걱정 때문에 먼 곳에 가 있었다. "정말!" 제니퍼는 억지로 열정적인 태도를 짜내고 있었다. "언제 촬영에 들어가니?" "아직 그건 결정이 안 됐어. 하지만 몇 달 안에 쇼를 찍는 건 분명한가 봐." "그래. 그럼 나쁜 소식은 뭐야?" 화제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 제니퍼가 물었다. "나쁜 소식이란 건 말야. 세릴리 임신 4 개월인데 내일 낙태수술을 하기로 했대."


캐디가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제니퍼는 세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릴은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에스 프레소 커피만을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대." 캔디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낙태수술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나한테 털어놓기로 작정한 거야. 그러길 정말 잘했지 뭐니. 세릴을 내 담당의사에게 보냈는데 양수검 사를 해야겠다고 하더구나. 임신한 후로 2 개월 동안이나 약을 써왔다는 거 야. 물론 세릴은 아기를 가진 줄 모르고 있었지." "그래서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데?" "아기가 기형이라고. 유전자에 이상이 있대." "애 아버지는 뭐라고 하는데?" 제니퍼는 세릴에게 이렇게 물은 것을 곧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세릴은 양 손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니퍼가 주위의 테이블을 둘 러보는 동안 캔디는 세릴을 팔로 감싸안았다. 그들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공중시설에서 이만한 프라이버시를 누릴 수 있는 곳은 뉴욕 말고는 없다. 세릴은 지갑에서 휴지를 꺼내 큰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 다. "애 아빠 이름은 폴이라고 해요." 세릴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낙태수술을 한다니까 뭐라 그러던?" 제니퍼가 다시 물었다. 세릴은 눈물을 닦고 휴지에 묻은 마스카라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여기 없어요. 날 버리고 떠났어요." "나쁜 자식 같으니라구. 남자들도 임신을 해봐야 해. 그렇게만 된다면 좀 더 책임감있게 행동할 줄 알게 될 텐데." 캔디가 말햇다. 세릴은 눈물을 다시 닦아내었다. 제니퍼는 세릴이 얼마나 어리석고 연약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릴의 상황과 비 교했을 때, 자기 자신의 문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두려워요. 그동안 아버지에게 소식이 전해질까 봐 입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만일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날 죽이려고 하실 거예요." "그래. 그리고 병원에는 누군가 함께 가주는 게 좋을 텐데." 제니퍼가 경고조로 말했다.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캔디가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낙태수술 전에는 무척 걱정했지만, 막상 받아보니 별거 아니던데. 줄리안 클리닉의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게 예의바르다구. 더군다나 세릴을 맡은 의사는 초일류급이란 말야." "그 사람 이름이 뭔데?" 결코 자신은 닥터 반데르머에 대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 며, 제니퍼가 물었다. "로렌스 폴리. 나도 전에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친구한테 소개를 받았어. " "그 사람, 낙태수술을 많이 맡아 하는 모양이구나."


제니퍼의 말에 캔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큰 도시니까." 제니퍼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들이키며 이 친구들에게 자기 역시 임신했다 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할까 고심하다 세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 다. "내일 나랑 같은 병원을 찾아가는 게 어때. 함께 있어줄 사람이 필요할 텐 데." "정말 그래 주겠어요?" 세릴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너무 서둘지 마세요. 숀버그 부인. 리허설이 있잖아요." 캔디가 그들의 대화를 막았다. 제니퍼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전해줄 소식이 한 가지 있는데 말야. 어제 병원을 찾아갔더니 나도 임신 2 개월 반이래." "어머나, 세상에!" 캔디가 비명을 질렀다. "정말이야. 그리고 이 소식을 제이슨에게 전하면 리허설에 오든지 말든지 상관 않겠다고 하겠지." 캔디와 세릴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세 사람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계산을 마친 다음 스튜디오를 향해 나섰다. 제이슨은 스튜디오에 없었다. 제니퍼는 안도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코트를 벗어 플로어의 구석진 곳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스웨터를 벗은 다음 자신의 몸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벌써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 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담은 병원 건물 일층의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겨울에 비친 자신 의 수척한 얼굴을 흘낏 바라보며, 자신이 무척 지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 게 되었다. 그래, 어쩌면 지친 표정이 학장에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버지와의 만남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아담이 의지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의료 센터의 학부생 대출 제도뿐이었다. 헤진 옷깃을 곧게 잡아당긴 뒤, 그는 가난에 지친 듯한 자신의 모습을 다 시 한번 확인하였다. 이제 용기를 잃어버리기 전에 학장의 사무실로 곧장 가야 했다. 사무실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힌 아담은 학장이 만나줄 여유가 있을지 모르 겠다는 비서의 대답에 실망하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 어갔다가 나온 그녀는 지금 곧 만나주겠다는 대답을 얻어왔다. 문지방을 막 넘어서는 아담을 닥터 마르코비츠는 자리엣 일어서며 맞았다. 그는 짙은 곱슬머리의 작고 땅딸막한 신사였다. 때가 3 월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그의 피부는 잘 그을려져 있었다. 학장이 손을 아담에게로 뻗으며 다가 왔다. 악수를 나누는 동안, 그는 다른 손을 아담의 등으로 돌려 아담을 안 았다. "자리에 앉지 그래." 학장은 자기 책상 맞은편에 있는 검은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앉은 채로


아담은 책상 위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 꼬리표가 붙은 마닐라지 서류가 놓여 잇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이 학장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은 몇 번밖에 없 었지만, 학장은 아담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아담이 기다 리고 있는 동안 아담의 기록을 훑어보았던 게 분명했다. 아담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학장님. 시간을 뺏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 문제가 한가지 생 겨서요." "그렇다면 잘 찾아왔구만." 닥터 마르코비츠의 미소가 아담의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으나, 학장의 인상이 의사라기보다는 정치가 쪽에 가까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담 에게는 벌써 이 만남에서도 아무 속득을 얻을 수 없으리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그는 손이 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책상다리를 한 다음 발목을 움켜잡았다. "제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담은 설명을 시작하며 마르코비츠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 지 지켜보았 다. 변화는 별로 미묘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듯싶더니, 학 장은 미가능 ㄹ찌푸리며 경계한느 듯한 태도로 팔짱을 끼었다. "더이상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지만......" 용기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 아담은 말을 계속했다. "곧 태어날 아기 때문에 저희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 아담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랬군." "난 내과 의사이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거든. 그래서 아기르 받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ㅏ구." 괜찮은 유머였다. "제 아내는 닥터 반데르머가 봐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 최고지. 닥테 반데르머보다 나은 의사를 찾기란 흠들어. 내 두 아들도 그 사람이 받아주었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왼쪽 벽에 거린 커다란 벽시계의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닥터 마르코비츠가 앞으로 몸을 내밀더니 책상 위에 놓인 마닐라지를 집어들었다. 그는 잠시 기록을 훑어 본 뒤 고개를 들었다. "아담. 지금이 아이를 가지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계획된 게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학자이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런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피임이 실패한 겁니다. 어쨌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대처할 방 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저는 추가적으로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하부과정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게 된 겁니다." "임신을 중절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고려해보지 않았나?" "생각해보았지요. 하지만 우린 둘 중 누구도 그런 건 원치 않습니다."


"가족들로부터는 도움을 받을 수 없나? 학교를 그만둔다는 건 현명한 생각 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왔는데, 자네가 그런 위험상태에 빠지는 건 보고 싶지 않군." "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길이 없어서요." 아담은 아버지의 비타협적인 반응이나 장인, 장모의 간섭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제가 가진 유일한 희망은 학교로부터 돈을 대출받는 것뿐입니다. 그게 불 가능하다면, 휴학원서를 제출하겠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자네는 학교가 허용하는 대출금을 모두 받아갔네. 학생 들을 위한 대출사업은 대단히 제한된 자원으로 운영되고 있어. 도움이 필요 한 학생들 모두가 혜택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선별적인 대출이 불가피하다 구. 미안하네." 아담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닥터 마르코비츠도 따라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좀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야. 자네가 우리 곁을 떠나는 건 원치 않네. 지금가지 자네는 대단히 뛰어난 성적을 보여왔으니까 말야. 아 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내 조언을 하번 더 고려해보았으면 하네." "아이는 태어나게 될 겁니다. 사실, 전 점점 기대가 돼요." "휴학은 언제부터 하게 되나?" "며칠 후면 내과학 실습을 마치게 됩니다. 그 과정이 끝나는 대로 일자리 를 찾아나서야겠지요." "휴학 기간이 길어지겠군. 무엇을 할 계획인가?" 아담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이곳 병원의 연구직을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구활동으로 제가 바라는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봉급 수준이 적절한 자리를 찾아보아야 하겠습니 다. 뉴저지에 있는 큰 제약회사를 고려해볼까 합니다. 아롤렌 사에서 저희 들에게 의사용 가죽가방을 선물로 준 일이 있거든요. 한번 시도해볼 생각입 니다." 닥터 마르코비츠가 갑자기 한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거렸다. "돈을 벌려면 그런 곳이 낫겠지."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적에게 투항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군. 제약회 사들은 최근 들어와서 의학연구활동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고 있어. 나도 한 군데에 합법적으로 관계하고 있지." "그런 문제게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대 3 학년 생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여줄 곳은 제약회사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거기서 알이 잘 되지 않으면, 돌아와서 연구직 자리라도 들어가겠습니다." 닥터 마르코비츠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움을 줄 수 없어 유감이군. 행운을 빌겠네. 그리고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대로 연락 주기 바라네." 아담은 문을 나서며, 그날 오후 아롤렌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첫번째


봉급을 받고 난 다음이라면 제약회사가 연구활동에 행사하는 압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여유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힘 들었다. "뭐가 어쨌다고!" 제이슨 콘라드가 소리쳤다. 그는 손을 공중으로 던져올리며 자신의 절망감 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제니퍼가 제이슨을 안 지는 4 년이 넘었는데, 제이슨은 언제나 극적인 태도 를 보이길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점심을 주문할 때나 댄서들을 가르칠 때 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제니퍼로서도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본자구." 제이슨이 신음하면 말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그랬지. 그게 정말인가? 아냐, 틀렸다고 말해줘. 이게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말해줘. 제발!" 제이슨은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니퍼를 바라보았다. 6 피트 3 인치의 큰 키를 가진 그는 서른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적인 인상을 잃지 않고 있 었다. 그가 게이인지 아닌지는 제니퍼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점에 관해서 라면 다른 댄서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춤은 제이슨 인생의 전부였으며 그는 놀라운 재능으로 뭉쳐 있었다. "아기를 가졌어요." 제니퍼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 하느님!" 제이슨은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제니퍼는 심정적으로라 도 자기를 지원하기 위해 옆에 서 있던 캔디와 눈길을 주고 받았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다니. 우리 무용단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기회에 리더 중의 하나가 아이를 가졌단 말이야. 아이구 맙소사!" 제이슨이 서성이던 것을 멈추더니 집게손가락을 펴 보이며 제니퍼를 향해 돌아섰다. "낙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계획했던 아이는 아니겠지?" "죄송해요." "하지만 아이는 언제라도 다시 얻을 수 있는 거야." 제니퍼는 조용히 고개만 흔들었다. "내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거야?" 제이슨은 한 손을 극적인 동작으로 가슴에 갖다 붙이고, 마치 가슴에 심한 통증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에게 이렇게 아품을 주고 그걸 즐기고 있어. 오, 하느님! 정말 끔찍한 고통이야!" 제니퍼는 이처럼 중요한 때에 아이를 가지게 된 사실에 어느 정도 죄책감 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자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제이슨의 반응은 대단히 이기적이었으며, 낙태와 같은 심각 한 문제를 언급하면서까지 자신을 붙들어두려고 하는 제이슨에게 분노을 느 끼고 있었다. 캔디가 제이슨의 팔을 잡았다.


"가슴이 아프시다는 건 농담이겠죠?" 제이슨은 눈을 뜨고 말했다. "내가 농담한다고? 이런 문제로 내가 농담하는 거 봤어? 이 아가씨가 날 일찍 무덤에 보내버릴려고 하는데 내가 농담한다고 하는 거야?" "한두 달 정도는 더 춤을 출 수 있을 거예요." "아, 아냐! 아냐! 아냐!" 순간적으로, 제이슨은 가슴의 통증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옛 매표소 자 리 앞에서 서성대기 시작했다. "제니퍼, 네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버리려 할 정도로 무심하게 행동한다 면 우리도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지." 그는 말을 멈추고 캔디를 가리켰다. "어떻게 생각해? 제니퍼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겠어?" "잘...... 모르겠어요." 제이슨은 옆눈으로 제니퍼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제니퍼와 캔디가 친한 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논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질투심이 풀 어주게 될는지도 몰랐다. 제이슨은 최소한 쇼의 녹화가 끝날 때까지만이라 도 제니퍼를 필요로 하고 있었으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 니퍼가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동안 캔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잘 생각했어!" 제이슨이 말했다. "아직도 희생정신을 가진 단원이 남아 있었군." 그는 다시 제니퍼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무실로 가면 세릴이 봉급을 계산해줄 거야. 여긴 자선기관이 아니란 걸 명심해." 캔디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제니퍼는 남은 두 주일 동안의 봉급도 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 정도는 해 주어야 해요." 제이슨은 상관 않겠다는 돗이 손을 휘저었다. 그는 플로어 위로 다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제니퍼를 출산휴가로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좋은 대로 해." 제이슨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가 연습장의 문을 열자 다른 무용수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연습을 시작하자구, 캔디." 제이슨이 문 안으로 사라져가며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두 여자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둘 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 었다. 캔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이슨이 나한테 그런 자리를 제안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네가 잘 되어서 기뻐. 진심이야." 그들은 함께 연습실로 들어섰다. 제이슨의 높은 목소리가 커다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좋아. 2 번 바리에이션을 처음부터. 포지션!" 그가 손뼉을 한번 두들겼고 그 소리는 출발을 알리는 화약총 소리처럼 들


렸다. "이리 와, 캔디." 제이슨이 소리를 질렀다. 잠시 동안 제니퍼는 리허설에 열중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잊 기 위해, 연습실을 나와 세릴의 사무실로 향했다. 세릴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보급판 애정소설을 읽고 있었다. "날 출산휴가로 처리하겠대." 제니퍼는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정말 안됐군요. 제이슨이 화를 많이 내던가요?" 세릴이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제니퍼의 눈에 책 표시가 들어왔다. '열 정의 불꽃'이란 제목이었다. "내가 본 것 중 최고였어." 제니퍼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휴가를 떠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 니지." 제니퍼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던졌다. "제이슨이 남은 두 주일 봉급도 계산을 해주도록 동의했어. 물론, 지난 공 연 때의 배당분도 받아야겠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세릴이 물었다. "모르겠어. 임시로 다른 직업을 구해보아야겠지요.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 니? 여기 일자리는 어떻게 얻었어?" "직업소개소에서. 그렇지만 시간제 일자리를 구한다면 말예요. 임시 비서 직에 지원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 거긴 항상 사람이 모자라거든요." "난 타자칠 줄을 모르는데." "그럼 백화점으로 가봐요. 내 친구들도 백화점에서 많이들 일하고 있다구 요." 제니퍼가 미소를 지었다. 세릴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내일 정말 나와 함께 가주겠어요?" 세릴이 물었다. "그럼, 너 혼자서 가게 할 순 없어. 양수검사를 받을 때도 혼자 갔었니?" "그래요!" 세릴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식은 죽 먹기었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걸요." "넌 나보다 훨씬 용감해 보이구나." 제니퍼는 다운증후군으로 죽었던 동생을 떠올리며 자신도 검사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릴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캔디가 말했지만 말예요, 난 전에 약을 많이 했었어요. 마리화나, LSD, 닥치는 대로 말이에요. 닥터 폴리는 내 유전자를 검사해봐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검사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니더라구요. 혹시 그걸 받게 되더라도 걱 정할 건 하나도 없어요. 처음엔 정말 긴장했었지만, 다시 하라면 얼마든지 하겠어요." 세릴이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제니퍼는 닥터 반데르머와 그의 남성우월주의적 태도를 떠올렸다. "그 닥터 폴리란 사람 말이야. 마음에 드니?" 세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내가 만난 의사 중에 최고로 친절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없 었으면 아직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예요. 간호사들도 친절하 긴 마찬가지고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줄리안 클리닉 사람들 모두가 그래 요. 제니퍼만 좋다면 캔디가 대신 예약을 해줄 텐데." 제니퍼는 웃음을 지었다. "고맙지만, 벌써 내 남편이 대학병원에 있는 의사를 소개해주었어. 자, 그 럼 일이나 마무리 짓자. 출산휴가를 떠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세릴이 코 끝을 찡그렸다. "나도 모르겠는걸요. 그런 건 캔디에게 물어봐야 해요." 다음 날 아침 세릴과 만날 약속을 한 뒤, 제니퍼는 코트와 가방을 집어들 고 거리로 나왔다. 지하철 역을 향해 걸어가며,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 감과 싸워야 했다. 제니퍼는 항상 임신이란 것을 멋진 경험이라고 상상해왔 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를 실제로 가진 입장에서, 행복을 느끼기는커녕 혼 란과 분노를 이기기 힘들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것이 누구 도 이해해줄 수 없는 문제였으며 따라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태가 아무 데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니퍼는 메이시(백화점)에 먼저 들러보기로 마음먹었 다. 제니퍼가 아파트 계단을 올라섰을 때는 벌써 6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제니퍼의 눈 앞에 소파에 앉은 아담이 들어왔다. 아담이 이렇 게 집에 일찍 오는 경우는 드문 편이었다. 그제서야 제니퍼는 아담이 아버 지를 만난 뒤 하루 종일 쉬기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와는 어땠어요?" 제니퍼는 친절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도움이 되었나요?" "그럼. 오늘 책임감과 일관성에 대해서 값진 설교를 들을 수 있었어." 제니퍼는 코트를 건 다음 아담에게 다가와 앉았다. 그의 눈동자가 빨갰고 주위가 거무스름해 보였다. "좋질 않았군요." "아주 나빴어. 이제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의 병세를 악화시킨 주범이라고 생각하셔." "하지만 어머니의 우울증은 형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생긴 건데." "그걸 잊어버리신 것 같아." "우리가 아이를 가지게 됐다니까 뭐라고 하세요?" "얘기 안 했어. 그럴 기회가 없었다구. 시작도 하기 전에 내 일은 내가 책 임져야 한다고 분명히 못박으셨어." "저런." 제니퍼는 아담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척 차가워 보였다. 제니퍼는 닥터 로렌스 폴리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샤워하고 올게요."


제니퍼는 한숨을 지으며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채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담은 자신이 사춘기 소년처럼 행 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간 뒤 옷을 벗었다. 그리고 나서 욕실 문을 열었다. "물을 그대로 틀어둬." 아담이 소리쳤다. 이를 닦는 동안, 제니퍼가 샤워룸에서 나왔다. 그녀는 아담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건을 집어들고 침실로 나왔다. 아담이 부탁 한 대로 샤워기는 틀어져 있었지만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아담은 언제나 사과하는 방법을 찾는 데 애를 먹곤 했다. 어쩌면 함께 식 사를 하러 나간다든지 하는 확실한 방법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였다. 샤워룸으로 들어서며, 아담은 원 바이 랜드(One By Land)라는 레스토랑에 제니퍼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은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 가본 일은 아직 없었지만, 아담의 과친구 한 명이 부모님 과 함께 식사하러 간 얘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환상적이었고, 그만큼 비쌌다. 망할 놈의 세상. 아담은 생각했다. 이제 진 짜 직업을 갖게 되면 정말로 축하할 일이 생기게 된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아담이 침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저녁 먹으러 함께 나가는 거야. 어때?" 제니퍼는 텔레비전에서 잠시 눈길을 떼고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야? 싫다는 거야? 이것 봐. 우린 좀 바람을 쐴 필요가 있다구. 그러면 좀 진정이 될 거야." "우리한텐 그럴 돈이 없어요." 제니퍼는 더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향해 자세를 고정시켰 다. 아담은 아내의 예기치 못했던 반응을 생각하며 머리를 수건으로 말렸다. 제니퍼는 아담��� 제안을 항상 잘 따르는 편이었다. 아담은 제니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렸다. "이것 봐." 그가 말했다. "지금 당신과 대화해보려고 하는 거야." 제니퍼가 고개를 들었고, 아담은 아내가 자신만큼이나 지쳐 있음을 깨달았 다. "듣고 있어요. 음식을 사다 놓았어요. 뉴스가 끝나는 대로 저녁을 준비할 게요." "오늘 밤에는 햄버거 대신 좀 특별한 걸 먹고 싶은데." "오늘 식사는 햄버거가 아니에요." 제니퍼가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만 그렇다는 이야기지. 자, 그러지 말고 나가서 먹자구. 당신도 좀 쉴 필요가 있어. 오늘 오후에 학장을 만났는데 내가 더이상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휴학을 하겠다고 말해줬지." "휴학을 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벌써 다른 일자리를 얻어놓았어요." "무슨 일자리?" "메이시 백화점의 구두 매장이요. 문제가 하나 있긴 한데, 격주로 주말근


무를 해야 해요. 하지만 당신의 당직 일정과 맞추면 별 상관이 없겠지요. 놀라운 건 말예요. 봉급이 무용단에서 받던 것과 같은 수준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휴학할 필요가 없어요." 아담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당신은 절대 메이시에서 일할 수 없어. 절대로!" "오." 제니퍼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 폐하가 납시었나?" "제니퍼, 지금은 빈정거릴 때가 아니야." "그런가요?" 제니퍼가 말했다. "그럼 조금 전에 당신이 빈정거린 건가요? 그러니까 당신은 빈정대도 좋지 만 나는 안 된다는 말이군요." "지금 말싸움할 기분이 아니야." 아담은 새 내복을 꺼내러 옷장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은 메이시에서 일할 수 없어. 아이를 가진 몸으로 오랫동안 서 있게 할 수는 없단 말야.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자구." "아이를 가진 건 나라는 걸 잊으셨나 보군요." 제니퍼가 대꾸했다. "그래 맞아. 하지만 아이는 우리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지." 제니퍼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하겠어. 1, 2 년 동안 휴학하고 일 을 하겠어. 당신의 일은 당신 자신과 아이를 돌보는 것 뿐이야. 그러기 위 해서는 백화점 매장에서 서성이거나 해선 안 되겠지." 더이상의 논쟁을 피하기 위해, 아담은 거실로 걸어갔다. 침실의 옷장이 너 무 작았기 때문에 그의 옷은 거실의 옷장으로 옮겨져 있었따. "이야기하다 말고 어디 가요?" 제니퍼가 그를 불렀다. 아담은 침실로 다시 들어와 말했다. "더 이야기할 게 없는걸." "천만에요. 있어요." 제니퍼가 화를 내었다. "당신이 한 만큼 나도 말을 좀 해야겠어요. 아무도 당신이 휴학하는 걸 찬 성하지 않을 거고 그 이유는 간단해요. 그러면 안 되니까요. 난 산달까지도 충분히 일할 능력이 있어요. 왜 우리 모두가 하던 일을 포기해야만 하나요? 난 춤을 계속할 수 없는 게 분명하니까 내가 새 직장을 구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당신이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게 장기적으로 봐선 우리에게 최 선을 거예요. 그리고, 난 벌써 일자리를 구했고 당신은 그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모르고 있어요." "천만에." 아담이 제니퍼의 말을 가로챘다. "난 뉴저지 주에 있는 아롤렌 제약회사에 들어갈 거야. 오늘 오후에 전화 를 걸었는데 나를 무척 보고 싶어했어. 내일 인터뷰를 하게 된다고." "왜 그렇게 고집불통처럼 굴지요? 휴학은 필요없어요. 내가 일할 수 있다


구요." "내가 당신의 건강을 지키고 당신 부모님으로부터의 간섭을 막는 걸 고집 이라고 부른다면, 맞아. 난 고집불통이야. 어쨌건 간에, 더 이상 얘기가 필 요없어. 난 학교를 떠나고 당신은 메이시에서 일하지 않는 거야. 더 할 말 있어?" 아담은 자신이 제니퍼를 모욕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 는 그렇게 당할 필요가 있었다. "할 말이 많아요. 하지만 얘기해봐야 헛수고일 것 같군요. 당신이 아버지 와 얼마나 닮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입 닥치고 있어!" 아담이 소리쳤다. "아버지를 헐뜯는 이야기는 나 말고 아무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나와 아 버지는 조금도 닮지 않았어." 그는 침실 문을 힘차게 걷어차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 거실 한가 운데 선 채로 뭐 부술 만한 물건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결국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대신, 옷을 마저 입은 후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안정을 되 찾은 아담은 제니퍼와 화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침실문을 잡아당겼 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제니퍼. 바깥에 나가서 먹을 걸 좀 사오려고 하는데, 같이 나가지 않겠어 ?" "혼자 가세요." 제니퍼가 대답했다. "전 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아담은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니퍼, 문 열어." 그가 애원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제니퍼, 문 열라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담은 분노가 다시 역류해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 꼈다. 뒤로 물러서며, 문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모든 문제를 상징이라 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오른발로 들어 있는 힘을 다해 방문을 걷어 찼다. 빗장 주위의 나무가 떨어져 나가며 문이 열려 반대편 벽 에 부딪쳤다. 제니퍼는 침대머리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담은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 다. "옛날에는 문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는데." 그는 더듬거리며 웃어 보이려 했다. 제니펀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 다. 아담은 문을 벽에서 떼어보았다. 문손잡이가 부딪친 곳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어." 아담이 명랑한 말투로 말했다. "아무튼 말야. 아까 말한 대로 나가서 먹을 걸 좀 사오자구." 제니퍼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담은 언짢은 기분을 누르며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아."


그가 온순한 태도로 말했다. "이따가 보자구." 제니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고 아담이 걸어나가는 것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담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 었다. 그가 그처럼 난폭하게 행동한 일은 이전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더 겁 이 났다.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이렇게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6 세릴 테데스코의 아파트 계단을 올라서며 제니퍼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제니퍼의 아파트도 초라했지만 이곳에 비하면 그곳은 궁 전과도 같았다. 부랑자 두 명이 -- 제니퍼는 그들이 이곳의 주민이 아니기 만을 빌었다 -- 현관에 텐트를 치고 있었다. 세릴의 아파트 호수를 확인한 뒤, 제니퍼는 노크를 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 렸다. 잠시 후 여러 개의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마침내 체인이 떨 어져 나가며 문이 열렸다. "안녕! 어서 들어와요!" 세릴이 말했다.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아버지가 이 자물쇠들을 몽딸 다 달아야 한다고 우기셔셔 말예요." "잘한 일이야." 제니퍼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제니퍼가 너저분한 아파트를 둘 러보는 동안 세릴은 옷을 마저 입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의사가 말한 건 잘 지키고 있겠지?" 제니퍼가 세릴에게 아침에 일어나서는 물 한모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도록 한 의사의 지시를 상기시켰다. "아직 아무 것도 입에 안 댔다구요." 세릴이 소리쳤다. 제니퍼는 무게 중심을 천천히 다른 발로 옮겼다. 방 전체가 더러웠기 때문 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셀리과 함께 병원에 찾아간다는 발상 자체가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릴을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리고 아직까지 담당의사에 관해 아담의 의견을 거스를 의도는 없었지만, 그 래도 그 전설적인 닥터 폴리의 모습을 한번 보아둘 필요는 있었다. 그들은 어제 어색한 화해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었다. 하지만 아담이 의학공부를


그만둔다는 생각이 아직도 그녀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제니퍼는 아 롤렌에서의 인터뷰가 성공적이지 못하기를 손 모아 빌고 있었다. "준비됐어요." 세릴이 침실에서 모습을 나타내며 말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여행가방이 걸 쳐져 있었따. "자, 어서 가보자구요." 줄리안 클리닉까지의 여정 중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넘어지지 않게 아파트 의 계단을 내려가 부랑자들의 곁을 지나쳐야 하는 것이었다. 세릴은 부랑자 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그저 그들의 관리인이 올라오면 쫓 겨나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들은 렉싱턴 가의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 110 번가로 향하는 6 번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 밖의 경치는 볼품이 없었지만 클리닉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나아져갔다. 15 층의 클리닉 빌딩을 뒤덮은 유리벽이 19 세기풍의 주변 건물 들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빌딩 주변의 낡은 건물들은 전부 개축되고 재정비되어 별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다. 저쪽 멀리의 한 구역은 비계로 둘러싸인 채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클리닉을 중심으 로 도시가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문을 들어선 제니퍼는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병원의 내장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것은 병원이라기보다 차 라리 특급 호텔의 로비를 연상케 했다. 모든 것이 새것이었고 흠집 하나 찾 을 수 없이 깨끗했다. 접수대에서 일하는 사무원들의 수는 무척 많았으며 덕분에 그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미모의 흑인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뭘 도와드릴까요?"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와 파란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명찰에는 '안녕하세요 ! 저는 루이스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세릴이 기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폴리 박사님 뵈러 왔어요. 낙태수술을 받기로 했거든요." 루이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미즈......" "테데스코예요, 세릴 테데스코." 제니퍼가 대신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세릴이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대기중인 정신과 의사를 불러드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들로 서는 가능한 한 불편한 점이 없으시도록 돌보아드려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친구가 같이 왔거든요. 친구와 같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환자가 친지나 친구를 동반하는 것은 저희들이 적극 권장하 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먼저 기록을 컴퓨터에 올린 다음 입원수속을 밟으셔 야 합니다. 두 분 모두 라운지로 가서 쉬고 계시지요. 조금 있다가 제가 찾 아가겠습니다. 라운지를 향해 걸어가며 제니퍼가 말했다.


"왜 너와 갠디가 이곳에 대해서 그렇게 칭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곳 사람들이 모두 루이스만큼 친절하기만 하다면 정말 대단할 거 야." 그들이 막 코트를 벗어놓기도 전에, 나이가 지긋한 한 신사가 그들앞으로 커피와 차가 담긴 수레를 밀고 다가왔다. 그는 분홍색 자켓을 입고 있었는 데, 그는 자랑스럽게 그것이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복장이라고 설명해주었 다. "간호사들도 이렇게 친절하니?" 제니퍼가 물었다. "모두가 마찬가지죠." 세릴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세릴이 무척 떨고 있 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분이 좀 어때?" 제니퍼가 세릴의 손을 꼭 움켜쥐며 물었다. "괜찮아요." 세릴은 자기암시라도 하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례합니다. 세릴 테데스코 양이지요?" 흰 셔츠와 파란 자켓 차림의 또 다른 젊은 여자가 물어왔다. 그녀의 명찰 에는 '안녕하세요! 저는 카렌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전 카렌 크리니츠라고 해요."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세릴은 자신없는 태도로 악수를 받았다. "제가 세릴 양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병원 안에서의 모든 일이 순조 롭게 진행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저를 호출해주세요." 카렌은 자켓 아래의 청색 벨트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기계를 툭툭 두들겨 보이며 말했다. "이곳에서 머무시는 동안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환자들 모두에게 담당직원이 할당되나요?" 제니퍼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카렌은 자랑스럽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희들 생각은 환자가 항상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도 위험한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병원이 점차적으로 기술에 의존 해갈수록 무관심의 가능성 또한 높아지게 되거든요. 의사들도 치료에만 골 몰하다 보면 환자를 순간적으로 잊어버리는 수가 있답니다. 그런 사고를 예 방하는 것이 저희들의 임무예요." 제니퍼는 그녀가 작별인사를 하고 장식용 화분을 돌아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렌에게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제니 퍼로서는 그것을 정확히 지적해낼 수가 없었다. "저 여자, 말하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어?" 제니퍼가 세릴에게 물었다. "난 도대체 뭐라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 가요. 그래서 그렇게 들리겠죠?" "아냐." 제니퍼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카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투가 좀 특이한 것 같았어. 근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도 몰라.


아침에 한 입덧 때문에 아직 제 정신이 아닌가 봐." "어쨌든 친절한 여자임에는 틀림없어요. 닥터 폴리는 만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보라구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다가와서 자신이 로드니 머레이라고 소개 했다. 그는 카렌의 것과 같은 청색 면 자켓을 입고 있었으며 같은 모양의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묘하게 단조로운 어조를 띠고 있었 으며, 제니퍼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동안 그의 눈이 깜박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테데스코 양." 그는 세릴의 팔목에 플라스틱 인식표를 고정시키며 말했다. "제가 위층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하지만 그 전에 검사실에 가셔서 피를 뽑고 다른 몇 가지 검사를 하셔야 합니다." "제니퍼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세릴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로드니는 세릴에게 깊��� 관심을 쏟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퍼는 병원의 첫인상이 기묘하게 느껴진 것이 자신의 날카로워진 신경 때문인 것 으로 치부해버리게 되었다. 검사실 사람들은 세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조금 도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제니퍼는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 었다. 나무 데서도 기다릴 필요가 없는 병원이란 건 그녀로서는 체험해본 일이 없었다. 세릴의 검사는 금방 끝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로드니는 세릴이 '임신 중절' 을 위한 특별 구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제니퍼는 줄리안 클 리닉의 사람들이 애써 '낙태'라는 표현을 쓰기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괜찮은 발상으로 느껴졌다. 낙태란 단어는 어 쩐지 깨끗하지 못한 어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6 층에서 내렸다. 여기에서도 일반적은 병원의 시설과 닮은 것이라 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바닥은 미끈거리는 비닐 대신 카페트로 덮여 있었 고 밝은 청색을 칠한 벽에는 화려한 틀로 둘러싸인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로드니는 주앙에 위치한 간호사실로 그들을 데려갔다. 그곳은 간호사실로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 잘 정돈된 라운지 한가운데에는 유니폼을 입은 다섯 명의 직원이 서 있었다. 그 중 세 사람은 정규 간호사 임을 나타내는 명찰을 차고 있었다. 그들이 풀먹인 간호사복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니퍼의 마음에 들었다. 카렌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줄 리안 클리닉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라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 이다. "이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테데스코 양." 말린 플라스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간호사가 말했다. 큼직한 몸집에 뼈가 꽤 굵어 보이는 금발머리의 여인이었다. 간호사는 세릴의 입원실 구석구석 을 살펴보았다. 화장실 문까지 열어보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말 린은 침대를 토닥거리며 세릴에게 옷을 갈아입은 뒤 편히 쉬고 있으라고 말 해주었따. 침대한 일반 병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입


원실 역시 호텔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선반 위에 있는 텔레비전은 침대에 눕던지 의자에 앉든지 편한 자세로 볼 수 있도록 적당한 각도로 맞추어져 있었다. 벽은 밝은 녹색이었는데 붙박이 옷장이 많이 달령 있었고 바닥 역 시 녹색 카페트로 덮여 있었다. 세릴은 파자마로 옷을 가라입고 침대에 올라갔다. 말린이 정맥주사를 위한 카트를 끌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세릴 의 안전을 위해 정맥주사를 놓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말린은 능숙한 솜씨 로 왼손에 주사바늘을 꽂았다. 제니퍼와 세릴은 주사병에서 액체가 떨어지 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호텔방 같던 분위기가 씻은 듯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자." 팔목에 테이프를 다 감고 나서 말린이 말했다. "조금 있다가 치료실에 내려가셔야 해요." 그리고 제니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따라오셔도 좋습니다. 물론 세릴의 허락이 있어야겠지요. 오늘은 세릴이 왕이에요." "어머나, 좋구 말구요!" "제니퍼, 따라와 줄 거죠?" 잠시 방 전체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듯했다. 제니퍼는 건너갈 수 있을 줄 알고 왔다가 뭣도 모르고 수영장 한가운데 제일 깊은 곳에 던져진 기분이었 다. 말린과 세릴 모두가 제니퍼를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죠, 따라갈게요." 다른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들어섰다. "이건 안정제예요." 그녀는 침대보를 걷어내리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니퍼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블라인드 커튼 사이사이로 빌딩 지붕들 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주사기를 들었던 간호사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좀 비켜주시겠어요." 또 다른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려왔다. 곧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한 한 간호 사가 운반용 침대를 밀고 들어와 세릴의 침대 바로 옆에 세웠다. "전 게일 셀린이라고 해요. 치료실가지 이 침대가 없어도 걸어가실 수 있 다는 걸 알지만, 규정상 이걸 타고 가셔야 해요." 제니퍼는 세릴을 운반용 침대에 옮겨서 병실 밖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도 와주었다. "복도 제일 끝으로요." 게일이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치료실 박에서 간호보조사 몇 명이 침대를 넘겨 받았다. 세릴이 안으로 실 려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게일이 제니퍼의 팔을 잡았다. "이쪽으로 들어가세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왜 그러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이런 수술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중요한 건 세릴 옆에 누군가가 있어 준다는 거예요.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심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구요."


"하지만 난 가족이 아닌 걸요." 제니퍼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도 임산부라구요'라고 덧붙여야 할것인가 망 설였다. "가족이든 친구든간에요." 게일이 말을 계속했다. "당신이 옆에 있어 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자 받으세요. 이건 옷 위에 걸치시고 이걸 머리에 쓰세요.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밖으로 나와선 안 돼요." 그녀가 제니퍼에게 소독 가운과 두건을 건네주었다. "다 입으시면 안으로 들어오세요." 게일은 옆에 붙어 있는 문을 통해 사라졌다. 이게 무슨 꼴이람. 제니퍼가 서 있는 방에는 한쪽 옆으로 시트가 잔뜩 쌓 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보일러처럼 보이는 커다란 기계가 하나 놓여 있 었다. 제니퍼는 그것이 소독기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입을 비죽거리 며 간호사가 말한 대로 두건과 가운을 걸쳐 입기시작했다. 옆문이 열리며 게일이 다시 나타나 소독기의 문을 열면서 제니퍼를 훑어보 았다. "됐어요. 들어가셔서 왼쪽에 서 계세요. 혹시 어지럽거나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으면 다시 나오셔서 여기서 기다리시면 돼요." 기계에서 김이 빠져나옴녀서 쉬잇 소리가 났다. 치료실 안은 제니퍼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벽에는 흰색 타일이 바닥에는 흰 비닐장판이 깔려 있었다. 벽 한구석에는 흰색 싱크대가, 그리고 다른 벽 에는 의료기구들을 보관하는 캐비닛이 있었다. 세릴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진찰대에 옮겨진 상태였다. 그 옆에 있는 선반 위에는 스테인레스 스틸 그릇들과 플라스틱 튜브가 놓인 접시가 올려져 있 었고 건너편 벽쪽에는 가스통이 달린 마취기가 놓여 있었다. 방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있었다. 한 명은 세릴의 배를 세척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비닐봉투를 뜯어 기구들을 접시 위에 분주히 쏟아놓고 있었 다. 치료실 정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가운과 장갑을 걸치고 들어섰다. 그는 곧 장 기구가 놓인 곳을 향해 다가가서 기구들을 자기 취향에 맞게 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던 세릴이 갑자기 팔굼치에 힘을 주면서 몸을 일으켰다. "테데스코 양, 누워 계셔야 해요." 간호사 중 하나가 제지하려 하자 세릴이 말했다. "폴리 박사님이 아니잖아요. 폴리 박사님은 어디 계세요?" 잠시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시선을 주고 받았 다. "폴리 박사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수술을 받지 않을 거예요." 세릴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폴리 박사님은 여기 오실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테데스 코 양을 맡게 되었지요. 수술은 간단한 거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어쨌든 전 그분이 맡기 전에는 절대 수술을 안 받겠 어요."


세릴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닥터 스테프슨은 우리 클리닉에서 손꼽히는 의사예요." 간호사 한 명이 말했다. "자, 이제 누우세요. 우리가 모든 걸 잘 알아서 할 거예요." 간호사는 세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를 눕히려 하였다. "잠깐만요." 제니퍼가 말했다. 잠시 자신의 목소리에 깃든 당당함에 놀라워 하며, 제니 퍼가 말을 계속했다. "세릴은 폴리 박사님이 아니면 수술을 안 받겠다잖아요. 그런 식으로 강요 할 수는 없는 거 아니에요." 제니퍼가 치료실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모두가 그 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닥터 스테프슨이 다가와 그녀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제니퍼가 말했다. "난 여기서 나가지 않을 거예요. 세릴은 분명히 폴리 박사님에게 수술을 받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닥터 스테프슨이 말했다. "테데스코 양이 그렇게 원한다면 우리도 환자의 뜻을 따를 겁니다. 줄리안 클리닉에선 항상 환자가 우선이지요. 병실로 먼저 돌아가 계시면 곧 테데스 코 양을 오려보내겠습니다." 제니퍼는 세릴을 바라보았다. 세릴은 진찰대 위에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 었다. "걱정 마." 세릴이 말했다. "이 사람들은 절대 나한테 손을 못 댈 거야." 제니퍼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치료실을 나섰다. 운반용 침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두건과 가운을 벗어 복도 한가운데 놓인 바구니에 던져넣 었다. 그때 말린 폴라스키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이야기를 막 듣고 왔어요. 정말 유감이군요. 이런 큰 병원에서는 일이 한 번 잘못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오늘 하루는 정말 난장판이었다 니까요. 닥터 폴리에 대한 소식을 벌써 알고들 계신 줄 알았는데요." "무슨 말씀이시죠?" "닥터 폴리는 어젯밤에 자살했어요." 말린이 말했다. "부인을 총으로 쏘고 자기도 쏘았죠. 신문에 크게 났었기 때문에 두 분도 알고 계신 줄 알았답니다." 제니퍼는 복도 반대편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떼었다. 세릴이 누운 침대가 옆을 지나갔다. 제니퍼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닥터 반데르머에게 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뉴저지 주 몽클레어의 정거장에 버스가 섰다. 아담은 운전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버스를 내렸다. 운전사는 아담이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생 각했다. 오늘 그는 이상하리 만치 들떠 있었다. 그것은 오늘 있을 인터뷰를 앞둔 불안과 어젯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섞인 복잡한 감정 때문 이었다. 어젯밤 그는 제니퍼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었다. 아무래도 임신한 제니퍼를 하루 종일 서서 일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서가 말해준 그대로, 몽클레어 내셔널 은행 맞은편에 회사차가 주차해 있었다. 아담은 복잡한 거리를 지나 차로 다가갔다. 운전석의 사나이는 데 일리 뉴스 지를 읽고 있었다. 아담이 차창을 두드리자, 그는 어깨 뒤로 팔 을 빼어 뒷문을 열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아롤렌 본부 건물에 도착했다. 아담은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워넣은 채 크게 심호흡을 한번 했다. 정문 앞에서 차가 멈추었고, 제복 차림의 경비원이 나와 아담이 있는 뒷자석을 들여다보았다. "숀버그 씨입니다." 운전사가 말했다. 경비원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흑백으로 줄이 간 차단기를 올려주었다. 차가 경사진 진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담은 시설의 화려함에 그저 놀 랄 수밖에 없었다. 나무들로 빙 둘러싸인 연못의 물결이 일렁이며 빛을 반 사하고 있었다. 잠시 후 본관 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거울처럼 번쩍이는 청동 건물로 양 옆에는 피라밋 모양의 별관이 지어져 있었고 각 별관과 본 관은 투명한 교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차는 연못의 가장자리를 돌아 본관 입구에 멈추어 섰다. 아담은 운전사에 게 감사를 표한 후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안에 들어서기 전에 그는 벽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담은 파란 블레이저 윗도리에 흰 셔츠, 줄무늬 넥타이와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입고 나온 상태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윗도로 왼쪽 소매의 단추 두 개가 떨어져 없다는 것이었다. 문을 들어선 아담은 방문객 명찰을 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2 층의 버튼 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아담은 자신도 지금 감시를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문이 곧 열리고 아담과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그를 맞았다. "맥가이어 씨 되십니까?" 아담이 물었다. "아닙니다. 전 태드라고 합니다. 맥가이어 씨의 비서이지요. 절 따라오시 지요." 그는 아담을 비서실까지 데리고 들어간 다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 아능로 사라졌다. 문에는 '동북부 지역 영업 담당'이라는 푯말이 붙 어 있었다. 주위의 가구들은 모두 치펜데일 사 제품이었으며 카페트는 사치스런 분홍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메디컬 센터의 모습과 학장이 마지막 으로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미처 다음 생각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클레런스 맥가이어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담은 사무실 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맥가이어는 태드에게 몇 가지를 지시한 뒤 그를 내보냈다. 맥가이어는 아담보다 1 인치 정도 작아 보이는 젊고 퉁퉁한 체격의 사람이


었다. 그는 태평스러운 인상의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 마실 걸 좀 드릴까요?" 맥가이어가 물었다. 아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아롤렌에는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셨 나요?" 아담은 긴장된 목청을 가다듬었다. "의대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뒤에, 제약회사에서라면 제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 아롤렌 샤로부터 가방을 선물로 받 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지요." 맥가이어가 웃음을 지었다. "아주 솔직하시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제약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 부터이지요?" 아담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제니퍼의 임신과 그들 부 부의 경제적 곤란이라는 솔직한 이유를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제 버스를 타고 오며 죽 연습한 대사를 읊을 때가 온 것이다. "의학을 공부할수록 제가 환상에 빠져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요즘 의사들은 환자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줄 모릅니다. 기술개발이 나 연구활동을 해야만 지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응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으 며 의료는 학문이 아닌 하나의 거래로 생각하고 있죠." 아담 자신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지만 하고 나니 그럴 듯해 보였다. 맥가이어도 그의 대답에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지난 2 년 반 동안에 전 제약회사가 베푸는 환자에 대한 공헌도가 의사들 보다 더 높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로 남기보다는 아롤렌 사 에서 일함으로써 사회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담은 말을 마치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이번 발표는 꽤나 성공적이었 다. "흥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맥가이어가 말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하셨군요. 그렇지만 먼저 알아두셔야 할 것은, 숀버 그 씨와 같은 신입사원은 세일즈 부서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 실입니다. 의사들이 소위 '약 외판원(detail man)'이라고 부르는 일이지요. 숀버그 씨가 생각하던 일자리와 비슷할지 의문입니다만." 아담은 다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영업사원으로 회사 경력을 시작한다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값진 공헌을 할 수 있으려면 몇 년을 걸려야겠지요." 그는 맥가이어가 자기 말을 의심하고 있거나 않은지 주의깊게 살폈다. 그 러나 그의 웃음이 가득한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맥가이어가 말했다. "특별히 질문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만...... 아버님께서 혹시 FDA 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담의 목에 있는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FDA 에서 일하고 있는 데이빗 숀버그 씨가 저희 아버님 되십니다. 하지만 그 사실과 제가 아롤렌에 관심을 가진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 실대로 말씀드린다면, 저와 아버님 사이에는 대화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제


가 아버님의 업무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버님이 아니라 바로 당 신이란 사실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학력과 근무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는 자세를 고쳐 앉은 뒤 국민학교 과정에서 시작해 의과대학에 이르기까 지, 그리고 여름에 가졌던 시간제 직업들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다. 모든 이 야기를 다 마치는 데는 15 분 가량이 걸렸다. "좋습니다. 바깥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도 곧 따라 나가겠습니 다." 문이 닫히자마자 맥가이어는 수화기를 들어 그의 보스 윌리엄 셀리에게 전 화를 걸었다. 셀리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맥가이어는 조이스에게 부사장 을 어서 대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가?" 빌(윌리엄의 애칭) 셀리의 껄끄럽고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아담 숀버그와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더군요. 아버지 는 데이빗 숀버그가 맞습니다. 제가 5 년 동안 보아온 후보자중에 최고더군 요. 아롤렌의 경영인 제목으로는 아주 적격입니다. 의학이나 제약회사에 대 한 가치관에 있어서도 우리가 바라는 바와 일치합니다." "잘되었군. 이번 일이 성공만 한다면 자네 보너스는 두둑이 주겠네." "숀버그를 찾아낸 게 제 공로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 친구가 먼저 연락을 했거든요." 클레런스가 말했다. "그래도 보너스는 받게 될 거야. 점심을 먹이고 나서 내 사무실로 올려보 내게나. 내가 한번 직접 얘기를 나눠보지." 클레런스는 전화를 끊고 나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방금 부사장과 통화를 했어요.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점심 식사 후에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군요. 시간이 어떳니지요?" "영광일 뿐입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제니퍼는 창문에서 시선을 돌려 세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흰 피부와 방 금 감은 금발머리는 세릴을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 진정제가 뚜렷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세릴은 베개 위에 머리를 편안히 뉜채 깊이 잠들어 있었 다. 제니퍼로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치료실에서 옮겨진 후 세릴은 닥터 폴리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말린 폴라스키는 셀리에 게 닥터 스테프슨이 닥터 폴리 못지 않은 의사이며 오늘 안으로 수술을 받 아야 한다고 설득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말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술의 위 험도가 커진다고 했다. 제니퍼도 결국 말린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지만 세릴은 닥터 폴리가 아니 라면 아무도 자신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다고 우겼다. 세릴은 그가 자살했다 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세릴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기분이 좀 어때?"


"괜찮아요." 세릴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담이 집에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놓아야 하거든요. 곧 전화를 할게. 내가 원한다면 내일 다시 찾아오겠어. 하지만 말아, 닥터 스테프슨에게 수술받을 마음은 전혀 없는거니?" 세릴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제니퍼의 말이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뭐라고 했어요? 잘 안 들려요." "집에 가봐야겠다고." 제니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돌아오기 전에 샴페인이라도 한전 먹었니? 말하는 게 위한사람 같 아." "샴페인이라니요, 무슨 말을." 셀리은 담요를 힘겹게 움켜잡으며 웅얼거렸다. "엘리베이터까지 바래다줄게요." 그녀는 담요를 제끼면서 왼팔에 연결된 정맥주사선을 마구 흔들었다. "아무래도 그냥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제니퍼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니퍼는 세릴을 진정시키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세릴은 벌써 다리를 침대 바깥쪽으로 내밀도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있었다. 셀리의 팔에 있던 정맥주사선은 뜯겨져 나갔고 바늘이 꽂혀 잇던 자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이것 좀 봐요." 세릴이 말하면서 정맥주사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곧 몸의 균형을 잃었 다. 제니퍼가 어깨를 붙들려하는 순간, 세릴은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 다. 제니퍼가 재빨리 바닥에 고꾸러지는 그녀를 팔로 받았다. 세릴은 몸이 반으로 접혀진 채 머리를 무릎에 쳐박고 있었다. 제니퍼는 그냥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아니면 세릴을 일단 들어올려야 할 지 망설여졌다. 결국 세릴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서 간호사를 부르러 가 기로 했다. 하지만 세릴을 부축하려 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홍건한 피가 제 니퍼의 시선에 빨려 들어왔다. "어머나, 세상에!" 제니퍼가 비명을 질렀다. 피가 세릴의 코와 입에서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제니퍼는 급히 세릴의 몸을 뒤로 눕혔다. 그녀의 눈 가장자리는 심하게 얻 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다리쪽에의 출혈은 더욱 심각 했다. 병원 가운 아래로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제니퍼는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려 침대 머리맡으로 황급히 다가가 호출 버턴을 계속해서 눌렀다. 세릴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버에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미친 듯 이 도움을 구했다. 그때, 복도에 말린이 나타났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 엄가은 채 병실 입구 벽에 몸을 꼭 붙이고 선 제니퍼를 밀치다시피 하며 안 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다른 간호사들도 병실에 도착했다. 그 중 한 명이 다시 달려나가 비상호출 방송을 내보냈다. 누군가가 제니퍼의 팔을 붙잡았다.


"숀버그 부인.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말린이었다. 그녀의 오른 뺨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제니퍼는 방 안으로 시 선을 도렸다. 간호사들이 세릴에게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도 한 일이 없는데, 갑자기 취한 것처럼 행동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침대에서 일어서려고 하다 가 쓰러져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어요. 닥터 스테프슨과 다른 몇 명의 의사가 복도를 달려와 세릴의 병실로 들어 왔다. 잠시 후 또 다른 의사가 마취기를 밀면서 들어왔다. 말린은 제니퍼의 곁을 떠나 마취기 옆으로 다가갔다. 제니퍼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벽에 머리 를 기댔다. 다른 환자들이 마구 바깥쪽에 몰려들고 있었다. 병원보조원 두 사람이 운반용 침대를 밀면서 나타났다. 곧 세릴은 치료실 로 다시 실려갔다. 세릴은 끔찍할 만큼 창백한 얼굴에 검은 마취용 마스크 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열댓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 있었다. "괜찮으세요?" 말린이 다시 제니퍼의 앞에 다가섰다. "그런 것 같아요." 말린의 억양은 닥터 스테프슨의 것과 마찬가지로 무척 단조롭게 들렸다. "세릴은 어떻게 된 거지요?" 질문이 아닌 평탄한 어조로 제니퍼가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괜찬하지겠지요." "닥터 스테프슨은 아주 훌륭한 의사랍니다. 간호사실에 있는 라운지에서 좀 쉬고 계세요.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지요." "가방이 병실 안에 있는데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제가 가져오지요." 말린이 가방을 가지고 나와 제니퍼를 라운지로 데리고 갔으며 잠시 후 마 실 것을 가져다 주었다. "세릴은 어떤 치료를 받게 되나요?" 제니퍼는 이렇게 물었으나 대답을 꼭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먼저 아기를 꺼내겠지요. 그 뒤 의 일은 나도 모르겠어요." "아이 때문에 출혈이 생긴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출혈과 쇼크 모두 다요. 아무튼 곧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제니퍼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야, 말린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몇 분 간격으로 그녀는 제니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고 제니퍼도 손을 흔들어 답했다. 제니퍼는 병원에 호감을 가져본 일이 한번도 없었으며 이번 경험으로 혐오 감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3 시 30 분이었다. 한 시간 가량 지나서 닥터 스테픈슨이 복도에 나타났다. 그의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온통 헝클어져 있었고 표정이 대단히 어두워 보였다. 제니퍼의 가슴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제니퍼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제니퍼가 말했다. 텔리비전에서 멜로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닥터 스테프슨이 고개를 그덕였다. "사망했습니다. 구할 방법이 없었어요. 사인은 미만성 혈관내 응고증(Diffuse Intravascular Coagulation)입니다. 저희 의사들도 아직 분명히 이해 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인데, 임산부에게 종종 일어나곤 하지요. 전에도 이 줄리안 클리닉에 같은 환자가 들어온 일이 있습니다. 그 환자는 다행히 목 숨을 건졌습니다만 세릴의 경우에는 도저히 출혈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사 살려냈다 하더라도 코팥은 기능을 완전히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테데스코 양의 가족을 아십니까?" "아니요." "안타깝군요. 세릴은 가족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길 거부했어요. 찾아내기가 쉽지 않게 됐네요." 말린과 게일이 제니퍼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울고 있었다. 제니퍼로선 놀 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간호사가 운다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 했는데. "우리 모두가 이 사고에 대해 슬퍼하고 있습니다." 단터 스테프슨이 말을 계속했다. "의술에 종사한다는 건 이래서 힘듭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그거 론 결코 충분하지가 않아요. 세릴과 같이 젊고 발랄한 아가씨를 잃는다는 건 비극입니다. 줄리안 클리닉에서는 모두들 이런 사고를 자기 일처럼 생각 하고 있습니다." 15 분 뒤에 제니퍼는 세릴과 함께 들어섰던 바로 그 문을 뒤로 하며 클리닉 을 떠났다.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 개를 돌려 줄리안 클리닉의 번쩍거리는 벽면을 올려다 보았다. 오늘 있었던 끔찍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 병원에 대해서만큼은 좋은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마음대로 맡길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아담은 맥가이어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9 층으로 올라갔 다. 다시 한번 화려한 내부장식이 그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했다. 이 사치스 런 장식에 비하면 맥가이어가 있는 층은 검소한 편이었다. 발거름을 빨리 하지 않으면 도저히 맥가이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 다. 그들은 이제 막 아담이 평생 본 것 중 가장 웅장한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쪽 벽은 완전히 창문만으로 되어 있었고 창문 너머에는 뉴저지의 광활한 겨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경치가 마음에 드십니까?" 아담은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빌 셀리입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책상을 돌아 아담을 향해 걸어왔다.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기쁩니다." "제가 할 소리입니다."


아담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빌 셀리는 아담이 생각했던 50 대 중반의 중년 신사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는 서른도 채 안 되어 보였으며 아 담과 비슷한 키에 짧은 금발 머리에 뒤로 깨끗이 빗어 넘기고 있었다. 그의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소매까지 걷어올린 흰 셔츠에 분홍 넥타이, 그 리고 황갈색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빌 셀리가 창문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뉴어크 시입니다. 멀리서만 보면 뉴어크도 아주 좋아 보입니다." 아담 뒤에 선 맥가이어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담은 맨하탄의 남쪽 지역도 알아볼 수 있었다. 뉴욕 하늘 위에는 구름이 많이 끼어 있었는데 한줄기 햇살만이 마천루 일부를 비추고 있을 뿐 나머지 는 어두운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마실 걸 좀 드릴까요?" 빌 셀리가 은으로 된 식기들이 놓인 커피 테이블로 다가가며 물었다. "커피나 차, 그리고 그 밖에라도 원하시는 건 뭐든지 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자리에 앉았다. 맥가이어와 아담은 커피를 들겠다고 대답했 다. 빌 셀리가 직접 커피를 만들었다. "맥가이어에게서 당신에 대해 대강 듣긴 했어요." 빌은 아담을 유심히 뜯어보면서 말했다. 아담은 맥가이어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기 시작했다. 맥가이어와 빌이 눈길을 주고 받으며 넌지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빌 역시 맥가이어의 평가가 정확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 동안 준 비하도록 한 신상명세서를 훑어본 후 아담이 경영자 훈련과정에 최적의 후 보라는 예감을 강하게 받은 터였다. 회사가 엄청난 속도로 팽창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보자를 물색하는 일은 그들 업무의 우선 순위를 차지해왔 다. 단 한 가지 빌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이 청년이 다시 의대로 돌아 가려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해결하는 방법이 따로 있 었다. "의료계 종사자에 대한 당신의 가치관은 우리의 견해와 일치하는 바가 많 습니다. 우리 역시 의사들이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답니다. 정말 제대로 찾아오셨군요. 아롤렌 사라면 당신이 만족할 만한 환경을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만일 채용이 되더라도 뉴욕에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아듬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제니퍼가 그곳 병원에 서 아이를 낳기를 원했다. 빌이 맥가이어에게 말했다. "가능하겠지, 클레런스?" "물론입니다." "다른 질문은 없으십니까?" "지금 당장은 궁금한 게 없군요." 아담은 인터뷰가 다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순간, 빌이 그를 제지했다. "조금만 더 앉아 계십시오." 맥가이어를 내보내기 위해 빌이 말했다. "클레런스, 곧 숀버그 시를 자네 사무실로 보내겠네."


맥가이어가 문을 닫고 나가자, 빌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저, 우리가 당신에게 대단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 군요. 당신의 의학도로서의 학문적 배경은 일류급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당신을 고용하는 것은 당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님 과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라는 걸 확신시 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빌 셀리의 솔직함이 아담의 마음에 들었다. 빌은 맥가이어가 가져온 신상명세서를 집어들면서 덧붙였다. "우리가 벌써 당신에 대한 보고서를 완벽하게 작성해놓았다는 사실을 아시 면 놀라시겠지요." 아담은 아롤렌이 자신의 사생활을 침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적으 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항의할 새도 없이 셀리가 말을 계속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훑어보고 나서 나는 당신을 단순히 채용하는 데 그치 지 않고 우리 회사의 경영자 훈련 프로그램에 곧장 참여시킬 생각을 했습니 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담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짐을 느꼈다. 일이 그가 기대했던 것보 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경영자 훈련 프로그램이란 게 여기서 실시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세일즈 과정은 여기서 받을 수 있지만, 경영자 훈련은 푸에르 토리코에 있는 연구센터에서 받게 되지요." 푸에르토리코! 맨하탄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 아담을 두렵게 만들었다. "매우 과분한 제안이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좀더 천천히 일을 배워가고 싶 은데요. 제 계획은 먼저 판매사원으로 시작해서 우선 비즈니스의 세계란 게 어떤 것인지 익힐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선태그이 여지는 남겨놓도록 하지요. 그 리고 아롤렌에서는 다음해부터 판매사원의 인원을 대폭 감축할 계획이라는 말씀도 드려놓아야 겠군요. 그걸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판매사원 자리에 들어갈 수는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만나보실 사람이 한 분 더 있습니다." 그가 인터콤을 두들기더니 비서에게 닥터 내흐만을 불러달라고 지시했다. "닥터 내흐만은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연구센터의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지금은 이사회 참석차 뉴욕에 와 계시지요. 신경외과학 방면의 학식으로나 인품으로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나면 푸에르토리코 문제에 대해 생각이 달라지시게 될 겁니다." 아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언제부터 일을 하게 됩니까? 전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했으면 좋겠는데요. "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요. 이번 주에 시작되는 판매사원 훈련 과정에 넣어드리지요. 그 전에 며칠 동안 판매사원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겁니 다. 클레런스 맥가이어가 자세한 일을 맡아 할 것입니다. 봉급은 오늘부터 계산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리고 보고서를 잃어보니, 우리의 모자 복지사업 에 관심이 많으실 것 같아 보이던데." 아담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때맞추어 닥터 하인리히 대흐만이 사무실


에 들어오고 있었다. 크고 마른 체격에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아 담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며 아담의 얼굴을 오랫동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 다. "이 젊은이가 푸에르토리코에 가게 되나요?" "불행하게도, 푸에르토리코 행은 연기되었습니다." 빌이 대답했다. "아담은 경영자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판매사원 경험을 쌓아보고 싶다는군 요." "그렇군요. 빌한테 얘기 들었소. 우리 회사에 큰 공헌을 할 재목감이라더 구만. 아롤렌의 연구활동을 예상을 훨씬 앞지르는 성과를 보이고 있지요. 당신에게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될 거요. 아직 실감이 안나겠지만 말이오."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담이 물었다. "정신성 약물과 태아학에 대한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담이 두 사람을 번갈이 보았다. 둘 다 묵묵히 아담 을 주시하고 있었다. "흥미롭군요." 아담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아롤렌 제약에 입사하신 걸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닥터 내흐만이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아담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 고 있었다. 닥터 마르코비츠가 적에게 투항하는 것 같다고 말하던 것이 생 각났다.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팔아넘김으로써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은 자 신의 가치관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행동이었다. 알고 보면 의사도 다를 바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아롤렌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로서는 뭐라 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작성한 아담에 대한 '완벽한 보고서'라는 것이 그러한 인상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아롤렌과 종신계약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돈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제니 퍼가 돈을 착실히 모아왔었더라면 의대를 그만둘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 다. 버스가 링컨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아담은 주위를 살펴본 뒤 낡은 지갑을 꺼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1 달러짜리 대여섯 장과 함께 빳빳한 백달러 지 폐 열 장이 들어 있었다. 현금으로 그렇게 큰 돈을 보기는 아담도 처음이었 다. 빌이 새옷을 해 입으라며 선금을 지불해준 것이었다. 하지만 천달러나 되는 돈을! 아담에겐느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의 윗도리와 셔츠, 그리고 제니퍼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예쁘게 포장 한 드레스가 든 두 개의 블루밍데일 백화점 가방을 힘겹게 짊어지고, 아담 은 렉싱턴 가에서 지하철을 타고 14 번가에서 내려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제니퍼가 전화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 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을 보니 식사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 았다. 오늘 저녁에는 절대 화를 내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아담은 침실로


들어섰다. 제니퍼가 전화를 끊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제니퍼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양 볼에는 눈물자국이 죽 그어져 있었고 눈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머릿결은 반은 묶이고 반은 풀어 헤쳐진 채 어깨에 내려와 있었다. "설마 장인, 장모가 방글라데시로 이민이라도 가시게 된 건 아니겠지?" 아담이 말했다. 제니퍼가 다시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는 말을 조심하지 않은 것을 후 회하며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아까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계속 통화중이더라구." 제니퍼가 손을 무릎 위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전화는 왜요?" "좀 늦을 거라고 말해주려고. 당신을 놀라게 해주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지금 볼래?"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이 거실로 나가 옷가방을 가지고 들어왔 다. 그녀는 시들한 표정으로 포장을 벗기고 상자를 열었다. 제니퍼는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쉬지 않 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에 안 들어?" 제니퍼는 눈물을 씻고, 상자에서 드레스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거울로 다 가가 드레스를 턱 밑에 대어보았다. "아주 멋있어요.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났어요?" 아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에 안 든다면, 바꾸도록 해." 제니퍼가 아담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드레스를 가슴에 댄 채, 허리를 굽혀 그의 입에 키스를 했다. "마음에 쏙 들어요. 내가 본 드레스 중에서 가장 멋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울어?" "오늘은 정말 끔찍한 날이었어요. 세릴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제이슨의 비서인데." "아니." "상관없어요. 세릴은 이제 겨우 스물이 될까말까 한 아이예요. 오늘 세릴 과 줄리안 클리닉이란 곳에 들렸었는데......" "알고 있어." 아담이 제니퍼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주 커다란 의료기관이지. 메이요 클리닉하고 비슷한 규모인데, 내 친구 들이 몇 번 순회실습차 가본 적이 있어. 그런데 좀 이상한 곳이라고들 하더 라구."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던데요." 제니퍼가 말했다. "아무튼, 세릴은 낙태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어요." 아담이 몸이 움찔거렸다. "낙태수술이라고! 낙태수술을 받는 여자를 따라갔단 말이야? 제니퍼, 당신 미쳤어?" "나말고 같이 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구요.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순 없


었어요." "물론 그랬겠지. 그럼 그 아가씨 가족이나 남자친구는 다 어디갔단 말이야 ? 당신밖에 없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돼?" "나도 자세한 건 몰라요. 어쨌든 난 따라갔고 거기서 세릴이 죽었어요!" "죽었다고!" 순간적으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사인이 뭐럐? 어디가 아팠는데?" 제니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릴은 아주 건강했어요. 낙태수술을 막 시작하려는데, 세릴의 담당의사 대신 다른 사람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세릴은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우겼지 요. 세릴의 담당의는 닥터 폴리라는 사람이었는데 죽었다고 하더군요. 자살 을 했대요. 그래서 다른 의사가 들어왔던 거죠." "환자들이 의사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병원도 있긴 있지." 아담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기다리던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올 수 없게 된 다면, 적어도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연하지. 그런데 수술을 거절했다면, 도대체 왜 죽은 거야?" "미만성 혈관내 응고증이라고 하던데요. 세릴은 내가 보는 앞에서 죽어갔 어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더니 피를 쏟지 않겠어요. 정말 끔찍했어요." 제니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망울이 다시 촉촉하게 젖어들었 다. 아담은 팔로 제니퍼를 감싸안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잠시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담은 제니퍼를 안정시키려 애쓰면 서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되씹어보았다. 수술도 받지 않은 환자가 혈관내 응고증으로 죽는 경우도 있는가? 세릴이란 아가씨에게 식염수에 의한 낙태 유도를 하기로 했었고 그래서 식염수가 미리부터 계속 들어가고 있었을 것 이라고 추측해보았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제니퍼를 그 기억에서 벗 어나게 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니퍼도 쉽게 충격을 떨쳐버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미만성 혈관내 응고증이라는 게 뭐예요? 흔한 건가요?" "아니야. 아주 드물지. 하지만 거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무엇인가가 갑자기 혈액을 응고시키기 시작하는 현상인데, 외상이나 화상이 심할 때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낙태수술과 관련된 경우도 있어. 하 지만 아주 드문 현상인데 말이야." "나 같은 임산부하고는 상관이 없나요?" "전혀 상관 없어!" 아담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의대생증에 걸려서 뭐든 신기한 병에 대해서 듣기만 하면 혹 시나 자기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아. 어서 샤워나 하고 옷 갈아입어. 그리고 뭐 좀 먹자구." "아무것도 사오지 않았는걸요." "그런 줄 알고 있었어. 상관 없어. 나 지금 돈이 아주 많다구. 어떻게 얻 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절거리는데, 샤월르 하고 나서 멋진 식당으 로 가는 거야. 어때?"


"좋아요. 오늘은 좋은 파트너가 돼 드릴게요." 제니퍼가 샤워를 하는 동안, 아담은 거실로 가서 의학 교과서를 뒤져보았 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미만성 혈관내 응고증은 임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교과서를 책꽃이에 꽂아넣던 중 '의약관련 단체연감'이 눈에 띄었 다. 아담은 책을 꺼내 아롤렌 제약회사에 관한 부분을 찾았다. 일반명으로 적힌 광범위한 항생제 목록을 제외하면, 아롤렌이 특허권을 갖고 있는 제품 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 중에는 아담이 들어보지 못한 여러 가지 안정 제와 임산부를 위한 프레그돌렌이라는 제품을 비롯한 몇 가지 구토를 억제 하는 약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롤렌이 이렇게 적은 종류의 특허약품만으로 어떻게 그런 놀라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그렇게 호화스러운 본부 건물을 지을 수 있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약을 팔아야 할 것이다. 아담은 책을 도로 집어 넣었다. 앞으로도 계속 후한 보수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아롤렌이 자본을 축적한 비결 따위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7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아담은 아파트 앞길에 나와 그를 데려가기로 한 아롤렌 사 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맥가이어가 아담에게 전화를 걸 어 퍼시 하먼이란 사람이 8 시 반에 그를 태우고 담당구역을 소개시켜줄 것 이라고 했다. 아담이 바깥에 나와 선 지 벌써 20 분이나 지나 있었다. 가랑비가 뿌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아파트를 나서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제니퍼는 그의 화해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학교를 쉬고 제약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는 사실에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 역시 아롤렌을 위해 일하고 있 다는 사실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제니퍼의 반응이 더욱 언짢게 느껴졌다. 어쨌든 영원히 아롤렌에 묶여 있지는 않을 것이며 이제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되었다. 오늘 오후에 찾아갈 장인, 장모님도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칭찬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푸른 시보레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왔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창 문을 내리며 물었다. "514 번지가 어디쯤 됩니까?" "퍼시 하먼 씨입니까?" 아담이 물었다. "제가 제대로 찾았군요." 퍼시 하먼이 몸을 뒤로 제껴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담은 자켓을 꼭 여미고 계단을 뛰어내려 차 안으로 들어갔다.


퍼시는 49 번가 출구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루즈벨트 로의 교통이 말이 아니라면서 늦은 것을 사과했다. 퍼시는 첫인상부터 맘에 드는 싹싹한 남자였다. 아담보다는 나이가 좀더 들어 보이는 퍼시는 어두운 청색 양복과 물방울 무늬가 그려진 붉은 넥타이 차림을 하고 있었다. 회사원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성공한 인상의 젊은이였 다. 차는 파크 애비뉴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심으로 향하였다. "글레런스 맥가이어가 당신을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데요. 무슨 비결이 있 나 보죠?" 퍼시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의학을 3 년 공부했다는 경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요." "맙소사. 그랬었구만! 회사 사람들이 당신을 그렇게 여길 만도 하지. 우리 같은 문외한들은 따라가지 못할 경력이군요." 아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였다. 대학을 다니며 뼈와 효소, T-임파 구의 기능 같을 것들을 배웠지만, 그게 과연 아롤렌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 인가? 더군다나, 그런 지식들은 시험만 끝나면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들인 데. 아담은 퍼시의 차안을 둘러보았다. 뒷좌석에 놓인 상자 안에는 팜플렛들이 들어 있었고 상자 옆에는 노트와 컴퓨터 인쇄물, 그리고 약품 주문 양식이 쌓여 있었다. 인쇄된 회람이 대시보드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붙여져 있었 다. 자동차 안은 번잡한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자신의 학력이 이런 일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도대체 모를 일이었다. 아담은 뉴욕 시내의 교통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퍼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롤렌에 들어오게 되셨지요?" 아담이 물었다. "경영대학원을 마치자마자 뽑혀서 들어왔지요. 학부에서 보건경제학을 전 공했기 때문에 보건분야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회 사 쪽에서 인터뷰 제의을 해온 겁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회사가 꽤 괜찮 아 보이더군요. 영업사원 생활도 즐겁지만 앞으로 더 기대되는 과정이 기다 리고 있지요. 당신에게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만, 푸에르토리코의 경영자 교 육과정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나한테 감사해야 하다니요?" "당신이 내 후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클레런스가 말하더군요. 지난 1 년 동안 푸에르토리코에 가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한테도 같은 걸 제안하더군요." 아담이 말했다. "곧장 푸에르토리코로?" 퍼시가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말이요. 아롤렌의 모 회사는 엄창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금융회사란 말입니다. 10 년쯤 전에 몇몇 똘똘 한 사내들이 MTIC 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보건산업에 투자를 시작했지요. 아 롤렌 사는 그들이 초기에 건져올린 수확 중의 하나입니다. 처음에 인수했을


때만 해도, 아롤렌은 보잘것없는 약공장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릴리와 머크 사 같은 대제약회사에 도전장을 내밀게 될 정도로 커졌다구요. 맥가이어 말 고 회사에서 또 누굴 만났습니까?" "빌 셀리와 닥터 내흐만이요." 퍼시는 휘파람을 휘 불더니 차창 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아담을 오랫동 안 바라보았다. "당신은 MTIC 의 창립 멤버들 중 두 사람을 만나본 거요.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은 MTIC 의 이사일 뿐 아니라 아로렌의 경영권도 장악하고 있다던데, 닥 터 내흐만은 어떻게 만날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은 지금 푸에르토리코의 연 구소장으로 있는데." "무슨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더군요." 퍼시의 반응을 보고 나서, 아담은 아롤렌이 원하는 게 과연 자신인가 아니 면, 그들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였는가 하는 의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말이지요, 회사 시설이 일류호텔에 맞먹을 만큼 화려하 게 지어져 있답니다. 거기 한번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꼭 딴 세상에 온 것 같더라구요. 거기서 교육받게 될 날이 너무 기다려져요. 유급휴가와 다를 게 없죠." 퍼시가 말했다. 빗방울이 차창을 끊임없이 두들겨대고 있었다. 아담은 푸에르토리코에 세 운 모자보건시설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궁금하였다. 처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제니퍼와 함께 밝은 햇살을 즐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끌 리긴 했다. 아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일몽에 잠겨보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일하던 병 원에서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푸에르토리코에 간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 왔어요." 한 아파트 빌딩 가까이에 차를 대며 퍼시가 말했다. 차를 세운 곳은 주정 차 금지구역이었다. 퍼시는 사물함에서 조그마한 표지판을 하나 꺼내었다. 거기에는 '의사를 만나는 중입니다'라는 문구가 씌어있었다. "원래 뜻에는 좀 어긋나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요." 퍼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공격계획을 세워볼까요. 전형적인 의사들은 방문할 때는 어떤 행동 을 취해야 하는ㅈ가를 가르쳐드리기로 하지요. 이 사람 이름은 제리 스미스 라고 합니다. 파크 에비뉴에서는 꽤 성공한 산부인과 의사지요. 그런데 좀 성질이 괴팍해요. 자기가 세기의 지성인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워삶기가 비교적 쉽답니다. 또 공짜 샘플을 아주 좋아하구요.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까?" 아담은 질문이 없다고 했다. 차를 막 나서는 아담의 머릿속에, 적에게 투 항하는 것 같다던 닥터 마르코비츠의 조언이 갑자기 떠올랐다. 퍼시는 트렁 크를 열어 커다란 우산을 아담에게 건네주고는, 약품 샘플들을 꺼내는 동안 들고 있으라고 했다. "스미스는 안정제를 제일 좋아해요. 그것들을 다 어디에 쓰는지는 모르겠 지만."


퍼시는 잡다한 약품이 든 작은 상자를 꺼낸 뒤 트렁크를 닫았다. 닥터 스미스의 사무실은 여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공기는 무척 탁했고 축 축한 냄새가 났다. 퍼시는 접수직원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아담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조심스럽게 대기실을 훑어보는 아담의 눈이 잡지책들 너머로 쳐다보는 여자 들의 눈과 마주쳤다. "안녕, 캐롤." 퍼시가 입을 열었다. "야, 오늘 멋지게 입었는걸요. 그리고 머리도 좀 봐!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아, 말하지 말아요. 내가 한번 맞춰볼게. 퍼머를 했군요. 저말 멋 져요. 꼬마들은 어떻게 지내나요. 다 건강하겠죠. 이봐요. 아담 숀버그를 소개할게요. 앞으로 내 대신 고객들을 만나뵙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말이죠. 아담에게 꼬마 사진을 보여줘도 될까요? 곰 가죽 위에 앉아 있는 그 사진 말예요." 아담의 손에 사진틀이 들리워졌다. 통통한 아기가 목욕수건 위에 누워 있 는 사진이었다. "캐롤,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2 분 뒤 퍼시와 아담은 진찰실에서 스미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멋진 연기였어요." 아담이 속삭였다. "그런 거야 식은 죽 먹기지요." 퍼시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중요한 건 말이지요. 의사를 만나기 전에 접수직원이나 간호사와 잘 사귀 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그 살마들이야말로 의사를 만나게 해줄 수 있 는 유일한 열쇠이지요. 이걸 제대로 못하면 대기실에서 늙어죽게 돼요." "하지만 아까 그 여자하고는 친한 친구처럼 이야기하던걸요. 어떻게 그 여 자의 개인적인 일들을 상세히 알 수 있었지요?" 아담이 물었다. "아로렌에서는 그런 정보들도 다 마련해준답니다. 회사에는 의사뿐만 아니 라 병원 종사자들 모두의 신상기록이 보관되어 있어요. 그런 자료를 입력해 넣거나 받아보는 것도 당신이 할 일이지요. 알고 보면 신기할 것도 없는 거 예요.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쏟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진찰실을 둘러보았다. 짙은 래커가 칠해진 캐비닛과 커다란 책꽃이 가 격조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중 제일 위에 놓인 <아메리카 산부인과학 저널>이 아담의 시선을 끌었다. 그 잡지는 발행된 지 1 년도 넘 은 것이었는데 우체국에서 묶은 포장끈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놓여 있었 다. 문이 열렸다. 닥터 스미스는 문지방에 멈추어 선 채로 뒤를 돌아보고 있었 다. "다음 환자는 6 번하고 7 번 진찰실로 들여보내도록 해." 멀리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담으로서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도 계획보다 늦었다는 걸 알아." 닥터 스미스가 소리쳤다.


"언제는 안 그랬나?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해!" 그는 안으로 들어선 뒤 문을 걷어찼다. "간호사하고는, 망할!" 닥터 스미스는 올챙이배가 인상적인, 큰 체격의 사람이었다. 턱은 워낙 살 집이 좋아 늙은 불독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스미스 박사님, 안녕하셨습니까?" 퍼시가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스미스는 그가 청하는 악수를 받고는 책 상 뒤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카멜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 콧구멍으로 담배 연기를 날려보냈다. "여기 이 사람은 아담 숀버그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아롤렌에 입사한 사원인데 제 특별고객들에게 소개를 시키러 다니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뭘 보여줄 건가?" "전부 다 보여드려야지요." 퍼시는 책상 가장자리에 상자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스미스가 눈빛을 번득거리며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안정제 말리움에 관심이 많으셨었지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많이 가져왔 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포장이 많이 개선되었지요. 환자들은 이 밝은 노란색 병포장을 좋아할 겁니다. 이 인쇄물도 받으십시오. 이곳 뉴욕의 줄 리안 클리닉에서 시행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말리움은 현재 시중에 나와 있 는 어떤 안정제보다도 부작용이 적은 걸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굳이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선생님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제게 누차 해 주셨으니까요." "맞는 말이야." 스미스가 말했다. 퍼시는 책상 위에 다른 약품 샘플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으면서 제품들의 효 능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기회가 닿을때마다, 퍼시는 아로렌 제품을 선 택한 스미스의 날카로운 판단력을 칭찬했다. "이게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약품입니다." 퍼시가 말했다. "프레그돌렌의 샘플은 이미 드린 일이 있지요. 이 약품이 임산부의 아침 입덧에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는 더이상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약품의 효능을 제일 먼저 간파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분이시니까요. 최근 실린 기사를 하나 복사해왔는데 나중에 시간이 나시 면 읽어보십시요. 프레그돌렌과 유사약품들을 비교한 실험에서 프레그돌렌 이 간에 무리를 덜 주면서도 가장 빠른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소개한 기 사입니다." 퍼시는 잡지 더미 위에 반지르르하게 코팅이 입혀진 복사물을 올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아드님 데빗은 잘 지내나요? 이제 보스턴 대학 3 학년으로 올라가지요? 아담, 당신도 한번 그 사람을 만나보면 좋을 텐데. 영화 배우 탐 셀렉하고 닮았는데, 더 잘나면 잘났지 못하지는 않더라구." "잘 지내고 있지. 관심을 가져주니 고맙군." 스미스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는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모금 빨아들이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석 이번에는 수석을 차지했다구." "알고 있습니다." 퍼시가 말했다. "의대에 진학하는 데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15 분 뒤, 그들은 다시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퍼시는 우산을 뒷좌 석 바닥에 살짝 내려놓은 뒤 운전석에 앉았다. 유리창 와이퍼에 주차위반 딱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 이런." 퍼시가 말했다. "이 방법은 제대로 통한 적이 없단 말이야." 그가 와이퍼 작동 버턴을 누르자 딱지라 유리창에서 사라졌다. "따-단!" 퍼시는 멋진 마술이라도 부리는 양 손을 높이 치켜올리며 외쳤다. "이 차는 아롤렌 사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에 신경 쓸 필요 가 없어요. 자, 그럼 다음 고객은 누구더라?" 그는 컴퓨터 인쇄물의 다음 장을 넘겼다. 퍼시가 접수직원들을 능숙하게 구워삶고 정신없이 바쁜 의사들에게 약품을 팔아넘기는 솜씨를 구경하느라 아침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의 사들을 상대하는 퍼시의 실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침 내내 퍼시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담은 자기가 가진 약학적 지식 이 아주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퍼시는 최근의 정보에 밝았으 며, 의사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문가인 것처럼 믿게 할수 있는 능력이 있었 다. 아롤렌이 의사들의 지능을 얼마나 낮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11 시 반쯤에 퍼시는 서튼 플레이스에 있는 내과 개인 클리닉을 나섰다. 그 는 차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운전대에 기대었다. "혈당량이 갑자기 떨어진 것 같아요. 뭘 좀 먹어야겠는데, 식사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요?" "난 식사시간 같은 건 상관 안 해요." 아담이 대답했다. "좋아요! 어차피 아롤렌이 부담하는 거니까, 그럴듯한 데서 먹어야겠지요. " 아담은 전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계절' 레스토랑을 입에 올리며 그곳 이 부의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농담을 했었다. 그래서 퍼시가 그곳에 가자 는 말을 꺼냈을 때, 아담은 그 역시 농담을 하고 있는걸로 생각했다. 그러 나 정작 그를 따라 그릴 룸으로 들어서자 아담은 현기증을 느꼈다. 냅킨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담은 병원의 북적거리는 카페테리아를 떠 올렸다. 지금은 그곳에서 백만 마일쯤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마실 것은 뭘로 하겠느냐고 물었다. 아담은 머뭇거리며 퍼시를 바라 보았다. 퍼시는 마티니를 주문했다. '맙소사'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같은 걸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이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소감이 어때요?" "재미있군요." 아담은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매일 여기서 식사합니까?"


"솔직히 말하지요. 맥가이어가 당신을 좀 놀래주라더군요." 아담이 깔깔대며 웃었다. 퍼시의 솔직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당신의 능력에 정말 놀랐어요. 훌륭해요." 퍼시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쉬운 일입니다. ���어장에서 고기를 잡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의사들은 약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요. 당신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겠군요." 아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약리학 수업을 마쳤지만 실제로 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배운 건 약이 세포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따위의 것들이 었다. 아담이 퍼시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 순간, 마티니가 도착했다. "아롤렌에서 멋진 경력을 쌓기 바랍니다." 퍼시가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 프레그돌렌이란 약품은 어떤 겁니까? 내 아내도 아침에 입덧으로 고생 하고 있거든요. 그 샘플 중에 몇 개만 가져가면 안 될까요." "나라면 안 그럴 거예요." 퍼시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변하며 말을 계속했다. "알로렌은 프레귿돌렌을 몇 톤씩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그게 대단한 발명 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난 그 약이 효과가 있을 거 라고 생각 안 해요. 그리고 독성이 있을 가능성도 있구요." "무슨 말입니까?" "벌써 여러 의학잡지에 실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퍼시는 말을 끊고 잠시 마티니를 들이켰다. "물론, 내 고객들한테는 그런 기사는 소개하지 않지요. 의사들이 처방을 남발해대는 걸 보면 그런 기사를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게 분명해요. 의사 들이 의학 잡지에서 약품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새빨간 거짓말이지요. 그 작자들이 정보를 얻는 건, 나같은 살마한테서가 고작인 거예요. 그리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들려주는 거지요." 아담의 벙벙한 표정을 바라보며 퍼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도 의사들이 예감이나 습관 같은 데 의존해서 처방을 내린다는 걸 누 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일은 아롤렌이 그들의 습관이 되 게 하는 것이예요." 아담은 미티니 전을 천천히 돌리며 올리브가 안에서 회전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러면서 일을 하는 동안 모르는 척 눈감고 지내야 할 부분이 많다 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담의 걱정을 눈치챈 퍼시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정말 솔직한 얘기 하나 하지요. 나로서는 영업사원 생활을 청산하게 되니 까 보통 홀가분한 게 아닙니다." "그건 왜죠?" 퍼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당신의 열정에 찬물 을 끼얹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말예요, 요즘 내가 맡은 구역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입니다. 갑자기 내가 정기적으로 찾아가던 의사들 여 럿이 한꺼번에 고객목록에서 삭제돼버린 거예요. 처음에는 이사를 갔든지


죽든지 했겠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사람들 중 상당수 가 알로렌이 주최하는 선상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개인 클리닉을 그 만두고 줄리안 클리닉으로 옮겨간 거예요." "줄리안 클리닉" 아담의 뱃속에서 묘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제니퍼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 올렸다. "그 중에 몇몇은 나와 아주 친분이 깊었어요." 퍼시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줄리안 클리닉은 내 구역이 아니었지만 그 사람들을 한번 만나보 려고 찾아갔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변해 있었어요. 로렌스 폴리라는 의사는 내가 아롤렌에 입사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그 사람은 아롤렌 사 제품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좋아서 자주 찾곤 했었죠.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같이 테니스도 치곤 했구요." "얼마전에 자살했다는 닥터 폴리 말인가요?" 아담이 물었다. "그래요, 맞아요. 그런데 그 자살이란 것도 내가 말하는 변화 중에 하나 죠. 난 정말 그 사람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시내의 산부인과 활동 클리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선상학회에 갔 다오고 나서 줄리안 클리닉에서 일하겠다며 모든 걸 포기해버렸어요. 내가 찾아갔을 땐 완전히 사람이 달라져 있었어요. 일에 너무 열중하느라고 테니 스 칠 시간을 낼 수가 없다더군요. 그 사람은 자살 같은 걸 생각할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침울한 표정을 잇는 걸 본 일이 없거든요. 게다가 일을 무척 좋아했고 부인과도 사이가 좋았어요.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어요. 부인을 쏜 다음에 산탄총 총구를 입에 집어 넣고는......" "대충 상상이 가네요." 아담이 그의 말을 막았다. "아롤렌 선상학회는 어떤 겁니까?" "카리브해 한가운데 정박한 유람선 위에서 열리는 의학 세미나인데 아주 인기가 좋지요. 여러 분야에서 내노라 하는 의사나 교수들이 발표를 합니 다. 극네에서 열리는 의학 학회 중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 이상은 나도 몰라요. 클레런스 맥가이어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학회가 MTIC 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던데요."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빌 셀리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랬어요? 의 사들에 관한 일들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도 당신 얘기에 관심을 보일 거 아 니에요. 빌 셀리란 사람, 아주 젊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던데." "그래요?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오늘 오후에 한번 찾아가 보지요. 셀리를 언제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 그 기회를 잡게되는군요." 그날 오후, 퍼시는 아담을 대학병원 앞에 내려주었다. 아담은 아롤렌 사에 서 일하고 나면 그 전과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그들은 여섯 군데의 클리닉에 들러 500 개에 가까운 샘플을 나누어주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스미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샘플에 욕심을 냈고 퍼시의 찬사에 우쭐해 했다.


아담은 의대 정문을 지나 병원으로 들어선 뒤, 도서관 안에 있는 정기간행 물실로 향했다. 최근 잡지에 프레그돌렌에 대해 난 게 없는지 살펴보고 싶 었다. 퍼시가 들려준 이야기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아담도 부작용이 있는 약을 팔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10 개월 전에 발행된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그가 찾는 내용이 실려 있 었다. 산부인과 임상의들이 이런 논문을 놓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였다. 퍼시가 말한 대로, 프레그돌렌은 플라세보(Placebo : 어떤 약품이 효과가 있는지 비교 관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 효과가 전혀 없는 가짜약)와의 비 교 실험을 통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세 경우를 제외하 고는 오히려 플라세보가 프레그돌렌보다 좋은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나타났 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프레그돌렌은 기형유발적(Teratogenic)인 것으 로, 즉 태아의 발달과정에 심각한 이상현상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임상약리 저널>에는 또 다른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의학계의 반대 여론에 도 불구하고 프레그돌렌의 판매량이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왔으며, 특히 지난해에는 매출량이 급증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담은 잡지를 덮었다. 아롤렌의 마케팅 기술과 산부인과 의사들의 무지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퍼시 하먼은 그가 즐겨 찾는 일식 레스토랑에서 스키야키 요리로 배를 채 운 뒤 차를 몰고 흥얼거리며 주차장을 나섰다. 레스토랑은 뉴저지 포트리에 있었지만 지금 같은 야밤이라면 맨하탄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까지 20 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퍼시는 레스토랑에 머무는 동안 파란 블레이저 상의와 황갈색 바지를 입은 한 사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파란 시보레가 멀리 자취를 감추어버릴 때까지 잠자코 앉아 있다가 곧 가까운 전화박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레스토랑을 떠났습니다. 15 분 뒤면 주차장에 들어갈 겁니다. 공항에 도 연락을 해두지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사내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동전 두 개를 더 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기계적인 동작으로 버튼을 눌렀다. 차는 할렘 리버로 들어섰다. 왜 진작 빌 셀리를 만나볼 생각을 못했던 것 일까. 빌 셀리는 퍼시의 관찰력에 찬탄을 표하면서 매우 친절한 자세로 자 신의 말을 경청해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퍼시를 그룹 부회장 앞에까지 데려 다준 일도 있었다. 아롤렌 같은 큰 조직에서 그런 기회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자신의 미래가 그때처럼 밝게 빛나 보인 적이 없었다. 퍼시는 아로렌에서 지정해준 주차장 앞에 차를 멈추었다. 주차장은 74 번가 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겨우 네 블럭 떨어진 곳에 있었다. 비오는 날을 제외한다면 그 정도 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이었다. 거대한 창고를 연상 시키는 주차장은 낡은 도로면 옆에 세워져 있었다. 입구는 커다란 쇠창살문 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퍼시가 사물함에서 꺼낸 원격조정장치의 버튼을 누 르자 창살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입구 위의 푯말에는 퉁명스럽게 보 이는 문구가 하나 씌어 있을 뿐이었다. '주차장 : 일별, 주별, 월별.' 그리


고 그 뒤에 작게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퍼시는 차를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창문이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별도로 할당된 주차공간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퍼시는 좌우를 주의깊게 살피며 차를 운전해야 했다. 1 층에는 빈 공간이 보이지 않 았다. 퍼시는 지하층을 싫어했다. 침침한 지하층에 내려가면 항상 불안했 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처시는 자리를 찾기까지 세 층을 내려가야 했다. 차문을 잠그고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소리가 기름으로 얼룩진 시멘트 바닥에 울려퍼졌다.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가 들려왔다. 계단에 도착해 문을 열어젖힌 퍼시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며 뒤로 물러섰다. 구식 상고머리에 감색 윗도리를 걸친 두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길을 가로막고 서 있기만 했다. 짜릿한 공포감이 퍼시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문손잡이에서 손을 놓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한 새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퍼시는 뒤로 돌아 반대편에 있는 계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두의 밑창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미끄러지며 퍼시가 비틀거렸 다. 퍼시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반대편 계단의 입구로 다가가 문을 잡아당겼다. 손잡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이 잠긴 상태였다. 가쁜 숨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주차장에 울려퍼졌다. 유일한 출구는 차가 들어오는 경사로뿐이었다.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을 즈 음,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경사로 앞을 막아선 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퍼 시는 옆에 주차된 차 뒤로 숨어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보았다. 두 사람이 갈라져 한 사람은 계단, 한 사람은 경사로를 지키고 있었다. 순간 퍼시는 주차장 중심부에 있는 낡은 자동차용 엘리베이터를 생각해냈다. 자세를 낮게 유지하며, 퍼시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 베이터 앞에 도착해서 나무로 된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의 다른 세 벽면은 두꺼운 철제그물로 둘러싸여 있 었다. 머리 위에 달린 전구만이 안을 희미하게 비추어주었다. 퍼시는 떨리 는 손가락으로 '1'이라고 쓰인 버튼을 눌렀다. 철컥하고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난 다음, 전기모터의 날카로운 회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1 층까지는 그의 키만큼의 거리 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그의 아래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사내가 곧장 다가와 조정판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아래 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포에 완전히 질려버린 채, 퍼시는 계속 버튼을 눌 러대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하강을 멈추지 않았다. 퍼시가 엘리베이터 로 도망가도록 미리부터 각본이 짜여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이 퍼시를 쫓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뭘 원하는 거요?" 퍼시가 소리쳤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그가 지갑을 꺼내서 나무문의 틈을 통해 아래층으로 던졌다. 한 사내가 허 리를 굽혀 지갑을 움켜쥐고는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그것을 주머니 속 에 넣었다. 다른 한 사람이 총 같아 보이는 물체를 꺼냈다. 거리가 아주 가 까워졌을 때에야, 퍼시는 그게 주사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퍼시가 엘리베이터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는 덫에 걸린 짐승의 신세나 다 름이 없었다. 모터의 움직임이 멈추고 나무문이 열렸다. 퍼시는 비명을 지 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한 시간쯤 뒤에, 파란색 봉고가 테터보로 공항으로 들어가 걸프 스트림 사 의 제트기 앞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나온 두 사람이 뒷칸에서 큼지막한 나 무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비행기의 입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8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모두가 아로렌 영업사 원 과정을 이수한 사원들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친구와 친지들이었다. 과정 의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던 아놀드 와이즈먼이 빌 셀리와 함께 강당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 오른쪽엔느 커다란 성조기가 세워져 있었다. 아담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거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4 주일 동안의 과정을 이렇게 거창한 행사로 마무리짓는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 다. 하지만 세일즈맨들이 약을 파는 과정의 십 분의 구 정도가 순전히 쇼라 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지난 4 주는 정말 빨리 흘러갔다. 2 년 반 동안 쌓아온 의학 지식 덕분에 아 담은 첫날부터 다른 교육생들보다 훨씬 앞서가기 시작했다. 스무 명의 교육 생들 중 반은 약학 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다섯은 경영학 석사 출신이었으 며 나머지는 모두 아롤렌의 여러 부서에서 일해오던 정식사원이었다. 아담은 군중 속을 바라보며 제니퍼를 찾았다. 어쩌면 마음을 바꾸어 이곳 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담은 자신이 헛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니퍼는 처음부터 아롤렌에 입사하는 것을 반대해왔으며, 설사 오고 싶어 했다고 해도 요즘 들어 심해진 아침 입 덧 때문에 정오 이전에는 아파트를 나설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선은 기적을 바라며 검은 머리의 젊은 여인을 찾아 군중 속을 헤매고 있 었다. 순간, 그의 눈길이 검은 레인코트를 걸친 곱슬머리의 신사에게 고정되었 다. 그 신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입구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평범 하게 생긴 금테 안경이 그의 매부리코 위에 걸쳐져 있었다. 아담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눈에 착각을 일 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였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아담은 줄곧 얼떨떨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형식 적인 절차가 다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아담은 아버지가 서 있는 입구를 향해 다가갔다. "아버지?" 닥터 숀버그가 아담을 향해 돌아섰다. 숀버그가 들고 있는 이쑤시개 끝에 새우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담 역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아버지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를 긴장하게 했다. "역시 사실이었구나." 닥터 숀버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롤렌 제약에 입사했다고 하더니!" 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도대체 이 일을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하란 말이냐 ! 널 의대에 집어넣느라고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기억이나 하니?" "그걸 기억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A 학점을 놓치지 않았던 겁니다. 전 다시 돌아갈 거예요. 잠시 휴학을 하고 있을 뿐이라구요." "도대체 왜?"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곧 아이를 갖게 될 거예요." 잠시 아버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혐오스런 표정을 지으 며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네가 이런 사람들과 손을 잡을 줄이야......" 그는 홀의 화려한 내부장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업의 이익에 대한 욕심이 의학자들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는 하지 못하겠지?" "아롤렌은 공공 사업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안 통한다. 그런 선전문구에는 관심이 없어. 제약회사도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야. 대중들을 현혹시키기 위 해서 수백만 달러를 광고비로 지출하지. 그 광고라는 건 순 거짓말일 뿐이 야. 내 아들이 그 계집애 때문에 이런 회사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건......" "제니퍼라고 부르세요." 아담이 아버지의 말을 가로챘다. 아담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져오는 것을 느꼈다. "데이빗 숀버그 선생님." 빌 셀리가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아담의 뒤에서 다가왔다. "아롤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만큼이나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겠 지요. 전 빌 셀리라고 합니다." 닥터 숀버그는 그가 내미는 악수를 거절했다. "당신이 누군지 잘 알고 있소. 솔직히 말하자면 내 아들을 보고 자랑스럽 게 느끼기보다는 그저 놀랐을 뿐이오. 당신들 초대에 응한 이유가 있다면 아담이 이 회사에 있다는 이유로 내게 특별한 배려를 기대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아버지." "전 언제나 정직한 분을 존경해왔습니다." 빌이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계속했다. "저희도 선생님이 FDA 에 있다는 이유로 아드님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을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그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오."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새로운 약품을 허가받기가 조금이라도 쉬워지는 일이란 결코 없을 것이 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닥터 숀버그는 들고 있던 새우를 쓰레기통에 던져넣 고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 아버지의 신념과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요. 아버님은 의 약 분야에서 다른 회사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많이 보아오신 분입니다. 아롤렌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만큼 우리와 접촉이 없으셨던 게 아타까울 뿐이에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님의 행동을 변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조만간에 아버짐을 아로렌 선상학회에 오시도록 요청해보지요. 거기에 대 해서 들어보신 일이 있나요?" 아담이 퍼시 하먼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넘게 퍼시로부터 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예절바른 사내가 왜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버님께 이미 여러 차례 초청장을 보내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선상학회 뿐만이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의 연구시설을 참관해 달라는 부탁도 드려보았 지요. 당신이라면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한번이라도 아버 님이 우리의 요청을 수락하신다면 아롤렌에 대한 시각이 맣이 달라지시게 될 겁니다." 아담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아버님에게 램브란트의 그림을 공짜로 드린다고 해도 받으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버지와 저는 대화가 거의 단절된 상태입니 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 오늘 아버지를 보고 무척 놀랐거든요." "그것 참 안된 일이군요. 우리로서는 아버님을 선상학회의 저명한 강연자 중 한분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데요. 이 세미나가 권위를 인정 받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만일 오시게 된다면 모든 경비는 저 희측에서 부담하게 됩니다." "제 어머니께 부탁드려 보시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담이 웃었다. "배우자는 초청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빌은 아담을 샴페인이 놓인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그건 왜 그렇죠."


"선상학회는 철저하게 학문적인 행사입니다." "물론 그렇겠지요." "선상학회는 아롤렌 사의 재정지원을 받게 되지만 운영은 MTIC 에서 맡아 하고 있습니다. MTIC 가 유람선에 참가자들을 태우기로 결정한 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자느느 의도에서였습니다. 전화 나 환자, 증권중개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입니다. 학회가 열릴 때마다 특정한 임상이나 연구 주제가 결정되고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 물을 강연자로 초청하게 되지요. 따라서 세미나의 수준은 최고 일류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배를 한가운데로 내보낸 다음 덧을 내린다구요?" "아, 아니요. 배는 마이애미를 출발해서 버진 아일랜드를 경유한 다음 푸 에르토리코까지 갔다가 다시 마이애미로 돌아옵니다. 참가자들 중 일부는 푸에르토리코에 내려서 저희 연구시설을 돌아보게 되지요." "그러니까 일만 하고 즐기지는 않는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도박같은 것도 전혀 안 하구요?" "물론 약간의 오락은 있을 수 있지요." 빌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버님이 오시면 아주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쓰실 수 있다면 한번 말씀을 드려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도 그는 퍼시 하먼에 대해 생각하고 있 었다. 빌에게 퍼시가 언제 맨하탄을 떠났는지 물어보려는 참에 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영자 훈련과정에는 아직도 관심이 없으신지요?" "사실대로 말ㅆ므드리자면, 전 지금 판매사원 과정에 푹 빠져 있는 상태입 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요." "그렇게 하십시오." 삼페인잔 너머로 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날 오후, 아담은 맥가이어의 사무실에서 자신이 맡을 구역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퍼시 하먼의 구역을 넘겨받게 됩니다. 대개 여기는 경 험이 풍부한 영업사원을 할당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당신의 능력 을 믿고 있어요. 자, 여길 보세요." 클레런스가 커다란 맨하탄의 지도를 펼쳤다. 동부 지역의 한 부분이 노란 펜으로 큼지막하게 줄그어져 있었다. 표시된 구역은 34 번가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5 번가, 동쪽으로는 강까지 이르고 있었다. 대학 병원은 구역에 포 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담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뉴욕 종합병원, 마운튼 시나이 종합병원, 그리고 줄리안 클리닉은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클레런스가 아담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말했다. "줄리안 클리닉 같은 큰 규모의 병원은 담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 지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의욕이 아주 대단하시군요!" 클레런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개인 개업의들을 상대하기에도 벅찰 텐데요. 종합병원들은 본부에서 관할 하고 있습니다." "줄리안 클리닉 같은 곳은 종합병원 이상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아롤렌과 줄리안간에는 아주 특별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 습니다. 둘 다 MTIC 를 모회사로 하고 있거든요. 따라서, 줄리안 클리닉은 아롤렌 사에 임상 정보를 제공해주며 아롤렌은 클리닉에 특별연수의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클레런스는 몸을 앞으로 숙여 컴퓨터 인쇄물을 집은 후 그것을 아담의 무 릎 위에 올려놓았다. "일이 별로 없을까 봐 걱정이 된다면, 여기에 있는 고객 명부를 한번 훑어 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아담의 무릎에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져왔다. 제일 앞면은 '만하탄 동북부 개업의 목록'이라고 씌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아롤렌 제약 뉴저지 몽클레 어'라는 문구가 보였다. 제일 아래 오른편 구석에는 '대외비'라는 단어가 찍혀 있었다. 아담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알파벳 순서에 의해 의사들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나열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첫줄에 닥터 클라크 반데르 머의 이름이 있었다. 제니퍼를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약을 팔러 간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 졌다. 맥가이어는 아담이 만나게 될 의사들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를 늘어놓 기 시작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설명을 마친 맥가이어가 말했다. "네. 퍼시 하먼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맥가이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푸에르토리코의 경영자 훈련과정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들었지만, 실제로 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그냥 굼금해서요." "그리고, 모르는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을 하도록 하세요. 여기 당신이 타 고 다닐 차 열쇠가 잇어요. 차는 뷔크 사의 센튜리예요." 아담이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여기엔 주차장 주소를 적어놓았어요. 당신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 운 곳이지요. 앞으로도 그곳을 계속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담은 다시 종이족지를 받았다. 회사의 세삼한 배려에 다시 한번 감탄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주차공간을 마련한다는 건 차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당신의 컴퓨터 비밀번호요. 자세한 건 교육과정 을 통해서 배워두었겠죠. 컴퓨터는 차 트렁크 안에 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건 당신의 컴퓨터 비밀번호요. 자세한 건 교육과정 을 통해서 배워두었겠죠. 컴퓨터는 차 트렁크 안에 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아담은 마지막으로 종이봉투를 넘겨받고 다른 한손으로 판매 책임자와 악 수를 나누었다. 이제 그는 아롤렌 사의 정식 '외판원'이 된 것이다.


로큰롤 음악이 나오는 곳을 찾아 FM 다이얼을 돌린 후, 아담은 차창을 내 리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팔꿈치를 창틀에 걸쳤다. 차는 시속 50 마일의 속도 로 달리고 있었다.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지더니 아버지의 조롱섞인 목소리 가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돈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도와줬으면, 의대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구!" 아파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에 '친정에 가요'라고 쓰인 메모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아 담은 종이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아담은 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먹다 남은 닭고기가 좀 있었다. 그는 닭고기와 마요네즈, 그리고 호밀빵 두 조각을 꺼내어 샌드위치를 만든 다음, 거실로 들어가 가져온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어 떤 의사를 먼저 찾아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닥터 반데르머의 이름을 쳐넣고 수화기를 모뎀에 연결시켰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아담은 출력 키를 두들긴 후 뒤로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모뎀의 조그마한 적색 램 프에 불이 들어왔다. 이제 컴퓨터가 아롤렌의 중앙 컴퓨터와 연결된 것이었 다. 스크린이 번쩍거렸다. 샌드위치를 씹고 있던 아담은 몸을 앞으로 숙여 스 크린에 나타난 문자를 읽기 시작했다. 클라크 반데르머, 의학박사. --학력 및 경력 --인적 사항 --재산 관계 --전문 분야 --처방 자료 (스페이스 바를 눌러 메뉴를 선택하시오.) 아담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스페이스 바를 눌러 인적 사항이라고 쓰인 부분에 커서가 멈추게 한 다음 출력 키를 눌렀다. 다른 메뉴가 떠올랐 다. 인적사항 --가족 사항(과거), 부모 및 형제 --가족 사항(현재), 배우자 및 자녀 --특기 및 취미활동 --개인적 기호 --사회 활동(교육과정 포함) --건강 기록 --성격


(스페이스 바를 눌러 메뉴를 선택하시오.) 하느님 맙소사! 이건 조지 오웰의 <1984 년>의 재판이었다. 그는 커서를 ' 가족사항(현재)'에 맞추고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은 장황한 설명들로 가득 찼다. 닥터 클라크의 부인과 자녀에 대한 자료를 모두 읽는 데는 10 분이 넘 게 걸렸다. 대개가 시덥잖은 내용들이었으나 중요해 보이는 자료들도 꽤 눈 에 띄었다. 반데르머의 부인은 세번째 아기를 낳은 후 우울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병력이 있었다. 또 둘째인 그의 딸은 신경성 식욕불량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롤렌과 같은 제약회사가 의사들의 신상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파악해두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작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처방 자료'라는 범주 안에 다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담은 '처방 자료'로 들어가 보았다. 예상한 반대로 반데르머의 처방 양식에 대한 분석과 매년 사용하는 약들의 종류 및 그 양에 대한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다시 주 메뉴로 돌아와, 아담은 닥터 반데르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출력하 라는 명령을 쳐넣었다. 도트-매트릭스 프린터의 휠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담은 부엌으로 들어가 콜라를 찾았다. 프린터가 작동을 멈추기까지 꼭 32 분이 걸렸다. 아담은 마지막장을 프린터 에서 뜯어내고 길게 늘어진 프린트 용지를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전부 50 장은 되어 보였다. 의사들은 일개 제약회사가 자신들에 대해 이렇게 엄청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보고서의 내용은 무미건조하고 지루했다. 그 안에는 반데르머의 투자명세 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데르머의 활동 경력 부분에서 아담이 눈길이 멈 추었다. 반데르머가 일하는 산부인과 합동 클리닉에는 로렌스 폴리가 몸을 담은 일이 있었다. 로렌스 폴리. 그는 얼마전 갑작스런 자살로 숨을 거두지 않았는가. 제니퍼도 자기의 담당의사와 폴리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는 사 실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현재 반데르머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의사들로는 닥터 존 스텐즈와 닥터 준 바움가르텐이 있었다. 아담은 제일 먼저 닥터 반데르머를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의사를 만나 려면 접수직원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퍼시의 충고대로, 접수직원의 데이 터를 검색해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클리스틴 모건이라고 했다. 나이는 스물 일곱이었고 남편 데이빗 모건의 직업은 화가였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하 나 있었는데 이름은 데이빗 준니어, 별명은 디제이(DJ)였다. 퍼시 하먼의 활기찬 목소리를 닮아보려고 애쓰며,아담은 산부인과 합동 클 리닉의 다이얼을 돌렸다. 크리스틴이 전화를 받았고 그는 자신이 하먼의 후 임으로 일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아담은 퍼시가 크리스틴의 잘생긴 아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말이 먹혀 들어 간 모양이었다. 크리스틴은 지금 곧장 찾아오면 의사선생님을 만나게 해주 겠다고 했다. 5 분 뒤, 아담은 파크 애비뉴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어떤 약 을 팔아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알로렌이 임산부들을 위해 개발 한 비타민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36 번가와 파크 애비뉴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주차할 곳을 찾기가 무척 어려


웠다. 구역에도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결국 파크 애비뉴와 랙싱 턴 가 사이의 소화전이 있는 자리에 만족을 해야 했다. 차문을 잠그고 나서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약품 샘 플과 프린트물,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자잘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 로렌의 회사 도안이 새겨진 크로스펜도 여러 자루가 눈에 띄었다. 아담이 필요에 따라 사용하게 될 선물이었다. 아담은 약품 샘플과 프린트물들 중 쓸만한 것들만을 골라 가방 속에 넣고 크로스펜 역시 하나를 꺼내어 옆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트렁크를 잠그고, 반 데르머가 일하고 있는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틴은 퍼머 머리에 놀란 새 같은 표정을 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유리 문을 열고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아롤렌 사의 아담 숀버그라고 합니다." 아담은 명함을 내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도 미소로 답하면서 접수 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크리스틴이 보여주는 DJ 의 사진에 아담 은 경탄을 해주었다. 크리스틴은 빈 진찰실로 아담을 들여보낸 뒤, 수석 간 호사에게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담은 희고 작은 책상 맞은편에 놓인 간의 의자에 앉아, 스테인레스 등자 가 달ㄹ린 진찰대를 바라보았다. 제니퍼가 그곳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하 기가 힘들었다. 아담은 사진을 보내기 위해 책상서랍을 열고 들어있는 볼펜, 처방지, 검색 용지등을 무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닥터 반데르머 가 들어왔다. 아담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서랍을 닫았다. "뭐 찾는 게 있었나요?" 닥터 반데르머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는 손에 아담의 명함을 들고 있 었으며 명함과 당황한 아담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누가 당신을 들여보냈소?" "선생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들여보냈습니다." "가서 말 좀 해야겠군." 닥터 반데르머는 문을 향해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당신을 바깥으로 바래다 줄 사람을 들여보내겠소. 난 환자가 있어서요. 그럼, 이만." "샘플을 좀 가지고 왔는데요." 아담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크로스펜도요." 아담은 황급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어 그의 명함을 두쪽으로 찢어버리려 고 하는 닥터 반데르머의 앞에 내밀었다. "혹시 제니퍼 숀버그와 아는 사이입니까?" 닥터 반데르머가 물었다. "제 아내입니다. 동시에 선생님의 환자이기도 하구요." "당신은 의대에 다니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맞습니다." "그럼 이건 대체 뭐요?" 반데르머가 명함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은 휴학중입니다. 제니퍼가 임신한 이후로 돈이 필요해서요."


"아기를 갖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군요. 또한 그런 바보 같은 선택 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인이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오." "제니퍼는 무용수입니다." 아담은 반데르머의 가정문제를 떠올리면서 이 의사가 남한테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어쨌든 의학을 포기한다는 건 범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제는 제약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고 있다니, 맙소사! 이게 무슨 시간 낭비 요!" 아담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버지가 화를 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제니퍼의 아침 입덧을 멈추게 할 만한 처방이 없겠느냐고 물으며 반데르머 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환자들 중 반 정도는 아침 입덧을 경험합니다." 닥터 반데르머가 손을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입덧의 아기를 위한 영양 섭취에 장애가 되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난 될 수 있는 한 약 같은 것은 쓰지 않아요. 특히 아롤 렌 사가 만든 프레그돌렌은 말입니다. 절대 그런 엉터리약을 의사들한테 팔 아넘길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 약은 인기는 있는지 모르지만 위험해요." 닥터 클라크 반데르머는 아담이 알던 것보다 더 노련한 의사였다. 좀 퉁명 스럽고 불쾌한 면이 있긴 했지만 적어도 최신 정보를 따라가고 있는 것만큼 분명했다. 반데르머가 말을 계속했다. "오신 덕분에 전화 요금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군요. 다음 주에 아롤렌 선 상학회에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마이애미에서 마지막으로 배가 언제 출발하게 됩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날 따라오시오." 반데르머가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담은 서류가방을 집어든뒤, 그를 따라 지찰실 밖의 좁은 복돌르 걸어내려 갔다. 반데르머가 중간에서 멈춰 서더니 문을 열고는 아담이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 섰다. 그는 다짜 고짜 명함을 아담의 손에 쥐어준 다음, 문을 닫았다. 북적거리는 대기실 한 가운데에서 아담은 한참을 눈만 끔뻑거리며 서 있었다. "선생님은 만나보셨나요?"ㄹ 크리스틴이 물었다. "네, 만났습니다." 왜 세일즈 훈련과정에서는 아롤렌 선상학회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 았을까? 반데르머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만 할 수 있었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렸을 텐데. "제가 만나뵙게 해드릴 수 있다고 했잖아요." 크리스틴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담은 다른 의사들도 만나볼 수 있는지를 물으려 하다가, 그녀의 뒤에 붙 어 있는 명패를 발견했다. 반데르머, 바움가르텐, 스텐스 말고도 닥터 로렌 스 폴리와 닥터 스마이스의 이름은 반데르머의 파일에 들어 있지 않았었다. 아듬은 주머니에서 크로스펜을 꺼내 크리스틴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그녀의 고맙다는 인사말에 손을 내저으며 아담은 닥터 스마이스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가리켰다. "새로 오신 분입니까?" "아녜요. 다겉 스마이스는 이곳에서 일하신 지 15 년이나 되었는걸요. 그런 데 요즘은 몸이 좀 안 좋으세요. 게다가 환자들을 대부분 줄리안 클리닉에 서 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저도 거이 뵙지를 못하지요." 아담은 다시 한번 명패를 눈길을 던졌다. "닥터 폴리란 분은 얼마전에 자살했다는 그 분이 맞습니까?" "그래요. 정말 비극이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었지요. 하지만 지난 6 개월 동안은 거의 뵙지를 못했어요. 그분도 주리안 클리닉에서 주로 환자를 보셨죠." 퍼시 하먼도, 닥터 폴리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이 줄리안 클리닉으로 가기 위해서 개인 클리닉을 포기한다는 말을 했었다. "닥터 폴리가 이곳을 그만둘 무렵에 여기서 일하고 계셨나요?" "그럼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환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스케 줄이 바뀌었다는 걸 알려줘야 했거든요." "자리를 옮기기 전에 닥터 폴리가 어디 먼 곳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까?" "네, 그랬지요. 제 기억으로는 무슨 학회에 다녀오신다고 했는데, 그래요, 유람선을 타고 간다고 하셨어요." "닥터 바움가르텐과 닥터 스텐스는 어디 계십니까? 지금 만나뵐 수 있을까 요?" "그분들은 지금 수술실에 들어가셨어요." "도대체 말이 안 돼." 아담이 제니퍼를 향해 젓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아파서 아롤렌에 올 수 없다더니, 오후가 되니까 팔팔해져 서 장모님하고 쇼핑을 했다고?" 제니퍼는 눈을 내리깔고 붉은 야채요리를 접시 가장자리로 밀어 놓았다. 어머니와 만나는 일이 왜 중요한 것인지 아담을 이해시키려고 여러 차례 노 력했었다. 그러나 항상 코웃음만 쳐온 그에게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는 건 구차스런 일이었다. 제니퍼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아담은 호마이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제니퍼가 임신한 뒤로 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해진 것 같았다. 더 제니퍼를 자극했다가는, 그 녀가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 같았다. "이것 봐, 오늘 일은 잊어버리고 그냥 식사나 즐기자구. 오늘 당신 정말 예뻐 보이는데. 그건 새로 산 드레스인가?"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모님이 사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정말 멋져." 그러나 제니퍼의 기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아 보였다. "드레스는 멋저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엉망이에요. 전에는 아기를 가지면 여성적인 매력이 더 철철 흘러넘치게 되는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더 뚱뚱하고 멋없는 여자가 되었을 뿐이더라구요." 아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니퍼가 말을 계속 했다. "입덧만 멈추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거예요. 왜 사람들은 아침 입덧이


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한테는 증상이 하루 종일 가는데." 아담은 테이블 너머로 팔을 뻗어 제니퍼의 손을 꼭 쥐었다. 분위기를 바꾸 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닥터 반데르머를 찾아갔던 악몽 같은 이 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담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니퍼의 표정이 좀 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진찰할 때의 매너가 형편없다고 했잖아요." 제니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침 입덧에 대해서는 별 말 안 해주던가요?" "음, 그냥 곧 가라앉게 될 거라고만 하던데." 제니퍼는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레스토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안 제니 퍼는 입을 계속 다물고 있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제니퍼는 침시로 들 어가 '다이너스티'가 방영되고 있는 채널에 맞추어 텔레비전을 켰다. 아담은 언짢은 기분을 억누르며 컴퓨터의 전원을 올렸다. 그는 닥터 스마 이스의 이름을 새로 올리기 위해 산부인과 합동 클리닉의 기록을 찾았다. 놀랍게도, 그의 이름은 벌써 등록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아침에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여 반데르머에 대한 프린트물을 다시 훑어보았다. 틀림없이 스마이스의 이름은 그곳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스텐스와 바움가르텐 의 기록을 찾았다. 그들의 파일에는 스미스와 폴리의 이름이 둘 다 들어있 지 않았다. 아담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런 누락 여부를 점검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야 했다. 아담은 만일 이것이 프로그래머의 실수라면, 아롤렌 사에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담은 스마이스의 파일에 동료 의사들의 기록이 어떻게 올라 있는지를 알 아보기 위해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 모니터에 짧은 메시지가 올라왔다. 산부인과 선상학회 참가. 83/9.9 84/6/5 재교육 참가 후 푸에르토리코 연구센터 방문 예정. 아담은 손가락 끝을 입가에 대고 부비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스마이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는 입력되어 있는 것 이 없었다. 아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고객 명부를 펼친 다음 손가락을 대고 훑기 시작했다. 스마이스의 이 름은 올라 있지 않았다. 그가 사실상으로 합동 클리닉의 일원임에도 불구하 고 아롤렌은 스마이스를 줄리안 클리닉 소속으로 분류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모든 궁금중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 다. 아담은 이번엔느 로렌스 폴리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모니터에는 짧은 한 문장만이 나타날 뿐이었다. TERMINATED (종결됨) 어떤 프로그래머가 유머 감각을 발휘한 모양이엇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 것이 무척 역겹게 느겨졌다.


3 주가 흘렀다. 아담의 영업사원으로서의 능력은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아담은 의사들에게 공짜 약품들을 보따리로 가져다주었고, 의사들은 그가 아롤렌 제약의 상품들을 극찬하는 동안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었다. 약품 의 부작용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담은 아로렌 거의 모든 제품들에 대해 선전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프레그 돌렌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 의학저널의 기사와 반데르머의 경고는 항상 그의 기억을 맴돌았고, 아담도 그렇게 위험 가능성이 높은 약품을 판매하는 책임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이 되면 아담은 컴퓨터를 통해 다음날 방문할 의사들의 가족을 점검하 였다. 그는 약을 파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만 신경을 썼다. 이제 아담은 더 이상 합동 클리닉에 관한 자료처럼 누락되거나 틀린 부분에 대해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운 생활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던 어느 날, 새로운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났다. 아담은 한 병원에 있는 내과 의사들과 만나기 로 약속하고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접수직원으로부 터 들은 대답은 의사들 모두가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아롤렌 선상학회에 참가했던 한 의사가 거기서 돌아온 후, 줄리안 클리닉으 로 적을 옮기겠다는 발표를 했고, 그에 분노한 동료 의사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막겠다고 병원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아담은 병원을 나서며 퍼시 하먼이 들려주었던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퍼시가 연락하지 않은 이유가 또다시 궁굼해졌다. 뉴저지의 아롤렌 에서는 하먼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처 음 계획대로 푸에르토리코에 가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퍼시는 경영자 훈 련과정에 매우 큰 기대를 걷고 있었다. 거기에는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 분 명했다. 어느 날 오후, 아담은 일정을 서둘러 마치고 본부의 빌 셀리는 찾아갔다 아롤렌 석상학회에 대한 궁금증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푸에르 토리코에는 갈 마음이 없었지만,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5 일간의 의학 세미 나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곳에 가면 잠시만이라도 학교에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또 어쩌면 잠시 동안의 휴가를 통해 제니퍼와의 관계 를 새롭게 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제니퍼의 입덧은 점점 심해졌고, 그 녀가 친정에서 보내느 시간은 늘어만 갔다. 아담이 새로 시작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하거나, 친구들에게 전화라도 좀 해보라고 권하려 하면 제니 퍼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3 시 30 분쯤 되어, 아담의 차는 아롤렌 사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셀리는 비 행기에서 전화를 받고 4 시쯤 도착하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제복 차림의 경 비원이 셀리의 사무실에 확인을 해보더니 아담을 통과시켜 주었다. 빌의 비 서 조이스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숀버그 씨. 부사장님은 위층에 올라가 계십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조이스는 복도 제일 끝에 있는 소형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아 담이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조이스는 다시 열쇠를 꽂은 다음 21 층으 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유리 상자에 갇힌 채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아


담에게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티셔츠와 카키색 바지를 입은,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가 아담을 맞았다. "아담 숀버그 씨입니까?" 아담은 그의 인도를 받으며 햇빛이 내리비치는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외 벽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으며, 아담은 최대한 벽과 거리를 유지하려 했 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두렵지는 않았으나, 아무든 기분좋은 일은 못 되었다.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에야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텔레비전에서 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라운지 너머에는 수족관이 있었고 그 뒤편에 마사지실에 붙은 락커룸이 보였다. 맞은편에 뚫린 커다란 문은 수영장으로 통하고 있었다. 티셔츠 차림의 사내는 아담을 수영장 안으로 안내한 뒤, 바깥에서 문손잡 이를 잡은 채 서 있었다. 햇볕이 너무 밝아서 눈을 크게 뜰 수가 없었다. 한쪽 벽은 유리로 덮여 있었는데, 유리는 2 층 높이로 솟아 끝이 지붕 모양 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바닥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수영장 밑에는 푸른 무늬가 박힌 흰 타일이 깔려 있었다. 풀에서는 셀리가 수영에 열중하고 있었다. 방향을 바꾸던 그가 아담을 발 견하고 가장자리로 헤엄쳐나왔다. 그는 자그마한 물안경과 검은색 고무 수 영모를 쓰고 있었다. "수영 안 하겠소?" 아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수영복이 없어서요." "수영복 따위는 필요없소. 여긴 사내들밖에 없는걸. 자, 어서 들어와요. 폴이 수건을 준비해줄 거요." 아담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거절할 만한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 다. 게다가 지상에서 20 몇 층이나 올라온 곳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기 회란 자주 있는 게 아니었다. "좋습니다. 풀은 어디에 있습니까?" "락커룸으로 들어가서 벽에 있는 부저를 누르면 램프의 요정처럼 폴이 나 타날 거요." 아담은 그가 시킨 대로 했다. 폴은 여러 장의 수건과 하얀 테리천 가운을 건네주었다. 아담은 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수영장으로 나가면서 그는 자신의 희멀건 살결을 바라보았다. 셀리가 건강한 피부빛을 어떻게 유지해왔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부끄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아담은 가운을 벗어던지고 풀 에 뛰어들었다. 물은 아주 차가왔다. "물이 차가워야 몸이 자극을 받는 거요." 아담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눈치챈 빌이 말했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냉기는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는 빌의 터닝 동 작을 따라하려 했으나 물만 코로 들어갈 뿐이었다. 아담은 요란스럽게 기침 을 하며 풀 밖으로 나갔다. 안됐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빌이 마사지를 받자면서 아담을 락커룸 으로 데리고 갔다. "왜 나를 보자 했소?"


빌이 테이블 위에 몸을 눕히며 물었다. 아담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빌은 아담을 친절하게 대해주기는 하지만 그 래도 여전히 냉정하고 사무적인 말투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폴이 아담에게 돌아누우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선상학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말이오?" "참가 자격, 그리고 의사들은 어떻게 선발하는지, 또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부서가 아롤렌에 따로 있는지,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MTIC 에 걸면 확인할 수 있지요. 난 당신이 경영자 훈련과정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먹은 줄 알았소."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폴이 아담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도 선상학회에 갈 수 있을까요? 영업사원이 참가하는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어렵소." 빌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옷을 입으며 대답했다. "학회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서요. 안타깝게도 피요르드 호는 그리 큰 배가 못 되지요. 게다가, 가더라도 지루해 할 겁니다. 프로그 램이 임상의들을 위한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배위 위락시설들도 모두 강의실로 바뀌어 있는 형편이오." "그래도 무척 가보고 싶은데요." "미안하군요." 빌은 아담이 꺼낸 주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매기 위해 거울로 다가갔다.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길일 것이오." 아담은 선상학회를 대녀온 뒤로 개업을 그만두는 의사들에 대해 물어보기 엔느 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빌 셀리는 아담이 던진 질문 대문에 언짢아하고 있었다. 옷을 입고 빌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며, 아담은 쓸데없는 질문을 피하기로 마음먹고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 만, 뉴욕으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 아담의 머릿속에는 아롤렌 선상학회에 관 련되어 일어난 이상한 사건들에 대한 상념들이 떠나려 하지 않고 있었다. 퍼시 하먼의 실종 역시 그러했다. 퍼시가 푸에르토리코로 가지 않았다는 사 실을 알게 된 아담은 그의 집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 았다. 링컨 터널을 통해 시내로 접어들면서, 아담은 퍼시의 아파트에 한번 들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웃들 중에 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도 몰랐다. 퍼시는 2 번가의 퇴락한 적갈색 건물에 살고 있었다. 3C 라고 쓰인 버튼 옆 에 퍼시 하먼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는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거리 맞은편에는 구겨진 파란 웃도리를 걸친 한 사내가 담배를 구둣발로 비벼끄고 있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사내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건물을 향해 다가왔다. 아담은 옆에 붙어 있는 관리실 버튼을 눌렀다. 순간, 좁은 홀 안에 요란한 부저 소리가 울려퍼졌고 아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은 많이 낡아 있었지만 그가 살고 있는 건물보다는 훨씬 말끔해 보였다.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계단으로 다가가 아래쪽을 내려다보 았다. 소매가 없는 런닝 셔츠 차림의 사내가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관리인이 물었다. "퍼시 하먼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말고도 여럿 왔었소." 관리인은 관심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여기 없어요. 못 본 지 한 달이 넘었수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관리인은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떠나려고 발을 옮기던 아담은 계단 위에서 잠시 멈칫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관리인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 섭게, 그는 무슨 충동에라도 사로잡힌 듯 서둘러 3 층으로 뛰어오르기 시작 했다. 물론 문을 잠겨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난 창문은 비상계단으로 통하고 있었다. 아담으로서는 이러한 경험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비상계단으로 빠져나갔다. 퍼시에게 무슨 사고가 있었다는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가 확인해보기로 했다. 비상계단은 오래되어 녹이 많으 슬어 있었다. 아담은 쇠창살 아래로 펼쳐 진 콘크리트 바닥을 내려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건물 벽에 몸을 붙인 채 한걸음 한걸음 발을 떼던 아담은 마참내 퍼시가 사는 방의 창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문은 약간 열린 채로 내버려져 있었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 지 못하기만을 바라면서, 창문을 들어올렸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이상 망설일 게 없다고 생각하며 창문을 기어올라가 지저분한 퍼시의 침실 안으 로 들어갔다. 아담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정돈되지 않은 챔대 옆을 돌아 서랍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옷가지들만이 가득 차 있었다. 몸을 돌려 화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변기 안의 수위가 낮은 것으로 보아, 오랫 동안 사람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담은 다시 침실을 지나 거실로 들어섰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날짜가 두 달 가까이 지난 신문이 올려져 있었다. 부엌 싱크대 안에는 음식물 찌꺼기 다 엉겨붙은 채로 접시들이 쌓여 있었다. 분명히 퍼시 하먼은 다시 아파트 로 돌아올 예정이었던 것이다. 아담이 걱정한 대로 무슨 일이 그에게 일어 난 것이다. 아담은 아파트를 빠져나가 경찰을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미처 부엌을 나서기 전에, 나지막한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아담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멈추어 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틀림없었 다.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담은 조심스럽게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현관문 의 체인이 풀려나간 채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담의 눈앞이 희미해져 왔다. 만일 들어온 이가 퍼시라면 저렇게 숨어버 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담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오기 를 기다렷다. 냉장고이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공포에 질린 채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10 분 가량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지나친 상상이 었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거실로 들어가 침실 쪽을 쳐다보았다. 비상계단으


로 통하는 창문은 그대로 열려져 있었다. 커튼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날리며 물결치고 있었다. 침실을 가로질러 바깥으로 나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가버렸다. 창문을 향해 달려가던 아담 앞으로 어떤 물 체가 옷장으로부터 튀어나오며 그를 가로막았다. 아담이 미처 반응을 보이 기도 전에 주먹이 그의 배를 치고 들어오며 아담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9 제니퍼는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합동 클리닉에 들어섰다. 대기실에는 전보 다 적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빈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잡 지를 펼쳤다. 그러나 도저히 정신을 집중하고 읽을 수가 없었다. 닥터 반데 르머가 학회 참석차 바깥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과 아가에게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없는 동안 출 혈이 있을까 봐 무척 걱정하던 터였다. 반데르머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익숙 해지긴 어려운 일이었지만, 제니퍼로서는 다른 의사에게 몸을 맡기기가 싫 었다. 자시 후, 제니퍼는 진찰실에 들어섰다. 종이 옷으로 갈아입으며, 간호사에 게 닥터 반데르머가 휴가를 잘 보냈는지 물었다. "그런 것 같더라구요." 낸시으 대답이 왠지 시들했다. 그녀는 제니퍼에게 소변검사용 용기를 건네 주며 검사실을 가리켰다. 낸시의 말투에는 뭔가 걸리는 데가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닥터 반데르머가 제니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제가 할 일이 다 안 끝난걸요." 낸시가 반데르머에게 말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헤마토크리트(혈액을 원심분리하여 적혈구의 비율을 측정하는 검사) 검사를 하려면 피도 뽑아야 하고, 또 체중도 아직 재지 않았고요." "그냥 인사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반데르머의 목소리는 유달리 부드러웠고, 평상시의 무뚝뚝한 어조의 흔적 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잘 있었어요? 제니퍼. 좋아 보이는데요." "네." "낸시가 일을 마치는 대로 돌아오겠습니다." 반데르머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낸시는 그가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맙소사! 뭐에 씌인 사람 같지 않아요? 돌아온 뒤로 사람이 이상해졌어요. 환자들에게 훨씬 친절해전 건 좋지만, 내 일을 열 배로 힘들게 하잖아요. 자, 그럼......" 낸시가 제니퍼를 향해 돌아섰다. "피를 뽑고 체중을 재야겠어요." 일이 끝나갈 무렵 닥터 반데르머가 돌아왔다. "이제 내가 맡지요. 체중에는 별 문제가 없군요. 기분은 좀 어때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낸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제 됐어요. 내가 제니퍼하고 얘기하는 동안 헤마토크리트 검사나 끝내 지 그래요?" 낸시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시험관을 들고 진찰실을 나가버렸다. "자, 기분은 어떻습니까?" 제니퍼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반데르머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인상을 간직하고 잇었지만, 어딘가 지친 사람처럼 풀어진 느낌을 주었다. 머릿결 역시 전보다 푸석푸석해 보였 고, 이전의 서두르는 듯한 태도가 사라지고 제니퍼에게 진심으로 관심��� 쏟 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상태가 아주 좋아진 것 같아요." "별로 확신에 찬 대답같이 들리지 않는데요." "그게...... 전보다 피로는 덜 느끼는데, 아침 입덧이 심해지고 있거든요. 식이요법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임신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고 있습니까? 때로 감정상태가 아이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수가 있지요." 제니퍼는 다시 한번 닥터 반데르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주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임신 자체에 대해 마음이 갈팡질팡 하고있어요." 지금가지 제니퍼는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었다. 닥터 반데르머는 그녀의 대답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느끼는 산모가 많이 있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제게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으셔도 좋습니다." 제니퍼는 그동안 무용수로서 쌓아온 경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아담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반데르머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아이를 갖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제니퍼는 10 분이 넘도록 이 야기를 늘어놓았다. 반데르머의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표정이 아니었다면 울 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다. 그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 게 멀게 느껴졌다. 제니퍼가 말을 마치자, 반데르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말씀해주였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은 건강에 아주 나쁜 일이 지요. 어쩌면 그런 감정적 요인들이 아침 입덧을 악화시킨 건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다면 지금즘은 많이 호전되어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새로운 처 방을 해드리도록 하지요." 그는 막 진찰실에 들어선 낸시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약품 보관실에서 프레그돌렌 샘플을 좀 가져오도록 해요." 낸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자, 그럼. 진찰을 시작해볼까요." 진찰 과정에는 초음퍼검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닥터 반데르머의 설명에 의 하면, 태아의 조직에 반사된 초음파가 영상을 합성해낸다는 것이었다. 제니 퍼는 제대로 이해를 못했지만 반데르머가 촬영에 아무런 고통도 따르지 않 고 산모나 태아에게 전혀 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자 안심이 되었 다. 테크니션 한 사람이 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방에 들어왔지만 반데르머 는 혼자 하겠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텔레비전 스크린과 닮아 보이는 모니터 에 아기의 윤곽이 나타났다. "남자 앤지 여자 앤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알아도 별 상관없겠지요." 제니퍼가 대답했다. 그동안 이 문제로 고민한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확실할 순 없지만...... 둘 중에 하나를 꼭 선택하라면 말이지요...... 남자처럼 보이는데요."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제니퍼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아담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반데르머는 진찰실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진찰 결과를 기록하 기 시작했다. 그가 낸시를 내보내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나가버렸 다. 반데르머가 쓸데없이 그녀의 일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무척 불쾌한 모 양이었다. 제니퍼는 진찰대 위에 앉은 채 옷을 갈아입어야 할지 그대로 기다려야 할 지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닥터 반데르머가 그녀를 향해 의자를 돌렸 다. "아침 입덧 문제만 제외한다면, 아주 건강한 상태입니다. 이 약이 구토 증 세를 없애줄 겁니다." 그는 약품 샘플들을 제니퍼 옆에 올려놓고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세 번 복용하도록 하세요."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첫째, 이제부터 는 줄리안 클리닉에서 저를 만나게 될 겁니다." 제니퍼의 심장이 한 순간 멎는 듯했다. 세릴이 병실 바닥에 쓰러지며 피를 쏟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니퍼, 괜찮아요?" "좀 눕고 싶어요." 닥터 반데르머는 제니퍼가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말 죄송해요. 이젠 좋아졌어요. 왜 선생님을 줄리안 클리닉에서 만나게 되죠?" "제가 이제부터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으니까요." 반데르머가 제니퍼의 맥박을 재며 대답했다. "개업의 생활에 진력이 났답니다. 그리고 줄리안 클리닉에서라면 더 좋은 진료를 해드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제 좀 나아졌습니까?"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한 후 이런 일은 처음인가요?"


"네." 제니퍼는 반데르머에게 세릴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 다. "정말 끔찍한 경험을 하셨군요." 닥터 반데르머가 말했다. "그것도 아이를 가진 몸으로 말입니다. 그런 현상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답 니다. 줄리안 클리닉을 원망하지는 마세요. 나도 미스 테데스코에 대한 이 야기를 전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아가씨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 었다는군요.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해온 것이 혈액에 이상을 일으킨 원인 이엇는데 혈액검사에도 그게 나타나질 않았답니다. 미스 테데스코가 좀더 솔직했더라면 건강하게 살아 있었을 겁니다. 줄리안 클리닉에 대해 쓸데없 는 의심이라도 가지실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세릴과 함께 가기 전에도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곳의 의 사들이 무척 친절하다는 사실만큼은 인정을 해요." "그게 내가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곳에는 다 른 개업의들에게서 볼 수 없는 쓸데없는 경쟁심 같은 게 없어요." 제니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괜찮으시겠습니까?" 닥터 반데르머가 물었다. "그럴 것 같아요." "두번째로 양수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제니퍼는 다시 한번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생각이 바뀌셨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처음에, 제니퍼의 남동생이 가졌던 문제가 단순히 선천 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염색체의 이상은 수정된 이후에 발 생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얼마전에 어머니가 동생을 낳으셨던 병원에서 염색체 슬라이드를 입수했는데, 검사실에서 유전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 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가진 기술을 한번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겠지요." "양수검살르 하면, 내 아이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 게 되나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 주일은 걸리 니까요. 너무 오래 지체하다가는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더라도 아무런 조치 를 취하지 못하게 됩니다." "조치라면, 낙태수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문제 가 생기더라도 대처하시리라 믿습니다." "남편과 부모님하고도 상의를 해봐야겠어요." 제니퍼는 양수검사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병원을 나섰다. 그러나 반데르머처럼 사려깊은 의사에게 진찰받는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었 다. 제니퍼는 아담에게 닥터 반데르머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 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담은 완전히 의식을 잃지 않고 있었다. 퍼시의 거실로 끌려 들어온 뒤,


소파 위에 던져진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리고 지갑이 주머니에서 빠져 나갔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아 담은 머리를 흔들며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려 애썼다. 아담이 손으로 주위를 더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그에게 안경을 쥐어주었 다. 잠시 후 방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는 앞을 풀어헤친 흰 셔츠 위에 파란색 윗도리를 걸친 탄탄한 체격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시오."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소." 아담은 몸을 움직여보았다. 놀랍게도 다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경찰서까지 동행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 아파트 안에서 무얼하고 있었 는지 있는 그대로 말씀해주시지요, 숀버그 씨."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좀더 순순히 나오셔야 할 겁니다." 사낸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천정을 향해 연기를 뿜어올렸다. "내가 할 소리요." 아담이 목청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사내는 아담의 옷깃을 틀어쥐고 그의 몸을 반쯤 들어올렸다. "지금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오." 아담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사내는 잠시 있던 손에 힘을 뺐다. "좋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이 아파트에서 무얼 하고 있었소?" "난 퍼시 하먼의 친구요. 아롤렌 제약회사에 입사했을 때, 내게 일을 가르 쳐주었지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퍼시는 내게 전화를 주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한번도 연락이 없었고 내가 전화를 해도 통 받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직접 찾아와 본거요." "아파트에 무단침입한 이유로는 충분치가 않은걸." "그건 충동적인 행동이었소. 무슨 사고라도 당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고 요."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과 긴장감이 아담을 내리누르고 있었 다. 아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퍼시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푸에르토리코에 가서 경영자 훈련과정을 밟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도 가지 않았다고 하 더군요." 여전히 사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게 내가 아는 전부요. 그리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어요." "당신 말을 믿겠소." 잠시 후 사내가 입을 떼었다. "고마운 일이군요." 아담은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내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더니, 명함 한 장 을 꺼내 아담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로버트 말로, 사립 탐정'이라고 씌 어 있었고,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6 주즘 전에, 퍼시 하먼은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일식집을 나선 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퍼시 하먼의 가족에 의해 고용된 이후로 주욱 아파트를 지켜왔지요. 젊은 아가씨 둘이 들른 뒤로는 당신이 첫 방문객이 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라도 갑니까?" 아담이 물었다. "짚이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무슨 이야기라도 듣게 되면 전화를 주십시오." 충격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아담은 텅 빈 아파트에 들어섰다. 제니퍼가 없다는 사실이 그의 화를 돋구었다. 또다시 친정집에 가버린 모양이었다. 아담은 침대에 몸을 전지고는 텔레비전을 뉴스가 나오는 채널에 맞추었다. 서서히 긴장을 풀리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그를 개웠다. 잠시 동안 다시 하먼의 아파 트에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보기 좋은데요." 제니퍼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근무시간에 침대에나 누워 있고......" 아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잉잉글우드에 가 있는 줄 알았는데." 제니퍼가 아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담의 기분을 어떻게 맞추주어야 하는 가.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는 게 사죄할 만한 잘못은 될수 없었다. 제니퍼는 두 손을 엉덩이 뒤로 가져가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요. 친정에 갔다 왔어요." "그럴 줄 알았지." 아담은 텔레비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제니퍼가 물었다. "그냥 한 말이야." "나 좀 봐요." 제니퍼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친정집에 갈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닥터 반데르머가 양수검사를 받으라더 군요. 검사를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야기를 하러 갔던거예요." "그것 참 장하구만. 우리 아이 문제를 장인 장모와 상담한단 말이지." "낮 동안에는 어차피 당신을 못 볼 줄 알았다구요. 물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이를 낳은 일이 있 어요." "하지만 결정은 우리 둘만이 하는 거야." 아담은 침대 위에서 몸ㅁ을 굴려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자신이 심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반데르머는 양수검사가 필요없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 데." "그랬지요. 그런데 죽은 오빠의 염색체 슬라이드를 보고 나서 생각을 바꾼


거래요." 아담은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전학에 대한 짧 은 지식으로는, 양수검사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다른 의견도 좀 들어보는 게 좋을거야. 전에 산부인과 의사를 추천해 달 라고 부탁했더니, 사람들이 허버트 위클먼이란 사람도 입에 올리던데 말이 야." 제니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의사는 필요 없어요. 괜히 그러다가 혼란만 생길 거예요. 전 닥터 반데르머에게 만족하고 있어요. 더군다가 최근에는 매너가 아주 달라졌더군 요." "무슨 말이야?" "의학 학회에 다녀온 이후로 진찰에 더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쏟아주던데 요. 전처럼 서두르거나 하질 않았어요." 아담은 자신이 지금가지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긋이 잊어버렸다. "또 달라진 건 없었어?" "개업의 생활에 진력이 났다고 했어요." 제니퍼는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줄리안 클리닉으로 옮길 거라고 하던데요. 이제부터 거기서 진찰을 받게 될 거예요." 아담은 천천히 침대 위에 몸을 쓰러뜨렸다. "세릴이 죽고 난 이후로 다시 줄리안 클리닉에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니퍼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하지만 닥터 반데르머가 그곳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앟았고 또 나도 개 인적으로 좋은 인상을 ㅂ다았었으니까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으로서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전 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니퍼는 퍼시 하먼의 시종이나 아롤렌 학 회에 얽힌 이야기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닥터 반데르머 마지 얽혀든 이상, 무슨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아담은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제니퍼는 얼굴을 씻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닥터 위클먼한테 진찰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반데르머가 줄리 안 클리닉으로 옮겨간다는 건 반갑지 않은 소식이야." 제니퍼는 놀란 눈으로 아담을 바라보았다. 아담이 이상스런 행동을 하는 경우가 요즘 들어 잦아진 듯했다. "이건 진담이야." 그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세면대 한구석에 놓인 눈에 익은 약병을 발견하고 는 곧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뭐야?" 아담이 약병을 움켜잡았다. 제니퍼는 그의 ���굴과 약병을 쥔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돌 려 벽에 수건을 걸었다. "지금 묻고 있잖아." 아담이 소리쳤다. "몰라서 물어요? 프레그돌렌이잖아요. 내 아침 입덧 때문에 먹는 거라구 요. 자, 좀 비켜줄래요?"


아담은 침실을 향해 걸어 나가려는 아내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 그가 약병을 제니퍼의 눈 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제니펀느 그것을 손으로 밀어젖히며 대답했다. "닥터 반데르머가 주었어요." "말도 안 돼. 반데르머가 이런 걸 처방해줄 리가 없어." 제니퍼는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던 아담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담은 침실로 돌아와 병 안에 든 파란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캡슐을 쏟아 부었다. 틀림없는 프레그돌렌이었다. "내 말이 안 들려요?" 제니퍼가 말했다. "이 약은 먹은면 안 돼. 이거 더 가지고 있어?" "난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이 약을 먹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구 역질을 안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애초에 날 닥터 반데르머에게 보낸 사람 은 당신이잖아요." "어쨌든, 다시는 그 사람 찾아가지 말아." 아담은 화장실 선반에서 제니퍼의 백을 내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프로그돌렌이 여러 병 더 들어 있었다. 제니퍼가 백을 빼앗으려 하며 소리쳤다. "난 닥터 반데르머가 마음에 들어요.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다구요. 어서 돌려줘요!" 아담은 안에 든 야들을 모두 끄집어낸 다음에야 백을 돌려주었다. "잘 들어! 이건 먹으면 안 돼. 아주 위험한 거라구." "정말 위험한 거라면 닥터 반데르머가 주었을 리가 없어요. 꼭 먹을 거예 요. 지금 아픈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란 말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해요. 지금 당신은 약품 외판원에 불과하 다구요." 아담은 발 끝으로 변기 뚜껑을 걷어 올리면서 약병 마개를 열었다. "이리 줘요!" 제니퍼가 남편의 의돌르 눈치 채고 소리질렀다. 아담은 첫번째 약병의 내용물들을 변기안으로 쏟아넣었다. 제니퍼가 아담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들고는 침실로 달려갔다. 얼떨떨해진 아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짬시 동안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제니퍼가 갑자기 화장실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문을 잠가버리려 하는 순간 아담의 발이 문 안으로 치고 들어왔고 두 사람은 서로 반대방향을 향해 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니퍼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샤워기 있는 곴까지 물러서며 약병을 뒤로 감추었다. "이서 약을 내놔!" 제니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가쁘게 터져나오고 있었다. "좋아!" 아담은 제니퍼에게 다가가 뒤로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안 돼요!"


제니퍼가 소리쳤다. 그는 제니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펴서 약병을 빼앗은 뒤, 캡술들을 변기 안으로 쏟아넣었다. 제니퍼를 저지하기 위해 뻗은 아담의 오른팔에 밀 려 그녀의 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제니퍼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벽 에 기대어 있었다. 아담은 나머지 약병들을 모두 열고 내용물을 쏟아버렸다. 그리고나서야 제 니퍼에게 사과를 하려고 돌아섰으나, 제니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 의사는 아니잖아요!" 그녀가 소리쳤다. "매일매일 헛구역질하는 데도 진력이 났다구요. 그 사람이 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주는 약인데 왜 못 먹게 하는 거예요!" 제니퍼는 침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장롱 위에 놓인 옷가방을 내렸다. "제니퍼, 지금 뭐하려는 거야?"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옷을 집어 가방 속으로 던져넣기 시작했다. "제니퍼, 약간 의견충돌이 있었다고 해서 떠날 것까지는 없잖아." 제니퍼가 상기된 얼굴을 아담에게 돌렸다. "친정에 갈 거예요. 이젠 지쳤어요. 그리고 난 환자라구요. 이런 모욕은 견딜 수 없어요." "제니퍼, 사랑해. 내가 약을 빼앗은 건 단지 우리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였을 뿐이라구."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예요. 잠시 여기를 떠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니퍼는 수화기를 들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의 사무실로 택 시를 타고 갈 테니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제니퍼, 제발 이러지 마." 제니퍼는 짐을 계속 싸기 시작했다. 옷가방을 닫고 백을 집어든 후 아파트 를 걸어 나갈 때까지 아담에게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제니퍼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아담이 진실로 깨닫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거실로 걸어가 컴퓨터 앞에 앚았다. 그리고 나서 컴퓨터를 켜고 아롤렌의 메인컴퓨터에 연결시킨 후 반데르머의 파일을 불러냈다. 닥터 반데르머의 처방 습관이 바뀌었는지를 알아보려 했 으나 스크린은 '줄리안 클리닉으로 이직'이라는 짧은 메시지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놀란 아담은 지워진 또 다른 파일이 없나 확인하기로 했다. 멕가이어에게 넘겨 받은 프린트물을 집어들고는 자기 구역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명부를 작성하라는 명령을 처넣었다. 컴퓨터에는 반데르머 외에도 여섯이나 되는 의사들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아담은 삭제된 의사들의 개인 기록을 불러냈다. 기록들은 모두 지워져 있 었다. 그 중 넷은 '재교육 참가...'라는, 닥터 스마이스의 것과 같은 설명 이 붙어 있었다. 선상학회에 일단 참가한 사람은 구체적인 개인 기록이 더 잇아 필요없게 되는 모양이다. 나머지 두 사라은 반데르머의 것과 마찬가지 로 '줄리안 클리닉으로 이직'이라 씌어 있었다. 선상학회는 아롤렌뿐만 아 니라 줄리안 클리닉과도 모종의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한 혼란을 느끼며 아담은 줄리안 클리닉에서 일하는 스탭진들의 이름을


호출했다.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가 작동을 시작하더니 꽤 긴 분량의 명단을 뽑아냈다. 프린트물을 훑어가던 아담의 눈길이 중간쯤에서 멈추었다. 닥터 테이어 노튼! 도대체 이분이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대학의 내과 과정이었던 사람이 지금은 줄리안 클리닉에 있다고? 아담은 컴퓨터에 테이어 노튼이라는 명령을 입력한 후 개인기록을 불러보 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줄리안 클리닉으로 이직'이라는 문구가 전부 였다. 이 늙은 고집쟁이가 평생을 바쳐운 대학 건물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은 도저 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담은 노튼 역시 선상학회를 다녀왔는지 궁금 했다. 아담은 다시 줄리안 클리닉에 대한 통계자룔르 확인했다. 새로 들어간 여 섯 명의 의사들 중에 넷은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거기에도 무슨 사연이 있 음이 분명했다. 30 분이 넘도록, 아담은 질문을 입력해 넣었으나 대부분 아 담의 비밀 코드번호로는 해당 자료의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답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아담은 다시 전략을 바꾸어 올해 주리안 클리닉에서 행해 진 양수검사의 횟수를 알아보았다. 컴퓨터의 대답은 7,112 회였다. 얼마나 많은 태아에 대해 이상상태가 발견되었는가 한느 또 다른 질문에 컴퓨터는 다시 대답을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아담은 같은 기간 동안 실시된 낙태수술 의 획수를 물었다. 대답은 1,217 회였다. 아담은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니퍼를 상대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0 다음날 아침 아담이 잠을 깼을 때 제니퍼는 옆에 없었다. 그는 식사를 거 른 채 곧장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8 시 만에 아담은 산부인과 합동 클리닉 앞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잠시 후, 크리스틴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가 벨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아담 숀버그입니다." 그녀가 아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었다. 그는 감 색 넥타이를 고쳐 매고 가능한 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지요. 디제이의 소식도 들을 겸 해서요." "디제이는 잘 지내고 있어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랍니다. 지난 금요 일에는......" 아담은 생각을 정리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크리스틴이 말을 잠시 멈추려 하는 순간에 입을 열었다. "닥터 반데르머를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분은 지금 줄리안 클리닉에 계세요." "벌써 자리를 옮겼습니까?" "네. 지금 이곳은 엉망이에요. 닥터 반데르머는 어제까지 근무를 하셨어 요. 그런데 앞으로 6 개월 동안 환자 예약이 되어 있단 말이예요. 이제 난 크리스마스 때까지 전화기만 붙들고 있어야 할 형편이라구요."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던가요?" "천만에요. 선상학회에서 돌아오시자마자 닥터 스텐스와 닥터 바움가르텐 에게 이곳을 떠나겠다고 했다더군요. 개업의 생활이 싫어졌다나요." 그것은 퍼시가 들려준 닥터 폴리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크리스틴은 전화를 받기 위해 몸을 뒤로 돌렸다. "정말 엉망진창이야." 크리스틴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환자들은 나한테만 화를 내고 있어요." "선상학회에서 돌아온 이후로 닥터 반데르머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거나 하 지는 않았나요?" 아담이 물었다. "바로 그거예요." 갑자기 크리스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들이 아무리 신경을 써도 선생님 비위를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도 대체 말이 안 통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죠.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아주 자상해진 것 같기도 했어요. 전에는 항상 무뚝뚝하기만 했었는데 말예요." 이미 이전에 만난 경험이 있었기에 아담 역시 무뚝뚝하다는 표현이 그에게 아주 걸맞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제일 이상스러웠던 건......" 크리스틴이 말을 계속했다. "닥터 폴리도 같은 행동을 보였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때만 해도 닥터 반데 르머는 닥터 폴리에게 불같이 화를 냈었죠. 하지만 그때는 의사 선생님이 네 분이나 더 계셨으니까 충분히 공백을 메꿀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았어요. 가엾은 닥ㄷ터 스마이스마저 이상한 병에 결려서 병원에 있 으니 말이에요." "무슨 병에 걸렸는데요?" "병명은 잘 모르겠어요. 신경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나 봐요. 그분이 처음 발병할 때 나도 옆에 있었지요." 크리스틴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사한 표정을 짓더라구요. 정말 괴상망측했어 요. 모두들 그를 보고는 당황해 했지요." 한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와 접수 창구로 다가갔다. 아담은 그 여자가 지나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어쩌면 스마이스의 증상은 아담이 얼마전 의대 실습시간에 발표한 적이 있는 만발성 운동장해와 비슷한 건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환자의 경우에는 안정제에 대한 이상 반응이 주원인이었다. "닥터 스마이스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내가 알기론 그런 일은 없었어요." 크리스틴이 대답했다.


"아주 시원시원하고 멋진 분이었어요. 외모가 당신과 비슷해요. 머리도 당 신처럼 검은 곱슬이고요." "지금 어느 병원에 있습니까?" "대학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그곳 간호사 말로는 곧 줄리안 클리닉으 로 옮길 거라고 하던데요. 다시 전화 벨이 울렸고 크리스틴이 전화를 받으려고 돌아섰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닥터 폴리와 닥터 스마이스도 선상 학회에 갔었습니까?" "네 두 분 다요." 크리스틴이 수화기를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네, 병원입니다. 잠시 끊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그녀는 아담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닥터 스텐스나 닥터 바움가르텐을 뵙게 해드릴까요?" "오늘은 그냥 가겠습니다. 지금은 무척 바쁘실 것 같군요. 나중에 여유 있 을 때 뵙도록 하지요. 디제이에게 안부나 전해주세요." 크리스틴은 아담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인 다음 전화기의 대기 버 튼을 눌렀다. 아담은 병원을 나섰다. 이제 더이상 줄리안 클리닉에 얽힌 의혹을 무시해 버릴 수가 없었다. 왜 많은 의사들이 갑작스레 자신의 일터를 버리고 그곳 으로 옮겨가려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닥터 반데르머는 제니퍼에게 프레그 돌렌을 처방해주었을까? 언짢더라도 다시 한번 그를 만나보는 수밖에 없었 다. 닥터 반데르머를 설득하여 약 처방을 중지하든지 아니면 제니퍼를 더이 상 보지 않도록 하든지 해야 했다. 아담은 자신의 힘으로 제니퍼에게 의사 를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할렘 가의 남쪽 구역으로 들어서자, 아담은 눈 앞에 주위의 낡은 건물들 너머로 우뚝 솟은 클리닉 건물이 나타났다. 거울 같은 벽면으로 둘러쳐진 외관에 감탄해 하던 아담은, 곧 그것이 아롤렌 본부 건물과 같은 패턴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롤렌 건물은 주위 환경과 잘 조 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 클리닉은 2 백 년 전 시대의 촬영 세트 한가운데 에 놓인 21 세기 건물 같았다. 건물에서 한 블럭도 떠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담은 주차할 공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만일의 경우 판매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가장 할 수 있도록 서류가방을 챙겨 들고 클리닉 정문을 향해 큼직큼직하게 반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담은 자신이 우려가 괜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여기의 스탭진처럼 행세하면서 로비를 지나 곧장 산부 인과 외래진료실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의과 대학에서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뱅원에서는 직원처럼만 행동하면 병원의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었 다. 그러나 줄리안 클리닉의 안온혼 분위기가 생각을 바꾸게 했다. 아담은 안내 창구가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가 닥터 반데르머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전했다. "기다리세요." 접수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들어 아담이 한 말을 전달했다. "선생님은 지금 방에 계십니다. 그런데 산부인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녀가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먼저 반데르머 선생님께 저를 만나주실 시간이 있으신지 여쭤봐야겠어요. 제 아내에 대해 상의드릴 게 있어 왔거든요." "물론 만나주실 거예요." 접수직원은 아담이 제정���인가 아닌가 확인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보라보았 다. "저희 보조원을 한 명 불러 드리지요." 접수직원이 카운터 위의 버튼을 누르자 푸른 셔츠에 흰 바지 차림을 한 젊 은이가 나타났다. 그녀가 사내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보조원은 아담의 앞에 서서 긴 중앙복도를 걸어 내려가 곷가게와 서점, 그 리고 내부장식을 깔끔하게 잘되어 있는 카페테리아를 지나쳤다. "아주 멋진 곳이군요." "네." 사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담은 걸음을 옮기며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펑퍼짐한 얼굴에는 표정이 전혀 나타나 있질 않았다. 처음에는 이 사내가 마약이라도 먹은 줄 로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정신병 환자인지도 몰랐다. 환자들이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는 경우는 꽤 흔했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보조원은 아담을 대기실에 남겨놓고 돌아갔다. 그곳은 병원 대기실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반 주택의 거실에 가까워 보였다. 뱡 안에는 소파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작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상한 병원이군. 아담 은 이렇게 생각하며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게 코팅된 유리는 건너편 거리의 줄지어 늘어선 건물들에 독특한 음영을 던져주고 있었다. 마치 오래 된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잡지를 하나 펴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 시 후 문이 열리고 닥터 반데르머가 들어왔다. 아담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 어섰다. 풀먹인 흰 가운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주 위풍당당해 보였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와 같은 적의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담 숀버그 씨, 줄리안 클리닉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담은 반데르머의 친절함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이곳에서 일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합동 클리닉에서도 무척 만족해 하셨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한때는 그랬지요." 반데르머가 대답했다. "하지만 환자 한 사람 당 얼마씩 하는 그런 식의 진료는 이제 뒤떨어진 방 식입니다. 여기서는 아픈 환자들을 단순히 치료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 의 전반적인 복지에 관심을 쏟고 있답니다." 반데르머의 억양은 책을 읽어 내리듯이 아주 단조롭게 들렸다. "제니퍼에 대한 일을 상담하러 왔습니다." 아담이 말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전학자 한 사람을 불러놓았습니다." "잘되었군요. 하지만 우선 프레그돌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게 부인의 입덧에 도움이 되었나요?" 반데르머가 물었다.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단순한 플라세보 효과 (Placebo Effect : 약효가 없는 가짜약을 환자가 진짜로 알고 투여받았을 경우 심리적인 차원에서 환자가 약효를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놀란 건 선생님께서 그런 약을 처방했다는 사실 입니다." "지금 시중에는 여러 가지 약품들이 나와 있습니다만, 프레그돌렌은 그 중 최고입니다. 보통 저는 아침 입덧에는 약을 처방하지 않고 있지만 부인의 경우에는 증상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해야 했지요." "하지만 왜 프레그돌렌이었습니까? 뉴 잉글랜드 저널에 부정적인 기사가 실린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연구는 잘못된 것입니다. 실험과정에 실수가 있었어요." 반데르머에게 저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담은 한참을 머뭇거 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난번 만났을 때에 선생님께서 프레그돌렌은 위험한 약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생각을 바꾸게 되셨습니까?" 반데르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위험하다고 말한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벌써 몇 년 동안 써온걸 요." "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 다른 두 명의 의사가 대기실에 들어섰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반드르머가 그를 줄리안 클리닉의 유전 학자인 닥터 벤자민 스타라고 소개했다. "닥터 스타와 저는 오늘 아침 부인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닥터 스타가 말을 받아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반데르머와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억양을 띠고 있었다. 아담에게는 이 클리닉의 의사들이 모두 죽도록 일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담은 스타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닥터 스타 는 고의적으로 어려운 표현들을 사용해 아담을 혼라에 빠뜨리려 하는 것처 럼 보였다. 제니퍼의 양수검사가 불가피한 이유에 듣고 난 후 그것을 이해 하려고 애쓰던 아담은 자신이 시간낭비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 다. 마치 반데르머와 스타가 서로 짜고 그를 골탕먹이려 하는 듯했다. 아담 은 가봐야겠다면서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사겠다는 반데르머의 제의를 거 절했다. 복도를 걸어 내려가면서, 아담은 제니퍼의 말이 맞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닥터 반데르머는 변해 있었고, 그 사실이 아담을 무척 긴장하게 했다. 사 실, 클리닉 전체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아름답게 장식된 병실들을 둘러 보며, 왜 그런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병원은 가장 이상적인 환경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다 는 느낌을 주었고 뭔가 불길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다.


차로 돌아온 아담은 시동을 걸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기억에 의하 면 닥터 반데르머가 애총에 프레그돌렌의 사용에 반대했다는 건 분명한 사 실이었다. 또한 제니퍼가 양수검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 들었다. 지금 아내는 친정집에 격리된 상태였고 아담으로서는 아무런 행동 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제니퍼가 프레그돌렌을 복용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으며 더 나아가 반데르머에게 계속 진료 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제니퍼는 닥터 반데르머를 과신하 며 의사를 바꾸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담은 주차장을 벗어났다. 제니퍼는 두 가지 면에서는 옳았다. 그는 의사 가 아니었고 산부인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따라서 제니퍼의 마음을 변하게 하려면 자신이 먼저 그 문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다. 대학병원 주위에서는 주차할 만한 공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담은 뷔크 스용차를 병원 주차장으로 몰고 들어갔다. 차를 세운 뒤, 곧장 병원으로 걸 음을 옮겼다. 안내창구에 앉아 있던 아일랜드계 사내가 그를 알아보고 흰 가운을 건네 주었다. 병원 도서관에서, 아담은 산과학 몇 권을 골라 뽑은 뒤 산모의 입덧과 양 수검사에 대한 부분을 찾았다. 읽기를 모두 마친 그는 태아경(Fetoscopy)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자궁 내의 태아를 촬영한 사진들을 보며 자신의 아기가 현재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보았다. 아담은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놓은 다음 병원으로 향했다. 줄리안 클리닉의 부드러운 카페트와 번쩍이는 벽을 보았던 그에게 메디컬 센터는 마치 단테 의 지옥편 촬영을 위한 세트처럼 보였다. 벽에는 칠들과 스탭들의 표정에서 여유를 찾을 수가 없었고, 환자들의 심리적인 안정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0 층에 있는 신경과로 올라갔다. 아직 의대 학 생인 것처럼 행세하며 아담은 간호사실을 지나 환자 차트를 꽂아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세 명의 간호사와 두 명의 병동직원 그리고 레지던트 하나가 잡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에게 눈길을 던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닥터 스튜어트 스마이스의 차트는 1066 호라고 쓰인 칸에 꽂혀 있었다. 간 호사를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철제 커버로 된 차트를 뽑아들고 뒷걸음질치 며 비교적 조용한 의사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의사가 한 명 있었으나 전 화로 테니스 약속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담은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묘하게도 스마이스의 진단은 만발성 운동장해였다. 병력에 의하면 스마이 스는 햐정신성 약품을 사용한 일이 없었으며 아직도 병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병인을 밝히기 위한 검사들 중엔 바이러스의 분리를 시도하는 것 같은 고도의 기술적인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성으로 나타난 반응은 뇌파뿐이었다. 그것 역시 레지던트가 적어놓은 결 과에 의하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기는 하나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결론적 으로 할 수 있는 검사는 거의 다 해봤으나 병의 원인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상태엿다. 스마이스는 2 개월 반 동안 병원을 들락날락 했었고 최근에는 다 행히도 호전의 기미가 보인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 역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담은 차트를 제자리에 꽂아놓고 1066 호 병실을 향해 복도를 걸어갔다.


다른 방들과 달리 병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담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 어섰다. 스튜어트 스마이스는 책과 정기간행물들이 쭉 늘어서 있는 창가에 앉아 있 었다. 아담이 들어서자, 그는 고개를 들고 테 없는 안경을 고쳐 썼다. 자신 과 스마이스가 닮았다는 크리스틴의 관찰은 옳았으며 스마이스가 꽤나 미남 이었으므로 아담은 그런 사실이 싫지는 않았다. 아담은 자신을 의대생이라고 소개했다. 스마이스는 주기적으로 얼굴을 기 묘하게 찡그려 보이면서 아담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자신이 산부인과 의 모든 분야를 폭넓게 복습하면서 독방 생활을 보람차게 보내려 애쓰고 있 다고 말했다. 스마이스의 입술과 혀가 자꾸 경련을 일으키며 오그라들었기 때문에 그의 발음은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닥터 스마이스는 아담을 무척 반가워 했으며 자신이 가진 질병에 대해 창피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담은 스마이스가 자신의 질병에 띄엄띄엄 얘기하는 것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스마이스는 아 로렌 선상학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아담은 닥터 반데르 머가 자신의 아내를 보아주고 있다는 말로 얘기의 화제를 바꾸었다. "반데르머는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닥터 스마이스가 말했다. "아는 산부인과 레지던트에게 소개를 받았었죠. 병원 직원들을 많이 봐주 시는 것 같더군요." 닥터 스마이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분이 얼마전에 아롤렌 선상학회에서 돌아오셨다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 닥터 스마이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얼굴이 다시 경련을 일으 키고 있었다. "선상학회에 가본 일이 있으신지요?" 아담이 물었다. 스마이스가 읽고 있던 책이 무릎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스마이스 는 허리를 숙여 책을 집은 후 대답을 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혀근육이 엉켜 버려 결국 고개만 끄덕이면서 침묵을 지켜야 했다. 아담으로서는 질문을 던져 스마이스를 피곤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담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스마이스는 손을 저으며 아담을 다시 앉 으라고 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선상학회는 멋졌어요."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6 개월 전에 한번 간 적이 있고 이번 주에 다시 가기로 계획이 잡혀 있어 요. 그리고 이번에는 푸에르토리코에도 들르기로 되어 있죠. 무척 가고 싶 긴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퇴원하신 다음에 스케줄을 조정하시면 될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아요. 특히 푸에 르토리코 방문 같은 건 말입니다." 아담은 다시 줄리안 클리닉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스마이스는 줄리안 클 리닉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순간, 다시 경령이 일어났고 그는 마참


내 아담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담은 몇 분 뒤에 다시 한번 와볼까 하고는 생각을 해보았으나, 할일이 상당히 밀려 있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롤렌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커져만 갔지만 해고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6 시가 넘어 아담이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떠날 때 그대로 어질러 져 있었다. 아담이 '집으로 잘 왔어.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고 써놓은 쪽지가 그대로 문 옆에 놓여 있었다. 아담은 냉장고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안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바깥으로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제니퍼의 친정에 전 화를 걸어보았다. 불행히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담! 전화를 다 걸다니...... 정말 바갑네." 카슨 부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제니퍼 있습니까?" 아담이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있어. 오늘 아침부터 집으로 전화를 계속하던데." "일하러 나갔었습니다." "그랬군. 오늘 아침에 제니퍼가 양수검사를 받았어. 검사는 순조로웠고." 아담은 하마터면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뭐라고요! 제니퍼는 지금 어때요?" "괜찮네. 그렇게 걱정할 필요없어." "제니퍼 좀 바꾸어주십시오." "안됐지만 지금 제니퍼는 자는 중이야. 얘기 일어나면 자네가 전화했다고 알려주겠네." 카슨 부인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수화기를 한참 노려보다 분노를 억누르며 가만히 내려놓았다. 줄리 안 클리닉을 나설 때부터 느껴지던 긴장과 공포가 다시 한번 휘몰아쳐 왔 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반데르머는 제니퍼가 아침에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 지 않은 것일까?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1 제니퍼는 끝내 전화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아담은 불안한 심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도를 마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침실 안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변해버린 반데르머 박사가 제 니퍼를 계속 돌보게 된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내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다. 만일 선상학회에 다녀온 의사들이 왜 그런 변화를 겪게 되는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아니면 직접 자신이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가질 수만 있���면 제니퍼에게 반데르머 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 다. 스마이스는 이번 주에 마이애미에서 배를 탈 예정이었다고 했었다. 만일 자신이 스마이스 대신 왔다면 하다면 뭐라고 할까? "배에서 썩 꺼지라고 하겠지." 아담은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짓껄였다. 아담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겨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수화기를 모뎀에 걸 어놓으면서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으리라는 확신을 세우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만으로 키보드를 두들겨, 닥터 스튜어트 스마이스의 파일을 불러내자 전과 마찬가지로 바로 오늘 출발하는 재교육에 참가 예정이라는 대답만이 출력되었다. 아담은 서둘러 옷을 걸쳐 입으며 결심을 굳혔다. 크리스틴은 그가 스마이 스와 많이 닮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고 아담 역시 스마이스를 직접 만나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어 마이애미 교환국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교환수의 목소리가 나오자 아롤렌 유람선의 번호를 물었 다. 교환수가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이름은 번호부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담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시 전 화기를 들고 이번에는 피요르드 호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이번에도 운을 따 르지 않았다. 교환수는 피요르드 관광회사란 곳이 있다고 했지만 별로 관련 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담은 윗도리를 집어들고 부엌으로 가져갔다. 냉장고 위에 올려져 있는 다리미의 플러그를 싱크대 옆의 소켓에 꽂고, 수건을 길게 접어 테이블 위 에 펴놓은 다음 윗도리의 구겨진 곳을 골라 가며 다리기 시작했다. 그때 다 시 영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MTIC 의 번호를 물었다. "MTIC 는 전화번호부에 없고 MTIC 해운여객은 있군요." 마이애미의 교환수가 대답했다. 아담은 번호를 받아 적고 그대로 다이얼을 돌렸다. 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 고 그는 자신을 닥터 스튜어트 스마이스라고 소개한 후 비서가 예약을 확인 하는 것을 잊었다고 하면서 아직도 예약된 상태인지를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여자가 대답했다. 수화기를 통해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여기에 있네요. 뉴욕 시의 스튜어트 스마이스 씨. 오늘 출발할 산부인과 그룹에 들어 있습니다. 늦어도 오후 6 시까지는 승선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걸 물어봐도 될까요? 여권이나 뭐 다른 신분증이 필요 한가요?" "어떤 종류의 신분증이든지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스마이스 씨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스마이스의 신분증을 구한단


말인가? 10 여분 동안 아담은 침대 한구석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여권 문제만 해결된다면 스마이스의 신분을 가장하고 아롤렌 선상학회에 참가한다는 발 상은 정말로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제니퍼의 반데르머에 대한 인상을 깨 뜨려버리기 위해선느 그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틀림없 는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배에 오르는 일만이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 는 확실한 방법으로 보였다. 하지만 과연 산부인과 전문의의 흉내를 낼 수가 있을까? 그리고 만일 배에 오른 사람들 중에 스마이스의 친구라도 있다면? 그러나 충동적으로 아담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실패해봤자 별로 잃을 것도 없었 다. 스마이스의 친구를 만난다면 스마이스가 자신을 대신 보냈다고 대답하 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롤렌 사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영원사원으 로 활동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이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초악의 조치라봐야 그를 해고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 다. 아담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그는 클레런스 맥가이어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 문제로 며칠 동안 시내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알렸다. 클레런스는 동정심어린 목소리로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담은 다음으로 마이애미로 떠나는 비행기편을 확인했다. 델타와이스턴 항공에 매시간마다 떠나는 비행기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제니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기 시작함 녀서 목이 바짝 말라왔다. 신호가 두 번 울리고 나서 카슨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최대한 겸손한 태도로 장모의 안부를 묻고 제니퍼와 통화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일어났는지 한번 보지." 카슨 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후 제니퍼가 전화를 받았다. "깨웠다면 미안해." "자고 있지 않았어요." "제니퍼, 지난밤 일은 미안했어.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나도 모르 겠어. 당신이 그저 집에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야. 그리고 문제가 생겼는 데,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출장을 가게 되었어." "그렇군요." 제니퍼가 대답했다.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당신은 장인, 장모님하고 그곳 에 잠시 머물러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푸에르토리코에 가게 되나 보지요?" "아냐. 그렇지 않아."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좋아요. 좋을 대로 하세요. 그리고 혹시나 관심이 있을런지 몰라서 하는 말인데, 나 어제 양수검사를 받았어요." "알고 있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침 7 시부터 당신에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집에 없던 걸요." 카슨 부인은 어제 저녁 그가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제니퍽에게 알려주지도 않았었다. 아무래도 아내를 데려오려면 큰 싸움을 치러야 할 성싶었다. "아무튼 여행 잘 다녀오세요." 제니퍼는 이렇게 냉정하게 말하고 아담이 미처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제니퍼는 전화를 끊고 나서, 이렇게 중대한 시기에 아담이 뉴욕을 떠나야 할 만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그가 푸에르토리코에 가는 것 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아담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카슨 부인이 물었다. 제니퍼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담이 출장을 게가 되었다나 봐요." "잘된 일이구나. 어디로 간다든?" "모르겠어요. 얘기해주지 않으려고 하던데요." "혹시 바람이라도 피우는 게 아닐까?" 카슨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 친구, 그런 짓은 안 하는 게 몸에 좋을 거야." 카슨 씨가 읽고 있던 월스트리트 저널을 내리고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 며 말했다. "아담은 바람 같은 것 피우지 않아요." 제니퍼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적절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만은 사실이야." 카슨 부인이 말했다. 제니퍼는 건포도 시리얼을 그릇에 쏟아붓고 바나나를 잘라넣었다. 프레그 돌렌을 복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입덧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는 아 침식사를 가지고 테이블로 다가가 텔레비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제니퍼는 아담이 다시 전화를 했으리라 생각하고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어쩌면 그가 생각을 바꾼 것인지도 몰랐다. 그 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닥터 반데르머였다. "이렇게 일찍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괜찮아요." 제니퍼가 대답했다. 뱃속에서 아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다시 클리닉에 들러주셨으면 해서요. 좀 이야기할 것이 있답니다. 10 시쯤 해서 오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오후 제가 수술이 있거든요." "물론이지요. 10 시에 찾아뵐게요." 제니퍼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 "또 뭐니?" 카슨 부인이 물었다. "닥터 반데르머예요. 오늘 아침에 보자고 했어요." "무슨 일로?"


"말하지 않았어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양수검사하고는 관계없는 얘길 거다. 결과가 나오려 면 두 주일은 걸린다고 했잖니." 제니퍼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으며 반데르머가 꺼낼 얘기를 추측해 보았다. 어머니가 한 말이 기분을 좀 가라앉게 해주었다. 그녀로서 상상할 수 있는 상황리고는 혈액검사에서 철분이나 비타민이 좀 낮게 나왔다는 정도뿐이었 다. 카슨 부인은 제니퍼와 같이 병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로 가득 찬 반데르머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닥터 반데르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한 뒤, 책상 앞에 놓인 두 의자를 가리켰다. 반데르머의 얼굴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말 해주고 있었다.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정말 유감입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제니퍼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실내가 참을 수 없을 정도 로 뜨겁게 느껴졌다. "양수검사의 결과를 얻으려면 보통 두 주일은 기다려야 합니다. 세포의 핵 부분을 뚜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려면 조직배양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요.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이상현상이 너무도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양 수 속에 떠다니는 세포들을 그대로 관찰하고도 결과를 알 수가 있었어요. 제니퍼, 어머님과 마찬가지로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기를 갖고 있어요. 그것 도 상태가 아주 심합니다." "이 아기가 몇 주일밖에 살지 못하게 된다는 말인가요?" 카슨 부분이 옛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아기는 살지 못합니다." 닥터 반데르머는 제니퍼에게 다가와 팔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정말 가슴이 아프군요. 최종 결과가 나올 때 까지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미리 전해드리는 게 당신에게 나을 것 같아서 요.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제 말이 위로 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아이는 얼마든지 더 가 질 수 있고, 제니퍼가 말한 바대로 지금은 아기를 갖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 니지 않습니까?" 제니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데르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 다. 닥터 반데르머는 몸을 돌려 카슨 부인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가셔서 가족과 상의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나중에 길고 고통스런 분만과정을 거치느니 지금 결단을 내리는 것이 훨씬 현명한 길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야." 카슨 부인이 말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 제니퍼. 우리 집에 가서 상의를 해보자. 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닥터 반데르머에게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데르머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전화를 주십시오."


그가 모녀를 배웅하면 말했다. 두 사람은 클리닉을 빠져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그들이 차에 올라 타고 경사로를 오르는 동안 제니퍼가 입을 열었다. "아파트에 돌아가 봐야겠어요." "난 지금 당장 뉴저지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버지에게 이 일을 말 씀드려야 하지 않겠니." "아담이 보고 싶어요. 언제 아파트를 떠나는지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거든 요. 어쩌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먼저 전화를 해보자꾸나." "아니에요. 직접 찾아가겠어요." 카슨 부인이 지금이 논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차를 시내 쪽으로 몰았다. 아파트에 그들이 올라갔을 때, 아담의 옷가방은 옷장에 그 대로 들어 있었고 옷들도 없어진 것이 없었다. 아담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 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하려구?" 카슨 부인이 물었다. "그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죠." 제니퍼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부터는 돈 안 받고는 이런 일 안 해줄 거요." 병원 안내소의 잡역부로 일하는 사내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아담은 흰 가운을 받아 몸에 걸쳤다. "이곳을 떠나지지가 않는군요. 향수병에 걸린 모양입니다." 가운의 소매는 아담의 팔 길이보다 2 인치 정도 짧았고 주머니 부분에는 노 란 얼룩이 커다랗게 져 있었다. "이게 제일 좋은 거예요?" 아담이 농담조로 물었다. 자신의 변장에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아담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경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간호사실로 곧장 들어가 병동직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 이고는 차트 꽂이에서 스마이스의 차트를 꺼내었다. 아담이 진짜로 원하는 정보들은 맨 앞장에 다 있었다. 직원에게서 등을 돌 리고 앉은 채로, 아담은 의료보험에 대한 자료들과 사회보장 번호, 가족사 항, 그리고 생년월일 등의 모든 기록들을 베꼈다. 차트를 다시 집어넣은 후, 이번에는 1 층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연구 조교가 미국 의사들의 명단이 실린 영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 은 연감에서 스튜어트 스마이스라는 이름을 찾아 그의 학부 시절부터 레지 던트 과정까지의 기록을 점검했다. 스마이스가 하와이에서 1 년간 외과 수련 과정을 밟은 일이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아담은 스마이스의 의사로 서의 경력도 모두 외워버렸다. 마지막으로 바움가르텐과 스텐스를 만나고 싶다는 핑계로 크리스틴에게 전 화를 걸었다. 그녀를 통해서 스마이스가 테니스를 즐겨 치고 고전음악을 좋 아하며 열렬한 영화광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담은 차를 시내로 몰고 들어가 8 번가에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42 번가에 가까워져 갈수록, 사무실들이 들어찬 빌딩과 대형상점들이 점점 모


습을 감추고 야하게 장식된 극장들과 번쩍이는 네온불빛, 그리고 25 센트짜 리 포르노 영화들을 선전하는 포스터들이 나붙은 성인 전문서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굽 높은 샌달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걸친 매춘부들이 차를 세우려는 아담에게 손짓을 했다. 아담은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가 잡지 판매대 앞에 멈추어 섰다. 약을 팔려는 사람들이 몇 차례 지나가고 난 후 이번에는 비쩍 마른 사내가 다가 섰다. 그는 30 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샐쭉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진짜 여자가 있는데요." 진짜 여자라니, 그럼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따위의 가짜 여자는 아니라는 뜻인가? 아담으로서는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사내가 자신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을런지가 의심스러웠다. "신분증에 관심이 있는데요." "어떤 종류로?" 사내는 매일 들어보는 용건이라는 듯이 덤덤하게 물었다. 아담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운전면허증���나 선거등록증 같은 거라면......" "선거등록증? 그런 걸 찾는 사람은 또 처음 보는구만." "그건 안 됩니까? 글쎄. 아무튼 이런 일은 처음 해보는 거라서요. 배에 타 야 할 일이 생겼는데, 거기서 내 진짜 신분을 숨겨야 하거든요." "그럼 여권으로 하면 되겠는데, 언제까지 필요하오?" "지금 당장이요." "물론 현금은 있겠지요." "약간."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는 자동차 사물함에 신분증과 대부분의 현금을 숨겨 두고 내렸었다. "운전면허증은 25 불, 그리고 여권은 50 불이오." "거 비싸군요. 난 지금 50 불밖에 없는데." "안됐구만."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는 8 번가 쪽을 향해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아담은 사내를 잠시 바라보다가 브로드웨이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가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둘 다 해서 60 불이면 되겠소?" 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더니 한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상점 밖에는 펜으로 '폐점 처분! 기간 3 일간! 전품목 가격인하!'라고 씌어 있었다. '3 일간!'이란 글자는 시간이 많이 지나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상점 안에는 카메라, 전자계산기, 비디오 테잎과 '중국제 진품 상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 의 여신상의 미니어처가, 그 옆에는 '아이 러브 뉴욕(I Love New York)'이 라 쓰인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깡마른 사내가 아담을 데리고 상점 안을 통과해 뒷문까지 가는 동안, 점원 들 중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눈길을 던지는 이가 없었다. 문 뒤에는 복도가 있었으며 양쪽으로 문이 두 개 나 있었다. 아담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으로 빠지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사내가 첫번째 문에 노


크를 하고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아담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방 안은 좁고 어두웠다. 한구석에는 삼각대 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세 워져 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형광등 아래에 제도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 머리가 벗겨진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깡마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운전면허증하고 여권을 60 불에 만들고 싶다는데." "어떤 이름으로요?" 아담은 재빨리 스마이스의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과 사회보장번호를 불러 주었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담을 폴라로이드 카메라 앞에 앉 힌 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대머리 사나이는 제도용 테이블 앞에 앉아 작 업을 시작했다. 깡마른 사내는 벽에 몸을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10 분 뒤, 아담은 가짜 신분증들을 손에 꼭 쥔 채 상점을 가로질러 걸어 나 오고 있었다. 그는 차에 도착한 뒤에야 손을 펴보았고 신분증들은 완벽하게 보였다. 아담은 만족해 하며 차를 아파트를 향해 몰았다. 한 시간 안에 짐 을 모두 꾸려야만 했다. 아파트에 도착한 아담은 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니퍼와 카슨 부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이거 놀라운 일인데." 아담이 꽤나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푸에르토리코에 가버리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어서요." "푸에르토리코에 가는 게 아니라고 얘기했잖아." "어디든 지금은 가서는 안 되네. 제니퍼는 충격을 받은 상태야. 자네 도움 이 필요하다구." 카슨 부인이 말했다. 아담은 가져온 물건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려 제니퍼를 바라보았 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 보였다. "무슨 일인데?" "닥터 반데르머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주었다네." 카슨 부인이 대답했다. 아담은 제니퍼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아담은 카슨 부인에게 입닥치 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참고 아내 앞에 바싹 다가서서 점잖게 물었다. "닥터 반데르머가 뭐라고 했어?" "양수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대요. 우리 아기가 결함이 있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정말 싫지만, 여보...... 아무래도 수술을 해야 될 것만 같 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담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후리치며 말했다. "검사를 한 다음에 조직 배양을 하려면 몇 주가 걸려야 한단 말이야. 도대 체 그 의사는 어떻게 된 사람이야?" 아담은 전화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니퍼가 울음을 터뜨렸다. "닥터 반데르머는 잘못이 없어요."


그녀는 훌쩍거리며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조직 배양 같은 절차가 필요 없었다고 설명했다. 아담은 전화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자신이 아까 읽은 것들을 다시 기 억해내려고 애썼다. 조직 배양이 필요 없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난 믿을 수 없어." 아담은 줄리안 클리닉으로 전화를 걸어 닥터 반데르머를 부탁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기다리라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카슨 부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담. 닥터 반데르머보다는 우리 제니퍼의 기분을 더 생각해주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담은 장모의 조언을 무시했다. 줄리안 클린기의 교환수가 다시 나와 닥 터 반데르머가 수술중이며 끝나는 대로 아담에게 전화를 해줄 것이라는 말 을 전했다. 아담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미친 짓이야. 줄리안 클리닉에는 뭔가 이상한 게 있어. 그리고 반데르머 도......" "줄리안 클리닉은 내가 가본 병원중에 가장 나은 곳이었네. 그리고 내 주 치의를 빼고는 닥터 반데르머만큼 자상한 사람을 본 일도 없었고 말이야." 카슨 부인이 말했다. "병원에 갈게. 그 사람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아담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제니퍼는 어떡할 건가?" 카슨 부인이 다시 따지고 들었다. "다시 돌아올 겁니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카슨 부인은 아주 화가 났다. 자기가 처음으로 그들의 결혼에 찬성했었다 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니퍼는 울고 있었고 카슨 부인은 지금으로서 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는 제니퍼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꾸나.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해 주실 거야." 제니퍼는 어머니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문을 막 열고 나가려 할때, 제 니퍼가 입을 열었다. "아담에게 쪽지를 써놓고 올게요." 카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퍼는 아담의 책상에서 짤막한 메모를 써서 문 옆에 놓았다. 쪽지에는 간단하게 '집으로 감 제니퍼'라고만 썼다. 아담은 난폭한 택시 운전사처럼 황급하게 차를 몰았다. 줄리안 클리닉 현 관 앞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그를 제복 차림의 경비원이 제지했 다. 아담은 뛰어 들어감녀서 자신이 닥터 숀버그이며 응급호나자를 보러 간 다고 말했다. 산부인과에 도착했을 때, 접수직원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맞았다. "아담 숀버그 씨죠. 닥터 반데르머가 사무실에서 기다리시라고 하던데요." 그녀는 맞은편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왼쪽 세번째 방입니다." 아담은 접수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녀가 가르쳐준 곳으로 갔다. 방은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으며, 책꽂이는 여러 가지의 책들과 의학 잡지들 로 가듣 차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태아 표본들을 보자 이 안을 몽땅 뒤엎 어버리고 싶다는 기묘한 충동이 일었다. 아담은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커 다란 책상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타자로 친 수술 보고서 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닥터 반데르머가 방에 들어섰다. 그의 겨드랑이에는 반으로 접은 마닐라지 가 끼어져 있었다. "앉으시지요." "아뇨. 괜찮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제 아내의 진단 결과를 확 인하러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아내가 유전학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기 를 가졌다고 하셨다는데요." "유감스런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직 배양을 하려면 몇 주일이 걸릴 텐데요." 닥터 반데르머는 아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숀버그 부인의 경우는 양수 속에서 바로 관찰 이 가능한 세포들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당신도 의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 지만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다시피 두 분이 다 아직 젊지 않습니까? 아기는 얼마든지 다시 가질 수 있습니다." "슬라이드를 보고 싶습니다." 반데르머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아담에게 자신의 판단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 다. 반데르머는 나쁜 소식을 전하게 된 것에 대해 진정으로 유감스럽게 생 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데르머는 아담을 4 층에 있는 세포검사실로 데려갔다. 아담은 안으로 들 어서며 눈을 한참 껌벅였다. 벽도, 바닥도, 천정도 모든 것들이 하얗게 칠 해져 있었다. 방 뒤쪽에는 현미경이 네 대 줄지어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그중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던 갈색머리의 한 중년 여인이 반데르머 박사를 바라보았다. "코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만 제니퍼 숀버그의 슬라이드를 좀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코라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아담에게 접안렌즈가 두 개 달린 현미경 앞 에 앉도록 지시했다. "혹시 B 스캔 초음파 필름을 원하실가 봐 갖고 왔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닥터 반데르머는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다니던 마닐라지를 열어 아담에 게 보여주었다. 의대에서 아직까지 초음파 촬영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아다미 보고 있는 필름을 반데르머가 다시 뺏더니 뒤집은 후 태아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였다.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지요. 여기 고환이 여럼풋하게 보입니다. 이맘때 면 초음팔르 통해서 성 판별을 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만, 이 아기는 아버


지를 닮게 될 것 같군요." 닥터 반데르머는 아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 다. 무이 열리고 코라가 슬라이드를 담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슬라이드마다 조그마한 유리덮개가 한가운데 붙여져 있었다. 닥터 반데르머는 유성펜으로 표시된 한 개를 집어들었다. 그는 슬라이드를 현미경의 대물 렌즈 아래에 끼워넣고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나서 렌즈를 아래로 내렸다. 아담도 자 리에 앉아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닥터 반데르머는 표본의 염색질이 뚜렷이 보이도록 특별한 염색을 사용했 으며 지금은 분할 단계에 있는 세포를 찾아내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그는 찾기를 포기하고 코라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당신 보고 먼저 찾아 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반데르머가 코라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30 초 가량이 흘렀을 때 코라가 적당한 세포를 발견해내었다. 지시침을 조 작하여, 그녀는 아담에게 염색체의 이상부위를 지적해주었다. 아담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그는 결과가 상당히 모호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훈련되지 않은 그의 눈을 통해 보더라도 이상은 명백했다. 코라는 그외에도 염색체 중의 하나가 약간 비정상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몇 가지 사소한 문제점들 을 지적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코라가 좀더 전형적인 다운증후군에 걸린 세포의 샘플을 보고 싶은지 대답했다. "아뇨, 아무튼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채 반도 일어서 기 전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마음에 집혔다. 그는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현미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까 그 엑스 염색체를 다시 보여 주시겠습니까?" 코라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접안렌즈에 눈을 갖다 대었다. 다시 지시침이 염색체 부분에 맞추어졌다. 코라가 염색체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하는 데, 아담이 말을 가로막았다. "둘 다 엑스 염색체가 맞지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아담이 다시 한번 그녀의 말을 끊고는 닥터 반데르머에게 현미경을 보여주 었다. "엑스 염색체가 분명히 맞지요?" "그렇군요." 반데르머가 대답했다. "하지만 숀버그 씨처럼 저도 코라가 말하는 이상 현상을 식별할 수가 없답 니다." "지금 그런 것에 관심을 두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여기 엑스 염색체가 두 개라는 사실입니다. 방금 전에 당신이 보여주신 초음파 사진에는 아기가 남자애라는 말씀을 해주셨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슬 라이드는 여자의 것입니다." 아담이 말을 시작했을 때 반데르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고 얼굴은


표정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코라가 재빠르게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이분 말씀이 맞군요. 이건 여자 슬라이드예요." 닥터 반데르머의 오른손이 얼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코라는 슬라이드를 담은 쟁반의 한쪽 끝을 들어 그 밑에 적힌 번호를 확인한 다음 다시 슬라이 드에 스인 번호를 확인했다. 둘은 일치했다. 이번에는 등록장부를 확인해보 았지만 틀림없이 그 번호는 제니퍼 숀버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창백해 진 얼굴로, 닥터 반데르머는 아담에게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하고 방을 나 갔다. "이런 일이 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까?" 반데르머가 나간 후 아담이 물었다. "처음이에요." 코라가 대답했다. 잠시 후 닥터 반데르머가 커다란 체격의 한 사내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 사람 역시 반데르머와 마찬가지로 흰 가운을 걸치고 있다. 닥터 반데르 머는 그를 닥터 리들리 스텐포드라고 소개했다. 아담은 그 이름을 알고 있 었다. 그는 아담이 의대 2 학년 때 사용한 병리학 교과서를 저술한 바 있으 며 대학 병원의 병리학 과장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건 장말 큰 사고입니다." 닥터 스탠포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나서 머리를 들자 반데르머가 말했 다. "정말 그렇군요." 닥터 스탠포드의 말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억양이 없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전화를 좀 해야 되겠군요." 몇 분 지나지 않아 실내를 10 여 명의 의사들로 붐비게 되었다. "어제 양수검사는 몇 회나 실시했습니까?" 닥터 반데르머가 물었다. 코라가 기록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21 회입니다." "모두 다시 검사해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닥터 스탠포드가 반데르머의 말을 받았다. 반데르머가 아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당신에게 정말 감사드려야겠군요."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공감을 표시했다. 아담��� 마치 커다란 먹구름이 머리 위에서 사라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자기 아들이 결코 유전학적 괴물이 아닌 것으로 편명이 난 것이었다. 아담 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제니퍼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식사라도 함께 하고 가시면 좋겠는데요. 그리고 복막내 종양에 관한 병리 학 강의가 있을 예정인데 관심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닥터 스탠포드가 아담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아담은 양해를 구한 뒤 곧장 로비로 서둘러 내려갔다. 이런 큰 사 고를 맞고서도 식사나 같이 하고 강의를 듣자고 청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분명히 이 병원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정문을 지나 공중전화를 향해 걸어가면서, 아담은 차가 세워두었던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자 기뻤다. 아담은 제일 먼저 아파트에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장 모와 함께 친정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고 잉글우드로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이다 일단 아파트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 다. 그는 차에 서둘러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기쁜 소식에 대한 흥분된 마음은 점점 줄리안 클리닉과 닥터 반데르머에 대한 불안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가 염색체의 차이를 발견해낸 것은 정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니퍼에게 수술을 받게 했다면! 불안감이 파도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가까스러 첫번째 재난을 피해갔다고는 하지만, 만일 자신이 반데르머와 줄리안 클리닉에 대한 제니 퍼의 생각을 바꾸어놓지 못한다면 더 큰 위험에 처할수도 있는 것이다. 잠 시 동안 아롤렌 유람선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반데르머가 위 험한 인물이란 사실을 증명할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담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피요르드 호에 6 시가지 도착하기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아파트의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제니퍼의 매몰찬 메모를 읽고 나서 다시 잉글우드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제니퍼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좋은 소식이란 건 말야, 당신의 검사 표본과 다른 사람들의 것이 섞였다 는 거야. 염색체 이상이 있던 건 다른 사람의 아기였어. 슬라이드가 서로 바뀌었단 말이야." 잠시 동안, 제니퍼는 아담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반데르머 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였다. "닥터 반데르머가 뭐라고 했어요?" "양수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어." "나쁜 소식이란 게 바로 그거예요?" "아냐. 나쁜 소식이란 건 말이지. 당신이 내게 한 가지를 약속해 주지 않 는 한 내가 뉴욕을 잠시 떠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뭘 약속해주길 바래요?" "남은 기간동안 닥터 워클먼에게 진찰을 받고, 또 앞으로는 프레그돌렌을 먹지 마." "아담......" "틀림없이 줄리안 클리닉에는 무슨 흑막이 있어. 닥터 위클먼에게 진찰받 겠다고 약속한다면 나도 앞으로 아기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 "병원에서 실수하는 일은 흔히 있어요. 줄리안 클리닉에서 그런 일이 한번 있었다고 해서 앞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건 억지예요. 이제 세릴에게 있 었던 일도 다 잊어버렸고, 나한테는 줄리안 클리닉이 이상적인 장소로 느껴 져요. 그곳 사람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구요." "좋아. 그럼 며칠 뒤에 봐."


아담이 말했다. "어딜 가려구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아담, 난 당신이 필요해요." "날 혼자 아파트에 남겨놓고 친정집에 가서 그런 소릴 하니까 믿기가 좀 힘든데. 미안해. 서둘러야겠어. 사랑해, 제니퍼." 아담은 전화를 끊고 곧장 이스턴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45 분 후에 라가르 디아 공항에서 마이애미로 출발하는 비행기의 좌석을 예약했다. 그는 옷장에서 조그만 샘소나이트 가방을 꺼내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세면도구들을 막 쑤셔넣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담은 수화기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1 분이라도 더 지체하다가는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제니퍼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담과의 통화를 마치 자마자,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닥터 위클먼을 보리라 결심했던 것 이다. 일단 그에게 진찰을 받게 되더라도, 만일 불편한 점이 발견되면 다시 반데르머에게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이미 아파트를 나선 게 분명했다. 제니퍼가 수화기에서 소을 떼어놓기도 전에 전화벨이 다시 울 렸다. 아담이 전화를 했으리라 기대감에 서둘러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반 데르머의 전화였다. "좋은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네. 방금 아담이 전화를 해주었어요." 제니퍼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숀버그 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문제에 부딪힌 상황에서 사소한 차이점을 발견해내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지요." "그러니까 제 아기에게 이상이 있지 않다는 게 사실이군요." "아타깝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아직 우리로서는 부인의 검사결과를 알고 있지 못한 상태니가요. 그래서 같은 절차를 다시 한번 반 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날 양수검사를 받은 사람이 부인 말고도 스무 명이나 있었는데 모두가 검사 를 다시 받게 되었답니다. 물론 비용은 병원에서 부담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하나요?" 제니퍼가 물었다. 그녀는 실험실 사람이 저질렀음에 분명한 실수를 자신이 기꺼이 떠맡으려는 반데르머의 태도에 감탄해 하고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요. 명심하십시오. 문제가 정말로 있다면 시간이 촉박합니 다." "내일 아침에 뵈면 될까요?" "좋습니다. 너무 서두를 건 없지만 빠를수록 좋지요.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2 아담은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 륙하자마자 그는 지갑에서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꺼내고 그 자리에 스마이스 의 것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 여권에 적힌 주소들을 주의깊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사는 곳을 물으면 거침없이 외워 보일 수 있어야 했다. 비행기는 4 시 5 분에 착륙했다. 집을 찾고 나서 택시 승차장에 나섰을 때는 4 시 15 분이 넘어 있었다. 택시는 오래된 돗지 스테이션 웨곤이었고 운전사 는 스페인어밖에 할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는 필요로드라는 이름을 알아듣 고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담은 바깥에 펼쳐진 열대의 풍경에 눈을 돌렸다. 마이애미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택시가 길게 이어진 방죽을 지나가자 곧 항구의 모습이 아담의 눈에 들어왔다. 선박들이 줄지어 항구에 정박해 있었으며 피 요르드는 줄의 맨 가장자리에 있었다. 다른 배들과 비교했을 때 피요르드의 크기는 보통 정도에 불과해 보였으며 전체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가운데 솟은 커다란 굴뚝의 옆에는 두 개의 화살이 얽혀 있는 모양의 그림 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MTIC 의 로고인 모양이었다. 택시가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오자, 아담은 요금을 지불하고 길 한가운데 내려섰다. 한 손에 옷가방을 든 채 건물의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 선원들의 떠드는 소리, 그리고 공회전하는 엔 진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고 연기가 자욱하게 항구를 메우고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아담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아담은 안내창구를 향해 걸어갔다. 안내원의 제복은 줄리안 클리닉 직원의 차림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들의 복장 역시 흰 블라우스에 청색 자켓이었 다. 안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아담은 목소리를 높여 말해야 했다. 그는 승선을 위한 수속을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 물었고 안내원은 2 층으로 에스컬레이터 를 타고 올라가라고 알려주었다. 아담은 안내원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통 해 겨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옷가방을 든 채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그는 2 층으로 올라가며 아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자 들의 숫자는 무척 적어 보였고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다. 모두가 부유하고 만 족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의사다운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정장을 한 이들 이 대부분이었으나 셔츠에 헐렁한 바지 차림을 한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 다. 2 층에는 접수 카운터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카운터는 알파벳 순으로 구분 이 되어 있었고 아담은 'N-Z'라고 쓰인 카운터 앞에 줄을 섰다. 실내를 돌아보던 아담은 등골이 갑자기 서늘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어쩌 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버리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누가 눈치 채기 전에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가 비행기로 집에 돌아가 버리면 되었다. 아담은 자기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그때 이웃한 줄의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담은 재빨리 시선을 돌리 고 불안하게 발 끝을 바닥에 두들겨대었다. 하지만 당장은 자신이 시선을 끌 이유가 아무 데도 없었다. 아담은 천천히 옆 줄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 다. 그러나 그 사내는 여전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담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담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미소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나이가 아담을 향해 걸어왔다. "전 앨런 잭슨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손가방을 내려놓고 그와 악수를 나누고 자신을 스튜어트 스마이스 라고 소개했다. 엘런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 었다. 적어도 아담보다 열 살은 연상인 듯 보이는 이 사람은 딱 벌어진 어깨와 가는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엷은 갈색 머리카락은 곱게 빗겨져 넓은 이마를 가려주었다. "어디서 많이 뵌 듯한데요. 혹시 뉴욕에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아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수속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말썽 이 생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승선권을 가지신 분들은 몇 분 뒤에 피요 르드 호에 탑승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직 승선권을 받지 못하신 분들은 지 금 곧 데스크로 오셔서 절차를 밟아주시기 바랍니다." "정형외과이십니까?" 실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앨런이 곧 입을 열었다. "아니오." 아담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 사내는 진짜 스마이스를 알고 있지 못한 게 분명했다. "산부인과입니다. 무슨 과이십니까?" "정형외과요. 산디에고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있습니다. 선상학회에는 처음 참가하시나요?" "아뇨. 잭슨 씨는?" "두번째입니다." 앨런은 이렇게 대답하고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저기 네드 잭슨이 있구만. 네드, 이 친구야. 이리 와!" 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땅딸막하고 검은 머리를 한 사내가 이쪽 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자의 팔짱을 끼고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앨런과 네드가 해후를 만끽하는 동안, 아담은 여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여자의 이름은 클레어 오스본이라고 했다. 그녀는 30 대쯤 되어 보이는 말끔 한 인상의 여인으로, 둥글고 건강해 보이는 얼굴과 길고 탄력있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짧은 검은색 스커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 을 산부인과 의사라고 소개하자 아담의 기분은 깨어지고 말았다. "어느 쪽이지요? 정형외과, 아니면 산부인과?" "왜 범위를 그 둘로 좁히는 거죠?" 아담은 이렇게 농담을 던지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고 애썼다. "제 직감은 남다르지요." 클레어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번 프로그램이 정형외과 의사와 산부인과 의사들만을 위한 것이 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아담이 불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 산부인과입니다." "정말이요? 그럼 우리는 같은 곳에 있게 되겠군요." "그거 참 잘되었군요. 선상학회에는 처음 오신 건가요?" 아담으로서는 산부인과에 관련된 것 이외의 것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녀와 함께 전문적인 대화를 나누다가는 산통이 다 깨어지고 말 형편이었다. "네, 그래요. 네드도 처음이구요. 그렇지요, 네드?" 클레어가 네드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앨런과 네드 사이에서 간간이 들 려오는 말들로 미루어 두 사람은 같은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은 모양 이었다. "이것 봐요! 아주 대단한데요." 네드가 아담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우리 함께 저녁을 하는 게 어때요?"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좌석 배정은 아롤렌 사 직원들이 할 거야. 그 사람들은 식사까지도 학회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에이, 김 새는구만. 이게 뭐야. 뭐 우리가 여름 캠프에라도 온 건가?" 아담 바로 앞의 사내가 승선권을 받아들고 비켜섰다. 아담은 카운터 앞으 로 다가섰고 흰 셔츠를 입은 젊은이가 그를 맞았다. 가슴 주머니에는 피요 르드 호의 굴뚝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옷깃에는 ' 주안'이라고 쓰인 이름표가 달려 있었고 이름 아래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MT IC 라고 씌어 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주안이 물었다. 그의 억양은 질문을 너무 자주 해서 이제는 아무생각없이 읊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스튜어트 스마이스입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하고 허둥거리며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려 했다. 그때 아롤렌 사의 직원 신분증이 카운터 위에 떨어졌다. 다행히도 주안은 스마이스의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해넣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담은 뒤 로 고개르 돌려 새로 사귄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대화에 열 중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항해가 끝나고 나면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 만 같았다. 아담은 다시 주안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아롤렌 사의 신분증을 윗도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주안이 말했다.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아담이 안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주안이 여권을 열어보는 동안 아담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주안은 잠깐 그것을 훑어보기만 하고는 아담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여기 승선권이 있습니다. 사무장에게 제출하시면 객실을 할당해 드릴 겁 니다. 배에서 내리실 때에도 잊지 말고 소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럼 다음 분 오십시오." 아담은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옆으로 비켜섰다. 지금까지는 모든 일


이 계획대로 잘 풀리어가고 있었다. 아담이 승선권을 받고 나자, 네드와 클레어는 그를 데리고 다른 데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몇 가지 물품들이 담긴 가방을 지급받았다. 네드는 그것을 '종합선물'이라고 불렀다. 가방은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구석 에 MTIC 의 로고가 붙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크로스펜 한 자루와 연필 세 트, 그리고 가죽끈으로 묶인 큼직한 노트와 강의 스케줄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 조그만 약국을 차려도 될 만큼 많은 양의 아롤렌 사 약품들도 눈에 띄 었다. 아담은 약품들을 관심을 갖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름들을 자세히 훑어보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았다. 스피커를 통해 승선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군중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아담과 그의 새친구들은 바깥으로 천천히 발 걸음을 옮겼다. 도크 옆에서 제복 차림의 경찰관이 그들의 승선권을 검사했 고 그들은 승선대를 줄지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담은 경사로에서 주 갑판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가 생각하던 그런 호화 찬란한 신형 유람선은 아니었지만 배 안은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어떤 부분 은 최근에 개수작업을 마친 듯이 보였다. 승무원들은 모두 접수 카운터의 직원들과 같은 차림으로, 흰 윗도리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제복들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고 잘 다려져 있었다. 승무원 한 사람이 아담에게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그의 승선권을 검사하고 는 오른쪽 데스크로 가라고 말해주었다. 이미 선상학회에 참가한 일이 있는 승객들의 승선권은 처음 온 이들의 것과 색깔이 달랐다. 네드와 클레어는 다른 데스크로 가야 했다. 아담은 주 갑판 한 칸 아래에 있는 A 갑판의 407 호실을 배정받았다. 그에게 열쇠를 건네주는 사무장의 목소리는 접수 카운터의 직원과 마찬가지로 단조 로운 억양을 띠고 있었다. 아담 바로 뒤에 줄을 서 있던 앨런은 409 호의 열쇠를 받았다. 아담은 앨런 과 함께 걸어가며 그들의 묘한 억양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겠지요." 앨런의 대답이었다. 다른 승무원이 아담의 옷가방과 아로렌 서류가방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그 사내는 아담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따라오라는 몸짓만 해 보일 뿐이었다. "나중에 봅시다. 스튜어트." 앨런이 소리쳤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좀 시간이 거렸다. "네 이따 봐요." 아담이 대답했다. 승무원은 구찌 백과 일제 카메라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는 선내매점을 지 나쳐 계속 걸어갔다. 매점 뒤쪽에는 포도주와 위스키, 그리고 담배와 약품 을 파는 매장이 있었다. 배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아담은 배멀미에 대한 생 각을 했다. "실례합니다만, 언제 매점이 열리게 됩니까?" "배가 출발하고 한 시간 정도 있어야 합니다."


승무원이 대답했다. "드라마민이나, 귀에 붙이는 다른 멀미약도 팝니까?" 승무원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매점에서 드라마민이나 귀에 붙이는 다른 멀미약을 파는지 잘 모르겠습니 다." 그는 아담의 질문을 그대로 따라하며 답했다. 더이상 질문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407 호와 409 호는 배의 좌현 쪽에 위치해 있었다. 앨런의 모습은 아직 보이 지 않았다. 승무원은 객실의 문을 열고 아담을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호화 유람선 같은 것을 타본 일이 없는 아담의 눈에 방은 무척 좁아 보였 다. 방의 오른쪽에는 나이트 테이블과 함께 일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고 왼 쪽에는 조그마한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샤워기와 변기 그리고 벽장 옆에 붙은 세면기가 갖춰진 화장실도 무척 작아 보였다. 승무원은 화장실에 머리를 들어밀었다가 안으로 아예 들어가 버리더니 잠 시 후 물 한 컵을 들고 나타나 아담에게 건네주었다. "저보고 마시라고요?" 아담이 물었다. 그는 컵을 받아 들고 물을 한 모금 삼키었다. 화학약품 냄 새가 풍겨왔다. 승무원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노란색 캡슐 한 개를 꺼내어 아담에게 내밀 며 말했다. "다시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네, 아주 좋은 곳이니까요." 아담은 노란색 캡슐에 눈을 고정시킨 채 어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승무 원이 자신에게 이 약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담이 손을 내밀자 그가 아담의 손바닥 위에 캡슐을 떨어뜨렸다. 드라마 민 같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확실하게 알 길이 없었다. "멀미약인가요?" 승무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채 계속 아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담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컵을 체자리에 갖다 놓으러 화장실로 들어간 동안 아담은 입 속에서 캡슐을 다시 꺼내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승무원은 아담이 잠을 잘 것이라고 예상한 듯, 침대에 깔아놓은 담요를 들 추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아담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짐을 풀기 시 작했다. 그들의 서비스 수준에 감탄하며, 아담은 침대에 올라앉아 그가 일을 처리 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일을 마치고 나자 아담에게 꾸벅 인사 를 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동안 아담은 승무원의 행동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침대에서 일 어나 가죽 가방을 열었다. 약들이 담요 위에 쏟아졌다. 그는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노란 캡슐을 꺼내어 샘플들 중 같은 것이 있는 지를 비교해보았다. 같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배 위에 약품 총 연감이 있 을지도 몰랐다. 이런 곳이라면 기본적인 의학서적들을 갖춘 도서관 하나 쯤 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 약이 멀미약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아 담은 마지막으로 캡슐을 쳐다보고는 아스피린 병에 집어넣었다.


그는 강의 스케줄을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케줄은 25 페이지에 걸쳐 씌어 있었는데 앞의 반은 정형외과, 뒤의 반은 산부인과에 대한 것이 었다. 강의들의 주제는 대개 임상적인 범주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선 상회의가 폭넓은 인기를 끌어온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만일 아담이 예상하는 대로 일종의 세뇌 과정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면, 그것은 강의 시간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하지만 어떤 내용의 강 의를 해주었길래 반데르머와 같은 의사가 아롤렌 사의 제품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일까? 최면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일까? 아담은 스케줄을 침 대 옆에 던져버렸다.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다 알게 될 일들이었다. 갑작스런 기적 소리에 아담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바깥을 둘러보기 위해 선실을 나서 기로 마음 먹었다. 아담은 윗도리를 벽에 걸고 넥타이를 벗어버린 후 복도로 나섰다. 그는 잠 시 409 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같은 벽으로 연결된 앨런의 방에서 그동 안 아무런 소리도 듣지를 못했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려보았 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 승무원 한 사람이 아담의 곁을 지나갔고 아담은 그를 위해 몸을 벽에 바싹 붙이고 있어야 했다. 다시 문을 두들겨보 았다. 결국 그가 떠나려고 몸을 움직이려 할 때 안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바 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담은 손바닥으로 다시 한번 문을 힘차게 노크했다. 어쩌면 앨런은 화장실에서 그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지 도 몰랐다.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담은 손을 내리고 손잡이를 돌 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담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앨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방금 바닥에 떨어뜨 린 것으로 보이는 물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아담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앨런은 입을 우물거리며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동안 잠을 자고 있던 모양이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배가 떠나는 걸 구경하러 나가던 중이었는데 당신도. ....." 아담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앨런이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 했기 때문이었다. 아담은 재빨리 다가서서 앨런이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붙잡아 다시 침대에 눕혀주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아담이 물었다. 졸린 목소리로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냥 좀 피곤할 뿐이에요." "눈을 좀 붙여두시는 게 좋겠군요." 아담이 이렇게 말하고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이트 테이블 주위를 둘러보았 다. 어쩌면 술을 몇 잔 마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위에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아담은 앨런에게 담요를 덮어줄까 고민하다가 그가 옷으 ㄹ 다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침대 시트 위에 눕혀놓았다. 주 갑판의 데스크 주위에는 아직도 객실 배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부두와 연결된 승선대는 이미 올려져 있었다. 아담은 두 층을 더 올라가 유보 갑판(Promenade Deck : 승객들이 산책하기 편리하도록 설치해


놓은 갑판)에 도착했다. 에어 컨디셔너가 가동되는 시원한 실내에서 나의 마이애미의 열대 바람을 쐬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아담은 난간에 다가가 부두를 내려 다보았다. 인부들이 배게 연결된 계류장치들을 풀어내고 사슬을 던지며 바 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배의 진동이 더욱 심해지면서 배 앞쪽의 추진기가 작동을 시작하더니 마침내 배가 천천히 도크에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배 후미 쪽에서 환호성 소리와 함께 딕시랜드 풍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아담은 티크 목재로 만든 벽과 마주쳤다. 벽의 한 쪽에는 뱃머리 쪽으로 향하여 난 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승무원 전용. 승 객들은 출입을 금함'이라 씌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지만 아담으로 서는 당장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시 한번 기적이 힘차게 울리더니 엔진의 진동 소리가 바뀌었다. 메인 스 크류가 돌아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배는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아담은 배 위를 거니는 다른 승객들과 여러 차례 마주쳤다. 모두가 친절하 고 쾌활해 보였다. 갑판 위는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아담은 한 칸 아래의 갑판으로 내려섰다. 거기는 여러 가지 크기의 강의실 들, 초대형 강당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두어 명 남짓한 사람을 수용할 만한 정도의 세미나실들이 늘어서 있었다. 각 방마다 흑판과 슬라이드 영사기가 비치되어 있는 것도 눈의 띄었다. 아담은 '도서관'이라 쓰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의약품 총연감을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 아오기로 하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복도는 끊어지고 잠겨진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반대편에는 선원들의 숙소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담은 다시 한 칸 아래의 주 갑판에 내려섰다. 선내 매점과 접수 데스크 들을 지나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식당 안은 대단히 넓었으며 크리 스탈로 만든 샹들리에와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연단이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담의 눈에 들어왔다. 그 양족에 뚫린 문 은 주방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였다. 승무원들이 분주히 그 문들을 들락거리 며 쟁반을 나르고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저녁 만찬이 9 시에 베풀어질 예정 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담은 그의 객실이 있는 A 갑판으로 다시 내려갔다. 몇몇 객실은 문이 열 려 있었고 의사들이 짐을 풀며 들락거리고 있었다. 아래로 한 층을 더 내려가자 또 다른 강의실 시설들과 조그마한 운동기구 실, 선상의(船上醫) 집무실, 그리고 실내수영장이 나타났다. 이제 배 안을 웬만큼 돌아보았다고 생각한 아담은 다시 유보 갑판으로 올라갔다. 칵테일 파티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네드 잰슨이 아담을 발견하고 그를 수영장 가장자리에 모여 앉은 그룹으로 끌고 갔다. 아담으로서는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 에 결국 차가운 하이네켄 맥주를 들이키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앨런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요?" 네드가 물었다.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밴드가 '성자들의 행진 (When the Saints Come Marchin' In)'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그는 손바닥으


로 무릎을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아담은 테이블 맞은편에서 조용히 파티를 즐기며 앉아 있는 클레어에게 웃 음을 지어 보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의사들만의 모임이 갖는 전형 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흥청거리며 짓궂은 농담을 서로에게 던져 보기도 하고 술을 마구 들이키기도 하였다. 아담이 맥주 한 병을 비우자 네 드가 새것을 들이밀었다. 그때 갑자기 배가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담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마이애미의 불빛은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이제 배는 대서양 한복판에 나 와 있었다. 아담의 뱃속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그느 황급히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른 의사들은 배의 진동에 전혀 무감각한 것 같았다. 아담은 멀미약을 구 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이 다시 한번 노란 캡슐에로 옮겨 졌다. 아담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캡슐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이 왁지지껄하게 떠들어대는 무리 속에 계속 머물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아담은 실례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인적이 없는 쪽의 난간으로 걸어 갔다. 몇 분이 흘렀고 좀 기분이 나아지자 선실로 돌아가 잠시 누워 있기로 했다. 눈을 감으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금 마신 맥주가 여전 히 뱃속에서 출렁대고 있었다. 제니퍼와 그녀의 아버지는 집 뒤에 펼쳐진 들판으로 산책을 나섰다. 제니 퍼는 아버지가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 만 지난 반 시간 동안 잡담만 늘어놓으며 진지한 대화를 피해왔다. 마침내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려놓으며, 제니퍼는 본론으로 이야기를 돌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아빠?" 카슨 씨가 제니퍼의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네가 직접 결정할 일이 아니겠니." "그래도 아빠 의견을 듣고 싶어요." "내 의견이 어떤가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란다. 하지만 네 어머니는 닥터 반데르머를 깊이 신뢰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양수검사 샘플이 뒤섞인 건 잘못된 일이지만 그 의사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마음에 들던데. 내 느낌 으로는 그 사람의 충고를 따르는 게 좋을 것 같다." "닥터 반데르머는 곧장 양수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니퍼가 말했다. "그 사람이 네가 아기를 지워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해야겠지. 네 엄마나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육체적으로 심각 한 문제를 가진 아기는 세상에 나오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거야. 그건 아 기 자신을 위해서도 옳지 않은 일이지. 이번 일에 대한 내 느낌은 그렇단 다." "제 의견도 아빠와 같아요.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무척 언짢아 져요." 카슨 씨는 제니퍼를 감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물론 그렇겠지, 얘야. 그런데 네 남편되는 사람은 네게 조금도 도움을 주 지 못하는 것 같다. 단정하기는 싫지만 아담의 행동은 무척 마음에 안 들


어. 지금 그 녀석은 목적도 불분명한 여행이나 다니고 있을 게 아니라 네 곁에 머무르면서 함께 중요한 문제들을 상의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들은 집 뒤에 둘러쳐진 울타리에 도착했다. 카슨 부인이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한느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말씀이 옳은 것 같아요." 제니퍼가 문을 열며 말했다. "닥터 반데르머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일 양수검사를 받겠다고 이야기하겠 어요."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제 저녁식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아담은 단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후에야 그 음성이 객실 한구석에 매달린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9 시였다. 아담은 애써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래도 저녁만찬은 별로 구미가 당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샤워를 마 치고 몸의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방을 나선 그는 앨련 의 객실 문을 두들겼다. 대답이 없었다. 앨런은 자고 있거나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아담이 참견할 상황은 아닌 듯 싶었다. 선내 매점에서는 물건을 팔고 있었다. 아담은 드라마민을 사려고 점원에게 다가갔으나 전원은 약이 다 팔렸으며 새것을 창고에서 내일 아침에 꺼내와 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담은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식당 입구에서 한 승무원이 그에게 정형외과 의사인지 산부인과 의사인지를 물었고 아담은 산부인과라고 대답했다. 그는 아담을 연단 가까이에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벌써 다섯 명의 의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담은 자신 의 이름이 스튜어트라는 사실에 정신을 집중하느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 름을 소개하는 것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제대로 들은 것은 테드와 아치볼 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뿐이었다. 대화의 화제는 의사로서의 생활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주로 임 상적인 것보다는 돈 버는 이야기로 흘렀다. 아담은 불편한 뱃속에 신경을 쓰느라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 를 보아 승무원에게 음식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사람들은 배의 진동 을 어떻게 건뎌내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커피가 날라져왔고, 잠시 뒤에 껑충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잠시 마이크를 시험해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행사의 공식적인 MTIC 후견인으로 이름은 레이 몬드 파웰이라고 합니다. 아롤렌 제약회사의 선상 의학 학회에 참가하신 여 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식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사람들이 연단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파웰은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나서 마이크를 닥터 고다드에게 넘겼다. 그 는 실제적인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고다드가 말을 마치자, 파웰이 다시 마이크 앞에 다가섰다. "자 이제 여러분을 놀라게 할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참가자 여러분들 의 여흥을 위해 저희들이 준비한 캐리비언 무용단을 소개합니다." 연단 양쪽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열두 명의 아슬아슬한 옷차림을 한 무용


수들이 몰려나왔다. 그들 중 단 두명 만이 남자였고 나머지는 아리따운 젊 은 아가씨들이었다. 무용수들에 이어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멘 록 밴드가 등 장하였다. 밴드는 노련한 솜씨로 연단 주위에 스피커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관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파웰과 고다드는 한쪽에 비켜서서 그들이 연 출한 행사가 의사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평가해보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갈색머리의 한 매력적인 무용수가 아담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허리는 가늘었고 가슴은 탄력있게 위로 솟아 있었다. 그녀가 아담을 바라보더니 윙크를 해 보였다. 그때 안타깝게도 아담의 뱃속이 다시 부글거 리기 시작했고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아담이 왁자지껄한 관중들을 헤치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유보 갑판 의 난간에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 그의 뱃속이 뒤집어지면서 아담은 난간 바 깥쪽으로 음식물을 토해내었다. 잠시 그는 자신을 본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갑판 위에는 전혀 인적이 없었다. 아담은 눈을 밑으 로 내려 자신의 셔츠를 쳐다보았다. 셔츠는 깨끗했다. 아담은 마음을 놓고 바람에 몸을 맡기며 걷기 시작했다. 아직 그의 상태는 식당으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좋지 못했다. 잠시 후, 기분이 좀 나아진 것을 느낀 아담은 승객들의 출입을 통제하던 그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쪽 부분은 좀 여이 무척 어두웠고 갑판은 단조로운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아담은 뱃머리 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로프 한 묶음과 체인이 바닥에 널브러 져 있었다. 파도가 배의 양쪽에서 솟아오르며 용트름을 했다. 그 위로는 별 이 빛나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아담의 어깨를 건드렸다. "여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스페인 액센트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담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상학회에 처음 참가해서 배를 둘러보던 참이었습니다. 함교(Bridge)에 들러볼 수 있을까요?" 아담은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는 격언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술을 먹지 않았소?" "아뇨. 전 멀쩡합니다." 아담은 그의 질문에 놀라며 대답했다. "딴 뜻이 아니라, 전에 승객들과 좋지 못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물어 본 겁니다. 선장이 함교에 있을 테니 당신이 올라가도 좋은지 한번 물어보겠습 니다." 사내는 아담의 이름을 묻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우현에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하나 보였다. 사다리 옆에는 계단이 하나 나 있었다. 배에서는 사다리와 계단이 함께 쓰 이는 모양이었다. 계단 위에는 스페인 액센트를 쓰던 아까 그 사내가 함교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함교 안의 장비들은 붉은 조명을 받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 었다. 키를 잡은 사내는 아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을 선장 에릭 노드스트롬이라고 소개했다. 그


는 아담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젊었으며 말을 계속하면서도 방문객에 대 한 경계심을 버리지 않는 듯했다. "호세 말로는 처음 이 배에 타시는 거라고 하던데요, 닥터 스마이스." "그렇습니다." 아담은 스마이스가 여기에 한번 왔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어색하게 대답 했다. 선장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아담이 말했다. "이 배는 누구 것입니까?" "나도 잘 모릅니다. 승무원들은 모두 MTIC 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요. 그 회사에서 이 배를 산 것인지 아니면 임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MTIC 가 대우는 잘 해줍니까?" 노드스트롬 선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봉급은 제때에 잘 받고 있지요. 하지만 같은 코스를 반복해서 왕복한다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지요. 게다가 승무원들과 사귀는 일도 많은 제한을 받 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만나볼 기회가 없습니까?" 아담이 물었다. "전혀요. MTIC 에서 규정을 통해 그런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답니다. 당 신이 내가 함교에서 만난 첫 승객이지요. 이전에 술 취한 승객들과 불쾌한 경험을 한 일이 몇번 있긴 했지요." 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의사들이 마셔버린 양을 생각해보더라도 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 되었다. 바람이 없는 곳에 다시 들어오게 되자, 배의 동요가 뱃속을 언짢게 만들었 다. 아담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선장에게 했다. "호세. 닥터 스마이스를 배웅해드리게." 노드스트롬 선장이 말했다. 호제는 문을 열어 아담보다 앞서 앞으로 나갔다. 배의 움직임 따위는 신경 이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아담은 보 다 신중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 배 위에서 걷는 데 익숙해질 거요." 호세가 웃으며 말했다. 배의 후미 쪽으로 걸어가며 호세는 배의 설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 담은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으나 대부분 이야기가 너무 여려워 머릿속 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명이 밝은 곳으로 나와서야 아담은 처음으로 콧수염 을 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마이스 선생......" 호세가 입을 떼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소?" "무슨 일인데요?" 아담이 물었다. 선장이 말한 대로라면 선원들과 승객들의 접촉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고, 아담으로서는 문제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 나 한편으로는 선원 중의 한 사람을 잘 알아둔다는 것도 나중을 생각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매점에서 담배를 팔고 있는데, 내가 돈을 드릴 테니 사다 주시겠소?" "왜 직접 사지 그러시오?"


"우리는 이 문을 넘어서지 못하게 돼 있거든요." 아담은 그의 제안을 곰곰히 따져보았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어도 해가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몇 갑이나 사다드릴까요?"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만큼이오." 호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50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었다. 호세의 부탁은 단순한 담배 심부름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는 배 위에서 암거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10 달러 어치만 사다드리기로 하지요." 아담이 말했다. 호세는 다시 주머니를 뒤져 10 달러 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아담은 돈을 받아들고 다음날 11 시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강 의 스케줄에 의하면 그 시간은 휴식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호세가 입을 크 게 벌리고 웃어 보였다. 그의 이빨이 콧수염과 대조적으로 하얗게 빛났다. 바닷바람을 몇 번 크게 들여마신 뒤, 아담은 객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3 닥터 스마이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계속 잠을 청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의 팔 을 움켜잡았고 아담은 억지로 감겨오는 눈을 떴다. "내 안경." 아담이 말했다. 그의 발음이 분명치 않게 흘러나왔다. 아담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을 침대 아래로 내려뜨리며 나이트 테 이블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의 손에 부딪친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것을 주으려고 허리를 굽히던 아담은 자신이 닥터 스마이스라는 사실을 가 까스로 기억해내었다. 승무원이 그에게 물 한 컵을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담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대답했다. 승무원이 다시 주머니에서 노란 캡슐을 꺼내었다. 아담은 주저하지 않고 캡슐을 받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삼키지 않고 물만 조금 마셨다. 승무원은 이제 만족했는지, 화장실로 컵을 가지고 들어갔다. 아담은 다시 입에서 캡슐을 뱉어내었다. "그런데 말이죠?" 아담이 말했다. 이제 발음은 아까보다 많이 정확해져 있었다.


"이건 무슨 약입니까?" "선생님을 안정시켜 드리기 위한 약입니다." 승무원이 기계적인 어저로 대답했다. "이봐요, 난 충분히 안정을 찾은 상태라구요. 배멀미를 좀 해서 탈이긴 하 지만 불안한 상태는 아니란 말입니다. 차라리 내 뱃속을 편하게 할 만한 그 런 약을 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약은 선생님을 안정시킬뿐 아니라 보다 빠른 이해를 돕게 됩니다." "뭘 이해한단 말이오?" 아담이 물었다. "강의 말입니다." 승무원이 문을 닫고 나가며 대답했다. 아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가 몰려왔다. 배멀미가 이렇게 사람 을 무력하게 만드는 줄 몰랐었다. 아담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 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그의 생각은 승무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 맴돌 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로 가면서 아담은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앨런은 아직도 침대 위에 몸을 뻗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앨런." 아담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천히 앨런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열렸 다가는 다시 닫혀버렸다. 아담은 허리를 굽혀 앨런의 눈꺼풀을 열어보았다. 처음에는 흰자위만 보였으나 곧 눈동자가 내려와 초점을 잡기 시작했다. "일어나요." 아담은 이렇게 말하며 앨런의 눈가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 를 잡고 천천히 이르켜 세웠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담이 물었다. "아니오." 앨런은 승무원처럼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요. 더 자게 좀 나둬요." 앨런이 다시 몸을 눕히려 했으나 아담이 그를 제지했다. "말을 좀 해봐요. 당신 이름이 뭐지요?" "앨런 잭슨." "지금 어디에 있습니���?" "아롤렌 선상학회에 참가하고 있지요." 앨런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지금이 몇 월이지요?" "6 월이요." "오른손을 들어봐요." 앨런은 시키는 대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꼭 로보트나 약물에 깊이 취한 환자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며 아담이 본 일이 있는 만발성 운동장해 환 자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 병원에 들어왔을 때 그 환자는 스 물네 시간 잠만 자려 했으며, 깨웠을 때는 앨런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장소


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담은 앨런을 침대에 다시 눕게 했다. 그리고는 잠시 앨런을 바라보다가 밖을 나와버렸다. 문을 닫고 나서 아담은 공포심에 몸을 떨었다. 앨런은 약 에 취해 있었다. 거기에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노란색 캡슐은 일종의 안정제 역할을 하는 게 분명했다. 아담은 승무원 이 자신을 깨웠을 때 느꼈던 노곤한 상태를 기억해보았다. 당시에는 그것을 배멀미 이후의 무력감으로 치부해버렸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약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이 노란 캡슐을 삼킨 일 이 없었고 저녁 때 먹은 것들은 곧장 토해버렸었는데, 어쩌면 물에 문제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담은 화장실로 들어가 컵에 물을 채웠다. 물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에 혀를 대보았다. 화학약품의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염소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배수구에 물을 버리고 나서 아담 은 아침식사를 위해 객실을 나섰다. 식당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실내 한 가운데에는 먹음직스런 메뉴들이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승객들은 한 줄 로 늘어서서 참을성 있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고 아담은 테이블 주위를 서 성이며 네드와 클레어를 찾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뱃속의 상태가 나아졌는지 시장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식욕이 왕성한 데도 불구하고 먹기가 두려운 것이 문제였다. 그는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스크램블한 계란과 베이컨, 소시지, 그리고 대니쉬 치즈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때 다른 메뉴가 아담의 눈길을 끌었다. 한쪽 구석에 과 일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과일이라면 먹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아담은 바나 나 몇 개와 오렌지 두 개, 그리고 그레이프프루트를 집어들고서 그의 자리 로 갔다. 막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네드와 클레어가 나타났고 아담은 그 들을 테이블로 불렀다. 아담은 그들이 음식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지켜보았다. 둘 다 피곤한 인상 이었고 그들이 자리에 앉았을때 보니 음식도 별로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아담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만일 음식과 물에 약이 들어 있었다면 왜 이 두 사람과 다른 의사들은 앨런처럼 나가떨어지지 않은 걸까? 어쩌면 노란 캡슐만이 약효를 내는지도 몰랐다. 두번째로 배를 타는 사람들에게만 약을 먹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캡슐과 음식에 든 약이 함께 섞이면서...... "어젯밤은 정말 굉장하더구만." 네드가 입을 열었다. 아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피곤해요." 클레어가 말했다. "주량 이상으로 술을 마셨나 봐요. 어제는 정말 죽는 것처럼 곯아 떨어졌 어요." 네드가 맞받았다. "어쩌면 바닷바람 때문인지도 몰라." 무심히 해보는 말처럼 보이려 애쓰며, 아담이 물었다. "혹시 배멀미 약이라면서 노란 캡슐을 받은 일이 없나요?"


"난 안 받았는데." 네드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대답했다. 아담은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그건 왜 묻죠?" 클레어가 말했다. "별 일 아녜요. 멀미약을 구할 수 없을까 해서 알아보는 중이랍니다." 아담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그들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만 일 아담이 약에 취한 앨런 이야기를 한다면 네드와 클레어는 그가 미쳤다고 할 것이었다. 둘은 묵묵히 커피만 들이키고 있었다. 분명히 두 사람 모두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담은 매점에 들렀다. 매점에서는 드라마민을 팔고 있었다. 아담은 멀미약을 사고 막 발길을 옮기려 하다가 호세에게 말보로 담배를 사주기로 한 일을 기억해냈다. 객실에 돌아오니 나이트 테이블 위에 물컵과 노란 캡슐이 놓여져 있었다. 그는 물과 캡슐을 변기에 쏟아넣고 물을 내렸다. 오늘의 첫 강의는 대강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컬럼비아대학 교수라 는 그 병라학자는 정말이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강의를 하였다. 몇몇 의사 들은 졸고 있었는데 아담은 그들이 지루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약에 취한 것인지 궁금했다. 두번째 강의는 닥터 고다드가 맡았고 전 강의보다 훨씬 흥미있게 진행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의자에 앉은 채 기지개를 켜올렸다. 고다드는 성인의 몸에 이식된 태아의 조직이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최근 시험결과를 요약해서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의 추측에 의하면 그것은 태아의 조직이 항체 반응을 일으킬 만큼 충분한 항원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태아의 조직은 의료분야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며 특히 당뇨병 환자의 췌장에서 태아의 섬세포(Islet Cell : 췌장에서 인슐린을 분비하는 세포)를 증식시키게 된 것은 혁명적인 성과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아담은 객실로 돌아가 말보로 담배 상자를 들고는 유 보 갑판으로 올라갔다. 아담은 사람들이 모두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 다가 호세를 만났다. 그는 담배를 받아 어깨에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 집 어넣었다. 호세는 약을 먹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담은 호세가 주었던 10 달러짜리 지폐를 도로 건네주었다. 호세는 어리둥절해 하며 지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나 하지요." 아담이 말했다. "담배를 계속 갖다줄 테니 내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시오." 호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쪽 음식이 어때서 그러세요? 꽤 괜찮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 것도 물어보지 말아요. 나도 저렇게 많은 담배로 당신이 뭘 하는지 묻지 않을 테니 내가 음식으로 뭘 하려는지 묻지 마시오." "괜찮은 제안이구만. 그럼 언제 또 만나지요?" "오늘 오후 4 시. 일단 지금 먹을 것을 좀 주시오." 호세는 뒤를 잠시 돌아보더니 아담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했다. 그들은 방 수문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아무도 주위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호세는 아담을 이끌고 배 제일 밑바닥에 위치한 그의 선실로 데리고 갔다. 선실은


마치 감옥 같았다. 샤워기와 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에는 변변한 문 한 짝 안 달려 있었으며 안은 땀과 담배진이 절은 냄새로 꽉 차 있었다. 호세는 편히 쉬라는 아담에게 말하고는 자신이 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방을 나갔다. 아담은 침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곳에 앉았다. 5 분도 안 되어 호세는 음식을 담은 종이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봉지 안에 는 빵과 치즈 그리고 과일과 주스가 들어 있었다. 아담은 봉지를 받아들고 방 구석에 있는 빈 병을 가리키더니 호세에게 먹을 물을 채워 달라고 부탁 했다. "배 안에서 먹는 물은 모두 같은 건가요?" 아담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내가 이 배를 설계한 줄 아시오?" 그는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조심해야 돼요. 우리가 거래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안 좋아할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아담은 객실로 서둘러 돌아가 옷가방을 열고 음식을 감추었다. 그는 주스 병 두 개를 옷장에 집어넣고 더러워진 옷으로 덮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세 번째 강의시간이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강의실로 돌아가싿. 줄리안 클리닉의 진찰대에 몸을 뻗고 누운 제니퍼는 자신의 마음이 무척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양수검사를 다시 받느냐 안 받는냐 를 결정하는 것은 병원에 다시 가는 것에 비해 어려운 일이었다. 닥터 반데 르머는 그날의 첫번째 환자로 제니퍼를 받기로 했었고, 지금 제니퍼와 카슨 부인은 의사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반데르머가 나타났다. 그 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샘플이 뒤섞인 사건은 제니퍼보다 반데르머에게 더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고 말은 중간중 간 자꾸 끊어졌다. 그러나 반데르머가 천자 과정을 진행하는 솜씨는 전보다 더 능란해 보였다. 바늘이 꽂히는 순간, 제니퍼는 뱃속의 아기가 꿈틀거리 는 것을 느꼈다. 제니퍼는 무척 겁에 질렸지만 반데르머가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며 안심시켜주었다. 검사가 다 끝나면 제니퍼는 진찰대 위에 앉은 채 말했다. "결과가 나오는 대로 제게 연락을 주시겠죠?" "물론이죠. 이번에는 검사실에 모든 걸 맡기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마 음 푹 놓으세요.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노력해보지요." 제니퍼는 닥터 반데르머에게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그 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하고 바랬다. 반데르머의 그런 태도 가 오히려 제니퍼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아담은 다시 담배를 10 달러어치 사서 객실로 가져왔다. 다시 방을 나가는 길에, 그는 앨런의 방을 들러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앨런은 방에 없었다. 아담은 앨런이 어딘 가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객 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침에 본 바에 의하면 앨런은 몸을 움직일 만한 상 태가 아니었다. 그동안 좀 상태가 나아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끌고 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 한 일이었다. 어쨌건간에 앨런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담은 먼저 식당에 들러보았다가 유보 갑판으로 올라갔다. 갑판 위의 야 외 그릴에서는 햄버거와 핫도그를 굽고 있었다. 승객 몇 명이 갑판에 놓인 의자에 누워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아담은 빈 강의실과 운동기구실 그리고 선상의 진료실도 들러보았다. 진료실 입구에는 '응급시에는 승무원에게 연 락하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아담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안정을 되찾지 않으면 다른 사라 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식당으로 돌아가 다른 의사들을 관찰해보기로 하였다. 아담의 자리 오른편에는 어제 보았던 그 갈색 머리 무용수가 앉아 있었다. 무용수는 이번에는 정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승객으로만 보 였다. 식당 안을 ㄷ루러보다가, 아담은 다른 무용수들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아담은 옆에 앉은 갈색 머리 무용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는 히더라고 해요." 그녀 역시 이제 아담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무미건조한 말투로 이야 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을 말해주지 않았다. 테이블의 다른 손님들은 그저 먹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향긋한 냄새 를 풍기는 고기 수프가 아담의 앞에 놓여졌다. 아담이 조금 먹는 척하는 동 안 히더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담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별로 많이 드시지 않는군요." 음식으로 장난만 치고 있던 아담이 대답했다. "배멀미 때문이에요." "그래도 먹어야 해요. 이상하게도 뱃속이 비면 더 멀미가 심해지거든요." "그런가요?" 아담이 회피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아담이 다 시 말을 덧붙였다. "당신도 별로 먹지 않고 있는데요." 히더가 날카롭고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용수 생활을 하려면 어쩔 수 없죠. 항상 몸무게에 신경을 써야 하니까 요."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수들이 몸무게에 죽고 살고 한다는 사실은 이미 제니퍼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늘밤 당신 방에 찾아가도 될까요?" 히더는 마치 날씨를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담은 식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이 닿애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랬다면 입에 있던 음식이 다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는 몇 번 기침을 한 뒤 주위에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은 정신없 이 식사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담은 다시 히더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하는 투가 이상하긴 했지만 약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담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통해서 이 이상한 곳에 대


한 몇 가지 의문을 풀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공연이 끝나는 대로 방으로 와요." 아담이 속삭였다. "11 시에 찾아갈게요." 아담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다행히도, 다른 승객들은 그들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담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담은 객실로 돌아와 호세가 마련해준 빵과 치즈를 급하게 먹어치웠다. 오후 강의시간에는 빈 자리가 많이 늘어나 있었다. 앨런은 여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지만 네드와 클레어는 강의실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아 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앨런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진 정제를 조금밖에 투여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번째 강의가 무렵에는 청중 들의 반 이상이 자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것은 강의가 지루해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4 시가 되어 아담은 호세를 만나러 위로 올라갔다. 어쩌면 그 선원이라면 앨런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얘기 좀 합시다." 아담이 말했다. "문제가 있수?" "별것 아니고, 몇 가지 물어보려고 그래요." 호세는 아담을 선실로 데리고 들어간 다음 문을 닫았다. 그는 캐비닛에서 잔 두 개와 럼주 한 병을 꺼내었다. 아담은 사양했으나 호세는 두 잔에 모 두 럼주를 따랐다. "자, 무슨 일이오?" 호세가 물었다. "이 배 안을 다 돌아본 적이 있소?" 호세가 술을 한번에 털어넣고는 대답했다. "아뇨." 그는 손등으로 입을 쓱 닦고 말을 계속했다. "다 보지는 못했지. 그 흰 유니폼을 입은 놈들이 사는 곳엔 가질 못하니 까." "그 사람들도 이곳에서 같이 생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담이 말했다. "무슨 소리. 제 정신이요? 그 이상한 놈들과는 서로 얼굴도 못 보고 살아 요. 선실이 갑판에 따로 있거든요." 호세가 두번째 잔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정말 마실 생각 없소?" 아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승무원들의 숙소로 가는 계단은 주방 안에 있소." 호세는 이렇게 말하고 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먹을 걸 찾아서 그곳에 간 일이 있어쓴데 그 때 알았소. 붙잡혀서 하마터면 배에서 쫓겨날 뻔했지요. 그런데 그 녀석들 에 대해서 왜 물어보는 거요?" "내 옆방에 머무르던 승객 하나가 사라져버렸소. 무척 몸이 안 좋은 상태 였는데 감쪽같이 없어진 거요."


"의무실에 확인해보았소?" 호세가 물었다. "선원 하나가 잘 차려진 벼원에 있다고 하던데. 장비 나르는 걸 도와주다 가 보았다고 하더구만." "그게 어디에 있나요?" "B 갑판에요. 진료실 뒤쪽에 있지요." 아담은 호세가 준비해둔 봉지를 집어들었다. 그곳에서라면 앨런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담배는 더 갖다 주는 거겠지요?" 호세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좋소. 잠깐 복도를 확인합시다." 호세는 빈 잔을 내려놓고 문을 열어보았다. "하나만 더 물읍시다. 무용수에 대해서는 뭐 아는 게 있소?" 호세가 씨익 웃으며 아담을 돌아보았다. "내가 관심있는 부분만큼은 알고 있지요." "그 여자들, 창녀들이오?" 히더가 찾아오기 전에 그 정도 사실은 알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호세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아르바이트하는 여대생들이오. 질문이 참 이상하구만." "그 여자들과 만나본 일이 있소?" "그러면 얼마나 좋겠소." 호세가 대답했다. "이것 봐요. 우린 절대로 배 저쪽의 정신병자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돼 있어요. 그렇지만 1 년쯤 전에 푸에르토리코 해변에서 하나를 만난 일이 있 지. 내가 수작을 거니까 전혀 관심이 없어 하더라고요. 그때는 되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년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그 여자가 가발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가발이 벗겨지고 머리가 다 밀려 있었는데, 관자놀 이 양쪽에 무슨 커다란 흉터가 있더라구요. 아무튼 정말 이상한 일이었소."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담이 물었다. "나도 몰라요. 결국 그 여자를 붙잡을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흥미를 잃어 버렸지." "이상한 일이네요." 아담이 봉투를 집어올리며 말했다. "왜 그러슈? 유람선 생활이 즐겁지 않아요?" 전화벨이 울렸다. 제니퍼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반데르머의 전화라고 느꼈 다. 아래층에서 카슨 부인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한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니퍼는 어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아래 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부엌에 도착했을 때 카슨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수 화기만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제니퍼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안녕, 제니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닥터 반데르머가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제니퍼도 눈치챌 수 있었다. "양수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검사과정을 감독했습니다. 검사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전과 마찬가지 로 염색체에 심각한 이상이 발견되었어요. 제니퍼, 표본은 바뀐 일이 없었 습니다. 아기는 다운증후군에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생식기관이 기형적으로 발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정말 끔찍해요." 제니퍼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자, 이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는 게 좋아요." "옳은 말씀이에요.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 수술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아요. 빠를수록 좋겠지요." "그러시다면 바로 내일로 수술시간을 잡아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제니퍼는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카슨 부인이 제니퍼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네 기분이 어떨지 잘 안다. 하지만 옳은 선택을 한 거야." "저도 잘 알아요. 아담에게 소식을 전해야겠어요." 카슨 부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엄마. 그 사람은 내 남편이라구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런 일을 혼자 결 정지을 순 없어요." "그래, 얘야. 네 생각이 옳다." 카슨 부인은 부엌을 나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전화로 카슨 씨에게 아 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으려는 게 뻔했다. 카슨 부인이 사라지자, 제니퍼는 아담이 돌아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파 트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신호가 스무 번이 넘게 가도록 아무도 전화를 받 지 않았다. 제니퍼는 전화번호 안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롤렌 제약회사의 번 호를 확인했다. 아롤렌의 교환수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클레런스 맥가이 어를 대 달라고 요청했다. 한참을 맥가이어의 비서와 말싸움을 벌인 후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숀버그 부인." 맥가이어가 말했다. "별로 안녕하지 못합니다." 제니퍼가 차갑게 대답했다. "제 남편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군요." "죄송합니다만 저도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숀버그 씨는 제게 전 화를 걸어서 집안 문제로 잠시 여기를 떠나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제게 거짓말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전 당신들이 아담을 푸에르토리코로 보낸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숀버그 씨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희가 부인께 진실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제니퍼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아담이 아롤렌 사에서 보내는 출장을 떠나면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다른 일이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아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아담을 찾고 있는 중인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실까 해서요." "난 전혀 모르는 얘기야. 누구보다도 제니퍼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닥터 숀버그가 대답했다. 제니퍼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어머니가 부엌으로 돌아왔다. 제니퍼가 맥가이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카슨 부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그분은 아담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줄로 알고 계셔." 아담은 6 시쯤에 노란 캡슐을 또 받았었다. 아담이 식당에 앉아 있는 동안 승무원들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고의로 먹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아담은 음식을 냅킨에 싸서 감추기로 했다. 그는 적당한 때 눈치를 보아 식당을 빠져나온 후, 객실로 돌아가는 길에 의 무실을 들러보았다. 그곳에는 장비를 완전히 갖춘 수술실과 방사선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담은 앨런의 방에 다시 들렀다. 놀랍게도, 앨런은 사라지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담은 그를 깨웠고 앨런은 자기가 방에서 나 간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아담은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자 기 방으로 돌아갔다. 반데르머가 프레그돌렌을 처방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배에 오른 것은 잘한 알이었다. 자신은 지금 뉴욕 시 전체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있 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담이 원하는 것은 안전하게 제니퍼의 곁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아담은 누군가가 의사들을 유람선에 보내는 이유는 그들을 일상생활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준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의사들에게 약을 먹여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한도를 넘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끔찍 한 일이었다. 노크 소리가 났고 아담의 맥박이 갑자기 빨라졌다. 아담은 문 밖의 사람이 캡슐을 들고 온 승무원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맙소사." 찾아온 사람은 바로 히더였다. "마지막 공연에서 배주더군요. 정말 잘됐지 뭐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선상을 둘러보았다. 히더는 속이 환히 비치는 블라 우스를 입고 있었고 미니 스커트는 아담이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짧 아 보였다. 그녀는 정말 멋진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담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몸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제니퍼에 게 돌아가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줄 것인가?


"히더, 어서 앉아요. 우리 이야기나 합시다." 방 안을 춤추듯이 돌아다니던 히더가 멈추어 서고는, "좋아요." 라고 대답하며 아담의 옆에 앉더니 훤히 들어난 허벅지를 아담의 다리에 바짝 붙였다. 그녀는 앙중맞은 동작으로 신고 있던 하이 힐을 공중에 날려 보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당신에 대해서." 아담이 대답했다. 풍만한 가슴이 만들어내는 곡선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전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히더가 아담의 목에 팔을 감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에도 그렇게 말했었죠." 아담이 점잖게 히더를 밀어내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정말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아요." "들려줄 만한 게 별로 없는데요." "이봐요, 이런 일이 젊은 아가씨가 흔히 하는 그런 일은 아니잖소. 어떻게 이런 곳에 오게 되었어요?" 히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 아담은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긴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명상에라도 잠긴 듯한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 다. "히더?" 아담이 그녀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네." 히더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지금 내가 묻고 있잖아요." "아, 그래요. 내가 어떻게 피요르드 호에서 일하게 되었다고요? 그게, 얘 기하자면 길어요. 처음에 저는 뉴어지에 있는 아롤렌 제약에서 비서로 일하 고 있었는데, 그곳 간부들이 저를 마음에 들어했나 봐요. 곧 전 푸에르토리 코에 있는 MTIC 로 옮기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요. 그래서 그곳에서 비서 생활을 한동한 했는데, 그곳 사람들이 내가 춤을 좋아한다는 걸 알아내고 여기로 옮겨준 거예요." 그것으로 무용수 생활에 대한 설명은 되었지만 매춘을 하는 이유로는 부족 했다. 어쩌면 히더는 창녀가 아닌지도 몰랐다. 그저 그렇다고 단정할 만큼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유람선 생활이 즐거우신가요?" 히더가 주제를 바꾸며 물었다.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제가 더 멋지게 해드릴게요. 그보다 먼저 드릴 선물이 있어요." "정말이요?" 아담이 물었다. "기다려봐요." 히더는 책상 위에 던져둔 손가방을 가지러 갔다. 돌아섰을 때, 그녀의 손 에는 노란 캡슐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아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벽장에서 주스를 좀 꺼내주겠어요. 물은 좀 맛이 이상해서." 아담이 말했다. "그러죠." 히더는 책상 위에 약을 내려놓고 주스를 가져왔다. 병 뚜껑을 열고 주스를 아담에게 내밀었다. 아담은 히더가 주스를 도로 가져다 놓는 동안 손에 쥐 고 있던 캡슐을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자 이제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갖게 해드릴게요." 그녀가 아담의 무릎 위에 앉으며 말했다. "기다려봐요." 아담이 그녀의 입술을 피하며 말했다. "아까 준 캡슐은 무슨 약이죠?" "당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거예요. 그걸 먹으면 긴장이 풀리고 걱정거리 를 잊게 되지요." "당신도 그걸 먹나요?" 아담이 물었다. "아뇨." 히더가 높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난 걱정거리가 없는걸요." "왜 난 걱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사들은 다 걱정이 많지요." 히더가 대답했다. "의사들은 이런 식으로 찾아다니나요? 당신 말고 다른 무용수들도?" "아뇨. 파웰 씨와 고다드 씨가 가라고 시킨 사람만요." "그들이 나에게 가라고 하던가요?" 히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 줄 알아요?" "당신이 유난히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히더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제가 싫으세요?" "천만에요." 아담은 이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러는 동안 그 의 손은 히더의 머리를 더듬고 있었다. 히더는 가발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관자놀이 부분에 가 닿았을 때 뭔가 볼록 튀어나온 것이 느껴졌다. "히더, 한 가지 물어볼게요. 이건 흉터인가요?" "흉터 같은 건 없는데." 히더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말예요?" "관자놀이 근처에." 아담은 그녀의 머리를 돌린 다음 머리카락을 갈라보았다. 호세가 말한대로 1 센티미터 정도의 길이로 흉터가 여러 개 보였다. 히더가 손을 올려 그곳을 만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아담이 물었다.


"몰라요. 아무튼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당신을 즐겁게 못해줘서 미안해요. 긴장이 너무 풀려버려서 그런가 봐요. " 히더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캡슐을 좀 늦게 드릴 걸 그랬나봐요." "내가 걱정이 없어졌다고 하면 파웰 씨가 기뻐할까요?" 아담이 물었다. 히더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져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긴장이 풀리게 되는 게 파웰 씨와 무슨 상관이 있지요?" "그래야 당신을 교육실로 데려갈 수 있거든요." 히더가 대답했다. 아담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히더가 그의 눈길을 의식하고는 재빠르 게 물었다. "긴장이 너무풀렸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래요. 그 교육실이란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물론이지요. 안 그래도 당신을 그곳으로 지금 데려가려는 참이에요. 준비 가 다 되었다면 말이에요." "이렇게 긴장이 풀려보기는 처음이에요." 아담이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지금 날 데리고 가지 않겠어요?" 히더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아까 그 명상 상태에 잠긴 것 같았 다. 몇 분 후에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약을 한 알만 더 드시고 나면 제가 교육실로 모셔다 드릴게요. 당신이 잠 이 든 걸 확인한 다음이라야 해요." 히더를 속이기는 신기할 정도로 쉬었다. 승무원과 마찬가지로 히더는 아담 에게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아담은 몸을 뒤로 눕히며 눈 을 감았다. 10 분 정도가 지나자 히더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문 밖으로 인도 했다. 그들은 중앙계단을 통해 주 갑판으로 올라간 다음 식당으로 향했다. 연단 옆에 난 문을 통과하자 테이블보와 접시들, 그리고 쟁반들이 쌓여 있 는 것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또 다른 문이 나 있었고 문으로부터 난 계단은 배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곳이 갑판임에 분명했다. 그들이 내려가는 동안 승무원은 몇 명이 그들의 옆을 지나쳤다. 아담은 그 들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겉으로만 약에 ���한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게 되면 큰일이었다. 계단 밑에 도착한 그들은 긴 복도를 지나 문 앞에 도착했다. "스튜어트 스마이스 씨예요. 두번째예요." 히더가 문을 지키고 있던 승무원에게 말했다. "47 번 자리로 가요." 승무원은 이렇게 말하며 크레디트 카드 같이 생긴 물건을 히더에게 넘겨주 었다. 그녀와 아담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의 눈이 어둠에 적응되어 가면서 극장과 흡사하게 설계된 실내의 모습 이 드러났다. 가슴 정도 높이의 벽 너머로 영화 스크린이 보였다. 스크린 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지만 어렴풋이 명멸하는 빛 속 에서 의사들의 모습이 잠깐 보인 것 같았다.


승무원 하나가 히더에게서 카드를 받아들더니 아무 말 없이 아담의 팔을 잡고 극장 안으로 끌고 갔다. 안은 무척 어두웠지만 좌석이 보통 극장의 것 들과 매우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개의 전극과 가죽 띠가 달린 의자는 조그마한 전기 의자를 연상하게 했다. 각 줄에는 열다섯 개에 서 수무 개 정도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앞뒤로 스무 줄이 넘어 보였다. 아담의 팔을 이상하리만치 세게 틀어잡은 채, 승무원은 아담을 끌고 중앙 복도를 걸어갔다. 의사들은 모두 벌거벗겨진 채 가죽 끈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헬멧에는 이어폰과 자극을 위한 전극이 달려 있 었다. 모두가 앨런처럼 약에 깊이 취해 있었으며 꿈과 생시를 왔다갔다 하 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전선들이 그들의 몸 위에 치렁치렁 얽혀서 각 신경부위와 바늘 모양의 전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승무원은 제일 앞 줄의 빈 의자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의자 옆 부분에 카드를 밀어넣고 전선을 손보기 시작했다. 아담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가운데 떨어진 것 같은 기 분이었다. 그는 앞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으로 눈길을 돌렸다. 스크린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건네주고 있었다. 약의 이름이 스크린에 비추어지는 순간, 의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약을 떨어뜨렸다. 때맞추어 관객석에서 는 기묘한 신음 소리가 났다. 스크린의 의사는 다시 아롤렌 사 제품에 손을 가져가더니 커다랗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담은 그의 옆 자리에 앉은 의 사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무원이 가죽 끈을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담은 자신이 역조건과 긍정적 암시를 이용한 최신 마인드 커트롤 기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따라, 의사들의 얼굴은 고통 으로 일그러지기도 하고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지금 의사를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반데르머가 프레그돌렌에 대한 생각을 바꾼 이유는 이제 분명히 밝혀 졌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사람이 제니퍼와 아기의 생명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승무원이 아담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승무원의 손가락이 가슴에 닿자 아담은 자신 역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방관자의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담에게도 전선을 달고 똑같은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서투른 솜씨로 단추를 끄르고 있는 승무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들 역시 심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약에 취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모든 승무원들이 약을 먹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개중에는 히더처럼 정신과 적 수수를 받은 이들도 있으리라. 불필요한 외과 수술을 비난하는 장면이 스크린에 비추어지고 있었다. 분명 히, MTIC 는 의사들이 아롤렌 제품을 사용하도록 세뇌시키는 이상의 무언가 를 꾸미고 있었다. 승무원은 셔츠의 단추를 다 풀고 나서 벨트에 매달려 낑낑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요?" 더이상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던 아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교육 과정을 돕고 있습니다." 승무원이 아담이 갑작스런 질문에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오?" 아담은 승무원의 손목을 잡았다. 천천히 그러나 엄청난 힘으로 승무원은 자기 손목을 잡은 아담의 손을 떼 어냈다. 그가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정말로 놀라운 힘이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승무원이 말했다. 그는 헬멧을 들어 아담의 머리에 씌우려 했다. 아담은 헬멧을 잡아채 승무원의 머리에 처박았다. 그리고 전선들을 움켜쥐 어 그의 목에 감고는 바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승무원이 소리를 지 르거나 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아담이 중앙 복도를 달려가는 동안, 의사들은 또다시 고통에 찬 신음 소리 를 내질렀다. 아담의 등골이 다시 한번 오싹해져 왔다. 그는 문을 향해 내 달아 있는 힘을 다해 복도로 뛰어나갔다. 문을 지키던 승무원이 아담이 자 기 옆에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담은 주 갑판으로 오르는 계단을 뛰어오르다가 발을 헛디더 넘어질 뻔했 다. 아래로 내려오던 승무원 하나가 아담에게 손을 뻗어 도우려 했다. 그 승무원은 아담을 저지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식당에 도착한 아담은 위쪽으로 도망치는 게 옳은지 망설였다. 그러나 아 래쪽으로 가면 폐쇠공포증이 생길 것같아 위쪽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강의실을 막 달려가고 있는데 벨 소리가 계속 울리며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 러나왔다. "승무원에게 알림. 승객 스마이스 씨가 발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발견하 여 제지시키도록 할 것." 계단 꼭대기에 올라선 아담은 공포에 휩싸인 채 숨을 장소를 생각하기 시 작했다. 락커나 벽장 같은 곳은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볼 장소일 것이다. 게다가 발견되고 나면 더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가 유보 갑판에 올라섰다. 아래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수영장 옆을 지나쳐 계속 달렸다. 갑자기 거대한 흰 굴뚝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가까운 곳에 철제 사다리가 보였다. 미처 생각 해볼 겨를도 없어, 아담은 사다리를 움켜잡고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위로 오를수록 바람이 강해지면서 풀에헤쳐진 가슴을 때려왔다. 오십 피트 정도 올라갔을 때 그를 쫓는 사람들의 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가 달 라붙은 흰 벽에 서치라이트가 비쳐지는 상상을 하며 아담은 공포에 질려 눈 을 꼭 감아버렸다. 몇 초가 그렇게 지났지만 아래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담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승무원들은 구명선을 덮은 캔버스 천을 들추어보거나 락커를 열어보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직 그 들은 아담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까마득히 떨어진 갑판을 내려다보던 아담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쪽으로 고갤르 돌린다고 더 나을 것도 없었다. 별들이 밤 하늘을 배경으로 좌우로 어지럽 게 흔들려 보였다. 몇 분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매달려 있던 아담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굴뚝 바로 아래에서 승무원들이 떼지어 모여다니고 있었다. 아담은 다


시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기까지는 25 피트 가량의 거리가 남아 있 었다. 굴뚝의 정상 바로 아래에 양쪽 방햐으로 뚫린,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보였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두려움을 무릅 쓴 채 사다리를 계속 올라가 구멍 앞에 도착했다. 구멍 안에는 철제 그물이 바닥에 쳐져 있었다. 더이상 노출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구멍의 가장자리를 움켜잡 고 다리를 들어 사다리를 넘었다. 사디리와 구멍 사이에 매달린 아담은 정 신이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사다리에서 발을 풀고 구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겨우 몸의 균형을 되찾은 아담은 굴뚝 안에 난 좁은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 했다. 이 공간이 무슨 목적으로 마련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아무튼 그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아무도 이제 자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훨 씬 안정이 되었다. 아담은 다음 행동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고통스럽게 신 음을 해대던 의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제 그는 반데 르머와 폴리가 어떤 고난을 겪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담의 생각이 태아학에 대한 아롤렌 사의 관심을 반영한 닥터 고다드의 강의에 미치자 아롤렌은 점점 더 많은 태아조직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줄리안 클리닉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양수검사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이쓴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었다. 제니퍼의 검사 표본이 바뀐 것도 어쩌면 사고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담의 머리에서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만일 그가 뉴욕에 돌아가기 전에 제니퍼가 양수검사 를 다시 받게 된다면! 아담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까 계속 갑판 위를 달려갔다 면 선원들이 있는 구역으로 들어가 무전기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냐,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다시 갑판으로 내려가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굴뚝 바깥쪽에서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조심스럽게 구멍 가장자리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사다리 중 간쯤 되는 곳에서 승무원 한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담은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제 꼼짝없이 잡힌 신세였다. 승무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고 손 하나가 구멍 입구를 움켜잡았다. 곧 이어 승무원이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들어왔다. 아담은 승무원의 실루 엣이 와전히 드러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가 몸의 균형을 잡으며 팔 을 벽에서 떼어낼 때, 아담은 빠른 속도로 달려가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들고 굴뚝의 철판에다 부딪쳤다. 승무원이 뒤로 자빠지며 바깥으로 떨어 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담은 그의 자켓을 휘어잡았다. 그리고는 승무원의 몸을 당겨 좁은 통로 안으로 쓰러뜨렸다. 아담은 허리를 굽혀 승무원의 머 리를 살펴보았다. 피는 흐르지 않고 있었다. 승무원은 앉은 자세로 벽에 기대게 한 다음, 셔츠와 흰 자켓을 벗겼다. 나 비 넥타이는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벗기기가 아주 쉬었다. 아담 은 몸을 일으켜 승무원에게서 벗긴 옷을 몸에 걸쳤다. 아담은 굴뚝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승무원이 정신을 다시 차리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만 했 다. 선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로 보였다. 그가 사다리를 반쯤 내려갔을 때 아래쪽의 갑판에 승무원들이 다시 나타났 다. 이제 묵묵히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아담은 갑판에 내


려서서 넥타이를 고쳐 매고 옷매무새를 만진 다음 걸음을 옮겼다. 계단 앞 에서 락커를 점검하고 있는 한 승무원의 옆을 지나치며 그는 뛰고 싶은 욕 망을 가까스로 참았다. 다행히 계단 아래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승 무원들은 다른 곳으로 흩어져서 그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담은 우현쪽 갑판으로 계속 걸어갔다. 장애물로 막힌 곳을 통과하고 나자 자신의 가정이 여기서는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옷을 벗어 배 밖으로 던져버 렸다. 아담은 이전에 호세를 따라 지나갔던 문을 다시 통과했다. 침침한 전구들 이 복도의 벽에 기괴한 그림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복도 맨 끝에서 목 소리와 함께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선원들의 식당 이 그 쪽에 위치한 모양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쇠로 된 바닥을 발끝으로 걸어가던 아담은 호세의 방 앞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문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간 후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다. 벽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으나 스위치를 찾 지 못했다. 방의 모습을 기억해내고자 애쓰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침대 머리맡의 벽에 램프 하나가 달려 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때 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뻗어나와 그의 목을 쥐었다. "호세!" 손이 목을 눌러 기도를 막아버리기 전에 아담이 가까스로 그를 불렀다. 아 담이 막 정신을 잃어버릴 무렵 목을 누르던 손의 힘이 풀려나갔다. 딸깍 하 는 소리와 함께 방의 불이 들어왔다. 호세가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죽고 싶소?" 호세가 침대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길래." 아담이 목을 문지르며 가까스로 말했다. "난 자고 있었단 말이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워낙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 아르바이트 여대생이 들러붙던가요?" 호세가 빈정거렸다. "여대생이 아니라 흰 자켓을 입은 정신병자들이 그랬지요." "왜? 당신에게 뭘 원하는데?" "내가 말해줘도 믿지 않을 거요. 당신에게 돈 벌 기회를 주지요. 어때요, 관심있어요?" "돈이야 언제나 관심이 있지. 무슨 일인데 그래요?" 호세가 물었다. "배가 세인트 토마스에는 언제 도착합니까?" "지금 몇 시요?" 아담이 시계를 들여다보고 대답했다. "한 시 반이요." "그럼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있어야 해요." "좋아요. 항구에 들어갈 때까지 나를 여기에 숨겨주시오. 그리고 배에서 몰래 빠져나가도록 해주시오."


호세가 손등으로 그의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돈을 얼마나 준다는 거요?" 아담은 지갑을 열고 돈을 세기 시작했다. 모두 합쳐서 3 백 달러였다. "택시비만 남기고 275 달러를 주겠소." 호세의 눈꼬리가 채켜 올라갔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보장 못해요. 노력은 해보겠소만, 만일 당신이 잡히 게 된다면 난 아무 관계도 없었던 걸로 해야 하오." 아담이 백 달러를 호세에게 넘겨주었다. "뭍에 도착하면 나머지를 주기로 하겠소." 호세는 동의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락커로 다가갔다. 그는 기름때가 묻은 카키 바지와 허름한 플란넬 셔츠를 꺼내어 아담에게 던져주 었다. "이걸 입고 선원 행세를 해야 해요. 저쪽 승무원들을 나만큼이나 싫어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있는데 그들이 도움을 줄 거요. 여기서 기다려요.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아담은 그의 도움에 감사한다는 말을 했으나 호세는 말을 가로막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돈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바지를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담은 옷을 갈아입고, 벗은 옷은 락커 뒤쪽에 숨겨놓았다. 그는 개수대 위에 걸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끔찍했다. 하지만 수 염이 빨리 자란다는 사실만큼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아담의 모습은 이제 더이상 승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문이 다시 열렸고 아담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호세 였다. "다음부터는 제발 노크 좀 하시오." "이봐요, 여긴 내 방이오." 호세가 짜증을 내었다. 그가 침대에 몸을 눕히며 말을 이었다. "내 친구들에게 당신이 배에서 내리고 싶어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소. 나 가는 길을 하나 알고 있더구만. 전에 세인트 토마스에 있을 적에 선장의 명 령을 어기고 내린 일이 있대요. 그런데 문제는 돈을 전부 선금으로 주어야 한다는 거요. 다른 두 녀석들에게도 좀 쥐어줘야 하니까." 아담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잘 들으시오." 호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제안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여기서 나가면 되는 거요." 아담은 아무런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호세가 원 하기만 한다면 그의 돈을 완력으로 빼앗을 수도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아 담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끄집어냈다. 25 달러짜리 지폐를 남긴 채 나머지 돈 을 호세에게 넘겨주었다. "내게 무슨 호의나 베풀고 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나 본데, 한 가지는 분명 히 알아두시오. 이까짓 돈이 탐나서 우리 목을 걸고 이런 짓을 하겠소? 그 흰 옷 입은 자식들을 워낙 미워하기 때문에 당신을 돕기로 한 거요." "잘 알겠소." 아담은 호세가 정말로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줄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따져보았다.


"밤 동안 이곳에 계속 숨어 계슈. 아침에 항구에 들어가고 나면 내가 와서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 알겠소?" 아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계획이 어떤 건지 가르쳐줄 수 없겠소?" 호세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알려 드리리다. 그저 편히 쉬면서 아무 걱정 말고 있어요." 문이 닫힐 때까지 계속 호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척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는 너무 긴장해 있어서 잠을 자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잠시 후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 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큰 고함 소리가 복도를 울리 며 아담을 깨웠다. 아담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당장 분별해낼 수가 있었다. "이 구역에서는 내가 책임자요. 아무도 내 허락 없이는 이곳을 뒤지지 못 합니다." 그것은 선장의 목소리였다. 더 낮게 깔린 목소리가 대답을 했다. "내가 바로 피요르드 호의 책임자요. 어서 비켜주시오." 그것은 레이몬드 파웰 같아 보였다. 또 다른 사람들이 고함을 쳐대기 시작했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세게 닫히 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에 질린 채, 아담은 숨을 곳을 찾아 좁은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숨 을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락커 역시 그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 다.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아 떠올랐다. 그는 머리카락을 이마 앞으로 내려 뜨리고 기름때가 묻은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변기로 가 앉 았다. 변기 옆에는 펜트하우스 지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고 무 릎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방문에 열쇠가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문이 활짝 열렸다. 아담은 고개를 들었다. 승무원이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뒤에 파웰이 서 있 었다. 바깥에서는 노드스트롬 선장이 아직도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 다. 파웰은 아담을 역겹다는 듯이 힐끔 쳐다보고는 떠나버렸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잠시 동안 아담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색자들의 무리가 복도 저쪽으로 사라져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변기에서 일어나 바지를 올렸다. 펜트하 우스 지를 침대로 가져가 보려 했으나 승무원들이 다시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잠이 들었고 배가 도 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커다란 충격음에 잠을 깼다. 시간은 5 시 15 분이었다. 그때부터 한 시간 15 분 동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이었다. 사람들이 종종 그가 있는 방 앞을 지나쳤고 아담은 그들이 방에 들 어올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졸였다. 6 시 반이 되어서야 호세가 돌아왔다. "준비가 다 되었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락커에서 럼주병을 꺼내었다. "먼저, 술을 한 잔 해야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그래요." 호세가 아담에게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이 나라면 받겠소." 아담은 잔을 기울여 조금 홀짝여보았다. 술은 무척 독하고 썼다. 아담은 고개를 흔들며 잔을 호세에게 돌려주었다. 상관없다는 듯이, 호세는 잔을 한 입에 비워버렸다. 병을 다시 락커에 집어넣으며 호세가 손을 비볐다. "만일 누가 이름을 물으면 엔젤이라고 하시오. 하지만 별로 말을 할 일이 없을 거요." 호세는 문을 열고 아담에게 따라오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4 밤잠을 설친 제니퍼가 부엌에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시간은 7 시 45 분이었다. 그녀는 부모님들이 아직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서둘러 전 화를 받았다. 그러나 벌써 카슨 부인이 수화기를 든 뒤였다. "제가 받을게요, 엄마." 닥터 반데르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제니퍼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니퍼." 반데르머가 말했다. "3 시 반에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너무 시간을 늦게 잡아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워낙 일정이 빡빡해서요. 지금부터 물만 마시세 요. 저녁 때면 다 끝나서 저녁식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제니퍼가 시들하게 대답하고 나서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입원하게 되지요?" "오늘 하루만 계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이곳에 오시고 나면 설명드리도록 하지요." "언제까지 병원에 도착해야 하나요?" "오늘 앛미에 먼저 들러보시는 게 어때요? 입원수속을 일단 마쳐야 하니까 요. 그리고 스케줄이 비게 되면 시간을 앞으로 당길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 튼 마음 푹 놓으시고 구체적인 문제들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니퍼는 커피를 한잔 끓여서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잠시 마음을 잡지 못 하고 갈팡질팡했으나 이내 자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 었다. 닥터 반데르머와 부모들 역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들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아담이 옆에 있으면서 자신의 결정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


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아담은 주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호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복도를 지나 식당 앞을 통과한 후 좁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앞을 지나가는 선원들은 아담에게서 별다른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아담에게는 등골이 오싹해져 오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보고 소리를 쳐댈 것만 같았다. 제일 아래층까지 내려간 그들은, 파이프들이 엉킨 채 니젤유 냄새를 뿜어 내는 좁은 복도를 따라 고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기계들로 가득 찬 기 관실처럼 보이는 방 하나를 지나쳤다. 몇몇 사내들이 웃통을 벗어제낀 채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땀에 절어 번들거리고 있었고 방에서 나오는 소음은 귀를 먹게 할 정도로 요란했다. 아담과 호세 앞에 바퀴가 달린 철제 스레기통들로 빼곡히 들어찬 넓다란 방이 나타났다. 쓰레기통에 들어찬 오물들로부터 악취가 풍겨나오고 있었 다. 호세는 안으로 들어가 아담을 한쪽 구석으로 안내했다. 두 사내가 블랙 잭 게임을 하며 앉아 있었다. 호세가 다가가자, 몸집이 큰 사내가 한번 올 려다보더니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좀 괜찮은 패로 하나 줘봐." 몸집이 큰 사내가 말했다. 호세는 테이블 옆에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사내들의 뒤로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밖으 로는 부산한 항구의 모습이 보였다. 따가운 햇살이, 마치 지옥으로 내리비 치는 천상의 빛인 양 실내를 감추고 있었다. "할렐루야." 아담은 열대의 햇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면서 입구 쪽으로 걸 어갔다. 이제 뭍이, 그리고 자유가 바로 저 앞에 있다. 그러나 그곳으로 어 떻게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담으로서는 아직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담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바깥의 선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흥 분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어 버렸다. 바로 오른쪽에 내려진 승선대 입구에는 흰 자켓을 걸친 승무원 두 명이 지키고 선 채 아무도 배에서 내리지 못하도 록 감시하고 있었다. "호세, 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소." 아담이 말했다. 호세는 카드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대 답했다. "가만히 기다려봐요." 아담은 그대로 가만히 선 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호세, 내가 저곳을 통해서 그냥 내려주길 바라는 거요?" "아니요, 좀더 기다려보슈." "도대체 계획이란 게 어떤 거요?" 호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담은 다시 뻥 뚫린 구멍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항구 뒤쪽으로 완만하게 솟은 푸른 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덕 위에 는 조그마한 오두막집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가 호세에게 다시 질문을 던 지려는 순간, 청소 트럭들이 위로 뻗은 배기관을 통해 디젤 연기를 내뿜으 며 줄지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트럭들은 배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잠시 후 경적소리가 부두에 울려퍼졌다. 카드 게임을 즐기던 사내들은 욕을 내밷으며 카드를 집어던지고는 쓰레기 통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사내가 쓰레기통을 밀고 작달막한 사내는 앞에서 당기었다. 쓰레기통은 경사로를 굴러가 제일 앞에 선 트럭 앞에 멈추어 섰 다. 사내들이 다른 것을 가지러 돌아간 동안, 트럭도 일을 시작했다. 커다 란 수압식 기중기가 뻗어나오더니 쓰레기 통을 잡고 운전석 위를 넘기어 뒤 쪽으로 쓰레기를 쏟아부었다. 쓰레기통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철로 된 빗장을 달아두었기 때문에 작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 다. 쓰레기통이 다시 제자리에 던져질 때쯤 해서 호세와 다른 사내들은 또 다른 쓰레기통을 부드 쪽으로 굴려보냈다. 그렇게 몇 개가 실려 나간 뒤에 호세가 아담을 향해 소리쳤다. "자, 이리로 와요." 아담은 그를 따라 쓰레기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 쓰레기들과 함께 나가는 거요." 세 사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안으로 들어가란 말이오?" 아담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말다툼할 시간이 없어요. 이 짐만 실으면 첫번째 트럭이 떠나게 된다구 요." "이것 말고는 배에서 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없어요." 다른 사내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걸 이용한 일이 한번 잇었지. 시내를 둘러보기에 그리 좋은 방법 은 아니지만, 적어도 붐비지는 않지." "트럭이 어디로 가게 됩니까?" "공항에서 가까운 하치장으로 가게 되지요." "맙소사." 아담이 말했다. "왜 이 음식찌꺼기들과 함께 나가게 된다는 걸 진작 알려주지 않은 거요?" "이건 음식찌꺼기가 아니오." 사내가 다시 대답했다. "그런 건 바다에 버린다구요. 이건 보통 쓰레기일 뿐이오." 트럭 쪽에서 다시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서 서둘러요. 내 선실에서 더이상 어물쩡거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요. 여기 발을 올리슈." 호세는 손으로 아담의 발을 받쳤고 큰 몸집의 사내가 쓰레기통의 빗장을 열었다. 재빠른 동작으로 호세는 아담을 던져올렸다. 아담은 상자와 종이, 그리고 다른 여러 쓰레기들이 쌓인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카드 놀이하 던 아까 사내가 이야기하던 것과는 달리, 안에는 음식찌꺼기도 들어 있었 다. 빗장이 소리를 내며 닫혔고 아담은 어둠 속에 내던져졌다. 곧이어 쓰레 기통은 경사로를 굴러 부두쪽으로 내려갔다.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담은 그가 땅 위로 들리어 올라가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쓰레기통이 흔들 거리더니 거꾸로 뒤집어졌고 아담은 비명을 지르며 트럭의 뒤켠에 떨어졌 다. 그는 쓰레기들을 뒤집어쓴 채 손과 무릎을 아래로 하며 떨어졌다.


이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담은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나 온 뒤에야 고개를 들어 쓰레기를 떨어냈다. 길은 험했지만 바닥에 깔린 쓰 레기들이 쿠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아담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대의 태양은 트럭 전체를 오븐처럼 뜨겁게 달구 어버렸다. 아담의 몸에서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담은 트럭이 하치장까 지 도착하여 무사히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무 것도 신경쓰 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트럭의 짐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경적이 한번 울렸다. 아담은 엄청나게 큰 쓰레기더미 속에 쳐박혔고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트럭이 저만치 사라져버린 뒤였다. 아무도 아담이 배를 빠져나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이제 안전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아담은 2 백 야드쯤 떨어진 섬 위에 공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왼쪽으로 쪽빛의 카리브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먼지를 한참 떨어내고 나서야, 아담은 공항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다. 간소하게 지어진 공항 건물의 입구는 흰색으로 칠해진 택시들로 붐비고 있 었다. 안으로 들어선 아담에게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불편한 시선을 지어보 냈다. 차림새에 벼화를 주지 않고서는 표 한 장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 닐 것 같았다. 그는 조그마한 매장으로 들어가 청바지와 '세인트 토마스로 오십시오'라고 쓰인 티셔츠 한 벌을 샀다. 그리고는 복작거리는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엇다. 나가는 길에 호세가 준 옷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넣 었다. 그것들은 쓰레기통 안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어울렸다. 주위를 돌아보던 아담은 펠트 천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비행 예정표 를 발견했다. 이곳은 두 개의 항공사 -- 아메리칸과 이스틴 -- 가 운행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논스톱으로 뉴욕에 가는 아메리칸 항공사편 비행기가 있었다. 비행기는 9 시 20 분 출발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아담은 표를 사기 위 해 줄 뒤에 다가갔다. 줄은 매우 천천히 줄어들었다. 아담은 비행기를 놓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뉴욕행 편도로 한 장 주십시오." 마침내 카운터 앞에 서게 된 아담이 말했다. 카운터의 아가씨는 그의 싸구려 옷차림과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상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요금은 어떻게 지불하시겠습니까?" "크레디트 카드로요." 아담은 지갑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했다. 주머니에서 레몬 껍질이 지갑과 함께 딸려나왔다. 아담은 당황해 하며 레몬 껍질을 ㄸ러어버리고는 비자 카 드를 꺼내었다. 카드를 바라보던 아가씨가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는 다시 지갑을 뒤져 운 전면허증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면허증을 확인하고는 옆카운터에 있는 남자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비자 카드는 숀버그 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면허증은 스마이스 씨 이 름으로 되어 있군요." 남자 직원이 아담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아담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며 자신의 진짜 면허증과 아롤렌 사에서 발


행한 직원신분증을 찾아 넘겨주었다. 아담은 친구의 면허증을 맡아주고 있 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쪽으로 비켜서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남자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는 아담의 신분증들을 가지고 문 안으로 사라졌 다. 창구계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표를 팔면서 가끔 고개를 돌려 그가 그냥 가버지리 않는지 확인했다. 아담은 긴장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 썼다. 10 분 가깝게 시간이 흘렀다. 아까 그 직원이 자신을 볼드윈 제이콥이라고 소개한 항공사 지국장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그는 아담의 신분증들을 손에 든 채 말했다. "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비행기 좌석이 다 매진되었군요. 기다 려보시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아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계원은 대기자용 티켓을 건네준 후 갖고 온 짐이 없는지를 물었다. "없어요. 전 여행을 다닐 때는 될 수 있는대로 몸을 가볍게 하지요." 아담은 카페테리아로 가 도너츠 두 개와 커피 한잔을 하고는 약이 들었는 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 친 아담은 카슨 씨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걱정하던 대로 제니퍼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카슨 씨의 바리톤 조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 다. "안녕하십니까. 아담입니다. 제니퍼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요?" "제니퍼는 여기 없네." 카슨 씨의 목소리가 유달리 무뚝뚝했다. "어디 갔습니까?" "아마 연락할 방법이 없을 거야." "장인어른, 따님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제니 퍼의 남편입니다. 그리고 지금 꼭 연락을 해야 할 중대한 일이 생겼단 말입 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니퍼는 여기 없다네. 자기 어머니하고 같이 줄리안 클리닉으로 갔어. 오늘 아침에 입원한다고 하면서." "입원을 한다고요?" 아담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입원을 합니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제니퍼는 건강하다네." 카슨 씨가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자네가 제니퍼에게서 며칠간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의 의견차를 조정해보든지 말든지 하게.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이런 때에 먼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이 썩 탐탁치가 않다네." "왜죠? 무슨 일입니까?" "제니퍼가 다시 양수검사를 받았는데 결과가 역시 양성으로 나왔다네. 그 래서 중절수술을 받기로 한 걸세." "제니퍼는 중절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아담이 외쳤다.


"그건 자네 의견이지." 카슨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리가 제니퍼의 의견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라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걸세."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채, 아담은 클리닉을 통해 제니퍼와 통화하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병원측은 제니퍼가 아직 병실을 배정받지 않은 상태이며 환자들을 방송으로 호출하는 것은 금기사항이기 때문에 연락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했다. 아담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직 비행기가 이륙하기가지는 반 시 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반데르머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앗으나 그는 수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기 부스를 떠난 아담은 다시 아메리칸 항공사의 카운터로 달려갔다. 카운터 앞은 비행기에 곧 탑승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참을 밀고 밀 리고 한 후에야 줄의 맨 앞에 도착해 지국장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을 전 했다. 지국장은 아담의 티켓을 받아들고 묵묵히 컴퓨터를 두들겨대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좌석은 완전히 예약된 상 태입니다." 아담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제이콥이란 사내는 더이상 그의 일에 관심 을 쏟고 싶은 생각이 없음이 분명해 보였다. 아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했다. 그는 다시 전화기 부스로 달려가 대학 동 창인 하트필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베이는 법대를 마치고 월 스트리트에 커다란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담은 그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 한 채 자신의 아내가 중절수술을 받으려 하고 있으며 그것을 중지시키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베이는 아담이 농담이라도 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업 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법률회사에 전화를 걸지 그랬어?" "맙소사, 하베이. 난 지금 심각하다구." "좋아. 그럼 소송법을 잘 아는 사람과 접촉해보아야 할 거야. 에멧 레드포 드란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의 친구분이시라네." "고마워." 아담이 타려 하는 비행기가 곧 이륙한다는 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 다. 그는 수화기를 떨어뜨리고는 곧장 카운터로 달려가는 계원에게 몸을 던 지는 듯한 자세로 다가가 말했다. "제발, 아가씨. 저 비행기에 꼭 올라타야 합니다. 내 아내가 아기를 가졌 는데 내가 뉴욕에 도착하지 않으면 아기가 죽게 된다구요." 아담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미쳐버릴 듯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기자 명단에 1 순위로 넣어드리도록 하지요." 아담에게 약간의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승객들은 끊임없이 도착해 탑 승권을 카운터에 내밀고 있었다. 뚱뚱한 사내가 무전기를 들고 나타나서는 탑승자용 출구를 열고 들어가 다시 문을 닫았다. "숀버그 씨."


캐롤이라는 이름의 항공사 계원이 말했다. 아담은 다시 카운터로 달려갔다. 그러나 캐롤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죄송ㅎ바니다. 좌석이 꽉 찼군요. 대기자들은 한 사람도 탑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대로 옆에 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깥으로부터 제트 엔진이 가동되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탑승자용 출구가 다시 열리더니 스튜어디스 한 사람이 모스을 나타내고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캐롤은 다시 아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좌석이 하나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흡연석인데, 그래도 타시겠습니까?" 불길하게도, 줄리안 클리닉에서 제니퍼를 맞은 직원은 세릴 테데스코를 맡 았던 바로 그 여자엿다. 흰 블라우스와 파란 자켓을 걸친 카렌 크리니츠를 바라보며, 제니퍼는 끔찍했던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하지만 카렌은 제니퍼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녀는 제니퍼와 카슨 부인에게 기계 적인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전 카렌이라고 해요. 제가 제니퍼 양의 담당직원이 되었답니 다. 문제가 생기거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 때는 제가 도와드리게 되지요. 이곳에서 머무시는 동안이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필요하신 것이 있 으면 저를 불러주세요." "정말 멋진 곳이구나." 카슨 부인이 말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카렌이 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이전 에 들은 말과 똑같은 것 같다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카렌은 계속해서 줄리안 클리닉의 방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을 끝마치자, 카슨 부인이 입을 열어 감사를 표시했다. "이 시간 이후로 잉글우드 메모리얼 병원에 계속 만족해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환자들에 대한 배려가 대단한 것 같구나."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줄리안 클리닉은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 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렌이 한 말은 제니퍼를 괴롭히고 있었다. 제니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세릴에 대한 일 때문에 신 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매일 많은 환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직원들에게 있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얘야, 괜찮니?" 카슨 부인이 물었다. "네, 엄마." 제니퍼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카렌이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바 라보았다. "오늘 함께 와주셔서 감사해요. 저한테는 무척 의지가 되는걸요." 카슨 부인이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 카슨 부인은 자신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제니퍼가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랬다. 비행기가 케네디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아담은 가까운 공중전화로 달려갔 다. 우선 줄리안 클리닉에 전화를 걸어 제니퍼의 병실을 대 달라고 했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다이얼을 돌려 제니퍼의 수술이 언재로 예정 되어 있는지를 물었다. 교환수가 신분을 밝혀주기를 요구하자 아담은 닥터


스마이스라고 이름을 대었다. 교환수가 그 말을 믿었는지 잠시 후 전화가 간호사에게 연결되어 제니퍼 숀버그의 수술이 오늘 오후로 예정되어 있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수술을 시작하지 않았단 말씀이지요?" 아담이 물었다. "네 그래요. 하지만 수술실로 곧 들어가게 될 거예요. 닥터 반데르머는 거 의 준비가 끝난 상태거든요." 아담은 다시 동전을 허겁지겁 집어넣어 세번째로 줄리안 클리닉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닥터 반데르머를 호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술실의 간혹 사가 전화를 받았고 의사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로 30 분 후면 지금 수 술이 끝난다고 대답해주었다. 아담은 하베이가 추천해준 변호사인 에멧 레드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 람의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라고 한참을 싸운 뒤에야 레드포드에게 연결될 수 있었다. 아담은 가능한 한 간략한 내용으로, 변호사에게 자신의 아내가 중절수술을 받게 될 예정이며 자신은 그 수술이 중지되기를 원한다는 사실 을 전했다. "지금으로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레드포드가 대답했다. "대법원 관례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의 중절수술 결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 "믿을 수 없군요." 아담이 말을 계속했다. "그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하단 말입니다. 그래도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전 혀 없단 말입니까?" "글쎄요, 수술을 연기시킬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세요. 어떤 방법을 서서라도 꼭 해보세요." 아담이 소리쳤다. "부인의 성명과 다른 신상에 관한 내용들을 불러주시지요." 아담은 재빠르게 원하는 것들을 불러주었다. "언제 수술을 받을 예정인가요?" 레드포드가 물었다. "지금부터 한 30 분쯤 뒤에요." "30 분이라고요! 반 시간 동안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해주길 바라십니까?" "이제 그만 끊어야겠어요. 아내는 지금 줄리안 클리닉에 있어요.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공항건물을 가로질러 택스 승차장으로 갔다. 줄 제일 앞에 있는 택시에 올라탄 그는 줄리안 클리닉으로 가자고 운전사에게 외쳤다. 운전사는 아담이 걸친 싸구려 옷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아담은 20 달러를 꺼내 보였다. 운전사는 만족스러워 하며 기어를 넣고 차 를 출발시켰다. 제니퍼는 운반용 침대에 누운 채 치료실 바로 바깥에 있었다. 카슨 부인이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제니퍼는 세릴과 함께 줄리안 클리닉에 들렸던 일 을 떠올렸다. 카슨 부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으


나 그녀 역시 제니퍼만큼 긴장하고 있는 빛이 역력했다. "라운지에 돌아가 계세요." 제니퍼가 말했다. "전 괜찮을 거예요. 닥터 반데르머의 얘기로는 수술이 아주 간단 할 거라 고 그랬어요." 카슨 부인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딸을 넌지시 내려다보고만 있었 다. "제발요, 엄마. 너무 요란떨 필요 없다구요. 돌아가서 잡지나 읽고 계세 요." 카슨 부인은 허리를 굽혀 제니퍼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라운지를 향해 걸어갔다. 제니퍼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어머니의 멀어져가는 모습 을 바라보았다. "됐어요." 간호사가 치료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간호사는 제니퍼가 나워 있는 침대의 브레이크를 풀어 치료실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녀가 양수검사를 받았던 곳과 비교를 한다면 이곳은 정말로 수 술실다워 보였다. 제니퍼는 흰 바닥과 유리문을 댄 흰색 캐비닛이 전에 본 일이 있음을 기억했다. 간호사 두 명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제니퍼를 수술대 위 에 눕히며 입을 열었다. "수술은 금방 끝난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금방 잊어버리시게 될 거예 요." 수술대에 몸을 눕히던 제니퍼는 몸 속의 아기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간호사 중 하나가 배 아래쪽을 소독하는 동안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 했다. 복도로 향한 문이 열리면서 닥터 반데르머가 수술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제니퍼는 그를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좀 어떠십니까?" 반데르머가 물었다. "좋은 것 같아요." 제니퍼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그런데 다음 순가 반데르머는 눈 도 깜빡이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제니퍼가 의아 한 표정으로 간호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반데르머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반데르머는 명상을 하는 듯하던 상태에서 깨어나 간호사들에게 마취제를 넘겨달라고 지 시했다. "좀 따갑습니다." 반데르머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늘을 찔러 넣었다. 제니퍼는 눈을 감으며 앞으로 도리 일들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케네디 공항으로부터 줄리안 클���닉까지의 택시는 정말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경험이었다. 아담이 20 달러를 흔들어 보이자 택시 운전사는 목숨을 건


레이스를 시작했다. 30 분이 채 안 되어 택시는 병원 앞에 멈추어 섰다. 아 담은 운전사에게 이십 달러를 던져주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은 채 계단을 뛰 어오르기 시작했다. 접수 창구에서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간 아담은 반데르머 가 수술을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중절수술은 6 층에서 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달 려 들어갔다. 접수직원이 등 뒤에서 혼자서는 6 층으로 갈 수 없다고 소리치 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그는 복도 끝의 '치료실'이라고 쓰인 이중 문을 밀치 고 들어갔다. 간호사실을 지나치자 고풍스런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 체 줄리안 클리닉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간호사 한 명이 멈추라고 소리쳤다. 아담은 그 말을 무시한 체 계속 달려 갔다. 그는 첫번째 치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비어있었다. 다음 방을 열어보았다. 간호사가 그를 제지하러 다가왔으나 아담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환자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제니퍼가 아니었다. 아담은 복도를 가로질러 다른 방을 확인하려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겁니까?" 간호사가 독일식 액센트로 물었다. 아담은 그녀를 난폭하게 옆으로 밀어젖혔다. 닥터 반데르머가 수술대에 몸 을 굽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주사기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 리고 있었다. "제니퍼!" 아담이 외쳤다. 그는 제니퍼가 국소마취제 주사를 맞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제발, 이러면 안 돼. 수술을 받지 마. 다시 검사를 해보자구." 제니퍼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병원 보조원 둘이 문을 열고 달려 들어 와 아담의 양팔을 등뒤로 꺾었다. 그들 역시 배의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좋아요, 좋아요." 아담이 말했다. "잘 알았어요. 당신들은 나보다 힘이 세군요. 자 이제 날 점잖게 놓아주시 오." "숀버그 씨 아니오?" 잠자코 있던 반데르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가지 미치광이 하나가 난 동을 부리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제니퍼는 당신이 뉴욕에 없다고 하던데." "제발 수술을 멈추세요. 선생님께 꼭 드려야 할 말이 있습니다." 보조원들의 존재를 그제서야 깨달은 듯, 닥터 반데르머는 한 사내의 어깨 를 두들기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네. 그냥 놔두게." 반데르머는 마스크의 한쪽을 벗어 가슴에 늘어뜨렸다. 두 사내는 잡고 있던 아담의 팔을 놓아주었다. 문이 다시 열리면서 클리닉 의 스탭진들이 무슨 일을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우루루 몰려 들어왔


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닥터 반데르머가 말했다. 그는 다시 보조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가 있어도 되네." 그들이 나가자마자, 반데르머는 제니퍼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후 치료실의 옆방으로 아담을 안내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담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지금 아롤렌 선상학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닥터 반데르머는 아담이 입고 있는 청바지와 세인트 토마스의 이름이 새겨 진 티셔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반데르머가 알아 들었는지, 아담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반데르머는 고작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중에 우리가 얻은 지식들을 비교해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 은 부인을 돌봐야 합니다. 라운지로 가서 좀 기다리시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아담이 말했다. "아롤렌 선상학회는 단순히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행사가 아닙니다. 학회 라는 것은 그들이 행동통제 계획을 위장하는 교묘한 수단일 따름이에요." 닥터 반데르머는 이제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아 담이 정신병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신과로 가서 전문지식을 갖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도록 설득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닥터 반데르 머는 아담에게 한 발짝 다가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당신이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닥터 페이스입니 다. 아래층으로 함께 가지 않겠소? 내가 그분을 소개해 드리리다." 아담은 반데르머의 손을 어깨에서 떨쳐버리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시지 않는군요. 전 지금 약물을 이용해서 사람 의 행동을 수정시키려는 음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도 바로 그 희생자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약에 취해 있는 거라구요. 이제 이해 가 가십니까?" 닥터 반데르머가 한숨을 쉬었다. "아담, 당시닝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난 선상학회 동안에 약을 먹거나 한 일이 없소. 그곳에서 강의를 했고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푸에르토리코에서도 역시 그랬구요." "하지만 제 눈으로 다 보았는걸요." 아담이 말을 계속했다. "피요르드 호에 타보았습니다. 그들은 의사들의 음식에 약을 집어 넣었고, 또 계속해서 노란 캡슐을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는 필름을 보게 했지 요. 그건 마인드 컨트롤의 한 방법이었다구요. 생각해보십시오. 왜 프레그 돌렌에 대한 생각을 갑자기 바꾸시게 되셨는지 말입니다. 배에 타시기 전까 지만 하더라도 선생님은 제게 프레그돌렌이 위험한 약이고 절대로 처방하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의 프레그돌렌에 대한 의견은 바뀐 일이 없소. 난 이전부터 프레그돌렌


이 시장에서 나온 것들 중 가장 나은 약품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임산부 들의 입덧에 처방해왔단 말이오." 대화에 아무런 진전이 없음을 깨달은 아담은 닥터 반데르머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제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시더라도 내 아기를 낙티시키지만은 마 아주십시요. 양수검사 때 슬라이드가 섞인 일은 누군가 고의로 저지른 것이 분명합니다. 아롤렌 사에서는 태아 조직의 공급을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 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치료실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반데르머 선생님.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해햐 하나요?" 문 앞에 선 간호사가 물었다. 닥터 반데르머는 손짓으로 간호사를 다시 돌려보냈다. "아담." 그가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말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상심하고 있으리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딴소리 마십시오." 아담은 눈을 비벼대며 경고조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수술을 중지시키는 것뿐입니다. 그게 다예요. 내가 지나 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인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으실 텐데요." 반데르머가 치료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니퍼는 아마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지금 수술을 중단한다는 건 제니퍼 에게 너무 잔인한 처사가 됩니다. 이미 당신 부인은 많은 고통을 겪었소." 아담은 승산이 반데르머 쪽으로 기울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의사를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자, 라운지에 가셔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내가 곧 뒤따라가지요." "그럴 순 없습니다." 아담이 소리치며 반데르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다구요." "아담!" 반데르머가 고함을 질렀다. "당장 내 앞에서 비켜나지 않으면 사람을 부르겠소." "들어보십시오. 유람선에 근무하는 사람들 중엔 정신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수술을 받은 이들은 옆머리에 흉터가 나 있어 요. 바로 여기에 말입니다." 아담은 반데르머의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아담은 공포에 질 린 채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반데르머의 머리 양쪽에 희미한 칼자 국이 나 있는 것을 보았다. 닥터 반데르머는 대단히 분개해 하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참을 수가 없군." 그는 문을 열고 보조원 두 명을 불러 아담을 데리고 나가도록 지시했다. "숀버그 씨를 라운지로 데리고 가시오. 이 사람이 얌전하게만 행동한다면 그대로 두어도 좋지만 만일 문제를 일으킨다면 곧바로 정신과에 연락하도록 해요." 아담은 손을 위로 들어올려 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일으키지 않겠소." 아담은 혹시 안정제 주사 같은 것이라도 맞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하고 있 었다. 반데르머가 정신 수술을 이미 받았다면 그로 하여금 아롤렌에 거스르 는 행동을 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했다. "제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아담이 물었다. 닥터 반데르머는 잠시 아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니퍼에게 아무런 도우밍 되지 않을 거요. 하지만 제니퍼가 원하는지 물 어는 보겠습니다." 반데르머는 치료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니퍼가 팔꿈치 로 수술대를 딛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에요?" 닥터 반데르머는 아담과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준 다음 그가 제니퍼와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아담은 제니퍼의 임신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반데르머가 자기 의견을 간단하게 얘기했다. "아무튼, 그이가 이 일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남편이 문제를 일으켜서 정말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하지요." 제니퍼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반데르머가 대답했다. "이제 다시 수술을 진행해야 할 것 같군요. 수술이 다 끝난 후에 아담과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이가 다시 돌아왔죠?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지금으로서는 제가 아 담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마음이 가라앉아 있을 때 빨리 수술을 진행해주세요." 반데르머는 제니퍼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간호사들에게 다시 준비를 하 도록 지시했다. 그는 다시 옆방으로 돌아가 아담에게 제니퍼가 나중에 이야 기를 하고 싶어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담은 더이상 시비를 걸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온몸이 마비되어버린 사람처럼 보조원들이 이끄는 대로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닥터 반데르머는 다시 소독을 하고 치료실에 들어갔다. 그는 주사기를 들 고 국소마취제를 제니퍼의 피하에 주사했다. 이제 막 수술이 시작되려는 찰 나에 다시 문이 열렸다. "반데르머 선생님, 수술을 중단하셔야 되겠습니다." 제니퍼가 눈을 떴다. 문 앞에는 수술복을 걸친 땅딸막한 여자가 서 있었 다. 제니퍼로서는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닥터 반데르머는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클리안 줄리닉 수술실의 책임자인 헬렌 클라크였다. "방금 긴급 수술중지명령을 받았아요. 제니퍼 손버그의 수술은 더이상 진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뭐요?"


닥터 반데르머가 놀라며 물었다.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하지만 뉴욕 대법원 판사가 섬여한 서류를 받았 답니다." 헬렌이 대답했다. 닥터 반데르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다시 제니퍼를 향해 몸을 돌렸다. 헬렌이 다시 경고조로 말했다. "어리석인 짓은 하지 마세요. 법원의 명령을 어기면 우리 모두가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구요." "말도 안 된느 소리야." 닥터 반데르머가 말했다. "수술실에까지 법원이 간섭하려 들다니."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스크와 장갑을 벗어 던졌다. 반데르머가 떠나려 하는 것을 바라보던 제니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 을 억누르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치료실에서 쫓겨난 뒤, 아담은 에멧 레드포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드포드는 수술중지 명령을 받아냈으며 지금 클리닉으로 이송되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담은 라운지로 돌아가, 서류가 시간 맞추어 도착하 기만을 조용히 기도했다. 카슨 부인이 잡지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 아담 은 장모의 시야로부터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채 5 분도 되지 않아, 한 간호사가 황급히 카슨 부인에게 다가왔 다. 간호사가 허리를 굽히고 카슨 부인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그녀는 손을 위로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수술이 취소되었다구요!" 아담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도 제니퍼가 훌쩍이며 침대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자 곧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슨 부인은 동시에 제니 퍼에게 다가가 그녀를 사이에 놓고 마주 서게 되었다. "제니퍼." 아담이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일이 제대로 풀리게 될 거야." 제니퍼는 아담의 손길을 뿌리치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날 내버려둬요. 당신은 미쳤어요. 날 가만히 내버려두라구요." 아담은 몇 발짝 뒤로 물러나 슬픈 표정으로 제니퍼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 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 사고의 책임자인가?" 카슨 부인이 말했다. 아담은 너무나 당황하여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불필요한 중절수술을 중 단시킨 게 사고란 말인가? 눈물이 솟아나오려 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몸 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거리로 나선 아담은 지갑을 열어보았 다. 3 달러와 동전 몇 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에멧 레드포 드가 있는 5 번가의 사무실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옷차림이 이래서 죄송합니다." 비서에게 안내되어 사무실을 들어서며 아담이 말했다.


"옷을 갈아입느라고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요." 아담의 차림새가 불쾌하게 여기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듯 레드포 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담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한 것 투성 이였다. 수술중지 명령을 만들기 위해 애쓰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을 알아보 도록 지시한 직원의 보고를 통해 보더라도 아담의 주장은 의심스럽게만 여 겨졌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레드포드가 입을 열었다. "하베이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당신을 돕는 데 동의하기는 했지만 저를 괴 롭히는 부분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저도 동감입니다. 줄리안 클리닉은 필요하지도 않은 중절수술을 고의적으 로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레드포드는 이렇게 말하고 아담의 부시시한 머리와 ���염이 덥수룩한 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담이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아롤렌 제약회사와 그 모회사인 MTIC 가 약물과 뇌수 술을 통해 의사들이 약품을 처방하는 성향을 변화시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 정말 미쳤군. 레드포드는 이렇게 생각하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담의 목소리가 더욱 급박해져 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곤란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갑니다." 레드포드가 말했다. 어쩌면 이 아담이란 사내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며 돌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담은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흥분해버릴 것 처럼 보였다. 레드포드는 책상 밑에 숨겨진 버튼을 누른 후 말했다. "숀버그 씨, 제가 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런 강박관념을 치료하기 위해 전문적인 도움을 구해보신 일이 있는지요 ? 그렇게 하시는 것이 모두를 위해 최선의 방도가 되리라 봅니다만." "전 지금 진실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담이 말했다.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레드포드가 일어서서 문을 열었고 비서에게 스튜펜 스키를 부르도록 지시했다. 레드포드가 다시 아담에게 말했다. "배심원들은 당신 주장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은 레드포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의 얼굴에서 그런 면이 조금도 보이 지 않았다. "그 말이 맞을 것 같군요. 제가 눈으로 목격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전혀 없으니까요." 문이 다시 열리더니 레드포드와 같은 줄무늬 윗도리 차림의 젊은이가 들어 왔다. "이쪽은 제 동료 스튜펜스키라고 합니다."


레드포드가 말했다. 아담은 인사를 해 보이고 다시 한번 자신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레드포드 에게 설득시키려 노력했다. "그들은 음식에 약을 넣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정제처럼 보이는 노란 캡슐을 먹도록 했어요." "숀버그 씨,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두 변호사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아담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두 사람 을 바라보았다.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병원 측에서 스튜펜스키에게 보여준 양수검사 와 관련한 자료들을 보고 나서 저희들은 중지 명령을 집행하게 한 것을 후 회하게 되었습니다." 레드포드가 설명을 계속했다. "하지만 명령은 오늘로부터 사흘 후에 열리게 될 비상심리 때까지는 유효 합니다. 저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아무 일 없으 리라고 단정하셔도 좋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숀버그 씨." 아담이 그들과의 면담이 다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 다. 네 시간 뒤, 샤워와 면도를 마치고 제일 괜찮은 옷으로 갈앙입은 아담은 아버지의 사무실 바깥에서 업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6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손님이 돌아간 뒤, 닥터 숀버그는 아들이 하는 황당 무계한 이야기들을 참 을성 없는 태도로 들어주었다. "난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가 아담에게 말했다. "네 기분을 푸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의학협회에 있는 피트 대 븐포트에게 한번 전화를 걸어보지. 그 사람도 선상학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 니까." 닥터 숀버그는 대븐포트의 집으로 다이얼을 돌려 그에게 아롤렌 선상학회 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잠시 동안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는 고맙다는 인 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피트의 말로는 피요르드 호에서 가진 세미나는 상식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저녁에 좀 외설적인 행사가 베풀어지긴 했었지만 학회 는 그 사람이 참가해본 중에서 최고였다는데." "그분도 다른 사람들처럼 약을 먹었던 겁니다." 아담이 말했다. "아담, 제발 부탁이다. 넌 지금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MTIC 는 직 접, 혹은 아롤렌 제약을 통해 10 여 년 동안 여러 세미나와 학회를 후원해왔 다. 선상학회도 벌써 5 년이나 계속되어온 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담은 아버지를 설득할 희망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약을 먹이고 행동통 제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요. 심지어 수술까지 한다구요. 닥터 반 데르머의 머리에 난 흉터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일종의 원격조정 장치를


통해서 그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닥터 숀버그가 눈을 굴렸다. "네가 가진 정신의학의 지식을 조금만 활용한다고 해도, 너의 말이 얼마나 피해망상적으로 들리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게다." 아담은 곧장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려라." 닥터 숀버그가 그를 불렀다. "잠깐 이리 좀 와봐라." 아담은 그의 아버지가 좀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 었다. 닥터 숀버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하고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난 FDA 에서 새로운 약품을 감독하고 있는 국 장급 인사다. 네가 말한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멋대로 조치를 치할 순 없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흥분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직접 선상학회에 참 가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구나." "안 됩니다." "선상학회에는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냐?" "조사를 시작해주십시오." "그럼 우리 협상을 하자."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네가 저잇ㄴ과 의사를 만나서 혹시나 네가 피해망상의 증상을 보이고 있 지나 않은지 확인해보겠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도 아롤렌에 대한 조사를 진 행시키겠다고 약속하마." 아담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가 미친 것 같다고 말을 한다면 비명을 질러보리리라. "감사합니다. 아버지,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공항으로 차를 타고가는 동안, 아담은 아롤렌이 미국 의학협회의 피트에게 어떤 약을 먹였으며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MTIC 의 통제하에 있는지를 생각 해보았다. 아담이 탄 비행기가 9 시쯤 되어 라가르디아 공항에 착륙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다시 텅 빈 아파트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우 울한 일이었으며 제니퍼에 대해서도 매우 걱정이 되었다. 잉글우드로 가서 화가 난 카슨 씨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으나, 다른 대안이 없음을 절감했다. 어서 제니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아담의 차가 진입로로 들어섰다. 카슨 씨의 집에는 불이 모두 꺼져있는 상 태였다. 조심스럽게 정문 앞 계단을 올라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곧바로 문 이 열렸고 아담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자네 차의 불빛이 침실을 비추고 있어. 도대체 이 시간에 무얼 하려는 겐 가?" 카슨 씨가 화를 내며 말했다.


"제가 장인어른을 깨웠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니퍼와 할 얘기가 있어서요." 카슨 씨가 팔짱을 끼워 보이며 말했다. "자네 정말 배짱 한번 대단하군. 그것만큼은 내가 인정해주지. 하지만 내 딸은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던데. 며칠 지나면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 지만, 지금 당장은......" "지금 꼭 봐야만 합니다. 제니퍼는 수술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단 말입니 다." 아담이 말했다. 카슨 씨가 아담의 옷깃을 휘어잡으며 소리쳤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는 아담을 뒤로 힘껏 밀어 제꼈다. 아다담이 몸의 균형을 되찾고는 입가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제니퍼! 제니퍼!" "이제 더이상 봐주지 않겠네!" 카슨 씨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다시 아담의 옷깃을 움켜잡고 차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가려 했다. 하지만 아담은 옆으로 비켜서며 집 안으로 달려 들 어갔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제니퍼의 모습이 위층 거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아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 좀 들어봐!" 아담이 다시 소리쳤다. 그러나 미처 제니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카슨 씨 가 아담을 뒤에서 잡아채어 문 밖으로 끌어냈다. 되받아 싸울 생각이 없었 던 아담은 차가 있는 곳까지 끌려가 현관 가장자리의 잡목 위에 쓰러졌다. 그가 몸을 미처 일으키기도 전에 요란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슨 씨가 오늘 밤에는 절대로 아담을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담은 차에 올라타서 제니퍼가 수술을 받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궁리했다.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었다. 조지 워싱턴 다리를 반쯤 건넜을 때 아담은 결론을 내렸다. 모든 이들이 그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접 푸에르토리코에 가서 증거 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가 배 위에서 본 모든 것이 푸에르토리코에도 똑같 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5 빌 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담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축하하오, 아담. 방금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을 내린 셈이오. "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완전히 결정을 내린 것은 아직 아닙니다." 아담이 말했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로 가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곳에 가서 시설을 둘러보겠다는 겁니다. 제니퍼는 별로 찬성 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제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아마 제 아내도 동의해줄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한 가지 잊은 게 있구만. 클레런스가 메세지를 남겨놓았 소. 부인이 이상한 내용의 전화를 걸어왔다고 하던데요. 제니퍼는 당신이 회사 일로 여행을 떠난 줄 알고 있다고 했소." "처가와 문제가 좀 있어서요." 아담은 손을 내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제니퍼와 제 아버님은 항상 불편한 사이입니다." 아담은 자신으로서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셀 리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아롤렌 연구센터를 보고 나면 흥분을 감 추지 못할 거요. 언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지금 당장이요." 아담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벌써 다 꾸려서 차 안에 두었습니다." 셀리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당신의 태도는 언제나 높이 사줄 만해요. 회사 비행기를 사용할 수 있는 지 한번 알아보지요." 그의 비서가 일을 처리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셀리는 아담이 경영자 훈련 과정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이유를 물었다. "나는 내가 설득력이 부족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소." "그 반대입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부사장님이 해주신 조언이 없었더라면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 그는 이렇게 말하며 빌 셀리를 바라보다가, 그 역시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 해보고 충동을 느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아롤렌 사의 어느 누구도 아담 에게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호화스런 걸프 스트림 여객기에는 두 명의 아롤렌 임원이 탑승하고 있었 다. 한 사람은 아담과 같이, 다른 한 사람은 아틀란타에서 비행기에 올랐 다. 그들은 아담과 친절한 인사말을 나눈 뒤 나머지의 시간을 일에만 매달 렸다. 아담은 오래된 잡지나 뒤적이면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센 쥬안에 착륙했고, 두 사람은 회사에서 보낸 미니버스에 올라 탔다. 자신도 함께 타야 하는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 아담앞에 파란 블레 이저 자켓과 흰 바지를 걸친 두 사내가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머리를 짧 게 쳐올리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금발, 또 다른 사람은 검은 머리였다. MTIC 에서 만든 명찰에는 각각 '로드맨'과 '던리'라고 새겨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숀버그 씨." 로드맨이 말을 꺼냈다.


"푸에르토리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던리가 아담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려 했다. 순간 열대의 기후에도 불구하 고 아담의 등과 팔에 닭살이 돋아올랐다. 로드맨의 목소리는 피요르드 호의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억양이 없었다.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까지 가는 동 안에도 그들은 기계적인 스텝을 유지하며 걸어갔다. 리무진은 그리 신형으로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에 혼자 앉게 된 아담은 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러시아워의 교통상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차는 도시를 빠져나와 섬의 북쪽 해안을 따라 달렸다. 그러나 아담이 있는 곳에 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고 차는 쇼핑 센터와 주유소, 자동차 부속품점 등 을 지나쳤다. 모든 시설들이 한편에서는 황폐해져 가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한창 공사가 진행중에 있었다. 그러한 풍경은 아담의 눈앞에서 묘 한 대조를 이루었다. 녹이 슨 철골들이 콘크리트 밖으로 비죽이 나와 방치 되어 있는 것이 여러 차례 눈에 띄었다. 시설을 확장하려다 인부를 구할 수 없어 포기한 듯했다. 쓰레기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보기에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남루한 상업지구 건물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허름하기는 마찬가지인 주택 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누추한 풍경 주위에 화려한 저택이 하나 둘 들어선 모습도 가끔 보였다. 이곳은 부자 동네와 빈촌의 경계가 따 로 없는 듯했고 염소와 닭들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도로는 4 차선에서 2 차선으로 좁아졌고 푸른 언덕 너머 바다의 모습이 가끔 보이기 시작했다. 공기도 점차 맑고 시원해져 갔다. 한 시간 반 가량을 달린 뒤에 차는 넓은 도로를 벗어나 무성한 초목들 사 이로 구불구불 뻗은 좁은 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숲지대가 끊기 는 듯하더니 다시 카리브해의 장관이 아담의 눈에 들어왔다. 곧 해가 질 시 간이 되어 하늘은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도로는 언덕 아래로 뻗어 내려가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나무들이 만드는 터널 속으로 이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리무진이 속도를 줄이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차 앞에 경비실이 보였다. 경비실 양쪽의 숲으로는 위에 철조망 이 달린 장벽이 뻗어 있었다. 철조망에 달려 있는 전류 저항기로 보아 보아 벽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장한 경비워닝 나와 차에 다가갔다. 운전사에게서 서류 한 장을 받아든 그는 아담을 잠시 살펴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리무진은 MTIC 의 소유지에 들어섰고 아담은 뒤로 몸을 돌려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경비 원이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피요르드 호에 올라탄 동안에는 아무런 계획 을 가지고 있지 못했었고 자신에게 탐정으로서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본 일 도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에 도착한 아담에게 위안을 삼을 만한 게 있다면 이번에는 진짜 이름을 가지고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자동차가 커브길을 꺾어 돌자 완만한 잔디 벌판과 청록색으로 빛나는 맑은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건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본관은 아롤렌 본부와 마찬가지로 청동유리로 덮여 거울처럼 된 육각형 건 물이었다. 건물 왼편의 해변쪽으로 또 다른 2 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첫인 상으로는 클럽하우스 같이 보였다. 테니스 코드와 널찍한 수영장이 그 옆에


만들어져 있었고 요트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다에도 몇 대의 요 트가 떠 있었는데, 화사한 색채의 돛들이 바닷물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해안에 맞붙어 세워진 콘도미니엄이 한쪽에 보였다. 이곳은 연구소라기 보 다는 국제적 수준의 휴양지에 가까웠다. 리무진은 본관 정문 앞의 차양 아래에 멈추어 섰다. "안녕하십니까, 숀버그 씨." 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그를 맞으며 말했다. "MTIC 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담은 차에서 내려 그 남자를 따라 프런트로 갔다. 꼭 호텔에 찾아온 기 분이었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금전등록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아담이 서류작성을 마치자 '크레이그'라는 명찰이 달린 파란 자켓의 또 다 른 남자가 짐을 들고 아담을 엘리베이터로 인도했다. 그들은 6 층에서 내려 길게 뻗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 이 보였다. "오래 머물 계획이십니까?" 크레이그가 물었다. "며칠 만 있을 겁니다." 크레이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방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선 곳은 거실과 침실, 화장실이 모두 갖추어진 완벽한 특실이었 다. 크레이그는 호텔의 벨보이처럼 분주히 돌아다니며 전등과 텔레비전에 이상이 없는지를 점검하고 술을 늘어놓는 테이블을 바라보다가는 커튼을 걷 어 젖혔다. 그는 정중하게 아담이 내미는 팁을 거절했다. 방안의 시설들은 그저 아담을 놀라게 할 뿐이었다. 창 밖으로는 해가 지는 바다의 장관이 펼쳐져 있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부터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카리브풍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테라스로 다가섰다. 아담이 클럽이 라고 짐작했던 건물에서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씨는 너무나 쾌청했고 아담은 제니퍼가 지금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 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포코노스의 하트 모양 욕조가 있는 호텔에서 보 낸 신혼여행도 이렇게 화려하지는 않았었다. 아담은 제니퍼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직접 전 화를 받았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나자 제니퍼의 목 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제니퍼, 제발 한 가지만 약속해줘." 아담이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중절수술을 받지 말아야 해." "돌아온다고요?" 제니퍼가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아담은 자신이 있는 곳을 밝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갑작스런 질문에 거짓말을 둘러댈 겨를이 없었다. "푸에르토리코야." 그가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아담." 제니퍼가 무척 흥분해 하고 있었다.


"나한테 그렇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었다면, 멀리 떠나지 않았어야 하지 않아요? 병원에서 허락을 해주는 대로 곧장 클리닉에 갈 생각이에요." "제발, 제니퍼." "마음껏 즐기시다가 오세요." 제니퍼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담은 실의에 빠진 채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 다. 전화기가 울렸고 아담은 제니퍼가 한 전화이리라 생각하며 서둘러 수화 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래층의 프론트 직원이었고 반 시간 뒤에 저녁식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식당은 해변을 굽어보고 있는 클럽 건물 앞에 만들어져 있었다. 문 바로 옆에 요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하늘에 뜬 보름달은 바다위에 기다린 달무리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식당의 벽은 어두운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분홍빛 테이블보 아래로 같은 색의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웨이터들은 모두 흰 자켓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담은 여덟 개의 좌석이 놓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바로 오른쪽 에는 아롤렌 사에서 만난 일이 있었던 닥터 하인리히 내흐만이 앉았다. 내 흐만의 옆에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체구에 얼굴이 불그스레한 남자가 있었 는데 그는 태아학 연구를 총감독하고 있는 닥터 싱클레어 글로버라고 자신 을 소개했다. 다겉 글로버의 옆에 앉은 닥터 윈필드 미첼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금 테안경을 쓴 대머리의 중년 남자였다. 내흐만은 미첼이 정신성 약품의 개발 을 담당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나므 이 의견에 조용히 귀기울일 줄 아는 미첼의 태도는 그가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닥터 미첼의 옆에 앉은 윌리엄 어쩌구 하는 사내는 회사의 경영을 담당하 고 있다고 했다. 아담은 그의 성을 듣지 못했다. 그는 전형적인 아이비 리 그 출신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황갈색 머릿결에 아직 변성기를 겪지 않은 소년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경영자 훈련과정을 책임지고 있는 브라이언 홉킨스가 그 옆에, 그리고 홍보 담당인 린다 아론슨 양과 푸에르 토리코 연구센터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명랑한 성격의 노신사 해리 버켓 이 앉아 있었다. 아담은 피요르드 호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잠시 동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으 며 누구도 약에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아담에게 약을 먹 이려 했다면 벌써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했으리라. 테이블 주위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으며 모두가 아담을 반가워 하고 있었다. 버켓은 MTIC 가 푸에르토리코에 연구센터를 짓기로 결정한 이유를 이곳에서는 정부가 면세 혜택을 주고 불간섭 정책을 펴기 때문이라고 설명 했다. 이 섬에는 아로렌 말고도 많은 제약회사들이 시설을 옮겨놓은 모양이 었다. 아담은 그에게 경비가 무척 삼엄하더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이런 천국과 같은 곳에서 지내며 치러야 하는 희생이지요."


해리 버켓이 대답했다.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주장하는 소규모 테러리스트 집단들이 공격해 들 어올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것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담은 더이상 꼬치꼬치 묻지 않기로 했다. MTIC 의 경영인인 윌리엄이 아담을 바라보며 말했다. "MTIC 는 의학계에 대해 한 가지 철학을 가지고 있답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이익에의 욕구가 의학인들의 봉사정신을 잃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 다. 당신도 그런 우리 생각에 공감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담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담은 디저트를 조금 잘라먹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사실이에요. 잠깐이나마 의대에 머무르는 동안 저는 의사들 에게서 휴머니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기술개발과 연구에 대한 욕구가 환자들을 돌보는 일보다 우선하게 된 것입 니다." 테이블에는 의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아담은 그들이 불쾌하게 생각하 지나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닥터 내흐만은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 이고 있었다. 아담으로서는 내심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아담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갖게 될수록, 그들이 부리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내기가 더욱 쉬워지는 것이다. "당신의 그런 태도가 의사들과 상담을 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을까요?" 린다 아론슨이 물었다. "전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의학에 대한 경험이 많은 도움을 주 었지요. 영업 활동은 꽤 성공적인 편이었습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빌 셀리의 보고로 미루어본다면 숀버그 씨의 말이 지나치게 겸손하게 들 리는군요." 내흐만이 말했다. "아담, 경영자 훈련과정에 참여하기로 한 이후로 우리들의 계획에 대해서 들으신 일이 있는지요?" 닥터 글로버가 물었다. "구체적으로는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닥터 내흐만이 양손을 맞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태아학 부문에서의 연구성과 덕분으로 우리 아롤렌 사는 아주 새로운 약 품과 치료법을 개발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린다와 함께 이러한 새 개념들을 의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교육시킬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 었지요. 당신은 그 자리를 맡아줄 사람으로서 완벽한 학문적 배경과 사고방 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래요." 린다가 말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숀버그 씨를 주눅들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지금 당장은 그저 아롤렌의 연구활동 상황을 둘러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담은 자신이 며칠이라도 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그런 방식의 교육과정을 밟게 된다면 자신이


필요로 하고 있는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제 의견은 좀 다른데요." 브라이언 홉킨스의 말이었다. "먼저 숀버그 씨는 경영자 훈련과정에 참가해야 합니다." "브라이언, 그건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린다가 말했다. "제발, 여러분." 닥터 내흐만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부서간의 내분을 노출시키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아직 그럴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홉킨스를 제외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담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비우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는 닥터 내흐 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멋진 식사였습니다. 하지만 연구시설을 한시 바삐 둘러보고 싶어 견 딜 수가 없군요." "저희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내일은......" 아담이 열띤 모습으로 물었다. 닥터 내흐만은 글로버와 미첼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모두 미소를 지어 보 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오늘 시설의 일부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닥터 내흐만이 대답했다. "피곤하시지 않은가요?" "전 아주 말짱합니다." 닥터 내흐만과 닥터 글로버, 그리고 닥터 미첼이 차례로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테이블에 더 남아 커피와 음료수를 즐기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닥터 내흐만은 아담을 데리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은 또 다른 문을 통과하여 연구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의 바닥에는 흰 타일이 깔려 있 었고 벽은 화사한 원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곳은 연구소의 행정을 담당하는 구역입니다." 닥터 내흐만이 말했다. 잠시 후 그들은 유리로 둘러싸인 교각을 건너게 되었다. 교각의 양쪽에서 는 종려나무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건물은 이중으로 되어 있었는데, 워싱턴의 펜타곤 건물처럼 한 건물이 다른 건물에 둘러싸여 둘이 함께 동심 원을 이루고 있었다. 안쪽 건물의 복도로 내려서는 아담에게 우리에 갇힌 짐승들의 냄새가 풍겨 왔다. 닥터 글로버가 첫번째 문을 열고 아담을 데리고 들어간 뒤, 약 반 시 간에 걸쳐 여러 방들을 돌아다니며 복잡한 기계장치들을 설명하고 쥐와 원 숭이들의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그곳에서는 태아학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 를 진행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에는 흰 가운을 걸친 연구원들이 일에 몰 두하고 있었다. 닥터 글로버는 태아 조직의 이식 실험이 긍정적인 결과를 나타낸 이후로 연구원들이 스물네 시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었 다. "실험재료는 어디서 구하게 되나요?"


분홍빛 생쥐가 들어있는 조그만 철제 우리 앞에 멈추어 선 아담이 물었다. "연구활동의 대부분은 동물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연구 센터 내에 동물 을 사육하는 시설을 따로 두고 있지요." 닥터 글로버가 대답했다. "태아를 이용한 연구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저희들도 약간의 문 제에 부딪치게 되었지요. 하지만 변통할 방법을 가까스로 찾아내었습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실험재료는 주로 줄리안 클리닉을 통해 공급받고 있습니 다." 아담은 눈아펭 놓인 유리상자를 모조리 깨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 다. 왜 아무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걸까? 분명히 반데르머와 같 은 의사들은 중절수술의 빈도를 높임으로써 태아의 공급량을 늘이려 했던 것이다. 아담이 관심을 보이는 데 대해 내샘 만족해 하며, 닥터 글로버가 말을 이 었다. "내일은 건물 내의 병동으로 안내해드리지요. 그곳에서는 이미 태아의 췌 장 추출물을 이용해 당뇨병을 치료하는 연구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바 있 습니다." "이 분야는 저도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닥터 미첼 에게도 자기연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내흐만이 닥터 글로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닥터 미첼이 입을 열었다. "1 년 뒤 판매량을 집계해보면 어떤 부서가 가장 큰 공헌을 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미첼은 나머지 30 분을 향정신성 약품, 특히 페노사이아진(Phenothiazine) 계의 신제품에 대한 설명에 할애했다. "이 약품은 어떤 종류의 정신질환에도 아주 좋은 효과를 나타냅니다. 또한 전혀 독성이 없고 극심한 증세를 보이던 환자를 아주 모범적인 시민으로 변 모시키기도 하지요. 물론 어느 정도의 부작용으로서 환자의 행동이 좀 부자 연스러워지긴 합니다만." 아담은 그의 말에 항의를 제기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행동이 좀 부자연스러워진다'는 표현으로 그들은 약 품의 부작용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분명히 피요르드 호의 승 무원들과 줄리안 클리닉의 보조원들은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 다. "그 새로운 약품의 이름이 뭡니까?" 아담이 물었다. "화학명 말입니까? 일반명 말입니까? 아니면 상품명을 말하시는겁니까?" 오랫동안 독백을 늘어놓느라 숨가빠하며 닥터 미첼이 물었다. "상품명이요." "콘포민(Conformin)이라고 합니다." 닥터 미첼이 대답했다. "제가 샘플을 좀 얻을 수 ���을까요?" "약이 시판되고 나면 얼마든지 샘플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FDA 의 인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요."


"조금만이라도 안 될까요?" 아담이 다시 물었다. "그저 포자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만이라도 보고 싶군요. 영업 사원 경력을 통해 그런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닥터 미첼은 이상하다는 듯이 아담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면 어떻게 구해드릴 수도 있겠지요." 아담은 화제를 돌리기로 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약품이 곧 시판될 예정이라면 벌써 인체실험은 마치신 상태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미첼의 표정이 밝아졌다. "벌써 수년간 인체에 약품을 투여해왔습니다.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정 신장애 환자들을 전세계에서 모았지요.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약품은 백 퍼센트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병동을 둘러보고 싶군요." 아담이 말했다. "내일 가보시게 될 겁니다. 오늘은 화학 실험실로 안내해드리지요. 세계에 서 몇 안 되는 첨단설비를 갖추고 있답니다." 아롤렌의 연구설비들은 어느 모로 보나 최상급이었다. 대학병원의 자금 사 정은 언제나 빡빡해서 연필 한 자루를 사는 데도 보조금지원 청구서에 항목 을 집어넣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러 실험실들을 들락거리다 보니 아담 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관심을 보이려 애썼으나 시간이 흐를수 록 그것도 힘들어져만 갔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숀버그 씨를 첫날밤부터 지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마침내 닥터 내흐만이 입을 열었다. "저도 동감입니다. 하지만 제 부서에는 30 분밖에 있지를 않았는데." 닥터 글로버가 말했다. "그거야 이곳이 볼 게 더 많으니까 그렇죠." 닥터 미첼이 맞받았다. "자 이제 그만들 하시죠." 닥터 내흐만이 양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무척 유익했었습니다." 아담은 과거시제로 감사를 표시하며 닥터 미첼이 그만두어 주기만을 바랐 다. 그들은 중앙복도를 걸어가 교각을 건넌 뒤 바깥쪽의 건물로 나갔다. 아담 은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또 하나의 교각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거대한 철문으로 입구를 막아놓은 세번째 건물이 감추어져 있었 다. "저 곳은 뭘 하는 곳입니까?" 아담이 물었다. "임상 병동입니다." 닥터 내흐만이 대답했다. "내일 그곳에도 가보시게 될 겁니다." 저곳에 정신장애자들을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담은 잠


시 주저하다가 내흐만을 따라 중앙현관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지 막 인사를 나누고 뿔뿔이 흩어졌다. 시간은 12 시 15 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쁜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 담은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눈동자 바로 뒤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 져왔다. 이제 이틀 안에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설마 콘포민의 샘플을 구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분석해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반데르머와 같은 의사들에게 자신들이 그런 약을 먹었 는지 스스로 확인해보도록 설득시키는 데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담 은 방문을 다시 열고 나가 반대편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달린 호마이카 위에는 '수영객용 엘리베이터'라고 새겨져 있 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아담은 종려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여러 가지 초목들이 무성하게 자란 바깥으로 나왔다. 구불구불한 길이 숲 사이로 뻗어 있었다. 길을 따라가던 아담은 결국 해변에 도착했다. 아담은 구두를 벗고 차가운 모래사장 위로 맨발을 내디뎠다. 보름달은 해 변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모래사장은 아주 매끈하고 보드라웠다. 살랑대는 바람에 요트에 매달린 밧줄을 흔들며 차임벨과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빌 셀리와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 그토록 매혹되어 있는 이유를 알 만도 했다. 클럽 건물을 지나며 아담은 식당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웨이터들 이 테이블을 정돈하며 내일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클럽으로부터 백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는 콘도미니엄이 새워져 있었다. 건 물은 스페이풍을 모방한 듯 회벽과 붉은 기와로 장식되어 있었고 불이 켜진 방이 몇 개 보였다. 그중의 한 방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앉아 텔레비전 을 보고 있었다. 주위의 환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며 이런 곳에서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 명한 사실이었다. 모든 제약회사들이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어가며 의사들 이 자기네 약품을 사용하도록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 지만, MTIC 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사들을 직접 조종할 수 있기를 바랬다. 아롤렌이 판매인력을 대폭 감축하기로 결정한 것은 하나 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담은 몸을 돌려 신발을 벗어둔 곳까지 되돌아갔다가 다시 건물안으로 들 어갔다. 복도를 반쯤 지날 무렵에 비상구 표시가 붙은 문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어보니 문 뒤로 계단이 지붕까지 뻗어 올라가 있었다. 아담은 안에 서 잠기지 않은가를 확인한 후, 계단을 밟고 올라가 꼭대기에 있는 문을 열 어보았다. 그 문 역시 잠겨 있지 않았으며 아담은 본관 건물의 꼭대기에 올 라서게 되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귀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 나갔다. 아담은 옥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세워진 4 피트 정도 높이의 담으로 다가갔다. 이곳에서는 연구 센터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주 거 지구의 건물들은 조그만 바위 언덕 맞은편에 세워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울창한 삼람이 펼쳐져 있었다. 연구 센터의 부지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아 담은 가려서 보이지 않는 건물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몸을 돌려 본관의 안쪽에 세워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에 비


치어 건물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아담은 거눌들이 창문없는 방이 없도 록 고려한 새로운 건축기법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물 사 이사이의 공간들은 수영장과 온실, 그리고 종려나무 등을 배치하여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두 건물은 모두 같은 높이로 지어져 있었으며 각 층마다 교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닥터 내흐만이 병동으로 이요하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는 제일 안쪽의 건 물은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담은 교각을 지나 건물로 건너가 반대편 을 내려다보았다. 세번째의 건물은 고작 3 층 높이밖에 안 되었다. 바로 아 래쪽에는 아까 실험실을 나가면서 보았던 철문으로 이어지는 교각이 있었 다. 이곳 옥상에는 안테나와 전선, 위성수신기 등이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었 다. 건물 안에 있는 통신 센터에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또 반구형의 채광창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건물 중앙에 있는 것이 가장 커 보였다. 그밖에도 냉방장치를 위한 냉각탑이 서 있었으며 아담이 본관건물 이 옥상으로 나올 때 상요했던 것과 비슷한, 허름한 출입구가 나 있었다. 중앙에 있는 채광차에서 나오는 빛으로 건물 전체가 미래적인 인상을 풍기 고 있었다. 잠시 동안, 아담은 대낮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콘크리트 벽에 손을 댄 체 서 있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아담은 한숨을 내쉬 며 푸에르토리코에 오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결코 이성적인 것이 아니었음 을 인정했다. MTIC 는 결코 아담이 자기네들의 비밀을 밝혀낸 뒤 곱게 돌아 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좌절과 실망에 싸인 채, 아담은 잠자리 로 돌아왔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16 날이 밝아왔다. 병동을 빨리 돌아보아야 하는 아담의 조바심에도 불구하고 병동 건물의 방문은 오후로 미루어져 있었다. 아침의 대부분은 버켓과 함께 보내야 했다. 버켓은 아담이 제니퍼와 함께 보내게 될 곳이라면서 콘도를 둘러보게 했고, 그 밖에도 MTIC 가 사원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을 위해 마련한 여러 가지 시설들을 보여주었다. 아담은 MTIC 가 자기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 도록 끈질기게 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버켓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주거 시설들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억지로 지어 보이는 데 도 엄청난 의지가 필요했다. 버켓은 마침내 아담을 린다 아론슨의 사무실에 바래다주고 떠나갔다. 린다는 밝은 표정으로 아담을 맞으며 아롤렌 사의 온갖 정보들을 수 분내 에 전세계에 전달할 수 있는 컴퓨터 터미널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또 아담


을 크로포드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는 아롤렌 선상학회를 책임지고 있는 인 물이었다. 아담은 그를 보는 순간 스마이스의 가짜 여권을 만들어준 대머리 사기꾼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크로포드는 선상학회에 참가한 의사들이 진료를 하고 있는 지역에 대한 그 래프 분석도를 보여주었다. 대부분은 뉴욕에 있었으며, 최근 몇 달 들어 시 카고와 로스엔젤레스에서도 회의에 참가한 의사들이 있었다. 참가한 총 인 원 중이 10 페센트 가량은 줄리안 클리닉에 모여 있었다. "선상학회가 무척 인기를 끌고 있군요." 아담이 당황감을 감추며 말했다. "인기를 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지요." 크로포드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현재 저희들이 가진 배로서는 수요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랍니다. MTIC 사에서는 이미 또 다른 유람선을 구입해 서해안 쪽에 가져다 놓았지 요. 올해 안에 그 배도 운행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총 다섯 척의 배를 운행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의료인들을 수 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셈입니다." 크로포드는 팔짱을 끼고서, '자, 이 정도면 어떠냐'는 투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어린 자식이 한 일을 자랑해대는 아버지와도 같은 태도였다. 아담은 역겨움을 느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의사들이 제약회사의 외 판원 노릇을 하게 될 판이었다. 닥터 내흐만이 아담과 점심식사를 같이 한 후 그를 닥터 글로버의 사무실 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글로버와 미첼은 누가 먼저 아담을 데리고 가느 냐는 문제로 한참 논쟁을 벌였다. "당신네들 두 사람은 도저히 한 방에 같이 둘 수가 없군요." 내흐만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담은 연구 센터의 시설이 서로 격리되어 있는 것이 이런 분쟁을 방지하 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경쟁적이다 못해 신경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곧 병동을 돌아볼 수 있 게 된다는 사실이 아담에게는 기쁠 따름이었다. 미첼이 다시 한 시간 동안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했고, 아담은 그에게서 어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만 을 고대했다. 제일 안쪽을 통하는 문 앞에 다다른 닥터 내흐만이 엄지 손가락을 조그마 한 전자 스캐너에 갖다댔다. 문이 열렸고 유리로 덮인 교각이 나타났다. 그 리고 그 너머로 아담이 전날 밤에 지붕에서 내려다본 경관이 드러났다. 복도 끝에 다시 문이 나타났고 닥터 내흐만이 다시 엄지손가락을 댔다. 문 이 열리고 아담이 코에 익숙한 병원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그들은 반구 형 채광창을 통해 햇빛이 밝게 비치는 3 층 높이의 현관을 지나 조그마한 수 술실들을 지나치며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의 끝에는 최신 원격감시 장치를 갖춘 간호사실이 있었다. 간호사 중의 한 명이 그들을 격리 병실로 안내해 주었다. 닥터 글로버가 환자들을 아담에게 소개해주었다. 닥터 글로버는 환자들을 일일이 설명해며 환자 각각의 자료에 대한 그의 놀라운 기억력을 마음껏 자랑했다.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부 내용들은 각 방마다 설치된 컴퓨터 터미널을 통해 조회할 수 있었다. 병실에는 태아의 섬세포를 이식받은 후 현재는 인슐린 튜여를 받을 필요가


젼혀 없게 된 당뇨병 환자들이 꽤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결과였 다. 병동의 한쪽 끝에는 중추신경계를 이식받은 환자들이 있었다. 아담은 자동 차 사고로 척수가 절단된 한 여자를 만났다. 1 년이 넘도록 전신마비 상태에 있던 그녀는 이제 태아의 중추신경조직을 이식받은 덕분에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다리의 운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단계까지는 이르 지 못했으나, 통상적인 치료법으로 이정도의 회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녀는 닥터 글로버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게 희망을 주신 것, 정말로 감사드려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글로버의 눈이 자부심으로 빛났다. 차트를 훑어보고 있던 닥터 미첼이 입을 열었다. "뇨에 박테리아가 증가하고 있군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닥터 글로버가 비난조로 대꾸했다. "자 이제 다른 곳으로 가보십시다." 닥터 내흐만의 말이었다. 닥터 내흐만이 모두를 데리고 다시 현관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들은 열 명 에서 열다섯 명 정도의 환자들을 더 보았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 음 층으로 올라갔다. 2 층은 정시노가 병동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이 번에는 닥터 미첼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수염과 머리를 쓰 다듬으며 타고난 선생의 기질을 발휘하여 환자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의 기본적인 치료방침은 정신성 약물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일단 정신성 약물을 통한 치료과정이 완료되면, 그 다음에는 행동통제의 방법을 사용하지요." 다시 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번에는 닥터 미첼이 손가락으 스캐너 에 갖다댔다. "이곳은, 물론 잘 아시다시피 간호사실입니다." 닥터 미첼은 이렇게 말하며 흰 블라우스와 파란 상의 차림을 한 두 명의 중년 간호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은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고, 그 옆에 앉아 있던 파란 블레이저 차림의 두 병원 보조원들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아담은 이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계���해서 복도를 따라 내려가며 미첼은 여러 가지 기계장치를 설명해주었 다. 마침내 닥터 글로버가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담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요입니다. 이분은 의대를 다니다 온 사람이 라구요." 미첼은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병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현대적인 시설을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정신과 병동의 내부는 대학벼원의


병동과 너무나 똑 같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배치와 설계를 제외한 다른 모 든 것들은 전혀 달랐다. 대학병원은 침실과 램프, 심지어 천정까지도 모두 제때에 보수를 하지 않아 당장 내려앉을 듯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곳의 병실은 마치 막 개원한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 다. 환자들도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한결같이 가슴 부분까지 담요를 덮고 있었다. 그들은 깨어 있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눈 만이 병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의사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아담은 이렇게 평화스러운 정신병동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아담의 눈길이 환자들의 공허한 표정 위에 머물렀다. 닥터 미첼은 다시 끝 도 없는 강의를 해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얼마나 그의 말을 더 들어주어야 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때 아담의 시선이 오른쪽 두번째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고정되었다. 그것은 앨런 잭슨이었다! 아담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는 앨런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 다. 아담은 얼굴을 숨기기 위해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았을 때 앨런의 표정은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 다. 약에 깊이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담은 좀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ㄲ고 오른팔에는 정맥주 사를 통해 맑은 액체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담은 피요르드 호가 그저 께 푸에르토리코에 기항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그들이 앨런 에게 이렇게 약을 많이 먹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앨런의 수술은 처음 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미첼이 환자들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아담이 앨런을 가리키며 물었다. " 이 환자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닥터 미첼이 닥터 내흐만을 바라보았다. 내흐만이 고개를 끄덕여보였고 미 첼은 앨런의 침대에 붙어 있는 차트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오하이오 주 샌듀스키의 로버트 아이즈만이군요. 치유불가능한 측두엽 간 질 환자로서 폭행 전과가 있으며 통상적인 치료법에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 지 않았습니다. 아이즈만은 보석이 불가능한 상태로 정신병자 교도소에 수 감되어 있다가 아롤렌 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여기에 오래 있었나요?" 아담이 물었다. "며칠 안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닥터 미첼이 말꼬리를 흐렸다. "잠깐만요." 아담이 미첼의 말을 가로막았다. "전체적인 것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더 쉬울 때가 있지요. 이 사람은 어떤 치료를 받았습니까? 붕대로 미 루어보건대 일종의 뇌수술을 방은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미첼이 다시 한번 닥터 내흐만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그의 병력을 보고 나서 우리는 환자가 치유불가능한 상태라는 결론을 내 렸습니다. 그래서 콘포민을 한동안 투약시킨 뒤에 대뇌변연계에 초소형 너


극을 삽입시킨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환자를 치유시킬 가능성이 있는 유일 한 희망입니다. 황소의 머리에 전극을 심어서 곡격성을 없애는 고전적인 실 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그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어낸 것입니다. 황소가 사람을 해치지 않게 하는 것 그 이상을 우리는 할 수 있 답니다." 아담은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이즈만 씨의 치료는 이제 막 시작 단계라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 닥터 내흐만이 덧붙였다. "그가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환경조절(Conditioning) 과정을 밟게 됩니다. " "그렇습니다." 닥터 미첼이 내흠나의 말을 받았다. "그 치료는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이제 나흘 정도 후면 이 환자는 퇴원할 수 있게 되지요. 환경조절로 가서 우리가 하는 작업이 어떤 것인지 직접 보 시지 않겠습니까?" 앋담은 앨런의 공허한 표정을 다시 한번 바라본 뒤 의사들을 따라 복도를 내려갔다. "방금 보신 아이즈만 씨는 주환경조절(Operant Conditioning)과 역환경조 절(Adversative Conditioning)의 과정을 교차적으로 밟게 됩니다." 닥터 미첼이 말했다. "컴퓨터의 통제를 받는 프로그램이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체계를 감지해내 서 그것이 외부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기 전에 다른 사고로 전환시키는 것이 지요." 아담은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바람직하지 못한 사고 체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아롤렌의 제품을 사용하기를 꺼 리는 태도라든지 혹은 개업의 생활에 대한 만족감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리 라. "이곳이 저희가 설계한 환경조절실 중의 하나입니다." 미첼은 이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어 아담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곳은 피요르드 호에서 본 극장의 축소판이었다. 맞은 편 벽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있었고 그 앞에는 전극과 가죽띠가 달린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 다. 아담은 공포에 질린 채 고개를 돌렸다. 미첼이 문을 닫았다.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까?" 아담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것 역시 프로그램의 일부로 입력을 해놓았습니다. 가장 바 람직한 성격을 선택해놓았지요." "지능은 어떻게 되지요?" "아주 미미한 부작용이 따르긴 합니다." 아담을 다시 병실 쪽으로 안내하며 닥터 미첼은 설명을 계속했다. "창조성 부분에서 약간의 손실이 있음이 밝혀졌지만, 기억력은 변함이 없 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부분은, 특히 기술적인 정보에 대해서 기억력이 신장되기도 했습니다." 아담은 앨런을 지나치며 그를 바라보았다. 앨런의 표정은 아까 그대로였


다. 그들은 이 사람을 완전히 살아 있는 시체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연구는 계속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응용에는 한계가 있지만 말입니다." 닥터 내흐만이 사람들과 함께 철문을 통과하며 설명했다. "태아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더 많은 응용분야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겁니 다." 닥터 글로버의 말이었다. "그건 당신 의견이지요." 미첼이 맞받았다. "우리가 완성시키고 있는 행동통제 기술을 이용한다면 격리병동이나 감옥 같은 것들이 필요 없어질 때가 올 겁니다. 실제로, 미국정신보건협회와 교 도소관리위원회에서도 우리 실험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답니다." 그들은 반구형 채광창이 있는 3 층 높이의 현관으로 다시 나왔다. 닥터 글 로버는 미첼의 입을 막으려고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그는 태아학 연구를 지 원하는 정부기관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아담은 그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MTIC 는 독립적으로 활 동하고 있는 모든 개업의들을 분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더이상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전문적업인이 아니라 MTIC 와 아롤렌 제국에 봉사하는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담." 닥터 내흐만이 그를 불렀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계십니까?" "네, 물론이지요.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놀라시는 게 당연하지요." 내흐만이 말했다. "이제 우리 연구 센터 내의 위락시설에서 즐거운 시간을 좀 보내도록 하십 시오. 해변에서 몇 시간 계시다 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겁니다. 그러 면 8 시에 식당에서 뵙기로 할까요?" "수술실에 한번 들러보면 안 될까요?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요." "수술을 참관할 수는 없습니까?" 닥터 내흐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관찰실을 따로 설치해 두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이곳에 계시기로 결정을 내리신 뒤라면 얼마든지 가보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온 후, 아담은 어떻게 해서든지 확실한 증거 물을 손에 넣은 후 빠져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 다. 제니퍼가 중절수술을 받지 않게 설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의료인들 로 하여금 MTIC 의 음모를 중단시키도록 만들 수 있는 그런 증거물을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몇 시간 동안을 햇볕 아래에 누워 있던 아담에게 갑자기 한 가지 아이디어 가 떠올랐다. 그것은 대담하고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지만 만일 성공 만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칵테일 파티와 저녁식사는 아담에게 고문에 가까웠다. 닥터 내흐만은 가능 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아담을 소개하려 했으며, 그가 피로에 지쳐 방으로


도망쳐왔을 때는 11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정까지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한참을 누워 있 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군청색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가방을 열어 오후 동안 준비해두었던 물건들을 확인해보았다. 11 시 55 분이 되었다. 밀려드는 긴장감을 더이상 건뎌낼 수 없었던 아담은 방을 나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달빛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대낮처럼 밝았다. 그는 교각을 건너 두번째 건물로 넘어간 다음 반대편 쪽 으로 가 제일 안쪽의 3 층짜리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채광창이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아담으로서는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 다. 아담은 가지고 온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열어 낮에 요트 안에서 훔쳐 온 로프 한 다발을 꺼내고는 적당한 환기통을 찾기 시작했다. 환기통이 지 붕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지를 확인한 후, 그곳에 로프를 묶고 나머지 부 분을 건물 아래의 교각이 있는 곳으로 떨어뜨렸다. 등반 경험도 없는 데다가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아담은, 모든 용기를 동원 해 벽을 오른 후 다리를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잠깐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린 다음, 밧줄을 잡고 벽으로 몸을 밀었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조금씩 조 금씩 아래로 내려가 마침내 교각의 지붕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는 손과 무 릎을 지붕 위에 짚고 건물까지 기어간 다음 중앙에 있는 채광창으로 다가갔 다. 아래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담은 동작을 멈추었다. 천천히, 채광창의 가장자리로 얼굴을 가져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아래에서는 SF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채광창 아래에는 엄 청나게 큰 수술실이 만들어져 있었고, 의사나 간호사 대신 기계가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로보트처럼 생긴 기계들은 긴 팔로 한번에 두 명 씩 환자들을 상대했다. 방 한쪽 끝에는 다른 환자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누워 있었으며 머리는 입체 고정장치로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환자가 넷밖에 안되었지만 이 시 스템은 적어도 한번에 열댓 명을 수송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너무도 질려버린 나머지, 앋담은 채광창에 몸을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벨트 위치에 누워 있던 환자 하나가 밀 려나가 컴퓨터 단층촬영 장치로 들어갔다. 촬영장치가 환자의 머리 주위에 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나자, 로보트의 팔이 뻗어나와 반데르머의 흉터가 있던 곳과 똑같은 위치에 구멍을 뚫었다. 피가 흘러나와 환자의 머리 아래쪽에 고이기 시작했다. 로보트에서 또 다 른 팔이 나오더니 천천히 환자의 두대골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채광창을 통해 드릴이 회전하는 소리가 어렴푸싱 들려왔다. 다시 단층촬영 장치가 작 동하기 시작했고 세번째 팔이 뻗어나와서 두개골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컴 퓨터 단층촬영 장치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뒤 전극을 삽입하도록 설 계된 시스템이었다. 그때 수술실의 왼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아담은 재빠르게 몸을 뒤로 숨겼다. 유리로 칸막이를 한 방에 몇 명의 사람들이 제어장치를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만일 그들이 고개를 한번이라도 들었더라면 곧바로 들켜버렸을 판이었다. 아담은 몸을 엎드린 채 이번에는 채광창의 가장자리 를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들킬 염려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닥터 내흐만이 닥터 미첼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수술이 끝난 환 자는 다음 환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옆으로 밀려나왔다. 아담은 역겨움을 느꼈다. MTIC 와 아롤렌은 엄청난 규모의 정신 수술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다. 몸을 굽힌 채 채광창에서 멀리 벗어난 아담은 옥상을 가로질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들려오는 자동화 로보트의 소음을 제외하고는 주위는 조용했다. 아담은 재 빠르게 2 층으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은 환 경조절실의 바로 옆이었다. 그는 어두운 병동을 향해 뻗은 복도를 바라보았 다. 병동의 맞은편 끝에 있는 간호사실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직을 서고 있는 간호사는 지금 무언가 먹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바로 뒤 에는 뻣뻣하게 몸이 굳은 채로 두 명의 보조원이 앉아 있었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아담은 병실 안으로 들어가 바로 옆의 침대 아래 에 몸을 숨겼다. 어렴풋한 조명 속에서 한 환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아담은 그가 소리를 지르지나 않을까 초조해 하며 가만 히 기다려보았으나 그대로 누운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아담에게 시선을 고 정시키고 있었다.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아담은 침대 아래를 기어 병실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끝에서 두번째의 침대까지 도착한 그는 고개를 들어 간호사실 쪽 을 돌아다보았다. 거기는 간호실에서 무척 가까운 곳이었고 간호사는 여전 히 샌드위치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따. 두 명의 보조원들도 꼼짝않고 앉 아 있었다. 이제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담은 침대 위에 누운 환자를 바라보았다. 앨런은 전혀 그를 알아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앨런,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려고 해요." 아담이 속삭였다. "날 따라올 수 있겠어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차라리 수액 병��� 대고 이야기하는 게 나아보였다. 아담이 앨런의 팔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정맥주사 바늘을 뽑아내는 동안에도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따. "내가 몸을 일으켜주면 걸을 수 있겠어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앨런을 덮은 담요를 거머쥔 아담은, 플래쉬 불빛이 병실의 천정 위에서 춤 을 추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그대로 덮어놓았다. 간호사 하나가 문 앞의 스캐너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있었다. 문이 쉿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아 담은 바닥에 엎드려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간호사는 복도를 지나가며 환자들에게 플래쉬를 비추어보았다. 그녀가 앨 런의 침대 옆을 지나가는 동안, 아담은 숨을 죽이며 정맥주사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걸어갔고 복도 끝에 다다 른 다음 몸을 돌려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들어온 문으로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은 간호사가 다시 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아담은 행동을 게 시한 시간이 적절했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앨런을 덮은 담요를 걷어내고, 그의 팔을 끌어 침대 가장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천천히 앨런의


하체를 들어 바닥으로 내렸다. 앨런의 다리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병실 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당직 간호사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 다. "바닥을 기어갈 수 있겠어요?" 아담이 앨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앨런의 손을 붙잡고는 잡아끌어 보았다. 놀랍게도 앨 런이 반응을 보이더니 이내 혼자 힘으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시범을 보 여주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병실의 맞은편 끝을 향해 기어갔다. 간호사실은 조용했다. 이제 15 피트 가량이 남아 있었는데, 그동안이 가장 위험했다. 그들은 침대 밑에서 기어나와 계단을 향해 복도를 지나기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고개만 이쪽으 로 돌린다면 바로 들켜버릴 판이었다. 겨우 문있는 데까지 도착한 아담은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계단으로부터 불빛이 비치자 아담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곧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더 열어 제친 후 앨런에게 문을 지나가도 록 다그쳤다. 잠시 후 그들은 병실을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담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한번 켠 뒤, 허리를 굽혀 앨런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처음에는 불안한 자세를 보이던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의 균형 을 어느 정도 찾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요?" 아담이 물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으나, 분명하지는 않았다. "우린 지금 여기서 나가려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담은 앨런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앨런은 처음에는 발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한는지도 모른는 채 끌려가다가 3 층에 다다르 때쯤 되어 서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몸을 좀 움직이고 나야 행동이 부드럽게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제 기운을 거의 되찾은 듯했다. 정맥주사를 통해 계속해서 일정량의 진정제가 들어갔던 것이 분명했다. 옥상으로 나온 앨런은 이제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듯했으며, 눈동자의 동 공도 이제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하지만 앨런이 두번째 건물까지 3 층 높 이나 되는 곳을 로프로 붙잡고 오를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것 은 아담 자신에게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탈출 계획을 더욱 주도면밀 하게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두 건물 사이의 공간을 내려다보던 아담은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사방이 건물로 막 힌 정원에서 탈출할 길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람들이 앨런이 사라진 것을 알아내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고 더이상 좋은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은 로프의 끝을 붙잡아 앨런의 팔에 매었다. 그리고 자신은 밧줄을 붙들고 건물의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가까스로 밧줄에서 손을 떼어 옥상의 가장 자리에 매달렸고 다리를 걸 친 만한 곳을 찾아헤매며 허공을 차다가, 결국 옥상 위로 올라설 수 있었 다. 호흡을 가쁘게 몰아 쉬며, 아담은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앨런은 건물 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담은 로프를 당겨보았다. 그의 힘으로는 앨런을 겨우 몇 인치 정도밖에


끌어올릴 수가 ㅇ벗었다. 뭔가 지렛대 작용을 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때 이집트의 노예들이 피라미드를 만들면서 돌을 끌어올리는 그림을 떠올렸다. 그들은 짐을 진 가죽처럼 줄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아담은 같은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옥상 반대편으로 끌고 가서 처음에 로프 를 메어놓았던 환기통에 다시 줄을 감아 매었다. 그리고 다시 옥상 가장자 리로 달려가 보았을 때, 앨런은 삼분의 일 정도 끌려 올라온 상태였다. 아담은 같은 동작을 세 번 반복했고, 네번째 줄을 잡아당기는 동안 앨런이 옥상 가장자리의 벽에 도착했다. 아담은 몸을 아래로 뻗어 앨런의 옆구리쪽 을 잡아당기면서 그의 발을 붙잡았다. 아담은 힘껏 그를 끌어올렸고 두 사 람은 옥상 위에 함께 나동그러졌다. 가까스로 숨을 가다듬은 아담은 밧줄을 풀어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뒤 앨 런을 일으켜 세웠다. 앨런의 오른쪽 볼에 긁힌 상처가 난 것을 제외하고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아담은 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고, 앨런과 함께 옥상을 가로질러 계단을 내 려갔다. 계단 위를 걷는 동안 발을 자꾸 헛디딘 쪽은 오히려 아담이었다. 아담의 팔은 축 늘어져 있었고 정강이는 지쳐 마구 떨리고 있었으며 손바닥 은 벗겨져 있었다. 아담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앨런을 침대 위에 눕히고는 그 옆에 고꾸라져버렸다. 너무 무리하게 힘을 써버려 완전히 기진 맥진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좀더 쉬고 싶었으나 언제 그들이 빈 침대를 발견하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 다. 아담은 앨런이 입고 있던 병원 가운을 벗기고 재빨리 다른 옷으로 갈아 입혔다. 다행히, 두 사람의 체격은 거의 비슷했다. 아담은 앨런을 다시 침 대에 눕히고 그가 다시 잠을 이룰 수 있을만큼 약기운이 남아 있기만을 바 랐다. 아담은 만일을 위해 문을 잠그고 나가서 타고 갈 만한 차가 있는지 둘러보기로 했다. 복도를 잰 걸음으로 걸어가며 탈출 계획을 신중히 세워놓 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후회했다. 셀마 파크먼은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하고 약품 보관함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1 시 15 분밖에 되지 않았다. 당직근무가 끝나려면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었는데 벌써 그녀는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해 하고 있었다. 두 보조원이 앉아 있는 쪽을 돌아보며, 그들의 참을성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연구 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후로 셀마는 따분한 일과에 지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는 그들에 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산책 좀 하고 올게요." 그녀는 로버트 루들럼의 소설책을 덮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대답이 없 었다. "제 말 안 들려요?" 셀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병실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세요." 셀마는 이렇게 말하고 구두에 발을 끼워넣었다. 셀마는 자신이 자리를 비 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지껏 무슨 일


이 있은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이곳에서 근무하기로 결심하던 때만 해 도, 이 자동인형 같은 환자의 유모 역할보다는 좀더 활발한 일을 기대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호바트 정신병원의 좋은 자리를 버리고 푸에르 토리코까지 찾아온 그녀는 자신이 실수를 해도 단단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 했다. 셀마는 간호사실을 나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엘리 베이터를 타고 수술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걸어갔다. 닥터 내흐만 이 셀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루해요?" 그가 말했다 "좀더 흥미있는 스케줄을 마련해줘야겠구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셀마의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가 내흐만의 비위에 거슬 렸고, 내흐만은 콘포민 투약 대상자 명단에 그녀를 올려놓은 상태였다. 셀마는 스크린 위에 컴퓨터 영상이 떠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자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래층에서만큼이나 지루 해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겠다고 인사를 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 다. 셀마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호사실로 돌 아왔다. 보조원들은 그녀가 떠날 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병실을 돌아볼 시간이 아직 안 되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플래쉬를 집어들고 병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셀마가 하는 일은 결코 힘들다고 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 환자들 중의 반 정도는 팔에 정맥 주사를 꽂고 있었고 근무 시간 동안 두 번만 환자들을 확 인하면 되었다. 그것 말고는 침대마다 플래쉬를 비추어보며 환자가 아직 살 아 있는지 점검하는 게 고작이었다. 셀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플래쉬가 빈 베개 위를 비추고 있 었다. 셀마는 몸을 굽혀 바닥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환자가 침대에서 떨어 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좀 달라 보였다. 침대 옆에 있는 차 트로 다가가 환자 이름을 확인했다. 아이즈만이었다. 셀마는 아직도 환자가 주변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간호사실로 돌아 가 병실의 불을 켰다. 형광등의 불빛으로 병실은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셀마는 보조원들을 부르고 다시 방을 살펴보았다.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 었다. 아이즈만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셀마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보조원들에게 계속해서 찾아보라고 지시한 다음, 수술실을 향해 급하게 발 걸음을 옮겼다. "환자가 없어졌어요." 병동을 막 나서려 하더 내흐만과 미첼을 발견한 그녀가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야." 닥터 미첼이 중얼거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셀마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즈만의 침대가 비어 있고 병실을 뒤져봐도 나오질 않았어요. 직접 내려가셔서 보시는 게 좋겠어요." "아이즈만이라면 어제 수술을 받았던 환자인데 콘포민 주사를 맞고 있지


않았나요?" 내흐만이 물었다. 그는 미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병실로 들 어간 셀마가 이것 보라는 듯한 태도로 빈 침대 위를 가리켰다. 닥터 미첼이 정맥주사를 집어들어 바늘끝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액체가 조 금씩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직 멀리 못 갔을 거요." 환자가 숨을 만한 곳을 다시 한번 샅샅이 훑어본 뒤, 닥터 내흐만과 미첼 은 태아학 연구실과 옥상, 그리고 정원을 뒤졌다. "보조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야겠어. 당장 아이즈만을 찾아내야 한다구." 닥터 내흐만이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은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상태라구요." 닥터 미첼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환자를 지금 당장 찾아내지 못할 경우 삽입한 전구를 작동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그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닥터 내흐만이 물었다. 미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환자는 환경조절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신호를 보내보았 자 행동을 통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가 없어요. 단지 고통이나 쾌감을 일으 키게 할 뿐이지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누구에게 위험하다는 말이오? 환자를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 주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닥터 내흐만이 물었다. "그건 저도 분명히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군요. 가능한 한 빨리 찾아낼 수 있어야 할텐데. 콘 포민 투약량을 잘못 조절했는지도 몰라요. 어쨌든간에 보조원들을 부릅시 다. 콘포민을 채운 주사기를 휴대하도록 해서 발견하더라도 환자가 말썽을 피우지 못하도록 지시하시오." 아담은 갈수록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본관 건물 맞은편의 주 차장에는 여러 대의 차들이 서 있었으나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사 용할 방법이 없었다. 아담은 바깥 경비가 삼엄한 만큼 연구 센터 안의 사람 들은 오히려 주의깊에 행동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그것은 오 산이었다. 아담은 다시 한번 엉성한 계획을 세운 자신을 책망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채, 아담은 해변으로 통하는 좁은 길을 지나 클럽으로 다가갔다. 클럽하우스 뒤쪽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었다. 아담은 행운을 바라며 차들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그때 창구 입구 맞은편에 커다란 포트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트럭의 문은 열려 있었다. 아담은 운전석에 뛰어올라 시동장치를 찾기 시 작했다. 그러나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경보기가 귀를 찢을 듯한 사이렌 소 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허겁지겁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클럽의 문이 열렸다. 아담은 건물을 돌아 소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경 보기는 곧 멈추었으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가 있는 쪽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로든지 움직여야 할 상황이었다. 아담은 요트의 돛대가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해변 쪽으로 몸을 날려 제일 가까운 요트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내들이 클럽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보기가 잘못 울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날이 밝기 전에 앨런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내야 했고, 그러기에는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아담 은 환자가 없어진 것을 이제는 누군가가 알아내지 않았을까 걱정하기 시작 했다. 닥터 내흐만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수척해 보였고 눈동자도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 건물 안에 있을 텐데요." 닥터 미첼이 말했다. "환자가 건물 안에 있다면 벌써 찾지 못했을 이유가 없지 않소." "어쩌면 저원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곳은 아직 샅샅이 뒤져보지 않았습 니다." "지금 스무 명의 보조원들이 건물을 뒤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숨어 있다면 지금쯤은 찾았다고 연락이 왔어야지요." 닥터 내흐만이 말했다.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만 기다려봅시다." 닥터 미첼은 누구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다. "어쩌면 벌써 병동을 벗어났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환자가 바깥에서 발 견되다고 하면 우리에게 대단히 안 좋은 일이 될 거요." "바깥으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비실 앞의 문을 열수 없을 테 니까요. 그리고 파크먼 양도 이곳에 계속 있지 않았습니까. 파크먼 양은 그 전에 병실을 돌 때는 분명히 있었다고 했습니다." "수술실에 올라와 있는 동안에는 분명히 병실을 비웠었지요." 내흐만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 동안이었어요. 그리고 보조원들도 그동안 아무 일 없이 조용했다고 했구요." 셀마가 대답했다. "본관 전체를 뒤져보아야 할 거요." 닥터 내흐만이 셀마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소 이야기했다. "아이즈만 혼자서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병동 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도왔을지도 몰라요. 만일 그렇다면, 전극을 작동 시킨 다음 송신기로 아이즈만을 추적하는 방법을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소." "효과가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먼 거리에서 작동시켜본 일이 없거든요." 닥터 미첼이 말했다. "그럼 지금 해보시오. 그리고 경비원에게 연락해서 아무도 정문을 통과시 키지 말라고 지시해요." 닥터 미첼은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 경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 프로그램 책임자인 에드가 호프스트라에게 연락을 해 긴급한 일이 생 겼으니 통제실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전화를 끊고 미첼은 내흠나과 함 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통제실은 수술실과 같은 층에 있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MTIC 가 운영하


는 메인 컴퓨터가 유리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흰 코트를 걸친 대여섯 명의 엔지니어들이 컴퓨터의 작동과 관리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10 분쯤 지나서 호프스트라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도 잠에서 덜깬 듯 눈 이 퉁퉁 부어 있었다. 미첼은 곧장 문제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환자의 전극을 작동시킬 수만 있다면 경비원들이 송신기를 이용해서 그를 추적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먼 거리에서도 크게 가 능할 거냐 하는 거요?"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호프스트라가 단말기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가 아이즈만의 이름을 쳐넣 자마자 컴퓨터는 에러 메시지를 보내며 환자의 치료과 완료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출력해 보였다. 호프스트라는 컴퓨터의 대답을 무시해버렸다. 통제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단말기를 주시했다. 잠시 후 스크린에 '전극 장동 작업중'이라고 나타났고 또 한참 뒤에는 '작도 ㅇ 개시'라는 신호가 떨어졌다. "지금까지는 잘 되어가고 있군요." 호프스트라가 말했다. "이제 환자의 배터리가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알아보지요." 호프스트라는 아이즈만의 전극으로부터 신호를 보내게 하라는 명령을 입력 해넣었다. 신호는 컴퓨터가 포착해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약했다. 호프스트라가 의자를 빙 돌리며 말했다. "자, 전극은 이제 작동되었지만 신호가 너무 약하군요. 이걸로 환자의 위 치를 추적해낼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본관으로 돌아갈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담 자신으로서도 알수가 없는 일이었다. 본관 1 층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으며 푸른 블레이저 차림 을 한 사내들이 주사기를 손에 들고 떼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제 니퍼와 곧 시행될 중절수술에 대한 생각을 하면 바깥에 그렇게 마냥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아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로 비로 걸어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 층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조용했 다. 아직 손님들의 방은 뒤져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가 불을 킨 아담은 앨런이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잠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빠져나 가야 합니다." 아담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앨런을 일으켜 앉힌 후 머리에 감은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수술 실의 자동화된 기계가 머리 양쪽의 극히 일부분만 건드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담은 빗을 들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빗겨내려 깎인 부분을 가렸 다.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앨런을 일으켜 세우고 살그머니 문을 열어보았다. 보조원 셋이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이상 머뭇 거리다가는 기회를 아주 놓쳐버릴 판이었다. 그들이 방 안으로 모두 들어가 자마자 아담은 앨런의 손을 잡고 수영객용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문이 닫


히는 순간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하 지는 않았다. 아담은 1 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아담의 가슴을 내려앉게 하 는 일이 일어났다. 하강을 시작하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3 층에서 멈춘 것 이었다. 아담은 앨런에게 눈길을 던졌다. 붕대를 끌어낸 뒤 앨런은 훨씬 보기 좋아 졌지만 그의 공허한 표정으로 아직은 약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 다. 문이 열리면서 얼굴에 흉터가 난 보조원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기계적으로 아담과 앨런을 번갈아 쳐다본 후 고개를 돌려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그의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 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아담은 숨을 멈추었다. 엘리베이터가 2 층을 지나갈 때쯤에서 사내는 그들의 존재를 갑자기 깨닫게 된 듯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으며 왼손에는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아담은 반사적으로 잽싸게 주사기를 든 팔을 잡아 꺾었다. 그리고는 그를 앨런 쪽으로 밀어붙였고 두 사람의 몸이 부딪치는 순간 사내의 등에 주사기 를 찌른 뒤 손바닥으로 눌렀다. 세 사람 모두 동시에 엘리베이터 바닥에 쓰러졌고 앨런이 제일 밑에 깔린 채 한 덩어리가 되었다. 사내는 등을 젖히면서 몸을 옆으로 굴리고 입을 벌 려 소리를 지르려 하였다. 아담은 손으로 사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엘 리베이터가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그 보조원은 아담의 팔을 강한 힘으로 틀어잡고 자신의 입을 막은 손을 떼 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아담은 끈질기게 버티었다. 그때 사내의 눈동자 가 갑자기 위로 돌아가더니 순간적으로 아담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면 서 흐늘흐늘해졌다. 아담은 그의 입에서 손을 떼고 나서 다시 공포에 휩싸였따. 몸을 뒤로 제 쳐 사내를 쳐다보니 눈은 완전히 머리 위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성형수술을 받았는지 얼굴이 무척 망가져 보였지만, 그래도 아담은 낯익은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퍼시 하먼이었다. 잠시 동안 아담은 온몸이 마비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히려 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앨런의 몸을 끼 워놓고 하먼을 끌고 나와 무성한 수풀 속으로 던져버렸다. 아담은 잠시 하 먼을 함께 데리고 갈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으나 앨런 한 사람을 끌고 가기 에도 벅찬 형편이었다. 앨런을 데리고 문을 나와 해변으로 향하는 길을 따 라 걸어갔다 콘도미니엄 부근에서 차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뿐이었다. 달의 일부부닝 구름에 가려 있었기 때문에 전처럼 밝아 보이지 않았으며 종려나무와 소나무들이 모래사장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클럽으로 가던 중, 아담은 그가 몸을 숨긴 일이 있던 요트와 마주치자 갑 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한 가지 착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담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선원 행세를 할 만큼 배에 대해서 많이 알 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작은 배를 부리는 법은 알고 있었다. 다 행히 요트의 주인은 돛을 벗겨내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본관 건물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더이상 머뭇거리고 잇을 시간이 없었 다. 아담은 일단 요트를 물가로 끌고 갔다. 그런 다음 앨런을 배에 태워 캔 버스 천 위에 눕게 한 후 밧줄로 돛대에 묶었다. 아담은 다시 바다에 뛰어 들어 배가 완전히 모래사장을 벗어나 물 위에 뜰때까지 밀었다. 파도는 그 다지 높지 않았으나 배를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바둣물이 허리에까지 차 오르게 되자 아담은 배 위로 뛰어올랐다. 애초의 생각은 곶을 돌아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가지 배를 저어가는 것이 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결국 돛을 올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아담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돛을 달아 올렸다. 벗겨진 손바닥에 통 증이 느껴졌으나 계속해서 밧줄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돛은 바람을 안으며 부풀어 올랐고 활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 면서 어느 정도 안정감이 생겼다. 아담은 몸을 돌려 키를 제 위치에 놓은 후 레버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잠시 동안 배가 해변으로 다시 밀려가는 듯했으나 이내 바람을 가르고 파 도를 헤치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 손으로 앨런을, 다 른 한 손으로 키를 붙잡고 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배가 클럽하우스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방향을 함부로 바꾸 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커다란 파도를 와전히 넘어서 자, 아담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쉬었다. 마침내 배는 곶을 돌아 추적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아담은 별들이 흩뿌려진 열대의 하늘을 배경으로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돛 을 바라보았다. 서쪽에 뜬 달은 조각구름들 사이로 들락거리고 있었으며 달 아래에는 뭍 위에 바위산이 검은 시루엣을 드리우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경관이엇다. 그때 대서양으로부터 몰아쳐오는 거대한 파도가 배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아담은 다시 키를 잡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큰 돛의 밧줄을 조 인 다음 조그만 삼각돛을 올리자 배는 훨씬 빠른 속력으로 물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몇시간만 지나면 해변에 도착해 도움을 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자 아담의 기분이 낙관적으로 변해갔다. 닥터 내흐만은 대단히 노한 표정으로 컴퓨터에서 고개를 돌렸다. 해리 버 켓이 그에게 수색 겨로가를 보고하러 와 있었고, 내흐만은 그들의 허술한 보안 조치에 불만을 터뜨렸다. "40 명의 인원과 수백만 달러짜리 경비장치를 가지고서 알아냈다는 것이 겨 우 보조원 한 사람이 기절해 있고 숀버그 씨가 객시에서 사라졌다는 것뿐이 오?" "그렇습니다." 버켓이 대답했다. "그 보조원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주사기에 찔렸다고 하던데." "네. 얼마나 세게 ㅉ리렸는지, 바늘이 부러져서 그의 몸에 박혀 있었을 정 도였습니다." 버켓은 잣니이 완벽한 수색작업을 펼쳤음을 강조하려 애썼으나 내흐만은 막무가내로 화만 내고 있었다. 내흐만으로서는 버켓이 그토록 많은 인력과 첨단 장비를 가지고도 약에 잔뜩 취한 환자 하나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그 덕분에 처음에는 귀찮은 일로만 여겨지던 사건


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확대되어가고 있었다. 닥터 내흠나은 벌써 열 번이나 불이 꺼졌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붙였다. MTIC 에 보고를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일 문제가 커지게 된다면 일찍 보고하는 것이 휠씬 이로운 선택이 될 것 이다. 하지만 그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입 다물고 조 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철책에 접근한 흔적 같은 건 찾지 못했소?" 내흐만이 물었다.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닥터 미첼이 전화를 한 이후로 정문을 통과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버켓은 이렇게 말하며 미첼을 바라보았다. 그는 초조한 듯이 자신의 손톱 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 내흠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류가 흐르고 있는 철책은 도저히 넘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환자가 아직도 연구 센터 안에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로서는 버켓과 경비원들의 능력을 믿을 수가 없어 게속 그들에게 이 일을 맡겨놓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공항에 몇 명을 보내서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들을 점검해보라고 하시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요. 환자는 절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버켓이 대답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알 바 아니오." 내흐만이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처음에 사람들은 환자가 병동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지만 분명히 빠져 나갔잖소. 자 어서 공항을 지키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버켓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환자가 병동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던 바로 그 당사자인 닥터 및레 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송신기의 출력이 너무 약해서 환자를 추적할 수 없다고 해도, 전극을 자 극시킴으로써 그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닥터 내흐만이 호프스트라에게 눈길을 던졌다. "가능합니까?" "모르겠는데요." 호포스트라의 대답이었다. "신경생리학적으로 전극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걸 자극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가 없어요. 어쩌면 환자 가 죽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자극할 수는 있는 거 아니오?" 내흐만이 다시 물었다. "아마 그럴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려요. 기존 프로그램은 환자가 바 로 옆에 있다는 걸 가정하고 짜여져 있거든요." "얼마나 시간이 걸린다는 거요?" 호프스트라는 손을 양쪽으로 들어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한 시간 내로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극을 작동시키는 건 금방 하지 않았소?" "그랬지요. 하지만 전극을 가하는 건 훨씬 복잡한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럼 해보시오." 닥터 내흠나은 이렇게 말하고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버켓을 향해 손을 들 어올렸다. "저 사람이 거느린 패거리들을 믿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담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배에 올라탄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 다. 연구 센터가 해변의 북쪽 곶을 돌고 난 이후로, 이따금 커다란 파도가 몰아쳐 와 배가 부딪치며 캔버스 천 위를 덮쳤다. 수 톤은 되어 보이는 거 대한 물결이 밀려왔을 때 아담은 이대로 바닷속에 묻혀버리나 보다 하고 생 각했으나, 마치 물 위에 뜬 코르크처럼 배는 물결 위를 오르락내리락 할 뿐 이었다. 그들은 북쪽 해안을 따라 정서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 암초 가 숨어 있을런지 알 수가 없었기 땜누에, 아담은 해안에서 2, 3 백 야드의 거리를 꾸준히 유지했다. 앞으로 닥쳐올 어려운 상황들을 상상해보았다. 배 밑의 검푸른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을 상어들의 존재가 점점 그를 불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려 커다란 검은색 지느러미가 물을 가르며 따라오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곤 했다. 아롤렌 연구 센터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아담은 뱃머리를 뭍을 향해 돌렸다. 15 분 정도가 더 지나자 해안을 밝히고 있는 불빛들이 보 이기 시작했다. 이제 해안의 파도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가까워지자, 아담은 뭍에 오른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더이상 생각을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명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었다. 갑자기 앨런이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 잡 고 밤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담은 전혀 손을 쓰지 못한 채 안절부절해 하고만 있었다. 아마도 많은 양의 아드레날린이 체내에서 분비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앨런의 비명은 점점 커져갔고 마침내 그는 몸을 일으켜 앨런을 잡아매고 있는 로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바람에 배는 위험할 정도로 기울어졌다. 아담은 돛과 키를 조정하는 일을 포기한 채 앨 런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배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고, 돛이 바람이 부 는 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앨런!" 아담이 외쳤다. "무슨 일이예요?" 그는 앨런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댔다. 여전히 앨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간간이 숨을 몰아 쉬며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도대체 왜 이래요?" 앨런이 얼굴에서 손을 떼었고 잠시 동안 아담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 다. 멍해 보이던 그의 표정은 고통과 노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앨런이 미친 개처럼, 아담에게 덤벼들어 목덜미를 붙들었다. 앨런의 힘에 한편 놀라며 아담은 공격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배위에는 움 직일 공간이 없었다. 앨런은 밧줄에 묶인 몸을 비틀며 팔을 휘둘러 아담의 얼굴에 강타를 먹였다. 이번에는 아담이 비명을 지르며 배의 가장자리에서


몸의 균형을 잃고 물 속으로 넘어지려 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붙잡을 만 한 것을 찾아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돛에 달린 밧줄을 잡았으나 아무런 도움 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몸이 험한 파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얼음장 같이 찬 바닷속에 잠긴 아담은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며 물위로 떠오 르려 애썼다. 언제 상어가 다가와 덥석 물어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손에 자고 있던 밧줄에 다리가 걸리자 아담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돛이 돌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무역풍이 배를 끊임없이 밀어가고 있었다. 아담은 돛대에 달린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낚싯줄에 걸린 고기처 럼 바닷속으로 끌려갔다. 그의 오른쪽 눈이 부어오르고 있었으며, 설상가상 으로 코에서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코피가 조금씩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ㅆ기 줄을 당겨 배 위에 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앨런은 여전 히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침내 아담이 배 가장자리를 붙잡고 물 밖 으로 몸을 솟구쳤다. 밧줄이 풀려버린 돛이 부딪치면서 라이플 총 같은 소리가 났다. 배가 회전 하기 시작하면서 활대가 배 뒤로 돌아가 앨런의 머리를 쳤고, 앨런은 캔버 스 천 위에 고꾸라져버렸다. 아담은 앞뒤로 흔들리고 있는 활대를 주시하며 배 위로 올라섰다. 앨런이 다시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앨런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로 깊게 숨을 쉬고 있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몸 을 단단히 붙든 채, 아담은 앨런의 머리가 깨져버리거나 않았는지 살펴보았 다. 계란 모양의 혹이 그의 머리 위에 커다랗게 솟아 있었다. 아담은 앨런의 몸을 돌려 누이고, 무엇이 그토록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오 던 그를 미쳐 날뛰게 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때 앨런의 머리에 봉 합한 절개부분의 한쪽이 터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제서야 아담은 어 떻게 된 일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담은 가까스로 고물 쪽으로 건나간 뒤, 키를 잡고 돛의 밧줄을 잡아당겼 다. 배가 방향을 바꾸면서 돛이 다시 부풀어올랐다. 아담은 해안을 향해 배 를 몰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앨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젖은 옷으로부터 스며온 냉 기와 앞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담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에드가 호프스트라는 눈동자에 핏발이 선 닥터 내흐만을 올려다보았다. 내 흐만은 호프스트라의 어깨 위로 몸을 구부려 컴퓨터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먼저 호프스트라가 입을 열었다. "전국이 반응을 보였는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쵀대 출력 신호를 보냈어요. 좀더 시간을 주시면 출력을 더 높이도록 조 정할 수 있을 겁니다." "좋소. 서둘러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요. 그리고 말이오, 전에 우리가 원숭 이에 대해 실험을 하면서 얻은 결과가 이번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 은데."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지는 않지만, 자극을 받은 원숭이들은 주위의 물건들 을 마구 때려부수고는 결국 자해행위를 하다가 죽어버렸답니다." 호프스트라가 대답했다.


닥터 내흐만은 몸을 곧바로 세우며 기지개를 켰다. "나한테는 그게 좋은 소식으로 들리는데." "하지만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시스템을 차단해야 합니다. " "그런 건 상관없소. 이런 늦은 시간에 우리 통제하에 있는 의사들에게 지 시를 내릴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환자는 자해행위에 대한 환경조절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닥터 미첼이 말했다. "그래요, 안타까운 일이지." 닥터 내흐만이 맞장구를 쳤다. 배가 해안으로부터 백 피트 정도 떨어졌을 때쯤에는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 져 있었다. 아담은 해안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배를 서 쪽으로 틀어 해안과 평행하게 진행시켰다. 파도소리로 미루어 해안의 모습 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란하게 파도가 부서지는 곳이라 면, 그곳에는 암초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끔 신음을 흘리는 앨런은 여전히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의식 을 잃고 있는 것이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발작의 후유증 때문 인지 아담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간에, 그는 앨런이 해안에 도착 할 때까지 조용히 있어 주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바다가 만들어내는 음향 너머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담은 해안 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코코야자 나무 숲 사이에 집 몇 채가 지어져 있는 것 이 보였다. 그쪽에는 모래사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아담은 키를 꺾고 돛줄을 잡아당겨 배를 뭍으로 향하게 했다. 돛을 내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배는 날아갈 듯한 속도로 전진해갔다. 키 를 다릴로 저지하면서, 바람에 마구 펄럭여대는 돛줄을 풀어내었다. 곧 파 다고 부서지면서 검은 육지 위로 흰 거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 했다. 가까이 갈수록,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의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아담은 모 래사장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배가 이런 속도로 나가다간 모래사장이라 해도 안전하지 못할 판이었다. 커다란 파도가 배 아래를 지나 가더니, 이내 훨씬 큰 것이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파도를 받은 배가 공 중에 치솟았고 아담은 곧 배가 뒤집혀버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파도가 지나 가자 곧 균형을 되찾았다. 아담은 뒤로 고개를 돌려 또 다른 파도가 그들을 덮쳐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번 것은 집 한 채만큼은 되어 보였다. 하늘 높이 치솟은 파도의 끝은 거품을 일으키며 곧 부서져 내릴 듯한 기세였다. 아담은 한 손으로 키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캔버스 천을 움켜잡으며 눈을 꼭 감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집채만한 파도는 배를 덮쳐오지 않았고 대신 폭발적인 힘으로 배를 쏜살같이 밀어주었다. 아담은 눈을 떠 배가 흰 거품이 일고 있는 바닷가로 질주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배는 바다로 밀려나 오고 있는 파도에 부딪쳐 공중으로 떠오르며 아담을 바닷속으로 던져넣었 다. 다행히 물은 허리 깊이밖에 되지 않았다. 아담은 바닷물을 뱉어내며 몸


을 일으켰다. 허리에 밧줄이 감긴 채 캔버스 천 위에 묶여 있던 앨런은 돛 주위에 몸을 굴리며 다리를 배 가장자리에 내놓고 있었다. 아담은 파도와 싸우며 배를 붙잡고 해안을 향해 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부표가 바닥을 긁 었고 아담은 다음 파도가 오기를 기다려 배를 물 위로 완전히 끌어올렸다. 아담은 모래사장 위에 몸을 내던지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어 얼굴에 썼다. 폭이 좁고 가파른 모래사장 위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었으며, 낡은 나무보트들이 코코야자 나무에 묶여져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오두막집으로 이루 어진 마을이 보였다. 해안 한쪽 끝에서 야윈 개 두 마리가 나타나 마구 짖어대며 그들을 맞았 다. 가장 가까운 위치한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담이 몸을 일으켰을 때 에는 개들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했으나, 곧 다시 나타나 더욱 맹렬하게 짖어댔다. 아담은 개에 신경을 쓰지 않고 앨런에게 다가가 밧줄을 풀어준 후 일으켜 세웠다. 아담이 앨런을 부축하면 해변 위를 걷는 동안 앨런은 머리를 들고있었다. 야자나무 숲을 지나, 그들은 오두막집 앞에 이르렀다. 집 옆에는 낡은 0.5 톤 짜리 픽업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아담은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 시동 장치를 살펴보았으나 열쇠는 그곳에 꽂혀 있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며 다리를 물려고 덤벼들었 다. 아담이 계단을 올라가는데, 집의 불이 켜지면서 한 형체가 창문가에 나타 났다. 아담은 뒷주머니를 뒤져 지갑이 온전히 있는지 확인했다. 잠시 후 문 이 열렀고 한 사내가 맨발에 웃통을 벗은 차림으로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 의 손에는 손잡이가 진주조개로 장식된 구형 리벌버 권총이 들려 있었다. "No hablo much espanol(전 스페인어를 잘 못합니다)." 아담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으나, 사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Me puede dar un ride al aeropuerto(공항까지 나를 데려다 주셨으면 좋 겠는데요)." 아담은 몸을 약간 돌려 트럭을 가리켜 보였다. 사내는 아담을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버리라는 뜻으 로 총을 흔들어 보이고는 문을 닫으려 하였다. "Por favor(제발 부탁입니다)." 아담은 스페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몸이 아픈 친구와 바다를 헤매던 이 야기와 지금 곧 공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에게 설명했다. 아담은 지갑을 꺼내어 축축하게 젖은 종이돈을 세기 시작했다. 사내가 이번 에는 관심을 보이며, 총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아담을 따라 해변으로 같이 갔다. 그는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애를 쓰며 노력하던 아담에게 한가지 아 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담은 요트의 밧줄을 사내에게 쥐어주며 공항까지만 데려다 준다면 배를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 푸에르토리코 인이 마침내 이야기를 알아들은 듯했다. 그의 얼굴에 큼 직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배를 모래사장 위로 신나게 끌어올려 코코야자 나무의 기둥을 묶었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다시 집 안으로 모습


을 감추었다. 아담은 서둘러 앨런을 운전석 옆자리로 밀어넣었다. 푸에르토리코인이 열 쇠를 흔들며 나타났다. 그는 트럭의 시동을 걸면서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자 고 있는 앨런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담은 친구가 아프다는 사실 을 설명해주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 역시 잠아 곯아 떨어진 척하기로 했 다. 그들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아담은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담은 손가락을 들어올려 이스턴 항공사의 탑승구 앞에 내려 달라고 부탁하며, 매 표창구 직원에게 앨런과 자신의 이런 꼴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 막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트럭이 멈추었고 아담은 앨런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번에는 그를 깨우기가 비교적 쉬었다. "Muchas gracias(정말 고마웠습니다)." "De nada(천만의 말씀)." 운전사는 이렇게 말하고 트럭을 출발시켰다. 아담은 앨런을 팔로 부축하며 말했다. "자,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그들은 거의 비다시피한 공항으로 걸어 들어갔다. 택시 몇 대와 구급차가 입구에 서 있었으나 여행객들이 나타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아담은 지어진 지 오래된 낡은 건물을 둘러보다가 앨런을 빈 구두닦이 의자에 앉혀 놓고는 매표창구로 갔다. 비행 스케줄에 의하면, 두 시간 후에 이스턴 항공사의 비행기가 마이애미 로 출발할 예정으로 되어 있었다. 스케줄 옆에는 '근무시간 이외에 전화를 사용해주십시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아담은 바로 옆에 있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곧장 나가겠다고 대답을 했다. 아담이 전 화를 끊는 순간 말쑥하게 잘 다려진 갈색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카운터 뒤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아담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 다. 아담은 그 순간 자신의 옷차림이 말이 아니라는 걸 의식했다. 트럭을 타고 오는 동안 옷은 거의 말라 있었으나, 직원의 반응을 보자 변명거리를 만들 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담은 휴가를 마치는 것을 기념하는 파티에서 과음을 하고 보트에 올라탔는데 깨어보니 친구와 함께 호텔에서 몇 마일이나 떨어진 해변가에 누워 있었으며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곧장 공항으로 오게 된 것이라고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담은 또 내일부터 근무를 시작해야 하며 짐은 다른 일행들이 나중에 가지고 올 것이 라고 늘어놓았다. "정말 끔찍한 휴가였답니다." 그가 말했다. 창구직원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빈 좌석이 많이 남아있음을 알 려주었다. 아���은 미국으로 가는 좀더 빠른 비행기가 없는지를 물었고 직원 은 한 시간 뒤에 아틀란타로 출발하는 델타 항공사편이 있다고 대답했다. 서둘러 섬을 떠나는 게 그들을 위해 아전한 일이라고 생각한 아담은 델터 항공사의 위치를 물었다. 직원은 다음 건물로 건너가야 한따고 말해주었다. 아담은 앨런을 그대로 놓아두기로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여 행객 몇 명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아담은 줄 맨 끝에 가서 섰다. 카운터에 도착한 그를 직원이 불안한 눈초 리로 바라보았고 아담은 다시 똑같은 거짓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 역시 아 담의 말을 믿는 듯했다. "일등석을 드릴까요. 아니면 이등석을 드릴까요?" 처음에 아담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아롤 렌사가 발급해준 비자 카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대답했다. "물론 일등석이지요." 직원이 티켓을 준비하는 동안 아담은 터미널 주위를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MTIC 에서 보낸 듯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직원이 작업을 끝마쳤을 때, 아담이 물었다. "휠체어를 좀 썼으면 좋겠는데요. 제 친구가 파도에 휩쓸렸을 때 머리를 부딪쳤거든요." "정말 안됐군요. 제가 한번 알아보지요." 직원이 대답했다. 5 분도 안 되어 그가 휠체어를 끌고 나타났다. 아담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앨런을 데려오기 위해 건물을 나섰다. 델타 항공사의 매표 창구가 내려다보이는 1 층과 2 층 사이의 발코니에서는 흰 유니폼을 걸친 앰블런스 구급요원 두 사람이 아담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보고 있었다. 아담이 휠체어를 밀고 가는 것으로 보아 아이즈만이 멀지 않 은 곳에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아래층으로 서둘러 내려가서는 앰블런스로 달려갔다. 그들은 운 전사에게 환자를 찾았다는 사실을 버켓에게 알리라고 전했다. 머리를 바짝 깎아 올린 우람한 체격의 사내가 앰블런스의 뒤쪽에서 운반용 간이 침대를 꺼내었고, 그의 파트너는 구급 상자 속에 주사기 몇 개를 집어넣었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아틀란타행 델타 항공기가 출발하는 곳을 확 인한 후 B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담이 그두닦이 의자로 돌아왔을 때 앨런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는 서둘러 휠체어를 끌고 이스턴 항공사의 매표창구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앨 런은 그곳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은 앨런에게 지금 이곳 은 마이애미가 아니라 푸에르토리코이며 만일 원한다면 마이애미로 가는 비 행기편을 예약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나와 동행입니다." 아담이 앨런을 휠체어에 앉히며 말했다. "이 분은 지금 이곳이 마이애미라고 생각하고 있었요." 직원이 말했다. "고생이 많이 해서 그래요. 말씀드렸다시피 비가 난파되는 바람에 말이지 요......" 아담은 말끝을 흐려버리고 델타 항공사 쪽으로 향했다. "내가 지금 푸에르토리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요?" 앨런이 물었다. 그의 발음은 분명치 않았으나, 아담이 그를 피요르드 호에 오르기 전에 본 이후 처음으로 제정신이 돌아와 있는 듯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 20 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은 빠른 속도로 휠체어를 밀며 걸어갔다. 델타 항공사의 카운터 앞에는 화려한 차림


을 한 일단의 여행객들이 한데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 는 곳에 오자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경비원은 그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통과시켜 주었다. 검사대를 통과한 후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아담은 끓어 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미국 땅에 내리게 되는 것이 다. 탑승구로 가는 길이 내리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아담은 휠체어에 속 도가 붙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어야 했다. 앞에 식수대와 화장실이 보이자 아담은 잠시 그곳에 들러가기로 마음먹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신사용 화장실 입구엔느 청소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아담은 비행기에 오른 후 볼일을 보기로 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놓으려 하는 순간 무언가가 아담 옆으로 빠르게 움직이 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이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 서 그를 붙들고 팔을 꺾었다. 아담은 아무런 반격도 시도해보지 못한 채 바 닥에서 들어올려졌다. 아담은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틀어댔으나 화장실 쪽으로 끌려가면서 이마 와 가슴을 화장실 문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문이 열렸고 아담 과 그를 공격한 사내는 동시에 타일 바닥 위로 엎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팔을 잡고 있던 상대방의 힘이 늦추어졌다. 아담은 팔을 자 방 빼고는 몸을 일으켰으나 사내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담의 몸이 세면대 바로 옆을 스치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는 두 손을 바닥에 대어 충 격을 줄였다. 뒤쪽에서 앨런이 탄 휠체어가 화장실 문에 부딪치면서 앨런의 머리가 앞으 로 고꾸라졌다. 문이 열리면서 사내는 휠체어를 힘차게 밀어버렸다. 휠체어 는 화장실 안을 굴러가다가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소변기에 부딪쳤고 그 충 격으로 앨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두번째로 들어온 사내가 몸을 돌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동료를 도우러 다 가왔다. 두 사내가 동시에 아담의 몸을 덮쳐 그를 내려눌렀다. 아담은 있는 힘을 다 모아 다리를 휘둘러 한 사내를 걷어찬 후 한쪽 팔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시 팔을 휘둘러 몸집이 큰 사내의 아래턱을 강타하자 화장실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때 그의 동료가 노여운 표정으로 다가와 아담의 복부에 한 방을 먹였다. 아담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잠시 동안 무방비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두 사내가 아담을 위에서 내리눌렀고 작은 몸집의 사내가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한 대 꺼내었다. 그는 바늘 끝의 플라스틱 덮개를 이빨로 물어 떼어내고 아 담의 정강이 부분의 옷을 피더니 바늘을 살속 깊이 찔러넣었다. 아담은 계속 몸부림을 쳐대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내는 주사기의 피스톤을 잡아당기며 바늘이 혈관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주사기를 고쳐잡고 약을 주입하려 하였다. 그때 갑자기,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타일로 된 화장실 안에 울려퍼졌다. 두 사내는 그 기괴한 소리에 순간적으로 마비가 되어버린 듯했다. 배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앨런이 머리를 감싸쥐며 펄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은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고 입술이 말려올라가 흰 이빨을 드러 내보이고 있었다. 살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머리에


서 떨어지면서 머리칼 한 움큼을 잡아 뽑았다. 앨런은 미친 짐승처럼 변기 대로부터 세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리고는 두 손을 몽둥이처럼 모 아 마구 휘둘렀다. 주사기를 꽂았던 사내의 몸이 붕 뜨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변기 구멍 속으로 머리를 쳐박았다. 다른 사내는 눈 앞에 나타난 괴물을 얼얼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뒤로 한걸음 물러서면서 손을 들어올렸으나, 앨런은 그에게 재빠르게 다가가 입으로 사내의 귀를 물어뜯었다. 사내는 완 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앨런의 공격에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앨 런은 그의 머리를 잡고 세면대 위에 거울에 들이박았다. 피가 튀어오르며 거울 위에 우아한 곡선을 그려내었고 거울은 깨어져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 다. 아담 역시 앨런의 갑작스런 변모에 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미 경 험이 있었던 터라 이내 침착을 되찾앗다. 그는 허벅지에 꽂혀있던 주사기를 잡아 빼고는 간신히 일어서며 사내의 머리를 계속해서 거울에 찧고 있는 앨 런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산해보았다. 불행히도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앨런은 머리르 뒤로 젖히고 비명을 질러 울 리더니 이번에는 아담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담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문이 닫히 기 전에 앨런이 손을 집어넣었고 그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한참 계속했 다. 아담의 힘이 밀리면서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자, 아담은 다리를 문 에 갖다 대고 등을 벽에 기댄 채 문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앨런의 손가락이 문 틈에 끼었고 앨런은 다시 비명을 지르며 손을 잡아 빼냈다. 아담은 빗장을 건 후 변기르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린 채 벽에 기대어섰 다. 그리고는 다음 행동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앨런이 문에 몸을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부딪칠 때마다 빗장은 조금씩 휘 어져갔고 마침내 문이 활짝 열렸다. 아담은 앨런의 이름을 크게 불러댔다. 그러나 앨런은 기관차처럼 덤벼들었 다. 그의 동공은 완전히 줄어들어 있었고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생각할 겨 를도 없이, 아담은 잡고 있던 주사기를 앞으로 내밀었고, 앨런은 주사기를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바늘이 그의 배를 찌르고 들어가면서 주사액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바늘에 찔린 것을 전혀 느끼지도 못한 듯, 앨런은 아담의 머리를 잡고 초 인에 가까운 힘으로 그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앨런의 눈이 깜빡이면서 동공이 커다랗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오른쪽 눈은 마치 게으른 어린이의 것처럼 보였고 왼쪽은 무언가 궁금해 하는 듯한 모양을 짓고 있었 다. 아담은 잡은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앨러닝 바닥에 무릎을 꿇 고 뒤로 쓰러지면서 세면대 맞은편의 바닥 위에 몸을 뻗었다. 잠시 동안 아담은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바늘의 끝을 바라보았다. 주사액이 바늘 끝에 모여들며 점점 커지더니 한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손을 펼치자 주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담은 칸막이 안에서 나와 그들을 덮쳤던 두 사내를 한구석에 끌어다 놓 고, 앨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맥박을 짚어보았다. 맥박은 정상이 었다. 그때 갑자기 앨런의 눈이 깜빡이며 열렸다.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앨런은 손이 아프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 정도 출력으로 신호를 보냈으니, 환자의 전극은 엄청난 자극을 받았을 겁니다. 틀림없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을 겁니다." 호프스트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생긴 셈이군." 내흐만의 말이었다. "호나자가 목숨을 잃었다면, 아무도 시체를 살펴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전극이 삽입된 것을 누군가 알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당장 그 환자를 찾아 내야 합니다." 전화기가 울렸고 닥터 미첼이 수화기를 들었다. '잘되었군요'라는 말이 몇 차례 반복하던 그는 내흐만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 다. "공항을 지키도록 하신 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버켓 말로는 환자와 숀 버그를 찾아냈고 구급요운 두 사람이 그들을 잡으러 갔답니다." "자극을 주는 동안 환자가 앰블런스 안에 있었다면 어쩌지요?" 내흐만이 물었다. "그리고 보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닌데요. 공항까지의 길을 수색해보 는 게 좋겠어요." 닥터 내흐만이 두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나 끝날 건가?" 아담이 보기에 앨런의 발작이 원격조정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유효거리가 벗어날 수 있게 되기만을 바 랬다. 어서 비행기에 올라타야 했으나, 그들의 몰골이 지금 말이 아니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 이제 5 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담은 서둘러 세수를 마친 뒤 피를 뒤집어 쓴 앨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앨런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뜯겨나간 자국이 흉하게 남아 있었다. 아담은 그의 머리를 쓸어 부풀리려 해보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 다. 이제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담은 앨런을 휠체어에 올 려 태운 후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때 바닥에 아직 쓰지 않은 주사기 한 대가 굴러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앨런이 또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 필요하리라 생각하며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들이 탑승구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탑승 수속을 다 마치고 문을 닫으 려 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요!" 아담이 외쳤다. 그들을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델타 항공사 의 두 직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손님들이 배가 난파당했다던 그분들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담은 탑승권을 그들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매표창구에 있는 직원에게서 이야기르 들었습니다. 저희는 계획이 바뀌신 줄 알았습니다." "천만에요. 이 친구를 설득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을 뿐입니다."


직원은 머리르 옆으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앨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 취하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을. 배가 뒤집힐 때 머리를 부딪쳤었거든요. 그래서 진통제를 맞았는데, 그것 때문에 축 늘어진 것 같습니다." "그랬군요." 직원이 아담에게 탑승권을 돌려주었다. "좌석은 2A 번과 2B 번입니다. 아틀란타에서도 휠체어를 준비해놓으라고 할 까요?" "그래 주시면 고맙겠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사실 저희들은 원래 워싱턴으 로 갈 계획이었는데 그쪽으로 예약을 미리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직원이 대답했다. 아담은 앨런이 탄 휠체어를 밀고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탑승권 을 받아든 스튜어디스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곧 앨런의 휠체 어를 넘겨 받아 대신 밀고 가면서 아담의 난파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 다. 비행기의 좌석은 반 정도밖에 차 있지 않았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잠이 들어 있었다. 아담 역시 아침식사 시간 잠깐을 제외하고는 비행기가 아틀란 타까지 가는 동안 눈을 붙이고 있었다. 아담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동안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나 않았을까 걱정하 였지만, 공항에는 델타 항공사의 직원이 휠체어를 끌고 와 기다리고 있었으 며 아담을 찾아 워싱턴으로 직행하는 비행기의 티켓을 넘겨주었다. 비행기 가 이륙하기까지는 40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그는 제니퍼에게 전화를 걸 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제니퍼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제니퍼, 이제 만사가 잘 풀릴 거야. 모든 걸 다 설명해줄게." "그래���." 제니퍼의 대답은 막연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것만 약속해줘." "오늘 오전에 심리가 열려요.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내 일까지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제니퍼, 사랑해. 이제 비행기에 올라타야 해. 우린 지금 아틀란타에 있거 든." "아틀란타라고요? 그리고 '우리'라니요?" "아담 아니에요?" 마가렛 웨인트롭은 날렵하게 타자기를 치던 손동작을 멈추었다. "맞지요?" 술에 잔뜩 취한 친구들처럼, 아담과 앨런은 어깨동무를 한 채 비서의 책상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담!" 웨인트롭 부인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아버님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아담은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말쑥하게 정장을 하고 닥터 숀버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놀라


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린 채 닥터 숀버그는 아들의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담은 두 손님에게 자리를 비워달라며 양해 를 구했다. "아담.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란 말이냐."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전에 제가 부탁드린 일에 대해서는 손을 좀 써보셨어요?" 아담이 물었다. "아직은 아무 연락도 안 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증거가 더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데려왔습니다. 이리 오셔서 인사하세요. 켈리포니아 대학에 있는 닥터 앨런 잭슨입니다. 지금 막 아롤렌 선상학회를 마치고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연구 센터에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술을 마신 거냐?" 닥터 숀버그가 물었다. "아니오. 약에 취한 데다가 뇌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이리 오세요. 제가 직 접 보여드리지요." 닥터 숀버그는 조심스럽게 앨런에게 다가갔다. 아담은 천천히 앨런의 머리 카락을 들어올려 전극이 삽입된 부분의 수술자국을 아버지가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사람들이 일종의 원격조정장치 같은 것을 여기에 심어놓았던 겁니다." 아담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부드럽고 동정어린 어조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환경조절'이라는 과정을 수행하기 전에 앨런을 빼돌릴 수 가 있었지요. 약기운이 바져나가고 나면, 이분이 직접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설명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분은 자기 머리에서 전극을 빼내 살펴 보는 데 틀림없이 동의할 겁니다." 앨런의 머리에 난 수술자국을 들여다보던 닥터 숀버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아담에게 눈길을 향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인터콤으로 다가 갔다. "마가렛, 법무상에 있는 버나드 니폴드에게 연락을 해서 급한 일로 내가 만나겠다고 전해줘요. 그리고 베데스다 해군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내가 사인을 할 테니 비밀을 요하는 환자 한 사람을 받아 달라고 해요, 그리고 당장 24 시간 경비를 요청하도록." 닥터 숀버그는 눈길을 돌려 아담을 바라보았다. KILL666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에필로그


제니퍼는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토록 많은 출산 강습회에 나가 보았 지만 실제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경험이었다. 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읽고 경험자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이 독특하고 감동적인 사건을 접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강렬한 고통과 함께 기묘한 전율이 온몸을 덮쳐왔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기 운이 소전되어가는 것을 느겼다. 끝에 가서 과연 아이를 낳을 만한 힘이 남 아 있을런지 제니퍼에게는 의문이었다. 고통은 점점 잦게 찾아와 오래 머물 렀다. 마침내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 느 껴졌다. 제니퍼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반은 의식적으로, 나머지 절반은 무의식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압박감이 점점 커져가며 한계 점에 도달하는 듯했다. 그러나 제니퍼는 숨을 멈추고 계속 힘을 주었다. 감자기, 해방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액체가 쏟아져 나왔고, 새로 태어난 아기가 최초로 성대를 시험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제니퍼는 눈을 떠 마지막 남아 있는 힘으로 아담의 손을 붙잡았다. 아담은 아내의 다리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두려운 감정에 사로잡힌 채, 제니퍼는 아담을 바라보았다. 만족스런 검사 결과에도 불구하고 제니퍼 는 아기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학병원의 의사들은 여러 차례 양수검사를 통해 그 때마다 아이가 정상이라고 이야기해주었지 만, 지금까지도 그들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제니퍼는 아담을 쳐다보며 그의 얼굴에서 어떤 재난을 암시하는 표정이 떠 오르는지 지켜보았다. 도저히 직접 아기를 볼 자신이 없는 제니퍼는 아담을 통해 아기의 건강을 확인하고 싶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담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 흘러갔고, 마 침내 아담이 눈을 돌려 제니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제니퍼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육체적 고통이 다 지나간 뒤였음 에도,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제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소식을 기다렸다. '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았 어야 했는데' 제니퍼는 줄리안 클리닉에서 샘플이 바뀐 일 이후로도 그것이 의도적으로 저질러졌었다는 것을 완전히 믿지 못한 채 계속 불길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은 혀 끝으로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축였다. "아주 예쁘고 건강한 사내아이야. 제니퍼, 다행히도 당신을 빼닮았는걸." 제니퍼가아담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행복과 감사의 눈 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제니퍼는 팔을 뻗어 아담의 머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담이 웃음을 터뜨리자 제니퍼의 마음은 안도와 기쁨으로 가득 차 올랐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에게 감사드리는 것뿐이었다. 아담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고 있던 수술복을 천천히 벗은 후, 대학 병원의 분만실을 나와 대기실로 갔다. 제니퍼의 마지막 진통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아담에게 전달된 소식은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다 른 아버지 후보자들 가운데에는 아담의 아버지 닥터 데이빗 숀버그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닥터 숀버그가 대기실로 들어서는 아담을 맞았다. "아담, 잘 있었느냐." 그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차가웠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의대에 다시 들어간 기분은 어떠냐?" 닥터 숀버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어 기뻐요. 다른 친구들을 따라 가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고요." "그거 참 잘됐구나."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제니퍼는 좀 어떠냐?" 아담이 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제니퍼의 이름을 말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주 좋아요." "그럼 아이는?" "아주 건강하고 예쁜 사내아이랍니다." 아담이 대답했다. 그때 아담은 이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던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버지에 눈 에 눈물이 그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처 놀랍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팔이 그를 감싸안았다. 아담도 아버지를 안았다. 아담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들었고, 미래의 아버지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은 그 렇게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침내 좀 어색해진 듯, 닥터 숀버그는 감았던 팔을 풀고 아담의 팔을 다 정하게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 렸다. "난 울지 않았다." 닥터 숀버그가 말했다. "저도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데요?" "우리 둘 다 형편없는 거짓말쟁이라는 거야." "인정 안 할 수 없네요." < 끝 >

┌────────────┐ │ 메스(원제:Mindbend) │ └────────────┘ 로빈 쿡 지음 / 박민 옮김


원작자의 말 & 옮기고 나서 ■ 원작자의 말 1966 년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의학계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들 을 수 있었고, 그것은 늑대가 왔다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양치기 소년의 우화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이해집단들을 통해 제기되어 온 바 있는 이러한 위기의식은 종종 서로 상반되는 의견으로 표출되기도 했 다. 병원 침대 수가 너무 많다느니, 너무 적다느나, 의사들이 너무 넘친다 느니, 너무 모자란다느니 하는 식이다. 이러한 분열상은 대중들을 혼란과 무감각상태로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의학계의 위기'라는 말이 진정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 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늑대가 나탄ㅆ다고 외쳐댄 과거의 많은 사람들 덕 분에 언론은 진정한 위기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기업체가 빠른 속도로 의학계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사태 를 목격하고 있다. 대차대조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업체의 정서는 의술 의 기반을 형성해온 이타주의적 전통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러한 대립이 의학계의 윤리적, 도덕적인 초석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대기업들 은 의료분야를 자금유동성이 높고 고수익이 보장되며 위험도가 낮은 저자본 사업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금이야말로 그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호기 라고 생각하고 있다. 의학분야로 밀려드는 기업체의 관심에 대한 증거는 영리성이 다분한 사립 병원, 가정간호사 시스템, 의료기구상, 그리고 투석센터, 외과시술센터 드 오가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바이오테크회사의 설립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이러한 현상이 연구분야에서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활동이 의술에 미치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의학계의 반응은 놀랄 만큼 미미했다. 전문잡지들은 학문적인 가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 러한 현상을 무시하고 있으며 의사들은 기업체에 붙어버리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한편, 대중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고 언론은 이제 막 경고성 의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하는 형편이다. 이 책이 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정서적인 틀 속에서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이 책은 독자에게 개인적인 통찰력을 부여하고 주인공과의 동일시 과정을 통해 사건의 정황을 이해하게 해줄 것이며, 나는 그러한 것 들이 소설의 본연적인 가치에 속한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기업체에 의한 의료계의 잠식 현상에 대해 내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한 병원으로부터 받은 서신 때문이었다. 그 서신에는 병실 이용도가 낮으니 수술환자를 더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치 정당한 수 술을 거절당한 환자가 병동에 들끓고 있다는 듯한 투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우리의 의료체계가 어리석게도 과도한 시설과 서비스에 기대게 되었으며, 당연한 귀결로서 자체내의 비용을 증대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못된다.


이 책의 창작을 위해 내가 제약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다른 이익단체들보다 더 깊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의료계와 영리적인 관계 를 맺은 역사가 가장 깊으며 점차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 이다. 중요한 점은 제약회사라는 것이 그들이 설득하려고 애써온 바와는 달 리, 결코 공공의 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단체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다. 그들의 목적이란 투자자들의 자본에 대해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제약회사들의 점차로 고조되어가는 상업적 이윤에 대한 관심은 손쉬운 먹 이감인 의사들을 겨냥해 그들이 상품 홍보에 쏟아붓는 엄청난 액수의 돈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 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제약회사들이 제공하는 이러한 선물과 서비스를 거절하는 의사는 흔하지 않은 형편이다. 나는 아직도 의대 3 학년 시절에 받은 검은 가방을 사용하고 있고, 제약회사 들이 후원하는 심포지움에도 여러 차례 참가한 일이 있다. 그들은 연구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금액을 홍보와 광고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약품과 이윤, 그리고 정책(Pills, Profits, and Politics)>에 쓰인 바에 의하면, 그 액수는 미국에 있는 모든 의과대학이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총 교육비용을 능가한다. 물론 제약산업이 사회에 공헌한 바를 간과한다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지 결코 그들의 목적이 되지 못 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이 희생되어버린 사건이 실제로 존재해왔다. 그간 많은 다채로운 사건들이 발생해왔으며, 상업적인 이윤에 대한 관심이 불행 한 결과를 낳은 예를 굳이 들자면 탤리도마이드(Thalidomide)사건과 DES 에 관련된 사고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제약회사들은 약품이 위험 성이 있거나 효과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윤을 올리려는 욕심만으로 시장에 내놓은 일이 있었다. 지난 30 년 동안 미국에서는, 의술에 대한 개념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어왔 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오던 의사와 환자간의 유대감은 이제 기업 체의 경제적인 이익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미국의 시민들은 의학계내 에 어떠한 체제가 형성되어가고 있는지 알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두는 독자 분들을 위하여, 다음의 책들을 소개한다. Ainsworth , T. H. , M. D., <Live or Die> (Macmillan, 1983). 개업의로서의 생활과 병원국장을 지낸 경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만큼 유리 한 위치에 서 있는 저자는, 의사들에게 의료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고 새로운 리더쉽을 발휘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Silverman , Milton , et al . , <Pills, Profits, and Politic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4) 이 책은 제약회사 전반에 대한 총괄적인 조감도를 제시하여 독자들의 흥미 를 돋우며 그들로 하여금 예기치 못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게 만든다. 10 년 전에 씌어진 오래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카로운 시사성을 잃 지 않고 있다. Starr , Paul , <The Social Transformation of American Medicine>


(Basic Books , 1982). 미국 의학의 역사에 대한 인상적인 개괄을 제시하며, 어떤 과정을 통해 의 료계가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Wohl , Stanley , M. D. , <The Medical Industrial Complex> (Harmony Books, 1984) 읽기 쉽고 간락하게 씌여진 이 책은 의료산업복합체에 관련된 아름답지 못 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로빈 쿡 □ 옮기고 나서 로빈 쿡은 의학소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고 할 만큼 의료계를 소 재로 한 작품을 계속해서 써오고 있는 작가이다. 작가 자신이 임상의사로 의료계에 몸담아 오면서 직접 보고 느낀 문제점들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 해 하나하나 표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메스(원제●Mind bend)>에서는 기업의 이윤 추구에 침식당하고 있는 의료 계의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로빈 쿡의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정확하게 생생한 의료 현장의 묘사와 날카로운 문제 제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독 자들에게는 뭔가 베일에 싸인 듯한 영역을 시원스럽게 들여다보는 것 같아 한껏 흥미를 돋우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의사들의 눈에 그의 소설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만 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때때로 든다. 그 이유 중에는 작가가 흥미진진한 소설 만들기에 집착하여 현실보다는 많이 과장된 내용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엉뚱한 상상력을 유발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잠재적인 자기방어 심리도 있으 리라. 글쎄, 어차피 소설이란 어떤 이야기도 꾸밀 수 있는 것이고 재미있게 쓰고 자 하는 것은 작가의 본능일진데, 현명한 독자라면 그 정도는 스스로 판단 할 수 있지 않을까. 옮긴이 박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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