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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이 코 매 직 저자: 이상우

차 례 작가 소개 작가의 말 1. 프롤로그 2. 죽음의 그림자 3. 박 성 철 4. 미스디렉션의 세계 5. 폭풍 전야 6. 예 언 7. 난승도사 8. 탈출왕 후디니 9. 사라진 혐의자 10. 초능력의 세계 11. 벗겨지는 베일 12. 실패 13. 초능력 14. 에필로그

작가 소개 1938 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한 작가 이상우는 한국일보 주간 편집국장, 스포츠서울 초대 편집국장, 서울신문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저널리스트 작가이다. 이상우는 이 작품 외에도 화조, 밤에 죽다, 안개도시, 악녀시대, 모두가 죽이고 싶던 여자, 악녀의 성 등 백여 편이 넘는 수준 높은 장,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현재는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의 말 요즘들어 세계 추리소설계는 공포 소설 붐을 이루고 있다. 원래 '공포'는 추리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여겨져 왔지만, 요즘처럼 공포 그 자체를 주제로 삼기는 드문 일이었다. 1991 년 토마스 헤리스의 소설이 영화화되어 아카데미상을 휩쓴 일도 드물지만, 그 영화는 정통파가 아닌 공포를 주제로 한 영화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공포, 의학, 과학 등 비고전적인 추리가 베스트 셀러의 대열에 서 있다. 인간의 심리적 욕구 중 강력한 두 가지를 든다면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공포, 서스펜스를 느끼며 즐기고자 하는 욕구'라고 한다. 알고자 하는 욕구의 전제가 되는 것이 미스터리이고 이 미스터리를 구조적으로 활용한 것이 고전파, 전통 추리소설이다. 미국에서 추리소설을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또한 진상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응용한 오락이 마술이다. 그러나 마술사들은 그 진상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펜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세계의 추리작가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소재로 한 '마술 추리소설'을 거의 한 번씩 썼다. 그러나 마술의 진상은 밝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초능력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포에 못지않게 인간의 궁금증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 매직 소설은 오랜 기간 동안 독자의 사랑은 받아 왔다. 필자도 매직과 초능력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은 충동을 오랫동안 느껴 오다가 마침내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마법과 초능력은 원래 어울릴 수 없는 다른 세계지만 소설로 묶어 보았다. 필자는 최근 사회 추리소설에 정력을 쏟느라고 고전파 소설 쓰기에 소홀했던 것을 반성하며 이 소설을 내놓는다. 이 소설은 1991 년 '초능력 살인'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것을 일부 개작해서 다시 내놓은 것임을 밝혀 둔다. 1994 년 봄 雲堂에서

1. 프롤로그 민망해하는 사람들 속에 의연한 자세로 앉아 있던 왜소한 사내가 일어섰다. "너희들 중 나의 자세를 놓고 실망한다든가 싫어한다든가 하는 행동을 하는 이가 많다는 건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사내의 목소리는 체구답지 않게 우렁차게 울렸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만물을 주관하는 신이 있듯이 너희들을 주재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나 없이 너희들이 무엇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라." 모여앉은 사람들은 모두 네 명, 남자 셋에 여자 하나다. 모두 젊어 보이는 그들은 일어서 있는 중년 사내와 같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나는 오늘 벗어남에 대한 현대적인 공부를 해보겠다. 너희들도 각자 노력하기 바란다." "탈출이란 후디니를 가리키는 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사내가 물었다. 중년 사내의 눈이


번쩍이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것에 심한 구별을 짓지 마라. 분별이야말로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니." 중년 사내는 말을 다 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각자 반성의 시간을 가져라." 중년 사내가 사라졌다. 대번에 불평들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젠 사이비 교주가 다 되었군 그래." "무게만 꽉 잡으면 단가?" "반성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반성!" "자, 각자 일들이나 하자구." 모였던 남녀들도 흩어졌다. 금세 있었던 일들은 시간을 쫓아 과거로, 망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사건이 일어나 앞서 생겨났던 모든 일들이 역류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처절한 비명이 온 집 안을 메우고 그 틈새로 피비린내가 흘렀다. 놀란 남녀가 한달음에 비명의 장소로 뛰어갔을 때 오만했던 한 생명은 이미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그는 결박되고 칼에 맞아 죽어 있었다. 놀라운 일들을 손쉽게 해치우던 그들이었지만 이 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믿을 수도 없었다. 곧 시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일어설 것 같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미 돌아가신 게 확실하니까 현장을 보존해야 해.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결국 다이얼이 돌려졌고 수화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밀실에서 그는 초능력에 의해 죽었단 말인가? "시경 강력계의 추 경감입니다." 2. 죽음의 그림자 "저는 요즘 불안한 생각이 자주 들어요." 이지아가 예의 신비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쓰다듬어 넘기는 긴 머리카락이 창문 너머에서 떨어지는 햇살에 탐스럽게 출렁거렸다. "지아의 능력은 예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는 사내는 키가 작고 어쩐지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불안정스레 보이는 40 대였다. "스승님께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예지와 후지는 일란성 쌍생아예요." 지아의 말투는 오후 4 시다운 나른함을 띠고 있었다. "그럼 무엇이 불안하다는 거지?" 스승님이라 불리우는 사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다. 지아는 묵묵부답으로 창가로 몸을 돌렸다. 햇살이 쏟아지면서 얇은 옷 사이로 육감적인 몸매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너와 관계되는 일인가, 아니면 나와......" 사내는 지아의 몸매에 무관심해지려는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스승님과 관계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상당히 큰 힘으로 나를 압박하고 있어요. 스승님 자신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지아가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태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없어. 나는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사내는 가부좌로 자세를 바꿨다. "스승님은 하실 수 있어요." 지아는 다시 몸을 돌렸다. 둘은 사선으로 대하고 있었다. "후" 사내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는 더 크게 숨을 내놓았다. 그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지아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족스런 눈빛이 잠깐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찬 채 30 분이나 시간이 흘렀다. 사내가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어떻습니까? 단전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집니까?" 지아가 물었다. "아니야. 아직......" 사내가 맥없이 말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던지 땀방울이 얼굴에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부정입니다. 위대한 것은 인간, 인간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스승님은 더구나 은혜를 입고 태어난 몸입니다. 이 점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관을 극복하면 능력은 순식간에 자라나지요." 지아의 말투는 여전히 싸늘하였다. "목욕이나 하여야겠어." 사내는 걸치고 있던 헐렁한 가운을 훌렁 벗어 던졌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빈약한 몸매가 드러났다. 그러나 여인은 그러한 일에 익숙한 모양으로 전혀 거리끼거나 놀라는 기색이 없이 방에 딸려 있는 욕실문을 열었다. 욕실 안에는 이제 적당히 식은 따뜻한 물이 김을 모락모락 올리고 있었다. "가서 아란을 올려보내." 사내는 뚜벅뚜벅 욕탕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예" 지아는 공손하게 대꾸하고 방을 나섰다. 밖은 신록이었다. 넓은 정원이 베란다를 앞에 두고도 충분히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있었던 방은 2 층이었다. 좌우 양쪽으로 계단이 원형으로 나 있었으며 방 정면으로는 베란다가 나 있는 구조였다. 지아는 잠시 연한 초록잎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들로부터 싱그러운 생명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흡수할 만큼 흡수했는지 지아는 몸을 거칠게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수업이 끝났나?" 남자 하나가 지아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말투에 묘하게 빈정대는 기미가 있었다. "그래요 최현덕 씨." 지아가 사무적인 말투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흥!" 현덕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알아들었다는 표시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키가 엄청 큰 사람이었는데 이런 이들이 다 그렇듯이 약간 어깨가 처져 마치 건들거리며 걷는 것처럼 보였다. 아란은 자기 방에 없었다. 지아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레이다처럼 돌아가던 지아의 눈길이 화장대에 놓여 있는 빗이며 립스틱 따위의 물건에서 멎었다. 잠깐 그 물건들을 바라본 지아는 식당으로 향했다. "유아란!" 식당으로 들어가며 대뜸 이름을 불렀다. 놀라며 일어나는 그림자가 둘이었다. "어머, 박형준 씨도 있었군요? 방해가 되었나요?" 식당에 있던 사내는 겸연쩍은 미소를 띄웠지만 낭패한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얼굴 형태는 사각형이었는데 눈매가 풀려 있는 탓인지 그런 형의 얼굴이 갖기 쉬운 완고함 따위는 엿보이지 않았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란이라 불리우는 여자가 말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귀엽고 예쁜, 소녀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여자였다. 갓 스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았다. "스승님께서 찾으신다. 올라가 보아." 아란은 그 말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빨리 올라가." 지아는 내숭떨지 말고' 하는 말이 뒷부분에 따라붙으려는 것을 꾸욱 밀어 넣었다. 아란은 아장아장 걷는 태로 식당을 나갔다.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어요?" 지아가 아란이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형준에게 물었다. "그저, 그...... 오늘 공연에 대해서......" 형준은 말을 조금 더듬으며 어눌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면 어느 정도의 인내심은 필수적이었다. 형준의 입이 떨어질 잠깐의 시간 동안 지아는 식당을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싱크대에 불쑥 솟아나 있는 그릇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던 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하였다. "......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을 따름이에요."


형준이 말을 마쳤다. "오, 그래요?" 지아는 싱크대 쪽으로 걸어갔다. 형준은 불안한 눈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여자는 아란과는 틀려. 형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뒷모습마저도. "누가 그릇을 닦았어요?" 지아의 말이 형준의 정신을 퍼뜩 돌아오게 하였다. "그거야...... 언제나 그렇듯이 아란 씨가 했지요." 형준의 어눌한 말투는 사람의 비위를 긁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아란이가 설거지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지아는 답답한 형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갔다. 자기 등 뒤로 형준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형준을 이 집안에 소개시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녀는 형준에게 좀 심한 말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아는 처음 형준을 보았을 때 그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날은 지아가 난승도사 밑에 들어간 지 꼭 1 년이 되는 날이었다. 으레 세상 인심이 그렇듯이 1 년을 축하한다며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술을 마시러 나갔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그런 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아 자신에게도 그날은 자신이 마술을 배우기 시작한 날로써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박형준이라는 묘한 사내를 만난 날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날은 봄비가 처량하게 부슬거리며 내리고 있었다. 일행은 이미 한 잔씩을 마신 후였고 누군가가 "기분이다! 나이트 가자!" 라고 소리를 친 것에 동의하여 이태원으로 발길을 돌린 참이었다. 우산을 준비한 사람이 없어서 이태원 거리를 기웃거리는 동안 다들 적당히 머리며 옷이 젖어들었다. "빨리 아무데나 들어가요." 지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녀로서는 이태원이 처음이었고 그곳의 스물거리는 이상한 기운을 감당하기에는 감성이 너무나 어렸다. "그러자구. 흠뻑 젖겠어. 이러다간!" 현덕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난승도사의 수제자였다. 그러나 지아는 그의 쾌활함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이 거대한 동굴 같은 거리에서 스물대는 구역질나는 기운을 못 느끼는 걸까? 이 사람들은 모두 어쩌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머! 저 남자!" 지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한 사내가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저 술취한 사내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심하게 취한 것 같지도 않았다. "건달 녀석인 모양인데?" 현덕은 혼자말로 지껄일 뿐 그 사내를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았다. "저 남자를 그냥 보내면 안 돼요!" 지아가 빽 소리를 쳤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점이 일행에게 이상하게 비춰졌다. 그들은 모두 2, 3 년씩 마술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행동유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진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디 아픈 모양이지?" 지아와 비슷한 때에 들어온 김희수가 앞으로 뛰어나가 그 사내를 툭 쳤다. 그러자 사내는 짚단 허물어지듯이 픽 쓰러지는 것이었다. 사내는 옆구리에서 샘솟듯이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1988 년 4 월의 일이었다. 지아는 그 이후로도 그에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날 난승도사에게 제자로 받아들여 달라고 청을 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증거를 소홀히 하기 싫다는 지극히 여성적인 감정에 의했던 것이었다. 그가 왜 칼을 맞았는지,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감정이 허락하는 날 때때로 그의 과거를 짚어보기는 했다. 오늘 같은 날도 그런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아는 다시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모든 것이 너무 얽혀 있었다. 지아는 1 층 마루 한가운데 걸린 중악당 (中嶽堂) 이라는 현판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마루에 어울리지 않게 큰 현판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면 현관에서 바로 보이게 되어 있어서 그 현판 밑의 방이 집주인의 방이 아닐까 착각을 하게도 만들었지만 사실 그 방은 아란의 방이었다. 중악당, 그 현판에서도 요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집 안에 살기(殺氣)가 끼어 있어, 지아는 그렇게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누군가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지아는 불행히도 그것이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일은 박 회장님이라도 만나야지." 그녀는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뜻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뱉어내었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어, 최 선생님." 지아가 약간은 놀란 어조로 말했다. 현덕은 그 시간이라면 보통 자신의 방에서 그날 있을 공연에 대한 준비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꼬박 지켜지는 것으로, 가령 스승인 난승도사가 찾지만 않는다면 꼭 지켜지는 일이다. 이미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내려오면서 본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지아가 대뜸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도 무슨 뜻인지 서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니, 아니." 현덕은 눈에 띄게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저 물을 마시러 나왔을 뿐이야." 지아는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가 더욱 수상했지만 그에게서만은 아무런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순간적으로 가끔 느껴지는 느낌도 그에게는 없었다. 마치 교활한 늑대 로보를 잡기 위해 덫을 설치하며 모든 냄새를 지우는 사냥꾼처럼. "한데 왜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놀라고 그래요?" 지아는 톡 쏘며 다시 싱긋 웃었다. "나도 놀랐잖아요." 현덕은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여전히 멍청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농담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박 회장님이 누구야?" 둘은 서서히 자리를 옮기며 등나무로 짜여져 있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돈 많고 명 짧은 남자라도 하나 꼬셨나 보지?" "그런 사람 없어요." 지아는 피식 웃었다. "그보다 오늘 공연은 대수롭지 않은 모양이지요? 별 준비도 안 하네." "만날 그 타령인데 준비는 무슨 준비?" 이번에는 현덕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 속에서 뭐해요?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어요?" "그렇게 물으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데......" 현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요?" "왜요는 일본 이불이 왜요지." "예?" 지아는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농담을 깨닫고 까르르 웃었다. "정말 왜요?" "마술사가 숨겨 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바로 대답을 하면 재미없잖아?" 현덕은 여전히 빙그레 웃음을 띄운 채 말했다. 지아는 기를 끌어올리려 노력을 했다. 지난 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토요일에도 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단전에 힘이


모여지지를 않았다. 오늘 그녀는 과도하게 힘을 썼던 것이다. 이제 자연히 느껴지는 것들이 없다면 그녀로서는 더 손 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능력은 전혀 늘지 않았어.'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난승도사의 제자가 된 지 이미 3 년이 지났다. 그녀의 본래 목적은 벌써 달성되었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녀 자신을 돌볼 시간은 전혀 없었다. 온갖 일들이 그녀의 시간을 쪼개고 있었다. 박 회장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어이구, 그림 좋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또 다른 조수 김희수였다. "섭외는 잘했어?" 현덕이 물었다. 희수는 양복 윗주머니에 참하게 꽂혀 있는 손수건을 쏙 뽑아 얼굴의 땀을 닦았다. "땀이나 식히고 얘기합시다." "오늘이 뭐가 덥다고 그래?" 현덕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쳇, 형은 모르우. 집 안에 턱 틀어박혀서 명상이나 퍽퍽 하고 있으면 뭐 더울 것도 없지요." 희수의 말은 지아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었다. 잠깐의 환상이 그녀의 망막 위에 번쩍였다. "나처럼 피부가 연약한 사람은 이런 날씨도 못 견딘다고요." 희수는 과장스레 떠들어댔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현덕이 포기했다는 몸짓을 하며 다시 물었다. "사람들은 다 구했냐고?" "어이구, 형님도 걱정이 팔자요. 다 구했으니까 들어왔지. 못 구하고서 들어올까." 희수는 지아를 엉덩이로 툭 밀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제는 고물가시대(高物價時代)라는 게 실감이 나우." "그건 또 왜?" 현덕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그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희수의 떠들고 싶어하는 기분을 맞춰 주기위해 내놓은 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뻔한 얘기잖우? 조수를 더 구하는 것이 낫지. 이제 사람 사서는 더 이상 일을 못해먹겠더라고요." "이 계통의 일들도 전문화, 조직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긴 하지." 현덕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문화, 조직화라니오?" 지아가 솔깃해서 물었다.


"말 그대로지. 동네 꼬마들 모아놓고 사기치듯이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단 말야." "그럼요?" 지아가 부쩍 흥미를 나타냈다. "마술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마술사가 자신을 멋지게 속여 주기를 바라지. 만약 마술사가 어설퍼서 자신을 멋있게 속여넘기지 못한다면 본전을 생각하게 되고 마는 거야. 우리는 속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지. 허가받은 사기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요?" 희수가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속이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형 말은 어려워서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희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종래 자신의 숙소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현덕은 말을 그치지 않았다. "마술사란 고대에 있어서는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지. 그러나 오늘은 이게 무얼까? 사기를 쳐서 목에 풀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은 어느 새 독백의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본다. 고대의 마술사들이라 해도 사람을 속인 것은 사실이야. 그들에게 어쩌면 약간의 초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아는 현덕의 '초능력' 이라는 소리에 움찔 몸을 움츠렸다. 그의 말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실려 있었다. 갑작스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한차례 올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관객이 줄어들 텐데. 지아의 관심은 어느 새 날씨로 넘어갔다. 때문에 현덕의 말을 잠깐 놓치고 말았다. "......필요한 것은 조직,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야.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사기꾼이야." 현덕은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 끝났다고 여겨지자 벌떡 일어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지아는 혼자가 되었다. 지아의 가슴이 갑작스레 답답해졌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을 토해 버릴 수 있으면 좋을 것을, 비도 내 답답함도..... 지아는 웅얼거리며 거실의 유리문으로 다가섰다. 정원으로 바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넓은 정원의 수풀을 헤치며 죽음이 걸어가는 것이 그녀에게 느껴졌다. 아직은 그림자일 뿐, 실체가 어느 곳에서 손을 내밀지 그녀는 알지 못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떠오르지를 않았다. 갑작스레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기관을 통해 집 안의 온갖 움직임이 전달되어졌다. 현덕의 고른 숨소리, 희수가 음란한 잡지를 들춰 가며 군침을 삼키는 소리, 남녀가 얽혀서 절정을 맞고 있는 느낌까지도 모두 전달되었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비가 마침내 쏟아졌다. 그 속에서 불안한 그림자가 무너지고 있었다. 지아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빗속으로 몸을 던졌다. 몸에 묻어 있는 끈끈한 느낌들을 모두 떼버려야만 했다. 3. 박 성 철 한국초능력자연구회 회장 박성철은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는 영감을 얻었다. 그 손님이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모를 것도 없는 일이긴 했으나 만남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서 그는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을 자제했다. 성철의 느낌은 사무실이 있는 필동으로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손님은 이미 사무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남잘까? 여잘까?' 만남의 즐거음을 얻자는 생각도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는 못했다. 성철은 택시 안에서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여자. 성철은 이제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사람마다 독특한 체취가 있고 정신의 사이클에도 지문과 같은 고유함이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최소한 그의 경험상에서는 들어맞고 있었다. 성철은 새삼스레 백미러를 통해 옷매무새를 살피게 되었다. 멋대가리 없이 너무나 큰 머리통 때문에 목 아래는 보이지도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뒷자리의 손님이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이 이상해 보였는지 택시기사가 물었다.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철은 멋쩍게 웃었다. 택시기사는 자신을 택시강도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강도짓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성철이 기사의 불안을 덜어준답시고 질러 말을 했다. "예?" 택시기사의 반문은 비명에 가까웠다. 기사는 자신의 짐작이 맞는 경우는 그것이 사실일 때라는 경험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초능력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기사의 눈이 더욱 동그랗게 떠졌다. "지금 기사 아저씨는 제가 택시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죠?" "햐, 족집게네요. 아예 자리를 펴고 나서지요." "점장이가 아니고 초능력 연구가입니다." 성철은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초능력이라고요? 눈에서 광선이 번쩍번쩍 나가는 그런 것 말인가요?" "하하, 그건 만화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성철은 가볍게 웃고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 한창 젊어


보이는 사람이 맛이 갔구먼 하는 눈치로 택시기사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이래야 10 평 남짓한 초라한 곳일 뿐이었다. 정식으로 학술단체 취급도 아직 해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성철을 비롯한 사람들에게는 선각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이미 오래 전 유리겔라라는 초능력자가 방한하였을 때,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한국초능력자연구회' 였다 이들은 유리겔라의 말대로 고장난 시계를 움직이는 데 성공 하거나 숟가락을 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초능력을 개발하고 키워나가는 것이 어쩐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부여받은 사명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비록 생활이라는 무거움 짐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초능력만이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었고 사이킥 파워(Pdykich Power)가 머지 않아 가공할 무기로 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 대비하지 않으면 한민족은 정신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는 데 그들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교회에 십일조 헌금을 바치듯이 연구회에 돈을 바쳤고 길을 다니면서도 한 어린이라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초능력을 개발하여야 우수한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돈이 벌리는 일이 아니었고 어떤 수익성 있는 일을 하기에는 능력들이 너무 모자라 상임위원은 회장인 박성철밖에 없었다. 성철 역시 받는 돈이 넉넉해서가 아니고 다른 일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상임위원이 된 것이었다. 집에서의 반대는 당연히 대단하였다. 서른을 훨씬 넘기고도 장가갈 생각도 안 하는 주제에 이제는 직장마저 때려치웠으니 앞날이 훤하다고 집안 어른들은 혀를 찼다. 그 중 아버니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어서 아예 집에서 내쫓기기까지 했다. 성철도 큰 미련없이 담요 두 장만 말아서는 집을 나와 버렸다. 전생의 인연이 거기까지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보다 높은 영적인 단계에 그분들이 도착하면 자신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부끄러워할 것이 틀림 없다고도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숙식한 지 보름 만에 어머니가 나타나 협박 반, 사정 반으로 그를 다시 집으로 끌고 갔다. 성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며 이제는 카르마(業)에 의한 관계가 아니가 자신이 깨우침을 나눠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초능력이란 단순히 기술적인 능력이 남보다 앞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손으로 꺾으면 1 초도 안걸릴 숟가락을 3 분, 5 분씩 걸리며 노려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후의 문제였다. 내세에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도달하게 될지는 현세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행했는가에 달린 것이었다. 그 속에는 그 속에서의 깨달음이 있다. 그 깨달음을 넘본 사람을 도사(道士)라고 불렀던 것이다. 성철의 견해는 분명 초능력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것이었다. 어려운 영어 나부랭이나 지껄이는 사람들은 그 뜻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우리것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그 까닭의 저변에는 이들 부류가 학문을 하는 데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다. 말이 좋아 연구회지, 실상은 그들 자신이 연구대상인 셈이었으니. 그 중에 성철의 경우는 좀 유별났다. 그의 특기는 텔레파시(Telepathy)였으나 그렇게 우수한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일반적인 다른 회원과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가 회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사연이 꼬여 있었다. 이들이 재야 학술 단체로 있기는 하지만 회원 수는 300 여 명이 넘었다. 그 정도면 단체로는 웬만한 크기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모임에 그 숫자가 다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크기가 그쯤 되다보니 그 중에는 초능력이라고는 손톱끝만큼도 없는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했다. 그런 이들은 초능력을 길러 보고자 하는 부류와 학문적으로 연구해 보고자 하는 부류의 두 종류가 있었다. 성철은 그들 모두를 포용하여 단체를 이끌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초능력자라고 해도 그 능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자격지심을 지니는 이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단순히 연구만을 하는 이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연구자들을 백안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태도는 당연히 역으로 돌아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라는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었다. 성철이 골치를 썩이는 문제 역시 바로 그 점이었다. 성철의 전임이었던 이태호 회장 때에는 이런 일로 골치를 썩이는 일은 없었다. 이태호 회장. 그는 한국 초능력의 짧은 역사에 가장 뛰어난 초능력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전세계에도 몇 되지 않는 특수 초능력자로 생각되었다. 특수 초능력이란 우량성 초능력이라고도 부르는데 쉽게 말하면 '프라나'라고 불리우는 기(氣)를 자신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그의 장기는 염력(念力)이었다. 물건을 휘게 하거나 공중으로 끌어올리는 일 따위가 그의 초능력이었다. 그는 초능력 실험의 하나인 주사위와 숫자 맞추기에서 백 퍼센트 적중의 놀라운 힘을 보였다. 주사위 숫자 맞추기란 주사위를 실험자가 던지기 전에 그 숫자를 말하고 피실험자의 염력으로 주사위를 숫자에서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이태호는 화려한 각광을 받았고 초능력계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그는 이후에도 재떨이를 허공으로 들어올리거나 탁자를 들썩이게 만드는 등 놀라운 능력을 보여서 어렵잖게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회장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35 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미 50 이 넘어선 '원로'들의 불만도 대단했다. 그러나 실력이 있는자가 대표의 자리를 맡아야 획기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여론에 원로들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선출된 이태호 회장 취임 초기에는 초능력자와 비초능력자 사이에 갈등이 없었다. 아니, 갈등이 없었다기 보다는 이태호 회장의 능력 앞에 비초능력자들이 모두 감복했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태호 회장의 권위에 금이 가는 일이 생기면서 '한국초능력자연구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명성이 미국으로까지 퍼져나감으로써 발생했다. 성철은 머리를 흔들고 그 기억을 떨쳐버리고자 했다. 그 문제만 없었더라면 지금 자기는 조용히 자신의 초능력을 기르며 내세에서의 좀더 나은 자신을 위해 수양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 속진에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옛 고승이나 도사들은 명산의 암자나 동굴 속에서 도를 닦았던 모양이라고 성철은 생각했다. 지금 이태호 회장은 고문의 위치에 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하는 초능력자 집단과 조용석이라는 원로 초능력 연구가를 중심으로 하는 비초능력자 집단이 으르렁대고 있는 실정이었고, 성철은 중도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아 회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철은 세력균형 속에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을 쓰디쓴 웃음으로 비웃었다. "옛일에 연연하시나요?" 사무실 문을 빼곡이 여는데 벌써 낭랑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허허, 지아 양이 왔구먼." 성철은 문을 미처 다 밀지도 않고 얼굴에 하나 가득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 재미없어. 또 내가 여기 오는 것을 미리 아셨군요." "그거야 어디 내가 알려고 그래서 안 건가? 지아 양의 기가 너무 세서 자연스레 노출이 된 거지." 성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커다란 머리가 우측으로 기울어졌다. "앉아." 지아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미니스커트가 하염없이 말려 올라가며 탐스러운 허벅지를 거의 드러내 놓았다. "자세가 너무 야하잖아?" 성철은 근엄한 척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지아에게 그것은 통할 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아는 그 말에 생글생글 웃었다. "미안해요. 마흔이나 된 회장님 앞에서."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자세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 성철이 물었다. "저야 늘 그렇지요." 지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이야말로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나야말로 늘 그렇게 지내지. 가시방석에 앉아 지내는 것 아니겠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은 지뢰밭을 헤치고 다니는 것보다는 안전하잖아요?" 지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는 말에 성철은 긴장을 했다. "일이 잘못되고 있는 면이 있나?" "잘못되긴요." 지아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 있는 불안을 성철이 놓칠 리 없었다. "자, 속이지 말고. 무슨 일이 있지?" "모르겠어요." 지아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니?" 성철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나간 일의 자취를 찾는 것뿐이에요. 앞으로 다가올 일은 알 수가 없다고요."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잖아. 지아 양은 그 계획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저 역시 그걸 알아내고 싶어요. 하지만 어떤 전율이 전해질 뿐, 그 계획조차도 뿌연 안개같기만 해요. 그것은 공포의 그림자로만 존재하고 있어요." 지아는 몸서리를 쳤다. "지아 양은 그런 위험을 이길 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철은 자신없는 말투로 위로를 했다. 지아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만일 내부 사람들 모두에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위험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잖아?" "차라리 그런 것이면 좋겠어요." 지아는 한탄조로 말했다. "누군가가 심령방해(psymissing)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심려방해?" 성철은 움찔했다. 그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것일까?


"도사님의 수업 진전은?" 잠시 딴전을 부리던 성철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고마고만해요. 갑작스런 진전이란 보기 어려운 법이잖아요." 지아는 말을 하다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회장님, 지금 난승도사가 문제가 아니라고요! 내가, 이지아가 문제예요! 그 검은 그림자를 쫓아내어야 한다고요! 도와 주실 거예요?" 지아는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좁고 누추한 사무실에서 그녀의 몸부림은 오히려 신선한 일면이 있었다. 사무실은 장방향이었다. 기물이라고는 낡은 철제 책상과 어디서 들여왔는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티크 책장, 그리고 지금 지아와 성철이 마주하고 있는 응접세트뿐이엇다. 회색천으로 싸여 있는 싸구려 같은 느낌을 주는 소파와 닦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손자국으로 바닥 무늬가 일그러져 내려다 보이는 유리테일블이 300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단체의 실체였다. 그리고 그 낡은 터 안에 마치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과 여성속의 절망, 그 절망을 즐기듯이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 길고 긴 사슬처럼 얽매여 있었다. 마치 하나로 연결된 둥그런 사슬이었던 것이다. 그 눈의 임자는, 그녀를 절망 속으로 들여보낸 것은 바로 성철이었으니까. 따라서 성철에게는 그녀를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그것은 계획의 취소를 의미했으며 계획의 취소는 초능력을 향한 모든 노력의 좌절이었다. 지아를 위로할 적당한 말을 찾아 사무실 안을 서성이던 성철이 갑작스레 지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아 양이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보내지고 있는 텔레파시의 일종이 아닐까?" 지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지도 몰라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해요." 지아의 말에 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자의 짓이라면 큰 우려는 하지 않아도 좋아. 실제로 무슨 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냥 겁을 주자는 것뿐일 게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지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못할 일이 없는 법이에요." "지아 양의 일은 더 이상 진전이 없지?" 성철이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물었다. 지아가 먼저 말을 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물론이에요." "우리가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하는 한 그도 위험하지 않아. 그러니까 단지 위협만으로 그칠 수밖에." 지아는 성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것은 모순이에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위험할


이유가 처음부터 없어요!" 지아의 말에 성철도 금방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서기에는 멋쩍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진 않아. 그자가 비록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그자를 중심으로 재기를 노리는 사람들 중에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지아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정말 그 사람일까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이면 확실히 안심이 되나 보지? 금세 목소리가 좋아졌는데?" 성철이 반가운 느낌에 바로 반문을 했다. 지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예요. 다만 실체가 보인다면 싸울 수 있어요. 저는 이게 카르마(業)가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더랬어요." "카르마가 불안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성철은 소파에 앉았다. 마치 머리의 거대한 무게가 그를 내리 누르는 것 같은 모습으로. "확인을 할 방법이 없을까요?" 지아가 깍지를 끼며 물었다. 희고 작은 손이 보석처럼 빛났다. "글쎄, 텔레파시에서 나오는 전파를 감지해 내는 장치가 미국에는 있다고 말만 들어 봤지." "쓸데없는 소릴랑 하지도 마세요." 지아가 톡 쏘았다. "미안. 방법이 없어. 그자에게 누군가를 붙여서 감시를 하기 전에는 말야." 성철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감시라도 붙여야죠!" 지아의 목소리가 톤을 높였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지아 양도 잘 아는 일이잖아?" 성철이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일은 수고는 많이 들지만 얻는 것은 별로 없지. 입으로는 나물대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말 위험이 있다고 하면 뛰어들 사람은 거의 없어.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도 별로 없고." 성철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다 내가 비실세 회장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 아직도 이쪽에 붙을까, 저쪽에 붙을까 하고 머리를 쥐어 짜는 사람들이 많거든. 하지만 나한테 붙을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지." 지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저도 힘을 낼 테니까요." "그래요. 지아 양, 힘을 내요. 그리고 위험한 느낌이 오면 내게 메시지를 보내요. 나도 이제부터 내 감각의 문을 백 퍼센트 열어 놓을 테니깐." 성철은 지아의 손을 쥐고 토닥거렸다.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철이나 지아나 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4. 미스디렉션의 세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희수도 느끼고 있는 일이었다. '팀' 안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냉소적인 것이었다. 희수가 보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은 난승도사와 현덕간의 불화에 있는 듯 하였다. 둘 사이에 언제부터 금이 갔는지 희수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아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문제의 요점이 초능력이라는 것에 있다는 것도 분명한 것 같았다. 희수는 초능력이란 말을 되뇌며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초능력으로 물건을 공중으로 휙휙 날려 보낼 수 있으면 정말 근사한 일일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마술의 본령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희수의 꿈은 마술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있었다. 희수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자신을 던졌다. "이 자식아! 울긴 왜 울어!" 훌쩍대던 희수가 어머니의 모진 매에 퍼렇게 질려서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모두일 만큼 맞고 또 맞은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술집 작부였다. 그러나 너무나 예뻤고 그 때문에 그는 맞으면서도 어머니의 고운 태를 바라보기를 즐겼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한테는 한번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희수는 자기 기억이 4 살 때부터 시작된다고 알고 있다. 그 첫 기억이 모진 매였다. 그 다음에는 낮에는 자고 저녁이면 집에서 없어지는 엄마에 대한 기억. 그러나 그것마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10 살이 되었을 때 엄마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머니와 같은 술집 동료였던 아주머니들한테서 들을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영화배우였다고 했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아닌 삼류 영화배우. 그러니까 늘 짐이나 나르던 엑스트라역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위험한 촬영이 있었는데 대역 맡은 아버지는 그날 사고로 돌아가셨고 결국 사체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그네들이 아는 모든 사실이었다. 10 살 때 희수는 세상에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자기를 고아로 만드는 데 일조를 기한 모든이들을 다 죽일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열다섯이 되면서 허물어졌다. 엄마가 부잣집의 세컨드로 호위호식하면서 자신을 내팽개쳐 두었다는


것을 알았던 때였고, 영화배우인 아버지가 사고로 죽지 않았더라도 엄마와 결혼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던 때였다. 덕분에 희수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였다. 그때부터 그는 동네 불량배가 되었다. 그가 자란 동네는 서울 외곽도시이었고 적당한 암흑 조직이 어수선하게 운영을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그는 타고난 독기와 매력으로 나름대로 작은 자기구역을 금방 꾸려나갈 수 있었다. 별명이 독불장군이었으니. 마술과의 인연은 그 당시에 마술처럼 일어났다. 그가 22 세 되던 겨울이었다. 시민회관에서 마술 공연이 있었다. 시민회관 건립과 더불어 개발이 일어나 번화가로 변모하기 시작하자 기존의 파벌들이 손을 뻗쳐 오기 시작했다. 희수는 반발하고 싸움도 몇 차례 걸어 보았지만, 혈혈단신인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 구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기고 있었고 마음 내킬 때마다 발을 들여 놓았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마술 공연이라, 저런 사기극을 보러 다니는 게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야?" 희수는 그날의 파트너였던 오효미라는 여자에게 광고를 보며 말을 걸었다. "왜요? 재미있잖아요?" 여자는 마술 공연에 흥미가 있는 듯했다. "사기극이 재미는?" 희수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희수 씨는 마술에 나오는 트릭을 모두 알고 있어요?" 여자가 팔짱을 힘주어 끼면서 말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있는 가슴이 희수의 팔로 전달되어 왔다. "그걸 모를까?" 희수가 비웃는 투로 말하며 효미를 좀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정말?" 효미의 얼굴은 깜찍스런 예쁜 얼굴이었다. 전문대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전공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먹었지만 그리고 희수에게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이지." 희수는 한 블럭만 더 가면 자신의 단골 술집 '페브린'이 나온다는 것을 상기하고 발길을 그 쪽으로 돌렸다. "그럼 우리 저거 봐요." "응?" "난요, 마술이 얼마나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요. 옛날부터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희수 씨, 우리 저거 봐요. 네?" 효미는 몸을 흔들며 희수 앞에서 아양을 떨었다. 가슴이 출렁거리는 것을 호색의 눈으로 바라보던 희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와! 정말 보는 거지요?" 효미는 덜렁 희수를 안았다. "그래! 가자구, 까짓거." 희수는 오던 길을 거슬러 시민회관으로 갔다. 마침 시간이 맞아 7 시에 있는 2 회 공연의 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희수의 눈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시시껍절한 마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팡이에서 꽃이 나오거나 끝없이 입 안에서 테이프가 나오고 손수건에서 비둘기가 나오는 따위의 그리고 심혈을 기울인 것처럼 만들어진, 사람을 3 단으로 절단하는 쇼. "같은 걸 해도 내가 하면 저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희수가 효미에게 속삭였다. "그럼요?" 마술의 재미에 효미는 푹 빠져 있었다. 그녀의 말은 건성으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로 피가 퍽 튀게 만드는 거야. 상자에서 피가 죽 흘러 내리는 거지. 정말로 절단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얼마나 멋진 일이겠냐고." "아이." 효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것이다. "자, 오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키가 삐죽 큰 사내가 공기총을 들고 나와서 소리쳤다. 수영복을 입고 설치던 여자 둘이 과장된 몸짓으로 그 사내 곁으로 다가섰다. 번쩍이는 천박한 옷자락을 휘날리던 마술사는 무대 뒤쪽으로 쭉 걸어갔다. 그래봐야 키 큰 사내와의 거리는 10m 가 채 안되었다. "이제 제가 총으로 찬드라카드라(마술사의 예명)님을 쏘겠습니다. 찬드라카드라님은 단지 저 접시 하나로 총알을 막아내실 겁니다." 공연장 안은 당장에 소란스러워졌다. 놀란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였다. "뻔한 속임수잖아? 저 거리라면 어디는 못 겨누겠어? 조수랑 짜 가지고 접시를 딱 갖다대는 곳으로 총알이 날아가게 만드는 거야." 효미는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납득이 된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 접시가 깨질 텐데......" 효미의 중얼거림에 맞춰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술사는 접시를 턱 내밀었고 쨍한는 소리에 이어 납탄알이 툭 무대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접시가 총알을 막아낸 것이었다. "접시가 안 깨진 이유는 뭐지요? 효미의 말투에는 약간의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이런....." 희수는 새어나오는 욕을 꿀꺽 삼키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사기야! 내가 쏘아 보겠어!"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희수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걸음에 무대로 뛰어올랐다. "자, 총을 이리내." 희수가 내미는 손을 바라보며 키 큰 사내는 주춤 물러섰다. "그분에게 총을 드리게." 마술사가 돌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 큰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가 총을 건네주었다.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야 그저 사건이 있을수록 좋을 뿐인 것이었다. 희수는 총을 들어 마술사를 겨냥했다. 그는 공기총 사격에 큰 자신감이 있었다. 마술사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희수는 차마 웃는 얼굴은 겨냥할 수 없어 겨냥지를 허벅지로 바꾸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총을 쏘았다. 마술사는 다시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고, 총알은 그의 발 밑을 굴렀다. 희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일순 당황했으나 곧 눈치챈 것이 있었다. 자신은 분명 허벅지를 겨냥했는데 마술사는 왼쪽 가슴을 보호하려는 자세로 팔을 뻗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이 공기총은 발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실제 총알은 나오지 않았으며 누군가가 '쨍그랑' 하는 음향효과를 내주었던 것이다. 희수는 내막을 알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서 폭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의 무례한 행동을 점잖게 받아준 것에 대한 예의를 자신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술사와 악수를 정중하게 나누고 내려왔다. 자리로 돌아왔는데 효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을 감탄의 눈길로 보고 있어야 할 여자가 없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짜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곧 짜증은 걱정으로 변했다. 마술은 아직 여흥으로 몇 가지 더 남아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희수는 공연장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속을 뒤집어 놓았다. 화장실부터 뒤졌지만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희수는 시민회관 밖으로 뛰쳐나왔다. 허둥대던 그는 옆으로 스쳐지나가던 행인과 콰당 부딪쳤다. 그 조우가 우연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라는 점은 희수의 손에 쪽지가 주어짐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B 지구 공터로 쪽지에 적힌 것은 간단했지만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민회관을 자신의 구역으로 여기고 있는 해룡파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B 지구 공터는 역시 희수가 자기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곳인데 최근에 쇼핑센터가 지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시민회관 구역을 손아귀에 넣은 해룡파는 당연히 쇼핑센터 구역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귀찮은 독불장군 희수를 처리해야 했고, 자기 구역에 들어온 봉을 놓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자식들을!" 희수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는 따르는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여자란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효미가 비록 여대생이라고 해도 전문대생이었고 뛰어난 미모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효미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적에게 넘어간 것이다. 지금 해룡파에 있는 것은 효미가 아니라 희수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희수는 곧바로 B 지구 공터로 향했다. "야, 개자식들아! 내가 여기 왔다!" 희수가 건축자재 사이를 뛰어다니며 외쳤다. 해룡파는 웬일인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비겁한 녀석들! 어디 숨었냐!" 다시 외치는 순간, 등 뒤에서 일어나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희수는 얼른 몸을 낮췄다. 머리 위로 철근 덩어리가 휙 지나갔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자식들이 아주 날 죽일 작정을 했구나.' 희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몸을 낮춘 자세에서 바로 원을 그리며 발을 날렸다. 발에 묵직하게 체중이 걸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수는 힘을 다해서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쿵소리와 더불어 한 녀석이 쓰러졌다. 희수는 그자가 들고 있던 철근 뭉치를 손에 잡아 보았다. 그러나 손아귀에 맞지도 않고 너무 무거웠다. 1 회용의 기습용이면 몰라도 들고서 뛰어다닐 수 있는 성격의 무기가 아니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내가 그렇게 겁이 나냐!" 희수는 쌓여 있는 건축자재 더미 위로 뛰어올라갔다. 공터가 모두 내려다 보이는 곳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기습을 당할 염려가 없는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짜샤, 네깟 놈을 두려워하다가 내가 제 명에 죽겠냐?" 굵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곧 거무스레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희수 씨!" 찢어지는 비명도 함께 나왔다. 효미의 목소리였다. "해룡이, 이 비겁한 놈아! 여자는 풀어줘라!" "저 자식이 형님 이름을 마구 불러대!" "확 가서 조져 버려!" 해룡파 부하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내버려 둬. 곧 죽을 놈인데 맘껏 짖으라고 해라."


해룡의 비웃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해룡은 이제 막 40 줄에 접어든 별 6 개의 사나이였다. 본 이름은 아무도 몰랐고 해룡살롱의 영업부장이었기 때문에 해룡이라고 불리웠다. "김희수, 독불장군 시대는 끝났어!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신분보장은 해주지. 장성로를 떼주겠다! 그러나 오지 않는다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만들어 주겠어." "개수작 말아!" 희수가 맞받아쳤다. "아악!" 다시 효미의 비명이 들렸다. "자기 여자도 지키지 못한 독불장군이라면 누가 너를 신뢰할까?" 해룡의 목소리 뒤로 킬킬대는 음란한 소리가 깔렸다. 희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부모를 잃고 헤매며 크는 동안 그가 보고 느낀 것은 혼자라는 것이었다. 남의 밑에 있어야 단물만 다 빨리면 내팽개쳐지는 것을 그는 너무나 많이 보았다. 우선 자기자신부터 그랬다. 여자들에게 신선한 맛이 떨어지면 등을 돌렸다. 그런데 날 보고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희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해룡! 날 모욕주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러나 분명히 말하겠다! 그 아가씨 몸에 생채기 하나 날 때마다 네 몸에 칼자국이 하나씩 생길 거다! 알았냐!" "내봐라, 임마!" 해룡의 비웃음 뒤로 효미의 비명이 들렸다. 희수로서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그는 맨손이었다. 칼 하나 갖고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듬직하게 느껴지는 돌멩이를 양손아귀에 쥐었다. "야아아아!" 희수는 괴성을 지르며 해룡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려갔다. 닥치는 대로 두셋을 때려 눕히기는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차츰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판이었는데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 했다. 희수는 구원을 바라는 자신의 환청이 아닐까 하며 깜박 정신을 잃었다. "희수 씨, 희수 씨!" 효미의 목소리가 들리며 희수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다시 정신이 깊은 어둠의 나락에 떨어질 것 같았다. "정신이 드나봐요." "워낙 신체가 튼튼하니까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도 따라 들렸다.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지요." 또 다른 사내의 목소리......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하는 궁금증이 희수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효미의 얼굴이 잔상으로 잡히며 차츰 초점이 맞춰졌다. "눈을 떴어요." "고생 많았지....." 희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나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뒤에 두 사람도 그 모습이 잡혀 왔다. "다, 당신들은....." 희수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중심이 잡히지 않아 다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가만 있게." 사내가 말했다. 그는 마술사의 조수였다. "며칠 내에 괜찮아질걸세." 점잖게 말하는 사람은 마술사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그저 큰 우연일 뿐이지요." 조수가 말했다. "우리는 그곳을 지나다가 싸움이 난 것을 알고 말리려고 약간의 수작을 했던 것뿐이라고요." "수작이라니오?" "그런 폭력배들은 싸울 때 경찰이 나타나서 방해를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항상 있지요." 조수가 설렁설렁 말을 풀었다. "우리 마술 도구 중에는 음향에 관계되는 것들도 있어요. 그 중에서 약간의 고음을 만들어 이었다 끊었다 해본 거지요." 조수는 말을 마치고 씩 웃었다. "그랬더니 과연 다 내뺐다 이겁니까?" "그렇지요. 스스로의 긴장감이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되지요. 마술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미스디렉션(missdirec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희수가 최초로 들은 마술 용어였으며 이후로 희수는 마술의 세계에서의 미스디렉션이 아니고 미스디렉션의 세계에서의 마술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현덕과 후일 예명을 다시 난승도사로 바꾼 장성욱이었다. 어차피 설 곳을 잃어버린 그는 자기들을 따라가지 않겠느냐는 현덕의 제의에 쾌히 응했고, 효미와는 그렇게 이별을 했다. 처음에는 암흑가의 생리를 잘 아는 만큼 공연장에서의 질서 문제 따위나 오가며 생기는 시비거리를 해소하는 일 등, 힘이 드는 일만을 해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성욱이 단학(丹學)에 빠져들고 예명도 난승도사라는 희한한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마술하는


스타일도 크게 변해서 그때부터 희수도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희수는 아직도 변변한 마술 하나를 익혀 놓은 것이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연기뿐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어떻게 하면 연기를 보다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점만 신경을 썼을 뿐 마술을 익히는 데는 큰 열성이 없었다. 그는 마술의 세계에 있는 것 역시 의탁할만한 곳이 마땅찮아 있는 것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뿐 마술이란 그에게 목 매달고 지켜야 하는 천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난승도사의 제자 중에서는 그가 제일 자유분방한 축에 속했다. 그는 딱히 연습을 할 것도 없고 해서 수시로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 적당히 제비 노릇을 하기도 하고 충무로의 영화사며 기획사까지 기웃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해서인지 희수는 그저 머물러 있었다. 희수는 담배를 비벼 껐다. 이곳에 온 지 이미 5 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도 많이 변하긴 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그로서는 스승의 여자들을 탐해본 적이 없었다. 동료들 중에 혹 그를 따르는 여자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는 냉정하게 그들을 대했다. 그 여자들에 대한 권리는 스승에게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는 최근 아란과 형준 사이에 생겨나고 있는 묘한 분위기를 상당히 못마땅한 눈치로 보고 있었다. 그는 물론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형준도 암흑세계에서 놀던 인물이라는 확실한 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스승의 여자를 넘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희수는 때를 보아 형준에게 일침을 놓아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5. 폭풍 전야 아란은 숨이 차서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늘은 그만 두 번이나 일을 치룬 것이었다. 그야말로 허물어졌는지 꼼짝달싹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동그란 얼굴의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었다. 눈 밑이 푸르죽죽한 것이 음기가 상당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며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도톰하여 육감적인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자신을 찾을 줄을 몰랐기에 그녀는 형준과 한참을 즐겼던 터였다. 대개 공연 전날은 관계를 맺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의외로 자신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격렬하게 일을 치뤘다. 그런 일은 최근에 몇 번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난승도사 밑으로 온 지는 2 년 밖에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들어온 지 석 달 만에 난승도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첫 관계는 공연이 끝난 날에 일어났다.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와 녹초가 되다시피한 상태였다. 다른 제자들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약속이 있었던 듯 모두 외출을 나가 버리고 난승도사와 그녀밖에 집에 남지 않았다. "아란, 이리 좀 올라와라." 이층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아란은 공연 끝에 지친 몸을 다시 일으켜 옷매무새를 고치고 올라갔다. 그러나 옷매무새는 전혀 고칠 필요가 없었다. 위에 올라가자 난승도사가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어디 계세요?" "이쪽이다." 아란이 난승도사를 찾자 방 안에서 소리가 났다. 이층의 방안에는 욕실이 따로 붙어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해매게 되었던 것이다. 무심히 문을 열고 들어선 아란은 깜짝 놀라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난승은 벌거벗은 채 욕조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란이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검붉은 심벌이 아란을 어지럽게 했다. "멍하니 있지 말고 등을 밀어." 난승도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란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지만 웬일인지 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목욕 타월을 집어들어 난승도사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더운데 옷을 벗어." 난승도사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싣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안그래도 더운 느낌을 받고 있던 아란은 얼른 윗도리와 치마를 벗어 던졌다. 슈미즈 바람이 되었는테 물이 튀어 젖게 되자 그도 귀찮아 벗어 버렸다. 그러자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게 되었다. 그때서야 난승도사의 심벌도 서서히 용트림을 했다. 아란의 얼굴이 더 붉어졌지만 거기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같이 씻지." 난승도사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며 아란을 마주보게 세워 놓고는 브래지어를 벗겨 버렸다. 아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반발의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불가사의한 마술과 같았다. 난승도사의 손길은 아무 저항 없이 팬티로 옮겨 갔고 아란은 잠시 후에 전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같이 욕조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다음에는 침대 위에서 격렬한 정사로 이어졌다. 그 모든 일이 지극히 객관적으로 이루어져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설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관계는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다. 난승도사


앞에만 가면 그녀 자신은 없어지고 객체화된 하나의 물건이 성의 향락을 누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때에 구원으로 존재한 것이 형준이었다. 그녀가 들어왔을 무렵 형준은 아무 하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 희수가 하던 잡일을 그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실제로 마술과는 관련이 없는 일로써 백날 하고 있어야 아무것도 아닌 일일 따름이었다. 따라서 형준은 그녀의 주목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난승도사와 반자발적인 관계를 맺게 되자 마술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났다. 그 두려움은 먼저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주게 했다. 마술을 할 줄 아는 이들이 모두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며 그 반대로 마술을 전혀 할 줄 모르는 형준이 그 위치를 부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형준은 답답하리 만큼 말도 잘하지 못하였고, 얼굴도 남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미남도 되지 못했다. 그 점이 처음 형준을 보고 말을 붙이게 하는데 장애요인이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바뀜으로써 형준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였다. 서로를 위로해 주며 공휴일에는 같이 놀러다니기도 하더니 둘 사이는 급속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난승도사가 그 점을 깨닫고 있는지의 여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형준이 마술에 너무나 재주가 없다 하여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란이 뭣에 씌운 것처럼 관계를 가진 뒤였다. "박형준이란 녀석 어때?" 느닷없는 그 말에 아란은 얼굴색이 변할 만큼 놀랐다. "뭐, 뭐가요." 놀란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쉬느라 탐스러운 가슴이 출렁거렸다. 난승도사는 부드럽게 손을 가져가 유두를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아란은 견디기 어려워 몸을 비비꼬았다. "마술에 대한 전망 말이지." 난승도사는 그녀가 쾌락을 다 흡수해 내지 못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그,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숨이 탁탁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아란이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아무 재주도 없는 친구를 이런 불경기에 계속 둘 수는 없단말야. 자기 밥값은 해야 되는데 그치는 영 노력하는 태가 안보여." 어쩌면 이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몰라. 아란은 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해보았다. 두 남자를 한 집 안에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남의 눈도 많았고.


그러나 형준이 이곳을 떠나면 무엇을 그가 할 수 있을런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현덕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도 형준처럼 재주가 없어서 내보내게 되었는데, 훗날 다시 돌아와 제발 관객 역할이라도 맡겨 달라고 사정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형준 역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박 선배도 열심히 하는 눈치예요." 아란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내뱉았다. "그래? 그렇다면 좀더 두고 봐야겠군." 난승도사의 말에 아란은 부르르 몸을 떨고는 안심하고 쾌락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형준을 찾았다. "어, 웬일이야?" 형준은 반갑게 아란을 맞았다. 뻔히 어디 다녀오는지 알면서 질투심도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그쪽이 아란에게도 편했다. "당신이 재주가 없다고 쫓아낼 궁리를 하고 있어요." 아란은 한숨 돌리며 말했다. "누가?" "누군 누구예요? 스승님이 뻔하잖아요?" 뻔한 사실을 질문하는 형준이 너무 답답했다. 지나치게 꼼꼼한 것인지, 정말 멍청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사실 공밥을 축내는 거나 다름없으니....." 형준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공밥을 축내긴 무슨 공밥을 축낸다고 그래요?" 아란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게 사실이니까." 형준이 시큰둥해졌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봐요. 뭔가 할 게 있을 거예요. 형준 씨 잘하는 걸 생각해 봐요. 나도 생각을 해볼 테니까." 아란이 그를 토닥거렸다. 등 뒤로부터 다가가 그를 안았다. 그 순간 번개 같은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할 게 있어요!" 아란이 소리를 쳤다. "픽 포켓(Pick-pocket) 쇼는 할 수 있어요." "픽 포켓?" 형준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픽 포켓 쇼요. 남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아내기예요. 형준 씨 손놀림이 빨라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란은 순식간에 기분이 들떠서 형준을 꼭 안았다. 형준이 고개를 돌려 아란의 입술을 찾았고 둘은 달디단 긴 키스를 하였다. 그 이후로 형준은 픽 포켓 쇼를 담당하게 되었고 상당한 실력으로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특히 희수가 섭외해 놓은


사람들은 어쩌다 쓸 뿐이고, 그는 실제 무대에서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만큼의 박진감이 그곳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형준이라는 사람 자체가 야심이 있다든가 해서 무대를 멋지게 연출해 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형준의 지위는 굳어질 수 있었고 난승도사 밑에서 안정된 생활의 기틀이 구축되어졌다. 아란은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샤워라도 해서 찌뿌드한 기운을 몰아내지 않으면 오늘 공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제는 공연방식도 많이 변해서 예전처럼 되는 대로 이 마술 저 마술을 끄집어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스토리를 정해 놓고 그 속에서 마술을 일으키는, 굳이 말한다면 '마술 연극'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있을 공연은 전우치의 죽음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전우치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도사(道士)다. 그가 하루는 친구들을 모아 놓고 주연을 연다. 친구들은 그에게 재주 보이기를 바라며 먼저 한 친구씩 도술을 보이기로 한다. 그 중 전우치가 종이를 찢어 나비를 날린 것이 최고의 도술로 칭찬을 받는다. 기분이 우쭐해진 전우치는 나무를 하나 심고 점점 크게 만들어 하늘나라를 넘보게 된다. 하늘에 닿을 만큼 나무를 크게 만들고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천도복숭아를 따서 밑으로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곧 발각되고 전우치는 하늘나라에서 토막이 나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 내용에 떨어진 토막을 이어 붙이는 마술도 시도할 것이었다. 아란과 지아가 맡은 것은 전우치의 시비로 모여 있는 뭇사람들보다 더 나은 도술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비들 뒤로 밧줄과 술병이 춤을 추며 따라오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 테마극을 연출하고 막전막후에서 현덕의 마술 쇼와 형준의 픽 포켓 쇼 등이 있을 예정이었다. 아란은 쇼의 구성을 되새겨 보며 훌훌 옷을 벗어던졌다. 균형있는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길고 부드러운 목덜미에서 동그랗게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어깨선,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있는 젖가슴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며 유두 역시 선홍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은 군살이 하나도 없이 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란은 신경질적으로 벗은 옷들을 팽개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란의 방은 2 층 난승도사의 방 바로 아래에 있는 것으로 난승도사의 방이 좌측에 창이 있는 것과 달리 양쪽으로 방이 있다는 사실말고는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란은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가닥가닥 풀어진 정신을 가다듬어 갔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확실한 장래를 설계할 필요가 물론 있었다. 난승도사는 조수로 꼭 예쁜 여자를 뽑아 2, 3 년 노닥거리고 노리개로 삼아 즐긴 후 매정하게 쫓아내는 성격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결과도 정말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형준에게 기댈 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해심이 아무리 넓은 남자라도 자기가 평생 데리고 살 여자가 버젓이 남과 자는 것은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형준은 용납하고 있었고 그것은 형준도 아란을 노리개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명백한 증거였다. '난 화대도 받지 않는 창녀야.' 아란은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어떻게든 술집에는 나가지 않을려고 기를 써서 들어온 직업이었는데. '화대도 받지 않는 창녀'라는 생각이 들자 죽고 싶은 심정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몸매에 자신이 있었다. 적당히 눈먼 사내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중졸의 학력으로 그럴듯한 사내를 소개받는 것은 틀렸고 스스로 찾아나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럴듯한 직업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술집에도 공장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며 혹시 인신매매가 아닌지 계속 의심을 해나갔고 그 중에 마술사의 조수라는 이색 직업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귀신에게라도 씌운 듯이 몸을 내주었고 이후로는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하고 있어서 그럴듯한 남자는 그림자도 찾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지내선 안 돼. 물줄기를 맞으며 아란은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하나의 방법으로 공연에서 정말 아름답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눈먼 녀석이 쫓아올지도 모를 일이니까. 아란은 몸을 닦고 나와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기 시작 했다. 집 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현덕은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 지 꼼짝을 하지 않았고 형준의 방에서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희수나 지아의 방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애당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지아는 성철을 만나고 돌아와 더 답답해진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난승도사의 유혹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넘어가지 않았다. 난승도사가 여자를 유혹하는 비결은 최면에 있는 것이엇다.


그러나 지아는 자의식이 강한 여자로 최면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아란처럼 단순한 여자일수록 쉽사리 승복하게 되어 있었다. 지아는 그런 사정을 훤히 이해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녀가 난승도사의 이름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난승도사의 복잡한 여자 관계에 기인하고 있었다. 지아는 방 안이 자신을 질식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현덕이 이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스승님을 만났나요?" 지아가 물었다. "응." 현덕이 지아를 대하는 태도는 최근에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그 이유를 지아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짐작되기는 오직 한 가지, 그가 난승도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난승도사와 함께 있다가 내려오면 현덕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담했던 것이다. 현덕의 오늘 자세에는 더욱 더 무뚝뚝함이 들어 있었다. 지아는 위축이 되어 몸을 사렸다. 현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을 스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아는 2 층으로 올라갔다. "누구냐?" 노크를 하자 난승도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압니다." "들어와라." 난승도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오늘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아요." "공연에 못 나가겠다는 소리냐?" 난승도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말씀은 아니고요. 불안감이 커졌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긴장이 되어서 그런 거야." "긴장이라니오? 저도 3 년이나 이 생활을 하고 있어요. 공연 하나에 쩔쩔매는 풋내기가 아니라고요." "허, 아무 일도 없을 거래도." 난승도사가 짜증을 냈다. "가거라, 난 좀 쉬어야 해." 난승도사가 손짓으로까지 나가라고 해서 지아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려가지 않고 베란다로 나섰다. 좋은 오후였다. 정원이 터질 듯한 생명감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굳을 대로 굳어져 있는 집 안과는 영 딴판이었다. 출발은 저녁 5 시였다. 시간이 되자 거실에 사람들이 모였다. 난승도사는 도포를 걸치고 두건을 쓰고 있었다. "준비들은 다 되었겠지?"


난승도사의 물음은 의례적인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현덕이 대답했다. "형준이는 줄을 당길 때 너무 세게 당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줄이 너무 빨리 올라가면 거짓말 같단 말야." "예" 형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 공연은 '마술극'의 장래를 위해 중요한 기점이 될 거야. 마술극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다른 마술사들로부터도 합작 제의를 받고 있다. 오늘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마술계의 선두주자다운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하자고." 난승도사는 한마탕 훈시를 했다. 그러나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느낌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저 시큰둥한 자세였다. 현덕은 평소대로 무표정한 모습이었고 아란은 빠져나갈 궁리를 아직도 요리조리 하고 있었고 지아는 답답한 불안감에 빠져있고, 희수는 오늘은 혹 발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형준은 주의받은 일 이외의 생각은 아예 없었다. 서로 다른 마음가짐 속으로 폭풍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6. 예 언 "강 형사!" 추 경감은 짜증 섞인 소리로 강 형사를 불렀다. 이번이 세번째였다. "예?" 강 형사가 추 경감의 큰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가 먹었어? 왜 대답을 안 해?" "부르셨습니까?" "장해요, 장해." 추 경감은 쳐를 쯧쯧 차더니 말했다. "봉천동에서 살인사건이야. 빨리 나와." "옛!" 강 형사는 잠바를 왼쪽 팔에 걸치며 뛰어나왔다. 짙푸른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때가 가을이 아닙니까? 한 구절 아름다운 시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 팔자 좋군.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가는 형사가 아름다운 시구라." "어, 이러지 마십시오. 저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일수록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안그러면...." "염세주의자가 된다고?" 흥분해서 말하는 강 형사의 말을 추 경감이 일찍 잘랐다. "잘 아시면서 ." 강 형사도 그저 한번 웃고 다시 그 말을 들먹이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꽤나 고지대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자가용 안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 곳이 못 되는 곳이군요." "여기도 서울의 소문난 부촌이라는 걸 모르나? 달동네라는 것도 다 옛말들이야." 추 경감이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이 근처인 모양인데 내려서 찾는 게 낫겠습니다." 강 형사의 말에 둘은 이미 오 년쯤 전에 폐차시켰어야 할 고물차에서 내려 번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두 분....." 맑은 목소리가 추 경감과 강 형사를 불렀다. "형사분들이지요?" 목소리의 임자는 2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단발머리에 주황색의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소녀티가 났다. 하얀 피부에 커다란 두 눈은 약간 공포에 질려 있는 듯 했고, 작고 붉은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하얀 이가 더욱 고혹적이었다. 옐로우 계열로 맞춰 입은 투피스가 여인의 차분해 보이는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렇습니다. 누구시지요?" 강 형사가 황급히 질문을 던졌다. 마치 추 경감이 말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라도 하는 양. "이 집에 사람이 죽어 있어요." 여인은 강 형사의 질문엔 아랑곳없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예?" "몸이 꽁꽁 묶여 있네요. 칼을 맞았어요." 여인은 먼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꿈꾸는 듯이 거의 감정이 없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쇠사슬도 보이는데,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여보세요!" 강 형사가 버럭 고함을 쳤다. 여인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강 형사는 놀란 여인에게 조금은 민망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드린 대로예요." 여인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만 더 참았다면 범인이 누군지 볼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여인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문득 몸을 돌려 가버렸다. "이봐요!" 강 형사가 얼른 그 여인을 쫓아갔지만 모퉁이를 돌아서 보니 주황색 모자의 단발머리 여인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강 형사는 사람들도 얼마 없는 골목들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노란색 투피스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됐어?" 추 경감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요?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이 근처에 사는 여자일 게야." 추 경감이 담배를 끄며 말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저 골목으로 들어가고 바로 쫓아갔으니까 사는 곳은 뻔합니다. 찾으려고 한다면 못 찾을 리가 없습니다." 강 형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런데 흥미가 당기는군. 그 여자가 말한 집이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란 말야." "예?" 강 형사가 놀라 반문을 했다. "바로 여기야. 금방 순경이 나왔기에 알았지. 자, 들어가 보세. 어쩌면 그 여자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추 경감은 강 형사의 팔을 잡아 끌었다.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꼬마 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집 안에는 정말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살이라고 보여집니다." 초동수사를 지휘하고 있던 경위의 말이었다. "현장은 쇠사슬로 잠겨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추 경감과 강 형사는 서로 얼굴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흉기는 칼인가?" 추 경감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위가 놀라며 반문했다. "피살자의 몸은 묶여 있었지?" 이번에는 강 형사가 물었다. "예....." 경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그 여자, 분명 뭘 알고 있었군요?" 강 형사가 추 경감에게 말했다. 추 경감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시했다. "피살자는 누구지?" "마술사 난승도사라는 사람입니다." "난승도사?" "예. 제법 유명한 사람인데 들어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니, 난 금시초문인걸." 강 형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단 현장으로 올라가 보시지요? 아직 현장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경위의 말을 들은 일행은 2 층으로 올라갔다. 집은 꽤나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이미 들어설 때 정원에서 느꼈지만 올라설수록 점점 더 화려해지고 있는 이상한


집이었다. 1 층은 좌우가 대칭형으로 짜여져 있었다. 양쪽으로 방이 각각 3 개씩이었다. 당연히 거대한 마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루는 마치 하나의 무대처럼 꾸며져 있었다. 마루의 스테이지 뒤편으로는 2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역시 오른편, 왼편 모두 통하게 되어 있었다. 즉 계단은 좌우 끝에서 서로 마주 보게끔 놓여있는 것이다. 이층에는 단 하나의 방이 있었다. 난승도사의 방이 중앙에 있고 밖의 벽은 온통 장식물로 가득차 있었다.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고색창연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칼이나 총 따위의 무기들도 한 면 가득 있었다. "이것들은 다 마술 도구나 옛날 마술사의 유물이랍니다." 경위가 아는 척 소개를 했다. "흉기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위는 칼들이 빠끔히 걸려있는 벽을 가리켰다. "이 빈 자리가 보이시죠? 흉기로 사용된 칼은 바로 여기에 걸려있던 단검이었습니다." "그럼 사체는 저 방에?" 강 형사가 이층에 있는 유일한 방을 가리켰다. 경위는 물론이라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치우지 않았습니다." "잘했어." 추 경감이 간단하게 대꾸하고 문을 열었다. 난승도사라는 그 마술사는 얼핏 보기에도 튼실해 보이는 끈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난승도사는 왜소한 체구를 가진 별 볼품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묶여 있는 의자도 보통 책상에 붙어있는 팔걸이가 있는 싸구려 의자로 지금껏 보아온 이 집의 화려한 이미지와는 영 동떨어져 보였다. 끈은 두 번에 걸쳐 그를 묶고 있었고 매듭은 그의 가슴에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다. 그는 정면을 보고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칼은 그의 목을 정면에서 꿰뚫고 있었다. "이걸 어째서 자살이라고 그랬지?" 강 형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피살자는 묶여 있는 무저항의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한거야."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경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방문은 저희가 도착했을 때 쇠사슬로 잠겨 있었습니다. 바로 저 쇠사슬입니다." 경위는 방 안의 장 옆으로 나와 있는 쇠사슬을 가리켰다. "저 쇠사슬은 장을 한 바퀴 돌아 문 손잡이에 매어져 있었습니다. 문 틈으로는 간신히 난승도사의 오른쪽 반밖에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틈으로 칼을 던겨 사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각도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경위는 다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의 오른편에만 커다란 창문이 하나 있었다. 왼편에는 나지막한 탁자가 하나 있었고 깎아 놓은 사과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방은 참 검소하게 차려져 있는 편이었다. "이 창문은 보시다시피 비록 열려 있긴 해도 이렇게 쇠창살로 사람이 통과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바깥쪽은 베란다와 통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칼을 던져 난승도사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칼의 각도 상으로 도저히 그 일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구선수들처럼 커브로 칼을 던졌다 하더라도 저렇게 90 도로 꺽일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렇겠군." 추 경감이 장을 열어 보며 말했다. 안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주로 도포들이었는데 여러 가지 색상이 있었다. "쇠사슬의 자물쇠는 이것입니다." 경위가 장 앞에 놓여 있는 우악스럽게 생긴 자물쇠를 가리켰다. "방문 손잡이에 쇠사슬을 걸어 놓고 잡아당겨서 자물쇠로 잠가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 짓을 했다지?" 강 형사가 물었다. "아직 그 점은 모르겠습니다." 경위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야, 됐어." 추 경감은 빙긋 웃으며 경위를 돌아보더니 허리를 굽혀 쇠사슬의 자물쇠를 잡으려 했다. "어이쿠!" 추 경감은 몸을 굽혔다가 그만 방바닥에 미끄러져 엎어지고 말았다. "반장님도 조심하셔야지오." 강 형사가 웃으며 손을 내밀어 추 경감을 일으켰다. "방바닥에 기름칠을 했나, 원." 추 경감은 자물쇠를 손수건에 싸서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예, 그렇네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물쇱니다." 강 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 난승도사 같은 마술사들은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여닫을 수가 있었겠지?" "그랬겠지요." 강 형사가 다시 맞장구를 쳤지만 이번에는 강 형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혼자 뭔가 중얼대고 있었다. "사고 당시 있었던 사람들은 누군지 파악이 됐나?" 강 형사가 물었다.


"예, 마술사의 조수들 넷이 있었습니다. 모두 아래층 방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방은 모두 여섯이던데?" "하나는 주방입니다." "음, 그래? 그럼 가정부나 정원사 같은 사람은 두지 않았나?" "건장한 사내 셋에 예쁜 미스 둘이 있으면 됐지, 다른 사람들이 뭔 필요가 있겠습니까?" "난승도사는 독신인가?" "예. 하지만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도 하나 있다고 합니다. 조수하고 바람을 피우다가 이혼을 당해서 아들도 여자가 기르고 있다더군요." "나이는 몇이나 됐어? 얼굴로는 별로 짐작이 되지 않은데?" "만으로 마흔 다섯입니다. 아들은 국민학교 3 학년이고요." "그때 바람 피웠던 여자는 아직도 조수로 있나?" "아닙니다. 그건 꽤 오래전 일이고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줄 압니다." "이봐, 강 형사." 추 경감이 강 형사를 불렀다. "여기는 이 친구한테 맡기고 내려가서 조수들을 조사해 보지." 추 경감은 손수건에 싸인 자물쇠를 경위의 손에 턱 얹더니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강 형사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외출 나갔다던 조수도 그새 돌아왔는지 다섯이 다 있었다.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정말 돌아가셨나요?" 추 경감이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앞으로 나서며 묻는 여인이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었는데 의도적으로 왼쪽 한 가닥의 머리를 풀어 놓은 묘한 느낌을 주는 아가씨였다. "그렇소." 강 형사가 대신 대답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그래요. 아까 골목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시던 분이군요." 여인은 강 형사의 말꼬리를 채며 재빨리 말했다. 보라색 블라우스에 화장 색조도 전부 보라색으로 하고 있어서 상당히 우울하고 음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노란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거슬려 보여 강 형사의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혹시 노란색 투피스를 입고 있던 단발의 여자를 보지 못했나요?" "아니오, 전혀." 여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몇 가지를 여러분 모두에게 물어보도록 하지요." 강 형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먼저 여러분 이름부터 알려 주십시오." 강 형사의 말에 그들은 차례로 이름을 댔다. 보라색조의 여인은 이지아라고 했다. "먼저 난승도사가 이층에 올라간 것은 언제입니까?" "아침 9 시경입니다." 최현덕이라는 조수가 대답했다. 그는 키가 상당히 커 보였고 말할 때 사람을 비웃는 듯한 미소를 곧잘 띄웠다. "무슨 일로 올라가셨죠?" "그곳은 선생님 방인데 무슨 일로 올라가다니오?" 지아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그럼 평소에도 그 방에서 잘 나오지를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선생님은 주로 거실에 계시는 편입니다." 박형준이라는 조수가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얼굴이 사각형인데가가 약간 턱이 나와 별로 붙임성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아침에는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올라가신 건가요?" "예. 탈출 마술에 대해 연구하실 게 있다고 하셨어요." 다른 여자 조수인 유아란이 말했다. 얼굴이 동그란 귀여운티가 철철 흐르는 아가씨였다. 비록 지금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가끔씩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지만. "그래서 몸이 묶여 있었군요." 강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계속 말했다. "그럼 도사님을 묶어 놓은 사람은 누구지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선생님 스스로 묶으신 거예요." 김희수라는 조수가 말했다. 강남 어디쯤 내놓으면 제비족을 해도 능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이 얍사하게 생긴 사내였다.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묶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강 형사의 말에 조수들은 모두 피식 웃었다. "그럼요. 그건 기본이지요." 희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꾸했다. "자기 혼자 풀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묶여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거군요?" "물론이지요." "그럼 방문에 쇠사슬을 채워 놓은 이유는 뭐지요?" "관객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요." 현덕이 대답했다. "그래야 마술이 되니까요." "반만 말이지요." 강 형사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물론이지요. 다 보여 줄 수도 있지만 다 보여 준다면 오히려 믿지를 않는 법입니다." 현덕은 진지하게 대꾸했다. 7. 난승도사 "자, 보시지요."


현덕은 말을 하며 어느 새 끈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이것을 이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묶습니다. 단단히 묶인 것 같습니까?" 강 형사는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끈을 당겨 보시지요." 현덕은 어린아이에게 말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려가며 말하면서 끈을 홱 잡아당겼다. 그러나 매듭이 하나 생겨났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끈의 양 끝을 잡아 보시지요." 강 형사는 현덕이 손을 내미는 대로 따라 끈의 양 끝을 잡아쥐었다. 현덕은 그 위로 손수건을 하나 살짝 덮었다. 다시 그 위에 현덕은 마술사들이 흔히 하는 손짓을 하더니 강 형사에게 말했다. "강 형사님, 끈을 당겨 보세요." 강 형사가 끈을 당기자 현덕이 손수건을 벗겨냈다. 끈의 매듭은 온데간데없고 팽팽한 하나의 끈이 강 형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 재밌군요." 강 형사가 입을 한번 쩍 다시고는 말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잔재주지요. 사실 그 끈은 이미 묶을 때 풀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술사들의 용어로는 세파로우의 매듭이라고 하지요." 현덕은 여전히 점잖게 말을 이었다. "이런 것은 누구든지 서너 번만 연습하면 흉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끈을 묶었다가 잡아당겨 풀어 보인다면 아무도 재밌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아주 쓸모도 없는 주문이나 손짓에 사람들은 기대를 하게 되고 그런 기대가 만족될때 마술사에게 갈채를 보내게 되지요. 요즘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불어 관객의 심리를 노리는 이러한 수법의 개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시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마술은 이야기를 담는 형태로 변해가려 하고 있어요." 현덕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지아가 끼여들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듣도록 합시다." 추경감이 아연 활기를 띠려는 조수들의 이야기를 가로 막았다. "여러분들은 스승의 죽음에 그다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한데요?" 추 경감의 말은 조수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현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실감이 나지 않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다니오?"


강 형사가 물었다. "난승도사님은 죽음과 관련된 마술을 자주 했습니다. 마치 지금도 저 문으로 도사님이 웃으며 들어오실 것만 같습니다." 현덕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문을 돌아보았지만 문은 굳게 닫혀진 그대로였다. "흠, 그래요?" 추 경감이 턱을 문지르며 현덕을 주시했다. "그 난승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지요?" 현덕은 잠깐 난처한 눈빛으로 지아를 쳐다봤다. "어려울 난(難), 이길 승(勝) 그렇게 쓰지요." 지아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기기 어렵다?" 강 형사가 머리를 갸웃했다. "바로 그 뜻이죠." 지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끊듯이 말했다. "뭣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지요? 보통 도사라면 청운이니, 백운이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잖아요?" 강 형사의 질문을 지아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술사들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관객에게서 묘기를 하나 보여달라는 청을 받았을 때와 같은 표정이 지아의 얼굴을 스쳤다. "그건 고전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삼국사기라는 책에 나와 있지요."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역사책 말입니까?" "예, 그래요. 그 책 김유신 열전에 그 이름이 나오지요." 지아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려는 양 천천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김유신이 열일곱 살 때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다고 해요. 고구려가 쳐들어 온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백제는 가잠성이라는 곳을 쳐들어 왔다더군요. 그곳에서 현령이었던 찬덕이라는 사람이 홀로 용전분투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나요. 김유신은 그 일로 격분해서 비술을 익히려고 중악에 들어 갔다고 해요." 그 말에 강 형사는 이 집 마루에 중악당(中嶽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는 그런 강 형사의 모습이 이상해 보였지만 무시한 채 계속 말했다. "거기서 김유신은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에게 적을 무찌를 힘을 달라고 기원을 올렸답니다. 그러기를 4 일 만에 갈의를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났답니다." "그 노인이 난승도사였구먼." 추 경감이 토를 달았다. 지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신은 그 노인이 보통 노인이 아닌 줄 알고 방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지요. 난승도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대요. 김유신이 일곱 번이나 간청을 그치지 않자 그때서야 비법을 가르쳐 주었대요. 불의한 일에 사용하면 재앙과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요." 지아의 마지막 말에는 섬ㅉ한 기운이 들어 있어서 별안간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그건 누구를 겨냥한 말이지요?" 추 경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아가 흠칫 놀랐다. "경감님의 리트로코그니션은 보통이 아니군요." "옛? 뭐라고요?" "아, 아니예요. 그냥 혼자말이에요. 그런데 경감님이야말로 뭐라고 하셨지요?" "재앙과 화라는 그 말은 그저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역사책에 나오는 말일 뿐이에요." 지아는 슬며시 몸을 도사렸다. "좋아요. 삼국사기에는 무슨 또 다른 이야기가 있나요?" "없어요. 그 이후로 난승이라는 이름도 행적도 나오지를 않아요." "그럼 그 이름을 택한 까닭은 뭐지요?" "호호호, 그거야 스승님의 맘이시지요." 지아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내었다. "그래도 짐작이 되는 바가 있을 것 아닌가요?" 추 경감은 집요하게 그 점에 파고들었다. "글쎄요? 아마도 가장 위대한 마법가로 여기셨던 모양이지요. 아니면 가장 최초의 마법가로 여겼거나." "스승님의 마술에는 그런 옛 이야기와 관계되는 것이 많지요." 희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가령 불덩이를 날려 버리는 마술도 김유신과 관계가 있지요." "불덩이를 날리는 마술이라고요?" 강 형사가 흥미가 당기는 듯이 물었다. "스승님이 무대에 나가 계시면 신라시대의 군복을 입은 군졸이 뛰어 들어옵니다. 보통은 제가 하지요." 희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고구려 군사들이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위기에 처해 있다고 고합니다. 그러면 스승님은 지금 구원하러 갈 여유가 없다고 탄식을 하지요. 그러면서 품에서 커다란 구슬을 하나 꺼내듭니다. 구슬을 잠시 어루만지면 구슬은 삽시간에 불덩이로 변합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면 공중으로 날아오르게 되고 관객들의 머리 위를 날아 북한산성을 구원하러 가는 것처럼 홀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지요." 희수는 말을 하며 점차 자신의 말에 도취해 갔다. "그것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까?" "예. 백제 정벌 후에 있었던 이야기지요." 지아가 대답했다. "그런 마술은 어떻게 하는 거지요?"


강 형사의 물음에 조수들은 모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거야말로 남의 밥벌이를 끊으시겠다는 말씀이군요." 현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강 형사님은 범인을 어떻게 잡으시는지요?" "그야 뭐, 경험에 의해 길러진 추리와 증거 수집, 뭐 그런 것에 의지하지요." "우리도 그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간답니다." 현덕의 말에 강 형사가 더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난승도사의 본명은 어떻게 됩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조수들은 아란을 쭈삣거리며 바라보았다. "장성욱이라고 하셨어요." 아란의 얼굴이 붉어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들은 이름도 몰랐단 말입니까?" 강 형사가 깜짝 놀라 조수들을 둘러보았다. "스승님은 신비로운 분이셨습니다." 형준이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그보다는 비밀이 많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좋겠군요." 강 형사가 냉소적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럼 여러분은 난승도사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겠군요." 추 경감이 조수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신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현덕이 대답했다. "전처와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압구정동에 살고 있어요." 아란이 대답했다. "좋아요. 유아란 씨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옆방으로 잠깐 가시지요." 추 경감의 말에 아란의 큰 눈에 금방 눈물이 잔뜩 고였다. 마치 잠시 후에 고문이라도 당하리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리기 위해서 따로 몇 가지 여쭤 보려는 것뿐입니다." 추 경감이 오히려 당황해서 아란을 달랬다. 그 말에 가서야 아란은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기며 옆방으로 따라왔다. "난승도사에게는 적이 있었습니까?" 강 형사가 아란에게 대뜸 묻자 아란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적, 이라니오?" "경쟁자라든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는 거지요." 아란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술사들이 모두 경쟁자지요."


강 형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아가씨에게서 추상적인 질문은 어떤 답변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조수들하고의 관계는 좋았나요?" "글쎄요? 어떤 것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예, 뭐 사제지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잖아요." 강 형사는 이 아가씨가 뭔가 숨기고 싶어서 바보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스승님의 죽음을 알게 된 당시의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지요." "저,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란은 천진스럽게 강 형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방으로 들어가기 전 상황부터 말해 보시죠." 강 형사는 공연히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예. 아침 여덟시 반쯤이었어요.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얼마 안 됐을 때였거던요." "잠깐만요. 조수들은 모두 아예 여기서 먹고 자고 살고 있나요?" "아니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러지 않아요. 물론 자고가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요. 보통은 퇴근하지요. 각자 일이 있잖아요."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요?" "아니오. 저는 여기서 먹고 자고 그래요." 아란은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강 형사는 그 점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럼 오늘은?" "어제 늦게까지 총평이 있었어요." "총평이오?" "예. 어제 공연이 있었거던요. 못 보셨어요? 신문에도 제법 크게 났는데." "그 계통에는 워낙 문외한이라서." 강 형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린 공연이 끝나면 평가를 해서 더 나은 공연을 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럼 어제 총평으로 혼이 난 사람도 있습니까?" "그거야 거의 늘상 몽땅 혼나는 형편이에요." "평소에 상당히 엄하신 분이었던 모양이군요."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꼼꼼하신 분이지요." 아란은 어디까지나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같이 혼났다고 해도 톡별히 심하게 혼이 난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없는데요." 아란은 그러면서 배시시 웃었다. "좋습니다. 계속 말해 보시지요." "예. 아침을 드시면서 스승님은 이제는 약간 현대적인 마술도


해봐야겠다고 그러셨어요. 그러면서 후디니 식의 탈출 마술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바꿔 보겠다고 그러시면서 올라가셨죠." "후디니 식이라는 것은?" "어머, 저는 그런 말 잘 설명할 줄 몰라요. 나중에 지아 언니에게 물어 보세요. 그 언니는 그런 거에는 아주 캡이에요." 아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방에 쇠사슬은 오늘 처음 설치해 놓으신 건가요?" "아니오. 꽤 된 거예요. 어디에 쓰시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럼 아무튼 예전에는 장을 둘러서 쇠사슬을 설치하지는 않았지요?" "아니요. 설치되어 있었어요." "그것이 뭣 때문에 설치되어 있었지요?" 강 형사가 답답해서 방 안을 한 바퀴 돌면서 물었다. "잘 모르겠네요. 마술에 대한 건 현덕 씨에게 물어 보세요. 스승님은 현덕 씨하고만 말씀하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아란이 정말 꼬리가 석 자인 불여우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8. 탈출왕 후디니 강 형사는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다시 아란에게 질문을 했다. "20 대 초반의 단발머리 아가씨인데 혹 짐작가는 사람 있습니까? 주황색 모자에 노란 투피스를 입고, 얼굴은 희고 쌍꺼풀이 지고, 입이 작은 여잔데." 강 형사의 말에 아란의 얼굴에는 살짝 놀라는 빛이 지나갔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충분히 훈련된 강 형사는 놓치지 않았다. "모르십니까?" "예, 몰라요." 아란은 다시 능청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 아침의 상황이나 설명하시지요." "예. 아침에 그러니까 아홉시쯤에 비명소리가 이층에서 들렸어요. 저희가 허겁지겁 올라갔을 때는 이미 늦었지요. 우린 문을 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창문 쪽으로 간 현덕 씨가 스승님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알려와서 형준 씨가 경찰에 전화를 했지요." "그때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누굽니까?" "지아 언니지요." "그래요? 어디 있었지요?" "어젯밤 총평이 끝난 후 나갔었어요. 밤 12 시나 되었었는데....." 강 형사의 질문은 집 안에 있으면서 이층으로 오지 않은 사람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란은 또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득이 아주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디 갔는지 짐작되는 것이 없나요?" "없어요. 집에 갔었던 거겠지요."


"그래요? 좋습니다. 사건 당시에 어디 계셨습니까?" 아란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 계셨지요?" 강 형사가 채근했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꼭 말해야 해요?" "물론입니다." 강 형사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아란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화장실에 있었어요." "그럼 사건 현장에는 좀 늦게 도착했겠군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추 경감이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예, 그래요." 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 씨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까?" 추 경감이 계속 물었다. "없었어요." "예, 좋습니다. 돌아가셔서 현덕 씨를 불러 주십시오." 추 경감이 아란을 돌려보냈다. "저 여자,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강 형사가 추 경감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 이상한 여자를 알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 추 경감이 맞받고 있는데 현덕이 들어왔다. 키가 큰 사람들의 흔한 버릇처럼 어깨를 약간 구부리고 서 있었다. "앉으시지요." 추 경감이 자리를 권했다. "마술생활을 한 지는 오래되었습니까?" "5 년째입니다." "그 정도면 독립을 할만도 하지 않습니까?" 추 경감은 사건과는 별 관계도 없는 듯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독립이오?" 현덕은 피식 웃었다. "밤무대에는 저도 가끔씩 나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술 시장이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혼자 나가서 버티느니 이 생활이 더 낫습니다. 선생님은 꽤 이름이 있으니까요." "혹시 따로 나가지 못하게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무슨 말씀을?" 현덕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독립을 할 생각도, 그럴 능력도 되지가 않습니다." 현덕은 강경하게 추 경감의 말을 부인했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는 어디에 계셨지요?" 이번에는 강 형사가 물었다. "이 방에 있었습니다."


"예?" "이 방이 바로 제 방입니다." 현덕의 말에 추 경감과 강 형사는 새삼스레 방을 다시 둘러 보았다. 특별한 장식 따위가 없어서 화려한 마술사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방이었다. 방 한가운데 응접세트만 없었더라면 학생의 공부방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책상 옆의 작은 책장은 마술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미국 책과 일본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후디니의 탈출 마술에 대해서 연구해 보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저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현장에 첫번째로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형준이하고 희수가 올라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분명하지가 않네요." "올라가서는 어떤 행동을 취하셨습니까?" "열린 방문 틈으로 이미 선생님이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을 알아보려고 테라스로 나와서 창문 쪽으로 다가갔지요. 그리고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찰에 연락은 어느 분이 했지요?" "형준이가 했습니다." "어떻게 척 보기만 하고도 죽었다는 확신을 했습니까? 연기에 그런 과장된 측면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코미디를 하는 게 아닙니다." 현덕의 말에 갑자기 가시가 돋혔다. "그 후디니라는 건 뭘 말하는 겁니까?" 추 경감이 다시 질문 속에 끼여들었다. "사람 이름입니까?" "예, 미국의 마술사입니다. 이름은 '해리 후디니'지요. 본명은 '에리히 웨스'고 1874 년 헝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따라오게 되었던 거지요. 어려서부터 서커스의 마술을 가장 좋아했었다고 해요." 현덕은 말을 하며 점점 더 활기차고 빠르게 이야기를 했다. "서커스가 끝나면 매일매일 분장실로 찾아가 마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상대도 해주지 않던 마술사들도 결국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마술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다더군요. 하지만 집안이 어렸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넥타이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만 했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거기서 넥타이를 가지고 맨날 '세파로우의 매듭'을 꼬고 있었을 거예요. 그때 프랑스의 마술사 '로베르트 후우디' 의 전기를 읽었답니다. 그의 전기에서 감명을 받고 뒤에 자신의 예명도 후디니라고 흉내를 내서 짓게 되었던 것이지요. 후디니는 청년이 되자 어렸을 때의 꿈을 실현하여 마술사가 되었습니다. 후디니는 그때까지는 엉성하고 긴박감이


없던 탈출 마술에 주력을 했습니다. 수갑이나 자물쇠에 대해서는 은행털이보다도 더 열심히 연구를 했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은 모두 움직일 수 있게끔 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발가락도 손가락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후디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알아주는 데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쇼킹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지요. 당시 세계에서 그 경비가 가장 엄중하다는 런던 경시청, 셜록 홈즈에 나오는 레스트레에드 경감의 스코틀랜드 야드가 바로 거기지요. 그 런던 경시청에서 탈출을 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탈출에 성공을 했습니다. 후디니의 이름이 일약 알려진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지요. 이 일로 그의 이름 앞에는 탈출왕이라는 명칭이 추가되어 붙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디니라는 사람의 마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밧줄, 수갑, 자물쇠 등으로 온몸이 결박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었지요. 한번은 철로에 묶인 채 기차가 달려오는 과정에서 탈출을 시도한 적도 있었답니다. 뭐니뭐니해도 후디니라고 한다면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수중 탈출입니다. 후디니의 마술은 주로 야외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이것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강이나 운하 등에서 실시되었지요. 밖에서 실시되는 마술은 인공적인 조작이 덜 가해진다고 생각하는 관중의 순진성을 노린 수법이지요. 게다가 야외에서 하기 때문에 인기도 더 좋았다고 합니다. 먼저 관객의 눈앞에서 상자를 조립하지요. 후디니는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상자안으로 들어갑니다. 상자의 뚜껑은 관객 중에 한 명이 나와 입회한 가운데 꼭 닫혀집니다. 거기다가 또 튼튼한 끈으로 십자형으로 묶어 버립니다. 어떻습니까? 반장님은 그런 상태에서 탈출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원, 천만에요. 그 속에서 질식감으로 까무러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마술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자는 크레인을 동원해서 번쩍 들어올려져 서서히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잠겨 버린 상태에서 초조하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관객들이 모두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후디니가 죽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되어서야 수면이 척 갈라지며 후디니가 한 손을 치켜 들고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상자는 자물쇠가 채워진 그대로 사람들에게 공개됩니다. 후디니가 어떻게 상자 밖으로 탈출했는지 모르는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게 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관중들의 환호, 그 순간의 쾌감을!" 현덕은 흥분하여 목소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후디니의 인기는 참 대단했지요. 그의 일대기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습니다. 파라마운트에서 1953 년 '마술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었지요. 토니 커티스와 자네트 리가 주연한


영화지요. 이 영화에서는 후디니가 수중 탈출에 실패하여 죽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은가요?" 강 형사가 물었다. "역시 죽는 문제가 나오니까 민감하시군요." 현덕의 독특한 비웃음이 슬쩍 지나갔다. "예. 실제로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죽지를 못했답니다. 물론 그렇게는 죽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낭만적이라고요?" 강 형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현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긴 꼭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후디니의 죽음도 자신과 관련이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없지요. 1929 년 후디니가 몬트리올에서 공연하던 때였다고 합니다. 후디니의 극성 팬들이 분장실로 그를 찾아왔다고 해요. 아마도 옛날 자신이 서커스를 따라다니던 생각을 하고 그들을 만났겠지요. 찾아온 학생들은 후디니한테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답니다. '후디니 씨, 당신의 몸은 말도 못하게 튼튼해서 어떤 고통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후디니는 자신만만하게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팬에 대한 허풍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학생은 후디니의 배를 한 대 쳤습니다. 후디니는 이미 나이도 오십이 넘은데다가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을 맞은 거지요. 심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는 웃으며 사태를 수습하고 그 다음날도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선전(宣傳)처럼 불사신일 수는 없었어요. 공연 1 막을 마치고 결국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곳에서 복막염으로 사망했지요." "누군가가 후디니를 음해하려고 꾸몄던 일이라는 말은 없습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아니오. 하지만 혹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왜 한번 조사해 보시렵니까?" 현덕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됐습니다." 강 형사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런데 그 탈출 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1932 년 J.C 캐넬이라는 사람이 '후디니의 비밀'이라는 책을 낸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 이 마술이 어떻게 진행되었던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요." "한번 말씀해 보시지요?" 강 형사가 은근히 채근했다. "직업상의 비밀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낡은 수법에 해당되니까 말씀드리지요. 후디니는 특수한 가위를 하나 감추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 속에 들어가면 가위로 자물쇠를 끊고 뚜껑을 밀어서 틈새를 벌린 다음 그 틈새로 마치 뱀장어처럼 빠져 나왔다더군요. 그런 후에 상자 위에서 다시 뚜껑을 맞춰 놓고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었지요." "그럼 자물쇠는 망가진 상태로 상자가 건져지는 것 아닙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현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강 형사의 얼굴에 의문이 하나 가득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거기서 우리 같은 조수들의 역량이 필요한 거지요. 후디니가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두 손을 들어 답례를 하며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동안 조수들은 재빨리 자물쇠를 새것으로 갈아치웁니다. 상자는 이제 멀쩡해지는 것이지요." "이 방에 있던 것을 증명하실 수는 있습니까?" 강 형사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했다. 현덕은 질문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잠시 멍하니 강 형사를 바라보았다. "아, 알리바이가 있느냐는 것이군요." 현덕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없어요. 없군요. 우린 모두 각자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없으니 모두 혐의를 받아도 할 말이 없겠네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추 경감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조수 분들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지요?" "예? 뭘 말입니까?" "성격이라든가 가족들, 이 일을 하게 된 동기 등 말입니다." 강 형사가 덧붙였다. "하하, 저도 그런 이야기는 안 했는데요." "그럼 본인부터 하시죠." 강 형사가 재촉하듯 말했다. "그저 좋아서 할 뿐입니다. 그리고 전 고아 출신입니다. 밤 무대에서 웨이터 노릇을 하다가 선생님을 만나서 조수가 되었지요. 지금 있는 조수들 중에는 가장 고참인 편입니다." 현덕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다른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현덕이 나가려는 것을 강 형사가 잡았다. "잠깐만요. 유아란 씨는 난승도사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마술사와 조수라는 통상적인 관계 말고 말입니다."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현덕이 다시 비웃는 투로 말했다. "좋습니다. 박형준 씨를 불러 주십시오." 추 경감이 말했다. "저 친구 영 기분이 나쁜데요? 아주 음침한 구석이 있어요." 강 형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자신의 일에 과도하게 열중하는 기색이 있구먼." 추 경감도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살인도 불사할 정도라는 느낌을 받았어." 노크 소리가 나고 박형준이 들어왔다.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살이 그를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게 했다. 걱정이 잔뜩 되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방으로 들어왔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어디 있었습니까?" 자리를 권하기가 바쁘게 강 형사가 물었다. "저, 그, 식당에 있었습니다." 느릿한 말투로 형준이 대답했다. "식사는 끝난 시간이었는 줄로 아는데요?" "그, 미스 유가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그, 설거지를 좀 도와 주고 있었습니다." "유아란 씨와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군요?" "그냥 그, 동료일 뿐입니다." 형준은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말을 했다.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없었겠군요?" "예." "비명이 들렸을 때 위치상으로 보면 제일 먼저 현장으로 가셨을 것 같은데 그랬습니까?" "예. 제가 도착했을 때에는 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담배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자꾸 말을 더듬는 것이 긴장해서 그러는 것인가 싶어 추 경감이 담배를 한 대 권했다. 형준이 인사를 꾸벅하고는 담배를 받아 쥐었다. "그러면 다른 조수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까?" "저, 아니오. 정신이 없어놔서요." 형준은 그것이 자기 잘못인 양 얼굴이 벌개져서 말했다. "그렇다면 혹 장대를 본 것은 없나요?" 추 경감이 물었다. 형준은 그 말에 펄쩍 뛰었다. "장대라뇨? 모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말투마저도 변해 있었다. 그의 변한 말투를 듣는 순간 강 형사도 안색이 변했다. 강 형사의 기억이 순식간에 88 년 4 월로 달려갔다. 깡패들 간의 집단 패싸움이 있었다. 두 조직간의 세력 확장을 위한 충돌이었는데 그때 큰 부상을 당하고도 감쪽같이 사라졌던 한 사람이 연상되었다. 강 형사는 조심스럽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9. 사라진 혐의자 "마술사들은 대체로 달변인 줄 알았는데요?" 강 형사는 자꾸 말을 더듬는 형준이 본래 그런 습관이 있는지 의심이 갔다. "그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말을, 그 많이 하지 않고 마술을, 저,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속이는 데는 꼭 말을


잘해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니까요." 형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되었다. "어떤 동기로 마술을 하게 되었습니까?" "달리 재주가 없어서지요." 형준의 목소리는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주로 잘하는 마술은 무엇입니까?" 강 형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픽, 픽 포켓 쇼입니다." 형준은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픽 포켓 쇼라면 손님에게서 손님 모르게 이것저것 물건을 꺼내 보이는 쇼가 아닙니까?" 강 형사의 질문에 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칼치파와는 관계가 다 끝나셨나?" 강 형사의 서릿발 같은 질문이 형준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형준은 움찔하더니 담배를 뚝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본명이 박형준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강 형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먼 일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본명은 박형구. 소매치기 그룹인 칼치파의 교사! 신참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담당했지. 손가락 사이마다 면도칼을 끼우고 풍선을 만져도 풍선이 터지지 않는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다닌 인물로 88 년 칼치파 검거 당시 유일하게 잡히지 않았던 박형구 맞지?" "아, 아닙니다!" 형준은 팔을 내저으며 강 형사의 말을 부인했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경찰에 가서 조회만 하면 5 분 내에 판별이 될 텐데 부인한다는 게 우습잖아? 그때 칼치파 검거를 주도했던 형사가 바로 나야." 강 형사의 말에 형준은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팔을 늘어뜨리고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엉뚱한 대어를 낚았는데요? 강 형사는 추 경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꺼내들었다. 바로 그 순간에 형준은 몸을 45 도로 돌리며 무릎을 올려 강 형사의 사타구니를 올려찼다. "어이쿠!" 강 형사가 사타구니를 잡고 쓰러지는 순간 형준의 손이 그의 가슴 사이로 들어가는 듯 싶었다. 추 경감이 재빨리 형준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서늘한 느낌이 추 경감의 심장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형준은 왼손으로 강 형사의 콜트를 쥐고 추 경감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반장님, 실수하셨습니다. 놈은 왼손잡이예요." 강 형사가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아직도 사타구니를 붙잡고 말했다.


"이런, 틀림없이 오른손으로 자네 권총을 뽑았는데....." 추 경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그 반대던가?" 형준은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예수님은 우리 마술사들을 아주 사랑하실 것 같아. 예수님 말씀을 우리만큼 잘 지키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어." 형준의 말투는 갑작스레 유창하게 변해 있었다. "추 경감님이 보았을 때는 내 오른손이 강 형사님의 품으로 들어간 게 맞지요. 난 한 대 얻어맞은 후에 왼손으로 권총을 뽑아든 거예요. 추 경감님은 내가 당연히 제일 먼저 권총을 훔칠 것이라는 자기 최면 상태에 빠져 있어서 오히려 내 왼손이 하는 일을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오른손을 때리려면 오른손만을 보아야 하니까." "그런다고 자네가 여기서 빠져 나갈 수는 없어." 추 경감이 노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경찰이 지키고 있다는 건가요?" 형준은 다시 웃었다. "그런 허수아비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 내가 보여드리지." 형준은 바지 주머니에서 끈을 두 개 꺼내 들었다. "마술사들이 끈으로 새파로우의 매듭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형준은 끈을 화려한 방식으로 묶어 나가며 추 경감과 강 형사를 재갈지우면서 같이 결박해 버렸다. 다른 하나의 끈으로는 둘의 허리와 다리를 묶었는데 그렇게 하자 둘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짝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어때요? 멋지지요? 내가 이 끈을 꺼낼 때만 해도 이렇게 끈이 길 줄은 몰랐을 겁니다. 아무튼 이건 내 첫무대가 되니까 극적으로 꾸며 봐야겠군요." 형준은 의자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러고보니 여러분은 이곳에 나같은 잡범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고 살인범을 잡으러 왔던 것이지요? 내가 여기서 달아나면 아마도 내일 아침 신문에는 내 이름이 지명수배 되겠네요? 하지만 나는 범인이 아닙니다. 다만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을 뿐이에요." 추 경감과 강 형사는 묶여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가르쳐 드릴 수가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난 그 사람에게서 은혜를 입었거던요. 그럼 난 이곳에서 빠져 나가기로 하지요." 형준은 그러더니 밖에다 대고 말했다. "현덕이 형, 반장님이 현장을 지키는 경위님을 좀 불러 달라시는데."


"그럼 안녕히. 다음에는 좀더 좋은 자리에서 만납시다." 형준은 권총을 책상 위에 올려 놓더니 윙크를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추 경감과 강 형사는 당황해서 끈을 풀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끈은 점점 더 조여들어 오기만 했다. 꼼짝없이 올가미에 걸린 짐승 꼴이었다. 움직여 보려고 해도 두 사람의 허리와 발이 같이 묶여 있으므로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밖에 움직일 수 없는 처지인데다가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전혀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경위님, 저는 허락을 받고 잠시 나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아, 경위! 박형준 씨는 조사가 끝났고 급한 볼일이 있다니 내보내 주도록."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예. 경감님!" 경위의 대꾸였다. 누가 이곳에 온 걸까? 아니면 형준, 아니 형구의 조력자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추 경감과 강 형사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은 자기 차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희수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부르지 않자 궁금한 나머지 문을 열었다가 장승처럼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추 경감과 강 형사는 풀려나자마자 비상선을 치며 형구를 잡으려 했으나 그는 벌써 사라진 지 오래였다. 추 경감은 당장 경위를 불러들였다. "자네, 누구의 지시로 용의자가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묵인했나?" 목소리에는 한껏 노기가 들어 있었지만 위엄이 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요행히 총기 탈취는 당하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 형구가 그 총을 가지고 나가 인명피해가 났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경감님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경위의 말투에는 불만이 잔뜩 들어 있었다. "자네, 현장 상황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오나? 우린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단 말야." 추 경감의 호통에 경위도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 뒤에서 분명히 소리가 났습니다. 녹음기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 보니까 반장님 목소리하고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걸 빨리 깨달았어야지." 강 형사가 책망조로 말했지만 역시 힘이 없었다. 모든 잘못은 너무 방심한 채 체포를 서두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처음 추 경감을 본 그가 목소리를 구분해 낸다는 것도 어려운 이야기였다. "녹음기 같은 건 없어."


추 경감이 말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납득이 가지를 않는데요? 그 자리에는 박형구 그자와 저 둘뿐이었습니다." "복화술입니다." 현덕이 언제 와 있었는지 불쑥 말을 던졌다. 모두들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들 그 문제를 못 푸실 것 같아서....." "그럼 당신은 박형구가 어떤 방법으로 달아났는지 알고 있단 말이오?" 강 형사가 시비조로 말했다. "물론이죠. 두 분의 상황을 봤을 때 짐작했습니다." 현덕의 어조는 태연했다. "복화술이라는 건 뭐지요?" 추 경감이 물었다. "말 그대로지요. 배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배로 말을 해요?" 강 형사가 놀라며 반문했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잖아요?" 현덕은 입을 전혀 떼지 않고 말했다. 물론 목소리도 현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것 자체는 묘기이지 마술은 아닙니다. 인형이 하나 있다면 재밌는 쇼를 꾸며볼 수가 있지요." "아니, 그러실 것은 없습니다." 추 경감이 그를 만류했다. "그보다는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지요." "말한 그대로입니다. 형준이는 두 분을 묶고 문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 경위님이 오시자 자신은 외출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며 손으로 문을 가리킵니다. 경위님의 주의가 문으로 쏠릴때 '내보내!'라고 한다면 문에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현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쳤다. "그 복화술이라는 것도 여기서 배운 것입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그렇지요. 형준이는 복화술에 아주 능통했습니다. 복화술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벤트릴로퀴늠(Ventriloquism)이라고 하지요. 그 뜻도 '나는 배로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에 속하지만 기원전 2,000 년의 이집트에도 복하술사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현덕의 시도때도 없는 마술 소개가 또 시작되었다. "그리스의 제사장들도 복화술을 연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탁을 받을때 우매한 사람들을 속일려고 사용했겠지요. 마술사들은 그 기술을 도입해 인형이 말을 한다고 트릭을 꾸며 내기 시작했지요. 물론 이제는 그러한 것에 속을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당시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마술로 대단한 효과를 내는 데 성공한 것은 '스핑크스의 목'이라는 것이지요." "스핑크스의 목?" "예. 테이블 위에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이면 속에는 한 남자의 목이 들어 있지요. 그리고 테이블 아래는 훤히 들여다 보여 사람이 상자 안으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재밌군요." 강 형사가 지루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현덕은 더욱 신이 나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마술사는 그 앞으로 나가서 상자 속의 남자를 마술봉으로 깨우게 됩니다. 남자는 눈을 뜨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서 둘은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마술사는 주문이 풀려 이제 이 불쌍한 사내는 정말 죽게 되었노라고 말하며 상자를 닫고, 들어올려서 옆구리에 끼고 객석으로 갑니다. 관객들은 그 순간 상자 안에서 웅얼거리는 사내의 말소리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지요. 그 소리는 점차 힘이 없어지며 끝내 사라지고 만 뒤에 마술사는 상자를 열어 보입니다. 그 안에는 한 줌의 재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복화술로 사람을 속인 거군요." 강 형사가 씁쓰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럼 처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사내의 목도 인형이었습니까?" 경위가 물었다. "아니지요. 그건 실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마술의 세계에서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현덕의 말은 어떤 섬ㅉ한 기운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요. 살인사건이 일어나 경찰이 쫙 지키고 있는데 마술사도 아닌 그 조수가 척 달아났으니." 강 형사는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이것 봐요!" 현던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형준이 어떤 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로 우리를 모두 우습게 본다면 용서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모두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과거를 문제삼지 않습니다. 모두 나아질 수밖에 없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의 과거는 그보다 더 비참해질 수 없는, 그런 상태였으니까." 현덕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나가 버렸다. "이런! 반장님, 제가 뭐라 했습니까?" 강 형사도 툴툴거리며 화를 냈다.


"자기 혼자 떠들고 자기 혼자 성내고, 북치고 장구치고!" "자네도 시끄럽네." 추 경감이 철딱서니 없는 부하를 나무랐다. "조용히 시말서 쓸 생각이나 해." 그 말에 강 형사의 투덜거림이 쏙 들어갔다. "김희수나 데려와. 조사를 계속해야지." 강 형사는 멍한 얼굴로 추 경감을 바라보았다. 이 마당에 조사는 무슨 조사냐는 뜻이었다. 범인은 박형구가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빨리 데려와." 추 경감은 강 형사의 무언의 항의를 그대로 묵살했다. "반장님, 범인은 박형구예요. 이제 조사는 무의미하고요." "이 친구가? 헛소리 말고 빨리 사람이나 데려오라구." "박형구가 진범이 따로 있다고 한 말을 믿고 그러신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진범이 따로 있고 그게 누군지 안다면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인데 안 불고 달아났겠습니까?" "그놈이 범인이건 아니건 증거가 있어야지. 보고서에는 '박형구가 달아났으니 범인입니다.' 이렇게 올릴까?" 추 경감이 짜증을 냈다. 희수가 불려오고 몇 가지 질문이 오고 갔다. 그 대답에서도 앞의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평소에 박형구, 아니 박형준의 행동에 이상해 보이는 점이 없었어요?" 강 형사가 물었다. "아니오.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 그저 사람이 조금 건방진 구석이 있었을 뿐 외출을 자주 나가는 편도 아니었고, 사교적인 타입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말도 더듬는 편이고 해서 판토마임식의 마술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종종 했지요." "오늘 살인에 대해서 의심이 가지 않아요?" "의심이라뇨?" "그치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잖아요? 그건 도착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속에 있었다는 뜻은 아닐까요?" "글쎄요? 그런 건 형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이 자도 능구렁이로구먼.' 강 형사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당신의 무슨 이유로 마술을 하기 시작했나요?" "멋진 의상과 화려한 조명, 그리고 갈채! 그런 이유말고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이면으로의 고달픔은요?" "그건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는 거지요. 무엇이든 성공한 자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성공할 겁니다." "좋습니다. 이지아 씨를 불러 주십시오." 추 경감이 말했다.


"한심한 사내예요." 강 형사가 희수가 나가자 말했다. "그렇게 말할 것은 아니야. 사람이란 누구든지 자기분야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 사람도 그런 한 사람일 뿐이야." 문이 열리면서 지아가 들어왔다. "이지아 씨는 현장에 계시지 않았다고 했지요?" "예" 추 경감의 질문에 지아가 얌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그 시간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곳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 있었나 봐요." "어디서부터 말입니까?" "압구정동이오." "압구정동에는 무슨 일로 가셨지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걸 꼭 알려드려야 합니까?"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알아낼 겁니다." "그건 좋을 대로 하세요." 추 경감도 지아도 한치의 양보 없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했던 추 경감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여유있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일어난 줄 어떻게 아셨지요?" 10. 초능력의 세계 "살인사건을 제가 알고 있었다고요?" 지아는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시치미 뗄 것 없어요." 추 경감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지아의 옷깃을 잡았다. "뭐하는 거예요?" 지아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추 경감은 손을 뒤집어 지아의 웃옷을 뒤집었다. 노란 안감이 나타났다. "앗!" 강 형사가 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언제 아셨죠?" 지아는 태연하게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 "처음 보았을 때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이 서질 않았지요. 하지만 유아란 씨에게 노란 색 투피스의 여인에 대해 묻자 뭔가 아는 것이 있는 눈치를 보이더군요. 그때 확신을 가질 수 있었지요." 추 경감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사건에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 건지 한번 말씀해 주시지요." 추 경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담고 있었다. "말씀드리겠지만 아마도 믿지 못하실 거예요." 지아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그럼 좋아요. 말씀드리지요. 전 에스퍼(ESPER)예요." "에스퍼? 에스퍼가 뭡니까?" 추 경감이 반문했다. "초능력자란 뜻이지요." 강 형사가 말했다. "초능력자? 자네가 웬일이야? 그런 말도 알고?" "별거 아닙니다. 요새 만화책 좀 보고 있습니다." 강 형사가 피식 웃었다. 그 말 속에는 지아를 비웃는 뜻이 들어 있었다. "아직 어리시군요." "모르시는 말씀, 요즘 만화가게를 가면 국민학생 꼬마들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답니다." "흥!" 지아는 코웃음을 쳤다. "자, 설명을 해보시지요." 강 형사는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추 경감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 에스퍼예요. 인간에게는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의 감각이 있지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초능력자한테는 여섯번째 감각이 있고 그것을 제 육감각, 흔히 육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거죠?" 강 형사가 말허리를 자르며 들어왔다. "만화나, 보고 아는 것으로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오오, 저런 당신이 내 앞에서 숟가락이라도 하나 휘어 본다면 믿어 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유리겔라가 여러 사람 버려 놓았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지아가 강 형사를 돌아보며 차갑게 웃었다. "숟가락만 가져다 주시죠. 그런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에 속하니까요." "허, 그게 정말입니까?" 추 경감은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건 초능력이 아니니까요." 지아의 말투는 여전히 냉랭했다. "초능력이 아니라고요?" 강 형사가 반문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했고 시청자들에게도 직접 해보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실제로 고장나 멈춘 시계를 움직이게 한 사람들도 있었잖아요?" "있었죠. 저도 그때 관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유리겔라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그런 능력이 저한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그 자는 일류 마술가에 불과해요. 강 형사님은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매스컴의 화려한 각광을 받았을까 하는 점과 왜


시청자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같이 해보자고 했는지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군요?" 강 형사는 허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건 초능럭자를 찾기 위한 하나의 쇼였어요." "누구의 쇼란 말이지요? 유리겔라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뭐가 있지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요." 지아는 여전히 여유있게 냉소를 흘렸다. "그런 것을 마술 용어로는 미스디렉션(missdirection)이라고 부르지요. 미스디렉션이란 말 그대로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단지 그 현상에만 빠져서 본질을 놓치고 마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강 형사로서는 늘상 추 경감에게 들어오던 말이었던 셈이니까. "흥, 미스디렉션을 그렇게 잘 파악할 수 있다면 마술사들이야 말로 경찰일을 보는 것이 좋겠군요." 강 형사가 다시 비꼬았다. "그렇지요. 크레이튼 로스라는 작가가 마리니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추리소설을 쓴 것도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시죠." 지아는 강 형사의 비꼼을 하나도 남김없이 되받아쳤다. "초능력이란 그 개발 여하에 따라서는 하나의 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적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유체이탈을 할 수도 있고, 회담의 자리에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투시로써 알아낼 수도 있지요." "젠장! 반장님, 이런 정말 만화 같은 이야기를 언제까지 듣고 계시렵니까?" 강 형사가 투덜댔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몇 명 되지 않아요. 전세계를 통틀어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지요. 그리고 초능력은 아직 그 비밀이 밝혀지지 않아 선천적인 능력에 최우선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유리겔라 같은 이가 돌아다니며 쇼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특수한 초능력, 우량성 초능력자를 찾기 위한 것이지요." "우량성 초능력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추 경감이 질문했다. "프라나(氣)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요가 같은 것에서 공중으로 떠오르는 능력이 바로 이와 같은 단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강력한 프라나, 그러니까 기를 발산해서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게 되지요." "이지아 씨는 그런 정도에 이르렀나요?" 추 경감의 질문이 사뭇 진지해서 강 형사는 무슨 주제건 튀어나오기만 하면 몰두하는 추 경감의 희한한 버릇을 상기했다. "아니예요. 저는 보통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해요. 지구 초능력이라고 부르는 초능력의 2 단계지요." 지아는 완전히 강의라도 하는 말투였다. "초능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온갖 것을 다 생각하고 또 초능력자는 그 모든 것을 다 해낸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초능력이란 영어로는 사이(PSI)라고 부르고 그 안에서는 초감각적 지각(Extra sensory preception), 곧 이에스피(ESP)와 염력(PK)과 예지의 세 부분으로 크게 나눠서 생각해 볼 수가 있지요. 초능력이라고 할 때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텔레파시나 투시(Remort viewing), 유체이탈(Psychometry)따위는 모두 ESP 에 속해 있는 능력이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그럼 이지아 씨의 특기는 무엇입니까?" "리트로코그니션입니다." 그 말은 두번째 나오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일종의 예언 능력에 속하지요. 뒤늦게 사실을 알아내는 것을 리트로코그니션, 즉 후지(後知)라고 합니다." "사건이 벌어진 뒤에 알아내는 게 무슨 예언이고 초능력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요." 강 형사가 다시 피식 웃었다. "경찰들은 육감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요? 경찰이 하는 일은 지나간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럴 초능력이라고 부르진 않아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초능력이지요. 강 형사님한테 비웃음을 사기 좋은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지요. 후지의 능력에는 전생을 알아내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거 잘 됐네요. 전 전생에 뭐였지요? 우리 어머니는 용꿈을 꾸고 날 낳았다고 전생에 임금이었을 거라고 하시던데?"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척 보고 척 말하는 점장인 줄 아세요?" "말씀 잘했어요. 그럼 어떻게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척 아셨나요?" 강 형사가 강하게 지아를 추궁했다. "리트로코그니션이나 프리코그니션(PRECOGNITION:예지)의 능력은 쌍둥이 같은 것이에요." "프리코그니션?" "예지의 능력이지요." "오늘 아침 전 어디선가 풍겨오는 강한 살의를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왔을 때 이미 사건은 터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기는 한데 전혀


말이 되지를 않는군요." "뭐가요?" "우리를 처음 보자 형사라는 것을 단번에 맞췄지요. 그리고 나서는 몸이 꽁꽁 묶여서 죽어있는 사람에 대해서 떠들었지요. 칼에 맞았느니 하면서 말이에요." "예, 그랬어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지아는 태연하게 강 형사의 말을 받았다. 강 형사로서는 드디어 절호의 찬스를 잡은 셈이었다. "그때 당신은 주황색 모자에 단발머리 차림이었소. 헌데 내가 그 뒤를 쫓아가자 어느 틈엔가 보라색조의 여인으로 둔갑해서 내 눈을 속였단 말이오." "그래서요?" "찔리는 구석이 없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지아는 그 말도 태연하게 받아 오히려 강 형사를 놀라게 했다. "찔리지 않을 수가 있나요? 들어가 보지도 않은 곳의 상황을 내가 감히 형사나리들한테 본 것처럼 줄줄 말을 했으니 말이에요." "그럼 우리를 보았을 때의 복장이 평상시 복장이에요, 아니면 지금의 모습이 평상시 모습이요?" "그거야 좋으실 대로 생각 하세요." "내, 참, 이거야 원." 강 형사가 천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날렸다. "그 이야기는 법정에서나 하시도록." "법정이라니요?" 지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도망친 박형준 씨를 난승도사에게 소개한 사람이 당신이요?" "어? 그걸 어떻게?" 지아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눈치를 내비췄다. "흥, 이제야 조금 놀라시는군요. 박형준이는 도망치며 자기는 진범을 알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 은혜를 입어서 밝힐 수가 없다고 했지요. 이제는 두 손을 드시지요." 강 형사는 스스로 결정타를 넣었다고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그 말이 나오자 지아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오호호호, 정말 우습네요." 지아는 한바탕 웃더니 다시 약올리는 투로 말했다. "은혜를 베푼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인가요? 난 그 사람이 소매치기 출신이라는 걸 전혀 몰랐지요. 그걸 알고도 감싸준 것은 최현덕 씨고, 픽 포켓 쇼를 하도록 해서 형준 씨를 살아가게 한 것은 아란이지요. 또 나도 모르는 새에 희수 씨도 그 사람을 여러모로 봐주었는지 모르지요. 그런 막연한 말로 날 몰아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정말 오산이에요." 강 형사는 '아차' 하는 기분이 되었다. 너무 일찍 자기 패를


내어 보이는 우를 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리바이가 있다는 것을 잊으셨나 보지요? 난 내가 다녀온 곳에 대해서 증명을 해줄 증인도 있답니다." "흥, 그 정도야 준비할 머리가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강 형사는 궁해진 다음 말을 비웃음으로 때웠다. "그런데 난승도사님의 전부인은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추 경감이 갑작스레 난데없이 질문을 했다. "예? 그걸 왜 저한테 묻나요?"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요? 알고 있을 것 같은 리트로코가 들었어요." "리트로코그니션이에요." 지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예, 좋아요. 이수아라고 해요." "언니가 되나요?" "반장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 없군요. 제나 카드 테스트를 한번 받아 보시지요?" "제나 카드 테스트는 또 뭡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사실은 물어 본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것이었는데 지아는 또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추 경감이 찌푸린 얼굴로 강 형사를 돌아보자 강 형사는 목께까지 벌겋게 물이 들었다. "ESP 카드로 초능력을 측정하는 실험이지요. 그 카드는 원, 네모, 별, 십자, 냇물, 모양의 다섯 가지로 되어 있는데 뒤집어서 제시를 하면 무슨 무늬인지 맞추는 것이에요. 24 회 측정을 해서 8 번 이상 맞추면 초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 받지요. 12 번 이상 맞춘다면 확실한 초능력자이고요." "우연히 그렇게 맞출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강 형사가 여전히 주책없이 물었다. "항상 같은 결과가 유지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적어도 초능력자라고 한다면 그 정도야 다 맞출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일반인들은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 정도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정말 드물지요. 가령 리겔라 같은 이가 실제로 초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스푼 몇 개 구부리고 씨앗 하나 발아시키는 따위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데이빗 카퍼필드의 마술이 더 쓸모가 있겠지요." "이수아 씨는 친언니입니까?" 추 경감이 이야기를 다시 본류로 돌렸다. "아니예요. 사촌이에요." "초능력자라고 하면서 마술을 배우는 이유는 뭡니까?" "뭘 곤란하게 그런 것을 묻습니까?" 강 형사는 비웃음을 하나 가득 얼굴에 담고서 말했다.


"마술을 그럴듯하게 배운 뒤에 초능력으로 했다, 이렇게 사기나 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요." 지아의 얼굴이 눈에 띌 정도로 핼쓱해졌다. "이런 식으로 대하신다면 정말 더 심문에 응하기 어렵군요. 저에게 죄가 있다면 영장을 발부해서 유치장에 잡아넣고 다음 질문을 해주세요." 지아는 말을 마치자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가 버렸다. "강 형사, 왜 이래?" 추 경감이 강 형사를 보며 화를 냈다. "이지아에겐 기회가 없었어. 그건 명백하다고." "반장님이 너무 쉽게 보시는 거라고요. 저 여자한텐 동기, 기회가 모두 있습니다." "무슨 동기?" "이혼을 당한 불쌍한 언니가 있지요. 형부였던 남자는 계속 미모의 젊은 여자를 바꿔 가며 놀아나고 있는데 자기 언니는 혹처럼 달린 국민학교 3 학년짜리 아들을 데리고 적적한 밤을 보내야 한다 이겁니다." 강 형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저 여자를 조수로 집어 넣은 거지요. 난승이라는 친구는 미모에 혹해서 그냥 받아들인 거고요. 그래서 기회를 노리다가 오늘을 디 데이로 삼은 겁니다. 압구정동에 간다고 해서 알리바이를 만들었지요. 언니한테도 전화를 해서 확실한 방패를 만들었겠지요. 그 뒤에 2 층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이게 웬 떡인지 난승은 자기 스스로 온몸을 묶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로 푹! 그렇게 된 겁니다." "응, 그랬으면 좋겠군." 추 경감이 웃음을 풋 참으며 말했다. "이봐, 강 형사. 이지아가 조수가 된 것은 최소한 삼사 년은 되었을 거야. 그 동안 기회를 한 번도 잡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나 돼? 마술 중에는 위험한 것도 많은 줄로 알고 있어. 그때 사고사로 위장하는 것이 지금 같은 경우보다 훨씬 나은 살인 방법일 거야." 추 경감이 '그렇지않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오늘 디 데이로 잡았다면 그만한 계획이 있었야 하지 않아? 그냥 때를 노리다가 푹 찔렀다고? 그게 몇 년이나 기회를 노린 여자가 할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초능력으로 알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강 형사는 추 경감의 말을 억지를 쓰며 받았다. "초능력 이야기할 때는 내리 비웃더니 다급해지니까 초능력을 들고 나오는구먼. 그래 초능력으로 칼을 붕 떠 올려서 휙 날아가게 했을 것 같아?" 추 경감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강 형사를 바라보았다. 강


형사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소리를 못했다. 11. 벗겨지는 베일 "난승도사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지아가 말했다. 그녀는 난승도사가 죽은 것이 원통하다는 뜻인지, 자기가 못 죽여 억울하다는 뜻인지 모를 말을 했다. "운명이라는 게지. 때가 되어 생기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지아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사람은 성철이었다. "운명이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계획했던 일이라고요. 내가 왜 먼저 손을 쓰지 않았는지..... 언니를 생각하면 ...... 내게 끊임없이 메시지가 오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걸 몰랐을까요? 내게 초능력이 뭘 해줄 수 있겠어요." "허허,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되지." 성철의 기묘하게 큰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 원인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우리 같이 조 박사님을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 성철이 의기소침해 있는 지아를 잡아 일으켰다. "자, 같이 가보자고. 조박사님이 시원한 해답을 내려줄 테니까." 조 박사란 초능력 연구자들 중 원로급에 속하는 조용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모두들 그를 박사라고 부르고 있고 어느새 그 자신도 자기를 박사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특정한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건물이 하나 있어 임대료를 받아 먹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참 팔자좋은 늙은이란 소리를 들을 만했다. 원래는 UFO(미확인비행물체)를 연구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인류에게는 지구의 자체적인 진화로 생성된 원시인류가 있고 외계인과의 성 접촉에 의하여 생겨난 돌연변이 인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돌연변이 인간들의 특징이 바로 초능력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였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만사가 편리하게 풀릴 수 있었다. 초능력이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특수한 부류의 인간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초능력이 없다고 크게 낙담할 문제도 아니고 초능력을 가질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셈이었다. 조 박사 자신도 순수 혈통임을 자랑해서 초능력을 가질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전세계 모든 초능력자의 능력을 비교 검토하여 어느 정도의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이도 한국에는 초능력자가 너무 적었다. 조 박사의 의견을 따른다면 외계인들은 한반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그의 이론은 이렇듯이 다소 황당한 측면이 있었으나 조 박사는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UFO 이외의 일에는 넓은 이해력과 통찰력을 갖고 있어 모두들 좋아했다. 둘이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역시 무료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니, 이게 어느 분들이야?" 조 박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어서는 일행을 확인하였다. 잠시 못 본 사이에 그에게 부쩍 늘은 흰머리에 지아는 잠시 놀랐다. 지아의 눈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조 박사가 웃었다. "자자, 다들 앉아. 미스 리는 놀랄 것 없어. 내 본래 모습이 이래. 그동안 조금이라도 젊어 보일려고 간간이 염색을 했었지." "아, 네."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사건 때문에 찾아왔겠지?" 지아와 성철은 조 박사의 말에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 박사님, 언제 그렇게 텔레파시의 능력은 갖추셨습니까? 이거 뭐 말씀드릴 게 하나도 없네요." 성철이 껄껄 웃었다 "텔레파시가 다 뭐꼬? 내가 말하는 건 '지레짐작' 이라고 하거나 '이심전심' 이라고 하는 게요." "그게 다 같은 소리지요, 뭐." 성철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조 박사와 있기만 하면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허허허, 같은 소리라? 하지만 난 외계인의 자손이 아니라 초능력이 없어." 조 박사는 예의 지론을 꺼내었다. "전염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지아가 재치있게 끼어들었다. "전염? 아니, 초능력이 콜레라야? 전염이 되게? 허허." 조 박사는 말을 마치고 허리가 휘도록 웃었다. "이봐요, 미스 최!" 조 박사가 찔끔찔끔 배어나오는 눈물까지 닦으며 비서 및 경리 역할을 하는 뚱뚱한 아가씨를 불렀다. 지아 몸집의 꼭 2 배쯤 되어 보였다. "여기 차 좀 가져와요." "저 여자도 둔해서 큰일이야." 미스 최가 물러나자 조 박사가 투덜대며 말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비서만큼은 초능력자로 두기로." "저 여자분도 초능력이 있겠는데요?" 성철이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초능력이 있겠다고?" 조 박사가 의아해 했다. "그럼요, 먹는 데 가히 초능력을 발휘할 것 같아요." "먹는 데? 오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이 먹을 거라 이


말이지?" "안 그러고야 저런 몸집을 유지하겠습니까?" 셋은 그 말에 모두 웃음보를 터뜨렸다. 지아는 답답하던 마음이 이곳에 와서 풀려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 나오자 지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천천히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아주 재밌군, 흥미로워." 조 박사는 깍지를 끼고 고개를 소파 뒤로 젖히고 이야기를 들으며 중얼중얼 댔다. 지아가 말을 마친 후에도 조 박사는 그런 자세를 풀지 않고 가만 앉아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철이 채근을 했다. "음, 어느 걸 말인가?" 조 박사가 반문했다. "예?" 성철이 오히려 조 박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범인이 문제인가? 아니면 미스 리의 상태가 문제인가?" "범인이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누구나마나 그것은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지." 지아의 말에 갑작스레 생기가 돌았지만 조 박사가 의외로 심드렁하게 받았다. "이번 일은 살인멸구의 가능성이 짙어." "살인멸구라면 사람을 죽여서 비밀을 지킨단 말입니까?" "그렇지." 조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죠. 그리고 그런 지시를 따르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물론인지." 조 박사가 의자에서 약간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이 세웠던 계획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그 말에 지아와 성철은 한줄기 전율을 느꼈다. 계획. 그것을 그들은 아무런 다른 말을 붙이지 않은 채 '계획'이라고만 했다. 정말 위험한 '계획'이었다. "미스 리는 계획에 따라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 난승도사 밑에 들어갔던 게지?" 조 박사의 말에 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는 그것은 별로 잘한 일이 아니야." 조 박사는 담배를 한 대 물면서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꼭 그런 방법밖에 없었는지 알고 싶어지는군." 조 박사가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계획은 본래 미스 리가 마술을 철저하게 익혀서 이태호 전 회장의 초능력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있었던 게지." 조 박사의 말에 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마술사를 불러다 감정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지?"


"그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나중에 구설수를 피하려 한 것이 두번째 이유였습니다."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마술을 직접 배울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미스 리가 선택된 이유는 뭐야?" "그것도 이유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촌언니 때문에 아는 마술사가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지아 양이 리트로코그니션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회장의 지난 일을 추적하는 데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지." 조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3 년이나 지나도록 일이 진척을 보지 못한 이유는 뭐야?" "처음에는 1 년이면 마술을 다 배우지는 못할지라도 트릭을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아가 차분한 어조로 지난 일을 풀어 나갔다. "그러나 마술이란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던 것이 하나의 장애였어요. 일단 하나를 숙달되게 익히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지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스 리는 그러면 3 년을 마술로 지낸 셈인데 후회가 되는 것은 없는 게요?" "없어요." 지아가 간단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점만은 그녀 스스로도 분명하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항상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는 초능력보다 이건 거짓이야라고 생각하고 보아 주는 마술이 얼마나 배짱에 맞고 속이 편한지 몰랐다. "바로 그 점에서 문제가 출발하는 게야." 조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문제요?" 지아가 어리둥절해 했다. "미스 리가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이 문제라는 게지." 조 박사가 상체를 끌어당겨 지아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초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기꾼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을 미스 리는 가지고 있었던 게야." 조 박사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마술이란 것은 틀리지. 그건 허가를 낸 사기를 치는 거거든. 어디 사기만 치나? 돈도 생기지." "워낙 사기를 치면 돈이 생기는 법 아닙니까?" 성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조 박사도 같이 너털웃음을 보냈다. "문제는 초능력과 마술의 그같은 차이가 아니야. 미스 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야." 조 박사의 말이 둘에게 얼른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미스 리이 심적 상태에는 다른 이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데 다른 불안감이 있다는 거지." 조 박사가 부연 설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예외적인 별난 현상은 아니니까 이해하시오, 미스리." 조 박사는 지아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초능력자라면 모두 그런 경험, 즉 남들의 불신 말이지.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심적인 불안으로 굳어져 있어요. 그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면 초능력마저 위축되는 경향을 띠게 되지." 조 박사는 두 사람을 살피며 말의 반응을 훔쳐보았다. 둘 다 수긍하는 눈치였다. "징조는 미스 리에게 나타났던 게야. 운명을 바꾸려면 바꿀 수 있었을지 모르지. 그러나 보다 더 큰 힘이 인간의 작은 힘을 눌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게야." "너무 어럽게 말씀하시지 말아요." 성철이 투덜댔다. "어렵게 들렸다니 미안하이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말이야." 조 박사가 다시 껄껄 웃었다. "난승도사를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죽일려고 했지. 그 때문에 미스 리에게 그 일이 계속 감지되었어. 그러나 미스 리는 마음속에 본래 불안감이 있었지. 때문에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느낌을 잃었던 것이야. 따라서 불안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거지." "난승도사가 죽은 것이 우리의 '계획'과 관계가 있을까요?" 성철이 물었다. "그건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싶네만..." 조 박사의 말에 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참고적으로 한 마디만 더 함세. 이 회장이 최면술에 도가 튼 사람이라는 것 알고 있나?" "예? 금시초문인데요?" 성철과 지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이야. 만약 킬리안 사진만 찍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이 회장의 정체를 모를 뻔했지." "그렇다면 개별적인 증언자들은......" "그래, 모두 최면에 의한 것이었지." "그렇다면....." 지아가 입을 떼는데 조 박사가 손을 들었다. "성급한 추측은 금물이야." "킬리안 사진이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성철이 한탄조로 말했다. 킬리안 사진이란 사람의 기(氣)를 찍어내는 사진기술을


말한다. 본래 니콜라 테스라 부부가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후 소련에서 킬리안 부부가 과학적으로 연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킬리안 사진으로 초능력의 신비 중 일단이 벗겨지게 되었으며 그 사진의 효과는 특히 염력을 판가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염력이 강한 사람은 손끝에서 방사선의 진홍색 파워가 찍혀져 나오게 마련이었다. 기가 약한 경우는 원형으로 파워가 찍혔고 색도 흰색이었다. 그 다음 단계가 푸른색이고 최종적으로 진홍색을 띠는 것이었다. 이태호의 능럭이 한창 이름을 떨치던 무렵 '전미주심령자연합'이라는 미국의 초능력 단체 사람들이 방한하였다. 이태호는 당연히 그들을 맞으러 공항으로 나갔고 즉석에서 그는 간단히 염력 시범을 제의받았다. 그는 별 부담감도 없이 그 제의에 응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적인 시범 뒤에는 킬리안 사진이 있었다. 고압 방전의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킬리안 사진이 현상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실망과 혐오감을 감추지 못한 채 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한창 이 회장에게 기대어 뻗어나가던 '한국초능력자연구회'에도 이 사건은 큰 타격이 되었다. 이 회장파에서는 한 장의 사진 따위는 큰 문제가 못 된다. 이 회장이 사기를 친 것이라면 그 점을 증명해야 되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찍은 킬리안 사진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초능력자로 초능력에 대한 연구를 하는 연구자 그룹은 모두 이 회장의 능력을 믿을 수가 없다.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떠들었다. 둘의 팽팽한 싸움끝에 결국은 초능력자 집단에서 차기회장을 내는 조건으로 이태호 회장의 2 선 후퇴가 결정되었다. 그때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 바로 박성철이었다. 성철은 이 회장의 심복이 아니었지만 비초능력자들을 무마하기 위한 얼굴마담으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고 실제 회계 등을 맡아보는 총무 자리에는 이 회장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전병호가 앉았다. 자연히 소외된 성철에게 꼬드기는 세력이 있었다. '이태호가 몰락하지 않으면 당신은 별 볼일 없는 게요. 이태호의 비밀을 파헤칩시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참언과 간사함과 집요한 설득이 자리를 같이했다. 결국 지아를 파견해 이 회장의 비밀을 열어보자는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 계획은 3 년간을 흐지부지하며 지내왔지만 최근에야 중대한 정보를 알아내게 되었다. 이태호는 난승도사의 제자였던 것이다. 난승도사가 '찬드라카드라'라는 이상한 예명으로 활동하던 초창기에 수제자로 있었다는 사실을 지아가 알아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대단한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한국 최고의


초능력자가 한국 최고 마술사의 제자...... 지아는 이 사실이 가져올 큰 파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했다. 때문에 확실한 물증을 잡기 전에는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난승도가 피살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살인멸구의 뜻은? 12. 실패 추 경감과 헤어진 강 형사는 혼자 신사동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지아의 여러 가지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지아는 난승도사의 헤어진 아내인 이수아와 사촌간이다. 수아가 혼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고생스럽게 사는 모습을 보고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젊디 젊은 나이에 남자에게 속아 일생을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사촌 언니의 복수를 위해 난승도사의 제자가 되고, 기회를 보았다가 언니의 복수를 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강 형사는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충분히 범행 동기가 성립된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수상한 행동을 했었다. 일부러 언니 이수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난승도사와는 제자들 중 자기가 가장 이해하는 제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거야.' 그러나 강 형사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제자들 중에 누구보다도 난승도사를 따르고 이해하는 사람이 지아같아 보였다. 다른 제자들은 난승도사의 초능력에 대한 심취를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지아만은 그것을 찬성하고 있었다. '이 집이구나!' 강 형사는 걸음을 멈추고 휘황한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뉴한강'이라는 불빛이 정말 한강물 흐르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강 형사는 호주머니를 한번 만져 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호주머니를 만져보는 것은 돈이 달랑달랑 할 때의 습관이었다.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밴드소리가 귀를 찢는 것 같았다. 촉광 낮은 조명 아래 담배연기와 술 냄새가 얼굴을 후끈하게 만들었다. 남녀의 요설이 느끼한 분위기에 섞여 역겹게 들렸다. "어서옵쇼. 싱글이십니까?" 어느새 그의 앞에 건장한 청년이 나타나 고개를 굽실거렸다. "혼자는 안 돼?" 강 형사는 촌닭처럼 물었다. "아, 아닙니다. 더욱 환영합니다. 혼자 오신 과부님, 유부녀님도 수두룩 하니까요." 청년은 농반 진반으로 떠들었다. "앞자리가 없을까?"


강 형사는 무대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대에는 번쩍이는 조명 밑에 반나체가 된 무희들이 다리를 천장까지 닿도록 쩍쩍 벌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박통만한 유방이 출렁거렸다. 유두에만 유난히 반짝이는 은종이를 살짝 붙이고 있어 유방 전체가 무방비로 노출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무희들이 정면을 향해 일제히 다리를 번쩍번쩍 들 적마다 객석에서는 환성이 터졌다. "손님이 조금 늦으셨습니다. 하지만 저쪽 기둥 뒤에는 아직......" 청년은 강 형사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앞에 가느다란 기둥이 가려서 무대의 일부가 안 보이긴 했으나 비교적 앞자리였다. "어떻습니까? 잘만 보시면 아가씨들 허벅지에 난 솜털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은 강 형사를 완전히 음란 도착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본하고 더 주문하실 것은 없습니까?" "기본은 뭐뭐냐?" 강 형사가 쑥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맥주 다섯 병에 안줍니다." "뭐 다섯 병씩이나!" 강 형사가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염려 마세요. 잘 마시는 싸모님 한 분 모시고 올 테니까요." 청년은 아주 반죽이 좋았다. "아냐! 그냥 둬. 혼자 다 마실 테니까." 강 형사는 더욱 아찔해져서 손을 저었다. "근데, 마술은 언제 하냐?" 강 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며 물었다. "아, 예. 그 아가씨 보러 오셨군요. 마술보다는 아가씨가 훨씬 더 볼만하죠. 한 삼십 분 있으면 시작합니다." 청년은 휭하니 돌아 서더니 얼마 있다가 맥주 큰 병 다섯 병과 과일 따위를 깎아 담은 바가지 안주 접시를 가져다 놓고는 또 부리나케 갔다. 강 형사는 맥주 다섯 병을 바라보며 추 경감의 얼굴을 떠올렸다. 둘이라면 아주 적당한 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원래 같이 오기로 했으나 추 경감이 갑자기 상관의 술 상대로 징발 되었다. 이지아가 여기서 아르바이트 마술을 한다는 것을 추 경감이 알아내었다. 소위 극장식 식당이라는 데는 술을 마시는 동안 코미디언들이 나오고 가수가 나오고 하더니 요즘은 마술이 나오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이지아가 난승도사 마술단이 공연하는 그들의 정식 영업이 아닌 아르바이트 출연을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다면, 거기엔 반드시 조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조수로


수배중인 박형준, 즉 형구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추리를 했기 때문에 강 형사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강 형사는 다소 긴장한 마음으로 맥주를 따라 마셨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혼자 앉아서 마시자니 싱겁기 짝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경쾌한 리듬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희들의 몸놀림이 빨라지자 춤추러 나오는 남녀가 부쩍 늘었다. 좌석과 무대 사이의 손바닥만한 공간에 수십 명의 남녀가 올라가 발바닥을 비벼댔다. 서로의 몸과 몸이 닿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저런 짓을 하는지 강 형사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실내가 온통 발광하듯 격렬한 음악과 춤이 끝나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그때였다. 무대 위에 밝은 불이 켜지면서 수영복 차림의 여자가 뛰어나왔다. 어느새 가져다 놓았는지 테이블까지 나와 있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지금부터 초능력의 여인 이지아 양을 소개합니다. 박수로 환영합시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나오자 박수와 밴드의 북소리가 뒤섞여 귀를 찢는 듯한 소리를 냈다.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술시간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지아 양이 하는 마술은 마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초능력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때 무대 위로 다시 백발의 노인 한 사람이 헐렁한 콤비 양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지아 양의 조수 무주공산 도사입니다. 박수....." 다시 요란한 박수소리가 울렸다. 허우적거리듯이 걷는 노인은 객석을 향해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굽혔다. "자, 그러면 이 놀라운 장면들을 놓치지 마시고 잘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잘한다고 생각하면 박수를 아끼지 마십시오. 초능력 시범이 끝난 뒤 박수를 치지 않으면 여러분 손바닥에 장미 가시가 난답니다. 자, 그럼......" 수영복 차림의 지아는 감탄할 정도로 몸매가 잘 빠졌다고 강 형사는 생각했다. 지아는 가슴 속에서 수건을 꺼내 그 수건에서 물을 짜낸 뒤 불을 붙여서 태워버리는 기초적인 마술 몇 가지를 해 보였다. 그 동안 무주공산 도사는 착실히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강 형사는 어느 땐가 반드시 박형준이 등장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무대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지아 양의 특기인 초능력 테스트를 보게 되겠습니다." 조수가 테이블 위에 맥주병, 생맥주 잔, 모자, 여자인형 등을 가져다 놓았다. 거기서 2, 3 미터 떨어진 곳에 지아가 섰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 중 여러분이 원하는 물건을 손대지 않고 공중에 떠올렸다가 바닥으로 내려


놓는 초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할까요?" 아나운서가 나오는 동안 조수가 물건 이것 저것을 들어 보이며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맥주병!" 누군가 앞 테이블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맥주병. 좋습니다. 자, 잘 보십시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지아가 맥주병을 노려보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정신을 눈에 집중하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염력으로 물건을 움직이는 초능력을 발휘하려는 것이었다. 몇 초가 지난 뒤 "얏" 하는 지아의 기합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맥주병이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다. "와!" 감탄과 함께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이러한 마술은 테이블 위의 물건이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무대 위에 박형준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다음, 여러분 중 희망자는 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남자 두 분만 올라오십시오. 천하의 미인 우리 이지아 양과 함께 초능력 테스트를 하실 분....." 앞에 있던 젊은이 한 사람과 나이 쉰은 되었을 법한 중년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조수가 두 사람을 나란히 세운 뒤 넥타이며 양복 소매 등을 살펴보았다. 두 사람 앞에 지아가 마주섰다. "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십시오." 지아가 다시 염력을 발휘하는 태도를 취했다. 일초, 이초...... 십여 초가 지나자 정말 놀라운 일이 생겼다. 두 사람의 넥타이가 저절로 풀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어때요. 이분 바지나 팬츠도 벗겨 버릴까요?" 아나운서가 나오자 폭소와 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여러분 말씀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미녀가 신사의 팬츠를 벗긴다...... 좋지요. 하지만 그건 풍속사범 단속법에 걸리기 때문에 삼가하기로 하겠습니다. 두 손님,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가자 조수인 무주공산 도사가 갑자기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지갑 두 개를 꺼내들었다. "아차, 아까 손님이 지갑을 버리고 내려가셨군요. 와서 찾아 가시죠." 객석에서 다시 박수가 터졌다. 노인이 이번에는 볼펜, 손수건, 자동차 열쇠 등을 호주머니에서 또 꺼냈다. 잠깐 동안에 두 손님의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버린 것이다. "자, 오늘의 초능력 시범을 이것으로 끝내고 오는 금요일 다시 시범이 있겠습니다. 박수!"


이지아와 노인이 공손히 절을 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강 형사는 어느새 박수를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박형구 녀석은 없잖아.' 강 형사는 실망스런 독백을 하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 그 녀석이다! 그 노인이야. 그 녀석이 감쪽같이 나를 속였단 말야.' 강 형사는 무대 뒤로 뛰어 올라갔다. 그곳은 위로 올라가는 비상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강 형사는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이지아도 박형준도 보이지 않고 거대한 사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쁜 놈! 술값 안 내고 이리로 도망을 쳐! 혼 좀 나보아라." 고릴라 같은 사나이가 강 형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 손으로 가슴을 쥐어 박았다. "캑캑......" 강 형사는 숨도 쉴 수가 없고 가슴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강형사는 한 손으로 호주머니에 있는 수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형사요. 형사!" 강 형사가 겨우 말을 뱉아냈다. "이 녀석이 누구한테 공갈이야!" 고릴라는 강 형사의 손을 비틀어 수갑까지 빼앗아 버렸다. "저...... 정말......" 강 형사가 발버둥을 치며 비명에 가까운 사정을 했다. 그러나 고릴라는 강 형사의 목을 거세게 졸랐다. "캑! 캑!" 그대로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이젠 놔 줘요."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 진짜 형사예요. 그쯤 해두세요." 고릴라가 뒤를 돌아보더니 강 형사의 목을 놓아 주었다. 거기에는 어느새 왔는지 이지아가 서 있었다. "지아 씨, 고마워요." 강 형사는 우선 인사말부터 해놓고는 목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흔들어 보았다. "강 형사님이 여기 웬일이세요. 월급이 넉넉해서 이런데 술마시러 다니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지아가 약간은 빈정대듯이 말했다. 난승도사의 집에서 보던 이지아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약간은 겁에 질린 듯한 순진한 처녀로 보았던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냥, 소문난 초능력 여자가 나온다기에 왔다가..... 어쨌든 고마워요." 강 형사가 지갑을 꺼냈다. "얼마요?"


고릴라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오신 제 팬이니까 오늘은 제가 내지요. 아저씨, 아셨죠?" 지아가 고릴라를 쳐다보자 녀석은 절을 꾸벅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어때요. 저기 가서 한 잔 더 할까요?" 이지아가 길 건너편의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박형구, 아니 박형준은 어디로 도망 갔습니까?" 강 형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호호호. 역시 형사님은 다르셔. 무주공산 도사가 박형준 씨라는 걸 아셨군요." "이래뵈도 형사 생활 8 년쨉니다." 강 형사가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도 몰라요. 숨어서 다니자니까 돈이 좀 필요한가 봐요. 제가 여기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왔더군요. 그래서 몇 번 같이 출연했죠." "그럼 어디가 거처인지 아시겠군요." "몰라요. 공연 시간이 되면 나타날 뿐이에요." "그럼 다음 금요일에 다시 여길 오겠군요." 그 말에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오지 않을 겁니다. 아까 강 형사님이 이곳 기도한데 혼나는 모습을 보고 갔는데 오겠습니까?" 지아가 웃어보였다. "손님 호주머니 터는 것을 본 뒤에야 그가 박형구라는 걸 깨달았으니......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변장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게 우리들 직업인데요." 지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무대 위의 수영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강 형사가 분위기를 바꿀 속셈으로 말했다.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맥주병은 어떻게 움직였나요? 정말 감쪽같았습니다." "제가 속임수를 쓴 것으로 아시는 모양인데..... 그게 아니예요. 진짜 초능력을 보신 겁니다." 이지아가 다소 정색을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초능럭은 난승도사도 쓸 수 있겠지요?" "그건 사정에 따라 다릅니다." "그럼 난승도사는 왜 끈을 염력으로 풀지 못했을까요?" "초능력은 아무데서나 아무 시간이나 발휘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럼 도대체 누가 지아 양의 스승을 죽였을까요? 그건


초능력으로 알 수 없을까요? 아니 현장 상황으로 보아 밀실 속에 도저히 단도를 던질 수가 없었거던요. 누군가가 초능력으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닐까요?" 지아는 한참 동안 강 형사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스승님 휘하에서 초능력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저뿐인데, 그럼 제가 그랬단 말씀인가요?"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동기로 보나....." 강 형사가 어물쩍 하는 척 하면서 이지아의 약을 올렸다. "동기라뇨?" "사촌 언니인 이수아 씨가 어린 아들 데리고 한탄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복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히 우러나올 것 아닙니까?" "불쌍한 언니를 이런 일에 끄집어내지 말아요." 이지아는 언니 이야기에 대단히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언니는 언니대로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 간단 말예요. 형사님의 서푼 동정은 필요 없어요." 이지아는 거의 울먹일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언니의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일이 없단 말씀이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지아는 이제 토라져 더 이상 말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난승도사가 이수아 씨와 헤어진 후 문란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겠죠?" 강 형사는 기왕에 끄집어낸 말이니 결말을 보아야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건 몰라요." 지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아란과 난승도사의 관계는 짐작하셨을 텐데요." "몰라요." 이지아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강력히 나타냈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해서. 그러나 내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불쌍한 사촌을 위해 꼭 복수하리란 일념을 품은 한 여인이 오랫동안 계획을 세운 디 데이가 드디어 왔었는지도 모르죠. 환희와 복수의 화려한 디 데이 말입니다." "이 술값도 제가 내지요. 아저씨, 여기 얼마예요?" 지아는 강 형사를 완전히 무시하려고 했다. "지아 씨,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농담이었습니다. 하하하. 잊어버려 주십시오, 하하하," 강 형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 지아는 새침한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재빨리 술값을 치르고 난 강 형사는 허탈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시계를


보았다. 12 시가 훨씬 넘었다. "예, 강 형삽니다." "이런...... 형사가 뭐 잘난 직업이라고 형삽니다, 형삽니다 하는 거야." "아, 반장님!"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알아? 그래 어떻게 되었어?" "꽝입니다." "뭐야? 수류탄 터졌어?" "아뇨. 복권 뽑았을 때 빈 껍데기가 나오면....." "오밤중에 복권은 웬 복권이야." "그놈이 나타나 내 눈앞에서 재주 부리다 놀고 갔는데......" "뭐야?" "그런데 그 재주 뻔히 보고 있으면서 잡지 못했습니다." "쯧쯧쯧...... 내가 가야 하는 건데......도대체 자네 형사 생활 몇 년째야? 그래 변명해 봐. 눈앞에 뻔히 보면서 잡지 못한 이유가 뭐야? 그놈의 초능력인가 뭔가 때문에 맥을 못 추었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고요. 하여튼 멍청이가 된 겁니다. 전 아무래도 형사 소질이 없나봐요. 반장님 저 교통과 같은 데 가면 안 될까요?" "잘 논다! 내일 아침에 빨리 나오기나 해." 추 경감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 형사는 옷을 벗고 누웠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박 형구에게 속은 것도 속은 것이지만 이지아에게 구원을 당한 것이 불쾌했다. 그녀가 얼마나 형사를 비웃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잠을 들 수가 없었다. 13. 초능력 "반장님, 이거 갈수록 어려운데요?" 강 형사가 퇴근하는 추 경감을 쫓아오며 투덜댔다. "뭐가?" 추 경감은 심드렁한 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도망친 박형구는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 종잡을 수도 없지요, 용의자들은 용의자들대로 무슨 일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도 찾을 수가 없고요." "음, 그 점이 이상하긴 이상해." "그렇지요? 난승도사라는 사람, 여자 문제말고는 나름대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해 왔던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사건의 동기를 모르겠단 말야." "제 이야기도 그건데요?" 강 형사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추 경감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 제 이야기가 그건데요. 그렇게 생각해 봐도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박형구밖에 없습니다. 이런, 정류장이네요?" 강 형사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 경감은 벌써 강 형사가


노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어디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해 보세." 둘은 근처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또 사건이 있는 모양이구먼요." 포장마차 아줌마가 둘을 보자 반기며 말했다. "허허, 그렇게 되었습니다." 추 경감도 껄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아무튼 범인은 박형준 그놈이 분명합니다. 정황도 그렇고, 녀석 성품도 그렇고....." "성품이 어떤데?" "겪어 보지 않았습니까?" "그 점이 더 그치가 범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어." "예?" 강 형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 일찍 달아나지 않았을까? 자네는 이 점을 의심해 보지 않았나?" "의심은 무슨 의심이에요? 도망칠 틈이 없었던 거지요." "도망칠 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어. 경찰에 신고를 한게 누군지 잊어버렸어? 바로 박형구 그치야." "그런데요?" "머리를 쓰라고, 머리를. 112 를 돌려서 신고하는 척 해놓고 물건이나 사러간다고 나가버리면 누가 알아?" "에이, 그럼 바로 자기가 범인으로 몰릴 텐데요?" "어차피 조사가 들어가면 바로 과거 전력은 탄로나는 거야." 그 말에 강 형사의 수다스런 입도 다물어졌다. "그치는 진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버틴 거야. 계속 자기를 은폐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게지." "멍청하게도 말이지요." "그렇지, 그 점은 멍청했던 게 맞아. 하지만 멍청하다고 범인은 아니야." "박형구가 유아란과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애정이 부른 질투가 동기가 아닐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이지아가 출연하는 나이트클럽을 소개해준 건 유아란이야. 유아란은 거기에 박형구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제보를 한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나?" 추 경감이 소주를 털어 넣으며 말했다. "반장님은 그러니까 유아란과 박형구 사이에 깊은 애정관계는 없었다고 보는 겁니까?" "어느 정도 관계는 있었겠지만 죽고 못 사는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거야." "그럼 유아란이 범인일까요?" "역시 동기가 빈약하지." "두 남자를 모두 제거할 기회로 삼았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그럼 덫이 마련되어 있어야지. 아무런 보조장치가 없잖아." 강 형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럴 바에는 하나씩 다 살펴보는 게 낫겠네요." "그것도 좋은 방법이야." 추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덕이 말하던 회장이 누구야? 조사해 봤어?" "예, 지금 회장은 박성철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야?" 추 경감은 꼼장어를 추가시켰다. "전 회장으로 이태호라는 사람입니다." "어떤 인물인데?" "반장님, 저 말 많이 시키고 안주는 혼자 드실 생각이죠." "이 친구가? 너 혼자 다 먹어. 이런......" 추 경감이 꼼장어 접시를 밀었다. "농담입니다." 강 형사가 헤벌쭉 웃었다. "이태호는 한국 최고의 초능력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결국 사기꾼으로 들통이 난 인물입니다." "뭐야? 그건 최현덕의 이야기하고는 딴판이잖아." "그렇습니다." 강 형사는 꼼장어 하나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기극이 판명이 난 이후에도 그치 주위를 맴돌며 그가 여전히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고 맹종을 하는 것이지요." 추 경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그건 정말 이상한 이야기군 그래. 뭔가 관련이 된 게 있을 거야. 돈이든 권력이든 말야." "그런데 크게 관련이 된 것은 없습니다. 협회 재정도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고요. 상임위원도 현재 박 회장뿐이니까요. 권력이라는 것도 그저 협회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요. 오직 있다면 명예 정도입니다." "명예라,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런데 최현덕의 이야기는 뭐야? 그치는 철석 같이 이태호를 위대한 초능력자로 여기던데." 추 경감이 물었다. "최현덕이 이태호 집을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을 그 앞 슈퍼에서 확인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세뇌를 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세뇌? 허, 이 친구 상상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럼 뭐겠습니까?" 강 형사의 말에 추 경감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초능력" 추 경감이 난데없는 말을 불쑥 꺼냈다. "예?" "초능력이 이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반장님도, 그런 황당무계한 게 무슨 관계가 있을라고요?" "아니야, 이건 나의 육감만은 아냐. 분명히 초능력이 이 사건과 관계가 있어. 이지아가 왜 마술을 배우는 걸까 하는 점도 의심이 갔었잖아?" "그건 그랬지요. 정말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사연이 있는 거야. 사촌언니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지아 같은 냉철한 지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사촌언니의 복수를 대신하려고 자신의 전생애를 걸어? 넌센스지. 그 여자는 그 여자 나름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난승도사에게 접근을 했던 거야." "혹시 집단 최면술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강 형사가 뜬금없는 소리를 불쑥 내었다. "집단 최면술? 뭐가?" "말 그대로지요. 집단에게 최면을 걸어서 난승도사가 죽지 않았는데 죽은 걸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정말 난승도사를 죽인 거라면?" "자네 지금 술기운이 돌고 있지?" 추 경감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가능해?" "글쎄. 만화책에서는 가능하다고 하는데....." "에라, 잘난 친구야." 추 경감이 강 형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추 경감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고." "어, 반장님!" 강 형사가 추 경감을 불렀지만 추 경감은 어느 틈엔지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아주머니, 술이나 한 병 더 주세요." "이 친구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구먼." 추 경감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누구든 길 건너 포장마차에 가서 강 형사 좀 데려와!" 밤 11 시였다. 오래간만에 들어간 집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 추 경감을 다시 불러낸 것은 박형구였다. 박형구가 마포서에 검거되어 시경으로 옮겨졌다는 연락을 받고 추 경감은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 형사에게 연락이 닿지를 않는 것이었다. 지금껏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해도 걱정이었다. 곤드레가 된 형사를 어디다 쓸 수 있을지.


"박형구를 잡았다고요?" 강 형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어디 있었어?" "술 냄새가 안 나는데?" "반장님도 안 나잖아요?" 강 형사가 씩 웃었다. "난 집에 갔잖아." "포장마차에 있다고 꼭 술을 먹으라는 법 있습니까?" "그럼 뭐했어?" "얘기했지요." "누구랑?" "아주머니랑요." 추 경감은 이야기를 할수록 알 수 없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글쎄, 세상이 좁긴 좁더라고요. 그 아주머니가 박형구를 잘 알지 뭡니까?" "그래?" "예. 그래서 있을 만한 곳에 대해서 정보를 얻었지요. 곧 마포서에 연락을 하고 어떻게 되었나 두고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뭐야?" 추 경감은 기가 막힌 눈으로 강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자리를 안 지키고 거기에 있었어?" "그게 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요. 성공하면 찾을 테니까 그냥 있었지요." "뭐야?" 추 경감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어이구, 시간만 있으면......" "헤헤, 봐주십시오. 따져보면 일등공신 아닙니까." 강 형사가 싱글벙글 웃자 추 경감도 마음이 눅어 들었다. "좋아, 이건 공으로 과를 상쇄한 거니까 공도 과도 없는 걸로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추 경감은 강 형사를 한 번 더 노려본 뒤에 다시 말했다. "빨리 따라와." 박 형구는 불과 며칠 사이에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복화술사 나리, 또 뵙는군요." "흥!" 강 형사의 빈정거림에 형구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 추 경감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했지. 그래 누구지?" 형구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범인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지은 죄가 워낙


많으니까요." 강 형사가 계속 빈정댔다. "난승도사를 죽인 범인에 대해서 묻는 거야. 너한테 복화술을 가르쳐 준 그 사람이지." "쳇, 난 그 사람한테 배운거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형구가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그럼 누구에게 마술을 배웠지?" 추 경감이 물었다. "누구에게 배웠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오?" 형구는 여전히 퉁명스레 대꾸했다. "허, 입은 떨어졌군. 난 또 입을 안 열고 배로 말할 줄 알았어." 강 형사의 빈정거림이 이번에는 역효과를 불렀는지 형구는 다시 입을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둘이 여려 차례 다른 방법을 써 보았지만 그의 입은 요지부동이었다. "자네는 정말 그 사람에게 의리가 깊구먼." 추 경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런다고 진상이 은폐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네. 우리는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어." 추 경감의 말에 형구의 얼굴에 약한 경련이 일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다만 왜 난승도사를 죽여야 했던가 하는 점이다. 그걸 모르겠어. 그 점을 해명해 주기를 바라는 거라고." 그러나 형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열지 않았다. 추 경감은 강 형사에게 손짓을 해서 취조실을 나왔다. "저자는 정말 말하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이건 관계되는 말을 하면 범인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어." 추 경감이 도리질을 했다. "쳇, 주제에 의리는....." "서러울 때 도와준 사람은 평생 잊지를 못하는 거지. 그런 점은 높이 살만해." 추 경감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필터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눈이라도 좀 붙이자구." "좀더 몰아붙여 보지요." 강 형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범인을 안다고 공갈을 치니까 상당히 먹혀 드는 것 같던데요?" "난 공갈친 게 아냐.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예?" 강 형사가 놀라서 추 경감을 바라보았다. "그게 누굽니까?" "누군 누구야? 범인이지." 추 경감은 빙긋이 웃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범인이 누구란 말입니까?"


"자네도 내일 밤이면 알 수 있어." 강 형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추 경감과 똑같은 정보를 갖고 있는데 왜 난 알 수가 없을까? "범인이 누군지 알면 왜 여태 체포를 하지 않았습니까? 말도 안돼요." "왜 체포를 안 했냐고?" 추 경감이 강 형사에게 꿀밤 먹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첫째, 증거가 없어서지. 그래서 자네보고 박형구를 빨리 잡으라고 한 거야. 박형구가 목격자니까. 그리고 둘째, 범인의 동기를 모르기 때문인데 조사결과는 미진하지만 자네의 말 덕분에 가닥은 잡혔네." 추 경감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저한테도 힌트를 좀 주십시오. 내일이면 범인을 잡으신다고 했으니까 저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강 형사가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을 대로 하게. 첫번째 힌트는 기묘하게 놓여 있던 의자야. 두번째 힌트는 내가 그날 그 방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던 거구. 세번째는 정원으로 떨어진 어떤 물건이지. 나는 그걸 장대라고 생각한단 말야. 그리고 네번째, 이게 결정적인 건데 박형구가 범인을 안다는 사실이야." 이 네 가지 사실은 강 형사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범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지? "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지아입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강 형사가 추 경감에게 말했다. "왜 또 이지아가 나와?" 추 경감이 강 형사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왜라니오? 초능력협회에는 아직도 이태호를 감싸는 무리가 있다고 했잖습니까?" 강 형사가 금세 답답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데다가 이지아는 지금 회장인 박성철의 편입니다. 난승도사가 이태호를 전에 제자였답시고 감싸 돌면서 선수를 쳐서 이지아를 죽이려 했을 겁니다. 전죄도 있고 하니 불안하기도 했을 거고요." "농담하지 말고 오늘 잠복근무 준비나 해." 추 경감은 강 형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추 경감이 잠복근무를 한다고 데려간 곳은 난승도사의 집이었다. 경비를 보던 순경들도 이제는 철수를 한 모양이었는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무슨 잠복근뭅니까?" 강 형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어?" 추 경감이 이층 창문 옆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범인은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여기서 칼을 던져 난승도사를 죽인 거야." "하지만 여기서는 맞출 수가 없어요. 칼이 휘어지기라도 하나요?" "칼은 휘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야." "예?" 강 형사는 여전히 추 경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해 보라구. 첫째 방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그러면 창문은 열려 있어. 그럼 조건에 충족되는 거지. 다음에 남는 문제는 각도가 안 맞는다는 거야. 창문 밖에서는 그렇게 칼을 던질 수 없다." "그렇지요. 제 말도 그겁니다." 강 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 범인이 노린 것도 그거야. 불가능하게 보이게 하는 거지. 하지만 장대가 있으면 돼." "장대요? 장대로 의자를 돌려놓는단 말입니까?" 강 형사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의자가 놓여 있는 위치가 그렇게 이상했던 거야." "하지만 난승도사가 아무리 왜소해도 50 킬로그램은 나갔을 겁니다. 그 의자를 장대 하나로 어떻게 돌려놓는단 말입니까?" "의자 다리 밑에 기름칠이 되어 있으면 가능해." 추 경감이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그날 엉덩방아를 찧은 것은 그 때문이야." 강 형사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 의자는 박형구가 가지고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범인은 역시 박형구 아닙니까?" 강 형사는 말하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을 느꼈다. "박형구가 범인이 아니니까 지금 우리가 잠복근무를 하고 있잖아. 박형구가 의자를 가지고 갈 때 의자 다리 밑에 기름칠이 되어 있는 걸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박형구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거기서 착안을 한 게 아냐. 그날 이곳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 박형구야. 그것은 범인이 아직 빠져나가기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는 뜻이야. 난승도사는 칼을 맞고 비명을 질렀어. 그리고 범인은 장대를 이용해 의자를 돌렸지. 다음에 장대를 버리고 문을 열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거야." "그럼 범인은 김희수군요. 두번째로 도착한 것은 김희수니까." "김희수는 정말 동기가 없지. 경위가 그날 한 이야기 생각나나? 열린 방문틈으로 창문은 보였다고 했어. 내 짐작에는 박형준은 그 창문을 통해 범인이 장대를 버리는 모습을, 그러니까 뒷모습을 보았던 것 같아.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지."


"그럼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는 건 누굽니까?" "난 이런 이야기를 조수들한테 모두 흘렸어. 범인은 의자 다리에 기름칠을 하는 수법으로 난승도사를 죽인 거라고." "예? 왜 그런 귀한 정보를....." 강 형사가 놀라서 말했다. "들어봐. 그리고 이런 말도 해주었지. 범인은 흔적이 남지 않을 거라 안심했겠지만 먼지가 않게 되면 기름칠이 된 바닥과 그냥 맨바닥은 표시가 나게 된다고 말야. 먼지가 곱게 앉은 뒤에 선풍기 따위를 돌려서 먼지를 날려보내면 기름기가 있는 곳에 앉았던 먼지는 날라가지 않는단 말야. 그러면 의자가 돌아간 자국이 분명하게 나오겠지." "그럴듯 하네요." 강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럴지는 잘 몰라. 기름이 적어서 먼지가 앉기 전에 모두 증발해 버리면 그런 흔적은 안 남을 거라고. 하지만 범인은 불안해서 틀림없이 그 기름자국을 지우러 올 거야. 우리는 그걸 기다리는 거야." 추 경감이 말을 마쳤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쉿! 입질이 왔다." 둘은 어둠의 일부가 된 것처럼 조용히 범인을 기다렸다.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방에 불이 켜질 때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꼼짝 말라고 외쳤다. 놀라서 두 손을 치켜든 사람은 최현덕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른 거지요?" 추 경감이 물었다. 현덕은 체념한 듯이 말했다. "저도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위대한 마술사가 자기에게 능력도 없는 초능력에 빠져서 마술을 모독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추 경감이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최면술을 배우러 이태호씨 집에 다녔지요?" "아니오. 내가 왜 최면술을 배웁니까?" "마술에 써먹고 싶어서였겠죠. 이 회장은 초능력을 위장했지만 당신은 마술에 보다 효과를 주기 위해서 최면술을 배우고자 한 것 같습니다. 최면에 걸린 인간은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극적인 효과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거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도대체 최면술이 마술에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현덕이 여전히 강하게 항변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어요." 강 형사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이 회장도 궁금했겠죠. 최면술이 마술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하고. 하지만 이미 예전에 난승도사는 최면술로 마술의 효과를 올린 적이 있었고 당신은 그 당시에 그걸 직접 쳐다보았고요. 예를 들자면, 이건 모두 당신이 한 이야기지만 다시 들어봐요. 예를 들자면 그 당시에 그런 마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사람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위험한 아니, 위험하게 보이는 마술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위험은 없었어도 인간이 겁을 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턱 최면을 걸어 놓으면 실제 불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요. 제가 그 말을 했습니다. 왜 평상시 할 수 없는 일들이 최면상태에서 가능할까? 그것은 최면이 인간의 잠재된 힘을 끌어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렇다면 남에게 조종되지 않고 스스로 그 힘을 조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인간이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종종 생각했어요." 현덕이 힘없이 말했다. "난승도사는 최면술을 실제 써본 적이 있는 만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에게는 안 가르쳐 주어서 당신이 이태호에게 배우러 다녔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해답은 일단은 김희수에게서 얻었습니다. 여자들이 난승도사와 김희수를 놓고 볼 때 난승도사를 선택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백이면 백이 다 그런다는 것은 더 이상하지요. 그 해답은 최면술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난승도사는 최면술로 여자를 꼬신 거지요. 그래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제자들에게는 최면술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태호는 최면술로 난승도사를 기만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예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소." 최현덕이 강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당신이 난승도사를 죽인 데에는 아무래도 이태호의 입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강 형사는 그걸 세뇌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그걸 최면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최면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암시를 줄 수 없어요. 더구나 나처럼 계획적인 범죄는 더더욱 말이오." "당신은 초능력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보였습니다. 그게 내 관심을 자극한 것인데, 첫째는 초능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경멸이고 또 하나는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이오. 경멸은 난승도사와 이지아를 향해 나타났고 존경은 이태호에게 나타났소.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당신은 이태호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도구였다는 것이오. 그 점은 이지아 씨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지아 씨는 초능력으로 사건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언제나 난승도사의 위험과 관계되는 일에는 안개처럼 뿌옇게 불분명한 느낌만 가졌다고 했지요. 그것은 당신의 살의가 어느 정도 최면에 의해 형성되어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 이용 도구로 써먹을려고 했다고?" 현덕의 말이 바르르 떨려 나왔다. "초능력연구회에서 이태호가 처한 곤경은 당신도 알고 있을 거요. 당신이 최면술을 배운답시고 그곳에 들락거릴 때 이 회장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던 게요. 나는 마술사의 조수였다. 그러나 초능력은 그 당시부터 갖고 있었다. 봐라, 초능력을 혐오하는 동료가 나의 초능력을 이렇게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말이오." 최현덕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내 자유의지로 스승님을 살해했어. 마술은 마술일 뿐이야. 난 마술과 스승님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해왔어! 그런데 초능력이라니! 마술로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초보같은 일을 하다니. 마술에 대한 모독이야! 난 얼마나 새로운 마술을 위해서 노력하자고 말을 했는지 몰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조소뿐이었지." 현덕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와서 나를 내쫓으려고 했으니 죽어 마땅한 일이었어." 추 경감이 눈짓을 하자 강 형사가 수갑을 꺼내 들었다. 14. 에필로그 "반장님, 초능력이 정말 가능한 것이고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도움이 될까요?" 강 형사가 책상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가는 느닷없이 추 경감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초능력이란 이미 모든 개발이 끝난 지구상에서 황무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오직 하나의 희망이니까." "반장님, 정말로 그렇게 생각 하신단 말씀이세요?" 강 형사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거짓으로 그럴까?" 추 경감이 코웃음을 쳤다. "한국초능력연구횐지는 어떻게 됐지요?" 강 형사가 추 경감의 말에 짚이는 곳이 있다는 듯이 물었다. "쓸데없는 일에만 오랜 시간을 끌어오고, 능력도 별 볼일 없다고 생각된 박성철 회장이 물러났지." "그럼 후임 회장은요?" "조용석이라는 비초능력자로 초능력연구가라고 하더군." "옛? 그러면 이지아 씨는요?" 강 형사가 의외라는 듯이 소리쳤다. "이지아 씨는 마술을 계속하기로 했어. 그게 더 좋다는구먼. 아, 그리고 마술협회 신임회장이 되었다는군." "예에?" "왜 그렇게 놀라나?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인데다 머리도 좋지, 게다가 리트로코그니션의 탁월한 초능력까지 갖고 있지 않냔 말야."


"어? 그런 말은 총각인 저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강 형사가 펄쩍 뛰었다. "미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남녀가 없고 노소가 없는 걸세." 추 경감이 주름투성이의 얼굴을 활짝 펴며 껄껄 웃었다. "웃기는 또 왜 갑자기 웃으십니까?" 강 형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물었다. 추 경감은 혼자 잠시 더 웃더니 헐떡이며 말했다. "자네가 행여 이지아 씨를 좋아라도 할까 봐 웃었네."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웃음거리가 됩니까?" 강 형사가 볼멘 목소리로 항의를 했다. "아, 물론 그럴 수도 있지. 대한민국은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니까. 하지만 자네가 이지아 씨의 손목이라도 잡았다가는 자네의 여성편력이 와르르 이지아 씨의 초능력에 의해 폭로될 게 아니겠어?" 추 경감의 말에 강 형사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미인이 왜 아직 변변한 남자 하날 못 꿰어차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후훗, 그래 그런 이유인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자, 받게나." 추 경감은 강 형사에게 사각봉투를 하나 던졌다. "이게 뭡니까?" 강 형사는 봉투 속의 물건을 얼른 꺼냈다. 편지지가 아니라 카드가 나왔다. 마술협회에서 보낸 회장 취임식의 통보를 알리는 극히 사무적인 편지였다. 카드를 살피던 강 형사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카드안에 이지아 본인이 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었다. 초능력이란 이미 모든 개발이 끝난 지구상에서 황무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오직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마술은 이 희망 위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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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코매 직 저자: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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