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지은이: 아마기 세이마루 타이핑: 이용한[msn : kotaroz16](http://www.kotaro.wo.to) 안내문: 저는 추리소설을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추리소설들을 찾 으며 인터넷등을 뒤져보면 아시겠지만 김전일은 구할수 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전일의 팬으로서 김전일 소설 1 ~ 7 권까지 전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다른 추리소설매니아분들께도 권유하고 싶지만 그냥 서 점가면 구할수 있는 책이 아닙니당(물론 있는서점도 몇군데있죠^^)그래서 여러분의 불편을 덜어드리며 김전일의 재미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 렇게 소설책의내용을 배껴서 올립니당. 수정한것 없이 그대로 올립니당. 간혹가다가 오타가 있어도 잼있게 읽어주세요^^이 책은 만화판 '소년탐정 김전일'을 읽으신 분이 읽으시면 재미가 2 배이상^^ 아! 그리고 제가 스캐너가 없어서 트릭의 그림과 소수의 그림을 올려드리지 못한점 양해바랍니다(--)(__)』 ※본 텍스트 화일은 수정,삭제, 재편집하지 않았을 시에만 배포가능합니다. 수정할수 있는 경우는 단 한가지! 제가 오타를 낸것!!^^ 즐겁게 감상하세여^^~~~~ 위에 있는 글 지우고 배포하믄 진짜 나쁜넘..ㅜㅡ

[소설]명탐정 김전일 1 권 'P'로부터의 살인 예고장


『사면이 유령의 오페라 참극의

바다뿐인 외딴 섬에서 노래가 울려 퍼질 때 극장은 다시 무대로 변한다.』

【아아 추하다. 말할 수 없이 추하다.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이 마음도. 나의 마은은 내 몸보다 먼저 지옥에 떨어질 게 틀림없다. 이제부터 사람을 죽이려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으니. 팬텀은 가만히 대본을 덮고 무대를 내려왔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이 손으로 목졸라 죽이는 것뿐이다….】

차 례

CONTENTS

프롤로그...........................................7 제 1 막.........오페라 극장 호텔에서의 초대장.......11 제 2 막.........카를롯타는 극장에서…...............45 제 3 막.........밀실 극장...........................71 제 4 막.........방황하는 팬텀......................125 제 5 막.........필립 백작은 호수에서...............161 제 6 막.........조셉 뷰케는 목 매달려…............195 제 7 막.........진상...............................227 에필로그.........................................269 후기.............................................277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 단서는 모두 주어진다. 명탐정 김전일이 찾아내는 「진상」에


독자 여러분도 더듬어 당도하리라고 기대한다. 범인은 누구일까? 왜 범인은 『오페라의 유령』의 스토리에 비겨 범행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탐정 김전일이 잡은 실마리라는 것은…?

주요등장인물 탐정 김전일과 친구 미유끼 겐모치 - 경찰청 경감 구로사와 - '오페라 극장 호텔'의 주인 미카 - 구로사와의 딸 노죠 - 극단원 세이꼬 - 노죠의 아내 리오 - 극단원 아쯔시 - 극단원 유키오 - 극단원 에구치 - 아르바이트 학생 마쿠베 - 화가 에이사쿠 - 의사

'프롤로그' 『사내의 뺨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아침 안개가 낀 섬의 끝을 보았다. 정 확히는 섬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돌로 된 무덤을 지켜보았다. 창으로 바라보이는 바다는 평온했다. 파도 사이를 꾸물꾸물 기어가는 안개 때문에 그렇게 보 이는 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인간도 시간도 그렇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임으로써 미움이나 노여움을 은밀하게 덮어 감추려는 것은 아닐까 문득 바람에 안개가 날려, 돌무덤이 가까이 당겨진 것처 럼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돌무덤의 묘비가 보였다. 뺨에 상처가 나있는 그 사내의 외동딸의 것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묘비를 내려다보며 사 내는 오른손 가락으로 뺨의 상처를 더듬었다. 상처는 왼쪽 눈꼬리부터 콧망울 옆까지 이어졌다. 눈에 확 띄는 상처였다. 예순 조금 전으로 보이는 사내의 눈동자에는 뛰어난 지 성의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약간 잔주름이 진, 햇빛에 그을린 뺨에 난 빨간 지렁이 같은 흉터는 조금 도 어울리지 않았다. 치료만 적절했다면 이렇게까지 흉터가 남지는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꿰매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마치 그 상처가 자기 스스로 져야만 하는 후회의 십자가인 것 처럼. 바람이 불어 창이 삐걱거렸다. 낡은 창문짝 사이로 비릿 한 아침 안개가 흘러들어왔다. 사내의 이름은 구로사와. 이 낡은 '오페라 극장 호텔'의 주인이었다.』

제 1 막 -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의 초대장' 1『 "김전일! 일어낫!" 김전일의 왼쪽 귀에 대고 어머니가 쇳소리가 날아들어 오 른쪽 귀를 뚫고 나왔다. "우와 앗?!" 튀어 오르듯 일어난 김전일의 얼굴로 갈아입을 셔츠와 바 지가 날아들었다. "언제까니 잘 거냐, 미유끼는 벌써 와 있어." "네, 왜? 여름방학 끝? 벌써 학교?" 김전일은 잠이 덜 깬 눈으로, 잠옷 대신 입고 있던 T 셔 츠를 허둥지둥 벗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바닥에 굴러다 니는 청바지를 주워 던졌다. "참 녀석 하곤!" 바지가 어제 벗었던 그대로여서 늘 끼워 놓은 벨트 버클 에 김전일의 이마가 정통으로 맞았다. "또 잠이 덜 깬 거냐? 오늘부터 여행한다고 했잖아. 뭐야 그 '오페라 극장 호텔' 이라나 하는 호텔에 초대받았잖 아." "어, 어머니 지금 몇 시?!" "8 시야." "말도 안돼. 왜 깨우지 않았어요!" "알았으니까 빨랑 옷 갈아입고 밑으로 내려가거라. 미유 끼는 벌써 와 있다. 짐은 적당히 챙겨 줄 테니까 빵이라도 먹어." "알았어 알았어요. 바지 갈아입을 거니까 잠깐 나가 줘요. 어머니." "그래." 미유끼는 현관에서 시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층에서는 뭐 하는 건지 화내는 소리와 비명, 발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좀더 빨리 왔어야 했어." 미유끼는 중얼거리며 현관에 달린 거울을 보았다. 오늘 여행을 위해 산, 좀 어른스런 주름 장식이 달린 흰 블라우스. '오페라 극장 호텔' 의 식사는 양식이라며 어머 니를 졸라 낮은 굽의 흰 구두까지 샀다. 그리고 꽃모늬 미


미스커트만 해도 여름철에 잘 어울리면서도 귀엽다고 옆집 언니가 칭찬해 주었던 것이다. "이런 날은 너무 화내지 말아야지." 스스로 다짐하며 미유끼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미소 지었다. 이윽고 이층에서는 변함없이 쿠당쿠당 발소리가 나는 가 운데 김전일의 어머니가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미안해, 미유끼. 어머, 그런 곳에 서 있지 말고 올라와요. 얘는 지금 화장실에 있으니까. 차 마시지?" "아니요, 괜찮아요. 금방 나가야 하니까…." 그 때, 나이키의 보스턴 백을 안은 김전일이 계단을 내려 오며 미유끼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머니가 한 그대로 계면 쩍게 웃고 있다. "너, 빵은?" 어머니가 물었다. "아, 먹으면서 갈 거예요. 잠깐 기다려. 자, 가자. 미유끼." 김전일은 그렇게 대답하고 폼을 잡아가며 보스턴 백을 등 에 맸다. "아무래도 좋지만, 김전일." 미유끼가 고개를 돌리며 김전일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ㅡ그거, 채워." "응?" 김전일은 고개를 숙이고 다리 사이를 보았다. 지퍼가 보기 좋게 열려 있었다. 정리가 덜 된 물건이 틈 새로 살짝… "으앗, 이런 이런. 하하하하하." 속 보이는 웃음 소리를 내며 기세 좋게 지퍼를 올렸다. 직…. "ㅡ!" 소리도 내지 못하고 김전일은 백을 떨구었다.』 2『덜컹덜컹 미덥지 못한 소리를 내며 김전일과 미유끼를 태 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이즈(일본의 지명, 태평양을 향한 반도 형태의 지형을 하 고 있다. : 역자 주)의 동남단. 인적도 드문 쓸쓸한 시골 역 이었다. 낡은 열차의 녹슨 문이 열렸다. 8 월 말의 후끈한 열기가 흘러들어왔다. 열차와 승강장의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 김전일은 건 너뛰는 것처럼 한 발을 디뎠다. 농구화 바닥이 떨어져 나 간 콘크리트의 조각을 밟아 바작하고 마른 소리를 냈다. 역 이름을 알리는 방송이 발차 벨 소리와 거의 동시에 흘 러 나왔다.


"뭐 하는 거야, 미유끼. 빨리 내려. 전차 가 버린다구." 멍청한 얼굴로 돌아보며 김전일이 말했다. 개찰구를 향해 척척 걸어가는 김전일의 뒤를 쫓아 미유 끼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열차를 내렸다. "너, 아직도 오늘 아침 일로 화내는 거야?" 옆으로 오려고도 하지 않는 미유끼를 김전일은 귀찮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별로." 뚱하게 눈을 돌리며 미유끼가 대꾸했다. "할 수 없었잖아. 나라고 보이고 싶어 보인 건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럼 뭐야." 미유끼는 걸음을 빨리 해서 앞에 가는 김전일의 옆으로 와서 얼굴을 쏘아보았다. "김전일, 정말 옷은 그것밖에 안 가져 온 거야?" "으응." "믿을 수 없어." "할 수 없었잖아. 서두르느라고. 갈아입을 바지는 있으니 괜찮아." "4 박 5 일이나 되잖아 더구나 오늘밤은 멋진 코스 요리를 먹어야 하는데 청바지뿐이라니…." "바보, 폼 잡아도 소용없어. 더구나 할아버지도 어딜 가 든 같은 차림이었다구." "시대가 다르잖아, 멍청아." 김전일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긴다이치 코우스케로 유명한 대 탐정이다. 즉 김전일은 천재라고 불리던 명탐정의 손자인 것이다.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던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김전일도 고등학교 2 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경찰청에까지 이름을 떨 칠 정도로 놀라운 추리력을 발휘, 몇 개의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냈다. 김전일과 미유끼가 이렇게 '오페라 극장 호텔' 이라는 이 름의 호텔에 초대받은 것도 실은 전에 그 호텔에서 일어 났던 괴사건 때문이었다. 신문 지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 무서운 연속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낸 소년이 다름 아닌 김전일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낡은 극장은 그 후 헐려 새로운 극장을 짓고 있었다. 이 극장의 완성을 공연이라는 형태로 조용히 축하하려는 기획이 있어. 그 첫손님으로 김전일 일행이 초대되었다. "그래도 미유끼, 너네 부모 말야 이해심이 넓은걸." "뭐?" 미유끼는 김전일의 든 것 없이 큰 보스턴 백을 땅바닥에 놓고 핸드백을 찾으며 물었다.


"괜찮으냔 말야. 고등학생인 딸의 남자와 단둘이만 여행 을 보내다니." "남자라니? 김전일 너 말야?" "달리 여기 누가 있으냐구." "후훗….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미유끼가 웃었다. "ㅡ그런 거 새삼스러운 게 아니잖아. 유치원 때부터 사귀 었으니까. 우리 부모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김전일이라 면." "그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김전일은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혹 미유끼도 부모한테는 "연극부원 모두가 같이 가는 거 야" 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고 나온 건 아닐까라고 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전일은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져, 집에 서 나오면서 청바지 뒷주머니에 황급히 찔러 넣었던 '고 무 제품' 이 터무니없이 민감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그 동그란 형태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을까, 걷 는 도중에 저 특징 있는 톱니 모양으로 된 포장 가장자리 가 얼굴을 내밀지 않을까…. 역전에 서서 마중 나올 차를 기다리면서도 안절부절 엉 덩이를 만졌다가, 몸의 방향을 바꿨다가…. "아아, 점점 더 버리고 싶다. 그래도 만에 하나 필요하게 되면…." 혼자 그런 고민을 계속하는데 눈앞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 렸다. "어이, 오래 기다렸냐?" 시즈오카 현 경찰이라고 쓰인 경찰차의 운전석 옆자리의 창문이 열리더니 수염이 멋대로 자란 투박한 중년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렇다. 이 아저씨가 함께였다. 잘 생각해 보니 둘만은 아 니었던 것이다. "뭐예요. 겐모치 아저씨." 김전일은 오히려 기분이 느긋해졌다. "아, 미안 미안. 저번 그 사건 때 신세를 졌던 시즈오카 현 경찰에 인사나 하려고 들렀는데 점심까지 얻어먹게 됐 거든." 겐모치 경감은 와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었다. 이 경찰청의 겐모치 경감과 김전일은 '오페라 극장 호텔' 에서 일어났던 연속 살인 사건 때부터 알게 된 친구 사이 였다. 외딴섬의 호텔에서 발생했던 전대미문의 괴사건을 단신으로 해결했다 해서 겐모치는 경찰청장상을 손에 넣었 다고 한다. 그렇다곤 해도 실제로 해결한 것은 김전일이었으므로 천


하의 경찰청 수사 1 과ㅡ살인과의 벼락 출세 경감은 그로 부터 김전일에게 머리를 들 수 없었다. 그 겐모치 경감도 이번에 초대장을 받았던 것이다. "자, 타 타라구. ㅡ어이, 이봐 이번엔 항구까지 가 줘." 운전사인 정복 경찰관에게 그렇게 말하고 겐모치는 털썩 시트에 등을 맡겼다. 거의 경찰 차를 택시 취급하고 있었 다. 겐모치의 완고한 것 같은 표정에 숨겨진 붙임성을 알고 있는 김전일은 그 잘난 척하는 태도가 이상했지만 경찰청 수사 1 과의 경감이라면 경찰 조직의 제일선 중의 제일선, 이런 시골의 정복 경관에게는 까마득히 높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김전일을 이 경관은 어 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필경 경찰청장의 아드님이라도 되 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3『15 분 정도 시골길을 달리자 작은 고기잡이 항구가 보이 기 시작했다. 약간 때가 탄 어선들 사이로 유달리 눈에 띄는 새하얀 순 항 요트가 정박하고 있었다. 선체에 '팬텀호' 라고 씌어 있 는 이 15 인승의 고속정이 '오페라 극장 호텔'이 있는 작 은 외딴섬의 우따시마를 오가는 유일한 교통 수단인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오페라 극장 호텔'의 주인 아저씨, 구로사와가 변함없이 온화한 미소로 김전일 일행을 맞았다. 구로사와의 왼쪽 뺨에는 눈에 띄는 커다란 흉터가 있어 그의 부드러운 용모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 상처 말입니까? 하하하, 무서워하는 손님도 가끔 계 십니다만. 뭐 야쿠자 출신 같은 건 아니니까 안심하십시 오." 물어보기도 전에 구로사와는 그렇게 웃어 넘겼다. 그런 대범한 구로사와가 김전일은 좋았다. 또 만나 보고 싶다. 내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 므로 구로사와부터 초대장을 받았을 때는 정말 기뻤다. 전에 함께 이 호텔을 찾았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살인 사 건에 휘말렸던 장소 따윈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쌀 쌀맞게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김전일과 미유끼 두 사람만 참석하게 되었다. 순항 요트에는 김전일 일행과 구로사와 이외에 두 사람 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김전일 일행의 반대편 좌 석에서 무언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쿡쿡 하고 목구멍 속으로 웃었다. 소란스런 엔진 소리 때문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들


리진 않지만 시선과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미유끼를 보 고 멋대로 평가를 하는 것 같다. 한 사람은 어깨까지 오는 장발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로, 스물을 넘긴 것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키가 작았고 얼굴색 이 건강하게 보이질 않았다. 검붉은 얼굴에 요란한 오렌지 색 폴로 셔츠를 걸친 게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좋지 않은 안색이 두르러져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 끝을 비뚤어지게 올리며 알랑거리는 듯 웃는 모양이 그 남자의 비굴하고 소심한 성질을 단적 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흰 피부에 좀 살찐 듯한 사내였다. 살이 빠지면 얼굴은 그런 대로 잘 생겼다 할 가지런한 이목구 비였지만 아랫배와 턱의 지방이 그것을 망쳐 놓았다. 장발의 사내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을 것 같다. 힐끔 힐끔 주위를 살피는 모양이 신경질적일 것 같아 보였다. "나, 저기 좀 살찐 사람 본 적 있어." 미유끼가 김전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누군데." "아마 '환상' 이라는 유명한 극단의 배우일 거야. 나 한번 공연을 보러 간 적 있어." "헤, 과연 연극부답다. 잘 아는데." "김전일도 연극부잖아. 일단은." "나? 나는 가끔 도와 줄 뿐이야. 부에 들어간 기억은 없 는 걸." "또…." "어이, 너희들 연극에 흥미 있나?" 뜻밖에 살찐 사내가 미유끼를 향해 말을 걸어 왔다. "ㅡ고등학생? 아, 혹시 구로사와 선생님이 말한 명탐정인 가." 김전일을 물끄러미 보며 히쭉 웃는다. 웃자 가지런하고 깨끗한 어금니가 보였다. 그것이 묘하게 천박한 인상을 주었다. "하, 이거 참…. 그런데 누구죠?" 그 사내의 강요하는 듯한 기세에 김전일도 미유끼도 자 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내 옛날 제자입니다. 김전일 군." 조타실에서 얼굴을 내밀며 구로사와가 말했다. "제자? 주 인 양반, 학교 선생님이라도 하셨어요?" 겐모치 경감이 묻자 구로사와는 흰 이를 보이며 말했다. "하하하. 그런 게 아닙니다. 4 년쯤 전에 어는 극단에서 연 출츨 맡고 있었죠. 저 두 사람이 그때 받아 준 연습생입니 다. 각각 지금은 훌륭한 배우로서 활약하고 있지만 제가 무 리하게 부탁을 해 이번 연극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실은 벌 써 3 일 전부터 연습에 들어갔죠. 잠깐 마을까지 물건을 사


러 갔다 돌아오는 겁니다." "예엣. 그럼 주인 아저씨가 설마 극단 '환상'의 구로사와? 그 유명한?" 미유끼가 얼이 빠진 듯 물었다. "뭐 그렇게 유명한 것도 아닙니다만." "와ㅡ 주인 아저씨가 그렇게 유명했단 말입니까?" 김전일이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장발의 사내가 몸을 내 밀며 말했다. "이봐 이봐, 너 실례잖아. '환상'의 구로사와 선생이라면 예전에는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던 연출가 야. 현대 연극을 개혁하고 비즈니스로 성공시킨 막후의 최 고 배우라고도 한다고. 근 연출의 폭넓음과 변화의 풍부함은 아직도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연출가란 말이다. 특히 '오페라의 유령'만 해도 8 종류나 되는 연출을 시도해 그 전부를 대성공으로 마치셨으니까. 알어? 너희들.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김전일과 미유끼는 서로 마주 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김전일도 미유끼도 물론 그 가극은 알고 있었다. 평생 잊 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지금 가는 '오페라 극장 호텔' 에서 일어났던 그 참혹한 사건의 '테마'같은 것이었으므 로. "ㅡ모른단 말야? 정말이지 요즘 녀석들은. 가스통 루루의 명작 스릴러 소설이야. 파리의 한 극장인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살던 괴인 팬 텀이 아름다운 오페라 가수인 크리스틴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차례로 살인을 범한다는, 뭐 단순 히 말하면 단순한 스토리지만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시도 되고 있어. 런던을 비롯해 뉴욕의 브로드웨이 등 전세계에 서 무대극이나 뮤지컬의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단 말야. 구로사와 선생님의 '오페라의 유령'은 당시 브로드웨이 의 연출가가 일부러 관람하러 올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 았어. 우리 제 12 기 구로사와 문하생은 이번에야말로 기념 할 만한 9 번재를ㅡ." "알았어. 시끄러, 유키오. 너는 말이 많아, 멍청하긴." 살찐 사내가 엄한 목소리로 오렌지색 셔츠의 유키오라는 사내를 막았다. 유키오는 주눅 든 모습으로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 인석은 말만 잘 하는 녀석이거든. 아, 이녀석은 유키오, 나는 아쯔시라고 해. 그쪽 여자애는 알아보는 것 같지만서도, 아무튼 '환상' 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하고 있 어.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쯔시는 아연해져 있는 김전일과 미유끼에게 일방적으로 지껄였다.


"아, 우리들이야말로 잘 부탁…. 난 김전일, 얘는 미유끼 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김전일이 말했다. 반응은 없었다. 이미 아쯔시도 유키오도 소곤소곤 서로 속 삭이며 또 목구멍 속으로 웃고 있었다. "이봐, 미유끼." 김전일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미유끼에게 귀엣말을 했 다. "ㅡ너, 아무래도 연극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갑자기 배의 속도가 떨어졌다. 엔진소리가 작아지는 대신 거친 파도 소리가 귓청을 때 렸다. "거의 다 왔어요. 여러분." 구로사와가 방향타를 좌우로 조정하면서 말했다. 어느 새 눈 앞에는 높은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꼭대기에 빛 나는 순백색과 나뭇잎이 연상될 정도인 연두색으로 벽을 나누어 칠한 커다란 호텔이 솟아 있었다. "봐, 김전일."』 4『'오페라 극장 호텔'이 있는 우타시마는 미나미이즈 근해 에 떠 있는 둘레 1 킬로미터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섬 대 부분이 잔디로 덮여 있고 드문 드문 나무가 있을 뿐인 사 면이 바다뿐인 외딴 섬이었다. 근대에 들어 어느 재력가가 별장을 세우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무인도였던 것이다. 그 후 이 별장은 몇 번인가 주인이 바뀌었는 데 마지막 주인이 죽고 난 후엔 황폐하게 방치되어 있던 것을 10 년 전에 현재의 주인인 구로사와가 섬 채로 사 들였던 것이 다. 낡을 대로 낡은 서양식 건물을 6 년에 걸쳐 조금씩 개축 해 4 년 전에 호텔을 열었다. '오페라 극장 호텔'의 주변은 세심하게 손질한 서양풍 정 원으로 둘러 싸여 마치 유럽 귀족의 저택처럼 우아했다. 건 물 외관은 죠지안 스타일이라는 장엄한 건축 양식으로 현 관 양측에 배치된 장식 기둥이 그 특징이었다. 외벽은 신 록을 나타내는 연두색과 흰색으로 아름답게 칠해져 있었 다. "멋져, 역시." 눈 앞에 솟아 있는 '오페라 극장 호텔'을 보며 미유끼가 감탄스레 말했다. "그렇군." 겐모치 경감이 맞장구를 쳤다. 그에게는 남다른 느낌이 다 시 찾은 것이다. 어쨌든 김전일 일행 3 명은 그 '참극의 호텔'을 이렇게 다


시 찾은 것이다. 순항 요트에 함께 탄 극단원 두 사람은 배에서 내리자마 자 손을 흔들고는 어딘 가로 사라졌다. "그럼 자, 당장 새로운 극장으로 안내하죠." 구로사와가 그렇게 말하고 현관의 하얀 두 문짝을 열었 을 때, 스무 살을 넘겼음직한 앞치마 차림의 남자가 막 나 오려 하고 있었다. "아, 주인 아저씨." 그는 말했다. "그래 왜? 에구치 군."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노죠 씨 일행을 부르러 갈 까 하고…." "노죠 군이라면 아마 아직 극장에 있을 거야. 내가 곧 불 러오지. 자넨 나머지 두 사람을 찾아 와 주겠나? 방금 전 까지 함께 있었는데…." "예." 에구치는 앞치마를 두른 채 밖으로 나갔다. "방금 그 사람도 배우인가요?" 미유끼가 구로사외에게 물었다. "아니, 그는 에구치 군이라고 W 대학 학생이에요. 여름방 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와 줍니다. 일을 잘해 큰 도움이 되죠.ㅡ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호텔 안쪽은 복도 한쪽에 붉은 카펫을 깔았고 커튼도 서 양식 창문에 잘 어울리게 화려하고 옅은 핑크빛의 꼿무늬 로 통일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곳에서 무서운 살인극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연 상시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극장의 본관은 현관에 들어서서 가운데에 정원을 사이에 둔 양편 복도의 오른쪽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 끝 무렵 에 또 다른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극장 입구의 문은 문짝만 완성되어 아직 변변한 자물쇠 도 없었다. 사물함 같은 데 쓰이는 자물통이 문의 금속 장 식에 대롱대롱 달려 있을 뿐이었다. "뭐 극장이라고 해도 그렇게 비싼 물건이 있는 게 아니 니까 이런 자물통만으로 충분하지만, 볼품이 없어서 가까 운 시일 내에 제대로 된 자물쇠를 달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자물통마저도 아직까지 채워 본 일이 없어요. 하하하 자,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구로사와의 재촉에, 김전일 일행은 극장 앞으로 발을 내 디뎠다. "오ㅡ 가련한 에릭. 당신을 위해 노래라도 부르게 해 주 세요!" 꽤 알려진 여자의 목소리가 객석으로 울려 왔다. 무대 위에 의자가 5 개 반원형으로 놓여 있고 그중 3 개에


두 사람의 여자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머! 저 한가운데 남자, 노죠 아냐." 미유끼가 배우보다 크게 소리를 질렀다. "ㅡ게다가 머리 짧은 여자는 리오잖아 나머지 한 사람은 노죠의 부인으로 아마 세이꼬지?" "어, 저 사람들 그렇게 유명해?" 김전일은 물었다. "물론이야. 믿어지지 않아, 전부 극단 '환상'의 절ㅁ은 스 타들 천지야!" 미유끼가 "어머ㅡ."를 연발하며 떠들어대자 무대 위에 배 우들은 연습을 멈추고 일어섰다. "바보, 미유기 네가 떠들어서야. 미안합니다. 얘는 푼수라 서." 김전일이 그렇게 말하고 미유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하하하. 괜찮습니다. 마침 점심 시간이기도 해서 마치 려고 하던 참이니까요." 여자 둘 사이에 앉아 있던 노죠가 상쾌한 웃음을 띠며 말 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 웃는 얼굴을 보고 김전일은 깜 짝 놀랐다. 옆에서는 미유끼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인 김전일이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노죠의 용모는 아 름다웠다. 장신의 강인한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가지런한 이목구비. 햇빛에 그을린 피부.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조금 나르시스틱한 몸짓까지, 아무리 보아도 잘 생겼다고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지금 씬 조금 더 해 보고 싶었는데." 앳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리오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 다. 손발이 길어서 잠깐 동안 보여주는 움직임도 우아하게 비 친다. 말랐으면서도 볼륨이 나올 곳은 나와 있다. 완벽한 몸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데다 화려함이 빛처럼 전신에 넘쳐흘러, 얼굴은 눈에 띌 만큼 아름답지 않은데도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있다. 그러고 보면 새침하게 옆에 있는 세이꼬와는 대조적이ㄷ.ㅏ 그녀는 확실히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어딘지 사람을 업신 여기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괜찮잖아요? 3 시부터 다시 연습이니까. 그보다 저 배가 고파졌어요." 세이꼬가 말했다. "그래도…. 세이꼬 양은 완벽하니까 괜찮겠지만 저는ㅡ." 리오가 말했다.


"뭐예요, 그게. 싫어?" 세이꼬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말해 두겠는데 리오 양. 당신 같은 건 내가 아빠에게 말 하면 간단히 모가지야. 인기가 좀 올랐다고 까불지 말아 요." "특별히 그런 건…. 그저 모처럼 구로사와 선생님이 연출 해 주시는 것이어서 아주 좋은 연기를 하고 싶어서예요. 크 리스틴은 대사도 많고ㅡ." "그건, 무슨 뜻이예요. 어차피 당신이 주역이고 난 악역 이란 말이지. 구로사와 선생님에게 팔리고 있다고 우쭐대 지 말아요. 정말이지 왜 내가 카를롯타고 당신이 크리스틴 인 거야. 이런 곳 오지 말 걸 그랬어!" 세이꼬는 대본을 바닥에 동댕이쳐 버렸다. "그만 해 둬, 세이꼬. 손님들 계시잖아." 노죠가 눈썹을 꿈틀하며 타이른다. "어머, 또 리오 양 편드네. 역시 당신은ㅡ." 짝짝, 하고 누군가 손바닥을 쳤다. "좋ㅡ아. 자, 모두들 휴식." 구로사와였다. "ㅡ식당에 점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네들은 먼저 가 기다려 줘. 우리들도 곧 갈 테니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세 사람의 배우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무대를 내려 와 구 로사와를 향해 가볍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극장을 나가 버 렸다. "대단해. 모두들. 프로 배우라는 건 분위기가 달라…." 미유끼는 뺨에 홍조를 띠었다. "ㅡ엄하다고 할까, 서로 의식하고 있다고나 할까…." "음. 나는 그저 사랑 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김전일의 반박에 구로사와가 멋쩍에 웃으며 얼버무렸다. "하하…. 뭐 그들은 동기생이니까. 라이벌 의식이 강하겠 죠." "동기생요? 하지만 같은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김전일이 끼어든다. 사소한 것이라도 의문을 갖고 금세 머 리를 들이민다. 그것이 김전일의 성격이다. "리오는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일 겁니다. 4 년 전 내 제자 였을 때는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이었으니. 세이꼬는 스물 다섯 살, 제일 연장자인 노죠 군은 이젠 스물일곱일 거고 배우로서 공부를 시작하는 데 연령은 관계없는 것이니까 요.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공부와는 다르니 말입니다. 40 세 의 신인도 있죠." "와ㅡ…." "그럼 이제 극장을 간단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5『새로운 극장은 50 석 정도의 소극장으로 길이는 20 미터, 무 대와의 간격은 6, 7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보다 한층 좁았다. 극장이므로 물론 창문은 없다. 출입구는 방금 들어 온 객 석의 뒤쪽, 즉 무대 정면에 있는 것과 무대를 향해 오른쪽 에 나있어 기계나 도구들을 들이고 내는 데 쓰이는 뒷만, 이 둘밖에는 없었다. 튼튼해 보이는 뒷만은 양쪽으로 여는 문으로 단단히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어머, 독특하네." 객석 양측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보고 미유끼가 말했다. "ㅡ극장에 그림 장식이라니. 그래도 왠지 멋져요." "저 그림은 아까의 제자들이 새 극장에 걸어 달라고 준 것입니다." 구로사와는 무대 왼쪽에 장식된 훌륭한 색감의 커다란 현 대화풍 유화를 가리켰다. "ㅡ그래도 나쁘지 않죠? 극장에 그림을 장식한 거. 불을 켰을 때의 극장이라는 것은, 창문도 하나 없어 아무래도 살 풍경하니 말입니다." "그럼 저 반대편의 여자애 그림은요?" 김전일이 물었다. 그것은 머리가 짧은 소녀의 그림이었다. 어둠침침한 극장 속에서도 그 피부가 하얀 것이 눈에 띄 었다. 소년처럼 머리를 짧게 깎았지만, 그래도 한눈에 소녀 임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어깨, 우아한 목, 핑크빛의 평 상복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살짝 부푼 가슴. 아마 14, 15 세의 소녀일 것이다. "…아, 저거 말입니까. 이곳 단골 손님 중에 예전부터 사 쉬건 어떤 화가가 있어서 말이죠. 마쿠베라고 합니다만. 저 그림은 그가 그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도 자신의 그림으로 이 극장을 장식해 달라는 부 탁을 받아서. 뭐 오른쪽의 그림과는 별로 화풍이 맞진 않 겠지만ㅡ." "네ㅡ 그렇지만 아름다운 그림이군요. 모델은 누구죠?" 김전일이 묻자 구로사와는 일순 표정이 어두워졌다. "죽은 내 딸입니다." 이런, 하고 김전일은 생각했다. "정말 여전히 무신경한 녀석이야. 넌 말야!" 겐모치 경감이 옆구리를 찌른다. "아저씨나 잘 하세요." "하하하, 신경쓰지 마십시오." 구로사와가 말을 이었다. "ㅡ 4 년도 더 된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곤 웃는 얼굴로 극장의 입구를 향해 걷기 시 작했다. "자, 다음은 설비 쪽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다지 돈을 들이지 않아 극장 자체는 조금 작아져 버렸지만 그래도 시 설은 상당한 것입니다. 예컨대 이걸 보십시요." 구로사와는 그렇게 말하고 입구 옆의 벽에 달린 스위치 를 조작했다. 극장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위쪽에서 커 다란 빛이 어렴풋하게 켜졌다. "와아." "대단해!" 김전일도 미유끼도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거대한 샹들리에였다. 조명 자체의 밝기는 약했지만 무수한 유리알과 거울 장 식이 스스로 빛을 반사하며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지름이 20 미터 가까이나 되는 훌륭한 샹들리에였다. "뭐 원래는 허물은 낡은 극장의 객석 천장에 있던 것입 니다만 제가 거기에 손을 좀 봤죠. 너저분하게 장식 구슬 이랑 미러 볼 따위를 붙여 저런 모양이 된 겁니다." "헤ㅡ 그래도. 왜 다시 그렇게까지 해서 무대 위에 샹들 리에 같은 걸 올렸죠?" 김전일이 버릇없이 물었다. 구로사와는 대답했다. "저의 무대에서 샹들리에는 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무슨 의미인지 그 때의 김전일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라운지에서 차라도 마시지요." 구로사와가 샹들리에를 끄고 극장의 전등을 켰다. "아, 주인 아저씨. 또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미유기가 말했다. "좋아요." "이 극장 무대 안 길이가 너무 길지 않나요? 분명히 전 의 극장은 좀더 평범한 모양이었다고 기억하는데…." 확실히 이 무대는 가로 넓이에 비해 안 길이가 깊었다. 거 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무대 안쪽과 양편은 숲의 풍경을 담은 그림막이 둘러쳐 져 있다. 객석에서 보면 무대 위는 흡사 숲속 같다. "과면 미유끼 양. 연극부원 만의 무언가가 있군요." "아 아니에요. 그런…." 미유끼는 불이 달아 올라 뺨에 손을 갖다댔다. 예전부터 의 버릇이다. "무엇보다 인력도 예산도 없었던 거죠. 대도구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마무리하기 위해, 배경을 담은 그림막을 몇 겹이고 겹칠 수 있도록 무대의 안 길이를 깊이 잡은 겁니 다."


구로사와는 입구 옆의 '조작실'이라고 쓰인 작은 방에 김 전일 일행 세 사람을 불러들이고는 무슨 기계를 만지기 시 작했다. "무대를 봐 주십시요." 구로사와가 말하자 무대의 삼면을 에워싼 숲속 풍경의 그 림 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다른 그림 막이 나타났다. "벽돌인가…?" 숲의 막이 다 올라가자 무대는 적갈색의 벽돌에 둘서싸 였다. 거기에 무대의 정면 즉, 막이 내려지는 무대와 객석 과의 사이에 성긴 그물 같은 것이 드리워져 왔다. "뭔가요, 저건?" 김전일이 묻자 내내 조용히 있던 겐모치 경감이 끼어들 었다. "저건 고기를 잡는 그물이잖아. 저 크기하면 아마 후리 그 물일 거야." "뭐예요 아저씨, 후리 그물이란 게." "도대체, 요즘 녀석들은. 그런 것도 모르냐. 이렇게 해변 모래사장에서 끙차 끙차 잡아당기는 그물이야. 학교에서 배웠을 텐데." 겐모치 경감은 특유의 몸짓을 섞어 설명했다. "그렇죠 그렇죠. 그 그물입니다. 낡은 것을 고기잡이 항 구에서 싼값에 잘라 받은 것입니다. 바깥 세상과 지하의 미 궁을 나누는 철장을 나타내도록." "이게 철창? 좀 무리가 아닌가요?" 김전일이 버릇 없이 말하자 구로사와는 의미 있는 미소 를 지었다. "자, 지켜 봐 주십시오." 구로사와는 다시 기계를 조작했다. 그러자 어둠침침한 극장의 전등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여 러 가지 색깔의 빛을 냈다. "와, 멋지다!" 김전일 일행은 자기들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객석과 무대를 나누는 망이 청백의 빛을 내며 무거운 철 창으로 변해 배경인 벽돌 문양이 말 그대로 차가운 지하 미궁 같이 보였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괜찮은 물건이죠? 저 그물에는 형돠ㅇ 도료 가 발라져 있죠. 거기에 '블랙 라이트'라는 특수한 라이트 를 비추는 것입니다. 컴컴한 곳에서 빛나는 해골이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내는 데도 같은 것이 쓰이죠.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이 장면에서 진짜 철창이 내려오지만 그런 예산은 없으니 후리 그물로 대용하는 겁 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나죠? '유령'의 소굴이라는 분위기 가."


"유령?" 김전일이 묻자 구로사와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그래요. '오페라의 유령' 말입니다." "네? 그럼 이번 연극이라는 게 '오페라의 유령'인가요?" '또'라는 기분으로 김전일이 물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나에게 '오페라의 유령'은 특별한 것 이니까요. 그렇죠, 필생의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 커다란 샹들리에도 이 새로운 극장에서 '오페라의 유령' 을 상연하기 위해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장치는 겁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 지하에 사는 추악한 괴인 팬텀이 아름다운 가수 크리스틴에게 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배 역을 주기 위해 오페라 스타인 카를롯타의 머리 위에 샹 들리에를 떨어뜨려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팬 텀의 비극적은 사랑은 그렇게 해서 무서운 비극을 엮어 나 가죠." 구로사와는 뺨에 홍조를 띠었다. 뺨의 상처가 붉게 도르라지는 것을 곁눈느오 보며 김전 일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전에 이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겐모치 경감 으로부터, 구로사와의 딸은 원래 연극 배우였는데 '오페라 의 유령' 상연 중에 실종되어 이 '오페라 극장 호텔' 무 대 위에서 자살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전의 그 살인 사건은 '오페라의 유령'의 스토 리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오페라의 유령'에 연연하 는 구로사와의 정신 상태가 김전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 다. '비정상'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기대됩니다. 정말 기대돼요." 구로사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조명 스위치를 내려 괴인 의 소굴을 다시 어둠 속으로 묻어 버렸다.』 6『아아, 말할 수 없이 추한 얼굴이다. 이 썩은 듯한 살갗이 밉다. 이 해골 같은 눈도 코도 모 든 것이 원망스럽다 아아 나의 이름은 팬텀. 지옥의 불꽃에 몸을 태우면서, 그래도 천사를 동경한다.

팬텀은 '오페라의 유령'의 대본을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 로 읽어 나가며 침침한 무대에 서 있었다. 자신의 추함에 번민하면서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 는 '유령'의 기분을 팬텀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 대로 지금 자신의 기분이기 때문이다.


아아 추하다. 말할 수 없이 추하다. 얼굴뿐만 아니라 이 마음도. 나의 마음은 필시 내 몸보다 먼저 지옥에 떨어질 게 틀 림없다. 이제부터 사람을 죽이려 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도 느껴 지지 않으니까. 그러나ㅡ 그래도 나는 믿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천사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임을. 지옥의 불꽃에 이 몸이 눌어 타 불게 될지라도.

팬텀은 가만히 대본을 덮고 무대를 내려왔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이 손으로 목졸라 죽이는 것뿐이다. 저 용서할 수 없는 계집을. 목에 밧줄을 감고 대롱대롱 매단다. 그리고 숨이 끊기기 직전에 살짝 귓가에 속삭여 주는 거다. 왜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가, 그 이유를, 살짝. '그 사내'를 죽이는 것은 조금 나중이다. 그 녀석은 마지 막에 마지막으로 잡는 거다. 왜냐면ㅡ. 쿠쿠쿡…. 쿠쿠쿡…. 팬텀은 소리 죽여 웃으며 극장을 떠났다.

완전 범죄의 준비는 모두 끝났다. 비극의 막은 오늘 밤 열린다. 카를롯타의 처참한 죽음으로서ㅡ』

제 2 막 - '카를롯타는 극장에서' 1『밤이 되었다. 김전일과 미유끼, 겐모치 경감 세 사람은 식 당에 제일 먼저 들어가 있었다. 8 월 말이라곤 해도 생각보다 해가 짧았다. 극단원들의 연습을 보러 가기도 하고 해변에 나가 헤엄 을 치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앗 하는 사이에 해가 지고 말았다. 미유끼는 천진난만하게 까불고 있는데, 김전일은 뭘 해도 흥이 나지 않는 하루였다. 이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오페라의 유령'이 무대에 올 려지려 하고 있다. 지난 '연속 살인' 때와 마찬가리로ㅡ.


단지 그것뿐인데도 왠지 떨리는 가슴을 억누룰 수 없었 다. "전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정말인가? 에구치 군." 복도로부터 구로사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주인 아저씨. 파도가 높아져 순항 요트의 위 치를 바꿔 놓으려 했는데 엔진이 걸리질 않아요. 그래서 수 리 공장에 전화를 거니ㅡ." "걸리지 않았다는 건가?" "네." "무선은? 순항 요트에 무전기가 실려 있잖아?" "안됩니다. 밧데리가 합선된 모양인데 전기 계통이 전부 못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곤란하군. 다음 정기 순항선은 언제 오기로 되 어 있지?" "모레 점심 때입니다." "이런이런. 그때까지 통조림처럼 갇혀 있어야 하나…." "정말입니까, 그게." 김전일이 복도로 뛰어나와 물었다. "아, 네. 그렇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얼굴색이 변한 김전일의 모습에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 치가 당황해 하며 말했다. "ㅡ식품도 물도 충분한데다가 더구나 모레에는 순회 경 비선이 옵니다." "하지만ㅡ." 김전일의 뒤에서 들은 적이 있는 억양 없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수 없겠군요." 1 미터 90 센티나 돼서 올려다봐야 하는 키에 가늘고 긴 창 백한 얼굴. 입가에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검녹색 안 경 너머의 눈은 차갑게 빛나는ㅡ. 의사인 에이사쿠였다. 지난 번 이 호텔에서 일어났던 그 살인 사건 때 그 또한 이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어, 에이사쿠 씨. 당신도 이 호텔에 오셨습니까?" 겐모치 경감이 김전일의 뒤를 이어 나타났다. 미유끼도 식 당 문으로 불안한 기색을 하며 내다보고 있었다. "이런이런,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아니 전, 실은 그 사건 이후 이 호텔에 왠지 관심이 가서 말입니다. 그 후로는 주 말마다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 람들처럼 주인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구요. 하지만 놀랬습니다. 그때의 멤버가 4 명이나 모일 줄이야. 아니, 주인을 포함하면 5 명인가? 아, 이건 실례. 기억하기 싫은 것을 생각나게 해 버렸군요." 에이사쿠는 그렇게 신경을 안 쓰며 말하곤, 쿡쿡 하고 비 둘기처럼 작게 웃었다.


"뭐가 어떻게 됐나요?" 극장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에이사쿠와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가 나타나 묘하게 목이 메인 듯한 소리로 물 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김전일은 하마터면 앗 하고 소리 를 지를 뻔했다. 남자는 물안경 같은 것을 쓰고 있었고, 게다가 커다란 마 스크로 입과 코를 덮고 있었다. 마스크 옆으로 엿보이는 거무칙칙한 피부에는 얼룩 모양 의 습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아마 극도의 알레르기 체질인 모양이었다. "아, 마쿠베 씨.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해서." 구로사와가 말했다. 마스크의 사내는 화가 마쿠베였다. 극장을 장식하고 있던 그 아름다운 소녀의 그림, 구로사와의 딸의 초상화를 그렸 다는 화가였다. 이어서 극단원들도 서서히 모이기 시작해 순항 요트도 전 화도 고장이라는 말을 듣고 서로 불안을 털어놓았다.』 2『밤 7 시 반에는 극단원과 다른 숙박객을 포함한 거의 전 원이 식당에 모여 있었다. 한 사람만이, 노죠의 아내 세이꼬만이 아직 모습을 보이 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세이꼬는." 노죠가 식탁 의자에 부루퉁한 모습으로 앉아 말했다. "방에는 안 계셨습니까? 노죠 씨?" 유키오가 아첨하는 투로 물었다. 항상 입고 있는, 어울리 지 않는 오렌지색 셔츠 차림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를 침착하지 못하게 챙 그랑 거리며 만지작거리고 있는 품이, 웃는 얼굴과는 달리 초조함이 배어 있다. "아, 또 잠깐 다퉜는데 핏 하고 나가 버렸어. 어쩔 수 없 는 여자라고. 정말…." "그렇다면 헤어지면 되잖아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아쯔시가 말했다. "시끄러, 뚱보야. 네가 참견할 일이 아냐." 노죠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목소리조차 방금 전까지의 명 랑함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뱉는 듯 차갑게 울렸다. 아쯔시는 아무 대꾸도 없이 입을 '삥'자 모양으로 다물 고 말았다. 김전일은 이 짧은 대화에서 그들 극단원들의 인간 관계 가 심상찮게 불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가족적인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구로사와 선생님, 벌써 7 시 반이나 되었습니다. 식사를


시작하죠. 이렇게 극장의 완성을 축하하러 모여 주신 여러 분들에게 죄송스럽게 이 이상으로 불편을 끼쳐 드릴 수 없 습니다. 세이꼬가 돌아오면 제가 단단히 타일러 두겠습니 다. 건배하며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노죠는 웃는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으음, 유감이지만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자, 모두 잔 을ㅡ." 구로사와가 말을 한 순간, "뭐야 이건, 어머…!" 리오가 목소리를 높였다. "ㅡ보세요.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리오는 일어서서 성냥갑 정도 크기로 접은 종이조각을 구 로사와에게 내밀었다. 구로사와가 받아들고 펼치자 워드프로세서로 친 듯한 글 자가 씌어 있었다.

"카를롯타는 극장에서 샹들리에의 깔개가 되었다.ㅡ P"

"무슨 뜻이야, 이건." 옆에서 들여다보던 아쯔시가 말했다. "카를롯타라니, 세이꼬의 배역을 말하는 건가…?" 유키오가 말했다. " 'P' … PHANTOM(팬텀)? 설마ㅡ." 김전일의 뇌리에 팟 하고 최악의 연상이 스쳐갔다. 가극 '오페라의 유령'에서 오페라 가수인 카를롯타는 괴 인 팬텀이 떨어뜨린 샹들리에에 깔려 죽는다. 그리고 예전에 이 호텔에서 일어났던 연속 살인의 최초 희생자 또한…. "세이꼬가 샹들리에에 깔렸을 거라는 얘긴가?" 김전일이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김전일을 보았다. 그 시선에 튕기듯이 김전일이 의자에서 일어나 극장을 향 해 달리기 시작했다. 겐모치 경감이 뒤를 이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곧 따라 붙었다. 극장 문은 닫히 채였다. 자물통은 쇠장식에 매달린 채, 잠겨 있지 않았다. 김전일은 한 번 심호흡을 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문을 열 었다. 극장은 캄캄했다. 객석도 무대도 빨아들일 것 같은 암흑 이었다. 구로사와가 끼어 들어와 입구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더듬어서 켰다. "ㅡ?!" "비켜!" 뒤에서, 튀어나오듯이 김전일을 밀어내며 세이꼬의 남편 인 노죠가 극장에 뛰어들었다. "뭐, 뭐야, 사람들 놀라게 하고 …. 아무 것도 없잖아." 노죠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극장 전등은 침침했지만 그래도 무대 위엔 아무 것도 없 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철창 대신인 후리 그물로 나뉘어진, 아무 것도 없는 무대 저편에 벽돌무늬 모양의 그림막이 보였다. 샹들리에도 그 거대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흐릿한 빛 을 발하면서 확실히 무대 위에 달려 있었다. "놀랐잖아!" 노죠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ㅡ세이꼬, 못된 장난 좀 작작 해!" 정말 무서운 얼굴이다. "이런. 별 볼일 없는 농담에 말려 모처럼의 저녁 식사를 잡쳤군. 돌아가시죠 선생님." 아쯔시의 말에 구로사와는 화가 나 얼굴이 빨개졌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망나니 아가씨야. 이렇게 자기 멋대 로 하는 건 4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온후한 그로선 드문 반응이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극단원들 전원이 잠잠해 졌다. 고함 을 쳐대던 노죠도 자신의 감정을 삼키는 것처럼 말 없이 구로사와를 쳐다 보았다. 김전일은 이 순간 문득 구로사와의 눈동자에서 바닥을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이 떠올라 노죠에게 퍼부어지는 듯한 기 분이 들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노죠는 구로사와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갑시다. 새로 건배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구로사와는 벌써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으로 이 열쇠를 사용하게 되었는걸." 그리고 앞 호주머니에서 마스터 키 다발을 꺼내 단지 그 냥 매달려 있을 뿐이었던 자물통을 벗겨 극장 문에 단단 히 채우고 그대로 열쇠로 잠가 버렸다.』 3『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지만 구로사와가 간단한 인사와 건배를 하자 저녁 식사가 다시 시작됐다. 결국 세 이꼬만 나타나지 않은 채, 8 시 반쯤에 식사가 모두 끝났 다.


식사가 시작되어 20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아쯔시가 식사 를 서둘러 마치고 식당을 빠져 나갔다. 그가 돌아 온 것은 식사가 끝날 무렵이다. 라운지의 소파 에 앉더니 불쾌한 듯 연달아 혀를 차며 휴대용 워드프로 세서로 뭔가를 치기 시작했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또각 또각 키보드를 치다가는 이따금 혼자 웃었다. 기도하듯 눈 을 감은 채 무언가를 중얼중얼 뇌까리기도 했다. 식사가 끝났는데도 세이꼬가 나타나지 않아서일까? 식당 에 여전히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미유끼는 김전일의 옆에 앉아, 식후에 나온 커피를 계속 홀짝거렸다. 이 불편한 자리를 뜨고 싶은 듯 몇 번이나 김 전일에게 눈치를 줬지만, 김전일은 알아채지 못하고 멍하 니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카를롯타는 극장에서' 라. 뭘까, 그건…." 문득 정신을 차리니 창이 후득후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빗방울이 부딪는 소리이다. 어느새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 양이었다. 바람도 조금 강해져 낡은 나무 창틀이 이따금씩 벌레가 우는 것처럼 삐걱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바람 소리에 섞여 멀리 바다에서 폭풍이 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여러분." 침묵을 깬 것은 노죠였다. 연극의 대사 같은 말투였다. 의 자에서 일어나 몸짓 손짓까지 하고 있다. "ㅡ모처럼 이렇게 알게 됐으니 저쪽 라운지에서 게임이 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미유끼와 리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상쾌하게 웃었다. "넷? 함께요? 저도 할래요!" 미유끼는 변함없는 푼수기를 발휘, 한껏 높은 목소리로 호 응했다. 방금 전의 협박장 소동 같은 것은 완전히 잊어버 린 듯하다. 하긴 이 정도의 두뇌 상태가 아니면 이것저것 번거로운 일에 머리를 들이밀기 일쑤인 김전일과의 교제는 계속되지 않았으리라. 리오도 미유끼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천진난만한 것인지 아니면 노죠에게 관심이 있어선지 같은 극단원이면서 어느 지방의 소녀 팬인 것처럼 떠들며 노죠에게 꼬리를 치듯이 붙었다. "다른 분들도 어떻습니까? 즐깁시다. 이런 멋진 만남의 밤 을." 노죠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미소를 머금었다. 김전일은 연극투의 말에 신경이 거슬려 급기야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밖에 냈다. "정말이지.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자기 아내가 어딘가로 사 라졌는데 다른 여자애들하고 게임이나 하다니."


작은 소리로 말하려 했는데 들었는지 김전일의 옆에 앉 아 있던 유키오가 노죠를 향해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노죠 씨. 제가 세이꼬를 찾으러 갈까요?" "응? 아, 그렇군. 자, 또 부탁해 볼까." "예,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유키오가 나가자, 노죠가 변명하듯 말했다. "부끄럽군요. 이런 일은 새삼스런 게 아닙니다. 아내는 좀 제멋대로라서요. 하인들이 떠받치던 집에서 자란 탓인지 마음에 좀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금세 뛰쳐나가 버립니 다. 그런 땐 언제나 저 친구에게 부탁해 데려오게 하죠. 내 가 가면 오히려 복잡해집니다. 하하하." 김전일은 노죠 부부와 그 주위의 극단원들의 기묘한 인 관 관계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극장에서 연습중일 때 말다툼을 한 것으로 보아 세이꼬 는 리오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하다. 리오에게 남편의 노 죠가 손을 대 세이꼬가 질투하고 있다. 뭐, 그런 것이겠지. 아쯔시는 아무래도 노죠에게 반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극단 내부의 상하 관계 때문인지 정면으로 반항할 순 없 는 것 같다. 그게 안타까운지 아쯔시가 노죠를 여자 볼 때 는 빈틈을 찾듯이 음습했다. 그리고 유키오는 노죠 부부와 아쯔시 밑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심부름꾼으로 보였다. 그렇다 해도 이 유키오라는 남자가 윗사람을 대할 때의 비 굴함은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으리라고 추측됐다.』 4『식당 끝 라운지 코너를 게임 장으로 만들자 우선 노죠가 소파에 앉았다. 이어서 미유끼가 예의 바른 척 조금 간격을 두고 앉아 김 전일에게 손짓했다. "얘 얘, 김전일ㅡ." "네 네, 친해 보자구요." 반감을 띠고 노죠를 보면서 김전일은 미유끼와 노죠의 사 이로 파고들었다. 김전일은 이 호남인 척하는 노죠가 도대체 마음에 안 들 었다. 그의 권유에 할랑할랑 미유끼가 넘어가 약간 질투도 섞 여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 남자의 웃는 얼굴에는 뭔가가 있다. 이렇다 할 근거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이 '오페라 극장 호텔'에 도착할 때부터 머 리 속을 맴돌고 있는 그 암울한 예감에 확실히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 괜찮겠죠?" 이번에는 노죠와 김전일의 사이에 리오가 끼어들었다.


생긋 웃곤 푹신한 소파에 타이트한 미니스커트 그대로 아 무렇게나 앉았다. 그러자 쪽 곧은 다리가 눈에 확 들어왔 다. "우우…." 저절로 눈이 가자, 미유끼가 재빠르게 눈치채고 김전일의 발을 밟았다. "아얏, 뭐야, 미유끼." "음흉한 눈으로 봤잖아!" "그렇게 보지 않았어ㅡ." 문득 옆을 보니 겐모치 경감 입이 길쭉해져 리오의 다리 안쪽을 끈끈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ㄷ. "아, 아저씨…." "재미있어 보이는 데. 이봐, 나도 끼워 줘." "너무 노골적이야. 아저씨는…." 당사자인 리오는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박하 담배 를 꺼내 태우고 있었다. "아, 카드입니까? 재미있겠군요." 아르바이트 대학생 에구치가 앞치마를 두른 채 다가 왔 다. "괜찮으면 함께합시다. 미스터 아르바이트도." 리오가 권하자 에구치가 욕심이 난 얼굴로 주인 아저씨 인 구로사와를 보았다. 구로사와가 쓴웃음을 지었다. "조아. 에구치 군. 함께 하도록 해. 오늘은 낮부터 여러 가 지 힘들었을 테니까." "해도 괜찮겠습니까? 주인 아저씨. 얏호!" 에구치는 떠들어대며, 겐모치 경감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미유끼의 옆자리로 끼어들었다. 아마 미유끼가 목표였던 모양이ㄷ.ㅏ 조금 가슴이 파인 미유끼의 주름 장식 블라우스, 고득학생으론 좀 너무 크다 싶은 가슴을 슬며시 보고 있 었다. "이봐, 미유끼, 셔츠 단추 좀 채워. 가슴 보인단 말이야." 김전일은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애인 같은 말투라 김전일이 혼자 당황하자 미유끼는 쿡 하고 웃었다. "괜찮아. 이 단추 채우면 귀엽지 않는단 말야." "그, 그래도 말야. 너…." "네가 엉뚱한 곳만 보지 않으면 되잖아." 미유끼는 모르는 척 카드를 집었다. 김전일은 미유끼가 어린애같이 때묻지 않아 좋았다. 동시 에 그때문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자신과 미유끼의 사이는 지금하곤 다 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릴 적부터의 친구에서 조 금은 앞으로 나아갔을지도 말야.


두근두근하며 김전일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5『결국 이렇게 해서 겐모치 경감이랑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 구치도 참가해 전부 6 명이 라운지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노죠가 세번째로 카드를 돌리자 리오가 말했다. "이거 말예요. 그러지 말고 조금 돈을 거는 게 어때요? 그 러지 않으면 재미없는걸." "좋군요, 그거." 에구치가 맞장구를 쳤다. "이봐 이봐. 자네들 도박은 안돼. 도박은." 겐모치 경감이 무섭게 으르렁댔다. "에이 아저씨, 딱딱하셔." 리오가 말했다. "당연하지. 이래봬도 경찰관이니까." "예에! 그래요? 멋지다!" 리오가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피스톨도 있어요? 네? 보여 줘요." "아, 아니. 지금은 휴가중이라 권총은 없어." "그럼 경찰 신분증이라든가 하는 건 가지고 있죠? 보여 줘요, 보여 줘." 겐모치 경감은 리오의 교태 어린 말투에 잠깐 신이 나서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검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경찰청이라고 금색 글씨가 박혀 있다. "어머! 이거 진짜?" "당연하지." 겐모치 경감이 우쭐해서 빙글거렸다. "만지게 해 줘요. 네." 리오가 손을 내밀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해." 겐모치 경감이 신이 나 신분증을 건네자마자, 리오는 그 것을 낚아채 원피스의 가슴께에 쑤녀 넣고 말았다. "이건 내 거야!" "이, 이봐. 뭐 하는 거야?!" "돌려 받고 싶으면 거칠게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돈을 건 다고 해 봤자 4, 5 천 원이니까. 괜찮잖아요. 순경 아저씨?" 겐모치 경감은 허둥거렸다. "그, 그렇지만." "괜찮지 않습니까? 겐모치 경감님." 주인 아저씨인 구로사와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도박에서 딴 돈 중 반은 이 저금통에 넣는 것입니다." 구로사와는 난로모양의 장식에 있는, 한 변이 10 센티미 터 정도 되는 주사위처럼 생긴 커다란 사각 플라스틱 상 자를 가리켰다.


"에, 저게 저금통입니까? 속이 텅 빈 것 같은데." 미유끼가 묻자 구로사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재밌게 만들어졌죠? 죽은 딸애의 물건입니다. 손님들에 게 잔돈을 받아 넣은 게 거의 가득 차서 유니세프에 헌금 하려던 참입니다." 보니까 상자 옆에 작은 종이 팻말이 붙어 있꼬 "혜택받 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랑의 모금 상자" 라고 씌어 있 었다. "그렇군. 다시 말해 도박이 아니고 모금 활동을 위한 여 흥이라는 거죠. 으음, 과연 구로사와 씨, 말씀하시는 것에 빈틈이 없군요. 자, 그런 고로 걸 돈, 아니 모금액을 정하 도록. 나도 낄 테니까 각오들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주지. 왓하하하." 겐모치 경감이 그렇게 말하고 큰 입을 헤벌쭉 웃었다. 결 국 야단스럽게 도박은 안된다고 말한 것은 허세였다. 젊은 사라들 사이에 끼어들어 법석대는 것이 조금 겸연쩍었을 뿐이었다. 설교조로 말해 보호자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전일은 경감이라는 딱딱한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겐모치 경감 의 그런 사람 냄새 나는 점이 싫지 않았다. "그럼, 모두들 즐겁게 노세요. 저는 2 층 안쪽 방에 있을 테니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간단한 인사를 하고 구로사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곧 카드가 돌려졌다. 게임이 시작되고 나서 김전일은 아직 누군가가 식당 테 이블에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보니까 화가인 마쿠베였 다. 마쿠베는 테이블에 혼자 있었다. 식사 때 벗었던 마스크 를 다시 써서 여전히 기묘한 모습으로, 그저 아무 말 없이 카드놀이에 열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연필로 데 생하였다. 물안경같이 생긴 안경의 갈색 렌즈 너머로 눈만 이 되록되록 돌아갔다. 카드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김전일은 극장에 걸려 있던 그 소녀의 그림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 투명한, 너무나도 맑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 기묘한 사내의 화필에서 나온 것이다. 마쿠베의 연필심이 부러져 마른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 다. 팟하고 김전일은 마쿠베가 라운지에서 게임을 즐기는 멤 버 중에 '누군가' 한 사람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마쿠베는 새로운 연필을 꺼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그 시선은 역시 종이와 게임을 하고 있는 '누군가' 의 얼굴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 마쿠베는 누구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드 놀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김전 일은 그대로 마쿠베의 일을 잊어버리고 게임으로 돌아갔 다. 그리고는 다시 조금은 소란스런, 그러나 평화로운 밤 시 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하나 이 때 이미 악마가 장치한 교묘한 "계략" 은 조용히 개막 벨을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살짝 숨을 감추면서.』 6『30 분 정도가 지났다. 유키오는 10 분쯤 전에 돌아와 자신도 끼고 싶다는 표정 으로 게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라졌던 에이사쿠도 슬그머니 돌아와 있다. 방으로 돌아간 구로사와의 주방ㅇ서 뒷마무리를 하는 종 업원들 몇 명을 빼고는 이 호텔에 있는 전원이 라운지에 모여 있었다. 그 때였다. 쿠아앙…. 격력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바로 가까운 곳에서 울렸다. 낡은 목조 건물 자체가 몸을 떨듯 흔들리고 유리창이 진 동으로 드르르 울렸다. "지진인가?" "아니, 소리가 났어요." "극장 쪽에서였어." 모두 한마디씩 하며 게임을 하던 손을 놓았다. 김전일은 순간 가까운 곳에서 교통 사고라도 일어났나 하 고 생각했다. 희미하게 유리가 부서지는 듯한 음색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끼리 부딪쳐 몸체가 짜부라지고 앞 유리창이 산산 이 부서져 흩어질 때의 불쾌한 울림. 얼마 전에 편의점 앞 교차로에서 들은 적 있는 '그 소리'와 극히 흡사했다. 그러나 금세 생각을 다시 바꿨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이곳은 외딴섬이잖아. 자동차 같 은 게 달리고 있을 리가 없잖아. 잠깐 그럼 뭐야, 이건?" 땅이 울리며 유리창을 진동시킬 정도로 무거운 충격음. 거 기에 섞인 유리 부서지는 소리. "유리…? 설마ㅡ." 김전일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샹들리에다…."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극장을 향해 뛰었다. 그 후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서로 부딪 쳐 가며 뒤를 따랐다. 카펫을 깐 복도를 벗어나 극장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달렸다. 이번에는 장난 따위가 아니다. 그 확신이 김전일에게 있


었다. 이 호텔을 찾아온 뒤 몇 번이나 두근거렸던 것이 다 시 머리 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오페라 극장 호텔' ㅡ 반복되는 연극 '오페라의 유령' ㅡ 그리고 'P' 로 부터의 메시지…. 머리 속에서 모든 조건이 염주처럼 연걸되더니 최악의 결 론을 이끌어 냈다. 이 소리는 샹들리에다. 샹들리에가 떨어진 소리인 것이다. 극장 문에는 주인 아저씨가 잠근 자물통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제길, 자물쇠가 잠긴 채다! 이봐 아쯔시,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열쇠를 받아 와!" 노죠가 외쳤다. 아쯔시가 대답도 없이 뛰어나간다. 구로사와의 방은 2 층 끝이다. 숨 가쁘게 계단을 오르는 소 리가 들리고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김전일은 애가 탔다. 아쯔시가 돌아오기까지 고작 수 십 초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ㅡ비켜 줘!" 전력 질주해 돌아온 아쯔시가 마스터 키의 꾸러미에서 자 물통 열쇠를 골라내 난폭하게 열쇠 구멍에 들이밀었다. 곧 구로사와도 나타났다. 주방에서 몇 사람의 종업원도 소동을 듣고 몰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극장 문이 열렸다. 안은 캄캄했다. 손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켰다. "ㅡ!" 그것은 말 그대로 악마가 만들어 낸 죽음의 오브제(전위 미술에서 상징적 효과를 내기 위해 기존의 물건들을 이용 하여 만들어 내는 미술 작품 ; 역자 주)였다. 직격 2 미터의 거대한 유리 세공 덩어리가 정사각형의 무 대 한가운데 떨어져 무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마룻바닥 가득히 흩어진 유리조각이 침침한 극장 빛을 받 아 어설프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수한 '죽은' 유리들. 그 중심에 세이꼬가 있었다. 아니 이미 고깃덩이였다. 무게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거대한 낙하물에 눌려 피 가 뭉그러진 고깃덩어리. 생사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세이꼬는 살해됐다. '오페라 극장 호텔'의 악몽은 또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ㅡ.』


제 3 막 - '밀실극장' 1『겐모치 경감과 의사인 에이사쿠를 제외하고 모두 식당에 모여 있었다. 에이사쿠가 현장인 극장 무대 위에서 세이꼬의 유체를 검 시했다. 검시에는 겐모치 경감이 함께 참여했다. 식당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벽시계 소리가 도로 공사장의 망치 소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벌써 한 시간이나 흘렀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 두 서로의 표정을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을 뿐 눈이 마주 칠라치면 당황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 시선이 살인자를 찾는 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방안에 서로에 대한 의심이 낳은 살벌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여기에서 누군가가 자칫 잘못 입을 열면 그 살기는 그에게로 갈 것이다. 그런 생각들 때문인지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 럼 품고 있으면서도 그저 잠자코 시선으로만 주고받기를 계속했다. 그 중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아주 냉정하 고도 객관적으로 눈앞의 사실만을 응시하면서 진상을 캐려 는 자가 딱 한 사람 있었다. 김전일이었다. 김전일은 바로 조금 전까지 겐모치, 에이사쿠와 함께 현 장 검증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못 올리고 미유끼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돌아왔다. "역시 'P'는 '팬텀' 이었어. 가극 '오페라의 유령'에 나 오는 '팬텀'도 틀림없이 그렇게 'P'라는 이름으로 극장 지 배인에게 예고장을 보냈지. 그래, 그건 예고장이야. 이제부 터 일어날 처참한 사건을 알리기 위한 살인 예고장…? 하 지만 무엇 때문에? 살인 예고장 따윈 살인에 있어서는 위 험만 가증시킬 뿐인데…." 현장을 조사하고 있을 때에도 김전일은 줄곧 생각의 미 로를 헤매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로였다. 나아가도 나아가 도 같은길, 같은 풍경만이 되풀이해서 나타났다. 김전일에게 이 사건은 처음부터 알 수 없는 일, 이상한 일,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계속될 뿐이었다. "도대체, 범인은 무엇 때문에 '팬텀'이란 이름을 쓰고 있 단 말인가. 아니 이름만 대고 있는 게 아니지. 놈은 그 가 극 '오페라의 유령' 스토리를 흉내내어 샹들리에까지 떨 어뜨려 보였어. 이유도 없이 그저 멋으로 그런 거나 광기 로 그런 짓을 한 건 아냐. 적어도 이 살인은 그런 단순한 정신 이상자의 짓은 아닌 게 틀림없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로만 이루어진 "완전범죄"니까. 도대체 범인은 어떻게 해서 그 극장에서…." "누구야…." 갑자기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김전일의 생각을 끊었 다. "누가 한 거야." 노죠였다. 그에게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자, 신경이 거슬렸 는지 그의 중얼거림은 외침으로 변했다. "누가 세이꼬를 죽였는지 묻고 있는 거다. 엉!?" 노죠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옆에 앉은 유키오의 목덜 미를 잡아 힘껏 끌어 올렸다. "모, 몰라요. 그런 거! 내가 아니라니까요!" 서슬 퍼런 노죠의 모습에 유키오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만해요!" 리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와 동시에 연쇄 반응을 일 으키듯 모두가 불안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미유끼도 엄습해오는 공포를 뿌리치듯이 조금씩 고개를 저으면서 금방이라도 울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김전일…. 응, 왜…?" "미유끼, 괜찮아. 진정해…." 김전일은 미유끼의 떨리는 어깨를 어루만졌다. "여러분도 진정하세요. 안달해 봤자 모레까지 이 섬에서 는 나갈 수 없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나, 나는 방에 돌아가겟어. 이런 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노죠가 이렇게 말하며 일어선다. 김전일이 황급히 제지했 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노죠 씨. 금방 겐모치 경감이 돌 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시끄러! 이 중 누군가가 살인을 했을지도 모른다구. 그 런 놈들하고 같이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 아!" 노죠는 출입구를 향했다. "아무래도 방에 돌아가야겠다면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나서 가십시오. 노죠 씨." 김전일은 출입구를 막고 서서 딱 잘라 말했다. "무슨 뜻이야. 그건…?" 노죠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당신을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모두가 다음 표적이 될 가 능성이 있음과 동시에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죠. 만일 당신이 범인이면 어떻게 하죠? 지금 여기를 혼자 나가게 하면 증거 인멸의 기회를 주는 걸지도 모르죠." "마, 말도 안돼…. 난 범인이 아냐! 무슨 증거 인멸이야. 그런…."


"흠, 여기에 있는 사람 모두, 그렇게 말하겠죠. 하지만 누 군가가 범인이란 말입니다." 아쯔시가 끼어 들었다. 노죠는 그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 다. "이봐, 뚱보! 넌 뭐야, 넌!" 아쯔시에게 다가서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만해요, 제발! 노죠 씨. 진정해요!" 리오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가 나르다 만 찻잔을 테이블에 내던지듯이 내려 놓고 노죠를 뜯어 말렸다. 유키오는 출입구로 살금살금 다가가 도망칠 준비를 했다. 김전일도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눌려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짝짝, 하고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 거기까지야." 구로사와였다. 연극 연습에서 배우의 대사를 멈추게 하는 방법이었다. 노죠도 리오도 아쯔시도 유키오도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 어 버렸다. 그 때 바로, 식당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모두 전기에 덴 듯 몸을 움츠렸다. 들어 온 사람은 검시를 마친 에이사쿠와 겐모치 경감이 었다.』 2『"끝났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억양 없는 합성음 같은 소리로 에이사 쿠가 말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내는?" 노죠가 물었다. 아내를 잃었는데도 그 말투에 슬픔은 느 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뚱한 말투였다. "살인이요, 역시." 에이사쿠가 딱 잘라 말하자 모두의 표정에 긴장이 맴돌 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내가 묻고 싶은 건 아내가 누구 한테 살해당했느냐는 거욧!" 노죠가 거칠게 대꾸했다. "그런 건 아직 모르오. 에이사쿠 선생에게는 유체의 상황 과 사망 추정 시각을 감정받았을 뿐이오." 겐모치 경감은 짜증내듯 내뱉었다. "에이사쿠 선생님, 감정 결과를 들려 주십시오." 김전일이 재촉하자 에이사쿠는 기계적인 어조로 감정 결 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인을 말씀드리면 세이꼬 양의 유체는 안면에 울


혈과 일혈점이 있었습니다. 일혈점이라고 하는 것은 목이 졸렸을 때 안면에 생기는 반점을 말합니다. 그것과 목에 이 런 식으로 줄 같은 것이 죄어 들어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에이사쿠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동작을 해 보였다. "예? 그럼 목 졸려 죽었단 말입니까?"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유키오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곧바로 겐모치 경감이 손으로 제지하여 앉혔다. "그렇습니다.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세이꼬 양 은 교살, 즉 목졸려 살해당했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세이꼬는 샹들리에에 깔려 죽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노죠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에이사쿠 선생. 그럼 세이꼬 양 이 살해당한 뒤에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그런 말입니까?" 김전일이 물었다. "그렇다고 봐도 되겠죠." "아니 그런… 그럼 대체 그녀는 언제 살해당한 겁니까?" "부검하지 않고선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만, 사반이 나 경직 상태, 체온이 남아 있는 정도로 판단해 볼 때, 아 마도 사체가 발견된 9 시에서 사후 2 시간 내지 3 시간은 경 과했다고 생각됩니다." "2 시간 내지 3 시간이라…." "결국, 이런 거군." 겐모치 경감이 경찰 수첩을 펼치면서 끼어 들었다. "ㅡ범인은 오후 6 시에서 7 시 사이에 피해자, 세이꼬를 교 살하고 그 후 7 시 반 이후에 극장 무대 위로 사체를 옮겨 9 시 정각에 사체 위에 샹들리에를 떨어뜨렸다. 대충 그런 얘깁니까?" "잠깐 기다려 주시오, 형사 양반. 어째서 사체를 무대 위 로 옮긴 것이 7 시 반이지요? 천천히 설명해 주지 않겠쏘?" 아쯔시가 물었다. 그는 어느 샌가 워드프로세서를 꺼내고 있다. 입맛을 다시듯이 입술을 핥으며 흥분해서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얹어 놓았다. "잊었소, 당신? 저녁 식사 전 7 시 반에 그 예고장인가 뭔 가를 읽고 극장을 보러 갔잖소. 그 때 무대 위에는 아무 것 도 없었고 샹들리에도 그때까지는 확실히 달려 있었소." "그러고 보니 그렇군. 과연… 이게 경찰 수사라는 건가. 대단한데. 이런 체험은 할래야 할 수 없는 거지." 아쯔시는 또 입맛을 다시며 워드프로세서 키보드를 두드 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그럼 일단 세이꼬의 사망 추정 시각인 오 후 6 시에서 7 시 사이에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지 알려 주 십시오." "알리바이 조사입니까? 경감님."


아쯔시가 묻자 그것을 곁눈질해 보며 유키오가 말했다. "나는 관계 없어요. 나는. 세이꼬 양을 죽일 이유 따윈 아 무 것도 없어요. 게다가 그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 렸을 때 다른 사람들과 모두와 함께 저기 라운지에 있었 으니까요." 유키오는 식당과 연결되어 있는 라운지를 가리켰다. "어, 그런 거라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때 저는 거 기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리오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그러고 보니 그 큰소리가 났을 때 여기에 있는 멤버는 거의 전원 이 식당이나 그 라운지에 있었던 것 같군요." 유키오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시선이 식당 끝에 서 있는 구로사와에서 멈췄다. "어? 선생님도 계셨습니까?" 유키오가 말했다. "아니, 난ㅡ." 구로사와의 말을 가로막듯이 리오가 끼어 들었다. "맞아, 경감님. 애초부터 범인이 우리들 중의 누구라고 정 해진 건 아니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 섬에 잠 입해 온 거라구요. 뻔해요!" 점점 말이 격력해진다. "ㅡ아아, 어쩔 셈인 거야? 그런 연극 같은 방법으로 예고 장까지 보내고…. 기가 막혀서. 샹들리에를 떨어뜨리다니. '오페라의 유령'은 아닐 테고, 머리가 이상한 거야. 틀림 없어! 어딘가에서 정신 이상자가 이 섬에 숨어 들어와 서…." "아니에요, 그건." 김전일이 말했다. "ㅡ범인은 미치거나 하지 않았어요. 정신이상자도 아니구 요.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지능범이에요. 그리고 놈은 틀림 없이 우리들 중에 있어요." "뭐라구요?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죠?" "예고장으로요." "예?" "리오 씨, 저녁 식사 때 당신에게 보내 왔다는 그 예고 장 말인데요, 그거 어디에 있었죠?" "냅킨 밑에요. 유리잔을 집으려는데 나왔어요." "에구치 씨, 식기를 테이블에 놓은 건 당신이었죠?" "예, 그런데요."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가 당황한 듯 대답했다. "식기를 놓기 시작하고 나서, 누군가 수상한 사람이 식당 에 들어 온 낌새는 없었습니까?" "아뇨, 설마. 그런 일은 없었어요. 수상한 인물은커녕 나 이외에 어느 종업원도 주방에서 나온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외부 사람이 살인 쪽은 어쨌건, 적어도 그 예 고장은 보낼 수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군요." "예, 뭐…." "결국 그 예고장의 발신인 'P' ㅡ 팬텀의 정체는 테이블 정돈이 끝난 뒤에 우르르 이 식당에 모여 든 우리 중 한 명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라는 얘기 가 되는군요." "유, 유령? 유령이라니 설마, 미카 양의…." 에구치가 중얼거린 순간 네 사람의 극단원들은 거의 동 시에 무언가를 피하고 싶은 듯 시선을 약간 떨구었다. 에구치가 내던진 "미카"라는 이름에 그들이 뭔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쳇,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가 유령이야.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노죠가 내뱉었다. 그 모양을 구로사와가 관찰하듯 무표정 하게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노죠 씨." 김전일이 말했다. "ㅡ유령은 살인 예고장 따윌 보내거나 하지 않죠. 하지만 이 살인은 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의 짓처럼 풀 수 없 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 뭐야 그건." "수수께끼는 몇 가지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기묘한 것 은 이 범죄가 완전한 '밀실'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밀실…!?" "그래요. 그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 여 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극장으로 뛰어 들어가 문에 자 물통이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했어요.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대 위에 시체가 있었죠." "잠깐 기다려 주시오. 그 극장에는 뒷문이 있습니다. 범 인은 틀림없이 거기로부터…." 구로사와가 말했다. "아뇨. 그 때 곧바로 겐모치 경감님과 둘이서 뒷문을 확 인하러 갔었습니다. 거기도 자물쇠가 채워진 채였습니다." "아아, 확실해요. 뒷문은 안쪽에서 단단히 빗장이 질려 있 었어요. 이런 큰 레버 식의 철빗장이요. 틀림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겐모치 경감은 야단스럽게 30 센티 정도나 손을 펼쳐 보였다. "ㅡ극장에는 그 외에 다른 출입구는 없고 창문도 없어요. 그렇다면 그 때 극장은 완전한 밀실 상태였던 셈입니다. 그 리고 이 호텔에 있는 멤버는 모두 밖에 있었구요." 이제 아무도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모두 김전일의 입에 서 담담히 흘러나오는 무서운 사실에 마른 침을 삼키고 있


을 뿐이었다. "ㅡ다시 말해 7 시까지는 확실히 아무 것도 없었던 극장 무대 위에 범인은 시체를 옮겨다 놓았고, 그리고 그 위에 샹들리에를 떨어뜨리고 도망쳤어요. 안쪽에는 빗장이 질려 있고 단단히 자물통이 채워져 있던, 창문도 없는 '밀실' 에 서 범인은 유령처럼 사라진 겁니다."』 3『"어이, 잠깐. 그럼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얘긴가?" 노죠의 말투가 죽일 듯 달려드는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김전일로부터 노죠에게로 옮겨갔다. 노죠 는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주방 입구 가까이에 있는 사람 에게 눈을 돌리곤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였다. "구로사와 선생, 당신이지?" "ㅡ!" 구로사와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반론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혐의가 걸릴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 침착한 모습이다. 순간 썰렁하게 침묵이 퍼지는가 싶더니 금세 깨져 버렸 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노죠 씨! 그런 심한 말을…." 리오가 그렇게 말하며 의자를 걷어차듯 일어섰다. 그러자 겐모치가 다가서서 제지했다. "자 자, 리오 양. 어쨌든 말을 들어 봅시다. ㅡ근데, 노죠 씨. 당신이 그러는 데는 무슨 근거가 있겠죠?" "근거고 나발이고 극장 열쇠를 맘대로 열고 닫을 수 있 는 사람은 달리 없잖아." "ㅡ!" 공기가 얼어붙었다. 들리지 않는 외침이 그 곳의 모두에 게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확실히, 구로사와 씨라면…. 아냐, 하지만ㅡ." 겐모치가 웅얼거리는 것을 초조하게 생각했는지 리오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건 좀 이상해요. 선생님이 범인이라면 극장 열쇠를 잠 그고 가거나 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 짓을 하면 내가 했 습니다 하고 말하는 게 되지 않겠어요? 열쇠는 선생님밖 에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거꾸로 열쇠를 잠그고 갔 을지도 모르잖아. 리오." "그건 억지예욧!" "하지만 분명히 그 때 선생님만 라운지에 없었어요." 유키오가 말 참견을 하자, 노죠가 구로사와에게 비아냥거 렸다. "그래, 분명히 방으로 돌아가셨나요, 선생님?" "음. 나는 내 방에 있었어."


구로사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알리바이는 없는 거죠. 게다가 구로사와 선생, 당신에게는 세이꼬를 죽일 만한 동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만해요, 노죠 씨!" 리오의 제지를 뿌리치고 노죠는 구로사와에게 다가갔다. "난 알고 있어. 위선자인 당신이 맘 속에는 나와 세이꼬 를 증오하고 있다는 걸. 분하겠지, 자신의 딸이 우리들 때 문에 자살했다고 생각하니. 그래, 틀립니까, 선생 양반?" "그만해욧!" 김전일이 강경하게 일방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 기세에 눌 려 노죠도 그를 제지하려던 리오도, 겐모치 경감까지도 일 제히 행동을 멈추고 김전일을 바라보았다. "주인 아저씨도 여기에 있는 여러분처럼 완전한 알리바 이가 있어요." "뭐?" 노죠가 입을 삐죽거린다. 김전일은 계속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때 샹들리에 소리를 들은 우리들 은 불과 몇 초만에 복도로 뛰어 나갔습니다. 라운지를 지 나 복도에서부터는 극장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가 환히 보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면 금방 보였을 거예요." "하,하지만 극장 입구에서 이 본관까지는 불과 몇 미터밖 에 되지 않아. 달리면 몇 초만에 빠져나갈 수 있잖아." 노죠가 반론을 제기했다. "극장 입구로부터가 아니에요. 무대 뒤에서예요." 김전일이 태연히 대답했다. "뭐?" "노죠 씨, 아직 모르시는군요. 샹들리에를 올리고 내리는 장치는 무대 뒤에 있다구요. 샹들리에를 떨어 뜨리려면 무 대 뒤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돼요. 다시 말해 범인이 샹들 리에를 떨어뜨리고 나서 극장을 빠져 나갔다고 한다면, 놈 은 극장 안쪽 무대 뒤에서부터 출구를 통해 본관까지 불 과 몇 초만에 달려야만 되는 겁니다. 나와 겐모치 아저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무대 위의 샹 들리에는 굵은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고 그 와이어는 무대 뒤에 있는 전기로 작동시키는 릴에 감겨 있었어요. 이 장 치를 작동시키면 샹들리에가 내려와 무대에 거의 닿을락말 락하게 떨어지게 끔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그렇죠, 주인 아 저씨?" "예. ㅡ그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장치는 내가 연출한 '오 페라의 유령' 무대에서는 필요 불가결한 물건입니다. 팬텀은 자신이 사랑하는 젊은 오페라 가수인 크리스틴에 게 배역을 주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인기 가수인 카를롯타


에게 샹들리에를 떨어뜨려 죽여 버리죠. 그 씬이 이 가극 에서는 하이라이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연출 장치가 설마 이렇게 쓰이리라고는…." 무표정한 구로사와의 얼굴에 비로소 고뇌의 빛이 떠올랐 다. "범인은 이 장치의 와이어를 빼내기 위해 릴과 모터를 연 결하고 있는 톱니바퀴를 부수고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와이어가 완전히 풀려 나가도록 거기다가 안전장치 를 빼버리곤 샹들리에를 낙하시킨 겁니다. 뭔가 트릭이 없는 한, 이 안전장치를 빼낸 순간 샹들리에 는 낙하해 버리죠. 결국 구로사와 아저씨가 범인이라면 샹 들리에를 떨어뜨리고 나서 불과 몇 초 만에 무대 뒤에서 객석 통로를 지나 연결 복도를 빠져 나가선 자신의 방으 로 돌아와야만 되는 거죠. 그건 불가능해요." "트릭이 있을지도 몰라,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것을 지연 시키는 것 같은 트릭이!" 당황한 듯 노죠가 덤벼 들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거 보라구." "하지만 만일 그런 시한 장치 같은 트릭이 있다면 주인 아저씨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사전에 그 장치를 해 두 어 사건 시간에 샹들리에를 떨어뜨릴 수가 있었겠죠. 그렇 죠? 노죠 씨." "으음…." 노죠는 그걸로 불쾌한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ㅡ어쨌든 지금 단계에선 범인이 누구라고 단정지을 수 는 없어요." "김전일 씨 그럼 어떻게 하죠? 우린 이대로 가만히 이 안 에 숨어 있는 살인자와 함께 모레까지 지낼 수밖에 없나 요?" 리오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뇨, 할일은 얼마든지 있죠. 우선은 오늘 하루에 있었 던 모두의 행동을 확실히 해 두는 겁니다. 세이꼬 씨의 사 망 추정 시각 전후의 알리바이를 중심으로 각자의 증언을 대조해 호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이꼬 양이 살해되었다는 게 6 시에서 7 시 사이 죠? 그 시간은 무대 연습도 없었고 게다가 저 역시 알리 바이 같은 건 없어요." 리오는 울상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눈가의 화장이 지 워져 흙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 다. 김전일은 그 묘한 얼굴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범인은 한 사람 한 사람 죽일 생각이니까 그런 인간의 증언에는 어딘가 모순이 있을 게 틀림없어요. 그럼


아저씨. 알리바이 조사를 시작해 줘요." "어, 그래. 맡겨 줘." 겐모치 경감은 손에 든 볼펜을 꽉 쥐었다.』 4『겐모치 경감은 면밀히 탐문하기 시작했다. 김전일 일행이 섬에 도착한 오후 1 시 이후부터 시체 발 견까지의 8 시간 동안,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개별 적으로 조사하고 또한 각각의 증언에 모순이 없는지 하나 하나 확인을 했다. 그 결과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를 제외한 호텔 종업 원 몇 명은 오후 4 시반 이후 주방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 확인되어 이번 사건의 혐의가 완전히 풀 렸다. 겐모치 경감과 행동을 같이했던 김전일과 미유끼도 물론 혐의에서 벗어났다. 알리바이 조사의 대상이 된 남은 8 명의 행동이 확실하지 않은 것은 오후 1 시 반에서 3 시 사이, 그리고 오후 4 시에 서 7 시 사이로, 총 4 시간 반 동안이 불확실했다. 의사인 에이사쿠가 감정한 세이꼬의 사망 추정 시각은 오 후 6 시에서 7 시 사이였다. 이 시간은 전원에게 확실한 알 리바이가 없는 셈이 된다. 식당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밤 7 시였다. 이 때 아 르바이트 대학생인 에구치가 순항 요트와 전화가 고장난 것을 구로사와에게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 후 사망 추정 시각으로 미루어 이미 살해당했을 세이 꼬를 제외하고, 완전히 식당에 모여 있던 것은 오후 7 시 반. 'p'로부터의 협박장이 이 때 배달되었다. 극장에 모인 13 명이 보는 가운데 구로사와 씨가 극장 문 에 자물쇠를 채운 것은 이 몇 초 후였고 오후 7 시 40 분에 는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식사 재개 후에는 김전일, 미유끼, 겐모치, 노죠, 리오, 에 구치, 마쿠베 7 명은 화장실 등을 이유로 불과 1, 2 분 간 자 리를 떴던 것을 제외하곤 줄곧 함께 있었다. 아쯔시는 저녁 식사가 진행중이었던 오후 8 시에 자리를 비웠는데, 식사가 끝나기 직전에 돌아온 후 내내 라운지에 있었다. 8 시 반에 식사가 끝나자 유키오가 세이꼬를 찾으러 나갔 고 라운지에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구로사와가 "방에 돌아가겠네" 라고 말 하고 나갔다. 의사인 에이사쿠는 어느 샌가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 키오가 돌아온 8 시 50 분 무렵에는 라운지 구석 안락 의자 에서 책을 읽고 있던 것을 김전일이 확인했다. 그리고 오후 9 시 정각에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이 때는 구로사와와 죽은 세이꼬를 제외한 전원이 라운 지와 식당에 모여 있었다. 사건 직후에 아쯔시가 열쇠를 가지러 갔을 때, 구로사와 는 자신의 방에서 클래식을 들으면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고 한다. 극장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는 식당 출구에서부터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후 몇 초만에 김전일은 복도로 뛰어나갔으므로 극장에서 나오는 자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알아챘을 터이지만, 그 때는 아무 도 목격되지 않았다. 따라서 줄곧 방에 있었다는 구로사와의 증언도 확실한 알 리바이인 셈이다. 결국, 모두의 알리바이 증언을 총괄하면 이렇게 된다. 피해자 세이꼬의 사망 추정 시각 전후에는 김전일, 미유 끼, 겐모치 세 사람을 제외한 전원에게 알리바이가 없고,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에는 모두에게 알리바이가 있다. 그것은 곧 이 살인이 밀실에서 이루어졌고 용의자 전원 이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 '이중의 벽'으로 보호 된 '완전 범죄'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5『탐문이 끝나자 겐모치 경감이 김전일에게 물었다. "이봐, 김전일." "뭐예요, 아저씨." "너 유령이라든가 저주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그래? 난 믿지 않는 쪽인데 뭔가 이번만은 정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갑자기 무슨 말하는 거예요?" "생각해 봐, 김전일. 헐린 극장에서 두 사람, 새 극장에서 또 한 사람, 총 세 사람이나 이 극장과 관련된 곳에서 시 체로 발견됐잖아. 이게 저주가 아니고 뭐겠냐?" "ㅡ'오페라 극장 호텔'과 '오페라의 유령',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시체가 나온다. 음 어떤 의미에선 저주일지도 모 르겠군요."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냐?" "근데요, 아저씨. 이 살인은 유령의 짓도 아니고 저주도 아녜요." "그야 그렇겠지. 유령이 워드프로세서로 살인 예고장을 인 쇄해 보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이 섬에 있는 사람은 전부 알리바이가 있는데다가 현장은 밀실. 이대로라면 유령의 짓이라고 보고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잖아. 음, 상사에게 그런 보고를 했다간 그 날로 내 형사 생명도 끝날 거야." "ㅡ그래, 아저씨, 그거예요!" "어?"


"범인은 어째서 현장을 밀실처럼 만들었을까요?" "그, 그야, 저어ㅡ 수사를 혼란시키려는 거 아니겟어?" "상대는 그런 쪽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타입은 아니에요, 아저씨. 이렇게까지 치밀한 수법으로 괴사건을 연출해 보 인 범인이 도대체 뭣 때문에 밀실 살인 같은 무의미한 연 출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저씨가 말한 대로 경찰이 유령의 짓이라고 비현실적인 결론을 내릴 리도 없구. 알리바이는 어쨌건, 밀실 트릭을 써서 자살로 위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건 범인 에게 있어서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장식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 그야 그렇지. 그 상황에선 어떻게 돌려도 자살설 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 "이건 요술도 유령의 짓도 아닌 용의주도하게 계획된 교 묘한 완전 범죄인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사건에 어떤 의 미가 있을 게 틀림없어요. '밀실'이나 가극 '오페라의 유 령' 스토리를 흉내낸 그 샹들리에의 연출에도요. ㅡ맞아요 내 생각엔 순항 요트와 전화 고장도 틀림없이 범인의 계 획의 일부일 거예요." "뭐라구! 그럼 설마…." "범인이 의도적으로 우리들을 이 섬에 가둔 거라고 한다 면…. 이 사건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걸 거예요." "또 사람이 죽는다는 건가?" "ㅡ몰라요. 전 아무래도 그저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날 거 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군요."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비는 더욱 세차게 창문을 두드려댔고 바람에 낡은 문이 삐걱거렸다. 게다가 때때로 천둥 소리가 번개와 거의 동시 에 요란하게 울려 퍼져 고막을 때리곤 했다. 몇 시간 전까지 바다로 둘러싸인 이 조용한 호텔의 배경 음이었떤 파도 소리는 이제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바람 소리와 그에 따라 건물의 삐걱거리는 소 리, 그리고 천둥 소리만이 밤의 어둠 속에서 미친 듯 날뛰 고 있었다. 그들은 형체 없는 '유령'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의 발소 리를 죽이고 인기척까지도 덮어 가리려는 듯싶었다. 김전일은 손목시계로 눈을 돌렸다. 밤 11 시를 넘고 있었 다. "순회선이 오기까지 앞으로 하루 반, 36 시간인가…." 길고 불안한 밤의 장막이 괴물의 모습처럼 시커멓게 드 리워져 있었다.』 6『구로사와는 복도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았다. 2 층 복도 창에서는 바다 쪽 절벽 끝에 있는 딸의 무덤이 보였다. 그 곳은 밤에도 보이게끔 정원등을 항상 밝게 켜


놓았다. 그러나 오늘 밤은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거센 비에 가 리워져 그 곳은 어둠 저편으로 쫓겨났다. 구로사와는 4 년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 아침,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온 딸 미카를 혼자 내버려 둔 자신의 잘못. 딸이 얼마나 상심하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 ㅡ나, 이제 노죠 씨와 결혼할 수 없어요.ㅡ 그렇게만 말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버린 미카. 슬프겠지만 실연의 아픔은 반드시 세월이 치유해 주리라 낙관적으로 생각해 버린 당시의 자신. 어느 날, 계속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 딸이 걱정되어 방 안에 들어가 보니 딸의 모습은 거기 없었다. 미카가 없는 동안 물 주는 것을 잊어버려 말라가던 창가 의 화분에는 물을 준 흔적이 보였다. 엎드려 울고 있었으 면 침대가 흐트러져 있었을 텐데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미카가 소중히 여기던 네모난 플라스틱 저금통이 텅 빈 채 열려 있고. 저금통 안에는 이탈리아의 동전이 쌓여 있었다. 노죠와의 결혼이 결정된 뒤, 마지막 부녀 여행으로 이탈리아에 둘이 서만 갔었다. 미카는 신혼 여행으로 한번 더 이탈리아에 가 면 그 때 그 동전을 사용해 선물을 사 올 거라며 소중히 저금통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노죠로부터 받은 약혼 반지 상자가 텅 빈 채로 화 장대 위에 있었다. 구로사와의 등줄기가 악마가 쓰다듬는 것 같은 오한이 지 나갔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무릎이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몇 번이고 넘 어지면서 극장을 향해. 왜 맨 먼저 거기로 향했는지 지금 도 모르겠다. 아마도 구로사와가 연출가이고 미카가 여배 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라면 무대를 택한다. 틀림없이 미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미카는 무대 위에 있었다. 사랑했던 무대를 자신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이며. ㅡ미카! 정신 차려ㅡ 소리치며 안아 일으킨 구로사와의 팔에서 그녀는 마치 클 라이맥스를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뭔가를 갈구하는 듯이 눈 물을 글썽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ㅡ노죠…씨ㅡ 구로사와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작은 다이아 반지를 무명지에 낀 미카의 왼손에서 은색 동전이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동


시에 그녀의 온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꽃이 떨어지듯 미카는 죽었다. 배반한 연인을, 필시 마지막까지 사랑하면서. 미카의 직접 사인은 비소 중독이었다. 면도칼은 음독으로 숨이 끊어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준 비해 두었던 것이다. 베인 상처는 손과 목에 모두 12 군데 나 나 있었다. 독에 의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빨리 목숨을 끊으려고 닥치는 대로 그어댔을 거라는 게 경찰의 견해였 다. 장례식은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행해졌다. 장례식에 참석해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노죠 옆에는 연극 같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애도하는 척하는 극단 연습생 여자가 있었다. 대재벌 회장이며 극단 '환상' 의 이사이기도 한 아키히코의 딸 세이꼬였다. 노죠에게 바 싹 달라붙듯 어깨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구로사와는 생각했다. 그런가. 이 사내는 미카를 버리고 돈과 지위를 선택한건 가. 하지만, 바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는 이 세이꼬를 미카 이상으로 사 랑하고 만 거다. 그저 그뿐인 거다. 언애에 변심은 으레 있 는 법이다. 그가 더 사랑하는 여성을 선택했다고 그를 책 망할 수는 없다. 미카는 연약했던 거다. 그래서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멋대로 죽음을 선택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 다. 그래 아무도…. 구로사와는 노죠를 용서했다. 미카의 손 에 있던 반지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살짝 그에게 돌려주고 난 뒤 다른 극단원들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ㅡ고맙네. 딸을 위해 이런 곳까지 와 줘서ㅡ 장례식 후 아직 생전 그대로의 미카의 방에서 구로사와 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했다. 구로사와가 연출가를 사임하 고 작은 호텔을 시작한 이유를 미카는 눈치채고 있었다. 미카가 11 살 때 구로사와는 이 우타시마 섬을 손에 넣었 다. 그 때는 다만 별장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호텔로 개조하려고 한 것은 미카가 15 살이 되어 본격적 으로 무대 여배우가 될 것을 결심했을 때였다. 구로사와는 미카가 진정한 여배우로 인정받는 데, 대연출가로 불리던 자신의 존재가 아마 장애가 될 거라고 보았다. 딸이 연기자로서 아무리 활약해도 아버지의 명성 때문이 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구로사와는, 자신이 지 닌 많은 재능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여겨졌다. 그렇게 되 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자. 10 년 전에 아내를 잃은 자신에


게 단 하나 남은 혈육이며, 자신의 인생보다도 소중한 보 물인 딸을 위해. 언젠가 대배우가 된 미카가 이 작은 호텔 에서 자신을 위해 무대를 열어줄 것을 꿈꾸며. 그런 구로사와의 생각을 미카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 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에 몰두하여 당당히 배 역을 손에 넣었다. 물론 구로사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배역의 이름은 크리스틴. '오페라의 유령'의 여주인공이 었다. 대역으로 이사장의 딸 세이꼬가 맡아 공연이 제대될 무 렵 구로사와 곁으로 미카는 돌아 왔다. 딴 사람이 된 것처 럼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ㅡ. 미카가 남긴 일기자으이 마지막은 자살한 날짜로 시작해 이 렇게 끝을 맺었다. 너무나 좋은 아빠. 저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신 자상한 아빠. 금방은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언젠가 꼭 무대 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또 멋진 연출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눈물이 흘렀다. 아염없이. 일기장을 덮어 화장대 위에 놓 았다. 화장대 위에는 쓰다 남은 립스틱과 화장품이 그대로 있었다. 미카가 손목이랑 목을 그었던 것과똑같은 모양의 면도칼도ㅡ. 구로사와는 면도칼을 손에 들었다. 눈썹 정리용으로 짐작 되는 날이 그대로 드러난 구식 면도칼이었다. 그것을 쥔 손에 문득 미카의 따뜻한 피가 전해 오는 듯 했다. 숨이 끊어지려는 딸을 안아 일으킨 내 손을 흥건히 적신 그 선혈의 온기가. 정신을 차리니 거울 속에, 자신이 면도날을 손목에 바짝 대고 있었다. ㅡ그어. 그대로 그어 버려ㅡ 머리 속에서 뭔가가 속삭였다. 온몸의 힘이 면도칼을 쥔 오른손으로 쏠렸다. 베려고 하는 힘과 그에 저항하는 힘. 양쪽이 한 가닥의 팔 속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결국 저항하는 힘이 조금 이기는가 싶었다. 구로사와는 면 도날을 손목에서 떼어 왼쪽 뺨에 댔다. 그리고는 아직도 사 라지려 하지 않는 '죽음을 원하는 힘'을 흉기를 쥔 오른 손에 쏟아 부었다. 뺨에 뻘건 줄이 생기고 피가 흘러 나왔다. 통증은 없었다. 적어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은 아직도 계속 흘러 떨어졌다. 끊임 없이 흘러 내리 는 눈물과 피로 얼굴이 뒤범벅이 되어 더러워져 갔다.


이윽고 구로사와는 면도칼을 떨어뜨리고 바닥 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대로 소리내어 울었다. 어린애처럼 계속 울 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ㅡ. 4 년 전 여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7『"뭘 보고 있는 겁니까, 주인 아저씨." 김전일은 창가에 선 구로사와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구로사와가 뒤를 돌아 보았다. "아뇨, 아무 것도. 바깥이 어두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 지 않아요…."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달리 어 두워보였다. "…좀 여꿉고 싶은 게 있는데요, 괜찮으십니까?" 김전일이 물었다. "예, 물론이고말고요. 뭡니까, 사건과 관계 있는 겁니까?" 애써 목소리에 생기를 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예, 어쩌면요." 김전일은 대답했다. "ㅡ아마 관계가 있을 겁니다. 제 생각엔." "뭡니까, 그건." "주인 아저씨의 죽은 따님 얘깁니다." "미카의…?" "겐모치 경감한테 들었습니다만, 미카 양은 확실히 이전 의 헐린 극장 무대 위에서 자살하신 거죠?" "…예. 4 년전에." "원인은 실연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김전일은 괴로웠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구로사와에게서 고뇌의 빛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계속해야만 된다. 김전일은 고통을 억누르는 구로사와의 눈을 쳐다보며 다 짐하듯 물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주인 아저씨. 미카 양이 실연당한 상 대가 누굽니까?" "…." "노죠 씨…이죠?" "…예." "역시 그랬군요…." "… 그와 딸 아이 미카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결혼을요?" "예. 미카는 순진한 아이였습니다. 이건 부모라서 하는 얘 기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미카에게 노죠 군은 첫사랑이 었습니다."


구로사와는 봇물이 터지듯 말하기 시작했다. "ㅡ노죠 군에게는 연극에 재능이 있었소. 아직 거칠긴 했 지만, 확실히 언젠가 반드시 대배우가 될 만한 재능이 있 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카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있 는 것처럼 보였소. 틀림없이 그라면 딸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생각했소.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거요." 구로사와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말속에 분노가 역 력해지고 얼굴이 붉은 빛을 띠어갔다. 그것은 아마도 이 4 년 동안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 는, 계속해서 눌려왔던 감정의 표현이었다. "ㅡ결혼식을 한 달 앞둔 여름 어느 날, 미카는 무대를 팽 개치고 모습을 감춰 버렸습니다. 그리고 돌아 왔을 때는 이 미 이전의, 넘치는 애정으로 둘러싸인 밝은 17 세 소녀가 아 니었습니다. 모든 꿈과 희망을 잃은 노파와 같은 눈으로 그 아인 나에게 말했던 겁니다. '그와 결혼할 수 없게 되었 다ㅡ.'고요. 맞아요. 그는 배반한 겁니다. 내 딸을 버린 거죠. 그리고 세이꼬를 택했습니다. 부자이고 제멋대로인 아가씨를요. 돈과 지위를 위해서죠. 그렇고말구요. 뻔하죠. 미카보다 그 런 벼락부자 아가씨가 좋다니. 돈을 위해서 그랬을 거요. 그의 욕심과 야망을 위해, 미카는, 미카는…!" "드디어 정체를 밝히셨구만, 선생." 연극에서와 같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슴푸레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노죠였다.』 8『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노죠가 서 있었다. 노죠는 천천히 김전일 쪽으로 다가와 반듯한 입을 보기 싫게 삐죽이며 내 뱉듯 말했다. "ㅡ역시 그게 당신의 진심인가?. 조금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나와 세이꼬를 변함 없이 제자로 대하며 이 런 곳까지 부르더니. 쳇, 위선자였군. 실은 미워했겠지. 엉? 미워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 당신의 딸을 자살 로 몰고 간 건 바로 나였는걸. 하하하하." 구로사와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다문 입술 안쪽에서 부 러질 듯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김전일은 알 수 있었다. "그만둬요." 참을 수 없이 김전일이 싸울 듯이 노죠를 향해 몸을 들 이대었다. "괜찮소, 김전일 군." 구로사와가 제지했다. "주인 아저씨, 하지만ㅡ." "괜찮습니다. 그 말 그대로니까요." "흥, 인정하는구만."


"노죠 군. 나는 확실히 자네가 미웠네. 미카가 자살한 건 자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 "흥…, 그게 듣고 싶었떤 거요. 당신의 진심이.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당신의 시시한 여흥에 동조해 이런 데까지 온 거지." "그런가….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 주게." "뭘요?" "내가 그런 자신을, 자네를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미워했 다는 걸." "어떤 의미요,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변심이란 있을 수 있지. 나 역시 인간인 이상 그걸 책망할 수는 없네. 나도 연출가로서 인 간의 마음을 그려 온 사람이네. 그런 것은 잘 알고 있는 터 일세. 그런데도 나는 자네를 미워하고 말았지. 나는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네. 그 모순을 뛰어넘기 위해 이렇게 자네와 세이꼬 양을 함께…." "아냐." 노죠는 냉혹하게 웃으며 거절하듯이 구로사와에게서 홱 눈을 돌렸다. "당신은 역시 위선자야. 구로사와 선생." "노죠 군…." "거기 있는 아기ㅡ 이름이 뭐라고?" "… 김전일. 김전일입니다." "너에게는 가르쳐 주지. 저 착한 얼굴을 한 할아범의 정 체를 말야." "…." "아마 저 치는 내가 원래 어떤 사내였는지 알고 싶었을 걸." "무슨 뜻입니까?" 김전일이 물었다. "하하하, 이봐 이봐. 아직 몰랐었냐, 아가야. 명탐정의 손 자가 아니었냔 말야. 그런 정도론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 한다구. 알겠냐, 저 남자는 내가 돈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버 리고 세이꼬에게 돌아섰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거야. 그것 을 알면 내가 미카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 인된다. 즉ㅡ." 노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ㅡ즉, 나를 죽일 이유가 된다는 거지." 번개가 쳤다. 침침한 복도가 일순 대낮처럼 눈부시케 빛 났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지며 동시에 벼락 소리가 울려 퍼 졌다. 생나무가 찢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노죠는 구로사와 를 가리켰다. "당신이 죽였지, 세이꼬를. 귀여운 딸의 애인을 뺏아간 계 집을 처치해 버린 다음 딸을 버리고 다른 계집에게 달려


간 놈에게 복수하려던 게 아니었냔 말야. 당신은 다음 번 엔 나를 죽이려는 속셈이었던 거다. 엉? 내 말이 틀리나, 팬텀 선생!" "그만 둬!" 멱살을 잡으려던 김전일을 몸을 비틀어 가볍게 젖히고 노 죠는 계속했다. "당신의 정체는 알고 있어. 다음은 내 차례겠지. 가르 쳐 주지, 선생. 당신이 알고 싶었던 나의 정체라는 것을." "…." "당신의 상상대로요. 나는 세이꼬의 재산과 배경을 목적 으로 미카를 버렸다. 대연출가라고 불리던 당신 딸 미카와 결혼하면 언젠가 커다란 찬스가 오지 않을까 노리고 있었 던 거다." "… 노죠…. 설마…." 구로사와가 입술을 떨렸다. 주먹을 쥐며 노죠에게 다가갔 다. 그러나 노죠는 조금도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ㅡ그런데 당신은 눈이 뒤집혔었나? 미카의 주연 데뷔가 결정된 순간 은퇴해서 호텔 주인 아저씨가 되겠다고 말하 다니. 처음에는 농담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예정대로 미카 와 결혼을 약속하자마자 당신은 정말로 이런 쬐끄만 섬에 처박혀 은거 생활을 시작했단 말야. …정말 간신이 세이꼬 로 옮겨 탈 수 있었던 게 다행이지ㅡ." "그만 해!" 노죠의 말을 가로막으며 구로사와의 주먹이 날았다. 노죠 는 부드러운 몸 놀림으로 구로사와의 펀치를 피하면서 이 번엔 역으로 다리를 걸어 구로사와를 넘어 뜨렸다. "ㅡ!" 구로사와는 비틀하고 창틀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히고는 주르르 힘없이 주저 앉았다. "주인 아저씨ㅡ!" 김전일이 구로사와에게 달려들어 일으켰다. 맞는 통에 벌 어졌는지 뺨의 오랜 상처에서부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피가…." "괜찮아, 난 괜찮아…." "쳇…. 말해 두지만 나는 그리 간단히 죽어 주지 않을 걸." 구로사와와 김전일을 내려다 보면서 노죠는 말했다. "알리바이가 있든 없든 나는 당신이 범인이라고 생각하 고 있어. 왜냐면, 세이꼬를 죽일 만한 동기가 제일 많이 있 는 것은 당신이기 때문이야." "그럴까요.?" 김전일이 노죠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라구?" "당신은 어때요, 노죠 씨. 세이꼬 양이 죽으면 제일 이득 을 보는 것은 당신 아닌가?"


"이 자식, 무슨 소리야?" "세이꼬 양의 부친은 당신들 극단의 이사장이라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대단한 재력가로 재벌이라고 말할 정도다. 원래 세이꼬 양하고는 재산을 목적으로 결혼한 당신이다. 그녀를 죽여 그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던 것 아냐?." "하하하 바보 아냐?" "그 계집을 죽여도 나에겐 한푼도 득 되는 게 없다구, 유 감스럽게도." "무슨 얘기야." "세이꼬는 내가 자신을 별로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을 차 츰 눈치챘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그 계집, 몇 억이나 되던 자신의 예금 구좌를 전부 해약해 부친에게 돌려주었다. 덤 으로 생명보험도 들지 않아서, 요컨대 자기가 죽어도 나에 게 한푼도 남지 않도록 손을 써 놓았던 거야. 제길. 그래도 덕분에 이상한 의심을 받지 않고 끝날 것 같고. 돈 쪽은 변호사라도 고용해서 부자인 장인에게서 조금이라도 뜯어낼 생각이지. 하하하하." 소리 높여 웃으며 노죠는 가버렸다. 김전일은 뒤를 쫓을 생각도 없었다. 노죠의 말은 김전일 에게 이제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 추악함으로 가득 차 있 었다. 이미 노여움을 넘은 경멸에 김전일은 몸을 떨었다. 김전일은 그저 망연히 소리 높여 웃으며 사라지는 노죠 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득 김전일의 귀에 꿀꺽하고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곁눈질해 보니 문틈으로 누군가 엿보고 있었다. 그것 은 유키오였다. 방안은 아주 캄캄했다. 불을 끈 채로 슬쩍 듣고 서 있었던 것이다. 유키오는 김전일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계속해서 엿보고 있었다. 조금 열어 둔 문 안으로 번개가 가끔 비쳐 늘 똑 같은 오렌지색 셔츠 소매가 반딧불처럼 빛났다.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내내 지켜보던 유키오의 눈에 노 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만 뒤굴뒤굴 움직이면서 사라지는 노죠와 바닥에 주저앉은 구 로사와를 번갈아 보았다. "김전일 군." 구로사와는 피가 번진 왼쪽 뺨을 누르고 일어났다. "ㅡ그가 말한 대로 세이꼬 양을 죽인 것은 나일지도 모 르겠군요." "무,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주인 아저씨ㅡ!" "지금 확실히 알게 된 겁니다. 나는 저 녀석이 밉다. 아 니, 정말 미웠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주인 아저씨…." "그래, 살인자 '팬텀'은 역시 나일지도 모른다. 내 속에 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고 있던 증오가 팬텀이라는 괴


물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세이꼬 양 을 죽였을지도. 현재 내 알리바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애매하다. 샹들리에 가 떨어졌을 때 라운지에 없었던 것은 나뿐이니까. 게다가 밀실이었던 극장 열쇠만 해도 내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 이요." "주인 아저씨, 저와 함께 가시죠." 일어선 구로사와의 팔을 붙잡고 김전일은 걸음을 내디뎠 다. "뭐 뭡니까? 김전일 군, 갑자기ㅡ." "극장에 가는 겁니다." "네? 이런 시간에, 왜…." "알리바이 깨기입니다." "알리바이?" "네.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 전원이 함께 있었다'라는 알리바이입니다. 그 트릭을 지금부터 찾으러 가는 겁니다."』 9『"뭐야, 김전일. 이런 시간에." 실내복 차림 그대로 억지로 끌려 나온 미유끼가 투덜거 렸다. "이봐 김전일. 무대 위라면 이미 충분히 조사했잖아. 지 금이라고 별…." 내키지 않는 듯 호주머니에서 꺼낸 열쇠 다발에서 극장 의 자물통 열쇠를 고르며 겐모치 경감이 말했다. "무대 위가 아녜요. 내가 조사하고 싶은 것은 무대 뒤야." "무대 뒤라고?" 구로사와가 응급 처치를 끝낸 뺨의 상처를 반창고 위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네. 주인 아저씨, 저 샹들리에를 매달고 있던 와이어는 무대 뒤의 장치에 이어져 있을 테지요?" "아, 네…." "그럼 범인 ㅡ '팬텀'이 장치한 트릭의 비밀도 무대 뒤 에 있을 겁니다." "열었어, 김전일!" 겐모치 경감이 무거운 목재 문짝을 열며 말했다. 세이꼬의 시체는 사건 후 호텔 종업원들에 의해 운반되 어 나갔다. 그러나 현장 보존의 원칙에 따라 무대 위에 깨 져 흩어진 샹들리에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참극의 흔적이 새겨진 무대 위를 지나 네 사람은 무대 뒤 로 발을 내디뎠다. 작은 전구 하나가 비추고 있는 이 어둡고 좁은 공간은 노 출된 기재와 소도구 더미, 의상 등으로 꽤 복잡했다. 그 중 심부에 커다란 모터와 도르래와 같은 릴이 설치되어 있었


다. 릴에 감겨 있어야 할 와이어는 완전히 풀어져 천장에 매 달려 있었다. 그 와이어의 끝은 천장의 도르래에서 벗겨져 무대 위로 떨어져 부서진 샹들리에에 이어져 있을 것이다. "주인 아저씨. 이 장치는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김전일이 묻자 구로사와는 벽에 있는 스위치를 가리켰다. "샹들리에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것은 입구 옆의 조작실 이나 그 배전반에서 할 수 있습니다." 김전일은 스위치와 장치를 번갈아 보고 나서 장치 쪽으 로 다가가 별다른 생각 없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당황 한 겐모치 경감이 주의를 주었다. "이, 이봐. 장치를 함부로 만지지 마. 아직 지문 채취도 하 지 않았다구." "일 없어요. 지문 같은 거 채취해봐야. 범인은 현장에 지 문을 남길 만한 멍청이가 아닌걸." "그, 그렇지만서도…." "아, 괜찮아요 괜찮아." 김전일은 개의치 않고 여기저기 더듬고 있었다. 한동안 조사하고 나자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역시." "ㅡ범인은 이 장치의 모터 부분과 와이어를 감은 릴을 연 결하는 톱니를 부수고 거기다 릴의 회전을 막고 있던 안 전 장치를 부숴 샹들리에를 떨어 뜨렸어. 그런데 이 릴은 그렇게 크지 않아. 안전 장치를 부순 후에라도 예컨대, 쇠파이프 같은 물건을 안전 장치 대신에 릴에 끼워 두면 회전을 막아 둘 수 있 을 것 같아." "그래도 김전일, 그렇게 해도 결국 이곳에 없으면 그 파 이프를 뽑지 못하잖아? 시한 장치 같은 조작이라도 있으 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발견하지 못했고…." "으음…." 문득 김전일의 코가 익숙한 냄새로 간질간질해졌다. "응? 이 냄새 어디선가…." "왜 그래, 김전일." "아니,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아?" "싫어, 난 몰라." "바보, 그런 게 아니라니까. 좀더 뭐랄까, 옛날의 것을 떠 올리게 하는 냄새란 말야…." "그러고 보니 냄새가 나." 겐모치 경감도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ㅡ음, 이건 확실히 모기향 냄새야. 틀림없어." "아, 그래. 우리 집은 요즘 전자 모기향이니까 완전히 잊 어버리고…." 김전일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동시에 김전일의 두뇌는 어


지럽게 회전하기 시작, 또 다시 하나의 결론을 튕겨 내었 다. "그렇군! 알았어. 시한 장치의 정체를!" "뭐, 정말인가 김전일?!" 겐모치 경감이 말했다. 김전일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개구리처럼 바닥을 설설 기기 시작했다. 아연해진 겐모치 경감과 미유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김 전일은 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전일, 괜찮아?" "있다. 이거닷!" "뭐, 뭐야? 뭐냐고." 김전일은 반투명의 실 같은 것을 미유끼의 코끝에 들이 댔다. "이거야." "… 실?" "그래, 낚싯줄이야. 나일론 실이지. 이게 범인이 만들어놓 은 시한 장치란 말야." "이런 게? 이봐 김전일, 설명해 줘. 대체 어떻게 해서…." "간단한 거죠. 범인은 쇠파이프 대신에 이 나일론 실로 와 이어가 감겨 있던 릴의 회전을 멈추게 했던 겁니다." "이런 가는 실로? 아무리 나일론 실이 튼튼하다고 해도 그건 무리야. 샹들리에는 적어도 수백 킬로는 되는데." "그러나 미유끼, 그게 그렇지도 않아. 확실히 한 가닥으 로야 저 터무니없이 큰 샹들리에를 버텨낼 턱이 없지. 그 러나 이것을 몇 겹으로 둘둘 말아 두면 어떨까. 대충 한 번 감아 10 킬로를 지탱한다고 할 때 다섯 번 감으면 50 킬로 정도의 중량을 버틸 수 있지. 릴의 회전을 멈추게 할 뿐이 라면 2, 30 번 정도 감아 두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과연 그렇군. '화살도 세 촉을 합하면 꺾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이지." 겐모치 경감은 찡그린 얼굴로 수긍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시한 장치가 되지? 낚싯줄 을 끊지 않으면 샹들리에는 떨어지지 않잖아." "둔한 아저씨구만요. 이 나일론 실과 모기향을 합쳐 생각 해 보면 답이 나올 거예요." "모기향…. 아, 그렇군!" 미유끼가 갑작스레 소릴 지르며 손뼉을 쳤다. "ㅡ모기향의 열로 나일론 실을 녹여 끊었던 거예요!" "정답. 즉, 이런 것이지. 범인은 우선 이 릴에 나이론 실 을 감아 회전할 수 없도록 고정시키고 나서 안전 장치를 부쉈다. 그리고 나이론 실에 닿도록 모기향을 장치, 불을 붙인다. 다음은 시간이 흘러 모기향이 타들어 가면 모기향과 닿 아 있던 부분의 실이 열에 녹아 끊어져 감아 놓은 것이 풀


어지고 와이어를 감은 릴이 돌기 아가면 모기향의 재도 이 나이론 는 것으론 증거를 찾을 수 없다. 기향 특유의 냄새까지는 지울 수

시작한다. 릴이 힘차게 돌 실도 날려 버려 언뜻 보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모 없었던 거지."』

10『"음, 과연. 알고 보면 간단한 장치였군." 무대에서 물러 나오며 겐모치 경감이 말했다. "그렇죠, 말 그대로 "기계적 트릭"이에요. 사건 직후에는 현장의 처참함에 정신이 없어 이 냄새까지는 알아차리지 못 했죠." 김전일이 덧붙여 말하자 미유끼가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이곳에 늦게 왔다면 냄새가 완전히 없 어져 알아내지 못했을 지도 몰라" "글쎄? 어쨌든 간에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었을 거야. 이 실이 현장에 남겨져 있는 한." "과연 그렇군. 범인은 우리가 사건 후 극장을 봉쇄해 버 릴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래서 이 증거를 회 수할 기회를 놓쳤던 거지." 겐모치 경감은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김전일은 맞장구 치지 않고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모양을 곁눈질로 신경 써 가며 겐모치 경감은 수첩을 펼쳐 연필로 적기 시작했다. "뭐 어쨌든 이걸로 알리바이가 없어지는 사람도 나오겠 는 걸. 적어도 샹들리에가 떨어질 때의 알리바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는 거지. 좋아, 일보 전진이다. 나머지 밀실의 수수께끼가 풀리면 이 사건도 어떻게…. 어? 이봐. 왜 그래, 김전일?" 김전일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겐모치의 말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 듯,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 "이봐, 김전일, 뭘 고민하는 거냐?"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아저씨." "뭐가?" "이 수수께끼 말인데, 지나치게 간단하지 않냔 말이죠."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 이 사건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 로 가득 차 있어요. 밀실 수수께끼도 '오페라의 유령'을 본 뜬 이상한 살인 수법도, 저 'P'로부터의 예고장도, 내게는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알리바 이 트릭은 조금 발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작은 속임수라니요." "지나친 생각이야. 김전일. 그만큼 너의 추리가 날카롭다 는 거라고." "아니, 틀려요. 저보다는 어쨌거나 이 멤버 속에는 현직 경찰관인 아저씨가 있어요. 살인이 일어나면 현장이 봉쇄


되리라는 것은 이 정도의 범인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 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언젠가 경찰이 들이닥쳐 열로 녹은 흔적이 있는 실을 발견하리라는 것도요." "… 음, 그건 그렇군. 이 경우 범인이 그 무대 뒤에서 범 행에 직접 관계가 있는 중요한 작업을 했다는 것은 명백 하다. 전원에게 알리바이가 있는 부자연스런 상황에서는 우리 경찰도 알리바이에 트릭이 있을 거라고 먼저 생각한 다. 그러니까 요컨대 범인은 여기에 어떤 속임수를 장치해 서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것을 자연시켜 알리바이를 확보하 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경찰도 생각할 거란 말이지." "어쨌든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녀석, 얼렁뚱땅하지마. 어쨌든 그렇다면 보기에는 멋진 무대 위의 현장 보다 이 무대 뒤에 범인의 유류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이 개입하면 이 주변은 감식반원 들이 바닥 먼지까지 채취하며 돌아 다닐 테고 당연히 그 나이론 실도 발견되었을 거야." "잠깐만요. 그럼, 이 트릭이 간파될 것을 범인도." 미유끼가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듯 왼손을 가슴에 대며 말 했다. "뭐, 계산에 넣어 두지 않았을까." 김전일은 증거인 나일론실을 겐모치 경감에게 건네며 말 했다. "그런…. 그럼, 김전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거?" "아니, 그래도 일보 전진한 것은 변함없어. 적어도 알리 바이가 없어지는 사람이 네 명은 생겼어." "네 명?" "음. 우리가 처음에 극장을 보러 갔던 오후 7 시 반에서 샹 들리에가 떨어진 오후 9 시 사이의 알리바이가 완전치 않 은 인물이지. 이 1 시간 반 사이에 누군가가 무대 위에 시 체를 옮겨 놓은 것만은 틀림 없으니까 말야.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네 명밖에 없어. 즉, 식사 중에 자 리를 떴던 아쯔시, 식사 후에 세이꼬 씨를 찾으러 갔던 유 키오, 라운지에서 게임이 시작된 후 어느 샌가 없어졌던 의 사 에이사쿠 선생, 그리고ㅡ." "저입니다." 구로사와가 말했다. 새삼스레 동요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너무 여러 가지 일이 많아 이 정도의 일로는 놀라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네. 유감스럽게도. 주인 아저씨도 지금의 단계에서는 알 리바이가 없는 유력한 용의자가 됩니다. 아니, 네 사람뿐만 아니라 현재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직까지는 완전하게 혐의를 벗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왜냐면ㅡ."


김전일은 샹들리에가 부서져 흩어진 무대로 눈길을 주었 다. "왜냐하면 범인은 시간의 벽도 밀실의 문도 자유자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신출귀몰의 괴인 '팬텀' 이니까."』 제 4 막 - '방황하는 팬텀' 1『아쯔시는 방에서 워드프로세서를 치고 있었다. 고전적 취 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짙은 색의 나무 책상에 바싹 달 라붙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겐모치 경감의 심문이 끝나자 아쯔시는 곧바로 자신의 방 으로 돌아왔다. 시나리오를 계속 쓰기 위해서였다. 요즘 들어 그는 20 분 정도 같은 스토리를 계속 쓰려면 곧 막혀 버려 처음부터 새로 쓰기 일쑤였다. 그랬었는데 오늘 밤은 그럭저럭 1 시간 이상이나 한 가지 스토리를 계속해 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흥분해 있었다. 멋진 생각들이 계속해서 용솟음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시체 를 보았다는 극적인 체험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래그래, 그래, 그래그래…." 얇은 입술이 떨리듯 달싹달싹 움직였다. 가끔 혀로 입술 을 적시고 입 끝을 내밀어 자신의 입 냄새를 맡으며 오싹 오싹 몸을 떨었다. 그는 나르시시스트였다. 자신의 얼굴도, 몸도, 목소리도, 성격도, 재능도 그리고 입냄새까지도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 에 대한 불만은 조금도 없다. 다소 잔혹한데다 여자를 좋 아해서, 학대를 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성미까지도 분명 여자에게는 참을 수 없는 매력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방에는 자신을 촬영한 비디오가 몇백 개나 있었다. 자신의 무대는 물론, 일상적인 생활부터 여행지의 자신, 자 신을 사랑했던 여자들과의 음란한 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비디오로 찍어 정성껏 제목까지 붙여 모아 두고 있 었다. 물론 그러한 "작품"의 주인공은 전부 그 자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행동은 모든 것이 예술이었다. 커 피 잔을 든 몸짓, 담배를 무는 모양, 풀린 구두 끈을 고쳐 묶는 움직임, 자신을 보는 여자에게 보내는 유혹의 시선, 그것들은 모두 연기이며 자기 표현이고, 예술ㅡ아트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쯔시의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은 연극이라는 집단 예술에서는 받아 들여지기 어려웠다. 확실히 연기력이 있 는데도 그에게 주역이나 그에 가까운 배역이 돌아오지 않 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의 연기는 잘 되든 못 되든 너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는 곡예적인 배역만을 할 수밖에 없 었다. 그가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딜레마에서 벗 어나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분야 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쯔시의 고독한 행위 예술에도 예전에는 관객이 있 었다. 그는 노죠였다. 다른 극단원들이 속으로 비웃는 자기 의 버릇을 노죠만은 이해해 주고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극단의 연습생이었떤 때의 노죠를 아쯔시는 그저 위선적 인 호남으로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 구로사와의 딸과 노죠 의 관계가 어린애들의 불장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 년 전 노죠가 어느 누가 봐도 현실성이 있어 보 이는 세이꼬와의 결혼을 선택했을 때, 아쯔시는 이 냉혹하 고 타산적이며 아름다운 남자에게서 자신과 같은 냄새를 맡게 되었다. 노죠의 호남인 양하는 것 또한 계산된 행위 예술이었음 을 알았을 때 아쯔시는 처음으로 노죠에게 흥미를 가졌다. 마침 그 때 노죠도 아쯔시에게 접근해 왔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3 년 이상에 걸친 친밀한 사귐이 시작되었다. 노죠는 아쯔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태연스럽게 말했다. 미카를 배우로서 성공할 수 있는 실마리로 이용하려 했다 는 것, 그리고 이용가치가 쓸 수 없게 된 그녀를 버리고 재 산과 지위를 노리고 세이꼬와 결혼한 사실 등, 아쯔시는 모 두 노죠 본인의 입으로부터 들었다. 아쯔시도 역시 노죠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어두운 비밀이나 버릇 등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4 년 전 에 범한 '어떤 범죄'의 일조차 모두 포함하여 숨김없이 서 로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들로서는 신뢰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아쯔시는 노죠가 부탁하는 것은 모두 받아들였다. 노죠의 여자에 대한 나쁜 습관에 대한 소문이 극단에 떠돌았을 때 도 그를 위해 변호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노죠는 그 아쯔시의 신뢰를 아주 간단히 배반해 버렸다. 아쯔시는 자신이 쓴 대본이 극단의 사실상 소유주인 세 이꼬의 아버지 아키히코의 눈에 들도록 노죠를 통해서 몇 번이나 부탁했다. 그러나 노죠에게 건네준 대본은 하나도 아키히코 씨에게 들어가지 않았다. 노죠가 그대로 묵살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야 비로소 아쯔시는 깨달았다. 노죠에게 있어서 자신은 다루기 만만한 부하에 지나지 않았단 사실 을. 노죠는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 해 줄 마음 따위는 털끝 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아쯔시의 가슴 에는 노죠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 올랐다.


아쯔시는 노죠에게 달려들었다. ㅡ너의 정체를 세이꼬에게 불어 버릴 테야!ㅡ 그러나 그런 아쯔시를 노죠는 비웃었다. ㅡ하하하하. 해 봐, 뚱보. 너에게 했던 얘기들은 전부 세 이꼬가 알고 있을 거야. 그 여자는 나에게 홀딱 빠져 버렸 거든. 무슨 말을 해도 나로부터 떼어낼 수 없을 거다. 나 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여자니까. 그런 것쯤은 너도 알고 있을 텐데?ㅡ 그런 말을 듣고 아쯔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죠와 자신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노죠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행동까지는 할 수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쯔시는 자신의 비행이 폭로될지도 모 르는 상황을 쉽게 웃어 넘기는 노죠의 대담성이 갑자기 두 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쯔시는 자신이 4 년 전에 범한 나쁜 일을 빌미로 노죠에게 목을 잡힌 꼴이 되었다. 아쯔시는 곧 "4 년 전의 범죄"에 대해 비밀을 공유하던 유 키오 또한 그 일을 빌미로 노죠에게 복종을 약속했음을 알 게 되었다. 아쯔시도 유키오도 어느 사이엔가 노죠의 교활한 덫에 걸 려들었던 것이다. 탁, 탁, 탁, 탁….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마른 소리가 빗방울 소리처럼 담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휴대용 워드프로세서에 붙은 액정 화면의 푸른 백라이트 에 떠오른 문자가 말하는 것은 피비린내 나는 죽음과 마 법의 주문에 대한 이야기였다. 몇 번이나 입술을 핥으면서 아쯔시는 계속 키보드를 두들겼다. 광기를 뿜는 눈으로, 손 이 춤을 멈출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움직였다. 똑똑ㅡ 문득, 노크 소리가 아쯔시를 방해했다. 워드프로세서를 치 던 손이 멈췄다. "누구야?" 경계심을 품고 아쯔시가 말했다. "접니다. 유키오입니다." 겁먹은 듯한 유키오의 가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분명 유 키오의 목소리다. "뭐야, 이런 시각에.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그래도 알려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뭐야, 도대체. 말해 봐." 아쯔시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턱으로 다가갔다. "네…. 실은 세이꼬 양을 죽인 범인이 드러났습니다." "뭐라고? 사실이야, 그게?"


"아마도 사실일 것 같습니다. 동기가 확실하니까요." "누구냐? 말해 봐." 아쯔시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유키오도 그것에 이끌리듯 닫혀진 문 건너에서 작은 소 리로 대답했다. 아쯔시가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유키오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쯔시는 유키오의 말을 막고 말했다. "유키오ㅡ." "네." "너의 그 생각, 다른 사람에게 말했나?" "아뇨." "그런가ㅡ 들어 와." 아쯔시는 그제야 방문을 열었다.』 2『"아, 모르겠어!" 침대 위에서 뒹굴던 김전일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 쳤다. "결국 어느 누구의 진술에도 모순이 없는걸." 미유끼가 말했다. "아아… 완벽해." 식당에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김전일은 미유끼와 함께 오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전원의 행동을 정리하고 있었다. 겐모치 경감으로부터 받은 전원의 진술 메모를 참고로 김 전일이 기억을 더음어 용의자 전원의 시간마다의 행동을 확인하고, 그것을 미유끼가 메모한다. 이것이 언제나 두 사 람이 하는 방법이었다. 미유끼의 메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유끼의 메모·용의자 모두의 행동." 오후 1:00 김전일 일행, 섬에 도착 아쯔시, 유키오, 주인 아저씨, 물건을 사러 나 갔다 돌아옴. 김전일 일행, 극장으로 들어 감. 노죠 부부와 리오, 연습 중. 오후 1:30 …용의자 전원의 행동 불명. 오후 3:00 전원 연습에 참가. 오후 3:30 김전일 일행, 연습을 보러 감. 오후 4:00 연습 끝. …용의자 전원의 행동 불명. 오후 7:00 식당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 순항 요트의 고장 발견.


오후 7:30

오후 7:40 오후 8:00 오후 8:00

오후 8:50 오후 9:00 오후 9:00

오후 9:30

전화도 불통. 세이꼬를 빼고 전원 집합. 'P'로부터의 예고장 도착. 전원 극장에 감. 주인 아저씨, 극장에 자물통을 채움. 식사 재개. 아쯔시, 식사를 마치고 나감. 아쯔시, 돌아와서 워드프로세서를 치기 시작. 식사 끝. 유키오, 세이꼬를 찾으러 감. 노죠, 게임을 하자고 리오와 미유끼에게 권함. 김전일과 겐모치도 합세하여 게임을 시작함. 주인 아저씨, 방으로 돌아감. 마쿠베, 게임하는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 에이사쿠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짐. 유키오, 돌아와서 게임을 구경하기 시작. 에이사쿠도 어느새 돌아와 있음. 샹들리에가 떨어짐. 극장에 주인 아저씨와 종업원을 제외한 전원 이 달려옴. 곧 아쯔시가 2 층 주인 아저씨의 방으로 올라 가 열쇠를 가지고 옴. 수십 초 후 주이니 아저씨도 나타남. 자물쇠를 엶. 세이꼬의 시체 발견.

*또한 오후 4 시부터 오후 9 시가 넘을 때까지의 사이에 몇 명의 종업원은 주방에서 저녁 식사 준비와 정리를 하 고 있었다. 따라서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3『"미유끼, 잠깐 기분 전환이라도 할까? 밑에 있는 자동판 매기에 가서 말야, 뭔가 마실 것 좀 사 오지 않을래?" 침대 위에서 하품을 하면서 김전일이 말했다. "싫어, 그런 거. 복도에서 '팬텀'과 마주쳐 버릴지도 모 르잖아. 김전일 네가 갔다 와. 넌 남자잖아." 할 수 없이 김전일이 일어섰다. "할 수 없지. 내가 갔다 오는 수밖에."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꺄악!" 비명 소리가 울렸다. 김전일도 덩달아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우와악!? 뭐, 뭐야?" "노, 놀랬잖아요? 김전일 씨…."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리오였다. 그녀는 탱크 탑(가슴 이 깊게 파이고 소매가 없는 윗옷 : 역자 주)에 반바지라 는, 거칠다기 보다는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고개를 갸웃거


리고 있었다. "리, 리오 양? 어쩐 일입니까? 이런 시각에…." 김전일이 묻자 리오는 애교를 띤 얼굴로 웃으며, "흥분이 돼서 잠이 와야 말이죠." "흥분이요?" "그렇잖아요, 이건 진짜 살인 사건인 걸. 왠지 앉지도 서 지도 못하겠는 기분이란 말예요." 방금 전까지 공포에 질려 울어대서 눈이 부어 있던 그녀 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한 말투였다. 적어도 세이 꼬가 죽었다고 슬퍼하진 않는 것 같았다. "ㅡ나 연극에서 탐정 역할을 해 본 적이 있는데, 왠지 그 때의 일이 떠올라요. 아무튼 이 사건에 대해 누군가와 이 야기를 하고 싶어져서." "아하…." 김전일은 방안으로 고개를 돌려 미유끼를 보았다.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죠?" 리오가 말했다. 눈이 요염하게 젖어 있었다. "에, 좀 곤란한데요." "어때요, 이것봐요, 마실 것도 두 개 사 왔어요." 리오는 문 앞에 선 김전일을 뒤로 밀치며 방으로 들어오 다가 미유끼가 있음을 눈치챘다. "어머…." "들어오세요…." 미유끼의 인사는 어딘지 순진해 보였다. "저런, 손님이 있어서였나ㅡ? 으으. 그럼, 나도 끼워 줘요. 네? 괜찮죠?" 리오는 거리낌없이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와 멋대로 김 전일의 침대에 앉았다. "이거, 김전일 씨 거예요." 리오는 가슴에 품듯이 들고 있던 음료수 캔 한 개를 김 전일에게 건넸다. "당신, 명탐정의 손자라죠? 게다가 구로사와 선생에게서 들었는데 전에 이곳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혼자서 해 결했다면서요? 멋져!" "하하…. 감사합니다." 김전일이 겸연쩍어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미유끼의 차가 운 시선이 날아 왔다. "김전일, 내가 마실 것을 사다 준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나?. 하하하. 그럼 내 것 마셔, 응?" 김전일은 리오에게서 받은 캔을 건넸다. 당연히 미유끼는 받지 않았다. "필요 없어, 그런 건." 피이 하고 미유끼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리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전일의 팔을 끌어당겨 옆에 앉


혔다. "난, 극단의 멤버이고 노죠 씨등과는 연습생일 때부터 알 고 지냈어요. 그들 사이의 인간 관계도 대충 알고 있으니 까 상당히 도움이 될 텐데요." "아, 그렇군요, 이거 잘 됐네요. 얘기 좀 해 주세요." 김전일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4『리오는 살해된 세이꼬를 포함한 극단 '환상'의 멤버들 간 의 인간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노죠 씨인데요. 그 사람, 확실히 잘 생긴데다 배우 로서도 재능이 있고 보통 때는 상냥해서 좋은 사람 같지 만 말이죠. 사실은 꽤 껄끄러운 소문들이 많아요." "뭡니까? 그 소문이란 게." 김전일이 묻자 리오는 별 뜻 없이 작게 말했다. "즉, 뒤가 있다는 거죠." 리오가 말한 노죠의 뒤라는 것은 방금 전 눈앞에서 본 노 죠의 추한 본성을 뒷받침했다. 특히 노죠의 여자에 대한 성질은 악명 높아서 젊은 여자 단원이 극단을 그만둘 때마다 노죠가 손을 댔기 때문이라 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최근에는 뻔뻔스럽게도 아내인 세 이꼬 앞에서 팬인 여자애를 해치웠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 다. 그러나 세이꼬는 노죠에게 홀딱 빠져서 그를 떠날 수 없 었다. 그게 좋은 구실이 되어 최근에는 세이꼬가 보는 앞 에서 리오에게까지 추근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군ㅡ 그런데 리오 양은 노죠의 유 혹에어떻게…." 김전일이 호색 기질을 드러내자, 리오는 김전일의 등을 팡 팡 허물없이 치더니 딱 잘라 말했다. "바보 같으니. 내가 그런 사내와 잘 리 없잖아." "자, 잔다고요?" 김전일은 리오의 탁 터놓는 말투에 이끌려, 급기야 탱크 탑의 가슴께에 눈이 갔다. 노브라다. 그러다 곧 미유끼가 째려보는 걸 알아채고 얼버무렸다. "그, 그래도 리오 양. 노죠가 카드를 하자고 했을 때 기 꺼이…." "아, 그건 사교적인 접대예요. 뭐, 배우로서의 그는 좋게 평가하지만 무대를 내려가면 그저 악당이니까요.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에요. 그 치도 내가 그런 생각이 없다는 걸 알 고 있기 때문에 친숙하게 대할 뿐 손을 뻗지는 않았어요. 정말 그런 값싼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지 말아줬으면 해 요. 내 취향의 남자는 좀더 재능이 넘치는ㅡ 그래, 예를 들 면…."


리오는 큰 눈동자에 윤기를 흘리며 멍하니 시선을 허동 으로 띄었다. 몽상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예를 들면…?" 김전일에게 리오는 꿰뚫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ㅡ!?" 김전일이 움찔하자 정신이 든 리오는 늘 눈에 띄던 작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예를 들면 김전일 씨, 당신 같은 사람이라든가." "엣…?" "잠깐, 리오 씨! 극단 사람들에 대해 말해 줘서 김전일의 추리에 도움을 주러 온 게 아닌가요!? 그런데 오히려 방 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미유끼가 말을 잘랐다. "괜찮아요? 휴식이예요. 휴식. 그죠. 김전일 씨?" "네, 네에…." "네가 아니잖아. 너도 뭐라고 말해 봐!" "아 아. 그럼, 리오 양. 다음은, 살해된 세이꼬 양에 대해 서 말해 주시겠습니까?" "세이꼬 양에 대해서? 그래요, 죽은 사람을 험담하고 싶 진 않지만 그 사람은 말도 안되는 망나니 공주님이었어요. 어쨌든 원하는 것은 절대 손에 넣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 는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손에 넣은 순간 싫증을 내는 거 예요. 전부터 그랬어요." "아, 그래요? 그럼 어째서 노죠에 대해서는 싫증내지 않 았을까요?" "글쎄요…. 필시 노죠 씨가 아무리 해도 세이꼬 양의 것 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싫증을 잘 내는 여자란 반 대로 그런 타입에 약하니까요." "노죠가 세이꼬 양을 죽였을 가능성은?" "글쎄…. 뭐 싸움이 많은 부부였으니까 동기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세이꼬 양을 죽여도 노죠 씨는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노죠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요?" "네. 방금 전 조금 싸웠어요. 그 때 들었죠." "그래요…. 세이꼬 양이 말했어요. 자신이 죽어도 그가 땡 전 한푼 가질 수 없게 자기 예금 같은 걸 전부 아버지 이 름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대단한 집념이죠? 그런데 알아요? 구로사와 선생의 딸인 미카와 노죠 시의 얘기." "네. 주인 아저씨에게서 들었습니다." "ㅡ결국 세이꼬 양도 미카를 버리고 자기에게로 온 노죠 씨를 믿지 못했던 걸 거예요, 분명." "그렇군. 그러나 살인의 동기는 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니 까요. 오히려 돈보다는 원한이라든가 증오라든가, 그런 동


기 쪽이 왠지 이 사건에 어울리는 것 같안 말예요. 그렇다 면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던 노죠도 일단 '동기 있음'이 되는 거지만…." 김전일은 이뮤끼가 만든 용의자 리스트에서 노죠의 동기 란에 ○ 표시를 그려 넣었다. "그럼, 리오 양. 다음엔 그 언제나 어드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아쯔시라는 남자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아쯔시에 대해서요? 나, 그 사람은 정말 싫어요. 그러니 까 그다지 자세하게 알진 못하죠. 분명히 아오모리 출시이 고, 독신이고, 특정한 애인도 없이…." "성격이나 취미, 주위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 등이 알고 싶 습니다만." 김전일이 말했다. "음. 글쎄요…. 뭐,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나르시시스트인 뚱보' 라고나 할까?" "나, 나르시시스트인 뚱보…라고요? 좀 심하군요." "그래도 그 치, 자신을 비디오로 찍어서 그것을 수집하고 있는 걸. 정말 기분 나쁘다고 생각지 않아요?" "엑, 정말입니까?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뚱보 주제에 자신을 멋지다고 생각하 고 있는 거예요. 멍청하긴." "ㅡ그가 세이꼬 양을 살해할 동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까요?" "글쎄…. 어떨까. 노죠 씨라면 몰라도 세이꼬 양을 죽일 동기는 없을 것 같은데요." "노죠라면이라니, 무슨 뜻이죠?" "최근 노죠 씨와 아쯔시 사시가 이상해요. 전에는 기분 나 쁠 정도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2 개월쯤 전이었나, 크게 싸 우는 것을 극단 후배가 본 후로 뭔가 험악한 느낌만 드는 걸요, 그 두 사람." "2 개월 전이라…." "그래요. 그 이후 아쯔시는 오로지 유키오하고만 행동을 같이하고 있어요. 하지만 유키오 쪽에서는 노죠 씨와도 가 까이 지내는 것 같아요. 아무튼 아쯔시에 대해서 내가 알 고 있는 것은 그 정도예요." "그럼, 다음은 그 유키오에 대해ㅡ." "유키오는 연습생 때부터 세이꼬 양이라든가 아쯔시 씨 를 졸졸 따라 다녔죠. 요 1 년 정도는 노죠 씨 심부름꾼 역 할을 했죠. 하긴 나도 가끔 이렇게 저렇게 이용했지만서 도." "저런… 동정이 가네요, 같은 남자로서." "하지만 그 남자는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요." "네? 그건 무슨 뜻이죠?" "왠지 믿을 수가 없는 걸요, 그 치. 최소한의 도덕심도 없


어요. 자신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 다는 게 느껴져요." "싫어하는군요, 몹시." "싫어요, 물론." 그렇다면 왜 함께 연극을ㅡ 하고 물으려다 김전일은 말 을 삼켰다. 대답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벼운 여자인 척 하고 있지만 실은 그녀의 마음 속엔 엄 연한 룰이 있다. 그 룰을 벗어나는 인간에게 그녀는 결코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점점 냉 정하게 대한다. 그렇지만 필요하면 아주 싫어하는 상대라 도 조금도 그런 내색은 보이지 않고 관심을 끌어 이용한 다. 그러면 마음을 허락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김전일은 조금 전 리오가 한 말을 생각해 냈다. "내 취향의 남자는 좀더 재능이 넘치는ㅡ 그래, 예를 들 면…." 그 '예를 들면'에 이어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마음이 끌린다는 남자란 누구일까? 그런 생각에 빠진 김전일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리 오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유키오는 범인이 아닐 거예요. 잘난 척 말은 잘 해도 소심해서, 어느 쪽이냐면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 그것 을 방패로 뭔가를 꾸미는 타입이죠. 살인 같은 거, 실수로 라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나머지 한 사람…." "네? 나머지 한 사람이라니요ㅡ." "4 년 전에 죽었다는 미카에 대해서 말해 주십시오." "ㅡ!" 그 이름을 김전일이 말한 순간, 리오의 눈동자에 어두운 그늘이 생겼다. 마치 컵에 담긴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 처럼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곧 천천히 흐려져 갔다. 그러나 잉크 섞인 물이 그렇듯이 그녀의 눈동자에도 희 미한 자국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불과 몇 초 사이였지만 묘하게도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세 사람이 있는 방안에 가득했다. 이윽고 차분한 말투로 리오가 말하기 시작했다. "미카는 천재였어요…." 억지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건지, 보통 때의 그녀답지 않게 무감동한 어조였다. "ㅡ친한 친구였어요, 나와 미카는. 그런데 노죠 같은 악 당에게 휘둘리다가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 살았으면 대 단한 여배우가 되었을 텐데. 나와 둘이서 더블 캐스트로 언


젠가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을 연기하자고 약속했었 어요. 그 때 걘 고작 나와 같은 17 살이었어요. 그런데… 왜 자살 같은 걸…." 말을 계속하면서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말투가 점 점 더 격력해졌다. 벌써 4 년이나 더 지난 일인데도 마치 어 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비극이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리오의 조롱하는 듯한 행동에 화가 나 앵돌아져 있던 미 유끼도 그녀의 의외의 일면을 보고 좀 신기해 했다. 리오가 말한 미카는 순진무구하고, 그래서 더욱 눈부시며 재능이 넘치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 그러나 자시에게도 타인에게도 결벽을 요구해 조금은 도덕적으로 완고했다고 한다. "그럼, 미카 양의 연애 관계는 노죠 씨 말고는?"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하고 싶어하 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 반해 있던 남자는 많았을 거예요. 극단 안에서도, 아마 학교에서도 말예요. 예 를 들면, 그래요, 이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대학 생ㅡ." "에구치 씨 말입니까?" "그래요. 그 에구치라는 사람도 분명 미카에게 반했을 거 예요. 예전에 우리 무대 연습 때 자주 보러 왔었거든요, 그 사람. 미카에게 물었더니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던가." "사, 사실이빈까, 그게!" "네, 틀림없어요. 여러 번 본 얼굴이니까, 기억하고 있는걸." "그럴 수가…." 생각지 못한 "실마리"였다. 만약 이 살인이 4 년 전에 있었던 미카의 자살이 낳은 원 한의 결과라면…. "그건 지나친 생각인가…." 김전일은 모순되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그렇게 중 얼거렸다.』 5『구로사와의 방은 바다를 등진 2 층의 구석에 있었다. 바다 가 보이는 방에서는 미카의 무덤이 있는 절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종일 창 밖을 내다보며 지낼 것 같아 차 차리 산이 보이는 방을 개인 방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구로사와는 안락 의자에 앉아 시나리오의 페이지를 넘기 고 있었다. 그것은 누런 종이의 낡은 책자였다. 표지 한가 운데는 '오페라의 유령 제 8 작' 이라는 활자가 박혔고 그 조금 아래 편엔 '각본 연출 구로사와'라고 적혀 있었다. 스탠드가 켜져 있는 책상 위에는 또 한권의 하얀 새 책 자가 있었다. '오페라의 유령 제 9 작'이라고 손으로 씌어 있는 그 각본은 새 극장에서 상연될 것이었다. 구로사와로


서는 4 년 만에 연출하는 작품이었다. 수수하게 끈으로 묶 인 각본 표지는 면도칼 같은 걸로 그었는지 한 일자 모양 으로 찢겨 있었다. 구로사와는 무릎 위에 놓인 대본에 쓰인 짧은 대목을 충 혈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필립 백작 팬텀 필립 백작 팬텀

"뭐 하는 거야, 자네." (말 없다) "놔라, 그 손을." (말이 없는 채 그대로 작은 배를 뒤집어 엎 어, 백작을 호수에)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구로사와는 각본 에서 눈을 떼고 찌르는 듯 날카롭게 입구 쪽을 바라 보았 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으로 다가가 도어 체인도 걸지 않 은 채 문을 열었다. "깨어 있으셨습니까?" 문 밖에는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가 서 있었다. "에구치 군…." 구로사와는 주저하지 않고 에구치를 들어오게 했다. "ㅡ들어오게." "죄송합니다, 이런 늦은 밤에." "아니야. 나는 상관없지만…. 무슨 일인가, 도대체." "아니, 좀 주인 아저씨가 걱정이 되어서…." 에구치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위에 놓인 찢겨진 표지 각본을 힐끗 보았다. "날 걱정해서? 하하하, 왜일까?" 구로사와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ㅡ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친 생각을 했나 봅니다." "아니, 괜찮아. 고맙네.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무튼 알겠네." "…." "그러나 걱정하지 말게. 그 4 년 전과 같은 볼쌍 사나운 흉 내는 두 번 내지 않을 테니. 맹세해도 좋네." "네ㅡ." "그러나 에구치 군. 자네에겐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나 는." "주인 아저씨…." "그 때 자네가 와 주지 않았다면 나도 미카를 쫓아 목숨 을 끊었을지도 몰라." "그런…." "에구치 군. 자네가 미카를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있네." "…."


"미카도 자네를 좋아했네. 그러나 그것은 친구로서였어. 유감이야, 정말 유감이다. 미카는 잘못 골랐던 거지, 사랑 할 상대를. 그런 사내 때문에 죽다니 미카는 너무나 어리 석은 실수를ㅡ." "주인 아저씨. 이 사건은ㅡ 세이꼬 양이 살해된 것은 미 카 양의 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의 집 안 싸움으로ㅡ."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이제야 안 거야." "네…?" "안 거라고. 왜 내가 저 새로운 극장에 '오페라의 유령' 을 올리려 했는지. 왜 그 배역에 미카의 동기생을 선택했 는지, 왜 그 극장에 미카의 그림을 장식하게 되었는지ㅡ. 모두 우연이 아냐. 이것은 운명이 만든 시나리오인 거야. 나는 분명 이렇게 될 것을 원하고 있었던 거야. 이 '오페라 극장 호텔'에 팬텀이 나타나 내 대신 복수해 줄 것을. 나는 위선자야…. 나는…." "그만 하세요, 주인 아저씨!" 에구치가 외쳤다. "미안하네.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은 없었어." 구로사와는 어깨를 움츠리며 안락 의자에 앉았다. "그만 가서 쉬게." "…네." 에구치는 가볍게 인사하고 발길을 돌렸다. "에구치 군." 방을 나가려는 에구치를 구로사와가 불러 세웠다. "ㅡ자네는 이 시간에 혼자서 내 방에 오다니, 무섭지 않 은가?" "왜 무섭습니까?" "내가 범인 ㅡ 팬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 나?" "주인 아저씨는 범인이 아닙니다. 게다가 범인이 죽이려 는 사람은 분명 그 극단 멤버입니다." "그런가…." "ㅡ주인 아저씨는 어떻습니까. 아까 제가 문을 노크했을 때 상대를 확인도 않고, 도어 체인도 걸지 않고서 그냥 열 으셨죠. 무섭지 않으셨던 겁니까? 만약 제가 팬텀이었다 면ㅡ." "에구치 군." "네…." "난 죽는 거라면 두렵지 않네." "…주인 아저씨." "만약 팬텀이 나의 증오가 낳은 괴물이라면 나는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정도라네." "…."


"목적을 달성하면 마지막으로 나를 죽여 달라고." 에구치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말 없이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구로사와의 방을 나갔다.』 6『김전일은 리오와 미유끼를 각자의 방까지 데려다 주고 돌 아와 혼자 복도의 창에 서서 새까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 었다. 혼자서 복도에 있는 것을 겐모치 경감이 봤다면 위험하 니까 방으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전 일은 방 안이라고 안전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밀실에서 그야말로 유령처럼 사라져 버린 팬텀의 악마 같 은 지혜로부터 도망치기에는 나무로 된 낡은 문 따위는 별 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밤 하늘에는 달도 별도 없었고 바다는 지옥 같은 암흑이 었다. 단지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호텔의 불빛과 절벽의 제 일 끝에 희미하게 떠 있는 도깨비 불 같은 빛 ㅡ 그 돌무 덤을 비추고 있을 야외 조명만이 왠지 두렵고 캄캄하기만 한 밤의 마력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주었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바람만이 아직 조금도 가라앉을 기 색이 없었다. 먼 곳에서 천둥이 치고 있는지 바람 소리가 마치 멀리서 개 짖는 소리처럼 울려 왔다. 그것만으로도 팬 텀의 기척을 지워 없애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김전일의 모습을 복도 구석에서 엿 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김전일의 방에 미유끼와 리오가 와 있을 때도 문 밖에 서 있었다. 몰래 안에서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 이면서. 그리고 미유끼와 리오를 각자의 방으로 배웅하고 자기 방 으로 돌아오는 김전일의 뒤를 몰래 따라 온 것이다. 김전일이 혼자인 것을 확인하자 그 그림자는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으로 김전일에게 다가갔다. 그림자는 스윽 하고 오른손을 들어 김전일의 어깨를 잡 았다. "ㅡ!" 김전일이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뒤 를 돌아보았다. "에, 에이사쿠 선생님!?" 어두운 복도에 올려다봐야 할만큼 키가 큰 에이사쿠가 서 있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김전일 군." "노, 놀란 정도가 아녜요. 명이 10 년 정도는 짧아졌다고 요. 정말이지…." 김전일은 휘청이며 벽에 기대섰다. "미안. 자네가 비명을 지를지 어떨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네." "농담하지 마세요. 그런 걸 시험하다니 뭐가 재미있습니 까? 만에 하나 제가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뛰쳐 나왔을 거예요." "그랬겠지. 하지만 난 자네가 비명을 지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네." "네?" "놀란다는 것과 비명을 지른다는 것은 다른 동기에서 생 기는 반응이라고 생각해. 놀라는 것은 예상치 않은 자극에 대한 반응에 지나치지 않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은 틀림없 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행위지. 이 경우 자네는 도 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왜냐하면 나는 단순히 자네의 어깨에 손을 얹은 것뿐이 었으니까. 살인범이라면 그런 신사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 았을 거야. 그것을 자네는 순식간에 판단하고 무의식중에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거지. 아, 정말 대단해. 과연 명탐정의 손자답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너무나 놀라서 목소리가 나 오지 않은 것뿐인데…. 하하…." "그건 그렇고 조금 전까지 자네 방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 두 사람, 자네는 어느 쪽 타입이 마음에 들지?" "어, 어떻게 그것을…?"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갔지. 그런데 모처럼 의 성적 교섭의 찬스를 뺐는 촌스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 아 밖에서 모양을 살피고 있었던 거라구." "그, 그런 악취미가…." "그런데, 어땠어? 두 사람 중 어느 쪽 하고 이제부터ㅡ. 아니, 아니면 두 사람 모두 데리고 동시에ㅡ." "자, 잠깐.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건. 생각이 지나 쳐요!" "그런가. 아깝군.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살인 사건 같은 상 황은 여성을 유혹하는 데 최고의, 그야말로 좀처럼 없는 기 회인데 말야." "네? 그렇습니까?" "그럼. 이런 실험이 있어. 불안정하게 매달린 다리와 단 단한 콘크리트로 된 다리 두 군데서 같은 방법으로 남성 이 여성에게 말을 거는 실험을 했을 때, 불안정한 다리 쪽 에 있는 여성이 말을 걸어 온 남성에게 호감을 갖는 비율 이 높았다고 해. 왠지 아나?" "아니요…. 전혀." "즉, 여성은 공포심 등에서 오는 흥분 상태를 성적 흥분 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야, 알겠나? 살 인 사건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ㅡ 아, 이런! 이런 말을 하 려고 온 게 아닌데 본론으로 들어갈까."


"…아, 네. 좋으실 대로." 에이사쿠의 페이스에 말려 멍해진 김전일이 말했다. "실은 조금 전에 발견된 세이꼬의 시체 말인데ㅡ." 가벼운 얘기를 할 때와 거의 다름없이 엷은 미소를 띤 체 에이사쿠는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ㅡ조금 이상한 점이 있어." "이상한 점이라고요?" 김전일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래. 세이꼬의 시체는 극장의 무대 한 가운데에 똑바로 앉은 상태로 상반신은 앞으로 숙이고, 더욱이 팔은 머리 앞 으로 뻗으려는 듯 가지런히 한 자세로 방치되어 있었어. 샹 들리에는 그 위에 떨어졌던 거야. 이건 조금 전 부검 결과 로서 들었지?"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그런데 그 때 그녀의 시체는 그 모습 그대로 상반신까 지 사후 경직이 되어 있었던 거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건 좀 이상해." "네? 어떤 점이 이상하죠? 저로선 확실히…." "좋아. 사후 경직이라는 것은 사망 후에 일어나는 근육의 경직으로 이것이 진행되면 시체는 죽었을 때의 자세 그대 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세이꼬의 유체의 경우, 계절이 여름인데다가 잠긴 극장 안 이어서 사후 경직은 꽤 빨리 진행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빨라. 상반신까지 경직되기까지에는 적어 도 2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거야." "잠깐만요. 세이꼬의 사망 추정시각은 오후 6 시부터 7 시 까지 사이였죠?" "그렇지." "그렇다면, 시체가 발견된 9 시 시점에서 보면 2 ~ 3 시간 경과한 것이 된다. 일단 계산은 맞지만…. 잠깐, 에이사쿠 선생님. 사후 경직이라는 건 시체를 움직였을 경우 어떻게 되는 거죠?" "무리하게 움직이면 경직은 풀려 버리는 거지." "음…. 그렇다면 확실히 이상하군요, 이건." "이해하겠나?" "네. 우리들이 'P'로부터의 예고장으로 생각이 미쳐 처 음 극장으로 달려갔던 것은 밤 7 시 반이었죠? 그 때는 극 장 무대 위에 시체가 없었다. 그리고 1 시간 반 후인 9 시, 같은 무대 위에서 세이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러면 계 산이 맞지 않아요. 에이사쿠 선생님, 1 시간 반이면 경직은 어디 정도까지 미칩니까?" "기껏해야 목이나 턱 정도지." "역시…. 그럼 역시 부자연스럽군요, 이 상황은. 사후 경직이 상반신까지 퍼지기 위해서는 최저 2 시간은


필요하다. 즉, 적어도 7 시 전에 시체는 '어떤 이유'로 인 해서 발견되었을 때의 모습, 즉 똑바로 앉아서 앞으로 구 부리고 있는 부자연스런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7 시 반에 나를 포함한 전원이 무대 위에 아무 것 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시체는 7 시 반부터 9 시 사 이에 무대 위로 옮겨진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 다. 그렇지만 시체를 섣불리 움직이면 사후 경직이 풀려 버 린다고 한다. 그렇죠, 선생님?" "그렇지." "요컨대 이런 거군요. ㅡ세이꼬는 살해된 후 우리에게 발 견되었을 때의 그 부자연스런 자세인 채로 어딘가에 놓여 있다가, 우리들이 무대를 처음 보러 간 7 시 반 이후에 그 대로의 모양으로 무대 위에 옮겨진 것이네요." "그런 거지. 김전일 군. 이 상황, 어떻게 생각하나? 자넨."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나도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자네에게 생각해 보라고 얘 기한 거라네. 어떤가, 자네의 추리로는?"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으으윽이예요." "…그런가. 뭐, 잘 생각해 보게나. 그럼, 김전일 군, 잘 자 게." 이렇게 말을 남기고 에이사쿠는 사뿐사뿐한 걸음 걸이로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홱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 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김전일은 외과 의사라는 이 장신의 사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이런 정보를 주는가 가 궁금해 졌다. 애초에 김전일은 에이사쿠가 어디의 누구며 어떤 경력의 소유자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니, 겐모치 경감조차도 그에 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에이사쿠도 에구치가 그런 것처럼 이번 살인 사 건의 깊숙한 곳에 숨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미카의 자 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런 이유로 이 호텔에 계속 신경을 쓰고, 김전일에게 이 같은 정보를 주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생각이야, 아무래도…."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김전일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고 있었다.』

제 5 막 - '필립 백작은 호수에서' 1『마치 짙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팬텀은 도취해 있었다. 아 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목 적을 달성하려는 의지만이 그를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써 온 시나리오였지만 이제야 이 페이 지를 넘길 수가 있게 되었다. 작은 계산 착오는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지금 생각하면 효과적으로 작용해 주었다. 오 히려 수수께끼와 공포를 불러 일으켰으니까. 모든 것은 예상 이상으로 잘 되고 있다. 복도의 부드러운 융단은 자신의 발소리를 삼켜 주고 있고, 바람의 격력한 신 음 소리가 앞으로 일어날 참극의 소리를 씻은 듯 지워 줄 것이다. 한밤중인데도 조금도 졸립지 않았다. 신경은 더욱 맑아지고 생각은 날카로워져 조금의 실수나 트러블 정도는 순간적인 기지로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팬텀은 첫 살인의 순간을 떠올렸다. 손에 흔적이 남지 않 도록 가죽 장갑을 끼고 굵은 밧줄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완 전히 카를롯타의 숨이 끊길 때까지 조이는 동안 줄이 살 에 파고들어 손바닥이 차갑게 마비되어 버렸었다. 그녀의 목에 감은 줄을 조이기 시작하자 긴장 때문이었 는지, 억눌려 있던 증오가 구역질처럼 올라 왔다. 그 탓으 로 힘이 너무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의 죽은 얼굴은 보라 색으로 부어 입에서 혀가 삐져 나와 있는 꼴을 하고 있었 다. 그러나 뒤처리는 완벽했고 증거는 무엇 하나도남지 않 을 것이다. 이번에도 그 때처럼 잘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이번에는 남자다. 카를롯타처럼 간단히 죽으리라 고는 볼 수 없다. 만약을 위해서 칼도 지니고 있지만 찌를 때 피가 튀어 옷이나 몸에 묻을 가능성도 있으니 되도록 이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팬텀은 목적한 방문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했다. 미리 전화로 깨워 놓 았으므로 세게 노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방의 사 람들이 듣게 되면 사정도 곤란해지고…." 곧 문이 조금 열리고 필립 백작이 얼굴을 내밀었다. 보통 때보다 얼굴 색이 좋지 않다. 팬텀의 얼굴을 보자 그 는 조금 경계하면서도 도어 체인을 풀고 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필립 백작이 뭔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얘기하면서 팬 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순간을 팬텀은 놓치지 않았다. 카를롯타를 죽인 것과 같은 밧줄을 손바닥에 감으면서 잽 싸게 다가갔다. 줄 중간 정도를 필립 백작의 목에 걸고 팔 을 교차시켰다. "ㅡ!" 팬텀은 그대로 필립 백작을 밀어 넘어뜨리고 말을 타듯 올라타 끈을 조여 올렸다. 필립 백작은 목을 뒤틀어 팬텀을 보았다. 왜 나를 죽이지?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팬 텀은 끈에 더욱 힘을 주는 것돠 동시에 얼굴을 필립 백작 에게 가까이 대고 그 대답을 살짝 가르쳐 주었다. 필립 백작의 핏발 선 눈이 공포와 후회로 커졌다. "…!" 그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버둥버둥 움직였다. 하나 그것조 차 팬텀의 무릎에 눌려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 손은 목 으로 파고들어 오는 끈을 잡아 벗기려고 있는 힘을 다해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저항도 소용없이 그의 목은 벌의 배처럼 잘 록해지고, 얼굴 색은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물들어 갔다. 그렇게 해서 5 분쯤 지났을까. 필립 백작의 전신에서 전지 가 떨어진 것처럼 힘이 빠졌다. 그러나 팬텀은 계속해서 더 욱 힘을 주었다. 앞으로, 2 분, 아니, 3 분만.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ㅡ 그대로 5 분 정도나 더 조인 뒤에야 팬텀은 손의 힘을 풀 었다. 그리고 짓누르고 있는 백작의 등에 귀를 댔다. 필립 백작의 심장은 이미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팬텀은 호흡을 가다듬고 정지해 있었다. "힘든 건 이제부터다." 속삭이듯이 중얼거리고 팬텀은 방의 불을 껐다.』 2『김전일은 폭풍 속에 있었다. 그곳은 2 층 창에서 보이는 벼랑의 맨 끝이었다. 어둠 속에 어른 키 정도의 돌무덤이 푸르스름한 정원등 의 불빛을 받으며 서 있다. 그것은 미카의 무덤이었다. 비바람은 갈수록 격렬해져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을 정도 였다. 김전일은 슬슬 호텔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비 옷의 후드를 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그 때였다. 뒤쪽에서 바람 소리에 신음소리가 섞여 들려 왔다. 김전일은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곳은 절벽 끝이니까 신음소리가 들 려 온 쪽은 사람이 숨을 만한 공간이 있을 리 없는 것이 다. 그렇다면 저 묘비 뒤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김전일은 묘비로 다가갔다. 뒤를 들여다 보았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안심하고 돌아가려고 돌아섰다. 순간, 뭔가 단단한 벽 같 은 것에 부딪쳐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찐 채로 김전일은 그 벽을 올려다 보았다. "ㅡ!" 그것은 온통 시커먼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모양을 한


'어떤 것'이었다. 검은 망토로 거대한 육체를 덮어 쓴 인간은 기묘한 가면 을 쓰고 있었다. 무기질의 가면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며 핏 발 선 눈만이 그 안에서 묘하게도 생기 있게 꿈들거렸다. "팬텀…?" 김전일은 입술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팬텀은 김전일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 손을 김전일의 목에 천천히 감았다. 김전일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이미 팬텀이 마음먹은 대로 맡기고 있을 뿐이다. 팬텀의 입이 싱긋하고 초생달 모양으로 벌어지더니 목을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악!" 김전일은 필사적으로 팬텀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비틀었 다. 다시 움켜잡으려는 유령의 손아귀를 뿌리치기 위해 김전 일은 묘비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이었다. 팍! 묘비 밑의 흙이 돌연 솟아 올라 썩어서 반쯤 백골이 된 인간의 손이 튀어 나왔다. "우와 ㅡ앗!" 김전일은 벌떡 일어났다. 그곳은 침대 위였다. 벌써 아침이 되어 창문 커튼 사이로 햇빛이 옅게 비치고 있다.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켜 세워 창 밖을 보자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꿈…인가?"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심장은 헤비메탈의 베이스 드럼 처럼 8 비트로 두근거렸고, 입안은 바삭바삭했다. 삼킬 침조 차 없었다. "이런 꿈을…. 정말이지…." 김전일은 악몽의 찌꺼기를 털어 버리려고 두세 번 머리 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빠져 나 와, 땀에 젖은 T 셔츠를 벗어 던졌다. 대충 옷을 갈아 입은 후 방에서 복도로 나오자마자 구로사와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김전일 군." "아, 주인 아저씨…. 안녕하세요…." 눈을 부비며 대답하는 김전일에게 구로사와는 미소를 지 었다. "이제 식사 준비가 되었을 테니 식당으로 모여 주십시오." 무리하게 쥐어짜는 듯한 피곤한 미소였다. 당연하다. 어제 여기서 살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호텔에 있는 사람은 분명 모두 느른하게 지쳐 빠졌을 것이다. 아마 범인조차도.


"주인 아저씨, 전화는 됩니까?" 김전일이 물었다. "아뇨, 유감스럽게도. 호텔 전화 교환실의 회선이 칼 같 은 것으로 잘린 걸 발견해 연결해 보았지만 역시ㅡ." "안됐습니까?" "네. 아무래도. 딴 데도 잘린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전화 불통은 범인의 짓이었다. 주도면밀한 범인의 짓 이다. 분명 다른 곳에도 몇 군데에 걸쳐 회선을 절단해 두 었으리라. 전화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아무래도 단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순항 요트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 계통이 고장은 아 마추어의 손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서 역시 정기 순회선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정기 순회선이 오는 것은 내일 낮쯤이다. 그때까지는 정 체불명의 살인자와 함께 이 외딴섬의 호텔에서 지내야만 되는 것이다. "ㅡ미유끼는 일어났습니까?" 김전일은 불안감을 얼버무리려고 화제를 바꾸었다. "아뇨, 아직입니다. 겐모치 경감은 일어났습니다만." "그럼, 제가 미유끼 녀석을 깨워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구로사와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3『"미유끼ㅡ 일어나ㅡ." 미유끼의 방문을 두드리면서 김전일은 아이들이 친구를 부르듯이 일부러 길게 늘여 미유끼를 불렀다. "일어났어." 삐진 목소리로 미유끼가 대답했다. "그럼, 빨리 나와. 밥 다 되었으니까." "난 샤워하고 갈 거야. 김전일 먼저 가지 그래. 리오 양 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뭐야, 그건. 쳇, 마음대로 해." 혀를 차고서 김전일은 방문 앞을 떠났다. "정말. 언제까지 어이없는 질투나 하고." 이렇게 혼잣말을 했지만 내심 싫은 것만도 아니었다. "질투라. 헤헤…." 급기야 칠칠치 못하게 입이 벌어졌다. 김전일과 미유끼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김전일과 미유끼의 사이가 좋다는 것이 7 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까지 꼽 혔다. 슈퍼 열등생인 김전일과 우등생인데다가 학교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미인으로 평가받는 미유끼. 너무나 어울리 지 않는 두 사람이 언네자 함께 있는 것은, 단순히 소꿉친


구라는 지겨운 인연 때문일 거라고 남학생들은 모두 그렇 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김전일은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미유끼를 이 성으로서 의식해 왔다. 최근에는 미유끼와 단둘이 외출할 때는 이빨도 제대로 닦 고 팬티도 갈아 입었다. 미유끼에게 잔소리를 듣고 머리도 일 주일에 한 번은 감기로 했다. 그러나 미유끼 쪽은 국민하교 때와 마찬가지로 눈 둘 곳 을 찾기 어렵게 탱크탑과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김전일의 방에 놀러 와서는 부모님이 잠든 뒤에도 방에 남아 있으 니 참기 어려웠다. 미유끼가 돌아간 후 혼자 남은 김전일의 방에 있는 티슈 가 눈에 띄게 줄어 버리곤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에게 는 "또 여름 감기에 걸렸다"고 변명하는 자신이 처량할 수 밖에 없었다. 미유끼 쪽은 어떨까. "뭐, 단지 소꼽 친구라면 질투할 리가 없잖아, 보통은, 음 음…." 혼자 상상하고 있는데, 겐모치 경감이 당황해 부산을 떨 며 김전일을 불렀다. "김전일! 이봐, 어디 있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나고 겐모치 경감과 구로 사와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 왜요? 아저씨." "왜고 뭐고 김전일, 이걸 봐!" 그렇게 말하고 겐모치 경감은 작은 종이 조각을 김전일 코밑으로 내밀었다. "이, 이건." 종이조각에는 워드프로세서로 이렇게 쳐 있었다. '필립 백작은 호수에 빠졌다.ㅡ P' 김전일은 겐모치로부터 종이 조각을 낚아채더니 소리쳤 다. "뭐야, 이거! 도대체 어디서 났죠?" "내 의자에 놓여 있었어. 어떻게 생각해, 김전일? 설마 또 누가ㅡ." "주인 아저씨!" 김전일. 목소리가 날카롭다. "아, 네." "필립 백작이라면 '오페라의 유령'의 등장인물이죠?" "그렇습니다. 필립은 유령을 쫓아서 지하 수로로 침입하 려다가 호수에ㅡ." "빠지는 거죠?"


"네." "그 역할은 누가 할 예정이었죠?" "유키오 군입니다. 하, 하지만 설마…." 구로사와가 말했을 때 복도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악! 김전일!" "미유끼다!" 말하는 것과 동시에 김전일은 뛰어가고 있었다. "미유끼! 괜찮아?!" 잠겨진 나무 문에 세 사람이 급한 대로 몸을 부딪쳐 댔 다.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샤워 소리를 듣고 김전 일이 목욕탕으로 뛰어 들었다. 목욕탕은 새빨갰다. 피비린내가 가득 차 있었다. 차 오른 수증기 속에 미유끼가 반 나체로 웅크리고 있었 다. "미, 미유끼…." 김전일의 머리 속에서 최악의 연상이 스쳐지나 갔다. 그 순간, "김전일!" 미유끼에게 소리치며 타올 한 장만 두른 모습으로 김전일 에게 안겨 들었다. "미유끼, 상처는ㅡ." 김전일은 그렇게 말을 걸다 세차게 뿜어 나오는 샤워기를 본 순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 춰 서 버렸다. "피다…. 피의 샤워다…." 피가 섞여 새빨간 물이 샤워 꼭지로부터 뿜어 나오고 있 는 것이었다. "급수 탱크…." 김전일이 헛소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멍하니 서 있던 구로사와의 어깨를 흔들며 김전일은 외 쳤다. "주인 아저씨! 급수 탱크는 어딥니까!"』 4『'오페라 극장 호텔'을 내려다 보는 작은 언덕 위에 그것 은 있었다. 이 오래된 호텔을 개조할 때 샤워의 수압을 높 이기 위해 만든 객실 전용 급수 설비로서 호텔의 종업원 들은 그것을 제 2 급수 탱크라고 불렀다. 콘크리트로 다져진 지면에서 직경 2 미터, 높이 1 미터 정 도의 철 탱크가 튀어 나와 있었다. 지면을 파 내려가 거기 에 대형 수조를 묻은 것이다. 구로사와가 사닥다리에 발을 올려 힘차게 수조 위로 올 라갔다. 잠수함의 해치처럼 생긴 뚜껑 윗부분에 달린, 링 모양의 무쇠 핸들을 양 손으로 힘껏 돌리자 뚜껑이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회중 전등을 든 겐모치 경감의 뒤를 따라 김전일도 수조 위로 기어 올랐다. 뻐끔히 열린 구멍을 들여다 보며 회중 전등을 켰다. "윽…!" 김전일은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돌렸다. 회중 전등 빛이 오렌지 색 셔츠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유키오 군…. 이럴 수가…." 구로사와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양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빨갛게 물들이면서 물가로 떠밀려 온 죽은 물고기처럼 흔 들흔들 떠돌고 있었다. 구로사와와 김전일의 손을 빌려 시체를 끌어 올리고 난 후 겐모치 경감은 분노를 삼켰다. " '필립 백작은 호수에 빠졌다'ㅡ인가? 왜 또 범인은 이 런 힘든 짓거리를 한 거지? 연극 스토리를 흉내 내 사람 을 죽이는 게 뭐가 재밌나! 제길!" "놈은 일부러 이런 곳까지 시체를 옮겨 온 거야. 단지 협 박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어.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 다. 이 비유에는…." 김전일은 유키오의 참혹한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곧 의사 에이사쿠가 불려 와 검시가 행해졌다. 에이사쿠가 검시하는 동안에 살해된 세이꼬와 유키오를 뺀 전원을 식당에 집합시켰다. 검시는 1 시간 정도로 끝나 그 결과가 김전일과 겐모치 경 감 두 사람에게만 알려졌다. 보고에 의하면 사망 추정 시각은 오전 1 시부터 오전 4 시 사이인 듯. 사인은 교살로 물탱크의 피는 죽은 뒤 생긴 목 과 흉부의 칼 자국으로부터 서서히 흘러나온 것으로 생각 되었다. "ㅡ즉, 그 시체의 상처는 살해된 후에 생긴 것이란 말입 니까?" 겐모치 경감이 묻자 에이사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겁니다. 상처에 생활 반응이 없으니까." "생활 반응?" 김전일이 묻자 겐모치 경감이 대답했다. "그래. 살아 있을 때 생긴 상처는 주위가 부어 오르게 돼. 그런데 그 시체의 상처는 그게 없다는 거지. 하지만 그거 이상한 얘기군. 어째서 시체에 상처를 만든 거냔 말야? 그 렇게 유키오가 미웠던 건가?"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김전일이 말했다. "응? 그럼 뭐지, 김전일."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아마 범인은 시체를 빨리 발견


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저렇게 시체를 난도질해 상 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수도를 통해 호텔 어딘 가로 뿜어 나온다. 게다가 그 '필립 백작은 호수에ㅡ'라는 예고장이 더해지면 물탱크에 유키오의 시체가 있을 거라고 곧 상상 이 되지 않습니까?" "으음…. 그런데 김전일, 범인은 왜 또 시체를 빨리 발견 시키고 싶어했을까? 보통 살인범은 시체가 발견되기를 늦 추려고 궁리하는 게 정상인데." "연극의 막이 내일 낮에는 내려지기 때문이겠지요." "뭐?" "내일 순회선이 올 때까지 놈은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 겠죠. 이 살인극의 전부를ㅡ."』 5『식당에 모인 전원에게 겐모치 경감이 시체의 상황을 간 단하게 설명했다. 그 사이 김전일은 전원의 표정을 관찰했 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발겨하지 못했다. 각자 겁에 질린 듯이 몸을 움츠리고 남의 흠을 찾아내려 는 듯이 주위를 쳐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리오만은 공포심보다 호기심이 컸는지 김전일과 겐모치 경감 못지 않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용의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잠시 후 테이블에 막 끓인 홍차가 날라져 왔다. 그러나 아 무도 입에 대려고 안했다. "드시죠." 구로사와가 작은 소리로 권하자 노죠가 잔 속에 든 것을 재떨이에 버렸다. "이렇게 기분 나쁜 걸 마실 수 있겠어요.? 시체가 들어 있 던 수조에서 나온 물로 끓였을 것 아닙니까!" "그만 좀 해 둬, 너!" 겐모치 경감이 노죠의 목덜미를 움켜 잡았다. 겐모치 경감이 화를 내자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구로사 와가 끼여 들었다. "노죠 군. 마시고 싶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좋지만 이 홍차는 안전해. 유키오 군의 시체는 객실 전용의 물탱크에 빠져 있었고 주방의 물과 온수는 그전부터 있던 옥상의 물 탱크에서 끌어 오는 거다." 구로사와는 다른 멤버들을 둘러 보며 말했다. "ㅡ그러니 모두 안심하고 마셔 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그런 말을 들어도 선뜻 잔을 손에 잡는 사 람은 없었다. 사건 직후라 왠지 기분이 나빠 마실 기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더니 노죠가 야유를 보냈다. "아무도 마시고 싶지 않은 것 같구만요, 선생. 뭐, 그게 현 명할 거야. 유키오의 피는 안 섞여 있어도 대신 독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니까."


"잘 마시겠습니다, 주인 아저씨." 김전일이 노죠의 말을 자르고, 잔을 들어 호박색 액체에 입을 댔다. "쳇,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위선자뿐이잖아!" 노죠는 그것을 보고 입을 일그러뜨리며 내뱉었다. 그런 노죠를 옆 눈으로 째려 보면서 겐모치 경감은 수첩 을 꺼냈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의 어젯밤 알리바이에 대해 묻겠 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1 시간 정도로 질문은 끝났다. 성과는 없었다. 오전 1 시부 터 4 시 사이는 모두 알리바이가 없었다. 자고 있었다는 사 람과 자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는 사람밖에 없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없다. 어젯밤은 밤새도록 폭풍이 불어서 무리는 아니다. "경감님." 조사가 잠시 멈췄을 때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가 말 했다. "ㅡ실은 좀 생각난 게 있습니다만." "뭐지, 말해 봐." "네.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기 전에 급탕실로 포트의 물 을 부으러 갔었습니다. 그랬더니 105 호실의 포트가ㅡ." "105 호? 유키오의 방이잖아?" "네. 그 유키오 씨 방 포트가 급탕실 바닥에 나뒹굴어 주 위가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역시. 그럼, 이런 게 아닐까요?" 리오가 앞지르듯 말 참견을 했다. "유키오 씨는 한밤중에 포트에 물을 받으러 급탕실에 갔 던 거예요. 봐요, 그가 있던 105 호실은 급탕실 바로 옆이잖 아요? 그러니까 물을 담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라 방심하 고서 안전한 방에서 살인귀가 방황하는 복도로 나온 거예 요. 그 때 팬텀이 덮쳐서 목을 조였다. 그리고 그 뒤 유키오 씨를 업어 언덕 위의 물탱크까지 날 라다 놓고 세이꼬 양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의 짓거리로 보 이기 위해 물탱크에 던져 넣었다. ㅡ어때, 김전일 씨. 이 추 리." 리오의 요염한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며 김전일이 말했다. "글세. 범인의 목적이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 할 수도 있으니까." "네? 무슨 말이죠?"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녜요." 김전일이 말을 흐리자 리오는 원망스럽게 삐죽거리며 입 을 다물었다.』


6『가볍게 식사를 끝내자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구로사와는 식사 후 뒷정리를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시체 가 있던 물탱크의 물을 빼러 밖으로 나갔다. 아르바이트 학 생인 에구치도 다시 한 번 전화선이 절단된 곳을 찾으러 간다며 밖으로 나갔다. 김전일은 오늘 아침에 꾼 꿈에 이끌려 절벽 끝에 있는 미 카의 무덤으로 혼자 발을 옮겼다. 안개가 낀 좁은 길을 따라 가자 2, 3 분 만에 돌무덤이 나 왔다. 그곳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에구치 씨 아닙니까?" 갑자기 뒤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깜짝 놀란 에구치 가 돌아보았다. "…아, 김전일 씨." 안심한 듯 웃는 얼굴이었다. 김전일은 가까이 다가가며 떠 보듯이 말했다. "전화선을 보러 간 게 아니었습니까?" "네,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이곳으로 발길이 와 서…." "그렇습니까." 김전일은 화제를 바꿨다. "ㅡ에구치 씨, 그 죽은 미카라는 여자 어떤 사람이었습니 까?" 에구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틀리에로 안내하죠." "아틀리에?" "네. 미카 양의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아틀리에는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걸어서 5 분 정도 면 도착할 언덕 위에 있었다. 에구치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은 구로사와가 일부러 화 가인 마쿠베의 작업실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통나무로 짜 맞춘 수수하게 지은 작은 단층이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마스크와 물안경을 쓴 마쿠베가 얼 굴을 내밀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마쿠베의 모습에 김전 일은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에구치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끄덕이고 척척 아틀리에 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쿠베는 에구치와 김전일을 안으로 맞아들이고는 곧 캔 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김전일이 마쿠베에게 인사했다. 마쿠베는 보지 않고 약간 고개만 끄덕이고 그대로 캔버스 위에 화필을 움직여 나갔다.


그의 표정은 예의 이상한 안경과 마스크에 덮여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스크의 입매가 실룩실룩 움직이는 것 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지나는 김에 마쿠베가 그리는 그림을 훔쳐본 김전일은 왠 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 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사이도 없이 벽 한 면을 덮 다시피한 무수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 왔다. "이것이 미카 양이었습니다." 에구치가 이렇게 말하고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사랑스 럽게 올려다 보았다. 아틀리에 벽을 가득 메운 그림. 그것들은 모두 한 소녀의 짧은 인생을 추억한 아름다운 그림책이었다. 아직 아주 어렸을 때의 초상에서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 을 갖기 시작한 소녀 시절, 그리고 어린 껍질을 벗고 성인 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던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미카의 짧은 일생을 그곳은 얘기하고 있었다. 그림 속 소녀의 눈동자는 그야말로 맑게 빛나며 순진무 구했다. 평범한 소녀이기도 하고 비범한 여배우기도 한, 언 뜻 모순된 자질이 그 인상적인 눈동자 속에 분명히 동시 에 담겨 있었다. "나는 미카 양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에구치는 벽의 가운데쯤 장식되어 있 는 한 장의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미카와 노죠 의 그림이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았을 때로 환히 미소 를 띠우면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ㅡ그래서 이 남자는 용서할 수 없었죠. 팬텀은 세이꼬 양 과 유키오 씨가 아니라 이 남자를 제일 먼저 죽였어야만 했어요!" 에구치는 이렇게 내뱉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혼자서 아틀리에를 나갔다.』 7『겐모치경감과 김전일은 식당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있었 다. 가끔 어느 쪽인가 짧은 단어를 내놓고는 곧 다시 침묵 에 빠진다. 이럭저럭 2 시간 가깝게 그렇게 계속 반복하고 있다. 미유끼는 따분하다면서 주방에서 설거지를 돕고 있었다. "이봐, 김전일. 조금 전 거 말인데." 겐모치 경감이 물었다. "조금 전 거라뇨?" "리오에게 말한 것 말야. 유키오가 급탕실에서 살해되지 않았을까라고 리오가 말했더니 자네가 그렇게 보이려는 것 이 범인의 목적이라고ㅡ." "아, 그거. 뭐, 단순히 물 받는 급탕실을 범행 장소로 생


각하기에는 좀 어색해서요." "어색하다?" "ㅡ범인은 시체에서 피가 흘러 나오게 만들어 시체가 사 람들에게 빨리 발견되도록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은 전에 말했죠?" "응. 그게 어떻다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러면?" "그러니까, 뭐가?" "급탕실과 유키오의 방의 위치 말이죠. 유키오의 방이 2 층 끝이라면 모르지만 그가 있던 105 호실은 급탕실 바로 앞이 예요. 그런데 범인은 왜 언덕 위의 물탱크까지 시체를 일 부러 옮겼을까요?" "그건 예의 '오페라의 유령' 스토리에 맞추기 위해서 아 냐?" "그렇다면 유키오의 방 욕실에 던져 놓으면 되죠. 그 쪽 이 발견도 더 빠를 테고." "음, 역시…. 어째서 범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제 생각에는 범행은 반대로 객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가 싶어요. 그것을 숨기려고 범행 현장을 급탕실로 보이게 꾸미고 일부러 먼 물탱크까지 시체를 옮긴 게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그건?" "이런 거죠. 범인은 어떤 방법으로 유키오의 방에 침입해 서 녀석을 죽였다. 그러나 그것이 알려지면 혼자 방에 들 어 박혀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긴다. 그게 범인에게 불리했던 거죠. 방안에서 살해된 것보다는 급탕실에서 당했다는 쪽이 심 리적으로 다소 안심이 되잖아요? 남은 사람들에게 '지금까 지와 같이 방에 틀어 박혀 위험한 장소에만 안 가면 괜찮 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그, 그렇다면, 설마…." "아아, 아저씨. 팬텀의 사냥감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릅 니다. 놈은 또 밤이 되어 '제 3 의 먹이'가 혼자 떨어져 있 을 찬스를 지금도 계속 기다릴 겁니다." "이런 일이…." "아무튼 오늘밤이 승부입니다. 밤이 되면 식당이든 어디 든 모두 모아 놓고 오늘밤만 무사히 보내면 다음 날엔 배 가 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창 밖을 바라 보았다. 밖은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비도 바람도 완전히 멎어 있 었지만, 바닥에 스며든 빗물이 30 도가 넘는 더위 때문에 짙 은 안개로 피어오른 것이다. 갑자기 김전일은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오늘밤…? 정말 그럴까, 팬텀의 먹이를 밤에만 노린다고 할 수 있을까?"


겐모치 경감의 말에 그 생각이 끊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말야, 김전일." "ㅡ에?" "그 팬텀이라는 자식은 어째서 또 유키오 같은 사람을 죽 였을까? 세이꼬야 부자에 제멋대로인 아가씨라 누군가의 원한을 샀다든가, 금전에 얽힌 트러블에 휘말렸다던가 하 는 살해 동기가 몇 가지 상상되지만 유키오는 도무지…. 돈 도 없고 성질도 없이, 노죠와 아쯔시의 졸개에 불과한 남자 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 거라고 생각해? 혹시 범인의 정체를 우연히 알았기 때문에 살해됐을까ㅡ." "틀려요. 이 사건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면밀하게 계획 된 연속 살인입니다. 팬텀은 처음부터 세이꼬 다음으로 유 키오를 죽일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예고 장까지 준비해 둘 다 연극의 역할에 맞춰서 죽이는 식의 연출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음, 그렇게 말하니 그렇기도 하군. 하지만 유키오는 왜ㅡ." "글쎄…. 하지만 동기는 분명 '세이꼬의 살인'과 마찬가지 가 아닐까요. 즉, 달리 생각해 보면 세이꼬와 유키오는 둘 이서 '범인의 증오를 살 만한 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되 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김전일은 구로사와로부터 들은 그의 딸, 미카의 자살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기괴한 살인 사건 속의 동기는 역시 4 년 전 미카의 자 살에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히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력한 용의자가 한 사람 떠오른다. 말할 필요 도 없이 구로사와 주인 아저씨다. 그러나 그에게도 '세이 꼬 살인'에 대해서는 다른 멤버와 마찬가지로 완벽에 가 까운 알리바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ㅡ. "세이꼬는 그렇다 치고 유키오까지 미카의 '실연 자살' 에 관련됐다고 할 순 없는데…. 오히려 관계가 있다면 노 죠 쪽ㅡ 잠깐? 설마, 다음으로 팬텀이 노리는 것은…." 김전일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억누르며 겐모치 경감에게 물었다. "아저씨, 노죠의 방은 몇 호실이죠?" "? 그게… 어디더라ㅡ." 수첩을 꺼내려는 겐모치 경감을 그대로 두고 김전일은 복 도로 뛰쳐 나갔다. 그는 제일 앞에 있는 101 호실의 문을 마구 두들겼다. "문 열어요! 김전일입니다!" 문이 열리고 리오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김전일 씨. 왜 그래요?" "알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 뭐를?


"노죠 씨의 방ㅡ 그래,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가 '오페라 의 유령'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죠?" "배역? 헤로인의 연인 역인 샤니 자작인데." "그것만이 아니죠? 단 5 명의 배우로 '오페라의 유령'을 하려는 거니까 한 사람이 몇 가지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텐데요." 가극 '오페라의 유령'의 각본은 이미 김전일이 다니던 고 등학교의 연극부가 여기서 합숙했을 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 '그 때'도 연극의 스토리대로 친구들이 살해되었다. 분명히 극중에서는 "세 명" 의 등장 인물이 팬텀의 손에 걸려 생명을 잃게 되어 있다. 한 사람은 샹들리에 밑에 깔려 죽는 오페라 가수인 '카 를롯타', 또 한 사람은 물 속에 끌려 들어 가는 '필립 백 작',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ㅡ." "어떤 역할입니까, 노죠 씨가 할 예정이었던 또 한 가지 배역은!" "오페라 극장의 도구 주임인 조셉 뷰케예요. 팬텀에게 목 졸려 죽는…앗!" 리오는 숨을 삼켰다. "그거다! 리오 양, 노죠의 방이 어디죠!?" "음…. 분명히 복도 반대쪽이라고…." "알았어, 김전일. 108 호실이닷!" 그 때 겐모치 경감이 수첩을 덮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가요, 아저씨! 어쩌면 다음에 팬텀이 노리는 것은 노죠 일지도 모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전일은 복도를 달려 나가고 있 었다.』 8『팬텀은 짙은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잔디가 난 지면을 골 라 구두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천천히. 다행이 이곳까지의 길은 모두 잔디와 콘크리트 징검돌이 있어서 구두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았다.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계속이 조금 변경되긴 했 어도 큰일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유키오의 시체가 발견된 후 모두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 가 줄 것이지 어떨지는 팬텀에게도 모험이었다. 날씨도 회 복되어 버렸고, 이대로 내일 점심 때까지 식당에 모여서 지 내게 되면 계획은 좌절된다. 조금이라도 그 위험을 줄이려고 살해 현장을 급탕실로 꾸 며 보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계획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를 위한 또 다른 시나리오도 준비되었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 '오 페라 극장 호텔'에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그 절벽의 돌무덤 밑에 혼자 쓸쓸히 잠들어 있는 '미카'


에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자들의 처참한 단말마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ㅡ. 거의 한잠도 안 잤는데도 팬텀의 눈은 이상한 흥분과 긴 장에 야생 동물처럼 강하기 빛났다. 그 눈으로 팬텀은 경 계의 끈을 팽팽히 당기면서 천천히 "목적지" 로 걸어갔다. 팬텀은 두 손에 장갑을 끼고 극장의 건축 현장에서 들고 온 커다란 콘크리트 블록을 쥐고 있었다. 팬텀은 어느 방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크게 숨 을 들이쉬었다. 이제 곧.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난다…. 팬텀은 블록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있는 힘을 다해 눈 앞의 창 ㅡ 노죠의 유리창을 향해 던졌다.』

제 6 막 - '조셉 뷰케는 목 매달려' 1『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김전일과 겐모치 경감은 식당에서 볼 때 1 층 안쪽에 있 는 노죠의 방으로 가던 중이었다. "김전일, 지금 이 소리!" 겐모치 경감은 순간 발을 멈추고 소리쳤다. "노죠의 방 쪽이에요. 서둘러요, 아저씨!"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전력으로 달려갔다. 코너를 돌자 신음 소리라고도 비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난폭하게 열렸다. "ㅡ!" 굴러 나오듯이 튀어 나온 것은 노죠였다. "노죠!" 그렇게 외치고 겐모치 경감이 달려 들어 웅크린 노죠를 도와 일으켰다. 노죠는 전신을 경련하듯 떨며 목이 찢어질 만큼 심하게 기침을 했다. 붙잡힌 어깨에서는 피가 배어 나 왔다. 김전일은 노죠의 모습을 곁눈으로 보면서 문이 젖혀 있 는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카페트 한쪽에 부서진 유리가 흩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쯤에 커다란 콘크리트 블록과 얼음 송곳처럼 가는 칼이 뒹 굴었다. 창은 나무 창살이 산산히 날아가 버려 제 모양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유리창은 여유 있게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 을 정도로 뻥 뚫려 짙은 안개가 흘러 들어왔다. 김전일은 일단 발을 멈추고 방안을 신중하게 둘러 보았 다. 침대 뒤, 테이블 밑, 소파 뒤. 누군가 숨어 있는 사람


은 없을까. 가면 쓴 괴인이 검은 망토를 바람에 날리며 갑 자기 덤비진 않을까…."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은 방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심 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 다. 김전일은 창가로 다가가 바깥의 동태를 살피면서 과감하 게 부서진 창 사이로 목을 내밀었다. "ㅡ!" 팬텀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눈에 들어온 건 짙은 안개가 가득 찬 환상적인 정원의 풍 경뿐이었다. 휴우 한숨을 쉬며 김전일은 땅바닥을 보았다. "응? 저건ㅡ." 창 밑 잔디 이에 검은 가죽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깨진 유리에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김전일은 갈라진 유 리창 틈으로 빠져 나갔다. 지문이 묻지 않도록 살짝 지갑 을 주워 들자 동전 넣는 부분이 열려 있는지 후드득하고 내용물이 땅바닥으로 흩어졌다. 10 원 짜리 세 개와 100 원 짜리 두 개. 작게 접은 은행 인 출 명세서. 그리고 열쇠 고리에 끼워 놓은 열쇠 두 개. 하 나는 '도요타'라고 새겨진 자동차 키이고 또 하나는 사물 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은색의 작은 열쇠였다. 나머지는 직경 3 센티 정도의 거북등 모양의 단추. 아마 떨어져서 잃 어 버리지 않으려고 지갑에 넣어 둔 걸 거다. 김전일은 그 중에서 은행 명세서를 주워 들고 펼쳐 보았 다. '계좌명, 아쯔시' 한쪽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순간 김전일의 머리 틈에서 작은, 그야말로 작은 의문의 씨앗이 생겼다. 그 씨앗은 김전일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하나 하나 줍는 동안에 점차 싹을 틔워 벌써 가는 줄기를 쳐들고 있었다. "어이, 김전일. 노죠는 무사해! 어깨에 칼이 스친 것뿐이 다. 목도 졸렸던 것 같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어." 창에서 얼굴을 내밀고 소리치는 겐모치 경감의 말조차 귀 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전일은 지문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 지 않고 아쯔시의 물건이라 짐작되는 검은 지갑을 뒤집어 서 내용물을 잔디 위에 쏟아 놓았다. "어이, 김전일, 듣고 있어? 노죠는 무사하다구. 갑자기 창 으로 블록이 날아 들더니 연극에서 쓰는 팬텀 가면으로 얼 굴을 가린 놈이 뛰어 들었대. 노죠는 얼굴은 못 봤다고 하 지만 꽤 몸 싸움을 한 듯하니까 어쩌면 방에 뭔가 범인의 유류품이ㅡ 응? 김전일, 너 뭐 하는 거야? 뭐야, 그 지갑 은…?"


"이 창 밑에 떨어져 있었어요. 분명 아쯔시 걸 거예요." 김전일은 바닥에 흩어진 내용물을 천천히 지갑 속으로 다 시 넣었다. "뭐, 뭐라고! 그럼, 범인은ㅡ." "…일단 아쯔시의 방으로 가 보죠."』 2『"이봐, 아쯔시! 문 열어!" 겐모치 경감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외 쳤다. 그 말하는 투로 보아 겐모치 경감은 이미 아쯔시가 범인이라고 거의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이봐, 문을 부술 테야! 김전일, 도와 줘." 그렇게 말하자마자 겐모치 경감은 혼자서 문에 몸을 부 딪치기 시작했다. 180 센티미터가 넘는 겐모치 경감이 정 면으로 부딪친 구식 문짝의 약한 자물쇠는 김전일의 도움 도 필요 없이 눈 깜작할 사이에 튕겨 날아갔다. "ㅡ!"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창은 열린 채이다. 책상 위에는 아쯔시가 언제나 갖고 다니는 워드프로세서가 스위치가 켜 진 채 있었다. "제길, 도망쳤어!" 이렇게 내뱉으며 겐모치 경감은 열린 창을 통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어느 사이엔가 미유끼, 리오와 의사인 에 이사쿠, 그리고 에구치 등 종업원들도 모여들었다. 뒤이어 마스크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마쿠베가 보이고, 마지막으로 구로사와가 나타난 걸 보고 김전일이 말했다. "팬텀이 나왔습니다." 김전일은 책상 위의 워드프로세서로 다가갔다. 푸르스름 한 빛을 발하는 액정 디스플레이에 글씨가 찍혀 있다. 첫머리에 '희곡 오페라 극장 호텔 살인 사건'이라고 제 목이 써 있고, '아쯔시 지음'으로 되어 있다. "이건ㅡ." 지문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김전일은 '다음 페이지' 라고 표시된 키를 눌렀다. '등장 인물'이라고 씌어진 화면 이 나타났다. 화면에는 '구로사와'와 '노죠'라는 이름이 이어졌다. 연 극의 등장 인물표 같았다. 죽은 '세이꼬'와 '유키오'의 이름도 있었다. 이름 아래에 는 간단히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세이꼬의 프로필은 '첫 번째 희생자. 팬텀에게 목 졸려 죽고 샹들리에가 머리 위 로 떨어진다'로 적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키오도 '두 번째 희생자'로서 소개되었다. 노죠의 이름 밑에는 '세 번째 희쟁자, 방에서 칼로 찔려 목에 밧줄이 감긴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인물표의 마지막 난은 '아쯔시'였다. 프로필에는 '팬텀의 정체. 세 사람을 살해한 범인'으로 씌어 있었다. 김전일은 이번에는 화살표 키를 눌러 화면을 스크롤시켰 다. 파란 액정 화면에 어느 절해의 고도에서 일어난 연속 살 인 사건의 전말을 쓴 연극의 시나리오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결말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야기의 마지막 1 행은 이렇게 씌어 있었다. "조셉 뷰케는 목 매달렸다 ㅡ P"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는 짧은 후기가 남겨져 있었다. "구로사와 선생님께. 이 작품을 부디 선생님의 손으로 완 성시켜서 선생님의 열 번째 '오페라의 유령'으로 발표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제자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ㅡ아쯔시" "하…하하하…. 이놈인가, 범인이!" 아주 가까이에서 누군가 이성을 잃은 듯이 웃었다. 김전 일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어깨에 피가 밴 노죠가 서 있었 다. "ㅡ아쯔시였는가 말야, 팬텀은. 빌어먹을. 나를… 이 나를 죽이려고 하다니. 웃기지 마라. 너 따위 놈한테 내가 살해 될 것 같아. 하하하하하." 노죠는 갑자기 목이 막힌 것처럼 웃음을 멈추더니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바이트 학생인 에구치를 포함한 모든 종업원들을 뜯어 먹을 듯 노려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야, 너희들!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을 게 아니잖아! 어서 가 잡아, 그 돼지 녀석을!"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어젯밤 살인 사건 이 일어난 후로 사사건건 다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양의 탈이 벗겨진 듯 비열함을 드러낸 노죠에겐 말 없이 성실한 종업원들마저도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뭐야, 그런 눈을 하다니! 나는 피해자야, 살해될 뻔했단 말야. 호텔 관리가 나쁘니까, 너희들 종업원이 변변히 못하 게 일을 해서 내가 이런 꼴을 당한 거다. 고소하겠다. 이 섬을 나가면 구로사와도 너희들도 한꺼번에ㅡ." 리오가 성큼성큼 노죠 앞으로 다가갔다. 짝!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리오가 노죠의 뺨을 때린 것이다. "…무, 무슨 짓이야, 이 년이!" "시끄럽군요, 당신!" 이미 기세에 질린 노죠를 리오가 날카롭게 닦아 세웠다. "ㅡ어지간히 해 두고 입 다무는 게 어때요? 그렇지 않으 면 아쯔시 대신 내가 당신을 죽여 벌리 테니까!" 리오의 기세에 눌려 노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김, 김전일 씨. 도대체 어찌 된 겁니까? 아쯔시 군이 범 인입니까?" 혼란해진 모습으로 구로사와가 물었다. 김전일은 그 물음 에는 대답하지 않고, "ㅡ아무튼 이곳에 있어 봤자 소용없습니다. 식당에 모여 있습시다. 아저씨ㅡ 겐모치 경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 는 겁니다. 모든 것은 그 때부터입니다." "그렇군요, 그게 좋겠어요. 난 그렇게 할래." 리오가 그렇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남은 사람들도 묵 묵히 뒤를 따랐다. 노죠도 살인자에게 당했던 여운 때문인 지, 자존심이 상한 노여움 때문인지 부들부들 턱을 떨면서, 그래도 강한 척하면서 카펫 위에 침을 뱉고서 방을 나갔 다. 아쯔시의 방에 남아 워드프로세서를 옮기려는 김전일에게 미유끼가 물었다. "얘, 김전일. 워드프로세서에 뭐라고 써 있는 거야? 역시 아쯔시 씨가 범인인 거야?" "대충 읽어 본 느낌으로는 워드프로세서에 쳐진 것은 이 사건의 진상을 대략 써 놓은 극의 대본이 아닌가 생각해." "뭐? 그럼 아쯔시 씨가 범인이고 그것은 '자백서'라는 거?" "이것이 정말로 아쯔시의 손으로 작성된 거라면 그렇게 되겠지." "정말로라니,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응,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쯔시는 이제 살아 있지 않을 거야." "그, 그런…." "자, 우리도 식당으로 가자. 이 유서에 쓰인 고백을 다시 한 번 잘 읽어보고 싶어. 모든 것은 그 다음이다."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워드프로세서의 스위치를 내렸 다.』 3『겐모치 경감은 아쯔시를 찾으러 뛰쳐 나간 지 30 분이 채 못돼 돌아왔다. "아쯔시가 있었다…." 겐모치 경감이 탈락한 마라톤 주자처럼 힘없이 어깨를 늘 어뜨렸다. "엣? "있었다" 라니, 붙잡지 못했어?" 그렇게 말하며 달려드는 노죠를 뿌리치고 겐모치 경감은, "잡을 것도 없이 죽었어. 뒤쪽 소나무에 목을 매달았 어ㅡ."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노죠는 휘청휘청 뒷걸음질 쳐 의자에 앉는가 싶더니 목 깊숙이에서 비둘기 같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쿡쿡쿡…그렇군, 죽었나. 그건 잘 됐어. 다행이지 않은가, 쿡쿡쿡…." 구로사와도 기도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짓을." "또 검시가 필요하겠군." 의사 에이사쿠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입가에서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그렇게 말했다. 에구치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똑바로 서 서 일이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화가인 마쿠베의 표 정은 안경과 마스크에 감춰져 읽을 수 없었다. "팬텀은 죽은 거군요. 죠셉 뷰케 대신에 스스로 목 매달 아…." 리오가 비극의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여배우처럼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자기 도취에 빠진 연극조의 말투가 싫다는 듯이 겐모치 경감이 사무적으로 알렸다. "여러분. 범인은 사망했 습니다." 게모치 경감은 검은 수첩을 꺼내, "ㅡ그럼 나머지는 미해결인 밀실 살인 건과 또 하나, 범 인으로 짐작되는 아쯔시의 첫 번째 살인에 대한 알리바이 말인데ㅡ." "그거라면 워드프로세서의 메모리 속에 있지 않을까요?" 리오가 말했다. 겐모치 경감은 김전일을 보며, "이봐, 사실인가, 그게?" "네, 일단은. 아저씨. 한 번 읽어 보세요."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워드프로세서 에 스위치를 켰다. 겐모치 경감이 아쯔시가 남긴 '유작'을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그것은 자기 도취에 빠진 남자의 광기에 찬 복수 이야기 였다. 아쯔시는 자신이 쓴 대본이 노죠 부부에 의해서 극단 이 사의 손에 넘겨지지 않고 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이 살인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자신이 낳은 세기의 걸작을 졸작이라고 비웃는 노죠에 대 한 증오, 그리고 그런 노죠의 행위를 알면서도 묵언하고, 게다가 '뚱뚱하기 때문에'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합리 하게 자신을 극단에서 쫓아내려 했던 세이꼬에 대한 누여 움이 시나리오라는 형태를 빌려 끝없이 이어졌다. 아쯔시의 작품 속에서 대사 형식을 빌려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아쯔시

"나는 내 자식을 죽인 아버지다."

아쯔시에게 노죠와 세이꼬가 버린 시나리오가 자신의 자 식과 같았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이 '오페라의 유령'의 공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외 딴 섬의 호텔을 무대로 한 진짜 "살인극" 을 스스로 연출 한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밀실조차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 는 팬텀이 노죠 부부를 참살한다는 스토리였다. 아쯔시의 계획에서 처음에는 노죠 부부만을 살해할 예정 이었다. 그러나 유키오에게 밀실 살인 트릭의 '수단'을 들 켜 협박을 받자 부득이 시나리오를 다시 써서 유키오를 죽 인 것이라고 한다. 세이꼬를 살해했을 때 사용한 밀실 트릭도 설명되어 있 었다. 범행의 기초 준비는 김전일 일행이 섬에 도착한 날 아침 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김전일 일행을 마중하러 가는 길에 구로사와 그리 고 유키오 세 사람이 마을로 물건을 사러 갔었을 때, 아쯔 시는 다른 사람 눈을 피해 몰래 극장 문에 채워진 것과 같 은 자물통을 샀다. 그 순간을 유키오에게 들켜 그것이 나 중에 유키오의 살해 동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무대 연습 후 저녁 식사 때까지의 비는 시간에 세 이꼬를 극장으로 불러 내 살해했다. 이 때 아쯔시는 알리 바이 조작을 위해 샹들리에가 2 시간 후에 떨어지도록 트 릭을 꾸몄다. 나일론 끈과 모기향을 사용한 장치를 샹들리에가 달려 있 는 와이어를 감은 릴에 매달았다. 이 시한 장치는 김전일 이 추리한 그대로였다. 그리고서 아쯔시는 세이꼬의 시체를 무대 장치 속에 숨 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식당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오후 7 시 30 분 'P'부터의 예고장이 도착한다. 물 론 이것도 아쯔시가 꾸민 것이다. 이것을 보고 전원이 극 장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것은 계산대로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무대를 보고 장난이라고 생각한 구로사와 가 화가 나 극장에 자물통을 걸으라는란 것도 아쯔시의 계 산에는 들어 있었다. 저녁 식사가 다시 시작되자 아쯔시는 혼자 재빨리 식사 를 끝내고 워드프로세서를 가지러 가는 척하고 식당을 나 갔다. 그리고 방에서 샹들리에를 매단 장치를 부쉈을 때 사 용한 공구를 가지고 나와 몰래 극장으로 갔다. 이 때 극장은 구로사와가 걸은 자물통으로 잠겨 있었다. 아쯔시는 공구를 사용해서 이 자물통을 부수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이꼬의 시체를 무대 위에 올려 놓은 후 극장을


나올 때 부서진 자물통 대신에 자신이 마을에서 사 온 같 은 모양의 자물통으로 바꿔 잠갔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그 소리를 들 은 전원이 극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이 때 아쯔시는 구 로사와로부터 극장의 열쇠를 받아 잽싸게 자신이 산 자물 통 열쇠와 바꿔치기해, 그것을 사용해서 극장 문을 연 것 이다. 이것이 아쯔시가 '고백'한 밀실 살인의 트릭이었다. 그리고 이 트릭은 밀실의 벽을 뚫고 드나들 수 있는 유 령 같은 괴인, '팬텀'의 존재를 어필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고 아쯔시는 고백했다. 그러나 자물통 사는 것을 봐 버린 유키오를 살해할 때부 터 아쯔시의 계획은 광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초조한 그는 훤한 대낮에 노죠의 방에 뛰어 들어 오직 힘 으로 그를 죽이려 한다.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나 있었다. "ㅡ이 뒤, 아쯔시는 노죠 살해에 실패했고, 더욱이 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지갑을 노죠의 방 근처에 떨어 뜨렸음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이에 마음을 정하고 구 로사와 씨 앞으로 이 최후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달았 다. 뭐, 이런 건가…." 겐모치 경감은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의 얼굴 빛을 살폈 다. 그러나 김전일은 멍 하니 눈 앞의 찻잔을 바라 본 체 아직도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김전일.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인데?" "… 별로." 김전일은 덤덤하게 식은 홍차를 홀짝거렸다. 겐모치 경감은 조금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리며 검은 수 첩을 덮었다. "아무튼 범인이 죽은 이상 사건은 여기서 끝이다."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에도 김전일은 내내 식당 테이블에 앉아 검지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찻잔 치우는 것을 돕던 미유끼가 김전일에게 물었다. "봐, 김전일. 아까부터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아…." 건성으로 김전일이 맞장구를 쳤다. "아아가 아니잖아. 얘기는 듣지도 않고서, 정말…." 미유끼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거 미유끼, 기억하고 있니?" "응? 뭐?" "어젯밤 리오 양이 말한 것말야. 그래, 아쯔시에 대해서 내 가 물었더니 싫어해서 잘 모르지만 하면서 말해 줬잖아?" "아, 그때. 그거라면 메모가 있어, 봐ㅡ."


미유끼는 자신이 만든 용의자 메모를 펼치고 아쯔시의 난 을 가리켰다. '아쯔시, 아오모리 출신, 독신, 특정한 연인 없음, 나르시시스트, 취미는 비디오로 자시을 찍는 것(기분 나빠!), 리오와의 사이는 X, 노죠와 최근에 싸운 듯, 유키 오를 심부름꾼으로 쓰고 있음ㅡ.' 등 작고 깨끗한 글씨로 자세하게 씌어 있다. "ㅡ근데?" "역시. 그렇다면 역시 이상해, 그 치는…." "응?" "미유끼, 도와줘." "뭐, 뭐를, 갑자기…." "아쯔시의 짐을 뒤지는 거야."』 4『"이봐 김전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아쯔시의 방을 뒤 진다니, 이미 사건은 끝났잖아." 겐모치 경감은 방에 돌아가 한숨 돌리던 참에 갑자기 끌 려 와 망연한 표정이었다. "끝나지 않았어요." 김전일이 아쯔시의 짐을 뒤엎으며 대답했다. "뭐? 하, 하지만 조금 전에는 너도ㅡ." "범인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예요. 일단 아저씨 의 말이 맞는 척해 준 것뿐이라구요." "범인을 안심시킨다고? 범인은 이미 죽어 버렸는데." "아쯔시라면, 범인이 아니예요." "뭐, 뭐라곳!?" "내 생각이 맞는다면. ㅡ미유끼, 어때, 화장실 안에는?" "자켓과 바지가 걸려 있지만 호주머니 속에는 손수건밖 에 없는 것 같아." "그래. 여기도 없어. 아마 틀림 없을 것 같군." "이봐, 뭐야, 설명해 봐, 김전일." 겐모치 경감이 물었다. "아쯔시의 지갑요. 그 안에 당연히 들어 있어야 할 것이 없었어요." "들어 있어야 할 것?" "네, 아쯔시라면 확실히 가지고 있을 텐데 말예요. 어쩌 면 짐 속에 있을지도 몰라 찾아 보는 건데, 역시 없군요. 아마 범인이 갖고 있겠죠." "범인이? 대체 그게 뭐야?" 김전일이 그 단어를 말하자 겐모치 경감은 악 하고는, 증 거로 확보한 아쯔시의 지갑을 윗옷 안주머니에서 꺼내 속 을 확인했다. "음…. 분명히 없어. 이봐 김전일, 범인은 무엇을 위해 그 런 걸까….?" "글쎄요."


"글쎄요라니. 너…그래, 범인이 누구야, 그건 알고 있겠 지?" "아뇨, 아직 확실히는 모릅니다." "확실히는, 이라는 건 짐작은 한다는 뜻이겠지?" "네, 아까 아쯔시의 '고백문'을 읽었을 때 말인데요. 동 기도 알 수 없고, 그 치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던 겁니다. 하여간 알리바이 조사, 밀실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 뭐든 다시 하지 않으면 안돼요. 어쨌든 범인에게는 당연히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그 것만은 확실해요. 범인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는 놈이 남은 일을 처리하려는 그 순간에 덮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놈의 행동에 주의를 하면서 때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이쪽이 놈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아 차리지 못하도록,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하면 놈 은 반드시 움직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전일은 내심 초조했다. 설사 추측이 그대로 맞아 떨어져 범인이 '일'을 정리하려는 현장을 덮 친다고 해도 동기를 모르고, 밀실이나 알리바이의 수수께 끼도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어떻게 할 수 없다. 교활한 범 인인 만큼 이런저런 변명을 대 여유 있게 혐의를 벗어나 버릴 것이다. 최소한 동기를 알면…. "선입관을 버려. 믿고 있는 것을 버리고 냉정하게 '사실' 만을 보는 거다ㅡ." 김전일은 자신에게 이렇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이 '오페라 극장 호텔'을 찾은 후로 본 '그 인물' 의 모습을 가능한 한 떠올려 보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 고 이성으로 '그 인물'의 심정을 힘껏 분석했다. "어딘가에서 느꼈다. 묘하게도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을, 그것은 어디였지? 제기랄, 생각해, 생각…." 실마리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 나왔다. "그래, '그림'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김전일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김전일?" 겐모치 경감이 물었지만 김전일은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 고 말했다. "아저씨. 저는 오늘밤 내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보일 겁니다. 그러니 "놈이" 이상한 행동을 일 으키지 않도록 숨어서 살짝 감시해 주시겠어요?" "그, 그래, 어렵지 않지." "부탁해요, 경감님." "오, 그 대신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어, 김전일." "네. 반드시 수수께끼는 풀어 보이죠. 명탐정이라고 불린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우스케의 이름을 걸고!" 김전일은 눈동자에 투지가 넘쳤다.』 5『마쿠베는 아틀리에로 가 캔버스를 마주했다. 밤 9 시가 넘 었지만 쉬지 않고 붓을 놀렸다. 이대로 밤을 새워서라도 이 그림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마쿠베가 그리는 그림은 그의 감정 그 자체였다. 극도의 알레르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맨 얼굴을 거 의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 왔다. 대신에 그는 화필에 모든 감정을 집어넣는 것을 익혔다. 그러나 마쿠베의 그런 그림에 쏟는 정열이 단숨에 예술 로 숭화한 것은 미카와 만나고부터였다. 그 때부터 화가 마 쿠베의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해 이윽고 미카의 성장을 그린 개인전 '환영 소녀'로서 각광을 받았다. 미카가 죽기 몇 달 전 일이었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아틀리에의 문을 노크했다. "누구십니까." 마쿠베는 마스크를 통해서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마쿠베 씨죠? 김전일입니다.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 서ㅡ. 문을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문을 열자 숨을 헐떡이는 T 셔츠 차림의 김전일과 미유끼 가 서 있었다. "마쿠베 씨, 이렇게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실은 듣 고 싶은 게 있어서….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 요한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쿠베는 그린던 그림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잠깐 망설였다. 그런 사이에 김전일은 출입구로 얼굴을 들이밀 며 이젤에 얹혀 있는 그림을 보고 말했다. "아름다운 그림이군요." 마쿠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손짓으로 두 사람을 불러 들 였다.』 6『"동기가 확실해졌습니다, 아저씨." 마쿠베의 아틀리에에서 돌아오자 김전일은 쭉 '망보기' 를 한 겐모치 경감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정말!" "네, 거의 틀림없을 겁니다. 역시 모든 것은 4 년 전 미카 의 자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범인이 왜 아쯔시의 지갑에서 '그것'을 빼냈는가도 거의 짐작이 갑니다." "그래? 드디어 남은 것은 밀실과 알리바이군." "간단히 말해 두죠. 내일 낮까지 이 두 가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합니다. 벅찹니다. 이건." "무ㅡ슨 소리. 자네라면 할 수 있어, 김전일. 저 유명한 명 탐정의 손자니까 말야." "쳇… 뭐, 해 볼 테니, 아저씨. 극장 열쇠를 줘요." "아, 여기ㅡ." 겐모치 경감은 윗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스터 키 꾸러 미를 만지작거렸다. 움겨쥐어 꺼낸 열쇠 꾸러미에 섞여 은색의 물건 두 개가 톡톡 떨어졌다. 두 개 중 하나가 바닥에 굴러서 김전일의 발밑에 멈췄다. 주워 보니 오백 원짜리 동전이었다. "아니, 아저씨! 이 오백 원짜리, 혹시 어젯밤 카드에서 나 한테 딴 돈 아니예요?" "응? 아, 그랬지. 호주머니에 넣어 둔 채 그냥 두었군." "치사해. 아저씨가 딴 돈은 천 원이니까 그 중에 반은 저 금통에 넣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대로 호주머니 에 있는 거예요?" "어ㅡ? 너도 꽤 쫀쫀하구만. 저금통이 가득 차서 들어가 지 않았단 말야. 할 수 없잖아." "거짓말. 텅텅 비었었잖아요." "의심나면 가서 손으로 들어 봐. 동전이 꽉 차서 꽤 무 거울 테니." "네? 하, 하지만 그 때 본 저금통은 분명히 빈ㅡ." "뭐야. 몰랐냐? 그건 '돈이 없어지는 저금통' 이라고ㅡ." 겐모치 경감이 자랑스럽게 그 속임수를 해설하자, 김전일 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거다…." 김전일은 중얼거렸다. "왜 그래, 김전일…." "아저씨, 극장 열쇠 줘요." "에…?" "어서요!" 김전일은 겐모치의 손에서 열쇠 꾸러미를 나꿔채자 극장 으로 달려갔다. 극장에 들어가자 김전일은 입구 옆 스위치로 천정의 전 등을 켜고 그리고 조작실로 들어가 무대 조명까지 모두 켰 다. 그리고서 무대에 뛰어올라 처참한 현장 모습 그대로인 샹 들리에의 잔해로 다가가서 쭈그리고 앉아 유리 조각을 주 웠다. "김전일, 왜 그래? 갑자기…." 미유끼는 이유도 모르고 김전일의 뒤를 쫓아 무대 위로 올라 왔다.


"뭘 좀 알았나? 이봐, 뭐라고 말 좀 해, 김전일." 겐모치 경감도 고함치듯 말하며 그 뒤를 따랐다. "역시 그랬군. 왜 범인이 팬텀을 자칭하며 '오페라의 유 령' 스토리에 맞춰 살인을 연출했는지, 그 이유를 드디어 알았어."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부서진 유리 파편을 하나 집어 들었다. 눈부신 무대 조명을 받아 손바닥 위에서 보석처럼 빛나 는 유리조각을 응시하면서 김전일은 중얼거렸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7『다음날 아침은 어이없을 만큼 아무 일 없이 찾아왔다. 처참한 사건의 끝을 알리듯 음침하게 끼었던 안개도 걷 혔고, 지난 이틀 동안은 한 여름 밤의 악몽이라는 듯이 하 늘이 높게 푸르고 태양이 부드럽게 내리 쬐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보다 꽤 늦어져 오전 10 시 경에 시작되 었다. 노죠는 식사는 필요 없다고 방에 틀어박힌 채 있었다. 식 당에는 겐모치와 김전일, 미유끼 외에 에이사쿠와 마쿠베, 리오밖에 없었다. 단 이틀 사이에 세 명이나 사망자가 나 온 것이다. 죽은 사람을 두고 밤을 지샐 때와 같은 고요함 속에서 마 지막 아침 식사가 나왔다.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누 구나 산더미처럼 말하고 싶은 게 있을 것이다. 종업원 누군가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한 분위기를 못 견 디고 오디오를 켰다. 밝은 가락의 모차르트 실내악이 흘러 나왔으나 무거운 공기는 조금도 걷히지 않았다. 마쿠베가 먹다만 접시에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유끼도 김전일도, 그리고 겐모치 경감조차 식욕이 없는 모양으로 햄 에그도, 소시지도 반 이상이나 남기고 벌써 디 저트로 나온 커피를 마셨다. 단 한 사람, 에이사쿠만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왕성한 식 욕을 보였다. 에구치는 오늘로 아르바이트가 끝이라며 마지막 뒷정리를 마치고 종업원실로 짐을 정리하러 갔다. "수고했네." 구로사와는 그를 보며 쓸쓸히 웃었다. "구로사와 선생님!" 구로사와가 식당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리 오가 쫓아왔다. "ㅡ저, 극단 그만 두겠어요." "뭐? 무슨 소리야, 그건." "그만두고 이 호텔 일을 돕고 싶어요."


"무슨 바보 같은…. 너만큼 재능 있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부탁이예요. 선생님이 계신 곳에 있게 해 주세요. 이번 공연이 끝나면 저 다시 이 섬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 니ㅡ." "그만 둬. 어차피 이 호텔은 이제 문을 닫게 될 거야. 그 렇게 해도 아무 소용없어." "그런…." "살인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난 호텔에 누가 좋아서 오 겠어. 알겠지? 이제 이곳은 끝이다." "싫어요. 그런 건, 싫어…." 리오의 큰 눈동자에서 눈물이 넘쳐 테이블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ㅡ선생님이 좋아요. 옆에 있게 해 주세요. 부탁이예 요…." "리오 양…." 구로사와가 놀라 당혹해졌다. 백발이 섞인 눈썹이 당혹스 러워 약간 일그러졌다. 구로사와의 어깨에 리오가 뺨을 기대왔다. 구로사와는 자 신의 가슴에서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리오의 등에 팔을 두르려다 문득 멈췄다. "리오 양…. 이것은 운명이야." 구로사와는 조용히 말하며 두 손으로 살짝 리오의 몸을 떼냈다.』 8『기다리고 기다리던 순회선이 드디어 오후 1 시에 왔다. 보통 때처럼 인사 정도로 들렀던 순회선은 겐모치 경감 이 살인 사건을 알리자 크게 놀라 무선으로 지원을 요청 했다. 세 사람의 종업원을 남기고 구로사와를 포함한 전원이 경 찰 순시선을 타고 육지로 향했다. 사건의 범인이라고 판단되는 아쯔시의 자살로 일단 해결 을 보았다는 겐모치 경감의 보고도 있어 지역의 경찰서에 서 간단한 조서를 꾸미는 것만으로 모두를 집으로 돌려 보 냈다. 노죠는 수면 부족과 공복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아 누 르며 다카다노바바의 지하도를 걸었다. 아침 식사를 걸렀을 때는 그런 대로 참을 만했지만 경찰 에서 준 간식도 손을 대지 않았고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입에 댄 것은 결국 초콜릿 한 개뿐이었다. 더욱 이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지낸 이틀 동안의 불안감 때 문에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오다와라에서 신주쿠까지의 급행을 타고 오는 동안 잠깐 사이 졸았지만 피로는 이미 최고로 올라갔다.


그러니 노죠가 '미행자'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당연했 다. 노죠가 좁은 지하도에서 나오자 '미행자'는 잠시 출구에 머물러 충분히 거리를 두고 나서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 시 그의 뒤를 따라 갔다. 10 분 정도 걸었을까, 노죠는 흰 타일이 붙은 작은 아파트 로 들어갔다. 경계심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그 역시 이 제 사건은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행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 '미행자'에게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행자'는 건물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숨어 노죠가 맨션 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본 후 자신도 살짝 뒤따라갔다. 발 소리가 나지 않도록 구두까지 벗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노죠가 방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조용히 현관 앞 으로 다가갔다. '미행자'는 가만히 안의 상태를 엿듣고 있었다. 사냥감을 기다리는 헌터처럼 숨을 죽이고…. 10 분 정도가 지났다. 문 너머에서 현관 자물쇠를 여는 소리가 나고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이 열린다. 그 순간 '미행자'는 열린 문 틈으로 다리를 집어 넣었다. "! 너, 너는…!?" 노죠의 눈이 공포로 크게 벌어졌다ㅡ."』

제 7 막 - '진상' 1『"ㅡ왜,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노죠가 소리쳤다. "그것은 내가 할 말이야, 노죠 씨. 어째서 당신이 이곳 에ㅡ 아쯔시의 아파트에 있는 거지?" 김전일은 놀라 꼼짝 못하고 서 있는 노죠의 손에서 작은 상자 같은 것을 재빨리 빼앗았다. 8 밀리 비디오 테이프였 다. "무, 무슨 짓이야…." 테이프를 다시 뺏으려고 노죠가 달려들자 김전일을 뒤따 라온 겐모치 경감이 끼어들어 밀쳐 버렸다. 겐모치 경감이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신호인 듯 미유끼도, 구로사와도, 리 오도, 에구치랑 마쿠베, 에이사쿠까지 앞을 다투어 방으로 밀어 닥쳤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군 김전일 네 녀석이…." 여덟 명에게 둘러 싸여 도망갈 곳을 잃은 노죠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면서도 김전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김전일은 그 시선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노죠 씨. 다시 한 번 묻죠. 왜 당신이 여기 있죠? 그리 고 어떻게 이 방으로 들어 올 수 있었죠? 아쯔시의 방 열 쇠를 어떻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야. 대답해, 노죠ㅡ, 아 니, 팬텀." 그곳에 있던 모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랍고 당 황스러워 한숨을 쉬었다. 이 때까지도 김전일이 노죠를 미행한 이유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무리도 아니다. 경찰서에서 노죠가 조사 차례가 되어 좌사자 대기실에서 나갔다. 이 때를 골라 김전일은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에 게 이곳에서 나가면 바로 아쯔시의 아파트로 가 달라고 알 렸다. 구로사와가 이유를 물었지만 김전일은 "사건을 진짜 해 결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만 하고는, 겐모치 경감 이 극단에 문의해 받은 아쯔시의 주소와 그 아파트의 약 도를 건넸다. 구로사와도 김전일의 추리력이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랄 만한 결론이 있을 것 이다ㅡ 그렇게 생각하고는 말 없이 그 제안에 따랐다. 다른 모든 사람도 구로사와를 따라 휴대용 무전기를 받 아 들고, 한 발 앞서 도쿄의 다카다노바바에 있는 아쯔시 의 아파트로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노죠를 미행해 온 김전일과 연락을 취 해 합류해서 아쯔시의 아파트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노죠 군이 팬텀이라고? 무슨 말입니까, 김전일 씨. 나는 도대체 뭐가 뭔지…." 구로사와가 묻자 김전일은 노죠를 응시한 채 대답했다. "주인 아저씨, 범인은 죽은 아쯔시가 아니었습니다. 세이 꼬 양도 유키오도, 자살했다고 알고 있는 아쯔시마저도 모 두 이 사람이 죽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연속 살인의 진 짜 범인인 겁니다." "ㅡ!." 숨을 삼킨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지워 뭉개려는 듯 재빨 리 노죠가 끼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내 가 팬텀이라고? 농담도 아냐. 왜 내가 세이꼬를 죽여야 하 지? 유키오도 아쯔시도 나는 죽일 이유 따윈 하나도 없다 고." "오호…. 그럼, 어째서 당신은 이곳에 와 있는 거지요? 게 다가 당신이 이 방에서 가지고 나가던 이 비디오 테이프 는 도대체 뭐죠." 김전일이 다그치자 노죠는 코웃음을 쳤다.


"나와 아쯔시는 오랫동안 사귄 친구여서, 그 녀석이 열쇠 를 숨겨 두는 장소 정도는 알고 있어. 게다가 그 테이프는 내가 그에게 빌려준 거다. 섬에서 돌아오면 돌려 받으려던 거라고." "억지 변명이야. 나는 겐모치 경감과 함께 당신을 뒤 쫓아 왔다. 그런데 아파트 건물 안에서 당신은 열쇠가 숨 겨진 장소를 찾는 짓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어." "그건 네가 보지 못한 것뿐일 테지." "그럴까. 나는 이 눈으로 보았어. 당신이 이 방 열쇠를 자 신의 지갑에서 꺼내는 걸. 그 열쇠는 아쯔시의 지갑에서 빼 낸 거겠지, 아닌가?" "…." "게다가 그 비디오 테이프만 해도 그래. 살인 사건 바로 뒤에 아직 경찰이 가택 수색도 하기 전인데 어떻게 해서 든 가져가야만 하는 비디오 테이프가 대체 뭐가 녹화돼 있 지? 일단 이 자리에서 저쪽 비디오로 틀어 볼까, 노죠 씨." "그만 둬!" 돌연 노죠는 안색을 바꾸며 소리쳤다. "ㅡ네 놈에게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있냐. 이것은 프라이 버시 침해야. 알았어, 범인은 아쯔시다. 그 녀석이 세이꼬 와 유키오를 죽인 거다. 모두 그 녀석의 유서에 씌어진 대 로야. 그렇지 않으면 극장이 밀실이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지? 알리바이도 그래. 그 자 외에 누가 세이꼬를 무대 위에 옮 길 수 있었냔 말야? 적어도 나는 할 수 없었어. 그 예고장 을 읽고 나서 모두가 극장으로 확인하러 갔다 돌아온 후 나는 계속해서 식당 아니면 라운지에 있었어, 김전일, 네 놈도 나와 함께 있었을 텐데. 분명히 샹들리에는 아쯔시의 유서에 써 있던 나일론 끈 장치를 써서 직접 손대지 않고 떨어뜨릴 수 있었을지도 몰 라. 하지만 무대 위로 시체를 옮겨 놓는 일 같은 건 극장 에 들어가서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던 무대 위에 1 시간 반이 지난 후에는 분명 히 시체가 놓여 있었다. 단 1 분도 자리를 뜨지 않은 내가 어떻게 시체를 옮기는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거지? 설마 원 격 조작으로 시체를 되살려 스스로 걷게 해 무대 위로 올 라가게 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봇물이 터진 듯 지껄여 대는 노죠는 초조한 기색이 뚜렸 했다. 김전일은 노죠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말하게 하고 난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가라앉은 모습으로 잘라 말했다. "시체는 처음부터 무대 위에 있었던 거야."』


2『"뭐, 뭐야?" 노죠의 목소리가 커지고 가지런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 것을 보고 김전일은 자신의 한 마디가 노죠가 지닌 자신 감의 한 구석을 깨 버렸다는 것을 확신했다. 순간의 침묵. 그 사이 김전일의 두뇌는 강철처럼 강인한 노죠의 정신 을 궁지로 몰아 가기 위해 어떤 논리가 유효할 지를 재빨 리 계산해 정확한 답을 튕겨 냈다. 이번에는 이쪽 차례다. 여유를 갖고 추적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다. "몇 번이라도 말해 주지. 시체는 처음부터 무대 위에 있 었던 거다.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지." "무슨 말입니까, 김전일 씨. 보이지 않았다니…." 말 없이 서 있는 노죠 대신 구로사와가 물었다. "기억해 보세요, 주인 아저씨. 그날 저녁 식사 전에 리오 의 접시에 'P'로부터의 예고장이 놓여 있던 때를." "으, 으응. 분명 '카를롯타는 무대 위에서 샹들리에의 깔 개가 되었다'고 씌어 있는ㅡ." "그래요. 그것을 읽은 우리들은 틀림없이 세이꼬 양의 신 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곤 극장으로 달려갔죠. 그러나 샹들리에가 그대로 달려 있는 데다 무대 위에는 아 무 것도 없었어요. 그걸 본 노죠가 큰 소리로 모든 게 세 이꼬 양의 못된 장난이라고 단정하고, 다시 저녁 식사를 하 러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랬죠?" "그래요. 분명히 그랬어요, 기억해요." 리오가 말했다. 김전일은 그런 리오를 향해 물었다. "그럼 리오 씨. 그 때 극장에서 불이 켜 있을 때를 기억 해 주세요. 제일 먼저 뭐가 눈에 들어 왔습니까?" "물론 그 큰 샹들리에였죠. 뭐야, 떨어지지 않았잖아라 고…." "그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 을 겁니다. '샹들리에는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예고장은 거 짓이다' 라고, 그 순간 누군가가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무 대 위에 무엇이 있는가는 잘 확인도 않고 그곳을 나와 버 렸습니다." "잠깐 기다려. 확인했잖습니까. 네, 그렇죠? 겐모치 씨? 당 신도 분명히 봤을 겁니다. 무대 위에 아무 것도 없는 건. 아무리 극장 조명이 침침했다곤 해도 분명했습니다. 그렇 죠?" 노죠가 끼어 들었다. "아, 그래. 분명히 무대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겐모치 경감이 마지 못해 동의했다. "아뇨, 있었어요. 단지 보이지 않도록 꾸몄을 뿐이예요." 그러자 노죠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어, 어처구니 없어. 극장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렇지. 그 렇게 많은 사람의 눈이 그리 간단히 속아 넘어 간다는 건 가. 아니면 투명하게 만드는 약이라도 발랐다는 거냐." "그러나 사람의 눈은 의외로 믿을 수 없는 것이지. 실제 로 우리들은 더 밝은 '오페라 극장 호텔'의 라운지에서도 정말 똑같은 잘못을 범했으니까." "뭐?" "이걸 봐." 김전일은 보스턴 백을 열어 상자 같은 것을 꺼냈다. 상자는 주사위를 크게 만든 것 같은 직육면체였으며 플 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한 면만은 투명한 유리를 끼 워 속이 잘 들여다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자를 들여다 보면 가운데 부분에 2 센티미터 정도의 주사위 모양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 였다. "ㅡ이거 기억나겠지?" "아, 그거 카드를 했을 때의…." 미유끼가 말했다. "그래. 성금을 넣기로 했던 저금통이지. 그 때 나는 이 저 금통이 텅 비었다고 생각했어. 지금도ㅡ."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저금통을 눈 높이로 치켜 올려 보였다. 분명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누구의 눈에도 그렇 게 '보였다'. "그러나ㅡ." 김전일은 저금통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비어 있어야 할 상자 속에서 짤랑짤랑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이었다. "ㅡ이런 식으로 안에는 분명히 돈이 들어 있는 거다." "어머, 재밌어. 어떤 구조로 된 거지, 그거?" 리오가 묻자 김전일이 대답했다. "거울을 사용한 트릭이죠. 이것은 '거울상자'라고 하는 건 데. 상자 안에 앞쪽 위에서 안쪽 아래를 향해 대각선 모양 으로 거울이 붙어 있는 것뿐입니다. 돈을 거울 뒤편의 상 자 윗부분으로 들어 간다는 속임수죠." "거울? 그것 뿐인가요?" "그것뿐입니다. 인간의 눈은 깊이라든가 입체감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나 사진, 실물을 틀리지 않고 구별할 수 있죠. 그러나 거울은 그 깊이나 입체감까지 고 스란히 비춰 냅니다. 거울 속에 보이는 깊이는 사실은 허 상일 뿐인데도 우리는 이렇게 간단히 속아 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김 전일?" 겐모치 경감이 물었다. "관계가 밀접합니다, 아저씨. 돈이 들어 있는데도 들어 있


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분명 있는 것이 보이지 않 는다ㅡ 이 '거울 상자'의 원리를 이용해서 노죠는 무대 위 에 처음부터 놓여 있던 세이꼬 양의 시체를 우리들의 눈 앞에서 멋지게 사라지게 한 겁니다. 탐정이었던 할아버지는 옛날에 저에게 종종 마술의 비법 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중 하나에 이것과 같은 원리로 거울을 사용해서 사람의 몸이나, 코끼리 같은 큰 물건까지 사라지게 해 보이는 마술이 있었죠. 장치라지만 간단해요. 무대 주위의 세 방향을 같은 무늬 의 커튼으로 두른다. 그리고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 앞에 거울을 무대 양측의 커튼과 45 도 각도로 놓기만 하면 됩 니다. 그러면 거울에 비친, 무대 양측 커튼이 객석에서는 무대 뒤의 커튼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깊이나 입체감도 제대로 재현되어 무대를 보는 관객은 거울 건너 쪽에 있는 것을 사라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거울을 두 장 사용해서 90 도 각도의 "V"자 모양 이 되도록 끝을 맞춘 다음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 앞에 놓 으면 거울의 맞물린 곳도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있다. 거 울의 잘린 곳이나 맞물린 곳을 감추도록 기둥이라든가 철 창 같은 것이 있으면 완벽하게 되죠." "철창! 설마ㅡ." 구로사와가 놀라자 김전일은 끄덕였다. "그래요, 주인 아저씨. 그 무대 앞에 내려져 있던 철창과 비슷했던 후리 그물도 이 트릭의 성공에 한몫한 겁니다." "이럴 수가…." "이봐, 김전일, 잠깐만." 겐모치 경감이 끼어 들었다. "ㅡ네가 말한 방법대로 거울을 사용해서 시체를 사라지 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거울은 어떻게 하지. 그대로 무 대 위에 남게 되는 거 아냐?" "저런, 저런. 아직 모르겠어요? 정말로 둔한 아저씨구만." "뭐라고?" 겐모치 경감은 불끈했다. "좋아요, 아저씨. 범인이 왜 가극 '오페라의 유령' 스토 리를 흉내 내 시체 위에 샹들리에를 떨어뜨렸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는 거예요." "앗! 그럼 설마…?" "이제 알겠습니까? 샹들리에는 시체를 눌러 찌그러뜨리기 위해서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어요. 무대 위에 남아 있는 거 울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구요." "그럴 수가…." "그런 터무니 없이 큰 샹들리에가 떨어지면 거울 따위는 한방에 산산조각 납니다. 그 샹들리에는 유리도 잔뜩 썼고


게다가 미러 볼이라는 거울 장식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거 울 파편을 숨기는 데는 안성맞춤일 겁니다. '나뭇잎을 숨 기려면 숲에 숨겨라'라는 옛날 속담처럼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즉시 무대 윌 올라가 샹들리에의 잔해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생각한 대로였어요. 막대한 양 의 유리 파편에 섞여 있는 상당한 수의 거울 파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모두 작게 부서진 것을 보면 어쩌면 자동차의 앞유리에 사용하는 유리 같은 걸로 만든, 특별히 주문한 거 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강화 유린가! 과연 그거라면 한 곳이 갈라지면 전체에 작게 금이 가서 큰 파편은 남지 않을 테니. 샹들리에의 일 부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야. 음, 눈치채지 못했어…." 겐모치 경감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죠는 물론 그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전에 '오페라 의 유령' 스토리에 비긴 살인이 일어났던 것도 알고 있었 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페라의 유령' 무대가 행해지려 고 한다. 거기서 배우가 극 중의 역할대로 샹들리에 밑에 깔리면 누구라도 '이것은 극의 스토리를 흉내낸 살인이다' 고밖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샹들리에를 떨어뜨린 진짜 목적, '시체를 감춘 거울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도 생각이 미치지 않게 되는 거지요." "김전일, 그럼 유키오 씨가 물탱크에 던져진 것도 그 때 문이야?" 미유끼가 물었다. "아. 두 사람 다 '오페라의 유령'의 스토리를 모방해 살 해하면 샹들리에를 떨어뜨린 진짜 이유는 점점 더 알아채 기 힘들기 때문이지. 그것과 또 한 가지, 자신이 할 예정 이었던 연극의 역할을 이용해 노죠 자신도 노리는 사람 중 의 한 명으로 생각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노죠 씨의 역할이라면 샤니 자작?" 미유끼가 묻자 김전일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아니, 또 다른 하나의 역할 쪽이죠. 노죠는 헤로인의 상 대역인 샤니 자작 이외에 또 하나, 팬텀에게 교살되는 오 페라 극장의 도구 주임인 조셉 뷰케 역도 맡고 있었습니 다. 'P'의 메시지에는 각각 피해자의 극중 역할과 살해 방법 이 씌어 있었으니까, '카를롯타'와 '필립 백작'이 죽으면 나머지는 '조셉 뷰케' ㅡ 즉 노죠밖에 없다. 라는 셈이 되 죠. 모두 그렇게 생각케 만들면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계획을 마지막까지 수행하는 데 여러모로 좋으니 까." "음, 메시지에 그런 의미까지 숨겨져 있다곤…. 정말 무 서운 범인이다." 겐모치 경감은 팔짱을 끼고 깊은 한숨을 쉬며 노죠의 모


습을 살폈다. 노죠는 피로한 빛이 짙게 어린 것을 제외한 다면 눈에 띄는 변화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배우인 노죠의 연기력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그 의 심리 상태에 여유가 있어선지 많은 범죄자를 상대해 온 베테랑 형사인 겐모치 경감도 알 수 없었다. 김전일은 노죠가 풍기는 이 이상한 분위기에 아무런 압 박감도 느끼지 않은 듯 담담했다. "노죠, 당신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세이꼬 양 을 극장으로 불러내 목을 졸라 죽였다ㅡ." 노죠는 그 말에 대꾸하려고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처 럼 표정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그저 묵묵히 시선이 허공 에서 떠돌았다. 김전일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ㅡ그리고 곧 시체를 무대 위로 옮겨 거울로 칸막이를 세 우고 '거울 상자'의 트릭으로 극장 입구에서 시체가 보이 지 않게 감추었다. 거울은 아마 그 극장에 장식되어 있는 추상화의 액자 같은 데 숨겨 섬에 가지고 왔을 것이다. 시 체가 똑바로 앉아서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 부자연스런 자 세였던 건 그 자세라면 다소 거울이 작아도 시체를 숨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때부터 시체가 무대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시체의 사 후 경직이, 발견된 때의 모습 그대로인 채 상반신까지 퍼 져 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시체는 처음부터 그 자세 그 대로 무대 위에 있었던 것이다. 노죠는 아마 그 전날 밤 중에 몰래 이 트릭의 리허설을 했을 것이다. 그 예고장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는 극장에 자 물쇠를 채우지 않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거울 트릭의 준비를 마친 노죠는 그 나일론 실을 사용한 장치를 세트해 놓고 9 시쯤 샹들리에가 시체 위에 떨어지도록 해 놓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당 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놓아 둔 'P'로부터 의 메시지를 보고 놀라는 소리를 냈던 거지. 나머지는 우리들이 '극장의 무대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해 주기만 기다리면 되었다. 범인이 노린 대로 어두운 극장의 전등과 그 그물 덕분에 우리들은 시체를 감 춘 거울의 존재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 예고장을 세이 꼬 양의 어린애 같은 장난이라 단정하고 극장을 나와 버 린 것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샹들리에가 떨어져 트릭의 도구인 거울 을 산산이 부서뜨려 샹들리에의 잔해와 섞어 버렸다. 며칠 이 지나 경찰이 끼어들기 전에 '범인 역'인 아쯔시는 유 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사건은 해결. 이 같은 줄거리였다. 샹들리에를 떨어뜨리는 시간의 트릭이 곧 밝혀지리란 것


도 물론 계산에 넣었다. 그 경우 샹들리에가 떨어진 순간 의 알리바이는 무의미한 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무대 위에 시체를 옮길 수 있었던 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이 문 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극장을 보러 간 이후의 행동 이 확실했던 노죠에게는 완전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는 구 조이다. 덤으로 제일 나중에 죄를 씌워 죽일 예정인 아쯔시는 식 사 중에 자리를 떠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알리바이가 없 다. 이것도 아마 노죠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세이꼬 씨의 이름을 써서 아쯔시를 어딘가로 불러낸 것이 아닐까, 그 때 식당에 돌아온 아쯔시가 불쾌한 듯했던 것은 세이꼬 씨에 게 바람을 맞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에 세이꼬 씨가 시체로 발견됐으므로, 아쯔시는 당 연히 그녀가 불러 만나러 갔었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런 것을 말하면 오히려 자신이 의심받기 마련이니까. 그것 도 범인은 계산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전일. 아쯔시 씨는 자신을 불러낸 세이꼬 양이 살해되었으니, 다음으로 자신을 노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진 않았을까?" 미유끼가 말했다. "그야 생각했겠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노죠는 동기와 알 리바이 등 여러 가지를 가지고 구로사와 주인 아저씨가 범 인이라고 주장했던 게 아닐까." "어째써?" "즉, 구로사와 주인 아저씨가 범인이라고 모두 생각해 준 다면 진짜 범인은 그만큼 다음 범행을 하기 쉽기 때문이 지. 첫날 밤, 나와 주인 아저씨가 복도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 을 때 노죠가 나타나 꽤 행패를 부린 적이 있는데 그것도 같은 이유에서 였을 거야. 그 때 노죠는 주인 아저씨가 자 신과 세이꼬 씨를 증오하는 이유를 대며 마구 아우성 쳐 댔다. 마침 유키오의 방 앞이라 유키오가 문을 조금 열고 그 모습을 살피고 있던 것이 기억나, 아마 그것도 노죠의 치밀한 계산이 아니었을까." "그때 말입니까? 그건 어떻게…." 구로사와가 물었다. "즉, 일부러 유키오가 주인 아저씨와 자신이 말다툼하는 것을 듣게 유도해 주인 아저씨를 범인으로 생각하게 했습 니다. 만약 유키오가 그걸 형 같은 아쯔시에게 보고한다면 아쯔시도 연달아 계략에 말려들게 할 수 있어서죠." 어쩌면 그 때 이미 노죠는 유키오를 죽일 목적으로 그의 방에 다가갔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는데 유키오의 방 앞 복도에 주인 아저씨가 있었죠. 잘못 돌아간다고 판단해 숨 어 상태를 엿보는데 내가 나타나고 미카 양의 얘기가 나


왔죠. 거기서 그 기회를 이용해 유키오에게 '구로사와 범 인설'을 실감나게 연기해 들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랬던 게 아닐까요? 이러한 세심한 심리 트릭의 성과였는지 어쩐지, 아무튼 유 키오도 아쯔시도 완전히 노죠의 손에 걸려 살해되었습니 다. 뭐, 아쯔시의 경우는 설마 대낮인데 범인이 죽이러 오 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겠지만요. 아쯔시를 목졸라 죽이고 나무에 매단 다음 노죠는 아쯔 시의 워드프로세서에 아쯔시 자신이 쓴 '고백문'인 것처 럼 보이게 살인극의 시나리오를 플로피 디스켓을 써 카피 해 넣었죠. 그리고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 자신의 방 유리 창에 콘크리트 블록을 던져 넣은 다음 도로 들어온 것입 니다." "뭐라고! 그럼, 그 소란은…." 놀라는 겐모치 경감에게 김전일은 눈으로 끄덕여 보였다. "아, 그것은 노죠의 1 인 극이었습니다. 유리창 아래에 아 쯔시의 지갑을 떨어뜨려 놓은 것도 물론 노죠입니다. 창을 통해 밖으로 도망간 팬텀을 쫓아가려면 누군가 반드시 유 리창 아래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쯔시 의 방에 남겨진 '유서'와 뒷 나무에 목이 매딜린 시체가 발견될 거고, 사건은 해결. 그런 시나리오죠. 정말이지 잘 도 생각해 냈죠." 노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김전일은 상관없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했다. "ㅡ그러나 그런 당신의 계획에도 약간의 계산 착오가 있 었죠. 처음의 '세이꼬 살인' 때 주인 아저씨가 그 예고장 을 장난으로 여겨 화를 내면서 극장에 자물쇠를 채워 버 렸습니다. 그 탓에 그 극장은 밀실이 되어 버렸죠. 범인조 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우연이 불가사의한 밀실 살인을 낳은 겁니다."』 3『"ㅡ노죠는 이 우연한 '밀실 살인'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 다. 그래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아쯔시의 '유서'에 있었던 '열쇠 바꿔치기 트릭'을 짠 겁니다." "뭐? 그럼, 그 아쯔시의 워드프로세서에 있던 '대본'도 전 부 노죠가 썼다는 거야?" 겐모치 경감이 묻자 김전일은 노죠의 눈에서 시선을 떼 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그렇죠. 거기 있는 노죠의 보스턴 백을 열어 봐요. 분명 아쯔시가 갖고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워드프로세서 가 있을 겁니다." "그래?" 겐모치 경감은 노죠의 발치에 있는 커다란 백을 들어올 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노죠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의 백을 맘대로 열어 보는 겐모치 경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저 김전 일을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정말이다! 봐, 분명히 있어." 겐모치 경감은 아쯔시의 것과 같은 A4 사이즈의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를 백에서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노죠는 그것을 사용해 아쯔시의 유서처럼 보이게 '대본' 을 썼죠. 며칠을 걸려 차분하게 손질하면서 말입니다. 그렇 죠, 노죠 씨." 노죠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전일에겐 그 침묵이 오히 려 사실을 웅변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전일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했다. "그러나 첫 살인 후, 당신은 서둘러 쓴 살인극의 시나리 오를 어쩔 수 없이 변경했다. 주인 아저씨가 극장에 자물 통을 채워 버린 일로 말이야. 당신은 필시 당황했을 거야. 밀실 살인이라는 것은 피해 자가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던가, 아니면 밀실을 열 수 있 는 특정 인물에게 죄를 덮어 씌우려는 특별한 이유가 없 는 한 범인에게 어떤 의미도 없는 '장식'에 불과하죠. 그 저 장난이고 사건을 복잡하게만 할뿐이니까요. 이대로는 아쯔시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살해할 계획도 엉 망이 되고, 자칫하면 사건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져 경찰이 극장 내를 철저히 조사해 그 거울을 이용한 트릭마저 드 러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당신은 필사적으로 생각 했다. 밀실 살인을 가능케 하는 트릭. 그 중에서도 가능하 면 아쯔시 혼자 만으로도 실행 가능한 트릭이 좋을 것이 다. 9 시에 샹들리에가 떨어지기까지의 1 시간 반, 식사 중에 도 카드 놀이가 한창일 때도 계속 그것만 생각했을 것이 다." 노죠는 이제 김전일을 보지 않았다. 시선이 허공을 떠돌 았다. 그 모습은 김전일의 너무도 근사한 합리성에 취해 있 는 것으로조차 보였다. 명곡의 논리정연한 가락에 완전히 빠져들어 듣고 있는 것처럼ㅡ. 처참한 사건의 클라이맥스에 어울리지 않게 기묘하게 고 요한 가운데 김전일은 고발을 계속했다. "그러나 머리 좋은 당신은 드디어 이 우연이 낳은 밀실 상황을 해결할 '트릭'으로 억지로라도 갖다붙일 만한 것 을 생각해 냈다. 그것이 아쯔시의 유서에 써 있는 '열쇠 바 꿔치기 트릭'이었다. 아쯔시가 뭍으로 물건을 사러 나갔었 다는 사실을 이용해, 같은 모양의 자물통을 사 와서 바꿔 친다는,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트릭을 꾸며냈다. 더군다나 당신은 이 우연한 사건을 이용해 '아쯔시가 자 물쇠를 사는 것을 유키오가 보았다'라는 더 빈틈없는 사 실까지 조작해 유키오를 살해한 동기로까지 이용할 수 있


었다." "음,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머리 좋은 범인이다…." 자기도 모르게 겐모치 경감이 감탄했다. "정말 그렇죠. 극장에 자물쇠가 채워지고 나서 샹들리에 가 떨어지기까지의 겨우 1 시간 반 사이에 이렇게 잘 된 스 토리를 만들어 냈으니. 그러나 어차피 즉흥적인 트릭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자그만 틈이 있었죠. 그것이 유서의 내용과 노죠의 행동에 작은 모순을 낳고 만 겁니다." "가르쳐 주지 않겠나, 김전일 군. 그 모순을ㅡ." 오랫동안 묵묵히 있던 노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의외 일 정도로 가라 앉은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의 오만한 모 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쯔시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가다 현장에서 들켜 버린 데 다 완벽했을 트릭마저 차례로 깨져 나가는 데서 받았을 쇼 크를 그 표정에선 찾을 수 없다. 노죠는 그저 어깨의 짐을 내려놓은 듯이 상쾌하고 부드럽게 바라 보았다. 그것은 '팬텀'의 공손한 패배 선언이었다. "우선 첫번째로는…." 김전일은 노죠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목소리도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달리 온화했다. "ㅡ첫째 모순은 '밀실'이 만들어진 계기 그 자체였습니 다. 아쯔시의 '유서'엔 밀실 살인을 연출해 유령 팬텀의 존 재를 나타내고 싶었다고 씌어 있었지만, 저에겐 그 극장이 밀실이 된 것은 주인 아저씨의 갑작스런 판단에 따른 우 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유서'에는 그것도 계산했다고 씌어 있지만 갑작스러운 일을 계산에 넣어 그런 치밀한 트릭을 준비한다는 것은 좀 무리였죠." "그것은 명백한 실패였다. 생각할 시간이 없어서 말야. 나 중에 깨닫고 나서 나도 당황했지. 하다 못해 '마침 일어난 우연을 이용했다' 정도로 썼으면 좋았을걸. 그 정도는 못 보고 지나칠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어쨌든 방심했었다." 노죠가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김전일은 계속한다. "그리고 '열쇠 바꿔치기 트릭'의 해설에도 몇 가지 모순 된 점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쯔시가 구로사와 주인 아저씨 가 있는 곳으로 열쇠를 가지러 갔다 돌아 오는 도중에 열 쇠를 자신이 산 것으로 바꿔치기했다고 씌어 있었다. 즉, 아쯔시는 자신의 의지로 주인 아저씨의 방에 간 것으로 되 어 있지만 잘 생각해 봐요. 그 때 아쯔시가 열쇠를 가지러 간 것은ㅡ." "앗, 그래요, 분명히 노죠 씨가 아쯔시 씨에게 갖러 가 라고 말했었지!?"


리오가 손뼉을 쳤다. "맞아. 그것은 노죠의 명령이었습니다. 즉 노죠의 머리 속 에는 이 때 이미 '아쯔시가 열쇠를 바꿔치기 했다'라는 거 짓 트릭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노 죠는 그 때 자신이 가지 않고 아쯔시에게 열쇠를 가지러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죠의 행동은 또 한 가지의 모 순을 낳았습니다. 우리들이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극장 문 앞 으로 달려갔을 때 그 곳에는 아쯔시만이 아니라 유키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열쇠를 가지러 가라는 명령은 아 쯔시가 아니라 유키오에게 하는 쪽이 당연한 거죠. 왜냐면 유키오는 아쯔시보다 나이도 아래였고 게다가 노죠의 심부 름꾼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 때 노죠의 행동은 고등학교 써클에서 3 학년이, 그 장 소에 1 학년이 있는데도 2 학년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과 같 은 것이죠. 그런 순간에는 더욱 더 평소의 습관이 나오는 것이고, 심리적으로 보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 지 못했습니다." "져….졌군. 대단한 도련님이야, 정말. 하하…. 정말, 졌어." 노죠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ㅡ한 가지만 더, 가르쳐 주게 김전일 군. 어떻게 내가 아 쯔시의 열쇠를 빼냈는지 알았지?" "간단하죠. 아쯔시의 지갑에 자동차 키와 사물함인가 뭔 가의 열쇠가 들어 있고, 거기에 자기 집 열쇠만 없다는 것 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열쇠라는 것은 보통은 모아 서 열쇠 고리로 묶어 두기 마련이고, 더구나 지방 출신이 며 독신에 애인도 없다 즉, '독신 생활'을 하는 사람이 집 열쇠도지니지 않고 장기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아무리 생 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뭐, 만약 집 열쇠만은 다른 곳에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 으니까 일단 아쯔시의 짐을 전부 뒤져 보았지만 결국 없 었습니다. 그러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죠. 범인이 '어떤 목적'으로 아쯔시의 집에 침입하기 위해 훔쳤다, 라는 게 되는 겁니다." "역시, 어리석었어." "당신의 목적은 바로 이 비디오 테이프였던 거죠?" "글쎄. 머리가 좋은 너라면 그 테이프의 내용도 대략 예 상을 하고 있겠지?" "아, 이 테이프의 내용이야말로 당신이 아쯔시 이하 세 사 람을 살해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알고 있었나? 자, 내가 졌네. 어차피 이 테이프 를 다른 사람이 보지 않게 만들 수가 없어. 진 것을 인정 하네, 명탐정 군." 그렇게 말하고 노죠는 양 손을 벌리는 시늉으로 익살을


부렸다. "죄를 인정하는 건가?" 겐모치 경감이 묻자 노죠는 말했다. "조건이 있다." "뭐야, 말해 봐." "그 테이프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고 없애 줘. 그렇 게 하면 모두 말하겠다." "음…. 그러나 이 테이프는 증거품이래서 말야. 내용이 무 엇인지 확인할 때까지는 마음대로 없앨 수…." 주저하는 겐모치 경감을 격해져, 노려 보며 노죠는 내뱉 었다. "그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어. 그 테이프의 내용을 다 른 누군가의 눈에 보이게 하면 나는 죽어도 입을 열지 않 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야!" "으음…." 겐모치 경감은 김전일과 눈길을 주고 받았다. "좋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고 없애겠다." "약속한 거다. ㅡ자, 무엇부터 듣고 싶지?" "동기를 말해주지 않겠나? 주인 아저씨 앞에서." 김전일이 말했다. "! …정말이지 모든 것을 알고 있구만." 노죠는 구로사와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직 김전일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 구로사와는 노 죠와 김전일을 그저 묵묵히 번갈아 보았다. "…알았어. 말하지." 노죠는 그가 세이꼬 이하 세 사람을 죽이기에 이른 진짜 '동기'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4『"나는 미카를 사랑하고 있었다ㅡ." 만감을 담아 노죠가 그렇게 입을 뗐다. 이미 그 눈에는 이 전의 야심에 찬 오만함은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ㅡ미카는 내 인생의 전부였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역시 조 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놈들을 죽인 것이다. 그놈들 때문에 자살한 미카의 한을 풀기 위해서. 저 비열한 시궁 창 쥐들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나는 이 4 년 동안 이 를 갈며 살아왔던 것이다." "노죠 군. 자네 도대체…?" 구로사와는 그렇게 말하면서 노죠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겐모치 경감이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노죠는 구로사와를 바라 보았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심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진 심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것만은 용서를 빌고 싶 었습니다. 존경하는 구로사와 선생님께 욕설을 퍼부은 것 만은ㅡ."


"자, 자네는 미카를 버린 것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선생님 저는 미카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버리거나 할 리 없습니다. 미카가 자살한 것 은 제가 세이꼬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카는 세이꼬에게 살해된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ㅡ 그 여자의 천 박한 질투 때문에 미카는 자살한 겁니다!" "노죠 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미카가 자살 한 4 년 전 여름에 자네들 사이에…." "믿어 주십시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속였습니다. 4 년 전 미카의 유서를 받은 이후로 계속ㅡ." "미카의 유서를, 자네가? 무슨 소린가, 그건…." "미카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제 앞으로 미카 가 보낸 유서가 도착했습니다." "사, 사실인가, 그건?" "네…." "무슨 소린가…. 왜 나에게 보내지 않고 자네 앞으로, 딸 은…." "그것은…." 깊에 숨을 들이쉬고 난 노죠의 말은 목 안이 울렸다. "ㅡ너무도 잔혹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미카는 도저히…." "도,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던 거냐? 정말로 실연을 당해 괴로워서 죽은 것이 아니라면 딸 아이는…. 미카는 왜 자 살을 했지? 말해 봐, 노죠 군!" 구로사와는 말리려는 겐모치 경감을 뿌리치고 노죠에게 달려들어 다그쳤다. "말해 줘, 노죠 군! 부탁이다!" 구로사와는 비통하게 호소했다. 노죠는 작게 한숨을 쉬고 혀를 깨물듯 얼굴을 찡그리며 혼잣말처럼 억양 없이 말했다. "미카는 아쯔시들에게 당했습니다." "…뭐라고!?" 구로사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모두 그 여자의, 세이꼬의 사주였습니다. 나와 미카가 결 혼할 수 없도록. 미카가 스스로 나와 헤어지게 만들기 위 해서 그 뚱보 녀석들을…. 아쯔시와 유키오를 이용해 세이 꼬란 년, 미카를…." 노죠의 전신이 열병에 걸린 듯 떨렸다. 구로사와도 마찬 가지였다. 구로사와는 몸을 떨면서 김전일의 손에 들려 있는 테이 프를 보고 말했다. "… 설마, 그럼 설마, 그 비디오 테이프는…." "…네. 그 때 그 장면을 아쯔시란 놈, 비디오로 찍어 둔 겁니다!"


노죠가 말했다. 괴로움에 차 쥐어 짜는 목소리였다. "어떻게 이런…이런 일이…. 그런 일을 그 놈들이…." 구로사와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미카의 유서를 읽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전 온 몸이 떨 렸습니다. 분해서… 미워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 아 쯔시를, 그 놈들을, 이 손으로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말한 노죠의 떨리는 주먹에 울툭불툭 혈관이 튀 어 나왔다. "ㅡ하지만 생각뿐이었습니다. 어설프게 그런 일을 했다가 는 미카와의 일을 찍은 테이프가 남겨진다. 테이프가 어디 에 보관되어 있는지 저는 몰랐고, 무엇보다 비디오 테이프 란 복사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만약 복사한 것이 아쯔시뿐만 아니라 유키오나 세이꼬의 손에라도 남겨진다면 그것도 없애 버려야 한다. 미카의… 그런 모습만은 누구의 눈에도 보여서는 안된다. 설령 경찰 이라 해도ㅡ." 그렇게 말하고 노죠는 겐모치 경감에게 눈길을 주었다. 겐 모치 경감은 불편한 듯이 시선을 피했다. 노죠로부터 빼앗은 테이프를 든 김전일의 손이 떨렸다. 자 신의 손에 있는 것이 악마가 토해 낸 오물처럼 흉측하게 생각된 것이다. 노죠는 계속했다. "ㅡ저는 증오심을 감추고 먼저 세이꼬에게 접근했습니다. 세이꼬에게 접근하는 것은 간단했습니다. 원래 미카에게 그런 짓을 할 만큼 나의 연인이 되고 싶어했던 계집이었 으니까요. 미카의 자살 소식을 들은 그 여자는 시치미를 떼고 울부 짖는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신이 한 짓 을 미카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나서 죽은 건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겠죠. 그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 니다. '미카가 어제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러 와서 크게 싸 우고 막 헤어진 참이었다'라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증오심 도, 슬픔도, 절대로 알게 해서는 안된다. 복수를 위해서 참 지 않으면…. 그랬더니 그 여자, 나를 위로하고 싶다면서 내 방으로 뻔 뻔스럽게 찾아왔던 겁니다. 나는 방안에 있는 미카에게 받 은 것을 모두 숨긴 후 그 여자를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악마가 되자. 복수를 위해서 악마가 되는 거 다 라고ㅡ.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실은 오래 전 부터 미카와의 사이는 식어 버렸다'라고. 일생일대의 가장 큰 연극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준 것입니 다. 그리고 그 날 함께 잤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그 년과!


추한 짐승을 안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 밑바닥에서 질척질척 진흙 같은 게 솟아 올라와…양심, 희 망, 그런 아름다운 것들이 모두 더럽혀지는 것을 느꼈습니 다. 나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후 나는 복수를 위해서만 사는 악마가 된 것입니다!" 노죠의 눈동자가 갑자기 광기를 띠었다. 증오가 청년의 아 름다운 모습을 하늘에 퍼지는 비구름처럼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ㅡ나는 은밀히 테이프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연 인을 배반하고 욕망과 야심을 위해서 부잣집 여자에게 달 려간 비열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연기하면서. 증오하며 세 이꼬와 결혼하고 복수를 불태우면서도 아쯔시와 유키오에 게 다가갔습니다. 유키오와 아쯔시처럼 우매한 인간의 '신 용'을 얻기에는 나도 우매해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서 여자 단원이 사표를 낼 때마다 내가 속여서 상처를 입 힌 것처럼 일부러 거짓말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아쯔시는 색욕의 덩어리 같은 자신과 내 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놈 쪽에서 먼저 접근 해 왔습니다. 그 후로는 치켜 세워 우쭐하게 했죠. 나르시 시스트를 기쁘게 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은 없었습니다. 촐 싹 촐싹 칭찬만 해주면 되었으니까요. 세이꼬는 아쯔시와 내가 사귀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있 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비열한 행위를 그 놈들 에게 시킨 것은 다름 아닌 그 여자였으니까. 게다가 내가 극단의 여자 단원에게 손을 대고 있다는 소 문에도 세이꼬는 신경을 곤두 세웠습니다. 내가 미카가 죽 은 후 곧 세이꼬와 결혼한 것에 불신감이 있었던 것이겠 죠. 어쩌면 노죠라는 남자는 애정 따위엔 관심도 없이 돈 과 명예를 위해서만 여자에게 다가가는 사내가 아닐까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난 세이꼬 앞에서는 좋은 남편 역할을 했습니다. 여자 문 제로 싸움을 해도 하찮은 소문 따위는 믿지말라고 우겼습 니다. 매일 매일 사랑한다, 좋아한다라고 마음에도 없이 말 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 역시 마음속 깊숙이는 나를 믿지 않았다 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생명 보험에도 들지 않고 자신의 예금을 모두 부친 명의로 다시 바꿔 놓았겠지요. 하지만 그 것도 오히려 나에겐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 여자를 죽 였을 때 돈을 노린 범행이라는 따위로 생각되면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요." 긴 4 년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무너질 듯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견뎠습니다. 내 자신에게 말해 주었던 겁니다. 이것은 '연극'이라고, 길고 긴 연극이라고ㅡ. 그렇게 정하고 매일을 보내는 동안 나의 일상은 왠지 정


말로 무대 위에 있는 듯했죠. 기묘한 감각이 지배했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는 겁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음식 을 먹는 연기를 할 때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센 술을 마셔도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연극 중 에 위스키 대신 식은 홍차를 마실 때처럼…. 그렇게 하루가, 길고 괴로운 무대였던 겁니다. 그 4 년 간 나는 노죠를 연기했던 겁니다. 1 분 1 초가 모두 연기였습 니다. 어쩌면 자고 있을 때조차. 이해하겠습니까? 이런 기 분. 이해할 수 없겠죠. 분명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죠?" 우는지 웃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구로사와가 띄엄띄엄 말했다. "이해하네, 노죠 군. 나는…." 김전일은 생각했다. 분명 구로사와는 정말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미카를 잃고나서의 하루하 루는 끝없는 비극의 무대와 같았을 테니까. "그, 그러나 노죠. 유키오는 어떻게 된 거지? 그런 소심 한 남자가 자신이 강간한 일로 자살한 미카의 원래 연인 이던 자네와 행동을 함께 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데ㅡ." 겐모치 경감이 물었다. "유키오는 소심한 주제에 권위주의적인, 한마디로 구제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놈들 중에 서는 그래도 가장 보통 사람에 가까운 녀석이었던것 같습니 다. 세이꼬에게 부탁 받아 미카에게 그런 짓을 한 것도 아 쯔시는 반 정도는 자신의 변태적 성욕 때문이었지만, 유키 오의 경우는 세이꼬로부터 돈과 장래를 약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극히 단순한 이유였던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미카가 자살해 버렸다는 사실에 조금은 양심에 가책을 받 았는지, 내게 접근해 내가 미카로부터 자살한 이유를 들었 는지 어떤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카의 자살은 내가 그녀를 버렸기 때문이다'고 말해 주 었더니 그 놈은 꽤 안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뒤에는 나 도 한 통 속이라고 생각했는지 찰싹 붙어 오는 것이었습 니다. 언젠가 죽게 될 지도 모르고. 멍청한 놈입니다. 정말 로. 하하…." 노죠는 작게 웃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듯한 힘 없는 웃음 이었다. "ㅡ이렇게 나는 그 세 사람 옆에 있으면서 복수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진실'을 끌어내 갔습니다. 그것은 그 세 사 람이 정말로 미카의 유서에 써있던 대로 했던 가를 확인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카의 유서를 다시 읽어도 나는 그 놈들의 행위가 믿어 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추악해 질 수 있을까, 그것은 혹시 무대에서의 긴장을 견디지 못해 정신 이 이상해진 미카가 본 잔혹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ㅡ 이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 나ㅡ." 노죠의 눈에 돌연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부서진 기계에 서 기름이 흐르듯 주르륵 뺨을 타고 떨어져 갔다. "그러나 진실은 상상보다 훨씬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저 는 보고 말았습니다. 이 방에서 아쯔시와 유키오에게 능욕 당하는 미카의 모습을!" 마음의 상처에서 고름을 쥐어짜듯 비통한 외침이었다.』 5『무서운 정적 속에 노죠는 계속 '지옥'을 이야기해 나갔 다. "나는 아쯔시 앞에서는 미카와의 일은 구로사와 선생과 의 연줄이 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쯔시에게 사 실을 말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 는 여자를 모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차츰 아쯔시는 내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생 각을 굳히게 되어 결국 한 달 전 자신의 방 ㅡ 바로 이 방 으로 나를 데려왔습니다. 이 방에는 보시다시피 무수한 비디오 테이프로 가득차 있 습니다. 이 밖에도 어디낙 숨겨 놓은 테이프가 또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도박을 했습니다. 유키오로부터 그들이 미카를 가지 고 놀았다고 들었다라는 얘기로 선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그 때 찍은 테이프를 보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아 쯔시는 마지못해 승낙하고 도려낸 책 속에서 그 테이프를 꺼냈습니다." 노죠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이 들고 있는 테이프를 가 리켰다. "ㅡ놈은 호색한다운 미소를 띠며 방의 불을 끄고 테이프 를 재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 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비디오에서 작은 소리가 나내기 시작하고 저기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 이 회색의 노이즈로 바뀌고. …미카의…미카의 우는 얼굴 이…클로즈 업으로…아아…."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얼굴을 노죠는 두 손으로 가렸 다. 오열이 새어 나왔다. 핏발 선 눈으로 김전일을 바라보 며 말했다. "김전일 군, 알겠나, 그 때의 내 기분을! 지옥이야. 지옥 그 자체다. 생각해 봐. 정말로 사랑했던 여 자가 눈앞에서 가장 경멸하는 사내에게 더럽혀지는 것. 그 것도 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방법으로! 알겠나, 김전일 군!? 이것만은 모르겠지, 너라도. 아니, 아무도 알 리가 없어. 그 때 나의 고통만은!"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었다.


"ㅡ그 자리에서 아쯔시를 죽이려고도 생각했지. 그래도… 그래도 참았던 거다. 혀가 끊어질 정도로 깨물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 들어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주먹을 쥐었 다. 죽을 힘을 다해 참았던 거다. 알겠나, 응? 그 고통을!? 지금 격정을 못 이기고 이 놈을 죽이면 곧 발목을 잡힌 다. 그렇게 되면 세이꼬나 유키오를 놓치고 만다. 게다가 이 놈에게는ㅡ 이 놈을 죽이는 데는 더 어울리는 죽음의 장소가 있다. 미카가 잠든 그 섬에서, 미카의 앞에서 이 쥐 새끼들로 피의 축제를 벌리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야!" 온몸의 털이 곧추서는 살기가 노죠의 전신에서 뿜어 나 왔다. 간신히 어깨로 숨을 쉬면서 노죠는 계속했다. "ㅡ 1 개월 후에 우리들은 '오페라 극장 호텔'에서 극장 오프닝 행사로 '오페라의 유령'을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죽이고 싶은 인간이 한 곳에 모이는 거니까. 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페라 극 장 호텔 살인사건'의 시나리오를…." 어느 샌가 노죠의 눈물이 멈췄다. "ㅡ자! 갑니다, 경감. 팬텀의 복수극은 이제 막을 내렸습 니다. 나의 일생 일대의 무대가 이제야 끝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노죠는 겐모치 경감에게 다가가 두 손을 내밀었다. 겐모치 경감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수갑을 채웠 다. 겐모치 경감에게 이끌려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노죠는 뒤를 돌아보았다. "구로사와 선생님. 어땠습니까, 제 연기. 조금 나아졌습니 까?" "나도 늙어서 신경이 둔해졌어. 제자의 연기도 못 알아보 았으니." 구로사와 역시 눈물을 흘렸다. "노죠 군. 자네는 바보다. 그 정도의 재능을 왜 자신을 위 해서 쓰지 않고. 왜 그렇게까지 미카를 위해서만…. 왜…." 노죠는 조용히 미소를 띠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ㅡ." 낡은 아파트의 밖으로 난 층계참에서 김전일이 겐모치에 게 테이프를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이 테이프 처분해 주는 거죠?" "응. 약속했으니까. 내가 시말서를 한 장 쓰면 되는 일이 다." 겐모치 경감은 가볍게 대꾸하고 테이프를 받았다. 7 층 층계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물이 흐르고 있었 다. 노죠의 손에서 미끄러지듯이 테이프가 놓여져 천천히 떨 어져 내렸다. 김전일은 몸을 내밀어 '그것'을 바라 보았다. 테이프가 납


빛 수면에 가라앉는 것을 보며, 김전일은 며칠 전 처음 절 벽 위의 '오페라 극장 호텔'을 올려다 봤을 때를 떠올렸 다. 그때부터 계속되던 불길한 생각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 는 것을 느꼈다. "자, 노죠. 갈까ㅡ." 겐모치 경감이 말했다. 격렬하고 긴 증오의 날들이 낳은 처참한 살인 사건이 조 용히 막을 내렸다.』

'에필로그' 『몇 개월 후 김전일 앞으로 구로사와에게서 온 편지가 도 착했다. 그 동안 '오페라 극장 호텔'을 처분해 그 매각금으로 새 로운 극단을 결성했다는 내용과, 구로사와가 만든 새 극단 의 창단 공연에 대한 안내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구로사와의 새 극단인 '유랑민 봉기(蜂起)'는 한창 날리 던 명성에 연연해 하지 않고 은퇴한 대연출가의 재기라고 매스컴에서도 크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전일 일행 이 찾아간 창단 공연 첫날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까지 몰 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대단한 사람들이지, 김전일." 김전일의 손을 끌어당긴 미유끼가 흥분해 있었다. 그녀에 겐 몇 배의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이 공연 티켓을 손에 넣 은 것이 무엇보다도 기쁜 것이리라. "응, 그렇군ㅡ…." 김전일은 얼이 빠진 채 대꾸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연 극보다 공연을 보러오는 유명한 탤런트와 여배우들 쪽에 더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봐, 저기 저 사람 아사노 유리코 아냐? 우와! 역시 스 타일 좋다. 봐, 저 다리!" "김전일! 뭘 보러 온거야." 미유끼가 발끈해 김전일의 팔을 당겼다. "앗, 어 어…." 김전일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엣!" 그 순간 엉겁결에 누군가의 부드러운 다리를 잡았다. "앗, 죄송합니…? 이 다리는 어디서 본 기억이…." "오랜만이네요, 김전일 씨." 어디선가 들은 듯한 화려한 목소리. 올려다 보니 리오였 다.


"리오 씨!" "와 주었네요, 두 사람 모두." "이야ㅡ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긴 다리군요." 김전일이 리오의 다리를 잡은 채로 말하자 미유끼가 팔 꿈치로 찔렀다. "이봐, 김전일, 언제까지 더듬고 있을 거얏! 미안합니다, 리오 씨, 이 치는 정말 무신경해서…." "아얏! 아프다고 미유끼…." "당연하지." "후후…." 의미 있는 미소를 띠고 리오는 김전일에게 귓속말을 했 다. "어때요, 김전일 씨. 그 뒤에 미유끼 씨와 그거 했어?" "에? 무, 무슨 소립니까!" "어머, 아직이에요? 후후, 그래도 말이죠, 초조해 할 건 없 어요. 어쨌든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수밖에, 그 죠?" "아, 아니, 전 별로 초조해 하지는…." "뭐, 뭐야, '아직'이니 '가까이에 있다'느니…." 미유끼가 미심쩍은 얼굴로 김전일을 쳐다 본다. 김전일은 당황해 하며 하제를 바꿨다. "ㅡ아, 그러고 보니 리오 씨, 극단 '환상'을 그만두고 '유 랑민 봉기'에 입단했다면서요. 이야ㅡ 놀랬어요." "당연하잖아요. 구로사와 선생님이 극단을 만들었는걸. '환상' 따위에는 아무 미련도 없어요." 리오는 기쁜 듯 미소 지었다. "ㅡ그리고 그리고, 오늘 나, 주역 맡았어요. 감격했어요. 나중에 감상을 들려줘요, 두 사람 모두!" "네, 물론." 대답하는 김전일의 어깨를 누군가 갑자기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잡았다. "와 주었군요, 김전일 씨, 미유끼 양!" 구로사와였다. 얼굴에는 공연 준비에 쫓긴 며칠 동안의 피로가 드러나 있지만 눈은 오히려 전보다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주인 아저씨." 김전일이 말하자 구로사와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제 주인 아저씨가 아닙니다. 그 호텔은 처분 했으니까." "아, 그렇죠. 하하." "하지만 주인 아저씨. 아니, 구로사와 선생님. 미카 씨의 무덤음 어떻게 하셨습니까?" 미유끼가 물었다. "미카의 묘는 시내로 옮겼습니다. 아오야마 묘지에 집안


의 묘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기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러셨군요…." 김전일은 왜 구로사와가 저 '오페라 극장 호텔'과의 인 연을 끊으려고 결심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구로사와도 뭔가를 느꼈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듯 중얼거렸다. "ㅡ그로부터 벌써 반년입니까." "네ㅡ. 그렇게 되나요, 구로사와 선생님. 노죠의 재판이 시 작됐습니다." "겐모치 경감에게서 들었습니다. 아마 무기징역이 될 거 라고ㅡ." "그럴 겁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세 사람이나 죽였으니 까ㅡ." "김전일 씨. 언젠가 그가 죄값을 치르고 나오면ㅡ." 구로사와가 말했다. "ㅡ나는 그를 위해서 무대를 연출하려고 생각하고 있습 니다." "노죠 씨를 위해섭니까?" "네. 이것은 동정이라든가 그런 기분에서가 아닙니다. 내 딸을 위해서 그가 살인을 범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순 수하게 연출가로서 그의 훌륭한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습 니다. 그러면 내가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어떤 '것'에 손이 닿 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가 나올 때까지는 나도 현역에 서 활동할 생각입니다. 나이 같은 건 말하지 마세요. 일도 하고, 연해도 하고, 감성을 닦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노 죠 군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죠." "구로사와 선생님. 그럼 그것을 위해 '오페라 극장 호텔' 을 처분해서 극단을…?" "절반은 그것 때문입니다. 나머지 반은ㅡ." "…." "딸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주세요'라는 유언을." 그렇게 말하며 미소 띤 구로사와에겐 강한 자신감과 그 걸 뒷받침하는 지성이 넘치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ㅡ그렇지. 김전일 군, 만나면 한 가지 물어 보려던 것이 있습니다." "네? 뭐죠?" "그 때 당신은 노죠 군의 범행 '동기'를 알고 있던 것 같 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알았습니까? 뭔가 결정적 인 증거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김전일이 말했다. "ㅡ그저 아틀리에에서 마쿠베 화백이 그린, 미카 씨와 노


죠 씨가 함께 있는 그림을 보았을 때 묘한 부조화를 느꼈 던 겁니다." "부조화?" "네. 우리들 앞에서 욕설을 퍼부어 대는 악당과 그 그림 속에서 미소 짓는 청년이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뭐, 옛날 그림이기 때문일 거라고 그때는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노죠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틀리 에에 다시 가서 지금의 노죠를 그린 그림을 보았을 때, 뭔 가 알 것 같더군요. 그 악당인 척하는 것은 모두 그의 연 기가 아닐까 하고요." "그랬습니까? 마쿠베 씨의 그림에서." "그 그림 속의 노죠는 남자인 내 눈으로 봐도 아름다웠 습니다. 마쿠베 씨는 말했습니다. '이것이 노죠 군의 진짜 모 습이다. 나의 화필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라고. 그 말을 믿었을 때 진상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습니다. 그야말로 감쪽같이 속은 걸 알아차린 것으로 순식간에 사 건의 전혀 다른 모습이 보여 왔습니다." "음, 역시. 멋진 추리입니다." "아닙니다, 하하, 그 정도는… 하하…." 김전일이 겸연쩍은 웃음을 씻어 버리 듯 개막 벨이 울렸 다. "자, 두 분 모두 극장으로 들어 가세요. 시작합니다." 구로사와가 김전일과 미유끼를 극장으로 안내했다. "ㅡ연출 구로사와, 각본 노죠에 의한 가극, '오페라 극장 호텔 살인 사건'의 개막입니다.』

'후기' 『이 작품을 손에 든 독자는 아마 두 층으로 나눌 수 있을 것 입니다. 하나는 물론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 중인 인기만화 '김 전일 소년의 사건일지'의 애독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만 화판 '김전일'을 읽은 적이 없는 독자입니다. 만화판 '김전일'은 아시는 바와 같이 만화계에 '본격 추리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 금자탑으로 연재 개시로 부터 딱 2 년이 지난 지금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며, 이 신 장르 의 꼭대기에 계속 군림하고 있다. 당연히 이 소설판도 '주간 소년 매거진'의 독자를 주 타킷 으로 상정하고 기획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 명탐정 김 전일 1'은 '주간 소년 매거진'에 실린 '오페라 극장 호텔 살 인 사건'의 속편으로 쓰인 것입니다.


뭐야, 그럼 만화 쪽을 읽지 않은 나는 이런 책 읽어도 별 볼 일 없잖아, 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책꽂이에 되돌려 꽂아놓으 려고 하는 당신,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나의 고심이 물거품으로 되어 버립니다. 뭐라고 해도 이 작품을 쓸 때 내 가 제일 고심했던 점은 '김전일'을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김 전일'의 재미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니까. 어쨌든, 편집 쪽의 주문은 엄했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주간 소년 매거진'의 '김전일' 애독자를 즐겁게 할 내용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판에 서 씌어 있는 사건의 속편에 해당하는 오리지널 스토리가 좋 아. 그리고 만화의 재미를 그대로 살려, 거기다가 소설 나름 의 수법에 의한 의외성의 연출, 감동을 듬뿍 담아 가자. 단, 그렇다고 해도 만화판을 읽지 않은 독자가 의미를 모를 만한 것은 안돼. 될 수 있으면 이 소설판에서 새로운 '김전일' 열성 팬이 생길만한 것을 해 줘." …제맘대로만 얘기한다. 이리하여 만화판 같은 엄한 원고 체크와 왁자지껄한 협의를 거쳐, 칠전팔기의 결과, 이 작품이 태어났습니다. 과연 그만큼 맞춰졌는지 어땠는지. 그 판정은 작품이 아니라 독자에게 맡 거야 할 것이겠죠. 질타와 격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94 년 8 월 아마기 세이마루』 (♣편집자주 : 글쓴이가 말한 '김전일 소년의 사건일지'는 현재 한 국에서 '아이큐점프'에 '소년탐정 김전일'로 연재되고 있다. 이 작 품은 소설을 번역한 것이다.) 지은이 : 아마기 세이마루 생년월일·나이 미상. 동경 출신. 혈액형 O 형. 다수의 소설, 만화 등 원작 집필. '주간 소년 매거진'의 만화판『소년탐정 김전일』의 구성작가로 참여. 그린이 : 사토 후미야 1965 년 12 월 22 일생. 사이타마 현 출생. 혈액형 O 형. '제 46 회 신인만화상' 입선을 거쳐 만화판『소년탐정 김전일』의 그림 담당. 지갑 수집이 취미. ㅡ KINDAICHI SHONEN NO JIKENBO(소년탐정 김전일)ㅡ "참 힘들었습당..........얼른 오타를 수정하고 7 개의 텍스트 파일을 하나의 HWP 파일로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당.^^ 1 편보시구나서 2 편인 '유령선 살인사건'도 많은 기대해주세요. ㅡ타이핑한녀석^^:ㅡ

소설 명탐정 김전일 2. 유령선 살인사건

지은이:아마기 세이마루 옮긴이:임은경 펴낸곳:(주)서울문화사 차례 프롤로그 제 1 장 류오마루 항해일지 제 2 장 출항 제 3 장 유령선 마리 세레스트호 제 4 장 악몽의 밤 제 5 장 대신 죽은 자 제 6 장 진상 에필로그 후기 프롤로그


짙은 안개 사이로 떠오른 그 배는 분명히 범선이었다. 그러나 선원들에게는 전설에서 들은 유령선이나 신기루처럼 보였다. 1872 년 12 월의 일이다. 첫 번째 기항지인 지브롤터를 향해서 대서양 위를 항해하던 범선 데이 그라테이호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묘한 모양의 배와 맞부딪쳤다. 그 범선은 돛의 대부분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있었고, 술에 취한 듯 좌우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라테아호의 모아하우스 선장은 조타수에게 명령했다. "속도를 올려. 저 배에 바싹 다가가 봐." 그라테아호가 뒤쫓기 시작하자 그 기묘한 범선은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나 그라테아호가 신호탄을 쏘아 올렸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본 쌍안경에도 선원의 모습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아니, 선원은커녕 조타 핸들을 잡는 사람조차 없는 것 같았다. "선장님, 무슨 일이 생겨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1 등 항해사인 올리버가 그렇게 말하고 그 배를 수색하겠다고 자원했다. "좋아. 보트를 타고 가 봐." 선장이 명령하자 올리버는 두 명의 선원을 데리고 안개 낀 차가운 바다 위로 나갔다. 세 사람은 가까이 접근해. 고개를 들어 그 배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보았다. '마리 세레스트호' 파도와 안개에 흠뻑 젖은 목제 선체에 영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올라가 보자." 선원 한 명이 꺼림칙해하며 반대하자 올리버는 그를 보트에 남기고 다른 한 명과 세레스트호의 갑판으로 기어올라 갔다. "아, 아니...?" 두 사람은 배 위의 너무나도 기괴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조타 핸들은 조작하는 사람도 없이 부서진 풍차처럼 제멋대로 돌고 있었다. 늘어진 돛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파닥파닥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갑판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배 안을 뒤지자 더 이상한 광경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부엌도, 식당도, 승무원의 방도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고, 소동이 일어났던 흔적 같은 것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 선원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선원들의 옷은 깨끗이 세탁된 채로 깨어져 있었고, 부엌에는 만들던 아침 식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빵과 고기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고 냅킨과 포크, 수저까지 갖춰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햇볕에 그을린 선원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몰려와 아침 식사를 할 것 같았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도, 돌아갑시다, 올리버 항해사!" 미신을 깊게 믿는 선원이 가슴에 십자가를 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선장실에 가 보지 않았어.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있을 거야.


없다는 건 말이 안돼." 공포심을 마음속에서 몰아내자, 올리버는 용감해졌다. 그는 학질에 걸린 것처럼 떠는 선원을 따라오라고 명령해서는 선장실 문을 열게 했다. "...!" 그곳에도 선장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아침 식사를 위해 준비된 듯한 접시와 식기, 그리고 빵과 달걀 프라이만이 주인 없는 식탁에 어떤 메시지처럼 놓여 있었다. "분명히 태풍 때문에 모두가 탈출한 거야. 틀림없어!" 정색을 하며 주장하는 선원에게 올리버는 식탁 위의 컵을 가리켰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렇다면 이 컵에 남아 있는 커피는 당연히 쏟아져야 정상이고, 게다가 약병도 넘어져 있어야 하잖아. 태풍 따위는 없었어. 이 배에서 사라지기 직전까지 선장은 여기서 우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을 거야." 침대 옆에 놓인 책상을 바라보던 올리버의 눈에 얼핏 책같은 것이 띄었다. 그것은 선장이 남긴 마리 세레스트호의 항해일지였다. 일지에는 이렇다 할 이변에 대해서는 전혀 쓰여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항해가 평탄하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항해일지는 10 일 전인 11 월 25 일 아침으로 끝나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 사람이 없는 배가 10 일 동안 마치 고도의 항해 기술을 가진 베테랑 선장이 키를 잡고 있던 것처럼 정확하게 항해를 해 온 것이다. "유령이 배를 몰기라도 했단 말인가?" 올리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너무 놀라 계속 신을 부르면 중얼거리는 선원과 함께 올리버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바로 옆에 데이 그라테아호가 보이자 대범한 올리버도 자신도 모르게 휴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보트에서 기다리던 선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보트로 내려가려던 순간 올리버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시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은 없었다. 짙은 안개가 서린, 아무도 없는 배의 갑판을 쳐다보며 올리버는 중얼거렸다. '유령 선장....'

제 1 장 류오마루 항해일지 1 "아저씨, 대충 그렇게 정해요." 식은 커피를 소리내며 홀짝홀짝 마시면서 김전일이 말했다. "하지만, 김전일. 아침 식사밖에 주지 않는데 이 정도 가격이면 비싸. 적어도 만


엔 정도는...."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긁었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보세요, 세끼 식사 포함해서 십이만 엔이면 적당하잖아요." 미유끼가 핑크색 형광펜으로 팜플렛에 선을 그었다. "시, 십이만!? 아무리 세끼 식사를 준다지만 그건 너무 비싸." "쩨쩨하게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커피 더 드릴까요?" 커피를 가져온 웨이트리스가 웃음을 띄웠다. 점심 시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40 대 중반의 중년 남자와 고등학생 정도의 남녀 두 명이 이렇게 떠들고 있었다. 여름 휴가 계획을 짜는 친구들처럼 여행 팜플렛을 펼친 채 떠들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점원들과 점심을 먹는 샐러리맨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아버지에게 여름 휴가 여행을 가자고 보채는 아들과 딸? 아니면 학교 선생이 반장과 함께 학급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그러나 사실은 이 '아저씨'라고 불리는 중년 남자는 밑바닥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출세한 경찰청 조사 1 과의 경감 겐모치였다. 경찰청 '살인과'의 경감이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전형적인 '요즘 젊은이'인 김전일에게 아저씨라고 불리게 된 의도는 '오페라 극장 호텔 살인 사건'으로 신문 지상을 시끄럽게 만든 기괴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외딴 섬의 오래된 호텔에서 일어난 이 이상한 살인 사건을 해결로 이끈 사람이 다름 아닌 전일이었다. 김전일은 자신이 다니는 후도 고등학교의 연극부 부원이며 소꿉친구인 미유끼의 권유로 함께 연극부 합숙을 가게 되어 살인 사건에 말려든 것이었다. 비번이라 휴가중이던 겐모치 경감이 미침 그곳에 있다가 김전일의 경이적인 추리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 이후로 옛날 명탐정으로 유명했던 고우스케의 손자라는 김전일과 공적, 사적으로 계속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럼 이것으로 정하죠. 9 만 8 천 엔 오키나와 문 비치, 4 박 5 일!" 김전일은 귀찮다는 듯이 팜플렛 더미를 정리하고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오후 수업을 못 듣게 된단 말예요." 김전일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처음부터 오후 수업은 빼먹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수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휴가가 근사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가 아닌가는 분명히 그것에 달려 있었다. "잠깐만 앉아 봐, 김전일." 겐모치가 김전일을 보고 말했다. "보너스 받은 돈은 차와 맨션 임대료로 거의 다 써 버렸어. 게다가 아이 녀석 입학도 있고, 그러니 너무 무리할 필요가...." 그러자 옆에 있던 미유끼가 말을 가로챘다. "어머! 겐모치 경감님, 무리라니요. 너무 심하지 않아요? 열다섯 번째 결혼 기념일이잖아요. 큰맘 먹고 쓰세요. 아주머니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아, 이거 정말 멋져!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 리조트 호텔에서의 7 일 간, 16 만 8 천 엔. 봐요, 프라이비트 비치에서 마린 스포츠까지 할 수 있다구요. 꺄오! 너무 멋져, 나도 한번 가 봤으면."


미유끼는 자신의 일처럼 신나 하며 형광펜으로 팜플렛 여기저기에 표시를 해댔다. "됐어! 적당히 해 둬." 겐모치가 미유끼를 말렸다. "뭐 때문에 너희들에게 팜플렛 수집을 부탁했는지 모르겠다. 바빠서 내 대신 값싸고 화려한 투어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게다가 근무중에 빠져나와 이런 곳에서 점심까지 사주고...."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좀더 싼 것으로 보여 드릴게요." 김전일은 종이 봉투에서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얇은 팜플렛 한 장을 꺼내서 겐모치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예요. '대자연에 둘러싸인, 사시사철 여름인 섬들, 오가사와라 섬을 향해서, 고급 여객선으로 8 일 간의 꿈의 향해, 딱 2 만 9 천 8 백 엔!' 어때요!" "이야, 이거 아주 싼데!" 겐모치의 눈이 동그래졌다. "같은 오가사와라 여행이라도 미유끼가 찾아 준 건 12 만엔이나 하지만 이것은 그 4 분의 1 도 안 돼요. 어때요? 점심값은 했죠, 아저씨?" "흠... 그런데 뭐야, 동태평양 범선? 들어 본 적도 없는 선박 회사군. 괜찮을까, 김전일?" "무슨 소리예요? 배 따위는 어느 회사 배건 상관없잖아요." "하지만 이 팜플렛도 어쩐지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가 지저분하고, 게다가 이 '딱!'이라는 낱말도 걸리지 않아? 마치 그 배를 타면 돛대가 딱 하고 부러질 것 같은...." "어휴, 참! 모처럼 고생해서 찾아 드렸더니, 그러면 쩨쩨하게 그러지 마시고 미유끼가 보여 드린 고급 리조트에 팍 돈을 내고 가시면 되잖아요. 공무원은 불경기와는 상관없잖아요!" "재가 지금 쩨쩨하게 그러는 게 아냐. 난 그저 비슷한 일정이라면 싼 것으로 하려고...." "자, 자, 겐모치 경감님." 미유끼가 끼여들었다. "이런 건 기분 문제잖아요. 내가 아주머니 입장이라면 결혼 15 주년 여행이 2 만 9 천 8 백 엔짜리라는 걸 알면 아무리 일정이 좋다고 해도 기분이 좀 상할 것 같아요." "그럴까?" "여자에게 기념일이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라구요." "좋아, 알았어! 미유끼가 권해 준 투어로 하지. 이 오키나와 이시가키 섬, 16 만 8 천 엔으로!" "와아, 멋진 경감님! 대담한 배포!" "하하하! 나란 사람은 쓸 때는 쓰는 사람이야." "칫! 허영을 부리시긴. 나중에 울지나 마세요, 아저씨." "이 녀석, 남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겐모치는 킁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식사 전표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2 "김전일, 정말로 오후 수업 안 들을 거야?"


"으응. 좀 볼 일이 있어서. 요코다에게 대신 대답해 달라고 부탁 좀 해줘, 미유끼." "또? 언제나 그러는구나. 그러다가 출석 일수 모자라도 난 몰라." "괜찮아. 그럼, 부탁해!" 학교 근처까지 바래다 준 겐모치의 차에서 내린 김전일은 미유끼와 헤어져 번화가까지 급히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가 가는 곳은 휴가철을 맞아 상점 전체가 세일을 하는 상가의 한 경품 추첨 코너였다. "어이, 명탐정. 또 땡땡인가? 할아버지가 아시면 울겠군." 경품 추첨 직원인 빠칭코 주인이 담배를 찌들어 누렇게 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시끄러워요, 담배에 찌들어 가지고. 이 좀 닦아요!" '히히히. 그래, 경품권을 가져왔나, 명탐정?" "봐요, 여기 있잖아요.' 납작 찌부러진 가방에서 김전일은 두툼한 경품권 다발을 세 개나 꺼내 보였다. "1 등 여행 초대권이 탁! 붙는 걸 보여 줄 테니까 가만 계세요." "이야, 대단한데? 어떻게 모았지. 그렇게 많이?" "인맥이에요, 인맥. 이웃 사람들 일을 도와 주는 대신에 이 경품권을 받았거든요." "캬아, 대단하군! 그렇게까지 할 정성이 있으면 차라리 착실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당당히 돈을 내고 가는 게 나을텐데?" "알았어요, 알았어. 아무튼 나한테는 지금 '경품권이 당첨되는 게' 중요하다구요." 경품권이 맞았어. 두 명 여행 초대권이. 어렵게 맞았는데 그냥 버리면 아깝잖아. 어차피 공짜니까 미유끼, 시간 있으면 함께 가지 않을래? 지극히 자연스러운 유혹일 것이다. 라이브 초대권이 맞았어. 그냥 두면 아까우니까 시간 있으면 함께 가지 않을래? 영화 시사회 초대권이 들어왔어. 모처럼 생긴 거니까 이번 금요일날 만나서 보러 갈래? 초대권을 주는 잡지에 열심히 응모하는 남자 고등학생 중에, 맘에 드는 여학생을 유혹하는 것이 목적인 음흉한 학생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어렸을 때부터 이웃에 살았고, 게다가 고등학교까지 계속 함께 다녔는데도 아직 키스 한 번도 못했다. 소꿉친구로 친하게 지낸 지 십수 년인 미유끼와 자신 사이에 아직도 넘지 못한 마음의 벽을 이번 여름에 단번에 넘으려는 것이 김전일의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금색으로 빛나는 1 등상 구슬이 나와야만 한다! "이얏--!" 김전일의 기합 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뭔지 모르지만 기합은 넣지 마." 경품 추첨 직원인 빠칭코 아저씨는 경품권 매수를 세고 나서, "이것을 넣고 딱 백 번 돌리는 거다." 라며 여전히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오케이!" 김전일은 팔을 한 번 휘두르고 나서 경품기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금구슬, 금구슬, 금구슬, 금...."


힘차게 휙휙 돌리기 시작했다. "--금구슬!" 그러나 쪼르륵 굴러 나온 것은 빨간 구슬이었다. "여기 유감상, 티슈." "에잇, 다음!" "여기, 티슈." "다음!" "이런, 또 티슈네. 어쩌지, 명탐정?" "에잇, 에잇, 에잇!" 땀을 흘리면서 김전일은 손잡이를 더욱 세게 돌렸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빨간 구슬뿐이었다. 껌, 초코볼, 티슈 같은 것들만 계속 당첨될 뿐이었다. "엉터리! 아저씨, 이거 진짜로 맞는 거 아니죠!" "맞아, 실제로 맞았잖아? 껌 두 개하고 초코볼 세 개에다 티슈까지." "그게 아니라 1 등 말예요, 1 등!" "아직 맞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겠지. 아, 이제 마지막이군, 마지막 한 번 남았어!" "버, 벌써? 에잇, 내 노력은 다 어떻게 된 거야!" 화가 난 김전일은 마지막으로 힘차게 돌렸다. 접시에 또르륵 하고 구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으...." 신음 소리를 내고 나서 김전일은 접시를 쳐다보았다. 금색이었다. 직경 2 센티미터의 플라스틱 구슬이 막 태어난 달걀처럼 보였다. "맞았다.!" 경품 추첨 직원인 아저씨가 땡땡땡 기세 좋게 종을 울렸다. "김전일! 오가사와라 행 호화 여객선 초대권, 당첨!" 3 "김전일, 정말로 이런 곳에 부두가 있을까?" 미유끼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택시는 인적이 끊기고 창고들만 즐비한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괜찮아, 약도대로 가고 있으니까." 김전일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차츰 불안해졌다. 이즈 시치 도로 향하는 페리호의 출항 장소인 다케시바 부두를 지나 이럭저럭 10 분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1, 2 분만 더 가면 운전사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보리라 생각했을 때 운전사가 먼저 말했다. "손님, 저겁니까?" 운전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창고 사이로 커다랗고 흰 배가 있었다. "마, 맞아요! 분명히 저거예요. 서둘러 주세요. 집합 시간이 다 됐거든요." 부두 입구에 택시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물건을 내리는 순간 기적이 울었다. "어떡해, 배가 떠날려나 봐!" 미유끼가 보스턴 백을 안고 모자를 누르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 출항 시간까진 아직 20 분이나 남았는데."


김전일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미유끼 뒤를 따라 달려갔다. "김전일, 어서 와, 어서!" 부두의 콘크리트를 디딜 때마다 미유끼의 하늘색 미니스커트가 팔랑팔랑 춤추고, 내리쬐는 태양이 희고 큰 그녀의 모자를 눈부시게 비추었다. 그 뒷모습에 김전일은 넋을 빼앗겼다. 미유끼는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가 좋았고 예뻤다. 평판이 좋지 않은 '말썽꾸러기'인 김전일과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늘 함께 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미유끼의 마음이 좋아서라고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맘대로 말하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수군거림에 미유끼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김전일은 내심 몹시 불안했다. 미유끼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아 언제 소꿉친구라는 특권이 효력을 잃어버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전일, 아직 괜찮은 것 같아!" 배의 계단을 두서너 개 올라간 지점에서 미유끼가 뒤로 돌아 손을 흔들었다. 눈이 부신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얀이를 보이면서. 그것은 김전일의 불안감을 깨끗이 날려 버리는 미소였다. 4 배에 올라탄 김전일은 크게 실망했다. 호화 여객선이라고 해서 크기도 엄청나며, 반짝반짝하는 휜 갑판에 수영장이 딸려 있고, 새하얀 옷을 입은 선원들이 일제히 경례를 하며 맞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였다. 먼저 환영이 없었다. 입구에서 무뚝뚝한 표정의 젊은 남자가 쿠폰을 확인할 뿐이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크기는 커녕 아주 낡은 데가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볼 때는 하얗게 보였던 선체와 갑판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거의가 거무튀튀했다. 또 문과 손잡이 같은 것도 몹시 낡아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출항 시간이 임박해 있는데 다른 승객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상하네... 보통 이런 배라면 사람들이 무척 많이 타잖아? 괜찮을까, 김전일?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미유끼가 불안해서 김전일의 티셔츠 소매를 잡아당겼다. "입구에서 쿠폰을 체크했잖아. 호화 여객선은 이런 걸 말하는 거야." 큰소리치면서도 김전일은 다른 손님들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려댔다. "하지만... 호화 여객선이라고 해서 온통 새하얀 데가 멋진 사람들이 가득 타고 시끌시끌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배는 모두 다 지저분하고.... 어머! 하얗게 칠해져 있는 곳도 자세히 보니 거무튀튀하잖아!" "바보같이. 이건 원래 이런 색이야. 자연 소재를 살린 '순수한 멋'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니?" "들어 본 적은 있지만... 하지만 이건...." "자, 자, 일단 객실로 가 보자. 객실은 분명히 근사할 거야." 김전일은 그렇게 말하고 '선실 2'라고 쓰인 표시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손님?"


불러 세운 사람은 선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어깨에 장식용 금색 끈이 붙은 흰 제복과 선원 모자가 잘 어울리는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닙니다, 객실이 어딘가 하고...."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터 앞쪽은 출입 금지입니다. " "하지만 선실이라고 써 있는데요?" "아닙니다. 그 계단 아래는 지금은 화물실로 쓰고 있습니다." "화물실이라니, 이 배는 여객선 아닌가요?" 김전일이 묻자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네, 반은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반이라뇨?" "개인 선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화물실로 개조해서 쌀과 술 등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요. 우리는 호화 여객선인 줄 알고 탔는데요? 그런데 어째서 화물실이 함께 딸려 있는 거죠?" "호화 여객선이라구요? 실례지만 손님, 어느 회사를 이용하셨죠?" "경품 추첨이요. 집 근처에 있는 상가의 경품 추첨에 당첨되었어요." "경품이라.... 정말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호화 여객선이라는 것은 지나친 과대 광고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2 만 9 천 8 백 엔의 값싼 오가사와라 여행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2 만 9 천 8 백 엔의 오가사와라 여행!?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혹시 겐모치 경감님 부탁을 받고 김전일, 네가 찾아온 팜플렛 아냐?" "아, 그 '딱!'이라고 써 있던 것이구나! 이런, 속았어! 이게 뭐가 호화 여객선이야. 세상에, 이렇게 지저분한 배를 가지고." "김전일, 너무 지나쳐." 미유끼가 김전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 선원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본 김전일은 자신도 억지 웃음을 지었다. "하, 하지만 공짜지. 하하하! 게다가 나쁜 사람들은 그 상점 사람이야.'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원은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아, 말씀드리는 게 늦었는데, 저는 이 배의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라고 합니다. 실례입니다만 손님의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전 미유끼입니다." "아, 전 김전일입니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정중한 미즈사키의 인사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김전일 씨, 미유끼 씨. 출항 시간이 약간 늦어지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때까지 배 안을 조금 둘러보시겠습니까?" "네, 저는 좋습니다만." "저, 저도...." "그럼 가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미즈사키는 흰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서 김전일과 미유끼의 짐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5 "이쪽이 거실, 그리고 저 안쪽이 오락실입니다. 오락실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습니다. 오래된 것이지만 수시로 수리를 하기 때문에 즐기시는 데 불편은 없을 겁니다." 미즈사키는 재빠른 동작으로 김전일과 미유끼를 데리고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 세련된 동작은 반은 화물인 누더기 여객선의 선원이 아닌, 그야말로 진짜 호화 여객선의 승무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즈사키의 안내로 배 안의 이곳 저곳을 하나하나 둘러보고 나자 첫인상으로 생겼던 실망이 다소 누그러졌다. 구식이며 낡기는 했지만 나무를 많이 사용한 품격 있는 실내 장식은 이 배가 예전에 제 1 선에서 활약하던 때의 대단했던 모습을 상상케 했다. "둘러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미즈사키가 자신에 차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요. 의자라든가 테이블도 오래 되긴 했지만 고급스럽고." 미유끼는 이제 완전히 기분이 바뀌어 있었다. "그렇지요?" 라고 미즈사키가 말했다. "원래는 4 천 톤급 중형선 중에서는 가장 고급 여객선이었습니다. 20 년이나 된 배지만 객실에 미니 부엌까지 있을 정도로 설비도 잘 갖추었고, 사용된 장식들도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헤헤헤. 그럼 호화 여객선이 맞는 거군요." "어휴! 김전일, 너는 너무 단순해." "하하하!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미즈사키는 악의 없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미즈사키 씨." 김전일이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내내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우리 이외에 손님은 몇 명 정도 있지요?" "네, 두 분을 빼고 일곱 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전부 해서 아홉 명!? 그것으로 채산이 맞습니까?" "아니오, 전혀 채산은.... 뭐, 화물로 다소 메우고는 있습니다만." "그럼, 적자란 말입니까?' "네. 사정이 있어서.... 그리고 이 배는 이번이 마지막 항해가 된답니다." 미즈사키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네, 김전일 씨. 그래서 저희들은 이 배의 마지막 손님이 될 여러분을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밤 저녁식사는 배의 스태프들과 모두 함께 뷔페식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야호, 멋져라!" 미유끼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무리해서 솜씨가 뛰어난 요리사를 동승시켰으니까 음식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근사해, 김전일!" "어때, 미유끼. 오길 잘 했지?"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김전일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 녹슨 손잡이를 잡고 갑판 위에 올라설 때는 이 여행을 기회로 미유끼와의 마음의 울타리를 넘으려던 게 오히려 단단한 벽처럼 될 것 같아 몹시 불안했다. "그럼, 이제 곧 출항 시간이니까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미즈사키가 걸음을 내딛자 바로 전에 보고 나온 거실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하!, 어때, 카즈에. 대단한 배지?"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서, 설마!" 김전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 아니, 아저씨!"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겐모치 경감이었다. "기, 김전일! 네가 어떻게 여기에!?" 겐모치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 풍의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아저씨. 분명히 딜럭스 투어로 간다고 하시구선...." "쉬, 쉿!" 당황한 겐모치가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겐모치 경감의 뒤를 보자 나이에 맞지 않게 희고 꽉 끼는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어머, 김전일과 미유끼네? 언제나 남편이 신세를 지고 있다지요? 호호호!" 기분 좋아하고 있는 중년 여성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겐모치의 부인이었다. 6 항해일지, 7 월 23 일. 날씨, 쾌청. 파도, 조금 높음. 출항 시간, 15 분 늦음. 딸아, 나는 또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딸아, 이제 네 앞으로 보내는 편지 같은 이 항해일지를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나는 뱃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것만이 나의 긍지였다. 그러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깊고 푸른 바다가 너와 나를 건너지 못하게 갈라 놓은 것을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단다. 딸아, 이제 나는 언제까지나 네 옆에 있으려 한단다, 이 항해가 끝나는 대로. 불안하진 않다. 반드시 모든 예정을 마치고 이 항구로 돌아오마. 사랑하는 딸아, 항구의 어디에서도 너의 모습은 찾을 수 가 없구나. 언제나 출항할 때면 늘 와주더니.... 출항을 눈 앞에 둔 나를 부두에서 늘 배웅해 주더니. 그래, 이유를 알고 있다. 그만두자. 이제 그만두자, 이런 것을 쓰는 것은. 배야, 나의 마지막 항해를 장식할 배야. 너의 이름은 '류오마루' 나는 지금 '선장'으로서 너의 '키'를 잡는다-나는 '일지'를 덮어 가방 속에 넣은 다음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속에는 갈색 액체가 들어 있다. 플라스틱 뚜껑을 꽉 닫아 놓았는데도 코를 대면 곰팡내 같은 냄새가 난다. 이 액체를 이만큼 모으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 처음엔 담배를 끓여 뽑아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해도 불순물이 섞였고, 쥐를 쓴 실험에도 생각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여러 가지 조사를 해 보면서 살충제 중에 '그 성분'이 많이 포함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즉시 입수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 갈색 농축액을 뽑아 내는 데 성공했다. 쥐를 써 시험해 보자 예상을 뛰어넘는 효과가 났다. 바늘 끝에 몇백 배나 묽게 만든 것을 조금 발라 살짝 찌르기만 했는데 쥐는 흰 배를 보이며 경련하더니 1 분도 채 안 되어 호흡이 멎었다. 그후 들쥐를 사용한 실험에서도 같은 효과를 얻었다. 나는 확신을 가졌다. 이것이라면 됐다. 이것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바늘 끝에 제일 진한 액체를 듬뿍 살짝 찌르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인간'이라 해도-드디어 기적이 울렸다. 출항이다. 이제 뒤로는 갈 수 없다. 어떤 광폭한 파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이 배에 탄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지금 나는 복수를 위한 '항해'의 키를 잡는다. 바로 지금부터, 나의 이름은 '유령 선장'.... 제 2 장 출항 1 출항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렸다. 경종처럼 조그마한 엔진 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는가 싶더니 배는 약간 흔들리며 천천히 육지에서 멀어졌다. "김전일, 배가 떠나고 있어! 갑판에 올라가 보자." 미유끼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김전일은 겐모치가 이 투어에 참가해 자신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기분이 언짢았다. 미유끼와 자신 두 사람만의 로맨틱한 여행을 만들려고 했는데 겐모치가 끼여 무드가 깨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유끼에게 '좋은 느낌' 따위는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배를 타다니." 겐모치가 혼자 있는 것을 보고 김전일은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있어서 안 좋아? 나도 이런 초라한 투어에 참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구. 여행비만 도둑맞지 않았어도 근사한...." "예! 도둑요? 경찰이 도둑을 맞았다구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마누라가 들으면 어떡하라구." "뭐라구요? 그럼 말 안 했어요, 아저씨? 이 투어가 아주 값싼 거라고?" "물론이지. 마누라는 몰라. 큰맘 먹고 돈을 썼다고 말해버렸거든. 나중에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어." "에헤?" "그러니, 알았지? 절대 비밀이야. 미유끼한테도 분명히 말해 둬." "김전일, 드디어 출항이야! 경감님도 거기 계시지 말고 어서 이리로 오세요!" 미유끼가 모자와 스커트를 누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기적과 엔진 소리가 미유끼의 목소리를 삼키며 메아리쳤다. "그래요, 여보. 어서 와요! 동경만이 한눈에 보여요." 겐모치 부인도 지지 않고 젊고 앳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쳇, 여자들이란 그야말로 기분파야." 겐모치의 투덜거림에 김전일도 마음속으로 수긍했다. "야호! 저것 봐! 너무 멋져!" 갑자기 기적 소리 사이로 또 다른 앳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두 소녀였다. 그들은 미유끼와 겐모치 부인처럼 바다 바람에 휘날리는 스커트를 잡고서 갑판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배를 탄 이래 어쩌면 처음 보는 손님인 것 같았다. 9 명의 승객 중 4 명은 아는 사람. 그러니까 그녀들은 남은 5 명 중 2 명이 되는 것인가. "이봐, 예쁜 아가씨들. 너무 몸을 앞으로 내밀지 않는 게 좋아. 이 손잡이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잖아." 두 소녀에게 친숙하게 말을 걸면서 다른 남자 손님이 나타났다. 이것으로 전체 승객 9 명 중 7 명까지 알게 된 것이다. "예? 괜찮아요. 우리는 그렇게 무겁지 않거든요." 머리가 긴 쪽 소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미안, 미안. 그런데, 아가씨들은 여대생인가?" "웬걸요, 우리는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머리가 짧은 쪽이 대답했다. "에헤? 그래? 너무 예뻐서 처녀인 줄 알았지." "거짓말!" "하하하하!" 김전일은 겐모치와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화가 그냥 듣고 있기에는 속이 메스꺼웠다. "쳇! 기가 막혀서.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고등학생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말할 필요도 없어. 요즘 젊은 것들이란...." 겐모치의 말투에 김전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겐모치는 김전일을 그야말로 '요즘 젊은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인 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김전일의 뛰어난 추리력을 알게 된 겐모치는 그 동안 가졌던 젊은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에게 묘한 공감초자 갖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좀 부럽죠, 아저씨?"


김전일은 속마음을 떠보듯이 겐모치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뭐야? 너는 그렇겠지만 난 안그래! 나는 어린애들한테는 흥미 없어." 퉁명스럽게 부정하는 겐모치의 솔직함이 김전일은 마음에 들었다. "아가씨들 둘이서 왔어?" 밤색 머리의 껄렁한 남자가 어느새 두 여고생 옆에 바싹 다가가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반응이 좋자 그 틈을 타 잽싸게 접근한 것이었다. "아, 나는 다카시라고 해. 대학생이지. 오가사와라 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지." "어머, 그래요?" 웃는 얼굴이었지만 머리가 긴 쪽 아이는 약간 경계하는 듯 했다. 그녀와 달리 머리가 짧은 쪽은 이 껄렁한 남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적극적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라면 어떤 거예요? 혹시 다이빙 같은...." 그녀는 배의 엔진 소리에 묻히지 않으려고 목소릴 높였다. "맞았어. 난 다이빙 강사야. 참! 예쁜 아가씨들, 나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 "나는 미사토 아케미." 머리가 짧은 쪽이 대답했다. "그리고 얘는 이지마 유우." "안녕하세요, 유우예요." 머리가 긴 쪽은 조금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케미와 유우라. 그런데 어디서 왔지?"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전일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이봐, 미유끼.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커피나 마시자구." "그래." 미유끼는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네 명이 배 안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다카시가 다가왔다. "저, 죄송하지만 사진 좀 찍어 주시겠습니까?" 다카시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흰 이를 반짝거리며 미유끼를 향해서 휴대용 카메라를 건넸다. "네? 저 말인가요?" 미유끼가 물었다. "참! 그러지 말고 아가씨도 함께 찍는 게 어때요?" 이번에는 미유끼에게 마음이 있는지 다카시는 친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배에는 손님이 아홉 명 밖에 타고 있지 않대요. 오가사와라까지는 50 시간이나 걸리니 그 동안 사이좋게 지내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거예요. 자, 함께 찍어요!" "하, 하지만...." "괜찮아요, 어서요. 아, 아버님과 어머님도 함께 찍으시지요." 다카시는 겐모치 부부가 미유끼의 부모인 줄 잘못 알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 꼬마 소년, 셔터 좀 눌러 줄래?" 다카시는 김전일에게 카메라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김전일은 '꼬마 소년'이라는 말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봐, 당신! 미리 말해 두겠는데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야. 경찰청 조사 1 과 경감이니까 '언니들'을 꼬시려면 각오해 두시라구!"


"엣, 경찰?" 다카시는 얼굴색이 변했다. 몹시 놀란 그는 카메라를 다시 낚아챘다. "괜찮다면 제가 찍어 드릴까요?" 그때 뒤에서 또 다른 승객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마음대로 다카시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았다. "여러분, 함께 찍는 게 어때요? 자, 즐거운 여행입니다, 사이 좋게 지냅시다!" 50 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큰 그 남자는 은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어깨에서 커다란 카메라 가방 같은 것을 내려놓자 백의 가죽 손잡이에 달린 '아카이 요시카즈'라고 쓰인 명찰이 흔들렸다. 그것이 그의 이름인 것 같았다. 김전일과 다카시 사이가 더욱 험악하게 될 것 같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 자, 어서 모여 서세요. 어디를 배경으로 할까요? 역시 바다가 좋겠죠?" 아카이라는 남자가 수선을 떨다 보니 김전일도 어느새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좀더 가까이 서요. 그렇게 서면 다 나오지가 않아요."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남자가 지시를 했다. "손님." 언제 나타났는지 파란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종업원인 듯한 젊은 여자가 카메라를 조작하는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도 함께 찍으세요. 제가 찍어 드릴게요.' 조금 전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에 비하면 말투는 그다지 깍듯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소박하고 접하기 쉬운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여자로서는 큰 키로 165 센티미터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체격도 전반적으로 근육질이어서 마치 수영 선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햇볕에 그을린 작은 얼굴에 아직 솜털이 남아 있어 앳돼 보였는데, 그래선지 짧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꼭 다문 도톰한 입술에 큰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미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나름대로 건강한 매력을 뿜어냈다. "당신은 이곳의 종업원입니까?" 아카이가 조작하고 있던 카메라를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가토리 요우코라고 합니다. 이 배의 잡일이나, 레스토랑과 커피숍 웨이트리스, 매점의 판매원, 또 룸 서비스 등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진 찍는 것도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그래요? 그럼, 부탁할까요? 내가 찍으면 '기묘한 것'이 함께 찍힐 것 같거든요. 하기야 나는 '그걸 찍기 위해' 이 배에 타긴 했지만, 하하하!" 영문 모를 말을 하고 혼자 웃으면서 아카이는 카메라를 건네준 후 승객의 대열에 끼었다. "자, 찍습니다....치즈." 카메라의 자동 플래시가 터졌다. 어느새 해질 시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우코는 다카시에게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손목 시계를 쳐다보더니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여러분, 지금부터 2 시간 후인 7 시 정각에 친목회를 겸한 디너 파티를 개최합니다. 그때까지 천천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깊게 고개를 속이고 그녀는 그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서인지 총총걸음으로 배 안으로 돌아갔다. "김전일, 손님이라곤 여기 있는 사람이 다인가 봐."


미유끼가 삼삼오오 흩어져 가는 승객들을 옆눈으로 보면서 물었다. "아냐, 당연히 또 한 사람 있어. 아까 미즈사키란 사람이 손님은 우리까지 합쳐서 아홉 명이라고 말했잖아." 그 '아홉 번째' 사람은 지금까지의 일들을 숨어서 계속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겐모치에게 못박혀 있었다. 시선을 느낀 겐모치가 되를 돌아보자 그 남자는 잽싸게 몸을 돌려 도망치듯 모습을 감추었다. 2 김전일은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의 갈색 얼룩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은테 안경을 낀 아카이라는 중년 남자가 한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카메라로 찍으려 한다는 '묘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찍기 위해서 이 배에 탔다"고 했다. 전부터 이런 작은 의문이 신경 쓰여 어쩔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김전인은 또 이 작은 의문의 답을 찾으려고 하다가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 배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예를 들어 이 배가 베풀고 있는 대우가 그렇다. 김전일이 있는 개인 객실은 전기 풍로가 딸린 미니 부엌과 냉장고, 게다가 소형 전자 레인지까지 갖춰져 있다. 오락실과 거실의 실내 장식품이 고급인 것으로 보아 이 배는 전에는 작긴 하지만 상당히 고급 선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배가 오래되어 낡았다 해서 승객 수도 많지 않은 오가사와라 항로를 항해하고 있으며, 더구나 반은 화물선으로 사용되는 최저의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오래된 것으로 친다면 그 유명한 퀸 엘리자베스 2 세 호도 있는데 그 배는 여전히 제 1 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호화 여객선이다. 그리고 배의 승무원 수도 적은 것 같았다. 이 정도로 큰배인데 손님 이외에 배에 올라타고 만난 사람은 미즈사키라는 흰 제복을 입은 선언과 잡일을 한다는 요우코라는 젊은 여자, 그리고 갑판에서 작업을 하던 젊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미즈사키라는 남자도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손님을 대하는 완벽한 태도와 자신감으로 보아 그에게는 엘리트 냄새가 났다. 2 등 항해사라고 했지만 30 세 전후로 생각되는 연령으로 보아 이런 폐기 직전의 배에 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전일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앞으로 10 분 정도 지나면 7 시다. 7 시부터는 선원과 함께 선상 파티가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뭔가 알 수 있을까? 김전일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 파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파도가 조금 높은 듯해 약간 불안한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


아래서의 파티란 너무나 근사했다. 미유끼는 물론이고 뚜렷한 이유 없이 두근거렸던 것 따위는 싹 잊어버린 김전일까지 날라져 오는 요리를 집어먹기도 하고,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예상치 못했던 호화로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어머, 김전일! 넥타이에 소스가 묻었어! 그렇게 마구 집어먹으니까 그렇잖아." "아, 이런! 하지만 괜찮아, 핥으면 되니까." 김전일의 말에 미유끼가 얼굴을 찡그렸다. 미유끼는 어깨가 드러나는 핑크색 칵테일 드레스로 잔뜩 멋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전일은 미유끼가 강제로 가져가라고 한 재킷과 넥타이로 그런 대로 모양만 내고 있었다. "이봐, 김전일! 선장의 인사가 있대." 점잖지 못하게 수선을 떠는 김전일을 나무라듯이 겐모치가 말했다. 그제야 앞쪽을 보니 흰 선원복을 깔끔하게 입은 50 대 중반의 남자가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바로 선장인 것 같았다. 턱수염이 긴 것이 선장이라는 직책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마치 야마토 함장 같애." 미유끼가 김전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미유끼가 말하는 야마토 함장이 탄 전함은 태평양전쟁으로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린 전함이 아니라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이스캉달을 항해 날아오른 우주 전함을 말한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나? 아무튼 그 남자 뒤에는 비슷한 모습의 선원들이 일렬로서 있었다. 조금 전 김전일과 미유끼를 안내해준 미즈사키라는 2 등 항해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전히 파란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요우코가 흰색 일색의 선원복 사이에 꽃처럼 끼여 있었다. 사람 수를 세어 보자,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를 포함해 이 배의 승무원은 12 명이었다. 승객 9 명 승무원 12 명이라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 크기의 배를 움직이기엔 아무래도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에, 여러분. 제가 이 배의 선장을 맡고 있는 다카모리 고조입니다. 이번...." 다카모리 선장의 인사는 무기력한 데다 건성이었다. 벌써 술을 많이 마신 듯 다리가 떨렸다. 하는 말에도 '이따위 배'라든가 '고물 여객선'이라는 말이 많아 자신이 이 배의 선장이라는 걸 결코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음이 한눈에 보였다. 선장이 대충대충 지루하게 인사말을 하는 중에 미유끼가 또 귀속말을 했다. "야마토 함장과 비슷한 건 겉모습뿐인 것 같아." 4 "그럼 항해의 무사고를 빌면서, 건배!" 다카모리 선장의 건배 선창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다.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김전일이 중얼거렸다. "응? 뭐가?" 미유끼가 반문했다.


"이 파티 말야. 어째서 이 저녁 식사가 뷔페 파티가 되었는지 아니, 미유끼?" "? 그건 이 배의 마지막 항해라서 특별히 그렇게 했다고 미즈사키 씨가 말했잖아. 아냐?"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사람 수가 부족하기 때문이야." "사람 수가 부족하다고?" "그래, 봐. 이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라곤 아까 사진을 찍어 준 요우코라는 여자 단 한 명밖에 없잖아. 보통 방법으로 식사를 하면 한 사람으론 제대로 서빙을 할 수 없잖아. 하지만 뷔페식으로 하면 일단 요리를 한꺼번에 차려 놓기만 하면 되잖아. 게다가 분위기도 낼 수 있고 ." "아하, 그랬구나...." "대단한 꼬마군." 중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쪽을 보니 옆에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한쪽 손에 컵을 들고 서 있었다. 축 하고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냄새로 보아 컵에 든 것은 술인 듯했다. "여ㅣ날에는 레스토랑에 위이트리스와 웨이터가 열 명 가까이나 있었어. 선원만 해도 지금의 배 이상은 되었다구.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적자라지만 잡일부와 요리사까지 합쳐 겨우 열두 명밖에 태우지 않았어. 항해사는 단 세 명이고 기관사는 한 명 뿐이야. 게다가 전문 무선사는 한 사람도 없어. 1 등 항해사가 무선사를 겸하고 있긴 하지만. 항해사가 되기 전에 무선사를 한 경험만으로 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겠나! 규정 위반도 어느 정도지." 노인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김전일이 물었다. "나? 나 말인가? 어때, 선장처럼 보이지 않나?" "아니에요!" 밝은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에이프런 차림의 웨이트리스 요우코였다. "손님, 아니에요. 이 할아버지는 기관사입니다. 엔진 같은 걸 고치는." "바보 같으니! 그것만이 아냐. 요우코, 너는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그래요, 난 그저 잡일부니까요!" "아, 저..." 두 사람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 김전일과 미유끼가 당황스러워하자 요우코가 얼른 말을 돌렸다. "미, 미안합니다. 이분은 오오츠키라고 하는 기관사입니다. 그죠?" "기관'장'인 오오츠키 겐타로야. 그렇지만 2 등 기관사도 3 등 기관사도 없어. 기관실에는 기관사가 아닌 보통 직원과 나 단 둘밖에 없어." "아, 안녕하세요...." 김전일과 미유끼가 인사를 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오오츠키 씨. 손님에게 함부로 대하고." "아니, 그보다 저... 당신이 아까 사진을 찍어 준 분이지요?" 김전일이 묻자, "아, 미안합니다. 제 소개도 하지 않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파티니까 즐겁게 보내라고 미즈사키가, 아니 미즈사키 항해사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만.... 저는 이 배의 잡일부 겸, 매점원 겸, 웨이트리스인 요우코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요우코는 어린애처럼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그 얘긴 아까도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어휴, 이런!" 하하하. 재미있군요, 요우코 양. 그런데 결례지만, 나이는 어떻게 되죠?" "열아홉 살인데요." 요우코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수수한 파란색 제복에 에이프런을 두른 탓에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촌스럽게 보이지만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아 옷만 잘 입으면 사람들 눈길을 끌 용모였다. "헤에? 그래요? 그럼, 우리가 열일곱 살이니까 두 살 위군요. 대단해요, 이렇게 남자만 있는 곳에서 일을 하다니--." "벌써 반 년이나 되어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어요. 그리고 나는 바다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아주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요우코는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아 보였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게 제일입니다. 나는 학교라는 데가 도저히 맞질 않아서..." 김전일이 팔짱을 끼며 말하자 미유끼가 옆눈으로 째려보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학교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바보. 일이 아니라 공부 말야. 일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애. 싫어도 꾹 참고 계속하면 돈도 벌 수 있고 ."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2 학년이 돼 그런 소릴 하면 조금 봐주기라도 하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으면서 요우코는 쿡쿡 웃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미유끼는 얼굴이 빨개져서 김전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김전일, 창피해, 그만해...' "응? 그, 그래. 참, 그런데 요우코 양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김전일이 화제를 바꾸었다. "요우코 양, 이 배에 탄 손님은 모두 아홉 명이잖아요?" "네, 그런데요?" 여고생인 아케미와 유우는 여전히 껄렁한 다카시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소, 은테 안경의 중년 남자인 아카이는 어느새 선장과 의기투합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인을 마셔 얼굴이 빨개진 겐모치 부부는 신혼 시절로 돌아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김전일과 미유끼를 포함하여 모두 8 명. "한 사람, 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죠?" 김전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요우코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네, 그 손님은 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방에 틀어박혀요?" "그래요. 기분이 나쁘다면서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 않대요. 그러면서 자기 방으로 음식을 갖다 달라고 했어요. 게다가 알레르기가 생겼다고 매점에서 마스크와 선글라스까지 사다 달라고요?" "사다 달라고요?" "네. 음식과 함께 갖다 달라고요. 그러면 나올 수도 있다고...."


"나올 수도?" "아주 인상이 나쁜 남자예요." "음, 그 남자는 어딘가 이상해...." "그러면 안 돼, 김전일.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아냐, 미유끼. 얼굴은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말 몰라? 그런데 요우코 양, 그 손님 이름은 뭐죠?" "분명히 나카무라 이치로라고 승객 명단에 쓰여 있긴 해요." "나카무라 이치로? 아주 평범한 이름이군. 왠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그 이름은 가명일지도 몰라." "그럼, 혹시 범인이라도...." 요우코가 눈을 크게 뜨며 김전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요, 비행기를 납치하듯이 배를 타서 차지하고 협박하는...." "어머, 그럼 어떡해요...." "하하하! 괜찮아요. 이 배에는 현역 형사가 타고 있으니까요." "네? 그게 누구죠?" "봐요, 저기서 아까부터 먹기만 하고 있는 덩치 큰 아저씨 보이죠? 그 사람이 경찰청 조사 1 과 겐모치 경감입니다. " "네에?' "후후후, 놀랐습니까?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 경감님도 인정하는 명탐정 고우스케의 손자입니다." "호호호! 그래요 ? 재미있네요, 김전일 씨." 요우코가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자 김전일은 정색을 하고 힘 주어 말했다. "사실입니다. 아, 사실이라니까요." 미유끼는 옆에서 쿡쿡 웃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김전일도 왠지 계면쩍은 듯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분 좋은 온화한 공기가 세 사람을 감싸소 있는 바로 그때였다. "아주 즐거운 것 같군, 요우코 양." 갑자기 말을 걸어온 사람은 흰 선원복 차림의 깡마른 남자였다. 그는 요우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뒤로 떡 젖히고 서서 거만한 태도로 내려다보았다. 다른 선원이 햇볕에 그을려 새까만 데 비해 이 남자의 얼굴색은 김전일보다도 더 흴 정도였다. 한창 파티중인데도 전혀 술을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손에는 와인 글라스 대신에 우유 같은 흰 액체가 든 컵을 들고 있었습니다. "와카오지 항해사..." 요우코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와카오지 1 등 항해사겠지." " 죄, 죄송합니다." "말해 두겠는데, 이 파티는 선원들과 손님들 간의 친목을 위한 파티야. 잡일부는 선원이 아니지. 너는 접시 정리나 음식 운반 등 할 일이 많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요우코는 빠른 걸음으로 가 버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멍하니 서 있는 김전일과 미유끼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흥! 하고 콧소리를 내더니 돌아서려고 했다. 그때 김전일이 와카오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손님, 무슨 볼일이라도?" 뒤로 돌아본 와카오지의 눈을 쳐다보며 김전일이 말했다. "당신이 1 등 항해사라고 했나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모르지만 나와 미유끼는 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멋대로 사람을 쫓아 버려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김전일은 어안이 벙벙해서 말을 잃었다. 갑자기 와카오지가 90 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큰 소리로 사과를 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같은 일이 없도록 종업원들을 잘 가르칠 테니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김전일을 향해서 머리를 깊게 수그린 채 와카오지가 말했다. "아, 알았습니다...." 김전일도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와카오지가 물었다. 그는 아직도 고개를 수그린 채였다 "아, 네,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 버린 와카오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전일은 미유끼와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뭐야, 저 사람." "대단한 사람이야, 저 인간은." 그렇게 말한 사람은 조금 전에 얘기를 나누던 늙은 기관사인 오오츠키였다. 와카오지가 있는 동안은 못 본 척하고 술만 들이키더니 그가 가 버리자 잽싸게 다가와 김전일과 미유끼에게 또다시 푸념을 해댔다. "요우코도 불쌍해. 와카오지가 싫어하는 미즈사키와 좋아지낸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언제나 당하기만 하니...." "예? 요우코 양이 그 미즈사키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단 말인가요?" 미유끼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미유끼에게 이런 이야기는 가장 흥미 있는 분야이다. "이, 이런! 항상 요, 요 입이 말썽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오오츠키는 후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엉겁결에 입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일부러 말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오츠키 씨, 저 와카오지라는 남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김전일이 묻자 오오츠키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원래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엘리트 선원이었던 남자야. 저 남자만이 아냐. 3 등 항해사인 카노우도 모두 거기에서 왔어." "동아 오리엔트 해운이라고요? 그 유명한 해운 회사요?" "그렇지. 우리 나라의 몇 안 되는 큰 해운 회사지. 우리 동태평양 기선도 어쨌거나 그 계열 기업이야. 지금은 그 회사에서 떨어져 나간 화물 회사이긴 하지만." 김전일은 이 말을 듣고 그제야 납득이 간 눈치였다. 미즈사키에게는 엘리트라는 이미지가 완벽했고, 아카오지 역시 일그러진 엘리트 의식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엘리트가 왜...." 이런 누더기 배에 타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려다 김전일은 말을 삼켰다. 그러나 오오츠키는 그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이미 눈치를 채고 쉽게 대답했다. "선장인 다카모리와 와카오지가 그 회사에서 쫓겨난 이유는 분명해. 그건, " 오오츠키는 컵에 남아 있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 두 사람은 오리엔탈호 선원이었어." "오리엔탈호!?"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미유끼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배는 3 년 전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낸 대형 해양 사고로 신문 지상을 한동안 시끄럽게 했다. 아니, 그것말고도 김전일과 미유끼에겐 예전에 두 사람이 말려든 어느 연쇄 살인을 기억나게 하는 배였다. 나가노 지방에 있는 아카네 산 속의 조용한 호수인 '히렌코'를 피바다의 지옥으로 만든 처참하고 슬픈 사건을. 오오츠키 노인은 계속했다. "너희들도 기억하지? 그 불쾌하고 꺼림칙한 배를. 미세키 해안에서 유조선과 충돌해 침몰된 호화 여객선이야. 그러니 바보가 아니면 그 배의 선원들이 다 쓰러져 가는 자회사로 밀려난 이유도 상상이 되겠지?" 김전일은 깜짝 놀라 다카모리와 와카오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김전일의 그런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손님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왠지 불길하게 가슴ㅇ심지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오리엔탈호 사고의 당사자였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 이 믿기 어려운 우연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오츠키 노인은 계속해서 말하려 했다. "그것만이 아냐. 이 배에는 그 외에도...." "할아버지! 왜 쓸데없이 손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가시 돋친 목소리로 누군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카노우로군. 흥! 안 그래도 지금 자네에 대해서 말하려던 참이야." 그는 3 등 항해사인 카노우였다. 이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선원 중에서 유일하게 동아 오리엔트 해운과 관계가 없었다. 눈이 신경질적으로 움푹 들어가 있고 덩치가 작은 남자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오오츠키에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영감!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했다간 바다에 던져 버리겠어!" 그러더니 곧 미유끼를 쳐다보고 희죽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이 영감의 말은 전부 엉터리입니다. 자,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마시고 재미있게 즐기십시오. 밤은 아직 기니까요." "네, 네. 그럴게요...." 미유끼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배에 탔다. 김전일도 미유끼도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5 류오마루 항해일지.


7 월 24 일, 밤. 날씨, 쾌청. 파도, 높음. 항해, 순조로움. 딸아, 지금 나는 방의 전등을 끄고 달빛에 의지해 이기를 쓰고 있다. 창 밖으로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별들은 나를 행복한 추억에 잠기게 해 주는구나. 따라, 언젠가 옛날 나와 둘이서 지금처럼 선창에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본 것을 기억하니. 너를 낳자마자 네 엄마는 곧 죽었지. 혼자서 너를 키워야만 된 나는 얼마 동안 너를 배에 태우고 바다로 나와 있었지. 배에 요람을 가지고 온 나는 다른 선원들에게 자주 놀림을 받았단다. 너는 조타 핸들을 조종하는 나의 모습을 제일 좋아했지. 그때 나는 작은 화물선 항해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너와의 대화를 잊고 선원으로서의 지위를 쌓는 데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너의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사라졌다. 지금 나는 후회로 가득하다. 좀더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더라면. 선원 이전에 아버지로서 오늘날 너의 슬픔을 이해해 주었더라면.... 류오마루여. 조용히 밤바다를 헤쳐 가는 나의 배여. 너는 나의 이런 감상을 비웃고 있느냐-나는 일지를 테이블 위로 놓고 창가로 갔다. 불을 끈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지금까지 보고 있던 밤하늘을 뒤덮은 별들의 진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저 밤바다 같은 어둠만이 온통 채워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삼킨 칠흑 같은 바다와 똑같은 끝모를 어둠만이. 파티에서 마신 술에 취해 그 놈은 지금쯤 한창 꿈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네가 이 세상에서 꿀 수 있는 마지막 꿈이 될 것이다. 나는 작은 가죽 상자를 열어 그 안에서 '도구'를 꺼냈다. 5 밀리미터 정도 두께로 자른 코르크판에 여러 개의 짧은 바늘을 꽂아 만든, 손 안에 딱 들어오는 작은 '도구'. 이것에 그 갈색 액체를 바른다. 그러고서 이것을 손바닥에 숨기고 가까이 다가가 목이건 팔이건 아무 데나 찌르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바늘에 묻은 니코틴 독이 상처를 통해 혈관 안으로 들어가 온 몸으로 퍼져 그 놈에게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확실한 죽음. 고통에 가득 찬 죽음. 그 비열한 놈에게 잘 어울리는 죽음. 그 놈에게 선장을 자칭할 자격 따위는 없다. 밤이 밝으면 그때부터 이 배의 선장은 나, 유령 선장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제 3 장 유령선 마리 세레스트호


1 "도, 도와...줘...." "--!?"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인터폰을 들자, 김전일의 쥐어짜는 듯 한 신음 소리가 났다. 미유끼는 인터폰을 팽개치고 단숨에 김전일의 방으로 뛰어갔다. "미유끼, 제발 나 좀...." "김전일!?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배가...." "? '배가'가 뭐야? 똑바로 말해, 김전일!" "배가 아파..." "....?" "어, 어제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미유끼, 소화제 좀 갖다...줘..." "..." 미유끼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내 참... 알았어. 일단 의무실에 전화부터 해 보고" 전화를 하고 온 잠옷 차림의 미유끼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김전일에게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아침 5 시 반에 그런 목소리로 전화를 하니..." "으으...! 정말이야, 정말로 죽을 것처럼 아프단 말야" 새하얘진 얼굴로 김전일이 계속 쥐어짜는 소리를 하자 미유끼도 다시 걱정이 되었다. "어, 어떡하지? 나는 위장약 같은 건 가져오지 않았어. 의무실에 전화를 해도 아무도 없고..." "아이고! 죽을 것 같애...." "어휴, 참! 아무라도 불러올 테니까 잠깐만 참고 있어." 미유끼가 나가려고 하자 김전일이 모기만한 소리를 냈다. "나,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어떡해..." 미유끼가 아무 대답도 없이 나가자 김전일은 배를 문지르면서 엉금엉금 쫓아나갔다. 2 배 안은 원래 2 등 선실이었던 화물실과 기관실이 있는 배 바닥 부분, 식당과 리빙 홀 등이 있는 1 층 갑판부, 그리고 객실이 있는 2 층부, 조타실과 무전실, 선장실 등 승무원실이 있는 3 층 선교부, 이렇게 4 층으로 나뉘어 있다. 김전일과 미유끼는 승무원실이 있는 3 층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3 층은 제일 뒷부분 계단에서 똑바로 마주 보이는 막다른 곳의 조타실까지 복도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승무원실은 그 복도 양쪽으로 나란히 있었다. 그러나 팻말이 한 칸씩 건너서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반은 빈 방인 것 같았다. 사용하고 있는 방의 바로 옆방이 모두 비어 있는 것은 선원들의 근무 시간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시간에 샤워도 하소 식사도 해야 하므로 소음 때문에 방해받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배의 뒷부분에 있는 계단을 올라간 김전일과 미유끼는 복도 왼쪽의 승무원실에서


나온 한 선원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입니까, 김전일 씨, 미유끼 양?"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였다. "죄송합니다만 이 계단은 선원과 종업원 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데요...." "아! 미즈사키 씨세요. 죄, 죄송, 배가 아파서요. 제가 아니고요, 이 친구가, 저렇게 아프대요. 저기, 혹시 위장약이나 소화제 없으신가요?" 미유끼는 못된 장난을 치다 들킨 어린애처럼 갈팡질팡 두서없이 말했다. "위장약이라... 글쎄요, 저한테는 없구요. 그럼, 선의를 얼른 깨웁시다." 미즈사키가 그렇게 말하고 선의의 방을 노크하려 했을 때 복도 구석에서 문이 열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서는 요우코였다. 일어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나오던 중인지 아직도 잠이 덜 깬 모습으로 계속 걸어왔다. 미즈사키와 김전일과 미유끼가 있는 것을 본 요우코는 눈을 비비다 말고 크게 고개를 숙였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요우코, 지금부터 식사 준비를 할 건가?" "네, 그런데요?" 요우코는 김전일과 미유끼를 바라보았다. "식사 준비는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을 거야. 이 손님이 배가 아프다는데 혹시 약 가지고 있는 것 없나?" "위장약 말인가요? 위장약은 글쎄..." "맞아! 요우코, 네 방의 냉장고에 우유가 있잖아. 와카오지에게 들었는데 언제나 따뜻하게 해서 마신다고 하더군." "네, 그래요." 요우코가 대답하자 미즈사키는 김전일과 미유끼를 향해서, "우유를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웬만한 위장약보다 훨씬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1 등 항해사도 위궤양을 앓고 있는데 언제나 약 대신 그렇게 마시고 있습니다. 어때요, 김전일 씨, 드릴까요?" "네, 네. 낫기만 한다면 아무거나 좋아요." 김전일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두 분은 제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요우코, 네가 조금 늦어진다고 요리사에게 연락할 테니까 가서 우유를 데워다 주겠어?" "알겠어요. 하지만 요리사가 무서우니까 잘 말해 줘야 되요, 미즈사키." "알았어. 그런데 요우코, 손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미유끼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사이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기관장 할아버지가 말했거든요." "네? 오오츠키 씨가요? 참, 그 양반 곤란한 사람이군." 미즈사키는 계면쩍은 듯이 머리를 긁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군요. 부러워요." 미유끼가 이렇게 말하자 요우코는 미소를 띄우고 부끄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 자, 김전일 씨, 미유끼 양, 조금만 기다려요."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하고 복도 구석 왼쪽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하하, 이거 원... 아무튼 두 분 이쪽으로 오세요." 미즈사키도 웃으며 두 사람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종업원실의 미니 부엌과 전자 레인지, 냉장고 등의 설비는 김전일과 미유끼가 있는 객실과 거의 같았다. 단, 침대는 아주 수수했으며, 방 한가운데에는 객실보다는 조금 큰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실례합니다." 미유끼는 배를 움켜쥐고 있는 김전일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휴우... 휴우..." 김전일은 의자에 앉아 여러 번 크게 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자 그때마다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데..." 그때 갑자기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이, 이 냄새는 ...!? 어젯밤 마늘이 듬뿍 든 파스타를 너무 많이 먹고는 갑자기 배가 아파져서 이를 닦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 아프면 입냄새도 심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으...! 차, 참을 수가 없어.... 이게 내, 내 입냄새라니.... 김전일이 입을 일그러뜨리면서 숨을 훅 하고 들이마시자 김전일의 모습을 본 미유끼가 더욱 걱정스러운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왔다. "괜찮아, 김전일? 그 정도로 아픈 줄은..." 괜찮아라고 하려고 김전일은 입을 우물거렸다. --안돼! 날아가는 파리도 떨어뜨릴 악취를 미유끼에게 맡게 할 순 없어! 경찰청 경감조차 한 수 쳐 주는 대단한 명탐정도 여자에게는 보통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 이 투어에 참가하기 전에 읽은 '핫도그 프레스'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그 기사는 이런 것이었다. "...여자 고등학생 100 명이 대답했습니다. 입냄새 나는 남자만은 절대 사절! 그런 사람은 분명히 위가 몹시 나쁜 사람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과 키스하다간 당장이라도 그 사람 충치가 뭉턱 삐질 것 같다!..." 안 돼, 미유끼! 가까이 오지 마! 어젯밤에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먹고 마신 탓에 그만 이런 엄청난 일이.... --어, 어떡하면 좋지.... 그렇지! 배가 아픈 것도 잊고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김전일이 일어섰다. "? 왜 그래, 김전일?" 의아스러운 표정의 미유끼에게 김전일은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아냐. 난 뜨거운 음식은 못먹거든. 그냥 따뜻할 정도로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호호호." 제대로 입도 못 벌리고 김전일은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와 보니 마침 요우코가 우유를 담은 머그컵을 가지고 계단을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요우코 양!" 김전일이 뒤에서 손을 흔들어 불러 세우자 요우코는 어깨를 잠깐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김전일 씨, 왜 그러죠?" "아, 다행이다! 혹시 우유를 데우러 부엌으로 가는 겁니까?" "제대로, 그런데 왜요?" "아니, 실은 저... 가는 김에 껌이라든가..." "네?" "왜 있잖아요, '클로레츠'나 '후라보노' 같은 껌 있으면 부탁해도 될까 해서요." 입을 가린 채 말하는 김전일의 '의도'를 대충 짐작했는지 요우코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네, 있어요. 올 때 함께 가져올게요." "미안합니다...." 겸연쩍어 하는 김전일에게 요우코는 살짝 웃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3 미즈사키 방으로 다시 들어온 김전일은 미유끼로부터 제일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대신 미즈사키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미즈사키는 그것을 몹시 기다렸다는 듯 김전일이 앉자마자 물었다. "김전일 씨와 미유끼 양, 두 사람은 겐모치 부부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네, 잘 아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미즈사키 씨, 그 '씨'자는 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좀 거북해서...." "네, 그래요. 그렇게 해 주세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전일을 보고 있던 미유끼가 김전일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분은 엄연히 저희 손님인걸요." 미즈사키는 정중하게 거절하더니 갑자기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아 참! 김전일 씨, 어떻습니까? 아직도 아픕니까?" "아니오, 아까보다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실은 미즈사키 씨에게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기회에 물어 봐도 될까요? "저에게 말입니까?" "네, 오리엔탈호에 대해서입니다만." "--!" 그 이름이 나온 순간 늘 상냥한 표정을 잃지 않던 미즈사키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김전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와 미유끼는 전에 그 사고에 관계된 어떤 사건에 말려든 적이 있습니다.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에게 들었는데, 이 배의 선장과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라는 사람이 전에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물어 보는 겁니다만...." "저는 오리엔탈호에 탄 적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만, " 미즈사키는 이렇게 전제를 하고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사고였다고 합니다. 3 만 톤급 호화 여객선이 단 한 시간 내에 완전히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렸으니까요." "물론 죽은 사람도 많았지요. '일본의 타이타닉호 사건'이라고 말들 하니까요.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도대체?"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배가 아픈 것도 잊고 몸을 앞으로 바싹 내밀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생긴 사고였다고 합니다. 상대방인 유조선 선장이 몹시 술에 취해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100 명 이상이나 되는 사상자가 생긴 엄청난 사고였습니다. 최종적으로 과실 책임이 없다고 판단된 오리엔탈호 측에서는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항해사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 동아 오리엔트 해운을 그만두게 했습니다." 미즈사키는 단번에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이야기를 멈추었다. 짧은 순간에 생긴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들어가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요우코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과 '클로레츠' 껌을 가지고 들어왔다. "?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시던 중인가 보죠?" 요우코가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미즈사키는 평소 때의 상냥한 얼굴로 돌아갔다. "자, 6 시부터 조타실 근무가 있어서 저는 그만. 두 분은 천천히 나오십시오. 그리고 요우코는 너무 늦어서 요리사에게 야단맞지 말고 어서 가 보도록 해." "네, 그래요." "김전일 씨, 미유끼 씨. 아침 식사는 7 시 반부터입니다. 그 때 선장님의 인사가 있으니까 늦지 말고 집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미즈사키는 방을 나갔다. 김전일은 요우코한테 받은 우유를 목 안으로 부으면서 미즈사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또다시 원인 모를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어젯밤에도 몇 번인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뭔가 무서운 일이 어느샌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 수 없는 불안감. --쳇, 바보같이. 기분 때문이야, 기분. 김전일은 가슴에 이는 알 수 없는 오한을 우유와 함께 소리 내어 마셔 버렸다. 4 결국 김전일과 미유끼는 조금 늦은 7 시 40 분에 식당에 얼굴을 내밀어ㅕ 벌써 다카모리 선장의 인사가 시작된 것 같아 살그머니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나 선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미리 온 사람들이 시끌시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이, 김전일, 이쪽이야."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겐모치가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씨. 선장님이 인사를 한다고 했는데?" 김전일이 다가가서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글쎄, 늦잠을 자고 있나...." 겐모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선장님이 아무 데도 없다고?" 갑자기 김전일의 귀에 와카오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네. 인터폰으로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셔서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지만 역시...." 선원은 당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방송은 해 보았나?" "네, 해 보았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이런! 손님들은 모두 다 모이셨는데." 와카오지는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기관실은? 무전실과 의무실도 보았나?" "네, 하지만...." "없다는 말인가? 이상하군, 그럼 도대체 어디서...." "방 안에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그럼 어째서 인터폰으로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지?" '무, 무슨 일이 있어서 방 안에 쓰러져 있을지도...." 선원은 우물쭈물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선원이 나섰다. "실은 제가 6 ㅅ심지어 반부터 조금 아까까지 1 등 항해사님이 시키는 대로 계단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선장님이 내려오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방에 있다는 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더니...." 와카오지는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와카오지와 선원들이 서서 뭔가 심각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있던 김전일은 또다시 불쾌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전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김전일은 와카오지에게 다가갔다. "아닙니다.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선장님이 오시지 않아서...." "선장님이오?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까, 늦게 오시는 일이?" 김전일이 묻자 와카오지는 귀찮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지급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선장님은 언제나 방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후 정확한 시간에 이곳으로 오십니다." "와카오지 씨." 졸린 얼굴로 서 있던 3 등 항해사 카노우가 아양을 떨듯이 가까이 왔다. "무슨 일인지 제가 가 볼까요?" 그러지. 나는 여기서 선장님 대신 간단한 인사를 하고 손님들께 식사를 하시도록 할 테니까, 자네는 누구를 데리고 선장실에 가 보게나. 만의 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그곳에 남고 나머지 한 사람은 곧 와서 알려 주게." 와카오지는 1 등 항해사답게 짧고 확실하게 명령했다. 카노우는 가까이에 서 있던 선원에게, "이봐, 함께 가자구."라고 꼬이듯이 말하고는 식당을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김전일은 가슴이 더욱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저들을 따라가야 한다!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잠깐만요!" 김전일은 큰 소리로 카노우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와카오지를 향해서,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네?...왜." 와카오지가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저... 호기심 때문에요."


김전일은 그렇게만 대답하고 와카오지의 대답도 듣기 전에 카노우 뒤를 따라 식당을 나갔다. 김전일은 이 여객선을 계속 짓누르고 있는 기묘한 낌새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직감 능력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예전부터 김전일의 이러한 예감은 대부분 적중했다. "이봐, 왜 그래, 김전일? 나도 같이 가자구!" "아, 나두요!" 겐모치와 미유끼도 서둘러 김전일의 뒤를 따랐다. 뭔가 긴장감이 도는 상황이 되자 다른 손님들과 승무원들은 불안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멍하니 선장실로 향하는 다섯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두릅시다!" 김전일은 앞서가는 선원들을 재촉했다. 카노우는 김전일과 겐모치, 미유끼가 왜 자신들을 따라오는지, 왜 그렇게 조급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고래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걸음을 빨리 했다. 5 선장실은 3 층의 조타실 바로 옆으로, 배의 진행 방향의 오른쪽, 그러니까 우현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장님, 다카모리 선장님! 주무십니까?" 카노우는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선장님, 문을 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카노우는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서 쉽게 열렸다. 커튼이 열려 있는 것 같은데도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남쪽으로 향하는 배의 우현, 즉 서쪽에 있는 데다 창문이 작은 탓도 있어서 아침 7 시 반에는 아직 해가 들어오지 않았다. 카노우 항해사가 전등을 켜면서 다시 한번 불렀다. "선장님?" 역시 대답이 없다. 그러나 실내에서는 기묘하게 '사람의 낌새'가 느껴졌다. 방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김전일은 그것이 '사람의 낌새'가 아닌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있었던 낌새'였다. 오래된 오크 제 테이블 위에는 깨끗한 접시와 포크, 나이프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쿡 하고 코를 찌르는 계란 타는 냄새에 섞여서 향기로운 빵 굽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나는 쪽을 보자 전기 풍로 위에 프라이펜에서 달걀 프라이가 치직치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김전일은 토스터 속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두껍게 자른 빵이 적당한 갈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토스터는 아직 따뜻했다. 토스터 안에 있는 빵도 아직 따뜻한 채였다. 커피 메이커에서는 커피가 수증기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그 옆에 커피잔까지 정확히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아침 광경이었다. 단, 준비된 아침 식사를 해야 할 인간의 보습만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선장님...?" 카노우는 다시 한번 부르면서 목욕탕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환기 팬 도는 소리만이 마치 배의 엔진 소리의 일부인 것처럼 있지도 않은 듯 울리고 있을 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카노우가 목소리를 약간 떨면서 중얼거렸다. "선장님이 없어...." 지금까지 이 방에는 틀림없이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다카모리 선장이라 생각되는 그 인물은 모든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돌연히 사라졌다. 입을 쩍 벌린 시공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 듯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마리 세레스트호다...." 갑자기 입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김전일은 뒤돌아보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에 눈에 찡그렸다. "당신은?" 은테 안경의 한 중년 남자가 오토 포커스의 일안 레프를 들고 있었다. 그는 눈에 잘 뛰는 명찰이 붙은 큰 카메라 백을 내려놓았다. 9 명의 승객 중 한 사람인 아카이였다. "마리 세레스트호야. 이것은." 아카이는 계속 셔터를 누르면서 말했다. "마리 세레스트호?" 카노우가 되물었다. 아카이는 흥분한 얼굴이었다. "그래요. 당신도 선원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겠지요? 1872 년 대서양 위에서 발견된, 사람이 없는 유령선 이야기." "...!" 카노우는 물론 김전일과 미유끼, 게다가 겐모치까지 동시에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분도 다 아는 것 같군요. 그래요, 어린이 대상의 괴담 책 같은 데 자주 나오는 그 유명한 유령선이오. 아침 식사 준비를 모두 갖춘 범선 안에서 선원만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바로 그 배입니다." "도대체...?" 김전일이 말하려 하자 아카이는 카메라를 아래로 내렸다. "아, 실례! 저는 아카이라고 합니다. 괴기 사진작가라고나 할까요? 이런 괴현상을 사진에 담는다거나 기사로 쓰는 일을 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이 배를 둘러싼 '소문'을 깨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데 어째서 이게 마리 세레스트호라는 거요? 우리들은 사라지지 않았어. 여기 이렇게 있지 않소!" 카노우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뭔가 잔뜩 겁을 먹은 듯이 입술이 떨렸다. "아, 당신은 모릅니까? 마리 세레스트호의 선장실 상황이 어땠는지? 먹던 계란, 마시던 커피와 놓여진 식기, 그리고 실종된 날 아침으로 끝나 있는 항해일지...." 그렇게 말하고 아카이는 테이블에 펼쳐져 있는 일기를 들어 보였다. "1994 년 7 월 23 일. 오늘 날짜입니다. 어떻습니까, 마리 세레스트호와 똑같지 않습니까?" 무서운 공포감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아카이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현대판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입니다." 6 아침 식사를 마친 배 안은 암울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선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카이의 입에서 다른 승객들에게로 퍼져 있었다. 그러나 사라진 이유도 행방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승객들도 불안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선원들을 붙잡고 "배는 괜찮습니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까요?" 등의 질문을 반복할 뿐이었다. 10 시가 지나자 이윽고 리빙 홀에 승객들을 모아 사태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와 3 등 항해사인 카노우가 불안한 승객들 앞에 섰다. 먼저 와카오지가 선장인 다카모리가 행방 불명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자신이 선장 대행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고서 앞으로의 대처 방법에 대해서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다카모리 선장은 치밀한 수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이며 배의 현재 위치로 보아 돌아가기보다는 오가사와라를 향해 가는 것이 낫기 때문에 이대로 항해를 계속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승객들의 불안감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 위에서 행방 불명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승객 중 한 사람인 다카시가 선생에게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보기 흉하게 다리를 떠는 것으로 보아 매우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주 가까워진 여고생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선지 애써 품을 쟀다. "선장님이 없어도 정말 괜찮을까요? 표류한다거나 하지 않을까요?" 여고생 중 한 명인 아케미의 목소리는 반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머리가 긴 유우도 한마디 했다. "구조는 받을 수 있겠죠? 정말로 괜찮은 거죠?" 그녀는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와카오지에게 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와카오지는 단호하게 말하고 침착한 태도로 계속 말을 이었다. "먼저, 앞으로 달라질 상황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장이 있을 때도 우리 세 항해사끼리만 교대로 핸들을 잡았기 때문에 배의 항해에는 사실상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조가 필요한 상황도 현재는 없으므로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승객들은 와카오지의 설명을 듣고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 40 대 중반으로 보이는 1 등 항해사는 보통 사람ㅇ심지어 아닌 것 같다. 기관사인 오오츠키 말대로 '대단한 남자'라는 인상을 풍긴다. 선장이 행방 불명된 비상 사태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간단한 설명으로 승객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그 대단한 오리엔탈호 사고의 경험자답다. 그러나 오오츠키의 말대로 선원 수가 규정보다 크게 모자란다면 선장이 없어도 항해에 지장이 없다는 말은 맞질 않는다. "다음, 다카모리 선장의 행방 불명에 대한 것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잘못 실수하는 바람에 배 밖으로 떨어진 게 아닐까 합니다." 와카오지가 그렇게 말한 순간 아카이가 일어섰다.


"이의 있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어제 나는 다카모리 선장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베테랑 선원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배 밖으로 떨어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 와카오지 씨. 사실을 말해 주시오. 우리는 앞으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켜야만 하니까요."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케미가 거의 울 지경이 되어 물었다. "아카이 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표정도 바꾸지 않고 와카오지가 말하자 이번에는 유우가 일어섰다. "뭔가 숨기는 것 아니에요? 어서, 사실을 말해 줘요!" 날카롭게 외치는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모든 승객의 시선이 와카오지에게 집중되었다. 승객뿐 아니라 이미 사정을 알로 있는 종업원인 요우코와 기관사인 오오츠키도 새파래진 얼굴로 와카오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와카오지는 역시 그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숨기는 것은 없습니다. 손님들께서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살해됐나요?" 다카시가 물었다. 꿀꺽 하고 사람들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지도 몰라, 선장은 누군가에게--." 아카이가 뭔가 말하려 하자 와카오지는 단호하게 그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없습니다." "살해됐다면 차라리 괜찮소." 아카이가 갑자기 일어서며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장은 사라진 것입니다. 한창 아침 식사 준비를 하다 갑자기 다른 창원으로 빨려들어간 겁니다." 아카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긴 다음, 더욱 힘을 주었다. "이 배는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령 선장으로부터." 7 "유령 선장!?" 그때까지 묵묵히 있던 3 등 항해사 카노우가 아카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쳤다. "유령 선장이라구요? 고스트 캡틴이란 말이군요. 그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마리 세레스트호 얘기를 좀 해 주십시오." 아카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유령선의 전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말해 두는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1872 년에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큐멘터리입니다. 시작은 대서양 위를 항해중이던 범선인 데이 그라테아호가 앞에 가는 이상한 모습의 범선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합니다. 도ㅍ이 누더기처럼 늘어져 있던,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옴직한 유령선 같은 모습으로 항해를 계속하던 그 배가, 항해사상 최대의 수수께끼가 된 바로 그 마리 세레스트호였습니다."


이제 와카오지도 아카이의 말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와카오지 역시 선원이다. 그도 이 괴기 사진작가라는 중년 남자가 말하는 기묘한 '사건'에 대해 언젠가 듣고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호탄에도 대답하지 않는 그 이상한 범선에 선장의 명령을 받은 데이 그라테아호의 선원 두 명이 보트를 타고 가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갑판 작업원과 항해사, 선장조차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탐색에 나선 두 명의 선원들도 처음에는 태풍 같은 것 때문에 선원 모두가 배에서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잘못된 생각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배 안은 평소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원들의 옷과 짐도 모두 그대로였고, 게다가 식당에는 아침 식사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선장의 아내가 사용하던 재봉틀도, 아이들 장난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선장실이었습니다. 달걀 프라이와 접시에 담긴 빵, 커피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뚜껑이 열린 약병이 내용물이 쏟아지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배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태풍에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면 약병도 커피잔도 당연히 쓰러져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배 안에는 당연히 혼란한 상태를 말해 주는 흔적이 남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선장실의 항해일지에는 10 일 전 아침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즉, 발견되기 10 일 전 아침에 마리 세레스트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돌연히 증발해 버린 것입니다. 발견자들을 무엇보다도 떨게 만든 것은, 사람이 없는 이 범선이 10 일 동안이나 항로를 벗어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선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고 합니다. 분명 유령 선장--고스트 캡틴이 키를 몰고 있었을 것이라고." "아주 똑같지 않습니까, 이 배와?" 갑자기 카노우가 끼여들었다. "맞아, 지금 얘기와 너무 똑같아. 이 배는 분명히 저주받고 있는 거야." "잠자코 있어, 카노우!" 와카오지가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카노우는 멈추지 않았다. "와카오지 씨,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잖아요. 이 배가 유령선이라고 불리는 것을. 1 년 전 당시 선장이 항해중에 사고로 죽고.... 그리고 그후 정박해 놓았는데도 조타실에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거나, 아무도 타고 있는 사람이 보는데 한밤중에 멋대로 항구를 돌아다닌 적까지 있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 배에는 죽은 선장의 유령이 붙어 있다는 소문이 나서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고.... 이제 당신들 차례가 온 게 아닌가요? 당신은 그 오리엔탈호의--." "그만해!" 와카오지가 갑자기 화를 냈다. 그 서슬에 숨쉴 틈 없이 지껄여대던 카노우도 그만 말을 멈췄다. "다카모리 선장이 없어진 것은 사고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일 것이다. 선장은 근래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일로 고민이 많았어. 갑자기 자살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어. 그렇지 않은가, 카노우?" 와카오지는 흥분을 억누르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카이가 반론을 폈다.


"그래요? 그럼, 와카오지 씨,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까? 선장은 아침 식사로 빵을 토스터에 넣고,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뽑고, 달걀 프라이를 하다가 갑자기 죽고 싶어져서 방을 뛰쳐나갔다는 겁니까? 세상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선장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괴기 현상 그 자체입니다."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전일이 말문을 열었다. "뭐라고?" 아카이가 눈을 크게 떴다. 김전일은 일어서서 말을 이었다. "자살도 아니고, 괴기 현상도 아닙니다." "아, 자네는 조금 전에 선장실에 함께 갔던 친구군, 이름이...." "김전일입니다." "김전일 군, 자네는 무얼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일지입니다." "--?" "테이블 위에 항해일지가 펼쳐져 있지 않았습니까. 거기엔 아무 내용 없이 오늘 날짜만이 써 있었습니다. 아카이 씨, 당신은 그것이 언제 쓰여졌다고 생각합니까?"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지기 직전이 되겠지. 선장은 일지를 쓰다가 갑자기 저주를 증발한 것이고." "그럼, 그것들은 뭐죠?" "뭐가?" "우리가 선장실에 갔을 때 풍로에 불이 켜 있고 프라이 팬 위에서 계란이 타고 있었어요. 그럼, 선장은 한창 요리를 하다가 없어진 거겠죠? 달걀 프라이를 하면서 일지를 쓰기 시작하다가 사라졌다는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 선장은 아침에 일어나 일지를 쓰려고 날짜를 썼는데 도중에 그만두고 아침 식사준비를--." "그것도 이상합니다." "왜지?" "방에 전등이 켜 있지 않았으니까요." "뭐...?' "우리가 선장실에 간 것은 7 시 45 분경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달걀 프라이는 타고 있었고, 토스터의 타이머도 막 꺼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선원에게 들은 얘기로는 처음에 선장실에 인터폰을 한 시간은 7 시 35 분경이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7 시 반까지 선장은 방에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거지?" "그 정도의 아침 식사 준비를 하려면 보통 15 분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러면 선장이 일지를 쓰려고 생각한 것은 그보다 전인 7 시 15 분경이 됩니다. 그 시간이라 해도 태양은 동쪽 아주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이 배의 우현, 즉 서쪽에 있는 선장실엔 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당연히 어둡습니다. 따라서 선장이 일지를 쓰려고 하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방의 전등을 켜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선장실에 들어갔을 때 전등은 켜 있지 않았습니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으음...."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어 버린 아카이 대신에 와카오지가 말했다.


"그러니까 손님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군요. 선장은 돌연히 증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도중에 포기하고 스스로 방을 나간 것이라고. 전등이 꺼져 있는 것이 그 증거이고, 나갈 때 선장이 끈 거라고." "그것은 더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뭐라고요?" "방의 전등을 끄고 갈 여유가 있는 사람이 달걀 프라이하는 불을 켜 놓고 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선장실의 그 상태는 아침 식사 준비도, 막 쓰기 시작한 일지도 모두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선장 이외의 누군가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봐, 김전일, 그건 무슨 말이지?" 겐모치가 안색을 바꾸며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김전일의 말투에서 '사건'의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즉, 이런 거예요, 아저씨. 선장은 그보다 훨씬 전에 그 방에 없었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해 놓고, 또 일지에 날짜도 써 넣은 거죠." "음... 역시. 숫자 정도라면 필적 흉내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김전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떠면 선장의 실종을 아카이 씨 말대로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을 흉내낸 건지도...." "흉내라...." 리빙 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묵묵히 김전일과 겐모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100 년 이상이나 지난 옛날의 괴사건을 모방해 선장을 '사라지게 한'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는 유령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김전일, 그 '누군가'란 어디의 누구라는 거지?" 겐모치가 물었다. "그걸 알면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저씨. 뭐, 정체 불명의 '유령 선장'이라고나 할까요?" "자, 잠깐. 그, 그러하다면 그 사람이 선장을 데려갔다는 건가...?" 카노우가 묻자 김전일은 대답했다. "어쩌면요. 그러나 데려갔다 해도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인데 구명 보트도 남아 있으니 선장이 이 배에서 없어졌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즉--." 김전일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둘러보았다. "선장은 그 '유령 선장'의 손에 의해서 살해된 게 되는 겁니다." 순간 승객도 선원도 일제히 뻣뻣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김전일은 즉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해 두세요!" 와카오지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손님은 너무 지나칩니다. 터무니없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발언은 삼가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일은...." 겐모치가 나서려 하자 와카오지가 얼른 말문을 막았다. "선장이 없어진 이상 제가 선장 대행입니다. 이 배의 책임자입니다. 배에 타고


있는 이상, 저의 지시에 따라 주세요.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와카오지는 이렇게 말하고 카노우에게 눈짓하고는 함께 리빙 홀에서 나가 버렸다. 와카오지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요우코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저 사람들 정말 기분 나쁜 사람들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요우코는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숙일 때마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풍겨 왔다. "아닙니다, 요우코 양. 어쩔 수 없겠죠.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살인 사건이니 뭐니 하는 건 선원들로 봐서는 당혹한 이야기일 테니까요." 와카오지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리 겐모치는 아주 우쭐한 태도였다. 젊은 여자가 난처해하는 모습에 경찰도 약하긴 마찬가지안가 보다. "저, 잠깐만요." 갑자기 멍청한 남자인 다카시가 끼여들었다. "당신은 경찰이십니까?" 겐모치를 향해서 물었다. "그렇소." "그럼 지금 하신 말씀이 틀림없겠네요. 선장이 누군가에게 살해되었다는 말 말입니다." "난 몰라! 어떡하면 좋아...!" "몰라, 몰라, 집에 가고 싶어...!" 다카시 뒤에 숨듯이 붙어 있던 아케미와 유우가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울먹였다. "지금 한 얘기가 사실이면 이 배에 살인자가 타고 있는 거잖아..." 머리가 짧은 아케미가 예쁘고 가는 눈썹을 파를 떨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소녀는 고등학생으로서는 화장이 너무 짙었다. 눈썹도 밀어서 모양을 정돈한 것 같았다. 또 한 명인 유우도 아케미만큼 두꺼운 화장은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연한 색 펄이 든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모습을 찾고 있는 듯 커다란 눈동자를 움직이며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전일이 그것을 의심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유우는 멈칫하고, 즉시 시선을 겐모치에게 향했다. "그럼, 범인은 누구죠? ...어쩌면 선원들 중의 주군가...." "글쎄...." 겐모치가 김전일에게 시선을 보냈다. 김전일이 그것을 받다 "분명히 너희들이 아닐까 생각해." 김전일은 일부러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했다. "하하하하! 역시,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겐모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일어섰다. "자, 그만 우리는 방으로 돌아갈까?" 8 겐모치 방에 네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부인이 차를 끓이는 동안 겐모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김전일? 그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 내 느낌으론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렇지? 역시 모든 그 놈이 선장을..." "그런 말 하기엔 너무 일러요, 아저씨, 숨기는 게 있으면 뭔가 노리는 것도 있겠죠." "그렇지...." 둘의 대화를 듣고 겐모치 부인 카즈에가 끼여들었다. "어느 쪽이 형사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시, 시끄러. 당신은 잠자코 차나 주면 돼." "어머! 왜 그래요, 당신? 김전일 군과 미유끼 양 앞이라고 그렇게 으스대지 말아요!" 카즈에가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자 겐모치는, "아, 아니. 당신 말투가...."라고 우물쭈물하며 기가 죽었다. "그만하세요, 두 분. 열다섯 번째 결혼 기념 여행인데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미유끼가 웃으면서 두 사람을 말렸다. 겐모치는 갑자기 창피했는지 얼굴이 벌개져서 다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김전일. 내가 아무리 형사라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선원들을 심문한다는 게...." "역시 그렇겠죠?" "응. 살인이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어. 뭔가 물증이 있으면 강력하게 권한을 행사해도 나중에 할말이 있지만." "물증이라... 이곳은 바다 한가운데고 시체는 지금쯤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있고... 아!" "왜 그러지, 김전일?" "무선은 어떻게 되었죠? 배엔 반드시 무선이 있잖아요. 그걸로 해안 보안청에 연락해 헬리콥터 같은 걸 보내 달라면 아직은 시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 잠깐! 선장이 행방 불명되었다면 당연히 누군가 무선으로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까요? 아저씨, 선원 아무한테나 물어 봐 주실래요?" "그, 그러지." 겐모치는 곧 인터폰으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겐모치의 표정이 차츰 일그러졌다. 수화기를 놓고 겐모치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일이 힘들게 됐어, 김전일. 무선은 사용 불능이 된 것 같아." "뭐라고요! 그게 사실이에요?" "아침 7 시쯤까지는 됐던 것 같은데, 10 시쯤 와카오지가 선장이 행방 불명이 된 것을 연락하려 했더니 기계가 물에 젖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대." "그것을 고칠 수 없을까요?" "고치긴 어려워." "겨, 경감님, 그럼...." 미유끼가 얼굴이 하얘지며 말을 더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 데도 연락을 못 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나...." "안 돼요! 어떡해요, 이대로 표류해 버리면..." 미유끼가 소리쳤다.


"괜찮아, 미유끼. 이 정도 배가 무선 하나 망가졌다고 그렇게 간단히 표류할 것 같아?" "하, 하지만...." "그러나, 김전일." 겐모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말대로 이건 '사건'일지도 몰라." "그렇다니까요." 김전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전기를 망가뜨린 것도 다카모리 선장의 실종과 마찬가지로 '유령 선장'의 짓일지도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지, 김전일?" "아무튼 빨리 이것이 '사건'이라는 걸 증명할 단서를 찾아야겠어요. 자칫하다간 너무 늦어 버릴 것 같아요." "그럼, 선장실에 가 보자는 말인가?" "네. 다시 가서 조사해 봐요." 김전일과 겐모치는 카즈에가 준 차엔 손도 대지 않고 방을 나왔다. 9 두 사람은 카즈에와 미유끼를 방에 남겨 둔 채 선장실로 향했다. 선장실은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저씨?" "어떻게 억지로라도 열어 볼 수밖에." 둘이 잠시 선장실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복도 끝에 있는 조타실 문이 열렸다. "김전일 씨, 겐모치 씨?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타실에서 나온 사람은 미즈사키였다. "아, 미즈사키 씨. --그렇지! 지금 바쁘십니까?" "아니오, 조타실 근무는 오후 10 시부터라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그럼 잘 됐군. 미즈사키 씨, 부탁이 있습니다." 김전일은 선장실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글쎄요...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와카오지 항해사가 뭐라 할지... 이곳 열쇠는 당연히 그가 갖고 있을 테니까요." "한번 부탁해 주겠습니까?" "음... 그러나 1 등 항해사는 2 시에 조타실 근무를 마치고 지금은 방에서 잘 겁니다. 지금 깨우면 밤 근무에 영향이..." "그러면 이 문을 어떻게..." 김전일은 두 손을 비비며 말끝을 흐렸다. "할 수 없군요, 마스터 키를 사용합시다." 미즈사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스터 키?"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네. 배 아랫부분에 있는 기관실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그 열쇠는 그렇게 아무나 가져올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일반 종업원이라든가."


"종업원이라면 좀..." "손님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하지만 손님들은 열쇠를 어디서 관리하고 있는지 모를 테니까..." "그렇군요..." 김전일은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것을 옆눈으로 보면서 미즈사키는 복도의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한참이 지나 선원 한 명이 마스터 키를 자지고 나타났다. "그럼, 열겠습니다." 미즈사키가 선장실 문에 열쇠를 꽂았다. 방 안의 상태는 커피 메이커와 전기 풍로, 토스터 스위치가 꺼져 있는 것을 빼고는 아침에 보았을 때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후 3 시를 지나는 때여서 서쪽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두워서 전등을 켜야 했던 아침보다는 매우 밝은 인상이었다. 겐모치가 앞장서서 전등을 켜지 않고 실내에 발을 들여 놓았다. 뒤따라 김전일이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 갑자기 벽을 쳐다본 김전일이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가서 한 군데를 응시했다. "아저씨, 이것 좀 보세요!" 김전일은 소리치면서 입구에 있는 큰 구식 전등 스위치 옆을 가리켰다. "왜 그러지? 뭐가 있나?" 겐모치는 가까이 다가와 가리키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직경 1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고 검붉은 '얼룩'이었다. 그러나 벽이 새하얀 비닐 벽지로 발라져 있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김전일, 이것은...!" 겐모치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핏자국이야. 틀림없어." "핏자국...?" 미즈사키도 깜짝 놀라며 더욱 자세히 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아침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겐모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무리도 아니에요. 아침에는 이 방에 햇빛이 없어 어두웠잖아요. 그래서 방에 들어오면서 바로 이 전등 스위치를 켰어요. 이런 식으로." 김전일은 폭 3 센티미터, 길이 4 센티미터 정도인 구식 스위치를 올렸다. 껌뻑껌뻑하며 작은 소리가 나더니 형광등이 켜졌다. "아, 그랬군... 역시, 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 겐모치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보였던 핏자국이 전등을 켜자 큰 스위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범인'도 이런 이유로 여기 묻은 핏자국을 못 보았을 거야." 김전일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미즈사키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범인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범인 말이에요." 김전일이 대답했다.


"주, 죽었다고요!? 설마 그럴 리가..."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다카모리 선장은 바로 이 방에서 칼이나 단단한 흉기 같은 것으로 살해당한 것입니다." 김전일이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핏자국이 다시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 핏자국이 그 증거입니다. 스위치 뒤에 핏자국이 있는 것으로 봐서, 범행은 선장이 자고 있는 깊은 밤에 행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범인은 한밤중에 이곳에 들어와 선장을 살해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선장이 눈을 뜬 거죠. 그러자 범인은 도망치려는 선장을 뒤쫓아서 이렇게--." 김전일은 하나하나 몸동작을 해 보였다. 침대 쪽에서 누군가를 쫓는 것처럼 방문을 향해 걷더니, 뭔가를 잡듯이 주먹을 쥐었다. "들고 있던 흉기로 선장을 죽인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김전일은 쳐들고 있는 손으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미즈사키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김전일의 몸동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겐모치는 그런 몸동작엔 익숙해져 있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팔짱을 끼고 김전일의 추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김전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건 당시 이 흰 벽에는 분명히 다카모리 선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튀었을 것입니다." 물론 바닥에는 더 많은 피가 묻었을 테구요. 범인은 전등을 켜고 그 참상을 보자 몹시 당황해서 핏자국을 닦았을 겁니다. 그러나 전등을 켤 때 스위치 뒤에 묻어 버린 이 작은 핏자국만은 전혀 보지 못한 거지요. ...그런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추리를 하던 김전일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그런데 아저씨, 어째서 범인은 그런 '서투른 살인 방법'을 택했을까요?" "응? 그건 무슨 뜻이지?" 묻는 겐모치 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김전일은 부엌 주위를 뒤지기 시작했다. 식기장을 열어 보고, 개수대 밑의 수납장과 냉장고까지 다 보고 나서 김전일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알았어요, 아저씨." "뭐를 알았다는 거야?" 겐모치가 애매하게 묻자, "왜 범인이 벽에 피가 튀는 서투른 살인 방법을 택했는지를요." "으응?" "이런 게 아닐까요? 범인은 필사적으로 피를 닦았어요. 한밤중에 잠자는 시간을 틈타 방에 침입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살인할 생각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그러면 목을 졸라 죽인다거나, 독을 사용하는, 현장에 흔적이 남지 않는 살해 수단을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심리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서 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없을까 찾아보았어요." "뭐가 있었나?" "아니오, 있었다기보다는 '없었다'입니다." "뭐가?" "과일 깎는 칼이오." "칼?" "봐요." 김전일은 냉장고를 열어 보였다.


"우유며 계란 외에 과일이 많이 들어 있잖아요. 키위와 사과, 망고까지 있어요. 그런데 이 방에는 과도도 없고 큰칼도 역시 없어요. 식사용 칼로는 과일을 깎기 힘들어요.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워요." "음.... 그럼, 그 없어진 칼이 흉기라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범인이 그것을 치웠습니다. 물로 씻어 원래 장소에 놓아 두어도 됐을 텐데 왠지 둘 수 없었나 봅니다." "흠. 흉기를 현장에 남겨 둔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심리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게다가 최근의 검사 방법은 아무리 깨끗이 씻은 것이라도 혈액을 검출할 수가 있거든." 겐모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김전일이 다시 목청을 높였다. "아! 범인은 분명히 어떤 '흔적이 남지 않는 살해 수단'을 준비해서 이 방에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데 침대에 가까이 가서 '이때다!' 한 순간 다카모리 선장이 눈을 뜬 겁니다. 그래서 선장과 맞붙게 된 범인은 준비해 온 살해 수단인 흉기를 떨어뜨린 게 아닐까요?" 김전일은 바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범인은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실내가 완전히 캄캄한 건 아니지만 부엌 쪽의 작은 불빛과, 창문의 달빛만으로 바닥에 떨어뜨린 흉기를 찾기는 매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를 켜고 다시 흉기를 찾을 만한 여유는 더욱 없었겠죠. 아무튼 선장이 밖으로 도망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요.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방문을 두드린다면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사람들이 나올 것 아닙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바로 옆의 조타실에서는 맑은 정신으로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렇지요, 미즈사키 씨?" "네. 오전 2 시까지는 제가 있었고, 그 이후엔 오전 8 시까지 와카오지 1 등 항해사가 있었습니다." 미즈사키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 났다. 김전일은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겐모치를 쳐다보고 추리를 계속했다. "그래서, 당황한 범인은.... 음, 당황한 범인은 다른 흉기를... 으음?" 김전일은 말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김전일?" 겐모치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아무리 방이 어둡다지만 다른 사람의 부엌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칼을 찾는다는 게... 그보다는 바닥에 떨어진 흉기를 줍는 게... 음... 아, 그렇지! 그렇다면 말이 되지." "뭘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거야?" "아니에요, 이니에요. 잠깐 헷갈렸어요. 범인보다 먼저 다카모리 선장이 부엌에서 칼을 집어든 거예요. 선장이라면 칼이 어디 있는지 당연히 알 테니까요. 그때 범인은 선장이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즉시 입구를 막은 겁니다." "맞아. 그 뒤는 알겠다, 김전일." 겐모치는 부엌에서 뭔가 집는 시늉을 하더니 입구 앞에 선 김전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선장은 이런 식으로 범인을 향해 칼을 쳐들었다. '저리 비켜!'라고 하며. 그러나 범인은 즉ㅅ심지어 선장에게 덤벼들어 칼을 빼앗아...."


겐모치가 여기까지 말하자 김전일이 겐모치의 손에서 칼을 빼앗는 시늉을 했다. "거꾸로 선장을 푹 찔러 버렸다. 뭐, 이런 것이겠죠?" "응. 만약 이 추리가 맞는다면 용의자는 상당히 좁혀지는 거야, 긴전일." 겐모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고는 움켜잡은 김전일의 팔을 틀어쥐고서, "어쨌든 피해자는 50 대의 강인한 바다의 남자다. 범인이 너처럼 연약한 놈이었다면...." 라면서 김전일의 팔을 비틀었다.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아파요! 무슨 짓이에요, 아저씨!" "하하하하! 이런 식으로 간단히 잡혀 버렸을 거야." "그렇다고 진짜로 하기예요!" 김전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지만 겐모치는 잘못했다는 기색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즉, 칼을 뺏아 찌르는 행동은 보통 힘 가지곤 어렵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범인은 미 배에 타고 있는 스물한 명 중에서 연약한 여자와 노인을 뺀 '누군가'가 되는 거다. 어때, 김전일?"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럴 거예요. 똑똑하시네요, 아저씨." 김전일은 손목을 문지르면서 비아냥거렸다. "아무튼 이제 경찰이 나서야 할 때에요. 아저씨." "좋아! 심문은 나에게 맡겨!" 겐모치는 손가락을 두두둑 두두둑 소리나게 꺾었다. "동기가 될 만한 사실을 철저히 캐낸 다음, 그 다음은 알리바이다. --아니, 잠깐! 시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범행 시각을 모르는데...."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범행 시간은 몰라도 위장 공작을 한 시간은 대충 알잖아요." "그렇지! 그럼 오늘 아침의 알리바이가 필요한 거군." "범인은 한밤중에 다카모리 선장을 칼로 찔러 죽인 후 서둘러 핏자국을 닦고 흉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선장이 아침 인사에 나오는 시간에 임박해 다시 선장실로 들어가 현재 상태대로 만들었다. 선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여러 가지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 추리가 맞는다면 위장 공작을 했다고 생각되는 아침 시간의 알리바이를 조사하면 당연히 범인을 알게 되잖아요. 참! 그런데 항해일지에 날짜를 쓰고, 테이블에 식기를 놓고, 그리고 커피를 끓이고, 토스터에 빵을 넣고, 달걀 프라이를 한다. 이런 작업을 서둘러 한다면 대충 어느 정도 걸릴까요?" "음.... 아무리 발라도 한 10 분은 걸릴 거야." 그러자 김전일은 과장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쿠, 가엾으셔라! 매일 아침 직접 식사를 차려 드시는군요, 아저씨." "못된 녀석! 어른을 놀리면 못써. 급한 사건 때문에 아침 일찍 나올 때만 그래. 아주 가끔 그럴 분이야." "알았어요, 알았어요. 아무튼 10 분 정도라면 위장 공작은 가능하다는 거죠? 그럼, 다음은 범인이 아침 몇 시 몇 분에 위장을 했는가를 추정해 볼까요?" "선원의 증언에 의하면 아침 7 시 35 분에 인터폰으로 불렀을 때는 이미 선장실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보다 전이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범인이 그때 방에 있었다 해도 대답할 리가 없잖아요. 확실한 건 우리들이 선장실에 간 '7 시 45 분'이라는 시간뿐이에요. 선장실의 토스터와 커피 메이커가 따뜻했던 것과, 계란 타는 냄새로 보아 10 분에서 15 분 정도는 지났을 거예요. 반대로 말하면 30 분은 지나지 않았던 거고. 그러니까 오늘 아침 7 시 15 분부터 7 시 35 분까지의 20 분 중에서 10 분, 아니 7, 8 분 정도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게 되는 거죠." "좋았어! 가자, 김전일! 거기까지 나왔으면 범인은 거의 잡은 거나 다름없어!" 겐모치는 호탕하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김전일은 약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기세 좋게 단번에 풀어 버린 추리에 조금 꺼림칙한, 그러나 치명적인 허점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인 김전일을 보고 겐모치도 기세가 누그러졌다. 겐모치는 얼른 미즈사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미즈사키 씨. 당신은 와카오지 씨를 깨우십시오. 그리고 모두 다 모이게 해 주십시오.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는 사람만 제외하고, 손님이건 선원이건 모두 다 식당으로 모이라고 하세요" "뭘 하실려고요?" "알고 있잖습니까? 사정 얘기를 들어 보려는 겁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협조하게 할 겁니다. 핏자국이 발견된 이상 살인 사건의 의혹이 매우 짙습니다." 미즈사키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쩔 수 없군요." 라고만 말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겐모치에게 마스터키를 건네주고 선장실을 나갔다. 제 4 장 악몽의 밤 1 해는 어느새 지고 배는 또 별이 빛나는 밤하늘 하래 있었다. 항해 자체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그 순조로운 평온이 오히려 선장의 실종 사건을 새하얀 옷에 묻은 얼룩처럼 두드러지게 했다. 승무원과 손님 대부분이 식당에 모였다. 저녁 식사를 마쳤지만 겐모치 경감의 요청에 따라 조사에 협력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타실에서 키를 잡아야 하는 3 등 항해사 카노우와, 기관사인 오오츠키 대신에 기관실 근무를 하고 있는 선원 한 명은 식당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겐모치를 피하듯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승객 '나카무라 이치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우코에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사다 달라고 했던 그 이상한 남자는 식사 때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겐모치의 요청에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방문을 잠그고 틀어박혀 있었다. 겐모치도 정식 절차를 밟은 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로 데려올 수 없었다. 그래서 협조에 응한 사람들부터 취조하기로 하였다. 겐모치는 김전일과 함께 취조하고 싶었지만 경관도 아무것도 아닌 김전일이 함께


있으면 상대방이 거북해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 대신 한 사람씩 리빙 홀로 오게 해서 겐모치가 취조하는 동안 김전일이 바로 옆방인 오락실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게 했다. 맨 먼저 들어온 사람은 기관사인 오오츠키였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스스로 제일 먼저 할 것을 희망했던 것이다. 올해 67 세가 된다는 이 기관사는 앞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는 범인을 알아요." "뭐요!? 누굽니까, 그게?" 겐모치가 묻자 오오츠키는 히죽 이를 내보였다. "와카오지라면, 그 1 등 항해사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 남자가 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니오, 보지 못했소. 하지만 그 놈은 전부터 다카모리 선장을 미워했으니까." "미워했다구요?" "그래요. 그 놈은 원래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엘리트였소. 그 놈은 이런 폐선 직전의 배에 타게 된 것이 순전히 다카모리 선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음.... 그럼 실제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피해자인 다카모리 선장은 와카오지 씨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습니까?" "글쎄, 그건 모릅니다. 그저 나는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이니까." "소문이라.... 그렇지만 소문만 듣고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겐모치가 조금 실망한 듯이 말하자 오오츠키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틀림없소. 그라면 했을 거요. 뱀처럼 교활하고 집념이 강한 인간이니까. 그 오리엔탈호 사건 때도 그 놈이 약삭빠르게 처신해서 사고 책임을...." 갑자기 오오츠키가 우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즉시 겐모치가 다그쳤다. "뭡니까, 그 얘기는? 자세히 말해 보세요." 겐모치가 다그치자 오오츠키는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전에 김전일과 미유끼에게 했던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의 관계, 그리고 오리엔탈호 사건에 대해 짧게 말했다.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두 사람이 결탁해서 그 사건의 책임을 잘 피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저런... 치사하군. 아무튼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으니까. 승객이 무척 많이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그중에서 누군가 선장이었던 다카모리 씨에게 원한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 "하,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소문이라고 말했소. 그 사건의 책임은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 쪽에게 있어요. 그러니 원한을 산다면 그쪽이오.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는 책임이 없소. 형사님, 지금 말한 것은 절대로 회사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이 나이에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는데 회사를 험담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오오츠키는 얼굴색이 하얘지며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경찰에겐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증언자에게 불이익이 될 만한 것은 입이 찢어져도 말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부딪쳐 온 유조선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만약 아신다면...." "모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릅니다. 상대임 유조선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카노우에게 물어 보시오." "카노우?" "3 등 항해사인 카노우 말이오. 지금 조타실에 있는 남자요." "아, 그 신경질적인 남자 말입니까? 그 사람이라면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까?" "당연하죠. 그는 그 유조선에 타고 있었으니까." "뭐, 뭐라고요!?" 겐모치는 저절로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 그런 사람이 어째서 오리엔탈호의 선원이던 사람들과 함께 이 배에 탄 거죠?" 겐모치가 갑자기 달려들듯 묻자 오오츠키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모, 몹니다. 정말로 몰라요. ...나는 그가 지병 때문에 정식으로 배에 탈 수 없어 이 배에 왔다고만 들었을 뿐...." "지병이라구요? 도대체 그 병에 뭐죠?" "뭐라더라... 어려운 이름의 병인데. 나르코라든가 니르카라든가, 아무튼 일단 잠들면 일어나지 못하는 병이라던데.... 이 배에 타고도 종종 그 병 때문에 근무 시간을 완전히 빼먹은 일이 있어요."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의 입장에서는 그 카노우라는 남자가 자신들의 배를 침몰시킨 사람 중의 한 명일 텐데 잘도 그런 남자와 함께 일을 하고 있군요." "카노우를 이 배에 타게 한 사람이 와카오지라는 소문도 있어요." "캬아! 또 소문입니까? 이 배에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소문이 도대체 몇 가지나 돌고 있는 겁니까?" 겐모치가 한숨을 쉬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당신이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주십시오." "나는 기관사니까 기관실에 있었어요. 기관부 직원도 함께 있었소."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겐모치는 수첩을 덮었다. 2 오오츠키 다음에 취조를 받음 사람은 승객인 아카이였다. 괴기 사진작가를 자칭하는 이 중년 남자는 카세트를 가지고 들어와 겐모치 앞에 앉았다. "그것은 왜 가져왔습니까?" 불쾌한 얼굴로 겐모치가 묻자 아카이가 즉시 대답했다. "취재를 하려고 합니다. 안 됩니까?" "당신은 기본적인 상식도 없습니까!" 겐모치의 혈관이 불거졌다. "하하하하! 미안합니다." 아카이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안 된다면 좋습니다. 자, 그럼 시작하시지요, 경관님." "내 참.... 그럼, 먼저 묻겠는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배에 탔습니까?" "일 때문입니다. 취재하기 위해서죠." "취재라구요? 무엇을 취재하려는 거죠? 설마 선장의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아니겠지요. 배에 타기 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안 사람은 범인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니, 나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뭐라구요?" 겐모치가 눈을 크게 뜨고 언성을 높이자 아카이는 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 아니, 그렇다고 내가 범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이 배에 사고로 죽은 선장의 귀신이 씌어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영적 현상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하고 탄 것입니다." "쳇! 말도 안 돼. 배에 귀신이 씌어 있다니. 그런데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 물론이죠. 이 정보는 매우 신뢰성이 높은 겁니다. 2 개월쯤 전에 오가사와라 섬에서 한밤중에 아무도 타지 않은 이 배가 제멋대로 항구 안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엄청난 이야기지요." "정말 엄청난 이야기군요. 그런데 그것을 믿는 당신은 더 엄청나군요." 겐모치가 비아냥거려도 아카이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이 배는 원래 1 년쯤 전에 당시의 선장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때 그런 소문이 나서 그 뒤론 아무도 타지 않게 되었지요. 자세히 조사를 해 보니까 떠돌던 그 소문은 단순히 소문에 불과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재가 입수한 정보는 숙직하던 경비원조차 분명히 목격한, 그야말로 확실한 괴현상입니다. 게다가 얼마 후면 이 배는 폐선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오호라, 그럼 당신은 유령 사진을 찍기 위해서 이 배에 탔다, 그거군요?" 겐모치는 턱을 고이고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실체화된 유령은 아직 찍지 못했지만, 하지만 유령이 일으킨 괴현상은 확실하게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선장실을 확실하게 찍어 두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이 배를 탄 보람은 있습니다." 아주 만족스런 표정인 아카이에게 겐모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가 나 소리쳤다. "당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건 유령이 한 짓도 아니고, 게다가 4 차원으로 빨려들어간 것도 아냐. 분명한 살인 사건이야. 이제 됐어. 당신 방으로 돌아가. 더 얘기를 듣다간 나까지 미쳐 버리겠어!"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아카이는 여유 있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빙 홀을 나가려다 말고 그는 갑자기 뒤돌아 섰다. 그러고는 조급하게 수첩에 메모를 하던 겐모치에게 말했다. "참, 경관님.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습니다." "뭡니까. 아직도 뭐가 남았소?" 겐모치가 화를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요리사에게 물어 보면 알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엔 6 시부터 계속 식당 창가에서 아침해를 찍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선장을 데려간다거나 죽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겠지요?" 아카이는 그렇게 느물거리면서 리빙 홀을 나갔다. 3


아카이 다음으로 여고생인 아케미와 유우가 겐모치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긴장해 손을 떨고 있었다. "저...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몰라요...." 머리가 짧은 아케미가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것을 본 겐모치는 가엾은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겁먹지 마. 내가 잡아먹지는 ㅎ을 테니까. 그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 돼." "네...." 두 사람은 힘없이 대답했다. "자, 그럼 아케미 쪽부터 묻겠는데, 자네는 고등학생인가?" "네, 2 학년입니다." 겐모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적어 넣었다. "그럼, 또 한 명인 유우 양. 자네도 고등학생이겠지?" 그러나 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두껍고 작은 입술을 앞으로 내민 채 아래를 쳐다보고 있다. "왜 그러지? 아닌가?" 겐모치가 조금 의외라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유우는 검고 큰 눈을 떨면서 친구인 아케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저는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유우는 사정이 있어서..." 아케미가 거들어 주듯이 말했다. "무슨 이유일까? 가능하면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겐모치가 부드럽게 묻자 유우는 단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굳어지는 그녀의 표정에 밀려 겐모치는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알았어. 알았어. 묻지 않지.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너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은데." "우리들은 7 시경부터 계속 다카시 씨와 함께 있었습니다." 아케미가 대답했다. "다카시라면 그...." 겐모치는 '경박한 놈'이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다음 말을 삼켰다. "네, 맞아요." 두 사람이 자신에 차 함께 대답했다. "어이에 있었지?" 이번에는 유우가 대답했다. "셋이서 객실층 복도 맨 끝 베란다에 있었습니다." "계단 옆에 있는 베란다?" "...그렇습니다." '7 시경부터 몇 시까지 있었지?" 겐모치의 목소리가 점점 진지해졌다. 유우는 그것을 느끼고 아케미와 서로 마주 보았다. "...아침 식사 안내가 방송될 때까지니까 7 시 반이었을 거예요." "그럼, 그 사이에 계단을 지나간 사람은 보지 못했나?"


"선원들이 계속 청소를 했지만, 그것말고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는, 아케미?" 유우가 묻자 아케미가 대답했다. "청소하고 있던 선원들 외에는.... 아! 경관님과 중년 여자분이 아래로 내려오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우리들도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래...." 라고만 말하고 겐모치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오락실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김전일이 모든 얘기를 듣고 있었다. 4 다카시는 입을 헤 벌리고 겐모치 앞에 앉자마자 말했다.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심문을 받아야 하는 거죠?"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야. 자네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면 돼." 겐모치가 말했다. 차츰 피곤이 몰려와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주춤해졌는지 다카시는 어깨를 움찔하며 힘없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우선 나이와 이름, 그리고... 분명히 대학생이라고 했지? 어느 대학이지?" "오오사와 다카시, 26 세? 대학생치고는 너무 나이가 많군." "아니오, 그게... 실은 대학생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뭐? 그럼 여고생들에게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단 말야?" "...네." "세상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 너 같은 사람 때문에 요즘 젊은이들이.... 에잇, 그래 좋아, 좋아.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아무튼 너에게 묻고 싶은 건 여고생 둘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함께 있었느냐는 거야. 얼른 대답하고 돌아가." "...아, 그것만이면 됩니까?" "그것만이면 돼. 그것으로 일단 알리바이가 성립돼." 다카시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7 시부터.... 음, 아침 식사 방송이 있을 때까지니까 7 시 반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셋이 계속 같이 있었나?" "네, 거의 함께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의? 중간에 누군가 빠졌다는 말인가?" "유우 양이 방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곧 돌아왔습니다." "그게 몇 시경이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묻는데 그 유우 양의 방은 어딘가?" "음, 복도 맨 끝 오른쪽에 있는 201 호실이었나...?" 다카시는 그렇게 말하고는 겐모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말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알았어!" 겐모치는 고함을 치며 탁 소리가 나게 수첩을 덮었다. 5 "경관님, 정말로 선장님은 살해된 건가요?" 겐모치 앞에 앉자마자 요우코가 물었다. 그녀는 식사 뒷정리를 막 끝내고 왔는지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에이프런에 문지르고 있었다. "응. 거의 틀림없을 거야." 겐모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까 얘기했듯이 선장실 벽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어. 시체를 찾지 못해 단정할 순 없지만 바닥이나 벽을 검시해 보면 대량의 피를 닦은 흔적이 당연히 발견될 거야. 그렇게 되면 살인 사건으로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지게 되지." "설마, 살인이라니.... 난 그저 아카이 씨 말처럼 유령이 한 짓으로밖에...." 요우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어리석긴! 뭐가 '유령 선장'의 짓이야! 쓸데없는 말 말아!"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거칠어진 겐모치에게 요우코는 얼른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냐, 미안하군." 겐모치는 황망히 사과를 했다. "너는 잘못이 없어. 나쁜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그 아카이인가 뭔가 하는 남자야. 그런데 요우코 양, 김전일에게 들었는데 그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와 그...." "네, 사귀고 있습니다." "음, 그랬나? 하하하!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미남 미녀끼리." 겐모치는 소리친 것이 미안했는지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에요, 제가 무슨...." 요우코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미즈사키 씬 아주 멋져요. 나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고 요우코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하하하! 이런! 애인 자랑하느라고 정신이 없구만." 오우코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냐, 그렇게 사이좋은 걸 보니 아주 부러운데? 그런데 자네가 보기엔 미즈사키 씨와 선장과의 인간 관계라고나 할까,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 같은 건 없었나?" 겐모치는 돌연 본론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오, 미즈사키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 시절부터 다카모리 선장에게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아요. 그 사람보다는 와카오지 쪽이 선장과 사이가 나빠요." "그래? 와카오지와 선장은 사이가 몹시 나빴나?" "네. 아주 많아요. 게다가 미즈사키 씨한테는 언제나 못되게 굴었습니다. 와카오지 씨는 선장과 미즈사키 씨 둘이서 자신을 모함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요. 얼마나 대단한 엘리트였는진 모르지만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나는


배게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모두들 미즈사키 씨가 훨씬 우수하다고 말해요. 와카오지 그 사람은 늘 화만 내고, 제 고집만 피우고... 분명히 그 남자일 거예요, 선장을 죽인 사람은." 요우코는 토라진 듯이 입을 삐죽대며 말했다. 겐모치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물었다. "자, 자, 알았어. 그럼 3 등 항해사인 카노우 씨와 다카모리 선장 사이는 트러블 같은 게 없었나? 알고 있으면 말해줘." "뭐, 특별한 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카노우 씨는 마치 와카오지 씨의 부하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래서 다카모리 선장이나 미즈사키 씨와는 가깝게 지내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적대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구요." "음.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것만 말하고 끝내지." "저는 6 시 10 분경에 김전일 씨에게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주고 그후로 는 계속 주방과 식당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식당 창가에서 사진을 찍는 아카이 씨에게 커피를 갖다 주기도 하고요. 그리고 식사 준비를 끝내고 방송으로 아침 식사를 알리고...." "방송? 그럼 그 방송을 몇 시에 했는지 정확히 알겠군?" "네. 정확히 말하면 7 시 27 분입니다. 언제나 아침 식사시간 3 분 전이 되면 방송하라고 요리사가 말하니까요." "7 시 27 분이라...." 겐모치는 확인하듯 한 번 복창을 하고 그것을 검은 수첩에 적었다. 6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는 문을 노크하고 나서 리빙 홀로 들어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앉았다. "어이, 미즈사키 씨!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당신과 사이가 안 좋다는 와카오지 씨를 깨워 주셔서. 앞으로 두 사람 사이가 더욱 험악해질지도 모르겠는데, 어쩌죠? 뭐, 아무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라고만 대답하고 미즈사키는 다시 한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시작할까요? 당신도 바쁠 테니까 간단히 요점만 묻겠습니다. 먼저 당신은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다카모리 선장과 함께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서 옮겨왔다고 하던데, 그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저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 시절부터 다카모리 선장님께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에 선장님의 권유에 따라 동태평양 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으흠... 의리 있는 일이군. 당신을 보니까 역시 의리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럼,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주겠습니까?" "네. 5 시 반쯤 일어나서 방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막 나오다가 김전일 씨와 미유끼 양을 만났습니다. 김전일 씨가 위통이 매우 심해 제 방에서 약 대신 따뜻한 우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우코가 우유를 데워 올 동안 잠시 김전일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흠. 그 얘기는 김전일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후는?" "네. 6 시부터 10 시 5 ㅏ지는 조타실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7 시부터 8 시 정도까지 조타실에 있던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7 시부터 7 시 반경까지는 무전실에 있던 와카오지 항해사와 인터폰으로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8 시경까지는 무선 정보를 근거로 기관실과 항해 계획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습니다." "음, 역시." 겐모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뭐라고 적고는, "이제 됐습니다. 또 협조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미즈사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7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는 잠을 자야 한다고 일단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9 시가 지나자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왔다. 그때 겐모치는 무리하게 그를 데리고 가서 취조를 시작했다. "빨리 끝내 주십시오. 새벽 2 시부터 조타실 근무입니다. 그때 가지 조금 더 자 두지 않으면 근무중에 수면 부족으로 위궤양이 재발하게 됩니다." 와카오지가 불쾌감을 드러내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겐모치가 소리쳤다. "나야말로 녹초가 됐소! 선장 대리라면 당연히 이 배의 책임자잖아! 그러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협력을 해 줘야 하잖소!"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겐모치는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마구 비꼬았다. "흥! 자, 그럼,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사라진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하던데, 어떠셨는지요? 그리고, 선장과 미즈사키 씨 때문에 이런 누더기 여객선에 타게 되었다고 당신께서 억측을 부렸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와카오지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정보 제공자는 밝힐 수 없소!" "그렇다면 저도 노코멘트입니다." "뭐라고?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내 참.... 그래, 아무튼 좋아. 하지만 오늘 아침 당신이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확실히 대답해 줄 수 있겠지?" "새벽 2 시부터 아침 6 시까지 계속 조타실에서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나?" "배가 항로를 지켜 향해하소 있던 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겠지요." "잠깐 동안이라면 키를 그냥 두어도 배가 항로를 벗어난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무슨 뜻입니까?" "선장이 살해된 것은 어제 한밤중이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그럼 경관님은 나를 의심하는가 보군요." "그렇게는 말 안 했어. 그건 그렇고, 6 시 이후에는 뭘 했지?" "아침 식사가 시작되는 7 시 반까지 계속 무전실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 배의 무선사도 겸하고 있으니까요." "그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나?" 와카오지가 하는 말은 미즈사키의 증언과 일치했지만 겐모치는 시치미를 뗐다. "또 증명입니까? 6 시 반부터 7 시까지는 계속 하치죠 섬과 무선으로 통신하고


있었으니까 조사해 보면 알 겁니다. 그 이후는 7 시 반경까지 조타실에 있던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협의? 무엇에 대해서?" "하차죠 섬에서 오가사와라까지의 기상 상태와 다른 선박의 운행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그후 7 시 반에 내가 식당에 간 것은 경관님도 아시지요?" "쳇!" 겐모치가 혀를 차자 와카오지는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이제 의심이 씻어졌습니까?" "그런 건 지금 말할 수 없어." "그렇습니까...." 와카오지는 말끝을 흐리면서 선원복 안주머니에서 금장식이 된 볼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타닥, 타닥, 타다다닥, 탁.... 어떤 리듬을 타고 있는 듯이 두드렸다. "? 뭐하는 거지?" 겐모치가 물었다. 와카오지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두들겼다. "당신! 뭘 하냐고 묻고 있잖아!" 겐모치가 흥분해서 소리치자 와카오지는 눈을 치켜뜨고는 히죽 웃었다. "모르스 신호입니다. 모르십니까?" "모르스? 그 비상 신호인가 뭔가 보내는 것?" "그렇습니다. 나는 전에 무선사를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때 배운 거죠. 지금도 가끔 이렇게 사용합니다. 재미있지요?" 뭐가 재미있어. 그런 게!" "재미있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마음껏 우리말로 말하는 것과 같은 쾌감이 있습니다." "뭐?" 겐모치가 몹시 화가 나 벌떡 일어섰다. "이봐! 당신 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엉!"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카오지는 펜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면서 마음속으로 웃고 있었다. "뭘 말하고 있다는 거야!" "글쎄... 뭘까요?" 그렇게 말하고 와카오지는 펜을 다시 넣고 일어섰다. "자, 그럼 이것으로 저의 '심문'은 끝난 거군요, 겐모치 경감님." 마음대로 나가는 와카오지를 그 대단한 겐모치도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8 시간은 이미 밤 10 시를 넘고 있었다. 방에 틀어박힌 '나카무라 이치로'를 빼고 선의와 기관부 직원, 요리사와 잡일을 하는 선원까지 거의 모든 사람의 취조가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겐모치 앞에 앉은 사람은 10 시까지 조타실 근무를 하고 있던 3 등 항해사인 카노우였다.


"저는 지금까지 키를 잡고 있었습니다. 피곤하니 빨리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카노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는 두말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 오리엔탈호와 부딪친 유조선의 선원이었다면서?" 그러자 카노우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자, 그것보다 어째서 그런 자네가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던 두 사람과 함께 이 배를 타게 되었는지 말해 보게." 겐모치의 질문은 더 이상 카노우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카노우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오오츠키 영감이야! 그 영감탱이가 나불나불 지껄인 거야!" "이봐, 진정해!" "개자식! 죽여 버리겠어!" "카노우!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겐모치는 당황해 잽싸게 카노우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고는 힘을 주었다. 건장한 겐모치의 팔에 눌려 움직일 수 없게 된 카노우는 차츰 진정을 되찾았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놔 줘요! 아야야야! 팔이 부러지겠어요!" "그러니까 날뛰지 마." 겐모치가 팔을 풀어 주자 카노우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나는 선장을 죽이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경감님. 믿어주세요." "믿게 하고 싶으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알았나?" "아, 알았어요." "자, 먼저 어째서 자네가 이 배에 타게 되었는지부터 말해 봐. 어떤 지병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들었는데, 그렇다 해서 끔찍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건...." 카노우가 우물쭈물하자 겐모치는 더욱 다그쳤다. "처음 자네를 이 배에 끌어들인 사람이 오리엔탈호의 선원이었던 와카오지 맞나? 그리고 그 이유는 뭐지? 당신이 타고 있던 유조선 때문에 오리엔탈호가 침몰했을 텐데." "그것은 내 탓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견습 선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나르코렙시(NARCOLEPSIE)의 일종인,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힘들ㅇ오늘날 하자, 도와 준 겁니다." "나르코렙시? 그게 네가 잠들면 깨지 못한다는 병인가?" "아니에요. 나르코렙시는 대낮에 갑자기 잠이 와 자기 시작해 버리는 병인데 내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의사는 그 병의 일종이 아닐까 하던데. 1 년에 두세 번이지만 밤에 잠든 채 만 하루 정도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전에 회사에 다닐 때도 몇 번 근무를 빼먹어서.... 잠깐만요, 그런데 내 병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사 있죠?" "글쎄, 아직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 아무튼 그 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당신을 와카오지가 구해 주었다는 얘기지?" "그래요, 그것뿐이에요." "흠... 좋아. 당신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배에서 내리는 대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하고, 그럼 마지막으로 당신이 오늘 아침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말해


봐." "늘 그랬듯이 6 시에 일어나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그러고서... 그렇지, 7 시부터 7 시 반경까지 리빙 홀에서 뉴스를 보았어요. 맞아요, 경감님도 그때 왔었잖아요. 뉴스가 한 15 분 정도 했나? 경감님이 식당으로 가고 곧바로 선장이 없어졌다고 선원이 말하자 그 말을 듣고 나도 식당으로 갔어요. 그 다음은 아시죠?" 카노우가 침을 튀기며 쉬자 않고 말했다. 그러자 겐모치는, "알았어, 알았어. 이제 방으로 돌아가." 귀찮다는 듯이 말하고 겐모치는 카노우를 보내 주었다. 9 김전일 일행 네 명은 또 겐모치 방에 모여 있었다. 김전일은 팔짱을 끼고 의자 등에 몸을 기대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겐모치는 초조하게 경찰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고, 미유끼와 카즈에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곁눈으로 쳐다보면서 차 준비를 했다. "이봐, 김전일." 겐모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전일을 불렀다. "어떻게 된 걸까?" "글쎄요, 어떻게 된 걸까요." 김전일은 천장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일단 알게 된 것은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오늘 아침 7 시 15 분부터 7 시 35 분까지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는 점이야. 선장실에 들어가 15 분 가까이나 걸려서 아침 식사 준비를 했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거야." "음... 그렇게 되나요...." "먼저, 기관사인 오오츠키는 그 시간에 계속 기관실에 기관실 직원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어. 자칭 괴기 사진 작가라는 아카이는 식당 창가에서 아침해를 찍고 있었고, 여고생 두 명과 가짜 대학생인 다카시는 2 층 계단 끝에 있는 베란다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던 것 같아. 불러내는 데 응하지 않은 그 '나카무라 이치로'도 이 시간에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던 것은 베란다에 있던 사람들이 증명했고, 아침 식사 직전에 인터폰으로 불렀을 때 분명히 방에 있었다는 선원의 증언도 있어. 잡일부인 요우코도 요리사와 함께 부엌이나 식당에 있었어. 2 등 항해사인 미즈사키는 6 시부터 계속 조타실에 있으면서 7 시부터 7 시 반까지는 무전실의 와카오지와, 그 이후 8 시까지는 기관실과 각각 연락을 취했다는 것이 확인됐어. 그리고 가장 동기가 있을 듯한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도 7 시부터 7 시 반까지 무전실에서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를 했고, 그러고서 곧 식당에 모습을 나타냈어. 인터폰을 끊고 나서 식당에 올 때까지 2, 3 분의 시간이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선장실에 되어 있던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그리고 기관실에 있던 직원과 계단에서 청소하던 사람을 빼고 남은 세 사람의 선원과 요리사, 그리고 선의까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마지막으로 3 등 항해사인 카노우인데, 그는 그 시간에 식당에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어." "그렇게 되면 모두--."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거야." "말도 안 돼요. 이곳은 태평양 한가운데잖아요.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 모두


결백하다면 선장은 자살이나 사고사로 죽은 게 돼요.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핏자국을 닦은 흔적까지 있으니까. 이것이 살인 사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한데 말야." 그때 김전일이 갑자기 일어나며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어딘가에 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트릭이 분명히 있어!' 10 미즈사키는 배의 키를 잡은 채 창 밖에 가득히 퍼져 있는 밤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검은 바다 위로 가끔 어른거리는 '잔상'을 그는 계속 두려워했다. 그 때문ㅇ제대로 키를 잡지 못하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이윽고 망각이라는 우수한 수단으로 그를 계속 괴롭히던 '잔상'을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는 다시 그 무서운 광경이 떠오르고 있었다. 잔상이라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순간이긴 하지만 심한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놀라움과 공포가 미즈사키의 가슴을 꿰뚫었다. 바다에 고인 잿물처럼 짙은 안개를 헤치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검은 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경적. 그 뒤에 다가온 충격. 최악의 우연과, 보잘것없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이 빚어낸 참상.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일어난 것 같다.... 아, 이제 곧 끝난다. 이 항해는. 그러면 정말로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머릿속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날 밤의 지옥이 재현된다. 비명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에 가득 차고 그 모두를 집어삼키는 칼 같은 파도가 목전에 다가온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악몽은. 빨리 끝나라. 제발 한순간이라도 빨리.... 미즈사키는 마음속 깊이 간절히 빌었다. 11 류오마루 항해일지. 7 월 26 일, 밤. 날씨, 쾌청. 파도, 평온. 항해, 약간의 차질 발생. 딸아, 나는 지금 많이 지쳐 있다. 왠지 몹시 불안하다. 기상도에 의하면 앞으로 3 일 동안 계속 날씨가 좋아서 어제까지의 높은 파도도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건만. 어째서일까.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분명히 곧 '힘든 상황'에 접어들려 하고 있다.


다소의 계획 변경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딸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너를 위해서 나는 바다 위를 간다. 다시 한번 말하마. 이것은 선장으로서의 나의 마지막 항해다. 실패는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사랑하는 딸,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류오마루여. 나의 최후의 배여. 나는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선장'인 나 자신의 힘을 믿고서--. 나는 일지를 덮었다. 항해 계획이란 당연히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무서울 일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말하면서도 나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다. 그야말로 후회해도 후회해도 끝이 없는 실수였다. 그 놈을, 다카모리를 잠에서 깨게 해 버리다니. 다카모리와 몸싸움을 하다 둑을 묻힌 '흉기'를 떨어뜨렸을 때는 정말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끝인가라는 생각까지 스쳤다. 부엌으로 달려간 것은 순간의 착상에 지나지 않는다. 칼이 거기에 있던 것은 불행중 다행이었다. 순간의 차이였다. 다카모리는 밖으로 도망치려고 바로 문 앞까지 가 있었다. 나는 잽싸게 그 놈을 덮쳐 목에 힘껏 칼을 찔러 넣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중 일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찔린 곳은 정확하게 다카모리의 목 뒤에 있는 숨골이었다. 단번에 깊게 찔려 그 비열한 놈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숨을 죽이며 떨이는 몸을 가라앉히고 전등을 켰을 때 나는 아주 놀랐다. 흰 벽에 붉은 반점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도, 내 옷에도 묻어 있었다. 다카모리의 피, 다카모리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였다. 나는 즉시 피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그 옷으로 바닥과 벽을 닦았다. 부엌의 개수대에서 물에 적셔 꼼꼼하게 핏자국을 닦았다. 다행히 피는 바닥엔 직경 10 센티미터 정도로 괴어 있었고, 벽의 서너 군데에만 튀어 있을 뿐이었다. 숨골을 찌른 것과 그것을 찌르자마자 빼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다행이었다. 경동맥을 자르기라도 했다면 주위가 온통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핏자국을 다 훔치고 시체를 밖으로 끌어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천천히. 다카모리의 시체는 무거웠다. 그다지 덩치가 큰 놈은 아니었지만 시체라는 것은 정말로 무겁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피 묻은 나의 옷과 함께 다카모리의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릴 때 그 놈 목에 꽂힌 칼을 그대로 둔 것은 큰 실수였다. 칼을 잘 닦아서 제자리에 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계속 버러지는 바람에 도저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보다 더 큰 실수는 핏자국을 닦을 때 전등을 켜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스위치 뒤에 가려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다카모리가 살해되었음이 발각 됐음을 알았을 때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후로는 나의 그런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승객 중에 형사가 있던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무엇보다 그 김전일인가 하는 소년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두 명이나 더 죽여야 한다. 여기서 의심을 받는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세 명이 죽고, 그것이 살인 사건으로 경찰에 의해 상세하게 조사된다면 나는 혐의를 쓸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그 세 명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나와 그 놈들의 관계를 조사하면 곧 알아 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세 명 모두 살인된 것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말고, 마리 세레스트호 사건처럼 '수수께끼의 실종 사건'으로 끝내 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이 형편없는 배가 최고의 무대였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하지만 초조할 건 없다. 괜찮다. 이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했으니까. 조금이라도 살인 혐의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그 협의를 없애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항해 계획'으로 즉시 바꿀 예정이었으니까. 두려워 할 일은 없다. 아무것도.... 나는 가방 안에 일지를 넣고 대신에 그 '흉기'를 꺼냈다. 나머지 두 명. 이번이야말로 이 도구를 확실해 써 보자. 이것을 살짝 들어올리자 바늘 끝에 묻은 갈색 액체의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복수는 오늘밤 끝난다. 그리고 '유령 선장'의 항해도.... 12 시간은 새벽 3 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벌써 동쪽 하늘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익숙한 항해사라면 계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방각을 정확히 읽어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조타실 키는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가 잡고 있었다. 새벽 2 시부터 아침 6 시까지는 그의 근무 시간이다. 이 배 자체는 구식이지만 인원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사용한 최신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장치되어 있다. 따라서 지도나 컴퍼스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전기가 망가져 다른 배의 무선을 받을 수 없어 레이더에서 절대 눈을 떼면 안 된다.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몇만 해리를 향해한 경험이 있는 와카오지에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와카오지는 키를 잡은 채 3 년 전의 악몽 같은 밤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날 밤 오리엔탈호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 있었다. 동아 오리엔트 해운이 자랑하는 이 최신 호화 여객선은 거의 모든 최첨단 장비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그래서 바다 위의 리조트 호텔이라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배에 승선한 종업원은 5 백여 승객의 10 분의 1 밖에 안 되는 60 여 명이었다. 하이테크 장비를 갖춰 소수 인원으로도 충분한 신형 배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선원들을 최대한 줄인 것이다. 그래서 60 여 명의 스텝 거의 대부분이 배를 조종하는 일과는 무관한 일반 종업원들이었다. 와카오지는 이 배에 선장 다음의 중요 직책인 1 등 항해사로서 승선했다. 선박업계의 명사들과 부유한 실업가들이 많이 참가하는 이 처녀 항해에 몇 명 안 되는 선원으로 뽑힌 것은 업계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짐을 뜻했다. 와카오지는 당시 동아 오리엔트 해운의 간판이 될 오리엔탈호의 차기 선장이 약속된 엘리트이며, 초대 선장인 다카모리는 이미 차기 중역으로 불려지고 있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30 세로 무선사에서 항해사로, 그후 또 순식간에 40 대에 오리엔탈호의 1 등 항해사로 출세한 와카오지가 다카모리에겐 거북한 존재였다. 따라서 다카모리와 와카오지의 관계는 결코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알력 때문에 오리엔탈호 승무원들의 3 분의 2 는 선장인 다카모리 파벌에서, 나머지 3 분의 1 은 와카오지 파벌에서 선발되었다. 사고의 발단은 배 안에서의 이 파벌 싸움이었다. 오리엔탈호가 출항한 지 3 일대 되는 밤에 처녀 항해를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파티에는 일반 승객과 함께 선박업계의 명사들이 많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유대 관계가 중요한 선박업계에서, 명사들 얼굴을 이 파티에서 익히면 앞으로의 출세에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그 파티가 있는 날 저녁, 문제가 발생했다. 선장이 근무 계획 변경을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 계획에 따르면 와카오지에겐 파티가 열리는 시간에 조타실 근무가 배다되어 있었다. 게다가 와카오지의 파벌인 선원들 대부분이 파티 동안 모두 근무를 해야 했다. 와카오지는 당장 다카모리 선장을 만나 항의했다. 그러나 다카모리는 전혀 그 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너무 화가 난 와카오지는 근무 보이콧이라는 강경 수단을 쓰기로 했다. 최신 장비인 위성 자동 조타 시스템을 작동시켜 두고 보조 근무를 하는 4 등 항해사와 함께 조타실에서 나와 버렸다. 독단적으로 그 축하 파티에 참가하려 한 것이다. 바고 그 강경 수단이 그 악몽의 대형 사고를 초래한 것이다. 사고엔 몇 가지 불행한 우연이 겹쳤다. 하나는, 이때 오리엔탈호가 미세키가우라라는 암초가 많은 위험 해역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짙은 안개였다. 전날까지 밝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흐려지더니, 미세키가우라 해역에 짙은 안개가 끼여 있었다. 그래서 불빛 심지어 환한 배 안에서는 암초를 피하려 계속 접근해 오는 유조선의 경고 불빛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최악의 조건이 겹쳤을 때 사고는 일어났다. 와카오지가 옷 매무새를 고치고 파티장으로 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콘크리트


블록을 부술 때와 같은 소리가 나고 배가 조금 흔들렸다. 배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충돌 사고 경험이 없었고, 와카오지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 작은 충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티장으로 가는 복도 창으로 밖을 내다보자,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객선의 호화로운 조명에 검고 거대한 배의 그림자가 비춰지고 있었다. 거대한 유조선이 오리엔탈호의 중간 해리 부분을 치고 들어온 것이다. 유조선은 충돌 직전에 피하려고 뱃머리를 튼 상태로 오리엔탈호의 허리 부분을 후빈 채 멈춰 있었다. 그러나 오리엔탈호는 충돌 후에도 유조선의 진로를 방해하듯이 계속 왼쪽으로 꺾으려 하고 있었다. 해상 충돌 예방법에 의하면 근접해 있는 배는 각자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려 충돌을 피해야 했다. 따라서 사고의 책임은 명백히 왼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는 오리엔탈호에 있었다. 와카오지의 머릿속으로 사고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이 빠르게 스쳤다. 자동 조타 시스템이 암초를 피해 키를 왼쪽으로 꺾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왼쪽에 가까이 있는 유조선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컴퓨터에는 이미 오른쪽에 암초가 있다고 입력되어 있어서 오리엔탈호는 저절로 그것을 피하려고 계속 왼쪽으로 핸들을 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조선은 법규에 따라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무튼 그 결과 두 대의 배가 충돌했다. 와카오지는 순간적으로 이 사고의 대부분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핸들을 잡고 있었다면 유조선이 법규에 따라 오른쪽으로 피하리라 판단하고 당연히 배를 정면으로 직진시켰을 것이다. 그랬으면 아무 일 없이 두 대의 배는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람에 의한 재난이다. 무전실에 있던 무선사는 당연히 유조선으로부터 위험 신호를 받고 필사적으로 알리려 했다. 그러나 조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와카오지는 후회와 두려움에 떨며 인터폰으로 즉시 방송실에 사태를 알렸다. 방송실에서는 이미 사고를 알고 있다가 와카오지의 지시가 있자 긴급 방송을 했다. 큰 사고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침몰할 걱정은 없지만 단지 만약을 위해 대피해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와카오지는 그렇게 간단한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딪친 곳이 가장 약한 부분인 배의 중간 허리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 침몰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충돌 상대가 유조선이었다. 원유를 싣고 있을 것이므로 큰 화재가 날 가능성이 있었다. 구명 보트에 타야 해! 와카오지는 구명 보트가 있는 갑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깨닫지 못했을까? 뱃머리에 있는 감시대에는 당연히 항해사가 있다. 환한 조명이 켜진 배 안에서는 가까이 있는 유조선의 경고등이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캄캄한 바다만 보이는 감시대에서조차 안 보였을 리가 없다. 더 빨리 유조선을 발견했다면 이런 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못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갑판 위로 튀어 나가자, 이미 눈앞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조선에서 벌써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일 초의 여유도 없었다. 바다 위로 원유가 흘러나와 불이 옮겨 붙으면 모든 게 끝이다. 그때는 보트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서둘러야 해! 와카오지는 구명 보트를 내리고 눈에 띄는 선원복인 흰 상의를 벗고 오렌지색 구명 조끼를 입었다. 그로부터 조금 지나 승객들이 갑판에 넘쳐 있을 땐 벌써 오리엔탈호는 눈에 보일 만큼 기울기 시작했다. 와카오지는 울부짖는 승객들 틈에 섞여 맨 먼저 구명 보트에 올라타, 이미 오리엔탈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완전히 기울어진 오리엔탈호의 갑판에서 가끔 팔랑팔랑 뭔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보트에 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오리텐탈호 측의 사상자와 행방 불명자는 87 명을 헤아렸다. 유조선의 승무원은 화재에 휩싸여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오리엔탈호의 감시대에 있어야 했을 6 등 항해사도, 와카오지와 함께 조타실 근무를 보이콧한 4 등 항해사도, 유조선의 긴급 무선을 받았을 무선사도 모두 죽었다. 상대방 유조선의 승무원이 거의 죽거나 행방 불명이 된 건 오리엔탈호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재판은 아주 짧게 끝났다. 사고의 모든 책임은 일방적으로 유조선 측에 있게 되었다. 서로 싸우던 선장과 와카오지는 법정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화를 내고 상대의 잘못을 따지는 과정에서 각각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와카오지의 실수는 조타실을 떠난 것. 그리고 다카모리 선장의 실수는 감시대에 있던 항해사를 강제로 파티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짙은 안개 속이었다 하나 뱃머리에 있는 감시대에서는 당연히 접근하는 유조선을 빨리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아무도 없었던 것은 명백히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은 감시대에 있던 것으로 된 항해사가 '사망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런데 와카오지는 다카모리의 입을 통해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감시대에 있었어야 할 항해사가 살아 있는 것이다. 죽었다고 보고된 항해사는 사실을 다른 장소에서 근무하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고의 진상을 숨기려 선원 등록도 하지 않고 승선시킨 전혀 다른 사람을 그 항해사로 속인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 움직이는 하이테크 여객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다카모리 선장은 무리하게 선원 수를 줄였다. 그러나 결국 출항 직전에야 선원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등록도 시키지 않고 젊은 선원들로 인원을 채운 것이다. 그 인물은 살아 있고, 게다가 지금 바로 이 배에 타고 있다.


3 년 전을 생각하면서 와카오지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수없이 생각나는 것은 충돌했던 그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조타실에서 나가는 광경이었다. 그때 단념했더라면, 아니, 적어도 보조인 4 등 항해사만이라도 남게 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 갑자기 등뒤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와카오지가 돌아본다. "네." 대답을 하자 상대도 말을 해 왔다. 와카오지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문으로 다가간다. 와카오지가 잠금 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돌리는 동안에도 문 밖에 서 있는 '그 인물'은 조금도 이상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문이 열린다. '그 인물'은 와카오지에게 용건을 말한다. 와카오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수상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체도 발견되지 않은 다카모리 선장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와카오지가 한밤중의 방문객에게 의심을 품은 것은 '그 인물'에게 손이 잡혔을 때였다. 쿠욱! 하고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껴 손을 뺀 순간 비로소 왜 이런 때 '그 인물'이 조타실에 찾아왔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순간 몸 속 깊은 곳에서 격심한 고통이 끓어올라와 그 생각을 날려 버렸다. "으... 으윽!" 쥐어짜는 목소리와 함께 숨을 뱉었지만 숨은 두 번 다시 들이켜지지 않았다. 호흡이 경련으로 바뀌더니 순식간에 몸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몸을 끊어내는 고통이 덮치면서 와카오지는 리놀륨 바닥위로 나뒹굴었다. 와카오지는 생각했다. 무얼까, 이건? 어째서 이렇게 괴롭지. 이봐, 거기 서서 쳐다보지만 말고 나 좀 도와 줘. 왜 그래. 왜 웃는 거야. 나는 괴로워. 분명히 이건 심장이다. 심근 경색인가 뭔가 하는 발작이다. 웃지 말고 의사를 불러 줘. 이봐, 왜 가만히.... ...설마, 네놈이? 그래, 아까의 통증, 그 바늘로 찔린 듯한 통증이.... 그제야 와카오지는 한밤중의 방문객이 다카모리를 살해한 '유령 선장'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와카오지의 호흡은 점점 멈춰 갔다. 이윽고 희미한 숨소리를 내며 누워 버린 와카오지에게 '유령 선장'은 왜 자신이


그를 죽였는지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크게 열려진 와카오지의 눈이 순간 공포로 일그러지고 그리고 곧 빛을 잃었다.... 제 5 장 대신 죽은 자 1 김전일은 6 시 반에 잠에서 깼다. 이번에는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꿈이었다. 눈을 떠 보니 이 유람선에서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유끼도 겐모치도 다른 손님도, 그리고 선원들조차 한 명도 남지 않은 여객선에 김전일은 혼자 남아 있었다. 미유끼와 겐모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배 안을 걸어다녔다. 리빙 홀, 오락실, 그리고 식당까지.... 식당에는 접시와 식기가 테이블에 정확히 차려져 있다. 접시엔 아침 식사인 빵이 놓여 있고, 구석의 카운터에서 유리 용기에 담긴 커피가 수증기를 내고 있다. 아침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의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김전일은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식당을 뛰어나와 다시 배 안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모든 방이란 방을 난폭하게 열며 미유끼와 겐모치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물론 없었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철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아무도 없는 배에 울려 퍼졌다. 김전일은 어느샌가 선장실 앞에 있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은 첫날 본 광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대로가 아니었다. 접시와 컵은 역시 테이블 위에 있었지만 커피는 식었는지 수증기를 내지 않았고, 계란 타는 냄새도 없었다. 토스터 안에 빵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토스터는 따뜻하지 않았다. 김전일이 다가가 커피 메이커를 만지려 한 순간 갑자기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커피 메이커에 불이 켜졌다. --!? 당황하는 김전일의 눈앞에서 토스터와 전기 풍로의 스위치가 동시에 켜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김전일은 비명을 지르며 선장실을 뛰쳐나왔다. 김전일이 복도에 나오자마자 바로 옆 조타실 문이 딸그닥 소리를 내고 닫혔다. 누가 있는 건가...? 김전일은 조타실로 가까이 가서 문을 열었다. --?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조타실. 그 한가운테 잡은 사람이 없는 조타 핸들이 천천히 천천히 돌고 있었다.... 여기서 김전일은 잠을 깼다. 몸과 머리, 잠옷 대신 입은 티셔츠까지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김전일은 흔들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천천히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샤워기를 틀면서 김전일은 조금 흥분되어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자신의 추리에서 큰 '구멍'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까지 꾸었던 악몽 덕분이었다. 뜨거운 물을 머리 위에서부터 뿌리면서 김전일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간단하잖아. 아침 식사 준비를 모두 아침에 할 필요는 전혀 없어. 꿈에 나타난 선장실 상황처럼 미리 다해 놓고 아침에 스위치만 넣으면 되잖아! 접시를 꺼내거나 빵을 토스터에 넣거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계란을 떨어뜨리려면 적어도 10 분 정도는 걸린다. 하지만 그걸 모두 한밤중에 해 놓았으면 어떤가. 그렇게 해 놓고 아침 식사 직전에 선장실에 들어가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의 스위치를 켜고 전기 풍로에 달걀 프라이를 하기 시작하면 된다. 이 방법을 쓰면 '10 분'을 1, 2 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 몇 명인가 나올 것이다! 김전일은 그 '몇 명인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이 한 사람의 '그 인물'로 좁혀져 왔다. --그런데 잠깐! 만약 '유령 선장'이 '그 놈'이었다면 왜 다른 인간에게 완전한 알리바이가 생겨 버리게 했을까?... 에잇, 모르겠어! 김전일은 샤워를 침착하게 할 수 없게 되자, 욕조에서 뛰어나와 허리에 타월을 둘렀다. "아아... 또 배가 아파지네." 중얼거리면서 김전일은 객실에 구비된 드라이어 콘센트를 뽑고, 대신 자신의 2 와트짜리 드라이어를 꽂아 스위치를 켰다. 순간 소리도 없이 전등이 꺼졌다. "으악, 뭐, 뭐야!?" 캄캄해진 목욕탕에서 타월 한 장만 걸친 채 뛰어나오자 미유끼 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미, 미유끼!" 최악의 상황이 머리를 스쳤다. 머릿속이 순간 하얘지는 것 같았다. 타월만 두르고 방에서 뛰어나갔다. "미유끼! 괜찮아!?" 미유끼의 방문을 힘껏 두들겼다. 문은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 "미유끼!" "김전일?" 미유끼의 목소리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미유끼, 괜찮아?" "응, 고마워, 괜찮아. 단순한 정전 같아.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를 쓰려는데 갑자기...." "그, 그래, 난 또... 어휴, 다행이다...." 김전일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꺄악!" "살려 줘!" 미유끼와 김전일의 방과 통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방문이 열리고 사람이 뛰어나왔다. 여고생들이었다.


역시 정전 때문에 놀라 뛰어나온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은 아침 7 시 전이다. 그래서 햇빛이 들지 않는 서쪽은 당연히 어둡다. 게다가 살인 사건이 발생한 상황이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어...?" 김전일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곤란해져 엉겁결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니, 사실은 가린 척만 했을 뿐이다. 두 사람 다 샤워중이었는지 몸에 타월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머리가 짧은 아케미는 풍성한 가슴이 반쯤 나와 있었다. "꺄악!" 김전일을 본 두 사람은 아까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지르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비명 소리에 겐모치도 뛰어나왔다. 그리고 문 밖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유끼가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 그 비명 소리는 뭐야? 뭐하고 있어, 김전일!?" 김전일의 허리에 감은 타월이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꺄아아악!' 이번에는 미유끼의 비명 소리이다. "꺄아악, 꺄아악!" 건너편의 두 사람으로부터도 이어서 또 비명 소리가 터졌다. "김전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너, 설마 사건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서 미유끼를...!" 겐모치가 험상궂은 얼굴로 다그치자 김전일이 당황해서 손을 휘휘 저었다. "아, 아니에요! 설마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있어요!" 그 말은 거의 설득력이 없었다. 김전일은 '앞'을 가린 채 자신의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으으...! 엉망진창인 아침이다. 2 김전일과 미유끼는 겐모치 방에 와 있었다. 겐모치의 방은 전기 차단기가 따로 되어 있는지 정전이 되지 않았다. "김전일, 정전된 걸 핑계로 소란을 피워대다니 한심하다. 이 녀석아." 겐모치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소란을 피운 건 제가 아니에요." 김전일이 침울하게 대꾸했다. "네 개의 방에서 동시에 전력이 센 드라이어를 사용해서 차단기가 내려간 거예요, 아저씨." 미유끼가 쿡쿡 웃으면서 대신 설명했다. 카즈에도 웃으면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네가 소리지르는 바람에 그 모양으로 튀어나왔단 말야." 김전일은 미유끼를 향해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목욕탕에 있는데 갑자기 캄캄해져서..."


"으이구...." "김전일, 넌 지금 화난 척하지만 사실 너는...." 미유끼가 옆눈으로 김전일을 힐끔 쳐다보고는,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그 아이들의 몸매를 봐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날카로운 미유끼의 관찰력. "무, 무슨 소리야...." 김전일은 어물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보다 차단기는 어떻게 되었지?" "그렇게 큰 소란을 피웠으니 선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 나올 수밖에요. 지금쯤은 이미 고쳤을 것 같은데, 제가 보고 올게요." 미유끼가 그렇게 말하고 막 방에서 나가자 잚은 선원 한 사람이 얼굴색이 하얘져 달려왔다. "아, 미유끼 양! 겐모치 경감님은 어디 계십니까!?" 선원이 미유끼를 보자 다급하게 물었다. "네? 안에 계십니다만...." 미유끼가 영문을 몰라 말끝을 흐렸다. "뭐야?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선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겐모치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전일도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실은... 또...." "? 또라니?" "네, 또 사라졌습니다." "뭐, 뭐야!? 누가?" "3 등 항해사인 카노우 씨입니다." "그 화를 잘 내는 젊은 사람 말인가?" "방은 어떻습니까!?" 김전일이 끼여들었다. "그, 그게... 똑같습니다." 선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선장님 경우와 똑같습니다." 3 카노우의 방은 배의 진행 방향의 오른쪽, 즉 우현에 있었다. 창문 커튼이 열려 있어 매우 밝았는데도 전등이 켜진 상태였다. 방은 선장실과 마찬가지로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싱글 침대와, 그 옆으로 작은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는 큰 자명종 시계 외에 포트와 인스턴트 커피병, 그리고 커피가 담겨진 머그컵 등이 놓여 있었다. 김전일은 머그컵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머그컵은 약간 따뜻했다. 뜨거운 것을 붓고 나서 1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침대 위엔 홑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고, 잠옷 대신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티셔츠가 그 위에 구겨져 있었다. 양복장은 열려진 채였으며, 서랍도 닫혀 있긴 했지만 완전히 닫히지 못한 채 하의가 끼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방의 주인이 아주 급히 뛰어나가야 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제가 이 앞을 지나가는데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으려다가 그냥 한번 불러 보았더니 대답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이런 상태였습니다. 카노우 씨가 있을 만한 장소는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 데도 없습니다. 어제 선장님 일도 있고 해서 먼저 경감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젊은 선원은 그렇게 말하고 애원하듯이 겐모치를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가 이 방을 들여다본 것은 불과 얼마 전이란 말이군." "네, 10 분 정도 전입니다. 카노우 씨 근무 시간은 오후 2 시부터라 늘 이 시간에는 아래 리빙 홀에서 뉴스를 보는데...." "음... 어떻게 생각하나, 김전일?" 겐모치가 묻자 김전일은 선원을 쳐다보았다. "다른 종업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압니까?" "네, 대충은요. 그러나 와카오지 1 등 항해사는 원래 무전실에 있을 시간이지만 무전기가 망가져 버렸으니, 글쎄요.... 아마 방에 있을 것 같습니다." "미즈사키 씨는 아침 6 시부터 조타실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는 조금 전까지 기관실에 있었습니다. 요우코는 부엌에서 요리사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고--." 선원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선원들이나 선의의 소재도 확실했다. 단, 김전일과 겐모치 이외의 다섯 명의 승객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그 역시 알지 못했다. "아무튼, 일단 선장 대리인 와카오지 씨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 겐모치가 그렇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서 '325 호실, 와카오지'라고 쓰인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와카오지 씨, 자고 있으면 일어나십시오! 카노우 씨가 없어졌습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겐모치가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겐모치가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겐모치는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거기에 와카오지의 모습은 없었다. "이, 이런! 설마 이 사람까지...?" 겐모치는 끌려들어가듯 휘익 방으로 들어갔다. 김전일도 뒤를 따랐다. 목욕탕을 들여다본 김전일이 겐모치를 보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봐, 김전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뭐라고 말 좀 해봐!" 그 대단한 겐모치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김전일은 묵묵히 방의 상황을 관찰했다. 커튼은 완전히 열려 있고 방 안은 밝았다. 침대 위는 잘 정돈되어 있다. 카노우의 방처럼 어수선한 것은 전혀 없었다. "...?" 김전일은 갑자기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 같은 것에 눈길을 주었다. "이것은...." 손수건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그 '노트'를 집었다. 표지를 보자 '항해일지, 마린사'라고 되었다.


"뭐야, 김전일?" "항해일지예요. 그런데 이건 뭐지? 무슨 기호 같기도 하고...." 항해일지의 펼쳐져 있는 페이지에는 점과 선을 어수선하게 나열한 듯한 기묘한 기호가 쓰여 있었다. "경관님!' 갑자기 문에서 조금 전의 젊은 선원이 아까보다도 얼굴이 더 새하얘져 뛰어들어왔다. "겨, 경관님, 어떡해요! 시, 시체가... 큰일났어요... 도와주세요. 그, 조타실..." 선원은 곧 기절할 듯이 온 몸을 떨면서 두서없이 소리치다 입구의 턱에 걸려서 넘어져 버렸다. 겐모치가 그의 가슴팍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소리쳤다. "진정해! 무슨 일이 있다고? 조타실이 어떻다고!?" "조, 조, 조타실에 죽어 있어요!" "뭐!? 누가, 미즈사키가!?" "카, 카노우 씨..." "뭐, 카노우가!?"

4 김전일 일행이 뛰어가자 조타실 입구에 다른 젊은 선원이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비켜!" 겐모치가 그를 밀어제치고 김전일과 둘이서 미끄러지듯이 조타실로 들어갔다. "--!" 그것은 조타실에서 당연히 근무사고 있어야 할 미즈사키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카노우의 시체였다. 카노우는 천장을 향해 바닥에 누운 채 죽음의 공포와 고통으로 입가를 흉하게 일그러뜨린 모습이었다. 두 손은 가슴을 쥐어뜯는 자세로 놓여진 채 숨이 끊겨 있었다. 허공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생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피부는 핏기가 없어 마치 바싹 마른 붉은 흙 같았다. 선원의 긍지인 하얀 선원복이 묘하게도 수의처럼 그의 참혹한 송장을 감쌌다. "목이 찔린 흔적은 없어. 외상도 보이지 않고, 음... 도대체 이건...." 시체를 검색하던 겐모치가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긁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아....!" 털썩 주저앉은 젊은 선원이 중얼거렸다. "선장님도, 와카오지 씨도, 이곳에 있어야 할 미즈사키 씨도 모두 사라져 버렸어. 게다가 카노우까지 죽어 버렸어. 도대체 이제 누가 배를 몰지? 난 이런 큰 배를 모는 방법을... 아, 도저히 자신 없어!" 김전일도 겐모치도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설마 정말로...." 김전일은 아침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정말일지도 몰라. 이 배는 정말로 그 '마리 세레스트호'처럼 될지도 몰라.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사라지고, 결국 모두 사라진 후 배는 혼자서 항해를 계속한다. 형체 없는 '유령 선장'의 손에 맡겨져 언제까지나 바다 위를 떠돈다.... "제가 한 말이 맞죠?" 갑자기 등뒤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빛났다. 돌아보니 역시 아카이였다. "제가 말한 대로 아닙니까? 선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져 가다 결국 마지막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 "그만해!" 겐모치가 소리쳤다. "아카이 씨! 당신 이렇게 계속 조사를 방해한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네 네, 나갑니다. 어휴! 무서워, 무서워...." 아카이는 플래시 없이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조타실을 나갔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날 리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겐모치는 숨을 거칠게 쉬었다. "미즈사키 씨의 방은 보았습니까!?" 김전일이 애써 두려움을 떨쳐 버리듯 젊은 선원에게 물었다. "아, 아니오, 아직..." "여기서 핸들을 잡고 있던 것 같지 않으니까 미즈사키 씨는 사라진 게 아닐 겁니다. 한번 오시겠습니까?" "네, 네. 곧...!" 선원은 깜짝 상자의 인형처럼 조타실에서 튕겨 나갔다. 김전일은 시체 옆에 앉아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겐모치에게 다가갔다. "어때요, 아저씨. 뭔가 알아 냈습니까?" "이걸 봐, 김전일." 겐모치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시체의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이것은...." 시체의 손바닥에는 붉은 점들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들은 상처 같았다.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온 것이다. "외상은 이것 뿐이야. 어쩌면 죽은 원인은...." "독살...." 김전일이 앞서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시체를 해부해 보기 전에는 확실해 말할 수 없지만..." "이런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만으로 죽일 수 있는 독이 있을까요?" "몇 가지 있어." 겐모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놀라운 사실인데요. 아무튼, 이 상처로 카노우 씨가 죽었다면 흉기는 독 묻은 여러 개의 바늘이 달린, 예를 들어 밤송이나 생화를 꽂는 침봉 같은 것이 돼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저씨, 저것...?" 김전일은 배의 핸들 손잡이 아래를 가리켰다. "응...?" 성냥곽보다 조금 작은 정도인 침봉처럼 생긴 것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바늘이


솟아 있는 쪽을 위로 한 채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코르크판에 바늘을 꽂아 만든 것 같았다. 겐모치가 바늘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코르크판 옆을 살짝 잡아서 들어올렸다.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관찰하자 바늘 끝에 갈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겐모치가 냄새를 맡았다. "니코틴인 것 같은데." "네? 니코틴이라면 담배에 들어 있는 것 말예요?" 김전일은 전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래. 니코틴은 아주 미세한 양이라도 혈액 속에 직접 들어가면 호흡 정지와 심부전을 일으켜 사망하게 만드는 강한 독이야." "네에? 그래요? 어휴... 앞으로는 절대 담배 안 필래!" 김전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치자 겐모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이 녀석! 당연하지. 넌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앞으로 담배만 펴 봐, 혼날 줄 알아!" "아저씨,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네?" 배시시 웃으면서 김전일은 '흉기'가 떨어져 있던 핸들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어휴!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야." 겐모치가 중얼거렸다. "아저씨!" 쭈그리고 앉아 핸들을 자세히 쳐다보던 김전일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겐모치를 불렀다. 그의 표정은 이미 진지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뭐야? 뭐가 있어?" 겐모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살인 방법을 알았어요!" "뭐?" "보세요. 이 배의 키를 잡는 핸들을요. 테이프가 감겨 있잖아요." 가까이 보니까 조타 핸들의 손잡이 부분에 3 센티 정도 끊겨진 테이프가 벗겨진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음, 그래.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됐다는 거지?" "즉, 이런 거예요. 범인은 그 바늘을 사용한 흉기를 이 핸들에 붙여 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카노우가 키를 잡는 순간 독침에 찔린 거구요." "음, 정말 무서운 흉기야.... 이젠 이 배에 타고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방문 손잡이 하나 마음 놓고 잡을 수 없겠군." 겐모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데요, 아저씨. 또 한 가지 개운치 않은 게 있어요." "뭐라고?" "범인인 '유령 선장'은 한밤중에 다카모리 선장의 방에 들어가 그를 죽이려다가 맞붙어 싸우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흉기를 떨어뜨렸구요.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요. 그런데 왜 범인은 선장을 죽이는데 떨어뜨린 흉기를 안 줍고 부엌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칼 따위를 썼을까요? 나는 계속 이 점이 마음에 걸렸어요." "? 그것은 다카모리 손에 든 칼을 범인이 뺏았다고 네가--." "그 추리 말인데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왠지 어색한 데가 있더라구요."


"어색하다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다급한 상황인데 다카모리 선장이 상대를 죽이려고 흉기를 가지러 가기보다는 즉시 밖으로 도망치는 게 자연스럽잖아요." "음...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럼 왜 범인은 발밑에 떨어뜨린 흉기를 줍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게다가 처리하기도 곤란한 칼 따위를 썼을까?" "떨어뜨린 흉기는 줍고 싶어도 주울 수가 없었을 거예요." "왜?" "그렇지 않겠어요?" 김전일은 겐모치의 손에 있는 니코틴을 바른 독침을 가리켰다. "다카모리 선장을 죽일려고 했을 때 범인이 쓰려던 흉기는 어쩌면 그 독침을 거예요. 어둠 속에서 주우려고 하다가 손에 찔리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잖아요." "그렇지" "아저씨, 어차피 이 사건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겐모치 경감님, 김전일 씨." 갑자기 문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티셔츠 차림의 미즈사키였다. "미즈사키 씨, 무사했습니까!?" 김전일이 뛰어가며 소리쳤다. 미즈사키는 졸음을 떨치려는 듯 머리를 흔들고, "미안합니다. 자명종이 고장나 울리지 않는 바람에.... 그래도 저는 잠을 깹니다만 오늘 아침은 어쩐 일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보다 저것을--." 김전일은 바닥에 누워 있는 카노우를 가리켰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김전일 씨, 겐모치 경감님? 카노우가 왜 저렇게 바닥에.... 서, 설마...?" 주춤주춤 다가가는 미즈사키를 향해 겐모치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죽었...습니까? 죽, 죽었단 말입니까...?" 미즈사키는 걸음을 멈췄다. "카노우는 살해되었습니다. 어쩌면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인물인 '유령 선장'에게 살해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와카오지 씨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어떠면 그도..." 김전일이 말끝을 흐리자 미즈사키는 멍한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어때서... 차례차례 이런 일이.... 도대체 누구죠? 이런 일을...."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이 미즈사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것을 보고 김전일이 물었다. "왜 그러죠, 미즈사키 씨? 뭔가 생각난 게 있습니까?" 미즈사키는 김전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무대답도 없이 조타 핸들로 다가갔다. "큰일났다! 이 배는 오가사와라로 가고 있지 않아!" 미즈사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네에!?" 미즈사키는 조타 핸들을 힘주어 돌리면서, "아무튼 배를 남쪽으로 향하게 해야 해. 이대론 점 점 항로를 벗어나게 돼. 어휴!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다."


김전일과 겐모치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을 멍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5 약 1 시간 정도 간단히 취조를 끝내고 김전일과 겐모치는 조타실로 되돌아왔다. 미즈사키는 자신이 이 배에 남은 유일한 조타수라는 긴장 때문인지, 그야말로 귀신에게 씌인 듯한 모습으로 오로지 핸들만 잡고 있었다. 그런 미즈사키에게 헛기침을 하면서 겐모치가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습니까, 미즈사키 씨? 이제 이 배의 항해사는 당신 혼자인데 오가사와라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습니까?"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로에서 많이 벗어나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10 시간 정도만 가면 오가사와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겐모치는 얼른 말을 꺼내기가 거북했는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다른 게 아니라, 미즈사키 씨. 원래 살해하려고 했던 사람은 카노우 씨가 아니라 당신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 뭐라고요? 무슨 말씀이죠, 그건?" 핸들을 잡은 채 미즈사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실은 범인은 지금 당신이 잡고 있는 그 조타 핸들에 독침을 붙여 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신 대신 카노우 씨가 먼저 그것을 만져 죽어 버린 것입니다." 겐모치가 담담하게 설명했다. "세상에....!" 미즈사키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걱정 마세요. 그 흉기는 카노우 씨가 잡았을 때 곧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테이프로 간단히 붙여 좋아서 금방 떨어진 것 같습니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위한 덫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만지면 곧 떨어지도록 붙여 두었던가 봅니다." "그, 그런데... 어때서 저를 노렸는데 카노우가 죽은 거죠?" "당신은 원래대로라면 아침 6 시부터 여기서 근무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늦게 오게 되었죠. 그렇죠?" "네...." "카노우 씨 방의 자명종 시계가 아침 6 시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았을 때 시계 바늘을 7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자명종 벨은 멈춰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보통 때처럼 6 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어 4 ㅓ면 조금 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이 배가 오가사와라로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 조타실로 달려오 서둘러 방향을 바꾸려고 했겠지요. 그래서 불행히도 늦잠을 잔 당신 대신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늦잠을 자게 되고, 그래서 당신 대신 오후 2 시부터 저녁 6 시까지 근무하는 카노우 씨가 핸들을 잡으러 조타실에 들어오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처음 부터 노린 사람은 당신이었던 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런.... 분명히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도, 도대체 누가...." 미즈사키는 핸들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와카오지 1 등 항해사입니다." 겐모치는 자신에 차서 말했다. "와카오지 씨가...?" "그래요. 와카오지는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이 엘리트였던 자신을 모함해 이런 누더기 배, 아니 미안합니다. 아무튼 결코 화려하다곤 할 수 없는 이 배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든 근거 없는 의심이든, 아무튼 그것이 그를 살인으로 몰아세웠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즉, 그에게는 다카모리 선장과 당신을 죽일 동기가 충분히 있었던 겁니다." "그, 그러나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인 일고 잡히게 되면 자신 역시 파멸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리라고는 저도 도저히..." "와카오지에게 더 이상 미래가 없었다면 어떻습니까?' "예? 그건 무슨 뜻입니까?" "그는 위궤양을 앓고 있었잖습니까? 그것이 사실은 암이었다고 한다면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 그건... 뭔가 근거가 있는 얘기입니까?" "이것을 보십시오." 겐모치는 옆에 끼고 있던 노트 같은 것을 미즈사키 앞에 펼쳐 보여 주었다. "...뭡니까, 이것은?" "와카오지 방에 있던 항해일지입니다. 자, 이 기호 같은 게 뭔지 당신이라면 알겠지요?" 일지의 한가운데에 점과 선을 섞은 묘한 기호 같은 것이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다. "아니, 이건!" 미즈사키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모르스 신호입니다!" "역시 항해사이이군요. 정답입니다." 겐모치는 저만치 뒤에 서 있는 김전일을 옆눈으로 힐끗 보고서, "여기 있는 김전일이 그러더군요. 항해사인 와카오지가 쓴 것이니까 다른 선원에게 한번 보이라고요. 그래서 먼저 기관사인 오오츠키 씨에게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전쟁 때부터 배에 타겠던 베테랑답게 곧 모르스 신호임을 알고 읽어 주었습니다. 그는 모르스 신호라는 것은 짧은 신호음고 긴 신호음을 섞어서 알파벳이나 50 음도를 나타내는 통신용 암호의 일종이라고 말하더군요. 회중 전등과 깃발로도 멀리 있는 배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어 선원들에겐 아주 중요시되는 것 같더군요. 그러니 당신이라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미즈사키 씨?" 미즈사키는 잠시 그 일기를 들여다보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유서입니다, 이것은...." "그렇습니다. 이것은 와카오지가 남긴 유서입니다. 그 남자는 원래 무선사였지 않습니까? 그것을 자랑하듯이 내 앞에서도 모르스 신호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요우코 양과 요리사, 그리고 모르스 신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젊은 선원들 앞에서도 가끔 같은 짓을 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불쾌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유서까지 이런 것을 사용해서 남길 줄은 몰랐습니다." 겐모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며 수첩을 펼쳤다.


"아무튼 유서의 내용과 사건의 상황은 완전히 일치합니다. 희생자가 대신 죽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이 자살한다는 최악의 결말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사건은 대충 해결됐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겐모치는 수첩에 써 놓은 '유서'의 내용을 대충 읽더니 싱거운 몸짓으로 그것을 덮었다. 6 와카오지 1 등 항해사의 유서 나는 알게 됐다. 내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죽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복수를 하라고 나를 몰아세웠다. 다카모리와 미즈사키 두 사람의 모함에 의해서 나는 이 누더기 같은 마리 세레스트호에 타게 되었다. 다카모리는 김전일의 추리대로 밤에 죽였다. 그리고 밤 동안 그 방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고 나머지는 아침에 했다. 무전실 근무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가던 중에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의 스위치를 켜고 풍로에 불을 켰다. 그래서 알리바이를 가진 나는 그후 두 번째의 살인 계획에 착수했다. 나는 그 계획에 따라 독을 묻힌 바늘을 장치해 두었다. 아침 6 시가 되면 미즈사키가 그 함정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목수는 끝이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죽을 수 있다. 와카오지


7 김전일은 갑판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혼자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다는 파도도 없이 조용했다. 배도 흔들리지 않고 바람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움직이는 배 위에서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배의 진행 방향을 따라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가 흔들리지 않는 것도 물의 흐름에 따라 배가 나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김전일은 생각했다. 이 사건도 어쩌면 그와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이없이 맞이한 결만. 그리고 맥빠질 만큼 간단하게 모든 진상을 밝힌 와카오지의 '유서'--. 그러나 만약 이 모든 사실이 와카오지 이외의 누군가에 의한 것이라면.... 진짜 범인인 '유령 선장'의 기묘한 항해 계획에 따라 착실하게 항로를 따라가는 배와 같은 것이라면.... 김전일이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와카오지를 범인으로 가정할 경우에 생기는 '모순'이다. 몇 명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 근거가 되는, 선장실의 아침 식사 준비에 필요한 10 분이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밤 동안 끝마쳐 두면 이 10 분을 1 분이나 2 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실은 김전일도 먼저 와카오지를 의심했다. 그는 문제의 시각에 무전실에 있었고, 아침 식사 직전까지 조타실의 미즈사키와 인터폰으로 협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3 층에 있는 무전실에서라면 사람이 네 명이나 있는 계단을 통하지 않아도 선장실로 갈 수 있다. 문제의 아침 식사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면 그의 알리바이는 무너진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한 가지 모순이 생긴다. 문제의 시각, 즉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가 성립된 가장 큰 이유는 3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사람이 네 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계단이 보이는 장소에 있던 선원은 분명히 와카오지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선원의 말에 의하면 보통 때 같으면 아침 그 시간에는 1 층 복도를 청소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리빙 홀과 식당이 있는 1 층 복도가 아무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므로 더러운 것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평소대로 그렇게 했으면 2 층 객실에 있는 승객 누군가가 알리바이를 갖지 못할 가능성도 있어 자신이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데도 일부러 그 계단 청소를 시켰다는 것은 범인의 심리로는 좀 부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계단 청소를 하게 되면 청소를 하다가 3 층을 올려다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3 층 계단을 올라가는 지점에서는 복도 끝 오른쪽에 있는 선장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와카오지가 선장실에 출입하는 것을 청소하던 선원이 볼 가능성은 너무 많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선원에게 계단 청소를 시켰으리라는 와카오지의 행위는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아!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 아저씨는 완전히 사건을 해결한 것처럼 저러고...." 크게 하품을 하다 말고 김전일은 갑자기 배를 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야야야! 어휴... 너무 생각을 많이 했더니 또 배가 아파.... 혹시 나도


와카오지처럼 암에 걸린 건 아닐까? 이 나이에 그럴 리는 없겠지?" 김전일은 비틀거리며 배 안으로 들어가 가까이 있는 인터폰을 들고 요우코의 방 번호를 돌렸다. "네, 요우코입니다." "아, 요우코 양? 나 김전일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또 배가 아파서... 어제 주신 그 뜨거운 우유를 좀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그럴게요. 제가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자꾸 귀찮게 해서요." 헤헤 하고 힘없이 웃고는, 김전일은 인터폰을 끊었다. 8 "으앗, 큰일났다! 위험하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김전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목욕탕에서 드라이어가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정전 때문에 소동을 피우느라 스위치 끄는 걸 잊어버렸어. 계속 켜져 있었을 거 아냐?" 김전일은 잽싸게 목욕탕으로 뛰어가 드라이어 코드를 잡아 뽑았다. "휴우... 큰일날 뻔했네. 그런데 이상하네. 완전히 나체로 방에 뛰어들었을 때는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아, 그렇게. 그때는 아직 정전이어서..." 말을 하다 만 김전일의 시선이 갑자기 허공을 맴돌았다. 눈에 초점이 풀리고 대신 머릿속에 떠오른 '발상의 혼'이 차례로 형상을 드러냈다. 김전일의 두뇌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해 그 발상이 추리로 승화되었다. 이윽고 김전일은 마구 엉킨 실꾸러미 속에서 교활한 악마의 지혜로 이르는 검게 물든 실 한 가닥을 선택했다. "그래! 또 한 가지 가능성이 있잖아!" 김전일은 몸으로 문을 열어 젖히며 목도로 뛰어나갔다. 바다의 넘실거림에 맞춰 약간씩 흔들리는 복도를 힘차게 달려갔다. "꺄악!" "어어어어...!" 3 층에서 내려온 요우코와 딱 마주쳐 김전일은 계단을 구를듯이 휘청거렸다. "왜 나왔어요, 김전일씨!? 지금 우유를 방으로 갖다 드리려고..." 요우코는 랩으로 뚜껑을 떠ㅍ은 머그컵을 보였다. "주세요! 가지고 갈 테니까. --아! 그리고--." 김전일은 '어떤 설비'가 되어 있는 장소를 물었다. "네? 그것은 계단을 내려가서 배 뒤쪽을 향해 복도를 따라가면 돼요. 그러면 수도실과 방송실이 있고 그 안에..." "죄송합니다!' 김전일은 마지막까지 듣지도 않고 뜨거운 머그컵을 들고는 급히 가려고 했다. "어머! 그것을 마시고 가는 게... 여기서 좀 먼데..." "아니, 괜찮습니다." 김전일은 상관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 방'은 요우코의 말대로 매우 멀리 있었다. 머그컵 위를 랩으로 덮었기 때문에 조금은 달릴 수 있었다. 약 3, 4 분 정도는 달렸을 것이다.


그곳은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바로 이때다 싶을 때 이곳이 잠겨 있었다면 너무 답답했을 것이다. 김전일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 벽에 붙어 있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음... 역시 네 개의 방에 하나씩이야. 그럼, 선장실은..." 김전일은 반대쪽 벽에 걸려 있는 배치도와 비교하면서 '그것'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있다! 이것이 그거야. 흠..." 김전일은 그제야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앗! 아직도 뜨겁네. 이런, 입술에 우유막이... 괜찮겠군, 위에만 뜨거운 것 같아."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 김전일은 다시 배치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느 방과 함께... 어!? 뭐야, 이건!?" 김전일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네! 그렇다면 어때서 그때...?" 김전일의 눈에 투지의 빛이 고이기 시작했다. "...맞아, 그렇게 된 거야. 이제 이것으로 이 살인 사건의 수수께끼는 다 풀렸어. 결국 범인도 찾아냈어! 봐라, '유령 선장!' 지금까진 모든 게 너에게 유리했다고 생각했겠지!" 김전일은 단숨에 우유를 들이켰다. "이번엔 내 차례다!" 9 "뭐라고!? 와카오지가 범인이 아니라고!?" 겐모치는 마시던 차를 거의 뿜어 낼 뻔했다. 겐모치 부인과 함께 그들의 방에서 차를 마시던 미유끼도 몰라 목이 콱 메었다. "뭐, 뭐라고... 사실이야, 김전일?" "틀림없어. 진짜 범인인 '유령 선장'은 따로 있어. 이 배의 멤버 중에." "어떻게 된 거지, 김전일?" 겐모치가 조금 냉정해졌다. "와카오지의 유서에도 써 있고, 게다가 앞뒤가 다 맞는데 달리 범인이 있을 리가..." "그것은 범인이 모두 맞춰 놓은 겁니다. 면밀한 '항해 계획'에 따라서요." "하지만 김전일, 그러면 모르스 신호로 쓴 유서는 어떻게 되는 거지?" 미유끼가 물었다. "그건 누가 썼는지 몰라. 그런 점과 선뿐인 유서라면 필체 감정도 못할 테지. 와카오지가 원래 무선사고 모르스부호를 써 타인을 놀리는 버릇이 있던 걸 이용해 필적 감전이 불가능한 유서를 위조한 거야." "...정말인가, 김전일?" 이윽고 겐모치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물론입니다. 이제 다카모리 선장을 죽인 트릭은 밝혀졌어요. 와카오지는 그 독침으로 한밤중에 죽였을 겁니다. 나머지는 카노우를 죽인 트릭을 알아내면 돼요." "잠깐, 김전일. 난 뭐가 뭔지..."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 일단 가자. 분담해서 탐문하자고, 미유끼!" "아, 알았어!"


"자, 함께 가자. 내 대신 메모를 해 줘." "어이, 김전일. 다시 탐문하는 건 좋은데, 그 진짜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계획은 세워 놓았나?" 겐모치가 물었다. "아니오, 아직이오.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한 발 먼저 공격하면 단번에 해결될 거예요. 어쨌든 승부는 배가 오가사와라에 도착할 때까지 앞으로 몇 시간 안에 결정될 테니까요." 김전일은 자신감에 차 대답했다. 그러고는 겐모치를 쳐다보며 힘차게 선언했다. "절대 지지 않겠어요! 명탐정으로 불린 할아버지 이름을 걸고!" 겐모치와 분담해서 탐문하기로 한 김전일과 미유끼는 먼저 조타실의 미즈사키에게 갔다. 카노우의 시체를 본 직후에 취한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타실 문을 노크하자 미즈사키의 대답이 들리고 잠시후 문이 열렸다. "김전일 씨, 미유끼 양? 무슨 일입니까?" 미즈사키는 긴장과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다. 눈은 충혈됐고 얼굴색도 좋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피곤하신데." 김전일 뒤에서 미유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배려는 김전일에겐 없다. 미유끼를 데려오길 잘했다고 김전일은 생각했다. 자기 혼자였으면 조급하게 굴어 상대방이 경계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얘기를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이제 겨우 항로를 원래대로 돌렸습니다. 오가사와라 도착은 많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잠깐 동안은 진로를 고정시켜 항해할 수 있으니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드릴까요?" 웃는 얼굴로 대하는 미즈사키를 김전일이 황망히 말렸다.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실 것 없습니다. 혼자서 계속 핸들을 잡느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 게다가 미즈사키 씨에게 묻고 싶은 건 한 가지뿐이니까요." "저에게 말입니까?" 미즈사키가 표정이 어두워지며 되물었다. "네. 역시 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아니, 사실 사소한 겁니다." "그게 뭐지요?" "실은 아까 카노우 씨의 시체를 봤을 때 말인데요. 미즈사키 씨가 잠에서 막 깨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는 곧 '이 배는 오가사와라로 향하고 ㅇㅅ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옆에서 보기에는 저쪽에 있는 계기들을 쳐다본 것 같지도 않던데 어떻게 그걸 알았습니까?" "아, 그것 말입니까?" 미즈사키는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태양의 위치입니다." "네? 태양의 위치요?" "네. 오가사와라는 동경항에서 거의 직선 방향인 남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배는 똑바로 남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침 그 시간이라면 태양은 배의 왼쪽 90 도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위치에 있는 거지요. 태양을 보고 배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하... 역시, 항해사시군요. 그럼 그때 배는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큰 원 궤도를 그리고 있던 것 같습니다. 키가 왼쪽으로 꺾인 상황이었으니까 어쩌면 카노우가 독에 찔리기 전에 잠깐 핸들을 돌렸다던가, 아니면 넘어질 때 핸들을 건드려 돌려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아, 어쩌면." 김전일은 갑자기 딴 곳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아, 아닙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김전일은 휙 밖으로 나갔다. "어머! 갑자기 왜 그래, 김전일? 미, 미안합니다, 미즈사키 씨. 저 친구는 뭔가 머리에 떠오르면 다른 건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한답니다." 당황한 미유끼가 꾸벅꾸벅 머리를 조아리며 대신 변명했다. "아니, 뭐..." 미즈사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제게 물어 볼 말은 이제 끝난 겁니까?" "네, 대단히 고맙습니다!" 서둘러 말하고 미유끼는 김전일 뒤를 따라나갔다. "오늘 아침 6 시요? 음... 일어나 있었던 것 같은데..." 아케미는 소년처럼 짧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잘 생각나지 않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김전일 뒤에 서 있는 미유끼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겠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그 경감님과 무슨 관계죠?" 아케미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반대로 물어 왔다. 김전일이 당혹스러워하며 대답하자 아케미가 말했다. "그러면요, 나는 상관없지만 유우한테는 이것 저것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 아이는 좀 사정이 있어서 집을 나왔거든요. 그래서 경찰이라든가, 뭐 그런 것에 조금 예민해져 있어요." 느릿느릿한 말투가 다카시와 대화할 때나 겐모치의 심문을 받을 때하고는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이제 대답해 줄 거죠? 조금 전에 했던 질문입니다만, " "뭐죠?" "아침 6 시의 상황 말입니다." "음... 맞아요! 커튼을 닫지 않고 잤거든요. 그래서 눈이 부셔서 깼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요." "잠깐! 당신들은 그때 정전이 되었다고 방에서 뛰어나왔잖아요? 그건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건... 그때 샤워를 하고 드라이어를 쓰려고 하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거예요. 너무 캄캄했기 때문에 무서워서..." "...고마워요, 됐어요." "...?"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아케미를 김전일은 더 이상 쳐다보지 않았다. 묵묵히 걸어서 복도로 나갔다. 미유끼가 김전일 대신 사과를 하고 뒤따라 나왔다.


"김전일! 말하다 말고 갑자기 나오면 어떡해!" "미유끼, 다음은 아카이 씨야." 김전일은 미유끼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대꾸도 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응? 그 기분 나쁜 사람? 싫은데..." "괜찮으니까 따라와!" 10 아카이는 식당에서 고개를 들어 불빛에 필름을 비춰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카이 씨, 어제 찍은 사진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응? 내 사진이 보고 싶다고?' 갑작스런 김전일의 부탁에 아키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러면...." "아키이 씨는 프로잖아요. 현상 도구 같은 건 당연히 갖고 있으실 테죠?' 김전일이 비꼬듯 말했다. "아니, 그런 것까지는 아직.... 아참! 시험 촬영으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라면 있는데, 그건 안 되나?" 아카이는 그렇게 말하고 늘 메고 다니는 큰 가방을 열어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어제 아침 선장실 상황을 찍은 것 한 장과 배 안의 이곳 저곳을 띠ㄱ은 사진 3 장, 그리고 일출을 찍은 사진 2 장이 있었다. "이거다! 아카이 씨, 이걸 빌려 주십시오!" 김전일은 일출을 찍은 사진을 집어들었다. "응? 좋을 대로...." "됐어!' 김전일은 그 사진을 주머니에 놓고 마침 커피를 가지고 온 요우코에게 물었다. "요우코 양,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뭐죠?" 요우코는 멍한 얼굴로 두 손으로 쟁반을 든 채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죽은 두 사람을 포함해 조타실에서 근무하는 세 사람의 근무 시간을 알로 싶거든요." "아, 네... 먼저, 와카오지 씨가 새벽 2 시부터 아침 6 시까지, 그리고 오전 10 시부터 오후 2 시까지 두 번이에요. 다음에 미즈사키 씨는 아침 6 시부터 10 시까지, 그리고 오후 10 시부터 새벽 2 시까지 두 번일 거예요. 또 카노우 씨는... 분명히 오후 2 시부터 6 시까지, 그리고 계속해서 오후 6 시부터 10 시까지로 알고 있습니다." 김전일은 요우코의 말을 미유끼에게 메모시키면서 말했다. "땡큐! 그리고 또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엔 뭐죠?" "배의 속도 같은 건 어떻게 늦출 수 있죠? 자동차처럼 브레이크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저는 배에 대해서는 전혀... 미즈사키 씨나 오오츠키 씨에게 물어 보면 잘 알 거예요." "음... 그럼, 오오츠키 씨한테 물어 볼까? 그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ㅈ심지어 압니까?"


"기관실... 참! 조금 전에 갑판에 나가는 걸 봤어요." "갑판이라.... 좋아, 미유끼, 가자!" 김전일은 힘차게 말하고 달려갔다. 오오츠키는 갑판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오후가 되자 아침까지 맑았던 하늘이 완전히 바뀌어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오오츠키는 희미하게 안개가 낀 바다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왜소한 뒷모습은 평소의 거친 인상과는 달리 너무 쓸쓸해 보여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김전일은 비로 옆에까지 다가가서 조금 서 있다가 이윽고 그를 불렀다. "오오츠키 씨." "...어이, 꼬마 탐정과 걸 프랜드." 오오츠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김전일은 미유끼와 마주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쳇! 꼬마라니요. 이래봬도 저희는 엄연한 손님이라고요." "하하하하! 내가 신경 쓰는 건 엔진밖에 없어. 그 때문에 천애고아가 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자식들은 있으실 것 아녜요? 아, 그 나이라면 벌써 손자가--." "...딸이 있었어."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없다는 뜻인가요? 죽었나요?" "어휴, 김전일!" 미유끼가 김전일의 어깨를 툭 쳤다. "하하하! 아니, 내 딸을 아직 40 안짝이니까 아직 살아 있을 거야. 그 반대로 죽은 건 나야." "네? 할아버지라뇨?" "딸에게 나는 완전히 죽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야. 그 애가 철이 들 때부터 나는 거의 바다 위에 있었으니까. 지금 딸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몰라. 20 년 가까이나 소식 불통이야."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바다에 시선을 둔 채 오오츠키는 중얼거렸다. 그 옆얼굴을 보고 미유끼가, "그럼, 쓸쓸하시진 않으세요?' 라고 물었다. "멍청하긴. 나는 뱃사람이야. 배에 타고 있는 한 쓸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김전일은 생각했다. 분명 이 오오츠키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배에 타고 있는 한, 그리고 바다 위에 있는 한 그는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라고.... "그보다, 꼬마야. 뭔가 나에게 볼일이 있어 왔겠지?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어서 물어 보기나 해!" 오오츠키는 보통 때처럼 말투가 험악한 고집불통 영감으로 돌아갔다. "아 참! 맞아요. 할아버지께 이걸 보여 드리려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은 아카이로부터 빌린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건 어제 저녁에 찍은 사진인데요, 오오츠키 씨. 이 사진이 몇 시에 찍은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 어디 보자...." 오오츠키는 노안 탓인지 사진을 멀리 내밀고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대충 6 시, 아니 5 시 반 정도인 것 같은데?" "우와! 정말 놀라워요. 한눈에 보고 안다니, 그야말로 울트라 초 베테랑이시군요." "바보 녀석. 나만큼 배를 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거야." 오오츠키는 그렇게 말하고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뭐야, 그것뿐이야?" "네." 김전일은 짧게 대답하고 멍하니 서 있는 미유끼의 팔을 끌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돌아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면 몸에 해로워요.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은 아주 강한 독이거든요." "...?" "자, 진짜 갑니다.!" 오오츠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김전일의 뒷모습을 바라본 후 막 피우기 시작한 담배를 벤치 옆의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손에 든 두 장의 사진을 트럼프 카드처럼 가지고 놀면서 김전일이 중얼거렸다. "미유끼, 틀림없는 것 같아. 아제 카노우 살인의 트릭도 알게 되었어." "응? 정말?" "그건...." "어이, 김전일, 미유끼!" 다른 선원들과 요리사를 탐문하고 있던 겐모치가 김전일과 미유끼를 보고 다가왔다. "아저씨, 어떻게 됐어요?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냈어요?" 김전일이 묻자 겐모치는 화가 난 얼굴로 대답했다. "탐문은 성과가 없었는데,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일에게 뜻밖의 사실을 알았어." "네? 뭐예요, 그게?" "아주 화가 나는 사실이야." 그렇게 전제를 하고 겐모치는 그 '화가 나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라는 거야. 아무튼 일단 항구에 닿으면 당장--." "맞아요, 아저씨!" 김전일은 갑자기 흥분해서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응? "그것을 이용해서 범인을 잡는 거예요." "뭐? 범인을 잡는다고? 그럼 너, 또 뭔가를 알아 낸 거야?" "그럼요! 이제 마지막 단계예요, 아저씨!" "어!? 그럼, 바로--." "그래요, 바로 그 자예요!" 김전일은 자신에 찬 표정으로 겐모치와 미유끼를 향해 소리 쳤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11 류오마루 항해일지. 7 월 27 일, 오후 4 시. 날씨, 흐림. 옅은 안개 발생. 파도, 고요함. 항해 계획, 순조로움. 딸아, 항해는 계획대로 되러 가는데도 왠지 나는 불안감이 가득하구나. 불길한 예감이 떨쳐지질 않는다. 오늘 아침까지는 피로가 쌓여 그럴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기상 예보와는 달리 싫어하는 안개까지 끼가 시작했다. 비릿한 안개가 낀 속에서 항해는 또 밤으로 접어들고 있다. 류오마루여. 너는 알고 있는가, 이 항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나의 마지막 항해의 끝을-나는 일지를 덮고 안개가 낀 바다에 눈길을 돌렸다. 나의 항해 계획은 순조롭게 끝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독약이 든 작은 병도 바다에 던져 버렸다. 다카모리 선장의 피가 묻은 옷도 구두도 모두 처분했고, 샤워도 수십 번 했다. 완벽하다. 불안해할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완전 범죄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배가 항구에 들어가면 나의 항해는 끝난다. 그것으로 '유령 선장'은 어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다--. 12 배는 오가사와라 해역까지 앞으로 1 시간 반 걸리는 거리에 임박해 있었다. 멀리 오가사와라 섬들이 보이는 거리였다. 그러나 바다는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지금은 섬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짙은 우윳빛 안개 속으로 표류하듯이 나아가는 이 배는 정확하게 항구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느새 무한한 환상 세계에 빠져든 건 아닐까.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조타실에 모두 집합해 달라는 겐모치 경감의 요청이 있었을 때는 오히려 안심한 표정들이었다. 여럿이 모여 있으면 불안한 생각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10 분 후에, 사라진 세 사람과 기관실에 남아 있는 오오츠키를 뺀 전원이 조타실에 모였다. 그중에는 승선한 이래 한 번도 보습을 볼 수 없었던 그 '나카무라 이치로'라는 남자도 섞여 있었다. 방에서 나오길 완강히 거부했던 이 남자는 여전히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겐모치가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로 선언했다. "시작한다고요, 무엇을요? 이제 사건은 다 해결된 것 아닙니까?" 아카이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아카이만은 사건이 해결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취재 대상이 예상을 빗나가 매우 실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사건의 범인은 와카오지 씨가 아닙니다. 오히려 와카오지 씨도 진짜 범인에게 당한 희생자의 한 사람입니다." 겐모치가 이렇게 말하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무, 무슨 말이에요!? 진짜 범인이라니...." 다카시가 겐모치에게 다가오자 겐모치가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겐모치는 김전일과 시선을 맞추고 나서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위엄을 섞어 말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카노우를 살해한 냉혹한 살인귀는 지금 이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살인귀, 즉 '유령 선장'이란...." 겐모치는 말끝을 흐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그 시선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나카무라 이치로'에게 멎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뭐야!" 마스크를 낀 남자가 갑자기 소리치며 홱 하고 몸을 돌렸다. "--!?"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 멍해 있는 틈을 타서 눈 깜짝할 사이에 핸들을 잡고 있는 미즈사키를 덮쳤다. "미, 미즈사키 씨!" 김전일이 소리치고 겐모치와 함께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늦었다. 남자는 양복 속에 감추고 있던 '물건'을 꺼내어 미즈사키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 일시에 긴장감이 돌았다. 남자가 꺼낸 것은 검게 빛나는 권총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장난감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중량감 있는 리볼버를 꺼낸 것이다. 그는 너무도 뜻밖의 일에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미즈사키의 머리에 그것을 갖다댔다. "움직이지 마!"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남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어버렸다. "아, 아니!? 너... 넌, 긴토!" 겐모치가 흥분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소리쳤다. "어이, 경감님! 오래간만이군요." 남자는 움푹 패인 흉악한 눈으로 겐모치를 응시하며 기분 나쁜 미소를 띄웠다. "아, 아저씨, 저 사람은 누구죠?"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전일이 물었다. 겐모치는 긴토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준비 자세를 갖춘 채 대답했다. "연속 살인으로 지명 수배를 받고 있는 놈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살인귀야!" "뭐, 뭐라구요!?" "2 년 전에 내가 한 번 잡았는데 호송 도중에 경관을 살해하소 총을 뺏아 달아나 버렸어. 그 뒤로도 이유 없이 20 여 명이나 되는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어.


--그런데 어째서 또 이런 배에 탄 거지!"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이젠 나도 모르는 살인죄까지 덮어씌우는 거야! 이젠 나도 모르는 살인죄까지 덮어씌우려는 건가, 경찰 양반? 좋아! 너도 함께 죽여 줄까, 엉!" 긴토는 눈에 핏기를 띠면서 소리쳤다. "이, 이봐. 무슨 짓이야! 우린 네가 그 세 사람을 죽였다곤 전혀 생각하지 않아. 진정해!" 겐모치는 양손을 벌려 긴토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시늉을 하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가까이 오면 이 놈을 죽일 테다! 아무튼 나는 여기서 빠져 나갈 테니까 쫓아오지 마. 오면 모두 다 죽여 버리겠어!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이 나를 속이려고 했기 때문이야.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단지 배가 고팠단 말야. 모두 다 너 때문이야, 이 나뿐 자식아!" 긴토는 흥분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진정해, 긴토!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 겐모치는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긴토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긴토는 미즈사키를 인질로 잡은 채 조타실 문 쪽으로 옆걸음질을 쳤다. "이, 이봐. 어딜 가는 거야? 긴토!" "시끄러! 나는 이 배에서 내릴 테니까 따라오지 마. 이봐, 너! 보트를 내려, 어서!" 긴토는 젊은 선원에게 턱으로 명령했다. 선원들은 벌벌 떨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것을 본 긴토는 만족한 듯이 흉칙하게 웃으면서 미즈사키에게 말했다. "너는 인질이야.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따라오지 못하게 여기 있는 선원들은 전부 데리고 간다. 그리고, 너!' 긴토가 권총으로 바로 옆에 있는 선원의 어깨를 쿡쿡 찌르자 젊은 선원은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네? 네, 네." "또 한 명, 영감이 있지! 그 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그 영감도 데리고 간다. 그러면 더 이상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놈이 없겠지?" "그건 안 돼요!" 미즈사키가 하얗게 질렸다. "이 배는 이미 암초가 많은 해역에 들어왔습니다! 핸들을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으면 10 분도 못 돼서 난파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안개 속에선 한 사람도 구조 받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하하하" 긴토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웃어댔다. "이봐, 너희들! 구멍 보트를 다 내려, 어서!' "하, 하지만..." 선원 한 명이 뭔가 말하려다가 긴토가 마구 권총을 휘두르자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경찰 나리. 자, 그럼 이만." 마지막으로 긴토는 겐모치를 쳐다보며 침을 탁 뱉고는 조타실 밖으로 나갔다. "꺄악!"


"으아악!" 일시에 승객들의 비명 소리와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저씨! 저 놈을 쫓아가요!" 김전일이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콘 소리로 외쳤다. "알았어! 여기는 네가 맡아. 나는 미즈사키를 구할 테니까." 겐모치는 심호흡을 하고 긴토의 뒤를 쫓아 조타실에서 튀어 나갔다. "여, 여보!" 겐모치 부인도 뒤를 쫓아나갔다. "멍청이! 그 말은 왜 한 거야! 이제 배를 어떻게 움직인단 말야.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김전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계기판과 스위치들을 둘러 보았다. "어떡한담! 언제 암초에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김전일은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중얼거렸다. "...레이더라든가 탐지기 같은 걸 사용하면.... 아냐, 안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해!" "아,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어떡해... 난 죽고 싶지 않아, 하느님 살려 주세요! 아케미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유우는 너무 놀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 그저 울부짖는 친구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다카시도 놀림을 받은 어린애처럼 엉엉거리며 울고 있었다. 요우코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아카이는 커다란 창 밖에 펼쳐진, 다른 세계의 입구 같은 새하얀 공간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김전일, 어서 해 봐. 힘을 내.... 제발..." 미유끼는 애원하는 눈으로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어휴! 하다 못해 배를 멈추는 방법만이라도 알면.... 이, 이건가! 이건가!?" 김전일은 자포자기한 듯 계기의 스위치를 끝에서부터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의 속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에잇!" 게다가 계기를 함부로 만지자 이번에는 경고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안 돼, 도저히 안 돼. 어쩔 수가 없어!" 김전일은 단념해 버리고 뒤로 돌아섰다. "누구, 누구 없습니까! 조금이라도 배에 대해서 아는 사람!" 승객들은 모두 학질에 걸린 듯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그저 기도하는 듯한 소리만 웅얼대고 있었다. "틀렸어, 이젠...!" 김전일은 갑자기 인형극에 나오는 인형의 매달린 끈이 끊어진 것처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 자, 독자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도전장입니다. 진상을 해병할 거라고 생각했던 김전일 소년에게 갑자기 덮친 예측 불허의 긴급 사태. 이것을 그는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그가 명탐정인 이상 당연히 이대로 그냥 바다에 빠져 죽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김전일 소년이 풀었다고 하는 이 연쇄 살인의 진상이란 무엇일까요?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복선'을 하나씩 풀면서 당신은 그 진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진짜 범인 '유령 선장'이란 누구일까요? 그리고 기묘하게 만들어진 '트릭'이란...? 김전일 소년이 범인을 알아내는 데 근거가 된 '단서'를 당신이 먼저 알아 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제 6 장 진상 1 "이제 틀렸어..." 그때였다.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김전일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인물'은 김전일을 밀어제치고 조타 핸들 앞에 서자 김전일이 함부로 만진 장치들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동작에 승객들도 소란을 멈추고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삐삐삐 소리를 내던 경고음이 멈췄다. 그리고 옆에 있던 텔레비전 화면 같은 것이 녹색 영상을 비추어 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디스플레이에도 지직지직 소리가 나며 화면이 떴다. 그 인물은 동시에 손을 잡은 레버를 힘껏 눌렀다. 그것이 감속 조작이었던 것 같았다. 엔진 소리의 울림이 바뀌어 곧 배는 천천히 멈추었다. "...아니! 암초도 바위도 전혀 없는데...?" 조타 핸들을 쥔 채 두 개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던 '그 인물'은 당혹한 표정으로 말했다. 짝짝짝! 등뒤에서 손뼉 치는 소리가 났다. "--!?" '그 인물'은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당신이 바로 '유령 선장'이었군." 김전일이 박수를 치면서 대담한 미소를 띠었다. "뭐...!? 서, 설마, 그렇다면 이건 당신이 꾸민 연극...?" 거기까지 말하고 당황해서 '그 인물'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내가 꾸민 연극이야. 이곳은 암초도 바위도 아무것도 없는 해역이야. 당신이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당신 자신이 증명하게 만들려고 꾸민 연극이야. 물론 미즈사키 씨에게도 협조를 구했지. 물론 미즈사키 씨는 당신이 범인인 줄 몰랐겠지만--."


김전일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요우코 양, 아니, '유령 선장'!' "--!" 요우코는 가면을 벗어던진 듯 굳어진 표정으로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평범한 시골 아가씨인 요우코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바위같이 강인한 의지와 냉철한 실행력을 가진 천재적인 범죄자였다. 김전일은 그녀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물어 봤을 땐 배를 정지시키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진짜 선장처럼 솜씨가 좋은 거지?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요우코 양?" "..." 요우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다. 김전일은 계속했다. "대답할 수 없다면 내가 대신 말해 주지. 당신은 지금 보여 주었듯이 배를 움직이는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서 기묘한 살인 트릭을 꾸몄어.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자신이 배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숨긴 거고, 틀렸나!?" "..." 요우코는 입술을 깨물고 김전일과 마주 보았다. 그 자세에서는 조금 전까지의 촌스러운 분위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짐승 같은 의연함조차 풍겼다. "자, 잠깐만요!" 아카이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해 주십시오. 저 요우코 양이 범인입니까? 그리고 그 연속 살인범이라는 남자는 도대체..." 아카이와 함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잠깐!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하겠소." 문 입구에서 겐모치가 크게 소리쳤다. "어...!?" 모든 사람들이 겐모치를 향해 돌아섰다. 거기에는 겐모치와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해서, 조금 전 도망간 긴토가 있었다. 그들 뒤에는 긴토에게 끌려간 미즈사키와 다른 젊은 선원들, 그리고 기관실에 있어야 할 오오츠키의 모습도 있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이 사람이 살인범인 긴토라는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나카무라 이치로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내 부하 직원입니다." "어!? 그럼 경찰관!?" 유우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렇게 흉악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도망친 아내를 찾으려고 직장에는 병 때문에 입원하게 됐다고 거짓말하고 이 배에 탄 겁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상사인 내가 나타나자 밖에도 나오지 못하고 몰래 숨어 있었던 겁니다. 원래 엄벌해야 하지만 이 중요한 연극을 잘해 주면 보고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조금 전의 명연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참! 너도 어서 용서를 빌어!" 겐모치가 무서운 기세로 다그치자 나카무라 형사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그럼 아까의 권총은?" 다카시가 묻자 겐모치가 품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이것은 제 것입니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비번일 때마다 사건에 휘말려 이렇게 가지고 다니게 됐습니다." 이윽고 그곳을 가득 메웠던 긴장감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김전일이 투지에 찬 시선으로 요우코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요우코 양? 아니, '유령 선장'? 드디어 당신이 성공적으로 빠져나갈지, 아니면 내가 그것을 따라잡을지 결판이 날 클라이맥스입니다.!" 김전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방금 전에 벌어진 '고발극'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집중했다. 2 "요우코! 거짓말이지? 네가 사람을 죽이다니... 어떻게 그런..." 미즈사키가 너무도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요우코는 순간 미즈사키로부터 시선을 떼었다가 다시 쳐다보며 호소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미즈사키 씨.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필사적으로 배를 멈추려고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나를 살인범이라고..." "이제 연극은 그만 하는 게 어때, 요우코 양." 즉시 김전일이 끼여들었다. "당신이 조작한 트릭은 모두 밝혀졌잖아!" "농담 그만해요, 김전일 씨." 요우코는 김전일에게 눈길을 돌렸다. "다카무라 선장도, 카노우 씨도 와카오지 씨가 죽였다고 경관님도 말하지 않았나요? 유서도 발견되었으니 모든 게 다 해결..." "그 유서는 당신이 쓴 거야. 필적 감정으로 밝힐 수 없게 와카오지의 경력을 이용해서 모르스 신호를 사용한 거야. 대단하군, 요우코 양. 하지만 그런 점과 선 따위론 필적 감정으로 하려고도 하지 않으니까 잘못 생각한 거야." "말도 안 돼요. 나는 모르스 신호 따윈 전혀 몰라요. 어째서 내가 그 사람들을 죽여야 했지요? 미즈사키,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요우코는 미즈사키에게 애원하듯이 시선을 보냈다. 거기에 응하듯이 미즈사키가 말했다. "김전일 씨,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나는 요우코를 믿습니다. 우선, 그녀에게는 동기가 없습니다. 다카모리 선장을 죽일 동기도, 와카오지 씨를 살해할 동기도. --맞아요! 겐모치 경감님이 말했잖습니까? 카노우는 내 대신 잘못 죽었다고. 원래 노린 사람은 나였다고요. 그렇다면 요우코가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됩니다. 나와 그녀는 연인 사이입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우코가 나를 죽이려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김전일 씨!" 미즈사키는 차츰 감정이 들어가 힘주어 말했다. 반대로 김전일은 침착했다. "네. 분명히 요우코에게는 미즈사키 씨를 죽일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그리고 카노우 세 사람은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뜻이죠?" "그 세 사람은 오리엔탈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는 오리엔탈호의 승무원이었고, 카노우는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만약 요우코 양이 그 사고 희생자의 유족이나 또는 연인이었다면 그녀에게는 그들을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게 됩니다." "요우코가 오리엔탈호의...?" 미즈사키의 얼굴색이 변했다. "--아, 아닙니다! 무, 무엇보다도 그 사고의 유족에게는 사고 책임이 있던 유조선 측에서 충분한 보상을..." 요우코와 김전일을 번갈아 보면서 변명을 하는 미즈사키를 멈추게 하고 김전일이 요우코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요우코 양? 당신과 오리엔탈호 사고는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요우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전일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겁니까? 하기야,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리한 당신이 서툴게 거짓말을 해서 추궁 당할 만한 근거는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경찰이 자세히 조사를 해 보면 당신과 그 사고와의 관계 정도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잠깐, 김전일!" 겐모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김전일과 요우코의 대결에 끼여들었다. "그 점에 관해서 유용할지도 모르는 것을 찾았어.' 겐모치는 눈짓을 해 부인으로부터 가죽 표지로 된 일기장 같은 것을 받아쥐었다. "그, 그건...!" 요우코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에 조타실에서 나갔을 때, 물론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요우코의 방을 조사해 봤어. 흉기에 묻어 있던 니코틴 독을 찾아내서 결정적인 증거로 삼으려고. 그런데 니코틴은 없었지만 대신에 이 항해일지가 나왔어." "항해일지라고요, 이 배의?" 미유끼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저분하고 낡은 표지의 글자를 읽었다. "류... 류오마루 항해일지...? 미즈사키 씨, 이 배의 이름이 뭐였죠?" 미유끼가 미즈사키에게 물었다. "이 배의 이름은 '코발트 마린호'입니다. 그것은 틀립니다. ...류오마루는--." 말하던 미즈사키의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것은 오리엔탈호와 충돌한 유조선의 이름입니다....!" "역시 그랬군." 겐모치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도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에서 그 사고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이 류오마루라는 이름을 본 기억이 있어. 그래서 이 항해일지를 잠깐 보았더니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이 마지막 페이지에 써 있더군.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일지를 쓴 사람은 물론 그 류오마루라는 유조선의 선장이겠죠? 그럼 요우코 양은 그 선장의--." 김전일이 묻자 겐모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펴서 김전일에게 보여 주었다.


"어떠면 딸일지도 몰라." 옆이 너덜너덜해진 그 페이지에는 휘갈겨져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딸, 요우코에게' "돌려 줘!" 요우코는 비통하게 소리지르며 겐모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고는 일지를 빼앗더니 분노에 끓는 눈으로 김전일과 겐모치를 번갈아 보면서 소리쳤다. "그래! 나는 류오마루의 선장이었던 카시마의 딸이야!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승객과 선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요우코에게 쏟아졌다. "요우코... 네가 정말...?" 미즈사키가 입술을 떨었다. "아냐!" 요우코가 소리쳤다. "나는 사람 따위를 죽이지 않아! 내가 카시마의 딸이라고 해서 어떻다는 거야!?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게 싫었기 때문에 숨겼을 뿐이야!" "깨끗이 단념하지 못하는군. 죽은 세 사람은 모두 오리엔탈호 사고와 관계가 있던 인물이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다그치는 겐모치를 물리치듯이 요우코가 침착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카노우 씨가 죽은 것은 미즈사키 씨를 노리고 핸들에 붙여 놓았던 독침 때문이라고 했죠? 늦잠을 잔 미즈사키 대신에 핸들을 잡은 카노우 대신 죽었다고 나는 들은 것 같은데요?" "아, 그때는 일단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그때는...." 겐모치가 곤란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래요? 그럼 죽은 세 사람이 모두 오리엔탈호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억지가 아닌가요? 그중 한 사람은 잘못해서 대신 죽었을 뿐이잖아요. 말해 두겠는데, 나에게는 미즈사키를 죽일 동기 따위는 없어요. 나와 미즈사키는 연인 사이예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누구에게 물어 봐도 알겠지만 내가 미즈사키를 살해 할 이유 따위는 절대로 없다구요!" "흠... 그 말은 마치 '카노우를 죽일 이유라면 있을 수 있지만'이라고도 들리는데." 김전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요우코는 당황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냐! 물론 나는 카노우 씨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다카모리 선장도, 와카오지 씨도, 카노우 씨도 모두 3 년 전 오리엔탈호 침몰 사고의 당사자야. 이 세 사람을 당신이 죽일 만큼 미워한 이유가 분명히 그 사고 뒤에 숨겨져 있는 거야. 어쩌면 당신의 아버지가 남긴 그 항해일지에 그것이 써 있지 않을까, 요우코 양?" 김전일이 요우코의 손에 있는 일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요우코는 일지를 가슴에 품으면서 고개를 가로 저였다. "아냐! 살해될 뻔했던 사람은 미즈사키야. 내가 사랑하는 미즈사키!" 미즈사키는 요우코의 말에 순간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곧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경감님! 우리들은, 나와 요우코가 범인일 리가 없습니다!"


김전일은 미즈사키가 힘주어 하는 말에 약간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겐모치는 변함없이 김전일을 쳐다보며 도움을 청했다. "으음... 어떤가, 김전일? 분명히 그 독침은 아침 6 시부터 조타실 근무를 하게 되어 있는 미즈사키 씨를 노리고 만들어진 게 틀림없어. 그렇게 되면 미즈사키 씨를 미워하던 와카오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러운데... 네 추리로는 어떤가?" "그 독침은 처음부터 카노우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김전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경찰이 이 연쇄 살인 사건과 오리엔탈호 사고에 주목하면 조사에 의해 오리엔탈호에 충돌한 류오마루 유조선 선장의 딸인 당신이 의심받는 것을 피할 수 없겠죠. 그래서 당신은 카노우가 아닌 미즈사키 씨가 살해 대상이었던 것처럼 꾸며서 경찰의 눈을 벗어나려고 한 겁니다!" 3 "뭐라고? 하지만 카노우는 오후 2 시까지 조타실 근무가 없어. 미즈 사키 씨가 늦잠을 자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는--" 겐모치가 당혹스러운 듯이 말하자 김전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미즈사키 씨가 늦잠을 자도록 요우코 양이 꾸몄다면 어떻게 되죠? 자명종 시계의 벨이 울리지 않게 하거나, 수면제 같은 것을 마시게 해 그가 늦잠을 자도록 만들었다면? 어떻습니까, 미즈사키 씨? 그 가능성은 있습니까?" "그, 그것은..." 미즈사키가 우물쭈물하자 즉시 요우코가 나섰다. "잠깐, 미즈사키. 내가 말할게요. 그것은 가능할 거예요. 바로 그날 우린 같은 방에서 지냈으니까요." "이, 이봐. 요우코. 그런 말을..." "괜찮아요. 가만히 있어서 의심받는 것보다는 나아요.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연인 사이니까요. 나는 그날 밤잠을 자다가 새벽 3 시가 지났을 때 갑자기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무서워져서 미즈사키의 방으로 갔어요. 덕분에 함께 늦잠을 자서 요리사에게 몹시 야단을 맞았죠." 미즈사키는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요우코의 대범한 발언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요우코는 그런 미즈사키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미즈사키 씨가 늦잠을 자도록 조작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카노우 씨가 늦잠을 잔 미즈사키 대신에 핸들을 잡을지 어떨지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카노우 씨의 근무는 오후 2 시부터예요.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라면 미즈사키가 먼저 깰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카노우 씨는 언제나 일어나면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아래층 리빙 홀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봤어요. 그런데 그날 아침에만 조타실에 간다는 건 우연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요." "아니, 우연이 아냐. 카노우 씨가 언제나 그랬듯이 6 시에 잠을 깨면 곧 조타실에 올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어." 김전일이 말했다. "뭐, 뭐라고요?"


"카노우는 당신이 조작한 '자동 살인 트릭'에 조종되어 조타실로 유인된 거야." "흥! 그 트릭, 트릭 하는데, 아무리 탐정이라지만 제발 그만 좀 해 둬요. 사람을 조종해서 끌어낸다니요. 그럼 제가 카노우 씨에게 텔레파시라도 보내 조타실로 가게 만들었다는 말인가요?" 요우코가 도전적으로 말하자 김전일은, "가능해." 라고 즉시 대답했다. "당신은 카노우의 항해사로서의 습관과, 그의 지병에서 나온 생각을 이용해서 아침 6 시로 잘못 알게 만든 거야." "...!" 요우코는 숨을 삼켰다. 그것은 김전일이 자신에게 치명타를 날린 순간이었다. 김전일은 댐에 고인 물을 일시에 내보내는 것처럼 한꺼번에 말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카노우 씨에게는 이상한 지병이 있어서 일단 잠을 자면 깨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그 때문에 가끔 근무를 빼먹은 적이 있다고 전에 겐모치 아저씨에게 말했지, 이 사실은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 요우코 양, 당신도 당연히 알겠지?" 김전일이 물었다. 요우코는 김전일을 바라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어쩌면 새벽 2 시가 지난 시간이었을 거야. 요우코 양, 당신은 조타실에서 핸들을 잡고 있던 와카오지를 살해하고 다카모리 선장과 마찬가지로 시체를 바다에 던져 넣었어. 그리고 조금 전에 보여 준 배를 조작하는 지식과 기술로 배의 방향을 정반대 즉, 북쪽으로 돌려서 고정시킨 다음 조타 핸들에 독침을 붙여 놓았어. 그러고서 미즈사키 씨의 방으로 갔지. 미즈사키 씨의 방에 간 것은 그를 늦잠 자게 만들기 위해서였지. 만일의 하나 그가 6 시 전에 잠에서 깨면 꾀병을 부린다거나, 아무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카노우보다 먼저 조타실에 가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을 거야. 틀린가, 요우코 양?" 요우코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전일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 이번에는 카노우 씨의 행동인데, 그는 늘 해오던 것처럼 당연히 6 시에 잠을 깼어. 그것은 자명종이 6 시에 맞춰져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지.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려는 순 간 카노우는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창 밖으로 보이는 수평선 가까이에 태양이 있었으니까. 카노우 씨는 항해사니까 태양의 위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배가 남쪽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 오른쪽에 있는 카노우의 방은 서쪽에 있게 되고, 그러니까 아침에는 햇빛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해. 그러나 카노우 씨는 그 태양의 위치를 보고 '배가 오가사와라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카노우 씨는 이렇게 생각한 거야. '큰일났다, 늦잠을 잤어. 벌써 저녁 6 시야!'라고. 나는 아까 아침 6 시의 태양이 과연 저녁 6 시의 태양으로 보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 배에서 가장 베테랑 선원인 오오츠키 기관사에게 아카이 씨가 아침 6 시 반쯤 찍은 '일출' 사진을 보여 주었어. 저녁에 찍은 사진이라고 거짓말하고. 그랬더니 오오츠키 씨는 그걸 보고 저녁 5 시나 5 시 반경의 '일몰' 이라고 말했지." "뭐라고?...못된 놈! 나를 속였어!"


오오츠키가 화가 나 소리쳤다. "그러나 김전일, 왜 카노우는 '배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 미즈사키 씨는 조타실에 와서 카노우의 시체를 보았을 때 이미 배가 항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데?" 겐모치는, 말없이 요우코를 응시하는 미즈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미즈사키 씨는 그때 아무도 배의 핸들을 잡지 않은 것을 눈앞에서 본 덕분에 배가 항로를 벗어났으리란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카노우 씨에겐 또 하나 이러한 오해로 연결되는 큰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 그게 뭐지?" "일단 잠을 자면 일어날 수 없게 되는 카노우 씨의 지병이요." "아, 과면증. 나르코렙시의 일종이라는 병 말인가?" "네. 카노우 씨는 전에도 그 지병 때문에 똑같이 근무 시간에 늦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 경험으로 카노우 씨는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6 시'라는 시간과, '배의 좌측에 있는 해'를 보고 아침 6 시가 지나서 이미 저녁 6 시가 된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범인의 계획대로요." "음. 역시..." 겐모치는 팔짱을 끼고 감동한 듯이 중얼거렸다. 김전일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카노우 씨는 당황했을 겁니다. 카노우 씨의 조타실 근무는 오후 2 시부터 6 시까지, 그리고 오후 6 시부터 10 시까지입니다. 그러니 오후 6 시까지 잠을 잤다면 이미 2 시부터의 근무를 완전히 빼먹은 게 됩니다. 카노우 씨는 아침도 먹지 않고 마시려던 커피도 그대로 둔 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적어도 6 시부터의 근무에 맞추기 위해 조타실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조타실을 보고 좀 의아했지만 아무튼 핸들을 잡은 겁니다. 그래서 그 독침에 찔린 것입니다." 김전일이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 것을 요우코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듣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김전일에게 곧장 향해져 있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어라고 말하듯이. 김전일도 요우코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아침 6 시에 이 배가 북쪽으로 가고 있던 것은 오른쪽에 있는 방에서 자는 아케미 양의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이 깨었다'라는 증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후 7 시 전에, 그녀는 정전이 돼 '캄캄해진 방'에서 뛰어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카노우 씨가 핸들을 잡은 채 쓰러지는 바람에 배의 방향이 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핸들이 움직인 탓에 배가 빙빙 돌기 시작해 카노우 씨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배를 북쪽으로 향하게 했던 사실은 이미 모르게 되어 버린 거죠. 물론 이 점도 범인의 계획 속에는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나, 요우코 양?" "흥! 대단해. 상상만 가지고도 잘도 말하는군." 요우코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겐모치를 향해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한테는 다카모리 선장이 사라진 날 아침의 알리바이가 있었잖아요, 경감님? --맞아요, 경감님. 그날 아침 선장실에는 아침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고 했어요.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고, 달걀 프라이까지 되고 있었다고 들었어요. 7 시부터 아침


식사 사이에 선장실에 갈 수 없다면 알리바이가 있다는 거라고 경감님이 말했지요?" "음, 분명히 말했지..." 겐모치의 확실한 대답을 듣자 요우코는 기뻐하며 더욱 자신 있게 말했다. "봐, 어때? 김전일. 그러니 나에게는 당연히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나는 계속 주방에서 요리사와 함께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요, 경감님?" "그것은 틀림없어." 겐모치는 수첩을 펴고 메모를 보았다. "와카오지의 유서에는 한밤중에 식사 준비를 해 두고 아침 식사 직전에 커피 메이커와 토스트 스위치를 넣는 트릭을 썼다고 쓰여 있었어. 즉, 오카오지처럼 1, 2 분이라도 선장실에 갈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고, 달걀 프라이를 만들 수 있게 돼. 그러나 요우코는 계속 주방에 있었고 7 시 반 조금 전에, 정확히는 7 시 27 분에 방송을 하러 주방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어. 그러니까 3 층의 선장실까지 갈 시간은 당연히 없었지.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계단에는 4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었어. 요우코가 그 계단으로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이 증명했지. --자, 이런데 어떤가, 김전일?" 겐모치는 이렇게 말하고 김전일을 보았다. 김전일은 그 시선에 대답하듯이 요우코의 눈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저씨. 그 알리바이 트릭이라면 벌써 깨버렸어요." 요우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4 "뭐라고요? 그렇다면 말해 봐요. 내가 도대체 어떻게 선장실에 갈 수 있는지--." 이렇게 말하는 요우코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 선 소년의 '지혜'가 보통 사람 같지 않다는 것에 그녀는 무척 신경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경이적인 관찰력과 추리력이 자신의 지혜를 웃돌고 있다는 것에. "선장실에 갈 필요 따위는 없어. 배 밑바닥에 있는 전원실로 가면 충분하니까." "뭐...!?" 요우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점점 파래져 갔다. "전원실? 무슨 뜻이지, 김전일?" 미유끼가 물었다. "간단해, 미유끼. 스위치를 켜기 위해 일부러 선장실까지 가지 않아도 돼. 전원실에 있는 차단기를 올려 전기를 통하게 하면 되는 거야?" "앗!" 미유끼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알겠어? 즉, 그날 밤 선장을 살해해 시체를 처리한 범인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해 놓고 전원실로 내려가 선장실로 통하는 차단기를 내린 거야, 그리고 다시 선장실로 가서 커피 메이커와 토스터와 프라이팬을 얹어 놓은 전기 풍로 스위치를 모두 켠 거야. 이렇게 해 놓고 아침에 방송을 하러 방송실에 가는 사이에 그 옆에 있는 전원실로 가 차단기를 올린 거지.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3 층


선장실에서는 커피가 끓고, 빵이 구워지고, 달걀 프라이까지 될 수 있었던 거야." "으음..." 겐모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죠! 추측만으로 사람을 범인 취급하지 말아요!" 요우코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증거라면 있지. 상황 증거이긴 하지만 당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 주는 증거가." "그, 그런 것이 있을 리가...!" "미유끼, 미즈사키 씨. 그날 아침의 일을 기억합니까? 내가 배가 아파서 미즈사키 씨 방에서 뜨거운 우유를 마신 일 말입니다." "으, 으응... 그게 왜?" 미즈사키와 시선을 맞춘 미유끼가 대답했다. "그때 요우코가 '우유를 따뜻하게 해 올게요.'라고 말하고 우유를 담은 머그컵을 가지고 부엌으로 갔지?"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지?" 요우코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김전일은 그 표정 그대로였다. "잘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이상해. 방에 전자 레인지가 있으니까 거기에 데우면 되는데 일부러 식당 옆에 있는 부엌까지 갈 필요가 없거든." "아! 그렇게 말하니까 그러네. 하지만 김전일. 어쩌면 전자 레인지가 망가졌을지도 모르잖아." "아냐, 미유끼. 그건 틀려. 요우코 방의 전자 레인지는 망가지지 않았어. 그 증거로 오늘 아침 내가 또 뜨거운 우유를 부탁했을 때 요우코는 자신의 방에서 전자 레인지에 우유를 데워 주었으니까." "뭐, 뭐라고!? 어떻게 그걸...?" 요우코는 말하다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김전일이 요우코의 말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일을 아느냐는 거지? 그때 당신은 부엌이 있는 1 층이 아니라 당신 방이 있는 3 층에서 따뜻한 우유를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나?" "아!" 요우코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김전일은 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데워 준 우유를 마시다가 위쪽이 뜨거워서 뗄 뻔했어. 하지만 아래쪽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지. 그런 것이 전자 레인지로 데웠을 때의 특징이잖아. 그래서 알게 되었지. 당신 방 전자 레인지는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어째서 그날 아침에는 전자 레인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그 대답은 전원실에 있었어." "..." 아무 말 없이 김전일을 노려보는 요우코에게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김전일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당신은 그날 아침 전자 레인지를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 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당신 방과 선장실은 같은 차단기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야!" "...!" "이 차단기를 이용한 '원격 조작 트릭'을 알게 된 건 아침에 있었던 정전 소동 때문이었지. 나와 미유끼, 그리고 우리 방과 통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방의 두 사람까지 모두 네 사람이 동시에 드라이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차단기가 내려가


버렸지. 소동이 있은 후 방에 들어와 보니 스위치를 켜 놓았던 드라이어가 그대로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어. 이것을 보고 어쩌면 같은 방법으로 빵을 굽기 시작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 배의 전원은 방 네 개씩 따로 연결되어 있더군. 먼저 객실이 그렇다는 것은 오늘 아침 정전 소동이 났을 때, 나와 미유끼 방과 건너편의 2 방이 동시에 정전된 것을 보고 알았어. 그것을 보고 나는 객실뿐만 아니라 분명 종업원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생각대로였지. 선장실은 3 층 제일 끝 오른편이고, 요우코, 당신 방은 그 건너편이야. 두 방에 붙은 옆방은 모두 비어 있었어. 즉, 선장실로 연결된 차단기가 내려가 있던 그날 아침 그 시간에는 빈방 두 개와 함께 당신 방의 전기도 사용할 수 없었던 거야. 당신 방은 동쪽에 있으니까 아침해가 많이 들어와서 전등을 켤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냉장고와 전자 레인지와 전기 풍로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 미즈사키 씨가 우유를 데워 오라고 했을 때 당신 방에 가서 전자 레인지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매우 초조했겠지. 하지만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래서 당신은 할 수 없이 1 층 주방까지 일부러 우유를 데우러 가는 부자연스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 어때, 요우코?" "아냐... 아냐, 나는... 죽이지 않았어. 나는..." 요우코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김전일과 미즈사키를 번갈아 보았다. "요우코... 용서해 줘!" 그때 갑자기 미즈사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 쳤다. "나는 지금까지 속이고... 아, 몰랐었어, 네가 그... 류오마루의 카시마 선장 딸이었다니..." "...? 미즈사키..." 요우코는 갑작스런 미즈사키의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요우코, 들어 봐." 결심한 듯이 미즈사키가 말했다. "나도 그 배에 타고 있었어. 그 오리엔탈호에!" "뭐...!?" 미즈사키의 고백에 요우코는 너무 놀라 숨을 삼켰다. 5 "무슨 말이야, 그게...? 미즈사키가 오리엔탈호에 타고 있었다니.... 나, 나는 몰랐..." 요우코는 입술을 떨었다. "용서해 줘, 요우코! 그 사고는 내 탓이야. 내가 감시대를 이탈해서 그런 일이...!" 미즈사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 모르겠어, 미즈사키! 무슨 말이지!? 하지만 오리엔탈호 선원 명부에는 미즈사키의 이름이 없었잖아!" 요우코는 자신이 살인자로 고발되고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선원 등록은 돼 있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분명히 타고 있었어. 보충 인원으로. 그리고 사고 원인을 만들어..."


미즈사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그날 나는 몹시 들떠 있었어. 보충 인원이긴 하지만 동경하던 오리엔탈호에 탈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 명예에 취해... 그래서 다카모리 선장이 감시대에서 내려와 파티에 참가하라 했을 때도 선장이 그렇게 말해준 게 너무 감격스러워... 설마,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그 최신 하이테크 여객선이 충돌 사고를 일으키리라고는, 설마..." 미즈사키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 그럼, 당신도 그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요우코는 이미 김전일과 겐모치는 엄청난 사실에 온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는 말조차 이제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미즈사키에 대한 요우코의 마음이 이 배에서의 살인을 위한 거짓 애정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미즈사키도 당연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고백했다. 애정과는 상반된 행위지만 자신의 생각 또한 진실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나는 비열한 남자야. 그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같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들어 주세요, 겐모치 경감님, 김전일 씨.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 미즈사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 3 년 전의 사고 책임은 모두 오리엔탈호에 있었습니다. 류오마루호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리엔탈호에 타고 있던 우리들의 어리석은 허영과 쓸데없는 권력투쟁이 초래한 사고였습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사고의 원인을 모두 알고 있는 나의 입을 봉했습니다. 내가 그 배에 타지 않은 것으로 꾸몄습니다. 그래서 사고 원인을 알고 있는 감시대 요원은 사망한 6 등 항해사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원 배치는 선장과 1 등 항해사였던 와카오지 씨가 정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선원 대부분이 사고의 희생자가 돼 버린 데다가,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일부러 자신의 배에 불리한 발언을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이런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재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오리엔탈호 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사고의 규모로 보아 이례적으로 빨랐습니다. 그것은 류오마루호 측의 승무원의 거의 재난으로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오리엔탈호 쪽의 증언만이 받아들여진 것도 그 한 이유였지만, 결정적인 것은 류오마루의 단 한 사람 생존자였던 인물이 류오마루호에 불리한 증언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살해된 카노우였던 거군요?" 김전일이 묻자 미즈사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백을 계속했다. "카노우는 오리엔탈호의 선장인 다카모리와 1 등 항해사인 와카오지 씨의 거짓 증언을 모두 인정한 데다 류오마루호의 카시마 선장이 근무 중에 술을 많이 마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거짓말, 그렇지 않아! 아버지는 보통 때는 술을 잘 마셨지만 배에 타고 있는 동안만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어! 내가 어렸을 때 배에 자주 함께 탔을 때부터 그랬어!" 요우코는 미즈사키를 보고 소리쳤다.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떨쳐 버릴 수 없는 애정이 뒤섞여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물론 그래. 요우코의 말이 맞아. 모두 날조된 거야." 미즈사키가 요우코를 향해 말했다. 그의 눈은 요우코의 눈과 똑같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는 카노우를 매수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하도록 한 겁니다!" 미즈사키의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미즈사키의 고백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비열한 행위이다. 설령 그것에 미즈사키가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해도 그들의 소행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면 그 역시 똑같은 죄를 진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때는. 침묵 속에서 미즈사키의 고백을 계속되었다. "나는 3 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뒤 신문을 토해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고로부터 겨우 5 개월이 지나는데 이미 재판은 끝나고, 책임은 모두 류오마루호가 진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재판 내용을 보고 직감적으로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가 카노우를 매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을 만나 그에 대해 다그치자 그들은 사실을 모두 인정하더니 나에게 다짐을 해 두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추지 마, 너도 이제 공범자야.'라고요." "하지만 믿을 수 없어, 미즈사키 씨 같은... 그렇게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 그런 비열한 일에 동참했다니..." 미유끼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김전일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느낀 의문이기도 했다. 미즈사키는 힘없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비겁하고 소심한 인간일 뿐입니다.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네가 사실을 증언해도 이득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요. 거짓 증언을 하는 대신에 거액의 뒷돈을 받아 챙긴 카노우 외에 류오마루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죽어 버린 승객과 선원들에 대한 보상은 어차피 보험 회사가 할 일이다. 그러니 류오마루호를 가지고 있던 해운 회사도 손해는 없다. 여기서 사건의 진상을 뒤집으면 오리엔탈호의 살아남은 선원은 물론, 동아 오리엔트 해운도 다시 일어서러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나를 설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나의 속에 있던 마음을 끌어냈습니다. 사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두 번 다시 배에 탈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내가 살인자로 몰린다 해도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배는 내게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방해받지 않는다면 비겁자건 뭐건 무엇이든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지 않은 것입니다." 미즈사키의 고백을 방심한 듯이 듣고 있던 요우코는 갑자기 창 밖을 쳐다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김전일은 요우코가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저 노래 같았다. 그녀는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입술로 뭔가 노래하고 있었다. 안개가 낀 창 밖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미즈사키의 고백은 계속되었다.


"다카모리 씨는 동아 오리엔트 해운에서 쫓겨날 때 내게 자신을 따라 오라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사고의 진상을 알고 있는 나를 옆에 두고 싶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고, 나만이 아무 일도 없는 듯 동아 오리텐트 해운에 남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나는 묵묵히 다카모리 씨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정말로 나는 배에 탈 수만 있다면 회사 따위는 어디라도 좋았으니까요. 그러나 나와 다카모리 선장과 와카오지 씨가 이 코발트 마린호에 타는 것으로 정해지고, 그리고 주식에 실패해서 가지고 있던 뒷돈을 모두 날린 카노우가 굴러 들어와 이 배에 오리엔탈호 사건의 비밀을 공유하는 네 사람이 다 모였을 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배는 귀양선이며, 우리들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에 의해 이 배에 태워진 것을요." 미즈사키는 요우코에게 눈길을 주었다. 요우코는 여전히 조타실의 넓은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안개는 조금 걷히기 시작해 그 사이로 살며시 바다가 보였다. 김전일에겐 그것이, 이 사건이 종말에 가까워짐을 나타내는 거처럼 생각되었다. 6 요우코는 힘없이 한숨을 쉬고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긴 침묵을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백했다. "내가 졌어요, 김전일 씨." "요, 요우코...." 미즈사키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그것을 제지하며 요우코는, "김전일 씨,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 봐요. 모두 다 솔직하게 말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김전일 쪽으로 다가갔다. "이 코발트 마린호가 한밤중에 항구를 돌아다녔다는 소문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역시 당신이 한 겁니까?" 김전일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는 복잡한 마음을 억눌렀다. "네, 그래요." 요우코도 김전일과 비슷한 어조로 차분히 대답했다. "배에 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늘 보고 배운 덕에 대부분의 배는 조종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여자이면서도 선원이 되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이런 큰 배는 처음이어서 미즈사키가 조작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어요, 그리고 '진짜' 해 본 것은 조금전이 처음이었어요. 이 배에는 원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설마 내가 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이 배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처녀로 통했으니까요." 일단 결심하자 요우코는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그 세 사람이 입을 맞춰 사고의 책임을 당신 아버지에게 덮어씌웠는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김전일은 기계적으로 다음 질문으로 옮겼다. 요우코는 또 무감동하게 대답했다. "이 항해일지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 아버지의 유품이겠죠. 당연히 재판 할 때도 조사되었을


텐데요?"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것이 나왔을 때는 사고가 난 후 7 개월이나 지나서였어요." "네? 그건 어떻게 된 거죠?" "...내가 아버지의 사고를 안 것은 사고로부터 1 개월 가까이나 지났을 때였어요." 요우코는 먼 과거를 회상하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곧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혼자서 나를 키웠죠.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자주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탔어요. 나는 아버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어요. 정말 즐거웠어요. 그때가 가장... 아버진 나에게 배를 조종하는 법을 열심히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로 뱃사람을 만들 생각이었는지도 몰라요." 요우코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자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탈 수 없게 됐어요. 그때부터 나는 계속 외톨이였어요. 그래서 나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 조금 지났을 때 난 드디어 가출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떠돌이 남자와 함께 살게 되었어요. 형편없는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나는 뉴스도 보지 않고 신문도 읽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큰 사고가 있었는데도 정말로 한 달이 지나도록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 역시. 나는 집으로 급히 돌아왔어요. 하지만 집 안에 한 걸음도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기자들이 우글우글해서 너무 무서웠으니까요.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무조건 아버지가 모두 나쁘다고 쓰여 있어서 딸인 내게도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온통 쏠리고 있다 생각되자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이름을 바꿨습니다. 옛날 이름으론 제대로 바깥에 나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너무나 아버지가 미웠어요. 나를 내팽개쳐 두고 바다에만 나가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자식이라 어쩔 수 없더군요. 아버지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슬펐어요. 그래서 겨우 꽃만 사 들고 사고가 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미세키 해운으로 갔어요. 사고로부터 7 개월이나 지났는데도 해안에는 아버지의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끼여 있었어요. 기름에 지든 고기들도 많이 죽어 있었고. 전부 내 아버지 탓이라 생각하니 정말로 죽고 싶어졌어요. 그때였어요. 내가 파도에 떠 있는 가방을 발견한 것은. 그것은 기름에 찌든 여행 가방이었어요. 아버지가 아끼던 가방이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죠. 그 가방은 배 여행이 많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해난 사고가 났을 때도 물에 뜨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어요. 자신은 뱃사람이니까 그 가방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나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고하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것을 건져내 열어 보았죠. 안에는 스며든 바닷물 이외에 거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어요. 있는 건 이 항해일지뿐이었어요.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페이지를 넘겼죠.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요. 그때 가슴에 벅차 오르던... 슬픔을..." 요우코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7 요우코는 사랑스런 아기처럼 일지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일지는 비닐 봉투에 넣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7 개월 동안 바닷물 위에 떠 있어서 거의 젖어있었어요. 하지만 유성펜으로 쓰여진 글씨는 대부분 또렷하게 남아 있었죠. 나와 함께 옛날에 배에 탔을 때의 추억이라든가... 즐거웠던 때에 대해서 한가득 적어 놓았어요. 아버지가 그 항해를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 것도...." 요우코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몇 번인가 흐느껴 운 다음 요우코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나를 내버려 둔 게 아니었어요! 나와 둘이서 다시 한번.... 이번엔 정말 함게 살아 줄 생각이었던 거예요! 자신의 꿈도, 삶의 보람도 모두 버리고 나를 위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요우코는 또 말이 막혔다. 다시 조용해진 조타실에 스며든 조그만 엔진 소리와 파도 소리가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전혀 몰랐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가출해서.... 그때는 출항 전송도 하지 않고.... 일지를 한장한장 넘길 때마다... 즐거웠던 추억이... 앨범을 넘기듯이 솟아나서.... 나는 알게 되었죠.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요우코는 떠오르는 추억에 더욱 목이 메어 거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유끼도 김전일도, 승객들도, 그리고 비극에 익숙해진 겐모치조차도.... 어떤 사람은 눈물을 닦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참으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내가 전송하러 갔다면 하고 생각했어요. 그랬다면 아버지는 나를 보고 분명 출항을 늦췄을 거예요. 나에게... 이 항해가 끝나면 계속 함께 지내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면 그런 사고를 피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나 후회스러워서... 너무도... 후회스러워서... 그런데--" 갑자기 눈물에 젖어 있던 요우코의 눈동자가 빛났다. 차가운 증오의 눈빛이었다. "그런데 일지를 마지막 날짜까지 넘겼을 때 나의 슬픔은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의 아버지 글씨는 거의 아이들 낙서처럼 혼란스러웠어요. 그것은 사고 상황을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전신에 오한이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손이 떨려서 일지를 떨어뜨릴 뻔했죠. 아버지의 일지에 쓰여 있는 사고 상황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읽은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배에 대해 아버지에게서 배운 나는 곧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진실을 알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재판 기록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키를 잡고 있었다는 카노우의 증언을 봤을 때 나는 거의 확신을 갖게 됐죠. 아버지의 일지는 거짓이 아님을. 아버지는 평소에 애주가였지만 배를 타는 동안은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 일지를 매스컴에 발표하지 않았죠?"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렇게 하려고도 생각한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이미 재판까지 다 끝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아버지 배에 탔던 카노우까지 다카모리, 와카오지의 한패가 되어 그쪽에 유리한 증언을 한 채로요.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지를 가지고 가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거짓으로 썼다는 말을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성격만이 유일한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어 버렸으니까요." 김전일은 더 이상 반박할 말도 없었다. 요우코는 계속했다. "그래서 나는 복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배에 대해서도 더 많이 공부했고, 어떻게든 그 사건과 관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재판에서 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일지가 진실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됐습니다. 그들이 타는 배에 카노우도 동승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카노우를 취직시켜 준 사람이 와카오지였으니까요. 이들이 뒤로 손을 잡았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데다가 사고의 책임을 모두 아버지에게 덮어씌우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다카모리와 와카오지. 그 놈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매수되었는지 모르지만 사고의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었다는 증언을 해 아버지의 인생 모두를 더럽힌 카노우.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나의 인생까지도 그 놈들 때문에 엉망이 된 것입니다. 100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대형 사고의 원흉으로 몰린 선장의 딸로서 나는 세상 사람들의 악의에 찬 시선을 피해 숨어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 테니까요. 너무나 미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그 놈들이 미웠습니다! 몇백 번 죽여도 풀리지 않을 정도로!"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고 토해 내듯이 말했다. "아버지의 사고 뉴스를 처음 알고 집으로 달려갔을 때 나의 집에는 '살인마!', '지옥으로 떨어져라!'등등의 무서운 낙서가 써 있었고, 사람들이 던진 돌로 집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무섭고, 너무 슬퍼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망쳤습니다. 알겠어? 그때 내 마음을! 어렸을 때부터 자란 자신의 집이... 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던 그 집이 쓰레기장처럼 변하고 저주를 받고 있었어! 그런 집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김전일, 당신은 상상할 수 있을까? 절대 할 수 없을 거야! 몇백 명이나 되는 유족들의 증오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고 큰 소리로 외쳤어. 하지만 내 외침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이름을 바꾸고 경력을 위장해 그 놈들이 있는 동태평양 기선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들킬 염려는 없었습니다. 그러고서 이 코발트 마린호에 타기 위해 미즈사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의 연인이 되면 같은 배에 타고 싶다는 나의 희망도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우코는 미즈사키를 보지 않았다. "요, 요우코... 나는... 네, 네가..." 뭔가를 말하려던 미즈사키를 요우코가 가로막았다.


"미즈사키 씨, 나는 당신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에요. 이 배에 타기 위해 당신의 연인이 돼 당신에게 안겼어요. 그 뿐이에요."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그러나 김전일은 그 억제된 말 속에 결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증오와 배반과 불신으로, 폭풍 한가운데 서 있는 마른 나무처럼 흔들리면서도, 안간힘을 써 뽑히지 않으려는 격렬한 '사랑'... 요우코는 아무에게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의 가방이 7 개월 동안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그렇게 흘러왔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아버지가 나에게 복수를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 대신에 복수를 해 달라고 아버지는 그 일지를 통해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요우코는 다시 창 밖으로 눈을 주었다. 안개가 걷히는 사이로 멀리 섬이 보였다. 잠겨 가는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이제 복수는 끝났으니까 더 이상 남은 것은 없습니다. 경감님, 체포해야죠?... 자, 여기 있습니다." 요우코는 항해일지를 겐모치에게 건넸다. "이제 더 이상 '유령 선장'이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요우코는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즈사키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더니 어깨를 떨며 울부짖었다. "내 탓이야! 모두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바보..." 미즈사키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눈물이 자신이 범한 커다란 죄 때문인지, 아니면 요우코와의 갑작스런 이변 때문인지 김전일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배만이 우는 아이를 달래는 요람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기괴한 유령선의 전설에 얽힌 비참한 사건은 잠겨 가는 저녁해와 함께 조용히 그 막을 내렸다. 8 오오츠키는 기관실에 있었다. 땀투성이가 되어 항구에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엔진 조정을 하고 잇는 오오츠키에게 김전일이 살짝 다가가 불렀다. "오오츠키 씨, 바쁘세요?" "당연하지. 보면 몰라!" 김전일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오츠키는 대답했다. "하하하!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군요, 할아버지." 김전일이 농담하듯 말하자 오오츠키는 기분이 몹시 나쁜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야, 볼일 없으면 저리 가!" "그렇게 윽박지르지 마세 요. ...아, 그래, 이 사건의 결말을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찌 되었건 모두 다 바보 같은 놈들이야!" 오오츠키는 토해 내듯이 말했다.


"죽은 놈들도, 요우코의 아버지도, 미즈사키도, 이 사건에 관계된 놈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야. 배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은 생각할 줄도 모르는 이기주의자들!" "흠...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잖아요?" 김전일이 비꼬듯 말했다. "뭐, 뭐라고?" 오오츠키는 작업을 멈추고 김전일을 쳐다보았다. "아, 화내지 마세요! 난 말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을 뿐이니까요. 말만 전하고 곧 사라질 거예요." "말을 전해 달라고..." "손님 중에 머리가 긴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가 있죠? 그 아이는 부모와 사이가 좋지 못해서 가출한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그 아이가 왜 일부러 이런 누더기 같은 배에 탔는지 아세요?" "...?" "모르죠,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래요." "나, 나를...?" "그 아이 이름은 유우예요. 그 아이가 바로 할아버지와 소식불통인 딸의 아이, 즉 할아버지의 손녀예요." "뭐, 뭐라고!? 그 아이가 세이코의 딸이라고!?" 오오츠키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자, 나는 다 전해 드렸어요. 참! 그 아이는 지금 여러 가지로 괴로워하고 있어요, 만나면 차분히 얘기를 들어 주세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 아무리 막무가내 할아버지라도. 자, 그럼 저는 갑니다!" 김전일은 오오츠키가 부르는 것도 모른 체하고 잽싸게 그곳을 떠났다. 9 요우코 대신 여행에서의 마지막이 될 저녁 식사 뒷정리를 도우면서 미유끼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겐모치 부인이, "뭘 모르겠다는 거지, 미유끼?" 하고 반문했다. "아, 죄송해요. 그냥 혼자 말한 거예요. 그런데 사모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즈사키 씨도, 요우코 양의 아버지도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배에 타려고 했을까요? 딸을 내버려 둔다거나, 비겁한 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 하지만 남자에게 일이란 그런 것 같아. 우리 남편도 사건이 생기면 집안일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아. 잠복을 해야 한다는 둥 하면서 사흘씩 나흘씩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자주 있어. 지난번에는 아이 입학식에도 오지 않고 일주일 동안이나 집에 안 들어오더라구.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혼이라도 해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그이가 잠복해 있는 호텔로 쳐들어 갔지. 그랬더니 텁수룩한 수염에 잠을 못자 초췌한 얼굴로 나와서는 '웬일이야?'라고 한마디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순간 왠지 그이가 멋지게 보이더라구. 집에서 빈둥빈둥대던 모습과는


너무 달랐거든. 당장이라도 쓰러질듯이 피곤해 보였는데 눈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어. 그래서 결국 나는 '수고하세요'라고만 말하고 돌아와 버렸어." 겐모치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역시 경감님이시군요..." 감동했다는 듯이 대꾸하면서 미유끼는 김전일을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걸을까. 분명 5 년 후에도 10 년 후에도 이렇게 사건을 쫓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때도 변함없이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분명 잘 지켜 줄 거야. 그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방황하지 말고 힘차게 해나가기를--. 미유끼는 그렇게 생각했다. 에필로그 오리엔탈호 선원이었던 미즈사키의 고백은 오가사와라행 여객선의 연쇄 살인 사건 이상으로 센세이셔널한 화제가 되어 매스컴을 뒤흔들었다. 매스컴 주도로 류오마루호의 선장이 남긴 항해일지 내용과 미즈사키의 증언을 토대로 3 년 전에 일어난 대형 사고의 재검증이 행해졌다. 사건은 이미 죽고 없는 다카모리 선장 외에 두 명의 관계자, 그리고 미즈사키뿐만 아니라 대기업인 동아 오리엔탈 해운의 간부들까지 말려든 일대 스캔들로 발전할 것 같은 기세였다. 동시에 류오마루 선장의 딸의 해상 복수극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경찰청 조사 1 과의 현역 경찰 겐모치가 이 사건을 해결했다 해서 이 사건은 서스펜스 드라마처럼 다루어졌다. 또한 범인인 요우코는 비극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 해결 뒤에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의 활약이 있었다는 것은 본인의 희망도 있고 해서 매스컴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어이, 요우코 양, 오랜만입니다!" 김전일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기차역 대합실에서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구치소 면회실에서 큰 소리로 떠들자, 김전일의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얼굴을 찡그리고 헛기침을 했다. "오랜만이네요, 김전일 씨." 요우코는 웃지 않았다. "기분은 어때요? 저런! 가까이서 보니까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체! 지독하게 비꼬는군요." 김전일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그럴 생각으로 한 말이 아녜요. 김전일 씨한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덕분에 미즈사키 씨가 모든 사실을 말해주었으니까요. 천국에 계신 아버지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예요." 요우코가 힘없이 미소를 짓자 김전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며 요우코에게 진지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라고요? 무슨 뜻이죠?" 요우코가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기뻐하시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이 말만은 당신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후회는 없어요. 이것은 운명이에요. 아버지가 나에게 진실을 밝혀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날 그 해안으로 나를 이끄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7 개월이나 지나서 아버지 일기가 발견되는 우연이 일어날 리가 없어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요?" "나도 그 항해일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을 읽어 봐도 당신에게 향한 메시지로 가득하더군요. 자신의 생의 보람을 버리고라도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던 아버지인데 당신이 이런 상황으로 몰리는 것을 원하셨을 리가 있을까요?" "...." "아버지는 그저 알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자신이 당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미." "그런 말을 하러 왔나요!?"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것을 당신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 받아서." 김전일은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 "미즈사키 씨가 부탁해서 가져온 겁니다. 당신이 자신을 용서한다면 그때 봉투를 열라고 하더군요." "미즈사키가요?" 김전일은 옆에 있는 직원의 허가를 받고 요우코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요우코는 희고 두꺼운 봉투를 받아서 뒷면에 써 있는 '미즈사키'라는 글씨를 거칠어진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전일은 직원이 시계를 본 것을 깨닫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참! 요우코 양한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 물어 봐야겠어요." "네? ...뭐에요?" 요우코는 그렇게 말하고 봉투 위에 손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 배의 조타실에서 미즈사키 씨가 3 년 전의 사고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요우코 양은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죠? 노래를 부른 게 아닌가요?" 김전일이 묻자 요우코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요." "역시 그렇군요. 나도 자주 그래요. 선생님께 꾸중을 들을 때라든가, 듣고 싶지 않은 설교를 들을 때요. 머릿속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 상대가 말하는 것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지요?" "...."


"요우코 양, 듣고 싶지 않았지요? 미즈사키 씨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 "...." "그 사람, 요우코 양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전해 달라고 나에게 애원하듯이 부탁했어요." "미즈사키가...?" "요우코 양이 용서해 주기만을 기다리겠대요. 그 봉투 만져 봐요. 뭔가 단단한 것이 들어 있으니까." 요우코는 김전일 말대로 봉투를 만져 보았다. "...반지?" 요우코가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미를 알겠죠?" "...." 요우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그저 무릎 위에 놓인 흰 봉투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면회 시간 끝입니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시계를 보면서 알려 주었다. "그럼 나는 가겠습니다." 일어서는 김전일을 요우코가 불렀다. "김전일 씨, 잠깐만요." "왜요?" "바다는 넓다, 넓다...라는 노래 있지요?" "아, 그 노래요?" "김전일 씨, 그 노래 1 절과 2 절 어느 쪽이 좋아요?" "예? 2 절이라면 바다에 띄우고...이죠? 음, 어느 쪽인가, 1 절 쪽이라고 할까?" "나도 어렸을 때는 그랬어요. 아버지는 2 절이 좋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요우코는 김전일을 보고 미소지었다. "--지금은 나도 2 절이 좋아요." "...분명 미즈사키 씨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a48  

[소설]명탐정 김전일 1권 수정할수 있는 경우는 단 한가지! 제가 오타를 낸것!!^^ 위에 있는 글 지우고 배포하믄 진짜 나쁜넘..ㅜㅡ 'P'로부터의 살인 예고장 ※본 텍스트 화일은 수정,삭제, 재편집하지 않았을 시에만 배포가능합니다. 지은이: 아마기...

Read more
Read more
Similar to
Popular now
Just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