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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반란 -한대희 장편추리소설 차 례 1. 프롤로그 2. 신혼 첫날밤에 생긴일 3. 비극의 서막 4. 빨간 립스틱 5. 국회의원 성기용 6. 변신 7. 고급사교클럽-왕궁 8. 플랑크톤의 비밀 9. 프랑스의 걸인들 10. 암호, 풀리다 11. 납 치 12. 호랑이 굴속으로 13. 속초에서 인천까지 14. 왕궁의 참변 15. 음모의 종말 16. 에필로그

1.프롤로그 우이동 유원지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사내는 천천히 공터를 가로질러 걸었다. 산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사내는 새삼 옷깃을 여몄다. 늦은 봄 날 씨에도 불구하고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밤 공기는 서늘한 느낌을 안겨주기에 족했다. 그러나 그 촉감은 언제나 마주해도 좋을 훈제된 생선요리처럼 신선한 감각으로 그의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더욱이 잠시 후 이루어질 비밀스런 만남을 떠올리자, 입가에는 미소마저 피어올랐다. 후. 사내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신선한 공기를 폐 깊숙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전신을 감싸는 야릇한 쾌감을 느끼며 산장으로 오르는 비탈길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벌써 여러 번 들락거려 제법 낯이 익은 좁은 골목 양켠으로 아베크족들을


유인하는 각종 휴게실과 유원지 특유의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있었다. 사내는 깃발처럼 빼곡히 들어 서 있는 간판들을 건성으로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가 찾아가는 하얀산장은 우이동 산장 골목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힐끗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던 사내는 조금씩 걸음을 빨리했다. 약속 시간도 임박했지만 무엇보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조급증이 문득 치밀면서 느긋하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면 은밀하게 이루어질 밀회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탓일까? 사내는 몰래 자신을 뒤쫓는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림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사내의 뒤를 쫓았다. 사내가 하얀산장의 담장을 꺾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림자 사내는 재빨리 가까운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든 사내는 서둘러 다이얼 버튼을 연속적으로 두드렸다. 한참만에 신호가 떨어지자 그림자는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합이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수화기 저쪽에서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빠르게 스쳐가고, 이어 탁하고 쉰 듯한 굵은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미스터 Q 다." "백합입니다. 고기가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차질은 없나?"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버그 설치도 끝났습니다." "수고가 많다. 상황이 끝나면 다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중전화부스를 빠져나온 그림자 사내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하얀 산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앞서 들어간 사내를 뒤따라 빨려들 듯 하얀 산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철희 박사가 하얀산장의 정문을 들어서자 수부를 지키던 종업원이 급히 일어서며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듯 종업원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남 박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하얀산장의 본채로 이르는 큰길을 따라 걸어가던 종업원이 주차장을 벗어나자 화단을 가로지르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화단 양켠으로 목련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고, 활짝 만개한 목련의 싱그러움이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오솔길은 그렇게 길게 나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와 어울려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남 박사는 도원경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풍류를 유난히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밀회 장소를 유독 이곳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그였다. 흥취에 젖은 남 박사는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저만치 보이는 별채 앞에서 종업원이 남 박사를 기다렸다. "여깁니다." 종업원이 10 호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별채 현관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수고했네." 팁을 건네주자 종업원이 반색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 종업원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함박 머금고 급히 돌아섰다. 종업원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남 박사는 10 호실의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방문을 밀고 방으로 들어서자 성귀희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맞아들였다. "어서 오세요." "일찍 오셨구려, 성 여사." 성 여사는 수줍은 듯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남 박사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자태는 남 박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고혹적이었다. 그녀는 짐짓 샐쭉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원망과도 같은 그리움의 표현이 다분히 함축되어 있었고 남 박사의 가슴에 참을 길 없는 정염을 불러일으켰다. 남 박사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나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한편 그 시각에 별채 10 호실과 인접한 별채 11 호실에는 도무지 생긴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암호명 백합으로 불리는 사내가 들어오고 있었다. 도어 체어록을 잠그고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방 안을 한바퀴 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양복 상의를 벗어붙인 사내는 우선 담배를 한 대 붙여 물고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태운 사내는 꽁초를 재털이에 비벼 끄고서야 천천히 준비해온 FM 라디오를 집어들었다. 여유 있던 사내의 행동이 라디오를 잡는 순간 민첩해졌다. 볼륨을 켜자 라디오에서 잡음이 새어나왔다. 백합은 재빨리 라디오의 주파수를 102.9 메가헤르츠에 맞추었다. 순간 FM 라디오에서 남녀의 거친 호흡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백합은 빙긋 미소를 흘리며 라디오를 고정시키고 한켠으로 멀찍이 물러서서 라디오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흐흥. 버그가 꽤 쓸 만한데!' 버그(bug)는 미 CIA 가 개발한 스파이들을 위한 도청전자장비이다. 손목시계, 넥타이핀, 만년필 등 어디에나 장치할 수 있는 초지향성 마이크로. 크기는 어른 손톱 만하나 성능은 세계 최고로서 백합이 별채 10 호실에 미리 장치해 둔 도청 장치였다. 그러고 보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거친 호흡 소리는 별채 10 호실의 남 박사와 성 여사가 일으키는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놀랍게도 버그는 굳게 포옹한 남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미세한 숨결마저도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었다. '미친년놈들 같으니, 더럽게 한가한 짓거리들이나 하고 있군.' 별안간 하체가 묵직해지고 자신의 가슴이 더워지는 듯하자 백합은 별채 10 호실을 향하여 불평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감질만 나게 하는 호흡 소리가 울리는 리디오를 끌어 당겨서 볼륨을 잔뜩 키웠다. 순간 두 남녀의 거친 호흡이 방을 온통 메울 듯 마치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이윽고 남 박사의 품에서 빠져나온 성 여사는 머리 매무새를 다시 고쳤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남 박사를 올려다보았다. "시장하시죠?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그녀는 윗목에 차려진 요리상을 잡아 끌었다. 순간 남 박사는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야, 난 그보다 더 급해요." 와락 성 여사를 잡아당긴 남 박사는 다시 한번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랫목에 펼쳐진 이부자리에 그녀를 쓰러뜨리고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아이참, 성급하시긴..."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며 성급하게 보채는 남 박사를 나무라면서도 싫지는 8 않은 듯 짐짓 몸짓으로 옷을 벗기는 남 박사의 손길을 거들었다. 그들의 만남은 늘상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의 첫만남은 남철희 박사의 강연회에 성귀희 여사가 우연히 참석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남박사의 강연에 매료된 성 여사는 개인적으로 남 박사를 방문하여 강연 내용에 관한 학문적인 토론과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그때를 빌미로 두 사람은 빈번한 접촉을 하기에 이르렀다. 학문 토론에서 시작된 만남이 인생 상담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사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것이 불륜인 줄 자각하면서도 남 박사는 주체할 길 없는 강렬한 흡인력으로 성 여사에게 매료되어갔다. 그것은 성 여사도 매한가지였다. 숙명. 그들에게, 두 사람의 인연과 만남은 그렇게 귀납되어졌고 그들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토록 늦게 만나게 된 인연을 한탄하면서도 현실의 벽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이렇게 불륜은 시작되었다. 비록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만남이지만 그들은 뜨겁게 서로의 욕구를 불태우며 새로운 이성에 대한 탐닉에 열중했다. 엄연한 불장난을 저지르면서도 그들은 새로 생성된 이성 관계에 환희를 느꼈고,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기폭제였으며, 그들의 삶에 있어 비밀스레 간직한 기쁨 중의 하나였다. 어느틈에 알몸이 된 그들은 격정의 순간을 향해 치달았다. "아..." 성 여사가 탄성을 발하며 남 박사의 등을 휘어감은 팔에 힘을 가해 옥죄었다. 남 박사는 격렬하게 성 여사를 향해 파고 들었고 그녀의 손톱이 날을 세워 남 박사의 어깨를 파고드는 순간, 남 박사는 온 몸이 폭발하는 듯한 격정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환희의 절정을 헤매는 듯한 그녀의 안색이 별안간 창백해지더니 기성을 발하며 숨을 끅끅 몰아세웠다. 너무나 엉뚱하고 돌연한 사태에 당황한 남 박사는 급히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이봐요. 성 여사 무슨 일이오? 왜 그러는거요?" "가 가슴이..." "서 성 여사! 정신 차려요. 성 여사..." 그러나 그걸로 그만이었다. 안간힘을 쓰며 가슴을 쥐어뜯던 그녀의 팔이 축 늘어지면서 그녀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한 남 박사는 넋이 나가버린 듯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복상사()라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복하사()라는 말은 또 금시초문이다. 남 박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돌연한 사황에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쩐다? 이대로 달아나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경찰을 불렀다가는...안 돼! 그렇게 되면 나는 끝장이다. 안락한 가정이 파멸되는 건 물론 사회적 지위와 체면은 또 어떻게 되나? 안돼! 그럴 순 없어!' 남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 박사는 그렇게 다짐을 했다. 달아나자, 그러나 그나마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파렴치한 행위 같아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일을... 도대체 이 일을 어떡하나... 남 박사가 뚜렷한 수습책을 세울 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따르르릉...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이 남 박사를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말았다. '누굴까? 누가 이 시간에,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어쩐다지? 이걸 받아야 하나?' 끊임없이 울어대는 전화벨이, 혼이 반쯤은 나가버린 남 박사의 의식을 더욱 혼돈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그래 전화를 받자, 전화를 안 받는다면 상대방에게 더욱 의심을 살지 모를 테니까. 그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 여보세요." "남철희 박사님이십니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사내의 싸늘한 목소리에 기겁을 한 남 박사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한 그였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대는 데는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누, 누구요, 댁은?" "너무 당황하지 마십시오, 박사님. 저는 박사님을 잘 알고 있고 박사님을 돕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사내의 음성은 냉정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점이 남 박사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요? 댁은 뉘시요?" "박사님, 진정하십시오. 저는 박사님의 바로 옆방인 별채 11 호실에 투숙해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 양해해주십시오. 저는 좀전에 박사님이 그 방으로 들어가시는 걸 목격했고 밖에서 박사님을 뵈려고 서성대다가 호기심 때문에 방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뭐요?" "하하...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으으음..." 남 박사는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해 내었다. 이제 끝장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하면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박사님,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부터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박사님이 여기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박사님을 아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자, 지금부터 그 방에서 박사님의 흔적을 지우십시오. Q 박사님의 손길이 닿은 곳은 빠짐없이 손수건으로 지문을 닦아내십시오. 그리고 박사님의 소지품을 빠뜨리지 말고 챙겨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세요. 이 산장의 종업원은 제가 주물러서 입을 막아놓겠습니다." "고, 고맙소. 근데 댁은 뉘십니까?" "전 백합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정도만 기억해두십시오. 훗날 기회가 닿는다면 박사님께 인사를 드릴 날도 있을 겁니다. 자,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아, 알겠소." 전화를 끊고 남 박사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실낱 같은 희망이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사내가 시키는 대로 작업을 서둘렀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그리 많은 시간은 소요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벌거벗은 그녀의 알몸 위로 그녀의 옷가지들을 가만히 덮어 그녀의 치부를 가려주었다. 그리고 깊은 죄의식을 느끼며 그녀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버린 그녀의 사체를 묵묵히 내려다 보던 남 박사는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조용히 별채를 빠져 나갔다.

2. 신혼 첫날밤에 생긴일 향수를 전신에 조금만 바릅니다. 그러나 유방처럼 남성이 키스하는 장소에는 바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혀에 쓴 맛을 주게 됩니다. 암내가 나면 그곳에 향수를 뿌리도록 합시다. 신부의 누드에는 오늘 밤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아름답고 귀여운 팬티를 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위에는 앞이 열리는 네글리제를 입도록 하는 게 좋습니다. 팬티는 여행중에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신랑 몰래 새것으로 갈아 입어야 하며 디자인이나 무늬가 다른 것을 준비하는 것도 신랑에 대한 마음가짐이라 것입니다. 네글리제는 지나치게 투명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고상하게 보입니다." 윤정님()은 들고 있던 책장을 와락 덮어버렸다. 신혼의 지혜라는 커다란 활자가 그녀의 시야로 성큼 빨려들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녀는 신혼의 지혜를 탁자 위에 동댕이치고 말았다. 신혼 초야를 치러보지 못한 여성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정님은 신혼 초야의 공포와 불안 때문에 유난을 떨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소연하거나 아무 허리띠나 붙들고 앉아 물어볼 수도 없는 문제여서 더욱 그랬다. 결국 두 달 전에 동네 서점에서 구입한 신혼의 지혜를 통하여 그녀는 신혼 초야의 불안을 약간은 해소할 수 있었다. 책자를 통독한 후 신혼의 에티켓을 깡그리 외우다시피 하며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그녀였다. 정님은 화장대의 거울 속에 자신의 전신을 비추어 보았다. 네글리제 속에는 정님이 25 년을 고이 간직해온 탄력 있는 몸매가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자태를 풍기며 숨어 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입가로 흘리던 정님은 이내 침대 모퉁이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정작 그녀의 네글리제를 열어주어야 할 신랑은 여태 객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띠띠... 뛰... 손목시계 알람은 벌써 밤 열한 시를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얼핏 입가로 스치는 짜증을 한숨으로 토해내며 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창 밖에 펼쳐진 제주도 중문단지의 하야비치호텔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풍광은 짙게 내겨깔린 어둠에 차단당한 채 그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는 새까만 암흑만이 혓바닥을 넘실거리며 창가를 더듬고 있는 듯했다. 문득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왈칵 치밀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에 정님은 커튼으로 창 밖의 어둠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고 커튼 구석구석을 잘 여민 후에야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것은 정말 눈꼽만치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였다. 그녀가 몇 번씩 읽어서 달달 외워버릴 정도가 된 신혼의 지혜 속에도 이런


상황에서 신부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드바이스는 전혀 없었다. 정님은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도무지 울어댈 줄을 모르는 수화기를 들어올려 보았지만 딱히 전화를 걸어 볼 만한 곳도 없었고 또 무책임한 신랑을 수배하자면 어디로 전화를 넣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도통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딱한 일을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인가. 막연한 상념이 그녀의 조바심을 꾸욱 누르고 말았다. 정님은 결국 침대 위에 몸을 길게 눕히고 말았다. '남자는 정말 알 수 없는 동물이야. 신혼 첫날밤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담. 아무리 친구가 좋기로서니...' 그러니까 그녀의 신랑 우춘구()가 잠깐 친구를 만난다며 객실을 빠져 나간 것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서울에서 예약해두었던 하야비치호텔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5012 호실에 여장을 푼 것이 오후 다섯 시. 온통 야자수로 장식된 그릴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식탁에 앉아 캄보밴드의 은은한 생음악을 감상하며 분위기 있는 저녁 식사를 마친 것이 여섯시경, 그리고 호텔 뒤쪽에 면해 있는 해변을 잠시 거닐다가 곧장 객실로 돌아온 그들이었다. "오늘 정말 힘들었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는 게 어떨까?" 엉뚱하게 그런 제안을 먼저 했던 것은 신랑이었다. 객실로 돌아온 후 함께 목욕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우겨대는 신랑을 간신히 달래놓고 욕실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샤워를 틀어놓고 정성껏 몸을 닦아내던 그녀는 어렴풋하게 전화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신랑의 난처한 듯 군지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신랑은 욕실을 노크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머, 이 시간에요?" "잠깐이면 될 거야. 급한 일이라구 친구가 여기까지 찾아왔어." 신랑은 그렇게 허둥지둥 방을 빠져 나갔다. 어떻게 하면 첫날밤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만 골똘하던 그녀는 허둥대는 신랑의 말투에서 풍겼던 이상한 낌새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샤워를 마친 후 미리 준비해온 산뜻한 네글리제를 걸친 그녀는 가벼운 화장으로 얼굴을 마무리하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녀가 해도 너무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아홉 시 뉴스센터가 끝난 후인 열 시경이었다. 초조하게 안달하면서 주말의 명화를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텔레비전을 기웃거리던 그녀는 결국 옷을 갈아입고 호텔 내부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경우에요? 난 춘구 씨가 이렇게 매너가 없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평생을 함께 보내겠어요? 난 내일 첫 비행기로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벼르고 별렀다. 신랑만 찾아내면 한바탕 쏘아붙인 후 폭탄 선언을 퍼부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일까? 그릴에도, 바에도, 커피숍에서도, 하다 못해 나이트 클럽에서도 신랑은커녕 그 친구라는 작자까지 그들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정님은 다급한 마음에 폭탄 선언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각 업소의 웨이터들을 붙들고 남편의 인상 착의를 대며 언제 들렀는가 탐문에 나섰다. 그러나 웨이터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에는 그런 사람들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호텔 내부에서 신랑의 흔적이 사라진 걸 보면 신랑과 친구는 호텔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중문관광단지라고 하지만 호텔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면 허허벌판이다. 아무리 다급한 그녀였지만 이런 야밤에, 깊은 어둠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허허벌판을 헤매고 다닐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시 객실로 돌아온 그녀는 한동안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어디 계세요 춘구 씨, 제발...' 불쑥 불쑥 치미는 불길한 예감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이제라도 돌아만 와준다면 폭탄 선언이 아니라 열렬한 키스를 퍼부을 심정마저 되어 있는 그녀였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이 흘러도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정님은 애꿎은 전화통만 쏘아보면서 방 안을 거닐었다. 혹시나, 당장이라도 신랑이 들어올까 싶어 네글리제 차림으로 서성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처량해 보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당당한 몸매가 지금은 비곗덩이처럼 비참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 앉히려고 별의별 공상을 다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불안정한 쪽으로 기울어갔다. 남자란 동물은 원래 그래. 여자들 입장은 눈꼽만치도 생각치 않는다니까. 이건 시도 때도 없어, 모두 자기들 편리한 대로 갖다 붙이고 이유를 둘러대는 거야. 흐흥, 아무튼 돼먹지 못한 짐승이야. 늑대, 너구리, 멍청이들. 언젠가 일찍 시집을 갔던 친구 하나가 퍼부어대는 제 남편의 험담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술을 한 잔 마시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수 있잖아. 오죽 급한 일이면 친구라는 사람이 사흘이라는 신혼 여행 기간을 참지 못하고 이곳까지 뒤쫓아왔을까?' 정님은 남편을 이해한다기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서글픔은 횬막변했다가 불안은 이내 분노로


변해갔다. 그녀의 감정이 격정을 향해 치달리려고 할 즈음 딩동. 객실의 부저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그녀의 격정은 숨가쁘게 환희로 교차했고, 그녀는 쏜살같이 현관으로 뛰쳐 나갔다. "춘구 씨?" 그러나, 찰칵하고 객실 도어가 열렸을 때 우악스럽게 밀치고 들어선 것은 정님의 남편 우춘구가 아니라 네 사람의 낯선 사내였다. "누, 누구세요? 당신들은..."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우악스런 손아귀가 그녀의 입을 봉해 버렸다. 그리고 문이 육중하게 닫히면서 객실 내부는 바깥 세계와 차단되고 말았다. 순간 정님은 그렇게 느꼈다. 사내의 손을 빠져나와 호텔 복도로 달아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정님은 사력을 다해 사내의 손을 물어 뜯으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정님의 연약한 힘으로는 사내들의 억센 완력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쌍년이 어딜 대들어?" 그녀는 오히려 개처럼 질질 끌려가 침대 위에 팽개쳐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내는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따귀를 서너 차례 맞고나자 그녀의 얼굴을 피투성이가 되었고 정님은 더이상 반항할 기력마저 잃고 말았다. 너무 겁에 질려 울음마저 미처 나오지 않았다. "사, 사려주세요, 제발..."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입술로 간신히 애원을 했다. "살고 싶으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굴어! 알겠어?" 사내는 그제서야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정님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님의 네글리제가 거칠게 찢겨나갔다. 순간 그녀는 기절할 듯 놀랐다. "아, 안돼요. 돈을 드릴게요. 달라는


대로 뭐든지 다 드릴게요. 제발, 예?" "이런 개 같은 년이! 아직 주둥일 나불거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함께 사내의 주먹이 다시 날아 들었다. 그러나 사내들의 의도를 눈치챈 정님은 발악하듯 B 몸부림을 쳐댔다. 뜻밖에도 저항이 완강하다는 듯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의 눈심지가 꿈틀 솟아 올랐다. "안되겠어! 둘이서 이 년을 꼼짝 못하도록 붙들어!" 그리고 사내는 서둘러 바지를 벗어 내렸다. 정님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항을 했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그녀의 몸은 사슬에 조이듯 사내들의 억센 힘에 얽매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베개 때문에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고 사내의 억센 손아귀에 잡힌 양팔이 자율를 잃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치부를 가리고 있던 헝겊조각마저 찢겨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거의 퓰탔하고 말았다. 여덟 개의 흉측한 눈동자가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자신의 나신을 내려다 본다고 생가하자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그녀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순간, 하체를 관통하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몸 속으로 밀려들어오면서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악!" 그녀는 다시 혼절을 거듭하고 말았다. '아, 이건 아냐! 이래선 안 돼 제발, 제발 꿈이었으면...'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정님은 벅찬 행복감에 들떠 있었다. 마치 솜털 같은 양떼구름이 기창 밖으로 눈부시게 펼쳐지자 정님은 가벼운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어머나, 저 구름들 좀 봐요. 춘구 씨, 구름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지 정말 몰랐어요."


끝없이 펼쳐진 구름계곡의 장관이 마치 자신들 앞에 펼쳐진 미래인 양 정님은 감탄을 연발했고 춘구는 은근히 부추기며 정님의 감동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정님은 들뜬 마음을 도무지 억제할 수 없었다. 사실 난생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 대한 감격보다는 하나의 가정을 꾸미기 위해 치러야 했던 그 지긋지긋하고 수선스러웠던 격식을 다 마쳤다는 안도감, 그리고 공항 로비까지 따라 나섰던 극성스런 떨거지들마저 떨쳐 버리고 드디어 단둘의 허니문으로 접어들었다는 포근함이 그녀를 그렇게 들뜨게 했는지도 몰랐다. 기창 밖으로 펼쳐진 웅장한 구름 계곡의 장관은 한폭의 서사시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으로 정님의 시야로 달려 들었고, 그 정경은 그녀의 감정을 더욱 증폭시킬 듯했다. 그때 춘구의 넓적한 손이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꼬옥 감싸왔다. 따뜻한 체온이 전달되면서 그녀의 상념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이 사람의 여자가 된다. 오늘로서 25 년간이나 고이 간직해왔던 순결을 이 사람에게 바치고 완전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모든 고통을 참아가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일심 동체가 되어 백년 해로를 하며 희로애락을 함께 할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을 했다. 춘구는 환한 웃음을 한입 가득 물고 그녀를 그윽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을 꼬옥 감싸쥐었다. '행복합니다. 이 기쁨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오로지 당신에게 감사 드립니다.' 정님은 미처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을 수줍은 미소로 얼핏 흘려주었다. 그는 움켜쥔 그녀의 손에 가만히 힘을 보태어 알았다는 시늉을 지어보였다. 정님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웃음에 답해 주었다.


그녀의 미소에는 티끌만한 가식도 없는 행복이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년이 몸매 하나는 그저 그만인데? 일품이야." "그 자식이 여자는 제대로 골랐어! 사내 여럿 잡아먹을 년이야." "그나저나 이대로 죽여버리긴 아까운걸." 까마득한 의식 저쪽에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짧은 찰나의 본능적인 경각심이 그녀의 무의식 한가운데로 파고들며 온몸의 세포를 일깨우고 있었다. 안 돼, 이대로 죽어선 안 돼, 살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막연한 목적도 없이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였다. 세번째의 사내를 거쳐 지금은 네번째의 사내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연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정님은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잠깐만에 지나가버린 듯 이제는 아무런 감각조차 없었고 사내의 단조로운 반복 운동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아픔을 새기며 기억될 뿐이었다. 이윽고 세차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네번째 사내마저 그녀의 배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는 일말의 안도와 함께 그녀의 의식은 또 다시 끝을 모르는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정님의 어렴풋한 의식이 다시 깨어난 것은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전달되어 ���는 으스스한 한기 때문이었다. 반쯤 젖혀진 커튼 사이로 어렴풋한 여명이 빠져들어와 실내를 헤집고 있었다.


제발 꿈이었으면, 어젯밤의 그 악몽이 제발 꿈이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것은 현실로서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두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나왔다. 도무지 형언할 길 없는 분노가 그녀의 가슴을 북받치게 하고 있어 그 눈물을 제어할 능력을 그녀는 가지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온몸이 기진할 듯한 탈진을 느끼면서 정님은 차츰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자각이 그녀의 이성을 일깨우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는 마음을 추스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악!" 순간 그녀는 온몸을 찔린 듯한 아픔 때문에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몽둥이로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이 온몸을 울리면서 도무지 움직일 수 조차 없을 듯했다. 정님은 고통을 억누르며 거울에 비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거울에 비쳐진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는 하혈로 인한 핏자국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고 침대 시트 역시 핏자국으로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 나동그라져 있는 그녀 혼자뿐이었고, 남편은 물론 어젯밤의 그 사내들도 흔적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문득 실내가 황당그레하게 넓은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녀는 헤아릴 길이 없는 고독함에 휩사여 몸을 떨었다. 메말라 버린것만 같던 눈물이 또다시 주르르 쏟아졌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더 이상 어찌해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하면서 그녀를 지금껏 지탱시켜준 이성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객실 도어를 요란하게 "두들겼다. 순간 섬광처럼 치미는 한가닥 기대를 안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뼈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어닥치면서 그녀는 침대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님은 사력을 다하여 몸을 일으켰다. 구원을 청해야 한다. 사람 살려요. 가느다란 의식의 한쪽 끝을 부여잡고 그녀는 감각이 없는 하체를 끌며 객실 도어를 향해 바닥을 기었다. 객실 도어를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요란스러워졌다. 사력을 다해 기어간 정님이 도어 손잡이 쪽으로 팔을 뻗는 순간, 별안간 문이 열리고 육중한 힘이 밀어닥치며 그녀를 넘어뜨렸다. 아, 실낱처럼 이어져 있던 정님의 가느다란 의식은 다시금 깊은 심연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흡사 나선형 우주선이나 돔을 연상시키는 제주도의 명물 하야비치호텔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정확하게 새벽 세 시경이었다. 호텔의 9 층 복도에서 서른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사내가 홀 중앙으로 투신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증언했다. 9 층 복도에서 호텔의 중앙 로비인 1 층의 코스모포리탄 홀로 뛰어내린 청년은 두개골이 파열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신혼 부부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호텔의 특성 그대로 깊은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홀의 구석에서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몇 쌍의 남녀들은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은근한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던 그들의 눈 앞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떨어져 피를 튀기며 죽어갔으니 혼이 반쯤은 달아날 수밖에.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던 사내의 다리가 쭉 뻗으며 동작이 멎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호텔은 아수라장 속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고 달려왔던 사람들도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고개를 돌리거나 입을 막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난생 처음 당하는 봉변에 당황하긴 호텔측도 매한가지였다. 야간 당직인 Q 지배인이 뛰어나와 우왕좌왕하는 종업원들을 지휘하여 손님들을 객실로 들여보내고 장내를 정리한 후에야 미처 경찰에 연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제주도 경찰국의 육중우() 형사가 현장에 당도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다 되어서였다. 단잠을 자다 말고 호출당한 육 형사는 손수 승용차의 핸들을 잡고 5.16 도로를 달려오면서 연신 불평을 털어놓았다. 어떤 시러베 자식이 이 시간에 죽어 자빠져서 남의 잠을 깨우고 지랄이야, 그가 터뜨린 불만의 요지는 대충 그 정도였다. 게다가 그까짓 투신 자살 소동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도경찰국으로 지원을 요청한 서귀포 경찰서의 담당자들에 대한 짜증도 불만 속에 함께 묻어 있었다. 하긴, 제주도의 최고급 특급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이다보니 그들이 수선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 싶었다. 멀리 성산일출봉 쪽에서 어렴풋이 여명이 밀려올 즈음에야 그는 호텔에 닿을 수 있었다. 육중한 거구를 휘두르며 현장에 도착한 육중우형사는 거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현장의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초조하게 지원을 기다렸던 서귀포팀은 역시라는 감탄을 연발했다. 육중우형사는 변사체의 정황을 채취하고 사진을 찍은 후 대기하고 있는 앰블런스에 사체를 실어 보내고 현장의 목격자들을 불러 당시의 정황을 듣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변사체의 신원은 쉽게 밝혀졌다. 이름은 우춘구, 당 34 세, 프론트에서 주민등록증과 숙박카드를 대조하여 5012 호 투숙객임을 확인한 순간 그는 한달음에 5 층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 요란을 떤 끝에 방문은 열렸고 참혹한 모습의


윤정님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육중우 형사는 대뜸 사태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잠시 아연해하던 그는 신속하게 다음 행동으로 옮겼다. 벌거벗은 채 의식을 잃은 윤정님의 몸에, 눈에 뜨이는 옷가지들을 대충 걸치게 하고 즉각 병원으로 후송을 시킨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방 안을 훑어 보았다. 방 안의 풍경은 한마디로 살풍경하고 난잡했다. 그녀의 나이트 가운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고 침대자락 여기저기에 묻은 핏자국은 그냥 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방 안의 정경은 어젯밤의 격전을 적나라하개 드러내 놓고 있었다. 윤정님이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형광등 불빛에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하얀색으로 둘러싸인 병실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묵묵히 병상을 지키는 뚱뚱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셨습니까?" 사내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점퍼 R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보였다. 아마 경찰임을 확인시킬 요량인가 보았다. 순간 그녀는 왈칵 치미는 설움을 억제하느라 돌아눕고 말았다. 제발 꿈이길 바랐는데, 그 모든 게 악몽이길 간절히 빌었는데, 그녀는 너무나 부끄럽고 아득한 현실 앞에 몸을 오두마니 웅크린 채 떨었다. "부인, 말씀을 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인이라니,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담은 형사가 마치 딴 세계에서 온 사람인 듯한 착각마저 느끼는 그녀였다. 병실에는 잠시 침묵만이 흘렀다. 육중우 형사는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그녀로부터 들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을 듯했다. 더 이상 그녀의 병상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였다. 온통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그녀를 도와주는 길은 조용히 혼자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일 뿐일 듯 싶었다. 그러나 육중우 형사는 다시금 주춤 몸을 돌렸다. 어쩐다? 지금 이 말을 전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결국은 알아야 할 일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마음을 다잡고 어렵게 입을 뗐다. "부인, 경황이 없으실줄 압니다만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되시는 우춘구 씨의 죽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육 형사는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도무지 꼼짝 않을 것 객그녀가 어느 틈에 벌떡 일어나 잡아 먹을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이가 죽다뇨?" "모르고 계셨습니까?" "말씀해 주세요. 그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고정하십시오. 부인..." "믿을 수 없어요! 그이가 죽다니, 왜 갑자기...?" 그녀는 거의 발광하듯 악을 써댔다. 그리고 육 형사의 소매를 붙들고 울부짖었다. 제 정신이 아닌 듯 그녀의 눈자위는 이미 풀어지고 있었고 입에는 거품이 물려 있었다. 육 형사가 말을 잘못 꺼낸 걸 깨달았을 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럴리가 없어요. 그이는 죽지 않아요. 그이는 살아 있어요?" 육 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인, 우춘구 씨는 어제 새벽 세시경, 9 층 복도에서 뛰어내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풀어지던 그녀의 눈동자가 주춤 한곳으로 모아지는 듯했다. "아!" 짤막한 외마디 신음을 내밴으며 그녀는


또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윤정님은 그로부터 열흘 이상을 더 병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육중우 형사는 그녀로부터의 진술 청취를 아예 포기하고 그녀의 쾌유만을 비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난처한 그의 입장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육 형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급거 날아온 정님의 모친 역시 딸이 겪은 엄청난 불행을 마치 당신 자신이 겪은 양 통곡과 혼절을 거듭하며 마구 소동을 벌였던 것이다. 가족들의 그런 무분별이 환자에게 엄청나게 해롭다는 의사의 경고가 떨어지면서 모친의 발작은 가까스로 진정되었지만 육 형사로선 크나큰 홍역을 치른 셈이었다. 열흘 가량이 경과하자 윤정님의 증세는 당장이라도 퇴원을 할 수 있을 만큼 몰라보게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때 정신병 초기 증세까지 번졌던 그녀의 병세가 놀라울 정도의 빠른 회복을 보이자 담당 의사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남들 같으면 벌써 정신병원을 들락거렸어야 할 엄청난 시련을 꿋꿋이 이겨낸 걸로 보아 그녀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듯하다는 느낌마저 피력했다. 그러나 윤정님은 몰라보게 말수가 적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혹시 벙어리가 되지나 않을까, 그녀의 모친이 지레 겁을 먹을 만큼 그녀는 입을 벌리기 싫어했다. 어쩌면 집단 폭행을 당했던 첫날밤의 끔찍한 기억이 강렬한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녀의 의식 체계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딸 아이의 그런 모습이 애처로워 모친은 그녀의 입을 열어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살을 했다는구나 우서방이, 어이구 미련퉁이 같으니, 사내가 불알을 찼으면 그 값은 해야지, 자기 여편네가 그 꼴이 됐으면 어떻게든 위로를 해줄 생각은 않고 죄없는 지 목숨을 왜 끊어, 끊길." 모친은 육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수사결과를 넋두리처럼 늘어 놓았다. 육 형사는 우춘구의 죽음을 자살로 처리하여 수사를 종결시킨 모양이었다. 즉 새신랑 우춘구가 친구를 만나러 외출한 사이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침입하여 혼자 객실에 남아 있는 신부를 집단으로 윤간하였다. 그 후에 객실로 돌아왔던 신랑 우춘구는 그 절망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았고 심적인 갈등을 일으켜 번민끝에 투신자살이라는 코스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육중우 형사의 추리는 대충 이런 정도였고 수사보고서의 결론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어떡하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니 기운을 내. 아, 용케 액땜한 걸로 치면 되잖니 응? 미친 개한테 한 번 물린 셈치고 잊어버리자, 정님아." ""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게야. 차라리 이런 일이 일찍 벌어졌던 게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렴. 태평양에 배 한척 지나갔다고 어디 흔적이라도 남니? 어차피 불가항력이었던 걸. 사람의 힘으로, 그것도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일이잖니. 더 이상 마음에 두지말어 응? 정님아." 모친이 온갖 표현력을 다 구사하며 그녀를 구슬렀지만 정님은 꿈쩍도 하지 안았다. 그저 멍하니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먼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심하게 흘러가는 흰구름에 정신을 뺏기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의 유해를 안고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정님에게 시련은 계속되었다. 제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오명이 꼬리표처럼 그녀를 따라 다녔던 것이다. 특히 시집 식구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냉대하는가 하면 시집쪽의 먼 피붙이들은 대놓고 욕을 하기도 했다. 시집 쪽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장례식장에 따라나선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면박을 퍼부어댔다. "흥, 제 남편 잡아먹은 년이 낯짝도 두껍지,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저 흉물스런 것 좀 봐, 꼴에 우는 시늉이라도 하면 점수라도 더 줄 줄 알았나 보지?" 그러나 정님은 꾹꾹 참았다. 그 모든 험담도 결국 그녀가 감수해야 할 업보라는 생각이 그녀의 의식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차가운 냉대 속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시집 식구들 틈바구니에서 떨어져 나온 정님은 그들이 신방으로 마련해 두었던 압구정동의 전세 아파트로 돌아왔다. 모친이 친정으로 돌아가자고 아무리 구슬러 보아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드넓은 서울 땅 어디에도 그녀의 육신을 편히 눕힐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라고 그녀는 자각하고 있었다. 야멸찬 질타를 퍼붓든, 위로와 노정을 베풀든 간에 지금의 그녀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모든 시선들이 다 귀찮았다. 나는 이미 우씨 집안 사람이야. 비록 시댁에서 날 내치고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신만은 당당하게 해야 돼. 그녀는 그렇게라도 처신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납득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자기 위안이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압구정동의 아파트에 칩거한 그녀의 생활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철저히 외부와의 단절을 고집한 그녀의 애원 때문에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그녀는 고립무원 속에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 한끼라도 거르지 않고 제때 먹을 건 찾아 먹는지 궁금하고 딸의 처지가 안쓰러워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친정어머니의 전화만이 유일하게 열려있는 외부와의 통로였다. 그러나 그 전화마저 짜증스러워하는 그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폐쇄적인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녀는 날로 여위어만 갔다.


이따금씩 가뭄에 콩나듯이 생각날 적마다 간간이 끼니를 이어가는 데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 스스로 생가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참으로 끈질긴 목숨이다. 그녀가 그런 자각을 시작한 것은 압구정동의 아파트에 칩거한 지 한 달쯤 되던 날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밤이면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신혼초야의 그 끔찍했던 상황들은 그녀의 뇌리 속에 활동사진처럼 박힌 채 도무지 지워질 줄 몰랐고 끊임없이 새롭게 상영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헛소리와 비명을 마구 질러대었고 악몽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곤 했다. 차라리 죽어 버리자. 제주도의 도립병원에서부터 부슬비를 맞으며 치렀던 남편의 장례식 날,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죽음이라는 낱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고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소박한 소망을 한 번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죽어버리겠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어 보았지만 그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모진게 목숨이라지 않는가. 그런데 무작정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런 무의미한 죽음이 과연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회의가 끊임없이 그녀를 일깨웠다. 그리고 막상 죽음을 결행한다면, 남편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영원히 면할 수 없게 된다는 자각이 늘상 실행 일보직전의 그녀를 번번히 붙들어 세우곤 했던 것이다. 또한 한 발 먼저 저 세상에 가 있는 남편 우춘구도 그녀의 죽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그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 그이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 날 밤 침입한 괴한들의 대화를 엿듣고 난 후부터 정님은 남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 그것은 너무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음모 아래 빚어진 엄청난


사건이었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 방관할 수는 없다. 남편에게 씌워진 자살이라는 멍에를 벗겨주자, 남편은 어떤 험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자살을 시도할 만큼 어리석거나 나약한 남자는 결코 아니다. 차츰 그녀는 남편에게 씌워졌던 그 굴레를 벗겨주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듯한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신념을 지니게 되면서 그녀의 생활은 조금씩 생기를 띠었고 활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엄마, 그동안 걱정만 끼쳐서 미안해." 짧은 시간 동안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던 떠올리며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모친은 마치 딸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온 양 펄쩍 뛰며 반색을 했다. "그래, 드디어 마음을 잡았구나. 정말 잘 생각했다. 정님아, 당장이라도 네 얼굴을 보고 싶다. 네가 이리로 올래? 아니면 내가 그리로 찾아가련?" "아니야 엄마, 좀 더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어. 마음이 정리되면 내가 찾아갈게." "그래. 그래라, 네 목소리가 밝으니까 내가 살맛이 난다." 아쉽긴 했지만 모친은 그 정도로도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그날밤. 정님은 한 달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이따금씩 아파트 단지내의 슈퍼마켓에만 걸음을 했던 그녀가 단지 밖으로 외출한 것은 아파트에 틀어박힌 후로는 처음이었다. 백화점의 휘황한 네온사인과 카페 골목의 아기자기한 초롱등은 그녀의 눈을 크게 자극했다. 화려하고 밝고 활력에 찬 거리의 풍경들은 아름답고 신선한 충격이 되어 그녀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예전에는 일상적으로 보아 넘겼던 거리의 풍물들이 오늘따라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고, 휘황한 네온사인은 그녀의 허전한 가슴을 채워주기라도 할 듯 밝게


빛났다. 그녀는 압구정동의 밤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약동하는 거리의 활력들을 그녀는 생명알을 줍듯 하나하나 가슴 속에 챙겼다. 그래, 외출하길 정말 잘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진상을 밝혀야 해. 나는 왜 저 사람들처럼 활짝 웃으며 밝고 활기있게 살아갈 수 없게 되었는지, 남편은 왜, 무엇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그 모든 사실들을 만천하에 밝혀야만 떳떳하게 저 사람들 틈에 끼어들 수 있는 거야. 문득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휘황한 네온사인이 그녀의 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겨울 나그네> 그녀는 옥호를 입 속으로 가볍게 뇌어 보았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자신의 처지와 일맥상통하는 뉘앙스를 그 상호는 풍기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어차피 이 추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가 여한없이 떠나야 하지 않는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끌려들어가듯 겨울 나그네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 온화한 분위기가 성큼 그녀를 맞아들였다. 삭막한 분위기의 상호와는 달리 실내는 아늑한 분위기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우아하고 웅장한 실내장식은 모처럼 그녀에게 안혼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스탠드 한쪽에 자리를 잡은 정님은 하이볼을 한잔 시켜놓고 상념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제부터 어쩐다? 정님은 앞으로 그녀가 해 나가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첫번째 할 일은 남편 우춘구의 죽음에 대한 사인을 재규명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그 사건을 맡아 처리했던 제주도경의 뚱뚱한 형사에게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제주도경의 육중우형사에게 보낼 편지의 머릿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윤정님은 제주도경 강력계의 육중우 형사 앞으로 두툼한 봉투의 등기속달을 발송했다. 그 내용물 속에는 그녀가 당했던 참담한 심정과 소감들, 그녀에게 베풀어준 육 형사의 온정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남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는 그녀의 확신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그 편지를 쓰느라 그녀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했다. 편지지의 공간을 채워 나가는 하나하나의 글씨들에는 그 동안 당했던 그녀의 고통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녀는 육 형사가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재수사에 착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육 형사의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며 들뜬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녀의 그런 기다림은 아랑곳없이 육 형사로부터 답장이 날아온것은 거의 보름이 다 되어서였다. 윤정님 씨. 일찍 답신을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한 양해부터 구해야 할 것 같군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각종 사건서류들과 씨름을 하다보니 마음과는 달리 답신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무엇보다 윤정님 씨가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나 정상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으신 듯한 느낌을 받아 우선 기쁜 마음부터 앞서는군요. 윤정님 씨. 저는 누구보다 윤정님 씨의 입장을 이해하고 윤정님 씨의 편에서 윤정님 씨에게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춘구 씨 사건에 대한 윤정님 씨의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음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윤정님 씨는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남다른 견해나 시각이 물론


있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저의 입장에서 사건을 살펴볼 때 윤정님 씨께서 주장하신 우춘구 씨의 타살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나 물증은 거의 발견할 수 없으므로 우춘구 씨의 자살은 타당성 있는 결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드리는 바입니다. 아무쪼록 악몽과 같은 과거는 훌훌 떨쳐 버리시고 새로운 삶을 알차게 꾸려 나가시길 간절히 빕니다. 두서없는 난필 줄입니다 총총. - 제주도에서 육중우 드림 윤정님은 편지를 와락 구겨서 Q 던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내가 바랐던 건 이게 아닌데. 윤정님은 새롭게 엄습하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투박한 체취가 물씬 풍기는 육중우형사의 답신은 윤정님에게 그야말로 절망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실낱같은 희망, 가느다란 가능성마저 묵살당하고 짓밟힌 그녀는 참담한 심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입술을 앙다물었다.

3. 비극의 서막 우이동의 하얀산장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한 시경상황실은 현장부근을 순찰중인 패트롤카를 호출하는 한편, 경찰서인 북부경찰서 상황실로 긴급무전을 때렸다. 재수없게도 사건현장과 가장 인접한 곳에서 순찰을 돌고 있었던 죄로 현장보존 책임을 떠맡았던 북부경찰서 외근계 5 호 패트롤의 김준복 순경은 현장을 목격한 후 재수 없다는 느낌을 그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우선 사건현장인 하얀산장의 독특한 풍치도 그의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벌거벗은 여자의 변사체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북부경찰서 외근계 소속으로 5 호 패트롤카를 담당하고 있는 그에게 오늘


아침에 할당된 임무는 우이동 파출소에서 신병을 확보중인 잡범들을 본서로 이송하는 일이었다. 늘상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제처럼 공휴일이 겹치는 날은 유원지를 관할하는 우이동 파출소의 특성 그대로 파출소 보호실은 취객을 비롯한 잡범들로 넘쳐나게 마련이었고 일손을 거들기 위해 가끔씩 잡범 이송은 그의 몫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경우는 달랐다. 그가 잡범들을 싣고 본서로 막 출발하려는 찰라, 상활실로부터 그에게 새로운 지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부랴부랴 잡범들을 택시에 옮겨 태워 본서로 실어보내고 하얀산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비교적 원상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우선 사건현장 자체가 사람의 내왕이나 발길이 잦지 않는 한적한 산장의 별채라는 지역적 이유도 있었지만 외부에 흉한 소문이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리는 유흥업소의 특성이 잘 맞아 떨어진 듯했다. 사건현장인 별채 10 호실은 살인사건의 현장치곤 무척 정갈한 편이었다. 윗목에 차려진 요리상은 손도 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아랫목에 펼쳐진 이부자리 위에는 여인의 벌거벗은 알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30 대 중반쯤 되었을까? 중년부인의 농염한 채취가 물씬 풍기는 변사체를 살펴보면서 김 순경은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해보지 못했고 여자에 대해선 문외한인 그가 언뜻 보기에도 단정한 이목구비와 깨끗한 용모를 지닌 여인은 평범한 여느 아낙과는 다른 청결미랄까,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듯했다. 쯧, 이렇게 정숙해 보이는 여자가 어쩌다가 이렇게...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그는 문득 고개를 저었다. 과연 정숙한 현모양처형의 여인이 이런 은밀한 장소에서 부정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금방 고개를 쳐들며 그의


사고()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부질없는 잡념을 떨치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녀의 가정이 어떻게 파괴될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에게는 소관밖의 일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가 당장 해야할 일은 본서에서 강력계 수사팀이 도착할 때까지 완벽하게 현장을 확보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30 여 분이 경과했을까? 본서에서 조한창 형사반장팀이 들이닥치는가 했더니 뒤이어 시경 강력계의 손삼수반장과 도덕록형사가 현장에 도착했고 얼마후에는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일간지의 사진기자 몇명이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들어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법석을 떨었다. 어쨌든 어수선하고 요란스런 분위기에서도 현장검증은 착착 진행되었다. 현장상황을 카메라에 빠짐없이 챙긴 후 응정밀검색에 들어갔다. 지문 채취를 하기 위해 백분가루를 뿌리는 팀과 머리털 한올이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진공청소기로 방바닥을 훑는 팀, 변사체의 상황을 체크하는 검사팀이 서로 엇갈리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나갔다. 한켠에 서서 우두커니 지켜보던 김순경은 같은 경찰이면서도 그들의 민첩한 행동에 내심 감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문득 그를 부르는 손삼수반장의 손짓을 보고 김순경은 급히 손반장을 따라 별실을 나왔다. "맨 처음에 출동하셨다죠?" "네." "그때 현장보존 상태는 어떻던가요?" "깨끗했습니다. 손댄 흔적도 별로 없는 듯했구요." "사건을 신고한 사람은 누굽니까?" "바로 저 사람입니다." 김순경은 주변에 둘러서 있던


종업원중에서 그중 나이가 들어보이는 청년을 가리켰다. 청년이 쭈뼛거리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자넨가? 신고한 사람이?" "네." 청년은 괜스레 면구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시늉을 했다. "이름은?" 손반장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들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제 이름 말입니까?" "그래." 청년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도 그것은 직업상 몸에 밴 버릇인 듯했다. "이길남입니다." "여기서 하는 일은?" "수부를 맡고 있습죠." "수부라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게 뭐하는 일인가?" "손님 접대를 맡습니다요. 주로 손님을 방으로 안내하는 일이죠." "그럼 10 호실 손님도 자네가 받았나?" "그렇습니다." "그 손님이 온 시간은?" "어젯밤 여덟시쯤 됐을 겁니다. 여자분이 먼저 와서 음식을 시켜놓고 한참 후에 남자손님이 오셨으니까 그때가 여덟시 반에서 아홉시, 아마 그쯤 될 "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따로따로 이곳에 도착했다 이 말이지?" "네." "그럼 남자가 돌아간 시각은?" "네." "그 남자는 몇 시쯤 돌아갔느냐구?" 허튼소리는 일체 말라는 듯 손반장이 눈알을 부라리자 길남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돌아가는걸 못 봤습니다." "뭐야?" 손반장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정말입니다. 저 혼자 바빠서 자리를 잘 지키지도 못했지만 여기는 정문 쪽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또 여기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눈을 달가워하지 않는 서요. 저희들도 일부러 못본척 할 때 많습니다. 하지만 어제 그 손님은 정말 이상했어요. 밤사이에 저희들을 한번도 부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침에는 일부러 상을 치우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 방을 찾아왔다가 사람이 죽은 걸 발견했지 뭡니까요. 어이구 얼마나 놀랬는지..." 길남은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손발을 휘저으며 묻지도 않은 말까지 다 털어 놓았다. "그 남자 여기 자주 왔었나?" "가끔..." "몇 달에 한 번 정도로..." "그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 없어? 말해." "어이구 이런데 출입하는 사람이 어디 자기 신분 밝히고 다닙니까요?" 길남은 어림도 없다는 듯 두 손을 훼훼 내저었다. "음..." 손반장은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이런 식의 심문이 수사에 도���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자네 길남이라고 했던가?" "네?" 길남은 다시 귀를 쫑긋 새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 다시 보면 알아볼 수 있겠지?" "그야 물론입죠." "나중에 자네가 필요하면 다시 부를 테니 그때 좀 도와 주게." "알겠습니다." 손반장은 더이상의 심문은 생략한 채 산장의 종업원들을 선선히 풀어주고 말았다. 우이동 파출소에 산장의 전라()여인 변사체 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처음엔 수사본부장으로 관할서의 수사과장이 지목되고 전담 수사반에는 북부경찰서의 강력반이 결정되면서


손삼수와 도덕록형사는 이번 사건에서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사체 여인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여인의 이름은 성귀희, 36 세, 주소는 성북구 돈암동 1297 번지, 가족사항으로는 부군 유재택과의 사이에 1 남 1 녀를 두고 있었다. 신원확인 과정에서 수사반을 바짝 긴장시킨 것은 성귀희여사의 남편 유재택 씨가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홍해강철그룹의 계열회사인 홍해무역의 대표라는 직함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성귀희 여사의 친정쪽 가계가 밝혀지면서 수사반은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성귀희여사의 부친 성기용 씨는 정계의 거물 정치인으로 삼척동자도 알만한 그 가족구성 또한 그러했다. 대대로 명문가족으로 불려지고 받들어지는 집안으로 선조 중에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독립군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가 있는가 하면 오늘에 이르러선 정치 경제 및 사회 각분야에 그 집안의 후손이 자리잡거나 그 가족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국민적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집안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수사본부장은 대뜸 관할 경찰서장으로 격상되었고 수사지휘권은 시경 강력계에서도 수완가로 알려진 손삼수반장에게 할당되었다. 손삼수는 무거운 책임감을 함께 느꼈다. 애초에는 치정에 얽힌 살인 정도로 가볍게 치부했던 사건이 모종의 정치적 흑막이 연류되거나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건으로 확대해석이 되자 손삼수로선 허리띠를 다시 한번 조여매고 사건해결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개수사로 결정되었던 애초의 방침도 재수정되어 비밀수사로 방향이 전환되었고 철저한 보안을 위한 각종 조치가 즉각 시행되었다. 수사회의에 수사본부장이 잘 참석하지


않는 관례를 깨뜨리고 수사본부장인 관할서장이 직접 수사회의를 주재하며 각별한 당부를 하는 것도 빠드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어 그에게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는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몇 번씩이나 강조하였다. 그런 여러 가지 압력 요인은 손삼수를 긴장 속으로 몰아 넣기에 족했다. 이번 사건처럼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사건을 맡은 일은 처음이었다. 따라서 그에겐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가슴 한자락에서 뜨거운 투지가 함께 샘솟고 있었다. 변사체의 부검도 신속히 이루어졌다.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부검은 관내 K 대학병원의 법의학과장인 문창주 박사가 직접 집도를 맡았다. 손삼수는 부검영장을 소지한 송휘영 검사와 함께 부검현장에 배석하는 열성을 보였다. 발가벗은 채 수술대 위에 반듯이 누워있는 여체는 36 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혈액의 침하현상으로 그렇잖아도 희디 흰피부가 뽀애게 비쳐졌고 눈부신 무영등 불빛에 반사되어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비쳤다. 사체특유의 냉랭한 아름다움이랄까 독특한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문박사는 냉정한 손놀림으로 집도를 시작했다. 문박사가 신체의 외부적 특징을 구술하고 조수인 듯한 사내는 받아적는 가운데 외양검사는 일단락 되었다. 우선 사체의 외양에서는 사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메스를 대기전에 문박사는 참빗으로 사체의 음모를 정성껏 빗겼다. 그리고 참빗에 묻어나오는 몇 가닥의 음모를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 작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혹시나 변사체의 음모에 남아있을지 모를 남자의 음모를 가려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사체에 본격적으로 메스가 가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려 견딜수 없게 된 손삼수는


수술실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피비린내의 역겨움도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신체의 아름다움이 메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현상이 그의 마음을 못내 아프게 했다. 손삼수가 수술실 복도를 서성거리며 초조하게 담배연기를 빨아대는 동안에도 부검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근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부검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문박사가 직접 집도한 부검인데도 불구하고 부검결과는 손삼수를 지극히 실망시키고 말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인을 찾아낼 수 없다니요?" "이런 경우가 가끔은 있습니다. 이 부인의 경우는 뇌출혈이 아닐까 싶어서 뇌혈관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동맥류를 발견할 수 없었고 뇌출혈 소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질식에 의한 액사도 아니고 외부의 충격이나 약물 중독의 흔적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죽었다는 겁니까?" "글쎄, 그게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부검을 통해서는 사인이 될 만한 병변이나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있다면 급사()의 일반적 소견과 인두부()의 수종()과 울혈이 심해져 있다는 소견뿐이에요." "결국 죽은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이거로군요?" "그래요. 죽은 부인은 건강체질인 듯하고 지병도 없는 듯해요. 어쨌든 부인의 가족이나 생활환경을 통해서 사망원인을 다시 찾아보아야겠어요." 너무나 엉뚱한 부검결과에 손삼수는 낙심을 하고 말았다. 단지 소득이 있다면 정확한 사망 시각이 밝혀진 정도였다. 성귀희여사가 사망한 시각은 어젯밤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 즉 1989 년 4 월 23 일 밤 아홉시경, 사인은 알아낼 수가 없었고, 혈액형 AB 형의 사내와 정사를 마친 후 곧장 사망했다는 결론만 얻어낼 수 있었다. 성여사의 질에서 채취한 정액에서


AB 형의 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성여사의 음모에서 수집한 두세 가닥의 다른 음모에서도 역시 AB 형의 혈액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얌전한 고양이가 싱크대에 먼저 올라가는 세상이라지만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귀희 그 애 같은 새침데기가 뒷구멍으로 호박씨 깔 줄은 정말 몰랐네." 성귀희여사와 가장 절친했다는 길화정여인은 한마디로 펄쩍 뛰었다. 혹시나 한가닥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한 기대를 걸고 있던 손삼수반장은 낙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배심감 느껴요. 너무했어 그 애두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였을까? 허긴 내가 둔재지. 그 애가 그렇게 남자교재 하는걸 눈치조차 못채고 있었으니." 길화정여인은 오히려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 이틀건너 하루씩 거의 매일 얼굴을 맛댈 정도로 허물이 없는 사이였으면서도 그녀의 남자관계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인간적인 비애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이런 식이다. 손삼수 역시 비애를 느꼈다. 수사는 자칫 초기 단계에서부터 미궁으로 빠져들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더럭 치밀었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돼. 손삼수는 난감해지는 마음을 힘겹게 추스렸다. 그는 어제 저녁 수사본부로 그를 찾아왔던 방문객을 문득 떠올렸다. 성귀희여사의 부친이자 6 선 관록의 국회의원 성기용의원 보좌관이란 길다란 직책이 붙은 명함을 내민 사내는 수사진척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사내는 비교적 말수가 적은편이었다. 그러나 묵직하면서도 조용히 툭툭 뱉어내는 어투와 날카로눈 눈매는 시종일관 손삼수를 압도했다. 사내는 말했다. 어른께서는 이 사건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다는 걸.


그리고 딸의 불행에 정치적 음모나 흑막이 개입되지 않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점을, 또한 신속하고 조용한 사태해결을 희망한다는 사족도 빠뜨리지 않았다. 사내가 물러간 후 어깨가 짓눌린 듯한 무거운 압박감에선 벗어났으나 그것은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손삼수는 여전히 무거운 가슴을 안은 채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우선 성기용의원이 요망한다는 신속하고 조용한 사태해결은 도무지 요원할 듯 싶었다. 첫째 성귀희여사의 사인 자체가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고 성귀희여사의 6 생활자체도 베일에 철저하게 가려 있었다. 주변에서 말하는 성귀희여사는 불륜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정숙하고 깔끔한 여자였다. 그녀야말로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고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온통 헌신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다.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진술했다. "어머머, 흉칙해라, 남자 전화요? 그런 거 없어요. 우리 아줌마가 어떤 사람인데요?" 이름이 춘자라는 성귀희여사댁의 가정부 역시 가당치도 않다는 듯 펄쩍 뛰었다. 손삼수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절로 배어나왔다. 그녀는 정말 철저하게 완벽한 철옹성 같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놓았고 외부의 어떤 사람도 그녀의 내면세계에는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미모에다 지적이며 현모양처형의 완전한 여자. 그리고 가계()의 혈통을 그대로 물려받아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사회사업가. 여성사회단체의 중견간부직을 맡아 육영사업등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며 뚜럿한 업적을 남긴 여인. 한마디로 그녀는 팔방미인이면서 어디에도 외간남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어간 현장에는 남자의 체취가 엄연히 남아있었지 않은가. 그것도


뚜렷한 불륜의 흔적이. 수사본부의 숙직실 소파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상념에 잠겨있던 그의 시야에 도덕록형사가 불쑥 들어왔다. 도형사는 수확도 없는 방증수집을 하느라 성귀희여사와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있었다 암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도형사의 기색을 힐끔 살펴보고 여전히 허탕만 치고 다녔다는 걸 지레짐작하면서 그는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아, 도형사. 혹시 김석기로부터 연락 없었나?" "네, 김기자님 요즘 바쁜 모양이죠?" "음, 무슨 특집기산가 뭔가 기획팀장을 맡았다는 소리는 얼핏 들었는데 그후론 도통 연락이 없어." 그러고 보니 김석기의 얼굴을 못본 게 달포는 훨씬 넘은 듯했다. 김석기는 아주일보의 사회부기자로 그와는 막역한 지기였다. "제가 전화를 한 번 넣어볼까요?" 도형사가 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냥 둬." 서둘러 담배 한대를 붙여물며 손삼수는 씁쓰레한 미소를 흘렸다. 오죽 급했으면 그 친구 생각이 났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처량한 느낌이 들어 도형사를 제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석기의 명쾌한 사건해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김석기는 지금까지 그가 부닥쳤던 여러 가지 사건에서 독특한 시각으로 사건을 관찰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참 반장님!" 문득 생각이 난 듯 도형사가 그를 빤히 맘 "공항에 안 나가십니까?"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손삼수는 탄성을 발하며 서둘러 숙직실을 뛰쳐나갔다. 도형사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남철희박사는 의자에 앉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반사경으로 구강()의 상태를 살펴보던 홍성국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가라 앉았구먼." "정확한 병명이 뭔가?" "급성 편도선염이야. 혹시 단세포성 안지나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쪽은 아니야. 이제 더 이상 치료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다 나은건가?" "그래, 하지만 오늘까지는 주사를 맞아야 돼." "나 원, 내가 주치의를 잘못 골랐군. 난 하루 이틀이면 거뜬해질 줄 알았더니 일주일이 넘도록 사람을 붙들고 늘어져서 골탕을 먹여대니." "이 사람아!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안정이나 취하도록 해. 될 수 있는 대로 술도 삼가고, 과로는 절대 금물이야! 자칫하면 심장판막증이나 중이염 같은 합병증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어이쿠, 갈수록 태산일세. 이젠 협박까지?" "다 자넬 위해서야. 주사실로 가세." 홍박사는 재빠르게 긁어내던 처방전을 수간호원에게 건네 주었다. "나중에 보세."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홍박사가 문득 몸을 일으켰다. "아참, 언제 골프 한 번 안 치려나?" "옛끼 이사람아.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몸조리나 하라며?" "하하... 부킹하면 연락함세." 간호원을 따라 주사실로 들어서며 남박사는 씁스레한 미소를 흘렸다. 사흘전의 우이동 사건이후 오늘 이 시간까지 그는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마다 가위에 눌렸는가하면 가슴은 바늘에라도 찔린 듯 아려왔다. "자리에 누우세요. 박사님, 소매 걷으시구요." 퍼뜩 정신을 차린 남박사는 간호원이 가리키는 간이 침대에 몸을 눕히고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따금한 감촉과 함께 주사바늘이 팔뚝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페니실린액이 혈관을 통하여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머리가 후끈 더위지는 듯한 현기증에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매우 불쾌한 감각이었다. 한참만에 어지럼증이 가셔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처방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한걸음 나서자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눈 속으로 따갑게 파고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계단을 내려온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굴까? 사건 당일밤에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정신을 추스릴 틈도 없었으나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곰곰 생각해보니 백합이란 별명을 가진 사내의 정체가 못내 궁금한 그였다. 자진해서 뒤처리를 맡겠다던 사내. 그가 왜 자신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가 장담했던 만큼 뒤처리는 완벽하게 이루어진 듯했다. 다음날 출근하는 길로 곧장 자료실로 들어가 배달 되어온 조간신문을 모두 뒤져 보았으나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한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석간신문 역시 매한가지였고 다음 날도 그랬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야 그는 사회면 귀퉁이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이동 산장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여자의 신원이 돈암동 oo 번지의 ���귀자(35 가명) 여인임을 밝혀내고 수사에 착수했으나 부검결과 일반적인 급사의 소견외에 뚜렷한 사인을 밝혀내지 못해 수사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찰은 산장 종업원의 진술을 통해 성여인이 40 대중반의 사내와 투숙했음을 밝혀내고 함께 툭숙했던 사내를 찾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으나 종업원이 말하는 사내의 인상착의가 뚜렷하지 못해 더욱 애로를 겪는 등 수사는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신문기사는 대충 이런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사내의 뒤처리는 완벽한 모양이다. 그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마음 한자락에서는 도무지 풀릴 길이 없는 의문이 뭉클쿵클 피어나고 있었다. 백합이라니, 그런 별명의 사내를 그는 알지도 못하거니와 왠지 백합이라는 별명이 풍기는 뉘앙스가 그는 싫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어쩐지 범죄의 냄새가 피어나는 듯하여 더욱 싫었다. 더욱이 자신은 그를 까맣게 모르는데 그쪽에선 자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모든 것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 당시에 그를 직접 만나서 사태를 해결하거나 아예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것은 은근히 마음에 걸렸으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지금이라도 자수를 해 버릴까? 그는 이내 머리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때가 늦은 듯했다. 비록 성여사의 돌연한 죽음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고의는 아니였다 하더라도 뺑소니를 쳤다는 비굴함이 그의 양심에 이미 큰 생채기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 역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방조라는 올가미를 씌워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기왕 벌어진 일이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견딜 때까지 견뎌보는 거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우이동 파출소앞에 세워 둔 지프의 운전석에 뛰어오른 손삼수는 급히 시동을 걸었다. 도형사가 옆자리에 뛰어오른 후 지프는 급하게 달려 나갔다. 오늘은 무역상담차 미주지역을 출장중이던 성귀희여사의 남편 유재택사장이 아내의 부음을 접하고 일정을 단축하여 급거 귀국하는 날이다.


손삼수는 공항에서 그와 도킹할 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그들이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에 당도했을 대 전광판을 통하여 노스웨스트 961 편의 도착을 알리는 빨간불이 깜박거리며 작동하고 있었다. 손삼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객기가 지금 막 공항램프에 도착했다면 시간여유는 넉넉한 편이었다. 내국인 전용 입국케이트 양쪽에는 벌써 마중나온 출영객들로 인해 발 디딜틈 없이 인파로 빽빽이 메워져 있었다. 인파에 떠밀려 출영객들의 꽁무니에 선 손삼수는 느긋한 마음으로 입국자의 자동문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한두 사람의 여객들이 화물을 가득 실은 캐리(carry)카를 밀며 인파가 늘어 선 통로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도형사, 유사장 사진 준비해 왔나?" "여기 있습니다." 도형사가 명함판 사진을 한 장 건네주었다.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유재택사장은 한마디로 호인풍의 미남자였다. "이건 정말 뜻밖인데?" 손삼수는 사진을 뚫어져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대단한 미남잔데 이 남자?" "원 반장님도. 잘생긴 사람 처음 보셨습니까?" "이렇게 잘 생기고 돈많은 남편을 둔 여자가 바람을 피우다니 이상하잖은가?" "하하... 그럼 그 상대는 훨씬 더 잘 생긴 남자인 모양이죠."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겠군." 손삼수는 그 말뜻을 곰곰 되씹어 보았다. 유재택사장보다 더욱 잘 생기고 멋진 남자. 성귀희여사 같은 완벽 주의자가 빠져들 수 있는 남자. 어쩌면 상대는 상류층의 대단한 인텔리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손삼수는 강하게 품었다. "홍해무역쪽은 어때?"


"그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던데요." 0 "외견상 말이지?" "외견상만이 아니라 꽤 실속있는 회사 같던데요. 거 왜 모기업인 홍해철강이 몇 년전에 자기 덩치보다 더 큰 회사를 흡수 합병해서 재계에 화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힘있는 기업에 무슨 문제가 있을리 없겠죠." 손삼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때 도형사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반장님, 저기!" "아!" 과연 사진 속의 훤칠하게 잘생긴 인물이 통로를 지나 이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가벼운 수트케이스 하나만 든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그 뒤켠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커다란 여행가방을 들고 뒤따라 나왔다. 도형사가 잽싸게 그의 걸음을 가로막고 나섰다. "유재택사장님이시죠?" "그렇소만." 도형사는 재빠르게 신분증을 비쳐 보였다. "미리 전화연락 드렸습니다만 시경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반장님이십니다." 도형사가 손반장을 소개하자 유사장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선선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별말씀을. 귀국하시는 데까지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은 시간은 뺏지 않겠습니다." "자, 가십시다." 그들은 나란히 공항청사를 빠져나왔다. "어떻습니까. 저희들의 대화내용을 아랫사람들이 듣는 게 거북하실 텐데 저희들 차를 타시는게." "좋습니다." 도형사가 지프의 운전대를 맡고 뒷자리에 유사장과 손반장이 나란히 않았다. 그리고 유사장의 밴츠 승용차는 천천히 지프를 뒤따랐다.


"먼저 약속한 대로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만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죠?" "말씀 하십시오." 손반장은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도형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지프를 몰았다. 유사장의 입에서 한마디의 진술이라도 더 끌어내려면 최대한의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외람된 질문 같습니다. 두 분의 부부 사이는 어땠습니까?" 유사장은 불쾌한 듯 손반장을 힐끔 보고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문제의 발단이 우리 부부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하시는 모양인데 그러건 없습니다. 우리 부부사이에는 적어도..." "오해는 마십시오. 부인을 사랑하셨습니까?" "네." "부인도 그랬다고 확신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유사장의 목소리는 침통하게 가라앉고 0 있었다. "부인께선 많은 사회활동을 하고 계셨는데요. 한 번도 이상하다거나 달리 생각해 본적은 없으십니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있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부부라면 더이상 부부라는 굴레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반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사장은 침통한 낯빛을 지은 채 묵묵히 차창 밖으로 스치는 거리의 정경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혹시 부인께 지병같은 건 없었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사장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부인의 죽음에 급사의 소견은 나와 있는데 뚜렷한 이유를 밝힐 수 없으니 말예요."


유사장이 주춤 눈빛을 모았다. "혹시 그런 것도 병이라고 친다면..." "그럼?" "집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특이체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치의의 소견서를 늘상 지니고 다녔었는데요." "예?" 손반장의 입에서 경악과도 같은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형사! 차를 K 대학병원으로 돌려!" 잠시후 손삼수와 도형사는 K 대학 병원 문창주 법의학박사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손삼수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문박사는 부검서류를 다시 꺼내어 재검토를 시작했다. 탁자의 한쪽에는 유사장의 집에서 찾아낸 "이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성 체질이니 페니실린은 절대 투여하지 말라"는 경고성의 주치의 소견서가 놓여있었다. 문박사는 이윽고 서류를 덮고 손박사을 향하여 돌아 앉았다. "맞습니다. 부인의 사인에서 페니실린 쇼크상태와 유사한 소견이 나타납니다. 부인의 사인은 페니실린 쇼크사로 보아도 틀림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그 부인과 관계를 했던 남자가 아마 페니실린 주사를 맞은 채 부인과 관계를 했던 모양입니다. 즉 부인이 직접 페니실린을 투여받지 않았어도 남자의 몸속에 흡수되었던 페니실린이 부인과 동침시에 정액을 통하여 부인의 질내에 그것이 그 부인에게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겁니다." 손삼수와 도형사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성귀희여사의 사인은 밝혀졌으나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결과에 놀란 듯 그들의 입은 도무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연구실로 돌아온 남철희박사는 나른해지는 몸을 소파에 묻었다. 당장 일손이 집힐 것 같지도 않아 소파의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형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바로 그때. 따르르르... 일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며 상념에 그를 일깨웠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남박사님이십니까?" 수화기에서 울려 나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렇습니다만..." "미스터 백이니다. 절 기억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뉘신지?" 남박사는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느라 양미간을 오무렸다. "하하... 벌써 잊으셨습니까? 백합이라는 별명을 말입니다." "아, 백선생!"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등을 활처럼 휘며 수화기에 바짝 달라붙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 한 번 만납시다." "하하... 절 만나봐야 즐거운 일도 없으실 텐데요." "아니오. 당신을 만나고 싶소. 지금 당장." 그는 다급하게 수화기에 속삭였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박사님, 때가 되면 박사님께서 원치 않으시더라도 나타날 겁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여, 여보시오..." 다급한 남박사와는 달리 사내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한껏 배어 있었다. "하하... 박사님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하실 땐 말씀드렸습니다만 전 박사님 편이라는건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그 정도만 알고 계십시오." "답답해서 그럽니다. 제발..." "그러실 줄 알고 전화 드린 겁니다.


경찰 수사의 진척상황도 알려 드릴겸 해서요." "아..." 그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배어나왔다. "성여사의 사인이 밝혀졌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성여사는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했습니다." "그, 그럴 리가..."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이것은 급거 귀국한 성여사의 남편 유사장으로부터 확인된 사실입니다. 성여사는 원래 페니실린에 과민한 특이체질이었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오. 금시초문이오. 성여사로부터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남박사님께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당치도 않은 얘기요. 그날 성여사는 페니실린주사를 맞은 사실이 없으니까."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이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이 사람은 페니실린에 과민성 체질이니 절대 페니실린을 투여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퓨소견서도 나왔고 부검을 집도했던 문창주박사도 페니실린 쇼크사라는 소견에 동조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남박사님께선 최근에 병원에 다닌 일이 없습니까?" "그야... 있소만..." "무슨 병으로 치료를 받으셨습니까?" "편도선염이라고 하더군요." "주사도 맞았겠죠?" "그, 그래요." "그게 무슨 주삽니까?" "페 페니실린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남박사님! 박사님 몸 속에 흡수되었던 페니실린이 성여사와 동침시에 정액을 통하여 성여사의 질내에


사정되어 성여사에게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겁니다." "그럴 수가! 그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설이요! 터무니없는 소리를..." 그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너무나 뜻밖의 결론에 흥분을 참을 길이 없는 듯 수화기를 움겨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백합은 차분하게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믿으셔야 합니다, 박사님. 페니실린에 과민한 특이체질 중에는 그렇게 예민한 반응을 일으키는 사례가 왕왕 있다고 하니까요." 얼이 빠져버린 듯 그는 수화기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쨌든 박사님은 안전지대에 계십니다. 그 점을 확인시켜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럼 차후에 다시 연락드리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수화기 저쪽에서 백합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남박사는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철희박사의 연구소가 빤히 바라보이는 길건너편에 세워둔 승용차안에서 백합은 카폰을 내려놓으며 힐끔 연구소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냉소를 잔뜩 머금은 채 연구소를 올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엑셀러레이터의 페달을 밟았다.

4. 빨간 립스틱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김석기는 우선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섣불리 인사를 건넬 수는 없었다. 누굴까? 분명 안면은 있는데... 그러나 도통 기억이 떠올라 주지를 않았다. 아주일보사() 사회부 기자인 김석기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매우 폭넓게 시회 활동을 하는 편이었고 따라서 발도 넓은 편에 속했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 속에 새겨둘 수 없는 형편이긴 했다. 그의 수첩과 호주머니 그리고 책상서랍속에 명함들이 속절없이 쌓여도 속수무책의 처지이긴 했지만 오늘처럼 기억이 꽉 막히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도대체 누구까? 기억이 날듯날듯 하면서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아둔한 머리를 새삼 한탄했다. 바로 그때,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로 빨려들었다. 순간 김석기는 막 출발하려는 버스의 난간을 붙들고 황급히 버스의 승강구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그는 이해할 수없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여자를 뒤따라 버스에 탔을까? 스스로 자문자답을 해 보아도 분명한 해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여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무언가 한마디 말이라도 나누어 봐야겠다는 절박한 본능이 그에게 우발적인 행동을 일으키게 했는지도 몰랐다. 버스 안은 승객들로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그녀는 통로 중간에 서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김석기는 한켠에 선 채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순간 그는 와락 느껴지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다. 그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니힐한 분위기,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의 범접을 꺼리는,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을 듯한 허무의 체취를 그녀를 가슴 가득 품고 있는 듯했다. 버스가 서너 정거장이나 지나쳤을까? 고층아파트가 밀접한 강남의 번화한 구역에서 그녀는 버스를 내렸고 김석기도 덩달아 따라 내렸다. 그는 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고 싶었으나 도무지 구실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 앓는 심정으로 묵묵히 그녀의 뒤만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병신같은 짓을


할까? 자문자답을 해보아도 숫기가 벌떡 샘솟지 않는데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남자를 주눅 들게 하는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어쨋든 말은 붙여 봐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만난 일이 있는지 궁금증은 풀어봐야겠다. 그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걸음을 빨리 했을 때였다. 그녀가 주택가의 한산한 골목길을 꺾어 돌았고 뒤이어 김석기가 골목으로 뛰어 드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터트렸고 김석기 역시 경악의 외침을 내지르고 말았다. 불과 5,6 미터쯤 되었을까?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만한 좁은 골목에서 육중한 승용차가 그들을 덮칠 듯 괴물처럼 달려오고 있질 않은가. "위험해!"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은 골목 옆에 위치한 선술집의 유리문을 깨트리며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뭐, 저런 개새끼가 다 있어?" 술을 먹다말고 날벼락을 당한 주정꾼 두엇이 뒤늦게 골목 밖으로 후닥닥 뛰쳐나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으나 문제의 뺑소니차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석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깨어진 유리파편에 의해 온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아랑곳없이 우선 나동그라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것 보시오. 빨리 병원부터 가 봐야겠수다!" 난감해서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술꾼의 충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안달하는 술집여주인에게 명함 한 장을 남겨 놓은 후 그녀를 들쳐업고 병원을 찾아 뛰어나갔다. 2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김석기와 윤정님은 압구정동의 조용한 레스토랑에 마주앉아 있었다. 잔잔하게 실내를 메우고 있는 음악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그들은 누구도 선뜻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정님의 약간 부은 눈자위에는 아직도 울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 서럽게 울어대는 정님의 참담한 심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는 연민의 정으로 그녀의 서러움에 동참해 주었다. 그녀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실컷 울고 난 지금의 그녀는 모든걸 초월한 듯한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먼저 입을 늉 "죄송합니다.처음 뵙는 분 앞에서 너무 추태를 보인것 같아서요...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는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전 어떻게 됐을런지." "모든건 사필귀정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별일이야 없었겠지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윤정님 씨." 순간 정님은 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절 알고 계세요?" "네." "?" "제 직업이 신문기잡니다. 윤정님 씨가 제주도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저도 현장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윤정님 씨를 만나 직접 취재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었죠." "" 정님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제서야 눈 앞에 마주 앉은 사내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을 듯했다. 그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관심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오해는 마십시오. 그때는 다른 사건의


취재를 위해 제주도에서 체류하고 있던 중에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했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취재를 해보려고 노력했던 거구요. 그러나 지금은 윤정님 씨를 결코 취재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절 어떻게 보시든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선생님을 탓하지는 않아요." "그때의 아픈 상처를 많이 회복하신 듯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 "그런데 또 오늘과 같은 일을 당하셨으니...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냥 한때의 불운이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정님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의 그녀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김선생님께선 오늘 벌어진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김석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야멸차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어난 사건은 계획적으로 꾸며진 음모였어요. 바로 제 남편을 죽인자들이 절 협박하기 위해서 꾸민 음모, 바로 그거예요." 너무나 엉뚱한 소리에 김석기는 눈을 꿈벅거렸다. 순간 그녀의 정신이 올바른지 더럭 의심이 날 지경이었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이건 사실이에요. 엄연한." "가만, 그렇다면 윤정님 씨의 남편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는 겁니까?" "네." "아니, 경찰 발표로는 자살로 밝혀졌다던데..." "타살이었습니다." "그런 증거라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어떻게요?" "그동안 제게 끊임없이 협박을 해온


자들이 있었어요. 바로 오늘처럼." 말을 맺고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고, 반면 김석기는 허둥거리며 엽차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잠깐만요. 혹시... 그 동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 "제게 자세한 말씀을 좀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취재를 요청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단지 사태의 전말을 알고 싶어서예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제가 정님 씨에게 힘이 되어 드리고 싶어 섭니다." "말씀드리죠. 정식으로 취재를 하신대도 좋고 제 푸념이나 하소연이라 생각하셔도 좋아요. 지금의 저는 더이상 꺼릴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석기는 한모금의 엽차로 목을 축였다. 몸 속에서 잔잔하게 피어나온 흥분이 전신으로 번지면서 그를 긴장 속으로 몰아 넣었고 그의 목을 바싹 태우는 듯했다. 다시금 엽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인 그는 기대에 가득한 시선으로 정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육중우형사의 답장을 받은 다음 날, 윤정님은 급거 제주도로 날아갔다. 육형사가 내린 수사결론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그녀였다. 무엇보다 선입견으로 수사에 의한 육형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했는지 그녀는 조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정님은 제주도 경찰국이 마주보이는 건물에 위치한 커피숍 비바리에서 전화로 육형사를 불러내었다. 육형사는 어지간히 놀란 듯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그는 이마에 송글송글 배오나온 땀을


연신 손으로 훔치며 그 큰 눈을 껌벅거렸다. "제 편지를 못 받아 보셨습니까?" "봤어요." "그럼?" "저는 그 결론에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육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윤정님 씨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마치 윤정님을 설득하려는 듯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다 끝난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이 아닙니다. 잘못된 부분을 옳게 바로 잡자는 뜻일 뿐이에요." "제가 수사를 잘못했다고 질책하시는 모양인데 제 수사결론이 잘못되었다는 w 반증이나 물증이라도 있습니까?" "육형사님께선 그이가 자살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가요?" "물론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검결과나 당시의 정황을 유추해 보건대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심증적인 상황이나 여건은 충분했다고 인정됩니다."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군요. 제가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그이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집단폭행을 충격 때문에 춘구 씨가 자살을 결심했다고 하셨지만 전 바로 그 점을 납득할 없는 거예요. 우선 그날밤 그이가 호텔 객실로 돌아왔다는 기억이 제겐 없어요. 그이는 방을 나갈때 객실룸 키를 방에 두고 나갔기 때문에 그이 혼자서는 방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형편이에요. 제가 문을 따주지 않는 이상 말예요. 또 설옥 제가 피해를 당한 현장을 목격했다 하더라도 그게 자살할 이유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쇼크야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저에 대한


사랑이 식거나 멀어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야할 이유는 안된다고 봐요. 그렇게 생각치 않으세요?" 정님은 육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탁자 아래로 눈길을 내리깐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만에 육형사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윤정님 씨의 반론에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이번 사건의 진실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윤정님 씨가 절 비난하신다 하더라도 제 입장만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굳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사건의 진실은 윤정님 씨나 저나 또 그 누구라도 극명하게 밝힐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만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윤정님은 천천히, 그러나 똑바로 육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선 형언할 길이 없는 안타까운 체념이 함께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육형사에 대한 분노와 질책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들고 조용히 일어섰다. 아무리 항의하고 떼를 쓴다 하더라도 육형사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커피숍의 문을 밀고 한걸음 나서는 순간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그녀의 동공을 파고 들었다. 그녀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뒤따라 나서던 육형사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왜 그러세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괜찮아요." 육형사의 손길을 뿌리친 정님은 급히 걸음을 옮겼다. 당장 가야 할 행선지나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작정 걸었다. 이러한 결과를 뻔히 예견했으면서도 육형사를 찾아 온


스스로에 대한 반감이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성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마침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빨려들듯 택시에 올랐고 택시는 힘차게 달려나갔다. "어디로 모실까요!" "중문단지!" 그녀의 입에선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어쩐다? 꿈에 보일까 두려웠던 그 악몽의 장소를 다시 찾아간다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까? 아니야, 지금의 내 처지에 뭐가 더이상 두려울까. 그곳이 악마의 소굴이라하더라도 하등 꺼릴 게 없어. 그녀는 마음을 바짝 다잡았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정님은 하야비치호텔의 뒤쪽에 면해 있는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두어달 전, 남편과 함께 이 백사장을 거닐 때, 그때는 행복의 단꿈에 젖어 있었는데, 문득 과거와 현재의 엄청나게 변한 처지를 떠올리자 착잡한 심경이 그녀의 가슴을 온통 적시는 듯했다. 그녀는 호텔 커피숍으로 발길을 돌렸다. 호텔은 여전히 번창했고 번잡했다. 두어 달 전의 끔찍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아무도 가지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정님은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고 마음을 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 서울로 돌아온 정님은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힌 채 탄원서 작성에 열중했다. 그녀는 탄원서에서 남편 우춘구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며 그 사건은 엄연한 계획적 타살이었음을 구구절절이 주지시켰다. 그리고 경찰의 수사결과에 대한 반론을 조목조목 예시하며 남편의 사인을 재규명해 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탄원서를 정부종합민원실을


비롯하여 내무부장관, 치안본부공보실, 그리고 여.야 각당의 국회의원 원내총무실, 제주도청 민원봉사실, 제주도경 민원봉사실, 서귀포경찰서 등 관계요로의 관공서로 빠짐없이 발성했다. 탄원서를 발송한 후 정님은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정부의 어느 부서든 이번 만큼은 그녀의 하소연을 이해하고 그녀의 편이 되어 남편의 죽음을 재조명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처럼 화려한 옷치장으로 맵시를 내어 보고 머리모양도 새롭게 다듬어 보았다. 아직 친구들을 찾아다닐 용기는 생기지 않았지만 혼자서 인파에 뒤섞여 도심을 쏘다니는 것도 그녀가 남몰래 느끼는 새로이 터득한 재미 중의 하나였다. 탄원서를 발송했던 반응이 나타난 것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혼자서 영화 두 편을 보고 이곳 저곳 쏘다니며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집에 뭬틸것은 저녁 일곱 시경이었다. 전신에 묻어 있는 피로를 털어버리기 위해 막 샤워를 시작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전화벨 소리를 묵살해 버리려던 그녀는 마지못해 욕실을 빠져나왔다. 타월로 몸에 몬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거실로 나온 그녀는 흥겨운 기분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이 개같은 년!" "어머..." "너 요즘 도대체 무슨 짓하고 다니는 거야?" 수화기 저쪽에서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어댔다. 정님은 너무 놀랍고 어이가 없어서 입이 1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것 보세요, 전화를 잘못 거신 모양인데... 이게 무슨 실례예요?" "실례? 야! 너, 윤정님이 맞���?"


"네?" 순간 정님은 등줄기를 스치는 차가운 기류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인생이 불쌍해서 죽을 목숨을 살려줬더니, 뭐라구? 수사를 다시 해 달라고 탄원서를 써? 이 썅년아, 그게 네 마음대로 호락호락 이루어질 것 같아?" "다, 당신은..." "흐흐... 이제 우리가 누군지 알겠어? 다시 한번 기회를 줄테니까 귀를 씻고 똑똑히 잘 들어 앞으로는 죽은 듯이 집구석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게 좋아, 만약 한 번만 더 수틀린 짓을 하면 그땐 정말 네 남편 우춘구 옆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알았나?" "" "우리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야. 네가 우리를 우습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흐흐... 너 하나 처치하는 건 식은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보여주지, 흐흐..."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얼이 온통 빠져버린 듯 정님은 수화기를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만에야 정님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을까? 정님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것도 그녀가 탄원한 진정내용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 협박으로 되돌아 오다니, 그녀는 마치 커다란 절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에 가슴마저 답답해졌다. 이제 어떡한다? 그녀의 진로는 첫걸음부터 커다란 벽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자신이 탄원서를 띄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도 불과 사흘만에. 그녀는 탄원서를 발송한 대상을 곰곰이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탄원서를 발송한 곳이야말로 그녀가 최종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던 국가 중요기관들이 아닌가. 혹시 그 중에 놈들의 프락치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 육중우형사가? 그러나 그녀는 육형사에 대한 신뢰성마저 저버릴 수는 없을성 싶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정체불명의 적은 베일 속에 숨어 있는데 자신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더욱이 자신을 협박하는 무리들이 남편의 죽음은 타살이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확인시켜주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그녀가 얻은 소득 중의 하나였다. 다음날부터 정님은 더욱 부지런히 뛰었다. 탄원서를 발송한 창구로 직접 찾아 다니며 작금의 그녀가 당하고 있는 협박의 내용을 추가하여 그녀가 작성한 탄원서의 신뢰회복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시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의 탄원서에 대한 관공서의 책임있는 답변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몇 번씩 확인해보아도 사실여부를 확인중이라느니 진정내용의 진실성을 심사중이라거나 하부기관으로 처리를 명했다는 정도의 답변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확실할 반응이 나타난 것은 다시 며칠이 지난 후였다.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따고 한걸음 들어서던 순간 그녀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집을 나서기 전에 깨끗이 닦고 정돈해 두었던 집안 내부가 온통 들쑤셔놓아 뒤죽박죽이 되어 있지를 않는가. 게다가 화장대 거울에 빨간 립스틱으로 흉측한 글 씨가 휘갈겨져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마치 목덜미에 시퍼런 칼날이 와 닿은 듯한 섬뜩한 느낌에 정님은 오금이 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앞으로 무너졌다.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오고 오그라들면서 도무지 주체할


길없는 슬픔이 격랑처럼 그녀에게 퍼부어 졌던 것이다. 정님의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난 김석기 역시 한동안 할말을 잃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진한 아픔으로 전달되어와 그는 위로의 말도 찾기 어려운 듯 했다. "그랬었군요. 이제야 좀 이해가 됩니다만..." 석기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 "이대로 포기를 하실 건가요?" "아뇨." "그럼? 이번과 같은 사건이 또 일어나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전 더이상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정님은 결연한 어조로 말을 뱉어 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 생각에도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힘을 내세요. 윤정님 씨. 이 세상은 윤정님 씨 혼자만을 고립무원 속에 남겨둘 만큼 각박하진 않을 테니까요. 저도 윳동윱 제 능력껏,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거리낌없이 도와드리죠." "고맙습니다." 정님은 모처럼 피어오른 미소를 한입 가득 물고선 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5. 국회의원 성기용 따르르르... 자명종 소리에 얼핏 잠을 깬 김석기는 손을 뻗어 탁상시계의 알람을 눌러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해 앞으로 엎어진 채 수마() 속으로 곤하게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눈자위를 간지럽히는 햇살에 정신이 돌아온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창 밖은 벌써 환하게 밝아 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던 그는 뒷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젯밤의 취기가 여지껏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맡을 더듬어 자리끼를 찾아든 그는 냉수 한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통해 찬기운이 온몸으로 흘러내려가자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가만, 내가 어떻게 내 방까지 찾아왔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정말 어지간히도 마셔댔어. 그러니까 압구정동의 레스토랑에서 윤정님을 만난 후 그녀로부터 파란만장항 사연을 듣고 함께 가슴아파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리고 1 차 2 차하면서 세 군데의 카페를 전전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쉽게도 거기서부터 필름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아도 더 이상의 기억은 떠올라 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가 어떻게 하숙방까지 찾아들 수 있었을까? 술에 곯아떨어져서 혹시 윤정님한테 실수나 저리른 건 아닐까? 마음 한구석에 슬며시 걱정이 생겨났다. 어제따라 술발이 잘 받았던 게 사고의 원인이었다. 게다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미녀가 따라주는 술을 어떻게 마다할 수 있는가. 천하의 악당들을 안주삼아 그녀가 마시지 못하는 술까지 넙죽넙죽 받아 마신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제기랄, 여기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어제는 내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군. 별수 없지. 초면에 술주정을 했대도 이미 엎지러진 물인걸... 그는 몹지 뻐근한 뒷골을 손으로 누르며 머리를 저었다. 부시시 몸을 일으킨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방문을 열었다. 우선 오늘 아침 신문을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그의 하루는 늘상 그렇게 시작되었다. "김 씨, 일어나셨수?" 조간신문을 집어들고 방문을 닫으려던 그는 하숙집 안주인인 여천댁의 목소리에 놀라 다시 방문을 열었다. "아, 예, 일어났습니다. 아주머니."


"어이구, 어제는 웬 술을 그리 자셨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여천댁이 활짝 웃는 얼굴로 핀잔을 주는 시늉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여천댁이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바싹 얼굴을 디밀었다. "어제 그 아가씨 정말 참합디다. 김 씨 애인이우?" "예?" 뜻밖의 소리에 김석기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에이그 능청스럽긴. 어젯밤에 김 씨를 여기까지 데려온 처녀 말이우." "아, 예." 그러고 보니 윤정님이 그를 집까지 데려와 이부자리를 봐주고 돌아간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이렇게 누추하게 살아가는 꼴을 보였다니. 볼래 나쁜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부끄러움이 더럭 치밀었던 것이다. "김 씨, 그렇게 참한 색시는 처음 봤어요. 좋은 사람 있을 때 빨리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하숙집 밥 먹을 참이우?" "아, 아닙니다 아주머니." 그는 황황히 손을 저으며 급히 방문을 닫았다. 한번 열렸다하면 봇물처럼 터지는 여천댁의 수다는 일분일초라도 빨리 잘라버려야 했다. 그녀가 이 방까지 들어왔다니 갑자기 가슴이 더워지는 듯한 느낌에 그는 급히 신문을 펼쳐들었다. "망국병 비상! 지역과 계층 안가리고 전국으로 번지다!" 커다란 활자가 그의 눈으로 성큼 빨려 들었다. 순간 지난 보름 동안 전국을 무대로 뛰어 다녔던 피로와 노고가 D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히로뽕, 대마초 등을 사용하는 마약류 사범이, 하루가 다르게 크게 늘어나면서


농민과 가정주부 청소년 층에까지 크게 확산되고 있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15 일, 고위층 인사의 자제가 히로뽕을 상용한 혐의로 검찰에 입건됨으로써 마약류 사범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웠는가 하면 지난해 10 월 부산에서 전과 7 범이 연쇄점과 가정집등에 침입,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렸고 부산은행 송도지점 앞길에서 히로뽕 환각 상태의 20 대 청년이 흉기를 들고 출근길의 여직원을 인질삼아 난동을 부린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중략 이같이 마약류 사범이 급증세를 보이게 된 것은 한때 일본 마약시장의 45%까지 잠식했던 국내의 히로뽕이 대만 등 동남아의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저급품에 밀려나면서부터, 일본 밀반출이 어려워지고 일본 시장에서 15%의 점유율을 보이자 수출물량을 전량 내수로 돌렸기 때문. 더욱이 마약에 때묻지 않은 지역으로 알려졌던 제주도에서도 지난해부터 마약류사범이 적발되기 시작하여 관계당국을 긴장시키고 있으며 특히 적발된 마약사범 중에는 농민도 끼어있어 큰 우려를 갖게 하고 있다. 검찰은 제주지역이 국제적 관광지인 점 등으로 미뤄 마약사범이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커 강력한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그러나 히로뽕 조직은 자금책 연락책 제조책 운반책 밀매책 등으로 연결돼 있으나 철저한 점조직으로 돼 있어 일망타진이 어려운 실정이다. 검찰은 제주도에 마약을 공급한 운반책으로 짐작되는 용의자를 비밀리에 추적중이었으나 지난 달 25 일 문제의 인물이 인천의 해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뒤를 쫓던 검찰을 허탈케 한 바 있다. 검찰은 문제의 용의자를 살해한 조직을 뒤쫓고 있으나 수사는 미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나라를 망치는 마약류 사범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한 전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마약사범퇴치 운동에 우리 모두가 나서야 할 때이다. <특별취재반>" 김석기는 신문을 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제발 이 기사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이 땅에서 마약을 퇴치하고 몰아내는 운동에 기폭제가 되었으면, 그는 간절하게 빌었다. 일본에 밀반출되던 루트가 거의 차단돼 국내로 밀매망이 뻗치면서 마약은 급격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물량 공급이 대량으로 늘어나면서 가격이 하락하자 일부 지역의 술집에서는 매상을 많이 올리기 위해 히로뽕을 술에 타서 판매한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양산 김해 일원에서는 농사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고 정력제로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고 꾀어 4-5 차례 공짜로 주어 중독자로 만든 후 돈을 받고 파는 등 순박한 농촌마저 마약으로 오염시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외에도 마약의 부작용으로 빚어진 각종 폭력사태는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었다. 고위층 인사의 자제가 히로뽕 중독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비롯되어 더듬어 본 전국적인 마약실태에 김석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김석기를 비롯한 특별취재반은 사명감마저 느끼며 밤잠을 설치고 뛰어다녔을 정도였다. 검찰의 마약사범전담반과 합동으로 뛰어다닌 지난 보름 동안 김석기는 모처럼 신문기자로서의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천재일우의 기회로 포착해 내었던 지난 밀매조직의 하부선이 조직에 발각되어 제거당하면서 추적의 선이 끊어져 버린 사실은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놈들이 우리가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중의


하나였다. 검찰의 전담요원 역시 그런 의문을 품은 듯했다. 그리고 그들은 도리어 김석기의 취재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지 않았던가. 김석기는 펄쩍 뛰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영원한 의문으로써 남아 있게 되었다. 검찰과 함께 펼쳤던 합동취재는 그야말로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상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던 듯했다. 누굴까?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은 엄염한 사실이 되었다. 찾아내고 말겠다. 석기는 내심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 합동취재는 이미 수포로 돌아갔지만 인천해안에 떠오른 변사체 사건만큼은 개인적으로 파헤쳐 보아야겠다고 그는 마음먹고 있었다. 따르르르릉.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굴까 이 시간에? 그는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마침 집에 있었군." 상대는 손삼수였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오랜만이야." "인사 한 번 빨리 하는구먼." "나원 이친구. 또 뭔가 일이 잘 안풀리는가 보군. 아침부터 시비를 걸어 오는 걸 보니." "하하... 어쨌든 축하해. 한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결국 별하나 건졌더구먼." "특종은 무슨... 사회 캠페인 특집기사에 불과한걸..." "그나저나 왜 그렇게 얼굴 구경하기가 힘들어? 오늘은 얼굴 한 번 보자. 어때?" "글쎄. 그 못생긴 얼굴 보고 싶은 마음 별로 없는데?" "예끼!" "하하... 틈 나는 대로 전화할게." 그러나 틈을 내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경과해야 했다. 김석기와 손삼수가 얼굴을 마주 본 것은 결국 저녁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시경 옆골목에 위치한 할머니


순대국밥집 골방에 마주앉은 그들은 소주병을 기울이며 모처럼의 회포를 풀었다. 손삼수로부터 우이동 산장의 전라() 여인 변사체 발견사건을 전해들은 김석기는 대번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 친구야! 그런 건수가 있으면 왜 진작 연락을 하지 않았어?" "자네한테 도통 연락이 닿아야지. 게다가 수사방침이 비공개로 결정되었으니 연락해봤자 별 수 있겠나?" "거, 참..." 김석기는 새삼 입맛을 다셨다. 무엇보다 그를 자극한 것은 변사체로 발견된 성귀희여인이 거물 정치인 성기용 씨의 G 딸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모종의 정치적 흑막이 있지나 않을까? 대뜸 ���동된 그의 호기심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연거푸 세 잔째의 술잔을 비워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술발이 잘 받을 모양이었다. 아니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그의 주변에선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인천해안에서 떠오른 마약밀매용의자는 음모와 협박. 게다가 이번에는 우이동 산장의 전라여인 변사체 사건이라니. 김석기는 네 번째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사내는 지금 막 방으로 들어서는 그를 분노가 그득한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유재택은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공손히 목례를 올렸다. 그리고 사내의 앞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팽팽한 공기가 실내를 그득 메웠다. 사내는 질책이 담긴 표정을 좀처럼 풀 줄 몰랐고 유재택은 목묵부담으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질식할 듯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유재택이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장인어른." 그 말에 대꾸도 없이 성기용은 그의 앞에 놓였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으며 지그시 유재택을 쏘아 보았다.


그의 얼굴에선 여전히 비난의 표정이 남아 있었다. 유재택은 울컥 치미는 울화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이 노인네가 윱천왜 이렇게 투정을 부릴까? 물론 착잡한 심경을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금지옥엽이던 외동딸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동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사위와 틈이 벌어질지도 모를 현실에 대한 우려가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고 동시에 그를 분노케 했을 터였다. 사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짐짓 처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륜의 행각을 벌였던 아내에 대한 불만과 울화를 그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 점이 성기용의 심기를 더욱 불편케하고 분노를 폭발케 했다. 물론 고의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장인과 등을 돌림으로써 필연코 그에게 돌아올 타격을 그는 윈치 않았다. 아직은 그의 기업에 대한 방패막이로서 싫든 좋든 성기용은 절실히 필요한 인물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들의 밀월은 원만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성기용은 홍해강철그룹의 후견인이나 진배없었고 홍해강철그룹이 급성장을 거듭한 비화의 뒷언저리에는 성기용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수년전 철강업계에서 선두그룹의 하나였던 고려제강을 흡수합병하여 재계를 발칵 뒤집었고, 새우가 고래를 집어삼킨 사건으로 비유되면서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성기용이 그들의 뒤를 돌봐줌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 후로 홍해강철그룹은 급성장을 거듭하며 사세를 널리 뻗쳤고 그룹의 주력 업종이었던 철강부문을 연간 총 매출액의 40%로 낮출 수 있을 만큼 업종 진출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가내공업 수준이던 자그마한 철공소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처럼 재벌의 골격을 갖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주인 부친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정략결혼을 성사시킨 유재택사장의 2 세 경영시대가 열리면서 비로서 결실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성기용은 그의 막후에서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큼직한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방패막이로서 조력자의 역할을 담당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성기용의 정치인 생활에 필요한 자금 파이프 노릇을 하는 것은 그의 차지였다. 이렇듯 공생공존의 관계를 지금 와서 깨뜨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요즘처럼 국민들의 여론이 기업에 일방적으로 불리할 때는 처신이 더욱 조심스러운 법이다. 또한 양가문의 이해에 일방적으로 얽힌 정략결혼이었다 하더라도 유재택의 성귀희에 대한 사랑은 진실했고 끔찍하였다. 비록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어 씻을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었지만 가정은 가정이고 사업은 또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장인과의 위상정립을 새로이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장인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터였다. 그는 즉각 달려왔다. 그러나 장인은 여전히 감정의 앙금을 떨치지 못한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던 성기용이 그의 앞에 잔을 밀고 묵묵히 술을 따랐다. 화해의 제스처다. 유재택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공손히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 술잔을 건넸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서야 성기용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딸자식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질책을 한다면 나로선 할 말이 없네." "" "허나 모든 일에는 상대성이 있는 법이야. 마누라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고 밖으로 내 돌린 자네의 불찰이나 자네가 무책임하게 일으킨 불미스런 여자관계 따위들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요인중의 하나라는 걸 자네도 부정은 못할 걸세."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누구의 잘잘못인지 시시콜콜 따질 생각은 없네. 다만 자네가 일방적으로 서운하게 생각한다면 나도 불만이 없지않다는 뜻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자네가 재가를 하고 싶다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네.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오늘 자네를 부른건 그 말을 전하고 싶어서야."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장인어른께 잘못한 점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꾸중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아이들 교육문제만 신경을 써주면 나로서는 더이상 바랄 게 없네." "장인어른! 그동안 저도 많은 심적 느꼈고 나름대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저를 너무 몰염치하다거나 야박한 놈으로 몰아 붙이진 마십시오." 유재택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자 성기용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구먼. 자 술이나 한 잔 더 하지." 술이 한 순배 더 돈 후 유재택은 기회를 보아 준비해 온 두툼한 봉투를 꺼내 놓았다. "뭔가?" 성기용의 눈빛이 그렇게 물었다. "이번에 미국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음.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미국측 간사로부터 초청을 받았네." "여비로 보태 쓰시라고 준비해 왔습니다. 혹시 부족하시다면 미국지사에서 도울 수 있도록 별도로 수배해 놓겠습니다." "됐네. 그럼 이 돈은 자네 성의로 생각하고 받아둠세." 성기용은 거리낌없이 봉투을 집어 넣었다. 그의 입가에 흐르는 흐뭇한


미소를 보며 유재택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화해는 끝났다.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어깨가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그는 느꼈다. 봉투 속에는 결코 여비로 볼 수 없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평소 정기적으로 불입했던 비밀자금의 거의 두배에 가까운 거액이었다. 봉투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흡족해할 성기용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유재택은 회사로 돌아왔다. 사장실 소파의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 긴장감이 이완되면서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오늘처럼 장인과의 대결이 힘든 적은 없었다. 그는 장인과의 대좌를 늘상 대결한다는 느낌으로 임해왔다. 앞으로는 더욱 힘들어질테지. 그는 씁쓰레한 미소를 씹으며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나른한 피로에 쫓겨 잠시 눈을 붙일 참이었다. 뚜 인터폰이 그의 잠을 쫓고 말았다. "왜 그래?" 그의 입에서 절로 짜증이 터져나왔다. , "사장님, 손님이오셨습니다. 시경 강력계 손삼수 반장님이라시는데요." 이런 무례한 친구를 봤나. 여기가 어디라고 제 집 안방드나들듯 선약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온담. 불쑥 치미는 불쾌함을 꾹 누르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 "안으로 모셔!" 잠시 후 앞자리에 마주앉은 손삼수를 유재택은 고자세로 내려다보았다.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만 마침 계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바쁜 시간을 뺏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제멋대로군. 무식한 놈 같으니.' 유재택은 차가운 눈빛을 느끼지 못한 듯 손삼수는 어눌한 어조로 먼저 예의를 차리는 시늉을 했다. "용건이 뭔가요?" "사장님께 양해를 구할 일도 있고 부탁 말씀을 들릴 일도 있고 해서요."


"말씀하십시오." 그는 불청객을 빨리 쫓아내고 싶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손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수사는 난관에 봉착해 있습니다.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한 점 우선 사고드립니다." 유재택은 가당치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부인의 죽음에 대한 원인은 밝혀졌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조금도 진전이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였으며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에서 고의성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조차 말입니다. 이러다간 자칫 수사가 미궁에 빠진 채 수사본부가 해체되지 않을가 염려스러운 지경입니다." "그래서 날보고 어쩌라는 거요?" "사장님 심중에 혹시 짐작 가시는 부분이 없으십니까? 부인과의 상대로 격에 맞을 만한 인물이라거나 사장님께서 의혹을 가진 부분이 있다면 솔직히 들려 주십시오." "이것봐요 손반장!" 유재택은 기어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집사람이 죽은 건 현실이오. 나에겐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사실이오. 나는 그 악몽을 더 이상은 되살리고 싶지 않소. 내 기분 아시겠소, 손반장? 범인을 잡건말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죽었던 집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 끔찍한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오. 나는 그 사건이 빨리 가라앉기만을 바랍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회사나 나의 사생활이나 내 이름 석자가 신문 지상에 까발려지는 건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제발 더이상 이 문제로 날 귀찮게 하지 말아 주시오." 망연자실한 듯 우두커니 유재택을 바라보던 손삼수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장님,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한


범인에 대한 원한도 없으십니까?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범인을 잡는 건 당신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니잖소!" 유재택은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자기 부인의 죽음을 놓고 마치 남의 일처럼 초연할 수 있다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사건해결보다는 사건이 조용하게 가라앉기만을 바란다구? 흥, 돈많은 사람들의 인정머리란 게 고작 그 정돈가? 그렇다고 내가 수사를 포기할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난 그렇게 사회정의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순 없어. 오후 한나절을 내낸 침울한 기색으로 수사반을 지키고 있던 손삼수가 저녁 무렵에 나타나 김석기를 할머니 순대국밥집으로 끌고가 술이 한 순배 돈 연후에 털어놓은 울분은 울분의요지는 대충 이랬다. "내 말이 틀렸나? 한 이불 속에서 몸을 섞고 살던 부부가 과연 이래도 되는 거야? 세상이 꼭 이렇게 삭막해져야만 되겠어?" 손삼수는 자못 분개한 듯 계속 울분을 토로했다. 이것은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보아 대단히 보기 어려운 광경중의 하나였다. "그래,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 아니겠어?" 그는 우선 흥분한 손삼수를 진정기키기 위해 위로의 말부터 꺼냈다. "말세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수준이 그 정도니까 오늘날처럼 가치관의 혼돈이 온통 사회문제로 비화되는게 당연한 이치지." "옳은 말이야. 자 그 문제는 천천히 대처하기로 하고 이제 화제를 바꾸는 게 읍" 김석기는 손삼수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드는 틈을 타서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 "좋아, 술이나 마시자구." 두 사람은 건배를 했다.


한편, 손삼수가 김석기를 붙들고 유재택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고 있는 시각에 그곳에서 불과 서너블록 떨어진 요정의 밀실에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야? 그게 사실이야?" 성기용의원은 경악에 찬 눈으로 두 눈만 멀둥거리고 서 있는 안희갑감보좌관을 쏘아보았다. "네, 분명한 사실입니다." "소스가 어디야?" 성기용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듯 다시금 확인을 했다. "평소에 제가 줄을 대고 있던 K 일보 기자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강태산의원께서 K 일보 사회부장에게 따님이신 성귀희여사의 의문사를 캐어들어 가면 대어가 걸려들거라면서 기사를 확대하도록 은근히 종용하더라는 겁니다. K 일보뿐만이 아닙니다. S 일보와 P 신문에도 압력을 가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 친구 믿을 만한가?" "그 기자 말씀입니까?" "그래." "제 심복이나 다름없는 친굽니다." "으음... 강태산이 그 놈이 등 뒤에서 날 칼로 찌르겠다 이 뜻이로군." 성기용은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강태산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위인이다. 한때는 그에게 가장 강력히 도전했던 라이벌 정객이 아닌가? 그러한 위인이 지금 도전을 해 오고 있다. 성기용은 일말의 위기감을 느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놈이 무슨 낌새를 챈건 아닐까?"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아닌 모양입니다. 어쨌든 의원님을 물고 늘어져서 끌어 내리는데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하여 칼날을 세운 듯합니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 사건의 전모에 대한 윤곽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듯합니다." "어쨌든 방심할 수는 없는 친구야."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할 듯 싶습니다."


"알겠네. 당장 손을 쓰도록 해, 경찰쪽은 내가 틀어막을 테니까, 자넨 언론을 맡아서 뛰어! 그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는 건 곤란해. 이 정도선에서 막아, 알겠나?" "네." "그럼 즉시 뛰어." "알겠습니다." 안희갑보좌관이 물러간 후 성기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형 둑이 터지는 것도 바늘 만한 구멍에서부터 비롯된다. 하물며 지금은 시기가 좋지않다. 자칫 불똥이 그에게 튀기 시작한다면 뜻밖에 큰 타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성기용은 다시금 마음을 추스렸다. 그리고 잠시후 이 요정의 회식에 참석한 계보원들에게 주의환기를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되새겨 넣고 있었다.

6. 변 신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가자 윤정님은 찔끔 눈물을 지릴 뻔했다. 십수년간 정성껏 길러온 머리칼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생머리에 반했다면서 남편 우춘구는 그녀의 긴 머리를 유난히 좋아했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유독 생머리를 고집하면서 애지중지했다. 수년전부터 짧은 헤어 스타일이 복고풍을 밀어내고 최신 패션으로 세계적 열풍을 일으켰지만 지금���지 긴머리만을 고수하였다. 거리에서 긴머리 소녀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건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웨딩드레스를 입는데 긴머리는 거추장스럽다고 미용사가 간곡히 설득했지만 그녀는 머리 자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끼던 머리를 그녀는 결국 자르고 말았다. 그것은 김석기를 만나면서 그녀가


일으킨 첫번째 변화였다. 우선 긴머리가 남들의 시선을 끈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괴한들의 보이지 않는 시선에서 한시바삐 달아나고픈 절실한 심경이 먼저였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생애의 강렬한 욕구가 그녀의 마음을 기어이 움직였던 것이다. 김석기는 그녀의 변화하는 마음의 허전한 구석을 튼튼히 메워주었다. '힘을 내세요 윤정님 씨. 윤정님 씨 혼자 고립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제가 도와 드리죠 기꺼이.' 그녀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계획을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김석기와 헤어진 다음날 밤 그녀는 밤이 으슥하기를 기다렸다가 압구정동의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일차적으로 숙소를 옮기는 것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경비실에는 몸이 아파 시골로 정양하러 간다며 연막을 쳤다.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아파트 관리를 잘 부탁한다며 돈봉투까지 꺼내 놓았다. 간편한 옷가지 몇개와 신변용품, 그리고 남편이 쓰던 물건만을 챙겨 넣은 트렁크를 들고 경비원의 융숭한 배웅을 받으며 그녀는 짧은 기간이나마 정이 들었던 아파트단지를 떠났다. 그리고 번거롭긴하나 용의주도하게 잠적하기 위해 택시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서울 시내를 헤맨 끝에 그날 밤 늦게서야 그녀는 비밀리에 마련해 둔 아파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동 사거리에서 신장쪽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우측의 숲 속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외딴 아파트단지였다. 그녀가 상처받은 마음을 정리하고 새출발하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일 듯 싶은 곳이었다. 우선 주변경관이 화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많지 않고 도심에서 제법 떨어진 조용한 아파트가 그녀는 마음에 쏙 들었다.


적들에게 그녀가 압구정동을 완전히 떠났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몸만 빠져나오고 보니 생활집기나 가구들은 새로 장만해야 했다. 그녀는 돈에 대한 여유는 제법 있는 편이었다. 결혼을 할때 시댁과 친정에서 받아 둔 지참금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공인회계사로서 수입이 좋았던 듯 남편의 통장에도 꽤 많은 돈이 저축되어 있었다. 새로 옮긴 아파트에서 새출발의 첫날밤을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면서 그녀는 앞으로의 플랜을 차근차근 점검해 보았다. 완벽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는 적이 안도하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새삼 불태우며 결의를 가다듬었다. 흥, 미련한 놈들, 두고 보아라. 내가 이렇게까지 표독스럽게 덤벼들 줄은 상상 못했을게다. 여자의 가슴에 못을 박고 한을 심은 네 놈들의 눈에서 반드시 피눈물을 뽑아내고 말테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가까운 잠실의 한강쇼핑센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밤사이 짜둔 목록에 쓰여진 물품들을 구입하고 쇼핑하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녀는 철저한 변신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준비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선 돈 많은 부잣집 아들과의 결혼에서 실패한 돈많은 이혼녀로 행세할 요량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집기며 비품들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녀는 섬세한 안목으로 쇼핑을 끝내고 오후에는 미용실에서 과감하게 머리를 자르고 말았다.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 나가는 듯한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나오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어머나, 머릿결이 정말 고와요. 힘들게 길러서 왜 자르려고 하세요?" 미용사의 호들갑스런 위로에 그녀는 씁쓰레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커트를 끝낸 미용사는 이번엔 앞머리를 곱게 말아 올리며 정성껏 가다듬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 됐습니다. 손님 정말 예쁘게 나왔죠?" 미용사의 자화자찬에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조마조마한 불안감으로 안달하던 조바심이 대번에 씻겨지면서 그녀는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거울 속에서 지금까지의 그녀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윤정님이 활짝 웃고 있었다. 놀랍게도 긴 생머리의 윤정님은 짧은 핀컬퍼머의 생판다른 윤정님으로 변모해 있었다. 게다가 미리 준배해 두었던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착용하자 자기가 보아도 깜짝 놀랄 정도로 엉뚱한 여인이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정말 잘 나왔죠?" "그래요. 수고하셨어요." 미용사에게 공치사와 함께 두둑한 팁까지 얹어주고 미용실을 나온 그녀는 흡족한 마음과 함께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듯 했다. 이제 서울거리를 마음껏 활보해도 그녀를 알아 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녀는 새로운 자신감에 가슴마저 뿌듯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오늘 구입한 비품들의 정리정돈을 끝내고 약간은 한가해지자 미처 모친에게 연락을 못했다는 자각이 얼핏 떠 올랐다. 그녀는 친정으로 전화를 넣었다. 마침 모친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엄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화기 저쪽에서 모친의 숨가뿐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너 거기 어디냐? 정님아? 정님아, 몸은 괜찮니? 응?" 그녀는 말투에 한껏 어리광을 섞어 말했다 모친을 안심시키는 데는 이 방법이 제일이었다. "이것아 어딜가면 간다고 얘기를 해야지. 난 또 십 년 감수하는 줄 " "아이참 엄만, 내가 어린애유?" "어린애가 아닌데 이렇게 엄마 가슴을


태우니?" "미안해요 엄마." "어젯밤부터 계속 전화를 받지 않길래 혹시 또 무슨일이 생긴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줄이나 아니? 아침에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정양하러 시골에 갔대지 뭐냐. 제발 엄마 속좀 그만 썩여라. 이러다 나까지 제명에 못 살겠다." "에게게, 내가 할 소릴. 엄마 등쌀에 내가 못견딜 판인걸?" "어휴, 이 철없는 것아. 너 정말 몸은 괜찮니? 정말 별일 없는거니?" "그래요 엄마. 나 밥도 잘 먹고 잠 잘자고 있어." "도대체 거긴 어디냐?" "시골이랬잖아." "시골 어디냐니까?" "제발 내 걱정말우 엄마. 나 혼자서 조용한 시간 가지려구 이리 내려온 거야. 그런데 엄마한테 여기 위치 알려주면 헛수고 되게? 내 마음만 정리되면 금방 올라갈게 엄마. 그러니 당분간 신경 끊으시고 조용히 기다려요 응?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우." "에이구, 그놈의 마음 정리하는데 웬 시간이 그리 걸리누." "그럼 전화 끊어. 엄마." 그녀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기왕 숨어지낼 바엔 철저히 숨어야한다는 생각에서 그녀는 자칫 입밖으로 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꾹 눌렀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보니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실수란 사소한데서부터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렇게 몇 달만 더 지나면 그녀는 세인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갈 것이다. 그녀가 노리는 게 바로 그 점이기도 했다. 잠시 생각끝에 마음을 정한 그녀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상대는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합동공인회계 사무실의 유용치()였다. 그는 남편의 대학동창으로서 회사내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며 그녀도 여러번 만나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편의 과거 행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중의 하나였으므로 그녀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소홀히 대할 수 중요한 사람이었다. 한참만에 유용치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유선생님. 저 윤정님이에요."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그나저나 왜 이제야 연락 주십니까?" 그의 말투에는 형언할 길 없는 반가움이 한껏 배어 있었다. 그녀는 사고 후 남편의 직장에 대한 처리가 너무 늦었음을 자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뵙고 싶어요. 유선생님." "그럽시다.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춘구가 쓰던 사물도 돌려드려야 하구요." "아...!" 그것은 정님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남편의 흔적을 챙기는데만 급급했지 회사에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회사에 남아 있는 남편의 흔적, 어쩌면 남편의 죽음에 대한 단서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떠오르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유선생님, 한가한 시간을 말씀해 주세요." "전 아무때라도 좋습니다. 시간과 장소만 알려주시면 쏜살같이 달려가겠습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시원시원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윤정님은 소공동의 황실 그릴에서 유용치와 마주 앉았다. 그곳에 예전에 남편과의 은밀한 즐기던 장소라 쉽게 머리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변모한 그녀의 모습에 눈이 부신 듯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상상밖인데요?" "뭐가요?"


"솔직히 말해서 전 유정님 씨를 만나면 무슨말로 먼저 위로를 할까.하고 고민을 했거든요." "기대밖의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원, 천만에요.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난 듯한 건강한 모습을 뵈니까 기분은 좋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그동안 어려움이 많으셨겠죠?" 그는 새삼스럽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그녀는 담담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뭘 드시겠습니까?" 그는 웨이터를 불러서 저녁식사를 주문하며 장기전으로 돌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것도 그녀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처음에 사고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럴 친구가 아닌데 꽤 엉뚱한 구석도 있었구나 하고 말이죠." 순간, 정님은 눈빛을 발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유선생님 말씀중에 엉뚱하다는 건 그이의 자실에 관한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유선생님이 보시는 그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는 스카치로 잠시 목을 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춘구 그 친구는 천성적으로 유하고 남을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지만 틀림없는 낙천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저도 동감이에요." "" 관심이 동하는 듯 이번엔 유용치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차츰 그녀가 자기를 찾아온 저의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제가 유선생님을 뵙고자한 건 유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어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 힘자라는 데까지 벗겨보고 싶어요. 전 남편의 죽음은 타살임을 확신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원인을 규명하는 데는 저 혼자의 힘으로는 너무나 벅차요." "" "우선 남편의 과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싶습니다. 유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는 부분만 말씀해 주셔도 제겐 큰 도움이 될겁니다. 그리고 남편이 이 회사에 들어와서 했던 업무에 관해서 세밀한 자료를 구했으면 해요. 남편이 어떤 회사의 어떤 일을 했는지? 혹시 내밀한 거래 관계는 없었는지, 모든 부분들을 말예요?"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저도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니까요." 그는 역시 선선히 승낙을 했다. 잠실대교를 건너온 택시는 송파대로를 향해 곧장 달렸다. 네온사인이 현란한 롯데월드를 지나치자 큰길 양쪽으로 나뉜 석촌호수가 나타났고 택시는 우측의 서쪽호수를 끼며 급커브를 틀었다. 문득 호수장 모텔이라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눈에 크게 들어오자 김석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됐습니다. 여기 내려주세요."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린 석기는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허, 서울시내에도 이런 곳이 다 있었다니. 그의 입에서 경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북적대는 인파와 석촌호수를 끼고 길 한쪽으로 끝없이 늘어서 있는 각종 아크릴 간판과 네온사인이 휘황한 불야성의 거리였다. 한눈에 서울의 어느 곳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독특한 야경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이 초행길이었다. 다만 오래


전에 이 부근을 몇 번 지나간 일만 떠올리고 막연하게나마 주택가 정도로 짐작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간 셈이었다. 어쨌든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서울의 놀라운 거리에 감탄을 거듭하고 그는 이윽고 그의 목표물을 찾아내기 위해 눈길을 돌렸다. 고급레스토랑 다링 포인트. 그가 찾아낸 약속장소는 호수장모텔과 골목 하나를 끼고 마주 서 있는 건물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윤정님 씨는 왜 하필 이런 유흥가에 약속 장소를 정했을까?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그는 천천히 도로를 가로질러 건넜다. 그러나 다링 포인트의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그의 의혹은 지워지는 듯했다. 붉은 장미무늬가 박힌 카페트를 밟고 내려가는 지하통로 옆에 설치된 웅장한 폭포는 첫눈에 그에게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서구풍으로 설계된 고급스런 실내장식과 넓은 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가 안온한 느낌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다링 포인트는 환락가처럼 현란한 바깥 세계와는 분위기가 백팔십도 바뀐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그는 좌석을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석자리에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얼핏 살펴보니 꽤 미인이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군. 어떤 놈은 복이 많아서 저런 미인과 데이트하는 호강도 누리는데, 그는 슬그머니 터져나오는 푸념을 억누르며 그 좌석을 지나쳤다. 바로 그때. "김선생님!"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그를 부른 바로 문제의 그 아가 씨가 아닌가. 그녀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했다. "저예요. 김선생님."


여전히 눈을 깜박거리며 우두커니 서 있던 석기는 안경을 벗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색이 환해졌다. 그녀가 바로 윤정님이 아닌가.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으니..." 급히 앞자리에 당겨 앉으며 석기는 새삼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뜯어 보았다. "김선생님까지 못 알아보실 줄은 몰랐는데요." "이렇게 변했는데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힌트라도 주셨으면 몰라도." Q "저 어때요? 더 못해졌죠?" 그녀는 겸연쩍게 웃었다. 석기는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원 천만에요. 전 웬 선녀가 하강을 하셨나 했습니다." "어머나, 김선생님도 짖궂으시긴..." "어, 정말입니다. 전 거짓말하면 두드러기 돋는 체질이라서요." 석기의 우스꽝스런 몸짓에 그녀는 참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김석기 역시 시원하게 웃었다. 웨이터가 다가오는 바람에 그들은 웃음을 그쳤다. 진토닉과 키스 오브 파이어를 한 잔씩 시켜놓고 그들은 천천히 분위기를 즐겼다. 피아노 반주와 함께 흘러나온 여가수의 노래소리가 홀을 잔잔하게 메웠다. 이윽고 윤정님을 찬찬히 뜯어보던 김석기가 먼저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댁에 여러 번 전화를 넣었는데 통 받지를 않던데요?" "그 집을 나왔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럼 이사를 하신건가요?" "아뇨." "" "당분간 숨어지낼 수 있는 집을 마련해서 거처만 옮긴 거예요." "언제 옮겼습니까?" "사흘 됐어요." 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정말 잘 하셨습니다. 그렇잖아도 걱정을 했었는데." "별 말씀을, 그나저나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는 잔 속에 반쯤 남아있는 진토닉을 한꺼번에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웨이터를 불러 진토닉 한잔을 더 청했다. 윤정님은 시켜놓은 키스 오브 파이어에는 손도 대지 않다. 세모골의 자그마한 술잔에 진한 빨간빛의 액체가 가득 담긴 이름에 어울리는 예쁜 술이었다. 술잔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윤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선생님을 뵙자고 청한건 긴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어서예요." 김석기는 긴장한 낯빛으로 정색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혹시 새로운 나왔습니까?" 정님은 잠자코 핸드백에서 메모지 한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 주었다.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메모지에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않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김석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낙서처럼 휘갈겨댄 악필도 그랬지만 두서없는 글자의 나열들이 마치 암호문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메모지의 내용을 해독할 방법이 없어 그는 윤정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짓을 했다. "도대체 이건 뭡니까?" 그제서야 정님은 앞뒤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제 오후에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유용치를 만나 도움을 청했던 일이며 유용치가 챙겨놓은 남편의 사물을 인계받은 사실들을. "그렇다면 이 쪽지는 남편의 사물 속에서 발견된 겁니까?" "네." "음..." 석기는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렇다면 암호문처럼 작성된 이 메모는 이번 사건의 중요한 단서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몸 속에서 잔잔하게 요동치는 흥분을 억누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어떤 의문에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가만, 윤정님 씨는 남편의 죽음이 남편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뜻밖에도 그녀는 단호하게 심경을 피력했다. 김석기는 내심 허탈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그러셨을테죠. 또한 가능성도 가장 높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님 씨는 큰 실수를 하신 겁니다." "네?" 정님은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업무와 연관되어 살해되었다면 그 직장에는 분명히 남편의 적이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런데 정님 씨가 자신을 노출시키고 이쪽의 의도를 드러냈다면 적의 입장에선 어떤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증거자체를 소각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또 다른 행동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죠." 순간 정님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며 안색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석기는 그녀의 기분을 전환시킬 필요를 느껴 급히 말을 바꾸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이쪽에서 냉정하게 대처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제 말뜻을 아시겠죠?" "...네." 정님은 어렵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은 조급전보다는 한결 풀어진 듯 보였다. "유용치라고 했나요?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인가요?" "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남편과


평소에 가장 가까운 동료였구요?"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사람에게 새로 옮긴 집 연락처를 알려주셨나요?" "아뇨."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직접적인 접촉은 피하셔야 합니다." "남편의 과거를 알기 위해선 아직 그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텐데요?" "그렇군요." 김석기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짓눌러 왔다. 그 틈을 뚫고 피아노 연주곡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이윽고 김석기가 머리를 들었다. "제가 그 사람을 상대하면 어떨까요? 그게 거북하시다면 두 분이 만나는 자리에 제게 합석하는 형태도 괜찮을 듯합니다." 정님은 잠시 생각에 잠겨드는 눈치였다. "그래야만 혹시 이쪽이 적들에게 노출되더라도 윤정님 씨가 표적이 되는 일만은 면할 수 있을 겁니다. 표적이 된다면 당연히 신문기자인 저한테 화살이 쏠릴 테죠." 생각에 잠겨있던 정님은 한참만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김선생님까지 희생되는 일이 생기다면... 전 그런 일은 원치 않아요." "하하...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아무려면 제가 그리 쉽게 당하겠습니까? O 전 저를 보호해 줄 든든한 백 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님 씨와는 입장이 달라요." 정님의 염려를 그는 한마디로 묵살하고 말았다. 마지못한 듯 정님은 간신히 머리를 끄덕여 승낙의 뜻을 표했다. 석기는 빙긋 웃으며 고마움을 전했고 정님 역시 활짝 웃으며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분위기를 환하게 바꾸었다. 석기는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랑스런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윤정님을 처음 만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녀를 만나는 날이면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느꼈다. 그건 왠지 자신도 모르는 감정이었다. 이런 걸 연정이라고 부르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정확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롭고 신선한 감각이었다. 그 감정은 오늘따라 더 했다. 놀라울 정도로 변모한 모습을 보이며 나타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애틋한 연민과 함께 뭉클한 정을 가슴 가득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해 이 여인을 보호해 주어야겠다는 각오를 남몰래 가슴에 새긴 석기였다. 석기의 그런 느낌이 전달된 듯 정님 역시 다소곳한 표정으로 석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모지를 다시 한번 뒤적여보던 석기는 끝내 모르겠다는 듯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이 쪽지는 아무래도 남편이 필요에 의해 작성해 두었던 암호문 같은데 정님 >씨 생각엔 어떻습니까?"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님은 쉽게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다면 이 암호는 남편의 죽음을 캘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겁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머리를 끄덕였다. "이 암호문 한부를 복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반드시 풀어보겠습니다." "그 쪽지를 가지세요. 집에 사본이 한 부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근데 신혼 첫날밤에 남편을 객실 밖으로 유인해 낸 친구, 그 전화를 걸었다는 친구가 누군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정님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지금까지 그 점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눼 "전 아직..." 그녀가 말을 더듬거리자 석기는 방긋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쉽게 알아 내실 수는 없을 겁니다.


놈들이 그렇게 어수룩하게 일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한 가지만 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 "남편의 사물을 제가 한번 확인할 수 없을까요?" "그래요. 내일 가지고 나오도록 할게요." "아닙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습니다. 댁에 가서요." 순간 정님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혹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보여드리죠." "고맙습니다." 김석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 안돼요. 이러심 안돼요. 제발..." 윤정님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급한 말과는 달리 그녀의 몸짓은 그다지 강한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석기는 그녀의 허리를 휘어감은 팔을 더욱 옥죄었다. 나긋나긋한 그녀의 몸매가 바짝 밀착되면서 여인 특유의 싱그러운 체취가 그의 전신을 자극해 왔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는 다급하게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봉곳 솟은 가슴을 움켜쥐자 뭉클한 감촉이 그의 전신을 짜릿하게 휘감아왔다. "아..." 그녀는 기성을 발하며 서서히 함몰되어 갔다. 다음 순간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해내는 그녀의 입술을 그의 입이 봉해버렸다. 그리고 기나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김석기는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인 채 축 늘어져 있던 그녀의 팔이 그의 어깨를 휘감으며 그를 받아들었다.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러나 서투른 손짓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녀는 몸짓으로 그의 동작을 거들어 주었다. 허겁지겁 세 번째의 단추를 풀고 가슴을 열자 봉곳 솟은 가슴과 하얀 살결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후끈 달아오른 그는 이번엔 급하게 그녀의 치마를 끌어내렸다. 몇 번인가의 헛손질 끝에 지퍼를 열고 치마를 벗긴 그는 유일하게 그녀를 지키고 있던 자그마한 팬티마저 벗겨내려 버렸다.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둔덕과 볼륨있는 몸매가 한눈에 드러나자 그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터질 듯 팽창하는 사내를 주체 못해 그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몸 속으로 깊숙히 미끄러져 들어갈 찰나였다. 따르르르... 귀청을 때리는 자명종 소리에 김석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명종 시계의 알람을 죽이고 실내를 둘러본 그는 이내 허탈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그를 황홀경 속으로 몰아 넣었던 모든 것은 바로 꿈이었다. 또한 그가 몸을 일으킨 것은 윤정님의 침대가 아니라 자신의 하숙방 이부자리가 아닌가. 그리고 조금 전에 꿈 속에서 벌였던 정사의 여운이 후줄근한 진땀이 되어 찌꺼기처럼 그의 전신에 남은 채 불쾌한 감각만을 잔뜩 안겨 주었다. 그는 미처 치르지 못한 정사에 대한 아쉬움이 남은 듯 원망스런 눈길로 자명종 시계를 쏘아 보았다. 조금만 늦게, 단 5 분만이라도 더 늦게 울릴 일이지, 하는 안타까움으로 그의 가슴 속엔 자명종에 대한 원망이 새록새록 피어 올랐다. 제기랄, 이게 무슨 주책이야. 이번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주책없는 자신에 대한 반감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어젯밤,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끝까지 억제했던 김석기였다.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생겨난 그녀에 대한 친근감이 정()으로 변화하고 이제는 연정으로 변모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그였다. 깊은 밤에, 그것도 여인의 농염한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아파트에 두 사람만이 호젓하게 앉아 있다는 것이 끊임없이 그를 충동하고 유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갑자기 야수로 돌변한다한들 조금도 꺼리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의 각오는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자만심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성과 지성을 총동원하여 본능과 충동을 억누르고 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인격을 믿고 집으로까지 초대한 그녀의 호의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게 또 한번의 상처를 남길지도 모를 행동을 스스로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길만이 그녀를 아끼고 보호하는 길인 듯 싶었다. 그러나 이 무슨 추태인가. 비록 자신의 무의식 속에서 빚어진 일이긴 하나 이야말로 어기없는 간음이 아니겠는가. 정신적인 간음을 범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스스로 자책을 했다. 이제부터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녀에게 이런 꼴을 들킨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는 간신히 자신을 추스렸다. 담배 한 개비를 뽑아물고 불을 붙인 그는 담배연기를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연기가 목구멍을 깔깔하게 간지럽히자 새롭게 정신이 들면서 그의 부끄러움을 조금은 씻어내어 주는 듯했다. 그는 이번에는 어젯밤 그녀의 집에서 가져온 메모쪽지를 집어 들었다. 어제 새벽녁에야 하숙방에 돌아온 후 한 시간동안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 보았으나, 끝내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암호문과도 같은 이상한 부호였다. 그것은 윤정님의 남편 우춘구의 사물 속에서 김석기가 우연히 발견한 우춘구의 기록이었다. K.


O. S. P. H. 마치 고대 이집트 문자를 방불케하는 이상한 문구의 부호와 같은 글자들은 우춘구가 보관하고 있던 조세편람이라는 두툼한 책자의 뒷장에 낙서처럼 휘갈겨져 있었다. 글자를 확인한 윤정님은 우춘구의 필적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글자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그녀는 도무지 모르는 눈치였다. 조세편람이라면 공인회계사가 약방의 감초처럼 늘상 곁에 두어야 하는 필수품 중의 하나이다. 우춘구가 그렇게 귀중한 서책에 기록해둔 글이라면 그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얼핏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의문스런 부호들을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그 뜻은 도통 풀어낼 길이 없었다. 혹시 고대의 갑골문자나 상형문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는 백과사전을 들쳐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실망하고 사전을 덮어버렸다. 문제의 부호는 그가 내심 점찍었던 고대의 글자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장난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춘구가 장난삼아 끄적거린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더럭 치밀면서 회의가 불쑥 치밀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모양의 그림들 앞에 K, O, S, P, H 등의 글자들은 틀림없는 영문 이니셜로 뒤쪽의 그림 내지는 글자를 수식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했다. 언젠가는 이 글자의 비밀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때는 우춘구의 죽음에 얽힌 베일도 걷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기대를 다짐하면서 그는 메모지를 수첩 갈피 속에 소중히 끼워넣었다. 그리고 ���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문득 오늘 오후에 윤정님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오전 중에 신문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회의와 데스크와의 회합, 그리고 자질구레한 자신의 업무를 대충 마무리한 김석기는 점심을 함께 하자는 데스크의 언질도 뿌리친 채 열두 시가 되기 무섭게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소공동의 황실그릴이었다. 김석기가 헐레벌떡 달려 왔을 때 윤정님과 유용치라는 사내가 먼저 도착하여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제가 좀 늦었죠?" 김석기가 겸연쩍게 자리에 다가가자 윤정님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저희들도 방금 왔어요. 참 인사하시죠. 조금전에 말씀드렸던 김석기 기자님이에요. 이쪽은..." ' "유용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내는 활달한 성격인 듯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한 후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정님씨로부터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많이 도와주십시오." 김석기가 먼저 분위기를 잡아나가자 사내는 대뜸 맞장구를 쳐 왔다. "물론입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려야죠." 유용치의 시원하면서도 신선한 성격으로 인해 분위기는 대번에 풀어졌다. 딱딱한 대좌가 되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던 김석기의 염려가 한결 누그러들면서 사내에 대한 그의 경계심도 가라앉는 "외람됩니다만 제가 먼저 몇 가지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사내는 여전히 시원시원했다. "우춘구씨가 근무했던 직장의 특성에 대해서 우선 알고 싶습니다." "저희 합동회계법인에 대해서 말인가요?" "네." 잠시 생각을 굴리는 눈치를 보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들 합동회계법인은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회사규모가 상당히 크겠군요." "하하... 오해는 마십시오. 법인이라도 주식회사가 아니라 합명회사이자 무한 책임회사이고 공인회계라는 특수한 업종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 제조업체처럼 덩치나 규모를 따지긴 어렵죠. 저희 회사의 자산이라면 사람들뿐이니까요." "네에... 그렇다면 직원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약 180 명 가량 되죠." "그 분들이 모두 공인회계사들인가요?" "공인회계사는 100 명 정도예요. 나머지는 관리직원들이구요." "정말 대단한 규모로군요. 공인회계사라는 전문 직업인을 100 명씩이나 거느리자면 일감도 엄청나게 많아야겠군요." "물론이죠." "그럼 우춘구씨의 회사내의 위치는 어떠했습니까? 직장 동료들과의 교우관계 같은 것두요." 사내는 거기서 주춤 눈빛을 모았다.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희들 회사의 분위기는 여느 회사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서로 맡은 업무가 제각각이고 모두들 혼자서 처리하기에 벅찬 서류더미에 쌓여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씀드려서 옆방의 친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일 년 열두 달이 흘러도 동료 직원들끼리 회식 한번 하는 경우도 드문 편이니까요. 전문직이라는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다고나 할까요? 사실 사무실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습니다. 서로 농담 같은 것도 건네는 일이 드물 정돕니다. 솔직히 저도 이번 사건이 생기고 윤정님씨의 부탁을 받고 우춘구 그


친구가 하던 파일을 들쳐서 목록을 정리하기 전에는 그 친구가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지도 전혀 몰랐으니까요." "우춘구씨가 하던 일은 어떤 일인가요?" "목록을 윤정님씨에게 들렸으니까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의 일반적인 업무들입니다. 한가지 특성이 있다면 저희 합동회계법인은 국내 기업들의 외국부문 즉 해외기업부문을 전문적으로 취급합니다. 이 분야에서 저희 법인의 노하우는 독보적이죠. 자세한 업무 내용은 말씀드려도 쉽게 이해하시기 힘들 겁니다."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만 유선생의 월급여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순간 유용치의 안색이 붉어지면서 그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꼭...말씀 드려야 합니까?" "네, 큰 지장이 없으시다면."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박봉에 시달리는 편입니다. 일반 회사 과장월급에도 못 비치죠." "설마..." 김석기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공인회계사라면 일반인이 알기에는 전문직종에다 상당히 고급스런 직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편입니다. 공인회계사시험에서 어렵게 1 차 2 차를 통과해야 스태프의 자격이 주어지고. 그리고 다시 2 년을 근무한 후에야 3 차 시험을 치르는 자격이 부여되고 거기서 합격해야 정식 공인회계사가 됩니다. 그래서 받는 월급 초봉이 30 만원 정도예요. 이 정도라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그럼 우리 그이의 월급은 어느 정도였나요?" "우춘구씨의 직급은 상당히 높은 편이죠. 스태프에서부터 매니저, 주니어 매니저를 거쳐 시니어 매니저가 되었지만 월급은 그리 높지 못했습니다." "그럴 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얼핏 우춘구의 저금통장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무려 억대의 거금이 예금된 남편의 통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문득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기색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처럼 말문이 터진 유용치는 지금까지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불평들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있었고 김석기는 연신 감탄을 거듭하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에 열중한 그들은 그 누구도 구석자리에서 그들을 노려보는 무서운 시선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과연 유용치는 그이 장담만큼이나 재빠르게 사건의 중심으로 뛰어든 듯했다. 그와 헤어진 지 이틀 후 김석기는 유용치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윤정님의 노출을 막기 위해 유용치의 창구는 김석기로 못을 박아두었기때문이었다. "김석기기자 계십니까?" "유형이요? 접니다. 김석기입니다." "아, 김기자님. 우춘구씨의 행적을 추적하다보니 뜻밖에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유용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한껏 들떠 있는 듯했다. "그게 뭡니까?" 김석기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살해되기 몇 달 전부터 우춘구 그 친구의 인천출장이 유독 잦았습니다. 우춘구의 죽음은 인천출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천? 인천 어딥니까?" 김석기는 문득 긴장하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제가 지금 당장 인천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자세한 건 다녀와서 말씀드리죠. 기대하셔도 됩겁니다. 하하..." 김석기가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김석기는 깊은 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문제는 인천이다. 인천이 또 등장하고 있다. 그는 쫓던 인천의 사건과 유사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꺼림칙한 것 만큼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인천방면이 이번 사건의 주요무대의 하나임은 분명한 듯하다. 단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면 유용치에게 조심하라는 주의를 미처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그에게 엄청난 후회를 안겨주었다.

7. 고급사교클럽 - 왕궁 남대문을 아래로 굽어보며 우뚝 솟아있는 상공회의소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손삼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부터 그가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도무지 자신감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삼수가 방문하려는 상공회의소 빌딩의 2 층 중회의실에서는 고도정보화사회를 추진하는 정보협의회, 약칭 고정협이 주관하는 제 5 차 정기총회가 지금 막 개최되고 있었다. 손삼수가 그의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고정협에 관심을 두게 된 단 한가지 이유는 성귀희여사가 고정협의 협의위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성귀희여사가 고정협이 주관한 각종 심포지엄과 논문발표회, DB 산업육성 방안에 관한 워크숍 등의 학술행사와 강연회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성귀희여사의 사진앨범에서 그 모든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랭카드가 나부끼는 행사장에서 국내 유수의 석학들과 어깨를 맞대고 자랑스레 찍은 사진들은 성여사의 지성적 추구에 대한 욕구와 지적 사치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왕성한 사회활동욕구와 평소의 성품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손삼수는 다시금 확인을 했다.


그러나 성여사의 과거행적에 접근하는 일만은 정말 용이하지 않았다. 우선 고도정보화 사회를 추진한다는 고정협만해도 그랬다. 정보협의회 위원명단을 입수하여 위원들의 면면을 훑어본 그는 한 마디로 기가 딱 질리고 말았다. 고정협의 추진하는 사업들이 선국으로 막 발돋음하려는 우리 경제, 그리고 국가의 미래와 명운을 걸고 여러 가지 정책을 연구하고 홍보한다는 대승적 차원의 취지에도 문외한인 그로선 혀를 내두를 일이지만 무엇보다 전직 장, 차관을 비롯하여 현직 장관의 이름이 보이는가 하면, 학계 관계 재계 정계 예술계 사회단체 등에서 회장 사장 박사 변호사 판사 소장 단장 교수 국장들의 직함등을 지닌, 사회각분야의 거물급 저명인사들을 총망라한 듯한 구성원의 면면에는 솔직히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까지와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그는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감을 부추기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복장 상태를 점검하고 넥타이를 매만지면서 상공회의소 빌딩을 향햐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래 전에 결혼식을 올릴 때 넥타이를 매어보고 그 후로 넥타이를 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지라 목을 꽉 졸라맨 넥타이가 그를 더욱 거북스럽게 만드는 듯했다. 이 정도 고역은 어쩔 수 없지. 그는 억지로 자위하면서 빌딩 로비의 넓은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행사장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어서 회의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된 지 꽤 오래된 듯 행사장 입구의 접수대에선 파장의 분위기가 엿보였다. 한가하게 손장난을 치고 있던 직원 두엇이 뒤늦게 손삼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삼수는 가벼운 목례로 그들을 제지하고 조용히 회의장


안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회의장을 가득 메운 위원들의 열기가 후끈하게 얼굴로 달려오는 듯했다. 그는 다행히 비어있는 맨 뒤쪽의 좌석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총회의 목차와 기념강연의 연설문, 위원들의 명단들이 적힌 안내 팜플렛을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연단 위에서는 한국과학 연구소 남철희 박사의 기념강연이 한창 열을 뿜고 있었다. "이와같이 컴퓨터, 반도체 등의 정보산업은, 80 년대 이후 이미 급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높은 성장이 기대된다는 것입니다. 정보산업, 교육 및 연구 등 지식 산업 부문을 광의의 정보부문이라고 구분한다고 했을 때 한국에서의 정보부문 고용자는, 83 년 현재 17%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이는 미국의 1970 년 41%, 1978 년 서독이 32%, 1975 년 일본의 30%에 비하여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도 선진국의 발전유형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가정할때, 정보부문이야말로 앞으로 가장 빠른 고용의 성장이 기대되는 부문일 것입니다. 즉 농업, 제조업 등의 분야에서 생력화()가 되면서 여기서 방출되는 인력이 정보 부문으로 흡수되는 발전패턴이 예상되는 것입니다...(중략) 어쨌든 정보화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급속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추세이며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같은 정보화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이를 우리 산업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컴퓨터의 원리 등을 전혀 교육 받지 못한 기성세대는 정보화를 마치 미래의 가상적인 픽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와같은 정보화의 인식부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종의 보,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손삼수는 멀뚱멀뚱한 시선으로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남철희 박사의 강연내용이 그의 귀에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연에 귀를 기울여 본댔자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거의 없었으므로 그의 관심은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는 일 뿐이었다. 맨 뒷줄에 앉아 있다보니 보이는건 참석자들의 뒤통수와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는 그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희끗희끗한 뒷머리와 뒷모습만 보아도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체취와 분위기가 은연중에 풍기는터라 그들과 얼굴을 딱 맞닥뜨린다한들 쉽사리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이 참석자들 중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성귀희여사와 불륜의 정을 통한 사내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단 말인가. 순간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손삼수는 덩달아 박수를 쳤다. 긴 강연을 마친 남철희박사가 좌중을 향하여 목례를 올리고 있었다. 남철희박사가 연단을 내려올 때까지 박수는 끝없이 이어졌다. 잠시후 사회자가 12 층 연회장에 마련된 리셉션에 참석해 주길 요망하는 공지 사항을 알리면서 총회는 폐막되었다. 12 층으로 장소를 옮기기 위하여 모두들 자리에서 분분히 일어났다. 그리고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물밀듯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손삼수는 팜플렛을 뒤적이는 등 딴전을 피우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퇴장하는 회의참석자들을 곁눈질로 슬쩍 슬쩍 살피는게 고작이었다. 잠시후, 참석자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 나가버린 회의장에 그는 혼자서 허전하게 앉아 있었다. 애초부터 크게 기대했던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성여사의 상대 남자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리셉션 장소까지 쫓아갈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어차피 오늘 당장 상대를 밝힐 수 없는 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행색으로 연회장을 서성거리고 싶은 생각은 정말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자. 그는 애써 자신을 추수리며 몸을 일으켜 천천히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남철희박사는 리셉션 장소에서 단연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의 강연 내용에 감명을 받은 회원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감상을 피력했고 남박사는 기꺼이 그들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칵테일 잔을 받쳐들고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남박사는 내심 흐믓했다. 한가지 서운한 게 있다면 이 자리에서 그의 자랑스런 모습을 지켜보아 주어야 할 성귀희여사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가 사람들 사이를 두어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메모쪽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무심코 메모지를 펼쳐 릿그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남박사님. 남박사님의 훌륭하신 강연을 정말 감명깊게 잘 들었습니다. 내일밤에 박사님을 초대하여 박사님의 고견을 경청하고 싶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기 바라며 내일 오전중으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스터 백으로부터" 백합이다. 그 놈이 이 자리에 끼여 있다니, 그는 등줄기를 스치는 으시시한 한기를 느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사회 저명인사들의 모임인 이 자리에서 누가 유력인사의 탈을 쓰고 있는 백합인지 그로선 짐작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래, 정식으로 나를 초대하겠다고? 내일이면 네놈의 상판대기를 구경할 수 있겠구나. 좋다, 암좋고말고. 그는 마음의 동요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며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남철희 박사는 테헤란로에 위치한 왕궁클럽을 찾아들었다. 병원장인 친구 홍성국 박사와 함께였다. "남박사님, 왕궁클럽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회원전용의 고급 사교클럽입니다. 예약에서부터 모든 경비는 제가 책임질 테니 부담없이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참, 남들의 눈도 있고 하니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분만 함께 모시고 오십시오. 두 분이 술을 들고 계시면 제가 자연스럽게 그 좌석에 합석하겠습니다." 백합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바쁘다는 친구 홍박사를 억지로 끄집어낸 남박사였다. 고급 사교클럽이라는 백합의 자랑과는 달리 왕궁이 들어있는 건물은 웅장하기만 했지 외관상 볼품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왕궁내부로 몇 발짝 들어서면서 그는 백합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최고급 자재들을 동원한 실내장식하며 이탈리아 대리석과 크리스탈 상들리에로 장식된 입구에서부터 입장객들이 압도당할 만큼 실내는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시내에서 웬만한 고급 술집들을 두루 섭렵했다는 홍박사마저 혀를 내둘렀다. 입구에서 회원증 제시를 요구하는 종업원에게 남박가 이름을 대었더니, 종업원의 태도가 대번에 돌변했다. 그리고 깍듯이 잠시만 기다려줄 것을 청하더니 인터폰을 들어 안으로 그의 도착을 알리는 눈치였다. 이어 우아한 한복차림의 여인이 급히 나와 반색을 하며 그들을 반겼다. "남철희 박사님이신가요?" "그렇소만..." "백사장님으로부터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 마담 송이에요." 백합이 여기서는 백사장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남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따라오시지요." 송마담이 앞장을 서고 그들은 뒤를 따랐다. 30 대 중반쯤이나 되었을까? 어쩐지 천한 느낌도 들지않을 뿐 아니라


제법 분위기마저 있는 송마담을 뒤따르면서 남박사는 한결 흥겨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오늘밤은 좋은일이 있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로와 같은 복도를 지나자 화려한 홀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송마담은 그 홀로 지나쳤다. "아니, 여기말고 또 있습니까?" 송마담음 볼우물에 살짝 웃음이 고였다. "네, 두 분은 오늘밤 특별회원이십니다." "특별회원?" "저쪽 홀은 일반회원전용 홀이에요. 두 분처럼 귀한 손님을 저런 누추한 곳에서 모실 수가 있나요?" 제법 마음에 들던 홀이었는데 누추하다니? 남박사의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살피며 의미있는 웃음을 던지고 송마담은 계속 안으로 걸었다. 그리고 다시 문을 두어 개나 지났을까? "바로 여기예요." 송마담이 가리키는 홀로 들어서던 남박사와 윤박사는 그만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넓은 홀의 한가운데에 실내풀이 널찍하게 자리잡은 기묘한 분위기가 대번에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을 경악케한 것은 풀과 그 주변에서 뒹구는 20 여 명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알몸이 아닌가. 그녀들은 하나같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미모를 지닌 듯했고 갓 스물이 넘었을까 싶을 정도로 팽팽하고 맑은 우유빛 피부들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도원경이 있었다니. 언젠가 독일을 여행했을 때 그곳의 남녀혼탕 사우나에서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본 기억이 얼핏 났지만 그건 도무지 여기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듯했다. 송마담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문득 그들의 상념을 일깨웠다. "자, 마음에 드시는 파트너를 고르세요. 남박사님, 홍박사님두요."


남박사가 머뭇거리자 송마담이 다시 재촉했다. 남박사는 마지못해 풀 속에서 인어처럼 헤엄을 치는 한 아가씨를 지명했고 홍박사는 다른 아가씨를 골랐다. "서유미, 주미애 두 사람 나와요." 송마담의 지시에 호명받은 두 아가씨는 물기를 채 닦지 않은 채 그들 앞에 마주섰다. 윤기 흐르는 그녀들의 몸매에 눈이 부신 듯 남박사와 홍박사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후 그들은 호젓한 밀실로 안내되었다. 남박사의 파트너 서유미와 홍박사의 파트너 주미애는 여전히 벗은 몸 그대로였다. "춥지 않나? 가운이라도 하나씩 걸치지 그래?" 남박사가 안쓰러운 듯 입을 떼었으나 송마담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아가씨들은 원칙적으로 옷을 걸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박사님이 원하신다면 특별히 가운 정도는 걸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이날밤 놀라운 향연을 벌이면서 남박사는 엄청난 폭주를 거듭하였다. 백합이 그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박사가 거의 고주망태가 되어 있을 때였다. 연구실 창 밖으로 울창하게 뻗어있는 포플러를 바라보며 남철희박사는 상념 속으로 젖어 들었다. 오늘따라 좀체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의 마음 한자락을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는 것은 바로 어젯밤의 술자리였다. 왕궁클럽의 파격적인 분위기는 그로선 좀처럼 엄두를 낼 수 없는 뜨거운 향연이자 기묘한 경험이었다. 어젯밤의 여흥은 오늘 이 시간까지 말끔히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고 잔잔한 여운이 여지껏 온몸을 맴돌고 있었다. 한가지 꺼림칙한 게 있다면 백합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그 백합이 나타난 것은 술자리가 거의 파장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송마담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등장했을 때 그는 어지간히 취해 있었고 취중에서도 그에 대한 놀라움을 금치못했던 기억만큼은 새록새록 살아남았다. 기껏 시중의 건달 정도로 치부했던 백합이 어마어마한 클럽의 사장이었다니,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젯밤에 그가 백합을 어떻게 대접했는지는 도무지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백합이 등장한 그 다음 순간부터 그의 필름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오늘 아침 그의 집 안방 침대 위에서였다. 인사불성 된 채 낯선 세단에 실려온 그가 집에 당도했을 때는 새벽 네 시가 거의 임박했었다고 아내가 귀띔해 주었다. 그렇다면 백합과 합석을 한 후 한두 시간은 족히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얘긴데 혹시 주책없이 헛소리나 내깔리지 않았을까? 더럭 걱정이 치밀면서 마음 한구석이 은근히 켕기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망발이라도 내뱉었다면 이야말로 큰일이다. 더구나 친구인 홍성국 박사가 함께 동석했던 술자리가 아닌가. 무엇보다 떨떠름한 것은 취중에 성귀희 여사와의 불륜을 스스로 떠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하... 실수? 그럴 만한 일도 없었지만 우리 사이에 뭘 그런걸 따지구 그래? 그나저나 어젯밤은 굉장한 밤이었어. 고 젊은 것들 말이야 지금도 삼삼하게 눈에 밝혀 환장하겠어. 이봐 그런 자리 언제 또 만들어 줄 거야? ...아, 백사장인가 하는 그 친구가 자네한테는 꿈벅 죽더구만. 하하... 친구따라 강남간다잖아. 이럴때 친구 덕 좀 보자구."


아침에 홍박사에게 전화를 넣어 슬쩍 떠보았더니 그는 장황하게 공치사를 늘어 놓았다. 다행히 눈에 띌 만한 실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적이 안도했다. 더욱이 그의 필름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백합이 그의 앞에서 꿈벅 죽는 시늉을 했다니 그것도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닐 듯했다. 그러나 생면부지인 그 작자가 왜 그렇게 흉물을 떨며 그를 후하게 대우했는지 그 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무리 곰곰 되씹어 보아도 그와 백합이란 사내는 일면식도 없었으며 그와 연결될 만한 선도 달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 작자가 오랜 지기라도 되는 양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선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미심쩍은 그였다. 뚜. 인터폰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그는 급히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박사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구?" "백사장님이시라는데요?" 화들짝 놀란 그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안으로 모셔요."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작자가 내 연구실까지 찾아오다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낼 셈이로구나. 그래, 만나보자. 못 만날 이유도 없지. 도리어 내가 바라던 참이다. 그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잠시 후, 여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백합이 연구실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허허... 갑자기 찾아와서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백합은 말과는 달리 조금도 염려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떡 벌어진 풍채를 흔들거리며 마치 십년지기라도 만나는 양 허풍을 떠는 그의 모습은 무척 세련되고 자연스러웠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침 부근을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만 실례가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백합의 말이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남박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엔 폐가 많았습니다. 워낙 고주망태가 되어 있어서... 무슨 실수나 하지 않았는지..." 남박사도 인사치레의 말을 던졌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무래도 제가 대접이 소홀했던 것 같아 마음이 켕깁니다." 백합은 예의를 차리는데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듯했다. 그의 화술로 미루어 짐작컨데 그의 말투에서 적의는 묻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여직원이 차를 날라 오는 바람에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남박사는 담배를 권하고 불을 붙여 주면서 백합의 면면을 슬쩍 훑어보았다. 백합은 회관상으로 당당한 풍채와 함께 사내다운 시원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또 그의 외모 어디에서도 백합이라는 별명이 풍기는 의미심장하고 야릇한 분위기나 채취는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점잖은 신사일 따름이었다. 남박사는 자신이 짐작이 기우이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내. 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내가 아직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적이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은 남박사님께 몇가지 자문도 구하고 부탁말씀도 드리겸해서 염치불고하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여직원의 모습이 사라지자 백합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남박사는 긴장감을 애써 감추며 찻잔에 손을 뻗었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자질구레한 말을 생략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남박사는 심호흡을 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 "박사님께선 우리 전자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재편성될지 짐작 하시겠죠?"


남박사는 흠칫 놀라며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바로 그 문제였구나.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내색을 않고 백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백합의 입가로 알듯 모를듯한 미소가 얼핏 스쳤다. "지난 연말에 정부 모 부처에서 박사님께서 몸담고 계신 연구소에 몇 가지 용역을 넘긴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의 말소리가 절로 떨렸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정확한 처방을 내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극비리에 넘어온 용역일 겁니다.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나라의 산업 재편성에 관한 구도를 설정하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맞습니까?" 남박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딱딱하게 낯빛을 굳힌 채 백합을 똑바로 쏘아 보았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박사님, 저 역시 우리 국익에 반하는 행위는 원치않는 사람입니다. 박사님을 해롭게 할 뜻도 전혀 없구요. 우선 제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남박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천길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정부부처의 용역이라면 극비중에서도 철저한 보안을 요하는 극비사항이 아닌가. 그런대 백합은 용케 그 사실을 캐내어 추궁을 해오고 있었다. 가슴이 얼어붙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그는 제대로 입을 열 수 조차 없을 듯했다. 사실 지난 20 년동안 줄기찬 도전과 불굴의 응전으로 편안할 날이 없던 전자업계는 최근에 들어서도 숨찬 변혁을 거듭하고 있었다. 정부의 각종시책은 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나 진배 없었다. 정부의 시책에 재빨리 편승하지 못한 기업은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수 없고, 정부시책에 재빨리 부응하는 기업만이 승승장구하는 것은 기업이 지닌 숙명인 것이다. 예를 들어 전화교환기부문 하나를 살펴보더라도 전화교환기 도입계획이 확정되고 사설교환기 부문에 외국과 합작한 P 전자가 뛰어들게 됨으로써 T 전자와 H 정밀의 20 년 독점아성이 거의 무너질뻔 했는가 하면 T 전자와 H 정밀의 반격이 주효해서 최근에는 정부의 전화계획 자체를 혼선을 빚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전자 교환기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며 이를 반대하던 체신부가 돌연 방침을 바꾸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전화수요에 대처키 위해서는 전화교환기 제작을 2 원화 내지 3 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바람에 한바��� 혼선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재계는 재벌 지배체제로 틀이 잡혀가면서 전자 폴리에스터 필름자동차 중화학공업 디젤 기관차의 생산독점권 등 산업 전 분야에 걸쳐 이전 투구의 싸움을 벌이는 중인데 정부시책에 관한 정보가 어느 한 쪽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그 싸움의 승패는 불을 보듯 빤해지지 않겠는가. 백합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는 순간 남박사의 등허리에는 진땀이 촉촉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백합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바싹 앞으로 당겼다. 그의 입가에는 유들유들한 웃음이 맴돌았다. "박사님께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바로 박사님께서 맡고계시는 용역이 어느쪽으로 결론이 나는지 귀띔만 살짝해주실 수 없겠는지요?" "당신은 내가 연구결과를 쉽사리 털어 놓을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는 쌍심지를 돋우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백합은 더욱 유들유들한 미소로 그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박사님의 명예에 금이 가게 하거나 박사님의 인격을 훼손할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저는 단지 우리가 공생공존하는 길이 없을까 그 방법을 모색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박사님도 살아나고 우리도 살 수 있는 방법, 제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점은 깊이 사과 드립니다." 백합은 어디까지나 정중한 말투와 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못 정중한 한마디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남박사의 폐부를 꿰뜰고 있었다. 남박사는 자신이 크나큰 함정에 빠져 들게 되었음을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모든 게 계획적이다. 이 작자는 바로 그걸 노리고 나에게 접근해온 것이다. 어쩌면 성귀희여사의 돌연한 죽음도 이 자들의 흉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음모를 어떻게 발견해낼 것인가, 남박사는 때가 너무 늦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어떻습니까? 박사님." 백합이 은근히 재촉했다. 등줄기에서부터 번지는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남박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말씀하셔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소이다. 내가 맡은 연구결과는 결론에 도달하자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 "알겠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무리한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선선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백합을 배웅한 남박사는 길게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백합이 눈 앞에서 사라진 순간, 나른하게 피로가 일거에 몰려들었던 것이다. 큰일났군. 이 일을 어쩐다? 일단 지연작전으로 시간을 벌어두었으나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는지 그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였다. 유용치의 전화를 받은 후 김석기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의 새로운 전화를 기다렸다. 그 때문에 그는 될 수 있는한 외출을 삼가고 자리를 굳게 지켰다. 웬만한 외근은 옆자리의 석기자에게 모두 떠 넘겨버리고 전화통 주변만 맴돌았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가 기다리는 전화는 도통 걸려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어지간히 지친 그는 저녁 무렵에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전화를 기다린다는 건 시간낭비임을 비로소 깨달앗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따르르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그는 주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야, 마침 자리에 있었군." 뜻밖에도 전화를 걸어온 건 손삼수였다. "어때? 지금 시간 좀 낼 수 있나?" "글쎄..." "혹시 자네가 반가워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싫다면 혼자 가야겠군." "무슨 일이야?" "인천 해안에서 변사체가 또 한구 떠올랐어." "뭐! 인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김석기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나?" "알았어. 지금 당장 달려갈게." 전화를 끊고 뛰어나가면서 김석기는 속으로 내내 빌었다. 제발 그의 조바심이 기우로 끝나기를. 그러나 그의 염려는 현실로서 눈 앞에 벌어지고 말았다. 현장은 울창한 송림이 넓게 펼쳐진 외딴 바닷가였다. 도무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듯한 한적한 지역이었다. 변사체는 갯벌이 끝나는 지점에 가미니로 덮여 있었다. 현지경찰의 안내로 현장에 도착한 김석기는 손삼수에 앞서 현장으로 달려갔고 가마니를 들쳐 보는 순간 그이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8. 플랑크톤의 비밀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 5012 호실은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낯익은 정물들이 한눈에 들어오자 윤정님은 가슴 한 구석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누구에게랄 것없이 울컷 치미는 분노와 함께 애잔한 슬픔이 마음을 축축히 적셔왔다. 혹시 감상적인 충동에 마음이 여려질까보아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5012 호실을 선택하고 말았다.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서린 곳이었지만 사건의 현장에서 사건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고 싶은 그녀의 염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래전에 신혼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이 서렸던 방에서 다시 묵고 싶다고 그녀가 둘러대자 프런트맨은 마침 비어 있다며 선선히 그 방을 내어 주었다. 가벼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정리를 마친 후 정님은 커튼을 열어 젖혔다.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겁게 가슴을 누르던 압박감이 일거에 씻겨지면서 마음이 일순 가벼워졌다.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한걸음 나서자 싱그러운 바다내음을 실은 바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정님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바닷바람을 폐부 깊숙히 들이 마시고 오염된 도시의 공기를 뽑아내기라도 할 듯 가쁘게 숨을 토해 내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심호흡을 하고나자 온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베란다의 야외용 의자에 걸터앉은 정님은 끝없이 멀리 펼쳐진 수평선에 눈을 돌렸다. 일찍이 남편 우춘구와 함께 바로 이 자리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들 가정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려보고


싶어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소박한 꿈마저 이루어보지 못한 채 그녀는 변을 당했고 남편마저 잃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또 혼자서 수평선을 바라보자니 만감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처연한 마음과 함께 복수심이 고개를 쳐들며 다시금 그녀를 충동질했다. 가늘게 한숨을 내어 쉰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수평선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천천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우선 누구와 접촉해야 쉽사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해 보아도 그건 쉽지 않은 문제일 듯했다. 하야비치호텔에 종사하는 수백 명의 종사원 중에서 그녀에게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접근하는 타이밍도 문제였다. 호텔측으로선 대외비의 일종인 기밀을 쉽사리 털어놓을 리는 없을 터이므로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가슴을 졸이며 고심을 거듭하던 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접촉할 대상으로 호텔의 중간 간부층에서 고르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비밀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최소한 과장의 지위정도는 돼야 가능할 듯했고 젊은 사람만이 자신의 처지에 동정을 보낼 듯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데는 밤시간이 더 적합할 듯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업무가 한가해질 뿐아니라 밤이라는 분위가가 사람들에게는 긴장감을 풀어주고 아무래도 느슨하게 헛점을 노출시키지 않겠는가. 일단 마음이 결정되자 기분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객실에서 1 층 로비로 내려 온 정님은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양식 그릴에서 호텔 특유의 풀코스요리를 시켜놓고 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맛을 음미하였다. 그녀로선 모처럼 포만감을 느낀 식사였다. 그리고 커피숍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소화도 시킬 겸 호텔 정원에서


가벼운 산책을 했다. 어둠이 뉘엿뉘엿 내려앉을 즈음 객실로 올라온 정님은 욕탕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했다. 온몸을 정성껏 닦고 가운을 걸친 후 룸으로 나오자 그제서야 그녀가 예정한 시각에 겨우 임박해 있었다. 그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전혀 큰일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네 프런트 데스크입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깔끔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객실담당 과장님 부탁합니다." 그녀 역시 깔끔한 목소리로 책임자를 .불러 내었다. 잠시후 정중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객실담당 매니저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전 5012 호실에 투숙한 사람인데요. 과장님을 뵙고 상의를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어요."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내려 오시죠." "잠깐만요. 이건 제 개인적인 문제라 과장님을 조용히 만나뵙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과장님께서 제 방으로 찾아와 주실 수는 없을까요?" 뚱밖의 당돌한 제안인 듯 수화기 저쪽에서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내 당황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들은 객실을 방문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손님이 방문을 요청하는데두요?" "네, 그게 저희들 규칙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내려가죠. 과장님과 둘이서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요?" "그럼 제 사무실에서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쪽이 조용할 듯 싶습니다만." 정님은 선선히 승낙을 했다. 정님이 다시 옷을 갖춰입고 내려간 것은


오 분쯤 지나서였다. 과연 객실담당 과장의 사무실은 2 층의 후미진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과장은 목소리만큼이나 깔끔하게 생긴 30 대 후반의 사내였다. 한눈에 선량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정님은 우선 안도를 했다. "양성득이라고 합니다. 우선 좀 앉으시죠." 양성득()과장은 명함 한 장을 건네며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정님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과장은 눈이 부신 듯한 눈빛으로 정님을 바라보았다. 야밤에,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내를 객실로 불러 올리려는 여자치고는 그다지 행실이 나쁜 여자로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사실 그는 여성 투숙객으로부터 은근한 추파를 받은 경험이 왕왕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한 그였지만 내심으로 오늘도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 힘이 닿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정님은 이윽고 마음을 정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장님은 이 호텔에 얼마나 게셨습니까?" "서울에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내려온 지는 반 년쯤 됐습니다만."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과장님께서도 두 달 전에 바로 이 호텔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겠군요." 순간 양성득과장의 눈이 둥그래졌다. "두 달 전이라면... 혹시... 사람이 추락사했던 그..." "네 바로 그 사건입니다." 정님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제서야 짐작이 가는 듯 그는 놀란 눈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생각이 납니다. 아주머니께서 바로 그때..."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할 말을 잊은 듯 놀란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방 안에 침묵만이 무겁게 내리 깔렸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만에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왜 과장님을 뵙고 싶어했는지 궁금하시겠죠?" 양과장이 재촉의 눈빛을 보내왔다. "제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선 제가 처한 입장부터 들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정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의 사고를 당한 후 저는 한동안 삶에 대한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그러니까 그이와 저는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저도 몰라요. 우리가 왜 그런 끔짝한 변을 당했어야 했는지, 어쨌든 저는 우리에게 가해진 음모의 진상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었어요. 그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이의 한을 풀어주는 길이 될 것도 같구요. 그래서 이 호텔을 다시 찾아오게 된 거예요." 정님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실내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그가 침묵을 깨뜨렸다. "알겠습니다. 부인의 뜻이 어떠신지.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건이 나던 날을 전후하여 이 호텔에 묵었던 투숙객 명단을 구했으면 해요." "명단을?" "네,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데는 그 당시의 투숙객 명부가 꼭 필요합니다." "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 사건의 관련자가 당시 이 호텔에 함께 투숙했을 거라고 전 확신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 사건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이 호텔 주변에는 마땅한 민가나 숙소가 없으니까요. 우리


그이가 추락한 시각이 새벽 세 시였어요. 그 시간에 외부에서 누가 들었왔다면 쉽게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그러나 경찰 수사기록이나 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으니까요." 양과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낯빛을 딱딱하게 굳힌 채 깊은 생각 속에 잠겨 들었다. 그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포착한 정님은 바싹 달라붙었다. "부탁드립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인 줄은 알고 있어요. 경찰에 정식으로 부탁할까 생각해 봤지만 전 그렇게 번거롭게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과장님께 부탁드리는 거예요. 명단만 뽑아주신다면 과장님이나 호텔측에는 절대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님은 핸드백을 열어 준비해온 읖꺼내 가만히 밀어놓았다. 한눈에 두툼한 돈의 부피가 짐작되는 봉투였다. 양과장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 앉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이건 도로 넣어두십시오." "제 성의로 알아주시고..." "알겠습니다. 부탁은 들어드릴테니 이건 도로 넣어 두십시오." 양과장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만 저희 호텔에서 그런 사고를 당하셨으니 저희들한테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되어서 승낙하는 겁니다. 단 비밀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네 약속할게요." "제가 내일 오전까지는 뽑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 직접 룸으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님은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객실로 올라온 정님은 일단 목적을 성취했다는 안도를 느끼며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룸서비스를 통하여 샌드위치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으로 아침을 때운 정님은 외출도 삼간 채 실내를 서성거렸다. 그녀는 양과장으로부터 명단을 입수하기 전까지는 계속 객실을 지키고 있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자니 오늘따라 시간이 무척 더딘 듯했다. 열시쯤이나 되었을까? 그녀가 시간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윤정님씨!" 뜻밖에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김석기였다. "어머나 김선생님 아니세요? 여기 전화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예?" "저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습니다. 문제가 생겨서 급히 날아왔습니다." "어머, 김선생님께서요?" "네, 급히 만나야겠습니다. 만나서 말씀드리죠. 제가 객실로 올라가겠습니다." 정님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별안간 무슨 일일까? 김선생이 서울에서 이곳까지 부랴부랴 날아오다니. 불길한 예감이 더럭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허둥대고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것도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일이다. 정님은 문득 치미는 불안감에 몸을 웅크렸다. 윤정님은 호텔 객실로 들어서는 김석기의 표정에서 얼핏 초조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석기는 환한 웃음으로 안도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우선 마음이 놓입니다." 첫 인사치고는 과장된 제스처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으나 진실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는 그의 성의가 엿보이는 듯하여 그녀는 가슴 한구석에서 감동이 뭉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좀 앉으세요. 먼길 오시느라 피고하시죠?" 그녀는 짐짓 애교스럽게 자리를 권했다. 그의 성의에 그녀가 보답할 것은 그외에는 달리 없을 듯했다. 아니, 지금 그녀의 입장으로선 그의 가슴에 매달려 짐짓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석기를 응접소파로 안내하고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음료수들을 꺼내어 탁자 위에 늘어놓은 후에야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렇게 갑자기 제주도까지 날아오신 걸 보니..." 대답대신 김석기는 탁자위에 놓인 캔맥주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꼭지를 따내고는 단숨에 캔에 든 맥주를 거의 비워버렸다. 그는 며칠을 술에 굶주린 사람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님의 눈빛에 문득 불안이 감돌았다. 예사스럽지 않은 느낌, 바로 그랬다. 그녀는 허겁지겁 캔을 비워내는 그의 모습에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그의 고통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이윽고 가슴이 타는 갈증을 메운 듯 빈 탁자 위에 내려놓은 김석기는 이번에는 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 눈길을 쫓았다. 한참만에야 그는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방이 신혼여행때 묵었던 그 방입니까?" 정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망이 매우 좋은 방이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도 용기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선생님." "네." "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어떤 말씀을 하셔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말씀하세요." 흐릿한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던 그는 결국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이번엔 담배를 붙여 물었다. 정님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선생님께서 급히 제주도로 오신 건 다른 볼일 때문인가요?"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절 만나러 오신거죠?" 김석기는 한참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녀가 정색을 하고 바라보자 그는 묵묵히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날렸다. 그리고 허공에서 산화하는 담배연기를 쫓던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 "유용치 씨가 살해되었습니다." "예?" 순간 그녀는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건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손삼수는 현장 책임자이자 관할서인 인천경찰서 차홍락 형사반장으로부터 사건개요를 대충 전해들었다. 죽은 사내의 이름은 유용치. 순간 김석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복하여 확인해 보았지만 죽은 사람은 틀림없는 유용치였다. 이럴 수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과 충격을 느끼며 김석기는 손삼수를 잡아 끌었다. 두 눈으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친구가 갑자기 왜 이래? 아는 사람이야?" "날 좀 도와줘. 부탁이야." "잘 아는 사이냐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지금은 내 눈으로 직적 확인하는게 더 급해!" 투덜거리는 손삼수를 잡아 끌다시피하여 현장으로 달려간 김석기는 갯벌에 누워있는 유용치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틀림없는 유용치다. 울컷 치밀어 오르는 비위를 간신히 억누르며 현장을 빠져나온 김석기는 영문을 몰라하는 손삼수마저 뿌리친 채 무작정 거리로 뛰쳐 나왔다. 대담한 놈들이다. 그런 무지막지한 조직에 홀로 대항하고 있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윤정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금 등줄기로 차가운 한기가 스쳐지나갔다. 얼핏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공중 전화부스로 뛰어들었다. "저는 지금 외출중이오니 용건을 말씀해 주시면 돌아오는대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뚜 소리가 들리면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윤정님의 전화에선 자동응답기가 그를 상대해 주었다. 그는 낙심하여 수화기를 내리고 말았다. 아무리 초조하고 다급하다지만 자동응답기를 상대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문사로 돌아와 전화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참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동응답기가 그를 상대해주었다. 도대체 어디로 싸돌아 다니는거야? 이렇게 밤이 깊도록. 은근히 불만을 품는 자신을 느끼면서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안달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외출에 간섭하고 나설 처지는 더욱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혹시 그녀마저 놈들의 수중에 떨어진게 아닐까하는 우려가 그에게 다시 전화통을 끌어당기게 만들고 있었다. 다이얼 버튼을 누르던 그는 문득 손길을 멈추었다. 지난번에 무심코 그녀가 내뱉었던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몇 군데를 조회한 끝에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그는


급히 제주도로 전화를 넣었다. 그리고 프런트를 통하여 그녀가 하야비치호텔 5012 호실에 투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안전하다. 그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서둘러 제주도행을 다음날 아침 첫 비행기를 예약하고 출장신청서 용지를 집어들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얼핏 뚜렸하게 초점이 모아졌다. 윤정님은 근심스런 눈길로 자신을 굽어보는 김석기의 시선과 맞닥뜨리자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않은가. 그러나 경황중에 몸을 일으키다보니 손을 뻗어 만류하려는 김석기의 품에 안기는 현상이 되고 말았다. 잚은 순간, 움찔 굳었던 김석기는 이내 부드럽게 그녀를 얼싸안았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얼떨떨하기는 정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둘러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빠져나오느라 허둥대면서 김석기를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웬일인지 그의 품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또한 그녀로선 감당하기가 힘에 겨운 사건이 연속되는 현실과 나약하고 무기력한 처지를 떠올리자 왈칵 설움이 치밀었다. 정님은 가늘게 울음을 삼켰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아요. 내가 정님 씨를 지켜드릴 겁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님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더욱 힘껏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서러움에 몸부림을 쳤고 그는 그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동치던 그녀의 어깨가 차츰 잦아들면서 격동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평정을 회복하는 걸 느낀 그는 그녀를 가만히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함께 옆자리에 누운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아 주었다. 김석기는 그녀를 안고 있던 한손을 풀어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뺨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느낀 듯 새삼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고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기나긴 입맞춤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애타게 서로를 갈구했다. 그것은 운명을 함게 하고픈 동질의식이 유발한 절실한 행위였고,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김석기의 손이 그녀의 슬립 속으로 파고 들었다. 주츰 그의 손길을 제지하려던 그녀의 몸짓도 잠깐, 이내 그의 손을 풀어주고 말았다.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슬립을 풀어헤치고 봉곳 솟은 가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이 이번엔 급히 아래쪽으로 뻗어 나갔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녀의 은밀한 둔덕을 쓰다듬는 순간,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눈부시게 하얀 그녀의 살결이 온통 드러나자 그는 깊은 신음을 토해 내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고통이자 신비이며 환희의 순간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몸 위로 쓰러져 갔고 격동의 시간이 흘렀다. "미안하오..."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의 잔잔한 여운을 즐기면서 김석기는 그녀의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아니에요. 죄스런 마음을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어느새 놀라울 만큼의 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김석기가 무안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그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잠시후. 그들은 호텔 뒤쪽에 면해있는 해변을


거닐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달려온 겁니다. 정님 씨의 일거일동이 놈들에게 체크되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님 씨와 접선하던 유용치를 먼저 제거해 버린 걸겁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유용치 씨는 이번 사건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에요.그런 사람을 꼭 죽였어야만 했을까요?" "아마 그들의 정보가 누설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느꼈을 테죠. 바로 정님 씨 남편에 대한 비밀같은 것 말입니다." "" "어쨋든 지금부터는 조심하는데 더욱 맛기해야 할 것 같아요." "전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우선 이 호텔에서 나갑시다.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손을 뻗쳤을지도 모르니까요." 정님은 새삼 놀라운 듯 우두커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저녁 무렵 객실담당 양과장으로부터 숙박명부를 입수한 정님은 김석기의 손을 잡고 신혼부부 행세를 하며 하야비치호텔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유용치의 부검소견서를 읽어내려가던 손삼수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몰라 뜬구름이라도 잡는 것처럼 렇렷그는 유용치의 부검결과에 막연하나마 희망을 걸고 있었다. 힝대수사 00 호, 1989 년 0 월 0 일 시경강력계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회신함. <질의 1> 유용치의 정확한 사망원인은? <회답> 전신몰입성익사()임, 강물, 바닷물, 풀장등과 같이 물이 많은 곳에 전신이 몰입되어 야기되는 익사로 가장 흔한 형태의 하나임. <질의 2> 의 흔적은 있는지? <회답>


본의 아니게 물에 들어가게 될때 반사적으로 주위에 있는 물체를 잡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능으로 또 이렇게 강한 힘을 손에 주고 긴장한 가운데 사망하게되면 시체경직 때문에 그 물체가 사후 계속 손에 쥐어진 채 있게 된다. 흔한것으로 강가의 나무가지.뿌리.잡초 등이 있으나 본건의 경우 시체의 손아귀에 아무런 이물질도 없었음. <질의 3> 를 판정하기 위한 플랑크톤검사의 결과는? <회답> 물 속의 플랑크톤 분포는 과 중간층간에는 별로 차이가 없으나 과는 많은 차가 나며 의 경우 종류 및 그 수에 있어서 약 3 배가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임. 귀하께서 현장에서 채취하여 체출한 플랑크톤과 시체의 표면에서 체취한 플랑크톤이 동일한 종류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체표면에서 다량의 플랑크톤이 검출된 점으로 미루어 시체는 까지 가라 앉았던 점으로 사료됨. 또한 플랑크톤의 종류가 해양플랑크톤 중에서도 연안 플랑크톤에 속하며 표면 100m 에서 서식하는 상층성 플랑크톤으로 구분되는 접으로 미루어 현장의 수심은 100m 이내로 짐작됨. 그러나 위() 및 십이지장 이하에서 을 하던 중 검출된 플랑크톤은 하층성 플랑크톤으로서 수심 500m 이하에서 서식하는 플랑크톤으로 밝혀짐.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현재로선 정확히 발힐 수 없음을 통보함. 손삼수는 부검소견서를 덮고 말았다. 이건뭔가 이상하다. 십이지장 속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의 서식지가 500m 이하라면 유용치는 깊은 바다 속에서 익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사체의 표면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은 100m 이하에서 서식하는 종류가 아닌가. 게다가 유용치의 익사체가 떠오른 지역도 비교적 수심이 앝은 해안이다.


그래, 여기에 뭔가가 있다.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손삼수는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하여 그가 품고있는 의문점을 풀어볼 요량이었다.

9. 프랑스의 걸인들 코아 에이전트는 퇴계로의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한극장 옆 골목을 꺾어 들면서 윤정님은 다시 한 번 약도가 그려진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김석기가 그려준 약도에는 골목의 상황이 비교적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정님은 약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골목이 거의 끝날 즈음에서야 코아 에이전트라는 옥호가 담긴 자그마한 네모꼴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정님은 우두커니 서서 초라하게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코아 에이전트라는 옥호도 그렇지만 형편없이 낡은 건물의 외관을 살피자니 김석기가 말한대로 성실하고 유능한 흥신소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잠시 ���설이던 정님은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다. 기왕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김석기의 간곡한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가자니 이번에 제법 번듯하게 옥호가 쓰여진 문이 정면으로 나 있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안으로 한걸음 들어서자 정돈되어 있는 아늑한 분위기가 그녀를 반겼다. 실내는 보기 보다는 꽤 넓은 편이었고 십여 명의 직원들이 일에 몰두하고 있어 분위기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듯했다. 그녀는 비로서 안심이 됐다. 김석기가 굳이 이곳을 천거한 이유를 알만 했고 업무에 바쁜 듯 낯선 손님에게 서먹서먹한 시선이나 관심 따위를 주지 않는 직원들의 배려에 또한 신뢰심이


생겼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맞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소장님을 뵙고 싶은데요." "혹시... 윤정님 씨 아닌신가요?" "그래요." "이쪽으로 오세요. 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석기로부터 이미 연락이 닿았던 듯 그녀는 곧장 소장실로 안내되었다. 소장실은 사무실 한쪽의 공간을 차지하여 .상담실로도 이용되는 듯했다. "차준복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차준복소장이 명함 한 장을 내어 밀었다. 정님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차소장은 한눈에 깔끔하고 예의바른 40 대 초반의 사내로 비쳐졌다. 말쑥한 외모도 마음에 들었지만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지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선생이 추천한 사람이 아닌가. 정님은 잔잔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김석기 씨로부터 대충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김기자와는 오래전부터 교분을 맺고 있는 절친한 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로부터 윤정님 씨가 안고 있는 고민을 반드시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강력한 압력을 받고 목하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허허..." 그는 너털웃음으로 서먹한 분위기를 일시에 씻어 버렸다. 그녀 역시 김석기로부터 차소장에 대한 인적사항을 대충 챙겨듣고 있었다. 차준복은 전직 경찰로 경찰 재직시에는 민완형사로 이름을 날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년 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오직() 사건에 말려들어 한 번 인정을 잘못 베푼 것이 화근이 되어 옷을 벗어야 했고, 그의 처지를 동정한 전직 동료들의 도움으로 코아 에이전트를 설립, 제 2 의 인생을 걷고 있는


인물이었다.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차소장이 눈빛을 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님은 핸드백을 열고 두툼한 봉투를 꺼내 놓았다.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의 객실담당 양성득과장으로부터 건제받은 투숙객 명부였다. 컴퓨터 감열용지에 깨알같이 프린트되어있는 명단을 들여다보던 차소장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뭡니까?" "지난 4 월 16 일을 전후하여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했던 숙박객 명부예요." "그런데요?" "그 명단에 올라있는 인물들의 신상파악을 부탁합니다. 그게 제가 의뢰하고 싶은 일이에요." "아니?" 차소장의 눈이 둥그래졌다. "이게 모두 몇 사람입니까?"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오륙백 명쯤 되지 않을까요?" "그럼 이 사람들을 몽땅 뒷조사한다는 말입니까?" "네, 한 사람도 빠짐없이요."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 차소장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 보았다. 아마 지금껏 의뢰받은 사건중에서 이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는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잠시 눈길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왜요? 너무 어려운가요?" 정님은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그를 쏘아 보았다. "그런건 아닙니다만 작업이 너무 방대해서요. 이 정도 조사를 하려면 비용이 꽤 들어갈 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비용 문제라면 염려마세요. 얼마가 들든 조사만 해주세요. 자, 여기 착수금을 우선 드리겠습니다." 정님은 수표 한 장을 꺼내어 소장 앞에 밀어 놓았다. 잠시 눈어림으로 수표의


동그라미 숫자를 세어보던 그는 다시금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차소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결의를 나타내었다. "단 그 분들의 사생활이나 인격이 침범 당하지 않도록 비밀리에 진행해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직업이나 나이, 현주소 등을 정확히 분류해 주세요. 그 아마 허위기재된 사람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런 것도 잘 체크해주시구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연락은 어디로 드리면 될까요?" "제 쪽에서 수시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김석기 씨 쪽으로 연락 주세요." "" "조사방법은 소장님 편한대로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시간은 빠를수록 좋겠어요." "최선을 다해보죠. 그래도 일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시간은 좁 걸릴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님은 다소곳이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김석기의 생활은 활력이 넘쳐 흘렀다. 혼자 애태우던 윤정님과의 사랑을 확인하자 무엇보다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함께 희열을 느꼈으며 일에 대한 투지가 더욱 샘솟았다. 그의 주변 환경이 새삼스레 달라질 일도 없건만 그의 눈에는 모든 사물들이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비쳐졌다. 늘상 싱글거리는 그의 표정에서 혹연한 변화가 느껴지는 듯 직장 동료들까지 은근한 시샘과 함께 입방아를 찧을 정도였다. "김석기 씨,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보지? 혼자 단물 빨지 말고 같이 나눠 먹자구. 좀 털어놔봐! 어때!" "김선생님, 요즘 사랑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꼭 연애를 처음하는 숫총각처럼 들뜨신 것 같은데요?"


누가 뭐라든 김석기로선 알 바가 아니다. 그의 귀에는 어떤 야유나 질시도 도대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윤정님과의 비밀을 가슴깊이 꼭꼭 묻어둘 뿐이었다. 지난번 제주도에선 하야비치호텔을 부랴부랴 빠져나온 그들은 곧장 성산일출봉관광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김석기가 제주시에서 타고 내려왔던 렌터카가 마침 요긴하게 쓰였다. 남들의 눈을 피하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신혼부부로 가장하여 일출봉호텔에 투숙한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호텔방에서만 숨어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뜨겁게 서로를 나누어 가졌다. 지금까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갈증을 뒤늦게 깨달은 듯 그들은 애타게 서로를 갈구했고 뜨겁게 상대를 찾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미래와 원한과 복수에 대한 갈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하룻밤을 꼬박 새운 그들은 일출봉의 해돋이 구경을 위해 호텔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일출봉의 교묘한 웅자와 해돋이의 장관을 목격한 그들은 대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윤정님은 자못 감탄한 듯 탄성을 연발했다. 기회를 보던 김석기는 정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동안 마음에만 담아 결혼에의 열망을 정식으로 노출시켰던 것이다. 정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고 낯빛만 붉혔다. 그리고 지금 형편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석기는 그 말을 긍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당장 그녀가 해결해야 할 남편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 후에는 고려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들의 제주도에서의 일정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장미빛 인생.


지금 김석기의 심경이야말로 바로 그랬다. 즐거운 마음으로 윤정님의 포로가 되어 버린 그의 주위는 온통 무지개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김석기의 눈에 이상스런 장면이 문득 비쳤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하숙방 책상에 넣어 두었던 자료를 가지러 잠시 하숙집에 들른 그의 눈에 대문간에서 연신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 하숙집 안주인 여천댁의 잔뜩 부은 입이 얼핏 뜨였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주머니?" "글쎄 어떤 시러베 잡것들이 남의 대문이 자기들 광고판이나 벽보판쯤 되는 줄 아나 봐. 그저 대문에 빤하게 비어 있는 날이 없다니께." 그리고보니 그녀는 대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입으로는 연신 불평을 쏟아 놓으면서도 손놀림은 재빠르게 대문에다 물걸레질을 해대고 있었다. "누가 그런 짓을 합니까?" 김석기는 위로 겸 지나가는 말을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여천댁은 상대를 만났다는 듯 일손마저 놓고 하소연을 늘어 놓았다. "그러게 말이유 김 씨, 잡상인들이 스티커를 붙이는 건 그렇다 쳐요. 그건 뜯어내면 되니까. 이러니 속에서 천불이나지 않겠수. 이것 좀 봐요. 이것, 김 씨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을 거유." 과연 대문 한쪽 귀퉁이에 이상한 모양의 기호가 몇개 그려져 있었다. 여천댁은 한심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바로 김 씨가 다니는 신문사의 신문배달부가 그려 놓은 거유." "예? 신문 배달부가 왜 이런 것을..." 김석기가 뻥한 얼굴로 여천댁을 바라 보았다. "아따, 왜는 왜겠어? 신문 배달소년이 바뀌면 이런게 생긴다니까. 생각해 봐요 김 씨,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집들이 쭉 늘어서 있으니까 자기 구독자를 찾아


내는게 쉽지는 않을 거유. 아 그렇다고 남의 집 대문에 이렇게 보기흉한 표시를 꼭 해야 하는건지 원..." "죄송합니다. 제가 한번 주의를 주겠습니다." "원, 김 씨가 미안할 것 뭐 있수. 아서요. 그렇게 따진다면 주의줄 사람이 한두 사람이라야지. 아 지난번 국회의원 선거때도 그런 홍역을 치렀잖수. 각당의 선거운동원들이 별의별 표시를 다하고 다닙디다. 우리집이 자기들 표밭이라고 생각하는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들 마시느라구 쯧쯧..." 여천댁의 푸념을 귓전으로 흘리며 신문배달소년이 그려놓은 기호를 빤히 들여다 보던 김석기의 입에서 문득 심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렇다! 우춘구가 그려놓은 암호문도 바로 이런식의 기호일것이다. 신문배달소년이 그려놓은 기호야말로 우춘구의 메모지에 담긴 기호와 흡사하지 않은가. 그는 급히 수첩에서 우춘구의 메모를 꺼내어 대문에 그려진 기호와 대조해 보았다. 틀림없다. 바로 이거다. 김석기는 잔잔하게 온몸으로 버지는 흥분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그리고 그는 냅다 뛰었다. 언젠가 신문사 자료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 옛날의 그 자료를 찾아내는 일이 우선 급선무였다. 김석기의 돌연한 행동에 얼이 빠져버린 듯 여천댁은 뻥한 눈길로 급히 달려가는 김석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따르르르릉. 현관 손잡이를 막 비틀던 윤정님은 전화벨소리에 멈칫 몸을 돌렸다. 묵살해버릴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받기로 마음을 고쳤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김선생 뿐이질 않는가. 전화벨은 끈질기게 울렸다. "여보세요! 정님 씨?"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들자 김석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저예요." "마침 계셨군요."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어요." "어이쿠,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요 꼼짝말고 거기 계십시오. 제가 금방 달려가겠습니다." "예?" "암호 말입니다, 암호. 둘 중에 한가지는 풀었습니다. 그 뜻을 알 수 있게 됐다구요!" "어머,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우연히 그 뜻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신문사 자료실입니다. 지금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어요." 그러나 정님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전화는 성급하게 끊어졌다. 그리고 30 분이 지났을까? 현관의 버저가 울림과 동시에 김석기가 현관문을 열고 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윤정님은 외출복차림 그대로 실내를 서성대던 초조함을 애써 감추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들였다. 그는 옆구리에 두툼한 책 한 권을 신주단지처럼 소중하게 끼고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이 책은 우리 신문사 자료실에서 빌려온 책인데 암호의 역사라는 프랑스 원서예요. 그 책 속에 바로 우춘구 씨가 썼던 부호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김석기는 책장을 두드리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여기 접어둔 부분입니다. 이 부호들이 우춘구 씨가 그려둔 보호와 같지 않습니까?" "근데, 어떻게 그리 쉽게 이걸


찾아내셨어요?" "하하... 우연한 일로 이 책에 착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바로 이 부호들입니다. 이 부호들을 누가 만들어낸 줄 아십니까?" "" "이건 프랑스 걸인들이 고안해낸 부호였습니다." "예?" "프랑스 거지들이 동료거지들을 위하여 밥을 빌어 먹은 집 대문에다 부호로 표시를 해두곤 했다는 겁니다. 일종의 안내문역할을 하는 거겠죠." "세상에..." 정님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도무지 모를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제가 우춘구 씨의 부호와 프랑스 걸인들의 부호를 풀어서 대조해 보았습니다. 이 표를 한 번 보세요." 김석기는 자신이 풀이해낸 부호표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우춘구 씨의 부호 / 프랑스 걸인이 고안한 부호(생략) 그러나 뚫어져라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정님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듯미간을 모았다. "전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어요. 그이가 왜 이렇게 이상한 부호를 기록해 두었는지." "전혀 마음에 짚이는게 없으십니까?" 김석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두 개의 부호가 닮은꼴이란 건 인정하시겠죠?" "네." "단지 우춘구 씨의 부호앞에는 영문표기가 하나씩 더 붙어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 부호의 해석에 대한 범위는 좁혀질 수 있을 겁니다. 즉 우춘구


씨가 앞에 기록해 놓은 영문표기는 우춘구 씨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인물이나 단체의 영문이니셜이 아닐까요?" 정님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그리고 부호를 해석한 메모지에 눈길을 주었다. 그렇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정님은 언뜻 뇌리를 스치는 예감에 전율을 느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이가 그런 무호한 짓을 할리가. 정님은 방정맞은 자신의 상상을 무너뜨리려는 듯 강하게 머리를 저었다. "유용치 씨가 건네준 자료 말입니다.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던 김석기가 불쑥 내뱉는 말에 정님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이 사람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상상을 하고 있는거야. 정님은 문뜩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낭패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재촉하는 듯한 김석기의 눈���에 이끌리듯 정님은 몸을 일으켰다. 정님이 안방옷장 깊숙히 숨겨두었던 자료철을 꺼내어 건네자 김석기는 급히 자료를 뒤적여 유용치가 넘겨준 서류뭉치들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남편 우춘구가 생전에 취급했던 공인회계에 얽힌 업무사항을 낱낱이 수록한 자료였다. 어쩌면 유용치가 이 서류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귀중한 서류였다. 김석기는 맨 앞장에 적힌 목록만을 빼내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너머로 살펴본 목록에는 회사 이름들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김석기의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그리고 목록과 부호가 적힌 메모지를 대조해보던 그는 이번엔 목록에 적힌 회사명을 체크해 나갔다. 작업이 끝난 듯 잠시 고개를 들고 생각에 골몰하던 그가 이번엔 목록과 부호를 펼쳐놓고 새로운 도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작업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따금씩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드는 눈치였다. 그 틈을 타서 정님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아직 그에게 아무것도 대접한게 없다는데 문득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녀는 주방옆에 마련해둔 간이식 룸바에서 칵테일 두 잔을 만들었다. 원래 술이라곤 입에도 못대던 그녀였지만 신혼 첫날밤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술을 택했고 이제 한 잔의 술은 그녀의 생활에서 떼어낼 수 없는 도피처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마실 것을 만들어 자리로 돌아오자 그의 작업은 거의 끝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내미는 칵테일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우춘구의 부호/ 유용치의 자료/해석(생략) 잔을 내려놓은 후에도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칵테일잔만 천천히 기울일 뿐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기 어려워한다는 걸 그녀는 그의 표정에서 이미 읽고 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그녀에게 도표를 건네주었다. 묵묵히 도표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윽고 메모지를 내려놓았다. 말문을 잃은 그녀의 무표정에는 긍정과 부정의 그늘이 함께 얼룩져있었다. 그녀는 마땅히 두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듯 시선을 멀리 허공으로 던졌다. "우춘구 씨의 재산상태에 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김석기가 불쑥 내뱉은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런 엉뚱한 말이 어딨느냐는 무언의 항의가 그녀의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똑바로 쏘아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치기가 두려워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못이긴 척 외면하는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순간적으로 붉어지는 장면을 김석기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그의 마음 한구석 역시 아련한 아픔이 함께 적셔오는 듯했다. 그녀는 잠자코 핸드백을 열어 통장 하나를 꺼내 놓았다. 통장에는 우춘구라는 이름 석자가 뚜렷이 박혀 있었다. 무심코 통장을 들쳐보던 그는 문득 손길을 멈추고 말았다. 가만, 이게 도대체 얼만가? 통장의 잔고에 기록된 동그라미를 세어보던 그는 기가 질린 듯 손을 내리고 말았다. 2 억 5 천만원. 통장에 기록된 액수도 액수거니와 그로선 도무지 실감이 가지않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그의 몸은 한껏 굳어지는 듯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짓눌렀다. 그들은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양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만에 김석기가 침묵을 깨뜨렸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이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우춘구 씨의 행적이 조금은 드러난 것 같습니다." "" "될 수 있는 한 우춘구 씨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어쨌든 눈 앞에 나타나 있는 현상을 토대로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괜찮겠습니까?" "" 정님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럼 승낙하신 걸로 알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기색을 살피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째는 우춘구 씨가 자신의 업무인 회계를 처리하면서 자신에게 공인회계를 위탁한 기업체의 내부에 깊숙히 들어가다보니 해당기업의 엄청난 비리 사실이나 약점을 잡게 되었고 처리과정에 '해당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수수료를 입막음조로 받아내었을 가능성입니다. 제 생각엔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짐작되고 또한 그런 가설아래에서야 우춘구 씨가 보복살해를 당했다는 추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 "두 번째로 그럼 상대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젭니다. 도표로 짐작컨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은 역시 P.& B.코리아와 홍해강철입니다." "" "다국적 기업인 P.& B.코리아는 베일에 싸인 기업으로 매스컴의 추적을 받고 있고 홍해강철 역시, 정치인의 결탁으로 급성장을 이룩하여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기업입니다, 아마도 뒤를 캐다보면 가장 구린데가 많은 기업중의 하나일 겁니다." "됐어요! 그만 하세요!"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듯 그녀는 목소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뜻밖의 반응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말에 무리가 있었다면 용서 하십시오."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그녀는 칵테일잔을 거칠게 들이켰다. "...정님 씨."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들으서야 합니다. 남편을 살해한 범인을 밝혀내야 하지 않습니까?" "...모르겠어요. 이제와서 후회가 돼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아름다운 추억이나마 영원히 간직했을 텐데...정말 후회스러워요." "마음을 약하게 가지시면 안됩니다." "아니예요. 전... 정말이예요. 더이상 이 사건을 쫓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요. 그게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그녀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방향을 잃은 듯 헤매고 미미하게 떨려오는 손끝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절박한 위기를 느낀 그는 그녀의 두 손을 꽉 움켜 쥐었다. "힘을 내요. 정님 씨, 정님 씨가 괴로워해야 할 일은 절대 아닙니다. 우춘구 씨의 행적이 어떠했든 그건


과거지사입니다. 그리고 그건 이유야 어떠하든 원인이 발생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고 놈들은 잔인하게 보복을 했습니다. 그 놈들은 우춘구 씨만 살해한 게 아니라 한 가정을 파괴했고 정님 씨에게는 씻을 길 없는 큰 상처를 안겨주지 않았습니까? 정님 씨가 놈들을 쫓는 것은 남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정님 씨 자신의 결백을 찾기 위한 몸부림인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정남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품 속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참고 참았던 설움이 터져 나오면서 그녀의 어깨는 물결치듯 떨리고 있었다. 김석기는 그녀를 안으면서 등을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손삼수는 무심한 눈길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그가 몸을 실은 형사기동대 R 마이크로 버스는 어느새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도로가 교차하는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국립과학수사 연구소가 소재한 신월동 방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그는 초조함 속에서 마음을 졸이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했다. 플랑크톤 연구를 위해 도서관에 파묻히기도 했고 아예 관련서적들을 집에까지 들고 와 밤을 세워가며 독파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하는 것도 오늘로써 벌써 세번째였다. 담당 법의학 과장인 최상주박사는 그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자상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선 손삼수가 품고 있던 의문에 최상주박사 역시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의문만 느낀다고 유용치의 입수장소(), 즉 익사한 현장은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최박사의 지도를 통하여 플랑크톤에 관한한 절반은 전문가가 되어버린 그였으나 의문점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최박사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익사한 현장을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역에 산채한 플랑크톤의 분포도를 조사한 뒤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너무 엄청남 방식이긴 했으나 손삼수는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동원가능한 모든 인력을 착출하여 급거 출장을 보내 동해안과 남해안 서해안 등 적국 각지역의 플랑크톤을 샘플로 골고루 채취한 것이다. 동해, 속초, 묵호, 주문진, 울진, 남해, 여천, 서산, 인천 등 지역별로 표기된 샘플은 모두 한꺼번에 모아져 과수소로 보내어졌다. 완벽하진 않았으나 이 정도라면 우리 나라 해역의 플랑크톤 분포도가 대략은 작성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의학 과장실로 들어서자 최상주박사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들였다. 좋은 징조다. 그렇게 직감하여 그도 따라 웃었다. "결과가 나왔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 이게 다 그동안 손반장님이 쏟은 노력 덕분이오. 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최박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현미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왼쪽의 플랑크톤은 유용치의 십이장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이고 오른쪽이 손반장이 채취한 샘플 중의 하납니다." 현미경에 가만히 눈을 대어보던 손삼수는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해냈다. 잔잔한 감동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현미경의 유리표면에 부착된 두 개의 플랑크톤 샘플은 육안으로 살펴보아도 너무나 똑같은 동일한 종류였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고맙습니다 박사님. 덕분에 시야가 탁트였습니다." "하하... 그거야 손반장의 집념이 올린 개가가 아니겠소?" "원 별말씀을..."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처음엔 나도


자신이 없었어요. 손반장 고집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 갔던 거지만... 사실 플랑크톤이란 게 워낙 종류가 많고 다양한 미생물중의 하나에요. 또 분류 방법도 좀 많습니까? 수질이나 수계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살고 있는 물의 깊이에 따라 다르고 크기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부유하는 방법에 따라 또 달라요. 게다가 이렇게 딱 들어맞는 샘플을 채취해 왔으니 이거야말로 손반장의 공로가 아니고 뭐겠소?" "그런데 이 샘플은 어디서 채취된 건가요?" 손삼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빙긋 웃음을 머금으며 최박사가 빈병을 하나 맙눼 그 병에는 속초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레테르가 붙어 있었다. "아니? 그럼... 유용치가 익사한 장소가 속초 앞바다란 말입니까?" 손삼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10. 암호, 풀리다 해운대 비치사이드호텔의 로비라운지 크리스탈 가든은 언제나처럼 화려한 분위기가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홀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무대 위에선 지금 막 등장한 여가수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육감적인 몸매를 흔들어대며 정렬적으로 노래를 뽑아내었다. 가만, 저건 어디서 온 년인가? 무대 뒤쪽의 구석진 좌석에서 칵테일 잔을 기울이던 백합은 흐느적대는 그녀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연노랑색의 짧은 스커트는 그녀의 터질 듯 팽만한 둔부를 감추기에는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현란한 율동이 시작되면서 스커트 속에 숨어 있던 노랑색 팬티가 이따금씩 스커트 밖으로 삐져나오곤 했다. 국산은 아닌가 본데? 백합은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입가로 흘렸다.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그녀의 약간은


가무잡잡한 피부빛깔로 미루어 그 언저리의 태생인 듯 싶었다. 어쩌면 베트남계열인지도 모르지. 백합은 손을 들어 매니저를 불렀다. 키가 껑충한 크리스탈 가든의 매니저가 다가와 허리를 꺾었다. 백합이 다시 한 번 손짓을 하자, 그는 귀를 바싹 갖다 대었다. "저년 어디서 왔어?" 백합의 손가락 끝이 무대 위의 여가수를 "아, 오키노 말입니까?" "오키노? 저 여자는 일본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일본계 필리핀입니다." "그랬구먼." 백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의 짐작이 맞았던 것이다. 더이상 분부가 없는 듯하여 허리를 세우는 매니저를 백합이 다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양복포킷에서 지갑을 꺼내어 매니저의 손에 두툼한 지폐를 쥐어 주었다. "오늘밤에 내 방으로 들여보내!" 자르듯 말을 뱉고 백합은 무대 위의 여가수에게 눈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던 매니저는 한참만에야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백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합은 해운대 비치사이드호텔에서 특상급으로 꼽는 손님일 뿐 아니라 그의 비위를 거슬렀다간 어떤 봉변을 당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합은 비치사이트호텔의 오랜 고객이었다. 또 그는 하룻밤 숙박에 백만원을 홋가하는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에 늘상 투숙했다.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은 외국의 국가 원수급이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가 아니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처지라 일 년 내내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비치사이드호텔의 최고급 특실이었다. 그런 방을 단골로 사용하는 고객의 비위를 거스렸다간 어떤 사태가 생길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힘없는 매니저로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속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콧대높은 외국의 여가수를 구워 삶아야 한다는 건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다. 그는 서둘러 호텔의 야간 당직 총지배인을 찾아 나섰다. 백합의 시선은 여전히 무대 위의 여가수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팝송 메들리를 정열적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백합으로선 그녀의 가창 실력을 가늠할 수도 없고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한 낯선 노래들이었지만, 남태평양의 낭만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크리스탈 가든의 독특한 체취에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무엇보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늘씬하게 빠진 몸매는 그를 더욱 흡족케 했다. 노란색의 짧은 미니스커트 아래로 곧게 뻗은 하체의 선율은 그녀가 열창하는 생음악의 선율과는 색다른 매력이 있을 성 싶었다. 오늘은 모처럼 이국적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겠군. 생각만해도 가슴이 뿌듯하게 차 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늘 낮에 느꼈던 불쾌한 감정이 깡그리 씻겨지고 없었다. "총본부에서 오시는 분이니까 깍듯이 모시도록 해!" Q 의 지령을 받고 서울을 떠나올 때도 백합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가 이 비밀조직에 몸을 담은 지 벌써 십 년,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겨우 그는 조직의 상층부 인사와 대면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의 지휘계통은 국내 책임을 맡고 있는 Q 의 휘하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이 없을 터이지만 Q 만 하더라도 그에게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십 년간 Q 를 모시고 있었고 그의 지령을 따르고 있었으면서도 Q 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Q 의 이름이 무엇이며 Q 가 누구인지. 아니 그것은 그가 절대 알아선 안되고 d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철칙과도 같은 불문률 중의 하나였다. 또한 조직을 배신했을 때는 무자비하고 철저한 보복을 당한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그였다. 조직에 가입한 이래 Q 의 지령에 죽고 살아야 하는 규율만이 숙명처럼 그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다만 Q 의 휘하에서 그는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고 그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에게 오늘에야 새로운 지령이 내려온 것이다. 그에게는 바로 서광이었다. 하늘 같은 Q 가 겁을 내는 조직의 상층부와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 어쩌면 그에게는 새로운 출세가 보장되고, 지금의 조직체계를 새롭게 재편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에 그는 들떠 있었던 것이다. <블루버드> 그들은 조직의 통칭을 그렇게 불렀다. 조직원은 그들이 소속된 국가를 초월하여 조직의 이익에만 멸사봉공하여야 하며 조직원은 죽음으로써만 조직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엄격한 규율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의 본부가 어디에 있고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조직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합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각 나라마다 지부가 있으며 또 전세계를 5 등분으로 나누어 각 지부를 관할하는 구역이 있고 그 위에 총본부가 존재한다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백합이 오늘 만나는 사람은 다섯 명 구역장 중의 한 사람인 아시아 태평양담당 구역장이었다. 암호명 천사라고 불리는 아시아 태평양담당 구역장이 면당상대로 백합을


지적했던 것이다. Q 의 지령을 받고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한 백합은 지시대로 김해공항의 스낵코너에서 가슴에 꽃을 달고 호리우치라는 일본인 여행객을 기다렸다. 호리우치는 바로 천사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부푼 마음을 추스리며 천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록 천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천사는 커녕 그를 아는 척하거나 담뱃불을 빌려달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조차 없었다. 참을성 있게 자리를 지키던 백합은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오늘의 접선은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되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울화통을 터뜨릴 대상조차 찾아내지 못한 백합은 내친 김에 호리우치가 타고 온다는 JAL 002 편의 탑승객 명부를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탑승객 명부에선 호리우치라는 이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일본항공의 안내창구에서 다시금 확인해 보았으나 역시 허탕이었다. 오늘따라 JAL 002 편에 탑승한 일본인 여행객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는 것이다. 30 여 명의 일본인 승객들은 후쿠오카에서 출발하여 동경에서 갈아 탄 셀뉘백합이 내심 점찍을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Q 의 지시가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조직에서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걸까? 백합이 씁쓰레한 마음을 달래며 호텔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메모지 한 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약속 장소를 변경한다. 뒷면에 기록된 지시사항을 따르라! 천사로부터." 메모를 읽어 내려가던 백합은 깊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천사의 지시는


랩탑(Lap Top)컴퓨터를 통한 면담요청이었다. 백합은 프론트에서 천사가 맡겨놓은 랩탑을 찾아들고 객실로 돌아왔다. 랩탑은 007 백에 딱 들어맞는 소형컴퓨터였다. 객실문을 잠근 백합은 호텔의 메인컴퓨터와 연결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다행히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은 텔렉스 팩시밀리는 물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장치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설치를 마친 백합은 천사가 지시한 전자 사서함의 코드를 두드렸다. 잠시 후 모니터에 천사의 메시지가 나타나면서 그들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사다.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제기랄. 이따위 만남이 기쁘다니, 이래가지고서야 상대방이 남잔지 여잔지, 아니면 어떤 꼴을 하고 있는 작잔지 도무지 알아볼 재간이 없지 않나. 백합은 내심 툴툴거리며 키보드를 눌렀다. 그리고 그의 불쾌한 기색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왜 약속을 변경시켰습니까? 나는 조직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나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미안하다. 우리를 감시하는 눈이 있어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 양해바란다." "무슨 소립니까? 천사가 감시를 받나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우리 조직에서 변고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비밀이 새어나간 겁니까?" "내가 당신을 호출한 것은 바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일이다. 지휘부에서는 당신을 중용하기로 결심을 했다." 순간 백합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확인한 후 터져나오는 기쁨을 억제하며 급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거야말로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희망 사항이 안닌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는 새삼 결의를 다졌다.


"내가 파견했던 요원 한 사람이 살해당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내 조직의 붕괴를 의미한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누굽니까? 살해당한 우리 조직의 요원이?" "그건 말할 수 없다!" 백합은 주춤 숨을 몰아 쉬었다. 이것은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그럼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일이다." "하지만 전 국내조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자네를 호출한 것이다. 자네가 제일 먼저 할 일은 Q 를 제거하는 일이다." "예?" 백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절로 배어 나오는 듯했다. "그, 그건 하극상 아닙니까?" "Q 는 이미 조직관리능력을 상실한 듯하다." "Q 가 배신자라는 뜻입니까?" "그건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기 위해 Q 를 처단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네가 앉는 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백합은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Q 의 정확한 신원을 알려주십시오." "그건 당신 스스로가 알아내어야 한다!" "예?" 백합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듯 모니터를 빤히 바라 보았다. 모니터에서 천사의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찍혀 나왔다. "그것은 당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다.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자리를 지킬 능력과 자격이 없다." 한참만에 백합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좆윱"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새로운 암호명을 내리겠다. 당신의 암호명은 '불새!', 약자로 F 라고 부른다." "고맙습니다." "F 의 건승을 빌겠다! 천사." 그리고 교신은 끊어졌다. 화상이 사라져버린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백합은 문득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손삼수가 외출에서 돌아오자 도덕록형사가 반색을 하며 그를 맞았다. "반장님!" 도형사가 부리나케 그의 책상으로 건너왔다. "과장님이 찾으시던데요?" "날?" ' "네." 손삼수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러졌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수사과장이 계장을 제쳐두고 말단 수사반장을 호출한다는 건 예전에 없었던 일이 아닌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수사상황에 대한 불호령을 어찌 감당할까.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사실 성귀희여사 살해사건과 유용치 살해사건은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는 꼴이 아닌가. 이래가지고서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에 대해 그가 직무를 태만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금도 비록 수포로 돌아갔으나 성귀희여사의 사생활이나 의문점에 대한 탐문을 마치고, 합동회계법인사무소에 들러 유용치와 가까왔던 동료 공인회계사들로부터 한 마디의 단서라도 캘 수 있을까 하고 방증수집에 열을 올리고 돌아온 참이었다. 결과는 물론 허탕이었다. 그로서도 이런 사건은 처음이었다. 수사형사 생활이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그가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인 사건은 처음인 듯했다.


성귀희여사의 해괴한 죽음과 공인회계사 유용치의 의문의 죽음은 그에겐 조금도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성귀희여사의 죽음도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또하나 의문의 죽음이 등장했으니 그로선 골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없는 터였다. 물론 두 사람의 죽음은 별개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두 건의 죽음은 신통하게도 합심하여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는 어렵게 몸을 일으켰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는 도형사의 간절한 눈빛도 눈빛이지만 기왕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게 좋을 법하다는 생각에 그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수사과장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뜻밖에도 수사과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아, 손반장. 요즘 고생이 많다지? 자 앉어." 뜻밖의 환대에 손삼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우람한 풍채에 어울리게 멋진 웃음을 흘리는 수사과장을 올려다보았다. "자, 앉으라니까." 어쨌든 불호령은 면했다 싶은 반가움이 와락 치밀어 그는 절에 간 색시처럼 과장이 권하는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내가 자넬 찾은 건 다름이 아니고 성귀희여사건 말이야." 결국 그 문제로구나. 손삼수는 고분고분한 눈빛을 지으며 수사과장의 입모양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 사건이 어떻게 되고 있나? 지금." "면목이 없습니다만 수사는 아직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해결될 전망은 없나?" "해결해낼 자신은 있습니다." "어허, 수사가 자신만으로 되는겐가? %현재 상황이 어떤가 이 말일세." "현재로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결국 미궁으로 빠지기 쉽겠다 이런 얘기로군."


과장은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손삼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 억누르고 과장의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 과장은 결론을 유도하는 그의 뜻을 거스르거나 반박할 때는 금방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게 바로 과장의 통솔 방식이어서 그를 정면으로 거스를 뜻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그 사건은 이 정도에서 덮어 버리는 게 어때?" "예?" 너무도 엉뚱한 제의에 그는 과장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방금 자네입으로 그랬잖아. 사건해결이 쉽지 않다구. 괜히 쓸데없는 사건에 수사력과 신경을 쓰지 말구 다른 데로 돌리는 게 어떨까? 이건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과장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딘가 겸연면쩍은 듯 그를 위로하는 어투로 말을 돌렸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듯한 그의 표정을 읽으며 과장은 다시 한 번 반복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은 내 입장에서 할 말이 아닌 줄 잘 아네만, 내 골머리가 아파서 그래, 골머리가." "아니, 누가 과장님을..." "자네 며칠 전에 홍해무역의 유사장을 찾아갔다면서." "그렇습니다." "어떤 채널로 그런 진정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네만 상부로부터 나한테 불호령이 떨어졌지 뭔가. 피해자를 괴롭히거나 엉뚱한 짓거리 말고 수사 똑바로 하라구." "면목없습니다. "사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 쪽도 뭐 그리 유쾌한 일이라고 수사가 질질 늘어지는 걸 좋아하겠나? 집안의 창피라도 큰 창피가 아닌가. 그런 사건이 자꾸 여론에 떠오르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건 본인들로서는 죽을 맛일 테지."


"" "게다가 성귀희여사는 간통 현장에서 사망했고 또 사망원인이 페니실린 게 밝혀졌다며?" "네" "그렇다면 뚜렷한 살의나 범의가 있었다고 볼 순 없는 문제 아니겠나.어쩌면 친고죄형태의 범죄로도 볼 수 있는 게야. 단지 간통한 정부를 찾아 내지 못했다는 정도인데 피해당사자가 사회적 체면을 고려해서 극구 문제를 덮어줄 것을 요청하니 어쩌겠나? "그건 안 됩니다!" 버럭 대답을 하고서도 순간적으로 너무 소리가 컸다 싶어 손삼수는 스스로 움찔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과장의 안색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안되다니? 뭐가 안된다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 말뜻은 그것은 사회정의에 반하다는 뜻으로..." 그가 말꼬리를 채 있기도 전에 과장의 불호령이 먼저 떨어졌다. "이 사람아! 그렇게 사회정의를 앞세울 양이면 벌써 며칠 째야? 두 달이 지났어, 두 달이! 그러고도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자네 자신이 창피하지도 않은가?" "면목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수사력을 언제까지나 그 사건에 매달아 둘 수만은 없어.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 따위 사건 하나에 매달리고 있어? 오늘 내일까지 해결해낼 수 없을 경우엔 성귀희여사사건 수사본부는 해체한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과장실을 물러나와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손삼수의 낯빛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얄궂은 심사를 눈치챈 도형사는 말을 붙여볼 엄두도 못낸 채 멀찍이서 서류뭉치를 들고 부산을 떠는 척하면서 몰래 그의 기색을 훔쳐보기에만 급급했다. 손삼수의 굳어버린 낯빛은 도무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로선 아내의 죽음을 제대로 규명해보려는 노력도 않은 채 덮어버리기에만 급급한 홍해무역의 유재택사장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과장의 우격다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여기저기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과장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부하에 대한 방파제역할은 커녕 직무유기를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부아를 더욱 돋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텐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살아야 하는 경찰조직의 속성에서 이탈할 수는 또한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또 울화가 치밀어 그는 혼자서 속을 끓일 수 밖에 없었다. 김석기가 수사반으로 들어선 것은 그가 울분을 채 삭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아니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마치 땡감을 씹은 사람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챈 김석기가 농담을 던졌으나 그는 짐짓 외면하고 말았다. 어리둥���한 김석기가 뭔가 핀잔을 주려는데 급히 다가온 도형사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직하게 뻔속삭였다. "지금 반장님 기분은 엉망입니다. 수사과장실에 불려가서 한바탕 당한 모양이에요." "그래요?" 김석기는 영문도 모른 채 도형사가 손짓으로 귀띔하는 과장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반장님 모시고 나가서 기분 전환 좀 시켜주십시오. 도형사의 간청이 아니더라도 그는 손삼수에게 볼 일이 있는 참이었다. 그는 짐짓 익살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삼수를 흘겨보았다. "이봐, 동대문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눈흘기면 어떡해?" 손삼수는 마지못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나가자구. 내가 오늘은 중요한 정보제공을 할테니까 어쩌면 유용치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지도 몰라." 단서를 제공하겠다는 김석기의 유혹에도 마음이 동했지만 더 이상 사무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억누를 수만도 없을 듯해서 손삼수는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뒷골목의 할머니국밥집 골방구석에 마주앉기 무섭게 김석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죽을 상이 되어 있어?" "" 도무지 입을 열 기분이 아닌 듯 손삼수는 침묵만 지켰다. "이봐!" "그보다 자네 정보라는 게 뭐야?" 마침내 터진 그의 말문이 너무 엉뚱하다는 듯 김석기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먼저 물었잖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일세. 자네하곤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니, 이 친구가... 그렇다면 나도 말 못해!" 이번에 손삼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성귀희여사 사건을 미제사건으로 덮어버리라는군." "과장이?" "음." "그래서? 자네도 그대로 따를 생각이야?" "어쩌겠나? 상황이 상황인걸. 일반 관례로 봐서도 한 달내에 해결해내지 못할 경우엔 수사본부가 해체되지 않나. 과장이 그 문제로 압력을 많이 받는 모양이니 어쩌겠나." "도무지 자네답지 않은 소리로군." 손삼수는 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망했는데? 자네한테." "내 입장이 되어 봐. 자네도 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수사본부는 해체해야 돼. 그렇다고 내가 그 사건을 아주 포기한 건 아니야." "그럼?" "수사본부는 해체하더라도 내가 아니면 도형사 혼자 전담시켜서라도 그 사건만큼은 붙들고 늘어질 생각일세." "모처럼 듣기좋은 소리 한 번 하는군." "그나저나 뭔가? 자네 정보란 게?" "아참 그랬지." 김석기는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취재수첩 갈피에 끼워두었던 도표가 그려진 메모지를 꺼내어 손삼수에게 내어 밀었다. 도표에는 이상한 부호와 부호를 풀이한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로 우춘구의 메모지에서 발견된 암호문을 풀이한 도표였다. 손삼수의 시선이 문득 홍해강철그룹이란 낱말에서 우뚝 멎었다. 그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는가 싶더니만 금세 영문을 모르는 듯한 얼굴로 김석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혹적인 감각을 지닌 여자였다. 아니 차라리 관능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는 표현이 옳을는지도 몰랐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콧소리를 뿜으며 즉각 반응을 보였고 부드럽게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정염의 소유자였다. 백합이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다. 대단한 여자다. 평소 절륜의 정력을 지닌 사내라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눈 앞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새삼 탄복하는 기색이 여실히 어려 있었다. 그러니까 크리스탈 가든의 매니저가 그의 지시대로 다이아몬드 스위트룸에 그녀를 들여넣어준 것은 자정이 막 넘을 무렵이었다. 매니저는 그녀를 설득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는 공치사를 빠뜨리지 않았고 그는 두툼한 팁을 매니저에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이렇게 거창한 스위트룸에 혼자 투숙하고 있는 사내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이 새삼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가 권하는 칵테일잔을 서슴없이 들이켰다. 술잔을 마주 기울이며 백합은 그녀의 외모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선명한 눈망울과 오똑한 코. 자그마하면서도 붉은 입술 속에서 간간이 엿보이는 가지런한 치열, 그리고 갸름한 얼굴 양켠의 오목한 보조개는 사내를 뇌쇄시킬 만큼의 매력을 한껏 담고 있는 듯했다. 뜻밖에도 가까이서 본 그녀는 도무지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긴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이국적이면서도 이지적인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에 백합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그것은 평소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여자라면 노리개 정도의 존재로만 취급하며 지금껏 독신을 고집해온 자신이 아닌가. 냉혹하고 비정한 그의 성품은 상대가 여자라 하더라도 가차없었다. 그런 백합이 가슴이 떨리다니.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일면을 스스로 발견한 듯하여 더욱 놀라웠다. 이 여자를 놓쳐서는 안 된다. 순간 그는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그러나 그런 내심은 깊숙이 묻은 채 그는 표정을 숨겼다. "우리 나라에는 언제 왔습니까?" "한 달쯤 됐어요." "이 호텔 크리스탈 가든의 무대에 선 건?" "오늘로 일주일째에요." 그녀는 술잔을 입에 대며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흠, 이 부산 바닥에서 썩고 있기엔 아까운 솜씨던데?" 그녀는 칭찬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냈다. 순간 보조개가 옴폭 패이며 그의 마음을 왈칵 잡아끌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탯억눌렀다. "서울의 무대에 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소?" "여기가 어때서요? 전 장소가 어디든 제가 설 수 있는 무대만 있다면 만족해요."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래를 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십 년쯤..." 아직 서른은 되어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10 대 시절부터 노래를 했다는 걸까? 어림잡아 계산을 하던 백합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활동무대는 주로 어딥니까?" "동경과 마닐라, 홍콩, 제 마음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죠." "인기도 꽤 얻었겠군요." "별루예요. 워낙 한 군데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변변한 레퍼터리도 없어요. 절 밀어줄 스폰서도 없었지만 인기를 얻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도 없어요." 그녀는 여전히 시큰둥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어쩌면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체념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시종일관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정말 인기따위는 달관해버린지도 몰랐다. "오키노 씨!" "예?" 시선을 천정에 던지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마주보았다. "내가 당신의 스폰서가 되어주면 어떻겠소?" "?" 그녀는 선뜻 이해가 가지않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의 부와 풍요를 누리게 해주겠소. 인기까지도 말이오. 나는 내가 마음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렇게 자신 있으세요?" "물론."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텐데요?" "그 따위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오. 그딴 건 알 필요도 없소. 문제는 내가 당신이 좋아졌다는 사실이오."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합 역시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끌어 당겼다. 그녀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 솔직하신 분이군요." "나는 여러 번 말하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오. 예스, 노 두 마디 중 하나만을 듣고 싶은 거죠." "좋아요. 선생님을 믿기로 하겠어요." "고맙소. 우리의 뜻깊은 만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그들은 단숨에 술잔을 비워 냈다. 그녀는 환한 웃음으로 기쁨을 나타내었고 그는 와락 그녀를 얼싸안았다. 그녀 역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술을 더듬던 백합은 한 입 가득 물고있던 술을 그녀의 입 속으로 흘려넣었다. "아이 참..." 그녀는 도리질하며 눈을 흘겼지만 싫지는 않은 듯 더욱 그의 품 속으로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은 채 양탄자 위를 함께 뒹굴었다. 백합은 그녀의 허리춤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속살을 더듬었다. 매끈한 살결이 손길에 닿는 감촉과 함께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더욱 손을 뻗어 그녀의 봉긋 솟은 가슴을 움켜쥔 백합은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다음 순간 백합은 성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겨내었다. 한 겹, 두 겹, 그녀의 꺼풀이 벗겨질 때마다 백합은 탄성을 발했다. 마지막 남은 헝겊조각을 벗겨낸 순간 백합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나신은 백합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의 극치였다. 백합은 그렇게 느꼈다. 참을 길없는 욕망을 느끼며 백합은 서둘러 몸에 걸친 가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황소처럼 거칠게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그의 사내가 그녀의 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움찔 굳어 있던 그녀는 이내 기성을 발하며 적극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환희의 나락으로 접어들기가 몇 번일까? 도무지 지칠줄 모르던 그녀의 정염도 창 밖으로 희미하게 먼동이 터올 즈음에야 한풀 꺾이는 듯했다. 포만감을 느낀 그녀가 몸을 바로 누울 즈음, 백합은 노곤한 탈진을 느끼며 깊은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핏 정신이 돌아온 것은 창 밖이 훤히 밝아올 무렵이었다. 옆자리에는 벌거벗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그녀가 곤한 잠에 빠져있었다. 백합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쾌한 아침이다. 백합은 그렇게 느꼈다. 어젯밤 천사와의 접선으로 그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단 한가지 사족처럼 붙어 있는 단서만 해결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단서란 것도 사실 그로선 해결못할 일도 아니다. 지금껏 그에게 불가능이란 말은 없었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 그의 침대 위에서 천사처럼 잠들어있는 일본계 필리핀 여가수 오키노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녀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술술 잘 풀려나간다. 이러니 어찌 상쾌한 아침이 되지 않겠는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알몸 위에 가운을 걸쳤다.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세면을 마친 그는 어젯밤에 먹다 남은 양주병을 들고 바다쪽으로 면한 테라스로 나갔다.


탁 트인 드넓은 아침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술맛은 일품이었다. 짜릿한 액체가 목젖을 타고 넘어가면서 그는 더욱 흥겨운 기분이 되었다. 천하를 한 손에 얻은 기분이 어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른 후 백합은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뉘였다. 싱그러운 바다내음과 상쾌한 바닷바람이 전신을 휘감아오자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했다. 자, 이제 무엇부터 시작한다? 천천히 술잔으로 입술을 축이면서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우선 오키노를 서울로 끌어올리는 일이 급선무다. 오키노 본인의 의향을 직접 들어 보아야겠지만 우선 왕궁클럽에 데려다 놓을까? 아니야, 그건 안될 말이다. 백합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혼자서 독차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왕궁클럽은 이목이 많을 뿐만 아니라 번거롭기 짝이 없다. 게다가 오키노처럼 아까운 여자를 그런 곳에서 때를 묻힐 필요는 없다. 그래, 일단 서울의 내 숙소 부근에 거처를 정해놓고 장래 거취문제를 천천히 생각해보기로 하자. 본격적인 가수로 데뷔하기에는 나이로 보나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신분으로 보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가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럴 듯한 유흥업소를 하나 차려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는지도 모르겠다. 오키노의 진로를 대충 결정한 백합은 이번에는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았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문제는 천사의 지시대로 Q 를 제거하는 일이다. Q 를 제거한다! 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기도 하지만


기실 호락호락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우선 Q 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만 하더라도 난제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Q 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은 천사의 처사가 야속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한다는 데는 더이상 반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합은 담배를 찾아 불을 붙여물고 길게 연기를 뿜어 내었다. 지금껏 Q 와 그의 연결고리는 단 한 개의 전화번호뿐이었다. 545-789X. Q 가 그에게 전화를 통하여 지시를 내리든가 아니면 그가 전화를 하여 Q 를 불러내는 게 그들의 유일한 접선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전화연락을 중개하는 정체불명의 여인이 끼어 있다. 어쩌면 그 전화번호는 Q 의 저택이나 사무실이 아닌 중개인 역할을 하는 장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가 Q 를 호출했을 때 단 한 번에 그와 접선이 된적은 한 번도 없었던 듯했다. 용의주도한 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전화를 받던 여자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Q 에게 전혀 눈치를 채이지 않고 그의 신원을 파악하자면 이쪽에서도 그만큼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백합은 담배연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때 인기척이 들려오면서 백합의 상념이 깨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백합이 탄성을 발했다. 그의 눈 앞에서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그녀가 그를 내려다보면서 생긋 웃고 있지 않는가. 싱그러운 바닷바람과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생동감 넘치는 그녀의 몸매는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다시금 불끈 치솟는 자신의 사내를


느끼며 백합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뭔가?" 손삼수가 메모지를 흔들며 반문을 했다. ,그의 표정에서 궁금증이 가득 묻어 나왔다. 김석기는 빙긋 미소를 흘리며 메모의 내력을 천천히 설명해 나갔다.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서 빚어졌던 우춘구와 윤정님의 비극적 사건, 그리고 윤정님과의 우연한 해후, 또 연속적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윤정님을 보호하게 된 계기며 유용치의 만남, 그리고 유용치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의 절망감. 김석기는 조리있게 설명해 나갔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든 손삼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윤정님이 집단폭행을 당하고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협박을 당하는 대목에서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함게 울분을 토로했다. 김석기의 이야기가 끝을 맺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골방에 마주앉은 그들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쪽으로 밀쳐놓은 해장국은 벌써 싸늘하게 식어 버렸고 상 위에는 담배���초가 수북히 담긴 재떨이와 빈 담배갑만이 잔해처럼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이건 마치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군." 한참만에 손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셈이지." 김석기도 맞장구를 쳤다. "이 무심한 친구야. 그런 이야기를 왜 진작 해주지 않았어?" "미안해. 하지만 그럴 틈이 있었어야지, 자네도 좀 바빴어?" "어쨌든 지금이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야. 이제 나머지는 경찰에 맡겨." "무슨 소리야?" "놈들이 그렇게 대담하게 설쳐대는 걸로 봐선 아마 대단한 범죄조직 중의 하나가 틀림없어. 그런데 공권력도 없는 나약한 두 사람이 그런 범죄조직을 상대로


싸운다는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야." "내 생각은 달라!" "?" "경찰처럼 공개적으로 그 놈들을 쫓다가는 도리어 큰 코 다치기 십상일걸? 아니면 놈들은 아예 영원히 지하로 잠적해 버릴지도 몰라. 그런 면에선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우리쪽이 더 안전해." "그건 무모한 짓이라니까!" "어쨌든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줘. 부탁이야. 그리고 자네 힘이 필요할 때는 내가 직접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으음..." 손삼수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 내었다. 김석기를 믿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어쩐지 이번 만큼은 위태로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 메모지를 보고 느껴지는 게 없나?" 손삼수의 기색을 눈치 챈 김석기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손삼수는 다시 메모지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메모지 한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여기 홍해강철그룹 속에는 홍해무역도 포함되는 건가?" "물론." "어쩐지 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순간 김석기와 손삼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는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우춘구 씨의 투신은 윤정님 씨가 집단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인해 빚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제주경찰은 수사결론을 내렸어. 그러나 당사자인 윤정님 씨는 그 사실을 극구 부인해. 남편이 자살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내 생각에도 그래. 우춘구는 자신의 형편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많은 유산을 남겼어. 그것도 도무지 정상적인 수입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금액이야. 그것은 우춘구


씨가 생전에 음성적인 수입원이 있었거나, 흑막에 얽힌 부정한 돈을 움켜 쥐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우춘구 씨는 놈들에 의해 감쪽같이 제거당한 셈이지. 여기 있는 우춘구의 메모가 바로 흑막의 내용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몰라. 만약 나의 추리가 성립된다면 이 메모는 훌륭한 단서가 되는거구. 홍해강철과 P.& B 코리아, 이 두 회사 중의 하나이거나 아니면 두 회사 모두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 묵묵히 듣고 있던 손삼수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홍해무역도 마찬가지야. 유재택사장은 성귀희여사의 죽음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냉담하게 대처하고 있어. 도리어 .경찰수사를 종결시키기 위해 압력을 넣고 있지 않나. 내가 분개하는 건 바로 그 점이야!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서 몸을 섞고 살던 자기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가 이말이야." "그쪽도 정상적인 부부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군." "그래, 이 메모지가 어쩌면 오비이락이 되거나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성귀희여사의 죽음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구린 냄새가 나." "그런 뜻에서 유용치 사건 역시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손삼수가 문득 무릎을 쳤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치 못했어. 나는 지금까지 성귀희사건과 유용치사건을 별개의 사건으로 분류해 왔어. 그래서 지금껏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 메모지가 단서로서의 진실성만 확보된다면 이 두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될 수 있을 거야. 틀림없어." "그런데 놈들이 유용치를 왜 살해해야 했을까?" "우춘구의 죽음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유용치가 윤정님 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우춘구의 과거 행적을 캐던 중에 아마도 어떤 냄새를 맡았다면? 놈들은 당연히 유용치마저 제거하지 않을 수없었을 테지." "그렇군." "이제 뭔가 조금씩 감이 잡히는 것 같아." "아참, 또 한가지 자네한테 부탁할 게 있어." "?" 손삼수는 눈빛을 발하며 김석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기억 속에는 과장과의 불쾌했던 면담은 까맣게 지위진 듯했다. 김석기는 약간은 흥분한 듯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손삼수에게 또 한장의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이건 또 뭔가?" 메모지를 들여다보던 손삼수가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그것도 우춘구의 유품에서 찾아낸 메모야." "뭐야?" "그걸 풀어보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도무지 알아볼 재간이 있어야지." "나, 원, 우춘군지 뭔지 이 친구, 암호를 어지간히도 좋아하는군." 어이가 없는 듯 손삼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춘구는 평소에 비밀이 많았던 사람같아. 그래서 남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호나 암호문을 즐겨 사용했을 테지." "알았어. 프랑스 거지들의 암호를 도용해서 쓸 정도라면 이것도 그다지 어렵거나 난해한 암호문은 아닐 거야. 어떤 방식인가만 밝혀내면 금방 원문을 조립해낼 수 있지. 암호해독반에 넘기면 금방 밝혀져. 그럼 해답이 나오는 대로 자네한테 연락할게." 손삼수와 헤어진 김석기는 곧장


신문사로 돌아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어선지 편집국 내부는 파장을 맞은 장터처럼 한산했다. 각 부서마다 한두 사람 정도의 인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제각각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회부의 구석진 곳에 있는 자신의 책상에 털썩 주저 앉으며 그는 외부의 연락사항이 없는가 하여 고무판 옆에 끼워둔 메모지에 먼저 눈길을 던졌다. 15 시 30 분, 알파에서 전화옴. 빠르게 휘갈겨 쓴 악필로 보아 아마도 석광현기자가 남긴 메모인 듯했다. 알파가 전화를 하다니, 그는 천천히 전화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다이얼의 버튼을 또박또박 눌렀다. 알파라면 윤정님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만 내밀하게 약정해둔 호칭이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어의 첫 글자인 알파와 유난히 의미를 부여한 김석기는 그가 첫 번째로 마음을 둔 첫 여자인 윤정님에게 그런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못본지도 벌써 이틀은 된 듯했다. 그러나 신호음이 한참을 울리도록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 기척은 없었다. 다시 신호음이 서너번 더 울린 후에야 그는 마지못해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외출을 한 걸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설마 별 일이야 있을라구. 그는 문득 치미는 조바심을 간신히 억눌렀다. 내가 이거 무슨 방정맞은 생각이람. 그는 세차게 내저으며 잡념을 떨치려는 듯 책상 서랍을 열고 원고뭉치를 꺼내어 책상가득 펼쳐 놓았다. 오전중에 쓰다가 접어둔 사회질서회복에 대한 캠페인 성의 특집기사였다. 나날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차량과 혼탁한 교통질서의 서울의 거리는 극심한 교통지옥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출퇴근시간 러시아워때의 교통혼잡은


참혹한 전쟁이나 진배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보다는 걸어가는 게 차라리 빠를 정도였고 과부땡빚을 내서라도 승용차를 마련해야겠다는 국민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보다못한 그는 교통질서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데스크에 진언하여 질서확립 캠페인 추진의 승낙을 받아내어 기사집필에 막 착수할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볼펜을 집어 들었으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듯 원고지는 한줄도 메워지지 않았다. 윤정님의 그늘진 얼굴만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볼펜을 집어던진 그는 다시 전화통을 잡아 당겼다.그러나 신호가 가는데도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산란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말았다. 회사를 빠져나온 그는 신문사 뒷골목에 붙어있는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우선 저녁이나 때우자. 조금도 급할 것이 없는 기사였다. 그는 일단 저녁을 먹으면서 천천히 머리속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국밥 한그릇을 시켜놓고 막 수저를 들려는 찰나였다. 삐... 별안간 열구리에서 삐삐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급히 허리춤을 열고 무선수신기를 들쳐보니 손삼수의 전화번호가 디지틀에서 깜빡이고 있지를 않은가. 손삼수다! 암호해독이 끝난 모양이다. 그는 전광석처럼 식당의 카운터 앞에 붙어있는 전화통으로 내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삼수의 호탕한 웃음이 우선 귓전를 때렸다. "이봐! 풀었어! 드디어 풀었다구!" 홍재오리혹해택천히내강비 만송사철자불금요유금취의망 "이것좀 봐, 알고보니 간단한 암호문이지 뭐야. 일명


전치식()이라는건데 , 이렇게 세로로 읽으면 우춘구의 암호문이 되지, 그러나 1,2,3,4,5, 이렇게 가로로 이게 바로 이 암호문의 해답이야. 어때?" 손삼수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함박 머금은 채 암호문을 풀이해 주었다. 김석기는 긴장한 얼굴을 풀지않은 채 암호문에 담기 행간의 의미를 풀이하는 데 열중하였다.

11. 납 치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염려의 말과는 달리 서류봉투를 건네는 차준복소장의 표정에선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윤정님은 다소곳이 서류봉투를 받아 들었다. "수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봉투를 열어서 확인을 해 보십시오. 미심쩍은 데가 있으면 저희들이 다시 조사를 해야 하니까요." 차소장은 공치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빙긋 웃음을 머금을 뿐, 재차 서류 확인을 권했다. 그는 평판만큼이나 확실하고 빈틈이라곤 없는 사람인 듯했다. 망설이던 정님은 재촉에 떠밀리듯 봉투를 열었다. 바깥 사무실의 직원들조차 모두 퇴근한 듯 코아 에이전트 소장실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정님이 서류를 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적막을 흔들어댈 뿐이었다. 차소장은 창 밖으로 어둠에 싸여있는 밤거리에 시선을 던진 채 움직일 줄 몰랐고 정님은 명단을 확인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의 흘렀다. 명단을 쫓던 정님의 시선이 이따금씩 움찔 멎었다간 이내 다음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녀가 우선 확인한 것은 투숙객들의 직업란이었다. 혹시 남편의 업무와 연관성이 있거나


남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자가 있지나 않을까? 정님이 관심을 둔 것은 바로 그런 쪽이었다. 이윽고 정님은 서류를 덮었다. 그제서야 차소장은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비점은 없습니까?" "잘된 것 같아요... 그런데 소재 파악 불능자가 여섯 명이나 되는군요." "네. 그 점에 대해선 여기 명부를 따로 작성해 두었습니다. 9056 호 이기태 손명호, 9057 호 박노철 박정국, 9058 호 사명두 안판호, 세군데 방에 나란히 투숙한 이 사람들은 투숙객 명부에 기록된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모두 허위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저희들 나름대로 전화번호부를 뒤져서 혹시 '인적사항이 비슷한 사람을 골라내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역시 허사로 돌아갔어요. 그 사람들은 모두 가명을 기재 했거나 아니면 불성실 기록자들이죠." "여섯사람이 나란히 투숙했다는 게 어쩐지..." "바로 그 점에 의문을 느끼고 저희들이 하야비치호텔에 확인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 "그 사람들이 투숙했던 9057 호실 앞에서 우춘구 씨가 추락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정님은 숨을 삼켰다. 등줄기로부터 솟아오른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우춘구 씨의 죽음이 타살이 확실하다면 아마도 그 방에 투숙했던 놈들의 소행으로 보여집니다. 자기들 방 앞에서 사람을 추락시킨다는 건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소리를 질러 발악하거나 반항할 경우의 위험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 "그런 사실들이 어째서 수사초기에 체크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앞서는군요."


"어쨌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차소장의 말을 자르듯 막고 정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건의 실체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자극했고, 어쩌면 차소장의 다음 말이 더욱 그녀를 충격으로 몰아 세우지나 않을까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총총걸음으로 코아 에이전트를 빠져나온 정님은 그길로 길동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파트 현관의 도어록을 이중삼중으로 걸고서야 안정이 되는 자신을 느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그녀는 한동안 맞은편의 거실 벽만을 응시하였다. 별로 치장을 하지 않은 벽지만이 하얗게 남아있는 벽면이 오늘따라 더욱 스산하고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저 벽에 그림이라도 하나 갖다 걸어야 할까 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의 사실 확인에 가슴이 팔딱거리고 흥분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못나빠진 자신에 대한 한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정신차려 이년아! 그렇게 나약해 빠져서 그 끔찍한 놈들과 어떻게 싸울 생각이냐!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부시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다시 서류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투숙객 명부를 빼내어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투숙객 명부에서 의문점이 가는 사람을 빼내는 일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의 일차적인 용의자 선정기준은 우춘구의 메모에서 나타난 P.B 코리아와 홍해그룹과의 관련자, 그리고 남편 우춘구의 직업과 동일한 직업을 가진 공인회계사였다. 그러나 그녀가 심사숙고하여 한참만에야 뽑아낸 인물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짹새롭게 별표를 만들어 그들의 명단과 인적사항을 기록하였다. 7014 호/ 김두태(40)|홍해무역사장


출장중, 출장이유 알 수 없음. 비서실장 사건 다음날 상경 7036 호/ 성기용(58) 국회의원 휴가차 제주도 하야비치호텔 투숙 사건 다음날 상경 묘령이여인-성기용의 내연의 처로 보임(30 대) 성명불상, 성기용과 함께 투숙 사건후 3 일간 계속 묵음 7037 호/김종욱(39) 성기용 의원 사건 다음 날 함께 상경 안희갑(41) 보좌관 무엇보다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김두태라는 인물과 성기용의원이었다. 김두태는 홍해무역 유재택사장의 ���서실장이라는 직책에 있는 바쁜 몸이다. 그가 무슨 일때문에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해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대기업의 비서실장이라면 사장의 분신과 다름없는 직책이다. 비록 유재택사장이 해외출장중임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한가한 제주도 출장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다. 사장이 유고상태라면 비서실장은 더욱 자리를 지켜서 사장공석의 업무를 메워야 함은 자명하다. 그러한 위치의 그가 제주도까지 출장을 왔다면 사장의 지시에 의한 출장이거나 뚜렷한 목적이 있을 터이다. 과연 그 목적이 무엇일까? 정님은 그 점에 의문을 느끼고 그의 이름앞에 의문부호를 붙였다. 다음은 정치인 성기용이다. 그가 유재택사장과 장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리고 그가 내연의 처와 보좌관을 거느리고 제주도의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한 것은 그의 딸, 그러니까 유재택사장의 부인인 성귀희여사가 우이동의 어느 산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직후이다. 가정적으로 엄청난 변을 당한 사람이 제주도에서 한가하게 휴가를 즐겼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물론 정치인이므로 가정소사에는 대범한 구석도 있을 터이고 울화를 삭이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는 변명도 세움직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게 그녀의 솔직한


D 감정이었다. 성귀희여사의 죽음은 그녀가 서울로 올라와 마음을 정리한 후 묵은 신문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신문기사의 구절에서 읽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나처럼 불행한 여자가 또 있었구나 하는 연민의 정을 느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하나의 의문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딸의 죽음에 초연한 아버지. 그러한 부정()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뜻에서 그녀는 성기용의 이름 앞에도 의문부호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두 사람은 하야비치호텔의 7 층에 투숙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사건직후 호텔을 떠나 바로 상경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일치를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호텔에서의 만남이 없었을까? 그들은 얼굴을 맞대면 서로 알 만한 처지가 아닌가. 혹시 그들은 모종의 밀회를 나누기 위해 같은 호텔에 투숙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과연 그들중의 한사람이, 혹은 두 사람 모두가 우춘구 살해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었다. 정님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강한 심증을 느꼈다. 아직 뚜렷한 혐의점은 발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중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9056 호, 9057 호, 9058 호에 투숙했던 행동 요원들이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는 가설만은 훌륭히 성립될 듯 싶었다. 과연 누구일까? 정님은 문득 외로움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옆에 누군가라도 있었으면 속시원히 가슴을 터놓고 싶은 심정이 그녀에게 추위를 느끼게 했다. 팔짱을 낀 채 가슴을 안고 거실을 서성이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김석기의 신문사로 전화를 넣어 보았으나 부재중이라는 답변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허전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하숙집으로 전화를 넣어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허탕이었다. 당장은 김석기를 수배하는 일이 수월치 않은 듯하여 정님은 스웨터를 걸쳐입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혼자 방 안에서 오두마니 외로움을 타고 있는다는 건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온사인이 휘황한 천호동의 환락가를 배회해 보았으나 허전한 마음은 도무지 메워질 줄 몰랐다. 잠시 바람을 쐬면 풀어질 듯 하던 가슴은 더욱 더 오므라지는 듯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택시를 세운 정님은 빨려들 듯 택시 좌석으로 뛰어들었다. "압구정동으로 가주세요." 딱히 압구정동으로 가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불현듯 우춘구와의 짧은 추억이 서려있던 압구정동의 아파트가 그녀의 의식세계를 온통 지배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아파트를 둘러보면 마음이 가라 앉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그녀의 마음은 무작정 압구정동으로 향했다. 실로 오랜만에 옛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얼굴에 생기가 돌고 가슴은 설레는 듯했다. 압구정 아파트 압구에서 내린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낯익은 상가건물과 가로수들이 그녀를 반기듯 눈 앞에 펼쳐져 있있다. 오랜만이야. 정말 반갑구나. 그녀는 마치 졸고 있는 듯 서 있는 가로등에도 정겨운 눈빛을 보이며 천천히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러나 사람의 눈길을 피하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그녀는 현관입구의 경비원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경비원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목을 빼어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제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도를 했다. 그러나 현관문을 따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의 달콤한 환각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거실은 물론 안방과 건넌방까지 집안은 온통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화장대 거울에는 붉은색 립스틱으로 흉측한 글자가 써 있었다. "쓸데없는 짓은 마라!" 뚫어져라 경고문을 바라보던 정님은 화장품 한 병을 집어들어 발악하듯 거울을 집어던졌다. 쨍그랑, 거울이 깨어지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무엇보다 그녀에게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주는 청량제 만큼이나 시원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 길로 아파트를 뛰쳐나온 그녀는 한걸음에 길동의 보금자리로 달려오고 말았다. 그리고 기나긴 밤을 악몽 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설친 그녀는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을 빠져 나왔다. 우선 코아 에이전트를 들른 정님은 차준복소장에게 새로운 일감을 맡겼다. 바로 김두태와 성기용의 뒷조사를 부탁하는 일이었다. 회색빛의 야트막한 5 층 건물을 흘깃 올려다보던 사내는 천천히 몸을 돌려 도로변에 면해있는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빨려들듯 스며들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생각을 가다듬은 그는 동전을 집어넣고 또박또박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가 떨어지더니 이내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여보세요?" "미스터 백입니다. Q 와 통화를 하고 싶은데요." "선생님은 출장 중이십니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외국으로 나가셨기 때문에 정확한 일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리죠." 수화기를 내리며 백합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외국 출장중이라니, 그로선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다시 한 번 건물을 올려다 본 백합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회색 건물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빌딩의 1 층에는 커피숍이 자리잡고 있었다. 커피숍의 문을 밀고 들어선 백합은 우선 전망 좋은 창가의 구석진 자리를 골라잡았다. 맞은 편 빌딩의 현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됐어, 이 정도면. 백합은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엽차를 날라 온 아가씨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과연 그의 짐작대로 창가의 좌석은 앞 건물의 들고 나는 출입자들을 감시하는데는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레지가 이내 커피를 날라왔다. 퇴근시간이 임박한 듯 다방 안은 들락날락하는 손님들로 제법 흥청대는 분위기였다. 흘깃 살펴본 손목시계는 다섯시 삼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백합은 느긋한 기분으로 좌석등받이에 몸을 묻고 뜨거운 커피를 홀짝 거렸다. 지금껏 그가 알아낸 바로는 그 사무실의 퇴근시간은 여섯시였다. 그 사무실이란 다름 아닌 그와 Q 의 전화를 연결시켜 주던 전화번호의 소재지였다. 그 주소를 알아내는데도 그는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전화번호의 소재지와 가입주를 알려주길 꺼리는 전화국 직원을 구워삶느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결국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는 은근한 협박과 함께 슬쩍 건넨 돈봉투에 전화국


직원은 항복하고 말았다. 어느쪽이 효력을 보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래서 알아낸 주소가 강남구 청담동 홍강빌딩 501 호, 전화 가입주는 강성열이었다. 그로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장답사겸 둘러본 문제의 주소지에는 엉뚱하게 정치문제 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외판원으로 가장하여 사무실 안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 거창한 간판과는 달리 제법 넓은 사무실 안에는 20 대 후반쯤은 되었을 성 싶은 여자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떼를 쓰는 척 하면서 대충 분위기를 훑어 보았다. 20 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무실은 벽면으로 가득 늘어선 책장 속에 각종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는 폼이 제법 연구실의 분위기는 풍기고 있었다. 문에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창가에는 제법 큼직한 집무책상이 자리잡고 있었고 한쪽 켠으로 올망졸망한 캐비닛과 철책상이 서너 개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사무실의 중앙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응접소파였다. 제법 무게있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듯 응접소파세트는 가죽으로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었다. 일단 사무실을 물러나온 그는 이번엔 주변을 통한 탐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사결과가 조금씩 나타나면서 그는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도 그 사무실의 주인은 정치인 성기용으로 밝혀진 것이다. 정치문제연구소라는 간판은 비록 형식적이었지만 그곳은 그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는 계보들이 들락거리며 사랑방 구실을 하는 사설 사무실격이었던 것이다. 며칠간의 탐문을 마친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우선 상대가 녹녹한 인물이 아니란점이 마음에 걸렸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이면 그에게 돌아올 후환이 자꾸만 그의 마음 한구석을 찔렀다. 미처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가 결국 마음을 다잡아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은 천사의 재촉을 받고서였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양복상의 포킷에 감쪽같이 들어있는 메모에 그의 눈은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서둘러야 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누가 감히 그의 몸에 접근하여 이런 메모를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되씹어 보고 머리를 굴려보아도 깜쪽같이 메모를 남길 수 있는 작자는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어쨌든 천사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린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한 섬뜩함을 함께 느꼈다. 더 이상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계획해 두었던 일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방 안은 여전히 혼잡스러웠다. 가끔씩 시계를 들여다보는 등 손님을 기다리는 시늉을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건너편 회색건물의 현관에 박혀 있었다. 시계바늘은 여섯시 오분을 막 지나고 있었으나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퇴근이 늦어질 모양이군' 그는 마음을 추스리며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녀의 이름은 정지숙(), 당 28 세, 충남 홍성 출신으로 정치문제 연구소에는 5 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또 여자로선 드물게 K 대 법학과를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다. 그런 여자가 어떻게 이따위 건달패들의 모임 같은 사무실에서 썩고 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사실 그로선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오늘밤 그녀를 납치하여 그녀의 입에서 Q 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는


사명감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가 하숙하고 있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덮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는 이내 단념을 하고 말았다. 자칫 남들의 눈에 뜨일 서투른 수작을 할 수는 없다. 퇴근길에 완전무결하게 증발을 시켜야만 한다. 그는 그렇게 계획을 고쳐 잡았다. 여섯시 15 분. 짜증스럽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회색건물의 현관에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백합은 서둘러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푸른색 체크무늬의 투피스로 정장을 한 정지숙의 뒷모습이 저만치에 보였다. "잠깐만요. 정지숙 씨 맞죠?" 한달음에 그녀를 따라잡은 백합은 짐짓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세웠다. "누구세요?"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첨졍맘 "홍해강철 회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미스터 조라고 합니다." "네, 그러세요?" 그녀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경계심이 조금은 풀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했군요. 십년감수했습니다." 그는 더욱 너스레를 떨며 환하게 웃었다. "저희 회장님께서 성기용의원님께 전해드리라는 중요한 서류봉투가 있습니다. 그걸 오늘 중으로 인수해 가셨으면 합니다만." "무슨 서류예요?" "죄송합니다만 봉투가 봉해져 있어서 저는 속을 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두툼한 걸로 봐서는 수표같기도 하고... 어쨌든 지금 좀 가 주십시오." "어쩌나... 의원님도 안계신데..." "미스 정이나 의원님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은 늦었는데 내일 인수하러 갈게요." "크, 큰일 날 말씀마십시오. 우리 회장님 불같은 성질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시면 제 목이 남아나지 못합니다." 그는 짐짓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저기 세단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정, 그러시다면..." 그녀는 마지못한 듯 따라 나섰다. 그는 펄쩍 뛰며 허리를 굽히고 급히 앞장을 섰다. 그녀는 건물옆 큰 길가에 주차해 있는 아오디 500 의 늘씬한 자태에 감탄의 눈빛을 발했다. 그리고 백합이 문을 열어주자 스스럼없이 차에 올랐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엄청난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도산대로를 지나 영동대교 인터체인지에서 유턴을 하여 방향을 바꾼 세단은 곧장 올림픽 대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새단은 무서운 속도로 미사리를 향하여 질주를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달콤한 환상에 젖어있던 지숙은 그제서야 이상한 듯 백합을 맘 "이건 회사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잠자코 있어!" 백합의 입에서 음산하리만큼 싸늘한 대답이 흘러 나오자 그녀의 얼굴은 금세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다, 당신은 누구예요?" "잠자코 있으라니까!" "아, 안 돼요. 나 여기 내려줘요." "흐흐... 내릴 테면 내려보시지!" 그녀가 허둥지둥 도어 핸들을 잡아챘으나 도어록은 굳게 잠긴 듯 끄떡도 않았다. "부탁이에요. 절 제발 여기서 내려 주세요."


"이 쌍년이 자꾸 떠들 거야?" 백합의 커다란 주먹이 날아와 그녀의 얼굴을 후려 갈겼다. 그녀는 실성한 듯 그 주먹을 잡으며 허우적거렸다. 순간, 그의 손에 쥐어있던 손수건이 그녀의 얼굴을 덮으며 강한 향기가 그녀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녀의 사지는 금세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느낌 때문에 얼핏 눈을 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기겁하듯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몸이 발가벗겨진 채 침대 위에 나뒹그라져 있지 않는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의 양팔과 두 다리는 끈으로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전의 그 사내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수치심에 몸을 웅크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 악마." "흐흐... 뭐라고 앙탈을 부려도 좋아.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해 둬. 지금 이 순간부터 너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내 손에 있다는 걸 말이야." "도대체 누구예요. 당신은?" "흐흐... 내 목소리를 듣고도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나?" "다, 당신은? 바로..." "하하... 이제야 알아보시는군." , 그녀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백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나는 여러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간단하게 대답해. Q 는 누구냐?" "당신은 그를 배신할 셈인가요?" "묻는 말에나 대답해!" "조직은 배신자에게 어떤 처벌을 하는지


당신 자신이 잘 아실 텐데요?" "이 년이 아직 입이 살았군!" 백합의 주먹이 날아 오자 동시에 지숙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눈빛을 표독스럽게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앙다문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한줄기 배어나왔다. 완강한 저항이 뜻밖이라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백합이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조직에선 Q 를 제거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나는 조직의 명령에 따를 뿐이다." "거짓말!" 그녀가 울부짖듯 외쳤다. "믿고 안믿고는 너의 자유다." "이 위선자!" "어쨌든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다. 정지숙, 너는 결국 불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여자에게 가혹한 처사를 저지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네가 그걸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미리 일러두지만 이 집은 사방 몇킬로 안에는 인적이라곤 없는 외딴 독립가옥이다. 네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널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십분간의 여유를 주마. 그 동안에 네가 마음을 돌린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처를 베풀어 주겠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밖에서 방문을 거는 쇳소리가 유난히 그녀의 귀청을 크게 울렸다. 지숙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한탄스러워 울음마저 메말라 버린 듯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끈에 묶인 팔목과 발목이 저려오기 시작하면서 사내에 의해 발가벗겨졌다는 수치심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대로 무참하게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조금씩 그녀를 압박해왔다.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도무지 없는 듯했다. 절망감 속에서 허우적거릴수록 가슴은 팔닥팔딱 뛰었고 당장 질식이라도 할 것처럼 숨이 차오르곤 했다. 이윽고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사내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억제하지 못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백합은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여유를 보였다. 그는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에서부터 뻗어내린 가냘픈 어깨의 선, 그리고 봉곳 솟은 앞가슴이며 그의 손길이 마치 애무라도 하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파르르 몸을 떨던 지숙은 수치심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길은 여전히 그녀의 몸을 더듬어 나갔고 가슴과 복부를 거쳐 미끈하게 뻗은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서 손놀림이 멎었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어때? 마음을 돌리기로 결심했나?" 지숙을 내려다보며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외면을 했다. "좋아,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이 말씀이로군." 말을 맺기 무섭게 그의 손놀림이 바쁘게 이어졌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무성한 수풀사이를 헤집기 시작하자, 그녀는 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그만! 그만! 그만 하세요!" "어때? 마음을 바꿨어?" "말할게요. 뭐든지 다..." 그녀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오면서 말문이 막혔다. 서러움이 가득찬 흐느낌이 계속되자 그는 그녀의 잔등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기다렸다. 그녀의 울음은 한참만에야


잦아들었다. "Q 는 누군가? 성기용이야?" 그의 어조는 나직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녀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아니에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를 모면하겠다고 거짓말 하는 건 용서못해!" "정말이에요..." "그럼 Q 는 누구야?" "저도 누군지는 몰라요." "이 년이 정말!" 그의 목소리가 별안간 높아졌다. "믿어주세요. 전 정말 몰라요" "Q 에게 늘상 연락을 전했으면서 Q 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돼?" "제가 직접 Q 의 얼굴을 본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럼 어떻게 연락을 전했어?" "제가 맡은 일은 전화가 오면 그 사실을 또 다른 전화번호에 통보하는 걸로 끝이 났어요. 그 뿐이에요." "그 전화번호를 대."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번호를 불렀고 백합은 받아적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듯 우두커니 전화번호가 메모된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사태가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너무나 용의주도한 Q 의 행적에 다시금 전율이 솟는 듯 그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이윽고 그는 다시 그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럼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우리의 조직원이오?" "...예."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언제 가입했소?" "5 년쯤 됐어요." "그러니까 정치문제연구소에 입사하기 직전이었겠군." "...네, 그래요." "그 사무실에 취직한 이유는?"


"조직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뜻밖의 대답인 듯 그는 멍하니 지숙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재원이라고 느껴졌던 그녀가 할 일없는 연구소 따위에서 썩고 있는 이유에 수긍이 가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성기용의원도 우리 조직원이오?" "그건 저도 몰라요." "그가 Q 가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소?" "그것도 전 몰라요." "그럼 당신은 도대체 뭘 안다는 거요?" 백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지지않고 대꾸를 했다. "조직의 생리에 대해서 당신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전 제가 접촉하고 맡았던 일 외에 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으음..." 그녀의 항변은 기실 옳은 말이었다. 그는 가늘게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조직의 철저한 생리에 몸서리가 쳐지는 듯 잠시 말문을 닫고 말았다. "그럼 당신을 조직에 가입시킨 사람은?" "학교 다닐 때 함께 서클활동하던 대학선배였어요." "그 친구 이름은?" "강성열이라고해요."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용의 정치문제연구소 전화번호가 왜 그 사람의 이름으로 가입이 되었는지 떡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치문제연구소라는 사무실도 어쩌면 강성열이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딨소?" "몰라요." "그럴 리가 있어? 당신을 조직에 가입시킨 사람인데 모르다니." "정말이에요.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그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풍문도 못 듣고?" "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그 사람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버렸다는


말이오?" "저도 그 분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했었어요. 하지만 만나볼 수는 없었어요.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럼 당신이 버림받은 셈이로군." "...네." 그녀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강성열이라는 그 친구가 Q 일 가능성은 없겠소?" "그건 저도 몰라요." "전화 통화는 했을 거 아니오. Q 와 말이오." "제가 통보를 할때 그 상대는 거의 여자였어요. 가끔씩 남자가 받을 때도 있긴 했으나 그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백합은 문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Q 는 과연 누구인가! 성기용의 개인사무실을 연락사무소로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성기용은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그는 정말 조직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백합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 성기용이 Q 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득 천사의 냉혹한 지령이 얼핏 그의 뇌리를 스쳤다. '내가 파견했던 요원 한사람이 살해당하는 변고가 발생했다. 그것은 한국내 조직의 붕괴를 의미한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렇다. Q 를 제거해야 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Q 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고의든 우연이든 Q 는 조직의 상층부요원을 제거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사가 파견했다는 조직의 요원은 또 누구일까? 백합은 주춤 눈빛을 모았다. 그가 최근에 Q 의 지시에 의해 살해한 사람은 세 사람이다. 첫번째는 바로 성기용의 딸, 그러니까 홍해무역 유재택사장의 부인인


성귀희여사. 두 번째는 합동회계법인의 공인회계사인 우춘구. 세 번째는 우춘구의 직장동료인 유용치였다. 그럼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천사가 파견한 요원임이 분명한데 그는 과연 누구일까? 백합의 상념은 더욱더 오리무중 속으로만 빠져들어가는 듯했다. 세 사람 중에서 누가 Q 와 끈을 맺고 있었던 사람일까?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그 세 사람 중에선 그의 심중에 꼽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Q 의 수하에 나를 제외한 또다른 킬러조직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를 뻬돌리고 그가 모종의 음모를 획책했던 것이 아닐까? 백합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나의 조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터에 그가 다른 꿍꿍이를 가질 리는 없을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골이 지끈지끈 쑤셔왔다. 백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침상옆 서랍을 열어 주사약과 쳄꺼내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백합은 아랑곳 없이 약병에 바늘을 꽂아 주사기 속에 약을 그득하게 채워넣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내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잖아요. 사, 살려줘요 제발." 그녀는 파랗게 질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 조용히 해." "살려줘요." "널 죽이지는 않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 약은..." "널 살려는 주겠지만 돌려 보낼 수는 없다. 내 말뜻을 알겠지?" "그 약은..." "그래 마약이다. 네가 살아나는 방법은


길밖에 없어." "이 악마!" 지숙이 발악하듯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주사바늘이 팔뚝을 파고 들어가는 순간 크게 치떴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힘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12. 호랑이 굴 속으로 먼동이 뿌옇게 터올 새벽 무렵의 회현동 골목길을 그녀는 총총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싸늘한 초가을의 새벽공기가 차디찬 감촉으로 피부에 와닿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몄다. 머리에 둘러쓴 머플러 사이로 앞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자 그녀는 몸을 더욱 옹송거렸다. 그녀는 허름한 행색의 그녀였으나 머플러 사이로 드러난 반듯한 이목구비가 한때는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짐작케했다. 세파에 시달린 듯 햇볕에 그을은 화장기없는 검은 피부와 다듬지 않은 얼굴, 정리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머리카락, 작업복차림의 허름한 행색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절반은 가리고 있었다. 큰 길가로 나서면서 그녀의 걸음은 다소 느려졌다. 얼핏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 여유는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도시의 새벽길을 호젓하게 걷는 기분은 언제나 신선한 느낌으로 가슴을 헤쳐온다. 그녀는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남몰래 즐기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 남산으로부터 뚜렷하게 솟아오른 여명이 그녀를 더욱 감상에 젖게 했다. 회현동을 빠져나와 퇴계로를 꺾어돌자 커다란 빌딩이 그녀의 시야를 가로 막고 나섰다. 옥상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 홍해강철이란 입간판이 그 위용을 빛내며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빌딩이었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밀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밤을 꼬박 새운 초췌한 몰골로 수위실을 빠져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던 수위 장씨가 아는 체를 했다. "아이구 황여사, 오늘도 일등으로 나오시는구먼." "안녕하세요." 그녀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벌써 일 주일째 들어온 황여사란 호칭이 아직도 몸에 배지 않아 서먹서먹하게 대충 얼버무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녀는 바로 윤정님의 변장한 모습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대성용역이라는 청소대행업체의 고용인으로서 홍해강철빌딩의 청소를 맡고 있는 10 여 명 청소부 중의 한 명이었다. 대성용역의 인사기록카드에 그녀의 이름은 황정실, 주소는 중구 회현동 2 가 967 번지, 결혼한 지 1 년만에 중동건설현장의 노무자로 나갔던 남편이 공사현장에서 실족하여 사망한 후 어린 외아들 하나를 키우기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든 억척 또순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홍해강철빌딩의 청소부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로서 일 주일째였다. 그러나 이곳에 취직하기 위해 벌인 준비 작업에는 보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우선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대역을 고르는 일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었다. 가명으로 입사 서류를 위조할 수는 있었으나 탄로날 경우를 대비할 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실존인물 황정실은 천호동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는 과부로 그녀와 약간은 안면이 있는 터였다. 그녀에게 대가를 치른 후 그녀의 동의를 얻는 일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 다음에는 홍해강철빌딩과 가까운 회현동 골목어귀��� 월셋방을 얻어 빌린 주민등록대장을 옮겼다. 그외에도 그녀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척


많았다. 청계천의 의류상가를 뒤져 될 수 있으면 촌티가 나는 허름한 옷가지들을 여러 벌 구입했는가 하면 어렵게 방송국의 분장사를 만나 몇 가지 분장술을 터득해야 했다. 희디흰 그녀의 피부를 거무튀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녀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지금은 스스로가 보아도 놀랄 만큼 그녀는 분장술에 일가견을 보이고 있었다. 애초에는 곧바로 비서실로 침투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그녀는 이내 단념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홍해강철의 비서실에는 특이하게도 많은 미녀들이 고용되어 있었고 그녀들의 업무는 주로 외국 바이어접대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바이어의 통역으로서 입국한 출국할 때까지 철두철미하게 바이어의 편의를 돌봐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관광가이드에서부터 잠자리 수발까지 육탄공세를 퍼부어야 하는 역할도 고역이겠지만 무엇보다 활동영역이 좁아들고 부자유스러울 듯해서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청소부로 첫 출근한 날, 그녀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혹시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거나 그녀의 정체가 탄로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시종 그녀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둘째날부터 그녀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 아니라 모두 동정의 눈빛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 젊은 새댁의 처지가 너무 딱하고 안쓰럽다는 거였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부지런히 일을 했다.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사둘 필요도


있었지만 손에 익지 않은 서투른 일을 빨리 익히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해야 했다. 탈의실에서 회사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물통과 물걸레를 집어들고 5 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맡은 구역은 5 층의 홍해무역과 6 층의 임원실이었다. 5 층 복도의 걸레질을 마친 그녀는 이번엔 사무실로 들어섰다. 인적이라곤 없는 넓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니 왠지 으시시하고 스산한 느낌에 가슴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그런 상념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휴지통의 쓰레기를 한 곳에 모으면서 그녀는 버려진 휴지 조각들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단서가 될만한 문서가 눈에 띄지나 않을까 하는 일념에서였다. 걸레로 사무실바닥을 훔치면서도 그녀의 눈은 책상 위의 서류뭉치나 집기 나부랑이들을 살폈다. 소득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체념이 이따금 일었으나 그녀는 집요하게 주변을 살폈다. 5 층 청소를 마치는 데 한 시간은 족히 ? 6 층으로 장소를 옮기니 이 곳은 한결 수월했다. 야간당직 경비원이 복도에 놓인 책상에서 졸고 있다가 그녀를 보자 반색을 했다. "어서 오시우." "안녕하세요, 김씨." 그녀 역시 눈웃음으로 답해주고 부지런히 걸레질을 시작했다. 6 층은 복도청소만 하면 그만이었다. 각 임원실은 카핏이 깔려 있어 휴지통을 비우는 일만으로 할 일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화장실청소뿐이었다. 남자화장실 청소를 할 때면 늘상 그녀는 야릇한 충동에 휩싸이곤 했다. 여자로 태어나 평생 남자화장실을


<구경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뜻 밖에도 남자화장실을 무상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서먹서먹했던 그 일이 이제는 이력이 붙어 대담하게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남자들이 용무를 보고 있을 때는 야릇한 쾌감마저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리고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그녀가 남자화장실을 출입할 때 남자들이 용무를 보고 있기를 은근히 기대까지 하게끔 되었다. 쾌감뿐만이 아니라 직원들이 주고받는 농담이나 대화를 엿들으면서 혹시나 한 토막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 때문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7 층으로 올라가자 막 출근한 듯한 7 층 담당 조성자여인이 로비에 걸터않은 채 담배 한 모금을 빨아대고 있었다. 조여인은 담배 한대를 다 피워야 일을 시작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일찍두 왔네 새댁." "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해요. 언니." 대여섯 살 연상이라 그녀는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불러주었다. "거긴 다 끝났어?" "네." "어쩜 부지런도 해라. 그나저나 미안해서 어쩌지? 새댁한테 늘상 신세만 지구." "별말씀을 다 하세요." "염치가 없어서 그렇지." "손을 놀리고 있으면 뭐해요?" 그녀가 먼저 물걸레질을 시작했다. 황급히 담배를 비벼끈 조여인이 걸레를 뺏었다. "자, 걸레 이리주구 물통에 물이나 퍼다 줘." 두 여인이 수선을 떨며 부지런을 피우자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청소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그제서야 출근 시간이 된 듯 하나씩 둘씩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댁 덕분에 금방 끝났네." "재가 크게 도운 것도 없는데요 뭐." "아침 식사했어?" "아뇨." "그럼 됐어, 뒷골목 해장국집으루 가. 내가 살게." 조여인은 호탕하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아침의 대청소를 마치면 그녀들은 하루의 반은 거의 마친 셈이었다. 낮에는 화장실 청소만 간간이 하면 그만이었다. 여자화장실은 별 문제지만 남자화장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하루에도 대여섯 번은 들락거려야할 만큼 남자화장실은 문제가 많았다. "어이그 팔자도 더럽게 타고나서 허구헌날 이게 무슨 꼴이람. 한때는 꿈도 많은 청춘이었는데 어쩜 내신세가 이렇게 오그락 바가지가 되었는지. 사내 잘못만나 이 꼬라지가 되어 있지만 어쨌든 사내는 문제가 많은 동물이야. 안그래 새댁?" 조여사는 해장국집의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팔자탈령을 걸쭉하게 늘어 놓았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동감을 표해주었다. "하여튼 사내놈들은 문제가 많아. 총하나 쏘는 것도 재대로 쏘질 못하고 바닥에다 오줌을 질질 흘려놓으니 말야. 특히 7 층 사내들은 더해. 어제도 잠시 딴데 정신을 팔았다가 작업 반장한테 혼쭐이 났지 뭐야.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글쎄 화장실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지 뭐야. 빌어먹을 놈들!" 조여사의 익살스런 몸짓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여사와 그녀는 비교적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나이 차이도 적당히 있었지만 언니 언니하며 따르는 그녀의 애교가 남자처럼 호쾌한 조여사의 성격과 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날 오후였다.


여느때처럼 무심코 6 층의 남자화장실을 들어갔던 그녀는 흠칫 굳고 말았다. 구석자리에서 볼 일을 마치고 돌아서며 바지의 자크를 올리는 사내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너무나 익었던 것이다. 바로 그 놈이다! 그녀의 숨이 멈출 듯한 충격을 느끼며 우두커니 서서 사내를 지켜보았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얼굴.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두고두고 징이 박힌 증오의 대상이었다. 툭 불거져 나온 눈두덩과 광대뼈, 그리고 요심 사납게 생긴 두터운 입술, 남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삐죽한 키. 신혼 첫날밤 그녀를 덮친 첫번째 사내로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흠칫 외면을 했다. 저 놈이 무슨 일로 이 빌딩에 나타났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저 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정님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사내를 곁눈질했다. 다행히도 사내는 이 운명적인 만남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사내는 수도물로 입 속까지 헹구고는 여유있게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양동이와 걸레를 양손에 든 채 그를 따라나섰다. 사내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하단 버튼을 눌렀고 이내 엘리베이터문이 열렸다. 그녀는 사내를 뒤따라 냉큼 승강기에 오른 뒤 등을 돌렸다. 1 층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금세 하강을 시작했다. 끔찍한 사내와 단둘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이는 듯했다. 엘리베이터가 1 층에 닿기 무섭게 그녀는 로비로 빠져나왔다. 이제 어떡한다? 그러나 그녀가 더이상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다. 사내가 곧장 현관으로 빠져나가질


않는가. 어쩐다? 유니폼을 사복으로 갈아입을 여유조차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곧 마음을 정하고 양동이와 걸레를 휴지통 옆에 세워 놓고선 곧장 현관으로 따라나섰다. 저만치서 승용차에 오르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바심하던 그녀는 마침 다가오는 빈 택시를 가로막듯 손을 내밀어 세웠다. "저 앞차를 따라가 주세요." 택시 뒷자석으로 뛰어오르며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쏘아 부쳤다. "아니, 그렇게 차에 뛰어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해요 아저씨, 급해서 그래요." 그녀는 조바심하며 멀어져가는 승용차의 뒤꽁무니만 살펴보았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십년 감수했잖습니까? 내리세요. 여태까지 점심도 못먹었어요." 순간 얼굴이 파래저던 그녀는 문득 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운전기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급해요 아저씨! 저 놈을 꼭 잡아야 돼요! 저 놈은 살인자예요!" 살인자라는 말에 정신이 퍼뜩 드는 듯 운전기사는 그녀와 멀어져가는 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님의 다급한 표정을 보고 마음을 잡은 듯 급히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문을 닫으세요!" 정님이 급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무섭게 택시는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잖구!" 입으로는 투털거리면서도 택시는 차들 *차이로 미끄러지며 곡예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5 분여를 달렸을까? 다행히도 신호대기에 걸려 서 있는 앞차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저 차예요!" "바로 그렇지, 제깐놈이 가봐야


어디까지 갈라구." 운전기사는 자못 자랑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내내 조바심하던 정님의 안색도 역시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놓치면 안돼요. 아저씨!" "그럼요. 안심 탁 놓으십시오. 이래봬도 운전솜 씨 하나는 세계적입니다. 그건 자타가 공인하니까요. 제깐 놈이 이 서울 바닥에서 달아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에 갇힌 손오공 찾기지 별 수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모처럼 활극에 신바람이 난 듯 마구 떠벌려 댔다. "그나저나 저 놈이 진짜 살인범입니까?" "네, 저 놈 외에도 패거리들이 있어요. 전 그 놈들 소굴을 알아 내려는 거예요." 정님도 운전기사의 신바람에 적당히 보조를 맞추어주었다.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겨주십쇼." 그때 신호가 터지면서 차들이 다시 달려나갔다. 앞차와 택시 사이에는 세 대의 차가 끼어 있었다. 운전기사가 몇 번 용을 써서 금방 두 대를 떨구어버렸다. "저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따라가셔야 해요." "염려 탁 놓으십쇼!" 그러나 정님은 쉽사리 조바심이 놓아지지 않았다. 과연 그녀의 염려와는 달리 택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앞차를 쫓았다. 바싹 뒤를 따라가다 한 대 두 대씩 사이에 끼워 주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자유자재였다. 앞차의 꽁무니를 바싹 따라 잡았을 때 정님은 앞차의 넘버를 재빨리 외웠다. 앰버서더 호텔을 지나친 승용차는 장충단공원을 끼고 돌아 남산 순환도로의 언덕길을 기어올랐다. "저 놈이 영동으로 빠질 모양인데요?" 과연 운전기사의 예측대로 승용차는 제 3 한강교를 지나 강남대로를 질주한 끝에 테헤란로에서 좌회전을 하더니 얼마나 달렸을까? 커다란 빌딩을 끼고 우회전을


하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됐어요. 여기 세워주세요." 정님은 골목입구에서 택시를 세웠다. 멀찍이서 승용차가 멎고 사내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여자 혼자서 괜찮아요?" "염려마세요. 이젠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자칫 놈들이 눈치채면 큰 일 벌어지니까 그냥 돌아가세요." 운전기사는 모처럼 기대했던 활극의 끝을 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차를 돌렸다. 택시가 멀리 사라지는걸 확인하고서야 정님은 천천히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사내가 타고온 베이지색 소나타가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정님은 마치 흉물스러운걸 보듯 차를 비켜 걸으며 방금 사내가 사라진 건물을 승바라 보았다. 얼핏보면 호화로운 저택을 연상케 하는 집이었다. 그러나 왕궁이라는 옥호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치장된 현관의 입간판으로 보아 그 내부는 그럴 듯한 요정이 아닐까 싶었다. 얼핏 살펴보니 현관에서 정문으로 이르는 정원도 예사롭지 않게 치장되어 있었고 널찍한 주차장하며 모든 시설물들은 화려와 극치의 미를 뽑내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얼른 왕궁을 지나쳤다. 그리고 왕궁을 옆으로 낀 골목을 돌아 다시 대로변으로 나왔다. 됐다. 이제 일말의 단서라도 잡았으니 이쪽으로 케어보면 무언가는 나올 것이다. 정님은 우선 눈앞에 보이는 귀빈다방으로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무엇보다 차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앞으로 계획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일 듯 싶었다. 천천히 커피 한잔을 비운 정님은 공중전화를 찾아 회사로 전화를 넣었다.


"너 지금 어디 있니?" 조성자여인을 호출하기 무섭게 수화기 저쪽에서 그녀의 호들갑스런 수다가 귀를 찔러왔다. "말두 말어 얘! 너땜에 회사가 발칵 뒤집혔어. 너 양동이와 걸레를 현관 로비에 떡하니 팽개치고 사라졌다며, 작업조장이 너 찾느라고 난리야." "미안해 언니."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나 지금 병원에 있어, 언니." 불쑥 뇌까려 놓고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럼없이 거짓을 늘어 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수화기 저쪽에서 놀라는 소리가 수선스레 들려왔다. "갑자기 복통이 생겨서 견딜 수가 없었어." "어이구 이것아! 그럼 날 먼저 부를 일이지 거기 어디야? 내가 당장 쫓아갈게." "이제 괜찮아요." "글쎄 거기가 어디냐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오실 필요는 없어요. 그보다 언니, 병원에서 당분간 해야 한대요." "뭐 뭐야? 너 남모르는 큰 병을 앓고 있었던 거 아니니?" "...네." "어이그 이 등신! 그럼 진작 이야기를 했어야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일를 한다고, 지금 회사로 들어오련?" "지금 너무 피곤해요." "그래 그래 그럼 집에 가서 푹 쉬어라. 응?" "미안해요 언니, 당분간 일하러 못나갈지도 몰라요." "그래,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 사람나고 일났지 일나고 사람 났니?" 조여사는 한 마디로 화끈하게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작업 조장한테는 내가 그렇게 일러두마, 염려말어." "고마워요 언니."


"내가 집으로 찾아갈게. 몸조리나 잘해." "아녜요. 오늘 밤차로 시골로 갈까 해요. 아무래도 푹쉬자면..." "어이그... 남들 신세는 지고 싶지 않다 그런 심보로구먼. 독살맞을 년 같으니, 그래, 어쨌든 조리나 잘해."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언니." 조여사의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여사의 푸근한 정이 가슴에 와닿아 느낀 뭉클한 감정을 삭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꾸밈없는 진실로 대하는 조여사를 속였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다방을 빠져나온 정님은 택시를 타고 길동의 아파트로 향했다. 이것으로 회현동 셋방과는 안녕이다. 그녀는 또다시 묘한 감정을 가슴에 새겨두었다. 근 한 달만에 다시 길동의 보금자기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다. 지난 한 달간 그녀는 과거와의 차단을 위해 철저하게 황정실 여인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본가의 모친은 물론 김석기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주변의 모든 지인들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과거의 일부를 원상회복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오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택시가 잠실을 지나 둔촌동의 낯익은 아파트단지를 지날 때 그녀는 더욱 그런 감동을 느꼈고 자그마한 행복을 맛보는 듯했다. 아파트단지 앞에서 택시를 내려 총총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님 씨?" 귀익은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정님은 화들짝 놀랐다. "어머, 김선생님!" 김석기 역시 놀라운 눈길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와락 마주 잡았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I 그녀의 허름한 행색을 아래 위로 훑어보던 김석기는 그녀의 유니폼에 붙은 홍해강철의 마크를 보는 순간, 문득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동안 그녀의 행적을 다소는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님 씨가 실종되어서 무척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은 없고... 틈만 나면 여기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김석기를 빤히 지켜보았다. 김석기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그 간의 고뇌와 우수가 잔뜩 서려있는 듯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집으로 들어가세요. 자세한 건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그들은 나란히 몸을 돌려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정님은 정성껏 몸을 닦았다. 집으로 돌아와 김석기에게 차 한 잔만을 대접한 후 응접실에 혼자 앉혀두고는 욕실로 뛰어든 그녀는 거의 한시간 가까이 샤워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동안 청소부 황여사로 변장하느라 목욕을 변변히 못한 탓에 때가 한정없이 밀려나왔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까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긴장감이 일시에 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목적했던 일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그녀에게 더없는 상쾌함을 안겨주었다. 욕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일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만에 욕조를 빠져 나왔다. 거실에 김석기 혼자서 그녀를 기다린다는데 생각이 미치기는 했지만 긴장이 풀어지면서 강한 허기를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몸을 대충 닦은 다음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김석기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요. 이제 곧 끝나요." 안방 화장대 앞에 걸터앉은 그녀는 부지런히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고 얼굴을 매만졌다. 한참만에 그녀의 얼굴은 예전처럼 그 활력과 아름다움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마무리 손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대 거울 속으로 김석기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거울 속에서 그녀의 손놀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어주었다. 순간 김석기가 등 뒤에서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를 포옹했다. 그리고 와락 그녀의 몸을 돌려 그녀를 얼싸안았다. 거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제지할 틈도 없었다. 움찔 몸을 굳혔던 그녀는 순순히 그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 그의 혀가 그녀의 입속을 가득 채운 채 몸부림을 치더니 강한 흡인력으로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이번엔 그의 입안에 그녀의 혀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손을 돌려 그녀의 가운을 뒤로 젖혔다. 목과 어깨의 가냘픈 곡선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가운이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전신이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가운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대의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눈이 부실 만큼 희고 고왔다. 등줄기에서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완만한 곡선이 눈을 찌르는 순간 그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더이상 견딜 수 없는 듯 그녀를 번쩍 횬그는 급히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급하게 엉킨 그들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잔을 기울였다. 조금전의 열정과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하고 결혼합시다." 불쑥 내뱉은 김석기의 말에 정님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얼핏 웃음이 삐어져 나올 듯하던 그녀의 얼굴은 이내 공허한 느낌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암흑에 짓눌린 창 밖으로 "이건 나의 진심이오." 그는 무안함을 달래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시게 됐어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어왔다. "나도 모르겠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게 됐는지. 아마도 그건 지금까지 혼자 마음 속에서 품어왔던 막연한 바람이 불쑥 튀어 나온지도 몰라요.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더이상 정님 씨가 위험한 곡예를 계속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절더러 더이상 사건추적을 말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러나 정님은 한 마디로 잘랐다. "그럴 순 없어요!" 그녀의 너무나 완강한 어투에 그는 허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정님 씨의 그 뜻을 모르는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게 간섭할 생각은 마세요." "할 수 없군요..." 그는 체념의 눈빛으로 정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으로 볼 때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막연하게 품어왔던 일반적인 범죄가 아니라 막강한 배후세력을 가진 조직범죄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어요. 우리가 더 이상 째위험합니다. 그런데도 정님 씨는 홀홀단신으로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제가 적진으로 뛰어든 건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오후에 만났을 때 입었던 유니폼의 마크, 그건 홍해강철의 로고 아닙니까?" "그럼 홍해강철이 적진이라는 단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나요?" "단정을 내리는건 아닙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사실 여부는 좀 더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가능성은 높습니다. 경찰에서도 홍해강철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습니다." "어머, 경찰에서요?" "네." "경찰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우춘구 씨의 암호문을 풀어 냈거든요." "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석기는 그제서야 수첩에서 암호를 풀이한 메모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메모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확신과도 같은 신념이 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암호문을 보면 홍해강철이 모종의 비리나 비위사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춘구 씨는 홍해강철의 비밀을 너무 깊이 알아버렸고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제거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찰도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님 씨가 직접 그 속으로 뛰어들다니, 이건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입니다." ""


"근 두 달 동안 정님 씨를 만날 수 없어 전 혼자서 몸을 달아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경찰에 실종계를 낼까 생각하다가 며칠만 더 참기로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지요."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님 씨가 홍해강철에 침투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님 씨를 어떻게 홍해강철을 지목하셨습니까?" "뚜렷한 확신은 없었어요. 단지 그날 제주도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했던 손님 중에 홍해강철그룹의 임직원이 몇 사람 끼어 있었어요. 그래서 확인이나 해 볼까하고." "그래서 알아낸 거라도 있습니까?" 잠시 생각했던 정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석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벌이려는 계획에 대해 자문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젖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그의 관심과 바람이 그녀에게 부담이 됐는지도 몰랐다. 갑작스런 그의 결혼신청은 그녀에게 너무나 뜻밖의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계획을 밝힐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고 도리어 방해를 하거나 적극 만류나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이 그녀의 생각마저 바꾸어 놓고 있었다. "회사로 다시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아뇨, 고작 청소부로 침입해 봤댔자 빼내올 정보도 없고 그 일도 한계에 부딪친 듯 해서 그만둘 참이었어요. 그래서 이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정말 생각 잘하셨습니다." 그는 모처럼 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회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을 얻어 지냈어요." 천연덕스런 정님의 말에 그는 오히려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사건추적은 계속 하시겠다는 봇" "물론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더 이상 포기하라고 종용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은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걸요." "약속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 "제 결혼신청 말입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이 사건을 해결할 후로 미룰 수는 없을까요?" "알겠습니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윱" "고마워요."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며칠 푹 쉬면서 생각해 봐야겠어요." 불쑥 말을 뱉어놓고 그녀는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늘어놓는 스스로에 대해 깜짝 놀랐다. 그는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듯 체념의 빛을 보이면서도 약간은 안심을 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연락 주십시오." "네." 정님은 다시 한번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내심에서 김석기는 동반자 내지는 후원자의 위치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김석기에게 며칠 푹 쉬겠다던 정님은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 무섭게 부지런을 떨며 외출차비를 차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공을 들여 얼굴을 다듬었다. 지금 그녀가 만들어 내려는 얼굴은 20 대 초반의 발랄한 처녀의 얼굴이었다.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에는 조금은 야한 듯 싶은 화장을 했다. 그리고 준비 해놓은 도수없는 금테안경을 쓰자 거울 속에는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가 원했던 얼굴은 20 대 초반의 개성이 강하고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얼굴 만지기가 끝난 후 그녀는 옷장에서 화려하면서 스포티한 멋을 풍기는 투피스를 꺼내어 갈아 입었다. 금혜수. 그녀는 생소한 자신의 이름을 되뇌어 새기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장안평으로 가주세요." 오늘 당장 그녀가 해야할 일은 장안평 중고자동차매매센터에서 그럴 듯한 승용차를 한대 구입하는 일과 방배동 근처의 반듯한 맨션아파트 한 채를 빌려 새로운 숙소를 장만하는 일이었다.

13. 속초에서 인천까지 김포국제공항 신청사의 귀빈실은 품위와 격조있는 분위기의 실내장식으로 별세계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공항귀빈실은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혼잡의 극치를 이루는 살풍경한 공항 로비와는 전혀 다른 아늑한 휴식공간이었다. 김석기는 잠시후 벌어질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입가로 은근한 미소를 흘렸다. 귀빈실에서 김석기뿐만이 아니라 각 매스컴의 기사 수십명이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폭풍전야의 고요, 바로 그랬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차를 마시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말소리를 낮추어 밀담을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TV 카메라 기자는 녹화용 기자재를 설치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잠시후 LA 발 KAL002 기편으로 입국할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한국측의원들의


귀국기자회견을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김석기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가 소속된 부서가 사회부이다 보니 정치부기자들이 단골로 출입하는 공항귀빈실도 처음 밟아보는 터였지만 내노라는 정객들과 맞대면해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미 의원친선협의회 한국측 대표인 성기용의원과 면담이 그의 숨은 목적이었다. 신문사의 정치부장을 졸라 어렵게 참석한 자리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김석기는 벌써 가슴이 설렝다. 사실 그에겐 목표달성보다는 성기용의원의 반응을 살펴보는데 숨은 뜻이 있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갑자기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항램프와 연결된 도어가 열리면서 귀빈실로 들어서는 의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대표답게 성기용의원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스처와 함께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자, 기자 여러분. 숨 좀 돌립시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고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자리가 정돈되면 여러분의 관심사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능수능란하게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과연 정치인이 다르긴 다르다. 김석기는 감탄을 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한 상대의 무게가 전달되면서 가슴은 납덩이��� 눌린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져왔다. 어쨌든 부딪치고 볼 일이다. 그는 내심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시종일관 뒷전에서 기자회견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기용은 너스레를 떠는 듯하면서도 기자들의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들며 잘도 피해나갔다. 국내의 시국이 혼란스러운 판에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관광용 외유를 즐길 수 있느냐는 독설에 가까운 질문에도 그는 안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여유있게 빠져나갔다. 집안 사정이 어려울수록 이웃이나 친구의 도움이 절실한게 아니냐며 국내정치의 어려움은 외부에서 그 해결점을 모색할 수 있는 법이라고 오히려 강변했다. 그리고 그들의 업적을 일목요연하게 늘어놓았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국인과의 선린우호체제 유지를 위한 그들의 공도 은근히 과시했다. 아울러 최근 국내에 팽배하고 있는 반미감정과 미국의 통상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완충장치의 역할을 하였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먼발치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격론을 지켜보던 김석기는 기자회견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성기용의원 보좌관 안희갑을 한쪽으로 끌어내어 미리 준비해 둔 메모지를 슬쩍 건네주었다. 귀찮은 듯 난색을 표하던 안희갑의 표정은 메모지를 잠깐 훑어보는 순간 대번에 일변했다. 그는 급히 성기용의원의 뒤쪽으로 달려가 성기용의원이 한숨을 돌리는 틈을 타서 재빨리 메모지를 전해주었다. 메모지를 볼 경황이 없는 듯 마무리에 열중하던 성기용은 보좌관의 두 번에 걸친 눈짓에야 비로서 메모지를 들여다 보았다. 안경을 집어들고 메모지를 읽는 순간 그의 표정은 움찔 굳었다. 먼발치에서 김석기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너나 잠시후 안경을 벗고 다시 회견에 임하는 그의 모습에선 조금도 동요의 기색은 없었다. 그는 원래의 포커페이스로 침착하게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로군, 김석기는 다시 한 번 벽에 막히는 듯한 둔중함을 느꼈다. 그러나 잠시후 안희갑보좌관에게 슬쩍 귀엣말로 무언가 지시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총걸음으로 돌아온 안희갑보좌관이 그를 한쪽으로 잡아 끌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의원님께서 특별히 만나주시겠답니다. 오늘 오후 네 시까지 의원회관 의원님방으로 찾아오십시오. 단, 취재는 30 분 이내에 끝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안희갑은 총총걸음으로 돌아갔다. 김석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의 의도는 멋들어지게 적중하고 있었다. 대성공이다. 그는 희색이 만면했다. 그들은 취재시간을 30 분으로 제한하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는 듯 싶었지만 그럴수록 당황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성기용의원의 속을 읽을 수 있어 그는 더욱 유쾌했다. 어쨌든 그의 취재요청을 허락하는 순간 그들의 패배는 불을 보듯 빤히 결정된 일이 아닌가. 김석기는 서둘러 한발 앞서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불같이 화가난 성기용의원은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육중한 체구를 들썩거리며 김종욱비서관을 닥달했다. 귀국을 하다보니 배알이 꼬이고 심사가 뒤틀어지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공항에서 애송이 같은 기자들의 공세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마치 신경이 치도곤을 당한 듯 파김치가 되어 있는 판에 김석기의 메모는 그의 신경을 곤두 세우게 만들고 말았다. "존경하는 성기용의원님. 홍해강철의 5 천만달러 해외유출내막과 아울러 몇 건의 살인사건에 얽힌 의원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취재를 승낙해 주신다면 다시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아주신문 김석기 기자 배상" 6 한껏 정중한 어투의 메모였지만 이건 협박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지금까지 이런 식의 공갈을 당한 적이 없는데, 그 점이 그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홍해강철의 5 천만달러 해외유출 사건이라니 그것은 그로서도 금시초문일 뿐아니라 충격적인 소스가 아닐 수 없었다. 또 몇 건의 살인사건이라니, 그의 딸 성귀희의 죽음에 얽힌 문제라면 또 모르겠지만 메모에는 분명 몇 건이 살인사건이라고 지적되어 있지 않는가. 몇 건의 살인사건이라는 문구가 내심 마음에 걸리지 않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는 취재를 허락하고 말았다. 그 기자의 정확한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자신을 협박하는 듯한 용기의 배경이 과연 무엇인지 그는 그 점이 궁금했다. 그런 터에 의원회관으로 돌아오자 또 한 가지 불길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계보사무실인 정치문제 연구소의 여비서 정지숙이 돌연 실종되었다지 않는가.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길래 같은 식구가 행방불명이 됐는데도 여지껏 속수무책이었느냐 이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의원님 안계신 공백을 메우느라 미처 그쪽으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만..." 김비서가 사색이 되어 머리를 조아렸다. 성기용의원의 외유기간 동안 국내 정치의 공백업무를 담당했던 김비서와는 달리 성의원을 수행하여 외유에 따라나섰던 안희갑보좌관은 흥미있는 눈길로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씩씩대며 거칠게 콧김을 뿜어대던 성기용은 제 풀에 지친 듯 이윽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그래, 실종된 지 오늘로 며칠됐어?" "열흘가량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태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아뇨... 의원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어서..." "그럼 왜 진작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나!" "저, 전... 한 며칠 지나면 미스 정이 제발로 걸어들어올 것만 같아서 하루이틀 기다리다 보니..." "이건 사고야! 알겠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병신같은 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불쑥 한마디 내뱉은 성기용은 소파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뉜 채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음... 틀림없이 사고가 난 거야!" 분명한 단정을 내리는 그의 눈빛에선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저도... 나름대로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습니다." 김비서가 변명을 하듯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처음 하루이틀 동안 전화를 받지 않길래. 제가 사무실로 찾아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문은 잠겨 있는 채였고, 문을 따고 들어가 봤더니 별다른 흔적도 없었습니다. 메모나 근무일지를 살펴봐도 특이한 사항도 없을 뿐 아니라 별다른 약속도 없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하숙집을 찾아갔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벌써 며칠째 들어오지 않는다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스 정의 깔끔한 성격탓으로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일은 없었다구요." "그래서?" "자료수집차 지방출장계획이 있었는데 의원님 안계신 동안 거길 떠난 모양이라고 얼버무려 놓긴 했습니다." "시골 집에는?" "거기도 연락해봤습니다. 넌지시 의원님의 안부 전화가 왔었다는 핑계로 갰척쨉거기도 가지않은 눈치였습니다. 오히려 저한테 미스정이 건강히 잘 있는지 묻고 집으로 잘 내려오지도 않는다며 원망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음..." "그리고 미스 정이 갈 만한 데나 친한 친구들 모두에게 수소문해 봤는데 최근에 미스 정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치안본부 장영국본부장 전화로 연결해." "네!" 김비서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 재빨리 물러나 전화통에 매달렸다. 사실 이런 일은 함부로 떠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칫 촉각이 예민한 기자가 냄새를 맡는 날이면 매스컴의 "성화에 또 얼마나 시달리며 혹시 스캔들로 비화라도 된다면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 아니겠는가. 이런 일에는 장영국경무관이 제격이다. 장영국경무관은 성기용의 봉우이자 무엇이든 터놓을 수 있는 믿음직한 심복이나 진배없었다. 한참만에 비로소 수배가 된 듯 장영국이 수화기 저쪽에 나타났다. "하하... 장 본부장, 그 동안 별일없었나?" 그는 장영국경무관을 늘상 치안본부장으로 격상시켜 불러 주었다. 인사치래도 겸하는 말이지만 바로 미래의 치안본부장이란 뜻이기도 했다. "어이구, 영감님께서 웬일이십니까?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구. 그나저나 외유나가셨다던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래 일은 잘 되셨습니까?" 정영국은 그를 늘상 영감이라고 불렀다. 물론 법조계 출신의 선배이자 정치계의 거물인 그에 대한 예우에 맞는 적절한 존칭이 없어 부른 말인데 이제는 입에 배어버렸다. "하하... 그야 이를 말이오. 누가 하는 일인데, 사실은 내 장본부장한테 은밀한 부탁을 좀 할까 하는데 괜찮겠소?" "무슨 일입니까?" "내 사무실에 있던 여자 아이 말이야." "여자라면? 아, 아, 그 늘씬한 미인 말이군요. 바로 정지숙 씨." "그래. 미스 정이 실종되었어. 오늘로 벌써 열흘짼데." "저런, 요즘 유행하는 인신매매범에 냐된 거 아닙니까?"


"글쎄..." "하하... 틀림없을 겁니다. 나부터도 납치라도 해서 한번 구애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겁니다. 하하..." "이 사람! 농담말고..." "알겠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시오." 순간 수화기를 든 성기용의 안색에 한가닥 어둠의 빛이 스쳐갔다. "우리 미스 정을 좀 찾아주게." "알겠습니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해서라도 소재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는군!" "예?" "전국에 지명수배할 양이면 내가 자네한테 은밀히 부탁할 필요도 없지 않나." "알겠습니다.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건지." "조용조용히 소리나지 않도록 좀 해주게. 내 체면을 생각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즉시 그렇게 조치를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성기용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도 왠지 미덥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장영국은 알겠습니다란 소리를 입에 발린 듯이 뇌까렸지만 그 입바른 소리가 더욱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어쩔 텐가, 지금의 그로선 장영국의 쉬운 대답에라도 기대어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홍해의 유사장 수배해 봐! 지금 즉시!" 그는 괜히 부어오른 심통을 김종욱 비서관에게 퍼부었다. 힐끗 바라본 벽시계의 바늘이 어느새 4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석기라는 애송이 기자와의 면담시간이 거의 임박해 있지 않은가. 그 놈과의 면담 전에 유사장으로부터 사실 확인을 해야 한다. 5 천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해외로 유출시켰다니, 그로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그 기자의 입을 틀어 막아야 한다. 독단적으로, 그것도 그런 기밀이


새어나갈 정도로 허술하게 처리한 유채택의 소행이 괘씸하긴 하지만 그건 2 차적인 문제다. 이번의 건수를 해결하고 유재택으로부터 끌어낼 사례금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지금까지의 부아가 조금은 사그라드는 듯했다. "유사장님은 해외출장중이시랍니다." 김비서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듣는 순간 그의 낯빛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런 시기에 해외여행이라니, 어지간히 한심한 친구로군. 그에 대한 불쾌한 기억들이 떠오르며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어디를 간 건가?" "지금 유럽에 계신답니다." "미친 놈! 유럽이 다 뭐야! 제 목에 칼이 꽂히는 줄도 모르고, 이봐." "네, 의원님." "홍해에 다시 전화해서 유사장 수배하라구 해. 오늘밤 늦더라도 우리집으로 전화를 해달라고 그래! 촌각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네!" 바로 그때였다. 여비서가 인터폰을 통해 김석기의 도착을 알려왔다. "이로 모셔!: 그는 퉁명스럽게 이르고 소파의 등받이에 길게 몸을 뉘었다. 잠시 후. 여비서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서던 김석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냉랭한 분위기가 와닿는 듯한 느낌에 흠칫 몸을 추스렸다. 거만스런 포즈로 그를 노려보던 성기용의원이 크게 모션을 취하며 손을 내밀었다. "바로 당신이오?" "김석기라고 합니다." 악수를 한 손을 풀지않은 채 성기용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위압적인 자세였다. 김석기는 그렇게 느꼈다. "자 우선 앉읍시다." 손을 풀어주면서 성기용은 자리를


권했다. 김석기는 조용히 명함 한 장을 내어밀었다. 명함과 김석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성기용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뜻밖의 인물이로군." "무슨 뜻입니까?" "나한테 공갈을 칠 정도로 배포가 큰 사람이길래 난 우락부락한 고릴라라도 나타날줄 알았는데 절에 간 색시처럼 얌전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탔으니 말이오." "고릴라가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천만에, 고릴라보다야 샌님상대가 한결 편하지, 안그렇수?" "어쨌든 죄송합니다. 국정에 바쁘신 분을 이렇게 시간을 뺏어서요. 하지만 성기용의원님을 상대로 공갈을 칠 만큼 배포가 큰 놈은 못됩니다.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하하... 농담이오, 농담." 그때 비서 아가씨가 차를 내어와서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성기용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 이렇게 오셨으니 용건을 먼저 알아봅시다. 말씀 하실까요?" 김석기는 한쪽의 책상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보좌관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주위를 물리치시는게..." "하하... 상관 없소이다. 나의 분신과 같은 사람들이니까. 그러나 정 원하시다면." 성기용이 팔을 한번 휘젖자 보좌관들은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자, 이제 됐습니까?" "고맙니다." "우선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나와 나누는 대화는 모두 오프더 레코드로 해주실 수 있겠소?" "그러니까 기사화하지 말라는 뜻이로군요." "그래요."


"일방적인 주문은 곤란한데요?" "주문이 아니라 조건이오." "응하지 않으면 취재를 거부하실 " "경우에 따라선." "만약 지킬 수 없을 경우는?" "약속은 꼭 지켜져야 하오." "좋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론 부족해요!" "알겠습니다. 약속하죠." "반드시!" "네." "됐습니다. 얘기를 시작합시다. 그 대신 나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선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을 하겠소이다." 취재노트를 들쳐 몇 가지 의문점을 대충 간추린 김석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귀희여사의 죽음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딸 아이의 죽음을 떠올린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오만 소감을 말하라면 말하겠소. 아버지로서의 가슴아픈 심정을 느꼈지요. 여느 평범한 범부와 다를 바가 있겠소?" "따님의 돌연한 죽음에 의혹을 가져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그건 사고사요." "물론 사인은 페니실린 쇼크사였습니다. 하지만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그런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미 경찰에서도 종결된 사건이오." "그렇게 압력을 넣으셨으니까요." 성기용은 와락 김석기를 노려보았다.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이는 듯 한참을 바라보던 성기용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부모의 심정이 되지 않고선, 또 부정한 딸의 죽음을 직접 당해보지 않고선 함부로 말을 해선 안돼요. 가문의 치부를 언제까지나 세상에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이오. 그것이 부끄러우면 부끄러울수록 빨리!"


"알겠습니다. 지난 봄에 제주도에 가셨죠?" "그래요.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봄인지 어젠지는 모르겠는데 제주도를 갔던 기억은 납니다." "그때 하야비치호텔에 투숙하셨습니까?" "그랬지." "그때 제주도를 방문하신 목적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야 휴양차 내려간 거요. 그때 마침 )정기국회 회기도 끝나고 해서,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요?" "그때 공교롭게도 그 호텔에서 한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살인? 아, 아, 그래요. 젊은이 하나가 투신자살했다던데 바로 그 얘기로군.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우춘구 씨는 신혼여행 온 신랑으로서 당시 합동공인회계법인 소속의 공인 회계사였습니다. 또 우춘구 씨는 홍해무역의 공인회계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런." "우춘구 씨는 홍해무역이 5 천만달러의 비자금을 해외로 유출시킨 사실을 알아내고 메모를 남겼습니다. 그는 그 때문에 살해된 걸로 보여집니다." "아니, 경찰에선 자살로 결론을 내린 줄 알았는데?"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군요." "그야 물론, 내가 묵었던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으니까." "휴양차 가셨다면서 의원님은 다음 날 바로 상경하셨더군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휴양을 즐길 기분이 나겠소? 댁이라면? 근데 그 일로 날 의심하고 취재를 하고 있는 거요?" "천만에요. 단지 의원님께서 그때 그 호텔에 계셨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비이락이겠지만 말입니다. 의심한다면 홍해무역의 비서실장 쪽이겠죠?" "저런 그 사람도 그 호텔에 묵었소?" "모르고 계셨습니까?" "금시초문이오."


성기용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로서도 정말 처음 듣는 말인 듯 생판모를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일류배우를 뺨치는 능구렁이 정치인이다. 김석기는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호흡을 조절했다. 성기용 역시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홍해강철그룹의 외화유출 사건이오. 잘 아시겠지만 나도 그 회사와 인연이 닿았다면 닿은 사람이었으니까. 내 말뜻 아시겠소?" "네." "그래서 묻는건데 그 사안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는 가지고 있소?" "아뇨." "물증도 없이 그런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있는거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남긴 메모는 있습니다." "그 메모를 한 번 봅시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경찰에 있습니다." "저런." 순간 성기용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뜻밖의 사태에 그로서도 당황함을 감출 길이 없는 듯보였다. 김석기는 노회한 정치인의 허둥대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경찰이 벌써 수사를 착수했겠군."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소, 내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그 외화유출건 말인데 당분간만 덮어주시오. 이건 일개 기업의 흥망이 걸린 문제요. 확실한 증거가 확보되기 전에는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 "진상이 밝혀질 때가지만 보류를


해달라는 거요. 내 부탁이 무리한 거요?" "알겠습니다." 그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사위인 유재택사장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다. "어허, 그 어처구니 없는 사람이 그런 무리한 짓을 다하다니..."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성기용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오.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경우에 닿기나 하는 일이오? 나름대로 나도 진상을 파악해 보겠소. 그러니 그때까지만 시간을 주시오. 젊은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젊은이에게 그 결과를 알려주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의원님만 믿고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김석기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기용의원을 믿는 마음은 애초부터 눈꼽만큼도 없었다. 지금부터 증거인멸을 위해 몸부림을 치실 테지.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수렁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할는지도 모른다. 김석기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성기용은 처음에 소파에서 거만스럽게 그를 맞이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의원회관 현관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김석기는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며 의원회관을 빠져나왔다. 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성기용은 급히 보좌관들을 소집하고 긴급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그들과 머리를 맞대었다. 그 날도 오후 세 시쯤이나 되었을까? 피곤한 탐문수사를 마친 후였다. 도덕록 형사와 함께 여의도의 일식전문점 주문진에서 알탕 한 그릇씩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나서던 손삼수는 눈길을 끄는 광경에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음식점 벽의


한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수족관이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거대한 수족관 속의 바닷물을 바꾸어주는 물갈이 광경이었던 것이다. 그의 시선은 수족관에서 밖으로 뻗어나간 대형호스를 쫓았고 그 끝에는 대형 물탱크를 등에 실은 복사 한 대가 서 있었다. 얼핏보면 유조차로 오인할 만큼 유조차와 흡사하게 닮은 꼴의 차였다. 아마도 음식점의 전용수송차량인 듯 차의 옆구리에는 주문진이라는 상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어떤 영감에 손삼수는 이마를 쳤다. 그리고 급히 모터를 작동시키는데 열중하고 있는 운전기사를 불러세웠다. "기사 양반, 이 물은 어디서 실어온 거죠?" "보고서도 모르겠소?" "이게 진짜 바닷물이오?" "어허, 웃기는 양반 다 보겠군, 바다고기가 민물에서 헤엄치는 것 봤소? 이 물은 말입니다. 동해바다 하고도 주문지에서 공수해오는 진짜 바닷물이외다. 어디 지금 막 실어온 싱싱한 바다짠물 맛을 한 번 보시겠소." 그렇다! 바로 이거다. 손삼수는 왜 진작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하고 자신의 우둔한 머리를 새삼스레 손등으로 두드렸다. } 유용치의 십이지장에서 속초바닷가의 플랑크톤이 검출된 후 손삼수는 심각한 딜레머에 직면한 뒤, 지금까지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용치가 속초 앞바다에서 익사했거나 익사당한 후 인천 해안에 퍼졌다는 사실은 과학수사가 입증해 낸 쾌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은 반증할 논리적 근거는 전혀 알아내지 못한채 과학수사는 오히려 그를 혼돈의 수수께끼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유용치의 사체부검결과 사망측정시각은 유용치가 김석기에게 인천으로 모종의 의문을 캐러 간다는 전화를 넣은 직후로


밝혀졌다. 부검의 오차를 여섯 시간 가까이 잡아준다고 해도 그 시간에 그가 속초로 달려가 익사했으며, 또 누군가에 의해 인천 앞바다에 버려졌다는건 터무니 없는 논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상주박사는 그나마도 펄쩍 뛰며 사망측정의 오차를 길게 잡아봐야 두 시간 이상은 있을 수 없다며 결코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것은 과학이 입증해낸 쾌거였다. 넌센스이며 수수께끼가 아닌가? 유용치가 4 차원의 세계에서 살해되지 않았다면 도무지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삼면을 둘러싼 바다의 수심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었으나 대체로 서해는 해안에서 수킬로를 나가봐야 수심이 100 미터를 넘지 못하는 개펄로 이루어진 바다이지만 동해바다는 해안에서 1,2 킬로만 나가도 500m 수심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통설에만 의존한다 하더라도 유용치의 위와 십이지장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은 결단코 인천 해안에서 서식하는 플랑크톤일 수 없다는 역설적 논리가 훌륭하게 성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손삼수의 골머리를 썩이던 의문은 주문진의 수족관을 보는 순간 깨끗이 씻겨지고 있었다. 유용치가 속초 앞바다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속초 앞바다에서 길러온 동해바다의 물을 사용하는 수족관에서 살해된 후 인천해안에 유기되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삼수는 즉각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서울과 경기 수원의 대형일식집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여 나갔다.

14. 왕궁의 참변 새벽 한 시경. 고급사교클럽 왕궁에서 한눈에 보기에도 늘씬한 미녀 대 여섯 명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다. 그녀들은 언제나처럼 큰 길 모퉁이의 심야 영업 스낵바인 OB 호프에서 치킨과 생맥주를 시켜놓고 뜯고 마시며 재잘거렸다. 그녀들에겐 오늘처럼 손님이 뜸해 특별히 바쁘지 않고 개인적인 약속이나 스케줄이 없는 날의 퇴근길에 늘상 벌어지는 일상적인 회식이었다. 새벽 한두시쯤이면 한창 배가 출출한 시각이라 허기진 배를 채울겸 해장술로 들이키는 한 잔의 생맥주맛은 상큼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오늘 하룻동안 벌어졌던 각종 우스갯거리들로 재잘거리며 짓궂은 손님들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흉을 보기도 하며 입방아들을 찧었다. 이렇게 일과를 결산하고 나면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어느 정도 가시기도 하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감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무지막지하게 구겨졌던 자존심도 어느 정도 펼 수 있는 듯 싶어 그녀들은 이런 자리를 즐겼다. 오늘도 여느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설국희는 동료들과의 재담이 즐거우면서도 왠지 조금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신경이 쓰이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창가의 구석자리에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두 사람의 사내 중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맞은 편 사내의 시선 때문이었다. 왠지 사내의 시선에는 끈끈한 무엇이 붙어 있는 듯하여 번번이 그녀의 신경에 거슬렀다. 혹시나 안면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새삼 살펴보았지만 틀림없이 낯선 얼굴이었다. 누굴까? 분명 초면이었지만 그의 시선에 담긴 눈빛은 일상적인 그것은 아닌 듯했다. 설국희는 짐짓 외면을 했다. 어차피 자존심과 알몸마저 던지고 사는 세상에 뭇사내들이 끈끈한 시선으로 본다고 뭐 대수랴. 어차피 쳐다본다고 닳을 몸도


아닌 터에 실컷 보라지 뭐. 설국희는 1 대수롭지 않게 묵살해버리기로 마음을 먹자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는 듯했고 동료들과의 화제에 빠져들면서 사내의 시선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30 여 분 후. 설국희은 동료들과 함께 세상이 돈짝만하게 보일 만큼 강덩이를 부풀려서 OB 호프를 빠져 나왔다. 그녀가 술집을 빠져나올 때 언제 사라졌는지 사내들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녀의 기억 속에서 끈끈한 시선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새벽 2 시경쯤 그녀들은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타고 귀가를 서둘렀다. 설국희는 집 방향이 비슷한 은혜와 합승을 하고 양재동 못미처 포일동 어귀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신흥주택단지라 벌판 가운데 군데군데 단독주택들이 밀집해 있었고 국희의 셋방은 비교적 단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 이슥한 시각이라 이따금씩 서 있는 가로등만이 졸고 있을 뿐 사위는 인적 하나없이 고요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국희는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리는 자신의 하이힐 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그림자하나 없는 이런 밤거리가 그녀는 언제나 무서웠다. 더구나 군데군데 시커멓게 벌리고 있는 벌판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나마 요즘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 비교적 나은 편이다. 방세가 싼맛에 처음 세들었던 일 년전만 해도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나 진배 없었다. 하루 빨리 번화하고 살기편한 영동 중심부의 아파트로 옮기겠다고 결심한 지 오래였으나 언제나 마음뿐,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다. 우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무엇보다 나태해진 생활습관에 젖어 있다가 번거롭게 이사를 한다는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래도 결국 이사는 해야겠다' 바로 그때였다. 상념에 젖은 채 무심코 골목의 모퉁이를 돌던 국희는 별안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물체에 화들짝 놀라며 간이 덜컹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상대는 두 사람의 사내였다. "누, 누구세요..." 너무 놀란 그녀는 간이 오그라드는 듯한 충격과 함께 숨이 턱턱 막힐 뿐 아니라 말소리가 입 밖으로 제대로 새어나오지 않는 듯했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입을 덮었다. 순간 그녀는 가로등 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사내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 놈들이다! 국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들은 OB 호프에서 그녀에게 끈끈한 시선을 던진 바로 그 사내들이었다. "놔요! 놔! 사람살려요!" 그녀는 별안간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사내들을 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정수리에 세찬 충격을 느끼며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사내들의 발길질이 무수히 가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두 사내의 양손에 잡힌 채 개 끌려가듯 질질 끌려갔다. 그들은 벌판의 암흑 같은 어둠 속으로 그녀를 끌고갈 요량인 듯했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그녀는 발악을 해서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도무지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함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사내들의 당황한 몇 마디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몸이 길바닥에 세차게 나동그라지면서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의식을 회복한 것은 두어 시간이 지나서였다. 얼굴을 닦아내는 물수건의 따뜻한


감촉에 그녀는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의 내 몸뚱이는 산산조각으로 짓이겨져 있어야 할 텐데 온몸에서 퍼져오는 감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폭신하고 안온한 느낌에 살포시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 또래의 여자가 희고 가지런한 이빨을 내보이며 활짝 웃고 있지 않는가? "어머, 정신이 드세요."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에요?" 방 안을 둘러보니 어느 가정집의 안방인 듯했다. 세련되고 사치스럽게 장식된 실내분위기를 언뜻 살펴본 순간 안도감이 밀려들면서 맥이 탁 풀어져 그녀는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안심하세요. 그 못된 놈들은 쫓아버렸으니까요."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사처럼 예쁘고 착한 여인이라고 국희는 언뜻 생각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 있어요." 자리에 앉은 채로 온몸을 훑어보니 상처를 크게 입지는 않은 듯했다. "언니가 절 구해주셨군요." "내가 뭐 한 게 있나요. 클랙슨을 마구 눌러대니까 그 놈들이 놀라서 제풀에 달아나 버렸지..." "고마워요 정말..." 그녀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목구멍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별소릴 다하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당연히 도와야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아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미처 생각을 못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어요?" "다행히 크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었나 봐. 두어 시간만에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어머, 두 시간이나요?" 문득 생각난 듯 그녀는 서둘러 일어날 채비를 차렸다. "어머, 안돼요. 그런 몸으로 어딜


간다구?" "집으로 가야 해요." "아서요.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어요." "하지만..." "폐 될것 하나도 없어. 이 집엔 나혼자 덜렁 살고 있으니까 적적하던 참인데 마침 잘 됐지, 뭐." "정말... 괜찮을까요?" "염려마, 마음 푹 놔요.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는데 또 봉변이나 당하면 어쩌려구. 아무래도 내가 두어 살은 위같으니까 언니집에 온 셈치고 마음놓고 쉬어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어려운 세상,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여기가 어디에요?" "방배동 삼덕맨션이야." "네에?" 국희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삼덕맨션이라면 장안에서도 이름이 난 고급주택으로 손꼽힌다. 이런 호화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는 그녀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던 것이다. "전 설국희라고 해요. 언니는?" "난 금혜수라고 해." "어머나, 언니 얼굴처럼 이름도 참 예쁘다." "국희란 이름이 더 예쁜걸?" 금혜수는 씁쓰레한 미소를 머금으며 국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금혜수란 제 3 의 여인으로 분장한 윤정님이었다. 정님은 목하 품 속으로 뛰어든 제물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일념으로 우수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예쁘기만 하면 뭘해... 살아가는 낙이 없는걸." "어머, 언니가 왜요?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국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정님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차피 국희도 알아야 할


일이니까 솔직히 얘기하고 싶어. 국희는 현지처라는 얘기 들어봤어?" "그럼... 언니가?" "그래, 난 돈 많은 일본의 실업가와 계약결혼을 했어. 한 달에 한 번이나 아니면 몇 달에 한 번씩 불쑥 나타나는 일본인 남편을 목놓고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지." "어머나, 정말 부럽다." 국희는 손뼉을 치며 감탄을 했다. "얘는?" "정말이야 언니, 나도 이런 생활 좀 해봤음 좋겠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독수공방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그렇다구 히스오 씨와의 사랑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구. 어디까지나 시한부 인생이나 진배가 없어. 아직은 내가 젊음을 잃지 않고 있으니까 견딜수 있지만 언젠가는 버림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하루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그리고 여길 박차고 뛰어 나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정님은 다시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그렇다고 나가봐야 당장 뾰족한 수도 없으니,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따금씩 옛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예전에 뭘 했는데?" "무희였어. 성인 디스코텍에서. 하스오 씨를 만난 것도 거기서였어." "나체춤?" "응." "호호..." 별안간 국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믿어지지 않아. 언니가 나체춤을 췄다니." "얘는 그게 어때서. 난 지금도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잖아도 요즘은 무료해서 견딜수가 없길래 다시 그 길로 나가볼까 하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야." 순간 국희의 눈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번졌다.


"언니, 그럼 나하고 같이 일해볼 생각 없수?" "국희하고 함께? 어떤 일인데? 여건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없지. 그렇잖아도 혼자서 적적하던 참인데 국희가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고." "정말이야 언니?" "그럼." 구미가 바싹 동한 듯 국희는 열을 내어 왕궁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님은 난생 처음 듣는 고급사교클럽에 구미가 동하는 눈치를 보이면서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호감을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국희는 더욱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정님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왕궁으로 잠입하기 위한 루트로 설국희를 선택했던 자신의 계획이 멋들어지게 별그녀는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단말마의 신음을 토하며 백합은 몸을 일으켜 옆으로 드러누웠다. 침대 옆의 붉은 조명에 반사된 그의 몸은 온통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오키노가 손을 뻗으며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이 달링, 정말 멋져요. 당신은 스트롱맨이야." "당신도." 그는 사랑스런 오키노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오키노는 정말 굉장한 여자였다. 그녀는 정염의 화신과도 같이 한 번 불이 붙으면 도무지 식을 줄 모르는 여자였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녀의 몸 속에선 새로운 정염이 활화산이 터지듯 솟아나왔다. 방금도 그녀와의 열정적인 정사로 녹초가 된 그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백합 역시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의 보조개에 담긴 무한한 매력에 온통


빠져서 허우적댄다는 표현이 옳을는지도 몰랐다. 오키노를 서울로 끌어올린 그는 대뜸 저택을 한 채 구입하여 오키노를 들어 앉히고 그의 오랜 호텔생활도 청산하고 말았다. 누구에게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그것은 가히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그만큼 오키노는 투자할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오키노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주고 몸을 일으킨 그는 욕실에 들어가 냉수를 한바탕 뒤집어 썼다. 온몸에 끈적거리는 땀을 비눗물로 가볍게 씻어내고 샤워를 하자 온몸이 개운해지면서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온 그는 등나무 소파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자 한결 머리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Q 를 제거해야 한다. 그는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을 머릿속에 졺맘 정지숙을 문초하여 알아낸 전화번호의 소재지는 뜻밖에도 성기용의원의 저택이었다. 전화가입주 역시 성기용이었으며 저택에 설치된 세 대의 전화중 한 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Q 는 역시 성기용의원이었단 말인가? 백합은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것은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가설이다. 정지숙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분명히 말을 했다. Q 는 외유중이라고. 그는 어젯밤 TV 저녁뉴스에서 본 성기용의원의 귀국 기자회견 장면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성기용이 Q 였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결코 아니다. 성기용과 같은 거물을


제거하는 것도 쉽지 않을 터이지만 또 그 후유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다. 나라 안이 발칵 뒤집힐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그의 아성이 일거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래서 조직의 본부에서도 Q 를 쉽사리 제거할 수 없어 나를 끌어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마에 배어나오는 진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이제 어쩐다? 지금와서 발을 뺄 수도 없거니와 조직의 명령은 더더욱 어길 수 없는 일이다. 사면초가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가 낭패스러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수 없군. 일단 천사와의 접선 날짜가 며칠 후로 다가와 있으니 그의 태도를 지켜본 후 모든걸 결정하는 수 밖에 없겠지. 그가 마음을 정하고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따르르르...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왕궁 지배인 황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전화선을 타고 울려왔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왕궁이 쑥밭이 됐습니다. 정체불명의 괴한 수십 명이 몰려와서 업소를 마구 때려부숩니다. 도와주십시오!" "뭐야?" 백합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대소동이 벌어진 것은 윤정님이 왕궁으로 잠입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국희의 소개로 마담 송을 만나 면접을 마친 후 왕궁에 첫 출근을 한 날, 정님은 어지간히 놀라고 말았다. 회원제 고급사교클럽이라는 국희의 언질 때문에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밖에서 볼 때보다 더욱 으리으리한 내부시설에 우선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왕궁의 변태적인 영업 방법이었다. 출근을 하는 순간부터 발가벗어야 한다는 사규도 그랬지만 손님에게 지명이 될 때까지 풀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는 규정에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근 첫날과 그 다음 날까지 그녀는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수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마치 미인대회에 출전한 여자처럼 아름다움과 매력을 뽐내어 왕궁을 찾는 남자들의 눈요기감이 되고 빨리 선택되지 못했을 때의 패배감은 무엇보다 큰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청순한 매력이 어필되었던 듯 그녀는 곧잘 처음부터 선택되어 손님의 방으로 호출되어 가곤 했다. 그녀의 높은 인기에 흡족한 듯 송마담은 그녀를 끔찍이 생각해주는 척했다. 그녀의 학력과 교양이 인정되어 카운터의 경리자리로 옮길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졌으나 그녀는 과감히 뿌리치고 말았다. 불량배의 폭행사건 다음 날부터 그녀의 숙소로 옮겨온 국희와의 의리 때문이기도 했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좀더 자유롭고 남들의 눈을 끌지 않는 일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그녀는 옷벗는 일에도 이력이 붙게 되었고 뭇남자들 앞에서도 자신있게 치부를 보일 수 있을 만큼 용기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복수를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대가이다. 어차피 목욕탕에서 옷 벗는 걸로 치부하면 약간의 수모는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까짓 옷을 걸치고 걸치지 않는 게 무어그리 대수이겠는가. 이렇게 마음을 정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면서 대담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치를 수 있는 용기도 차츰 생겨났다. 그리고 그녀는 동료 호스티스들과의 사교에 정성을 들였고 인기를 얻는 일에도 애를 쓴 보람이 있어 일주일 후에는 거의


모든 아가 씨들이 그녀를 따르고 좋아하게끔 되었다. 그러나 지난날 홍해강철 그룹의 화장실에서 목격했던 문제의 사나이, 그녀가 꿈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천추의 한을 남겨준 괴한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놈은 이곳의 단골손님일까? 아니면 왕궁의 거래처 사람중 하나일까? 어느쪽인지 종잡을 수는 없었으나 _그녀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진 채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곳에 자주 출입하는 단골손님 중에서도 혹시나 특별한 인물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관심을 기울였다. 단골 중에서는 남철희박사와 홍성국박사가 특히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남철희박사는 무언지 알 수 없는 우수가 얼굴에 늘 끼어 있어 그녀의 호기심을 끌고는 했다. 2-3 일에 한 번씩 들리는 남철희박사가 홍성국박사를 대동하고 나타나면 송마담의 앞장서서 수선을 떨며 특별대접을 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는 언제나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마셔대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 해대곤 했다. 그럴 때면 당황한 홍박사에 의해 제지되거나 억지로 끌려나가기 일쑤였는데 그녀가 남박사를 주목하게 된 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횡설수설 때문이었다. 그날도 폭주 끝에 과음한 남박사는 아니나 다를까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성귀희라는 여자의 이름을 뇌까리더니 성귀희의 죽음은 자신과 무관하다. 나는 죄가 없다는 투로 몇 번인가 중얼거리며 악을 쓰고 버둥대다가 홍박사에 의해 끌려 나갔다. 성귀희라는 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기용의원의 무남독녀 외딸, 홍해강철그룹 유재택사장의 부인, 그녀의 돌연한 죽음에 남철희박사가 연루되어 있다니.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우연히


입수한 정보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남철희박사는 왕궁에 들르는 날이면 꼭 그녀를 점지하곤 했다. 어쩌면 그녀의 처지에서 느껴지는 동병상련의 분위기를 감 잡아서일까? 그녀는 그렇게 혼자 생각하며 속으로 웃곤했다. 그리고 다음날 왕궁에 들른 남박사는 누군가로부터 충고를 받은 듯 어젯밤의 술주정을 사과했고 그 후론 얌전하게 술만 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렇게 열흘째가 되던 날. 왕궁은 정체모를 괴한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 당하고 말았다. 밤이 이슥한 시각에 갑자기 들이닥친 괴한 20 여 명은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낫, 도끼, 철봉 등 무시무시한 흉기들로 왕궁의 내부시설을 닥치는대로 때려 부쉈다. 그들은 외부와의 연락선인 전화선을 끊고 정문을 굳게 지키며 왕궁을 완전 고립시킨 채 무려 삼십여 분에 걸쳐 난행을 거듭하였다. 왕궁은 대번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다행히 그들은 반항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끔찍한 흉기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이리뛰고 저리뛰는 벌거숭이 여자들에게 그들은 관심도 두지 않는 듯했다. 처음에 멋도 모르고 덩치 큰 웨이터가 그들에게 덤벼들다가 낫에 찔려 쓰러진 후 그들에게 대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동안 공포분이기를 조성하며 설치던 그들은 왕궁의 사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왕궁의 지배인, 마담 등 경영자측 직원들을 분리하고 웨이터와 호스티스를 솎아낸 후, 손님들을 모아 신분을 확인한 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중의 리더인 듯한 자가


종업원과 직원들을 상대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재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미모의 여인이었다. 차례가 되어 사진을 들여다 본 정님은 겁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로선 생판 모르는 여자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매한가지였다. 그 여자의 사진이 바로 정지숙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놈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겁을 주었지만 정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뜻밖의 결과에 실망한 듯 리더격인 사내가 마지막 엄포를 놓은 후 철수를 명령하고 그들은 썰물이 빠지듯 사리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동안 왕궁의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고 말았다. 백합과 경호원인 듯한 일당의 청년들이 들이닥친 것은 괴한들이 철수한 지 20 여 분이나 지나서였다. 백합은 노발대발하여 청년들을 윽박질렀다. 알고 보니 왕궁의 경비를 책임져야 할 주먹들이 그들 요원 중의 한 사람집에서 벌어진 집들이에 참석하여 한꺼번에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정과장이란 집들이의 주인공은 백합의 주먹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정님은 뒤늦게 나타난 청년들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온몸에 치솟는 전율을 억제하느라 입술을 악물었다. 그녀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문제의 괴한들이 한꺼번에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국희의 귀에 대고 귀엣말로 속삭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저사람들은 누구니?" 그녀는 네 명의 사나이들을 가리켰다. 국희가 대뜸 말을 받아 속삭였다. "사장님과 직속 경호원들이에요. 여기 직원들이에요."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 속에서 번져 나오는 환희를 억누르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백합의 원한에 가득찬 원성이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 들어 왔다. "두고보자! 이 새끼들! 이 빚은 틀림없이 갚아주고 말 테니까!" 서울과 경기일원 일식전문점의 수족관에 대한 정밀 분석에 나선 손삼수는 뜻밖의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접하게 되었다. 수사팀은 대형 일식집만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를 벌였으나 우선 일식집의 엄청난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체인화되어 전국으로 번져 나가는 몇몇 대형업채의 규모에 그들은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치찌개니 된장찌개니 하는 한국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그들로선 변질된 음식문화의 엄청난 규모에는 기가 질릴 정도였다. 업소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그들이 분석한 수족관의 내용도 제각각이었다. 바닷물만 해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수족관 속의 물은 막연히 바닷물이겠거니 하고 그들의 피상적인 관념은 이번의 수사로 완전히 바로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바닷물의 내용도 정말 다양했다. 서울의 일식집에서 사용되는 바닷물에는 서해의 아산만이나 삽교천에서 공수해 오는 C 바닷물이 있는가 하면 서울근교인 반월의 사리포구에서 바닷물을 사서 쓰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주문진이나 동해바다처럼 직접 동해 바다에서 물을 날라오는 대형업체가 있는가 하면 전문적인 바닷물 장수로부터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일식집도 부지기수였다. 업계의 형편을 대충 파악한 손삼수는 이번엔 수사범위를 축소하여 바닷물 공급회사중에서 속초의 바닷물만을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업자로 한정하여 범위를 압축해 나갔다. 그리고 속초에서 바닷물을 끌어오는 업자가 두사람 뿐임이 확인되자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거래음식점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나 광범위하여 수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탐문작업이 시일이 흘러가면서 대상이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손삼수는 수사의 기준을 몇 가지 설정해 놓고 끈질기게 탐문을 거듭한 결과 일주일 후에 조사범위가 한층 좁아들어 어깨가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낄 정도였다. 철저하게 유용치나 우춘구 혹은 윤정님 그리고 합동회계법인과의 연결부분이 있거나 선이 닿을 수 있는 업소를 찾아나섰다. 손삼수는 왕궁이라는 유흥업소에 착안하기 시작한 것은 체크리스트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손삼수는 왕궁탐색을 결정했을 때는 왕궁이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거의 쑥밭이 되어버린 직후였다. 손삼수는 또다시 허탈감에 접어들고 말았다. 자신이 한발 늦은 왕궁은 쑥밭이 되어 내부수리중이라는 간판을 걸어놓은 채 휴업상태에 있었고 경영주 및 주요간부들은 모두 잠적해 버린 후라 수사는 한 발짝도 전진해 보지 못한 채 또 다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15.음모의 종말 왕궁의 폭력배 난동사건은 다음 날 신문 사회면을 온통 장식하며 센세이션널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활개치는 조직 표력배의 집단 난투극." 사회면 톱을 차지한 머릿기사에 이어 식칼, 낫, 도끼. 철봉 등으로 무장하고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한 왕궁피습사건은 모든 매스컴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말았다. 사건현장의 참혹하고 끔찍한 상황이 생생하게 보도되면서 나라 안은 온통 들끊었다. 잇따라 유흥가에 도사리고 있는 조직


폭력배들의 실상이 매스컴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속속 보도되면서 경찰의 무능을 질타하고 치안부재의 상황을 우려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인을 더욱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그러니까 왕궁 테러가 빚어진 지 불과 이틀 후의 오전이었다. 출근길의 러시아워가 막 끝난 열시경 성기용의원의 그랜저 승용차는 88 올림픽 도로를 빠져나와 여의도로 접어들고 있었다. 88 도로의 여의도 북측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온 승용차가 국회의사당을 향해 좌회전 깜박이등을 넣고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둔탁한 굉음과 함께 승용차가 거칠게 요동을 쳤다. 백미러를 들여다보던 운전기사의 입에서 대뜸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떤 새끼들이 감히!" 어처구니 없게도 뒤따라오던 르망이 그랜저의 뒤꽁무니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운전기사가 짜증을 부리며 운전석에서 내려서자 뒤차에서 내린 청년 세 명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야! 임마! 눈깔 똑바로 뜨고 운전 제대로 해, 알겠어?" 운전기사가 눈을 부라리며 성깔을 퍼부으려 할 순간이었다. 앞장 선 청년의 강력한 라이트 어퍼컷에 의해 운전기사는 말은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성기용의원이 막 차문을 밀고 나오려 할 때였다. 운전석의 문이 덜컥 열리면서 강렬한 악취를 풍기는 병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염산이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가 얼굴을 숙이며 피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는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지르며 시트 바닥을 딩굴었다. 이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청년들은 재빨리 르망에 올라타고 차를 급발진시켜 영등포 로터리 쪽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급히 차를 돌려 성모병원 응급실로 성기용의원을 모신 후 경찰과 국회경비대에 신고를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서울 일원에 즉각 비상경게령이 내려졌다.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범인검거를 위한 총력태세로 나섰다.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문제의 사고차량인 르망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수사회의에 참석했다가 사고 소식을 접한 손삼수반장은 즉각 현장으로 달려왔고 성기용의원 테러사건 임시 수사본부인 국회 경비대 사무실에는 시경 강력계장을 비롯 수사과장은 물론, 시경국장 치안본부장 등의 거물들이 속속 도착하여 북적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성기용의원이라면 여당의 현역 정치인이자 차기 대권을 노리는 거물 중의 거물정치인 아닌가. 그런 인물이 백주에 테러를 당하다니, 그들의 낯빛은 무두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왕궁 테러에 이은 정치인 피습이라니, 범행의 치밀성과 끔찍하면서도 대담한 소행은 그들 모두의 간을 오그라들게 했다. 이제부터 빗발처럼 쏟아질 치안부재란 비난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그들은 그 궁리를 하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러다가 30 여 분 후, 성모병원으로부터 성기용의원이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는 비보가 날아들면서 그들은 아예 말을 잃고 말았다. 이제 끝장이다. 그들은 그렇게 느꼈으며 그렇게 생각을 정하자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이 드는 듯했다. 다시 30 분 후. 이번엔 도주차량을 발견했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이 때다 싶어 손삼수는 수사본부를 빠져나왔다. 무엇보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놈들일까? 이런 끔찍한 범죄를 대담하게 저지를 수 있는 놈들이. 문제의 차량이 발견되었다는 신길동 언덕배기의 공터를 향해 달리는 패트롤카 속에서 손삼수는 내내 그 생각에만 골몰하였다. 조금 전에 수사본부에서 치안본부장 주재로 진행된 수사회의의 초점도 바로 그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첫번째로 떠오른 해답은 원한 관계였으나 그것은 성기용의원의 사생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처지로서 섣불리 거론하기 어려운 문제라 일단 뒤로 미루어졌다. 둘째는 권력투쟁을 들었으나 이 또한 방법이 졸렬함과 함께 가능성의 희박으로 제외되었다. 다음으로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북한측의 요인암살 계획이 거론되었으나 대상이 하필 성기용의원일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빠졌고, 역시 강력하게 대두된 해답은 좌경폭력 세력의 조직적 테러일 가능성이었다. 모두들 그 점에서는 공감하는 눈치를 보였다. 아니 그쪽으로 수사를 몰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만약 여론을 그쪽으로만 집중시킬 수 있다면 치안부재상황의 무능한 경찰이란 비난을 면할 수 있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그들의 가슴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곧 재야 세력이나 좌경 세력들이 된서리를 맞겠군, 손삼수는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전에 목격한 경찰 수뇌부의 기세등등한 각오로 보아서는 된서리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벌일 수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현장에 도착한 손삼수는 우선 문제의 차량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헤드라이트를 비롯한 납작해진 앞쪽의 몰골로 보아 도주차량이 틀림없는 듯했다. 더욱이 차량에서 발견되었다는 쪽지가 그를 아연실색케 했다. "지문채취 열심히 해보슈." 마치 발가락으로 쓴 듯 서투르게 휘갈겨 쓴 쪽지를 보는 순간 손삼수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억제할 수 없어 애꿎은 타이어에 발길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지문채취를 하느라 승용차 내부의 여기저기에 백분가루를 뿌리는 도형사를 말렸다. 도형사는 거의 끝났다며 작업을 감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내부에서는 지문은 물론 그 비슷한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형사는 이번엔 청소기를 들이대고 차내에 떨어진 먼지 따위를 빨아들였다. 혹시나 범인의 모발이 떨어져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삼수는 이윽고 등을 돌리고 말았다. 두고 봐라 이놈! 경찰을 조롱하다니, 네 놈을 기어코 잡아내고 말 테니. 패트롤카로 돌아온 그는 무전으로 시경 상황실을 호출하고 차량조회를 했다. 차주가 과연 누구일까 해서였다. 정확하게 2 분 후, 무전을 통해 답신이 들어왔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문제의 차는 도난당한 차였던 것이다. 그 이틀 동안 김석기 역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석기를 비롯하여 아주신문사 사회부기자 30 여 명이 총동원되다시피하여 치안부재의 현실과 폭력조직의 실상을 파헤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김석기는 취재팀을 총지휘하는 가운데서도 윤정님의 근황을 알아내고자 무척 애를 썼으나 그녀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이번엔 성기용의원에 대한


염산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더이상 윤정님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여타 다른 매스컴에서는 성기용의원의 피습에 관하여 경찰의 발표문을 인용한 좌경폭력이나 북한측의 요인암살계획의 가능성을 흘리고 있었으나 그의 시각은 정반대였다. 그는 취재반을 4 개반으로 나누었다. 제 1 반에는 홍해강철그룹의 동정을 비밀리에 탐색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영문도 모른 채 사건의 외곽에 배치된 취재 1 반 기자들은 연달아 불평을 터뜨렸으나 특종이 터질지 모른다는 김석기의 암시만 믿고 취재에 나섰다. 그리고 제 2 반은 성기용의원 주변에 매달리게 했다. 성기용의원 보좌관을 비롯한 가족들이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토록 했다. 다음 제 3 반은 왕궁에 대해 취재를 강화토록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왕궁 습격에 연이어 터진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은 연관된 사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우려 때문이었다. 왕궁을 취재하면서 그는 한가닥 깊은 의혹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왕궁은 상류층 인사들만이 드나드는 고급사교클럽으로서 회원제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그 회원 중에는 우리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저명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성기용의원 역시 왕궁의 회원이었다. 바로 그 점이 그로 하여금 왕궁에 집착토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4 반은 비상대기조로 편성하여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는 지원체제를 구축하여 24 시간 대기토록 했다. 김석기가 홍해강철그룹 주변에 포진한 취재 1 반을 둘러보고 왕궁이 있는 테헤란로로 가기 위해 제 3 한강교를 차로


달리고 있을 때였다. 허리춤에서 삐삐가 요란하게 울었다. 급히 송신기를 살펴보니 비상대기조에 속한 석기자의 호출번호가 디지털로 깜박이고 있었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무서운 속도로 한남대교를 가로지른 그는 급히 우측의 리버사이드 호텔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넣고 로비의 공중전화부스로 뛰어들었다. "아, 석기자? 무슨 일이야?" "윤정님 씨라는데요, 급히 전할 말이 있으시답니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십니까? 5 분 후 다시 전화를 넣기로 했는데요?" "그럼 이쪽으로 전화를 달라구 부탁해. 내가 리버사이드호텔 커피숍에서 전화를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호텔 전화번호를 일러주고 커피숍���로 들어온 그는 입구 쪽의 카운터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슨 일일까? 그녀가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면 필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찾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설레는 듯했다. 정확하게 5 분 후, 카운터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석기는 급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혹시 김석기라는 사람을 찾으면 좀 바꿔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 아가씨가 이내 그에게 전화기를 돌려 주었다. 상대는 역시 윤정님이었다. "지금 어디 있는 거요? 정님 씨?" "그건 아실 필요없어요." "제발 사람 애 좀 작작 태우고 말해주시오. 내 곧 달려가겠소." 이쪽의 간절한 마음이 전달된 듯 정님은 말을 끊고 가늘게 한숨을 몰아쉬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님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생각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놈들은 벌써 제 손아귀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이것 봐요, 정님 씨!"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정님의 말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잘랐다. "더 급한 일이 있어요. 한국과학연구소의 남철희박사를 살펴보세요. 그 사람이 바로 성귀희여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에요." "뭐, 뭐요? 그게 정말이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백합은 컴퓨터의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전사사서함을 통하여 천사의 부호와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깜박이기 시작했다. 백합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천사와의 교신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사다." "여기는 불새. 임무를 완수했음." "임무를 완수하다니? 틀림없는가?" "그렇습니다. Q 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병신같은 놈. Q 는 제거되지 않았다." 순간 백합은 깜짝 놀라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랩탑 컴퓨터의 버튼을 두들겨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Q 는 분명 제거했습니다." "어리석은 놈. 너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성기용은 Q 가 아니다." "그럴 리가..." "네가 한 짓은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아버린 것과 같다. 넌 큰 실수를 저질렀어. 조직의 상부에선 크게 노하고 있다. 너는 이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백합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샛노랗게 변해갔다. 그는 급히 키보드를 눌러댔다. "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틀림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제발..." 그는 공포에 짓눌린 듯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는 거의 초죽음이 된 얼굴로 애원을 했다. "이번엔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니터의 화상은 냉정하게 잘랐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지난번의 .지시는 철회한다. 자결하라! 그것만이 네가 비극적 종말을 면할 수 있는 길이다. 이상 천사로부터."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백합은 랩탑컴퓨터를 치켜들고 힘껏 내동댕이쳤다. 거센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분노로 인해 온몸이 떨려왔고 눈빛은 이글이글 타올랐다. '속았다! 이용만 당한 것이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어. 깨끗하게 당하고 말았다. Q 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고 제거 지시를 내렸을 때 이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챘어야 하는건데, 좋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내가 살아남는 길은 돐제거하는 길뿐이다. 천사를 찾아라! 테이타 뱅크를 통하면 어쩌면 쉽게 천사를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 전쟁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른 흥분이 온몸을 파도치듯 훑어나갔다. 그는 즉시 전화통에 매달려 부하들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가 아무리 수소문하고 애를 태워도 도무지 부하들의 소재파악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전화통을 팽개친 그는 한달음에 밖으로 내딛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나서 5 분 정도 지났을까? 진분홍 드레스 차림의 오키노가 안방으로 들어섰다. 깨어진 컴퓨터의 파편으로 페허처럼 황폐해진 휑뎅그렁한 방 안의 풍경을 살펴보고 그녀는 이내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으며 화장대에 걸터앉았다. 외출채비를 서두르는 듯 머리채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놀림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그녀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묘한 여운을 머금은 웃음이었다. 이윽고 몸단장을 마친 그녀는 옷장에서 정장을 한 벌 꺼내어 갈아입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듯한 가방을 꺼내어 챙겨들고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지 10 여 분 후. 이번엔 백합이 다시 들이닥쳤다. 백합은 분노와 흥분으로 몸을 가눌 길이 없는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온 집안을 뒤졌다. '이 여우 같은 년! 어딜 갔어?' 오키노를 찾아 헤매던 그의 눈길이 안방의 열린 옷장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맥이 빠지는 듯 털석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몸을 추스릴 기운도 없는 듯 맥이 풀린 시선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오키노가 천사였다니, 그것은 꿈에도 상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쩐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일이 순순히 잘 풀린다 했더니. 이제 보니 모든 건 계획적이었다. 천사가 자신의 동태를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건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년을 잡아야 한다. 반드시 붙들어서 요절을 내어야 한다.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이 여우 같은 년이 어느새 눈치를 채고


달아나다니. 그는 좀더 일찍 데이터 뱅크에 조회를 해보지 못한 것이 뼈가 저리도록 후회가 되었다. 집을 나서는 길로 데이터 뱅크를 찾아간 그는 천사의 전자사서함 호출부호에 대한 확인부터 서둘렀다. 그랬더니 이제 웬일인가. 천사의 호출넘버가 바로 자신의 저택이 소재지가 되어 있질 않는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그는 대뜸 별채의 방 한 칸을 덮쳤다. 그리고 방문을 여는 순간 프랑스제 샤넬 No.4 의 향기가 코를 확 찔렀다. 이것은 오키노가 즐겨 사용하는 향수였다. 그리고 그의 눈을 뒤집어 놓은 것은 방 중앙의 탁자 위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랩탑 컴퓨터였다. 그는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꼭두각시처럼 그녀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분통이 터졌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년이 더 이상 멀리 숨어버리기 전에 잡아내야 한다. 문득 몸을 일으킨 그는 다급하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한편, 백합이 애타게 찾고 있던 심복 4 인조는 윤정님의 손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왕궁의 피습사건이후 개점휴업상태가 되어버리자 절호의 기회라고 느낀 정님은 국희를 꼬드겨 사내들을 집으로 유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큰 일거리가 하나 있는데 잘만 해결하면 일확천금이 생긴다는 유혹에 사내들은 너무 쉽게 걸려들었다. 마침 경찰수사와 취재기자들의 집요한 공세에 적당히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던 그들에겐 안성마춤의 유혹이기도 했다. 국희를 밖으로 따돌리고 사내들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정님은 우선 주안상부터


올렸다. 처음엔 용건부터 재촉하던 사내들은 정님의 애교있는 몸짓에 제법 호기를 부리며 술잔을 받아들었다가 잠시 후 모두 의식을 잃고 말았다. 강력한 수면제를 탄 맥주 한두 잔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준비해둔 가스총은 써볼 필요도 없었다. 사내들이 인사불성이 된 걸 확인한 정님은 서둘러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준비해둔 철사줄로 사내들의 손을 뒤로 돌려 묶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양발을 다시 묶고 그 위로 다시 반창고로 칭칭 감았다. 이 정도쯤 되면 항우장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작업은 10 여 분만에 간단히 끝났다. 정님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며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손등으로 씻어내었다. 사내들은 손과 발이 조이는 통에 고통스러운 듯 이따금씩 몸을 뒤틀었다. 그때마다 정님은 움찔 놀라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님은 이번엔 사내들의 입을 반창고로 봉해 버렸다. 덩치 큰 사내들을 끌어내느라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는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쉬지 않고 다음 동작으로 옮겼다. 가위를 집어든 그녀는 이번엔 사내들의 옷을 갈기갈기 도려내기 시작했다. 누더기처럼 변했던 사내들의 옷을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잠시 후 사내들은 모두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소동 속에서도 사내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내가 당했던 빚은 철저하게 갚아준다. 정님은 조금씩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추스리면서 입술을 앙물었다. 신혼 첫날밤의 끔찍했던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치가 떨리는 원한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듯했다.


정님은 준비해둔 도구들을 방 한가운데 차곡차곡 늘어놓았다. 칼, 전기인두, 송곳, 집게 등 보기에도 끔찍한 기구들을 그녀는 나름대로 준배해 놓고 있었다. 사내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가 준비를 완료하고서도 한참이 더 지나서였다. 사내 하나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본 정님은 사내들에게 물 한 양동이를 퍼부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몸을 일으키려던 사내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아 버둥대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몸부림이 계속되자 정님은 몽둥이로 그들을 후려갈겼다. 이윽고 모든 걸 체념한 듯 몸부림을 멈춘 그들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당황의 빛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않는 듯 눈을 크게 치떴다. 그들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년, 풀려만 나면 보자. 당장 요절을 내어 뼈를 갈아 먹어버릴 테다. 그들의 눈빛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네 놈이 뱀눈이지?" 정님은 놈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꼽히는 눈이 실처럼 가느다란 사내의 심벌을 몽둥이로 쿡쿡 찔렀다.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불꽃이 튀는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흐흥, 아직 반항할 힘이 남아 있다 이 말씀이로군." 그녀가 힘을 가해서 다시 한 번 내려치자 몸을 크게 떨던 뱀눈은 사지를 쭉 뻗고 말았다. 정님은 의식을 잃은 뱀눈의 몸 위로 다시 물을 퍼부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린 뱀눈은 더이상 적개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다른 세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는 애원의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자, 뱀눈! 네가 대답해 봐! 내가 누눈지 알겠어?" 뱀눈의 실 같은 눈빛에서 한가닥 의혹의 빛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묵묵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정님은 마음을 정한 듯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이며 그녀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잠시후 마지막 팬티 한 장을 벗어버린 그녀는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들의 눈 앞에 우뚝 섰다. 미끈한 나신의 여체가 눈 앞에 나타나자 사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들의 사내가 팽창을 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정님은 그들의 사내를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사내는 금세 풀이 죽어 오므라들고 말았다. 사내들은 고통스런운 듯 다시금 몸을 뒤틀었다. "자, 뱀눈. 대답해 봐. 이래도 모르겠어?" 의혹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뱀눈의 사내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흥, 한 여자의 일생을 짓밟아 놓고도 너희들은 강물에 가랑잎 한쪽 흘려 보내버린 듯 무심할 수 있었다 이거지?" 사내들의 눈에서 더욱 의혹의 빛이 스쳐갔다. "나는 올해 봄, 정확하게 4 월 10 일, 신혼여행을 갔다가 제주도 하야비치 호텔에서 네 놈들에게 무참하게 능욕을 당하고 남편까지 잃은 윤정님이다" 순간, 사내들의 눈빛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그리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그들의 몸뚱이는 더욱 심한 공포와 전율로 한층 더 떨고 있었다. "자, 말해 봐, 뱀눈! 우리 그이를 살해한 건 네 놈들이지?" 윤정님은 한걸음 다가서며 표독스런


눈길로 뱀눈을 노려 보았다. 그러나 뱀눈은 멍한 얼굴로 그녀의 아래 위만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금 탐욕의 미소가 서렸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나신은 표독스럽다기보다는 처절한 아름다움과 애처로움을 갈무리한 천사에 다름없었다. 내가 왜 진작 몰랐을까? 이 여자에게 이런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었다니, 뱀눈은 멍하니 윤정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사나운 손길이 그의 빰을 세차게 후려 갈겼다. 퍼뜩 정신을 차린 뱀눈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가늘게 몸서리를 쳤다 독을 품은 듯한 그녀의 눈에서 싸늘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네놈들이 내가 여자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맛을 보여주지, 여자의 가슴에 한을 품게 만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말이야." 정님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도구들 중에서 날이 시퍼런 칼을 집어들었다. 순간 사내들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똑똑히 말해주지, 나는 더이상 살아갈 의욕을 포기한 사람이다. 너희들이 대답을 하든말든 상관 않겠다. 그 대신 내 뜻을 거스를수록 너희들에게 돌아가는 건 참담한 고통과 결국은 죽음뿐일 것이다. 대답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그렇게 하면 입을 봉한 반창고를 뜯어주겠다." 정님은 시퍼런 칼날을 들여다보이며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내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좋다. 이건 너희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다. 우선 그 벌로 네 놈들이 함부로 휘둘러대는 그 막대기부터 잘라 버리겠다." 순간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일순 경악에 가득찬 공포와 설마하는 기대감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그들의 눈가를 스쳐갔다.


그러나 정님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먼저 뱀눈의 사내를 움켜쥐자 사내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에선 더이상의 항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정님은 여유있게 심벌의 한가운데를 칼로 그어버렸다. 뱀눈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몸부림을 쳤다. 다른 세 사내들 역시 경악에 찬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들이 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냉정하게 손을 휘둘렀다. 순간 방 안에는 심벌을 잃어버린 사내들의 처절한 몸짓과 피비린내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건 네놈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엄벌이자 보복일 뿐이다. 그리고 이건 맛보기야. 너희들이 내 질문에 순순히 응한다면 병원으로 실려가서 접합수술을 받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꾸물거리다가는 수술은 커녕 너희들의 목숨마저 위태로울 것이다. 자, 이번에도 거부하면 이번에는 한쪽 눈을 뽑아버리겠다." 순간 사내들은 고통 속에서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님은 흡족한 미소를 흘리며 우선 입을 봉한 반창고를 뜯어내었다. "이 개 같은 년! 두고 보자! 풀려나가기만 하면 네 년을 박살을 내어 씹어 먹어 버릴 테니까!" 입이 자유롭게 풀리자 마자 뱀눈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리고 연신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해 주겠다. 빨리 물어 봐라!" 뱀눈은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듯 이를 악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너희들이 우선 신혼방에 침입한 것은 계획적이었지?" "그렇다." "누가 시켜서 한 짓인가?" "그건..."


순간 뱀눈의 눈빛을 주춤 모았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정님이 다시 반창고를 집어들자 뱀눈이 급히 입을 열었다. "마, 말하겠다. 그건 우춘구가 시킨 것이다!" "뭐라구?"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어이가 없는 듯 정님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그리고 냉소를 흘리며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본 모양이군." 뱀눈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정말이다. 못 믿겠다면 옆에 애들한테 물어 봐! 이건 사실이라니까!" 옆의 세 사내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는 진실이 서려 있었다. "그럴 리가... 우리 그이가 너희들을 쳐나를 윤간하게 만들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 정님이 눈빛은 초점을 잃고 있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뱀눈은 애원하듯 정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말투는 어느새 고분고분하게 변해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그이는 누가 죽였어?"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뭐라구?" "우춘구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뭐야?" "믿을 수 없겠지만 이건 사실입니다. 그 당시는 우춘구 씨는 저희들의 보스였습니다." "보스라니? 그럼 그이가 깡패두목이었단 말이에요?" 뱀눈은 씁쓰레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우춘구 씨가 어떤 조직의 중간보스였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그의


수하에서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조직? 그게 무슨 조직이죠?" "저희들도 정확한 규모나 조직의 확실한 정체는 모릅니다. 그러나 거대한 세계적인 조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조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배신을 할 수 없고 철저하게 복종을 해야 합니다. 역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가 자살을 한 이유가 뭔가요?" "우춘구 씨는 그때 이미 조직의 상부로부터 살해위협을 당하고 있었고 그 이유는 조직의 불문률을 깨뜨리고 거액의 자금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정님은 퍼뜩 짚히는 데가 있어 그의 말을 잘랐다. "가만, 자금을 착복하다니? 그건 무슨 뜻인가요?" "저도 정확한 사실은 모릅니다만 우리 조직은 우리사회의 지하경제에 깊이 관여하여 엄청난 재산 축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한 돈이나 음성적인 거래를 캐어 우리 수중에 P 끌어들이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죠. 물론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협박과 함께 온갖 계략이 다 동원됩니다. 그런데 우춘구 씨는 조직에 알리지 않은 채 건수를 하나 올렸고 그게 조직의 상층부에 발각이 된 거죠." 너무나 엄청난 사실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듯 한 발짝 뒷걸음질치던 정님은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뱀눈은 계속 말을 이었다. "상부로부터 징계 지시가 내려온 것은 바로 결혼식날 아침이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우춘구 씨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조직에 대한 최대한의 저항이자 자신의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3 발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윤정님 씨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뭐라구요? 나를 무참하게 짓밟아 놓는 게 마지막 배려였다구요?" 정님은 분노에 찬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조직은 우춘구 씨의 부인인 윤정님 씨까지 희생물로 지정하고 있었으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당신의 목숨은 아직까지 붙어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끈질기게 남편의 죽음을 규명하고자 추적해 들어왔습니다. 당혹한 우리는 당신을 협박하여 이 일에서 손을 떼게 만들려고 했어요. 당신의 목숨을 구해내는 길만이 한때 우리가 모셨던 보스의 죽음에 보답하고 충성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결과는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막무가내인 고집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뱀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안면은 고통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옆의 세 사내는 과다하게 흘린 피로 인해 의식을 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이 있습니다." 뱀눈이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은 제발 비밀로 붙여 주십시오. 그래야만 당신이 살아날 수 있고 우리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발." 정님은 대답대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뱀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차근차근 몸에 걸친 정님은 김석기에게 전화를 넣었다. 마침 자리에 있었던 듯 김석기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저예요..."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님 씨! 정님 씨! 말씀하세요.거기 어딥니까?" 김석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정님은 잠시 감정을 억제하고 말문을 열었다. "절 폭행했던 사람들을 잡았으니 경찰에 연락해서 데려가세요. 그리고 구급차도 함께 보내 주세요. 이 사람들 모두 위급해요. 병원에 데려가서 수술부터 받아야 할 거예요. 그리고 문초해 보면 아시겠지만 이 사람들이 바로 성기용의원 테러사건의 주범이에요." 그리고 정님은 자기의 주소를 불러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거기 꼼짝말고 계십시오." 정님은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 놓고 뱀눈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경찰이 달려와 당신들을 구해 줄 거예요." 뱀눈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소지품을 챙긴 그녀는 천천히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아파트 현관을 막 내려 왔을 때였다. 늘씬하게 생긴 미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윤정님 씨죠?" "누구신가요?" 정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노란색 투피스를 받쳐 입은 그녀는 한마디로 도발적인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로선 생판 처음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전 오키노라고 해요. 일명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천사라고 불리워도 부족함이 없을 듯 싶었다.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절 알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방 안에 있는 쓰레기 같은 놈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구요."


정님은 흠칫 숨을 삼켰다. 경계의 눈빛을 느낀 듯 오키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님 씨를 해롭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다만 우춘구 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을 뿐이죠." "좋아요." 정님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타라는 신호였다. 정님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녀는 운전석에 올라타 곧장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정님을 향해 방긋 웃어보이고는 차를 발진시켰다. 잠시 후 국립묘지 쪽으로 달리던 승용차는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올림픽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늘씬한 승용차는 생긴 그대로 날렵하고 미끈하게 올림픽 도로를 미끄러지며 달렸다.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굴까?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궁금증이 더럭 치밀었지만 그녀는 조바심을 꾹 누른 채 묵묵히 차창으로 흐르는 풍경에만 눈길을 주었다. 한참 후 승용차는 번잡하던 고속도로를 벗어나 미사리의 강변도로를 달렸다. 거기에서 또 한참만에 좌측으로 꺾은 승용차는 구불구불한 비포장길을 달리다가 시야가 탁 트인 한강 모래사장 앞에서 멈추었다.

16. 에필로그 "당신은 누구시죠?" 묵묵히 강물을 지켜보고 있던 정님은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사는 여전히 환한 미소로 그녀에게 답해 주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당신도 조직의 일원인가요?"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씀해 주세요. 제 남편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는 건 뭐죠?" 정님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전 윤정님 씨가 우춘구 씨에 대해 불필요하게 나쁜 감정이나 기억을 안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건 무슨 뜻이죠?" "우춘구 씨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한 번의 실수를 그는 현명한 처신으로 상쇄시켰어요. 조직에서도 더 이상의 보복은 없다는 걸 약속합니다. 단 윤정님 씨가 더 이상의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입니다." 정님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뜻인지 알겠군요." 이윽고 침묵을 깨뜨린 건 정님쪽이었다. "그게 모둔가요?" "네." "..." "정님 씨는 현명한 분이라 믿어요. 인간의 능력이란 무한대이면서도 일면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순도 안고 있어요. 더구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과 맞설 때는 더욱 그래요. 이 세상에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듯이 혼자서 거대한 조직에 맞서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춘구 씨의 선택에 윤정님 씨가 더이상 저항하지 않기를 바래요." "잠깐만, 제 신분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됐죠? 또 제가 그 아파트에 묵고 있는 것까지." "호호...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건 아무것도 숨길 수 없어요. 혹시 나중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거나 우리의 조직에 관심이 있다면 국회편에 연락을 하세요." 순간 정님은 얼이 빠진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 가실까요?" "먼저 가세요, 전 여기 남아 있겠어요." 그녀는 두말않고 승용차에 올랐다. 그리고 차를 돌려 급히 오던 길을 달려나갔다. 정님은 그녀의 승용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한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럴 수가 없어, 조금 전까지 느꼈던 우춘구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이 어느덧 가슴 한자락에 참담한 찌꺼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까 마음은 한결 편해지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춘구의 죽음을 규명해 보겠다는, 남편의 명예를 회복시켜 보겠다는,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 온 대명제가 물거품이 된 지금, 그녀의 마음은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고 방향을 잡지 못해 허우적대어야 했다. 한편, 윤정님과는 달리 김석기와 손삼수는 일대 개가를 올리고 있었다. 윤정님의 아파트에서 중태에 빠진 백합의 하수인들을 체포하여 경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키고 긴급 수술과 치료를 시키는 한편, 백합을 잡기 위해 전국에 지명수배 전통을 때렸다. 백합에 대한 혐의는 완벽하게 쥐고 있었다. 손삼수에 의해 체포된 남철희박사의 자백으로 인해 백합의 끄나풀로 밝혀진 홍성국박사 역시 체포되었고 남철희박사가 빼돌린 중요기밀과 그 기밀을 사들여 엄청난 소득을 올렸던 여러 기업들이 잇달아 입건되는 연쇄파동으로 나라 안은 불을 쑤신 듯 온통 들썩거렸다. 김석기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특종을 연속 터트려 신문사로부터 엄청난 포상을 약속받았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백합의 행적을 뒤쫓던 경찰은 묘령의 여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서해안의 끝섬에서 백합을 사살하였을때 사건의 열기는 클라이막스를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제보를 한 여자의 신원이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백합을 체포하기 위해 해양경찰대 2 개


중대가 끝섬을 덮쳤을 때 백합의 저항은 처절의 극을 달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백합과 10 여 명의 수하들의 발악적인 저항으로 경찰의 사상자도 상당수 발생했으나 만 이틀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백합과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 개가를 울렸다. 그러나 전투결과의 노획품에 경찰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끝섬이야말로 우리나라 최대의 마약본거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백합이 20 여 년에 걸쳐 공들여 가꾸었던 대마초 및 각종 원료 생산을 위한 농장은 백일하에 파헤쳐지고 쑥밭이 되고 말았다. 더욱 세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마약재배에 동원된 인부들은 철저하게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납치되어온 부녀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번 끌려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끝섬은 글자 그대로 죽음의 섬이었다. 그리고 무장한 감시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당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반항하는 무리들은 마약중독자로 폐인을 만드는 참혹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했음도 잇달아 밝혀졌다. 실종되었던 성기용의원의 여비서 정지숙이 마약중독자가 되어 발견된 곳 역기 끝섬이었다. 글자그대로 지옥과 다름 없었던 끝섬의 비밀을 파헤치고 사건시리즈를 마감한 김석기가 한숨을 돌린 것은 찬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이었다. 센세이셔널한 기사로 세인의 심금을 울리고 사회의 반향을 일으켰던 그도 우춘구와 연관된 기사는 가급적 기피하였다. 그것은 그가 사건 시리즈를 시작할때 걸려온 윤정님의 부탁 전화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미처 모르고 있던 사건의 전모를 귀띔해 주면서도 기사화하는데는 극력 반대를 하고 나섰다. 김석기 역시 아쉬움은 남았으나 그녀의 안전을 위하��� 관련 기사만큼은 다루지


않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그녀와의 연락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시골에서 당분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전화 이후 그녀는 정말 그림자조차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시리즈를 연재하는 틈틈이 그는 정님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줄을 넣고 뛰어 보았으나 헛수고로 그치고 말았다. 백합이 사살되고 국내 최대의 마약 밀매단이 일망타진된 후, 세인의 기억에서 사건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선 한 사람의 입국과 또 한 사람의 출국이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먼저 입국한 사람은 홍해강철그룹의 유재택사장이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온 유재택사장은 마중나와 있던 성기용의원의 안희갑보좌관, 그리고 김두태 비서실장과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리 약속이 된 듯 급히 발걸음을 2 층 출국장으로 돌렸다. 출국장의 출국 게이트에는 홍콩행 케세이 퍼시픽 304 기편의 개찰이 막 개시되고 있었고 그들은 급히 개찰구로 다가갔다. 개찰구옆 한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묘령의 여인이 몸을 일으켜 유재택사장을 맞았다. 그녀가 바로 오키노로 통하던 천사였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유재택이 그녀의 가냘픈 손을 꽉 쥐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재택이 먼저 말문을 열었고, 그녀는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의 만남은 그걸로 그만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서로 나누던 그들의 만남은 그녀가 손가방을 들고 등을 돌림으로써 끝이 났다. 그녀가 출국 게이트로 사라진 후 유재택사장 역시 등을 돌렸다. 그들의 짧은 만남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졌고 유재택사장은 흡족한 기분으로 대기하고 있던


벤츠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틀 후. 정확히 말해서 천사가 출국하고 나서 이틀 후의 아침. 어젯밤의 숙취로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자리끼로 달래고 눈을 부비며 배달된 아침 신문을 펼쳐들던 김석기는 경악이 가득한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신문의 1 면 톱기사는 대대적인 정계개편을 알리고 있었고 1 면 전체를 해설기사에 할애하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나는 듯 눈을 뜨고 신문을 훑어보던 김석기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럴 수가" 뜻밖의 충격에 그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정계개편은 오래 전부터 짐작되어 오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개편 폭이 너무 방대했을 뿐 아니라 개편의 내용은 너무나 파격적이 아닌가. 성기용의원의 전성기에는 기를 펴지 못하고 비주류의 한직에서 맴돌고 있던 모 인물이 파격적으로 국무총리에 중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로 불리던 인물들이 대거 실세로 요직에 중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성기용의원의 보좌관 안희갑이었다. 안희갑은 뜻밖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고 그것은 예상의 허를 찌르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안희갑은 모인사의 숙적이나 정적이었던 성기용의원의 보좌관이 아니었던가. 해설기사는 대화합의 원칙 아래 이루어진 인사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지만 김석기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음 경제면을 들치던 김석기의 손길이 또 한 번 굳고 말았다. 정부 주도 하에 이루어지던 산업 합리화 정책이 거의 결정단계에 이르렀고 홍해강철그룹을 중심으로 중공업분야를


재개편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기사가 대뜸 그의 눈길을 끌었다. '이건 애드벌룬이다.' 김석기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예측기사를 펼쳐놓고 허탈한 심정이 되어 앉아 있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사회면 톱은 그의 기명기사 사건시리즈 마지막회가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 이 사건들은 오늘의 이런 결론을 창출하기 위한 예비공략에 불과했던 건지도 몰라. 거대한 음모에 휘말려 허수아비처럼 놀아났을지도 모른다는 허탈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면 그것은 기어코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반드시 윤정님을 찾아 내어야 한다. 윤정님의 신혼여행이 무참하게 깨어지면서 시작된 이번 사건이 정계개편으로 막을 내릴 수는 없다.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윤정님을 찾아내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한 아녀자의 나약한 힘이, 천사의 반란이, 이 사회에 청량한 반향을 던질수 있다면 천사는 반란을 일으켜야만 한다. 김석기는 또 다시 할 일을 찾아내었다는 듯 이부자리를 박차고 활기차게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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