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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움직이는 표적 (상) 지은이: R.맥도널드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소개 제 1 장. 루 아처의 데뷔 제 2 장. 주정뱅이 석유왕의 실종 제 3 장. 삼각관계 제 4 장. 12 각형의 방 제 5 장. 3 호 촬영소 제 6 장. 추 적 제 7 장. 스위프트의 주정뱅이들 제 8 장. 한물 간 여배우 제 9 장. 암흑가의 보스 제 10 장. 미치광이 피아노 제 11 장. 군용 수송 트럭 제 12 장. FBI 의 수석검사관 제 13 장. 최악의 상태 제 14 장. 말괄량이 아가씨 제 15 장. 움직이는 표적 제 16 장 성자 클로드

⊙ 작가소개 ▶ 작가/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 루 아처(Lew Archer) 시리즈가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음 - 필명을 존 로스 맥도널드로 바꾸어 '루 아처 시리즈'의 첫권인'움직이는 표적'을 출판했다. - 이어서 제 12 작 '금력의 피안'(The Far Side of the Dollar, 1965) 을 출간 - 미국 추리작가협회 MWA 의 회장에 피선 - 주요작품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길(The Way Some People Die)>,<피해자를찾아라(FindaVictim)>,<운명(TheDoomsters)>, <지하인간(The Underground Man) 등이 있다. ▶ 옮긴이/이기형


- 문학박사 - 전 국민대학교 대학원장 - 한국 추리작가협회 회장 - 저서 - '미국문학사', '세계추리문학사' - 번역서 - 말르로의 '희망'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일강의 죽음'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예고살인' '커튼' 외 다수.

제 1 장. 루 아처의 데뷔 택시는 101 번 국도(國道) 에서 벗어나 바다 쪽을 향했다. 길은 갈색 언덕 밑을 빙 돌아 떡갈나무 숲이 줄지어 서 있는 협곡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카브릴로 협곡입니다."라고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집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동굴 속에 숨어서 살고 있소?" "무슨 말씀을. 저택들은 저 아래 바닷가에 있습니다." 잠시 뒤에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커브를 하나 더 돌아 시원한 지대로 들어섰다. 길가의 광고판에는 '사유지 통행 허가가 어느 때든지 취소될 수 있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떡갈나무 숲 다음에는 정돈된 종려나무와 몬티레이 실삼나무의 생울타리가 나타났다. 나는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잔디밭 깊숙히 들어간 하얀 현관들, 붉은 타일과 녹색의 구리 지붕들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여자가 운전하는 롤스로이스 한 대가 일진선풍처럼 우리 곁을 지나갔다. 그 장면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좀 낮은 협곡의 연한 푸른 빛깔의 아지랑이는 마치 천천히 불에 타는 지폐에서 나는 가느다란 연기와도 같았다. 바다까지도 아지랑이를 통해서 아늑하게 보였다. 바다는 마치 협곡의 입구에 박힌 반짝이는 푸른 빛깔의 보석처럼 윤이 나는 견고한 쐐기와 같았다. 바다는 사유지와도 같았다. 빛깔은 영원히 퇴색할 것 같지 않았다. 바다는 인간의 자존심을 위축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태평양이 이렇게 작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보초처럼 서 있는 주목나무 사이의 사설 차도 위쪽에서 회전하여 자가용 고속도로망 속을 한동안 빙 돌다가 하와이 쪽으로 깊고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 위로 나왔다. 그 집은 협곡에 등을 진 언덕배기의 아래쪽에 다소 외떨어져 있었다. 건물은 길고 낮았다. 양 날개 부분이 예각으로 마주쳐서 거대한 하얀 화살촉처럼 바다를 겨누고 있었다. 관목 숲 '스크린' 사이로 하얗게 번쩍거리는 테니스 코트와 녹청색으로 가물거리는 수영장이 눈에 띄었다. 택시 운전사는 부채꼴 사설차도로 나와서 차고 옆에 차를 세웠다. "이곳이 아까 말씀드린 동굴인이 사는 곳입니다. 뒷문


입구에 댈까요?" "난 으스대는 사람이 아니오." "그럼, 그 동안 대기할까요?" "그러시오." 푸른 린네르 스모그를 입은 육중한 여자가 뒷문 현관에 나와서 내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처 씨입니까?" "그렇습니다. 샘프슨 부인이신가요?" "저, 크롬버그 부인인데요, 가정부죠." 미소가 마치 햇빛이 쟁기질을 한 밭을 지나가듯이 주름살투성이 얼굴 위를 스쳐갔다. "택시는 보내도 좋아요. 펠릭스가 언제든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냈다. 나는 가방을 손에 들면서 약간 난처해짐을 느꼈다. 일이 한 시간으로 끝날지, 아니면 한 달이 걸릴지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가방은 헛간에 넣어두겠어요."하고 가정부가 말했다. "아마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나를 이끌고 크롬과 자기(瓷器)로 꾸며진 부엌을 지나 수도원처럼 싸늘한 둥근 천정의 복도를 건너서 2 층까지 올라가는 승강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버튼을 눌렀다. "모두가 문명의 이기로군요."하고 나는 그녀의 등에다 대고 말했다. "이 승강기는 샘프슨 부인이 다리를 다쳤을 때 설치한 거예요. 7,500 달러나 들었는 걸요." 이 말이 나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효과는 충분했다. 그녀는 승강기 건너쪽에 있는 문을 노크했다. 대꾸가 없었다. 가정부는 다시 노크하고서 문을 열었다. 천정이 높고 하얀 그 방은 여자의 방치고는 너무나 크고 장식이 없었다. 육중한 침대 위엔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었다. 시계와 지도와 여자용 모자를 화장대 위에 늘어놓은 그림이었다. 시간과 공간과 섹스가 그려진 셈인데, 일본의 화가 쿠니요시의 그림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샘프슨 부인!"하고 가정부가 외쳤다.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광욕 발코니에 있어요. 무슨 일이예요?" "아처 씨가 오셨어요.... 전보로 부르신 분 말예요.""이리로 나오시라고 해요. 그리고 커피를 더 가져와요." "프렌치 도어로 나가세요." 라며 가정부는 돌아섰다. 내가 발을 내딛자 샘프슨 부인이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잔뜩 올라온 아침 햇살을 등지고 몸에 타월을 두른 채 긴 의자에 절반쯤 누워 있었다. 그녀 옆에 휠체어가 있었으나 불구의 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비쩍 말라 있었고 살결은 갈색이었다. 햇볕에 너무 그을려서 단단하게 보일 정도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고수머리는 좁은 이마에 마치 크림 거품처럼 바짝 붙어 있었다. 나이는 마호가니 조상(彫像)처럼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책을 가슴 위에서 내려놓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 평판은 들었어요. 밀리센트 드루와 클라이드가 헤어졌을 때 당신이 퍽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말예요." "꽤 긴 이야기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추잡한 이야기들이죠." "당신은 밀리센트와 클라이드가 너무 추잡하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소위 탐미주의자들 말예요! 난 클라이드의 정부가 인간이 아닌 무슨 동물일 거라고 늘 의심해 왔어요." "나는 고객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과 함께 나는 그녀에게 소년과 같은 미소를 보냈다. 하도 써먹어서 비록 닳아빠진 미소이긴 했지만. "이야기도 하지 않나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나의 고객들에게도 말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신선했지만 병적인 소음(騷音)이 전음(顚音) 밑에 깔려 있었다. 나는 어쩐지 겁을 먹고 있는 듯하고, 또 아름다운 갈색 육체 속에 질병을 감추고 있는 듯한 샘프슨 부인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앉으세요, 아처 씨.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하실 거예요. 아니, 궁금하시지 않은가요?" 나는 긴 의자 옆의 '덱 체어' 에 앉았다. "물론 궁금하지요. 억측까지도 한답니다. 내가 맡는 일은 대부분 이혼문제니까요. 그래서 보시다시피 이렇게 남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습니다." "아처 씨, 자신을 비방하시는군요. 그리고 당신은 탐정처럼 이야기하진 않는군요. 당신이 이혼 얘기를 꺼내주어 반가워요. 그런데 이혼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고 싶군요. 결혼생활이 지속되길 원해요. 난 남편보다 더 오래 살 작정이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갈색 피부는 조금 거칠고 시들어 있었다. 햇볕은 그녀의 구릿빛 다리와 나의 머리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의 발가락과 손톱은 다같이 핏빛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건 적자생존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아마 내가 다리를 못 쓰는 걸 알고 계실 거예요. 그러나 난 남편보다 스무살이나 젊어요. 난 남편보다 더 오래 살 생각이에요." 괴로움이 그녀의 목소리 속에 들어가서 마치 말벌처럼 왱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뇌에 찬 목소리를 듣자 그 소리를 꼴깍 삼켰다. "이곳은 용광로 같죠? 남자분들이 윗도리를 입어야 하는 건 공평치 못해요. 윗도리를 벗으세요." "괜찮습니다." "당신은 대단한 신사로군요."


"어깨에 권총을 메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도 궁금합니다. 부인께선 전보에 '앨버트 그레이브스'에 대해 쓰셨던데..." "그분이 당신을 소개했어요. 랠프의 고문변호사 중 한 사람이지요. 점심 뒤에 그분과 보수문제를 결정하세요." "그분은 지방검사를 그만두었나요?" "예, 전쟁이 끝난 뒤에요." "전쟁이 끝나기 전인 40 년과 41 년에 그분 밑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 뒤론 못 뵈었습니다만." "그분은 나에게 당신이 사람을 잘 찾아낸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검은 얼굴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식인종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처 씨, 당신은 정말 사람을 잘 찾아내시나요?" "실종자를 잘 찾지요. 바깥 주인께서는 실종되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실종은 아니에요. 그인 혼자, 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집을 나가버렸답니다. 내가 실종자 조사국에 간다면 그이는 펄펄 뛸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분을 찾아내어 그분과 함께 간 사람의 신원을 아시고 싶다는 거군요. 그리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이가 있는 곳과, 그이와 함께 있는 사람을 나에게 알려주세요. 그 다음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어요." 그녀는, '나는 병자이고 비록 다리는 못 쓰지만.'하고 작아서 들리지 않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은 언제 집을 나갔나요?" "어제 오후예요." "어디서요?" "로스앤젤레스에서요. 그이는 라스베이가스에 가 있었어요. 근처 사막에 우린 땅이 있거든요. 그러다가, 그이가 어제 오후에 앨런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비행기로 떠났지요. 앨런은 조종사예요. 랠프는 공항에서 앨런을 떨쳐 버리고 혼자 자취를 감추었대요." "왜 그랬나요?" "술에 취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녀의 붉은 입술은 멸시하는 듯이 일그러졌다. "앨런은 그이가 술을 마셨다고 했어요." "부인은 그분이 법석을 떠느라고 집을 나갔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분은 종종 그랬나요?" "종종이 아니라 늘 그랬어요. 그이는 취하면 걷잡을 수 없어요." "여자관계는?" "남자들은 다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아요. 그이는 돈에 대해서는 허깨비예요. 몇달 전에도 산을 하나 남에게 주어버렸거든요." "산을?" "사냥 막사까지 끼워서 완전한 산을 하나 말예요." "여자에게 주었나요?" "차라리 여자에게 주었으면 좋았게요. 남자에게 주었어요.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에요. 회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로스앤젤레스의 성자'라는 남자에게 주었어요." "그분은 잘 속아 넘어가는 분인 모양이군요?" "랠프가요?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그인 노발대발할 거예요. 그이는 난폭한 석유 투기꾼으로 시작했어요. 당신은 그런 종류의 인간을 아시죠? 절반은 인간, 절반은 악어, 절반은 곰덫이에요. 그이에겐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돼지 저금통이 있어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말예요. 그러다가 지난 2~3 년 전부터 술에 약해졌어요. 두세 잔만 들어가면 어린애가 되고 싶어한답니다. 그이는 모성형의 여자나 부성형의 남자를 찾아가서 코를 풀어달라고 하고 눈물을 훔쳐 달라고도 하고, 일을 저지르면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잔인한 사람인가요? 난 단지 객관적으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에요." "알겠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그분이 산을 또 주어버리기 전에 남편을 찾아달라는 거죠?" 생사는 불문이렸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정신분석 의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이가 여자와 함께 있다면 당연히 나는 흥미를 느낄 거예요. 그녀에 관해서 죄다 알고 싶답니다. 그런 신나는 일을 놓쳐버릴 순 없기 때문이죠." 나는 그녀의 정신분석 의사가 누군지 정말 궁금했다. "어떤 여자인지 짐작도 안 갑니까?" "랠프는 나에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이는 나보다도 미란다하고 더 가깝죠. 그리고 나에겐 그이를 감시할 수단도 없고요. 그래서 당신을 고용하는 겁니다." "탁 터놓고 말해서요."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탁 터놓고 말하죠."

제 2 장. 주정뱅이 석유왕의 실종 하얀 윗도리를 입은 필리핀 인 하인이 활짝 열린 프렌치 도어에 나타났다.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샘프슨 부인." 그는 긴 의자 옆의 낮은 테이블 위에 은제 커피 세트를 내려놓았다. 그는 체구가 작고 민첩했다. 조그맣고 동그란 두상(頭狀)의 머리카락은 기름을 칠한 것처럼 반들반들하고 새까맸다. "고마워요, 펠릭스." 그녀는 하인에게 인자했다. 아니면, 나에게 그런 인상을 주고 싶었겠지. "좀 드시겠어요, 아처씨?"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은 술은 좋아하시겠네요?" "점심 전엔 술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좀 색다른 탐정입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일어나서


일광욕 발코니의 바다 쪽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일광욕 발코니 아래는 테라스들이 긴 녹색의 계단을 이루며 언덕배기의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언덕배기 바로 밑은 해변이었다. 집 모퉁이 쪽에서 물방울이 튀는 소리가 들려서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풀 장이 위쪽 테라스에 있었는데, 푸른 타일 속에 타원형의 녹색 액체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사내애와 계집애가 숨바꼭질을 하면서 물개처럼 헤엄치고 있었다. 계집애가 사내애를 쫓아갔다. 사내애는 계집애에게 붙잡혀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다 큰 총각 처녀이었고, 지금까지 움직이던 장면이 태양 속에서 얼어붙은 듯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 뒤에 서서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하프를 타듯이 그의 갈빗대를 살그머니 만지다가 오목한 가슴에 난 털을 꼭 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의 등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마치 청동의 장님상처럼 긍지와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비켜섰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모습이 드러났다. 몹시 연약해 보였다. 그녀의 두 팔은 목적을 잃은 듯이 처졌다. 그녀는 풀 장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물속에서 디룽거렸다. 얼굴빛이 검은 청년은 다이빙대에서 한 바퀴 반을 돌고 떨어졌다. 그녀는 못 본 체했다. 물방울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서 마치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샘프슨 부인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점심 안 드셨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펠릭스, 파티오 (스페인식 집의 안뜰) 에 3 인분 점심을 차려놓으세요." 펠릭스는 살짝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그녀는 그를 다시 불렀다. "내 화장대에서 남편 사진을 가져오세요. 당신은 그이 얼굴을 알아두셔야 하죠, 아처 씨?" 가죽 사진첩 속에 있는 얼굴은 살이 찌고 머리카락은 엷은 회색이며, 입은 차분하지 못했다. 두터운 코가 대담해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고집불통으로 보였다. 부어오른 눈두덩이에 주름이 지고, 축 처진 볼때기에 군살이 잡힌 미소는 판에 박은 듯이 억지로 지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미소는 시체안치실에서 주검의 가면 같은 얼굴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미소는 내가 늙어가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볼품은 없지만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에요." 라고 샘프슨 부인이 말했다. 펠릭스는 킬킬거리는 건지 투덜거리는 건지, 아니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건지 모를 조그마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뭐라고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펠릭스는 파티오에 점심을 차렸다. 파티오는 집과 산 중턱 사이에 있는 붉은 타일을 깐 삼각형의 뜰이었다. 석조 옹벽 위에는 경사면에 지의류(地衣類)와 아제라툼과 로벨리아가 부서지지 않는 청록색 파도 모양으로 심어져 있었다. 내가 펠릭스의 안내로 안뜰에 들어가자 아까 그 얼굴빛이 검은 청년이 파티오에 있었다. 그는 긍지와 분노는 걷어치운 채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편안한 자세로 있었다. 그는 키가 아주 커서 함께 서 있으니 내 키가 보통보다 좀 작게 느껴졌다. 190cm 정도는 되었다. 그는 내 손을 단단히 쥐었다. "앨런 태거트라고 합니다. 샘프슨 씨의 비행기를 조종하지요." "루 아처요." 그는 왼손으로 조그마한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무얼 마십니까?" "우유." "농담이시겠지? 당신은 탐정인 줄 알았는데요." "발효시킨 암말의 젖이오." 그는 유쾌한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지었다. "내 술은 '진 비터즈'입니다. 포트 모레스비에서 이걸 마시는 버릇을 배웠지요." "비행을 많이 했겠군요." "출격 55 회, 그리고 2,000 시간 비행." "어디서?" "대부분 캐롤라인 군도에서요. 난 P_38 을 탔었소." 그는 탑승기의 이름을 아가씨의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향수를 느끼는 듯 말했다. 아까 그 아가씨가 검은 줄무늬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 옷은 좁혀야 할 곳만 좁히고 다른 데는 넉넉하니 풍성했다. 검붉은 머리카락은 말리고 빗질을 했는데도 머리 주위에 물거품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색 얼굴에서 커다란 녹색 눈이 마치 인디언의 밝은 눈동자처럼 유난히 밝고 기묘한 느낌을 던져주었다. 태거트는 그녀를 소개했다. 그녀는 샘프슨의 딸 미란다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금속 테이블에 앉으라고 권했다. 테이블 가운데에 비치 파라솔이 달린 쇠막대기가 꽂혀 있었다. 나는 마요네즈가 쳐진 연어 너머에 앉아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키가 큰 이 아가씨의 동작에서 차츰 세련된 매력이 풍겨나오고 있어서 가만히 지켜볼 만했다. 만 15 살에 사춘기에 들어서서 20 살이나 21 살에 결혼이나 첫 정사를 경험하게 된다. 연애의 꿈에서 벗어나 처녀에서 여자가 되기까지 고단한 몇 해를 보내고, 이어서 28 살이나 30 살에 완전히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그녀는 21 살 가량 되었고, 샘프슨 부인의 딸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우리 새엄마는.... "하고 그녀는 마치 내 생각을 알고나 있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새엄마는 언제나 극단적이에요." "샘프슨 양, 나를 두고 한 말입니까? 난 매우 평범한


탐정인데요?" "꼭 당신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에요. 새엄마가 하는 일은 매사가 다 극단적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망아지에서 떨어져도 허리 아래가 마비되진 않아요. 그러나 엘레인은 그렇게 되었어요. 그건 심리적 이유에서라고 생각돼요. 엘레인은 예전처럼 그런 미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경쟁에서 뒤지게 되었지요. 낙마한 것이 그런 계기가 되었어요. 새엄마는 아마 일부러 낙마했을걸요." 태거트가 짤막하게 웃었다. "미란다, 그만해 두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녀는 오만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나를 욕하진 마세요." "내가 여기 온 것에도 심리적 이유가 있습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난 왜 당신이 여기 계시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뒤를 밟는다든가 하는 그런 일인가요?" "비슷한 일이오." "새엄마는 아버지에게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해요. 남자가 하룻밤 집을 비운다고 해서 탐정을 불러들인다는 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게 걱정된다면 신중히 생각해 보겠소." "걱정될 건 없어요."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난 단지 심리적 관찰을 했을 뿐이에요." 필리핀 인 하인이 기척도 없이 파티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펠릭스의 변함 없는 미소는 일종의 가면이었다. 그의 개성은 그 가면 뒤에 외롭게 자리잡고서 멍이 든 것 같은 눈 안쪽 구석에서 은밀히 밖을 엿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쫑긋한 귀가 내가 한 말을 죄다 듣고 나의 숨소리를 세며, 맑은 날씨에 내 심장의 고동소리까지 듣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거트가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었다. "진짜 탐정을 만난 건 생전 처음인 것 같은데요." "사인이라도 해드릴까요? 난 X 라고만 쓰지만." "솔직히 말해서, 탐정이라는 것에 관심이 쏠리는군요. 한때는 나도 탐정이 되고 싶었지요. 비행기를 타기 전이지만. 아이들은 대개가 탐정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꿈에 집착하지는 않지요." "왜요? 탐정이 싫어선가요?" "이 직업은 장난이 아니오. 그런데 샘프슨 씨가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당신은 동행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복장은?" "스포츠복 차림이었지요. 해리스 트위드의 윗도리에 갈색 모직 셔츠, 엷은 갈색 바지에 브로그 구두, 모자는 쓰지 않았고요." "정확히 언제 일이오?"


"약 3 시 30 분경, 우리들이 어제 오후 버뱅크에 착륙했을 때였습니다. 다른 비행기들이 이동하고 나서야 내 비행기를 격납할 수 있었죠. 나는 늘 그 일을 직접 했습니다. 도둑맞지 않도록 특별장치를 해놓는답니다. 샘프슨 씨는 호텔에다 리무진을 보내달라고 전화하러 갔었고요." "어느 호텔?" "발레리오 호텔." "윌셔 근처 원주민 부락인가요?" "아버지는 그곳에 방갈로를 가지고 있어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조용한 곳이어서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했어요." "내가 정문 입구 쪽으로 나가 보니--" 하고 태거트가 말을 이었다. "샘프슨 씨는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요. 하지만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몹시 취하셨지만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었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약간 약이 올랐습니다. 버뱅크에서 꼼짝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되었으니까요. 단 5 분간을 기다려 주시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발레리오까지는 택시로 3 달러 거리인데, 그런 돈조차 내겐 없었다니까요." 그는 자기가 너무 말을 많이 했나 하고 미란다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미있어 하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하고 그는 말했다. "호텔까지 버스를 탔지요. 30 분씩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탔다고요. 그런데 호텔엔 계시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둑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았지요. 그리고 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샘프슨 씨는 발레리오에 가시긴 가셨나요?" "아닙니다. 아예 가시지도 않았더군요." "짐은 어떻게 되었소?" "없었습니다." "그럼, 외박할 생각은 없었겠군?" "그렇다고도 하지 못할 거예요." 하고 미란다가 끼어들었다. "아버지는 발레리오의 방갈로에 필요한 건 뭐든지 두셨으니까요." "지금쯤은 거기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에요. 엘레인이 한 시간마다 전화를 걸고 있는걸요." 나는 태거트에게 물었다. "그 분은 예정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없었소?" "어제는 발레리오에서 묵을 예정이었지요." "당신이 비행기를 격납고에 넣고 있는 동안 그분이 혼자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15 분 정도-- 20 분 이상은 아닙니다."


"그럼, 발레리오에서 리무진 차가 꽤 빨리 도착한 게로군. 샘프슨 씨는 호텔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공항에서 누굴 만나셨을지도 몰라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엔 친구분이 많으셨나요?" "대부분이 사업상의 친구예요. 아버진 아무하고도 별로 어울리지 않으셨어요." "그분들 이름을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그 이름들이 벌레나 되는 것처럼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 물어보면 될 거예요. 그분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찾아갈 거라고 말해 두겠어요. 펠릭스가 차로 안내할 거예요. 그러고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앨런이 그곳까지 비행기로 모실 거예요." 그녀는 일어서서 거만한 눈초리를 번득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앨런, 오늘 오후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죠?" "기꺼이 모시죠." 하고 그는 말했다. "심심찮게 됐습니다." 그녀는 집안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분노치곤 귀엽게 봐줄 만했다. "저 아가씨는 좀 쉬어야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일어서서 내 앞에 우뚝 섰다. "무슨 뜻이오?" 그에게는 오만한 고교생의 독선적인 면이 한 가닥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콕 찔렀다. "그녀에겐 키가 큰 사나이가 필요한가 봅니다. 당신이면 멋진 한 쌍이 되겠는데." "물론이지, 물론이오." 그는 고개를 부정적으로 양쪽으로 흔들었다. "그런데 나와 미란다 사이에 대해서 성급하게 속단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란다도 포함해서?" "난 우연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건 당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지. 저 검둥이도 물론이고." 검둥이란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에 서 있는 펠릭스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갑자기 그림자를 감추었다. "저 녀석이 내 신경을 건드린단 말이오." 라고 태거트가 말했다. "언제나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엿듣고 있거든요." "아마 단순한 관심 뿐일 거요."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에서 내 마음에 걸리는 녀석이 있다면 바로 저 자요. 난 가족들과 식사는 함께 하고 있지만, 막상 다급할 땐 하인이 아니라곤 말 못해요. 조종사에 불과하니까." 미란다에겐 그게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진 않았다. "쉬운 일 아니오? 샘프슨 씨도 내내 비행기만 타고 있을 순 없잖겠소." "비행기를 타는 건 내겐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그게 좋아요. 내가 싫은 건 늙은이의 감시인 노릇을 하는 거지." "그에겐 감시인이 필요한가요?" "그분이야 언제든지 소란을 피워도 되죠. 미란다 앞이라 당신에게 말을 못했지만, 샘프슨 씨가 지난 주에는 사막에서 죽을 작정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 같았어요. 하루에 1 쿼트 반이나 마셔대는걸요. 그렇게 술을 마시다간 과대망상증에 걸려요. 난 술주정꾼 뒤치다꺼리는 아주 질색입니다. 그런 뒤엔 그는 마음이 헤퍼지는 거지요. 나를 양자로 삼아서 항공노선을 사주겠다는 둥." 그는 목소리를 거칠게 해서 주정뱅이 늙은이의 흉내를 냈다. "앨런, 내가 자넬 돌봄세. 항공노선을 사줄께." "아니면 산을?" "난 항공노선 얘기는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분이면 그런 일 정도는 저지를 수 있을 거요. 그러나 술이 깨면 아무것도 줄 생각을 하지 않아요. 한푼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철저한 정신분열증 환자로군." 하고 나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된 거죠?" "확실히는 모르겠소. 2 층에 있는 그 계집년에게 걸리면 누구나 돌아버리게 되는 모양이오. 그리고 그분은 전쟁 때 외아들을 잃었지요. 아마 그럴 즈음에 내가 나타났을 거요. 그분에게 전속 조종사가 꼭 필요하진 않소. 아들인 밥 샘프슨도 조종사였어요. 일본의 시카시마 상공에서 격추당했다는군요. 그 때문에 노인은 충격을 받았다고 미란다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란다는 아버지와 사이가 어떤가요?" "꽤 좋지요. 그런데 최근에 부녀간에 틈이 생기고 있어요. 샘프슨 씨는 미란다를 시집보내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누구, 정해진 사람에게?" "앨버트 그레이브스." 그는 이 말을 찬성도 반대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 3 장. 삼각관계


고속도로는 바닷가 마을의 저지대에 있는 산타 테레사로 이어졌다. 우리는 2 킬로미터나 늘어선 빈민가를 통과했다. 무너져 가는 오두막집들, 가게 앞의 노점들, 옛날에는 보도였던 질척한 오솔길들, 그리고 먼지 속에서 뛰노는 흑인, 또는 유색인종의 어린애들. 중심가 쪽으로 가까운 곳에 판지 케이크 겉에 바른 크림처럼 빛나는 네온사인 간판의 여행자용 호텔 몇 채와 붉은 빛으로 칠한 싸구려 식당, 주당들이 모여드는 초라한 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의 절반 가량은 땅딸막한 인디언 체구에 모로코 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카브릴로 협곡을 지난 뒤부터는 마치 다른 행성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캐딜락은 마치 지상을 미끄러져 가는 우주선과도 같았다. 펠릭스는 중심가에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바다 반대쪽으로 향했다. 길거리는 높이 올라갈수록 변해갔다. 남자들은 여러 색깔의 셔츠와 린네르 양복을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헐거운 바지나 복부가 노출되는 옷차림으로 캘리포니아 스페인계 상점들과 사무실 빌딩 등을 드나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마을 위에 솟아 있는 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산은 의연히 존재함으로써 그들 모두를 어리석게 보이게 했다. 태거트는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고 그는 물었다. "내 마음에 들 필요까진 없소. 당신은?" "돈을 벌기에는 아주 경기가 없는 곳이죠. 사람들은 마치 코끼리처럼 죽기 위해 이곳에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죽지 않고 살아가지요. 그것도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오." "당신은 이곳엘 전쟁 전에 와보았어야 할 걸 그랬군. 과거에 비하면 현재 이곳은 와글와글 들끓는 벌집이나 다름없소. 옛날에는 기껏해야 돈많은 늙은 부인네들이 상품권이나 뜯어내고 지독한 구두쇠 노릇이나 하면서, 정원사들의 품삯마저도 깎으려 들던 곳에 불과했소." "당신이 이 마을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몰랐는데요."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이 지역 담당검사였을 때 두세 사건을 맡아 함께 일을 했었지." 펠릭스는 사무실 빌딩의 안뜰로 이어지는 노란 벽토를 바른 아치 길 앞에 멈춰섰다. 그는 차창을 열고 말했다. "그레이브스 씨 사무실은 2 층에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되지요."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요."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그레이브스의 사무실은 그가 사건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법정의 지저분하고 좁은 방과는 대조적이었다. 대기실은 시원한 초록색 천과 흰색으로 칠해진 목재로 꾸며져 있었다. 게다가, 시원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금발의 아가씨가 접수대에 앉아 있어서 실내의 색채 조화는 더욱 완벽했다. 그녀가 물었다. "약속을 미리 하셨습니까?" "그레이브스 씨에게 루 아처가 찾아왔다는 말만 전해 주시오." "그레이브스 씨는 지금 매우 바쁘십니다." "그렇다면 기다리겠소." 나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샘프슨에 대한 일을 생각했다. 금발 아가씨의 흰 손가락이 타이프라이터 키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괜스레 초조해지면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찾기 위해서 고용되었다는 점이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성직자들과 교제하던 석유재벌이 결국은 과음으로 죽었다는 것 아닌가. 그의 사진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사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쪽 문이 열리고 한 노부인이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인사하고는 만족한 듯이 웃음소리를 내며 뒷걸음쳐 나왔다. 그 여자의 모자는 해변에 떠내려온 걸 건져낸 것 같아 보였다. 그녀의 자줏빛 비단 드레스에 매달린 회중시계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그녀의 뒤를 따라나갔다. 그녀는 그가 아주 예리해서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는 고맙다는 듯이 듣는 체했다. 나는 일어섰다. 그는 나를 보고서는 그 여자의 모자 너머로 눈짓을 보냈다. 그 모자가 사라지자 그는 문 쪽에서 돌아왔다. "루, 만나서 반갑네." 그는 내 등을 두드리지는 않았으나, 손아귀 힘만은 여전히 억셌다. 그러나 세월이 그를 변하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는 관자놀이까지 벗겨져 있었고, 작은 회색 눈동자가 잔주름 사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푸른빛이 감도는 턱은 양옆으로 처져 있었다. 그가 나보다 다섯 살도 채 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별로 편치 못했다. 그레이브스는 험난한 길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바로 노쇠를 재촉했다. 나도 그를 만나 반갑다고 말했다. 정말로 반가웠다. "아마도 6~7 년은 될 걸세."하고 그가 말했다. "정말 그쯤 되겠군요. 당신은 이젠 검찰직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군요." "버텨나갈 수가 없었어." "결혼하셨습니까?" "아직 못했다네. 인플레 때문에 말이야." 그는 싱긋 웃었다. "수는 잘 있나?" "수의 변호사에게 물어보시죠. 그 여잔 나와 사는 것이 싫어졌다는군요." "그것 참 안됐군, 루."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하고 화제를 바꾸었다. "재판


일은 많습니까?" "종전 후론 그렇지 않다네. 이런 마을에서는 통 수지가 안 맞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하고 나는 실내를 돌아보았다. 냉정한 금발 아가씨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나의 일선이라네. 나는 아직도 투쟁하는 검사지. 그러나 한편으론 늙은 부인네들과 대화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네." 그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루, 이리로 들어오게나." 안쪽 사무실은 훨씬 넓었고 시원했으며, 꽤 많은 장식물로 꾸며져 있었다. 장식물이 없는 두 벽에는 사냥 그림의 복사판들이 걸려 있었고, 다른쪽 벽은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커다란 책상 뒤에 선 그가 오히려 왜소해 보였다. "정치는 어떤가요?" 하고 내가 물었다. "당신은 주지사가 되려고 하셨잖습니까, 생각나시나요?" "캘리포니아에선 당(黨)이 산산이 깨졌네. 하지만 어떻든 내 자신의 정치욕은 충족시켰지. 바바리아 지방의 어느 마을을 2 년간 다스렸거든. 군정(軍政)이긴 했지만." "뜨내기 정치꾼이었나요? 나는 정보부에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랠프 샘프슨 씨 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샘프슨 부인과 이야기해 보았나?" "해보았지요.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사건의 요점을 모르겠더군요. 당신은 아십니까?" "물론 난 알고 있어야지. 내가 그 방법을 알려준 셈이니까." "왜요?" "샘프슨 씨는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500 만 달러를 가진 사나이는 그와 같은 모험을 해서는 안되지. 루, 그는 주정뱅이라네. 아들이 전사한 뒤부터는 더욱 심해졌어. 나는 그가 정신 이상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늘 걱정이 되었다네. 샘프슨 부인이 자네에게 클로드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던가? 샘프슨 씨가 사냥 막사를 주었다는 인물 말일세." "오라, 그 성자 말이군요." "클로드는 해를 끼치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아. 그러나 그 다음 인물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네. 자네에게 로스앤젤레스에 대해서는 말해 줄 필요도 없겠군. 이곳은 늙은 주정뱅이가 혼자 살기에는 안전한 곳이 못 된다네." "그렇겠죠." 하고 내가 말했다. "그런 말은 내게 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샘프슨 부인은 남편이 은밀히 즐기려고 여행을 떠난 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내가 그 부인에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부채질했네. 그 여자가 남편을 보호하는 데 돈을 쓰지 않으려고 해서 말이야." "당신이 돈을 쓰시겠군요."


"그 여자의 돈을 쓰지. 나는 그 사람의 변호사에 불과하니까. 게다가, 그 노인네를 좋아한단 말일세." 그리고 그의 사위가 되길 바라고 있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는 돈을 얼마나 내겠답니까?" "자네가 원하는 대로 일단 50 달러에다가 경비는 별도일세, 어떤가?" "75 달러 주시죠? 이 사건의 헤아리기 어려운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65 달러일세." 하고 그는 활짝 웃었다. "나도 내 고객을 보호해야지." "그런 문제로 다투고 싶진 않습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일지도 모르니까요. 샘프슨 씨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을 수도 있잖겠습니까?" "그런 점도 이미 고려해 보았네. 그 사람은 이 근처엔 친구가 별로 없어. 자네에게 그 사람이 교제하던 사람들의 명단을 주겠네. 그러나 최후의 방편으로라면 모르지만,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아. 그의 진짜 친구들은 텍사스에 살고 있지. 그 사람은 바로 거기서 돈을 벌었다네." "당신은 이 사건을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한 발자국 더 나가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자넨 일자리를 잃을 말만 하는군." "그렇습니까?" "루, 그럴 수는 없다네. 만일 경찰이 내 대신 그를 찾아낸다면 그는 당장 나하고는 관계를 끊을 걸세. 게다가, 나로서는 그가 여자와 함께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네. 작년에는 그를 샌프란시스코의 50 달러짜리 매음굴에서 찾아낸 적이 있었거든." "당신은 그곳에 왜 갔었습니까?" "그를 찾으러." "이 사건은 이혼의 요인도 될 듯싶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샘프슨 부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난 아직도 이 사건을 종잡을 수 없고, 그 여자의 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도 그 여잘 알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네. 그러나 적어도 그녀를 어느 선까지는 다룰 수 있지. 무엇이든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내게 가져오게나. 그 여자에겐 탐욕과 허영과 같은 두서너 가지 뚜렷한 동기가 있어. 자네가 그녀와 거래를 할 때는 그러한 점들을 고려하게나. 그리고 그녀는


이혼은 원치 않는다네. 차라리 좀더 기다렸다가 그의 재산을 몽땅, 아니면 그 절반이라도 상속받으려 하겠지. 미란다 양이 나머지 절반을 차지할 거고." "그게 그녀의 주된 동기인가요?" "적어도 내가 그 여자를 알게 된 뒤로는, 아니 아마도 그녀가 샘프슨과 결혼한 이래로는 그랬을 거야. 그녀는 과거에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었지. 댄서, 화가, 디자이너 등등. 하지만 재능이 없었어. 그녀는 한동안은 샘프슨의 정부였다네. 그러다가 그에게 전적으로 비비적거리다가는 마침내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지. 그게 6 년 전 일이야." "그 여자의 다리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녀는 자기가 훈련시키던 말에서 떨어져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네. 그 뒤론 아주 걷지 못해." "미란다 양은 그 부인이 걷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미란다와도 대화를 나누었나?" 그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어때, 굉장한 여자가 아니던가?" "그렇더군요." 라고 말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축하합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그레이브스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자동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도중에 그가 내게 물었다. "그녀가 내 얘길 하던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로 짐작했지요." "그녀는 굉장한 여잘세." 라고 그는 되풀이했다. 나이 사십에 그는 사랑에 도취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차에 이르렀을 때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란다가 뒷자리에 앨런 태거트와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뒤쫓아왔어요. 나도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가겠어요. 버트, 안녕하세요?" "안녕, 미란다." 그는 그녀에게 불쾌한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태거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거트는 그저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일종의 삼각관계였지만 결코 정삼각형은 아니었다.

제 4 장. 12 각형의 방 우리는 공항을 휩쓸고 해안 앞바다로 불어가는 바람 속으로 날아올라 산 남쪽 분기점으로 항했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산타 테레사는 한 장의 천연색 항공지도였고, 항구에 정박한 범선들은


하이타이를 풀어넣은 물통 속에 떠 있는 하얀 비누 조각이었다. 공기는 무척 맑았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들은 마치 판지로 만들어 세운 세트처럼 윤곽이 너무도 뚜렷해서 손가락으로 찌르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이윽고 우리는 그것들을 타넘어가다 싸늘한 대기 속으로 올라갔다. 80 킬로미터의 지평선을 이루며 길게 뻗어 있는 황량한 산맥들이 눈 아래 펼쳐졌다. 비행기는 점차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바다 저편을 향해 날았다. 야간비행 장비를 갖추고 있는 4 인승의 소형 비행기였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미란다는 앞좌석 태거트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조종간을 잡고 있는 태거트의 오른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기체를 조용하고 안정되게 유지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이 보였다. 기체는 하강기류에 부딪쳐 고도를 30 미터쯤 낮추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그의 무릎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 손을 물리치지 않았다. 내 눈에도 명백한 일이었으니,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도 명백했으리라. 태거트가 원하기만 한다면 미란다는 그의 것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레이브스는 결국 비참한 좌절로 끝날 일에 쓸데없이 기대를 안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레이브스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란다는 그레이브스가 꿈꾸어 온 모든 것-- 돈과 젊음과 꽃봉오리처럼 탄탄한 젖가슴과 한창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원했고, 따라서 그녀를 소유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손에 넣어왔다. 그는 오하이오 주 출신으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가 13 살인가 15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농장을 잃고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났다. 버트는 6 년 동안 고무공장에서 타이어를 만들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대학에 들어가 우등생이 되었다. 서른도 되기 전에 그는 미시건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 년 동안 디트로이트에서 회사법을 연구한 다음 서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까지는 산맥을 본 적도 없었고 바다에서 수영을 해본 적도 없었으므로 그는 산타 테레사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여행을 캘리포니아 주에서 보내고 싶어했었는데, 버트는 그런 중서부에 대한 꿈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 꿈에는 석유로 부자가 된 텍사스 백만장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너무 바빠서 여자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시(市)검사보, 시검사, 지방검사를 거치면서 그는 마치 사회의 주춧돌을 닦는 듯한 태도로 많은 사건을 다루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당시 나도 그를 도와 일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주의 대법원 판사는 법정에서의 그의 변론을 가리켜 법률학의 모범이라고까지 논평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마흔이 된


지금 그레이브스는 담벼락에 대고 박치기를 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그는 그 벽을 뛰어넘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벽 스스로가 무너질 수도 있다. 파리를 쫓는 망아지처럼 태거트가 다리를 흔들었다. 비행기는 방향을 잡아 다시 제 항로로 찾아들었다. 미란다는 그의 무릎을 잡고 있던 손을 치웠다. 약간 화가 나서 귀 밑까지 붉어진 태거트는 조종간을 잡아당기고서 날아올랐다. 마치 그녀를 뒤에 남기고 창공의 품 속에 홀로 안길 수 있다는 듯이 날아올랐다. 천정의 온도계가 섭씨 4 도 이하로 내려갔다. 24 킬로미터 상공에서 저 멀리 오른편 아래쪽에 펼쳐진 산타 카탈리나 섬이 보였다. 몇 분 뒤, 우리는 왼쪽으로 돌아 하얗게 얼룩진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나는 엔진 소리를 덮어누를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버뱅크 공항에 착륙할 수 있겠소? 뭣 좀 물어보고 싶은데." "그럴 생각입니다." 기체가 선회하며 계곡으로 접어들자 한여름의 열기가 기체에까지 올라왔다. 열기는 결이 고운 잿가루처럼 쓰레기 하치장과 들판과 반쯤 개발된 교외를 덮고 대기를 메우며, 국도와 대로를 달리는 조그마한 차량의 걸음을 더디게 했다. 미세한 흰 먼지가 콧구멍으로 스며 들어와 목이 깔깔했다. 그 깔깔함은 내가 언제나 품고 있었던 느낌과 한데 어울려, 반나절이 지나 시내로 돌아온 뒤까지도 지속되었다. 공항 택시 정류장의 안내원은 붉은 줄무늬 셔츠를 입고 양소매에 강철테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노란 모자가 잿빛 뒤통수에 거의 수직으로 매달려 있었다. 오랜 세월의 햇볕과 욕설이 그에게 분노로 붉어진 얼굴과 지극히 침착한 태도로 만들어주었다. 사진을 꺼내 보이니 그는 샘프슨을 기억해 냈다. "예, 그 양반 어제 여기 왔었습니다. 몸이 좀 불편한 듯이 보이기에 눈여겨 보았죠. 하지만 뭐 인사불성이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경비원을 불렀게요. 좀 지나치게 마셨던 게지요." "그렇고말고요." 하고 나는 얼른 말했다. "누구와 함께 왔던가요?" "글쎄, 난 모르겠는데요." 마치 더위에 지쳐 늘어진 듯한 여우 목도리를 둘이나 두른 여자가 옆에서 빠져나와 차도로 뛰어들었다. "지금 빨리 시내로 들어가야 돼요." "안됐습니다만, 부인, 차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급한 일이라니까요." "차례를 기다리시라니까요." 하고 그는 지겨운 듯이 말했다. "보시다시피 차가 딸리지 않습니까?"


그는 몸을 돌려 다시 내게로 돌아섰다. "이보쇼, 뭐 또 물어볼 게 있소? 그 양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도 모릅니다. 그는 무얼 타고 떠났소?" "자동차지. 검은색 리무진. 아무 표시도 없길래 눈여겨 봐두었지요. 아마 어느 호텔에서 보내준 거겠지만." "차에 누가 타고 있던가요?" "운전사 뿐이던데." "아는 사람입디까?" "아뇨. 호텔 운전사를 몇 알기는 하지만 늘상 바뀌니까. 몸집이 작은 친구 같던데. 얼굴은 좀 창백하고." "차의 제조번호나 허가번호는 기억지 못하겠죠?" "형씨, 난 항상 눈을 크게 뜨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천재는 아니잖소?" "고맙소." 나는 그에게 1 달러를 주었다. "나 역시 천재는 아닙니다." 나는 2 층 칵테일 바로 올라갔다. 미란다와 태거트는 어쩌다가 어울리게 된 낯선 사람들처럼 앉아 있었다. "발레리오 호텔에 전화했습니다."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리무진 한 대가 곧 이리로 올 겁니다." 잠시 뒤 나타난 리무진은 야구심판의 유니폼처럼 번쩍이는 푸른빛 사지 양복을 입고 헝겊 모자를 쓰고 있는, 체구가 작고 얼굴이 창백한 운전사가 몰고 있었다. 그러나 안내원은 어제 샘프슨 씨를 태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앞좌석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잽싸게 나를 돌아보았다. 잿빛 얼굴, 움푹 들어간 가슴, 눈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첨하듯 부드럽게 꼬리를 끄는 목소리였다. "발레리오로 갑시다. 어제 오후에 근무했었소?" "그렇습니다." 그는 기어를 넣었다. "누구 또 다른 분은 근무하지 않았소?" "아뇨, 야간에 근무하는 친구가 하나 있긴 합니다만 6 시 전에는 오지 않지요." "어제 오후 혹시 버뱅크 공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나요?" "아니오." 그의 눈에 슬며시 근심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그의 눈에는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잖소?" "아니오, 확실합니다. 이쪽으로 나온 일이 없었으니까요."


"랠프 샘프슨을 아시오?" "발레리오에 묵으셨던 분 말씀입니까? 예, 그럼요. 알고말고요." "최근에 그를 본 일이 있소?" "아니오, 몇 주 동안 뵙지 못했는데요." "알겠소. 그런데 출장 전화는 누가 받습니까?" "교환수지요. 제발 일이 잘못된 게 아니길 바랍니다. 샘프슨 사장님은 선생님 친구분이신가요?" "아니오."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 양반 고용인 중 하나요." 경어를 남발한 것이 후회되는지 그는 남은 길을 가는 동안 입을 꼭 다물고 차를 몰았다. 차에서 내릴 때 내가 팁을 1 달러나 주자 그는 꽤나 당황해 했다. 요금은 미란다가 치렀다. "방갈로를 보고 싶소." 하고 나는 로비에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먼저 교환양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는걸." "방갈로 열쇠를 찾아놓고 기다리죠." 교환양은 밤이면 사내들 꿈만 꾸다가도 낮에는 그들을 증오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처녀였다. "무슨 일이죠?" "어제 오후 버뱅크 공항에서 리무진을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텐데요?" "그런 종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질문이 아니오. 사실을 확인하자는 거요." "지금 무척 바쁩니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동전처럼 짤그랑거리는 어조였다. 작고 딱딱한 두 눈이 은화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1 달러짜리 지폐를 책상 위 그녀 팔꿈치 옆에 내놓았다. 그녀는 마치 더러운 물건을 보듯이 지폐를 쳐다보았다. "지배인을 불러야겠군요." "좋습니다. 나는 샘프슨 씨 일을 보고 있는 사람이오." "랠프 샘프슨 씨 말씀인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쾌활하게 바뀌었다. 혀를 굴리는 음성이었다. "그렇소." "예, 그분이 전화를 하셨어요!" "알고 있소. 그래서 어떻게 했소?" "그분은 제가 미처 운전사에게 알리기도 전에 곧바로 그 말씀을 취소하셨는걸요. 예정이 바뀌었던가 보죠?" "그래요. 두 번 다 그 양반인 건 틀림없소?" "그럼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저는 샘프슨 씨를 잘 알고 있거든요. 몇 년째 이곳에 오셨으니까요."


그녀는 그 깨끗하지 못한 1 달러짜리 지폐가 행여 자기 책상을 더럽힐세라 냉큼 집어들어 싸구려 플라스틱 핸드백에 쑤셔넣었다. 그리고서 그녀는 붉은 신호등이 셋이나 켜진 스위치보드로 돌아섰다. 로비로 돌아가자 미란다가 일어났다. 그곳은 찍소리도 못낼 만큼 조용하고 호사스러운 곳이었다. 푹신한 양탄자와 푹신푹신한 소파, 그리고 연자줏빛 코트를 입은 보이들이 차려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박물관 안의 살아 있는 젊은 요정처럼 움직였다. "아버지는 근 한 달째 여기 오시지 않았대요. 지배인 대리에게 물어봤어요." "그가 열쇠를 내주던가요?" "물론이죠. 앨런이 방갈로를 열러 갔어요." 나는 그녀를 따라 복도를 내려가 끄트머리께의 튼튼한 철문에 이르렀다. 본관 뒤뜰은 잔디밭과 화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길이 있고, 양쪽엔 방갈로들이 늘어서 있었다. 높다란 돌담이 감옥처럼 둘러쳐져 바깥 세계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돌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매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테니스 코트와 풀 장, 식당과 바와 나이트 클럽이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돈이 가득 든 지갑이나 사용되지 않은 수표책 뿐이었다. 샘프슨의 방갈로는 다른 방갈로들보다 컸으며 상당히 큰 테라스가 붙어 있었다. 옆으로 나 있는 문은 열려 있었다. 우리는 불편해 보이는 스페인식 의자들이 제멋대로 놓여 있는 홀을 지나 높직한 천정을 참나무 대들보가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진 화덕 앞의 기다란 의자에 태거트가 앉아서 몸을 숙인 채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친구를 불러낼까 하고." 그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미란다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좀 돌아다녀 봐야겠어." "나하고 함께 지낼 줄 알았는데요." 그녀의 음성은 불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개의 호텔 객실처럼 늘어놓은 것만 많을 뿐 개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버님은 일용품들을 어디다 두지요?" "아마 침실일 거예요. 여기에는 별로 물건을 두지 않아요. 갈아입을 옷 몇 벌 정도겠죠." 그녀는 홀 저편의 침실로 나를 안내하고는 불을 켰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방은 12 각형으로, 벽이 12 개나 되었지만 창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간접 조명의 붉은빛이 감돌았다. 주름잡힌 두텁고 붉은 커튼이 천정에서 바닥까지 드리워져 벽을 덮고 있었다. 방 중앙에 놓인 묵직한 안락의자와 침대도 역시


검붉은색이었다. 금상첨화격으로 천정에 원형 거울이 박혀 있어서 방 전체를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그 붉은 그늘 속에서 나의 기억력은 허우적거리다가 가까스로 이 방과 비슷한 방을 찾아냈다. 어떤 사건 때문에 찾아갔었던 멕시코 시티의 어느 나폴리식 유곽이었다. "여기서 지내려면 그 양반이 술을 마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가 다시 꾸민 게 틀림없어요." 나는 방을 한 바퀴 돌았다. 12 개의 벽에는 점성술의 12 궁도가 각각 금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사수자리, 황소자리, 쌍동이 자리, 그리고 나머지 9 개의 별자리들. "아버님은 점성술에 관심이 있었나요?" "예, 그래요." 하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말려보기도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어요. 오빠가 죽자 자제력을 잃었던 거죠.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빠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뭐 특별히 찾아가시는 점성술사라도 있었나요? 세상은 그런 사람들 투성이이니까." "모르겠는데요." 나는 한 커튼 뒤에서 벽장을 찾아냈다. 문 대신 커튼을 여닫게 되어 있었다. 안에는 셔츠와 구두, 그리고 골프복에서 야회복에 이르기까지 각종 양복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차례차례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어떤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지갑이 나왔다. 그 안에는 20 달러 짜리 지폐 뭉치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을 꺼내어 벽장에 붙은 전구에 가까이 대고 보았다. 무당처럼 생긴 여자의 우수에 잠긴 검은 눈과 두툼하게 늘어진 입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 양쪽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와 검은 드레스의 하이 네크라인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일부러 그림자를 지게 했기 때문에 검은 옷과 그림자가 한데 어울려 검은빛 일색이었다. 그 그림자 위에 흰 잉크로 '페이로부터 랠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기를'이라는 말이 여자의 필적으로 쓰여 있었다. 분명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우수에 잠긴 눈만이 낯익을 뿐 그밖의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샘프슨의 윗도리에 지갑은 도로 넣고, 그 사진은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사진 수집의 제 1 호 증거물로 보관했다. "이것 보세요." 하고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미란다가 말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스커트가 무릎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실내의 장미빛 조명 속에서 그녀의 몸은 불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미치광이 방에 있으면 무슨 생각이 나죠?" 그녀의 머리카락은 온통 불타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반듯이 위를 향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 늘씬한 몸뚱이는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방을 질러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그스레한 빛이 내 손을 비쳐 내게도 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을 떠요." 그녀는 눈을 뜨고 생긋 웃었다. "알아보셨군요, 그렇죠? 이 교도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살람보'처럼 말이죠." "책을 너무 많이 읽는군." 하고 내가 말했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진 채 달아오른 육체를 감지했다. 그녀는 내게로 몸을 돌려 내 몸을 잡아끌었다. 내 뺨 위에 그녀의 입술이 뜨겁게 짓눌렸다. "이거 어떻게 된 거요?" 하고 문간에서 태거트가 물었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성이 난 듯이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그 어정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뜻밖의 사건을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옷을 바로 매만졌다. 나로서는 조금도 재미가 없었다. 미란다 만큼이나 신선한 육체를 접해 본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온몸의 피가 마치 경마장을 달리는 망아지처럼 내 몸속을 치달렸다. "윗도리 주머니에 든 게 뭐길래 그처럼 딱딱하죠?" 미란다가 또렷한 어조로 물었다. "권총을 차고 있소." 나는 그 검은 머리 여자의 사진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혹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소?'페이'라고 서명했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나도." 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그녀는 마치 한 점을 따내기라도 한 듯이 옆눈으로 태거트를 보며 남몰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휘젓기 위한 도구로 나를 사용했는데, 그게 나를 화나게 했다. 바깥을 내다볼 창 하나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거꾸로 비친 영상 뿐인, 꼭 정신병자의 두뇌 속과도 같은 방.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제 5 장. 3 호 촬영소 초인종을 누르자 통화관(通話管) 속에서 여자의 풍성한 음성이 가르랑거렸다. "누구시죠?"


"루 아처입니다. 모리스는 집에 있습니까?" "그럼요, 어서 오세요." 버저가 울리며 아파트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층계를 올라가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엷은 금발의 뚱뚱한 여자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랫동안 뵙지 못했군요." 나는 흠칫 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이는 새벽에야 눈을 붙였어요. 지금 아침 식사중이랍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3 시 반이었다. 모리스 크램은 컬럼니스트를 위해 일하는 야간 취재기자여서, 저녁 7 시부터 다음날 아침 5 시까지 일했다. 나는 부인의 안내로 거실 겸 침실로 쓰는 방을 지나 부엌으로 갔다. 그 방에는 신문지와 책, 아직 잠자리를 치우지 않은 소파 겸용 침대가 들어차 있었다. 모리스는 가운을 입고 식탁에 앉아서 자기를 올려다보는 두 개의 계란 프라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검고 체구가 작으며, 두툼한 안경 뒤에서 검은 눈이 예리하게 빛나는 남자였다. 그 눈 뒤에는 로스앤젤레스의 중요 정보는 모조리 분류하여 간직한 조직적인 두뇌가 있었다. "밤새 안녕하셨나, 루?" 하며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후도 한참 됐어." "내겐 아침이야.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잖나. 여름날 자리에 들 때 샛노란 태양이 머리 위에 빛나도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이지. 오늘 아침엔 나의 어떤 뇌엽(腦葉)이 필요한가? 앞인가 뒨가?" 그는 '아침'을 강조했고, 부인 또한 ���게 커피 한 잔을 따라줌으로써 남편의 말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까지도 샘프슨 가(家)의 꿈을 꾸다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샘프슨 가에 관한 그 모든 일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더라도 아마 나는 곧이 들었으리라. 나는 그에게 '페이'라고 서명된 그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얼굴을 아나? 나도 본 듯한 얼굴인데, 아마 영화에서 봤을지도 몰라. 배우 타입이거든." 그는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물 간 흡혈귀로군. 마흔은 넘었겠고. 하긴, 이 사진도 10 년은 됐겠구먼. 페이 이스터브룩이야." "이 여잘 아나?" 그는 포크로 계란 프라이를 찔러 터뜨려진 노른자가 접시를 노랗게 물들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몇 번 본 적이 있지. 펄화이트 시대의 스타였어." "지금은 뭘 하고 먹고 사나?" "이렇다 할 만한 건 없어. 그냥 조용히 살고 있지. 한두 번


결혼한 적이 있고."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달걀을 먹기 시작했다. "지금도 결혼생활을 하고 있나?" "모르겠는걸. 지난번에 한 결혼이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그런 대로 수입을 올리고 있어. 심 쿤츠가 자기 영화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지. 왕년에는 그녀의 전속 감독이었거든." "부업으로 점성술도 겸하고 있지는 않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두 번째의 달걀을 난폭하게 찔렀다. 무슨 질문이든 자기가 그 대답을 모른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내게는 그 여자에 관한 기록이 없네, 루. 이젠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못 되거든. 하지만 그 여자에게 모종의 수입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어. 제법 돈을 뿌리고 다니니까. 체이슨에서 본 일이 있다네." "물론 혼자였을 테지?" 그는 낙타처럼 음식을 좌우로 십으며 작고 진지한 얼굴을 찌푸렸다. "이 친구야, 자네가 내 뇌엽 앞뒤 양쪽을 다 파헤치자는 거로군. 내 뇌엽을 혹사하는 데 대한 대가는 있는 건가?" "5 달러 내지." 하고 내가 말했다. "경비는 나오기로 되어 있어." 크램 부인은 젖가슴을 내 머리 위에서 출렁거리며 커피를 또 한 잔 따랐다. "영국인 건달 같은 사내와 함께 있는 걸 몇 번 봤어." "인상은?" "백발에 겉늙었고 눈은 푸르거나 잿빛, 체격은 보통이고 깡말랐어. 옷은 잘 입었고, 자네가 나이든 합창단 소년을 좋아한다면 미남으로 보이겠지." "내가 그런 타입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잖나. 또 다른 친구는 없나?" 나는 그에게 샘프슨의 사진을 보여주거나 그의 이름을 댈 수는 없었다. 그는 이름들을 모으는 대가로 양쪽에서 보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편없는 보수이긴 했지만. "적어도 한 번은 본적이 있네. 그녀가 10 달러짜리로 옷을 해 입은 것 같은 관광객 비슷한 뚱뚱한 남자와 밤늦게 저녁을 먹는 걸 보았네. 그 친구, 곤드레가 되어서 문간까지 가는 데도 부축을 받아야 했지. 그것도 서너 달 전이었어. 그 뒤로는 그 여잘 본 적이 없네." "그래, 그 여자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나?" "교외 어딘가에 살 테지. 그건 내 전공 밖이야. 어쨌든 5 달러 상당의 정보는 제공했다고 보는데." "그건 부정하지 않네만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 시메온


쿤츠는 아직 일하고 있나?" "독립해서 TV 용 영화를 만들고 있지. 그 여자가 거기 나가 있는지도 모르겠군. 지금 촬영중이라고 하니까." 나는 그에게 5 달러 지폐를 주었다. 그는 지폐에 입을 맞추고는 그것으로 담뱃불을 붙이는 체했다. 그의 손에서 마누라가 지폐를 잡아챘다. 내가 떠날 때도 그들은 귀여운 미치광이들처럼 깔깔거리면서 쫓고 쫓기며 부엌을 맴돌고 있었다. 타고 온 택시는 아파트의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다시 집어타고 집으로 돌아가서 로스앤젤레스 일대의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페이 이스터브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유니버셜 시티의 TV 영화제작소에 전화하여 페이 이스터브룩을 찾았다. 교환수는 그녀가 스튜디오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며 찾아보겠노라고 했다. 자그마한 촬영소에서도 그 모양이니 적어도 영화에 관한 한 페이는 분명히 한물 간 배우가 틀림없었다. 교환수가 다시 전화에 나왔다. "이스터브룩 양은 여기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촬영중입니다. 뭐 전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그리로 가지요. 몇 호 촬영소지요?" "3 호입니다." "시메온 쿤츠가 감독합니까?" "예. 아시겠지만 출입증이 있어야 됩니다." "갖고 있소." 하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권총을 풀어 거실의 벽장 속에 걸어놓는 실수를 저질렀다. 무더운 날이라 거추장스럽기도 했거니와, 그것을 쓸 일도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벽장 안에는 낡아빠진 골프채들이 든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들을 차고로 가지고 가서 차 뒤칸에 던져넣었다. '유니버셜 시티'의 건물 벽은 때에 찌든 칼라처럼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TV 영화제작소 건물들은 다른 것들보다는 새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길가에 늘어선 볼품없는 술집이나 지저분한 식당들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었다. 애당초 오랫동안 사용할 생각도 없었던 듯 석회를 이겨바른 벽돌은 한눈에도 날림 공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주택가의 모퉁이를 돌아 차를 세우고 촬영소의 정문으로 골프 가방을 메고 갔다. 배역(配役) 사무실 밖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서 배역을 맡아 흐뭇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질을 너무 해서 해어질 정도가 된 검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가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고 있었다. 인정머리 없게 생긴 여자가 그 또한 인정머리 없게 생긴 꼬마 계집애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있었다. 분홍색 비단 옷을 입은 그 계집애는 깩깩 울어대고 있었다. 뚱뚱하거나 마르고, 수염이 더부룩하거나 깨끗했고, 정장을 하고 솝브렐로 (멕시코 모자) 를 쓰고, 병들고 알코올에 중독되고 노쇠한 -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한물 간 - 배우들이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다. 결국은


일어나지 않을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나는 쫙 깔려 있는 글래머들을 눈 딱 감고 외면하며 어둠침침한 홀을 지나 회전문으로 갔다. 먹다 남은 햄조각처럼 생긴 턱주가리를 한 중년의 사내가 푸른 경비원 제복을 입고 문가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골프 가방을 매우 소중한 듯이 껴안고는 문앞에 멈춰섰다. 경비원이 눈을 반쯤 뜨며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그가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어떤 질문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쿤츠 씨가 이게 당장 필요하시다던데요." 일류 스튜디오의 경비원들은 여권이나 비자를 요구했고, 숨겨진 사제폭탄을 찾느라고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뒤졌다. 하지만 독립된 스튜디오에서는 조사가 다소 느슨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노렸던 것이다. 그는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미궁(迷宮)으로 통하는 길과도 같은 새하얗고 비좁은 콘크리트 길을 빠져 나와 분간할 수 없는 빌딩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었다. 발길을 돌려 '웨스트 메인 스트리트'라는 표지판이 걸린 길을 따라 내려갔다. 거기서는 두 명의 페인트공이 비바람에 휘어진 술집의 앞면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이 세트는 회전문은 있었지만 내부는 전혀 없었다. "3 호 촬영소가 어딥니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오른쪽으로 돌아 첫번째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요. '뉴욕 아파트' 건너편 길에 표지판이 보일 거요." 나는 오른편으로 돌아 '런던 스트리트'와 '컨티넨탈 호텔' 앞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멀리서 볼 때는 꼭 진짜 같았던 호텔의 현관이 다가가서 보니 너무나 보기 흉하고 얄팍한 세트라서 나 자신이 과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골프 가방을 던져버리고 '컨티넨탈 호텔'에 들어가 다른 허깨비들과 함께 가짜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허깨비들에게는 분비선이라는 게 없지만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좀더 가벼운 것을 들고 왔어야 했다. 예를 들어 배드민턴 라켓 같은 것들 말이다. 3 호 촬영소에 다다르니 붉은 등이 타오르고 있었고, 방음장치가 된 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골프 가방을 내려 벽에 세워 놓고 기다렸다. 잠시 뒤 붉은 등이 꺼졌다. 문이 열리자 토끼 모양으로 차려입은 코러스 걸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흥청거리며 거리를 올라갔다. 나는 그녀들이 다 지나가도록 문을 잡고 있다가 마지막 한 쌍까지 다 나간 다음에 안으로 들어섰다. 음향실 내부는 그대로 공연장이 재현된 듯이 붉은 플래시 커버를 씌운 연주석(演奏席)과 관람석, 그리고 로코코 풍의 금빛 장식들이 있었다. 오케스트라석은 텅 비어 있고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관람석 앞줄에는 한 무더기의 청중이 떼지어 앉아 있었다. 한 젊은이가 셔츠 차림으로 머리 위의 꼬마 조명등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가, "라이트!"하고 소리치자 꼬마등이 밝아지며 맨 앞줄 중앙에 앉아 카메라를 마주보고 있는 여자의 머리를 비추었다. 나는 관람석 사이의 통로를 내려가서 불이 꺼지기 전에 그 여자가 페이임을 확인했다. 라이트가 다시 들어오고 버저가 울리자 실내에는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은 그 여자의 나직하고 폭넓은 음성으로 인해 깨어졌다. "저 애 참 멋있죠!" 그녀는 몸을 돌려 옆에 앉은 잿빛 콧수염의 사내를 향하고는 가만히 그 팔뚝을 잡아 흔들었다. "컷!" 머리가 벗겨지고 연푸른빛 개버딘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피곤에 지친 듯한 작은 사내가 카메라 뒤에서 일어서더니 페이 이스터브룩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이것 봐, 페이. 당신은 저 친구 어머니란 말이야. 그는 지금 저 무대 위에서 정성을 다해 당신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 이건 저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큰 기회야. 몇 년 동안 당신이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렸던 결과란 말이야." 중앙 유럽 사람들의 음성처럼 감정이 어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무대 쪽을 쳐다보았다. 무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열을 내며 말했다. "좋았어, 한결 낫군. 하지만 정말로 묻는 건 아니야.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형을 취했을 뿐이니까. '멋'을 강하게 발음해요."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액센트를 더 강하게, 좀더 감정을 넣어요. 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노래부르는 당신 아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껏 쏟아내는 거야. 자, 다시 한 번 해봐요."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 여자가 악을 썼다. "안돼! 세련미를 담아서는 못 써요. 교양은 쑥 빼놓으라고. 소박한 감정을 나타내는 거야. 따사롭고 애정어린 소박한 감정을. 알겠소, 페이?" 그녀는 울화가 치밀어 마음이 산란한 듯이 보였다. 조감독에서 소도구 담당에 이르기까지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갖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애 참 멋있죠!" 라고 그녀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어, 훨씬 좋아." 하고 작은 사내가 말했다. 그는 조명담당과 촬영기사에게 촬영 개시 신호를 보냈다.


"저 애 참 멋있죠!" 하고 그녀는 다시 말했다. 잿빛 콧수염의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여자의 손을 감싸쥐었고, 그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컷!" 미소가 슬며시 사라지며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불이 꺼졌다. 몸집이 자그마한 감독이, "77 번" 하고 외쳤다. "가도 좋아, 페이. 내일은 8 시야. 편히 쉬도록 해요, 페이."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조는 매우 언짢은 듯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이 무대 양옆으로 모여들고 카메라가 그들을 향해 회전을 하는 동안 그녀는 일어나서 중앙 통로를 걸어 올라갔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우중충한 창고 같은 건물을 빠져나와 양지로 나갔다. 그리고는 문 어귀에 선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빨리 걷지 않았다. 어딘지 목적 없는 듯한 걸음걸이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수수한 검은 옷에 베일이 달린 모자'라는-미망인용의 초라한 의상 때문에 그 큼직하고 멋진 몸매가 어설프고 볼품없어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건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감상적인 기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냄새 없는 가스처럼 스튜디오 안에 퍼져 있던 음산한 기운이 텅 빈 세트의 거리를 건들건들 걸어가는 그 커다란 검은 형체에 몰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컨티넨탈 호텔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골프 가방을 집어들고 그녀 뒤를 밟았다. 다시 땀이 흐르기 시작하며, 나는 평생 프로는 될 수 없는 늙은 캐디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나이가 죄다 다른 여섯 여자와 만나서는 떼를 지어 정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정문에 이르기 전에 발길을 돌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녀들은 '갱의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아치 문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경비원 옆에 있는 회전문을 밀어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경비원은 나와 골프채를 기억하고 있었다. "필요없다고 하시던가요?" "골프 대신에 배드민턴을 치시겠다는군요."

제 6 장. 추 적 그녀가 나올 때까지 나는 입구 근처의 황색 보도 가장자리에 차를 대놓고 엔진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쪽 보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맵시 있게 디자인된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었다. 마음가짐이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속옷 탓인지 그녀의 몸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뒤에서 보니 10 년은 젊어 보였다. 그녀는 내게서 반 구역쯤 떨어진 곳의 검은 세단 옆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차량의 물결 속으로 끼어들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달려나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단은 새것으로 '뷔크'였다.그녀가 내 차에 주의를 기울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일대에는 청색 컨버터블 (접는 지붕이 달린 차) 천지였으며, 그 길의 교통상태는 마치 흔들리고 있는 요지경 속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자기의 개성까지 곁들여 차선을 들락날락하며 맹렬하게 차를 몰았다. 하지만 훌륭한 솜씨였다. 고가도로에서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도 속력을 110 킬로미터나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내 존재를 눈치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재미로 그러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80 킬로미터를 유지하며 선세트 거리를 내려가서는 바다로 향했다. 비벌리 힐즈의 커브 길에서는 90 킬로미터를 냈다. 그녀의 육중한 차는 타이어를 태워먹을 듯이 달렸다. 다소 가벼운 차를 탄 나는 원심력에 맞서서 팽팽한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내 차의 타이어는 날카로운 비명을 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태평양 연안 도로로 통하는 기다란 환상도로의 마지막 내리막길에서 나는 방심한 나머지 하마터면 그녀를 놓칠 뻔했다. 그러나 직선도로에 접어들자 그녀가 대로를 벗어나 우회전을 하기 직전에 다시 그 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우들론 레인' 이라고 표시된 길을 올라갔다. 산기슭을 따라 달리는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내가 커브를 돌아나갔을 때 수백 야드 앞을 달리던 그녀의 차가 크게 회전하며 좁다란 현관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그 지점에서 추격을 멈추고 유칼리 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도로 연변에 늘어선 동백나무 생울타리 사이로 하얀 집 현관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2 층이었고, 한길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있었으며, 한켠에는 언덕 기슭을 파서 만든 차고가 붙어 있었다. 한물 간 여배우가 사는 집치고는 꽤나 멋들어진 집이었다. 얼마 지나니 열리지 않는 문을 지켜보기가 지겨워졌다. 나는 윗도리와 넥타이를 벗어 둘둘 말아서는 차 뒷좌석에 던지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곤 트렁크 안에 있던 길쭉한 꼭지가 달린 기름치는 통을 꺼내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차도를 올라가 뷔크 곁을 지나 차고의 열려진 문으로 들어갔다. 차고는 엄청나게 커서 뷔크 외에도 2 톤짜리 트럭 한 대는 더


들어갈 만했다. 기묘한 것은, 중량급 트럭이 최근 거기를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널찍한 타이어 자국이 나 있었고, 군데군데 상당량의 기름이 흘러나와 있었다. 차고 뒷벽에 달린 작은 창은 평지보다 조금 높은 뒤뜰로 면해 있었다. 새빨간 실크 스포츠 셔츠를 입고 어깨가 듬직한 사내가 내게 등을 돌린 채 휴대용 캔버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짤막하고 숱이 많은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보아 랠프 샘프슨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발돋움을 하고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창문은 비록 흐렸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림처럼 선명했다. 빨간 셔츠를 입은 사내의 널찍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듯한 등판. 그 옆 풀밭에 땅콩 그릇이 놓여 있었다. 머리 위의 오렌지 나무는 설익어 암록색 골프공 같은 오렌지들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커다란 손에 달린 갈퀴 같은 손가락이 땅콩 그릇을 더듬었다. 손은 땅콩 그릇을 못 찾고서 오그라든 왕새우처럼 풀밭 속을 기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옆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랠프 샘프슨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또한 붉은 셔츠의 그 사내가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얼굴도 아니었다. 그것은 원시시대의 조각가가 돌을 깎아 만든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너무나 흔해빠진 20 세기의 이야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격투를, 극심한 동물적 기질을, 그리고 모자라는 두뇌를. 나는 바닥의 타이어 자국으로 되돌아가서 무릎을 꿇고 그것을 조사했다. 바로 그때 현관 차도를 달려오는 질질 끄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행동을 취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붉은 셔츠의 사내가 문간에서 말했다. "무슨 일로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거지? 여기서 어슬렁거릴 일이 없을 텐데." 나는 기름통을 거꾸로 들고 벽에다 기름을 한 줄 뿌렸다. "불빛을 가리지 말아요." "뭘 하는 거야?" 하고 그는 성가신 듯이 물었다. 윗입술이 마치 입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는 키가 나보다 더 크지도 않았고 어깨가 문짝만큼 넓지도 않았지만, 그런데도 우람하게 느껴졌다. 나는 낯선 집을 찾아가서 처음 보는 불독에게 말을 걸 때와 같은 초조감을 느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틀림없이... "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집에 있소." 그가 나를 향해 육박해 오는 그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왼편 어깨를 내밀고 턱을 당긴 그 모양은 마치 매일같이 매시간을 3 분짜리 20 회전으로 나누어 사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소리야, 우리 집에 있다니? 우린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무얼 팔 생각으로 어슬렁거리는 거라면 잘 안될 거야." "흰개미요." 하고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소금을 뿌린 콩과 맥주와 충치냄새가 풍겨왔다. "골드 스미드 부인에게 말씀드리시오. 분명히 흰개미가 있다고." "흰개미?" 그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이 우뚝 섰다. 나는 그를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대로 넘어져 누워만 있을 상대가 아니었다. "나무를 갉아먹는 조그만 동물이오." 나는 벽에 기름을 좀더 뿌렸다. "치사한 벌레 새끼들이지." "거기 그 깡통에 든 게 뭐지? 거기 그 깡통 말이야." "여기 이 깡통?" "그래." 우리는 조금 친해졌다. "흰개미 죽이는 약이오." 하고 나는 말했다. "그 놈들이 이걸 먹고 죽는 거요. 골드 스미드 부인에게 확실히 흰개미가 있다고 말해요." "난 골드 스미드 부인을 도대체 모르는데." "이 집 안주인 말이오. 조사해 달라고 본부로 전화했었는데." "본부?" 그는 의아스러운 듯이 되물었다. 그의 반흔 조직에 돋아난 눈썹들이 그의 작고 멍청한 눈 위로 셔터처럼 내려왔다. "흰개미 박멸협회 본부 말이오. '킬러버그' 가 흰개미 박멸협회 남캘리포니아 지부지요." "아!" 그는 이 말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 집에는 골드 스미드 부인은 없는데." "여기가 유칼립터스 레인이 아닌가요?" "아냐, 여긴 우들론 레인이야. 당신은 집을 잘못 찾았군."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군요." 라고 나는 말했다. "난 또 여기가 유칼립터스 레인인 줄 알았지." "아냐, 우들론이야." 그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고서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빨리 가봐야겠군. 골드 스미드 부인이 나를 찾겠는걸." "그럴 거야. 그런데 잠깐 기다려." 그의 왼손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는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이젠 다시는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말게. 여기서 어슬렁거릴 일은 없을 테니까."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눈은 거친 빛을 띠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금이 가고 주름이 진 입 가장 자리에 투명한 침이 한 줄 흘러나와 있었다. 주먹으로 살아가는 싸움꾼들은 불독보다도 예상하기가 어려웠고, 위험하기는 그 갑절이었다. "이것 봐." 나는 기름 깡통을 치켜들었다. 이 물건이 자네 눈을 멀게 할지도 몰라." 나는 그의 눈에 기름을 뿌렸다. 그는 지레 겁을 먹고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나는 잽싸게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오른 주먹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귓대기가 불에 덴 듯 얼얼했다. 내 와이셔츠의 칼라가 찢겨나가 그의 손아귀에서 디룽거렸다. 그는 오른손으로 기름에 흠뻑 젖은 두 눈을 싸쥐고 어린애처럼 끙끙거렸다. 그는 장님이 될까봐 겁내고 있었다. 차도를 반쯤 내려갔을 때 뒷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생울타리 가장자리를 돌아 내 차가 있는 곳과는 반대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는 걸어서 그 구역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컨버터블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고 문은 닫혀 있었지만 뷔크는 여전히 현관 차도에 서 있었다. 초저녁의 놀 속에서 나무숲 속의 그 하얀 집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늑해 보였다. 그 집 안주인이 점박이 무늬의 모피 코트를 입고 집에서 나온 것은 주위가 어둑어둑할 무렵이었다. 나는 바퀴가 뒷걸음질쳐나오기 전에 차도 입구를 지나 선세트 대로상에서 뷔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앞서보다도 훨씬 맹렬히 그러나 보다 어설픈 솜씨로 차를 몰며, 온 길을 거슬러 할리우드로 향했다. 웨스트우드, 벨 에어, 그리고 비벌리 힐스를 통과했다. 나는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모든 것의 종착점이자 또한 수많은 사연의 시발점이기도 한 할리우드와 바인의 모퉁이 근처에서 그녀는 방향을 돌려 어느 사설주차장으로 들어가서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거리에 주차한 다른 차들 곁에 차를 세우고서 그녀가 스위프트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한 숙녀처럼 화려한 모습이었다. 나는 집으로 가서 와이셔츠를 갈아입었다. 벽장 속의 권총이 나를 유혹했지만 나는 권총을 휴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생각 끝에 총집에서 총만 뽑아내어 차 안의 장갑함 속에 집어넣었다.


제 7 장. 스위프트의 주정뱅이들 스위프트의 뒷방은 번질번질한 놋쇠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어슴푸레하게 이글거리는 검은 떡갈나무 목재로 장식되어 있었다. 양옆에는 가죽 쿠션 좌석이 있는 칸막이 방들이 줄지어 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테이블로 차 있었다. 칸막이 방과 대부분의 테이블에는 고급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기다리면서 붐비고 있었다. 여자 손님들은 대부분이 탄탄한 피부에, 다이어트로 지나치게 여위어 있었다. 반면에 남자들은 남성적인 할리우드풍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무어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의 떠들썩한 말소리와 화려한 몸짓 속에는,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백만 달러짜리 계약 상대자로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고집스런 자만심이 들어 있었다. 페이 이스터브룩이 안쪽 칸막이 방에서 마주보고 있는 상대자는 청색 플란넬 옷의 팔꿈치만 보였다. 나머지는 칸막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세번째 벽에 붙어 있는 스탠드로 가서 맥주를 주문했다. "바스 에일, 블랙 호스, 카르타 블랑카, 아니면 기니스 스타우트로 드릴까요? 여기서는 6 시 이후는 국산 맥주는 팔지 않습니다." 나는 바스를 주문하고 바텐더에게 1 달러를 주며 거스름돈은 그냥 가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잔돈이 남지 않을 금액이었다. 그는 사라졌다. 나는 바 뒷벽의 거울을 바라보려고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거울 속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의 얼굴이 4 분의 3 가량 보였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진지하고 열의에 차 있었다. 입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상대방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늘 젊은 여자를 거느리는 부류의 사나이였다. 해마다 무슨 짓으로 돈을 벌어들이는지 아무도 모르는 말쑥하고 늙을 줄 모르는 사나이. 그는 바로 모리스 크램이 설명한 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소년합창단원이었다. 그의 감색 윗도리는 너무도 잘 어울렸다. 더구나 그의 목에 두룬 하얀 실크 스카프는 은발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칸막이방 곁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사나이와 악수를 했다. 그 붉은 머리 사나이가 돌아서서 방 한가운데 있는 자기 테이블로 돌아갈 때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러셀 헌트라는 메트로 영화사의 계약 대리인이었다. 은발의 사나이는 페이 이스터브룩에게 팔을 흔들어 작별을 고하고 문 쪽으로 나갔다. 나는 거울을 통해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이곳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똑바로 앞을 바라보면서 요령 있게 빠져나갔다. 그에게 있어서 이곳은 텅빈 곳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손을 흔들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가 나가자 몇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한 사나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페이 이스터브룩은 마치 그에게서 받은 병균을 주위에 퍼뜨려야겠다는 듯이 자신의 칸막이 방에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술잔을 들고 러셀 헌트의 테이블로 갔다. 그는 끝이 비뚤어진 못생긴 주먹코에 스파이처럼 번득이는 작은 눈을 가지고 있는 비만한 사나이와 마주앉아 있었다. "러셀, 사업은 어떠시오?" "여어, 루!" 그는 나를 만난 게 달갑지 않은 듯했다. 나는 기껏 일을 해야 고작 주당 300 달러를 벌어들일 뿐이니, 소작인 계급에 속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1,500 달러를 번다. 그는 시카고에서 온 전직 기자였다. 그는 첫번째 소설을 메트로에게 팔아 넘긴 이후로 다시는 새로운 소설을 쓴 적이 없었고, 촉망받던 젊은이로부터 편두통을 앓는 고약한 늙은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공수병(恐水病) 때문에 수영장에도 가지 못했다. 그가 둘째 부인과 이혼하고 셋째 부인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셋째 부인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전혀 없었다. "앉게, 앉아." 하고 그는 내가 서 있자 입을 열었다. "한잔하게. 술은 편두통을 없애준다네. 나는 내 자신을 망치기 위해서 술잔을 들지는 않네. 오로지 편두통을 없얘기 위해서야." "잠깐만." 하고 스파이와 같은 눈을 가진 사나이가 말했다. "만일 당신이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앉아도 좋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소이다." "내 대리인인 티모시일세." 하고 러셀이 말했다. "나는 이 친구에게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이고 말이야. 스테이크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저 신경질적인 손가락을 좀 보게. 그의 두 눈이 탐나는 듯이 나의 둥근 모가지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난 불길한 예감이 든다네." "또 그놈의 예감 타령인가?" 라고 티모시가 말했다. "당신도 창작하시오?" 나는 슬그머니 의자에 걸터앉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행동가입니다. 말하자면 사냥개이지요." "루는 탐정일세." 하고 러셀이 말해 주었다. "이 친구는 사람들의 떳떳하지 못한 비밀을 캐내어 분개한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게 일이지." "그럼,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야비하게 굴 수 있소?" 티모시가 유쾌한 듯이 물었다. 나는 그 농담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정보를 얻으러 왔을 뿐이지 실력을 행사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나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의자 곁에 서 있는


웨이터에게 돌아섰다. "당신이 악수한 사람은 누굽니까?" 하고 나는 러셀에게 물었다. "스카프를 맨 멋진 사나이 말인가? 페이는 그의 이름이 트로���라고 하더군. 그들은 한때 부부였지. 그러니까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은 무얼 하고 있나요?" "확실히는 모르겠어. 그 사람 여기저기 얼씬거리던데. 팜스 프링스, 라스베이가스, 타이후아나 등지에서 말이야." "라스베이가스?" "아마 그럴 거야. 페이 말로는 수입상이라더군. 하지만 진짜로 그 사람이 수입상이라면 나는 원숭이 삼촌이겠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상기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원숭이 삼촌인 모양이야. 하긴 실토하네만, 유방이 셋이나 있는 내 누이동생이 지난 성신강림절에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꼬마 침팬지를 출산했을 때 세상에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을라고. 그녀가 첫번 결혼으로 인해 그레이스토크 경 부인이 된 걸 알고 있지?" 느닷없이 그의 재잘거리던 말소리가 그쳤다. 그의 안색은 다시 암울하고 참담했다. "한 잔 더." 하고 그는 웨이터에게 말했다. "스카치를 더블로 주게. 지금 것과 똑같은 걸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웨이터는 검정 압핀과 같은 눈동자를 가진 쭈글쭈글한 노인이었다. "이 신사 어른의 주문을 받고 있으니까요." "웨이터도 내 주문은 받지 않는다네." 러셀은 절망에 빠진 듯한 익살스런 제스처로 팔을 내흔들었다. "난 별로 반갑지 않은 손님인가 봐." 웨이터는 티모시가 하는 말에 정신이 팔린 체했다. "그러나 난 기름에 튀긴 프렌치포테이토는 싫어. 오그라탱 포테이토로 주시오." "죄송하지만, 여기는 '오 그라탱 포테이토'는 없습니다." "만들지 못하나?" 티모시는 들창코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물었다. "35~40 분 가량 걸립니다." "제기랄!" 티모시가 내뱉었다. "무슨 놈의 싸구려 음식점이 이 모양이야. 러셀, 체이슨으로 가세. 난 꼭 '오 그라탱 포테이토'를 먹어야만 하겠네." 웨이터는 우두커니 서서 그를 먼 거리에서 보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페이 이스터브룩이 자신의 테이블에서 여전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난 체이슨엔 들어가지 못한다네." 라고 러셀이 말했다. "왜냐하면 난 코민포름 (소련 공산당 정보국. 1947~1956) 의 스파이이기 때문이야. 나는 나치당원을 악당으로 하는 시나리오를 썼지. 그래서 코민포름의 스파이가 되었다네. 여보게들, 거기서 내 돈이 나오고 있단 말이야. 모스크바 냄새가 나는 금화 말일세." "그만두시죠." 하고 내가 말했다. "페이 이스터브룩을 압니까?" "조금 알지. 몇 해 전에 그녀를 출세시켜 주었거든. 또 앞으로 몇 해 지나면 그녀를 몰락시켜 줄 거야." "나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겠소?" "왜?" "나는 항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했죠." "믿지 못하겠군, 루. 하긴 그녀는 자네 짝이 될 만한 나이이긴 하겠군." 나는 그가 알아들을 만한 말로 이야기했다. "나는 기억할 수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녀를 사모해 왔죠." "저 사람이 원한다면 소개해 주지 그래." 하고 티모시가 말했다. "사냥개들은 나를 신경질나게 하거든. 그래야만 내가 '오 그라탱 포테이토'를 조용히 즐길 수 있잖겠나." 러셀은 마치 자기의 붉은 머리가 천정이라도 받치고 있는 듯이 힘들게 일어섰다. "안녕히 계시오." 하고 나는 티모시에게 말했다. "저자들이 당신 덜미를 잡고 밀어내기 전에 종업원들과 적당히 재미나 보시오." 나는 내 술잔을 들고 러셀을 끌고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에게 내 직업은 이야기하지 마십시오."하고 나는 그의 귓속에다 대고 말했다. "아무려면 자네의 치부를 공적으로 밝힐 난가? 사적으로 밝히는 건 별문제이지만. 난 자네의 치부를 사적으로 밝히는 건 좋아하네. 난 자네의 치부가 무척 좋단 말이야." "그러나 그건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닙니다. 장래의 나를 위해 제발 남겨두시지요. 나중에 그래프트 에빙 정신병 진료소를 통해 내게 보내주십시오." 이스터브룩 부인은 마치 검은 탐조등과 같은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페이, 이분은 루 아처요. 스파이야. 국제공산당의 스파이. 이 사람이 당신을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사모해 왔다는구려." "멋진데요!"하고 그녀는 아까 어머니 역에 쏟았던 어조로


말했다. "앉으시지 않겠어요?" "고맙습니다." 하며 나는 그녀 맞은편의 가죽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네만..."하고 러셀이 말했다. "난 티모시를 보살피러 가야겠네. 그는 지금 웨이터에게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야. 내일 밤에는 그 친구가 나를 돌볼 차례라네. 제기랄!"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의 미로(迷路) 속을 헤매면서 칸막이 방에서 나가버렸다. "이따금 기억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에요."하고 그 여자는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떠나가 버렸죠. 그들 모두가 잊혀져 버렸고요. 헬렌, 플로렌스, 그리고 메이... 그들은 모두가 떠나가 버렸고, 또 잊혀져 버렸어요." 절반은 거짓이요 절반은 진짜인 포도주에 취한 그녀의 감상적인 말은 러셀의 절망적이고 터무니없는 말과는 상쾌할 정도로 딴판이었다. 나도 내 역할을 해야 했다. "그와 같이 지상의 영광은 사라지도다... 헬렌 채드윅은 당시에 위대한 연기자였죠.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쟁쟁하잖습니까?" "아처 씨, 나는 아직도 손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할리우드는 생명력이 다한 것 같아요. 우린 늘 영화 제작에 애를 썼지요. 정말로 애를 많이 썼어요. 나도 한창 때는 주당 3,000 달러 정도를 벌었죠. 하지만 우린 돈을 위해서 일하진 않았어요." "연기가 문제이지요." 남의 말을 인용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럼요. 연기가 문제였어요. 하지만 이젠 그렇지가 않아요. 할리우드는 성실성을 잃어버렸어요. 할리우드엔 아무런 생명력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할리우드에도 내게도 전연 생명력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녀는 절반 남은 셰리주 병에서 마지막 잔을 따르더니 천천히, 그리고 서글픈 표정으로 죽 들이켰다. 나도 천천히 술잔을 들이켰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하고 나는 활짝 벌어진 털코트가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풍만한 육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육체는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꽉 조인 허리, 불룩한 유방, 암포라 항아리 같은 궁둥이, 그리고 미묘할 정도로 끈질기게 풍기는 여성적인 매력. 다시 말하면 고양이가 풍기는 것과 같은 동물적인 자부심으로 생기를 띠고 있었다. "아처 씨, 난 당신이 좋아요. 당신은 매우 동정적이로군요. 당신, 언제 태어났는지 말해 보세요." "생년 말인가요?" "생일 말이에요." "유월 초이틀이오." "정말인가요? 나는 당신이 쌍동이자리일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쌍동이자리 사람들은 인정이 없어요. 그들은 쌍동이들과 똑같이 이중 성격의 소유자들이지요. 그리고 생활도 이중적이에요. 아처, 당신은 인정사정 없는 사람인가요?"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을 크게 뜨고서는 내게 가까이 기대어왔다. 나는 그녀가 나를 놀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난 만인의 친구랍니다."하고 나는 그녀의 마력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말문을 열었다. "어린애들과 강아지들이 나를 좋아하죠. 나는 꽃도 키우고 정원도 가꾼답니다." "당신은 비웃고 있군요."하고 그녀는 토라진 듯이 대꾸했다. "난 당신이 동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은 공삼궁좌 (空三宮座)에 있고 나는 해중 (海中)에 있어요." "그렇다면 우린 기막히게 멋진 해공 합동구조대를 조직할 수 있겠군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점성술을 믿지 않으세요?" "당신은?" "물론 나는 믿어요. 과학적인 방법으로 말예요. 당신도 증거를 보시면 결코 부정하지 못해요. 예를 들면, 나는 게자리예요.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내가 게자리 타입이라는 걸 알아보지요. 난 감정이 섬세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요. 그리고 사랑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새끼손가락 끝에서 나를 비틀어버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난 필요하다 생각되면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답니다. 다른 게자리 사람들처럼 나도 결혼생활이 불행했어요. 아처 씨, 당신은 결혼하셨나요?" "지금은 아닙니다." "결혼한 적은 있었다는 뜻이군요. 당신은 재혼할 거예요. 쌍동이자리 사람들은 언제나 재혼하지요. 그리고 연상의 여인과 재혼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몰랐소." 그녀의 억지스러운 음성이 내 균형을 조금 잃게 하고 있었고, 대화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지배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당신 이야기는 무척 자신만만하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 건 진실이에요." "그렇다면 직업적으로 나서야겠습니다. 설득력이 있는 장광설을 청산유수로 구사한다면 돈을 벌 수 있지요." 그녀의 솔직한 눈동자가 좁아지더니 마치 성채의 총안(銃眼)과 같은 두 개의 검은 동전 구멍처럼 되어버렸다. 그런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전략적인 판단을 내리고서는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순진성이 괴어 있는 검은 웅덩이였다. 마치 독약을 뿌린 우물과 같았다. "오, 천만에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이 짓을 직업적으로


하진 않아요. 그건 내게 주어진 재주, 말하자면 천부적인 재능이지요. 게자리는 심령적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그 재능을 사용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코 돈을 벌기 위한 건 아니에요. 오로지 나의 친구들을 위한 거예요." "하여튼 당신은 다른 수입처를 가지고 있으니 다행이군요." 다리가 가는 유리잔이 그녀의 손가락에서 굴러떨어져 테이블 위에서 두 동강이 났다. "그래서 당신은 쌍동이자리라는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항상 사실만을 찾고 있으니까." 나는 한가닥 의혹을 느꼈으나 이내 훌훌 털어버렸다. 그녀는 무작정 총을 쏘다가 우연히 과녁을 맞춘 셈이리라. "무얼 캐물어 보려고 한 건 아닙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오, 알고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일어났다. 나는 그녀의 몸이 나를 짓누르는 걸 느꼈다. "아처 씨, 여기서 나가요. 또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요.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다른 곳으로 가시죠." "그럽시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빳빳한 지폐를 놓고 묵직한 위엄을 보이며 걸어서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는 놀랄 만한 성과에 기분이 흐뭇하긴 했지만 마치 암커미에게 먹히는 운명에 처한 수커미 같은 기분이 들었다. 러셀은 머리를 두 팔에 묻고 앉아 있었다. 티모시는 마치 아무런 방어력도 없는 조그만 동물을 구석에 몰아넣고 사납게 짖어대는 테리어 종 개처럼 웨이터장(長)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 웨이터장은 그에게 '오그라탱 포테이토' 는 15 분 뒤에 준비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제 8 장. 한물 간 여배우 헐리우드의 루즈벨트 술집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은 공기가 나쁘다고 투덜거리며, 비참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젊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말라고 내가 말했지만 결국 우리는 '지브라 룸'으로 술집을 옮겼다. 그녀는 술을 아일랜드 위스키로 바꾸고, 더군다나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지부라 룸'에서는 옆좌석 사나이가 비웃는 눈초리를 보냈다고 그녀는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나는 그녀에게 바깥 바람을 쐬러 나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돌입하려는 듯이 윌셔까지 차를 몰았다. 나는 앰배서더에서 그녀의 뷔크를 세워달라고했다. 나는 스위프트에 차를 두고왔던 것이다. 앰배서더에서는 바텐더가 그녀에게 등을 돌리면서 자기를 비웃었다고 하며 그녀는 그와 다투었다. 나는 그녀를 '한툰 파크'의 지하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그렇게 붐비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는 곳마다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일어서서 인사하거나


우리 자리로 합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웨이터까지도 그녀를 떠들썩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낙오자였던 것이다. '한툰 파크'엔 건너편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아베크 족 이외에는 손님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텅 비어 있었다. 두툼한 융단, 부드러운 조명. 이 지하실은 우리가 지샌 밤을 장사지내는 장례실이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마치 시체처럼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정신을 잃진 않아서 눈도 멀쩡했고, 떠들고 마시고, 심지어 생각하는 것에도 무리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발레리오 술집 쪽으로 그녀를 유도하여, 그녀 쪽에서 그 술집 이름을 말해 주기를 바랬다. 그러다가 몇 잔을 더 마신 뒤에 내쪽에서 먼저 술집 이름을 꺼내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도 함께 마셔댔지만 아직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쪽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취해서 무슨 말이라도 지껄여주기를 기다렸다. 쌍동이자리의 아처는 망각을 일깨워주는 조산원이었다. 나는 술집의 안쪽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 쌍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갈수록 야위어, 마치 식인종과 같은 얼굴이었다. 코는 가늘고 귀는 지나치게 찌부러져 있었다. 눈꺼풀은 바깥 모서리에서 축 처져 있어서 내 눈은 내가 좋아하는 삼각형으로 보였다. 오늘밤 내 눈은 눈꺼풀 속에 박힌 얇은 돌쐐기와도 같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스탠드 위로 몸을 내밀고서 절반 빈 리큐르 잔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과 얼굴을 반듯이 지니게 했던 자존심은 이미 흘러나와 버렸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밑바닥의 괴로움을 되십으며 인생의 비가(悲歌)를 읊조리고 있었다. "그이는 자기 몸도 가누지 못했어요. 레슬링 선수와 같은 몸에다 인디언 추장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이에겐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었어요. 그러나 그이에겐 남다른 점은 없었어요. 상냥한 분이었지요. 조용하고, 침착하고, 별로 말이 없었고, 정열적이었어요. 그분처럼 정절을 지킨 남자도 없을 거예요. 그분은 폐결핵에 걸려 어느 여름에 죽어버렸지요. 그걸로 난 만신창이가 되어 벗어나지 못했지요. 내가 정말로 사랑한 건 그분 뿐이었어요." "이름은 뭐라고 했죠?" "빌이에요." 그녀는 교활한 듯한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그분은 우리 회사의 지배인이었어요. '협곡 1' 이라는 커다란 땅 하나가 우리 것���었어요. 우리는 1 년쯤 함께 살다가 그이가 죽었지요. 25 년 전 이야기예요. 나 자신도 그때 죽은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녀는 눈물이 없는 커다란 눈을 들어 거울 속의 내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그녀의 우울한 얼굴에 응해 주고 싶었지만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웃으며 내 자신을 격려했다. 결국 나는 착한 놈이었다. 깡패들과 매음부들, 나쁜 놈들과 어수룩한 놈들... 나는 그들과의 공모자였고, 부정한 침실의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는 사립탐정이었고, 의처가의 밀고자였으며, 간막이 벽 뒤에 스며드는 비열한 놈이었고, 일당 50 달러면 아무에게도 총잡이로 고용되는 그런 놈이었다. 그러나 나는 착한 놈이었다. 그런 결과로, 눈꼬리와 볼때기에 주름이 잡히고 입술은 까져 이빨이 드러났다. 미소라고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얻은 것은 늑대의 웃음과 같은 바싹 마른 굶주린 표정 뿐이었다. 그 얼굴은 술집이나 형편없는 호텔, 싸구려 사랑의 보금자리, 법정과 감옥, 검시와 경찰들, 그리고 고문당한 벌레처럼 드러난 말단신경을 너무나 많이 본 얼굴이었다. 만일 내가 남에게서 이런 얼굴을 본다면 나는 그 얼굴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얼굴이 미란다 샘프슨에겐 어떻게 보이는지 무척 궁금했다. "사흘 동안의 파티는 지겨워."하고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승마도 에메랄드도 보트도 지겨워. 좋은 친구 하나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나아요. 내겐 좋은 친구가 없어. 심 쿤츠는 자기가 내 친구라고 하고, 내 마지막 영화를 찍고 있다고 말해요. 나는 25 년 전에 인생을 몽땅 살아버렸어요. 나는 이젠 지쳐버렸다고요. 아처, 당신은 나와 어울리고 싶은가 보죠?" 그녀 말이 옳았다. 나는 내 직업을 떠나서도 그녀에게 흥미가 있었다. 그녀는 영화(榮華)의 절정에서 오랫동안 굴러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촬영소의 감독에게서 그녀가 배운 엉터리 정확성과 같은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저속하고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거칠었다. 그 목소리는 금세기 초엽에 디트로이트나 시카고, 인디애나폴리스의 뒷골목에 살면서 그녀가 배운 것이었다. 그녀는 술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아처, 집까지 바래다 줘요." 나는 기둥서방처럼 민첩하게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집에 갈 순 없소. 기분나게 한잔 더 합시다." "당신은 친절한 분이셔." 나는 그녀의 비웃음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다. "이곳은 참기 어려워요. 시체실 같아. 제기랄!"하고 그녀는 바텐더에게 소리를 질렀다. "광대들은 모두들 어디 있나요?" "부인, 당신은 광대가 아닌가요?" 또 싸움을 벌이려 하기에 나는 그녀를 끌고 계단을 올라 바깥으로 나갔다. 안개가 조금 끼어 있어서 네온이 약간 희미하게 보였다. 즐비한 빌딩 위로 별 하나 없는 하늘이 우중충하고 낮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녀의 팔에서 전율을 느꼈다.


"다음 거리에 좋은 술집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발레리오 말예요?" "아마 그럴 거요." "좋아요. 한잔 더 하고 나서 집에 가야지." 나는 그녀의 차 문을 열고 부축해서 태워주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내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나는 물러섰다. 나는 깃털을 채운 베개가 좋지, 추억이나 좌절감으로 가득찬 복잡한 베개는 싫었다. 발레리오 술집의 웨이트레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를 맞이해서는, 박스로 안내하곤 재떨이를 비워주었다. 미끈한 얼굴의 희랍인 청년 바텐더가 박스까지 일부러 나와서 그녀에게 인사하고 샘프슨 씨의 안부를 물었다. "그분은 아직 네바다에 계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내 얼굴의 표정을 알아차렸다. "랠프는 나와 아주 친한 친구예요. 여기 오면 내게 들르지요." 두 구역을 차를 몰고 왔기 때문인지, 환영이 깍듯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물론 나의 오해였는지도 모르지만. "훌륭한 어른이시죠."하고 바텐더가 말했다. "요즘은 못 뵈었습니다만." "랠프는 참으로 멋진 분이에요."하고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상냥하고요." 바텐더는 우리의 주문을 받고서 돌아갔다. "그분의 점도 쳐봤습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아주 친하다는 친구분 말입니다." "오, 어떻게 알았죠? 그이는 염소자리예요. 상냥한 분이지만 대단히 지배적인 형이에요. 하지만 그이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답니다. 외아들이 전사했어요. 랠프의 태양은 천왕성의 앙갚음을 받아요. 염소자리의 사람에겐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모르죠.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물론이죠. 랠프는 신앙심이 점점 깊어가고 있답니다. 천왕성이 랠프의 적이지만, 다른 행성들은 그의 편이에요. 그걸 알고서 랠프는 용기를 얻었지요." 그녀는 밀담을 하는 양 내게 몸을 기댔다. "내가 그분을 위해서 꾸민 방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 방은 이곳 방갈로에 있는데, 우릴 들여보내진 않을 거예요." "그분은 지금 이곳에 계신가요?" "아니에요. 네바다에 계세요. 그분은 사막에 아주 멋진 집을 가지고 있죠." "그 집에 가보셨나요?" "당신은 질문이 많아요." 그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애교를 떨면서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질투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친구가 없다고 내게 말했잖소?"


"그랬나요? 랠프를 잊고 있었나 봐요." 바텐더가 술을 가져왔다. 나는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나의 눈은 방의 뒷면을 향하고 있었다. 울리지 않는 그랜드 피아노 옆 벽면의 문이 발레리오 호텔의 로비 쪽으로 열렸다. 앨런 태거트와 미란다가 함께 들어왔다. "실례합니다."하고 나는 이스터브룩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일어서자 미란다가 나를 보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한 손가락을 입에 대고 다른 손을 저어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당황한 눈빛을 하고서 물러갔다. 앨런은 보다 민첩했다. 그는 미란다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문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갔다.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고, 웨이트리스는 단골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이스터브룩 부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미란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은 아버지를 찾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난 계약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제발 들어가지 마시오." "하지만 난 당신에게 연락하려고 애를 썼는데요." 그녀는 긴장하여 울상이 되었다. 나는 태거트에게 말했다. "내 야간작업을 망치지 않도록 미란다를 데려가시오. 가능하면 시외로." 페이를 세 시간이나 상대하고 있노라니까 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샘프슨 부인이 전화로 당신을 찾던데요?"하고 그는 말했다. 필리핀 인 벨보이가 벽에 기대어서서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희미한 로비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데?"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대요." 미란다의 눈동자가 사슴의 눈처럼 호박색으로 이글거렸다. "등기속달로 왔어요. 어머니더러 돈을 보내라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보내지는 말고 준비하라는 거예요." "얼마를?" "10 만 달러." "다시 이야기해 봐요." "10 만 달러 어치의 증권을 현금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만큼 갖고 계신가요?" "가지고 있지는 않아도 만들 수는 있어요. 버트 그레이브스가 위임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그 돈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요?" "아버지 말로는 다시 연락하거나 심부름꾼을 보내시겠대요." "편지는 틀림없이 아버지가 보내신 거요?" "엘레인이 아버지의 필적이라고 해요." "어디 계신다고 했소?" "그런 건 없고, 편지의 소인은 산타 마리아예요. 아버진 오늘 그곳에 계셨을 거예요."


"꼭 그렇지는 않지. 그런데 샘프슨 부인은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말씀은 없었어요. 의견을 듣고 싶은 거겠죠." "알았소. 이렇게 합시다. 어머니에게 돈을 준비하라고 해요. 하지만 아버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증거 없이는 아무에게도 돈을 건네주지 말아요."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한 손이 드레스의 깃을 잡아당겼다. "난 짐작할 겨를이 없소." 나는 태거트에게 돌아섰다. "오늘밤 미란다를 비행기로 보낼 수 있겠소?" "방금 산타 테레사에 전화를 했더니 공항이 안개에 싸여 있답니다. 내일 아침에 첫편으로 보내죠." "그럼 샘프슨 부인에게 전화로 전해요. 나는 가망 있는 단서를 잡고서 추적하고 있다고. 그레이브스에게는 경찰에 조용히 연락해 두는 게 좋겠다고 하시오. 그리고 지방경찰과 로스앤젤레스 경찰, FBI 에게도." "FBI 에게?"하고 미란다가 소곤거렸다. "그렇소." 하고 나는 말했다. "납치는 FBI 소관이오."

제 9 장. 암흑가의 보스 바에 돌아오니까 턱시도(연비복) 를 입은 젊은 멕시코 인이 기타를 들고 피아노에 기대어서 있었다. 그는 애조를 띤 희미한 테너로 스페인 투우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손가락은 천둥치듯 기타줄을 타고 있었다. 이스터브룩은 그 사나이를 쳐다보느라고 내가 옆에 앉아도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큰소리로 박수를 치고 그 사나이를 우리 자리로 불렀다. "바발루를 부탁해요." 하며 그녀는 그에게 1 달러를 주었다. 사나이는 고개를 숙이고 싱긋이 웃고서 돌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랠프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도밍고는 저 노래를 아주 잘 불러요. 그분에겐 순수한 스페인 피가 흐르고 있어요." "당신 친구라는 랠프 말인데... " "랠프가 어떻게 됐나요?" "나와 함께 이런 데 온 걸 화내지 않나요?" "어리석은 소리 마세요. 언젠간 그이를 소개해 주고 싶어요. 당신도 그분을 좋아할 거예요." "지금 무얼 하시나요?" "은퇴한 셈이죠. 돈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왜 그분과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큰소리를 내어 웃었다. "내게 남편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그분 걱정할


건 없어요. 순수한 사업상의 친구이니까." "당신이 사업을 한다는 건 몰랐는데요." "내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나요?" 그녀는 또 소리를 내어 웃었지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기운찬 웃음이었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날더러 왜 랠프와 결혼하지 않았느냐고요? 재미있군요. 두 사람은 각자 결혼했는데... 하여튼 우리들의 우정은 차원이 달라요. 보다 더 정신적인 거예요." 그녀는 나의 취기까지 깨놓았다. 나는 술잔을 들었다. "우정을 위하여, 차원이 다른 우정을 위하여." 그녀가 술잔에서 입을 떼기 전에 나는 웨이트리스에게 손가락을 둘 올려보였다. 두 잔째가 그녀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 자체의 무게 때문인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둔탁해진 눈은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입은 하품을 연발하며 떡 벌리고 있었고, 빨간 입술에 핑크와 백색의 입안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입을 마비된 듯이 다물며 소곤거렸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데." "집까지 바래다 드리죠." "친절도 하셔라." 나는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웨이트리스가 이스터브룩에게 동정의 눈초리를 보내며 나를 흘겨보고는 열린 문을 붙들어주었다. 이스터브룩은 지팡이를 잃은 노파처럼 길에서 비틀거렸다. 나는 술 때문에 다리 힘이 온통 빠진 그녀를 부축하며 주차장까지 갔다. 그녀를 차에 태우는 건 석탄 부대를 싣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가 문과 좌석 등 사이의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는 차를 몰고 태평양 연안도로로 향했다. 차의 동요 때문에 잠시 뒤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집에 데려다 줘요." 그녀는 멍청하게 말했다. "어딘 줄 아세요?" "들어서 압니다." "내일 아침엔 지겨운 일을 해야 돼요. 제기랄! 그가 나를 영화계에서 쫓아내면 난 틀림없이 울어야 할 거야. 생활이야 할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여류사업가로 보이는데요." 나는 용기를 북돋아주듯이 말했다. "아처, 당신은 친절한 분이시네요." 이 대사에 나는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노파를 돌보아주시다니. 내가 어디서 돈을 벌고 있는지 듣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도 나를 싫어할 거예요." "어디 한번 들려주시오." "하지만 당신에겐 말 못해." 그녀의 웃음소리는 추악하고 흐트러진 음성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조소를 품고 있는 듯이 들렸는데, 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이에게는 보기 드문 상냥한 분이시네요." 그렇고말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확실히 나는 미국형 남자다. 숙녀가 도랑에 넘어질 것 같으면 언제나 기꺼이 손을 빌려주는 사나이. 숙녀는 술에 곯아떨어져 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쯤 의식을 잃은 그녀와 한밤중의 대로를 차를 몰고 간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얼룩무늬 코트를 입은 그녀의 육체는 나이를 먹어 무거워진 산고양이나 표범이 옆좌석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는 그렇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다. 기껏 50 살 정도였지만, 나이값만큼 완전히 늙어 불쾌한 과거의 추억이 철저히 발효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과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또 그 이상 알아내기엔 나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녀는 샘프슨이나 그 밖의 누구이든 간에 경솔한 인간에게는 나쁜 친구라는 점이다. 그녀의 패거리들은 위험했다. 거칠고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만일 샘프슨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녀는 그걸 알고 있거나 탐지하고 있거나 할 것이다. 그녀의 집 앞에서 차를 멈추자 그녀는 눈을 떴다. "차를 차고에 들여놓으세요. 부탁합니다." 나는 노상에서 차를 후진시켜 차고에 집어넣었다. 현관 계단을 오르는 데도 손을 빌려주어야 했다. 그녀는 문을 열어달라고 내게 열쇠를 주었다. "들어오세요. 마시고 싶은 걸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괜찮습니다. 바깥주인은?" 그녀는 콧구멍에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 몇 해 동안 함께 살고 있지 않아요."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두 가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향 냄새와 술 냄새. 다시 말하면 동물 냄새와 인간 냄새였다. 빤질빤질하게 초를 먹인 바닥에 발을 내려놓으며 나는 그녀가 미끄러져 넘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나 제 집에 들어선 그녀는 눈을 감은 몽유병자와 같은 정확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나는 발끝으로 더듬으면서 뒤를 따라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녀는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어둠 속에서 부상된 그 방은 그녀가 랠프 샘프슨을 위해 설계한 붉은 방과는 조금도 닮은 데가 없었다. 밤이어서 베니스식 차일이 온통 내려져 있었지만 그런대로 커다랗고 쾌적한 방이었다. 벽에 후기인상파 그림의 복제품이 서너 장 걸려 있고, 만들어 붙인 책장에는 책이 꽂혀 있었으며, 전축과 레코드 케이스, 광택이 나는 벽돌로 된 벽난로 앞에는 묵직한 지방색이 깃든 긴의자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견실한 중류계급의 방이었다. 한가지 이상한 건 긴의자와 전등 밑 안락의자에 씌워놓은 의자 커버의 무늬였다. 하얀 사막의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녹색의 열대수가 솟아 있었는데, 그 잎 사이로 눈알이 하나씩 내다보는 무늬였다. 그것은 보고 있는 사이에 무늬가 변했다. 눈알이 사라졌다가 또 나타났다. 나는 그 눈알의 덩어리 위에 엉덩이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난로 곁의 구석에 꾸며놓은 스낵 바에 서 있었다. "무얼 마시겠어요?" "위스키와 물." 그녀가 유리잔을 들고 왔다. 도중에 유리잔 속의 술이 절반은 쏟아져 연한 녹색의 융단에 거무튀튀한 오점으로 점점이 묻었다. 그녀는 소파의 쿠션을 깊숙히 가라앉히면서 내 곁에 걸터앉았다. 검은 머리가 내 어깨 쪽으로 기울어져 와서는 그대로 멈췄다. 머리카락을 염색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미용사가 일부러 염색하지 않고 남겨둔, 약간의 잿빛 머리카락까지 잘 보였다. "난 뭘 마시고 싶은지 생각이 안 나요."하고 그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세요." 나는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의 어깨 폭은 내 어깨만했다. 그녀는 내게 기대왔다. 그녀의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가 느껴졌지만 그것도 점점 가라앉았다. "이봐요,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난 오늘밤엔 송장이에요. 다른 날 밤에나..."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쩐지 계집애 목소리 같았지만 흐리멍덩했다. 그녀의 눈 속의 젊음도 해저의 안광과 같이 희미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시들어가는 눈꺼풀에 떠오른 혈관에서 그녀의 심장의 고동소리의 아련한 전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구부려 놓은 짙은 속눈썹이 눈꺼풀의 가장자리를 수놓고 있었는데, 그것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잔재이며 그녀의 늙어빠진 모습을 결정적으로 처참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잠들었을 때가 오히려 쉽게 동정이 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자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가만히 그녀의 눈꺼풀 하나를 들어올려 보았다. 대리석과 같은 하얀 안구가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내 팔을 풀고 그녀의 몸에 쿠션을 받쳐주었다. 드레스의 가슴 부분이 엇갈려 있고 양말도 비틀려 있었다. 그녀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옆방에 가서 문을 잠그고 전등을 켰다. 전등은 천장부터 조화를 가운데에 꾸며놓은, 탈색 마호가니 재(材)로 만든 번득번득한 테이블이며, 한쪽 면에 있는 자기(瓷器)로 된 옷장이며, 반대켠의 만들어 붙인 식기선반이며, 아랫벽에 바짝 붙여놓은 다리가 여섯 개인 육중한 의자 등을 비추었다. 나는 전등을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조촐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한 순간 나는 이 여자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한 점성술사나 죄없는 주정뱅이는 얼마든지 있다.


그녀의 집은 로스앤젤레스 주에 있는 몇 십만이나 되는 다른 집들과 다를 것이 없었고, 사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전형적이었다. 단지 커다란 차고와, 차고를 지키는 불독처럼 생긴 사내만이 특이할 뿐이다. 욕실 벽은 파스텔 블루타일로 되어 있었고, 네모진 남색 욕조가 들어차 있었다. 세면대 위의 선반에는 강장제 특허약, 크림과 물감, 그리고 파우더, 루미놀, 넴부탈, 베로날 등이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우울증 약병과 약상자가 세면대, 빨래 바구니, 양변기 뚜껑 뒤까지 넘쳐 있었다. 빨래 바구니 속의 옷가지는 여자 것이었다. 칫솔도 케이스에 든 것 하나 뿐이었다. 면도기는 있었지만 면도용 크림은 없었고, 도대체 남자용품이란 전혀 없었다. 욕실 옆 침실은 전쟁 전의 감상적인 희망처럼 분홍 일색으로 아름답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침대 곁 테이블에는 우주에 관한 책이 한 권 얹혀져 있었다. 옷장에는 여자옷 뿐이었고, 대부분이 '삭스'나 '마그닌'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장농 속의 내복이나 잠옷은 복숭아색과 연한 남색, 또는 검은색 레이스였다. 두 번째 서랍 속에 있는 꼬깃꼬깃한 양말 뭉치 밑을 들여다보다가 이 집의 이상한 핵심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고무줄로 묶어놓은 좁다란 꾸러미가 늘어서 있었다. 그 꾸러미는 1 달러와 5 달러, 10 달러짜리 지폐 다발이었다. 지폐는 대부분이 낡고 더러웠다. 만일 이 꾸러미가 전부 내가 조사한 것과 똑같다면, 서랍 밑바닥에는 8 천 내지 1 만 달러의 돈이 들어 있는 셈이다. 나는 웅크리고 앉아서 돈을 바라보았다. 침실의 서랍은 돈을 감추는 데 좋은 장소는 못 된다. 그러나 자기의 수입원을 밝힐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은행에 맡기는 것보다 안전하다. 전화의 벨소리가 불이 붙은 듯 울려 마치 치과의사가 이를가는 소리처럼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깜짝 놀라 뛰어 일어났다. 전화기가 있는 현관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서랍문부터 닫았다. 거실에 있는 여자에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넥타이로 목소리를 위장했다. "여보세요." "트로이 씨예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예, 그렇소." "페이 있어요?" 그녀는 말씨도 빠르고 발음도 생략되어 있었다. "난 베티예요." "페이는 없는데." "저 말예요, 트로이 씨, 약 한 시간 전에 페이가 발레리오에 뛰어들었어요. 함께 들어간 남자는 형사 같아요. 그 남자가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어요. 트럭이 지날 때 그런 남자가 있으면 곤란해요. 게다가 당신은 술에 취했을 때의 페이를 아시잖아요." "알고말고."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물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거요?" "물론 '피아노'에 있죠." "랠프 샘프슨이 거기에 있나?" 그녀는 대답 대신에 깜짝 놀란 듯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전화선 저쪽 끝에서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며, 접시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마 레스토랑인 모양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왜 내게 묻죠? 난 최근에 그분을 못 봤는데." "어디 있나?" "난 몰라요. 그런데 누구시죠? 트로이 씨예요?" "물론이야. 내가 페이를 혼내 줄 거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 현관문 손잡이가 내 뒤에서 가볍게 찰칵 소리를 냈다. 전화기에 손을 건 채 나는 공포에 얼어붙어, 커트글라스 (세공유리) 손잡이가 천천히 돌며 거실에 전등이 갑자기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갑자기 홱 하고 열리고 가벼운 톱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은발 머리에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그는 마치 무대에 나타나는 배우처럼 안으로 들어와 왼손으로 문을 깍듯이 닫았다. 그의 오른손은 톱코트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호주머니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나는 그와 마주섰다. "당신 누구요?" "질문에 대해서 되질문하는 게 실례라는 걸 알아." 그의 목소리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남부 영국인의 억양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부드럽게 들렸다. "당신은 누구지?" "강도라면-- ?"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무거운 것이 내 쪽을 향하여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태도가 더욱 불손해졌다. "여보게, 난 간단한 질문을 했을 뿐이야. 간단히 대답하게." "이름은 아처."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머리를 감을 때 푸른 물감을 사용하시오? 내겐 그게 잘 듣는다고 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노여움을 보다 명확하게 표시했다. "난 경솔한 폭력은 싫어. 제발 이걸 휘두르지 않게 해주게." 나는 그의 머리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정성들여 가른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는 골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은 무섭군."하고 나는 말했다. "이탈리아계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지." 그의 호주머니의 권총은 작지만, 현관을 냉각시키는 고성능 냉동장치 같았다. 그의 두 눈은 벌써 얼음장 같았다. "직업이 무언가, 아처?" "보험회사 직원이오. 내 취미는 총잡이를 위해서 허리를 굽히는 거요." 나는 그에게 보험관계의 모든 설명이 적힌 회사 명함을 보여주려고 지갑을 더듬었다.


"아니, 손은 내가 보이는 곳에 내놓게. 그리고 주둥아리 놀리는 걸 조심해, 알겠어?" "그야 알고말고요. 당신에게 보험을 권하진 않겠소. 총을 가지고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에겐 좋은 고객이 아니라서." 이 말의 뜻을 알면서도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이 집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페이를 데리고 왔소." "그녀를 알고 있나?" "그렇소. 당신은?" "내가 묻고 있는 거야.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소." "어서 돌아가는 게 좋을걸." 나는 수화기를 들어 택시를 불렀다. 그는 경쾌하게 내게 다가왔다. 왼손이 나의 가슴과 겨드랑이 밑을 뒤지고 옆구리부터 허리까지 더듬어 내려갔다. 권총을 차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녀석에게 수색당하는 건 불쾌했다. 이 녀석은 사내인지 계집앤지 모르는 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발자국 물러나서 권총을 내게 보였다. 니켈을 씌운 리볼버로 32 구경이 아니면 38 구경이었다. 나는 그를 쓰러뜨리고 권총을 빼앗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살짝 굳어져 총구멍이 마치 동공처럼 초점을 맞추었다. "안돼..."하고 그가 말했다. "난 권총이 빨라, 아처. 자네에겐 찬스가 없어. 자, 돌아서게." 나는 돌아섰다. 그는 권총으로 내 콩팥 위쪽의 등을 쑤셔댔다. "침실로 들어가게." 그는 나를 전등이 켜진 침실로 들어가도록 문을 마주보게 했다. 나는 그가 재빠르게 방을 가로질러 서랍을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권총이 나의 콩팥으로 되돌아왔다. "이 방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난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소. 페이가 전등불을 켰었지." "페이는 지금 어디 있나?" "현관 방에." 그는 나에게 이스터브룩 부인이 긴의자 등에 누워 있는 방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죽은 듯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코는 골지 않았다. 한 팔이 마치 과식한 흰 뱀처럼 마룻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술에 찌든 육체에 대한 비난이 담겨져 있었다. "페이는 술을 삼갈 수가 없군." "우린 함께 마시고 다녔소."하고 나는 말했다. "멋지게 술판을 벌렸지." 그는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그런가? 그런데 왜 당신은 이런 벌레주머니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갖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그렇게 말합니까?" "내 아낼세." 그의 콧구멍이 살짝 비뚤어지는 것을 보니 그의 얼굴도 변할 것 같았다. "정말이오?" "아처, 난 질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아내에게서 손을 떼라고 당신에게 경고해야겠네. 내 아내에겐 많지는 않지만 패거리들이 있는데, 당신은 그들과 어울리진 못할걸. 페이는 물론 아주 붙임성이 있지. 나는 페이보다 못하지만, 페이의 패거리 중에는 붙임성이 조금도 없는 놈이 있어." "그들도 당신처럼 수다스럽소?" 그는 조그마한 이빨이 고르게 돋은 잇몸을 드러내 보이고 재빠르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의 상반신이 기울자, 동시에 그의 고개도 젖혀져서 전등 불빛이 번뜩였다. 그의 모습은 불쾌했다. 그는 노인의 가면 뒤에서 빈틈없이 기를 쓰고 움직이는 불량소년 같았다. 권총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은바퀴처럼 빙빙 돌다가 나의 심장을 겨누고 멎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표현방식이 다르지. 나도 내 정체를 뚜렷이 밝혀줄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소." 식은땀이 내 등에 흘렀다. 택시의 경적이 거리에서 울렸다. 그는 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내가 나갈 때까지 붙들어 주었다. 바깥은 집안보다 따뜻했다.

제 10 장. 미치광이 피아노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덕분에 빈 차로 돌아가지 않게 됐습니다. 말리부까지 끌고 갔거든요. 거지 네 명이 해변 파티에 불려나갔죠. 그들은 바다엔 아예 가지도 않을 겁니다." 택시의 뒷좌석은 아직도 온실과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들 하는 얘길 들려주고 싶은데요." 그는 선세트 대로의 빨간 신호에 걸려 속도를 떨어뜨렸다. "시내로 돌아가십니까?" "잠깐만." 그는 차를 멈추었다. "<피아노> 라는 술집을 알고 있소?" "<미치광이 피아노> 말인가요?"하고 그가 말했다. "서(西) 할리우드에 있죠. 술집 같은 뎁니다." "누가 하는 가게요?" "그 사람들이 내게 장부를 보여준 적이 없어서요."하고 그는 기어를 넣으면서 경쾌하게 말했다. "거기 가십니까?" "왜 어때서?"하고 나는 말했다. "아직 초저녁인데."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밤은 깊었고 싸늘했다. 밤의 맥박이 느리게 뛰고 있었다. 네 개의 타이어는 밤안개에 깊이 젖은 아스팔트 길을 굶주린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질주했다. 선세트 대로의 네온이 불면증이라도 걸린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옆골목에, 쓰레기투성이인 뒷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 어깨를 내밀고 있는 2 세대 주택들 속에 그 술집이 있었다. 가게에는 네온도, 플라스틱과 플레이트 유리의 현관도 없었다. 비바람을 맞아 갈색이 된 데다가, 딱지처럼 벗겨져 나간 아치 문이 입구 위에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치 문 위에는 장식 쇠난간이 붙은 발코니가 두텁게 커튼을 내린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흑인 도어맨이 아치 문 밑에서 나타나 택시의 문을 열었다. 나는 운전사에게 요금을 치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문 위의 희미한 전등 불빛으로, 나는 그의 푸른 옷의 보풀이 닳아서 실밥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색 가죽을 입힌 문은 땀이 밴 손으로 문질러댔는지 손잡이의 언저리에 검게 때가 묻어 있었다. 문을 열자 터널과 같이 길쭉한 방이 나타났다. 내프킨을 팔에 걸친 웨이터 복을 입은 다른 흑인이 문까지 나와서 나를 맞아들였다. 그의 미소를 띤 입술은 벽에서 나오는 푸른 전등 불빛 속에서 짙은 감색으로 보였다. 벽 장식은 여러 가지 자태의 푸른색 나체 사진들이었다. 좌우 벽에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하얀 커버를 씌운 테이블이 늘어서 있었다. 한 여자가 방의 맨 끝에 있는 낮은 연단 위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담배 연기 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은 교묘하게 움직였지만 등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기계인형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내 모자를 비좁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아가씨에게 맡기고 피아노에 가까운 테이블을 잡아달라고 청했다. 웨이터는 내프킨을 창 끝에 다는 삼각형 깃발처럼 팔락거리면서 앞장서서 통로를 미끄러지듯이 걸어갔다. 그는 경기가 좋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은 경기가 좋지 않았다. 테이블의 3 분의 2 가 비어 있었다. 나머지 테이블은 커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고급 바의 대표적인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뚱뚱이도 홀쭉이도 죄다 푸른 수족관 같은 불빛 속에서 얼굴이 물고기 같았다. 물고기와 같은 얼굴에다가 굴과 같은 눈들이었다. 그들의 짝들은 대부분이 돈을 미리 받았거나, 돈을 당장이라도 받고 싶어하는 표정들이었다. 3 분의 2 가 내가 코러스 계통에서 본 적이 있는 금발 여자들인데, 그녀들은 마치 시간의 경과를 멈출 수 있는 것처럼 순진한 미소를 얼굴에 고착시키고 있었다. 몇몇 여자는 나이가 들어보였지만, 그녀들의 둥실둥실한 육체는 한두 해 더 떠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들은 손과 혀와 눈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만일 그녀들이 '미치광이 피아노' 수준에서 밀려나간다면 보다 나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지루한 노란 얼굴의 멕시코 아가씨가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초리는 나를 더듬다가 외면했다. "스카치와 버본, 어느 것으로 하시겠습니까?"하고 웨이터가 물었다. "버본과 물, 내가 타겠어." "예, 알겠습니다. 샌드위치도 있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생각했다. "치즈 샌드위치." "감사합니다." 나는 내가 너무나 융통성이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쳐다보았다. 자기 이름을 베티라고 한 그 여자는 피아노를 친다고 말했었다. 피아노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테이블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웃음소리와 대조적인 선율을 이루었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투명한 건반 위에서 마치 피아노가 혼자 연주하기 때문에 그녀는 피아노를 따라가야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급속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된 벌거벗은 어깨는 야위었으나 맵시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마치 타르처럼 쏟아져 내려와서 어깨를 새하얗게 보이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남 아저씨. 술 한잔 사주세요." 멕시코 아가씨는 내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녀는 걸터앉았다. 어깨가 둥글고 허리가 없는 그녀의 육체는 마치 채찍처럼 움직였다. 깃을 낮게 판 가운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야만인에게 옷을 입힌 것 같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목석 같은 얼굴은 웃는 기술을 배우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가씨에게 안경을 사주어야겠군." 그녀는 그 말이 익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익살꾼이에요. 난 익살꾼이 좋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억지로 내는 소리였다. 목석 같은 얼굴에서 나옴직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나를 싫어할 거야. 하지만 술은 한잔 사지." 그녀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눈알을 굴렸다. 눈알은 송진 덩어리처럼 딱딱하고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 팔에까지 뻗어 쓰다듬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좋아요, 익살 아저씨. 익살맞은 얘길 해주세요." 그녀는 내가 싫었고, 나도 그녀가 싫었다. 그녀는 상체를 내밀어 자기의 드레스 속을 보게 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작고 단단했고 젖꼭지는 연필 끝처럼 뾰족했다. 그녀의 팔과 윗입술엔 부드러운 검은 털이 돋아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아가씨에게 호르몬제를 사주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거 먹는 거예요? 난 무척 배가 고파요." 그녀는 설명삼아 자기의 배고픈 하얀 이를 내게 보였다. "왜 나를 뜯어먹지 않나?"


"당신은 나를 놀리시는군요?"하고 그녀는 토라져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내 팔을 주물렀다. 웨이터가 나타나 내게 빠져나갈 기회를 주었다. 그는 쟁반을 테이블 위에 비웠다. 접시에 올려놓은 조그마한 샌드위치, 물 한 잔, 바닥에 1 센티미터 가량의 위스키를 넣은 술잔, 빈 주전자, 웨이터가 이심전심으로 알고서 그녀의 몫으로 가져온 음료수 한 잔. "6 달러가 되겠습니다." "뭐라고?" "음료수가 각각 2 달러, 샌드위치가 2 달러입니다." 나는 샌드위치의 윗조각을 들추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엷은 치즈 한 토막을 보았다. 그건 금박지처럼 얇고 값도 꽤나 비쌌다. 나는 10 달러 지폐를 내려놓고 거스름돈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내 원시인 동반자는 그녀 몫의 과일 주스를 마시고 나서 네 장의 1 달러 짜리를 흘끗 보고는 다시 내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당신 손은 아주 정열적인데."하고 나는 말했다. "난 오직 베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베티?" 그녀는 피아니스트의 등에 대고 멸시의 검은 눈초리를 던졌다. "그러나 베티는 예술가예요. 그녀는 안..." 말 끝은 제스처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서 빨간 혀 끝을 마치 침이라도 뱉는 듯이 밀어냈다. 나는 웨이터에게 신호를 보내어 피아니스트에게 술을 보내도록 했다. 내가 멕시코 아가씨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웨이터가 피아노 위에 술을 내려놓고 나를 가리키자 피아니스트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타원형이었고 마치 축소된 듯이 보일 정도로 작고 섬세한 생김새였다. 그녀의 눈은 빛깔도 표정도 또렷한 데가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초대할 셈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고서 다시 건반 위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그녀의 하얀 손이 인공적인 '부기우기'의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거인의 발길이 금속의 덤불을 스칠 때 내는 소리처럼 하얀 손에서 음악이 나왔다. 거인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거인의 스프링 해머와 같은 심장의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곡을 바꾸었다. 그녀의 왼손은 여전히 둥둥 소리를 내며 베이스를 굴리고 있는 한편, 오른손은 블루스를 정교하게 치고 있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단단한 치찰음을 내는 목소리는 모서리는 무뎠지만 어쩐지 가슴을 치는 데가 있었다. ......


내 발은 남쪽을 향하고 있소. 난 우울증 환자예요. 박사님, 박사님, 박사님 내 두뇌를 분석해 주세요. 박사님, 나를 안정시켜 주세요. 박사님, 나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난 우울증 환자예요. 그녀의 노래 가사에서는 퇴폐적인 지성이 풍겼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 노래는 내 뒤에서 지껄이고 있는 패거리들보다 훨씬 고급인 청중들에겐 어울렸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손뼉을 치며 그녀에게 한 잔을 더 시켜주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내 테이블에 왔다. 그녀의 육체는 조그맣고 완벽한 타나그라의 작은 입상(立像)과 같았다. 나이는 20-30 살 사이의 어떤 곳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내 음악을 좋아하시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이마를 숙이고 나를 치켜보았다. 그건 자기 눈에 자신을 가진 여자의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갈색 반점이 박힌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당신은 52 번가에 있어야 했는데."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다고는 생각 마세요. 그러나 당신은 잠시라도 거기 있지 않았죠? 거리는 엉망이 되었어요." "이 가게는 수지가 안 맞겠군. 망하고 있어. 누구나 그 조짐을 볼 수 있지. 주인은 누구요?" "내가 아는 분이에요. 담배 가지셨나요?" 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자 그녀는 깊이 빨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은 무의식적으로 치켜올려 주기를 기다리다가 내가 그러지 않자 약간 수그러졌다. 그녀는 쓴 술병을 빨아먹고 성장한, 늙지 않은 얼굴을 가진 아기와 같았다. 그녀의 콧구멍 가장자리는 핏기라고는 없었고 눈처럼 하어다. 프로이트의 학설에는 과오가 없었다. "내 이름은 루."하고 나는 말했다. "난 틀림없이 당신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난 베티 프레일리예요." 그 말에는 명함의 엷고 검은 가장자리 장식처럼 유감의 여지가 있었다. 그 이름은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소." 나는 더욱 대담하게 거짓말을 했다. "베티, 당신은 심한 상처를 받았소." 모든 마약중독자에게는 불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런 말은 두 번 이상 해서는 안돼요. 하얀 감방에서 2 년, 피아노도 없는 방. 모의죄는 불법체포였어요. 그들이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마약이 필요하다는 것 뿐이었지요. 그들은 나를 위해서 나를 체포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란 말예요! 그들은 선전효과가 필요했어요. 내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니에요. 만일 내가 그 습관을 끊는다면 그건 마약 단속관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닐 거예요." 그녀의 붉은 입은 담배의 붉은 끄트머리 위쪽에서 비뚤어졌다. "피아노 없는 2 년간의 감금생활!" "당신은 오랫동안 쉬었던 솜씨치고는 잘 치는데."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성시대 때 시카고에서의 내 음악을 들었어야 했는데. 당신은 내 레코드를 들으셨겠죠?" "안 들은 사람이 없었지." "내 말대로 괜찮던가요?" "굉장했어! 나는 당신 레코드에 미쳤었지." 그러나 나는 재즈 피아노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잘 못했거나 지나치게 칭찬을 했던 모양이다. 입에서 풍기던 씁쓸함이 눈과 목소리까지 번졌다. "난 당신 말을 곧이듣지 않아요. 레코드 하나 대보세요." "오래 전 일인데." "<진 밀 블루스> 를 좋아하셨나요?" "좋아했지." 나는 안심하고 말했다. "당신은 설리번보다 잘했지." "루, 거짓말 마세요. 난 그런 곡을 취입한 적이 없어요. 왜 당신은 나를 지나치게 떠벌이게 하는 거예요?" "그야 당신의 연주를 좋아하기 때문이지." "물론이겠죠. 당신은 십중팔구 음치일 거예요." 그녀는 나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변덕스러운 그 눈이 단단하고 밝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초점을 맞추었다. "당신은 경찰 같은데? 꼭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파고드는 방식이 좀 수상해요. 당신은 경찰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경찰의 눈은 남이 다치는 것을 보고 싶어해요." "베티, 진정해요. 당신은 신경이 너무 날카롭군. 물론 난 경찰이나 다름없지만, 남이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소." "마약단속반인가요?" 그녀의 얼굴을 새하얀 공포가 휩쓸었다. "그런 게 아냐. 사립탐정이오. 난 당신에게서 바라는 게 없어. 그저 우연히 당신의 음악이 좋아졌을 뿐이지." "거짓말!" 증오와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메마른 소음이었다. "당신이 페이의 전화를 받고 트로이라고 대답했죠? 도대체 무엇을 쫓고 있는 거죠?" "샘프슨이라는 사람. 그의 소식을 못 들었다고는 말하지 마. 당신은 그의 소식을 들었을 거야." "그분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어요." "전화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럼, 좋아요, 나는 그분을 다른 사람들처럼 여기서 보았을 뿐이에요. 그걸로 내가 그의 간호원이 되나요? 왜 내게 온 거예요? 그는 내 고객 중 한 분에 불과할 뿐이에요." "당신이 내게 왔지. 기억 안 나?"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고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증오감을 쏟아냈다. "여기서 나가서 들어오지 말아요." "난 여기 있을 거야." "그렇게 해보세요." 그녀는 팽팽한 하얀 손을 웨이터에게 홱 돌렸다. "퍼들러를 불러요. 이 사람은 FBI 의 끄나불이에요." 웨이터는 검푸른 얼굴을 당기며 불안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서둘지 마."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피아노 뒤에 있는 문으로 갔다. "퍼들러!" 실내의 모든 손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주홍색 셔츠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조그만 눈이 두리번거리면서 말썽꾼을 찾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지적했다. "저 사람을 끌어내서 혼을 내줘요. 저치는 탐정이에요. 나를 염탐하러 왔어요." 나는 뛸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뛰는 것도 하루에 세 번은 너무 많다. 나는 그에 맞서 젖먹은 힘을 다해 펀치를 먹였다. 칼자국이 있는 머리가 쉽사리 물러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치려고 했지만 그는 팔로 받으며 뛰어들었다. 그의 흐릿한 눈빛이 바뀌었다. 나는 그 눈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주먹 하나가 나의 배를 갈겼다. 나의 방어자세가 무너졌다. 다른 주먹이 목덜미로 날아왔다. 나의 두 다리가 연단 모서리에 걸렸다. 나는 쓰러지면서 피아노에 부딪쳤다. 의식이 요란한 불협화음을 내면서 사라져 거대한 그림자 속에 가라앉았다.

제 11 장. 군용 수송 트럭 검은 상자의 밑바닥에 보잘것없는 작은 사내 하나가 딱딱한 것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딱딱한 무언가가 그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먼저 한쪽 턱을, 이어 다른 쪽을. 그때마다 그의 머리는 뒷전의 딱딱한 벽면에 부딪쳐 한 번씩 퉁겨져 나왔다. 다시 얻어맞고 다시 퉁겨져 나오고...... 이 괴로운 고문은 상당한 시간 동안 규칙적으로 단조롭게 지속되었다. 주먹이 다가올 때마다 그 보잘것없는 사내는 쑤시는 이빨로 그것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렇지만 그의 두 팔은 양옆에 얌전히 늘어져 있었다. 양다리는 극도로 활력을 잃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통로 어귀에 나타나서 잠시 동안 황새처럼 한발로 서 있더니, 이윽고 괴상하게 절룩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퍼들러는 자기 일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림자는 그의 등뒤에서 허리를 죽 펴더니 한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팔이 내려오며 팔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물체를 휘둘렀다. 그것은 퍼들러의


뒤통수에서 호두를 깔 때처럼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흰자위만 보였기 때문에 눈 속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뒤로 밀쳤다. 앨런 태거트가 구두를 도로 신고는 내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다지 세게 때리지는 않았으니까요." "다음번에 또 녀석을 마구 때려줄 일이 생기면 내게도 알려주시오. 구경하고 싶으니까." 입술이 부풀어오른 것 같았다. 다리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와도 같았다. 나는 가까스로 일어섰다. 그래도 한쪽 다리만으로 설 수는 없었다.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길로 찬다면 나중에 후회했으리라. 설사 몇 해 뒤일지라도. 태거트가 내 팔을 붙들고 입구 쪽으로 끌고 갔다. 도로변에 택시 한 대가 한쪽 문을 연 채 서 있었다. 길 건너편 '미치광이 피아노'의 입구는 한산했다. 그는 나를 택시에 밀어넣고 뒤따라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잠시 나는 머릿속이 멍했다. 이윽고 그 진공 속으로 분노가 밀물처럼 몰려 들어왔다. "집에 가서 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할리우드 대로의 스위프트로 갑시다." "거긴 문을 닫았는데요."하고 운전사가 말했다. "내 차가 그 집 주차장에 있어요." 그리고 차 안에는 총이 있었다. 그 길을 반쯤 가서야 비로소 머리와 혀가 보조를 맞추었다. "당신은 대체 어디서 여기에 온 거요?"하고 나는 태거트에게 물었다. "이리로 통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있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딱딱거렸다. "말을 돌려서 하지 말아요. 난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미안합니다."하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샘프슨 씨를 찾고 있었지요. 아까 거기는 '미치광이 피아노'라는 집이었어요. 샘프슨 씨가 나를 거기 데려간 적이 한 번 있기에, 그 사람들한테 그 양반 소식을 물어볼까 하고요." "바로 내가 하려 했던 일이로구먼. 그 친구들 대답은 당신이 직접 본 그대로요." "어쩌다가 거기 가시게 됐지요?" 나는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저 비실비실 들어갔다가 비실비실 나온 것 뿐이오." "나오시는 걸 나도 봤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내가 걸어서 나왔소?" "어느 정도는. 도움을 좀 받기는 했지요. 누군가가 당신을 부축해 주더군요. 난 택시에서 기다렸지요. 그 깡패 녀석이 당신을 골목으로 몰아붙이는 걸 보고 뛰어나간 겁니다."


"아직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군."하고 나는 말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는 내게로 몸을 기울이며 진지한 어조로 속삭였다. "정말로 샘프슨 씨가 납치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장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군. 납치란 그래도 뭣 좀 생각할 수 있었을 때 떠올랐던 생각이오." "누가 그 양반을 납치했을까요?"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가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트로이라는 사내도 있고. 그자를 만난 적이 있소?" "아뇨. 하지만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에 관해서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두어 달 전에 샘프슨 씨와 함께 네바다에 갔었지요." "어떤 자격으로?" 멍든 내 얼굴이 짓궂은 곁눈질로 그를 노려보고 싶어했다. 나는 그러도록 내버려두었다. "확실히는 모릅니다. 여자는 차를 타고 그곳에 갔거든요. 비행기가 고장나서,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러 수리했죠. 그 여자를 본 적은 없지만, 샘프슨 씨가 얘길 하더군요. 두 사람이 햇볕 아래 앉아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나요. 내 생각으론 그 여잔 그 '클로드'라는 성자의 패거리 같습니다. 샘프슨 씨가 산을 기증한 그 사람 말입니다." "이전에 말해 주지 그랬소. 내가 당신에게 그 여자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땐 미처 몰랐습니다." "이젠 상관없는 일이오. 난 오늘 저녁을 그녀와 함께 보냈으니까. 발레리오에 나와 함께 있었던 게 바로 그 여자였소." "그랬었군요." 그는 깜짝 놀란 듯했다. "그 여자가 샘프슨 씨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까요?" "그럼직도 한데, 아무 말도 않더군. 난 지금 다시 한 번 그녀를 찾아가려는 중이오. 그런데 응원군이 있었으면 좋겠는걸. 그 친구, 좀 거칠어서." "좋지요!"하고 태거트가 말했다. 감각이 아직 마비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운전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커브를 돌 때 차를 비스듬히 기울여 모는 경향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탈없이 이스터브룩의 집에 도착했다. 주위는 어두웠다. 뷔크는 차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차고는 비어 있었다. 나는 총 끝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뚫고 들어갑시다." 그러나 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어서 둘이 함께 어깨로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뒤로 돌아갔다. 뒤뜰에서 나는 뭔가 매끄럽고 둥그스름한 물체를 밟고는 휘청거렸다. 맥주병이었다. "조심해요, 형씨." 태거트가 불량소년과 같은 투로 말했다. 그는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젊은 혈기로 부엌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리가 함께


밀어붙이자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우리는 부엌을 통과해서 컴컴한 홀로 들어갔다. "권총은 가졌소?"하고 나는 물었다. "아니오." "하지만 사용법은 알 테지?" "당연하죠. 기관총이 더 좋긴 합니다만."하고 그는 허풍을 떨었다. 나는 그에게 내 총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만족하시오." 나는 현관문으로 가서 빗장을 뽑고는 문을 조금 열었다. "누구든지 오면 내게 알려요. 당신은 모습을 비치지 말고." 그는 버킹검 궁전에 새로 들어간 보초병처럼 지극히 엄숙한 자세로 자기 위치에 섰다. 나는 불을 켰다 껐다 하며 거실과 식당, 부엌과 욕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 방들은 내가 아까 본 그대로였다. 침실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두번째 서랍에는 스타킹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달라진 점이었다. 그리고 스타킹 뭉치 뒷전 한구석에 찢겨지고 속이 빈 편지봉투 한 장이 꾸겨져 처박혀 있었다. 겉봉의 수신인은 이스터브룩 부인이었고, 주소는 내가 찾아온 집의 주소였다. 누군가가 그 뒷면에 연필로 몇 마디 말과 숫자를 휘갈겨 써놓았다. 40,000 > 2 > 20,000 그것은 매우 수익성이 좋은 사업의 계획서 초안 같아 보였다. 내가 아는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미치광이 피아노'는 그만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봉투를 다시 뒤집었다. 발송 날짜는 1 주일 전인 4 월 30 일이었고, 산타 마리아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봉투의 내역을 기억에 새기고 있는데, 길에서 육중한 모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줄기 불빛이 집 앞을 쓸더니 열려진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곳에 서 있던 태거트가, "아처 씨!"하고 쉰목소리로 불렀다. 다음 순간 그는 대담하고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현관 앞, 작렬하는 백광(白光) 속으로 뛰쳐나가며 들고 있던 총을 쏘았던 것이다. "멈춰!"하고 내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총알은 금속판을 때리고는 억울한 듯 윙 하는 여운을 끌며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응답하는 총성은 없었다. 나는 팔꿈치로 그를 밀치고 내달아 현관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유개(有蓋) 화물 트럭 한 대가 부랴부랴 차도를 벗어나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트럭이 미처 속도를 올리기 전에 찻길에서 따라잡았다. 운전대의 오른쪽 창이 열려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팔을 넣어 걸고는 한쪽 발을 펜더 위에 걸쳤다. 시체처럼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 핸들 위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겁을 먹은 작은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트럭이 바람벽이라도 들이받은 듯 급정거를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손을 놓치고 길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내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트럭은 뒷걸음질쳐 이를 가는 소리를 내며 기어를 바꾸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휘황한 불빛이 한 순간 내 눈을 현혹시켰다. 으르렁거리는 네 바퀴가 나를 덮쳤다. 난 의도하는 바를 깨닫고는, 옆으로 몸을 날려 보도 쪽으로 굴렀다. 트럭은 내가 있던 지점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통과하더니, 그대로 대로를 따라 올라갔다. 엔진의 으르렁거림이 점차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번호판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불이 켜 있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다. 뒷문에는 창이 없었다. 내 차로 갔더니 태거트가 벌써 엔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를 운전석에서 밀어내고 트럭을 뒤쫓았다. 선세트 대로에 이르렀을 때 트럭의 뒷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산을 향했는지, 바다 쪽으로 돌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태거트를 향했다. 그는 총을 무릎 위에 놓고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쏘지 말라고 했으면 말을 들어야지." "당신이 말했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운전사 머리 위쪽을 겨냥했던 거니까요. 놈을 놀라게 해서 차 밖으로 몰아낼 생각이었습니다." "놈은 나를 깔아 뭉개려고 했어. 당신이 총을 갖고 침착했더라면 놈이 달아나지는 않았을 텐데." "미안합니다."하고 그는 깊이 뉘우치는 태도로 사과했다. "모처럼 총을 잡고 보니 들떴던 모양입니다." 그는 손잡이 쪽을 내밀며 내게 총을 건네주었다. "잊어버려요."하고 말하고 나는 좌회전을 해서 시내로 향했다. "트럭을 눈여겨 봤소?" "군용 수송차 같던데요, 병력을 수송할 때 쓰는 종류 말입니다. 검은색이었지요, 아마?" "푸른색이었어. 운전사는?" "놈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캡을 쓰고 있더군요. 본 거라곤 그것 뿐입니다." "앞쪽 유리창을 못 봤단 말이오?"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유감천만이로군."하고 나는 말했다. "희박하기는 해도 샘프슨이 그 트럭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혹시, 탄 흔적이 있던가." "그게 정말입니까? 우린 경찰에 가야 하나요?" "그래야 할 것 같소. 그러나 먼저 샘프슨 부인에게 알려야겠지. 부인에게 전화했소?" "연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했을 땐 부인이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었지요. 그게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답니다." "그렇다면 아침에 찾아뵈야겠군." "우리와 함께 비행기로 가실 겁니까?"


"아니, 차로 가겠소.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뭡니까, 그 일이란?" "별것 아니오." 하고 나는 무뚝뚝하게 잘라말했다. 그 뒤 그는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가지 위에 걸린 시뻘건 구름층의 가장자리가 엷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밤늦도록 쏘다니던 택시와 자가용의 행렬은 어느덧 꼬리를 감추고, 새벽일을 나가는 트럭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유개 군용 수송 트럭을 찾아보았지만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태거트를 발레리오에 내려주고는 집으로 갔다. 문간에서 우유 한 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놈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걸린 전자시계가 4 시 20 분을 알리고 있었다.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얼린 굴 한 상자를 꺼내어 굴 스튜를 만들었다. 아내는 굴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이제 나는 낮이든 밤이든 어느 때라도 부엌 식탁에 앉아서 마음껏 굴을 포식하며 정력을 증강할 수 있다. 옷을 벗고는, 방 저편에 놓인 또 하나의 빈 침대는 보지도 않고 자리에 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온종일 자기가 하고 지낸 일들을 구태여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위안이었다.

제 12 장. FBI 의 수석검사관 중심가에 이르렀을 때에는 아침 10 시가 지나 있었다. 피터 콜튼은 사무실의 납작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육군정보국 시절 내 직속 상관이었다. 내가 우유빛 유리문을 열자 그는 한 무더기의 수사기록부에서 냉큼 고개를 들어 흘끗 시선을 던지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아, 내가 환영받고 있지 않음을 표시했다. 그는 검사실(檢事室)의 수석수사관으로, 짧게 친 금발과, 뒤집혀진 쾌속정의 뱃머리처럼 날카로운 코를 가진 비대한 중년 사나이였다. 그의 사무실은 강철 틀에 끼운 유리창이 단 하나 뿐인, 석고로 된 작은 방이었다. 나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벽에 붙여놓은 등받이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얼마 있다가 그는 코끝을 내게로 돌렸다.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그냥 얼굴이라고 해두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얼굴이 그 모양인가?" "싸움질에 말려들었지요." "그래, 나더러 이웃집 어깨를 체포해 달라는 건가?" 미소가 입가에서 느릿하게 꼬리를 끌었다. "자네, 자신의 싸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네. 내게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야 물론 문제가 다르지만." "아이스캔디 하나와-- "하고 나는 퉁명스레 말했다. "풍선껌


세 개." "법의 힘을 풍선껌 세 개로 매수할 작정인가? 이 친구, 자넨 지금이 원자력시대라는 것도 모르나? 풍선껌 세 개면 우리 모두를 풍지박산으로 날려보낼 만큼 막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단 말이야!" "그만두시죠. 사고는 '미치광이 피아노' 와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넨 내가 미쳐 날뛰는 피아노에 총을 들이대는 것밖에는 따로 시간보낼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일개 한물 간 이혼전문 사립탐정과 일장 희극을 연출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튼 좋아, 털어놔 보게. 또 공짜로 뭔가 해달라는 거겠지." "일거리를 드리려는 겁니다. 대령님 생애 최고의 일거리가 될지도 모르죠." "물론 대가를 바라시겠지." "자그마한 겁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이야긴지 들어나 봄세. 단 다섯 마디로 끝내야 돼." "시간은 그렇게 걸리지 않을 겁니다." "벌써 다섯 마디야."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내 의뢰인의 남편되는 사람이 그저께 소유주 불명의 검은색 고급 승용차를 타고 버뱅크 공항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그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스물다섯 마디야." "잠자코 들어주시죠. 어제 그 부인은 남편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는데, 10 만 달러를 현찰로 보내라고 했답니다." "그런 목돈이 있을 리가 있나. 더구나 현찰로." "있습니다. 그 친구들은 갖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봅니까?" 그는 어느 틈에 책상 왼쪽 윗서랍에서 인쇄된 서류다발을 꺼내어놓고는 재빨리 훑어넘기고 있었다. "납치인가?" 그는 무심코 물었다. "그런 냄새가 납니다. 콧구멍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최신 보고서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지난 72 시간 동안 검은색 리무진이라곤 없구먼. 리무진을 가진 사람들은 차를 ���거든. 그저께라고 했지? 몇 시였나?"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자네 의뢰인은 머리회전이 좀 늦는 모양이군." "신중 제일주의랍니다." "남편 제일주의는 아닌 모양이군. 그 여자 이름을 말해 주면 도움이 될 텐데." "기다리십시오. 조건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일은 공개되어서는 곤란해요. 내 의뢰인은 내가 여기 온 줄도 모릅니다. 또 하나, 나는 그 친구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죽으면 곤란해요."


"손대기엔 너무 거창한걸, 루." 그는 일어나서 우리에 갇힌 곰처럼 유리창과 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공식 루트를 통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 되면 내 손이 비게 되지요. 또, 그 동안 대령님은 한편에서 무언가 다른 일을 하실 수도 있을 테고요." "자넬 위해서 말인가?" "대령님 자신을 위해섭니다. 자동차 대여소 조사부터 시작하십시오. 그게 둘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미치광이 피아노'라는 술집인데요." "됐어, 그만하게."하고 그는 자기 얼굴 앞에서 손뼉을 쳤다. "공식보고서를 기다리기로 하지,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야." "내가 언제 엉터리 일거리를 갖고 왔던가요?" "한두 번이 아니지. 하지만 그 얘긴 그만두세. 자네도 어느 정도 과장할 수도 있지 않나, 안 그래?" "내가 무엇 때문에 말을 둘러대야 합니까?" "그러는 편이 직접 뛰어다니는 것보다 비용도 덜 먹히고 손쉽거든." 그의 푸른 눈이 가늘어지며 반짝거렸다. "우리 군(郡)에는 자동차 대여소가 무지무지하게 많단 말이야." "내가 직접 해도 좋지만 여길 떠나야 해서요. 그 사람들, 산타 테레사에 살거든요." "그자들 이름은?" "대령님을 믿어도 될까요?" "어느 정도는. 보기보단 나을 거야." "샘프슨."하고 나는 말했다. "랠프 샘프슨." "그자 얘긴 들었지. 자네가 말한 10 만 달러 건의 뜻도 알 만하구먼." "문제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다릴 수밖에요." "그거야 이미 한 말 아닌가." 그는 발꿈치로 몸을 돌려 창을 향하고는 등을 진 채 말했다. "뭐랬더라, '미치광이 피아노'인지 뭔지에 관해서도 말했었지?" "날더러 돈 안 들이고 되는 일거리를 찾고 있다고 말하기 전이었죠." "설마 자네에게 상할 만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 "그저 실망했을 따름이죠. 나로서는 10 만 달러의 현찰과 500 만 달러의 고정자산이 걸린 일거리를 갖다드렸는데, 대령님은 하루의 귀중한 시간 어쩌고 하면서 입씨름만 하시니 말입니다." "여보게, 나도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잖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드와이트 트로이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나?" "드와이트 트로이라니--- "하고 나는 물었다. "어떤 작잔데요?" "자그마한 봉지에 든 독물이지. '미치광이 피아노'를 운영하고


있다네." "그런 집을 규제할 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또 그런 작자도 말입니다. 소생의 견문이 좁았던가 보죠?" "그럼, 자넨 그 친구를 알고 있군?" "그자가 백발의 영국인이라면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콜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만났습니다. 모종의 사연으로 내게 권총을 휘둘렀지요. 비켜줬습니다. 그 친구 총을 빼앗는 건 내 담당이 아니라서요." 콜튼은 언짢은 듯이 두툼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녀석을 잡아넣으려고 몇 년 동안이나 애먹었지. 녀석이 원체 매끄러워서. 위험하다 싶어질 때까지 한탕하다가는 슬며시 옆길로 샌단 말이야. 30 대 초반에는 한창 날렸었지.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술을 팔았더랬어, 결국 문을 닫았지만. 그 뒤론 오르락 내리락했지. 한동안 네바다에서 도박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마피아가 쫓아냈어. 듣자 하니 최근에는 녀석의 국물도 줄어들었다더군. 그래도 우리는 놈을 족칠 날을 기다리고 있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미치광이 피아노'를 폐쇄하면 될텐데요?" 나는 잔뜩 비꼬아서 말했다. "6 개월마다 폐쇄한다네." 그는 툭 쏘았다. "지난번 소탕이 있기 전에 자네도 그 꼬락서니를 볼 걸 그랬지? 그땐 라인스톤이라는 술집이었어. 변태성욕자들을 위해 2 층엔 한편에서만 볼 수 있는 창까지 달아놨더군. 여자가 남자를 매질하는 따위의 틀에 박힌 짓거리를 보여주는 거지. 우리가 끝장을 내줬지만." "거긴 누가 운영했었나요?" "이스터브룩이라는 여자야. 그 여잔 어찌됐느냐고? 기소조차 안됐다네." 그는 분한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형편이 그래 놓으니 손댈 도리가 있어야지. 나는 정치가가 아니잖나." "트로이도 아니죠."하고 나는 말했다. "녀석이 어디 사는지 아십니까?" "몰라. 놈에 관해서 물은 쪽은 내가 아니었나, 루?" "그렇군요. 대답은 나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녀석과 샘프슨은 얼마간 같은 행동반경 속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미치광이 피아노'에 사람을 하나 달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손이 비는 친구가 생기면 그렇게 하지." 뜻밖에도 그는 내게로 다가와 두툼한 손을 내 어깨에 얹었다. "자네, 트로이와 다시 맞닥뜨리더라도 놈의 총을 빼앗을 생각일랑은 말게. 전에도 그걸 시도한 친구가 있었지." "나야 그런 짓 안하지요." "그래야지."하고 그는 말했다. "그걸 시도한 친구는 죽었다네."

제 13 장. 최악의 상태


로스앤젤레스에서 산타 테레사까지는 시속 100 킬로미터의 속도로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샘프슨 저택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해는 어언 중천을 지나, 테라스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동하는 흩어진 구름 사이를 뚫고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펠릭스가 나를 집안으로 맞아들여 거실로 안내했다. 방이 워낙 커서 육중한 가구들조차 빈약해 보였다. 바다를 마주보는 벽은 단 한 장의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양끝에 드리워진 유리섬유 커튼은 마치 빛살을 모아 만든 것 같았다. 샘프슨 부인은 그 커다란 창가에 놓여 있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버티고 앉은 실물 크기의 인형과 같았다. 그녀는 노란색 실크 저지 드레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두 발은 금빛 구두를 신고 발받침용 작은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염색한 머리카락에는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금속제 휠체어는 문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꼼짝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극적인 한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초침이 시간을 새김에 따라 바야흐로 일장 희극이 될 판이었다. 침묵의 순간이 15 초쯤 흘러 팔뚝이 근질근질하게 되자, "이젠 됐소."하고 내가 말했다. "나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오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잡으셨더군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서 토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과드릴 일은 없습니다. 부인께서 맡기신 일로 줄곧 뛰어다녔으니까요. 게다가, 지시 사항도 전해 드렸고... 부인께서도 그대로 하셨습니까?" "일부는요. 좀더 가까이 오세요, 아처 씨. 그리고 앉으세요. 나는 전혀 남을 해치지 않는 존재이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자기의 의자와 마주 놓인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방을 가로질러 가서 의자에 앉았다. "일부라니, 어느 부분인가요?" "내 몸 전체예요." 그녀는 식충식물과 같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독침은 빼어버렸답니다. 하지만, 물론 당신은 지시사항을 물었겠지요? 버트 그레이브스가 지금 돈을 만들고 있어요." "경찰에 알렸답니까?" "아직은요. 그 문제를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데요. 하지만 먼저 편지를 읽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곁에 놓인 커피 테이블에서 봉투를 집어들어 내게로 던졌다. 나는 이스터브룩 부인의 서랍에서 발견한 빈 봉투를 꺼내어 둘을 대조했다. 그것들은 크기와 질은 물론 주소를 쓴 필적까지도 달랐다. 유일하게 닮은 점은 산타 마리아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다는 것 뿐이었다. 샘프슨의 편지에는 부인 앞으로 주소가 적혀 있었고, 전날 오후 4 시 반에 접수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이걸 몇 시에 받았습니까?"


"어젯밤 9 시경이에요. 보시다시피 속달로. 읽어보세요." 편지는 보통 쓰는 흰 타이프 용지 한 장인데, 푸른 잉크로 휘갈겨쓴 사연이 한 면을 채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엘레인 뜻하지 않은 사업에 관계하게 되어 현금이 급히 필요하오. 미국 은행에 있는 우리 공동명의의 안전금고에 증권이 꽤 있소. 앨버트 그레이브스라면 그것들 중 어느 것을 팔아야 현찰이 되는지 알고 있을 거요. 10 만 달러 상당의 증권을 현찰로 바꿔 주기 바라오. 액면이 50 달러나 100 달러보다 큰 지폐는 곤란하오. 이번 거래는 신빙성 있고, 또한 몹시 중요하니 은행에서 지폐에 표시를 한다든가 일련번호를 기록하지 않도록 해주구려. 돈이 되거든 내 연락을 받거나 증거서류를 갖춘 대리인이 갈 때까지 집의 금고에 보관해 두도록 하시오. 곧 소식 전하겠소. 물론 앨버트 그레이브스를 신임하지 않으면 안되오. 그러나 이번 일은 극히 중대하니 그 밖의 누구에게도 이 일에 관해 말해서는 안되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나는 막대한 이익을 놓치게 됨은 물론, 자칫하면 법망에 걸릴지도 모르오. 누구에게든 엄중히 비밀에 붙여두지 않으면 안되오. 그래서 내가 직접 은행에 가는 대신 당신에게 돈을 부탁하는 것이오. 일은 이번 주 안으로 끝날 것이니, 근간 당신을 보게 될 거요. 당신을 사랑하오. 걱정마시오. 랠프 샘프슨 "신중하게 작성되기는 했지만..."하고 나는 말했다. "신빙성이 없군요. 그가 직접 은행에 갈 수 없는 이유라는 게 극히 빈약합니다. 그레이브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 역시 그 점을 지적하더군요. 그의 생각으로는 모두 조작이래요. 하지만 결정은 내게 달렸습니다." "부인은 이것이 남편의 필적임을 절대로 확신합니까?" "그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극히' 란 말의 스펠링을 보셨지요? 그건 그 이가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인데, 그러면서도 늘 틀리게 쓴답니다. 아예 발음까지도 틀리게 해요. 그이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문제는 이겁니다--- 그는 살아 있을까요?" 그녀의 맵시 있는 푸른 눈이 언짢은 기색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처 씨, 당신은 정말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분은 보통 이런 식으로 거래하지는 않을텐데요?" "그이의 사업방식에 대해서라면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우리가 결혼한 이래 사실상 그이는 사업에서 손을 뗐으니까요. 전쟁 중 목장을 몇 개 사고팔긴 했지만, 거래의 제반사항을 내게


알려주지는 않았거든요." "거래 중 비합법적인 것은 없었습니까?" "난 하나도 몰라요. 그이는 사업처리 능력이 완벽하답니다. 그것도 나를 꼼짝못하게 묶어놓은 수단 중의 하나죠." "다른 건 또 뭡니까?" "난 그이를 믿지 않아요."하고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난 그이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 많은 돈을 가졌으니 세계일주라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어쩌면 내 곁을 떠날 생각인지도 모르고요. 알 수 없어요." "나 역시 모르지만 추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주인께서는 몸값 때문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는 머리에 권총이 겨누어진 처지에서 부르는 대로 받아쓴 겁니다. 정말로 사업상의 거래였다면 부인에게 편지를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레이브스는 변호사로서 그 나름의 역량이 있겠지요. 하지만 납치범들이란 희생자의 부인과 거래하기를 좋아한답니다. 그 편이 손쉽거든요." "난 어쩌면 좋지요?" 그녀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물었다. "편지에 적힌 지시대로 따르십시오. 그렇지만 반드시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공공연하게 존재를 알리라는 것이 아니라, 한 편에 대기시켜 두라는 겁니다. 부인도 잘 아시다시피 납치범들이 돈을 챙긴 다음에 남편의 머리통을 날려보내고 줄행랑을 놓는 건 누워 떡먹기가 아닙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남편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혼자서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이가 납치되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군요. 아직 내게 말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신 모양이죠?" "제법 많지요. 그것들을 종합해 보면 남편께선 질이 나쁜 친구분들과 어울리고 계셨다는 괘가 나오더군요." "그건 알고 있었어요." 한순간 그녀의 표정은 자제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그것 보라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이는 가정적인 남자와 모범적인 아버지의 포즈를 취하곤 했죠. 하지만 결코 나를 속일 수는 없었어요." "아주 고약한 패거리들입니다."하고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패거리들 못지 않아요. 현존하는 최고의 악질들이지요." "그이는 늘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좋아했어요." 그녀는 문득 말을 끊고는 내 뒤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란다가 거기 서 있었다. 늘씬한 키를 강조하는 회색 개버딘 투피스를 입고 구릿빛 머리채를 머리 위로 말아올린 그녀는 어제 내가 만난 처녀의 언니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크게 열려 있었고,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아버질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자칫하면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고작 한다는 게 그분 험담이라니." "내가 고작 그런 것밖에 안했던가, 애야?" 다갈색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오직 푸른 눈동자와 조심스레 루즈를 칠한


입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미란다는 우리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화가 나 있을 때조차도 그녀의 몸은 어린 고양이의 유연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을 드러내 보였다. "새엄마의 진짜 관심사는 자기 자신 뿐이에요. 자기도취자라는 것이 있다면 새엄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잔뜩 허영에 들떠서 옷치장이나 머리 손질, 특급 미용사, 다이어트...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죠. 안그래요? 그러니 계속 자기만 사랑하세요. 물론 다른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생각일랑은 말아야겠지요." "분명히 네 사랑은 기대하지 않을 거다." 나이가 위인 여인이 쌀쌀하게 대꾸했다. "그런 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그럼, 네 관심사는 뭐지, 애야? 앨런 태거트겠지, 아마. 보나마나 간밤엔 그와 함께 지냈을 테고." "거짓말! 난 안 그랬어요."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선 채 계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장이 난처했지만,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입 끝으로 하는 고양이 싸움이 종종 폭력사태로 끝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앨런이 또 연기를 한 모양이지? 언��� 너와 결혼하겠다던?" "천만에! 난 그 사람과 결혼 안해요." 미란다의 음성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식의 말다툼을 오랫동안 이끌어가기에는 너무 어렸고, 따라서 상처받기 쉬운 일이었다. "날 놀리는 것쯤 간단하겠죠. 다른 사람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테니까. 무정한--- 그래요, 새엄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새엄마가 조금이라도 아버질 사랑해 드렸다면 아버진 행방불명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버질 이곳 캘리포니아까지 꾀어내어 모든 친구로부터 떼어놓고는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질 몰아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 샘프슨 부인 또한 초조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란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넌 처음부터 날 싫어해서 옳건 그르건 내게 반대해 왔지. 네 오빤 좀더 내게 잘 해줬는데..." "오빠를 끌어들이진 마세요. 오빠를 손 안에 쥐고 놀았다고 해서 새엄마 신용이 늘어날 것도 아니니까. 댄스 파티에 의붓자식을 파트너로 데려갔으니, 그 허영심도 꽤나 만족했겠죠?" "그만하면 됐어." 샘프슨 부인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썩 나가, 못된 계집애 같으니." 미란다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입은 다물었다. 나는 앉은 채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단(壇)을 쌓아 만든 잔디밭 아래로 돌을 깐 오솔길이 있어서 바다를 굽어보는 벼랑 끄트머리에 세워진 정자로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붕이 원추형이고 사면 벽이 유리로 완전히 둘러진 팔각형의 작은


집이었다. 팔각정 유리벽을 통해서 그 너머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다의 물빛이 보였다. 파도가 이는 곳은 초록빛과 흰빛이었으며, 저 멀리 해초가 있는 지역은 황록색으로 빛났고, 그 맨 끝에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내 시선은 파도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하얀 물거품의 선(線) 저편에서 일어난 뜻밖의 움직임에 사로잡혔다. 조그마한 검은 원반이 해면을 따라 미끄러져 나와, 파도에서 파도로 뛰어다니더니, 이윽고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뒤 또 하나가 뒤를 이었다. 미끄러져 나오는 그 물건들의 출처는 너무 해안에 가까워서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예닐곱 개가 파도를 타고 뛰놀다가 사라지고 나자, 원반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몸을 돌려 침묵에 싸인 방을 향했다. 미란다는 여전히 앉아 있는 상대를 굽어보며 서 있었지만, 자세는 변해 있었다. 그녀의 몸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 내려뜨려져 있던 한 손이 올라가더니 계모를 향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엘레인." 내게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샘프슨 부인의 얼굴은 보였다. 딱딱했지만 영리한 표정이었다. "넌 내 가슴에 못을 박았어."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도 용서를 바라는 건 설마 아니겠지?" "새엄마도 내 감정을 건드렸잖아요." 미란다가 흐느끼는 어조로 말했다. "내 앞에서 앨런을 비난해서는 안되잖아요." "그렇다면 앨런에게 추파를 던지지 마. 아니, 참, 이렇게 말할 셈이 아니었는데... 내가 진정으로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겠지? 난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너도 그러고 싶지?" "그래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엄마도 알잖아요? 앨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시니...." "넌 앨런 걱정만 하면 돼." 샘프슨 부인은 거의 쾌활하다 싶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말 그래 주실래요?" "내 장담하지. 그러니 이젠 그만 가보렴, 미란다. 무척 피곤하구나." 그녀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 소동 덕분에 아처 씨는 배우신 게 많았을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하고 나는 말했다. "부인의 견해에는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긴 그럴 듯하죠, 안 그래요?" 그녀는 막 방을 나가려는 미란다를 불렀다. "미란다, 마음이 내키면 여기 머물어도 좋아. 난 위층에 올라갈 거니까." 그녀는 곁의 탁자 위에 놓인 은제 종을 집어들었다. 별안간 울려퍼지는 방울소리가 마치 한 그라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와 같았다. 미란다가 방 저편 구석에 외면을 하고 앉음으로써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당신은 우리들의 최악의 상태를 보셨어요."하고 샘프슨 부인이 내게 말했다. "이번 일로 우리에 대한 선입관을 갖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말씀하신 대로 하기로 작정했으니까요." "내가 경찰을 부를까요?" "그건 버트 그레이브스가 할 거예요. 산타 테레사의 모든 권위자들과 친하니까. 그가 곧 이리 올 거예요." 가정부 크롬버그 부인이 방에 들어와서 고무 바퀴가 달린 휠체어를 양탄자 위로 끌고 왔다. 그녀는 힘을 거의 안 들이고 샘프슨 부인을 안아올려서 휠체어에 앉혔다. 그들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샘프슨 부인이 위층으로 오르는 동안 집안 어디선가 전기 모터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 14 장. 말괄량이 아가씨 나는 방 구석에 놓인 기다란 소파에 미란다와 함께 앉았다. 그녀는 애써 나를 외면하며 말했다. "남이 보는 앞에서 그런 싸움을 하다니-- 우릴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뭔가 다툴 일이 있었던 게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새엄마는 어떤 때는 상냥하지만, 그래도 늘 날 미워하는 것 같아요. 밥은 새엄마의 귀염둥이였지요. 오빠 말예요, 아시겠지만." "전사했다고?" "그래요. 오빤 내게 없는 모든 걸 갖추고 있었어요. 힘세고 자제력이 강했고, 하는 일 모두가 뛰어났었죠. 죽은 뒤엔 해군 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요. 새엄마에게는 오빠가 걸어다니는 땅까지도 소중했어요. 때로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긴, 우린 모두가 오빠를 사랑하긴 했지만 말예요. 오빠가 죽고 나서 이곳으로 옮겨온 뒤 우리집은 너무 달라졌어요. 아버지는 종잡을 수 없게 되고, 새엄마는 엉터리 하반신 불수에 걸리는가 하면, 나도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거든요. 어머나, 내가 너무 입이 싼 것 같아요. 그렇죠?" 고개를 반쯤 돌리는 그 제스처가 내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은 부드럽게 떨렸고, 커다란 두 눈은 생각에 잠겨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고마워요." 그녀는 생긋 웃었다. "보시다시피 내겐 이야기 상대가 없어요. 전에는 아버지의 그 많은 돈을 등에 지고 행복하다고 생각했었죠. 거만한 꼬마 계집애였거든요. 지금도 그럴는진 모르지만. 난 깨달았어요. 돈은 사람을 다른 이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것을. 우리는 소위


산타 테레사의 사교생활이라는 것도, 국제 할리우드의 집단이라는 것도 갖지 못했고, 여기서 사귄 친구도 없어요. 하긴 그 일로 새엄마를 탓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전쟁중에는 여기 와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건 새엄마였거든요. 내 잘못은 학교를 떠난 거예요." "어느 학교를 다녔는데?" "래드클리프예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보스턴에는 친구들이 있었는걸요. 규칙을 어겼다고 작년에 학교에서 쫓겨났어요.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받아줬을 거예요. 하지만 용서를 빌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죠. 난 지나치게 자만했어요. 난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내게 잘 해주려고 애쓰셨고요.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아버지는 새엄마와 벌써 여러 해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집안에는 언제나 긴장이 감돌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급기야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만 거예요." "아버지는 도로 모셔올 수 있소."하고 내가 말했다. 그러나 발뺌할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이 있잖소. 앨런이나 버트와 같은 사람들 말이오." "앨런은 정말로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녜요. 한때는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버트 그레이브스는 내 친구가 아녜요. 하기야 그 사람은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달라요. 자기와 결혼하려는 사람하고는 마음 편히 어울릴 수가 없잖아요."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미란다를 사랑하고 있던데." "그건 알고 있어요." 그녀는 동그스름한 턱을 의기양양하게 치켜들었다. "그게 바로 마음 편히 그와 어울릴 수 없는 이유인걸요. 또한 그 사람이 싫증나는 이유이기도 하고." "미란다는 요구가 너무 많군." 그런데 나 또한 너무 많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마일즈 스탠디시> 에 나오는 인물처럼.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일이란 결코 완전히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오. 미란다는 생각하는 게 좀 허황돼. 그리고 이기주의자야. 언젠가는 땅바닥에 떨어질 날이 올걸. 충격이 너무 커서 아마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지. 아니면 난 그놈의 자만심이 박살나길 바라겠소." "난 거만한 계집애라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극히 가볍게 말했다. "그 진단엔 요금이 붙지 않나요?" "더 이상 내게 거만을 떨지 말아요. 이미 한 번 그랬으면 됐잖아." 그녀는 얌전을 뺀답시고 서투르나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제 당신에게 키스한 것 말인가요?" "기분이 안 좋았던 체는 안하겠어. 기분은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단 말이오. 다른 사람의 도구로 이용되는 건 딱 질색이거든."


"그렇다면, 내게 무슨 악의가 있어 당신을 이용했다는 건가요?" "뭐, 악의가 있었다는 건 아니오. 유치하고 건방진 수작이었을 뿐이지. 태거트를 녹일 생각이라면 좀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야 할 거요." "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말아요." 날카로운 어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그만큼 화가 났었나요?" "이만큼 화가 났었지."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잡고 그녀의 입에 내 입을 포개었다. 반쯤 열린 그녀의 입술은 타는 듯 뜨거웠다. 가슴부터 무릎까지 그녀의 육체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응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뭐 조금이라도 만족했나요?" 어깨를 풀어주자 그녀가 말했다. 나는 커다랗게 뜬 그녀의 초록빛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솔직하고 침착한 눈이었지만, 끝 모를 심연을 안고 있었다. 그 바다처럼 깊숙한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나는 궁금했다. "내 자존심이 위로받았지." 그녀는 깔깔 웃었다. "적어도 입술은 위로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루즈가 묻었군요."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아가씨는 몇 살이오?" "스물이에요. 당신의 엉큼한 속셈에 이용되기에는 충분한 나이죠. 내가 어린애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세요?" "미란다는 다 큰 여자야." 나는 일부러 그녀의 육체를 볼록한 젖가슴과 날씬한 허리, 둥그스름한 엉덩이와 쪽 곧은 통통한 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어색해서 꼼지락거릴 때까지. "즉, 모종의 책임감이 있다는 뜻이지." "알아요." 그녀의 음성은 자책감 때문에 거칠었다. "자신을 함부로 굴려서는 안되겠죠. 당신은 많은 인생을 겪었어요, 안 그래요?" 그것은 어린 소녀의 입에서나 나옴직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결국 그게 그거지만,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일을 겪었소. 나는 수많은 인생을 보는 것으로써 먹고 사니까." "난 아직 충분히 인생을 겪지 못했나 봐요.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는 불현듯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내 뺨에 지극히 가벼운 키스를 했다. 나는 굴욕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카딸이 아저씨에게나 할 그런 종류의 키스였기 때문이다. 하기야 나는 그녀보다 열 다섯이나 위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내 굴욕감도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버트 그레이브스는 20 년이나 연상이 아니던가.


차도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집안으로 다가들었다. "버트가 틀림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충분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짧기는 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힐난하는 듯 초조한 눈짓을 내게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제력을 발휘하여 표정을 풀었다. 그럼에도 그 미간에는 초조감을 나타내는 깊은 주름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그는 체구가 큰 사람치고는 신속하고 절도 있는 고양이걸음으로 움직였다. 적어도 그의 몸만큼은 행동을 취하는 것을 반기는 듯했다. 그는 미란다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나를 향했다. "무슨 일인가, 루?" "돈은 마련됐습니까?" 그는 옆구리에 끼고 온 송아지 가죽의 서류 가방을 내리더니, 자물쇠를 열고는 커피 테이블 위에다 그 속에 든 것을 쏟아놓았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갈색 포장지로 싸고 붉은 테이프로 한데 묶은, 한 다스가 넘는 직사각형의 꾸러미들이었다. "10 만 달러야."하고 그가 말했다. "50 달러 짜리 1 천 장. 그리고 100 달러 짜리 50 장이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군." "당분간 금고 속에 넣어두시지요. 이 집안에 하나쯤은 있겠죠?" "있어요."하고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 서재에요. 번호는 책상서랍 속에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돈과 이 집 사람들의 보호조치를 강구해야 해요." 그레이브스는 갈색 꾸러미들을 손에 든 채 나를 향했다. "자네는 무얼 하지?" "나는 여기 머물지 않습니다. 보안관 서리들더러 좀 나오라고 하시죠. 그들은 이런 일을 위해 있는 존재이니까." "샘프슨 부인은 그들을 부르지 못하게 할걸." "이젠 할 거요. 부인은 당신이 모든 일을 경찰에 맡기도록 바라고 있어요." "됐어! 이제 좀 정신이 드는 모양이군. 이것들을 치우고는 전화를 걸겠네." "직접 만나보시죠." "어째서 그래야 하나?" "이번 일은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는 낌새가 보이기 때문이오. 집안의 누군가가 당신들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거든." "자네는 나보다 한술 더 뜨는구먼. 아무튼 뜻은 잘 알겠네. 샘프슨 씨에게서 받아내긴 했어도, 그 편지를 보면 그자들이 내부사정에 밝은 모양이야. 하기야, 상대가 여럿이고 샘프슨


씨가 납치되었다는 가정하에서의 얘기이지만." "우리는 다른 가설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 가정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발 경찰이 너무 열을 내지 않도록 해주시죠. 그자들이 겁을 먹으면 곤란하니까. 뭐, 샘프슨 씨가 살아 돌아오기��� 바라지 않는다면야 이야기가 다르지만." "잘 알겠네. 그런데 자네는 어디로 갈 작정이지?" "이 봉투에는 산타 마리아의 소인이 찍혀 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든 또 하나의 편지봉투에 관해서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합법적인 업무 때문에 그곳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요. 하기야, 이번 경우에는 비합법적인 일일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곳으로 가려는 겁니다." "그 양반이 거기서 무슨 사업에든 관계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래도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지." "농장 쪽은 알아보셨나요?" 미란다가 그레이브스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관리인에게 전화했소. 소식을 못 들었다더군." "어떤 농장이오, 그거?"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베이커스필드 건너편에 농장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채소밭이죠. 하긴, 이런 일이 생긴 지금 거기 가신 것 같지는 않군요." "일꾼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나갔다던데."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나간 지 두 달이나 된다는군. 폭력사태까지 있었다고 하고. 형편이 말씀도 아니지." "그 일이 이번 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 "아시잖아요."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는 사원(寺院)에 계실지도 몰라요. 전에도 거기 계실 때 편지가 산타 마리아를 경유해서 왔거든요." "사원이라고?" 나는 전에도 한두 번 사건의 언저리에서 벗어나 동화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지킨 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일을 하려면 그것도 직업에 따르는 위험들 중의 하나였지만, 나로서는 그런 건 달갑지 않았다. "구름 속의 사원, 아버지가 클로드에게 준 것 말예요. 아버지는 초봄이면 그곳에서 2-3 일 지내시곤 했죠. 산타 마리아 부근의 산속에 있어요." "클로드란 또 누구요?"하고 내가 물었다. "내가 일전에 이야기했잖나."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샘프슨 씨가 산을 기증한 그 성자 말이야. 그자가 산의 작은 집을 개조해서 일종의 사원 같은 것을 만들었다네." "클로드는 사기꾼이에요." 미란다가 끼어들었다. "그 사람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는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일류 시인 흉내를 낸답시고 떠벌이는 꼴이라니...." "거기 가본 적이 있나요?"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버지를 태워다 준 적이 있어요. 하지만 클로드가 입을


열자마자 내려왔어요.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 사람은 굵직하고 쉰목소리를 내는 지저분한 늙은 염소예요. 게다가, 그처럼 소름끼치는 눈은 본 적이 없어요." "나를 지금 그곳으로 데려다 주지 않겠소?" "좋아요. 스웨터를 입고 올께요." 마치 항의라도 하려는 듯 그레이브스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는 방을 나가는 처녀를 걱정스러운 듯이 지켜보았다. "염려 마십시오. 아무 탈없이 데려올 테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잠자코 있었을 걸. 그는 황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내게 다가왔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건장한 사나이였다. 옆구리에 늘어뜨린 두팔은 뻣뻣했고, 그 끝에 달린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잘 들어, 아처." 그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뺨에 묻은 루즈를 지우게. 아니면, 내가 닦아줄까?" 나는 당황한 마음을 미소로써 얼버무리려 했다. "내가 참죠, 버트. 사나이의 질투를 다룬 경험은 많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미란다에게서 손을 떼. 아니면, 그 잘난 얼굴을 망가뜨려 놓을 테니까." 나는 미란다가 루즈 자국을 남긴 왼뺨을 문질렀다. "그녀를 오해해선 안돼요...." "자네의 키스놀이 상대는 샘프슨 부인이라는 말인가?"하고 그는 비통한 듯이 나직이 웃었다. "젠장!" "미란다가 한 거요. 장난이 아니었어. 우울해 하길래 말상대를 해줬더니 딱 한 번 키스해 줬을 뿐이오. 아무 뜻도 없었다고요. 순전히 부녀지간의 키스와 같은 거였지." "자네 말을 믿고 싶구먼."하고 그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내가 미란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자네도 알잖나." "그녀가 말하더군요." "뭐라고 했는데?" "당신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알고 있으니 기쁘군. 우울할 때는 내게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루?" "사랑 문제로 내게 의논하지는 마시오. 결과가 뻔하니까. 하지만 한마디 충고는 할 수 있지." "해보게." "참으시라는 거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저 꾹 참고 기다리세요. 당장에 큰일을 떠맡았으니 우린 힘을 합쳐야 해요. 나는 당신 연애사업에 위협적인 존재도 못 되거니와, 설령 된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비단 나만 무관심한 게 아니라 태거트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마디로 미란다에게 관심이 없어요." "고맙네." 그는 쉰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처량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나보다 너무도 어려. 태거트는 젊음과 매력을 다 갖추었고." 문밖 홀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마치 신호라도 받은 듯 태거트가 문 어귀에 나타났다. "누가 함부로 남의 이름을 불렀지요?" 그는 물에 젖은 수영복만 걸친 알몸이었다. 널찍한 어깨, 잘록한 허리, 그리고 늘씬한 다리--- 자그마한 머리통에 붙은 물에 젖은 검은 고수머리와, 만면에 띤 나른한 미소--희랍인들에게는 젊음의 신으로 여겨질 만했다. 버트 그레이브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를 훑어보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아처에게 자네가 얼마나 미남인가 말하던 참이었지." 미소는 약간 엷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칭찬치고는 애매하게 들리는군요. 하지만 대관절 무슨 얘기죠? 안녕하시오, 아처 씨.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당신은 미란다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던 참이었소." "바로 보셨습니다." 그는 경쾌하게 대꾸했다. "좋은 아가씨지만 내게는 안 맞아요. 자, 괜찮으시다면 나는 뭣 좀 걸쳐야겠습니다." "물론이지."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권총을 가지고 있소?" "연습용 한 쌍이 있지요. 32 구경으로." "한 자루에 장탄을 해서 몸에 지니고 있으시오. 알겠소? 집 주위에 꼭 붙어서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하오. 기분 내키는 대로 쏘다니지 말고." "나도 배울 건 다 배운 사람입니다."하고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뭐가 터질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하지만 뭐가 터질 일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두라는 거지. 내 말대로 하겠소?" "기꺼이 하지요." "나쁜 친구는 아니야." 그가 나가자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녀석의 꼴을 보면 견딜 수가 없으니.... 우스운 일이야, 전에는 질투 같은 걸 품은 적이 없었는데." "전에도 사랑에 빠진 적이 있으신가요?" "이제까지는 없었지." 그는 불운(不運)과 고조된 감정, 그리고 실망의 짐에 겨워 구부정하니 서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데다가, 그것을 영원히 지키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말해 주게."하고 그가 말했다. "미란다는 뭣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었나? 이번 일--- 아버지 때문인가?" "그것도 한 가지 이유였죠. 가정이 풍지박산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언가 안정된 뒷받침을 원하더군요." "그럴 거야. 나도 알지. 그게 바로 내가 그녀와 결혼하려는


이유 중 하나야.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런 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지." "물론이죠."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노골적인 질문을 시도해 보았다. "돈도 그 이유 중 하나인가요?" 그는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미란다에게는 자기 재산이 한푼도 없어." "그렇지만 앞으로 생기게 될 테지요." "아버지가 죽으면 자연히 생기겠지. 그 양반의 유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녀가 절반을 상속받게 되더군. 물론 나도 돈이 싫다는 것은 아니야---" 그는 쓰디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몫 잡으려는 사람은 아니네. 자네가 그런 뜻으로 물었다면 말이지만." "그런 사람은 아니죠. 그래도 그녀는 당신 생각보다는 빨리 그 돈을 쥐게 될걸요. 영감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다급하고 기묘한 일에 말려든 모양이니까. 혹시 그가 이스터브룩이라는 이름을 입밖에 낸 적은 없나요? 페이 이스터브룩. 아니면, 트로이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서라도?" "트로이를 알고 있나? 도대체 그 친구 어떤 인물인가?" "총잡이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살인도 몇 번인가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놀랄 일도 아니군. 샘프슨 씨더러 트로이를 멀리 하라고 달래느라 무척 애먹었지. 그래도 그 양반은 녀석을 좋게만 생각했으니...." "트로이를 만나보셨나요?" "두 달쯤 전에 라스베이가스에서 샘프슨 씨가 소개해 주었다네. 셋이서 한 바퀴 돌았는데, 많은 사람이 그자를 아는 것 같더군. 노름판의 카운터가 그자를 알고 있던데.... 그것도 인기의 척도라고 할까." "그럴 리는 없죠. 그렇지만 놈은 한때 라스베이가스에서 영업을 한 적이 있어요. 많은 일을 벌였었죠. 그러니까 납치라고 한들 놈의 체면이 깎일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트로이는 어쩌다 샘프슨 씨와 어울리게 됐나요?" "한때 샘프슨 씨 밑에서 일하지 않았나 생각되네만, 확실치는 않아. 괴짜더군. 나와 샘프슨 씨가 노름하는 걸 보기만 할 뿐, 자기는 하지 않는 거야. 나는 그날 밤 1 천 달러를 고스란히 날렸지. 샘프슨 씨는 4 천 가량 따고. 부익부 빈익빈이야." 그는 서글프게 웃었다. "트로이 녀석,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게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그랬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녀석, 내게는 소름끼치는 악당으로 비치던데. 놈이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그걸 알아내려는 게요."하고 내가 말했다. "샘프슨 씨는 혹시 돈에 쪼들리는 건 아닙니까, 버트?" "원 천만에! 그는 백만장잘세."


"그런데 어째서 트로이와 같은 하찮은 녀석과 일을 벌일 생각이 들었을까요?"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하니까 그렇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텍사스와 오클라호마에서 토지임대료조로 돈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싫증이 난 거야. 돈을 못 버는 것이 내 타고난 재능이라면, 그 양반은 돈을 버는 천재라네. 자신이 직접 돈을 벌지 않으면 기분이 안 나는 거야. 내가 돈을 잃지 않으면 기분이 안 나듯이 말이지." 미란다가 방에 들어오자 그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준비됐나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버트 씨, 내 걱정은 마세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지그시 눌렀다. 연갈색 코트의 앞자락이 열려 스웨터에 감싸인 작은 젖가슴이 드러났다. 마치 무슨 무기처럼 튀어나온 그 가슴은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기가 짜증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점차로 증대해 가는 위협을 시위하는 듯도 싶었다. 말아올렸던 머리채는 풀어내려 귀 뒤로 넘겨 빗겨져 있었다. 그 활짝 핀 얼굴이 도전이나 하듯이 그에게 기울어져 갔다. 그는 그녀의 빰에 가볍게, 그리고 부드럽게 키스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안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건장하고 지성도 갖춘 사람이었지만, 가느다란 세로줄 무늬의 푸른 신사복을 입고 그녀 곁에 선 모습은 약간 후줄근해 보였다. 미란다와 같은 말괄량이를 길들이기에는 좀 늙고 지친 모습이었다.

제 15 장. 움직이는 표적 산으로 난 도로는 연갈색 작은 떡갈나무와 가지를 쳐서 붉은 속줄기가 드러난 나무들의 경사진 숲을 뚫고 위로 뻗어오르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고 나는 우리가 탄 차의 속도를 시속 80 km 로 유지했다. 올라감에 따라 길은 좁아지고 굴곡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표석(漂石)으로 뒤덮인 산비탈과 떡갈나무와 전신주가 죽 늘어선 폭 넓은 계곡을 후딱후딱 훑어보았다. 구릉 사이의 틈새기를 빠져나갈 때는 낮게 뜬 푸른 구름처럼 보이는 바다가 뒤로 스쳐 달아났다. 이윽고 길은 한 바퀴 돌아 고갯마루에 걸린 구름 때문에 별안간 잿빛으로 물들고, 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으스스해진, 산의 황무지 속으로 굽어들었다. 밖에서는 구름이 묵직하고 빽빽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구름은 스르르 엷어져, 가닥가닥 하얀 실오라기가 되어 길가로 흩어져 날아갔다. 구름에 가리어 흐릿하니 을씨년스러운 산허리가 우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시대의 첨단을 걷는 아가씨를 곁에 앉히고 46 년형 신형 자동차를 몰고 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콜튼이 말했던 원자력시대와, 인간이 뒷발로 서서 태양을


기준삼아 시간을 헤아리기 시작했던 저 석기시대와의 분기점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 전방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U 자형의 커브를 쏜살같이 돌아나오자 길은 앞으로 곧장 뻗어 있었다. 순간, 열이 오른 모터가 저절로 피치를 올리는가 싶더니 우리는 구름 밖으로 빠져나왔다. 산길 꼭대기에서 보니, 햇살 가득한 골짜기는 샛노란 버터가 넘쳐흐르는 주발 같았고, 건너편 산맥들은 뚜렷한 시야 속에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정말 찬란하죠?" 미란다가 말했다. "산타 테레사 쪽에 아무리 구름이 끼더라도 이 골짜기에는 거의 언제나 햇살이 넘치거든요. 장마철이면 난 종종 혼자서 차를 몰아 저기에 가곤 했지요. 그저 태양이 그리워서요." "나도 태양이 좋아요." "정말이예요? 태양을 좋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네온사인을 좋아할 타입이니까, 안 그래요?" "좋도록 생각해요." 그녀는 펄쩍 뛰어드는 길과 뒷전으로 흘러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길은 초록색과 황색이 바둑판 무늬를 이룬 계곡을 뚫고 곧장 앞으로 탄탄하게 뻗어 있었다. 들에서 일하는 멕시코 인부들밖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나는 차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속력계의 바늘이 85 와 90 의 중간을 떠나지 않았다. "아처,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 달아나는 거죠?" 그녀가 놀리는 투로 물었다. "겁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진지한 대답을 기대하시오?" "기분전환삼아 좋잖아요." "나는 좀 위험한 것을 좋아하지. 내가 조종하고 길들인 위험말이오. 자기 목숨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서, 또한 그것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뭔가 권력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 "이 차가 펑크만 안 난다면 말이죠." "펑크난 적은 한 번도 없소." "말해 주세요. 그게 바로 탐정 일을 택한 이유인가요? 위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도 그럴 듯한 이유���겠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을?" "다른 사람한테서 물려받았지." "아버지?" "보다 젊었을 적의 내 자신에게서. 그때 나는 세상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소. 모든 나쁜 짓은 어떤 특정한 무리의 책임이며, 따라서 그들을 벌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아직도 그 시늉을 계속하고 있지만 말이오. 게다가, 난 말이 너무 많아." "제발 계속하세요."


"난 버린 놈이야. 미란다까지 버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나도 이미 버렸어요. 그런데 아까 그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1935 년 경찰에 투신했을 때만 해도 나는 악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타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더랬어. 언청이처럼 말이오. 경찰의 일은 그런 사람들을 가려내어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악한 마음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더군. 누구나 그것을 가슴속에 품고 있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느냐는 여러 가지 요인에 달려 있지. 환경, 기회, 경제적 압박, 한때의 불운, 나쁜 친구 따위 말이오. 문제는 경찰관이 경험에 의한 주먹구구식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서 그 판단에 의해 행동해야 한다는 거요." "아처 씨도 사람을 판단하세요?"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지. 경찰학교 출신들은 소리 높여 과학수사를 부르짖지. 하기는 그도 옳은 소리야. 그렇지만 내 일의 대부분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판단하는 거요." "그래서 모든 사람들한테서 악을 발견하나요?" "대강 그래. 내 눈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든가, 아니면 사람들이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거겠지.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전쟁과 인플레는 으레 수많은 골칫거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고, 그들 중 많은 무리가 캘리포니아에 발판을 굳혔으니까." "우리집 얘기는 아니겠죠?"하고 그녀가 따졌다. "특별히 그런 건 아니오." "아무튼 아버지가 잘못된 것을 전쟁 탓으로만 돌릴 순 없어요. 전적으로는요. 원래 조금쯤은 나쁜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래요." "미란다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소?" "그랬어요." "아버지에게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걸." "나도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젊었을 적엔 아버지도 주관이 있었을 거예요. 할아버지는 평생 자기 땅을 가져보지 못한 소작인이었거든요. 아버지가 어째서 평생토록 땅을 사들이는지 이해가 가요. 하지만 자신이 가난했으니만큼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더 동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 농장에서 파업을 일으킨 사람들을 봐요. 생활조건은 형편없고 임금도 넉넉하지 못한데, 아버지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거든요. 온갖 짓을 마다 않고 그 사람들을 아사지경으로 몰아넣어서 결국은 파업을 일으키게 했잖아요. 멕시코 인 농부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거야 흔해빠진 착각이지. 또한 쓸 만한 착각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들을 착취하기가 한결 쉽거든-- 이거, 내가 중년에 들어서면서 대단한


도학자가 되어가는 모양인걸." 잠시 말이 없다가 그녀가 물었다. "물론 내게도 판단을 내렸겠죠?" "임시적 판단이라면야. 아직 확증이 없으니까. 미란다는 거의 모든 소질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거의 어떤 사람으로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거의'죠? 그토록 내게 부족한 게 뭐죠?" "갖고 있는 연에 달 꼬리지. 시간을 재촉해서 빨리 가게 할 수는 없어. 보다 나은 걸 찾아내어 자신을 뒷받침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돼요." "당신은 이상한 분이세요."하고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자기 자신도 판단하시나요?" "안해도 좋을 때는 하지 않지. 그런데 어젯밤엔 했어. 주정뱅이에게 술을 먹이고 있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으니까." "어떤 판정이 나왔죠?" "판사께서는 선고를 보류했지만, 그 대신 호된 질책을 내리셨소." "그래서 이처럼 빨리 달리는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난 다른 이유로 스피드를 내요. 그렇지만 제 생각엔 일종의 도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죽음을 향한 소망 때문이죠." "제발 심리학 전문용어는 삼가주시오. 미란다도 차를 빨리 모나?" "캐딜락으로 이 길에서 170 킬로 까진 내봤죠."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경기는 규칙이 아직 뚜렷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수 당한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지루해지면 그래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달래는 거죠. 난 무언가, 무언가 전혀 새로운 것을 맞고 싶다. 무언가 적나라하고 눈부신 것, 노상(路上)에서 움직이는 표적 같은 것을." 나의 애매모호한 분노는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것 같은 충고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런 짓을 자주 하다가는 정말로 무언가 새로운 일에 부딪치게 될걸. 골통이 박살나서 영원한 망각 속으로 꺼지는 거지." "원 망칙해라!"하고 그녀는 부르짖었다. "당신도 위험을 좋아한다고 해놓고선, 케케묵은 버트 그레이브스와 다를 게 없잖아요." "미란다에게 겁을 주었다면 미안하게 됐소." "나에게 겁을 줬다고요?" 그녀의 짤막한 웃음은 소리는 작았지만 갈매기의 울음처럼 날카로웠다. "당신네 남자들이란 하나같이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숙취(宿醉) 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아처 씨도 역시 여자란 가정에 들어앉아 있어야


제격이라고 생각하나 보죠?" 길은 걷잡을 수 없이 굴곡이 심해지며 하늘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경사가 제동역할을 하게끔 차를 몰았다. 시속 80 킬로미터로 달리는 차 속에서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제 16 장

성자 클로드

자신이 호흡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만한 높이에 이르자, 우리는 안쪽으로 갈수록 높은 길로 접어들었다. 새로 깐 자갈길은 닫혀 있는 나무문으로 앞이 막혀 있었다. 문설주에 붙어 있는 금속제 편지함에 '클로드'라는 이름이 흰 글자로 찍혀 있었다. 내가 문을 열자 미란다가 차를 안으로 몰았다. "아직 2 킬로미터는 더 가야 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 말을 믿나요?" "아니. 하지만 경치를 좀 보고 싶소. 여기 온 적이 없으니까." 그 일대는 길을 제외하면 마치 아무도 산 적이 없는 곳 같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감에 따라, 표석으로 점점이 수놓인 계곡과 사철 푸른 산이 눈 아래 펼쳐졌다. 저 멀리 나무숲 사이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연갈색 사슴의 움직임이 짜릿한 전율을 전해 왔다. 또 한 마리의 사슴이 회전목마와 같은 껑충걸음으로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공기가 원체 맑았기 때문에 설령 그들의 발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모터의 크르렁거리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다만 빛을 담뿍 머금은 대기와 맞은편 산의 벌거벗은 암면(岩面) 뿐. 차는 산꼭대기의 받침접시 모양으로 움푹 팬 지대의 가장자리를 기어 넘었다. 눈 아래, 사면이 절벽으로 에워싸인 대지(臺地) 중앙에 독수리 떼와 비행사밖에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구름 속의 사원'이 서 있었다. 그것은 직사각형의 단층 석조건물로, 하얗게 칠한 벽돌담이 중앙의 빈터를 빙 둘러싸듯 세워져 있었다. 철사로 엮은 울타리 안에는 몇 개의 별채가 있어서, 그것이 사원을 둘러싼 채 일종의 말뚝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별채들 중 하나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드문드문 피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본채의 평평한 지붕 위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였다. 워낙 꼼짝도 않고 있어서 내 눈조차도 지나쳐 버린 그 무엇인가가--한 늙은이가 책상다리를 한 채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황제처럼 의젓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죽 빛깔의 큼직한 체구였다. 이발을 하지 않아 제멋대로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과 삐쭉 솟아나온 수염으로 싸인 모습은 마치 햇빛에 바랜 낡은 지도 같았다. 그는 유유히 몸을 굽혀 천 한 조각을 집어들어서 벌거벗은 허리에 둘렀다. 그는 우리더러 참고


기다리라는 듯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뒤뜰로 내려갔다. 뒤뜰의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가 나타나 비척비척 정문으로 가더니 자물쇠를 풀었다. 나는 비로소 그의 눈을 보았다. 하늘빛의 상냥한 눈이었으나 동물의 눈처럼 도덕관념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햇볕에 검게 탄 멋들어진 양어깨와 부채 모양으로 가슴을 내리덮은 무성한 수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자와 같은 데가 있었다. 성량이 풍부하고 자신만만한 음성은 바리톤과 콘트랄토의 미묘한 혼합음이었다.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친구들이여. 이 몸의 외딴집 문전에 들리는 여행자는 누구라도 기꺼이 맞아 내 모든 것을 대접하리다. 환대는 미덕 중에서도 상덕(上德)이니, 최상의 미덕인 건강에 가까운 것이오." "고맙소. 차를 탄 채 들어가도 됩니까?" "친구여, 차는 부디 울타리 밖에 두고 오시오. 울타리 바깥 조차도 기계문명의 부산물로 더럽혀져서는 안되거늘." "그는 당신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 차에서 내리며 나는 미란다에게 말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은가 봐요." 우리가 다가가자 그의 하늘빛 두 눈이 그녀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이자,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이 앞으로 휘돌며 어깨를 쓸었다. "안녕하세요, 클로드." 하고 그녀가 활발하게 인사했다. "아니, 샘프슨 양이 아닌가? 요즘 같아서는 젊은 미인의 방문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처럼 발랄하고 아름다울 수가!" 그는 입술 사이로 숨을 들이켰다. 매우 거칠고 핏발이 선 숨소리였다. 나는 그의 나이를 알아내려고 그의 발을 보았다. 새끼줄로 밑창을 대고 가죽끈을 맨 샌들에 얹힌 두 발은 마디마디 옹이가 지고 부풀어 있었다. 60 년 묵은 발이다. "고마워요." 그녀는 탐탁지 않게 말했다. "아버지를 보러 왔어요. 여기 계실지 모르지만." "아니, 안 계신데, 샘프슨 양. 여긴 나 혼자 뿐이오. 지금은 제자들도 멀리 보냈소이다." 그는 입을 다문 채 빙긋이 웃었다. "나는 태양과 산을 상대로 교제하는 늙은 독수리라오." "늙은 콘도르겠죠!"하고 미란다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최근에 아버지가 여기 오신 일이 있나요?" "몇 달 동안 오시지 않았소이다. 오시겠다고 약속은 하셨는데 아직 안 오시는구려. 아버님은 영적인 잠재능력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도 물질생활이라는 우리에 갇혀 얽매여 있소이다. 그분을 하늘나라로 끌어올리기는 어렵지요. 타고난 천성을 태양 앞에 열어 보이기가 그분으로서는 괴로운 거요." 그는 이 말을 영탄조의 리듬으로, 거의 예배를 드리는 투로 읊조렸다. "한번 둘러봐도 상관없겠죠?" 라고 내가 말했다. "분명히 확인하고 싶군요."


"나 혼자 뿐이라고 말했잖소." 그는 몸을 돌려 미란다를 향했다. "이 젊은이는 누구지?" "아처 씨예요.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돕고 계시죠." "그랬었군. 미안하오만, 아처 씨, 그분이 여기 안 계신다는 내 말을 믿어주셔야겠소. 당신은 아직 청정식(淸淨式)을 치르지 않았으니 사원 안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할 수 없소이다." "어쨌든 한번 둘러봐야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소."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갈색의 그 손은 두툼하고 물큰한 것이 꼭 생선튀김 같았다. "당신은 사원에 들어가서는 안돼요. 미드라스 (옛 페르시아의 빛의 신) 께서 노하실 게요." 들쩍지근한 그의 숨결이 구역질이 나도록 내 코를 찔렀다. 나는 어깨에 얹힌 그의 손을 잡아뗐다. "선생은 청정식을 치른 몸인가요?" 그는 그 순진무구한 눈을 들어 태양을 향했다. "이런 일을 농담 삼아서는 아니되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죄많은 사람이었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마음의 눈이 멀어 죄에 물든 몸이었지요. 마침내 태양의 화염검이 육신의 검은 소를 저며내자, 나는 청정한 몸이 된 것이오." "그렇다면 나는 초원의 들소겠군."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미란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무슨 헛소리예요. 우리는 들어가 볼래요. 당신 말은 뭐든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클로드." 그는 텁수룩한 머리를 숙이며 입을 오므린 채 사이비 부처님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메스꺼움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뜻대로 하구려, 샘프슨 양. 신성을 모독하면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미드라스의 진노가 너무 무겁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소이다." 그녀는 오만하게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아치 문 입구를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서편으로 기운 붉은 해가 산마루에 무심히 걸려 있었다. 한마디 말은 물론 한번 쳐다보는 일도 없이, 클로드는 문 안의 돌계단을 올라 지붕 위로 사라졌다. 돌로 포장된 내원(內院)은 텅 비어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닫혀진 나무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의 빗장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참나무로 서까래를 댄 방이 나타났다. 방안에는 더러운 담요가 덮인 붙박이 침대, 흠집투성이의 철제 트렁크, 판지로 만든 싸구려 옷장, 그리고 클로드의 들쩍지근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신성한 향기로군요."하고 나의 어깨 어림에서 미란다가 말했다. "아버지가 정말로 여기서 클로드와 함께 지냈을까?"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군요." 그녀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아버지는 그 태양숭밴지 뭔지 하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거든요. 점성술과 함께 꽉 믿어버린 거예요." "그 양반, 정말로 이곳을 클로드에게 주었나?" "등기까지 옮겨주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수도장으로 쓰라고 클로드에게 넘겨주었어요. 잘만 되면 언젠가는 도로 빼앗아올 거예요. 광신병에서 깨어난다면 말이지만, 과연 그렇게 될는지...." "사냥할 때 쓰는 집치고는 묘한걸." "실은 사냥용으로 지은 게 아니에요. 일종의 은신처로 지은 거죠." "은신처라니? 뭐가 두려워서?" "전쟁이죠. 이건 아버지가 종교에 미치기 전인데, 아버지는 조만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 전적으로 믿었어요. 적이 쳐들어오면 이곳을 피난처로 삼겠다는 거죠. 하지만 그 공포감은 작년에 사라졌어요. 일꾼들이 방공호 설립작업을 시작하기 직전이죠. 설립계획서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어요. 그 대신 아버지는 점성술 쪽으로 피신했지만." "나��� '광신'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소. 미란다가 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녜요." 그녀는 약간 처량하게 웃었다. "알고 보면 아버지도 그렇게 정신이 나간 것 같지는 않아요. 내 생각엔 지난번 전쟁 덕으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 게 아닌가 해요. 게다가 오빠가 죽었거든요. 죄의식은 온갖 종류의 터무니없는 공포감을 야기시키기 마련이니까요." "당신은 또 책을 읽은 모양이구먼."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 것은 심리학 교과서였군." 그녀의 반응은 놀라웠다. "아처 씨, 골치아픈 사람이군요. 바보 같은 탐정 노릇을 하기가 싫증나지도 않나요?" "정말 싫증이 나는걸. 내게도 뭔가 적나라하고 화끈한 게 필요한가 봐요. 노상(路上)의 움직이는 표적과 같은 것이." "원 세상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고는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우리는 문을 여닫으며 각 방을 돌았다. 대부분의 방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지만, 그 밖의 다른 세간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맨 안쪽의 거실에는 짚으로 엮은 돗자리가 대여섯 장 바닥에 깔려 있었다. 거실은 창문이 좁고 벽이 두터워 마치 요새와도 같았으며, 방안 공기도 형무소의 물 탱크 냄새를 풍겼다. "누가 되었든 제자들은 잘사는구먼. 전에 여기 왔을 때 그 사람들 중 누구라도 보았소?" "아뇨. 하긴 이 안에 들어와 보지는 않았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클로드와 같은 떠버리에게 좋은 봉이 되지. 가진 것을 몽땅 갖다바치고는 그 대가로 굶어죽기 십상인 단식요법과 신경쇠약의 보증을 얻는 게 고작이야. 그렇지만 태양숭배자들의 사원은 들어본 적이 없는걸. 그 바보들이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사원 수색을 마쳤다. 나는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클로드는 벌거벗은 등을 돌리고 태양을 향해 앉아 있었다. 옆구리와 엉덩이께에 주름투성이의 살집이 늘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언쟁이라도 하는 양 고개를 앞뒤로 젓고 있었는데,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 양쪽의 세계를 다 아는 수염난 여자처럼 햇빛 아래 부각된 커다란 내시와 같은 허약한 등과 머리는 기묘하고 우스꽝스럽고 징그러웠다. 미란다가 내 팔을 건드렸다. "저 미치광이 말인데요...." "녀석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하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말했다. "적어도 당신 아버지에 관해서는 사실을 말했나본데. 당신 아버지가 딴 채에 없다면 말이지만." 우리는 자갈을 깐 뜰을 건너 굴뚝에서 연기를 뿜고 있는 벽돌집으로 갔다. 나는 열려진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에 숄을 두른 젊은 여자 하나가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펄펄 끓는 남비 속을 휘젓고 있었다. 5 갤런 들이의 남비였는데, 콩 같아 보이는 것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제자들이 저녁 먹으러 올 때가 된 모양이군 그래." 어깨는 그대로 둔 채 여자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진흙빛 인디언 얼굴에 박힌 두 눈의 흰자위가 백자(白瓷)처럼 반짝였다. "어떤 노인을 못 봤소?" 나는 스페인 어로 물었다. 그녀는 사라사를 두른 한쪽 어깨를 움찔하며 사원의 본채 쪽을 가리켰다. "저 노인 말고, 수염이 없는 노인 말이오. 수염이 없고, 뚱뚱하고, 돈이 많은 노인. 샘프슨 씨라고 하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김이 무럭무럭 나는 남비 쪽으로 다시 돌아앉았다. 우리 뒷전에서 클로드의 샌들이 자갈을 울렸다. "보시다시피 나는 문자 그대로 혼자 있지는 않소. 시중드는 처녀가 있지요. 그렇지만 저 처녀는 동물이나 별로 다를 바 없소이다. 자, 두 분이 용무를 마치셨다면 나는 이만 실례하고 명상으로 돌아가야겠소. 해가 저물어가니 이별을 고하시는 신께 인사를 올려야 하오." 벽돌집 옆에 양철로 지은 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문에는 맹꽁이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가시기 전에 저 문 좀 열어주시지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몸에 두른 천 틈바구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창고에는 한 무더기의 자루와 마분지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콩이 담긴 포대 몇 자루, 분유 한 상자, 그리고 작업용 바지와 장화가 든 상자 몇 개가 모두였다. 클로드는 문간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때때로


제자들이 골짜기로 내려가 일수 노동을 한다오. 채소밭에서 하는 그런 일도 의식(儀式) 중의 하나이지요." 그는 내가 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그가 서 있던 자갈길 가장자리의 진흙에 자동차 타이어 자국이 나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대형 트럭의 바퀴자국이었다.이런 형의 오늬 무늬 자국은 전에도 본 일이 있었다. "울타리 안으로는 기계문명의 부산물을 들여놓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는 땅을 살펴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필요할 때만은 예외지요. 일전에 식량을 배달하기 위해 트럭 한 대가 다녀갔다오." "필시 청정식을 치른 트럭이었겠구먼요?" "운전사가 청정식을 치른 사람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렇군요. 이제 우리가 이곳을 더럽혔으니 집안 대청소를 한번 해야겠구먼요." "그거야 신과 당신네들간의 문제요." 그는 고개를 돌려 저무는 해를 한번 흘끗 쳐다보고는 지붕 위의 횃대로 되돌아갔다. 국도로 돌아가는 귀로에서 나는 필요할 때는 밤중에 눈을 감고도 차를 몰 수 있도록 그 길을 기억해 두었다. 

책이름: 움직이는 표적 (하) 지은이: R.맥도널드 본 데이터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차 례 ----⊙ 작가소개 제 17 장. 협박장 제 18 장. 그물을 치다 제 19 장. 강도냐 배신이냐 제 20 장. 여자와 남자 제 21 장. 구름 속의 사원 제 22 장. 혈 투 제 23 장. 새로운 혐의자 제 24 장. 가난한 미남자의 최후 제 25 장. 살인의 보수 제 26 장. 검시심문 제 27 장. 범인의 정부 제 28 장. 목숨값 제 29 장. 사라진 꿈 제 30 장. 필사의 도주


제 31 장. 제 3 의 사나이

⊙ 작가소개 ▶ 작가/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 - 루 아처(Lew Archer) 시리즈가 성공하면서 명성을 얻음 - 필명을 존 로스 맥도널드로 바꾸어 '루 아처 시리즈'의 첫권인'움직이는 표적'을 출판했다. - 이어서 제 12 작 '금력의 피안'(The Far Side of the Dollar, 1965) 을 출간 - 미국 추리작가협회 MWA 의 회장에 피선 - 주요작품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길(The Way Some People Die)>,<피해자를찾아라(FindaVictim)>,<운명(TheDoomsters)>, <지하인간(The Underground Man) 등이 있다. ▶ 옮긴이/이기형 - 문학박사 - 전 국민대학교 대학원장 - 한국 추리작가협회 회장 - 저서 - '미국문학사', '세계추리문학사' - 번역서 - 말르로의 '희망' (한국번역문학상 수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일강의 죽음'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예고살인' '커튼' 외 다수.

제 17 장. 협박장 우리가 골짜기를 지나기 전에 붉은 태양은 이미 해안선 위에 걸린 구름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땅거미가 진 들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농장의 합숙소로 돌아가는 일꾼들을 실은 트럭을 여러 대 스쳐 보냈다. 덜컹거리는 트럭 위에 가축 떼처럼 처박힌 남녀노소가 음식과 잠과 다음날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말없이 서 있었다. 낮이 어언 저물고 밤은 아직 속력을 올리지 않은 그 황혼녘에 잠겨, 나는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바야흐로 익어가는 밤과 점차 짙어가는 냉기를 한데 머금은 구름 떼가 한 줄기 우유빛 급류처럼 길 위에 흘러내려 산 저편으로 사라져 내려갔다. 한두 번 커브를 틀 때 미란다가 내게로 몸을 기대어왔다. 그 몸은 떨고 있었다. 나는 춥거나 무섭냐고 묻지 않았다. 그 어느 쪽인가의 대답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01 번 국도로 통하는 산길 도중에서 구름은 시종 산을 타고 굴러 내려갔다. 국도에 이르려면 아직도 요원한 산길에서, 나는 저 아래 고속도로상을 질주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보았다. 그것들은 안개로 인해 몽롱하고 거대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정지신호에 막혀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데, 산타 테레사 방면에서 두 개의 휘황한 불빛이 쏜살같이 다가왔다. 그 빛줄기가 불현듯 방향을 돌리더니 맹수의 두 눈처럼 우리를 향했다. 질주해 온 그 차는 우리가 지나온 산길로 접어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브레이크가 비명을 울리고, 고무바퀴가 지면을 스쳐 날며 으르렁거렸다. 여차하면 정면충돌을 면치 못할 기세였다. "고개를 숙여."하고 미란다에게 이르고는 있는 힘을 다해 핸들을 틀었다. 상대편 운전사는 태세를 가다듬더니, 시속 70- 80 킬로미터의 속도에서 폭음을 울리며 2 단 기어를 넣고 우리 차의 범퍼 바로 앞에서 빙그르르 차를 돌려 신호등과 우리 차 사이의 2m 간격을 빠져 내 오른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에 나는 운전사의 얼굴을 포착했다. 안개 서린 우리 차의 불빛 때문에 누르스름했으나, 우뚝한 가죽모자 밑의 얼굴은 깡마르고 창백했다. 차는 검은색 고급 승용차였다. 나는 차를 뒤로 물려 방향을 바꾸고는 그 차 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도로가 이슬에 젖어 미끄러웠고, 게다가 다른 차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을 잡아먹었다. 상대편의 붉은 후미등(後尾燈)은 꼬리를 끌며 산길 높이 올라가서 어느덧 안개에 삼켜지고 말았다. 어느 모로 봐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고속도로와 병행하는 샛길 중의 어느 하나에서 차를 돌릴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차를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샘프슨을 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갑자기 차를 세우는 바람에 미란다는 양손으로 차내의 계기반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해야 했다. 내 몸의 반사성이 점차 격렬해져 가고 있었다. "대체 웬일이죠? 그 차가 우릴 들이받은 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들이받았더라면 좋았을걸." "그 사람, 조심성은 부족해도 운전 솜씨는 기막힌데요." "흠, 녀석이야말로 움직이는 표적이지. 언젠가는 쏘아맞추고 싶군."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계기반의 불빛을 아래에서부터 받아 그늘이 진 어두운 얼굴 속에서 커다란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군요. 내가 또 아처 씨를 화나게 했나 보죠?" "미란다 때문이 아니오."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는 무언가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니까 그래. 나는 직접 행동으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하거든." "알겠어요." 그녀는 실망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춥고 배가 고프군요." 나는 길가 얕은 도랑에서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카브릴로 협곡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안개 때문에 켜놓은 가로등의 노란 불빛을 받아, 길 양편의 나무와 덤불들이 태양을 잃어버린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흐릿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풍경은 몽롱한 내 머릿속과 잘 어울렸다. 그 몽롱함 속에서 내 생각은 랠프 샘프슨이 숨겨진 곳에 대한 단서를 찾아 느릿하게 헤매고 있었다. 그 단서는 샘프슨 저택으로 들어가는 차도 입구의 우편함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데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없었다. 미란다가 먼저 그것을 알아보았다. "차를 세워요." 그녀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우편함에 하얀 봉투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기다려요. 내가 꺼낼 테니." 나는 한 발을 땅에 내디딘 채 손을 뻗어 막 편지를 집어내려는 그녀의 동작을 막았다. 나는 한쪽 귀퉁이를 잡고 편지를 꺼내어 깨끗한 손수건으로 쌌다. "지문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게 아버지한테서 온 것인 줄 어떻게 알죠?" "그거야 모르지. 집까지는 미란다가 운전하지." 주방에 들어가서 편지를 싼 손수건을 풀었다. 천정의 형광등이 에나멜을 칠한 흰 식탁에 죽음처럼 차디찬 백광(白光)을 던지고 있었다. 겉봉에는 발신인의 이름도 주소도 없었다. 나는 한쪽 모서리를 뜯고는 접힌 편지지를 손끝으로 집어냈다. 편지지에 인쇄된 글자들을 모아붙인 것을 보자 내 가슴은 철렁했다. 글자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오려내어 말이 되도록 늘어놓은 그 수법은 전형적인 납치범의 짓이었던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샘프슨 씨는 잘 있으니 10 만 달러를 흔한 포장지에 싸서 끈으로 묶은 다음, 산타 테레사 경계 남쪽 1.6 킬로미터 지점 프라이어스 도로 반대편 고속도로 분기점의 남쪽 끝 길 복판의 풀밭에 놓아두시오. 이 일은 오늘밤 9 시에 할 것이며, 돈 꾸러미를 놓으면 즉시 차를 몰고 떠날 것. 산타 테레사의 북쪽으로 떠나는지 확인할 것이오. 샘프슨의 목숨을 귀중히 여긴다면 경찰을 매복시키지 마시오. 매복이나 추적이 없고 돈에 표시가 안되었다면 샘프슨은 내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각별히 조심하시오. 만일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샘프슨에겐 유감천만일 것이오. "당신이 옳았군요."하고 미란다가 반쯤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무언가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온통 '샘프슨에겐 유감천만일 것이오'라는 말로 차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혹시 있나 찾아봐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즉각 자리를 떴다. 나는 편지지에는 손을 대지 않고 몸을 바짝 기울여 오려낸


글자들을 조사했다. 그것들은 크기와 모양이 저마다 달랐으며, 질이 좋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십중팔구 유명잡지의 광고란에서 오려냈으리라. 철자법으로 보아 중등교육 정도를 받은 사람 같았지만,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도 철자법이 틀리는 사람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러 틀리게 쓸 가능성도 있었다. 태거트와 미란다를 이끌고 그레이브스가 주방에 들어왔을 즈음에는 나는 이미 편지를 암기하고 있었다. 그는 강철처럼 차가운 눈을 빛내며 피스톤처럼 힘차고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식탁 쪽을 가리켰다. "저게 우편함에 있었는데...." "미란다한테 들었네." "아마 몇 분 전 고속도로상에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 차 중 하나가 집어넣고 갔을지도 몰라." 그레이브스는 편지 위로 몸을 숙이고 나직하게 소리내어 읽었다. 태거트는 문간의 미란다 곁에 그대로 서 있었는데, 자기가 끼어야 될 일인지 어쩐지 몰라 얼떨떨한 듯했지만, 지극히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지만, 적어도 그때만은 미란다가 전���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에는 푸르뎅뎅한 기미가 끼어 있었으며, 커다란 두 입술은 그 가지런한 고운 이를 덮고 샐쭉하니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취한 듯 울적한 자세로 문설주에 기대어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젠 확실해졌군. 보안관 서리를 데려와야겠어." "지금 여기 와 있소?" "그래. 서재에서 돈을 검사하고 있지. 보안관에게도 연락하겠네." "그에게는 지문감식원이 딸려 있겠죠?" "그건 검사실 쪽이 나아." "그럼, 검사도 부르시죠. 녀석들은 교묘하니까 이렇다 할 지문을 남기지는 않았을 거요. 그렇지만 혹시 잠복성 지문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장갑을 끼고 글자들을 오려내기란 어려우니까." "옳은 말이야. 그런데 자네를 스쳐 지나갔다는 차는 무슨 얘기지?" "그건 당분간 덮어두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테지." "적어도 어떻게 해서는 안되는가는 알고 있죠. 되도록 샘프슨 씨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 셈이오." "내가 염려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문으로 나갔으므로 태거트는 펄쩍 물러나 길을 비켜줘야 했다. 나는 미란다를 쳐다보았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태거트, 아가씨에게 뭣 좀 먹이시지." "할 수만 있다면야." 그는 부엌을 가로질러 냉장고로 갔다. 그녀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순간이나마 나는 그녀가 싫어졌다. 그녀는 마치 개와 같았다. 발정기의 암캐 같았던 것이다. "아마 먹을 게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그렇소. 하지만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로 아는데." "이 편지를 보고 나니 훨씬 실감이 나는군요. 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문자 그대로 현실이오! 이제 들어가요. 가서 누우시지." 그녀는 건들건들 방을 나갔다. 보안관 서리가 들어왔다. 체구가 크고 얼굴이 검게 탄 30 대의 사내로, 어깨가 꼭 맞지 않는 다갈색 기성복을 입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일그러진 표정 또한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자신이 권한을 갖고 있음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라도 시키려는 듯이 오른손으로 옆구리에 찬 권총을 잡고 있었다. 그는 시험삼아 도전적인 말투로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별거 아니오. 납치 및 공갈에 의한 지불청구서일 뿐이오." "이건 뭐요?" 그의 손이 식탁 위의 편지로 뻗었다. 나는 그가 그것을 만지지 않도록 그 손목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멍청하니 내 얼굴을 쏘아보았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러지?" "내 이름은 아처요. 고정하시오, 서리 양반. 증거물 함을 갖고 있겠지요?" "그렇소. 차 안에 있소." "가져오시죠. 이걸 감식담당원에 넘길 때까지 보관해야 하니까." 그는 방을 나가더니 검은 금속제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그 안에 편지를 떨어뜨리자 그가 상자를 잠갔다. 그것으로 그는 매우 만족한 듯했다. "잘 보관하시오." 그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방을 나갈 때 내가 말했다. "절대로 손에서 놓아서는 안돼요." "이제 우린 뭘 하지요?" 열린 냉장고 옆에 서서 반쯤 남은 칠면조 다리를 손에 쥐고 뜯어먹던 태거트가 물었다. "당신은 대기하고 있으시오. 조금 뒤 신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총은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그는 윗도리 호주머니를 두드렸다. "일이 어떻게 벌어졌다고 생각하시나요?샘프슨 씨가 버뱅크 공항을 떠날 때 놈들이 그 양반을 잡았다고 생각하나요?" "난들 알겠소? 전화는 어디 있지?" "집사 전용의 식료품실에 한 대 있지요. 바로 여깁니다." 그는 주방 끝에 붙은 문을 열고는, 내가 들어가자 도로 닫았다.


그곳은 찬장이 일렬로 늘어선 작은 방으로, 창은 구리로 만든 싱크대 위에 단 하나 뿐이었고 문 옆 벽에 전화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장거리 전화를 신청했다. 피터 콜튼은 아마 퇴근했겠지만, 메시지를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교환수가 그의 사무실을 부르자 콜튼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루입니다. 납치요. 몇 분 전에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전에 샘프슨이 보낸 편지는 일을 쉽게 하려는 연막이었습니다. 검사에게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사건이 그 지역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요. 샘프슨이 그저께 버뱅크 공항을 뜰 때 말입니다." "검찰 쪽은 납치 사건에는 반응이 느린데...." "시간 여유는 있습니다. 작전계획은 다 세워졌으니까요. 검은 승용차에 관해서는 뭣 좀 들어온 게 없습니까?" "너무 많아. 그날 전세낸 차가 무려 12 대나 되네. 하기야 대부분은 합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2 대를 빼놓고는 그날로 대리점에 반납되었네. 그 2 대는 선불을 주고 1 주일 기한으로 빌렸다더군." "세부 사항은요?" "첫 번째는 루스 딕슨 부인, 금발, 40 대 전후, 비벌리 힐스 호텔에 거주하지. 거기를 조사했는데, 방은 빌렸지만 아직 들어오지는 않았다더군. 두 번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사나이인데, 아직 그쪽 대리점에 차를 돌려주지 않았다는군. 하긴, 1 주일 기한으로 빌린 것인데 이제 겨우 이틀 됐으니까. 이름은 로렌스 베커, 약간 마른 친구로 옷은 그다지 잘 입지 않았고...." "그 친구 같은데요. 차 번호는 아십니까?" "잠깐 기다리게. 여기 있군--- 62S895 야. 1940 년형 링컨일세." "대리점은?" "패사디나의 딜럭스야. 내가 직접 가보겠네." "가능한 한 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 수소문도 좀 하시고." "말해서 뭣 하나! 그런데 자네 어째서 갑자기 열을 내지?" "이곳 고속도로상에서 말하신 인상에 부합되는 사내를 보았거든요. 그자는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가 날아든 무렵에 길다란 승용차를 타고 나와 엇갈렸습니다. 게다가, 그 친구인지 한 패인지 모를 녀석이 오늘 아침 태평양 연안도로에서 푸른색 트럭으로 나를 깔아뭉개려고 했고요. 놈은 뾰족한 가죽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왜 한 방 쏘아붙이지 그랬나?" "대령님이라도 그렇게는 안할걸요.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힘자랑이나 하고 다니다가는 영영 못 찾게요. 부하들에게도 그저 미행만 하라고 이르십시오." "내게 일을 가르치는 겐가?" "바로 그렇습니다."


"좋아. 달리 할 말은 없나?" "<미치광이 피아노> 가 문을 여는 대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만일의 경우를 위한 거지만...." "벌써 보냈네. 그 뿐인가?" "산타 테레사 지검(地檢)과 연락을 갖도록 하시지요. 지문감식차 협박장을 그리로 보낼 작정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편히 들어가십시오." "어, 그래." 그가 수화기를 놓자 교환수가 연결을 끊었다.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감감한 전화선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 도중 찰칵 하는 소리와 전화선이 탁탁 튀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결시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잡음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또 다른 내선(內線)에 연결된 수화기를 드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꼭 1 분이 흐른 뒤에 집안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수화기를 내려놓는 희미한 금속성이 들려왔다.

제 18 장. 그물을 치다 크롬버그 부인이 요리사와 함께 주방에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과 모성적인 엉덩이를 가진 여자. 내가 식료품실의 문을 열자 그들은 다같이 펄쩍 뛰었다. "전화를 쓰고 있었지요."하고 나는 말했다. 크롬버그 부인은 일그러진 미소를 애써 지었다. "선생님이 거기 계신다는 말을 못 들어서요." "이 집에는 전화가 몇 대나 있습니까?" "네 댄가 다섯 댄가--- 다섯 대로군요. 두 대는 2 층에, 세 대는 아래에 있지요." 나는 전화를 체크하려던 생각을 포기했다.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모두들 어디 있죠?" "그레이브스 씨가 고용인 모두를 거실로 불러모으셨는데요. 누구든 편지를 두고 간 차를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 본 사람이 있었나요?" "아뇨. 얼마 전에 나도 차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사람들이 언제나 여기까지 와서는 입구에서 차를 돌리거든요. 여기가 막다른 길인 줄 모르니까요." 그녀는 내게로 바짝 다가와서는 은근하게 속삭였다. "선생님, 그 편지엔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돈을 달라더군요." 나는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세 사람의 다른 하인들이 복도에서 나와 엇갈렸다. 고개를 숙이고 한 줄로 서서 왔는데, 원예용 작업복을 입은 두 멕시코인과 그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것은 펠릭스였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보냈지만, 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 눈에선 흐릿하니 석탄 덩어리 같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거실의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부지깽이로 까맣게 탄 장작을 뒤집고 있었다. "고용인들이 왜들 저 모양이죠?"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끙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흘끗 문쪽을 쳐다보았다. "자기들이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은 안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런 생각을 심을 만한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아챈 거야. 나는 그저 문제의 차를 본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을 뿐이야. 그야 사실은 그들이 내색을 감추기 전에 그 표정들을 보고 싶었던 거지만." "당신은 이것이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군요?" "전적으로 집안 사람의 소행만은 아니야. 하지만 그 편지를 누가 만들었건 배달만큼은 너무 때를 잘 맞췄어. 예를 들어, 9 시라는 마감 시간 내에 돈이 준비될 줄을 그자가 어떻게 알겠나?" 그는 흘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한 시간 10 분밖에 안 남았는데." "오로지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지." "논쟁은 그만두지요. 일부는 집안 사람의 소행이라는 당신 의견은 십중팔구 옳을 겁니다. 차를 본 사람이 있던가요?" "크롬버그 부인이 소리는 들었다더군. 다른 사람들은 벙어리 행세를 했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별 다른 내색이 없었단 말이지요?" "응, 멕시코 인들과 필리핀 인들은 속셈을 읽기가 어려워." 그러면서도 그는 신중하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뭐 내게 정원사들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건 아니지만. 펠릭스도 마찬가지고." "샘프슨 씨 자신은 어떤가요?" 그는 빈정거리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여보게, 루, 기발한 체는 하지 말게. 자네 직감은 그다지 잘 맞는다고 할 수 없잖나." "한번 가정해 봤을 뿐입니다. 만일에 샘프슨 씨가 수입의 8 할을 소득세로 내고 있다면, 이런 일을 꾸밈으로써 손쉽게 8 만 달러를 벌 수 있단 말입니다." "딴은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는걸." "실제로도 있었다더군요." "그렇더라도 샘프슨 씨의 경우는 너무 지나치잖나?" "설마 그분이 정직한 인물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죠?" 그는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불타는 장작을 탁 때렸다. 불꽃이 벌떼처럼 튀어올랐다. "일반인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종류의 일을 꾸밀 만한 머리가 없다네. 그 방면에는 어두워. 더구나, 일이 너무 위험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에게는 돈이 필요없어. 갖고 있는 유전만 해도 500 만 달러는 나가거든. 그것도 실수입을 따지면 훨씬 더 나가서


2,500 만 정도야. 10 만 달러쯤은 샘프슨에겐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번 납치는 진짜네. 루, 다른 생각일랑 말게." "그래도 그러고 싶은데요."하고 나는 말했다. "수많은 납치가 편의상 살인으로 끝나니까." "이번 일은 그럴 리가 없어." 그는 깊은 분노를 담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그렇게는 안돼!! 놈들이 요구한 돈을 주면 될 게 아닌가. 돈을 받고도 샘프슨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놈들을 찾아서 작살을 내면 돼." "동감이오." 그러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돈은 누가 갖다주죠?" "아니, 자네가 가는 게 아닌가?" "놈들은 나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게다가, 나는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세요, 버트. 그리고 태거트를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겁니다." "난 그 친구가 싫은데."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요. 또, 총을 겁내지도 않고. 만의 하나라도 일이 잘못 풀릴 경우,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아무것도 잘못될 일은 없어.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를 데리고 가지." "그렇게 하십시오." 크롬버그 부인이 문 어귀에 나타났다. 작업복의 앞섶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레이브스 씨?" "예?" "그레이브스 씨, 미란다 아가씨에게 말씀 좀 해주셔야겠어요. 좀 드시게 하려고 잠을 깨우려고 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으세요. 대답조차 없어요." "염려없을 거요. 내가 나중에 일러보지요. 당분간은 그냥 놔두시죠." "아가씨가 이렇게 나오시면 걱정이에요. 원체 감수성이 예민하시니...." "잊어버려요. 태거트에게 내가 서재에서 좀 보잔다고 알려 주겠소? 아, 그리고 권총을 가지고 오라고 이르시오. 총알을 재서." "알겠습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물이 글썽글썽했지만,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고 방을 나갔다. 그레이브스가 문 쪽을 향했던 몸을 돌렸을 때, 나는 미란다가 자신이 품은 불안감의 일부를 그에게 전해주었음을 보았다. 그의 한쪽 뺨이 가볍게 씰룩이고 있었다. 그 눈은 방 저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죄의식을 느꼈던 게지." 그는 반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엇에 대한 죄의식이죠?" "확실치는 않아. 내 생각으론 근본적으로 오빠를 대신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녀는 아버지가 타락해 가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봤어. 그래서 만일에 자기가 보다 가깝게 지냈더라면 아버지가 그토록 빠른 시간에 그렇게까지 깊이 타락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기는 모양이야." "그녀는 그분의 마누라가 아니잖소?" 라고 내가 말했다. "부인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부인을 만나봤나요?" "몇 분 전에 만났지. 기막히게 멋지게 받아들이더군. 실은 소설을 읽고 있는 거야. 어때, 마음에 드나?" "안 드는데요. 죄의식을 느껴야 할 사람은 바로 부인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미란다에게는 아무 도움도 안돼. 미란다는 묘한 아가씨라네. 무척 민감하면서도 자신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언제나 목을 길게 내밀고 자기 감정의 근원 저편에서 살려고 한다니까." "버트, 당신은 그녀와 결혼할 ���정인가요?" "할 수만 있다면 하겠네." 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두 번 청혼한 게 아니야.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더군." "당신이라면 그녀를 잘 돌볼 수 있을 겁니다. 그녀도 결혼하기에 충분한 나이이고."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참견 말라는 신호가 번득였다. "오늘 오후 드라이브 때 자네가 많은 얘기를 했다고 그러더군." "아버지 노릇 삼아 충고를 좀 했죠."하고 나는 말했다. "과속운전에 관해서 말이오." "아무쪼록 아버지 선(線)을 유지해 주기 바라겠네." 갑자기 그는 화제를 바꿨다. "그 클로드란 친구는 어때? 그자가 납치에 관계될 가능성은 있나?" "그 친구라면 어떤 일에도 낄 수 있을 겁니다. 그 녀석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몇 달 동안 샘프슨을 못 봤다고 잡아떼더군요." 자동차의 누르스름한 안개등이 집 주위를 쓸더니, 잠시 뒤 쾅 하고 차 문이 울렸다. "보안관이 틀림없네."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지독히 오래 걸리는구먼." 보안관은 단거리 경주선수가 결승점에 들어오듯 무척이나 서두르는 기세로 들어왔다. 양복을 입은 커다란 몸집에 차양이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들고 있었다. 입은 옷처럼 그 얼굴도 잡종이어서, 경찰관과 정치인 티가 반반이었다. 완강한 턱과는 대조적으로 입 모습은 부드러웠는데, 느슨하게 포개진 두 입술 사이엔 여자와 술과 떠벌이기를 좋아하는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그레이브스에게로 불쑥 손을 내밀었다. "좀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당신이 험프리스를 데려오라고 해서." 그를 따라 조용히 방에 들어선 인물은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파티에 가 있었다네."하고 그는 말했다. "잘 있었나, 버트?" 그레이브스가 나를 소개했다. 보안관의 이름은 스패너였다.


지방검사는 험프리스였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벗겨졌으며, 야윈 얼굴과 머리좋은 명투수의 눈과 같은 신들린 눈의 소유자였다. 그와 그레이브스는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워낙 친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레이브스가 지방검사를 지낸 시절, 험프리스는 예심판사였다고 했다. 나는 그레이브스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도록 물러서 있었다. 그는 그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야기하고, 알 필요없는 것은 젖혀놓았다. 그가 이야기를 끝내자 보안관이 말했다. "편지에는 돈을 놓은 뒤 북쪽으로 가라고 쓰여 있더군요. 즉, 놈은 반대방향으로 도망치겠다는 얘긴데-- 로스앤젤레스 쪽이 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하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러니 저편 고속도로상에 잠시 경계망을 치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하고 내가 한마디로 잘라말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샘프슨 씨에게 이별의 키스를 보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지만 납치범을 잡기만 하면 놈을 족쳐서...." "잠깐, 조." 험프리스가 끼어들었다. "놈들은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해야 되네. 우리가 일당 중 한 놈을 때려눕히면 다른 놈, 혹은 그놈들이 샘프슨 씨를 해칠 거야. 그건 자네 얼굴에 코가 달려 있는 것처럼 명백해."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편지를 보셨습니까?" "앤드루스가 갖고 있소."하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내 직속지문감식 담당이죠." "무언가 발견된다면 FBI 의 기록과 대조해 봐야 할 겁니다." 나는 내 자신이 점차 인기를 잃어가고 있음을, 그것도 자초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고 사교성을 발휘하기에는 시간이 급했다. 더욱이, 나로서는 풋내기 수사관들이 자기들이 할 일을 알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보안관을 향해 말했다.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과는 연락을 취했습니까?" "아직은. 먼저 상황판단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좋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편지의 지시 그대로 따른다고 할지라도 샘프슨 씨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은 5 할이 넘습니다. 그는 적어도 일당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기억할 테니까요. 버뱅크에서 그를 붙든 자 말입니다. 이건 그에게 불리합니다. 또한, 만일 여러분이 놈들이 돈을 못 가져가게 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됩니다. 납치범 하나를 감옥에 넣을 수는 있겠지만, 샘프슨 씨 또한 목을 잘린 채 어딘가에 드러눕는 신세가 될 테니까요. 최선책은 그 물을 치는 것인데, 그 방면은 그레이브스에게 맡기십시오." 스패너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졌다. 그 입이 할 말을 찾아 반쯤 열렸다. 험프리스가 그를 막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조. 법을


집행하는 방법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달리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샘프슨 씨의 목숨을 구하는 거니까. 이제 그만 시내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그는 일어났다. 보안관도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스패너가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될까요?" "괜찮을 거야." 그레이브스가 느릿하게 말했다. "험프리스가 그 친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테니까." "험프리스란 친구, 말하는 걸 보니 꽤 머리가 좋은데요." "1 급이지. 7 년쯤 함께 일했는데, 이렇다 할 실수를 저지르는 걸 못 봤어. 그래서 나오면서 내 자리를 물려줬지." 그의 음성에는 약간 후회하는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일을 계속할 걸 그랬죠?"하고 나는 말했다. "별로 만족을 못했나 보죠?" "급료가 더럽게 적은 일이지? 10 년을 매달렸는데도 끝났을 적엔 빚만 남았거든." 그는 내게 익살스런 눈길을 던졌다. "자넨 왜 롱 비치 경찰을 그만두었나, 루?" "돈이 주요인은 아니었지요. 숨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거죠. 게다가, 더러운 정치도 싫었고. 좌우간 내가 그만둔 게 아니오. 쫓겨난 거지." "좋아 좋아, 자네가 이겼네." 그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8 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군." 앨런 태거트는 황갈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서재에 있었다. 벨트를 맨 탓으로, 위쪽이 부풀어 어깨가 굉장히 크게 보였다. 그가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양손을 뽑자 두 자루의 권총이 나타났다. 그레이브스가 하나를 갖고, 또 하나는 태거트가 간직했다. 연습용 32 구경 권총으로, 푸르스름한 강철의 총신 끝에 가늠쇠가 불쑥 솟아 있었다. "명심하시오."하고 나는 태거트에게 일렀다.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저쪽에서 먼저 쏘기 전에는 절대 방아쇠를 당겨서는 안돼요." "함께 안 갑니까?" "그렇소." 이어서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말했다. "프라이어스 도로의 모퉁이를 알고 있습니까?" "응." "주위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을까요?" "전혀 없어. 한쪽은 탁 트인 해변이고, 다른쪽은 밋밋한 둑이야." "그럴 테지. 당신은 차로 먼저 가세요. 나는 뒤따라가서 고속 도로 저편 1 킬로미터 지점에서 대기할 테니." "설마 즉각 끝장낼 생각은 아니겠지?" "적어도 나는 그런 짓은 안해요. 그저 녀석이 지나가는 걸 보고 싶을 뿐입니다. 나중에 시(市) 경계에 있는 주유소에서 만나요. 이게 마지막 기횝니다." "알았네." 그레이브스는 벽금고의 다이얼을 돌렸다.


시 경계선에서 프라이어스 도로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벼랑을 깎아 파서 만든, 1.5 킬로미터 정도의 4 차선이었다. 그 복판에 콘크리트로 가장자리를 두른 잔디밭이 한 줄 있었는데, 이것이 길을 양분하고 있었다. 프라이어스 도로에 인접하는 지점에서 잔디는 끝나고, 길은 폭이 좁아져 3 차선이 되어 있었다. 그레이브스의 차는 그 교차점에서 빠른 속도로 U 턴을 한 뒤 불을 켠 채 정지했다. 헤드라이트의 타는 듯한 빛이 고속도로의 등판 위에서 작렬했다. 그곳은 그런 목적에 이용하기에는 아주 좋은 곳으로, 외진 모퉁이의 오른편 가장자리에는 하얀 전신주가 일렬로 서 있었다. 부근에는 집은커녕 나무 한 그루 없었다. 도로를 오가는 차도 뜸했고, 그나마 한참이 지나서야 한 대씩 나타나고는 했다. 계기반에 붙은 시계가 8 시 50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태거트와 그레이브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그들 곁을 지나 달려갔다. 거리계로 재어보니 다음 샛길까지의 거리는 1.1 킬로미터였다. 이 샛길 저편 200 미터 지점에 고속도로 오른편으로 펼쳐진 해안을 굽어볼 수 있도록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이 있었다. 나는 차를 돌려 남쪽을 향해 세우고는 라이트를 껐다. 8 시 53 분이었다. 매사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놈들의 차가 10 분 안에 내 곁을 통과할 터였다. 차를 세워놓자,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잿빛 밀물처럼 해안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차를 온통 둘러쌌다. 마치 심해어(深海魚)의 눈과도 같은 두세 쌍의 헤드라이트가 그 안개 속을 뚫고 북쪽으로 사라져 갔다. 도로 가장자리의 난간 아래 어둠 속에서 바다가 숨을 내쉬며 꾸르륵거렸다. 8 시 58 분이 되자 프라이어스 도로 방면에서 두 줄기 헤드라이트가 커브를 돌아 질주해 왔다. 돌진해 온 차는 내 차 바로 앞에서 급회전을 하더니 왼쪽으로 빠지는 샛길로 들어갔다. 차의 색깔이나 형태는 볼 수 없었지만, 차바퀴가 어지간히 닳았음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운전솜씨 또한 낯익은 것이었다. 나는 불을 끈 채 고속도로를 건너질러 가장자리를 따라 그 샛길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나 미처 거기 이르기도 전에 안개 속으로 잦아들어 멀리서 울려오는 듯한 세 가지 소리를 들었다. 통곡을 하는 듯한 브레이크의 울부짖음, 한 방의 총성, 스피드를 내기 위해 열을 올리는 모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샛길의 어귀에 커다랗게 확산된 흰 빛이 쏟아졌다. 나는 교차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또 한 대의 차가 샛길에서 나타나더니 내 앞에서 좌회전을 하여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앞쪽이 길쭉한 우유빛 컨버터블이었다. 차창에 김이 서려 운전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본 것 같았다. 나로서는 그 뒤를 추적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찌됐든 추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안개등을 켜고 노상으로 나갔다. 고속도로에서 수백 야드 떨어진 곳에 두 바퀴를 길가 도랑에서 처박고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뒷전에 차를 세운 뒤 권총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 차는 검은 승용차로, 전쟁 전 링컨 사(社)에서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엔진은 헛돌고 불은 켜진 채였다. 번호는 62 S 895. 나는 오른손에 권총을 틀어쥔 채 왼손으로 앞문을 열었다. 작은 사내가 내게로 몸을 기울여 왔다. 부릅뜬 죽은 눈이 안개 속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쓰러지려는 그 몸을 붙잡았다. 하루 24 시간을 뼛골에 사무치게 죽음을 의시하며 살아온 내가 아니었던가.

제 19 장. 강도냐 배신이냐 그의 왼쪽 머리에는 바로 그 가죽모자가 여전히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왼쪽 관자놀이를 가린 부분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얼굴 왼쪽은 화약 때문에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총알이 준 충격으로 목뼈가 부러졌는지, 내가 일으켜 세우자 머리가 어깨 위에서 디룽거렸다. 때가 시커멓게 낀 손톱이 달린 양손은 핸들에서 미끄러져 내려 옆구리에서 건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를 일으켜 세워 운전석에 앉히고, 다른 손으로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스포츠 재킷의 양쪽 옆주머니에는 휘발유 냄새가 나는 싸구려 라이터와 질 나쁜 갈색 종이로 만 담배가 반쯤 든 값싼 목제(木製) 담배 케이스, 그리고 칼날 길이 10 센티미터의 재크나이프가 들어 있었다. 작업용 청바지의 뒷주머니에서는 닳아빠진 상어가죽 지갑이 나왔는데, 18~20 달러 상당의 소액권과 캘리포니아 주 당국이 최근 로렌스베커 앞으로 발행한 운전면허증이 들어 있었다. 주소는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굴 언저리에서 떠도는 싸구려 호텔로 되어 있었다. 그게 그의 주소일 턱도 없었고, 로렌스 베커가 그의 이름일 리도 없었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는 인조 가죽 케이스에 든 더러운 빗이 하나 있었다. 다른 주머니에서는 사슬에 꿴 자동차 열쇠 뭉치 시보레에서 캐딜락에 이르는 어떤 차라도 열 수 있는 열쇠와 반쯤 사용한 성냥갑이 들어 있었는데, 성냥갑에는 '코너 하우스, 칵테일 및 스테이크, 부에나비스타 남쪽 101 번 고속도로'라고 찍혀 있었다. 재킷 안에 걸친 옷은 T 셔츠 뿐이었다. 계기반에 붙은 재떨이에는 짤막한 마리화나 꽁초가 몇 개 있었지만, 차 안의 다른 부분은 목구멍처럼 깨끗했다. 시트 주머니 속에 등록증조차 없었으니, 50 달러와 100 달러짜리 지폐로 열심히 꾸려놓은 10 만 달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물건들을 주머니에 도로 넣은 뒤 그를 일으켜 운전석에 똑바로 앉히고는 문을 탁 닫아 받침대 구실을 하게끔 했다. 차에 오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돌아보니, 헤드라이트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으나 헛돌아가는 모터는 이제 지쳤는지 드문드문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죽은 사내가 핸들 위로 몸을 숙인 모양이 마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고도 빠른 여행길에 나설 준비가 끝난 듯했다. 그레이브스의 차는 주유소의 펌프 곁에 서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그 곁에 서 있던 그레이브스와 태거트가 달려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핼쓱했으나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검은 승용차였네."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아 떠나면서 그자가 모퉁이에서 멈추는 걸 봤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캡을 쓰고 가죽 점퍼를 입고 있더군." "지금도 입고 있습니다." "놈이 지나가는 걸 봤습니까?" 태거트의 음성은 긴장이 지나쳐서 속삭이는 소리를 냈다. "내 앞에서 차를 돌렸소. 다음번 샛길에 차를 세우고 앉아 있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말이오." "아니 뭐라고!" 그레이브스가 소리쳤다. "설마 자네가 쏜 건 아니겠지, 루?" "딴 작자가 그랬소. 총성이 울리고 1 분쯤 지나자 그 샛길에서 크림빛 컨버터블이 나오더군요. 여자가 운전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로스앤젤레스로 갔어요. 그런데 놈은 확실히 돈을 집었나요?" "녀석이 집는 걸 봤어." "지금은 갖고 있지 않아요. 결국 두 가지 일 중 하나가 일어난 거야. 강도였거나, 동료의 배신이지. 만일 놈이 노상강도에게 당한 거라면 그 패거리들은 그 10 만 달러를 손에 넣지 못한 게 돼. 한편, 놈들이 자기 편을 배신한 거라면 당연히 우리도 배신할 테지. 어느 쪽이든 샘프슨에게는 불리하게 됐는걸." "이제 어떻게 하죠?"하고 태���트가 물었다. 그레이브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공개적으로 나서야지. 경찰에게 나설 기회를 주는 거야. 현상금을 걸고. 그 문제로 샘프슨 부인을 만나야겠군."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시오, 버트."하고 나는 말했다. "이 싸움은 조용히 벌이지 않으면 안돼요. 신문에 나는 일만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만일 노상강도의 소행이라면 놈의 패거리는 우리를 탓할 거요. 그렇게 되면 샘프슨은 끝장이지." "더러운 새끼들!" 그레이브스의 음성은 침울했다. "우리는 약속을 지켰어. 이 자식들을 잡기만 하면 그냥 -" "아직 일의 전말은 모르죠. 확실한 건 어떤 사내가 렌트가 속에서 죽어 있다는 것 뿐이죠. 보안관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겁니다. 별로 쓸모는 없겠지만 그럴 듯한 시위는 되거든. 그 다음에 고속도로 순찰대와 FBI 를 불러요.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시오." 나는 비상 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약간 움직였다. 그레이브스는 창에서 떨어져 뒤로 물러섰다. "자네 또 어디로 갈 셈인가?" "목표도 모르는 사냥길에 나서려는 거요. 사태가 샘프슨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으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게 아니오?" 부에나비스타까지는 고속도로로 80km 길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모텔과 술집, 그리고 극장 간판이 중심가를 밝히고 있었다. 세 개의 극장 중 둘은 멕시코 영화광고를 내걸고 있었다. 통조림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 멕시코 인들은 땅을 파먹고 산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멕시코 인들과 고기잡이 배를 우려먹고 살고. 나는 마을 복판에 멋없이 서 있는 커다란 잡화점 앞에서 차를 세웠다. 거기서는 총기류 및 잡지, 낚시 도구, 생맥주, 문방구, 야구 글러브, 피임약, 그리고 담배를 팔고 있었다. 오리꽁지처럼 쳐낸 머리카락에 반들반들 기름칠을 한, 20 명도 넘는 멕시코 소년들이 쉴새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게 뒷전에 놓인 회전 당구기와 거리의 소녀들에게 끌려 두 패로 나뉘어 있었다. 소녀들은 리본과 화장품으로 치장하고 젖가슴으로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소년들은 휘파람을 불며 폼을 잡거나, 혹은 관심이 없는 체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보도 쪽으로 불러 '코너 하우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동료와 말을 나누더니 둘이 동시에 남쪽을 가리켰다. "곧장 가세요, 8km 쯤요. 화이트 비치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어요." "커다랗고 붉은 간판이 있어요." 나중에 온 소년이 팔을 벌리며 열심히 말했다. "<코너 하우스> 라면 당연히 눈에 띄죠."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마치 내가 자기들에게 친절을 베풀기라도 한 듯 절을 하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네온의 '코너 하우스'라는 간판은 고속도로 오른쪽에 있는 길쭉하고 낮은 건물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 그 저편 교차로에 있는 하얀 이정표에는 검은 글씨로 '화이트 비치'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건물 곁의 아스팔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8~9 대 가량의 다른 차들이 있었으며, 트레일러가 달린 트럭 한 대가 고속도로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반쯤 커튼이 쳐진 창을 통해 보니, 몇 쌍은 테이블에 자리잡고 두어 쌍은 춤을 추고 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왼쪽에 기다란 바가 보였는데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입구에 선 채 마치 누군가를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춤추는 사람은 그 큰 홀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만큼 많지 않았다. 음악은 주크박스 (요금을 넣어 원하는 곡을 들을 수 있는 자동전축) 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홀 안쪽의 연주대는 비어 있었다.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힌 바닥과 미처 정돈되지 않은 채 휘청거리는 테이블의 행렬, 주정꾼들이 벽에 남기는 기념물의 냄새, 취한의 잠꼬대처럼 너저분한 장식 등이 이날


저녁 큰 바람이 한번 쓸고 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손님들도 홀 안의 침울한 분위기를 느끼는 듯, 애써 웃음과 쾌락을 얻으려 하면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어느 얼굴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나 뿐인 웨이트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검은 눈동자에 부드러운 입매, 스무 살을 맞아 막 피어나려는 멋진 몸매였다. 그 얼굴과 몸만 봐도 그녀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발에 티눈이라도 난 것처럼 조심스레 걸어왔다. "자리를 마련해 드릴까요, 손님?" "고맙지만 바에 앉겠소. 그런데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야구장에서 만난 친구를 찾고 있는데, 보이지를 않는군." "이름이 뭔데요?" "그게 골칫거린데... 이름을 몰라요. 그 친구에게 내기빚이 있는데, 여기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하더군. 키가 작고 서른다섯쯤 된 친구야. 가죽 점퍼를 입고 가죽 캡을 썼지. 눈이 푸르고 코가 날카롭게 생겼어." 그리고 마음속으로, '머리에 구멍이 뚫려 있지, 아가씨, 머리통에 구멍이 뚫려 있어' 하고 말했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이름이 에디 뭐라든가, 아무튼 그래요. 가끔씩 한잔하러 오거든요. 하지만 오늘밤엔 안 왔는걸요." "여기 오면 만날 거라고 하던데. 그 친구 보통 몇 시경에 오나?" "이보다 더 늦게 와요. 자정 때쯤. 그분, 트럭을 몰지요?" "응, 푸른색이오." "바로 그거예요. 주차장에서 본 적이 있어요. 이틀 전에 와서 여기 전화로 장거리전화를 걸었어요. 아니, 사흘 전이군요. 주인은 싫어했지만.... 왜 아시잖아요, 3 분만 지나면 요금이 엄청나게 붙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이 요금이 나오면 계산하겠다니까 주인도 가만 있더군요. 그런데 그분에게 줄 돈이 얼마나 되죠?" "많아. 그 친구 어디로 전화했는지 혹시 모르나?" "아뇨, 그야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요. 아저씨에겐 상관이 있나 보죠?" "연락을 하고 싶어서. 그럼, 돈을 보낼 수 있거든." "괜찮으시다면 주인에게 맡겨도 돼요." "그 양반은 어디 있소?" "이름을 치코예요. 바 뒤에 있어요." 한 테이블에 자리잡은 사내가 유리잔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나는 바로 들어갔다. 바텐더의 얼굴은 벗겨져 가는 이마 끝에서 느슨하게 늘어진 턱에 이르기까지 지독하게 길쭉하고 앙상했다. 이 밤에 텅 빈 바를 지키고 있는 그 몰골은 더욱 길어 보였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맥주."


그의 턱이 한 단계 더 처졌다. "동부식, 아니면? 서부식으로?" "동부식으로." "음악까지 35 센트 되겠는데요." 그의 턱이 원상복귀를 했다. "우리집에선 음악을 곁들이지요." "샌드위치, 되겠죠?" "물론이죠." 그는 아주 신이 나서 말했다. "어떤 걸로?" "베이컨과 달걀을 넣어 주쇼." "오케이." 그는 열린 문을 통해 웨이트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난 에디라는 친구를 찾고 있소."하고 내가 말했다. "며칠 전 밤에 내게 장거리전화를 건 친구 말이오." "라스베이가스에서 오셨소?" "지금 거기서 오는 길이오." "그곳 경기는 어떤가요?" "형편없소." "거 안됐구먼." 그는 기쁜 듯이 말했다. "뭣 땜에 그자를 찾는 거요?" "빚이 좀 있어서. 그 친구, 이 근처에서 사나요?" "그렇소. 어딘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럴 거요. 금발머리 여자를 데리고 한두 번 여기 왔었지요. 마누라일 테지. 내 생각엔 오늘밤에도 올 것 같은데 기다려 보시구려." "고맙소, 그렇게 하죠." 나는 맥주잔을 창가의 테이블로 가져갔다. 거기서는 주차장과 입구를 지켜볼 수 있었다. 잠시 뒤 웨이트리스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그녀는 내가 요금을 치르고 팁을 준 뒤에도 그냥 남아 머뭇거렸다. "돈을 주인에게 맡기실 건가요?" "그건 생각중이야. 틀림없이 그 친구 손에 들어가야 하니까." "아저씨는 양심껏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분인가 보죠?" "도박꾼이 낼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잖아?" "도박꾼이 아닐까 생각은 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열을 내며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들어보세요, 아저씨. 내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스포츠맨하고 데이트를 하걸랑요. 그런데 그 애 말이, 그 사람이 그러는데 내일 3 회전에선 징크스 호가 꼭 이길 거라나요. 아저씨 같으면 그 말(馬)에 거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말에?" "돈을 아껴요." 나는 말했다. "경마장 친구들을 이길 수는 없어." "난 팁으로 받는 돈만 거는걸요. 그 사람, 내 친구의 남자친구 말이에요, 징크스 호가 틀림없이 이긴대요." "돈을 아끼라니까." 그녀의 입이 샐쭉하니 오므라들었다. "도박꾼치곤 이상한 분이시네." "할 수 없군." 나는 1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었다.


"징크스 호더러 뭔가 보여달라고 하지." 그녀는 놀라움에 찬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아저씨--- 난 결코 돈을 달라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 "아가씨 돈을 잃는 것보다는 낫잖아." 근 12 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그런지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내가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몇 대의 차가 도착했다. 젊은이들이 한 무더기 웃고 떠들며 들어오자 식당은 단번에 활기를 띠었다. 뒤를 이어 검은 세단 한 대가 주차장으로 굴러 들어왔다. 전면 유리 옆에 경찰용 붉은 서치라이트가 티눈이 박힌 엄지손가락처럼 비쭉 튀어나온 검은 포드였다. 차에서 내린 사내는 평복을 입고 있었으나, 정복을 입은 야구심판 못지 않게 뚜렷이 표가 났다. 게다가,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는 권총 여기 있소, 하는 모양이었다. 입구에 달린 전등의 불빛 속으로 그가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산타테레사에서 온 보안관 서리였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바 끝의 붙은 문을 통해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었다. 변기 뚜껑을 내려덮고는 그 위에 걸터앉아 선견지명이 없었음을 한탄했다. 에디 뭐라는 녀석의 주머니에 성냥갑을 남겨놓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그대로 앉아 회칠을 한 벽에 끄적거린 낙서들을 보며 8~10 분을 보냈다. '넝마주이 존 라티노, 장애물 경기에서 120 회 우승, 1946 년 미시건 주 디어본 시 디어본 고등학교 졸업. 프랭클린 P 슈나이더, 오클라호마 주 오시지 군, 고맙다, 이 병신아.' 나머지는 유치한 그림을 곁들인 흔해빠진 변소 낙서였다. 천정에 붙은 벌거벗은 전구가 눈부셨다. 머릿속이 띵 하더니 나는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방은 땅 밑 저편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하나의 통로 - 좌우의 벽이 하얗게 칠해진 통로였다. 나는 그 통로를 따라 도시 밑을 흐르는 더러운 지하수에 이르렀다.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오물로 가득찬 그 강을 건너야만 했다. 다행히도 내게는 죽마(竹馬)가 있었다. 덕택에 나는 셀로판 지에 싸인 것과 마찬가지로 몸에 오물을 묻히지 않고 저쪽 기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나는 죽마를 던져버리고 - 그것들은 또한 목발이기도 했다 - 죽음의 아가리처럼 번쩍이는 크롬을 입힌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그것은 순조롭고 확실하게 나를 끌어올려, 나는 온갖 험난한 지대를 통과하여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대문 앞에 이르렀다. 줄무늬진 면포(綿布)를 두른 한 처녀가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노래하면서. 내가 포석(鋪石)이 깔린 광장으로 들어서자 등뒤에서 문이 철컥 닫혔다. 그것은 그 도시의 중앙광장이었지만,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다. 전차 한 대 눈에 띄지 않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 하나가 사람들의 발길로 매끄러워진 보도 위를 쓸쓸히 비추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자 내 발소리는


쓸쓸히 메아리쳤고, 사방에 웅크리고 앉은 크고 작은 집들이 폭풍을 앞둔 나무숲처럼 웅성거렸다. 문이 또다시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혀서 나는 눈을 떴다. 무언가 쇠붙이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 열어."하고 보안관 서리가 말했다. "그 안에 있는 걸 알고 있어." 나는 걸쇠를 뽑고 문을 활짝 열었다. "바쁘시군요, 서리님?" "바로 당신이었군. 당신일 거라고 짐작했지." 그의 검은 눈동자와 두터운 입술은 만족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손에는 총을 들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소."하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비밀로 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겠지, 응? 내가 들어오는 걸 보자 이리로 숨어든 이유가 있었겠지? 보안관은 이번 일을 내 부인의 소행으로 보고 있어. 당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할 거야."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 어깨 너머에서 바텐더가 말했다. "라스베이가스에 있는데 에디가 전화했다고 말하더군요." "어때, 뭐 할 말 있나?" 서리가 따지고 들었다. 그는 내 얼굴에 대고 권총을 휘둘렀다. "들어와서 문을 닫으시지." "뭐 어째? 머리에 두 손을 올리기나 해."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손을 머리에 올리라니까." 권총이 명치를 파고들었다. "총 갖고 있나?" 그는 다른 손으로 내 몸을 더듬으려 했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총은 갖고 있지만, 빼앗길 수는 없소." 그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 등뒤에서 문이 빙그르 닫혔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응? 공무집행방해죄야. 체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은걸." "생각이 굴뚝 같은 건 좋지만 그쯤에서 끝내시지." "농담은 집어치워, 이 하룻강아지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것 뿐이야." "그저 즐기고 있었을 따름이오." "그래, 입 다물지 못하겠나?" 그는 만화에 나오는 경찰처럼 말했다. 그는 빈손을 쳐들어 내 뺨을 때리려 했다. "잠깐."하고 나는 말했다.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안돼." "어째 안된다는 거지?" "아직 경찰을 죽인 적은 없었어. 이력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거든." 둘의 시선이 맞부딪쳐 얼어붙었다. 쳐들었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뻣뻣이 굳는가 싶더니 슬금슬금 내려갔다. "이제 총은 치우시지."하고 내가 말했다. "나는 강요받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당신 취미를 물어보지는 않았어." 말은 이랬어도 그의 분노는 어느덧 가라앉아 있었다. 거무튀튀한 그 얼굴이 분노와 의혹, 의심과 당황이라는 모순된 갈등 사이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이유로 여기 온 거요. 서리님." 마지막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으나, 나는 애써 입밖에 냈다. "에디의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발견했었죠." "녀석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는 빈틈없이 물었다. "웨이트리스가 말해 주었소." "허어? 바텐더는 녀석이 라스베이가스로 전화해서 당신을 찾았다던데?" "바텐더에게서 뭣 좀 짜낼까 하고 내가 꾸민 거요. 알겠소? 내가 꾸며낸 이야기란 말이오. 꾀를 좀 썼지." "그래, 무얼 알아냈지?" "죽은 사내의 이름은 에디, 트럭을 몰았고, 가끔 한잔하러 여기 왔다는 것. 사흘 전에 여기에서 라스베이가스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오. 사흘 전 샘프슨은 라스베이가스에 있었소." "농담은 아니겠지?" "서리님, 설령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내가 당신에게 농담을 걸어 뭣 하겠소?" "제기랄."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일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지는군, 안 그렇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걸."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 사실을 지적해 줘서 정말 고맙소." 그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총은 거두었다.

제 20 장. 여자와 남자 나는 고속도로를 1 킬로미터쯤 내려갔다가 차를 돌려 되돌아와서는, '코너 하우스'와 대각선상에서 마주보는 건너편 교차로에 차를 세웠다. 보안관 서리의 차는 여전히 주차장에 있었다. 안개는 걷히고 있었다. 물에 풀려가는 우유처럼 하늘 속으로 녹아들며 바다로 흩어져 날아갔다. 멀리 펼쳐진 수평선은 단지 내게 랠프 샘프슨이 그보다 더 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상기시켰을 따름이다. 산속 오두막에서 굶어 죽어가거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거나, 아니면 에디처럼 머리에 구멍이 뚫려서--- 그는 어느 곳에든 있을 수 있었다. 양쪽 방향에서 달려온 차들이 그 식당 앞을 지나 제가끔 집으로, 혹은 보다 밝은 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백미러를 통해 보니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에디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옮겨받기나 한 듯이 눈 밑에는 깊은 주름이 패이고,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트럭 한 대가 남쪽에서 올라오더니 천천히 내 곁을 지나 '코너 하우스'의 주차장으로 굴러 들어갔다. 푸른색 유개 트럭이었다. 한 사내가 차에서 뛰어내려 급한 걸음으로 아스팔트를 건넜다. 땅을 스치듯 하는 그 걸음걸이는 내 귀에 익은 것이었고, 입구의 불빛 아래 드러난 그 얼굴도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성미 고약한 조각가가 돌을 깎아만든 뒤, 그것을 또 다른 돌로 뭉개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검은 경찰차를 보자 그는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푸른 트럭으로 뛰어 돌아갔다. 트럭은 기어 소리를 울리며 뒷걸음질치더니 방향을 바꾸어 화이트 비치로 통하는 길을 내려갔다. 그 후미등이 점점 작아져 한 점의 붉은 섬광처럼 보였을 때 나는 그 뒤를 쫓았다. 길은 포장도로에서 자갈길로 변하더니 끝내는 모래사장이 되었다. 나는 3 킬로미터 가량을 트럭이 날리는 먼지를 마셨다. 양측이 절벽으로 막힌 해변으로 접어들자 길은 또 하나의 길과 교차했다. 트럭의 불빛은 좌회전을 하더니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불빛이 언덕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그 뒤를 쫓았다. 길은 언덕 측면을 깎아 만든 일방 통행로였다.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니 오른쪽 저 아래로 태평양의 파도가 보였다. 달은 바다로 흘러나가는 구름 떼 속에서 여행하고 있었다. 그 빛이 검은 물결 위에서 한 조각 납처럼 투박하게 빛났다. 언덕을 넘어서자 길은 평탄해져서 곧장 앞으로 뻗어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나는 트럭을 스쳐지났다. 트럭은 불을 끈 채 길에서 50 미터 떨어진 지점에 서 있었다. 나는 그대로 진행했다. 2 분의 1 킬로미터쯤 더 간 언덕 기슭에서 길이 갑작스럽게 끝났다. 오른쪽 바다 쪽으로 한줄기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나 있었지만, 그 입구는 통나무 문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막다른 그 길에서 차를 돌려세우고 걸어서 언덕을 되올라갔다. 하늘을 향해 들쭉날쭉 뻗어오른 유칼리나무 숲이 트럭이 서 있는 오솔길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길을 벗어나 나무숲 뒤로 몸을 숨기며 계속 나아갔다. 군데군데 솟아난 잡초 덤불로 땅은 고르지 않았다. 발이 걸려 넘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득 눈앞이 확 트이며, 나는 하마터면 낭떠러지 밖까지 걸어나갈 뻔했다. 발 밑 아득한 곳에서 하얀 파도가 해변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바닷물은 다이빙을 해도 괜찮으리만큼 깊숙히 밀려 들어와 있었지만, 금속판처럼 단단해 보였다. 발 밑 오른쪽에 사각형의 흰 불빛이 보였다. 나는 떨어지지 않도록 풀잎을 붙잡아가며 엉금엉금 기고 미끄러지며 언덕 허리를 내려갔다. 불빛에 둘러싸인 작은 건물 한 채가 윤곽을 드러냈다. 두 절벽이 만나는 곳에 하얗게 칠한 오두막집 하나가


있었다. 창에는 차일이 쳐 있지 않아서 단칸방 구석구석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총집에 권총이 제대로 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포복하여 창가로 접근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샘프슨은 아니었다. 퍼들러는 뭉개진 옆얼굴을 내게로 향한 채 한 손에 맥주병을 움켜쥐고 술통 모양의 안락의자에 엉덩이를 박고 있었다. 그는 벽에 붙여진 부서진 침대 겸용의 소파에 앉은 여자와 마주보고 있었다. 회칠을 하지 않은 천정의 서까래에서 늘어진 휘발유 램프가 그녀의 얼굴과 가닥가닥 늘어진 금발에 투박하도록 흰 빛을 던지고 있었다. 넓고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바싹 마른 입이 달린, 앙상하고 생활고에 지친 얼굴이었다. 오직 두 개의 차가운 갈색 눈만이 그 속에서 생기를 띠고, 움푹 꺼진 눈자위 속에서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방은 크지 않았는데도 지독히 황량해 보였다. 소나무를 깔아 만든 바닥은 양탄자도 없이 우둘두툴하고 더러웠다. 램프 바로 아래에 지저분한 접시들이 쌓인 나무탁자가 서 있었다. 그 저편 안쪽 벽에는 두 개의 버너가 달린 석유 난로와 축 늘어진 냉장고, 얼룩덜룩 녹이 슨 싱크대가 붙어 있었다. 싱크대 밑에는 양동이 하나가 놓여 있어서, 그것으로 찔끔찔끔 새는 물을 받고 있었다. 방안이 워낙 조용하고, 판자벽 또한 원체 얇아서 램프의 끊임없는 탄식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윽고 퍼들러가 입을 열자 그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난 여기서 밤새 기다릴 순 없단 말이야, 안 그래? 설마 날 여기서 밤새 기다리게 할 셈은 아니겠지? 난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한다고. 게다가, '코너 하우스' 앞에 죽치고 있는 그놈의 경찰차가 영 맘에 안 들어." "그 얘긴 아까도 하지 않았수. 그 찬 별거 아니라고요."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다시 말하는 거야. 난? 벌써 '피아노' 술집으로 돌아가 있어야 했다고. 당신도 알잖아. 에디가 안 보인다고 트로이 씨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니까." "내버려둬요. 졸기라도 한들 그게 대순가." 여자의 음성은 그 얼굴처럼 날카롭고 메말랐다. "에디가 일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들면 쫓아내면 될 것 아뇨?" "당신은 어느 모로 보나 그런 말을 할 입장이 못돼." 퍼들러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에디가 감옥에서 나와 일자리를 얻으려고 돌아다녔을 땐 당신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그 친구가 감옥에서 나와 일자리를 찾아헤맬 때 마침 트로이 씨가 일자리를--- " "기가 막혀서! 한 말은 제발 안할 수 없수? 얼간이같이." 흉터진 그의 얼굴이 감정을 다친 놀라움에 일그러졌다. 목을 움츠리자 두터운 목덜미에 거북 목처럼 주름이 패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야, 마시." "입 닥치고 에디나 감옥 얘길랑은 주절거리지 말아요." 그녀의 음성이 가느다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당신 대체 진짜 감옥맛을 몇 번이나 봤길래 그러는 거야, 얼간이 같으니." 그의 대답은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이었다. "이봐, 날 끌어들이진 말라고." "좋아요, 그렇담 에디도 끌어들이지 말아야지." "그런데 도대체 에디는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는진 나도 몰라요. 이유도 모르고. 하지만 틀림없이 무슨 까닭이 있을 거야." "나중에 트로이 씨에게 말씀드릴 때 그 이유가 그럴 듯했으면 좋겠구먼." "트로이 씨, 트로이 씨라니. 그 작자가 당신을 홀린 모양이구려? 에디는 아마 그놈의 트로이 씨에겐 얘기조차 안 꺼낼걸." 그의 작은 눈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에서 그 말의 뜻을 읽으려고 애썼으나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들어봐, 마시."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말했다. "당신이 트럭을 몰 수도 있어." "말하는 것 좀 봐! 그 따위 일은 난 조금도 하고 싶지 않다고요." "그렇게 되면 내겐 참 좋아. 에디에게도 좋고. 당신은 에디가 사창가에서 빼낸 뒤론 점점 멋쟁이가 돼가고--- " "입 닥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어!"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가 겁쟁이라서 골치야. 순찰차만 보고도 오줌을 싸는 판이니, 야단맞는 게 겁나서 여자를 앞세우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지. 쌔고쌘 뚜쟁이놈들하고 뭐가 달라."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술병을 휘둘렀다. "보라고, 날 끌어들이지 말라니까. 난 누구도 앞세우지 않는다고. 이봐, 사내새끼였다면 낯짝을 뭉개버렸을 거야." 맥주거품이 넘쳐흘러 그의 무릎과 바닥을 적셨다. 그녀는 지극히 쌀쌀맞게 대꾸했다. "에디 앞에선 그런 말 하지 않는 게 좋을걸. 당신을 열 토막은 낼 테니까. 잘 아실 테지." "그 원숭이새끼 같은 놈!" "그래, 원숭이새끼다! 앉아, 퍼들러. 당신이 기찬 싸움꾼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니까. 맥주 한 병 더 줄께." 그녀는 일어나서 방을 가로질러 갔다. 굶주린 고양이처럼 가볍고도 사나운 기세로. 그녀는 싱크대 옆에 박힌 못에 걸린 타월을 끌어내려, 맥주 얼룩이 진 가운을 가볍게 문질렀다. "트럭은 오는 거지?" 퍼들러가 기대에 차서 말했다. "나도 당신처럼 뭣이든 두 번씩 말해야 돼? 트럭 같은 건 몰지 않아. 그렇게도 겁나면 딴치들을 시키면 되잖아." "아니, 그건 안돼. 길을 모르는데. 뒤집어엎기 십상이지." "그렇담 시간낭비만 하고 있군, 안 그래?"


"응, 그런 것 같군." 그는 방바닥과 벽에 거대한 그림자를 던지며 머뭇머뭇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가기 전에 한번 놀면 어떨까? 잠깐 즐기자고. 에디 녀석도 보나마나 누군가와 이불 속에 있을걸. 난 돈깨나 있는 몸이라고." 그녀는 식탁에서 반달처럼 날이 휜 식칼을 집어들었다. "그거 갖고 꺼지시지, 퍼들러. 아니면, 이걸로 사랑해 줄 테니까." "이러지 마, 마시. 좀 친해 보자고." 그는 거리를 두고 멈춰섰다.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발작을 억누르려고 침을 꿀꺽 삼켰지만, 튀어나온 음성은 비명에 가까웠다. "꺼져!" 눈부신 불빛 속에서 식칼이 춤을 추며 그의 목을 향해 움직여 갔다. "알았어, 마시. 그렇게 화낼 건 없잖아."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실연당한 사내가 으레 그렇듯 상처받아 맥빠진 얼굴을 하고 몸을 돌렸다. 나는 창가를 떠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미처 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언덕길에 사각형의 빛이 뿌려졌다. 나는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코앞 마른 풀 위에 내 머리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며 어둠이 내 몸을 덮었다. 집 뒤, 어둠의 바닷속에서 퍼들러의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그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언덕을 올라, 유칼리나무 숲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그와 마시라는 금발 여자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나는 퍼들러를 택했다. 마시는 기다릴 터였다. 그녀는 에디 뭐라는 작자가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다.

제 21 장. 구름 속의 사원 부에나비스타 북쪽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푸른 트럭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트럭이 충분히 앞설 때까지 기다렸다. 교차로의 표지판에는 '앞길이 험하니 경계하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다시 추적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안개등으로 불을 바꿨다. 안개는 어언 바다로 날아가고 없었지만, 퍼들러로 하여금 가는 길 내내 똑같은 불빛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행로는 100 킬로미터가 훨씬 넘었다. 산속을 누비는 난폭한 운전의 두 시간이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8 킬로미터 정도 직선 코스를 달리기도 했는데, 낮에 올랐던 그 어느 길 못지 않게 험했다. 시커먼 절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린 적도 두 번이나 있었는데, 매 커브마다 아래 저멀리 영원한 암흑이 도사리고 있었다. 트럭은 마치 안전한 노선을 달리기라도 하듯 최대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트럭을 시야에서 내보낸 뒤에 헤드라이트를 다시 켜고, 다른 차를 운전하는 새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려고 애썼다. 어느덧 우리는 미란다와 내가 오후에 건넜던 협곡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협곡 안의 똑바른 길에 이르자 나는 차의 불을 모조리 끄고 달빛과 기억에만 의지하며 차를 몰았다. 트럭이 가는 곳을 알 것도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거기라야 했다. 협곡을 지나자 트럭은 '구름 속의 사원'으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타고 산속으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그 뒤를 쫓기 위해서 다시 헤드라이트를 켜야 했다. 클로드의 우편함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 옆의 나무문은 닫혀 있었다. 트럭은 훨씬 위를 달리고 있었다. 산을 기어오르는 반딧불 같았다. 그보다 더 높은 곳엔 톱니 모양의 검은 지평선 위에 별이 뿌려진 맑게 갠 하늘이 있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달이 별들 사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밤의 장막에 뚫린 동그랗고 하얀 구멍 같았다. 나는 어느덧 기다리는 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길을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사람을 뒤쫓는 일에 진력이 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그곳에는 퍼들러와 클로드 단 두 사람밖엔 없었다. 내게는 총이 있었고, 또 불의의 습격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차를 몰아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 산꼭대기에 있는 암층 대지의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리막길에 들어 그 사원으로 향했다. 사원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하얀 건물의 상공에서 희미하게나마 빛나고 있었다. 철사로 엮은 정문은 열려 있었다. 트럭은 그 안에 서 있었다.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정문 옆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트럭 안에는 웅크리고 있는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쪽에는 누런 삼베를 낀 나무 벤치가 하나씩 있었다. 땀을 흘리고서 옷을 입은 채 땀을 말리는 사내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가장자리에 쇠로 테두리를 한 사원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달빛이 그려놓은 로마 시대 원로원 의원 같은 모습을 한 클로드가 나왔다. 그의 샌들이 자갈길을 울렸다. "누구요?"하고 그가 물었다. "아처요. 기억하시겠소?" 나는 트럭 뒤에서 나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그 불빛이 내 손에 쥐어진 권총 위에서 빛났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수염은 떨리고 있었으나 그의 음성은 차분했다. "여전히 샘프슨을 찾고 있소."하고 나는 말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문 쪽으로 물러났다. "여기 없다는 걸 알잖소? 한번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거요?" "헛소리 작작해요, 클로드. 그런 말에 넘어갈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소?" "꼭 그렇다면 들어오구려."하고 그는 말했다. "보아 하니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구먼." 그는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고, 내가 들어가자 문을 닫았다. 내원(內院) 복판에 퍼들러가 서 있었다. "저리 가서 퍼들러와 서 있으시지."하고 나는 클로드에게 말했다. 그러나 퍼들러가 발을 질질 끌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의 발치에 한 발 쏘았다. 총알은 그의 발 앞 돌바닥에 흰 상처를 내고는 내원 저편의 벽돌담에 부딪치며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퍼들러는 우뚝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클로드가 시원치 않게 내 손에서 총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나는 팔꿈치로 그의 배를 찔렀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돌바닥에 나자빠졌다. "이리 오시지."하고 나는 퍼들러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드가 배를 끌어안고 일어나 앉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 사투리로 목청껏 부르짖었다. 그 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내원 저편의 한쪽 문이 열리며, 열댓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체구가 작고 갈색 피부를 가진 그들은 잽싸게 내게 달려들었다. 허연 이빨들이 달빛 속에서 번쩍였다. 그들은 말없이 다가왔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총을 쏠 수가 없었다. 갈색 피부의 사내들은 뻔히 총을 보면서도 개의치 않고 다가왔다. 나는 권총을 거꾸로 쥐고 기다렸다. 먼저 달려든 두 사내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벌떼처럼 나를 덮쳐 내 팔에 매달리고, 밑에서 내 다리를 찼다. 드디어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은 마치 이승의 어둑한 산기슭 아래로 사라져 가는 자동차의 후미등처럼 내게서 빠져나갔다. 나는 대항을 했다. 양팔은 비틀어 올려졌고 입은 돌바닥과 키스를 했다. 얼마 뒤에 나는 내가 엉망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두 팔은 뒤로 돌려 묶여졌고, 두 발 역시 구부려 돌려져 허리에 묶여 있었다. 몸을 약간 흔들어 한쪽 머리로 돌바닥을 짓찧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이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고함을 치려고 했다. 내 머리가 북에 씌운 생가죽처럼 진동했다. 그 윙윙거림 때문에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함치는 것도 포기했다. 머리는 계속 윙윙거림이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는 소리 없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진짜 고통이 시작되어, 마치 부두 노동자들이 돌아가며 말뚝을 박듯이 단속적인 리듬으로 관자놀이를 치고 있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집적거리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가 비록 클로드일지라도. "신의 진노하심은 준엄하도다." 등뒤 머리 위에서 그가


말했다. "신전을 모독한 자 어찌 벌을 면할 수 있으리오." "수다는 그만 떨지."하고 나는 돌바닥에 대고 말했다. "이젠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 납치죄의 벌을 받게 될 거야." "죄를 덮어씌우지 마시오, 아처 씨." 그는 혀를 입천정에 대고 '꼬꼬댁' 하고 우는 암탉과 같은 소리를 냈다. 억지로 목을 틀어 바라보니까 샌들에 얹힌 옹이투성이의 발이 내 머리 가까이에 있었다. "당신은 상황을 오해하고 있소." 옷치레를 하듯 어휘치레를 하면서 그는 말했다. "그대는 무장을 하고 우리들의 은신처에 침입, 본인을 공격하고, 본인의 친구 및 제자들을 공격했으며...." 나는 침울하게 애써 코웃음칠 수 있었다. "퍼들러도 제잔가? 기차게 종교적인 타입이지." "귀담아 들으시오, 아처 씨. 우리는 정당방위차, 완전한 정당성에 입각하여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소. 당신 목숨은 여전히 우리가 장악하고 있소." "굴뚝으로 기어 올라가서 연기를 타고 꺼져 버리는 게 어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구먼...." "당신이 냄새나는 늙은 사기꾼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지." 보다 그럴 듯한 욕을 생각하려 했지만, 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 주지 않았다. 그는 발꿈치로 콩팥 바로 위의 옆구리를 짓밟았다. 내 입이 벌어지고 이빨이 돌바닥을 갈았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신중히 생각하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불빛이 사라지며 문이 쾅 닫혔다. 머리와 몸의 통증이 별빛처럼 고동쳤다. 별빛이 아득히 작은가 싶으면, 다음 순간 크고 가까워졌다가 또다시 점점 작아져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천공기(穿孔機)의 핑핑 도는 첨단(尖端)과도 같았다. 의식의 문턱에 선 내 마음에 문지방 저편의 갖가지 영상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어느 거리에서 본 것보다도 더욱 험상궂은 얼굴들, 어떤 도시에서 마주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사악한 거리들이었다. 나는 시내 중심부의 텅 빈 광장에 와 있었다. 덜컹거리는 유리창 저편, 화장한 얼굴 밑에 병색이 짙은 늙은 창녀와 같은 죽음이 슬그머니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것은 다른 얼굴로 변하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란다의 햇볕에 그을린 젊은 얼굴에서 잿빛 머리카락이 솟아나오고, 클로드의 입에서 사라진 미소가 페이의 미소로 변하고, 페이의 얼굴은 커다란 눈만 남기고 오므라들어 죽은 필리핀 인의 머리가 되고, 그것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트로이의 흰 머리로 바뀌었다. 에디의 부릅뜬 검은 눈과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일그러진 미소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갖고 있어서,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두가 비슷해 보이는 멕시코 인의 얼굴들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두 손은 뒤로 돌려져 밧줄로 묶이고 두 발뒤꿈치는 엉덩이에 바짝 붙여진 채, 나는 몸을 굴려 문지방을 넘어 불편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눈꺼풀에 비치는 불빛이 나를 다시 밀폐된 붉은 세계로 데려왔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는 트로이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당신은 위험한 실수를 범했어, 클로드. 내가 이 친구를 알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그런데 이 친구가 먼젓번에도 찾아왔었다는 걸 어째서 내게는 알리지 않았느냔 말이야?" "난 그게 그렇게 중대한 일인 줄 몰랐소. 녀석은 샘프슨만 찾았거든요. 샘프슨의 딸도 함께 왔었고요."하고 클로드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낭랑하고 유창한 음향은 간데없이, 한껏 옥타브를 올린 음성이었다. 겁에 질린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중대한 일인 줄 몰랐다고, 응?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내 가르쳐 주지. 바로 네 녀석의 이용가치는 끝났다는 뜻이야! 정부인지 뭔지 그 까무잡잡한 계집앨 데리고 꺼지라고." "여긴 내 집이오! 여기서 살아도 좋다고 샘프슨이 말했소. 당신이 날더러 나가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미 말했잖아, 클로드. 당신은 자신이 맡은 노선을 망쳐놨어. 즉, 당신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야. 아니, 만사가 끝장난 건지도 모르지. 우리는 이 사원에서 철수해야 될 테고, 당신을 그냥 남겨놓았다간 경찰에 밀고하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난 어디로 갑니까?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엉터리 교회를 또 하나 차리면 되잖아. 가워 협곡으로 돌아가! 네 녀석이 무얼 하든 내 상관할 바 아니니까." "이러시면 페이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난 페이와 의논할 생각은 없어. 자, 이젠 그만 떠들라고. 아니면 퍼들러에게 넘겨서 넋두리를 들어주라고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직 당신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까." "뭔데요, 그게?" 클로드는 성의를 보이려고 애쓰며 물었다. "트럭에 실려 있는 짐을 끝까지 탈없이 운반하는 거야. 그거조차 잘 해낼지 의문이지만, 모험하는 수밖에 없지. 어떻든 모험은 당신이 하는 거니까. 남동문(南東門)에 가면 농장의 십장이 나와서 짐을 받아 안전하게 처리할 거야. 남동문이 어디 있는지는 아나?" "예, 고속도로 벗어나서 바로죠." "좋았어. 짐을 내리고 나면 트럭을 베이커스필드로 도로 몰고 가서 내버리는 거야. 그걸 팔려고 해서는 안돼. 아무 주차장에나 내동댕이쳐놓고 꺼지라고. 어때, 믿어도 되겠지?" "그럼요, 트로이 씨. 하지만 내겐 돈이 한푼도 없는데요." "자, 100 달러 주지." "겨우 100 달러?"


"그거나마 얻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당장 출발해. 퍼들러에겐 식사가 끝나는 대로 내가 보잔다고 전해." "트로이 씨, 설마 그자를 시켜 날 때리려는 건 아니겠죠?" "병신 같은 소리 작작해. 그 녀석이 당신의 더러운 대갈통의 머리카락 한 오라기라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클로드의 샌들이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불빛이 남아 있었다. 무언가가 내 손목을 죄고 있는 밧줄을 끌어당겼다. 양손과 팔뚝은 거의 마비 상태였지만, 그 힘을 어깨로 느낄 수 있었다. "놔둬!" 모처럼 입을 열자 턱이 제멋대로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멈추기 위해선 이를 악물어야 했다. "금방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꼭 시장에 내갈 암탉처럼 동여놨구먼, 안 그런가?" 나이프로 밧줄을 슬근슬근 끊는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의 긴장이 풀렸다. 풀려진 팔다리는 장작개비처럼 바닥으로 탁 하고 떨어졌다. 목덜미에 소름이 쫙 끼치며 전신을 뒤흔들었다. "일어나시지, 친구." "이대로가 편한걸." 천천히 번져오르는 불길처럼 팔다리 신경에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을 해서는 안돼, 아처. 경고삼아 부하들 얘기를 했었잖아. 그 애들이 당신을 다소 거칠게 대접했다 하더라도, 다 당신이 자초한 게 아닌가, 응? 그리고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당신은 보험가입 권유를 꽤나 유난스러운 방식으로 하는구먼. 꼭두새벽, 산꼭대기에서 권총을 들고 말씀이야.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오래 살 사람들한테 말이지."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팔을 움직여 보고 발을 모아서 차보았다. 한 가닥 뜨겁고 거친 피가 밧줄처럼 팔다리에 돌았다. 트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빨리 두 걸음 물러섰다. "내 손에 든 권총이 당신 뒤통수를 겨누고 있어, 아처. 그렇지만 몸이 풀렸으면 천천히 일어나도 괜찮아." 나는 팔다리를 아래로 끌어모아 돌바닥에서 힘껏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이 빙빙 돌고 비틀거리더니 이윽고 멈춰섰다. 내원 안쪽에 있는 썰렁한 작은 방 중의 하나였다. 한쪽 벽에 붙여진 벤치 위에 전기 스탠드가 서 있었다. 그 곁에 여전히 산뜻한 몸차림으로 니켈을 입힌 그 권총을 든 트로이가 있었다. "엊저녁 난 당신을 선의로 해석했는데."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이 오히려 날 실망시키는구먼." "나는 맡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오." "내 일에 저촉이 되는 것 같구먼." 그는 자기 말에 종지부를 찍기라도 하듯이 손 안에서 권총을 한 바퀴 돌렸다. "당신 일은 정확히 어떤 것이지, 형씨?" "샘프슨을 찾고 있소." "샘프슨이 없어졌나?"


나는 그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봐, 트로이, 알면서도 묻는 건 질색이오. 이미 저지른 납치행위에 하나 더 덧붙여봤자 아무런 이득도 없다는 걸 모르오? 날 내보내는 게 이로울 거요." "이봐, 친구, 나와 거래를 하자는 건가?당신, 거래 솜씨가 좀 서툴구먼, 안 그래?" "난 혼자 뛰고 있는 게 아니오." 나는 말했다. "오늘밤엔 '피아노'에 경찰이 가 있어. 페이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지. 미란다 샘프슨이 오늘 그들을 이리로 데려올 거요.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 당신 장사는 끝장이야. 쏘라고, 그 즉시 당신은 끝장이니까." "아마도 당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는 조심스레 미소지었다. "오늘밤 수입의 배당은 고려해 보지 않았을 테지?" "그럴까?" 나는 상대의 손아귀에 든 권총에 대처할 수단을 짜내려고 애썼다. 정신이 다소 희미했다.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내 입장이 돼봐."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어쩌다가 풋내기 사립탐정이 사업에 뛰어들었단 말씀이야.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씩이나 말이지. 내가 빙긋 웃고 참아주지. 달가울 건 없지만, 참는 거야. 난 당신을 죽이는 대신, 오늘밤 수입의 3 분의 1 을 양보하지. 700 달러야, 아처." "오늘밤 수입의 3 분의 1 이라면 3 만 3 천 달러지." "뭐라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더러 대신 말하라는 거요?" 그는 이내 냉정을 회복했다. "당신은 3 만 3 천달러라고 말했어. 과장을 해도 유분수지...." "10 만 달러의 3 분의 1 은 33,333 달러 33 센트야." "대관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야?" 그의 음성은 초조하고 거칠었다. 나는 그 모든 긴장이 권총으로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잊어버리쇼."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 돈엔 손대지 않을 테니." "그래도 나는 이해가 안 가."하고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네, 수수께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면 곤란해. 내가 펄쩍 뛰게 되거든. 손도 떨리게 되고." 해설이라도 하듯 권총이 움직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오, 트로이?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라고, 그리고...." "신문을 보면 알아."


"빨리 말하라고 했어." 그는 총을 들어올려 총구멍을 정통으로 내 눈앞에 갖다댔다. "말해, 샘프슨과 10 만 달러 얘기." "뭣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당신 사업 얘기를 해야 되지?당신은 이틀 전에 샘프슨을 납치했잖소?" "계속해." "어젯밤 당신이 보낸 운전사가 10 만 달러를 거둬갔어. 이만하면 충분하오?" "퍼들러가 했나?" 그의 무표정은 이제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운 표정이 그의 얼굴을 지배했다. 냉혹하고 진지한 살인마의 표정이었다. 그는 내게서 총을 떼지 않고 문께로 가서 문을 열었다. "퍼들러!" 높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다른 운전���야."하고 나는 말했다. "에디지." "아처, 자네, 거짓말을 하고 있지?" "좋도록. 경찰이 와서 직접 얘기할 때를 기다리시지. 지금쯤은 에디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 알았을 테니까." "에디에겐 그만한 머리가 없어." "희생타로서는 우수한 머리지." "무슨 뜻이야?" "에디는 시체안치소에 있어." "누가 그를 죽였지? 경찰인가?" "당신일지도 모르지." 나는 천천히 말했다. "풋내기에겐 10 만 달러면 큰 돈이니까." 그는 흘려넘겼다. "돈은 어찌 됐나?" "누군가가 에디를 쏘고 가져갔어. 크림색 컨버터블을 탄 자야." 나중 말이 정통을 찔렀는지, 순간 그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나는 오른쪽으로 뛰며 왼손바닥으로 그의 총을 후려쳤다. 총은 발사되지 않은 채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열려진 문께로 미끄러져 갔다. 한 발 앞서 퍼들러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총을 집었다. 나는 물러섰다.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줄까요, 트로이 씨?" 트로이는 얻어맞은 손을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 손이 스탠드의 둥그런 불빛 속에서 하얀 나방처럼 파닥거렸다. "지금은 아냐."하고 그는 말했다. "우선 여기부터 정리해야 돼. 또 골칫거리를 남기고 떠나고 싶진 않으니까. 녀석을 링컨의 선창으로 끌고 가도록. 녀석의 차를 써.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녀석을 거기 잡아둬. 내 말 알겠나?" "알겠습니다, 트로이 씨. 어디로 가실 건데요?" "확실히 모르겠어. 베티는 오늘밤 '피아노'에 있었나?" "내가 떠나올 땐 없었는데요." "어디 사는지 아나?" "아뇨. 2 주일 전에 이사했거든요. 누군가가 어딘가의 오두막을


빌려주었다더군요. 나도 어딘지는 모릅니다만-- " "아직도 그 차를 몰고 있나?" "컨버터블요? 예, 어젯밤엔 그걸 몰랐어요." "알았어."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난 아직도 멍텅구리와 건달들에게 둘러싸여 있군 그래. 녀석들은 말썽을 부리지 않고는 못 사는 모양이지, 안 그래? 이젠 우리가 녀석들에게 말썽을 부려줄 차례야, 퍼들러." "알겠습니다." "나가."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제 22 장. 혈 투 그들은 나를 끌어내어 내 차로 데려갔다. 트로이의 뷔크가 그 곁에 서 있었다. 트럭은 가고 없었다. 클로드와 갈색의 사내들이 떠난 것이다. 달은 이제 거의 지려 하고 있었지만 밤은 아직도 캄캄했다. 벽돌집 옆의 창고에서 퍼들러가 밧줄 한 다발을 꺼내왔다. "손을 뒤로 돌려."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나는 그대로 팔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있었다. "손을 뒤로 돌리라니까." "지금까지는 내 일만 해왔지만...."하고 내가 말했다. "이 이상 나를 더 건드렸다간 큰코 다칠 줄 알아." "주둥아리로는 잘 싸우는군."하고 트로이가 말했다. "퍼들러, 이 친구 주둥아릴 막아." 나는 퍼들러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주먹이 내 목덜미에 떨어졌다. 박살난 유리창처럼 고통이 전신을 꿰뚫고, 또다시 어둠이 묵직하게 나를 덮쳤다. 이윽고 나는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길은 폭주하는 차량으로 혼잡했다. 나는 모든 차의 소유자들을 조사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각 사람의 연령, 직업, 취미, 종교, 은행예금고, 성적(性的) 경향, 정치관, 범죄사실 여부, 즐겨 가는 식당 등에 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은 마치 의자 빼앗기놀이라도 하듯 수시로 차를 바꿨다. 차들의 번호와 색깔이 자꾸 변했다. 내 펜은 잉크가 떨어졌다. 푸른 트럭이 나를 태우더니 검은 장의차로 변했다. 에디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가 차를 몰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는 한 사내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계획이 반쯤 세워졌을 때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 차의 앞좌석과 뒷좌석 사이에 쑤셔박혀 있었다. 바닥이 끊임없이 진동했고, 그에 따라 머리의 윙윙거림도 계속되었다. 양손은 다시 뒤로 묶여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퍼들러의 널찍한 등판이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일어날 수가 없었으니, 그를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밧줄에서 손을 빼내려고 손목의 피부가 벗겨지고 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뒤틀고 당겼다. 밧줄이 나보다 잘 견뎌냈다. 나는 이 계획을 단념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나는 사람 없는 어두컴컴한 길을 지난 뒤에 우리는 산에서 빠져나와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그는 장대 끝에 쳐놓은 방수포(防水布) 아래에 차를 세웠다. 엔진이 꺼지자 이내 저 아래에서 백사장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 윗도리 칼라를 잡고 나를 끌어내어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내 차의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는 것이 눈에 뛰었다. "다시는 떠들지 마."하고 그가 말했다. "한 번 더 주먹 맛을 보지 않으려거든 말이야." "배짱이 대단하군 그래." 라고 나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한 편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동안 뒤에서 상대를 치려면 보통 배짱으로 안되지." "입 닥쳐." 그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고는 훑어내렸다. 망아지 냄새 같은 역한 땀내가 풍겼다. "보통 배짱이 아니야."하고 나는 말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사람을 닦아세우다니." "닥치지 못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말문을 닫게 만들겠어." "그러면 트로이 님께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닥치라니까. 자, 걸어." 그는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더니 방수포 아래에서 밀어냈다. 나는 물속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세운 기다란 선창의 해변 쪽 끄트머리께에 있었다. 등뒤 수평선에 유정탑(油井塔)들이 있었으나 불빛은 없었다. 바다와 선창끝에 있는 기름 펌프의 작동 외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앞서고 퍼들러가 뒤따르며 우리는 한 줄로 서서 그곳을 향해 걸었다. 선창 바닥에 댄 널빤지들은 하나같이 뒤틀리고 금이 가 있었다. 검은 물결이 그 틈바귀에서 번쩍였다. 해변에서 100 미터쯤 걸어나오자 선창 끝에 설치된 펌프가 기계로 작동되는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 곁에 연장을 넣어두는 창고가 하나 있을 뿐, 저 너머 태평양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퍼들러는 창고의 자물쇠를 열고 못에 걸린 램프를 벗겨내려서 불을 붙였다. "앉아, 등신아." 그는 램프를 들어 벽에 붙어선 육중한 벤치를 비췄다. 벤치한 끝에 바이스가 붙어 있었고, 그 주위에 펜치와 각종 렌치, 녹슨 줄칼 등 몇 가지 연장이 널려 있었다. 나는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퍼들러는 문을 닫고 램프를 드럼통 위에 놓았다. 너울거리는 노란 불빛을 아래에서 받은 그의 얼굴은 거의 인간의 얼굴 같지 않았다. 눈썹이 낮고 턱이 튀어나와 마치 네안데르탈 인처럼 생긴 그 얼굴은 둔중하고 쓸쓸해 보였으며,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한 일로 그를 탓하는 것은 부당한 듯싶었다. 그는 어쩌다가 강철과 콘크리트의 정글에 떨어진 원시인이었으며, 짐을 지우기 위해 훈련된 짐승이요, 싸우는 기계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탓했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행패를 감수하든가, 반격의 수단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넨 지금 좀 별난 입장에 놓여 있군 그래."하고 내가 말했다. 그는 못 들었거나, 아니면 대답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문에 몸을 기댔다. 아름드리 나무의 그루터기 같은 사내가 내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펌프의 쿵쿵거리며 삐걱거리는 소리와 그 아래에서 말뚝을 치면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퍼들러에 관해 내가 아는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는 좀 별난 입장에 놓여 있군 그래."하고 나는 다시 말했다. "입 닥쳐." "내 말은, 간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야. 보통은 정반대 입장에 있잖아, 안 그래? 자넨 감방에 들어앉아 있고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지." "입 닥치라고 했어." "이봐, 얼간이, 감옥 구경은 몇 번이나 했지?" "이 새끼가 정말!" 그는 악을 썼다. "그만큼 주의를 줬는데도." 그는 나를 향해 몸을 숙여왔다. "배짱 한번 좋구먼. 양손이 뒤로 묶인 사람을 을러대고." 그의 손바닥이 번쩍이자 얼굴이 얼얼했다. "자넨 겁쟁이라서 골치야."하고 나는 말했다. "마시 말대로야. 자넨 마시에게까지도 겁을 먹고 있어? 안 그래, 퍼들러?" 그는 그 자리에 나를 덮쳐누르듯 서서 눈을 깜빡였다. "이 새끼, 널 죽일 거야. 내게 그따위 소릴 지껄였지. 이 새끼, 널 죽일 거야." 서투른 말주변으로 너무 빨리 지껄이느라 말이 분명치 않게 토막이 되어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 침방울이 일었다. "하지만 트로이 씨가 좋아하지 않을걸. 잊었나? 나를 무사히 지키라고 했잖아? 자넨 날 어쩌지 못해, 퍼들러." "귀싸대기를 날려버릴 테다."하고 그는 말했다.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겠어." "내 손이 자유롭다면 어림도 없지. 불쌍하고 시시한 자식아." "누구더러 시시하다는 거야?" 그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자네지 누구야. 놈팽이 중에서도 하치라고."하고 나는 말했다. "원래부터 그랬지. 아주 저질이야. 상대가 묶여 있을 때를 노려 치기나 하고-- 기껏 할 수 있다는 게 그 정도지." 그는 나를 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칼을 꺼내더니 날을 폈다. 두 개의 작은 눈이 붉게 충혈되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어나." 그는 말했다. "누가 놈팽인지 보여줄 테다." 나는 그에게로 등을 돌렸다. 그는 내 손목을 묶은 줄을 끊고는 칼날을 접어넣었다. 다음 순간 내 몸을 빙그르 돌려 자기를 향하게 하더니 오른손으로 재빠르게 일격을 퍼부었다. 얼굴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나는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배를 걷어차자 그는 방안 저편으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되돌아오는 사이에 나는 벤치에서 줄칼을 집어들었다. 끝이 무디었지만 그런대로 쓸 만했다. 나는 그와 맞붙었다. 오른손으로 줄칼의 끝부분을 잡고, 관자놀이에서 관자놀이까지 이마를 일자로 그었다. 그는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날 베다니."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넨 곧 앞을 못 보게 될 거야, 퍼들러." 산 페드로 부두에 내린 어느 핀란드 선원이 발트 해 일대의 칼잡이들이 상대의 눈을 멀게 하는 수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죽이고 말겠어." 그는 황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그의 아래에 두고, 줄칼로 여기저기 급소를 골라 쑤셔댔다. 그는 허리를 꺾으며 엎어졌다. 나는 문 쪽으로 뛰었다. 그가 뒤에서 쫓아와 문간에서 나를 잡았다. 우리는 선창 언저리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허공으로 떨어졌다. 나는 물에 빠지기 직전에 재빨리 숨을 들이켰다. 우리는 함께 가라앉았다. 퍼들러는 맹렬히 나를 공격했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허리띠를 움켜잡고 매달렸다. 그는 겁에 질린 동물처럼 후려갈기고 발길질을 했다. 그의 몸속의 공기가 은빛 물거품이 되어 검은 물살을 헤치고 수면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잡고 놓지 않았다. 허파가 공기를 갈구하며 오그라들고,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골이 뻐근했다. 퍼들러는 이제 몸부림을 멈추고 말았다. 늦기 전에 수면에 떠오르려면 그를 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 밖에서 한번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를 찾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옷이 걸리적거렸고 구두 때문에 발이 무거웠다. 나는 수압 때문에 귀가 멍해질 때까지 점점 차가워지는 수층(水層)을 뚫고 내려갔다. 퍼들러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 닿지도 않았다. 여섯 번을 그러고 나서 나는 포기했다. 내 자동차 열쇠가 그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해변으로 헤엄쳐 나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가 없었다. 파도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기어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힘을 많이 뺀 탓도 있었지만, 한편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등뒤 차가운 물속에 있을 그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의 고동이 수그러들 때까지 모랫바닥에 누워 있었다. 내가 일어섰을 때는 수평선상의 유정탑들이 밝아오는 하늘 아래에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둑을 기어올라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헤드라이트를 켰다. 방수포를 떠받치고 있는 장대 중의 하나에 한 가닥 구리 철사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풀어 흙받이 아래에 있는 점화단자(點火端子)의 양극을 붙들어맸다. 단번에 발동이 걸렸다.


제 23 장. 새로운 혐의자 산타 테레사에 이르렀을 때 태양은 산 위에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 돌과 칼날 같은 풀잎과 나뭇잎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부각시켰다. 협곡 사이의 길에서 보니, 샘프슨 저택은 각설탕으로 만든 장난감 별장 같았다.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저택을 싸고 있는 크고 묵직한 침묵이 느껴졌다. 그 침묵의 지배권 속에 나는 차를 세웠다. 발동을 끄기 위해서는 점화장치에 비끌어매둔 철사를 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관문을 두드리자 펠릭스가 나왔다. "아처 씨 아닙니까?" "뭐 의심스러운 점이라도 있소?" "사고를 당하셨군요?" "보다시피 그렇소. 내 가방 아직 광에 있나요?" 그 속에는 새 옷과 자동차의 예비 열쇠가 들어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얼굴에 타박상이 있는데요, 아처 씨. 의사를 부를까요?" "신경쓰지 마시오. 하지만 샤워를 했으면 좋겠는데 마땅한 곳이 있겠소?" "예, 차고 위에 제 전용 샤워장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샤워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가방을 갖다주었다. 나는 그의 아늑한 욕실에서 샤워와 면도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아담한 독방, 채 자리를 치우지 않은 침대 위에 사지를 뻗고 누워 일이야 될 대로 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가니 그는 쟁반 위에 은식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무얼 좀 드시겠습니까?" "베이컨과 달걀을 먹고 싶지만 될 수 있을는지--- " 그는 둥그스름한 머리를 끄덕였다. "이 일만 끝내면 즉시 해드리지요." "그건 누구 식사요?" "예, 샘프슨 양 겁니다." "이렇게 일찍?" "방에서 드시겠답니다." "어디 불편한가?" "예, 모르겠습니다. 거의 주무시지 않으셨으니까요. 자정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오셨답니다." "어디 갔었는데?" "저는 모릅니다. 선생님이 그레이브스 씨와 함께 나가시자 바로 나가셨지요." "직접 운전하고?" "예, 그렇습니다." "차는?" "패커드 컨버터블입니다."


"가만 있자, 그거 크림빛이던가?" "아, 아닙니다, 빨갛지요. 진홍색입니다. 나가 계시는 동안 300 킬로미터를 달리셨더군요." "펠릭스, 당신은 가족의 일거일동을 매우 세���하게 지켜보는군?"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가스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나 차를 점검하는 것도 제가 맡은 일 중의 하나랍니다. 이 댁에는 정식 운전사가 없어서요." "그런데 당신은 샘프슨 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지?" "아닙니다, 저는 그분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의 불투명한 검은 눈은 그 자체가 가면이었다. "펠릭스, 일이 고되지는 않소?" "예, 아니올시다. 그런데 우리 집안은 사마르에서는 이름이 있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 공예과에 들어가려고 미국에 왔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지요. 피부색 때문에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그레이브스 씨의 지론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정원사들 역시 자신들의 문제이니까 반감들을 품고 있지요." "어젯밤 일 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닐 거요." 펠릭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레이브스 씨 지금 여기 있소?" "예, 아니올시다. 보안관 사무실에 계실 겁니다. 예, 전 이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쟁반을 어깨에 얹었다. "전화번호를 아시오? 아, 그리고 말끝마다 꼭 '예'를 붙여야만 하나?" "예, 아닙니다."하고 그는 부드럽게 비꼬는 듯이 말했다. "23665 번입니다." 나는 집사의 식료품실에서 그 번호를 돌려 그레이브스를 찾았다. 서리 중의 하나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레이브스요." 그의 목소리는 피곤으로 쉬어 있었다. "아처요." "대관절 어디 있었나?"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샘프슨 소식은?" "아직 없네. 하지만 조금 진전을 보였어. 나는 지금 FBI 가 보낸 중대사건 수사반과 함께 뛰고 있네. 죽은 사내의 신원을 워싱턴에 조회했지. 한 시간 전에 회답이 왔는데, FBI 기록에도 전력이 창창하다는군. 이름은 에디 래시터야." "식사가 끝나는 대로 그리 가지요. 지금 샘프슨 댁에 있어요." "안 오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음성을 낮췄다. "간밤에 그냥 내뺐다고 보안관이 벼르고 있어. 내가 그리 가지." 그는 수화기를 걸었다. 나는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프라이팬 속에서 베이컨이 기분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것을 접시에 옮긴 뒤, 스토브 곁에 있는 토스터에


식빵을 찔러넣고 뜨겁게 데워진 기름 위에 달걀을 깨뜨려 놓은 다음, 김이 나는 사이렉스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따라 내게 주었다. 나는 주방 식탁에 앉아 그 끓는 커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집안의 모든 전화가 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소?" "아닙니다. 주인용의 전화는 고용인용 전화와는 선이 다르지요. 아처 씨, 달걀을 뒤집어 드릴까요?" "아니, 그대로 먹겠소. 식료품실에 있는 전화와 같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어느 거요?" "세탁물실과 집 위쪽의 손님용 별채에 있는 것이지요. 태거트 씨가 쓰고 계십니다만." 입속에 가득히 음식을 문 채 나는 물었다. "태거트가 지금 거기 있나요?" "예, 모르겠습니다. 간밤에 차를 몰고 나가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가서 확인해 주겠소?" "예, 알겠습니다." 그는 뒷문으로 주방을 나갔다. 1 분쯤 지나자 차 한 대가 올라오고, 그레이브스가 들어왔다. 기세가 조금 줄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날쌔게 움직였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지옥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얼굴이군, 루." "바로 거기서 오는 길이오. 래시터의 기록을 가져왔나요?" "응." 그는 안주머니에서 텔레타이프 통신용지 한 장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나는 빽빽하게 인쇄된 종이를 훑어보았다. 1923 년 5 월 29 일 뉴욕의 소년재판소에 회부, 기소자는 아버지로 내용은 무위도식. 동년 4 월 4 일 뉴욕의 가톨릭 소년원에 입소. 1925 년 8 월 5 일 출소. 1928 년 1 월 9 일 브루클린 특별재판소, 자전거 절도혐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보호관찰을 받음. 1929 년 11 월 12 일 풀려남. 1923 년 5 월 17 일 도난당한 우편환 소지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검찰에 의해 기각됨. 1936 년 10 월 5 일 자동차 절도혐의로 체포되어 싱싱 형무소에서 3 년간 복역. 1943 년 4 월 23 일 마약국에 의해 누이동생인 베티 래시터와 함께 체포됨. 코카인 1 온스 판매혐의. 동년 5 월 2 일 선고를 받고 레븐워스 형무소에서 1 년 하루 복역. 1944 년 8 월 3 일 제너럴 일렉트릭 사(社)의 봉급수송차 강탈 공범혐의로 체포. 유죄가 인정되어 5∼10 년 형을 받고 싱싱에서 복역. 1947 년 9 월 18 일 가출옥 허가를 받고 출감. 동년 12 월 약정을 어기고 실종. 이상이 에디의 이력 중 특히 눈에 띄는 것들이었다. 비행소년 시절부터 비명횡사하기까지의 그의 경력이었다. 이제 그는 전혀 존재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펠릭스가 어깨 어림에서 말했다. "태거트 씨는 별채에 계십니다." "일어났소?" "예, 옷을 입고 있습니다." "아침 좀 주지 않겠나?" 라고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레이브스는 나를 향했다. "그 안에 뭐 쓸 만한 게 있나?" "딱 한 가지. 하지만 확실치는 않아요. 래시터에게는 마약 소지혐의로 함께 체포된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스앤젤레스에 마약사용 경력이 있는 베티라는 여자가 있죠. 트로이의 바가지 술집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베티 프레일리로 행세하고 있어요." "베티 프레일리라고요!" 펠릭스가 스토브 앞에서 말했다.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하고 그레이브스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요."하고 내가 말했다. "베티 프레일리가 어떻다고? 펠릭스, 당신 그 여자를 아시오?" "알지는 못합니다. 몰라요. 하지만 태거트 씨 방에 있는 레코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청소할 때 눈에 띄길래 이름을 봤었지요." "사실인가?"하고 그레이브스가 물었다. "제가 뭣 때문에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태거트가 뭐라고 하나 좀 들어봐야겠군."하고 그레이브스가 일어섰다. "잠깐 기다려요, 버트."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의 팔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억지로 밀어서는 아무것도 안돼요. 설사 태거트가 그 여자의 레코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래시터의 누이동생이라는 것조차 확실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친구, 레코드를 모으는 건지도 몰라요." "그분은 레코드를 꽤 많이 모으셨더군요."하고 펠릭스가 말했다. 그레이브스는 완고했다. "그래도 봐야겠어." "지금은 안돼요. 태거트가 정말로 죄가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우둔하게 굴었다가는 샘프슨을 찾을 수 없어요. 태거트가 방을 비울 때를 기다립시다. 그때 내가 레코드를 조사하지요." 내가 팔을 당기자 그레이브스는 순순히 도로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는 손끝으로 눈꺼풀을 슬슬 쓸며 말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사건은 듣도 보도 못했어." "그건 그래요." 그러나 그레이브즈는 사건의 절반밖에 모르고 있었다. "샘프슨 수색망은 수배되었나요?" 그는 눈을 떴다. "어젯밤 10 시 이후부터 발동했어. 고속도로 순찰대와 FBI, 그리고 여기서부터 샌디에이고까지의 전 경찰국과


지역담당 보안관에게 경보를 발했지." "전화를 한 번 더 하는 게 좋겠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이 주(州) 전역에 걸쳐 또 하나의 수색망을 펴는 겁니다. 이번에는 베티 프레일리입니다. 남서부지역 담당을 모조리 끌어들여요." 그는 듬직한 턱을 내밀며 비양거리듯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게 우둔한 짓이라고 생각지 않을까?" "이 경우에는 필요할 거요. 만일 우리가 얼른 베티를 잡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선수를 칠걸. 드와이트 트로이가 그녀를 노리고 있단 말이오." 그는 묘하다는 시선을 내게 던졌다. "루, 자넨 어디서 정보를 얻나?" "몸으로 얻은 거요. 간밤에 트로이 본인과 이야기를 했지요." "그렇다면 녀석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겠군?" "지금은 그렇지. 아마 그 10 만 달러를 자기가 차지하려 들거요. 그걸 누가 갖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베티 프레일리인가?"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래요. 검은 머리, 초록빛 눈, 체격은 보통, 160cm 정도,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 십중팔구 마약중독, 말랐지만 탄탄하고, 파충류와 놀아도 좋다는 사람에게는 예쁜 얼굴이지. 에디 래시터 살해혐의로 수배함." 그는 받아쓰다가 후딱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도 자네 추측 중 하나인가?" "좋도록 생각하세요. 전화를 걸겠어요?" "당장 걸지."하고 그는 방을 질러 식료품실로 가려고 했다. "그 전화는 안돼요, 태거트의 방에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얼굴에 한 가닥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네는 우리가 찾는 인물이 태거트라고 확신하는 모양이군." "만일에 그렇다면 당신 마음이 아프실까?" "나는 그렇지 않아." 하며 그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서재에 있는 전화를 쓰겠네."

제 24 장. 가난한 미남자의 최후 현관 안쪽 홀에서 기다리고 있자니까 펠릭스가 와서 태거트가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고 알렸다. 펠릭스는 나를 데리고 차고 뒷전을 돌아 드문드문 이어지는 돌계단 길을 올라 언덕으로 갔다. 객사(客舍)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그는 내 곁을 떠났다. 그것은 하얀 단층집으로, 언덕을 등지고 나무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아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벽과 바닥을 황송목(黃松木)으로 댄 응접실엔 안락의자와 전축,


잡지와 레코드 더미로 뒤덮인 탁자가 놓여 있었다. 서쪽 벽의 커다란 창으로 주택지 전체와 수평선까지 이르는 바다가 보였다. 탁자 위의 잡지들은 '재즈 레코드'와 '다운 비트'였다. 나는 레코드와 악보집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데카, 블루버드, 애슈, 12 인치 코모도어, 그리고 블루노트. 귀에 익은 이름도 많았다 패츠 월러, 레드 니콜즈, 럭스 루이스, 메어리 루 윌리엄스. 전혀 들어보지 못한 곡목도 있었다 - '무작정 찾아서', '독사의 움직임', '밤의 인생', '데나파스 퍼레이드' 그러나 베티 프레일리는 없었다. 그 전날 바다에 내던져진 검은 원반들이 생각난 것은, 돌아가서 펠릭스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문간에 섰을 때였다. 내가 그것을 본 몇 분 뒤에 태거트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저택으로 되돌아가다가 나는 바닷가로 향했다. 벼랑 끝에 세워진 유리로 덮인 정자에서 한 줄기 기다란 콘크리트 계단이 비스듬히 벼랑을 타고 내려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맨 아래 층 계참에는 바람막이를 두른 베란다가 딸린 휴게소가 있었다. 나는 그리로 들어갔다. 간막이를 친 탈의실들 중 하나에 고무에 유리판을 끼운 잠수용 마스크가 있었다. 나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고는 마스크를 썼다. 싱그러운 바닷바람이 파도를 몰아치며, 물결이 부서지기 전에 그 물마루를 불어 날려 물보라를 뿌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등에 따갑게 비추고 바싹 마른 모래가 발바닥에 따뜻하게 닿았다. 나는 잠시 파도가 미치지 않는 갈색의 젖은 모래 바닥에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푸르게 반짝이고 여인들의 몸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나는 두려웠다. 바다는 차갑고 위험했다. 그 품에는 죽은 자들이 안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헤쳐 들어가며 올렸던 마스크를 내려 덮어쓰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해변에서 50 미터 쯤 떨어진 파도 저편에서 몸을 돌려 누워서는 숨을 깊숙히 들이마셨다. 파도의 오르내림과 한껏 들이킨 산소 때문에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김이 서린 안경을 통해 본 푸른 하늘은 머리 위에서 맴을 도는 것 같았다. 나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 물안경을 씻고는, 수면 밑으로 잠수하여 가슴으로 물살을 헤치며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다 밑바닥은 길고 갈색인 갈비뼈 모양의 돌들이 흩어져 있는 새하얀 모래밭이었다. 파도가 약간 모래밭을 휘저어놓기는 했지만 흐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따라 40~50 미터 가량 지그재그로 헤치고 나아갔지만, 바위에 붙어 있는 유난히 작은 전복 한 쌍밖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발길로 물을 차고 수면으로 올라갔다. 물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올렸을 때, 벼랑 위에서 한 남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정자 옆 들벚나무 방풍림 뒤로 몸을 숨겼지만, 그전에 이미 나는 그가 태거트임을


알아보았다. 나는 서너 번 심호흡을 하고는 도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올라왔을 때 태거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세 번째의 잠수에서 나는 드디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깨어지지 않은 검은 레코드 판 하나가 바다 밑바닥 모래에 반쯤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레코드 판을 끌어안고 몸을 돌려 누워서 물을 차며 수면으로 올라갔다. 그것을 샤워장으로 가지고 가서 어린애를 다루는 어머니처럼 조심스레 말렸다. 탈의실에서 나오자 태거트가 베란다에 있었다. 그는 철망 문을 등지고 굵은 삼베로 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플란넬 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그는 매우 젊고 더욱 까무잡잡해 보였다. 작은 머리통에 붙은 검은 머리는 정성스레 빗겨져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천연덕스럽게 웃었으나,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안녕하시오, 아처 씨. 수영은 즐거웠습니까?" "나쁘지는 않았소. 물이 좀 차긴 했지만." "풀 장을 사용하실 걸 그랬습니다. 언제나 따뜻하니까." "바다가 더 좋소, 무엇을 찾아낼지 모르니까. 나는 이런 걸 얻었소." 그는 생전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레코드를 쳐다보았다. "그게 뭡니까?" "레코드 판. 누군가가 라벨을 떼어내고 바다에 던져버린 모양인데. 왜 그랬는지 몹시 궁금한데." 그는 내게로 성큼 다가섰다. 동작은 컸지만 바닥이 풀밭이라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좀 봅시다." "손대지는 마시오. 깨뜨릴지도 모르니까." "나는 깨뜨리지 않을 거요." 그는 팔을 뻗어 레코드 판을 잡으려 했다. 나는 레코드를 잡아채어 그의 손을 피했다. 그의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물러서."하고 나는 말했다. "그걸 내게 주시오, 아처 씨." "그럴 생각은 없어." "강제로라도 빼앗겠소." "그만두시지. 나는 당신을 두 토막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멈춰서서 10 초쯤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소년 같은 매력이 매우 느릿하게 되살아났다. "한번 농담을 해봤을 뿐인데 뭘. 하지만, 그놈의 레코드 판에 대체 무슨 곡이 실려 있는지 알고 싶군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렇다면 틀어봅시���. 여기 야외전축이 있으니까." 그는 나를 돌아 베란다 중앙에 있는 탁자로 가더니, 천으로 짠 네모꼴 상자를 열었다. "내가 틀겠소."하고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그걸 깨먹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니." 그는 의자로 돌아가서 다리를 죽 뻗고 앉았다. 나는 전축에 스위치를 넣고 레코드를 회전반 위에 올려놓았다.


태거트는 기대가 크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그가 무언가 조짐을 보일 것에, 무언가 서투른 행동으로 나올 것에 대비하며 선 채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 잘생긴 청년은 내가 품은 공포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유형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레코드는 흠집투성이의 낡은 것이었다. 표면의 직직거리는 소리에 반쯤 잠겨 피아노 독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너 개의 케케묵은 부기우기 곡의 화음들이 되풀이되었다. 이윽고 노련한 솜씨가 그것들을 엮어짜고 틀어누비며 생동감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의 화음들이 중첩되어 방안 가득 선율이 맴돌았다. 그 메아리 속에서 방은 반은 정글이요, 반은 기계였다. 선율은 쫓는 듯이 그곳을 오락가락했다. 거인의 그림자에 쫓겨 인공의 정글 속을 헤매는 듯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 정도는. 만일에 피아노 대신 타악기였더라면 일품이었을 거요." "아니, 바로 그겁니다. 피아노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훌륭한 타악기지요." 연주가 끝났다. 나는 전축을 껐다. "당신은 부기우기 곡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구려. 연주자가 누군지 모르겠소?" "모릅니다. 연주 스타일은 럭스 루이스 같은데." "과연 그럴까? 내게는 여자의 연주처럼 들리는데." 그는 애써 생각을 집중하는 듯이 이마를 크게 찌푸렸다. 자그마한 얼굴 속에 뚫린 눈이 더욱 작았다. "나로서는 저만큼 연주할 수 있는 여자는 알고 있지 못한데요." "나는 한 사람 알고 있지. 그저께 밤 '미치광이 피아노' 술집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었소. 베티 프레일리."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하고 그가 말했다. "그쯤 하시지, 태거트. 이건 그녀가 연주한 거요." "그래요?" "잘 알면서 그래. 당신이 바다에 던졌잖아. 자, 왜 그런 짓을 했지?" "질문은 필요없습니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근사한 레코드를 내버리다니.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오." "태거트, 보건대 당신은 꿈을 너무 많이 꾸는 모양이군. 내 생각에 당신은 내내 10 만 달러에 관한 꿈을 꾼 것 같아." 그는 의자에서 약간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쭉 뻗은 자세가 뻣뻣하게 굳어 느긋함을 잃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목덜미를 잡아 그를 들어올렸다면, 그의 두 다리는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뻗은 채 공중에 떴으리라. "내가 샘프슨을 납치했다는 말인가요?" "직접 그랬다는 건 아니야. 당신이 그 일을 꾀했다는 것이지.... 베티 프레일리와 그녀의 오빠인 에디 래시터와 함께 말이야."


"그런 사람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소. 양쪽 다 말이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앞으로 듣게 될 거야. 하나는 법정에서 만날 테고, 또 한 사람에 관해서도 듣게 될 거야." "아니, 잠깐만."하고 그가 말했다. "당신 말은 비약이 너무 심해 못 알아듣겠군요. 이게 다 내가 그 레코드를 내버렸기 때문인가요?" "그러니까 이것은 당신 레코드로군?" "틀림없소." 그의 목소리는 다소 떨렸으나 솔직함이 엿보였다. "내게 베티 프레일리의 레코드가 몇 장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어젯밤 당신이 경찰에게 '미치광이 피아노'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서는 버렸지요." "당신은 또 다른 사람들의 전화에도 귀를 기울이더군?"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마침 전화를 걸려다 당신 전화를 엿듣게 된 거지요." "베티 프레일리한테 걸 생각이었나?" "그 여자는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례되는 말이지만, 나는 어젯밤에 당신이 그녀에게 전화해서 살인허가를 내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살인이라니?" "에디 래시터 살해 말이야. 그처럼 놀란 체할 필요는 없을 텐데, 태거트." "하지만 난 그 사람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 만큼 알고 있었기에 베티의 레코드를 버린 게 아닌가?" "이름은 들었지만, 그 뿐입니다. 그녀가 '미치광이 피아노'에서 연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경찰이 그 집에 관심을 돌렸다는 말을 듣고는 레코드를 버린 거지요. 그 작자들이 소위 상황증거라는 것에 관해서 얼마나 터무니없게 구는지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을 속였듯이 나를 얼렁뚱땅 속이려 들지 마시지."하고 나는 말했다. "결백한 사람이라면 그 레코드들을 버린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이 나라 전역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레코드를 가지고 있잖나?" "내 말이 바로 그겁니다. 그 레코드에는 특별히 죄가 될 만한 것이 없지요." "그런데 당신은 있다고 생각한 거야, 태거트. 당신이 정말로 베티 프레일리나 이 사건과 관계가 없었다면, 그것들을 불리한 증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당신은 내 전화를 엿듣기 훨씬 전에 그것들을 바다에 던졌단 말이야--- 즉, 베티라는 이름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언급되기 이전의 일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 레코드를 빌미로 삼아 뭔가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럴 생각은 없어.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지목하게


했으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 그러니 이제 레코드 얘기는 집어치우고 다른 중요한 일을 논하자고." 나는 베란다를 가로질러 그 맞은편에 있는 버드나무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요?" 그는 여전히 자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듯 지은 미소는 자연스러웠으며, 음성도 맺힌 데가 없었다. 오직 그 몸의 근육만이 말을 듣지 않아,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와 떨리는 다리가 속마음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납치."하고 나는 말했다. "살인 건은 나중으로 미루지. 이주에서는 납치도 살인에 못지 않게 중죄이니까. 이번 납치에 관한 내 견해를 이야기할까? 그런 다음 당신 말을 듣기로 하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당신 말을 들으려고 안달을 하고 있으니까." "유감천만이로군요. 내게는 아무런 의견도 없으니." "나는 있어.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던들 보다 일찍 알아차렸을 텐데. 당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많은 기회가 있었고, 동기 역시 마찬가지야. 당신은 자신에 대한 샘프슨의 대우에 불만을 품었어. 그가 가진 엄청난 돈에도 반감을 갖고 있었지. 자신은 별로 돈이 없었으니까--- " "여전히 없지요."하고 그는 말했다. "당분간은 여유가 충분할 테지. 10 만 달러의 절반은 5 만 달러이니까. 일시적인 선물이긴 하지만." 그는 익살맞게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내가 지금 그걸 갖고 있나요?" "그토록 어리석지는 않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역시 어리석어, 태거트. 당신은 마치 세상 모르는 시골뜨기처럼 행동했어. 도시의 협잡꾼들이 당신을 이용하고 빨아먹은 거야. 십중팔구 당신 몫의 5 만 달러는 구경도 못하게 될걸." "당신은 뭔가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 걸로 아는데요?"하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점점 깨뜨리기 어려운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당신이 샘프슨을 태우고 라스 베이가스를 떠나기 전날 밤, 에디 래시터가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설마 독심술사는 아닐 텐데요. 아처 씨, 그 사내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태거트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새로운 주름이 잡혔다. "아니, 한술 더 떠 당신이 에디에게 한 말도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어. 당신은 그자에게 당신 일행이 다음날 3 시경에 버뱅크로 뜰 예정이라고 말했지. 또한, 검은색 승용차를 빌려 버뱅크 공항에서 당신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고 지시했어. 샘프슨이 발레리오 호텔에 전화를 걸어 승용차를 부탁하자, 당신은 그 전화를 취소하고 대신 에디를 보냈지.


발레리오의 교환수는 샘프슨이 다시 전화한 줄 알았고. 당신은 그 양반 흉내를 곧잘 내더군, 안 그런가?" "계속하시오."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헛소리를 좋아했으니까." "에디가 빌린 차를 타고 공항입구에 나타나자, 샘프슨은 당연지사로 차에 올랐어. 그로서는 조금치도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당신은 그를 고주망태로 만들었기에 그는 운전사가 바뀐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하도 취해서 조용한 곳에 이르렀을 때 에디 같은 꼬마 친구라도 능히 다룰 수 있었을 만큼 인사불성이었겠지. 에디가 그에게 무슨 약물을 사용했지? 클로로포름인가?" "이 이야기의 작가는 당신일 텐데?"하고 그는 말했다. "상상력이 고갈되어 가는 모양이군요?" "이 이야기의 작가는 우리 두 사람 모두야. 그 취소 전화는 중대한 실수였어, 태거트. 그 때문에 당신을 우선적으로 사건에 연관시켰으니까. 샘프슨이 발레리오에 전화를 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신밖엔 아무도 없었어. 샘프슨이 네바다에서 날아 들어올 예정이라는 것도 당신만이 알고 있었고. 그 전날밤 에디에게 귀띔을 해줄 수 있었던 사람도 당신 말고는 없었어. 당신밖에는 그 누구도 그 모든 일을 계획하고, 또한 스케줄에 따라 이행할 수가 없었던 거야." "나는 샘프슨 씨와 함께 공항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 시각 그곳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요. 당신은 여느 경관이나 마찬가지로 상황증거에 빠져 있는 거요. 게다가, 이 레코드 건은 상황증거조차 못 됩니다. 순환논법에 불과해요. 당신은 베티 프레일리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쥐고 있지 않고, 우리 둘 사이의 관계도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레코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음성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고 분명했으며 밝은 솔직성을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몸은 마치 내가 강제로 좁은 구석에 처박기라도 한 듯이 위축되고 긴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은 흉하게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둘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란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들이 함께 있는 게 한두 번은 남의 눈에 띄었을 테니까. 그리고 요전날 밤 내가 페이 이스터브룩과 함께 발레리오에 있는 걸 보고 베티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당신이 아니었던가? 사실 당신은 샘프슨을 찾으려고 '미치광이 피아노'에 갔던 게 아니야, 안 그런가? 베티 프레일리를 만날 셈이었던 거지. 그리고는 퍼들러에게서 나를 구해줌으로써 당신은 내 의심을 떨쳐버렸어. 나는 당신이 내 편이라고 생각했지. 워낙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당신이 푸른색 트럭에 대고 총을 쏘았을 때도 우둔한 탓으로밖엔 돌리지 않았어.


당신이 에디에게 경고하여 그를 달아나게 할 셈이었는데도 말이야. 안 그런가, 태거트? 납치와 살인으로 손을 더럽히지만 않았던들 나는 당신을 똑똑한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처럼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면, 똑똑하고 뭐고 말짱 헛거지." "이제 내 욕이 끝났다면...."하고 그는 말했다. "진지한 일을 논해 보실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권총을 들고 옆구리에서 나타났다. 전에도 본 바로 그 연습용 32 구경이었다. 경화기(輕火器)였지만 내 위장을 오그라들게 할 만한 위력은 충분히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으시지."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이 이처럼 쉽사리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포기한 게 아니야. 단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 뿐이지." "나를 쏜다고 그 자유가 확보되지는 않아. 다른 것이 확보될 뿐. 가스에 의한 사형이지. 총을 치우게. 그리고 이야기를 하세." "이야기할 것도 없어." "여전히 잘못 알고 있군. 내가 이번 사건에서 무슨 일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총이 손에 쥐어져 언제라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자,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렸다. 인간의 생명에 이렇다 할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겁이라고는 없이 착 가라앉은 그 얼굴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의 얼굴이었다. 거의 깨닫지도 못하는 채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차라리 천진난만한 소년다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미처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전쟁터에 서게 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샘프슨을 찾으려는 거네."하고 나는 말했다. "그를 다시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 밖이야." "당신은 그 일을 하는 데 길을 잘못 들었어, 아처. 자신이 어젯밤에 한 말을 잊었군 그래. 만일 샘프슨을 납치한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샘프슨도 끝장이라며?" "당신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나? " "샘프슨도 아무 일 없어." "그는 어디 있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내가 원하기 전에는 말이야." "돈을 쥐었잖나. 그를 놓아주게."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아처. 오늘은 풀어 주려고 했지. 하지만 연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됐어.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몰라. 만일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으로 샘프슨도 안녕이야."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천만에."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우리는 자유로운 몸으로 빠져나가야만 돼. 당신이 그걸 망쳤다는 걸 모르겠나? 당신에게는 일을 망치는 힘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는 능력은 없어. 내가 당신과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 뿐이야." 그는 내 몸 한복판을 겨누고 있는 권총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무심한 얼굴을 다시 내게로 돌렸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는 쏠 수 있었다. 구태여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것이다. "기다려." 나는 말했다. 목구멍이 죄어왔다. 살갗이 바짝 타들며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두 손은 무릎을 움켜쥐고 있었다. "오래 끌 필요는 없겠지."하고 그는 일어나서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의자에서 몸을 들어올렸다.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한발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첫 발과 둘째 발 사이에 달려들면 되는 것이다. 발을 뒤로 물리며 나는 급히 말했다. "샘프슨만 돌려준다면 자네를 붙들거나 이 일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겠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네 운을 시험해 봐야 할 테지만 말이야. 납치도 다른 사업과 같아. 운에 걸지 않으면 안되지." "걸고 있어."���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야." 그의 뻣뻣한 팔이 총과 함께 올라왔다. 총 끝은 마치 속이 빈 푸른 손가락 같았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몸둘 곳을 찾아야 했다. 반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권총이 불을 뿜었다. 내가 달려들었을 때 태거트는 어느덧 맥이 풀려 있었다. 총은 그의 손을 벗어나 미끄러져 날았다. 또 다른 총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한 쌍으로 된 태거트의 권총 중 다른 한 자루를 들고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칸막이에 뚫린 동그란 구멍 속으로 새끼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유감천만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 얼굴에선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제 25 장. 살인의 보수 나는 쓰러지는 태거트의 축 늘어진 몸을 붙잡아 바닥의 풀밭 위에 눕혔다. 검은 눈은 뜬 채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내 손가락이 닿아도 반응할 줄을 몰랐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뚫린 동그란 구멍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았다. 마치 작고 붉은 모반(母斑)과도 같은 죽음의 표시였다. 이제 태거트는 인간의 형상을 한 30 달러짜리 유기화합물이었다. 그레이브스가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죽었나?" "발작을 일으켜 넘어진 게 아니잖아요? 당신 정말 잽싸고 깨끗하게 해치웠군." "자네냐 태거트냐였다고."


"알고 있어요."하고 나는 말했다. "신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의 손에서 총만 날려 보내든가, 총 든 팔꿈치만 부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사격을 할 자신이 없었네. 군대에 있을 때 손을 놓았거든." 그의 입이 심술궂게 비뚤어지며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자넨 형편없이 입만 산 놈팽이로군, 루. 생명을 구해줬는데 방법이 덜 됐느니 어쩌고저쩌고 하다니." "그가 하는 말을 들었나요?" "충분히. 녀석이 샘프슨을 납치했더군."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어요. 패거리들은 이 일을 달갑지 않게 여길 거야. 샘프슨에게 보복을 하려 들 테지." "그럼, 샘프슨은 살아 있나?" "태거트 말에 의하면 그런 셈이죠." "그 패거리들이란 누군데?" "하나는 에디 래시터. 또 하나는 베티 프레일리. 더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 일로 경찰을 부르겠소?" "당연하지." "그 친구들더러 입을 다물라고 하시오." "난 이번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네, 루."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기야 자넨 내가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네. 그리고 이런 경우의 법적 해석은 자네도 나만큼은 알고 있지 않나." "베티 프레일리의 관점에서 사태를 보죠. 법률적인 것하고는 상관 없이 그 여자는 곧장 샘프슨에게로 달려가서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들 거요. 구태여 샘프슨을 살려둘 필요가 없거든. 돈은 쥐었겠다--- " "자네 말이 옳아."하고 그는 말했다. "신문과 방송에는 알리지 말아야겠군." "그리고 샘프슨에게 가기 전에 그 여자를 찾아내야 해요. 당신도 조심하시오,버트. 그 여자는 위험해. 게다가, 태거트에게 홀딱 빠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 여자도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말을 끊었으나,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란다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충격이 클 거요. 이 친구를 좋아했으니까, 안 그런가요?" "홀딱 반해 있었지. 알다시피 그 여자는 로맨틱한데다 너무 어리거든. 태거트에게는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어. 젊음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굉장한 전투경력이지. 이 일로 미란다는 큰 충격을 받을 거야." "나는 쉽사리 놀라지는 않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이번에는 좀 놀랐소. 매우 건실한 젊은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약간 자기중심적인 데는 있어도 건전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 "자네는 그런 타입을 나만큼 몰라."하고 그레이브스는 말했다. "나는 똑같은 일이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을 보아


왔네. 물론 이처럼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찬가지야.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육군이나 공군에 들어가서는 큼직하게 출세했지. 높은 보수를 받는 장교이자 신사로서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또한 그 자부심을 한껏 부풀리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성공도 했어. 전쟁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지.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그들도 끝장이 난 걸세. 다시금 애들이나 할 일로 돌아가서 나이 지긋한 선배 어른들의 지시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지. 조종간과 기관총 대신 펜이나 계산기를 다루게 된 거야. 그들 중 몇몇은 그걸 참지 못하고 나쁜 길로 들어섰어.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요리되는 것으로 알았던 만큼 왜 그것이 멋대로 자기 손을 벗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거야. 그들은 그걸 다시 빼앗으려 했지. 자유라든가 행복, 혹은 성공에 필요한 기반을 닦는 노력은 전혀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려고 든 걸세. 그 결과 당연히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 거지." 그는 바닥에 뻗어 있는 새로운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은 아직도 열린 채 지붕을 통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 눈을 감겼다. "꽤나 기분이 슬퍼지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서 나갑시다." "잠깐만." 그는 슬며시 내 팔을 잡았다. "청이 하나 있는데, 루." "뭔데요?" 그는 머뭇머뭇 말했다. "나는 이 일을 미란다에게 알리기가 두렵네. 그녀는 사실을 그대로 보려 하지 않을 거야. 자네, 내 말을 알겠지? 나를 탓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네." "날더러 알려달라는 건가요?" "자네 애인이 아니라는 건 아네. 그래도 그래 주면 고맙겠어." "그러지요, 뭐."하고 나는 말했다. "어쨌든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크롬버그 부인이 현관 바로 안쪽의 널따란 홀에서 진공소제기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녀는 흘끗 올려다보고는 그것을 껐다. "그레이브스 씨가 제대로 찾아가셨던가요?" "제대로 찾아왔소." 그녀의 얼굴이 긴장했다. "뭐 잘못된 일이라도?" "이젠 다 끝났소. 미란다 양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 "몇 분 전에 거실에 계셨더랬어요." 그녀는 집안으로 나를 안내하여 햇살이 가득한 방의 문간에 나를 남기고 가버렸다. 미란다는 스페인풍의 안뜰을 굽어보는 창가에 있었다. 두 손에 수선화 다발을 들고 하나씩 화병에 꽂고 있었다. 샛노란 꽃송이가 그녀의 검은 옷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 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색깔은 검은 모직 수트의 목 언저리에 매달린 진홍빛 나비 리본이었다.


자그맣고 뾰족한 젖가슴이 성난 기세로 옷을 뚫고 나올 듯했다. "안녕하세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냥 인사말이 아니라, 기도를 하는 거예요." "알 만하군." 그녀의 눈두덩이는 부어올라 있었고, 희미하나마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보였다. "그런데 아가씨에게 썩 나쁘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 "썩 나쁘지 않다니?" 그녀는 동그스름한 턱을 치켜들었지만 입 언저리에는 여전히 수심이 감돌았다. "아버님이 살아 있다고 여겨도 좋을 만한 근거가 있어요." "어디 계신데요?" "그건 몰라." "그렇담, 어떻게 살아 계시다는 걸 알죠?" "분명히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납치범 중의 하나와 이야기를 했소." 그녀는 황급히 내게로 다가와 내 팔을 움켜잡았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버님이 살아 있다고 하더군." 그녀는 내 팔을 놓고 두 손을 맞쥐었다. 깍지를 낀 다갈색 열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수선화 다발은 가지가 꺾인 채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말을 믿을 순 없잖아요? 당연히 살아 있다고 주장할 텐데 뭐. 그 사람들 뭘 원한대요? 아처 씨한테 전화를 걸어왔나요?" "그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했을 뿐이오. 얼굴을 맞대고 말이지." "직접 보고서도 놔줬단 말인가요?" "놔준 게 아니야. 그는 죽었소. 이름은 앨런 태거트라고 하지."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난--- " 그녀의 아랫입술이 벌어지며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어째 그럴 리가 없다는 거지?"하고 나는 물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상냥했고 언제나 내게--- 우리들에게 정직했어요." "큼직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말이지. 그런데 드디어 그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던 거요.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마다 하지 않게 된 거고." 그녀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고 말했단 말이죠?" "태거트는 아가씨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소. 나를 죽이려고 했지." "아녜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 여자가 그를 망친 거예요. 그대로 관계를 계속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태거트가 미란다에게 그 여자 얘길 했구먼?" "물론 얘기했어요. 내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걸요."


"그런데도 변함없이 그를 사랑했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그녀의 입은 다시 꼭 닫혀 자존심 때문에 커브를 그었다. "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 멍청이를요? 잠시 이용했을 뿐이에요. 내 목적엔 딱 맞았거든요." "그만두시지."하고 나는 거칠게 말했다. "나를 속일 순 없어. 또, 자기 자신을 속일 수도 없고. 그러다간 심신이 조각나 자기를 잃고 말 거야." 그래도 그녀의 깍지낀 두 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늘씬한 몸도 그대로 정지상태를 유지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휘어진 채 꿋꿋이 버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 바람이 그녀를 내게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발이 수선화를 밟아 뭉갰다. 그 입이 내 입 위에 겹쳤다. 가슴부터 무릎까지 그녀는 나를 꼭 부둥켜안았다. 너무 오래 끈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오랜 시간도 아니었다. "그를 죽여줘서 고마워요, 아처 씨." 그녀의 음성은 고뇌에 차 있었으나 부드러웠다. 상처가 입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이 낼 만한 그런 소리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그 몸을 내게서 떼어냈다."잘못 알았어. 내가 죽인 게 아냐." "아처 씨를 죽이려다 자기가 죽었다면서요?"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그를 쏘았지." "앨버트가?" 폭소와 히스테리의 중간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섬광처럼 오락가락했다. "앨버트가 했다고요?" "그는 명사수야. 우리는 함께 사격연습을 많이 했었지."하고 나는 말했다. "만일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미란다와 함께 여기 있지도 못했을 거야." "지금 나와 함께 여기 있는 게 좋은가요?" "조금 현기증이 나는군 그래. 미란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데, 그래 가지고 소화시킬 수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이윽고 어여쁜 처녀치고는 꽤 그럴 듯하게 원숭이처럼 히쭉 웃었다. "내가 키스했을 때도 현기증이 났나요?" "그렇지 않았다는 건 보면 알잖소. 하지만 대여섯이나 되는 개성들이 다투고 있는 방에 있으려니 어리둥절하군."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겠죠." 그녀는 히쭉 웃으며 말했다.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미란다가 현기증을 일으킬 거야. 이번 일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찾아요. 그런 다음 한바탕 속시원히 울라고. 안 그러면 끝내는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고 말겠어." "난 늘상 정신분열증 타입이었는걸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울어야 하죠, 의사 선생님?" "제대로 보기 위해서지. 그게 된다면 말이지만." "아처 씨,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군요,그렇죠?" "나는 갈라진 나무 틈새에 손을 집어넣을 만한 배짱은 없어." "맙소사."하고 그녀는 말했다.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에, 갈라진 나무라니. 정말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나도 몰라. 어젯밤 어디 갔었는지 말해 준다면 좀더 나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는데." "어젯밤에요? 아무데도 안 갔어요." "미란다가 간밤에 빨간 패커드 컨버터블을 몰고 한참 드라이브를 즐겼다는 건 익히 알고 있어." "드라이브야 했죠. 그렇지만 아무데도 안 갔어요. 그저 돌아다녔을 뿐이에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혼자 있고 싶었던 거죠." "무엇에 대해서?"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죠. 아처 씨는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어요?" "아니. 미란다는 아오?" "앨버트가 보고 싶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분, 어디 있죠?" "탈의실에. 일이 벌어진 곳이지. 태거트도 거기 있소." "날 앨버트에게로 데려다 줘요." 우리는 칸막이를 친 베란다에 앉아 죽은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찾았다. 보안관과 지방검사가 아직 커버를 씌우지 않은 태거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레이브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미란다가 들어서자 셋은 다같이 일어났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에게로 가려면 태거트의 몸뚱이를 타고 넘어야 했다. 그녀는 드러난 시체의 얼굴을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그레이브스의 한 손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자기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가 입맞춘 손은 그의 오른손, 바로 총을 쏜 손이었다. "이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그레이브스로서는 앨런 태거트의 머리통을 쏠 이유가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제 26 장. 검시심문 30 초 가량 아무도 말이 없었다. 연인들은 함께 시체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선 채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군, 미란다."하고 마침내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그는 지방검사를 슬쩍 쳐다보았다. "실례해도 괜찮겠지? 샘프슨 부인도 이 사실을 들어야 할


테니까." "어서 가게, 버트." 라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검사실에서 온 한 사내가 기록을 하고 다른 사내가 바닥 위의 시체 사진을 찍는 동안 험프리스는 나를 심문했다. 그의 질문은 재치 있고 철저했으며, 상황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태거트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죽었는가,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설명했다. 보안관인 스패너는 안절부절 못하며 시거를 질근질근 짓십으며 귀를 기울였다. "검시심문이 있을 거요."하고 험프리스가 말했다. "물론 당신이나 버트는 무죕니다. 태거트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고, 또한 명백히 그걸 사용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 총격 사건은 우리들을 전보다 더욱 난처한 입장에 몰아넣었군요. 사실상 전혀 단서가 없으니까." "베티 프레일리를 잊고 계시는군요." "그 여자를 잊은 건 아니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여자를 잡지 못했고, 또 설령 잡은들 샘프슨이 있는 곳을 그녀가 안다는 보장도 없거든. 문제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고, 우리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해결에 조금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소. 문제는 샘프슨을 찾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10 만 달러도."하고 스패너가 말했다. 험프리스는 짜증이 나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돈은 2 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2 차적이라, 그렇긴 하지. 그러나 현찰로 10 만 달러란 언제나 중요하지." 그는 탄력 있는 아랫입술을 힘껏 빨아들였다. 그리고 잿빛 눈을 치켜올려 나를 향했다. "심문을 끝냈다면 나도 이 친구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 "좋도록 하게나."하고 험프리스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시내로 돌아가야겠네." 그는 시체와 함께 떠났다. 단둘이 되자 보안관이 육중한 몸을 일으켜 나를 굽어보았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했다. "무슨 일이지요, 보안관?" "할 말이 있으실 텐데." 그는 두툼한 두 팔을 올려 가슴 앞에서 팔짱을 꼈다. "내가 아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당신은 간밤의 일에 관해서 응당 말해야 할 것을 죄다 털어놓지는 않았소. 오늘 아침 당신 친구인 콜튼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그 래시터란 친구가 몰던 승용차에 관해서 말해 주더군. 패사디나의 자동차 대여업소에서 빌린 거라던데 당신도 알고 있겠지?" 그는 느닷없이 언성을 높였다. 내가 놀라서 자백하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전에는 그런 걸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길 안 했어. 왜 그 협박장이 날아들었을 때 말이야." "비슷한 것을 보기는 했죠. 그러나 같은 차인 줄은 몰랐소." "하지만 당신은 그렇다고 추측했어. 콜튼에게도 그렇게 말했고. 이 지역에서는 실권이 없기 때문에 정보를 얻어봤자


그걸 살릴 수도 없는 관리에게 정보를 제공했단 말이야. 그런데 내게는 말하지 않았어 안 그런가? 말해 줬다면 그 자식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저격도 미연에 방지하고 돈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샘프슨은 못 찾았겠죠."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냐." 그의 얼굴이 분노의 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신은 사실을 손아귀에 틀어쥔 채 내 직무에 참견했어. 정보를 감췄단 말이야. 래시터가 총에 맞은 직후 당신은 잠적했어. 유일한 목격자가 사라진 거야. 그와 동시에 10 만 달러도 사라졌어." "그 말, 마음에 안 드는데요." 나는 일어섰다. 그는 거구였지만, 우리의 눈높이는 같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마음엔 들 것 같나? 당신이 그 돈을 가져갔단 얘긴 아냐. 그것도 두고봐야 알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지. 총을 이리 내고 내 조수가 남쪽에서 당신과 맞닥뜨렸을 때 대관절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시지. 또한, 그뒤에 한 일도 알고 싶군." "나는 샘프슨을 찾아다녔소." "샘프슨을 찾아다녔다고?" 그는 대놓고 빈정거렸다.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구태여 내 말을 믿을 필요는 없겠지.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니까." 그는 두 손으로 허리 뒤를 받치고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치사하단 소릴 들을지언정, 당신을 당장 집어넣을 수도 있어." 내 참을성도 한계를 넘었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하고 나는 대꾸했다. "사실 당신은 치사해." "지금 누구를 상대로 말하는지 알고 있나?" "보안관이지. 어려운 사건을 부둥켜안고 오리무중을 헤매는 보안관. 그래서 대타(代打)를 찾는 거고."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창백한 얼굴에 분노만 남았다. "시 당국에 보고할 테다." 그는 떠듬떠듬 말했다. "사립탐정 허가가 취소되면--- " "그 소린 전에도 들었소. 그래도 나는 이렇게 건재하단 말이오. 이유를 말해 드릴까? 기록이 깨끗하거든. 그리고 나는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지 않으니까." "이젠 공갈까지 치는군!" 그의 오른손이 옆구리에 찬 권총을 찾아더듬거렸다. "자넬 체포한다, 아처." 나는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진정하시지, 보안관. 앉아서 긴장을 풀어요. 의논할 게 있으니까." "얘기는 법정에서 할 수 있어." "안돼. 여기서 하는 거요. 당신이 나를 이민조사관에게 데려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오." "이민조사관?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예리하게 보이려고


미간에 주름을 모으며 눈을 껌벅였지만, 결과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을 따름이었다. "당신, 설마 외국 태생은 아니겠지?" "이곳 순종이오."하고 나는 말했다. "시내에 이민조사관이 있소?" "산타 테레사에는 없어. 가장 가까운 데는 벤투라에 있는 연방사무국이야. 그건 왜 묻지?"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소?" "꽤 있지. 외국인 범법자를 잡으면 그 친구들에게 넘기니까. 그런데, 당신, 날 놀릴 셈은 아니겠지?" "좀 앉아요."하고 나는 다시 말했다. "어젯밤 나는 찾고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다른 것을 찾아냈소. 당신과 그 조사관들이 대단히 기뻐할 일이지. 그걸 당신에게 거저 제공하려는 거요. 조건은 없소." 그는 엉덩이를 낮춰 캔버스 의자에 앉았다. 어느덧 분노는 자취를 감추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뭐지? 근사한 건수였으면 좋겠군." 나는 그에게 푸른 유개 트럭과 사원에 있는 갈색의 사내들, 트로이와 에디. 그리고 클로드 이야기를 했다. "트로이가 그 패거리들의 두목인 게 틀림없어요. 다른 자들은 부하고. 그들은 멕시코 국경과 베이커스필드 지역간에 정기적인 지하운송망을 펴놓고 있소. 남쪽 끝은 십중팔구 칼렉시코일 거요." "음." 스패너가 말했다. "국경을 넘기엔 딱 좋은 곳이지. 나도 두어 달 전에 국경수비대와 함께 한번 내려가 봤지만, 이쪽 길에서 저쪽 길까지 그저 철망 밑으로 기기만 하면 되더군." "트로이의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가 주워 싣는 거죠. 놈들은 '구름 속의 사원'을 불법이민자들의 임시거류소로 사용하고 있소. 과연 몇 명이나 그곳을 거쳐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젯밤만 해도 12 명이 넘었소." "놈들은 아직 거기 있나?" "지금은 베이커스필드에 있을 거요. 일망타진하려면 어려울 것도 없지. 클로드를 잡아족치면 틀림없이 불 거요." "기가 막히는군!" "하룻밤에 열둘을 데려온다면, 한 달이면 360 명이오. 놈들이 숨어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내는지 아오?" "아니." "두당 100 달러요. 트로이란 자식, 돈을 무진장 벌었겠는데." "더러운 돈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가난한 황인종들을 트럭으로 실어 들여와서 그들의 저축을 빼앗고는, 그냥 내팽개쳐 이주민 노동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는 약간 묘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친구들도 법을 어긴다는 걸 잊으면 안되지. 하기야 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우린 내버려두지만. 우린 그저 그 친구들을 차에 실어서 국경까지 데리고 가 풀어놓을 뿐이거든. 하지만 트로이 패거리라면 문제가 다른데. 녀석들이 한 짓은 깨끗이


30 년감이야." "그거 근사하군."하고 나는 말했다. "혹시 녀석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쏘다니는 곳을 모르나?" "'미치광이 피아노'란 술집을 하고는 있지만, 아마 거긴 안 나타날 거요. 이제 내가 아는 건 깡그리 얘기했소." 나는 두 가지를 빼놓았다. 내가 죽인 사나이와 아직도 에디를 기다리고 있을 그 금발 여자 말이다. "당신은 구린 데가 없는 것 같군." 보안관이 느릿하게 말했다. "아까 말한 체포 건은 잊어주게. 하지만 만일에 지금 말한 것이 핑계삼아 꾸민 이야기라면 나도 다시 생각하겠어." 감사의 말 같은 건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실망할 것도 없었다.

제 27 장. 범인의 정부 나는 유칼리나무 아래의 오솔길에 차를 세웠다. 마른 흙 위에는 트럭의 타이어 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솔길 저 아래편에 군데군데 녹이 난 초록색 A 모델 세단 한 대가 말뚝 울타리를 등지고 세워져 있었다. 운전대에 붙은 등록증을 보니 소유주는 마르셀라 핀치 부인으로 되어 있었다. 엊저녁은 달빛이 그 하얀 오두막에 친절을 베풀어 보기 좋았지만, 오늘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는 이 오두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초라해서 보기 흉했다. 그 모양은 뒷전의 망망한 푸른 바다에 찍힌 한 점의 지저분한 얼룩 같았다. 바다 그 자체와 언덕 기슭에 돋아난 잡초 사이를 희미하게 웅얼거리며 지나가는 몇 줄기 바람 외에는 살아 있거나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권총의 손잡이를 더듬어 그것이 틀림없이 제자리에 있음을 확인했다. 마른 흙이 내 발소리를 덮어주었다. 노크를 하니 문이 삐걱거리며 조금 열렸다. 여인의 음성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누구세요?" 나는 그녀가 권총을 가졌을 경우에 대비해서 한켠에 물러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거기 누가 있나요?" "에디야."하고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에디는 더 이상 자기 이름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으나, 그 이름을 사용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에디라고?" 놀라움에 반쯤 의혹이 어린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의 스적거리는 다리가 방을 가로질러 건너왔다. 방안의 어둠 속에서 그 얼굴이 미처 보이기도 전에 그녀의 오른손은 문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군데군데 벗겨진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은 꽤나 더러웠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에디!" 문간을 둘러보는 그 얼굴은 햇빛과 필사적인 기대감


때문에 눈이 멀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깜박인 뒤에야 내가 에디가 아님을 알아보았다. 지난 12 시간 동안 그녀는 급속히 늙어버렸다. 눈 언저리는 부풀고 입가는 쳐졌으며, 턱은 늘어져 있었다. 에디를 기다리느라고 생기를 몽땅 소모해 버린 것이다. 일종의 발작적인 분노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그녀의 손톱이 앵무새 발톱처럼 내 손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앵무새처럼 꽥꽥거렸다. "더러운 거짓말쟁이 같으니!" 그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그래도 총알이 박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강제로 그녀를 집안으로 되밀어넣고서는 발꿈치로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무릎으로 나를 차려고 애쓰다가는 이번에는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로 밀쳐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요, 마시." 동그랗게 벌어진 입으로 그녀는 내 얼굴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비명은 도중에 꺾여 연속적인 딸꾹질로 변했다. 그녀는 나가떨어지듯 모로 쓰러지며 이불 밑으로 파고들었다. 발작적으로 분통을 터뜨리며 그녀는 꿈틀거렸다. 나는 선 채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메마른 딸꾹질에 귀를 기울였다. 더러운 유리창을 통과한 뒤 빗물로 얼룩진 벽과 초라한 가구에 반사된 방안의 햇빛은 잿빛으로 보였다. 침대 곁에 놓인 구식 건전지 라디오 위에는 한 줌의 성냥개비와 담배 한 갑이 놓여 있었다. 잠시 지나자 그녀는 일어나 앉아 싸구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깊숙히 빨아들였다. 가운 앞섶이 빠끔히 열려 늘어진 젖가슴이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기와 더불어 뿜어져 나온 목소리는 단조롭고 경멸에 차 있었다. "안됐군요. 울고불며 한바탕 소동을 피워야 경찰 나리께서 만족하실 텐데." "난 경찰이 아니야." "내 이름까지 알면서 뭐. 하긴, 아침 내내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니까." 그녀는 싸늘한 관심을 나타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네 악당들은 어디까지 저질일 수가 있지?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쏴죽여 놓고는, 이번엔 내게로 와서 자기가 에디라고 하질 않나. 한 순간 난 또 혹시 방송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당신네 악당들이 또 공갈을 친 줄로 알았지. 더 저질로 놀 수는 없수?" "그 이상이야 못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난 당신이 대답 대신 총을 쏠 줄로 알았거든." "총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갖고 다닌 적도 없어. 에디도 마찬가지고. 만일에 에디가 어젯밤 도망쳤다면 이렇게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진 못할 텐데.... 그이의 무덤 위에서 기뻐 날뛰다니." 그 음성의 단조로움이 다시 깨졌다. "나도 당신 무덤 위에서 왈츠를 추게 될 거야, 경찰 양반."


"잠깐만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들어요." "좋지. 암, 좋고말고." 목소리에 다시 쇳소리가 감돌았다. "이제부턴 당신 혼자 떠들라고. 문을 걸어서 날 가두고 열쇠를 던져버려요. 내게서는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할 테니까." "담배를 꺼요, 마시. 좀더 그럴 듯한 얘기를 듣고 싶소." 그녀는 깔깔 웃으며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나는 그 손가락에서 반쯤 탄 담배를 빼앗아 발뒤꿈치로 뭉개버렸다. 새빨간 손톱이 내 얼굴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그녀는 침대 위에 엎어졌다. "당신도 틀림없이 관계했겠지, 마시? 에디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겠지?" "죄다 부인하겠어요. 그이는 트럭 운전사였고 임페리얼 계곡에서 콩을 실어날랐을 뿐이니까." 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가운을 벗어버렸다. "날 경찰서로 끌고가서 심문해 보시지. 공식적인 질문은 뭐든 부인할 테니까." "나는 경찰이 아니야." 그녀가 머리부터 옷을 입으려고 팔을 쳐들자 몸도 따라 올라갔다. 젖꼭지가 똑바로 섰고, 배는 희고 팽팽했다. 겨드랑이에 난 털은 검었다. "내 몸매가 맘에 들었수?"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는 거칠게 옷을 당겨 내리고서는 더듬거리며 목언저리의 단추를 채웠다. 실낱 같은 금발이 흩어져 내려와 얼굴을 덮어버렸다. "앉아요."하고 나는 말했다. "아무데도 안 갈 거니까. 난 당신에게 알려줄게 있어서 여기 온 거요." "당신, 경찰이 아닌가요?" "꼭 퍼들러처럼 한 말을 되풀이하는군. 잘 들어요. 내가 원하는 건 샘프슨이오. 나는 그를 찾기 위해 고용된 사립탐정이오. 내가 원하는 건 그 사람 뿐이란 말이오. 알아듣겠소? 그를 내게 넘겨주면 당신이 경찰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겠소." "치사한 거짓말쟁이 같으니."하고 그녀는 말했다. "사립탐정이든 뭐든 난 경찰 나부랭이는 믿지 않아. 게다가,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나는 그녀의 엷은 갈색 눈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천박했으며 아무런 뜻도 담겨 있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그 눈을 보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샘프슨이 있는 곳을 모르신다--- " "모른다고 했잖수." "그렇지만 누가 알고 있는���는 알겠지."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쥐뿔도 몰라요. 아까도 말했을 텐데." "에디는 혼자서 그 일을 해치우지 않았어. 틀림없이 동료가 있었을 텐데." "그는 혼자 했어요.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날더러


고자질쟁이가 되란 말요? 에디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경찰에 협조하란 말이우?" 나는 술통 모양의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소. 에디가 총에 맞았을 때 나는 거기 있었소. 주위 3 킬로미터 내에는 경찰이라곤 그림자도 없었지, 나를 경찰로 여기지 않는다면." "당신이 그를 죽였나요?" 그녀는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니오. 그는 돈을 다른 차에 건네주려고 샛길에서 차를 세웠소. 크림빛 컨버터블이었지. 여자가 타고 있더군. 그 여자가 그를 쏘았소. 그 여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물에 젖은 갈색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빨간 혀 끝이 윗입술을 맴돌더니 아랫입술로 옮아갔다. "그년이 마약중독자가 된 뒤로는 우릴 독사처럼 싫어했단 말이야."하고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마시? 그 여잔 어디 있지?"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베티 프레일리."하고 나는 말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를 그대로 두고 차를 몰아 '코너 하우스'로 되돌아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창 위에 달린 해가리개를 내렸다. 마시는 내 얼굴은 알아도 내 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반 시간 동안 화이트 비치로 뻗은 길에는 아무 왕래가 없었다. 이윽고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초록빛 A 모델 세단이 나타났다. 그 차가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순간, 나는 짙게 화장한 얼굴과 소용돌이 모양의 잿빛 모피와, 새파란 깃털이 달린 대담하게 치켜 올라간 모자를 보았다. 옷과 화장품, 그리고 혼자만의 반 시간이 마시를 일변시켰던 것이다. 두어 대의 차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A 모델의 최고 속력은 80 킬로미터 이하였으므로 그 뒤를 따르기는 쉬웠다. 무더운 날 천천히 차를 몰아 너무도 익숙한 길을 가는 데 유일한 난점은 졸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가 가까워지면서 통행차량이 늘어나자 나는 둘 사이의 간격을 좁혔다. A 모델은 선세트 대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 쉴새없이 태평양 연안도로를 통과했다. 차는 암청색 기름 연기의 꼬리를 끌며 산타 모니카 산맥 아래의 언덕을 기를 쓰고 달렸다. 그러다가 비벌리 힐스 부근에서 갑자기 대로를 벗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 뒤를 쫓아 양편에 생울타리가 쳐진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었다. A 모델은 자갈길 입구에 늘어선 월계수 울타리 뒤에 서 있었다. 그 곁을 지나치며 나는 마시가 잔디밭을 가로질러 유도화로 둘러싸인 깊숙한 벽돌 포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 막강한 힘에 의해 억지로 앞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제 28 장. 목숨값 나는 다음번 차도에서 차를 돌려 길가에 세워두고 교외의 평화를 깨뜨릴 신호를 기다렸다. 포커판의 불안한 분초(分秒)가 쌓여갔다. 차 문을 열고 한 발을 땅에 내디뎠을 때 포드 자동차의 엔진이 쿨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리는 끌어들이고 운전석에 웅크리고 엎드렸다. 으르렁거리는 포드 엔진 소리는 기어를 넣는 소리로 바뀌더니 이윽고 멀어져 갔다. 그 대신 더욱 우렁찬 소리가 들리며 검은색 뷔크가 차도 밖으로 후진해 왔다. 처음 보는 사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살이 퉁퉁한 얼굴의 두 눈은 아직 굽지 않은 밀가루 반죽 속에 박힌 건포도와 같았다. 마시는 운전사 옆에 앉아 있었다. 뒤창에는 영구차의 휘장 같은 회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로에 들어서자 뷔크는 한 바퀴 돌아 바다 쪽을 향했다. 나는 가능한 한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그 뒤를 따랐다. 브렌트우드와 태평양 연안도로 사이에서 그 차는 우회전하여 협곡으로 들어가는 길을 올라갔다. 나는 샘프슨 사건의 여정(旅程)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우리는 종착역에 이르는 좁은 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길은 계곡의 서쪽 절벽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난간을 두르지 않은 길 가장자리 저 아래로 무수한 덤불이 엉겨붙어 있었다. 길 왼편 위쪽 산마루의 마구 밀어붙인 빈터에 몇 채의 집이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만든 지 얼마 안되어 보였다. 맞은편 벼랑은 작은 너도밤나무류(類)가 우거진 황무지였다. 언덕 꼭대기에서 다음 언덕 허리를 기어오르는 뷔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력을 올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 물이 말라붙은 협곡 위에 결쳐진 비좁은 돌다리를 건너 그 뒤를 쫓아 언덕을 올라갔다. 그 차는 낯선 지역에서 더듬거리며 길을 찾는 한 마리의 커다랗고 검은 풍뎅이처럼 반대편 내리막길을 느릿느릿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바퀴자국이 난 한 가닥 샛길이 갈라져서 길 오른쪽으로 나 있었다. 풍뎅이는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그 길을 따라 들어갔다. 나는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어느 나무 뒤에 차를 세우고 뷔크가 오솔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진짜 풍뎅이보다 별로 크지 않게끔 되었을 때 차는 성냥갑처럼 생긴 노란 집 앞에 멈춰섰다. 성냥개비처럼 생긴 검은 머리의 여자가 집에서 나왔다. 두 쌍의 남녀가 차에서 나와 그 여자를 둘러쌌다. 다섯 사람은 발이 많이 달린 한 마리의 곤충처럼 한데 몰려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차를 떠나 덤불을 헤치고 언덕을 내려가서 계곡 맨 아래의 말라붙은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마른 강줄기는 둥그런 표석(漂石)들 사이를 구불구불 돌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돌틈에 있던 도마뱀 새끼들이 질겁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둑을 따라 휘어지고 뒤틀린 나무들이 무성하게 솟아 있어서 나는 들키지 않고 바로 집 뒤까지 갈 수 있었다. 그 집은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통나무집으로, 집 뒤 끝머리는 야석(野石)으로 만든 짤막한 돌기둥 위에 얹혀 있었다. 집안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매우 드높은 비명이 되풀이되었다. 비명이 내 신경을 긁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덕분에 내가 둑을 타고 내려가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가 지워졌던 것이다. 비명은 점차 사라지더니 한동안 잠잠했다. 나는 납작하게 엎드린 채 머리 위 마룻바닥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마루 밑에 감도는 정적은 또 다른 비명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듯싶었다. 송진 냄새와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나 자신의 식은땀 냄새가 풍겨 왔다.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직 사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군 그래. 우리가 순전히 새디즘이나 단순한 보복으로 이러는 줄 아는 모양이야. 하기야, 설사 우리가 복수심을 품게 될지라도, 우리는 당연히 네 소행이 우리의 복수심을 정당화시킨다는 건 느낄 수도 있겠지." "제발 입닥쳐요!" 이스터브룩 부인이 말했다. "그런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괜찮다면 내 관점을 밝히겠어, 베티. 내 관점은, 네가 매우 그릇된 행동을 했다는 거야. 내게는 단 한 번의 상의도 없이 혼자서 멋대로 사업을 벌였어. 내 부하가 그런 짓을 하는 게 난 딱 질색이란 말이야. 설상가상으로 넌 일의 선택에서도 부주의했고 또한 실패했어. 경찰은 지금 너는 물론, 나와 페이나 루이스까지도 찾고 있단 말이야. 더욱이 너는 그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음모의 제물로 내 귀중한 조수를 택했어. 그리고 사건이 극에 이르자 너는 단체적 협동정신은 고사하고 형제애조차 없는 사람임을 보여줬어. 친오래비인 에디 래시터를 쏘아죽였단 말이야." "당신이 사전을 통째로 외고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어요."하고 페이 이스터브룩이 참견했다. "심문이나 계속해요, 트로이." "난 오빠를 죽이지 않았어요." 상처입은 고양이의 흐느낌과 같은 목소리였다. "거짓말 마."하고 마시가 딱딱거렸다. 트로이가 언성을 높였다. 모두들 조용히 해. 이봐, 베티, 우린 기왕에 지난 일은 덮어둘 생각이야." "당신이 안한다면 내가 이 계집앨 죽일 테야."하고 마시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마시. 넌 정확히 내 말대로만 하는


거야. 아직 손해를 벌충할 기회는 있으니까. 우리 몸속의 보다 원시적인 충동들 때문에 일을 망쳐서는 안돼. 그래서 이처럼 유쾌한 작은 모임을 갖게 된 게 아닌가 말이야. 안 그래, 베티? 나는 돈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물론 알아낼 작정이야.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말하자면 넌 사면(赦免)을 받는 셈이 되는 거지." "이 계집앤 살 가치도 없어요."하고 마시가 말했다. "당신이 안 죽인다면 맹세코 내가 죽이겠어." 페이가 깔깔거리며 비웃었다. "헤이, 애송이, 그만한 배짱도 없으면서 뭘 그래. 혼자서 이 계집앨 다룰 만한 배짱이 있었더라면 우릴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이봐, 둘 다 입 다물지 못해." 그래 놓고 트로이는 다시 부드럽고 단조로운 독특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때, 베티? 마시쯤 내가 다룰 수 있다는 건 알지? 안 그래? 지금쯤은 너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깨끗이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다소 뜨거운 맛을 보게 될 테니까. 사실 말이지, 두 번 다시 걸어다닐 수 없게 될 거야. 어때? 결코 걸어다닐 수 없다고 보장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겠어."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만일에 네가 이기적인 이익에 앞서 조직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보고 협조하려 든다면 말이야...." 트로이는 부드럽게 계속했다. "그 보답으로 조직도 기꺼이 널 도와주리라고 내가 보장하지. 즉, 오늘밤 널 이 나라에서 빼내주겠단 말씀이야. 루이스와 나라면 널 위해 그만한 일쯤 할 수 있다는 건 너도 알겠지?" "당신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있나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난 당신을 잘 알아요, 트로이." "그렇다면, 아가씨, 당장 보다 친밀히 나를 알게 해줄까? 루이스, 이 계집애 구두를 마저 벗겨." 마룻바닥 위에서 그녀의 몸뚱이가 꿈틀거렸다. 내 귀에는 그 몸의 숨쉬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짝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마루판자를 울렸다. 나는 이쯤에서 내가 나서서 사태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상대는 넷이었다. 권총 한 자루로는 너무 벅찼다. 그런데 베티 프레일리는 살아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트로이가 말했다. "발바닥 반응검사부터 할까. 그렇게들 부르지, 아마." "이런 짓은 싫은데."하고 페이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 역시 질색이라고. 그렇지만 베티 고집이 이만저만 세야지." 찢어지기 직전의 엷은 막처럼 한 순간 침묵이 흐르더니 비명이 다시 터졌다.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나는 자신이 흙바닥을 물어뜯고 있음을 알았다. "네 발바닥은 반응이 대단히 좋군 그래." 라고 트로이가


말했다. "혓바닥이 그만큼 잘 돌아가지 않는 게 유감인데." "그걸 넘겨주면 나를 놔줄 건가요?" "내 보장하지." "당신이 보장한다고!"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내 말을 믿길 바란다, 베티. 좋아서 널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너도 설마 고통받는 걸 좋아하진 않겠지?" "그렇다면 날 일으켜 줘요. 날 앉게 해줘요." "암, 그러고말고, 착한 아가씨." "부에나비스타 고속버스 터미널의 사설 화물보관함에 있어요. 열쇠는 내 핸드백에 있고." 집에서 보이는 곳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뛰기 시작했다. 차에 이르렀을 때 뷔크는 여전히 저 아래 오솔길 끝에 서 있었다. 나는 돌다리가 있는 곳까지 언덕을 도로 내려가서 반대편 비탈을 반쯤 올라갔다. 그리고 한 발은 클러치를, 또 한 발은 브레이크를 밟은 채 뷔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차의 모터가 씩씩거리며 맞은편 언덕길을 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어를 넣고 저속으로 전진했다. 언덕 꼭대기에서 앞차의 동체가 햇빛 아래 번쩍였다. 나는 길 복판을 달려 다리 위에서 그 차와 마주쳤다. 브레이크의 비명이 경적의 울부짖음을 묵살하고 메아리쳤다. 그 대형차는 내차 범퍼에서 2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가까스로 정지했다. 차 바퀴가 미처 구르는 것을 멈추기도 전에 나는 운전석을 빠져나갔다. 루이스라고 하는 사내가 운전대에 앉아 나를 노려보았다. 살집 좋은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운전석의 문을 열고 그에게 권총을 보여주었다. 그 곁에서 페이 이스터브룩이 분노의 비명을 질렀다. "나와!"하고 나는 말했다. 루이스는 한 발을 내디디며 내게로 몸을 기울여 왔다. 나는 뒤로 물러섰다. "조심해, 손을 머리 위에 얹어." 그는 손을 올린 채 길에 내려섰다. 한 손가락에서 에메랄드 반지가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크림빛 개버딘 양복 속에서 커다란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당신도, 페이. 이쪽으로." 그녀는 하이힐 신은 발을 휘청거리며 나왔다. "자, 돌아서시지." 그들은 어깨 너머로 나를 주시하며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나는 권총을 거꾸로 잡아 루이스의 뒤통수 아래쪽을 후려쳤다. 그는 무릎을 꺾으며 소리 없이 엎어졌다. 페이가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잔뜩 몸을 움츠리고 물러섰다. 모자가 꼴 사납게 흘러내려 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기다랗게 땅에 누운 그림자가 그녀의 동작을 흉내냈다. "녀석을 뒷좌석에 쳐넣어."하고 나는 말했다.


"이 더럽고 비열한 자식!"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 밖에도 말이 많았다.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서!" "난 이 사람을 못 든단 말이야." "들지 않으면 안돼."하고 나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쓰러진 사내 위로 어정쩡하게 몸을 굽혔다. 활기를 잃은 그의 몸은 무거웠다. 그녀는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 넣어 그의 상체를 일으켜서 차로 끌고 갔다. 내가 문을 열고, 우리는 힘을 합쳐 그를 뒷좌석에 처박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협곡의 한가로운 정적은, 우리가 하는 일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루는 배경이었다. 나는 마치 아득한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듯,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피묻은 손에 돈을 움켜쥐고, 태양 아래 외로이 선 까마득한 사람들을 말이다. "이제 열쇠를 주시지." "열쇠?" 그녀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만화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열쇠?" "화물보관함 열쇠 말이야, 페이. 어서!" "열쇠 같은 건 없어요." 그러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뷔크 차의 앞좌석으로 향했다. 앞자리에 검은 가죽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열쇠는 그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지갑으로 옮겼다. "타시지."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운전석으로. 당신이 차를 몰아야겠어."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나도 차에 올라 바로 뒤에 앉았다. 루이스는 뒷자리의 한편 구석에 곤두박혀 있었다. 눈꺼풀이 조금 열려 있었지만, 치켜 올라간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 얼굴은 어느때보다도 더욱 밀가루 반죽 같았다. "당신 차를 비켜갈 수 없어요." 페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후진해서 언덕을 되올라가면 돼." 그녀는 야단스럽게 후진 기어를 넣었다. "너무 빨라."하고 나는 말했다. "사고가 났다 하면 당신은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 그녀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속력은 줄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차를 후진시켜 언덕을 올라 반대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오솔길 어귀에서 나는 그녀에게 차를 돌려 오두막으로 몰고 가도록 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는 거야, 페이. 클랙슨에 몸을 기대거나 해서는 안돼. 척추가 부러지면 별 볼일 없을 테니까. 쌍동이자리 출생은 인정사정이 없단 말씀이야." 나는 총 끝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슬쩍 건드렸다. 그녀는 질겁을 했고, 차는 껑충 뛰어나갔다. 나는 루이스의 몸뚱이에 기댄 채 오른쪽 뒤창을 내렸다. 오솔길은 오두막 앞의 작고


평평한 빈터 안으로 열려 있었다. "왼쪽으로 돌아." 나는 말했다. "그리고 문 앞에 차를 세워. 그런 다음 비상 브레이크를 걸라고." 오두막의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트로이가 문간에 서 있었다. 오른손으로 문틀 가장자리를 잡고 있어서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드러나 있었다. 나는 겨냥을 하고 쏘았다. 6 미터 거리였지만 총알이 새겨진 자국이 똑똑히 보였다. 구멍은 그의 오른손 엄지와 둘째손가락 사이에 마치 한 마리 살아 있는 통통하고 붉은 곤충처럼 패어져 있었다. 왼손이 총을 찾아 배를 가로지르기 전에 그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찰나였지만 내가 달려가서 다시 한 번 총의 손잡이를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은발 머리를 두 무릎 사이로 늘어뜨리며 문간에 주저앉았다. 뒷전에서 뷔크의 모터가 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페이 뒤를 쫓아가, 그녀가 미처 방향을 틀기 전에 차를 잡아세우고는 어깨를 잡아 그녀를 끌어냈다. 그녀는 내게 침을 뱉으려다 자기 턱만 적시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가."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부터!" 그녀는 하이힐 위에서 비틀거리며 거의 취한 듯한 걸음걸이로 들어갔다. 트로이는 문지방 밖으로 굴러나와 비좁은 현관에 웅크리고 뻗어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타고 넘었다. 방안에는 아직도 살갗이 타는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베티 프레일리의 목 언저리에 마시가 앉아 삽살개처럼 집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시를 잡아 떼어놓았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하이힐로 바닥을 굴렀지만 일어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총든 손을 흔들어 페이에게 그녀 곁의 방구석에 서 있도록 했다. 베티 프레일리는 일어나 앉았다. 목구멍에서 가냘픈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한쪽 뺨 관자놀이에서 턱뼈에 이르는 곳에서 손톱에 할퀸 네 개의 나란한 상처에서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굴의 다른쪽은 노르스름한 하얀빛이었다. "가관이군 그래."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 없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같았다. 시선은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들 상관 있겠소. 이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여기서 나갑시다." "그거 기분좋은 일이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손발과 두 무릎을 짚으며 엎어지고 말았다. "나, 걸을 수 없어요." 나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뚱이는 마른 장작처럼 가볍고 뻣뻣했다. 그 머리는 내 팔뚝 위에서 건들거렸다. 난 꼬마 악마를 안아든 기분이었다. 마시와 페이는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악이란 질적으로 여성적인 것이며, 여자들이 비장하고 있다가 전염병처럼 남자들에게 옮겨주는 독약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베티를 안고 밖으로 나와 차로 데리고 가서 앞자리에 앉혔다. 뒷문을 열고는 루이스를 땅바닥으로 몰아냈다. 얕은 숨결에 따라 두텁고 푸르딩딩한 입술 사이로 게거품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차에 올라 운전대 앞에 앉자, 가냘픈 까마귀소리 같은 목소리가 말했다. "내 목숨을 구해줬군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별로 대단한 가치는 없겠지. 하지만 대가는 치러줘야겠어. 값은 10 만 달러와, 랠프 샘프슨이야."

제 29 장. 사라진 꿈 나는 다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차를 세우고 점화 열쇠를 거두었다. 베티 프레일리를 안아올려 밖으로 데리고 나올 때, 그녀의 오른팔이 미끄러져 내려 내 두 어깨에 걸쳤다. 목덜미께에 그녀의 작은 손가락이 느껴졌다. "당신은 힘이 퍽 세군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아처, 그렇죠?" 그녀는 엉큼하고 교활한 속셈을 감추고 겉으로는 새침을 떠는 고양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생각이 난 모양이군. 손은 치우시지, 아니면 내동댕이 칠 테니까."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 차로 옮겨타서 차가 후진을 시작하자 그녀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요?" "그 친구들까지 실을 자리는 없어." "저 사람들을 놔줄 건가요?" "무슨 이유로 그들을 붙잡아두라는 거야? 폭행죄로 고발하라는 건가?" 나는 도로의 폭넓은 곳을 찾아내어 선세트 대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팔을 꼬집었다. "우린 돌아가야 해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 역시 당신이 에디에게 한 짓이 그들 못지 않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 물건을 갖고 있단 말예요!" "아니-- "하고 나는 대꾸했다. "내가 갖고 있지. 이제 그건 당신 게 아니야." "열쇠 말예요?" "그래." 그녀는 척추가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 축 늘어져 좌석에


파묻혔다. "그 사람들 놔주면 안돼요."하고 그녀는 토라진 듯이 말했다. "내게 한 짓을 봤잖아요. 트로이를 달아나게 내버려둬 봐요, 오늘 당장 당신에게 보복할걸요."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그 친구들은 잊고 자기 걱정이나 시작하시지." "나는 걱정할 장래도 없어요, 안 그런가요?" "우선 샘프슨부터 봐야겠어. 그리고 나서 결정하지." "그 사람에게 데려다 줄께요." "그는 어디 있나?" "집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에요. 산타 테레사에서 60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해변 어딘가에 있어요." "진담이겠지?" "진짜 진담이에요, 아처. 하지만 당신은 날 놔주진 않겠죠. 돈도 주지 않을 테고. 그렇죠?" "당신 돈이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녀는 앙칼지게 말했다. "내 10 만 달러를 빼앗고선." "나는 샘프슨 가족을 위해 일하고 있어. 그들이 돈을 되찾게 되는 거지." "그 사람들은 돈이 필요없어요. 어째서 똑똑하게 굴지 못하죠? 이번 일에는 나 말고 또 한 사람이 끼어 있어요. 그 사람은 에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돈을 가져다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게 어때요?" "그 남자가 누군데?" "그 사람이 남자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시의 손가락에 의한 압박에서 회복되어 있었고, 그녀는 목소리를 소녀의 음성처럼 꾸며내고 있었다. "여자와 함께 일할 수는 없겠지. 그 남자는 누구지?" 그녀는 태거트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려줄 때는 아니었다. "그 얘긴 잊어요. 잠시 당신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아직 샘프슨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어.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당신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텐데." "그는 부에나비스타 북쪽 20 킬로미터쯤 되는 해변 어느 집에 있어요. 수영 클럽이 탈의실 겸 휴게소로 쓰던 집인데, 전쟁중 문을 닫았죠." "그는 살아 있는 건가?" "어제까지는 그랬어요. 첫날엔 클로로포름 때문에 뻗었지만 이젠 멀쩡해요." "어제는 살아 있었다 이거지. 묶여 있나?" "난 본 적도 없는걸요. 에디가 맡았더랬으니까." "굶어죽도록 그대로 내버려둔 모양이군."


"난 거기 갈 수가 없었어요. 내 얼굴을 아니까.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에디 뿐이었어요." "그리고 에디는 천벌을 받아 죽었단 말씀이지." "아니, 내가 죽였어요." 그녀는 거의 점잔을 빼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걸요. 난 에디를 쏠 때 샘프슨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돈 생각만 했겠지, 안 그런가? 셋으로 나누느니 둘이서 나눠갖는 편이 낫다고 말이야." "물론 그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고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조금이었어요. 에디는 날 어릴 적부터 못살게 굴었어요. 내가 다 자라서 내 갈 길을 가려고 하자 그는 날 꼼짝 못하게 옭아넣었단 말예요. 난 마약중독자였었는데, 그는 그걸 팔았거든요. 그리고는 당국에 고자질해서 내게 죄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가벼운 처벌만 받고 빠져나갔어요. 내가 그걸 안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난 언젠가는 그 값을 치러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난 그가 한창 신이 나 있을 때 해치웠지요. 아마 그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을 거예요. 뭐든 일이 잘못될 경우에 대비해서 마시에게 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으레 그리 되기 마련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납치란 곱게 끝나지 않는 거야. 특히, 납치범들끼리 서로 죽이기 시작하면 더욱 그렇지." 나는 대로로 접어들자 첫번째 주유소에서 차를 세웠다. 그녀는 내가 점화 열쇠를 거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뭘 할 셈이죠?" "전화로 샘프슨 구조요청을 하려는 거야. 그는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거기 가려면 한 시간 반은 걸릴 테니까. 그 집, 이름이 붙어 있나?" "전에는 선랜드 수영 클럽이라고 했어요. 기다란 녹색 건물이죠. 고속도로에서도 보여요. 작은 갈림길 끄트머리께에 있으니까." 처음으로 나는 그녀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주유소 직원이 차에 기름을 채우는 동안, 나는 그곳의 공중전화로 산타 테레사를 불렀다. 창을 통해 베티 프레일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 펠릭스가 전화를 받았다. "샘프슨 저택입니다." "난 아처요. 그레이브스 씨 거기 계시오?" "예, 계십니다. 불러 드리지요." 그레이브스가 전화에 나왔다. "도대체 자넨 지금 어디 있는 건가?" "로스앤젤레스요. 샘프슨이 살아 있어요.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오. 선랜드라는 수영 클럽의 탈의실에 갇혀 있다는데, 거길 아십니까?" "전에 좀 다녔지. 요 몇 해 동안 문을 닫은 걸로 아는데, 어디 있는지는 알지. 부에나비스타 북쪽 고속도로상이지." "구급약품과 음식을 갖고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시지요.


의사와 보안관을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양반, 상태가 나쁜가?" "모르죠. 어제부터 죽 혼자 있었다니까. 나도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겠소." 나는 그레이브스와 대화를 끝내고 피터 콜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 근무하고 있었다. "대령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일부는 대령님을 위한 거고, 일부는 법원을 위한 거죠." "보나마나 또 두통거릴 테지." 그는 내 전화가 별로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이 놈의 샘프슨 사건은 금세기의 골칫거리라니까." "전에는 그랬지요. 오늘 내가 매듭을 지을 겁니다." 그의 음성은 완전히 한 옥타브가 떨어졌다. "다시 말해 보게." "샘프슨이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또, 납치범 중 마지막 인물을 지금 데리고 있고요." "이봐, 제발 어려워하지 말게나, 빨리 말해. 그는 지금 어디 있나?" "대령님 담당구역 밖인데요. 산타 테레사 군입니다. 지금 산타 테레사의 보안관이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랑을 하려고 전화를 했단 말이지. 이런, 자기 도취에 빠진 악당 같으니. 난 자네가 나나 법원에 뭔가 줄 게 있다고 들었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납치는 아닙니다. 샘프슨은 주 경계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FBI 가 상관할 수는 없지요. 그래도 이 사건에는 부산물이 있습니다. 브렌트우드와 태평양 연안도로 사이에 선세트 대로로 통하는 협곡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으로 통하는 길은 홉킨스 로(路)라고 합니다. 그 길을 따라 8 킬로미터쯤 들어가면 노상에 검은 뷔크 세단이 있는데, 그 곁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페인트 칠을 하지 않은 소나무 오두막이 있습니다. 집안에 네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트로이지요. 알건 모르건 법원은 그들을 필요로 할 겁니다." "무슨 이유로?" "불법 이민 반입이지요. 난 바쁩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요?" "당장은 그렇군."하고 그는 말했다. "홉킨스 로라고 했지?" 차로 돌아가 보니 베티 프레일리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구멍에서 나오는 구렁이처럼 그녀의 눈은 다시 음흉해졌다. "귀여운 양반, 이젠 뭐죠?"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을 위해 좋은 일을 하나 했지. 경찰을 불러 트로이와 그 일당을 주워담으라고 했어." "나도?" "당신은 빼놓았어." 나는 101 번 국도를 향해 선세트 대로를 내려갔다. "그자에게 불리한 증거를 주 당국에 제출할 거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밀입국 말인가요?" "그래. 트로이는 나를 실망시켰어. 트럭으로 멕시코 인들을 들여오다니, 신사 악당이 하는 일치고는 극히 저질이야. 그만한 인물이면 할리우드의 스타디움을 관할 소방서원들에게 팔아 먹든가 해야지." "수입이 좋잖아요. 그는 이중으로 수입을 올렸거든요. 그 불쌍한 쫌씨들한테서 차비를 뜯어낸 다음, 다시 그들을 두당 같은 값으로 농장에 팔아 넘겼지요. 멕시코 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파업선동자로 이용된 거예요. 트로이는 그런 식으로 몇몇 지방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죠. 한편에서는 루이스가 멕시코 정부에 기름칠을 하고." "샘프슨은 트로이에게서 파업선동자를 사들이고 있었나?"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걸 입증할 수 없을걸요. 샘프슨은 자신이 깨끗하게 보이도록 무척 조심했으니까." "충분히 조심하지는 못했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 말 뒤에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고속도로상에서 북쪽으로 차를 틀며, 나는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시트 주머니에 위스키 병이 있소. 그걸로 덴 곳과 얼굴의 상처를 닦아요. 마셔도 좋고." 그녀는 두 가지 충고를 다 받아들이고는 내게도 병을 내밀었다. "나는 괜찮아." "내가 먼저 마셔서 그런가요? 내가 걸린 병은 모두 정신적인 거예요." "집어치워." "당신은 내가 싫은 모양이죠, 그렇죠?" "나는 독약을 마시지는 않아. 나를 독살할 속셈이 없는 건 아니겠지? 당신도 머리는 있는 것 같군, 수준이 낮기는 하지만." "고맙다고 할 것도 없군요, 머리 좋은 양반." "그리고 당신은 온갖 경험을 다 겪었거든." "난 숫처녀는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얘기지만. 11 살 이후로는 그렇지 못했지요. 에디는 틈만 있으면 나를 팔아 돈을 벌려 했지만, 난 한 번도 허리띠 아래로 밥벌이를 한 적은 없어요. 음악이 날 지켜줬지요." "이번 일에서도 지켜줬어야 했는데, 유감천만이로군." "한번 걸어본 거죠, 결국 운은 없었지만. 어째서 내가 이런 저런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게 됐죠?" "당신은 아까 말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소. 자신이야 어찌되든 그자가 돈을 쥐길 바라는 거야." "그 얘긴 잊으라고 했을 텐데요." 잠시 침묵했다가 그녀는 말했다. "날 놔주고 그 돈을 갖는 게 어때요? 10 만 달러를 쥘 기회는 앞으로도 다신 없을 테니까."


"당신도 마찬가지야, 베티. 앨런 태거트도 그렇고." 그녀는 경악과 충격이 섞인 신음소리를 질렀다. 원래의 목소리를 되찾자 그녀는 적개심에 불타는 어조로 말했다. "날 놀리고 있었군요. 태거트에 관해서는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죠?" "그가 내게 이야기한 만큼."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죽음이 덮쳤소. 에디처럼 머리에 구멍이 생겼지." 그녀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그 말은 복받치는 울음 속에 삼켜졌다. 높고 길게 끄는 흐느낌이 점차 메마른 훌쩍거림으로 변해 갔다. 한참 지난 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왜 그가 죽었다는 말을 안했죠?" "묻지도 않았잖아. 그에게 반했었군?" "그래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우린 서로 반했었죠." "그토록 반했다면서 왜 그를 이런 일에 끌어들였지?" "내가 끌어들인 게 아녜요. 그가 원한 일이에요. 우린 함께 달아날 작정이었어요." "그리곤 내내 행복하게 살 셈이었겠군." "되지도 않는 농담 짓거리는 혼자서나 해요." "나 같으면 당신한테서 사랑의 젊은 꿈을 사지는 않겠어. 경험으로 말하면 그는 소년이었고, 당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야. 당신이 그를 꾀었을 테지. 턱 끝으로 부릴 사내가 필요한 참에 그 같으면 손쉬워 보였겠지."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녀의 음성은 놀랍도록 온화했다. "우린 반 년 동안 함께 지냈어요. 그는 내가 문을 연 지 1 주일 뒤에 샘프슨과 함께 '피아노'에 왔었어요. 난 당장 정신을 빼앗겼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우린 둘 다 가진 게 없었어요. 깨끗이 손을 씻고 새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고요." "그런데 샘프슨은 확실한 돈줄이었단 말이지? 납치가 확실한 방법이었고?" "샘프슨 같은 사람에게 동정심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처음에는 우리에게도 다른 계획이 있었어요. 앨런이 그 계집애--- 샘프슨의 딸 말이에요, 그 계집애와 결혼하려는 체하는 거예요. 그러면 샘프슨은 그걸 말리느라고 돈을 주어 쫓아낼 게 아니에요? 그런데 샘프슨이 그걸 망쳐버렸어요. 그는 어느 날 밤 앨런에게 발레리오에 있는 자기 방갈로를 빌려줬어요. 한밤중에 우리는 샘프슨이 침실 커튼 뒤에 숨어서 우릴 엿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그 뒤로 샘프슨은 그 계집애에게 만일 앨런과 결혼하면 의절을 하고 일체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앨런 또한 내보낼 작정이었지요. 다만, 우리가 그자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게 탈이었지만." "왜 그를 협박하지 않았지? 그 편이 더 손쉬웠을 텐데." "그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는 우리가 다루기에는 너무 거물이었고, 주 내의 최고 변호사들을 쓰고 있었거든요. 우린


비록 그에 관해 많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꼼짝 못하게 옭아넣기란 어려운 일이었죠. 예를 들어, '구름 속의 사원'만 해도 그렇죠. 트로이와 클로드나 페이가 그걸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지 샘프슨이 알고 있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샘프슨에 관해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다니 묻겠는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어떻게 아직까지도 활동할 기력이 있었을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나도 한때는 그가 강철로 된 심장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도 이젠 나이가 들었고, 아마 자신도 한물 간 것을 느꼈나 봐요. 젊음을 다시 느끼게 해줄 만한 것이면 뭣이든 찾았으니까요. 점성술이든 변태적인 섹스 행위든, 뭐든지 가리지 않았지요. 그가 걱정하는 건 단 하나, 자기 딸 뿐이에요. 그 애가 앨런에게 달라붙은 걸 알았다면, 아마 절대로 앨런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태거트도 그녀에게 달라붙었어야 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음성은 풀이 죽어 있었고 자그마했다. "하긴, 나야 그에게 잘해 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이 말 안해도 나도 그쯤은 알고 있다고요. 하지만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지요. 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그는 어떻게 죽었지요, 아처?" "그는 궁지에 몰리자 총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다른 사람이 먼저 쏘았지. 그레이브스라는 사나이." "그 남자를 만나보고 싶군요. 죽기 전에 앨런은 무슨 말인 가를 했다고 했죠? 설마---?" "당신 얘기는 없었어."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죠?" "산타 테레사의 시체공시소." "그를 볼 수 있다면 좋겠군요. 한 번만 더." 그 말은 어두컴컴한 꿈 속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뒤를 이은 침묵 속에서 그 꿈은 그녀의 마음 저편으로 번져, 저무는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들처럼 기다란 그림자를 던졌다.

제 30 장. 필사의 도주 부에나비스타를 향해 천천히 차를 몰고 갈 때, 황혼은 빌딩가의 추악함을 부드럽게 감싸주었으며, 번화가에는 하나둘 불빛이 늘어가고 있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의 불빛을 보았지만 나는 차를 멈추지 않았다. 시가지를 벗어나 몇 킬로미터 더 달리자 고속도로는 다시 해안선과 마주치고, 텅빈 해변가에 솟은 벼랑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졌다. 저무는 태양의 마지막 잿빛 광선이 해면에 들러붙어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여기예요." 베티 프레일리가 말했다. 그 동안 너무 조용히 있었기에 나는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다. 나는 교차로 바로 앞에서 도로의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바다 쪽 길은 경사져 내려가 해변으로 통하고 있었다. 모퉁이에 세워진 표지판이 비바람에 씻긴 글자로 이 해변의 바람직한 발전을 선전하고 있었지만, 집 한 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고속도로 아래쪽 200 미터 지점에서 바로 그 낡은 수영 클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몇 개의 별채로 이루어진 길고 납작한 건물로, 그 흐릿하니 선명치 않은 빛깔은 하얗게 번쩍이는 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차로 내려갈 순 없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길 아래쪽은 바닷물에 씻겨 나갔거든요." "당신은 거기 내려간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지난 주 이후에는 없어요. 에디가 처음 찾아냈을 때 함께 둘러보았거든요. 샘프슨은 남자용 탈의실의 작은 방에 있어요." "그랬으면 좋겠군." 나는 점화 열쇠를 빼내고 그녀를 차에 남겨놓았다. 내려감에 따라 길은 좁아져서, 양쪽에 깊은 도랑이 패인 불룩한 진흙 길이 되었다. 첫번째 건물 앞에 놓인 나무 발판은 휘어 있었고, 금이 간 틈바구니를 뚫고 자라나온 풀이 발 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처마 밑의 높직한 창들은 어두컴컴했다. 나는 손전등을 켜 건물 복판에 달린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문을 비추었다. 한쪽에는 '신사', 또 한쪽에는 '숙녀'라는 표시가 박혀 있었다. '신사'라는 글이 박힌 오른쪽 문은 조금 열린 채 건들거리고 있었다. 별 기대는 갖지 않고 나는 그것을 활짝 열었다. 실내는 텅 비고 죽은 듯이 고요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 외에는 집안에도 그 주위에도 생명의 자취라고는 없었다. 샘프슨도 없었고, 그레이브스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6 시 45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레이브스에게 전화한 지 한 시간이 훨씬 지났다. 카브릴로 협곡으로부터의 8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차로 달려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와 보안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다. 나는 손전등의 불빛으로 실내를 죽 훑었다.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날아온 모래와 흙먼지로 덮여 있었다. 맞은편 합판 간막이에 몇 개의 닫힌 문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일렬로 늘어선 그 문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뒷전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도마뱀처럼 너무도 빨라 나는 돌아볼 틈도 없었다. '복병이다!'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의식을 꿰뚫었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멀어져 갔다.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맨 처음 떠오른 말은 '병신같이!'였다. 거인의 외눈 같은 손전등의 불빛이 소름끼치는 양심의 눈처럼 뚫어져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나는 일어나 달려들려고 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그


충동을 제지했다. "이게 웬일인가?" "전등을 치우쇼." 불빛이 칼날처럼 내 눈을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전등을 내려놓고 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루?" "일어날 수 있어." 그러면서도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늦었군요." "어둠 속에서 집을 찾느라고 애먹었다네." "보안관은 어디 있나요? 그 사람도 못 찾았단 말입니까?" "사건 때문에 나가고 없더군. 군(郡) 병원으로 편집광(編執狂)을 호송중인 모양이야. 의사를 데리고 내 뒤를 따라오라고 전해 달라고 했지. 시간을 허비하기 싫어서 말이야." "내가 보기엔 시간을 꽤나 허비한 것 같은데 그래요." "위치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지나쳐 갔었던 모양이야. 부에나비스타에 다 가서야 그 생각이 났다네. 되돌아오자니 찾을 수가 있어야지." "내 차를 못 보셨나요?" "어디 있었는데?" 나는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에서 구토증이 일며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했다. "바로 이 위쪽의 모퉁이에 세워놨는데." "거기라면 바로 내가 주차한 곳이야. 자네 차는 안 보이던데." 나는 더듬더듬 차 열쇠를 찾았다. 열쇠는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확실해요? 녀석들은 내 차 열쇠를 가져가지 않았는데." "자네 차는 거기 없었어, 루. 그런데 녀석들이라니 누군가?" "베티 프레일리와 누군진 모르지만 나를 때려눕힌 녀석이오. 패거리 중 네 번째 멤버가 있어서 샘프슨을 감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나는 그에게 이곳에 이르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주었다. "그 여자를 차에 남겨둔 게 잘못이야."하고 그는 말했다. "이틀에 세 번씩이나 얻어터져서야, 사람 병신되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일어서기는 했지만 다리에 맥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기대라고 어깨를 내밀었지만 나는 벽에 기대었다. 그는 전등을 치켜들었다. "자네 머리 좀 보세." 흔들리는 불빛 속에 떠오른 그의 넓적한 얼굴에는 불안 때문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는 지치고 늙어 보였다. "나중에."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손전등을 집어들고 방을 가로질러 늘어선 문 쪽으로 갔다. 샘프슨은 두 번째 문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칸방 뒷벽에 붙여진 벤치 위에 쓰러져 있는 뚱뚱한 늙은이--- 머리는 똑바로 들고 있었는데, 모퉁이에 처박혀 있었다. 그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뒤를 따라 비집고 들어온 그레이브스가 외쳤다. "이런!"


나는 그에게 손전등을 건네주고 샘프슨 위로 몸을 숙였다. 두 손과 발목은 5 밀리 두께의 밧줄로 한데 묶여 있었다. 밧줄 한 끝은 벽에 박힌 스테이플에 잡아매어져 있었다. 다른 한 끝은 샘프슨의 목을 파고들어 왼쪽 귀밑에서 힘껏 잡아매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몸 뒤를 더듬어 묶여진 손목 한쪽을 잡았다. 차갑지는 않았으나 맥은 이미 없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동자는 제가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두툼한 발목을 감싼 삼원색의 바둑판 무늬 양말에 어쩐지 가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레이브스가 숨가쁘게 물었다. "죽었나?" "흠." 나는 온몸에서 맥이 빠지며 허탈감이 찾아왔다. "내가 여기 왔을 때는 틀림없이 살아 있었을 거요. 내가 얼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죠?" "지금은 7 시 15 분이야." "나는 6 시 45 분쯤에 여기 왔어요. 녀석들에게는 일을 벌일 시간이 30 분이나 있었군. 우리도 어서 움직여야지." "샘프슨을 이대로 여기 놔두고?" "경찰은 이 상태 그대로의 그를 원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를 어둠 속에 남겨놓고 떠났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내어 언덕을 올랐다. 내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레이브스의 스튜드베이커는 교차로 건너편에 세워져 있었다. "어디로 가지?" 운전석에 오르자 그가 물었다. "부에나비스타. 고속도로 순찰대로 갑시다." 나는 지갑을 조사했다. 화물함 열쇠가 없어졌을 것을 예상하며. 그러나 그것은 명함꽂이에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나를 때려눕힌 자가 누구였든 그에게는 베티 프레일리와 정보를 교환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돈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놓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있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마을의 경계선을 지날 때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말했다. "나를 버스 터미널에 내려주시오." "아니, 왜?" 나는 그에게 까닭을 말하고는 덧붙였다. "만일 돈이 그대로 있다면 놈들은 그걸 찾으러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리고 돈이 없다면 놈들이 십중팔구 이 길��� 따라와서 화물함을 부숴 열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당신은 이 길로 고속도로 순찰대에 갔다가 나중에 날 태워주시오." 그는 버스 터미널 앞,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표시하는 붉은 포석 위에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유리문 밖에 서서 장방형의 커다란 대합실을 들여다보았다. 작업복을 걸친 서너 명의 사내가 흠집투성이의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원시인처럼 보이는 몇몇 노인이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은 벽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편 구석에는 멕시코 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부모와 네댓 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그들은 마치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축구 팀으로


굳건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대합실 뒤쪽 시계 아래에 있는 매표소에는 꽃무늬의 하와이 셔츠를 입은 여드름투성이의 젊은이가 들어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도너츠 판매대가 있었고, 유니폼을 입은 뚱뚱한 금발 여자가 그 뒤에 앉아 있었다. 실내의 어느 누구도 내가 찾는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저녁과 버스, 토요일 밤이나 봉급 봉투, 혹은 수명을 다한 뒤의 안락한 죽음 같은,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유리문을 밀어젖히고 담배 꽁초가 흩어져 있는 플로어를 건너 화물보관함으로 갔다. 목표인 화물함의 번호는 열쇠 위에 찍혀 있었다--- 28 번. 구멍에 열쇠를 밀어넣으며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너츠를 파는 여자의 몽롱한 푸른 눈이 무심히 나를 향하고 있을 뿐,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함 안에는 천으로 만든 붉은 비치백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끌어내자 안에서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까이에 있는 빈 벤치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안에 든 갈색 종이꾸러미는 한쪽 끝이 찢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으니 빳빳한 새 지폐의 모서리가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도너츠 판매대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와이셔츠에 피가 묻었는데, 모르시나요?"하고 금발 여자가 물었다. "알고 있소. 늘 이런 식으로 입지요." 그녀는 마치 내 지불 능력이 의심스럽다는 양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100 달러 지폐를 내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고, 카운터 위에 10 센트 은전 한 닢을 탁 올려놓았다. 그녀는 두텁고 흰 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을 내주었다. 왼손에 컵을 들고, 언제라도 총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손은 비워둔 채 나는 커피를 마시며 문 쪽을 지켜보았다. 매표소 위의 전기 시계가 조금씩 시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버스가 한 대 도착했다가 떠나자 대합실의 구성원이 바뀌었다. 시계는 매분 60 번씩 착실히 시간을 십어 소화시키며 무척이나 느릿하게 똑딱걸음을 했다. 7 시 50 분쯤 되니, 시간이 너무 늦어 그들이 나타날 가망은 없는 듯싶었다. 그들은 돈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브스가 문간에 나타나더니 열심히 손짓을 해댔다. 나는 컵을 놓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의 차는 길 건너편에 다른 차들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녀석들이 방금 자네 차를 작살냈다네." 보도 위에서 그가 말했다. "여기서 북방 25 킬로미터 쯤 되는 곳이야." "놈들은 도망갔습니까?" "분명히 하나는 내뺏어. 프레일리란 여자는 죽었고." "다른 놈은 어찌됐나요?"


"순찰대에서는 아직 모르고 있네. 무전연락을 한번 받았을 뿐이니까." 25 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15 분도 걸리지 않았다. 줄지어 늘어선 차량과 헤드라이트의 불빛 속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일단의 사람들로 그 장소는 이내 눈에 띄었다. 그레이브스는 신호용 붉은 손전등을 열심히 흔들며 우리더러 그대로 직진하라고 지시하는 경찰 바로 옆에 급정거를 했다. 스튜드베이커에서 뛰어나가 보니, 차량의 행렬 저 너머 서치 라이트가 훑고 간 길 끄트머리에 내 차가 있었다--- 둑에 코를 처박고. 나는 부서진 차체를 에워싼 군중을 팔꿈치로 밀쳐내며 앞으로 내달았다. 갈색으로 그을린 주름진 얼굴의 고속도로 순찰경관이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그손을 밀쳐냈다. "이건 내 차요."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갈색 주름살이 귀밑까지 부채살처럼 퍼졌다. "확실하오? 당신 이름이 뭐요?" "아처." "정말 당신 거군. 등록된 이름과 같으니까." 그는 순찰 오토바이 곁에 불안한 듯이 서 있는 젊은 순경을 불렀다. "이리와, 올리! 이 사람 차야." 군중은 내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망가진 차 주위에 빈틈없이 쳤던 원진(圓陣)을 풀자, 그 곁 땅바닥에 놓인 담요로 덮인 물체가 보였다. 나는 두 눈으로 열심히 그 광경을 빨아들이고 있는 두 여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담요의 한 끝을 들추었다. 그 밑의 물체는 보기엔 도저히 사람 같지 않았지만, 걸친 옷으로 보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에 둘씩이나 죽는다는 것은 내게는 벅찼다. 속이 뒤집혔다. 얼마 전에 마신 커피만 남겨놓고 모조리 토해 내자 메스꺼움이 조금 가셨다. 두 명의 순찰경관은 내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 여자가 당신 차를 훔쳤소?" 그 중 나이든 쪽이 물었다. "그래요. 이름은 베티 프레일리." "본서에서는 수배중인 여자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놈은 어찌됐소?" "다른 놈이라니?" "사내 하나가 함께 있었을 텐데?" "사고 당시에는 없었습니다."하고 젊은 순경이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잖습니까?" "아니, 확실합니다. 현장을 보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내게도 책임이 있지요." "원, 천만에, 올리." 나이든 경관이 올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넨 분명히 옳은 일을 한 거야. 아무도 자넬 탓할 순 없어." "어떻든 수배중인 차였다니 다행이군요." 올리가 불쑥 말했다. 이 말에 나는 화가 났다. 보험에 들기는 했지만, 차를


원상태로 수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나는 그 차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기수가 자기 말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하고 나는 날카롭게 물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서너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북쪽을 향해 80 킬로미터 속도로 순찰을 돌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차에 탄 여자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더란 말입니다. 마치 내가 정지상태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 뒤쫓았지요. 거의 150 밀로미터나 속도를 내서야 가까스로 따라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가 나란히 달리는데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총알처럼 내리막길을 치닫더군요. 멈추라고 신호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할 수 없이 앞을 막았지요. 그러자 차를 틀어 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다 중심을 잃은 겁니다. 차는 60 미터 가량 미끄러져 나가더니 둑에 꼬나박혔지요. 내가 끌어냈을 땐 여잔 이미 죽어 있더군요." 말을 마친 그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이든 사내가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여보게, 신경쓰지 말어. 법대로 집행했을 뿐 아닌가." "차 안에는 그밖에 아무도 없었다고 확신하는 거요?"하고 나는 물었다. "연기처럼 사라졌다면 몰라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 그는 언성을높여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불은 나지 않았는데, 그 여자의 발바닥은 온통 물집투성이더란 말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찾아도 구두가 보이질 않아요. 그 여잔 맨발이었거든요." "그거 묘하군요."하고 나는 말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어느 틈엔지 앨버트 그레이브스가 군중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놈들은 따로 차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그녀는 왜 구태여 내 차를 몰았을까?" 나는 망가진 차 안으로 손을 넣어, 휘어지고 피가 묻은 계기반 아래의 점화장치를 더듬어 보았다. 양극이 아침에 내가 남겨둔 구리철사로 다시 이어져 있었다. "점화장치를 철사로 이어 발동을 걸었군." "아무래도 남자 솜씨 같군. 안 그런가?"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오빠한테서 얻어들었는지도 모르지. 차도둑이라면 다 아는 수법이니까." "놈들은 갈라져서 도망치기로 한 건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알 수 없는걸. 그녀는 내 차를 쓰면 당장 발각되리라는 것쯤은 알 만한데--- " "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되네--- " 나이든 경관이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소?" 내가 마지막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스패너 보안관이 무전기가 달린 차로 도착했다. 운전은 서리가 하고 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스패너가 뛸 듯이


내닫자 그의 살집 좋은 가슴은 여자의 젖가슴처럼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오?" 그는 축축하고 의심에 잠긴 눈으로 나와 그레이브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그레이브스에게 설명을 맡겼다. 샘프슨과 베티 프레일리에게 일어난 일을 죄다 듣고 나자 그는 내게로 돌아섰다. "잘 보셨겠지, 아처? 당신이 쑤시고 돌아다닌 결과를 말이야. 내 지시 없이는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소?" 나는 그런 소리를 순순히 받아들일 기분이 아니었다. "지시라니, 웃기는군! 당신이 좀더 일찍 샘프슨한테 갔더라면 지금쯤 그 사람도 살아 있었을 게 아뇨?" "당신은 그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내겐 알리지 않았어."하고 그는 툴툴거렸다.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아처." "물론 그럴 테지. 내 면허증을 갱신할 때 말이지. 전에도 들은 소리요. 그런데 자신의 무능력은 시 당국에 뭐라고 말할 셈이오? 사건이 큼직하게 터지고 있는데도 당신은 자리를 비우고 미친놈이나 병원에 나르고 있었단 말이야." "어제 이후로는 병원에 간 적이 없는데."하고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샘프슨에 대한 내 전갈을 못 받았단 말이오? 두 시간 전인데?" "전갈 같은 건 없었어. 그런 수로 빠져나갈 생각은 말라고." 나는 그레이브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산타 테레사 방면에서 구급차 한 대가 요란스레 사이렌을 울리며 고속도로를 달려 내려왔다. "더럽게 늦는구먼."하고 나는 순찰경관에게 말했다. "여자가 이미 죽은 걸 알고 있으니 서두를 게 없지." "여잘 어디로 데려갈 거요?" "연고자가 나서지 않는 한 산타 테레사의 시체공시소일 거요." "연고자는 없을 거요. 거기라면 그 여자에게는 아주 좋은 곳이지." 앨런 태거트와 에디, 즉 그녀의 애인과 오빠가 벌써부터 거기에 가 있지 않은가.

제 31 장. 제 3 의 사나이 그레이브스는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았다. 마치 그 사고현장을 본 것이 그에게 충격을 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산타 테레사로 돌아가는 데는 근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동안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앨버트 그레이브스와 미란다에 관한 생각으로. 그러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서자 그는 기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네, 루. 경찰은 아직도 얼마든지 녀석을 붙잡을 기회가 있어." "녀석이라니, 누구 말인가요?" "물론 살인자지. 제 3 의 사나이 말이야." "그런 사내가 또 있는지 모르겠군." 그의 손이 운전대를 힘껏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샘프슨을 죽였네."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누군가가 죽였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을 나는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는 오랫동안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조심해서 운전해요, 그레이브스. 매사에 조심해야죠."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은 다시 길로 향했지만 그 직전에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치욕감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속도로와 산타 테레사의 주요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차를 세웠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어디든 나는 상관없네." "샘프슨 저택으로 가지요."하고 나는 말했다. "샘프슨 부인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까." "지금 꼭 해야 되나?" "나는 그분에게 고용되어 있잖소. 결과를 보고해야 돼요." 신호가 바뀌었다. 샘프슨 저택으로 통하는 길을 오를 때까진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저택의 거무스레한 형체 속에서 몇 줄기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되도록 미란다는 만나고 싶지 않군."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오늘 오후 결혼했다네." "조금 성급했던 게 아닌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몇 달 동안이나 혼인신고서를 갖고 다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잖소? 아니면, 점잖게 묻어줄 때까지만이라도." "그녀가 오늘 하자고 우겼다네."하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법원에서 식을 올렸지." "아마도 당신은 첫날밤도 거기서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유치장도 한 건물 안에 있지요, 아마?"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차고 옆에 차를 세우자,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치욕감은 이미 그의 얼굴에서 가시고 없었다. 오직 도박사의 체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교로운 일이군."하고 그는 말했다. "이 밤은 우리들의 신혼 초야야. 몇 년 동안 기다려 온 밤이지. 그런데 그녀를 보고 싶지 않으니." "당신은 혼자 있기를 바라시오?" "왜, 안되나?"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소. 당신만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나는 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몰랐다. "자넨 나를 믿어도 되네, 루." "이제부터는 아처 씨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아처 씨, 지금 내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네. 그렇지만 난 그걸 쓰지 않을 참이야. 그만하면 폭력은 충분했으니까. 이해하겠나? 역겨울 정도로 싫증이 나버렸어." "역겨울 게 당연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두 번이나 살인을 저질렀으니 뱃속이 편할 리가 있나. 한동안 폭력을 만끽했군 그래." "어째서 두 번이라는 거지, 루?" "아처 씨라고 하라니까." "너무 그렇게 도학군자인 양할 필요는 없잖나? 계획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네." "대개들 그렇지. 당신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태거트를 쐈어. 그리고 그 이후 즉석에서 내키는 대로 행동한 거야. 막판에 이르자 당신은 점점 조심성이 없어졌어. 오늘 저녁 보안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리라는 것쯤은 알 만했는데 말이야." "자네는 그걸 입증할 수 없네." "그럴 필요도 없어. 하지만 당신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었다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지. 당신은 잠시 탈의실에서 샘프슨과 단둘이서만 있고 싶었던 거야. 태거트의 패거리들이 당신을 위해 했어야 할 일을 못하게 되자, 그 마무리를 스스로 짓지 않을 수 없었지." "자네, 정말 내가 납치에 관계했다고 생각하나?" "관계하지 않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 그러나 그 납치사건은 당신과 모종의 관계를 맺었어.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태거트를 죽일 타당한 이유를 갖게 함으로써 당신을 살인자로 만들었던 거야." "나는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태거트를 쏘았네."하고 그는 말했다. "그를 저 세상에 보낸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하지. 미란다가 그를 너무 좋아했거든. 그렇지만 내가 그를 쏜 것은 자넬 구하기 위해서였다네." "믿어지지 않는군."하고 나는 싸늘한 분노에 휩싸여 거기 앉아 있었다. 검은 하늘에 눈송이처럼 박힌 별들이 머리 위로 냉기를 퍼붓고 있었다. "계획적인 게 아니었네."하고 그는 말했다. "계획을 짤 시간도 없었어. 태거트가 자넬 쏘려 하기에 대신 내가 쏘았던 거야. 단순히 그거 뿐이라고." "살인은 결코 단순하지 않소. 적어도 당신만한 두뇌의 소유자가 저지를 때는. 당신은 사격의 명수요, 그레이브스. 그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어."


그는 냉혹하게 대꾸했다. "태거트는 죽어도 마땅해. 당연한 응보를 받은 거란 말이야." "그러나 때가 맞지 않았소. 난 그가 내게 한 말을 당신이 얼마만큼이나 들었는지 내내 그게 궁금했지. 당신은 그가 납치범 일당 중의 하나라는 걸 알 만큼은 들은 게 틀림없어. 만일에 태거트가 죽는다면 그 패거리들이 샘프슨을 죽이리라는 걸 충분히 확신할 만큼은 들었겠지." "나는 거의 들은 게 없었네. 그가 자넬 쏘려는 걸 보는 순간 대신 쏘았을 뿐이라니까." 그 음성에 쇳소리가 돌아왔다. "명백히 나는 실수를 저질렀던 거야." "실수를 한두 번 저지른 게 아니지. 첫 번째는 태거트를 죽인 것이었소.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단 말이야, 안 그래요? 당신이 정말로 죽기를 바랐던 건 태거트가 아니라 실은 샘프슨이었어. 샘프슨이 살아서 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았던 만큼, 당신은 태거트를 죽임으로써 그 기틀을 마련할 생각이었지. 그러나 태거트에게는 살아남은 동료라고는 하나 뿐이었고, 게다가 그녀는 멀찌감치 숨어 있었단 말이야. 그녀는 내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태거트가 죽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더더욱 샘프슨을 죽일 기회가 없었지. 물론, 기회만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 했을 테지만 말이야. 그래서 결국 당신이 직접 샘프슨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지." 치욕감과 불안감이 다시 그의 얼굴을 내리눌렀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그것들을 떨쳐버렸다. "나는 현실주의자라네, 아처.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샘프슨이 죽었다고 섭섭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의 어조는 바뀌어 갑자기 나직하고 단조로워졌다. 그 사람 전체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지탱시킬 그 어떤 자세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었다. "당신은 어느 때보다도 살인을 가볍게 취급하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당신은 살인혐의로 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보냈소. 그곳이 바로 당신이 가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소?"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입 언저리와 이마 사이에 깊고 보기 흉한 주름살이 잡혔을 뿐이었다. "자넨 내게 불리한 증거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네. 한 조각도 없단 말이야." "내게는 심증이 있소. 당신이 은연중에 고백한 것도 있고." "그러나 녹음이 안됐어. 그나마 나를 법정에 끌어넘기기에는 충분치 못해."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오. 당신은 자신의 입장을 나보다 잘 알 테지. 왜 당신은 샘프슨을 살해해야만 했는지 모르겠군." 한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 그의 어조는 또 변해 있었다. 솔직하고 젊어진 데가 있는 그 음성은 몇 년 전 수사관 시절에 내가 들었던 사나이의 음성이었다. "내가 해야만 했었다고 자네가 말하다니--- 루. 바로 그대로일세.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그곳 탈의실에 혼자 있는 샘프슨을 발견할 때까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네. 난 그에게 말도 걸지 않았어. 그를 본 순간 해치워야 한다는생각이 번뜩인 거야. 일단 그렇게 되니까 싫든 좋든 그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기꺼이 그 짓을 한 것 같은데." "그래."하고 그는 말했다. "그를 죽이는 건 즐거웠어. 이젠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만." "당신, 좀 손쉽게 넘기려는 게 아니오? 나는 정신분석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또 다른 동기들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소. 보다 뚜렷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은 것들 말이오. 당신은 오늘 오후,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재산이 많은 아가씨와 결혼했지. 아버지가 죽으면 그녀는 실제로 대단한 부자가 되는 거요. 설마 지난 두 시간 동안에 당신 부부가 500 만 달러의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하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500 만은 아니야. 절반은 샘프슨 부인에게 돌아가거든." "그녀를 잊고 있었군. 왜 그녀도 마저 죽이지 그랬소?" "자네, 너무 심하군." "당신은 샘프슨에겐 더 심하게 굴지 않았소, 별것도 아닌 125 만 달러 때문에 말이오. 그가 남긴 돈의 반의 반이지. 그레이브스, 당신은 송사리 도박꾼이었다고 생각되지 않소? 아니면, 앞으로 샘프슨 부인과 미란다도 살해할 계획이었던가?" "그렇지 않다는 건 자네도 알잖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넨 날 뭘로 보는 거야?"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소. 당신은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 날 여자의 아버지를 죽이고 여자로 하여금 상속자가 되도록 한 사람이오. 어떻게 된 일이오, 그레이브스? 백만장자가 아니면 필요없다는 거였소? 난 그래도 당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만해 두게." 고통스러운 음성이었다. "미란다를 끌어들이지는 말게." "그럴 수는 없지. 미란다만 아니었다면 할 말이 더 많았을지도 몰라." "아니...."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더이상 말할 게 없어." 나는 도박꾼의 차디찬 미소를 짓고 앉아 있는 그를 남겨두고 차에서 내렸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자갈길을 건널 때 내 등은 그를 향해 있었고 그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있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폭력에 싫증이 났다는 그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주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내 노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위층 홀에 내리니 크롬버그 부인이 있었다. "어딜 가시지요?"


"샘프슨 부인을 만나야겠소." "안되겠네요. 부인께서는 오늘 무척 신경이 날카로우시답니다. 한 시간쯤 전에 넴부탈 세 알을 잡수셨는걸요." "이건 중요한 일이오." "얼마만큼이나 중요한데요?" "그분이 기다리는 소식입니다." 알겠다는 기색이 그녀의 눈에 번뜩였다. 그러나 더 이상 캐묻기에는 그녀는 너무도 훌륭한 하인이었다. "잠이 드셨나 보고 오지요." 그녀는 샘프슨 부인의 닫혀진 방문으로 가서 조용히 문을 열었다. 겁에 질린 속삭임이 방안에서 울려왔다. "누구지?" "크롬버그예요. 아처 씨가 뵙고 싶답니다.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네요." "좋아요." 속삭이는 듯한 말이었다. 전등이 하나 켜졌다. 크롬버그 부인은 뒤로 물러서서 내게 길을 비켜주었다. 샘프슨 부인은 불빛 아래 눈을 깜박이며 팔꿈치로 몸을 괴고 있었다. 갈색으로 그을은 얼굴은 약기운 때문인지 잠에서 깬 탓인지 푸석푸석했다. 아니, 그것은 어떻게든 잠을 자보려고 애쓰는 얼굴인지도 몰랐다. 젖가슴 끝의 둥그스름하고 검은 꼭지가 실크 파자마 속에서 몽롱한 눈처럼 내다보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서 나는 문을 닫았다. "남편께선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 " 그녀는 나를 따라 되풀이했다. "놀라지 않으신 것 같군요." "꼭 놀라야 하나요?내가 방금 무슨 꿈을 꾸었는지 당신은 모르실 테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건 참 끔찍해요. 있지도 않은 얼굴들이 보일 정도로 정신이 몽롱하면서도 제대로 잠이 들지 않으니 기가 막힌 일이죠. 오늘밤에 나타난 얼굴은 너무도 생생했어요. 바닷물에 부풀 대로 부푼 그 사람 얼굴을 보았는데, 날 집어삼키려고 을러대지 않겠어요." "내 말을 들으십니까, 부인?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시간 전에 살해당했지요." "말씀은 들었어요. 내가 그 사람보다 오래 살 줄은 알고 있었지요." "그 일이 부인에게 뜻하는 바가 그것 뿐이란 말입니까?" "더 이상 무슨 뜻이 있어야 하죠?" 그녀의 음성은 희미하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것은 수면과 각성 사이의 깊숙한 동굴 속을 떠도는 속삭임이었다. "전에도 남편이 죽은 적이 있고, 슬픔은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밥이 죽었을 때 난 며칠이고 울었죠. 그의 아버지를 위해 슬퍼할 생각은 없어요. 난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랐으니까." "그렇다면 소원을 성취하신 셈이군요." "다 성취한 건 아니죠. 그 사람은 너무 일찍 죽었든가, 아니면 너무 늦게 죽었으니까요. 만일에 미란다가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이는 유언을 바꾸었을 테고, 결국 나 혼자서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녀는 교활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아처. 내가 악독한 여자라는 거죠. 하지만 난 실은 악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난 워낙 가진 게 없잖아요. 그나마 갖고 있는 얼마 안되는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잖겠어요." "500 만 달러의 절반입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돈이 아녜요. 그게 갖다주는 힘이지요. 난 무척이나 그걸 원했어요. 이제 미란다도 떠나버리면 난 완전히 홀몸이 되는 거예요. 이리 와서 잠깐이라도 내 곁에 앉으세요. 잠이 들기까지가 끔찍히 두려워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내가 꼭 그 사람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알 수 없군요, 부인." 나는 그녀에게 동정을 느꼈지만, 다른 감정들이 더욱 강했다. 나는 방을 나와 문을 닫음으로써 그녀를 떨쳐버렸다. 크롬버그 부인은 여전히 복도에 있었다. "주인 어른께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렇소. 부인께서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말씀을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어디 계신지 아시오?" "아래층 어딘가에 계실 거예요." 나는 거실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는 벽난로 옆의 방석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전등이 꺼져 있어서 벽 중앙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어둑어둑한 바다와 은필(銀筆)로 그린 듯한 수평선이 바라보였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일어나서 맞아주지는 않았다. "아처 씬가요?" "그렇소. 할 이야기가 있소." "아버지를 찾았나요?" 벽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그녀의 머리와 목 언저리를 형형색색의 장미꽃으로 밝혀 주었다. 커다랗고 검은 눈이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음, 돌아가셨소." "그럴 줄 알았어요. 애초부터 살아 있질 않았던 거예요, 그렇죠?" "차라리 그랬노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 "무슨 뜻이죠?" 나는 그 설명은 뒤로 미루었다. "돈은 되찾았소." "돈이라뇨?" "이거요." 나는 가방을 그녀의 발치에 던졌다. "일전의 그 10 만 달러." "이런 건 관심 없어요. 아버지를 어디서 발견했죠?" "잘 들어요, 미란다. 미란다는 이제 독립된 사람이야."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녀는 말했다. "오늘 오후에 그레이브스와 결혼했으니까." "알고 있어. 그가 말하더군. 그래도 미란다는 이 집에서


나가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안돼요. 우선 해야 할 일은 그 돈을 간수하는 거요. 난 그걸 되찾으려고 무척 애를 먹었고, 또 미란다는 그 일부를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몰라." "미안해요, 이걸 어디다 두죠?" "서재에 있는 금고가 좋겠지. 나중에 은행에 넣도록 하고." "알았어요." 그녀는 불현듯 확고한 태도를 보이며 발딱 일어서더니 앞장서서 서재로 갔다. 마치 위에서 내리누르는 그 어떤 힘에 대항이라도 하는 듯, 두 팔은 죽 뻗고 양어깨는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금고의 문을 여는 동안 차가 차도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자세가 우아한 맵시보다 매력적이었다. "누구죠?" "앨버트 그레이브스. 날 여기까지 태워다 줬지." "그런데 왜 들어오질 않았죠?" 나는 남아 있는 용기의 조각들을 주워모아 가까스로 말했다. "그는 오늘밤 미란다의 아버지를 죽였소." 그녀의 입이 숨가쁘게 움직이더니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농담이죠, 그렇죠? 그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가 했어." 나는 사실 속에서 도피구를 찾았다. "오늘 오후 나는 아버지가 갇혀 있는 곳을 알아냈지.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레이브스에게 전화하여 보안관을 데리고 되도록 빨리 그리로 가라고 했소. 그레이브스는 나보다 한 발 앞서 그리로 갔지. 보안관을 대동하지 않고서 말이오. 내가 도착했을 때, 그의 자취는 없었어. 차는 어딘가에 숨겨놓고 이미 집안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거야. 내가 들어가자 그는 뒤에서 나를 내리쳐서 기절시켰지. 내가 정신이 들자, 그는 방금 도착한 체했어. 아버지는 죽어 있었고, 시체는 아직도 따뜻했소." "앨버트가 그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믿어야 돼." "증거가 있나요?" "내게는 심증 뿐이오. 물증을 찾을 시간이 없었어. 그걸 찾는 건 경찰에게 달렸지." 그녀는 가죽을 씌운 안락의자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군요. 아버지, 그리고 앨런도...... " "그레이브스가 두 사람 다 죽인 거요." "하지만 앨런을 죽인 건 아처 씨를 구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아처 씨가 그렇게 말하고선---" "그건 좀 복잡한 살인이었소."하고 나는 말했다. "정당방위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지. 그는 태거트를 죽일 필요가 없었어. 사격의 명수거든. 상처만 입힐 수도 있었단 말이오. 그러나 그는 태거트가 죽기를 바랐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 중 한 가지는 미란다도 알 텐데." 그녀는 불빛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내게는 그녀가 여러 가지 다른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그래요. 알고말고요. 난 앨런을 사랑했었거든요." "하지만 그레이브스와 결혼할 작정이었지." "어젯밤까지는 마음을 정하지 못���고 있었어요.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그럴 듯해 보였던 거죠. 사랑 때문에 고통받느니 결혼하는 게 낫잖아요?" "그는 미란다를 걸고 도박을 했고, 그리고 이긴 거야. 하지만 그가 걸었던 또 하나의 도박은 실패했지. 태거트의 동료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거야. 그래서 그레이브스는 직접 아버지를 교살한 거요."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감쌌다. 관자놀이에 솟은 푸른 정맥이 애띠고 섬세했다. "추잡해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녀는 말했다. "왜 그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군요." "돈 때문에 그런 거지." "하지만 그는 돈에는 관심조차 없었는데요. 그 점이 내가 그를 존경한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그녀는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그 얼굴에는 쓰라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존경심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군요." "그레이브스에게도 돈을 우습게 안 시절이 있었을 거야.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곳도 있었겠지. 그러나 산타 테레사는 그런 곳이 못 돼. 이곳에서는 돈이 활력소이지. 그게 없으면 반송장이야. 백만장자들을 위해 그 많은 돈을 다루면서도 자기는 한푼도 없으니 그레이브스도 조바심이 났던 거요. 그러던 차에 문득 자기도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차린 거지. 그는 자신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거야."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는지 아세요?" 그녀가 말했다. "돈이고 섹스고 내겐 없었으면 좋겠어요. 둘 다 이롭다기보다는 골칫거리거든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때문에 돈을 탓할 수는 없소. 악이란 사람들 개개인의 내부에 숨어 있는 거야. 돈은 그 핑계에 불과하지. 사람들은 원래 지녔던 다른 가치들을 잃었을 때 맹목적으로 돈에 매달리는 거야." "앨버트 그레이브스는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요?" "아무도 몰라. 그 자신도 모르겠지. 지금 중요한 일은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는 거지." "아처 씨는 꼭 경찰에 알릴 건가요?" "그럴 생각이야. 미란다가 동의해 준다면 나로서는 한결 마음이 편하겠어. 결국에 가서는 미란다에게도 마음 편한 일이 되겠지만." "나와 함께 책임을 나누자는 거군요. 하지만 사실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잖겠어요? 어쨌든 그들에게 알릴 테니까.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인정하신다면서." 그녀는 의자 속에서 쉴새없이 몸을 꼼지락거렸다. "기소를 당하면 그는 부정하지 않을 거요. 나보다는 미란다가 더 잘 알 텐데." "잘 안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모든 게 다." "그러니 내게 맡겨두라는 거요. 미란다는 풀어야 할 의문점을 많이 갖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풀 수는 없소. 또한, 불확실한 상태에서 삶을 계속해 나갈 수도 없는 것이고." "삶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낭만적인 기분으로 대하지 말아 줘."하고 나는 거칠게 말했다. "자기연민을 해봤자 빠져나갈 수는 없어. 미란다는 두 남자와 아주 불행한 인연을 맺었었지. 하지만 미란다는 내가 보건대 그걸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한 아가씨요. 일전에 내가 말했지. 미란다 앞에는 스스로 이끌어나가야 할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제 그때가 된 거요." 그녀는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몸에서 비스듬히 튀어나온 젖가슴은 연약하고 부드러웠다. 부드러운 입술이 말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좋죠?" "나와 함께 가는 거야." "아처 씨하고? 나와 함께 살길 바라세요?" "내게 기댈 생각일랑 말아요, 미란다. 당신은 사랑스런 아가씨야. 물론 나도 무척 좋아하지. 그렇지만 내게 맞는 사람은 아니야. 날 따라와요. 함께 검사한테 가서 말합시다. 결정은 그에게 맡깁시다." "좋아요. 험프리스한테 가도록 하죠. 늘상 앨버트와 친했으니까." 그녀는 나를 태우고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 절벽으로 둘러싸인 채 시내를 굽어보는 대지 위로 차를 몰았다. 붉은 삼나무로 지은 험프리스의 방갈로 앞에서 차를 세우고 보니 또 한 대의 차가 차도에 서 있었다. "앨버트의 차예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제발 혼자 들어가세요.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녀를 차에 남기고 테라스로 이르는 돌계단을 올라갔다. 미처 노크를 하기도 전에 험프리즈가 문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골처럼 창백했다. 그는 테라스로 나와서는 문을 닫았다. "그레이브스가 와 있소." 그가 말했다. "2~3 분 됐지. 자기가 샘프슨을 살해했노라고 하더군." "어떻게 할 생각이오?" "보안관을 불렀소. 지금 오는 중이오." 그는 숱이 적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의 몸짓도 그 음성처럼 맥없고


희미했다. 마치 현실이 그의 손 닿는 곳을 벗어나 멀찌감치 물러선 것 같았다. "이건 비극이오. 앨버트 그레이브스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었었는데." "범죄란 종종 그런 식으로 번지기 마련이지요." 라고 나는 말했다. "전염병이나 같습니다. 전에도 그런 현상을 보셨을 텐데요." "내 친구들에게 일어난 적은 없었소."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버트는 방금 전에 키에르케고르 이야기를 하더군. 양심에 관해 그 사람의 말을 인용했는데, 인간이란 깊이를 모를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거나 같답니다. 양심을 잃지 않고는 그 심연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거지요. 일단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순간 죄인이 된다나요. 그 친구 말로는 자기는 심연을 들여다보았으니 샘프슨을 살해하기 전에 이미 죄를 지은 거랍니다." "아직도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군."하고 나는 말했다. "그는 내려다본 게 아니라 올려다보았던 겁니다. 큰 돈이 서식하고 있는 언덕 위의 집들을 말이지요. 자신도 표변하여 크게 되려고 했던 겁니다. 샘프슨이 남길 백만금의 4 분의 1 로 말입니다." 험프리스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알 수 없구먼. 그는 돈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겼었는데....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무언가가 그에게 일어난 겁니다. 샘프슨을 미워한 건 사실이지만, 그를 미워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던가요. 샘프슨이란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머슴처럼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레이브스의 경우에는 뭔가 보다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평생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불현듯 모든 일에 싫증이 난 거지요. 모든 것이 그 의미를 잃었던 겁니다. 그로서는 자신에게나 이 세상에 있어서 더 이상 미덕이라든가 정의가 없어졌습니다. 아시겠지만, 그게 바로 그가 검사직을 그만둔 이유입니다." "그건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복수의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게까지 되었던 거지요."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영리했습니다." "매우 맹목적이었지요." 험프리스는 우겼다. "지금의 버트 그레이브스처럼 비참한 인간을 나는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미란다에게로 돌아갔다. "그레이브스가 와 있소. 미란다가 전적으로 그를 잘못 판단했던 건 아닌 셈이군. 그는 올바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으니 말이오." "자수했나요?" "계속 배짱으로 밀고 나가기엔 그는 너무도 정직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사람의 정직성이란 조건에 따라 달라지니까. 그런데 그는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험프리스에게로 가서 털어놓은 거요."


"그가 자수했다니 기뻐요." 그러나 그녀는 다음 순간 다른 소리를 냄으로써 그 말을 부정했다. 운전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흐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안아 일으켜 옆자리에 앉히고 직접 차를 몰았다.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데 시내의 모든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그다지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그 모든 불빛과 별들의 반짝임은 한갖 반딧불의 미광(尾光), 어두운 공간 속에 퍼져 있는 차가운 불꽃이었다. 내 세계에 있어서 현실이란 곁에 있는 소녀, 따스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길잃은 소녀였다. 그 몸에 팔을 둘러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토록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으며, 그처럼 연약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녀는 1 주일도 못 되어 나를 미워할 터였다. 그리고 반 년이 가기 전에 나 역시 미란다를 미워하게 되었으리라.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그녀가 스스로 자기 상처를 달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계속 울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그랬으리라. 그녀의 울음소리는 차츰 일정한 리듬으로 낮아지더니, 이윽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덕 기슭에서 무전기를 단 보안관의 차가 우리 곁을 스쳐 그레이브스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하여 기어 올라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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