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강좌 〈수요페미클럽: 일본군'위안부' 문제 다시 보기〉 강의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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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피해자 중심 역사쓰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구술생애사 I 박정애(동북아역사재단) ....................................................................................................................... 2 민족-젠더-이주 교차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I 조경희(성공회대학교) ...................21 역사부정주의 담론-실천에서 나타나는 여성 혐오: 반일 종족주의 현상과 램지어 사태 I 강성현(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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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 역사쓰기: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구술생애사 I 박정애(동북아역사재단)

1. 모든 것은 김학순으로부터 시작됐다: 김학순, 그 역사적 만남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그리고 김학순 매년 8월 14일은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2018년 한국정부가 첫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이래 매년 국가행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위안부’ 관계 운동단체나 활동가들은 2018년 이전부터 8월 14일을 기려오고 있었다. 2012년

타이베이에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가한

열린

제11차

각국의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을

참가자들은

매년

8월

14일을

위한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제정했다. 아시아연대회의는 일본 및 일본 침략전쟁의 피해국 출신인 활동가, 단체, 개인이 함께 모여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2년부터 개최한 연대회의이다. 각각의 현황을 공유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공통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다. 8월 14일은 1991년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최초의 공개증언을 한 날이다. 이 날이 아시아연대회의 장에서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논의되는 주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전쟁 및 무력갈등

하의

여성폭력

문제가

토론되며,

한국

기지촌의

성폭력

문제,

미투(#MeToo) 운동까지 언급된다. 김학순은 국가주의 차원에서 제도화되어 있던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입장에서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한 용기와 연대의 상징이다.

김학순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다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가, 연구자들 사이에는 “모든 것은 김학순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공감이

공유되고는

한다. 2

내가

만나왔던

일본의

활동가들도


활동계기를 묻는 질문에 거의 예외없이 김학순의 이름을 들고는 했다. 대단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91년

12월

김학순

아시아·태평양전쟁

피해자들은 도쿄지방법원에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을 했고, 법원 참석 후 일본 각지의 집회에서 증언을 했다. 일본에서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가정주부로 살던 시민 여성들은 집회장에 나갔고 그곳에서 김학순을 만났다. 그리고 인생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윤명숙도 김학순을 만나 연구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일본 유학시절 여성사 관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자 했지만,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글쓰기 속에서 방향을 잡기 힘들었다. 1991년 가을 김학순을 만났고, 윤명숙은 식민지 지배체제와 전쟁, 그리고 여성 피해에 대해 고민했다. 만주에서 태어난 김학순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에도 기대기 어려웠던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김학순은 행복하지 않았다. 일종의

도피처로

기생학교를

갔고

어머니는

김학순을

수양아버지

밑으로

입적시켰다. 1941년 김학순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양부와 함께 중국으로 갔고, 중국 식당에서 맞닥뜨린 일본군에게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김학순의 삶은 민족과 계급, 성 차별이라는 삼중 차별이 얽혀 있는 것이었고, 일본의 전쟁 및 식민지 지배 책임, 범죄의 반복 금지를 강조하는 김학순의 목소리는 여성사 연구자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듯한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도

시작은

김학순이었다.

내가

청소년기였던

1980년대

그룹

‘다섯손가락’의 ‘이층에서 본 거리’라는 노래가 유행했었다. “길거리 약국에서 담배를 팔 듯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라는 가사가 있었는데, 결국 심의에 걸려 바뀌어야 했지만, 이 가사는 그 즈음 나를 둘러싼 세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사이에는 10대 여학생을 납치해간다는 ‘봉고차

괴담’이

가슴을

졸였다.

여학교마다

있다는

‘변태

선생님’

소문을

공유하며 욕을 했고 시도 때도 없는 ‘바바리 맨’의 공격에 이를 갈아야 했다. 길거리나 대중교통 안에서 위아래를 훑어보는 아저씨들의 시선, 드물지 않았던 불쾌한 손길, 때로는 느닷없는 훈계나 폭력까지,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견뎠나 3


싶은 일상들이 내 사춘기의 일상을 채우고 있었다. 1990년대 하면 X-세대나 캠퍼스의 낭만 등이 회자되고는 하지만, 내가 겪은 90년대는 좀 달랐다. 고3때 숨죽이며 김학순의 TV 증언을 들었고,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꼭 챙겨봤다. 1991년에 성폭력 가해자를 21년만에 찾아가 살해했던 ‘김부남

사건’이

있었고,

1992년에는

10년

넘게

자신을

성폭행

해왔던

의붓아버지를 죽인 ‘김영오 사건’이 있었다. ‘아동학대’나 ‘성폭력’이라는 개념조차 어색했던 시대였다. 또한 1993년에는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 위계를 이용한 성적 괴롭힘을 ‘성희롱’이라 명명할 수 있게 되었다. 두렵고 불편한 일상을 견뎌내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실체를 지목할 언어가 없어 억울하고 답답한 시기였다. 여성들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 그동안 막연했던 불안감이나 죄책감이 분노로 형태를 띠게 될 무렵, 나는 김학순을 만났다. 지루한 캠퍼스 축제가 열리던 1992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김학순 방문을 알리는 벽보를 봤고, 홀리듯

행사장에

들어갔다.

솔직히

그날

김학순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난다. 그저 김학순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번개를 맞은 듯 했으며 소리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세월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그날 각인된

김학순의

메시지이다.

”힘들었지?

나는

너희들보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고 ‘위안부’가 되어 고통을 겪었어. 우리 잘못 때문이 아니야. 정치하는 사람, 전쟁하는 사람,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 잘못이야. 그 죄를 반드시 물어야 해. 우리 이야기를 분명히 기록해야 이런 일을 멈출 수 있어.”

만남의 기록은 계속돼야 한다 김학순의 표정은 담담했고 눈빛은 맑았으며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성폭력 트라우마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볼 수 있을까. 김학순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가해자는 벌을 받아야 하고 우리들은 고통을 반복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성으로서의

나의

삶은

위로받고

화해하고

용기를

얻을

있었다.

김학순으로부터 인생이 바뀐 많은 여성들의 경험 또한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4


생각된다. 그 뒤 수요시위에 참석한 생존자들을 만났을 때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면담을 위해 생존자를 만났을 때나 활동가와 생존자들의 인권캠프를 따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이제는 찾을 수 없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전하는 생존자들은 살아져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로써 강하게 살아냈구나 라는 감탄이 들게 하였다. 김학순과 또 다른 김학순들로부터 배운 것은 결국 산다는 것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함이었다. 더불어 그 존엄함을 훼손하는 모든 시도와 명분에 반대함으로써 우리가 배운 것을 실천해야한다는 믿음이었다.

김학순이 등장하고 30여년이 지났다. 이제는 김학순도,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생존자들도 만날 수 없다. 각종 궤변으로 강제동원과 성노예를 부정하면서 김학순들이 기록해온 역사를 지우려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그러나 김학순들을 만났던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하거나 위태롭지 않다. 피해자들의 바람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한 일인지 더욱 선명하게 되새길 뿐이다. 전쟁과 가난, 인종 또는 민족, 그리고 성 차별이 얽히고설킨 폭력이 지속되는 한, 김학순은 더욱더 세계 곳곳의 사람과 만나야 한다.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이 제정된 의미도 여기에 있다. 김학순과 만났던 순간들을 기록하는 이유도, 그 순간에 생긴 긍정의 에너지를 증폭시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기록은 미래 세대 누구나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2. 피해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피해자의 고통에 응답하며 역사가 시작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허스토리>와 <아이 캔 스피크>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주인공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임을

알고

후의

주변

사람들

반응이다. 1992년부터 시작한 시모노세키 재판이 배경인 <허스토리>에서는 주인공들이 과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홀대한다. 5


반면 2007년 미국 하원의원의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배경으로 한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공감하며 힘을 보태주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의

일본군‘위안부’

사건은

처음부터

사람들이

역사로

인식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종전 이후 일본군 출신이 집필한 전쟁체험기나 회고록 속에서나 위안소를 찾은 내용을 흔하게 접할 수 있으며, 전 일본 총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경리장교로서 인도네시아 발릭파판에

“병사들을

위해

위안소를

만들어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松浦敬紀 編, 1978, 『終わらない海軍』, 文化放送, 98쪽)한 적 있다. 그랬던 영역이 ‘문제’로 ‘발견’된 건 1990년대 이후에서다. 1990년대는 여성주의 역사인식이 확장되고 피해자들이 직접 발언을 한 시기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청중은 피해자의 목소리는 물론 침묵과 과장, 회피, 번복의 말투와 몸짓에 귀 기울였다. 청중은 알고자 하는 의지와 사회구조적인 역사상 이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성격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 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전쟁승리를 명분으로 여성의 성을 동원하는 정치권력은 가해책임을 지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공감된 청중이 함께 써온 역사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서야 피해자는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었다. 1944년 만16세 때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소개소에 갔다가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의 위안소로 끌려갔던 김순악은 해방 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한 뒤에는 돈을 벌어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색싯집’과 ‘요릿집’을 전전했고 아버지가 다른 두 아이도 얻었다. 우등생인 큰 아들이 삶의 낙이었지만 결혼한 후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는 아들을 보며 가슴에 울증이 생겼다. 술과 담배, 다툼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김순악의 삶을 바꾼 건 이남이의(훈 할머니) 등장이었다. 훈 할머니로 알려진 이남이는 1998년 김순악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6


왔다.

언론사들은

다퉈

이남이를

인터뷰했고

동네

사람들은

이남이를

환영했다. 김순악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고 표현했다. ‘위안부’였던 이를 사람들이 그렇게 반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김순악은 이남이의 일을 알아본 끝에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전쟁범죄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김순악은 피해 신고를 결심했다. 이후 김순악은 자신의 이야기를 대구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에게 풀어놨다. 이미 ‘위안부’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와 공감이 있던 활동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김순악의 삶을 이해했다. 의심과 질문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으로 김순악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이후 김순악은 ‘위안부’ 피해자 생활 대상자로 결정됐다. 그는 더 이상 우울증에 짓눌리지 않았다. 김순악은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두고

보고

보고

봤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가

김순악을

피해자로

‘인정’해준 것이며 삶의 고통이 김순악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2일 김순악은 전 재산을 기부하고 작고했다. 절반은

대구의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건립기금으로

나머지

절반은

소년소녀

가장들 장학금으로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학순에 이어 피해자임을 드러낸 문옥주의 삶은 또 어떤가. 그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둥안(東安)과 버마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 1991년 12월의 일이다. 당시 문옥주의 친구들은 그를 비난하면서 떠나갔다. 문옥주는 많은 사람을 잃으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문옥주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공동대표와의 만남을 믿음직스럽고 고맙게 기억하는 이유다. 문옥주는 해당 만남을 두고 자신이 하나를 이야기하면 그이는 열이나 스물을 이해했다며 놀라워했다. 또 질문보다는 듣기에 애쓰는 모습은 문옥주의 가슴을 울렸다. 문옥주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96년 10월 26일 작고했다. 영화

<허스토리>의

소재이기도

시모노세키

재판에

원고로

참여했던

박두리는 피해신고를 하는 당시까지도 “증거가 똑똑치 못하다”는 걱정을 했다. 7


듣는 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과연 믿어줄까 계속 의심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두리는 1994년 9월 야마구치(山口) 지방법원 시모노세키(下關) 지부에서 열린 재판에 나가 자신의 피해 내용을 진술했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1심 판결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입법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일본국회가

박두리에게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본의 법원에서도 자신의 피해를 ‘인정’ 받은 셈이다. 그제서야 박두리는 자신의 말을 사람들이 믿어줄까? 하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목소리>(1997)나 수요시위, 언론을 통해 만난 박두리의 모습에서는 이전만큼의 불안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06년 2월 19일 작고했다.

피해자에게는 듣기를, 역사에게는 질문을 이렇게 의심과 질문 대신 믿음과 공감 앞에서야 피해자들은 비로소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들의 표정과 몸짓, 말은 과거 ‘위안부’여야 했던 여성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영혼에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를 드러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일본군 위안부’ 라는 기만적인 이름을 가진 성노예 제도의 민낯을 마주하게 했다. 김학순이 세계 최초로 자신의 피해사실을 공개증언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및 식민지 책임을 물은 지 30여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당신들이 겪은 일은 피해가 아니었다며 훈계하고 입막음하려는 역사부정론자들이 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이들의 이야기는 더 확장되어야 한다.

이글의 피해자 구술내용은 김순악 구술, 차혜영 면담·정리, 2004,「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증언집 6집;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여성과 인권과 문옥주 구술, 모리카와 마치코 글, 김정성 옮김, 2005, 『버마전선 일본군‘위안부’ 문옥주』, 아름다운 사람들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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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학순 이전의 피해자들: 그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소식 없는 귀환 중국 각지의 이재 동포 6천명을 인솔하고 지난 10일 부산 등 거쳐 귀향한 상해한국교민피난민 수용소장 오룡비씨는……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 독신부녀가 300명이나 되고…… 과거에 가난한 살림살이에 희생이 되어

멀리

대륙까지

끌려간

소위

위안부가

대다수이며

그리운

고국을

찾아왔으나 반갑게 맞아주는 연고자도 없는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다.”

『대구시보』 1946년 3월 19일자에 실린 위의 기사는 그달 10일 상하이에서 부산에 들어온 ‘위안부’ 피해자들이 300명 가까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해방 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끌려갔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거의 유일한 기사이다. 피해자와

동년배인

윤정옥(1925년생,

이화여대

교수)은

‘끌려갔던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을까’라는 질문으로 1970년대부터 피해 실태조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 기억처럼 귀환자들에 대한 소식을 매일같이 전하고 있던 해방공간의 신문들 틈에서 ‘위안부’들이 돌아왔다는 기사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난 뒤, ‘위안부’로 끌려갔던 그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 1946년 3월에 부산에 도착했던 그 여성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이 공개증언하기까지 우리는 정말 ‘위안부’ 피해에 관한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일까.

‘위안부’를 본 사람들 1990년대부터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가 일본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군 출신의

전쟁체험기‧부대사(部隊史)를

대상으로

‘위안부’ 관련

기록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1000권이 넘는 기록물을 발굴할 수 있었는데, 그 중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작성된 것이 208권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역사적, 9


사회적

주제로서

본격화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들이다.

기록물

속에서

일본군은 ‘돈벌이’를 빌미로 속아서 전쟁터에 끌려온 ‘위안부’를 동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위안소 이용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위안부’와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는 글도 꽤 있었다. 연합군도 교전 후 일본군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위안부’들을 보았다. 이들은 여성들을

속이고

성적으로

이용했던

일본군의

‘위안부’

제도가

사악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일전(對日戰)에 활용 가치가 없는 이상은 피해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연합군이 승리한 뒤 도쿄와 인도네시아, 괌 등지에서 열었던

전범재판에서

아시아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았던

사건에

대해

전쟁범죄로서 묻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전쟁 지역에서 머물렀던 조선인들도 종전을 전후한 시기에 ‘위안부’들을 봤다고 회고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보호하고

있던

군인‧군속으로

끌려갔다

일원이었던

‘위안부’ 종전을

여성 맞은

정정화는

30여명을 조선인들도

중국

봤다고 현지에

충칭(重慶)에서 했다. 남은

타이완에 ‘위안부’

200명가량을 구조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이후 이 여성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이나 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서로 조직을 이루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으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김학순 이전에도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했다. 김학순은 전쟁 및 식민지 범죄로서 ‘위안부’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당사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그가 우리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한 첫 피해자인 것은 아니다.

1975년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조선인‘위안부’ 피해자 배봉기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꽤 떠들썩한 화제였지만 한국까지는 그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윤정옥 전 교수가 배봉기를 만나고 1981년 8월 29일자 『한국일보』에 그의 이야기를 쓴 적도 있지만 반응은 크지 않았다. 10


1984년에는 태국에 살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인 노수복의 존재가

『중앙일보』의

취재로 드러났다. 그 내용은 1984년 3월 17일부터 21일까지 4회에 걸쳐 「나는 여자정신대, 노수복 할머니 원한의 일대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1942년에 부산에서 끌려가 싱가포르, 태국 등지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노수복은 해방 후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수용소에 있으면서 돌아갈 날을 손꼽았지만 막상 귀환날짜가 정해지자 부모님 볼 낯이 없어 수용소를 탈출했다. 중국계 태국인과 결혼해 나름의 삶을 꾸려가던 노수복은 한국의 ‘이산가족찾기’ 소식에 동요했다.

노수복은

KBS

방송을

통해

동생들을

찾았고

‘이산가족’이

배경으로서 그의 ‘위안부’ 피해가 함께 이야기되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서 멈췄다. 어디에서인가 이산된 존재로 있을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는 상상하지 못했다. 정치‧학술‧사회의

영역에서

‘위안부’

이야기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을

1980년대 여성잡지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발굴하고 그 이야기를 실었다. 1982년 『레이디경향』 9월호에는 ‘위안부’피해자 이남님(당시 55세)의 ‘독점수기’가 실렸다. 전남 승주 출신의 이남님은 1945년 2월 마을 친구 순단이와 ‘위안부’로 끌려갔다. 버마 랑군에 도착해 어디론가 끌려가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으며 전쟁이 끝나고

‘카타’라는

“몽매간에도

도시에서

그리워하던

연합군에 땅”에

의해

억류됐다.

도착했지만

1946년

곳은

7월

없었다.

중순 수기는

식당주인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술집을 전전하다가 청주에서 대폿집을 차린 이야기로 끝이 난다. 『여성중앙』 1984년 4월호에 실린 배옥수 또한 1944년 7월에 버마로 끌려간 피해자이다. 버마 아라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막사 근처의 가건물에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일본이 패전하고 배옥수는 태국 방콕으로 갔다가 캄보디아 프놈펜을 거쳐 베트남 사이공에 도착했다. 수용소에서 만난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고 베트남에 남았다가 남편의 학대로 이혼을 하고 다시 베트남계 캄보디아인과 재혼을 했다. 1975년 ‘월남 패망’을 앞두고 한국 교민들과 함께 귀국을 했지만, ‘베트남인 아내’ 신분이던 배옥수는 ‘한국인의 베트남 아내’에게 주어지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빈곤에 허덕여야 했다. 서울의 여관방에 머물고 11


있던 배옥수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악상을 남겨 다시는 재현되어서는 안 될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라며 말을 끝맺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역사화하기 위해 피해자가 이야기를 해도, 증거가 도처에 있어도 제대로 질문하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1980년대까지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재현된 ‘위안부’의 모습은 성 착취 장면이 클로즈업된 선정적인 것이었다. 김학순 이후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왔어도

2020년

현재

‘위안부’

피해를

왜곡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우리가 여전히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역사를 만드는 질문은 인권과 평화의 미래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권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의 일상이 존중받을 권리라면,

평화는

그러한

일상들의

균형

상태이다.

일본군

성노예

제도

역사로부터 우리는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질문을 하며 제대로 답을 찾아가고 있는가. 피해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쓰는 방법

문헌자료라는 함정 신뢰할만한 문서 자료로 뒷받침되어 ‘입증’된 역사일수록 ‘진짜’에 가깝다는 믿음이 있다. 물론 역사 쓰기의 첫 출발은 관련 자료의 수집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위안부, 위안소라는 검색 키워드에 딱 맞는 자료 발굴에 큰 박수를 보내고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피해자 중심의 ‘위안부’역사 쓰기에 독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 우익 세력의 내세우는 무기는 일본의 공권력이 ‘위안부’ 강제동원에 직접 가담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대응 세력은 여기에 반응했고, 해당 문서의 발견 여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쟁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공권력의

속성이었다.

‘공인과

일본군이

은폐’라는

공공연하게

이중

위안소를 12

전략이 이용하되,

일본군‘위안부’ 전장

터에

제도의 위안소가


있다거나 여성들을 속여서 이곳에 끌고 간다는 풍문은 육군 형법 등으로 처벌했다. 위안소, 위안부라는 말부터 은폐된 용어였다. 이보다 흔하게 쓰인 말이 육군오락소, 삐야(ピー屋), 특별요리점, 예기, 작부, 특요원 등이었다. 위안부 당사자조차 위안부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누구보다 위안부라는 존재를 지우고 싶어 했던 사람은 피해 여성들이었다. 연합군의 포로가 된 여성들은 자신을 노동자나 종업원이라고 밝히기도 했으며, 전쟁 이후를 살아가는 동안 피해보다는 수치로 독해되는 자신의

전쟁

공간이었고,

경험을

최대한

피해자에게

잊고

숨기려 싶은

했다.

위안소는

공간이었으며,

이용자에게

허가된

사람들에게는

수치의

공간이었다. 전쟁 이후 여러 기억들의 각축 속에서 위안부 제도의 역사는 풍화되는 듯 보였다.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제도 범죄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료 발굴을 넘어 해석이 중요한 시기 1991년 8월 김학순의 공개증언 이후, ‘위안부’의 역사는 전쟁과 식민지 책임의 역사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피해자 중심 관점에 선 사람들은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위안부’관계 기록들 속에서 수많은 범죄의 증거들을 읽어냈다. 일본과 타이완, 중국, 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발굴된 공적, 사적 문서들이

정리되어

자료목록

또는

자료집으로

제공되고

있다.

역사적

문헌기록들을 계속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여성혐오와 내셔널리즘의 시선을 걷어내고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의 태도에서 벗어날 때 가해자 또는 공모자의 입장에서 생산된 자료에서도 피해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성과 계급, 민족이라는 분석 범주는 ‘위안부’ 문제 인식 초기부터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 중심의 역사적 상상력이다. 이전의 기록은 피해자 및 목격자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새로운 기록으로 탄생했다. ‘기억’은 문헌자료로 입증되어야 비로소 공공역사의 자료로서 의미가 획득되는 것이 13


아니다. ‘기억’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자료이다. 피해자의 이야기는 그가 인식하는 피해의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이야기 시점에서 말하기를 어렵게 하는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1993년에 발간된 증언집 1집에서 가명을 사용했던 피해자들이 사회가 변하면서 본명으로 청중 앞에 나서게 된 과정들이 그러하다. 피해자의 이야기는 성과 계급, 민족에 따라 중층적인 차별을 겪은 피해자의 위치를 드러내기도 한다. 공문서 또는 사문서에 포착된 피해자 중에는 동원된 시기와 장소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중국 윈난 지역 피해자에 관한 문서에서 이름이 확인된 윤경애는 자신이 싱가포르에 끌려갔다 포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 1938년에 끌려갔다고 말한 박영심의 문헌자료상 동원 시기는 1939년이다. 동원과 이송 과정, 위안소 생활 과정에서 정보에서 배제되어 협상력이 박탈된 피해자일수록 자신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이야기 속에는 가해의 구조가 스며있기도 하다. 중국 한커우 위안소에 끌려갔던 하상숙은 ‘관공서 같은 곳’의 허가가 있은 후에야 ‘위안부’ 생활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허가 내주는 관리에게 돈을 먹여서 나이를

올렸다’는

가해

구조의

이면까지

인식하고

있었다.

평양과

중국

하이청(海城)의 위안소로 끌려갔던 공점엽은 ‘군인들과 순경과 주인과 병원이 법을 끼고’ 서로 연락하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피해 여성들은 정책과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면서도 공권력 시스템과 군대의 구조와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쓰는 일본군‘위안부’문제의 역사 따라서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 특히 연구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자료 생산의 주체와 생산 맥락을 파악해야 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를 향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긴장하며 자료를 보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누구를 위하여 어떤 미래를 만들기 위한 역사를 써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황선순이 말해준 ‘나보르’와 이복순의 ‘도라쿠도’가 어디를 말하는 지, 피해자들이 각자 사용하는 언어의 배경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감지해야 한다. 유독 식민지 조선을 겪은 피해자들과 사람들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섞어서 14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이유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오랜 기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외면 또는 은폐하고 싶었던 ‘위안부’의 이야기는

문서자료로

찾아내기

쉽지

않다.

찾아낸다

해도

주로

피해자를

상대화하는 문서 안에 포함되어 있어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혼란을 준다. 따라서 문헌자료는 촘촘히 독해해야 한다. 피해자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자료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어떠한 관점으로 역사를 써야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피해자는 공인된 성동원 시스템 안에서 겪은 성착취 문제와 전쟁에서 비롯된 폭력과 강간 공포와 가족 및 지역 공동체와 맺는 애증관계, 그리고 망설임과 침묵 속에서 ‘아직도 말할 수 없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소리를 모아 가해자는 벌을 받고 그들이 겪은 비극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축섬의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는 결정적인 문서자료로서 입증된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인 이복순의 존재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조각 조각 비춰주는 사진과 문서가 있었으며 이야기를 함께 쓰고자 했던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과 노력이 있었다. 오랜 기다림과 끈질긴 추적, 그리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때, 이복순이 작고한지 10년 만에 축섬 조선인 피해자의 이야기는 역사로 쓰일 수 있었다. 우리들의 의지에 따라 ‘위안부’ 문제 역사쓰기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동시에 이제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바람도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5. 포스트 생존자 시대의 ‘위안부’ 역사 쓰기, 피해자의 기억을 이어간다는 것은

피해자들은 계속 이야기해오고 있다. 예전부터 한국인 피해자 240명이라는 말이 불편했다.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분들은 1993년 6월부터 제정·시행된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한국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지금까지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들이다. 한국인 생존자 지원이 원칙이었기 15


때문에 그 이전에 작고했거나 행방불명되어 소식을 알 수 없거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현지에 거주하며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하신 피해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 해결이라고 했을 때 내가 이해하는 피해자는 240명에 한정되지 않았다. 또한 240명 모두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도 아니며 현재 18권에 달하는 식민지 시기 조선인 출신 피해자들이 남긴 증언집에 목소리를 실은 이들도 등록자 밖에 있는 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배봉기나 홍강림, 조윤옥 같이 등록이전에 작고한 분들이 증언을 남겼으며, 북한에서는 1995년에 피해신고자 219명 중 40명의 증언집을 발간하였다. 생존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 피해자들도 이제 거의 작고하였다. 그러나 증언집을

통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생존자와

삶을

함께한

활동가와

가족들의 회고를 통해 우리는 피해자의 메시지를 언제든 접할 수 있다. 피해 등록 후 비공개로 일상을 꾸려왔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남아있으며, 생존자들이 함께 전한 동원과 위안소 생활과 귀환 당시 만났던 동료들의 이야기, ‘위안부’ 관련 명부에 이름으로만 남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피해자들은 문서와 이미지, 그리고 공간 안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겨 놓았다. 이 이야기들을 최선을 다해 듣고 그 피해와 고통을 반복해서 만들어 온 역사적 구조를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 그것이 피해자뿐 아니라 우리를 자유와 자율성을 지닌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우리의 미래는 피해자의 역사를 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포스트 생존자 시대, 우리는 달라져야 할까. 240명 가운데 생존자가 20명 이하가 되기 시작하던 2019년부터 포스트 생존자 시대의 ‘위안부’ 운동을 고민해야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피해자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던 나로서는 선뜻 동의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생존자는 어떤 의미였나,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자 없는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피해자가 살아있는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은 일부만 맞다. 16


피해자가 겪는 ‘피해’의 문제는 가해측의 ‘가해’의 내용과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분명해질 것이다. 공권력의 부정의한 지배체제와 여기에 공모했던 사회구조, 그리고 직접적인 가해자들까지, 가해측은 과오를 낱낱이 드러내고 드러날 때마다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힘써야 한다. 피해자에게 스스로 피해를 입증하라고 하고 피해자의 발화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며 진위를 따지는 풍경은 참으로 그로테스크하다. 더욱이 조선인 피해자는 1930, 40년대 가부장제의 자장 안에 있었고 제도교육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또 대부분이 10대, 20대에 동원되었기에 주변 사람들과 대등하게 협상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도 어려웠다. 구술 내용을 검토해보면 누가, 언제, 어떻게, 어떠한 경로로, 어디로 끌고 가서, 어떻게 돌아왔는지 불분명한 사례 투성이다.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일본군‘위안부’제도를 만들어낸 자들이며, 이것을 운용하고 이용한 자들이고, 그 실행자로 개입된 자들이다. 피해자는 1990년대까지 말 못했던 고통과 분노를 최대한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아는 한의 정보를 총동원했을 뿐이다. 한편 피해자의 말은 듣는 이가 그 말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을 수 있는 범위로 제한되기도 했다. 피해자의 말들을 복기하면, 이들의 소원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위안부로 끌려가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들어줄 수 없는 사죄의 주체들은 ‘보상 또는 배상’이라는 명분으로 돈을 제시했다. 이 정도로 그만하고 싶은 피해자도 있고, 눙친 사죄와 함께 내보이는 돈에 모욕감을 느끼는 피해자도 있고, 돈은 돈이고 분명한 사죄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고 싶은 피해자도 있었다. 결이 다른 가족들의 고통과 호소, 침묵 속에서 번민하는 피해자도 있었다.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속죄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피해자의 뜻에 따라 응답하기를 바란다. 더불어 더 많은 피해자가 살아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냈을 때, 그 말들을 일일이 듣고 응답을 고민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반성하기 바란다.

피해자의 기억을 이어간다는 것은 17


분명한 것은 피해자 중심의 문제 해결이 반드시 ‘피해자가 살아있는 때의 해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피해자를 그저 대변한다는 뜻도 아니다. 1990년대 이후 피해자의 존재에 응답했던 우리들의 공감에는 여성을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살 수 없게 만든 역사적인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범주 안에 고려의 공녀나 조선의 ‘환향녀’ 그리고 오늘날의 성범죄 피해자나 미투 운동이 함께 언급되는 것은 ‘위안부’ 문제가 ‘재발’되어온 역사에 대한 각성과 그 폭력을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각의 ‘재발’

시기 연루된 모든

공권력과 사회

권력들은 가해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 그래서 내가 이어온 피해자의 기억을 또 다른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직접 만나 구술채록을 받은 분들이나 사망자·행방불명자의 가족, 그 주변에서 관계를 맺었던 마을사람들이나 목격자의 이야기를 썼다. 연구자로서, 활동가로서 ‘위안부’ 문제 해결의 내용을 구성하고 그 가치를 확장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했다. 연구자 및 활동가로서 나의 위치는 피해자의 대변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야기의 전승자(傳承者)이다. 다양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결을 지닌 피해자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그대로 전하려고 했다. 오늘날 각자의 삶을 감당하고 있는 독자들이 피해자의 삶 곳곳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연루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아가 역사학자로서, 이야기들을 얽어놓은 시간적, 공간적 그물망의 전모를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 피해자 재발구조의 고리를 끊어내는 우리의 목소리를 모으기 위함이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기억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뭣이 중 헌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행위다.

피해자

이야기를

우리들의 역할을 고민하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18

전한

책이

전승자로서


日韓共同「日本軍慰安所」宮古島調査団,

洪玧伸

編,

2009,

『戦場の宮古島と「慰安所」』, なんよう文庫. 遠藤美幸,

2010,

「戦場の社会史:

ビルマ戦線と拉孟守備隊

1944年6月-9月(後篇)」,

『三田学雑誌』 102(4)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6, 『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洪玧伸, 2016, 『沖縄戦場の記憶と「慰安所」』, インパクト出版会. 일본군‘위안부’문제 연구회, 미야코섬에 일본군‘위안부’ 추모비를 세우는 모임 등, 2018,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시 묻는다: 미야코섬 ‘아리랑비’, ‘여성들에게’ 건립 10주년의 의미와 과제」, 추모비 건립 10주년 오키나와 국제 심포지움 자료집. 정진성 편, 2018, 『일본군‘위안부’관계 미국 자료Ⅰ·Ⅱ·Ⅲ』, 선인.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8, 『일본군‘위안부’ 자료 목록집Ⅰ·Ⅱ·Ⅲ·Ⅳ』, 선인. 서울대 정진성연구팀 편, 2019, 『일본군‘위안부’관계 연합군 자료Ⅰ·Ⅱ·Ⅲ』, 서울시.

<구술·증언집>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 지음, 오근영 옮김, 2014,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꿈교출판사.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

1993,

『증언집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편, 1995, 『(50년 후의 증언)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한울. 종군위안부및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1995,

『짓밟힌

인생의

웨침』,

종군위안부및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한국정신대연구소, 2001,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5』, 풀빛. 西野瑠美子, 2003, 『戦場の「慰安婦」: 拉孟全滅戦を生き延びた朴永心の軌跡』, 明石書店. 전쟁과 여성 인권센터 연구팀, 2004, 『일본군‘위안부’ 증언집6: 역사를 만드는 19


이야기』, 여성과인권. 문옥주 구술, 모리카와 마치코 글, 김정성 옮김, 2005, 『버마전선 일본군‘위안부’ 문옥주』, 아름다운 사람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일본군위안부

피해

구술

기록집:

들리나요?

2013, 소녀의

이야기』,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吉見義明,

2013,

「ある元日本軍「慰安婦」の回想(3):

黃善順さんからの聞き取り」,

『中央大學論集』 34. 희움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2016, 『故 문옥주 20주기 추모전: 우리가 기억하는 당신#1 옥주씨』, 희움 일본군‘위안부’역사관 자료집. 서울대 정진성 연구팀, 2018,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사진과 자료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야기』, 푸른역사.

20


민족-젠더-이주 교차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I 조경희(성공회대학교)

⚫ 들어가며 여러분 반갑습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이렇게 온라인으로 강의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일본과

한반도의

역사나 사회를 연구해왔고 또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로서 이주와 소수자의 관점에서 연구나 강의를 진행해왔습니다. 이번 특강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틀을

교차성

관점에서

검토할

것이고,

서브주제로서

재일조선인 여성의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강의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로 ‘교차성’ 관점에서 본 여성의 삶. ‘교차성’ 개념이란 무엇이며 이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로 ‘위안부’를 둘러싼 중층적 억압구조를 이해하기. 일본에서 살아남았던 배봉기와 송신도라는 두 피해자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이 얼마나 복합적인 억압과 차별구조에 놓여있었는지를 상상하고

단일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셋째로

역사부정과 여성혐오의 결합, 그리고 이에 대항하기.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그동안

‘위안부’

부정론에

고집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역사부정을

반복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최근에도 미국의 마크 램지어라는 하바드대 교수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부정론을 펼쳤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도 나중에 가능하면 언급해보고자 합니다.

1. ‘교차성’ 관점에서 본 여성의 삶

⚫ 교차성 개념이란? 먼저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차성이란 말, 요즘에 많이 들어봤을 텐데요. 한국에서는 이 개념이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 즉 21


생물학적 여성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원리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적극적으로 제안되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래 교차성 개념은 인종 문제와 젠더 문제가 분리된 현실을 비판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교차시키려고 하는 노력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교차성 혹은 상호교차성이라는 개념은 개개인의 경험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범주, 변수가 단일하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인종, 민족,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개인적 취향까지 다양한 범주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되고 거기서 발생하는 복합적인 차별이나 억압을 규명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비장애

20대

‘나’라는

개인의

이성애자

정체성이--예컨대

한국인이자

등등

다양한

측면이--

제시했던

사람이

미국의

여성이자

상호교차적으로

중산층

작용하면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먼저

콜롬비아

대학

교수

킴벌리

크렌쇼라는 여성입니다. 법학자이고 변호사였던 사람인데 그의 논문 「인종과 성의 교차점을 탈주변화하기: 반차별 독트린, 페미니즘 이론, 반인종주의 정치에 대한 흑인 페미니즘의 비판」1에서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그림1).

1

Kimberlé W. Crenshaw.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 The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1, 1998. 한국어 번역은 아래를 참조. 킴버리 크렌쇼/웹진 인-무브 페미니즘 번역모임 번역, 「인종과 성의 교차점 탈주변화하기: : 반차별 독트린, 페미니즘 이론, 반인종주의 정치에 대한 흑인 페미니즘의 비판」, 『웹진 인-무브』 www.En-Movement.net 22


그림1: 킴벌리 크렌쇼와 그의 논문

그는 흑인여성의 위치에서 1960년대 흑인 공민권운동, 소위 블랙파워운동이 얼마나 남자중심의 편협한 반인종주의운동이 되었고, 한편 페미니즘운동 또한 백인여성

중심

화이트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하면서

흑인여성들이

거기서

이중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여성이니까 흑인을 대표할 수 없고, 흑인이니까 여성을 대표할 수 없다는 딜레마, 이 상호소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교차성

논의가

분석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흑인 여성 장애인이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는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을 각기 따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경험합니다. 하나의 몸을 가진 개인이 복수의 억압구조에 놓이게 됨으로써 그가 경험하는 복합적인 억압은 더 드러나지 않게 비가시화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교차성’은 단일한 대립 축 밖에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와 프레임이 얼마나 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운동의 확장을 저지하고 있는지를 깨우쳐주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intersectionality 개념에 대해 ‘교차성’보다 '교집합성’이라는 용어가 더 이해를 도울 것이라고 제안한 학생이 있었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intersection은 원래 교차점이고 선이 교차하는 이미지(그림2)가 맞는데요. 정체성으로 생각할 때 선보다는

면이

겹치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쨌든

이미지(그림3)가 예컨대

문제의

성격을

흑인-여성-장애인은

설명한다는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을 각기 따로따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가진 개인이 동시에 복수의 억압구조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별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1+1+1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복합차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굉장히 독특한 형태와 고유한 특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23


그림2: 한우리 외, 『 교차성 × 페미니즘』, 여이연, 2018. 그림3: http://www.abouthr.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35

유엔에서도 2000년대 들어 복합차별/교차적 차별(multiple/intersectional forms of

discrimination)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문제가 중요한

거론되었습니다. 역할을

하고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있는데,

동안

고정화된

역할분담으로 활동과 사고가 제한되어 온 결과 여성혐오와 인종혐오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2000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일반권고 25에서 복합차별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2 이에 따르면 “인종차별은 반드시 여성과 남성에 동등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인종차별이 여성에만 과도하게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그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이나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21세기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복합차별 문제가 인식되기 시작했고 인종차별과 젠더의 교차성, 차별의 복합성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쟁중 발생하는 특정 민족에 대한 성폭력 문제, 이주여성들이 선진국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과

학대.

조선학교

치마저고리를

입은

재일조선인 여학생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등이 있고,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가

2

http://peacewomen.org/sites/default/files/ohchr_generalrec25_march2000_0.pdf 24


복합차별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위안부 문제는 복합차별의 산물 이 교차성 개념에서 생각할 때 '위안부' 문제만큼 다양한 문제에 걸친 사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야말로

복합차별의

산물입니다.

식민주의와

민족차별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성들 중에서도 어떤 여성들이 갔느냐 했을 때 또 계급의 문제, 피해자들 중에 10대 소녀들이 많았는데 그럼 아동권리 침해도 포함, 국가가 개입한 전쟁동원과 전쟁범죄의 문제이자 또 해방 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강력한 순결주의를 전제로 한 여성혐오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각각의 전선이 서로 배타적인 운동논리나 담론으로 표출된 경위가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로 이분화하거나 분할하는 관점에 대해 그동안 문제제기가 있어왔고, 최근엔 1980년대 이전의 위안부 담론이나 재현의 문제를 분석하는 연구도 진전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은 정조를 강조하는 한국의 가부장제 남성중심사회에서 침묵과 수치, 혹은 성애화된 시각으로 재현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극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들을 민족의 오욕으로 생각하고 분노하는 한편에서 일상적인 젠더폭력에는 민감하지 않는 풍조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반면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쪽에서는 일본의 식민주의나 민족차별 문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를 인식하는데 민족이냐 여성이냐 계급이냐로 분할하는 관점의 한계성을 인식해야 하고 단일 프레임에 고집하는 것이 ‘위안부’ 문제의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떤 연대를 호소하기 전에 자신의 위치에서 나오는 책임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는지 늘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차성’ 개념은 ‘위안부’ 문제를 인식하는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 식민지 시대 조선여성들 식민지의

여성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25

위해

여기서

훌륭한

연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학교 밖의 조선여성들』이라는 조금 두껍고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은 식민지시기 조선인(한국인) 여성들의 교육경험에 대해 그야말로 민족, 젠더, 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입니다(사진4). 젠더사 연구자이신 김부자 선생님의 박사논문이고 저와 동료 연구자가 함께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림4: 김부자 저/김우자, 조경희 번역, 『학교 밖의 조선여성들: 젠더사로 고쳐 쓴 식민지교육』, 일조각, 2009.

연구에

따르면

1920-30년대

조선인들의

보통학교(초등학교)

취학률이

증가했지만 식민지시대 말기인 1942년 단계에서도 조선인 남자의 3명중 1명, 여자는 3명중 2명이 '완전불취학'이었습니다. 아무리 진학률이 늘어났다고 해도 총체적으로 봤을 때는 불취학이 더 많았고, 특히 조선인여성들의 대부분은 글을 쓰거나

읽을

없는

비식자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보통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증가율만 보고 식민지기에 조선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보급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인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차이가 있었고 조선인들 중에서도 계급-젠더 변수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소작농이나 빈농집안에서는 취학률이 낮았고, 또 기회가 생긴다 해도 우선순위는 남자들에게

배분되었습니다.

당시

신식교육을

극히

소수의

여성들은

󰡐신여성󰡐이라고 불렸는데, 신여성은 일반적인 남성사회에서는 사치, 게으름, 건방짐, 정사관념이 없는 등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부장들은 더

26


여성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3 이처럼

식민지하

여성들은

민족,

계급,

젠더라는

일종의

차별과

억압의

삼각구조에서 자신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펼칠 기회를 갖지 못했고 이와 같은 차별이 그 후의 불평등한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도 재일조선인 1세 여성들도 대부분 취학기회를 갖지 못했고, 비식자상태로 삶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볼 떄 위안부 할머니들이 갑자기 연행되어서 우연한 비극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또 계급적 불평등 관계 속에서 식민지 여성들의 애초부터 삶의 가능성이 제한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세가지 변수만이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자’들 중 10대 소녀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는 아이들의 권리침해나 학대도 또한 지적할 수 있고, 나중에 보는 것처럼 해방 후 상황에 따라서는 분단-냉전의 영향까지도 포함됩니다. 또한 이 책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점은 식자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하층여성들일수록

바가

무엇인가

스스로가

써낸

라는

점입니다.

글이나

자료가

여성들

중에서도

특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을 배운다는 것, 그리고 글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를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고난을 겪은 여성들의 기록은 구술기록을 참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구술과 증언이 역사자료의 보충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의미를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 재일여성들의 경우 위안부 피해자들도 재일조선인 1세 여성들도 대부분 취학기회를 갖지 못했고, 비식자상태로 재일동포의

3

삶을 권리와

보냈습니다. 정체성을

재일조선인 지키려면

1세

남성

여성들의 중심의

경우,

일본에서

민족주의

운동에서

이상의 내용은 김부자/김우자・조경희 번역, 『학교밖의 조선여성들』, 일조각, 2009을 정리하였

다. 27


주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집에서는 가부장적 권력하에서 억압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재일 여성들의 힘겨운 경험을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이 공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는 상태로 그들의 소외상태는 방치가 되는 것입니다. 해방 후 가난 속에서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억세게 살아온 재일여성들이 일본의 페미니즘 운동과 연결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우먼리브 따위 헛소리 똥배 여자들 / 오랜 옛날 여자들이 싸움에 나갔다”고 읊은 종추월(宗秋月)의 시는 오사카의 조선인 집단거주지인 이카이노(猪飼野)의 곱창집 2층에서 계를 타는 재일여성들의 험난한 일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4

“절망을 먹고 살찐 조선

여자들의 똥배”는 종추월에게 자신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없는 그들에게 계는 “목숨을 담보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하고 독자적인 문화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일본사회에서 재일여성들이 누구보다 먼저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운동의

가부장제를

주체가

복합적으로

되어왔다는

것은

경험했으니깐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활동가이셨던

김이사자

민족차별과 선생님은

“재일이라는 것과 여자라는 것은 나에게 별도의 일이 아니다...민족문제로 여'성'을 무화하는 재일 남자도, 여성문제로 민족'성'을 무화하는 일본 여자도 재일 여자에게는 지배와 억압의 가해자다”라 했고, 송연옥 선생님은 재일여성들이 "'위안부' 당사자는 아니지만 식민주의에 고통받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기에 민족, 젠더, 계급이 중첩되는 존재로서 '위안부'의 곁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5

4

宗秋月, 「頼母子講」, 『猪飼野·女·愛·うた』, ブレ—ンセンタ—, 1984.

5

金伊佐子,「在日女性と解放運動: その創世記に」(1992), 『前夜』1-4, 2003에 재수록. 宋連玉, 「『在

日』女性の戦後史」,藤原書店編集部,『歴史のなかの「在日」』, 藤原書店, 2005. 28


그림5: 1960년대 오사카 조선인 부락에서의 재일여성 ©曺智鉉 曺智鉉, 『猪飼野: 追憶の1960年代』, 新幹社, 2003.

1990년 12월 정대협 초대 대표 윤정옥 선생님의 일본 방문은 ‘위안부’ 문제를 일본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 1980년대부터 독서모임 활동을 해오던 17명의 재일여성을 중심으로 도쿄에서 ‘윤정옥 선생님을 둘러싼 재일동포 여성모임’이 결성되었고, 윤정옥의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거나 일본 시민사회와 함께 좌담회나 워크샵을 기획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약 1년 후인 그리고 1992년 11월, 그들은 ‘종군위안부문제 우리여성네트워크’(이하, ‘여성넷’)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6

재일여성들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집회를 개최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집회는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최초의 집단적 경험이 되었습니다.이처럼 재일여성들의 독자적인 네트워크는 한국의 여성운동과 공명하면서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7

6

‘여성넷’에 대해서는 金富子, 「在日朝鮮人女性と日本軍『慰安婦』問題解決運動: 一九九〇年代のヨ

ソンネットの運動経験から」, 『継続する植民地主義とジェンダ―: 「国民」概念·女性の身体·記憶と責 任』, 世織書房, 2011; 徐阿貴, 「在日朝鮮人女性の主体構築: 『従軍慰安婦』問題をめぐ る運動から」, 『F-GENSジャ―ナル』 4号, 2005 등을 참조. 7

이상의 내용은 조경희, 「포스트식민 페미니즘의 (재)소환 : 1990년대 재일여성들의 '위안부' 운동

과 정체성 정치」,『문화과학』104, 2020.12 참조. 29


2. 피해 이후의 삶: 배봉기와 송신도를 중심으로

여기서부터

일본에서

살아남은

‘위안부’

피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은? 증언을 하거나 수요집회 등에 참석하는 할머니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그들의 삶의 극히 일부입니다. 증언집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분들은 그 삶의 과정이 상상이상으로 복잡다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십 명의 피해자들의 증언만 해도 너무나 버거울 정도로 무겁습니다. 일단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경험자체가 초국가적인 스케일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대일본제국의 식민지배와 점령은 한국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네시아, 버마, 싱가폴, 뉴기니아 등 그 범위를 넓혔고 점령지 각지에 위안소들이 존재했죠. 피해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어떻게 동원되었는가”에 초점을 두기 쉽지만, 피해는 연속적입니다.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라는

두권의

책은

어떻게

끌려갔는가

만이

아니라

현지에서

어떻게

버려지고 살아남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8 우리는 ‘증언’ 이후의 현실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사유하지만, 이 피해가 뭔지 알지도 못하거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가신 피해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현실에서

출발할

대중적으로

알려진

‘위안부’

문제가

너무

한국

국내

중심적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공부할 때 “우리 앞에 서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점령지에서 버려지고 죽음을 당한 사람들,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던 여성들, 귀향 후 숨죽이면서 살아온 사람들

8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푸른역사, 2018. 30


그림6: 일본 시민단체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박물관(WAM)이 공개한 ‘일본군 위안소 웹지도’ ©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https://wam-peace.org/ianjo/)

⚫ 오키나와의 위안부, 배봉기 여기서부터

‘위안부’

피해자의

삶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1975년에 오키나와에서 자신이 ‘위안부’ 임을 밝힌 재일조선인 여성. 보통 1991년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증언이 최초로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그 ‘역사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무려 16년 전에 일본에서 증언을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는 29세 때 함경남도 흥남에서

“여자

소개인”의

말에

속아

1944년에

오키나와(沖縄)

도카시키

섬(渡嘉敷島)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44년이라 하면 이미 미군이 남양군도를 침공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

오키나와가

마지막

요새였는데,

배봉기

할머니가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습으로 나하가 초토화된 상황이었습니다. 31


도카시키는 오키나와 시내에서 30키로 떨어진 곳. 아열대 밀림지역입니다. 마을 외진 곳에 있는 빨간 기와집의 방을 7개를 만들고, 일본이름 ‘아키코’로 불리면서 다른 6명의 조선 여성과 함께 일본군의 성노예를 강요당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과 군부(軍夫),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되었습니다. 일본군이 마지막 보루로 삼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무려 오키나와 도민의 4분의 1이 희생이 되었고, 그들과 함께 약 1만 명의 조선인들도 희생되었습니다. 그 진상은 여전히 잘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군공습과

굶주림

속에서

배봉기는

미군에

의한

공습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미군의 집중공격을 당했던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들의 일상은 위태로웠습니다. 전쟁말기의 광기 속에서 조선인 군부들은 일본군이 씌운 ‘스파이 혐의’에

의해

안정화되었을

학살의 때는

위험에

성노예로,

노출되어

악화되었을

있었고, 때는

‘위안부’들은 간호사로

전황이

이중역할을

강요당했습니다. 특히 살아남은 ‘위안부’들에게 일본에서의 ‘해방후’는 또 다른 생존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군

‘위안부’가

되거나

자신의

경력을

숨겨

오키나와에서 은둔생활을 보낸 이들에게 끝까지 ‘해방’은 없었습니다. 배봉기할머니는 빨간 기와집이라고 불린 위안소에서 생활했습니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인 카와다 후미코(川田文子)가 배봉기의 증언을 재구성하여 『빨간 기와집』이라는 책을 냈고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그림 8, 9). 현재 우리가 배봉기할머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와타 후미코의 노력때문이죠.

32


그림7: 가와다 후미코 『빨간 기와집』의 일어판과 한국어 번역판.

전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군포로수용소에서

민간인억류자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수용소에서 벗어난 후에도 종일 걷다가 어두워지면 각지의 술집을 전전하는 생활이 반복되었습니다. 가와다씨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딜 가도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여기저기 걸어 다녔지요” “노상 머리가 아파요. 칼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도 있어요. 눈이 빠질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신경통까지. 견디다 못해 여기저기 파스를 붙이면서 가위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내가 오키나와에 와서 30년 넘게 지냈는데 고향에 간 건….두세번….꿈을 궜어요. 꿈에서 간 거에요. 고향에 가봐야 집도, 아무것도 없는 걸요. 꿈에서 밖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녔어요. 집이 없었으니 집에는 들어가지 못했어요. 꿈에서도 그랬다니까”.9

⚫ 왜 증언했는가, 왜 외면되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배봉기 할머니는 왜 1975년에 증언을 하게 되었는가. 왜 위안부 피해자임을 그 당시에 밝혔을까요. 이 점은 오키나와의 조선인이 놓인 불안정한 법적지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가 1945년 이후 미군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아시죠. 지금 현재도 일본의 미군기지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후

오랫동안

오키나와와 일본본토 사이에는 자유로운 이동도 어려웠습니다. 여권과 같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그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일본으로 반환되는 것이 1972년입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오키나와에 살았던 조선인들의 법적지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법적지위가 명확하지 않았던 오키나와의

조선인/한국인들은

불법체류자가

가능성이

있었고

한국에

강제송환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봉기 할머니는 어떻게든 강제송환을 피하고자 자신이 일본군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아픈 과거를 밝히게 된

9

가와다 후미코/오근영 옮김, 『빨간 기와집』, 꿈교출판사, 2014. 33


것입니다. 일본의 『고치신문』이라는 지방신문 1975년 10월 22일 자에 처음으로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전시중에 오키나와에 연행된 한국여성, 30년만에 자유를 얻었다. 불행한 과거를 고려해서 법무성에서 특별재류허가를 냈다”는 내용입니다. 기사 제목에 ‘위안부’라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을 보니 그 당시 ‘위안부’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와타 후미코씨는 이 기사를 보고 배봉기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체류권을 얻기 위해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스스로 밝혔던 것인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한국행을 피하고 싶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리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하더라도 오키나와에서 이미 30년을 살았고, 또 “전쟁에서의 일이 부끄러워서 전후 본국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버림받았다. 조선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심지어 오키나와에서도”라는 말처럼 타국에서 버려진 피해자들에게 본국으로, 고향으로의 귀환의 길은 멀고 또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또 여기서 하나 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로 일하다가 살아남은 것만으로 너무나 귀중한 고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배봉기 할머니가

75년에

증언을

했는데,

한국정부는

그를

외면했을까요?

한국사회에서 왜 잊혀졌을까요? 일본이었기 때문에? 오키나와였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죠. 일단 하나는 70년대 독재정권시기의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정부나 한국사회가 일본군 ‘위안부’들을 피해자로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오히려 흥미위주의

성애화된

[여자정신대]라는 능욕당한

대상으로

영화에서는 여성들이라는

전시

재현되었다고 성폭력이라는 수치스럽고

인식이

있습니다. 아니라

성애화된

1974년

일본군에게 시각이

부각되었습니다(사진8).김청강 선생님의 논문에 따르면 이 영화는 원래 제목은 〈종군위안부〉였다가,

10

영화

등록과정에서

〈여자정신대〉로

바뀌었습니다.

10

김청강,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 졌나?: 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동아시아 34


심의과정에서 〈여자정신대〉라는 제명이 "부도덕"하다면서 공보부에서는 제명을 바꿀 것을 영화사 에 요청하였으나, 영화사가 "정신대"라는 단어는 우리 국어일 뿐만 아니라 "용사"라는 뜻을 담고 있다며 이의신청하고 확정했다고 합니다. 즉 ‘종군위안부’ ‘정신대’라는 용어를 둘러싼 혼란을 보여주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보상받지 못한”이라는 문구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다루지 않았던 상황을 표현하고 있지만, 한편 “성전쟁의 전선”은 여전히 피해여성을 성애화하는 시선이 드러납니다.

그림8: 〈조선일보〉 1974.10.20., 27 광고

혹은 70년대 독재정권시기의 가부장적 분위기에는 한국정부도 한국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를 묵살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것과 동시에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배봉기 할머니를 지원했던 사람들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총련계 재일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977년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서는 배봉기의 증언기사를 냈습니다. “원쑤들의 발굽에 청춘과 삶을 짓밟혀...일제시기 오끼나와에 끌려온 한 할머니의 피의 고발”이라고

문화연구』71, 2017. 35


나와 있고 그 옆에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기사가 동시에 실려있습니다. 이와 같은 분단의 대치상황 속에서 총련의 기관지에 ‘위안부’가 소개되었다는 점이 분명이 연관이 있습니다. 실제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키나와 거주 총련 활동가인 김현옥, 김수섭 선생님들이 할머니를 돌봤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한국정부가 오키나와의 ‘위안부’ 피해자를 외면하게 되는 배경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총련이 관여를 했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오키나와의 조선인’ 문제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식민주의와 가부장제, 전쟁폭력에 의해 일어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 후 냉전-분단체제에 의해 방치되어 더 심각한 고통을 키웠음을 확실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즉 배봉기를 비롯한 ‘오키나와의 조선인’이라는 문제는 일본의

책임뿐만

아니라,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반공주의를 내세워 피해자들을 외면한 한국정부의 책임 또한 환기시킵니다. 배봉기는 전쟁 중과 전후를 가혹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규명하고 그 희생을 기리는 국가적인 기억의 정치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아까 나온 “나는 버림받았다. 조선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심지어 오키나와에서도”라는 말이 정말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KBS가 1990년에 배봉기 할머니를 찍은 영상이 있습니다(현재 ‘허스토리’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11 리포터가 무작정 배봉기 자택을 찾아가는데, 필요없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그냥 심하게 불편해하고 내보낸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얼마 안 지나서 1991년 10월에 배봉기 할머니는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소하기 49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이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김미혜 선생님이 『‘나’를 증명하기』라는 책에 배봉기 할머니를 중심으로 오키나와의 조선인의 법적지위에 관한 글을 실었고, 또 류큐대학의 오세종선생님이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라는 책에서 배봉기의 삶에 대해 쓰고

11

있습니다.

김미혜

선생님은

“배봉기

할머니는

KBS 허스토리 https://www.youtube.com/watch?v=ajf31D886Qg 36

식민지배의

희생자,


국가적으로

조직된

성폭력의

희생자,

그리고

남북

분단체제의

희생자로서

중층적인 모순의 희생자였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2

그림9: 배봉기에 관한 연구들

⚫ 일본 ‘국가’와 싸운 송신도 다음으로 송신도 할머니의 삶에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송신도 할머니는 충남 논산군 출신이고요. 16세에 대전의 어느 조선인여성을 통해 “시집을 안가도 전쟁터에 가면 돈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용도 모르는 채 동행을 하게 됩니다. 도착한 곳은 중국 무창의 세계관이라는 위안소였고 그 후 7년간 중국을 전전하면서 위안부 생활. 위안부 시절 말을 듣지 않으면 관리인은 때리고, 군인은 칼로 위협. 폭행으로 한쪽 귀는 고막이 찢어서 난청이고, 옆구리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고, 또 왼팔에는 가네코라는 문신이 새겨졌습니다. 임신, 출산, 사산을 반복하는 등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해방 후 고향에는 안 돌아가고 일본군 군인을 따라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입국했지만

하카타역에서

버려지게

되었고

전재산과

귀환증명서도

도난당하고 자포자기가 되고 열차에서 뛰어내렸다가도 목숨을 건집니다. 농가에

12

김미혜, 「오키나와의 조선인: 배봉기 씨의 '자기증명'의 이중적 의미를 중심으로」, 이정은/조경

희 편, 『나를 증명하기: 아시아에서 국적, 여권, 등록』, 한울, 2017. 37


구조되었고 그들의 소개로 어떤 재일남성과 미야기현에서 동거를 하게 됩니다. 도호쿠의 시골마을에서 ‘위안부’라는 과거 때문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남성이 돌아가신 후에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오랫동안 어렵게 생활을 해왔습니다. 일본인 전쟁피해자들은 군인은급과 유족연금을 받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데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에서 살게 해주는데 불만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이자 이주여성이라는 이중삼중으로 주변화된 위치성을 볼 수 있습니다. 1992년 일본 시민단체가 ‘위안부’ 증언을 모으기 위해 ‘위안부 110번’이라는 핫라인 개설. 미야기현에 송신도라는 할머니가 있다고 제3자가 신고. 가와다 후미코가 찾아감. 가와다를 보자마자 “자네 또래 아이 둘을 중국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원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현실에 분노하여 1993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소송 진행을 진행했습니다. 2007년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고군분투하는 송신도 할머니가 10년간의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을 담아낸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입니다. 할머니가 낸 소송은 1심 2심에서 기각되어 2003년 최고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되었습니다. 송신도 할머니는 “비록 재판에서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며 일본시민들에게 오히려 씩씩한 모습을 보입니다. 일본어로 재미있게 욕을 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인간불신과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8


그림10: 〈나의 마음은지지 않았다〉 포스터와 재판투쟁 과정의 송신도 할머니

⚫ 지원자, 증언, 연대운동 송신도 할머니는 재판진술에서 “위안소에서 7년, 일본에서 50년 사람을 믿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의심하는 것밖에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을 통해서 내 경험을 말하면서 조금은 인간답게 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재판이라는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일을 해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까지 아니더라도 증언을 한다는 것도 자신의 개별 경험에 대한 자기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프레임으로 기억된 경험을, 듣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조화하고 자신의 역사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전시 성폭력의 피해여성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아픔을 수반하는 과정인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도 할머니 자신이 “지원자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세련된 할머니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재판

과정을

통해

피해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고 같이 억울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이런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할머니의 말이 너무나 힘이 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할머니들의 에피소드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피해자와

지원자의

때문입니다.

송신도

만남이

있었기

할머니의

경우,

때문이고,

그들과

양징자선생님을

깊은 비롯한

관계를

맺었기

재일조선인과

일본시민들이 재판지원운동을 펼쳤습니다. 송신도할머니는 영상에서는 굉장히 유쾌해 보이지만, 초기에는 지원자에게 갑옷을 입는 것처럼 딱딱하고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어려운 과정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양징자 선생님은 “국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안는 어둠은 보통 체험을 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깊이를 이해하면서, 그래도 알려고 하는

39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운동”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13 내가 끝까지 알지 못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참고로, 송신도할머니가 살았던 미야기현이라 하면 2011년에 동일본대지진이 직격한

지역입니다.

휩쓸렸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송신도

기적적으로

할머니의

집이나

살아남으셨다고

재산은

합니다.

삶이

쓰나미에 고난의

연속이어도 할머니의 생명력이 끝까지 버티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송신도 할머니는 외국에 사는 마지막 한국인 ‘위안부’ 피해 생존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등재판 진술에서 할머니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위안부’ 재판을 진행하는 것은 나 혼자지만 나 밖에도 [일본에] ‘위안부’가 된 조선인 여자는 반드시 있다. 그러나 아무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 “나는 수치심을

참고

용기를

짜내면서

재판을

진행했다.

도리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죽어도 죽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마지막까지 씩씩한 모습을 보인 송신도할머니는 2017년 1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피해 ‘이후’ 삶의 고유성 지금 본 두 할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한국에서 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과 조금 다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일단 언어가 일본어라는 것은 큰 차이일 것입니다. 배봉기도 송신도도 고향에 귀환할 수 없었습니다. 위안부 피해도 물론이지만, 재일조선인 피해자들의 경우 어쩌면 민족, 여성, 계급뿐만 아니라 고향이 아닌 이국땅, 타지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또 다른 복합적인 요인으로 추가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일본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민족차별과 여성차별이 뒤섞인 상황에 놓였죠. 다시 말하면, 그들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일 뿐만

아니라

전쟁

미귀환자이며,

거주국에서는

이주여성이라는

교차적인

억압상황에 놓여졌습니다. 계속 일본사회에서 자란 결과, 한국의 피해자 할머니들과 다르게 이들은 일본에 책임을 묻고 나를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

13

梁澄子, 「宋神道さんと共に裁判をたたかって」, 『立命館言語文化研究』23-2, 2011. 40


예컨대 배봉기 할머니는 증언과정에서 일본군에 대해 “우군이 져서 분하다”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일본군을 내 편으로 여겼고, 송신도할머니는 지원운동의 과정에서 자꾸 일본의 군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지내는 속에서 자신을 과거의 일본군 혹은 일본정부와 떼어놓고, 자신의 피해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징자 선생님은 할머니가 군가를 부르거나 남자 지원자들에게 과잉 대접을 하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고 하면서도 “피해를 인식하고 회복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시민들을 향해 말했던 것은 ‘전쟁은 절대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투쟁까지

해냈지만,

그가

분노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상황 그 자체이고 여전히 조선인에게 차별을 하는 정부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송신도 안의 전선은 일본과 한국이나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국가와 민중이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경계 바깥에서 살아온 그들은 삶의 여정에서 고향=나라의 상실과 단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두 할머니의 대인기피증, 인간불신의 어둠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었지만 이런 할머니들이 지원자들과의 소통이나 증언의 과정에서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땅에 남겨지고 버려진 존재였지만, 그 땅에서 삶의 터전을 가꿔왔다는 점에서 피해 ‘이후’의 삶을 이해하는 것 또한 피해에 대한 인식만큼 중요하고, 또 위안부 문제를 공간적으로 확장시켜 상상하게 해줍니다.

3. 역사부정과 여성혐오를 넘어

⚫ 왜 부정론이 ‘위안부’에 집중하는가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교차성, 복합적인 차별과 억압의 관점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복합차별 문제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차별과 혐오를 실행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직관적으로 혐오행위를 복합적으로 결합시켜서 진행합니다. 혹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의 법정투쟁 실화를 다룬 영화 〈나는 41


부정한다(Denial, 2016)〉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주인공은 데보라 립스타드라는 유대계 미국인인 홀로코스트 연구자이고, 앞의 남자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히틀러 연구자, 영국 대학교수 데이빗 어빙입니다. 자신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인데, ‘부정론자’라는 꼬리표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당당하게 이 여성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부정론자가 패소당합니다. 이 영화는 그저 “진실은 승리한다”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부정론자가 갖고 있는 어떤 특징을 보여줍니다. 부정론자에게 정공법으로 맞서면 안 되고 때로는 침묵도 필요하다는 전략적인 태도도 보여주면서 부정론자들의 교묘하고 모순된 태도를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영화는 어빙의 피해자 조롱과 여성혐오 발언, 인종주의, 가부장적 성향을 그리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연출은 실제 법정에서의 어빙의 발언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소송을 경험한 실제 주인공인 역사가 립스타트는 어빙이 여성혐오주의자이며, 일반적으로 부정론자들이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4 홀로코스트 연구자가 남녀 할 것없이 많은데 여성연구자들만을 골라서 시비를 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

나라든

공통적인

경향이겠지만

역사부정론자들이

인종주의나

여성혐오도 세트로 갖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돌아가서 질문을 다르게 해보자면, 왜 일본에서 이렇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부정이 활발할까요. 일본의 역사부정은 위안부만이 아니죠. 독도문제, 야스쿠니, 강제징용, 난징대학살도 있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만큼 일상적으로 우파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사례도 없습니다. 크만큼 ‘위안부’피해자들의 존재를 경시하고, 여성혐오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운동단체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조종한다고 생각하고 피해자에 대한 비주체화, 구술과 증언을 무력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부정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인데 이 배경에는 역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발이 있었습니다. 1993년 고노담화, 1995년 무라야마담화에 이어 1996년에 합격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위안부’

14

https://globe.asahi.com/article/11532409 42


문제와

난징대학살에

관한

서술이

있다는

것이

접적인

계기가

되어

새역모(‘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만들어집니다. 위안부를 가르치는 역사교과서가

일본을

왜곡하는

‘자학사관’에

빠져있다고

하면서

교과서

‘위안부’ 서술 삭제를 요구하고, 일본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교과서를 직접 집필, 제작, 유통하는 캠페인을 전개한 것은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들의 캠페인의 결과 역사교과서에서의 ‘위안부’ 서술은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교과서 운동 이후 새역모나 일본회의가 열정적으로 전개한 운동은 반페미니즘 운동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요즘에 자주 말하는 백래시 운동. 젠더 관련법이 제정되거나 각 지자체에서 강좌가 생기거나 하는 젠더질서의 변화에 대한 안티, 백래시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지금의

아베도

이와

같은

백래시를

추진했던 한 사람. 학교에서의 과격한 성교육을 금지하자, 부부별성제 반대 같은 것을 내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백래시 운동이 역사수정주의와 동시에 추진되었고 이를 연결하는 매개가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이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역사부정의 대표세력인 새역모, 재특회, 일본회의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였으며

이들은

‘위안부’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키워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성의 복권’을 내걸고 여성들의 자율적 영역을 부정하는 한편에서 ‘위안부’를 매춘부로 불러 피해자들과 성노동자들을 동시에 모욕하는 담론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해왔습니다.15

⚫ 한미일 역사부정론 부정론자들이 교과서에서의 위안부 서술 삭제와 함께 열심히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성노예’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노예(sex slave)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퍼져간 것을 심각하게 우려한 그들은 재미 재유럽 일본인들과 함께 유엔 로비활동이나

15

이상의 내용은 조경희,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

음」, 『한국문학연구』47, 2019; 「일본의 역사수정주의·국가주의·백래시의 연동 : '새역모'와 '일본회 의'를 중심으로」, 『황해문화』, 2019.12. 43


소녀상 철거운동에 나섰고 지금도 그런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 일부를 영화 〈주전장〉에서 볼 수 있어요. 여기서 일본 우파들의 경악할 수밖에 없는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스기타 미오라는 자민당 국회의원은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소수자나 피해자들에 대한 조롱이나

부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는

생산성이

없다”“사회에서

권리를 보장해줄 필요가 없다”는 발언으로 일본 내에서도 많이 비판을 받았고, 미투운동에 대해서도 “현대의 마녀사냥”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성매매 비판을 성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해서 오히려

성매매하는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성노예’ 비판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맥락이 있죠.

여성의

자기결정권,

피해자의

에이전시와

같은

말이

결국

피해자의

자기책임론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기억이나 증언이 ‘성노예’라는 객관적인 조건을 부정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는 것은 왜곡된 형태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성노예’라는 말은 차별적인 말이 아님은 물론, 위안부 연구자들이 멋대로 만든 개념도 아닙니다. 위안부 피해경험의 심각성을 나타내는데 있어 이미 90년대 초중반부터 국제적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1996년 유엔인권위원회 포괄적인

조사결과인

소위

이때부터

일본정부는

‘성노예’

“여성피해자는 성노예라고

강제매춘과

하는

것이

쿠마라스와미 개념에

성적종속,

적절하다”

보고서에서도 반박하고

일상적인

라고

명확히

쓰이고

있었는데

신체적 답하고

있습니다.

학대를

보고서는 당했으므로

있습니다.

이때가

1996년인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역사수정주의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위안부문제 부정이 일본우파들에게 얼마나 핵심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대일본제국이 성노예(sex slave)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도 현재 부정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사료

분석하면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위안부는 출간했죠.

성노예로 일본에서도 44

없다”고

베스트셀러를

하면서

기록했습니다.


최근에는 하버드대 교수 마크 램지어가 학술논문에서 매춘업자와 여성들과의 자유로운 계약이었다는 내용을 실고 있어요. 램지어는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재일조선인, 피차별부락과 같은 심각한 역사왜곡과 혐오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차별은 만들어진 것, 합리적인 것이다. 그들은 범죄집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심각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힘겹게 비판 글을 썼습니다.16 왜 역사부정론이 문제인가. 사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더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하고 학술적으로 반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자료적 검증 없이, 물론 아카데믹한 포장을 씌우고 있지만 논문을 읽어보면 도저히 학술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자의적으로 자료해석을 했고, 출처 표기도 불분명합니다. 가장 문제는 그들의 논의가 피해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맺으며 마지막으로 오늘 본 바 같은 역사부정과 여성혐오의 결합양상에 주의하면서도 이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제인권체제의 규범은 국가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과거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법원이 2018년 10월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내린 판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기업에 대해 4명의 피해자들에게 각 천만엔씩 보상하라는 판결내용이었습니다. 피해를 받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세계적 조류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여전히 1965년 한일청구권 협약을 내걸어 한국정부에 대해 “국제법의 상식에 반한다”는 말을 반복하기만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조약이어도 국제법의 패러다임 자체가 현재 인권중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16

‘위안부’

문제만이

아닙니다.

참고로

2018년에

유엔

조경희, 「마크 램지어의 역사부정과 소수자 혐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재일조선인, 부라쿠

민 서술 비판」, 『여성과 역사』34, 2021.6. 45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일본정부에 권고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포괄적인 인종차별금지법

채택,

국내인권기관설치,

헤이트스피치

관련,

아이누민족

차별철폐, 여성폭력을 포함한 오키나와에서의 안전과 보호, 부락차별해소 추진법 실시, 고교무상화제도에서의 조선학교 차별 시정, 이슬람교에 대한 프로파일링 종결, 피해자중심으로 위안부 문제의 영속적인 해결 등 12항목입니다. 일본은 뭐 하나 제대로 지키지 않는 채 세계적인 조류에 너무나 역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일관계 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강제노동과 학살과 같은 식민지하 인권침해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청구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노예자손들이 400년 전 노예제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에 특화된 해결되지 않는 역사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규모를 가진 당연히 해결해야할 인권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주전장〉영화에도 등장하는 아베 코키라는 국제법 교수는 “위안부문제가 성노예제 라는 인식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공통의 대응”의 표출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확한 비판과 대응이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여성의 인식매매와 성노예 문제에 대한 억지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폭력 없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도 ‘위안부’ 문제는 현재도 반추되어야 할 과거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1)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억압과

차별문제이면서도 2)전지구적이고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3)과거의 아픔을 회복하고 존종하는 과정을 통해서야만 미래의 평화를 구상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하고 반추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교차성 개념으로부터 시작해 여성혐오의 문제까지 쭉 봤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위안부' 문제만큼 다양한 문제에 걸친 사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도 '위안부' 문제의 일부일 수밖에 없고, 전체상을 그려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늘 부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46


활동하고 있지만 여전히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는 ‘위안부’ 문제”에 접근해서 공부를 심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의 강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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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부정주의 담론-실천에서 나타나는 여성 혐오: 반일 종족주의 현상과 램지어 사태 I 강성현(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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