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에서 지은 건물인데, 이 건물은 현재 건국
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동네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학교로 이전되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고등 교육의 산실과 다 름이 없다.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하여 해방 후 국민대, 단국대,
ⓦ 골동품 상가 관련 기사는 1970년대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협성실업학교, 건국대 등 이 건물을 거쳐 갔기 때문이다. 서북
1950~60년대에도 인사동에는 골동품 상가와 화랑이 있었지만
학회회관을 거쳐간 대학이 많았던 것은 많은 대학의 창립자들
주로 외국인들이나 소수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했던 골동품 상
이 서북학회 출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서북학회의 위상은 일제
가와 화랑은 인사동보다는 호텔이나 당시 고급 상권이었던 반
강점기 인사동의 지역적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태화기
도조선아케이드에 있었다. 따라서 1970년대 골동품 상가와 화
독교사회관은 한양절충식 건물로 건축적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랑가가 인사동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이들에 대한 수요가 외
건축물이지만, 여성들의 사회 교육 시설로 활용되며 인사동에
국인 중심에서 중산층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서 가장 지명도가 높았던 건물었는데,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되
여기서 인사동이 골동품 상가와 화랑가로 선택된 것은 인사동
었다. 그밖에 한인을 대상으로 운영했던 조선극장은 식민지 자
의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도심에서 물리적으로 가
본주의 하에서 대중 위락 시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장소
까웠기 때문이다.
였다. 1960년대 주목할 만한 건물은 파고다 공원을 둘러싸고 만 들어진 낙원상가와 파고다 아케이드였다. 1970년대 초 파고다
ⓦ 1980년대 들어서면 골동품이 사치품으로 여겨지면서 중과세
공원을 둘러싸고 지어졌던 파고다아케이드는 지금 철거되었지
대상이 됨에 따라 인사동의 골동품 상권은 급속히 몰락하게 되
만, 이곳은 반도조선아케이드와 함께 서울에서 대표적인 근대
었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파트 보급에 따른 라이프스
적 상가이기도 했다. 낙원상가는 세운상가를 모델로 건설된 주
타일의 변화가 골동품과 그림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확대시켰
상 복합 건축물이다. 이 일대는 1960년대 가장 도시화된 지역
다는 점이다. 새로 장만한 아파트에 그림이나 도자기를 장식하
이었으며,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상권을 형성했
는 것이 유행하면서 동양화나 서양화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
던 지역의 한 곳이었다. 인사동 길을 걷다 보면 모던하면서도
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인사동의 쇠퇴하는 골동품 상가를 화랑
정감있는 표정을 갖고 있는 통인빌딩을 만날 수 있다. 창이 적
이 대신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 80년대 인사동의 가장 큰 변화
어 무뚝뚝해 보이지만 검은 벽돌이 문화적 친근감을 더해 주는
다. 초창기 화랑은 표구사에서 시작했지만 화랑의 거점이 명동
건물이다.
이나 을지로 입구에서 인사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청담동으로 확대되었다.
ⓦ 현재 인사동은 소위 전통 문화의 거리로 불린다. 그런데 이 호칭이 인사동의 정체성에 적합할까? 과연 언제부터 인사동이
ⓦ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역사 도시 서울의 정체성을 외국인에
전통 문화 거리가 되었을까? 그러나 인사동에 관한 공식적인 기
게 보여 줄 수 있는 장소로 인사동이 선택되었고, 1990년대에
록에서 인사동이 전통 문화의 거리였다는 오래된 기록은 찾아
는 그간 미뤄져 왔던 도심 재개발 사업이 부분적으로 진행되면
볼 수 없다. 또 일제 강점기에 ‘전통’, ‘고가구’, ‘화랑’ 등과 관련
서, 인사동의 골동품 상가와 화랑들은 밀려나거나 업종 전환이
된 기사를 찾아보아도 인사동이 전통 문화의 거리였다는 기록
모색되었는데, 흥미롭게도 인사동이 골동품 상가로서의 명성이
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에 인사동은 전
사라져 가면서 옛 정취를 보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
통의 이미지나 고가구, 화랑과는 상관없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경제 성장과 함께 우리 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북촌이 재발견되면서 인사동에서 사라
ⓦ 일제 강점기에 인사동과 관련된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한 인
져 가는 골동품 상가가 마치 우리의 전통 문화의 소멸로 인식되
사동의 주요 시설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계명구락부, 조선노동
면서, 보호해야 할 지역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인식되었기 때문
공제회, 조선체육회, 조선어학연구회 등이 있었고, 의원들의 개
이다. 이때부터 인사동에 ‘걷고 싶은 거리’나 ‘문화의 거리’로
업 관련 기사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인사동
만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 인사동이라는 정체성이 형성
이 지식인들이 모이는 지역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기생
된 것은 30여년에 불과하다. 조선 시대 권문세가의 거주지에서
과 관련된 기사도 보이는데, 일제 강점기 인사동은 꽤 재력 있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거리, 해방 후에는 외국인을 위한 골동품
Wide AR no.29 : 09-10 2012 Re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