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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설계 CM 및 감리 도시설계 건축사업 및 전략수립

정림건축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풍부한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우수한 기술력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설계 및 전문 CM사로서 개발기획 단계에서부터 건설사업관리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건강하고 바른 건축문화 창달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대구은행 본점 리모델링 (설계, CM)

|주| 정림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www.junglim.com / TEL 02. 708. 8600


19 : 03-04, Special Edition vol.03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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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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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트 김범준 • 김선현 • 김세경 • 김주경 • 김태만 • 민서홍 • 박창현 • 이상대 • 임영환 • 조성익 • 조진만 • 최수연 • 홍재승 • 디림건축 • 스페이스연건축 • 에이라운드건축 • 엠엠케이엠 • 오우재건축 • 조진만건축 • 토포스건축 • 티알유건축 • 플랫/폼 • 해안건축 • 구영민 개인전 <RUIN> • 땅집사향 147차~148차 • 제12회 심원건축학술상 • 제43차 WIDE건축영화공부방 • 제28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동양PC • 마실와이드 • 메타건축 • 목천김정식문화재단 • 비타그룹건축 • 삼현도시건축 • 삼협종합건설 • 수류산방 • 시공문화사 • 오씨에이건축 • 운생동건축 • 원오원 아키텍스 • 유오스 • 유타건축 • 유하우스건축 • 정림건축 • 제대로랩 • 헌터더글라스 •

표지 설명: X세대 건축가들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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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Flow Map 생산자 •강병국 •구영민 •김광수 •김기현 •김명규 •김미현 •김범준 •김선현 •김세경 •김연흥 •김용남 •김재경 •김정식 •김주경 •김창균 •김태만 •김태수 •민서홍 •박달영 •박상일 •박지일 •박창현 •손도문 •우의정 •이강희 •이상대 •이주연 •이태규 •이한종 •임근배 •임영환 •임재용 •임진우 •장윤규 •전진삼 •정귀원 •정승이 •조성익 •조진만 •최수연 •최욱 •최원영 •편집실 •한제임스정민 •홍재승

페이지 125 17 127 121 124 3, 6 33 65 89 표4 7 20 3, 6 25 12 41 6 97 14 19 127 81 13 8 113 49 12 표2, 표3 127 127 57 11 1 18 20, 125, 127 16 10 73 105 113 5 15 22 9 113


엄덕문(1919-2012, 엄덕문건축연구소), 세종전각 계획안, 서울 입면 스케치, 2008 / 황근욱 기증 / MC04.1000.0001

목천김정식문화재단 mokchon-kimjungsik.org T.02 732 1602


Ato

19 : 03-04, Special Edition vol.03

Contents

ARCHITECTS IN KOREA・Ⅲ EDITORIAL

X세대 건축가들의 자서전Architect’s Autobiography

ESSAYS

나의 건축 인생 연대기 혹은 기억조작

[25~32]

김주경 OUJAE Architects

실패의 역사 (to be) unbuilt

[41~48]

김태만 HAEAHN ARCHITECTURE

오리지낼러티 탐문의 건축여정 어느 건축 마라토너의 방백傍白 ‘지속가능한’ 아마추어 건축 꿈꾸는 자의 행복한 건축 냅킨 드로잉

몇 가지 단서들

건축이라는 올가미

건축 짓는 농사꾼의 길

어느 젊은 건축가의 회상

풍경風景, 반 풍경 그러나 알레고리 NOTICE 4

[33~40] [49~56] [57~64] [65~72] [73~80] [81~88] [89~96]

[97~104]

[105~112] [113~120]

김범준 TOPOS Architectural Firm 이상대 spaceyeon architects 임영환 D·LIM architects 김선현 D·LIM architects 조성익 TRU Architects

박창현 a round architects 김세경 MMKM 민서홍 MMKM

조진만 JO JINMAN ARCHITECTS

홍재승, 최수연, 이강희 PLAT/FORM

제12회 심원건축학술상

공모[표2]

제28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V A 2

비코 마

공모[6]

2019.


Atollo 1977

Vico Magistretti Archivio in Viaggio 2019. 3. 20 – 4. 20 비코 마지스트레티 展

Opening Ceremony

Location

Host

2019. 3.20

ONE O ONE plus 2019. 3.20 Wed - 5:30pm

ONE O ONE plus 종로구 수송동 126-2(종로5길 91) 126-2 Suseong-Dong, Jongno-Gu, Seoul, Korea T. +82 2 722 6700 domuskorea @ 101- plus.kr www.101-plus.kr

Fondazione Vico Magistretti Italian Cultural Institute in Seoul Organizer ONE O ONE plus - domus Korea

Wed

– 4.20

Sat

Hours

Tue - Sun 1 0am - 6pm Closed on Mondays

Sponsor

De Padova, Artemide, Flou, Oluce, Schiffini Duomo&co, LIA, Light Now


제28회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TSKIM

재단법인 목천김정식문화재단

Fellowship Foundation

www.mokchon-kimjungsik.org

Architectural

www.tskaf.org

Mokchon Foundation

내용

자격요건

선정방법

12,000달러 수여

건축학위를 받은 대한민국 국민

예선 통과자 선정, 예선 통과자는

해외건축여행기금 미화 본 기금으로 수령자 본인이 금액내

자유롭게 여행목적, 기간 설정가능

만35세 미만의 한국에서

(단, 외국에서 공부하지 않은 자)

제출자료

제출처

(자기가 직접 창작한 건축작품 또는,

(재)목천김정식문화재단 (우)03041

1차 : 포트폴리오

예술활동을 통해 만든 작품들로 구성된 포트폴리오),

지원양식서 (웹사이트 내 지원양식 다운로드)

2차 : 여행목적 및 계획안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119 목천빌딩 10층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담당자 앞

1차 제출된 포트폴리오 심사 후,

여행목적 및 계획안을 제출처에 제출, 2차 면접 후 최종 수상자 1명 선발

제출기한

2019년 4월 30일

(우체국 도장상 날짜)을 마감으로

등기우편이나 속달우편을 통해 제출

〮 자세한 내용은 www.tskaf.org에서 확인 〮 2018년부터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의 한국 측 운영은 목천김정식문화재단에서 담당합니다. 〮 미디어 후원 : 와이드AR


Photo by Yoon Joonhwan


METAA

리얼-리얼시티 Real-Real City 2019 0712 - 0825 @아르코미술관 #(故)이종호 #동료건축가 #도시현실 #일상 #예술과의접점 #건축적실천

2019년도 문화예술진흥기금 시각예술창작지원산실 전시지원

studio METAA는 1989년 ‘건축과 예술을 통한 점진적 발전 / Metabolic Evolution Through Art & Architecture’ 라는 이념 아래 hardware를 담당하는 메타건축과 software를 다루는 메타기획으로 함께 설립된 건축.문화집단입니다.

studio METAA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122 성북프라자 6층 메타건축

www.metaa.com

메타기획

www.metaa.net

Metabolic Evolution Through Art & Architecture since 1989


Urban Tablet of Actualized Architectural Arcadia

l주l유타건축사사무소 www.utaa.co.kr

중곡동 UTAA 사옥.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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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강석원

ARCHITECT KANG

SUKWON

대한민국 미술전람회(1961년 제10회) 건축부문 최초 대통령상 수상자,

1966년 파리 국제박람회를 통해 한국디자인의 해외시장 개척을 꿈꾼 젊은이, 프랑스 건축가 조르주 앙리 팽귀송Georges Henri Pingusson의 오랜 조력자,

제1회 김수근문화상 건축상의 영예를 안은 건축가,

한불 문화교류의 선봉에 선 프랑스 국가공로훈장Commandeur de l’Ordre National du Mérite 수상자,

‘정확한 건축’을 견지해 온 건축 노장 강석원의 첫 책

제대로랩 zederolab.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8길 15-2, 4층 · 이메일 zederolab2016@gmail.com · 전화 02.2061.4146 · 정가 35,000원


Pandora#1 Pandora#2 No man_s Land Oneiric Living in the virtical Fantasia Garden in the Machine (de)Park upon Graffiti Laputa dra_del Office-Lacrar Escher in Frame Utopian Relics City Shed

구영민 교수 건축전

漏印 2019 0404 - 2019 0505

장소 : 갤러리 아디크 gallery ADIK 한국건축설계학회 전시관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26길 42 오프닝 타임 : 12시 - 19시 / 월 휴관 오프닝 리셉션 : 4월 6일 토요일 오후 4시 17


A Thousand City Plateaus A Thousand City Plateaus

Winner of International Idea Competition for urban regeneration of Jamsil Sports Complex

Winner of International Idea Competition for urban regeneration of Jamsil Sports Complex

UnSangDong Architects

UnSangDong Architects

와이드(22


와이드(220.287)-광고-창조와창발 다시.indd 1

2019. 3. 7. 오후 12:10

『창조와 창발—한반도 르네상스를 위한 마음 혁명』 © 김용호 교수[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창조와 창발』은 우리의 서툰 고난에 대한 주해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 책은, 창조성은 어떤 개인이 천부한, 특출한 역량이라고 보 지 않는다. 창조나 창발의 역량은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잠재한 가치이며, 그 발현은 사회 문화 전반과 관계된 문제다. 이 책은 창조 따위에 서린 우리의 헛된 망상과 신화를 깬다. 뇌 과학과 인지 심리학, 사회학과 인문학, 불교 의 이론들이 장르를 넘어 근거가 된다. 딴 곳 딴 시대의 유명인들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 우리 곁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서 그 원리를 살핀다. 피겨 선수 김연아나 야구 감독 김성근, 영화 감독 임권택도 있지만 초등학 교 선생님 안순억이나 산호 여인숙 서은숙처럼 대중적으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예술과 같은 몇몇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경제, 학교 교육은 창조성이 더욱 중요한 장이다. 책의 부제에 등장 하는 ‘한반도 르네상스’는 저자의 용어가 아니라 음악 평론가 박용구 선생이 하신 말씀이다. 102살의 나이에도 가장 창조적인 마음으로 움직이던 선생은 우리가 사는 이 세기, 한반도에서 인류 문화를 다함께 향상시켜 낼 새로운 르네 상스가 열릴 수 있으리라고 믿으셨다. 그 르네상스는 서구 선진국을 따라잡으려 이런저런 물질을 축적하는 데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우리 삶의 질서를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닿게 하려 할 때, 내 마음으로 네 아픔을 연 김용호 지음 | 520쪽 | 24,000원 민하려 할 때, 그 자리에서 창조의 작은 날갯짓이 시작된다. 바로 지금 이 땅, 이 역사 위에서 말이다.

p ho t o gra p hy [L EE J hee y eu n g]


김범준

ARCHITECTS IN KOREA Ⅲ 김주경

민서홍(앞), 김세경(뒤)

김범준 TOPOS Architectural Firm 김주경 OUJAE Architects 김태만 HAEAHN ARCHITECTURE 민서홍, 김세경 MMKM 박창현 a round architects

박창현

김태만


임영환(앞), 김선현(뒤)

한국의 건축가들 Ⅲ 조성익

이상대

임영환, 김선현 D·LIM architects 이상대 spaceyeon architects 조성익 TRU Architects 조진만 JO JINMAN ARCHITECTS 홍재승, 최수연, 이강희 PLAT / FORM 조진만

홍재승(좌), 이강희(중), 최수연(우)


EDITORIAL

X세대 건축가들의 자서전 Architect’s Autobiography

본지와 그림건축이 공동 주최하는 땅집사향의 2018년도 프로그램은 건축가 초청강의 <시즌5>의 세 번째 라운드로 운영되었다. 땅집사향의 이야기손님으로 초대된 건축가들을 특집한 이번 호는

독립하여 짧게는 5년, 길게는 25년 안팎의 건축경력을 갖춘 X세대(1965~1980년생,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 건축가들의 자서전 형식으로 묶는다.

우리나라에서 X세대는 정치적으로 민주화되는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산업화의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물질적·경제적 풍요 속에서 성장한 공통된 특성을 가진다. 탈권위주의적이며

자유분방하고 개성이 뚜렷하다. 이들은 대체로 사고가 합리주의적이며 매사에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이며 각종 영상 매체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들 세대만의 독특한 (자기중심적) 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현재 40~50대 중반에 걸친 나이로 명실상부 우리 사회의 든든한 허리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건축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시기적으론 자서전이라는 포맷이 거북할 수도 있는 이들 X세대 건축가들에게 편집자는 20~30대

건축전공자 포함, 일반 대중으로서 건축에 관심 많은 건축 팬덤Fandom을 타깃Target으로 건축인생

중간지점을 돌아보는 자전적 에세이의 집필을 요청하였다. 사무소 규모의 크고 작음에 차이는 있지만 건축가의 길에 들어서서 겪은 생생한 경험이 후배들과 일반인들에게 공명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다.

특집된 건축가의 에세이는 건축의 세계가 궁금한 중고등학생(과 그들의 부모)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현재 본지의 발행부수 중 일부는 전국의 고등학교 도서관에 보급되고 있다.) 편집자의 시선 중 하나는 내일의 건축가 지망생들에게 닿아 있으며, 동시에 일반 대중의 건축에 대한 이해와

신뢰 구축에 있음이다. 자서전이 통상의 건축담론 이전의 살아 있는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본지는 2017년부터 매년 3-4월호를 땅집사향 건축가들의 특집호Special Edition로 발간하여 한국의

건축가Architects in Korea 시리즈로 묶어내고 있다. 이번호는 그렇게 묶은 세 번째 책이다. 건강한 건축

잡지 저널리즘을 표방해온 본지의 건축가 기록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참고로, 땅집사향은 종이매체의 한계를 보완하는 오프라인 강의 형식의 저널링Journaling 작업의

일환이다. 매월 세 번째 주 수요일 저녁에 무료 공개 강의Public Lecture로 진행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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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나의 건축 인생 연대기 혹은 기억조작 [26] 김주경 오리지낼러티 탐문의 건축여정 [34] 김범준 실패의 역사 (to be) unbuilt [42] 김태만 어느 건축 마라토너의 방백傍白 [50] 이상대 ‘지속가능한’ 아마추어 건축 [58] 임영환 꿈꾸는 자의 행복한 건축 [66] 김선현 냅킨 드로잉 [74] 조성익 몇 가지 단서들 [82] 박창현

건축이라는 올가미 [90] 김세경

건축 짓는 농사꾼의 길 [98] 민서홍

본문에서 사용된 모든 도판(사진, 도면 등)은 각 건축사무소로부터 제공받았으며 해당

페이지 내에 출처와 크레딧을 표기하였습니다.

어느 젊은 건축가의 회상 [106] 조진만

풍경風景, 반 풍경 그러나 알레고리 [114] 플랫/폼 23


19 : 03-04

건축가 김주경 ZUKHYUNG KIM www.oujae.com


나의 건축 인생 연대기 혹은 기억조작

글. 김주경

오우재건축사사무소 대표

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SNS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한때 했었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옳겠다. 나는 개인사를 남들과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 부류 중 하나이다. 내가 모르는 제3자가 나에 대해 시시콜콜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공포에 떨 준비가 되어 있으며, 반대로 알량한 관심을

핑계 삼아 타자에 투사되는 관음증적인 시선을 거두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다만 지금 내가 있는 곳 주변, 두 눈 앞에 놓인 실체가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인다. 저 멀리 익명성에 숨어 온라인으로 움직이는 가상의 것들은

거부하되, 당장 내 곁에서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실재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인터넷의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이 불경스러운 요즈음 시대에,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구비하지 못한 채 구식 폴더폰을 열어 전화를 받는 내 모습을 보고 혹자는

구닥다리라 흉보겠지만 나란 인간은 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변하지 않을 권리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 패턴만 보자면 술자리에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을 정도로 보수적이라 칭할 만하지만 생각의 영역에서는 현황유지보다는 사회변화에 무게를 두는 진보적 자세를 취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달리 보면 행동은 굼뜬 상태로 입만

살아있는 입-진보라 오해할 수도 있겠다. 일상생활의 게으름이 행동의 보수화를 낳았을

뿐, 실천적 자세는 늘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과거의 것을 무조건 긍정하는 자세를 경계하며, 현재적 가치의 미래 계승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과거를 회상하는 ‘건축가의 자서전’을 요청하는 편집자가 달가울 리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기를 쓰지 않는다. 다만 그날그날의 일들을 적어두는 습관을 갖고 있어 찾고자 노력한다면 몇 년, 몇 날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추적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 내가 수첩에 행적을 적어두는 것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아로새기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작년 땅집사향 강연 때, 사회자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어서 이야기 말머리를 풀기 어려웠다고 푸념을 했었는데, 나에게는 핀잔 아닌 핀잔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하여 이 지면을 통해 공공에 알려진 건축가로서 공개할 수 있다고

여기는 범위 내에서 공적인 ‘사생활’을 적고자 한다. 건축과 관련된 나의 연대기이거나 혹은 개인적 욕망이 투영된 기억조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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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실무수련-건축기행 나는 소위 강남 8학군에서 제도교육 12년을 받았다. 어머님의 탁월한 교육열에 따른 맹모삼천의 결과로 비춰질 소지가 없지 않으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저 내 집 마련의 호구지책으로 늘 서울 변두리 끝자락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내가 살던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형식

주변으로는 늘 논이라는 농촌풍경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학교도 부족하여 국민(초등)학교 졸업 시 나의 학급 인원은 96명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졸업앨범을 보면 여덟아홉 줄로 중첩된 사람의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같은 반에서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사람이 많다보니 학급 내에

여러 분파가 공존했지만 평화롭게 공간을 나눠 썼고 왕따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초등학교 교실이 24명으로 구성되니 내 유년시절 국민(초등)학교는 한 반에 4학급이 있었던 셈이다.

대치동 유년시절에 나는 고층주거와 논밭이 공존하는 개발시대 도시와 농촌의 풍경 변화를 직접 목도했다.

내가 막연히 건축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1학년 기술시간이었다. 엉뚱하게도 기계부품을

작도법에 따라 도면을 그려가는 제도수업이 너무나도 재미있었는데, 그때는 건축학과 기계공학의 차이를 알지 못한 채, 2차원 그림과 3차원 입체, 단면과 공간의 관계에 매료됐었다. 그것의 가장 친숙한 형태가 집이었기에 건축에 대해 맹목적 동경을

품었고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장래희망은 건축가로 고정되어 있었다.

1

12년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이 무한한 자유가 가당키나 한 일인지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강 시간과 담임선생

부재로 상징되는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향유해나가는데 선배와 음주는 필수적이었다. 시절도

하 수상하여 매 주말마다 매캐한 연기 속으로 날아 들어가는 화염병의 포물선을 눈으로 쫓았고 상하의 청바지 패션을 물리적 고통과 등치시키는 새로운 공식을 배울 수 있었다. 거듭되는 가두시위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촌놈이 그 동안 몰랐던 서울 도심의 실핏줄과 같은

골목길을 발견했으며, 본의 아니게 직선과 곡선이 마구 섞인 도시조직의 복잡다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대학생활 내내 나의 관심은 건축보다는 사회를 향해 있었고 건축의 집합으로서 도시와 인문학에 심취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마냥 닥치는 대로 시집, 소설책과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어댔고, 동아리활동과 대학신문 기자생활을 통해 조직문화도 익혀나갔다.

1990년대 대학생활은 풍족했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 때는 자기가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잉여가 있었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여행자유화 조치에 따라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곤 했다. 내가 부릴 수 있었던 사치는 도서구입과 국내 답사여행이었다. 혼자서 카메라와 책 한 권 들고 안동으로, 담양으로,

부산으로 무작정 돌아다녔고, 검은 기와만 얹었다고 하면 들어가 봐야 하는 등 막무가내 여행을

해댔다. 그 흔한 여행안내서도 없었던 터라 전국 교통지도 하나 들고, 무모한 여행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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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방배동주택 ⓒ오우재, 2007 2. 부암동주택 ⓒ오우재, 2015 3~4. 부암동주택 ⓒ오우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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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과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늘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지식을 쌓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단순히 기술만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모여 이해되지도 않은 원서를 나눠 읽으며 갈증을 해소하려 했으나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광풍이

시들해지고 해체주의가 고개를 들 무렵이었는데, 기초적인 배경지식도 없이 현상만을 쫓다보니 수박의 겉핥기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리도 조급했었는지

차근차근 밟아나가기에 열정이 넘쳤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때는 성숙과 숙성의 가치를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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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도피성 입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영화 한 편을 본 일이 있다. “쉰들러

리스트”(1994년 개봉). 스필버그가 만든 오스카 작품상에 빛나는, 사실에 바탕을 둔 영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을 하나씩 구출해내는 사업가 쉰들러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었다. 전체적으로 흑백 톤이었는데 중간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군중 속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였다. 전체적인 내용은

잊었어도, 또 다른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수용소 내에서 건축가로 보이는 한 유태인 여성이 막사의 구조적 안전에 대해 독일 장교에게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장면으로, 대단히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독일 장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짓더니만 권총을 들어 아무렇지 않게 유태인

건축가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버렸던 것이다. 비록 짧은 에피소드였지만

건축가의 전문성이 생존의 문제 앞에 무용지물임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건축가의 위상이 현실세계에서는 어디쯤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내 뇌리에 박혀있다.

마지막 단기 사병의 임무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학교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건축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고, 지식의 새로운 소통창구로 인터넷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복학생으로서 마지막 학구열을 불태우며 닥치는 대로 정보를 습득하며 남은 학기를 보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건축 설계를 할 것인지 스스로 자신감이

없었던 시기였다. 다른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때라 마지막 학생 설계였던 졸업전을 통해 내 건축설계 능력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설계에 대한 욕망이 솟아오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지금의 건축가로서 내가 있기에 이때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졸업전과 함께, 동료와 후배들과 함께 운영했던 작업실의 경험도

건축가로서 발돋움하기에 중요한 자산이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략 십여 년 동안 세 곳을 전전하며 선후배들이 숙식을 함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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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교동 솔빌딩 ⓒ오우재, 2016 6. 진부시외버스터미널 ⓒ오우재, 2017 7. 횡계시외버스터미널 ⓒ오우재, 2017 8. 장평시외버스터미널 ⓒ오우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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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공동체로서 학습과 놀이를 병행한 그야말로 건축 난장이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공동작업의 경험과 다양한 인간 군상의 재밌는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었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함께 건축적 고민들과 잡스런 풍류를 공유했던 작업실 식구들은 크던 작던 각자 자신의 역할을 건축계 곳곳에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잠시 취직전선을 유예하고 심화학습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위를 받지는 못하고 수료에

머물렀다. 대학원 시절 맞닥뜨린 구제금융IMF 위기는 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를 추동했고 망설임 없이 지원한 사무실의 부름을 받아 5년간의 실무수련을 쌓았다. 이론과 실무

사이의 간극을 느끼면서 건축의 최종 단계는 디테일에 있음을 알게 해준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실제와 만나면 어떤 건축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설계라는

작업이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집을 짓는 과정이 그 어떤 것보다 보람찬 일임을 알게 됐다. 수련기간 동안 모은 돈으로 80일간 유럽일주를 감행한 것은 여러모로 무모한 짓이었다. 말 그대로

아무 계획 없이 비행기에 올랐고 자칫 미아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유럽이라는 낯선 곳 여기저기를 부초처럼 떠돌아다녔다. 서양건축사 시간에 주입식으로 암기한 건물들 앞에서 그 이름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신비한 체험을 했고, 축적된 역사와 최첨단의 오늘이 공존하는 희한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돌아와 자발적 실직 상태인 채로 소일하다가 건축사 자격을 얻었다. 여기저기 설계사무소를 호구지책으로 전전하다가 원래의 실무수련지로 복귀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제법 굵직한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거대한

주상복합건물을 설계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나는 친구, 선후배와의 오랜 작당모의 끝에 개업을 결심했고 여러 조합을 저울질하다가 작업실 후배인 지금의 파트너와 현재의 사무소를 개설했다. 그때의 결행 또한 무모한 일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아직도 나는 이 작은 사무소에 깃들여 살고 있고 아직 죽지 않고 건축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체질적으로 누구를 좋아하기는 해도 모범으로 받드는 데에는 인색한 편이다. 그래서 건축적 스승을 언급하는 게 매우 조심스럽다. 나에서 깨우침을 전달해준 스승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백여 명은 될 터이다. 셀 수 있는,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들에게는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다. 나를 지도하신 선생님들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다만 조급한 제자를 차분히 9. 후생시장 ⓒ영주시청 10. 후생시장A 가로변(전) ⓒ오우재, 2015 11. 후생시장A 가로변(후) ⓒ오우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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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셨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스승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 그분들은 나에게 좋은 스승이란

무언가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궁금하게 만드는 데 있고 끝까지 뒤에서 바라봐주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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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인 학교명과 회사명, 지명,

사람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하고 싶다.

집짓기의 괴로움 | 망작과 졸작 사이 정확히 1년 전, 땅집사향 발표를 앞두고 내 머리 속은 복잡했다.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 마당의 첫 손님이라는 부담감은 당연한 일이라 치고, 집짓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내보일

것 없는 일개 건축가가 자신의 건축 작업에 대한 일설을 펼친다는 게 좀체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단칼에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후회를 물리치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축철학이나 고준담론, 개념적 접근을 피하고 집짓는 과정에서 겪었던 실패담을 정리해보자는 마음을 먹은

뒤부터였다. 잘해왔던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잘못했던 것을 되짚어보고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건축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더 보탬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우재’라는 작은 건축집단에서 12년간 해왔던 모든 작업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되짚어보는 것은, 나에게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재밌기도 할 법 하건만, 간지 사이마다 스며있는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지난날 미욱한 처신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결과물들을 직시해야만 했기에, 유쾌한 일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오우재’의

작업이 부끄럽거나 초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매년 정리한 프로젝트

목록에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일부 작업들을 누락시켜왔고 기각된

사초들을 훑어보면 잊고 싶었던 행적들이 오롯이 되살아났기에 단순히 추억거리로 회상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점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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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하고자 할 뿐이다.

사람의 무늬를 탐구하는 인문학자들의 흔한 말처럼 세속의 일이란 어긋남의 연속이듯이, 집을 짓는 일 또한 많은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이 빚어낸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갈등을

조정하고 형태의 완성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타협과 협의의 진득한 통과의례란 피할 수 없는 건축가의 숙명일 터이다. 훌륭한 건축가들은 멋진 건축물 이전에 세련되고

전문적인 소통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공간 구성 능력,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는 현명한 시선, 미래를 선도하는 예술의지는 물론이거니와 이해당사자를 설득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해야만 좋은 건축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평소 건축이라는 단어를 대신해서 집짓기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던 것은 이런 사유에 근거한다. 내가 건축의 근본과 원리에 대한 탐색보다 처음의 생각이 구체적인 형태가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에 더 집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30

12. 후생시장B 가로변1(전) ⓒ오우재, 2015 13. 후생시장B 가로변1(후) ⓒ오우재, 2016 14. 후생시장B 가로변2(전) ⓒ오우재, 2015 15. 후생시장B 가로변2(후) ⓒ오우재, 2016


지난 작업들을 되짚다 보니, 집짓는 과정이 늘 즐거움과

함께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환희 속에는 그 만큼의 환멸도 늘 공존했는데, 상대적으로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았던 작업에서조차 준공사진을

찍을 때의 쾌감을, 설계와 시공과정에서 겪은 애로사항이 적지 않게 감쇠시키고 있었고, 하물며 아쉬웠던 작업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 없었던 것이다. 경험과 능력치가

부족했던 탓에, 젊음의 열정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소통의 부족은 집짓는 과정에서 늘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

일쑤였다. 전문적인 지식으로 자세히 설명하면 충분할 거라는 섣부른 판단, 건축주의 취향과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는 어설픈 착각, 건축의 공공성이 자본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방진 오만, 그리고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환멸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물론 집짓기의 달콤한 과실과 적당한 망각이 나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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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지만, 짐짓 위악을 과장하여 말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련의 좌충우돌을 ‘집짓기의 괴로움’으로 표현하고 싶다.

다시 정리한 작업 목록에서 지어지지 않았거나 지어질 수 없는 항목을 제외하고 결과물의 완성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구분지어 보면, 그런 대로 잘 지어진 작업,

의도대로 지어지지 못한 아쉬운 작업, 그리고 짓느니만

못한 작업,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차례대로 평작, 졸작, 망작이라 이름 짓고 싶은데, 전반적으로 평작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지만 졸작의 사소한 빈틈과 망작으로 분류되는 것들의 세부가

보여주는 볼썽사나운 광경들은 내가 해왔던 집짓기

과정에 무시하지 못할 크기로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잘 되었다고 판단된 작업들(평작)은 대체로 건축주와의 믿음이 견고한 상태에서 지어진 경우가 많았다. 시공과정의 실수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조정해가며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건축물을 완성해나갔고 지금까지 잘 쓰이는 것을 보면 기본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택 프로젝트의 경우 웬만하면 지금도 찾아가 안부를 물을 정도의 집들이 있다. 공공건축물은

시공사에 따라 완성도의 수준이 결정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직접 감리를 수행할 경우는 평작 수준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졸작이라 칭할 수 있는 작업들은 대체로 상호 신뢰가 깨어진 경우 발생했다. 건축가의

지레짐작으로 설계 내용에 대해 건축주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해 오해가 발생하기도 하고

도면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은 건축주가 실제로 지어진 공간과의 차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공건축물의 경우 시공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때, 그리고 건축주와 시공사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 설계 의도대로 집을 짓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데, 결국 소통의 난맥상의

결과물일 확률이 높다. 다른 경우로는 건축의 공공성과 사적 이익이 충돌할 때 졸작이 탄생하는

것 같다. 개인의 자산에 공공의 재원이 투여될 경우 공공성 확보에 대한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조정해줄 주체가 모호할 경우, 공공재의 사적 점유가 벌어져 이도저도 아닌 채 졸렬하게 집이 마무리된 사례가 많았다.

망작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질 때 생겨난다. 불가항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파탄이 만들어내는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가가 조정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망작은

16. 후생시장B 골목1(전) ⓒ오우재, 2010 17. 후생시장B 골목1(후) ⓒ오우재, 2016 18. 후생시장B 골목2(전) ⓒ오우재, 2015 19. 후생시장B 골목2(후) ⓒ오우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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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다. 망작은 처음부터 망작이 될 것을 예고하고 벌어지지 않는다. 언제든지 선의로 시작하고, 과정에서 애매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분쟁이 발생한다. 설계계약상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정확하게 맺고 끊는 과정 없이 두루뭉수리 넘어갈 때 망작은 어김없이 등장했던 것 같다.

땅집사향 발표 때, 나는 5개의 프로젝트를 소개했었다. 졸작 리스트에서 골라내온 이 20

작업들은 대체로 설계 시작에서 시공단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겉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외관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 이면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아름답지 못한 자국을 적어도 하나 이상을 갖고 있는 작업들이다.

개업 초 처음으로 설계했던 방배동 주택은 젊은 열정이 건축주의 현실적 감각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종 단계까지 집을 완성하는 데에 실패했던 작업이다. 도면을 통해 입체적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설계 결과물을 문서로 정리해 서명을 받아두는 습관을 갖도록 해준 프로젝트였다.

비교적 최근에 5층 규모로 지은 서교동의 근린생활시설은 집짓기의 세 주체인 건축주, 시공자, 설계-감리자의 완벽한 불협화음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지 알려줬던 21

프로젝트였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선의로 시작된 집짓기 과정, 즉 구체적인 내역 검증이나 기술적인 검토를 생략하고 구두로 합의한 채 착공된 건물은 설계도서와 상관없이

거듭되는 설계변경, 임의 시공을 거치면서 완공되었으나 미완성인 아주 이상한 결과물로 서 있다.

부암동에 지은 작은 집은 졸작이라고 부르기에는 완성도가 높은 주택이다. 다만 취향이 완전히 다른 두 건축주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건축가로서 미숙했던 점과 지역적 맥락 해석에 철저하지 못했던 무능함 탓에 뜻하는 바대로 설계의도를 구현하지 못했던 작업이었다.

영주시 후생시장과 강원도 버스터미널 개선사업은 나무와 콘크리트라는 구조만 다를

뿐, 민간 영역에 공공이 개입한 프로젝트로서 사적 욕망과 건축의 공공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한 작업이었다. 건축적 해법을 찾아가는 일은 재미있는

과정이었지만 욕망 덩어리 그 자체인 이해당사자들과 공공 영역의 관리자를 설득하고

조정하는 일은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지역적 특수성까지 더해져 시공과정의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매끈한 외피 속의 숨겨진 지난한 과정을 고려하여 졸작으로 분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사한 작업들을 일부러 외면하고 망작과 졸작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조금 모자란 프로젝트들을 통해 나는, 건축 작업의 토대로서, 일이 되어가는 과정과 이해당사자 간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괜찮은 것을 다듬어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안 좋게 마무리된 일들의 기록을 끄집어내서 반추해 보는 것은

비록 유쾌한 행위는 아닐지라도 나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청중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다소 도발적으로도 보일 나의 발표가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울림을 제공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스스로 부끄러운 치부와 생채기를 드러냄으로써 또 다른 새 살을 얻을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건축가들 모임에서 나는 종종 당선작 말고 낙선작 전시 또는 망작 전시를 하자고 제안하곤 했다. 당선작이야 심사위원들이 뽑는 일이니 결과물만 감상하면 될 일이지만, 낙선작은 부끄러움을 이유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이니 낙선작과 망작들을 모아 그

이유를 가늠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실현된 적은 없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망작과 졸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의 부끄러운 편린들이 의미를 갖게 되기를 앙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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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후생시장D6 가옥(전) ⓒ오우재, 2016 21. 후생시장D6 가옥(후) ⓒ오우재, 2016


19 : 03-04

건축가 김범준 Bumjoon Kim www.topo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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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낼러티 탐문의 건축여정

글. 김범준

TOPOS 건축사사무소 대표

1984년 건축학과에 입학했으니 35년의 건축인생을 보낸 셈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35년간 도대체 무엇을 했지? 하는 당혹감이 강하게 듭니다. 하지만 그래도 35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제법 잘 버텨왔네 라는 생각도 드네요.

1984년, 건축학과에 입학하다 내가 어렴풋이 건축가를 꿈꾸게 된 것은 중학생시절 방배동의 친구 집에 놀러갔던 일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강남에는 집장사들에 의해 단독주택들이 대량으로 지어져, 어디서

기원한 양식인지 모르지만, 대개 비슷한 구조의 이층집이었고, 내가 살던 집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집은 무언가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품격이 느껴졌습니다.

이야기 중에 친구의 아버지가 ‘건축가’이고 그 집도 아버지가 직접 설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건축가란 직업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고3이 되어 학력고사를 치루고 나니, 전공학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건축과를 적극

추천한 이는 세 살 위의 작은 누나였는데, 누나는 계열모집으로 공대에 들어가 2학년이

되면서 전공학과를 선택할 때 건축과를 떨어지고 화학공학과를 가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누나는 종종 건축과 학생들이 음악을 틀어 놓고 제도판에서 작업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건축과를 적극 추천하였고, 부모님도 ‘얘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그리고 노는 것을 즐겼으니 건축과도 좋겠다.’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중동건설 붐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건설경기는 매우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84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1학년은 전공수업 없이 공과대학 전체의 교양과목만 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두꺼운 원서를 교재로 다른 공대생들과 함께 수학, 화학, 물리 등을 배웠죠. 특히 수학은 대학원 졸업까지 필수과목으로

나를 괴롭혔지만, 건축설계실무에서 도움이 되었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수학, 물리 심지어 화학까지 건축가에게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리만 기하학이나 카타스트로피 이론 등에 관심이 생겨 책을 사고 공부해보려 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공대계열 공통과목으로서의 수학, 물리, 화학 등의 커리큘럼은 건축과 학생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방대한 내용을 공부하도록 강요합니다. 건축구조에 대한 기초적이고 실제적인 감각은 무시하고 곧바로 정역학, 동역학, 구조계산으로 공식을

외우고 문제를 푸는 방식의 구조수업 역시 문제가 많았습니다. 건축학과의 커리큘럼의

문제를 이렇게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내가 대학시절 학교 공부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1984년에서 1988년까지 나의 대학생활은

그야말로 젊음과 시간을 방탕하게 낭비한 시간이었습니다. 참 허무하게도 고스톱과 술, 34


당구를 치면서 시간을 죽였고, 학점만 적당히 따면서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핑계를 좀 대자면

당시는 학생운동이 매우 치열했던 시기라 휴교도 많았고, 나와 친구들이 살던 곳이 당시 유흥의

중심지인 강남 신사동인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전두환 정권이 야간 통행금지를 없앴고, 삼저효과로 나라 전체가 흥청망청 하던 분위기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대학 졸업자의 취업이 무척 쉬었던 시절이었죠, 요즈음 보고 싶은 책, 봐야 될 책이 너무 많은데, 책을 읽을 시간은 너무 모자란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시절입니다.

1988년, 건축학과 대학원에 입학...건축을 좋아하게 되다 건축전공과목은 학부 2학년부터 시작했는데 건축설계 첫 시간에 당시 영국 AA스쿨을 마치고 귀국하신 지 얼마 안 되었던 김병윤 강사님이 자하 하디드의 1983년 홍콩피크 국제현상설계 당선안을 보여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기존의 건축과는 매우 달랐던 자하의 조감도는

선생님에게는 충격적이었겠지만, 기본적인 건축조차 모르는 나에겐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1학년 겨울방학 건축과 고교 동문회에서 코르뷔지에를 모른다고 웃음거리가 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니 무리도 아니지요. 2학년 건축설계수업의 몇 주간은 줄긋기와 제도 글씨 쓰기를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실무에서도 캐드 CAD가 도입되기 이전 이었으니 건축제도가 매우 중요 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 설계실에서 몇 시간씩 선을 그리는 건 고역에 가까웠습니다. 2학기에 주택설계

등을 과제로 하였으나, 건축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설계수업에서는

약간의 손재주 혹은 감각으로 3학년부터 계속 좋은 점수를 받았고 졸업설계에서 상도 타고나니 졸업할 무렵에는 큰 문제를 못 느낀 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간 탓에 대학4학년 당시 내 나이는 만 21살이었고 취직하기엔 좀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한양대 건축과 대학원은 교수님과 연구실을 함께 쓰고 있었고, 방학과

관계없이 주 6일 아침 8시 반 출근, 저녁 6시 퇴근이 규칙이었습니다. 월급 없는 직장생활이었죠. 아무튼 선배들의 논문을 위한 번역 일과 연구실의 자잘한 잡일들과 교수님 심부름 외의 많은

시간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건축역사, 건축이론, 건축가의 작품집 등을 보면서 건축에 대한 애정이 싹텄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인간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고, 알아갈수록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1993년, 공간건축空間建築에 들어가다. 대학원과정 수료 후 여러 사정으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논문을 병행했습니다. 연구원 근무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연구 보고서는 일단 장기연구에 가까워, 타당성 분석에서 현상설계까지 1년에 처리해야 할 프로젝트의 수가 많고 하나의

프로젝트도 각 단계별로 건축주 보고, 각종 심의, 인허가 등 여러 번의 중간 마감을 거쳐야 하는 건축설계보다는 작업량이나 마감 스트레스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보고서를 아름답게

꾸며야 하는 건축설계란 직업의 특성까지 고려하면...... 어쨌든 1년 8개월간의 연구원 기간 동안

졸업논문도 끝내고, 연구원을 떠나 건축설계사무소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당시는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연구원 티오T/O, job opening가 생기면 대부분 정식연구원으로 뽑아주던 시절이었지만

건축설계를 하고 싶다는 정열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함께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하던 동료가

그 당시 소위 ‘PD병’에 걸려서 연구소를 그만두던 그런 시절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충분히 젊었습니다. 어쨌든 공간건축에 지원해 합격했고 십수 명의 동기들과 1993년 1월

3일부터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원에서 많은 시간적 배려를 받았으나 퇴근 후 학교 연구실에 가서 논문을 쓰다가 스티로풀을 깔고 잠드는 생활은 건강에 좋지 않았고, 결국 결핵에 걸려 최소 1년간 독한 결핵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아마도 연구실 바닥의 먼지가 직접적인 병인이

된 것 같습니다. 먹으면 눈이 핑 돌만큼 어지러운 결핵약을 매일 먹으면서 근무하기에는 당시 공간건축의 환경이 너무 열악했습니다. 일상화된 야근, 철야는 물론이고 (당시는 무려 주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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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였습니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 9개의 제도판이 있었고, 작업하면서 담배를 피우던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동기들은 공모전 수상 등 나름 경력들이

화려했고, 무엇보다 학창시절 작업실에서 활동을 해서 모형 칼질조차 매우 능숙했습니다. 당시 캐드로는 축선과 코어정도만 그리던 시절이었음에도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뤄서 공간건축의 첫 해외프로젝트 수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동기도 있었죠. 몸은 힘들고 자존감은 낮아진 상태였지만 경쟁심은 강했던 나를 지탱했던 건 타고난 인내심 같은 것이었습니다. 목표를 위해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낸다, 라는 느낌보다는 주어진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적인 정서의 인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축실무 초반에 배워야 할 것들 건축가로서 가장 중요한 공부는 당연히 건물을 실제 지을 수 있는 도면을 만들어

내는 빌더builder로서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최종도면을 만들기 위해선 가장 기본적인

계획능력은 물론이고 여러 대안을 검토하고 건축주에게 여러 차례 계획안과 대안들을

브리핑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은 물론 수많은 협력업체와 협의하고 이끄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해야 하고, 기술적으로는 건축 관련 법규를 검토하고 각종 심의와

인허가를 통과시키고 자재 및 구법의 장단점 및 적용방식을 검토하는 엔지니어어로서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건축법규, 건축 재료와 구법, 디테일 등에 대한 지식, 다양한 분야의 협력업체와의 소통능력,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 언어 혹은 이미지를

능숙하게 다루어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능력 등 기본적으로 쌓아야 하는 지식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사실 이런 지식들을 기존의 도제식 말고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해왔을 테고, 나도 그중 하나이지만 지금도 그게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7~8년 전에 건축계획수업을 기존의 건축계획 책을 교재로 하지 말고, 실제 실무를 하면서 배운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달라는 어느 교수님의 요청으로 1년간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전에 설계사무소를 다니면서 8년 정도 건축설계강의를 해본 경험이

있었지만 사전에 별 준비 없이 그간의 건축설계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과제를 크리틱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수업이었고 결국 1년 만에 손을 들었습니다. 건축학과와 건축공학과 합반으로 100명 정도의 인원을 대상으로 교재를 만들어가며 강의하는 것은 설계사무소를 다니면서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나 스스로 그런

체계적인 실무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또 어찌 보면 건축설계실무라는 것이

순수학문이라기 보다는 실제 프로젝트를 해나가면서 각기 다양한 상황과 문제에 부딪히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인데 강사의 강의로 이것이 가능한가 라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캐드나 3D 툴을 배울 때 책을 한 권 떼는 것보다 실제작업을 반복적으로 훈련해야 결국 그 프로그램이 나의 몸에 흡수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결국

실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해내야 하는 작업의 양, 프로젝트마다 다른 수많은 다양한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해내는가에 따라 각 개인의

작업능력과 전문지식의 수준을 대부분 결정합니다. 디자인적 감수성이나 개성과 달리

실무능력의 흡수는 대략 4~5년차 정도가 되면 개인 간의 차이가 매우 커지므로 가급적

5~6년차 까지는 실무능력을 키우는데 집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건축설계실무 능력은

개인이 따로 시간을 내서 어떤 책을 보고 공부해서 따라 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인별 실무 능력의 차이를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어떤 프로젝트를

어떤 사람들과 경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첫 번째로 프로젝트의 규모가 너무 크지 않은 편이 좋습니다. 많은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서는 화장실 또는 코어계획만 하다가 프로젝트가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체 설계과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하는 작업이 전체 설계과정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번째 어느 정도 퀄리티를 요구하는 프로젝트가 좋습니다. 그래야 다양한 재료들에 대한 조사도 해보고, 디테일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프로젝트들은 36


대개 건축법규도 좀 더 치밀한 수준으로 검토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세입니다.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더라도 각 팀원들이 배우는 정도는 모두 다르고,

어떤 팀장이든 잘하는 직원에게 더 중요한 일을 맡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실 대형사무소에서 건축설계실무를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대략 1990년대 말 이후 우리나라 건축업계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생깁니다. 몇 개 안 되는 소수의 설계사무소가 급격히 대형화되면서 턴키Turn-Key나 현상설계로 발주되는

공공발주 대형프로젝트를 대부분 수주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대형사무소는 공채로 뽑은

주요 인력은 현상설계나 T/K팀으로 돌리고 그 팀들이 수주한 프로젝트들은 사내에 실시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팀을 (주로 경력직을 뽑습니다) 두거나, 저렴한 가격으로 도면을 생산하는

실시설계 전문외주업체에 하청을 주게 됩니다. 결국 대형설계사에 입사한 신입사원들은 경력의 대부분을 3D 모델링이나 보고서, 파워포인트 작업을 하게 되고, 그 작업들 중에서도 각자의

능력에 따라 편중된 업무를 연속해서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건축실무 능력을 거의 가지지 못한 채, 유학을 가거나 건축사 시험준비 학원에서 속성으로 실무를 배워 건축사 자격을 얻어 자신의 사무소를 열게 됩니다. 흡사 20세기 초반 포디즘의 도입으로 노동자들이 전체 상품의

기획이나 생산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혹자는 이를 건축설계영역의 전문화 혹은 다양화라고 말할지 모르나 내가 보기엔 매우 우려되는 기형적 상황입니다. 물론

기존 건축과 도시에 대한 탁월한 비평서, 이론서를 발표하거나, 실험적인 페이퍼 아키텍트로서의 명성을 쌓고, 그를 바탕으로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한다면 실무적 능력을 갖춘 이들을 고용해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건축가들이 유명해서 많이 알려졌을 뿐 현실에서의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1997년 이후 아틀리에에서 대형사무소로 변화 앞서 언급한대로 1997년 IMF 구제금융은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건축설계사무소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IMF의 즉각적인 영향은 모든 분야에서의 구조조정이었고, 내가 다니던 사무소도 IMF 직후 설계인원의 1/3 정도를

감원했습니다. 그러나 건축설계시장과 생태계에 미친 더 지속적이고 중요한 영향은 그 이후 몇 개의 건축사무소가 대형화하면서 그 몇 개의 대형사무소들이 전국의 대형 공공 프로젝트들을 거의 독식하게 되고 중소규모 건축사무소들은 공공 프로젝트의 수주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내가 근무한 공간건축도 그 중 하나입니다. 1993년 공간건축에 입사했을 때 설계실 근무인원은 대략 80명 정도였습니다만 2008년 무렵 공간건축은 감리를 포함해서 6백 명이

넘는 조직으로 확대됩니다. 나는 공간건축에 입사할 때 막연하지만, 대략 6~8년간 근무하고 건축사 자격증을 딴 후 독립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대부분의 건축가 지망생들의 일반적 코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차가 되던 1997년 한국에

소위 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면서 개업 중인 거의 모든 설계사무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회사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해져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대형 공공발주 프로젝트에서 <설계시공일괄입찰방식> 소위 턴키발주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공사발주 물량이 감소하고 수주 경쟁이 과열됨에 따라

설계 평가의 공정성 및 투명성과 전문성 확보를 위한 개선책이 더욱 필요하게 되어 설계시공

일괄입찰방식(턴키발주방식)을 적극 도입하기로 한다”라는 정부 발표문이 보이는데, 내 생각에

실질적 이유는 그 무엇보다 턴키방식이 공무원들이 좋아할만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무원들이 턴키로 설계+시공의 컨소시엄만 선정하면 건설업체가 예산에 맞추어 설계부터 시공까지 책임을 지고 건물을 완성해 주고, 건축주인 공무원은 문자 그대로 열쇠만 돌려 열기만 하면 되는

턴키방식은 설계사와 시공사를 각각 선정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무엇보다 정부예산에 맞추기 위해 설계와 공사업무 내내 신경을 써야하는 공무원의 고민을 획기적으로 없애주는 방식입니다. 내가 다녔던 설계사무소는 1998년 턴키방식이 활성화 되는 초창기 많은 건설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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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키공모방식과 건축사무소의 대형화가 남긴 그늘 턴키도입 초기만 해도 대형건설사들은 건축설계 특히 경쟁방식의 설계공모방식에 무지했고 따라서 설계안이나 설계 작업프로세스에 대해서 설계사무소에게 거의 맡기고 “잘

부탁합니다.”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상황은 급격히 바뀌게 되는데 그 원인과 양상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설계안의 방향 설정이나 최종안 선정 심지어 투시도를 비롯한 모든 제출물까지

건설사가 깊숙이 관여하고 결정권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설계사의 소장이 1년에 1개 이상의 턴키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반면 건설사의 턴키 담당들은 한해에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관리, 감독하게 되고 결국 단기간 내에 여러 설계사와 여러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되면서 스스로 설계사무소의 소장보다 턴키에 대해선 전문가란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설계사가 별도의 사무실을 얻어 보안을 강화한다던지, 보안 및 통제의 용이성을 위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디자인회사를 아예 합사 사무실에 불러들여서 일하게 하는 등, 대형 건축사무소가 건설사에게 내놓는 새로운 서비스들은 곧바로 모두가 지켜야 할 기준이 됩니다.

둘째, 설계시공 일괄입찰방식에서 설계사무소는 수억에서 수십억의 설계비를 놓고 다투는

경쟁이지만 건설사들은 수백억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공사비를 놓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설계사와 건설사는 하나의 컨소시엄으로 참가하지만 실제적으로 건설사가 컨소시엄의 주관자고 설계사는 건설사에게 돈을 받고 참여하므로 건설사가 원청, 설계사는 하청이 되는 구조입니다. 당락을

결정하는 점수에서 PQ(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점수는 비슷하고 공사비도 비슷하게 합의되니 결국 설계점수가 몇 백억 몇 천억의 수주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그 이전의

설계사무소들 간의 현상설계경쟁이 건달들이 맨주먹으로 맞짱 뜨는 와중에 양아치들이 간혹

회칼을 들고 반칙을 저지르는 수준이었다면 몇 천억의 수주를 다투는 턴키판은 흡사 기관총을 든 갱들의 싸움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꽤 큰 현상설계에 떨어지고 나서 “우리가 하고 싶은 계획안을 제출한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말하던 낭만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공공프로젝트의 턴키발주방식이 국내 건축사무소들의 대형화와 생태계에

새겨놓은 많은 것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건축설계디자인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생각을 해보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수백, 수천억의 수주를 결정하게 됨으로써 설계진행과정과 결과물에서

건축적 담론은 사라지고 심사에서 이기기 위한 모든 방법이 동원됩니다.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할 때 각 대안별 메인 투시도들을 걸어 놓고 소위 투시도빨이 잘 받을 안을 선택하는 사무소도

생기고, 국내 심사위원들(건축부터 구조, 기계, 전기 토목, 조경 등 분야별 교수님들이 대다수)이 선호하는 스펙터클한 안을 만들기 위해서, 역시 아시아를 비롯한 국제현상에서 요구되는

스펙터클한 건축을 구사하는 스타건축가들의 디자인이나 표현 기법을 거리낌 없이 모방하게

됩니다. 그럴듯한 그림에 대한 건설사들의 집요한 요구를 한정된 기간 내에 (그나마 쓸모없는 각종 보고들로 더욱 작업 시간은 줄어드는) 한정된 체력, 그리고 한정된 우리들의 실력에서

대부분은 쉽게 모방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또 매우 많은 수의 예비 심의위원들에게 홍보를

해야 하고 건설사는 전국에 있는 현장소장들에게 계획안의 홍보를 맡깁니다. 따라서 건축설계

컨셉은 쉽고, 명료하며 동시에 강력하게 기억될 수 있는 슬로건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보고서작업 팀에서는 그런 단어와 문장을 찾기 위해 별도의 작업을 진행하고, 때로는 계획안과 관계없는

개념이 만들어 집니다. 심사에서 보여 지는 것을 제외한 부분은 가장 저렴한 방식이어야 하고,

따라서 재료와 디테일의 수준은 조악하고, 내부공간과 프로그램의 기능성도 떨어지는 결과물이

됩니다. 그것은 다시 그러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턴키 외에 현상설계 등의 프로젝트에서도 투시도를 잘 뽑아내는 건축가가 사무소에서 인정을 받는 상황이 됩니다. 무엇보다 대형사무소를 중심으로 실시설계의 외주가 일반적 방식이 되어 빌더로서의 기본적 능력을 배우지 못한 건축가가 양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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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KAI 신인건축가상 수상 건축설계의 해외진출은 공간건축을 창립하신 김수근 선생님이 남들보다 일찍 꾸어오던 꿈이었던 것 같습니다. 1971년 파리

퐁피두센터 국제현상 참가를 시작으로 1975년 국내 건축사사무소 중 최초로 이란의 엑바탄 주거단지의 설계를 수주합니다. 끝내 지어지지는 못했지만 선배들이 남긴 글들에서 그때의 기쁨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도 해외진출의 모색은 계속 되었고 1995년에는 말레이시아의 수도에 대형 콤플렉스타운인

비전시티를 수주하게 됩니다. 나도 1997년 공사현장의 설계지원을

위해 쿠알라룸푸르에 파견되어 3개월여를 보냅니다. 2000년대 중반 턴키시장 등으로 몸집을 불린 공간건축은 해외설계시장에 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필리핀 지사를 시작으로 앙골라, 알제리, 카자흐스탄 등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해외 프로젝트를

수주합니다. 나의 경우 2006년 소장이 되면서 설계소를 맡은 후 2년간 국내 턴키 1개와 10개의 해외 프로젝트의 프로모션 및

계획설계를 진행하게 됩니다. 계획안을 쉼 없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전혀 건축의 질과 무관한 건설사들의 다양한 요구에 대응해야하는 것에 피로감을 심하게 느껴 왔고, 설계심사과정의

부조리와 심사위원들의 안목과 공정함 부재에 진저리쳐지는 상황에서 빠른 속도로 설계안을 제안하고 실행해야 했기에 오히려 요식적인

디자인 대안결정 회의 등이 없이 상대적으로 온전히 디자인 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2007년 말에는 소장이 어느 정도의 디자인 결정권을 가진 이후 진행한 프로젝트들을 출품해서

이뎀건축의 곽희수씨와 함께 ‘KAI신인건축상’(2008년 이후 문광부의 ‘젊은 건축가상’으로 상급이 변경됨)을 수상하고 구, 서울역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건축문화제에서 첫 개인 전시회를 여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2013년, 공간건축을 떠나 TOPOS로 독립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고 해외설계시장에서 새로운 수주는 물론 기존에 진행하던 사업도 중지되고 설계비의 지급도 막히는 등 공간건축은 성공적 해외진출의 결과와 다르게 더 큰 재정적

피해를 떠안게 됩니다. 게다가 국내에서 진행되던 굵직한 프로젝트

몇 개가 동시에 중단됩니다. 약 1년간 직원 급여가 지불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턴키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건설사에서는 왜 직원들이 야근을 하지 않느냐 하는 독촉이 끊임없이 제기됐었고

내부적으로는 1년째 월급을 못 받고 있는 직원들에게 야근을 하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때마침 개인적으로 당뇨가 생겼음을 우연히 알게 되고... 결국 마지막 턴키를 끝내고 퇴사할 것을 결심합니다. 다행히 마지막 턴키에서 당선이 돼서 홀가분하게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의 오리지낼러티?

1

작업의 프로세스이든 결과물로서 건축의 스타일이든 자신의

건축 작업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매우 1. 2007년 KAI신인건축가상 전시 패널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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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합니다. 자신의 오리지낼러티가 많은 사람들이 인정과 찬사를 받고 좋은 작업의

기회가 많아지는 계기가 되면 더욱 좋겠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만으로 건축가의 인생은 더욱 흥미롭고 의미 있어진다는 생각입니다. 건축에 대한 자신의

오리지널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사는 세상이나 자신 스스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어찌되었든 사회와 삶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오십을 넘겨보니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나 목적이 점점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나뿐 아니라 동년배 친구들이 대부분 그러한 듯합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는데 ‘직장에서 인정받기’‘열심히

돈 벌기’ 혹은 ‘가족을 위한 희생’ 외에 다른 것이 없다면, 또 얼마 후에는 그 능력마저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무할까요? 사실 대부분의 50대 직장인들이 겪는 문제이죠. 건축가가 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건축가로서 자신의 오리지낼러티를 발견하고 쌓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실 나도

정답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과정 중에 있습니다만, 우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에서 읽은 다음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나에게 무언가를 플러스 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이어지는 글에서 하루키는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가 유일한 기준이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정보와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마이너스 해나간다는 말에는 깊이 동감하지만 ‘즐거운가?’가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은

소설가에게는 적합할지라도 건축가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건축은 개인의 선호를 넘어 보다 공공적 타당성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더라도 소설가 스스로 감수하면 그만이지만 (출판사도

약간의 피해를 보겠지요) 매우 큰 금액과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모여야만 만들 수 있는 건축, 최소 몇 십 년은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세워져 있어야 하는 건축이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건, 사회적 경제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때문에 건축가는 자신이

사는 시대정신zeitgeist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실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문화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필요하겠죠. 물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공부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은 가능합니다. 특별히 건축주가 건축가의 지식과 안목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건축법규와 건축실무만 알아도 충분히 전문직으로서 건축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문직으로서의 지식 이외에 역사와 동시대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권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여러분이 건축가로서 더 좋은 건축 작업을 할

기회와 능력을 높여주는 동시에 그 공부가 여러분의 삶을 더 풍부하게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거라는 이유에서입니다. 20대, 30대는 상대적으로 많은 월급과 시간, 성적 매력을 가진 친구들이 훨씬 더 신나는 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지요. 매우 부럽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편력도 직장도 심지어 사랑스러운 자식도 영원히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경우 오십을 넘긴 친구들의 삶이 너무 권태롭고 심지어 위험해 보입니다. 그래서 종교에 귀의하는 친구들도 많아지더군요. 공부 또는 교육이 최고의 노후복지라는 말이 점점

납득이 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사회와 삶, 문화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건축가란 직업의 커다란 장점으로 느껴집니다.

요즘도 나는 내 작업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주말마다 산에 가거나 자전거를 타는 50대가 아니어서 행복합니다. 20대의 건축과 학생이라면 서양의 역사책부터 읽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학문적 개념어, 사회제도 등은 서구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서양미술이나 건축의 역사는 끊임없이 당대 이전의 역사에 대한

인용이거나 계승이거나 극복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언젠가 세상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근대적 역사관을 기반으로 새로움과 스펙터클의 가치를 향해 달려온 서구건축의 한계가 드러날 때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서양의 역사를

공부하시기를 권합니다. 아마도 역사공부 이후에는 어떤 분야의 책도 더 쉽고 재미있게 읽힐 겁니다. 40


19 : 03-04

건축가 김태만 Taeman Kim www.HAEAHN.com


실패의 역사 (to be) unbuilt

글. 김태만

㈜해안건축 대표

건축 설계를 업으로 해온 시간들이 나이의 절반을 넘긴 듯하다. 이후로도 딱히 다른 업을 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없는 걸 보니, 이 일을 더 잘해야 버텨내겠군 하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다.

건축계 어떤 선배가 흘려 들으라는 듯 말했다. 유명세를 얻는 건, 좋은 작품을

통해서보다는 구설에 오르는 것을 통해서가 더 빠르다고. 그래서인가 미디어는 온통 ‘기사거리’의 기준선을 통과한 것들로 넘쳐난다. 유명세를 얻고자 하는 게 부질없는

것임은 차치하고라도, 그 말 자체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적어도 건축계 내부의 논의가

아니라 대중의 관심과 논의에 있어서는. 1967년에 지어진 <부여박물관>의 왜색 논쟁은 아마도 김수근 선생의 이후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게다. <자유센터>와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지금 건축가들의 작업을 다시 돌아보게 할 게 분명하다.

현재 자의 반 타의 반 건축계 대표주자이고 공공건축정책의 선봉에 계신 분은 광화문광장 논란 때문에 오히려 더 자주 세간에 오르내렸다. 반면 그가 한 평판 좋은 건축 작업들이

꽤 있는데 별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오래 가는 좋은 작업이 주목 받는 건 참 드문 일이다. 어쩌면 그걸 의식하지 않는 게 맞을 게다.

논란은 건축가를 생각하게 하고, 변하게 하고, 한편으로 다져지게 하는 모양이다. 길지

않은 내 작업의 행로에도 적지 않은 구설과 실패들이 얽혀 있다. 한 10여 년은 무슨 일을 했는지 별 기억이 나지 않기는 한데, 사건이 있기는 했다. 1990년대 후반 연이어 열리던 고속철도 현상설계 중 하나인 <부산역사 현상설계>. 제출 마감시간을 몇 분 넘겼다.

접수는 했으나, 심사 평가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그 큰 현상에 그 고생을 했는데.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야박하기도 했지만 아마추어 같았던 시절의 실패, 주니어 때 겪었던 큰 트라우마다. 2006년 경 <서울시청사> 턴키에서는 한 시공사-설계사 컨소시엄이 제출 시간을 놓쳐 접수조차 못했다. 몇 달을 수십 명이 수십억의 비용을 들여가며 준비한

수천억 공사 기회가 물거품이 된 것이다. 건설사나 설계사나 적잖은 후폭풍이 있었을 터. 별 관심은 없었는데, 어린 시절의 실패와 새삼 오버랩 된다.

2008년에 설계하고 2011년에 완성되었던 <세빛섬>은 소위 ‘나쁜 worst ’ 건축물 중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원했던 것은 한강을 활성화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었고, 《과학동아》가 다룰 듯한 흥미진진한 설계-시공-조정 방식을 가졌지만, 그래서 영화 ‘마블 어벤져스’에도 잠깐 등장했지만, 정작 더 오른 내린 건 프로젝트의 배경이나 관련 행정에 대한 구설들이었다. 더 공들여 운영하면 한강의 자산이 될 수 있는 건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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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에 <세빛섬> 외에 <서울추모공원>과

<여수엑스포국제관>을 담은 자료들을 전시했었다. 뒤돌아 보면 모든 작업이 모자라고 아쉬운 게 우리네 특성이니, 전시 자체에 대한 비평이 있는 것은 감수할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

전시는 내용을 떠나 소위 큰 설계사무소 대표들이 참가한다고, 그게 옳으냐고 구설에 올랐다.

토건족이란 종족 분류가 있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누구는 설계를 말로만 하고 정치로 하는 줄 알았나 보다. 혹은 우리 건축계에 베니스비엔날레가 소수의 누군가를 위한 금단의 영역이나 마지막 보루 같은 무엇이었나 보다. 얼결에 전시에 발을 들여놓으니, 원하지 않게 주변이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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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한 전선을 확인하게 되었다. 내 작업이 아니라. 부질없는.

반복되는 실패의 역사를 통해 성장한다. 적어도 변화한다. 실패를 통해 성장하고 다져가는 것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제 그 시간들 위에 새로운 시도들을 더해간다. 하여, 몇 가지 대표적 실패의 역사를 남긴다.

인천공항 T2 확장(2017) 인천공항에 드디어 제2터미널이 문을 열었다. 제1터미널은 그리 최첨단 룩look은 아니지만, 적당히

쾌적하고 이제는 정들어서 한국적 분위기도 느껴지는, 무엇보다 일사천리 수속으로 나도 세계 어느 공항보다 만족도 높게 기억한다. 2터미널이 그것을 능가하리라는 기대치를 갖는 것은

당연지사. 새 집이니 왜 좋지 않겠냐 마는, 이모저모 뜯어보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2011년, 일천한 공항설계 경험 탓에 프랑스 adpi, 미국 KPF와 팀을 짜서 참여했었다. 산과 바다의

일렁임을 터미널에서 느끼며 인천에 도착하게 하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봉황을 상징했다고

홍보되는 현재의 안에 밀려 2등. 헌데, 이제 새로 완공된 2터미널에서 예전 현상안을 다시 꺼내본

듯한 기시감을 갖는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랜드사이드 콘코스 인테리어를 결정했다는데.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내가 한 작업들에서도 누군가는 낯선 이의 향기를 발견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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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제2터미널의 개장 직전, 그 터미널의 확장을 위한 또 한 번의 현상공모가 있었다. 현재 완성된 두 개의 앤틀러에, 원래 마스터 플랜대로 2개를 더해 바야흐로 제2터미널을 완성하는 내용이다. 기존 지어진 디자인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일이니, 건축가로서 마음껏 해보지 못할 아쉬움이 한켠에 남기는 한 일. 하지만 터미널 진입램프를 둘러싸는 두 개의 팔을 만드는 일이라, 어찌 보면 공항의

인상을 이제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였다. 다시 한 번 우리네 공항에 대한 기대를 곱씹게 됐다. 왜 밋밋할까? 간사이나 베이징공항, 센젠공항, 두바이공항 같은 비정형 초절정 기술을 구현한 공항이 난무하는 시대에, 한국에

도착했다는 경험이 물씬한 터미널을 만들 수 있다면.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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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빛섬 ⓒ김용관 2. 추모공원 ⓒ해안건축 3. 인천공항T2, 2011 ⓒ해안건축 4. 인천공항T2확장, 2017 ⓒ해안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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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터미널의 공간은 봉황 레토릭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제1터미널보다도 다소 밋밋한 외관과 내부공간의 체험을 주는 것 같았다. VE 하면서 이것 저것 엄청 빼냈을 게 분명하다. 그럼 스케일만 남고, 감동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같은 자리에 또 한 번 현상에 임하면서 가진 목표는 여행에 대한 기대를 주는 것 그리고 도착의 안도감을 주는 것이었다. 터미널을 진입하면서 느끼는 체험과, 티켓을 들고

앤틀러를 따라 게이트로 가면서 느끼는 체험,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 활주로에서 5

바라보는 터미널 광경이 주는 도착의 경험이었다.

설계하면서, 또 사용하면서 느낀

인천공항은 가성비가 엄청나다. 운용 효율성 면에서도 그렇고, 빡빡한

공사비 예산으로 만들어낸 건축물인

것을 생각하면 또한 그렇다. 막 완공된 터미널에 덧대어 두 개의 윙을 만드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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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니, 기존 구조와 어휘를 존중하는 것은 필수다. 인천공항공사가 감내할

재료와 기술과 예산 쓰임이 꼼꼼히 학습에 학습을 거친 다음이니, 200퍼센트 실증적인 적정 기술을 시도하자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였다. 거기에 새로움에 대한 체험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기.

그래서 우리는 채광 방향과 승객 진행방향 시선을 고려해 조각된 단위 모듈을 200여

미터 반복해서 리드미컬한 경험을 만들었다. 비정형이지만 철저히 전개 가능한 곡면들로 단위모듈들을 엔지니어링 했으니, 가성비 높은 인천공항 건설의 전통은 유지했다. 그

리듬이 앤틀러 내부에서 마디 마디를 만들어 내니 긴 통로가 풍부해지겠다. 차를 타고

터미널을 들어오면서 이 리듬들을 외부에서 느끼니, “와! 공항이다.” 할 만하다. 비행기 창

밖으로 머리를 디밀고 도착할 터미널을 바라보는 여행객에겐 부드러운 아치들이 게이트의 배경이 된다. 셔터를 누른다. 높은 가성비를 유지하면서도 고만고만하지 않은 체험을 만들어낼 만하다 싶었는데,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다. 일장 춘몽.

세운4지구(2017) 근래 을지면옥의 보존이 이슈화되면서 노포(오래된 점포)나 지역의 보존, 특히 세운지역의 역사성 장소성과 개발방식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국제지명현상설계에 참여했던

세운4지구는 조합과 SH가 추진하며 10여년 이상 공전해오던 곳이다. 이미 2004년

아이젠만과 팀을 이뤄 참여했던 기억도 살아나는 땅이니, 같은 프로젝트로 두 번의 현상 참여라는 흔치 않은 내력이 또 이어진다. 그 사이 서울시장도 여러 번 바뀌고 이 땅에 대한 시와 중구의 동상이몽도 여러 라운드를 거쳤다. 대책 없는 존치, 또 가로를 일부

살린 중소규모 블록단위 재개발로 결정된 다른 블록들과 달리, 이곳은 전면 재개발로

결정되었다. 그 와중에 상권은 이미 쇠락했고, 내부는 이미 사람의 흔적이 없다. 현상의 조건은 기존의 도시 조직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생존 가능한

프라임급 오피스군들과 5성급 호텔을 포함하는 고밀도의 개발로 사업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해외 4개사, 국내 4개사의 지명현상에서 2등을 하며 선택받지 못한 결과.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팀들이 옛 조직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방향을 잡았다. 우리의

도전은 옛 조직과 현대적 건물 유형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것이었다. 골목길

상권이 성행하는 요즈음, 경쟁력 있는 리테일러들이 유치된다면 옛 조직 자체는 매력적일 8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다. 풀어야 할 문제는 그 상부 조직. 종묘로 인해 제한된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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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인천공항T2확장_2017 ⓒ해안건축 8. 세운4지구 ⓒ해안건축


내에, 낮으면서 고밀도인 오피스와 호텔들을 배치하면, 재해석해 낸 옛 조직들은 지하상가와

다름없는 환경에 처하기 십상이다. 어떻게 이 충돌을 풀어내느냐에 디자인의 향방이 달려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제안은 다른 안들에 비해서는 다소 극단적인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 북측의 종묘와 동측 대로를 향해 모든 오피스와 호텔을 집중하고, 서측 세운상가와 남측 청계천을

향해서는 저밀도 만을 배치하는. 해서 옛 조직은 2층의 저밀 조직을 유지하고 그 상부에 작은 스케일의 레지던스, 마치 미니 빌딩 같은 것들이 섞여있는 방식이다. 공간을 조직하는 방법은

다양한 스케일을 믹싱하는 방식이다. 건물의 스케일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가로의 위계가 세 가로에서 동맥에 준하는 것까지, 각층에서 만나는 오픈스페이스들이 작은 마당에서 큰 광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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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기까지.

기대효과는 단순하다. 새로 살려진 가로에서는 항상 바람을 느끼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뜨는 햇살과 지는 햇살을 받아낼 수 있다.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조직의 미래를 담보하는 조건이

있을까? 건물을 짓고 도시공간을 상상하고 구현해내는 것이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사람들이 공간에 애정을 주는 패턴은 고정되지 않는다. 공간이 활성화되는 것은 물리적 형태가 영향 미치는 것 이전에, 혹은 상관없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맥락 하에 이루어진다. 바뀌는

행위와 조건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의 흐름을 버텨내는 도시공간의 구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시간을 견뎌내고 조건 변화를 견디어 내는 물리적 구조를 고민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도시재생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설계에서. 공간을 활성화하는 조건에는,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상상력에 운영자들이라는 주연이 필수적이다. 소상공인부터 도시주거 입주자, 프라임 오피스의 입주사, 서울 최고의 호텔을 운영하려는 운영자들까지. 요구의 층위는 다양하고,

각각의 요구는 종합적이지 않다. 맡은 구역, 담당한 건물의 내부공간은 원하는 방향으로 미세하게 조정해 나갈 것이고 그 미세한 차이가 각각 운영의 성패를 크게 좌우 하겠지만, 하나의 타운에는 이렇게 휘몰아치는 다양한 요구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뼈대가 필요하다. 성공 이전에 생존 혹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만한. 적절한 특수해와 보편해의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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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문예회관(2018) 공연장은 참 어렵다. 진입장벽이 높다. 고척돔 옆에 1000석 정도 공연장을 설계납품하기는 했는데 불운하게도 지어지지는 않았다. 다목적홀이 아닌

전용 콘서트홀은 더군다나 기회도 적다. 부천문예회관은 그 흔치 않은 도전 기회의 하나였다. 역시 실패로 끝났지만.

지역마다 흔히 지어지는 다목적홀은 플라잉 로프트와 프로시니엄 아치,

그리고 몇 개의 후무대를 갖는 형식이다. 요즘은 뮤지컬 공연이 대세지만,

그 외에도 오페라, 오케스트라, 무용, 각종 강연, 그야말로 다목적이라 사실 어느 것에도 집중하기 힘드니, 정작 홀 디자인의 방향성은 무난해진다.

음향이 중요하지만 그 다양한 종류 공연들의 잔향시간을 만족시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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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세운4지구 ⓒ해안건축 13. 부천문예회관 ⓒ해안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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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효율적인 작업이 아니라, 낮은 값을 택하고 결국은 전자 음향에 의존하는 홀을 만들게 된다. 클래식 콘서트를 목적으로 하는, 후무대도 없고 프로시니엄과 플라잉

로프트도 없는 홀은 그야말로 악기처럼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다. 디즈니 홀 음향작업으로 유명해진 나가타 어쿠스틱스와 그렇게 홀을 조각해 나가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과정이었다. 최근에 서울에도 바인야드vineyard(깊은 산속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놓여 14

있는 포도동산에 둘러싸인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하는 타입_편집자 주) 콘서트 홀이

오픈해 새로운 경험을 주고 있지만, 모든 홀에 바인야드 타입을 적용해보려 애쓰는 것은 발주처들이 갖는 일종의 건축적 환상이다. 객석이 수천 석에 달하지 않으면. 음향적

기준에 올인 하는 전문가들은 역시 콘서트 홀은 슈 박스 shoe-box(객석 정면에 무대가

있고, 무대 한복판에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 타입_편집자 주)라고 외친다. 들여다 보니,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편견이고, 슈 박스는 올드

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편견. 부천은 바인야드 타입 홀을 만들기 적당치 않은 상황이라,

슈 박스 타입에 기본을 두고 바닥과 벽과 천정과 발코니 등을 굵게 또는 미세하게 조각해 나갔다. 우리의 콘서트 홀 추억이 상당부분 1988년 개관한 부채꼴 평면의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에 머물러 있으니,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반사판만 있는 게

아니라 천창이 있는 콘서트 홀도 만들고 싶었고, 무엇보다 위계가 나눠지듯 층이 나눠지는 발코니 객석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앞뒤 좌우 모두 몸을 뒤틀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집중하는 곳. 합창단원도 독주자도 무대에 서면 넓은 한판의 객석이 나를 주목하고, 내가 그 관객과 호흡하는 곳. 우리가 만든 좌석을 예매하려고 온라인 창에서 좌석 등급표를 이리저리 스크롤 해보면 아마 두 개 구역 정도로만 나눠져 있지 않을까?

더 중요한 목표는 이 공연장을 일상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지극히 비일상적인 15

행위 중 하나일 공연관람을 위한 전당을, 시청 앞과 보행자 가로에 연결된 이 밀도 높은

땅에서 일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일. 공연장만큼 앞 뒤가 분명한 건물이 흔치 않다.

화려하게 도시로 로비를 자랑하는 분명한 전면이 있고, 그곳을 통해 레드카펫도 펼쳐지고 공연을 보러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바쁘게 택시를 내리고 뛰어간다. 무대의 뒤쪽은

하역과 출연자의 영역이다. 무대를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공연을 준비한다. 마에스트로는

주인공이다. 상주 오케스트라는 이곳이 직장이다. 무대는 일상이고, 전용연습실은 도시를 바라보는 사무실 같은 곳이다. 시민들은 그곳이 공연과 상관없이도 늘 들르는 곳이어야 했다. 시청 앞이어서 더 그렇고, 민원실과 상가 앞이어서, 아파트 앞이어서 더 그렇다.

언덕을 만들고 그 언덕에 대, 소 공연장과 갤러리 연습실 등이 여러 방향으로 박혀 있다. 다양한 공연들은 각자 도시의 다양한 거리를 향해 벌어지고, 각자 일정에 따라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언덕은 광장의 일부여서 광장에서의 일상이, 시청에서의 일상이 언덕으로 이어진다. 단일한 스케일의, 멋진 매싱을 디자인 하는 콘서트 홀이 아니라,

일상으로 스며드는 구조를 가진 음악의 언덕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장춘몽으로 남았다.

정부세종신청사(2018) 정부세종청사의 한 가운데에 신청사를 짓겠다는 현상설계는 2018년 말 건축계에

나름 파장을 불러왔던 것 같다. 10여년 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만들어진, 하나의 큰 옥상공원을 머리에 이고 수킬로미터 구불구불 연결된 정부세종청사의 한가운데 땅.

당선된 안에는 사각형 타워가 비죽 솟아있고, 덩달아 비교되어 매체에 실릴 기회를 얻은 2등안, 떨어진 안에는 청사가 납작하게 실제로는 비스듬하게 누워 있다. 16

4.3그룹 출신으로 한국 건축계의 원로이자 현역이신 건축가가 또 다른 건축가 한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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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부천문예회관 ⓒ해안건축 16. 정부세종신청사 ⓒ해안건축

함께, 심사에 문제를 제기하며 심사위원장과 세종시 총괄건축가 직까지 던지고 나오면서,


또 그 과정을 SNS상에 여러 번 공유하면서 파장은 꽤 넓게 오래 이어졌다. 다수의 일간지에서 여러 날 동안 여러 꼭지로 다뤄졌고, 공중파에도 세종신청사 논란이 다뤄졌다. 세종시장,

행복청장, 행정안전부장관 등 관련 고위직들이 한마디씩 언급 안 할 수 없을 정도가 됐고,

건축단체들은 모호하지만 관련 성명들을 냈고, 결국 국가건축정책위원회에 안건이 되어 정부

차원의 방향 수정 권고도 있었다. 주관부서인 행안부는, 절차상 문제는 없으니 당선자는 유지하되 공공건축가들을 뽑아서 수정방향에 대한 역할을 맡긴단다. 어디서부터 꼬이고, 어떻게 풀었어야 하는 건가.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팩트와 가설이 오갔고, 매체 헤드라인에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들이 자유분방하게 오간 모양새다. 비분강개하는 누구는 또 토건족을 들먹이며 음모론을

지피고, 누구는 건축계 기성세대들의 오래되고 잘못된 관행을 당연히 들먹인다. 누가 보수이고 중도이고 진보인지 혼란이 벌어지는 정치판을 대하는 것 같은 관전평을, 건축계는 이 논란에

대입하며 한편 즐거워들 하는 것 같다. 한 발 떨어져서 사태를 심판하려는 어떤 이들은 기획의

부재를 거론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용자의 요구가 진지하게 고민되어 지침과 심사과정에 오롯이 반영되지 못하는 현상설계 시스템의 부실을 지적한다. 지당하신 말씀들. 많은 건축대중들은

논의의 맥락과 무관하게 박스형 타워 건물이 사무실이나 정부 건물로 좋은 거 아니냐, 관공서 모양내지 말라는 식의 의견을 달고, 어떤 대중은 삼각형처럼 보이는 건물이 갖는 개성이나 다양성에 한 표를 보탠다. 서바이벌 예능이나 또 하나의 건축추리소설을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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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하는 일이 대중의 필요와 취향만 따르는 일이라면 전문성이 있을까? 용도와 유형을 단선으로 매칭한다면 독창성이 있을까? 건축이 맥락과 역사를 가볍게 여기고, 건축과 도시가 추구해

봄직한 미래지향적 가치를 자꾸 뒤로 미룬다면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곳에 어떤 건축이 적합한 태도인가 하는 것이다. 논의는 다양할 터이니, 적어도 그 컨텍스트에 어떤 함의의 건축인지 안들은 스스로 발언해야 한다. 장차 공모 일반에 절차적 보완이 이뤄진다면 그것도 훌륭한 성과이겠다. 하지만 분명히 그곳에 맞지 않는 안을

선정한 셈이고 우스운 설계과정을 거치고 있는 셈이다. 뽑은 의도가 잘못되었고, 수습하는 과정이 차차선이니, 어쨌든 결과물의 정당성은 보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2007년 ‘해안+발모리+H’팀의 마스터플랜으로 시작된 지 십여 년, 많은 아이디어와 조건들은

사라졌고 어떤 아이디어는 앙상하게 살아남아 세종시청사의 현재 모습이 되었다. 사라진 것은 지형과 타운 전체에 도시 건축 조경을 아우르는 연결된 디자인이고, 그래서 그것에 기댔던

미감과 교류가 희미해졌다. 입체적인 교통체계는 개별 건물 단위 하부에 섬 같은 아주 적은

양의 주차공간으로 분산되고, 그래서 비워진 많은 땅들, 복합용도로 채워져 도시를 풍성하게 17~19. 정부세종신청사 ⓒ해안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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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야 할 땅들이 주차장이 되었다. 청사 전체는 연결되었는데 소통하고 개방할 수 있는 블록들에는 담장이 쳐졌다. 몇 킬로미터 이어진 장엄한 옥상공원은 직원들만의

공간으로 제한되었다. 세 군데 살아남아 옥상공원으로 연결하는 경사면들은 가로막혀, 도시 스케일의 옥상정원은 가지도, 보지도 못한다. 남은 것은 수평적으로 낮게 연속된

건물군들 이고, 중요한 마스터플랜 덕목 중 하나인 비어있는 중심이었다. 높이의 문제도

사각, 삼각의 문제도 아니다. 그 건축유형이 위계적인 구조를 지향하느냐 수평적인 구조를 지향하느냐의 문제이다. 중심행정타운이 태생적으로 선택한 민주적이고 개방적이고 소통하는 도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사용하게 하는 건축이냐 하는 문제이다.

중앙에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게임의 룰을 우리가 바꿀 수

없었지만, 그곳은 그곳만의 맥락을 소화하면서 여기에 어울리는 중심성이 있든, 여기에 적합한 건물로서의 인식성이 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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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공간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풍부하게 하든 맞춤한 제안들이 필요한 곳이다. 우리가 선택한 것은 다시 한 번 비어있는

중심이었고, 저층-고층의 유형을 불식시키면서 저층의 기조를

계승하는 경사 유형의 건물이었고, 균일한 사무공간의 적층이 아니라 다양한 평면유형과 내부공간을 갖는 유연하고 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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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공간이었다. 세종청사가 결여한, 손에 잡히는 외부공간과 손에 잡히는 내부공간,

위계적이지 않으면서도 도시를 기억하게 할 오픈스페이스와 올라가도, 올라가지 않아도

좋을 녹지면과 청사 건물의 자연스런 어울림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을 만드는 것이었다. 새로운 버전으로 수정하여 이 도시의 이상을 지키려던 노력이 접혔다. 이제 그곳에 오래도록 꾸어 왔던 큰 꿈 하나가 멀어져 간다.

나가며 장소에 적합한 건축을 결정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절차적 합리성 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 의지를 가지고 주장하고, 의지를 가지고 판단하고,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지도록 애써야 가능한 일. 1973년 준공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현상의 심사는

1959년에 있었다. 217개 참여작 중 선정된, 지금도 신선한 요른 웃존의 제안이 심사위원 에로 사리넨의 적극적 설득으로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건축계 흔한 전설이다. 최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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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기사는, 당시 경쟁했던 출품작들을 현재의 렌더링 기술로 실사화 해 비교했다. 그 논란 많았던, 많은 고생과 좌절로 점철되어 완성되었던 당선안이 얼마나 고마운 결정이었는지. 시드니 사람이 아닌 지구촌 건축 관객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압축 성장 탓에 무르익지 않은 건축 시스템 탓을 할 수도 있고, 건축에 기대하는 문화

수준이 낮은 이 사회를 탓할 수도 있고, 작은 규모에 아옹다옹 하는 좁은 시장과 경쟁 상황을 탓할 수도 있다. 자긍심은 차고 넘치되 실력과 경험과 체계를 쌓아 놓지 못한

선배들과 우리 자신을 탓할 수도 있다. 그래도 큰 혁신, 큰 시도, 작은 혁신, 작은 시도들을 그러모아 한걸음씩 걸어가야 하지 않겠나, 스스로 다독인다.

정부세종신청사 심사장에서 심사위원들 간 진지한 토론과 설득으로 훗날에도 부끄럽지 않을 안이 선정되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마침 보름달을 마주하니,

옥토끼도 생각나고 뒷마당에 떠놓고 빌었다는 물 한 대접도 생각나고, 뭐라도 빌어볼까

싶다. 건축에 다양한 디자인 미디엄들을 통합 시도해 보고, 일상적인 삶의 터전인 건축의 모습을 계속 상상하고, 폭발하는 사상과 기술들이 건축과 어떤 영향들을 주고 받을지를 이리저리 탐색해 보는 과정들이 지속될 터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실패의 역사 속에 몇 가지는 살아남아 이 세상으로 걸어 나올 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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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정부세종신청사 ⓒ해안건축


19 : 03-04

건축가 이상대 Sangdae Lee www.spaceyeon.com


어느 건축 마라토너의 傍白 방백

글. 이상대

㈜스페이스연 건축 대표

설계스튜디오에서 가끔 학생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건축은 마라톤과 같은 것이라고··· 여러분은 이제 출발점에서 조금 앞에 있을 뿐이고,

앞으로 달려야 할 길이 멀다고···.” 옆 친구들이 항상 더 잘 하는 것으로 보이고, 부족해

보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기소침해 했던 나 스스로의 기억에 기대어, 정말 자기 자신이 건축을 좋아한다고 생각되면 현재에 좌절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면서 끝까지 가보란 의미에서 마라톤 이야기를 건넨다.

홍대 앞 ‘비상화실’ 건축은 다행히도 감성만의 작업은 아니고,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요구한다. 이것이 아마 다른 예술과의 큰 차이이지 않을까?

내성적 성격에 적극성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면, 더군다나 그다지 감성적 성격 또한 갖고 있지 못했다.

시적 영감이나, 자연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갖고 있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그 흔한 사생대회 상장 하나 받아보지 못했으니, 손재주나 색깔 감각도 별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중, 다행히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나무들과 화초류가

많았고, 조그만 연못과 방치된 뒷켠 창고에서의 유년기 기억 등 나만의 세계가 있었던

것은 다행인 것 같다. 새삼, 비 오는 날 집안에서 산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게다가, 집

뒤 병풍처럼 펼쳐져 있던 커다란 산과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던 바다가 청소년기 나의 추억의 한 조각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 자란 것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절친 한형우 교수가 항상 하는 얘기 중에 ‘부산 출신의 건축가가 유독 많다며, 그 이유가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서 일 것이다’라고 추측을 하니, 나 또한 거기에 동조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대학시절은 나 스스로 평가하기에 그다지 평탄하지만은 않았고 힘든

시기였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고충이 있으니, 나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1980년대 중반 최루탄과 함께 대학을 보낸 사람으로서, 짱돌과

제도판 사이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나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기 건축을 잘 하고 싶어 했고, 신통치 못한 나의 재능에 좌절했던 시기임에 틀림없다.

대학교 2학년 2학기, 우연히 친구 따라 선배들이 건축대전과 졸업 작품을 준비하는

작업실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칼질에 소질이 있다는 칭찬에 모형 작업을 시작하면서, 건축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 홍대 앞에 있었던 ‘비상화실’은 50


나에게도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야 함을 자각시켜 준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그 때의 선배들은 영주시 초대 디자인단장(총괄건축가)을 지낸 조준배 그리고 Aand건축을 운영하는 김중근, 오종수, 김효찬 등으로 열심히 설계를 해 오던 선망의 대상인 인물들이었다.

프랑스 유학의 배경 비상하고픈 나의 욕망과 달리 그다지 만족스러운 작업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던 나는, 3학년

2학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내가 이 상태로 마지막 4학년을 더 다니게 되면, 나의 건축인생은 끝이 날 것 같았고, 군대를 다녀오면서 시간을 벌어 보고자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을 앞둔 6월 초 입대를 하였고, 초대 대통령직선제투표, ’88서울올림픽을 군에서 보낸

이후 1990년에 4학년으로 복학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아진 것처럼 보였고, 여행

자유화, 유학 자유화의 물결이 건축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4학년 때, 프랑스유학에 대한 소개가 건축잡지에 실렸고, 조준배 선배의 프랑스 건축유학은 내게도 자극이 되었다.

4학년 말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6개월을 열심히 회현동의 프랑스어학원에 다니고서는, 1991년 6월에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 대학동기 3명이 같은 목적으로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니, 프랑스 유학이 광풍이었던 시기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때, 같은 비행기에 올랐던 제공건축의 윤웅원 소장과 스위스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 동부지방 쥐라Jura산맥의

브장송Besancon에서 어학 공부를 하였다. 쥐라산맥의 맞은 편 스위스지방은 라쇼드퐁 La Chaux de

Fonds

으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젊은 시절 건축가로서의 꿈을 키우던 그의 고향마을이다.

쥐라산맥 언저리에서 어학을 시작하게 된 것도 혹시 운명은 아니었을까?

어학기간 중 브장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코르뷔지에의 롱샹 Ronchamp성당을 처음 보게 되었다.

건축이 빛과 만나서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공간을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과 고집 센 한국 학생 파리Paris에는 다양한 건축학교가 존재하고, 조금씩 학교의 성격이 달랐다. 당시 한국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입학하는 두 학교가 라빌레트La Villette건축대학과 벨빌Belleville건축대학이었는데, 여러

선배 유학생들의 조언을 듣고 최종적으로 지원하게 된 학교는 벨빌건축대학이었다.

당시 벨빌건축대학에는 앙리 시리아니Henri Ciriani 선생님이 계셨고, 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그 분의 건축교육은 유럽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축스튜디오 중 하나였다.

나처럼 선천적 건축 감각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고, 시리아니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 판단은 내가 살아가면서 해왔던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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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 중 가장 잘한 선택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리아니 선생님의 가장 유명한 설계스튜디오였던 30×30 및 그분의 다른 설계수업을 통해

건축의 기본 언어를 배웠고, 그의 열정과 신념을 보면서 건축가의 자세를 배웠고, 그와 함께 근대건축을 논하는 UNO그룹의 로랑 보두엥Laurent Beaudouin, 에디스 지라드Edith Girard, 로랑

살로몽Laurent Salomon 등을 통하여, 같은 생각을 공유하면서도 다양한 건축을 해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또한, 훌륭한 건축이론가들이 벨빌건축대학에 많이 계셨는데, 특히 자크 뤼캉Jacques Lucan

의 이론수업을 통하여 근대건축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시리아니 그 분은 몹시도 완고한 분이셨는데, 건축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건축적 시도를

스튜디오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이유는 그의 건축이론이 가장 우수하다는

생각이기보다는, 근대건축의 중요한 공간 및 형태 언어라도 제대로 배우고, 그 이후에 자신의 건축세계를 만들어가라는 의도를 담고 계셨다.

나의 졸업 작품 발표회에서 그 분이 “너는 참으로 고집이 센 학생이다”라고 하시면서도, 펠리시타시옹Felicitation이라는 최고의 평가를 해주셨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1. 1997 프랑스 졸업 작품 발표회(Henri Ciriani, Michel Kagan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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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집 센 분에게서 고집이 세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결코, 싫은 것만은 아닌 칭찬으로 들렸다.

벨빌건축대학 시기는 건축의 기본 언어를 배우고, 이 단어들의 조합을 통해 건축이라는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배웠던 시기라 생각된다. 물론 건축이라는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이 프랑스의 모더니즘 언어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모더니즘 건축언어는 서양의 유구한 건축사가 함축된 결과로서의

진행형이었고, 다른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의미가 있었다.

그 기간 중 유럽의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하며 서양의 전통건축과 함께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서양건축의 거대한 흐름을 몸으로 이해하는 2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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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한형우와의 만남 프랑스 유학시절 많은 한국 건축가들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는 기회만 되면, 밤 새워 가며 술과 함께 건축을 이야기했던 낭만적 시기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의 건축인생에 가장 중요한 동반자가 된 사람은 한형우 선배이다. 프랑스 유학 기간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학 후 1997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좋은 사무소의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못하던 나에게 첫 사무소에 들어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은인 또한 한형우 선배였다. 먼저 귀국하여 한울건축에서 양진황 소장님의 실장으로 있던 한형우 선배의 현상설계 모형을

만들어 주게 되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성관 소장님이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해 주셔서 귀국 후 첫 직장이 한울건축이 되었다. 당시 이성관 소장님 밑으로는 최문규 실장님 등 훌륭한 스텝들이 있을 때였다. 1년여를 한울건축에 있으면서, 이성관 소장님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와, 건축가적 기질, 디테일까지의 집요함 등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접한 한국 건축가가 이성관 선생님이었던 것은 한국 건축계에 첫발을 딛는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엄청난 사회경제적 충격을 안겨 주었던 IMF의 시기였고, 1998년 상반기에는 직원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때였다.

유학 후의 장미 빛 삶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락은 나에게 비애감을

안겨주었고, 출중한 건축가들 밑에서 프로젝트를 맡을 기회가 없어 보였기에,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건축계의 대형사무소란 대부분이 서울과 주변 신도시 아파트 개발 붐을 등에 업고 규모를 키운 건축사무소들이었고, 일반건축을 통해 사무소 이미지를 바꾸고자 하는 단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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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프랑스 졸업작품


대형 사무소 조직에서의 건축 작업 능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욕심과 도시락의 비애감은 나를 건원건축으로 이끌었다. 입사하여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대형건설사와 진행하는 턴키 프로젝트였다. 딱히 조언을 해줄 선임 디자이너가

없던 시절, 내가 긋는 선이 거의 그대로

디자인으로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첫 단추가 잘 끼워져 순탄한 대형사무소

디자이너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턴키의 시대였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건설사를 갑으로 상대해 가면서 디자인을 해야 하는 특이한 시기였다.

또한, 대형건축사무소들이 턴키수주를 위해 해외의 유명건축가들을 디자인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 또한 몇몇 중요 턴키프로젝트를 해외건축가와 협업해야 했는데, 나는

프랑스의 미셸 카강Michel Kagan을 추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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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같이 일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내가 유학 시절 아주 좋아했던 건축가로서, 나의 졸업

작품 심사위원으로도 초빙하였던 분이었다. 프랑스에 가서 존경하는 건축가와 같이 협업을 하며, 그 분의 디자인 작업 방식을 옆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나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었다. 그 분과

같이 진행한 작업이 한국에 지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남았었다. 하지만, 건축가로서 카강이 나에게 주었던 가장 큰 영향은 건축가로서의 태도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이 자신의 계획안을

소중히 하고, 타인으로부터 디자인에 대한 간섭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는

그런 건축적 태도가 건축가의 자존심이 아님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에서 같이 고심해서 만든 계획안을 건원의 회장 및 임원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설명을 듣고 난 건원의 회장님이 계획안을 이렇게 저렇게 고쳐보면 어떻겠느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그 때에 카강이 했던 답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나의 컨셉을 가지고 수백 가지, 수천 가지의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변경방안을 제안하였다. 자신의 계획안이 건축적

문외한으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모습이라 생각했는데, 타인의 의견을 유연하게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개념을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한 건축가의 모습임을 깨닫게 해 주신 분이었다. 비록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항상 마음 속 깊이 생각되어지는 분이다.

독립, 그리고 좌절의 시대 40세가 될 즈음에 나의 머릿속에는 독립에 대한 생각이 꿈틀거렸다. 당시는, 유학을 다녀 온

건축가들 중 많은 분들이 사무소를 내면서 왕성히 활동을 하던 시기로, 나 또한 40세 이전에는 당연히 개인 사무소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무소 운영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건원을 박차고 나왔다. 인도를 아내와 다녀오고 난 이후, 다시 맞이한 현실 상황은 내가 처음 유학을 마치고 왔을 때처럼 앞에는 아무런 길도 열려 있지 않아 보였다.

그때, 대학동기이면서 지금은 단국대 교수로 간 성우철 소장이 엄형석이란 분과 같이 사무소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에게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다. 막상 사무소를 박차고 나왔지만, 혼자서

앞을 돌파해 나갈 추진력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좋은 새 출발이라 생각되었고, 흔쾌히 효자동으로 6. Michel Kagan과 같이 한 일산문화센터계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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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가게 되었다. 효자동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성우철은 단국대학교로 가게 되었고, 엄형석 소장과 같이 사무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 수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도인과 같은 성품을 가진 엄형석 소장 또한 바깥으로 잘 나가지 않는 분이었으니, 사무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현상설계 참여인데, 당시에 현상설계에서 아무런 사전작업 없이

당선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때였으니 (물론 간혹 예외상황이 있었지만) 매번 2,3등으로 낙선하는 상황이었다.

앞길이 막막한 효자동 생활을 접게 된 계기는, 그즈음 건원에서 턴키 프로젝트를 같이

할 것을 제안해오면서였다. 턴키가 끝난 이후에는 사무소로 다시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고, 나는 슬그머니 사무소를 접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나에게 절대 무의미한 기간만은 아니었다. 사무소를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하며, 디자인을 한다고 해서 설계사무소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교훈을 얻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자신의 권리만이 아닌 사무소 운영자로서의

무한책임을 질 각오를 해야 함을 또한 알게 되었다. 사무소 운영에 대한 고민을 말없이

감내한 도인과 같은 성품의 엄형석 소장에게 그 후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건원에 다시 들어갔을 때에는 직원으로서 오너에게 갖는 불평, 불만은 거의 없어졌다.

적어도 내게서는 크던 작던 자신의 사무소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면서 직원에게 급여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련은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다시 복귀한 시절은 PFProject Financing사업의 전성기였고, 나에게 거대 규모의 복합개발

프로젝트가 맡겨졌다. 턴키는 프로젝트의 프로그램이 명확하고, 건설사가 기본계획안대로 공사를 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과도한 디자인을 하지 않는 반면, PF사업의

계획안이라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시절이었다. 게다가 복합개발의 디자인 모델로 미국의 존 저드 Jon Jerde의 후쿠오카 캐널 시티Canal City나

록본기힐 프로젝트를 따라하던 시기여서, 나의 디자인 성향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결국은, 만화 같은 계획안을 그럴 듯하게 그려 댄 미국 유학출신의 디자이너에게 펜대를 넘기는 상황이 되었고, 그 프로젝트가 당선된 후에 나는 3년 정도를 그가 그린 만화를 현실화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3년여를 분당 주택공사 앞 합동사무실에서 보낸

시기는 나에게 시련을 넘어서 인고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더 강하게 담금질 시켜준 시간이며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준 시기이었다.

PF프로젝트를 분당에서 마무리하고, 본사 복귀 후에는 오히려 윗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의 작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그 당시 사무소에서는

오너의 관심프로젝트가 아닌 프로젝트들을 조용히 나에게 넘겨주는 배려를 해 주었고, 주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 나 나름의 계획안들을 정리해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다시, 독립의 길로 2010년 후반부터 다시 본능과도 같이 독립에 대한 생각을 굳혀갔다. 영화 ‘빠삐용’의

스티브 맥퀸처럼 자유를 향한 갈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특히 건축가로서 나의 이름을 걸고 건축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었다. 2003년 무작정 독립했을 때의

뼈저린 실패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구체적 고민을 하던 시점, 나의 절친 한형우 선배로부터 사무소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다.

건축계에서 동업이란 것이 잘 되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기에, 더군다나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의 동업은 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의 고사 끝에 결국 함께

사무소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2003년과 같은 수동적인 동업은 원치 않았기에, 사무소를 별도로 다시 설립하여 시작하는 조건에 서로 동의를 하였다. 그 후, 2011년 4월에 사무소를 개설하여, 지금까지 8년의 세월이 흘렀다. 54


8년을 함축하자면, 나에게는 그 동안 눌려있던 건축의 욕구를 분출하는 기간이 되어졌다. 또한, 파트너 관계에 있어서는 각자의 건축 작업을 하면서도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는 우리의 방식을

통하여 발전해온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한형우 선배의 감성적 성향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좋은 책들을 같이 공유하고,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며 이전보다 내적인 성장을 더 이룰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건축주들과의 만남 독립 후 시작 지점의 시간을 돌아보면, 오랜 좌충우돌의 기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던지,

처음부터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홍대 앞의 <우캔주카페>, 강화도의 <앤틱갤러리>, 일본계 전자부품회사의 사옥 겸 공장 등을 첫해에 진행하게 된 것이다.

홍대 앞 <우캔주카페>는 특히,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기존의 다가구주택을 카페용도로 전층을 리모델링하는 독특한 프로젝트로, 계획적 차원만이 아닌 기술적인 경험이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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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였다. 기술적 현장경험이 없었다는 무지함이 각층 슬라브와 벽체를 걷어내는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었던 역설적 프로젝트였다. 과거의 흔적을 통한 새로운 공간창출이라는 리모델링의

아이디어는, 한울건축 초기에 같이 근무했던 공정건설의 김광유 소장을 시공팀으로 끌어들이고, 엔진포스의 윤태권 소장이 공정건설을 도와줌으로써, 든든한 기술팀의 지원 아래 기대이상의 결과물로 태어나게 되었다.

2012년에는 한형우 교수 지인 소개로 ‘경농’이라는 농업회사의 회장님에게 계획안 아이디어를 간략히 브리핑할 기회가 생겼다. 이후 지금까지 그 회사를 위해 세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고, 자연과 건축이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재미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에는 독특한 경력과 강한 장인정신을 갖고 있는 신재호 도시건축건설사 대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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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동주택의 건축주로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황학동근생>, <논현동 D’A사옥> 등

서울시내에 근생 건축물을 진행하게 되었고 2017년도에는 <논현동 D’A사옥>으로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현재는 <풍산그룹사옥>을 설계한 것이 인연이 되어 풍산 회장님의 기부프로젝트인

<육군부사관학교 도서관>을 공사 중에 있는데, 학교장님 이하 많은 군 관계자분들이 나의

평범하지만은 않은 도서관 계획안을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셔서, 즐겁게 현장을 다니고 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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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화도전시장 정면 8. 강화도전시장 제1전시실 9. 경농 김제(2012) 10.경농 김제 내부 11. 경농 이천(2015) 12. 경농 이천 내부 13. 경농 나주 내부 14. 경농 나주(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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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마라톤 레이스 독립 후 8년의 기간은 다양한 프로그램의 프로젝트들을 통하여 나 스스로 검증해 보고 싶었던 공간들과 재료에 대한 실험들을 하면서 나를 발전시켜 나간 시간이었다.

물론 그 사이 몇몇 프로젝트는 순탄치 못한 진행과정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로 끝난 경우도 있지만, 그 또한 발전의 과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좋은 건축물의 탄생은 건축가만의 노력만이 아닌, 좋은 건축주, 능력 있는 시공자와의

협업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새삼 뼈저리게 느끼며, 역설적으로 많은 프로젝트들을 좋은 건축주들과 진지한 건설사와 같이 진행했음을 새삼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앞에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던 마라톤으로 돌아가 본다. 18

“지금의 내가 과연 마라톤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을까? 언제까지 더 뛸 수 있을까?” 이전에는 마라톤을 어떻게 완주할 수 있을까에 의미를 더 두었는데, 새삼, 완주보다도 같이 옆에서 뛰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이 더 중요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의

기간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주변에 많은 좋은 사람들이 같이 옆에서 뛰어 주었고, 쓰러지지 않도록 격려해 주어서 아직까지 달려 나갈 힘을 얻고 있음에 감사한다.

15. 논현동D'A(2015) 16. 논현동D'A내부 17. 육군부사관학교도서관(2017)모형 18. 사무실 뒤 서울시 보호수(든든한 뒷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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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홍대 우캔주카페 21. 우캔주카페 디자인 회의(김광유, 윤태권, 건축주 부부와 함께, 2011) 22. 황학동 근생(2015) 23. 황학동 근생 내부


19 : 03-04

건축가 임영환 Yeonghwan Lim www.dlimarch.com


‘지속가능한’ 아마추어 건축

글. 임영환

원칙

D·LIM architects 파트너

사무소를 개소한 지 이제 확실히 두 자리 숫자의 해가 지났다.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글로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옮기기란 쉽지 않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건축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절실하게 체감했다. 다행인 것은 굉장히 느린 속도지만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화한 건지 나를 찾는 건축주들의 수준이 높아진 건지는 확실치 않다.

처음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바뀐 것도 있고, 처음의 생각이 바뀌어 없앤 것도 있다. 이런 저런 원칙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했지만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생각들이 있었고, 그러한 원칙들이 결국 회사의 정체성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신인은 번듯한 준공작이 없기 때문에 좋은 건축주를 만나기가 참 어렵다. 그러다

보니 힘들게 얻은 계약의 기회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조건이 좋지 않아도, 건축주가 좀

이상해 보여도 마찬가지다. 쉽게 가지 뭐. 회사의 이득이 되잖아. 어쨌든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프로젝트를 이어가곤 한다. 나 역시 개소 초창기에 이러한 전철을 밟을 뻔했다. 하지만, 건축가 이전에 교육자로서 내 학생들에게 하는 말과 현업에서의 내 행동이 서로 엇박자가 나는 모양새가 싫었다.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신념도 생겼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제 발로 찾아온 건축주를 돌려보내고, 때로는 거의 성사된 계약을 파기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나에게도 회사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식상한 이야기이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건축의 업역은 서비스라는 사실이다. 분명 서비스로 분류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회사

사업자등록증에 명기되어 있듯이 서비스는 회사운영의 기본이다. 회사의 연륜이

쌓일수록 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끊임없이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주지시킨다. 나를 믿고 찾아온 건축주들을 어떠한 측면에서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중요한 원칙이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건축주로서 자격이 없을 때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계약 전에 충분한 탐색이

필요했다. 또한, 기껏해야 한두 번의 짧은 미팅이 전부인지라 건축주와의 미팅은 항상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해야 했다.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다행히 큰 일은 없었지만

계약 후 내가 파기한 프로젝트만 서너 건이 넘는다. 가끔 되돌아 생각하면 아쉬운 기분도 58


들지만 건축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과의 결별은 나와 직원들을 위해 정말 잘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박리다매라는 말이 있다. 서비스업에서 중요한 마케팅방법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건축에서는 그러한 전략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서비스의 질은 충분한 대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만큼 건축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상대하는 대부분의 건축주는 거실에

들여 놓을 고가의 오디오를 구입하거나 겨울을 대비해 고심해서 명품 코트를 사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건축사사무소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전 재산 혹은 꽤 많은

비중의 재산을 투자해 설계를 의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군가가 시공사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사 시작과 함께

벌어지는 시공사와의 불편한 관계 혹은 유치권행사 등 세간에서 흔히 떠도는 좋지 않은 소문들에 건축주들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시공사에서 건축가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졌다.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이제야 그렇게 됐다. 충분한 대가와 그것에 보답하는

건축서비스의 질은 멋진 프로젝트의 탄생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훌륭한 건축주를 양산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공식적인 프로필 나, 임영환은 홍익대학교와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과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파트너 김선현과 디림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한국건축가협회상,

한국건축문화대상, 서울시건축상, 경기도건축상, 젊은 건축가상,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에는 영국 런던의 The CASS Bank Gallery에서 전시된 한국건축전에 참여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안중근기념관>, <CJ나인브릿지더포럼>, <스타덤엔터테인먼트사옥>, <쉬즈메디병원>, <네이버어린이집>, <세마당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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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CJ나인브릿지더포럼 ⓒ윤준환 2~4. 세마당집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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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인 프로필 나는 어릴 적부터 보기 좋은 걸 참 좋아했다. 특히 예쁜 집들에 대한 동경은 상당히

강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특별히 눈여겨보았던 주택들의 외관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경영학도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미 경영학과를 다니는 형과 부모님의 압력도 있었겠지만, 왠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중요한 결정들을 할 것 같은 자리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첫 번째 도전에서 원했던 학교에 합격하지 못했다. 재수를 결정하고 종합반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던 어느 날 정말 갑작스럽게 건축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솔직히, 그 때는 건축가라는 호칭도 몰랐고, 설계와 시공의 구분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 내가 왜

건축을 떠올렸는지 잘 이해는 가지 않는다. 문과와 이과로 구분된 당시 수능은 시험과목 자체가 많이 달랐고 문과에서 이과로 전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인지 내가 그렇게 원했던 꿈을 지난 십여 년간 망각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건축이라는 학문에 모든 것이 꽂혀버렸다. 혹시 신의 계시는 아니었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도 해보지만 어쨌든 입시의 압박에 헤매던 그 짧은 순간에 내게는 참 소중한 결정이었고 반대로 험난한 고생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디림건축의 시작 사무소 이름을 말할 때마다 한 번에 알아듣는 이가 많지 않다. 잘못 표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디딤, 다림, 드림’이 가장 흔한 오기의 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잊히지도 않는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실 상호인 D·LIM은 Design과 나의 성姓인

LIM의 합성어이며 ‘Design & Life In Mind’라는 뜻을 가진 머리글자Acronym다. 건축을

디자인으로 국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마케팅의 일환이자 건축 업역의 수평 확장을 위한 나름의 초석이다.

모든 이들에게는 그들만이 꿈꿔왔던 각자 다른 삶이 있다.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음 속 그림을 끄집어내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할 일이요. 그 모양새를

이해하고, 그것을 주변과 맞추어보고, 이웃하는 그림과 나란히 세워도 보고, 그 안에 다시 일상을 그려도 보며, 그 이면의 모습까지 다듬는 것이 두 번째요. 그 삶의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의 마지막 이다. 대지와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설계에 투자하는 시간만큼 그곳을 사용할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는 이유가 그러하다. 이런 작업들이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집을, 이웃과 함께하는 긍정적인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내는, 평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축가의 역할이 아닐까?

“The difference between a good and a poor architect is that the poor architect

succumbs to every temptation and the good one resists it.”

(Ludwig Wittgenstein)

매번 초기 설계안을 구상하면서, 우리는 많은 유혹들에 부딪친다. 우리의 건축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정적인 디자인 어휘들, 그들의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면, 우리는 한낱 피상적인 스타일리스트로 전락할 것이며, 마음

속의 삶을 조각하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건축일 뿐 대중과 함께하는 진정한 건축이 아니다. 디림이 ‘지속가능한’ 아마추어이고 싶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진리이면서도 지키기는 어려운 것은 건축이나 삶이나 다를 바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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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인 디림건축의 시작 2006년 3월 홍익대학교 건축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미국에서의 생활을 15일 만에 정리하고 귀국했다. 배우자인 김선현은 당시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워낙 급하고

정신없이 시작되긴 했지만 교육자로서의 새로운 삶이 즐겁고 모교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설계에서 손을 뗀 아쉬움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힘들게 이어온 건축가의 길을 교수라는 직업과 맞바꾸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생각보다 교수라는 직업이 시간이 많다, 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2007년 2월, 이번에도 참으로 갑작스럽게 설계공모에 응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등록을 위해서는 회사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미국건축사였다. 하버드에서 프로젝트매니지먼트를 전공하고 멀쩡한 글로벌 회사에 시니어매니저로 다니고 있던 아내의 한국건축사 자격증이 필요했다. 아내를 설득해 사무소를

오픈하기로 합의하고, 하루 만에 회사의 이름을 정했다. 바삐 정하느라 많은 고민을 하지 못했다. 못내 아쉬운 점이다. 다행히, 설계공모에 당선이 되어 아내는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디림건축에 합류한다. 진정한 고생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생각1_소박하지만 세련된 화려한, 장식적인, 극적인, 원색적인, 강렬한, 복잡한, 위압적인. 유혹적인 말이며 인위적이다.

세련된, 멋스러운, 인상적인, 눈에 띄는, 두드러진, 풍부한, 위엄 있는. 매력적인 말이며 자연스럽다.

유혹적인 말의 내면에는 건축의 폭력적인 본성이 숨어 있고, 자연의 언어에는 온건함의 미학이

스며 있다. 두 집합의 단어를 적절하게 조합하면 디림건축이 추구하고 있는 건축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세련된, 장식적이지 않지만 멋스러운, 극적이지 않지만 인상적인, 원색적이지

않지만 눈에 띄는. 강렬하지 않지만 두드러진, 복잡하지 않지만 풍부한, 위압적이지 않지만 위엄 있는...

역설적인 상황은 가끔은 오히려 순리적이다. ‘소박하지만 세련된’ 어떻게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언어의 조합이지만 반대로 가장 적합한 조합이다. 세련되다, 라는 말에는 독특하다거나 화려하다는 의미는 없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여성이 정장을 차려입고 하이힐과

액세서리까지 한 여성보다 세련되게 보일 확률이 훨씬 높은 이치와 같다. 세련되다, 라는 말에는 분명 간결함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생각2_오목함과 볼록함의 중첩; Infraposition 볼록함보다는 오목함을 좋아한다. 우뚝 선 조형보다는 움푹 파인 흔적이 좋다. 평지 위에

도드라진 건축보다는 땅에 묻혀 조화된 건축이 항상 매력적이다. 오목함은 대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자연스러우며 가끔은 자연이 되기도 한다. 볼록함은 땅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을 압도하곤 한다. 그리고 땅과 종종 유리되기도 한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세빛둥둥섬처럼 말이다.

그동안 계획안으로 끝난 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유독 <웅진백제역사문화관>은 아쉬움이 크다. 역사문화관은 무령왕릉을 포함한 일곱기의 고분이 안장된 충청북도 공주 송산 중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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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설 예정이었다. 수려한 산세를 가진 송산에 자리 잡고 있지만 대지는 산의 형상을 거스르고 이미 인공적으로 평탄해진 상태였다. 송산 고분군 앞 인공의 평지 위에

우뚝 솟을 역사문화관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 속에서도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일곱기 고분의 볼록한 형상을 오목함으로 대치시키면서 내 머릿속 상상력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일곱의 고분을 위한 일곱의 공혈孔穴은 송산의 지형과 동화되는 건축의 겸손한

대응방식이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관람객들은 찬란했지만 쇠락한 백제의 역사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건축과 땅의 관계는 한쪽이 우세해서는 안 되며 서로 양보하는 겸손한 자세로 만나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다. 건축과 자연과의 만남 역시 같다. 건축물이 들어서기 이전과 이후의 관계는 산술적 합의 결과인 중첩이 아니라 건축과 자연의 유기적인 결합의 관계여야 한다. 위로 포개지는 것superpose이 아니라 아래로 포개지는 것infrapose.

생각3_지형과 건축의 협업 평지 혹은 경사지.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항상 둘 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창작물을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평지는 새하얀 도화지와 같이 무엇이라도 받아줄 것 같지만

나는 경사지를 더 좋아한다. 설계가 의뢰되고 현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에 오랫동안 그 형태로 있어온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대지가 본연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상상들이 시작된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지형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관계의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반듯하게 나누어진 필지보다는 이웃과의 관계와 주변맥락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대지의 형태나 땅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만 변형된 지형을 말한다. <시흥3동 어린이집>이 그러했고, <네이버어린이집>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500㎡ 남짓의 시흥동의 대지는 6미터 도로에 접한 작은 주택과 바로 뒤 맹지 위에 지어진 조금 더 큰 주택을 합필해 만들어졌다. 차가 오르기도 쉽지 않는 경사진 도로에서 진입할

수 있는 틈을 겨우 허락한 대지는 이웃한 주변 대지보다 낮아 대부분 옹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대지보다 4m 높은 도로에서 진입하다보니 오히려 유치원은 나지막한 5

단층집이 되었다. 주택가 좁은 골목길의 스케일에 딱 걸맞은 외관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0세부터 3세까지 영유아반들이

출입구에 인접해 2층에 배치되고 활동적인 4,5세 유아반들은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들어섰다. 1층은 넓은 놀이터를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어 활동량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놀이 환경을 제공한다. 1층 출입구에

영유아반이 배치되고 계단을 올라가 2층에 4,5세 유아반을 두는 일반적인 어린이집 구성방식에서는 4,5세 유아반의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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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접근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시흥3동 어린이집>은 대지가 낮아 도로에서 바로

2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정반대의 구성이 가능해 졌고, 복잡한 외부환경을 등지고 내부로 수렴되는 건축공간을 조직할 수 있었다. 대지가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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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이 오히려 어린이집에는 장점으로 활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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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네이버어린이집 ⓒ윤준환


<네이버어린이집>의 대지내 경사는 시흥동 대지보다 더욱 급격하다. 전면 6m 도로에서 시작된 경사는 대지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며 뒷산으로 연결된다. 자연녹지지역이기 때문에 넓은 대지

위에 겨우 20%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경사지였기 때문에 더 이상 제약이 아니었다. 땅 위로는 3개동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땅 속으로는 넓은 기단이 형성되어 서로 연결된다. 경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된 어린이집에서 300명의 어린이들이 바로 뛰어나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매

층마다 만들어졌다. 경사지 위에 위태로운 놀이터가 아니라 흙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안전한

놀이공간이 조성됐고, 최상층을 제외한 모든 층이 피난층이 되는 구조가 되었다. 세 개의 단으로 구분된 대지와 세 개의 동으로 나뉜 건축이 만나면서 사이사이 아홉의 외부공간이 만들어졌고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달라 아이들에게 다양한 놀이 체험의 기회를 준다.

금천 5제 서울시 금천구 관내에 디림건축의 이름으로 준공된 프로젝트가 이미 다섯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나름 전국에 걸쳐 건축물을 설계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중 금천구가 단연 으뜸이었다.

그 다섯 중 네 개의 건축물이 건축상을 받았다. 서울시건축상 3개, 한국건축문화대상 2개.

2013년 준공된 스타덤사옥이 서울시건축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모두 수상하면서

수상도 다섯이 되었다. 그동안 디림이 받은 건축상이 총 14개인데 그 중 거의 삼분의 일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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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에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수상의 영광도 안게 되지만 유독 금천구에 몰려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금천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스타덤사옥> 리모델링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금천구에 연속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금천구가 서울의 경계에 있어

오가는 거리에 부담도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낙후된 환경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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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금천구는 서울의 변방이다. 1963년에서야 서울로 편입이 되었으니 그러한 인식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래서 금천구의 인심은 서울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만나는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 공무원들의 태도에도 시골의 따듯한 정서가 묻어났다. 동네는 서울의

변두리라기보다는 번화한 지방도시의 읍내에 가깝다. 고층아파트들로 철옹성을 쌓아 만들어진 서울 보통의 거리보다 살가웠고 사람냄새를 여기저기서 맡을 수 있었다. 감리를 위해 현장까지

차를 몰고 가기에는 체증이 심했고 골목골목 더디게 움직였지만 어릴 적 추억 속 동네 같은 도시 경관이 나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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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동 우시장에 다 쓰러져가는 창고를 사옥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시작된 인연이 공공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도시답지 않은 정겨움이 나를 이곳에 묶어두었다. 공무원은 건축가의 디자인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가끔 어쩔 수 없는 변경의 요구에도 예의를 갖추었다.

구청장은 건축가의 열정과 노력에 감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에 보답해야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이십여 년 건축을 하면서, 특히 십년 넘게 서울에서 내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건축의 선순환이다. 건축가가 노력하고, 건축주가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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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고 감사하면, 건축가는 더욱 애쓰고, 그 신뢰관계를 지켜 본 시공사도 함께 노력한다.

이러한 선순환이 결국 좋은 건축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예산의 문제도 아니며 시간의 문제도 아니다.

독산동에 <스타덤사옥>, 신시흥동에 <도담어린이집>, 시흥3동에 <새싹어린이집>, 그 옆에

<두레주택>, 그리고 또 그 옆에 <사회적경제허브센터>까지 디림에서 금천구에 설계한 건축물은 이미 다섯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고작 다섯이다.

9. 도담어린이집 ⓒ박영채 10~11. 스타덤사옥 ⓒ박영채 12. 금천사회적허브센터 ⓒ디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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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_답사와 여행 사이 몇 해 전부터 매 학기가 끝나면 방학기간을 이용해 건축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건축물을 보러 참 많은 곳을 다녔지만 최근과는 큰 차이가 있다. 건축가가

도시와 건축을 보기 위해 다니는 여행을 흔히 답사여행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답사여행과 여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사의 한자어는 ‘踏査’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보고 조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행인데 조사라는 말이 들어가니 왠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유럽여행을 가는 많은 사람들의 목적 중에 으뜸은 건축물을 보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여행상품이 대부분의 시간을 가우디

건축물 투어로 꾸며져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 그 모든 사람들이 답사여행을 가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우디 건축물을 느끼기 위한 것들이다.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바르셀로나의 역사와 가우디의 13

인생사에 관해 배우는 것이다.

건축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다녔던 여행은 답사여행이 아니라 그냥 답사였다.

무언가를 배우고 와야겠다는 목적이 워낙 강하다 보니 열심히 찍고 조사하기 바빴다. 한번 답사를 가면 그곳에 다시는 안 올 사람처럼 사진으로

모든 것을 담아내느라 정작 눈으로 보는 시간보다 렌즈를 통해 건물을 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건물을 본다기 보다는 거의 분해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답사에서 돌아오면 수백 장 때로는

수천 장이나 되는 사진을 정리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무슨 값비싼 골동품

처럼 컴퓨터 어딘가에 저장하여 그냥 묵혀 둔다.

누구도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을 찾아 꼭꼭 숨겨둔 14

보물처럼 말이다.

언제부턴가 답사가 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건축을 보는 즐거움은 온데간데 없고 찍고

기억하느라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여행일수록 여행의 기억도 쉽게 잊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건축물을 경험하기 위한 시간보다 조사하는

데에만 매달린 결과이다. 2014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다녔던 루이스 칸의 건축여행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한 도시에 있는 무수한 건축물들, 건축가가 모두 다른 건축물을 세밀히 조사하며 다녔던 이전의 답사와는 달리 그 해에는 한 건축가의 작품 궤적을 좇아 계획을 세우고 떠났다. 필라델피아부터 트랜튼, 뉴헤이븐을 거쳐 뉴햄프셔의

<필립엑서터도서관>까지의 긴 여정이었지만 방대한 자료를 마구잡이로 정리해 떠나는

답사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부의 깊이도 달라졌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에더만홀 기숙사> 앞 넓은 잔디밭에 앉아 명상도 하고 <엑서터도서관> 책상에 앉아 여행일정도

정리했다. 작은 마을에 있는 수영장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칸의 건물을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여기에 있는 동네 아이들은 칸이 만든 수영장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네” 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에 혼자 웃기도 했다. 여유가

생기면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건축가가 건축물을 사용자처럼 사용하고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좋은 건축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하룻밤을 외어서 본 시험이 절대 진짜 실력이 될 수 없듯이 공간을 경험하고 느끼지 않고 조사해서 얻은 지식으로 만들어진 건축은 허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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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Phiilips Exter Library ⓒ임영환 14. The Bath House ⓒ임영환


19 : 03-04

건축가 김선현 Sunhyun Kim www.dlima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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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의 행복한 건축

글. 김선현

D·LIM architects 파트너

작품에 대한 설명글은 종종 쓰지만 나에 대한 이야기는 2010년 젋은 건축가상을 수상한 후 만든 작품집에 짧게 쓴 글이 전부였다.

25년간 건축을 업으로 살아온 건축인생이지만 이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되짚어 보기는 아직은 겸연쩍은 나이인 듯하다. 하지만, 건축을 업으로 하는 삶을 꿈꾸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힘들어하고 있을 후배들이 포기하지 않고 건축가로 성장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맘으로 몇 자 적으려 한다.

아름다운 공간을 향유하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사치일까 필수일까?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면 건축 경기는 바로 직격탄을 맞는다. 이는 더 좋은 공간이 아니라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므로, 아름다운 공간을 추구하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사치다 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의 『행복의 건축』에 나오는 아래 구절을 읽는다면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것은 그저 삶의 일부라고 답하게 될지 모른다.

‘방 하나가 우리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의 행복이 벽의 색깔이나 문의 형태에

달려 있다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보고 살아야 하는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감방같은 창이 달려 있고, 더러운 카펫 타일이 깔려 있고 지저분한 비닐

커튼이 걸려 있는 집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괴로움이 영영 우리를 떠나지

않을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주위의 모든 것에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도 있다. 우리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환경을 늘 의식하면서 평생을 살아 갈 수는 없다. 따라서 결국

그럴 여유가 있는 만큼만 환경을 의식하게 된다. (중략) 이런 거리감의 고백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부재하는 곳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열었을 때

마주하게 될 슬픔을 비껴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알랭 드 보통)

타고난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대학 새내기 시절 첫 과제가 1m1m1m의 정육면체 나무로 창의적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많은 친구들이 목공소에 맡긴 반면 톱질과 망치질에 자신 있던 나는

혼자 몇일을 낑낑대며 작업을 완성했다. 다행히 담당교수님의 표정을 보니 맘에 드신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허허 웃으시며 “네가 인생에서 망치나 한 번 들어본 적이

있겠니?” 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아마 그것을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66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 싹이 보였다고 하던데 난 건축가로 클 자질이 그리 보였던 것 같지는 않다. 단지 놀이 거리가 제한되었던 어린 시절에 내 유일한 놀이 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방의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을 즐길 수

있는 낭만적인 아이였고, 인형을 마음껏 살 수 없던 시절에 다행히도 못쓰는 천 쪼가리를 이용해 하루에 하나씩 인형을 뚝딱 만들어 내는 그런 재주는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주말마다 집을 고치셨다. 처마를 손보고, 옛날에는 흔했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는 콘크리트 쓰레기통도 만드셨다. 게다가 절단된 지름이 큰 통나무를 가지고 와서 멋진 바둑판도 직접 만드셨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덕에 나는 어린 나이에도 톱질과 못질 가리지 않고 잘하는

재주를 가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에게 위험하기 짝 없는 연장을 쥐여 준 아버지는 어떤 생각이셨을까? 다음에 뵐 때 넌지시 여쭤 보아야겠다.

꿈꾸는 자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인생을 사는 것조차 벅차 이유없이 불안할 때가 많았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가 모두 그러하듯이.

중학생 시절 무심코 보았던 드라마 한 편에 꽂혀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고집 셌던 나는 대학시절 뒤늦은 고민을 한꺼번에 해야 했다. 때늦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친하지도 않았던 선배들을 붙들고 무수한 질문을 했고, 무작정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완벽하게 몸부림쳐야 한 치의 의심없이 건축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대학에 강의를 나갈 때면 그때의 내가 생각나서 말이 많아지고 손이 바빠진다.

지금도 떨림과 두려움은 있다. 매번 작업을 할 때마다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다. 만나는 건축주도 다르고, 건축물의 용도가 틀린 것도 있지만 설령 건축주와 용도가 같다 하더라도 대지가 다르기 때문에 건축가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해야한다. 이것이 내가 건축 작업을 할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과 동시에 설렘의 이유일지 모르겠다. 다행히 이제는 그 감정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인생이 계획대로 순조로운 듯했다. 건축가로 성장하고 있음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대학을 졸업했고, 대형설계사무소에 설계 및 프레젠테이션 테스트를 통과하고 입사를 했다. 그

설계사무소는 7am to 4 pm 근무시간 시스템이었기에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와 다시 새벽 6시에 출근길에 오르는 일상을 일년 넘게 했었다. 별 보고 귀가하여 별 보고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 된

삶이었다. 새벽에 귀가하여 벗어놓은 옷을 다시 그 다음날 입고 출근하기가 일쑤였다. 그 다음날 입을 옷을 고른다는 것조차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불가했던 시절이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꿈을 꾸고 있었기에.

입사 2년차에 명칭도 생소했던 IMF를 맞았다. 하루 아침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구조조정이

시작되었고 피 말리는 시간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던 세대에서 당당히 문화를 품평하며 품위를 지켰던 그 세대는 “물리적으로 살아남기”라는 숙명적 과제를 안고 전락했다.

옆자리의 동료와 선배가 하루하루 사라지고, 다음 날 또 사라지고, 그 다음 날은 내가 될지

모르는 긴 불안감 속에서 더 이상 건축디자인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크고 폼 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팀장들이 자의 건 타의 건 퇴사를 하게 되니 진행되던 일들은 인수인계라는 절차없이 살아남은 대리, 사원에게 인계되었다. 진행중이던 건축물의 공사비 절감 측면의

디자인 변경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옥탑층에 설치된 물탱크를 보이지 않게 높이 가렸던

파라펫은 이제는 의미가 없었고, 고민하여 선택되었던 건축외장재는 향후 몇 년 뒤의 내구성도 67


고민하지 않은 채 현재만을 살아갈 건축물처럼 변경되었다. 그 퇴보에 나도 일조를 하였다. 살아남아 뿌듯했고, 그래서, 슬펐다.

제도판에 머리를 파묻고 건축물만 바라봤던, 순수했던 시야에 조금은 때를 묻히고

싶어졌다. 완벽한 화장실 레이아웃을 위해 나는 왜 몇날 밤을 반납하는지. 45도 각도가 좋은지 40도 각도가 좋은지. 10센티가 옥에 티가 되어 몇날 몇일을 화나게 하는지.

나의 이런 고민들이 가치가 있길 바랬고, 그 가치가 성공으로 이어지길 바랬다. 전략이 필요했다.

나의 고뇌가 가치를 가지기를, 그 가치는 건축물을 높이고, 이것은 결국 건축물의

사용자를 위해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늦깎이로, M.ArchMaster of Architecture

가 아닌 PMProject Management 을 공부하게 된 이유이다.

세상에 나쁜 건축주는 없다 디림건축사사무소는 2007년에 개소해 2019년이 되었으니 벌써 12년차가 되었다. 속설에 1년을 버티면 3년은 무사하다고 3년을 버티면 7년은 무탈하게 지나간다 했던가? 그런데 벌써 열두 번째 해를 맞고 있다. 12년동안 참 많은 건축물의 준공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많은 건축주를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공간을 의뢰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만나는 건축주들의 얼굴은

항상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 긍정의 에너지는 나로 하여금 늘 건축을 하는 보람을 느끼게 한다. 직업적으로 성공한 분, 사업적으로 성공한 분, 가정 안에서 성공을 이룬 분. 그 분들 삶의 성공이야기를 듣는 것은 건축가가 누리는 또 다른 특혜인 것 같다.

아이를 위해 다락방에서 서재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놓아주고 싶은 꿈을 가진 아빠

외로운 어르신들의 공간을 위해 애쓰는 구청 공무원

직원들에게 쾌적한 업무공간을 제공하고 싶은 사장님

사업의 번성을 꿈꾸는 사업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은 유치원 원장님

명절에 대가족이 모이는 공간을 상상하며 즐거워하시는 여러 세대의 가장

새로운 생명이 처음 맞게 되는 공간이 가장 좋은 공간이 되길 바라는 산후조리원 팀장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용역직원들의 휴식공간마저 고민하시는 인간성 좋은 병원장님

물론 12년 사무소를 운영하다 보니 힘들게 했던 건축주도 있었다. 한 프로젝트를 몇달을 고민하며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허가 직전에 이유 없이 건축주의 변심에 의해

중단되었다. 대부분 해외에 체류를 하는 A씨는 홍대 근처에 건물을 신축하기를 바랐다. A씨의 대리인과 계약하고 대리인과 회의를 하며 그 진행상황을 A씨에게 이메일로

전달하며 커뮤니케이션 했다. 건축주가 희망하는 착공 일자는 정해져 있었지만 워낙 바쁜

A씨의 확인 이메일은 일정보다 항상 늦었다. 여러 번 연락이 두절되기도 하였다. 설상가상

대리인과 A씨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 대리인조차 없이 오로지 이메일로만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6개월이 지나서야 건축허가를 넣게 되었다. 그러다 A씨는

대지를 매매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게 사업은 비용정산 없이 종료되었다. 그 일로 경제적 손실을 보았으니 건축주인 A씨를 원망하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일의 손해는 건축주가 아닌 나의 우유부단함과 욕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건축주를 보지 않고 계약을 했다는 점. 건축주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법을 구체화하지 않은 점, 디자인 확인이 장기간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프로젝트의 진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음을 진지하게 공유하지 않음 점 등 수없이 많다. 중간중간 불합리한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조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은 욕심에 예견되었던 문제점을 애써 흘려 보냈던 나의 가벼움을 반성한다. 세상에 나쁜 건축주는 없다. 68


어느 날 한 청년이 너무나도 예의 바르게 적은 이메일로 연락을 취해왔다. 그의 아버지가 한

건물을 사옥으로 사용하기위해 리모델링하길 원한다고 했다. 디림건축사사무소의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폈고, 건축 철학과 그간 해온 건축 작업이 너무 맘에 든다는 이유로 우리를 찾았다며 리모델링 설계를 의뢰해왔다. 그의 겸손함과 건축가를 대하는 프로페셔널한 자세에 늘 그렇듯

의지가 불탔다. 그런데 건물을 검토해보니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낙후 정도가 심했고, 한 기업의 사옥으로 사용하기에는 층고가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건축주는 리모델링을 결정하고 의뢰를

해온 상황이었고, 전문가 입장에서는 리모델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향후 사옥으로의 가치를 생각하면 신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건축주를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청년의 아버지이자 플라스틱 안료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부정적 분석결과를 설명해야 하니 맘이 좋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뒤, 그

대표는 단 한 차례의 질문도 없이 “전문가가 리모델링이 비합리적이라고 보시는 거네요. 그럼

신축합시다” 라고 답했다. 그 말은 짧지만 확고했다. 그렇게 첫 회의가 끝나고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의 직관력과 추진력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맨 손으로 사업을 건실하게 이루어낸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듣게 된 그 분의 살아온

이야기에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를 넘어선, 인생 선배가 후배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따뜻했다.

<(주)플라스틱과사람들 사옥>(별칭,함채원)은 강동구청에 인접한 200㎡의 작은 모퉁이 대지

위에 서있다. 대로에서 한 블록 들어와 있는 전형적인 우리네 도심의 가로에 면해 있고 주변의

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열악하다. 프로젝트는 아파트, 연립주택, 상가 건물로 둘러싸인 좁은 대지 위에 임대 상가와 원룸 6세대, 그리고 중소기업의 사무실이 들어가는 복합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연면적 467㎡의 5층 건물은 강동구 디자인 심의와 용적률 완화를 위한 인센티브 심의를 거쳤고, 180% 기본 용적률에 강동구에서 권장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기준들을 충족시켜 194%까지

용적률을 완화 받았다. 도로사선제한선 바로 밑까지 건물을 올렸지만 가장 비례가 적절한 사선을 찾아내 건물의 형태를 독창적으로 구성했다. 건축주가 요구하는 원룸의 수를 맞추기 위해 한

개 층에 3세대를 구성했다. 벽체 두께에 의한 면적 손실을 줄이면서도 세대 간 소음을 없애기

위해 시멘트블록을 그대로 노출시켜 복도와 세대 간 칸막이 벽을 계획했고, 콘크리트를 노출시켜

상부를 마감하고 화장실 벽도 두께가 가장 얇은 불투명유리로 처리했다. 가사 공간과 개인 공간을 좌우로 구분해 공간의 효율을 높였고, 현관에서 사적인 공간은 보이지 않도록 처리했다. 면적의

효율을 위해 별도의 마감재가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콘크리트와 블록이 가지고 있는 거친 물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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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채원(이하 동일) 로비 ⓒ박영채 2. 외관 ⓒ박영채 3. 외관 야경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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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드러났다. 원룸과 사옥은 출입구와 동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만, 향후 사옥의 확장에 대비해 3층에서 연결 가능한 구조로 계획되어 있다. 모퉁이 대지 위 건물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 대비되는 표정을 갖고 있다. 대로변으로는 사옥의 이미지를, 주택가로 열린 반대편은 주거의 파사드를 드러내며 이웃에 대응한다. 사옥의 독립 출입구를 가진

대로변 입면은 기업의 청렴한 이미지를 표현하기위해 3m 모듈의 고밀도 패널로 줄눈 없이 마감되었다. 건물의 별칭인 ‘함채원含彩院’은 색을 담은 집이라는 뜻으로, 플라스틱안료를 생산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외부는 주변과 동화되는 무채색을 띠고 있지만

내부에는 다양한 원색을 담고 있다. 방문객이 로비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거친 송판 노출 콘크리트와 원색의 플라스틱 안료의 대비이다. 실제 플라스틱 안료 알갱이를 6m 높이의 폴리카보네이트 패널에 담아 로비의 전시 벽을 꾸몄다. 직원들이

근무하는 4층과 사장실이 있는 5층은 중앙의 보이드 된 공간으로 연결된다. 사무 공간과 회의실은 남쪽으로 열린 커튼월을 통해 따듯한 햇살을 받는다. 커튼월은 역경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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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층 원룸복도 ⓒ박영채 5. 4층 사무공간ⓒ박영채. 6. 5층 사장실 ⓒ박영채


기울어져 있어 빛의 양을 조절하며, 외부에서는 상가 건물의 전형적인 사선 형태를 탈피하는

조형적 도구가 된다. 4층과 5층 모두 테라스공간을 가지고 있고, 옥상에는 정원을 꾸며 직원들이 잠시 담소와 함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10년 전에는 의사인 친구를 참 부러워했다. 이유인즉 그 친구는 항상 주변의 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었고, 나뿐이 아니고 많은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건축을 업으로 하고 있지만 지인을 도울 일이 없다 보니 느끼는 감정이었던 같다. 그러다, 3년 전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을

하여 아들 딸을 두고 있는 이 친구는 판교 단지에 주택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었고, 벌써 주택

설계도 진행하고 있었다. 주택 도면에 대한 자문을 요청해왔다. 도면을 심도 있게 분석할 필요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설계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대로 공사하게 되면 많은 시련을 안겨 줄 것이 자명했다. 고민되었다. 계약의 조건 및 기성금의 지급 정도에 따라 나의 조언은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친구로서의 조언에 그치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 달리 친구의 간곡한 요청으로 그 집의 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였다. <코코넛집>이다.

<코코넛집>은 판교주택단지에 몇 남지 않은 필지에 들어선 단독주택이다. 외부는 마치 코코넛

껍질처럼 단단한 회색 석재로 마감했지만 내부는 코코넛의 과육과 같이 희고 달콤하다. 건물은 정방형 대지의 모양 그대로 중정을 품고 있다. 현관부터 시작된 내부 동선의 맨 끝에 부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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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코코넛집(이하 동일) 외관 ⓒ박영채 8. 주출입구 ⓒ박영채 9. 중정 마당 ⓒ박영채 10. 계단실에서 보는 중정 야경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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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이 있다. 거실을 지나 1층 계단실 바로 옆에 할머니 방이, 2층의 계단실 양 옆으로

아이들 방이 들어섰다. 부부의 공간으로 가는 동안 서로 마주치고 인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부부 침실은 서재와 드레스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지만

슬라이딩도어를 모두 열면 중정을 감싸 도는 열린 복도가 된다. 2층 경사지붕 아래에

만들어진 다락은 아이들 방 사이의 계단실과 화장실 상부까지 확장되며 각방에 넓은

침실을 만들어준다. 현관에는 창고가 딸려 있지만 신발장 문을 열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11

비밀공간이다. 부부 침실의 침대에 누우면 가로로 긴 코너창을 통해 산과 하늘이 보인다. 가끔은 부부방과 아이들 방을 연결하는 테라스에 나가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즐길 수 있다. 중정마당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으며 창고 문 상부에 숨겨진 스크린을 내리면 마당은 야외 극장이 된다.

현재 친구네 가족은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건축가 친구를 둬서 자랑스럽다는 그 친구의 한마디가 나를 힘 나게 한다.

여행, 건축가로 누리는 덤 현실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을 객관화하는 시간은 누구나 필요하다. 이것을 많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이룬다. 특히,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행은 마음의 식량이다. 사진이나 책을 통한 상상여행만으로는 배가 고프다. 익숙한 곳은 익숙한 대로, 낯선

곳은 낯선대로의 묘미는 상상력이 소진되지 않도록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마음과 머리를 채워준다. 또한, 자연 속에서 정신을 무장해제하는 충전 여행과 철저히 인공적인

곳에서의 영감 여행의 밸런스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주어진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12

가끔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한국의 미에 한껏 취하는 낭만을 즐긴다.

가끔은 고대 건축을 통해 깊은 영감을 받고, 한 인간의 미약함을 느끼며 겸손함을 배운다. 그 당시의 기술력과 어느 한 곳 소홀함이 없는 디테일에 현대건축 그 가벼움을 반성하며 막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히는 비장한 나를 보기도 한다.

가끔은 유적을 통해 한 시대의 전성기를 상상해 보는 것을 즐기기도, 그 무한할 것 같던 그들의 영광이 무너져버린 유적처럼 덧없어 한편으로 헛헛해지기도 한다.

가끔은 시애틀의 올림픽 조각공원Olympic Sculpture Park에서 바라보는 태평양 물줄기와

샌디에이고 San Diego에 위치한 루이스 칸의 솔크연구소 Salk Institute의 비움의 중정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에 비치는 빛의 다름을 즐긴다.

가끔은 여행중 천혜의 자연 속에 너무나도 인공적인 건축물이 환상적 조화를 이루는

광경과 조우하는 행운. 혹시 스위스 어디선가 알프스 소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자연 속에 “앗”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건축물을 만나는 행운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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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실 ⓒ박영채 12. 다락방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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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조성익 Sungik Cho www.trugroup.co.kr


냅킨 드로잉

글. 조성익

학창 시절, 건축가를 동경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냅킨 드로잉이었다.

TRU건축사사무소 대표

기다리고 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주변을 찬찬히 응시하던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테이블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근사한 레스토랑. 검정색 옷을 입은 건축가가 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식탁에 앉아 음식을 위에 놓인 종이 냅킨을 집어 든다. 호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냅킨 위에 쓱쓱 스케치를

시작한다. 그 즈음 설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순식간에 작은 냅킨 위에 건물의 윤곽이 그려지고 때 맞춰 나온 콘스프를 음미하며···. 어딘가

영화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건축가의 클리셰인데. 이런 모습이 그 시절의 워너비였다. 그로부터 한참 후 건축가가 된 지금. 멋진 레스토랑에서 건물의 아이디어가 떠오른 일은

아쉽게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냅킨 드로잉만큼은 건축가를 꿈꾸는 사람들의 로망이라 믿고 있다. 멋지지 않은가? 손바닥 만한 종이에 느슨한 선으로 그린 그림이 씨앗이 되어 정교한 도면으로 자라나고 거대한 건물로 현실화되는 일이. 생각해보면 스케치 뒤에

이어지는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가 없다 뿐이지 지금 내가 건축가로서 하고 있는 일이

당시의 로망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순간 떠오른 작은 생각의 실마리를 붙잡아 재빨리 종이 위에 옮기고 세심하게 공을 들여서 실제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 말이다. 이런 이유로 꽤 만족하며 건축가의 길을 걷고 있다.  냅킨 드로잉에 대한 로망이 나한테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미국의 건축 월간지

《Architectural Record》에서는 매년 <칵테일 냅킨 드로잉 콘테스트>를 열고 있는데 칵테일 잔 밑에 딸려 나오는 냅킨에 건축 스케치를 그려서 응모하면 우수한 작품에 상을 주는 행사다. 매해 4백 명쯤 되는 참가자들이 있다고 하니 냅킨 드로잉의 동지들이 전

세계에 활약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기쁘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을 찾아보시고 참여도 해보시길.

왜 건축가의 스케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까? 앞서도 말했지만 짧은 시간에 쓱쓱

그린 조그만 그림이 땅 위에 굳건히 서 있는 거대한 건물이 된다는 그 스케일의 도약이

신기하기 때문일 것 같다.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스케치의 대가인데 굵은 펜으로 빠르게 그린 선들이 몇 년 후 수백 미터 길이의 베이징 공항으로

완성되는 것을 보면 마법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가 그린 스케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댓 개의 곡선 주변에 점을 찍어 놓은 것이 전부인데 건축가는 이런 간단한 그림을

그리며 이착륙을 하는 수백 대의 비행기와 여행을 앞둔 수만 명의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위대함은 단순함 속에 있다는 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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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있는 집을 설계했다. 집 위에 집을 얹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린 스케치가 능동 하늘집이 되었다. 삼각형 지붕을 옆으로 슥 밀어볼까, 수첩에 그렸던 그림이 광주 다락집이 되었다. 한 식구의 복잡다단한 생활을 담아야하는 집을 단순 명쾌한 그림 하나로 응축하는 맛, 스케치에는 생각을 점프할 수 있는 즐거운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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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명을 위한 건축은 아니지만 나도 건물의 초기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도구로 스케치를 활용하곤 한다. <진천 벚꽃집>에서는 ‘벚꽃을 보는 전망대’ 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지붕 너머로 탑이 있는 공간을 설계했다. 집 위에 집을 얹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린 스케치가

<능동 하늘집>이 되었고 삼각형 지붕을 옆으로 슥- 밀어볼까 하며 수첩에 그렸던 그림이 <광주

다락집>으로 지어졌다. 한 식구의 복잡다단한 생활을 담아야 하는 집을 단순 명쾌한 그림 하나로 응축하는 맛. 스케치에는 생각을 점프할 수 있는 즐거운 가능성이 있다.

[진천 벚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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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 하늘집] 1~2. 베이징 공항, 노먼 포스터 3~4. 진천 벚꽃집 5. 능동 하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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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갑 종이에 그린 화가 이중섭의 그림이나 아내의 치마 폭에 쓴 다산 정약용의 편지처럼 식사 후 입을 닦는 용도로 만들어진 냅킨 위에 스케치를 하고 있으면 의외의 상상력이 펼쳐진다. 보드라운 질감의 종이가 찢어질까 조심스럽게 펜을 대면 잉크를 빨아들여

유순하게 주변으로 번져 간다.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를 잡아 둬야 하기에 냅킨의 손바닥 만한 면적이 늘 아쉽다. 그 한계와 간절함 때문에 오히려 생각은 대담해지고 표현은 심플해지나 보다.

로망으로 시작되어 직업으로 연결된 스케치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일상 생활에도 이어졌다. 평소에 보고 생각한 것을 작은 그림으로 정리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여행을

가게 되면 새롭게 보고 들은 것들을 스케치북에 옮겨 두곤 하는데 일주일 정도 휴가를 다녀오면 두어 권의 스케치북이 그림으로 빼곡히 차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페이지를 넘겨보면 흐뭇하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예를 들면 시에나에 몇 날 머문 일이 있었는데 (시에나는 위대한 캄포 광장이 있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다.) 오래 전 중세에 만들어진 도시의 광장은 조개껍질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완만한 경사가 한 점으로 모이는 특이한 모양으로 유명하다. 아침이면 산책을 나가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하루 이틀 그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전날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높은 탑의 그림자가 광장을 움직이며 다니는데 마치 해시계처럼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대략의 76

6~7. 광주 다락집


시각을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나가 보니 광장의 바닥에 그려진 패턴을 따라 미묘한 경사가

있어서 빗물이 빠르게 광장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가 그치면 금세 바닥이 마르고 사람들이 앉기 좋은 상태가 되는 이유에 이런 비밀이 있었다.

이런 관찰과 발견을 차곡차곡 스케치북에 모으는 일은 내 여행의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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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캄포 광장, 이탈리아 시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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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스케치라는 주제가 나온 김에, 일본의 건축가 우라 가즈야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여행 중에 머문 호텔룸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호텔 방에 도착하면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지는 대신 방안의 물건을 털끝하나 78

9. 캄포 광장, 이탈리아 시에나


여행과 스케치라는 주제가 나온 김에 일본의 건축가 우라 가즈야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여행 중에 머문 호텔 방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스케치하는 일을 한다. 호텔 방에 도착하면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지는 대신 방안의 물건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둔다.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다. 우선 줄자를 꺼내서 방의 길고 짧은 변의 길이를 재 본다. 방의 윤곽을 종이에 그리고 세부사항들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침대와 콘솔의 위치. 워드로브의 문이 열리는 방향. 심지어

촛대와 컵의 위치도 체크해서 세세하게 그려 넣는다. 가는 펜으로 그린 그림 위에 투명 수채화

물감으로 카페트와 침대 시트의 텍스처를 표현한다. 여기까지 두세 시간 작업을 해야 비로소 이 건축가는 옷을 갈아입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잔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그의 작업에서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스케치를 할 때 사용하는 종이다. 호텔 룸에

비치된 편지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그래서 가끔 스케치 한 켠에는 <포시즌스> 같은 호텔의 로고가 들어 있다. 건축가가 스케치하고 있는 호텔 방이라는 현장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디테일이다.

궁금하신 분들. 그가 스케치를 모아 펴낸 책. 『여행의 공간』을 꼭 보시길 바란다. 그 정교함과 정확도에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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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행의 공간, 우라 가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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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스케치가 젊은 건축학도의 마음을 끌었던 또 다른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면 손그림이 주는 ‘구식’이라는 느낌도 한몫했었던 것 같다. 오래 전에는 건축가들이 모두 손으로 도면을 그렸지만 지금은 건축 설계에 컴퓨터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많은 건축가들이 컴퓨터를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삼차원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근사한 곡선과 형태를 뽑아내 주는데 자글자글한 손 그림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장점이다.

스케치의 매력은 이런 컴퓨터의 세계에서 아날로그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멋짐이 아닐까? 컴퓨터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만 흔들리는 기차에서 그린 투박하고 애매한 라인들은 오히려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아직 미완으로 남은 부분이 색다른 아이디어를

불러모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약간 촌스럽지만 단골이 많은 식당처럼 완성되지 않은 여지가 있어야 아이디어들이 달라붙어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세계적인 건축가들 중에 스케치와 친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들고 싶다. 나의 스케치 히어로들을 소개하자면,

미국의 건축가 스티븐 홀. 거친 질감의 종이 위에 투명 수채화로 그린 스케치는 아름답고 푸근하다. 그가 설계한 성 이그나시우스 교회를 가 보았더니 교회 내부의 벽이 마치

스티븐 홀의 수채화 붓 터치처럼 빛을 받아 반짝였다. 바람을 품은 돛 같은 자유로운

선이 특징인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도 좋아한다. 스파게티가 뒤엉킨 듯한 라인을 눈으로 따라가며 천천히 들여다보면 “뭐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는 행복하고 낙관적인 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알도 로시는 장난꾸러기처럼 뾰족 지붕을 그려 놓고 알록달록 색을 칠했다. 어른을 위한 동화책에 나올 법한 그림이다.

건축에 관심 많으신 여러분. 건축가들의 스케치를 찾아보면서 저의 로망에 동참해보시길. 식당에서 냅킨을 꼭 챙기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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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여행의 공간, 우라 가즈야


19 : 03-04

건축가 박창현 Changhyun Park www.aroundarchitects.com


몇 가지 단서들

글. 박창현

a round architects 대표

음악과 리듬감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고전 음악을 들어 왔다. 양친이 모두 음악을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하루 종일 고전음악과 함께 했다. 고전 음악에 노출된 시간에 비하면 어느 것 하나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오랫동안 들어왔던 음악은 나의 삶에 스며들어 있다. 고전 음악을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간간히 입시생을 위한 피아노 레슨을 집에서 하셨기에 비슷한 곡의 반복 연습을 들어야만 했다. 박자와

타건의 강도 그리고 빠르기 등등 섬세한 소리들은 나의 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든 환경이

되었다. 그런 음에 대한 예민함이 채워지면 곡에 대한 유연한 리듬감이 생기게 된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음악을 들어오면서 몸에 스며들어 있는 감각과 감수성이 나의 무의식에 깔려 있게 되었고 지금도 나도 모르게 그런 감각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집에서 오랜 시간 동안 피아노와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되었고 건반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좀 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면 아마도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때는 피아노 보다 작곡에 관심이 많았다.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성으로 새로운 곡을 피아노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중학교 저학년 때 부모님에게 작곡 공부를

시켜달라고 조르면서 창작에 대한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처음 작곡을 전공한 선생님으로부터 화성학, 대위법을 접하면서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곡을 만듦에 있어서 기본 구조와 변주에 대한 여러 개념들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학교 친구들이 록rock music 과 가요를 들을 시기에 나는 고전음악에 빠져

있게 되었고 결국 전공을 위한 수업까지 들으면서 더욱 그 세계에 빠져 들었다. 사춘기의 기억보다는 음악을 듣고 작곡 입시를 위한 시간들이 중학교 시간과 함께 했다. 그 뒤

부산에서 살던 나는 종종 특별 레슨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 오면서까지 준비를 했지만 시험 당일 피아노 실기시험을 치다가 갑자기 코피가 터지는 사고와 함께 시험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참 추웠던 겨울 시험 전날 서울로 올라온 탓에 너무 긴장해서인지 실기

시험 도중에 피를 쏟고 만 것이다. 함께 실기 시험을 치르던 동료 수험생들에게 부끄럽기도 했고, 결국 나는 시험 평가 선생님들이 안정하라는 소리조차 뒤로 하고 시험장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어린 나에게 참 가까울 뻔 했던 음악과 거리를 두게 된 추억의 사건이 되었다. 아직도 그

때 듣던 오디오와 턴테이블과 함께 하면서 어릴 적부터 가까웠던 리듬감이나 작곡에서의 구성과 구조는 나에게 또 다른 감각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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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예 1주일 전 서울에서 우연히도 23년 만에 대학 은사님을 만났다. 학부 때 별로 존재감 없던 학생을 정년 퇴임을 앞둔 교수님은 오랜만의 재회임에도 아주 반겨 하셨다.

사실 교수님과 처음 만난 것은 1992년의 일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부산대학교는 예술대학 안에 미술학과가 있었고 그 중 공예 전공으로 과가 나뉘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공예 전공에는 다시 도자기, 목칠(옻칠), 목가구로 세분화 되어 있었고

1,2학년에는 세 전공을 다 경험한 뒤 그 중 한 전공을 3학년 올라갈 때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목가구를 전공하였고 그때 가구를 전공했던 것이 이후 건축설계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은사님은 목칠 전공 교수님이었고 그랬기에 1,2학년 때만 수업을 했었다. 1,2학년 수업이었지만 목칠에 대한 기본 내용과 조형에 대한 수업, 그리고 재료에 대한 여러 다양한 경험들이 주로 진행되면서 간접적으로 목칠의 전통적인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공예는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몸도 힘들고 공이 많이 들어가는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목칠 작업은 형태의 스케치를 통해 정리하고 스케일이 작은 스터디를 위한 오브제를 만들어

형태를 발전시킨다. 그렇게 나온 형태를 최종 결과물로 만들기 위해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붙이고 쌀로 만든 풀로 단단하게 형태를 고정시킨다. 여름에는 3일, 추운 겨울에는 1주일 정도면

삼베 위의 풀이 마르게 되는데 그것을 사포로 갈아서 면을 깨끗하게 다듬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다시 삼베에 풀 먹이는 작업을 하고 말리게 되는데 이렇게 한 번씩 하는데 1주일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 삼베는 거의 7겹을 붙이는 작업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만 최소 7주가 걸리게 된다.

그렇게 형태를 만들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옻칠을 올리게 된다. 옻칠은 민감하기도 하고 먼지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칠을 위한 방이 따로 있다. 그 방은 여러 겹의 비닐로 쳐져 있고 그 속에는 다시 3명 정도가 동시에 들어 갈 수 있는 미송 판재로 만든 가구같은 방이 또 있다. 교수님은

형태가 되면 옻칠하는 방식을 전통 그대로 가르쳐 주셨는데 먼지가 칠방에 들어 오지 않게 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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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고 비닐 옷과 머리 수건, 그리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하물며 손톱까지 깎고 작업하게 하였다. 옛날에는 칠방에 들어가기 위해서 몸의 털을 모두 깎고 옷을 벗은 상태에서 들어가 칠을 할

정도로 먼지에 민감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매번 단호하게 지킬 내용을 엄수하라고

알려주셨다. 칠을 하고 나오면 다시 칠이 마르는데 1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칠 또한 6~7회 정도 칠 살(두께)을 올리게 되는데 급한 마음에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연마를 하게 되면 칠이 밀리게 되어 다시 칠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때 교수님은 칠공예 작업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고 그 시간이 결과물을 숙성시키고

완성도를 만들어 내는 소중한 인자라는 이야기를 강조하셨다. 즉, 예술가란 시간을 정지시켜

순간순간 소홀히 지나치는 아름다움과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제 일로 삼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콘크리트가 다 양생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기후나 기온이 맞지

않으면 기다렸다가 시공해야 한다. 그리고 작업에는 순서가 있다. 건축에서 구축이라는 단어가

뜻하듯 순서대로 하지 않거나 동시에 진행해 순서를 바꿔 시공할 수도 없고, 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기다림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기다릴 수 있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본 생각은 학부 때 그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소중한 철학이기도 하다.

몸과 감각 나는 학부 때 목가구를 전공했다. 목가구는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학과인데 디자인에 대한

수업도 많이 있었다. 한 학기의 결과물은 자신이 디자인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전시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처음 컨셉을 잡고 생각하는 방향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은 건축 설계에서 진행하는 프로세스와 닮아 있다. 그러나 크게 다른 부분은 결과물을 1:1로 학생 자신이 직접 만든다는 것이 다르다.

가구를 만들기 위해 먼저 나무를 고르는 것이 필요한데 좋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보통 여러 곳의 제재소를 다니면서 선택을 한다. 나무 수종에 따라 큰 판재로 나오는 나무도 있고 그렇지 않은 1. 학부재학 시절 목칠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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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가구의 크기에 따라 나무 수종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원목 중에서도 오랫동안 건조된 목재를 구입해야 변형도 적고 수축 팽창이

적기 때문에 수종을 선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이후에는 하드웨어를 선택하고 목재를 잘라 가공을 하는데 이 또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크기가 큰 경우 혼자 자르기도 어렵고

작업의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목재를 밴드쏘나 환톱으로 재단하고 대패와 사포로 표면을 다듬는 작업은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거의 몸으로

직접 한다. 기계로 다듬는 것이 한계가 있고 손으로, 몸의 감각으로 그것을 확인하면서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은 기계가 대신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항상 무거운 목재를 옮기고

자르고 시간을 거치게 되면서 몸으로 만드는 것은 마치 몸과 가구가 하나로 되는 느낌까지 도달하게 된다. 가공품이나 공장 생산품과는 다른, 정교하고 세밀한 완성도를 지닌 성과품에서는 한편으로 인간미까지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손과 몸에 재료와 연결된 감각이 생기게 되는데 어느 정도 강도의 목재는 어느 정도 힘으로 연마가 되는지, 이 정도의 크기는 얼만큼의 힘으로

들거나 무게감이 있는지, 재료와 재료가 접합하는 부재의 사이즈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고 힘을 받을 수 있는지, 디테일에서 접합에 대한 폭과 길이는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모든 ‘몸 지식’을 학부 때 가구를 제작하면서 배웠다.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재료에 따른 부재의 사이즈와 그 재료를 지탱하는 방식과

접합하는 방식은 설계에서 흔하게 결정해야 하는 수순의 하나이다. 몸 지식이나 몸 감각이 없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어떻게 접합하는 것이 맞는지 알기 어렵다.

사람이 사물을 만드는 방식과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효율성을 강조하는 생산방식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원하는 쓰임과 모양에 맞추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나오는 물건들이 삶의

방식을 경직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와 교감 없이 주어지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행복에 대한 잣대 역시 타인에 의해 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설계를 시작하면서 그 대지와 사용자에 대한 생각, 그리고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긴 여행과 같다고 생각했다. 건축은 하나씩 하나씩 과정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

완성되고 그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몸으로 만들어 나가는 결과물이며 그로써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도구이다. 이런 결과물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이전의 나의 경험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이우환의 조응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우환’의 글을 읽어 왔다.

그가 생각하는 것 중 ‘장소’에 대한 내용과 ‘만남’이나 ‘신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내용들은 나도 모르게 나의 결과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의 미술은 넓은 의미에서 개념주의로 규정할 수 있는데 관념을 비실체적으로 표현하면서 더욱

그러한 관점이 커지고 있다. 반대로 이우환의 작업은 실체적인 만남에서 출발하게 되는데 세계는 만남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는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세계는 사건의 연속이며 이 사건이나 현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찰나에 만나게 되고 시적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또한 그 사건은 어떠한 ‘장소’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매개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가 개입되면서 상호 만남에 대한 특별한 벌어짐이 사건으로

증폭되는 내용은 이우환의 생각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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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우환의 책


키에르케고르나 하이데거는 만남을 나와 타자, 의식과 세계의 갈라진 틈새에서 일어나는

‘어울림’으로 설명하였고, 베르그송이나 니시다 기타로는 ‘순수 경험’, 바슐라르는 ‘시적 순간’,

보들레르는 ‘조응’으로 파악했다. 어떤 것이든 일방적인 생각이 아니라 양쪽의 상호적인 사건으로 서로 간의 관계에 의해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고 드러나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통해서 장소와 사물에 대한 생각의 폭을 얼만큼 열어놓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건축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틀을 만들기 위해 장소와 물리적인 매개가 나와 타자를 연결하거나 개입되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용도 이우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만남’이라는 것은 장소성의 자각, 만남의 관계를 지속하고 보편화하는 행위로서의 구조 작용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편안한 행위들을 통해 사물과 사람이 만나게

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는 관심은 여러 다양한 시도로 건축에서 드러내려고 한다. 결국 건축도 장소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친구들과 인터뷰 건축설계 일을 하면서 일과 관련된 사람 이외에는 별로 만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그리 관심도 없다. 성격상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즐겁기도 하기에 사람들을 만나면 주로 듣는 편이다. 그렇게 듣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졌다.

내가 일을 하면서 고민하거나 어려워했던 지점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어 나갔는가도 궁금하고 현실적으로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시작했던 작업이

인터뷰이다. 건축가의 인터뷰는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내용이기도 했지만 그전에는 동업관계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인터뷰 일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 어려웠다. 2013년 독립하여 나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처음으로 진행한 일이 1970년대생 건축가의 인터뷰이다. 일단 나와

비슷한 동년배의 건축가이며 자신의 사무소를 운영하는 실무 건축가이자 3년 이상 꾸준히 작업을 해온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당시 리스트에는 대략 30여 명의 건축가가 올랐는데 나이, 전공과 출신 학교와 실무 경험한 출신 사무소, 유학의 유무를 포함해 8가지의 항목을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직접 알고 지내던 건축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면식이

없었어도 물어보면 바로 연결이 될 수 있는 정도의 범위가 되었다. 이렇게 인터뷰를 생각했던 것은 일본 건축가 친구인 후지무라 류지로부터 선물 받은 『1995년 이후 차세대 건축가가 말하는 현대의 도시와 건축』이라는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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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지무라 류지(우) 4. 후지무라 류지의 인터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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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기 위해 선정한 건축가의 작업과 기사를 통해 내용을 정리하고 건축가에

맞는 질문지를 만드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건축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고 작업에서 일관된 관점이 보이면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반대인 경우에는 질문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내용을 드러낼 수 있도록 질문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우리가 이 시대에 생각하거나 고민해야 하는 과제에 대한 질문도 하게 되는데 이 질문도 답을 들을 수 있으면 좋지만 답을 할 수 없다면 질문을 계기로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진행했다. 5

여러 건축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고 공통된 관심사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건축가뿐 아니라 일본이나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건축가들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약 30여 명의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앞으로도 인터뷰 했던 건축가들의 5년 후, 10년 후의 이야기나 새로운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기대하며 꾸준히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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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5. 이소정, 곽상준 6. 시마다 요헤이 7. 윤재민 8. 장영철, 전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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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노쿠마 준, 나루세 유리 10. 렌 이토 11. 바바 마사타카 12. 최교식, 김주경 13. 차상훈, 우지현, 최영준 14. 김순주, 권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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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5. 카밀리오 호벨로 16. 토시하루 나카 17. 엠마누엘 리브 18. 서승모 19. 나가사카 조 20. 소가베 마사시 21. 유소래, 나은중 22. 아멜리아 코스타, 호드리고 리마 23. 후지노 타카시 24. 카가오 타카노리,시마다 요, 카키우치 코지, 누노무라 요코 25. 오신욱 26. 민우식 27. 김수영 28. 야마모토 니켄 29. 정현아 30. 서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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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구조 건축가의 개념이 서양에서 건너 왔고, 시대 상황의 반영에 의해 건축가는 마스터로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건축과 관련된 많은 분야와 내용을 건축가가 생각하는 방향과 의도대로 만들어 내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물론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내고 이끌어가는 것이 결과에서는 더 잘 드러날 수도,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결정과 방향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닫힌 구조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된다.

어떤 창의적인 작업을 할 때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언제나

‘가능성’이 살아있는 본연의 상태이다. 결과는 언제나 가능성을 기대하는 과정이며 어쩌면 결코 목적에 도달하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어떻게 호기심의 연장 상태를 과정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을 해오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의 유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하는 구조는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제안하는 결과물이 설계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사용자에 의해 결정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방법은 없을까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마스터 한 명이 결정해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닌 프로젝트 참여자인 설계 담당자, 31

사용자나 건축주, 시공자의 의견이나 감성을 받아들이면서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여러 다양한 조건들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 모든 조건들을 결과에서 빠지지 않도록

조율하고, 중요도를 정하는 것 자체가 설계의 과정으로 생각된다. 좀 더 유연하고 가능성을 포함하는 과정이나 방식을 생각하는 것으로써 열린 구조를 생각하고 있다.

맺음글 전술한 몇 가지 단어들은 나에게 중요한 사건들이자 인자들이다. 이 경험들이 모여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문득문득 어떤 결정을 할 때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요즘처럼 정보나 이미지가 많은 시대에서는 자신의

경험이나 결정을 믿고 그것을 밀고 나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변별력을 만들어 내고 결과의 특징이나 성격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결국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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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열린구조 스케치


19 : 03-04

건축가 김세경 Sekyung Kim www.mmkm.co.kr


건축이라는 올가미

글. 김세경

MMKM 공동대표

글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보니 가끔씩 잡지에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간단한

글조차 크게 부담을 느낀다. 지난 연말에 《와이드AR》로부터 원고요청을 받고도 시간만 보내다가 음력설이 지나고서야 자리를 펴고 대략 이러면 되겠다싶은 방법을 찾았다.

‘건축가의 자서전’이라고 하기엔 거창하다. 이번 기회에 건축가로써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개인적으로 중요했던 시기와 작업들을 펼쳐놓고 큰 단락을 만들어보니 자연스럽게 4단계 정도로 구분이 된다. 시기별로 참여했던 프로젝트와 경험들, 그리고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자면 나는 X세대(1965~1980년생,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의 중간쯤에 속하는 90학번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얼마 전 방영된 쌍팔년도

쌍문동을 배경으로 한 TvN 드라마 ‘응팔(응답하라1988)’의 주인공 덕선이와 친구들과 같은 나이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경험하고 산업화의 수혜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대중문화에 열광하던 세대이다.

내가 자란 부산은 일제 강점기 때 본격적으로 항구도시로 근대화되면서 자의반 타의반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영향으로 일본문화에 대해 거리감이 상대적으로 덜했던

것 같다. 90학번 과동기인 오랜 친구 김창훈은 중앙동에 있는 경문사(일본문학, 예술

전문서점)에서 원어로 된 《신건축新建築》 잡지를 사서 친구들한테 보여주곤 했었는데

책아저씨(학교마다 건축과를 돌며 전문서적을 소개하는 영업사원)가 들고 오는

번역복사판, 그것과는 다른 오리지낼러티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또 방학이면 배를 타고

일본건축기행을 가는 친구도 있고 졸업 후 일본유학을 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꼭

지역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안도 타다오Ando Tadao, 이토 도요Ito Toyo같은 일본건축가들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학생 때 작업을 보면 나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토 도요는 구마 겐고Kuma Kengo 와 함께 지금도 좋아하는 일본건축가이다.

내가 다녔던 동아대학교(부산)의 당시 건축공학과 입학정원은 80명으로 1946년에 개교를 했으니 졸업생 수가 상당해서 지역에서는 선배들 도움으로 취업은 어렵지 않은 편이었고

건축업이 전반적으로 호황일 때였다. 하지만 정작 졸업한 해인 1998년도는 외환위기(IMF 구제금융신청, 1997.11.21.)의 여파로 사회는 전반적으로 어수선했고 건축업계도 막

구조조정을 시작하던 때였다. 졸업과 불안정했던 사회생활 초년기(약 4년)는 건축가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존여부를 탐색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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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탐색, 정글의 법칙 졸업설계는 대학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나름의 도시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제시한 작업이다. 도시의 성장과 변화에 따른 내부구조의 확장가능성을 컴퓨터의 시스템 오류를

제어하는 아이디어Extension Manager(확장파일의 상호충돌에 의한 오류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와

접목해서 상업지구 내 소규모 필지의 건물들 사이에 코어역할을 하는 공용공간을 삽입하여 전체를 하나의 복합공간으로 활용하도록 함으로써 무분별한 재개발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도시재생 방식의 개발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건물은 부정형의 대지에 대응하면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와 표피를 가진 매스들이 대지경계선을 접하면서 공중에 띄워져 조합을 이루게 된다. 이는 밀집된 도시구조를 연상시키며

그 틈 사이로 흩어지는 빛과 뒤틀린 매스, 노출된 골격 등이 다양한 장면적 요소로 구성되며 여러 가지 동선은 다양한 시점을 제공한다.

졸업설계를 준비하던 시기는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1년간 떠나 있던 미국연수를 마치고 막

돌아온 때였다. 미국에 머물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건축기행을 한 경험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LA를 중심으로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

모포시스Morhposis, 에릭 오웬 모스Eric Owen Moss 등의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건축가의 작품들은 온화한 기후 탓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졸업설계에도 그 당시 느꼈던 형태, 재료에 대한 오마주가 있는 듯하다.

1990년대 건축계는 한국현대건축운동을 이끌던 4.3그룹(1990~1994)과 이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던 서울건축학교 SA(1995~2002)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졸업 후 첫 직장인 건축사사무소

건축문화(김영섭 대표)는 서울건축학교의 교장인 조성룡 소장님의 사무실과 서울건축학교가 같은 건물에 있어 당시 젊은 건축가들의 왕래가 잦았던 꽤나 핫hot한 곳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엔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이때부터 시작된 건설경기의 내리막으로

인해 건축설계업계의 사정은 갈수록 나빠졌고 건축설계 일을 그만두거나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대규모 설계사무소로 이직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1998년 입사당시 건축문화는 직원 20명 정도 규모의 아틀리에 사무소로 종교건축에서 오피스까지 일이 꽤 많은 회사였지만, 이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2001년 퇴사할 때는 1/3정도로 축소되었다.

이 시기에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설계업무에 CAD(컴퓨터를 이용한 설계)가 막 도입되기 시작한

2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작업도구에 대한 업무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고 당연히 이를 교육해줄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10년 이상을 중소규모

실무현장에서 CAD작업에 대한 제대로 된 매뉴얼을 본 적이 없었다. 작업방식은 개인마다 달랐고 도면의 질은 떨어졌으니 디자인의 품질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디자인을 구현할 도구가 너무나 열악했었다. 제도판 세대가 가고 CAD 세대에 맞는 시스템을 갖추기엔 당시 국내의 모든 상황은 최악이었던 것이다.

신입사원인 내게 주어진 첫 번째 프로젝트는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한, 천주교 박해시대 순교지인 남양성모성지를 재조성하는 사업으로

건축문화에서는 마스터플랜과 1단계 사업으로 사제관, 집회시설의

설계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업을 주관하는 이상각 주임신부는 설계자를 존중하는 분이어서 필요이상의 주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안목이

높아 어떤 안에도 쉽게 만족하지 않는 편이었다. 2년 정도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사제관 설계를 완료한 상태에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고

몇 번의 건축가가 바뀐 후에 20년이 지난 현재 세계적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 Mario Botta가 설계한 대성당이 공사 중에 있으며, 피터 줌토르Peter 가 기도실을 설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에게는

Zumthor

힘든 클라이언트임에 분명하지만 건물 하나를 짓는데 20년 이상을 심사숙고하는 그 분의 태도는 존경할 만하다.

3

1~2. Extension Manager, 1997 3. 남양성모성지 마스터플랜, 1998~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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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에서 보낸 3년 반은 낯선 환경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정글의 법칙’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근무시간의 경계는 없었고 집은 최소한의 휴식을 위한 베이스캠프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 압축된 노동과 탐험의 보상은 약간의 자신감과 또 다른 공허함

이었다. 한국적 모더니즘에 탐닉했던 당시 건축계의 화두는 내게도 건축적 본질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했던 자기소개서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건축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은 너무 방대하기만 하였다. 답을 위해 필요했던 지식들은 그

자체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고 주위의 어느 누구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도구도 없이 본능에 의지해서 분명치 않은 목표를 향해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완전히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갔다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만든다는 사실뿐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왜 만드는지는

항상 달랐다. 매번 다른 상황에서 모든 것에 완벽하게 대처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어떤

상황에도 공통적으로 유용한 최소한의 생존도구의 준비가 절실했다. 또한 그 도구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나만의 최적화된 방식이 필요했다.

불확실한 어떤 상황에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주워 모은 사실들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고학자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지식과

도구를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찾아 모으고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사실들은 목표지점을 향한 가장 정확한 길을 보여줄 것이다.

HGSA, 사라진 기억들 1990년대 중반 국제건축가연맹UIA이 요구하는 건축학 교육의 국제적 상호인정을

위해 국내 4년제 대학의 부족한 프로그램을 보완하고자 건축전문대학원이 생겨난다. 한양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HGSA(1999~2005)도 그 중 하나로

5학기제(스튜디오.3학기+졸업설계.2학기)로 운영되다 2005년에 일반대학원으로 전환되어 교과과정 중 하나로 남게 된다.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석사과정에서 역사와 이론을 공부하기에는 국내대학원 과정도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2002년 나는 다시 학생의 신분이 되어 2005년 졸업 때까지

30대의 초반을 왕십리(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기회에 스튜디오와 졸업설계 작업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관심사였던 도시의 현상적 문제와 건축의

인식론적 문제의 관심이 작업의 주제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스튜디오 1, IN SURFACE,

MEDIATHEQUE OF SEOUL, 2003] some QUESTIONS helped to proceed with this project.

what makes space different?

how can we define and recognize space?

what is the essential quality of space? the ANSWER to this question ar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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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arily related to the movement and relationship between a vie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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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IN SURFACE, MEDIATHEQUE OF SEOUL, 2003


and the object.

The main theme of this studio is; IN SURFACE.

IN BETWEEN detached skin from the ground and the excavated underground, not

successively accumulated, we tried to find new order of space that is different from the general historical order.

the CITY HALL -historical monument in SEOUL- need a change to something that

can resonate with this site and going to be part of the MEDIATHEQUE OF SEOUL. [스튜디오 2, architecture as TEXT, Navigating liquid space, 2003] 스튜디오의 실험은 바르트R. Barthes의

텍스트론과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시각의

연구를 사고의 출발점으로 하여 각자의 해석과 프로세스를 거쳐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각에 작용하는 공간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텍스트text는 형식과 의미로 해체되어 독립적인 개체로 서로

얽혀짐으로써 독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다. 오늘날 거대도시에서 각각의

6

7

건물들은 자본에 종속되어 하나의 오브제object로써 도시구조와 결합하여 상호텍스트적인

의미들로 소비consumption된다. 이에 따라, 설계의 범위는 더욱 거대해지거나 모호해지고, 건축가는 개개의 오브제들에 대한 신중함보다는 전체 관계의 배려에 대한 능력이 요구되어진다. 기하학geometry은 건축의 틀을 만드는 구조체계로써, 공간단위space_unit들은 유동적인

의미체계로써 자기참조적인 특징을 가지며 운동movement과 변형transformation과 투사projection에 의해 상호작용하여 미끈거리고, 중성적이고, 즐거움을 주는 유동적인 공간시스템liquid space system의

생성에 관여한다.

즉, 시스템은 하나의 공간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지각과 인식에 기초한 인간과 공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적용된 프로그램에 의해 공간에 대한 감각을 소비시키는 감각 기계이다.

근대인으로서, 건축가로서, 시인으로서 이상李箱은 시대를 앞서 간 박제된 천재이다. 오감도烏瞰圖 는

그의 3차원적인 공간적 상상력을 2차원적인 문학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엘 리시츠키의

프라운proun 회화나 테오 반 뒤즈부르그의 건축무한육면각체tesseractic space의 실험들에 비해 보다

3차원 공간으로 환원 가능한 시스템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텍스트로서의 건축architecture as 의 실험을 위한 훌륭한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TEXT

[졸업설계, 서울 도심활성화를 위한 중심업무지구 복합시설계획, 2005] 졸업설계(지도교수 정진국)는

거대도시 서울에서 ‘도심은 원활하게

기능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제안으로써 건축-도시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서울 도심에서의 전략적

설계방법을 모색한다. 전략적 프레임워크는 지구단위계획이나 개별프로젝트로는 조율하기 어려운 도심에서의 물리적 한계상황에 대한 통합/재조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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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의 복합화를 통한 자생적 변화를 유도한다.

후기산업사회에서 물리적 환경을 이루는 ‘공간개념’은 렘 콜하스 Rem Koolhaas의 표현을 빌리자면 6~7. architecture as TEXT, Navigating liquid space, 2003 8~9. 서울 도심활성화를 위한 중심업무지구 복합시설계획,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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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에서 마천루의 탄생 이후에 단순화된 거대볼륨들의 혼성적인 집단성과 거대볼륨 내부의 공간요소들의 밀집에 의한 또 다른 집단성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미학Junk

’으로, 모든 부분을 제어하고 조절하려는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서 건축가로서

Space

또는 도시계획가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제’를 목표로 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적 의식 수준의 일반적이고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프로그램의 복합화는 도심의 토지이용의 효율을 높임과 동시에 현대도시의 특징인

프로그램의 복잡성, 불확정성에 대응한다. 건축적인 장치는 적절한 수준의 우연적인

기능의 충돌을 야기함으로써 장소의 특이한 사건들을 만든다. 복합시설계획은 도시의 연속적 공간성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는 곧 상업적인 공적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시설은 지상의 3개의 건축물과 시청 앞 광장의 지하 공간과 이들을 연결하는 아케이드, 지하연결통로, 공중보행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설 A, B를 연결하는 아케이드는 동선과 프로그램이 교차된 밀집된 공간을 가진다.

졸업설계의 주제는 공간개념이라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도심활성화를 위해 어떻게 거대한 블록의 내부에 건물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건축적 방법론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0

이런 규모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축적 아이디어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졸업 후 개인적인 인연으로 합류하게 된 직장에서의 3년은 부동산개발사업의 설계파트너로 다시 현실의 위치로 되돌아오는 과정이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양, 규제완화 정책으로 공공주택사업, 민간개발사업 중심으로

반짝했던 건축경기는 반복되는 경제위기(2008 세계금융위기)로 또다시 곤두박질을 친다. 그리고 사라져간 설계사무소들... 사라진 학교들의 이름처럼 나는 이 시기의 기억을 굳이 되살리려 하지 않는다.

이 시기 월간 《건축문화》 편집부에서 일하던 친구 고 최연숙의 소개로 『영디자이너100』

이라는 단행본에 신진건축가로 소개되는 기회가 있었다. ‘건축가의 메모’라는 주제로 창작자의 사유를 구성하는 방식을 소개하는 에세이 중 개인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를 설명하는 일부분을 소개한다.

건축가에게 있어 메모는 ‘창조’의 과정과

‘실현’의 과정에서 모두 유용하다.

창조의 과정은 무수한 고민들이 내재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걸쳐있는

‘정신권 情神圈’의 영역에서 작업에 필요한

무언가를 현실세계로 ‘끄집어 내는’ 과정에

속한다. 종종 꿈 속이나 명상상태에서

얻는 아이디어는 현실에서의 그것보다

더욱 창조적인 결과물을 제공한다.

밤을 새워 가며 몸을 지치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가학적인 작업과정들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정신상태로의

전환을 유도함으로써 창작활동을

부추긴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현의

과정은 구름같이 불확실하고 덩어리져

있는 개념들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다.

건축가의 다이어그램은 이 단계에서 매우

유용한 표현이다. 보다 유능한 건축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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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과정을 애써 구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사고한다.

10. 서울 도심활성화를 위한 중심업무지구 복합시설계획, 2005 11. 어린이도서관 개념스케치, 2005


BIGNESS, 건축의 협력자들 10여 년의 사회생활 후 2008년의 나는 지쳐 있었고 턴키사업이나 각종 개발사업에 종속된 건축설계는

재미없는 숫자놀이와 그럴듯한 홍보물 만드는 일로

여겨졌다. 그해 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사무소를 열어 주택 리모델링 같은 조그만 프로젝트를 하면서 6개월을 지내다가 지인의 소개로 대형

설계사무소(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의 인테리어부서에 면접을 보고 3번째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1~2년을 생각하고 입사한 회사에서 7년을 대형프로젝트의 협력자(인테리어설계)로 보냈다.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제정으로 2005년부터 약 10년간 공공기관‧공기업 지방이전 건설사업이 줄을 이었고 상암DMC(디지털미디어시티, 첨단디지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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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클러스터), 판교테크노밸리(융합기술 중심의 첨단 혁신 클러스터)같은 지자체 단위의

산업단지 개발에 참여한 대기업 계열사, 방송사의

사옥의 건립도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현상설계를 통해 대형 설계사무소가 설계를 맡게 된다. 렘 콜하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임계점이 넘어서면 건축은 큰 건물이 되고 그러한 매스는 더 이상 단일한

건축의 몸짓으로는 통제될 수 없다. 이러한 불가능성은 부분의 자율성을 촉발한다. 실제 대형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건축설계팀(10명 내외)이 커버할 수 있는

디자인의 한계는 매스, 평면레이아웃, 입면, 구조 정도로 한정된다. 이것도 세밀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분야의 컨설턴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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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에 따라 하나 이상의 팀이 참여하더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따라서 발주처는 프로젝트의

질을 높이고자 계약조건에 인테리어설계를 요구하게 되고 대형 설계사무소의 인테리어설계팀은 이런 요구를 내부에서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는 A~Z까지 일관된 디자인디렉터의 의사를 존중하는 아틀리에 설계사무소의 작업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어찌됐던 나는 한동안 이 일에 재미를 느끼고 즐겼다. 수사적이고 과장된 건축디자인과의

구조적인 불연속을 인정한다면 재미 없는 상황은 피하고 만드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가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발주처와의 미팅보다 협력분야 설계자와의 미팅에서 얻는 게 더 많았고 건물의 소유자보다 사용자와 운영자의 입장에서 건축을 대했던 시기로 기억된다.

MMKM, 건축가 연합 2015년 말, 겨울이 시작되는 즈음에 나는 올림픽대로를 자동차로 달리면서 개인회사를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밀물처럼 나를 떠밀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개인사무소(KMA, 케이엠건축사사무소)를

만들게 되었고, 이전에 근무했던 건축문화에서 동료이자 선후배로 같이 일한 인연이 있는 민서홍(미니맥스아키텍츠 대표)과 함께 현재의 디자인브랜드 MMKM을 만들게 되었다.

12. SK 케미칼 Eco Lab 인테리어, 2009~2010 ⓒ박완순 13. 상암 MBC 신사옥 인테리어, 2009~2013 ⓒ박완순 14. NHN Entertainment 판교사옥 인테리어, 2011~2013 ⓒ박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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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정보플랫폼의 통계에 따르면 2013년 현재 4인 이하 규모의 건축사무소가 전체

사업체 수의 76%에 달하고 그 중 95%는 1인 사무소라고 한다. (2008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작된 구조조정과 취업난의 여파로 이후 2012년까지 신규 사무소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무소들은 소규모 건설시장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시장은 이미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으로

작은 회사들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생존방식이 필요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조직의 유연성을 가지며 다양한 분야로의 확장과 통합의 태도로 추상적 개념이나 디자인 성향보다는 프로젝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회사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프로젝트에 내재하는 건축의 목표를 찾으려고 했던 몇 가지 작업을 소개한다.

심리상담 연수시설인 <GESTALT HEILEN>(2016)은 남양주시

수동면에 위치하며, 이 지역의 겨울철 기후는 종종 강원도와 ​비교될 정도로 춥고 눈이 많다. 여기에 적용된

패시브하우스 기술은 건물의 형태와 재료 등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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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에너지절약형 설계는 가까운 미래의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도 더 많이 보급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안산시에 위치한 대학동성당 휴게공간

<미사후>(2016)는 사제와 신자가 만나는 공간이며 성당과 지역이 만나는 절충의

공간이다. 이 절충의 공간은 누군가 애써 전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머물며 소통되는 공간이다. 가깝지만

거리가 필요하고 공적이지만 사적인 공간의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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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사용자이며 그들이 곧 기획자이다. 건축가는 다만

관찰자이며 간단한 건축적 장치(3개의 벽)와 적절한 스케일의 공간을 제공하는 조력자일 뿐이다.

이촌동에 위치한 <대한의사협회회관>(2017)은 오래된

아파트지구내內 접근과 규모의 불리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단일 매스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방식의 상징성 구현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초고성능콘크리트 UHPC 패널을 사용한 백색의

외피를 제안하였다. 자부심이 강한 의료전문가를 회원으로 하는 새로운 협회회관에 형상이 자유롭고 강도가 탁월하여 독창적인 외관을 만드는 신소재와 신기술이 적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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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몇 마디 단어로 기억되는 개인적인

사건들을 그 시기의 사회상이나 건축계의 이슈도 같이 기억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기억은 자료를 찾아보고 확인하는 기회도 되었다. 자료를 많이 남기지 않는 성격이라 이번 기회에 충분히 소개하지 못하는 작업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있다. 그리고 원고가 마무리되었다는 해방감과 함께 문득 이런 질문 하나가 발목을 잡는다. ‘건축가는 건축이라는 올가미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자인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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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 Gestalt Heilen, KMA, 2016 ⓒ이한울 17~18. 대학동성당, KMA, 2016 19~21. 대한의사협회회관 현상설계, MMKM, 2017


19 : 03-04

건축가 민서홍 Seohong Min www.mmkm.co.kr


건축 짓는 농사꾼의 길

글. 민서홍

MMKM 공동대표

대학교육 시즌1 : 학생과 선생 탈건 : 건축에서 벗어남.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학생들로부터 꽤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이다. 왜, 건축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건축을 계속해도 좋은지, 건축을 해야 하는지, 어떤

건축을 하고 싶은지, 어떤 건축가가 되어야 하는지, 건축을 좋아하는지... 학생들의 고민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20여 년 전 대학생이었던 내가 했던 고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건축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 이 땅에서 건축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 년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건축가라는 직업이 갖는 특별한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여유 있게 살 수 없더라도, 남들이 누리는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물리적인 실체를 남기는 건축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IMF라는 사회적으로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호황에서 불황으로 넘어가는 1996년 대학에 입학했던 우리세대에게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를 넘어서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이냐 라는 새로운 고민을 하며 대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환경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우리 다음세대, IMF 이후 본격적으로 불황기에 대학생활을 했던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고민이 사치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쉽지 않지만 더욱 내가 좋아하는 일을 붙들고

내 능력이 허락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우리 후배들에게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리 세대의 몫이 아닐까 싶다.

학교에서 수업 중에 자주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한다. “건축과

학생으로서 대학에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 건축을 좋아하는지

여부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것에 매진하여 최선을 다해보는 것밖에는 없다. 대학 5년 동안 최선을 다해보고 건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되더라도 새로운 진로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처음 설계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시점이 3학년 2학기 집합주택 프로젝트를 하면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합주택 단지 내에 각호와 마당, 골목길을 엮으면서 새로 조성되는 단지가 자연스러운

동네로 인지될 수 있도록 계획했던 것이 당시 지도교수이셨던 이성관 선생님의 눈에 들어

학기말에 설계반 대표로 학과생 모두 앞에서 발표했던 설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동안 한울건축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 건축사사무소의 분위기를 처음

느꼈고, 만류하는 선배들과 주위 친구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건축설계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더욱 매진하여 졸업설계 프로젝트로 학과 98


최우수상과 대한민국 건축대전 입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현재는 선생으로서 학생들이 건축설계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실무수련 시즌1 : 김영섭 건축문화 대학을 졸업한 2003년, 당시 분위기는 건축설계를 하려는 사람은 응당 아틀리에, 소규모 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아틀리에의 생리상 대규모

설계사무소처럼 분업화하기가 어렵고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당백으로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수행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나 역시 건축설계를 계속 고민하는 선배들과 친구들의 조언과 고민들을 통해 김영섭 건축문화에 입사하였다.

김영섭 선생님은 천주교 교회건축으로 일가를 이루며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건축가 가운데 한 분으로 대표작으로는 <안양중앙성당>, <심곡부활성당>, <청양성당>, <초당성당> 등 수없이

많은 교회건축들을 1983년 이래로 꾸준히 작업해 오신 분이다. 건축 외에도 교회사, 종교음악,

종교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의 관심은 물론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시기도 하다. 그분이 이끌던 건축문화는 교회건축을 통해 실험적인 형태와 공간을 자주 제시하고는 했는데, 특별히 말안장 형태의 지붕을 갖는, 기둥하나 없는 <안양중앙성당>의 거대한 내부공간에서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지금이야 디지털 툴을 이용한 형태실험이 흔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디지털 툴을

이용해서 설계하는 프로세스가 국내에 정착되지 않은 1990년대 후반, 건축문화는 그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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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실험의 전 과정을 모형과 도면으로 해냈다는 것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놀랍기만 하다.

하긴 1800년대 후반에 활동했던 안토니 가우디는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계획하기도 했으니, 재주 없는 목수가 연장 탓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특별히 형태와 그

형태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건축문화는 첫 직장으로서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건축문화에서 나에게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단연 우리 가족을 위한 한옥을 설계하고 지어보았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집이 아니다’라고 늘 말씀하신

아버지는 내가 건축문화에서 실무수련을 하는 동안 작은 한옥을 마련하여 의뢰인으로써 김영섭 선생님을 찾았다. (실제로 지금까지 내 삶에 있어

10대의 10년을 제외하고는 우리 집은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서 거주했다.) 이 프로젝트의 주무자는 당연히 내가 되었고, 설계부터 감리와 준공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경험할 수 있는, 그것도 단순히 건축사보로서가

아니라 의뢰인의 아들, 직접 거주할 가족의 일원으로서 작업할 수 있었기에 건축가를 꿈꾸는 나에게는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1년에 가까운 프로젝트 과정을 통해 도면이나 모델로만 상상하고 계획하는 건축물이 실물이 되어 대지에 지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거의 매일 현장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고,

하루는 희열감에 몸을 떨다 다음날은 잘못된 시공으로 인해 좌절감에 치를 떠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이었다. ‘가족을 위한 프로젝트를

첫 프로젝트로 맡게 되는 것은 건축가에게 행운이자 동시에 재앙이다.’라고 말하는 주위 건축가들의 농담 섞인 이야기가 충분히 공감되는 경험이었다. 그래도 이 작은 한옥 프로젝트가 건축을 하고 있는 내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건축문화는 또 하나 나에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파트너 김세경 소장을 만나게 된 것. 당시 그는 사무소

실장이었고, 나는 신입사원이었지만, 사무소 안에서 가장 이야기가 통하고

자주 어울렸던 그와 결국 사무소를 함께 운영하며 동고동락하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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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익대학교 1학년 공동작업 ⓒ고영준 2. 우리가족을 위한 한옥 프로젝트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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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육 시즌2 : 건축설계와 도시설계 건축문화에서 3년간 실무수련을 마치고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형태와 공간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디지털 건축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흐름에 흥미를 갖게 했고 2006년 당시 디지털 툴이 가장 발전했던 미국으로의 유학을

계획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건축문화에서 경험했던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예술인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건축학과 도시공학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파악했고,

그 중간 어디쯤에 도시와 건축스케일을 연계할 수 있는 학문 Urban Design이 미국 학교에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한국 건축계에서는 도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논의하고 있었고, 나는 그때 체계적으로 도시설계를 가르치고 있는 미국에서 건축설계학 석사와 함께 도시설계학 석사를 복수전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내 생각에 미국에서 디지털 툴을 이용한 설계방법론이 가장 발달한 대학은

콜럼비아대Columbia University였으나, 그 진원지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라고 판단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학풍이 뚜렷한 버클리대UC Berkeley를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버클리대는 사회학, 인문학 등과 학제 간 교류가

발달되어 있어 제 3세계에서 건축의 사회적 역할이나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현대건축의 흐름에 대한 고찰 등에 초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디지털 건축은 버클리대에서는 다소 경시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매학기 UCLA로부터

디지털 건축 분야에서 권위있는 교수를 초빙하여 스튜디오를 운영했는데, 나는 사이악S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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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산오페라하우스 현상설계 출품작


Arc

의 전 학장이었던 닐 디나리Neil Denari 교수의 스튜디오를 수강했다. 버클리대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통해 지금까지도 내 건축적 태도를 만들어준 두 개의 어록이 있다면, 닐 디나리

교수님의 ‘나는 어젯밤 네가 꾸었던 꿈을 알고 싶지 않다. 그려서 (디지털 툴로) 보여주고, 실물로 어떻게 만들지 말하라.’와 로디 크리던Roddy Creedon 교수님의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네 생각이 아니다.’이다. 이 말씀들은 지금 내 작업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씀들이다. 몇 번의 스튜디오로는 디지털 건축에 대한 호기심을 채울 수 없었고, 더욱이 뉴 어바니즘New Urbanism의 영향을 받은 버클리대의

어반 디자인Urban Design의 커리큘럼은 내가 생각했던 도시설계의 모습과는 달랐기에 나는 다시

콜럼비아대로 옮겨 학업을 이어나갔다.

콜럼비아대의 어반 디자인 커리큘럼은 나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2008년 리만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양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질적 성장의 시대를

대비하는 도시계획과 관련하여 지역 간, 도시 간, 국가 간의 관계로부터 낙후되었거나 침체되고 있는 특정지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큰 주제로, 지금 한국에서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도시재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년 3학기, 세 번의 스튜디오에 나누어서 철저히 검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밀도 있는 리서치를 통해 마스터플랜을 계획하는 것이 도시설계 스튜디오의 핵심이었고, 다른 이론수업들은 스튜디오 과제를 보다 심도 있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해주었다. 특히 리처드 플런지Richard Plunz 교수의 이론수업은 직접 저술하신 저서 『The History of Housing in New York City』를 교재로 주거변천사를

통해 뉴욕New York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고, 도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주거형태의 변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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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센트럴 글래스 국제 아이디어 공모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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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핌으로써 도시를 넘어서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Area 전역을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콜럼비아대가 제공하는 다양한 디지털 수업들을 매학기 두 개씩

받아가면서 요새 흔히들 이야기하는 ‘Rhino Grasshopper, 3D Max Meshing, Script,

Coding, BIM, Revit’ 등 패러메트릭 디지털 툴Parametric Digital Tool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노력했다. 이를 바탕으로 졸업 후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두 번의 공모전에 도전했는데,

그 하나는 부산오페라하우스 현상설계로 디지털 건축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과 기술을 활용한 결과물을 만들어보았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 센트럴 글래스 국제 아이디어

공모전으로 주거를 도시 인프라로 이해하면서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주거형태를 제안하였다. 하나는 낙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입상하였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결과보다는 학업을 마무리하면서 정리해본다는 의미가 컸다는 점에서 위안 삼았다.

실무수련 시즌2 : SOM, 미국건축사 유학 후 다음 목표는 미국에서 실무를 경험하고 건축사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이미

아틀리에 규모에서 실무수련을 했고 도시설계를 공부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규모가 있는 큰 설계사무소에서 대형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과정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사무실을 경험하고자 뉴욕 SOM에 입사했다. 나는 주로 동북아시아와 중동의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스튜디오에 배정받게 되었고, 첫 프로젝트는 터키 이스탄불의

주상복합시설이었다. 개발도상국의 시스템은 생각 이상으로 열악해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우리나라는 이제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니다.) 이스탄불도 마찬가지여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건축한계선이 여러 번 변경되었고 그때마다 프로젝트도 우왕좌왕하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5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런 대규모 국제

프로젝트는 생물과도 같아서 계속 변할 수밖에 없고 계획기간만도 10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다음 프로젝트가 10년 전에 거의 완료되었다가 지연되고 다시 시작된 일본 도쿄 프로젝트였다.) 듣던 대로 보통의 미국회사와는 달리 SOM은

사내 경쟁도 치열하고 업무 강도도 높았다.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좋게 봐준 팀장 파블로Pablo가 자기 팀의 키퍼슨Key Person으로 나를 불러간 것은 그가 한국 프로젝트의 현상설계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SOM에서는 팀장아래 팀 내부의 중요한 사람을 ‘Key Person’으로 부르곤 한다.) 자연스럽게 내 역할도 더욱 커지고

그만큼 책임도 많이 따르게 되었다. 당시 프로젝트는 현재 명동에 소재한 IBK기업은행의 신사옥 현상설계였고, 한국 내 카운터 파트너 건축사무소로 나우동인과 함께 진행하게 되었는데, 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해가며 팀장이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 내야 했음과 동시에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통·번역을 도맡는 바람에 스트레스 지수가 최대치에

달했던 시기였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선이 되어 우리 팀은 한동안 IBK 신사옥 프로젝트에

매진하게 되었고, 힘들었지만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몸으로 익혔던 시간들이었다. SOM에서 2년간 근무하고 목표했던 건축사를 획득한 후, 다음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미국 대학원을 나오고 미국의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한 미국 건축사라는 프로필이

생기니 신기하게도 중국의 헤드헌터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중국의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다시 조직에서 내 커리어를 쌓아나갈

것이냐? 아니면 귀국해서 맨발로 시작하더라도 내 사무소를 꾸려볼 것이냐? 근 1년간의

고민 끝에 지금이 아니면 다시 개소하겠다는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아 귀국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 2013년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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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동 IBK기업은행 신사옥 현상설계 출품작 ⓒSOM


개소1 : MINIMAX architects 귀국 후 약 100일간은 한국사회에 적응도 할겸 주위사람들을 만나며 준비기간을 가졌다. 20살

대학에 입학한 이후 7년간의 학업과 10년간의 실무수련을 통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판단이 필요했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잘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전문 인력과 연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회사명을 미니맥스라고 짓고 2013년 7월

1일 사업자등록을 냈는데 미니맥스는 작은 조직이 연대하여 큰 시너지를 만들자는 생각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첫 프로젝트는 당시 리모델링이 한참이었던 신라호텔 명품 쇼핑몰의 한 코너에 6평짜리 자그마한 맞춤셔츠 매장을 차리게 된 의뢰인을 만나면서 시작되었고, 나는 현재까지 시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20년 지기 친구와 설계단계에서부터 협업을 통해 공사를 완료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의뢰인은 같은 호텔 6층에

20평짜리 비스포크 매장을 다시 맡아 달라고 주문하였고 이후에도 다수의 프로젝트들을 주변 지인들과 협업을 통해 완수하였다. 특별히 뉴욕 주립대 건축대학에서 교수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송진영 교수 연구팀과 진행했던 양평군 종합도시개발 마스터플랜 연구용역의 결과물은

26차 UIA 2017 서울 세계건축대회 일반부문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송진영 교수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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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에서 알게 된 사이이다.) 우리는 무분별한 도시지역 확산과 과도한 규제가 환경을 저해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며, 콤팩트 시티의 형태를 적용한 친환경 위성도시 모델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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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현재까지 만 6년을 운영하면서 미니맥스 3년 동안에는 나에게 주어지는 일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하자는 생각이었고, 가수가 노래따라 간다고 하듯 회사이름 탓인지 애완동물 집부터 도시 마스터플랜까지 광범위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와 협업을 통해 파빌리온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소개해준 미술관

큐레이터가 지금의 아내가 되었고 현재는 나를 가장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반려자로 함께 하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맨발로 시작하는 상황이라 많은 고민들이 있었는데, 돌이켜 보면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을 만들고 다시 연결되는 상황들이 이어지는 놀라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3년쯤 지났을 때,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건축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 또래의 다른 젊은 건축가들이 이제 뭔가 자신의 건축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사실 나는 정립된 건축관을 작업에 담아내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건축관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한 사람의 건축가로서 완전히 정립된 건축관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오랫동안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3년 동안 다양한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양적으로는 상당히

성장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건축가로서 보다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작업의 깊이를 고민해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경이 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6. 제26차 UIA 2017 서울 세계건축대회 일반부문 수상 7. 친환경 위성도시 모델 다이어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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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2 : MMKM associates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제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하려고 하니 사무실 공간을 같이 써보면

어떻겠냐는 이야기였다. 개소를 결심하고 귀국하면서 늘 언젠가 세경이 형이랑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해온 나는 그러지 말고 같이 사무소를 차리자고 제안하였고, 형은 흔쾌히

수락하였다. 처음에 세경이 형(이하 김 소장)은 두 사람 모두 건축문화 출신이고 김과 민의 이니셜을 따서 KM으로 상호를 정하면 어떻겠느냐 물었고, 나는 미니맥스의 MM을 앞에 붙이고 ‘milimeter×kilometer’라는 속뜻을 담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MMKM이 탄생한 것이다.

김 소장과 지난 3년 동안 고민했던 것은 현재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축은 어떤 것이고

앞으로 어떤 건축을 만들어 나갈 것이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된 이야기가 8

점점 진지한 이야기로 발전해갔고, 함께한 지 3년차가 되는 지난해 2월 건축 전문지

《Concept》에 MMKM 특집기사를 내게 되어 처음 글로 적어보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6개월 쯤 지난 7월 《와이드AR》이 주관하는 건축가

초청강의 ‘땅집사향’의 제141차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되었고, 짧은 에세이가 아닌 강의를 통해 이야기 하는 자리인 만큼 더 많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강의에서도 이야기했던 무엇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한 관심, 새로운 재료, 새로운 기술, 또는 기존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의 뿌리가 그동안의 학업과 실무를 통해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져 왔던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을 기준으로 정확히 1주일 전 2019년 2월 8일

MMKM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 있었다. 미니맥스 때부터 3년간 작업했던 <유한테크노스 신사옥>이 독일

기술경제부가 주관하는 2019 독일

디자인 어워드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게 된 것. 시상식 참석을 핑계로 오랫만에 아내와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시상식이 열린 프랑크푸르트를 마지막 목적지로 안달루시아와 바르셀로나

여행을 하면서 이슬람의 이베리아 반도 침략과 스페인 국토회복 운동을 통해 유적으로 남게 된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절묘한 융합의 결과물들과 안토니 가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모더니즘의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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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형태와 형태가 만들어내는 공간을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 직전 가우디 연구가

이병기 씨가 번역한 가우디의 저서 『장식』을 읽고 가우디가 만들어 낸 화려한 장식들이 의장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구조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면서 기존의 것과 다른 공간감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늘 그랬듯 무언가 물리적인 실체를 창조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자양분이 되어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초보 농사꾼에 비유한다.

그동안 학업과 실무수련을 통해 씨앗을 모아왔다면 이제 그 씨앗이 싹을 틔워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을 찾고 있다고, 초보 농사꾼이 언제나 성공할 수 없듯이 나 또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겠지만 꾸준히 정진한다면 유능한 농사꾼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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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19 독일 디자인 어워드 특별상 수상 9. 유한테크노스 신사옥 ⓒ이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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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조진만 Jinm a n J o www.jo-jinman.com


어느 젊은 건축가의 회상

글. 조진만

Jo Jinman Architects 대표

1975년 태어나던 해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고 오일쇼크의 정점. 부모님의 직업으로 매년 도시와 시골로 이사를 했다. 새로운 장소에 빨리 적응할 내성이 생겼다. 친구가 생길 틈이 없어 혼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1989년 동경 버블경제는 절정에 달했고 구석구석 골목마다 매일 새로운 도시문화와 욕망이 흘러

넘쳤다. 학교는 신주쿠 한복판. 인근의 시부야, 하라주쿠, 가부키쵸가 방과 후 놀이터였다.

감정적으로 항시 격앙된 사춘기라 거칠게 지냈다. 동급생들 모두 무언가에 억눌려 있었다.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일본이라는 낯선 상황이 불만이었고, 재일교포 친구들은 사회에서 타자로 속해 있었으니까. 모두 반항아 기질이 있었다. 방과 후 일본 만화에 등장할 법한 난투극 광경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시험 끝나면 교복 배지를 떼고 우르르 싸우러

거리로 나가고 경찰이 출동해야 상황이 수습되었다. 표출할 게 젊음뿐인 시기였다. 돌이켜

보면 지금도 흐르는 반항아 기질은 이때 생긴 것일까? 단게 겐조의 <성 마리아 성당>이 집 근처라 간혹 지나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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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대 시부야 2. 신주쿠


1995년 대학교 첫 건축과 수업. 도무지 흥미가 없다. 설계시간마다 찾아오는 건축책 아저씨로부터 노교수님보다 더 인상적인 건축학 개론을 듣고 르 코르뷔지에 전집을 강매당하다. 번역이 나빠서인지 머리가 나빠서인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 제도판 받침대로 사용하였다. 세상은 우리를 X세대라 불렀다. 기존의 천편일률적 집단적 문화에서 벗어나 ‘나 자신’이란 개성을

존중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소비하였다. 삐삐, 천리안, 넷스케이프 등 개인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정보의 접근성

측면에서 비약적인 전개가 있었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하였다. 오렌지족이라는 단어와 신촌/ 홍대의 록카페와 테크노 음악을 틀어주는 클럽이 도처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건축은 맹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안도 타다오, 리처드 마이어, 프랭크 게리가 당시 건축의 새로운 3대 거장의 위치를 점거하였다. 국내에서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로 ‘대충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많이’에 대한 사회적 반성이 있었다. 양적 생산과 대형 건설사 주축의 획일적 건축문화에 저항하는 4.3그룹의 활동이 인상적이었다. 『빈자의 미학』과 『S,M,L,XL』이 출간되었다.

전자는 당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표현적 가치에 함몰된 포스트모던 속에서 망각하고 있던

근본적인 건축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후자는 압도적인 책의 분량 속에서 이제까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건축의 구축방식과 도시계획, 방대한 논문들은 실로 경이적이었다. 부족한 영어 실력에 사전 끼고 내용을 한 단어씩 번역하고 또 그 속에 실린 도면들을 트레이싱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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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인도 ‘인류가 생활이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든 인간이 이 지상에 하나의 쉴 장소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도이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사막을 가로지르고 르

코르뷔지에와 루이스 칸의 아메다바흐를 거쳐 갠지스에 다다랐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 기상부터 취침까지 모든 것이 계획된 시스템 속에서 부분으로 움직이며 안도감을

느꼈는데 갑작스레 정반대의 지구 저편에 와있는 듯 했다. 여행은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항상 무슨 일을 실행하기 전에 우선 깊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생각은 생각일

나름이다. 그것이 현실에 부딪혔을 때 오히려 생각 자체에 갇혀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이미 틀어진 계획 자체에 집착하게 될 뿐이다. 몇몇 인도인이 “당신은 왜 그리 매사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이냐”고 정색했다. “생각을 놓으면 자유로울 수 있다”라고 말해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후 이러한 경험은 아직까지 나의 사고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다. 어디를 가건, 기차를 타건, 일단 예정된 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 맞지 않았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3. 타임지 표지_Generation_X 4. 빈자의 미학 5. kt_hitel_gl 6. S,M,L,XL_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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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신의 뜻처럼 되어버리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민물 게를 화장 불에 구워선 내게 건네주던 순박한 웃음의 어린 아이들. 내 손등을 핥곤 하던 타다만

시체를 주워 먹는 개들. 강 위론 타다만 시체가 떠내려가고 강변에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는 이들. 그 옆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셔대는 이들. 그들은 죽음을 믿지 않았다.

내세만을 믿는다. 이 성스러운 강물에 죄를 사하고 내생에 행복하리라 믿는다. 옴 샨티Om (‘나는 평화로운 영혼’이라는 뜻_편집자 주).

Sh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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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학로 학교 졸업 후 한시라도 실제 공간으로 구축되는 경험이 간절했다. 당시 이로재는 고

김수근 선생이 설계한 대학로의 <샘터사옥> 4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과 연결되어 일층의 개방된 거물 내부 가로와 사무실의 콘크리트 와플 천장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당시 승효상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몇 개월 안 된 신입에게 파격적으로 사무소 인근에 막 공사를 시작한 <쇳대박물관>의 담당을 맡기셨다. 짧은 설계 기간상

건축허가에 준하는 도면으로 착공하여 실시설계와 공사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출근해서 현장 상황을 보고 점심에 사무실로 들어와서 이튿날 시공에 필요한 도면을 작성하고

저녁에 승 선생님으로 부터 검토를 받고 다시 밤늦게 수정하여 다음날 아침 현장에 가져가 어려움이 있는 부분을 협의하는 방식이었다.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 때마다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최가 철물점 최홍규 대표님의 금속공사에 대한 장인적인 지식은 모든 것이 부족한 당시 나에게 또 다른 스승이었다. 박물관의 세세한 디테일들을 위해 동경과 교토의 모든 박물관을 함께 둘러보았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서 건물이 완공되고 느낀 성취감과 자신감은 큰 보상이었다. 작품 촬영을 위해 일본에서 저명한 사진가 오사무

무라이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은 고 김수근 선생의 대부분의 작품들과 겐조 단게, 시라이

세이치의 작품들을 작업하셨다. 선생의 운전수이자 짐꾼으로

여러 차례 현장들을 돌며 빛과 재료, 건축을 보는 시각을

길렀다. 새로 이사 간 사옥에는 아래 검도장이 있어 아침에 월,

수, 금은 검도. 화, 목, 토는 당시 불어난 중국 프로젝트를 위해

중국어 강사를 초빙하여 수업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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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도 8. 바라나시 9. 이로재 사옥 계단에서 직원 단체 사진 10. 쇳대박물관

하였다. 프로젝트들로 수많은 밤들을 하얗게 불태웠다.


2004년 베이징 CBD 베이징의 중심 상업지구 한복판에 짓는 5만 평의 복합시설에 참여하기 위해 북경으로 건너갔다. 중국 건축주가 자하 하디드, 이토 도요, MVRDV와 이로재에 각각 계획안을 받고 최종적으로 건축가로 선정되었다. 상전벽해처럼 도시 전체가 공사판이었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이미 북경과 상해에 사무소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건축계의 엘도라도와 같았다.

이환, 삼환은 아직 아련한 고도의 조직을 유지하고 사환, 오환으로 고도의 몇 배에 달하는 곳들이 채워졌다. 도시 외곽의 모형 회사로 가니 우리나라 웬만한 학교 규모의 건물 속에 상경한 수백의 어린 아이들과 청년들이 1일 2교대로 도시 전체에 새롭게 들어설 수백 개 건축물들의 허가용 모형을 만들고 있는 살풍경에는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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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만리장성 베이징에서 한 시간 거리 만리장성에 중국 건축사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Commune by The Great Wall>이라는 집합 프로젝트의 연장으로 10채의 부티크 호텔과

스파, 그리고 건축주의 주말주택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 해 동안 매일 아침 8시 북경을 출발하는

셔틀을 타고 만리장성을 오가며 작업하였다. 인근 농가를 빌어 작업실을 꾸리고 주방에서 농가식

밥을 지어먹었다. 수백 명 작업인부가 모두 인근 농부이다. 도면은 같은데 완성된 집마다 디테일이 다르다. 농번기에는 공사가 중단되었다. 현장 주변으로 펼쳐진 보수되지 않은 채 태고의 모습으로 반쯤 허물어진 만리장성을 타는 것과 그곳에서 보이는 하늘의 별들은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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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베이징 CBD 프로젝트 12. CCTV 건설 현장 13. 2004년 베이징 시가지 14.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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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천안문 전문대가 이듬해 올림픽을 의식해서 도시미관상 낙후된 천안문 남동 측에 인접한 거대한 전문대가 일대를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가하였다. 이곳은 우리의 인사동에 해당하는

위치로 명·청 시대에 상업과 문화로 화려하게 번창하였지만 불법점유와 증축으로 노후한 지역이다. 영국의 데이비드 아제이, 상해 신천지의 건축가 벤우드, 중국의 장영호와

경합하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위치와 면적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하였다. 공산주의 정부의 힘으로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기존 거주자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텅텅

비워지고 폐허가 된 후통과 사합원을 거니는 경험은 마치 데 키리코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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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축제 21세기의 첫머리, 경탄 반 우려 반으로 세계의 모든 이목이 현재 중국에 집중되어있다.

올림픽과 시장 개방경제 제 정책의 성공에 의한 경제적 빅뱅. 이러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맹렬한 기세로 맹목적인 과거의 파괴와 함께 낙관적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개발을 펼쳐 나가는 중국의 도시적 상황은 후대의 역사가가 돌이켜보아도 시대의 특필감 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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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우수한 ‘비즈니스맨’일수록 정확하게 프로젝트 스케줄을 짜고 그 계획대로 진행시켜 가는데 어떤 종류의 희열을 느낀다고들 한다. 중국 프로젝트.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연속이고 거기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사고에 얽매이지 않고 유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요구되어진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배경, 가치관을 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시행착오와 끊임없는 디자인 수정을 통해 설계를 진행시켜 가지만

중국에서는 그러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멋진 것이 때로 중국에서는 그저 그런 것이 되는 때도 있다. 이렇게 예기치 않게 거부되는 것을 통해서 역으로 자신들의

가치관을 재고하거나 역으로 그들의 문화적 사상적 미의 관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드라마(혹은 트라우마)를 어떤 교훈 혹은 지적 훈련의 시간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건축가의 사고는 더욱 확장되리라. 110

15. 천안문 전문대가 16. 비워진 전문대가 사합원 17. 베이징 올림픽


중국적 상황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 지금 중국의 상황이고, 심지어 디벨로퍼 조차도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단지 그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주변을 잘 살피고 평균해답 정도를 만든다 해도 그것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공유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적으로 젊고, 자신들보다 이전 세대가 한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실패경험의 축적’으로 조직의 방향성이 정해지는 것이 아닌 ‘성공경험을 어떻게 축적해 나가가는가’라는 공격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한국과는 가까우면서도 완전히 다른 작금의 ‘중국적’ 상황이 아닌가 한다. 중국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이름이다. 변방의 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여 중국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시대마다

다른 문화가 침투하여 곧 중국의 본류를 다시 만들기도 하였지만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은 동양의 대문화를 진전시켜 왔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보편성의 가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용광로 같은 문화였으니 그 속의 본질이 아시아의 가치였을 것이다. 지금의 요동치는 베이징의 변모, 혹은 중국의 다른 개발 도시들의 변화도 어쩌면 깊고 무거운 중심 속으로 용해되어 그 중심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9년 칭화대 지난해 화려한 중국의 세계무대 진출도 이듬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순식간에 식었다. 이로재를 떠나 대학원 학업에 몰두하였다. 담당이신 리샤오동 교수는 사라져가는 중국의 지역성과

공동체적인 가치를 세밀한 설계로 이어가는 드문 타입의 중국건축가이다. 한 학기를 남겨두고

경제적인 곤란함에 처해 있을 때 마침 OMA의 친구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아 베이징 사무실에서 방콕의 77층 타워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다행히 학교 측에서는 낮 시간 강의에

참석이 힘든 것을 주말에 교수님 방문으로 대체해주겠다는 고마운 허락을 받았으나 사무실에는

어쩔 수 없이 비밀로 하고 퇴근 후 또는 방콕 출장 시에도 논문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당시 OMA는 로테르담 이외에 베이징, 홍콩, 뉴욕, 도하에 사무소를 가지고 지역이 아닌 직능별로 직원들을 여러 지역에 돌려가며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파트너들의 연령은 30대 중후반으로 한국의 연차에 따른 관록이 아닌 실력과 패기로 사무소 전체에 활기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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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졸업작품 Infrastructural Urban Surface 19. 방콕 타워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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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로테르담 로테르담은 유럽에서도 특이한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새롭게 재건했다. 유럽 특유의 전통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항시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시험장과도 같았다. 그들이 가진 관용과 효율성, 다양한 가치의 포용, 개방성이 인상적이었다. OMA 본사로 옮겨 런던, 헬싱키, 암스테르담 등 다양한 유럽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종래 건축가의 이미지는 작업실에 앉아서 내면 깊은 곳에서 사색하고 조용히 스케치를 하는 정적인 모습이었다면 반대로 이제는 기회가 있으면 세계

어디라도 한걸음에 달려가 설계 경기에 참가하는 K-1 파이터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렘은 20

대부분의 시간을 세계 각지 프로젝트 현장을 돌아다니고 스텝들도 미국, 중국, 중동을 이동하며 작업하였다. 사무실은 24시간 현지 타임에 맞추어 돌아가며 마치 고요하고

정적인 로테르담 한구석에서 태풍의 눈과 같았다. 렘 선생님의 끝이 없는 호기심과 발상 그리고 때론 어린 아이와 같은 고집은 놀랍다. 외부에서 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프로세스, 내부에서는 직관적이고 감성중심적인 모습들. 200명에 달하는 세계 각지로부터 모인 건축가들은 렘 못지않은 내 스승이다. 사무실 내에서도 서로 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렘을 감탄시키기 위해 경쟁하고 또 우리는 일요일 오후면 도시가

따분해져 사무소에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래도 한편으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에 가슴한 구석이 늘 허전했다. 21

2013년 다시 서울 더 이상 늦출 수 없고 완벽한 준비란 있을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영원하다. ‘1971년이던가요. 나는 은행의 빛에 몰려 나의 집, 공간사옥

땅이 여러 차례 경매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땅에

지금의 사옥을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안간힘을 다해 지었지요. 주위에서는 나의 어리석음에 조소까지 보냈습니다. 돈이란 빚질 수 있지만 시간이란 빚을 얻을 수도 없고, 갚을 수도 없다는 생각으로 마구 지었습니다.’ 김수근 선생이 하신 말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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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신에는 한 가닥 흰머리도 없고

늙은이다운 부드러움도 없다.

세계를 내 목소리의 힘으로 쳐부수고

나는 전진한다. 멋쟁이로

방년 스물둘의 잘 생긴 나는

뚜벅뚜벅 걸어간다.

- ‘바지를 입은 구름’ 중에서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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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OMA 사무실에서 본 로테르담 시가지 21. 렘과의 미팅 22. 현재 운영 중인 사무소 작업 풍경


19 : 03-04

플랫/폼 건축가 PLAT / FORM www.platxform.com


풍경 반 풍경 그러나 알레고리 風景,

글. 플랫/폼

건축으로 자서전을 쓰다

최수연 공동대표(우)

건축가는 매번 프로젝트를 통해 인생을 기록하고, 그 산물은 기억의 저장소가 된다.

*괄호 안은 앞면 사진 위치임

산고가 따르기에 구현된 건축물 앞에 서게 되면 만감이 교차된다.

홍재승 공동대표(좌) 이강희 디자인 파트너(중)

사고와 발현의 과정은 모든 희로애락의 에피소드를 동반한다. 주로 그 과정은 순탄함 보단

건축 여정의 시작, 책 중학교 1년생 즈음 우연히 내 작은 손에 《건축과 환경》이란 잡지가 잡힌다. 주택의

내·외부 공간이 찍힌 사진들과 다양한 두께로 그려진 도면, 잡지의 구성 자체가 신기하다. 특히 평면도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미로 迷路 도였고, 단면도는 또 다른 모양의 집이었다.

도상학적인 그림들은 다른 이해와 인식을 요구하였다. 생전 처음 본 그림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더 깊은 호기심으로 건축에 대한 동경심을 형성한다. 도서관 예술서가의 건축 책은 아이에겐 보물 창고였다. 남몰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하나하나 먼지를

쓸어 그 빛을 보듯 건축을 짝사랑한다. 몇 권씩 합본된 일본잡지 《A+U》의 수준 높은

사진과 빼곡하게 표기된 일본어와 치수, 《AA file》의 개념 드로잉과 프로세스의 모형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아트이고 실험적이다. 건축과 수업보다 오히려 책을 통해 건축적 이상과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지금은 사라진 홍대 앞 예술서점

아티누스까지 중학생 시절 이후 약 10년간에 접한 건축과 예술 책들은 건축이라는 세상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다.

건축 사고의 전환, Louis Khan <루즈벨트 아일랜드 Four Freedom Park>, 그 공간에서 느낀 감도는 감동이었다.

공간은 공원으로 인도되는 화강암의 벽으로 담담하게 시작한다. 흰 화강암 계단은 빛을 온전히 발산한다. 어둠 속에서 빛의 존재가 아닌 밝음 속의 빛이다. 빛을 받은 계단은

자유의 단상으로 인도하는 기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 기울어진 초록의 잔디밭과

일렬로 식재된 나무는 자유를 향한 의지의 방향인 것처럼 사방이 열려있는 공간에서 한

곳으로의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움직임의 끝,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상 앞에 선다. 그리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둘러싸인 ‘The Room’으로 들어가면 온전히 비워진 공간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물가의 끝에 서게 된다. 거석의 형태를 띤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로 114


둘러싸인 비워진 방은 자유선언의 무게를 담고 빛 속의 빛으로 지붕 없는 사원을 완성하고 있다. 담담하게 시작한 이곳에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공간 울림의 경험, 이 무형의 계획은 ‘The Room’ 이라는 공간 최소한의 요소인 방에서 만들어낸다. 빛 안의 빛, 빛 속의

빛, 빛 중의 빛, 정제되어 있는 요소와 공간의 움직임, 기하학적 구도 안에서도 확장된 시선의

자유, 그의 스케치에서 보여질 수 없는 무형의 것들이 건축 안에서는 풍부하게 발현되어 있었다. 건축가의 존재가 느껴졌다. 내 건축의 방향과 사고와 가치관을 위해 비워내고 다시 재정립해야 함을 느꼈다. 재정립이 아닌 정립조차 안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The Room’ 하나의 방에서

칸Khan은 모든 것을 완결시켰다. 그리고 그의 건축을 완결시켰다. 칸의 마지막 작업 중의 하나이며,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사망하여 발견될 때 그는 이 완성된 계획안을 가지고 있었다. <루즈벨트

아일랜드 Four Freedom Park>는 욕망이란 재료를 녹여 만든 도시 뉴욕, 그 안에 남은 영혼의 보루인 듯 했다.

알레고리 #1 자연의 맥락, 지역건축 1. 땅의 캔버스, 빛의 중정 : 제주 도립 김창열미술관 (위치: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설계팀: 오태훈, 김민기, 이강희)

2013 가을 무렵 십수 년 만에 가본 제주는 경이롭다. 저지리라는 생소한 이름의 장소를 거리감

없이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다. 곷자왈이란 지형의 생소함을 묻어두며 지형의 형국을 살핀다. 미술관이 놓일 낮은 지형 우측으로 예술인 마을로 오르막이 있다. 미술관은 마을의

길목에 놓여 두 레벨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발상은 최종안에까지 이른다. 물방울이 맺혔다. 새벽 마당의 풀잎에도, 소나기가 지나간 길가에도 그러나 그 어떤 물방울보다 영롱하게 빛났던 것은 캔버스 안에 있었다. 물방울, 그 존재를 빛과 그림자 그리고 캔버스로 해석하고, 대지를

아우르는 빛의 중정을 두고 큐브의 매스를 랜덤하게 놓는 스케치를 한다. 현상당선 후 실시설계 과정을 통해 건축의 지형화는 점차 기능을 볼륨으로 치환한 8개의 석곽으로 되어갔고, 줄곧

개념의 근간이 되어, 제주 대자연 속 미술관은 절제된 태도로 땅과 관계한다. 물방울은 비로소

빛과 그림자에 의해 존재하듯, 8개의 매스와 중심에 광정光庭 을 두어, 井우물 정자 모양으로 형성된

회랑museum corridor으로 연계된다.

현상설계를 진행했던 절반의 시간은 김창열 화백님의 물방울에 대한 해석에 할애되었다. ‘물방울, 이것은 물방울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다다르며 물방울을 존재하게 하는 빛과 그림자의 존재를

공간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설계안을 도출한다. 당선 이후 화백님과의 대면에서 듣게 된 신전에의 비유는 사자 死者의 공간으로 공간 체계를 엄격하게 한다. 주 상설전시장은 긴 여정을 통해 다다른

인생의 안식처와 같이 격정적이며 고요하기도 하다. 수년이 흘러 준공식을 앞둔 미술관 마당에서 우연히 뵙게 된 화백님은 ‘감동입니다’라는 외마디를 말씀하신다. 건축가의 눈엔 미흡한 준공 현장에서의 아쉬움에 최소한의 위안이 되었다.

준공 후 《SPACE(공간)》지에서 크리틱으로 박길룡 교수님이 섭외되어 뜻깊은 여정을 하게 된다. 교수님은 자칫 건축가의 변이 당신의 해석에 선입견으로

작용할까 동행의 이유가 없다 하셨지만, 가만히 따르는 정도로 길을 걷는다.

석곽이란 표현을 최초로 해 주셨고, 그 단어가 얼마나 이 미술관을 함의하는지 잊을 수 없다.

‘김창열 화백의 미학은 모순의 관계에서 운생하는 것과 같이 이 뮤지엄은 땅에서

깨어나는 건물로 방각과 그 주위 두루(周)와 가슴(心)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땅으로의 회귀는 곧 음과 양으로의 형국으로, 검정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뮤지엄은 현무암을 담은 8개의 석곽(石槨)이 되었다.’ (박길룡, 《SPACE(공간)》

596호, 2017,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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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로잉, 김창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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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땅이 품은 움직임 : 스누피 뮤지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설계팀: 이강희, 신병철, 이규호)

개인이 수십 년간 나무를 심어 가꾸어온 곳, 나무 한 그루, 돌 한 덩어리는 얼마나 그

인생의 집합된 기억의 산물이며 장소일까? 스누피 카툰 작가인 슐츠는 타계 이후에도 미리 작업해 둔 내용으로 한동안 연재를 이어나가며 50년간 스누피 카툰을 연재한다. 하나의 대상을 평생의 업으로 가꾸어 나간다는 것이 이 땅의 역사와 일맥상통하였다. 자연

안에서의 지속성의 힘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제주도 동부 오름군락 안에서

주변 초지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은 인공적 산물에 주변을 거스르지 않을 겸손함을 요구한다.

동선은 가장 낮은 레벨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레벨로 완결되어야 한다. 주요한 전시공간 5개는 이 요건을 만족시키며 배치되어야 한다. 그 외에 요구되는 현황과 설계요건을

만족시키니 5개의 전시공간은 1m씩 경사진 방향으로 올라가게 된다. 경사진 땅은 이미

움직임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건축화하여 공간으로 발현시킨다. 로비 진입 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2층에 다다르게 된다. 빛과 공기의 내외부적 교감과 함께 바람의 정원, 돌의 정원, 초지의 정원, 물의 정원의 중정은 상징화된 공간이 아니라 참여하여 완성시키는 반풍경의 자연의 공간이다. 이제 장소는 스누피 가든 하우스로 전환기를 맞이하며

공공성으로 그 가치를 다시금 설정하게 된다. 피너츠가 그려진 카툰 자체 보단 그 내용이 품은 행간의 의미가 울림으로 다가오듯이 공간과 풍경이 반 풍경으로 만들어 내는 상보성은 땅이 이끄는 움직임에 토대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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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땅 융기 : 카페 오르다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설계팀: 백종수, 신병철) 청량한 날 성산일출봉을 오른다. 아니 오히려 융기된 둔덕 위를 따라 상승한다면 맞을까. 116

2. 김창열미술관 조감 사진 3. 중앙 광정의 계단을 통해 지붕판으로 오르는 김창열미술관 4. 스누피 뮤지엄 조감도 5. 가든 하우스로 완성되는 스누피 뮤지엄


시퀀스가 상승하며 바다의 수평선은 내 위치의 척도가 된다. 15도 정도의 완만한 초입부 초지는

수평선 멀리 보는 맛도 있지만, 지나온 삶의 발자국을 ‘선’으로 아름다운 기억은 하나, 둘 ‘점’으로 셈한다.

이 모든 것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 성산일출봉이 지척인 절벽 끝 넓은 잔디 광장은 땅의

일부여야만 하는 것을 대번에 알아본다. 중심은 비워 건축은 언저리에 위치한다. 지형의 속삭임을 듣고, 유클리드 기하학적 선과 형태를 거부하고, 원호의 겹침에 의해 건축은 구획된다. 지붕으로 향하는 작은 오름과 정점에서의 휴식은 채우기보다 비움이다. 바다 위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하늘의 별로 착각하게 되는 깊은 밤의 정적도 이 땅 위에선 미학으로 승화된다. 모든 허공이

보이며 거친 기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땅끝의 건축은 표면이 파쇄된 검은 노출콘크리트로 빛에 그림자를 드리우니 오히려 더욱 짙어질 것이다. 융기된 땅의 형상을 취할 건축은 바람이 흔적을 타고 자라는 퐁낭(제주도 방언, 표준어 팽나무)처럼, 파도와 바람의 형상으로 형태가 빚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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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 #2 로컬리티, 도시건축 1. 정제된 도시풍경 : Skeleton 사옥(위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설계팀: 임상우, 김재강, 구예은) 삼성동과 자양동은 사뭇 다른 로컬리티를 가진다. 1980년대 다세대 빌라로 밀집되어 있는 삼성동의 뒷골목은 질서의 재편을 기다리고 있다. 근생시설과 작은 주거가 밀집되어 있는 이곳, 대로변에 비해 뒷골목은 다세대 주거, 소규모 편의시설이 전부이지만, 곧 경제 논리에 의해 임대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고밀화 개발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1970년대 단독 주택지에서 시작하여 이젠 배후 업무시설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것에 비해 자양동은 지역성이 훨씬 내밀하다. 자연 발생된

주도로에 30~40평 규모의 작은 필지로 구획된다. 막다른 길은

자연스레 클러스터 소통의 장으로 오히려 인간적 훈풍이 분다.

좁은 길은 다세대의 입체적 계단으로 이어져 그 삶의 집요함이 담긴 특이한 건축적 시스템으로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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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동의 도시적 풍경은 대로변 입면으로 규정되는데, 구조로 형성된 외부 그리드 열주의 깊은

파사드는 빛과 그림자의 풍부함을 만든다. 또한 노출콘크리트의 규칙적인 구조적 틀은 다양함을 담을 수 있는 도시풍경으로 작용한다. 혼재된 도시 풍경을 정제하는 존재가 된다. ‘그린커튼’은

내외부 공간의 경계에 작용하는 매개체medium이다. 정북 사선으로 규정된 매스는 계단형으로 마치 솔르윗Sol Lewitte의 추상조각 같이 3차원 입방체의 반복된 규칙성은 미니멀리즘의 정신과 같다.

6. 카페 오르다 조감도 7. 투시도 8. 가로 경관 속의 스켈레톤 사옥 9. 입면 매스의 계단형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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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화된 도시풍경 : San Francisco Market 사옥 (위치: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설계팀: 김현석, 이규호, 김혜주)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이태리 캐주얼을 생산 및 수입 공급하는 의류회사이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기성 사회의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탈사회적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 시기의 청바지 같은 캐주얼

의류는 같은 시기 반문화운동 중이었던 이태리 피렌체에 퍼지게 되며 정장을 기본으로

입던 의복 문화에 파격을 주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이러한 이태리안 장인정신의 바탕 아래 히피문화를 접목시킨 이태리 캐주얼의 정신을 반영한다. 기본에 충실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정신, 이것이 이 사옥에 나타나야 할 개념으로 정의한다.

자양동은 1970~80년대의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주택가이다. 골목길의 소소한 풍경을 아직까지 많이 간직하고 있다. 법에 의해 규정된 볼륨에서 오래된 이태리 피렌체의 도시 파사드에 나타나는 규범적인 개구부를 통해 두꺼운 빛을 만들어 내는 건축으로 빛과

조망의 궤적을 만든다. 자양동에서 흔한 재료인 붉은 벽돌의 물성이 연속되게 사용하되 구법을 달리하여 지역에 조화되며 변화하는 모습의 도시 풍경으로 자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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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 #3 삶 것, 살기 위한 최소한의 건축 1. 반려동물 더불어 삶 : 카라 더 봄 센터 (위치: 경기도 파주시, 설계팀: 백종수, 김예리) 서교동 카라 아름품의 문이 빼꼼히 열림과 동시에 컹컹거리며 날뛰는 동물들, 누가

이렇게 인기척을 반겨주랴. 인간의 관심을 몸짓과 목청으로 원한다.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 명에 이르고 있는 오늘날 아직 동물권動物權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시점에 그 급증

추이는 오히려 우려를 동반한다. 숨 쉬는 존재와 공존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같이 살아가는 것은 성숙한 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직 선례가 없는 한국의 118

10. 샌프란시스코 마켓 모형 11. 단면 개념도


동물보호소는 단순 보호의 목적을 넘어 지역 사회와 사회 교육적 차원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2016년 믹스견을 입양하면서 동물권 행동 카라의 임순례 대표님의 의뢰를 받는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동물권,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보장받아야 할 필수 불가결한 삶의 요건과 최소한의 삶의 공간에 대해 다시 환기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건물의 이용자는 200마리의 개와 50마리의 고양이다. 설계는 개와 고양이의 크기

및 행동 양식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협소한 부지의 단점은 삼각 도우넛 형태로 지상과 옥상 트랙까지 연속적인 운동이 가능토록 고안한다. 중심은 비워져, 내측의 경사로로 동물은

옥상에까지 오르게 되어 이들에게 산책과 운동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의도적인 동선은 건물을

타고 돌아 올라간다. 인간과 동물이 쓰는 절대적 크기의 차이는 있으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 역시 온전한 자기만의 영역성의 확보는 삶의 질을 확보하는 척도가 된다.

보호소를 통해 입양을 하는 선순환의 정착과 인권을 넘어서 동물권을 정립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만들려는 분들의 노력과 헌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존경스러우며, 건축가로서 보편적 인간의 삶에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반추하게 된다.

12

2. 한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건축 : 보름집 (위치: 세종시 청라리, 설계팀: 백종수, 심예은)

13

고즈넉한 작은 마을 언덕을 오른다. 차가 진입하기에도 좁은 길을 지나니 남측으로 먼 산이 열린 땅이 나온다. 집성촌엔 외지인의 인기척이 생소하고 신기하기까지 하리라. 이웃 주민을 만나

나누는 인사말 한마디에도 정성을 다한다. 땅에는 남쪽으로 호두나무 두 그루가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아늑하다. 터를 서성이며 크기를 가늠하고 향을 보고, 주변 인접 집들과의 관계를 질서 지운다.

가족이 함께 하는 집이 아닌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건축이다. 업무차 지방에 내려가게 될 때

사용하게 되는 공간으로 최소한의 건축이 되어야 한다. 살기 위한 최소한의 건축은 삶의 방식이 가벼워야 온전히 최소한의 건축이 된다.

비우거나 채우거나 중심을 향하거나 중심이 되거나. 곧 결정에 이른다. 집 자체가 중심이 된다.

집의 구조도 거실, 다이닝, 부엌, 방의 위계를 수평화 하여 거주자는 필요에 따라 유영하게 된다. 본디 주택은 명명되고, 규정된 ‘명사적 공간’이 아닌 ‘동사적 공간’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필요한 기능적인 인프라를 확정하고 그것은 세 개의 박스 안에 장착된다. 나머지는 동사적 공간으로 12. 카라 더 봄 센터 조감도 13. 각층 평면 개념도

119


연결된다. 모든 공간이 영역성으로만 존재하며 연결되는 공간이 된다. 두 개의 판으로

구성된 원통형은 앞뒤가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모나지 않고 너그러운 삶을 지향하는 건축주를 닮고 있다면 적절한 표현일까? 두 개의 붉은 노출콘크리트 박스는 생활의

응집소로 설비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빛과 공기를 집의 중심에 선사한다. 재료는 절제되어 나를 바라보는데 방해하지 않는다. 2층에 돌출된 큐브는 오로지 대자연을 품는 다도와

명상의 공간이 되니, 올 가을엔 동방 미인차나 철관음을 음미하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14

15

16

나가며 반추 reflection의 맥락으로 반풍경의 함의점을 풀어서 이해해 보면, 풍경을 마주하되

이를 지각하는 주체의 유연함과 열린 상태를 건축설계의 지평으로 끌어들임에 따라

결과로서의 건축물은 단순히 기능상으로 미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마치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하지만 섬세하게 진동하며 따라서 작품을 대하는 불특정 다수는 풍경을

지각하는 주체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대상이기도 하다. 꽃이나 계속의 풍경 등 마주하는

대상의 취미 판단은 비록 주관적이지만, 달리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없는

이상 이는 가장 진정한 종류의 관계 맺기를 실천하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백승한,

네이버 카페 <와이드AR>, 땅집사향 저널)

플랫/폼 건축 자서전은 사적인 개인의 기록보다는 건축 작업의 역학적 관계를 통해

반추해 보려 했다. 건축 자서전에 수집된 프로젝트는 건축 작업 자체로 설명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프로젝트 간 비춰보는 작업으로써 반 풍경이 되기도 한다. 개별적으로는 파편적이나 서로 연결된 관계항의 구조이기도 하다. 건축가는 사고와 발현 그리고 구축 안에 존재한다. 120

14. 보름집 15. 보름집의 수평으로 열린 동사적 공간 16. 보름집 배치 개념도 ⓒ최수연


내용의 구성은 전체 13개의 장으로 이루어졌고, 각각의 장은 다시 3~4개의 절로 나누었다. 그리고 2장「설계의 과정」부터 시작하여「대 지분석」 「기능 , 및 요구조건 분석」 「개념설정과 , 발전」 「배치계획」 , 「평 , 면계획」 「단면 , 및 입면계획」 「도면의 , 표현」 「모형의 , 표현」 「공개발 , 표」 「포트폴리오 , 작성」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이 실제로 설계수업을 진행하는 순서에 맞추어 단계적으로 정보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내 용을 배열하였다.

구입문의 : 시공문화사 http://www.spacetime.co.kr, spacetime@korea.com, T. 02) 3147-1212, 2323, F. 02) 3147-2626


《와이드AR》 2017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1

PUBLISHER’S COLUMN – 친구

ARCHITECTS IN KOREA .Ⅰ EDITORIAL

젊은, 내일의 건축 리더들이 말하는 우리 건축 장場의 단면 #1. 건축의 뿌리 혹은 공부의 배경에 대하여 #2. 한국 건축 비평(계)에 대한 바람

designband YOAP : 3인 3색의 피보나치 수열로 건축하는 집단 FHHH Friends : 좌충우돌 화려한 팀플레이 집단 HG–Architecture : 디지로그의 세계를 실천하는 스튜디오 JYA–rchitects : 함께 흘리는 땀의 가치로 무장한 팀워크 mmk+ : 한 방의 장외홈런 다음을 준비하는 히어로 OBBA : 건축, 내러티브의 소중함으로 승부하는 사무소 stpmj : 아트와 건축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이어니어 Z–Lab : A to Z, 콜라보&커뮤니케이션스 컴퍼니

#3. 귀 사무소(팀)의 작업 화두는? #4. 현대건축을 수행함에 있어서 ‘전통’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CHARACTERS

#5. 귀하(또는 사무소, 팀)가 이해하고 있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6. 현 단계 한국 건축계, 무엇이 문제인가?

제9회 심원건축학술상 당선작 발표 경복궁 궁역의 모던 프로젝트 — 발전국가시기 광화문과

PROJECTS : OFFICE INFORMATION a.co.lab : 휴먼 네트워크의 수행자 BOUNDLESS : 관계의 진화를 엮는 전술가들 122

국립종합박물관을 중심으로(1962~1973) 수상자: 강난형


《와이드AR》 2018년 3-4월호, Special Edition Vol.02

PUBLISHER’S COLUMN – ABCD파티–올해의 발견

ARCHITECTS IN KOREA .Ⅱ EDITORIAL

한국 건축의 새 판을 여는 젊은 리더들의 12가지 화법 ESSAYS 건축의 엄밀성과 농담, 혹은 사랑과 체념 : aoa architects 건축이 남긴 이야기들 : CHAE–PEREIRA architects 새로운 프로세스와 시스템 : EMER–SYS 경계에서의 점진성 : EUS+ architects 새로운 주거 트렌드를 리드하는 건축, 건축가 :

근대 건축, 수용과 변용의 미 : OFFICE ARCHITEKTON 들띄우기와 흰색 그리고 부산 : RAUM architects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한 발견의 방식, 질문 : Samhyun Urban & Architecture 길, 에움길, 샛길 : SUPA schweitzer song 따뜻한 건축 그리고 10+ : UTAA CREDITS

제10회 심원건축학술상 심사결과 발표 당선작 : 해당작 없음 심사위원 김종헌, 박진호, 우동선, 함성호

johsungwook architects 엘리스의 비눗방울 놀이, 그리고 일상 속 이야기 생성 : L’EAU Design 스타일의 전략–작업의 방법에 대한 근본적 이해 : Min Workshop 123


MasilWIDE | 1F, 45-8, World Cup-ro 8-gil, Mapo-gu,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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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건축의 대중화와 세계화, 그 중심에서 마실이 함께합니다. 이제는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터넷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건축물 정보를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 속에서 한국의 건축정보를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요? 한국 현대 건축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PR, 출판 기업인 마실와이드가 함께합니다. 하나의 집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듯, 마실와이드는 세계 곳곳으로 마실을 갑니다.

마실와이드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로8길 45-8,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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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차 S-S 프로그램 발표

WIDE 건축영화 공부방 2019년 WIDE건축영화공부방은 도시(City/

프로그램 1

2012년 8월 도시영화의 바이블격인 프리츠 랑

학창시절, 늘 박스만을 고집하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왜 세계 4대 거장인지 궁금했다. 사실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증오’, ‘크로노스’, ‘삼사라’, ‘어버나이즈드’,

없었던 기억···. 그리고 마음 속으로 이런 말을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현대건축은 1958년에 지은 미스의 건물에서

Urban)에 시선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는 감독의 ‘메트로폴리스’를 살펴본 바 있으며,

‘프루이트 아이고’, ‘도시의 여신: 제인 제이콥스’ 등 수많은 도시 관련 영화를 접한 바 있습니다.

하우스 투겐타트Haus Tugendhat│2013│112분│다큐멘터리│감독 디터 라이파스Dieter Reifarth

이해도 되지 않았고 그가 싫었다. 10여년 후, 미국 뉴욕 출장 중 <시그램빌딩>을 찾았다. 그 앞에서 한참을 떠날 수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가장 광대한 소재와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투겐타트 하우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건물이다.

요구되는 분야기도 합니다. 우리의 환경, 즉 삶의

만국박람회 독일관>(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미스는 시기적으로 비슷한 두 작품에서 실제

가진 주제입니다. 그래서 더욱 전문성이 질과 직접 연관되니까요.

더불어 2019년은 건축영화공부방을

‘simultaneous screening’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마치 어릴 적 동네에 자주 들렀던

미스는 1927년에 건축을 의뢰받았고 투겐타트 하우스는 1930년 말에 완공된다. 1928년~ 1929년의 <바르셀로나

같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트래버틴 대리석을 깐 바닥과 십자가형 크롬 스틸 등의 공통된 재료도 확인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하고 개념적인 전시관의 아이디어를, 보다 복잡한 실제 주택의 기능에 적용했다는 점 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 높이 평가된다. 즉, <바르셀로나 파빌로온>에 적용했던 ‘유니버설 스페이스’ 개념이다.

동시상영극장이 먼저 떠오를 터입니다. 두 번째

감독은 영화를 통해, 가족, 전 사용자, 예술 사학자 및 복원 작업자와 함께 건물에 대한 각자의 여러 자서전적 의

20여 분 안팎의 유명 건축작품 위주로 다룰

1939년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다. 20세기의 정치적 재앙을 배경으로 이 영화는 주민과 세대의 개인적 경험에 대해

프로그램은 다큐형식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대개 예정입니다. 일시

2019년 4월 3일(수) 7:00pm 장소

이건하우스(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미, 역사적인 사진과 기억을 담는다. 독일 점령 기간 동안 투겐타트 집안은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주했으며 별장은 이야기하며, 그 미적 가치와 의미는 여러 세대를 뛰어넘어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될 것이다.

미스를 대표하는 경구 “Less is More”는 후에 포스트모던 시대로 넘어오면서 “Less is Bore”라는 로버트 벤투리

의 조소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렘 콜하스는 ‘Rem Koolhaas: A Kind of Architect(2008)’라는 다큐를 통해 미

스를 유일하게 존경했던 건축가로 언급했다. 독일 바우하우스 학장이기도 했던 미스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학장도 역임했다.(글. 강병국)

방장

강병국(간향클럽 자문위원, WIDE건축 대표) 신청 예약 방법

네이버카페 <와이드AR> WIDE건축영화공부방

게시판에 각 차수별 프로그램 예고 후 선착순 50명 내외 접수 주최

간향클럽, 미디어랩&커뮤니티 주관

WIDE건축, 와이드AR 후원

이건창호

프로그램 2 부가영상

1-삭제본 25분

온실, 소방서, 비난, 결혼식, 렘브루크 조각, 가구, 카피캣.. 등등의 부제로 본편에서 삭제된 흥미로운 부분들을 보여준다.

2-복원 기록 6분

건축가, 감독, 공무원 등 몇몇 사람들이 복원에 관련된 자신들의 입장을 이야기 한다.

125


간향클럽, 미디어랩 & 커뮤니티

간향클럽 사람들

우리는

mc 1

GANYANG CLUB, Media Lab. & Community 건축가와 비평가 및 다방면 건축의 파트너들과 함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건축한다는 것만으로 반갑고

프로듀서 전진삼

편집 및 운영간사 박지일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이태현

디자이너 심현일, 디자인현

건축계 안팎의 현안을 주시하며 이슈를 발굴-

mc 2

편집위원 백승한, 장정제

골 깊은 갈등 구조를 중재하는 매개자 역할을 통해

비평위원 김현섭, 박성용, 박정현, 송종열, 이경창, 현명석

행복한 세상을 짓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우리는

공론화하고, 나아가 건축동네의 계층, 세대, 업역 간의 우리 건축의 현재와 미래를 견인하는 통합의 지렛대가

사진총괄 부편집인 김재경 사진위원 남궁선, 진효숙

되겠습니다.

mc 3

제작자문 김기현, 시공문화사spacetime

우리는

인쇄관리부장 손운일

물론 건축과 대중 사회를 연결하는 미디어 커뮤니티가

인쇄처 대표 강영숙, 서울문화인쇄

mc 4

독자지원 및 마케팅 박미담

서점관리 심상호, 정광도서

이 땅에 필요한 건강한 건축 저널리즘을 구현함은 되겠습니다. 우리는

격월간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종이공급 박희진, 신안지류유통

인쇄제작국장 김은태

과월호 공급 심상하, 선인장

월례 저녁 강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땅집사향)》

지역 건축의 콘텐츠를 발굴하고 응원하는 《ICON

mc 5

기획자문 강병국, 고영직, 고충환, 김영철, 박병상, 손장원, 안철흥, 우종훈,

건축역사이론비평의 연구자 및 예비 저자를 지원하는

운영자문 김태만, 류영모, 신창훈, 안용대, 이수열, 이승용, 이윤정, 조남호,

건축가들의 이슈가 있는 파티 《ABCD Party》

Party》

《심원건축학술상》

신예 비평가의 출현을 응원하는 《와이드AR

직판관리 박상영, 삼우문화사 이정범, 이중용, 전진성 최원영, 하광수

건축비평상》

mc 6

고문 박민철, 박유진, 이충기, 정귀원, 조택연, 황순우

《간향저널리즘스쿨》

이종건, 임창복, 최동규

내일의 건축에디터&저널리스트 양성소 건축 잡지&저널리즘을 아카이빙하고 연구하는 《한국건축저널리즘 연구회》

명예고문 곽재환, 구영민, 김정동, 박길룡, 박승홍, 우경국, 이백화, 이상해, 이일훈, 대표고문 임근배

건축 비평도서 출판 《간향 critica》

mc 7

패트롱 김연흥, 김용남, 김정후, 나명석, 목천, 박달영, 이태규, 장윤규, 최욱

국내외 건축과 도시를 찾아 떠나는 현장 저널

mc 8

발행위원 김기중, 손도문, 오섬훈, 우의정, 임재용, 정승이

건축가(집단)의 모노그래프 출판 《wide document》 《WIDE아키버스》

부발행인 이주연

인간·시간·공간의 이슈를 영상으로 따라잡는

대표, 발행인 겸 편집인 전진삼

건축·디자인·미래학 강의실 《포럼 AQ korea》

mc 9

심원건축학술상 수상자 박성형, 서정일, 이강민, 이연경, 이길훈, 강난형

함께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심원문화사업회 사무장 신정환

《WIDE건축영화공부방》

등 일련의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또는 파트너들과

mc 10

126

심원건축학술상 심사위원회 김종헌, 박진호, 우동선, 함성호

마실와이드 대표 김명규 팀원 박소정, 최지희, 박은진, 김용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

‘건축가 초청강의’(시즌5) : Architects in Korea ·Ⅳ

우리 건축 장場의 새 얼굴로부터 기성, 중견, 노장

2019년 3월_제147차: Architects in Korea 35

건축가를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 하에 이

땅에서 활동하는 벽안의 건축가까지 주목하고자 합니다. 2016년 5월~2017년 2월(1라운드),

2017년 3월~2018년 2월(2라운드), 2018년 3월 ~ 2018년 12월(3라운드), 2018년 3월~2018년 12월(3라운드), 2019년 1월~12월(4라운드)로

이어지는 건축가 초청강의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주관

와이드AR 주최

림건축, 간향클럽 협찬

이야기손님: 김광수(studio_K_works 대표)

수류산방

장소: 이건하우스(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시공문화사Spacetime, 유오스Knollkorea, ​

일시: 3월 13일(수) 7:30pm 주제: 맥락 다시 보기

후원

㈜이건창호 문의

02-2231-3370, 02-2235-1960

2019년 4월_제148차: Architects in Korea 36

*<땅집사향>의 지난 기록과 행사참여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카페(카페명: 와이드AR,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aqlab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손님: 이한종(STUDIO 2105 대표) 일시: 4월 17일(수) 7:30pm

장소: 이건하우스(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 161) 주제: 좋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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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WIDE Architecture Report, Bimonthly Special Edition vol.03, 2019년 3-4월호, 격월간 2019년 3월 15일 발행, ISSN 1976-7412 2008년 1월 2일 창간 등록, 2008년 1월 15일 창간호(통권 1호) 발행 2011년 1월 19일 변경 등록, 마포 마-00047호 발행인 겸 편집인|전진삼 발행소|간향 미디어랩 GANYANG Media Lab. 주소|03994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 175 (동교동, 마젤란21오피스텔) 909호 전화|02-2235-1960 팩스|02-2235-1968 홈페이지|www.ganyangclub.com 네이버 카페명|와이드AR

본지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본지에 게재된 기사나 사진의 무단 전재 및 복사, 유포를 금합니다. 1권 가격: 12,000원 연간구독료 1년 구독: 65,000원 2년 구독: 1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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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AR》 주요 배본처

온라인 서점 예스24, 인터파크, 알라딘, 11번가, 인터넷 교보문고 오프라인 서점 대형 서점 ・교보문고 광화문점(02-393-3444) 강남점(02-5300-3301) 잠실점(02-2140-8844) 목동점(02-2062-8801) 이화여대점(02-393-1641) 영등포점(02-2678-3501) 분당점(031-776-8004) 부천점(032-663-3501) 안양점(031-466-3501) 인천점(032-455-1000) 인천 송도점(032-727-2807) 대구점(053-425-3501) 부산점(051-806-3501) 부산 센텀시티점(051-731-3601) 창원점(055-284-3501) 천안점(041-558-3501) ・영풍문고 종로점(02-399-5600) 미아점(02-2117-2880) 명동점(02-3783-4300) 청량리점(02-3707-1860) 김포공항점(02-6116-5544) 여의도점(02-6137-5254) 홍대점(02-2250-7733) ・서울문고 건대점(02-2218-3050) ・종로서적 종로점(02-739-2331) ・북스리브로 홍대점(02-326-5100) 동네 서점 효자책방 소란(서울 통인동, 02-725-9470) 《와이드AR》 과월호 구입처 본지 총판 정광도서 내 선인장(담당 심상하 방장, 02-725-9470) *2008년 판: 절판 *2009년~2015년 판: 파격 할인가 적용(한정수량) *2016년~2018년 판: 일반 할인가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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