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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집단   몽니   


‖   목차 007   •   [Special_1]   만화가들이   휴재하는   이유 013   •   [Special_2]   발매가   연기된   게임들 018   •   [Special_3]   연재가   중단된   소설들 023   •   [Review]   피로사회_박접골 031   •   [Review]   제7여자회   방황_물도마뱀 034   •   [Review]   계간   책   소개_송한별 039   •   [Text]   중편소설   죽을   날이   다가온   헤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_성우창 065   •   [Text]   장편연재   에레혼을   위하여_이상욱 085   •   [Text]   단편소설   흉기의   발명_김도우 100   •   [Text]   단편소설   소나기_닭의비행 124   •   [Text]   단편소설   Toadstool   Apocalypse_배상현 139   •   [Text]   단편소설   용사전_기서녹 164   •   [Image]   by   한시훈 166   •   [Column]   정세랑의   말랑몰랑 170   •   [Column]   로키와   함께   보는   TRPG   이모저모 179   •   [Play]   고민해결!   마법서점_티엘


매   호   ‘이대로   괜찮은가’와    ‘뭐   어때   살고   봐야지’라는   상반된   생각   사이에서   고 통   받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편집장입니다.   데드라인에    맞춰서   서문   쓰는   짓 은   그만해야   하는데   끊질   못하겠네요.   부끄럽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10월   초에   있었던   서울   와우북    페스티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10월    4일부터    6일까지   진행된   거리   판 매전에서   온우주   출판사,   기적의책    출판사,   환상문학웹진   거울,   siverforest와   함 께   합동   부스를   차렸습니다.   사실   창작집단   몽니는   잘   비비고    들어간    건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사흘   내내    있는    책을    죄다   꺼내   와서    팔았고,   그    결과   굉장히   의미   있는   결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창작집단   몽니와   텍스툰을   알 고   와주신   분들도   계셨어요.   죽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히    행사    바로   전날   인쇄소에서    급하게   받아    온    신작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은   현장    판매만으로   전량   매진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오전   중에   마지막   한   권이    똑    떨어져서   종이책을    사러   왔다가    전자책만    사고    가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 리고   그날   밤   편집장과   작가가   소리지르다   죽을   기세로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외 쳤다고   합니다.   조속히   재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르바니온』만    잘    나간    게   아니죠.   화려한    필진으로    주목   받았던    『홍대    기담』 과    총    상금    백만   원짜리   공모전의    결과물인   『2013   큐빅노트    수상작품집』,   그리 고   창작집단    몽니의    첫    발걸음   『올드림』도    매진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년   행 사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는데,   그게    자리   때문인지    아니면   합동    부스   때문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사흘    내내    죽어라    책만    나른    것    같은데   돌아 갈    때는   캐리어    하나   분량    만큼밖에    안    나와서    신기하면서도    기뻤습니다.   내년 에도   행사장에서   다시   뵙고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창작집단    몽니는    2012년부터   올해까지,   2년   동안    여섯   권의   단행 본과    여덟    호의    웹진을   발행한   셈입니다.    그    중    네    권의    단행본이   올해    4월부터    10월   사이의   약    5개월   사이에    나왔다는    걸    생각하면,   제가   도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나   싶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내년부터는   더   미친   짓을   할   예정입 니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더   미칠    수    있냐고요?   취미를    업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창작집단   몽니에서   출판사   등록을   해버렸습니다.   따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창작자    집단과   출판기획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창작


집단    몽니에서   출판기획의    성격을    따로    떼어내    출판사로   독립시키기로   했습니 다.   출판사의   이름은    에픽로그입니다.   epic과   log의   합성어입니다.   이름과   성격 에   대해서는   새로   만든   블로그   EPIC+LOG(http://epiclog.egloos.com)를   참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시   원고   모집   중이니까   연락주세요.    메일:   epiclog.pub@gmail.com 트위터:   @epiclog_pub 이런    말    하면   좀    부끄럽지만   트위터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메일입니다.   블 로그   덧글은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니   추천드리지   않아요. 에픽로그는    지금까지    창작집단    몽니에서   나왔던    단행본/작품을    토대로    내년 부터   전자책   전문   출판사로   활동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몽니가   그래왔던   것처럼    이상한    짓들을    열심히   저지를   예정이니    응원해주세요.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블로그에서는   가끔   똑똑해   보이는   소리도   하니까   RSS   피드   등 에   등록해   놓으시면   좋습니다. 그러면    슬슬   이번    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텍스툰    16호는    쉬어가는   것 들에   대한   이야기,   휴재   특집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창작물들이   어떻 게   쉬어가는지,   왜    쉬는지,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 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쉬는   것으로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만   마지막   자 제심으로   참아   냈습니다. 박접골님과   물도마뱀님,   그리고   제가   리뷰를   준비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한   작 품에    대해서    깊게,   그리고    저는    그간    읽은    작품    중   추천할    만한    작품들을    짧은    코멘트와   함께   정리했습니다. 성우창님의    마피아    하드보일드   소설   죽을   날이   다가온   헤페에게   무슨   일이   생 겼나는    이번   화가    마지막입니다.    세    번에   걸쳐    긴   호흡으로    연재해주셨습니다.    작품은    개작   후    에픽로그를    통해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상욱님의    에레혼을    위하여에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나   지켜봐주세요. 이번   호에는    단편    소설이    네    편이나    수록되었습니다.   김도우님의   흉기의   발명 은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된    흉기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의    이야기,   닭의비행 님의    소나기는    사랑을   주고받은   로봇과    가족의   이야기,    배상현님의    Toadstool   


Apocalypse는    색을   찾아   폐허가   된   도시로   떠난   소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기서 녹님의    용사전은    용사    마니아가    만나게    된    용사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두    한    줄로는    정리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 고,   주변에도    권해보세요.   남들보다   빨리   좋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네    분    모두    큐빅노트   공모전을   통해    찾아낸    분들인데요,   공모전   하기 를   너무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해야겠습니다. 완결을    앞두고    있는    한시훈님의   구망은   안타깝지만   이번   호도   휴재입니다.   대 신   두   주인공을   그린    일러스트를   준비했으니까요.   모두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으 로   기다립시다. 이번에    정세랑님의   정세랑의    말랑몰랑에서는    막    데뷔한   작가가    피해야   할   말 들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지    친절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읽는    내내    왠지   가슴이   따끔따끔했지만요.   좋은    소식    하나.   정세랑님께서    창비   장편소설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수상작품은   내년    출간될    예정입니다.    로키님의    로키와    함께    보는    TRPG   이모저모에서는    포도원 의   파수견이라는   룰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세계관의   작품이니 까   TRPG   마니아들께서는   놓치지   마세요.   룰에   압도하는   맛이   있습니다. 자,   TRPG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시죠?    텍스툰에서    티엘님이   출판사    ‘구르는 사람들’에서   출간될   예정인   TRPG   룰북    고민해결!   마법서점의   리플레이   중   일부 를   연재하고    계시다는   거.   지난   번에   이어서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총   세   번   연 재될    예정이니까,   이제    분기점을    넘었네요.   따라서    스토리도   절정을    향해   분위 기가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룰의    특징을   정말    잘    보여주는    리플레이라고   생 각해요.   본책이   나왔을   때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전자책과   소규모   출판,   그리고   행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러면서도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하고요.   제가   좋아 서   삽질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사람에게   삽질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래서   많은   분들에게   질문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공부할   것도   많네요. 부족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ditor’s   Page


[Special_1]   특집   기사

만화가들이   휴재하는   이유 아이부터   노인까지   만화는   전   세

닉네임이    있으니    팬들의    사랑이   

대를   아울러    인기   있는    책이다.    쉽

듬뿍    담긴    ‘토가시발’    되겠다.    『유

게   읽을    수    있고   글자수가   적어(물

유백서』는    『슬램덩크』,    『드래곤볼』

론   예외도   있다.    『데스노트』라든가   

과    함께    3대    점프    만화    중    하나였

『데스노트』라든가…⋯)    쉽고    재미있

고    후속작    『헌터X헌터』    역시    크게   

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만

흥행하고   있음에도   토가시(애정을   

화를    읽는    독자들    모두가    고통스

담아    줄여    부르기로   한다)는    욕을   

러워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휴

넘치도록    먹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재   공지를   봤을   때다.   

무엇일까?    궁금하니    우리의    친구   

매주    혹은    매달    다음    내용을    기

녹색   검색창에게   물어봤다.

다리는    팬들에게    있어    휴재란    커 다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만화가 들은    왜    어떠한    이유로    휴재를    선 택하게   되는    것일까.   몇    가지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작가 ▷    내   이름은    토가시    요시히로,    직업은   휴재하기죠 『유유백서』로    유명한    토가시    요 시히로는    본명보다    자주    불리는   

[그림   1]   ‘토가시’   검색   시   추천검색어


그렇다.    토가시가    유명한    이유

을    느꼈다는   

는   바로   악명   높은   휴재   때문이다.   

말이   있다.   다

일본    유명    만화    휴재율을    보면   

음    작 품 인   

『헌터X헌터』는    『원피스』보다    최소

『헌터X헌터』   

한    4~5배    가량    더    많이    휴재하고   

계약    당시    연

있다.    평균적으로는    2주에    한    번   

재하고    싶을   

꼴이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때만    연재하

이상(현재   진행   중)   밥먹듯이   하는   

겠다는    조건 [그림   2]   『헌터X헌터』

휴재    덕에    원성을    사고    있지만    그

을    내건   것으로   미루어보아    『유유

래도    한번    제대로    연재를    재개했

백서』를   연재할   당시   겪은    심적   고

다    하면   연재    잡지인    <점프>의    매

생이    지금의    잦은    휴재의    원인이   

출이   30%가    뛸   만큼   뛰어난   주목   

되고   있다고   추측할   뿐이다.

받는   작품임엔   확실하다.

『헌터X헌터』의    휴재일은    600일

한편    『유유백서』를    연재할    당시

을    돌파해    나날이    신기록을    경신

에는   <점프>측에서   대작을   강요하

하고    있다.    욕하면서도    차마    포기

며    장기연재를    종용했고,    <점프>

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팬들의    마

의    강요를    결국    못    참���    『유유백

음을    헤아려    하루빨리    토가시가   

서』를    급하게    완결    지으며    만화를   

연재를   재개하길   바란다.

연재하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감

[그림   3]   일본   유명   만화의   연도별   휴재   횟수


▷   신의   계시로   연재하는   미우치   

토리성과    드라마    및    연극    등으로

스즈에

도    제작되어,    매스컴의    주목을    받 고   있다.   

『헌터X헌터』    팬들이    아무리    죽

미우치   스즈에의   휴재   이유는   특

는   소리를    낸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이하게도    종교    때문인데,    사이비   

작품이    있으니    일본의    메이저    출

종교에    들어가서    종교    활동에    심

판사    하쿠센샤의    대표    작품이라   

취하느라    작품    활동을    못한다는   

일컬어지는    전설의    『유리가면』이   

이야기가    있다.    신의    계시를    받았

되겠다.   

을    때만    작품이    연재된다고    소문

『유리가면』은    미우치    스즈에의   

이    나    있는데    그    때문인지    6년    만

작품으로    1976년부터    연재를    시

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작,    20년이    넘게   장기    연재했으나   

휴재   덕에    작품   간의   텀이    긴   편이

1997년    휴재,    2004년에    약    6년

다.   하지만    매년   그녀의    연재    재개   

만에    42권    단행본이    발행되었고,   

소식은    뜨겁게   이슈가    되니    『유리

오늘날까지   새로운    단행본이   발행

가면』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

될    때마다    만화계를    떠들썩하게   

도다.    기다리는    팬들을    생각해서

만드는    전설의    작품이다.    일본에

라도    신의    계시가    없더라도    하루

서도    세대를    뛰어넘는    극적인    스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

[그림   4]   최근간   단행본.   출간일에   주목   |   [그림   5]   기념비적인   단행본   1권   표지


2.   트러블

았던   것에    화가   나   한때    연재를   중 단했다.

▷   원작과   애니메이션은   다르다?

한편   조사   결과   원작자의   캐릭터    디자인    확인    및    각본의    사전    확인

위엄   돋는   만화가가   있는가   하면   

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기를    얻었지만    자신의    의견을   

애니메이션과    관련하여    계약서를   

피력할    수    없는    만화가도    있다.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작자에

『백곰   카페』를    그린   히가   아로하는   

게는   애니메이션으로    발생하는   수

자신이   원작자임에도    불구하고   애

입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니메이션판   <백곰   카페>의   정보를   

이처럼    작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는    상황임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무작정    작

을    SNS에서   언급한    바   있다.    결국   

품을    애니메이션화하는    독단적인   

히가    아로하는    원작자의    의견을   

행동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에서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

휴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림   6]   『백곰   카페』   단행본   표지와   <백곰   카페>   애니메이션   이미지


3.   작품성&건강

리를   짓고   스토리   보강을   위해   2달    간    휴재에    들어갔다.    목요일    인기   

▷   탄탄한   작가·・스토리를   위해

웹툰    중    하나인    『치즈    인    더    트랩』    도   스토리를   정리하기   위해   약   2달   

휴재에   따른   다양한   이유   중에서   

간   휴재하고   있는   상태이다.   

팬들이   그나마    납득하며   받아들이

또한    웹툰    연재만으로는   수입이   

는    휴재    이유가    있으니    바로    작품

충분치    않아    많은    웹툰    작가들이   

성을    높이기    위해    휴재하는    경우

외주    활동을    하고    있는데,    연재와   

다.    만화책과    달리    웹툰은    일주일

외주    활동의    완급을    조절하지    못

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쉬지    않

하면    체력적으로    고갈되어    몸져   

고    연재하는    시스템이라    미리    스

눕는   경우가   발생한다.   

토리를    다듬어    놓지    않으면    페이

이처럼   웹툰은   호흡이   빠르고   기

스가    말려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다리는    시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

경우가   허다하다.   

는    한편    스토리가    쉽게    고갈되고   

예를    들어    임인스    작가의    『싸우

작가가    빠르게    소진되는    등의    문

자   귀신아!』    시즌2는    작가가    이야

제로    휴재가    드물지    않게    발생하

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급하게   마무

는   편이다.   

[그림   7]   (좌)   『싸우자   귀신아!』   (우)   『치즈   인   더   트랩』


4.   작가   사후

편으론   미완성으로    남겨지는   것보 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완성

▷   끝나지   않는   이야기

되는    것    또한    팬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원작

『짱구는    못말려』의    경우    원작자

은    아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리

인    우스이    요시토는    불의의    사고

메이크    작품    역시    사랑받아야    하

로    세상을    떠났지만    사전에    남겨

지   않을까.

둔    원고들이    발견되어    이후에도    연재될   수    있었다.   현재는    전직    스 텝들에    의해    새로운    짱구가    연재 되고   있다.    거장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타계 로   완결되지    못한   『사이보그   009』 도    완결편이    연재되고    있는    중인 데,    리메이크가    아니라    완결편이 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것이    가 능했던   것은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방대한    자료를    남겨    그    자료를    토 대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작의    스텝이    작 화를    담당하는    등    철저하게    원작 의   재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렇게    작가의   사후나    긴    휴재,    혹은    절필    때문에    기약    없는    휴재 에서    부활한    작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동시에   완성도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한

[그림   8]   『짱구는   못말려』    『사이보그   009』


[Special_2]   특집   기사

발매가   연기된   게임들 세상에는   하늘에   별   만큼이나   많

이   이   바닥   역사의   되풀이니.

은   게임들이    있다.   정작    게임    산업

본    기사에서는    그야말로   무수한   

은    60년이    채   되지   않았건만    이렇

발매연기들    중    특별히    주목할    만

게나   많은    게임들   중엔   그    별의   반   

한    가치가    있는    게임들.    발매연기

만큼이나    많은    게임들이    발매    연

로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대표적

기의   수순을   거쳐   갔다.   

인   국내외    게임   한   가지씩을    한   번   

어떤   때는   개발자의   역량에    미치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    못하여,    어떤   때는    게임   제작비    투자금이   여의치    않아서,    어떤    때

1.   포가튼   사가

는   소비자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 한    고육지책으로,    그    밖의   여러    가

어떠한    말이    필요    있으랴?   한국

지    이유    등등등…⋯.   그럴    때마다    발

에    태어나    한국의    게임들    중    발매   

매일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팬들은   

연기에   대한   평을   한다면   97년   11

입을    모아    개발자들을    욕하지만,   

월   발매된    손노리의   RPG   <포가튼   

그러한    팬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

사가>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    코너   

는   개발자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시

진행이   되지   않는다.

꺼멓게   타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았

본래    이    게임의    최초    개발    소식

을   리   없었을   것이다.   허나   어쩌랴.   

이    들린    것은    1994년,    발매    기획

역사는   결과로    말하는    법,   결국    우

은   1995년으로   잡혔다.   

여곡절   끝에   나온   게임이   망작이냐   

이미    이    시절    이    게임의    예약판

명작이냐에   따라    그간의   개발자들

매에    돈을    입금했는데    하도    연기

의    노고는    인정받거나,    혹은    지금

되어    게임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까지    들었던    욕의    갑절은    먹는    것

군대    간    유저들의    이야기는    전설


이    되어    버렸고,    그렇게    <포가튼    사가>의    발매    연기의    전설은    [그 림   2]로   모두   요약된다.    왜   이렇게   지독하게   발매를   연기 했는가?   후술할   예정이지만,    그것 은    국산    패키지    시장에    만연해    있 던    대량의    버그    문제    때문이었다.    발매    예정일을    잡으면    새로이    발 견되는   버그,    그   버그를    잡으면    다 시    발견되는    버그,    이러한    악순환 을    반복하다    못해    울며    겨자    먹기 로    그냥    내    버린    이    게임은,    미처    다    잡지   못한    버그들로    인해   ‘뽀개 진    사과’,    ‘버가튼    사가’라는    안    좋 은   명성을    뒤집어   써야    했다.   수차 례    발매를    연기한    끝에    나온    결과 물이    상기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게이머들의    혼란이    한층    가중된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포가튼    사가>는    2013 년   현재에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이   바닥의   절대   강자인   모   게 임   <X그나    X르타>와   함께   버그   게 임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고    있다.    소비자의   원성을   견디지   못하고   미 완성작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게 임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포가튼   사가>   공식   이미지,    [그림   2]   무수한   발매   연기의   기록


2.   듀크   뉴캠   포에버 게임    좀    안다    하는    사람치고    이    게임   모르는   사람   있을까. 그야말로    ‘전    세계    발매    연기    게 임’의   대명사.    말이    필요    없다.    바 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무려   14년   5개월에   이르는   엄청 난    개발    기간!    이    게임은    1997년    4월에   발표되어   2011년   6월에   출 시된    발매    연기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이다. 2011년에    이    게임이    기적적으 로    발매될    때까지    전세계    게이머 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이    게임 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공통적인   난 제를    가지고    있었고,    <듀크    뉴캠    포에버>라   함은    흔히   현실    속에서    볼    수    없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맥거핀    같은    존재를    지칭하는    말 이었다.    말이   필요   없다.   [그림   4]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무려    PC통 신    시절    게시판에    올라왔던    게시 글,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97년   4월   29일에   작성된   글이다. 무엇이   이렇게   듀크   뉴캠   포에버

[그림   3]   <듀크   뉴캠   포에버>   패키지

의   개발   기간   연장을   불러왔을까?    원인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소수   정예에    대한    과도한    집착.    <듀크   뉴켐    포에버>    제작팀 은   2003년   기준으로   17명에   불과 했으며,    이는    개발이    지지리    늘어 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지나치게    높은    목표.   듀크    뉴켐   포에버의    프로듀서였던   조지    브로서드는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좋은    아이디어가    보일    때마다    그걸    게임에    포함시킬    것 을    요구했고,    이는    자연스레    개발 의    장기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개 발의    장기화로    인해    게임의    그래


[그림   4]   <듀크   뉴캠   포에버>   발매   정보를   기록한   PC통신   시절의   페이지

픽이    낡아질    때마다    엔진을    교체

셋째,    마무리    실패.    가장    핵심적

했고,    이는    정상적이라면    1~2년   

인    이유인데,    모든    프로젝트는    마

만에    끝났을    개발   기간을    14년    이

지막    단계에서    시간이    가장    오래   

상으로    늘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걸린다.    어느    순간에는    결단을    내

정작    실제    게임의    그래픽은    기껏

려    과감하게    포기하고    일단    시간   

해야   평균    수준밖에   안    되며,    게임

내에    출시하는    것이    관리자의    역

성에    대해서는   '10년   전에    나왔어

할이다.    결단을    미루는    우유부단

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

함이야말로    개발    기간을    한없이   

야말로   비극이다.

늘리는   원흉이다.


이상의    두   게임의    공통점은,    모

개발    산업의    자본력이    시대에    따

두    명작이    될    거라는    기대를    받고   

라    높아져    이러한    웃기기도    하고   

있던    기대작이며    당대    최고의    평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는    많이    사

가를    받던    게임의    후속작이라는   

그라든   느낌이다.    허나   위의    두    게

것이다.   

임과    마찬가지로    예나    지금이나   

<포가튼    사가>는    당시    국산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의   마음

RPG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

이란    플레이어가    조금이나마    더   

며    일개    중소    개발팀에    불과했던   

즐겁고   만족스러웠으면    하는   것일   

손노리를    국산    패키지    게임계의   

터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한    축을    담당하는    장인    그룹으로   

일을   해줄    수도   없고,    해줄    필요도   

거듭나게    한    <어스토니시아    스토

없다.    단지    그들의    노고를    생각하

리>의   후속작으로    취급   받는    게임

고    제값을    지불하여    조금이나마   

이었다.    <듀크    뉴캠    포에버>    또한   

노력의    보상을    안겨주는    것,    그리

당시    뛰어난    그래픽과    훌륭한    게

하여   그들이    힘을   얻어   또    다른   재

임성으로   큰   인기를   얻던   <듀크   뉴

미거리를    들고    우리와    다시    만나

캠>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이었다.

길   바라는   것이   전부이다.

‘명작의    후속작’이라는    공통적인   

부디    단    한    명의    개발자와    플레

속성은    팬들의    주목과    기대를    한   

이어들이    빠지지    않고    게임으로   

몸에    끌기    충분했고,    이것은    팬들

행복해질    그날을    그려보며,    코너

이    스스로를    참을성의    한계에    몰

를   마친다.   

아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때문 에    보다    높은    품질의    게임을    위해    발매    연기와    개발    기간    연장을    감 행한    개발진들은    스스로    개발을    뒤엎고    0에서    다시    시작해버리는    악순환에   갇혀   버렸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게임   


[Special_3]   특집   기사

연재가   중단된   소설들 어느새   여우를   길들인   어린왕자

춘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해    말이다.    아쉽지만    이미    요단강을    건너간   

기다리는    것은    즐겁다?    누구나   

어린   왕자에   대해선   생략하자.

아는    동화    『어린    왕자』에선,    여우 가    기다림의    설렘에    대해서    이야

본    글은    다양한    형태의    연재    중

기를    한다.    ‘네가    오후    네    시에    온

단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기

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

사로    특정    출판사나    작가,    인물을   

야…⋯.’   하고   말이다.   여우가   어린왕

비방,    비난,    비판하려는   의도는    전

자를    기다리면서    즐거울    수    있는   

혀   없음을   미리   밝힌다.

것은,    ‘어린    왕자는    4시에    올    것이 다.’   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그   작품에   길들여지면   우

우린   때로   불가피하게   어린   왕자

린    꽤    관대해진다.    작가에게    생긴   

가   길들인   여우가   될   때가   있다.   그

‘어떠한    사정’에    대해서    따지지도   

것도    언제    돌아올지    모를    어린    왕

묻지도   않고    그    ‘사정’이    정리되어   

자의    여우가    말이다.    분���    직접적

다시    작품    활동을    할    때까지    기다

인    약속을    하진    않았지만    시작된   

린다.   그게    십   년이    넘어간다고    하

이야긴    끝이    날    거라는    생각    덕분

여도    돌아올    거란    희망을    버리지   

에,   의도치    않게   여우로    전락해    버

못한다.   

리고   만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정에는   여

이번   호에서는   우릴   하염없이   기

러   가지가    있다.   그    사정에    대해서

다리는    여우로    만든    어린    왕자에   

는    작품과    함께    예를    들며    이야기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바로    어

하도록   하자.

떠한    사유로든    갑자기    연재를    멈


예정에   없던   연재   중단은   출판사 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특 히    출판사의    흥망성쇠는    연재    중 단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다. ‘아울’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던    민소영   작가의   『적야의   일족』이   대 표적이다.    당시    『적야의    일족』은    대원씨아이의   ‘아키타입’이라는   소 설    브랜드와    계약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작품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아키타입이    브랜드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정리당한    작가는    블로그에    상황을    올리고    결국    연 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과    함 께   연재   중단   선언을   하게   된다.   

오른쪽   위에서 부터   『적야의   일 족』,   『13번째   현 자』,   『동방마스터    노아』,   『붉은   황 제』,   『저주회사   효 연철학원』   

지난    특집에서    소개했던   홍정훈 작가의    『13번째    현자』의    경우    계

는   출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작가

약되었던    출판사가    두    번이나    부

가   홈페이지에서    2부    연재를    했다

도    나는    바람에    연재가    중단되었

고는    하나    이    또한    결국에는    중단

다.   출간   소식은   아직도   요원하다.   

되었다.    송세현    작가의    『저주회사   

『동방마스터    노아』라는    작품을   

효연철학원』은    사정이    조금    더    복

쓴    윤현우    작가는    출판사의    판타

잡하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저주

지   사업    축소로   인해   연재    및   출간

회사    효연철학원』은    유행이    지난   

이   중단되었다.    홍진성   작가의   『붉

뒤에야   출판되었고    결국   사람들의   

은    황제』는    원래    6부작으로    계획

관심을    받지    못하자    인기가    없단   

되었으나,    5권으로    1부가    완료된   

이유로   출간이   중지되고   만다.

후   출판사의    부도로   인해    2부부터


국가의   부름을   받아   연재가    중단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홍성호   작가 의   『링스』가    그   예이다.    군대를    다 녀오기    전엔    다녀온    후    연재를    하 겠다고   의사를   밝혔지만   다녀온   후    아무런   언급   없이   연재가   중단되어    독자들을   안타까움에   빠트렸다.    잘   연재하던   작가가   독자와   트러 블이    생겨    연재를    중단한    경우도    있다.    『엘야시온    스토리』를    쓴    안 소연    작가가    이에    해당된다.    1부

『링스』 『엘야시온   스토리』

를   11권으로    마무리한    뒤    2부    연 재를    시작했는데,    이미    2부    시작 할    때부터    투병    생활을    하던    작가 를    독자가    괴롭히는    일이    생겼다.    작품의   특성상    2차    창작물이    활발 하게   만들어졌는데    작가는   종교적    문제로   매우   불편해   했던   것이다.    관련    창작물이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오면서   작가가    심한   스트레스 에    시달려    작가가    직접    공식    홈페 이지에   2차   창작물을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하는    상황이    발 생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꾸준히    글을    올렸고    공식    홈페이지    관리 자가    글을    삭제하자    반발심에    작 가의    메일로    문제가    된    2차    창작

물을    직접    전달하였다.    이에    작가 의   병은   더   악화되었다.   화가   난   작 가는    문제가    된    2차    창작물의    주 소재였던   동성애를    욕하기에   이르 렀다.    후에   인터넷에서   빠르게   이   이야 기가    퍼져나갔고    작가의    잘못만    부각되어   당시    네티즌들에게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사 건의    전말이    밝혀졌지만    이미    작 가의    지병이    악화될대로    악화된    상태여서    별다른    도움이    되진    않 았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    후    2부 가    다시    연재되었지만    결국    다시    연재를   중단하고   만다.         


이와는   다르게    작가    스스로가   원

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여러   

인인   경우도   있다.   『방문자』를   쓴   안

사정들을   이겨내고    작품을   연재하

유영    작가는    12권을    출간한    뒤    그

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대로    잠적해버렸다.    출판사에서도   

있다.   아마    그래서   독자들    또한    기

작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

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없는   것이   아

하였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닐까?         

작가의    잠적은    막을    수    있는    방법 이    없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가장    당황스러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K.N.I.T』를   쓴   안선영   작가 는    독자들에게    200X년에    돌아오 겠다는    말을    남긴    채    돌아오지    않 고    그대로   사라졌다.    독자들은   04 년부터    자릿수가    바뀌는    마지막    순간인    09년    밤    11시    59분까지    기다렸지만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 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가    돌아오 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연재    속도가    느려    마 치    연중된    작품처럼    보이거나    작 가가    아무런    말없이    잠적    타는    경 우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사유로   우린   어린    왕자를    만나지    못하는    여우가    된

『K.N.I.T』,   『방문자』


[Review]   리뷰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하네

피로사회_박접골

근대여,   안녕

_<모던타임즈>의   마지막   장면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그들은   어디로   걸어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았을 까.   그림자를   끌고   가는   뒷모습에서는   조금쯤   가난하고   따뜻한   냄새가   난 다.   막막하고   아득해   보이는   길은   금세   어둠과   피로를   불러들이고   이들은    곧   모랫길에   주저앉아   다   부서져   버린   크로와상과   설탕   맛   포도주를   맛보 고   있을   것만   같다.   그저   아무   일   없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근대    역시    다른    방식으로    무참히    괴로웠지만,    아무 리   관대하게    봐주어도    오늘날의    피로는    완전한    포화    상태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답게    녹슨   형상으로    보이 질   않는다.    지금의    피로는    틈과    무용성이    없는,    다만    무심으로   이뤄진   육각면체와   가깝다. 한병철은   지금의    개개인을   성과주체로   판단하고    그    징후와   증상   그리고   간단한   자가   치료   에   대한   글을   이 어나간다.    근대와    현대를    극단적으로    구분한    측면이   

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


있지만   저자의   직관과   성찰은   바로   시대의   분별에서   시작하고   그   분별은    중심    논거를    끌어가는,   지난    세기의   사상    들을   비판하는,    독특한   무늬의    디딤돌로    작용한다.    자본과    시스템의    얼굴을    다소    훑듯이    쓸기   때문에    화폐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성과주체의   피로가,   곧   모순의   굴레를   돌   수 밖에    없는   현대   주체의    피로가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은    점    혹은   정신 과    심리    양상에   치중해   현실계가    희미하게    드러난    점은   아쉽다.   여기가    규율   사회와   성과   사회의   교차로이기   때문일까.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도서이자   동시에    극소수의    예 술가를   위한    책이라고   느껴지는    지점이   존재하지만   이것을    단점으로   모 는    것은    어딘가   부질없고   야박하며    비좁은    짓    같다.   동어반복적인   성격 에도   불구하고    글의   흐름은    단호하고   간결하다.    책을   읽는   시간    보다   읽 고   난   후의   여파가   컸고   여러   권의   책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는   면에서   『피 로사회』는   틈이   있어   빛과   공기가   통하는   매력적인   도서였다.

어떻게   하나   우리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_우로보로스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내고   자신과   결혼하며   혼자   임신하고   스스로를   죽인다.    꼬리를   계속해서   먹을   경우   마지막엔   아무   것도   남지   않기   때문에   그를   무로   여기기도   한다.

근대의   자아가   타자와    나를   분리해   나갔다면   오늘의   자아는    그런    짓을   


벌이지    않는다.    어떤    문제    앞에서건    ‘그    정도는    이미    너만큼    알고   있고,    겪고   있고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이   그를   좀먹게   한다.   때문에   사소한   오류 조차    낙오감과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성과주체를    우울하게   하 며    심지어    수치스럽게    만든다.    분노는    짜증으로,    깊은    심심함은   조급으 로,    사유는    계산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영화와   티브이와    라디오가   이렇 게나    우릴    다독여주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답변이야   언제나    영험한   네이버   지식인에   구하면   되지.   왜   그래?   우리   곁에는   유튜브와   카 카오톡과   페이스북이   있는데!   나는   나를   위무할   수   있는데!

진짜   미추어   버리겠네 자본은    쉽게    구조를    만들고    구조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조성한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는   더이상    정직한    전력질주를    강요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목소리는    더욱    교묘하고    친근하며    자연스러워 졌다.    경쟁이란    타자와의    진흙탕    싸움이    아니 다.    그것은    이제    나    자신과의    아름다운   전쟁이    되어버렸다.    전투    중에도    우리    모두는    얼굴에    반드시   윤리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띠어야   한다.    순수한   패기와   올곧은    열정   그리고   진정성   있는    노력이    너를    구원해줄    것이다.    더    애썼다면   더    즐겼다면   더   미쳤다면    실패   따위는   생기지   않았 을   것이다.    지금껏   진심은   통한다,    는   구호가   이 렇게   잘   활용되는   시대가   있었을까.


촘촘하고   얄궂은   현대    경쟁의   성격은   타자와의   관계   역시    얕고    일시적 인    이해관계로    만든    다.    분자화한    개인은    비인격적인    면모까지   갖춘다.    친구는   말한다.   나는   너의    안녕을    바란   거지   결단코   성공을   바란   게   아니 야.    예술의    영역도   예외가    없다.   시심이    없는   시대에,    우리   는    이제   시까 지도    전략적으로   쓴다.    2011년    현대문학   시부문    심사평의    인상적인   구 절을   옮   겨본다.   ‘투고자들이   최근    한국   시의   동향에   눈이   밝고,   전문적인    수련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요사이   이보다   낯    뜨겁고    슬픈    문장을   읽어본    적이   없다.    취업을    미룬   채    대학원에서   유예 기간을   부여받고    시를   써    가는   일종의   엘리트    잉여   군소가   현재    한국   전 반의   시인   지망생들   모습이라면   지나친   모욕이   될까.

그렇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세상의   종말은   한국인들에게서부터.    세계의   멸망,   그것은   한국에서   시작   될   거예요. _에밀리   엘   중/마르그리트   뒤라스

한국은   규율   사회인   동시에   성과   사회,   나아가   피로   특화   사회,   피로   전 문    사회로    불러도    무방한    나라다.    이곳    젊은이들은    다종다양한   피로에    쉽게    휩싸인다.    각   이데올로기   사이에    끼인    청춘    개인은   기성   세대에게


서   분노와    연민을   마구잡이로    느낀다.   아니    어쩌면   느낄   틈도    없이   장애 물을   매끄럽게    스쳐   지나간다.    답이   없는    복잡한   문제에   노출된    그는   그    상태로    경쟁에    말려들고   곧장    위로   받는다.    이    위로란   다름    아닌   긍정의    폭력이다.    숙취    음료와    자양강장제    광고는    말한다.    그래도    여기   소속되 어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   요즈음의   노동은   특권이라고.   넌   그나마   복   받 은    거야.    갑과    을,    병과    정    노릇은    어디에서건    지속된다.   우리는   광활한    살    얼음판을    쉼없이    걷는다.    개개인의    타자화와    고립화는    더욱   강화된 다.    책   속의    멀티태스킹    (동시에   여러   작업을    수행하기)이란    말은   별난    특수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애초부터    갖춰야    할    필수   기본   자 질이다.

그래,   차라리   간   때문이다

_피로의   뜻은   고체   재료가   작은   힘을   반복하여   받아,   틈과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파괴되는   현상    또는   적에게   사로잡힌   상태와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규율    사회의    주체관이    나/너였다면    성과    사회의    주체관은    나/내    기관 이    된다.    매스컴은    말한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단지    간    때문이야.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고.   이것만   해결하면   돼.   프로메테우스의   비극(독수리에 게   매일   뜯겨   먹혀도   매일   재생되는   간)을   염두한   카피라면   이   문구는   시


대를    통찰하는    명문인    셈이다.    손쉬운    책임전가는    도처에서   일어난다.    너의    곤혹은    호르몬   탓이야.   운동    부족과    모자란    비타민   그리고   섬유소    탓이야.   아니지,   청춘   탓이   야.   아니,   아니.   우리   유전자가   그렇게   생겼어.    그도    아니면    그래,   이게    다   이명박근혜    탓이야.   사회    각계각층의   전반적 인   관심과   노력,   시급한    방안    마련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은   애시당초   사 어   아니었나.   구조의   진단은    유령   집단   전문가들의   것   아니었나.   멍청아,    이제   알았어?   문제는   언제나   너의   것,   너의   잘못일   뿐이라고! 시스템은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네가    감 당할만한   짐이야,   머잖아   보상   받을   수   있어,   울지   마,   아프지   마,   너는   할    수    있어,   라고    회유한다.    분개하는   청춘은    오래    전에   잊혀졌다.    2013년 의   우리에게는   분노라는   단어    자체가    미숙,   치기,   방종과   동일한   뜻을   지 닌다.    항의와    호소는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그들과   나의    삶은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피로    따위   케토톱으로   캐내고,   씹고   뜯고   맛 보고   즐기면   되지   왜   그렇게   우중충해? 그러나   미래의   보상이    한   번이라도   구체적인   문장으로   명기된    적이    있 었나.    합격과   실격의    화법   말고?    문제가    흘러넘치는    개인은   필사적으로    간접적인    삶을    살아   낸다.   나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법과   지쳤다고   말하 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내    피로에는   임계치가   없다.   해소되지   못한   울분 과   회피의식은   언어로   흘러들어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추측한다면   현 대    한국어의    특성은   자음   된발음의    발달,    강한    어감의   축약어와   괴이한    한자투의    과다수식,    수동태와    간접어의    남발이    주를    이룬다.   시대상을    언어가   가장   먼저   드러낸다면,   요새의   한국어는   우리들의   피로를   우리만 큼   피로하게   업고   있는   꼴이다.

아,   기도하는   어머니


긍정의    폭력과   한국    개신교의   아전인수격    결합은    여러    화학적    작용과    그   폭발력을   볼   때   가히   최악이라   할   만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상 당한   피로를   유발하므로   생략하고   싶다.   스스로의   피로를   합당하게   여기 는    지점을    벗어나   피로    유발    대상을   숭배하는    유형이    있으니    그것은   한 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일반    성과주체와    달리    육아하는   성과주체는    피로의   성격을   누구보다   곡해한다.   그는   피로를   누구보다   자발적으로   받 아들이는    주체다.    수동과   피동이    완전히   용해되어    한   몸이    되어   버렸다.    자녀의   열렬한   신도이자   열렬한   훈육자인   주체는   강철   멘탈을   지닌   투사 가   된다.   희생에   대한   지나친    각오와   의미   부여로   인해   피로가   물에   젖어    곱절의    무게가    되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그    중량을   자신과   동일시하 고    그에    따른   곤혹을   도리어    투지의    불씨로    삼는다.   자기합리화   단계를    벗어나   고통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성과주체의   모습은    어머니의   얼 굴,    긍정의    안면과    너무도    흡사하다.    희생과    양보라는    가치는   숭고하고    일면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주체의    피로를   가속화하고   그    속도를   망각하 게    한다는    점에서   해롭고   가슴    아프다.    종국에    피로는   피로로   불려지지 도    못한다.    그녀는   이    피로를   모성애라고    부른다.   모성애의    특질은   주체 가    완전연소될    때까지   자신의   피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끝까지,   끝의   끝 까지    이타적인   이기심으로    인고하며   기다린다는    데에   있다.    무엇을?   영 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자녀의   외적,   내적   성장을.

가능한   평화의   예 우리    시대의   수많은    폭력적   응원    중에   단연    으뜸은    화이팅,   이라는    명 령어다.   그   말은   무엇을    뭉개고    덮고   가리는   데   너무   유용하다.   분개하고    거부하고   헤매기를   권유하는   슬로건   은   전무하다시피하다.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Les   non   dupes   errent)_라캉


이   밤난   울고싶었지   그러나꾹   참아야만했어   난유행가   아냐난   제법엄숙해 허나   나의번뇌는   꼭노래로만   떠돌지미쳐도   곱게미친   거야_밤   그리고또   무엇이중/진이정

허먼    멜빌의    바틀비가    내뱉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와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   는   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번역의   모호함   때문 에    바틀비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할    여지는   많고    실제로    여러    해석이   가 능한데,   그의   말은   한정적이고   협소할   뿐이어서   개방된   주체라는   판단이    들진    않는다.    그의    언사는    얼핏    자유의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필경사는    정말로   무엇을   거부했던   것일까. 어떻게   해야    자유를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아를   열고   외출하나.    나 를    어떻게    부수나.   저자는    몇    가지    대안을   내놓고    있다.    앞서   말한   깊은    심심함과    분노    외에   오래   보기    그리고    부정하기.    덧붙여   유대감이   있는    공동의   눈   밝은   피로를    겪을    것.   여기에   쓸모없이   충실하기,   라는   해결책 을   더해도    좋을   것    같다.   녹슨    시간은    무의식을   자극하고    무의식은   지나 친    이성으로    구성된   성과주체를    묽은    존재로    변모시킨다.    너와   나   사이 의   틈은    부드러워지고   날선    자아,   무엇을    넣어도   허기졌던   밑    빠진   자아 는   가만히   이완되어   ‘내   생각을   벗어난   나’   처럼   자연스러워진다.   딴   짓과    딴   길   가기,   즉   낯설어지기는    단단한   주체에   균열을   만든다.   우애와   평화 는   이    지점에서   ���기는    것   아닐까.    우리는    이때   사실적으로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정직함과    희미한    선   그리고    강박적이지   않은    윤리감각이   생성될    때   나    는   너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 까.    우리가   걸을    곳은    0과    1사이의    무수한   길.    정말이지   나는    너와   오랫 동안   길을   잃고   싶다.


[Review]   리뷰

제7여자회   방황_물도마뱀 1권을    반    정도    읽자마자   결심이   

물건의    등장    방식부터    사용    용도

섰다.   난    이   작가를    스타로    만들고   

는   예측을   할   수   없게   정신   없이   돌

말   테다.   

아간다.    CD를    빌려간    친구가    사고로    죽

『제7여자회    방황』은    언뜻    보기

어버리자   학교에   구비된   천국   접속   

엔    제목부터    표지까지    정말    평범

시스템으로   죽은   친구에게   직접   물

함의   극치(였)다.   학교를   배경으로   

어보는데(5화   「디지털   천국」),    2권

여중고생이   주인공인    개그   만화는   

에선    그   친구가    멀쩡히    다시    학교

『아즈망가    대왕』의    대성공    이후로   

에    다닌다(14화    「환상천국」).    이처

결코    드물지    않지만    이건,    좀,    아

럼   일상과   비일상이   교차하는   기묘

니   많이    희한한   만화다.    이    만화는   

한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자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친구    선

칫하면   정신    없어    보일   수    있는    이

정’    제도에    의해    친구가    된    ‘타카

야기를   남다른   개그   센스와   탄탄한   

기’와   ‘카네무라(카네양)’의    이야기

구성으로   커버한다.

를   그린   옴니버스   만화이다.    한   회마다   새로운   미래의   물건이

하지만   이   만화의   저력은   단순히   

나    개념이    나와서    사건을    일으킨

신기한   물건이    등장해서   일어나는   

다는    점은    『도라에몽』을    연상시킨

웃기는   사건들로    끝나지   않는다는   

다.    어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점이다.    각    에피소드에는    모두가   

새로운    물건이    등장하지만    그    물

공감할   걱정거리에서    시작하는   경

건    때문에    사건이    더    꼬이는    구성

우와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

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도

야    할지    고민인    사건들이    교차해

라에몽』의    그것을    연상시키지만,   

서   나온다.   월간   연재   만화인   이   만


화는   1화씩   분절해도    봐도    짜임새 가    있지만    단행본으로    묶어서    보 니    만화의    변화무쌍함이    한    눈에    느껴지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야기    전반에는    삶과    죽음,    이 별,   상실감에서   우주인의   침략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사건들이   자연스 럽게    녹아    들어    일상의    틀을    깨지    않는다.    『돌격!    크로마티    고교』나    우스타    쿄스케    만화의    ‘정신줄    놓 고   보는’   성격을   띄는   동시에   그   흩 어진   정신줄을   어찌어찌   불러   모아 서    ‘자    다시    학교가자’로   돌아오는    그   갭이   이   만화의   매력이다.    (여기서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 다』의    이시구로    마사카즈    작가의    색채를    떠올렸는데,    아니나    다를 까   이   만화의   공식   애칭인   ‘칠녀(な なじょ)’를    이시구로    마사카즈가   

『제7여자회   방황』 단행본   1,2,3권

지었다).    일상에서   유도하는    개그의   텐션이    『제    7여자회    방황』은    국내에서   

풀리지    않고    강하게    강하게    유지

현재    3권까지   정발되었는데,    다른   

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개그    만화에서    소재에    한계를    느

특별한   점    없는   2권까지의    표지와   

끼고    자기복사적인    반복    패턴을   

달리   3권에서는   이    만화의    색깔을   

일으키게   되는    분수령이   보통    3권

직설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일상과    비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의    스타


일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특한    취향을    가진    팬    하나는    만 들었다.   속된   말로   하면   ‘병신   같지 만   재미있는’   만화다. 한낱    쥐뿔도    없는    일개    만화    팬 에    불과하지만.    작가를    스타로    만 들고   싶다.   속는   셈치고   한   번만   읽 어보시라.    “하긴    뭔지    알아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는    많으니    일일이    다    상관할   수는   없어.”(카네무라) “정말   그래!   평생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야지!”(타카기) (2화,   정체불명)


[Review]   리뷰

계간   책   소개_송한별 『악어의    맛』,   이서영,   온우주,   2013.    352쪽   13,800원.    너무나   사랑하는    세상이    미쳐    돌아 갈    때.    갈아엎을지언정    버릴    수    없을    때.   하지만    그    미친    세상으로부터   내 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켜야    할    때.   이 런    미묘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혁명이 라고나    할까.    소위    말하는    '운동권'임 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냄에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건   저런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 만   저자는   불편하라고   썼을   수도   있겠 다는   생각은   든다.

『GURPS   추리와   수사』,   리사   J.   스틸    지음,    김성일    옮김,    초여명,    2013.    144쪽   18,000원.

『악어의   맛』   (위) 『GURPS   추리와   수사』   (아래)

GURPS의   세부   룰들은   해당   분야의   

주면    안    된다.)    소설과    TRPG의    차이

가벼운    교양서    정도로    보고    있는데,   

점도    잘    설명해    놓았고.    이야기를   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특히   장르를   잘   

든다는    점에서는    창작자에게    큰    도움

분석해서   정리해   놓았다.   미스터리   장

이    될    거다.    TRPG    플레이를   위한   부

르에    대해   소개하기    위한    입문서로도   

분도    잘    되어    있는데,    나로서는    써볼   

나쁘지    않을    정도로    정리가    잘    되어   

일은   없을   것   같다.

있다.    (물론   진짜로    이   책을    입문서로   


『시리얼리스트』,    데이비드    고든    지 음,    하현길    옮김,   검은숲,    2013.   520 쪽   14,000원. B급    작가에게    다가온    매우    찝찝하 지만    구미가    당기는    사건과    그    뒤의    구린    면모를    그린    미스터리    소설.   고 전    명작에    대해    등장    인물들이    직접    떠든다든가,   사건을   조사할   때   고전의    방식을    언급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계 속해서   배경을   밝히고   있다.   하드보일 드,    스릴러,    호러의    전형적인    전개를   

왼쪽   위부터 『시리얼리스트』 『던전월드』    『거대한   사기극』   

잘    소화하고    있기도    하고.    예상대로    매력적인   펄프   픽션.   거칠고   덜깔끔한    진행은   조금   답답하지만   포용할   수   있 는   수준.   자극적.   

『던전월드』,    아담    코벌    지음,    김성일    옮김,   초여명,   2013.   416쪽   29,000원.

『거대한    사기극』,   이원석,   북바이북,    2013.   252쪽   13,500원.

자신의    내공과    순발력을    테스트할   

자기계발서의    출발부터    시작해서   

수    있는    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

자기계발서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졌

때그때    이야기를    만들어서    진행해야   

는지,   어떤   성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

하므로   플레이어도,   마스터도   어느   정

명하고   있는   책.   다만   종교계   이야기가   

도   내공과   순발력이   필요한   TRPG   룰.   

많이    나와서    사전지식    없는    (나같은)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보통    취향투성

사람들은    그    부분이    좀    피곤할    수도.   

이라서    뛰어    놀기    굉장히    좋은    점이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보란    거야   말란   

특징.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이   어마무

거야?   라는   한국인다운   답에   대해서는   

시하게    예쁨.    GURPS    룰북들은    디자

에필로그에서    짧고    명료하게    대답하

인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던전월

고   있다.   딱   거기까지만   궁금한   사람은   

드는   뭐   그냥   끝판왕.

서점에서   에필로그만   봐도   되겠다.


왼쪽부터   『쉿,   조용히!』,   『신더』   ,   『삼국지   가후전』   

『쉿,    조용히!』,    스콧    더글라스    지음,   

가    그래도   좋아하는    남자    살리겠다고   

박수연    옮김,    부키,    2009.    424쪽   

희생을    결심하는    장면은   너무    애틋해

13,500원.

서    한탄스러울    지경.    답답함으로    꽉    조인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그런   

미국    공공도서관    사서가    적나라하 게   그려낸   현장   에세이.   도서관은   고귀

의미에서   잠시   다음   권   주문하고   오겠 습니다.

하고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먹고살    돈    나오고    이상한    이용자들이   꾸꾸까 까하고   돌아다니는   곳이다.   너무   적나

『삼국지    가후전』   1권,   MASA   글,   배

라하게    보여주다    보니까    오히려   생각

민수    그림,    애니북스,    2013.    192쪽   

할   지점이   나오는   건   조금   재미있다.

10,000원. 가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삼국지.   

『신더』,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현    옮김,   북로드,   2013.   440쪽   13,800원.

레진코멕스에서    연재하고    있다.    보통    웹툰에서   출발한    단행본은    책으로   보 기는    좀    애매한    감이    있는데,    가후전

신세대   신데렐라는   기름    떼에    쩔어

은    책이    더    멋있다.   웹에서    보던    무시

서    스패너로    안드로이드를    박살냅니

무시한    연출이    단행본에서는    훨씬   더   

다.    아니    이렇게만    말하면    스페이스   

멋있어졌다.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오페라    같지만.    사이보그에    대한    차

영업용으로    훌륭하겠다.   유료   연재   결

별,    이성인에    대한    혐오가   한    몸에   받

제   다   해놓고   단행본까지   샀는데   아깝

는    주인공이    살아보겠다고    바둥    대다

다는   생각이   안   든다.


『매치스틱    케이스』,    인간실격,    보르 자,   류세린,   모베,   차민하   지음,   철이   그 림,   영상노트,   2013.   310쪽   6,800원. 좋은    기획에    의해    나온    좋은    기획 물.    수록된    작품들    사이의    수준차가    크게    없는    준수한    단편집.    작품    전체 적으로    분위기도    잘    유지했고.    개별    작품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무 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수록 된    작품들을    포괄하는    여는/닫는    이 야기.    특히    그    에필로그는    정말로   신 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라이트노블 과   단편은   잘   어울리지   않는   궁합이라 고   생각하는데,   기획력으로   한계를   돌 파해버렸다고   생각한다.

『매치스틱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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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중편소설_下

죽을   날이   다가온    헤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_성우창 창밖의   햇살에   눈이   떠졌다. 벌거벗은   상체를   억지로   일으킨   채   숙취로   아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으음…⋯.” 옆에서   난데없이   들린    다른   사람의   인기척에   퍼뜩   옆을    돌아보니    벌거 벗은    여자가    이불을   끌어안고   웅크려    있었다.    한참을    멍   때리며   그녀를    쳐다본   다음에야   새벽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자식으로써   할    수   있는    패륜   중    가장   극악한   일을    저지른   나는,    그   길로   돌아와    술을   진 창    퍼마시고    창녀와    잠자리를    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숙취에    절은    머리가    더욱   아파져   여자를    포개어    안으며    누웠다.   만족스러운   신 음을    흘리며    내   팔을    끌어당기는    라틴   여성의    아름다운    콧등을    보며   생 각에   잠겼다. 그렇다기보단,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단순한   잡념에   빠졌을   뿐이다.   이 것이   잠이   덜   깬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탓인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주 제인지   몰라도. 그의   죽음이,   나의   살해가   이토록   내게   가볍게   다가온   것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달리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그   사람은    내게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내게    생물학적으로   얼마나   밀접해    있든,   내게   법적으로   얼마나    가깝든,    부친   살해라는   행위에   내   양심은   아 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지지부진한   법철학에    근거한    선악을   따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쯤   결론을   내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홀가분하거나    개운해지지    않는    것을    느끼 며   가만히   여자의   풍성한   흑발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헤페…⋯   씻어야   되는데…⋯.” “언제   깬   거야?” “조금   전에요.” 그러면서   그녀가   내   품에서   돌아누워   마주보고   속살거린다. 뭐야,   더러운   창녀   주제에,   무슨   자기가   연인이나   된   양   굴고   있군.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구겨진다.   물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 다.   알맞게    어두운   갈색    톤의   피부와    탄탄한    몸매는   동양에서    찾기   어려 운   매력적인   건강미다. 하지만,   난…⋯. “어때요?   같이   욕실에서…⋯.” 그녀가    이불을   걷어    젖힌다.   길고    아름다운   갈색    다리가    내게   감겨    온 다.   성욕에   불타는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서   나를   먹어치워요.’ 이러고   말이다. 지구상의   어떠한    남자도    그녀를   거부하진   못할   것이다.    구겼던    얼굴을    펴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채    혀를    깊숙이   들이밀었다.    애써   생각을    거부하려는   생각으로. 당장   산재한   문제는   명확했다. 첫째는    바실리,   둘째는    검사를    이   도시에서    배제하는   것.    그러나    나는    첫째   문제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그냥   떨거지가   아닌가   봅니다.   꽤   질기군요.” 쇳덩이   같은   주먹에   묻은   피와   타액을   닦으며   라미레즈가   대꾸했다.   조 직   내에서   가장   난폭한    그가    땀을   흘리며   숨을   고르고   있다.   어젯밤   항구 에서   생포한    바실리   파의    포로는   예상대로   피떡이    된   채   의자에    앉혀   있 었다.   보통   이럴   땐   포로를    구속하기   위해   밧줄   따위로   결박해   놓거나   하 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의자에   얹힌   남자가   숨   쉴   때   


마다   입에서   피보라가   어렴풋이   뿜어졌다. “이름은?” “…⋯마…⋯마르티네즈다…⋯.” 오랜    구타와   감금의    영향으로   목이    매케해졌는지    한껏    갈라진    목소리 의   대답이   왔다. “의외로   이름은   순순히   말하는군…⋯.   좋은   자세다.   내가   누군지   아나?” 그제야    뒤로   젖혀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    나와    시선을    맞췄다.    퉁퉁    부어서    파랗게   내려앉은    오른쪽    눈   대신    멀쩡한    왼쪽    눈만은   제대 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어서    가까스로    검붉게    말라붙은    그의    입술    사이로    픽,    하는    건조한    실소가   들렸다. “동양인…⋯   후아레즈의   동양인   헤페는   알고   있지.” “점점   마음에   드는군,   그럼   본론으로   가볼까.” 라미레즈가   대령한    조잡한    나무의자에    가만히    걸터앉아    허리를    숙여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손을   모았다. “마르티네즈…⋯.   자네가   바실리   패거리   중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지?” “그저   말단보다   좀   나은   정도…⋯.”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턱짓으로   라미레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친구에게    반나절은   얻어맞고도    입을   열지    않은    녀석은   없거든.    대 부분   그냥   불어   버리든가…⋯   혀를   깨물지.” “큭큭큭큭…⋯   커흠.   죽지   않으려고   꽤   노력했지.” 이   상황,    그   상태에서   굉장한   여유와    배짱이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 렀다. “좋아,   바실리의   정체가   뭐지?” “…⋯   미안하지만   나도   바실리를   직접   본   적은   없어.”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다.   그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맥이라고    불리는    어떤   할아범이   대리해서   우리에게   지령을   내린다.” “할아범?   너희   조직에   늙은이가   있나?” “아니,   노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그   뿐이다.” 일전의   야쿠자가   봤다던   그   늙은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자네에    대해서    물어보지.    자네는    무슨    경위로    바실리와    같이   일하게   되었지?” “하,   하,   컥,    하하하…⋯.    이딴   나라의   길바닥에는    널리고   널린   게    일자리    찾는   한량들이라고,   새삼스레   그런   걸   묻나?”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냐,   조직에   들어가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널 린   게    카르텔이다.   굳이    바실리   같은    갑자기    나타난   신흥    조직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 “그렇군.” “게다가   부하들에게   직접   얼굴도   비추지   않고   수상한    대리나    내세우는    헤페   밑에서   말이야.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다.    너와,   아니   너를   비롯 한   모든   조직원과   바실리   사이에는   어떠한   유대관계가   있는   거지?”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피범벅인   그의    검붉은    얼굴은   잘    알 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감정의   동요가   생겼다. “삼   년   전…⋯.” 피로한   성대로부터   나오는    갈라진   음성은   문득   내게   불길한    느낌을    주 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는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으나,   그는    더욱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했다. “후아레즈의    흔한    불량배였지.    나는.    별    건    아니지.    내    또래라면    모두    비슷하니까.   딱히   거리로   나와도    할    일이   없거든.   그냥   만만해   보이는   놈    족쳐서    돈    뜯고,    그날    술    마시고…⋯    그렇게   사는    거지.    물론   당신들   같은    카르텔님들   눈에는   띄지   않게   말이야.” 그러고는   한   눈을   내게   찡긋하는   것이다.


“주로   당신네들   말이지.” 여기서   나는   그가   후아레즈   출신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게   다야,   그게   다였지만…⋯.    그래도   패거리들하고   노는   건    재밌었어.    나름    행복했다고.    일단   당장은    눈앞에   어려운    일은   없으니까.    다만   누나 는   매번   내   걱정이었지.” “호…⋯   누나라.” “응,   우린   고아였거든,   그래서   누나가   늘   내   걱정이었지.   그   나이   되도록    시집도   안   가고   말이야,   쓸데없이   귀찮게   내   참견이나   하고   있더라고.” “좋은   누나구만.” “그랬지,   좋은   누나였지…⋯   크큭큭.” 그의   몸이   들썩인다.   얼른   뒷얘기를   마저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투로. “그런데   말이야,    있잖아?   꼭    손   안에    있던    게   없어져야    뒤늦게    아깝다 는   생각이   드는   거.   누나도   그런   거더군.   그런   누나도   영영   사라지니   문득    쓸쓸하더라고.” “거   안   됐군.” “…⋯여하튼   그래서    하루는   패거리들    모아   놓고    술을    진창   퍼마셨지.    뭐    그때까진    괜찮았어.    그런데    말이야.    경찰이    들이닥쳐서   날   부르더라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끌려갔지.   아직    그때까진    걸릴    만한    일을   하지도   않 았는데   말이야,   이래봬도   마약은    손에    대지도   않았다고,   곰   같은   형사   둘    사이에    꼼짝    않고   쫄아서    벌벌    떨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굳은    표정으로   가만있기만   하더란    말이야.    결국    차가   멈추고   형사 들에게   이끌려   내렸는데   경찰서는   아니더군,   어디였는지   알아?” 나는    모르겠다는   말    대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도    별로   대답을    기 대하진   않았는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도시   서쪽   교외에   있던   숲,   알아?   거기.    꽤    근교에   있는데도   별로   사람 이    나다니지    않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경찰이    쫙   깔렸단    말이야.   형사들 이   거기로   날   데리고   가는데.   그   가운데에   있었어.   누나가.”


잠시   말을   끊고   침을   삼켰다.   목이   말라   말이   잘   안   나오는   듯하다. “옷이고   뭐고,   야생   짐승한테    뜯어    먹힌   처참한   상태더란   말이야.    그래 도    얼굴은    멀쩡해서   누나인   건    알아보겠더군.    자세한    경위는   듣지도   못 했어.    경찰은    나더러   누나가   맞냐고    물어보기만    하고    취조하러   도로   경 찰서로   끌고   가더라고,   나는    멍해서    그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어.   경찰 서에서도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뭘   물어봤는지는    몰라도   대답은    잘했나봐.   그때   난   초점도    없이    눈만   치뜬   누나   얼굴만   생각나서   아무   것 도    못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거   하난    확실히   기억났어.    경찰끼리   얘기 하는   소리가   들릴   때   그거   하나만   귀에   들어오더군.   ‘시체   근처에   검은   양 복   조각이   발견됐다.’고.” “…⋯.” “알겠어?   이   도시에서   검은   양복   따윌   입는   족속은   당신네들   밖에   없어.    당신   조직   상징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함부로    입고    다니지   못해.   사복   경 찰들도   검은   양복은   안   입는걸.   그래서   그날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패거리를   불러   모았던   거야.   아마   당신은    그날    별거   아닌   일이라   기억   못 할   테지만.   우린   무작정   당신네들이   자주   모이는   술집에   쳐들어갔지.”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마르티네즈는   더   이상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 는다. “나는   운이   좋았어.   10분도   못    돼서   쪽수에   밀려서   얻어터지고    거리에    버려지기    직전,    당신들은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며    우리    중    몇을   보는   앞 에서   입에   총구를   밀어    넣고    쏴   버렸지.   나는   그대로   기절했고,   일어났을    땐   머리맡의   전봇대에   내   친구들이   목매달려   있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죄책감   따위가   아니라.   그가   이야기를   시 작할   때의    불길한   예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기분   나쁨    때문에,   물론    그일은   내가   전혀   알   리가    없었다.   치기   어린   불량배와   내   부하들이   싸우 는   일   따위는   내게   보고까지   올라올   일도   없는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어?   우리   조직에   있는   녀석들은   다   그런   녀석이야.   바실리는   


그런   놈들만   골라   모아서    조직을    만든   거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야.    당신들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은   거리에   차고   넘치니까.   개중에는   카르텔 에게   뭉개진   다른   조직원이었던   놈들도   있고…⋯.   나같이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놈도   있지.   결국   목표는   하나야.   당신의   목.” “그래서…⋯   그래서   바실리는   오직   나만을   노린   도발을   계속한   거군.” 갑자기    마르티네즈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진맥진하게    앉아    있던    의자마저   흔들릴   정도의   큰   웃음이었다. “하하하…⋯.   아마    바실리도    당신에게    엄청난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이 지.   이   정도로   물고   늘어질   정도면?” 그러고는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게    거슬린   라미레즈는    마르티네즈를   입닥치게    하기    위해   험악한    얼 굴로   다가왔으나,   나는   그런   그를   제지했다. 비로소    큰    의문이    하나    풀렸다.    바실리의    보이지    않는    카르텔에    대한    강한   집착.   아니,   카르텔이   아닌   나에   대한   원한일   것이다.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무겁게   다가오는    막막함이    느껴진 다.   수많은    적들의   도전을    받아   왔지만    언제    이렇게   등골    서늘한   원한을    받아   봤던가.    마르티네즈의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이   칼이   되어    꽂히는   것    같았다. “그만.” “하하하하하하하!” “그마안!” 이곳에   들어선   뒤    처음으로   높아진   목소리에   그제야   끊기는    웃음소리.    허나   아직도   웃겨   죽겠는지   숨을   참고   끅끅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그래서,   네   놈들의   본거지는   어디지?” “아,   그렇지.   본거지?   본거지라…⋯.” 한껏    여유를   되찾은    마르티네즈는   이미    넝마주이가    된    몸에도    불구하 고   매우   밝아   보였다.   그간의    모든   것을   털어   버린   듯한   무언가   후련하고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라미레즈를   쳐다봤다. “저   친구   말이야…⋯   나   죽지   않도록   패려면   꽤   힘   좀   빼겠는데?”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듯.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이런   놈들이   도대체   몇이나   내게   총구를   겨누며   노리고   있단   말인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라미레즈는   그에게    돌진했고,   곧   마르티네즈가    으깨지는   소리가   나며   의자째로   날아가는   것을   뒤로   하고   헛간을   나갔다. 헛수고인가. 사무실에   향하며   든   생각은   그거였다. 여기까지    바실리의   실마리를    잡았건만   더    이상의    진행은    고사하고    무 력감마저   느껴진다. 그들은   괴물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은   카르텔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우 리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에게만   심신을   다한   살의의   칼을   겨누고   있다,   후아레즈   카르텔 의    정점,    호세   바티스타라는    동양인   헤페에게만,    바실리   한    명만이   아닌    수십,    어쩌면    백이   넘어가는   숫자의    인간들이    나에게    그런   적의를   태우 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그러한   살의의    괴물에게   대적하라니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   아닌가. 불현듯   최근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예인과의    재회,   아버지와의    청산.    갑자기    요즘    들어   내가   살아온    모든    일들이   나에게   결판을   지으려   빚쟁이들처럼   떼   지어   돌아오는   듯   했다.   바 실리의   일도   그랬다.   그의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모종의   일로   내게   원한을    품은    자들,    그들의   정점에    있는   바실리는    그럼    도대체   내가    과거에   어떤    원한을   그의   등에   지웠길래   저러한   괴물을   만들어   나를   삼키려   하는가?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일생   동안   만났던   지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저절로    옛날에   들었던    구절을   읆조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겨우   이깟   일로   죽는   걸   생각해서   이   장사를   어찌   해먹나. 모든   불안감과   막막함을   억지로   덮어   두고   한동안   좀   쉬고   싶은   마음에    얼른    사무실로    걸아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허나    기대와는    달리   안에는    마타가   응접용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페,   실례했습니다.   급히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 “…⋯음,   그래.” 상황이   상황인지라    상당히    짜증이   났지만   마타는   유능한    부하다.    그런    그   앞에서   함부로   내색을   할   순   없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청장입니다.   급히   뵙자고   꼭   좀   직접   전해달라는군요.” 검사   쪽의    일인가?   청장이   이렇게   날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청 장은   날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군. “라미레즈에게   한    시간   뒤에    출발   준비하라고    해라,    잡은   포로는    그냥    죽여   버려.   더   이상   필요   없다.” “네.” 마타가   방에서   나간   뒤,   책상   앞   의자에   털썩   기대앉았다. 마치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오는   것    같아   버겁다.    이제    또   검사는    어떻 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당장    청장이    급하게   부르는   것에서 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처럼   심적으로   내몰려진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 다.   마지막으로   느꼈을   땐,   한국을   떠   버리는   걸로   해결했었더랬다. “그를   죽이세.” 전에   없이   청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죽이다니,   라울처럼?” “그래,   베니토   곤잘레스도   말이야.” “청장,   갑자기   냉정함을   잃었구먼,   그게   당신   유일한   장점인데   말이야.”


그동안    섣불리   그    신임   검사를    손대지   않은    것은   한    도시에서   두    검사 가   짧은    간격으로   수상하게    죽어   버리면   중앙정부로부터    쓸데없는   주의    끌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베니토의    말을    믿는다면   이미   검찰에 서는   나의   존재를   예상   이상으로   인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청장   본인부터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던가? “상황이   바뀌었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가   어제   나에게   찾아왔네.” “허,   뭐랍디까?” “헤페,   그는   영장   발부를   준비하고   있어.” “영장?   하하.” “이봐,   웃을   일이   아니야.   그는   기동대를   부를   예정이라고.” 기동대!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튕겨져   일어났다. “이봐   청장,   그건   전쟁을   말하는   거야.” “진정해,   지금   들이닥친다는   게    아니니까.   부를   ‘예정’이라는    뜻이라고.    지금   당장   그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가   어제   내게   와 서    영장뿐만    아니라   내    관할에    멕시코   중앙    경찰    기동대   출동에   필요한    서류   인가를   받으러   왔네.”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럼   거기서   뭐라   거절하란   말인가?   대충   싸인하고   돌려 보낸   뒤   곧바로   자넬   불렀지.   도대체   어제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야?” “그건   알   필요   없어.    이런   씨발.   죽이라고   해서    지금   당장   죽일   수    있을    리   없잖아!” 쾅.   테이블을   걷어찬   발끝이   아팠지만   지금   그게   대수랴. 청장이    내   어깨를    붙잡고   돌려    세웠다.   그는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잘   듣게,   어제부터   서류를    꾸몄으니    아직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 다가   기동대를    부르려면   영장    발부를   먼저    해야   하니   아직    시간은   있어.    그는    자네가    영장에   답하지    않을    걸   예상하고    기동대까지    염두에    둔   거 야.   어찌   됐든   영장이   나오기   전에   그를   처리해야   하네.” 그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어찌됐든   그의   말대로라면   아 직은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시간이    남은   것이다.   속으로   욕을   삼키며   다 시   자리에   앉았다.   고작   며칠    동안   잠깐   바실리를   상대하느라   신경   안   쓴    사이   일이   이   지경이라니. “아마   오늘    쯤   중앙    대법원으로   영장    발부를    신청했을    거야.    어찌됐든    일단   없애,   뒷처리는   나중에   생각하세.” “이봐   청장…⋯   괜히   그랬다가    일만    더   커지잖아.   악순환이라고,    뒤에    올    후임   검사들도   똑같은   짓을   할   텐데.” 베니토만   이러리란   보장은   없다. “헤페,   그는   유능해.   오자마자    당신에게   시비를   걸고,   온갖    사건투성이 인   이   도시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자네에   대한   사건만   캐   댄   것만   보면   모 르겠나?   일단   후임   검사는   내   연줄로    적당히   만만한   인물이   오도록   해보 지.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끄자고.” 전에   없는   강경을   주장하는   청장.   나는   그에게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았 지만   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랬다.   반대로   베니토를   없애지   않고   내버려    두자면    나는    그대로   영장을   받고    체포되어    수사    당하고,   재판에   세워지 겠지.    이번만큼은    청장도    돕지    못할    것이다.    이미    베니토로부터   상당한    의심을   받고   있는   모양이니   나서서   수사를   방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허물어지듯   소파에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고작   애송이   검사   하나로   일 이   이   지경까지   오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결정할   때가   됐네.” 청장이   독촉하듯이   내게   말했다. “이건   나와   자네의   생존   문제다.”


모   아니면   도.   상황이   너무   극적으로   변한   감이   없지   않지만,   현실이   이 러하다. “좋아.” 그리고   결심을   세웠다. “하겠다.” 그   말에   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전과   같은   방법이라야   안   되겠지.   우리에게   맡겨라.” “좋아,   내일   당장   착수하게.” “그럴   작정이었어.   당신은   마무리나   잘   하라고.” “걱정   말게,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게.”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은   꽤   답답했다. 어찌됐건    좋든   싫든,    내일   또    검사를   죽여야    한다는    거사를   치러야    하 는   것이다.   요즘   여러   번    닥쳐왔던   커다란   일들에   이어   당장   내일도   받아 야    할    스트레스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마치   대학시절   미 뤄   왔던   과제가   한꺼번에   몰려온   느낌이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머리   아픈   와중에   문득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과제야    포기하고   집어치우고   놀아도   될   일이건만,   이   일은   그럴   수도   없으니   원. “라미레즈.” “예,   헤페.” “운전   꽤   하고   담이   센   녀석,   어디   없나?” “헤페,   절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섭섭합니다.” 운전석에   달린   룸미러에   라미레즈의   서운한   듯한   눈이   비춰졌다. “하하,   물론   너   만한   녀석이   없지만   이번   일에   널   쓸   수는   없다.   네가   하 기엔   좀   하찮은   일이거든.”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엔리케라는   놈이   있긴   합니다.   아마   항쟁할   때   몇   


번   보셨을   겁니다.   성격이   굉장히   악바리고   조직도   잘   따르는   놈이죠.   마타 가   가까이에   두고   잘   쓰는   녀석입니다.   운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   조직에   잘   따른단   말이지…⋯?” “예,   지난번   바실리가   기습할   때도    총   맞는   게   무섭지도   않은지    앞장서 서   쏴   갈기던   적도   있었죠.   완전이   여기가   미친놈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쳐   보이는   것이었다. “그   녀석   믿을   만한가?” “뭐,   나사   하나   빠진    놈은    확실합니다만   충성도   믿을   만합니다.    헤페께 서   모르셔서   그렇지   아마   헤페의   말씀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게   분 명합니다.” “좋아,   엔리케라고   했나?   그   녀석하고   차를   하나   수배해   놔라.” “자동차   말입니까?” “튼튼하고,   큰   걸로.” “트럭   말입니까…⋯?   누구   하나   밟아   버릴   겁니까?” “그래.” 라미레즈는   이번엔    놀란    표정을   짓는다.   룸미러에   비치는    그의    표정을    보는   건   의외로   재미있다. “설마…⋯?” “검사다.   방금   청장과   이야기를   하고   왔다.” 그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라미레즈는   평소의   다혈질적인    그의   성미에   안   맞게   신중히    말을    고르 는   눈치였다.   그런   그가   말을   꺼낸   것은   몇   개의   교차로를   더   지나친   다음 이었다. “저,   헤페.   제가   마타    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아닌   건   잘   알지만    말 입니다.   지난번   검사를   담가    버린    지도   얼마   안됐는데   너무   이른   것   아닙 니까?   물론   헤페의   명령이라면   불만은   없습니다만…⋯.” 본인은   최대한   내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조심조심   말을   꺼낸   모양이다.   


덩치에   안    맞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흥겨운    기분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이    후아레즈의    카르텔을    차지할    때부터    함께한    나의    파벌    중,    마타와    더불어    항상    앞장서서   나의   손발이    되어주던    그였다.    그러나   그의   덩치 만큼이나    거친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이   걱정되어    언제나    내    가까이에   두 고   부리던    그가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모양을    보이니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렇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나중에    모두에게   말할   테지만   지금은   상당히   위급한   상황이야.   예외라는   거다.” “알겠습니다,   헤페.   돌아가는   즉시   수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그    뒤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미레즈    또 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룸미러를   보았을    땐   그의   얼굴엔   비장미마저   넘쳐흘렀다. ‘힘   좀   빼.   뭐   별   거라고.’ 스트레스로   인해   긴장했던    온   몸이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완되는    느 낌이다. 차창에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비가   오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고,    하늘에   껴    있는   심상치    않은   뇌운을    보고   곧    비가    ‘엄 청나게’   오리란   걸   한   번   더   알아챌   수   있었다. 짐작대로,    아지트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    아지트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사이    입구에선    마타가    부하들과    나 오고   있었다.   이리로   오기   전에   미리   언질을   준   덕이다. “소식   들었습니다.” 차문을   열고   나온   내게   우산을   직접   받쳐주며   마타가   말했다. “애들   몇   명을   미리   검사에게   붙여   놨습니다.   위치는   언제든   알   수   있습


니다.” “라미레즈가    차량을    수배할    거다.   마타.    엔리케라는    녀석을    라미레즈 에게   붙여라.” 마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엔리케   말씀이십니까?” “베짱이   좋다더군.   그라면   경찰에게도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테지?” “그렇습니다.” “이번    일은    사고사로    위장할    것이다.    라미레즈가    차량을    수배하는    것 을   돕도록.   한   번에   확실하게   밀어   버릴   수   있도록   중량   큰   걸로   구해봐.” 거기까지   거침없이   말하고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아지트로   들어섰으나,    그런   나를   마타는   굳이   불러   세웠다. “헤페.” “뭐냐.” “너무   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좀   더   신중히   진행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그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차    안에서   잠시나마    풀렸던   긴장이    다시   나를    조이는    느낌이   든다.    맞 다.   나는   지금   서두르고   있다.   서두르고   싶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몸에   기운이   빠졌다.   탈력감을    느껴지며    벽에    몸이   스러진다.   놀란   마타와   부하들이   나를   부축하러   왔다. 그들에게   몸을   의지한   채로   숨을   골랐다.   몸과   마음이   먹먹하고   무거운    느낌.      나는   어서   이   모든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 “마타…⋯.” “예,   헤페.   말씀하십시오.” “결행은   내일,   내일이다.   내일   오전   중에   모두   끝내자.” “헤페…⋯..” “그리고   나는   휴가를   좀   가야겠다.”


신음소리를   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부하들은   나를    놔주었지만    여전 히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쉬십���오,   나머지   준비는   알아서   해   놓겠습니다.   헤페.” “그래,   그래야겠다…⋯.” 집무실로   향하려던   걸음을   침실   쪽으로   돌렸다.   집까지   갈   여력   따위는    없어    대충    아지트의   임시로   쓰는    침실에서    자기로    했다.   뒤에서   마타가    침실   쪽으로는   최소한의   경비만을   남기고   얼씬도   하지   말라는   지시   소리 가   들렸다.   젖은   솜   같은    피로감에   나는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천천히   발 을   뗐다. 침실에   들어선   나는   코트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새삼   느껴지는    스트레스,    다시금    요   근래    갑자기   들이    닥쳤던   일들을    되뇌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바실리의    출현과    습격,    새    검사의    부임.    무엇보다…⋯   잊었으리 라   믿었던   옛    인연과의   조우,   그리고   청산.   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바 실리   패거리들의   정체. 괜찮다.   내일    거사가   마치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정심을    잃은   것뿐이다.   이런   수라장   따위   얼마든지   헤쳐   왔지   않은가.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허나    이런   말을    수천    번   해봤자    불안감 은    매우   차갑고    끈적한    점액이   되어    내    몸을    감싸고   목을    졸라    온다.   이    모든    숙제가    나의   과거로부터   온    업보인    것,    그들을   짓밟는다면   그것으 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인가?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일생    동안   만났던    지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사모했던   사람마저도,   원망했던   사람마저도,   원한을   안겨준   사람마저도. 이   모든   일들이…⋯   나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안녕하심까!   헤페!   엔리케라고   함다!” 의외로    땅딸막한    녀석이었다.    키에    비해    몸이    다부진    것이    듣던    대로   


꽤나    배짱    있어   보인다.   내    앞에서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목소리마저도    말이다. “잘   해낼    만한   녀석입니다.    운전   실력이라면    몰라도    들이받는   것에    대 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지요.” “설명은   해줬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    앞으로   30분   정도   뒤면    베니토    곤잘레스는   청사로   출근할   것이다. “출발하자.” 작전은,   작전이랄    것도    없이    계획은    단순했다.   평소처럼   자동차로   출근 하는   베니토   검사를,   청사   도착   전   10분   거리에   있는   하천변을   따라   난   도 로   모퉁이에서   신호와   함께   트럭째로   덮쳐   버리는   것,   들이받고도   죽지   않 을   경우를   대비해   멈추지   않고   밀어서   하천에   빠뜨려   버리도록   한다. “엔리케,   이번    일만    잘해내면    앞날은    걱정하지   마라.    후아레즈의    남쪽    구역은   네   것이   된다.” “여부가   있겠슴까!   반드시   해내도록   하겠슴다!” 결행   현장까지는   우리    아지트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도로로    빠져나 가는    골목길의   현장에는    이미   독일제    10톤    트럭이   준비되어    있었고,   타 이밍에   맞춰서   엑셀만   밟으면   바로   전방에   지나가는   차를   덮치고   밀어서    도로   오른편에   난   하천까지    밀어    버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엔리케는   현장 에서    내려주고    나는   마타,   라미레즈와    현장이    잘    보이는   고지대로   자리 를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부터   뭔가   이상했다. “오늘은   도시가   한적하군.” “예,   출근하는    차량도   매우    적군요…⋯.    아,   지금    검사가    막    자택에서    출 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괜한   기우인가?   사실   그렇게   차량   통행이   많은   도시는   아니지만…⋯.


“뭐   됐다.   괜한   방해도   없으니   좋군.” “그렇습니다.   음…⋯   이쯤이면   잘   보일   겁니다.” 차에서   내리니   엔리케가    탄   트럭이   바로   발아래에서   보이는    언덕    위의    주택가였다.   햇빛은   알맞게   건물을    비춰,   건물   그림자   속에   우리가   잘   보 이지   않도록   했다. “아,   베니토가   옵니다.” 마타가   건넨    쌍안경으로   저   멀리   도로    저    편을   보았다.   그   말대로    멀찍 이    베니토의    아우디가   이쪽으로    도로를    따라    내달리는    것이   보인다.   운 전자는    차창의    태닝   때문에    잘   보이진    않으나,   그   아우디는    미리   조사한    대로    베니토의    아우디가   맞았다.    쌍안경으로    저    쪽을    보는   동안   엔리케 의    트럭이    시동이   걸리는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현장의   부하들도   신호 를   주고받는   모양이다. 아우디가   점점    목표   지점까지   다가온다.   타이밍은    한   번   뿐,   저절로    쌍 안경을   쥔   손에   땀이   찼다. “지금이야!” 나도   모르게    내지른   소리,   그   아우디는    가까워져   있었고,   들릴   리    없는    내   외침이   들렸는지   엔리케의   트럭은   타이밍   좋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꽝! 값비싼    아우디가   보기    좋게    찌그러진다.   트럭에    들이받혀    운전석부터    구겨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쌍안경을   넘어   내   망막에   각인되었다.    트럭은   그대로   자비   없이   아우디를   도로   옆의   가드레일까지   밀어붙였고,    트럭의   운전석에서   엔리케가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운전자를   잃은   트 럭은   멈출    기미    따위    보이지    않고    가드레일마저    휴지조각처럼    구겨   버 려,    아우디를    하천으로   날려    버렸다.   트럭    자신도   먼저    날아간   아우디를    붙잡으려는   듯이   도로변에서   굴러   떨어진다. “귀   막으십시오!” 정신    없이   바라보다    라미레즈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서    쌍안경을    떨어


뜨리고   양   귀를   막는다. 카가가가각!   꽈과광! 아우디는   깔끔하게    하천으로    떨어졌으나    트럭은    중량    때문인지    하천    벽을    긁고    부딪쳐,   굉장한   소음을    내다    하천변으로    어설프게   떨어진   모 양이다.    엔리케가    요령   좋게    뛰어내린   것이다.    계속   저기에    타고   있었다 간   뼈도   못   추렸겠지. “축하드립니다.   헤페.   급한   일   하나는   끝났군요.” “…⋯아아.” 아니,   뭔가    이상하다.   나는   무언가   퍼뜩    생각나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 보았다. 사람!   사람이   없다! “라미레즈,   시동   걸어라,   어서   자리를   이탈한다.” “네?” “사람,   이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사람이   안   보여.   뭔가   이상하다.” 평화로운    오전,   도로변에    사람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지금   이런    굉 음이   울렸는데?   바로   옆에   있는   주택가에도    창문   밖으로   고개   내미는   사 람이   단   하나도   없다? “그야   그렇겠지.    이   근방    시민들은   모두    어젯밤    중앙정부   권한으로    피 신시킨   상황이다.” 마타도    아니고   라미레즈도    아니다.   그    둘은   이    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 봤지만   난   등골이   서늘해    그럴    수가   없다.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이기   때 문이다. “이쪽을   봐라,   호세   바티스타.   후아레즈   카르텔의   헤페.” 허리춤의   권총을   움켜쥔다.   이런   제길,   씨팔!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로   목소리의   근원지를   본다.    우리가    있는    골목길    입구의    반대편,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등지고    등짐을   지며   서있 는   검은   정장의   젊은   사내,    분명   아까   자동차   째로   굴러   떨어졌을   베니토   


곤잘레스다. “휘유,   보기   좋게   날려   버렸구먼.” 이마에    손바닥을   대며    차가    보인다는   시늉을    한다.    20대의    젊고    노련 한    검사는    여유가   만만했다.   그를    비추는    역광에    익숙해지자   그의   뒤로    몇   사람의   인영이   더   보인다. 멕시코   기동대! “너   이   새끼…⋯   어떻게?” “순순히    항복해라!   호세    바티스타!   이미    이    근방    뿐    아니라    후아레즈    거의   전역을    멕시코   중앙군    병력이   둘러싸고    있다.   네가   지금    도망쳐   봤 자   기동대로   토끼몰이   몇   번만   하면   잡힐   일이지.” “또한   너를   1건의    살인미수와   2백여    건의   살인   혐의,    5백여   건의    특수    폭행과    뇌물    수수   혐의와    그   밖의    내란    음모죄로   체포한다.    미란다   원칙 은   따로   읊어주지   않아도   되겠지?” 또다른    뜻밖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일렬의    기동대    뒤로   청장의   모습 이   보인   것이다. “배신인가.   청장…⋯!” “배신?   나는    국가에서   임명한   이    도시의   치안   책임자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중이다.   난   자네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닥쳐   이   돼지야!   법정에서   내가   제시할   녹취록   몇    개면    네놈도   끝나는    걸   모르나!” 그    말에   청장은    낄낄   웃는    시늉을   한다.    베니토는    느끼한   미소를    흘리 며   뒤의   청장을   흘깃   쳐다본   후   내게   말했다. “이미   청장의   비리는   나도   익히   아는   바다.   호세   바티스타…⋯.   허나   그는    미약한   경찰력으로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미   그는   그동 안    네게서    받은   뇌물들과    모든    증거   자료를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내게    넘긴    상태,    그리고   나의    살해   계획을    알려주고   협조를    약속했다.   이른바   


사법   거래라는   거지.” “뭐라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는   허리춤에   있던   총을   뽑고   그들을   향해   겨눴 다.   그러자   일선에   선    기동대들    전원의   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베니토는   전혀   개의치   않고   기세   좋게   외쳤다. “투항해라!   바티스타!   너    하나로    끝날    일이야!   네가    얌전히   잡히지    않 으면    바로   전쟁이다!   여기에    온건   정부군뿐이    아니야!   인터폴도   협조하 고   있는   사항이다.   순순히    잡히면    국제   재판   까진   넘어가지   않게   해주지.    어떤가!” “차라리   죽겠다.   병신아.   어디   내   시체나   끌고   잘도   감방에   처넣어   보지    그러냐?” “협상   결렬인가.   좋군.” 그리고   손을   올려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었다.   나는   기동대의   총구를   보 면서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탕! 총성은   단   한   발,   어떻게?   옆구리에   뜨끈한   느낌이   들었다.   기동대에서    쏜   방향이    아니다.   나는    옆구리에서   난    상처로부터   죽   시선을    따라가   보 았다. “어…⋯?” 총상은    바로    옆으로부터    난    것이었다.    시선은    옆에    있던    사람의    손에    들린   총구에서   멈춰   섰다.   콜트   거버먼트   은장   커스텀.   나는   이   총을   누군 가에게   직접   하사했던   기억이   있다. “죄송합니다.   헤페.   순순히   투항하시죠.” 마타…⋯   어째서. “네가…⋯   왜…⋯.” “…⋯그렇게   됐습니다.” 마타가   분명하다.   어째서,   그가?   나는   단박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어,   어째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이만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옆구리를   쥔    채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이대 로,   이대로    끝인가?   뭔가    아귀가   안   맞는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알아 야   할   권리가   있다.   왜?   왜? “우워워어어어!” 라미레즈가   괴성을   지르며   마타를   들이받은   것은   그   때였다.   마타는   총 을    놓치고    그대로    벽에    처박혀    쓰러���다.    라미레즈는    그대로   마타에게    올라타며   외쳤다. “헤페!   도망가십시오!   차   키는   꽂아   뒀습니다!” 퍼뜩   우리   뒤에   있는   벤츠가   생각났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반대쪽   입구 에는   아무런   병력도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버티어   일어났다. “젠장!   꼼짝   마!” 반대쪽의    베니토가   기동대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라미레즈와    마타 가   뒤엉켜    골목    가운데에서    몸싸움을    하며    막고    있었기에    총을   함부로    쏠   순   없는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다. “으극!” 재빨리    차    운전석의    문을    열고    뛰어든다.    라미레즈의    말대로    차    키는    꽂혀   있다.   차   키를   돌리고   시동을   건   뒤,   밟는다. 부앙! 탕   탕! 차를    겨누고   몇    발   총알이    날아왔으나   앞뒤    보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    튀어나간   차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백미러를   보니   베니토와   기동대들이    저   멀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어서    빨리,   후아레즈를    탈출한다.    그런   일념    하에   전    속력으로    엑셀을    밟았다.   벤츠는   순조롭게   내   말을   들으며   도시   바깥쪽을   향해   달려갔다.


허나   상황이   그렇게   좋아질   리는   없었다. 마침   우리가   있던   곳은   후아레즈   남쪽으로   빠지는   가까운   곳이었다.   옆 구리의   통증을   참으며   도로를   달리니   머지않아   도시에서   나가는   곳이   보 였으나,   보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릉부릉부릉! 일렬로   서   있던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경찰차들이   내가   탄   차를   목격 하자마자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도로를   뒤덮고   있는   경찰차들은   모든    시민을   대피시켜   놓은   탓에   텅텅   빈    8차선   도로를   역주행   정주행   막론하 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나는    부리나케   핸들을    꺾어    왔던   길로    돌아간다.   어찌해야    하지,    어떻 게   해야…⋯. 문득,    저번에   야쿠자와    거래를    하던   도시    외곽   공터가    생각났다.    그곳 은   비포장도로에   온통   황무지니   그쪽으로는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단   나가서,   콜롬비아로   가는   거다…⋯!” 일단    마음을    먹고    핸들을    확    꺾는다.    나가자,    나가는    거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마타고   청장이고,   일단   나가자…⋯. 이러한   일념   하에   일단   도시의   건물   숲들로   뛰어들었다. 허나    마음먹은    것처럼    잘    되진    않았다.    이미    베니토의    지시가    떨어진    탓인지    골목    이곳저곳에서    경찰차들이    튀어나왔고,   설상가상으로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황은    생각한   것    보다   더    심각했다.   어쩌다    대로로    빠져   백미러로    뒤 를   보면   내   꼬리에   붙은   경찰차가   족히   두   자리   수는   넘었다.   그러다   맞은 편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경찰차들이    나타나고,    그러면    나는    다시   옆의    좁은    도로로    빠지는   걸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나마   버티는   것은    내가    골목길의    인간이기에,   조금이나마    그들을   따돌리는데    유리하기   때 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잡혀…⋯.” 어디론가   잠시만이라도   몸을    숨겨야    한다.   도시   밖으로는    이대로는    절 대로   못   빠져나간다.   갑자기   나타난   위기들   때문에   머리도   뒤죽박죽이고,    옆구리의   통증도   나를   괴롭힌다.   이만큼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용하다. 아지트,   아지트는   이미   기동대가   제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   다른    어딘가로   들어가야   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본다.   그   많던   경찰차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따돌린   건가?” 벤츠의    성능   때문인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난    차를    버리기 로   했다. 어딘가   으슥한   골목,   벤츠를   대고   차에서   내린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건 물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거긴   다세대   주택이었다.   아까   베니토가   말한    대로라면,   주민들은   모두   집에서   대피하고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적당히    2층의   아무    집이나    문을   차고   들어가   보니   평범해   보이는   가정집에는   아 무도   없었다.   안도하고   몸을   끌고   거실의   소파에   털썩   눕고   한숨   돌렸다. 내가    왜    이    정도로    대규모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몰랐을까,    아마    마타   때문이겠지.   분명   내가   자고   있는   틈에   있던   일일   것이다. “아파   보이는군.” 운명이    나를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한국어의    음성.    전혀    뜻밖의   등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올게   왔다는   것뿐 이었다. “고개   들어,   친구.   이제   이야기의   마지막이야.” 소파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본다.   이젠   뜻밖의   인 물이라는   것도   지친다. “그   말대로라면…⋯   제발   좋겠군.” 그    남자는   나와    같은    동양인이었고,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였다.   


까마귀   같이   검고   깃털들로   장식된   코트를   입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아는   얼굴이다. “차해준…⋯.” 늘씬하게    큰   키에    말끔하게   넘긴    머리,   그의    하얀    얼굴에는   상황에    안    맞게   상냥한   미소가   어려   있다. “어째서,   네가   여기…⋯.” 차해준. 따로   회상할   일도   없다.   내가   예인을   알게   된   계기가   된   친구.   내가   어머 니의   일로   아버지라는   인간에게   수모를   당했을   때   옆에서   위로한   친구. 한국인   전열진이었던   시절,   절친했던   나의   단짝이었다. “글쎄,   하긴   꽤   극적인   등장이지.   근데   이렇게   오랜만인데,   인사먼저   하 는   게   순서   아닌가?” 그는   여유를   부리며   근처에   널부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거기에   앉 았다. 난    아직도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여기    왜?    그는    분명    내가   아는   그가   맞다. “내가…⋯   환상을   보는   건가?” 내   말에   그가   속절없이   웃는다. “하하,   어지간히   몰리긴   했구나,   환영이   아니야.   나는   네   눈앞에   있다.” “너무   뜬금없군.   넌   여기   왜?” “네가   사라진   뒤로,   나도    내   갈   길을   간    뒤에   여기에   이른   거지.    인터폴    수사관   자격으로   지금   여기   있는   거다.” 인터폴.   아까   베니토가    말하길   인터폴도   개입하여   도시    어딘가에    있다 고   했다. “그게   너였나…⋯.” “나도   이렇게   너를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호세   바티스타라니,    이름까지    바꾸고   마약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끙끙거리며    옆구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해준은    자리에 서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왜   나타났는지는   잘   알겠지?” “…⋯서로   안부를   묻는   대신,   그걸로   퉁   치도록   할까.” “지난   달,   후아레즈에   전도   및   폭력   반대   시위를   하러   온   일단의   교회인 들이   하루아침에   행방불명된   뒤   멕시코   어느   해변가에   모든   장기가   소실 된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에서    솟아났다.    경찰청   앞에    있던    예수쟁이들의    반대   시위. “보통    흔히    일어나는    장기매매    사건으로    치고    말겠지만,    이번    사건에 는   유력한   목격자가   하나   있었다.   아니,   목격자라기보다는   납치되었다가    겨우   도망친   피해자가   있었지.” “아…⋯   예인인가.   무사히   돌아갔군.” “차라리   예인이었던   것이   다행이었어,   예인이는   귀국하자마자    다른   곳 은   돌아보지   않고   내게    연락했다.    덕분에   네가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   전 열진이라는    것은    극소수밖에   모르는    사실이야,   언론과    민간에는   후아레 즈   마약   카르텔이   저지른   일이라고만   알려져   있지.” “그래서   네가   나타난   거였구나.” “하하하,   세상에   우연은   없다잖아.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그게   무슨?” “인터폴의    정보망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이래    뵈도    난    국제수사관    중에서도   짬   좀   먹었다고.    너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인지 하고   있었어.” “뭐야…⋯   진작   알고   있었으면…⋯   얼굴이나   비추지   그랬냐…⋯   쿨럭.” 안   좋은    느낌이   든다.   분명   한국을    뜨기   전까지   둘도   없는    친구였건만,    아까   얼굴을    대했을   때부터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디선가   낯 설지   않은   느낌.   무언가   오랫동안   맡아   온   듯한   익숙한   구린내가   난다.   옆


구리의    총상을    살피는   척   하면서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더듬었다.   지금    느끼는   내   느낌이   맞다면,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 “난   네가   그쯤   해서   손을   떼길   바랐어.   친구.   네가   후아레즈의   헤페가   된    후로,   얼마   못    가   리더십을   잃고   패퇴하리라   믿고   있었지.   그런데   오히려    잘   나가면서   세를   키우더군.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어.” 철컥 총을    뽑아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거의    동시에,   차해준의    권총    또한    총구를   마주하게   되었다. “너였군,   바실리가.” “또   다른   동양인.   너의    사정   또한   잘   알고    있고,   너와   관계된   자들을    무 리   없이   조사하고   끌어들일   만한   조직력과   정보력.” “그리고   나의   사정   또한   잘   알고   있었지.   내   아버지…⋯   그   인간을   끌어들 인   것도   네   음모냐?” “어느   사업가든    탈세와   정경유착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법이지.   네    아 버지가    강제로    도주하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네   아버지가   일본에서    멕시코로    도망칠    마음을   먹게   한    것도    어렵지    않았지.   시기적절하게   우 연을   가장한   힌트   몇   개만   던져놓으면   되니까.” 이    냄새,   왠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낯설지    않았던   느낌,    바실리란    그 였던가,   우리는   그리도   오랜   해후를   하고   있었던가. “나란챠를   죽인   것도…⋯.” “알아서    후아레즈의    헤페로    속아들    주더군.    그들    눈에는    이    동양인이 나   저   동양인이나   같아   보일   테니까.” “네   목적을   모르겠군.   어쩔   셈이지?” “이제   이만   순순히   잡혀라.” 순간    그의   눈에    쓸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차해준은    허울   좋게    이 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잖게   알아차렸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외면한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이만하면   됐잖아?   그    동안    친구   된    의리로   너를    직접    잡지    않고    간접 적인   방법으로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 지.   이제   남은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안   잡히겠다면?” “잡히지   않고   배겨?   이   도시를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하,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자조   섞인   웃을   흘렸다. “…⋯이미   늦었어.” “늦다니?” “이미    치달을    대로    치달았어.    만약    오늘    네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나는   아마   순순히   그들에게   잡히고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야.   지금   내게   잡히면   되잖아?   뭐가   다른   거야.” “지난   십   년,   네가    생각하는   나는   달라,    우리의   관계도   달라.   만약    내가    한국의    전열진이라면,   가지고   싶은    여자를   갖지도    못하고,   인간    같지   않 은    쓰레기를    아버지로   두며,   장차    국제    수사관이    될   차해준의   친구라면    네   말대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넌   아직도   전열진이야.” “천만에,   난   후아레즈   카르텔의   헤페.   호세   바티스타다.   도시의   밤의   지 배자,   마약왕,   휘하   수천   명의   양아치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위 치에   있지.   전열진으로써의   나는   십   년   전에   죽었어.   예인의   일,   아버지의    일,    그리고    너를   만난    일까지.   내게    있어선   청산해야할    과거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야!”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의   친구라면    너는    왜    총을    겨누고    있지?    네가   나의   친구라면   어설프게   적대   세력을   만들어서   나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나를   만나러   왔을   거야.” “…⋯.”


“자,   이야기의   끝을   내자고.   친구.” 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늠좌를    겨누어   그를    바라본다.    차해 준도   지지    않고   내게    맞선다.   어느새    모르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전열진.” “운명이   결국   나를   이렇게    집어삼키는군.   옛   친구,   나는   호세    바티스타 다.   오늘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났으니,   죽기에는   좋은   날이다.” “전열진!” 탕! 각자의   권총에   불이   뿜는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다음   순간,   눈 을   뜰지   뜰   수   없을지는   누가   알까.   해준이   죽었다면,   나는   죽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내게    닥쳐   온    운명에서   달아나는데   성공한   것인가? 아직    그것은    알    수    없다.   좋든    싫든,   이    다음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떠한   모양새로든   이   갑작스레   닥 쳐온   저주   받은   굴레로부터    달려    나가고   싶은   것뿐이다.   오로지   그것   뿐,    그러한   바람만을   가지고,   나는   눈을   감는다.


[Text]   연재소설_3

에레혼을   위하여_이상욱 6. 어느덧    4월도    지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푸릇푸릇한    나뭇잎에    반 사되어    반짝이고    있는   풍경은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또한   선선 하게   부는   바람도   내   기분을   몹시   좋게   했다.   아직은   수도로   가는   길은   한 참   남았지만,   잠시라도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 안이    너무나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내   옆에    짜증나는   수다 쟁이가   있다는   것을   깜빡   했던   것이다. “라빈,   왜   이렇게   늦게   와?   그러다   벌써   해   지겠다.   네   느린   발걸음에   얼 마나   우리가   손해를    봤는지    알기나   해?   밖에서   노숙하는   것은   정말로   싫 다고!” 조금이라도   봄날의    기운을    느끼려고   하면   항상   방해가    들어온다.    이렇 게   카젠   시를   떠나고   나서    보름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사 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못살게    구는   것이    아주   수준급이다.    더군다나   그 녀는   여정    곳곳마다   내    발목을   잡았다.    자존심이   너무나도   세서    정말   쉽 게   돈을   벌   수   있는    부정대결에   결단코   반대를   하는   것이다.   정   그렇다면    자기만   하지   말고   날   내버려두면   될   것을,   남은   또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지…⋯.   진짜   귀찮기   짝이   없다.   떼어   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정말로    독한   마음을    먹고   따돌리려는    시도를   몇   번    해봤지만   기를   쓰고    나를   따 라오기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계속   나를   감시하려는   눈초리 는   정신적으로도   나를   무척   괴롭혔다.    하지만   꿋꿋이   견디며   나는   에레혼과   이   다비도프란   검에   대해   계속   생 각했다.   분명히   에레혼의   세계를   찾으라는   사명을   완수하라는   쪽지와   함 께   다비도프가   놓여   있었다.    확실히    어떤   연결   고리가   존재할   것이다.   특


히나    신비로운    힘을   보여준    다비도프를    볼   때    무언가    거대한    비밀이   숨 겨져   있을   것   같다.   과연   수도에   가면   알아   낼   수   있을까?   나는   확신이   서 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이   잠기던   중   갑자기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너무   아파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앨리스가   바로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앨리스 의   주먹이   내   정수리를   가격했던   것이다. “갑자기   왜   때리는   거야?” 나는   있는   힘껏    짜증난다는   말투로   앨리스에게   따졌다.    앨리스는    한심 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네가    멍하게    있으니까   그렇지.   가는    길에    집중    좀    하라고.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긴   한   거야?” 나는   지도를    펴서   살펴보았다.   음…⋯.   이제    조금   있으면   도시가   하나    보 일   텐데…⋯.    “으음,   저쪽으로   쭉   가면   도시가   나온다   이거지?” 라고   말한   뒤   갑자기   뛰어가는   앨리스.   나는   당황해서   멍하니   쳐다보다 가   “앨리스!   같이   가!”라고   소리치며    뒤따라갔다.   수련을   평소에   한   사람 과   수련   따위   생각도   안    한    사람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벌써   앨리스는    점으로   보일   정도로   저   멀리   앞에   있었다. “어이~   아직도   멀었어?   빨리   좀   오라고!   남자가   그렇게   느려서야   되겠어?” 가녀린    몸에서   나는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 리로   나를   놀려   댔다.   젠장.   이건   혹이   아니라   독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이다.   언젠간   여행하다가   독에   못   이겨   죽을   것이다.   온   힘으로   달린   끝에    헥헥   거리며   겨우   앨리스   옆에   설   수   있었다.    “라빈,   이제야    마을에   도착한    것   같아.    그런데    꽤나    큰    도시인   것    같은 데?” 앨리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꽤나   웅장한   건물들이   여럿 이   내   앞으로   일   자로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안내판을   보


니,   거기에는   ‘이곳은   보르데입니다.   어서   오세요.’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 다.   나는   품   안에   있는   지도를   펼쳐   보았다.   분명히   거기에는   보르데가   표 시되어   있었다.   수도로   가는    길    중에   들려야   하는   도시로   표시된   것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앨리스는   힐끗   지도를   쳐다보고는, “흠,   제대로    오기는   왔구나.    정말    처음에는   잘못    가는    거는    아닌지,    너 만   믿다가는   큰일   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걱정이었다고.” 하고   가볍게   말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앨리스,   그러면   네가   알아서    길을    찾던가   해보라고.   너는   아무런    노력 도   안   하면서   남   의심은   철저히   해요.” 앨리스는    칫,   하며    마을    입구로   뛰어갔다.    한숨   좀    돌리려고    그랬더니    왜    이렇게    급하게    구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마을    입구로    가니    경비병   둘이   앨리스와    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설마   빚쟁 이들이    전단지라도    배포했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그래,   하긴   이런   쬐그만   놈들이   세리아   라드론은   아니���지.   통과!” 응?    세리아    라드론?   그   사람은    누구지?    아무튼    다행히도    빚쟁이들이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그   놈들은   거기 서   빚을   회수할   애들이    많으니    다른   마을에   신경   쓸   여력이   없겠지.   우리 는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번화한   거리를   본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런   번쩍거리는    간판들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불빛들이    화려하게    빛나는    가운데,    광고   전단지는    다닥다닥    온    가로등에    붙여져    있었고,    마법으로    움직이는    모빌이   도시    곳곳을    장식해    놓았다.    앨리스도    나와    같은지    도시의    번쩍이는   풍경을    보며    재잘거리던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뭔가    우리,   촌사람    같다는   느 낌이   너무나도   강한데. 하지만   그   화려한    거리는   사람이   적어서   조용한   분위기였다.    너무나도    위화감이    들어    저절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위를    좀    더   자세히   둘러보


니,   경비병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것이   포착됐다.   어찌된   일이지? “저기요,   지금   이   거리에   무슨   일이   있나요?” 나는   지나가는   경비병   한   명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경비병은   귀찮은   듯 이    짧게    말하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하지만    그걸로    나는   충분히   상황이    파악됐다. “세리아   라드론이란   대도둑   때문이야.   아무튼   난   바쁘니   가마” 아까도   도시   입구에서   경비병이   나에게   세리아   라드론이   아니겠지,   라고    말했다.   무언가   이   도시에   세리아   라드론이란   대도둑이   범행예고장이라도    보낸   모양이다.   여기서   더   이상   있다가는   안   좋은   상황에   얽힐   가능성도   있 기에   다른   가까운   마을이   있나   한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저기요,   저도   경비병에   넣어주면   안돼요?   제가   검술은   어느   정도   하는 데…⋯.” 어디선가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앨리스의    목소리 가    들린   쪽으로   바라보니    앨리스가    경비병   한    명씩    붙잡고    자기가   경비 병을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지,   라는    생각이    들며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얼른   앨리스의    팔을   붙잡고,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따졌다. “뭐하긴,   내가    이래    봬도   검술은    꽤   하잖아?    내   검술로    대도둑을    잡으 면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지   않나   싶어서” 앨리스는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순간    기가   막혔지만,    평생    검 술만   했던   애였으니   아직   세상물정을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이해했다.    그나저나    검술을   꽤   한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헤이스트까지    익힌   그녀니    어느   정도는   뛰어날    수   있다 고   생각했지만   그녀보다는   뛰어난   사람은   여기저기   깔렸을   것이다.   더군 다나   자기   랭킹을   보면   보통   자기   위치는   잘   알   텐데   말이다. “아무튼    경비병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많이    바쁜가    봐.    그    세리 아   라드론이라는   사람이   털려는   곳을   직접   가야   얘기가   통하려나.”


경비병들의   무시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대도둑을   잡을    수    있다 는   확신   속에   나에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대도둑을    잡아.   너    너무    자만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빨리    떠야   될   상황이라고.    그    세리아    라드론이란   사람과는   멀리    떠나야지   편안하게   두   발   뻗고   잘   수   있지,   근처에   도둑이라도   들어봐.   시 끄러운    것은    물론이고,   그   사람하고    연관이라도    되면    골치   아파진단   말 이야.    그리고   네가    경비병을   어떻게    들어가냐?   경비병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는   제대로   된   직업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대도둑을    잡는    시점에서    일손이    많이    필요할 지도   모르지.   이때   한   번    찔러    봐서   임시   경비병이라도   된   다음에   어쩌다 가   대도둑을   잡기라도   하면   우리   인생은   완전   펴는   거야!” 내   설교하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딴죽을   걸지   않고    눈을    반짝 거리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앨리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여관을   잡는    게    좋 을   것   같아.   조금   있으면   밤이라서   방이   꽉   찰   수도   있어.” “응?   나는    어차피   그곳에서   밤    샐   수도   있으니까    너    먼저   가서   여관    잡 고   있어.   아무튼   난   빨리   가야겠다.   나중에   보자.” 그러고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앨리스를    나는    멍 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나    혼자서는   여관방   잡기   어려운데…⋯.   정신을   차 린    뒤    앨리스를   찾아보았지만   앨리스는    벌써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런,   오늘은   노숙을   할    수밖에    없겠군.   그   동안에는   앨리스의   랭킹을   이용 해서   숙박을    해결했다.   그럴    때마다   앨리스는    네   이름으로는   왜    방을   잡 지   않냐고   따졌지만   나는   숙박비를   거의   다   주면서   ‘그런   게   뭔   상관이야.    방만   잡으면   되지.   그   대신   돈은   여기   있어.   그러니   그것   가지고   불평불만    하지    않도록.’이라며    입막음을    하였다.    앨리스는   거의    공짜로    숙박을   하 기에    별로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계속   쳐다보았


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것   같다.    나는    적당히   노숙할    곳을    잡으며    잘    준비를   했다.    역시   한적한    공원의    벤치가   최고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신경   쓸   사람도   없으며   운치도   꽤   괜찮다.   귀뚜라미   소리가   은은 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눈을    감자    그간에    여독이    풀리면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7. 휘황찬란한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빨간색   바탕   위에   노 란색   용이    그려진   커튼이    걸려   있었고,    앞쪽에는   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다.    그는    고뇌에    찬    얼굴로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의자의   팔걸이에    기댔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키가    자그마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 의   눈은   여우처럼   매우   찢어져    있었는데,   그   눈에는   광기   어린   빛이   서려    있었다.   그   사람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    “폐하,   첸   칸자크는   명백히   반역을   저지르는   대역   죄인입니다!   빨리   사 형에   처해야   합니다!” 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사람들   앞에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내가   이러려고    혁명을    일으키고   나라를    세운    것인가?    내   친구    첸,    말    좀   해다오.   그대를   정녕   보내야만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인가?” 아까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창문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   뭉툭한    것이   내    볼을   찌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    감각 이   매우   거슬려서   눈을   떠보니   내   눈앞에는   경비병   한   명이   서   있었다.   그 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벌써   동이    텄는지    훤하게    밝았다.   난   방금까지도    달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당신,   이곳에서   뭐하시오?” 그   경비병은   나를   매우   수상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   것인지는   몰라 도,   나를   의심스럽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아,   저는   잠시   자고   있었는데,   그러면   안   되나요?” 나는   불만이   가득   찬   표정으로   경비병을   쳐다보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세리아   라드론이라는   대도둑이    지금   나타났 단   말이오.   혹시   복면을   쓴   금발의   여자를   못   보셨소?” “제가   어떻게   봤겠어요,   자고    있었는데…⋯.   그리고   저는   이곳에    처음    온    여행자라서   그   사람이   누군지도   여기서   알았다고요.” 내   말에   경비병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세리아    라드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도둑인데,    모르다니…⋯.    당신    매우   수상한데?” “모를   수도    있죠,    경비병   아저씨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저    멀리   구석진   시골에서   왔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    너   같은    애가   그녀와    연관   되어    있지는    않겠지.   그녀는    최 근   삼   년   동안   천    골드    가량의   재산을   훔쳐갔다니까.   그것도   경비가   엄한    곳만   골라서   털어갔어.” 나는   천   골드라는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금액이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계산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일   골드라도   본   적   없는   나 에게는   너무나도   현실감   없는   금액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나타나고    나서   매일    밤   여러    빈민촌    앞으로    음식과    옷가지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는    거야.   정부는   이게    세리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에    대한    꼬투리    하나   잡지    못하고   조사를   끝내고   말았지.” 정말로   대도둑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네.   현실에서   의적    행세라니…⋯.    너무나도   현실감    떨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지만   어 이없기도   했다.   그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   빈민촌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나아졌기라도    한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봐도    천   골드는    매우   큰    금액이기는   하지만    빈민촌을   살릴   금액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 하다.   이것은   그런   행위로    바뀔    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살짝   삐뚤어진    생각을    하다가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차가운    밤공기에    잠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젠장,   그나저나   아까   꿈은   뭔지   모르겠다.   원래   꿈은   항 상   터무니없는    것이긴   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해서   현실과    착각하고   말았 다.   마치   내가   그   왕인   것처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니    경비병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근처에   대도둑의   모습이   나타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무튼   나는   경비 병이   내   앞으로   들락날락하는   꼴이   왠지   거북해서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걷다   보니   인적이   드문    숲이    나왔다.    길조차    나지   않는   것을   봐서는   무척 이나   무서운   동물이라도   사는   곳인   것    같다.    새   소리조차   나지   않는   불길 한   조용함에   등골이   오싹해지기는   했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물론   숙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식재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적이   드문   숲은   좋은    곳이기도    했다.   숲에서   나는   열매를   따거나,   토끼 와   노루   같은   동물들을   사냥하면   바로   그게   식재료가   된다.    숲을    천천히   들어가며    좌우를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앞으로    나아가던    중   무언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땡   하고   조그맣게   종소리가   들렸다.   무슨    상황인지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목에   서늘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 었다.   살짝   밑을   보니   검이   내   목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너,   여기에   뭐   때문에   왔지?”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라고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목소리의   톤이   매우   높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냥   산책하다가   왔는데요,   그나저나…⋯   당,   당신은   누구시죠?” “산책?   이    인적   드문   곳을    산책하러    왔다고?   동물들의    습격이    있을지 도   모르는   곳에?” 어처구니없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약간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인적이   드물어서   산책하기    좋,   좋지   않을까요?   그,    그나저나   이   검    좀    치,   치워주시면   안될까요?” “안   되지!   네   이름을   당장   불러.   참고로   나는   지금   랭킹   네트워크를   접속 할   수   있는   단말기가   내   오른쪽   손목에   장착되어   있어서   바로   네가   거짓말 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   알아두고.   자,   이름을   대   볼까?” 완강하게   나를   협박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솔직하게   불   수   밖에   없었다. “저,   저는   라,   라빈   플래져라고   해요” “라빈   플래져라…⋯.   진짜   있네.   그런데,   이게   뭐야?   9,984,735등?   그러 니까   꼴지에서   3등이라는   얘기네.   하,   너   이   등수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긴    하냐?” 처음   만나는   사람에다가,   칼을   들이대   놓고   이런   질문을   받다니   무언가    어이없기는    했지만,    하나라도    거슬렸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질까봐   곧 이곧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부,   부정승부로   벌어먹기는   하죠,   하하.” “…⋯.” 갑자기   말이   없더니   검이   슥하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로써   나는    목숨은   붙은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쯤, “지금   뭐라   그랬어?   부정승부?” 갑자기    등    뒤에    서있던    여자가    나를   쓰러뜨리고는    내    머리    옆에    바로    칼을   꽂았다.   나는   너무    놀라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눈앞 에는,    금색의    단발이   인상적이었고,    깊은   바다와    같은   큰    눈망울에   하늘 을   찌를   듯한   매우   높은    코가    보였다.   그러나   그   사슴과   같은   눈망울에서 는   엄청난   분노가   서려   있는   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그 리고   불현듯   세리아   라드론이   금발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부정승부라니…⋯   정말로   미친   짓이야,   그건!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사람 이   또   있었다니…⋯   그것도   어린애가,   도대체   왜   그런   걸   하게   된   거야?”


그녀는    분노에   차면서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매 우   당황스러웠다. “그것만이…⋯   어머니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방도니까요…⋯.” 내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뭐라고   말하는    거지…⋯.    하지만   그녀의    분 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모습에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런가…⋯.” 그녀는    매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땅에   깊이    박힌    검을   손쉽게    빼내며    내    옆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나는    온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달을   바라보며    무언가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래 라면   절대   질문하면   안   되는   걸   질문하고   말았다. “저기,   당신   세리아   라드론이죠?” “…⋯.”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녀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며   반문했다.   금발에,   인적이   드문    숲에   있다는   정황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을   바보같이   묻다니…⋯.    차라리    모른    척을   했더라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자학을   하고   말았다. “호호호,   그래    너한테    알려준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겠니?    내가   그   유명한   세리아   라드론,   대도둑인데   말이야.” “참으로   폼   안   나는   대도둑이네요” 나도   모르게   딴죽을   걸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져서   편하 게   말해   버렸다.   그녀는   전혀   대도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   나는   원래   멋진   척   같은   거는   죽어도   못하거든” 그러면서   그녀는   나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   거야?”


“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요    하하.   돌아가시기    전에는    불치병에    걸리 셔서   침대에만   계셨어요.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가셔서    저랑   어머니하고만   살았어요.   어머니께서는   건강이   안   좋으셨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어요.    힘들어하던    저를    항상    북돋아    주셨죠.   어머니 와   함께   얘기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요.   그리고…⋯.”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흐르고   말았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신   지도   어느   정도   됐으니   담담해졌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아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내    눈앞에   아직도    어른거렸다.   눈물 을   삼키며    말을   이어나가지    못한   것을   본    세리아는   아무   말도    없이   일어 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마을로   돌아가,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말고,   네가   지금   어떤   상 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잘   되기를   빈다.   그럼   이만.”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진    세리아.   몸놀림이   너무나도   빨라    떠난    기척 조차   라빈은   느낄   수   없었다.   라빈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   나서   숲   속을   빠 져    나왔다.    마을    한    가운데로    가니,    분수대    옆에    앨리스가   앉아   있었다.    라빈은    모르는    척   지나가려   했지만,    어느새    기척을    눈치   챘는지   앨리스 가   말을   걸었다. “라빈!   그   동안   어디   있었어?   계속   찾으려   다녔잖아!” “네가   나를   왜   찾아?   그리고   멋대로   사라져   버린   게   누군데?” “아무튼!   세리아    라드론이    방금    어느   부잣집을   또    털고    갔대!    어떻게    그런   삼엄한   경비를   뚫을   수가   있지?   그때   내가   있기만   했어도…⋯.” 앨리스는   분한   듯이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나는   어이없는   눈초 리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가    무슨    실력으로   그녀를   잡 는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내가    만난   그    금발의   여자가    세리아   라드론이 라면,   앨리스는   절대로   그녀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라빈은   세리아의   몸 놀림은    앨리스의    몸놀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노련하고,   매우   빨랐 다.    헤이스트를    쓰면   모를까,    노련한   경비병도    못   잡는데    풋내기가   잡는


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8. 다음날   아침,    나는    돈   벌   수단을    알아보기    위해   이   마을을   여기저기    돌 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큰   마을이면   부정승부는   여기저기서   일어 나고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   그런   부정승부를   강력히   통제한다고   선포하 였지만,    막상    그런    부정승부를    하고    있는    장본인들이기에,    코웃음만   나 올   뿐이다.    역시   여관에서    나온   지    별로    지나지   않아    부정승부를   구하는    전단지를   입수하게   되었다.   부정승부를   구하는   것은   주로   술집에서   이루 어지는데,    여기서    무턱대고   달라고    하면   바로    쫓겨날   것이다.    대결   메뉴 를   보여달라고   조용히   귀띔을   해주면   넌지시   술집   주인장이   ‘알겠소’라는    대답과    함께    대결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물론    이    대결은   다   부정승부이 다.   엄연한   불법인데도,   진짜   거의   어느   술집을   가나   대부분   이렇다.   다만    그런   술집은   간판에   빨간색   검과   방패의   무늬를   그려   놓는다.    부정승부   메뉴판을   보던    중   갑자기   옆에   누군가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 다.    나는    또   앨리스인가하고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았는데,    잘   모르 는   흑단발의    여자가   내    메뉴판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당 황스러워서    몸을    뒤로   내뺐다.   그리고    그    여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 었는데,   어디서   익숙한   얼굴이었다.   음…⋯   그런데   무언가   위화감이…⋯. “뭘    남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어.    어제    봤으면서.    아무튼    그    메뉴 판,   부정승부니   뭐니   하는   메뉴판이야?”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제의    기억이    번개처럼    떠올렸 다.   아니   그럼? “후후,   변장   완벽하지?” “글쎄요?   머리   염색한   것   가지고   폼   내는   사람이   대도둑이라는   게   믿겨 지지   않네요.”


“킥킥   그러니?   뭐   그건   그렇고,   여기서도   그딴   걸   찾는   거야?” 내   딴죽에도   세리아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벼운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딴   거라니?   아,   부정승부를   말하는   건가?    “뭐,   그렇죠.   제   등수로   뭐하고   먹고   살겠어요?” “제대로   승부를   해서   등수   올릴   생각은   안   하고?” 그녀의   말에    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   말인즉   나보고   제대로    살 아볼   생각이    있냐는   말인데,    그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하니    그만   웃겼던    것이다. “그게   왜   웃기지?   너는   제대로   사는   것을   비웃는   거야?” 하아,   말    다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    대도둑이라면서   왜   이렇게    남에게    참견인지   모르겠다.    “대도둑이라는   사람이    꽤나    순진하네요.    아무튼    신고하기    전에    빨리    가기나   하셔요.   남   일   신경   쓰지   말고요” “그래,   그러면   나도   한번   해볼까?   그   부정승부라는   것?” “그러시던가요.   아무튼   저는   이만” 그리고    나는   대결할    사람을    고르고    메뉴판을    재빠르게    술집주인에게    갖다주었다.    이제    하루   지나면    브로커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세리아가   계속   나를   쫓아오지   않을까라는   묘한   기대감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자신들의   목적 에   따라   힘차게   걸어가는   행인들과   여유롭게   아래를   내다보며   말을   타고    가는    부유한    귀족들의   모습에    어디를    가나   마을    모습은    다    같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다들    그에    맞게   사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부정승 부를   하면서    하루하루   돈을    벌며   사는    운명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돈   많 은    사람들은    돈을   쓰며   호화스럽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이다.   불평등이니    불합리니   그런   말을   힘주어   낼   필요가   없다. 앨리스가   잡은   여관에   도착하니   마침   앨리스도   막   도착할   때였다.   앨리 스는   여행   중에도   끊임없이   수련하는   대단한   여자애였다.   자기   자신에   대


해   사랑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 었다.   온통   흙먼지투성이에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   속에도   그   맑은   눈동자 를   보면   숭고한   느낌이   든다.   기껏해야   수련생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모습 은   노련한   검사와   같이   재빠르고   다부지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잠재적인    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입을   열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라빈,   뭐하다가   이제   왔어?   돈은   제대로   벌었어?” “너야말로   돈   안   벌고   뭐하냐?” “당연히   나는   뛰어난   검사가   될   거니,   돈   버는   것보다도   수련이   더   중요 하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앨리스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가로저었 다.   적어도   자신    생활비는    벌어야   정상이   아닌가?   하지만   여관방을   잡는    데는    꽤나   유용한   것은    사실이기에    더   이상    그녀에게    말하지    않기로   마 음먹었다.    나는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 제   꾼   꿈은    무엇일까?   무언가   이   검과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신비 로운    검과   꿈이라    그리고    알   수    없는    단어,    에레혼까지   온통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하루   빨리    에레혼을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니 까.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면   뭐하지?   더    이상의   삶의    의미는   없는    것   같 다.    이렇게    허무함에    빠져있던    터에    내    주머니에서    띠리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브로커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   술집에서   받은   마법호출기에서   나 는    소리다.    호출기의   버튼을   누르면    브로커의    메시지가    눈앞에   바로   뜬 다.   메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부정승부는   취소.’ 뭐라고?   취소라니?   이런   경우를   처음   본   나는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웬 만해서는   취소될   리가   없다.   애초에   부정승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루어 지는   것이기에   귀족들은   모든   걸   감안해서   부정승부자를   구한다.   만약   취 소를   한다면   생각했던   것보다도   엄청난   위험이   대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위험이   있길래   취소된   거야…⋯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귀족의   


위험    따위   궁금하지는   않지만    내    돈줄이   끊겼다는    것이    매우    짜증이   났 다.    가만히    있기    너무나도    답답해서    길거리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 다가   경비병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어제    나타나   놓고   오늘    또   나타나다니,   그런    적 은   없었잖아.” “글쎄   말이야.    그래서    또    이렇게    경비병들   고생시키고,    정말이지    운수 도   더럽게   없는   날이구먼.” 또   나타난다고?    무슨    소리지?   나도   모르게    궁금해서   경비병들을    붙잡 고   묻고   말았다. “또   나타난다니?   누가   또   나타난다는   거죠?” “누구긴   누구야,   세리아   라드론이지.” 세리아   라드론?    그녀가   왜    또?    그러다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 고,   경비병들에게   또   물었다. “혹시   세리아   라드론이   퀴벡   백작의   집을   턴다는   예고장을   보냈나요?” 내가   이   말을   한   순간   경비병들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경비병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나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어떻게   알긴요.   경비병들이   가는   방향이   다들   그쪽이잖아요.” “하긴   그렇구나.   그래,   네   말대로   세리아   라드론이   퀴벡   백작의   집에   범 행예고장을   보냈어.   퀴벡   백작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어 제   사건을   듣고는   너무나도   놀랐는지   우리   마을   경비병들은   물론이고   용 병이란    용병은    다   끌어다   모아서    집을    지키려고    그런다고   하던데,   과연    이번에는   잡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젠장,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내   부정승부를   막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도대체    그게    그녀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는   거야?    하긴   애 초에    부잣집을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는    생각조차   이해를   


못하는    마당에,    내가    그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 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내   밥줄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것만은   정 말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그것은    절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씩씩   대며   퀘벡   백작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 질    지   상상도    못한    채   나는    그저   내    감정에    몸을   맡기며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Text]   단편소설

흉기의   발명_김도우 K시에는   기이하고   오싹한   박물관이    하나   있다.   그   박물관의    이름은    흉 기의   발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흉기의    발견은   실제로    사용된   흉 기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사람들을   찔러   죽이거나   혹은   베어서   죽이 거나    뭉개서    죽여   버린   물건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전시된   흉기들은   보 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흉기에게    죽임   당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만들 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하는    정도로    그쳤지만,   간혹가다    겁이   많 은   관객들이   졸도했다.   관람객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은   흉기뿐만이   아 니었다.    만약    길을   가던   삼척동자를    붙잡고    흉기의    발견에   전시된   흉기 의    주인들을    하나하나    말해준다면,    그는    울음과    노오란    오줌을   터뜨릴    것이다.    63명을    전기톱으로    썰어    버린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마’피터    브링거,    48명의    여자를    꼬챙이에    꽂아    버린   ‘인간    정형사’잭    슈월츠,    27 명의   노인의   두개골을   망치로   박살   낸    ‘죄와   벌’라스콜리니코프   등,   그   한    명   한    명의   업적(?)은    너무나   새빨갛고    비린내가    진동하여   감히    입에   담 기가   버거웠다.    FBI   사이코메트리   수사관인   피터   잭슨   씨는   이렇게   말한다. “물건들에게도   기억은   있습니다.   사실   그건   물건의   기억이   아니라   사용 자의   기억이   물건에   묻은   것이라고   표현해야   맞는   거지만.   아무튼   그렇습 니다.   기억이   제일    강렬하게    남은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살인에   사용된   물건입니다.   제   추측이지만   피의자의   기억뿐만이   아 니라,   피해자의   기억도   그   물건에   들러붙어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피터   잭슨   씨의   말을   곱씹어보면,   사람들이   흉기의   발견에서   졸도를   하 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그건   바로   흉기에는   피해자들의   원혼   같은   게    서려    있어서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유령을   보거나    유령의    말을   듣지   


못하므로(혹시나    유령을   보거나    느낄    수   있는    독자가    있다면    가까운   교 회나    절,    혹은    무당집을    찾아가길    바란다)   그    설은    일단   탈락이다.   아프 리카의   저명한    심리학자    트이로프    트문그지    씨는    피터    잭슨    씨의   말을    듣고    ‘물건의지설’이라는   이상한    가설을    세웠는데,    그    방대한    분량의   가 설을   적기에는   내가   할당   받은   지면이   너무나도   부족해   과감히   생략하겠 다.   대충    이름만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뇌가   없는   물건 들이   어떻게   기억을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 문이다!   물건도   의지가   있다!   특히    살인과    관련된   물건의   의지력은   남다 르다!    의지력이    남다른    이유는    아마    살인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겹쳐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흉기의   발견에   진열돼   있는   흉기들은   그   의지가   남다를   것이 다.   그들은    죄다   살인과   관련된    물건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이   원래부터    의지가   없었는지,   아니면   의지도   석유처럼   고갈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 지만,    지금    그들의   의지는    한풀   꺾였다.    왜냐,   지금    그들을   사용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재수종합학원의    어떤    반처럼,   흉기들 은   이제    사람들의   피와    살을   못   느낀다며    깊은   패배감의   수렁    속으로   빠 져들고   있었다.   그때   한   흉기가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   다섯   명을   죽였어.   나보다   더   끔찍한   흉기가   어디   있겠냐?” 이    이름   없는    흉기의   한    마디   때문에    흉기의   발견은    매일   밤    이야기판 이   벌어지게    됐다.   모든   흉기들은    자신이   최흉(最凶)의    흉기라고   주장했 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위하는   흉기들   덕분에   패배감에   찌들었던   흉기의    발견은    어느새    생기를    되찾았다.    흉기들은    매일    밤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이    옛날에   이렇게    훌륭한   흉기였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흉기들은   거짓을   섞어   넣어서 라도   자기   자신을   더   띄우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흉기의   발견에   웬    막대기가   하나   나타났다.   그    막대기 는    제1전시관   한구석에    전시됐는데,   아무도    그   막대기가    누가   사용했는 지,   또   누굴   죽였는지를   몰랐다.   다른   흉기들은   전부   옆에   이   흉기는   누가    사용했으며,    언제    사용됐다는    식의    안내문을    두고    있었는데,   막대기의    안내문은    한    문장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완전범죄에   사용된    흉기.’관 람객이   모두   물러간   밤,   흉기들은   어젯밤처럼   하나둘씩   저마다의   무용담 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로    자기의   위엄을    내세우려고   혀를   쉴    새   없이    놀린다.    신입    막대기는   딱히    할   얘기가    없는지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그 들의   이야기를   감상한다.   수많은   흉기들이   서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 고   있을   때. 제3전시관    한   가운데에   전시된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이    버러러러럭거 리며   기세등등하게   외친다.    “난   63명을   죽였다!   난   63명을   죽였다!   63명이나   죽였다고!   으하하하하!” 이    박물관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흉기는    바로    이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이었다.    그는    이    박물관의    대장격인    흉기다.    흉기의    발견에서   흉 기들의    서열은    간단하다.    사람을    많이    죽이면    서열이    높아진다.    1위는    63명을    죽인    전기톱,    그    다음은    55명을    죽인    도끼,    그    다음은    48명…⋯.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흉기답게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의   기세는   엄청났 다.   가히   혼자서   시동을   걸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흉기들은   이   전기톱   앞에서   입을   다문다.   소리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저렇게    무식한   소리를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버러러러럭!   정말    혼자서   흉기의   발견을   반으로   쪼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은   처음부터    이    박물관의    우두머리는    아 니었다.    그전에는    ‘동전    살인마’안톤    시거의    공기총이    흉기의    발견의   우 두머리였었다.    여든    명이   넘는   사람의    머리에    구멍을    내준   그는   자신의    주인처럼   동전던지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한   번도   동전던지기에   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를   이긴    흉기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


하면    그와    동전던지기를   한   흉기는    이기든    지든    바람구멍이   났다.   지면    졌다는   이유로   공기총이   바람구멍을   냈고,   이기면   이겼다는   이유로   공기 총이    바람구멍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 이    자신만만하게    공기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공기총은    흔쾌히   그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공기총이   동전을   쏘아   올리며   말했다. “앞면   뒷면   중에   골…⋯.”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버럭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총은    반토막이    났다.

날이   밝아서   관장이   박물관의   문을   열   때면   모든   흉기들은   일제히   입을    다문다.   하지만   입을   다문다고   해도   감춰진   살기는   숨길   수   없는   법.   관장 은   자신도   아침에   박물관에   들어설   때   다른   관람객들처럼   흠칫   놀란다고    한다. “흉기들이   갑자기   저에게   날아와서   박히는   기분   나쁜   상상이   불현듯   떠 오르곤   합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요?   공포   영화를    본   후에   혹시나   귀 신이    진짜로   내    앞에    나타날까   봐    상상을    해서    잠에   못    드는    것   말이죠.    그런   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도대체   관장은    왜    이런   살벌한    것들을    전시할까?   관장은    허 허   웃으며   대답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벅찬    단어인가요.    저도    아홉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는데,   녀석이   태어났을   때   꽤   감동을   먹었죠.   그리고   여기   있는   흉 기들은    그    벅찬   생명을    죽이는   데    사용됐죠.    고귀한   무언가를    끝낸   것들 이죠.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가요?   사실    저는    요란한    흉기들을   싫어합니 다.   피터   브링거의   전기톱   같은   거   말이죠.   그런   흉기들은   죽음의   격을   떨 어뜨리는    무식한    것들입니다.    개인적으로    꼭    보고    싶은    흉기가   있는데,    바로    ‘아이스크림    밀실   살인    사건’에    사용된   흉기입니다.    아이스크림.   얼


마나   상징적인   도구입니까!” 그렇게   그는    60분    동안,   아이스크림의    상징성에    대해서    목이    터져라    역설했다. 그렇다,   그는   싸이코다. 그해    겨울,    싸이코    관장은    카네다    지로의    도(⼑刀)에    목이    잘리고    만다.    관장은    박물관    문을    잠그기    전,    전시관을    돌아다니며    흉기들의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그날   관장은   제2전시관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카네다   지 로의   일본도    밑에   있던    존    그릴스의   징    박힌   장갑의   위치가    약간   삐뚤어 진   것이다.    관장은   그    장갑을   관람객들이    만질    수   있도록    다른   흉기들처 럼   투명한    상자   속에    넣지   않고    밖에다    내놨는데,   이따금    관람객들이   만 지고   제멋대로   툭   내팽개칠    때가    있었다.   관장이   장갑   위로   목을   쑥   내밀    때,    갑자기    그    위에    매달려    있던    카네다   지로의    도가    떨어졌다.   날이   잘    선    카네다    지로의   도는   관장의    목을    그대로    내리쳤고.   관장은   즉사하고    말았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皆さん、私は⼈人を殺殺すことを⾒見見ますか?” 녀석이   계속   일본어로   뭐라   뭐라   지껄이자,   전기톱이   버럭   외쳤다. “영어로   해!   이   멍청아!” 그렇다,   흉기들의   공용어도   영어가   된   것이다.   일본도는   쭈뼛   쭈뼛거리 며   말했다. “여러븐.   제가   사란을   주기는   거슬   봐쓰니까…⋯.” 흉기들은   녀석을   비웃는다.   영어도   못하는데   사람을   죽여서   뭐하냐.   깔 깔깔깔…⋯. 카네다    지로의   일본도는    어설픈   발음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들어    댄다.    전기톱이    심통이    났는지    갑자기    버러럭거린다.   그러자    카네다   지 로의   일본도는   입을   다문다.   흉기들이   코웃음   친다.   녀석   쫄았군.


관장이    죽고,   새    관장이    들어왔다.   녀석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놀이공 원에   온    어린아이처럼   박물관    이곳저곳을   펄쩍펄쩍   뛰며    흉기들을   보며    감탄했다.    새로    온   관장은    이전   관장처럼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어물   마 니아다.    대체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짓이겨지는   것을   돈    내고   보러    가는    것일까?    사람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혹시    미래의   연쇄    살인마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박물관    구석구석을   뛰 어다니던   새   관장은   카네다   지로의   도   앞에서   우뚝   멈췄다. “그러니까   이   칼이   이전   관장을   죽인   그   검이란   말이지?” 카네다   지로의   일본도는   웅웅거리며   소리쳤다.   그래   봤자   관장은   못   듣 겠지만. ‘저는   검이   아니무니다!   도이무니다!’ 관장은   칼이   살짝   떨리는   것을   봤다.   그   찰나의   순간,   관장의   두개골   속 에서   한   가지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혹시나   이   칼이   이전   관장의   목을    내리친    것처럼   자신의    목도   내리치는    게    아닐까?   관장은    카네다   지로의    일본도를   창고   깊숙한   곳에   쳐박아   넣었다.   일본도는   밤마다   쟁쟁거리며    울었지만,    아무도    그의   어설픈    일본식   영어를    들어주지   않았다.    다들   자 기   이야기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막대기    옆에는    망치가    하나    있었다.    녀석은    ‘망치꾼’강기준의    도구였 다.   녀석은   어느날   갑자기   막대기한테   말을   걸었다. “너,   중년   남자의   두개골을   까부수는   느낌이   어떤지   알아?” 막대기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할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대기가    묵묵부답이자,   망치는   더   떠들었다.    뭐    새하얀    두개골이   어떻고,   뇌수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막   지껄이는 데,    막대기는    관심이   없었다.    전기톱은   무언가에    또   심통이    났는지   버러 러럭거린다.   그러자   망치는   입을   다문다.


이전   관장이   외국에서   구한   흉기가   드디어   오늘   박물관에   도착했다.   새    관장은    벌벌    떨며   그    흉기가   들어있는    택배    상자를   받아든다.    그는   무서 워서   떠는   것이   아니다.   벅차서   떠는   것이다.   그   전설의   흉기가   나의   손에    들어오게   되다니!   일개   평범한   인간   따위가   감히   잡을   수   있는   흉기가   아 니다.   이   흉기를   잡는   데에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   흉기는   수백   명 을   죽인   끔찍한   것이다.   관장은   조심히   포장을   뜯는다.   상자   속에   뭐가   있 었냐면…⋯. “나는   133명을   죽였어.” 흉기들은   신입의   말에   탄성을   지른다.   전기톱마저   탄성을   내지른다.   어 떻게,    도대체,    저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녀석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말도   안   된다!   녀석은   바로…⋯,   주사기다! 존   캐보키언이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보 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어떻게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내    주고   싶었던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냥   빨리   끝내버리자.   그는   고통에   신음하 는   환자들의   목덜미에   주사기를   꽂았다.   주사기는   환자들의   몸속에   독약 을   밀어   넣었다. “그   주사기가   바로   나야.” 주사기의    말이   끝나자    대부분의    흉기들은    야유를    보냈다.    그게    뭐냐.    그게   살인이냐?    살이    찢겨   나가고    피가    뿜어져    나와야    진짜    살인이지!    그건    가짜    살인이다!   사람을    위한   살인이라니!    그런    건    살인이    아니다!    사람을    해치는   게    살인이지!   저    새끼   저거    그냥   많이    죽이기만   했네!   여 러    흉기들의    질타를   받은   주사기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주사기도   자신 은   살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을   살렸다고   생각 했다.   아마도   자기   주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리라.   그런데   정말로   그   주 사기의   주인이   존   케보키언일까?


바로    그때,   그러니까    흉기들이    주사기를   질타하고    있을   때,    흉기들    사 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뭐?   뼈와   살이   분리되어야   진짜   살인이라고?” 흉기들    사이에서   바늘들이    소리친다.    녀석들은   북조선의    살인마    령운 천이    사용한    흉기다.   령운천의   살인    방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인내 심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수년간    피해자들이    먹는    음식과   물에   바늘 을    조금씩    잘라    넣었다.    바늘은    피해자들의    몸속의    이곳저곳에   상처를    남겼다.    상처들은    염증이    나서    곪아    터져버렸고,    피해자들은    전부   피와    고름을   토하고   죽었다.   대가리가   잘려나간   바늘들은   전부   소리친다.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너희들처럼   단번에   무식 하게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죽임이다!   우리의   살인   방식은   최고다!” 수백   개의   바늘과    다른   흉기들이   한꺼번에   떠드니   그    합쳐진    목소리가    전기톱의   버러러럭-소리를    묻히게    만들었다.   박물관은    금세    ‘과연   어떤    게    진짜    살인인가’라는    주제의    토론이    펼쳐지는    아고라로    변한다.   말이    좋아    토론이지    실상은   욕지거리   판이다.    만약    그    시간에   누군가가   박물 관   밖을   지나간다면   흉기들의   살벌한   살기를   느끼고   오줌을   지릴   정도의    공포감을    느낀    후,   결국    심장마비로   죽을    것이다.   다행히    그때는   모두가    잠드는    시간인    새벽   세    시여서   행인    따위는    없었지만,   불행한    고양이   한    마리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박물관    뒤편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던    고양이는   벽   사이로   흘러나온   흉기들의   살기를   느꼈다.    “묘묘!” 고양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강물로   뛰어들어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다음    날,   그   고양이는   퉁퉁   분    채    물   위로   떠올랐고,   마침    그   위를   날아가던   펠리컨이   그   고양이를   삼켰다.

성인    남자   넷이    택배   상자를    들고   박물관에    나타난다.    남자   넷이    달려


들어서    겨우    드는   이   상자    속에는    엄청나게    압도적인   흉기가   들어있다.    당신들도   ‘시베리아   흑곰’블라디미르   알렉산더를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 이다.    그렇다.    이    상자    속에는    그의    흉기    사슬    꼬챙이가   들어있다.   왼쪽    끝에는    25kg   추가    매달려있고,   오른쪽    끝에는    쇠꼬챙이가    매달려   있는    5m    길이의    사슬.    그    무게가    200kg에    가깝다고    한다.    대체   블라디미르 는   어떤   괴물이길래    이    최악의   흉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   삼국지의   장 비나    관우보다    더한    놈이    분명하리라.    블라디미르는    이    흉기로    73명의    사람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호랑이나    시베리아    불곰들을   때려잡았다고    한다.    녀석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맹수의    영역에    진입한   최초의   사 나이리라. 전기톱은   심기가   불편했다.   자다   일어나보니   갑자기   웬   길쭉한   놈이   철 컹철컹거리며    자신의    옆자리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의    위치가    살짝    옆으로    옮겨졌다.    예전의    전기톱   자리가    박물관   정중앙이었다면,   지금은   그   정중앙에서   약간   옆으로   비켜나간   자 리에   있다.   그의   예전   자리는   지금   사슬   꼬챙이가   차지하고   있다.   화가   난    전기톱이   버러러럭거린다. “넌   누구냐?” 사슬   꼬챙이가   철럭철럭거리며   대답한다. “나는   사슬   꼬챙이다!” 그날   밤,   박물관은   철럭과   버러럭소리로   가득   찼다.   난   63명을   죽였어.    난   73명을   죽였어.   넌    둘이잖아.   내가   왜   둘이야.    꼬챙이랑   추,   비겁하게    둘이서    살인을    했군.   살인은    원래   일대일로    일어나는   일이야,    넌   반칙을    했어.   난    하나야.   아니야,   넌    둘이야.    넌   가짜야.   아니야,    난   진짜야.   둘의    다툼은    이제    말싸움에서   신체적인    접촉으로   이어진다.    전기톱은   시동을    건다.   사슬   꼬챙이는   몸을    빙빙    돌리기   시작한다.   두   금속이   맞부딪힌다.    아아,    파열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딱딱한    두    쇠붙이가   부딪혀서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흉기들은   귀를   틀어막는다.   


둘이    싸우거나   말거나,    막대기는    잠을    잤다.    그는    흉기들의    이야기에    별   흥미가   없는   것   같다.    그에게   살인이란   것은   뭔가   다른   세계의   일이나    완전   허구의   일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관장은   깜짝    놀란다.    전기톱의   이가    다    나갔고,    사슬    꼬 챙이가   정확하게   삼등분   됐다.    관장은    두   흉기를   붙잡고   엉하고   운다.   둘 은    이    박물관의   얼굴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    얼굴들이   지금   산산조각이    났다.    이   둘이    없으면    대체    사람들은    무슨   흉기를    보러    올   것인가!   물로    가득    찬   관장의    눈에   133명은    죽인   주사기가    들어온다.   저런    좀만한   것 을   보러   올   사람들이   있을까!   관장은   두   흉기를   창고에   처넣었다.   그리고    박물관   문을   닫았다. 오늘은   휴관일입니다. 이가   빠진   전기톱과   허리가   나간   사슬   꼬챙이가   창고에서도   싸운다.   그 러나   상처를   입은   둘은   예전   같지가   않다. “나느   예수,   세   며이나   주겨따.” “나는   칠십,   세   명이나,   죽였다.” 먼저    창고에   와    있던   카네다    지로의   일본도는    이   한심한    둘을   보고    코 웃음을   쳤다.    “애송이들이무니다.” 당신들은   박물관의   창고에   뭐가   있는지   아는가?   평범한   가정집의   창고 에는    잡동사니나    낡고   허름하지만    버리기    아까운    물건    따위가   있다.   박 물관의    창고에도    그런   물건이    있긴   있다.    하지만.   박물관의    창고에는   엄 청난    것들이    숨겨져   있다.   너무나    귀중해서    감히    전시하지   못할   보물들    말이다.    흉기의    발견의    창고도    마찬가지다.    이    창고에는    엄청나게   위험 하고   강력한   녀석이   들어   있다.   텍사스   연쇄살인마의   전기톱이나   시베리 아   연쇄살인마의   사슬   꼬챙이도    녀석    앞에서   숨도   감히   못   쉴   것이다.   녀


석은    수백    년   동안    살인을   해왔다.    녀석이   쿨럭거리며    말한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많이    늙은   것    같다.   어떤    천둥벌거숭이들이   감히   내    앞에서   싸 우는공? 쿨럭쿨럭. 관장이    먼지를   들이켰는지,    기침을    한다.    녀석의    몸에는    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   관장은   감격한다.   이   녀석을   직접   손으로   잡는   날이   오다니.    아아,   느껴진다!   이슬람의   암살자   가문   자르딘    가의    손길이!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희생자들의   목줄을   잘라내는   이   날카로운   칼날!   지금은    무뎌졌지만.    아름답도다!   관장은    자르딘   가의    칼을    박물관    정중앙에   배 치한다.    수백    년   동안    수백   명을    죽인   무기.    이    정도면   흉기의    발견에   정 중앙에    있어도    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전    관장은    이런    멋진    검을   왜    창고에다가   처박아   뒀을까?

한편,   지옥불   한가운데   떨어진   이전   관장은   새   관장이   박물관   정중앙에 다가   자르딘   가의   칼을   배치하는   것을   보고   울부짖었다. “이   멍청한   녀석아!   그건   조심히   다뤄야   하는   거라고!”

천   년   묵은   칼에   녹이   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전   관장은   자르딘   가의    칼을    애지중지했고,    진공   상태에    보존해서    녹이    스는    속도를   느리게   만 들었다.    그러나    무식한   새    관장은   그것도    모르는   채   그걸    박물관   정중앙 에다가    떡    하니    놓아뒀다.    게다가    멍청하게도    관람객들이    만지는   것을    허용했다.   자르딘   가의   칼은    말년에    개고생을   했다.   수백   명의   손이   그의    몸을   만져   댔다.   자르딘   가의   칼은   살기를   내뿜으려   했지만,   늙은   것이   살 기를    내뿜어봤자    그게   위협이나   되겠는가.    자르딘    가의    칼은   날을   세워 서   자신을   만지려는   손을   베려고   했지만,   녹   때문에   날이   죽은   지   수백   년


이   지났다.   급기야   늙은   칼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살려   줘!”

“여긴   밀실이야.   소리쳐도   소용없을걸.” 이곳은   어딘지   모를   밀실이다.   여자는   묶여   있고…⋯,   남자는   아이스크림 을    들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보니   꽤   꽁꽁    얼렸나   보다.   남자는   여자한테   말한다.   난   완전   범죄를   꿈꾸고   있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   있지,   왜냐하면   넌   이   완전   범죄의   피해자가   돼 야   하니까.   사이코   새끼.    남자는    여자한테   다가간다.   꽁꽁   얼린   아이스크 림으로    힘껏    머리를    내리친다.    아이스크림의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남 자가   막대기에   조금   남겨진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막대기는    잠시    꿈을    꿨다.    그때의    기억이    아주    조금    막대기한테    남아    있나   보다.   막대기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한다.   자신과   상 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것들아,   조용히   해!   골이   울린다!   쿨럭쿨럭!” 다른   흉기들이   분주히    자기자랑을   늘어놓을   때,   늙은   검이    골골거리며    외친다.   긴긴   세월   동안   수백   명을   도륙한   그   칼도   세월은   이길   수   없었나    보다.    사람들의    손때와    공기를    견디기에는    그가    너무    늙었다.   흉기들이    그의   미약한   외침에   모두   숙연해진다.   늙은   검은   기침을   계속한다.   그에게    살기   따윈   없어진   지   오래다.   이제   그의   몸은   그의   기침마저도   받아   줄   수    없었나   보다.   계속   기침을    하던    그는,   갑자기   부서졌다.   순식간에   가루가    되고   만   것이다.   아마   다음   날   아침,   관장은   또   박물관을   휴관할   것이다.

오늘은   휴관일입니다. 휴관일임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박물관   앞에   모여들었다.   우


두머리인    것   같은    자가    흉기의   발견을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   목청이   가히   텍사스   전기톱의   버럭   거리는   소리랑   비슷한   것   같다.   여러 분,   저   악마   같은   박물관을    보십시오.   저기   관장은    뭐가    좋다며   사람   죽인    물건을   늘어놓고,   또   저기   관람객은   뭐가   좋다며   사람   죽인   물건을   실실   웃 으며   봅니까?   여러분   저   박물관은   악마   씌인   곳입니다.    당장    불태워   없애 버려야   합니다!   관장이   박물관    안에서    달려    나온다.    당신들   뭐하는   거야!    오오,   저   눈빛을   보십시오,   정말   사탄의   눈빛이   아닙니까.   종교단체였나   보 다.   관장은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오자   종교단체는   물러갔다.   

관장은    빨리   박물관의    새   무기를    구해야   했다.    자르딘    가의   칼이나    텍 사스    전기톱이나    시베리아의    사슬    꼬챙이보다    더한    무기    말이다.   그런    무기를   대체    어디서    구할까?   롱기누스의   창이라도   구해야   하는가?   종교 단체가    더    갈갈히    날뛰겠지.    어렵다.    관람객들에게    흥미와    공포를   불어 넣을    수   있는,    그런    흉기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그때   관장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여보세요?” 전화기   건너의   사내는   이전   관장과   흉기   거래를   하던   사람이다.   사내는    이번에   새   물건이   들어왔다며,    관심    있으면   혹시   한   번   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관장은   하늘에서   동아줄이   하나   내려온   것만   같았다. 다음   날,   관장은   말뚝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   말뚝은   중세시절,   ‘검은    마귀’라고   불린   맑스   퀴르발   남작이   농노들을   처형시킬   때   사용한   말뚝이 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연쇄살인마의   흉기라고   할   수   있나?   관장은   말뚝 을   정중앙에다가   놓는다. 말뚝이    박물관   정중앙에서    울부짖는다.    어제까지   그곳을    차지하고    있 던    자르딘    가의   할배검과   나이는    비슷하지만    말뚝이    훨씬   더   튼튼했다.    굵어서   그런가?   말뚝은   녹   하나   없이   여전히   깨끗했다.   지금도   현역   흉기


로   활동할   수   있을   수준인   것   같다.   무리   없이   갈비뼈를   뚫고   심장   하나를    박살   낼만할   것   같다.    “내게   심장을   줘!   팔딱팔딱   뛰는   심장   말이야!   으으!   그   맛을   잊지   못하 겠다!” 말뚝이   심장의   맛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벌떡벌떡   뛰고   쫄깃한   게   말이 야,    아주    그냥    캬,    지금까지    내가    맛본   생물    중에서    정말   인간   심장만한    게    없더라구.    구석에    있던    흉기    하나가    반론을    제기한다.   리히텐슈타인 의   얼음송곳이다. “찔린   심장이   팔딱팔딱   뛴다구?   말도   안   돼.   심장은   찔리면   바로   멈춰.” 말뚝이   딱딱거리며   소리친다. “애송아,   네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나는   수백    수천의    사람의   심장 을   느껴본   말뚝이란   말이다!” 그러자   송곳이   틱틱   대며   소리쳤다. “애송이라니.   내가   너보단   사람   심장을   많이   꿰뚫었을   거다!” 그렇게   두    흉기는    ‘흉기에    찔린   심장은   뛰는가,   안    뛰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밤새   펼쳤다.   둘의   토론(사실   토론이라기보다는   말싸움이었다)은    동이   틀    무렵이   돼서도    끝나지   않았다.    이제    얼마   후면    관장이   들이닥칠    시간이다.    둘은    마침내   이   소모적인    말싸움을    끝내고    자신의   주장을   직 접적으로   증명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관장의   심장을   찔러보자!

한   시간   후,   관장은   원인모를   오싹함을   느끼며   박물관에   들어왔다.   그는    박물관의   새얼굴인    말뚝을   살피러   간다.   어라.   말뚝이    우뚝   서    있었다.   관 장은   말뚝에게   다가가다   말고   우뚝   멈춘다.   끔찍한   상상이   관장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말뚝이   살짝    움직였다.    관장은    기겁을   하며   도망친다.   바 로   그때,   누군가가   관장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의   심장에   얼음송곳을   찔러    넣었다.   얼음송곳이   비명을   지른다.   마치   방금   첫   경험을   한   여성처럼.


“아아!   이것이   바로   심장이로구나!” 그렇다.    그는   이제껏    사람을    한   번도    찌르지   못한    송곳이었다.    그곳에 는,    그러니까    그    거짓된    박물관에서    진짜    흉기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   이제   셋이구나.    아무튼   관장   한   명이   목   잘려    죽고,   다른   관장은   얼음 송곳에    찔려    죽자,   흉기의    발견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관람객들 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자   자의식과잉   상태의   흉기들은   번번이   관 람객들에게   달려들어   상해사고를   일으켰다.   피   맛을   보기   시작하자   입만    살았던    가짜    흉기들이   진짜    흉기가   된    것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 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구름처럼    모인    관람객들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고가    끊이질    않자,    K시    시청은    그곳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흉기의    발견에    있던    흉기들은   결국    한데   모아    다    소각됐다.   태워지는    와중에   막 대기는    여전히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꿈을    꿨다.    자신이   단단하고   달 달했던    무언가를    달고   있을    시절의   기억이    꿈으로   되살아났다.    얼마   후,    남은   것이라곤   재뿐이었다.


[Text]   단편소설

소나기_닭의비행 “와아아아아앙” 작은   물체가   괴성을    지르며   이부자리로   파고든다.   이불    틈으로    보이는    찰랑거리는   까만   머리카락,   작고    토실한   팔.   딸   열음이다.   모처럼   늦잠을    자려는    주말    아침을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힘껏   이불을   당겨    몸을   말고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아빠-   아빠-   아빠아아.” 열음이가   승현과   벽   사이의   작은   틈을   파고들면서   칭얼거린다. “나가자아아아아—―.” 조그만    몸체에    어찌    그리    힘은    좋은지.    몸으로    기어오르는    통에    어떤    자세로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제발   살려줘,   어제는   정말   늦게   들어왔단   말 이야.    “그러게   누가   3차까지   가래?” 선희가   팔자   좋게   비웃으며   침대의   넓은   공간을   만끽하고   있다. “주중에   자꾸   늦게   들어오니까   열음이가   아빠가   그리워서   그러지.   그치?” 자비심   없는    여자.   이렇게   소란해도   다시    잠들   수   있는   아내가    부럽다.    승현도   열음이를   껴안고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피곤한데도   다시   잠들   수 가   없다. “어디   가고   싶어?”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투투투툭.   무거운   빗방울이   유리창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오네.” 창을   조금   열어보니    축축한   흙냄새가   훅   하고   밀려들어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모양이다.   이거   계속   올   수도   있겠는데? “아빠아아-.” 간단하게   씻고   양치질을   하는   데   아이가   계속   매달린다. “어이르가고시허(어디를   가고   싶어)?” 양치도   아직   안   끝났는데   자꾸만   잡아끈다. “어제   지영이가…⋯    어제   놀이터에서    봤는데.   근데    개가    되게   커…⋯    근데    가기로   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리지만   대충   준비를   마치고   열음이를   따라   나선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잘   써야   해.   옷도   따뜻하게   입고.” “아유,   아빠가   더   극성이다.   비   좀   맞을   수도   있지.” 언제    일어났는지   선희가    뒤에서    참견이다.   열음이는    장화를    신겨달라 고   다시   칭얼거린다. “안   돼,   감기   걸리면.” 나가려고   한   곳이   어디인지   열음이는   그냥   걷기만   한다.   찰방거리며   골 목을   걷는   게   좋은   모양이다.    “지영이랑   놀기로   했어?” “응,   근데   이거…⋯” 개미들이   빗방울   안   닿는   곳으로   줄지어   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물   냄새가   온   몸을   감싼다.   빗방울   소리가   커튼처럼   모든   소리를   차 단하고    멀리    차   지나가는    소리만   아득하게    들린다.   멍하니   빈    골목을   바 라보고   있다.   후둑   후두둑.   빗방울이   굵어진다. “열음아…⋯?   열음아!” 발   밑에서   웅크리고   놀고   있던   딸이   사라졌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열음아…⋯!” 못보고   지나치려던   골목   구석에서   열음이의   딸기   무늬   우산이   보였다. “열음아…⋯!”


“아빠?   고양이다.   데려가면   안   돼?” 아이가    작은   새끼    고양이한테   정신이    팔려   있다.    승현은    딸을   번쩍    안 아   들고   집으로   걸어간다. “안   돼.” 아이의   단발머리   아래로   빗방울이   송글송글   굴러   떨어진다. * “아빠,   송이는?” “외갓집엔   우리끼리   갈   거야.   송이는   좀   더   자게   두자.” 어린   승현은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송이   집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는데…⋯” 외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승현이는   할머니가   부쳐주는   전도,   가만 히   쥐어주는   용돈도   좋았지만   엄마는   외갓집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애를   언제까지   집에만   둘   거냐?” “엄만,   승현이가   몸이   약해서    그래.    요즘   홈스쿨링도   많이   하고…⋯    조금 만   더   좋아지면.” “쯧.   그렇게   싸고만   도니까   애가   허약하지.   외동이라   말수도   적고.” “엄마!” 할머니는    늘    승현을    외동이라    불렀다.    엄마가    외동딸인    건    맞지만    난    송이가   있는데.   엄마도   할머니도   송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엄마…⋯   송이한테   전화   해볼까?   잘   있는지?” 승현이   소곤거리며    엄마한테    묻는다.   송이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 지   걱정도   안   되는지   엄마는   “있다가.”라며   짧게   대답한다. “엄마…⋯   이거   송이   거   싸   갈까?” 송이가    좋아하는   닭강정을    보니   생각이    나서    물었는데    그만    목소리가    켜져   버렸다.


“거,   되도   않는   로봇이나   붙여   놓으니까   애가   분별을   못하잖니.   당장   치 워라.” “승현아,   밥   다   먹었으면   잠깐   방에   들어가   있어.” 방에   들어가   있어도    간간히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송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딴   로봇을    놀이    친구로    두다니   젊은   애들은    너무   생각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외동이라    쓸쓸한   것   보다는    옆에   하나    있는   게   낫지   않느냐고   했다.    옆에   둔   뒤로   승현이   부쩍   책임감도   생기고    활동적이    되었다고,    조만간   학교에    보내겠지만    그    전까진    혼자   있는   것 보다    낫다고    했다.    아빠는    부딪히기는    껄끄러운지,    간간히    거들기만   했 다.    승현은    2박3일   동안    혼자   밥을   챙겨먹고    혼자   자야    하는   다섯    살   누 이동생   송이가   걱정됐다. ** “꺄아아악” 고슴도치   머리를   한   열음이가   집안을   뛰어다닌다. “이리   와,   머리   말려야지!” 선희가   화장실에서    소리를    지르지만   개념치   않는다.   승현은    어린    딸을    번쩍   잡아다   화장실로   간다.   드라이기의   미지근한   바람을   싫어하는   열음 이는   여전히   발버둥이다. “이러다   감기   걸린다구.” “느긋한   엄마도   이제야   걱정을   하는구나.” “응,   다음    주   바빠.    유치원에   못    가면   집에    혼자    두기도   그렇고    곤란하 단   말이야.” 보송하게   마른   여자아이는   자유의   몸이   되자   기쁜   듯이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다. “열음이는   날   닮아서   튼튼해.   허약한   우리   신랑이랑은   다르지.”


선희가   쯧쯧   하는   표정으로   승현을   바라본다. “아홉   살까지   학교를   안   갔다니   말이   돼?   나   같으면   개구리도   잡아먹을    나이인데   말이야.” “웃기지   마,   도시에   아파트에서만   자란   주제에.” “어머,   그럼   교외에서   요양하던   병약    소년은   본   게   많아서    그렇게    겁이    많은   거야?   개구리도   무서워,   귀뚜라미도   무서워,   물도   무서워…⋯.”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적인   거야.” “맞다,   원래는   로봇도   싫어하더니…⋯   혹시   무서워하는   거야?” “에이,   정말.” 끊임없이    괴롭히는    건    엄마나    딸이나    똑같구나.    승현은    맥주를    한    캔    따고   TV   앞에   앉는다.   그제야   선희도   얇은   이불을   들고   꼬물꼬물   옆에   와 서   붙는다. “재미있는   거   있어?” “있기는,   다   네가   주중에   본   거야.” “흐응.” 열음이도   제    엄마    옆으로   파고든다.   어제    먹은    술도   안   깼는데   내가    왜    또   술을   먹고    있지?   라고   승현이    생각하는   순간   선희가   맥주를   홀짝홀짝    훔쳐먹고   있다. * “와아아아악” 해도   환하게   뜨지    않았는데   콩알   만한   괴물이   어린    승현의    이부자리를    덮친다.    송이는    늘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하얀   원피스    잠옷을   펄럭 이며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승현에게    놀아달라고    졸랐다.   부모님은   송이 가    졸라도    바쁘다면서   놀아주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면   송이는    늘   승현에게   칭얼거렸다.   


“왜…⋯” 승현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잠옷   바람으로   송이를   따라   문간을   나가 려고   하자   아빠가   붙잡는다. “그래도   옷은   갈아입고   나가야지.   멀리   가지   말고   요   앞에서만   놀아라.” 아빠가   대충   승현과   송이의   옷을   입히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송이가   있으니까   낫지?” “응,    승현이가    많이    건강해진   것    같아.    활동량이    많으니까    잠도    더    푹    자고.” “그래,   좀   비싸긴   해도   데려오길   잘했어.” 엄마가   다시   잠을   청한다. “엄마!   송이가   메뚜기   잡았어.” 어린   승현이   소리치며   집으로   들어온다. “응…⋯   승현이도   잡았니?” “응.” 승현은    죽은   매미를    들어올린다.    채집장에서   파닥거리는    메뚜기와    달 리   매미는   죽어서   이미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현관에   거기   잘   보관해두자.   응?   송이랑   같이   가서   손   씻고   와.” ‘여보,   출근하기   전에   저것   좀   치워주면   안   돼?’ 엄마가   아빠한테   소근거린다. “엄마,   그거   치우면   안   돼!” 송이가   불안한지   손   씻으러   가면서   소리친다. ** “있잖아,   문   좀   잘   닫고   다녀.” “응?”


“아까   집에   와서   보니까   현관문   열려   있던데?” “미안,   장   본   거   들고   오면서   깜빡했나   보다.” 승현은   종종   뭔가를   빼먹어서   핀잔을   듣곤   했다.    “그래도   이   동네는   별로   위험할   일은   없겠지?” “그야   관리가   잘되는   편이니까.   열음이가   혹시   혼자서   나갈까봐   그러지.” “에이,   혼자   그렇게   나가진   않아.   106   손이라도   잡고   나가지.” “106이   뭐야,   106이.   남들처럼   그냥   아줌마라고   부르던지.” 승현은   로봇을   여전히   모델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마치   개를   개라고   부 르듯이.    다른    집에   하나씩    있는   가정용    로봇도    아이가   생기고    손이   많이    부족해지자   겨우   들여놨다.    “아줌마는   아니잖아.”승현이   투덜거린다. “그야   뭣도   아니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대하면   될걸.” “배   안   고파?” “뭐   해먹지?   아까   뭐   사왔어?” “순두부.” “아줌마도   순두부   잘하는데.” “난   106이   한   음식은   싫어.   내가   할게,   좀   쉬어.” “후아암…⋯   좀   편하게   살아도   될걸.   열음아!   그만   자고   엄마랑   놀자!” 선희가   달려가자   열음이   꺄앗   소리를   내며   뛰어다닌다. * “엄마,   나   내년에   학교   가?” 어린   승현이   설거지하는   엄마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왜?   빨리   가고   싶어?” “아니,   그냥.   근데   나   학교   가면   송이도   가?” “송이?   송이는…⋯   학교   안   가지.   송이는   어리잖아.”


“근데   송이는   맨날   다섯   살이잖아.   그럼   언제   가?” “…⋯.” 엄마는   물을   더   세게   틀었는지   소리가   잘   안   들���는   모양이다. “송이는   언제   학교   가?” “나중에.    그러니까    승현이가    먼저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가    동생한테    가르쳐줘야지.” “응.” “마루에   가서   책   읽고   있어.” “응.” 승현은   마루바닥에    엎드려서    교과서   화면을   띄웠다.   마당에    매미    소리 가   요란하다. “아아,   그러지   마.” 송이가   달라붙자   승현이   조용히   송이를   뿌리친다. “오빠   공부하잖아.   너도   공부해.   저거   책   읽어.” 승현은   탁자   밑에   떨어진   동화책을   가리킨다. “다   읽었어.” “그럼   저거.” “저것도   다   외웠어.” “오빠가   송이   읽으라고   동화책   많이   다운받아   놨잖아.” “다   봤어.” “흠…⋯.” 승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달리   송이를   따돌릴   만한   게   없다. “그럼   오빠랑   같이   이거   문제   풀자.   나눗셈이   뭐냐면…⋯.” 승현이   가만히   이마를   찡그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엄마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생각에   빠졌다.   로봇과   사람의    구분을    얼마


나   명확하게   가르치는   게    좋을까.    놀이   친구   용이라면   너무   딱   자르지   않 는    게    좋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종관계를    너무    일찍   인식하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친정어머니처럼   로봇과   함께    아예   기르지를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처음   송이를   데려왔을   때   다섯   살이라고   했다.   그   땐    승현이가    여섯    살이었으니까.    이제    우리    집에서    지낸다고,    네   여동생이 라고   했을   때   승현이는   별   스스럼없이   좋아했다.   잘못한   걸까. “승현이   오늘   문제는   다   풀었어?” 엄마가   손을   닦으며   마루로   나간다.   송이가   노트를   만지고   있고   승현은    그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다   풀었니?   송이한테   동화책   읽어주는구나?” 엄마는   머리가   길어졌다고,   주말에   미용실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엄마,   송이가   문제   다   풀었어.” “응?” “어.   송이가   심심하다고   해서   내가   설명해줬는데…⋯.” 엄마는    노트를   들여다봤다.    오늘   게    아니라   일주일    뒤    분량까지   다    풀 어져   있었다. “응…⋯   송이가   계속   풀어서   여기까지…⋯.” 아이들은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엄마가   잠시   말 이   없었다. “엄마,   근데    송이가   나보다    나눗셈을    잘해.   난    한   달이나    걸렸는데.    난    공부   잘   못하잖아.” 승현은   말을   끊었다.   어쩐지   엄마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 “잘   좀   챙기지   그랬어.”


“뭘?” “내   오리고기.” “내…⋯?!   어이구,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거   네가   직접   챙기지.” 선희가   핀잔을   하며   불에   프라이팬을   얹는다. “니가   다   챙겼다길래…⋯.”승현은   말을   흐린다. “조리기구를   챙겼다고   했지.” “없잖아,   구워먹을   게.” “이거라도   먹자.” 선희가   야채들을   꺼내어   팬에   굽는다.   배는   출출한데   야채   타는   소리가    헛헛하다. “열음아,   밥   먹자!”승현이   데운   밥을   옮겨   담으며   딸을   불렀다. “열음아,   니네    아빠가   채식주의자다?    몰랐지?”선희는    구운    당근과    아 스파라거스와   감자와   브로콜리를   접시에   잔뜩   쌓아   놓는다. “소금이라도   치자.    나   도    닦는   거    같아.”승현이    야채를    베어   먹으며    우 물거린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선희가   텐트   안에   누워서   묻는다. “여기   좋지?”바깥   정리를   대충   한   승현이   입구에   주저앉는다. “내가    어디    가까운    데    놀러갈    데   없느냐고   하니까    병구    알지?    병구가    여기   자기   부모님   땅인데   가깝고   자기도   가끔   놀러   온다구…⋯.” “병구가   이름이야?” “아니,   별명인데.   이름은…⋯   낯설어.” “열음이   멀리   안   갔지?” “응,   보여.” “작아도   개울이   가까이   있고,    사람도    북적이지   않고.   날씨   따뜻하면    자 주   올만   하겠다.” 선희가    텐트   바닥에    뒹굴   거리며    말한다.   저녁을    먹고    나니   마음은    헛


헛해도    배는    그럭저럭   불렀다.    적당한   온기를    품은   바람이    불었다.   텐트    옆으로는    언덕이    넓게   펼쳐져    있고   멀찍이    키    작은   나무들이    있었다.   승 현도   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누우면   잠들   것   같다.   아직   지형을   탐방    중인   아이도   지켜봐야   하고. “열음이   보여?” “응.   개울   쪽으론   안   갔어.” “있잖아…⋯   열음이   파마시켜볼까?   응?” 선희가   꿈지럭거리며   기어와서   승현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묻는다. “그러든지.” “어?   웬일이야?   넌   단발머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니야…⋯.” “왜,   열음이   어릴   때부터…⋯.” “…⋯그냥   그게   제일   자연스럽지   않나?   원래   어린   여자애들은?” “풉.   촌스러.” 선희의   웃음이   무릎을   타고   전해져   온다. “지금도   보여?” “응,   개미집이라도   찾았나보다.   이러다   땅   파고   들어가겠네.” “데리고   올까?   여기   샤워할   데도   없는데.” “내버려   둬.   물티슈   있잖아.” “그래.” 선희가   잠이   들었는지   한동안   조용하다. “바람이   부니까   좋다…⋯.” 승현이   혼잣말을   한다. “나도   좋다…⋯   풀   냄새도   나고.   시간이   멈춘   거   같아.” 선희가   아직   잠들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닌데   자주    놀러   나올걸.   진작…⋯   우리    열음이    있었


을   때.   우리   원래   열음이.” 선희가   중얼거린다. “…⋯됐어.” 승현이   말을   끊고   일어선다. “열음아,   열음아!   이제   씻고   옷   갈아입자!” “어   아빠,   잠깐만.” 선희의   머리가   텐트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 “내   메시지   봤어?” “응,   무슨   소리야?” “요즘   문이   자꾸   열려   있어서   좀   그렇다   그랬는데.   오늘은   집에   들어   왔 더니…⋯.” 선희가    현관을   열고    집을    보여준다.   식탁    옆에도,   침대    옆에도    바닥에    녹물이   묻어   있다. “열음이는?” “일단   106이랑   나가   있으라고   했어.   차에   있을   거야.” “어디   수도   공사했나?   물이   새?” “나도   몰라,   일단   관리실에   연락했는데.” 선희는   아직   퇴근하고   옷도   못   갈아입어   피곤해   보인다. “근데   이거…⋯   발자국   같지?” 승현이   확신이   없는   듯이   말한다. “자국은   뭉개졌어도   맞네,   꼬마   발자국   같네요.” 관리인이   말한다. “이   집   딸내미   거   아니에요?   신발   신고   집안에   들어왔나   보네.”


“무슨   소리에요.    열음이는    내가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리고    아침에    나 갈   때는   없었다구요.” 선희는   관리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아까   점심   때   이   집   꼬마를   내가   봤는데,   뭘.” “다른   아이를   잘못   보신   거겠죠.” “아니,   그   단발머리에   하얀   원피스.   뒷모습만   봐도   알지.” “우리   열음이   파마했어요.   그리고   유치원엔   남색   바지   입고   갔다구요.” 선희는    찜찜하다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집안을    청소했다.   바닥    말 고도   조금씩   녹물이   묻은   곳은   있었지만   우선은   이   정도까지만. “유치원에도   전화해봤는데   내내   같이   있었대.” 승현이    열음이를    데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106은    승현을    어려워하는 지   두   발짝   뒤에서   멀찌감치   따라   들어왔다. “간밤에    비가    많이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파이프에서    녹물이    샐    만한    집은   아니잖아.” “진짜   누가   들어왔나?”선희가   묻는다. “도둑도   아니고   열음이만한   어린   애가?” “집에   어떻게   들어왔지?   아침에   나갈   때   분명   잠궜는데.” “없어진   건   없는   거   같은데.” “응,   나도.   경찰은?”선희가   불안한   듯   열음이를   꼭   안고   있다.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야.   우리   집에   카메라   설치할까?” “그런   거   얼마나   하지?” * “오빠아아아아.” “아이   송이야,   오빠가   지금   자잖아.   있다가   놀아줄게.”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찬   공기가    확    닿았다.   어린   승현은   더    깊이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어스름하다.    송이가   꼬물거 리며    강아지처럼    달라붙는다.   한    이십   분이나    더   잤을까,    송이가   칭얼거 리는   소리에   결국   승현은   잠이   깬다. “오빠가   잘   때   깨우지   말라고   그랬잖아.” 승현은   점잖게   송이를   꾸짖는다.    “비와.   나가자.” “아직   엄마   아빠도   안   일어났잖아.   좀   이따가   나가자.” “어어어~   아빠가   못   나가게   해.” “그야   비가   오니까   그렇지.   비가   그치면   나가자.” 또   얼마나   지났지?   이제는   이른   아침이지만   밖에   환하다. “비   안   와.” 송이가   포기하지   않고   달라붙어   있다. “그래,   그래.” 눈곱도    떼지   않은    승현과   송이가    잠바를   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누가    깰까    싶어    송이가   조용히   현관문을    닫는다.    젖은    나무껍질이   밟혀   발밑 이   눅눅하다. “어디까지   갈   건데?” 신나게   뛰어나가는   송이를   따라   승현이도   얼른   쫓아간다.   아직   잠이   덜    깨어   하품이   나온다. “송이야,   천천히   가.   글로   가면   신발   젖잖아.” 송이가   길에서   벗어나자   승현이   잔소리를   한다.   신발에   진흙   묻혀   가면    엄마가   잔소리할건데.   공기가   아직   차가워서   코가   쎄하다. “에취.” 승현은   코를   문질문질하며   걷는다. 송이를   따라   걷다   보니   평소   잘   오지   않는   오솔길로   한참을   왔다.   다   아


는    길이지만    아빠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너무   멀리    나온    것    같아서   기분 이   썩   편하지는   않다.   분주하던   송이가   나무   둥치에   앉았다. “좋아?   나오니까?” “응.”송이가   끄덕거린다.    또르르비가   그친   지   오래인데도   나무는   아직   젖었는지,   나뭇잎에   있던   물방울 이   송이의   까만   단발머리로   굴러   떨어진다. “머리가   젖잖아.” 승현이   송이의   머리를   턴다.   송이는   강아지처럼   까만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괜찮아.” 벌레들도   다   비를   피했는지   조용하다.   가끔   나무가   흔들리면   투두둑   물 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좋다.” 승현도   바위에   물을   털어내며   걸어앉는다. 집에서   나온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승현도   이제   그저   잊어버리고    논다.    손에    쥔    달팽이가   움직이자   깜짝    놀라    떨어트렸다.    송이가   다가오자   소 리를   지른다. “송이야,   오지   마!” 달팽이를    밟을까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엄지    마디    만하게    제법   큰    놈 이   이제는   집   밖으로   더듬이를   내밀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또   잡아줄게.” 송이가   같이   쪼그리고   앉는다.   송이는   양손에   작은   달팽이를   하나씩   쥐 었다. “아니야,   이게   제일   커.   이건   장군이야.   뿌슝뿌슝.” “공격.   뿌슝.”


송이도   맞은    편에서   가만히    달팽이들을   내려놓는다.    젖은    낙엽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면서   기어가는   속도로   봐서   달팽이들이   만나기는   요원하다. 투두둑다시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한두    방울이   아니었다.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른,   얼른!” 송이가   빨리   따라오지   못하자   승현이   발을   동동   구른다.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비를   피하러   뛰어가는   중이었다.   빗줄기가   머리카락과   얇은   잠바 를   흠뻑   적셨다.   승현은   송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이제   몇   미터   남지   않 은   오두막을   향해   뛰었다. “아빠가   비올   때   나가지   말랬는데.” 승현이   아직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말했다.   간신히   들어오긴   했는데   몸 이   흠뻑   젖어   걱정이었다.   송이는   생쥐처럼   젖어   몸을   떨고   있었다. “추워…⋯.”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   같았다.   오두막은   동네   어르신들이   산길을   올 라가기    전에    잠시   채비를   하고    쉬어가는    곳이었다.    둘러봐도   몸을   말릴    만한   변변한   도구   같은   건   없었다.    “호…⋯” 승현이    송이를   꼭    껴안았다.    아무래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    산    초입 이라고    해도    집에서는    좀    떨어져    있었다.    송이의    숨소리에선   쇳소리가    났다.   마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오빠가   잠깐   밖에   좀   보고   올게.” 아까보다는   빗줄기가   많이   가늘어진    것    같았는데   딱히   그칠    기미는    보 이지   않았다.   승현은   집에까지   얼마나   뛰어야   할지   가늠해보았다.   어차피    젖은   거,   비를    가려주는    큰    나무들    아래로   달려가면   어찌어찌    될   것   같기 도   했다.   이마에서   약간   열기가   느껴졌다.   승현도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송이야,   뛸   수   있겠어?” 송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바를   머리에   뒤집어쓰자.   오빠만    따라서   얼른   뛰어.   집에   가서    따뜻 한   물로   씻자.   알았지?” “응.” “얼른   얼른!” 승현이   소리치지만   송이가   빨리   뛰어오질   못한다.   큰   나무   밑에서   잠깐    숨을   돌려보지만,   송이는   몸이   안   좋은지   빨리   뛰질   못한다. “송이야,   못   뛰겠어?” 눈이    빨개져   울    것   같은    얼굴로   송이가    쳐다본다.    여전히   숨에선    쇳소 리가   난다. “오빠가   업어줄게.   조금만   가자,   거의   다   왔어.” 승현은   자신의   잠바까지   벗어   송이를   감싸고   송이를   업는다.   몸이   약해    늘   보호만   받았던   승현은   송이를   업어본   적이   없어   서툴렀다.    콜록콜록송이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이   송이를   타고   승현이의   옷을   적셨 다.   비가   많이   약해졌는데도    물방울은    계속   흘렀다.   마치   송이의   몸이   스 폰지처럼   물을   내어놓는   것   같았다. 집   앞에선   부모가   아이들이   걱정되어   찾고   있었다.   간신히   현관에   들어 가   송이를    내려놓자   승현의    이마   위로    주룩    빗물이   흘렀다.    갈색   녹물이 었다.    송이를    엎고   있던    등에도,   송이를    덮어주었던   잠바에도    온통   갈색    물이   들어   있었다. “됐다,   무사히   왔으니까   됐다.” 엄마는   크게    놀란   듯이   승현을   꼭    안았다.   언제   나갔는지,   어디까지    갔 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엄마,   송이가…⋯.”


승현은   걱정되어   송이를   돌아보았다.   많이   아픈지   이제   눈도   감고   있었 다.   몸   마디마디   갈색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   엄마는   쓰러지려는   승현을    안고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이   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 “출근   해야지.” “오늘   팀장님   휴가이야.” “그래서?” “이십   분만   더   자자.   아침   안   먹어도   돼.   너는?” “난   외부   미팅   있지롱.   회의   끝나고   회사   들어가기로   했어.”선희가   모처 럼   여유를   부린다. “열음이는?” “열음이는   있다가   내가   깨울게.   오늘   하룬   유치원   늦게   보내도   되겠지.” “여기    있는데?   벌써    깼나    봐.”승현이    잠은    포기하고    이불을    뒤적거린 다.   좀   아까   뭔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온   것   같은데. “잡았다!”일어난   승현이   이불   채로   번쩍   들어올린다. “꺄악---!” 선희가    이제껏   들어본    적   없이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불에    싸인    그것은    열음이가    아니었다.    선희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도망갔다.   안방    문간에   비명    소리를   듣고   온    열음이가   서    있었다. “열음아,   보지   마!” 선희는   황급히   열음이의    눈을   가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승현은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까만    단발머리,    하얀   원피스,   얼룩덜룩한   살갗.   머 리는   때가   진득하게   껴   있었다.   피부는…⋯   손질이   안   된   낡은   표면.   군데군 데    피부가    떨어져   나간   데다가    녹슨    철가루가    이불에까지   떨어졌다.   쇳


소리가   들리는   목소리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오빠…⋯.” 승현은   주저앉았다. “송이…⋯?” * “…⋯   나도   마음이   안   좋아.” 멀리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잠을    너무    많이    자서인지    아직도    귀가    멍했다.   몇   시인지   모르지만    해가    방   안에까지   깊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 린    승현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바닥이    마루에    닿는   느낌이   낯 설었다.   한참   동안을   잠만   잔   것   같았다.   목덜미는   땀으로   축축했다. “…⋯이제   많이   건강해졌다   싶었는데.” 엄마가   전화하는   소리다.   언제나   반쪽   밖에   없는   대화는   알아듣기   힘들 었다.   게다가   전화   할    때는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싫다.   승현은   가만히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옆에   있는   작은   방문을   열었다.   송이가   자고   있으 면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침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 갔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빈    침대에   이불마저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아 무도   쓰지   않는   침대처럼. “그래,   완전히   망가졌어.   응…⋯   생활방수는    된다고   했는데   AS받으러    가 져가니까   완전   모른   척   하더라고.    응응…⋯   물에   그렇게   흠뻑   적시는   건   생 활방수가   아니라고,   소비자   과실이라고.”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늘   집안을   뛰어다니던   송이의   소리가   나지   않았 다.   날이   건조한지   마루바닥이   가슬가슬했다.    “그렇게   물이   새는   게   어디   있어,   마감이   불량인   거   같아.   응…⋯   응,   그러 니깐.   배상   신청은    해뒀는데,   응,   별로   기대는   안    해.   …⋯   거기선   보상판매   


이야기나   하는데,   새로   들여서   뭐하겠어.   그냥   이   참에   없애려고.” 승현은   거실로   걸어   나갔다.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응…⋯   승현이도   이제   나으면   학교   보내야지.   병원에서   며칠   밤   샜어,   응 응…⋯    애    아빠는   병원에서    바로   출근하고.    아주   큰일    날   뻔했어.    그래,   승 현이   괜찮아지면    언제   한번    보자.   다른    아이들이랑   노는   것도    좀   익숙해 지고   해야지.   외동이라서…⋯.” “엄마…⋯.” 승현이   가만히   엄마   등에   이마를   기댄다. “어,   승현아!   이제   좀   괜찮아?   전화   끊자,   나중에   응응.   애가   깼어.” 엄마가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어때?”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열이   있는지   본다. “…⋯배고파…⋯.” 엄마가   승현을   꼭   껴안는다. “일주일   동안   죽도   제대로   못   먹더니   이제   다   나았구나.” 엄마가   볼을   비비고   다시   꽈악   껴안는다. ** “에이,   누가   제대로   처리를   안   했네.” 폐기물   수거   업체   사람이다. “근데   이건   어디서   난   거에요?   내가   이   일을   이십   년을   했는데   이런   건   별 로   못   봤어.   홀쭉이   영감   말로   이런   건   한   삼십   년은   된   거라던데,   진짜요?” “네…⋯   그럴   거예요.” 승현이   대답한다. “이게    난데없이    집에서    나왔다는    게    맞아요?   참,    별일이네.    아는    거 요?” “어릴   때   집에   있던   거예요.   엄마가   버렸다고   했는데.”


“제대로   폐기    절차를   안    밟았네.   뭐,    삼십   년    전이라면    규정도   없고    했 으니까.   지금   이러면   벌금이   제법   나가.   녹슨   거   보니까   건질   부품도   하나    없어서   그냥   일반   쓰레기로   버렸나   보네.” “네…⋯.” 승현은    송이가   이렇게    작았나    싶었다.   송이는,    내가   알던    송이는    심심 한   걸   못   견디고,   늘   깡총거리고   뛰어다녔는데. “이거   봐요,   여기   메모리.    메모리를    완전히   초기화하지   않으면    이럴    수 가    있어요.    충전을   따로    안   했다고    해도   뭐냐,    요즘    무선   충전도    많이   있 거든.    오래된    매립지라고    해도    가끔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니까.   궁합이    맞는   무선   충전기랑   가까이   있다가   이렇게   오작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럽디다.   나야   이런   건   TV에서나   봤지,   원.” “집을   어떻게   찾았을까요…⋯?” “기계들은   기계들끼리   통한다고   하더라고.   영   딱하다    싶으면    네트워크 가   정보도   알려주고   하는   경우가   있대.   좀   기분이   그렇지?” 내가   알던   송이는   몰캉한   뺨에   보드라운   손바닥을   가졌는데.   관절을   구 부리면   쇳소리가   나는   이런   고물이랑은   다르다.   피부가   조각조각   떨어지 고   만지기만   해도   손가락에    녹이    묻는   이런   물건이랑은   다르다.   추해,   승 현은   생각했다. ** 선희는   말이   없었다.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오늘은   별   일   없었어?” “별   일   없지.” 승현이   말을   붙여   보아도   대답이   짧다.   열음이도   분위기를   아는지   조용 히   밥만   퍼먹고   있었다. “열음아,   물도   마셔야지.”


여전히   조용하다.    그날   이후로   어쩐지   집이    예전   같지   않다.   승현은    놀 랐던    선희를    안심시키고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완전히    폐기했다고   확인 하겠냐고   했지만   선희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   죽은   로봇   따위   보고   싶지   않아. 106이    조용히   빈    물잔을    채웠다.   승현은    원래    로봇이   나서는    것을    좋 아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좋은    심정이다.    열음이는    그날   이후로    어쩐지   풀이   죽어   조르지도   않는다.    “잠깐,   빵   사러   나가자.” 그릇을   치우다   선희가   이야기한다. “빵?   지금   늦어서   맛있는   건   다   떨어졌을   텐데.” “잠깐   나랑   나가.” 선희가   눈치   없는   승현을   잡아끈다. “열음아,   아빠   엄마   잠깐만   나갔다   올게.” 승현이   현관에서   소리친다. “어.” “역시   시나몬   롤은   다   떨어졌네.” 승현이   허전한   빵   봉투를   쥐면서   말한다. “있잖아…⋯   열음이가   생일에   받은   빨간   원피스가   마음에   드나   봐.” 선희가   말을   꺼낸다. “그래?   한참   고민했는데   다행이네.” “자기    건    처음이니까.    며칠    전에    머리    묶어주는데    그러더라고.    나중 에…⋯   나중에   자기   꼭…⋯   그    원피스   입혀서   폐기해달라고.   기억도   꼭   다   지 워달라고…⋯.   부품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태워줄   수   있냐고.” 승현이   발걸음을   멈춘다.   선희가   고개를   숙이고   떨고   있다. “…⋯열음이가…⋯?”


“다…⋯   아나    봐.   모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싸서    키웠는데…⋯.”선희가    작 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날…⋯   본   거지?” “응,   몇   초   보지도   못했는데.   원래   알고   있었나   봐…⋯   애들은   정말.” 승현은    선희를   껴안았다.    선희는    얼굴을    들어    다시    승현을    쳐다봤다.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건   아닌   거   같아.   나   이렇게는   나를   속이고는   못살겠어.   이건   열음이 가   아니잖아.”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집을    다섯   번    가 고도   남을   만한   길을. “있잖아.” 선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필요해,   새   이름이.” 멀리서   취객이   전봇대   밑에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현은   취하지   않았 고,   그   말을   또박또박   들었다. ** 현아,   라고   했다.   현아는   새로운   이름에   잘   적응했다. “열음,   아니   현아   신발은   챙겼어?” 아직도   가끔   헛갈리는   건   승현이었다.   가끔   잘못   불러도   현아는   대수롭 지   않게   반응했다.   오늘은   놀이공원을   가기로   했다.   몇   달   전에   새로   개장 한   곳이었다.    “난   놀이기구   무서운데.”승현이   투덜거렸다. “현아가   가보고   싶다잖아.”선희가   말을   자른다. 이제   열음이랑   갔던   곳,   열음이한테   입혔던   옷은   차츰   지워   나가려고   한 다.   그렇게   쥐고    있는    건   열음이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도,   제대로   보내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열음이의    무덤에도    찾아가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현아가   일곱   살쯤    되면.   늦어도   열   살쯤   되면   몸도   바꿔주어야   할   텐 데.   애들은   금방   큰다지만   그래도   바디는   제대로   된   걸   사주고   싶었다. “우리   이렇게   놀러   다녀도   돼?   이번   달에   많이   쓴   것   같은데.” “그렇게   아꼈다   어디다   쓰려고?   가끔인데   이   정도도   못해?” “어우,   현아   앞으로   들어갈   돈이   아직   한창인데.” 승현이   궁시렁   거리며    현관문을   닫는다.   서두른다고   나왔는데    벌써    이 른   아침은   지나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은   사람이   많을   것   같다.


[Text]   단편소설

Toadstool   Apocalypse_배상현 소가    밭을   갈고    있었다.    어른은   소의    등짝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어른 의   낌새를    눈치   챈    소는    더욱   열심히    밭을   갈았지만   결국    채찍에   얻어맞 았다.   소는   구슬프게   울었다.    하늘은    맑은   히은   색이었고   갈고   있는   밭의    흙은   검었다.   아이들은   검은   밭   주변을   뛰어   다녔다.    가끔씩    아이들이    무릎에    달라붙어    옛날이야기를    졸라대면    어른들은    귀찮다는    듯,    하지만   속으론   은근히    즐기며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조금 씩    풀어놓았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색에    관한   것이었다.    검은   색과   히은    색,    두   가지   색과   전혀   다른   ‘색’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아 이들은    들었다.    아이들에게   그   말을    전해준    어른들도    정작   그   색이라는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들도    자신이   아이일   때   마찬가지로,   어른에게   들은    내용일    뿐이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물이    흐르듯,    나무가    자라듯   이어져 왔다. “나무   둥치는    검고,    나무   이파리는    조금    덜   검어.””그럼    물은?””흐르는    물은   검고   내리는   물은   히지.””하늘도   마찬가지겠네?””당연하지.   낮의   하 늘은   히고,   밤의   하늘은   검거든.””머리카락은   검고   피부는   히어.””우리   피 부는   검고   소가죽은   조금   히어.” 색이    궁금했던   아이들은    검은   것과    히은   것을    하나하나    말했다.   저    두    가지   색이   아닌   것이   있다면    그것이   색일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그걸로   만 족하지   못했다.   검은   색과    히은    색이   반반씩   섞인   듯한   것도   있었지만   그 게    색인지는    애매했다.   주위    어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유난히   오래,    마흔다섯    해나    살았던   어떤   할머니는    그것은    색이    아니라고   말했다.   검


은   것과   히은   것은   정확히는   색이   아니라고.   검은   것과   히은   것이   섞인   것 도   아닌,   두   가지   색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고    말이다.   할머니   자신도   직접   색을   본   적은   없지만,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검거나    히지   않은   것.   그것이   아이들이   생 각하는   색이었다.   아이들은   색이    있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에,   색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그   크기를   마음대로   부풀려나갔다. 어른들은    아이들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마을에서    벌써    몇    년   째    아 이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색에    매료된   아이들이    태어난   후   마을에서   태어난   변변한   것이라곤   마음대로   흘레붙어   나온   송 아지와,   어딘가   모자라거나   많은   기형아뿐이었다.   태어난   기형아는   얼마    살지   못했다.   마을에   정상적인   아이들은   아홉뿐이었다. 다른   마을과의   교류가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꼼꼼히   뜯어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   생김새가   부자연스럽게   닮아   있는   경우는    흔했다.    그나마   실낱    같이    교류해   오던    이웃마을도,   사라진    지   적어도    5 년은   넘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점점    나무와   덤불로    막히고   숲이    마을을    둘러쌌다.    마을은   숲    한가운데   파묻혀    있었다.   그    모습은   내려앉 은   포자에서    발아한   버섯처럼    뜬금없었다.   몇    십   년   전에는    마을이   훨씬    더   컸었다고    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 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렸을    당시에도   이미,    어른들은    더    많은   사람이   있었던    과거를    회상했다는    것도.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덩달아   마을도   쪼그라들었다.   오래전에   태어난   것들은   점점    늙어가고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았다.    마을은    늙어갔다.    늙어가는   사 람은   자신이   늙는   것을   알고   있고,   늙지   않은   사람은   주변이   늙는   것을   예 민하게   알아챈다. §


“우리   이   마을을   떠나자.””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들은    어쩌고.””여기에    있어    봤자    미래는   없어.””나가   봤자    미래는    없어.””어차피    그럴   바에,   나 가는    게    낫잖아.””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    때문에    그래?””어른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거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그럴   바에   마을    밖에서    이것저것    보다가    죽겠어.””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   어쩌면   우리 는   낳을   수   있을지도   몰라.””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이는   듬성듬성   돋아난   머리를   긁적였다.   들어   올린   팔   사이로   부스럼 에서   떨어진   각질이   포자처럼   날렸다.   아이들은   마을을   버리기로   했다.    늦은   밤   아이들이   몰래   움막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밖에는   어느새   배웅    나온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   주민이    몇    줌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비밀은    없었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탈출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의    목에    귀한    돌칼을   걸어주 고,    더러는    집에    몇    벌    없는    가죽옷을    쥐어주었다.    아이들은   부담감   반,    민망함    반으로    그것들을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받아야   했다.    촌장이   소를   몇   마리   쥐어주겠노라   말했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 다.    아직    힘이   약한    아이들이   제대로    소를   다룰    수    있을   리    없었다.   도망 만   친다면    다행이고,   자칫하면    지금까지   당한    울분을   갚으려   할    수도   있 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딘가에    정착하고    살아갈    생각이    없었다.   소는    정착생활에서만   비로소   필요하다.   소는   아이들에게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당초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출발했다.   처음   생각보다   무 거운   짐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발걸음도   따라서   무거워졌다.   다섯   아이 들의   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어른들은   다시   평소   일과로   돌아갔다.   네    명의   아이들은    마을에   남았다.    별   기대    받지    못하는   마을의    마지막   종자 들이었다.   마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눈이   녹듯,   조용히   사그라질   것임을    어른들도   알고   있었다.   소는   다시   밭을   갈았다.   누군가   별   이유   없이   소의    히은색   엉덩이를   걷어찼다.   소는   더   열심히   팔을   놀렸다.


“근데   이제    우리    어디로   가?””딱히    고를   필요    있어?   얼마나    오래    산다 고.””그건   그래.   그냥    적당히   떠돌다   때   되면   죽으면   되잖아?””잠깐,   얘들 아.””왜?””그럼    우리,    도시에    가면    어떨까?””도시?””언젠가    들었는데   도 시   쪽엔   아무도   안   산데.””그    얘긴   나도   들었어,   도시라는   데서   큰   버섯이    핀    다음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다면서.””그런    델    왜    가려고    그래?””그   얘 기   나도   들었는데   버섯    포자에    잘못   맞으면   뼈도   못   추린댔어.   이야기   제 대로    들은   거    맞아?””너희,    색   보고    싶지   않아?””갑자기    색   얘기가    왜   나 오냐.””색이    가장    먼저   사라진    곳이니까,    어쩌면    가장    먼저   색이   돌아왔 을지도   몰라.””그거야   니   생각이지.” 아이들은    도시라는   곳으로    가    보기로   한다.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다.    많이    갈라지고    바스러졌지만,    아직도    곳곳에    단단한    길이    많다.   어른들 은   단단한    길이   보일    때마다   멀리하라고    일렀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도 시가   나온다고   어른들에게   몇   번이고   들어왔던   것이다.   아이들은   걸으며    각자    자신들이    들었던   도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도시에   가 면   위험하다고,   어른들은   도시에    가면    안   되는   이유들을   계속   말해   왔다.    그   말이   오히려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어른은   도시    아래에는    복잡한    동굴이    있어서,    한번   빠지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어른은    땅    위에는    돌덩이   천지인데,   원래는    그것들이    굉장히    높게   쌓여   있어서    자주    굴러    떨어진다고   했다.    한   어른은    그리고,   도시의    중심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다고   했다.    그   구덩이는   먼   옛날   버섯이   피어난   흔적이었다.   아주   거대한   버섯이었 다.    버섯은    모든   양분을    빨아들여서,   주위의    부드러운   것은    뭉개졌고   단 단한   것은   삭아   버렸다.   버섯은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얼마   뒤   버섯에서    포자가   내렸다.   포자는   독성을    띠고   있었고,   바람에   쉽게   날렸다.   대부분


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죽었고    남아   있는    사람도   점점   줄었다.    이   이야기 를    아이들은    꽤    자주    들었다.   창세신화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큰    버섯이면    버섯이   자란   구덩이마저    커다랄까.    아이들은    도시를   본   적 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도시의   모습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그   크기 를   마음대로   부풀려나갔다.    § 숲은    깊었다.   빽빽한    나무    때문에   햇빛이    바닥까지   오지    않았다.    땅은    항상    젖어    있었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과    가지들은    모두   조금씩   썩어    가고    있었다.    눅눅한   공기에서는    항상   썩은    내가   났다.    살아있는   숲에서 만    나는    냄새였다.   냄새는    약간   달착지근해서,    아이들은   그    냄새가   금방    마음에   들었다.   마을에서는   나지   않는   냄새였다.    숲   속은   빨리   어두워졌다.   발밑이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은   주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밑으로    모였다.   큰    나무일수록    주변에   다른    나무가   없어서    공간이    더    넓었다.   아이들은    나무   둥치    아래에    잠잘   준비를    하면서도   머 릿속으로는   도시의   모습을   상상했다.   모닥불은   붉게   타올랐다.   아이들은    히은   색   불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하루   종일   걸었기   때문에   금방   골아   떨 어졌다.   코도   골지   않고   자는   아이들은   죽은   것처럼   보였다. 가지고    온   식량을    축내기만   하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아이들은    간간 히   사냥을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을   주웠다.   사냥에   익숙한   아이는   없었지 만,   반대로   한   번도   사냥해   보지   못한   아이도   없었다.   사냥의   성과는   대부 분    시원찮았지만,    어느   날은    운이   좋았다.    가죽   무릿매의    회전으로   날린    돌에   커다란   쥐가   한   마리    잡힌   날이었다.   쓰러진   쥐의   등은   아이들의   무 릎께   높이에   있었다.   “만약   빗맞았으면   우리가   다쳤을지도   몰라.”어느   아 이가   말했다.   그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너무   커서   조리하기도   마


땅치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뭇가지를   깎아   쥐의   몸을   관통시켰다.   모닥불    위에서   고기가   익는   동안    아이    두   명은   나뭇가지를   들고   서   있어야   했다.    팔이   아파질   때쯤   교대해가며   겨우   고기를   다   익힐   수   있었다. “배부르다.   건강하다는   게    이런    걸까?””건강?””건강이라는    게    무슨    뜻 인데?””몰라.   떠나는   날   엄마가   나보고    항상    건강   하랬어.””난   첨   듣는   말 인데.””나도    처음    들어봐.    살아    있다는    말하곤    다른    말이야?””비슷한   거    같아.    넌    직접    들었잖아.    어때?””모르겠어.””잘    살아    있으라는    말    아닐 까?””그럴   수도    있겠다.””근데   그냥    사는   거랑    잘   사는    거랑   달라?””오래    살라는   말이겠지.””누구보다   오래?” 몇   밤이    흘렀다.   길은   중간   중간에    끊겨   있어서,   아이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몇    번이나   헤매야    했다.   한번    지나갔던    숲을   다시    기억하는   아이는    없었다.   이제는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원래   마 을을   나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