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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몽니


‖ 목차 006   •   [Special_1]   작가   인터뷰 016   •   [Special_2]   작품   연표 019   •   [Text]   장편연재   미첼라이아의   용병들   외전1_이고은 028   •   [Toon]   구망(久望)_한시훈 046   •   [Image]   by   이고은 047   •   [Image]   by   희령 050   •   [Column]   김의성의   예술   나누기 054   •   [Column]   정세랑의   말랑몰랑 057   •   [Review]   책   소개 060   •   [Review]   부엉이   소녀   욜란드_라키난 062   •   [Review]   7인의   집행관_라키난 064   •   [Review]   표백_라키난


마감일에 인사드립니다. 편집장 송한별입니다. 이번 겨울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멀쩡한 사람을 만나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무기력증이 도진 건 물론이고 총체적 멘탈 붕괴를 보이고 있는 분들도 참 많았죠.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긴 하지만 저도, 그리고 텍스 툰도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혹독한 겨울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젠 완연한 봄이니까 정신을 차려야겠죠. 이번 텍스툰 표지를 보고 놀라신 분들이 많았을 것으로 압니다. 2012년 3 월호, 그러니까 정확히 1년 전 9호에 이은 두 번째 작가 특집 호입니다. 이번 에는 장르문학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오신 홍정훈 작가님을 모셔보았습니 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사진 촬영까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이 자리를 빌어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는 지 모릅니다. 덧붙여서. 창작집단 몽니는 지난 단편선집 [올드림]에 이어 두 번째 단행본 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텍스툰을 봐오신 분들이라면 익숙할 이름 인 김승완 작가의 [야맹증] 시리즈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야맹증]은 올해 상반기를 목표로 종이책과 함께 전자책, 그리고 앱북까지 제작할 예정입니 다. 부디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만한 책 으로 만들고 있어요. 하나만 더하고 이 고통의 시간을 끝내도록 하죠. 창작집단 몽니는 지난번 에 이어 제2회 케이크 스퀘어 행사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케이크 스퀘어는 5 월 4일로 예정되어 있는데요, 이 자리에서 [올드림]과 [야맹증], 그리고 새로 운 작품들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뵐 예정입니다. 사실 제1회 행사에서 쏠쏠한 재미를 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요. 웃는 낯으로 가서 웃는 낯으로 돌아오게 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마찬가지이 길 바라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텍스툰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ditor’s Page


[Special_0] 들어가는 말

작가에 대하여 한국 장르문학계에서 작가 홍정 훈의 위치는 상당히 독보적이다. 1999년 [비상하는 매]로 대여점 시 장에 데뷔한 홍정훈은 2013년 2월 현재까지 15년 동안 공식적으로 85 권이나 되는 소설을 출간했다. 이는 1년에 5권 이상을 출간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회전 주기가 빠른 대여점 시장에서 한 작가가 두세 달에 한 권씩 책을 출간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역으로 한 명의 작가가 10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새로 운 작품을 출간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홍정훈 작품은 대체로 ‘전투 장면 이 멋지고 스타일이 좋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격투기에 대한 작가의 관 심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다. 작품에 따라 작품의 분위기가 가 볍고 무거운 차이는 있지만 주인공 이 싸우는 전투 장면이 상당히 자주, 또 극적으로 그려진다. 초기작부터 계속해서 발견되는 이런 모습은 홍 정훈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어 서 전투 장면만큼은 국내 작가 중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반 대로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소위 문학성이 있다고 평가 받는 다른 작 가들과 흔히 비교되기도 한다. 홍정훈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초

기에는 저작권 인식이 희박해 홍정 훈을 포함한 다수의 작가들이 ‘위자 드오브더코스트(Wizard of the Coast)’사가 보유하고 있는 TRPG 시스템인 ‘던전앤드래곤(Dungeon &Dragon, D&D)’의 설정과 세계관 을 무단으로 사용했다. 홍정훈은 본 인의 작품 [더 로그]를 개작하는 중 에 [더 로그]와 [비상하는 매]가 D&D의 설정을 무단으로 도용하지 않았냐는 네티즌의 지적을 듣고 직 접 위자드오브더코스트사에 문의한 결과 ‘지금까지 설정을 도용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나 이제 부터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답변을 얻는다. 이 일은 대여점 시 장 전체에 저작권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장기적으로 더 이 상 무단 도용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2013년 2월 현재 홍정훈 은 대여점 소설과 라이트노블을 집 필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자책 유료 연재 및 네이버 웹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홍정훈은 굉장히 활발하게 다 방면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 는 작가로, 새로운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젊은 정신’을 말하는 홍정 훈 작가의 이야기를 준비해보았다.


[Special_1] 작가 인터뷰

홍정훈의 세계 작가님을 뵙고 있습니다 텍스툰: 홍정훈 작가님을 뵙고 있 습니다. 작년에 책을 15권이나 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 게 작업하셨나요? 홍정훈: 필 받으면 그냥 식음을 전 폐하고 글을 쓰니까요. 그 전에 잉여력을 많이 모았죠. 텍: [아더왕과 각탁의 기사]는 완 결까지 다 쓰신 다음에 출간하 신 걸로 알고 있는데. 홍: 이런 거 말 해도 되나 모르겠 는데, 기본적으로 대여점용이 랑 서점판매용은 투입하는 에 너지를 달리 해요. 원래 [각탁 의 기사]는 출판사와 서점판매 용으로 계약해서 각 잡고 공들 여서 쓰고 있었는데, 시장 상황 이 나빠졌어요. 출판사 쪽에서 서점판매용으로는 못 낼 것 같 고, 대여점용으로 책을 내겠다 고 말을 바꿔가지고. 서점판매 용으로 5권 생각하고 있던 게 7 권으로 늘어난 게 그것 때문이 에요. 그런 식으로 힘을 들이는 거나 투입하는 에너지를 달리 하고 일정을 맞춰서 쓰고 있는 데, 그렇게 해야지 먹고 살죠 전업 작가로. (웃음)

텍: 원고가 쌓였다 나오게 된 게 원래 서점판매용으로 생각하 고 계셨기 때문인가요? 홍: 네 그렇죠. 서점판매용으로 생 각하면 아무래도 원고에 공을 많이 들여요. 되게 고심해서 쓰 다가 마음에 안 들면 전체 내 용을 다 갈아 엎어버리고 다시 쓰고. 그렇게 하는 거였는데, 시장도 너무 죽어가지고. 서점 시장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종 이책 시장이 너무 죽은 것 같 아요. 텍: 최근에는 ‘네이버 웹소설’에 새 연재를 시작하셨잖아요? 그 건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홍: 제가 ‘북큐브’에 [마왕전생 RED] 유료연재를 시작했는데, 종이책으로 보고 싶다는 이야 기가 되게 많았어요. 리플이나 메일이나 메신저나. ‘이렇게 종 이성애자들이 많구나, 역시 어 쩔 수 없나’ 하고 출판사를 알 아보고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출판사들이 유료연재 되는 작 품이라 난색을 표했죠. 그러다 가 계약하게 된 데가 ‘데일리북 스’에요. 데일리북스는 대신 계 약을 미리 정해놓자고 하더라 고요. 원래 계약 많이 해두는


거 안 좋아하는데, 종이책 내는 게 출판사한테 손해가 될 수 있는 거 아니까. 계약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 계약 원고 중 하나를 데일리북스가 네이 버 웹소설에 넣어버린 거죠. 텍: 아, 그렇게도 되는군요? 홍: 출판사나 에이전시를 통해 들 어갔을 거예요. 네이버 웹소설 이 담당자가 적어요. 그래서 하 나하나 작가들 관리하고 섭외 할 여력이 없어요. 텍: 그러면 웹소설에 들어가 있는 삽화라든가 표지 같은 건? 홍: 제가 컨펌(confirm)한 거 아니 에요, 네이버가 그냥 알아서 해 버린 거예요. 문제가 발생하거 나 하면 제가 데일리북스 쪽에 이야기하고, 데일리북스가 네 이버에 이야기하고, 네이버가 그림 작가 하청 주는 쪽에 이 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건너건 너 하다 보니까 병목현상이 생 겨서 일이 진행이 안 돼요. 텍: 원고도, 데일리북스 쪽에 넘기 면 돌아돌아 가는 시스템이겠 네요? 홍: 네. (웃음) 텍: 그러면 네이버에서 그런 웹소 설을 연재하는 것 자체에 대해 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홍: 대여점에서 책을 많이 보는 사 람들이 책을 어떻게 읽냐면, 대 사만 읽고 넘어가요. 후루루루 룩 대사만 읽고 페이지를 파라 라라락하면서 넘겨요. 그런 사

람들한테는 차라리 좋겠다 생각 해요. 그런데 제가 준 원고도 원 래는 공 좀 들여서 쓴 라이트노 블 쪽 원고였고, 타깃이 다른 원 고인데 그렇게 해버릴 거면… 들어간 공이 좀 아깝고, [각탁의 기사] 때랑 비슷한 느낌이 나요. …어쩔 수 없죠. (웃음) 살다 보 면 일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경우 가 하도 많아가지고. 텍: 네이버 웹소설을 보면 대사마 다 말풍선을 달아서 캐릭터 얼 굴이 들어가게 해 놨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보면 아까 말씀하 신 것처럼 파라락 넘겨가면서 보기는 편하겠네요. 홍: [슈퍼로봇대전] 인터미션에서 대화하듯이. 표정도 들어가면 좋을 것 같고. …그런 걸 넣을 거면 맞춰서 글을 만들었을 텐 데 그런 것도 아니고. 준 글을 가져다 자기들이 토막토막내 서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

멀티미디어 환경 텍: 최근에 네이버 웹소설에 연재 도 하고 계시고, 라이트노블도 연재하고 계시고, 처음부터 판 타지 소설도 써오셨고, 영화 [괴물] 원작 소설도 써보셨고, [아키블레이드]는 게임과 같이 진행하는 기획이었잖아요? 굉 장히 다양한 형태로 작업을 많 이 하시는데, 의도적으로 많이


도전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하 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가요? 홍: 의도적으로 많이 하고 있어요. 저는 애초에 처음 대여점 시장 에 뛰어들었을 때도 대여점 시 장이 너무 싫었어요. 당시 IMF 외환위기 때 퇴직금을 가지고 사람들이 생계형 자영업으로 내몰려서 대여점을 하게 됐어 요. 대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 겼는데, 거기다가 출판사들이 생각 없이 책을 우르르 쏟아 부었단 말이에요. 그게 그 사람 들 퇴직금을 갈취하는 행동이 지 문화산업이 아니었어요. 그 래서 이런 바닥에 적응해서 이 대로 살면 진짜 이건 막장이 된다, 어떻게 하든지 다른 돌파 구를 찾아야 되고. 사람이 한 우물에서 계속 물이 나온다고 생각 없이 그 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그 우물이 마르면 말라 죽죠. 그래서 이런저런 영역이 나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면서 해보고 있어요. 텍: 그러면 지금 가장 유력해 보이 는 시장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 하시나요? 홍: 유료연재나 전자책 쪽이 나았 는데, 올해 네이버 웹소설이 시 작해버려서 어떻게 될지 모르 겠네요. 문제가 되는 게, 네이 버 웹소설은 역시 공짜 제공이 라서. 말하자면 부분 유료화에 요. 온라인 게임에서 정액제가 몇 개만 남고 다 부분 유료화

제가 된 게, 부분 유료화 게임 이 몇 개가 있으면 예상 유저 풀의 상당수가 그쪽으로 가버 려요. 게임의 퀄리티가 어찌됐 든 상관없이. 네이버 웹소설의 경우에는 과연 네이버가 얼마 나 업무를 잘 처리하느냐가 중 요할 것 같아요. 사실 공짜라는 게 파급력이 너무 커가지고 중 간만 가도 대단한 것 같고. 사 람들이 네이버 웹툰처럼 엄청 난 지배력을 기대했다면 실망 했겠지만, 옛날에 이미 포탈들 이 소설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시도를 했었어요. 그거에 비하 면 훨씬 성공적인 안착이에요 지금.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하 고 있으면서도 이래도 되는 걸 까… 대기업이 구멍가게 다 죽 이네. (웃음) 텍: 전자책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본인이 개인적으 로 전자책을 제작하거나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홍: 그렇지 않아도 제가 ‘시길 (Sigil)’로 직접 한 번 제작을 해 봤고 ‘인디자인’으로도 해봤는 데 공돌이 출신이라 그런지 어 렵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종이책 출판시장이 안 좋아져 서, 전자책 온리(only)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고 주위사람 들한테 의견을 타진해 봤는데 ‘안 된다, 힘들다, 어림없다, 시 장이 그렇게 안 좋다, 전자책도 홍보하고 뭐 하고 하면 되게


빡세고 많이 팔리지도 않는 다’는 말이 작년 초에 나왔는 데, 작년 중반쯤 되면서 분위기 가 반전되더라고요. 시장이 되 게 급격하게 변한 게, 그만큼 도서 시장이 더 빨리 죽어서, 도서시장의 메리트가 너무 없 어진 거예요. 그래서 해볼만 하 구나, 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판 얹고 하는 시간에 그 냥 제 글 쓰는 게 벌이상 더 낫 다. (웃음) 관심이야 있죠. 1인 출판이나 전자책 전문 출판사 를 세운다고 하면 집에서 아주 아작을 낼 텐데. (웃음) 뭐 지 켜보죠. 전자책의 경우는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이북 리더 업체들이 예쁘게 잘 넘어가게만 해줘도 보기가 불편하지 않을 텐데. 네이버 북 스가 이번에 꽤 괜찮더라고요. 네이버 북스는 담당자들이 B2B로 일을 해서 북큐브 같은 곳에서 원고를 받아서 넣는 방 식으로 해서, 개인이 직접 계약 을 하기는 까다로울 것 같아요. 담당자가 인원은 적은데 관리 해야 할 작품 수는 너무 많���. B2B 관리하는 사람들은 업무 에 치여서 죽는다고 하는데. NHN이 대기업인데 사람도 더 뽑지. 텍: 출판 시장은 어느 쪽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라이트 노블을 쓰고 계신데. 홍: 뭐라고 해야 하나, 사실 라이

트노블이 그렇게 장르성이 있 는지는 모르겠어요. 이야기해 도 되나 모르겠네. (웃음) 원래 일본 출판사들은 엄청나게 큰 미디어그룹이에요. 걔네들은 책을 팔기 위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정도에요. 예전에 [스 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NT 노벨’에서 나왔죠, 한국에서. 권당 45,000~50,000권 정도 찍었을 거예요. 그걸 보고 ‘우 와 라이트노블 대단해!’라고 사 람들이 생각했는데, 저는 반대 로 ‘이거 큰일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애니메이션 나 왔을 때 애들이 춤추는 게 주 변에 막 돌아다니고 했는데도 5만 권밖에 안 팔렸으면 도서 시장으로서 진짜 심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광고를 뿌 렸는데 그것밖에 소화가 안 됐 으면 시장으로서 얼마나 위험 한 일이에요. 지금 한국 라이트 노블 쪽은 애니메이션으로 만 들어서 부팅할 수가 없잖아요.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 니고. 텍: 많이 해봤자 만화 정도. 홍: 하지만 만화 시장도 어차피 죽 은 건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나 마 다행인 건 그림이 붙어 있 어서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외 국으로 넘기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거에 기대 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어요. 일단 중국 쪽은


잘 안 되고. (웃음) 일본도 역 시 완전 갈라파고스라, 걔네들 안에서도 이미 내수가 충분해 서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서 잘 돌아가는데 굳이 외국 걸 들여 올 게 있나. 그 안에 데뷔하고 싶은 애들도 많아서 번호표 뽑 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문제 가 있어요.

작가 의식 텍: 작가님 작품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월야환담]이 랑 [더 로그]더라고요. 아무래 도 근작들이 과거작들에 비해 조명을 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작가 본인이 느끼기 에는 어떠신지? 홍: 원래 작가가 쓰다 보면 잘 터 지는 게 있고 안 터지는 게 있 고 일단. 그리고 시장 규모 차 이도 있고. 그 당시는 어쨌든 대여점들이 우후죽순으로 쭉 몰려서 시장에 책이 많이 깔리 니까 사람들이 관심도 많이 가 지고 했는데, 지금은 장르 소설 에 대해서 열기가 많이 식었어 요. 그런 상황에서는 작품적으 로 더 좋다고 더 부각되기는 힘들 것 같아요. 텍: 시장 상황 때문이라고는 해도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없으신 가요? 홍: 아니요. (웃음) 만약에 제가 인

기 끌고 잘 팔리는 것에 안주했 으면 [더 로그]만 계속 써서 지 금쯤 사오십 권 나왔겠죠. 내가 옛날부터 평가가 안 좋은 편이 라고 생각했어요. ‘그놈 글은 일단 쌈마이해, 싸구려 티가 풀 풀 나’ 이런 소리를 많이 듣다 가, 요새 라이트노블을 쓰니까 이제 자기들이 책을 선택해서 보기 시작하는 중고생들이 ‘이 사람이 판타지 무협에서 그렇 게 거장인 작가였다면서?’ 이런 소릴 하는데, 제가 옛날에 활동 할 땐 거장 소리는 하나도 못 들었어요. 그런데 시대가 바뀌 고 오래 살아남으면 취급이 어 쨌건 달라져요. 지금 당장의 평 가나 그런 것보다도 포텐셜을 가지고 계속, 하나 성공했다고 한 우물 계속 파지 말고 계속계 속 바꿔가면서 젊게젊게 젊은 마인드로 살아갈 수 있게. 굶어 죽지 않으면 보답이 오겠죠. 텍: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궁금해 졌는데, [아키블레이드]에는 굉장히 현실과 비슷한 사건들 이 나오잖아요. 농촌총각 결혼 이나 공정무역 커피 문제라든 가. 이런 것도 세계 안에서 일 어날 법한 문제들을 그리다 보 니까 나온 건가요, 아니면 그런 현실의 영향이 있었던 건가요? 홍: 당장 이런 문제들이 왜 일어났 는가, 인간들의 욕구나 사회적 형태 같은 걸 약간씩 비틀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늘 생각해요.


농촌 총각 문제나 전쟁 같은 이유로 남녀 성비가 변한다든 가, 그럴 때 사회에 타격이 오 잖아요. 그건 중세시대건 석기 시대건 현대건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사회적의 모습이 변해 가고 그런 걸 각 사회에 맞춰 서 시뮬레이션 하듯이 그리면 되게 재미있는 경우가 많이 나 와요. 그런 걸 하면 재미가 있 을까, 하는 걸 쓰는 거죠. 안 그 러면 왜 글을 쓰겠어요. 머리 빠개지게. (웃음) 텍: 옛날부터 초반에 도적 길드나 조폭 같이 일상과 가까운, 작은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이 굉 장히 많이 나오고 많이 깨지더 라고요. 이런 건 의식하고 계속 넣으시는 장면이신지. 홍: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거악(巨 惡)과 처음부터 싸우는 것보다 는 분위기를 띄우는 전초전이 있어야죠. 만화를 펼쳤는데 첫 권 첫 화부터 세계 타이틀 매 치를 하고 있으면 앞으로의 이 야기 구성이 엉망이 되죠. [드 래곤퀘스트]의 앞마당에서 나 오는 몹들이 슬라임인 거랑 마 찬가지죠. 전체 콘텐츠 로드맵 상 어쩔 수 없다? 무협지도 그 렇잖아요, 처음부터 천하제일 의 절대고수랑 맞짱을 뜨는 것 도 아니고. 동네부터 시작해서 점점점 경험도 쌓이고 명성도 쌓이고. 텍: 최근작으로 오면 올수록 주인

공들의 세계 구원 의지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가 령 [각탁의 기사]에서는 인류 를 구원하려는 의지가 드러나 고, [아키블레이드]에서도 사 회와 나약한 인간 사이에서 주 인공이 굉장히 고민하지만 선 을 추구하잖아요. 그런 작은 폭 력에서 시작해서 사회적 폭력 까지 이어지는, 그런 것들을 느 꼈거든요. 홍: 요새는 자포자기하고 막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기애가 진 짜 강한 사람은 당장 눈앞에 불의나 그런 것보다는 사회적 선을 행하려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들고 사회적으로 억눌려 있 는 사람은 억눌리고 있는 요소 자체에 바로 반발하고 그게 해 소되면 끝이지만, 인간으로서 조금 격이 높고 힘이 세고 포 텐셜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 혼자, 자기 가족 먹고 살 고 하는 건 금방 달성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행동할 수 있는 원리를 세워야 해요. 게임이라 면 게임이 그 이후의 콘텐츠를 알아서 주지만 현실은 사람이 직접 자신의 콘텐츠를 찾아야 한단 말이에요. 그건 사회적으 로 선을 구현하겠다든가, 되게 어려운 도전과제가 되잖아요. 할 일도 많고. 먹고 싸다 죽는 건 무의미한 삶이고 자기애가


있는 사람이 선택할 만 한 삶 이 아니에요. 조금 더 뭐랄까, 높은 경지에 관심을 가지고 세 상에도 관심을 가지겠죠. 그렇 지 않으면 안빈낙도하죠, 그냥 밭이나 일구며 혼자 살든가. 제 가 쓴 대부분의 캐릭터가 백마 를 타고 광야를 달리는 초인 같은 애들이잖아요. 그래서 그 런 쪽에 관심을 가지지 않겠나 생각해요. 초인문학이라고 해 야겠죠. 텍: 그런 면에서 일반인들의 입장 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 하는 [아키블레이드]의 ‘현우 진’이 특이하고 좋았던 것 같아 요. 인간은 약하다고 생각하면 서도 선을 추구하니까. 홍: 인류애를 가진다는 건 인간이 나약하고 악하다는 것도 인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선이 비관적이다, 넌 왜 이렇게 비관 적으로 보냐’는 사람들이 많아 요. 그런데 비관적으로 본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들한테 막 대하거나 나쁘게 대하거나 그 런 건 아니고, 비관적으로 보는 건 어디까지나 리스크 관리에 요. 예를 들어서 바닥에 지갑을 떨어트려 놓고 ‘네가 이걸 주워 가는지 아닌지, 내가 널 시험해 보겠다’ 이런 걸 하는 게 아니 라, 애초에 이런 유혹이 될 건 미리미리 주면 안 돼요. 그렇다 고 내가 그 사람을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은 오히려

모두가 약해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가학적인 믿음 을 시험하기 위해서 왜 남을 우습게 만들어요? 인터넷에서 보면 사람들이 뭐 해달라고 하 면 당장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한 쪽을 편들어서 우르르 몰려 가서 와다다다 저미는 게 아니 라,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하잖아요. 잘못했다가 괜히 생 사람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그 사람을 불신하거나 정 의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거죠. 텍: 그러고 보면 과거에 그렇게 장 르문학이 유행했는데 지금까 지 이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 나는 그 소설들이 현실에 대해 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이 있어요. 홍: 그런데 예를 들어서 조지 오웰 의 [동물농장] 같은 경우는 동 물 이야기지만 사실 사람 이야 기잖아요. 그런 상징성이나 보 편적으로 인간 본성을 다루면, 당장 우리가 ‘미드’를 봐도 공 감할 수 있는데. 사람 본연적으 로 가지고 있는 질투, 욕망, 시 기, 분노 같은 감정들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판타지가 몰락 했던 게 배경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아타리 쇼크’가 문제지. 한 작품을 엄청 잘 써서 백만 부를 팔 수 있다고 쳐봐요, 그


런데 그 가능성은 너무 낮아요. 그런데 당시 대여점 시장에서 밀어내기만 하면 아무거나 만 부씩 팔리니까 만 부 팔리는 걸 백 개 만들어서 백만 부 채 우면 되잖아요. 처음에야 대여 점이 다 받아줬지만 계속 그렇 지도 않고, 장르 자체에 대해서 도 사람들이 피곤해져가고. 펴 보면 대부분 십중팔구 지뢰인 데 사람들이 괜히 지뢰를 밟으 러 지뢰밭에 들어가지 않잖아 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떠 나고, 대여점이 없어지고 나서 젊은 층은 장르 소설 같은 게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갈 정 도고. 그렇다고 또, 그 일이 일어났 을 때 출판사를 마냥 비난하기 도 웃긴 게, 한 놈이 밀어내기 를 시작하면 다른 출판사도 밀 어내기를 시작하죠. 토양이 파 괴된다고? 내가 안 해도 어차 피 남이 파괴할 건데. 같이 끼 어들어서 얼른 돈이라도 챙기 는 게 낫지. 그런 마인드가 약 간씩 있었어요.

신년계획 텍: 그럼 이제 연초니까, 올해의 계획 같은 거 세워두신 게 있 으신가요? 홍: 이미 저질러진 일들을 빨리 수 습해서 정리를 해야죠. 너무 많

아요. 텍: 트위터에서 [더 로그] 만화 작 업을 하신다고. 홍: [더 로그]가 아니라 [월야환담] 이요. 옛날 [더 로그] 만화는 스 토리를 소설 그대로 하려고 해 서 너무 부팅이 안 됐어요. 만 화책은 빨리빨리 본론으로 들 어가야 하는데. 한 권 안에 본 론에 들어가야 하는데. 빨리 본 론에 들어가게 리부트하는 작 업을 해야 하는데 이건 작가가 확정이 안 돼서. [월야환담]은 같이 하려는 작가분이 있어서 같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 게 될지는 모르죠. 일이란 엎어 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텍: 그러면 아직 형태라든가 어떻 게 나오게 될지에 대해서는 결 정된 게 딱히 없는 거죠? 홍: 네, 그리고 아직 그걸 공개할 때가 아닌 것 같고. (본 인터뷰 이후에 작가 블로그 및 트위터 를 통해 고진호 작가가 참여한 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알려졌 다.) 그 외에는 딱히 뭐. 네이버 웹소설하고 유료연재들하고.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업무 량이 아니에요. (웃음) 텍: 유료연재 같은 경우는 주간도 아니고 하루이틀 만에 올리는 거잖아요. 홍: 네, 주3회죠. 텍: 네이버 웹소설도 지금 주2회 연재 아니신가요? 홍: 네. 네이버 주2회. 그리고 3개


월에 한 번씩 [기신전기 던브 링어] 또 내야죠. 점점 죽어가 고 있어요. (웃음) 운동을 해야 되는데, 작년에 10kg 정도 찐 것 같은데. 텍: 올해는 우선 그렇게 세 개 위 주로 진행하시는 거군요. 홍: 마무리를 지을 것들을 마무리 지어서 일을 좀 줄여야죠. 그리 고 좀 사람답게 살아야지. 텍: 끝이 보이는 게 있나요? 홍: [마왕전생] 곧 끝나고. [던브 링어]도 2-3권 정도면 끝날 것 같고. [던브링어] 이야기 자체 는 엄청 옛날부터 생각했어요. 이건 [초인 로크]라고 생각하 면 되요. 시대를 뛰어넘는 이야 기. 그 중의 한 에피소드고. 텍: 기회가 되면 다른 에피소드들 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홍: 대부분 비극이어서. 되게 옛날 에 기획했거든요. 옛날에 기획 할 때는 제가 좀 철이 없어서 ‘베드엔딩, 독자들한테 스트레 스 많이 주고, 에라이 독을 먹 고 죽어버려라!’ 하면서 독자들 에게 스트레스를 빡 줬는데, 요 새는 세상이 하고 힘드니까 독 자들에게 스트레스를 줬다가 쓰러질까봐. 나라도 적당히 해 야지. 제가 어찌 독자들에게 엿 을 먹이면서 좋아할 수 있겠어 요. 독자여러분들 덕에 먹고 삽 니다, 알럽유. (웃음) 텍: (웃음) 그럼 그 뒤에 예정되어 있는 건 있으신가요?

홍: 그 다음에는 묵직한 대하물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좀 하 이 판타지(High Fantasy) 계 열이었어요. 이번에는 좀 묵직 하게, 십 몇 킬로미터만 걸어도 발에 물집 잡히고, 마법도 파이 어볼! 이런 직관적인 마법들이 아니라 다 추상적인, 마법사가 있는데 뭘 한다더라- 하는 추 상적인 걸로. 작년에 가벼운 걸 좀 많이 했더니 묵직한 대하물 같은 걸 하고 싶고. 하지만 일 단 작년에 저지른 걸 뒷수습을 해야지. 텍: 반작용이 오는 거군요. 가벼운 걸 하면 무거운 걸 하고 싶고. 홍: 달달한 거 쓰면 씁쓸한 거 쓰 고 싶고. 짠 거 하면 매운 거, 밍밍한 거. 텍: 슬슬 인터뷰 마무리 하면서 독 자분들께 하고 싶으신 말씀 하 면서 마치면 좋을 것 같아요. 홍: 제가 대여점 시절에는 별로 독 자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안 들었어요. 내가 잘 써서 많이 읽힌다 해서 나한테 벌이가 돌 아오는 것도 아니고, 많이 읽히 면 많이 까이고. 당시엔 제가 어려서 까이는 거에 대한 내성 도 별로 없어서, 까이면 덤비라 는 말이나 했죠. 옛날에는 별로 독자들하고 직접 뭘 하는 느낌 이 없었는데, 요새는 내가 그래 도 어떻게든 독자들에게 사랑 받아서 먹고 사는구나, 라는 걸 느껴서 까여도 ‘허허허 고객님


은 항상 옳습니다, 제 잘못이지 요’ 하면서 맘 편히 삽니다. 독 자여러분들 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 텍: (웃음) 네 알겠습니다. 되게 훈 훈하게 끝나네요. 네 감사합니 다, 그럼 이쯤 해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Special_2] 작품 연표

15년의 궤적 1999

2000 [비상하는 매] 1999.07~2000.01 총 9권

[흑랑가인] 2000.01~2001.01 상하권

2001

2002

[더 로그] 2001.07~2004.01 총 13권

[13번째 현자] 2001.11~2002.05 미완 3권

2003 [월야환담 채월야] 2002.09~2003.04 총 7권

2004 [창세종결자 발틴사가] 2003.08~2004.11 총 10권

[더 로그] 만화 2004.01 미완 1권


[창세종결자 발틴사가]

2005

[월야환담 창월야] 2004.08~2006.06 총 10권

2006

[황제를 향해 쏴라] 2006.02~2006.10 미완 4권 [괴물] 2006.07 단권

2007

2008

[월야환담 광월야] 2007.12~2008.12 미완 3권

2009

[월야환담 채월야] 애장판 2008.01~2009.02 총 4권

2010

[아키블레이드] 2009.07 미완 2권


2011

2012

[아더왕과 각탁의 기사] 2012.03~2012.07 총 7권

2013

[기신전기 던브링어] 2012.06~ 미완 4권

~ 현재

[마왕전생 RED] 2012.09~ 미완 5권


[Text] 연재소설

미첼라이아의 용병들 외전1_이고은 세이탄티아로 돌아가는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며칠 동안 몬스터 한 번 만난 일도 없었고, 중간 중간 마 을에 들려 필요한 물품도 수시로 보 충했기 때문에 여유로운 여정이 이 어졌다. 아니, 부상당한 몸이 좀이 쑤실 정도로 지루한 여정이었다. 이 런 일정에도 쉘즈는 마냥 즐거운지, 항상 밝게 웃고 있었다. 종종 콧노 래까지 흥얼거리기는 것이 진심으 로 즐거운 모양이다. “정말 즐겁네요, 여행이란.”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네.” 피식 웃으며, 텐트를 치는 동안 손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 사이 매번 그냥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을 무시하고 땔감을 주워오던 쉘 즈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뭇가지들 을 잔뜩 주워와 모닥불을 피우기 좋 게 쌓아두었다. 살라만다를 불러내 간단하게 불 을 피우고 나니 쉘즈가 간단하게 저 녁으로 먹을 빵과 베이컨을 들고 왔 다. 빵을 데우고, 베이컨을 굽는 것 역시 살라만다에게 부탁해 간단하 게 해내자 쉘즈의 눈이 초롱초롱 빛 났다. “역시 정령은 좋네요. 특히 불의 정령은.” “다들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도

살라만다가 제일 좋은 것 같아.” 우리 둘이 빵과 베이컨을 먹는 사 이 살라만다는 기분이 좋은지 제가 피워둔 모닥불 사이를 이리저리 돌 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물의 정령은 어디서 든 물을 찾을 수 있다죠?” “응? 응. 그렇다더라. 왜?” “그냥……, 물의 정령이랑 계약하 면 어디서든 마시는 것과 씻는 건 걱정 없겠구나, 해서요.” “그렇지도 않을 걸? 애당초 정령 을 소환해서 그 힘을 쓰려면 꽤 정 신적으로 피곤해지거든. 사막 같은 곳에서 물을 만들거나 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최소 이런 산길에서 계곡 쯤은 찾지 않겠어요?” 하긴, 그 정도는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지. 살라만다도 근처에 불길예를 들면, 모닥불 같은-이 있으면 금방 감지를 한다. 하지만 산속에선 딱히 물의 정령에게 묻지 않아도 계 곡이 있음직한 곳을 찾아보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산에서 계곡을 찾는 것쯤은 정령 에게 묻지 않아도 조금만 찾으면 금 방 찾잖아? 여기만 해도 저쪽으로 조금만 가면 계곡이 있을 걸?” 내가 숲 안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쉘즈가 신기하단 듯 날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거야……, 그냥 그렇게 생겼잖 아? 그리고 작긴 하지만 물소리도 들리고.” “……물소리가 들려요?” “응. 안 들려?” “네.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요?” 가만히 듣고 있으면 작게 들리는 데……. 도시의 소음에 익숙해져 있 는 쉘즈의 귀에는 물소리가 거의 들 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녁도 다 먹었겠다, 수통도 채 울 겸 가볼래?” 의심스런 눈초리를 던지는 쉘즈 에게 직접 확인 시켜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수통을 집어 들며 묻자 그 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 라나섰다. 우리가 일어나자, 모닥불 에서 놀던 살라만다가 재빨리 내 손 등으로 옮겨와 횃불처럼 주변을 밝 혀주었다. 한 5분쯤 걸었을까? 물소리가 커 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더니, 금방 물이 가득한 계곡이 나타났다. “우와, 정말 있네요!” 신기하단 듯 나를 한 번 본 쉘즈 는 달빛이 가득한 계곡가로 다가가 살며시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잔잔 하게 흐르던 계곡물이 그녀의 손길 에 흩어지며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냈다. “시원해요.” 어린 아이처럼 까르르 웃는 쉘즈에 게 계곡에 반사된 달빛이 비취자 묘 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금은 움직

이기 편하게 간편한 바지를 입고 있 지만, 하늘하늘하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면 여신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쉘즈가 정말 예쁘긴 예쁘다. 그러니 가게어서도 탑이라 하며 유명했던 거겠지만. 멍하니 쉘즈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가 자 신을 넋 놓고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후였다. 얼굴 가득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천천히 물속 에 담근 손을 움직였다. 느리고 부 드럽게 물속을 헤엄치던 그녀의 손 길은 한순간 갑작스레 패턴을 바꾸 며 번개같이 움직였다. 아차! 촤악! “아하하!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어요? 새삼 제게 반했나요?” 그 작은 손으로 꽤나 많은 물을 끼얹었다. 쫄딱 젖거나 한 건 아니 지만, 왠지 이게 더 기분 나쁘다. 손 등에 자리 잡고 있던 살라만다가 혼 자 알아서 저만치로 피해버린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쳇. 아무 말 없이 손목에 묶어두었던 손수건을 풀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 수통을 들어 물을 채우는데, 쉘즈가 슬슬 내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화났어요?” “아니.” “에이. 난 피할 줄 알았죠. 다른 사 람도 아니고 붉은 사자님인데.” ……자존심 상한다. 붉은 사자라 하면 이제 모르는 용병이 드물 정도 인데, 그런 내가 여자한테 넋 놓고 있다가 물벼락을 맞다니. 얀이 들으


면 비웃겠지. ……아니, 얀은 한심하 단 듯 보고, 키르케가 비웃겠구나. “잠깐만요, 머리에도 좀 튀었네 요. 줘보세요. 닦아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쉘즈가 내 손수건 으로 손을 뻗었다. 잠깐. 이 손수건 은 안 된다. “아, 아냐. 내가 닦을게.” 슬쩍 손수건을 잡을 수 없도록 빼 는데, 그녀의 손길은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제가 죄송해서 그래요. 화내지 말고 줘보세요. 네? 에이, 화 푸 세…….” “됐다니까!” 화륵! “꺅!”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간, 내 감 정에 동조한 살라만다가 폭발하듯 불길을 내뿜었고 그 불길에 놀란 쉘 즈는 얼른 소리를 지르며 손을 거뒀 다. 토끼눈을 뜨고 가늘게 떨며 날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야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혹시 데였어?” 얼른 살라만다를 돌려보내며 수 통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살펴보 았지만, 다행이 순간적인 불길이었 고 그녀가 빨리 피한 덕분에 데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소릴 지른 것이 섭섭했던 건지 가늘게 떨 고 있는 그녀의 눈빛에 조금씩 분노 가 차올랐다. “물 조금 맞은 거에 너무 한 거 아 닌가요? 먼저 장난친 제가 잘못하

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풀어드리려 고 했는데.” “아니……. 그게…….” “정말 너무하세요. 물장난 좀 친 게, 살라만다한테 공격하게 할 정도 로 나쁜 장난이었나요? 제가 붉은 사자님을 쫄딱 젖게 하기라도 했나 요? 물 약간 튄 정도잖아요. 손수건 으로 닦으면 충분할 정도잖아요. 그 게 그렇게까지 기분 나쁘셨어요?” 곤란하다. 점점 목소리가 울먹이 는 게 그냥 두면 울 것 같다. 난 그 장난 때문에 그런 게 아닌데……. 게다가 공격하라고 시킨 적은 절대 없다. 하지만 쉘즈는 내게 변명의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쉘즈. 그 장난이 심했던 게 아니라…….” “그럼 뭐가 그렇게 기분 나쁘셨는 데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기 분 나빴나요? 제가 붉은 사자님을 못 믿어서요? 못 믿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전 이제껏 그런 거 본 적이 없는데! 신기한 게 당연하잖아요!”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 렁그렁하게 맺혔다. 어, 어떻게든 달래지 않음 정말 펑펑 울 기세다. “아, 아냐. 무, 물은 어차피 필요했 는걸. 그리고……, 그, 모, 못 믿을 수도 있지! 응. 네 말대로 본 적 없으 니 못 믿을 수도 있어. 이해해, 응.” “그럼 뭐가 문제였는데요! 그냥 제가 옆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요? 제가 이제 귀찮은가요?” “아,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 끙. 소, 손수건 때문에


그랬어.” “……손수건이요?”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솔직하게 말하자 의아한 듯한 쉘즈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하긴 조금 뜬금없게 들리겠지. “응. 소중한 거라서…….” 그렇게 말하며 살짝 쉘즈의 눈치 를 살피는데, 분명 조금 전까지 섭 섭하다며 울기 직적이던 여자가 너 무나 덤덤하게 날 보고 있었다. 어? “흠.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 긴 하지만, 물어보진 않을 게요. 붉 은 사자님 표정을 보니 그렇게 좋은 기억이지만은 않은 것 같네요. …… 왜 그렇게 봐요?” “아니……, 표정이 금방 바뀌어 서…….” “네? ……아. 아까 울먹이던 거 요? 에이, 역시 순진하다니까. 여자 가 그 정도 연기는 할 줄 알아야죠.” ……연기라고? 연기? 아까 그 정 말 섭섭해 죽겠다는 듯 울먹이던 게 연기? “꺄르르! 정말 몰랐나보네. 꿈의 방울에서도 최고라 불리던 이 쉘즈, 아직 죽지 않았네요. 아하하!” 정말 만족스럽단 듯 웃는 그녀를 보고 가만 생각해보니 확실히 평소 의 쉘즈답진 않았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건가 했지……. 쳇. 어째 화낼 기운도 나지 않는다. “하아. 돌아가자. 가서 자야 내일 또 걷지.” “먼저 가세요. 전 조금만 더 있다 가 갈게요.”

쉘즈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생글생 글 웃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 왜? 뭐 볼 일이라도 남았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여기 경치 가 너무 예뻐서요. 조금만 구경하다 갈게요.” “밤의 숲은 여자 혼자 있기엔 위 험해. 언제 뭐가 나올지 몰라.” “야영지에서 먼 것도 아닌데요, 뭘. 무슨 일 있으면 크게 소리칠게 요. 그럼 붉은 사자님이 바로 달려 와 주시면 되잖아요?” 음. 하긴 물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니 뛰어오면 금방 올 수 있을 거였다. 그리고 한동안 혼자 있을 시간도 없이 며칠째 여행을 계속 했 으니 그녀도 혼자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너무 늦지 않게 적당히 보다가 와.” “네~.”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 야영지 로 천천히 걸어오다 보니 나도 혼자 있는 시간이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을에 들르거나 했을 때는 방을 나눠 쓰긴 했지만, 잠들기 거의 직전까지 쉘즈는 재미있는 이 야기를 들려달라며 옆에서 졸라댔 고, 가끔은 아예 내 침대로 몰래 들 어와 자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났다 가 깜짝 놀라 왜 여기서 자냐고 물 으면 사람 체온이 그리운 날이 있다 나 뭐라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 지루 한 일정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애교 많은 쉘즈 덕인지도 모르겠 다. ……쉘즈가 없었다면 애당초 이


런 일정으로 가지도 않았겠구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가 문득 살라만다를 붙여주고 올 걸 그 랬단 생각이 들었다. 살라만다를 통 해 느끼는 게 쉘즈의 비명소리를 듣 고 달려가는 것보단 빨리 도착할 수 도 있고, 살라만다가 시간을 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먼 거리도 아니니 가서 붙 여주고 오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발 걸음을 돌려 계곡을 향했다. 천천히 걸어왔던 것과 달리 걸음을 약간 재 촉하자 금방 다시 계곡이 나타났다. “쉘즈, 혹시 모르니까 살라만다 를…….” 계곡을 가리고 있던 나무를 지나 쳐 쉘즈를 바라본 순간 그대로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내 목소리에 돌아본 쉘즈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꺄악! 보지 마세요!” “미, 미안!” 쉘즈의 외침에 얼른 몸을 돌렸지 만 잠깐 보았던 쉘즈의 알몸이 눈앞 에 아른거렸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 이지 않았던 데다가 쉘즈가 물에 들 어가 있어서 하반신은 아예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에 하얗게 빛나던 실 루엣은 꽤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 았……, 이, 이게 아닌데! “모, 목욕하려던 거면 말하지 그 랬어.” 담담하게 말하려고 신경 써서 목 소리를 냈지만, 내 의도와 달리 살 짝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쉘즈의 대

답을 기다리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뭐지? 씻는 중이면 최 소 물소리라도 날 텐데? “쉘즈?”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려 는데, 채 반도 돌아보기 전에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돌아보지 마요!” “아, 미안!” 조금만 더 고개를 돌렸으면 그녀 가 보였……, 아니, 이게 아니라! “음. 혹시나 해서 살라만다를 붙 여주려고 왔어. 혼자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네……. 감사해요.” 평소와 달리 쉘즈의 목소리는 들 릴 듯 말 듯 가늘게 흘러나왔다. 평 소 같으면 더 발랄한 목소리일 텐 데…….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 차피 지금 살펴볼 순 없으니 살라만 다를 불러내 그녀를 지켜달라고 부 탁하고는 얼른 야영지로 돌아왔다. 하지만 야영지에 와서도 자꾸만 머릿속에는 가득 달빛을 받으며 서 있던 쉘즈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처 음 만났을 때 굉장히 야한 옷을 입 고 있었기 때문에 알몸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뭐랄까, 더 청순한 느낌도 있었고, 평소 왈가닥이던 그 녀였지만 달빛 밑에 선 그녀의 어깨 선은 가늘고 여려보이……. “에잇! 매일 전투도 없이 이렇게 지 내다간 몸 굳겠다! 수련 해야지! 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며칠 만에 검을 뽑고 쉘즈가 돌아올 때까


지 계속 검을 휘둘렀다. * “아하하. 역시 도련님이야. 그럴 땐 콱! 물어야지.” 키르케 언니가 키득거리며 장난 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때 일을 떠올리며 살짝 붉어진 얼 굴이 더 화끈거렸다. “언니…….” “어머나? 가게 넘버원이었다는 여자가 이런 이야기에 얼굴이 붉어 진단 건…….” 키르케 언니의 표정에 더욱 장난 기가 서렸다. 그 표정이 마치 새 장 난감을 얻은 고양이 같아 장난감의 입장에선 묘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렇군. 도련님께는 비밀로 해줄 게♡ 잘 해봐~.” 붉은 사자님이 푸른 매 레이얀님 을 데리러 간지 사흘째. 키르케 언 니의 진료소에서 지내는 것에 조금 은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붉은 사자 님이 떠나고 다음 날부터 진료소의 이런 저런 잡일을 도왔더니 키르케 언니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언 니, 붉은 사자님 오른쪽 손목에 매고 있는 손수건, 누가 준건지 알아요?” “응? 그 붉은 손수건?” “네. 그렇게 소중하다고 말하는 거 보면 선물 받은 것 같은데, 왠지 느낌이 여자가 준 것 같아서요. 혹 시…….” 아무리 연애 바보니, 숙맥이니 해 도 좋아하는 사람이나 연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 “혹시라도 도련님에게 여자가 있을 지��� 모른다고 걱정하진 마. 확~실하 게 없으니까. 이 키르케가 보장해.” “풋, 아하하! 너무 강조하는 거 아 니에요?” “얀 자기나 도련님이나, 여자가 너무 없다니까. 얀 자기야, 본인의 미모와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좋아 하는 사람은 있어도 다가오는 사람 이 없으니 그러려니 싶기도 한데, 도련님은 조금만 핑크빛 분위기가 흘러도 금방 굳어버리니, 원. 산 속 작은 마을에 살았다더니, 여자를 만 날 일이 그렇게 없었나 몰라.” 정말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키 르케 언니는 한숨까지 섞어가며 레 이얀님과 붉은 사자님을 걱정했다. 그런데, 산 속 작은 마을? “산 속 마을이요? 붉은 사자님이 그런 곳에서 사셨어요?” “본인이 그렇게 설명해줬으니 그 랬겠지?” “그럼 집은 여기가 아니겠네요? 당연히 세이탄티아에서 쭉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돈을 벌려 고 용병이 되신 거예요?” 잔뜩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키르 케 언니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병들은 보통 각자 개인사정이 있기 마련이라 본인이 말하지 않았는데 꼬치꼬치 캐묻거 나 떠벌리는 건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붉은 사자님의 이야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실수하고 말았다. “후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알


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자세한 건 본인이 들려줄 때까지 기 다리도록 해. 그게 이쪽 세계의 예 의니까.” “네. 그럴게요.” “그보다, 도련님의 어떤 점이 마 음에 든 거야?” 키르케 언니가 순식간에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키르케 언니의 장난스런 표정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은 어린 시절 옆 집 언니와 수다를 떨며 놀 때를 생 각나게 했다. 그래서 키르케 언니에 게 더 빨리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건 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천 진난만하게 지낼 수 있었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함께 있는 사람을 유쾌하게 만드 는 장난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 변을 휘어잡는 강력한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고, 가게의 어지간한 고급 창녀보다도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면서, 어떠한 사람도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뛰어난 실 력까지. 키르케 언니는 정말 내가 동경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한 때, 키르케 언니가 썼던 ‘진홍의 장 미’라는 별명도 매혹적인 외모와 성 격을 가졌으면서도, 무서우리만치 뛰어난 실력으로 적을 짓밟는 언니 의 카리스마 때문에 생긴 것으로 알 고 있다. 이미 용병 일에서는 반쯤 물러났다고 들었지만, 지금도 언니 는 아빠에게 들은 그대로 멋진 여성 이라 자연스럽게 언니를 동경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용병이셨구나. 주로 활 동한 곳은 역시 클로델?” “네. 언니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도 클로델에서 ‘마탑 밑의 은빛 늑대’라면 보통은 쳐준다고 아빠에 게 들었어요.” 흥미롭다는 듯 듣고 있던 언니가 아 빠의 별명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마탑 밑의 은빛 늑대? 실버멜 말 이야?” “아! 알고 있네요? 아빠가 허풍이 좀 있어서 부풀린 게 아닐까 했는데, 정말 보통 이상은 되었나보네.” “네가 실버멜의 딸이었구나. 정말 뜻밖이네. 실버멜과는 몇 번 안 되 지만 함께 의뢰를 한 적이 있어. 친 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번엔 내가 언니의 말에 깜짝 놀 랐다. 언니와 아빠가 아는 사이였다 고? 언니의 눈빛에 아득한 그리움 이 가득한 것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저, 정말 아빠랑 아는 사이세요?” “응. 성격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 었던 걸로 기억해. 굉장히 예전의 일이라 지금은 조금 가물가물 하지 만, 확실히 기억나는 건 여자 용병 만 보면 딸애가 자꾸 용병이 되고 싶어 한다면서 하소연인지 딸 자랑 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릴 해대곤 했지. 난 그게 귀찮아서 피했던 걸 로 기억해.” 가게에 있으면서도 용병에게 관 심을 끊을 수 없었던 건 어렸을 때


의 꿈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시 라도 아빠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게에 있는 동 안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 용병은 그런 고 급 사창가에 오기 보단 더 싼 곳을 선호하니까. 붉은 사자님을 따라 오면서 혹시 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눈앞 에 아빠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실버멜은 클로틴 쪽 용병들 사이 에선 나름 유명했어. 유명한 딸 바보 였지. 의뢰를 마치자마자 술집에 안 가고 딸 보러 간다며 가버리는 용병 은 몇 없거든. 실력은 그냥 그런데, 그 딸 자랑 때문에 유명해졌지.” 키르케 언니가 키득거리며 말하 자 어린 시절의 아빠가 떠올랐다. 몇 달의 한 번씩 돌아오자마자 나를 번쩍 안아드는 팔이 어렴풋하게나 마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자기 별명을 ‘마탑 밑의 은빛 늑대’라고 가르쳐줬어?” “네. 아니었나요?” “맞긴 맞는데, 그것 보단 다른 별 명으로 더 유명했거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난지 키르케 언니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 고 계속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마탑 밑의 은방울.” “은방울이요?” “실력으로 유명해진 게 아니다 보 니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거든. 실 버멜이란 이름이 은방울(Silver Bell)과 발음이 비슷해서 모두가 놀

려먹은 거지. 게다가 보통 용병답지 않게 가정에 목숨 건 실버멜의 이미 지와도 잘 어울렸으니까.” 처음 들었다. 밖에서 내 이야기를 했단 것도 처음 들었는데, 그런 우 스꽝스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난 그래도 ‘은빛 늑대’라고 해서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키르케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왜 금 발인 아빠가 ‘은빛 늑대’인지 깨달 았다. 보통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본인의 머리색이나 눈 색 을 따라가는 별명이 지어지기 마련 인데, 아빠는 은발도, 은안도 아니 어서 전자 쪽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이름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 라니. “풋. 아빠, 되게 싫어했겠네요.” “그랬겠지? 나보단 클로델에서 주로 활동했던 용병들이 더 잘 알 거야.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음 한 번 물어봐.” “네.” 아빠가 몸담았던 세계. 여기서 찾 아보면 아빠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 는지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운이 좋으면 아빠의 유품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은 많으니까 차근차근 알아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졌다. “키르케 선생님!” 목소리로 키르케 언니를 찾는 목 소리가 들리자 키르케 언니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내려놓고 곧바로 아


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나도 얼른 언니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는 데, 미처 손님이 있는 응접실에 다 다르기도 전에 언니의 목소리가 들 렸다. “쉘즈, 뜨거운 물 좀 끓여줘!” “네!” 그렇게 차근차근 목표를 이뤄 가 면 될 거다. 붉은 사자님이 데려다 준 이곳은 최소 어제의 빚을 갚기 위해 오늘 빚을 지는 쳇바퀴 속 세 상은 아니니까. 일단은 붉은 사자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키르케 언니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손이 되는 것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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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김의성의 예술 나누기_7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_첫번째 D군에게, 오랜만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일방적인 고지서가 아닌 다른 이가 저를 생 각하며 썼을 편지가 오랜만인지라 편지가 도착하기까지의 그 기다림 조차 저는 달콤하게 즐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당신의 편 지에서 어쩜 그리도 당신의 내음 이 묻어나던지!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서운해 할까요. 하지만 저 역시 당신의 고 민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리 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요즘 제일 많이 드는 생각이 그 동안 살면서 제가 말을 너무 쉽게 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 잘 알 지도 못하면서 오지랖을 부리고 들은 그대로 바로바로 나오는 말 들에 의해 혹시라도 상대가 (…) 죄책감과 후회가 생깁니다. 말할 까 말까 할 때에는 하지 말라하였 는데, 저는 그 고민의 순간조차 없 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저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당신은 언제나 아니라고 하지 만, 당신이 이런 류의 고민을 할 때마다 저는 이 선(善)한 사람을

어찌해야 하나란 생각을 한답니 다. 제가 자주 하는 종류의 후회는 당신처럼 “그때 ~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관용구는 같겠지만 그 내용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혹 은 줬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죄 책감이 아니라 제가 잘 해내지 못 한 일에 대한 분노와 짜증에 가깝 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머릿속의 주인이 된다는 것도 정말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 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느끼는 나의 감정이 아니라 ‘나’ 때문에 느 꼈을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걱정하 고 고민하는 모습은 제가 언제나 당신의 친구이고 싶게 하는 당신 의 큰 매력입니다. 저 역시 말할까 말까 할 때에는 말하지 말란 말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 각하지만, 언제나 입술 언저리까 지 단어 단어가 근질거리는 것을 결국 참지 못하고 뱉어내고 마는 의지박약한 사람입니다. 저는 최 근에 템플스테이를 다녀왔습니다. 오래된 사찰에서의 하룻밤은 일탈 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새 벽 4시의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과 서늘한 공기는 머리를 맑게 해주 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그


Interesni Kazki, AEC, Waone 곳에서 듣게 된 서른 초반의 여성 분의 고민과 스님의 대화가 생각 이 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 이 되고 싶었던 그분은 사범대에 들어가 매우 성실하게 공부하며 교사임용시험을 준비하였으나 매 번 3차 시험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맞이하고 이번 시험에도 결국 3차 에서 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떨어지고 나니 이제 그 길 이 과연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 너 무 의심되고 결혼도 해야 될 나이 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너 무 고민이 되어 템플스테이를 왔 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러자 스님께서 아주 단호히(혹은

출처: www.unurth.com 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직업은 하고 싶으냐 적성에 맞느냐로 정 하는 것이 아니다, 나랏돈 받으며 살려면 관운이 있어야 한다, 벌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면 되지 않느냐, 꼭 그 일을 해야 만 하느냐…… 이 나이 지긋한 노 스님의 말씀에 과연 그 여자분께 서 어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여 자분이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그 여자분께 과연 필요한 조 언이었을까, 그것도 사실 저는 의 심스러웠습니다. ‘해야 되는데 어 떡하지?’라는 고민에서는 우리는 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기꺼이 하 게 않게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살까 말까, 말할까 말까, 가볼까 말까’ 하는 경우, 그 러니까 차분히 생각하면 하지 않 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이런 고 민에서 우리는 결국 하고야 맙니 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꼭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가버리고 마는 주인 공처럼 말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는 것,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 그 전에, 그게 나 쁜 것일까요? 이런 고민은 선택의 순간마다 등장하여 꾸준히 스트레스를 줍니 다. 그리고 이런 ‘어쩔 수 없이’ 계 속 받아야하는 스트레스는 일상에 서 마주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으로 녹여내곤 합니다. 저는 길거 리의 낙서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내용은 장난스러움이 가득하면서 하면 안 되는 건데 몰래 했다는 그 비밀스러움과 그에 의한 자유로 움, 그 때문에 느껴지는 선들의 속 도감이 꼭 길을 가다가 발길을 멈 추게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짧고 선명한 이미지라는 점은 아 주 매력적이고 강렬합니다. 이러 한 점에 예술가들이 거리 미술

(street art)1 작업에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몇몇의 거리미 술가들을 꼽자면 얼굴도 신분도 감춰진, 아트 테러리스트라고 종 종 불리는 거리 그래피티 예술가 이자 영화감독인 뱅크시 (Banksy)2 는 쥐, 고양이, 어린이, 군인 소재를 이용해 사회적 약자 의 모습을 냉소적이고 위트있게 표현한 작품을 많이 그렸습니다. 영국에서도 불법인지라 아무도 없 을 때, 몰래 그려놓고 떠나기 위해 그의 작품은 매우 짧은 시간에 완 성할 수 있도록 스텐실 기법을 자 주 이용하곤 합니다. 그의 한 작품 에 등장하는 글귀는 그의 당돌함 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SORRY! The lifestyle you ordered is currently out of stock. 또 키스 해링(Keith Haring)3 의 경우는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 는 히트 작가로 수많은 벽화, 드로 잉, 디자인, 조각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이 들어간 티셔츠나 포스터 등의 상업상품들도 많이 남기며

1

넓게는 야외전시, 거리 퍼포먼스, 해프닝, 포스터, 낙서, 벽화 등 개방된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행 하는 예술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1930년대 멕시코의 벽화주의를 선두로 1970년대에 개념미술 작가들이나 플럭서스 그룹이 거리에서 행한 퍼포먼스, 거리의 게시판이나 전광판을 이 용한 미디어아트, 정치적,사회적 선전을 목적으로 한 정치예술, 1980년대의 그라피티 아트(낙서 미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출처 - 두산백과]

2

www.bankst.co.uk에서 뱅크시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그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진다면 그가 만든 영화인 [선물가게를 나와야 출구]를 추천한다.

3

www.haring.com에서 키스 해링의 다양한 정보들과 작품을 볼 수 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술은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접근 가능 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 고 작품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활동의 시발점이 뉴욕지하철 의 빈 광고판이었다는 점에서도 그의 그러한 가치관이 드러납니 다. 당시에 수십 차례 경찰에게 붙 들려갔다고 하는군요. 그의 트레 이드 마크 중에 하나인 눈이 세 개 인 캐릭터는 평소 밑그림 없이 그 림을 그리는 그의 자유로운 작업 방식으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이었 는데 얼굴을 그리고 났더니 눈과 눈 사이가 너무 멀어 하나 더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길거 리 예술가 질다(Zilda)는 먼저 실 내에서 그림을 완성해 놓고 거리 의 외진 곳, 쓰레기가 모여진 구석 등의 벽에 붙이곤 사라집니다. 그 의 작품은 사람들에 의해, 혹은 비 바람에 금방 헤지게 되지만 그가 이러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우연히라도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 들이 가지게 될 감동을 극대화시 키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르 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주로 천사 그림을 그리는데 쓰레기더미와 후 미진 골목에서 고풍스럽게 그려진 기도하는 천사의 모습은 성스러움 을 느끼게 합니다. 내 오랜 친구 D군에게 그림을 한 장 보냅니다. D군과 D군의 고 민을 듣고 난 뒤에 저도 모르게 곰

곰이 생각하며 보게 된 벽화입니 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으련지 요. D군, 고민하는 당신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렇지 만 말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데,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능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 국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놀라운 우리들의 지 난 모습들을 그냥 조금 더 어여삐 여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지금 바 로 당장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 어도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씩 하 고 싶은 쪽으로 선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Column] 정세랑의 말랑몰랑_7

재밌는 생물이지만, 좋은 생물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 됐고 밴드 하는 놈 들만 안 만나면 돼. 우리 와이프가 뭐라는 줄 알아? 나만 보면 물끄 러미 ‘내가 그때 왜 너 같은 놈 을……?’ 한다니까.” 30분에 걸친 연애상담에 해답 을 내리며 시인이자 작곡가인 S선 생님이 말했습니다. ‘밴드 하는 놈’ 자리엔 밴드 대신 어떤 예술 분야 를 대입해도 되겠습니다. Preoccupied. 그보다 나은 단어는 찾을 수 없 을 것 같습니다. Occupied는 비행 기 화장실 같은 데서 자주 보셨죠? 안에 누가 들어 있을 때요. 거기에 pre가 붙으면 이미 들어가 있었다, 정도가 되겠네요.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생각・걱정에) 사로 잡힌’이랍니다. 그러니까 안쪽이 이미 꽉 차 있어서 밖에 누가 서 있 어도 몰라요. 어쩔 수 없이요. 창작 자들은 대개 그런 사람들이며, Preoccupied 상태는 일종의 장애 에 가깝습니다. 저는 또 왜 이런 내 부고발을 하고 있을까요. 언제나 머릿속에는 세 편의 장 편에 다섯 편 안팎의 단편 아이디 어들이 굴러다닙니다. 조용히 굴

러다니는 게 아니라 난잡한 머릿 속에서 ‘별의 커비’처럼 점점 더 커 지고 시끄러워집니다. 이 안쪽의 괴물들은 건강에 굉장히 좋지 않 아서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어 주 기적으로 뽑아 내보내지 않으면 불면이 오는데다가 깨어 있는 시 간까지 망쳐버립니다. 눈을 뜬 채 로 두 시간쯤 스킵되어버리지요. 한 자리에 느슨한 자세로 앉아서 극도로 무감각하게 안쪽에 갇히는 인간들이라는 건데, 그런 사람과 사는 것은 제가 열심히 설명하지 않아도 끔찍할 것 같지 않나요. 머 릿속의 진저리날 정도로 이기적인 괴물들이 저에게는 이야기고 다른 분야 사람들에겐 멜로디고 이미지 겠지요. 이름은 다르지만 결국 구 상(構想)이고 거대한 구상(球狀) 의 부비 트랩입니다. 이토록 사로 잡힌 상태라면, 생활의 자잘한 모 든 일들이 자동 운전 모드로 이뤄 지게 되는데 그러면 당연히 실수 가 많아집니다. 물을 쏟고, 약속을 잊고, 생일을 놓치고, 코트를 세탁 소에서 영원히 찾아오지 않지요. 고백합니다. 저는 종종 남자친구 의 존재를 까먹어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 랑하는 부분이 너무 일부일 뿐이


라서입니다. 그것은 마치 제가 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한 도시라는 느 낌, 아주 거대하면서도 무력한 느 낌입니다. 아마 저보다 스케일이 큰 작가들은 하나의 별, 하나의 우 주겠지요. 인물에 집중하는 작가 들이 더 심할지 세계에 집중하는 작가들이 더 심할지는 판가름이 나지 않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전 자가, Preoccupied 상태가 심한 건 후자가 그럴 것 같아서요. 어느 쪽이나 추천하고 싶지 않은 연인 들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머릿속의 도시 안에서 자꾸 사랑 에 빠지죠. 끊임없이 사랑에 빠져 도 비난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픽션이잖아.” 만약 당신의 창작자 연인이 대 수롭지 않게 말한다면, 그는 나쁜 작가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꿈을 꿀 때도 촉 감과 냄새, 온도까지 느끼는 종 (種)입니다. 머릿속의 존재를 완전 히 실감나게 빚고 사랑하지 않는 다면 이야기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가 아니 더라도 어떤 순간만큼은 그 인물 을 당신보다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 관계는 현실 세계에서만큼이나 진짜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연 락하는 것을 잊을 겁니다. 함께 있 을 때도 얼굴 너머 뒤쪽으로 쭉 빨 려들어가버릴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해도 나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없어.” 어느 날엔가는 뻔뻔스러운 얼굴 로 말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렇 게 말해주는 축은 조금 낫다고 생 각합니다. 이 최악의 연인들은, 그러니까 그걸 하려고 태어났습니다. 태어 나서 해야 할 일을 안다는 건 본인 에겐 축복이고 파트너들에겐 죽을 맛입니다. 당신에게 우선권이 없 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것. 그걸 알면서도 떠나지 않은 창작자의 연인들에게 지금이라도 도망치라 고 말하고 싶은 마음과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선하다고 말하고 싶 은 마음이 교차합니다. 우리는 재 밌는 생물들이긴 하지만 좋은 생 물들은 아니니까요. 당신들의 보 살핌을 필요로 하면서도 소중히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만하고 배 은망덕합니다. 도시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우리 를 사랑해주면 좋겠습니다. 어떤 날은 지독하게 아름답고, 다른 날 은 말도 안 되는 교통 체증으로 미 치게 만들고, 스카이라인이 빛나다 가 하수도가 범람하고, 유네스코 문화재와 환락가가 지척인, 쓰레기 매립장 위에 공원이 세워지는 그런 날마다 변하는 경이로움을 대하는 방식으로. 추하고 추하다가 가끔 빛나는 천만 명의 도시 서울을 보 듯이. 일관되고 전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지 말고 사랑한다면 조금 편 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우주를 사 랑하는 방식도 괜찮을 것 같습니


다. 태양과 암흑물질을 똑같이 사 랑하는 그런 방식으로. 아닙니다. 저는 또 거짓말을 하 고 있습니다. 거짓말 면허가 있으 니 습관적입니다. 업계의 친구들 을 배신하고 단 한 번 진실을 말할 래요. 역시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합니다. 당신 옆에 무해한 듯 노닐고 있는 그 사람은 상당히 유해합니다. 버리고 가야 합니다. 로맨스를 쓰는 작가를 만 난다 해도 당신은 호러 소설 안에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아마 창작자 끼리 사랑에 빠진다면 그건 세계 의 충돌일 거라고요. 더 아름다운 것으로 융합하기도 하겠지만, 그 보단 한쪽이 완전히 파괴되고 삼 켜지지 않을까 잔해가 될 사람들 을 걱정합니다.


[Review] 소개

책 소개

[뤼미에르 피플] _장강명, 한겨레출판, 2012 [뤼미에르 피플]은 신촌에 있는 가상의 빌딩 ‘뤼미에르 피플’을 배 경으로 집필된 열 편의 연작소설 을 수록한 소설집이다. 하지만 각 단편은 같은 건물을 배경으로 하 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 다. ‘박쥐 인간’, ‘마법매미’, ‘쥐들 의 지하 왕국’등 목차에 실려 있는 단편의 제목들만 봐도 굉장히 다 양한 이야기들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뤼미에르 피플]은 굉장히 다양

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기자 출신인 작가임을 나타 내는 것 같은 정확한 신문 기사,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입장에서 동 시에 풀어놓는 2단 구성, 트위터 서비스를 그대로 옮겨 온 문단 구 성 등은 소설이 다루고 있는 세계 를 지면 바깥으로 확장한다. 또한 각각의 단편은 서로 연결되어 있 기도 하고 한 단편이 다른 소설들 을 액자 구성으로 품기도 하는 등 [뤼미에르 피플]은 소설 내적으로, 또한 외적으로도 그 경계가 모호 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뤼미에르 피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메 시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상 당히 많은 정보를 추가하지 않으면 어떤 의미를 읽어내기 난해한 작품 마저 있다. 때문에 [뤼미에르 피플] 은 가상의 빌딩 ‘뤼미에르 피플’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야기이기 위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뤼미에르 피 플’을 관찰하면서 얻은 이야기들을 작가가 소설로 기록한 것 같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이런 이유 때문 에 다시 한 번 [뤼미에르 피플]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소설을 위해 동원된 가상의 공간도 아니며, 현 실에 있는 특정 공간이라고 하기에


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이런 모호함이야말 로 [뤼미에르 피플]의 독특한 성 격을 설명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 니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으며 동 시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이야 기가 가지는 가치라고나 할까.

[불교 SF 단편선] _박성환, (자가출판), 2012 독립출판이라는 역동적이고도 촛불 같은 생태계에 발끝을 이제 막 담군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는 데, 사람들이 용감하게 독립출판 을 시도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 이 아니라 그것이 하고 싶고, 또 그러지 않으면 참을 수 없기 때문 이다. SF 작가로 활동해온 박성환 작가의 [불교 SF 단편선] 역시 비 슷한 맥락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생 각한다. 혹은 작가의 말마따나 ‘불 교 SF가 안 팔리기 때문’이거나. 단편과 엽편, 그리고 영화 시나 리오로 구성되어 있는 [불교 SF 단편선]은 작가의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활동을 총괄하는 작

품집이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책 이기 때문인지 각 작품마다 작가 가 직접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 아쉬운 점, 생각하는 점 등을 코멘 트로 달아놨는데 이코멘트가 작품 을 읽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다. 작품을 먼저 보고 코멘트를 나 중에 보는 쪽을 추천한다. ‘불교 SF’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 에 대해서는 작가의 말을 통해 어 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단 점이라면 불교에 대해 기반 지식 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불교 SF 강좌가 아니라 작 가의 생각을 옮긴 작가의 말이라 는 걸 감안하면 이해할 만 하다. 하지만 역시 조금 더 친절한 설명 문이 있어도 좋았을 것이라 생각 한다. 책 외적인 생각을 더하자면, 어 째서 다양한 활동을 해 온 작가의 활동을 정리하는 의미 있는 책이 출판 시장을 통하지 못하고 개인 제작의 수순을 밟게 되었을까? 그 것은 말하자면 출판 시장의 축소 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SF 소설 의 비대중성과도 관련이 있을 것 이고, 불교 SF라는 생소한 장르와 도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우선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내비치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이 책은 조금은 더 좋은 대우를 받아도 좋은 책이다.


[오픈]

_김이환, 폴라북스, 2013 정말 솔직하게, 이 책을 읽고 나 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을 전한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지금까지 장편 을 쓰고 있었던 거지?’열 편의 ‘상 자’로 구성된 이 단편집은 당장 열 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멋지다. 몇 몇은 수려하기까지 하다. [오픈]은 소원을 들어주는 흰 상 자가 나오는 책이다. 술을 진탕 마 시고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도 나 오고, 크리스마스를 맞은 아이도 나오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노인도 나오고, 파산 위기에 빠진 남자도 나온다. 이들이 어떤 소원 을 빌지는 각자의 상상 및 즐거운 독서에 맡기겠다. 다만 말할 수 있

는 건, 사람의 소원이란 생각보다 쓸데없고 무책임하다는 것 정도다. [오픈]의 특징은 한 권 안에 다 양한 스타일의 글이 포함되어 있 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다른 작품 들이 섞여있어 방심할 수 없고, 주 인공이 달라지면 분위기도 같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맛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 장이 바뀌면 당황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열 편 중 한 편은 당신 마음에 쏙 들 것 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오픈]의 장점이다. 원래는 소원과 소원을 들어주는 상자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이 야기를 해볼 예정이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하는 데, 그런 이유로 예비독자들의 기 쁨을 뺏으면 안 될 것 같다는 확신 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이 이상의 소개는 능력 부족으로 인해 불가 능할 것으로 보인다.


[Review] 리뷰

부엉이 소녀 욜란드_라키난 [부엉이 소녀 욜란드] _박애진, 폴라북스, 2013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인간의 아이지만 부엉이 아래에서 자라난 소녀 욜란드의 이야기입니다. 온 부엉이의 어머니인 거대한 산솔부 엉이 그리마의 보호 아래 벌판에 서 자라났지요. 다른 부엉이 새끼 들이 그렇듯, 사냥을 하고 둥지를 만들면서요. 그래서 인간 세상에 나와서도 옷을 벗어던지거나 나무 위에서 잠들거나 합니다. 꾸며놓 으면 매우 아름다운데도 말이에 요. 그녀의 이야기에는 마녀의 저 주가, 사랑에 빠진 영주의 아들이, 왕의 자질을 가진 기사가 있습니 다. 물론 모험과 관계맺기도 빠질 수 없죠.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마음에 드실 법 한데요. 제 가 쓴 것만큼 오글거리는 이야기 는 아닙니다. 달짝지근한 즐거움 을 바라는 사람은 분명 통치가 엉 망일 때의 비참한 마을사람들 같 은 건 원하지 않겠죠. 할리퀸 로맨 스를 원하는 사람은 염장질이 부 족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판타지(욕망에 충실한)를 원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

는 사람이라면 호감이 갈 걸요. 모 험담이든 로맨스든 성장물이든, 어느 쪽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 좋 아하시는 대로 읽어주세요. 이 책 안에는 분명, 사람들이 동 화를 다시금 읽을 수밖에 없는 그 런 반짝이는 요소들이 녹아있습니 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다스러운 까마귀나 퉁명스러운 고양이 등이 매우 매력적이고 좋았는데요. 동 물들이 지닌 마법은 언제나 친숙 한 신비스러움을 낳기 마련이죠.


중간에 이야기가 환상성이 가장 짙어질 때는 잔인함과 기괴함이 전면에 등장하는데요. 그것마저도 두근거림으로, 모험으로 다가옵니 다. 동화에 종종 등장하는 과장된 표현이나 마술적인 규칙 때문이었 던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동화책 을 사모으는 저에게는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표지도 참 좋 았고요. 동화적인 요소를 여럿 차용하면 서도 [욜란드]는 동화의 전형적인 틀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점이 가 장 큰 장점이겠는데요. 특히 주인 공들이 곧잘 마주치게 되는 저주 와 운명이란 것을 어떻게 받아들 이는지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닥 반전이랄 만한 건 없습니다 만, 전개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에요. 다만 ‘틀’이란 그만 큼 재미를 보장하기 때문에 전형 적으로 굳어진 게 사실이고, [욜란 드]는 그런 점에서는 매력이 부족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는 읽는 사람이 마음에 드는 장면을 얼마 나 캐내느냐 하는 거겠군요. 부엉이는 지혜의 상징인 미네르 바의 부엉이로 유명하죠.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아테네)의 동물인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날개를 편 다는 유명한 말 때문에요. 이 이야 기의 부엉이들은 그림자에 잠겨들 어 ‘길’을 볼 수 있습니다. 부엉이에 게 자란 욜란드도 마찬가지고요. 행동하는 대신 사색하는 주인공이 라는 점에서 어울리네요. 한국에서

부엉이는 재물과 부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먹이를 쌓아두는 습성 때 문에 ‘부엉이 살림’ 같은 말도 생겼 고요. 또 부엉이는 독수리 같은 맹 금은 아니지만 엄연한 사냥꾼이자 포식자이기도 하죠. 절벽에서도 둥 지를 트는 강인한 새고요. 이런 점 들을 생각해 볼 때 ‘부엉이 소녀 욜 란드’란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Review] 리뷰

7인의 집행관_라키난 [7인의 집행관] _김보영, 폴라북스, 2013 서점에서는 [7인의 집행관]을 추 리소설로 분류했다. 저자에게는 한국 작가 중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라는 평이 붙어있긴 하 지만 이 책의 장르를 특정할 필요 는 없을 것 같다. 굳이 추리소설이 라고 한다면 이 이야기는 탐정이 없는 종류의 난제다. 이야기는 영 문 모를 소리로 시작해서 복잡한 해결로 끝난다. 일목요연하게 정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따로 없다. 그러므로 독자가 스스로 열쇠를 주우며 전개를 따라가야 한다. 그 만큼 읽는 이를 완전히 붙들어매 며,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다. '집행관'은 사형집행관이다. 사 형당할 사람은 이야기를 이끌어가 는 화자, 남자다. 그는 6개의 세계 에서 6명의 집행관에게 6번 사형 당해야 한다. 한번으로는 부족할 만큼 대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집 행관들은 각각의 이유로 남자를 저주하고 있으며 그래서 원하는 대로 남자를 죽일 권리를 받았다. 세계를 만들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위치에 남자를 배치하는 것이다.

남자는 각 세계마다 기억을 잃고 (집행관이 설정한 대로) 다른 사람 이 되기 때문에, 남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다른 이들(주로 집행관 들)은 각기 특징을 딴 이름이 붙는 다. 별명이라고도 할 만하고, 성질 전체를 딴, 누구든 ‘그 사람답다’고 할만한 이름이다. 예를 들면 “소심 한 자”가 그렇고 “미인”이 그렇다. 세계가 달라져도 이 인상은 변하 지 않는다. 우리가 세월이 흘러 변 모해도 여전히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주변인들도 그렇게 받아 들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도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도 마찬가지로 이 름이 있어야 한다. 남자는 계속 남 자이고,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조 금씩 달라지더라도 그를 바로 그 사람이라고 드러내는 특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꺾이지 않는 강 인함, 다른 이들에게 품은 감정, 세치 혀로 판을 뒤집는 말솜씨, 혹 은 배배 꼬인 성깔 등등을 대표하 는 것 말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내가 나라 면"이라는 내기다. 남자가 남자로 남을 수 있는가, 그렇게 만드는 것 은 무엇인가 하는 얘기다. 오디세 우스의 배라는 딜레마가 있다. 수 선을 거듭해 처음 건조됐을 때의 부품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 어도 그 배는 여전히 같은 배인가 하는 문제다. 사람 역시 세포가 죽 고 정신이 성장하며 다른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자신이 여전히 자 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 아상/정체성이고, 그건 크게 기억 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 어도 나는 나로 남을 수 있을 것인 가, 다른 사람의 기억이 심어지더 라도 자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 가. 만약 인간이 기억으로 살아있 는 것이라면 기억 측의 승리다. 그 렇기에 주인공 남자는 내기를 한 다. “내가 나라면,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잃고도, 내가 내 근원에 서 나온 나 자신이라면, 내가 누군

지도 모르는 채로도 나를 유지한 다면.” 그렇다면 남자의 승리다. 당연히 남자의 적은 '나'를 확신 하지 못하게 만든다. 남자는 뛰어 난 거짓말쟁이이고, 남자의 적은 훨씬 위력적인 거짓말이다. 책이 제시하는 명제에는 가짜가 있다. 집행관 중에, 사형 제도에, 죽어야 하는 이유에, 혹은 죽음의 개념에 말이다. 수많은 말 사이에 무엇을 믿어도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다 만 진짜의 파편을 솜씨좋게 엮은 '말'은 가장 큰 기만이 될 수 있다. 남자의 싸움은 의식과 말의 싸움 이다. 이러한 내용은 활자로 표현되기 에 더 매력이 돋보인다. [7인의 집 행관]이 책이라서 좋은 점이다. 상 영시간이나 제작비에 구애되지 않 고 원하는 만큼 길게 고민할 수 있 다는 점도 책이라 갖는 장점이겠 는데, 그래서 주인공의 싸움이 더 진득한 듯도 하다. 추리소설은 여 름이 제철이라지만 이건 겨울이 어울린다. 밤이 긴 계절 말이다. * 책을 읽다가 단서가 뒤죽박죽 이라 헷갈린다면, ‘기억’과 ‘남 자’와 ‘나’는 다른 층위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는 게 좋다. 세계가 만들어질 때마다 새로 만 들어져서 어리둥절하는 게 남자 고, 사형을 당해야 하는 본체인 죄 인이 '나’다. 굵은 글씨가 본체가 하는 말이다.


[Review] 리뷰

표백_라키난 [표백] _장강명, 한겨레출판, 2011 20대의 절망, 30대의 피곤함에 서 나온 책이다. 청춘 대신 죽고 싶다는 말을, 멘토 대신 엿 먹으란 말을 더 친숙해할 사람들에게 권 한다. 다만 책을 읽더라도 뭔가 나 아지는 것은 없다. [표백]에 따르면 지금의 세상은 전부 하얗게 표백된 세계, 그레이 트 빅 화이트 월드다. 할 만한 일 들, 가치 있는 것들은 이미 앞 세 대가 차지했다. 전쟁도 혁명도 없 다. 규칙은 이미 정립되었고, 새 세대는 할 일이 없다. 능력 있는 젊은이는 상층부의 트랙을 걸을 수 있지만 그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야심을 품거나 이름 을 남길 수는 없다. 개인은 절망하 지만, 그 절망은 구조에 기인하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화자인 남자는 관찰자다. 혼자 였으면 적당히 고민하며 그저 그 런 인생을 살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여자에게 선택되었다. 그녀 는 거대한 테러 계획을 세우는 중 이었다. 자살을 통한 테러다. 과거 커트 코베인이 자살을 통해 간접 적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끈

것처럼,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어른들을 엿먹일 계획이다. 아무 리 미친 짓이어도 사람들이 동조 하기 시작하면 무시할 수 없는 일 이 되는 점을 이용한 계획이다. 장래를 통째로 내던지는 자살이 야말로 개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선택된 사람들, 그녀의 계획을 보조하고 자살선언 으로 파문을 퍼뜨릴 사도들은 앞날 이 탄탄대로일 때 자살해야 한다. 빚이 있다는 둥 다른 이유가 있으 면 시시한 죽음으로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대기업에 정직원 으로 채용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 래야만 자살시위가 순수하게 시위 로 먹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잘 살고 싶다는 바람에서 나온 행동이 죽음이라는 건 아이 러니한 일이다. 여자는 남들이 부 러워할 만큼 예쁘고, 영리하고, 사 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혼자라면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 충분히 성공하여 빛났을 사람이 제일 먼저 죽음에 앞장섰다는 점 도 아이러니다. 이미 안정된 하얀 세계에서는 성공이라고 얘기하는 거 해봤자 잘날 수 없으니까. 사람 들에게 기억될 수 없으니까. 소리 내서 두려워할 수 없는 불안에 계 속 시달리다 그저 그런 사람으로 시들어가느니 두고두고 회자될 가 능성에 걸고 도박을 했다. 공포는 뚜렷한 위험에 대해, 불 안은 형태 없는 위험에 대해 품는 감정이다. 불안은 원인이 없기에 더 끈질기고 더 전능하다. 이기는 방법은 무덤덤하고 태평하게 안주 하는 것이다. 죽을 거라는 걱정 없 이 놀이기구에 올라타듯. [표백]은 한겨레문학상 17대(?) 수상작이기도 하다. 16대 수상작 이었던 [굿바이 동물원]은 세상이 하도 먹고살기 어려워 사람보다 동물이 더 살만하다는 이야기였 다. 어떻게든 하려고 해봐도 어떻 게도 할 수 없다는 절망. 전후에 전쟁의 상처가 그랬듯, 지금은 절 망과 불안이 문학적 키워드다.

그럼 문학에서는 어떻게 답을 하고 있나. [동물원]의 주인공은 결혼을 했다. [표백]의 주인공은 하급 공무원 일자리를 잡았다. 절 망을 주로 다른 작가, 김사과의 주 인공이 절망 앞에서 분노를 내뿜 었다면, 장강명의 주인공은 권태 로워졌다. 똑같이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웃기게도 이토록 팍팍한 이야기가 '힐링'보다 더 읽음직하 고 더 진실돼 보인다. 심지어 더 재미있다. 남 일 같지 않아서다.


The End And... Need Something More?

Then See You Next Time!


텍스툰:Textoon 2013.03 Vol.13 2013년 2월 28일 초판 제작 2013년 3월 1일 배포 제작 | 창작집단 몽니 편집 | 송한별 기획 | 성우창, 정정숙, 현동한 집필 | 김의성, 라키난, 송한별, 이고은, 정세랑, 정정숙, 한시훈, 희령 표지 | 송한별 홈페이지 | 현동한 주소 | http://textoon.co.kr 메일 | textoon@naver.com 트위터 | @textoon_desk


텍스툰:Textoon Vol.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