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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告

본 작품은 다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있을 수 있으니 19세 미만은 구독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본 작품은 픽션이며 실존하는 인물이나 지명, 사건 및 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사상 등은 작가와 일절 관련이 없음을 미리 알립니다.


나비애담

- 수질의 녕 (水蛭之濘)


~水蛭之濘~ 수 질 의


자 니 자 눈 자 에 자 서 어 눈 서 물 자 이 자 나 우 면 은 지 내 말 고 눈 어 에 서 서 자 피 가 자 난 다 ․ ․ ․


목 차

· 서 장 …………………… 007 쪽 ∼ 035 쪽

· 제 1장 …………………… 036 쪽 ∼ 193 쪽

· 제 2장 …………………… 194 쪽 ∼ 417 쪽

· 제 3장 …………………… 418 쪽 ∼ 546 쪽

· 종 장 …………………… 547 쪽 ∼ 585 쪽


서 장

꿈을 꾸었다. 온통 검은 색인 꿈이다. 답답하다. 가능한 온 힘을 다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어 본다. 허나 잘 되 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다. 구역질 하듯이 기침을 했더니 뜨거운 것이 나왔다. 뜨겁다. 속이 뜨겁다. 온통 뜨거운 것뿐이다. 머리도 뜨거워서 생각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괴롭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괴롭다. 그러나 발버둥 칠 힘도 없다. 숨쉬기조차 힘들다. 무기력해진다. 눈을 뜨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검은 색이 이글거리고 있다.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들 같아서 징그럽기만 하다. 닿는 것을 모조리 휘감아버린다. 모든 것을 삼킨다. 나는 그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분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왠지 매우 분하게 느껴졌다.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를 찾는 듯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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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빛, 검게 물든 세상 속에서 홀로 푸르게 제 색으로 빛나고 있는, 나비 날개. 은은한 푸른빛, 나는 그만 정신이 아늑해져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나고 만다. 항상, 이렇게.

“으음….” 눈꺼풀이 무겁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고 하지만 심한 덜컹거림 때문에 잠 이 들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눈을 뜬다. 버스는 아직도 굉음을 내며 길을 달리고 있었다. 갈수록 점점 더 차체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꽤나 험한 길로 들어섰나보다. 창밖을 보니 그 생 각은 더 확실해졌다. 아직 저녁 시간 즈음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도 밖 은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 딱히 별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가로등만이 보일 뿐. 이러면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나는 창문을 거울삼아 내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물 다 빠진 애매한 금발 염색, 네모난 안경, 대충 걸쳐 입은 남방…. 거기에, 잔뜩 찡그린 표정 까지. 안 그래도 딱히 좋은 인상은 아닌데 표정까지 그 모양이니 내가 보기 에도 정말 가관이다. 하지만 잠이 덜 깨서인지 피로가 영 가시질 않는 걸 어쩌겠나. 아, 목이 뻐근하다. 자는 자세가 안 좋았던 걸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창문에 기댔 다. 잠에서 막 깬 탓인지 창문이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예리한 차가움도 곧 체온에 휩싸여 사라지고 말았다. 멍하니, 어둡기만 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밖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 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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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건, 꿈…?” 흐릿한 일련의 영상들이 조각조각 난 채로 망막을 떠돈다. 무엇이었지, 무 슨 꿈을 꾼 거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꿈 자체는 생생했다. 마치 내가 시공을 넘어 그 어떤 곳에 정말로 갔다 온 것처럼. 그러나 내용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본래 나는 꿈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니다. 그냥 꿈은 꿈이라고 생각하기에 기억나면 기억나는 대로, 잊어버렸다면 잊어버린 대로, 항상 그 렇게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번엔 왜인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가 계속 신경 쓰이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 흔히들 말하는, 꿈을 이어서 꾼다는 게 바 로 이런 걸까. 어쨌거나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꿈 의 내용을 좀처럼 기억해낼 수 없었다. 꿈이란 건 생각해내려고 조바심을 내면 낼수록 더욱 생각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얘기하셨던가.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조 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물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흙먼지마냥 중구 난방이던 꿈의 파편들이 얌전히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흐릿한 기억 속에서, 강렬하게 빛을 내는 몇 개 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의식이 그 몇 개의 파편들을 건져 올리려는 순간…. “아, 다 왔나.” 덜컹, 버스가 멈춰 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객이 없어 비어있는 좌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타고 있는 사람도, 내릴 사람도 나 혼자. 터벅터벅 버스에서 내려 땅에 발을 붙이자마자, 버스는 그 특유의 엔진 소리와 함께 길 너머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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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 나의 고향에 몇 년 만에 돌아오게 된 것일까. 내가 어렸을 때 살던 고향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가득한 그곳은 숲 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이었다. 항상 풀 냄새가 그득하였으며 언제든 나 뭇잎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청년이 되기도 전에, 소년인 채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 었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어린 시절의 기억 전체가 지우개로 뭉개버린 것 마냥 흐리멍덩해서 아무 것 도 선명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내가 그곳을 막 떠나기 전의 기억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었으니 유 쾌할 수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 적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길. 산의 밑동을 둘러싸듯 이어진 도로에는 가끔 가다 한두 대의 차가 오갈 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과 나무 그리고 가로등과 전봇대 정도만이 보일 뿐. 허허벌판이란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곳이 과연 또 있을까. 길을 걷고 또 걷고, 그렇게 한참을 걷고서야 나는 표지판 하나를 겨우 발 견할 수 있었다. 거기엔 익숙한 지명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 언젠가 들어봤 음직한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며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 어보았다. 아버지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렸던 그 이름들. 그 탓일까, 들은 지 가 오래 되어 벌써 잊음직한 이름들인데도 아주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따라가다 보니 조그만 시내가 나왔다. 네다섯 개의 도로가 한데 모인 형상이라 시내의 중앙은 다소 복잡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 다. 그래도 여러 길이 모여서 통행량이 많은 탓일까 찻집이나 빵집 등이 몰 려있는 등 이 주변의 다른 곳보다는 꽤나 번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내를 벗어나 목적지를 향해 몇 걸음 옮기자 주위 는 다시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내 밖은 여전히 가로등이나 몇 개 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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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성 놓여있을 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둡고 조용 하다. 이따금 빠르게 지나쳐가는 차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멍하니 주위를 보 니 어쩐지 내가 다른 세계에 와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작정 걷기 만 하는 내 모습은 마치 꿈속을 걷는 내 모습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졌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둑한 길은 현실이 아닌 꿈의 풍경과 더 닮아 있었다. 그렇다, 꿈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버스에서 꿨던 꿈이 생각났다. 그, 최근 이 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꿈. 그 꿈의 내용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모조리 잊 혀져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단 한 가지 절대로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우륜….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 검은 색으로 물든 세상. 그 장면의 한 가운데에는 푸른빛이 영롱한 커다란 나비 날개가…. 대체 무슨 영문으로 계속 그런 꿈을 꾸는 걸까.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어느 새 원래 목적지로 했던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을이라고는 해도 워낙 크기가 작아서 별 다른 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 좁아진 도로에 집들이 간간히 들어서있는 것 정도. 그마저도 모든 집이 멀쩡한 건 아니었고 몇몇 집은 폐가나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가야할 곳, 내가 살던 고향은 이 마을에서도 조금 더 안쪽에 있는 깊숙한 산속에 있었으니까. 그곳은 이 마 을에서 그리 멀지는 않으나, 들어오는 길이 차가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로 좁은데다가 상당히 외진 곳에 있기도 해서 보통사람들은 잘 찾아오지 못하 는 곳이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그 길을 놓쳐버리 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 길로 발을 옮기자마자 거친 모래 알갱이가 신발과 부딪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갈수록 길은 험해지고 날은 어두워져 갔다. 문득 위를 올려다 보니 하늘이 나뭇가지로 가득했다. 그렇게 한참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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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도착하지 않으려나 싶었던 때…. 갑자기 푸른빛을 내는 나비가 눈앞을 슥 지나쳐갔다.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그 푸른빛. 그런 푸른빛을 내는 나비 자체는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반딧불처럼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을 내는 나비가 야생에 존재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순간 나는 내 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기까지 하였다. 그렇게 내 시선 끝에 한동안 머물던 나비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날갯짓하 다가 길옆의 조그마한 숲으로 날아갔다. 자세히 보니 사람 하나둘 겨우 거 닐 법한 폭의 샛길이 있었다. 산허리를 쭉 둘러가는 것 같은 그 샛길의 저 편에 아까 전에 보았던 푸른빛이 머물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그 나비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허공에 팔자를 그리며 날갯짓하였다. 마치 어 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나비. 나는 이상하게 그 나비에게 마 음이 동하였다. 어느 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 나비를 따라 조그만 샛길에 들어서있었 다. 나비는 더더욱 깊은 산속으로 날아가 나를 부르듯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였다. 원래 가던 길을 조금만 더 따라가면 집에 도 착할 텐데, 고작 나비 한 마리에게 이끌려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를 밤길 을 들어가 볼 필요가 있는 걸까. 순간,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 신묘한 나비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 나, 지금은 빨리 집에 들어가서 눕고 싶다는 생각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 래서 결국 나는 발걸음을 돌리기로 하였다. 그 때였다.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꿈속에서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익숙한 목소리….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소리가 들려온 쪽엔 아무 것도 없었다. 지나 칠 정도의 정적만이 숲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환청일까? 그 사이 내가 꿈이라도 꿨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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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졌다. 그 목소리는 분명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임이 틀림없었으니 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과연 누구이기에 나 의 이름을 부르는 걸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져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그 푸른 나비는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양 여전히 저 안쪽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나비를 따라 발걸음 을 돌렸다. 나비를 따라, 갈수록 좁아지는 샛길을 따라 걸었다. 점점 숲은 울창해지고 길은 가팔라졌다. 그 와중에 자갈과 커다란 바위들 은 저들끼리 서로 뒤엉켜선 괜히 내 발목을 붙잡았다. 눈앞엔 온통 나무들 뿐이라 그 모습이 마치 조그만 동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깜깜한 길을 푸른 나비만 따라 걷다가,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 앞에서 노랫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꿈에서 들어보았던 그 목소리였다.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 가슴에…. 자장가를 부르는 듯이 편안하면서도 어딘지 앳된 목소리.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적막한 산을 채워간다. 길이 좁아질수록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비가 내 걸음을 재촉한다.

떠나고 안 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나…. 풀과 나무를 비집지 않고서는 발 딛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은 샛길. 거의 몸을 밀어 넣다시피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앞쪽으로 억지로 몸을 밀어 넣자 지근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느껴 졌다. 아, 순간 직감했다. 여기가 이 샛길의 끝자락이려니 하고.

아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바로 이 앞이다. 금방이다. 푸른 나비가 눈앞의 수풀을 넘어 날아간다. 마 치 비밀을 품은 베일 같은 그 수풀 너머로 날아간다. 주저 없이, 베일을 젖힌다. 그러자 눈앞에 펼쳐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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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길에서 벗어나니 시야가 확 트였다. 눈앞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자 그마한 너와집 하나와, 그 옆으로 졸졸졸 흐르는 조그만 개울이 보였고, 개 울가엔 그곳의 자갈들로 쌓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 키 정도 높이의 돌탑들이 셀 수도 없이…. 그리고 그 돌탑들 사이엔, 꿈에서나 볼 법한 푸른빛 나비 날개가…. 그 커다란 한 쌍의 날개 사이로 치마저고리 비슷한 것을 입은 소녀가 보 였다. 살갗이 살짝 비치는 새하얀 저고리에, 무릎이 언뜻 보일 정도 길이인 다홍빛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노랫말을 읊조리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바닥의 돌멩이를 하나씩 하나씩 주워 쌓고 있었다. 그때, 나를 이끌어주었던 푸른 나비가 그 소녀의 곁으로 날아갔다. 그 푸 른 나비는 그녀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더니 부채 흔들듯 부드럽게 날개를 살랑거렸다. 그 살랑대는 바람이 뺨에 닿아 간지러웠는지 그녀는 살짝 고개 를 돌렸다. 그리고…. 마치 꿈만 같은 밤에, 나는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때는 몰랐다. 이 작고 사소한 만남으로부터, 모든 것이 서서히 뒤틀려가 기 시작했음을…. 그렇게, 이야기는 다시금 시작되었다.

나무의 잔가지 사이, 자갈밭 돌멩이 사이, 여기저기 곳곳에 숨어있던 푸른 나비들이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동시에 날아오른다. 꽃잎처럼 흩날리는 나비 무리 가운데 한 소녀가 서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다. 정적 속에 개울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소녀는 조 금 놀란 듯 눈을 휑하니 뜨고선,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거 같긴 한데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아 괴로운 이 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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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위기.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보려고 머리를 굴려보는데…. “우륜…?” 그 순간,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이름이 그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 “뭐야, 너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묻고 싶은 심산이었겠지만…. “맞지, 우륜, 우륜 맞지?! 정말 맞는 거지?!” 그 소녀는 대답할 짬을 전혀 주지 않았다. 우륜이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 에 그 나비는 토끼처럼 총총 뛰어 우륜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갑자기 날 다람쥐 뛰어내리듯이 우륜에게 달려들었다! “자, 잠깐…!”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에 우륜은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떼어 내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그녀는 애초부터 떨어질 생각이 없던 것처럼 달 라붙어선 찰거머리마냥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미친, 당장, 떨어졋…!” 몸싸움이라도 하듯 잔뜩 몸부림치고 밀치고, 그렇게 온갖 난리법석을 떤 뒤에야 우륜은 겨우 그 나비를 떨어뜨려놓을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 황에 놀라고 지쳐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자 그녀가 다가오더니…. “뭐야! 그렇게 움직이면 내가 안아줄 수 없잖아!” 그딴 소리를 지껄이며 우륜의 성질을 박박 긁어대기 시작했다. “아,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우륜의 표정은 점점 썩어만 가나…. “괜찮아! 저기, 어, 그러니까, 우륜이랑 나랑은, 아∼주 특별한 관계니까! 그러니까 수줍어하지 않아도 돼! 어, 음, 그리고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고!” 그녀는 우륜의 심정 같은 건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아니,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게 대체 지금 상황이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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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저 머리통에 뇌가 들어있기는 한 건지도 의문이다. 덕분에 우륜 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는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잘은 몰라도, 이 대로 있으면 더 귀찮아질 거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륜은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그럼 이만.” 그러고는 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우륜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나 보다. 엄청난 속도로 걸어오는 소리가 땅 바닥을 울렸다. “그럴 리가아아! 이름, 우륜이 아까 이름 우륜 맞다 그랬잖아! 그러니까, 우륜은 내가 아는 우륜이 맞아!” 그렇지만 우륜도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뻔뻔하기로 따지자면 우륜도 만만찮던 모양이다. “동명이인이겠지.” “아니라니까! 나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그, 생긴 게 조금 달라지기는 했 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랑 완전 판박이인걸!” 어렸을 때? 그 말을 들은 순간 우륜이 멈칫했다. “어렸을 때라니?” “그, 왜, 알잖아! 어렸을 때 나랑 놀았던 거 기억 안 나? 여기, 여기서 자 주 놀았잖아! 잘 생각해봐, 진짜란 말이야….” 점점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우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녀가 하는 소리가 아무래도 거짓말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륜이 이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 은, 옛날 기억이 나지 않아 그 말의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리라. “아니, 기억 안나.” “그럴 수가….” “옛날 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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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아?” 그녀는 멍하니, 얼빠진 듯이 입을 다물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 하나도 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정말로, 하나도 빠 짐없이 다? 우리, 어렸을 때 있던 일이나, 아무튼 그런 거 하나도 기억 안 나?” “그래.” 그러자 그녀는 실망한 것 같은 얼굴로 축 늘어져버렸다. 참 속내를 알기 쉬운 표정이다. 하지만 곤란한 건 오히려 우륜 쪽이었다.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마냥 거짓말로 치부하기엔 어딘가가 찝찝했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냥 갈 길 가버리면 끝이긴 하나 저렇게까 지 늘어진 모습을 보니 약간은 측은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도 조금은 미안해지려는 찰나, 갑자기 그녀는 우륜의 손을 꽉 잡더니…. “괜찮아!” “어, 뭐?” 갑자기 밝아진 그녀의 표정을 보자 우륜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그러니까, 기억 못해도 괜찮아! 아니 오히려 잘 됐어!” “아니, 난 안 괜찮은데…,” “괜찮다니까! 그 뭐지, 결혼하면 인생이 새로 시작된다잖아! 우리도 늦지 않았어,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시작하면 되는 거야! 그래, 새로운 시작이야!” “…….” 순간 우륜은 자기 눈앞의 머리통을 쪼개서 뇌를 열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대체 사고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기에 이 상황에 뜬금없이 결혼 얘 기가 나온단 말인가. “아무리 우륜이 잊었어도 난 싹∼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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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다 알려줄게! 앞으로 잘 부탁해!” “그냥 부탁하고 싶지 않은데.” “에이, 사양하지 말고! 으으음, 그러니까아 뭐부터 해야 될까…” 그러는 동안에도 우륜의 표정엔 이젠 그냥 좀 보내달라고 말하는 듯한 기 색이 역력했다. “아!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그치? 저기, 내 이름은 이연이야! ‘이’ 자 ‘연’ 자 해서 이연! 알려줬으니까 이젠 잊어버리면 안 돼, 알겠지?” “…….” 우륜이 일부러 인상을 찡그려보지만, 그녀, 이연은 우륜의 반응 따위는 전 혀 아랑곳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줄줄이 풀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연, 이연이라…. 우륜은 그 이름을 듣고 기억을 좀 더 곰 곰이 떠올려보지만 딱히 기억나는 건 없었다. 애초에 기억나지 않는 건 그것뿐이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통째로 날아간 어린 시절의 기억, 그것만큼은 무엇을 해도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심 지어 왜 기억이 사라졌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물어볼 사람도 없 었다. 딱 한 명, 그의 아버지만을 제외하고. 그러나 그 아버지마저도 옛날 일을 물으면 그저 웃기만 했을 뿐이었고, 결국 그의 아버지는 옛날이야기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륜이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그 는 과거에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면, 지금 까지 자신이 품은 의문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연에게 물었다. “이연.” “응? 왜?” “내 옛날 일들,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그럼! 나 책은 잘 못 읽어도 우륜에 관한 거라면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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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억하는걸!” 대답에 또 쓸데없는 사족이 붙어있었지만 우륜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영 미더웠지만 그래도 기억을 찾는 데에 이연이 도움이 되긴 할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맞장구 쳐주면서 얘기를 끌어나가면 틀 림없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할 터. 게다가 요 근래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꿈. 꿈이라서 애매하기는 하 지만, 그 꿈에 나오던 푸른 나비 날개, 그건 분명 이연과 관련이 있을 것이 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애매하긴 하지만, 우륜이 보기에 이연 이 가진 날개의 푸른빛은 분명 꿈에서 보았던 것 그 자체였으니까. “난 꼭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에 왔어.” “알고 싶은 거? 으음, 으음, 그래!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뭐든 해줄 게! 뭐든지 물어봐봐!” 그렇지만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는 걸까? 무작정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하 는 건 너무 범위가 넓어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꿈 얘기를? 아니다. 이 꿈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걸 듣는 사람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우륜이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연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고 있었다. 빨리 무언가를 물어봐달라는 눈치다. 우륜은 그 모습을 보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오히려 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 모양이 었다. 애당초 별로 믿음이 가는 상대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 문득, 이연의 등 뒤로 펼쳐진 푸른 나비 날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연 때문에 하도 정신이 없다보니 저 수상하기 그지없는 걸 완전히 깜빡하 고 있었던 것이다. “너, 그러고 보니 그 날개….” “응? 이거?” 이연은 자기 등 뒤를 슬쩍 보더니 금방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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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때, 예쁘지!” “아니, 예쁘든 말든 내 알 바 아닌….” “무슨 소리야! 그건 실례야! 게다가 이건 나한테 중요한 거란 말이야. 어 렸을 적에 우륜이 예쁘다고 해준 거란 말이야!” “미친, 지금 그게 문제냐! 내 말은 네 놈이 그 날개를 왜 가지고 있냐는 거야! 평범한 인간은 날개 같은 거 없다고!” 우륜은 너무 답답해서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버리고 말았다. 매 우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어, 왜 날개를 가지고 있나니, 그거야 나는 나비니까?” “뭐냐. 그러니까 그건 네놈이 사람 모양을 한 벌레 나부랭이란 소리?” “아냐! 난 사람이야!” “나비라며. 나비가 벌레지 뭐냐.” “아니라니까! 그 뭐지, 그러니까 이 나비가 그 날아다니는 나비는 맞는데 아무튼 난 나비가 아니, 아닌데 나 나비 맞는데 잠깐만….” “…….” “아니 아무튼! 난 나비가 맞지만 벌레는 아냐! 이것 봐, 어딜 봐도 사람이 잖아, 그치?!” 이연이 자기가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려는 듯 팔다리를 휘저었다. 우륜은 뭔가 말하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워낙 횡설수설해서 알아듣기 어렵기는 하지만, 대충 이연이 말하는 나비 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곤충 나비의 이름을 따온 인칭이겠지. 등 뒤의 날개를 보면 왜 나비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알 법도 했다. 하지만 정말 생각할수록 기묘하게 느껴졌다. 등 뒤에 나비 날개가 달린 사람이라니,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는다. “잠깐만.” “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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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은 이연의 날개 쪽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손을 내밀자 손이 날개의 빛을 뚫고 넘어갔다. “진짜 날개는 아닌가.” “까, 깜짝이야, 놀랐어.” “대체 왜.” “아니 그, 그러니까, 그, 아니야 아무 것도!” 이연을 수상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대체 그 머릿속에서 무 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니라.” 물론 더 캐묻고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에게는 이 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나에 대해서 뭐든지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지. 그렇지?” “어? 어어, 그렇다고나 할까….” “그럼 가르쳐줘. 내가 살았었던 이곳에, 뭔가 큰 일이 있었지?” “크, 큰일이라니…? 난 그런 건 잘….” “난 그 일 때문에 여기서 떠나야했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게 만들 정도의 일이었다면. 그렇게 큰일이었다면 분명히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틀려?” “저, 저기,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면….” 갑자기 이연은 우륜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륜은 확신했다. 이놈,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다고. “알고 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아니, 으으, 그 뭐랄까, 안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서로 얼굴 본 지 몇 분도 되지 않았지만 우륜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연은 거짓말을 하는 게 심각하게 서툴다는 것이 었다. 지금도 이연은 말을 더듬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등 굉장히 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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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절못하며 곤란해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지?” “그, 저, 아, 저기 그건, 말하기가 좀….” “싫으면 마. 굳이 너에게 매달리고 싶진 않으니까. 너 말고도 물어볼 사람 은 지천에 깔렸을 테니. 그럼.” 물론 우륜에게 이런 걸 물어볼 다른 사람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허세였다. 그렇지만 이런 뻔히 보이는 허세도 이연 같이 덜떨어진 놈에게라면…. “아냐! 좀만, 좀만 기다려 줘, 말해줄 거니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생각할 시간이라니, 무슨 수작부리는 거 아냐?” “수작이라니! 난 아직 아무 것도 안했어!” “아직? 그럼 좀 있으면 뭔가 수작을 부린단 소리군.” “너, 너무해…. 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려는 것뿐인데….” 우륜은 고민했다. 이연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뒤통수에 칼을 꽂는 사람도 넘쳐나는 마당에 순수한 마음 이란 변명은 글쎄…. 게다가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저놈은 분명 무슨 수작을 부렸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저놈을 순순히 믿으란 말인가? 뭐, 저렇 게 어설퍼서야 어떤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긴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됐어. 뭐라도 말해봐. 헛소리든 뭐든 내가 듣고 판단할 테니까.” “으으으, 정말이지 옛날엔 이렇게 못 되지 않았는데에….” 이연이 불평했으나 우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이 이상 이연에게 말려 들어 감정적으로 굴게 되는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미 평 소보다 훨씬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흥분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륜은 이연에게 손짓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연을 상대하느라 중구난방이 된 정신 상태로 이야기 를 들어봤자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우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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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좀 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이연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음, 아니다. 됐어. 시간이 늦기도 했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어. 다음 에 들으러 올 테니 미리 할 말 정리해놔.” “어, 가는 거야?!” “그래. 갈 거야. 피곤하니까. 네 말대로 생각할 시간 줬으니까 수작 부리지 마.” “아니 수작 안 부린다니까! 아니, 그보다! 저기, 잠깐만 기다려봐!” “뭐야 또.” “저기, 그, 그러니까….” 갑자기 또 얼굴을 붉히는 이연.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우륜의 얼굴에 불쾌 함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이상 신경을 거슬렸다간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어어…….” “빨리 말해.” “어어, 저기,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이 순간, 이연이 여자애가 아니었다면 이연은 지금쯤 몇 대 얻어맞아 흙바 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륜은 이연을 때려눕히고 싶다는 파괴충동을 잘 참아낸 자신을 장하게 여기며 이연에게서 발걸음을 돌렸다. “우륜, 잠깐만! 잠깐만 서 봐! 우륜!” 아무리 가지 말라고 외쳐봤자 우륜에겐 더 이상 이연과 어울려줄 이유가 없었다. 어휴, 지긋지긋한 새끼, 오늘은 안녕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발을 옮기려는 찰나…. 갑자기, 우륜을 부르는 이연의 목소리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아, 씨, 제발 좀 작작…!” 결국 짜증이 폭발한 나머지 우륜은 홧김에 등을 돌렸다. 그러자 굉장히 다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외치는 이연이 보였다. 뭔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 은 표정. 뭐지? 뭔가 못 볼 거라도 봤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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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무 위에서 큼지막한 무언가가 우륜에게 날아들었다!

와르르….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우륜은 바로 자갈밭에 몸을 날렸다. 하필 돌탑이 있는 자리에 몸을 날린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윽, 뭐야, 뭐야 대체….” 무언가가 떨어진 곳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쉭쉭거리는 소리. 우륜 은 곧바로 고개를 돌리곤,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거미…?” 그랬다. 방금 전, 우륜을 찍어 누르려고 했던 그것은 거미였다. 그것도 몸길이가 3미터 이상은 족히 되어 보이는 괴물 같은 크기의 거미 였다. 수북한 털로 뒤덮인 그 거미는 마치 성난 것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떨 며 우륜을 향해 쉭쉭거리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렸다면 아마 좋지 않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 거미는 눈이 마주친 아주 잠깐의 순간 동안 우륜의 머릿속엔 온갖 생 각이 스쳐지나갔다. 저 놈이 아무 것도 아직 달려들고 있지 않은 이 틈에 일어서서 자세를 잡아야하나? 아니면 달려드는 걸 기다렸다가 굴러서 피해 야 하나? 섣불리 움직이면 괜히 녀석을 자극해서 공격받는 게 아닐까? 지금 내 밑에 있는 돌이라도 집어던져서 시선이라도 끌어볼까? 팽팽한 긴장감 속, 일촉즉발의 상황, 그 때…. “그, 그만해!” 이연이었다. 갑자기 이연이 달려와 우륜과 거미 사이를 막아섰다. 우륜은 순간 당황해서 소리 질렀다. “뭐하는 거야, 빨리 저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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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얘, 나쁜 애는 아니니까! 얘기를 하면 들어줄 거야, 저기∼ 착하 지? 진정해 진정, 에끼, 우륜은 나쁜 사람 아냐! 먹는 거도 아니고! 자자, 옳 지, 얌전히….” 그 괴물 거미는 이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잠시 동안은 큰 움직 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미는 곧 다시 몸을 떨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연 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거미는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곧 이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우륜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검은 그림자를 아무 말 없이 담담히 지켜보았다. “우, 우륜!!” 저 멀리에서 나뒹굴던 이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우륜은 전혀 당황 하는 기색 없이 주의를 집중하고, 침착하게 거미가 달려드는 경로를 읽어, 빈틈을 찾아 가볍게 몸을 굴렸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미는 목표물에 들이받기는커녕 제 속력을 못 이긴 나머지 나무에 정면으로 머리를 들이박고 말았다. 우륜은 바로 자세를 잡고 거미를 주시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위화 감이 느껴졌다. 왜지? 대체 뭐지? 급하게 머리를 굴리던 우륜은 이내 그 답 을 알게 되었다. 거미가 우륜을 향해 몸을 돌리기 시작한 그때 우륜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거미의 다리 한 짝이 모자라단 사실을…. 그렇지만 그걸 알아도 별로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거미는 금방이라 도 다시 달려들 기세로 씩씩거리며 우륜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끝장을 보자 이거지.” 우륜이 주먹을 쥐고 몸 안의 기를 끌어올렸다. 그 기에 이끌린 것인지 주 위에 있던 푸른빛 나비들이 우륜에게 몰려들었고, 어느 새 우륜의 손은 나 비들이 떨어뜨린 푸른빛 나비가루로 가득해졌다. “우륜, 안 돼, 다치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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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한테 치여서 날아갔었던 이연이 어느새 우륜의 곁에 와있었다. 이연 은 통증이 가시지 않아 얼굴을 찡그린 채로 우륜을 붙잡고 애원했다. “꺼져! 무슨 짓이야!” “죽이면 안 돼, 안 된다고!” “미쳤어?! 나보고 그냥 뒈지라는 거야?!” “아냐! 그건,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아무튼 안 돼!” “미친, 당장 안 놔?!” 이연은 울상으로 애원하고 있었으나 우륜에게는 그저 헛소리로밖에 들리 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이연과 옥신각신하는 와중,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거미가 땅을 박찼다. 갑작스런 기습. 우륜이 그걸 알아챘을 때는 이미 거리가 너무 좁혀진 상 황이라 뭘 하려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연과 아웅다웅하느라 대응이 늦어져버렸던 것이다. 늦게나마 거미의 공격을 알아차린 이연이 우륜을 감싸보겠답시고 우륜과 거미 사이를 막아섰다. 그러나 우륜이 생각하기엔 그냥 헛짓거리였다. 브레 이크 나간 트럭 앞에 한 사람이 서있든 두 사람이 서있든 들이받혀 죽는 건 똑같다. 앞사람이 있다고 뒷사람이 안 죽을 거 아니잖은가. 그러니 이연의 행동은 그냥 생각 없는 무모한 행동일 수밖에. 제기랄, 망할, 빌어먹을! 욕을 내뱉을 시간적 여유만 있었다면 우륜은 그 렇게 했을 것이다. 우륜은 바로 이연을 잡아 내쳤다. 그건 아무런 계획도 이 유도 없는, 완벽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거미에게 받혀버리고 말았다. “……!” 평형감각이 흔들린다. 시각도 청각도 붕 떠서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는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등 뒤로 둔탁한 소리. 거미에게 받힌 우륜은 그대로 날려가 나무에 등짝을 부딪치고 말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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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거미가 사냥감을 마무리하기 위해 덮쳐온다.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그 잠깐의 짧은 틈에, 우륜은 엄청난 집념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엔 우륜을 머리부 터 씹어 부수려 드는 거미가…. “윽……!” 반사적으로 오른쪽 팔을 들어 올렸다. 곧, 날카로운 이빨이 살을 찢는 소 리가 울렸다. 듣기도 괴로운 소리에 우륜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륜, 우륜!!” 이연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우륜은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 다. 이 정도 크기의 거미가 작정하면 팔 하나 뜯어버리는 건 손쉬울 테니까. 팔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륜은 급박해졌다. 다행히도 오른팔은 아직까진 무사했다. 우륜은 왼쪽 주먹에 온힘을 모았 다. 제대로 휘두를만한 각도 거리도 아니었지만 이것밖엔 답이 없었다. “제길, 그만 놔라 이 미친 벌레새끼야!!” 최대한 힘껏 내지른 주먹. 그 충격에 놀란 듯 거미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우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굴려 거미의 마운트에서 빠져 나왔다. 거친 숨소리. 우륜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왼팔도 오른팔도 그의 몸을 지탱해줄 수가 없었다. “아 제길, 너무 무리를….” 피투성이가 된 오른팔은 거미에게 제대로 물렸던 탓인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왼팔이 멀쩡했던 것도 아니다. 왼팔은 너무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 반동으로 최소 30초 이상은 아예 꼼짝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우륜은 조급해졌다. 그 거미가 언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덮쳐올지 모르니…. 거미가 갑자기 마구잡이로 앞발을 바닥에 내려찍기 시작했다. 우륜은 알 아채지 못했지만, 사실 거미의 그 행동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벌이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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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아까 전 우륜의 공격이 비록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주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물론, 그 겁에 질려 벌이는 행동도 아직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한 우륜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몇 번이나 날카로운 발톱이 우륜의 옷을 스쳤는지 모른다. 그때였다. “제발, 제발 그만해…. 응? 제발…!!” 이연이었다. 이연이 거미의 앞발을 온몸으로 감싸 안아 붙잡고 있었다. 흙 먼지가 잔뜩 묻은 모습으로 거의 울다시피 하며 거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쁜 사람 아니야, 정말이야…. 내 친구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첫 친구라구….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응? 무엇 때문에 화났는지는 모르 겠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부탁해, 제발, 뭔지는 몰라도 내가 잘못했으니 까, 그러니까아….” 울음 섞인 목소리. 그 애원이 효과가 있었던 건진 몰라도 거미의 움직임 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정말로 이연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잠깐의 틈 사이 우륜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연이 거미에게서 시간 을 끌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륜은 이연이 그 거미를 계속 잠잠히 만들 수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우륜은 지친 몸을 좀 더 움직여 거미의 공격에 대응하기 충분한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쫙 팔을 벌리고, 다시 한 번 팔 쪽으로 기를 흘려 넣었다. 그러 자 우륜의 손에 남아있던 나비가루가 다시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푸 른빛에 이끌리기라도 한 것인지, 나비들은 아까보다 더욱 맹렬한 기세로 우 륜에게 몰려들었다. 몰려온 나비들은 푸른빛 나비가루를 헤집으며 자신도 푸 른빛 나비가 되어버렸고, 그 푸른빛 나비가 푸른빛 나비가루를 떨어뜨리고, 그 푸른빛 나비가루에 또 다른 나비들이 이끌리고… .어느 새인가, 나비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우륜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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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참으로 장관이었지만, 이연은 그 광경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이연은 몸을 떨었고, 결국엔 우륜의 앞을 가로 막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우륜의 반응은 싸늘했다. “너, 비켜.” 우륜의 차가운 목소리. 담담한 표정임에도 엄청난 살의가 느껴졌다. 그 눈 빛을 보고 이연은 직감했다. 우륜이 이 거미를 죽여 버릴 작정이라는 걸. “시, 싫어어, 됐잖아. 쟨 이제 더 이상 우륜을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러 면 된 거잖아. 응? 우륜, 미안해, 우륜을 다치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 얘도 나쁜 생각으로 그랬던 건 아닐 거야. 내가 잘 타이를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난 비키라고 했어.” 우륜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연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어떻게든 우륜의 마음을 돌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 어…?” 이연의 바람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연이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 다시 거미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갔던 것이다. “아, 안 돼….” 거미가 다시 한 번, 땅을 박차며 질주한다. “안 돼, 하지 마아아아아!!!!” 막을 새도, 붙잡을 새도 없었다. 그 검은 짐승은 이연의 절박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가 말로 잘 달래보겠다던 이연의 말은 결과적 으론 허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륜은 자신에게 질주하는 괴물을 담담히 바라보며 가루가 묻어있는 왼손 을 꽉 쥐었다. 그리고 손등을 위로 향하도록 하며 가루를 허공에 흩뿌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우륜이 가루를 흩뿌림과 동시에 푸른빛 나비 떼 가 폭풍 같은 기세로 거미에게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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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나비 떼로 가려지는 시야. 온몸에 잔뜩 달라붙은 나비 떼에게 당황했는지 거미는 속도도 잃고 방향도 잃은 채 몸부림쳤다. 나비들은 거미 에게 달라붙어 날개를 펄럭였고, 그 바람에 푸른빛 가루가 잔뜩 떨어져 거 는 푸른빛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 우륜이 달려들었다. 나비 떼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진 틈을 놓치 지 않은 것이다. 거미가 그걸 눈치 챘을 땐, 이미 우륜의 왼쪽 주먹이 거미 의 옆구리로 날아들고 있는 중이었고, 결국….

“아, 아….” 이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체액과 내장이 널브러져있었다. 우륜의 주먹이 닿자마자 거미는 터져버리 고 말았던 것이다. 마치 물풍선 터지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거미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몸에 붙어있는 다리 한 짝도, 몸 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다리도, 고통스러운 듯이 버둥거렸다. “아냐, 괜찮아, 아직, 살릴 수 있어, 아직….” 이연이 떨면서 다가와 거미의 큼직한 잔해를 안았다. 찐득한 체액이 이연 의 고운 옷을 적셨다. “괜찮을 거야, 죽지 않을 거야, 아프지, 조금만, 참아, 아, 금방, 이거 치 워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줘, 죽으면 안 돼, 제발….” 우륜은 조용히 이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연이 안고 있는 거미의 머리 에 손을 얹었다. 이연은 그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우륜? 잠깐, 지금,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대체 뭘…!!” 그러나 우륜은 듣지 않았다. 그냥 편히 보내주려는 것뿐이다, 속으로 그렇 게 생각하며 담담히 손으로 기를 흘려보냈다. 그게 방아쇠가 되어, 이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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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고 있던 거미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 아아아아아아….” 거미의 몸부림이 잦아든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연의 목소리가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간다. 그것은 애완동물을 잃은 주인의 심정과 비슷한 걸지도 모른다. 허나 우륜은 그 모습이 정말로 못마땅해서, 그만 욱한 나머지 화를 이기 지 못하고 이연을 꽉 붙잡은 채 소리쳤다. “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그게 무슨….” “너 날 죽일 작정이었지, 그렇지,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안달난 거 아 니냐고?!” “아니, 아냐…. 난 전혀 모르는….” “아니긴 뭐가 아냐!! 네가 조금만 더 헛짓거리 했으면 난 저 새끼한테 죽 었어!! 말로 하면 들어준다고? 지랄도 정도껏이지!!” “아, 흐으….” 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물이 새어나왔다. 우는 소리와 함께. “저 새끼 주인이 너지? 아냐? 아니냐고! 뭘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있어?! 누가 봐도 니 새끼가 제일 수상한데!! 시발, 날 죽일 작정이었냐고!!” “아냐, 믿어줘, 난….” 애원하는 이연. 그러나 우륜은 이연의 그 울먹이는 얼굴마저 짜증난다는 듯이 이연을 밀쳐버렸다. “빌어먹을, 됐어, 애초에 처음부터 넌 전혀 믿음이….” 그때 갑자기, 우륜의 몸이 휘청거렸다. “윽, 뭐지….” 몸 상태가 이상하다. 우륜은 당황했다. 뭐지, 뭐가 문제지? 너무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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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게 힘을 써서? 그럴 리가, 그 정도 가지고 이렇게 심한 현기증이 올 리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다, 우륜은 뭔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무자비하게 공격받은 자신의 오른팔. 무엇이 오른팔을 공격했었 는지 떠올리자 우륜은 한 가지 가설을 얻을 수 있었다. “설마, 거미독…,” 다리를 지탱할 수 없게 되어간다. 점점 어지러워진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귀가 멍해진다. 심지어 본인이 쓰러지는 것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우륜, 우륜?! 우륜, 정신 차려, 우륜….”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이연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다. ‘정말이지, 짜증나는 새끼….’ 그렇게 속으로 불평함과 동시에, 우륜의 의식은 어둠 깊숙한 곳으로 가라 앉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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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다. 차갑고, 숨이 막힌다. 그러나 괴롭지는 않다. 눈앞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지만 물에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는다. 아아,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다. 내 온몸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눈도, 내 손도 모두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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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잘 보니, 그 물은 나에게서 나오고 있던 것이다. 나는 손으로 내 가슴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랬더니 느껴졌다. 콸, 콸, 물 줄기가 거센 기세로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내 가슴에서만 물이 나오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입에서도 물이 나오고 있다. 마치 토해내듯이 말이다. 나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내 가슴에 난 물구멍에 손가락을 살짝 넣어보 았다. 아, 정말 의외였다. 생각 외로 따스했던 것이다. 너무도 따스해서 나 는 그만 웃어버릴 뻔했다. 이상한 기분이다. 몸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하고, 축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고. 오르락내리락, 이상하면서도 썩 나쁘진 않은 느낌.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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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다. 졸음이 온다. 내 몸도 마음도 따스한 물에 녹아 흘러내려간다. 어딘가로 스며든다. 나는 눈을 감고 몸을 떠내려 보내며 생각한다. 아아, 봄날처럼, 화사하고 따스하구나.

이렇게 날이 좋은데, 언니, 당신은 어디에 계시나요. 보고 싶어요, 언니. 전 지금도 여전히, 여전히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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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다. 따뜻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눈꺼풀 위로 내리쬈다. 우륜은 몸을 뒤척였다. 너무도 나른했다. 아무래도 좋으니 더 자고 싶었 다. 어제 그런 일을 겪었으니 이 정도 게으름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 다. 그때, 우륜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제, 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에서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우륜은 자신의 오른팔로 시선을 돌렸다. 전날 거미에게 물어 뜯겼던 오른팔엔 열 개도 넘 는 반창고가 마구잡이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이 막무가내인 어설픔. 누가 범인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딱 알 수 있었다. 우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를 떠올리며 정말 어찌 그리도 도움이 안 될 수가 있는지 속으로 한탄했다. 만일 그의 몸이 여느 보통 사람과 같았다면 아마 지금쯤 오른팔을 잘라내야 했을 터인데, 팔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인 그 런 상처에 반창고라니…. 세상은 성의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우륜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연은 방에 없었다. 우륜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웠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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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는데도 그리 밝지가 않았다. 바깥의 빛이 문짝에 발린 창호지를 투과해서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그리 밝지 않았다. 그 래도 대강 방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허름하기 그지없 는 방이었다.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갈라진 바닥장판에, 곳곳이 누렇게 변색 된 벽지. 그것들이 더욱 돋보이는 건 방안에 별다른 세간이 없는 탓일까. 판자촌 집들처럼 방이 좁지는 않다는 게 그나마 나은 점이었지만, 좁기라도 했다면 방이 덜 허전해보였을지도 모른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우륜은 문을 젖혔다.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눈부신 빛. 열린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빛이 방안을 밝혔 다. 그러자 몇 가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우륜이 누워있던 이부자리 옆에 웬 밥상이 보란 듯이 놓여있었다. 우륜은 밥상을 덮고 있던 조각보를 걷어냈다. 그러자 밥과 조금의 반찬이 나타났다. 밥상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말이 다. 밥그릇 가득히 쌓아놓은 고봉밥, 그리고 어디서 대충 뜯어온 거 같은 산 나물이 담긴 그릇이 두 개. 당연히 이걸 차린 사람의 정체는 그 ‘나비새끼’일 터. 우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굉장히 미묘했다. 우륜은 도대체 이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 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일만 해도 그렇다. 분명 이연이 잘한 일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우륜도 참다못해 화를 냈던 것이지만…. 그래도 알고는 있었다. 이연에겐 악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을. 오히려 이연 의 마음은 선의로 가득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그 선의가 좀 과도 하게 넘치고 있는 게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지만 말이다. 도대체 그 나비새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륜은 그런 생각을 하다 가, 곧 그만두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인간관계 란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 딱 그 정도였다. 열심히 고민해봤자 진만 빠질 뿐. 어제 일도 마찬가지다. 이연을 만난 건 그냥 지나가다 옷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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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친 정도의 사소한 인연일 뿐이니까. 그러니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완벽한 시간낭비라는 게 우륜의 결론이었고, 그래서 우륜은 고 민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우륜은 밥상에 놓여 있던 수저를 들었다. 인간관계가 어쨌건 지금은 배가 고픈데다가, 염치 때문에 호의를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곧 우륜은 망설임 없이 밥 한 수저를 떠서 입에 넣었다. 두둑. 모래 알갱이를 씹는 소리. 우륜은 담담히 수저를 놓고, 조각보를 밥상에 덮고, 밥상을 방 한구석에 밀어 넣고는, 누웠던 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햇살. 새 지저귀는 소리에 개울물 흐르는 소리. 마음이 절로 편안 해지는 포근한 산골 풍경. 마루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한다. 덕분에 우륜은, 방으로 들어가 밥상을 뒤 엎고 싶은 충동을 겨우 삭힐 수 있었다. “후우….” 그건 그렇고, 눈앞의 풍경이 정말 한 폭의 그림 같긴 했다. 어젯밤과는 사 뭇 다른 느낌이다. 어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훤히 보인다. 얇 은 개울물이라던가,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서있는 돌탑이라던가, 그 외에도 지붕에 얹혀있는 너와 하나하나까지. 그런데 우륜은 문득 뭔가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륜은 흙과 자갈이 뒤섞인 집 앞의 땅을 봐라봤다. 무언가가 자갈을 휩쓸고 지나간 것 처럼 표면에 흙만 보이는 곳도 있었고, 뭔가 폭발한 것처럼 살짝 바닥이 파 이고 그 주위에 자갈이 정신없이 흩어져 있는 곳도 있었다. 그 난장판은 분 명 어제의 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고 우륜은 확신했다. 그래, 그 거미. 그제야 우륜은 자신이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렇지만 괴이하게도,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거미의 시체는커녕 떨어진 다리 하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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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쯤이었는데….” 기억을 되짚어가며 거미의 시체가 있던 곳을 찾았다. 우륜은 그 위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륜은 거미의 흔적을 찾아 주위를 맴돌았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혹시 다른 단서가 있을까싶어 우륜은 허리를 숙여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뭔가가 묻었었던 흔적이 미묘하게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가 묻어 있다가 말라붙은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묻어있었는지는 뻔하다. 아마 그 거미의 체액일 것이다. 그런 식의 흔적들이 그 주위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었다. 그 흔적들은 마치 길을 이루듯 일렬로 나타났다. 그리고 바깥으로 갈수록 그 흔적들은 엷어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륜은 대강 알아챌 수 있었다. 이 흔적들은 아마 뭔가가 거미의 시체를 질질 끌어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 우륜은 거기서 또 다시 고민에 빠졌다. 사실 고민이라고도 말하기 뭐한 게, 떠오르는 게 이연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연이 그랬다고? 그 거미가 얼마나 무거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게는 둘째쳐도 부피가 상당 하기 때문에 그걸 움직이는 것은 성인 남성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닌 게, 몸통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흩어진 살점이 나 내장 등은 어떻게 했기에 하나도 남김없이 싹 사라졌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모든 걸 그 이연 같은 평균미만의 구제불능아가 했다고 보 기엔 어딘가 석연치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픈 문제였다. 사실 그런 건 누가 그랬든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우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어딘 가가 찝찝했다. 그래서 한참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었지만…. 이 이상으로 머 리가 과열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우륜은 이 문제를 그냥 넘기기로 하였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연한테 물어보면 깔끔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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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게 불가능했던 건, 이연의 모습이 계속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륜은 어제 일로 몸이 안 좋은 것도 있어 휴식도 할 겸 그 집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으나,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연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가야하나? 아니면 계속 기다려야하나? 우륜은 한참을 망설였다. 평 소라면 아마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으로 그냥 가버렸을 텐데, 이번만큼은 이 상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떠나면 이연을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륜은 한참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연은 오지 않았다. 우륜은 결국 이연을 기다리는 걸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륜은 걸터앉아있던 마루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우륜의 몸에 퍼진 독은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악랄했나보다. 어지간한 독 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치유해버리는 우륜의 신체가 이토록 고전할 정 도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죽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내딛자, 순간 엄청난 현기증과 함께 다리가 휘청거렸고 이마에 는 식은땀이 났다. 아무래도 집까지 돌아가려면 꽤나 고생 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륜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이 꽤나 고생스러워서, 이연을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길을 되돌아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밤에야 잘 보이지 않는 좁은 길을 찾느라 이래저래 고생이었지만 햇빛이 구석구석까지 비치는 지금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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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으니…. 어제도 해가 떴을 때 왔더라면 별 어려움 없이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륜은 어제 가려던 길로 생각보다 일찍 되돌아갈 수 있었다. 우 륜은 이연의 집으로 향하는 샛길에서 나와 이연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뒤돌 아보았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뭐, 인연이 있다면 조만간에 다시 보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우륜은 원래 목적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무들로 울창한 길이 펼쳐졌다. 높게 자란 나무들의 나뭇가지들이 하늘 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온통 나무로 가득해서, 아마 멀리서 보면 여기에 길 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어제 갔던 샛길보다는 훨씬 길다운 길이었다. 적어도 길 한가운데 에 큼지막한 바위들이 우르르 몰려 있다든지, 풀로 뒤덮여서 가야할 곳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등산길이라기보다는 오 히려 산책로 같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 같은 조그만 돌계단이 보였 다.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길쭉한 나무기둥 같은 것이…. 아니, 나무 기둥이 아 니었다. 그건 장승이었다. 장승이 퀭한 눈으로 계단 아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짧은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우륜 앞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시야가 탁 트이는 널찍한 땅이 나타났다. 우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단 하나, 우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단 하나 있었다. 폐허. 과연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돌계단 위엔 마을이 하나 있었다. 산골마을치고는 꽤 큰 규모였다. 땅도 꽤 넓었을 뿐더러 세워져 있는 가옥의 수도 적지 않았다. 고작 마을 입구에 서 바라봤을 뿐인데도 이 정도 규모가 느껴질 정도니 그 안쪽은 어떠하겠는 가.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수많은 가옥들은 모두 새까맣게 불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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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라는 점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륜은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륜도 물론 어지간하면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은 피 하고 싶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여기를 지나치는 수밖에 없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러워졌다. 그 와중에도 우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묘한 기분이란 바로 기시감이었다. 을씨년스 러운 것과는 별개로 마을의 풍경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우륜이 이 마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륜의 집이 이 마을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면 이 마을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 그러나 우륜이 느끼고 있는 묘한 기분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우 륜이 느끼고 있는 기시감은 여기를 와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 었다. 중요한 문제는 이거다. 우륜이 여기에 온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몇 년 이상은 된 일인데, 우륜이 이곳을 본 건 최근의 일이었다는 것이다. 우륜은 그 수많은 폐가 중 한 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더욱 더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우륜은 뭔가에 이끌리듯이 그 폐가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고, 그 순간 한 장면이 우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불꽃. 검게 불타는 세상.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검은 세상. 그랬다. 여기는 분명히 우륜의 꿈속에 나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우륜의 뇌리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우륜은 마 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머릿속 영상에 나타난 것은 푸른 나비 날개. 순간 우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푸른 나비 날개가 지금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엔 아무 것도 없었다.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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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은 기분이 나빠졌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기분이 나빠졌다. 우륜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이상 이 마을에는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륜이 마을을 벗어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을을 다 벗어났을 즈음, 우륜은 현기증과 함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을에서의 섬뜩한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애당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우륜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 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정말이지 몸도 마음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그게 우륜의 평소 생각이었지만, 이런 일들을 겪고도 쉽사리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가면 갈수록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생 각이 강해져갔다. 기분 나쁠 정도의 불길함에 온몸이 격앙되었다. 특히, 그 꿈 한가운데에 서있던 푸른 날개…. 비록 얼굴도 안 보이고 아무 런 증거도 없었지만, 그것의 정체는 왠지 이연일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가면 갈수록 그러기가 힘들어졌다. 빠르든 늦든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모든 일의 실마리가 될 것이란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특히, 왜 그녀가 그때 그곳 에 서있었는지는 꼭 물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의문이 그저 꿈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뒤죽박죽해진 채로 우륜은 목적지에 도착했 다. 마을 어귀 외진 곳에 한옥 형태의 집 하나가 산허리를 등지고 있었다. 화재발생지에서 꽤 떨어져있는 탓인지 그 집엔 그을린 흔적 하나 없었다. 그 집을 보고 있으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 륜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바로 이 집에서 지냈던 시절의 기억 이었으니까. 물론 기억한다고는 해도 꽤 오래된 일이다보니 모든 게 다 기억 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때의 주위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었으니 더더욱.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우륜은 이 집에서 지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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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버지와 함께하는 외국행 비행기 안 이었다. 그러니 딱히 인상적인 기억이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아주 일상적 이고 평범한 그런 무난한 기억들만 머릿속에 남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륜은 어쩐지 그 시절이 조금 그리워졌다. 돌이켜보면 딱히 즐거 운 시간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 후에 타지에 나가서 했던 경험들을 생각 해보면…. 비록 상대적인 평가이기는 하나, 우륜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 다. 이 집에 살던 시절이 차라리 훨씬 행복했었다고. 집 앞에 가보니 우륜이 부쳐놓았던 짐들이 대문 앞에 한가득 놓여있었다. 우륜보다 택배 기사 아저씨가 훨씬 빨랐던 모양이었다. 우륜은 짐이 들어있 는 상자들을 들어 올린 채 남은 손으로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무게와 부피가 한사람이 들기엔 만만치 않았지만, 그것들이 우륜과 그의 아버지가 몇 년간 타지에서 생활하며 남긴 전부라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너무나도 적 은 편인지도 모른다. 뭐, 짐이 적을 수밖에 없긴 했다. 워낙 집을 옮겨 다녔 던 데다가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아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다녔으니. 우륜은 열쇠를 꺼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륜에게 넘겨주 었던 물건이었다. 그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우륜을 반 겨주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환기고 뭐고 전혀 하지 않았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륜은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겉이야 한옥이었지만 지은 지 그 렇게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라 그런지 안쪽은 현대적인 집의 느낌이 많이 배 어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상 보통 현대가옥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다 만 전통적인 느낌을 풍기는 디자인이나 인테리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을 뿐. 우륜은 벽에 있을 전등 스위치를 찾아다녔다. 집안 구조가 익숙해서 그런 지 스위치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륜은 스위치를 눌렀다. 다행히도 전기가 들어왔다. 깜빡, 깜빡하며 형광등에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집안이 환해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우륜은 복도를 지나 장지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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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고 거실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았다. 간만에 느끼는 안락함. 그런데 그 와중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집이 왜 이렇게 깔끔하지? 몇 년 동안 아무도 쓰지 않은 집인데 너무 멀쩡했다. 심지어 먼지 하나조 차 없다. 부엌으로 들어가서 수도를 틀어보았다. 여느 집처럼 물이 막힘없이 콸콸 흘러나왔다. 좀 더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때 그릇이 보관되어있는 찬장이 눈에 들어왔 다. 역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많은 그릇 중 몇 개는 다른 그릇과는 유별나게 다른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찬장에 있는 대부 분의 그릇들은 하얀 바탕에 테두리를 파란색 꽃줄기 무늬로 장식한 모양이었 다. 허나 몇몇 그릇들은 유별나게 색이 알록달록했다. 마치 러시아나 터키의 식기 세트를 보는 것 같았다. 우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기억 속에 이런 그릇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희미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우륜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찬장을 닫았다. 어쨌거나 집이 깔끔하다는 건 자신에게 있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니까.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이 집을 잠깐 빌려줬던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중요한 문제는 아닐 터이다. 그러니 그런 고민은 그만두고 짐이나 풀어야겠다는 게 우륜의 생각이었 다. 물론 짐이라고 해도 아까 보았듯이 별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생활용품과 옷가지, 그리고 아버지의 유품, 겨우 이 정도다. 정말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다 버리거나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삿짐치고는 크기가 꽤나 조촐했다. 옷가지 들만 아니었다면 이보다도 훨씬 짐이 간소했을 텐데. 상자 중 하나를 열었다. 아버지의 유품 중에서도 아버지가 중하게 여겼던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우륜은 그 물건들을 안방으로 옮겨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우륜의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바로 액자였다. 한 아름 정도 되는 크기의 액자, 거기에 들어 있는 건 바로 가족사진이었다. 우륜의 부모님과, 대략 10살 즈음으로 보이는 우륜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액자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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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엔 조그만 사진이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많이 쳐줘봤자 초등학교 1학년정 도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아이와 어머니는 우륜의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았다. 우륜 에게 남아있는 기억은 그 둘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의 일들뿐이었으니까. 우륜의 어머니는 우륜이 이 마을을 떠나기 되기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장 례식을 치렀던 기억이 남아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그리고 그 구석에 껴놓 은 사진에 나와 있는 여자아이, 그 아이는 바로 우륜의 여동생이었는데, 듣 기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보다도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 다. 결국 우륜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실질적인 혈육은 아버지뿐. 그래도 우륜은 딱히 거기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어머니든 여동생이든 그에겐 별로 실감나는 일이 아니었다. 같이 지냈던 기억이 없으 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은 우륜도 생각해보곤 했다. 사진 속의 어머니, 그리고 여동 생과 같이 평범한 생활을 하는 상상을.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족이었다는 사람들이 실제론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궁금증 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우륜은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묘에 갔던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꽤나 자주 어머니의 묘를 찾아가시곤 하셨고 그 때마다 우륜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곤 하였다. 우륜은 잠시 벽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해외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묘에 들리지 못한 지가 벌써 몇 년째. 그 사실 때문에 아버지는 종종 한탄을 하시곤 하였다. 그래도 그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 거리란 건 그렇게 극복하기 쉬운 제약이 아 니니까. 허나 지금은 어떤가. 어머니의 묘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 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유지(遺志)를 잇는다는 의미로라도, 혹은 자식으로서 의 도리를 지킨다는 의미로라도 묘를 찾아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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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보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한 우륜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 다. 마침 바람도 쐬고 싶던 참이고, 손해 보는 일도 아니니까. 좋아,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다녀오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우륜은 바로 행동에 나섰다. 문밖을 나서자 집안의 정체된 공기와는 다른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어제의 일도, 오늘 해야 할 일도 잊 게 만들 정도로 시원한 공기였다. 집 옆에 길이 하나 나있었다. 산위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의 길. 우륜은 아 버지와 함께했던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과연 묘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상보다도 더 빨리 도착한 편이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륜은 숨이 차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제 당했던 부상이 또 도진 모양이었다. 길이 완만하고 그리 길지 않아서 우륜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우륜의 집에서 멀지 않은 조그만 산, 그곳에 묘들이 모여 있었다. 산의 한 면에 있는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계단식으로 경사를 만들어서 공동묘 지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든 곳이었다. 다만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는 바람에 이 조그만 산은 민둥산이나 다름없 는 모습이 되었고, 그 덕에 풍경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그곳이 묘로 가득한데다가 인적 하나 없는 고요한 곳이라면, 그곳의 분위기에 관해 선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평소 주변 분위기에 둔감한 우륜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이마의 식은땀을 닦느라 바빠서 거기까지 신경 쓸 여 력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어머니의 묘가 있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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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은 주변 묘비에 써진 글을 별 생각 없이 대강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상 하게도 비석에 써진 날짜가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이 사람들이 전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단 소리일까? 의문에 빠져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륜은 어머니의 묘 앞까 지 와있었다. 우륜은 한번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야가 확 트여 있어 저 멀리 있는 조그만 마을들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에 시원한 경치. 살 벌한 주위 분위기와 비교되어서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륜은 어머니의 묘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그때 문득 우륜은 뭔가를 깨 달았다. 오랜만에 오는 건데 아무런 것도 준비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 최 소한 꽃만이라도 하나 사올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봉분 앞의 화분에 서 헌 꽃을 꺼내려고 손을 뻗은 그때였다. 화분에 꽂혀있는 진분홍빛 꽃이 눈에 들어왔다. 진달래꽃이었다. 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싱싱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냥 싱싱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새 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꽃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묘뿐만이 아니라 다른 묘 앞에 꽂 혀있는 꽃들, 그러니까, 목련이나 매화, 민들레 등의 다른 꽃들도 전부 마찬 가지였다. 모든 꽃들이 알록달록한 자기 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래대로라면 잡초로 무성해야할 봉분도 생각보다는 깨 끗했다. 누군가가 대충이나마 큼직한 잡초들을 정리해놓은 모양이었다. 여기에 관리인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지만 우륜은 그런 얘긴 들어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관리인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 또 있긴 한 건지부터 의문이었고. 순간,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이란 말에 문득 이연이 생각났지만, 우륜은 그 냥 무시하기로 했다. 사실 뭐가 어쨌건, 귀찮은 일을 덜게 된 것이려니 하고 넘어가면 그만일 일이었다. 덕분에 우륜이 할 일은 돌아가신 어머니께 가벼운 인사를 올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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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정도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우륜은 가볍게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묘 앞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기라도 하듯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계속 머리카락을 스치며 체온을 식혀 주었다. 나른한 기분. 돗자리 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우륜은 누우면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유혹이 상당히 거셌지만, 그래도 우륜은 땀을 말리는 것 정도에 만족하고 일어섰다. 우륜은 일어서서 어머니의 묘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작별의 인사였다. 그 직후 우륜은 바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어쩐지 기분만큼은 홀가분했다. 그래서일까, 내려가는 발걸음은 올라가는 발걸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덕분에 집에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륜은 집 앞에서 난데없 는 손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거의 해질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륜은 체력도 다 떨어진 탓에 짐 정 리고 뭐고 빨리 문 열고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저 멀리에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상당히 피곤했던지라 집이 반 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우륜은 못 보던 사람 하나가 집 앞에 서 서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어깨 조금 아래까지 오는 길이로 물결치는, 잘 정리되지 않아 제멋대로인 갈색 머리카락. 그 아래로 나시티에 청바지라는 편한 차림에 낡은 블레이저 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가 강하 게 풍기긴 하였으나, 담배를 빽빽 피워대는 모습 때문인지 가까이 하면 영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도 강하게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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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저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여기엔 딱히 뭐가 있는 것도 아 닌데, 길을 잘못 들기라도 했나? 우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걸어갔 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여성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왠 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여성은 담배를 피며 다른 곳을 보고 있느라 우륜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우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때…. “저기 잠깐.” 그 목소리를 들은 우륜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우륜은 ‘설마 아니겠지’하는 헛된 기대감을 품어봤지만, 로퍼를 신고 땅을 밟는 소 리가 등 뒤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우륜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시죠.” 엮이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나는 퉁명스러운 대답. 그럼에도 그 여자는 아 랑곳없이 다가와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배 냄새가 우륜에게까지 확 끼쳤다. “흐음, 네 이름이 ‘우륜’, 맞지?” “네. 접니다만.” 원래대로였다면 어떻게 자기 이름을 아는지부터 물어봤겠지만, 우륜은 어 제 이연의 일을 겪고 난 뒤라 그런지 상당히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오, 제대로 찾아와서 다행이네. 하핫, 혹시 사람 잘못 본거면 어쩌나 했어.” “…….” “그래, 어땠어? 온 방향을 보아하니 거기 묘지에 다녀온 모양이지? 거기 에 아는 사람이라도 묻혀 있나봐?”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말상대가 필요한 거라면 다른 데서 찾아주시면 고맙겠는데요.” 피로가 쌓인 탓인지 우륜의 말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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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고 말하긴 했지만, 그 말은 사실상 더 이상 당신과 대화하기 싫다는 뜻이 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륜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뒤돌아 문고 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륜은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때 그녀가 던진 한마디가 우륜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그 한마디에, 잠시 우륜의 숨이 멎었다. 우륜은 다시 뒤돌아 그녀를 바라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그 자리에서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진실이라니….” “하핫, 말 그대로야, 왜,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잖아? 가령, 저 묘지에 묻힌 사람들이 왜 모두 같은 날에 죽어버렸는지, 대체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그녀의 말이 전부 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 다. 그녀가 말한 의문점이란 것은 계속해서 우륜의 머릿속을 맴돌던 것 중 하나였으니까.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줬음 하는데, 나 이래봬도 나쁜 사람은 아니 라고? 게다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소식도 있고 말이야.” “소식…?”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이것부터 말해야 됐을지도 모르겠네. 이거 꽤 급박 한 일인 거 같은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담배를 한 모금 물었다. 말은 급박하다면서 행동엔 너무 여유가 넘쳐서, 우륜은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난감해했 다. 아무튼 그녀는 담배 연기를 내쉬며 그 ‘소식’을 전했고, 그 소식을 들은 우륜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깐만요, 지금 그게 무슨….” “응? 말했잖아. 실종됐어. 그 이연이란 애 말이야.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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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움찔하는 반응을 보아하니 우륜 은 꽤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런 우륜의 모습이 꽤나 재밌었는지 입가 를 히죽거렸다. 뭐, 이연이 실종됐다는 사실은 우륜에겐 확실히 충격적이긴 했다. 그러나 우륜이 영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연이 실종됐다는 사실보다도 우륜을 더욱 거슬리게 한 건 바로….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말하는 겁니까.” “음? 그거야 뭐, 당연히 그 애가 너랑 관련이 있으니까? 심지어 어제 같 이 있었잖아?” “대체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죠.” “조사하는 게 특기라서 말이야. 그리고 안 그래도 지금 네 얘기는 하룻밤 새 쫙 퍼졌거든. 네가 이 동네에 돌아왔다는 거 이쪽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다 알고 있을 걸?” 어이가 없었다. 대체 자기가 뭐라고 그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하여튼, 그래서 뭡니까. 실종 사건이라면 경찰한테 신고하면 충분할 텐 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저한테 그 놈을 찾아달라 고 할 것도 아니고.” “어, 어떻게 알았어?” “네?” “맞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건데? 걔를 찾아달라고 부탁할 거였거든.” 얼척이 없었다. 우륜은 순간 ‘미친’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 다. 아니, 이 세상에 사람이 차고도 넘치는데 왜 하필 자신인걸까.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난 안할 겁니다. 그런 뇌 없는 새끼 때문에 고생하는 건 사양입니다. 애 초에 어제 처음 본 놈 따윈 어떻게 되든 내 알 바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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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래? 그런 거 치고는 아까 꽤나 놀란 것처럼 보였는데.” “기분 탓이겠죠. 어쨌든 전 저랑 아무런 관계도 없는 놈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다니, 그건 그 애가 들으면 좀 서운해 하겠는걸. 네가 없는 동안 그렇게나 열심히 했었는데 말이야.” 열심히 하다니, 대체 무엇을? 대체 뭐기에 목적어를 능구렁이 담 넘어가 듯이 빼버린 거지? 우륜은 그 목적어에 의구심이 생겼다. 그리고 동시에, 그 걸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물어보는 순간 뭔가 되돌릴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보나마나 이것은 그녀의 낚 시, 미끼를 무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겠지. 그걸 직감했으면 서도 우륜은 그게 뭔지 알고 싶다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열심히 했다니, 대체 무엇을 말입니까.”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씨익, 잘 걸렸다고 말하는 것 같은 짓궂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묘지에 가봤으면 알 텐데,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 “거기에 딱히 이상한 건, 아니 잠깐….” 그때 우륜의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거의 새 것 같은 싱싱한 꽃, 그럭저럭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봉분. 그걸 떠올리고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대충 눈치 챘으면서도 스스로에게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꽃…….” “그래, 너도 봤지? 나도 저기에 종종 가곤 하는데, 딱히 관리인이 있는 것 도 아닌데 지나치게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이게 대체 뭔 일인가 했었지. 그 러다가 어느 날 한번 마주쳤어. 그 이연이란 애 말이야.” “그럼 설마 집이 지나치게 깔끔했던 것도….” “아마 걔 때문이겠지? 뭐, 집 쪽은 나도 정확히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걔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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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우륜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그녀석이 그럴 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겼는데 정말 이연이 었다니. 설마 외국에 나가 있던 그 몇 년 동안 쭉 계속? 동시에 우륜의 머릿속엔 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이연이, 그녀가 이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고요한 산속에서, 홀로 황량한 묘지를 거닐며 묘 하나하 나마다 한 송이씩 꽃을 내려놓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마 자기 일도 아닐 터 이고 마냥 쉬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이연은 대체 왜 그런 일을 했던 걸까.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일을 계속해온 이연을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 걸까. 수 많은 의문들이 우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민의 빛이 얼굴에 감도는 걸 알아챈 그녀는 씩 웃으며 우륜에게 다가왔 다. 그리고 말로 우륜을 더욱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말이야, 이연 그 애는, 옛날에 있었던 ‘그 사건’을 눈앞에서 겪고 도 살아남은 사람 중 한명이거든. 으음, 나는 그 사건에 좀, 관심이 많단 말 이야? 그래서 난 걔가 무사하지 않으면 좀 곤란하거든. 내 생각엔 너도 나 랑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우륜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했고, 비록 근거는 없지만 그 과거의 일과 이연이 어떤 관련이 있을 거란 추측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그저 짐작에 불과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허나 그런 우륜에게 그녀는 이렇게 암시했던 것이다. 네 추측은 허황된 추 측이 아닌, 가능성 있는 가설이라고. 머리가 복잡했다. 우륜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대강 눈치 챘 는지 그녀는 우륜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전했다. “뭐, 그래도 할지 말지는 네 자유니까. 너한테 생각할 시간을 줄게.” “…….” “난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저 산 아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 야. 그러니 해볼 생각이 있다면 그때까지 내게 와서 말해주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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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우륜은 반응이 없었다. 어지간히도 고민에 차있는 모양이었다. 그 런 우륜에게 그녀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다. “잊지 마. 분명 선택은 자유지만, 네가 이연에게 빚을 진건 사실이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던져버리곤 산 아래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우륜은 우두커니 그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기만 하였다. 우륜은 힘없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그가 보고 있는 이 집의 모든 것에 이연의 손길이 닿았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 지 기분이 더더욱 찝찝해졌다. 이걸 어쩐다. 우륜은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가능하면 다 잊어버리 고 이대로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연의 잔상은 우륜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마치 망령에 게 씐 것 같았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너무도 찝찝한 나머지 조금도 잊히 지가 않았다. 답답했다. 결국 우륜은 마지못해 몸을 일으키고는 중얼거렸다. “빚을 졌다니, 그런 개떡 같은 헛소리도 정도껏이지….” 물론 우륜도 이연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 고 있었다. 하지만 의도가 좋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이연이 어제 벌인 짓들은 모조리 민폐였고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심지어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 그런 건 차라리 옆에 없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 호의들을 모두 무시해버려도 괜찮은 걸까? 더군다나 이연은 우륜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우륜 자신은 그런 이연에게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잘못한 건 잘못 한 거라고 치더라도 잘한 건 잘했다고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렇 게 하려면, 우선 실종된 이연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이지 도움 안 되는 새끼….” 우륜은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좀 있으면 해가 완전히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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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우륜은 온힘을 다해 달렸다. 얼마 후 산 아래 입구에 서, 말로 우륜을 꼬드긴 장본인인 그녀는 자신 쪽으로 급하게 뛰어오는 우 륜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엔진이 힘겹게 배기음을 토해낸다. 오랜 세월을 겪은 듯 곳곳에 풍파가 남은 차체가 제 기운을 못 이기고 몸을 뒤틀어댔다.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고철 덩어리가 또 있을까.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요동치는 낡은 차 안 조수석에서 우륜은 생각했다. 이런 차를 계속 타고 다니다간 차 천장에 수도 없이 머리를 박아대서 뇌진탕에 걸리는 바람에 남들보다 십 년 은 빨리 숨질지도 모른다고!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자동차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 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륜의 옆에서 차를 모는 여사님은 베테랑과는 영 거리가 멀어보였다. “어때, 생긴 거 치곤 그럭저럭 잘 굴러가지? 하핫.” 우륜은 질색했다. 그가 딱히 운전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커브를 할 때는 감속해야한다든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땐 부드럽게 해야 한다든지, 대 강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륜이 보기에 이 여편네는 이런 사소한 수칙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달리다가 시동을 꺼뜨리지나 않는 게 다행일 지경이다. “대체 이 고물은 뭡니까.” “고물이라니 말이 심하네. 아직도 짱짱한 현역인데 말이지.” “아, 예, 다 죽어가는 노병도 현역이라고 부를 수는 있죠.” “으음, 너 생각보다 되게 까칠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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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륜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잔뜩 심기가 불편해진 것 같은 표정이 유리창에 비쳤다. 대체 무슨 마가 꼈기에 이런 사 람들만 만나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어휴, 어쨌든 너무 까칠하게 굴고 그러지 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친하게 지내자고.” “솔직히 당신이 제일 수상한데요.” “당신이라니 호칭 한번 딱딱하네. 더 좋은 것도 많잖아? 누구 씨라든가, 누구 누나라든가…. 아아아, 그러고 보니 그걸 얘길 안했었네.” 그녀는 갑자기 운전대에 왼손만 남겨두고, 오른손으로 블레이저의 안주머 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우륜에게 건넸다. “내 소개를 안했었네, 한다한다 생각하다가 그만 깜빡했어.” 우륜은 곁눈질로 그것을 보고는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그것은 명함이었다. 빳빳하기는커녕 낡고 꾸깃꾸깃했지만 말이다. “이건….” 해질녘인데다가 차가 계속 흔들려서 명함에 써져있는 글씨를 읽기가 영 힘들었다. 우륜은 눈을 찌푸렸다. “유, 선경, 기자…?” 유선경 기자. 분명히 그렇게 써져 있었다. 우륜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후줄근하기 그지없는 한 량이 정말 기자란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우륜의 시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는 자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이래봬도 기자라고. 뭐, 보통 기자들하고는 좀 다르지만 말이야.” “확실히 당신처럼 수상한 기자는 본 적이 없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말하자면 난 프리랜서라고나 할까. 이것저것 취재 하다가 괜찮은 게 있다 싶으면 신문사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거지.” “말만 들어도 뒤가 구린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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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더욱 우륜의 의심이 깊어져만 간다. 자기가 기자라는 것도 실은 조작된 사실이 아닐까, 누군가의 신분을 도용한 건 아닐까, 그런 여러 가지 추측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뭐, 그런 사소한 건 어떻든 상관없었다. 허나 백번 양보해서 그녀가 진실 만을 말한다고 가정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진짜 기자든 아니든 알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절 도와서 얻는 게 뭡니까.” “어, 아까 처음 만날 때 얘기하지 않았나? 나는 그 ‘옛날 사건’에 관심이 많다고 말이야.” “옛날 사건…?” “몰라? 그 묘지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그 사건 때 죽은 거잖아. 아는 사 람들끼리는 ‘흑색화재’ 사건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지만…” 문득 우륜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 선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묘지에 묻혀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날에 목숨을 잃었다고. “‘흑색화재’라,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흑색 화재’, 분명히 우륜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나 흑색화재란 단어 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는 왠지 낯설지 않았다. “뭐어, 나도 직접 본 건 아닌데, 한밤중에 갑자기 이유 모를 화재가 발생 했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한 건, 마을을 뒤덮은 불꽃의 색이 검은색이었다는 거지.” 그건 우륜이 꿈에서 본 장면과 정확히 일치하는 설명이었다.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져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화재라지만 그렇게까지 사람이 많이 죽을 수가….”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가 가을이었을 거야. 거기다가 심지어 산속 이지. 불이 번지는 속도가 상상이상일걸. 뭐, 그리고 대부분은 유독 가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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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사망한 거 같으니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독했다고 하던데? 한동안은 불난 자리에 풀 하나도 못 자랐다고 하더라고.” 우륜은 점점 그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아졌다. 만약 그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잃어버린 옛 기억의 파편들이라면, 그래서 그 꿈의 내용이 실 제로 겪은 일이라면, 우륜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화재가 발생한 그 현 장에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기적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우륜은 어두워진 표정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마 이 모든 얘기들 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 이야기들이 모두 혼란스럽게 느껴졌기 때문 일 것이다. 그렇게 우륜이 혼란스러워 하는 와중에도 선경은 여전히 차 앞 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계속했다. “아무튼, 워낙에 큰 사건이고 했으니까, 범인을 잡아야한다고 난리였지.” “그래서, 잡았습니까.” “아니, 잡진 못했어. 그래도 누군지는 알아냈단 말이지. 정작 범인이라는 놈이 너무 도망을 잘 다녀서 지금도 체포는 요원한 모양이지만. 하지만 말 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뭐가….” 우륜의 물음에 선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니 뭔 가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괴로운 듯 왼손으로 머리를 긁어대는 걸 보니 정 말로 뭐가 잘 안 풀리나보다. 그러다가 그녀는 우륜의 벌레 보는 듯한 시선 이 영 신경 쓰였는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으, 그러니까, 난 이런 쪽으로 직감이 좋거든. 정말로. 믿어도 좋아. 아무 튼 증거나 단서 같은 게 없어서 뭐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뭔가가 있어. 분명해! 내 생각이지만, 이건 그 범인이란 놈을 잡는다고 해서 될 문 제가 아닌 거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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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런 눈으로 노려봐도 말이야. 정말로 지금은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직접 뛰고 있는 거 아니겠어?” “아, 네, 그러시군요.” 이 사람은 참 어딜 봐도 신뢰하기 영 껄끄러운 사람이라는 게 우륜의 감 상이었다. 그렇지만 더 추궁해봤자 소용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또 한 사실이어서 그 이상 뭔가를 하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았다. 차로 얼마 달린 거 같지도 않은데 밖은 땅거미가 진지 오래였고 하늘엔 서서히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우륜은 창밖으로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눈앞에 큼직한 솟을대문과 그 양옆으로 뻗어나가는 담장이 보였고, 그 너머로는 어렴풋이 2층 높이의 가옥이 보였다. “여긴….” “내가 아는 ‘정보원’이 있는 곳이야.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이쪽으로는 꽤 빠삭한 녀석이거든.” 그러면서 선경은 이미 반쯤 열려있던 대문을 확 열어젖혔다. 이름을 부른 다든지 노크를 한다든지 그런 건 없었다. 참 무례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 면서도 우륜은 선경의 뒤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과 가옥 사이에는 꽤 넓은 마당이 있었다. 그곳은 마치 식물원을 방 불케 했다. 대문으로부터 집까지는 사람 두세 명이 거닐 법한 폭으로 보도 가 나있었는데, 그 보도가 있는 부분을 제외한 곳은 모조리 식물과 화분으 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잔디, 분재, 화분, 나무 등 온갖 것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기까지 하였다. 그 정원의 끝에 입구로 보이는 문이 있었다. 이번에도 선경은 아무런 신 고도 없이 당당하게 문고리를 돌렸다. 이쯤 되니 우륜은 이러고 쫓겨나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 정보원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다지도 무례한 취급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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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처럼 원치 않게 엮여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문 안쪽에는 잡동사니가 양 옆으로 가득한 작은 통로가 하나 있었다. 그 리고 그 짧은 통로 끝에는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문이 보였다. 어느 새 선경 은 이미 그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를 높였다. “역시 있었고만! 안에 있었으면 좀 소리라도 낼 것이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군가 있긴 했던 모양이었다. 우륜은 선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통로와는 다르게 널찍한 방이 나타났다. 마치 서재를 방불케 하듯 사방에 책장이 놓여있는 방이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인 지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탁자가 의자와 함께 놓여있었다. 그리고 창가나 구석진 곳, 탁자 가운데 등 곳곳에 조그만 화분이나 분재들이 놓여있어 답 답할지도 모르는 방 공기를 약간이나마 싱그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방 끝에 한 남자가 종이뭉치를 가득 손에 든 채로 서있었다. 얼굴부터 온 화하고 순박해 보이는 인상이 가득한 남자였는데, 그가 걸치고 있는 안경과 회 색빛 두루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보이나 싶기도 했다. 그나마 키라도 훤칠 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순해 보이다 못해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 난데없는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 로 불청객들을 맞이하였다. 과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였다. “저도 방금 나와서요. 으음, 그건 그렇고, 예전부터 했던 말이지만 방문할 때는 한 시간 전에라도 전화를 주셨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면 문을 평소에도 잠가 놓던가. 문이 열려있다는 건 언제든 들어와 도 좋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나?” “찔리는 거라뇨. 여전히 절 나쁜 사람 보듯이 하는군요. 전 그냥 그렇게 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하는 것뿐인데요. 힘들게 방문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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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부재중이거나 하면 곤란하잖아요?” “글쎄, 너 어차피 집에 처박혀서 안 나오잖아? 어딘가 나가 있다면 문이 잠겨 있으니까 뻔히 알 수 있고. 그리고 난 지금도 여전히 네가 썩 내키지 는 않거든. 너 때문에 날려먹은 고료가 몇 푼인지 알기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 보도제한은 제가 건 게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건 할 줄 모른다니까요. 참, 그리고 집안에 도청기 다는 것도 사양할게요. 제가 종이만 만진다고 기계 다룰 줄 모르진 않아요. 제가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 이 모았으니까 이제 그만 기부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뭐? 어쩐지 하나도 신호가 안 잡히더라, 난 내가 잘못 건드렸거나 불량 품을 샀거나 한줄 알았는데…. 아니 그보다, 그거 비싸다고! 내놔!” 남자는 잔뜩 날이 선 선경의 말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받아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대화에 우륜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선 경과 그 남자는 영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대화를 계속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남자가 우륜을 발견했다. 선경과 쓸데없는 소리를 주고 받느라 미처 우륜이 있는 걸 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선경 씨, 저 사람은….” “아, 그래 맞아, 쟤가 있었지. 자기소개나 해주라고. 쟤는 아마 널 처음 볼 테니.” 참 빨리도 알아챈다. 우륜은 그렇게 속으로 불평하며 그 남자에게 다가갔 다. 우륜이 앞에 서자 그 남자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인사의 의미로 악수를 하자는 뜻인 것 같았다. 우륜은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고, 그 남자는 선경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김희민이라고 합니다. 보잘 것 없지만 충방사(蟲方士) 로서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어요.” “제 이름은….” “알고 있어요. 제 기억이 틀림없다면 아마, 남우륜, 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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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우륜은 이젠 새삼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놀랍지도 않았 다. 그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정도만 궁금할 뿐. “당신의 아버님은 이곳의 충방사들에게는 꽤 유명하신 분이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남씨 가가 원래 보는 시선이 좀 많다고 해야 할까요. 남씨 가는 먼 옛날부터 이곳 충방사들의 구심점이었으니까요. 저도 옛날부터 신세를 많이 졌기도 했고. 아마 그러니 그분을 모르는 충방사는 없을 거예요. 그분의 아 드님인 당신도 마찬가지고….” 그건 우륜에게 낯선 이야기였다. 어차피 어렸을 때라 별 관심도 없었던 게 분명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인이었을 줄이야. 아버지는 이곳의 얘기를 어지간해선 입에 올리지 않았으니 우륜은 그런 걸 알 턱이 없었다. “아, 그리고 당신은 최근에 푸른 나비의 거처를 지키고 있던 독거미를 때 려죽이셨더군요. 보통은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아무도 그 근처엔 얼씬도 안하 는데 말이죠. 덕분에 당신의 데뷔 소문이 주위에 쫙 퍼지더군요.” “도대체 다들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제대로 확인해본 건 아니지만 그 때 그곳에 제 3자는 아무도 없었는데.” “뭐, 저는 선경 씨한테 들은 거긴 한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우륜은 고개를 홱 돌려 선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선 경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뻔뻔한 웃 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그리고 벌 레들은 낮말도 밤말도 잘 듣는단 말이지.”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우륜에겐 영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따지자니 피곤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아무튼, 선경 씨.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설마 저번처럼 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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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끝난 일’을 들먹이려 오신 건 아니겠죠. 전 더 이상 그 일로 관련해서 피 곤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이미 끝난 일이라니, 누구 멋대로 이미 끝난 일이라는 거야? 어쨌거나 그것 때문은 아냐. 오늘은 다른 일로 온 거라고.” 이 희민이란 사람은 최대한 친절한 태도와 말투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그 래도 그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선경을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는 모양이라 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선경이 하는 짓을 보면 없는 원한이 생긴다 고 하더라도 이상하진 않을 지경이지만 말이다. “음. 하지만 말이죠. 무슨 일인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시잖아요? 전 제 입장 때문에 관여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단 말이죠.” “됐고, 일단 들어보기나 해. 네가 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야. ‘나비’ 에 관한 일이라고.” “나비요? 음, 확실히 그건 제 일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들어. ‘푸른 나비’가 실종됐어. 알아?! 어제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실종, 그 말에 희민이 미묘하게 반응했다. 잠깐 동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손을 입에 얹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종이라니….” “빨리 뭔가 해야 돼.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으음, 그렇지만, 행방불명이라지만 하루 만에 실종이라고 결론짓다니,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뭐?” “그러니까, 그냥 단순히 길을 잃었다든지, 남들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가버 려서 못 찾은 것뿐이라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좀 더 찾아보고 신중히 결 정하는 게….” 엄밀히 생각해보면 희민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우륜도 조금은 동감하는 바였다. 그 이연이라면 뜬금없이 길을 잃는 것 정도는 별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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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도 아닐 테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봐, 그 나비가 얼마나 중요한 애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나비들을 관리하는 건 네 소관 아냐? 그리고 그 정도로 간단한 문제였을 거 같았으면 애초에 여기에 오지도 않았어. 날 얼간이 취 급하지 말라고. 난 네 생각만큼 허술하게 움직인 적 따윈 없거든.” 선경이 소리를 높였다. 희민이 자신의 말을 얕잡아보고 있다고 생각한 모 양이었다. 그 정도로 선경은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었다. 희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흐음, 그래요. 당신도 충방사니까요. 선경 씨의 능력으로도 못 찾았다는 건 쉽게 볼 일은 아니라는 거겠죠. 뭐, 기분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건 죄송하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아요. 알다시피, 전 정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거든요. 아무리 나비 들을 관리하는 게 제 소관이라지만, 이렇게 막연해서야 전 아무 것도….” “그 소리는 질릴 정도로 들었어. 그래서 우리가 여기로 온 거 아냐? 구체 적인 형태가 잡힐 때까지는 저 애송이랑 내가 움직일 거거든.” 어느 샌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우륜이 선경에게 묶여 있었다. 우륜은 순 간 항의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더불어, 애송이라고 불리는 건 더더욱 맘에 안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뭔가 짐작 가는 거 없어? 말만해, 무엇이든지 조사해줄 테니까.” “으음, 그렇게 갑작스럽게 물어도 말이죠. 뭐라고 해야 할지….” “뭐라도 좋아. 최근에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나 수상한 일 없었어? 특히 다른 충방사들과 관련된 일이면 더욱 좋고. 이연을 노릴만한 건 같은 충방 사들뿐이니까.” “하기야 그렇겠네요. 마침 남 군덕에 방해물도 사라졌겠다, 그 애를 노리 고 있었다면 최적의 때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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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남 군이라니, 그거 혹시 저 말하는 겁니까.” 뜬금없이 자기 얘기가 나온 것 같아서 우륜은 흠칫했다. 희민은 뭐가 그 렇게 놀랄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우륜을 바라보았다. “네, 여기에 남씨는 우륜 씨 말고는 없으니까요. 뭐어, 혹시 제 말에 무슨 언짢은 점이라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륜은 별 다른 말 하나 없이 다시 잠잠해졌다. 참 구닥다리 같은 호칭이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진짜로 신경 쓰이는 것은 호칭 따위가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건 자기 가 이연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대목이었다. 물론 그건 그가 의도한 바도 아 니었고 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일이 이렇게 되 고 나니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연에게 별 일 없기를 비는 수밖에. “수상한 일이라, 뭐가 있으려나. 으음,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신경 쓰이 는 일이 있기는 했는데….” “오, 정말? 말해봐, 일단 지금은 뭐라도 좋으니까.” “어, 최근에 느닷없이 행인이 빈혈로 쓰러지는 사건이 꽤나 자주 발생하 고 있거든요. 뭐, 이것뿐이라면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겠지만….” 그리고 희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을 머뭇거리자 선경이 다음을 재촉했다. “음, 그런데?” “이게, 쓰러진 사람들의 몸을 보니 뭔가에 물린 자국들이 엄청 많았단 말 이죠. 마치 벌레가 문 것 같은 자국들이 말이죠. 거기다가 쓰러진 사람들은 모두 평소엔 건강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정말 그건 수상하네. 그래서 의심 가는 데라도 있나? 뭐, 피를 빠는 벌레 들을 다룬다던가 하는 놈들 있을 거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좀 찾아는 봤는데 말이죠. 음, 딱히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이걸 말해야 할지…. 괜한 의심으로 남한테 피해만 주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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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데요.” “그럴 리가! 자신감을 가져! 지금 넌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거 라고? 네가 말했다는 건 비밀로 할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사실은 이 여자가 제일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우륜은 대화를 지켜보았다. 아까 전까지는 그렇게 못 믿을 인간이라고 공격을 하던 선경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희민에게 바람을 넣고 있었다. 희민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도 남을 의심하는 건 영 뒷맛이 좋지 않은 일일 테니까. 게다가 여기서 지 목을 당한 사람은 선경에게 엄청 시달리면서 여러 모로 수난을 겪게 될 거 란 게 뻔했으니….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희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아무리 버텨봤 자 선경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용의선상에 오른 집안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역시, 그래서, 어디야?” “으음, 혹시, 수질(水蛭)의 충령(蟲靈)을 가진 집안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수질?” “거머리 말입니다. 거머리를 주로 다루는 충방사 집안이 있어요.” “아! 혹시 그 호수 근처에 사는!” “아마 선경 씨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임씨 집안은 한때 꽤나 번성 했으니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할 거에요. 거머리 같이 피 빠는 벌레를 다룰 수 있는 게 그들뿐인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충방사들 중에는 이 집안사람들만큼 피 빠는 벌레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또 없거든요. 그래서 이 집안사람들이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한 거고요.” “오오….” 선경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우륜에게는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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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집안을 주목하게 된 건 그들이 거머리를 다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네. 지금으로부터 한 1주일 전? 2주일 전? 그 즈음에 사건이 하나 있었 는데…. 1주일 전보단 뒤고 2주일 전보단 앞인데, 아무튼 그때, 행인이 한 명 살해되는 사건이 하나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살인사건이란 건 흥미롭긴 하지만.” 살인사건을 흥미롭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륜은 이마를 짚었다. 대체 이 인간은 뭔가 싶었다. “그 피해자가 피해자인지라 제가 나섰던 거예요. 피해자가 그냥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네가 나섰다는 건, 혹시….” “네. 맞아요. 그 피해자는 ‘나비’였어요.” “역시….” 나비? 대화로 보아서는 곤충 나비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이연이 말했던 그 나비를 말하는 걸까? “그 나비는 임씨 집안 부인의 묘에서 발견되었어요. 죽은 지 대략 3일 후 에 발견된 모양이더군요. 그 부근은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이 아니라 서 시체를 발견하는 게 늦은 모양이에요. 문제는, 이겁니다. 가슴 쪽에 총상 이 있었어요. 즉 누군가에게 총을 맞았다는 거죠.” “칼도 아니고 총? 그거 참 살벌하네. 범인은?”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 수사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해결 할 방법이 요원한 모양이에요.” “으음….” “재밌는 건 말이죠, 사건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뭐? 또 뭐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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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걸로 끝이 아니라니, 우륜도 선경도 거 기엔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임씨 집안에서 그 나비의 장례를 준비했는데, 한 3일 즈음 지나서? 막 발인을 하려던 차에, 시신이 사라지고 말았다지 뭐예요.” “시신이, 사라져?”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죽은 시신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아니, 이 경우는 누가 시신을 가져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납득이 안 간다. 대체 시신 같은 걸 가져가서 어디에 쓰겠다고? 선경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잔뜩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희민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뭐, 임씨 집안을 의심해볼 근거라기엔 논리로 봐도 연관성으로 봐 도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수상한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 다면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연 씨가 사라진 것과 관련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라고 하시니….” 그렇긴 하다. 희민이 말한 일련의 사건들은 모조리 기묘하기 짝이 없었고, 그 사건과 깊이 엮여있다고 하는 임씨 집안 역시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허 나 그게 이연이 사라진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애당 초 희민은 그저 선경이 최근에 있던 수상한 일 아무 거나 말해달라고 해서 아무 거나 말해준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 정도 정보 가지고는 선뜻 움직이기 힘들지 않을까, 우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선경은 아닌 모양이었다. 선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니 출입문으로 급한 발걸음을 했다. “뭐해 우륜! 빨리 빨리 가자고!” 선경은 우륜이 대답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런 선경의 행 동이 얼마나 어이가 없게 느껴졌던지, 선경이 방을 나가느라 열어놓은 문을 보며 우륜은 그만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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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정말이지, 왜 대체 이런 일에 엮인 건지….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그때 희민이 우륜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륜 씨.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말이죠.” “뭐죠.” “제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당 히 위험한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관여하지 않는 게 좋아요.” 불길한 느낌. 우륜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아뇨. 그래도, 전 갈 겁니다.” “그건 혹시, 이연이 실종된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우륜은 순간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희민은 우륜의 굳은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나비’와 관련된 일에는 깊게 엮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왜죠?”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나비에게 홀린다고나 해야 할까요.” 홀린다? 귀신에 홀렸다고 할 때의 그 홀린다? 우륜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으음, 아닙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마 제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다만 어쨌든, 너 무 깊게 엮이지는 마시길.” 그때 밖에서 선경이 우륜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성질 급한 인간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륜은 밖으로 나가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우륜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우륜은 문고리를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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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 직전, 희민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아, 뭐, 전 상관없어요.” 우륜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뭔가를 떠올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그 ‘나비’란 건 뭐죠. 뭐기에 사람을 홀린다고까지 하는 겁니까.” 그 질문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우륜의 질문에 뭔가를 생각하던 희민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얘기는 다음에…. 그 얘기는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혹시라도 다음 에 또 오시게 된다면, 그 때 말씀드리죠.” 역시 직감했던 대로, 지금 바로는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우륜은 이미 그 걸 직감했었기에 별 미련 없이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민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지, 뭐가 됐든 너무 깊게 엮이지 않는 게 좋아요. 꼭 기억하시길….” 그때 우륜은 등 뒤로 들려오는 희민의 목소리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평 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지만, 우륜은 그 목소리에서 평소의 온화함과는 다른 어떤 무언가를 느꼈다. 이상한 기분을 느낀 우륜은 희민을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서 별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제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우륜은 잔뜩 높아질 대 로 높아진 선경의 목소리를 따라나섰다. 왜인지, 헤어 나오지 못할 암굴 안 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우륜은 착잡한 심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꿈꿔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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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리워했죠. 그날 이후로 계속 그리워했어요. 다시는 만날 수도 없 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나를 좋아해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보 고 싶었어요.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밤마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어요. 물론 알고는 있어요. 하느님이 있어도 제 소원을 들어주진 않을 거예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착한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어떻 게 해야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요. 물어봐도 알기 쉽게 대답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포기한 건 아니에요. 계속 노력했어요. 물론 헛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지 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는 너무 마음이 답답했어요. 어차피 슬플 일이라 면 이렇게라도 해서 생각하지 말자, 잊어버리자.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 했어요. 아무리 해봤자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전 이제 아이가 아니게 됐어요. 이제 결혼도 할 수 있고 아이도 가질 수 있게 됐어요. 잘은 몰라도 듣기로는 그렇대요. 음, 그렇지만 이상하게 저는 여전히 옛날 그 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마치 그때 이후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말이에요.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전 마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어 요.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전 여전히 착한 아이도 아니고, 잘 우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 하고, 게다가 여전히 너무 외로워요. 울 지 않고 싶어도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매일 혼자 밤을 지새웠어요. 소원을 담은 돌탑을 몇 개나 세웠는 지 몰라요. 행복해지고 싶다고 매일 빌던 어느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바로 어제, 아니 몇 시간 전에요. 저는 매일 밤마다 그리워하고, 안기고 싶고,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요, 마침내 제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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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가라앉는 것 같으면서도 붕 떠있는 느낌. 가벼운 현기증이 머리를 울렸다. 눈을 떠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상한 공간. 이연은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 는 점점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건 마치 울음 같기도 하고 절규 같 기도 한 이상한 소리였다. 희미했던 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 머릿속을 울릴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 었다. 그건 마치 말소리 같았지만, 너무 발음이 뭉개져 있어서 사람 말이 맞 기나 한 건지부터 의심스러웠다. 이연은 귀를 막았다. 소리가 머릿속으로 파 고드는 것 같았다. 깨질 것 같았다. 그만, 그만하라고, 외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얼굴 바로 앞에, 이연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걸 본 이연은 공포로 가득 차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앗!!! 앗. 아, 아?” 그리고 이연은 정신이 들었다. 이연이 상체를 일으켰다. 목소리가 안 나오 지도 않았고 몸이 안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눈앞에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으, 꿈꿨나…?” 이연은 한쪽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아까부터 계속 머리가 아팠다. 만져보니 살짝 부어있는 거 같기도 했다. 마치 뭐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이연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가 너무 어두 워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습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서늘한 곳이었 다. 바닥을 짚은 손에 무언가 까칠까칠한 것이 묻어있었는데 이연은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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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물 먹은 흙 같다고 생각했다. 이연은 일단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머리가 아프고 나른했지만 그래도 걷 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도 슬슬 어둠에 적응해 가는지 아까만큼 주위 가 어두컴컴하진 않았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에 관해 이연은 그제야 슬슬 고민이 되었다. 이 연은 천천히 과거를 짚어보기 시작했다. 우선 제일 처음 기억이 난 건 우륜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일이었다. 그건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 강렬한 일은 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엔 벌어진 일이 뭔가 하면, 우륜이 거미에게 습격을 받았던 일이었다. 그 일로 우륜은 기절했고 이연은 우륜을 자기 집 으로 데려다가 자기 나름대로의 치료를 해주었다. 정말 나름대로. 이연이 할 줄 아는 치료라고는 반창고를 붙여주는 일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였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이연은 우륜과 있었던 일 때문에 착잡 함을 느꼈고 너무 마음이 답답해진 나머지 집을 나섰다. 향한 곳은 우륜도 들렸었던 그 묘지. 그곳은 이연이 항상 마음이 답답해질 때마다 들렀던 곳이 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향하던 이연은, 도중에 낯선 사람을 목격했다. “누굴까 그 사람. 으으음….” 이연이 그때 봤던 사람은 새하얀 바탕에 검은 테를 두른 한복을 입은 남 자였다. 갓을 쓰고 있진 않았지만 딱 봐도 어디 귀한 양반이구나 싶은 풍채 의 청년. 이연이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사람이 이 인적 드문 산속에서 간만에 만난 사람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연이 인사를 건넸지만 그 남자는 마치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그 인사를 무시해버렸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으으응, 나빴어, 정말….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쌀쌀맞다니….” 그리고 이연은 ‘그래도 딱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는 이유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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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 대해 생각하길 관둬버렸다. 그 이후엔 딱히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그냥 여느 때처럼 묘지에서 시간 을 보냈고, 여느 때처럼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정확히는 돌아오려고 했다. 집으로 내려가던 와중에 무언가가 머리에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이 드니 지금 이 꼴이었다. “역시, 아무 것도 모르겠어!” 이연은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되지도 않는 생각을 하느니 지금 당장 여길 빠져나가는 게 낫겠다는 게 이연의 결론이었다. 그 래서 이연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좋아, 일단, 일단 아무 데라도, 아얏!” 쿵, 걸음을 뗀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연은 무 릎을 문질렀다. 너무 급하게 걸음을 떼다가 무언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이 연은 그 앞으로 서둘러 나가는 대신 손을 뻗어 보았다. 뭔가 차갑고 넓적한 곳이 만져졌다. “뭐야 이거, 벽?” 이연은 거기에 손을 댄 채로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다. 딱히 손에 걸리는 것 이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뭔가 고리 같은 게 잡혔다. 그걸 잡고 흔들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벽이 아니라 문인 모양이었다. 이연은 그 걸 잡고 몇 번 움직여보았지만 아무래도 잠겨있는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이연은 뒤로 방향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발에 뭔가가 차이는 느낌이 났다. 이연은 자세를 낮추 고 그 부근의 어둠을 헤집었다. 뭔가가 손에 잡혔다. 막대기처럼 길쭉한 물 건이었다. 물기가 있어서 조금 미끄럽기도 하고 퀴퀴한 냄새도 났지만 이연 은 그 막대기를 버리지 않고 손에 꼭 쥐었다. 무서워서 뭐라도 의지하고 싶 었기 때문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뭔가 쥐고 휘두를 게 있으면 무서운 게 나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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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 이연은 그렇게 생각했던 듯했다. 어찌되었건 이연은 계속 걷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물이 고여 있는 습한 흙바닥,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알 수 없는 물건들,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곳이었다. 그 분위 기 탓에 이연은 몇 번이나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놀라 까무러치곤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연은 뭔가를 발견했다. 그건 계단이었다. 저 멀리, 저 앞에 빛이 보였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그 상황에선 누구나 저쪽이 출구라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이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연은 너무나도 기 쁜 나머지 무서운 것도 잊고 달려갔다. 분명 출구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길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이연은 거의 기다시피 하며 허겁지겁 계단을 올랐다. 숨 가쁘게 계단을 올라온 이 연은 속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감탄사를 외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앞에 는 벽밖에 없었다. 울퉁불퉁한 동굴 벽이었다. 어? 그럼 이 빛은 대체 어디 서 들어온 거지? 이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제야 이연은 자기 뒤쪽에, 계단 출구와 반대 방향인 쪽에 문이 있다는 걸 깨달았 다. 그 문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계단 근처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마침내 출구를 발견한 것이 기뻤던 이연은 환희에 젖어 문을 나섰고, 그리고…. “뭐, 뭐야 이거…?” 바깥의 풍경을 본 이연은 순간 멍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연이 서있는 곳은 어느 산속이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문 앞에 나있는 작은 공터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 던 것이다. 그것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이 가득. 자세히 보니 그 중 몇몇 사람들은 피까지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거 나 말거나 눈앞에 보이는 내리막길을 따라 산을 나가면 그만일 텐데, 이연 은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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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떡하지, 어떡…. 으앗?! 뭐, 뭐, 뭐, 뭐야?!” 이연은 깜짝 놀라서 안에서 주워왔던 막대기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갑자기 어디서 신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으, 아아아, 깜짝이야, 귀신이라도 나오는 줄, 으으으….” 이연은 긴장을 푼답시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우연히 자기가 들고 있는 막대기에 시선이 간 이연은, 비명과 함께 기절초풍했다. “이, 힉?! 뭐, 뭐야?!” 비명을 지르며 이연은 들고 있던 막대기를 내던졌다. 아니, 그건 그냥 막 대기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분명했다. 그건 분명히 사람 팔이었다. 이연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내려앉았다. 숨은 거칠었고 눈가는 촉촉했다. 계속 참고 있던 공포가 터지고 만 것이리라. “싫, 어어어, 이게 뭐야아아, 흐읏…….”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이연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팔이고 다리고 힘 이 들어가지 않아서였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탓도 있었다. 그때 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신음소리.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 어 디선가에서 계속 들려왔다. 분명히 누군가 의식이 있는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연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다리가 너무 떨려서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연은 힘없이 떨리는 손으 로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여전히 팔다리는 떨리고, 이연의 머릿속은 당장 도망치 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자신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데 무섭다 고 도망쳐버리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이연의 발목을 붙잡았다. 소리는 계속 멈췄다가 들렸다 하면서 이연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연은 조 심스럽게,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한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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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쓰러진 사람들 중 하나가 이연의 발목을 붙잡았다. “…!!” 이연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이번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몸부림 치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놔, 놔줘요…!!” 이연은 거의 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쉽게 떨어뜨릴 수 없 었다. 이연을 붙잡은 건 보통보다 조그만 체구를 가진 소녀였지만 그 힘만 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물고 늘어지는 악어 같았다. 그것은 점점 이연에게로 몸을 가까이 했다. 길게 뻗은 머리카락 사이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뭔가 사람의 말 비슷한 것도 했던 것 같지만 이연에 게는 그저 짐승의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런 걸 신경 쓸 겨 를이 없었던 것이다. 헌데 그 직후, 이연은 놀라운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공포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건 바로, 그 소녀의 등에 피어나 있는 검붉은 색의 나비 날개…. 그때 어디선가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연을 붙잡고 있던 그 소녀는 순간 멈칫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쪽 발 로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소녀의 손을 힘껏 밀어냈다. 지익, 이연의 발 목을 파고든 손톱이 밀려나면서 살갗에 핏방울을 맺히게 만들었다. 물론 이 연은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공황 상태였기에 별 큰 문제는 안 되었다. 곧 이연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기다시피 하면서 근처에 있던 손수레 뒤로 숨었다. 숨을 골랐다.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딱히 그게 누구라고 생각해서 숨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연이 몸을 숨긴 것 은 단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점점 더 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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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진정되지 않아 쿵쾅거리며 큰 소리를 낸다. 숨도 아직 제대로 고르지 못 한 탓에 숨소리가 요란하다.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오금도 저리기 시작한다. 그 기척은 점점 가까이 오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더 움직이지 않았 다. 뭔가를 건드리는 것 같은 소리는 났지만 자리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 렇게 하도 오래 움직임이 없자 이연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연은 조용히 고개를 수레 밖으로 내밀었다. 아까 이연의 발목을 붙잡았 던 그 기괴한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들 사이 로 어디선가 봤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어어? 어디서 봤는데, 음, 어어, 아, 아아아아?!’ 그제야 이연은 생각났다.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 서있는 그 남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냈다. 기품 있게 한복을 차려입은 그 남자, 분명히 이연이 어젯밤에 묘지 근처에서 목격한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가만히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아마도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향해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혼자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어떡하지, 도와 달라고 할까?’ 이연은 고민했다. 인상이 우륜마냥 까칠해 보이는 게 영 친절할 거란 생 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렇지만 이연은 섣불리 뛰어나가지 않았다. 어쩐지 분위기가 영 꺼림 칙했기 때문이었다. 이연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차라리 이대로 숨어 있다가 저 남자가 가고 나면 몰래 움직이는 게 낫겠다고 결론지었다. 그래, 그러자. 그렇게 생각하고 이연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천천히 수레 뒤로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퍼억, 뭔가를 후려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처음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아니, 그게 이연 자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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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서 난 소리라는 걸 알아채는 것조차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띵하 니 울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이연은 그만 바 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치 고무줄 늘린 것처럼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머리에서 쏟아진 피가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이연은 기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멍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이연은 누군가 자신의 앞에 있는 걸 느끼고 무작정 붙잡았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뭐라도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마 저도 몸에 힘이 없어 입술조차 마음대로 놀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연이 겨우 붙잡은 그 사람은 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람, 한 복을 입은 그 양반 같은 남자는 이연을 보더니, 갑자기 욕을 하며 이연을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이연은 자기가 걷어차이고 있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이미 비명을 지르기 는커녕 아픔을 느끼는 것조차 벅찬 상태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남자의 행동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이연은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연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남자는 이연이 자기를 붙잡은 게 불쾌하다 는 듯이 손으로 바지를 털었다. “더럽게….” 그 직후, 쓰러진 이연의 뒤로부터, 금이 간 탈로 얼굴을 가린 거구가 걸어 왔다. 사람이라기 보단 괴물 같은 체구.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 거구 의 손엔 이연의 머리를 후려쳤던 거대한 쇠막대기가 들려있었다. 남자가 눈짓으로 시늉을 하자 거구는 쓰러진 이연을 들쳐 메고 굴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는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후다닥, 흙을 밟는 소리. 남자는 바로 뒤 를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감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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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그는 결국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고, 남자는 무슨 생각에 서인지 혀를 차고는 산을 나가는 내리막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드리웠다. 인적 드문 산길은 온통 어둡기 그지 없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만이 유일하게 빛을 냈다. 유난히 아까보다 더 차체가 덜컹거리는 것 같아 우륜은 조금 불편해했다. 토할 것 같았다. 다만 그건 진짜 우륜이 멀미에 시달려서가 아니었다. 다름 이 아니라, 여전히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피곤했기 에 눈을 감으면 감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산속을 달렸을까, 대략 30분 정도를 달린 끝에 차는 멈춰 섰다. 다행히 우륜이 곯아떨어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우륜은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어두컴컴해서 밖에 뭐가 있 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자욱했다. “제대로 도착한 거 맞습니까.” “거의. 아직 조금 남았어. 흐음, 아무래도 여기서부턴 걸어 들어가야 할 것 같네.” 우륜은 앞을 살펴보았다. 과연, 포장도 안 되어있을뿐더러 좁디좁은 길이 라 차가 들어가기는 확실히 무리였다. “이 앞의 호수, 보이지? 이걸 쭉 둘러 가면 된다고 했어.” 선경의 말대로 차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굉장히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지금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우륜이 있는 곳의 정 반대편에 미약한 불빛들이 보였다. 호수를 직선으로 건너간다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겠으나 호수를 건널 수단이 없으니…. 우륜은 미리 준비해온 나비 몇 마리를 날려 보냈다. 우륜의 곁에서 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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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빛나기 시작한 나비는 허공에 원을 그리며 맴돌다가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마을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걸 보고 선경이 물었다. “어때? 뭔가 있는 것 같아?” “아무리 봐도 막무가내 찍기인데, 어째 제대로 짚으셨군요.” 전의 경험으로 대강 알게 된 것은 나비들이 이연에게 이끌린다는 사실이 었다. 우륜이 이연에게 도달할 수 있게 해준 것도 이연에게 이끌려 날아가 는 나비였고, 실제로 이연 주위에도 수많은 나비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서 우륜은 생각했다. 이걸 역으로 활용하면 이연이 어디 있든 나비들을 풀어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다만 우륜은 신경 쓰이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이연의 푸른 나비 날개, 거기서 흘러나오는 기가 자신이 가진 기와 거의 동질이었다는 게 신경 쓰였 다. 심지어 나비들이 이끌리게 만드는 것도, 나비들을 푸른색으로 빛나게 만 드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그건 우륜이 처음 이연을 봤을 때 놀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우륜이 이연을 만나기 전 숲에서 푸른빛 나비에게 이끌렸 던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리라. “좋아! 헛걸음은 아니란 거지? 그럼 주저 말고 가자고.” 선경은 먼저 앞장서서 호수 변의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우륜도 그 뒤 를 따랐다. 안개가 끼어있었지만 다행히도 길을 걷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는 정도였 다. 산길마냥 경사가 심하거나 지면이 울퉁불퉁한 일도 없는 평탄한 길. 그 저 가끔가다 호수랑 이어진 개울 정도나 눈에 띌 뿐. 그래서 빛 하나 없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따라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10분, 15분? 어쨌든 생각보다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를 두고 우륜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건 선경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가만히 서서, 이상할 정도 로 조용한 마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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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억이 맞는가 모르겠는데, 원래 시골집들은 이렇게 조용했습니까.” “어, 뭐어, 보통 조용한 건 맞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선경은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자 우륜이 제지했다. “조용히 들어갔다 오죠. 그건 좀 나중에 피고요. 눈에 띈다고요.” “아, 음, 그래, 그러지.” 웬일로 선경이 순순히 우륜의 말을 따랐다. 나름대로 의견이 일치했던 모 양이었다. 둘은 말없이 마을 입구로 걸어갔다. 입구라고는 해도 딱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황망히 서있는 낡아빠진 솟대 몇 개가 전부였 고 그밖에는 집이 한두 채 정도가 있을 뿐. 입구에 집이 두 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다 무너지기 직전인 폐가였 다. 아니, 사실상 반은 이미 무너져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마당은 잡초로 무성해 발 디딜 틈도 보이지 않았고, 집도 곳곳에 풀이 기분 나쁘게 얽혀 있어 벌레들이나 살법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채. 거기도 낡아빠진 초가집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집 의 형태는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긴 사람이 살고 있긴 했으니까. 우륜 과 선경이 지나갈 즈음 한 노인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노인은 집 앞을 지나가는 우륜과 선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말라비틀어진 생선 눈알처럼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에 우륜과 선경은 괜히 긴장을 하였다. 덕분에 노인의 집 앞을 지나치는 둘의 신경은 바짝 곤두서있었다. 다행히, 그 집을 지나치기 전에도 그 후에도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만 그럼 에도 둘은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 이상한 공간에선 가 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올랐고 또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지나친 적막함은 오히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도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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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인 걸까? 우륜과 선경은 긴장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계속 걸음을 옮겼 다. 마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 마을 중심부에 도착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 너무 조용한데 이거….” “…….” 이상했다. 분명 마을의 중심부에 들어왔는데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 았다. 아니, 불빛도 하나 없었다. 멀리서 봤을 땐 미약하게나마 불빛이 보였 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귀신에 홀려서 헛것이라도 봤단 말인가? 아니 면 모두들 쥐 죽은 듯이 숨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그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우륜은 마을 중심부에 우 뚝 솟은 거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목은 마치 무엇에게 보호받기라도 하 는 것처럼 크고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그 담장 안쪽으로 향하는 쇠문은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굳게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그건 뭔가 이상했다. 마을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는 이 상한 게 아니지만, 그 나무에 벽을 두르고 철문과 자물쇠를 설치하는 등의 수고를 들인다는 건 전혀 듣도 보도 못했다. 이건 마치 뭔가를 꼭꼭 숨기려 고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애초에 동네 나무 하나 지키겠다고 벽을 두르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이 정도면 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수준 아닌가. 우륜이 한참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선경이 우륜을 툭툭 건드렸다. 우 륜을 옆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우륜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 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성들이었다. 여성들도 있긴 있었는데, 그들은 조금 멀 찍이 떨어져서 우륜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사람, 한복을 입은 사람, 모자를 쓴 사람 등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딱 하 나, 눈빛만은 모두 똑같았다. 우륜은 마을 입구에서 보았던 노인의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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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렸다. 아아, 그 퀭한 눈빛이 지금 사방에 가득하다. 마치 죽은 생선 같 은,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빛에 휩싸여 있다. “이거 좀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겠죠. 저쪽도 섣불리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이고.” 우륜의 말대로 사람들은 어느 거리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 그 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나마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우 륜은 지금 당장 싸워도 지진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섣 불리 싸움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무력을 행사하는 건 항상 책임이 따르 는 일이니 신중해야 한다. 우륜은 그 교훈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 교훈에 매우 충실했다. 우륜은 양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별 거 아닌 행동에도 사람들은 겁을 먹고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비켜주십시오. 우린 싸우자고 온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다가 사람들 무리 중 한 사람이 우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 낡아빠진 군복과 군모를 착용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보아하 니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건 그인 모양이다. “돌아가소.” 중후하고 단호한 목소리. 모자 아래의 다부진 얼굴은 절대로 아무도 들여 보내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역시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 법이었다. 우륜은 상황이 영 좋지 않게 흘 러갈 거 같은 느낌에 혀를 찼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우린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돌아가소.” “우리에겐 중요한 사람입니다. 당신들에게 해가 될 일은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길을….” “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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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우륜의 속에서 욱하고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났다. 우륜은 애써 성질을 눌렀다.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으시죠! 아니, 도대체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 우륜은 몇 번이고 남자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 이 남자는 거절했다. 아니, 거절이라기 보단 그냥 일방적인 무시였다. 그러 니 우륜이 결국 폭발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 된다면 뭐가 안 돼서 안 된다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 체 뭐가 문젠지를 알아야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 “제길,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라니까!! 이 빌어먹을 놈들이, 뭘 믿고 까부는…!!” 답답해서 폭발하려 드는 우륜을 선경이 제지했다. 그렇지만 우륜은 화가 영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우륜!! 됐어, 그만해! 너 혼자 흥분해봤자 소용없는 거 알잖아!” 그때 갑자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둘은 이 영문 모를 일에 당 황스러움을 느꼈다. “우륜이라고? 남우륜?” 아까 전만 해도 단 한 마디도 않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신의 이름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는 듯 우륜은 아무 생각 없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뒤이어 말을 꺼냈다. “그 남씨의 얼라라고. 그렇다면 그 쓰레기 자슥이 이곳에 염치없이 기어 들어왔다는 소리요? 퉤, 옴팡지게 재수 없구먼.” 어느 새 그 말을 듣고 있는 우륜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륜은 애 써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니, 누굴 말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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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몰라서 묻사, 그거야 네 애비….” 그러나 그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선경이나 다른 마을 사람 들이 뭘 할 새도 없었다. 우륜은 갑자기 뛰어들어 남자에게 주먹을 휘둘렀 던 것이다. 그게 얼마나 힘이 실렸던지, 남자는 저만치를 나뒹굴고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두들 말문이 막힌 가운데, 우륜은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가 뭐 어쨌다고? 한 번 더 지껄여보시지.” 그걸 보고 몇 사람인가가 우륜에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좌우에서 한 명씩, 그리고 후방에서 한 명. 세 명 모두 무기로 쓰기에는 약간 부실해 보 이는 얇은 각목을 들고 있었다. 각목을 양손으로 과하게 힘주어 잡고 있는 걸 보니 무기에 과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을 생업으로 하 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륜은 그 사 람들이 자신보다 몇 수는 아래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좌우에서 달려들던 두 명은 우륜에게 정면에서 안면을 강타당해 쓰러졌다. 뒤에 있던 한 명은 열심히 각목을 휘둘러보았지 만, 우륜이 각목을 쳐서 날려버리자 무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당황하다가 복부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다.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하려던 당초 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였고 남은 건 험악한 분위기뿐. 남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우륜과 선경을 노려보았다. “음, 이건 좀 안 좋아 보이는데….” “왜요, 이제 와서 겁난다고 할 겁니까.” 그 와중에 아까 맨 처음으로 우륜에게 맞고 나가떨어졌던 남자가 겨우 정 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며 우륜에게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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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애비는, 그 자슥은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냄기고, 그리고는 지 얼라만 데리고 도망가 부렸지. 그런디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기어 들 어온단 거요!!” 남자는 자신을 부축해주는 옆 사람을 제치고 홀로 일어섰다. 여전히 회복 이 덜 됐는지 휘청거리고는 있었으나 목소리에 담긴 분노는 불꽃같았다. “설령 니가 단지 그 놈의 자슥일 뿐이라고 해도, 이렇게 된 이상 곱게 돌 아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기요. 다들 뭐하고 있소! 그 괴로운 일들을 벌써 잊은 기요! 싸우래요, 싸워서 본때를 보여주소!!” 그 불꽃 일렁이는 것 같은 목소리에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의 눈동자에 비치던 두려움은 어느새 불꽃같은 투지로 변해있었다. 이쯤 되니 선경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륜이라면 모를까 자신은 그 다지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또 싸움을 잘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있다 가 빠져 나와서 다른 계획을 구상할 생각이었는데, 우륜이 날뛰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틀어져버렸다. 덕분에 초조해져서 담배라도 물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자기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을 좋아하진 않을 테니. 그 사이, 남자의 말에 동조된 사람들이 슬슬 우륜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 누가 먼저 시작하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렸던 사람들이, 누 군가 한 사람이 달려드는 걸 보고는 그 뒤를 따라 너도 나도 우르르 달려들 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우륜은 그게 참 못 마땅하게 느껴졌다. 원한이고 뭐고 자기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인데 그걸 가지고 저렇게 난리들이니 그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 다. 아, 다 패버리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쯤이 되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나 쁘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먼저 패는 건 안 되지만 저쪽에서 먼저 싸움 을 걸어오면 죽도록 패도 괜찮다는 게 우륜의 평소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싸움에 대한 우륜의 자신감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달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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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족족 줄줄이 우륜에게 두들겨 맞고 날아가기 일쑤였다. 아무리 사람들이 기세가 등등해졌다곤 해도 아까보다 딱히 강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각목 째로 부수면서 얼굴에 스트레이트, 뒤돌면서 팔꿈치로 명치 가격, 발 차기로 무릎 찍어버리기, 가볍게 공격을 피하면서 뒷목에 손날 찍기…. 딱히 신체강화 같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일방적인 싸움 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우륜이야말로 진짜 악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경도 그 광경을 보며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생각할 정도였 으니 말 다한 셈이다. 몇 사람을 쓰러뜨렸는지 슬슬 기억도 안 날 즈음, 더 이상 숫자로 밀어붙 여봤자 인력낭비라는 걸 깨달았는지 상대의 기세도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우륜도 자기 몸의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걸 문득 느끼고 기세를 낮췄 다. 특히 몸에 잔존하고 있는 거미독이 체력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결국, 두 쪽 다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잠시 동안 소강 상태로 대치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 주위를 경계하던 우륜이 뭔가를 발견했다! 뭐라고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우륜은 바로 선경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타앙. 총소리. 발포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다. 멀뚱히 서있는 선경을 향해 날 아간 총탄은, 우륜에게 가로막혔다. “윽…….”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탄을 맞은 건 선경이 아닌 우륜이었다. 우륜이 선경 의 앞을 가로막았기에 가까스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너, 괜찮아?!” “으윽, 뭐 이 정도는, 그보다….” 우륜의 어깨 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륜은 그런 걸 신 경 쓸 새가 없었다. 다음 총탄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들지 모르는 일이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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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이건 그에게도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는 전혀 예상을 못한 점도 있지만, 그보다도 선경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생각지 못한 게 컸다.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휘몰아쳤다. 우륜은 그 잠깐 동안 온갖 고민이 들었다. 총탄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다만 총탄에게서 선경을 지킬 자 신은 없었고,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음 몇 초 후면 재장전이 끝날 것이고, 곧 총알이 또 날아들 것이다. 저 쪽에 총이 한 자루일 거란 보장도 없다. 먼저 달려들어야 하나? 아니면 여 기서 방어에 집중해야 하나? 그 어느 것을 선택하든 우륜의 체력과 몸이 끝 까지 받쳐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다. 우륜은 자신을 믿기로 하고, 선경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이 선경이란 인간은 그리 맘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우륜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총을 겨누는 소리가 들렸다. 우륜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일 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그만들 허게!”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이 든 목소리였지만 꽤나 걸걸했다. “으, 으르신…?” 그 한 마디에 좌중이 모두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우륜과 선경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샌 노인 한 분이 서계셨다. 순간 둘은 그 얼굴이 어디서 본 얼굴이다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곧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까 전 마을 입구에서 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그 노인이 었던 것이다. 어르신의 등장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그 군복 입은 남자가 당황한 듯이 노인 앞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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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르신, 하지만 이 시끼들은….” “크흠, 뭔가.” “아니, 그랑께, 이 시끼들은…!” “허, 그랑께, 대체 뭘 했다그 이런 난리를 피느냐고 묻잖요.” 노인의 물음에 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딱히 댈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그 이유를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지도. “읎으면 그만 돌아가소. 흐흠, 난 이 얼라들 데리고 돌아갈 테니.” 노인은 인파를 뚫으며 우륜과 선경에게 걸어왔다. 그 남자가 당황한 듯이 노인을 잡고 말렸다. “으르신, 잠깐만요! 아무리 으르신이라고 해도 그 수상한 자슥들을 그냥 보낼 순….” “수상? 얼굴 모르는 사람이면 다 수상하다고 할 거요? 억지도 작작 하소.” “그래도 이대로 보내면 분명 임씨 데련님께서….” “흠, 이 얼라들은 내 손님들이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않소. 그 케 나를 못 믿는 게요?” “아니, 그른 건 아니지만….” 남자는 상당히 곤란해 하면서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목이 아픈지 잠시 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손녀와 사위요.” “네?” 그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우륜과 선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 와중에 선경이 눈치가 빠른 게 다행이었다. 선경은 노인의 눈짓에서 뜻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네, 맞아요! 저희 할아버님이세요!” 선경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만연해졌다. 우륜은 표정과 목소리가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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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선경을 보면서 이런 뻔뻔하고 염치없는 인간이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허지만 아깨는 분명 찾는 사람이 있어서 왔다고….” “네, 그게 할아버님이었어요! 어렸을 때 한번 뵙고는 십 년이 넘도록 못 뵈어서∼ 결혼하기 전에 꼭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륜이 들어본 선경의 목소리 중에 제일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대놓고 저렇게 연기를 하다니, 우륜은 참 선경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선경이 손가락으로 우륜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그쯤 되면 우륜도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 만 말이다. “아, 으음, 네, 겨, 결혼합니다.”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고 했던가. 아무리 어설픈 거짓말이 라도 세 사람씩이나 뻔뻔하게 해대니 듣는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으르신, 분명 으르신네 아는 이미….” “아가 한 놈이란 소린 안했소. 그리고 손녀라카지 않았나.” 남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우륜과 선경을 쳐다보았다. 영 미심쩍다는 눈 빛이었다. “으음, 암만 뵈도 지지배 쪽이 머스마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이….” 순간 우륜은 선경이 아주 잠깐 정색하는 걸 목격했다. 도대체 방금 말의 어느 면이 그렇게 정색할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선경은 금 세 만면에 미소를 씌우고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대답했다. “에이, 요즘 세상엔 여자가 연상인 부부도 얼마나 많은데요. 게다가 저 아 직 한∼참 젊거든요?” 한참이라는 말이 묘하게 강조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륜은 그 모습을 한 심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드래요. 으르신, 이번엔 그냥 넘어가겠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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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영 껄끄러워하는 듯 했지만 노인의 기세에 눌려 별다른 말을 꺼내 지는 못했다. 결국 남자의 손짓과 함께 마을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있던 곳 으로 돌아갔다. 다시금 조용해진 마을. 그제야 우륜은 긴장이 풀렸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 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우륜!!” 이번에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맞은 총탄 때문에 계속 출혈 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애초에 보통 사람이라면 총탄을 맞은 시 점에서 두 다리로 서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니,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용 하다면 용한 일이었다. “흠, 집으로 데리고 오게.” 노인은 기침을 하면서 방향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륜도 선경 도 그 노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선경 은 다 쓰러져가는 우륜을 부축한 채로 노인의 뒤를 따랐다.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굴 속.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아니, 들어오고 싶지도 않았다. 이 곳은 항상 불쾌한 느낌이 드니까. 끝없이 이어진 통로. 그 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곳이 꺼려지는 걸지도 모른다. 어둡다. 불빛 하나 없는 통로는 음침하기 그지없다. 그저 자신의 발소리만 이 어둠 속을 메울 뿐. 얼마나 걸었을까, 어둠 저 너머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아 주 조그맣게 들려온다. 걸을수록 그 목소리가 점점 커져온다. 괴로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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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목소리. 미처 인간의 말이 되지 못한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음 소리 같았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그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곧 앞에 커다란 윤곽이 나타났다. 보아하니 그것은 철문 같았다. 굳게 닫 혀 있어야할 문이 열려 있었다. 심지어 문지기도 보이지 않았다. 뭐, 나에게 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나는 큰 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히 걸어 안쪽 으로 들어갔다. 문 안쪽 역시 빛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 도 분명히 뭔가가 움직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건 사람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서있는 사람도 있었는 데, 그 중 몇몇은 서로 얽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하아, 아….” 곳곳에서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마 이 사 람들이 그 ‘나비’라는 사람들이겠지. 괴로워도 괴롭다고 말할 수조차 없어 애처로운 목소리. 그리고 그녀들 위에 올라타서 몸을 흔들고 있는 살덩어리, 그건 아마 위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할 파수꾼들일 것이다. 그 광경을 보 니 나는 이 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찔꺽거리는 물소리와 비릿한 냄새. 역겨움에 치가 떨린다. 그들에게 감사 하지는 못할망정 욕보이기나 하다니. 처음부터 이놈들을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그 꼴을 보고나니 더더욱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곧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 자 나머지 놈들은 당황하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잠시 후, 바닥에 나뒹굴 었던 그 놈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를 수 없게 되었다. 거머리로 목구멍을 틀 어막았으니까 곧 질식해 죽을 테지. 안구를 파고드는 거머리들은 덤이다. 녀 석들은 자기들이 거머리들한테 죽임당할 거라는 걸 꿈에도 몰랐을 것이고,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이니 더더욱 알기 어 렵겠지. 녀석들은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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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녀석들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러 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놈들을 다 죽일 수 있었 다. 몇 분이 지나자 굴 안엔 나비들의 지친 숨소리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뒀던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쓰러져있는 나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몸을 더듬어, 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가능한 한 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처 음 해보는 일이라 잘 되지 않았다. 그들, 나비들은 힘이 없어 크게 몸부림치 지도 못하고 꺽, 꺽 거리는 소리만 내다가 금세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조금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그들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목숨들이었 고 살아 있어봤자 고통 받을 뿐인 사람들이었으니 이렇게라도 빨리 죽는 게 그들에겐 더 다행인 일일지도 모른다. 매일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고통 에 시달리면서 심지어 남자들의 노리개 꼴까지 당하다니, 그건 정말 죽느니 만 못한 삶이잖은가. 그래서 나는 그들을 편하게 해준 것뿐이다. 물론 이건 그냥 합리화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점점 목에 칼을 찔러 넣는 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생각보다 정말 힘든 일이었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칼이 생각보다 잘 들어가지 않아 힘을 주다보니 이젠 팔도 힘이 다 떨어져 서 덜덜 떨렸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뒤로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등이 축축했다. 땀이나 바닥의 습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나비들의 피가 바닥까지 흘러내려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너무 피곤해서 이대로 잠들어버리 고 싶기까지 했다. 그래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시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부분에 입 을 갖다 댔다. 아직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온기가 입술로 전해졌다. 그대로 빨아들였다. 비릿한 쇠 맛이 나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상하게 불쾌한 느낌이라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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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는 몰라도 목구멍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마음은 절박한데 몸은 내 생 각을 잘 따라주지 못했다. 거머리들이 몰려들었다. 피에 맛이 들린 벌레들이 시체에 달라붙어 닥치는 대 로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입에 머금은 피를 겨우 다 넘기고는 다시 상처에 입을 대고 피를 빨아들였다. 마치 나도 거머리가 된 것 같았다. 뭐, 사실 상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나는 옛날부터 벌레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벌레처럼 계속 피를 마셨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계속. 피가 더 나오지 않으면 다른 부분을 칼로 째고 거기서 나오는 피를 마셨다. 마시다 가 숨이 차서 고개를 드니 내 옷이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머리카락도, 손도, 어디 하나 피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 피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침을 삼킬 때마다 피 맛이 났다. 문득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 나비들을 능욕하던 그 놈들이 랑 내가 뭐가 다를까 하고. 그놈들은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었다. 남의 것 을 빨아먹기만 하는 주제에 감사할 줄도 만족할 줄도 모르는 놈들. 하지만 나는? 다른 거 다 제쳐놓고 생각해보면, 나도 이렇게 남의 것을 빨아먹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난 그놈들과는 달리 단순한 욕구나 재미 등 그딴 시답잖 은 이유로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도 결국 나 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무렵, 나는 거머리들이 들끓 는 방에서 일어섰다. 배가 너무 불렀다. 억지로 꾸역꾸역 피를 마셨더니 토 할 것 같다. 거머리들은 아직 주린 배를 다 채우지 못했는지 여전히 시체 위에서 들끓 고 있었다. 벌레들은 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시체를 갉아먹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피든 살점이든 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취해야 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이 정도론 턱없이 어림도 없었으니까. 너무 역하다. 기분 나쁘다. 토할 것 같다. 나는 겨우 몸을 겨누며 출구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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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걷기 시작했고, 충분히 영양을 섭취한 거머리들이 내 뒤를 따라 기었다. 다 내팽개치고 쓰러져서 잠들고 싶은 기분. 하지만 나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녀의 모습. 검붉은 나비 날개를 펴고 나를 반겨 주던 그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져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만나고 싶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몸은 지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입가에선 실없이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피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간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정신이 드나.”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륜은 얼굴을 찡그렸다. 눈꺼풀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또 쓰러졌었나 보군요.” 빠른 파악. 그 말에 선경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도 이런 일을 겪다 보 니 우륜의 사태 파악 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상처를 방치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쓰러지는 건 우륜에게는 늘 있는 일이었으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긴 했지만. 우륜은 상체를 일으킨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그맣고 허름한 방. 옆에는 선경과, 아까 보았던 노인이 앉아있었다. 얼마 안 있어, 다 떨어지기 직전인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노파였다. 아마도 노인의 부인이겠거니 하고 우륜은 생각했다. 노인과는 다르게 사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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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파는 우륜을 보더니 깨어나서 다행이라면서 기뻐 해주었다. 그러고는 우륜에게 약을 건네준 뒤, 방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노파가 나가고 나서 방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이 그리 오래간 것은 아니었다. 선경이 먼저 말을 꺼냈던 것이다. “어르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선경이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회복 디는대로 여길 떠나소. 여긴 있어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구먼.”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그건 분명히 우륜과 선경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리라. 우륜도 선경도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노인의 그 제안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둘이 별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고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우륜과 선경이 쉽게 돌아가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예상했을 테지만 말이 다. 애초에 그 정도로 포기할 거였다면 마을 사람들하고 싸움을 벌이기 전 에 알아서 돌아갔을 터이니. “어르신.” 다시 찾아온 침묵을 깨며 우륜이 말을 꺼냈다. “이 마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고건 어이 묻나.”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제 아버님이 ‘도망자’라고 말입니다.” “…….”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뭔가 말하기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노인은 허공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으음, 그건, 자네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기가?” 우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영 말하기 껄끄럽다는 듯 새 담배를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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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었다.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른가, 하긴, 그때 자네는 아직 얼라였을 테니, 모를 만도 하구먼. 으음, 가만 있어봐라. 그르고 보니 그 남씨의 얼라인 자네가 여기에 있다는 기는, 그 남씨도 지금 여기에 있단 긴가?” “그건 아닙니다. 제 아버님은 얼마 전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가, 그 양반도…. 그럼, 자네는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나? 여기에서 있었던 일 같은 고 말이여.”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몇 번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답을 해주시지 않으시더군요.” 노인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우륜의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는 말을 듣고는 더더욱. 옆에서 지켜보던 선경이 한 마디 던졌다. “그거군요. ‘흑색화재’ 사건.” “허, 자네가 그걸 어찌….” “남씨 가하면 사실상 그 사건밖에 더 없지 않나요. 그 남씨가 이 지역을 떠나 해외로 도피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으음, 그르킨 허지….” 흑색화재. 우륜은 내심 놀랐다. 그 사건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 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지금 이 사건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니, 정말로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륜은 의문점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선경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분명 아까 차에서 그 사건의 범인은 안 잡혔다고….” 분명히 그렇게 들었었다.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는 밝혀졌으나 아직 잡히지는 않았다고. 그 말에 선경은 당연한 걸 묻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네가 기억하는 그대로야. 아, 혹시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얘기하 는 건데, 네 부친이 범인이라는 게 아냐.” “하지만 그 사람들 반응은 완전 범죄자 취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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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은 그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블레이저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 를 찾았다. 담뱃갑을 집어 꺼내려다가, 문득 옆에 노인이 앉아있는 걸 깨닫 고 그걸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음, 우륜, 꼭 범인이 질책을 받게 되는 건 아냐.” “무슨 소립니까.” “들어봐. 내가 범인이 밝혀졌다고는 했지만 그건 사건이 터진 뒤 한참 뒤 의 일이야. 그 화재로 깡그리 다 불타는 바람에 증거고 뭐고 아무 것도 남 지 않았다고.” 노인은 문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둘의 대화를 착잡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마치 옛날 기억을 떠올리는 듯 했다. 그 와중에도 선경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건이 터진 다음의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기 마련이야. 매우 감정적이지.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그래. 범인을, 진실을 찾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람들은 그저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 할 뿐이야. 범인이 나 사건의 내막을 밝히는 건, 감정을 해소해도 마땅할, 그러니까 화풀이나 질책을 해도 문제없을 사람을 찾기 위한 거나 마찬가지지.” “어째 인간의 존엄성을 바닥에 처박는 발언이시군요.” “뭐, 경험상 그렇다는 거야. 딱히 내가 부정적인 게 아니라고. 아무튼 사 건 초기엔 단서고 뭐고 전혀 없었으니까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 거란 가망 도 없었지. 결국 그 비난의 화살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범인에게로 향 한 게 아니라, 비난을 받아도 가장 그럴싸한 사람에게로 향한 거지.” “그렇다면, 그게 설마….” “그래, 그게 바로 네 부친이시지. 맞죠, 할아버님?”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륜은 선 경의 말이 납득될 것 같기도 안 될 것 같기도 하여 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아버님은 그때,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충방사들의 우두머리라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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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음, 그래, 그런 느낌이었어. 마을에서 주관하는 일이나 마을에서 벌어 지는 사건, 그 모두가 네 아버님 소관이었지. 그러니 사건이 터진 이후에 네 아버님에게 책임론이 불거진 거야. 사건이 터졌을 때 범인 다음으로 욕먹는 위치 중 하나가 책임자 위치잖아? 범인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범인이 먹을 욕까지 다 먹을 수밖에.” 우륜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초대형 사건이긴 했지 만, 아버지가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질타를 받아야했다니. 우륜은 자신과 아버지한테 쏟아지던 그 싸늘한 눈빛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 후 해외로 쫓겨나다시피 한 후에 했던 고생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자네 애비 일은 미안허이.” 노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륜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우린 제정신이 아니었더와. 집도 재산도 잃고, 이웃도 가족도 잃 고, 도저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잖소.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땐 누구라도 그랬을 기요.” “…….”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한참 지난 일에 이제 와서 화를 내봤자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으니…. 그 자리에 있 는 모두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이상으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뭣 땀시 왔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하면 떠나는 게 좋을 기요. 여기 놈들은 그때 일 후로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그든. 아까 전에 봤으니 알잖소. 그 자슥 들은 제정신이 아니요.”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그래도 저흰 아직 떠날 수 없습니다.” “어허, 내가 몇 번을….” “전 꼭 찾아야 할 놈이 있습니다.” “찾아야 한다니…, 그르고 보니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드래.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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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는 몰라도 여기엔 없을 기요.” 그 말을 듣고, 옆에서 보고 있던 선경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흰 ‘나비’를 찾으러 왔거든요.” “뭐, 라고….” 나비라는 두 글자에 노인이 크게 반응했다. 그건 우륜도 선경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비, 라고? 참말로 그 나비?” “네. 접익신부(蝶翼新婦)의 딸들이자 접신지촉(蝶神之蠋)이라고 불리는 그 나비를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우륜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노인은 그 말에서 무엇을 떠올리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걸 보며 선 경은 노인과 나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떤 영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선경 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제가 아는 나비 중 한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죠. 조사를 해보니 이 근처에 그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더군요. 저흰 이 마을 어딘가에 그 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쉽게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허지만 어쩔 겐가. 봤듯이, 마을사람들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관심 외라 상관없어요. 저희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 은 또 따로 있습니다. 혹시 임씨 가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고건, 설마 자네들, 임씨 네를 의심하는 거였나? 으으음….”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노인의 반응을 보고 우륜은 자 기가 어쩌면 생각보다 더 커다란 일에 휘말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집 바깥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보아하 니 두 사람 정도. 오고 가는 걸 전혀 숨기려 하지 않는 당당한 발소리였다. “거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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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무게를 잡은 목소리. 우륜은 노인이 제지하기도 전에 문밖을 나섰고 선경도 그 뒤를 따랐다. 마당에는 두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한 사람은 새하얀 바탕에 검은 테가 들어간 한복을 입고 있는 남성이었는데, 강직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굳센 마치 선비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다른 한 사람은 더럽고 낡은 흰색 한복을 입고 험상궂은 백정탈을 쓴 남자였는데, 워낙 덩치가 커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키만 해도 최소 2미터는 넘어 보이는데다가 손에 사람 키만 한 길이의 무지막지한 쇠몽둥이(몽둥이라기보다는 철근이나 쇠막대처럼 보였 지만)를 들고 있으니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이나 도깨비 따위로 보일 수밖에. “임씨 데련….” 뒤에서 늦게나마 따라 나온 노인이 중얼거렸다. 선비 같은 남자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옷깃을 고치며,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닌 밤중에 실례라는 건 알지만, 내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네. 내 성의를 봐서라도 너무 불편하게 생각진 말아주시오.” 그 남자는 우륜과 선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뒷짐을 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그 불청객인가 보군. 흠, 우선 예의상 내 소개부터 하겠네. 장 남으로써 임씨 가를 맡고 있는 임요섭이라고 하네. 더불어 이 마을의 장(長) 도 겸하고 있지.”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태도. 우륜은 그 남들을 내리깔려고 드는 것 같은 눈빛이 참 맘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녀석이 정말 이연을 납치한 범인 이라면, 자기가 일을 저질러놓고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저리도 뻔뻔하게 굴고 있다는 소리니 더더욱 괘씸하게 느껴질 수밖에. “마침 잘 왔군, 안 그래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허어, 남씨 가의 장남이라고 했나. 돌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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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과 요섭은 말 한마디 없이 서로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불꽃이 튈 법 한 살벌한 분위기. 둘은 서로 조금도 지고 싶지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게요.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금방이라도 싸움이 붙을 것 같은 둘 사이로 노인이 끼어들었다. 노인은 우륜에게 눈빛을 보냈다. 굳이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뭐, 별 건 아니네. 난 단지, 더 끔찍한 사단이 나기 전에 저 손님들이 무 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려는 것뿐이지.” 고분고분 말하고는 있었지만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건 사실상 당장 이 마 을에서 나가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고 으름을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하게도 우륜이 그 말을 받아들였을 리 만무했다. “거절하지. 네 얄궂은 호의는 한 수레로 갖다 줘도 사양이다.” “하, 뭘 그리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나. 난 그저 자네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 뿐일세. 논밭에 신원을 알 수 없는 거름덩이가 늘어나기 전에 말이야.” “웃기고 있네. 그쪽이야말로 논밭에 코 박기 싫으면 조심하는 게 좋을 텐 데. 범죄자가 뻔뻔하긴.” “범죄자? 하, 다시는 그런 무례를 범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난 결백하거 든. 오히려 그건 네 애비를 두고 할 말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륜이 달려들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 가서는 요섭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미친 놈, 지금 이게 무슨…!” “결백 같은 소리 하네. 찔리는 게 있으니까 우릴 내보내려는 거 아냐!! 네 가 이연을 데려간 걸 모를 줄 아냐?!” “상놈이, 당장 안 놔?!” “빨리 불어, 그 새끼, 이연은 어디다 뒀냐?! 네 면상 날아가기 전에 빨리 말하는 게 좋을….” 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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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우륜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이 붕 떠있었다. 엄청난 충격이 우륜 을 강타했던 것이다. 말은커녕 호흡조차 잘 되지 않았다. “우륜, 우륜!” 선경이 바닥에 나가떨어진 우륜을 흔들었다. 타격이 크진 않았는지 우륜 은 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요섭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우륜이 꽉 쥐었던 옷깃을 다시 고치고 있었 다. 그리고 요섭의 바로 앞에 그 거구의 남자가 쇠몽둥이를 들지 않은 한쪽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서있었다. 우륜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엄청난 괴력으로 우륜을 날려버린 건 다름 아닌 그 거구의 주먹이었던 것이다. 아래에서 백정탈을 올려다보니 탈이 아까보다 더 흉악하게 보였다. 그 남 자의 깨진 백정탈 사이로,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눈빛이 쏟아 졌다. 주인이 시키기만 한다면 금방이라도 주인의 적에게 달려들어 쇠몽둥이 로 눈앞의 머리를 으깨려들겠지. 우륜은 그 모습을 상상해보고는 이렇게 생 각했다, 그건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이라고. “흥, 이연이라니, 누굴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증거도 없이 사람을 잡다 니…. 쳇, 됐다. 가자 희광아. 헛걸음했군.” 요섭은 분을 삭이면서 등을 돌렸다. 희광이라고 불린 거구도 미련 없이 요섭의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의 뒷모습 이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였다. 노인은 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노인이 우륜에 게 다가갔다. 우륜이 선경의 부축을 받아 막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이보게, 자네, 괜찮나? 그러니 내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디….” “뭐,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우륜은 손을 폈다. 손 안에 푸르게 빛나는 가루가 놓여있었다. 그걸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노인과는 달리 선경은 대강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우륜, 이거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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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에 반응해서 파랗게 빛나는 나비 가루입니다. 신기하게 그 이연 놈 한테도 반응하는 모양이지만….” 우륜은 손을 털었다. 푸르게 빛나는 가루가 공중으로 흩어져 흙바닥에 내 려앉았다. 곧 푸른빛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인가…?” “어르신, 이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요섭인가 하는 버러지 놈이 범인이라는 게 확실하다는 겁니다.” 회심의 미소. 우륜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다. 요섭이 이연과 접촉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 어느 정도 몸에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나비 가루가 반응을 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아까 전 요섭에게 과민하게 반 응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요섭에게 가루를 자연스럽게 접촉시켜볼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뭐, 일부러 과민하게 반응한 것이라곤 해도 우륜이 전혀 화가 나지 않았 던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는 먼지를 털고 일어나, 분을 어떻게든 삭이려 는 듯이 힘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노인은 여전히 시름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노인에게 선경이 다 가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뭐, 결국 이렇게 됐네요.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저흰 아직 여길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요.” “허어, 그래, 그런가. 어쩔 수 없는가, 그려….” 깊은 한숨과 함께 노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방에 들어가 있었던 노 파가 마당으로 나왔다. 별다른 말을 하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 났고 무슨 상황인지는 다 아는 것 같은 눈치였다. 선경은 노파를 보더니 노파 에게도 고마움의 표시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노파 역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우륜과 선경은 바로 탐색에 나서기로 결 정했다. 집을 나서기 전, 노부부는 마당으로 나와 둘을 배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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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어머님, 그럼 저흰 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륜과 선경도 간단하게 인사를 남기고 집 밖으로 나섰다. 노부부는 둘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주었다. 아직도 밖은 달이 중천인 어둠 속. 그래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었 다고 생각하며 몇 걸음을 뗀 그때,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들, 잠깐만!” 노인은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와 의아하다는 듯이 머뭇거리고 있는 둘 앞에 섰다.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어르신, 이건….” “열쇠요. 내한테 받았다는 건 비밀로 해두소. 분명, 쓸 일이 있을 게요.”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우륜에게 열쇠를 쥐어주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왠지 노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륜과 선경이 그 열쇠에 대해서 뭘 물어보기도 전에 노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덕에 둘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선경이 입을 열었다. “여, 이젠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해도….” “또 정면으로 당당히 입장, 이런 걸 할 순 없잖아? 거기다가 이젠 그 임 요섭인가 뭔가 하는 놈까지 경계하고 있을 거라고.” “그럼 뭐 달리 수가 있습니까. 뭐 딱히 지도나 정보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정면으로 치고 박는 수밖에 답이 없다고요.” “그런 짓을 하면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괜찮거든? 게다가 너도 슬슬 몸 걱정하는 게 좋을 걸. 아까처럼 툭 쓰러지지 좀 말고.” 둘은 그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로 방침은 달랐으나 양쪽이 다 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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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들어가기엔 우륜의 몸 상 태가 영 좋지 않은데다가 선경의 안전이 문제였고, 그렇다고 우회 전략을 찾 아보자니 아는 것도 이용할 것도 전무해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욕은 앞서는데 의욕을 받쳐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한번 위기를 겪어본 입장인데 또 막무가내로 덤벼들 수도 없는 일. 그 것 때문에 둘은 한참을 고민하느라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뿐사뿐 모래를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적인가 싶어서 우륜과 선경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잔뜩 경계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리가 들려온 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저어, 혹시, 우륜 씨, 맞으신가요…?” 보랏빛 저고리와 감색 치맛자락, 자수로 무늬가 수놓아진 우아한 한복차 림에 곱게 묶은 머리카락, 차분하고도 조곤조곤한 말씨. 양반집 규수라고 해 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여성이 둘의 눈앞에 서있었다. 그런데, 아직 앳됨 이 남아있는 그녀의 얼굴엔 무슨 일인지 수심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네, 제가 우륜입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전, 요진이라고 합니다. ‘임요진’이요.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 아왔습니다.” 임요진이라는 이름에 둘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왠지 익숙한 이름인데? 어 디서 들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떠오른 이름, ‘임요섭’. 그렇다면 이 여인은 설마…. “제 오라버니, 요섭 오라버니에 관해 꼭 할 말이 있어요. 부디, 제발, 제 얘기를 들어주셨으면….” 두려움인지 슬픔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가녀린 목소리.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불안한 목소리라 둘은 거기에 아무런 말도 댈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둘은 급작스레 요진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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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과 선경은 요진의 절박한 표정을 보고 예삿일이 아닐 것임을 짐작했 는지 요진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길가에서 대놓고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근처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한 채 있었다. 마을 중심하고도 꽤 떨어져 있는, 개 한 마리조차 얼씬하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다. 꽤 을씨년스 러운 게 평소 같았으면 근처에도 갈 생각을 안했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우륜과 선경은 요진을 데려와 썩어 문드러지기 일보 직전인 평상에 앉혔 다. 거기 말고는 딱히 앉을만한 곳이 없어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요진 은 가만히 자리에 앉고 나서도 진정이 잘 안되었는지 한동안은 계속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였다. 우륜은 그런 요진을 어떻게 대해줘야 할지 몰라서 계속 머뭇거렸다. 그걸 계속 지켜보고 있던 선경이 다가왔다. 선경은 요진 앞에서 무릎을 낮춰 눈높이 를 맞추고, 긴장한 듯 치마폭을 쥐고 있는 요진의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 개었다. 요진이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자 선경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기, 저….” “긴장하지 말고, 말하기 힘들 것 같으면 좀 있다가 해도 돼요. 기다려줄 수 있으니까.” 그 사소한 한마디에 요진은 그래도 다소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 광경 을 보며 우륜은 선경이 상대에 따라 태도가 꽤나 오락가락하는 거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태도에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특히 희민한테 보여줬던 태도와 비교해보면 완전 극과 극. “아뇨, 괜찮아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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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진의 눈빛은 아까보단 확실히 결의에 차있었다. 선경은 요진의 말을 듣 고는,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던 우륜을 눈짓으로 불러들였다. 그래도 요진은 쉽게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요진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래도, 아까만 큼 떨리지는 않았다. 선경 덕분이었다. 그렇게 한참 만에 요진은 겨우 이야 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감사해요. 제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하셔서…. 하지만 저, 무엇부터 얘기 해야할지….” “그냥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괜찮아요. 정리는 우리가 하면 되니까.” “그런가요. 정말, 다행이에요. 으음, 사실, 별 거 아닌 이야기일지도 몰라 요. 저희 오라버니에 관한 얘기인데….” “아까 그 오라버니가 요섭이라고….” “네. 제 오라버니세요. 저랑 나이차가 두 살 정도….” “엑.” “어, 왜 그러세요?” “저, 미안하지만, 나이가….” “아, 전 올해로 스물여섯이에요. 오라버니는 이제 스물여덟이시고요.” 선경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진이야 딱 그 나이대로 보이니 그렇다 쳐도 요섭이 의외였다. 그 액면가로 서른 초반도 아닌 스물 후반이 었다니. 우륜도 그게 어이가 없었는지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되뇌었다. “아, 뭐, 그래, 아무튼 좋아. 나이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응, 끊어 서 미안해. 계속 얘기해줘.” “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오라버니의 상태가 부쩍 이상해졌 다는 거예요.”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어떤 식으로?” “그게, 별 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수상해 보인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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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좀 더 자세히 말해줄래?” “요즘 들어서, 그러니까 한 일주일 정도 전부터, 굉장히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 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오라버니를 험담하려는 건 아니에요. 제가 뭐라 고 하든, 오라버니가 무슨 행동을 했건, 오라버니는 좋은 분이에요. 제 얘기 를 듣더라도 그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가만히 그 얘기를 들으면서 우륜은 속으로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섭 그 놈이 좋은 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사람이란 게 원래 자기랑 가까운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법이 라 그렇게 보였던 거겠지. 물론 우륜은 딱히 이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는 않았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이런 생각을 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이 얘기를 듣고 있는 게 과연 무슨 도 움이 될까하는 것이었다. 우륜이 보기에 요섭 그놈은 애당초 이상한 놈이라, 그놈이 요새 이상하게 군다고 하는 얘기는 우륜에겐 조금도 특별하게 들리 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영양가 없는 얘기를 군말 없이 들어주고 있는 선경 이 대단해보일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요새 뭘 하시는지 방에 틀어박혀서 전혀 안 나오기도 하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서는 창고에서 몇 시간을 보낸다거나….” “창고? 혹시 그 안에서 뭘 하는지 봤어? “아뇨, 잘…. 그게 보기는 봤는데, 들어오지 말란 소릴 못 들어서 오라버 니가 안에 있는데도 문을 연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엄청나게 야단맞았지 만…. 아, 정말 언뜻 보인 거라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뭐였어?” “아마, 책이었던 것 같아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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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낡고 오래된 책…. 어, 확실하지는 않은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말아주세요.” “그래, 알겠어. 혹시 그 외에 또 다른 건 없어?” “딱히 다른 건…. 아, 저, 중요한 게, 중요한 게 생각났어요. 이것부터 얘 기했어야 했는데….” “중요한 거라니?” “요즈음,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예민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인가, 오라버니 는 자주 밤에 나가서 새벽까지도 안 들어오시곤 하셨거든요.” “잠깐만, 밤중에 자주 나간다고? 혹시 어제도?” 어제라니, 어제라면 이연이 실종된 걸로 추정되는 날 아니던가. 우륜도 선 경도 덕분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우륜이 걱정한 만큼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나보다. “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거예요. 더, 신 경 쓰이는 점이, 있었어요.” 요진은 둘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뭔가 심상치 않 은 이야기일 거라는 게 단박에 느껴졌다. “어제, 바깥에서 소리가 나서 문득 잠이 깼어요. 누군가 대문을 열고 들어 오는 소리였어요. 전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살짝 문을 열고 내다봤어요. 그랬더니….” 요진은 잠시 숨을 삼켰다. 긴장된 모습.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 듯했다. 요 진의 표정을 보며 우륜과 선경도 자기도 모르게 같이 숨을 죽였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손에 피를 묻힌 채로….” 떨리는 호흡. 요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광경을 떠올리는 것만으 로도 무척이나 힘든 모양이었다. “저는, 전, 잘못 본 걸지도 몰라요. 어두웠으니까, 분명, 잘못 본거라고 생 각해요. 하지만 그래도, 이상했어요, 옷에도 얼룩이, 묻어있고, 눈빛도 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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웠고…. 오라버니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아서….” 한밤중에 피투성이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 을 것이다. 그 피투성이인 사람의 정체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면 더더욱. “너무, 너무 무서워서, 처음엔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잊어버리고 싶기도 해서 그냥 이불을 덮고 눈 을 감고 있었어요. 결국 잠들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해가 뜨고 나서, 오 라버니를 마주쳤는데, 오른손을 붕대로 감고 있어서….” 우륜은 요진의 말을 듣고 노부부의 집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때 보았었다. 요섭의 오른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말이다. 확실한 건 아니 지만, 요진의 말이 맞는다면 요섭이 묻히고 왔던 피는 정황상 이연의 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 무서워요.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이대로 있으 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그래서….” “그래서 찾아온 거구나.” “네…. 제발 도와주세요, 오라버니를 막아주세요, 전, 전 아무 것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요진은 입을 다물었다. 우륜도 선경도 한동안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을 적신 듯 무거운 공기. 왠지 모를 답답함. 우륜은 문득, 아무리 자신 이라도 이런 곳에 오래 있으면 굉장히 예민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여기서부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선경은 가볍게 요진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일어났다. 우륜은 선경의 의도 를 알아채고 요진과 살짝 거리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선경이 우 륜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쩔 거죠.” “응?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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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니, 어떻게 그 임씨 놈과 부딪힐까 하는 거 말입니다.” “아아, 그거 말이지, 방금 좋은 생각이 나서 말이야.” “좋은 생각이라니, 별로 신용이….” “닥치고 들어봐. 딱히 뭐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닐 거 아냐.” 확실히 다른 방법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기에 우륜은 얌전히 선경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채 1분도 안 되어 우륜의 얼굴이 움찔거리더니, 선경 의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금방이라도 욕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이 되 어있었다. 선경의 작전을 들은 우륜의 소감은 단호하고도 명백했다. “미쳤어요?” “에이, 그럴 리가. 난 언제나 제정신이야.” “아, 예, 그렇겠죠. 그리고 그 작전대로라면, 저 사람도 같이 위험해질지 모르는 일인데, 누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자진해서….” “응? 쟤는 할 거야. 안 물어봐도 그런 느낌이 확 오는 걸.” “아니 대체 누구 멋대로….”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허락 받고 올게, 기다려∼” 우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선경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선경이 말했 던 작전은 우륜 자신뿐만 아니라 요진도 위험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데 그런 작전을 쓰겠다니…. 뭐, 그래도 요진이 상식이 있다면 그런 위험한 작전을 섣불리 받아들이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때 요진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선경이 우륜 쪽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리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와 검지로 ‘ㅇ’자를 만들어보였다. “된대∼” 그 말을 듣자마자, 우륜은 욕을 내뱉으며 뒷목을 잡곤, 옆에 있던 벽에 머 리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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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고요했던 마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 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워낙에 큰 소란이라 요섭 역시 그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들어온 전보에 놀라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소란의 중심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진이 있다는 걸 들었기에 서두르지 않 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소란의 중심에는 우륜도 있었다. 오히려 우륜 이야말로 이 소동의 주역이었다. 우륜은 평소보다 과장된, 혹은 어설픈 억양 으로 마을 중앙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저리 안 꺼져! 니들 같은 잔챙이들한테는 관심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거 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이 년의 목을 꺾어버릴 테니까, 허튼 짓 하 기만 해봐!” 그러면서 우륜은 자기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이려는 양 요진의 목을 두르고 있는 팔에 꽈악 힘을 주었다. 요진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냈다. 그 러자 우륜은 남몰래 요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윽, 요진 씨 죄송합니다,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아,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 우륜은 다시 한껏 인상을 쓰면서 주위의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 우륜의 몹쓸 행동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전보다도 더욱 적개심에 불탔으나, 요진이 다칠까봐 안절부절못하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 요진이 다치기라도 하면 요섭에게 무슨 소릴 들 을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으니. 어쨌거나 결론부터 말해 선경의 작전은 일단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선경이 제안한 작전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륜이 요진을 인질로 잡고 악역 행세를 하면서 모두의 시선을 끌고, 그 사이 선경이 마을을 탐색하겠다는 것이었다. 못 되도 최소한 희민을 움직이게 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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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된다면 이연이 있는 곳을 바로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꽤나 그럴싸한 얘기여서 우륜도 이 작전의 타당도에 대해선 딱히 별말이 없었다. 다만 애당초 우륜이 걱정했던 건 작전이 타당한지 아닌지 따위가 아니었 다. 그가 걱정했던 건 바로 요진의 안전문제였다. 어지간한 경우라면 예상한 대로 흘러가겠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엔…. 자기 나름대로 최 대한 힘을 써보겠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요진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 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륜은 계속 찝찝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문득 우륜은 정말 선경이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전을 궁리해낸 게 선경이라는 걸 생각해보라. 그 얘긴 곧, 겉으로는 온화 한 표정으로 요진의 얘기를 다 들어주면서 속으로는 어떻게 요진을 이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 와중에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져오고 있었다. 우륜도 요진도 살 짝 긴장했다. 그 요란을 떨며 나타난 인물이 바로 요섭이었기 때문이다. 요섭은 오자마자 성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우륜 앞으로 걸어갔다. 허나 우 륜이 팔로 요진의 목을 조르려는 듯한 시늉을 하자 요섭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크으음, 네놈….”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데도 요섭이 씩씩거리는 소리가 우륜이 있는 곳까 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륜은 그 모습이 왠지 좀 고소하기도 했다. “하, 그렇게 점잖은 척하더니 씩씩거릴 줄도 아나보지?” “닥쳐라. 내가 분명 얌전히 떠나는 게 좋다고 말했을 터인데, 감히 내 호 의를 무시하고도 몸 성히 살아나갈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웃기고 있네. 누가 누구한테 으름장이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파악이 안 되나 보지?” “이 상놈새끼가….” 요섭은 우륜을 보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의 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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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우륜이 잡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요섭이 요진을 포기 할 마음이 없는 한은 말이다. 뒤이어 요섭과 함께 다니던 가면을 쓴 거구가 나타났다. 그 인간 같지 않 은 모습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여전히 장난이 아니었지만, 그래봤자 우륜이 요진을 붙잡고 있는 한 먼저 덤비진 못할 것이다. 즉, 상황은 여전히 우륜의 편이었다. “뭘 그리 속닥거리고 있나 그래. 되지도 않을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거라 면 그만 두는 게 좋을 텐데?” “개새끼가…. 이런 더러운 짓을 벌이고도 부끄럽지도 않은 게냐.” “내가 뭔 짓을 했던 네놈이 나한테 뭐라 할 처지는 아닐 텐데? 지금 부끄 러워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댁일 텐데?” “무슨 헛소린지. 난 아무 짓도 한 적이 없다마는?” “지랄하네. 이 지경까지 와서도 뻔뻔하게 굴기냐? 돌대가리냐? 말해줘야 알게? 이연 말이다 이연, 도대체 내가 몇 번을….” “그러니까 말했지 않은가! 난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그 푸른 날개 달린 나비 새끼 말하는 거라고!! 이쯤하면 좀 알아 처먹어라!!” 갑자기 요섭이 멈칫하는 게 눈에 보였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 다. 설마 자기가 납치한 사람의 이름도 몰랐던 걸까? “흥, 나비라니, 여전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는구나!” “그러고도 시치미를 떼다니, 정말이지 네놈 인성도 알만하군.” “아녀자를 인질로 잡는 무뢰배 새끼가 입만 살아선….” “여자를 납치한 새끼가 할 말은 아니지. 뭐, 그건 됐고, 신중하게 생각하 는 게 좋을걸. 네놈이 말하는 그 입만 산 새끼가 언제 네 여동생의 목을 부 러뜨려버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거든.” 그러면서 우륜은 자신이 한 수 위라는 걸 어필하듯 요진의 목에 두른 팔 을 끌어당겨보였다. 거기다가 상대를 깔보는 듯한 비웃음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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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섭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으나, 얼굴부터가 붉 으락푸르락해져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체통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우륜에게는 영 싱거워 보였다. 뭐, 그 모습이 꽤나 재밌는 요깃거리긴 했지만 그 모습을 마냥 즐기기만 할 순 없었다. 이렇게 상대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할 테니까. 만약 얻어내야 할 것이 있다면 기회는 아마도 지금뿐. 우륜은 지금이야말로 승부수를 던져야 될 때라고 직감했다. “징글징글하네, 아직도 말 할 생각이 없나보지?” “…….” 아무래도 뭔가 하지 않으면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륜 은 잠시 고민했다. 농성을 시작하기 전에 선경이 미리 일러준 비책이 있기 는 했는데, 그 비책이란 게 우륜에게는 영 껄끄러운 방법이었다는 게 문제 였다.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라서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 었지만…. “하, 과연 이래도 입 다물고 있을 수 있는지 보자고.” 이젠 정말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륜은 마음을 단단히 먹 었다. 긴장감이 역력했다. 우륜은 비어있는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우륜의 손으 로 쏠렸다. 우륜이 그 손을 요진의 저고리 옷고름 위에 얹었던 것이다. 거기 다가 옷고름을 살짝 잡아당기는 시늉까지. “이, 이, 이 새끼가, 그 손 당장 놓지 못할까!!!!” 당황한 요섭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섭 뿐이 아니 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서로 웅성거렸다. 이것이 바로 선경이 제시한 비책의 정체였다. 요섭이 보는 앞에서 그의 여동생을 성적으로 위협하는 것. 어찌 보면 이게 그렇게 효과적인 방법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요섭처럼 자존심이 세고 체면을 신경 쓰는 인간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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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칠 정도로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특히나 이 상황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 도 한둘이 아니니 그 파급력도 배로 늘어날 게 분명했고. 그렇지만 비책의 타당성과 효율성은 둘째치더라도, 우륜은 정말로, 이런 짓은 정말로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여동생을 인질로 잡고 협박 을 벌이는 시점에서 이미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을 텐데 이런 짓까지 하면…. 거기다가 선경이 일러준 내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우륜은 쏟아지는 시선 들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선경이 짜놓은 대본을 읊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더 듬거리면서. “뭐, 뭘 그렇게 당황하지?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말이야.” “개만도 못한 새끼…!” “뭐, 어, 어차피 이젠, 그, 처녀도 아닌데 이 정도로 당황할 건 없지 않나. 하, 하하.” “뭐, 뭣…?” “내가 이 년을 따먹…. 아니, 이 년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줬, 거든.” 그쯤 되니 우륜은 이미 고개를 못 들 지경이었다. 정말 인간만도 못한 무 언가가 된 것 같았다. 우륜은 속으로 빨리 이 순간이 끝나길 하염없이 빌면 서 동시에 선경에게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물론 효과는 확실하긴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겨우 분노를 참고 있던 요 섭은 방금 우륜이 한 대사를 듣고 나서 완전히 꼭지가 돌은 모양이었으니까. “요진아, 대답해 봐라. 저놈 말이 사실이냐.” 요섭의 목소리가 분노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요진은 갑작스런 질문에 흠칫 놀라고는 요섭의 시선을 피한 채로 대답했다. “마, 맞아요, 그, 밤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가 그만…. 이 사람이 제 옷을 벗기고는…. 아….” 우륜과 맞먹는 어설픈 연기력은 덤이었다. 요진은 자기도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했던지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 그래도 워낙 내용이 내용인지라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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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어설픈 것 정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연기를 하 는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래, 사실이라, 그렇단 말이지….” 갑자기 요섭은 체념한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옆에 있던 마 을 사람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칼을 신경질적으로 빼앗았다. 요섭은 잠시 우륜과 요진을 노려보다가 그들의 앞에 칼을 내던졌다. 칼이 허공을 빙글빙 글 돌다가 흙바닥에 내리꽂혔다. 우륜도 요진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칼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곧이어 요섭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진, 여기서 자결해라.”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요섭을 바라보았다. 특히 요진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다급하게 외쳤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말이 많구나. 그대로 살아서 집안의 수치 가 되느니 죽는 게 낫지. 정조를 잃은 순간부터 넌 어차피 죽은 것이나 마 찬가지니, 스스로 죽어 체통을 보존함이 마땅할 것이다.” 우륜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 자체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 것보다도 요섭의 가치관이 더 우륜을 당황케 만들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조를 지키지 못했으니 죽는 게 마땅하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시대에 맞지 도 않는 양반 행세를 하는 걸 봤을 때부터 저놈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 하긴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요진이 몇 번이고 절박한 목소리로 요섭을 불렀지만 그는 매정한 태도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다급해진 요진은 우륜의 팔을 뿌리치고 튀어 나갔다. 애당초 연기이기도 해서 우륜이 팔에 힘을 많이 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라버니,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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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이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이 요진은 요섭에게 달려갔다. 새파랗게 질 린 그녀의 눈빛엔 더 이상 이성이랄 게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요진이 요섭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우륜이 본 것은 요진을 거칠게 밀쳐 넘어뜨리는 요섭의 모습이었다. 쓰러진 요진을 보며 요섭이 차 갑게 중얼거렸다. “더럽게….” 그 목소리가 어찌나 냉랭했던지 우륜마저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요진 도 그런 요섭의 모습은 처음이었는지 아연실색한 채 바닥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다면 어디 한 번 해보아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 요섭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요섭의 행동을 주 목하고 있었다. “희광이, 그리고 자네들! 뭣들하고 있나, 당장 저것들을 잡아 죽이지 않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얼떨떨해 하는 사이 희광이가 먼저 움 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륜의 움직임이 한 발 더 앞섰다. 요섭이 뒤를 돌 자마자 요진에게 뛰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우륜의 행동을 제일 먼저 알아챈 희광이가 날쌔게 쇠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때에 맞추진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쇠몽둥이를 피해낸 우륜은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요진을 안아들고는 힘껏 뛰었다. “우륜 씨…?” “후, 다행이군요. 무사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뒤에서 뭔가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 고 있었던 것이다. 우륜은 요진을 안아든 채 무작정 달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 저는 두고 가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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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 마시죠, 죽으려고 환장했습니까!” “하지만….” “됐습니다, 그러다 죽으면 꿈자리만 사나워질 것 같으니…!” 이 위험한 일에 요진을 끌어들인 건 우륜 자신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우륜은 차마 요진을 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요 진은 분명 저 미친 양반 놈한테 살해당할 거란 생각이 들어 더더욱 그랬다. ‘제길, 선경 그 아줌마는 잘하고 있을런가.’ 어쨌거나 시선과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으니 우륜과 요진은 할 만큼 다 한 셈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 뿐. 우륜은 선경이 괜찮은 성과를 내기 바라면서, 그리고 요진이 무사히 살 아남을 수 있기를 빌면서 열심히 도망가는 수밖엔 없었다.

마을 중심이 소란스럽다. 사람들이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간다. 얼마 지나 지 않아 마을 변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텅텅 비게 되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돌아다니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선경은 대놓고 길 한가운데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움직일 시간이다. 선경은 미리 봐두었던 집 앞에서 걸 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블레이저를 제대로 입고, 힘껏 도약하여 담장 끝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누가 양반집 아니랄까봐 크기도 하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선경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아 까 전만 하더라도 요섭이 머물고 있던 곳이었다. 그건 즉 여기가 바로 요섭 의 집이란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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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완전 요진이 말해준 대로네.’ 선경이 이 집으로 곧장 올 수 있었던 건 요진의 도움 때문이었다. 요진은 선경에게 집이 있는 곳과 집안의 구조를 모두 순순히,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일러주었던 것이다. 참 사기 당하기 쉬운 성격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쨌 건 덕분에 일이 수월해져서 다행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형적인 양반 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집이었다. ㅁ자 로 쳐진 담장 안에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문과 가장 가까운 곳 에는 사랑채로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 사랑채 옆에 조그만 문이 하 나 있었는데 그 안쪽에 작은 안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안채는 그 안마당을 ㄷ자 형태로 둘러싸고 있었다. 우선 선경은 거침없이 문 하나하나를 빠르게 열어젖혔다. 우륜이 꽤 시간 을 끌어주기는 하겠지만 충분한 시간은 아닐 것이니, 이런 경우엔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 다. 그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자 조언이기도 했다. 닥치는 대로 문을 열어보았지만 딱히 소득은 없었다. 혹시나 운이 좋으면 이연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는 게, 집에 이연을 숨겨놨다면 요진이 먼저 알아채고 말을 했겠지. 뭐, 애초에 이연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집 크기에 비해선 사람이 많이 살지 않나본지, 사람의 흔적이 없 거나 잡동사니로만 가득한 방이 꽤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집을 가지고 있 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건 분명하지만, 이래서야 집이 썰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리라. 집을 뒤지던 선경은 조금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모든 방을 돌아보기로 했었지만 그랬다간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채와 사랑채를 위주로 조사해보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변경한 계획을 따라 먼저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안채에 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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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건 요진 혼자로, 아무도 쓰지 않던 조그만 방에 자리 잡아 머물고 있다 고 했다. 뭐,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안채에 살만한 사람은 요진 밖에 없으니 안채에 거주하는 사람이 요진 혼자인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어디부터 조사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우선 요진의 어머니, 즉 이 집안의 안주인이 거처했다는 방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뭔가 쓸 만한 게 있을까 기 대를 품고 방에 들어가 보았지만, 역시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아무 것도 없 었다. 심각할 정도로 썰렁한 방이 선경을 맞아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들었다. 하기야 요진의 어머님은 돌아가신지 오 래라고 했으니 흔적이 드문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니지만. 그 방에선 건질 게 없다고 판단한 선경은 옆방으로 몸을 옮겼다. 이상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선경을 맞아주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가구랑 잡동사니도 꽤 있고 심지어 옷장엔 치마 같은 여성복이 가득하기까지 하니, 확실히 누군가 이 방에서 지내긴 했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경은 문득, 요진이 말했던 어머니의 방이 아까 거기가 아니라 여긴가 싶 은 생각이 들었다. 방의 위치를 말로만 들었으니 충분히 헷갈렸을 수 있잖은 가, 게다가 방이 더덕더덕 붙어있다보니 서로 위치가 비슷해서 더더욱 헷갈 리기 쉽기도 하고. 선경은 방을 더 둘러보았다. 서랍장이나 앉은뱅이 탁상 위 등을 조사하던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서랍 속에 들어있던 염주, 벽 쪽 세간 위 에 놓여 있는 향과 향로, 간간히 보이는 조악한 품질의 경전 등…. 이것들 하나하나는 어디에 있어도 이상치 않은 물건이지만, 이것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면 조금 얘기가 다르다. ‘절이라도 다니시나….’ 딴 건 몰라도, 이 깊은 산속에서 조악한 품질일지언정 불경까지 구해서 가지고 있다는 건, 불교에 어지간히도 관심이 많다는 소리일 테니까. “이건 뭐라고 읽는 거지, 천, 수, 이건 뭐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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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은 제목에 천수경(千手經)이라고 써진 불경을 하나 집어 들고는 고민 했다. 제목부터 한자로 써져 있는 걸 보니 왠지 꺼림칙했던 것이다. 자신은 제법 한문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책이 불교경전이 라면 애기가 좀 다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안의 내용까지 모조리 한 문이라면…. 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렇지만 별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선경은 될 대로 되라싶은 마음으로 무작정 책을 폈다. 다행인지 뭔지 책 안의 내용은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친절하게도 누군가가 책의 줄 사이사이에 해석을 적어놓았던 것이다. 단순히 있는 그대 로 써놓은 게 아니라 이 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전부 설명해놓았다. 글씨가 조악해서 알아보기 힘든 게 문제긴 했지만…. 다만 책 끝까지 전부 그렇게 되어 있는 건 아니었고, 하다가 말았는지 대 강 중간정도까지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문득 선경은 의문이 들 었다. 이 산속에서 이런 걸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과 연 있을지. 요진의 어머니라면 꽤 나이가 있으실 텐데 그 세대의 여성이 과 연 이런 어려운 걸 직접 해석할 수 있었을까? 이 경전을 읽는 사람이 여성 이 아니라 남성이라도 선경은 비슷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 외에 별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 선경은 최대한 방을 정리해서 자신 이 다녀간 흔적을 지우고는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더 이상 안채엔 볼일이 없을 것 같았다. 집을 더 둘러봐도 되려나? 주위 를 살펴보았지만, 아직 사람들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 곳 정도 는 더 뒤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경은 이번엔 사랑채 쪽으 로 발걸음을 옮겼다. 요섭이 머물고 있는 곳이니 뭔가 중요한 게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선경은 사랑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은 생각보다, 더러웠다. 저 뒤편에 커다란 병풍이 있었고 양 옆으로 각종 세간들이 놓여있었다. 거기까진 좋았 지만, 문제는 그 다음. 방바닥 여기저기 종이와 책이 난잡하게 나뒹굴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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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것이다. 요새 요섭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요진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선 선경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를 한 장 집어서 살펴보았다. 또 한자가 가득했다. 골치가 아파왔다. 사(死), 충(蟲), 자(者), 육(肉), 혈(血) 등 익숙한 한자도 많았지만, 어떻게 한자들은 찍어 맞춰도 한문을 해석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 선경은 짜증이 나서 종이를 내던졌다. 사진기라도 가져 왔으면 찍어가기라도 했을 텐데 싶어 후회가 들었다. 결국, 이건 제쳐두고 다른 걸 먼저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이리저리 둘러보 던 선경은 옆에 있던 가구 위에 놓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백자 하나와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선경의 주목을 받은 건 액자였다. 선경은 손 크기 정도 되는 그 작은 액자를 집어 살펴보았다. 액자에 있는 건 빛바랜 흑백사진이었는데, 아마도 가족사진인 모양이었다. 요섭과 꼭 빼닮은 중년의 남성, 그 바로 옆에는 요진을 빼닮은 여인이 수척 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앞에 대강 열 살 즈음 되어 보이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이렇게 두 명이었다. 선경은 딱 봐도 그 아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요섭과 요진이었다. 지 금 모습이랑 너무 똑같아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선경은 사진 속의 요섭과 지금의 요섭을 번갈아 떠올리면서 역시 사람은 어렸을 때가 제일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유쾌한 기분이 든 선경은 액 자를 내려놓고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선경은 탁상위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나뒹구는 다른 책들처럼 낡고 빛바랜 책이었다. 읽을 수 있는 책일 거 같다 는 기대는 안 들었지만 선경은 혹시나 싶어 책을 펴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거기도 한자만 가득했다. 그때 책 사이에서 조그만 뭔가가 팔랑거리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경은 그게 뭔가 싶어 주워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종이인줄 알았는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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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보니, 사진이었다. 거기에는 단 한사람이 찍혀있었다. 사진 속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있었다. 한동안 선경은 그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뭐라고 섣불리 표현하는 것조차 실례일 만큼 아름다운 여인. 저고리와 치마 위에 살며시 놓인 손이 금방이라도 버드나무 가지마냥 우아하게 흔들릴 것 같았다. 그 여인은 그윽 한 눈빛을 지으며 입가에 살짝 보일락 말락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럼에 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 쓰읍….” 한동안 정신이 나가있던 선경은 급하게 침을 삼켰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침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꼴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선경은 자기가 그래놓 고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사진 그냥 확 들고 가버릴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선경은 갑자기 움 찔했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경은 책에 사진을 제자리에 급히 끼워 넣었다. 선경은 문을 살짝 젖히고 밖을 빼꼼 내다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선 경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막 안채를 벗어난 순간에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모래를 밟는 발소리까지 똑똑히 들렸다. 선경은 안채로 들어가는 문 뒤에 숨어 바깥 상 황을 살펴보았다. 그 와중에도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을 죽였다. 선경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때 선경의 시야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구지…?’ 어두워서 윤곽 외엔 잘 보이지 않았기에 선경은 눈까지 찡그려가며 그 인 물을 관찰했다. 작은 체구에, 대강 무릎 부근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자아이 같았다. 왜 저런 소녀가 여기에 있는 걸까? 선경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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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생각조차 까맣게 잊게 될 정도로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되었다. 선경은 경 악하면서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날개, 잖아?!’ 희미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아이의 등에서 삐져나와 있는 그것은 분명 날개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나비 날개. 그 날개는 어둠속에서 검붉은 빛을 희미하게 내고 있었다. 그 핏줄같이 빨간 그물맥이 보이는 검붉은 나 비 날개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 아이가 바로 ‘나비’라는 것. 그런데 날개의 생김새가 어딘지 이상했다. 뭔가 불안해 보인다고 해야 할 까? 날개가 아까 전에는 안 보였다가 방금은 또 보이고, 그러다가 또 어느 새 사라져 있고…. 게다가 날개의 형태마저도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하고 있어서 어느 때엔 날개라고 보기 난감한 기형이 되어있는 등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그 나비는 멍하니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갑자기 어디론가 힘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경은 그 나비를 계속 주시하면서 신중하게 그 뒤를 밟았다. 그 나비는 계속 걷다가도, 예고 없이 갑자기 멈춰서기를 수없 이 반복했다. 그렇게 멈춰 설 때마다 그 나비는 혼자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갑자기 실소를 터뜨리고,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이쯤 되니 선경은 과연 이 미행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 다. 그 소녀는 아무리 봐도 무슨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 았기 때문이다. 선경이 그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나비는 집 뒤편을 향해 서 계속 걷다가, 뒷마당에 산이 있는 방향으로 조그맣게 난 쪽문을 통해 어 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선경은 그때야 비로소 이 집에 뒷문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 나 비의 뒤를 쫓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그런 고민을 할 시간조 차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선경은 곧바로 나비를 뒤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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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우륜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광활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젠 더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이게 가능했 던 건 아마도 요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륜이 요진을 안아들고 도망 쳤기 때문에 쫓는 사람들도 요진이 다칠까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래봤자 이젠 막다른 길이긴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착장 같은 것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철골이나 목 재 같은 여러 자재들 그리고 버려진 보트 몇 대가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우륜은 요진을 내려주더니 그 손목을 붙잡고는 주변에 굴러다니던 보트 뒤로 요진을 이끌었다. 요진은 아직도 얼떨떨한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친 몸을 떨고 있었다. 진 정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지만 말이다. 우륜은 요진을 쪼그려 앉히고 자기도 무릎을 낮췄다. 보트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다행히 요진의 모습을 가려주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선경과는 달리 우륜은 남을 달래주는 방법 같은 건 잘 몰랐다. 그래도 왠 지 지금은 뭐라도 해서 요진을 진정시켜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륜 은 문득 선경이 요진에게 해줬던 걸 떠올리고는, 두 손으로 요진의 손을 감 싸 쥐며 말했다. “요진 씨, 잘 들으세요.” 요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륜은 동요하지 않았다. 우륜은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 라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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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놈들과 싸울 겁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이 끝나기 전까지 는 여기서 나오면 안 됩니다.” “하지만….” “혹시나 놈들이 빈틈을 보이면 도망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아무튼 절 대로 놈들에게 들키지 마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키면 안 됩니다.” “저, 우륜 씨, 차라리, 제가 나가는 게….” “맘에도 없는 소리 마시죠. 그렇게 떠는데 나가서 뭘 한다는 겁니까.” “그, 그렇지만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럴 일 없으니 재수 없는 소리 마시고, 아무튼 저도 당신도 죽는 일 없을 겁니다. 믿으시죠.” 우륜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요 진은 딱히 별다른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그때만큼은 왠지 모르게 우륜이 믿 음직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륜의 두 손에서 전해져오는 굳셈 덕일까, 문득 요진은 몸의 떨림이 아까보다는 덜해졌음을 느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륜은 혼자 일어서서 아무 일도 없는 양 담담하게 밖으로 걸어갔다. “요진 아씨는, 아씨는 어찌 했드래!” 몰려온 마을 사람들 중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륜은 아무런 반응 도 하지 않았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추켜올려 보이며 손가락으로 호수를 가 리켰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서서히 우륜이 의도한 뜻을 깨달으며 경악했다. “저, 저, 저 미친 자슥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우륜에게 욕을 퍼부었다. 우륜이 한 행동의 뜻은 아마도…. ‘너희들이 찾는 아씨는 저기 호수 밑바닥에 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 입장에선 우륜이 악마 그 이상의 것으로 보였을 수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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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우륜은 문득 평생 먹을 욕을 오늘 다 먹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덤비려면 빨리 덤비시지? 시체라도 빨리 건져야하지 않겠어?” 우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도발을 걸었다. 이미 꽤 흥분한 상 태였던 마을 사람들은 손쉽게 걸려들었다. 우륜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그건 우륜이 바라던 바였다. 그 거구가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의 머릿수를 좀 줄여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륜은 자신만만했다. 상대는 머릿수만 많 을 뿐 싸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오합지졸이니…. 거기 다가 지금은 우륜의 곁에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혼자 날 뛰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상황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우륜은 대활약을 펼쳤다. 상 대가 무기로 무엇을 가지고 있든, 체격이 어떻던, 몇 명이 오든, 우륜에게는 전부 중요치 않았다. 우륜은 자신에게 달려든 순서대로 공평하게 주먹을 하 나씩 나누어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우륜의 주 위엔 주먹을 맞고 좋아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몇몇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황급히 엽총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엽총으 로 산짐승을 잡을 수는 있어도 우륜은 잡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우륜은 총 을 꺼내려는 걸 보자마자 달려가서 포수의 명치에 직격을 꽂아주었다. 총을 든 사람은 그 외에도 두 사람 더 있었지만, 우륜이 일부러 인파 속으로 들 어가서 사람을 빨래 털 듯이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치고 하는 바람에 발사는 커녕 조준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곧 포수들끼리 사이좋게 차가운 바닥에 눕게 된 건 덤이었다. 떨어진 불씨도 다시 보자고 했던가, 우륜은 떨어진 엽총을 집어 들고 손 에 기를 흘려보냈다. 곧, 무지막지해진 손아귀 힘이 엽총을 박살내버렸다. 어느 새 사람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우륜의 주위를 맴돌게만 되었다. 접근 하기만 하면 그 즉시 박살이 나는데 그 누가 가까이 가고 싶어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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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우륜의 입장에서도 나름 다행인 일이었는데, 날뛰고 나서 보니 체력이 어느새 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몸 풀기에 지나지 않는 일이 이렇게 나 체력을 잡아먹다니, 그놈의 거미독이 꽤나 지독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한눈에도 딱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왔다. 아무래 도 상대편의 최종병기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백인분의 몫을 하는 무 시무시한 거구. 금이 간 백정탈 속에서 그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을 사람들도 그의 위압감에 눌려 슬금슬금 물러났다. 우륜과 희광이, 실 질적으론 둘만 싸움에 남겨진 셈이었다. 싸움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거구는 몸을 풀 듯 쇠몽둥이를 한번 바닥에 내려찍고는, 화통 삶아먹은 기차마냥 거친 움직임으로 우륜에게 달려 들었다. 쇠몽둥이고 뭐고, 그만한 덩치로 달려드는 걸 맨몸으로 들이받으면 분명히 교통사고 급의 참사가 일어날 터였다! 당연히 피하는 것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우륜은 온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거구는 영리하게도, 우륜의 회피동작을 계산한 것 마냥 절묘한 위치에 쇠몽둥이를 내리쳤다. “……!” 순간 우륜은 심장이 멈칫하는 걸 느꼈다. 바로 옆으로 쇠몽둥이가 스치고 지나갔다. 쇠몽둥이의 궤도가 심상치 않은 걸 눈치 채고 찰나의 순간이나마 속도를 줄인 게 다행이었다. 거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쇠몽둥이를 횡으로 휘둘렀다. 우륜은 몸 을 낮춰서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우륜은 머리 위로 스치는 엄청난 풍압 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저거 한 방이면 바로 저승길을 가겠구나 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우륜이 겁이 없어도 본능적인 감각이란 건 있을 테니까. 몇 번이고 비슷한 식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우륜은 뭔가 상황을 타개해보 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회피를 하면 할수록 왜인지는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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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점점 뒤에 있는 호수 쪽으로 밀려가는데, 반격을 하려고 해도 놈의 사정 거리 안에 뛰어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쇠몽둥이를 받아쳐서 틈을 만들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려면 분명 신체강화까지 동반 되어야 할 터, 저 걸 받아낼 정도로 강화를 했다간 후유증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게 될 것이다. 빈틈을 만들었을 때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그렇게 점점 우륜은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 멍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때 우륜은 옆에 있던, 쓰러지기 일보 직전 인 낡은 전신주를 발견했다. 정말 이걸로 될까? 의문은 들었지만 별달리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 다. 우륜은 주먹에 힘을 모았다. 근육이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우 륜은 옆에 있던 전신주를 가격했다. 우지끈. 허리 부분이 끊어진 전신주의 상단부가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찰 나를 놓치지 않고 우륜은 반대쪽 손으로 온힘을 다해 그것을 밀어냈다. 정 확히는, 그것을 던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끊어진 전신주는 우륜에 의해 강속구가 되어 거구에게 날아갔다. 그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장면도 그에 만만치 않게 놀라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미친, 뭐야 저게…!” 경악했다. 우륜이 온힘을 다해 던진 강속구를 그 거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낸 것이다. 거구는 잠시 자기가 받아낸 전신주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한 손에 전신주를 들고 쇠몽둥이와 번갈아가며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륜에게는 입에서 절로 쌍욕이 나올만한 상황이었다. 희광이는 양손에 든 두 무기로 그야말로 접근을 불허하는 미친 난무를 보 여줬다. 무기가 하나였을 때도 접근불가였는데 둘이면 오죽할까. 엄청난 위압 감 때문인지 우륜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빨리 호수 쪽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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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신주의 일부가 투둑 떨어져 나갔다. 희광이의 거친 손길을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그걸 보고 더 이상 무기로서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그 거 구는 우륜이 자신에게 해줬던 것처럼 전신주로 강속구를 날려주었다! “어…?” 그런데 그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우륜은 공격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전신주가 날아가는 투 척 경로가 요진이 숨어있는 보트 쪽을 정확히 관통했기 때문이다! 이걸 막지 못하면 요진이 공격에 휩쓸려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허나 우륜에게는 제대로 방어를 준비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날아온 전신주가 우륜을 덮쳤던 것이다. “우욱…!” 우륜은 최대한 버텨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우 륜은 그대로 뒤로 날려갔다. 우륜은 쓰러진 몸을 일으켜보려고 왼팔을 움직 이려고 했으나, 왼팔이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전혀 움직여지질 않았 다. 어설프게 막으려고 한 탓에 충격이 왼팔로 집중되어 무리가 간 모양이 었다. 덕분에 왼팔을 쓸 수 없어 오른팔로만 상체를 일으켜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떻게든 전신주가 보트 쪽으로 날아가는 건 막았다 는 것이었다. 우륜이란 장애물을 만나 속도도 떨어지고 궤도도 휘어졌던 탓 이다. 정말 그것만큼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륜 씨!!” 굉음과 신음에 놀랐던 건지 요진이 보트 뒤에서 튀어나왔다. 우륜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동안 멍하니 있다가 화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입니까!! 미쳤어요?! 내가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저, 저는 역시 걱정이 돼서….” 우륜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요진은 그런 우륜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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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익숙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 그 소리를 듣고 요진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하, 미친개처럼 날뛰더니, 그것도 이걸로 끝이구나.” 저 멀리, 인파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하얀 학창의(鶴氅衣),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인물은 요섭이었다. “오, 오라버니….” “요진, 실망이구나. 아직도 저 상놈을 감싸려 들다니. 간밤에 놈과 정을 통한 게 그리도 즐거웠더냐?” “아니, 아니에요, 저는, 절대…!” “흥, 네가 그리도 육정을 탐하는 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수절(守節)할 기 회조차 저버리다니…. 뭐, 됐다. 우선 목을 쳐야할 놈이 있으니….” 요섭이 말한 목을 쳐야할 놈은 물론 우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거구는 주인이 명령하기도 전에 쇠몽둥이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전에, 대답해라. 네 놈과 같이 온 그 여자는 어디로 갔느냐.” 요섭이 말하는 그 여자는 바로 선경이었다. 우륜은 얼척이 없었다. 애초에 떨어져서 행동하는 중인데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않은가. “몰라. 지금쯤 너네 동네 어딘가에서 싸돌아다니고 있겠지.” “여기까지 와서도 배짱을 부리다니, 용기 하나는 가상하군.” “아니, 정말 모른다고, 이 미친놈아. 내가 무슨 인간 레이더도 아니고….” “좋은 말로 할 때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다 방법이 있지.” “아, 글쎄 모른다니까! 사람 말 못 알아듣나!!” “뭐하느냐, 희광아. 당장 저 놈 다리 하나 분질러놓지 않고.” 거구는 무방비 상태인 우륜에게 서서히 걸어왔다. 곧 커다란 그림자가 우 륜과 요진에게 드리워졌다. 그러나 우륜의 눈빛은 아직 살아있었다. 우륜은 요진이 들으라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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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진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우륜은 갑자기 요진을 뿌리치고 튀어나갔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우륜이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예측하지 못한 탓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희광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매우 당황한 것처럼 보였고, 덕분에 빈틈이 명확하게 보였다. 곧, 한계치까지 강화시킨 우륜의 오른쪽 주먹이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정확히 심장에, 주먹이 직격했다. 퍼어억. 폭발과도 같은 주먹의 힘을 견디지 못한 살점이 허공으로 치솟아 흩어졌 다. 피와 살점이 엉겨 붙어 있는 덩어리들이 잔뜩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거 구의 가슴에서도 피인지 뭔지 모를 진득한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남자의 심장이 있던 자리엔, 이제 큼직한 구멍이 하나 있을 뿐. 우륜은 오른팔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몸 이 안 좋은데 거의 한계치까지 가는 무리한 강화를 시도했으니 당연한 일이 기도 했다. 아마 몇 분간은 팔을 움찔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거구가 이걸로 쓰러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일 터. 이 거구만 사라져준다면 뭐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우 륜은 고개를 들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거구의 몸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 믿 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뭐, 뭐야 이건….” 그 순간 우륜은 무지막지한 발길질에 걷어차여 또 허공을 날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륜의 머릿속은 아까 목격한 그 광경으로 가득했다. 우륜은 그 광경을 자기가 눈으로 봐놓고도 믿지를 못했다. 조금도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요진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희미해져가는 시야. 머 릿속을 맴도는 의문. 우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의식의 끈을 겨우 붙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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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채로 방금 전의 의문을 되뇌는 것뿐이었다.

나비는 쪽문을 통해 뒷산으로 걸어갔다.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한탄하 면서, 마치 혼자서 다른 시공간을 걷는 듯한 모습으로. 선경은 숨죽인 채 나비의 뒤를 밟았다. 나비의 행동이 굉장히 소름끼치기 그 지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호기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뒷산으로 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길도 잘 나있는데다가 경사도 완만한 편이었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산이 아니라 언덕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조그만 집이 한 채 나타났다. 적당히 초가지붕을 올려놓 은, 방도 몇 개 되지 않는 소박한 건물이었다. 별당? 초당? 아마도 그런 것 이리라고 선경은 생각했다. 나비는 그 집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경은 그 나비가 도저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눈동자도, 간혹 달빛을 받아서 보이는 미묘한 얼굴 표정도, 그 어떤 것도 전 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선경은 우연히 보았다, 검붉은 나비의 소리 없는 미소를. 나비가 행 복해하고 있었다. 눈물지을 정도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선경은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일렁이는 물로 차오르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도 행복 한 나머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마저 피안으로 데려갈 것 같은 미소. 선경은 그 미소에 그만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앗.” 그러다가 문득 선경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너무 놓고 있었다. 그 사이 나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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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길을 따라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선경은 잠시 고민했다. 나비가 머물러있었던 그 초당에 들어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경 은 초당을 조사하는 걸 미루기로 결정했다. 일단 위치를 알았으니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길이 갑자기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선경은 길 끝에 뭔가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조심조심 나비의 뒤를 밟았다. 나비가 계단을 올 라간 후, 이쯤 되면 그 나비도 꽤 전진했겠지 싶은 시점에 선경도 계단을 올랐다. 선경은 계단을 다 올라가자마자 주위의 나무들 뒤로 몸을 숨겼다. 계단 위로 올라온 선경이 제일 처음 본 건 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 는 철문이었다. 사람 두세 명 정도 폭을 가진 철문. 나비는 그 문 앞에 서서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비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문을 열려고 하는지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 다. 그러나 철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나비는 문이 열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문고리를 당겼다. 물론 열 릴 턱이 없었다. 나비는 마구 문을 흔들었다. 철컹철컹, 시끄러운 쇳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선경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이가 없어했다. 왜냐면 그 철문을 여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문고리 사이에 끼워진 철봉만 치 우면 절로 열릴 일이었다. 그런데 그 나비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계속 문을 흔들다가 제 성에 못 이겼는지 제 머리를 문에 찧기까지 하였다. 피가 철문 위로 질 질 흐르는 걸 보면서 선경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이 축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지? 담배 때문에 벌써 몸이 허약해져서 땀범벅이 됐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땀을 훔치려고 목에 손을 갖다 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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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 축축하고, 물컹한 것이 잡혔다. 손에 잡힌 그것이 꿈틀거렸다. 선경은 순간 오싹해졌다. 비명이라도 지르 고 싶어졌다. 그때, 나무 위에서 무언가가 우수수 쏟아졌다. “익…!” 차갑고, 물컹하고, 꿈틀거리는 것들. 선경은 기겁했다. 그녀는 놀란 듯 몸 부림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비탈길을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산속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해졌다.

달밤. 팔다리의 감각이 희미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제대로 눈을 뜨고 있 는 건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걷고 있다. 내가 걷고 있다. 나는 단지 시냇물에 흘러가는 나뭇잎 같아. 그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을 뿐. 그래도 어쩐지 외롭지 않아. 춥지 않아. 따스해요. 심장 고동에 편안함이 느껴져요. 나에게선 당신의 온기가, 당신의 고동이 느껴져. 보이지 않아도, 만지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어.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 행복해, 눈물도 웃 음도 나올 정도로 행복해서, 나는…. 나는…. 뭐였더라. 뭐였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 차갑고, 무서 워. 여기는 어딜까. 나는 누구지.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모르겠어. 머리도 아프다. 왠지 울음이 나와. 도와줘요, 누군가, 누군가 있어줘요, 보고 싶어, 무서워요, 아, 아파, 아아…. 그때 눈앞에 익숙한 집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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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눈앞에 여러 가지가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주마등처럼, 한순간 나타나고, 한순간 사라져서, 잡으려고 보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도 없고, 아아, 울고 싶어졌을 때, 어디선가 당신이 나타나, 미소 지으며 말 을 걸어주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나 마, 당신을 볼 수 있어서, 정말로…. 아아, 그래도 당신은 어딘가에서 분명, 나에게 웃어주고 있으리라. 여전히 당신은, 내 마음 속에, 검붉은 날개를 펼치고, 나를 향해 두 팔을 뻗고, 미 소지어준다. 그래, 나는 반드시, 놓지 않으리라. 당신을, 그리고 이 행복을….

우륜에겐 도저히 일어날 기색이 안 보였다. 아니, 일어나기는커녕 말조차 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보였다. 걷어차였던 것이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모 양이다. 거구는 몸에 큼직한 구멍이 뚫린 채 자기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움직일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륜이 마지막 힘을 짜내 어 기습을 가했듯이, 희광이도 억지로 몸을 움직여 우륜을 차 날려버렸던 것이리라. 그것보다 중요한 건 우륜이 목격했던 무언가다. 우륜은 자꾸만 그 광경이 잊히지를 않았다. 그 거구의 몸속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꿈틀거리며 몸 부림치는 무언가가, 하나도 아니고 잔뜩.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진득한 피 속에서 섞여 수없이 몸부림치고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그 거구의 몸속 내 장이 있을 자리를 꿰차고 있던 그것은 분명…. ‘설마, 벌레인가….’ 도저히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그건 어딜 봐도 분명 벌레였다. 그것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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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히 눈에 익은 모습을 가진 벌레.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물레로 돌린 도자기를 위아래로 쭉 잡아 늘린 것 같이 길쭉하고, 토끼 삼킨 뱀 마냥 불 룩한 진흙색 몸통을 가진 벌레. 평소에 보던 것보다 좀 큰 놈들인지 크기가 사람 손 정도였긴 했지만, 확실하다, 저건 분명히 ‘거머리’일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까의 공격 때문에 몸에서 떨어져나간 거구의 살점 속에도 거머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워낙 어두운 밤인데다가 거머리의 몸통 색이 어두운 탓에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을 뿐…. 거머리들은 갑자기 바깥으로 나와서 놀란 건지 이리저리 몸부림치며 난리를 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다 시 희광이가 있는 곳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거머리들이 희광이의 살갗을, 낡고 빛바랜 흰옷을 타고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수가 우글거리며 몰려들었는지 옷이 시꺼멓 게 보일 정도였다. 거머리들은 모여들어 희광이에 몸에 난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니 꼭 실타래가 얽히고설키면서 증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구멍 이 메워지자 희광이는 손발을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곧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려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요섭이 한손에 칼을 든 채 우륜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우륜의 옆에 있던 요진은 그 모습을 새파랗게 질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요섭이 점점 다가오자 요진은 다급하게 일어나려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 다. 당황해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몸을 뒤로 빼보지만 그래봤자 요섭에게 는 한두 발자국 차이일 뿐. “허, 어딜 가려 하느냐.” 더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요진은 공포로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요섭은 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냉정한 눈빛으로 요 진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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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죄송해요, 오라버니, 제발, 제발 한 번만….” 요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요섭은 들은 체도 안했다. 요섭은 칼 을 치켜들었다. 자결하라면서 요진에게 던져줬던 칼이었다. 칼끝이 요진에게 날아들었다. 요진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요섭의 팔을 붙잡았다. “…….” 말은 안했지만 요섭은 굉장히 노한 표정을 지었다. 요섭의 팔을 붙잡고 말린 건 다름 아닌 희광이였기 때문이다. 희광이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요진을 죽이면 안 된다는 뜻의 표현인가보다. 물론 요섭은 희광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희광이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놓지 못해!!” 요섭이 소리쳤지만 희광이는 듣지 않았다. 요섭은 기가 찼다. 임씨 가에 충실하기 둘째라면 서러울 하인인 희광이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대들다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힘으로 어떻게 뿌리칠 수도 없었고, 희광이는 요섭이 가진 무력 의 전부였기에 죽일 수도 없었다. 결국 요섭은 분노로 입술을 깨물면서 손 에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요진을 죽여서 괜히 희광이의 충성 을 잃게 되면 자신만 곤란해질 테니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칼을 놓는 것을 본 희광이는 그제야 요섭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요 섭은 지금 당장 희광이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일단은 참기로 했 다. 체면을 구긴 게 짜증이 났는지 요섭은 엄청 미간을 찌푸리곤 뒤돌아서 서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흥, 뭐, 됐다. 저놈들 둘 다 데려와라. 내가 직접 문초할 테니.” 우륜도 요진도 딱히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사태가 종료됐음을 직감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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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은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뗐다. 그런데 요섭의 발걸음은 그리 오래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엄청난 것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뭐, 뭐냐 저건…,” 경악했다. 요섭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사람들도, 우륜과 요 진도, 믿기지 않는 것을 목격하고는 놀라고 말았다. “네, 네놈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작은 그림자. 다 헤 진 한복을 입은 그 소녀는 멍하니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일그러진 검붉은 나비 날개를, 새빨간 혈맥 무늬가 그려진 날개를 펼치면서. 우륜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그 검붉은 나비 날개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 왔다. 또 다른 나비가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러나 그 나비 날개를 앞에 두고도 우륜은 그 인물이 이연과 같은 나비라 고 생각하는데 거부감을 느꼈다. 같은 나비 날개를 달고도, 눈앞에 있는 이 나비와 이연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연의 푸른 나비 날개에서 느껴지는 경외감과는 뭔가가 달랐다. 그 검붉은 나비에게서 느껴졌던 감각은 오히려 섬뜩함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오한에 떨고 있었다. 요섭은 자기도 당황스러운 주제 에 당황하지 않은 척 하려고 애썼다. “뭐, 뭘 두려워하는 거냐!! 당장 저 요물을 쫓아내지 못해?!” 요섭이 소리쳤지만, 이미 나비 날개에 압도당한 그들에겐 요섭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명, 희광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희광이의 몸에 뚫렸던 구멍은 어느 새인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성큼성큼 그 나비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나비는 그 덩치 앞에서도 겁을 먹기는커녕 태연했다. 희광이가 땅을 박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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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쇠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그때에도 태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나비는 갑자기 저고리의 앞섶을 들췄다.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숨 을 들이켰다. 저고리 안 가슴팍엔 피 칠갑이라도 한 듯 새빨간 살덩이뿐이 었다. 그리고 그 살덩이 위엔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검붉은 나비, 그리고 애벌레가…. 저고리를 들추던 것과 동시에 검붉은 나비 떼가 쏟아져 나왔다. 갑작스런 나비 떼의 홍수에 희광이는 당황한 듯 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구름 같은 나 비 떼 속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몸에 붙은 수많은 나비 떼는 떨어질 생각 을 않고 덕지덕지 붙어 날개를 파닥였다. 다들 그 괴기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거구는 괴로운 듯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얼마나 나비들이 많이 달라붙어 있던지 나비에 가려서 옷이 거 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얼마 가지 않아 거구는 쓰러지고 말았다. 절대로 그 무엇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거인이 나비 떼 따위에게 맥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모두가 그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같은 검붉은 나비 떼. 그 나비 떼 가운데서 새까 만 머리카락을 버드나무 가지처럼 내려뜨린 채 섬뜩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녀. 소녀는 걷기 시작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비 떼를 몰고서.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비 떼를 모는 소녀는 요섭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요섭은 공포에 질 려 몸이 굳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요섭은 미간을 찌 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무서워하는 건지 아니면 노여워하는 건지 잘 구분이 안 가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요섭에게로 걸어갔으나 그에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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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갈 뿐이었다. 다만 그녀는 요섭을 지나쳐갈 적에 그에게 슬쩍 눈길을 준 것 같기는 했다. 마치 깔보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요섭은 갑자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는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요섭을 지나친 나비 무리는 우륜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나 비들은 처음부터 요섭이 아니라 우륜을 향했던 것이다. 우륜은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그 나비를 애써 주시했다. 연기가 치솟는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비 날개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비는 우륜에게 다가오더니, 우륜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탁한 눈동자, 홍채 가운 데 한껏 조여진 동공이 섬뜩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우륜은 왠지 점점 정 신이 아늑해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점점 꿈과 의식의 경계가 흐려지고, 청각 도 시각도 멍해져간다. 가끔 몇몇 자극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울릴 뿐. 그때 우륜은 눈앞의 나비가 뭐라고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온갖 소리가 섞이는 가운데서도 명확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 그 나비는 아마도, ‘아니야’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우륜의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갔다. 요진이 뭐라고 소리쳤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나비는 그런 요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싱긋 웃음을 짓고는 다시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삼켜짐과 동시에, 우륜의 의 식도 그만 끊기고 말았다.

정신이 드니 또다시 어둠 속이었다. 등이 물기로 축축했다. “아, 으, 으으으으….” 일어나자마자, 몸속을 갈고리로 휘젓는 것 같은 격통이 밀려왔다.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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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악할 여유니 뭐니 하는 것도 없이 이연은 고통으로 신음을 내기에 바빴다. “아, 하아, 아, 아아아아아….” 너무나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 정으로 주위에 손을 뻗어보지만 이연을 도와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파, 아아아아….” 왜, 어째서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 걸까,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된 걸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손잡아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왜 이렇게 아파 해야 하는 걸까, 서러움에 눈물이 북받쳐서,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나왔다. 그때 살갗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온몸에서,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이연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손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꿈틀꿈틀, 벌레 같은 것들이, 손에 잔뜩…. 그곳은 거머리 떼로 가득했다. 어두워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무언가 자기 몸 주위에서 꿈틀거리면서 물장구를 치는 소리, 그리고 축축한 몸통에 서 미세하게 반사되는 빛이 온 곳을 메우고 있는 걸 보면…. 아, 주위에 가득찬 것의 정체를 깨달은 이연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아 그러지 못하였다.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니, 피를 잔뜩 들이마셔 불룩하게 부 풀어 오른 거머리 떼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아아, 지금도 그것들은 피를 빨고 있다.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목덜미에서, 가느다란 팔에서, 원숙히 부푼 가슴 위에서, 치맛자락 밑으로 빠져나온 다리 에서, 그 어디든 가리지 않고 기어가 피를 빨았다. 거머리들의 이빨이 상당히 예리한 탓에 피가 빨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픔도 없고, 심지어 거머리들의 축축한 입과 날카로운 이빨이 닿는 느낌도 역시 없다. 다만 이상할 정도의 저림과 차가움, 축축함이 간신히 신체의 위 험을 알릴뿐. 아아, 점점 숨이 차오르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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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문득 이연은 우륜을 생각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이연은 우륜이, 정 말로, 보고 싶어졌다.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곧, 어둠 속은 다시 거머리 꿈틀거리는 소리만 남게 되었다.

소년은 언제나 외톨이였다. 딱히 소년이 뭘 잘못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냥 날 때부터 다른 사람 들이 소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소년을 꺼려했다기보다 소년의 출신을 꺼려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소년의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상한 소문 탓이었다. 그 집안사람들은 벌레 먹이로 사람을 던져준 다, 그런 소문이 퍼져있었던 것이다. 사실, 따져보면 인상이 안 좋은 것은 다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소년의 가문은 먼 옛날부터 대대로 충방사 일을 해왔다. 생각해보아라, 벌레 로 요술을 부리는 걸 좋게 볼 사람들이 있으면 몇이나 있을지. 게다가 소년 의 집안에서 다뤘던 벌레는 하필이면 수질(水蛭), 즉 거머리였다. 그러니 더 더욱 인상이 좋지 않을 수밖에, 그래도 옛날엔 임씨 집안과 마을사람들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임씨 집 안사람들은 양반집 어르신으로서 할 일을 충실히 했고,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기도 해서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다. 허나, 그것도 이젠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 몰락은 소년의 아버지 대 즈음부 터 시작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마을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 가 부인을 내팽개치고 첩을 들이는 등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아 마을사 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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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문제들이었지만….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하나둘씩 실종되면서부터 상황 은 달라졌다. 그 실종사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은 거머리를 보았다고, 이건 분명 임씨의 짓이라고…. 그러나 소년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주기는커녕 안하무인이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의 상황이었다. 마을사람들도 하인들도 거의 다 떠나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인심도 모조리 떠나버렸다. 이 정도면 거의, 사회에서 배제되었다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소년은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년은 자기가 외톨이라 는 게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았다. 집에 있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 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자신을 귀신 보듯이 바라보는 또래 아이들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어차피 놀아줄 사람도 놀 곳도 모두 집 안에 다 있었으니, 멸시와 배척을 감수하고서 밖에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도 소년을 껄끄럽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름 아닌 소년의 어머니였다. 아주 옛날부터 소년의 어머니는 항상 병 때문에 앓아누워계셨다. 무슨 병 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선 걷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아무튼 심각한 병이긴 했던 모양이다. 그 병 때문에 소년의 어머니는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 었다. 문밖으로 나오기는커녕 하루 종일 문을 열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그래도 소년의 어머니는 가끔 문을 열고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곤 했다. 아주 어렸을 적, 소년은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다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 고…. 아아, 그때의 기억이 소년에게는 아직도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핏발이 선 눈동자, 부르르 떨리는 입술. 그건 분명 노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아, 요물….’ 어머니라고 불리는 형태가 뭔가를 중얼거렸다. 뭐라고 중얼거리기는 하는 데 속도가 빠르고 음량이 작아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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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뱀과 마주친 개 구리처럼. 소년의 눈엔 어머니가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귀신이나 괴물, 도깨비, 그런 것들이 어머니의 탈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요물이야…. 후, 하하하, 요물이라고….’ ‘못된 것…. 아아, 그래…. 그런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네가 모든 걸 삼켰어…. 토해내, 토해내, 토해내라고….’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들이 어지럽게 울리고 동시에 심장이 날뛴다. 소리 지르고 싶은데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소년은 정신이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에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눈빛은 소년을, 소년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듯했다. 그것은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 표독스러운 눈빛 앞에 선 소년은 자신이 금방이라 도 유령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상 공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후의 기억은 머릿속에 없다. 깨어나 보니 소년은 다른 사람들에게 둘 러싸인 채 자기 방에 누워있었다. 아마도 기절했었나보다. 아버지도 여동생도 소년에게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았다. 다행히 몸에는 딱히 다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소년은 그날 이후로 계속 이유 모를 공포에 시달렸다. 그 눈빛이, 그 목소리가, 그날 본 모든 것들이 쉽게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들은 잊 으려고 할수록 계속해서 떠올라 소년을 괴롭혔다. 소년은 평소에 잘 지내다가도 그날의 일이 떠오를 때마다 오한에 떨고 공 포에 떨었다. 지나가는 바람 속에 희미하게 목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듯하였 고, 수없이 지나쳐가는 수많은 머리들 사이로 그 노여운 표정만이 둥둥 떠 서 자신을 지켜보는 듯했다. 마치, 저주받았다고나 할까, 홀렸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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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았다. ‘죽어, 사라져.’ ‘찢어버리기 전에 저리 꺼져.’ ‘날 잡아먹기 전에, 하루 빨리 수를 써야해.’ 계속 어머니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무서웠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가 저주받아야 하는 걸까. 난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데, 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서받아야 한다. 저주를 풀어야한다. 그 런 강박이 어린 마음에 자리 잡았다. 소년은 생각이 날 때마다 어머니가 있 는 방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빌었다. 그러나 용서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집어던지는 물건에 맞지나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소년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허나 소년에겐 자 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그저 용서받고 싶을 뿐이었고, 미움 받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소년은 그런 시선 들을 대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미움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거다. 너희들은 아 무 것도 모른다. 아버지도, 동생도, 하인들도, 마을사람들도 그렇다.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바로 당신네들이다…. 소년은 용서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쁜 짓은 하지 않으려 했고 몸가 짐도 바르게 했으며 싫어하던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노력했다. 한 가지씩, 한가지씩, 목표를 이뤄낼 때마다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비록 그 결과는 참혹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번번이 거절당하고 외면당하는 데에 회의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미워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니까.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식이라 면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 자신이 마땅히 노력한다면 언젠간 알아줄 것이라고, 아니,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해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년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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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자 소년이 문득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어머니가 이 집에서 언제나 외톨이였다는 사실이었다. 소년의 어 머니는 철저히 혼자였던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처음엔 공포 때문에 어머 니에게 봉사했을지언정 나이가 들고나니 공포보다는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것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소년은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그 광기가, 노여움보다는 두려움에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집안에서 어머니에게 관심을 보인 건 여전 히 소년뿐이었다. 아버지조차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그런 얘긴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어머니를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아버지의 행동 이 점점 더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에 게 사실은 첩이 있다는 사실을…. 이 집에 머무는 사람 중엔 가족도 하인도 아닌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소년의 아버지는 그 여자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의 아 버지는 밤마다 그 여자의 방을 찾아갔다. 어머니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 개차반 같은 행동 덕분에 집안에 대한 평판도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양 반 집안이지만 개만도 못한 양반이라는 소릴 들을 정도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어머니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어찌나 몸 상태가 별로였던지 나중에 가서는 소년에게 화를 내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 탓일까, 그 즈음 소년의 어머니에게선 서서히 광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건 몸의 건강 문제만이 원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며칠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소년에게 질려버렸던 것이 또 다른 원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화도 못 낼 정도로 병약해진 어머니를 보며 소년은 점점 확신했 다. 자신의 어머니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하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아 외톨이가 된 채로, 언제 죽어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 은 채로 혼자서 처참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게 아닐까. 그 공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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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져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이 어머니에게 느꼈던 공포는, 어머니가 느끼고 있었던 공포의 편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 다. 아아, 자신이 무너져 사라지는 공포, 그 공포를 어머니는 몇 년 동안이 나 겪어왔던 것일까. 한창 낙엽이 지는 어느 쌀쌀한 가을밤. 소년은 홀로 이 허름한 방에 앉아,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광기가 빠져나 간 어머니의 얼굴엔, 새하얘지다 못해 푸른 핏줄이 선한 그 얼굴엔 그저 생 기 하나 없는 공허함만이 남아있었다. 소년은 몇 시간이고 어머니의 옆에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 의 어머니는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 다. 심지어 소년과 눈을 마주쳤음에도 자신의 옆에 있는 게 소년이라는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을 우두커니 바 라보기만 하다가, 겨우 소년을 알아본 것인지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네가, 내, ……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 불분명해서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말소리는커녕 가쁜 숨소리만이 들릴 뿐. 그 러다가 어머니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 며. 그 앙상한 손으로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아귀의 미약함 덕분에 소 년은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금 얼마 없는 힘을 쏟아 붓고 있다는 것을. 문득, 다음 말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소년의 머릿속을 스 쳤다. 소년의 어머니도 그걸 직감한 것인지, 숨이 멎었다가 트였다가 하면서 도 어떻게든 말을 건네려 하였다. 어머니는 마지막 힘을 짜내고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다’라고. 그것은 아마도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부모자식으로서 들었던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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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아아, 낙엽이 진다. 어머니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나서도 소년은 한동안 묵묵히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런 것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 고작 그런 말을 듣자고 이렇게 고생한 게 아니다. ‘미안하다’라니, 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소년은 그저 어머니에게 자식으로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과 받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뿐이다. 허망했다. 허름하고 비좁은 방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있 던 것은 소년 혼자였다. 나 말고 슬퍼해줄 사람이나 있을까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착잡해졌다. 대체 이토록 허무하고 덧없는 결말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눈물은 흐르는데 이상하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소년은 문을 젖혔다. 어둠 속에, 나무 뒤에 누군가가 있다. 고운 한복을 입고 우아하게 단장한 여인, 소년은 그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그 여인은, 아 버지의 첩이었다.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다 저 여자 탓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등지게 만 든 것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집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게 만든 것도, 전부 그 여자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몸을 숨기고는 달아났다. 소년은 그 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얼마 후,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양반집 부인치고는 간소하다 못해 허름하기까지 한 장례식이었다. 하마터면 상여도 없을 뻔했다. 이상한 장례식이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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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조의를 표하긴 했다. 그러나 소년의 눈엔 그 조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걸로 비춰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지나가던 거지가 죽어도 이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제일 가관인 건 소년의 아버지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장례식 내내 슬퍼하 기보다는 귀찮아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의 관이 묻힐 곳 에 상여가 도착한 날 밤, 소년은 아버지가 여기까지 와서도 그 첩과 더러운 짓을 하려는 걸 보았다. 어머니가 죽은 지 3년은커녕 3일도 되지 않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바로 옆에 어머니의 묘를 두고도 그럴 마음이 든단 말인가. 아무리 애정 없는 관계라고 해도 그래도 부부다. 하물며 어머니가 뭔가를 잘못해서 미움을 산 것도 아니거늘. 그런데도 사람이 이럴 수가 있 단 말인가? 이다지도 어머니의 삶이 덧없던 것이었단 말인가! 아아, 아버지의 눈동자엔 그 여자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그 여자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 홀린 것이다.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소년의 아버지도 갑자기 몸져눕게 되었다. 돌아가신 어 머니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점점 기운이 쇠하더니 종국에는 일어나지도 못하 게 되었다. 그 즈음 되서는 집에 남아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첩에게만 매달 리느라 재산을 신중하게 관리할 생각이 없었기에 재산은 결국 밑천을 드러 내게 되었다. 집안의 위상은 한참 전부터 밑바닥이라 더 떨어질 곳이 없었 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요물에게 홀렸다면서 비아냥거리고 손가락질했고, 소 년은 그때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집안에 아버지의 수발을 들사람이 정말로 몇 없었기에 소년과 소년의 여 동생, 그리고 다른 몇 명이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돌보았다. 그날은 소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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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였다. 저녁이 되어 소년은 탕약을 들고 아버지가 있는 방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안에선 불빛과, 희미한 여자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을 텐데 왜 불이 켜져 있는 걸까, 이 목소리는 정말 아버지 방에서 들려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소년 은 믿기지 않는 것을 보았다. 방안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커다란 나비 모양의 그림자가. 나는 놀라서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달려갔다. 달려가서 황급히 문을 열었다. 그 바람에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안에선, 한 여인이 아버지를 안은 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여인의 등에는 커다란 검붉은 색 나비 날개가, 섬뜩 할 정도로 새빨간 핏줄이 선 검붉은 색 나비 날개가…. 소년은 그때 마을 사람들이 소곤거리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임씨는 요물에게 홀렸다.’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년의 아버지는 행복한 표정인 채였다. 그 잠든 모습이 어찌나 만족스러워보이던지 두 번 다시는 깨어날 것 같지 않아보였 다. 그런 아버지를 품에 안은 채 계속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보며, 소년은 문득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물.’ ‘날 잡아먹을 거야, 잡아먹고 말거라고.’ 소년은 그 여자의 등 뒤에 달린 커다란 핏빛 날개를 보고, 금방이라도 삼 켜질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그제야 소년은, 자신의 어머니가 두려워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기 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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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자자 어서 자자 우지 말고 어서 자자 니 눈에서 눈물이 나면은 내 눈에서 피가 난다…. 아찔해진 의식 사이로, 어딘가 익숙하고도 그리운 노랫말이 희미하게 귓 가를 맴돌았다.

정신이 드니 나는 어두운 산속에 홀로 있었다. 밤인가? 낮인가? 아님 저녁? 모든 게 흑백으로 보여서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 시야가 검게 점멸했다. 주위 사물들의 윤곽이 모습을 감췄다 드러냈다 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그 즈음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여긴 꿈속이라는 것을.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깨닫자 시야를 가리던 검은 안개가 확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까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왠지 자신만만해져서 발을 한발자국 내딛었는데, 그러자마자 주위의 풍경 이 확 변하는 바람에 나는 또 당황하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잠시 동안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린 후 나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산속이 었지만, 아까하고는 묘하게 풍경이 달랐다. 심지어 어딘지 익숙하기까지 한 풍경이었다. 그때, 흑백으로 가득 찬 내 시야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푸른빛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그 푸른빛을 향해 주저 없이 걸어갔다. 그 빛을 따라가니, 여자가 있었다. 푸른빛 나비 날개를 가진 여자였다. 그 여자를 보고 나니 다른 풍경은 조금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시 야에 잡히는 건 오직 그 푸른 나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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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나비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그 나비에게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유리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에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얼굴, 연지를 바른 것 처럼 발그레하게 물든 뺨,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 저고리의 앞섶에선 그 안에 꾹꾹 눌러 담겨져 있을 풍만함의 흔적이 느껴졌고, 다홍빛 치마 아래 로는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한 종아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가 그 푸른 나비를 엎어뜨린 후였다. 푸른 나비는 좋아하는 감정도 싫어하는 감정도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 싫어했든 반항을 했든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지 금 내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이곳은 내 꿈 속, 그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날 목격할 이도 없고 질책할 이도 없으니 이보다 횡재일 순 없으랴.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비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이 겹치 며 그녀를 빨아들였고, 내 한손은 저고리에 가려진 그녀의 언덕을 저고리 위로 힘껏 짓눌러 희롱했다. 아아, 그것 뿐만으로도 내 이성은 벌써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황홀하다, 어찌 이토록 황홀할 수가 있을까. 혀에 진미(珍味) 가 퍼지는 것처럼 온몸에 그녀의 느낌이 퍼진다. 어느 새 나는 그녀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옷을 제대로 벗겼 는지 아닌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옷을 입고 있든 아니 든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일 테니 말이다. 허리를 움직 일 때마다 기분 좋은 미끄럼이 느껴졌기에 나는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 고, 그럴 때마다 저릿한 느낌이 그녀에게서 흘러들어와 내 전신 세포 구석 구석까지 스며들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극상의 쾌락. 내가 체면을 차려야할 인간이라는 것도 잊게 만드는 마약이었다. 반복되는 행위에 저릿한 느낌이 쌓여간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꿈틀대었던 그 느낌은 점점 저들끼리 뭉치고 커지더니 더 이상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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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되었다. 마치 커다란 뱀이 내 몸을 휘감고는 내 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거기까지 이르니 나조차도 내 몸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잠깐 얼굴을 떼어 그 나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표정을 한 채로 그 푸른 눈동자를 껌뻑이고 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나는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고픈 마음으로 가득해지고 말 았다. 아아, 그 눈동자를 눈물로 가득 채워서, 그 눈물바다 속에서 산란되며 흔들리는 빛줄기가 보고 싶어졌다. 참을 수 없는 감각을 조그만 한탄으로 토해내는 그 애처로운 모습이 보고 싶다. 나는, 네…. 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저지르고 말았다. 폭풍이 지나간 바다 같은 고요함이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내 뇌는 그 쾌락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감각은 아직도 아 까의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나비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 상했다. 어둠 속을 은은히 비추던 푸른빛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그 흔 적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든 그 순간…. 내 눈 앞에, 검붉은 나비 날개가 펼쳐졌다.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 떠오를 듯 말 듯 애매한 꿈. 떠올려보려고 시도는 해보았으나, 붕대를 감 아놨던 오른손이 아픔으로 욱신거린 탓에 금세 까먹고 말았다. 개꿈이겠지 싶어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선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 남은 꿈의 잔상들 을 모두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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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눈꺼풀도 무거워서 도저히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이상하게도 잠이 잘 들지 않았다.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더라.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 다. 내가 잠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더라. 너무 많은 것들이 한 번에 떠올라서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일단은, 그 래, 갑자기 우륜인가 뭔가 하는 미친놈이 나타나서 난장판을 벌였지. 그래서 마을에 한바탕 난리가 났고, 희광이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게다가 어찌된 일 인지 여동생까지 말려드는 큰 사건이 되었고, 그리고 마지막엔…. 우선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다음 일은, 그래, 그 녀석이 나타났다. 난 분명히 그 녀석이 누군지 알 고 있다. 모를 수도, 잘못 볼 수도 없다. 그 녀석은 얼마 전에 나와 실랑이 를 벌였던 그 녀석 아니던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나비 날개 말이다. 그 검붉은 색 나비 날개. 도대 체 그걸 왜 그 녀석이 가지고 있냐는 거다. 그 나비 날개를 가지고 있어야할 사람은 그 녀석이 아니다. 그런 날개를 가진 나비는 내가 알기론 딱 한 명, ‘송장나비’뿐이다. 허나 송장나비는 얼 마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그 날개도 함께 사라졌을 거란 말이다. 섬뜩한 일이다. 내가 귀신이라도 보았단 말인가. 아니지, 그럴 리가. 그 날개는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것이지만, 그 녀석은 살아있는 사 람인 게 확실하니까. 비록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나비날개란 건 그 나비라고 불렸던 자의 혼과 연결된 물건이다. 따라서 나비날개를 남에게 준다거나 하는 일은 불가 능하다. 혼을 통째로 옮긴다면 또 모를까. 허나 그 녀석은 분명 송장나비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 녀석의 안엔 송장나비의 혼이 깃들 어있다는 뜻인가? 정말로? 그게 정말로 가당키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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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해졌다.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나도 나비에 대해서 많이 듣기 는 했지만 자세히 아는 건 아니니….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해결하기는 무리인 것 같아서, 나는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일어나서 촛불을 켰다. 그러자 조그만 불꽃에서 빛과 온기가 미세하게나 마 주위로 퍼져나가 새벽녘 어둠을 밝혔다. 그래도 여전히 어둡기는 매한가 지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방이옵디다.” 이방인가. 이 이른 새벽부터 무슨 일일까.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 온 걸 보니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들어오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머리카락 군 데군데가 하얗게 샌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 나이로만 따지면 내 아 버지뻘은 되실 것이다. “피곤해보이십디다. 너무 이른 시간에 왔는지요.” “아닙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히 앉으십시오.” 노인은 무릎을 꿇었다. 나보다 연세도 훨씬 드신 분이 말이다. 뭐라고 말 을 해볼까 하다가, 그 정도로 꺾일 고집이면 진작 꺾였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걱정이 돼서 말입죠. 어제 그렇게 난리가 났잖소.” 이장 어른은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라 마을 경비에서 제외했었다. 그래서 아마 어제 일에 소집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도 어제 사건을 알고 있 다니…. 뭐, 그다지 작은 소동은 아니긴 했지만. “소동이 일어나긴 했죠. 하지만 곧 잠잠해질 겁니다. 제가 다 알아서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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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테니 말입니다. 흠, 다른 마을 분들은 어떻습니까.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 까?” “에또,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 말입죠. 아아, 그리고 희광이 말 입니다만.” 아, 잊고 있었다.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어제 희광이는 검붉은 나비 떼 에 휩싸이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었다. 나도 직후 그 나비 놈과 마주치 고는 의식을 잃어버렸고, 그 바람에 희광이는 나에게 아무런 응급조치도 받 지 못하고 만 것이다. “어찌되었습니까.” “에,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쩔쩔맸는데, 한참 있다가보니 지가 스스로 일어 나더구먼요.” “다행이군. 다행이야.” “많이 걱정하신 모양입니다.” 걱정을 안했다면 그거야 말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희광이는 내가 태어 나기 이전부터 이 집안에 봉사해온 자이며 이 집안의 기둥 중 하나니까. 그 가 없었다면 임씨 가는 지금만큼의 위치도 유지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나로선 희광이가 걱정이 될 수밖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지요. 헌데, 묻고 싶으신 건 그것뿐인지요.” “아닙디다. 전 그러니까, 도련님이 이 난리에 어찌 대응하실 것인지 궁금 해서 찾아온 것입죠.” “걱정됩니까?” “그거야 뭐, 걱정이야 당연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 잘 해낼 겁니다. 이 마을은 지금까지처럼 아무 문제도 없이 잘 돌아갈 겁니다.” 다 잘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잘 해냈듯 말이다. 난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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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말을 들은 노인의 표정이 어딘가 탐탁지 않았다. “아, 지가 걱정하는 건 요 마을이 아니지만 말입죠.” “음? 이장님, 당신이야말로 이 마을을 아끼시는 분 아닙니까. 이장님이 마 을 걱정 말고 다른 걱정도 하신단 말입니까?” “지가 걱정하는 건, 바로 도련님입죠.” “저 말입니까?” 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내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기라도 했나? 나는 이것저것 떠올려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 만한 걸 발견하지는 못했다. 서글서글하던 노인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었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까와는 다르게 날카롭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며 입을 노인이 열었다.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짐을 짊어지실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검붉은 나비 날개를 편 여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모든 걸 짊어지려 할 필요는 없어요, 도련님.’ 그 여인, 송장나비의 목소리가, 눈빛이, 그 모습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것 처럼 아른거린다. 굉장히 불쾌해졌다. “방금 어르신 말씀은 제가 아는 누군가가 했던 말과 완전 똑같군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죠.” “전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이 늙은이는 항상 도련님에게 감사하지 말입니다요. 그래서 실례 를 무릅쓰고 말하는 겁디다. 이제 됐습디다, 이젠 이 마을을 더 돌보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쾅. 나도 모르게 욱해서 책상에 손을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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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태연했다. 나는 왠지 스스로가 부끄러우면서도, 여 전히 화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아서 화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련님. 이 마을 사람들은 도련님 덕에 귀중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지요. 지도 그렇습디다. 생을 정리하고, 미련을 떨치고,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다들 한이 맺힌 채로 황천을 떠돌았겠지요.” “그래서, 그것이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하지만, 과유불급입니다.” “과유불급이라니, 어째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도련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만 있어도 충분했단 겁니다. 그 이상은 필요치 않아요. 있느니만 못하지요.”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그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갑작스런 마지막을 맞은 그들에 게는 이 정도 시간도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들 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충분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어르신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도련님에게, 그 충분한 시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을 말하는 것 인지요?” “그건, 솔직히 전 잘 모릅니다, 당연하게도 전 마을 분들 같은 일을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비록 막연하지만, 전 그분들에게 상당히 긴 시간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그들이 원래 삶에서 누렸어야할 시간 은 모두 누리게 해야….” “도련님, 그건 오히려 미련을 남기는 일입니다.” 오히려 미련을 남긴다고? “어째서죠?” “저흰 그때 죽었습디다. 저희의 천수(天壽)가 언제까지였던, 우리의 삶은 거기서 끝난 거예요. 다만 그것이 갑작스러웠기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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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뿐입디다.” “그래서 제가….” “잘 생각해보셨으면 합디다. 도련님이 하려는 것은 저희에게 두 번째 삶 을 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죠.”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천수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을 천수대로 살게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미련이 남는 것이고, 그러니 저는 그 미련을 풀어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도련님, 사람이 죽는데 미련이 없을 수는 없습디다.” “그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운명이고 섭리인 겁디다. 아무리 부조리한 결말이라도 말입죠. 이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만이 필요했던 겁디다. 두 번째 생을 시작할 정도로 많은 시간은 필요 없어요. 그건 오히려 계속 살고 싶다는 쓸데없는 미련만을 남길 뿐입니다.” “쓸데없는 미련이라니, 사람도 생명인 이상 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원을 들어줬을 뿐입니다!” 내 말을 들은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쪽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왠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그들을 도운 건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을 돕고 싶었을 뿐. 그런데도 내가 했던 일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걸까? 지금껏 내가 했던 일에 한 치의 의심도 품어본 적이 없었던 나이기 에, 어르신의 말은 더더욱 충격적으로 들려왔다. “지는 도련님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디다.” “그렇다면 뭡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아까 말했던 대로지요. 도련님이 모두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겁디다. 도 련님, 섭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죽은 자를 살려낸다는 건 말입디다, 그 생명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예요. 한번 무게에 짓눌리면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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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짊어진 것들을 모두 버리기 전까지는…. 아니, 너무 늦어버리면 짊어진 것들을 모두 버린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없습죠.”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설사 그 무게에 짓눌린다고 하더라도 전….” 노인이 하는 말의 내용이 왠지 익숙했다. 나는 언제인가 이런 내용의 말 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 송장나비, 그녀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굳이 모 든 걸 짊어지려 할 필요는 없다고.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그들을 버린다 면 그들은 나에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마 원망 을 받겠지? 당연하다. 내가 그들을 버린다는 건 곧 내 손으로 그들의 목숨 을 끊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 “그건, 저보고 사람들을 죽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게 살인과 뭐가 다릅니까! 그래서야 그 ‘흑색화재’를 일으켰던 범인 놈과 다를 바가 뭐 가 있겠냔 말입니다!” “도련님, 우리들은 죽어있어야 할 사람들입디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 있잖습니까! 어찌 되었든 살아있는 걸 죽게 만드는 건 살인 아닙니까!” “도련님, 그게 바로 ‘무게에 짓눌린다는’ 겁니다.” 순간 나는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이 멍해졌다. 이해가 될듯하 면서도 되지 않는 노인의 말 때문에 내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지 고 말았다.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기 전에….’ 아까부터 계속 송장나비의 말이,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돈다. 떠올리 려고 하지 않으려 해도 노인의 말이 계속 그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불쾌감이 밀려온다. 참을 수가 없다. “됐습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결국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것이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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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소리를 질러버렸을 지도 모른다. “더 이상 섭리를 거스르는 일은….” 노인은 뭐라고 더 이야기를 하려는 듯 했으나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듣기 싫어 주저 없이 방문을 나서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인은 나를 붙잡으 려 하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말이다. 왠지 모르게 착잡한 심정이었다. 노인의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지금은 이렇게 쓸데없는 고민하 느라 시간을 날려먹을 때가 아니다. 뭐가 어찌됐든 이 마을은 지금 날 필요 로 한다. 내가 이 마을의 일을 책임져야 한다. 쓸데없는 고민은 지금 닥친 문제를 해결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희광이부터 찾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내가 부르기도 전에 희광 이가 이미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희광이와 함께 뒷문을 향해 움직였다. 정확히는 뒷문을 통해서 갈 수 있는 그곳, 나비들을 가둬두었던 굴이 있는 곳으로. 해가 뜨기 전에 서둘 러야 한다는 생각에 내 발걸음은 조급해졌다.

그, 우륜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은 자기에겐 아무런 배후도 없단 듯이 얘 기했지만 그걸 순순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여나 정말 아무런 배후 가 없다고 해도 다른 제 3자가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을 수도 모르는 노릇 이니까. 그렇게 돼서 꼬투리를 잡히기라도 한다면 이 마을을 유지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이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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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놈들에게 떳떳하게 밝힐 수 있을만한 일은 아니니까.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가정해도, 이만한 난리를 피웠으니 분 명 이 마을을 주목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러다보면 이 마을에 대해 의 심을 품는 사람이 생기는 건 금방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다. 의심이 의심으로밖에 끝날 수밖에 없도록 사건의 증거를 없애거나 숨기는 일. 어제 난리를 피웠던 그놈은 내가 그 이연인가 뭔가 하는 나비를 납치했다 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증거 없이 막 들이대는 말 같긴 했어도, 결론 부터 말하자면 그 놈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나비의 이름이 이연이라 는 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긴 하지만 내가 그 나비를 납치했던 것 자체는 사 실이었으니까. 뒷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굳게 닫혀있는 철문이 나 를 반겼다. 희광이는 내가 시키기도 전에 문고리에 걸려있는 쇠막대를 꺼내 치웠다. 그러자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확 끼쳤다. 입구 안은 깜깜한 어둠이라 아래로 내 려가는 계단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리 가져온 등롱에 성냥으로 불 을 붙였다. 미약한 빛이었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그 다음부터는 쭉 일직선으로 난 통로 뿐이다. 이 통로는 꽤 길다. 이 집 뒷산에서부터 마을 중심부 지하까지 이어 져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리 잘도 긴 통로를 파놓았냐고 물으면, 글쎄, 낸 들 알겠나. 조상님들의 위대한 업적이려니 하는 수밖에. 그런 것 치고는 꽤 나 날림으로 지어진 통로긴 하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이 통로 여기저기엔 물이 고여 있고 지면은 울퉁불퉁하 기까지 하다. 게다가 여기는 빛줄기 하나도 들어올 구석이 없는 곳이라 분 위기가 상당히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 뭉친 진흙 에 신발이 붙잡혔다가 겨우 빠지는 소리,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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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등…. 누구 말마따나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분위기다. 여러 번 이곳을 와본 나였지만 여전히 이 분위기엔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 으스스한 느낌에 굴하지 않고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이번 에는 대놓고 생리적으로 불쾌한 것들이 손님들을 반긴다. 살이 썩어가는 고 약한 냄새와, 곰팡내 속에 희미하게 스며든 피 냄새. 그것들은 무의식적으로 죽음과 관련된 것들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항상 이곳에 올 때마다 본능적으 로 긴장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까닭일 것이다. 그 불쾌한 여정의 끝, 즉 통로의 끝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하나 있다. 그 리고 철문의 주위에는 살덩어리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 그것 들은 여기서 생을 마감한 나비들의 일부라고 생각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생각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기에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철문에 사용할 열쇠를 찾기 위해 품속을 뒤졌다. 혹시 깜빡하고 안 가져온 거 아닌가싶어 철렁했지만, 품속에서 짤랑거리는 무언가가 손에 닿는 걸 느끼고는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전에 있던 열쇠가 사라져서 다시 맞춘 건데, 맞춘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또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정 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쨌든 열쇠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철문에 열쇠를 꽂았다. 등불을 가지고 있는데도 꽤나 어두워서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는 일이 쉽지는 않았 다. 어떻게든 문을 여니 눈앞에 커다란 공동(空洞)이 펼쳐졌다. “욱….” 문 안쪽에서 훅하고 불어오는 피 냄새가 역겨워서 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몇 번을 겪어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내가 토기(吐氣)를 참느 라 머뭇거릴 무렵 밤눈이 좋은 희광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곧 희광이를 따라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바닥에서 심장박동 같은 것이 내 발에 전해졌다. 아, 정말 여러모로 기분 나쁜 것들뿐이다. 습하고 축축한 걸로도 모자라 미지근하기까지 한 기분 나쁜 공기. 발밑은 온통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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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투성이. 여기저기서 거머리가 물장구치는 소리까지.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그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최대한 기분 나쁜 형태로 그 려져 더더욱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희광이가 어느 한곳에 멈춰 섰다. 나는 희광이를 따라가 옆에 섰다. 바닥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 나는 거기다 등불을 비추었다. “아, 아…….” 진흙과 피로 얼룩진 한복을 입은 처녀. 저고리와 치마가 미처 가리지 못 한 살갗이 등불 빛을 은은히 머금어 묘하게 고혹적이다. 피와 물기로 잔뜩 젖은 채 신음하던 처녀는 등불을 보더니 핏기 없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괴로운 듯 숨을 토하며 겨우 고개만 들어 내 눈을 보았다. 살 짝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초점 없는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여자가 내 시선 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장이 뛴다. 이끌리게 된다. 좀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보고 싶다. 아니,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그건 분명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아, 이것이 홀 린다는 것일까. 역시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건 요 물이다. 내 앞의 이것은 나비, 사람을 홀려서 불행에 빠뜨리는 요물이다. 사 람을 홀리는 불결한 것이다. 그 더러운 것이, 진흙과 피로 뒤덮인 요물이 내 바지로 손을 뻗어온다. 난 저런 것과 닿고 싶지 않다, 떨어져라, 떨어져, 이 불결한 것…! 정신없이 걷어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여 버릴 기세로. 등줄기의 오한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걷어찼다. 비명 지를 힘조차 없어 숨만 겨우 터져 나오는 소리가 굴속에 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발부리 앞에 나비가 쓰러져 있다. 마치 시체처럼 미 동도 없다. 숨이 차다. 나는 다리가 풀려 살짝 뒤로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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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온갖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랬지, 왜 그렇게 흥분한 거지, 이 년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죽으면 곤란한데, 죽을 정도로 차진 않았을 텐 데, 혹시 너무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죽여 버렸나. 그런 생각으로 혼란스러 워질 즈음…. “커헉, 악…. 흐읏….” 나비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한다. 그래, 역시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지. 죽어 선 안 된다. 죽어버리면 내가 굳이 이 고생까지 하면서 데려온 의미가 없다. 눈짓으로 희광이를 불렀다. 희광이는 내가 가리킨 곳에서 바닥을 뒤적거 리더니 녹슨 칼을 하나 가져왔다. 제대로 날이 서있긴 한지 의심스러울 정 도로 녹슬어 있는 칼이었지만 어떻게든 써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나비를 발로 차서 뒤집었다. 그녀는 아직도 의식이 남아있긴 한 모 양이었다. 눈동자는 빛을 잃은 지 오래지만 눈꺼풀은 아직도 게슴츠레 열려 있는 걸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빛을 잃어 깊은 어둠을 머금은 눈동 자. 나는 내 심장이 다시 헐떡이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보고 있다간 아까처럼 제정신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지쳤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희광이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내 머릿속은 이미 빨리 일을 끝내고 이 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어서 이대로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희광이가 칼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그의 손이 너무 커서, 칼이 마치 바늘 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희광이는 나비 위에 걸터앉아 칼을 잡지 않은 손으 로 나비의 목을 쥐었다. 그녀는 문득 칼을 보더니 정신이 번쩍 들은 듯 눈 을 크게 떴다. 그녀가 본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 머리 위로, 정확히는 눈 위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칼날이었다. 푸욱, 그리고 뭔가가 터져서 액체가 흐르는 소리. “학, 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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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마냥 몸을 움찔거렸다. 입을 벌려 봐도 소리를 내기는커녕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고작이다. 온몸을 짓눌려서 발버둥 치지도 못한다. 나는 그 무자비한 광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용기는 없어서, 희광이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가끔씩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비위가 상할 정도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희광이는 나비에게 쑤셔 박았던 칼을 거칠게 빼냈다. 직접 본 건 아니고, 소리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았다. 뚝, 뚝, 물소리인지 핏방울 소리인지 구별 이 안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 사이로 나비의 숨소리가 낮게 깔린다. 그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고, 또 자극적이었다. 소 리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 갑자기, 옆을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 새파랗게 질려있는 얼굴을 또 보고 싶다. 견딜 수 없이 강한 충동이 든다. 조금만, 조금만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내 충동을 걷 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옆으로 흘깃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나비와 눈을 마주치 자마자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비는 처음부터 내 쪽을 보고 있었나보다. 아직 성한 푸른 눈동자가 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눈빛. 그 눈빛은 내 마음 속을 가장 깊은 곳부터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 푸욱, 그 하나 남은 눈에 칼이 내리꽂힌다. 나는 놀라 바로 고개를 돌렸다. 고깃덩이를 쑤시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도 가까운 데서 그런 소리가 들리니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희광이는 나비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미 그녀는 실신 하기라도 한 건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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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희광이는 한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누르고, 한손으로 그녀의 목에 칼을 쑤셨다. 칼날이 녹슬고 무뎌져서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는지 희광이는 몇 번이나 칼을 내려찍고 쑤시고 빼고 또 내려찍고 쑤시고 빼고를 반복했다. 그쯤 되니 그녀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숨이 붙 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죽었겠지만, 그녀는 나비, 그것도 보통 나 비들과는 급이 다른 나비니까. 정말이지 경이로움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렇 게까지 거머리들에게 생명을 빨려놓고도 아직도 빨릴 것이 남아있다니. 왜 그렇게 다들 이 나비를 손에 넣으려고 안달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에게는 이 나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 나비에게 마을사람들 모 두의 목숨이 달려있다. 나는 피로 배가 불룩해진 거머리 한 마리를 그녀의 목에 난 상처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거머리 때문에 쉽게 상처를 회복할 순 없을 것이다. 눈은 회복되든지 말든지 별 상관없지만, 목 은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거나 자신의 위치를 알릴 가능성이 있 기에 이런 조치를 취해야했다.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되었다. 이제 이 나비를 다른 곳에 숨겨놓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일단 나는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나비를 숨기는 건 내가 직접 할 일도 아닌데다가,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쾌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이 대충 끝났다고 생각 하자마자 바로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희광이도 곧 내 의도를 알아채고 내 뒤를 따라 걸어왔다. 여기서의 일은 이 정도면 됐다. 그렇다면 이젠 바깥의 일을 처리해야할 때다. 그 우륜이란 놈과, 옆에 같이 있던 여자, 후환이 생기기 전에 둘을 말 끔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판 남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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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은 그런 말을 하면서 나에게 욕을 퍼부었었지. 아직도 그, 화내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생생하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녀석의 말엔 휘둘리지 않을 거다. 나는 송장나비 같은 것과는 다르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런 파렴치 한 인종은 되지 않을 것이다. 긴 통로를 지나, 마침내 나가는 문이 보인다. 몸은 벌써 상당히 지쳐있었 지만 나는 애써 힘을 냈다. 힘을 내어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들리는 온갖 목소리들을 뿌리치며, 나는 문을 힘껏 젖혔다. ‘난,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야.’ 바깥 공기, 산들바람이 근심을 날려 지운다. 저 멀리 마을이 내려다보인 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마을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절대로, 송장나비, 당신처럼은 되지 않을 테니….’

흔들흔들, 가라앉는다. 나는 물속과도 같은 어둠 속에 있다. 너무도 익숙한 느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도 뻔히 알고 있 기에, 나는 조용히 다음 일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주위가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암흑으로 둘러 쌓여있던 시야에 검은색이 차오른다. 검은색으로 불타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아, 뜨겁고, 숨이 막힌다. 괴롭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푸른 나비 날개, 그래, 이제 와서 그게 누군지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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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누군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 소녀의 눈물방울이 내 뺨에 떨어지고 있었다. 슬피 울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화를 내야 할까, 달래 줘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으음….” 눈을 떠보니,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제길, 또 기절했나.”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왠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일으킨 몸이 다시 픽 쓰러지기 전에 몸을 옆에 있는 벽에 기댔다. 상황파악은 금방 됐다.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붙잡혀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 하면 뭘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딱히 별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손이 묶여서 힘이 잘 들어 가지도 않는데다가, 놈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진 몰라도 굉장히 몸이 나른하다. 깨어난 직후에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심각하게 나 른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냥 마음을 비웠다. 몸이 나른한 탓인지 다 귀찮게 느껴졌다. 난 대 체 어쩌다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람.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등이 차갑다. 흙냄새도 난다. 그래도 누워있으니 편한 건 사실이다. 참 속편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 며칠간 내가 겪은 일을 생 각해보면 쉽게 그런 소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긴 시간 동안 비행기와 버 스를 타고 기껏 고향에 돌아왔더니, 나비 날개 달린 미친년한테 시달리다가 호랑이도 때려눕힐 덩치를 가진 거미한테 공격당하고, 그 거미의 독에 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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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웠다가, 자기가 기자라는 수상한 인간에게 낚여서 수상한 마을에 왔더니 총을 맞고 기절하질 않나,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또 싸우다가 잔뜩 얻어 맞고 또 기절하지 않나. 이러고도 피곤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지.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그 나비라는 년 탓이다. 애초에 그 녀석만 아니 었으면 이런 일엔 휘말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녀석을…. 아니, 아니다. 몇 번이고 생각해봤지만, 그때 이연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내 과거를 쫓는 이상 언젠가는 만나게 됐었겠지. 그렇 게 따져보면 이연을 만났던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참 얄궂은 일이다. 뭐, 그렇다고 마냥 이연 그 녀석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그 년이 여러 모로 맘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워하고 모른 척하기에도 찝찝한 구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이런 위험한 일에 뛰어든 것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나비 새끼가 흔히 말하는 ‘나쁜 놈’이었다면, 난 그 녀석이 나에게 도움이 되든 말든 신경을 껐을 것이다. 그런데 이연 그 녀석은…. 솔직히 말해, 착하긴 하다. 어떤 상대에 대해 말 할 때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대충 넘어가려는 의미로 말하는 ‘착하다’가 아니 다. 정말로, 그렇게 멍청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악의가 없는 녀석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아무런 악의가 없다는 사실이 날 더 곤란하게 만들고 짜증 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런 녀석을 모른 척했다가 안 좋 은 결말이라도 나면 평생 동안 찝찝한 기분에 시달리게 될 것이리라. 하여 간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안 되는 년이다. 그건 그렇고 이 마을은 대체 어떻게 된 마을인 걸까. 이 마을은 이상하다. 딱 집어 말하기는 뭐하지만, 뭐라고나 할까, 이 마을은 공기부터가 불쾌하 다. 정말이지 여러 가지가 의문투성이다. 집단으로 사람을 습격하질 않나, 아직도 양반 흉내내는 미친놈이 있질 않나, 몸속에 거머리를 잔뜩 넣고 다 니는 거구가 있질 않나. 애초에, 그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연을 납치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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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뭘까. 어쩌면 그냥 미친놈들이라서 이연을 납치해갈 생각을 할 수 있 었는지도 모르겠다만…. 솔직히 이 마을에서 정상인은 마을 변두리의 그 노 부부와 요진이라고 했던 여자 그 둘뿐인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요진 그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와 진짜로 몸을 섞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요섭 그 녀석한테는 친동생이기 까지한데, 그렇다면 아마도 요섭에게 죽임 당하진 않았을 테지. 물론 이건 그 요섭이란 놈이 그나마 상식적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내린 결론이지만. 그런데 요섭 그 녀석이 정말로 상식적인 인간인가 하면…. 음, 글쎄, 일단 요즘 같은 시대에 양반 흉내나 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상식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각되는데. 아, 계속 누워있었더니 슬슬 졸음이 밀려온다. 일단 지금은 아무 것도 하 기 싫다. 그냥 잠이나 자고 싶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관뒀다. 지금 상황에 서 이것저것 생각해봤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봤자 상황을 정리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한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 을 감아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올 놈들이라면, 뻔하 다. 아마도 마을 놈들이겠지. ‘아, 씨, 그냥 자고 싶다니까 진짜….’ 짜증난다. 졸릴 때 건드리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도 드물다. 좀만 더 몸에 기운이 있었다면 바로 욕을 날려 줬을 텐데. 물론 놈들이 내 기분을 생각해줄 리는 만무했다. 끼이익. 내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 벌어진 문틈으로, 짙푸른 새벽녘 하늘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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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빛으로 세상이 푸르스름하다. 아직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이건만 이 산골 마을은 오늘따 라 이상하게 분주했다. 벌써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 근처의 공터는 일찍 잠이 깬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구경거리라도 있는 양 공터로 몰려든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엔 겁먹 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사람도 있었고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을 한 사람도 있 는 등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그럼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있었단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곳에는 손이 묶인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 는, 안경을 쓴 청년이 한 명 있었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우륜이었다. 우 륜은 몸에 기운이 전혀 없는 사람치고는 꽤 성질머리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우륜은 그 사람들이 자신을 마치 괴물 보듯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몇몇 사람들은 우륜이 좀 크게 움직이기만 해도 겁먹고 움찔 놀라기를 반복 했으니 우륜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행동들에 기분이 언짢아진 우륜이 째려보기라도 하면, 또 몇몇 사람들은 도망자 놈의 자식 주 제에 눈을 부라린다고 욕을 해댔다. 우륜 입장에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냈다. 그 길로 헛기침을 하며 걸어 오는, 새하얀 선비 옷을 입은 남성이 한 명. 저런 시대착오적인 옷을 입고 있는 이 마을 인간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딱 한 명밖에 없겠지. “요섭, 저 새끼….” 우륜은 그를 보자마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픈 충동 에 휩싸였다. 딱히 요섭이 우륜에게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거나 한 건 아니 었지만, 우륜에게는 요섭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 그 자체가 기분 나쁘게 느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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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과 요섭, 둘은 잠시 동안 서로의 눈을 노려보았다. 둘 중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치열한 기세싸움이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요섭이었다. 어차피 지금 우위에 있는 건 자신인데 이런 눈싸움 따위에 쓸데없이 열을 내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 모양 이었다. 그는 우륜의 앞으로 걸어가 내리까는 눈빛으로 우륜을 쳐다보았다. 곧 낫을 든 마을 사람 두 명이 다가와 우륜의 어깨를 눌렀다. 혹시라도 우륜이 날뛸까봐 미리 대비한 것이리라. 우륜이 만전의 상태였다면 손이 묶 여있어도 충분히 난장판을 벌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우륜은 그것만으로도 쉽게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몇 번 몸을 움직여보았지만, 지금 날뛰는 건 무 리라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약초를 진하게 썼는데 아직도 몸이 움직여지다니, 참 지독한 놈 이로다.” “크, 아무 것도 모르는 샌님인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잡술이 능하시구만.” 우륜이 도발하자 잠시 요섭의 표정이 움찔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예민 한 놈이라고 우륜은 생각했다. 하지만 요섭은 곧 여유 있는 모습으로 표정 을 고치고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다니, 아직도 제 분수를 모르는 게구나. 뭐, 네놈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사치겠지만, 조금은 자기 처지를 이해하는 게 좋을 거야.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하, 웃기시네, 지금 나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거냐? 대체 어떤 멍청이가 거기에 넘어가겠냐? 어차피 이러든 저러든 살려줄 생각은 전혀 없는 주제에 이딴 장난질을 쳐? 콱 지옥에나 떨어지시지.” “그만 나불거리고 순순히 내 말에 대답이나 하는 게 좋을 텐데. 혹시 또 모르지, 네 정성에 감동 받아서 무사히 풀어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최소 한 죽는 방법 정도는 선택할 수 있게 해주겠네만?” “감동 좋아하시네, 미친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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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말을 하고선 요섭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내보였다. 우륜이 무슨 말을 하던 지금 우위에 있는 것은 그였고, 그렇기에 우륜의 사소한 반항은 귀여운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륜은 요섭이 웃는 모습에 왠지 기분이 확 나빠졌다. 어쩌면 그건 우륜의 신경이 날카로워져있다는 반 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자, 대답이나 해주시지. 네 놈과 같이 기어들어왔던 그 여자는 어디 있지?” 같이 들어왔던 여자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선경을 얘기하는 것이리라. 우륜은 잠시 생각했다. 선경의 행방을 자신에게 묻고 있다는 건, 역으로 말 해 아직 선경이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어제도 내가 말하지 않았냐?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역시 순순히 말할 생각 없나 보군.” “아니, 미친놈아, 정말 모른다고! 나한테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드 는 거야!!” “미친개한테는 예로부터 매가 답이렷다.” 우륜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선경이 우륜한테 딱히 행선지를 알린 것도 아니었고, 연락 수단을 쥐어준 것도 아니었으니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합류방 법조차 정말 대충이었던 계획이었으니 우륜이 선경의 행방을 모를 수밖에. 문제는 그 무책임한 계획으로 인해 지금 고통 받는 게 우륜이라는 점이 다. 이쯤 되니 우륜은 선경에게 괜한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자기 혼자 내뺄 계획이라 자신에게 위험한 일을 시킨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별로 이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 상대 가 선경이라 영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요섭이 갑자기 우륜에게 다가왔다. 우륜이 그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요섭은 주저 없이 우륜의 배를 발로 힘껏 찼다.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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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우륜은 몸에서 폐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머금을 수도 없다. 덕분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마,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 우륜은 바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숨이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륜 은 요섭을 노려보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하, 핫, 모른다고, 했을, 텐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또 한 번 발길질이 이어졌다. 우륜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힘겨워했지 만, 그뿐이었다. 우륜에겐 꺾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날, 아무리 조져봤자, 하, 그 여잔, 안온다고…. 허억….” 가차 없는 발길질. 그러나 우륜은 살려달라고 빌기는커녕 비명 한번 지르 지 않았다. 요섭이 아무리 발길질을 해봤자, 우륜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만 거칠게 내쉴 뿐 아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징그러운 놈, 아직도 버티다니….” “허억, 겨우, 그 정도냐, 하하, 이거 원, 아프기는커녕, 간지럽지도…. 큭.” 요섭이 신경질적으로 우륜을 찼다. 그럼에도 우륜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이젠 오히려 우륜이 더 태연해보일 지경이었다. 우륜은 그것만으로 도 모자라 심지어 요섭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이었다. 궁지에 몰린 건 우륜인데 더 초조해하고 있는 건 요섭이었다. 우륜의 반응을 보고 요섭은 더더욱 난폭하게 굴었지만 그럴 때마다 우륜은 그저 태연히 반응할 뿐이었다. 하다하다 못해 먼저 지친 쪽은 요섭이었다. 곧 요섭은 우륜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새끼, 말해, 말하라고!!” 우륜은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벌레 보듯이 하던 요섭이 그 난리를 치는 게 어쩐지 우스워서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우륜은 이 모든 게 가소롭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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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웃으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지랄.” 퍼억,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요섭은 우륜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바람에 안 경이 저 멀리 바닥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우륜은 바닥을 나뒹구는 자기 안경을 보며 저러다가 기스라도 나면 책임 질 거냐면서 투덜거렸다. 요섭은 우륜의 그 능청맞은 모습에 더 짜증이 났 는지 한 번 더 폭력을 행사하려다가, 이대로는 소용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 지 팔을 내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손짓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맘껏 나불거려 봐라. 이번엔 안 아프고 못 배길 테니.” 요섭은 이미 당초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최대한 정보를 뽑아 내겠다는 원래의 목적은 잊어버린 지 오래고, 어느 새 그의 목적은 우륜을 고통에 굴복시키는 걸로 바뀌어 있었다. 요섭의 명령으로 어딘가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들의 손 엔 표면이 빨래판처럼 울퉁불퉁한 기왓장이 여러 장 들려있었다. “아, 제길, 설마.” 그 기왓장을 보는 순간 우륜의 머릿속에 그 기왓장들이 어떻게 활용될 것 인지가 그려졌다. 우륜은 대놓고 표정에서 독기를 내뿜고 있는 요섭을 보며 참 악독한 새끼라는 감상을 속으로 내놓았다. 요섭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우륜에게 다가왔다. 우륜은 ‘설마’하는 마음 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허벅지와 무릎 위로 기왓장 이 하나씩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기막히게, 고전적이군.” “때로는 고전적인 게 가장 효과적인 것이지.” 기왓장이 하나씩 쌓이더니 어느새 그냥 들기조차 힘들 정도의 숫자가 되 었다. 우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요섭은 우륜이 억지로 고통을 참느라고 말을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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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우륜을 쳐다봤다가, 생각보다 우륜이 너 무 멀쩡해 보이자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지독한 새끼….” 오히려 초조한 표정이 된 건 우륜이 아니라 요섭이었다. 요섭은 금방이라 도 성을 낼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한쪽 발을 기왓장 위에 올렸다. 이래도 버텨볼 테냐, 그런 심정으로 요섭은 무게를 실어 기왓장을 눌러 밟았지만 우륜은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태연했다. 식은땀이나 좀 나고 몸을 가끔 움 찔거리는 것 정도일 뿐, 고통을 호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된 놈인가, 이 녀석한텐 고통이란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건가? 이 정도까지 무게를 올렸으면 아프고 말고를 떠나서 지금쯤 무 릎이 완전히 박살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다니…. 요섭 이 보기엔, 아니 그 누가 보기에도 우륜의 무반응은 이상하다 못해 괴이하 기 짝이 없었다. 우륜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건만 요섭은 우륜의 그런 모습 이 더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왠지 자신이 우륜에게 밀리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났다. 점점 초조해졌 다. 그 불안감과 초조함이 요섭의 이성을 점점 갉아먹었다. 이 녀석은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제길, 뭐하고 있나, 당장 더 기와를 올리지 않고!!” 요섭이 광분하여 소리쳤다. 광기에 가득 찬 요섭의 모습을 보고 놀란 사 람 몇이 허겁지겁 기와를 더 가져왔다. 우륜은 그 모습에 한심함을 느낀 듯 태연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무릎 위에 기와가 몇 장 늘어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 다. 우륜은 여전히 태연했고, 요섭은 점점 더 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요섭은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폭력을 행사하 는 방법이라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문제는 그 방법들 중 어느 것으로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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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에도 무덤덤하고 신체가 망가질 정도의 고통도 끄떡없 는 놈을, 대체 무슨 수단으로 굴복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 이젠 더 할 게 없나보지?” 우륜은 요섭이 초조해하는 모습이 내심 재밌었는지 대놓고 요섭을 비웃기 시작했다. 그 비웃음을 듣고 열이 올랐는지 요섭은 우륜의 멱살을 잡고 씩 씩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다. 지금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있는 건 요섭임이 분명한데, 그 요섭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건 오히려 우륜 쪽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포기하시지, 네가 아무리 용을 써봤자….” “이 개새끼가!!!!” 우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요섭이 우륜을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우륜의 무릎 위에 있던 기왓장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져 시끄러운 소리 를 냈다. 그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요섭은 우륜에게 다가가 무자비한 구 타를 시작했다. 쉴 새 없는 구타, 우륜은 말은커녕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요섭이 제풀에 지칠 때까지 구타는 계속 되었다. 그런 요섭의 행동엔 광 기가 어려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겁에 질리게 할 정도로. “큭, 때리는 것밖에 모르냐, 무식한 놈….” “이래도 버티다니, 네놈은 인간도 아니야, 이 괴물 같은 새끼.” “말할 건, 다, 하, 했을 텐데, 지가 난리 쳐놓고, 허억….” “기다려라, 이번에야말로 네 놈의 주둥이를 반드시 열어놓을 테니….” 이쯤 되니 우륜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기는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렇게 난리를 쳐대다니…. 그야말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요섭은 방침을 바꾸기로 했다. 육체적인 고문으로는 더 이상 성과를 기대 하기 힘들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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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륜을 어떻게 굴복시킬지에 관한 생각이. 요섭이 생각한 그 방법이란 건 사실 한참 전에 미리 생각해두었던 것이긴 했다. 단지, 너무 극단적인 방 법이라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느꼈기에 바로 실행하지 않은 것뿐. 그러나 지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륜을 짓밟으려는 데에 혈안이 된 요섭 에게는 그 방법이란 게 극단적이라고 한들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느새 요섭의 입가엔 악마적인 웃음이 떠올랐고, 요섭은 곧 사람들에게 지 시를 내렸다. 그즈음, 우륜은 요섭이 실소를 흘리는 걸 보곤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 다. 어제만 해도 요섭이 그냥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저 정도로 미친놈이라면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으니 더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게다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한 동안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을 것이고, 힘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로 고문을 당해버렸으면 부상이 심해서 회복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물론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해봤자 그건 우륜의 기준이고 실제로는 반나절 정 도겠지만 말이다. 그때, 요섭의 지시로 어딘가 사라졌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 아까 분명히 두 명이 가는 걸 봤는데, 지금은 세 명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새로 나타 난 한 명의 모습이 매우 익숙했다. 그, 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는 분명히…. “저 사람, 설마….” 우륜이 경악했다. 그 끌려오다시피 한 아가씨는 다름 아닌 요진이었다. 완 전히 낭패다. 우륜은 요진도 이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완전히 잊 고 있었던 것이다. “우륜, 씨….” 겁에 질린 목소리. 그녀의 눈망울에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우륜은 이가 갈 렸다. 하다하다 못해서 이젠 자기 동생까지 인질로 삼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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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아, 할 게 따로 있지!!” “자업자득이다.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네놈 탓이잖나.” 우륜이 항의해보았지만 요섭이 그 소릴 들어줄 리가 없었다. 요섭은 사람 들을 시켜 요진을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하고는 품에서 조그만 비수를 꺼내 들었다. 비수를 미리 준비해온 걸 보아하니, 요진을 인질로 잡을 생각을 진 작부터 하고 있었던 거겠지. “자, 이번엔 희광이도 데려오지 않았으니, 방해받을 일도 없겠구나. 하, 하하, 하…. 네놈,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 야! 큭, 하하, 아하하하….” 그제야 우륜은 요섭이 일부러 희광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 렸다. 그것은 요섭이 처음부터 이 인질극을 계획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희광이라면 분명 요섭이 요진을 해치지 못하게 저지하려 들었을 테니까. 광기로 뒤틀린 요섭의 웃음. 당황하고 있는 우륜을 보며 요섭은 카타르시 스라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마귀가 따로 없었다. 우륜, 그리고 좌 중, 모두가 요섭의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자, 대답해라! 아니면 뭐냐, 이 애가 어찌되든 네놈이랑은 상관없다는 건 가? 할 짓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려는 것이냐?! 그것 참 너무한 일이로군! 첫 남자라는 놈이 이렇게까지 소인배여서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요섭. 미쳤다, 정말로 미쳤다.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요섭이 요진을 붙잡아 일으키곤 그녀의 목을 팔로 감싸 거칠게 자기 쪽으 로 끌어들였다. 동시에, 그의 다른 쪽 손은 비수로 요진의 목덜미를 겨누었 다. 과도한 흥분 탓인지 비수를 쥔 요섭의 손은 계속 떨리고 있어서 금방이 라도 의도치 않게 요진의 목덜미를 찔러버릴 것 같아 보였다. 덕분에 우륜 도, 요진도, 이 사태를 지켜보는 마을사람들조차도 불안감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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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어서 뭐라도 해봐야하지 않겠나!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 대로 입 다물고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 네가 보는 앞에서, 이 손가락을 마디 하나씩 잘라도, 그래도 보고 있겠다고?! 네놈도 사내대장부라면, 지가 건드 린 여자 정도는 책임질 줄 알아야지, 안 그런가?! 당장 무릎이라도 꿇던지, 싹싹 빌던지, 뭐라도 해보란 말이다!!” 좌중들마저 요섭의 광기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질 쳤다. 요진은 얼굴색 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입술을 떨고 있었다. 애써 입술을 움직여보았지만 목이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기에 입으로는 아무런 소 리도 낼 수 없었다. 뱀이 목에 혀를 날름거리는 것 같은 섬뜩함에 오금이 저려오고,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살려달라 고 애원하듯, 우륜을 향한 그녀의 눈동자는 위태롭게 요동쳤다. 그런 요진을 보며 우륜은 요섭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요진이 저런 미친놈 에게 죽게 할 수는 없다, 무슨 비책이 없을까, 요진을 구해낼 비책이, 눈앞 에서 헛되이 죽게 놔두는 건 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뭔가 방법이 있었다면 사태가 이 정도까지 악화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 화를 시도하는 것도, 직접 몸으로 나서는 것도 불가능. 할 수 있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젠장, 선경 그 아줌마는 이런 때에 뭐하느라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냐고!’ 결국 우륜이 할 수 있는 건 애꿎은 선경을 욕하는 것 정도였다. 우륜에게 는 선경이 영웅처럼 나타나 사건을 해결해준다는 기적 외에는 기대볼만한 것이 없었으니까. 물론 일어날 리 없는 일을 기적이라 부른다는 것쯤은 우 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우륜은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화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두고만 볼 순 없 었다. 우선은 급한 대로 시간이라도 끌어보자, 그런 생각으로 우륜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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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둬! 제길, 다 말할 테니!” “오, 이제야 좀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그래. 자아, 빨리 말해보시지. 안 그러면 네놈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요섭의 목소리가 간사하기 짝이 없다. 우륜이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열심 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꽤나 재밌었던 모양이다. “그래, 말할 테니까 그 손 당장 놔!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면 재 미없을 줄 알아라!” “재미없을 줄 알라고? 하하, 재밌는 소리를 하는구나! 네놈이 지금 해봤자 무얼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는지! 어쩔 거냐! 내가 네 여자를 건들 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네가 원하는 건 정보잖아, 안 그래?! 굳이 다른 사람의 피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나에게서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다면 피를 보든 말든 맘대로 해, 그게 아니라면 요진 씨는 얌전히 놔주는 게 좋을 거다!” “재미있군. 지금 이 나에게 협박을 하는 겐가? 협박에는 협박으로 맞서겠 다, 그건가? 어이없도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끝까지 조금도 굽히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냐!” “뭐? 난 자존심 따위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 갑자기 요진의 목덜미로 달려드는 비수. 요섭은 비수를 요진의 목을 향해 밀어 넣었다. 요섭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모두들 깨달았다. 요진의 목에 아무런 상처도 출혈도 없었다는 것을. 잠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사실은 단순한 일인데도 말이다. 별 다 른 게 아니라, 비수가 요진의 목에 닿지 않도록 애초부터 요섭이 일부러 방 향을 틀어 찌른 것일 뿐. 한마디로 말해 연기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연기였지만 모두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 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절대 연기가 연기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진은 너무 놀라는 바람에 완전히 평정을 잃었는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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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가쁘게 가슴을 들썩이며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 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만 같았다. “솔직히 난 네놈의 말을 꼭 들어야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난 이 어리석 은 동생의 목을 찌르는 데 망설임이 없단 말이야. 하지만 네놈은 이 아이가 죽지 않기를 절실히 바라는 듯하니…. 그렇다면 그만한 성의를 보여도 모자 랄 판에 감히 협박을 해? 웃기는군, 네놈은 여전히 자기 분수를 잘 모르는 듯하구나! 하하하, 가소롭기도 하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요섭밖에 없었다. 그는 요진이 어찌 되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륜은 결국 폭발했다. 그 꼬락 서니를 보고 나니 도저히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시발, 뭘 어쩌라는 건데 이 미친 새끼야!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이면 말을 말던가! 지랄도 정도껏 해야 지랄이지 뭔 시답잖은 개소리를 하 고 앉았어?!” “하! 그러신가? 그럼 얘가 어찌 되어도 자긴 신경 끄고 맘 편히 있겠다, 그 말인가!” “뒤지고 싶으면 너 꼴리는 대로 한번 해보던가! 백정만도 못한 빌어먹을 염병할 새끼,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아무리 그래봤자 네놈은 나에게 손끝하나 댈 수 없을 것이야. 곧 내 손 에 죽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좋아, 네놈이 원 하는 대로 피를 보게 해주지, 네놈이 원하는 대로 말이다!!” 요섭이 광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비수를 든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 에는 제대로 요진의 목을 겨눈 채로 날아든다. 아아, 끝이다. 정말로 이렇게 피를 보고야 마는 건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단념한 그때…. “그 유치한 짓 당장 그만 두지 그래? 너부터 피를 보는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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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진지함이라고는 1그램도 없는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경 씨…?!”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절체절명의 순간 담배연기와 함께 멋지게 등장 한 그녀, 아무리 우륜이라도 그때만큼은 선경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네놈은 분명, 이 녀석과 같이 다니던 그 여자임에 틀림없으렷다.” “이야, 또 만났네? 다시는 만날 일 없었으면 했는데, 이거 참….” 선경은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고 재를 털어냈다. 그야말로 여유가 넘치 는 모습이었다. 옷 여기저기 묻어있는 흙먼지와 몸 곳곳에 남아있는 핏자국에 도 불구하고 말이다. 선경은 문득 피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 들어간 걸 깨 닫고는, 담배를 바닥에 떨궈 발로 비벼 끄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꽤나 큰일을 저지른 모양 이네. 꼬맹이한테는 칼 같이 위험한 물건을 쥐게 하면 안 되는데 말이야.” 혼자 중얼거린 거라곤 해도 그건 분명 요섭을 향해 한 말이었다. 졸지에 애 취급을 받은 요섭은 어이가 없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자기 눈앞에서 선경이 뻔뻔하게 우륜에게 다가가고 있는데도 제지 하기는커녕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선경은 우륜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우륜의 상태를 본 선경은 사뭇 정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륜의 바지가, 특히 허벅지와 무릎 부분이 온통 피로 시뻘겋게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안쪽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으, 이건 좀 심한데.” “선경 씨, 여긴 어떻게….” “이렇게 난리판인데 그걸 못 찾겠어? 어쨌든 자세한 건 나중에, 지금은 빠져나가는 데 집중하자.” “아니 근데, 빠져나가는 건 또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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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륜은 말을 제대로 끝마치고 싶었지만 예기치 못한 방해로 인해 미처 그 러지 못하였다. 요섭 때문이었다, 그는 우륜과 선경이 둘이서 속닥거리는 게 영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빠져나가기는 무슨! 적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고도 염치없게 살아나갈 기대를 한단 말이냐! 뭐, 됐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더 이상 시간낭비 할 필요도 없으니, 여봐라! 당장 저놈들을 죽여 버려라, 어서 당장!!” 급작스런 상황 전개를 따라가지 못해 얼이 나가 있던 좌중들이 요섭의 호 령을 듣곤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곧, 좌중에서 무기를 든 사람들이 한 명씩 나와 우륜과 선경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우륜은 슬슬 걱정이 들 기 시작했다. 허나 선경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이봐요, 설마 아무 것도 준비 안하고 온 건 아니겠죠.” “어휴, 언제까지 날 무책임한 인간 취급할 셈이야? 걱정 붙들어 매고 있 으라고.” 만사 오케이라는 의미로 선경이 엄지를 치켜 올려주었지만 우륜은 여전히 선경이 못 미덥게 느껴졌다. 그리고 선경이 여유를 부리는 그 와중에도 마 을 사람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고….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 야 하나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우륜은, 흙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 고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우륜이 발견한 그것은 벌레, 아니 곤충이었다. 갈색을 띤 반질반질한 몸에 길쭉한 뒷다리 한 쌍. 그 곤충의 이름은 너무도 뻔했지만 우륜은 섣불리 그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 곤충은 본래 지금 계절엔 잘 보이지 않을 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후두둑 소리를 내며, 그 조그맣고 수많은 것들이 튀어 올랐다. 흙바 닥에서 잎사귀에서 나뭇가지에서, 여기저기서 튀어 오른 그것들은 사람들의 귓가에 마구잡이로 달라붙어,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귀뚜라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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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벌레를 다루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잊고 있었지만, 분명 희민은 선경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당신도 충방사니까요’라고. 모두가 선경에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공터는 금세 난장판 이 되었다. 그 소음들 사이로 선경이 달렸다. 요섭이 있는 쪽으로. 그 즈음 요섭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귀뚜라미의 영거리 소음 공세에 시달 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누가 자신한테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아 챘을 땐, 이미 주먹이 자신의 명치로 날아드는 중이었고…. “커헉…!” 두꺼운 송곳을 명치에 쑤셔 박는 느낌. 어찌나 주먹이 매웠던지 요섭은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휘청거렸다. 감당하기 힘든 타격이었는지 아픔이 느껴지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 다. 요섭은 가슴을 부여잡고 생각했다. 사람의, 그것도 여자의 맨주먹이 이 렇게 미친 듯이 아플 수가 있는 건가! 요섭은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고 악에 받친 표정으로 선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선경이 사실은 맨 주먹이 아니었단 사실을! 그녀의 주먹엔 반짝이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 악으로 버티고 있는 요섭을 보며 선경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 다. 그러더니 이번엔 요섭의 배에 펀치를 먹여주었다! 요섭은 더 이상 버텨 낼 재간이 없었고 그대로 차가운 흙바닥을 구르게 되고 말았다. 요섭을 좀 손봐준 선경은 매우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다시 우 륜에게로 돌아왔다. 요섭의 옆에서 바보처럼 정신이 나가 있던 요진을 데려 온 건 덤이었다. 선경은 우륜에게 돌아오면서 주먹을 풀고 손을 털었다. 그 러자 손에서 뭔가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그 반짝이는 건 다름 아 닌 열쇠였다! 그건 즉, 주먹을 쥘 때 열쇠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살상력을 높이는 짓을 저질렀다는 소리다! “자, 이제 슬슬 집에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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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긴 했지만, 우륜은 선경을 보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자신은 어째서 계속 이런 이상한 사람들 과 엮이는지…. 참으로 통탄할 따름이었다. 선경은 우륜을 부축해주고 남는 손으로는 요진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마 을사람들은 귀뚜라미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에 여기서 도주하는 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큭…. 어딜, 어딜 가는 거냐! 당장 서지 못해!” 요섭은 남는 힘까지 모두 짜내서 소리치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그런 소리를 해봤자 추해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우륜은 말없이 선경을 재촉했다. 어차피 일어서지도 못하는 녀석인데 상 대해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경은 조금 생각이 달랐 던 것 같았다. 선경은 몸을 요섭이 있는 쪽으로 돌리고는 소리 질렀다. “경고 하나 하지 꼬맹아! 푸른 나비를 숨겨놓고 계속 뻗대는 건 네 자유 지만, 내일 밤까지 푸른 나비를 풀어주지 않으면 내가 알아낸 너네들의 더 러운 비밀이란 비밀을 모두 까발려주마! 알겠어?!” 그리고 덤으로 이놈도 깽판 치러 올 거라면서 우륜을 가리켰다. 우륜은 선경에게 자기가 무슨 깡패라도 되냐면서 항의하고 싶었지만 굳이 말로 꺼 내진 않았다. 괜히 말을 꺼내느니 입 다물고 빨리 여기서 탈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우륜은 그런 되도 않는 허세는 집어치우고 빨리 여기를 뜨자며 선경을 재촉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항상 예측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법이었다. “뭐, 비밀이라니, 잠깐만, 그럴 리가…. 네놈들, 설마…!” 의외로 선경의 호언장담이 먹혀든 모양인지 요섭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륜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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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헛소리마라! 네놈들, 네놈들이 그런 허세를 부려봤자 내가 두려워하 기라도 할 것 같으냐! 애초에 네놈들이 그걸 알아냈을 리가…!” “믿든가 말든가∼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알아낼 방법이야 지천에 널려있는데 뭐. 어차피 우리들은 갈 거니까, 그럼 열심히 머리 싸매 고 고민해봐, 내일 밤에 또 올게∼” 선경의 대답이 참 얄밉기 그지없다. 선경은 우륜과 요진을 데리고, 덤으로 바닥에 떨어진 우륜의 안경도 줍고선, 여유롭게 마을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네놈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순, 커헉….” 요섭은 선경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몸에 아직도 아까의 충격이 남아있는 탓이었다. 부하들을 부리려고 해도, 다들 자기 귀에 집요하게 달려드는 귀뚜라미와 씨름하고 있어서 요섭의 명령에 따라줄 여유 가 없어보였다. 선경을 필두로 한 3인방은 금세 요섭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 후, 귀뚜라미 울음소리 사이로 요섭의 욕지거리가 섞였다. 물론 그 욕지거리 를 받아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허억….” 요섭은 다시 쓰러지려하는 몸을 지탱하려고 손바닥으로 흙바닥을 짚었다. 식은땀에 오한이 들었다. 의식이 흐려진다. ‘도련님.’ 뇌리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건 분명 송장나비의 목소리였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 여자의 목소리가 떠오른 걸까. 대체 왜…. 그런 의문과 함께, 요섭의 의식은 어딘지 모를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비애담 – 수질의 녕, 上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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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terfly Story - vol.1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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