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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 간호사=상냥한 미소’라는 기사가 널리 소개돼 6.25 전쟁의 참화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있던 독일인 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꿔놓았다. ‘한국인 천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독일인이 없을 정도라는 찬사도 쏟아졌다. 초창기 한국 간호사들의 한달 봉급은 3,500마르크. 한국 에선 장관급 월급이라고 부러워했지만 적금붓고, 가족 생 활비 부치고 나면 수중에 달랑 50마르크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그래도 이 돈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나라의 발전에 소중하게 쓰인다고 생각해 피곤한 줄 모르고 살았다. 독일에서의 첫 3년은 그러나 혹독한 시집살이나 다름없었 다.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현장에 투입돼 알코올 묻힌 거즈 로 시체 닦는 일, 환자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양동이 들고 유리창 청소 등…. 대부분 밤이면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끌 어안고 엉엉 울었다. 이런일 하려고 이곳까지 왔나 하며 분 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 1966년 1월 31일 제 1진으로 도착한 128명의 한국간호사들

수퍼바이저의 눈은 그러나 매서웠다. 본국으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고 일해야 했다. 시간을 칼 같이 지켰 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면 눈치 하나로 재빨리 움직였 다. 동양인 여성을 기피하던 환자들도 나중엔 주사를 아 프지 않게 놓는다며 한국 간호사만 찾았다는 일화도 전해 진다. 서독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의 만남은 이미 한국 근대화 역사의 고전으로 꼽히다시피 됐다. 서로 손을 맞잡 고 쏟아낸 그 눈물이 결국은 한국의 오늘을 만든 성장동력 이 된 것이다.

▲ 1970년 한인간호사들의 언어교육을 위한 모임

조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민들레꽃이 된 서독파견 간호사 들. 현재 독일에 남아있는 간호사는 800여 명으로 추산된 다. 개 중에는 학문의 길로 접어들어 간호대학교수가 된 경 우도 있고, 또 유명 화가가 된 여성도 있다. 송현숙씨는 정 신병원에서 근무 중 그림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걸 보고는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된 분이다. 3년 의무계약기간이 끝나 재계약을 맺는 사례도 적지 않 았지만 상당수 서독파견 간호사들은 ‘디아스포라’의 길을 걷는다. 더 좋은 조건으로 유럽 각지로, 또 박화자 간호사 처럼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 1977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독일교회대회에서 환영받는 한국간호사들

서독파견 간호사들은 개인적으로 모두 ‘인간승리’의 주역 들이며 국가차원에서 보면 유능한 ‘홍보사절’이다. 이들의 헌신과 조국애가 없었다면 오늘날 ‘20-50’(국민소득 2만 달러와 인구 5천만명)의 코리아는 분명 존재하기 어려웠 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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