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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 관한 글쓰기 학생이여, 게임을 품어라 공공행정학부 2014300007 강준혁 21세기의 학생들에게 ‘게임’이라는 용어는 결코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특히나, 본격적으로 입시가 시작되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앞둔 중학생들이라면 더더욱 익숙하면서도 주변 어른 분 들의 잔소리에 꺼려지는 단어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친숙하게도 쉽게 불리는 이 단어는 비단 컴퓨터로 하는 온라인 게임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장치를 이용한 비디오 게임 등 다양 한 범주를 망라하고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21세기의 중학생들에게 게임은 독으로 다가왔습니다. 입시위주의 강압적 공 부에 학원을 다닐 시간은 늘어나고, 부족해지는 여가시간에 학생들이 선택한 놀이 수단은 오 로지 ‘게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게임에서 달성하지 못한 부분을 달성 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중독’이라는 덫에 빠져들고 맙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게임은 21세 기의 학생, 특히 입시준비중인 중학생들에게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저마다 게임을 접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만, 필자는 불행히 그다지 유쾌하지 못 한 상황 속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어린 나이부터 교우관계가 좋지 못했으며, 초등학 교 5학년이 되어서는 반 전체에 의한 집단따돌림과 함께 교사의 무관심과 왕따 사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현실을 잊고 싶었습니다. 왜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단지 뚱뚱하기 때문일까? 대구말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따돌림에 돌아온 답변은 ‘네가 잘못한 부분이 있는 거 아냐?’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 기를 바랐고, 남을 먼저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조용히 있었고, 그저 선생님과 의 수업이 즐거운 하나의 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망각에 대한 갈망. 그것이 필자가 컴퓨터를 접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컴퓨터에 집중을 하는 동안은 현실을 잊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시 말하면 현실감각을 잊게 되어 반복된 오락은 사람을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중학교에 올라오고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컴퓨터를 끊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 나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불안감, 뛰는 심장, 떨리는 손, 거의 중증에 가까운 증상들이 나 타났습니다. 반면, 불안 속에 있던 필자와 달리 필자의 부모님은 그 즈음에 유행하던 CF 광고 의 문구를 들려주시며 토닥여주셨습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컴퓨터를 놓을 수 없다면 공부를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말이야 쉽겠습니다. 물론 공부를 즐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정확히는 미친 것 과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한 번 쯤 미쳐볼 법도 있 다고 하겠습니다. 필자가 공부를 처음 잡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즉, 따돌림을 당하던 시점입니다. 어른이 되어 녀석들의 콧날을 꺾어버리고 성공해서 필자처럼 고통 받는 아이들이 없도록 사회를 바꾸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공부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부에 맛을 들이 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공부에 ‘중독’됐습니다. 처음엔 공부하던 게 없으니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필자의 머리는 결코 외우 는 것에 능하지 못했고, 항상 지쳐 쓰러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청킹(Chunking, 자신의 경험과 연관 지어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기술을 알게 되었고, 꾸준한 노력 끝에 청킹


에 관해선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은 문제를 꾸준히 깊게 풀라는 사람들의 충고와 달리 인내심이 부족했던 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정확성보다는 속도에 치중 한 ‘속독’을 연마했고, 그 역시도 성공했습니다. 절대로 공부에 왕도는 없으니 대다수의 사람 이 한 말이라도 믿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 특히, 젊을수록 그것을 명심하고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학생들이라면 누구라도 선망하는 꿈의 고등학교,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까지는 단순한 공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서와 노력, 입시 전략과 전술, 그리고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한 면접 기술이 시너지를 이루었기에 빛을 발하게 한 것 입니다. 필자는 모두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외고에 진학했고, 또 다시 새로운 공부의 역사 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공부에만 중독되었을까요? 대답은 ‘아니다’라고 하겠습니다. 필자는 심 지어 인생에 큰 갈림길이 될 대학 수학 능력 평가, 즉, ‘수능’이 있기 하루 전의 새벽에도 오 락을 하고 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게임에도 중독되어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후회 하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게임을 하면 서도 꾸준한 공부가 있었기에, 지금은 바라던 고등학교에 진학해 미래가 창창한 대학교로 입 학했습니다. 반면, 지금의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의 시간뿐입니다. 여가의 시간도 없고, 휴식의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한 학생들에게 게임이라는 수단은 무엇보다도 가장 쉽게, 시간 관리가 편하며, 심신을 쉬게 해줄 수 있는 놀이인 것입니다. 게임은 더 이상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여가생활이며, 게임은 인생입니다. 자신 이 게임 중독에서 벗어나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인생을 즐기면 서 그만큼 더더욱 전략적으로 공부를 한다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즐기는 가장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게임중독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학생들이 게임을 즐 기며 공부도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최고의 길입니다. 그러나 혹시나 게임중 독이 걱정된다면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생각해봅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 라!”


감상문 쓰기 활동 노력파 천직(天職) 공공행정학부 2014300007 강준혁 천직(天職). 사전적 의미로는 타고난 신분이나 직분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하늘이 부여한 듯이 누군가에게 딱 맞는 직업을 가리켜 천직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1세기의 사 람들은 변호사, 검사, 판사, 회계사 등등, 일명 ‘사(士)’가 들어간 직업이 아니면 천직을 얻지 못했다며 동정, 비웃음, 심지어 멸시까지도 한다. 이처럼 옛말에 직업은 귀천이 없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우리는 직업에 가치를 매기고 만다. 특히나, 그럴수록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의 삶 속에서 직업이라는 존재는 자존심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직업이라면 과연 어떨까? 영화, ‘굿′ 바이(원제 : 오쿠리비토)’에서 주인공, ‘다이고’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는 어느 오케스트라 의 첼리스트였지만 악단이 해체되며 ‘납관’이라는 일을 의도치 않게 시작한다. 그러나 그 일은 사회적으로 천대받기에 비밀리에 그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 미카가 그 사실 을 눈치 채고 그를 설득하다가 끝내는 그로부터 떠나기로 결심하고 만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녀는 다이고에게 마지막으로 그 일을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겠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미카의 질문은 비단 다이고를 향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어 떠한 일이 주어진다면 그 일을 죽을 때까지, 똑같은 애착으로 쭉 해나갈 수 있을까? 인간은 참 간사하게도 자신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여긴 일이라도 조금의 실수가 생기면 금세 토 라져버리고 손을 놓는 감정적 동물이다. 하물며 사회적 동물로서 세간의 안 좋은 인식이 다분 히 남아있는 직장을 가진다면 더더욱 그 일을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특히나 작 중의 다이고 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직장에 다닌다면, 아버지로서의 누군가는 일을 계속해 하기가 어려울 뿐 더러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정말 아이들의 시선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직장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까? 비록 영 화에 나오는 납관 업무 정도의 인식은 아니지만, 필자의 아버지는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문구 센터의 직원에 머물러 일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단호히 부정하겠 다. 필자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일하셨고, 지금 또한 그렇다. 누군가가 필자의 아버 지가 가지셨던 직업을 비웃었더라면 나는 도리어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을 무시했다며 역으로 비웃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을 믿어주는 필자를 믿고서 성실한 아버지의 특기 를 살려 사업을 시작하셨고, 끝내는 대통령상까지 수상하는 대성공을 보여주셨다. 이처럼,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존재, 아버지라는 분은 그 아무리 멸시당하고 비웃음당하는 곳에서 일하시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그것은 직업의 귀천을 떠나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로서 자식에 게 줄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고 그 선택을 책임과 함께 이어나가 노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필자의 아버지가 보여 준 것처럼 또 다른 아무개의 아버지는 성공한 인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에 나가 직장을 가지고 한 가정을 꾸린 누군가는 조금 더 자신의 직업을 믿어야 한다. 비록 주변 시선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의 아이들은 결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 한다는 것을 직관해야한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에게는 부모의 직업이 부끄럽지 않기에 우리는 ‘그 일을 죽을 때 까지 할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도 ‘응’이라고 확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칼럼·에세이 글쓰기 양쪽 날개를 가진 언론 공공행정학부 2014300007 강준혁 2014년,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 중에서도 한국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록될만한 최악의 사 고가 발생했다. ‘세월호’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침몰하면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냈고, 특 히 수많은 단원고 학생들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주도하에 구조작업이 펼쳐졌고, 국민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여러 보도국들이 끊임없이 발표하는 구조 현황들이 오가는 속에서 이상호 기자가 연합뉴스를 상대로 욕설을 하며 격노하는 장면이 실시간 방송을 통해 공개되었다.1) 그의 욕설은 도대체 누구를, 혹은 무엇에 대하여 날린 것인가? 그 해답은 그의 욕설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에 관해 깊은 고찰을 끝냈을 때 지금의 한국 언론이 바꿔야할 정신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른 설명에 앞서 현재 한국의 보도국들은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 중립을 지키고 객관적으로 보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뉴스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겨레는 좌익언론이며,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이하 조중동)는 우익언론이라는 사실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지 어 언론사들이 중립을 유지하고 보도한다는 입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로 한국의 언론계의 입장과 대중들의 의식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기사가 만연하고 있다. 이 러한 언론사들의 주관적 기사가 판을 치던 중에 발언한 이상호 기자의 욕설과 맞물려 한국 언 론과 대중인식의 괴리를 확인하고, 그것을 해소해야할 방법을 모색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도는 주관적인가, 객관적인가? 두 선택지 사이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주관적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정치적 파문이 일어 게시되는 자료사진이 언론사마다 그 느낌이 다르도록 게재되고 있다. 이에 대해 모 블로거는 한 화제의 인물이 각 언론사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공개되었는지 평가를 했다.2) 우익언론인 조선일보에선 눈빛에서 어떤 결기며 결의가 느껴지고, 동아일보에선 정치적 파문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를 찍어냈으며, 좌 익언론인 한겨레신문에선 서글퍼 보이고 숙연하게 참회하는 인상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상황에서도 언론사들이 중립에 기반을 두어 객관적 기사를 쓰고 있 다고 우긴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이에 따라서 일부 입장에선 진정한 의미에서 훌륭한 기사는 객관적인 관점보다는 오히려 주 관적인 관점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언론인, 청암 송건호 선생으로부터 대두된 이 입장은 사 람이 쓰는 글이기에 관점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게 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던 입장조차 주관적인 입장이 된다고 말한다.3) 단적인 예로,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강조한다면 사람들은 가해자를 두둔할 것이며,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강조한다면 피해자를 두둔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설프게 객관 1) 이선기, “이상호 기자 연합뉴스 어딨어?!...분노의 욕설”, 『시사포커스』, http://www.sisa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343, 2014. 04. 25. 2) 남녘하늘, “신문과 진실”, 남녘하늘(南天) 아래 작은 글동네, http://idussaba.blog.me/130175321601, 2013. 09. 01. 3) 송건호, 『송건호 전집 8 – 민주언론 민족언론 1』, 한길사, 2002, pp.109-118.


적 입지를 고수하여 어중간한 보도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관적 입장에서 전문적으로 깊게 파고드는 편이 진정으로 훌륭한 의미에서의 기사로 본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이 두각된다. 그렇다면 해외의 언론은 어떨까? 흔히 우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언론사로 미국의 CNN 을 꼽는다. 그러나 세계적인 이목과는 달리 CNN은 스스로 진보언론의 위치로 생각하고 있으 며, 이에 대항하는 보수언론으로 폭스뉴스가 나타나는 등 객관적 입지를 주장하는 우리나라의 언론사와는 판이한 모습을 보인다.4) 물론 그들의 방법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나, 우리 언론과 달리 한 입장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집중적 해석과 판단이 오히려 세계적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관성이 큰 의의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 언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떻게 되어야할까? 우선 보도의 객관적 입지가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어디까지나 글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 점을 요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글은 나올 수 없다. 우리가 사건과 사고를 판단하는 것은 대상의 어떠한 점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충분히 여러 평가의 잣대가 세워질 수 있다. 따 라서 우리는 객관성을 우기며 나오는 여러 기사들의 이중적 해석의 가능성을 고찰하고 신중하 게 해석해야만 한다. 단순히 언론을 맹신하고 해석하는 것은 진실을 가리고 보는 위험한 행위 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은 언론사에도 있다.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론사가 주관적인 입장 을 가지고 있다고 인지하고 있고, 이를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방향으로 정식 입장을 표명하고 더욱 그 입장에 따라 전문적으로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사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지닐 수 없기에 보도국의 정치적지지 성향을 밝혀 전문화로 나아가야 바람직하다. 물론 우리는 그 결과물을 마냥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공통적으로 서술된 내용을 통해 절대적 평가의 잣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두 시점의 차이를 확인하 여 더욱 세밀하고 전문성을 가진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다. 기억하자. 어느 기사가 가진 포괄적인 진실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으므로 객관적 인 기사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한 언론을 통한 전체적인 상황 판단 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다각적으로 전문화된 주관적 시선을 통해야만 이 세상을 더욱 객관 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4) 조영신, “진보언론과 보수언론”, 『미디어오늘』, https://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73, 2006. 11. 01.

공행07강준혁 통합본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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