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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제가 쓰고 싶은 글은 미디어문예창작 박한결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면, 그 후에 항상 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소설을 쓰 고 싶으냐’고.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한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 이 읽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저는 글을 좋아했고, 특히 좋아하는 몇몇 작품들이 선사하는 감동이 너무나도 좋았 습니다.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를 좋아했고 이금이의 ‘너도 하늘말나리야’라는 책 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학작품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물었을 때, 저는 충격적 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내 주위의 누구도 그 작품을 읽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작품들이 주는 감동들이 주위의 아무에게도 전 달되지 못한다니.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고 아쉬웠습니다. 소설엔 그 작품이 지닌 감동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생각 끝에 저는 결심했습니다. “내가 느꼈던 감동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다 시 전파할 수 있는 작가가 되자”고. ‘피를 마시는 새’와 ‘너도 하늘말나리야’에서 제가 느꼈던 아련한 감동을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게 정말로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장르문학을 쓰고 싶다고, 인기가 많은 글을 쓰고 싶다고 하면 실망하는 사람 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인기를 추구하고, 상업성을 추구 하고, 트렌드를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천박한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제 글을 읽고, 제가 표현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어디 있겠습니 까. 아무리 장대한 서사, 가슴을 아리는 감동,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글을 쓴다고 해 도,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는다면 한없이 허망할 뿐입니다. 독자가 없는 작품은 성립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말합니다. 대중문학을 쓰고 싶습니다. 인기 가 많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읽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것 이 제가 지향하는 문학이고, 제가 꿈꾸는 소설의 이상향입니다. 주위의 아무에게나 제 작품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어볼 때,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을 나누는 때가 오 길 꿈꿉니다.


[영화감상문]

잘 가시게, 다시 만나요. 문예창작학과 2013260612 박한결

1. 가장 혐오스러운,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장의사, 하면 그다지 인상이 좋지는 않은 게 보통이다. 죽은 시신을 만지고 다루는 직업인 데 껄끄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원래 첼로를 켜던 고상한 남자가 이런 직업을 가진 다니, 일반적으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인 다이고는 생활고 때문에 첼로를 그만두고 장의사의 길에 들어서버렸다. 이 길엔 정말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고소득, 무경험자 환영, 여행도우미’라는 문구에 낚여서 시 작한 장의사의 길, 일단 본인의 당혹스러움과 거부감부터 존재했다. 시신을 닦고, 관에 넣으 며, 심지어 사망한 지 몇 주일이 된 독거노인의 냄새나는 시체를 직접 손으로 옮기기까지 해 야 했다. 얼마나 역겹게 느껴졌을까. 거기다 외부의 부정적인 시선. 주위 지인들의 싸늘한 눈 초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부인마저 그 일을 반대하고 나섰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거북스 러운 장의사의 길. 그러나 이 길을 끝내 다이고는 택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장의사 특유의 ‘아름다움’때문이었다. 다이고는 여러 번에 걸친 납관을 통해 경 험했다. 죽은 이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숙연하게 존중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정중하게 맞아주 는 ‘문지기’의 역할을. 생과 사의 경계선에 놓인 문을 지키는 엄숙한 문지기, 그 아름다움을 다이고는 납관을 통해 느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다이고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주위 사람들과 심지어 장의사를 반대하던 그의 부인까지. 모두가 다이고의 납관을 보며 그 인식을 달리했다. 모두가 장의사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감동해 마지않았다. 장례가 끝난 후 다이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적 지 않았다. 시신의 화장을 담당하던 한 노인은, 관의 뚜껑을 닫기 직전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 가시 게, 다시 만나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헤어지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그렇게 아 쉬운 듯 중얼거리는 노인의 말은 음울하다기보다는 희망차다. 우린 ‘죽음’ 하면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암흑을 떠올리지만, 오히려 거기엔 아름다움과 희망, ‘다시 만남’이 있다. 어쩌면 그 밝음을 이 영화는 말하려 한 게 아닐까.

2. 그러나 아쉬운 점. 신선한 소재와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해 준 명품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남아있 다. 바로 영화의 구성이었다. 초, 중반부는 매우 좋았다. 코믹한 장면을 다수 넣어주면서도 간간히 들어가는 감동적인 씬 들. 그 웃음과 눈물의 적절한 교차에 정말 ‘편안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언급한 ‘편안하게’는 매우 중요하다. 관객에게 아무런 부담이나 거부감이 없이 영화의 재미를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은 소재의 참신함, 배우의 명연기, 화면의 화려함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영화가 대단하다 해도 그걸 보는 관객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영 화에 대한 평가는 훨씬 낮아질 테니 말이다. 관객을 편안하게 해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요령은 바로 ‘텐션’에 있다. 텐션tension이 란 바로 긴장, 즉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긴장의 정도를 뜻한다. 텐션이 높아지면 관객 은 긴장하게 되고, 텐션이 낮아지면 관객은 이완하게 된다. 이 텐션의 높낮이 조절이 주기적 으로 순환되어야 관객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지나치게 피로해지거나 지 나치게 지루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야만 관객은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후반부는 실망이었다. 조용하고 슬픈 장면만 계속되어서 높은 텐션만이 유지되고, 이완이 없어져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지쳐갔다. 목욕탕 집 아주머니의 죽음과 다이고의 아버지의 죽음 사이에, 약간이라도 긴장을 이완시켜주는 완충제가 있었다면 훨씬 피 로가 덜했을 텐데. 그런 점에서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느꼈다.


[영화감상문]

고독한 문지기를 직시하다. - 가장 혐오스러운,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문예창작학과 2013260612 박한결

장의사, 하면 그다지 인상이 좋지는 않은 게 보통이다. 죽은 시신을 만지고 다루는 직업인 데 껄끄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원래 첼로를 켜던 고상한 남자가 이런 직업을 가진 다니, 일반적으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놓이게 된 남자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다이고이다. 생활고 때문에 첼로를 그만두고 걷게 된 장의사의 길. 이 길엔 정말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일단 본인의 당혹스러움과 거부감부터 존재했다. 시신을 닦고, 관에 넣으며, 심지어 사망한 지 몇 주일이 된 독거노인의 냄새나는 시체를 직접 손으로 옮기기까지 해야 했다. 얼마나 역겹게 느껴졌을까. 거기다 외부의 부정적인 시선. 주위 지인들의 싸늘한 눈초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부인마저 그 일을 반대하고 나섰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거북스러운 장의사의 길. 그러나 이 길을 끝내 다이고는 택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장의사 특유의 ‘아름다움’때문이었다. 다이고는 여러 번에 걸친 납관을 통해 경 험했다. 죽은 이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숙연하게 존중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정중하게 맞아주 는 ‘문지기’의 역할을. 생과 사의 경계선에 놓인 문을 지키는 엄숙한 문지기, 그 아름다움을 다이고는 납관을 통해 느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다이고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주위 사람 들과 심지어 장의사를 반대하던 그의 부인까지. 모두가 다이고의 납관을 보며 그 인식을 달리 했다. 모두가 장의사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감동해 마지않았다. 장례가 끝난 후 다이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았다. 문지기는 고독하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그의 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누구든 한 번쯤 지나가야 할 문을 지키는 듬직한 지 킴이이기에. 그렇기에 그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문을 지킨다. 그 고독함과 묵묵함을, 그리고 그에 내포된 아름다움을 직시하라, 그것이 다이고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인 것이다.


[칼럼]

고상함과 통속의 상호비존중 미디어문예창작학과 2013260612 박한결

국어시간에 나오는 소설을 배우며, 중 고등학생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이런 건 교수들 같은 사람들끼리만 멋대로 의미 부여하며 좋아하는 거지 뭐. 이런 걸 뭐하러 배워?” 한편, 유 명 웹툰을 감상한 어떤 늙은 소설가는 생각한다. “식상하고 천박하군. 이런 쓰레기를 대체 왜 좋아하는 거야?”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는 ‘리그’는 존재하나, 그 리그에 참여하는 자나 실질적으로 리그에 변수를 끼치는 사람이 매우 소수임을 의미한다. 어떤 경쟁에서 다른 이들에 비해 ‘독보적으로 뛰어난’ 몇 명의 사람들이 서로 용호상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 도 하지만, 오히려 ‘리그 자체’가 극소수의 사람들끼리의 경쟁이 될 때를 이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십여 가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만 사는 농촌에서 치러지는 노래경연대회 같은 걸 생각하 면 이해가 쉽다. 소설이나 시 같은 순수문학과 웹툰, 장르문학과 같은 대중적인 컨텐츠의 시장은 각기 다르 다. 이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는 좀 특수하다. 시장이 ‘다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양극화’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 다. 대중적인 컨텐츠를 주로 소비하는 대중들은 순수문학을 ‘문학도들이나 빨아대는 고상한 것’이라고 여기고, 순수문학을 지지하는 문학도들은 대중적인 컨텐츠를 ‘무게감 없이 통속만 존재하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는 시장의 차이를 넘어서 상호 소비층에 대한 멸시, 즉 비존중에 가깝다. 이러한 비존중은 결국 양쪽의 시장이 서로의 극단적인 방향만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순수문 학은 가면 갈수록 통속성을 무시하고 상징성, 의미, 철학 등등만을 추구해 갔으며, 대중들이 이에 접근할 여지를 계속해서 차단해 왔다. 반면 대중적인 컨텐츠들은 심오한 상징이나 고찰 보다는 즉흥적인 재미, 팬덤, 인기에만 치중했고, 그로 인해 작품 자체의 의미는 옅어지고 자 극적이고 유흥적인 소재만 강조하게 되었다. 순수문학과 대중적인 컨텐츠, 둘 중 하나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작품 속에 내재된 의미와 겉으로 드러나는 흥미, 둘 모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방향만 극 단적으로 고집’하려 한다는 게 문제다. 그 ‘상호비존중’에 의해 상대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부 정하게 되고, 결국 양쪽에서 취할 수 있는 이점 중 하나를 철저하게 버리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양쪽 모두에게 커다란 손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양쪽 시장은 서로에 대한 비존중과 배타적 입장을 지양하고, 서로의 방향성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고려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대중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작품, 그것이 가장 이상적임은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읽기과제]

철학으로 시를, 시로 철학을. 미디어문예창작 2013260612 박한결 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질문을 하는 건 시인이고 답을 하는 건 철학가라고. 그렇다면 질문 과 답이 한 번에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그러한 호기심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철학과 시 읽기 의 괴로움’인 것이다. 책의 프롤로그에선 이런 말을 한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 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스처를 배워서 그것 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책은 시와 철학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와 철학을 흉 내 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 람들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들만의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들은 시인 과 철학자들을 보며 “아! 저들은 저런 옷을 입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우리들 내면의 감정 과 생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을 선생님이나 정신적 멘토로 생각하지 말 며, 그들의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선 안 되며, 이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배워나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책은 14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엔 시인과 시를 소개하며, 뒤엔 앞서 소개한 시 인과 시와 관련이 깊은 철학자를 소개한다. 그런데 14개의 챕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개념은 바로 ‘타자’이다. 김행숙과 바흐친을 소개한 챕터5에서, 채호기와 맥루한을 소개한 챕터6에서, 한용운과 바르트를 소개한 챕터8에서, 마지막으로 김종삼과 블랑쇼를 소개한 챕터11에서 무려 4번에 걸쳐 타자에 대해 언급한다. 4개의 챕터에 걸쳐 주체와 타자는 교차하기도 하고, 무아 경에 이르면서까지 소통을 시도하기도 하고, 침묵하기도 하고, 타자를 소유하기 위해 타자를 죽이기까지 한다. 이렇듯 4번이나, 그것도 서로 다른 형태로 타자에 대해 언급한 이 책에서, 항상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개념이 있다. 바로 타자와의 ‘대체 불가능성’과 ‘고유성’이다. 나와 타자는 서로 다르고, 고유하며, 대체가 불가능하다. 타자와 타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대체불 가능성과 고유성을 8명이나 되는 시인과 철학자가 언급한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현대 사회에 서 주체와 타자, 타자와 타자��� 경계가 모호해지려 함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의 제목은 왜 하필이면 철학과 시 읽기의 ‘괴로움’이라는 거북한 단어를 사용한 것일 까. 그에 대해 강신주 작가는 ‘자기만의 제스처’에 대해 언급한다. 남들처럼 소비하고 남들처 럼 행동하는 ‘공통된 제스처’가 아닌, 자기만의 사고와 정신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제스처. 그 자기만의 제스처로 돈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며, 그렇기에 책의 제목에 ‘괴로움’이 란 말을 넣었다고, 하지만 그 괴로움을 잘 이겨내면 우리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 라고 작가는 역설한다. 이는 어쩌면 책 본문에 여러 번 언급된 ‘타자’의 개념과도 관련이 깊 다. 타자와 구분되는 ‘고유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제스처’를 갖는 것, 이것 이야말로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문창박한결 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