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기본소득> #002호 201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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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친구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소설로만 보자면 학과 내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던 친구였다. 내 소설 을 읽어본 교수님도 ‘그래, 자넨 뭐 다른 거 해보는 게 낫겠네’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다른

거’ 해볼 마음은 들지 않아서 계속 소설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장과 같은 하숙집에 들어간 것도, 그에게 무언가 배워볼 마음으로, 배우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운이라도 받아볼 목적으로, 배낭 두 개 분 량의 이삿짐을 꾸린 것이었다.

그때 장과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 각각 전주와 원주에 계시는 부모님께 하숙비와 용돈을

받아 썼다. 매달 받는 돈은 40만 원쯤으로 엇비슷했다. 내 아버지는 말단공무원이었는데, 별다른 잔소 리 없이 매달 말일 꼬박꼬박 그 돈을 보내주었다. 장은, 중3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화장품 방문판매원 일을 시작한 어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다. 그분께서 매달 돈을 보내준다고 했다. 나는 그때

까지 한 번도 장의 어머니를 본 적 없었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대충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보내준 그 돈으로 소설을 썼다. 새 옷을 사거나 여행을 떠날 순 없었지만, 밥걱정이 없

었고 누구에게 돈을 꿀 일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오면 그뿐. 하루의 대부 간이 필요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4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됐을 때였다. 장의 어머니가 더 이상 돈을 보내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왜? 어머님이 어디 편찮으신 거야?” 내가 묻자 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냥 이제 싫으시대... 좀 지쳤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당장 해결할 돈이 필요했다. 나나 장이나

모아둔 돈은 없었다. 말단 공무원인 아버지께 두 사람 몫의 하숙비를 부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장

은 선배들에게 급하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는 눈치였고, 나 또한 동향 선배들에게 이런저런 일거 리를 부탁해 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고등학교 선배인 최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침 딱 좋은 자리가 나서. 강남에 있는 학원인데 파트타임 국어 강사를 구하나 봐. 월수금 나가고

90만 원.”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가서 월급을 받아 장에게 돈을 꿔주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장에게 그 일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큼 선배의 제안에 흔들렸다. 소설은 쓰고 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고,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느니 차라리 돈이라도 버는 게 어떨 까? 소설은 장 같은 사람이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아버지한테 용돈 받아서 생활하는 것도 미안하고... 나 는 제법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을 장에게도 말했다. “네가 괜찮으면 내가 그 자리로 갈게.”

장이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생각만 했다.

“월수금 근무니까 나머지 요일 소설 쓰면 되지, 뭐. 내가 너보단 더 잘 쓰니까, 난 그 정도만 써도

돼.”

나는 장이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장과 나의 운명을 바꿀 만한 일이라는 것을 둘 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장은 그다음 주부터 학

원에 출근하기 시작했는데, 계획한 것처럼 ‘나머지 요일’에 소설을 쓰진 못했다. 학원에서 중간고사다,

계간 &lt;기본소득&gt; 20019. 가을

분을 소설 생각으로, 소설 쓰는 일로 메우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소설을 쓰는 일은 일정한, 물리적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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