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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마당 지도교사: 이상훈, 남대섭, 한동욱

해시계 만들기 도장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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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마당 학습 목표

1.

한국 선조들의 뛰어난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깨닫고 배우며 이를 통해 자긍심을 고취한다.

탐구 주제 (ESSENTIAL QUESTIONS)

2.  

3.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베터리를 이용한 시계가 없던 시대에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알았는가?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여러 권의 책을 인쇄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사용되었는가?

교과 내용 (CONTENT)

해시계 만들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만들기

4.

학습능력 (SKILLS)

지금처럼 다양한 도구들이 없던 시대의 선조들의 과학기술을 직접 재현해 봄으로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대한 자긍심을 느낀다.

5.

학습평가 방법: (TYPE, DESCRIPTION, MATERIALS, TESTS AND RUBRIC)

실제로 학생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집으로 가져간다. (평가는 하지 않을 계획임)

6.

교수/학습 활동(INSTRUCTIONAL STRATEGIES AND ACTIVITIES) 1. 25명씩 두그룸으로 만들어 한그룹은 해시계만들기를 다른 그룹은 도장 만들기를 한다. 2. 25명을 다시 5명으로 나누어 5조로 테이블에 지정하여 작업도구를 공유한다 3. 해시계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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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두꺼운 종이 (프로젝트 보드), 막대기, 압정, 풀, 물감, 붓, 사인펜, 컴파스, 시계, 자, 나침반

순서: a. b. c. d. e. f. g. h. i.

두꺼운 종이를 정사각형으로 자른다 정사각형의 중심을 표시한다 컴파스를 이용하여 중심으로부터 원을 그린다 원 중심에 압정과 풀을 이용하여 막대기를 세운다 물감을 이용하여 예쁘게 꾸민다 야외로 들고 나가서 해가 잘 드는 곳에 놓고 나침반이 가르치는 북쪽을 표시한다 현재 막대기가 만드는 그늘의 위치를 종이에 눈금으로 표시한다 현재시간을 그 눈금 위에 표시한다 매 시간 간격으로 눈금을 표시하고 그 시간을 기입한다. 이 떄 미리 표시해둔 북쪽을 맞춘다 4. 활용/응용: 작은 손목 해 시계를 만들어 본다 5.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만들기 a. 재료: 고무 지우게, 조각 칼, 종이, 잉크, 인주 b. 순서: i. 지우게 위에 자신의 한글 이름을 양각으 로 그린다. 이름은

이 떄 mirror

image로 그려야 함 ii. 조각 칼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이름의 외각을 파낸다 31


iii. 잉크를 이용하여 종이 위에 찍어본다 iv. 지우게 뒷면에 자신의 이름을 그린다 v. 조각 칼을 이용하여 이번에는 이름을 파낸다 vi. 잉크를 이용하여 종이 위에 찍어본다 vii. 그 차이를 비교해 본다 c. 활용/응용: 한 그룹이 한글의 자음 모음을 조각하고 이를 이용하여 문장을 완성하다 (예: 우리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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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활동/학습 자료

해시계 (Ref. 1) 1) 조선시대에 사용한 해시계. 앙부일영이라고도 한다. 일구는 해시계를 뜻하는데, 햇빛에 의해 물체의 그림자가 생겼을 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각을 측정하는 장치이다. 앙부일구는 그림자 받는 면이 오목한 것, 수평면인 것, 연직으로 벽면을 이룬 것 등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일반적인 것은 수영면이 오목한 반구형이다. 1434 년(세종 16) 세종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만든 앙부일구는 중국에도 없었던 발명품으로 유명하다. 앙부일구는 보통 청동을 녹여 만들며 크기는 대개 구경이 30∼40 ㎝에 달한다. 해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뾰족한 막대도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영침이라 한다. 영침은 남쪽 밑에서 북극을 향하여 솟아올라 구면 중앙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영침 둘레에는 시각을 가리키는 시각선 눈금이 세로로 그려져 있으며, 그 시각이 12 지로 표시되었다. 이 세로 눈금과 직각으로 그어진 13 개 눈금을 절후선이라 하는데 이 13 줄의 양쪽 전위에 24 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24 절기에 따라 그림자가 어느 눈금을 따라 움직이는지를 관찰하여 어림으로 그날의 절기를 짐작한다. 앙부일구 영침의 위치는 그 관측지점의 위도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므로, 대개의 경우 윗면에 한양북극고도 또는 북극출지라 하여 그곳의 위도에 해당하는 각도가 씌여져 있다.

2) 1434 년에 만든 해시계 가운데 하나. 청동제로 검은 칠을 한 위에 은상감으로 글씨 등을 새겨넣어 훌륭한 예술품으로 꼽힌다. 세종은 오목해시계인 앙부일구 이외에 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는데, 특히 앙부일구는 일반 서민들이 보기 쉽도록 서울 혜정교와 종묘 앞에 크게 만들어 세워 한국 최초의 공중 시계로서도 의의를 가진다. 세종 때의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8 세기 전후 작품들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경기도 여주군의 영릉전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2 기의 앙부일구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물 제 845 호. 국립중앙박물관·영릉전시관 소장.

물시계 보루각의 자격루는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시보장치가 붙은 매우 정교한 물시계 였습니다. 원래의 자격루는 세종 16 년(1434)에 제작되었으나 이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덕수궁에 있는 유물은 중종 29 년(1534) 9 월 17 일에 시작하여 2 년 만인 중종 31 년(1536) 6 월 28 일에 제작이 완료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해 8 월 20 일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스며, 이 자격루 유물은 해방 전시되었을 당시만 해도 전(箭)과, 물통을 연결하는 관이 있었고 대석(臺石, 받침돌) 도 물통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격루 유물은 지금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 제작년대가 조금 떨어질 뿐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보기 드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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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성박물관에 있었는데 지금은 때의 물시계보다 유물로 평가되고


물시계와 해시계 (Ref 2) 선정취지 및 필요성 자격루와 앙부일구는 조선 초 세종대왕대 창제된 물시계와 해시계이다. 자격루는 물동이에 물이 차 올라오는 눈금을 읽어 시간을 측정하는 원시적인 물시계와는 차원이 다른 고도의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장치로 작동되고, 자동 시보장치를 갖춘 15 세기 당시 세계 최고의 시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부일구는 대부분의 해시계들이 평면형 적도시계인 것에 비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목한 반구형의 시반면을 갖춘 매우 독창적인 해시계이다. 이와 같이 우수하고 독창적인 우리의 과학문화를 널리 알리는데 이 보다 적합한 것이 없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및 상징물의 의미 자격루와 앙부일구가 제작되던 15 세기 전반 조선은 과학문화의 측면에서 두 가지 배경을 지닌다. 하나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건설된 것이다. 불교가 지배하던 고려사회와 왕실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일으킨 조선왕조는 건국의 당위성과 새로운 국가의 안정적인 제도의 정비와 정착을 당시 최우선 과제로 지녔다. 그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사업으로 표준시간 체제의 정비와 그것을 위한 정확한 시간의 측정이 요구되었다. 한편 고려 말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원나라와의 교류는 과거 810 세기 사이에 세계 최고수준으로까지 번성했던 아랍의 과학을 접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결국 중국에서 전해오던 전통 물시계의 기계장치 전통과 아랍의 물시계의 기계장치 기술이 15 세기 조선에서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은 15 세기 전반 세종대 과학기술 성과의 큰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하에 세종대왕은 독립된 국가의 위상과 왕정의 권위를 드높여, 안정된 국정운영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표준의 시간체제를 정비하게 된다. 그 사업이 자격루라는 물시계의 제작과 앙부일구라는 해시계의 제작으로 결과를 보았다. 자격루는 그야말로 고도의 복잡하고 정밀한 기계장치로 작동되며, 자동으로 징, 종,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자동물시계로 장영실이라는 천재 기술자에 의해서 제적되었다. 물론 현재 중요한 기계장치 부분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지만 자세한 관련 역사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충분히 복원이 가능하며, 그동안 학계에서 피나는 연구로 거의 복원완료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는 실정이다. 머지않아 과거 장영실이 제작했던 자격루의 복원이 이루어지면 세계의 학계가 놀랄 것이다. 오목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해시계이다. 보통의 해시계들은 시반이 평면이다. 따라서 그 정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앙부일구는 해의 운행과 궤적의 원리를 최대한 앙부일구의 구조에 반영해 제작한 과학적인 해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4 절기도 해 그림자만 보아서 파악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었다. 물론 이러한 구조의 앙부일구는 원래 원나라의 곽수경이 발명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제작되었다는 학계의 보고가 없으며 현재 남아있지도 않다. 결국 중국 곽수경이 처음 발명했으나 그 실용적 사용은 유독 조선에서만 이루어진 듯하다. 즉 앙부일구는 우리의 독특한 과학문화 속에서만 뿌리를 내린 것이다. 34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 자격루는 아랍의 기계식 물시계 전통과 중국의 수운 혼천의로 불리는 기계식 물시계의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물시계이다. 13 세기 초 AL-jAJARI 의 시계들과 중국 북송대 소송의 “수운혼천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 유물들은 남아있지 않으며, 역시 관련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노력으로 복원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의 구조와 원리를 더 발전시켜 제작한 우리의 자격루도 하루 빨리 복원해서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우리의 독창적인 오목 해시계에 분명하다. 중국 곽수경이 발명했으나, 중국에서는 제작된 적도 없다. 분명

앙부일구는

우리나라에서만

제작

되도

남아있는

해시계이다.

그런데

외국

선진국의

과학박물관에는 앙부일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중국 또는 일본의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우리의 독특한 앙부일구를 빨리 상징화해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기대효과 자격루의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지는데 국민적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의 과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의 것으로 되어있는 우리의 앙부일구를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화사업 및 비영리 분야에서의 활용방안 앙부일부는 크기가 작아 소규모로 제작하면 휴대할 수 있는 크기로 제작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앙부일구들은 다양한 크기와 형태들로 문화유산으로서만 아니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시계로 부활해도 충분하다고 본다. 특히 아름다운 구조와 외형을 지닌 휴대용 앙부일구를 관광용으로 제작한다면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기념풍이 될 것이다. 일부 사업체에서 제작을 하고는 있으나 홍보 부족으로 널리 보급되지 못함이 아쉽다. 아울러 자격루와 앙부일구는 천체(해)의 운행과 구조에 대한 원리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훌륭한 과학교육용 기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全相運, 1963 "李氏朝鮮의 時計製作 小考", 『鄕土서울』 17 남문현, 『한국의 물시계』(건국대학교 출판부, 1995) 문중양, “앙부일구; 조선시대의 민본정치를 상징하는 해시계”『(월간)NEWTON』 2003 년 11 월호 <문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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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3)

정확성을

자랑하는

조선시대

해시계

앙 부일구는 세종 16 년(1434 년)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제작한 우리 나라 최초의 해시계이다. ‘앙부’는

◆ 학습주제 앙부일구 모형을 만들고 시간을 측정하기

‘하늘을 바라보는 솥’을, ‘일구’는 ‘하늘의 그림자’를 뜻한다. 말 그대로 시간과 절기에 따라 다른 그림자의

◆ 학습내용

길이와 위치를 이용해 시간과 절기를 알 수 있다.

1. 해시계의 개발배경에 대해 얘기하기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12 지신의 동물 그림으로 시간을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앙부일구로 읽은 시간은 얼마나 정확할까? 답은 ‘현대의

시계만큼’이다.

구조는

2. 해시계의 원리에 대해서 얘기하기 3. 해시계(앙부일구) 모형 만들기 4. 나침반을 사용해서 계절과 시간 측정하기

단순하지만

앙부일구는 계절에 따른 태양 고도와 시간 변화를

◆ 준비물

정확히 표시한다. 각 지역에 따라 위도와 수평면을

나침반, 뜯어만드는세상 해시계(앙부일구)

맞춰 다르게 설계할 정도다. 그런데 앙부일구로 읽은 시간은 무슨 까닭인지 현대 시계와 다르다. 앙부일구 탓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서울이

아닌

동경을

표준시로 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손쉽게

만들

1. 조립순서에 따라서 하나씩 뜯어서 만듭니다. 2. 우드락을 불 가까이에 두면 위험합니다. 3. 무리한 힘을 가하면 파손될 수

쉽게 뜯어내 조립하는 앙부일구

앙부일구를

◆ 주의사항

있습니다.

있는

스콜라스의

‘뜯어만드는 세상’ 키트가 있다. 설명서의 순서에 따라 우드락을 뜯어내고, 표시선에 따라 접고 끼우자. 가위질과 풀칠이 필요 없어 어떤 장소에서든 쉽게 만들 수 있다. 재질만 우드락일 뿐이지 모양은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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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방법 1.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합니다. 2. 설명서를 따라서 순서대로 조립합니다. 3. 나침반으로 정북을 맞추어 시간을


앙부일구와 똑같다. 측정합니다. 실제 앙부일구를 정교하게 재현한 만큼 해시계로

4. 실제 시간과의 차이를 기록합니다.

사용할 수 있다. 모형 앙부일구를 가지고 밖에 나가서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내려놓자. 계절에 따라 반구에

◆ 참고사항

덮인 그림자의 크기가 달라지며, 시간에 따라 바늘의

뜯어만드는세상 앙부일구는 완벽한 구가

위치가

바뀐다.

모형은

서울을

기준으로

제작됐으며, 2 시간 간격으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발생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동경시를 따르기 때문에 실제 해시간과는 오차가 발생합니다.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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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주제 앙부일구 모형을 만들고 시간을 측정하기 ◆ 학습내용 1. 해시계의 개발배경에 대해 얘기하기 2. 해시계의 원리에 대해서 얘기하기 3. 해시계(앙부일구) 모형 만들기 4. 나침반을 사용해서 계절과 시간 측정하기 ◆ 준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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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 뜯어만드는세상 해시계(앙부일구) ◆ 주의사항 1. 조립순서에 따라서 하나씩 뜯어서 만듭니다. 2. 우드락을 불 가까이에 두면 위험합니다. 3. 무리한 힘을 가하면 파손될 수 있습니다. ◆ 실험방법 1.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합니다. 2. 설명서를 따라서 순서대로 조립합니다. 3. 나침반으로 정북을 맞추어 시간을 측정합니다. 4. 실제 시간과의 차이를 기록합니다. ◆ 참고사항 뜯어만드는세상 앙부일구는 완벽한 구가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발생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동경시를 따르기 때문에 실제 해시간과는 오차가 발생합니다.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도장 (Ref. 4)

일본의 성씨(姓氏)「가와무라(河村)」의 도장 도장(圖章)은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을 새겨 찍도록 된 도구이다. 공사(公私)의 문서에 찍어 그 책임과 권위를 증명하는 물건인데, 신장(信章), 인(印), 인장(印章)이라고도 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도장, 혹은 임금의 도장은 국새(國璽)라고 한다. 서예나 그림에, 자신의 작품임을 인증하기 위하여 찍는 도장은 낙관(落款)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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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의 역사 최초의 도장은 기원전 5000 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출현하였는데, 점토판을 이용하여 스탬프처럼 찍는 형태였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는 도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명칭

용도

용례(用例)

성명인(姓名印) [李小狼] 또는 [李小狼印]

개인의 이름을 표시하는 도장. 가장 일반적

표자인(表字印) [字矗昊] 또는 [矗昊]

개인의 字를 표시하는 도장

신첩인(臣妾印) [臣小明](남), [妾美櫻](여) 서간인(書簡印) [如佩信印] 총인(總印)

[大英伯明皇龍正之章]

회문인(迴文印) [徐永裕印]

신하, 비빈(妃嬪), 궁녀 등이 황제에게 문서를 올릴 때 사용한 도장 편지를 보낼 때 사용 이름 및 출신지를 표기한 도장 이름을 표기하되, 문자를 반시계 방향으로 배열한 것

한반도에 도장이 최초로 소개된 것은 기원전 2 세기 무렵으로 보인다. 부여의 역대 왕들이 '濊王之印'(예왕지인)이라는 옥새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도장

현재에는 필요에 따라 누구나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다. 재료는 주로 나무, 뿔이나 돌로 만든다. 도장 문화가 있는 나라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국새

국새의 명칭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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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새(國璽)(1999), KA0003693

국새의 명칭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印章)의 명칭은 새(璽), 보(寶), 어보(御寶), 어새(御璽), 옥새(玉璽), 국새(國璽)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새(璽), 보(寶)는 나라의 인장(印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보(御寶), 어새(御璽)는 시호, 존호 등을 새긴 왕실의 인장을 뜻하는 말이다. 옥새(玉璽)는 재질이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이름으로는 국새(國璽)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국새의 의미

국새는 국사(國事)에 사용되는 관인으로서 나라의 중요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국새는 국가 권위를 상징하며, 그 나라의 시대성과 국력,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국권의 상징인 국새가 가진 불가침의 권위와 신성성은 다소 퇴색하였으나, 오늘날에도 국새의 상징적 의미는 그대로 존재한다. 정부에서는 헌법개정공포문의 전문, 대통령이 임용하는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외교문서, 훈장증 등 국가 중요문서에 지금도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국새는 동양(한국, 일본 등)에서는 인장의 형태로, 서양(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압인의 형태로 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사용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유사하다. 국새의 변천

1894 년 갑오경장 후에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종식하여 이전의 대보(大寶)를 폐지하고, 1881 년~1882 년경에 제작한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와 ‘대조선대군주지보(大朝鮮大君主之寶)’등을 사용하였다. 1897 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국새로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등을 제작, 사용하였다.

‘황제지새(皇帝之璽)’, ‘시명지보(施明之寶)’,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듬해인 1949 년 5 월 새로운 국새가 마련되었는데, 사방 두치(약 6 ㎝)의 정방형 인면(印面)에 한자 전서(篆書)로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라 전각하였다. 1963 년 1 월에는 국새규정을 고쳐, 사방 7 ㎝의 정방형 인면(印面)에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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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년 2 월 1 일부터는 민족의 자존과 문화적 자긍심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국새규정을 전면 개정하여 사방 10.1cm 의 정방형 인면에 훈민정음체로 “대한민국” 넉자를 가로로 새겨 사용하였다. 또한, 제 4 대 국새는 새로운 국새 관련 사항을 반영하여 국새규정을 개정, 2008 년 2 월 22 일부터 사용하였다. 그러나, 2010 년 9 월 제 4 대 국새에 대한 경찰수사결과 국새를 전통적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허위로 밝혀져 국새로서의 권위와 위상이 손상됨에 따라 제 4 대 국새를 폐기하고 새로운 국새(제 5 대 국새)를 제작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11 년 9 월 30 일 국새 제작이 완료됨에 따라 국새규정을 개정하여 2011 년 10 월 25 일부터 제 5 대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국가의 인장(印章) 제조에 대한 통제기록으로는 '고려 18 대 의종(毅宗)(1146~1170)때 “인부랑(印符郞)” 이란 인부(印符)를 두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초기에 상서사(尙瑞司)가 설치되어 새보(璽寶)·부패(符牌)·절월(節鉞)을 전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총무처에서 관장하여 왔으며, 정부조직개편으로 1998 년 2 월 28 일부터는 행정자치부 의정국 의정과(현, 안전행정부 의정관실 의정담당관실)에서 국새와 함께 대통령직인, 국무총리직인을 관리하고 있다.

전통시대 국새의 기원과 역사 우리나라 관인사(官印史)에 관한 유물이나 기록 등 대부분의 자료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역사를 바로 고증해 체계적인 관인사(官印史)를 세우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남아 있는 몇몇 문헌들의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의 관인(官印)의 용도는 치민(治民)의 장(長)이 전신(傳信)의 표시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옛날 환웅(桓雄)이 아버지 환인(桓因)으로부터 받아가지고 왔다는 천부 3 인(天符三印 : 風伯, 雨師, 雲師)이 우리나라 역사상 나타난 최초의 국새라는 주장이 있고,'『증보문헌비고』「예고새인조(禮考璽印條)」에 '부여(夫餘) 예왕(濊王)이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국새의 사용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되는 국새는 고려·조선시대에는 국인(國印), 새보(璽寶)·대보(大寶)라 하여 왕의 인장이 국새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문서와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 계승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되었으며, 왕의 각종 행차시 그 위의(威儀)를 과시하기 위하여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하였다. 국새는 시대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외교문서(특히 대중국 관계)에 사용되는 국인(國印, 大寶로 통칭)과 국내용 보인(寶印)으로 대별된다. 1894 년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국인(國印)은 대부분 중국 역대왕조의 황제들에 의해 사여(賜與)되어 들어왔고, 기타의 보인(寶印)들은 국내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부여에서는 일찍부터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국인(國印)을 사용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중국과의 외교관계 문서에 국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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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1172 년(명종 2 년) 금나라에서 금인을 보낸 것을 비롯, 요·원·명나라 등에서도 여러 차례 고려왕의 인장을 만들어 보내왔다. 1370 년(공민왕 19 년)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에게 보낸 금인(金印)에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란 인문(印文)이 있었다. 1392 년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내려주도록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다가 1403 년(태종 3 년)에 성조(聖祖)에 의해 비로소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의 국인(國印)이 수여되었다. 이를 대보(大寶)라 하여 1636 년(인조 14 년)까지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보인(寶印)들이 제작, 사용되었는데, 교서·교지 등에 찍는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諭書)에 찍는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시험의 문서에 찍는 ‘과거지보(科擧之寶)’, 교린문서, 특히 대일본관계에 찍는 ‘소신지보(昭信之寶)’등이 있었고, 소신지보는 조선 후기에 ‘이덕보(以德寶)’로 고쳤다. 1636 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만들어준 국인(國印)을 공식 대보(大寶)로 사용하였으나, 숙종 때 명나라에서 준 옛 국인의 인문(印文)을 찾아 별도의 것을 모조하여 비장해 두고 왕위계승 의식 때만 사용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특수 목적의 보인(寶印)들이 사용되었는데, 서적을 반포·하사할 때 쓰는 ‘선사지기(宣賜之記)’, 서책의 발간에 사용하는 ‘동문지보(同文之寶)’, 왕이 지은 글에 찍는 ‘규장지보(奎章之寶)’, 각신(閣臣 : 규장각의 벼슬아치)의 교지에 쓰는 ‘준철지보(濬哲之寶)’, ‘명덕지보(明德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등이 있었다. 이러한 인장들은 모두 도승지의 책임하에 상서원 등에서 제작·보관·관리하였다. 금속활자술의 가치 (Ref.6)

BBC,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타임잡지 등의 세계의 유수 언론들은 금속활자인쇄술이 인간의 역사를 통 틀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이었다고 보도하였다. 한 예로, 미국의 유명 잡지사인 타임에서 발행한 '더 라이프 밀레니엄(The Life Millennium)'라는 책을 들 수로 있는데, 이 책에서는 지난 천년동안 세계를 변화시킨 100 건의 사건 중 금속활자인쇄 발명을 가장 위대한 발명으로 꼽았다. 이들 유명한 언론들의 글을 살펴보면, 금속활자인쇄술이 인간 문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영향력이 매우 컸으며 영향을 미친 분야가 다양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영향력을 알아보려면 먼저 금속활자인쇄술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세계사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서양역사에서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 형태를 살펴보자. 금속활자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목판인쇄술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출판업자들은 책의 각장을 목판에 하나씩 새겨야 했다. 이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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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한 권의 책만 출판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은 목판인쇄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출판업자들이 다른 책을 발행하려면, 수많은 목판을 다시 파내어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 값은 매우 비쌌고, 부자들과 학자들만이 책을 소유할 수 있었다. 반면에, 출판업자들이 금속활자 한 세트가 있으면 다양한 책을 한 번에 출판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양의 책을 낮은 가격으로 출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책을 사서 보게 되었고, 대중의 새로운 지식을 향한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면서 작가들은 자신의 새로운 생각과 지식을 대중에게 퍼트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종교 개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마틴 루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그 결과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 후에도 많은 작가들의 생각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으며 많은 변화와 혁명을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활자 인쇄술은 정보를 널리 대량으로 퍼지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금속활자인쇄술은 정보의 대중화를 가속화했으며,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계층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 있던 일반 대중들이 정보를 생성하고 퍼트려 나가데 참여하게 되었고 서양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여러 가지 역사사건들 즉, 르네상스, 종교개혁, 산업혁명, 시민혁명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또한 현대 문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서양 문명에 영향을 끼쳤던 금속활자인쇄술은 그 기술의 발상지인 우리나라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활자 인쇄술은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많이 쓰였지만,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정보를 공유하고 퍼뜨리고자 하는 뜻이 담긴 우리 선조들의 땀과 노력이 깃든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영토가 컸던 중국의 경우 목판인쇄술로 책을 찍어 내어도 전 중국에 판매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수익창출에는 무리가 없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목판인쇄술이 발명된 이래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더 많은 책을 찍어내고자 하는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 '직지심체요절'이다. 직지가 인쇄된 것은 1377 년으로 고려 말 시기였으며 인쇄된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절이었다. 직지가 인쇄된 절은 직지의 마지막 장에 있는 문단에서 밝힌바 대로 '흥덕사'였으나 그 위치가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청주시에서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을 하던 1980 년대에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에 '흥덕사'라는 절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유물을 연구한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의 발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흥덕사와 같은 청주의 작은 절에서 금속활자인쇄본이 나왔으므로, 아마 중앙관청이나 규모가 큰 절에서는 금속활자술을 통해서도 책을 찍어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같은 추측들을 뒷받침하는 것이 '증도가'가 1200 년대에 금속활자술로 인쇄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하지만 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확인할 바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금속활자인쇄술이 더욱 빛을 발하며 발전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를 들어서였다. 특히 조선 왕실은 그 가치를 인정하여서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주자소를 설치하고 다양한 주자 즉, 금속활자를 발명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1403 년에 만들어진 '계미자'이다. 이후에도 1420 년에는 '경자자', 1434 년에 '갑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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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436 년에 '병진자'가 만들어져서 이 금속활자들로 많은 책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발전을 통해서 책을 더욱 다양한 계층들이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금속활자인쇄술이 우리나라 역사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1446 년 한글을 반포한 이후인데, 이때 1447 년에는 한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고 아직까지 이 책이 전해지고 있다. 한글로 된 금속활자의 개발이 한글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활자 인쇄술은 이웃나라로도 번져 갔는데 중국과 일본에도 전해진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특히 일본에 금속활자술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기록에 명시화 되어 있는 바이다. 예를 들면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 장수들은 많은 우리나라의 유물을 약탁해 갔는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의 동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동활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해졌고, 그는 문록 2 년(1593)에 조선에서 가져간 동활자를 당시 일본 왕이었던 후양성천황(後陽成天皇)에게 바쳤다. 이에, 후양성천왕이 이를 사용하여 「고문효경(古文孝經)」을 칙명으로 간행했다는 기록이 「시경경기(時慶卿記)」에 수록되어 있다. 1597 년 8 월에는 목활자를 새로 만들어 권학문(勸學文)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발문에 목활자 인쇄법을 조선에서 전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자인쇄술이 유럽전역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위와 같은 사료들을 통해서 미루어 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우리나라와 서양의 활자인쇄술 발명 이후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식을 독점하던 계층이 무너지고 많은 이들에게 정보가 퍼져 나가는 구심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금속활자술의 가치는 이 때문에 빛이 나고 위대한 것이 되었다. 특히 현대 문명에 미친 그 영향력 면에 있어서 다른 어떤 발명보다도 원론적인 것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다. 고려시대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 이를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과 실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고려 문종연간(1047∼1083) 기원설, 숙종 7(1102)년 기원설, 예종 15(1120)년 기원설, 충열왕 23(1297)년 기원설, 고종 19(1232)년 이전 기원설 등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안된 것이어서 활자의 주조에 있어서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자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 획이 나타나지 않아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였다. 조판술에 있어서도 사주와 계선까지 고착된 인판틀에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활자를 무리하게 배열하였기 때문에 옆줄이 맞지 않고 위아래 글자끼리 획이 엇물리거나 각 줄에는 글자의 출입이 있었다. 기록과 실물을 통하여 우리나라 금속활자인쇄술의 초창기인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에 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증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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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자(證道歌字)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남명 법천선사가 선종의 진리를 한층 오묘하게 논설한 본서의 초간본은 1076 년 중국 절강성의 괄창이라는 곳에서 간행되었는데, 고려는 송(宋)의 초간본이 수입되자 이를 금속활자로 찍어내 유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금속활자도 금속활자 인쇄한 책도 전래되지 않아 누가·언제·어디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는지 또 누가·언제·어디에서 그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찍어냈는지에 관해서는 알 수 있는 근거가 없다. 활자의 크기는 1.0 1.0 ㎝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는데 다행히 번각본에 번각간행에 관한 기록이 있어 그시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번각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책끝에는 『이에 공장들을 모집하고 주자본을 중조하여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자 하는 바이다. 기해(1239)년 9 월 상순에 중서령 진양공 최이는 삼가 기록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번각본은 이미 금속활자(金屬活字)로 간행되었던 판본을 몽고군이 쳐들어와 강화도로 천도한 1239 년 9 월에 번각한 것이며, 그 원본이 되었던 금속활자본은 강화도로 천도하기 전인 고종 19(1232)년 이전에 개경에서 찍어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정예문」자 상 정예문자(詳定禮文字)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상정예문」은 고려 인종 때에 최윤의(崔允儀) 등을 비롯한 17 명의 문신들이 임금의 명에 따라 고금의 예의를 수집하고 이를 참고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50 권으로 편찬한 전례서였으나, 그 실물은 현존되지 않고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상정예문」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떨어져 나가 내용을 살피기 어려웠으므로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이 2 부를 보집하게 하여 1 부는 예관에, 다른 1 부는 자기의 집에 두었으나 후에 몽고군이 침입하여 강화로 천도할 때 예관에 있던 것은 가져오지 못하여 없어지고 최이의 가장본만 남게 되자 금속활자로 28 부를 간행하여 여러 관사에 분장시키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상정예문」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최이가 진양공에 책봉된 것이 고종 2l(1234)년이며 대작한 이규보가 고종 28(l241)년에 서거한 점으로 미루어 그 간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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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1234 년에서 1241 년 사이의 어느 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도 기록으로 전해질 뿐, 금속활자나 금속활자본이 전해지는 것이 없어 활자의 크기나 자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흥덕사」자 흥덕사자(興德寺字)는 청주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직지(直指)」와 「자비도량참법집해 (慈悲道場讖法集解)」 등을 찍어낸 금속활자이다. 활자의 크기는 활자의 크기는 대자 1.0 1.0 ㎝, 소자 1.0 0.5 ㎝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백운화상이 저술한 2 권 2 책본의 「직지」 금속활자본은 현재 첫째 장이 떨어져나간 총 38 장의 하권 1 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전래되고 있으며,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책끝에는 「선광칠년정사칠월일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 (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는 간기가 있어, 우왕 3(1377)년 7 월에 청주목 외곽에 있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흥덕사에서는 「자비도량참법집해」도 금속활자로 찍어낸 바 있었음이 그 번각본이 국내에서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번각본 「자비도량참법집해」에는 간행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본서의 금속활자본이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출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직지」와 「자비도량참법집해」 등을 통해서 볼 때, 흥덕사 나름의 재래식 방법으로 주조한 흥덕사자는 중앙관서에서 주조한 금속활자인 증도가자에 비하여, 글자의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고 조잡하며 조판술도 미숙한 편이다. 그러나 원의 굴욕적인 지배로 중앙관서에서의 금속활자주조와 인출의 기능이 마비되었던 당시에 흥덕사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을 인출하여 고려시대 금속활자인쇄술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고려 「복」활자와 「전」활자 현 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인 복활자 하나가 있고 개성박물관에도 고려의 왕궁이 있었던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金屬活字)인 전활자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 활자는 한결같이 누가 무슨 용도로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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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 활자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주조와 책의 간행을 실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활자들이다. 고려 복활자의 크기는 1.0 1.0 ㎝이며 이 글자는 자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벽자이므로 일반적인 저작을 간행하기 위한 금속활자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활자의 주조방법이 아주 미숙하여 활자의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자획이 고르지 않으며 네 변의 길이도 앞뒤로 차이가 있고 활자의 뒷면이 타원형으로 옴폭 파져있다. 글자체는 송설체 계열인데 1975 년 3 월에 실시한 분석에 의하면 구리 50.9, 아연 0.7, 주석 28.5, 납 10.2, 철 2.2%의 금속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고려 전 활자에 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들 복활자나 전활자는 여러 가지 특징과 정황을 고려할 때 고려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직지 직지의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그 이름을 풀이하면 백운화상이 부처가 한말 중 가장 중요한 것인 직지에 대한 뜻풀이를 고승들의 책에서 가져와 이를 편집했다는 뜻이 된다. 직지의 저자와 출판한 사람은 달랐다. 백운화상은 이 책을 집필한 저자였는데, 그는 1289 년에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었다.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이고, 법명은 경한이다. 선종의 대가였고 1374 년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1377 년에 스승이 엮은 책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비구니 묘덕은 이들에게 공양하여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직지의 내용은 불교의 가르침을 수집한 것이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직지는 직역하면 '정확하게 가르킴', '정직한 마음', '바로 다스린다' 등의 다른 뜻으로도 풀이 된다. 백운화상의 제자들은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던 흥덕사에서 이 책의 상·하권을 출판하였다. 현재까지 하권 한 권만 발견되었는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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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http://k.daum.net/qna/view.html?qid=2gGg7 2) http://nationalculture.mcst.go.kr/symbol/data/symbol_view.jsp?kcs_seq=19 3) http://www.scholas.eu/shop/contents/viewer.asp?idx=24 4) http://ko.wikipedia.org/wiki/%EB%8F%84%EC%9E%A5 5) http://theme.archives.go.kr/next/symbolKorea/historyOfGreatSeal.do 6) http://prkorea.com/jikji/jikji1_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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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Korean History and Culture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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