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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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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호


글 싣는 순서

01 [표지 이야기] 오월 광주,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으로 이어지기를

사진 유재홍

5월 20일 오후 3시 5·18민주묘지에서 모인 생명평화 기도순례 길벗들. 우리 역사의 질곡을 짊어 지고 있는 이 땅에서 생명평화의 바람이 다시 살아나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로 굽이치기를 함께 기도했습니다.

04 [만나보기] “부당한 힘에 대한 도덕적 압력은 비무장입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 인터뷰 최철호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꿈이 시작된 것은 2007년 밝은누리가 농촌 으로 분립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생명평화, 통일이라는 주제를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구체화 해나갔고, 농촌과 도시가 상생하는 관계,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의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 을 실제 삶으로 경험하고 훈련했습니다. 10년이 지나 2017년 가을 곧 전쟁 날 것처럼 위기가 심화 되었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평화의 바람으로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10 [생명평화 고운울림] 이 땅 아픔과 상처 보듬는 순례의 걸음 5·18민주묘지와 지리산 등지, 목포신항까지 광주·전라지역에 울려퍼진 고운울림 최소란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길벗 230여 명은 기도순례 공식 일정과 자율 일정으로 광주와 전라 지역 곳곳을 걸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38주년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념하는지 둘러보 며 공부하는 이들도 있고, 무등산과 지리산에 오른 이들도 있고, 목포신항에 우뚝 선 세월호 현장 을 찾아간 이도 있고, ‘조국’을 찾아 뿌리내리려 애쓰는 고려인들을 만난 이들도 이도 있었습니다.

12 [생명평화 고운울림] “아팠겠지만, 그들도 그렇게 깨어났겠구나” 광주에서, 국가를 다시 생각하다 임재원 대한민국 역사에서 광주는 사람들의 신념, 인식체계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국가’와 ‘국민’ 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주 시민들도 그렇게 깨어났을 것입 니다.

14 [생명평화 고운울림] 이 땅에 묻힌 이들의 평안을 빕니다 길벗들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김재규 전쟁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모진 세월을 겪으며 뭇생명의 신음을 다 받아내고 있는 땅 지리산. 나 의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앞사람 뒷사람과 호흡을 맞춰야 오를 수 있는 산이었습니다. 운 해에 둘러싸인 정상에 발 딛는 이들에게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을 성찰하는 기회를 주는 듯했 습니다.

16 [교육마당] 오월 광주 ‘뜻’ 만나 이 땅 생명평화 ‘얼’ 세우는 생동중학교 들살이 광주와 남원지역으로 봄들살이를 떠난 생동중학교 학생들은, 광주민주항쟁 유적들을 따라 길을 걸었고, 그 역사를 온 몸으로 겪어낸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온 몸 바쳐 우리 땅과 얼을 지킨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고려인동포들을 만났습니다.

20 [함께 산다는 것] 이미 가진 것으로 누리는 넉넉함 함께 사는 이들이 준비해준 정갈한 생일잔치 김지선 내 아이 남의 아이 가르지 않고 우리 아이들로 마을에서 함께 기르는 벗들과 함께 마음 담아 생일 축하자리 마련했습니다. 고맙고 잘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22 [배움의숲] 작고 여린 생명, 마음 다해 만나가고 싶다 새로이 하늘땅살이 시작하는 마음 삼일학림 학생들이 올해 하늘땅살이를 새로이 시작할 때 쓴 글들을 모았습니다. 생명 을 키우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며 더 잘 만나가고 싶은 다짐으로 하늘땅살이 힘차게 시 작했습니다.

26 [밥상머리] 자연이 준 선물, 오롯이 고마운 마음으로 마을찻집 마주이야기, 뽕잎차 덖던 날

이선아

인수동 마을찻집 마주이야기가 연대하는 장수 긴물찻집에서 뽕잎차 덖은 날 풍경입니 다. 우리 땅 기운 머금은 차 마시며 우리 몸과 마음 정갈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28 [알림] 6월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 공주 금강, 천안 독립기념관

<밝은누리>는, 북한산자락 인수동에서 마을이웃들과 소중한 삶의 가치를 나누는 마을신문으로 2008년 처음 나왔습니다. 광장에서 모이는 집회와 더불어 오늘 우리 일상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뜻 이었습니다. 신명나는 마을공동체를 일구어가는 이들이 삶에서 건져올리는 참된 이야기들로, <밝은누리> 는 꾸준히 풍성하게 채워지고 널리 전해질 수 있었지요. 둘레에서 일어나는 뜻 깊은 일들 살피며 때에 따라 마을신문 내용이 요모조모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여기뿐 아니라 곳곳에 저마다 터한 땅에 어울리는 모습으 로 뿌리내린 생명(공동체)들이 반갑게 만나 든든히 손잡을 수 있도록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자연과 땅 일구는 삶으로 돌아가 새로운 미래 펼쳐가는 분들과 함께 마을신문도, 자연스레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농도상생마을의 가치를 나누고 있습니다. <밝은누리>를 우편으로 받아보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 400여 곳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있습니다. 전자 편지로 보내드리는 분은 훨씬 더 많습니다. 받아보길 원하는 주소, 혹은 바뀐 주소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 문의 : 033-436-0031, maeulin@hanmail.net <밝은누리>는 독자 분들의 후원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 새기며 마을신문이 줏대 있게 제 할 일 다 할 수 있도록, 다달이 소액 후원으로 마음 내주시기 바랍니다. * 후원 계좌 : 국민은행 487101-01-369173 [예금주 생명평화연대(마을신문)] <밝은누리> 발행인 ı 최철호 기자 ı 최소란 고영준 김준표 임안섭 정인곤 천다연 멋지음 ı 김준표 황지영 문의 ı 033-436-0031, 010-5653-9104 누리편지 ı maeulin@hanmail.net, greenearth923@empal.com 누리집 ı www.welife.org 후원 ı 국민은행 487101-01-369173[예금주 : 생명평화연대(마을신문)]


만나보기

“부당한 힘에 대한 도덕적 압력은

비무장입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 인터뷰

밝은누리는, 가치(신앙)와 삶이 모순되지 않고 가치를 삶으로 살아내는 생활영성수련, 그리고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리는 농도상생마을공동체를 일구어왔습니다. 밝은누리가 그동안 해왔던 사역이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으로 어떻게 이어 지는지요?

통일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주제로 꿈꾸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농촌으로 분립을 준비할 때였어요. 생명평화, 통일이라는 주제는 매우 큰 담 론이기 때문에 자칫 관념화 될 수 있어요.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서 자기가 품고 있는 관념을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명평화’는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에서 시작해요. 생활영성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 되고, 이 를 토대로 나와 네가 더불어 사는 생명살림터가 ‘마을’입니다. 농촌과 도시를 오가는 마을공동체 삶을 실 제로 살아가면서, 소외되고 단절된 농촌과 도시가 상생하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구나, 사람과 자연이 더불 어 사는 삶의 양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남북이 하나 되는 것에 대한 훈련으로서 농촌과 도시 가 더불어 사는 삶을 먼저 경험한 것이지요. 10년이 지나 2017년 가을 밝은누리 한마당잔치를 하면서 우리의 꿈과 바람으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 요. 2017년 가을, 곧 전쟁 날 것처럼 위기가 심화되었을 때 전혀 다른 평화의 바람이 시작된 것이라 생각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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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남과 북의 통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우리 사회 갈등과 대립을 야기하는 우리 근현대사 의 아픔과 질곡을 폭넓게 짚어주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제와 전쟁, 분단독재를 거치며 주인 된 역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일제 청산 없이 이뤄진 현 대사는 기회주의를 삶의 결정적 처세로 정착시켰고, 왜곡된 역사는 식민사관과 사대주의라는 얼빠진 병 을 양산했습니다. 역사와 문화, 생활양식 곳곳에서 얼빠진 삶이 구조화되었습니다. 주인 된 성찰 없이 이 뤄진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는 문명과 삶의 총체적 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 생명까지도 상품 화시키는 반생명 문화는 생명감수성을 잃게 만들고, 더불어 사는 삶, 가족과 마을을 파괴시킵니다. 제국 주의와 식민지배, 전쟁과 생태계 파괴라는 20세기 비극을 아직도 우리는 짊어지고 살고 있어요. 우리 통일이 20세기 끝자락을 잡는 통일이 된다면 너무 서글픈 일입니다. 역사는 그렇진 않을 것 같아 요. 이 땅에 담긴 역사의 큰 뜻은,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을 짊어진 이 땅이 새로운 생명평화를 증언하 는 땅으로 부활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남북이 정치사회적으로 하나되는 것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더불 어 사는 마을,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생태라는 주제가 맞물리는 통일이 될 때, 21세기 새로운 생명평 화 문명을 잉태하는 씨알이 될 거라 생각해요. 우리 근현대사 100년을 돌아보면 가슴 아프고 해결되지 못한 원통함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기도순례는 한라에서 백두 넘어 만주와 연해주, 중앙아시아 곳곳 원통함이 서려있는 현장을 순례하며 기도하는 겁니 다. 그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치유하셔서 하나 된 대한민국과 조선이 생명평화를 전하는 땅으로 다시 살 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함께 하는 길벗들이 각 지역에서 개인 순례일정을 정해 기도하고, 지역의 큰 아 픔과 원통함과 한이 서려있는 묘지들과 그 땅 생명들의 꿈과 한이 서려있는 산과 바다와 강에서 모두 모 여 기도해요. ‘생명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읽고, 기도문으로 만든 노래를 부르며 기도해요.

분단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통해 어떻게 차이와 갈등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오래된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는 게 새로운 것의 출발입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이 합의했던 선 언문의 통일원칙을 살펴보면, ‘자주’와 ‘평화’ 원칙을 견지해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와 김일 성이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 노태우의 7·7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과 김정일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 노무현과 김정일이 합의한 10·4남북공동선언까지 일관되게 ‘자주, 평화’라는 원칙을 견 지하고 있어요. ‘군사적인 대립을 종식하자’, ‘상호체제를 인정하자’, ‘자주적으로 평화롭게 통일하자’는 원칙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통일을 책임 있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모두 합의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엄청난 이념적 차이 때문에 통일정책에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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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고, 보수가 되 었든 진보가 되었든 이 땅 역사 속에서 공통의 상처와 아픔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주4·3사건에서 백성들을 탄압했던 사람들이나, 한국전쟁에서 평화를 위한 마음으로 먼 이국땅에 와서 전쟁에 참여해 유 엔기념묘지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 전쟁과 분단체제 속에서 이편이나 저편을 다 통틀어서 가지고 있는 공 통의 원통함, 공통의 풀어야 할 한이 있습니다. 그것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전문가나 학자가 아닙니다. 우 리의 기도로 하나님만이 풀 수 있습니다. 공통의 원통함과 상처가 만들어내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방어 하기 위해 더 강력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식의 왜곡들, 거짓과 기만의 재생산이 있습니다. 해원을 통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사람들에게 이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총 쏘 는 사람이냐 저기서 총 쏘는 사람이냐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념의 도구가 되어 죽어간 사람들이 많 습니다. 그런 분들의 죽음은 이념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순례에서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고쳐주소서 라고 해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현안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서는 비핵화와 동시에 비무장 영세중립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무장 영세중립에 대한 실제적인 사례와 구상을 설명해주세요.

‘중립’이란,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 충돌과 분쟁이 생길 때, 어느 한 편에 서서 분쟁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를 영구적으로 지키겠다고 선언하고 약속하는 것이 ‘영세중립’인 거 죠. 중립국 중에는 군대를 갖는 나라도 있고, 상비군을 없애고 중립을 지키는 나라도 있습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군대가 있는 중립국입니다. 스위스는 200년 이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영세중립국의 전형 적인 모델입니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에게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나치가 망하자 전 범국가 중 하나가 돼 버립니다. 2차 대전 승전국가인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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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시키려 할 때,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마음을 모아 중립을 선언하고 4개 국가가 인준하는 방식으로 된 사례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우리가 분단된 것은 철저하게 주변 제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독일에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가 분단의 위기를 영세중립으로 넘어섰던 것은 우 리가 참조할만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선례입니다. 또 주목해야 할 나라는 코스타리카입니다. 300년 이상 식민지배를 받았고 독립이 되고 나서도 수차례 내전이 벌어지다가 내전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이 군대를 해산하겠다는 놀라운 선언을 하고 그걸 의회가 인준했어요. “우리는 나라를 다시 세우고 제대로 된 독립을 하기 위해 사람을 키워야 하고 복지와 교육에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국방비에 지출할 여력이 없다”는 거예요. 주변 국가들의 내전도 많았고, 미국의 이 해관계와 충돌하는 일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비무장이라는 도덕적 힘을 토대로 영세중립을 선언했기 때 문에 이후 벌어진 중남미 분쟁들에서 코스타리카는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평화를 이끌고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해요. 강력한 군사력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거의 대부분 나라가 전제하는 안보논리와 다른 형태의 새로운 안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입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들 이해관계와 남북 간 무력 대치가 심각한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 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각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강력한 군사력, 군 비경쟁을 통한 안보와 평화라는 전략은 지금껏 온갖 거짓과 비리, 더욱 격해진 갈등과 불신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남북이 함께 군대를 축소 폐지하는 비무장 비핵 영세중립을 선언하는 대한조선 통일방안이 추 진되어야 합니다. 한겨레 모두 마음을 모아 비무장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경험한 나 라들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함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국제협약에 따 라 대한조선 영세중립국의 정치적 자립과 통합을 영구히 인정하고, 동북아 평화를 약속해야 합니다. 유 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이를 보증하고 유엔평화기구를 판문점에 설치하여 한반도 평화를 함께 지켜갑 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서 영세중립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세중립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게 아 니고, 가장 현실적인 겁니다.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리 미래 를 자주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입니다. 종전선언을 하고, 북미수교를 하고나면, 미국이 동 북아에 있을 명분이 없어요. 미국이 분단체제 극복에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미국 입장에서는 명분 있게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어떤 ‘평화체제’가 필요해요. 대립과 갈등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평 화를 위한 역할로서 ‘주변국들이 함께 지켜갈 어떤 평화체제’가 필요한 겁니다. 물론 우리의 자주성과 미 국, 중국의 이해관계, 일본의 불안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이 되겠죠. 그 ‘평화체제’가 결국 ‘영세중립화 통 일을 토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인 겁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유일한 길입니다. 거기에다 ‘비무장’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라는 제국의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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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대해 도덕적 압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정치현실을 지배하는 부당한 힘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 선 택 가능한 것을 체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압박하는 기도입니다. ‘영세중립화 통일을 토 대로 한 동북아 평화체제’가 전 지구적인 반핵, 반전, 군대감축을 추동하도록 하는 겁니다. 핵무기와 대량 살상무기를 가지고 곳곳에서 전쟁하고 있는 제국들이 돌이키고, 참 평화가 넘쳐나길 구하는 기도입니다.

지역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바이칼호수 등 요하문명 유적지를 탐방하고, 동북아 생명평화공동체를 제시하고 있습니 다. 우리 문명의 뿌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일제와 분단, 전쟁과 냉전으로 우리 근현대사는 심각한 왜곡과 갈등을 겪었기에, 이 시기에 형성된 어느 한 쪽의 생각과 체제로는 참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참혹한 폭력과 전쟁을 토대로 둘 중 하 나를 없애고 이루려는 평화는 끔찍한 ‘제국평화’입니다.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처와 불신이 너무도 깊 기 때문입니다. 일제로 인해 왜곡되기 이전의 역사에서 희망의 씨알을 다시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쟁 과 분단갈등으로 깊어진 상처와 불신이 구조화되기 이전 역사 속에서 희망의 물줄기를 샘솟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담은 것이어야 할 것입 니다. 가깝게는 일제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조선 말기, 멀게는 고려와 백제, 가야와 통일신라, 발해와 부 여, 고구려, 단군조선과 환웅배달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물길을 길어 올리는 것이 필요합 니다. 이는 모두 현재 극단적인 대립 속에 빠져 있는 양 진영이 모두 공유하는 역사이며, 함께 지켜가고자 하는 문명의 유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고대문명을 개척하고, 인류문화를 선도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잊은 채 뿌리 깊은 식민사관과 사대주의문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배층과 지식 인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사대주의 역사관과 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뿌리 깊 은 정신 질병이 되었습니다. 주체로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채 또 다른 제국의 영향 속에서 분단과 전쟁, 냉전을 겪어온 우리는 아직도 얼빠진 고통과 허망한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기회주 의 처신이 삶의 현실적 지혜로 강력히 자리 잡았습니다.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줏대 있는 삶이 얼마나 소 중하고 절실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주체적 자각, 지조와 정절로 겨레 역사와 얼을 지키고 인 류와 온생명 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삶과 얼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양학문 중심의 과도한 사대문화와 사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안 이 아니라, 그들이 앞서 만들어낸 산업문명과 자본지배 문화의 폐해를 분석하는 정교함과 정직한 반성입 니다. 제국주의시대를 거치며 그들이 전 세계에 강요했던 문명이 생명평화를 담보할 수 없고 죽임을 앞 당기는 문명이라는 양심 있는 고백입니다. 주체로서 성찰하지 못하고 헛된 환상으로 조급하게 내몰렸던 우리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냉철함과 정교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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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가 진행되는 동안, 공동체지도력훈련원과 삼일학림 청년학생들과 함께 <묵자>를 공부하고 있 는데, 동북아 생명평화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계승하려고 하는 사상적 토대, 교육운동은 무엇입니까?

중화사대문화와 일제식민사관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겨레 고대역사와 사상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늘땅 생명이 창조되었던 태곳적 기억을 간직한 겨레 문화와 말글에 담긴 얼을 소중 하게 배우고 이어갑니다. 지배윤리로 전락하거나 관념화 되어버린 유학 본래 가르침을 분별하고, 노장과 묵가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배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때 대륙의 다양한 사상을 합류시켜 새로운 사 상을 창조했던 송대 신유학은 조선왕조 500년 운명과 함께 그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 거대한 문명 전 환기에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매우 강력한 창조적 영감과 실천윤리를 제시하며 희 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유불선의 본류를 회복하고, 서학의 문제의식을 주체적 자각과 창진성으로 꽃피 운 동학을 비롯한 다양한 실천적 사상운동들도 망국의 아픔을 변혁의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문명을 개벽하는 웅장한 전망을 품고 신음하는 백성과 뭇 생명을 구하는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만주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전개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은 잊을 수 없는 현대사의 근 간입니다. 교육을 통해 겨레를 구하려 했던 명동학교는 명동마을을 토대로 가능했고, 오산학교는 용동마 을에 터해 가능했습니다. 농민을 역사 주체로 일깨우는 농군학교는 가나안이상촌 운동을 뿌리로 합니다. 명동학교 김약연은 윤동주와 문익환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은 짙은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습니 다. 오산학교 유영모의 창조적 지성은 이현필의 동광원 영성과 만났고, 여운형의 못다 이룬 자주독립의 꿈은 김용기의 가나안이상촌 운동이라는 씨알을 남겼습니다. 용정에서 꿈을 키운 안병무는 민중신학을 꽃피우고, 여성숙과 만나 디아코니아자매회를 잉태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농과 생명살림, 노동과 기도, 지성과 영성, 자기 규율과 자유, 마을과 겨레, 사랑과 평화를 하나로 구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육 해 방 평화라는 것은 메마른 제도나 추상 관념이 아니라 몸이 속한 구체적 현실, 더불어 사는 마을에서 선취 되고 증언되는 살아 있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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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고운울림

이 땅 아픔과 상처 보듬는

순례의 걸음

5·18민주묘지와 지리산 등지, 목포신항까지 광주·전라지역에 울려퍼진 고운울림

“아아, 광주여!”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에는 무등산자락 광주시내 사진 아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진실 을 증언하는 글 한 편조차 검열 당하던 시절부터, 시대의 격랑을 견디며 원통한 생명들을 품어온 무등산 과 광주땅. 국가권력의 폭주를 온 몸으로 막아내다 스러진 분들 앞에서 우리는 모두 빚진 마음과 동시에 묵직한 과제를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생명평화 일구는 삶이다. 오월 광주의 정신 으로, 한라에서 백두 넘어 동북아에 비무장 영세중립이 실현되길 염원하는 노랫소리가 광주·전라지역 에서 울려 퍼졌다. 5월 20일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있을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 함께하고자 서울에서, 홍천에 서, 군포에서, 남양주에서, 광주에서 온 생명평화순례 길벗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며칠 전부터 와서 국 가가 38주년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념하는지 참여한 이들도 있고, 광주를 둘러싸고 우뚝 솟아 있 는 무등산에 올랐던 이들도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유적지를 따라 걷는 이들도 있었 고, 서점 주인으로, 시장가게 아주머니아저씨로, 택시기사로, 물심양면 민중항쟁을 도왔던 이들을 찾아 가 증언을 듣기도 했다. 그분들은 계엄군의 학살과 집단 발포로 옆에서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걸 자기 일처럼 여긴 ‘사람들’이었다. 대동세상을 함께 꿈꿨던 동지들 죽음을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이 오늘을 그때 그날처럼 살아온 이들의 노력으로 오월 광주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순례하는 길벗들 가슴 깊 이 들어왔다. 5월 19일 오후에는 옛 상무관 앞에서 작은소리 음악회가 열렸다. 5·18 당시 행방불명 된 이창현 군의 아버지 사연을 떠올리며 손수 지은 노래,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품은 노래, 한이 서린 우리 소리 등 간절히 마음 담아 들려주는 여러 노래들이 한 시간 동안 흘렀다. 작은 소리는 우리를 지나, 희생자들 시신을 덮어 놓은 태극기를 끌어안고 피맺힌 통곡과 추모가 연일 이어졌던 옛 상무관으로, 광주시민 2만여 명이 둘러 앉아 뜻을 하나로 모아나갔던 5·18민주광장으로, 어린 학생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피하지 않았던 시민군들의 최후가 처참한 총탄 자국으로 남아 있는 옛 전남도청으로도 고요히 흘렀다. 5월 20일 오후 5·18민주묘지. 추모행사를 탄압하고 유족들을 회유해 5·18사건을 은폐하려는 압력에 도 굴하지 않고 망월동묘역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신묘역에서 구묘역까지 천천히 걸으며 추모하던 길벗 230여 명은 오후 3시 구묘역을 빙 둘러섰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일구는 바람으로 불 어오소서. 이 땅 생명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고쳐주소서. 미움과 거짓을 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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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대립과 갈등을 풀어주소서.” 나직하면서도 또렷하게 함께 낭독하는 기도소리가 푸르른 언덕 가득 메 운 망월동묘역 위로 울려 퍼졌다. 분단현실을 이용하여 학살과 발포가 정당화되는 세상이 다시는 오지 않기를, 정의와 평화가 춤추는 세상이 되기를, 오월 광주의 정신이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으로 이어지기 를, 함께 노래했다. 다음날인 5월 21일 저마다의 호흡으로 오월 광주의 정신이 살아있는 남도땅 이곳저곳 흩어져 기도순례 를 이어갔다. 지리산 등산 모둠은, 9살 어린이부터 다양한 연령대 길벗 60여 명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 다. 전쟁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모진 세월을 겪으며 뭇생명들의 신음소리를 다 받아내고 있는 땅 지리산. 오르고 내려가는 데 8~10시간의 대장정, 나의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고, 앞사람 뒷사람과 호흡을 맞춰 야 오를 수 있는 산이었다. 운해에 둘러싸인 정상에 발을 딛는 이들에게 20세기 인류의 죄와 오만을 성찰 하는 기회를 주는 듯했다. 다른 모둠은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이들의 해원을 기도했다. 이밖에도 오월 광주를 확장하는 폭넓은 만남과 연대 자리가 있었다. 지리산 실상사를 중심으로 귀농한 사람들이 교육 과 수련으로 일구어가는 마을공동체 방문, 우리 땅에 뿌리내리려 고군분투하는 고려인동포들을 만나 든 든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목포신항으로 두 시간 남짓 걸려, 3년 동안 바다에 잠겨 있다가 이제야 육지에 우뚝 올라선 세월호를 직접 눈앞에서 확인하고 진실이 밝혀지고, 유족들의 아픔이 치유되길 기도한 이들 도 있었다. 함께 살아가는 벗들 덕에 생명평화순례가 나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함께 일구어가는 삶, 마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없었다면,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남북외교와 국제정세에 일희일비하며 대립과 갈등의 한쪽 편에 갇힌 채 지내지 않았을까? 함께 살아가는 이들 덕에, 일상에서도, 한 달에 한 번의 순례 길에서도, 다르지 않은 생명과 평화가 우리에게 있는지 늘 돌아보게 된다. 이번 순례에서 농촌마을 어린 이들과 도시마을 어린이들이 만나 ‘철조망 돌돌돌 밀어라 여기는 비무장지대라’ 하고 노래 부르며 함께 어우러진 것처럼, 남쪽 어린이들과 북쪽 어린이들이 신나게 이어달리기하고 축구하고, 백두산도 오르고 만주벌판을 누비며 동북아 생명평화의 땅을 향해 달려나가길 꿈꾼다. ‘비무장 영세중립’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도 순례길 함께 걷는 이들과 꾸다보면 어느덧 우리 삶으로 이루어지리라. 일상에서 서로 살리 는 삶의 토대를 잘 닦고 아픔의 땅에 생명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 최소란 | 강원 홍천에서 살면서, 함께 일구어가는 삶을 글로 써서 나누는 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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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고운울림

“아팠겠지만, 그들도 그렇게 깨어났겠구나”

광주에서, 국가를 다시 생각하다

국가의 폭력, 무고한 죽음, 시민들의 항쟁, 결의에 찬 죽음….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싶어 찾아본 광주 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증언록 등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희의감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한 가지 분 명해진 생각은, 계엄군의 잔인하고 압도적인 무력행사에 의해 당시의 시민들은 쓰러져갔지만 38년간 진 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노력(또 다른 여러 차례의 죽음을 포함한)에 의해 그 죽음의 의미는 되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5월 18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에 들려 짐을 내리고 근처의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으로 향했습니다. 피에 물 든 태극기, 누렇게 바랜 여러 시 민, 학생들의 일기, 취재기록이 담긴 기자수첩 등 절박했던 당시 상황들을 말해주는 증거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은 아이들과 무등산에 올 랐습니다. 화순 쪽에서 오른 무등 산은 산 안에 산을 품고 여러 마 을을 품은 다정한 모습이었습니 다. 촉촉이 젖은 산길이 저희를 품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높은 봉 우리에 올라서서는 광주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무등산은 오랜 세월 그렇게 묵묵히 광주땅을 지켜본 큰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그곳에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이들과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늘 뜻 땅에 내려 온 생명 살리심 을 믿습니다~ 하늘 뜻 땅에…” 화음을 넣어 불러주는 큰 아이의 노래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려올 때는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팠지만 우리를 맞이해준 아름다운 무등산을 뒤로 하는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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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망월동묘역에 둘러서서 생명평화 고운울림 노래로 죽음과 삶이 한 자리에 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묘역에서는 앉아서 계속 흙장난을 하던 아이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했던 말이 오 래 남아 있습니다. “…엄마,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을 막 그렇게…” “그렇지? 그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어.”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지내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자국민에 게 이러한 폭력을 저지른 국가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 학생’이라는 이름, ‘국민’이라는 이름을 당연한 것으로만 여길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팠겠지 만, 광주의 시민들도 그렇게 깨어났겠구나. 어느 날 갑자기 국가에 의해 자행된 폭력을 뭐라고 설명할 것 인가? 국가가 어느 순간 국민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등 돌리거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면, 되려 국가가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갔다면, 이전의 가치체계는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 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광주는 사람들의 신념, 인식체계를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정보의 차단과 왜곡에 의해 다수의 국민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직간접적으로 진 실을 목격했던 사람들에게 광주는 쉽게 지울 수 없는 자국이 되었습니다. 광주 기도순례를 함께 했던 아이가 커가면서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질문할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 로의 순례길에서도 슬픈 역사를 마주하는 길목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하지만 함께 하는 어른들이, 또 일상으로 돌아와서의 삶이 곧 안정으로 이끌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진 실을 알고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야 함이 마땅하기에 앞으로의 순례길도 함께하며 공부하며 다녀오려 합 니다. 평화를 기도하고 해원을 위해 순례를 이어가고 있는 이 걸음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임재원 | 같은 뜻 나누고 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는 관계가 있어 행복한 인수동 마을밥상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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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 고운울림

길벗들과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이 땅에 묻힌 이들의 평안을 빕니다 오래 전 대학 동아리 사람들과 지리산 한 번 가 보자고 해서 뱀사골 거쳐 노고단 오르는 길을 갔었다. 그 때는 지리산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 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이해 도 부족했고 단지 크고 높은 산이라는 정도였 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주변에서 지 리산 다녀온 이야기 들으면서, 그리고 <태백산 맥> 읽으면서 다시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에 지리산 일정이 있었다.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 오르는 일정이 었다.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앉 은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 잡으려던 사람들은 형 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 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인가. 남도땅에서는 제 일 큰 산인 까닭이고, 더는 갈 데가 없는 마지막 산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리산 골짜 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또한 무덤이었다.” - 조정 래 <태백산맥> 중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들이 일어나 싸운 격 전지, 동학농민혁명 봉기, 을사조약 이후의 항 일의병활동, 그리고 해방 이후 제주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빨치산 조직이 있던 곳. 지리산 하면 떠오르는 어떤 강인함이 느껴지곤 했는데 이런 역사 속에서 저항정신이 깊이 새겨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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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큰 산에 오른다는 설렘 을 안고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시 작했다. 10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걸어야 했기에 내 호흡에 맞게 걸 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이 산을 오르는 의미와 마음가짐을 잘 새기고 싶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가 기 전 중반까지는 끊임없는 계단식 길이어서 체력 안배가 필요한 곳이었다. 먼저 출발했던 사람들 중에 뒤처진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속도를 내서 앞지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 하지만 왜 앞서가야 하지? 난 무엇 때문에 이 산을 오르는 거지?’ 이 산행의 의미를 되짚었다. 다른 사람이 보이고 그들과 비교하며 살아가려는 내 습성이 느껴졌다. 다시금 내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고 나서야 숲이 거치고 구름 지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땅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 름이 보였다. 하얀 구름들이 뭉게뭉게 펼쳐진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상에 가까울수 록 날씨는 점점 쌀쌀해졌다. 아이들도 어느새 잠바를 꺼내 입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잠시 쉰 뒤 천왕봉 을 향해 걸었다. 통천문을 지나니 정말 하늘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마지막 힘든 오르막계단을 오르고나 니 멀리서 생명평화를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 드디어 천왕봉에 다 올라왔구나!’ 이곳에서 죽어 간 무수한 영혼들에게 평안과 위로가 함께하기를. 그리고 이 땅에서 곱게 어울리는 밝은누리 씨알로 살 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드렸다. 멀리까지 구름에 둘러싸이며 앞이 잘 보이지 않다가 가끔씩 비추는 햇살에 하얀 구름떼로 모습을 드러 내기도 했고 또 구름이 잠시 거치면 멀리까지 넓게 퍼져있는 능선들이 보이는 아름다운 장광을 보기도 했 다. 올라왔던 이들이 하나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지리산 정기를 받으며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으 로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함께 올랐던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고 나서야 나도 자리를 정리했다. 내 려오는 걸음은 경쾌했다. 아이들은 올라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언제 그리 힘들었냐 는 듯. 천왕봉에서 머문 긴 여운을 안고, 어머니의 품이라 불리며 수많은 생명을 품어주었던 이 산에 고마 움을 느끼며, 동시에 이 땅에서 피 흘린 수많은 영혼의 안식을 빌며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김재규 | 최근 홍천으로 이사해 시골살이 배우며 하늘땅살이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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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마당

오월 광주 ‘뜻’ 만나

이 땅 생명평화 ‘얼’ 세우는

생동중학교 들살이 5월 16~22일 6박7일 동안 광주와 남원지역으로 생동중학교 들살이를 다녀왔다. 특별히 5·18광주민주 항쟁 전개과정에 대해 공부한 뒤 유적들을 따라 길을 걸었고, 그 역사를 온 몸으로 겪어낸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더 오래 전 온 몸 바쳐 우리 땅과 얼을 지키다 역사의 뒤꼍으로 잊힌 고려인동포와 후손들이 조국을 찾아와 터 잡은 광주 고려인마을을 찾아갔다. 5·18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과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떳떳하게, 부끄럽지 않게 살다간 이들

5·18광주민주항쟁의 유적을 따라 길을 걷는 ‘오월길’ 가운데 우리는 ‘오월여성길’과 ‘윤상원길’을 걸었 다. ‘오월여성길’에 있는 ‘오월어머니집’은 5·18 당시 사랑하는 가족이 희생되었거나 본인이 피해를 당하 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서로 아픔을 치유하고 보살피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우리는 오월어머니집 이사 장을 맡고 있는 정현애 선생님을 만나 이 야기를 나누었다. 정현애 선생님은 청년학생들이 자주 모 였던 ‘녹두서점’을 남편 김상윤 님과 함 께 운영한 분이다. <화려한 휴가> 같은 5·18 관련 영화나 책에 대해 선생님은, 그 당시 아픔과 고통을 잘 담아내려 애쓰 긴 했지만, 시민군만 너무 크게 보여주고 그때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하셨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 면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여쭤봤다. “힘 들어. 내 앞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더 크게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은, 과연 이 번에는 제대로 진상규명이 될까? 5·18특별법이 만들어질까? 하는 우려”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마음 에 남는 물음을 던져주셨다. “그때 만약 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를 빨갱이로, 북한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라 말할 수 있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결국 분단으로 인해 벌어질 수밖에 없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현애 선생님은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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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양림동에 있는 ‘소심당 조아라기념관’에 갔다. 조아라 선생님은 1912년 태어나 평생 여성운 동,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셔서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는 분이다. 유품들(특 히 신발)이 굉장히 낡고 소박했다. 5·18 당시에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6개월 옥고를 치르셨다고 한다. 티 없이 결백하다는 뜻인 ‘소심당’처럼 조아라 선생님은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 게 살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그 다음으로 광주기독병원과 구 광주적십자병원을 둘러보았다. 5·18 당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긴박하게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줄지어 헌혈에 동참했다. 당시 여학생(박금희)이 헌혈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총에 맞아 주검으로 실려 오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고, 유흥업소 여성들 이 자신들의 피도 깨끗하다며 헌혈을 하러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동지를 잃고 살아남은 이들의 사명

‘윤상원길’을 걷다가,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열사들 기념비가 있는 5·18자유공원에서 전용호 선생님을 만났다. 전용호 선생님은 윤상원 열사와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하셨다.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이 계엄군에게 진압될 때, 당신은 광주YWCA에서 <투사회보>를 만들고 계셨단다. <투사회보>는 함께 싸우는 시민들을 독려하고 서로 지켜야 할 사항들을 적어 광주시내 질서를 잡아나간 숨은 공신이었다. 그렇게 형제 같은 동지들을 잃은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전용호 선생님이, 어떻게 그 슬픔을 극복 하셨고, 그 사건이 당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 드렸다. 전용호 선생님은, 신군부세력에 대한 복 수심, 그리고 민주화를 이뤄야한다는 일념 때문에 절망할 겨를 없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살 수 있었 다고 하셨다.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구 전남도청에도 가보았다. 처참했던 총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적인 건물인데, 권력은 무자비한 폭력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한다. 5·18민주평화기념관이라는 이 름으로 올해 한달 동안 시민에게 개방을 했지만,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흔적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다. 전남도청을 원형대로 복원하자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 당시 도청 모습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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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묘지 앞에서 생명평화 노래하다

5·18민주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5·18 민주묘지에 갔다. 5·18민주묘지는 5·18 당 시 운명하신 분들이 잠들어있는 신묘역, 그리고 5·18 이후 이 땅 민주화를 위해 힘쓴 분들이 잠 들어있는 망월동 구묘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묘역 입구에서 굳세게 서 있는 탑은 그 크기 에 저절로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 5·18민주묘 지를 든든히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탑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가니 넓은 무덤이 펼쳐져 있었다. 파 란 하늘에 거대한 탑, 봉긋봉긋 솟은 무덤들과 뒤에 보이는 초원이 조화를 이루며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묘 중엔 이름 없는 묘, 사진 없는 묘도 있었다. 뜨겁게 싸워 억울하게, 눈부시게 운명하셨음에도 이름 하 나, 사진 하나 남지 않았던 분들도 계셨다. 구묘역 앞에서 진행된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 모임에도 함께했다. 우리 노래와 기도가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풀고 이 땅 생명평화를 일구는 작은 씨앗이 되었으 면 하는 바람이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사는 고려인마을

5월 19일 흙날. 우리는 광주 월곡동에 있는 고려인마을로 갔다. 고려인이란 19~20세기 일제강점기 한 반도에서 연해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분의 후손들을 말하는데, 1937년 소련에 의해 중앙아 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면서 해방과 분단 이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잊힌 동포들이다. 고려인 1세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고 자란 이 땅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부르며 입국해서 살아가는 동포가 4만 명에 이르는데, 고려인동포 4~5세대 자녀들은 재외동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해 강제추방의 위기를 맞았으나, 지난해 정부는 내년 6월까지 강제추방을 유보했다. 그 사이 법 개정이 이뤄지길 요청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들을 지나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라는 곳으로 가서, 고려인동포들, 고려인 4~5세대 청소년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천영 목사님을 만났다. 예전부터 외국인이주노동자와 새터민들에게 관 심 갖고 일해오다가, 2001년 고려인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들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 고, 후에 고려인마을을 일구셨다. 고려인마을에 다문화가정 학생을 대상으로 세운 ‘새날학교’ 교장이기도 한데, 본인은 허드렛일을 거들 뿐이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고려인마을 대표이신 신조야 선생님도 만날 수 있었다. 뜻을 품고 열심히 활동해온 이야기들과 고려인 들이 겪는 어려운 점도 들었다. 고려인마을에 있는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고려인진료소, 고려인 역사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이천영 목사님은 우리 만남이 ‘관광’하며 지나치듯 마을에 오는 여느 사람들과 달 랐다면서 나중에 새날학교 학생들과 같이 홍천에 놀러오겠다고 했다. 우리도 고려인들이 우리 땅에서 더 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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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기

이천영 목사님 본인도 5·.18 유공자라고 하셨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공자는 아니지만 자신 역시 5·18민주항쟁 시위에 참여했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자신도 5·18 유공자라 할 수 있단다. 고려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홍범도, 김좌진 장군은 이름을 날리며 독립군을 이끈 분들 이다. 그분들과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 용사들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할 수 있을까? 이천영 목사님은 많은 고려인들이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 우리는 독립유공자들의 자손 을 천대하는 나라라 이야기하셨다. 윤상원은 항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5·18민주항쟁은 이런 상징적 인물들과 시민군들의 희생으로 빛났 다. 하지만 당시 밥을 짓고 화약병을 만든 어머니들, 목 터지게 구호 외치던 광주시민들, 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혈한 이들, 다친 이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고친 의료진들, 목숨 바쳐 끝까지 싸우는 이들을 기억하자고 가두방송을 한 이들. 이런 생명살림의 토대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5·18의 뜻을 온전히 새 기기 어렵다. 우리는 5·18의 참 모습을 보았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의 뜻과 얼을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타인 의 고통에 응답하고, 생명살림의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 살리는 밥이 되는 삶을 살며, 용기와 헌신으로 타 인을 살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5·18민주항쟁의 뜻과 얼 마음에 새기며 지금 홍천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을 더 정성스럽게 살아내자 다짐했다. 글쓴이 | 강원 홍천 밝은누리움터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아가는 생동중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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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

이미 가진 것으로 누리는

넉넉함 함께 사는 이들이 준비해준 정갈한 생일잔치

하나. 막내 산이의 첫돌을 맞아 마을 친구들이 돌상을 꾸며주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비닐, 플라스틱 남발하지 않고 자극적이고 화 려한 풍선이나 반짝이 장식 쓰지 않았다. 정갈하면서도 기품 있 고 따뜻했다. 부모가 준비한 것은 마음 담긴 편지와 산이가 그 시간을 기쁘고 생기 있게 누리도록 잘 살펴준 것뿐이다. 어떤 식당에서 어떤 이벤트를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마을 친구들의 축하를 오롯이 받으며,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 격려받았다. 부모는 산이에게 마음 담긴 편지를 읽어주고 이모들, 언니, 오 빠들은 노래 불러주었다. 산이는 가진 생명력대로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이모들이 준비해준 돌잡이를 했다. 잘 자라서 친구들과 서로 살리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산야초 효소, 변 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옻칠과 밥 푸는 주걱같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옻칠주걱, 밥으로 잘 살라는 마음 담아 쌀, 신명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소고를 준비해주었는데, 산이는 소고 와 옻칠주걱을 잡았다. 산이가 사람 살리는 밥을 떠주는 주걱처 럼 누구에게나 넉넉한 품으로 생명 떠주는 사람으로 신명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인생 살기를 기도했다. 마지막에는 모두 함께 둘러앉아 평화 노래를 부르며 축복하고 떡과 과일 새참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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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첫째 여울이의 다섯 번째 생일잔치가 어린이집에서 있었다. 민들레방 친구들이 고사리손 정성 모아 생 일축하 새참 접시에 담아내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쓴 그림편지 엮어 선물로 주었다. 산책길에 친구들 과 따온 들꽃을 꽃병에 소담스레 담고 다 같이 둘러앉아 축하노래하고 한 명씩 따스한 포옹으로 마음 전 달했다. 역시 한 번 쓰고 버리는 비닐, 플라스틱 남발하지 않고 자극적이고 화려한 풍선이나 반짝이 장식 쓰지 않았다. 가진 것으로 정성껏 마음 전달하고 표현했음이 다 보였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무분별하게 소 비하거나 낭비하지 않도록 관념이 아닌 일상으로 배운다. 어린이집 생일잔치는 생일상에서 이미 우리가 얼마나 큰 것을 가졌는지 잘 보라고, 잘 누리라고, 잘 표현하라고 일깨워 준다. 어떤 때는 어린이집 사진 첩에 올라오는 아이들의 생일상만 보아도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된다. 돌잔치와 생일잔치는 힘들여 치르고 해치워야 하는 행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생명이 얼마나 깊고 큰 것인지 되새기게 해주는 자리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배운 대로 나의 일상에도 정성을 기울여 창조성 과 창의력이 발현되게 하고 싶다. 정갈하면서도 기품 있고 따뜻하게. 고맙고 고마운 시절이고, 사람들이다. 김지선 | 인수동에서 친구들과 육아하며 살리고 살림받는 삶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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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숲

작고 여린 생명, 마음 다해 만나가고 싶다 새로이 하늘땅살이 시작하는 마음

고등·대학 통합과정 삼일학림 학생들이 올해 하늘땅살이를 새로이 시작할 때 쓴 글들을 모았 습니다. 밝은누리움터에서 해마다 해오던 하늘땅살이지만, 생명을 키우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 며 더 잘 만나가고 싶은 다짐으로 하늘땅살이를 힘차게 시작했습니다. 부지런히 풀 매고 밭을 돌보는 뿌듯함, 스스로 키운 것으로 밥상 차리는 즐거움, 다음 농사를 위한 씨앗을 받는 기쁨…, 여러 마음들이 녹아져 밭생명과 사람이 서로 살리는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동중학교에서 하늘땅살이는 밭에서 일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내고 집 중하는 삶, 일상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꼈다. 삼일학림에서 공부해가면서 땅과 작물들에게 책임을 다하고 하늘땅살이를 몸으로, 마음으로 더 잘 알고 싶다. 계 획했던 것보다 씨앗을 더 다양하게 받았고 더 많은 밭을 만나게 되었다. 새롭게 마음먹고 정성 다할 작물들이 기대된다. 3월 발목이 아파 한동안 할 수 있고 하 고 싶던 것들을 줄이고 미루게 되었다. 내가 너무 발을 걱정하며 아무것도 안하 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큰 미련 갖지 말고 발목 나았을 때 책임 없는 주인이 되 지 말자고 생각했다. 발목이 나은 후 굶주렸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했다. 실수도 하고, 착오도 겪으며, 그럼에도 재미있게 다양한 작물들을 심었다. 밭에 걸어 올 라가고, 들풀 뽑고, 흙과 씨앗 만지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줄 몰랐다. 이 제 싹트기를 기다린다. 자기 나름대로 힘껏 자랄 모습이 기대가 된다. 학림 생활 첫 번째 밥상모심으로 냉이된장국을 했다. ‘객관적으로’ 맛있었다. 기뻤다. 예전 에는 하늘땅살이로 얻은 수확물(특히 콩)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함을 많이 느꼈 다. 학림에서 밥상모심을 하며 잘 먹는 법을 배워갈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예봄

한해 하늘땅살이 시작하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첫 수 업이었던 소금물 만들기 시간이었다. 소금에는 이물질이 많아서 바로 물에 녹이 지 않고, 이물질이 걸러지도록 천에 소금을 담아서 물에 녹인다. 나는 여기서 이 물질 거르는 천을 잡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천에 소금을 올린 순간 천이 흘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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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가더니 소금이 다 쏟아졌다. 내가 천을 잘 잡지 못한 탓이었다. 형, 누나들이 괜찮다고 했고,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나는 수업시간 내내 찜찜했다. 삼 일학림에 오니 나는 막내였다. 실수도 많이 하고, 생각도 짧고, 손도 느렸다. 올 해 하늘땅살이 하면서 더 깊게 생각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겠다 다짐했다. 준

사실 저는 농사에 관심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엄 마가 텃밭을 하셔서 초등학교 때부터 따라다녔는데, 아주 가끔 일을 거들뿐 대부 분 혼자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삼일학림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을 때 고민에 빠졌습니다. 난 농사가 정말 싫은데…. 이런 제게 엄마가, 밭이 아주 작다고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학림 학생이 되었고, 하늘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밭에 애정이 생긴 건, 처음으로 밭에 감자를 심고 난 뒤였습니다. 고랑을 만들고, 김을 매고, 씨앗을 넣는 게 은근 재미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심은 토마토와 오이 는 한결 능숙하게 심을 수 있었습니다. 감자밭 김매기도 얼른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생각을 비운 채 몸을 움직이는 게 마치 운동하는 것 같아요. 깔끔해진 밭 을 보면 마음도, 몸도 개운해집니다. 왠지 시간이 지나면 하늘땅살이를 더 좋아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네요. 채송

밭일을 해보고 싶고 또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늘땅살이를 하게 되었는데요. 밭일을 하게 되면 그때 뿐만이라도 마음이 차분해지며 딴 생각을 많이 안하게 됩 니다. 원래 제가 산만한 편이긴 하지만 밭일을 하면서 차분한 성격에 한 발짝이 라도 더 가까워졌으면 합니다. 태욱

순례 중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순례 다녀오면 감자, 고추, 가지 중 하나 는 싹이 나있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순례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에 기대하며 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단 한 군데에도 싹이 안 나있었다. 아쉬웠다. 그냥 돌 아가려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싹이 안 나면 어떡하지’, ‘꼭 나야 되는데’, ‘내가 뭘 더 해줬어야 했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앉아서 김매기를 하며 간 절한 마음으로 싹이 나길 기도했다.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그건 ‘욕심’이었 단 생각이 든다. 내가 밭에 심은 그 생명이 꼭 어떻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런 상 태여야 한다 생각하며 무언가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다. 그건 밭작물들을 대하 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씨앗들도 다 자기 때가 있고, 저마 다 좋은 때에 땅을 뚫고 올라올 것이다. 혹은 땅이나 이런저런 여건이 자기와 맞 지 않아서 싹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아쉬 워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만이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땅살이 하는 것은, 밭에서 나는 작물들로 자기 먹을 먹거리를 직접 해결하는 힘을 기르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자연이 거저 주는 것들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질 줄 알고, 자신이 기른 것을 욕심내지 않고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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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먹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내가 심었으면 당연히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마음 으로 하늘땅살이 한다면 그건 교만한 생각이다. 물론 수확한 것으로 먹고 살았던 옛날에는 흉년이거나 수확량이 없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기에 힘들어할 수도 있 었다. 내 경우에는 항상 생명에 대해 어떤 모습이 옳다 생각하기보다, 생명의 때 에 맞게, 생명 각각의 모습에 맞게 대하고, 자연이 주는 만큼 감사히 받고 열심히 작물들과 만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민

먹고 싶은 게 많습니다. 특히 매운 요리가 많이 먹고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파와 고추를 작년과 올해 심었습니다. 작년에 심은 고추와 파는 싹조차 나지 않 았습니다. 흉년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하늘땅살이를 대하는 제 마음의 문제였는 지 싹이 나주질 않았고 그래서 직접 키운 파와 고추를 먹어보질 못했습니다. 올 해는 직접 키운 파와 고추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큽니다. 얼마 전 밭에 가보니 파 싹이 많이 나와 있었고 고추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 같지만 하여튼 시작이 좋 습니다. 이게 요즘 하늘땅살이를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입니다. 매운 게 너무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심은 작물이 싹트는 걸 보면 꽤 많이 행복해하는 저를 볼 수 있습니다. 싹을 심은 뒤 ‘언제 나지?’ 하며 혹여 싹이 안 날까봐 불안해하곤 하 는데, 싹이 나면 그 불안감이 싹 사라지고 싹 나준 것에 고마워하며 혼자 기뻐서 피식 웃곤 합니다. 잘 키워서 학교 밥상에서 맛있게 먹고 싶습니다. 명현

밭의 모양새와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그 밭주인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 다. 삼일학림에 와서 밭을 책임지고 기르면서 정말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 두가 저마다 성격대로 김을 매고, 저마다 개성대로 밭을 다듬고 지주대를 꽂고 씨앗을 심는다. 꼼꼼한 성격처럼 풀 한 포기 남지 않게 김을 매는 사람, 몽땅 풀 을 뽑기보다는 훑듯이 여러 번 김매는 사람, 그리고 방치 수준으로 풀을 작물과 함께 기르는 사람처럼 자기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건 김매기를 통해서였다. 학 림에 와서 김매기는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하늘땅살이는 풀을 잘 매는 것만 이 전부는 아니었다. 씨앗은 이미 넣어 싹이 났으니 이제 김매기 할 일만 남았다 고 생각한 나는 여름에 사과참외 수확 철을 놓쳐 한 입 먹기는커녕 도로 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고, 또 상추씨앗이 마를 날만 기다리다 내리는 비에 그만 씨앗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그때는 좀 힘들기도 했지만 그걸 계기로 밭작물들은 하루하 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생명임을 깨달았다. 더불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기보다 는 거둬서 먹고 씨앗을 받는 것까지, 그렇게 끝까지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정말 중 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그리고 온 몸으로 깨닫고 다짐했다. 새하

올해는 내가 심은 작물들의 씨앗을 잘 거두고 싶다. 작년에 두 가지 씨앗을 거두었다. 얼룩강낭콩과 반달콩이다. 이번 봄에 두 번째로 들어간 씨앗이 바로 얼룩강낭콩이다. 작년에 받은 씨앗을 올해 다시 심었을 때 이전에 씨앗을 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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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되게 좋았다. 이 때 받은 느낌이 올 해 하늘땅살이를 할 때 나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 작년에는 매주 집에 가야 했기에 하늘땅살이는 물론 다른 일들에도 집중 하기 힘들었지만. 올해는 작년과는 다르게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하늘땅살이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년에는, 올해 내가 받은 씨앗이 더욱 많아져, 그런 느낌을 더 다양하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늘땅살이는 물론 나의 능력만으로는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기에 꾸준히, 마음 담아 하늘땅살이에 임해야겠다. 재범

하늘땅살이 하면서 신경 써야 하는 부분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김 매기의 역할은 크다. 밭을 관리하다 보면 풀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 덕에 정 작 자라야 할 작물들은 비실비실 해지기 일쑤다. 작년에 메주콩을 길렀다. 콩을 심은 후 김매기를 더디게 했고 결국 여름학기가 되자 풀밭이 되었다. 콩들이 풀 속에서 햇빛을 받으려고 키만 크게 되었고 허약해졌다. 그래서 장마에 버티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나의 게으름 때문에 콩들이 제대로 못 자란 상황이 생긴 것이다. 또 한꺼번에 많은 양의 풀을 매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매년 다짐하 고 또 다짐하는 부분이지만 한 번도 만족스럽게 마무리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올해는 콩뿐만 아니라 다른 작물들도 힘들지 않게끔 살피고, 할 수 있을 때 적더라도 꾸준히 하는 걸로 생각했다.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에 스스로 ‘잘했 다!’ 하는 생각이 들었으면 한다. 하님

어느덧 8년째 하늘땅살이. 하늘·땅과 어울려 기적 같은 생명 움트게 하 는 일, 날마다 커가는 생명의 변화에 나도 따라 새로워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명의 변화에 둔감해지는 것이 사실이 다. 예전에는 싹 하나, 생명 결실 하나하나에서 말하지 못할 큰 감동을 느꼈지 만,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덧 생명의 변화에 조금씩 둔감해지며 그에 따 라 그 감동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작년에 내가 쓴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생 명감수성. 가까이서 함께하는 작은 생명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격’하는 것, 그것 이 하늘·땅을 살리는 삶이다.” ‘생명감수성’ 없는 하늘땅살이는 생명을 생명이 아닌 ’자원‘ 혹은 ’생산물‘로 여기는 저들의 농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과 다 르다고 안심하는 순간, 나는 내가 생각하는 하늘땅살이의 가치에서 한걸음 뒤 로 후퇴하는 것이다. 생명 만나는 일에 더욱 힘써야겠다. 8년 전, 초등학교 4학 년의 나로 돌아가야지. 작은 변화를 세심히 알아차리며 감동하고, 또, 그런 너( 해, 물, 바람, 흙, 벌레)와 내가 일구고 있는 ‘하늘땅살이’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겠다. 작고 여린 생명에 귀 기울이고 싶다. 지금 내가 터해 있는 이곳의 수많은 생명들…. 나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닌 만큼 더 마음 다해 만나가야겠다. 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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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자 연 이

북한산자락 인수동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찻집지기로 일하고 있 는 윤슬지기 선아와 바다꽃지기 시은, 그리고 한주에 한번 찻집 문 닫 기 전 두 시간 동안 지기를 돕고 있는 도우미 친구들과 전북 장수에 있 는 긴물찻집에 다녀왔습니다.

오 롯준 이

전북 장계터미널까지 마중 나와주신 긴물찻집 원만 님 차를 타고 굽 이굽이 산속 깊숙이 들어가니 산세 좋은 언덕에 있는 긴물찻집을 만났 습니다. 아랫동네 개에게 물려서 눈이 부어 안쓰러운 선한 표정의 황 구 순이가 꼬리를 느릿느릿 흔들며 우리를 반겨줍니다. 오전내내 고 속버스를 타고 온 저희를 위해 맛난 점심을 차려주신 일안 님의 정성 스런 차림에 마음과 몸 든든히 채우고, 찻잎 담을 천가방 메고 앞치마 두르고 모자 쓰고 용달을 타고 뒷산으로 갑니다. 요즘은 뽕잎 새순이 풍성히 자란 때여서 오늘과 내일은 뽕잎을 딴다 고 해요. 구획을 정해 차나무를 심어서 거두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에 절로 나는 찻잎을 따는 거여서, 비탈진 산을 오르고 덤불을 헤치며 걷 다가 찻잎을 어느 정도 따면 또 움직여서 찻잎을 땁니다. 잔가지를 베 어주시면 저희는 둘러앉아 노래 부르다가 이야기꽃 피우다가 때론 청 아한 여러 새 노랫소리에 취해 침묵하며 뽕잎향기를 맡으며 뽕잎을 훑 습니다. 황구 순이는 어느새 우리보다 먼저 자리 잡고 귀를 쫑긋 세우고 망을 보고 있습니다. 걱정할 게 없다 싶어지면 자리를 잡고 명상하듯 산세 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듬직한지, 일안 님과 원만님 곁에 저리 좋은 벗이 있음이 참 다행이다 싶었어요. 차 가방에 가득 담길 때까지 자리를 옮기며 뽕잎 훑고 내려왔습니 다. 바구니에 담으니 여섯 바구니가 가득합니다. 모둠을 나눠 뽕잎 덖 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고온으로 달궈진 무쇠솥에 뽕잎을 덖고, 망태 에 펼쳐서 열기 날리고, 유념기(찻잎을 비비는 기계, 찻잎 유익한 성분 이 유념기에서 비벼지면서 잎에 묻어나게 합니다)에 넣어 즙액을 짜 고 그것을 다시 무쇠솥에 덖습니다. 그러면 찻잎에 묻은 액이 무쇠 솥 열로 인해서 잎에 고정이 됩니다. 그 과정을 총 네 번을 해서 하루 동 안 바짝 말리면 따뜻한 물에 부어서 마실 수 있는 차가 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을 쉼 없이 움직이며 땀 흘리는 그 과정 속에서 매일 차를 만 드는 것은 몸과 마음의 수련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날 딴 찻잎을 게으름 피워 그냥 두거나 내일로 미루게 되면 금세 차는 그 맛을 잃게 된다고 해요. 그날 거둔 찻잎은 그날 안에 앞서 이야기한 흐름으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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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을 찻 집 마 주 이 야 기 、 뽕 잎 차 덖 던 날

선 고물 마 、 운 마 음 으 로


마쳐야지 자연이 준 선물을 오롯이 고마운 마 음으로 받을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첫날 차 만드는 일을 마치고 맛난 밥을 먹 은 후, 이곳에 터 잡고 14년을 우직이 차 만드 는 일을 해오신 일안 님과 원만 님의 이야기 를 들으며 우리 땅에서 난 우리 차에 대한 사 랑도 느끼고, 어떻게 차를 대하며 마셔야 하 는지, 직접 그 흐름을 함께해보니 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마을찻집 마주이야기는 긴물찻집에서 잎차 를 계속 받고 있어서 이렇게 직접 뵙고 차에 대한 이야기, 이분들이 걸어오신 걸음을 들 으니 기쁘고 함께 오래 인연 이어가길 소망하 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차와 음료도 외국에 서 들어온 것들에 입맛이 많이 길들어져 있어 서 몸도 맘도 약해지기 쉬운데, 우리 땅 기운 머금은 우리차를 마셔야 우리 몸과 마음도 맑 아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작년에는 손수 흙과 나무로 소박하고 어여 쁜 찻집을 지으셔서 장수마을에 있는 이웃분 들의 쉼터를 만드셨답니다. 흙과 나무 내음 가득한 자그마한 공간에서 산을 바라보며 차 를 마시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우리 차와 함 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산과 들에 나는 꽃잎 따다 향기로운 꽃피자와 떡볶이도 내고 계셨 어요. 복잡한 마음, 가뿐 호흡을 잔잔히 가라 앉혀주고 지금, 이 자리에 정성을 다할 수 있 게 이 시간을 선물해주신 긴물찻집과 함께한 벗들로 풍성한 시간들, 고맙게 받았습니다.

이선아 |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차 내리고 빵 구우 며, 손님 맞이하는 일상 보내는 찻집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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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누리신문 87호(2018년5월)  
밝은누리신문 87호(2018년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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