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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FANCLE

13 FORBIDDEN 초판 1쇄

2010년 8월 16일

편집인 | 러브 표지 디자인 | 늘양 펴낸 곳 | 슈팬클 (http://cafe.naver.com/withsjfanfic) 값 17,177원 ISBN 516-13-2006-05-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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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씨!!” 신경질적인 소리가 조용하던 실내 안을 가로질렀다. 카운터 뒤에 앉아 책에 머리를 박고 문 제를 풀고 있던 려욱은 양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 결이 좋은 머 리가 마른 손가락 사이로 꽉 잡혀 당겨지다가 이내 스르륵 풀리며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온 다. 아침에 도착해서부터 계속해서 풀고 있는 파트를 아직도 잡고 풀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다 즐거운 방학, 하지만 려욱에게는 하나도 즐겁지 않은 방학이었다. 취직 준비생이라는 이름 을 단 백수인 탓에 부모님 눈치가 너무도 보여 아무 일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최대한 시간이 넉넉하고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걸 골랐건만, 이놈의 방학은 려욱에겐 도움이 전혀 안 되게 아침부터 뻔질나게 학생들이 만화책이나 DVD를 빌리러 오니 문제에 제대로 집중 이 될 리가 없었다. 머리를 뜯던 손은 사실 지금 문제집을 마구 헤집어서 뜯어놓고 싶은 충 동을 참고자 했던 거였다. “피식.” “!!!” 뼈마디가 뚜렷이 드러난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카운터를 쾅쾅 치며 발악을 하고 있는데 어 디서 유쾌하지 않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려욱이 깜짝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 자 그 곳엔 블랙진에 짙은 보라색 반팔 티를 입고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학생 하나가 서있었다. 급격히 무안해져서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책으로 다시 고개를 박았다. 보아 하니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것 같은데, 저런 꼬맹이한테까지 비웃음을 당하다니! 얼굴이 발


그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쪽팔려. 훤칠한 키에 흰 피부를 가진 그 학생은 천천히 려욱을 지나 만화책이 꽂혀있는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어슬렁어슬렁 책장을 하나씩 건드리 며 움직여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저기요.” 카운터에 코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쪽팔림에 대한 자책을 하는데 흐흠- 하며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부드러운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려욱은 고개를 들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네?” “짱 어딨어요?” “...짱?” “만화책 말이에요. ‘짱’” “아아.....” 뜬금없이 웬 짱이냐 했더니 만화책 제목을 말하는 거였다. 려욱은 들고 있던 펜을 책 옆에 가지런히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 뒤에서 나와 키가 훤칠하고 하얀 그 학생 옆을 지나가는데 그는 정말 키가 엄청 크다. 다리가 대롱대롱 매달 리는 스툴 위에 앉아 있었을 땐 몰랐는데 이제야 실감이 난다. “피식.” “...??” 또 한 번 비웃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려욱이 의아하게 그 학생을 올려다봤다. 뭐야, 왜 웃지? 라고 생각하며 그를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데 아래위로 훑는 그의 시선이 느 껴진다. 그리고 연이어 들리는 픽, 피식, 전혀 달갑지 않은 소리들. 이 자식, 지금 나 키 작 다고 비웃는 건가?!!!! “저기 꽂혀있는데 좀만 더 살펴보면 됐는걸..” “......” “다음부터는 제대로 찾아보고 물으세요. 바로 앞에 있었는데 그걸...” 아까 그가 어슬렁거리던 책꽂이에 바로 꽂혀있는 약 50권이 넘는 만화책을 가리키며 려욱 이 말했다. 뭔가 마땅찮은 투가 그대로 묻어나게 말을 하면서도 손님이니까 대놓고 빈정 상 하게 말은 못 하겠어서 말꼬리를 흐리면서 학생의 눈치를 보는데 얼굴이 하얀 학생이 쌍꺼 풀이 얇게 진 눈을 또르르 굴리며 딴청을 피운다. “이봐요, 학생!”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못 찾겠는데..” 바로 니 머리 위에 있잖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꽉 누르며 려욱이 팔을 뻗었


다. 저기-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만화책이 천장 바로 아래에 있는 가장 위 칸에 꽂혀 있어서 려욱의 손가락 끝이 만화책에 겨우겨우 닿는다. “어디라구요? 꺼내주세요. 안 보이는데..” “아니 바로 여기 있잖아요! 여기 안 보여요?” “...어디요? 꺼내달라니까요?” “여깄잖아요!” 려욱이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데 그가 능청스럽게 려욱의 얼굴에 자기 얼굴 을 들이밀며 ‘어디요오?’ 하고 다시 묻는다. “아 손 안 닿으니까 직접 꺼내요 좀! 여기 내 손가락 있는데!” “아아, 여기~” 드디어 짜증이 폭발한 려욱이 버럭 거리며 발돋움을 해서 손가락을 겨우 만화책 등잔에 갖 다 대자 그가 여유가 잔뜩 남는 팔을 뻗어 만화책 몇 권을 꺼내든다. 쥐가 나려고 하는 팔 을 내리고 몸을 쌩 돌려서 카운터로 가는데 뒤에서 킥킥대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번호 뒷자리요.” “팔팔..이 삼?” “88..2...3... 성함이?” “조.규.현.” 화면에 전화번호 뒷자리 네 개를 입력하자 동일 번호를 가진 이름이 세 개 떴다 . 그래서 이 름을 묻자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빨간 훤칠한 그 학생이 또박또박 한 글자씩 떼서 자기 이 름을 발음한다. 그를 따라 조규현을 목록에서 찾아 클릭을 하자 그의 개인페이지가 뜬다. 려욱은 거기까지 해놓고 그가 꽉 잡고 있는 만화책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턱. “뭐에요!” 려욱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뒤로 뺐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고 마른 손바닥 위로 하얗 고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꽤나 커다란 그의 손이 턱 얹혀 있다가 툭 하고 카운터 위로 떨어 져 내렸다. “달라면서요.” “만화책 달랬지 누가 손 달랬어요?!” “아.. 그럼 만화책을 달라고 하지 손만 내밀면 어떻게 해요.” 너무 당연하고도 엉뚱한 투로 그가 ‘손을 내밀면 당연히 손을 주는 거다’ 라고 우기며 만화 책을 넘겨줬다. 려욱은 어이없는 얼굴로 만화책을 낚아채서 바코드 찍는 기계로 다섯 권의 만화책 바코드를 다 찍고 비닐봉지를 하나 뜯어 그 속에 만화책을 쑤셔 넣어 카운터 위에


올려놨다. 빤-히. 얼굴이 하얗고 입술은 빨간, 키가 크고 조금은 말끔하게 생긴 그 학생이 려욱을 보 고 섰다. 려욱은 너무나도 제대로 내려다보는 그 시선이 싫어서 발뒤꿈치를 들고 스툴 위에 엉덩이를 밀어 올려 앉았다. 다리는 땅에서 떠서 대롱거리고 매달렸지만 눈높이가 그와 비 슷해져서 려욱은 괜히 즐거운 기분이 들어 잘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움직여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 “......” “...가져가시면 되는데요.” “수고하세요.” 뚱한 목소리로 려욱이 말했다. 규현은 비닐봉지에 둘째손가락을 끼워 넣어 묵직한 그 봉투 를 집어 들고 비디오방을 나섰다. 유리문에 달린 종이 몇 번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잦아들 고 훤칠한 키의 학생이 저 멀리 걸어가는 것이 그 너머로 비춰보였다. “뭐야 저 이상한 녀석은. 생뚱맞게..” 려욱은 책 옆에 가지런히 내려놨던 펜을 집어 들며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 중간에 풀다 말았던 문제를 다시 눈으로 좇는데 어디까지 풀었는지, 공식이 뭐였는지 새하얗게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이상한 녀석이 한참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안 그래도 안 풀리는 문제가 더 안 풀린다, 짜증나게.

“조.규.현.이요.” “......” 자기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얘기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만화책 바 코드를 대강 찍어 비닐봉투에 담았다. 매일 와서 똑같이 ‘짱’을 다섯 권씩 빌려간 지도 벌써 열흘째, 그렇게 자기 이름을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외고 있는데 도 매일 저런다. “수고하세요.” “......” 딸랑딸랑 종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조용함이 찾아오기까지. 려욱은 그가 비디오방에 들어와 서 나갈 때까지 입도 한 번 열지 않고 꿋꿋이 자기 할 일만 했다. 뭔가 상종하기 싫은 녀석 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람을 비웃는 게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어딘가 제 나이에 맞지 않 게 거만해 보이는 것이.. 아무튼 재수 없다. “딴 재밌는 만화 없어요?”


“헉” 려욱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나며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에 하얗고 마른 얼굴이 가득 클 로즈업 되어 보였다. 얇은 쌍꺼풀 아래로 까맣고 동공이 큰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 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속눈썹은 되게 기네, 자식이.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은데 언제 들어왔는지 만화책을 담은 봉지를 옆구리 에 낀 채로 그가 물었다. “딴 것도 좀 보고 싶은데, 뭐 재밌는 거 추천해 달라구요.” “아..저기, 포스터 붙어있는 거 보시면 추천만화책 목록 있거든요? 그리고 그 옆에 신간목 록도 있고..” “누가 그거 몰라서 물어요? 그런 거 말고 아저씨가 재밌게 본 거 말이에요.” “......” 뭐? 아저씨이? 려욱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가 지금 몇 살인데 나보고 아저씨 래? 이 자식이.. “만화책 안 봐요? 만화책방에서 일하면서 만화책도 안 보나?” “...저기 꽂혀있는 나루토도 재밌고, 추리물 같은 거 좋아하면 저쪽에 김전일이나 코난 같은 것도 괜찮구요, 판타지류 좋아하면..” “헤에. 보긴 보나보네요. 나루토? 그게 어딨는데요?” 바로 저 앞에 꽂혀있는데 또 묻는 규현 때문에 려욱은 결국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나루토가 있는 곳을 가르쳐줬다. 이번에는 눈높이정도에 책이 꽂혀있어서 려욱이 직접 빡빡하게 꽂힌 책을 잡아 꺼내서 1권부터 규현에게 건네준다. “그림체 귀엽네. 이거 무슨 내용이에요?” “읽어보면 알잖아요.” “읽기 전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알바가 이렇게 불친절해요? 사장님한테 일러버릴까 보다.” 빙글빙글 웃으며 규현이 말했다. 인내심이 극에 달한 려욱이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 가 ‘사장님’ 이라는 말에 다시 화를 가라앉힌다. “닌자 나오고 그런 내용이에요. 전 재밌게 봤어요.” “오호... 그래요? 아저씨가 재밌게 봤다고?” “......” 빠직. 려욱의 이마에 힘줄이 돋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 자식이 자꾸 어디다 대고 아저씨야! 규현은 ‘나루토’를 세 권 꺼내들더니 려욱을 지나쳐 카운터로 걸어갔다. 려욱은 규현이 만화 책을 꺼내며 딸려 나온 옆의 책들을 대충 탁탁 쳐서 정리해놓고 얼른 카운터 뒤로 돌아가


스툴 위에 올라앉았다. 아래로 내려 보던 시선이 려욱의 눈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올라온다. “픽” 또! 왜 자꾸 웃는 건지 알겠는데, 내가 키를 쭉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라고! 려욱 은 그의 그 웃음이 거슬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었다 이젠. 매일 와서 키에 대해 비웃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소리라도 질러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팔팔이삼.” “네.” “......” “......” 려욱은 숫자 네 자리를 탁탁 쳐 놓고 엔터를 쳤다. 세 사람의 이름이 뜨는 것에서 맨 아래 있는 이름을 클릭하려는데 앞에 서 있던 하얀 얼굴의 학생이 또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 준다. “조.규.현.” “......” “조규현이라구요. 내 이름.” “......” “조규현이라니까요? 찾았어요?” 대답 없는 려욱을 향해 몸을 쭉 내밀고 려욱이 들여다보는 화면을 같이 보려고 목을 빼며 규현이 말했다. 려욱이 꽉 잡은 마우스를 움직여 포인터로 ‘조규현’을 클릭했다. “이름이 뭐에요?” “......” “내 말이 안 들려요?” 규현이 희고 큰 손바닥을 쭉 뻗어 려욱의 얼굴 앞에 왔다갔다 움직였다. 려욱은 만화책 뒤 편에 붙어있는 바코드 스티커를 기계로 찍다가 훅 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손에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뭐에요?” “이름이 뭐냐니까요? 매일 보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자구요. 아니지, 아저씨는 내 이름 알 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아저씨 이름 좀 알고 싶은데.” 확실히 짜증이 났다. 이 자식 진짜 뭐야? 어디다 대고 아저씨, 아저씨 그러면서 남의 이름 을 물어봐? 지가 뭐라고?


“네? 알려줘요, 비싸게 굴지 말고.” 여유로운 얼굴로 그가 말했다. 얼굴은 하얗고 입술은 빨가며 쌍꺼풀도 있고 눈동자는 까만, 키가 훤칠하고 꽤 준수하게 생긴 조규현이라는 저 학생이. 려욱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다시 움직여 바코드를 마저 찍었다. 그가 들고 있는 비닐봉투에 여유가 남아보여서 려욱은 만화 책 세 권을 그의 가까이로 밀어놓고 빤히 규현을 쳐다봤다. 그도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려욱을 마주봤다. 잠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가만히 생각을 하자니 이 아이는 참 우스운 녀석이었다. 왜 자꾸 이름을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려욱은 약간 호기심이 생겼다. 매일 와서 똑같이 비웃는 것은 뭐며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게 구는 것도 그렇고. 마치 어린 꼬마가 엄마의 관심을 끌 려고 일부러 나쁜 짓을 해놓는 것처럼 구는 것이. 좀.. 귀엽네? “빨리요. 이름 알려주면 형이라고 불러줄게. 아, 근데 나이가 몇이에요? 혹시 진짜 아저씨 뻘이면서 아저씨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착각병 걸린 사람 중에 하나는 아니겠죠?” “착각병?” “있잖아요 왜, 나이는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 엄청난 동안 덕에 이십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 이거나 그래서 종종 자기가 아저씨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그런 사람들.” 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려욱은 그의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뭔 엉뚱한 소리야 정말. “어? 웃었다! 얼른 말해줘요. 이름, 나이! 아, 나는 열여덟이에요.” “......” “왜요? 더 어려 보여요?” 또 얼굴을 바짝 대고 규현이 물었다. 려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목을 뒤로 쭉 뺐다. ‘어려보이긴. 너무 학생스러운 옷차림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스무 살은 넘었다고 생각했을 거다 뭐.’ 그의 말에 소리 내어 대답하지는 않는데도 은근히 속으로 대꾸를 일일이 다 하며 려욱이 입술을 삐죽댔다. “아저씨 몇 살인데요? 내가 저번에 공부하는 거 슬쩍 봤는데 취직준비 하는 것 같던데, 맞 죠? 그럼 군대도 다녀왔을 거고.. 스물여섯? 스물일곱?” 규현이 대충 려욱의 나이를 가늠해보며 물었다. ‘넉살도 좋다.’ 려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니 세상에 아무리 만화책을 매일 빌리러 온다고 해도 그렇지, 만난 지 이제 겨우 열흘 정도 됐으면서 어쩜 이렇게 들이대고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려욱이라면 꿈도 못 꿀 행동이었다. 어려서 용감한 건가. “스물여덟. 김려욱이에요.” “오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거예요 그럼? ���와.. 아저씨 맞네 뭐~ 그래도 그렇게 불리 기 싫으면.. 려욱씨 어때요? 려욱씨 좋나?” “......”


“괜찮다구요? 알았어요 그럼 려욱씨. 형이라고 해주곤 싶은데 너무 나이가.. 많다 아저씬.”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면서도 려욱은 그 순간에 후회를 했다. 왜 저런 꼬맹이를 상대해주고 있는 거지 지금. “아~ 그래도 상당히 동안이에요. 사실 취직준비 하는 거라는 걸 몰랐다면 아마 대학생쯤? 으로 봤을 건데..” “......” “기분 좋죠? 사실 난 나이보다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더 들어 보이는 편이니깐, 우리 둘 이 다니면 열 살이나 나이차이 난다고는 생각 못 할 거예요. 그죠?” 조~금을 유난히도 강조하는 규현에게 려욱은 콕 집어서 ‘너랑 나랑 같이 어디 돌아다닐 일 없어’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말 다 하면서 즐거워하는 그 아 이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것이 저 얼굴이 하얗고 눈동자는 까만, 키가 크고 잘 생긴 열여덟 살 조규현이라는 아이를 본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혹시 조규현씨 핸드폰 맞나요?” -..맞는데.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로 그 건방진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로 듣는 목소리는 평소에 듣는 것과 는 뭔가 달랐다. 만화책을 빌리러 올 때는 자꾸 비웃고 말 걸고 혼자 좋아하고 그래서인지 정말 장난꾸러기 열여덟 살 남자아이 같았는데 전화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는 어쩐지 좀 차 분하고 어른스러웠다. 듣고 있다간 사르르 잠들 것 같은 그런 편안한 목소리.. “아, 여기 **책방인데요, 얼마 전에 빌려 가신 DVD가 연체됐거든요. 언제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네? 아... 그랬나요? 죄송합니다. ‘언제쯤 갖다드릴게요’ 정도의 딱 떨어지는 대답을 기대했던 려욱은 김이 새는 대답을 듣고 는 잠시 아무 대꾸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뭐야, 죄송하다면 다인 줄 아는 거야 뭐야.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릴 것 같아서 려욱이 얼른 말을 이었다. “언제 가져다주실 수 있죠? 오늘 내로 가져다주시면 좋겠는데.” -정말 죄송한데, 밤에 가져다드릴게요, 지금은 좀 어려워서요. 이상하다. 그 답지 않게 너무 예의바른 대답이었다. 려욱이 기억하는 조규현이라는 건방진 학생은 항상 자신에게 어딘가 깐죽대기도 하고 뺀질대기도 하면서도 꽤 귀엽게 굴었었는데. 녹아내릴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이것도 그 녀석 답지 않은 목록에 추가. 뭔가 불편한 기분 이 들었다. 뱃속에서 뭔가 꾸물대는 거 같은 편치 않은 기분이.


‘혹시 나인 걸 모르는 걸까?’ 려욱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저녁타임 알바는 다른 사 람이 하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몰랐다. 오늘은 어쩌다가 한 번 려욱이 대신 해 주는 거니깐. 나라는 걸 알았다면 덜 딱딱하게, 더 즐겁게 전화를 했을 지도 모른다. 평소 처럼 ‘아저씨~’ 라고 하며 장난도 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편하게 꿈틀대던 뱃속 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래, 나라는 걸 몰라서 그런 거겠지. “네 그러세요 그럼. 열두시에 닫으니까 그 전에 와주셔야 하거든요? 연체료 있구요.” -예 알겠습니다. 조금 딱딱한 대답을 뒤로하고 전화가 끊겼다. 려욱은 가게 전화기를 황망한 눈으로 쳐다봤 다. 뭐야, 이 자식 진짜 끝까지 모르잖아?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로 그의 목소리인 걸 알아챘는데 그는 모른다. 어째서? 게다가 그것도 오랜만이었다. 규현은 만화책방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며 하루에 다섯 권씩 나루토를 빌려다 보더니 49권까지 다 보고 반납하던 날 처음으로 신간 DVD를 하나 빌려갔 다. 그리고는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 신작 DVD는 1박 2일 동안만 대여가 가능한데 그는 벌 써 반납 일을 사흘이나 넘기고 있었다. 어째서 한참동안을 매일 도장 찍듯이 오던 그 아이 가 오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바쁜가보지 뭐..” 미성의 목소리가 려욱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래, 그냥 바빠서 못 올 수도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긴 뭘.” 려욱은 규현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때마침 백수쯤 되어 보이는 나이가 꽤 있음에도 후줄근한 차림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만화책을 산더미만큼 안고 돌아 왔다. ‘어라.. 여기 알바 하던 아가씨 관뒀어요?’ 그 손님은 만화책을 카운터에 얹어놓고 한 참을 딴청을 피우더니 만화책을 하나씩 바코드 찍어 반납절차를 하고 있던 려욱에게 슬그머 니 물었다. 저녁타임 알바생은 20대 초반의 예쁘장한 학생이었다. 그녀를 보느라고 만화책 을 빌리러 오나보다는 생각이 들어서 픽 웃은 려욱은 ‘아니요 오늘 일이 있어서 자리를 좀 비웠어요.’ 라고 대답을 했다. 생각보다 저런 손님이 많은 것 같았다. 아까 전에도 저녁타임 알바가 원래는 출근했어야 할 시간대가 되자마자 두 명의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군필자 가 확실한 아저씨 포스 풍기는 대학생들이 들어와서 판타지소설 두 권을 빌려가면서 거의 30분을 죽치고 앉아있더니. “진짜 할 일 없는 인간들이네..” 손님이 나간 후 만화책을 정리하며 려욱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알바생을 보려 고 만화책방을 들락날락 한단 말이야? 그 학생이 그렇게 예쁜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머 리를 굴리던 려욱은 금방 다시 문제집으로 복귀했다.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산더미였다. 딸랑- 한창 집중이 잘 되던 찰나 울린 종소리는 려욱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제


밤 11시 40분, 마감하기 20분 전인데 이 시간에 오는 손님도 있단 말이야? 순간적으로 짜 증이 치솟아서 고개를 홱 들었는데 까만 밤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 얼굴을 한 소년이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에, 아저씨 나 보고 싶었나봐? 그렇게 반가워할 줄은..” “무, 무슨 소리에요! 얼른 주세요.” “뭘?” “...뭐냐니요! DVD지!” “거봐, 보고 싶었네.” 규현이 입을 쭉 찢으며 씩 웃었다. 려욱은 괜히 그게 밉살스러워서 그가 내민 DVD를 낚아 채 얼른 바코드를 찍었다. 화면에 연체로 1500원 이라고 빨갛고 굵은 글씨가 떴다. 려욱은 고개를 숙여 DVD를 원래 케이스에 바꿔 끼우면서 힐끔 규현의 눈치를 봤다. 규현은 회색 폴로티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이 새하얬다. 긴 손가락을 반 정도 바지 주 머니 속에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서있는 폼이 꽤 불량스러워 보였는데 그의 얼굴은 눈 밑이 검고 상당히 피로한 느낌이어서 몽글몽글 안쓰러움이 자꾸 솟아났다. “아저씨 왜 나 자꾸 쳐다봐? 마음에 들어?” “......” 규현이 눈썹을 한 쪽 올리며 물었다. 려욱은 기가 차서 아예 그를 무시하기로 하고 힐끔거 리던 눈초리를 거뒀다. “어? 진짜? 정말?” “뭐가 정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말이 안 되긴. 보고 싶어 했고, 자꾸 나 쳐다보고 있고. 아저씨 진짜 나 좋아하는 거 아니 에요?” 규현은 빙글빙글 웃으며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려욱은 그를 살짝 째려봤다. 뭐야 저 뻔뻔 함은? 규현의 눈에 장난기가 잔뜩 서렸다. 려욱은 그걸 보고는 얼른 자리를 피해서 반납된 DVD를 제 자리에 꽂으러 갔다. 규현이 한 쪽으로 삐딱하게 기대면서 몸을 돌려 려욱이 걸 어가는 걸 빤히 지켜봤다. “......” “......” “....연체료는 1,500원입니다.” “아!” 려욱이 규현을 스쳐 지나 스툴 위에 앉으며 말했다. 그제야 규현이 바지를 뒤적이며 천 원 짜리 몇 장을 꺼낸다. “아저씬 어디 살아요? 오늘은 근데 왜 아저씨가 이 시간까지 있어요? 밤엔 항상 예쁜 누나


가 있던데.” “오늘 일이 있다고 바꿔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있는데. 왜, 예쁜 알바생 못 봐서 서운 한가보죠?” 려욱이 돈을 받아 채며 톡 쏘아붙였다. 카운터를 열어 오백 원을 거슬러주려고 동전을 집어 드는데 잘 잡히지가 않는다. 손동작이 어눌한 걸 흘끔 본 규현이 ‘천천히 줘도 되요’ 라며 아주 만화책방에 눌러 붙을 기세로 카운터에 다시 기댔다. 려욱은 동전을 한 움큼 쥐어서 오백 원짜리를 하나만 골라 카운터 위에 탁 내려놓았다. 뭔가 기분이 나빴다. 저 녀석도 알 고 보니 알바생 보러 들락날락하던 그런 인간들 중에 하나였던 거다. “아니요. 난 좋은데? 항상 아저씨는 낮에만 있으니까. 낮에 일이 있으면 반납하러 저녁에 와야 되는데 그러면 아저씨가 없잖아요. 그래서 연체된 거예요, 며칠 동안 바빠서 낮에 못 오는 바람에.” “.......” “게다가 밤에 반납하면 아저씨를 보러 올 구실이 하나 줄잖아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려욱은 얼른 딴청을 피우며 호들갑스럽게 동작을 크게 움직였 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아 정말! 하지만 려욱은 인정해야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는다는 걸. “안 가요? 이제 곧 끝날 시간인데. 미성년자가 늦게 돌아다니면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나.” “내 걱정도 해요? 우와~ 아저씨, 아니.. 려욱씨? 큭큭. 려욱씨가 내 걱정도 다 해주고 영광 인데.” “.......” “아 이상하다. 아저씨한테는 아저씨란 호칭이 어울리는 거 같은데..” 규현이 ‘려욱씨’ 라고 불러놓고 좀 멋쩍은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려욱은 어이가 없 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지보다 한참 나이 많은 사람한테 려욱 씨이? 그리고,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란 호칭이 어울린다는 거야? “꼭 그런 느낌이었는데. 꼬맹이한테 ‘어유~ 우리 애기 다 컸어요? 이제 어른이야~’ 하는 그런 느낌? 무슨 느낌인지 알아요 그거?” “........” “어라, 아저씨 화났나?” 이젠 정말 어이가 없다. 바늘아 빨리 움직여라 얼른 열두시가 되도록. 려욱은 그렇게 속으 로 기도를 백 번쯤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짜 어떤 식으로 대꾸를 해줘야할지 모 르겠다 저 녀석한테는. 대체 여기서 나한테 이러면서 바라는 게 뭐야? “집이 어디에요? 차 끊기는 거 아니에요?” “상관 마세요. 더 빌리실 거 없으면 돌아가세요.”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뭐라도 빌려야겠네. 그래야 또 아저씨 보러 오잖아요.”


“...그거 좀 그만 하면 안 돼요? 불편해요 엄청.” “에? 뭘?” “보러 온다느니 어쩐다느니 그거! 사람 놀리는 게 재밌나본데, 난 그거 별로 달갑지 않거든 요? 나이도 어린 학생이.” “놀린 거 아닌데? 솔직하게 말 한 건데.” 규현이 또 씨익 웃으며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책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규현의 발 걸음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책을 뒤적이는 소리 책을 꺼내는 소리 그리고 또 돌아다니는 소 리. 시계바늘은 55분을 향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5분만 더 참으면 된다. 그러면 되는데.. 뭔가.. 아쉽다? “여기요. 팔팔이삼.” “......” 이번엔 명탐정 코난을 앞에서부터 세 권 꺼내왔다. 려욱은 자동적으로 8823을 쳐서 입력하 며 리스트에서 ‘조규현’을 찾았다. “조.규.ㅎ...” “조규현씨요 네 알아요.” 또 한 글자씩 끊어서 발음하는 걸 냉큼 잘라버리며 려욱이 대꾸했다. 이미 려욱은 세 개의 만화책을 모두 바코드로 찍어 입력해놓고 규현이 돈을 주는 걸 받으려고 손을 내밀고 있었 다. 규현은 피어나는 미소를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규현아~ 한 번만 해봐요.” “...네?” “규현아~ 하고 한 번만 불러 보라구요.” “....왜요?” “내 이름이잖아요, 몰라요?” “그건 아는데, 내가 왜 학생 이름ㅇ..” “아 한 번만 아저씨. 네?” 백 원을 거슬러주는데 규현의 하얀 손이 백 원을 쥐고 있는 려욱의 손을 꽉 잡았다 . 려욱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봤다. 그랬더니 뜬금없이 이름을 불러보라니? 아 이 자식 진짜. “에이, 싫어요? 아저씨 진짜 너무 비싸다.” “왜 이래요, 손 놔요.” “아니, 열 살이나 어린 내가 아저씨 좋다고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저씬 어떻게 꿈쩍을 안 하 냐?” “무슨 소리에요, 놓으라니까요!”


“에? 몰랐어?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 거?” “......” 손을 잡아 빼는데 규현이 능청스럽게 말한다. 려욱은 순간적으로 손을 빼려고 잔뜩 넣었던 힘이 탁 빠졌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헤에.. 몰랐네. 어떻게 모르냐, 눈치도 없지.” “....놔요 이거. 놓으라고!” “싫어. 난 한 번 잡은 건 잘 안 놓거든.” 힘이 빠진 려욱의 손을 더 꽉 잡아 려욱을 앞으로 당기며 규현이 말했다. 려욱이 끌리듯이 스툴에서 내려와 카운터에 바짝 다가섰다. 려욱의 눈높이에는 정확히 규현의 입술이 있는 곳이었다. 꿀꺽. 으악!!! 엄청나게 어색하고 무안함이 드는 와중에 갑자기 침이 잔뜩 고이는 거 같아서 꼴까닥 목을 움직였는데 조용하던 실내에 그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릴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쪼..쪽팔려!!!! “....뭐야 아저씨, 무슨 상상을 한 거야?” “........” “크큭. 혹시 내가 뽀뽀라도 할 줄 알았던 건가?” 규현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규현의 말에 돌처럼 뻣뻣이 굳어진 려욱이 손을 확 잡 아 빼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규현은 돌아선 려욱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하하. 아저씨 되게 재밌다. 아하하하- ” “....시끄러워요. 문 닫을 시간이니까 가주세요. 빨리!” “크크 알았어요. 아저씨 그럼 내일 봐요. 아하하” 규현을 마주보는 걸 피하며 려욱이 말했다. 규현은 만화책을 집어 들고 문을 나서며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려욱은 규현이 나가고도 한참을 그대로 가만있었다. 진짜 무슨 생각이 었지? 그 순간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도 무안하고 창피했다 완전. 설마 무의식 중에 뭔가를 기대했던 건가?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김려욱 미쳤어 진짜. 뭔지 모르겠다 이런 건. 건방지고, 쉴 새 없이 깐죽대며, 자꾸만 뭔가 거슬리는 행동을 하 는 그런 꼬맹이 같은 녀석에게, 고백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운 ‘나 아저씨 좋아해’ 라는 통보 를 받고 마음이 떨리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할 수는 없는데.. 느껴졌다 그 감정 들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떨림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손을 꽉 잡았을 때 느껴지던 그 감촉, 한 번 잡은 건 놓지 않는다는 꽤 진부하고 유치한 대사를 읊던 그 목 소리, 까맣고 흔들림 없던 눈동자. 그가 그 순간 나랑 사귀자- 라고 했다면 난 오케이 했을 지도 모르겠다. 좋아서가 아니라 분위기에 이끌려서. 그에겐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분위


기가 있는 것 같았다. 조규현이라는 이름의 번호 뒷자리 8823인 하얗고 건방진 키만 큰 18 살짜리 꼬맹이한테..

“생각은 좀 해봤어?” “.......” “응 아저씨? 설마 고백 받고 그냥 날름 하고 입 닦을 건가?” “...말이 좀 짧으시네요 손님.” “엥? 아, 반말? 싫어요? 그럼 존댓말 쓰고 꼬박꼬박 진짜 아저씨 취급해주는 게 좋아?” “.......” 그게 그 뜻이 아니잖아! 빠직 힘줄이 돋아나는 걸 참으며 려욱이 빠른 속도로 그가 반납한 만화책을 정리했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 미안해요, 반말해서.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요, 응?” “..무슨 얘기요. 할 말 없는데요.” “뭐야 아저씨, 할 말이 없어요 진짜?” “......할 말이 뭐가 있어야 하는데요?” 려욱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무슨 대화를 하자는 건지,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 다. 그는 나에게 장난을 친 것뿐이고 난 그것 때문에 곤란한 것뿐이잖아. “아무거나, 아무 거라도! 그냥 무시하지 말고..” 그의 목소리가 조급하게 들렸다. 항상 느릿하면서도 또박또박 제 할 말을 다 하던 그 목소 리가 아니었다. 저음의 듣기 좋은, 흡사 노래 같은 그런 느낌이 아니다 오늘은. “무슨 대답을 기대했는데요? 장난치지 마세요.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장난이랬어? 나 장난친 적 없어. 그런 거 아니라고. 내ㄱ...” 딸랑규현은 카운터에 바짝 붙였던 몸을 반사적으로 떼어내며 입구를 쳐다봤다 . 뽀송한 화장에 물결치듯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를 한 쪽으로 넘겨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앳된 얼굴의 여자 하나가 또각 거리는 힐을 신고 들어오다 규현과 눈이 마주쳤다 . 그녀는 쌍꺼풀 없이 동그란 눈을 얼른 내리며 신작 DVD가 주르륵 꽂혀 있는 곳으로 가서 이것저것 고르기 시 작했다. 규현의 눈이 그 여자를 좇았다. 려욱은 ‘어서 오세요’ 라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넨 후 그 손님이 규현과의 대화를 끊어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규현의 눈이 집요하게 그 녀를 따라다니는 걸 보며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 고백이라도 또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처럼 굴더니 예쁜 여자 들어오니까 또 냉큼 쳐다보는 것 봐 . 그래놓고 장난이 아니라고? 흥. 됐어, 내가 믿나 봐라.


“저어.. 혹시 ‘스카이하이’ 있나요?” “네, 있어요.”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못 찾겠어서..” “아.. 잠시만요.” 그 여자 손님이 여기저기 뒤적이더니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카운터로 다가와 물었다 . 곱 상한 외모와는 달리 꽤 중성적인 보이스라 잠시 놀랐던 려욱은 얼른 컴퓨터에 영화 제목을 치고 DVD가 분류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직접 카운터에서 나와 DVD를 찾는데 규현과 그 여자 손님이 나란히 졸졸 따라온다. 손님은 그렇다 치고 규현은 왜 따라오는지, 그렇게 한 시라도 가까이서 여자를 보고 싶은 건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다. “여기...아....” 책장을 쭉 훑어보자 맨 끝에 손님이 원한 영화가 꽂혀 있었다. 찾고 있던 걸 발견한 기쁨에 배시시 웃으며 려욱이 팔을 뻗는데 하얗고 조금 더 긴 팔이 쑥 옆으로 뻗어 나와 DVD를 뽑아 들었다. “여기요.” “어머, 감사합니다.” 그녀가 규현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웃을 때마다 반달 모양으로 휘는 눈매가 꽤나 매력적이 었다. 려욱은 규현에게 보이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서둘러 카운터로 돌아왔다. 손님이 전 화번호 뒷자리를 부르고 대여절차를 하는 동안 규현은 손님 뒤편에 서서 팔짱을 끼고 고개 를 삐딱하게 한 채로 그녀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보고 있던 려욱의 눈에 그가 얼핏 손님 너머로 보였다. 저 눈빛 좀 보라지, 아주 덮치겠네 그냥. 단단히 꼬인 것 같은 생각이 잠시 머리에 떠올라 은근히 짜증스러운 손길로 DVD 뚜껑을 휙 열던 려욱이 순간 흠칫 놀랐다. 뭐야, 나 왜 이런 거에 짜증을 내고 있는 거지? “여기요. 대여기간은 2박 3일입니다.” 그 찰나의 당황스러움을 들킬까 얼른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에게 DVD 를 건넸다. 그녀는 다정한 려욱의 말투와 화사한 미소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지갑에서 꺼낸 돈을 내밀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유리문을 열자 딸랑이는 소리가 났다. 려욱은 최대한 밝게 인사를 하곤 DVD가 본래 담겨있던 통을 카운터 아래 서랍에 있는 다른 DVD통들 위에 올려놨다. “웃지 마 아저씨. 안 멋있어. 저 여자가 아저씨 좋아서 그러는 거 같지? 그런 거 절대 아니 라고!”


“......??” 손님이 떠날 때까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규현이 유리문이 닫히자마자 다짜고짜 말했 다. 려욱은 이게 뭔 소리야 싶어 토끼눈을 뜨고 규현을 쳐다봤다. 누가 뭘 좋아하고 뭘 어 쩐다고? “저 여자는 분명 아무한테나 다 웃어주는 그런 사람일 거야. 아저씨가 뭐 특별해서 그런 줄 알아?” “....저는 그런 식ㅇ....” “그러니까 마주보고 웃어주지 말라고! 왜 그렇게 남자가 웃음이 헤퍼? 아무한테나 다 웃고. 나한테만 안 웃고..” 어라? 이건 진짜 뭔가, 저게 장난하나 하는 어이없고 당황스럽고 일말의 짜증도 섞인 얼굴 을 하고 있던 려욱은 맥이 탁 풀려서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진짜 웃긴 자식이다 . 그 여자가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쳐다보고 친절한 사람처럼 DVD도 대신 꺼내주고 그녀가 생글생글 웃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지금 나한테 뭐라는 거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웃기고 재밌었다. 그래서 려욱은 더 크게 웃었다. 책방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찰 정도 로. 려욱의 웃음이 이어질수록 규현의 얼굴이 조금씩 빨개지기 시작했다. 규현은 무안한 표정으 로 눈길을 피하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또박또박 려욱에게 말했다. “나한테만 웃어! 나한테만 안 웃고 남한테 다 웃어주지 말고. 아저씨 완전 거꾸로라고.” “.......” “기분 나빠. 그렇게 딴 여자한테 웃으면.. 나보고 장난하는 거라고 했지? 아니야, 장난 아 니야. 전혀 아니라고!” “.......” “..아 좀 뭐라고 대꾸라도 해봐! 아저씨 진짜 안 그렇게 생겨서 사람 엄청 피 말리는 거 알 아? 내가 아저씨 아니었으면 매일 만화책 빌리러 왔을 거 같아? 나 만화책 잘 읽지도 않았 단 말이야. 아저씨 보려고 매일 온 건데, 아저씨랑 친해지려고 일부러 장난도 치고 그런 건 데 아저씬 맨날 나만 보면 무슨 벌레 보듯이 그러고! 진짜.. 뭐야 정말...” 규현이 느릿느릿 제 할 말을 다 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만 입술을 더 내밀면 삐진 어린아이들이 하는 것과 완전 판박이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규현이 입술을 오물오물 움 직이더니 아랫입술이 조금 삐죽 내밀어졌다. 민망하니까 려욱과 눈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옆 을 보고서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술을 내밀고 있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려욱은 끝내 참지 못하고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조규현, 왜 이렇게 귀여워? “우, 웃지 마! 그런 식으로 웃으라는 게 아닌데..” “아하하하하” “...뭐야, 완전 청개구리네. 웃으라니까 안 웃고 웃지 말라니까 웃고. 아 몰라, 나 갈래.” 규현이 홱 돌아섰다. 려욱이 흡사 토라진 거 같은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큭큭 거리며 계속


해서 웃자 규현은 정말로 카운터 위에 내려놨던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내일 올게 아저씨. 그만 웃어. 주름 생겨.” 퉁명스럽게 말하며 규현이 몸을 움직였다. 더디게 움직이는 몸짓과 완전 홍시처럼 제대로 익은 얼굴을 보건데 그는 가겠다고 계속해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잡아주길 바라는 눈치였 다. “존댓말.” 려욱이 한 마디 꺼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규현을 잡아줘야 할 것 같았 다. “...응? 존댓말?” “너 나한테 존댓말 쓴다며. 꼬박꼬박 아저씨 아저씨 그러면서 왜 말은 잘라먹어?” “아! 미, 미안해요! 미안미안. 앞으론 존댓말 쓸게요!!” 귀를 축 늘어뜨린 강아지 같았던 규현이 얼굴에 생기를 띄며 대답했다 . 려욱이 먼저 말도 걸어줬고 반말도 했다! “그럼 그거 말고 딴 거는? 나한테 뭐 딴말 할 거 없어요?” 보채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자꾸만 뭔가 말이 나왔다. 말을 이으면서도 규현은 계속해서 려 욱의 표정을 살폈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고 짜증나보이진 않았다 다행히. 려욱은 이다음엔 무슨 말을 이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가만히 대꾸를 하지 않고 입을 다 물었다. 왜 갑자기 말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반말로. 조금 전까지는 엄청 짜증이 났 는데 갑자기 왜 또 즐거워져서 한참을 웃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도 않았다 . 그런데 그냥.. 내가 느꼈던 짜증과 비슷한 걸 느낀 것이 분명한 규현을 보며, 규현이 그 감정을 표 현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으며 뭔가 스위치가 탁 하고 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이거야! 하고. “아, 아저씨 그럼 나 아저씨 폰 번호 알려줘요. 응?” “싫어. 내가 왜?” “......뭐야. 왜 안 알려줘요? 나랑 연락 안 할 거야?” “.......” “아니지? 할 거잖아, 그치?” “.......” 파란색 롤리팝 핸드폰을 꺼내 010 까지 쳐놓고 핸드폰을 려욱 쪽으로 내민 규현이 몸을 더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려욱은 그를 한 번 보고는 못 본 척 하며 카운터 위에 펼쳐진 문제 집으로 눈을 돌렸다. 펜을 잡고 책을 읽는 척 하고 있는데 규현이 핸드폰을 려욱의 얼굴 바 로 앞에 들이밀었다.


“정말 아저씨 이렇게까지 비싸게 굴 거야? 아 아니다, 아저씬 좀 비싸도 돼. 그래도 핸드폰 번호만 가르쳐주고 비싸게 굴면 안 될까? 내가 연락 할게, 매일매일. 응?”


"태영씨. 조금만 옆으로 붙어요." “이정도면 되요?” “좋아. 이제 찍습니다.” 찰칵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만큼 밝은 빛이 터진다. 사진작가의 능력을 모두 다 보여주는 듯, 단 순한 의류 브랜드 화보임에도 사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른 작가들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어머. 영운씨! 이 사진 분위기 봐봐. 역시 모델들이 김영운, 김영운 하는 이유가 다 있었구 나...” “하하...별 말씀을요. 그냥 셔터만 누르면 되는 직업인걸요.” 셔터만 누르면 되는 직업이라.. 그러면 나도 조명 때문에 피부 상하고 체중 조절 때문에 마 음대로 음식도 못 먹고 사진작가가 하라는 대로 포즈만 취하는 모델 대신 사진작가 했겠다. 그렇게 생각한 정수는 저건 지나친 겸손이야.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 었다. “조금 더 시크한 눈빛으로. 좋아요.” 찰칵-


한참을 그러고 있던 정수의 생각을 방해한 것은 영운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카메라에서 강렬한 빛이 터지고, 영운이 다른 여자모델과 함께 방금 찍은 사진을 보 고 있는 것이 정수에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은근한 질투심에 눈을 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 때문에 한참동안 이곳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씩 코치를 해주다가 영운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정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다음은 네 차례니까 어서 준비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후우... 나 다음 차례야. 빨리 해줘요.” 바람 불면 한 가닥씩 날릴 것 같은 길고 찰랑 거리는 머리카락을 쓸며 그가 조용히 속삭이 듯 말했다. 대답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스타일리스트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 자태는 그가 남자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영운의 말이 들렸다. “다음.” 모델 한 사람 한 사람이 빠르게 움직여야 밤샘 촬영이 없기 때문에 모두들 빠릿빠릿하게 움 직였다. 그건 정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카메라 앞에서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게 과연 사진이 잘 나오기 위해서인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지는 정수 본인만 알겠지만. 여러 번 포즈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기를 한참, 드디어 장시간의 화보촬영이 끝났다. “다들 수고 하셨어요. 오늘 촬영은 여기서 끝입니다.” 촬영 스탭의 끝났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찍힌 사진들을 검토하는 영운과 정수를 보는 태영의 얼굴에는 잠시 동안 잔잔한 미소가 머물렀다. 남자와 남자. 라는 점만 빼면 남부러울 것 없는 커플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잘 챙겨주는 스 타일의 영운과 애교 많고 귀엽기도 하지만 도도할 줄도 아는 정수는 평범한 커플들보다 훨 씬 잘 어울렸다. 그렇다고 두 사람을 단순한 연인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첫째는 모델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동성 커플이지만 그들하고는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 는 이들이었기 때문이고. “영운아. 우리 놀이공원 갈래?” “애냐?”


둘째는 간혹 가다 보이는 어른과 아이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영운은 언제나 안 들어 줄 것 처럼 말하지만 꼭 정수에게 말려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있다.

***

“영운아! 나 아이스크림 사줘.” 우여곡절 끝에 영운과 함께 놀이공원에 왔다. 놀러 다니는 건 싫어해가지고 곧 죽어도 안 간다는 걸 끌고 오느라 힘들었다. 정수는 애교 몇 번이면 넘어 올 것을 뭘 튕기나 싶었다. 이제는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는 정수는 정말 정신 연령이 어린 아이로 돌아간 건 아 닐까 라는 의문이 들만큼 아이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영운은 어차피 사줄 수밖에 없지만 무 슨 이유인지 한 번 버텨 보았다. 그러자 정수가 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살짝 째려 본다. 그 눈빛마저도 귀여워 제 피부처럼 하얀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더니 뭐가 좋은지 웃기 바쁘 다. 영운은 정수가 정말 어린 아이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 버리는 통에 아이스크림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 아니. 먹지도 않고 보면서 웃기만 할 거면 뭐하려고 산건지. 뚱한 얼굴로 영운이 정수를 계속 쳐다본다. 정수는 그 표정이 귀여워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 다. 흰색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에 묻혀 영운의 볼에 갖다 댔다. 입술까지 내밀고 대 놓고 삐졌다는 티를 낸다. 흔하지 않은 표정이라 그런지 웃음이 멈춰야 하는데 멈출 생각조 차 들지 않는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내 볼에 묻���고 뭐가 좋은지 박장대소 하는 정수의 코에도 똑같이 아 이스크림을 묻혀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장난을 쳤다. 먹으려고 산건지 장난을 치려고 산건 지. 영운은 정수의 얼굴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주었다. 말로는 애냐고 하지만 언제나 다정한 영운을 정수가 모를 리 없었다. “영운아~ 우리 관람차 타자.” “...그래.” 영운의 말투는 마지못해 허락해준다- 라는 식이었지만 정수는 그래도 좋은지 영운을 끌고 관람차에 탑승하기 바빴다.


서서히 관람차가 하늘과 가까워지고 정수는 영운을 보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예쁘 다고 호들갑을 떨며 너도 어서 밖을 좀 보라고 재촉했다. 그의 난리에 마지못해 창밖으로 시선을 뒀을 때 영운은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신기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던 놀이 공원, 한 번도 타보지 않았던 놀이기구. 어릴 때부터 조숙했던 탓일까 영운은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과 친해지지 못해 안달하는 친구들 과도 딱딱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정수만큼은 언제나 예외였다.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뭐든지 해주고 싶고 예뻐만 해주고 싶었다. 천생연분이란 이런 게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 관람차에서 내렸다. 은근히 머리가 어지럽다. 그 와중에 정수는 또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 분명히 사달라고 조르겠지 싶었다. “영운아~ 나 저 풍선 사줘.” “유치하게 무슨 풍선이야. 됐어.”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다 큰 어른이 유치하게 풍선이 뭐냐는 뉘앙스의 영운의 말에 토 라져 저만치 걸어가 버린다. 저기 달려 있는 풍선을 전부 사다가 안겨줘야 풀리겠지 싶었 다. ‘어른이 유치하기는. 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영운의 손에는 색색의 고운 풍선들이 들려있다. 한참을 앞으로 가있는 그의 손에 풍선을 쥐어 주었다. 그러자 또 좋다고 배시시 웃어댄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누가 모델 아니랄까봐 갑작스러운 얘기에도 순식간에 포즈를 취한다. 그러고는 짓는 표정이 딱 정수다워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띠었다. 사진은 예쁘게 잘 찍혔다. 하지만 갑자기 아프지도 않던 눈이 아팠다. 가끔 있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얼마 후 잦아드는 통증에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정수가 놓아 버려 하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풍선들은 꽤나 봐줄만 했다 . 아름다움은 순간 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

찰칵마무리 짓지 않은 촬영이 다시 이어졌다. 이제 처음이 아니라고 모델들도 영운이 원하는 스 타일대로 포즈를 취해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기분은 저기압을 탔다. 원래 말수가 적어 아무도 영운의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발랄했던 촬영장을 차분하게 만들었 다. 정수는 오늘 영운의 기분이 왜 안 좋은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 그가 기분 나쁠 일 이야 없었다. 어제 놀이공원에 가기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 지만 그런 일로 저러고 있을 영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정수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정수의 차례가 왔다. 눈 메이크업을 빨리 끝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갑자기 눈이 아프다. 평소에 눈 관리도 잘하는 편인데. 전에는 한순 간 아프고 말 것이라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가끔 나타났던 증상이니까 별거 아니겠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나 왜 이러지?’ 눈이 아파 도무지 촬영을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 빠른 시일 안으로 병원에 가봐야지 싶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큰 병일 경우에는 빨리 발견 하여 치료하는 것이 관건이니까. 정수는 영운이 나가 버린 것에 대하여 많이 당황했다. 정말로 나한테 화난 게 맞는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것 같았다. ‘정말 놀이동산 때문인가...’ 정수는 짜증나는 고민 끝에도 결국 결론을 얻어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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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모니터를 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황이 꽤나 심각 해 국내 의술로는 거의 치료가 불가능 할 것으로 보여 외국에서 치료해야 할 것....” 의사를 괜히 만난 건가 싶었다. 병을 키우면 좋지 않다지만 사진작가로써 승승장구하고 있 던 나에게 외국으로 떠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뇌 쪽에 문 제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잘 내지 않던 화까지 난다. 의사가 붙잡는 손마저 뿌리치고 그냥 병원을 나와 버렸다. 나보고 아프지 말라던 정수였는데.. 미안해진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런 정신으로 운전하는 것 에 별 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국가가 이상할 만큼, 보이는 차란 차는 모두 들이 받아 버리 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없이 황량한 거실이 영운을 반겼다. 불이 켜져 있는 집 안으로 들어 갔던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것 같았다. 아프다- 라는 걸 알고 나 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생각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있는 가족,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쌓아왔던 모든 것... 그리고 박정수. 그 많은 것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외국에 가면 가족들은 만날 것이다. 치료도 가능하겠지만 정수는 볼 수 없었다. 아니.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생각을 정리해보니 결론을 금방 추려낼 수 있었다. 그를 밀어내자.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라고 그를 놓아주고 가자. 최대한 잔인하게 그를 버리고 가자.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놓아 주는 것도 한 가지 사랑의 방법이라고 했 다. 평생 그는 내 진심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정수야. 나 같이 무뚝뚝하고 구박만 하는 남자 대신 성격 좋고 능력 있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내일이 그의 생일인데 이번 생일은 챙겨 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 이번 생 일은 너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해사하게 웃어주던 정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일 선물은 주지 못할망정 너에게 커다란 상처만을 남기고 갈 나를 용서하지 마. 정수 야.” 영운의 쓸쓸한 독백이 넓은 방 안을 울렸다.

***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영운이 자신의 생일을 모를 리는 없을 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생 일 선물로 뭐 받고 싶냐고 물어보고 파티 장소까지 직접 잡았던 그였는데 오늘은 눈에 보이 지를 않는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어? 저기 영운씨 아니야?” 그의 말에 일제히 바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부르려던 모두의 입은 다물 어 졌다. “정수씨. 진정해!” “놔.” 짧은 말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이 들어가 있어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을 생각을 못했다. 화가 났다. 나는 지금껏 그를 걱정하느라 생일 축하 파티고 뭐고 그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연하게 다른 여자와 팔짱까지 끼고 내 생일에 내 눈 앞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미웠다. 딱화를 감추지 못해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배신감이 가득 차있는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 다. 그 눈을 보면 지금껏 정리해왔던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되어 버린다. 밀어내야 한다. 잘 못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을 걷는 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 영화처럼 머릿 속의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간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그의 뺨을 때려 버렸다. 괜히 눈물이 났다. 그렇게 그에 게서 몸을 돌려 바 밖으로 나왔다. 생애 최악의 생일이었다. 생에 최고의 생일을 기대 했던 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번지는 아이라인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단지 그가 나를 밀어내고 다른 여 자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나는 이미 제정신을 찾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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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렇게 되고 난 후 며칠이 흘렀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새삼 느 꼈다. 몸이 급속도로 피로해져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 대신 온 새로운 사진작가는 나와 코드가


그다지 맞지 않아 사사건건 대립했다. 며칠 먹은 것도 없는데 혈압까지 높아지니 몸이 견디 기 힘들었는지 자꾸 쳐지는 기분이다. ♬♪♩ 전화벨이 울린다. 어차피 김영운도 아닐 전화인데 그러면서도 기대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하지만 액정에 뜨는 번호는 영운의 번호가 맞았다. [내사랑♥] "여보세요? 영운이야?" -아..박..정수씨 휴대폰 인가요? “네. 그런데요?” 그럼 그렇지 그일 리가 없었다. 그의 휴대폰을 주웠거나 했겠지 하면서도 실망감을 감추기 는 힘들었다. -며칠 전 저희 병원을 방문하셨던 김영운씨.. 손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원망스러웠던 마음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지금 그가 아프단다. 그렇게 아프지 말라고 말했건만 뇌에 이상이 생겨서 시력을 거의 잃게 될지도 모 른다는 의사의 사무적인 말투가 잔인했다. ‘김영운.. 내가 너를 이렇게 몰랐을 줄은 몰랐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대로 건물을 빠져 나와 그가 있다던 인천공항으로 빠르게 차를 몰았다.

***

‘그에게 말을 해줄 걸 그랬나...’ 곧 있으면 출국 시간이 다가 온다. 언젠가 한국에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그를 만나겠지. 그 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웠다.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찾지 못할 마음 접으라고 매정하게 대했는데 마지막에 모든 것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 알려주 지 않았지만 혹시 정수가 알고 찾아올까 천천히 게이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운아. 제발 지금 가지 말아줘. 잠시만 기다려.’


속으로 영운의 이름을 부르며 눈으로는 그의 익숙한 모습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이대로 못보고 그를 먼 곳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없던 힘도 생겨났다. 매정한 놈. 나쁜 놈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그 누구 에게라도 책임을 나누지 않으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 때 익숙한 게이트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뛰다시피 걸어가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떠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 떠나지 말라고 붙잡을 것 같아 그의 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나만 놓고 떠나는 그가 야속했지만 돌아올 그를 믿었기에 그렇게 한 참을 서있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순간 누군가 등을 끌어안았다. 그 팔을 푸르려고 손을 가져다 대자 익숙한 체온이 손으로 전해져왔다.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처럼 뒤에서 나를 꼭 안은 그의 얇은 팔. 울고 있는 듯 떨리는 목소리. “영운아. 언젠간 우리 꼭 다시 만나자. 그때까지 잘 지내. 꼭... 행복해야 돼. 내 사랑 안 녕.”

***

안녕 내 사랑 어두운 밤하늘을 빛내죠. 너무 보고픈 날엔 하늘 보며 외칠 게요. 안녕 내 사랑 환하게 웃어줘. 제이리치(J.Rich) - 안녕 내 사랑.


벌컥"형! 나 왔어!!" 이모가 연락한 지 10분도 채 안 됐는데, 벌써 도착했나 보다. 일이 잘 안 풀린다며 외출해 야 하는데 집에 어린애 혼자 둘 수 없다고 무작정 내게 떠맡겨 논 사촌 동생 . 어렸을 때부 터 '형, 형' 거리며 잘 따르더니 이젠 무슨 일만 있으면 바로 날 찾는 것 같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내 방에 들어올 때면 문 앞에서 반겨주는 내게 폭안겨 오는 규현이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오늘도 학교 잘 갔다 왔어?" "응!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열심히 눈싸움도 하고, 또..." 이제 '초등학교 1학년' 을 마무리하는 겨울이 됐다는 것도 요 어린 꼬맹이에게는 흥미로운 일인가 보다. 들어오자마자 내 무릎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신이 나서 설명하는 것이 귀엽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끔 이렇게 곤란한 소리를 해댈 땐 제외하고 말이다. "형, 오늘 내 친구가 자기 형이 재밌는 이야기 많이 해준다면서 막 자랑했었어. 근데! 나보 고 형도 없는 불쌍한 애래. 나도 형 있는데.. 그치??" 사촌형도.. 형은 형이다. 그러니, '형이란 작자는 그 도리를 해줘라!' 이 말인가...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 해줘?" 아무래도, 뭔가 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 꼬마를 어찌 하리오. 나는 그저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로다.

*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태양계를 벗어나서 우리 은하를 벗어난 후에 또 다른 은하의 어느 행 성에서부터 시작하지. 그 행성에는 4개의 나라가 있는데 이 네 나라의 지도자들은 항상 가 운데에 있는 신전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어. [왜, 신전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 나라들에는 각각 하나의 계절이 존재하는데 신전이 있는 조그마한 섬에는 4개의 계절이 동시에 존재하거든. [우리나라처럼??] 비슷해, 대신 이곳은 한 달에 한 번씩 계절이 바뀌지. [우와! 신기해!] 이곳에서는 자기 나라의 계절이 아닌 또 다른 계절에서도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신전에는 지도자 없어?? 신전 지켜야지!!] 글쎄..들어보면 알지 않을까? 그 신전에는 유일하게 딱 한 사람이 사는데 그 사람은 신의 부름을 받은 '예언자 ' 라고 불 리고 있지, 전쟁도 그가 전한 신의 말씀에 의해 시작되었어. 우선 어느 날, 예언자에게 한 사람이 찾아온단다. "제게 전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대가 '예성' 이라는 시인인가요." "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그는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시인이었는데 아무래도 보고 들은 게 많다 보니 항상 신기한 노래를 많이 부르고 다녀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지,


심지어는 팬 카페가 있을 정도로 말이야. 게다가 가끔은 중요한 소식을 직접 전해주는 전달 자 역할도 했단다. 마치, 이곳에서의 우체부처럼. 이 행성에는 전화기나 컴퓨터 같은 게 없 었거든.. [에이, 그럼 게임도 못하겠네..] 하여간, 예언자는 시인에게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말을 하지. "나는 지금 이 순��� '려욱' 이라는 소인의 이름을 걸고 그대에게 위대하신 신의 말씀을 전하 기 위하여 이 자리에 그대를 불렀답니다." "신의 말씀.. 이라 하셨습니까?" "예. 사실 얼마 전, 별이 아름답게 뜬 고요한 저녁에 신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신께서는 제 게 중요한 말을 꼭 세상에 전하여 달라 하셨지요. 그러나 예언자인 소인으로서는 쉽게 신전 을 비우고 나갈 수는 없는 일.. 하여 그대가 세상 곳곳에 신의 말씀을 전해 주었으면 해서 이리 불렀습니다." "아니, 제가.. 어찌 신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아니라하면 누가 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저를 대신하여 지도자들에 게 말하여주시오. 전지전능하신 신께서는 이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의자 위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가며 얼마 전의 신의 말씀을 고스란히, 조곤 조곤 예성에게 알려주었단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조곤조곤 전하기 위해 지도 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지. 그는 제일 처음으로 '비스나' 라는 나라의 강인, 이특 지도자를 찾아갔어. 비스나는 봄의 계 절을 가진 나라였는데 그는 비스나로 가는 내내 싱그러운 푸른 새싹과 자라나는 꽃들을 쉽 게 볼 수 있었지. 아니, 보는 것마다 이런 식물들뿐이었을 지도 몰라. 이곳은 그만큼 다양 한 식물들이 공존하고 있었거든. 아무튼, 예성은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가며 겨우겨우 비스 나 성에 도착했단다. 그리고 시인이 성을 방문했다는 소식에 열심히 강인의 곰 세 마리 공 연을 보며 웃어 재끼던 이특은 강인을 밀쳐내고 바로 그를 불러냈지. 분명히 매일 보는 강 인의 재롱보다는 오랜만에 찾아온 예성의 노래를 듣고 싶었을 거야. 그리고 예성은 곧 비스 나의 지도자들 앞에서 신의 말씀을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단다. "저. 지도자들이시여, 사실 소인이 봄의 향기로 가득한 이 성을 방문한 까닭은 신의 말씀을 두 분께 고스란히, 조곤조곤 전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소인이 부를 노래는 신의 말씀이 담긴 노래이니 집중하여 들어주시기 바란다는 뜻입니다." 예성은 이 말을 마치자마자 두 지도자의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지 . 엄청난 양의 바이브레이션을 섞어가며 말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가 겨우, 겨우 노래를 끝마쳤을 때, 이특과 강인 지도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어. 훌륭한 노래에 담긴 깊은 뜻, 신의 말씀이 두 사람에게도 전해졌던 거야. 그런데 예성의 신의 말씀이 담긴 노래가 여기서만 불린 것은 아니란다. 항상 무더운 여름이


지만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 ‘베라노’ 의 동해, 은혁 지도자에게도, 울긋불긋 단풍으로 가득한 지식인들의 나라 ‘나마르’ 의 시원, 한경 지도자에게도, 마지막으로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절경을 이루는 나라 ‘리베르’ 의 희철, 기범 지도자 앞에서도 그는 이 노래를 불렀지. 그러니까, 네 나라의 지도자들 모두가 신의 말씀을 노래로 듣게 된 거 야. [흐음.. 도대체, 그 신의 말씀이 뭔데?] 궁금하다면, 너에게도 알려줄게. 신의 말씀은 바로 이러했어. -항상 각 나라의 경계선에서, 각기 다른 나라의 계절을 빼앗으려 하는 범죄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니, 세상이 참으로 불안정해 보였다. 그리하여 나, 전지전능한 신은 앞으로 신전이 있는 섬을 한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맡기려 한다. 그 지도자가 되는 사람이 곧 네 나라의 지 도자이니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 신전의 지도자를 떠받들며, 섬겨야 할 것이니라. 신전의 지도자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너그러이 대해야 할 것이며,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당량의 자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지도자를 정해주는 나의 계시가 있을 것이니,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어라.그리고 각 지도자의 반응은 다양했지... "괜찮아, 괜찮아, 우리나라의 군대가 가장 강하지 않느냐." "그럼 우리가 그 지도자를 신처럼 떠받들어야 한다는 거냐거!!! 아아아악!!!!" "신이시여, 부디 좋은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신의 말 따윈 안 들으면 되는 거셈.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지." 참 다양하지?? [응.. 참 다양하네... 신이 차암! 고생하겠다.]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 처음에는 너의 말대로 차암! 다양한 반응을 보이던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같은 행성에 살아 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다른 지도자를 섬기느니 차라리 자기 자신이 신전의 지도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한 생각 후 이들 사이에서는 오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보단... 차라리 그게 낫겠네!!! 뭐.] 진짜, 그렇게 생각해? 신전의 지도자가 되면 귀찮을 게 뻔한데? 차라리 신전 지도자한테 일 미뤄놓고 편한 마음으로 있는 게 더 낫겠다. [그런가?]


우선 시작은 나마르의 시원 지도자였어. 그가 한경 지도자와 열심히 상의한 결과, 지도자의 성에 있는 남아도는 각종 식량을 먹을 것들이 부족한 곳으로 보내는 ‘식량 전달 운동’을 시 작하기로 했거든, 그리고 곧 먹을 것이 부족한 곳에서는 나마르의 지원을 받으며 걱정을 덜 수 있었지. 그들은 이런 식으로 착한 일을 하다 보면 신이 감동하여서 자신들을 신전 지도 자로 임명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거야. [그래도, 나마르에는 음식이 그렇게 남아돌아?? 나라면 다 먹어버릴 거 같은데..] 그 다음에는 베라노의 동해, 은혁 지도자들이야. 그 근처의 바다에서 베라노의 해적 때문에 다른 나라의 배들이 손해를 입을 때가 잦았었거든, 그래서 해적들에 대한 법을 강화하는 것 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차차 해결해 나가기 시작한 거지. [해적!!! 갑자기 그 영화 생각나!!! 막 해적 나오는...그...] 캐리비안의 해적?? [응!!! 그러면 베라노의 지도자들은!!!] 그 얘긴 이따 하자? 나마르와 베라노가 그런 일을 하니, 비스나와 리베르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비스나 에서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서 피난을 온 리베르나 베라노의 국민을 받아주는 특별 구역 을 만들어서 전에는 피난 와도 받아주지 않아 국경선 국민의 음식과 보금자리를 빼앗던 그 들의 약탈을 막았고, 리베르에서는 올해 더욱 심해져 집까지 무너지게 한 폭설 때문에 피해 가 많은 지역에 성의 군대를 파견하여 일손을 거들게 하였지. [지도자들이 수고가 많네.] 그지?? 지도자들만 고생하게 된 거지, 뭐.. 그나저나, 갑자기 이렇게 지도자들이 착한 짓을 하니까 하늘에서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거 있지... 어쩌면, ‘얘들이 뭔 약을 잘못 먹었나, 아니면 죽을 때가 다 됐나, 아!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서 지도자들이 이렇게 착한 짓을 하는 와중에 자칭 전지전능하신 신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 대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얼마 후 신은 드디어 결정했어. 이 중에서 가장 통솔력 이 있는 지도자를 신전으로 끌고 가야겠다는 말이야. 하지만, 이것도 문제였어, 누가 가장 통솔력이 있는지 걸핏하면 은하수 타고 돌아다니며 다른 행성의 신들과 놀았던 신은 알 수 없었던 거야. “흐음, 그럼 차근차근 생각해야겠군, 우선! 비스나의 강인??? 얘는 애들을 아주 열심히 힘 으로 휘어잡을 수 있을 법한데... 아냐, 아냐. 얜 너무 단순해서 안 되고. 그럼, 이특?? 얘 가 지도력이 있었나?? 우선 패스! 그다음이 동해... 아, 얜 조금 말실수해도 바다 녀석한테 물라고 그래서 안 된다. 그럼 은혁은.. 하아, 이놈은 비굴한 포스가 너무 심각하게 느껴져. 시원은... 얜 내 말도 잘 듣고 잘 따르고, 착한데... 너무 순해서 말이지... 아냐, 은근히 일


해결도 잘할 거 같은데?? 한경은?? 됐다. 나랑 말도 안 통하는데 무슨!!!!!!! (신은 한국인입 니다.) 희철?? 아, 얜 사차원이라서 안 돼, 분명히 신성한 신전에다 엉뚱한 짓거리를 해 댈 거란 말이야.. 어쩌면 리베르 성처럼 빨간 페인트칠을!!!!! 기범, 흐음.. 요게 제일 믿을 만 한데.. 그 망할 마녀 때문에 툭하면 잠자서 힘들겠군... 그럼 누굴 하지???" 이렇게 말이야, 그래서 결국 전지전능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바보 같은 신은 마지막 방법 인 전쟁을 통해 누가 통솔력이 강한지 확인해 보기로 했어. [전쟁?? 신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래, 어쩔 수 없는 신의 선택이었지. 그리고 이러한 신의 계시가 내려진 후부터 지도자들 과 각 나라는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하지. 그리고 전쟁을 하기로 약속한 날이 3일 앞으로 다가온 이때! 희철의 리베르 성에 한 손님이 등장해. “똑-똑- 이봐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저 동희입니다! 신동희!" 동희라는 말에 성문이 벌컥- 열리고 희철이 뛰쳐나온단다. 그리고는 그를 열렬히 반기며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가지. [도대체 무슨 속셈이람..] 속셈이라.. 정답!!! 신동희는 전 행성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팔는, 없는 물건이 없는 자질의 뛰어난 상인이 란다. 그리고 희철은 그의 특수 상품 덕분에 이미 많은 혜택을 보고 있었지. [도대체, 어떤 혜택을 봤는데??] 여기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단다. 그가 13년 전에 기범을 성으로 데려왔거든?? 그때 이 상인 신동희의 엄청난 도움이 숨어 있었다는 거지. 또 다른 이야기 시작한다! 있지, 희 철이 어느 날, 젊은 여자로 변신해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한 어느 마녀의 성으로 초대받아 갔다가 마녀의 구박을 받으며 차 심부름을 하던 기범을 처음 만나게 돼 , 지금의 기범이는 그때의 희철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희철은 그때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 거야. 그래서 기범이를 성으로 데리고 오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거울이라면 정신을 못 차 리는 그 마녀에게 거울 하나를 선물했단다. 하지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그야 당연히 백설 공주 즉, 기범 공주님이시지요. -아아아아악!!!!!!! 또 백설 공주!!!! 빌어먹을!!!!!!! 백설 공주!!!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여기까지만 해도 대충 내용 알겠지??? 지난번에 너 백설 공주 책 읽고 있던 거 봤어, 모르 겠단 말 하지 마. 아무튼 이런 식으로 기범은 성에서 쫓겨나고 여차여차 해서 7명의 난쟁이 집으로 가지, 기


범이 그렇게 난쟁이의 집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있을 때, 희철은 기범이 죽지 않았다 는 소리에 미쳐서 발광을 해대는 마녀와 또 한 번의 만남을 가져. 그리고 마녀를 새로운 거 울로 꼬드겨 마녀가 기범에게 사과를 먹인 후 잠에 들게 하지. 그다음 희철은 멋있는 왕자 가 돼서 기범 공주를 구출하는 거야. 비록 기범이 자꾸 잠에 빠져 힘들어하고 있기는 하지 만 기범을 손에 넣은 희철이 동희에게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되는 스토리지. 왜 냐고?? 마녀의 거울은 신동희의 상품이었거든. "상인아, 이번에는 좋은 상품 없는 거셈??"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에 의해 희님께 도움 될 만한 물건이 없을까 하고 제가 이렇게 날아왔습니다." "그래, 그래, 혹시 다른 나라에도 갔다 온 거면.." 희철의 말은 잠시 끊어두고 동희는 잠시 생각에 빠지지... -비스나에서 잡상인은 안 받아! 물건도 보기 전에 내쫓은 이특 지도자... -바다야 물어!!!!! 개에 물려서 한동안 고생하게 했던 동해 지도자... -물건을 보기 전에 제게 이러한 혜택을 주신 주님이시여 @!#$^#*&@#%!@#$#%^%$^*& 그냥 조용히 성을 빠져나오게 만든 시원 지도자... 그리고 희철의 손을 꼭 잡으며 "그, 그야 당연히 리베르가 처음이지요. 글쎄, 이번에 제가 지구라는 나라에서 잠시 물건 주문이 들어와 가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엄청난 것들을 발견했다는 것이 아닙 니까. 아니, 그곳에 있는 식물들은 뭐 그렇게 신기하답니까, 이곳에서는 잘 자라지도 않는 별의별 식물들이.." "그럼 독초도??" "아, 예!! 물론 입죠, 준비한 것을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선 요, 요거는 중독되면 입과 혀가 굳고 사지가 비틀리며 두통, 혈압강하, 구토, 복통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투구꽃이 라고 하죠, 아, 여기 있네. 이건 말입니다! 독성이 너무 강해서 말입니다. 먹으면 소화기계 통에 마비가 일어나고, 땀이 나오지 않으며, 눈앞이 캄캄해지고, 호흡이 느려지는데다가, 발 열, 흥분, 불안, 환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된다 하여 미치광이 풀이라고 하지요." "이건 예쁘게 생겼네, 뭐." "아, 그것도 독초입니다, 조심, 또 조심해서 다뤄야 해요, 그건 은방울꽃이란 겁니다. 마치 흔들면 방울 소리가 날 것 같지요?? 그렇지만 과량 복용하면 중독될 수 있다는 게 문제입


니다. 고것에 중독되면 식욕이 감퇴하고, 타액분비가 과다하게 일어나며, 메스꺼움, 구토 등 의 소화기 계통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이건 디펜바키아라는 거지요. 만약 이 식물의 잎을 먹게 된다면 혀와 입이 부풀어 오르고 삼키고 말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 게 된답니다. 소화되었을 경우, 점막 손상을 일으킬 수도 있답니다. 이게 원래 심장병을 고 치는 건데 잘 못 사용하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거 다 독초라는 거셈??" "그렇고 말고요. 당연한 소리입죠." "그럼 이것들 다 나 줘, 돈은 두둑하게 줄 테니까!" "아예, 예. 우리 희님께서 사가는 거니깐 저로선 아까울 게 없지요." 희철은 결국 신동희에게서 그 많은 독초를 사게 되지. 그리고 각 나라에 선물로 보내. -나 희님이셈. 이거, 이거, 내가 지구라는 행성에 있는 약초를 구한 거니까 다들 먹어보셈. 나님께서 착하게 선물도 했으니까 공정한 전쟁해야 하는 거셈짧은 메모와 함께...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비스나에 제일 먼저 도착했지. "약초?? 곰!! 강인아!!!! 너 먼저 먹어봐." 의심 많은 이특 지도자에 의해 강인이 처음으로 희생되는 순간이었어... 그 다음은 베라노였지. '이거, 분명히 동해한테 주면 바다만 챙기고 나는 안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먹어보 고..." 약초 먹고 힘내서 바다를 이기길 원했던 불쌍한 은혁 지도자의 희생이 두 번째가 된 거야. [쯧쯧, 불쌍한 인생을 사는구나.] 마지막으로, 나마르에선. "신이시여, 이 약초를 드시고 힘을 내셔서 저희가 이번 전쟁에서 힘을 낼 수 있게 해주십시 오." 신의 광 팬 시원 교도 때문에 ���도 모르고 독초를 먹은 신... 하아... [갑자기 신이 불쌍해지기 시작했어. 내일 교회 가면 신을 위로해 줘야지!!!] 그래, 그래.


그러나 신은 나름 불사의 몸이었던 거야. 그러니 죽지 않고 살았다는 거지. 그리고 희철에 게 몹시 화가 나서, 희철의 신전 지도자가 될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서 희철을 불러들였단 다. “희철 지도자는 들어라.” “신아, 대체 뭔 일이셈.” 신은 희철의 하극상에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열을 받았지만. ‘얜 원래 이런 성격이니 참아 야 한다. 참자.’ 라며 위안 삼으며 말을 꺼냈지. “이번에 그대가 다른 지도자들에게 독초를 선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불공평한 일이니 그대가 신전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겠다.” “뭔 소리 셈! 이건 결코 불공평한 게 아니라고!!!!! 내가 내 돈 주고 독초 사서 선물했을 뿐 인데 신은 뭔 상관인 거셈!!!!! @#$%#$%&%^&%^&*(*)#$%^@$%&$&(#$%&!#” 우선 소리부터 질러보는 희철 지도자를 지켜보던 신은 결국. “알았다, 알았어. 얼른 네 성으로 돌아가라, 돌아가.” 희철의 기회 박탈을 포기하게 되지. 그리고 가만 앉아 생각하지. “쟤가 지도자 되면 진짜 곤란하겠군. 그럼 정말 시원 지도자를 도와야 하는가.” 정말 귀찮은 일이 많은 신의 나날이었어. 그리고 신이 가도 된다니 희철은 정말 리베르 성으로 돌아갔어. 그리고 기범이를 깨웠지. 아무래도 13년 전 마녀가 먹인 사과 안의 성분이 아직 기범의 몸에 남아 있는 건지 1시간 동안 깨어 있었으면 2시간씩 잠을 자는 그를 깨우는데 약 20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말 이야. “희님?? 왜 깨우는 건데...” 잠만 자느라 머리카락을 자를 시간이 없어 허리길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마 치 여신이 머리를 쓸어 넘기듯이 뒤로 넘기며 기범이 말하자 희철은 ‘역시.. 우리 하얗고 빨갛고 검은, 우리 겨울 나라 리베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나랑 별 차이는 없지만, 찬양할 만한 미모를 소유하고 계신 백설 공주 셈.’이란 생각과 함께 잠시 얼음이 됐던 희철은 어깨 에 톡-하고 기대는 기범의 머리를 쓰담 쓰담 하며 말했어. “요즘 나님은 전쟁 때문에 할 일이 너무 많으셈, 그 와중에도 신이란 건 나만 구박하고!!! 일만 그르치게 시리!!!”


혼자 막 열을 내며 구시렁대는 희철을 토닥거리며 달래던 기범이 더는 참을 수 없어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섰어. “내가 신한테 가서 따지고 올까??” “그럴래??” 간간이 착한 짓 잘하는 기범을 신이 좋아함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을 같은 나라의 지도자 로서 가장 잘 알고 있던 희철의 조그마한 계략 아닌 계략이었지. “그럼 미인계 잘하고 돌아와!!! 나 희범이랑 신데렐라 놀이하고 있을게!!!!!!!” “응.” [형... 어째 내용이 막 막장이 돼가는 거 같은데??] 쓰읍- 막장이라니!!!!! [막장, 막장, 막장, 막장.] 햐쿠야!!! 얼른 가서 쌍절곤 가져와!!! 아니, 단 호박 수프를.. [아, 알았어!!!!!. 막장 아냐!!!!!] 그럼 그렇지. 그 후, 기범이는 열심히 고민하던 신의 앞에 나서게 돼. 그리고 아~주! 열심히 작전을 펼치 기 시작하지. 그리고 그 사이, 다른 나라들에서는! “강인아, 미안해, 내가 정말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 난 독초인 줄 몰랐어!!! 약초라 그러 니까, 곧 전쟁에서 힘써야 할 너 생각해서 준건데... 어떡해, 미안해.” 죽었다 살아난 강인을 부둥켜안고 눈물 연기를 펼치는 눈치 100단 이특과 “도대체 뭘 주워 먹었기에, 갑자기 죽다 살아날 수 있는 거냐거!!!!!” 갑자기 죽었다 살아난 은혁이 길가다 쓰레기 먹어서 그런 줄 알고 열심히 구박하는 동해, “아, 신이시여... 신께서는 제가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거 잘 아실 거라 믿습니 다...” 소식을 제일 늦게 듣고 신이 자길 미워할까 봐서 열심히 빌고 있는 시원이 있었지.


[형, 근데 누구 온 거 같은데??] 누가 오긴 누가 와. 그리고...

‘도대체 누구지?? 도대체 누가 내 아름답고 신비한 태양계를 벗어나서 우리 은하를 벗어난 후에 또 다른 은하의 어느 행성이야기를 방해하는 거야!!!!!!!’ 그렇다. 성민이 열심히 얘기하는 가운데 집안 전체를 울릴 정도로 요란한 딩동- 딩동(×100)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세요!!!!!!!!!” 성민의 이야기에 열심히 태클을 걸어주다 사람이 왔다는 걸 열심히 알려주는 제 할 일 잘하 고 있는 초인종 소리에 신이 나서 뛰쳐나간 규현을 원망할 수도 , 자신이 열심히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것을 모르고 우리 집에 찾아온, 아직은 누군지도 모르는 손님을 원망 할 수도 없었던 성민이었다. 결국,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렇게 완결도 나지 않은 채 미완성으로 끝나고 마는 순간이었다. “규현아, 잘 놀고 있었어??” “응!! 형이 막 웃긴, 아니!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정말?? 우와, 성민이는 착한 형이네. 참!! 엄마가 오는 길에 규현이 좋아하는 햄도 사고 라면도 사고, 성민이 주려고 단호박까지 사왔는데, 우리 규현이는 맛있게 먹을 거지??” “라면!!!!!!! 지금 끓여줘!!!!!!” “그래, 그래, 가서 단호박 수프도 끓일 테니까, 성민이형 불러와.” 밖에서 들려오는 행복에 겨운 두 사람의 목소리는 어느덧 검은 블랙홀 사이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 성민은 침대 위에 쭈그려 앉아 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형!!!!!!!! 얼른 나와, 엄마가 라면 끓여준대!!! 형!!!!! 단호박수프 안 먹을 거야??” ‘분명히 뭔 소리가 들리긴 들렸다. 하지만,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나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규현이 녀석은 아름다운 봄의 나라 비스나의 강인, 이특 지도자와 바 다가 아름다운 여름의 나라 베라노의 동해, 은혁 지도자, 그리고 낙엽이 어우러진 가을의 나라 나마르의 시원, 한경 지도자, 마지막으로 항상 눈이 오는 겨울 나라 리베르의 희철, 기범 지도자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나 보다. 그럼 앞으로 저 초딩규의 수준에 맞춰 나도 스타를 배워서 그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 건가. 아니, 나 왜 이렇게 비굴해 지는 거지?? 난


얼른 가서 열심히 한강 라면을 만들어 먹을 규현의 옆에서 맛있게 단호박을 삶아 먹으면 된 다. 이야기 한번 끊기면 어때, 어차피 막장... 아냐!!!!!  결코 막장은 아니었어... 막장이었 다면, 내가 진짜, 진짜, 진짜...’ 한참동안 혼자 열심히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성민을 그 깊고 깊은 세계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역시나, 방에 들어와서 성민의 팔을 흔들고 있는 규현이었다. “혀엉! 여기 처박혀서 뭐하는 건데! 엄마가 단호박 수프 만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얼른 나와, 응?? 가자!!! 나, 빨리 라면 먹고 싶단 말이야!!!” “으응... 알았어. 나가자, 나가.” 다시 한 번 생각에 빠지며 규현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앉은 성민은 멍하니 단호박 수프를 그릇에 담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 나는 맛있게 단호박을 삶아 먹으면 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단호박을 열심히 삶아 먹고 있다. 계속 웃으며, 말하며,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근데!!!!!’ 하지만, 성민이의 생각을 모를 수밖에 없었던 규현은. “엄마, 아까 형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랬잖아.” “응” “있지, 엄마는 비스나가 뭔 줄 알아?? 아, 베라노랑 나마르랑 리베르가 뭔지 알아??” “그게 뭔데??”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그 계절만 있는 나라!!!” 이야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규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그녀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성민에게 물었는데. “성민아?? 이게 무슨 뜻이니??” “그거, 다양한 나라의 언어에서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뜻하는 용어...” “아냐!!!!! 우리 태양계를 벗어나서 우리 은하를 벗어나서 또 다른 은하의 어느 행성에 있는 나라 이름이야!!!” 대답을 하는 성민의 말을 끊고 다시 한 번 이야기의 일부를 말해주는 규현. ‘열심히 내 이야기의 각 나라을 설명하고 있는 걸 보자니, 이야기는 제대로 들은 거 같은 데, 아무래도 이모는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말이다, 규현아.’ 그런 규현이가 이모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다시 한 번 후회 중인 성민이었다. 당연히, 성민 의 예상대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규현의 말에 맞장구 쳐주려고 노력 중인 이모를 보는 성민의 표정은 청소하다 남은 비누거품 때문에 미끄러운 바닥의 학


교복도를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각 나라의 지도자들 이름이... 강인, 이특, 동해, 은혁, 시원, 한경, 희철, 기범 이었어!!!!!  그리고 시인이름이 예성?? 예언자 이름이 려욱, 마지막으로 상인 이름이 신동 희!!! 형!! 나 잘 외웠지???” 이야기의 인물의 이름까지 쭉 나열해보고는 칭찬을 바란다는 눈빛으로 성민을 쳐다보는 규 현의 시선을 성민은 진심으로 무시하고 싶어졌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이모의 시선도. ‘이모... 그렇게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절 째려보지 말란 말입니다. 나는 그냥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새싹인 규현이에게 내가 지어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을 뿐이란 말 이예요 . 부 디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라니까요?’ 직접 말하고 싶지만, 앞에서 열심히 설명 중인 규현을 본 이상 차마 그럴 수 없었던 성민은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열심히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규현과 자신을 이상하 게 쳐다보는 이모의 앞에서 단호박 수프를 맛있게 먹기 어려웠던 성민은, 수프 그릇을 들어 올려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놓고 말했다. “이모, 단호박 수프 다 먹었으니까 들어갈게요.” “형!!! 다음에는 무서운 이야기도 해줄 거지?? 아니다, 아니다, 이 이야기 끝까지 들려줄 거 지???” 이미 아까까지 열심히 규현에게 들려주던 이야기의 끝 부분은 잠깐의 공황 상태 때문에 머 릿속의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지 오래였던 성민은. ‘규현아, 난 무서운 이야기까지 해줄 자신은 없구나. 그냥 그 친구의 형한테나 가서 재밌는 이야기 실컷 듣고 오려무나.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그 이야기의 결말은 어 디를 가든지 듣지 못할 것 같구나.’ 규현의 말에 ‘당황’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당황했다는 표정을 떠올렸던 성민은 한숨 을 푹- 쉬고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튼, 오늘 하루 참 고생 많은 성민이었다. 사촌 동생과 이모라는 관계에 성질 팍- 죽이 고 가만가만 시키는 대로 하고 나니 몸이 아주 근질거렸을지도 모른다 . 규현이 있는 동안 서랍 안에 처박아둔 핸드폰을 반갑다는 듯이 꺼내 든 성민은 바로 친구들에게 연락하기 시 작했다. -누구 셈. “나 성민인데, 오늘 노래방 안..” -밤비 녀석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으니까 끊으셈. -씨이, 숙제 중인데 누구냐거!!!!!


“우리 노래방 가자!!!” -나 바쁜 거 모르냐거!!!!  혁구 넌 얼른 바다보고 있으라거!! 바다 심심한 거 안 보이냐 거!!! “끊을게..” -시방, 누구여. “종운아, 나 성민인데.. -아, 형!!! 전화 끊으세요!!! 도서관에서 매너도 없어!! 정말. “려욱이랑 같이 있어??” -미안하다. -최시원입니다. “시원아, 나랑 노래방 가자!” -성민아, 미안한데. 나 지금 한경이 한국말 가르쳐주느라... “알았어.” -뚜-뚜-뚜-뚜- 지금 고객님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합니다. “하아...” 성민이,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했다고 벌이라도 주는 건지. 노래방 가자는 성민의 의견 은 결국 그의 포기로 사라져버리고. 그는 결국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엎 어져 베게 속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형, 나랑 같이 공놀이하러 가자, 내 친구 형은...” 잠시의 휴식은 몇 분도 안 돼 끝이 나고 다시 한 번 규현이에게 시달릴 준비를 하는 , 나름 불쌍한 성민이었다. ‘도대체 그 형은 누구 형인 거야!!!!!’

비록 끝을 맺진 못했지만, 나름 즐거웠던 성민이의 코믹 이야기 미완성(fragment) The End


봄 날씨의 정석을 보여주겠다는 듯, 따스한 햇볕이 거리를 흘렀다. 길을 따라 자리하고 있 는 벚나무들은 제각기 활짝 피어 만개하고 있다. 후덥지근하지도 서늘하지도 않은 기분 좋 은 바람이 거리를 훑고 지나가자 잘게 찢은 연분홍색 휴지 같은 꽃잎들이 보도블록 위로 천 천히 내려앉았다. 맑디맑은 날씨를 등에 업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거리 위로 느릿하면 서도 가벼운 발걸음이 있다. “오늘따라 날씨 정~말 좋네.” 장난기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고는 괜히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본 규현이 떨어지는 벚꽃잎 에 피식 웃고 이어폰을 고쳐 끼웠다. 머릿속으로 부드러운 음색의 보컬이 노래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바쁜 일상에 이리저리 치여 다니며 피곤해진 심신이 나른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 다. 게다가 오늘 아침부터 유난히 좋은 기분. 날씨가 좋아서 그러나. 아니면 틀어진 소개팅 때문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시간이 나서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봄날 아침의 거리는 규현에게 꽤 마음에 드는 듯하였다. 그렇게 천천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규현이 거리의 벤치를 발견하고는 벤치로 다가간다. “벚꽃잎 정말 많이 폈다..” 거의 그 거리가 벚꽃천지라고 과장해도 반박 못 할 만큼, 흐드러지는 벚꽃이 쌓인 벤치를 보고 규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 벚꽃을 쓱 바닥으로 쓸어내고는 빈자리 위로 털썩 주 저앉았다. 까만색 크로스백을 옆에 놓아두고 기지개를 핀 규현이, 팔이 올라가는 바람에 걸 려 따라올라 간 이어폰을 고쳐 꼽는다. 어느새 MP3의 곡이 바뀌었다. 발랄하면서도 담담한


여자 보컬의 목소리가 오늘은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귓가에 속삭였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인데, 누나가 빌려가면서 넣어둔 노래인가. 뭔가 가사가 오글오글 거리기는 한데, 뭔가 오늘 심정이랑 꼭 맞는 거 같아서.. 괜히 하하- 어이없게 웃고 말았다. 근데 뭐하지? 규현이 갸웃거리다 아! 하고 가방을 열었다. 그냥 목적 없이 나온 만큼, 검정 크로스백은 그 크기와는 다르게 든 게 없었다. 작은 책 2권과 노트북, 카메라케이스 (규현은 사진을 전 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갑과 휴대폰. 에이, 노래만 듣고 앉아 있기에는 조금 아쉬운 날씬 데 말이야. 책이나 읽을까? 아니야, 지나가던 사람이 보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일요일 아침, 길거��� 벤치 위에서 책이나 읽고 있는 남자라니.. 크핫, 애인도 없이 비참한 것 같잖 아. 뭐, 애인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갑자기 우울해지는 생각에 읽으려고 갈등하던 책을 크 로스백 안으로 집어넣었다. 책 읽기도 귀찮고 그냥 앉아 있어야지. 누나는 무슨 사춘기 소 녀도 아니고 그 나이 먹어서 무슨 이런 노래를.. 마음속으로 투덜거려 보아도 솔직히 노래 가 좋기는 좋다. 보컬의 목소리도 괜찮고. 노래와 가사를 곱씹으며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빈 공간 위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들을 보았다가 더 맞는 말 이려나. 간간히 지나가던 차 중 한 차가 건너편에 천천히 멈춰 섰다. 길 건너라, 언뜻 봤지 만, 확실히 아우디 A5 카브리올레였다, 2010년 나온 최신형. 대체 뭐지? 검은색 아우디가 이런 한산한 늦아침에 돌아다닌다는 건,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여기가 아무리 강남 근처라 고 해도 칠천만 원 상당의 최신형 아우디를 몰고 다닌다는 건 신기한 일. 역시 모든 남자의 로망은 자동차인지라, 그 차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문이 열리네. 운전석의 차 문이 열리고는 한 남자가 차 밖으로 몸을 꺼낸다. 뭐야, 젊잖아?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으로 추 정된다. 게다가 같은 남자가 봐도 부러울 정도로 잘 생겨먹었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짜증 나. 근데 모델인가? 아닌데, 웬만한 모델들은 내가 알 텐데 말이지.. 큰 키와 잘빠진 몸매, 그리고 화려한 외모는 사진학도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그러므로 모범적인 학생인 내 가 그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근데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규현이 한참 남자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깔끔한 검은색 셔츠차림의 남자는 차에서 내려와서 두리 번거렸다. 그러다, “이크,” 멍하니 그쪽을 보던 규현과 눈이 마주쳤다. 규현은 놀란 듯 익- 거리다가 급히 눈을 내리깐 다. 마치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았어요. 그냥 노래 듣고 있다가 눈 돌렸는데 네가 거기 있 었을 뿐이에요ㅡ 라는 듯하게. 너무 뚫어지게 바라봐서 눈치 챈 건가? 뭐라고 하면 또 어쩌 지. 아나, 괜히 봤어.. 근데 또 무슨 차도가 이렇게 좁아? 그냥 넉넉한 2차선짜리 도로는 왠지 가까워 보여 좀… 뭐랄까, 아니 좀 그랬다고. 아씨, 규현은 머쓱함에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도 처음 들어보는데. 이씨. 그래도 지금까지 듣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물론 가사는 몰랐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어가려고 했다. 물론 그 남자도 그 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 생각도 했고. “..조규현 맞지?” …응? 내 이름 들은 것 같은데, 규현이 뒷머리를 매만지며 이어폰을 뺀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남자가 건너편 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정확히 자신을. 규현이 MP3의 곡을 멈춘다. 뭐야, 진짜 나 부르는 거야? 규현에 당황해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다시 입을 연다.


“규현이, 조규현 맞지?” 아니, 조규현이라면 내가 맞기는 맞는데. 누구세요. 규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남 자를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분명히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면 서로 알던 사이인 것 같은데. 고교 시절 친구였나? 아니야,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선밴가? 그나저나 저 렇게 잘생긴 사람이 내 주위에 있었다면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건너가도 될까?”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멀뚱멀뚱하게 보던 중 웃으며 크게 물어보는 남자의 말이 당황스럽다. 얼떨결에 ‘그러세요.’ 해버린 게 쪽팔리기도 하고. 남자가 좌우를 살피더니 지 나가는 차들이 없자 천천히 건너온다. 문득 가볍게 휘날리는 벚꽃잎들과 그 남자가 사진같 이 눈에 담긴다.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사진에 담으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모델도 괜찮 고 말이지. 에이씨, 근데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미쳤지, 조규현. 누군지도 모르는 이상한 사람한테 가슴이 왜 설레, 설레기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서 아름다운 피사체에 느끼는 감 정이라 대충 일단락 짓고는 텅 빈 도로를 건너 벤치 앞까지 당도한 남자를 마주하러 몸을 일으키려다, “아냐, 앉아 있어.” 아, 예. 무안하게 일으키려던 몸을 제지하고는 다시 앉는다. 남자도 규현의 옆자리에 털썩 소리가 나게 앉는다. ‘놀랐지?’ 남자가 픽- 웃으며 내게 묻는다. 규현은 남자를 한 번 쓰윽 보더니 흐음, 하고 내색 없이 고민했다. 머리에 무언가 살포시 얹어지는 느낌이 나기에, 손 을 들어 벚꽃잎을 털어냈다. 들었던 손을 내려 무릎 위에 탁 얹히면서 규현의 입술이 일자 로 다물어진다. 일단 보기에는 진지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조금 내려간 눈꼬리 덕에 그닥 부정적인 느낌은 나지 않았다. 남자가 속으로 웃었다. 조규현 진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 아. 그렇다면 예상컨대 지금 규현은 내가 누군지, 혹은 어떻게 물어야 할지. 나름 고민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3초의 침묵동안, 남자가 규현을 보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삭히는 사이 규 현이 입을 열었다. “저기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실례지만…” “…역시, 니가 기억할 리가 있겠냐… 나 최시원인데, 모르겠어?” 규현의 물음을 뚝 잘라먹고는 시원이 나른하게 웃으며 역시란다. 규현이 말이 씹힌 불만감 에 입술을 삐죽이지만, 최시원이라는 이름에 무언가 기억이 날락 말락 머릿속이 간질간질하 다. 고등학교 땐가.. 누구지? 아니 아는 거 같기는 한데, 누군지 모르겠다. 규현이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쪽 손을 들어 턱을 괴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시원의 턱을 잡았 다. 그리고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게 하자, 시원이 놀라 삐끗한 손을 내리고는 규현을 땡그랗게 쳐다봤다. 규현이 진지한 얼굴로 한참을 쳐다보자 시원이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는 미소를 띠었다. 뭘 봐. 시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몇 초간 계속 그러고 있던 규현이 손을 놓았다.


“너라고등학교 나왔죠?” “이제 대충 감이 잡혀?” “…아뇨, 아직.” 규현이 다시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예쁜 것도 여전하네, 우리 규현이. 그런데 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옛날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애가 생각보다 좀 순진하 고 고지식해서 말이지. 대충 아는 척 연기라도 못하냐고. 조규현이는 계속 생각하라고 냅두 고, 괜히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원래 이렇게까지 짓궂은 성격은 아닌데, 이렇게까지 못 알 아보다니! 괘씸해서 말해줄 것도 말해주기 싫다. 솔직히 저렇게 눈 내리깔고 생각하는 모습 도 귀엽고. 근데 이 거리 정말 벚꽃이 많이 폈다. 바람에 따라 날아가는 꽃잎들이 신기하 다. 이 동네에 이런 곳도 있었나. 하도 벚꽃잎들이 많이 날려 규현의 보실보실한 머리 위에 도 몇 개가 쌓였다. 몸을 숙여 꽃잎을 떼어주려고 팔을 뻗는데, “혹시 마션선배??” “풉,” 고개를 든 규현이 반 톤쯤 높은 목소리로 마션선배냐고 묻는다. 시원이 순간 터진 웃음에 끅끅 되며 규현에 어깨에 기대듯 쓰러졌다. 웃기는데 씁쓸해, 끅끅 되던 시원이 곧 웃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 대체 마션선배가 뭐야, 마션선배가. 김희철 이 인간, 내 뒤에서 이러고 다닐 줄이야. 얼마 전 동창회에서 본 능글맞은 희철의 얼굴이 떠오르자, 시원이 어 이없다는 듯 허허, 웃으며 규현의 얼굴을 보았다. ‘잉?’ 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의 규 현은 자기의 말이 뭐가 웃긴지 궁금한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말똥말똥하게 쳐다보 는 규현이 너무 귀여워 순간 안아버릴 뻔 팔을 들어 올린 시원이 멈칫하다가 머리의 벚꽃잎 을 털어내어 준다. 원래 목적을 실행한 시원의 행동이었지만. 뭔가 어색한 시원의 행동에 갸웃거리던 규현도 시원이 누군지 알아맞힌 것이 후련한 듯 밝게 미소 짓는다. “마션선배 진짜 맞죠?” “…누가 그렇게 가르치더니.” “음.. 누구였지, 아! 희철선배요.” …김희철, 대체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던 거지? 고교 시절 희철이 지를 희‘님’이라 고 자칭하고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말을 닮았다고 ‘마션, 마션’ 거렸던 것 도. 예나 지금이나 미친놈이었어. 그나저나 그전 기억은 안 나네. 일 학년 때나, 이 학년 때 기억은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그 1년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다는 생각을 몇 번 해보긴 해봤지만, 정작 그 아이를 만나고 그 기억을 회상해보니 정말 내가 지독했구나, 이 런 생각만 든다. 몇 년 만의 재회인데도, 어색함 없이 그때처럼 뛰는 심장이 조금 당황스럽 기도 하고. 디게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네. “그나저나, 선배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고 있었어?” “…저야 뭐. 잘 지냈어요. 근데 선배는 잘나가나 본데요?”


규현은 오랜만에 만난 시원이 꽤 반가웠다. 시원이 졸업한 이유로는 만난 적이 거의 없었는 데도, 시원은 여전히 잘생겼고 능력 있고 다정해서, 어색함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나는 처음에 선배 몰라봤는데, 어떻게 선배는 나를 한눈에 알아봤 지? 궁금한데 한 번 물어보려고 하다가, 그냥 관뒀다. 별 이유가 있을 것도 아닐 테고, 내 가 선배 못 알아본 게 자랑인가도 싶고. 하나하나 생각해보니깐, 시원 선배 참 나랑 잘 맞 았었는데 말이지. 전교 회장이었던 주제에 몇 번 땡땡이도 깠었던 것 같고. 내가 유난히 선 배를 따르니깐 김희철 선배가 유난스럽다는 듯 뭐라 뭐라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시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목 근처에서 덜렁덜렁 거리던 이어폰을 잡아 내렸 다. 실컷 떠들다 보니 이어폰도 목에 걸쳐져 있었나 보다. 규현이 MP3를 집어넣을 요량인 지, 꿈지럭 꿈지럭거리는데 하던 말을 멈추고 규현을 지켜보던 시원이 규현의 손에 걸린 이 어폰을 뺏어 든다. 그리고 자기 거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게 귓속으로. 순간 손에서 사라진 이어폰의 동선을 따라 슥 고개를 든 규현이 시원의 행동을 보고는 픽 웃으며 다른 한쪽의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그리고는 플레이 버튼을 꾹.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없이 벤치에 기대었다.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선선한 분홍빛 바람이 조용한 거리를 쓸고 지나 간다.

마치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날이야. 마치 어제까지 나쁜 꿈을 꾼 듯 말이야.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너에게 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네. 봄바람에 피어오른 꽃잎처럼 화사해지고,…

귓가에 흘러드는 달콤한 노랫소리. 분명히 아까 들었던 곡인데도 뭔가 다른 것 같아 규현이 모호한 감정에 고개를 숙이며 다리 위로 떨어진 벚꽃잎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손가락 사 이에 하얀 벚꽃잎이 보드랍게 느껴진다. 괜히 딴청을 피우며 멍하니 있는데, 시원이 나지막 이 규현을 부른다. “규현아.” 시원의 부름에 규현이 고개를 든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있게 벤치에 팔을 올린 시원이 안 면 가득 달콤한 웃음을 머금으며 규현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시원의 모습에 가슴속 저 어딘가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번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규현도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 더니 곧 푸흐, 하고 밝게 미소 짓고 말았다. “날씨 좋~네.” 시원이 웃음기 띤 얼굴로 규현에게서 시선을 떼고, 쭉 기지개를 켜며 흘려보내듯 말했다.


그러게요. 날씨는 겁나게 좋네요. 규현도 옆에서 나지막이 맞장구를 치며 킥킥 댄다. 어느 따뜻한 봄날, 어쩌면 소중해질 사람과 재회하다. 그들 위로 떨어지는 서른네 번째 벚꽃잎과 함께.


“최시원!!! 대박!!!!! 쩔어!!!!!” 한가롭고 나른한 점심시간, 느닷없이 3반 복도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며 시원을 열심히 부르 는 한 소년, 그리고 시원이라는 애가 그 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는데….

말인 줄 알았다.

***

“이동해 또 뭔데 호들갑이야?” “대박!!! 교생 온 거 봤어?!” “교생?” “어!!! 레알 예뻐!!!!!” “여자야?!!?” “아, 아니… 남자.” “뭐야, 뭐 잘못 먹었냐?” “아니 근데 진짜로 예뻐.”


“안 예쁘면 너 뭐 할래?” “만빵.” “콜.” 교생이 남자인데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던 동해에게 만원을 뜯어낼 생각을 한 시원이 함박웃 음을 지으면서 1반, 동해네 반으로 뛰어갔는데... 시발... 이동해한테 만원 뜯기게 생겼다.

“야 예쁘지?” “어? 아, 아니 예쁘긴 뭐가 예뻐!” “구라 깐다. 니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아니거든!” 동해가 예쁘지? 예쁘잖아~ 라며 놀리는데도 꿋꿋이 정색을 하던 시원이 결국 못 이기겠는 지 헤- 하고 정신 줄을 놓고 교생을 바라본다. 화진고에서 눈 높기로 유명한 최시원이, 화 진여고에서 물 좋은 애들로만 골라 사귀기로 유명한 공공의적 최시원이 정신 줄을 놓고 쳐 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원의 눈 끝에는 남자 교생이 서있었다.

“야! 최시원!” “어… 어?” “것 봐, 내가 예쁘다고 했잖아.” “어….” “만원.” “어?!” “만원 내 노라거!” “아 쪼잔 하게 쫌!” “쪼잔 하긴 뭐가!” “동해야…. 제발 구차하게 살지 말자.” “야!” “야 근데 쟤 이름 뭐야?” “누구? 교생?” “어.” “이혁재.” “에!?” “맞아, 이혁재.”


이혁재라 하면… 그 가슴 털 북슬북슬한 개그맨 이혁재…. 정말 매치 안 된다. “아 근데 최시원.” “어?” “저 교생 넘보지 마.” “왜?” “김희철 선배가 점찍어 뒀어.” “김희철?” “어, 그 선배 한 달 전인가? 그때 이미 커밍아웃 해서 더 이상할 것도 없긴 한데.” “...” “웬만하면 건들이지 마.” “...” “알아들었어?” “어” 기분이 나빠졌다. 김희철... 선도부 선배여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괜히 속만 탄다.

***

“안녕하세요. “어 그래.” 김희철 선배다. 이혁재를 점찍어 뒀다는 그 사람. 지가 뭔데. “선배.” “어.” “교생 봤어요?” “어.” “완전 예쁜 거 같아요.” “응” “아무래도 저 교생 좋아하나 봐요.” “...” “선배는요?” “… 최시원.”


“네. 선배.” “걔 내 고양이다.” “네?” “내 꺼라고.” “...” “자고로 고양이는 주인이 정해진 법이지.” “...” “건들지 마라.” “선배.” “어.” “아직 고양이는 도둑고양이일 뿐이잖아요.” “뭐…?”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얘기에요.” “...” “주인이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한들.” “...” “고양이가 주인을 선택하는 거잖아요.” “...” “고양이가 누굴 선택하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이럴 줄 알았다. 선배는 고양이를 노리고 있었다. 과연 고양이는 누굴 선택할까.

“안녕하세요!” “네?” “이번에 오신 교생 선생님이시죠!?” “네? 네….” “전 2학년3반 최시원이에요!” “아 네….” “잘 부탁드릴게요.” “네.” 의외로 고양이는 쑥스러움을 많이 탔다. 어쩜 저 쑥스러움도 하나의 속임수일지도, 원래 고양이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가? “선생님.” “네?”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


“네? 네...” “그럼 저랑 데이트 하실래요?” “네?” “데이트요, 만나자구요” “아….”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님, 여자친구?” “아, 아니요….” “그럼 만나요!” “아… 뭐.” “네?” “그래요 그럼.” 고양이가 웃었다. 너무 놀래킨 걸까? 처음부터 남자친구를 말하기엔 놀랬을 수도…. 게이가 아닐 수도 있었으니 내가 조금 성급했던 거 같다.

“선생님!” “아…!” 선생님이 저-만치서 통통거리며 뛰어온다. 귀엽기는. 학교에서 만난 건 딱 한번 뿐인데도 이렇게 귀엽고 보살펴 주고 싶은걸 보니 …. 아무래도 정말 좋아하게 된 거 같다. 게다가 선생님이 입은 베이비 핑크색 후드 티는 정말 깨물어 주 고 싶었다. “시원군!” “시원군이 뭐에요 선생님 크크큭.” “아….” “그냥 시원이라고 불러주세요 크큭.” “아, 알겠어요.” “그리고 언제까지 존댓말 쓸 거예요.” “네?” “어허- 또 존댓말!” “아… 알겠어.” “그렇지!” 귀엽기는... 존댓말 안 쓴다고 인상 좀 찌푸렸다고 그새 풀이 죽어버리는 모습이라니... 진짜 주민등록증 한번 확인을 해보던가 해야지. 중학교 3학년 같잖아!


“근데.” “네?” “시원이는 나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야?” “음… 뭐라 불러줄까요?” “형…?” “형이요? 크큭.” “왜! 왜 웃어!” “아 알겠어 형.” “으씨…” “혁재 형.” “응?” “몇 살이야?” “나? 나 22살.” “대학생이네?” “응!” 대학생이냐는 물음에 또 응! 이라며 들뜨는 저 모습... 큭큭 내가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다.

***

“어…! 시원아….” “어?” “너… 먼저가.” “왜?” “아, 아니... 갑자기 약속이 생각났어.” “누구랑?”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우선 너 먼저가.” 집 앞에 다 와서 먼저 가라는 건 무슨 소리인건지. 잠깐...! 집 앞에 누군가 있다. 그리고 내 옆엔 불안해 보이는 혁재형... 무슨 일이지..? “형.” “응?” “혹시….” “...”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 “대답해요.” “…그런 거 없어.” “똑바로 말해!” “없어!” “그 말.” “...” “책임질 수 있어요?” “...” “...” “…!” 숨기는 게 없다고 말하는 혁재형의 입술이 얄밉고 날 속이려는 혁재형을 골탕 먹이고 싶다 는 생각에 무턱대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놀랐다는 걸 말이라도 하는 듯 평소에도 컸던 눈이 훨씬 더 커져버린 혁재형의 눈... 또 나를 밀어내려는 혁재형. 뭐가 그렇게 불안해. “이혁재” “희, 희철아….” “...” “희, 희철아.. 시원인 아무 상관없어...” “풉” “희철아…?” “내가 널 때리기라도 했어?” “희철ㅇ….” “닥쳐.” “...” “니 변명 듣기 싫어.” “...”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바래.” “희철아….” “너 이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 “그만하자.” “희철아!” 뭘 그만하자는 거지? 사랑? 인연? 둘이 사귀기라도 했다는 건가? 김희철은 그냥 이혁재를 좋아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심하게 엉켜있었다.


“최시원” “네 선배.” “내가” “...”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 “말이 말 같지 않았나 보지?” “...” “이제부턴 내가 빠져줄 테니.” “...” “어디한번 너네 둘이 잘해봐라.” “...” 자신이 빠져주겠다며 한껏 비아냥거리던 희철선배가 나와 혁재형 사이를 지나가고... 우리 둘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혁재형은 혁재형 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난 나대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생 각하느라 서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최션!” “...” “뭐야… 왜 또 저기압인데.” “야” “어?” “너 연애 많이 알고 있지.” “뭔 연애? 누구랑 누구랑 사귀는지 뭐 그런 거?” “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화진고 연예부 기자 이동해 아니냐!” “그럼 너 지금 남남커플이 있는 것도 알고 있어?” “누구?” “그냥... 너가 아는 커플로 전부 다.” 급했다. 혹시라도 어제 본 상황이 진실일까. 내가 생각했던 그게 사실일까 두렵고 무서웠 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희철에게만큼은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음...” “...” “1반 김려욱이랑 3학년 김종운 선배 사귀는 거?” “또” “1학년 박정수랑 8반 김영운 사귀는 거” “그리고” “아….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뭔데” “교생이랑” “...” “3학년 희철선배랑 사귀는 거” 헐 이다. 정말…. 사실이었다. 가슴이 저릿저릿 아려오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잔뜩 굳어진 내 얼굴을 동해가 보고는 왜 그러냐며 어깨를 흔들어 봐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아… 시원이구나.” “제가 묻는 거에 대답해주세요” “뭘…?” “그게 진짜에요?” “...” “희철선배랑… 선생님 관계” “...” “대답해 봐요!” 차마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혁재형이, 아니 교생선생님이 원망스러워 교무실에서 그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내가 부끄럽기라도 하는 듯 여기서 큰소리 내면 어떡해! 라며 나 를 나무라는 혁재형을 보니 더 화가 나고 말았다. “따라 나와요.” “이, 이것 좀 놔!” “형” “하… 정말.” “언제부터였어요?” “뭘” “희철형” “...”


“...” “좀…” “...” “오래됐어.” “얼마나요…?” “이곳에 교생으로 오기 전부터.” “...” “거의 2년 가까이.” “...” “그래서 그런데” “...” “시원아… 미안해.” “아니에요.” “...”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어요.” 만난 지 2년... 혁재형을 만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나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 감히 그 둘의 사이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내 심장을 접었다.

“선배” “... 너랑은 할 얘기 끝난 걸로 알았는데.” “...” “말해.” “... 제가 빠지겠습니다.” “하…” “...” “너한텐” “...” “뺑소니 하고 고의는 아니였다.” “...” “이러면 그 일이 덮어지나 보지?” “선배” “됐다. 그만해.” “...” “니 얘기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 “내 얘기는 내가 정리 되는대로 해줄 테니 돌아가 봐.”


혁재형과 헤어지고 선배가 있는 5층으로 곧장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선배는 내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난 선배의 모진 소리를 가만 히 들었다. 선배의 모진 소리를 들으며 혁재형에 대한 한여름의 햇빛처럼 강렬했던 내 마음 도 정리하자 짧았지만 그만큼 사랑했던 혁재형에 대한 내 맘을 대신하듯 나도 모르게 눈물 이 흘렀다. 그렇게 선배의 화난 목소리를 뒤로 흘렀던 눈물을 닦으며 계단을 내려가니

혁재형이 날 보며 울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에게 내 울음소리가 들렸을까 애써 밝은 표정으로 “교생선생님” 하고 말하자 “시원아…” 하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 그의 말을 들으면 멈췄던 내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은 느낌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 가려고 했지만…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울었다. “선생님” “미안해….” “이제” “...” “희철선배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선배한테 가보세요.” “...” “제 마음은 짧아서 정리도 빠를 거예요.” “...” “근데” “...” “희철선배는 아니잖아요.” “흐윽…” “얼른요, 안 그러면 희철선배 더 화나요.”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이 나를 사랑해서 흘린 거라고, 조금이라도 믿고 싶었지만 희철선배라는 말에 이내 눈물을 떨구는 혁재형을 보니… 그때서야 나를 사랑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미안한 감정에서 흘러나온 눈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

“희철아...” “하...” “...” “결국” “...” “또 제자리.” “...” “이혁재” “...응” “너 진짜 피곤하다.” “희,희철아...” “...”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말고.” “...” “최시원” “...” “걔한테 사과나 하고 와.” “희철아…”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난 시원이를 울리고, 또 희철이를 아프게 했다. 그런 나를 희철이는 놓지 않고 또 잡아 주었다. 미안해 희철아, 그리고 사랑해. 앞으로는 이 손 놓지 않을게.


(번외)

“혁재야” “응?”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 “좀 더 쉬운 길로 올 걸 그랬나봐.” “...” “하…” “...” “참 일이 많았었다.” “그래서 그런지” “...” “시원이한테 더 미안하다.” “...” “그치?” “… 몰라” 결국은 희철이 그리고 나. 우리 둘을 더 강하게 해준 잊지 못할 시원이, 시원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시원이 말을 하자 금세 뾰루퉁해진 희철이를 보고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너한테도 미안하고….” “알면 됐어 임마.” “어쭈?” “큭큭” “내가 형이거든!?” “알거든요?” “그럼 형이라 불러!” “이 쪼꼬만한 고양이를 어떻게 형 취급을 해.” “너 또!” “우리 괭이 이리온- ” 또 애완동물 취급이다. 내가 싫어하는걸 알면서도 은근 그런 내 모습을 즐기는 김희철. 완전 악질중의 악질이다. “희철아” “어?” “너 졸업하고”


“우리 여행이나 갈까?” “무슨 여행.” “그냐앙… 너 수능도 끝났겠다… 여행.” “...” 내가 여행제안을 하자 희철이는 벌써부터 여행지를 생각하는 듯이 턱을 괴고는 가만 눈을 감는데…. 누구남자인지 참 잘났다. “흐흥” “뭐야 왜 그래.” “아니야아….” “말해봐.” “뭐얼” “말꼬리 늘리지 말고 왜 웃었는데.” “히힛” “뭐야.” “그냥… 아 쑥스러!” “빨리 말해봐.” “누구남자인지…” “...” “너무 잘났길래.” “...피식” “으이씨… 이럴 줄 알았어!” 빨리 얘기하라며 재촉하는 김희철한테 솔직히 말했더니 이내 피식 - 하고 웃는다! 못됐어 진짜! 앞으로는 말 안 해줄 거야! “야” “내가 형이라고!” “크큭- ” “이씨…” “혀억재애야” “따라하지마아!” “아 미치겠다 크큭.” “웃지 말라고오….” “얼굴 빨개진 거 봐 진짜 귀엽다 너.” “놀리지 마!” “진짠데?” 악마 김희철…. 내 얼굴이 빨개진 걸 보고는 귀엽다느니 홍당무라느니 나를 놀리기 바쁘다.


씨이… 진짜 얼굴 새빨개졌잖아! “혁재야” “너!” “아, 알겠어. 혁재형” “왜” “우리 여행” “어” “크큭… 그런 걸로 삐지냐.” 그런 거라니! 이놈이! 그리고 난 안 삐졌어! 나 화난 거라고! “화난 거거든! 나 안 삐지거든!” “아 크큭 알겠어 여튼.” “응” “우리 여행으로” “...” “스키장이나 가자.” “스키장?” “어. 싫어? 싫음 말고.” “아니야! 누가 싫댔냐….” “그럼 스키장 콜.” 스키장! 방학 때 까지 얼마나 남았지... 응? 뭐야 1달도 안남았네…! “김희처얼!” “왜 또” “지금 호텔 예약해야 돼.” “호텔?” “안 그럼 성수기여서 우리 스키장에서 동사해!” “아아 귀찮은데.” “뭐야!” “내가 장소 결정했으니까 예약은 너가 해.” “… 알겠어.” “그렇다고 또 삐지지 말고.” “안 삐졌거든?!” “누가 삐졌다고 했냐? …입술이나 집어넣어.” 베그래…. 내가 어른이니까! 네 보호자로써 예약은 해준다! 짜식.


***

11월 29일 날씨 : 맑음 오늘 희철이랑 여행갈 곳을 정했다. 근데 희철이가 날 놀렸다. 난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 였는데 자꾸 삐순이라는 둥 날 놀려서 나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나왔었나 보다. 그러자 희 철이가 나한테 입술 집어넣으라고 했다. 내 입술이 그렇게 튀어나왔나…. 앞으로는 입술 집어넣어야겠다. 혁재의 오늘 일기 끝!


도망치듯 여행을 왔다. 차에 네비게이션은 떼어버리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차를 몰아 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나에게는 쉴 곳이 필요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들 그런 쉼터. 정글을 헤매다 유토피아를 발견한 탐험가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장관에 경탄했다.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마을이었다. 불규칙 적으로 배열된 논두 렁이나 하늘 위로 높게 드리워지는 연기. 불과 몇 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과 같아서, 시간 이 멈춘 듯, 본 적은 없지만 나를 안정되게 해주는 풍경은 가히 아름다웠다. 산 아래로 내려가 마을 어귀에 차를 대고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왠지 전원일기의 배 경음악이 들려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덜컹덜컹하는 바퀴소리가 들리자 각 집에서 너도나 도 할 것 없이 뛰쳐나와 나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저만치서 바라보기만 했다 . 순식간에 구경거리가 된 나의 기분은 나빴지만 그래도 며칠간은 신세를 져야만 한다는 생각에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촌장이신 듯 보이는 할어버지 한 분께서 느릿느릿 걸어 나오시더니 나를 뚫 어져라 바라보시곤 걸음걸이만큼 느릿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서울 청년이여?” “예? 예에….” “서울 사람이 우리 마을엔 워쩐 일로 왔대?” “그, 그게….” 솔직하게 말 할 자신은 없었다. 쉬고 싶어서 왔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으면 대체 어떤 반응 을 보이실까. 사실대로 그냥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 온 거에요, 할 수도 없고. 뭐 라고 말씀 드리지? 계속 눈도 못 맞추고 어물어물 대답도 못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갑


자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시더니 아까와는 다르게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으시곤 하는 말. “하이고 참말로 곱게두 생겼다. 서울 청년 이름은 어떻게 되나?” “조, 조오, 조규현, 이라고 합니다….” “이름두 곱다. 난 이 마을 이장이여. 잘 곳 없어 뵈는디, 우리 집에서 먹구 자구 해.” 아무런 이유도 대지 못했는데 선뜻 제 집에서 먹고 자고 하시라는 이장님의 친절함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어쩔 줄 모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시더니 마을 사람들이 모인 무리들을 쳐다보셨다. 그리곤 입을 크게 벌려 ‘동해야!!’ 하고 외치신다. “예, 할아버지.” “규현군 짐 안 들어드리구 뭣 허냐. 어서 들어드려라.” “예엡! 형, 짐 저 주세요.” 동해… 였던가, 이제 고등학생 된 듯 보이는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빼앗 아 간다. 괜찮다고 다시 가져오려고 하니까 어허이! 그러면서 캐리어를 자기 뒤로 숨긴다. “서울 사람은 되게 오랜만이라서 그래요. 여기까지 오면서 보셨다시피 번화가랑 우리 마을 은 많이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잘 오려고 하지도 않아요. 학교도 자전거 타고 20분 정도 걸리는 걸요. 그러니까, 형이 여기 있을 때까지만 좀 친절하게 대하게 해줘요, 예?” 소년답게 이히히, 웃으면서 말하는 게 꼭 십여 년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기억 속 한 구 석이 향수에 젖는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짐 정도는 내가 들겠다고 했다. 동 해는 그제야 내게 캐리어를 건넨다. 그리고 이장님과 함께 나를 저의 집으로 안내한다. 이 장님의 댁으로 가는 도중 마을 사람들이 드문드문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서울 사람들은 원래 전부 다 얼굴이 하얗냐던지, 전부 이렇게 수수깡처럼 말랐냐던가, 등등. 별로 대답 안 해줄 이유도 없어서 하나하나 다 대답 해 주었다. 그러자 참 착한 청년이라며 등도 쓸어주시고 한다. 아아, 이거야. 마을 사람들, 전부 다 친절해. 어귀에서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낮은 담 너머로 빨간 벽돌로 지어올린 집이 나타났 다. 마당에는 개집 안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개가 나른하게 눈 감고 누워있고, 나무는 또 어 찌나 많은지. 집 뒤로 펼쳐지는 여름답게 싱그러운 녹음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넋 놓고 보고만 있으니 동해는 시종일관 미소를 띠운 얼굴로 내 팔을 잡고 마당 안으로 이끈 다. “규현이 형! 어, 어으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너 원래 나 처음부터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잖아 인마.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 너랑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그렇게 부르고 싶음 그렇게 하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화 낼 거잖아요.”


“…그, 그렇지.” “그러니까 형이죠. 형 얼굴에 아저씨라고 그러면 괜히 죄 짓는 것 같고.” 그거 무슨 의미냐? 죄 짓는다니, 뭘? 설마 동해가 어려보이고 난 너무 늙어보여서 그런? 그런 의미면 나도 사양이야, 이 자식아! 혼자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동해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내 팔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도 아무 말 안하고 같이 들어갔는데 이장님 은 어느새 들어가 계셨는지 가족들 모두 모아놓고 나를 반겨주셨다 . 아저씨 , 아주머니 , 그 러니까 동해의 부모님이랑 동해의 형, 동해, 동해 할머니, 이장님. 가족 구성원은 이렇게 6 명이었다. 남은 방이 없다며 미안하다고, 동화(동해 형의 이름인 듯하다)보다 동해 방이 더 넓으니까 동해랑 같은 방을 쓰면 되겠다고 했다. 동해는 또 내 팔을 잡고(그만 좀 잡아) 자 신의 방으로 날 이끌었다. “가방은 아무데나 놔둬요. 침대는 어차피 더블이니까 나랑 같이 쓰면 되겠고.” “어… 남자애 혼자 쓰는 방 치곤 꽤 깨끗하네.” “왜요, 형은 방 더럽나 봐요?” “왜이래~ 나 이렇게 보여도 옛날에 과 선후배들이랑 합숙할 때 청소담당이었어. 후배 하나 가 돌아다니면서 먹으니까 흘리는데 내가 ‘헨리야 그러면 안 되지!’ 라던가 그러면서 ….” 침대에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 있는 때는 무슨 일을 했냐, 키는 몇이냐, 혈액 형이라던가, 학교 다닐 때 어땠냐 라던가. 대게 물어보는 건 동해였다. 난 그저 대답만 해 줬고. 또 물어보는 거 대답하는 건 귀찮지도 않은지 술술 대답해내는 동해가 대답하기도 했 고, 물으면 회피할만한 대답도 꺼리지 않고 한다. 성적이나, 여자친구, 어디 대학 준비하고 있냐던지…. “등급은 얼마나 돼?” “어, 4-2등급 정도. 나 공부는 하는 놈이에요.” “서울에서는 명지대 정도 가겠다. 요즘 많이 올랐거든, 거기 등급.” “그럼 형은 어디 나왔어요?” “나? 경희대.” 겨, 경희대?! 깜짝 놀라서 소리를 빼액 지르는 동해 때문에 귀청이 다 떨어지겠다. 근데 스 펙 좀 높은 대학 나왔다고 깜짝 놀라는 게 역시 고등학생답다 싶어서 또 웃음이 나온다 . 푸 훗, 귀여워, 하고.

*  *  *

오랜만에 손 대보는 넷북에 감탄이 아니라 경악이 나올 지경이다. 대체 내가 그동안 캐리어 를 얼마나 험하게 다뤘길래 내용물이 이렇게까지 외부 손상이 될 수 있는 거지? 마치 땅에 세게 떨어트린 것 마냥 한 쪽 모서리는 심하게 파여 있고 또 왜 이렇게 빛이 바래 있 … 아 니, 됐다. 그래도 슬쩍 봤을 때 외부만 손상되고 속은 멀쩡한 것 같아서 전원을 키고 마우


스를 연결했다. 바탕화면에 깔린 ‘스타크래프트’를 더블클릭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인터넷 익스플로러 바로가기 버튼을 꾹 눌렀다. 초록색 검색창이 떴다. 인기 검색어 순위 1위 ‘슈 퍼주니어 컴백’… 2위 ‘슈퍼주니어 미인아’… 아, 요 전에 회사 동료 수연 씨가 유리 씨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이제 곧 슈퍼주니어가 컴백한다며 수줍어했던 것이 기억난다 . 다시 인기 검색어 순위 3위 ‘신동 프로포즈’. 응? 프로포즈? 여자친구가 있나? 3위를 눌러 진상 을 확인하고 싶었다가 내가 고작 이거 보려고 오랜만에 노트북을 켠 게 아니거든 , 마우스를 돌려 메일을 눌러 새로 온 메일이 없나 확인하고 쓸데없는 광고 메일을 휴지통에 넣고 ‘비 우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좌측 상단에 위치한 ‘메일 쓰기’ 버튼을 눌렀다. 아, 처음을 어떻게 끊지? 인사부터 할까? 그 다음에는 자기소개를 하는 거지. 예를 들어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아홉 살 조규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당신에게 메일을 보 내는 이유는 제가 오래 전부터 당신의…’…? 그 다음에는? 당신의 뭐? 당신의 팬? 아니면 ‘의’자를 삭제하고 ‘을’로 고쳐서 ‘당신을 좋아해온’? 이름을 조규현이라고 버젓이 내 이름을 대놨는데 좋아한다고 하면 중간에 메일을 읽지도 않고 그냥 꺼버릴지도 모르지 . 그냥 ‘당신 의 팬’이라고 쓰자. 그 다음부터 말을 잇자. ‘ …당신의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의 소설은 전부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여덟 줄 정도를 술술 써 내려 가다가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어서 뒤로 발랑 누웠다. 그냥 쓰지 말까… 구차해 보이는데. 게다가 내가 쓰 던 메일 주소 그대로 보내면 그 사람이 읽기라도 할까봐? 손을 뻗어서 전원 버튼을 눌러 강제종료 해버리고 넷북을 닫았다. 미련하다 진짜. …………희철이 형이 한 달 전에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었다. 시원의 메일 주소라고, 그냥 그렇다고.

알 수 있다. 시원에게 메일이라도 한 번 보내보라는 희철이 형의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명령이었다. 내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타박이라도 하면 그는 분명 ‘미련한 새끼. 아직도 최시원 못 잊고 있는 거 안다. 어렵게 구한 메일 주소야. 꼭 한 번 메일이라 도 보내봐. …너 내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게 제일 싫어하는 건지는 알지? 안 보내면…….’ 이라고 하면서 그 크고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날 째려봤을 거였다. 사실 보낼 생각은 없어서 희철이 형 피해서 여기 온 것도 약 3%정도…포함일 거다. 잘 나가는 소설가 한 명 꼬여내서 연애질이나 하더니, 결국엔 ‘난 여자가 좋아’ 하면서 먼저 발 빼버린 그 놈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아직까지 못 잊고 있는지. 그 놈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못 잊어서 이렇게 아파하는 거 봐라. 다 나와 시원이 사귀던 때 알고 있던 이들이 나에게 한 말이다. 희철이 형도 그 중 한 사람이고. 이제는 결혼도 하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잊어보려고도 했었는데 옛정이 뭔지, 그리움이 뭔지. 하이에나 같던 시절의 본인을 사람답 게 만든 그 인간 못 잊고 산 게 벌써 2년이다. 시원과는 5년을 만났었다. 남자는 영원히 철 들지 않는 소년이라고 했던가. 그래, 나 아직 철 덜 들었다. 이렇게 못 잊어 허우적거리는 걸 보면. 보…고 싶은 건가.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보고 싶어. 잠시 생각을 하다 보니 가슴이 저릿한다. 그게 점점 커진다. 가슴에 큰 멍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어 …. 저기요 시원씨, 나 그렇게 버리고 가야 했어요? 난 아직 당신 정말 사랑하는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신 생각에 가슴이 아픈데, 왜…왜 시원씨는 나 그렇게 버리고 갔어요? 왜 나 거기에…버리는 것도 왜 본가여야만 했어요…….


콧잔등이 시큰거리더니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눈 한 번 감으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또르 륵…. 그 이상은 아니었다. 차라리 엉엉 울면 좋겠는데, 가슴에서 뭔가가 턱턱 막힌 것 같 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방해한다. 가슴을 퍽퍽 쳐대고 앞머리를 뒤로 쓸어겼다. 그냥 …심장 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가를 훔쳤다. 크응, 코 먹는 소리도 없고, 좋다. 남이 보면 그냥 손세수 한 거로 보이겠지. 뒤를 돌아봤는데 동해가 심드렁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학교 가기 싫어서 그런단다. “대체 방학 때 학교는 왜 나가라고 그러는데… 아 짜증나.” “원래 고 3이 그래. 몇 개월 안 있다가 수능 봐야 하잖아.” “…에휴. 그래, 내가 좀 더 인간답게 살려면 공부 해야죠. 스펙 보고 인간 따지는 말센데.” 고작 19년 밖에 안 살았으면서 뭔가 다 살았다는 노인네 말투다. 어이, 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해? 요 쪼꼬만 녀석이. 빈정대며 뭔가 말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동해 가 가로챈다. …아……. “뭐 하고 있었어요?” “어…. 컴퓨터 게임이랑…뭐, 많지. 많은 걸 했지.” “근데 말투가 왜 그래요? 꼭 세상 다 산 70대 스님처럼.” “아니 이 자식이.” 그 말도 내가 하려고 했는데, 쟤는 왜 계속 내가 하려는 말만 가로챈다니. 입술을 삐죽이니 까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내 옆에 앉아서 넷북을 만지작거린다. “이거 형 거예요?” “응.” 그럼 내 거지, 대체 누구 거야? 그렇게 퉁을 놓으려다가 그럴 여유는 없어서 그냥 ‘응’한마 디 하고 넷북을 열어보는 동해의 손을 제지했다. 뭐 못 보여줄 거라도 있느냐는 물음에 아 니, 뭐… 그냐앙, 아무튼!! 계속 힘을 주어 열어보려는 동해의 손을 찰싹 때렸다. 그제서야 툴툴거리면서 손을 슥 치우는 동해. 크흠. 괜히 이상해진 분위기에 헛기침을 했다. “뭐 야동이라도 있어요?” “없어, 인마. 사생활이 홀랑 벗겨질까봐 그런다. 경희대 스펙 쩌는 놈이 와, 이런 사생활이 있으셨구나, 하고 실망이라도 할까봐 그런다. 왜?” “형이랑 나 사이에 무슨 사생활이 있어요~ 좀 보죠. 예?” 대체 너랑 내가 무슨 사인데? 방 같이 쓰는 사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달라붙지 말고 좀 떨 어져 주지? 다시 노트북에 손을 대려고 하는 동해의 손에서 넷북을 되찾아와 등 뒤로 감췄 다. 동해는 얼굴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포기했는지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침대 위에 휙, 던진다. 러닝셔츠 하나만 입었는데, …와, 이 자식 근육이 장난이 아니다. 처음 봤을 때


가방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 때부터 알아 봤어야 했는데. 와아, 넋 놓고 보니까 좀 부끄러 운지 다시 와이셔츠를 집어 옷을 반대로 끼워 넣는다. 등판에 앞에 가있고, 앞이 등판에 가 있는데 설날 특집으로 봤던 ‘춤봤다’에서 옷 찢었던 옥택연이 떠오른다. 큼, 그거 보면서 근 육이나 키울까 했었는데 그냥 힘들어서 관뒀다. 윤아 씨도 나한테 근육 키우면 혼난다고 그 랬었고. 아, 아무튼 꼬마 자식이 벌써부터 근육을 키우냐. 큼, 크흠. “동해 근육 키워? 키 안 크는데.” “그럼 형은 근육 안 키워서 그렇게 키가 큽니까?” ‘키’를 들먹이니까 빈정 상한 얼굴로 와이셔츠 다시 확 던져 버리고 러닝셔츠도 벗고 방바 닥에서 티셔츠를 하나 주워 입는다. 음? 저 무늬 어디서 많이 본 건데…저거 내 거잖아! “동해야 그거 내건데….” “어어, 그러네. 한 번도 못 본 거네…. 아, 근데 형 왜 이렇게 작게 입어요?” “나 구온데. 작게 입지는 않아. 딱 맞는데?” “형 사이즈가 작은 거네. 으흐…. 그냥 벗어야겠다.” 다시 벗고는 서랍을 뒤져 좀 커 보이는 티셔츠를 꺼내 입는 동해. 어 , 팔뚝에 핏줄 섰다 . 동해에게 이리 와보라고 하고 옆에 앉혔다. 팔뚝 크기 한 번 대보자 했는데 아주 자랑스럽 게 팔뚝을 내놓는다. 찰싹 대보니까 와…진짜 굵다. “형 팔 진짜 하얗네요….” “음? 어어… 너랑 나랑은 왜 이렇게 관점이 다르냐. 됐구영,” “와, 손목도 얇다. 형, 형. 형 여자였으면 남자들한테 엄청 인기 많았겠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동문서답은 거절하겠고요, 일 끝났어, 가봐.” “에헤이. 나 넷북 보여 줘야죠.” 아직도 포기 안했냐?!!?! 소리를 빽 질렀다. 그랬더니 음흐흐 하고 낮게 웃으면서 노트북을 살살 만진다. 좀 보여 주지요? 아까보다는 좀 더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그럼 당연히 한숨을 내쉴 수밖에.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얼굴로 넷북과 마우스를 건 넸다. 그러자 샐쭉 웃으면서 받는 동해. 그리곤 바로 넷북을 열어 전원을 킨다.

*  *  *

쏴아아아아…. 거센 물줄기 소리에 잠에서 깨버렸다. 비라도 오나 싶어서 상체를 들어 마당 을 보니 잠들기 직전의 하늘과 다를 바 없는 하늘이었다. 그냥 파란 하늘에 구름 조금 낀 날씨. 그런데 왜 물 줄기 소리가…. 동해는 고개를 기웃거렸다. 마당을 보니 물에 촉촉하게 젖어있다. 뭐야 이게? 그러다 갑자기 위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에 깜짝 놀라 대충 신


발을 구겨 신고 옥상 쪽을 보았다. 뭐지? “어? 동해 일어났네.” “…형 옥상에서 뭐해요?” “아주머니가 여기 통에 든 물 좀 버려달라고 하셔서,” 그래서 마당에다 그냥 뿌려버렸지~ 옥상에는 규현이 덥지도 않은지 긴 팔 와이셔츠를 입고 선 양동이 손잡이에 손가락 하나를 끼우고 달랑대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입가 에서 미소를 떠나보낼 줄 몰랐다. 난 이렇게 더운데, 치사하게 형은 혼자 땀도 안 흘리고. 왠지 지구상에서 규현 혼자 이 더운 여름날에 뽀송뽀송할 것 같아서 동해는 약간 치기가 올 랐다. 그런 동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규현은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아아- 날씨 조오타아!” 이런 날씨에는 물놀이 한 번 가야 하는데, 덧붙이는 말에 갑자기 물놀이가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라 계곡도 없고 저수지는 한 번 잘못 하면 익사 할 수도 있 고, 개울가에서 놀면 할아버지한테 혼나고… 아, 어쩌지? 동해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는지 옥상을 향해 크게 외친다. “엄마! 창고에 엄청 큰 대야 있죠, 아직!!” “어- 아마도 있을 거다.” “으흐흐… 형! 물놀이 할래요?” “어? 됐어 무슨 물놀이야. ……하고 싶긴 한데.” “그럼 내려와요!” 규현을 부르고 동해는 그가 내려 올 동안 창고에서 아주, 엄청, 대박, 큰, 성인 남자 서너 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겠다 싶은 대야를 끄집어냈다. 과연 이 큰 물체가 대야라고 불릴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동해는 마당으로 대야를 질질 끌고 와서 집 안에 있는 수도 꼭지를 호스와 연결해 대야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콸콸콸…잘도 쏟아지는 물을 빤히 바 라보고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반 정도 채워진 물을 바로 앞에 쪼그려 앉아 물 채워지는 것 을 보고만 있던 규현 쪽으로 물을 튀겼다. 얼굴 쪽으로 튀어 읍푸푸 하고 손세수를 하는 규 현이 좀 귀엽기도 하고…또…물에 젖으니까 참하기도 하다. 아니, 섹시에 가까운가…. 동해 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저를 고양이 눈으로 째려보는 규현의 얼굴에 호스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는 규현. 이래선 물놀이를 어떻게 하시겠다고…. 그래도 약 간 즐겁기는 해서 동해는 푸하하, 크게 웃었다. 찰방, 발을 담갔다가 정수리까지 찌르르 올라오는 냉기에 물 잘못 틀었나 싶다. 규현은 한 번 발 잘못 담갔다가 냉기에 빳빳하게 굳은 동해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손을 한 번 담가 봤는데 좀 많이 차갑긴 해서 손을 탈탈 털었다. 어흐, 진짜 차가워. “따듯한 물 좀 부을까요?” “귀찮게 뭐하러 그래. 그냥 놀자.”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한 번에 푹 담그는 규현의 대담함에 오, 탄성을 질렀다가 이내 벌벌 떠는 꼴이 꽤나 웃겨서 푸하핫, 웃었더니 발끈했는지 규현은 나머지 발도 담그고 몸도 담갔 다. 하지만 그게 무리수였는지 한 동안 몸을 부들부들 떤다. 동해는 그제야 물이 엄청난 냉 기를 가졌다는 생각에 집 안에 들어가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를 떠와 물에 뿌렸다 . 규현 은 물이 잘 섞이도록 팔로 휘휘 젓더니 이제야 좀 살겠다는 얼굴을 한다. 그 얼굴을 본 동 해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어흐, 시원하다. 왠지 어르신 목욕탕에서 근육통 푸시는 표정과 도 같아서 규현은 큭큭, 웃었다. 동해는 물속에 두 손을 넣고 사이에 물이 차게 해서 규현을 향해 꾹, 눌렀다 . 그러자 규현 의 얼굴을 향해 시원하게 날아가는 물줄기. 규현은 순간 욱해서 동해의 얼굴에 물을 튀긴 다. 계속해서 서로 물을 튀기고 놀다 보니까 물이 대야 밖으로 다 나가버려 반 밖에 물이 차지 않는다. 동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스를 대야 안에 넣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콸콸콸 소리를 내며 점점 차오르는 물을 보다가 규현의 표정이 점점 사색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양 동이에 뜨거운 물을 담아온다. 조금씩 따르니 온도가 맞춰졌는지 규현의 표정도 안정을 되 찾는다. 동해는 계속 호스에 물이 흐르게 해 놓고 대야 안에 들어가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 는 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에 젖어 맨 살에 달라붙은 와이셔츠. 게다가 하얀 색이라서 속살이 다 비친다. 이대로 두 면 위험할 것 같아서 동해는 규현에게 이제 그만 하지 않겠냐고 묻는다. 규현은 벌써 ?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동해를 쳐다보았다. “좀 추워요. 그냥 두면 형도 나도 감기 걸리겠다.” “그런가…그럼 그만 하자.” 동해는 규현을 일으키고 대야 밖으로 나와서 대야를 기울여 물을 버린다 . 수도꼭지도 꼭꼭 잠그고. 수건을 가져다가 규현의 머리에 얹어주고 또 다른 수건을 자기의 머리에 올려 탈탈 털었다. 이제 머리는 그냥 자연스레 마르겠고, 규현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TV를 틀었 다. 규현은 동해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 어느 한 곳에서 멈 추고 보기 시작했다. 동해는 어느새 TV 시청에 집중한 규현의 얼굴을 돌아봤다. 왜 저렇게 생겼을까…옆선만으로도 사람을 쥐락펴락 하니, 동해는 한숨을 쉴 수밖에. 규현은 뭔가 동해가 보기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얀 피부며, 가늘고 길고 예쁘기까지 한 손, 덥거나 부끄러울 때 쏙 내미는 빨간 혀라던가…크게 웃을 때면 자신이 컴퓨터에서 메신저를 할 때면 같은 반 여자애들이 보내는 쪽지에 많이 들어있 던 이모티콘-눈을 찡그리고 입은 환하게 웃는 모양-같은 웃음을 보인다던가, 햐얗고 오밀 조밀한 얼굴에 뭐 그리 할 말은 많은지 아줌마처럼 팔짱을 끼고 붉은 입술로 오목조목 어른 들과 수다를 떨어대는 입술 등…등. 내년이면 서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습관들과, 행동 들. 그 외에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많았다. 동급생 같았으면 벽에 밀치고 으르렁 대기라 도 했을 텐데 하필 규현이 저보다 자그마치 열 살이나 많아서 그러질 못했다 . 규현이 학교 에서 근의 공식을 외우고 있을 때 본인은 겨우 가나다라 마바사아 자차카타 파하 깨치고 있 는 나이 차란 말이다. 또 왜 규현의 앞에서는 제 본 성격이 나오질 않는지…. 오죽하면 부 모님이 동해의 성격을 바꿔줘서 고맙다고, 동해가 규현 군 참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규


현에게 따로 이야기까지 했을까. 아마 규현은 제가 학교에서 주먹다짐 같은 것들을 하고 다 닌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마냥 동해가 순수하고 해맑은 소년인 줄 알 것이다 . 형만 답이 없 어. 수학 문제도, 세상 문제들에도 모두 다 답이 있는데 왜 형만 답이 없을까. 속이는 기분 도 들었지만 규현의 앞에만 서면 사석에서와 태도가 180˚ 바뀌는데 어쩔 것인가. 동해는 TV에서 코미디언들이 나와 몸개그를 하며 웃기는 프로그램을 보고 배를 두드리기까지 하며 빵 터지는 규현을 보고 몰래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일말의 두근거림이 있었다. 하얗고 오밀조밀…꼭 시츄 같았다. 또 다른 때 는 밤에 같이 자다가 혼자 깨서 곤히 잠들어 있는 규현의 얼굴을 본다던가…그럴 때 . 한 치 의 오차도 없이 다물려 있는 입술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한 번은, 정말 딱 한 번은 잠든 규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본 적이 있다. 그 때 가슴 속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올라 오는 미묘한 감정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규현의 몸 위에 올라타서 키스라도 하고 싶었달까……. 예쁘고 가슴도 큰 여자애들이 달라붙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 여자 애들이 붙을 때는 그냥 귀찮고 다 쓸어버리고 싶었는데, 규현과의 접촉은…뭔가…애를 태웠 다. 동해는 규현이 맘에 들었다. 자신이 봤던 어떤 여자들보다도 예뻤지만 규현은 그들과 달리 앵앵대거나 내숭을 떨지 않고, 연기조차도 하지 않았다. 키는 저보다 조금 더 컸지만, 처음으로 누군가의 등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까놓고 말하면 규현보다 자 신의 어깨가 더 넓으니까. 조금 더 생각 한다면 지켜주고 싶었다. 가는 손목과 발목, 가녀 린 어깨, 잘록한 등허리, 사슴 같은 뒷목에… 입 맞추고 싶단 생각도 했었다. 점점 자신의 본래 모습과 달라지는 것 같아 거부감도 들었지만 규현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해 서 결국 동해는 자신을 버렸다. 친구들에게도 규현과 같이 대했다. 그랬더니 거부감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제서야 동해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린 문제는 ‘대체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였다. 정답은 ‘좋아 한다’ 였다. 당연한 거였다. ‘애덤 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응당히 나와야 하는 것 처럼. 동해는 규현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규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고 민 할 겨를도 없이 마음은 계속해서 부피를 키워나갔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제가 초등학교 때 성민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규현을…만지고 싶다. 처음 여기 올 때보 다 살이 오른 볼을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다. 정복욕인가. 아니, 조금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동해는 계속 고민하다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순간 옆을 돌아봤을 때 규현이 저를 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눈이 마주치자 히끅, 딸꾹질 을 했다. 에이 썅, 바보 같게. 스스로를 타박하는데 규현은 또 쓸데없는 사족보행을 해서 왜 저가 끓어오르게 만드는지, 동해는 엉덩이를 뒤로 살짝 밀었다. 아 좀! 오지 마. 오지 마! 소리도 못 지르고 눈만 꿈뻑거리며 규현의 얼굴만 본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왜요?” “아니, 네가 아까부터 고개도 젓고 한숨도 쉬고 그러기에.” 봐라, 은근히 주위에 관심이 많아. 남한테 무심한 줄 알았더니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게 ‘나


당신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야’라고…감동도 줄 줄 알고. 동해는 규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 었다. 규현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동해를 제 어깨에 뉘었다. 무슨 일 있나보다, 그렇게 위로라도 해줄까 했는데 바로 나오는 동해의 말에 전신이 빳빳한 하드 보드지 마냥 굳는다. “좋아해.” “…어…어어?” “나 형 좋다고요.” “…자아식, 나도 너 좋아해. 내 풋풋했던 고딩 시절 떠오르고 좋다.” “그런 게 아니…. ……푸하하…….” 키득키득, 웃으며 규현의 무릎에 누웠다. 그게 아닌데. 규현은 동해의 이마를 찰싹찰싹 때 리기도 하고 앞머리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TV에서 웃긴 장면이 나오면 얼 굴을 이모티콘으로 만들어 놓고 폭소를 터트린다. 그래,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그렇게 형, 동생으로 남게 놔두자. 나중에 좀 더 유혹하고 대시해서 넘어오면, 나 없으면 안달 날 때 그 때 고백하자. 동해는 얼굴을 TV로 돌려 규현과 함께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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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나 할까 하고 동화의 슬리퍼를 빌려 신고 나왔다. 어흐, 작다. 역시 180cm가 넘는 남자답게 발도 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캐리어에 슬리퍼 담아 오는 건데. 아니면 귀찮더라 도 컨버스화 제대로 신고 오던가. 내 컨버스화는 발목까지 오는 거여서 귀찮긴 했는데 … 근 데 희철이 형이 생일 선물로 하얀 컨버스화에 예쁘게 낙서해 준 거라서 흙 많고 얼마 전에 소나기가 내려서 진흙이 가득한 곳에 신고 다니기에는 좀 많이 아까워서. 그냥 신발 불평은 말고 아무렇게나 걸어가기로 했다. 빌려 신고 나온 주제에 말이 많지. 이 마을이 그렇게 넓은 건 아니지만 하도 이장님 댁 안에서 동해랑 놀고 넷북이랑 놀다 보 니까 제대로 마을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어서, 전혀 낯익지 않은 골목 등장.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슬렁 어슬렁 그 골목에 들어가니 가게 하나가 나왔다. 옛날에 많이 봤던 구멍 가게, 아니면 도라에몽에서 나오는 퉁퉁이네 가게로 칠 수 있을 것 같다. 가게 앞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가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꼭 표정이 ‘아 왜 엄마는 맨날 나만 청소 시켜 형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라고 하는 것 같아서 귀엽다. 계속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아! 서울 사람…맞죠? 조규현씨.” “맞긴 한데…….” “그런데 무슨 일로? 아, 가게 오셨으니까 손님인가?” “아니, 그게…”


“규현씨 한테는 공짜로 드릴게요~ 뭐, 아이스크림이라도 드릴까요?”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없구요….” “그냥 받으세요~ 규현 씨 얼굴값으로 대신 하면 되니까.” “무, 무슨 얼굴 값…….” 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비비빅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아, 나 이거 좋 아하는데…. 그래도 그냥 공짜로 받을 수는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봉지를 벗겨서 내 입을 툭툭 건드린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입술 닿았으니까 규현씨 먹어요.’다. 이런 억지 가…. 나중에 돈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는 거 아니죠? 묻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까 입에 물었다. 우으…맛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내 손을 잡는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잡아 입에서 빼고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안에 들어가서 드세요. 더워요.” “여기 음지라서 괜찮으…으아?!” 음지라서 괜찮을 거예요, 라고 하려고 했는데 남자는 억지로 나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씨, 아까부터 계속 억지만 부려…. 그런데 그러고 보니까 바깥보다 안이 더 시원 하기는 하다. 더운 걸 워낙에 싫어하는 나여서 그런지 아까보다 지금이 더 좋고 ….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니까 그의 말대로 그냥 털썩, 소리 나게 앉았다. 그런데 이 양반, 나 안으로 들여놓고 아무 말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다. 나를 댁 가게 안으로 들여놨으 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나 쉬운 남자 아니에… 아니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아무튼 나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김영운입니다.” “아…영운. 김영운…. 이름이 예뻐요.” “에이, 예쁜 건 규현 씨가 더…그리고 얼굴도…….” “네?” “규현 씨도 이름 예쁘다고요.” 이 남자, 좀 수상한데…눈치도 뭣도 없는 곰은 아니라서 듣긴 들었다, 얼굴도, 라고. 내가 좀 예쁘게 생기기는 해서 선배들이 많이 예뻐해 주고 그랬긴 했었다. 이쁨 받을 수밖에 없 는 얼굴이라나 뭐라나. 손에 축축한 느낌이 들어서 봤더니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혀로 슥 닦아내고 얼른 먹어치워야겠다 싶어서 이로 아그작, 깨물었다. 좀 더 물어봤다. 나이는 어떻게 되냐고. 서른둘 이라고 했다. 나보다는 세 살이 더 많았다. 나는 스물아홉 살이라고 말하니 동안이라고 말한다. 에잇, 입에 발린 소리.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영운은 내게 투게더 아이스크림 통과 숟가락을 건넸다. 그냥 먹어도 되는 건가, 올 려다보니까 영운은 어서 먹으라고 고갯짓을 한다. 그제서야 나는 뚜껑을 열고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기 시작했다.


“영운 씨는 서울말 잘 하네요?” “원래 서울 사람이에요. 여긴 아내 고���. 오고 싶다고 해서 왔어요.” “오호, 애처가이시네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으며 애처가라고 하니 숟가락 하나를 더 가져와서 아이스크림을 떠먹 는다. 말없이 통을 건네니 이번엔 좀 크게 떠먹는 영운. 자기도 먹을 거여서 이 비싼 걸 나 한테 준 거였구나. 한 번 더 숟가락을 떠서 먹고 뚜껑을 닫아 옆에 내려놓았다. …이래 놓 으면 녹으려나. 영운에게 주니까 냉장실에 넣어 놓는다. 저거 팔 거 아니겠지? 먹겠지? “그렇게 안 봐도 안 팔아요. 좀 이따 저거 규현 씨가 가져가요.” 헐, 돗자리 까세요. 그렇게 말 하려고 했는데 미닫이문을 열고 어딘가로 쏙 들어가 버린다. 뭐지? 가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영운이 안에서 나올 동안 발장난도 치고 가게 안을 둘러 보기도 하면서 기다리는데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열리더니 영운과 미모의 여성을 뱉어 낸다. 와, 정말 예쁜 여자다. 여자는 나를 보더니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연주, 영운 씨 아내에요. 서울 분이시라고…?” “조규현입니다. 제가 이 마을에서 그렇게 유명해 졌나요?” “영운 씨가 여기 처음 왔을 때도 그랬어요. 어른들은 저한테 서울 놈이랑 결혼 하더니 얼굴 이 고와졌다고 그러시고.” “영운 씨랑 결혼 안하셨어도 예쁘신데요, 뭐.” “에잇! …규현 씨가 사람 볼 줄 아시네.” 연주 씨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손사래를 치며 호호, 웃는다.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영운이 잘 생겼으니 아내 또한 미모의 여성이어야 한다는? 그런? 하여튼 잘 어울리는 부부 다. 나도…나도 언젠간 여자 만나서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야 하겠지? 헌데 그럴 자 신은 없다. 가장 노릇 할 자신도 없고, 여자를 사랑 할 자신도 없다. 물론 시원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 좋아했지. 그런데… 최시원 그 사람이 나 이렇게 바꾸어 놓았지. 에잇, 더 슬 퍼지기 전에 생각은 그만 두자. 영운은 애처가답게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하나를 연주 씨에게 주고 거기에 연주 씨를 앉혔 다. 나는 더 이상 여기 있으면 둘 좋은 시간 방해할 것 같아서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영운 은 좀 더 있지 왜 벌써 가냐고 묻는다. 어…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냥 가봐야 할 것 같아 서, 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가게 문이 열리더니 형!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동해?” “여기서 뭐해요? 집에 가요.” “동해 너는 형 봐도 인사 않고, 규현 씨만 보이냐?” “…………안녕하세요.” 동해는 그제서야 영운과 연주 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다. 굉장히 기분이 나


쁘다는 듯한 얼굴이다. 왜 그러지? 동해는 영운 씨 싫어하나? 좀 그렇긴 해도 착해 보이던 데. 멀뚱히 동해랑 영운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데 동해는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고 가게 밖으로 날 끌고 나가려고 한다. 나도 마침 나갈 참이었어서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그 냥 밖으로 끌려 나오긴 했는데, 얘 왜 이래? 가게에서 꽤 멀어지고 나서 동해의 손을 내 손 목에서 떼어냈다. “형. 거기 다신 가지 마요.” “왜?” “저 아저씨 소문 안 좋아요. 가지 마요.” “착해 보이던데?” “저 형 게ㅇ…!! 아니에요. 아무튼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곁에 가지도 마요. 알았죠?” 네? 알았죠? 새끼손가락 까지 내걸며 내게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웃으면서 내 어깨를 잡고 어개동무를 한다. 하지만 키가 맞지 않아서 팔이 아픈지 내 팔뚝으로 손을 내린다. 아…좋 다. 왜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좋다. 기분이 좋다. 느낌이 좋다. 타박타박, 가끔씩 슬리퍼 질 질 끄는 소리도 섞이지만 흙 길을 걷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고, 서울과는 차원이 다른 공기 를 마시는 것도 좋다. 좋다, 왠지. 너랑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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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내가 무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심 있는 것만 보고, 내가 좋아 하는 것만 보는 줄 안다. 그야말로 무심함의 결정체인 줄 알지. 하지만 본인은 무심한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책상에서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런데 내가 미동도 않고 계속 쓰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다. 그 렇다면 나를 빤히 본 사람들은 내가 둔감하거나, 아니면 무심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사 실 무시하는 거다. 내가 사람들에게 못 보여줄 것을 적는다고 하면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 싶으면 적지, 못 보여줄 거 아니면 남이 봐도 상관이 없다는 거지. 그냥 무 시하는 거다. 보든 말든, 나한테 해가 될 건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 같은 상황은 좀 다르다. 오랜만에 공부 좀 하자고 두꺼운 책과 스프링 노트를 꺼내서 열심히 배껴 적고 있는데 동해가 온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서는 내가 하는 것 을 다 지켜보고 있다면, 정말 다르다. 그냥 평소의 나라면 얘가 나한테 뭘 하든, 아니 뭘 하든은 아니고 어떤 눈으로 지켜보고 있든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했을 텐데 ,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등이 따듯해질 만큼 접촉하지 않는단 말이야! 곧 허리나 어깨에 팔을 두르기라도 할 것 같아서 고개 돌리지 않고 동해에게 좀 떨어지라고 했다.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더니.” “나 원래 그래. 아 좀, 떨어지라고!”


“심심해요. 놀아줘.” 떨어지라고 해도 몸을 더 밀착시킬 뿐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 내 등판에 동해의 가슴 부 근이 닿을 정도로 붙어 있는데, 시, 심장소리가…다 느껴져. 왜 얘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건데? 혹시 심장 질환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 근데 왜 난 부끄러운 거야, 이 상황 이. 더 이상 이러고 있다가는 얼굴이 뜨거워져서 터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책과 노트를 함 께 덮어버렸다. 그제서야 동해는 에헤헤, 웃으며 뒤로 물러나 내 몸을 저의 쪽으로 돌린다. “대체 뭐 하고 놀아, 남자 둘이서? 쎄쎄쎄라도 하자고?” “그러게요. …아니 형 그냥 공부 마저 하세요. 형 보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고….” “모르는 거 물어보든가.” 구석지에서 상을 끌고 와 펴고 앉았다. 동해는 책꽂이에서 문제집 몇 권을 가져와서 내 앞 에 앉…는다. 내가 너 앉으라고 책상에서 비켜준 건데 여기에 앉으면 난 어떻게 되니? 그런 눈빛으로 빤히 바라봤더니 ‘그냥 여기 좀 앉게 해주죠. 네?’그런다. 아니…여기 앉지 마라는 눈빛은 아니었거든…. 고개를 숙여 문제를 계속 푸니 동해는 헤헤, 웃고는 문제집을 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제를 푸는 도중 지속적으로 정수리에 닿는 따가운 시선이 거슬 리기 시작했다. 흘끔 봤더니 동해는 샤프를 든 손을 놀리지도 않고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 었다. 그 것도 노골적으로, 농도 짙은 눈빛으로, 무섭게, 뚫어져라. 흠칫 놀라서 몸을 뒤로 뺐더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내가 풀고 있던 문제의 책을 가져간다. “허…수학의 정석…게다가 실력편….” “심심하면 가끔 풀어. 풀어볼래?” “됐습니다.” 내 앞에 책을 내려놓곤 다시 문제집에 얼굴을 박고 문제를 푼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가. 고 개를 갸웃 하고 나도 연필을 잡고 다시 문제를 풀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해보니 아주머니셨다. 동해랑 나, 둘 다 멍한 얼굴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아 주머니는 당황한 듯 볼에 손을 대고 오호호, 웃으신다. “엄마 왜요?” “아니…웬일로 조용하나 했는데 둘 다 공부 하고 있었네…. 간식 가져다줄까?” “안 그러셔도 됩…” “응! 가져다주세요.” 아주머니는 또 다시 호호 웃으시며 방 밖으로 나간다. 탁.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나는 연필 로 동해의 머리를 딱, 때렸다. 동해는 아프다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원래 공부할 때는 뭐 안 먹는 거야. 집중력 흐려져.”


“에이이, 형이랑 이야기 좀 하려고 그랬죠오.” “공부 하는데 왜 나랑 이야기를 해?” “내가 형 좋아하니까 공부가 안돼요.” “우, 웃기고 있네.” 말을 왜 더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해의 머리를 한 대 더 때린 뒤,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문제 를 풀었다. 좋아한다니, 저게 뭐냐고. 어른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호적 잉크도 제대로 안 마른 녀석이.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한지…. 저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지는 내 자유다. 그냥 장난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진심일까? 의심하는 건 내가 할 일이라 는 거다. 고딩 녀석의 장난이야. 그냥 장난이라고. 머리를 매만지며 진짠데…, 라고 하는 동 해를 애써 무시하며 문제를 계속 풀었다. 괜한 긴장감에 청각이 발달된다. 쌔액쌔액 동해의 숨소리가 들린다. MP3라도 귀에 꼽고 할까, 하고 생각하던 도중에 똑똑 하는 소리가 들리 고 아주머니가 쿠키와 주스 두 잔을 쟁반에 담아가지고 들어오신다. “동해도, 규현 군도 먹으면서 해요.” “감사합니다.” 방 밖을 나가며 그럼 열심히 공부하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제대로 시행할 수가 없다 . 아까까 지만 해도 잘 되던 공부가 동해와의 대화로 인해 툭 끊겨서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아 . 그런 남의 속도 모르고 동해는 빨대로 주스를 쪽쪽 빨아대며 쿠키를 집어먹는다 . 야속한 자식 . 동해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고 나도 쿠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맛있기는 한데, 목으로 잘 넘기질 못하겠다. 자갈을 씹어 먹는 기분.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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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동해는 귀에 꼽았던 이어폰을 빼고 은혁을 쳐다보았다. 은혁은 약간 상 기된 얼굴로 뒷문에서 동해의 자리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며, 약간 귀찮은 듯한 얼굴로 혀를 쯧 차주고 물었다. 동해의 자리까지 달려온 은혁은 허벅지에 자신의 양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여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디서 괴물이라도 본 것인지 뜨악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데 동해는 그 표정이 정말 무서워 흠칫 놀랐다. 아, 저거 진짜 표정 하고는. 다시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야 너 방학 전에 쌈박질 한 거, 담임이 안 것 같아!” “뭐! 야, 진짜?!” “어. 나 교무실 지나가는데 담임이 인상이 꼭 고릴라 같아서는 너 불러오라고 아주~!!”


“으아…망했다…!!” 동해는 은혁을 부둥켜안고 징징대는 시늉을 했다. 은혁 또한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둘이 절망하는 이유는 다르다. 은혁은 아마 ‘그 싸움을 저도 함께 했으니 이제 나도 죽겠다’ 일 것이고, 동해는 ‘이게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가족들 다 알 거고, 그럼 형도 알 거 아냐’ 라는 이유. 규현의 앞에서는 온갖 내숭 다 떨어놓고 이제 와서 싸움이나 하는 개망나니로 찍힐까, 그 것이 두려웠다. 좋은 놈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공부도 잘 하고, 성격도 좋은, 그 런 남자. 그런데 사실 그 놈이 사람 때리고 다니는 놈이었단다, 라고 규현이 알아버리면 저 에게 아주 큰 실망을 할 것이고, 제대로 고백을 해보려던 생각도 이제는 더 이상 하지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에 동해는 눈물을 머금고 은혁에게서 멀어졌다. 그런데 눈물 콧물 범벅인 은혁의 얼굴을 보 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한 얼굴로 은혁에게 다녀오겠다며 건투를 빌 어달라 한다. 은혁은 알았다며 나 말 좀 잘 해 달라 한다. 교실을 벗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본 학기는 아니고 방학 중의 보충수업이었기 때문에 복도 에 누군가 많이 있지는 않았다. 아침에 새가 조잘거리는 것 마냥 조곤조곤한 소수의 학생들 말소리. 그러다 어디선가 제 이름이 툭 튀어나온 것 같아 움찔, 한다. 혹시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원래 남의 말을 신경 쓰지는 않지만 규현을 만나고 조금 바뀌었달까. 동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그 남자 때문에 이런 고생을. 그러나 어쩔 수 없 이 잘 들리기만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다. “쟤가 이동해지?” “어. 방학하기 전에 6반에 그, 누구지? 덩치 큰 애.” “양준혁. 쟤보다 키도 더 크고, 덩치도 있는데… 어지간히 힘이 센가 보더라?” 작게 말 한다고 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본래 저가 귀가 밝은 것도 있겠지만 남 욕은 안 들 려도 자기 욕은 다 들리는 법. 그렇다고 뭐 이 자식아 다시 한 번 말해봐 하고 소리 지를 수도 없고. 지금 섣불리 공격했다가 교무실에 불려가고 있지 않은가, 아까 저 녀석들이 언 급했던 ‘양준혁’을. 아 시발, 그 새끼가 규현이 형 이야기만 안 꺼냈어도 안 때리는 건데. 그러니까 정확히 2주 전, 그 때 까지만 해도 준혁과 동해는 나름 데면데면 하던 사이였다. 준혁아 동해야 거릴 정도로 조금 더 친했었다. 그런데 대뜸 준혁이 어디서 들은 것인지 ‘야 너네 집에 이쁘게 생긴 아저씨 있다며?’라고 먼저 운을 떼는 것이었다. 동해는 깜짝 놀라 어디서 그 이야기를 주워들었느냐고 물었는데, 비밀이라며 킥킥대고 웃는 것이었다. 여기서 1차로 어택을 받은 동해는 가만히 있다가 준혁의 ‘이쁘게 생겼으면 나 좀 소개시켜주라.’라 는 2차 어택으로 동해는 그 상태로 꼭지가 돌아 준혁의 얼굴을 주먹으로 냅다 갈겨버린 것.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그 뒤로 서먹서먹하고 쳐다만 봐도 싫은 사이가 되었다 . 어쩌다 친구 하나 잃고 이제는 교무실까지 가고, 이게 다 조규현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자신의 잘못이지 규현의 탓이 아니어서 그렇게 편히 결론지은 자신이 바보스럽다 . 하아, 한 숨을 쉬고 자신의 앞에 있는 ‘노크는 기본’이라는 종이가 붙은 교무실 문을 두드렸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든 선생님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 아 ,


부담스러워. 뻘줌하게 서 있다가 저를 부르는 담임의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담임의 앞에 선 다. 담임은 의자를 끌어다가 그곳에 동해를 앉히고 말을 꺼낸다. “선생님이 무슨 일로 동해를 부른 것 같니?” “그냥… 뭐, 저어… 제 생활 태도… 아니에요?” “맞긴 한데, 그렇게 긴장 할 필요는 없어. 혼내려고 부른 거 아니니까.” 이 무슨? 은혁의 주장으로는 분명 험악한 인상으로 저를 불러오라고 했었다는데 지금 제 앞에 있는 담임은 인자하고 아름다운 미혼의 여성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얼굴에 잔뜩 의 문을 띄우고 저의 담임을 바라보니 담임은 아주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동해의 머리를 쓰다듬 는다. 얼이 빠진다. 뭐하는 거지? “동해 요즘 많이 변한 것 같아서. 성적은 좋았지만, 태도가 별로 좋지는 않았잖니.” “아…….” “얼마 전에 6반의 준혁이를 때린 사건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심한 것도 아니었고, 준 혁이도 괜찮다며 제가 잘못했다고 그러더라고. 때린 이유는 묻지 않겠지만 … 요즘 왜 갑자 기 태도가 좋아졌는지… 그 정도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지?” “그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거니?” 험한 고 3의 담임답게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여자는 여자다. 이렇게 딱 맞추니 말이 다. 여자는 오감 말고도 여섯 번 째 감각이 있다던데, 그건 이런 데에 쓰이는 건가. 동해는 고개를 숙였다. 담임의 눈에는 그것이 분명 쑥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여 자신의 제자가 마냥 귀여웠다. 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그 야생마가 이렇게 순한 양이 된 거지? 대단한 미인인 가보다-. 그렇게 말하니 동해의 고개가 더 숙여져 이제는 무릎에 얼굴을 묻는 상황까지 도 달한다. 어헛 이 녀석, 되게 쑥스러워 하네. 얼마나 좋으면. “네에…….” “우리 학교 학생이니?” “아니요. 연상인데요.” “와, 연상? 동해 힘들겠다. 동해를 마냥 어린애로만 보지는 않아?” “…어떻게 알았어요?” “흐흥, 척하면 척이지.” 여자란 이렇게 대단한 생물이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여자랑 사귈 걸, 하는 생각과 함께 여 자랑 사귀었으면 눈치도 빨라서 힘들게 생활했을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이왕 좋아하는 사 람 있는 거 들킨 김에 아예 고민 상담 좀 받아보자 하는 심정으로 동해는 담임에게 이것저 것 다 털어놓기 시작한다. “열심히 노력하고는 있는데 좋아한다고 그러면 웃기지 말라고 그러고, 또 언제는 진지하게 안 받아들여서 ‘고딩 때 생각나서 너 좋다’면서 웃어넘기기도 하고.” “또?”


“상대를 안 해주는 건 아니다만 마을에 슈퍼 운영하는 형이 있는데, 그 형도 그 사람 좋아 하는 것 같고. 그런데 내가 불리한 점이 많은 건, 솔직히 그 형이 나보다 좀 더 잘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형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고. 하지만 난 정말 그 사람 좋아하고 ….” 정말 딱 이 사람 아니면 절대 안 되겠다 싶은, 그런. 놓치면 다시는 그런 사람 없을 사람. 자신이 언제부터 담임과 친했다고 이렇게 구구절절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며 , 담 임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거지? 그런데 이런 일이 별로 위화감이 없 는 이유는, 담임이 사실 좋은 여자였기 때문일까. 2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담임은 온화 하고 따듯하게 자신의 투정을 다 받아주고 있었다. 이럴 줄 담임을 좋아해 볼 걸. 후회가 되기는 하다만 그래도 난…형이, 더…. 생각만으로도 좋은 기분이 부풀어 오른다. 애드벌룬 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 정말 좋아해. 그런데 왜…자신을 쳐다봐주지도 않는 거야, 그 사람, 조규현은. 날이 갈수록 애가 탄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동해이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규현이 영운과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건 아닌지 …. “동해는 그 사람 정말 많이 좋아하는 구나.” “…그런…것 같아요. 아니, 좋아요. 좋아해요.” “그럼 말 다 된 거네. 그 사람도 동해 좋아할 거야, 동해를.” “……진짜요?” “응. 이번만큼은 동해보다 몇 년 더 산 선생님을 믿어.” 황홀한 얼굴로 담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은 담임이 하나님 같았고, 담임의 말이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 같았다. 물론 이 사랑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 만 그랬다. 그 정도로 담임의 말을 믿고 싶었다. 고개를 세네 번 정도 세차게 끄덕이고 이 만 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90℃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교무실을 뛰어나왔다. 일말의 희망이 보여 기쁘게 웃었다. 헤헤, 하하, 으흐흐, 히히, 등의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 어 남들이 쳐다봐도 이번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은혁의 미쳤냐는 말도 들리지 않는 다. 형도 나를 좋아할 수도 있어. 그런 생각에 스트립쇼를 해도 좋을 만큼 기뻤다. 순간 그 런 말에 미칠 듯 기뻐하는 자신이 너무 어린애 같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걸로 어필 을 하면 안 될까? 그럼 그냥 넘어와 주면 안 될까? 응? 조규현. * 집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밟는 자전거 페달은 경이로울 만큼 가볍다. 공기저항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허공을 가르고 동해와 그의 자전거가 운동장을 벗어나려는 속도는 꽤나 빠르 다.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머금고 교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다. 아이 같고 고우며 소심하게 저를 부르는 걸 보니 분명 여자다. 그 목소리에 섞여 까르 르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를 부른 여자는 친구들과 함께 있다. 자신의 마라톤 같은 질 주에 제동을 건 행동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았다. “저어기, 동해야.” “…뭐야?”


같은 반 이었던 것 같은데. 어디선가 익숙한 동글동글하고 하얀, 약간의 화장을 한 듯 부끄 러움을 나타내는 색이 아닌 인조적인 볼터치와 색부터가 다른 목과 얼굴. 입술에 뭐 바르기 까지 했네. 형은 뭐 하나 바르지 않아도 하얗고 입술도 발간데. 몸을 배배 꼬며 자신을 불 러놓고 땅만 쳐다보는 그 행위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뭐냐고. 한 번 더 물으니 이번에는 뒤에 모인(여자와 마찬가지로 화장을 떡칠한) 세 명이 여자의 등을 밀어낸다. 간간히 ‘화이 팅’이나 ‘잘 할 거야’라는 둥의 속삭임도 들린다. 비웃어 주고 싶다. “나 바빠.” “이, 이거….” 두 손으로 내미는 하얀 봉투. 아마도 안에 곱게 접힌 사랑을 속삭이는 종이라도 들어있겠 지. 동해는 신경질적으로 여자의 손에 있는 봉투를 빼앗았다. 아, 하는 끊기는 소리가 들린 다. 바빠서 이만 가볼게, 라는 말을 내뱉고 동해는 다시 페달을 밟는다. 뒤에서 여성들이 흥분의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내뱉는 희열에 가득 찬 웃음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성공한 거 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튀어나온다. 골 빈 년들은 참 어리석지,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고? 난 귀찮아서 그냥 받을 테니 어서 꺼지라는 뜻이었는데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희 들과 근본적으로 다른…다른…… “…근본적으로 다른, ‘남자’지.” 입술 사이로 킬킬 웃음이 새어나온다. 물론 규현이 저 여자들보다 예쁘지도 않고 …남을 유 혹하는 미도 있는 것도 아니지만…난 좋다. 그 어떤 TV 속 걸 그룹이나 여가수보다 더 빛 이 나고 아름답다, 내 눈에는. 동해는 어서 보고 싶은 그 얼굴, 조규현을 머릿속으로 천천 히 떠올리며 페달을 더 세게 밟는다.

장장 15분을 페달을 열심히 밟아대어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다른 때보다 5분은 더 단축이 됐다. 물론 그 이유는 있고. 헉, 허억. 온 몸을 적신 땀이 불쾌했다. 쉬지 않고 달렸더니 더 숨이 찬다. 그래도 동해는 집에 1초라도 더 빨리 도착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에 다시 페달을 돌린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고, 어르신들에게 유쾌하게 인사도 건네다 보니 집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를 가진 마을 공터가 눈에 띈다. 자연스럽게 공터를 지나려다 공터보다 더 눈에 띄는 한 사람…아니 옆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해서 둘. 규현과 영운이다. 자전거를 공터 안쪽으로 몰았다. 끼이익, 바닥을 끄는 신경을 긁는 것 같은 소리에 규현과 영운이 동해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규현은 동해를 보더니 활짝 웃고선 앉아있던 나무 등걸 에서 일어나 동해에게 쫄래쫄래 걸어온다. 딱 ‘쫄래쫄래’가 어울리는 귀여운 걸음. 형 원래 저렇게 안 걷지 않나? 게다가 자신을 보고 웃는 일도 흔치 않고. …그러고 보니 규현의 볼 도 발갛고, 영운이 들고 있는 초록색 얇은 병. ……술?! 동해는 자전거를 제대로 받쳐놓고 헤실대며 웃고 있는 규현을 향해 걸어간다. 목에 대고 킁킁대니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는다. …하, 술 마셨구나. 동해는 규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영운에게로 향했다. 눈을 부릅뜨고 영 운을 째려보니 영운은 아직 제대로 취하지는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거린다.


“술. 마셨어요?” “조금. 헤헤, 동해야. 나 귀여워?” “네?” “영운 씨가- 나보고 엄-청 귀엽데.” 귀엽기는 한데, 이건 조금이 아니라 허용량을 훨씬 넘은 것 같은데? 술이 묻은 입술이 반질 반질하다. 아아, 뽀뽀하고 싶어. 이대로 뽀뽀, 그러면 해주려나. 하지만 제 눈앞에 영운이 있는 이상은 절대 그러지 못한다. 어디 유부남이 형한테 엄한 짓을 하려고 해? 미간을 찌푸 리자 규현은 대뜸 손가락으로 동해의 미간을 슬슬 문지른다. 뭐 하는 거냐며 손을 잡았는데 세게 비틀어 빼고는 긴 두 팔로 동해의 목을 감는다. 헐. 제대로 취했다.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있고, 표정은 당연히 수습 안 될 거고. 동해야아-.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려 제 이름을 부르는 장난 없는 애교에 동해는 미칠 것 같았다. 아, 어떻게 해…!! “다리에 힘이 없다. 업어주라.” “에, 예, 예에……?” “업어줘어~!!” 분명 제가 싫어하는 억지를 부려대는데도 싫지 않다. 오히려 흔하지 않은 기회를 이용해 보 고자 하는 욕망이 더 컸다. 하지만 이러면 안 돼…일을 그르칠 뿐이야. 참아, 이동해. 술 취 한 상대를 어떻게 하는 건 사내대장부로서 결코 할 일이 못 돼. 동해는 제 욕망을 억누르려 애국가를 조용하게 읊조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소리를 들은 규현은 으흥흥 웃으며 동해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이겼다.” “네?” “영운 씨랑 내기를 했거든. 동해가 나를 보면 무슨 짓을 한다, 안 한다. 영운 씨는 한다에 걸었고, 나는 내가 상태가 어떻고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한다에 걸었다? 근데…정말 내가 하는 짓만 다 받아주고 있네…. 고마워…….” 고양이가 갸르릉 대는 것 같이 잔잔하고 한 편으로는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몸에 힘을 쭉 빼고 동해에게 기댄다. 킁, 하는 코 먹는 소리가 들렸다. 귀엽다. 너무 귀여워. 곧 고른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고 자는 것 같아 동해는 규현을 등에 업었다 . 공터를 벗어나 려다 규현과 함께 있던 영운이 생각 나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린다. “죄송한데, 자전거 좀 저희 집에 옮겨주시면 안될까요?” “오냐.” “…그리고, 형을 상대로 내기 같은 거 걸지 마요. 난 기회 잡아서 먹이를 먹는 누구누구와 는 달라서. 유부남 주제에 좋아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기 상품으로는 뭐 걸었어요?” “팥빙수. 규현씨는 내가 필요 없다고 했어. 나도 기회 잡아 어찌 해보려는 건 아니었어.” “아, 그러세요.” 영운을 살짝 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원래 빼빼 말라서 그런


지, 무거운 느낌은 그닥 나지 않는다. 대신 걸음은 느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에 건 거야, 당신은. 눈을 질끈 감았는데 으흥, 하는 약간 앓는 소리가 들 린다. 잠에든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깬 건가. 깼어요? 물으니 으응, 하고 답한다. “……동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 보세요.”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하얀 봉투는 뭐야…?” “예? 아, 그게…….” “가정 통신문? 성적표? 아니면……러브레터…?” 러브레터, 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심장이 훍 바닥으로 툭, 떨어진 듯하다. 순간 멈칫했더 니 규현은 러브레터구나, 하고 말한다. “그런데 동해야.” “네?” “앞으로 그런 거 받아오지 마.” “에? 에…왜, 왜요?” “질투나. 이상하게… 질투가 나려고 해…….” 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규현은 동해의 목에 얼굴을 부빗거리더니 다시 잠에 든다. 뭐 …? 질투…난다고…? 심장은 다시 제자리에 붙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뛴다. 마치 링 위에 선 격투기 선수 같은 긴장감이 맴돌아 목울대를 넘겼다. 그거, 무슨 의 미에요? 조그맣게 묻지만 규현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동해는 한숨을 쉬고 다시 집을 향해 걷기를 재개했다. 나 혼자 삽질하는 건 아니었구나, 안심을 하고. * 끄으, 소리를 내며 규현은 머리를 덮쳐오는 두통에 눈을 지끈 감았다. 내가 어제 뭘 했더 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 술. 영운이 권해준 술을 많이 마시고…그 다음부터 기억 이 전혀 안나. 적정량을 초과했나보다. 그러다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앞 을 똑바로 주시했다. 잠시 흐렸지만 이내 또렷해진 사물에 규현은 안심한다. 동해구나. 잠 자는 동해. 도로롱 도로롱 작게 코를 골며 자는데 왜 이렇게 귀여울까. 흐흣, 낮게 웃었다. 그런데 목이 다 쉬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들이킨 알콜이 목에 무리를 준 건가. 규현은 몸을 제대로 뉘여 천장을 본다. 붙인 지 오래된 것 같은 빛바랜 야광 별들이 반짝반짝하다. 아직 새벽인가.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새벽안개 때문에 온 몸이 습기로 찝찝하다. 조금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기로 하고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다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터는데 누군가 저를 보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 다. 소파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는 검은 인영에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다. “누구야?”


“…컥, 으흠…. ……혀엉.” “도, 동해야?” “으음…네에.” 아직 잠에 취한 듯 잠긴 목소리다. 왜 일어난 거야? 물어보니 형이 없어서요, 라 한다. 응? 뭐? 왜 내가 없어서 일어나는데? 그런데 왜 가슴은 두근두근 하는 거지? 규현은 세게 머리 를 한 번 털고 가슴을 진정시키고 동해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무릎에 털썩 소리를 내며 눕 는 동해. 묵직한 무게감이 좋아 가만히 있었다. “형….” “응?” “나 잘 때 어디 가지 마요.” “왜?” “형이 옆에 없으면 내 몸이 다 알아버려. 그냥 내 옆에 있어요.” 대체 정말 이걸 장난으로 받아들여야 해, 아님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해? 지난번부터 자꾸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해가 미웠다. 규현은 동해의 머리를 밀어버리고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잠을 청할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다. 저의 옆에 있으라는 말은 뉘앙스가 연인과도 같았다. 조금씩 몰려오는 기쁨에 흠뻑 취하고 싶다. 그 밀물이라면 쓸려 가도 괜찮아. ���을 감고 동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다.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져 싫 은가보다 하고 떨어지려 하는데 동해는 규현의 손을 잡는다. 옴싹달싹 할 수가 없다. 너한 테 묶인 것 같아…나 좀 놔줘. ……아니, 계속 묶어줬으면 좋겠어. 내 손, 놓지 말아줘. 규 현은 동해가 잡은 손에 힘을 풀고 깍지를 꼈다. 눈을 살짝 뜨고 동해의 얼굴을 보는데 표정 이 나른하다. 이끌리듯 입술을 댄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제가 뭐하는 건가 싶어 급하 게 입술을 뗐다. 동해는 아쉬운 듯 쩝, 입맛을 다신다. “나, 나와.” 하니 군 말 않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규현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쿵 쾅쿵쾅, 발을 세게 굴리며. 그와 동시에 동해와 규현, 두 사람의 심장도 발소리와도 같이 뛴다. 쿵쾅쿵쾅,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날렸다. 아무리 분위기에 이끌려 한 키스라지만, 대체 애를 상대로 무슨 짓이야, 조규현. 성희롱이라고, 그거!! 그런데 심장이 입술에 간 듯 입술이 두 근두근. 손을 올려 입술을 매만지니 뜨거운 것 같아 규현은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인다. 그래 도 전혀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에는 소리 내어 울고만 싶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이 바보, 하고.

*  *  *


자신이 좀 많이 소심해서 동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있다가 아침에 다시 능청스레 말을 걸어 오는 동해에 안심을 하고 다시 마음이 편안해 졌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자연 스러운 동해의 행동은 정말 놀랍다. 애라서 금방 잊고 금방 회복하는 건가. 그렇게 수긍하 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으아아악!!!” 갑자기 귀에 바람을 부는 동해에 깜짝 놀라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 물론 동해가 허리를 잡아줘서 넘어지지 않은 거지만.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귀를 잡고 소리를 질렀는데 손가락 으로 허리를 쿡쿡 찌르고 만지작거려서 읏, 하고 움찔했다. 그러자 뭐 재미있는 것이라도 본 양 와하하 하고 웃음을 빵 터트리는데 꼴 보기 싫어서 발을 꾹, 밟고 자리를 피했다. 애 라고 무시한 게 잘못이었어, 저렇게 변태 같은데.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온 몸에 긴장을 풀 지 않고 있는데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 뒤를 확, 돌았다. 보이는 건 또, 역시나 이동 해. 살금살금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내가 바로 알아채 버리니 김이 샌 건지 푸휴, 바 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저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꺼져버려 나쁜 놈아. 입술을 비죽였 다. 뭘 하지? 이 시골 마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영운에게 놀러가는 것, 넷북 가지고 게임 하는 것, 그리고…아니면 동해랑 노는 것 중 하나인데, 술을 먹고 혹시 실수를 한 지 몰라 영운에게는 못 가겠고, 넷북은 동해 방에 있고, 동해랑은 지금 분위기로 절대 못 놀 고. 그렇지만 가만히 있자니 심심해서 미칠 것 같다. 그냥 눈 딱 감고 동해 방에 들어가서 동해랑 놀까? 아아씨, 아냐, 또 분위기에 이끌려 뽀뽀 해버릴지 몰라. “규현군.” “어, 어어? 네에?” “나랑 어디 좀 나갔다 올래요?” 아주머니다. 혼자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던 본인에게 심심함을 타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단비 같은 아주머니. 고개를 끄덕이니 아주머니는 그대로 나가도 되겠냐며 내게 물어 오신다. 어차피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머리 손질 다 하고 옷도 갈아입었으니 상관은 없을 듯싶어서 그냥 가겠다고 했는데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신다. 받아들고서 잘 살펴보니 돌돌 말린 비닐 장바구니다. “시장가시게요?” “네. 애들은 절대 따라 나갈 위인이 못 되고, 성인군자 규현군은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기보다는 전략형 전투를 잘 하시는 것 같아서 흠칫 했다. 게다가 말투…가, 위인…성인군 자…. 보통 아줌마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아주머니라서, 좀 젊어 보이시기도 하고, 친근 하게 대하기는 좀 그렇다. 뭐, 그냥 짐 들어 드릴 거라서 괜찮을까. 나가자는 아주머니의 뒤를 따랐다.


조금 걸었을까, 사람들 북적북적한 시장이 나왔다. 생선 비린내부터 향긋한 풀내음, 사람 냄새까지 온갖 후각을 자극 시키는 것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시장을 가보는 것은 이 나이 되도록 처음이라 약간 긴장한 것도 있었는데, 여유롭게 시장 중앙을 걸어가시는 아주머니를 따라가느라 급해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다. 아주머니는 생선들을 잔뜩 줄지어 내놓 은 생선 가게 앞에 서신다. 많이 와 보셨는지 주인아저씨가 단 번에 아주머니를 알아보고 자주 먹던 생선은 저기 있다며 다른 쪽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나를 한 번 흘낏 쳐다보시더니 뭐 먹고 싶냐고 물으신다. 네? “규현군이 먹고 싶은 거 있냐고요. 고등어라던가, 갈치나 꽁치… 이런 거.” “전 등 푸른 생선 류 좋아해요. 눈이 급격히 나빠져서 집에서도 즐겨 먹었었고.” “그럼 고등어구이. 가족들도 꺼리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찮죠?” “저야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거면 항상 괜찮죠.” 히히, 웃으며 넉살 좋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호호, 웃으시고는 주인아 저씨에게 고등어 한 마리를 달라고 한다. 단골이니 한 마리 더 준다는 말에 다음에는 한 마 리 더 사간다는 말씀을 하신다. 아, 이게 소비의 정석이구나. 나는 그냥 받고만 말았는데. 훈훈한 분위기가 잠시 시장을 맴돌다 사라진다. 다음은 채소 가게. 가족들이 모두 콩나물 무침을 좋아한다기에 나도 좋아한다고 했다. 사실 뭐든 다 꺼리지는 않고 다 먹는 편이지만, 좋아한다고 하면서 분위기 맞추는 것도 기술이라 면 기술이지. 아주머니는 숙주나물과 콩나물을 한 봉지씩 사시고 내게 장바구니를 펴보다고 하신다. 그 말대로 쫙 펴서 탈탈 털고는 입구를 벌리니 생선과 채소를 담으신다. 이리 주라 는 말에 손을 내저으며 내가 든다고 했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앞으로 언제든 부려먹으세요.” 웃었더니 따라 웃으시며 채소 가게를 벗어난다. 좋아하는 과일이 있냐는 물음에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다 먹는다 하니 아주머니는 뭔가 하나를 껍질을 까서 내 입에 쏙 넣어주시는 데, ……허…, 레몬이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했지, 신 걸 즐긴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요? 주저앉아 몸을 떠는 나를 보며 유쾌하게 웃으시곤 과일 몇 개를 사시고 제 갈 길 가신 다. 빠르게 따라잡아 졸졸졸 따라가니 아주머니는 그저 고개를 돌리며 살 것들을 탐색하신 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렀을까, 장바구니에 물건이 가득 차고 손에도 뭔가를 잔뜩 들게 되었을 때 아주머니는 집에 가자며 나를 재촉한다. 발걸음을 빨리 하시며 뭔가를 웅얼거리시는데 대충 ‘저녁 시간에 늦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를 따라 빠르게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집. …과 그 앞에 서 있는 동해가 보인다. 동해야, 부르니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온다. 아니 나 말고 아주머니 쪽, 이라고 말하려고 한 순간 동해는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 를 번쩍 들고는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그 덕에 들 것이 없어진 나는 옆에서 미묘한 웃음을 짓고 계시는 아주머니의 손에서 비닐봉지를 몇 개 빼앗아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왜, 분명 버젓이 자신의 앞에 어머니의 몫으로 놓인 봉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것을 먼


저 가지고 가버린 이유는 뭘까, 말도 않고. 정말, 네 그 어머니께 무례한 행동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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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이끌리듯 넷북을 켰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와 몸이 충돌한다. 머리는 왠지 절대 넷북을 만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몸은 마음과 아무런 상관없이 전원을 키 고, 로그인을 하고 메일함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멍했다. 다 음에는 놀라웠고, 무서웠다. 받은 메일함에서 읽지 않은 메일 중, 버젓이 떠 있는 ‘규현아’ 라는 제목의 메일을 작성한 ‘최시원’이라는 사람 때문에.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클릭했다. 드래그 할 길이는 너무나 길었고, 읽어 볼 자신은 없었다. 대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본가에 나를 데려다 놓으면 내게 미움을 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나? 아무리 내가 그를 그리워했다지만 이제 와서 메일은 보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혹시 시원은, 다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읽어보지도 않 고 혼자 설레발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금…조그마한…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잊지 못했으니까…아직 좋아하니까…. 서두는 어떤 편지가 그러하듯,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규현아, 안녕? 아… 이제 와서 안녕이라고 하면 내가 너무 뻔뻔할까? 그래도 일단 안녕이 라고 해 볼게. 내가 지금에서야 네게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별 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 가 너와의 사이를 ‘형과 동생’이라고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를 볼 자신이 없어서, 그래 서 여태까지 너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었기 때문일까… 지금의 나는 너에게 너무나도 죄스 러운 사람인 것 정도는 알지만, 그래도 몇 줄 써볼게. 넌 내가 많이 밉겠지만, 화가 나더라 도 부디 끄지 말고 읽어주길 바라. 너를 처음 봤었던 것이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7년 전, 네가 22살이고 내가 24살 이었을 때, 그 해 봄…이었지? 넌 몰랐겠지만 캠퍼스 안에서 너는 꽤 유명했어. 사내새끼 주제에 여리여리해서는 뭣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군대도 안 가고, 선배들 말도 안 듣고, 학점은 기 본적으로 4점은 넘지만 교수님들에게는 불량한, 그런데 여자 선배들에게는 엄청난 인기가 있는, 포모과 조규현. 난 네가 참 궁금했어. 과가 달라서 가지처럼 무성한 네 소문만 들었 지 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희철 선배와 캠퍼스를 거닐다 너를 발견한 희철 선배가 너를 가리키곤, ‘저게 바로 소문의 조규현이야.’ 라고 하는 거야. 난 놀랐어, 너는 예상 외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벚꽃과 잘 어울리는 분홍색 카디건을 입고선 벤치에 앉아 있 는데 내가 사귀었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더 참하고 단아했던 거지. 그렇게 넋 놓고 너를 보 는 희철 선배는 낄낄 웃으며 ‘소개 시켜 줄까?’ 라고 했었어. 아는 사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놈들한테는 몰라도 자기한테는 깍듯이 대하는 이쁜 놈이라고, 좀 많이 친하다고 …그랬지.


신나서 소개 시켜 달라는 내가 추하지는 않았는지, 희철 선배는 너를 불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인사를 시키더라? 그 때부터는 너도 기억 하지? 말까지 더듬으면서 당황하는 날 보고 는 교정이 다 떠나가도록 웃었었지, 너는. 그리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선배 정말 귀 여워요.’라고 말 했었고. 그 뒤로부터 너랑 나는 각자가 희철 선배와 만나는 것보다 더 만 나는 횟수가 잦아졌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고…. …중략… 네게 네 이야기를 듣고 참 많이 놀랐었다. 사업을 물려받으라거나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 한 다거나 등의 부모님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반항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꼴도 보 기 싫다며 집 한 채 장만해 주고서 내쫓았다고 그랬었지…. 그 동안 네가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가슴아 많이 아팠다. 지금도 아프고…. 생각해보 면 그런 집에 너를 다시 돌려보낸 내가 한심하고,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지. 하지만 솔직 하게 말하면 나는… 지금 네가 많이 보고 싶다. 현재 나의 아내를 보며 자꾸만 너와 비교하 게 돼. 규현이는 억지 안 부렸는데… 규현이는 교태부리거나 콧소리를 내며 앵기지 않았는 데… 규현이는 춤은 못 췄지만 노래는 잘 불렀는데… 규현이는 사사건건 내 일에 간섭하지 않았는데… 하고, 내 기억 속 너를 자꾸만 끄집어내게 된다. 2년이나 지났으니 너는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나를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라고 기억 할 지도 모르지만, 언 제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이제는 아마도, 너를 다 정리했을 수도 있으니까. 희철 선배 말로 는 네가 어디론가 훌쩍 떠났다고 하던데, 이 메일을 본다면 답장은 꼭 해줬으면 좋겠다. 내 휴대폰 번호는 아직 그대로야. 꼭 한 번 보자. 그럼 이만 말 줄일게. … 따위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시원의 글. 이제 와서 나보고, 한 번만 만나자는 당신은 뭐지? 하지만 기대했던 대로, 그는 나를 아직 잊지 못했구나… 아내와 나를 비교까 지 할 정도로…. ………그대로다. 2년 전의 시원의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온다. 나는 당신을 잊어보려고 노력 했는데, 내가 조금만 더 붙잡아 볼 걸 그랬다.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연락이라도 해 볼 걸 그랬다. 미련하게 연락 할 생각도 못하고……. 그 전에 만나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시원은 다시 내게 와줬을까? 지금과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분명 그랬겠지? 지금 나처럼 울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다.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시원은 다정하니까, 울어도 왜 우냐며 눈물이라도 닦아줬을…… “흐으……윽, 흑… ……하아….” 볼 위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다량의 액체. 왜 지금 울어? 왜 지금 눈물이 흘러? 그동안 절 대 눈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왜 이제야 나오느냐는 말이야…….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듯 펑펑 쏟아져 나온다. 문 밖에서 내 울음소리를 누가 듣든, 듣고서 이상한 생각 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머릿속은 오직 시원으로만 가득 차 서, 그도 날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엉엉…아이처럼…소리내어 울었다. 서로 바보처 럼 연락 한 번 해볼 생각 않고 가슴 아프게만 살았던 거야…. 다리를 오므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눈물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아이, 이동해. 동해를 보면 내색하지는 않지만 마치 첫사랑을


하는 십대 소녀마냥 기쁘고, 좋고, 설렌다. 하지만 그에 반해 시원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 다. 이건 분명 내가 그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이지만, 동해에 대한 내 마음은 뭐지? 울다가 순간 머릿속이 암전. 멍해진다. 그 누구도 풀지 못했다던 수학문제를 눈앞에 둔 느낌. 소년 다운 씩씩함에…대조되는 해맑은 웃음. 내 십년 전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 가슴이 떨리는 것일까, 아니면……. 문이 벌컥, 열리고 방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당연히 동해이겠거니 하고 눈���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동해야?’라고 했다.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겠지? 노심 초사 하고 있는데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아서 의아했다. 동해냐고 한 번 더 물으니 들려오 는 말은 뭐지……. “형 고개 좀 돌려봐요.” “어…오, 왜에…….” “고개 좀 돌려봐요!!” 난데없이 소리를 냅다 지르며 어깨를 잡고 나를 뒤로 돌리는 동해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뒤 돌아 있어서 보지 못했던 동해의 종잇장처럼 마구 구겨진 얼굴 . 아픔을 꾹 참는 듯한 얼굴에 내 가슴마저 아려온다. 떨리는 손으로 내 눈가를 닦아주곤 꽉 안는다. 순간 본 능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 아, 답은 이미 나왔다. 최시원은, 그저, 건들면 아픈, 상처일 뿐이다. 내 심장이 뛰고 있지 않은 오른쪽 가슴으로 동해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 아마 , 동해 도 내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강하게. 아니면 비정상적으로 뛰는 자신의 가슴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서 내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지금 하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지. 다 큰 남자 둘이서 꼭 껴안고 있는 폼은 누가 봐도 퍽 웃길 것 같아서 동 해의 어깨를 밀어냈다. 핏줄이 오도도 솟을 정도로 힘을 준 팔과는 달리 금방 떨어진다. “왜 울었는지는 물어봐도 되요?” “……꼬마는 몰라도 되는 이야기.” “…또……꼬마…!!” 일부러 속을 긁는 이야기를 하니까 순식간에 얼굴이 싹 변하더니 내 어깨를 꽉 쥔다 . 이번 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한 손에 쏙 들어간 어깨는 아팠다. 곧 있으면 부서지기라 도 할 것 같아서 동해의 팔을 잡았다. “아, 아파…놔줘어…….” “그만! 나 꼬마라고 좀 그만 해요. 형은 왜 몰라요? 학교에 나 좋다고 하는 그런 여자애들 은 필요 없어. 물론 형이 그 여자애들처럼 풋풋하거나 예쁘고 소녀 같지도 않고 가슴이 있 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난 형 좋아해요. 내가 형 좋아하는 거, 형이 모르


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그래요…꼬맹이가 치는 장난 같아요? 그래서 그래요? 아니라고. 난 진심인데, 형한테 장난 칠 생각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어요. 이제 좀 제발!!” “…난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이 없어.” “!” “난 잠시 쉬러 온 사람이야. 하지만 언제까지고 쉴 수는 없어. 너도 방학이 끝나면 다시 학 교 가야 하지? 그럴 거야. 나도 다시 일을 해야 해. 난 너랑 달라. 맘만 먹으면 계속 방학 일 수 있는 너랑 달리 나는 계속 그럴 수 없어.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나도 너 좋아. 장 난이라고 생각 안했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야. 너 인기 많잖아. 난 이제 곧 가야 하니까 나랑 노닥거리지 말고 그 예쁜 여자애들이랑 놀아주길 바랐어! 너 장난 아닌 거 알 아. 진심인 것도 알아. …하지만 동해야, 제발 나 좋아하지 마. 네가 그래준다면 난 정말 편 하게 여기 떠날 수 있어. 딱 여기서 끊자. 나 좀 편하게 해주라, 동해야.” “…….” 쏴아아아… 아까보다 더 굵어진 빗줄기는 내 마음을 때렸다. 그렇게 싸늘하게 내뱉었는데, 나라고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딱 풀려서 스르르 제자리로 돌아간 다. …나도 동해, 정말 좋아한다. 어쩌면 내, 네 상상 이상보다 더, 그 마음이 클지도 몰라. 내가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널 좋아할지도 모른다. 동해가 동급생들에게 소중 한 마음이 담긴 편지라도 받아오는 날에는 그러면 안되는 거지만, 갈기갈기 그 편지를 찢어 버리고도 싶다. 그렇게 사랑 앞에서는 한 없이 유치해지는 게 남자니까, 정말 동해랑 나이 가 같았으면 좋겠다. 나는 왜 동해보다 10년이나 더 일찍 태어나서 쓸데없이 냉정하게 생 각할까, 후회한 적도 많다. 하지만 역시 10년 더 일찍 태어났으니까, 어른이면 어른답게 굴 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커서…하지만 그건 핑계고, 겁이 났을 수도 있다. 지금은 상처로만 남은 최시원이 날 버렸던 것처럼, 이동해도 날 끝내 버릴까봐. 그래, 그랬을 거다, 분명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해가 갑자기 나와 눈을 맞추더니 손으로 내 어깨를 확 밀어 나를 뒤 로 넘어트린다. 그 덕에 나는 바닥에 머리를 찧어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고. 이게 무슨 짓이 냐며 손을 바닥에 짚어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고 싶었다. 동해가 내 배 위에 올라타는 덕 분에 그게 시행되지는 못했다. 이대로 동해의 눈을 마주보는 것은 힘들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더니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꽉 잡고 놓지를 않는다. 이게 무슨……. “싫어.” “뭐?” “난 너 편하게 못 해주겠는데.” 그리고 얼굴을 들이대곤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찧는다. 순서대로, 눈, 코, 인중. 그 리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댄다. 달콤하다… 블랙스톤 체리보다도 더. 이게 반드시 순차 적으로 해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동해가 날 밀칠 때부터, 이미 귀에는 빗소 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혀가 섞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동해의 혀가 치열을 훑고 내 입술 을 강하게 빨아들인다. 너무 집중했나, 나는 왜 자연스럽게 동해 등에 손을 올리는 거야. …그래, 포기하자. 이미, 다 포기했잖아… 나중에 아플 거 알지만… 편하길 포기했잖아….


*  *  *

본인은 그 먼 옛날, 가출에 일탈을 일삼던 불량 청소년이었다. 남들처럼 바이크며 여자나 술, 담배를 가까이 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그 때 반항이 좀 많이 심했었다. 공부는 제대 로 하지만, 그렇다고 태도를 좋게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면 되겠다. 가령 남들 공 부하는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쿨쿨 자고, 선생이 쉬라고 쉬는 시간 주면 그 때 저 혼자 눈 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교무실에 불려가기도 하고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 었다. 공부 잘하면 뭐 하냐, 새끼가 싹바가지가 없는데, 라던가 선생이 네가 조롱하라고 있 는 장난감이냐? 라던가. 벌써 10년 정도나 된 이야기인데 이제 와서 이래 저래 푸념 늘어 놓듯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스물세 살에 만나서 스물일곱까지 사귀고 나서 그 사람이 나 버리니까 추억에 허덕이게 만드는 …그 래도 사람답게 만들어 준… 그 개 같던 성격 싹 다 고쳐서 차분하게 만든 장본인은 지금 뭐 하고 있냐, 메일을 보낼라 쳐도 용기가 안 나서 말이지.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내자는 말을 하고선 꼴도 보기 싫은 부모님 앞에다 갖다 바쳐준 놈이 뭐 그리 못 잊고 아직까지 가슴 아 파하는지 모르겠다만 그 사람 생각 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이제 ‘습관’에 가깝다. 손톱 을 물어뜯는달지, 아니면 다리를 떤다던지. 그런 나도 모르게 하는 습관. 빈껍데기 일 뿐인 습관. 으음. 그럼 갑자기 내가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된 이유가 뭘지 생각을 해 보자. 내가 이 전에 무슨 행동, 생각을 했더라? …아. 동해, 때문이다. 동해와의 첫 입맞춤을 끝내고, 동해 가 갑자기 내 무릎에 눕더니 하는 말, ‘형 나한테 속았어요’. 처음엔 내 마음 갖고 장난친 거로 받아 들여서 화내려고 했는데 손을 뻗어서 내 입술하고 볼을 만지작거리는 거다. 뭐하 는 거냐고 퉁을 놓았더니 ‘나 사실 원래 성격 이거 아니에요.’랜다.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니 까 그냥 웃으면서, ‘나 사실 무지 나쁜 놈이에요. 남들 얼굴 때려서 강냉이 쓸어 보기도 했고 전치 사주 오주 이렇게도 입원 시켜도 봤어요. 선생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는데 방학 하고 형이 뿅 하고 나타나서는 나 내숭 떨게 만든 거지. 그러니까 형 나한테 속은 거예요, 감쪽같이.' …요 앙큼한 녀석, 하고 고개를 숙여 코를 살짝 깨물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고만 있고, 그래, 내가 저 웃음에 이동해한테 놀아나는 거지. 그렇게 하고 동해가 내 허벅지 위 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작스레 든 생각이 ‘난 학창 시절에 어땠더라’ 였다. 도무지 잊고 싶어 도 잊을 수 없는 과거인데 왜 난 지금에서야 생각이 난 거지? 왜 잊고 있었을까. 생각을 해 보니까 이것도 이동해 때문이네? 대체 동해 때문에 사람 얼마나 많이 바뀐 거야. 바로 너 때문에 사람 또 바뀌었어, 인마. 동해의 배에다 손을 올려두고 도동, 동, 도도동, 튕겨댔더 니 민감한지 끄응, 소리를 낸다. 좀 신기하기도 해서 몇 번 더 두드렸더니 그에 따라 끄응, 끙, 강아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호오, 귀여워. 볼도 말랑말랑한게, 역시 아직 애는 맞다. 이제 대놓고 좋아하니까 귀여운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아흐, 아흐으 …귀여워 귀여워. 앞머리를 툭툭 건드려 봤다. 살랑살랑, 머릿결도 좋다. 앞머리를 뒤로 싹 넘기니까 훤한 이


마가 드러났다. 아 진짜, 이마도 잘 생겼어. 근데 나 정말 바보 같다, 애인인데, 짱팬 같아. 내가 팬이 될 수 있는 건 성시경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동해가 정말 좋다. 좋다. 좋다. 좋다 는 말 평생 해도 질리지도, 지겹지도 않을 것 같아서, 푸흐흐… 실없이 웃었다. “보기만 해도 좋아 죽지.” “어, 언제 일어났어?” “형이 그 난리를 피웠는데 안 일어나면 병신이죠.” “요 입이 죽일 놈이지, 응? 어떻게 이 입을 괴롭혀 줄까?” “이왕이면 입술로 좀….” “시끄러워.” 손으로 입을 쭉 잡아 당겼다. 좀 많이 세게. 그랬더니 읍으으 거리면서 내 손을 찰싹찰싹 때리는 동해. 놔주니까 바로 일어나서 입을 슥슥 문지른다. 신경도 쓰지 않고 핸드폰을 들 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사십육 분… 그러고 보니까 좀 전에 택용이가 스타 접속하 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냥 못 들어가겠다고 문자 보내지 뭐. 문자 메시지 함에 들어가서 메시지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일이 있어서 접속 못 했다고, 경종이랑 같이 하라고, 미안하 다고 보내려고 하는데 저 동해 녀석은 왜 자꾸 문자 내용을 보려고 하는지 . 발로 저만치로 밀어버리니까 좀비처럼 다시 침대 위로 스물스물 올라와서는 내 몸 위에 눕는다 . 무겁다고 또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묵직한 무게감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그냥 나뒀다. “형 누구랑 문자해요?” “친구.” “뭐라고 보내는데?” “일이 있어서 접속 못했어. 경종이랑 해. 미ㅇ…내가 왜 너한테 내용을 알려줘야 하는데?” “궁금하잖아요. 혹시 몰라, 바람피우는 걸지도.” “………프로게이머 김택용이야. 그러니까 의심은 하지 말지?” 내가 너 놔두고 바람을 왜 피냐?! 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부끄…아니, 괘, 괜히 소리 높이기 싫어서(진짜다. 믿어라 제발.) 하는 수 없이 친구 이름 알려줬다. 그러니까 깜짝 놀 라서는 프로게이머랑 친하냐고 묻는다. 요즘 다시 뜨고 있고, 연예인 뺨치는 인기를 갖고 있는 프로게이머 이기는 한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조금씩 머리를 내미는 자만심은 어쩔 수 없다. 나 게임 잘 한다고, 웬만한 종족들 다 다룬다고 말해버렸다. 아, 잠깐만. 조규현 너 어린애처럼 왜이래!! 내 마음을 트위터나 개인 블로그에 표출한다면 [ㅠㅠ]다 진짜. “오오. 난 게임 같은 거 잘 못해서 잘 하는 사람은 부럽더라. 친구들이 게임 하자고 그러는 데 난 못해서 같이 못해서 소외감 같은 것도 들고….” “가르쳐 줄까?” “…에이, 됐어요. 친구가 한 번 가르쳐 줬었는데 못 한다고 판 엎은 적 있어요.” 그렇게나 못하나. 하긴, 스타크래프트가 머리 좀 써야 하는 게임이기는 하지. 아무튼 ‘보내 기’버튼을 꾹 누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동해에게 비키라는 의미로 이마에 립키스 한 번 해 주고 어깨를 밀어내니까 몸 위에서 비키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준다 . 또 타이밍은 좋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나가보니까 영운이 배달을 온 건지,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드리고 있 었다. “안녕하세요~” “…아, 규현… …안녕히 계세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당황하더니 인사 한 번 안 받아주고 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무슨 일 있나? 그냥 멀어지는 뒤태만 보고 있는데 동해는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뭐야, 저 아저씨…….”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작게 중얼거렸지만 들을 건 다 들었다.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뒀다. 괜히 나섰다가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  *

어슴푸레 안개가 낀 새벽, 동해는 문득 눈이 떠졌다. 동해는 아무 말 않고 집에서 나와 영 운을 찾았다. 규현은 아직 제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영운의 아내, 연주 또한 아직 가 게와 연결 된 집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새벽 네 시 임에도 불구하고 영운의 가게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드륵, 미닫이문을 여니 딸랑, 하는 도어벨 소리가 들리고 영운이 안경을 쓴 채로 동해 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연주 누나 아직 자죠?” “그럼. 미인은 잠꾸러기라서.” “사실 지금 깨어 있는 게 이상한 거거든요.” “꼬마야, 말대꾸는 불필요한 것 같다.” 영운은 버석한 웃음을 짓고,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 앉는 동해를 보고 말없이 과자를 건넸 다. 예전부터 영운은 동해가 오면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주고는 했다. 아이답게 그런 점은 좋지만, 유부남 주제에 규현을 마음에 두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영 운 쪽이 저보다 키도 크고…몸도 좋고…잘 생기기도 했고, 또 사실 아버지가 재력가이기도 한 영운이 좀 더 완벽한 남자이긴 했지만 가장 큰 결점은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 아닌가 . 규현 또한 집 잘 살고, 공부도 잘 하고 예쁘고…실력도 있고, 그렇지만 규현은 분명 저를 좋아한다. 그런데 영운이 이혼이라도 하고 규현에게 끈질기게 대시라도 한다면? 그럼 넘어 갈 확률은 50%는 당연히 넘겠지. 싸움이나 뻔질나게 하고 돌아다녔던 꼬마애가 뭐가 좋다 고. 동해는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지만 영운에게 규현이 넘어가지 않도록 단속 먼저 잘


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규현이 형 좋아해요.” “응. 그럴 것 같더라. 규현 씨 처음 봤던 날, 네가 우리 가게 왔을 때. 그 때부터 알고 있었 어. 나랑 놀고 있던 규현 씨를 보고 꼭지 돌아서 손목 확 잡아채고 데리고 가는데 그 누가 그 모습 보고 네가 규현 씨 안 좋아한다고 생각 하겠냐. 적어도 짝사랑 정도겠지.” “형도 나 좋아해요. 우리 사겨요.” “오, 그건 의왼데.” “아, 형!” “농담이다.” 발끈한 동해가 웃겼는지 영운은 안경을 벗으면서 낄낄거렸다. 역시 금방 발끈하는 것이 애 답다. 영운은 협탁에 안경을 내려놓고 마른 손세수를 했다. 동해는 과자를 입에 넣고 힘 있 게 아그작 아그작 소리를 내며 씹는다. 그러다 답지 않게 다리를 덜덜 떨고 두 손을 깍지 껴 검지손가락으로 다른 손등을 두드리며 초조해 하는 영운을 보며 다리로 영운이 앉은 의 자를 툭, 쳤다. “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묘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하죠?” 무덤덤한 얼굴로 영운의 무릎에 과자를 올려놓고 다리를 꼬아 앉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지금 하라는 동해의 말에 영운의 초조한 낯빛이 점차 사그러들고, 고개를 들어 동해의 얼굴 을 바라본다. 동해는 아직 무덤덤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다. “연주 임신했다.” “…얼마나 됐는데요.” “한 2주 됐나. 의사 말로는 상상 임신이래. 내가 영 관계를 맺어주지 않으니까 연주가 상상 이라도 계속적으로 한 거지. 그랬더니 아이가 생겼다 하더라고. 연주가 뭐라고 했는지 알 아? 당신 동성애자인 거 알지만, 그래도 당신은 가장이다. 여자랑 관계 못 맺는 거 아니까 부담이라도 덜어주려고 상상 임신 시도했다고. 그랬더니 책임감이 생기더라. 연주를 정말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는, 그런 거. 규현 씨? 좋아하지. 좋아하고 있어. 아니, 좋아 했지. 그 래야만 해. 하지만 규현씨가 옷 홀딱 벗고 스트립 쇼 추면서 나한테 맘 다 잡고 유혹을 한 다면 모를까, 난 규현씨 대놓고 좋아할 수가 없더라. 규현씨는 아직 내 마음 모르는데다가 착해서 나랑 불륜 저지르려고도 안 할 거 아니냐,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다행이야, 규현씨랑 나는 이렇게 끝나서. 규현씨가 너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 그렇다면 뭐야, 영운은 처음부터 규현을 가지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말? 영운이 막힘없이 한 말들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상상이 간다. 물론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동해는 영운이 안쓰러웠다. 담담하게 말을 해도 사실은 아직 규현을 좋아하고 있 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영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실에서 투게더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동해에게 건네주었고, 동해는 멀뚱한 얼굴로 통을 받았다. 뭐야? “규현씨랑 나랑 먹었던 아이스크림. 나는 못 먹겠고, 그렇다고 평생 쟁여놓을 수도 없으니 까 너 주는 거야. 규현씨 주든가, 영 꺼림칙하면 그냥 버리든가. 숟가락은 그 안에 있고.” “……저 이만 갈게요.” “잘 가라.” 동해는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넣고 가게를 나왔다. 곧 가게 안의 모든 불이 꺼지고, 영운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동해는 걸음걸이를 빨리 하여 집에 도착했다. 냉장고 안 에 통을 넣어두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달칵, 문소리에 깼는지 규현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동해야? 하고 침대에 바로 앉는다. 동해는 침대에 걸터앉아 규현을 안았다. 갑자기 끌어안 는 동해의 행동에 적잖게 놀란 건지 몸을 약간 움찔한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 새벽에.” “영운이 형 가게에 갔다 왔어요.” “배고파?” “…………연주 누나 임신 했대요.” “어, 정말? 얼마나 됐대? 아침에 가서 축하 해줘야겠다.” 진심으로 부부간의 결실을 축하하는 규현에 동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정말 착하 다, 조규현. 어떻게 이렇게 착할 수가 있을까…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착할 수가 있을 까. 동해는 규현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힘을 주는 것을 느꼈는지 규현은 손으로 동해의 등을 토닥거린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동해는 손으로 규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형은 아무 것도 몰라야만 해요. 형은 나중에 그렇 게 아파하지 말고 나랑만 사랑해야 해요, 차마 그렇게 말을 하지는 못하고 동해는 눈을 감 았다.

*  *  *

아침에 일어나니 동해는 없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학교에 가 있을 시간. 조금 추워 서 창밖을 봤는데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동안 덥다가 이렇게 마른 땅에 단 비가 내리니 마치 봄 같아서, 시원하고 좋다. 그래도 약간은 추워서 카디건을 걸쳐 입고 방 밖으로 나오니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실에 아주머니께서 TV에서 하는 아침방송을 보고 계 셨다. 규현 군 일어났어요? 물어오는 아주머니에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니 아주머니 도 함께 웃어주신다.


커다란 창으로 비가 오는 것을 한없이 보고만 있었다. 회색빛 공간에 초록 풀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연약한 빗줄기에 맞아 머리를 숙였다. 테리는 집 안에 들어가서 머리를 빼끔 내밀 고 검은 코에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이 시간이 길고, 한가하게 느껴져서 마음 마저 루즈해지는 것 같다. 북어 패듯이 흠씬 두들겨 놓은 것도 아닌데, 긴장 할 필요도 없 고. 저렇게 약한 비라면 밖에 나가서 맞다 들어와도 될 것 같아. 괜한 생각도 든다. 소파에 앉아서 아주머니와 함께 TV를 보다가 아주머니께서는 차를 권해 오신다. “규현 군. 우리끼리 티타임 좀 가져볼래요?” “티타임이요?” “녹차 있어요. 줄까요?”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보온도 없고 쌀쌀하던 차에 따듯한 것을 주신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 아주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고 불 위에 올리신다. 곧이어 찌르르 , 하는 물 끓는 소리가 TV소리 이외에는 정적을 잇던 공간을 가득 메운다. 아주머니는 컵 두 잔을 꺼 내어 티백을 넣고 물을 쪼로록, 따랐다. 그리고 쟁반 위에 올려 내 쪽으로 가져오신다. “자, 마셔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께 잔을 받고 호호 불어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침방송답게 담백한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었다. 여름철 상하기 쉬운 음식들, 냉장고 정리 방법…무더위 타파! 이열치열 보 양식 음식, 속까지 꽁꽁 얼게 만드는 각 색의 국수…장마철 잘 마르지 않는 골칫덩이 빨래 들…방 정리의 달인, 여러분의 지저분했던 방을 싹 다 치워드립니다!…여름철 일탈을 위한 휴가 가기 참 좋은 지역을 소개합니다!…휴가철 물놀이 사고 방지 안전 수칙…어머니도 여 자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어머니의 변신도 무죄!…올 여름 핫 트렌드!…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들부터 미용에 관한 것들까지 쭉. 아무런 생각 없이 가끔 녹차를 홀짝거리며 그 것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머니께서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시는 소리였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을 하고 게셨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렸다. “규현 군은 참 참하네요.” “예?” “잔 드는 손도 예쁘고. 스물 후반의 남자답지 않게 얌전하고, 단아하고. 친척 중에 규현 군 또래 조카가 있는데 아직까지 그 나이 먹도록 철이 안 들어서 직장도 가질 생각 않고 집에 서 놀고만 있다니까요. 규현 군이랑 정말 비교 되요. 물론 지금은 규현 군도 쉬고 있는 거 지만? 호호. 정말 예쁘고 참해요. …우리 동해가 규현 군 좋아할만 해요.”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봤어요, 동해랑 키스 하고 있는 거.” 충격적인 말. 너무 놀라서 잔을 놓쳐 바닥에 녹차를 엎지를 뻔 했다. 동해가 좋아할 만 하 다는 말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는 의심, 그 다음에 키스하는 걸 봤다는 말은 하늘이 무


너지는 느낌. 그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언제부터? 설마 처음 키스하던 날? 아니, 그 생각보다 더 먼저 든 것은, ‘이제 끝이다’. 이제 나는 끝이다, 라는 생각. 고개를 살짝 들어 아주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여전히 인자하다. “…언제…보셨어요?” “방에서. 규현 군 울던 날…이요.” 그럼 나 울던 것도 다 들으신 거네.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다. 전신에 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 나 어떻게 하지. “……죄송해요.” “뭐가요? 나 아직 규현 군한테 아무 말도 안 했고, 할 생각도 없어요.” “네?” “처음에는 제 딴에는 귀하게 키워놓은 아들이 저보다 열이나 더 먹은 남자한테 키스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놀라겠어요, 당연히 규현 군 괘씸하고 당장 집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었 죠.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하니 납득이 되더라구요. 규현 군은 처음 보면 모르지만, 오래 지켜보면 볼수록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요. 곁에서 결코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만드 는. 게다가 규현 군은 예쁘잖아요. 얼굴도, 손도, 행동도. 그래서 아, 괜찮다 싶었죠.” 따듯한, 제 손에 쥐고 있는 녹차의 온도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는 아주머니. 목 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벌컥벌컥 녹차를 마셨다. 뜨끈해지는 목이 좀 아프긴 했지만, 입 천장이 좀 따갑긴 했지만 표현을 할 수는 없어 침을 꿀꺽 삼키니 아주머니는 아무 말 않고 주방에서 물을 떠와 내게 건네신다. 바로 물을 받고 입 안에 물을 넣고 잠시 기다렸더니 시 원해지는 느낌. 이런 것 마저 너무 따듯하게 대해주셔서 죄책감이 밀려온다. 남의 귀한 아 들 꼬여내서 연애질이나 하고 있으니 꼴 보기는 싫을 텐데, 오히려 인정이나 해 주시고. 고 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또르륵, 떨어지는 눈물은 어찌 해 볼 수가 없었 다. 울지 마라는 말마저도 따듯했다. 엉엉, 소리 내어 울 것만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 자 손에 닿는 사람의 온기. 아주머니가 내 손을 잡고 하나하나 정성스레 손가락을 펴주고 계셨다. 멍하니 바라보자 아주머니는 내 손을 놓고 자신의 손으로 손뼉을 짝짝, 두 번 치더 니 팔을 짤 벌린다. 나는 그에 따라 몸을 움직여 아주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이동해는 이동해고, 내 아들은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기 전에 남자고, 사람이니까,” “윽…흐읍…….” “마음 가는 대로, 동해랑 사랑해요. 아직 어리지만 내가 봐도 멋있는 구석 많다니까요?” “으으…… 아, 알아요….” 훌쩍, 눈물을 삼키며 웅얼대자 아주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신다. 마치, 아들의 잘못을 보 듬어 주는 어머니 같이. 그런 포근함을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던가. 나는 내 기억 속에서 내 어머니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지어주셨던 따듯한 미소를 끄집어내었다.


*  *  *

엉망이 된 캐리어를 정리하기로 했다. 그 동안 필요한 것만 쏙쏙 골라 꺼내 썼기 때문에 이 리 뒤엉키고 저리 뒤엉키고 한 물건들을 이건 여기 두고, 저건 여기 두고. 옷이나 속옷, 그 리고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전부 동해의 방에 방치해 뒀기에 캐리어 속 물건들은 별로 많 지 않았다. 넷북, 마우스, 공책, 안경집, 그리고 검은색의…담배? “뭐야.” 이걸 대체 언제 넣은 거지? 의문을 가지고 머리를 골똘히 굴려보는데, 참. 이 캐리어는 내 것이 아니라 희철 형의 캐리어였지. 그런데 희철이 형이 이런 종의 담배를 피웠었나. 블랙 스톤 체리와 블랙데빌 헤이즐넛. 블데 헤이즐넛은 시선을 사로잡는 블랙의 강렬함이 묻어났 다. 이거 한 번도 한 텄는데, 내가 펴 봐도 괜찮을까? …에이, 어차피 다 잊어버린 상태겠 지. 헤이즐넛이 한국에는 아주 소량만 수입된다고 했던가.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는 모르겠 지만 일단 내가 먼저 선수 칠게요! 나도 모르게 사악한 웃음이 퍼지고, 먼저 블랙데빌 헤이 즐넛의 비닐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기고 윗부분을 열어 한 개비를 꺼냈다. 필터 부분에 새겨 진 블랙데빌 로고가 인상적이다. 약간 은은한 커피향이 맡아진다. 기분이 좋다. 입에 물고 담배가 나왔던 곳을 뒤졌다. 여기 어디 한 곳 쯤에 라이터가 있지 않을까 해서. 아니나 다 를까, 노란색 통에 오일이 가득 채워진 라이터를 발견했다. 일단 창문을 열어놓고, 라이터 를 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피운지 얼마 되지 않아 입 안과 방 안 가득히 진한 커피 향이 차오른다. 왜 동해 방에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구석에서 발견한 재떨이에 재를 톡톡 털 었다. 담배를 그렇게 자주 피는 건 아니지만 가끔 피워주는 것도 좋다. 나름 일탈의 한 조 각이니까. 벌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동해가 인상을 잔뜩 쓰고 켈록거렸다. 저러는 걸 보면 따로 담배를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왜 재떨이가 동해 방에 있는 거지? 한 소리 해 줄 심산으로 동해의 얼굴에 후욱,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현기증이 나는지 다시 밖 으로 나가서는 후, 하, 후, 하. 열심히 숨을 고른다. 그리곤 다시 코를 막고 방 안으로 들어 온다. “형 담배도 폈어요?” “자주는 아니야. ……담배 냄새에 약하면 나가 있지 왜 또 들어왔어?” “아 형, …담배 피우는 게 존나 섹시해서.” 아, 그래? 섹시하다니 감사…가 아니라 뭐, 이 자식이?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 두지? 라는 뜻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동해를 빤히 쳐다보니 아흥흥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 다. 왜 그래? 동해의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동해는 고개를 들고 내 입에 물린 담배 를 빼서 제 입에 넣더니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쪼옥 빨아들이고 내 목에 연기를 뱉고선 목 에 입 맞추고 떨어진다. 담배 약하지 않았나?


“섹시하다니까. 평소의 모습과는 정 반대라서 욕구 충족 중.” “대체 무슨 욕구를……!!” “근데 뭐 이렇게 독해요? 아 진심으로 짜증나려고 해.” “그럼 딴 거. 좀 더 약해.” “또 있어요? 약한 거 있으면 그거 피지 왜 센 거 펴요? 몸에 안 좋은 거 알아요?” 담배 피는 사람들 중에 몸에 안 좋은 거 모르고 피는 사람 얼마 없을 텐데. 대답은 하지 않고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끄고 캐리어 안쪽을 뒤져 핑크와 보라색이 그라데 이션의 조화를 이룬 담뱃갑 하나를 더 꺼냈다. ‘블랙스톤 체리’. 물론 이게 리틀 시가답게 피울 때 코가 좀 맵기는 한데 목도 안 아프고, 담배 냄새도 거의 없다. ‘나나’라는 만화에서 거의 주인공 급으로 등장하는 것이니 만큼 유명한 담배다. 비닐을 조심스럽게 뜯으니, 역시 코를 찌르는 달콤한 체리 냄새가 방 안 가득히 찬다. 동해의 손에 들려주고 냄새를 한 번 맡아보라 하니까 냄새를 맡아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와, 냄새 엄청 좋다…….” “그치? 이거 가끔 방향제 대용으로도 써.” “진짜 그러는 사람 있어요?” “아니.” “뭐야 그게.” 키득키득 웃으며 다시 한 번 냄새를 맡아보는 동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들고 만 있는다. 하지만 계속 들려���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빼앗아 재떨 이에 지져 껐다. 실망한 표정이 다 드러난다. 하지만 미성년자를 아직 피면 안 돼요. 웃으 면서 동해의 입술에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환 기를 시켰다. 괜한 오해 받으면 곤란하니까 벌써 동해가 손에 들고 있는 담배 두 갑을 빼앗 아 캐리어 안에 넣었다.

*  *  *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이 끌리는 부탁을 받은 건 아니었다. 나의 부재가 꽤 오 래 가서 회사가 약간 혼란스럽다고, 이제 두 달이면 괜찮은 시간 아니냐며 정리를 하고 제 발 회사에 출근을 해달라는, 신과장님의 부탁. 핸드폰 번호를 일찍이 바꾸지 않은 것이 후 회스러웠다. 그간 너무나 행복한 시간에 빠져 살아 내가 할 일을 잊고 있었다. 나는 사회인 이다. 결코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영락없는 사회인. 이 사실마저 잊었었다. 지금 시간은 세 시 반. 동해가 자율 학습을 빼먹고 들어온다고 가정하면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 사이 짐 정리를 해야 했다. 일단 옷을 갈아입고, ……


가족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방에서 나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 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쉬운 눈길로 당연히 나 올 것 같았던 질문을 하신다. “…동해…는…?” “……죄송해요….” “…괜찮아요. 동해도 마냥 어리지만은 않으니, 떼를 쓰지는 않겠죠.” 라고 눈을 찡긋거리며 웃으시는 아주머니. 물론 동해를 두고 저가 할 일을 찾아 떠난다는 아들의 애인이 밉기도 하겠지만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사회인 중 한 명이기에 나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리라 확신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굽히는 허 리가 차라리 부러져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 그럼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동해가 날 간호 해줄 테고. 하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울 때 까지 그런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란 것 자체가 바보 같은 것이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짐정리 를 시작했다. 옷걸이에 걸려 동해의 것과 마구 뒤섞인 옷들 중 내 옷을 골라 적당히 개어 캐리어 안에 넣 었다. 다음은 따로 보관해 두었던 속옷을 캐리어 속에 와르르 쏟아 부었다. 곳곳으로 튀며 캐리어 안으로 들어가길 거부하는 것 같아 가슴이 쓰렸다. 다음에 책, 생활용품, 필기도 구… 그리고 기타 등등의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캐리어에 담는다. 그리고 동해와의 추억도 캐리어 속에 담는다. 그리고 잠근다. 서울에 올라가면 이제 절대 열어보지 않을 캐리어. 괜 히 슬퍼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은데, 지쳐. 이 곳 생활이 길이 들어서 딱 딱한 도시로 갈 생각을 하니 벌써 답답하다. 막막하다. 미쳐간다.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아 침대에 누웠다. 동해 오기 전 까지만 자고 일어나자…. 그 전까지만…. *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놀라 눈을 떴다. 동해의 체온을 품은 손이었다. 눈을 다시 한 번 감았다 떠도 너다, 이동해. 동해다. 내가 사랑하는 이동해. 침대에 똑바로 앉아 나를 내려다 보던 동해의 손을 잡고 나도 바로 앉아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눈이 차갑다. 원래의 바다를 품은 네 눈이 아니다. 그래서 슬퍼서, 동해를 밀어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입술에 키스했다. 언제나 리드하는 건 너였는데, 지금은 마치 목각인형 같다. 쉴 새 없이 혀를 놀 려도 동해는 움직이지 않는다. 슬며시 입을 떼고 이어지는 실타래를 끊어 동해의 턱에 묻은 침을 닦았다, 혀로. 그러자 동해는 눈을 감는다. “저거 뭐야.” “캐리어?” “어.” “알잖아.” “집에 가려고?” “응.” “왜 벌써 가는데?”


“회사에서 날 찾아.” “…….” “보내줘.” 서로가 서로에게 해가 되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래도 내가 한 말 중에 제일 동해에게 상처 가 되는 말은 아마 마지막 말, ‘보내줘’겠지. 짧은 말들을 끝내고 동해가 아무 반응이 없자 그의 위에 올라탔던 몸을 움직여 침대 밑으로 내려와 캐리어를 만졌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캐리어를 발로 차고 나를 끌어당겨 제 밑에 가두는 동해 때문에. “내가 대체 왜…이 고생을 해서까지 형을 얻어야 했는데…. 너도 나 좋아하잖아. 근데… 왜 네가 먼저 떠나려고 하는 거야. 왜! ……제발 그러지 마, 제발.” “회사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아. 학교랑은 달라도 너무 달라. 무단 결과를 하면 그 다음 날 회사에서 받아줄 것 같아? 천만에. 바로 사직서 작성해야 하는 게 회사야. 더구나 나처럼 큰 회사는!! …다시 한 번 말 할게.” “…윽……하, 시발…….” “보내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동해는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티셔츠 사이에 손을 집어넣는다. 점점 티셔츠를 목 쪽으로 끌어올리는 행동을 밀어내야 했다. 딩동딩동, 머리에 적신호가 울린다. 가슴까지 티셔츠를 올린 손을 저지하고 내 입을 막은 손도 꼭 잡고 떼어낸다 . 의외로 쉽게 떨어지는 것이 이상하여 동해의 눈을 보았는데 동공이 탁 풀려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이제 곧 먹구름이 낀 눈에서 비를 흘릴 것 같다. 동해야, 이름을 부르니 내 볼 위로 톡 떨어져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동해의 입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동해의 등을 안고 내 쪽 으로 끌어 당겼다. 온전히 겹쳐지는 몸에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껴안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가지 마…가지 마…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눈을 슬쩍 감는 동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곧 아이처럼 조용히 잠드는 동해. 살짝 몸을 밀어내고 내팽개쳐진 캐리어를 다시 잡았다. 동해야 미안해. 주문처럼 되뇌인다. *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것은 제 옆자리의 규현의 유무. 결국 하지는 못했지만 막무가내로 규 현을 가지려 했던 제 욕심을 자책하며 동해는 어슴푸레 눈을 떠 규현이 있을 자리에 손을 뻗었더니 느껴지는 감촉은…부드럽고도 까슬까슬한 이불의 느낌.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동해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가 없다는 것에 절망을 했다. 항상,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반듯한 규현의 이마나 절대 떠지지 않을 듯 한 규현의 꼭 감긴 눈, 입술이었건만 지금은 그의 흔적마저 사라지고 없다. 황망하다. 보이 지 않는다. 상체를 일으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눈에 보이는 규현의 사라짐


의 증거, 그의 물건, 캐리어, 모든 것이 없다. 남은 것은 블랙스톤 체리와 블랙데빌 헤이즐 넛 한 갑 뿐, 규현은 처음부터 제 방에 없었던 듯,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없다. 그가, 형이, 조규현이. 밀려오는 엄청난 회의감에 동해는 몸을 떨었다. 규현은 정말 우리 마을에 왔던 것일까? 정 말 제 방에서 함께 자고, 시간을 보내고, 키스…도 했던 것이 맞을까? 한 손에 잡히는 그의 어깨는? 키스 하고 싶은 그의 입술, 안고 싶은 가녀린 뒤태는? 다 사라졌다. 다 끝난 거다. 동해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가 두고 간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무심코 열어본 그 속에는, 단 한 개비를 제외하고서 모두가 온전히 들어 있었다. 그런데 약간 삐죽 튀어나온 하얀 종이,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동해는 쪽지를 열어본다. 「미안해.」 단 세 글자 뿐.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쓴 듯, 글씨체는 마구 엉망이었다. 그래. 갔다, 규현 은. 내가 사랑했던 조규현은 이제 없다. 가버렸다. 억지로 잡으려 했던 자신을 탓해야 했다. 회사에서 자신을 부른다며 이제 그만 가야 한다던 그를 순순히 보내줬더라면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담뱃갑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가슴 한 구 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게 이별이라는 거구나. 그래도 뭔가 덜 아프다. 동해는 서랍 에서 성냥을 꺼내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성냥에 불을 켜 담 배 끝에 불을 옮겨 붙였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코끝이 저리다. 미안해, 내가 멋대로 가지려고 해서. 입 안에 맴도는 체리의 향은 달콤했지만 머릿속은 암 전이다. 맛을 느낄 수가 없다.

*  *  *

[1년 후]

쏴아아아…비는 세차게 창문을 때려 장시간 같은 음으로 소음을 만들었지만 내 귀에는 그저 키보드 자판을 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지금이 몇 시건, 오전이건 오후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이 기획안을 마감해야만 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지만 그런 건 상관

었다. 큰 회사에서 그만큼 큰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제작한다는 것은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 려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윗사람들이 날 믿어준다는 것이니까. 내 몸 하 나 아파도 회사의 일은, 나 아픈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니까.


“후…커피나 한 잔 타 마실까.” 며칠 밤을 새서 써 내려가다 보니 이제 끝마무리를 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조금만 더 쓰면 될 것 같은데.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부엌으로 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 위에 올렸다. 끓을 때 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TV에는 전라남도 목포의 온갖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목포. 전남 목포…… …이동해….” 이동해…. 잊고 살았던 이름이다. 그 곳을 떠나고, 고속도로를 탄 후에야 그 곳이 전남 목 포라는 것을 알았다. 전남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난생 처음 가보는 지역, 목포. 언제든지 다 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 하나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차를 몰았더니 그 곳이 어딘 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는 못 간다. 동해도… 보고 싶은데. 이동해, 그 아이 세 음절의 이 름을 오랜만에 입에 담으니 다시금 세차게 뛰는 가슴. 그래. 아직 난 그 아이를 잊지 못했 다. 보고 싶다. 넋 놓고 눈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니 정신이 없다. 순간,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에 정신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큼, 아…크흠. 택배 왔는데요. 조규현씨 댁 맞나요? “맞긴 한데… 뭐 주문 한 적 없는데요.” -어라, 이상하네. 그래도 일단 받기는 하셔야겠는데, 무게가 좀 나가서. “아… 그럼 일단 문은 열게요.” 이상하다, 뭘 시킨 적이 없는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의심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요 즘 시대에 이렇게 비싼 오피스텔 와서 범죄를 저지르겠냐는 생각으로 체인을 내리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보이는 건 검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서 있었다. 어? 택 …배 는? “택배는 어딨어요?” “여깄습니다.” “어디ㅇ… …?!” 남자가 모자를 벗더니 뒤로 던져버리고 상체를 숙여 키가 조금 낮아진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너는…. 야구 모자를 벗은 네 얼굴은 참 오랜만인데… 보고 싶었단 한 마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겨우 1년 사이에 더 성숙해진 네 모습은 참 멋있어서, 1년 전의 그 앳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멋있는 남자로 변해버려서,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정 말, 내가 보고 싶었던 동해 너…… 맞니? “동해…야.” “블랙스톤 체리를 머금은 동해바다 대령이요.” 씨익, 웃는, 더 이상 에헤헤 거리며 웃지 않는 더 어른이 되어버린 동해를 보고 왜 난 아무


말도 못 할까. 그리고, 그리고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도 나는 왜…어째서 아무 말 않고 눈을 감을까. 말랑말랑한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콧대에 닿고 …이내 입술이 닿고…하, 벌어진 입술에 블랙스톤 체리의 달콤한 향이 번진다. 이래서 블랙스톤 체 리를 머금은 동해바다라고 했구나. 오랜만에 맛보는 리틀 시가의 향…하지만 동해의 입술에 다 가라앉아 버리고, 동해를 집 안으로 끌어당겼다. 치이이익…. 주전자에 물 끓어 넘치는 소리와 함께 널 갖고 싶은 내 욕심도 끓어 넘친다.

*  *  *

눈가로 햇빛이 환하게 비춰 자연스레 눈을 떴다. …와, 동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좋아 하는 사람 얼굴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눈 감은 동해의 얼굴은 참…아기 같고, 이제 갓 스물이 된 애라서 그런지 아직 풋풋함이 남아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랴부 랴 회사 갈 채비를 하는 것 보다야 부드럽게 음영이 진 동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게 더 좋 지. 손가락으로 볼을 톡톡, 코도 톡톡, 입술도 톡톡. 움찔 거리는 게 이제는 재미가 들려서 이번엔 깨울 심산으로 동해의 목을 끌어당겨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고 손이 불쑥 올라오더니 내 등을 꽉 끌어안는다. 기습 포옹에 적잖이 당황했는데 나도 뭐, 기 습 뽀뽀 했으니까. 쪽, 내 어깨에 입을 맞추고 동해는 침대에서 일어나 티셔츠를 입었다. 왜, 그냥 벗고 있지, 라고 말을 하려다가 속이 훤히 다 보이는 말이라서 그만 뒀다. …사실은, 서른 되더니 변태 된 거냐, 내 몸이 그렇게 좋았냐, 이런 짓궂은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형, 욕실 써도 되요?” “으응. 가운은 저기, 옷장 서랍에 있어. 뒤져서 하나 가져가.” 동해는 내가 가리킨 서랍 안을 뒤져 흰색 가운을 하나 집어 들어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이 집 안에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하니까 기분이 묘하고 그렇다, 막. 아니 , 나쁘진 않은데… 좋은 쪽에 가깝다. 동해가 나와 함께 한다는 것…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뭐 든 좋고,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면 좋고. 바보 다 됐다. 시원 이후로는 이 렇게 바보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옷을 챙겨 입고 동해가 있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천으로 다 가려지니까 대충 세 수랑 양치질만 하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욕실 문을 두드리고 ‘나 들어갈 테니까 천으로 가려 놔’라고 하고 촤라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욕실 문을 열었다. 끄응, 열기 …수증기…. 그냥 열어놓고 해야겠다. 칫솔에 물을 묻히고 치약을 짜서 입에 넣었다. 아흐, 알싸하다. “형 뭐해요?”


“나…치카치카.” “와 치카치카래. 서른 되더니 애교가 많아졌어. 아까 뽀뽀도 먼저 하고….” 뭐 어쩌라고? 세면대에 양칫물을 뱉고 컵 안에 물을 받았다. 입에 물을 넣고 가글을 하다가 천을 살짝 쳐서 빼꼼 얼굴을 내밀어 나를 빤히 보는 동해를 발견하고 세면대에 내용물을 뱉 었다. 왜? 물어보니까 그냥, 한다. “흐���. 귀엽잖아요, 형.” “입에 발린 소리 하고 있어. 180 장신의 남자가 뭐가 귀엽다고?” “귀여운 건 키가 아니라 행동을 보고 말하는 거예요. 형 나이 헛으로 먹었구나?” “…점점 말하는 게 싸가지가 없어진다?” “으헤헤.” 끼익, 수도꼭지를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동해가 가운을 입고 천을 걷어서 내 쪽으 로 온다.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서 줬더니 곧이곧대로 받아서 머리를 탈탈 터는 동해. 나 도 세수 하고 이제 대충 머리 손질 하고 회사 나가야지. 수도꼭지에 손을 대려는데 갑자기 동해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다. 뭐 하는 거야. 뒤를 살짝 돌아보니 동해는 미소를 짓고 있 었다. “형, 나 자취방 빼고 형이랑 같이 살면 안 될까요?” “뭐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너 부모님이 사주신 거 아니야? 올라오시면 어쩌려구.” “절대 서울로 안 올라오신 댔어요, 촌놈 서울 가기 쪽팔리다고.” 네? 같이 살면 안 돼요? 답지 않게 칭얼거리는 동해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곤란한데. 입을 꼭 다물고 그냥 있으니까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나를 안은 팔을 풀고 떨어지려고 한 다. 따듯했던 등이 갑자기 싸늘해지니까 기분이 이상해. 뒤를 돌아 동해의 팔을 잡아당겨 목을 끌어안았다.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다가 내 등 위에 살포시(살포시라는 억양이 좀 웃 기지만) 올려놓는다. “…내조 잘 해.” “!……네.” 으흐흐, 낮게 웃으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동해의 행동에 또 살살 녹는다. 어른 다 된 줄 알았더니 역시 아직 병아리 정도밖에 안 됐구나. 하고, 동해의 신경을 살살 긁어놓으 려고 했는데, 어제 미처 다 쓰지 못한 기획안을 다 작성하고, 회사에 나가야 하니까 한 번 꼭 끌어안고 동해에게서 떨어졌다.

*  *  *


저번에는 이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어서 다시 노아의 방주라도 띄우겠다는 심보로 비가 아주 그냥, 세차게 내리더니 이번에는 북극의 얼음을 모조리 녹여버리겠다는 것처럼 햇볕이 쨍쨍 해서 빨래 널어두면 반의 반나절 만에 다 말라버리겠어서 요즘 날씨가 뒤죽박죽이니 얼른 묵은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빨래를 너는 중. 또 얼마 전에는 동해가 자취방을 빼서 짐을 다 가져오는 바람에 빨랫감도 두 배도 더 늘었단 말이다. 물론 난 회사 다닐 때에는 정장만 입어서 원래 빨랫감이 없었지만 동해는 학교 다닐 때…옷을 매일 갈아입고 하니까 세탁 바 구니는 동해의 옷으로 가득 차기 일쑤다. 가끔씩 뒤집어 놓거나 손빨래해야 하는 것들을 휙 휙 던져놔서 좀 피곤할 때도 있지만…저번에 한 번 언급했듯이, 부부 같아서, 그 재미로 참 는 거지, 뭐. 또 그게 마냥 갓 스물의 자취하는 대학생의 모습이라서 챙겨줘야 하는, 어, 그 러니까 엄마 마음? 난 또 뭐래냐. 빨래를 널다 말고 온갖 잡생각들로 가득 차서는 …포기 하 기는 했는데, 이러다 정말 이동해랑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살려고…. 대학엔 고등학교 때보 다 더 예쁜 애들 많을 텐데. 본인의 경험담이기는 한데, …동성애자라고 여자 안 사겨본 건 아닌데…음. 동성애에 눈을 뜬건 다 최시원 때문이다. 그 전에는 이성애자였는데…으음…난 또 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오전 근무로만 끝이 나서 항상 집에서 기다리던 동해를 이제는 내가 기다려야 하 는 꼴이 되어버렸다. 뭐랄까…내조 하는 마누라의 마음이랄까. …헐. 뭐래. 아까는 엄마, 이 제는 마누라야? 얼른 머릿속에서 동해를 지워야지, 안 그러면 일도 제대로 못하겠다 싶어서 청소기를 꺼내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욕실 청소, 그 다음에는 부엌 구석구석을 닦고, 아, 냉장고 청소도 해야겠다. 회사에서는 윗분들 눈치 보랴, 긴장하고 있으랴, 동해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온 몸의 근육이 루즈해져서는 마냥 헤실헤실 거리고 말 야. 화분에 물도 주고, 이참에 컴퓨터도 포맷 시킬까? 오랜만에 해서 디스크가 꽉꽉 찼을 텐데. 안 해주면 나중에 중요한 거 다운 받을 때 곤란해지거든. 할 일을 생각하다보니 꼬리 에 꼬리를 물고서는 계속 부풀어 오른다. 일단 바닥 청소부터 다 끝내고…그 다음에 순서대 로 욕실 청소를 하자. 점심도 먹어야지. 시켜 먹을까? 뭐 시켜 먹지? 아, 쟁반짜장 먹어야 지. 일단 시켜놓고 청소를 시작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근처 중식집에 전화를 걸어 쟁반짜장 하나랑, 탕수육을 주문했다. 계속 하나냐고 물어오는 주인에 조금 짜증이 나서 하나요! 소 리를 지르니까 왜 소리를 지르냐며 넉살 좋게 웃는다. 아…또 놀아났어, 이번엔 생판 남한 테. 억울해서 무를까 하다가 그런 짓 할 시간에 청소를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걸레를 쭉 짜 서 대걸레에 달아서 바닥을 슥슥 닦았다. 다음에는 욕실청소…부엌 청소…냉장고 청소…화 분에 물도 주고…시킨 자장면도 먹고 나니까 세 시가 훌쩍 넘었다. 동해가 네 시 정도에 집 에 들어오는데…마중 나가 있을까, 대학교 앞으로? 그럼 동해가 뭐라고 할까. 형이 마중을 다 나와주다니 감동이라며 기뻐할까, 아니면 왜 왔냐며 호통을 칠까. 그런데 왜 나는 속옷 을 들고 욕실로 향하고 있는 거지? 이상한 내 행동에 1g 의심도 없이 다 씻고 나와서는 옷 을 뭐 입을까 고민한다. 뭘 입어야 동해가 좋아할까? 아, 그러고 보니 동해가 전에 난 하얀 티셔츠에 검은 색 카디건이 잘 어울린다고 했었지. 여름이니까 짧은 반팔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이 나이 들어서도 애인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불변하거든. 어쨌 든 동해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데리러 갈게] …하고, 문자를 보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만에 띠링, 하는 문자 오


는 소리가 들렸다. 동해인가? [오게요? 나 좀 일찍 끝날 것 같은데. 그럼 근처에 롯데리아 있는 데서 기다릴게요.] [ㅇㅇ] 잰걸음으로 주차장까지 쭉 내려와서 급하게 시동을 걸고 명지대로 차를 몰았다 . 서두르듯 운전을 하니 꽤 빠른 시간 내에 명지대 근처에 도착했다. 마치 쫓기는 사람 마냥 빠르게 차 를 몰았더니 패잔병처럼 심신에 진이 다 빠져서 임산부처럼 라마즈 호흡법이라도 할 수 밖 에 없어진다. 후, 하, 후, 하. 그런데 롯데리아가 어디? 다시 동해가 보냈던 문자를 확인하 니 캠퍼스 근처일 것 같아서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느릿하게 차를 몰아 주위를 두리번거리 며 롯데리아를 찾았다. 어, 찾았다. 그와 동시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해도 발견. 그런데 … 옆에 찰싹 달라붙은 저 어여쁜 소녀는 누구? 금발에 늘씬한 각선미를 가지고 있는 데다 동 해랑 무척 잘…어울린다. 이어서 길을 다 건너고, 롯데리아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고개를 이리 저리 천천히 돌리며 주위을 쭉 훑는다(그 누군가가 나인 듯한데). 간간히 금발 소녀와 이야기도 하면서 롯데리아 앞에 꼿꼿이 서서는 다시 주위를 살피는 동해 . 곧이어 내 차를 발견한 건지 계속 응시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한다. 와, 인상이 험악해, 이동 해. 단 1분도 지나지 않아 내 핸드폰에서 띠링, 하는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왔으면서 왜 안 와요?] [갈게. 갈 거야.] 도로변에 차를 잠시 대고 롯데리아 앞, 그러니까 동해와 소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동해는 아까보다 뭔가 좀 더 풀린 얼굴로 옅게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러자 금발 소녀도 쫄 래쫄래 동해를 쫓아 내 쪽으로 걸어온다. “안 내리고 뭐 했어요?” “보고 있었어,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냥 과 동기에,” “정수연입니다! 그냥 과 동기이기는 한데… 제가 동해한테 열심히 대시하고 있어요!” “조규현. 동해 동거남이야.” 금세 물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동해는 기분이 언짢은 듯 아까와 같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곤 나와 수연 양을 쳐다보다 내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수연 양의 손을 찰싹, 때린다 . 이게 뭐……. “야 정수연. 내가 애인 있다고 했잖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야!!” 맞은 손이 꽤 아팠는지 애인이 있다고 말하는 동해에게 앙칼지게 소리치는 수연 양 . 어헛 , 이 아가씨, 꽤 드세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야. 이거 좀… 많이 들어 본 대사이기는 한데 본인도 한두 번쯤 재미삼아 해봤기 때문에 별다른 태클은 걸지 않도록 하 겠다. 어쨌든 동해는 당차게 자신에게 소리 지르는 수연 양을 하, 하고 한숨을 쉬고 보더니


이내 한 쪽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라고 서술하고 썩소라 발음한다.), “골키퍼가 대단한 실력자라면 다르겠지. 어떤 공도 다 막아내 버릴 테니까.” …라고, 수연 양에게 내뱉는다. 그리곤 가자며 내 손을 잡고 운전석을 열어주고 내가 타니 까 자신도 조수석에 가서 올라탄다. 흘끔, 바라본 수연 양의 얼굴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서 걱정이 되려고 하는 찰나, “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내일이면 다시 붙으니까.” 내 손에서 키를 빼앗아 시동을 걸고 내 손을 잡아 기어에 올려놓고 나서 떨어진다 . 그리고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꼬우’라 외친다. 나는 기어를 변속하고 액셀을 밟아 천천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동해는 가방에서 CD를 꺼내서 디스크에 삽입하고 노래를 틀더니 따라 부르 기 시작한다. You are my everything… Nothing your love won't bring. My life is yours alone. The only love I've ever known. Your spirit pulls me through. When nothing else will do……. 동해 노래 잘 부른다더니 진짜였구나. 헛말이 아니었구나. 게다가 너무 달콤해 서 운전하는 중에 눈까지 감을 뻔 했다. 그런데 동해는 갑자기 차를 대보라면서 도로변을 가리킨다. 동해의 말대로 비상등을 켜고 도로변에 차를 댔더니 대뜸 앞유리 썬팅 되어있느 냐고 물어온다. “응.” “그럼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밖에선 안 보이겠네.” 라고 하고는 불쑥 내 목을 끌어당겨 콧대에 입 맞춘다. 뭐 하는 거냐며 소리 지르려 했는 데, 입을 떼지 않은 상태로 눈을 맞춰버리니까, 꿈쩍도 못 하겠다. 전혀, 아무 것도, 할 수 가 없어. 뒤이어 내 입술에 천천히 저의 입술을 대었다 뗀다. 아, 대낮에 뭐하는 거야 정 말…. “일단 정수연이랑 나, 잘 어울린다는 거 취소해주죠?” “빈말 아니야. 둘이 정말 잘 어울려.” “그럼 나 정수연이랑 그대로 사겨도 된다는 말이에요?” 어라, 요 쪼끄만 녀석이, 어른한테 협박 하는 건가? 내가 둘이 잘 어울린다고 했지 언제 사 귀라고 그랬어? 날 놔두고, 그대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지. 안전벨트를 풀고 상체를 동 해 쪽으로 숙여 동해의 양 볼을 잡고 급하게 입술을 찾았다. 노랫소리가 커서 안 들릴 법한 혀 섞이는 소리는 정확히 우리 둘의 귀를 파고들었다. 동해도 이내 안전벨트를 풀어버리고 내 뒷머리에 손을 넣고 쓰다듬는다. 그 촉감이 꽤나 기분이 좋아 입을 맞춘 채로 흐흥, 하 고 웃어버렸다. 입술이 떼어지고, 동해는 내 턱에 흘러내린 둘 중 누군가의 것일 타액을 핥 았다. “사귀라고는 한 적 없어.” “사귈 생각도 없었어요. 이렇게 골키퍼계의 거물이 이동해 앞을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은근히 나 추켜세워서 감동이나 주고 말이야, 이동해 못됐다, 정말. “그, 그래도…수연 양에게는 잘 대해줘. 못되게 굴 필요는 없잖아.” “걔가 자꾸 우리 집에 오고 싶다잖아요.” “그런 이유라면, 그냥 데려 와도 되잖아.” “안돼요.” “왜?” 동해는 살짝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 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깍지를 낀다. 왠지 그윽하게 나를 보는 동해의 눈을 쳐다볼 수 가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피식, 바람 빠지게 웃는 소리가 들려서 네 앞에서 발가벗고 스트 립쇼라도 하는 듯 머리끝까지 화끈거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 동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심장을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형과 나의 집, 우리 둘만의 공간에는 항상 우리 둘만 있어야 하니까.” 쾅, 콰광, 투다다다, 하고 가슴에 우주대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 동해의 반대편으로 몸을 확 틀어버렸다. 얼굴이 뜨거웠다. 귀도 뜨겁다. 무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동해는 깍지 낀 손 을 절대 놓지 않았다. 동해도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무지하게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그 상태 그대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제야 몸을 운전석 쪽으로 돌려 다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동해도 내게 말을 건다거나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뿐, 그 외의 것들은 결코 하지 않는다. 흥 얼거리는 콧소리가 들린다. 아까 들었던 노래다. You are my everything. 너는 나의 모든 것이야…맞아, 지금의 나에게는 네가 전부야. 샐샐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동해도 기분이 좋은지 어느 부분부터는 허밍으로만 노래한다. 듣기 좋다. 사실은, 까놓고 말하자면 나, 솔직히 질투였어. 잘 어울린다는 말은 비아냥거린 거야. 혹시 네가 날 놔두고 수연 양이랑 놀아날까봐, 지금은 너밖에 없는 나를 버리면 고물이 될 내가 슬퍼서 그랬어. 넌 언제든 나를 버리고 좀 더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이랑 놀아날 수 있잖 아.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어. 단지…과 동기일 뿐이라는 금발의 여자는, 수연 양에게 는 미안하지만, 동해는 내가 가질 거에요. 가질 거야. 너 없이 살 자신이 없는 날 감당할 수가 없는걸. 너와 나의 집, 우리 둘만의 공간에는 항상 우리 둘만 있어야 한다는 너의 말. 그 말에 눈물 을 흘릴까, 아니면 부둥켜안고 기뻐할까. 부끄러워 몸을 돌려버린 내 모습을 참 우습기도 했겠지만, 동해야 있지, 난 네가 참 좋다.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설레게 해준 동해 네가 너무 좋아. 꼭 내 마음을, 기분을 다 알고 있는 양 내 기분에 맞춰서 언제든 나를 기 쁘게 해줘서 깜짝 놀라게 만드는 너는, …너는, 꼭 서프라이즈 선물 같다. 상자를 열면 놀 라게끔 만들어 놓은, 그런 서프라이즈 선물.


*  *  *

동해야, 하고 규현은 그를 불렀다. 어쨌건 곁에 남아서 마누라 노릇 잘 하겠다는, 대체 언 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엇비슷한 말을 하고선 자신의 집에 쳐들어와 동거 를 한지도 어언 두 달 째, 척하면 척으로 동해는 일요일 오후 한 시 반이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일요일은 둘 다 오프인 날이고, 동해는 어린 마음으로 함께 어 딜 놀러가거나(일명 데이트라는) 함께 꽁냥꽁냥 아무튼 그런 짓을 하고 싶었는데 동해와는 다르게 규현은 오전 내내 자기 바빠서 오후가 되는 시간에는 배가 고프다며 동해에게 밥 좀 해달라며 칭얼거렸다. 분명 열 살이나 저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애처럼 징징대는 규현이 좀 그럴 수도 있지만 동해는 그런 그가 귀엽게만 느껴져서 그냥 밥 해주고 맞은 편에서 얼 굴만 보고 있다. 그게 두 달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일 하는 규현의 사정을 모르 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좀 같이 놀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역 시 안되겠지. 동해는 제 앞에서 약간 풀린 눈으로 노란 계란말이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햄 스터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씹는 규현을 보았다. 이렇게 보면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말이지. 꽤 길어버린 머리를 꽁지로 묶어놓으니까 더 귀엽다. “왜?” “아니에요.” 잠이 덜 깨도 우물우물 꼭꼭 씹어 먹는 게 귀여워서 그랬어요. 그렇게 말하면 화내려나. 어 쩜 저렇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귀여울 수가 있을까. 동해는 규현이 서른이 다 되었을 때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해는 규현의 밥그릇에 햄을 올려놓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보았다. 규현은 그런 동해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동해를 흘끔 쳐다 보다가 고개를 내려 밥 을 먹는데 집중한다. 그러다 할 말이 생각 난건지 다시 고개를 든다. “동해야.” “예?” “뭐 할 말 같은 거 없어?” 할 말? 무슨 말? 동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규현에게 묻자 규현은 큼큼거리며 시선을 피한 다. 사실 저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만 부끄러우니까 먼저 운을 떼라는 것 같은데, 동해는 규현이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얼씨구나 좋다 하고 받아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 체 뭘 말하라고? 여기서 눈치 없게 사실 형이 말하고 싶은데 나보고 말하는 거죠? 라고 물 어보면 한 대 맞기라도 할 것 같아서 동해는 살짝 고민했다. 규현은 눈을 또르륵 굴리다 동 해를 흘끔 본다. “어, 뭐, 예를 들어서 놀러 나가자든가….” 아! 동해는 그제야 규현이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으이그, 그걸 말 못해서 나보고 힌트까지 줘 가면서 나한테 말 하라고 한 거야? 귀여워. 완전 조꼬딩이네, 조꼬딩. 아직 부


끄러운 게 많은 사춘기 소녀 같기도 하고. 그래, 이 부끄럼 많은 아저씨를 어떻게 하면 좋 을까. 눈 딱 한 번 감고 져 줘 볼까? 동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규현의 옆에 섰다. 새어나오 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시선을 피하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려 뻗은 규현의 손을 잡았다. 다른 한 손으로 젓가락을 빼내고 천천히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 자연스레 신사처럼 허리가 숙여진다. 귀여워. 팔불출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너무 귀여워. 이렇게 귀여우면 당 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야… “규현 씨, 오늘 저랑 데이트 안 하실래요?” 그리고 규현은 동해가 잡은 손에 힘을 쥐고 고개를 숙여 끄덕인다. 부끄러워한다. 귀여워. * 딱히 동해랑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뭐, 그냥 …동해가 데이트 하고 싶 어 하는 것 같길래. 매일 바빠서 같이 있을 시간이 없으니까 동해한테 미안하기도 했었고. 동해는 아직 어리니까 보호자랑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 ……휴 . 동해 핑계는 왜 대 냐. 솔직히 말하면 동해랑 데이트 같은 것도 해보고 싶었고, 먼저 내 쪽에서 더 좋아하니까 자주 대면하지 않으면 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단 말이지. 물론 같이 있는 시간 동안 계속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 뭐냐, 음…워, 원래, 데이트도 하고 싶었다, 그냥. 여느 연인들이 하 는 것처럼, 그 옛날 나와 시원이 함께 했던 것을 동해랑 하고 싶다는 거. 단지 그거다. 상 대도 나랑 데이트 하고 싶었으니까 쌤쌤, 피차일반, 오십보백보, 도토리 키재기. 피곤해서 내가 그냥 휴일에 잔 것도 있으니까 미루고 미뤄뒀던 데이트, …하려고, 동해랑. 손도 잡고, 얼굴 맞대고 웃기도 하고. 물론 보통 연인들과는 약간 다른 데이트겠지만 그래도 좋다. 다 챙기고 나와서 동해의 얼굴을 보니 그도 생글생글. 너나 나나 참 똑같다. 구제불능이야. 차를 타지 말고 걸어서 데이트를 하자는 동해의 말에 차 키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오피스텔을 벗어나 시내로 나왔다. 최대한 애인처럼 안 보이게…달라붙는 동해 에게 덥다며 떨어지라고 했더니 풀이 죽었다가 금방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 다. “어디 갈까요? 영화라도 볼래요?” “그냥 돌아다니면서 쇼핑이라도 하자.” “쳇. 공포영화 보면서 형이 무섭다며 안길 찬스였는데. 난 괜찮다면서 이마에 뽀뽀 하고…” “웃기고 있네, 변태 꼬맹이!! 그리고 참고로 난 공포영화 봐도 안 무서워하거든?!” 정말 웃기고 있다, 저 변태꼬맹이. 정말 그럴 생각이었는지 쏘우 같이 살이 댕강댕강 잘리 거나 칼에 푹푹 찔리고 피 튀기는 거면 몰라도 귀신 나오는 영화는 잘만 본다 . 물론 귀신 존재의 유무가 어떨지는 몰라도 귀신보다는 사람 쪽이 더 무섭다. 어차피 귀신도 사람이 원 한을 품고 죽어 영체화 되어서 인간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원한을 품는 이유도 분명 사람으로부터 파생되었을 거고. 좀 더 구체화시켜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사람으로부터 일 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귀신은 별 감흥 없고, 사이코패스가 나온다면 모를까…. 무섭지 않다 고 소리를 지르니 시선 몇 개가 등에 날아와서 꽂힌다. 헉…주목 받았어. 주목 받았다고!!


하지만 동해는 그런 시선 속에서도 짓궂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공포영화 안 무섭댔죠?” “어! …너 설마…….” “보죠. 공포영화.” 공포영화를 보자기에 그냥 별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온 곳은 DVD방. 동해는 주인장에게 ‘호스텔’이라는 영화의 자막이 있냐며, 있다고 하니 가방에서 DVD를 꺼내 주고 돈을 지불하 고선 나를 데리고 어떤 방으로 들어간다. 가방에서 왜 그걸 꺼내? 설마 계획이었나. 그나저 나 호스텔? 그게 무슨 영화지. 많이 무서운 건가….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니 동해는 내 얼굴을 보며 쿡쿡 웃는다. “뭐가 그렇게 웃겨?” “긴장 많이 하셨네. 하긴, 이게 좀 많이 무섭긴 해요.” “…내용이 뭔데?” “난 쓸데없는 스포일러는 안 해요~참고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에요.” 하고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해. 처, 청소년관람불가?! 그럼 자, 잔인한 건가…. 살 뎅강 썰리고 그런…? 초조함에 제발 그런 영화가 아니길 바라고 계속해서 시청했다. 「너희들은 동쪽으로 가야 해. 거기에 최고들이 모여 있거든.」 배낭여행을 한다는 세 명의 남자들은 한 남자에게 슬로바키아에 가면 최고의 멋진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짐 바리바리 싸들고 슬로바키아로 배낭여행을 떠 난다. 그리고 가던 도중 기차 안에서 참견이 심하고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한 비만 미국 인이 나오는데, 음식을 아무렇게나 손을 사용하여 먹으니 일행 중 한 명은 왜 손으로 먹느 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전 사람들이 음식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 곧 이어 남자들은 도착을 하고 샤워를 하고, 한 남자가 아이들을 만나 담배를 뺏기고, 밤새 미녀들과 논다. 다음날, 울리리고 하는, 한 친구가 사라지고 함께 놀던 여자 한 명도 사라진다. 그러다 울리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내용은 정말 쌈박하게, ‘I go home'. 그런데…그런데 그 울리는 집에 간 게 아니라……. “!!” 기차 안에서 만났던 비만 미국인에게 처참히 살해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비만 미국인에게 잡혀 이게 무슨 짓이냐고, 원하는 건 뭐든 다 줄 테니 살려달라고 하지만 비만 미국인은 돈이 많았던 건지 소용이 없었다. 자신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그런데 배우지도 않고 무차별 적으로 의료행위를 한다. 그리고 남은 한 남자와 그 미국인과 싸울 때 … 어, 그러니까, 전기톱으로 손을 자르…. 윽, 단말마와도 같은 소리를 내고 고개를 숙였다. 듣지


않으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내 행동을 본 건지 동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흔든다. 동해의 손길에 자연스럽게 귀를 막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형 울어요?” “어, 어어…?” 분명 눈 위로 흐르는 소량의 뜨거운 액체. 이동해 진짜…하드고어나 보고 나쁜 놈이다, 정 말.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아주 주룩주룩 흐르는데 손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러 닦아 냈다. 아, 흉하겠다. 서른 남자가 공포영화 보고 울기나 하고. 나잇값 못한다고 동해가 손가 락질 하지는 않을까, 혹시 지나가던 사람들 유리창 너머로 날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 을까, 그런 고민을 하기도 전에 동해가 먼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긴다. 향긋한 동해의 향기에 복잡했던 내 머릿속이 서류정리를 하듯 차곡차곡 반듯하게 쌓여간다…신기하다…. “공포영화 못 보면 못 본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다른 건 다 봐. 근데 하드고어만 못 봐.” “귀신은 괜찮고?” “응.” 그럼 나 진짜 나쁜 놈이네, 형 못 보는 하드고어나 고르고. 그렇게 말하는 동해의 목소리에 는 약간의 웃음기와 다정함이 묻어나왔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동해는 내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으켜 나가자고 한다. 돈 아깝다고 그냥 보자고 그러니까 그깟 돈 얼마씩이나 하냐며 방에서 나와 카운터에 그냥 가겠다고 하고 DVD방을 나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냥 손잡고 나왔다…주인이 이상한 생각 하지 않을까…? …아니, 됐다. 무슨 상관이야, 남들이 너랑 나 이상하게 보는 거. 이번엔 동해의 옆에 딱 붙어서 걸었다. 여름의 더위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안 더워요?” “안 더워.” “…땀 흘리는데.” 땀을 흘리는데 안 덥다고 하는 건 이 무슨 언밸런스. 결국 동해는 나를 끌고 근처 아이스크 림 가게로 들어선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쇼핑도 하며 돌아다니고. 결국 하늘이 어둑어둑 해 져서야 데이트를 끝마치고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너와 나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골 목길, 동해는 갑자기 내 손을 잡는다. ?? 뭐…. “우리 노래방 가요.” “노래방?” “처음 하는 데이트고, 또 언제 형 바빠질지 모르니까. 한 번에 진도 다 빼야지.” 진도? 진도는 우리 끝까지 가지 않았니? 대체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동해의 얼굴과 내 손


을 잡은 번갈아 보니 그냥, 가고 싶어서, 라고 한다. 싫으냐는 물음에 별 상관은 없어서 고 개를 저으니 또 나를 끌고 간다. 왠지 오늘 간 곳마다 동해가 끌고 간 듯 싶다. 골목을 벗 어나 오늘 우리가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길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노래방이 있 던가, 아니면 못 본 걸까. 자신만만하게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는 곳이 있는 것 같아서 잠자코 따라가기만 했는데 정말 노래방이 나왔다. 근처에 몇 년 동안 살던 나보다 더 잘 아네. 계단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카운터에 돈을 지불하고서 주인이 가리킨 곳으로 들어갔다. 넓지는 않지만 둘이서 놀기에는 딱 좋은 방. 동해는 신이 난 얼굴로 바로 선곡을 한다. 책을 보지도 않고. 곧이어 전주가 나온다. MC몽의 Bubble love다. “좋아하는 건 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시간 아까우니까 아끼려고 몇 개 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편이에요. 노래 부르 는 동안 다른 거 선곡하고. 이왕이면 신나는 거로. 알뜰하죠?” 칭찬 해 달라는 듯이 고개를 약간 들이밀며 키들키들 웃는 동해의 머리의 한 번 매만져줬 다. 동해는 마디점프 버튼을 여러 번 누르고 바로 랩 부분으로 넘어갔다. 내 옆에 앉아 손 을 깍지 끼고 흔들며 랩을 하는데 와, 잘 한다. 내가 하면 정말 오글거리는데. 얼굴에 연신 방긋방긋 웃음을 띠우고 가사를 보며 랩을 한다. 그러다 내 쪽으로 몸을 튼다. “네 맘을 열어줘, 조금만 더!” 내 가슴 쪽을 깍지 낀 손으로 툭툭 친다. 그 행동에 푸하핫, 웃음이 나왔다. 뭐라는 거야. 이미 마음 열어주고 있었잖아. 네 목소리만 들어도 난 너무 좋아, 끊지 말고 통화 하자 5분 만 더, 라는 가사에서는 엄지와 약지 손가락을 피고 귓가에서 살짝 흔드는데 그건 또 그거 대로 귀여운 거 있지. 에헤, 웃고 깍지 낀 손에 힘을 줬다. 그런데 갑자기 손을 슥 빼더니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걸고 엄지를 맞댄다. “너와 나의 약속 서로를 위로해. 마치 엄마 약손 바로 치료 돼.” 하고는 내 손을 쫙 피고서 자신의 배에 대고 슬슬 문지른다. 또 다시 서인영의 파트가 나왔다. 이번엔 마디점프를 누르지 않고 따라 부르며 노래 책자를 내게 건넨다. 나는 책을 받아들고 흥에 겨워 리드미컬하게 장을 넘겼다. 원래 노는 걸 좋아 하지는 않지만 사람은 원래 기분 따라 행동하는 거니까. 열심히 눈을 돌리며 뭘 부를까 고 민하고 있는데 마침 아는 노래가 나와서 리모컨으로 곡 번호를 꾹꾹 누르고 예약을 눌렀다.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동해는 또 리모컨으로 번호를 꾹꾹 누른다. I The Tri Top's? 처음 보 는 가수인데…의문을 띄우는데 한 곡 더 입력. 이번에도 아이 더 트리 탑스 노래다. 화면을 주시하고 있다가 볼을 감싸오는 동해의 손길에 동해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가볍게 쪽, 하고 입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이 좋아 약간 콧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시 랩이 나오고 동 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아침밥을 먹다가도, 피 곤해서 졸다가도 네 생각만 나, 그리고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공부를 하다가도, 필기를 하다가도, 과제를 하다가도 형 생각만 나.”


방송을 하다가도, 가사를 쓰다가도, 노래를 부를 때도 네 생각만 나. 이 가사를 센스있게 개사를 해서는 내 무릎에 이마를 대었다 뗀다. 어떡하지,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내 심장이 드럼이나 된 듯이 너는 대체 왜 드럼채로 두구당당 두구당당 때리는 거야 . 입 밖으로 나오 는 웃음은 내 의지를 무시하고 자꾸만 행복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붕붕 뜨게 i be keepin' it up 계속 배워가고 있어 사랑 지키는 법 내 사랑은 투명한 bubble bubble love 내 사랑은 투명한 bubble bubble love love 그 다음 파트의 가사가 문득 생각이 난다. 충동감에 동해가 ���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아 그 다음 파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아 너 때문에 난 너무나 행복해 저 하늘에 빛을 따라가다 만난 오직 나를 위한 한 사람 너무너무 좋아해. 정말 좋아해. 계속 웃게 되는 것도 맞고, 너 때문에 너무 행복한 것도 맞 아. 이 세상에 또 없을 사람 같아. 계속 보고 있어도 언제나 기분 좋아져.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동해의 손을 잡고 일으켜 배를 꼭 끌어안 았다. 두근두근…. 화려한 음악과 함께 점수가 나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놓지 않고 안고 만 있었다. 정수리에 따듯한 것이 닿았다 떼어진다. 키득키득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곧 내 귀에 익숙한 전주가 들리고 흐읍, 숨을 들이쉬고 노래를 시작했다. 동해는 약간 빳빳 하게 굳은 것 같지만 개의치 않고 노래를 불렀다. 곡명은 이은미의 헤어지는 중입니다. 웃 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첫 번째 후렴이 끝나고 동해를 슬쩍 돌아보니 동해는 고개를 돌리고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삐진 거야? 그런 거야? 아, 정말, 귀여워 죽겠어. 리모컨으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둘 다 아무 말 않고 있으니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단 10평도 채 되지 않는 좁다고 하면 좁을 수 도 있는 공간. 나는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동해의 앞에 양반다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 히 봐주지 않는 동해는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듯 했다. 하긴, 내가 너무 짓궂었던 것 같기 도 하고. 자기는 그렇게 귀엽고 깜찍한 퍼포먼스를 해대며 노래를 불렀는데 나는 헤어지네 마네를 운운하니 말이야. 미안함이 급습해 온다. “미안해. 장난이었어.” “…….” “나 안 일으켜 줄 거야? 바닥 되게 차.” 그제야 동해는 내 손을 잡고 일으켜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오늘만 해도 안는 게 몇 번이 야. 내가 안고, 네가 안고. 동해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두 손으로 양 볼을 잡고 빤히 쳐다봤 더니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린다. 아직도 삐져있는 건가? 아니, 그런데 그러기에는 동해가 너무 부끄러워한다. 키득키득 웃고는 동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시간 다 가겠다, 이러면. 노래 불러줘.” “……뽀뽀.” 진짜 나잇값 못하게 만드네, 말하고 동해의 볼을 꾸욱 눌러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에 립키스를 하고 좀 더 멀찍이 떨어졌다. 으흐, 더워. 에어컨이 고장 난 건가. 손부채질을 하 니 동해는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감싸서 우하하하, 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그게 그렇게 좋냐, 바보야. 뽀뽀도 한두 번 하냐고. 마이크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동해에게 넘겨주곤 리 모컨으로 시작을 눌렀다. 이번에는 처음 들어보는 전주. 노래 제목은 ‘너 맘에 들어’다. 오 늘 선곡 다 왜 이래? 입술을 비죽이니 동해는 일어나서 나를 소파에 앉히고 저는 일어나 큼큼, 목을 푼다. “피아노 배운다던, 그 손이 마음에 들어. 사과를 닮았다던 웃음이 마음에 들어.” 아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가사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가사도 그렇고 , 음도 그 렇고 꼭 프러포즈 하는 듯한 노래라서 기분이, 그 뭐냐, 그러니까 거품 몽글몽글 피어오르 는 것 같다. 가만히 눈을 감고 동해의 목소리를 들었다. 노래 너무 달달하다. 별다른 퍼포 먼스는 없었다. 그저 노래만 불렀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우고 살짝 눈을 떠 동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 저도 웃음이 가득한 얼굴인데,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좋은가 보다. 나도 그런데. 사랑 그 흔한 말이라 말 하지만, 아냐 우린 다른 거야. …조금 더 특별하고 싶은 사랑에 의미를 부여한다. 너와 나 는 특별하다고, 활짝 웃었다. 동해는 뒤를 돌아 점점 내게 다가온다. 그리 높지는 않은 테이블에 살짝 올라오더니 눈높이 를 맞추려 무릎을 굽히고 않았다. 너 맘에 든다고 말할걸 그랬지, 차라리 뛰어가 안아야 했 었는데. 네 맘 그 자리를 내가 꼭 가져가겠어. 지금이 시작이야. 이렇게 내가 너를 간절히 원해. 맘에 두고선 못 하는 말. 모른 척 해도 내가 아닌 척 해도 마음은 너 뿐이야-. 뒤에 가사가 더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위로 치켜들며 ‘뿐이야’라는 가사를 길게 끌어낸 다. 그러다 고개를 내리고 내가 기대고 있는 벽에 손을 댄다. “조규현!!” 대뜸 내 이름을 부르는데, 반말이네 뭐네 할 여유도 없이 이마를 살짝 대고 헉헉 숨을 몰아 쉬며 나를 내려 본다. 뭐라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에 동해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 다음 에 나올 말은 어떨까, 어떤 말일까. 살짝 흔들리는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침을 꿀꺽, 삼켰 다. 헉, 헉.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주는데 꼬물꼬물 손 을 올려 내 손을 잡는다. “앞으로는 어른으로 대할게. 싸가지 없게 굴지 않을게. 반말도 하지 않을게. 그 대신 너도 다시는 아까 같은 장난 하지 마. 난 항상 불안했어.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래서 날 못 믿고 딴 놈에게 가 버리는 건 아닐지. 좋아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내가 좋아해. 좋아해. 전혀 서른 같지 않은 네 모습도 좋고, 네 성격, 과거, 행동…모두 다 어떻든 좋아.”


“…….” “사랑해.” “…….” “사랑해.” 이마, 코, 인중. 순서대로 천천히 입술을 댄다. 그 만큼 느리게 눈을 감았다. “어른으로 대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그런다면 다 괜찮아, 너니까. 그런 말은 전혀 입 밖으로 나와 전달되지 못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마치 손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흩어졌기 때문. 팔을 구부려 점점 가까워지는 몸의 체온을 느꼈다. 따듯하다. 말랑말랑한 입술의 감촉이 좋다. 노래 반주가 끝나도록, 점수 나오는 소리가 들려도, 다음 노래가 시작이 되어도 서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미소 짓는 동해의 입술에 행복감이 묻어나온다.

열아홉 소년과의 조우, Nineteen fin.


그를 다시 만난 날, 희철은 외국에 나가 살던 사촌동생 수연을 만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7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따뜻하지만 맑고 상쾌한 아침 바람이 불어왔다 . 푸른 나무들에 둘러 싸여 있어서인지 숲 속을 거니는 듯 아침 공기는 산뜻했다. 만약 테라스로 나가 조금 더 낭 만적으로 아침을 맞이했다면 새벽의 보랏빛 장막이 거둬지며 주황빛 커튼이 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매일 아침 그랬듯, 잠깐의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 다. “김희철! 너 어디 있어? 빨리 내려와!” 희철은 동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침대에 앉아 꼼짝없이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있 었다. 누가 자신을 부르거나 말거나. “야! 김희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동해가 한 번 짜증을 내면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희철은 평 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졸린 몸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가 식탁에 앉았다 . 동해가 ‘나는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도 멀쩡한데 너는 왜 그래?’ 라는 눈으로 쳐다보았는데 희철은 졸려 죽겠 다며 유난히 아침잠을 못이기는 체질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 아침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는 것을 즐기지도 않고 , 밤에 일찍 자도 늦 게 일어나고 늦게 자도 늦게 일어나는 그였다. 그래도 꼬박꼬박 6시가 조금 넘으면 일어나 는 습관 덕에 직장에 지각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희철이 동해는 신기하기만 했다.


희철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동해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다 먹고 옷장을 뒤지 기 시작했다. 옷차림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라 가짓수가 많지 않은 옷들을 이것저 것 조합해보며, 가장 댄디해 보이는 스타일을 찾으려 노력했다. 물론 옷 사들이는 취미도 없었고 아끼는 옷만 주구장창 입는 성격 덕에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딱히 입을 만한 옷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수연에게 잠옷차림을 보일 수는 없어서 동해를 불러 어떤 옷이 가장 괜찮냐고 물어보았는데 ‘니 옷은 니가 알아서 해’ 라는 시크한 대답만 돌아올 뿐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결국 있는 대로 짜증이 난 희철은 옷이고 뭐고 그냥 잡히는 대로 입고 있겠다고 소리를 빽 지른 뒤, 돌아오는 동해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서는 다 뒤집어 놓은 드레스 룸을 뒤로하고 조용히 음악 감상을 하며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밖에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수연이 집으로 찾아온다고 했으니 굳이 옷을 챙겨 입을 필요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철은 수연이 혼자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덕분에 얼마 있다 경악을 해야 했지만.

딩동어느 집이나 다를 바 없는 흔하디흔한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다른 점은 다른 집들 보다는 조금 더 종소리에 가깝다는 것 정도였다. 원래는 한 가지에 집중을 하면 누가 옆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희철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수연이 온다는 사실에 집중을 해서, 취미를 즐기기 보다는 짜증나서 책을 읽는 척 폼만 잡 았지 신경은 초인종 소리에 반응하게 세팅 되어 있었다. 동해는 그런 희철을 어이없다는 눈 으로 바라보며 ‘정수연이 그렇게 좋나.’ 라고 중얼거렸다.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방문을 열고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연 희철은 수연을 보며 밝 은 미소를 지었다가 수연의 뒤에 따라 들어오는 한 남자를 보면서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 다. “오빠, 오랜만이야.” 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운 수연의 모습에 무책임하게 자신이 놓고 온 어렸던 소녀에 대한 죄 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을 받아 진정이 됐을 법도 하건만 희철은 수연을 따라 들어온 곱상한 외모의 남자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도 희철은 수연의 말에 대답은 해야겠 다는 생각에 무성의한 대답과 함께 환한 얼굴을 살짝 보며 잘 지냈을 것이 뻔한 안부를 물 었다. “어..어. 그래. 수연아. 미국에서는 잘 지냈어?”

‘넌 뭐야. 니가 수연이가 그렇게 자랑하던 유능한 변호사 남자친구라고 하지는 않겠지?’


“뭐...나야 오빠 한국으로 가고 나서 잠깐 방황을 했지만 기범씨 덕분에 나름 잘 지냈어.”

‘큭. 맞는데 어떻게 하나? 그나저나, 네 입에서 듣는 ‘유능한’ 이란 말은 느낌이 색다르다?’ “아...그..그렇구나.” 희철은 어색한 대답과 함께 곧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에 진정하자며 스스로를 달랬 다. 쪽팔리게 저런 놈 앞에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고 싶지는 않았다.

‘뭐... 뭐야. 너 지금 나 비웃는 거야? 이제야 한국 와서 뭘 어쩌려고. 수연이가 너랑 교제를 하는 거야 수연이 자유니까 간섭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너랑 수연이랑 교제하는 것은 둘째 치고 6년 전에 너 때문에 미국을 떠났던 나야. 너.때.문.에. 그런데 무슨 면목으로 날 찾아 와? 그것도 내 사촌동생이랑? 너 제정신이야?’ “오빠 내말 듣고 있기는 한 거야?”

‘어떻게 바뀐 게 하나도 없냐, 나 없는 6년 동안 뭐가 좀 바뀌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다다다 쉼 없이 말하는 거, 흥분하면 얼굴 붉어지는 거, 비웃기만 하면 자존심 상한다고 째 려보던 거. 정말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잖아?’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안다는 듯 희철은 그가 처음 집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 터 큰 눈으로 기범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와 자신이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이 눈빛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하던 둘이었다. 고양이 같이 날카롭고 큰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다면 살짝 긴장할 만도 하건만 기범은 이미 적응 되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희철을 내려다 볼 뿐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 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나는 희철은 화를 삭이기 위해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저 이상한 인간을 볼 때마다 느끼는, 속에서 열이 뻗치는 감정은 통제 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쁜 숨을 내쉬는 희철을 수연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희철 은 지금 수연의 그런 시선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수연의 시선은 무시 해버리고 눈이 빠져라 기범을 노려볼 뿐이었다. “몰라. 쟤 오늘 이상해. 넌 나랑 얘기하자. 쟤 제정신 차리면 알아서 너 찾으러 올 거야. 얼 마나 너 보고 싶다고 노래를 했었는데. 그런데 죽어도 미국에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다더라. 쳇. 돈도 많은 것이. 나나 한 번 보내 줄 것이지.” 두 사람의 눈빛 교환을 눈치 챈 동해가 적당히 둘러대며 수연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 갔다.

그제야 둘이 남게 된 거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분을 삭이는 희철, 다리를 꼬고 앉아 희철이 하는 행동들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기범. 어느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내뱉지는 않았다. 물론 각자 이유야 달랐 지만.


희철은 기범을 처음 만난 중학교 3학년 때도 그랬듯 평소엔 표정 변화도 없고 논리적이고 시크하고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포스를 풍겨 얼음왕자라 불렸던 자신이 기범 앞에서 입만 열면 그 ‘얼음왕자’ 포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의문이었다. 그때도 자존심 강한 희철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참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 6년 만에 다시 만난 기 범 앞에서도 얼굴을 붉히고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자신을 자책 중이었다. 도대체 저 나쁜 인간이 뭐가 좋다고. 기범은 웬만한 사람이면 알아차리지 못할 희철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감상하면서 한결같이 변함없는 외모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원래 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던 그였지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외모가 변함없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기범은 혼자 생각을 하며 피식거리고 웃고 있었다. 피식거리던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얼마 후, 희철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 었기 때문이었다. “너. 뭘 그렇게 봐. 내가 예쁘냐? 이 나쁜 자식아. 서로 다신 안보기로 해놓고 버젓이 내 앞에 돌아와 있는 이 나쁜 놈아!” “자기 예쁜 줄은 아나보네. 피식-.” 희철은 기범이 자신에게 눈을 한 시도 떼지 않고 쳐다보는 것이 싫었다. 아니. 쳐다보는 것 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또 예쁘게 생겼네, 너 여자냐?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 도 몰랐다. 그래서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기범에게 말을 꺼냈건만 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또 다시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놀리지 마. 재미없거든?” “난 재미있는���?” 참 이상했다. 미국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기범은 장난도 치지 않고 똑똑해서 선생 님들의 총애를 받던 모범생이었다. 그런 기범이 유독 희철만은 놀리고 장난을 쳤고 희철은 그거에 항상 발끈하면서도 자주 그와 붙어 다녔었다. 선생님들이 같이 일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고, 성격이 비슷해 투닥투닥 싸우면서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줬기 때문일지도 몰랐 다. 주변에서는 ‘너희 둘이 잘 어울린다.’ 라며 ‘사귀냐?’ 따위의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것도 개방적인 미국이었기에 가능한 발언들이었겠지만. 희철이 ‘여자들은 저런 애 뭐가 좋다고 쫓아 다니냐.’ 는 말만해도 질투한다 뭐한다 말도 참 많았었지만 반대로 남자들이 희철에게 사귀자고 말할 때 무심하게 돌아서 버리는 기범의 모 습에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때부터 불공평한 연애였다. 김기범과 김희철은. 한 쪽이 손해를 보는 게 너무 많았다. 희철은 그에게 먼저 고백한 것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시키라면 얼마든지 시킬 수 있었다. 주변에서 하루 종일 저 애 어떠니? 완전 멋있다! 너 쟤 랑 사귀냐? 같은 말만 듣고 살면 없던 정분도 생길 판이었다. 희철은 대책 없이 ‘나 너 좋 아해.’ 라고 고백한 후에 사람은 주변 환경에 지배 받는 존재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필요 없어. 이제 너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너 진짜 꼴 보기 싫어.” “픽- 내가 왜 너의 사촌 동생임을 뻔히 아는 저 여자애랑 사귀었을까? 내가 왜 저 여자애 혼자 가도 될 한국에 따라 왔을까? 내가 왜 저 여자애를 따라 이 집까지 왔을까? 넌 아직 날 알려면 멀었어. 김희철.” 겨우 진정을 찾아가고 있던 희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말은 자신을 찾아오기 위해 수연을 만나 좋아하는 척, 위해주는 척, 좋은 남자인 척 했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수연을 이용했다는 말. 희철은 그 점이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만나려면 한국에서 변 호사 생활하면서 법정에 서서 검사인 자신과 마주쳤으면 됐었다. 저런 비겁한 방법,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방법, 더군다나 예뻐만 해줘도 모자랄 자신의 사촌동생 수연의 감 정을 이용했다는 것에서 희철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 할 수 없었다. “김기범... 너 그런 사람이었어? 남의 감정이나 이용해 먹고 그런 파렴치한 인간이었냐고. 너에게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지만, 이번 일은 너의 변호사로서의 자질을 시험해 봐야 할 일 같은데?” “나를 그런 사람으로 몰아가지 마. 하지만 반 정도는 맞는 말이니 굳이 반박을 하지는 않겠 어. 큭.” 희철이 손을 들었을 때 기범은 희철이 자신을 한 대 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빚나갔고 기범은 처음으로 희철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에 실패를 했다. 맞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예상이 빚나가자 기범은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직까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기범을 쳐 버릴까 생각했지만 희철은 기범에 한해서는 한없 이 약한 사람이었다. 희철은 자신의 미련함에 피식-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는 기범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는 김희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더 이상 너에게 휘둘리던 과거의 김희철이 아니야. 너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너 같은 놈하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곱게 꺼져.” 비웃는 듯한 그 말과 입가에 걸린 미소는 과거 예쁘게 웃던 희철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분 위기를 풍겼다. 과거에는 언제나 웃으며 애교를 부리고 다녀 조금 귀여운 느낌이었다면 지 금은 뭔가 섹시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알았어. 알았어. 나는 곱게 꺼져 줄 테니까 시카랑 잘 놀아주고 있으라고. 밤에 데리러 올 게.” “됐고. 알았으니까 나가. 빨리.” “아. 그리고 나 미국에서 아예 한국으로 돌아온 거니까 우리 자주 보게 될 거야. 물론 너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나는 아주 기분이 좋지.”


그러고는 기범은 희철에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문을 열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 말을 들 은 희철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머리칼을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기 바빴다 . 그 소리를 들은 기범은 웃으며 자신의 차에 올라타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너 엄청 섹시하다. 피식.’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어두운 밤이 되었다. 희철은 아까부터 방에 틀어 박혀 나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수연은 오늘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동해를 조르고 있었다. 동해는 이 집 주인은 내가 아니라며 방에 들어가서 희철 을 만나 얘기를 해보라고 받아 쳤고 말이다. 결국 너무 소란스러운 1층 분위기에 짜증이 솟 구친 희철이 ‘니들 다 내 집에서 나가!’ 라며 내쫓으려 하고 있을 때 집 밖으로 쫓겨날 위기 를 맞았던 두 사람에게 구원자가 나타났다. “어이. 김희철. 뭘 그렇게 난리냐?” “Honey! 내가 오랜만에 보는 희철오빠가 반가워서 집에서 하룻밤만 자고 가겠다는데 희철 오빠가 화내면서 동해오빠랑 나 내쫓으려고 그랬어...” “야! 정수연. 말은 바로 하랬다고 니가 언제 나한테 와서 집에서 자고 간다는 얘기 했어? 이동해. 너 객관적으로 판단해봐. 얘가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 했니?” 있는 말, 없는 말 다지어내며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수연의 행동에 화가 난 희철 은 머리가 띵 해지는 기분을 느껴야했다. “야. 넌 좀 진정해. 오랜만에 본 사.람.들. 한테 그렇게 막 대하는 거 아니다?” “넌 닥쳐 줄래? 사건의 전말도 모르면서 그딴 소리로 사람 성질 긁지 마. 짜증나니까.” “릴렉스. 릴렉스. 이런 일이 그렇게 화내고 그럴 것은 아니잖아? 어차피 나도 너한테 물어 볼 생각이었는데. 집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호텔비가 아깝잖아? 명색에 변호사인데 모텔에 들어가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안 그래?” 분명히 반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범의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은 여전 히 고쳐지지 않았는지 희철은 기범을 내쫓을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 거기에 동해까지 눈치 없게 집에 하루만 있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통에 희철은 머리를 싸매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물론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라고 소리 지른 뒤 말이다.

기범은 올라가 버리는 희철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분명 전과 다름없이 머리를 싸매고 침대에 누워 있을 터였다. 살짝 저혈압에 몸도 안 좋아 혈압이 조금만 상승해도 버거워 하는 희철을 잘 아는 기범은 자신을 보면 화를 낼 것을 뻔


히 알았지만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가오지 말라고 자신을 밀어낼 줄 알았던 희철이었는데 의외로 얌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 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으로 기범을 쳐다보면서. “왜. 할 말 있냐?” 기범은 희철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대강 눈치를 차렸지만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 모르 는 척 물어봤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희철의 하얀 피부를 만지다가 기범은 이제 진실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수연과 본래 연인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연과 기범은 서로 상부상조 하는 관계였다. 수연은 동해에게 관심이 있었고 기범은 자신 이 모질게 밀어내 버린 옛 연인 희철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냥 오랜만 에 얼굴만 보려던 기범이었다. 하지만 희철의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고 그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음에도 굳이 자신의 감정을 막지는 않았다. 희철도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기 보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눈치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에 대한 더더욱 큰 확신도 들었고 해서 말이다. “너. 수연이랑 무슨 관계야? 니들 사귀는 사이 아니지.” “오호.. 눈치 빠른 김희철이네-. 그래. 어디까지나 서로를 위한 연기였을 뿐. 나는 너를 보 기 위해, 시카는 관심 있는 사람을 보기 위해 말이지.” “역시나... 아까 알아봤어. 시카가 왜 너 대신 동해를 쳐다보나 했거든.” “그나저나... 나는 어디서 자?” “네 능력껏.” 시크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기범은 ‘그럼 네 옆에서 자면 되겠네.’ 라고 말하며 씻고 올 테 니까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희철은 지금까지 모른 체 한 감정이 무색하게 얼굴을 붉히며 괜히 고운 손끝을 만져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달칵하고 열리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터는 기범이 방으로 들어왔 다. 희철에게 매일 여자 같다고 놀리는 기범이었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그 역시도 곱상하게 생긴 외모로 인해 옆에 서있는 여자의 외모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침대에 털썩 하고 앉아 입술을 띄었다 붙였다 하는 그 모습에 답답해진 희철은 할 말 있으 면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궁금한 것은 절대로 못 참는 그 성격 때문이었다. 듣고 나서 놀 라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준 기범은 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준비해 둔 말들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 해보았다. 희철은 기범이 어떤 말을 할지 모두 꾀고 있었지만 자존심 강하고 내면을 숨기기 급급했던 김기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을 들어보고 싶었다. 매일 자신만 좋아한다 말하던 게 살 짝 억울해서 라고 해두고.


“아니. 됐다. 뭐.. 이게 가망 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뭐야.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아. 김빠지게.” 쳇. 김기범이 그럼 그렇지. 저 자식 분명히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누 가 말하기를,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마냥 기쁘고 얼 굴에는 웃음꽃이 핀다던데 어떻게 김기범은 그런 게 하나도 없냐는 생각으로 한 번 져주는 셈 치고 내가 먼저 말하자고 마음을 굳힌 희철은 자신의 옆에 누우려는 기범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원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지만 손발이 오그라드는 ‘좋아해.’ 라는 말은 할 수가 없 었다. 과거 어떻게 그 말을 했던지 자기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기범은 희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입술만 닿아있기는 했지만 당황스 러운 것은 매사 마찬가지였다. 닿아있던 입술이 금방 떨어지고 잠시 희철을 가만히 응시하던 기범의 입에서 ‘좋아한다.’ 라 는 말이 나왔다. 나름 성취감이 있어 뿌듯해 하는 희철은 어서 불이나 끄라며 침대에 누워 버렸다. ‘너 원래 바닥에서 자라고 하려고 했어.’ 라는 말도 빼먹지 않고 해주었다.

§

“우리 데이트하자.”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기범에게서 나온 말에 희철은 넌 뭐냐는 눈빛으로 응수해 주었다. 어차피 과거에도 자주 길거리를 다녔던 둘이였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희철은 그냥 나가기 귀찮았다. “싫.어.” 딱 잘라 싫다고 말했던 희철이었지만 어느새 그는 드레스 룸에서 뭘 입을지 고민하고 있었 다. 다 같이 입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오늘 외출을 하자고 희철을 잡아 끄는 동해와 수연, 그리고 뒤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기범까지. “다 입었냐? 빨리 나와. 다들 너 기다린다.” 누구는 빨리 나가기 싫어 안 나가나.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의 패션 센스 는 바닥을 닦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옷을 집어 입고 나왔다. 검정색 스키니에 은색과 흰색 의 줄무늬가 있는 윗옷이었다. “야. 우리 어디가?” “Secret.” 미국 물 좀 먹었다고 저게 지금 영어로 말하는 거야? 물론 자신도 미국에서 살다오기는 했


지만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지도 영어를 좋아하지도 않는 희철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봐주고는 혼자 앞서 걸어가 버렸다. 기범은 조용히 뒤를 쫓아오다가 희철의 손목을 잡고 보석상으로 들어갔다. 요즘은 백금도 괜찮고... 24k는 컬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가치가 조금 떨어지지만 14k도 괜 찮겠다. 라며 신이나 반지를 고르는 기범은 무게 잡으며 말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 다. 매일같이 재수 없는 모습만 보다가 아이 같은 그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에 희 철은 ‘난 백금이 더 나아.’ 라고 귀띔해주었다. 요즘 인기 있는 상품은 이거, 저거... 혼자 열심히 떠드는 점원의 설명은 필요도 없다는 듯 이 한 귀로 흘리며 마음에 드는 반지를 찾고는 ‘이걸로 주세요.’ 라는 기범의 말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그녀는 희철과 기범이 나가는 순간까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또 오세요 손님. 이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반지 안 끼워 줄 거야?” 나오자마자 당연히 자신의 손에 반지를 끼워줄 줄 알았던 희철은 기범의 심중을 알 수 없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음을 건넸다. 물론 머리가 좋으니 자신만의 생각이 있겠지 라고 생 각했지만 희철은 그냥 궁금했다. “나중에.” 라고 말하며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기범을 따라 커피숍 안에 자리를 잡고 앉은 희철은 종업원 꽤 귀엽게 생겼네. 라는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에게 의사는 묻지도 않고 에스프레소 두 잔을 주문하는 그 매너 없음에 희 철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자기야말로 변한 게 없으면서 매일같이 너는 안 변했어 라는 말을 달고 사는 기범의 뻔뻔함도 새삼 놀라웠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새삼 놀라웠지만. “주문하신 에스프레소 두 잔 나왔습니다.” 희철이 꽤나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한 그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주고 제자리로 돌아가서도 계속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에 기범은 ‘뭐야.’ 라고 무심하게 말하고는 희철에게 무드 없게 반지를 내밀었다. “껴봐.” “쳇. 무드 없는 놈. 말을 그 모양으로 밖에 못하냐?” 손에 딱 맞는 반지였다. 아니. 맞을 수밖에 없는 반지였다. 희철의 왼손 약지는 기범의 왼 손 소지와 두께가 같았다. 그런 속설도 있지 않은가. 여자의 왼손 약지에 맞는 반지가 남자 의 왼손 소지에 맞으면 천생연분이라는.


“잘 맞네.” “언제나 이 반지를 보면서 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어.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 the vastness is bearable only through love. 이 말처럼 나는 작은 창조물이야. 너 없이는 세상의 광대함을 이길 수 없는. 너와 헤어져 ���던 6년 동안 깨달았어. 매정하게 밀어냈던 너 없이 사는 것은 힘들더라는 것을. 내가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빛이 되어주지 않을래?” 희철은 그동안 떨어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기범이 자신을 매정하게 한국으로 쫓아 냈을 때부터 그를 잊지 못해 흘러간 1년 남짓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절대 남 앞에서 울기 싫어하던 김희철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헤어짐을 고했 을 때도 겉으로는 웃고 등을 보이며 울었던 그였다. 그런 희철이 지금 다른 사람들도 다 보 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 번도 우는 사람을 달래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운 기범이었지만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언제나 남을 의식해 왔던 기범임에도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울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인지 기범을 흘겨보며 ‘이제 알았냐? ....나쁜 자식.’ 이라고 한 희 철의 말에 기범은 ‘나. 너 다시 만난 지 이틀 만에 나쁜 놈, 나쁜 자식, 나쁜 새끼 같은 온 갖 욕은 다 먹었다.’ 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

“아저씨, 핸드폰 번호가 뭐에요?” “야. 난 이미 5년 째 사귄 애인이 있다니까?” 휴대폰 번호 알려주는데 너무 속 좁게 군다며 기범을 타박하는 아이였지만 기범은 애인이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 절대로 휴대폰 번호를 알려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휴대폰 번호를 요구하는 그 아이에게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내줘야 하는 것인지 기범은 심히 고민을 해보았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줘요.” 결국 휴대폰 번호를 따내기는 포기를 했는지 이름을 묻는 그 아이는 꽤나 당돌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범은 대답이 없었다. 거의 포기 상태로 ‘나는 김려욱이에요.’ 라고 말하 는 아이를 보며 기범은 ‘너도 나중에 애인 사귀면 애인이 고생 좀 하겠구나. 누구처럼.’ 이 라고 생각하며 ‘김기범.’ 이라는 말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김동규 -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中


살랑거리는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봄날, 꽃잎 따라 남정네의 마음도 이래저래 흔들리니 도무지 방 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서책만 외고 있을 기분이 아니던 종운은 들고 있는 서책을 한 쪽으로 치워놓고 앞마당으로 나섰다. “아, 이리하면 되는 것입니까?” 맑은 햇살이 곱게 물들인 하늘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잠시 취했던 종운에게 또랑또랑하 게 앞마당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호호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함께 재잘대는 말소리가 나긋나긋 귓가를 두드린다. 종운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본채를 지나 뒤채로 이어지는 곳으로 접어들 자 돌담 앞에 한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짙은 분홍빛의 치마에 연노랑 저 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금실로 수놓아진 빨간 댕기를 땋은 머리끝에 길게 늘어뜨려 맨 계집 아이가 연신 감탄사를 내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아니, 저것은 누이인 수현이가 아니더냐? 대체 누구랑 저리 얘기를 하는 것인지, 계집아이 가 되어 저리 방정맞게 웃으면 쓰나. “아하하하. 그게 아니래두.” 혼을 낼 요량으로 다가서던 종운의 귀에 맑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사내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성인 그 음색이 묘하게 심금을 울려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지만 종운은 눈에 불꽃을 팍 튀기며 눈을 부릅떴다. 느긋하게 재촉하지 않던 발걸음을 서둘러 기둥 뒤에 가려 진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쪼그려 앉은 수현의 곁에 함께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맞댄 소년이


보인다. 흰색의 고운 비단 도포자락 위로 도령들이 입는 짙은 청색 조끼를 입고 끝에 호박 장식이 달린 가느다란 끈을 둘러멘 소년은 바로 려욱이었다. “대체 뭐 하는 짓들이냐!!” 종운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현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가 종운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려욱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섰다. “대체 뭐 하는 짓들이냐고 물었다!” 아까보다는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종운이 물었다. 수현과 려욱은 숙 인 고개로 서로 힐끔거리고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대꾸를 하여 더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는 것이었으나 종운은 변명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에 더욱 화가 났 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거늘! 네 어찌 이리도 경망스럽게 사내와 어울린단 말이냐! 아버 님께서 아시면 심히 노하실 일이다.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오..오라버니..” 수현을 못마땅하게 보며 혼을 내자 수현이 눈물을 글썽이며 종운을 올려다봤다 . 손에는 투 박하게 목화천이 명주실로 둘둘 메어져 있었다. 종운은 매섭게 다시 한 번 ‘빨리 가라고 하 지 않더냐!’ 라며 수현을 재촉했다. 아직 채 물들이지 못한 손가락을 꼭 쥐고 눈물방울이 대 롱대롱 매달린 채로 수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사박사박 고운 비단신이 흙바닥을 밟는 소리, 기다란 치마가 흙먼지를 쓰는 소리가 저만치 멀어지자 수현이 걸어간 자리를 보고 있 던 종운의 고개가 려욱에게로 향했다. 려욱인 안타까움이 잔득 어린 얼굴로 수현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었다. 흐흠- 하고 종운 이 헛기침을 하자 놀라서 얼른 고개를 떨군다. 그런 그의 눈길에 종운이 안상을 확 찌푸렸 다. 려욱은 김대감의 절친한 지기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글공부를 함께 하던 죽마고우였으나 세 상을 일찍 하직하고 곧 그의 아내도 따라 세상을 떠 하나밖에 없던 귀한 아들이던 려욱을 홀로 남겨두었는데, 일가친척들도 나 몰라라 하던 려욱을 안타까이 여겨 거두어들인 것이 김대감이었던 것이다. 려욱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아와 마찬가지였으나 김대감은 그를 양아 들로 삼는 셈 치고 종운과 함께 형제나 다를 바 없이 오순도순 키웠다. 하기에 실상 수현과 려욱이 어울리는 것은 종운이 수현과 어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겨지어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이 없었거늘 종운의 눈에는 그것이 그리도 마땅찮았다. “죄송합니다. 누이가 봉숭아물을 너무도 들이고 싶다기에..” 돌담 앞에 조르르 피어난 봉숭아가 몇 가지 꺾어져 있었다. 이파리는 모두 떼어지고 줄기만 고스란히 남은 봉선화 옆에는 손바닥만 한 사기그릇에 꽃잎과 이파리들이 백반과 함께 곱게 짓이겨져서 거무죽죽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누가 네 누이더냐?” 싸늘한 종운의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려욱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푹 묻었다. 종운의 매서운 눈초리가 정확히 찔러들어 온 몸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내 어릴 적엔 너나 수현이 모두 어리니 그 행실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리 경솔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더냐? 진정 네가 수현이의 혼삿길이라도 막아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아닙니다 형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현이는 제 누이인데..” “그러니까 누가 네 누이라는 게냐!” 려욱이 황급히 종운에게 변명을 하려하자 또 다시 종운의 목소리가 그 말을 자르며 날카롭 게 와서 박혔다. 려욱이 어깨를 떨며 움찔했다. “수현이가 네 누이더냐? 너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이지 않더냐? 그런데 어찌 네 가 이리 경솔하게 구는 게냐! 저 아이는 곧 다른 이의 정혼자가 될 수 있는 몸인데, 그를 생각해서 네가 알아서 잘 단속해 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어린 것이 멋모르고 오라비, 오라 비 하고 따르면, 너라도 정신을 차렸어야지!” 종운의 목소리가 너무도 칼 같아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 너무 아파서 온 몸에 생채기 가 나는 것만 같았다. 려욱은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하는 것을 꽉 누르며 이를 악 물었다. 종운은 움츠러든 려욱의 어깨가 조금씩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한 층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또 한 번만 더 네가 수현이와 어울리는 것을 본다면 내 너를 이 집에서 쫓아내고 말 것이 니 그리 알거라, 알겠느냐.” “......예..” 어두워진 안색으로 려욱이 대답을 했다. 종운은 기어들어가는 그 대답을 듣고는 만족한 얼 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종운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려욱이 아랫입술을 꽉 깨 물었다.

“무슨 일로 언성을 높인 것이냐.” 위엄 있는 목소리로 김대감이 물었다. 종운은 붉은색에 화려한 색상의 실들이 수놓아진 방 석을 깔고 앉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을 했다.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저.. 수현이와 려욱이가 뒤뜰에서 어울려 놀고 있기에 그러지 말라고 이른 것뿐입니다.” “수현이와 려욱이 그 아이가 어울리는 것이 무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 려


욱이를 항상 형제처럼 여기라 했거늘,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냐?”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 드러나도록 김대감이 물었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종 운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종운아, 물론 너와 려욱이가 아주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나는 려욱이를 너와는 또 다른 아들로 여기고 있으니 너 또한 그 아이를 형제로 여기고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 . 이 아 비의 말을 어길 셈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버님. 제 어찌 그 아이를 제 형제처럼 여기지 않는다 하십니까. 다 만..” 종운은 조근히 이르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 히도록 듣고 또 듣고, 수십 수백 번도 더 들었던 말이었다. “저는 물론 려욱이를 형제처럼 여기고 있사오나, 수현이는.. 혹 수현이 정혼하는 양가에서 그를 마땅찮게 여길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심려를 끼쳐 드리지 않도록 하려 그런 것인데...” 말꼬리를 흐리며 종운이 입을 다물었다. 김대감이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종운의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보는 것 같아서 이 자리가 너무도 불편해지고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본인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싶었으나 부질없는 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종운은 대감이 듣고 싶어 할 그 대답을 해주며 말을 맺었다. 김대감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 으로 종운을 물렸다. 가볍게 절을 올리고 미닫이문을 닫고 안방을 나서며 종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도련님, 이제 그만 하시고 려욱도련님 들어오시라고 하셔요. 저러다 몸 상할 것이구먼요.” “...덕팔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되었으니 너는 방에 가서 쉬어라.” “도련니임..” “어허, 방에 가래도?” 서책을 읽고 있는 종운의 곁에서 그 집 머슴 덕팔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 한 기색을 보인다. 벌써 려욱이 종운의 방 앞에 와 잘못했다 사죄를 한 지도 한참이 지났 다. 허나 종운은 그를 방에 들일 생각도 하지 않고 문전박대하고 있었다. 책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덕팔에게 물러가라 이르는 종운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나온 덕팔 이 미닫이문 앞에 꿇어앉아 있는 려욱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본다 . 한참 전 , 이곳에 꿇어 앉을 때만 해도 혈색이 있던 얼굴이 파리해져있었다. 이건 무슨 석고대죄도 아니고 정말 이 게 뭔 일인지. 종운의 고집스러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래가지고 어디 오늘 안에 해결


을 볼 수 있겠나. 덕팔은 조용히 려욱의 곁에 섰다. 이게 대체 몇 시진 째인지, 대감님이 아시는 날엔 려욱도련님 하나 제대로 모시지 않고 뭘 한 거냐며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면서도 방 안에 들어앉아 꼼짝도 않는 종운의 매서운 성정을 생각하면 또 려욱을 억지로 라도 방에 끌고 데려갈 수도 없었다. 종운이 려욱을 용서해주지 않는 한 이러나저러나 혼나 는 건 머슴이구나- 한탄하며 덕팔은 울상을 지었다. “덕팔아. 형님 말씀 들어. 얼른.” “..도련님, 그런 말씀 마시어라. 그러다가 밤 꼴딱 새버리겠다구요. 오늘은 이만 가시고 내 일 얘기하셔라, 예?” “아니다. 너 가고 나면 형님이 나오실 것이니 어서 가.” “도련님이 여기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서 잡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요.” “그러다 형님께 혼나지 말고 어서 가. 네가 이러고 있으면 나도 편치 않아. 나도 금방 돌아 갈 것이니 얼른 가라, 응?”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려욱이 조용히 속삭였다. 덕팔은 종운 못지않게 고집스러운 얼굴을 한 려욱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럼 진짜 조금만 있다가 가셔야해요. 예?” “그래.” 수척한 얼굴로 려욱이 웃는다. 덕팔은 이대로 방에 돌아가 봤자 려욱 걱정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룰 것임을 알면서 발길을 돌렸다. “형님...” 종운은 참으로 더디게 읽히는 서책을 한 장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려욱이 방 앞까지 찾 아와 애걸복걸 하고 있으니, 안에 들어앉아 책을 펴놓고 앉은 종운의 마음 또한 편할 리가 없었다. “형님.” “...조용히 해라, 집 안에는 듣는 귀가 많다는 것 모르느냐? 아버님께 또 꾸중 듣고 싶은 마음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거라.” 문에 어른거리던 호롱불 불빛이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기름칠을 곱게 한 문지방에 소리 한 점 남기지 않고 스르륵 열린다. 보다 못한 종운이 려욱을 돌려보내려고 나온 것이었다. 종운은 려욱에게 엄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 남아있던 노기는 사라진지 오래 였다. “어서 일어나라. 그러다 몸 상한다.” 종운이 말했다. 려욱은 누그러진 종운의 목소리에 낯빛이 한층 밝아진다.


“....들어가 앉아라. 사내자식이 어찌 이리 쉽게 아무데나 무릎을 꿇는 것이냐? 자고로 사내 란..” “압니다, 알아요. 아버님께 그 훈육은 저도 형님과 함께 받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하나요, 형님이 저를 보지도 않으시려고 하는데.” 종운의 말을 자르며 려욱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다 죽어가던 녀석이 금세 그런 일이 언 제 있었냐는 듯이 싱긋이 웃는다. 종운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눈에, 저 얼굴에, 저 웃음에. 그것 한 번이면 아무리 굳게 다잡으려 애써도 무너져내려버리는 내 가슴이 이걸 로 몇 번째던가.. “정가 댁에게 차라도 좀 내오라 이를까요?��� “됐다. 늦은 시각에 차는 무슨.” “그리 늦지 않았는데..” 려욱이 아쉬운 듯 우물쭈물 대답한다. 그리 나무라고 문 앞에 꿇어앉혀 놨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려욱은 멀쩡한 얼굴로 종 운의 맞은편에 놓인 방석에 앉아 종운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책 맨 앞장을 펼쳐 읽어본 다. 대체 바보인건지 속이 없는 건지. “이 책은 제가 읽지 못한 것인데.. 아직 제가 읽기엔 어려운가요?” “...그럴 거다. 나에게도 그리 쉽지만은 않더구나.” “이크. 형님께 쉽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몇 해나 더 있다 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려욱이 놀라며 얼른 책을 내려놓았다. 저 책은 아까 전 려욱이 방문 앞에 당도했을 때부터 같은 장만 읽고 또 읽고 또 읽은 그 서 책이었다. 종운은 이제 어디에 먹물 자국이 실수로 번졌으며 글씨가 정확히 어떤 모양이며 하는 것들을 다 외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내용 이란.. 심지어 종운은 지금 자신이 글을 읽을 수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내일 이른 아침에 서당엘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내일은 가지 않는 날입니다. 형님은 제가 빨리 방으로 돌아갔으면 싶으십니까? 저를 저녁 내내 그리 고생시키시고서...” 려욱이 섭섭한 듯 말했다. 종운은 그게 아니라고, 그저 저녁 내내 내 덕에 고생한 네가 피 로하지 않을까 우려가 됐던 것뿐이라고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은 하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너는 무얼 믿고 문 앞에 꿇어앉은 것이냐? 그러다 내가 밤새 너를 거기 그냥 놔두었으면 어찌하려구.” “...형님께선 항상 저에게 내신 화는 금방 풀리지 않습니까. 전 다 압니다, 형님이 진짜 역 정이 나셔서 화를 내신 것이 아니란 거. 그냥.. 모든 것이 염려되어 한 소리 하시는 것뿐이 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종운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진정 그랬던가.. 한 번도 그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실로 종운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달리 하려고 해본 적도 없었다. 려욱에게 어찌 오랫동안 역정을 낸단 말인가, 저 맑은 얼굴로 웃으며 죄송하다 하 는 아이에게.. 종운이 대답 없이 시선을 돌리자 려욱이 즐겁게 웃는다.

* * *

때론 여우같고 때론 순진한 양 같던 그 모습이 좋았더랬다. 사내아이면서도 계집만큼 어여 쁘던 그 얼굴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진정하지도 못하고 뛰었더랬다. 아직은 서당에서 천자 문도 다 떼지 못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김가(金家)에 처음 온 그를 보곤 들고 있던 서책을 소리 나게 마당에 떨어뜨렸다. 책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 아버지께 호되게 혼쭐이 나면서도 그 뒤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서서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그를 머릿속에 깊 게 박아 넣었다. 함께 서당에 가는 길에는 그를 제쳐 달음박질하여 혼자 두고 가버렸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여 서당에서도 가장 멀찍이 앉아 그를 내외했었다. 이내 집에 적응 을 하여 한층 밝아진 얼굴로 ‘형님, 형님’ 하고 쫓아다닐 때에도 귀찮은 듯 내치어야만 했 다. 하지만 려욱은 포기라는 것을 몰랐다. 서둔 발걸음으로 또 려욱을 놔두고 걸어가던 어 느 날, 려욱은 종운을 좇아 따라와 보겠다고 열심히 달리다 넘어졌더랬다. 몸은 앞에 두고 마음은 뒤에 뒀던 종운의 귀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버렸었다. 헐 레벌떡 돌아가 ‘네 어찌 그리 경박하게 뛰어다니느냐!’ 라고 소리 지르자 그는 찢어진 옷 사 이로 피를 흘리면서도 생글 웃으며 ‘형님과 함께 가고 싶어서요.’ 라고 했던가. 그 날이 처음이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정면에서 한 눈에 바라보게 된 것이. 못 견디게 예 뻐서, 또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종운은 눈물이 날 뻔 했다. 더 보고 싶었다, 그의 그 얼굴과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와 하나하나의 몸짓을 더 느끼고 싶었다. 종운은 제대로 려욱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항상 멀리서만 보고 그의 곁에 다가가지 않고 피하는 것이 나았다. 가까이서 보지 못할망정, 그를 보고도 갖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 다고 그리 여겼다. 그래서 려욱이 이리 불쑥불쑥 다가올 때면 종운은 밀어내지도 못하고 받 아들이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이 되고 말았다. “형님,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상념에 빠진 종운을 방해한 것이 미안한 듯 려욱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옷깃을 잡아끌었다. 종운은 그 손길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있던 이가 이리 눈앞 에 나타나다니. “아버님께서?” “예, 어서 가보셔야 할 것 같던데요..” 종운은 그러겠노라 답하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해진 일자 외에 따로 부르신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 아버지인지라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리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와 있은 적이 거의 없는 대감이 오늘은 어쩐 일로 종운을 기다리 고 있는 것인지. 안방에 들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왔느냐. 어서 앉거라.” “려욱이 급히 들라 이르길래..” 종운이 어머니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도포자락을 가지런히 하여 그 위에 두 손을 모았 다. “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김대감은 말을 하다 말고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정상호 영감의 막내손 말이다... 그 아이가 혼기가 거의 다 찼다 하던데. 내 너의 얘기를 하니 그 댁에서 썩 기꺼워하시더구나.” 정상호 영감의 막내손? 혼...기? 이것은 무슨 소리인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듣고 있던 종운이 곧 그 뜻을 깨닫고는 눈을 크 게 뜬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란 것은 알았지 만 그것이 이리도 빨리, 오늘 내일 하게 될 줄은 차마 모른 탓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수 밖에 없었다. 정상호 영감의 막내손이라면 종운도 익히 소문을 들은 이였다. 다른 양갓집 자제들이 너도 나도 담을 타 몰래 넘겨보고 싶어 한다던, 빼어난 미색과 팔방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여 인이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절세미인에 재주가 특출 나면 뭘 어쩌겠는가, 종운의 눈에는 그 어느 것도 들어차지 않는 것을. “너 또한 혼기가 다 차서 네 어미와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던 차였는데 잘 되었지 않느냐? 탁월한 아이라 들었으니 더 들어볼 것도 없지 않겠느냐, 빠른 시일 내로 혼례를 치르도록 하여라.” 의사를 묻는 것도 아니요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그리 하라고 정해


주는 말에 눈앞이 아찔했다. 종운은 눈을 감았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언제 어디서나 부모 님께 효를 다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라는 지침을 단 한 번도 어겨본 일이 없었 다. 그리고 이 일 또한 아무리 원치 않는다 하여도 결국은 자신이 승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종운은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감았던 눈을 뜨고 멍해진 눈빛을 들키지 않도록 눈은 무릎에 얹어진 손을 계속 해서 바라보며 ‘예, 그리 하겠습니다 아버지.’ 라고 대답했다.

“형님, 아버님께서 어쩐 일로 오라 하신 겁니까? 혹시.. 또 꾸중 들으셨습니까?” 걱정이 서린 목소리로 려욱이 물었다. 시무룩한 종운이 못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글공 부가 안 된다며 종운을 정자로 끌어내 엊그제 몰래 시장에 다녀온 것을 자랑하던 려욱은 제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혼자 다른 생각에 빠진 종운을 가만 보다가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갖은 장난을 쳐댔다. 그런 그의 마음을 빤히 알면서도 종운은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려욱이 장난을 치면 칠 수록, 형님 형님 하며 애살 있게 굴면 굴수록 마음이 더 착잡해져갔다. 이제는 이런 그를 남몰래 아끼지도 못한단 말이구나...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말도 안 되는 사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차피 세 상에 드러내놓지 못할 테니 마음에 묻어두고 혼자만 고이 간직하면 된다는 것을 . 하지만 느 낌이 조금 달랐다. 누군가를 몸으로 품으며 마음은 다른 곳에 놓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 리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형님? 형니임? 무슨 생각 하십니까~ 저와 놀아주신다고 따라 오시고선 그리 가만히 계시 면 어찌합니까?” “…….” “에이, 재미없다. 형님 때문이에요.” 종운의 눈이 울 것만 같아서 려욱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못 본체 해주는 것이 가장 현명하리라 여겼겠지. 하지만 려욱아.. 난 말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마음이 아파 눈이 울고 있다면 네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 그가 같이 따라 와줄까. 저 순진하고 어리디 어린 순한 아이를,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제 형이 좋다고 저리 천진하게 구는 아이를.. 가자고 하면... 하긴. 그 누 구보다도 항상 저에게 가장 매정하게 구는 이 형이 가장 좋다고 하는 아이니.. 따라 오기는 하겠지.... 하지만.. 만약 나중에, 저 훗날 언젠가 그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때 려욱 이 떠난다면 그때는 어찌 살까. “려욱아..” “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먼저 입을 연 종운이 려욱을 불렀다. “아버님께서 말이다.. 아주 참한 아가씨와 혼례를 치르라.. 그리 이르시더라. 아주 어여쁘고 재주도 많다고.. 동네방네 소문난 그런 아가씨 말이다.” “....네에? 그게 정말입니까?” 눈이 동그래지며 려욱이 놀라서 물었다. 종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놀란 얼굴 로 입을 벌렸던 려욱은 우와~ 라는 탄성과 함께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좋으시겠어요? 우와아. 누군지는 아십니까? 어떤 집 아가씨랍니까? 몰래 한 번 보러 가볼래요?” 그 또래의 아이들이 다 그러하듯 계집에 대한 환상을 려욱 또한 품고 있는지, 저가 더 흥분 하여 말한다. 그가 웃고 떠드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종운은 겉으로 웃음을 띠었으나 속은 시 커멓게 물러져가고 있었다. “정상호 영감 댁 막내손이라 하더라. 한 번도 보지는 못하였지만.. 나도 소문은 익히 들 어..” “아!! 저 그 아가씨 본 적 있습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중대한 비밀이라도 되는지 얼른 주변을 살피며 킥킥댄 려욱이 말을 이었다. “엊그제 시장에 갔을 때 말입니다! 저는 안 보려고 했는데, 그 아가씨가 지나가는데 정준이 어찌 안 것인지 그리 일러주더라구요! 그런데 정말, 엄청엄청 미인이었습니다! 저도 진짜 무슨 선녀가 강림한 것인 줄 알았더라니까요!” 들떠서 말하는 려욱을 가만 보고 있던 종운은 그러냐? 라고 물으며 가만히 웃었다. 눈 꼬리 에 눈물이 맺히려는 것을 얼른 고개를 돌려 가렸다. 여차하면 너무 기뻐서 우는 것이라 그 리 둘러대리라. 종이를 펴놓고 절경을 그려보겠다며 먹을 열심히 갈고 있는 려욱을 묵묵히 봤다. 글은 썩 잘 쓰는 편이나 그림은 아직 서툴러 선을 삐뚤빼뚤 그리는 것이 잘 그려지지 않아 속이 상 한지 끙끙댄다. 그 모습이 흡사 강아지 같아서 종운은 또 웃었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 어도 웃게 만들어 주는 려욱이, 항상 곁에 이렇게 단 둘이 있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을 텐데.

혼례 준비는 생각보다 착착 빠르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집 안에 잔뜩 쌓여가는 각종 혼례 물품들을 보며 종운은 씁쓸한 감상에 빠졌다. 어찌하여.. 신랑의 마음이 이리도 착잡한데 온 집안이 잔치라도 열린 듯이..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숨을 푹 내쉬는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려욱이 넌지시 묻는다. “아니다. 네 어찌 글공부를 하지 않구..”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여기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신경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서책은 그리 쉽게 내버려두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누이 이 르지 않았더냐.” “......압니다. 아는데..” 생긋 웃고 있던 려욱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형님께서 혼례를 치르시고 나면 지금처럼 자주 뵐 수 없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자주 볼 수 없다니.” “덕팔이가 그러던걸요. 형님께선 곧 과거도 보러 가시고, 벼슬도 받으시고.. 그러실 것이라 고.” “아...” “게다가.. 이제는 형님께 저녁에 찾아가서도 안 되고... 그렇다구요.” 려욱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종운은 한층 더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가, 이제 는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인가. “그러니 지금 많이 뵈어 두려는 것입니다.” 려욱이 싱긋 웃었다. “...그래. 려욱아, 너 일전에 난을 치는 것을 배우고 싶다 하지 않았니?” “예! 배우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까?” 종운은 지난 날 려욱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물었다. 아직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익숙지 않은 아이였다. 쉬워 보이기는 하나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그리지 않으면 난이 되기는커녕 마당 한 구석에 삐죽이 자라나는 잡초보다도 못한 그림이 되어 쉬이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난인데. 그런 려욱에게 종운은 난을 치는 것을 알려주겠다 하며 덕팔이를 시켜 소도구를 챙 겨 안뜰에 있는 정자로 나오라 일렀다. 려욱의 흥분된 얼굴을 보며 종운은 제 마음을 다시 한 겹 덮었다. 이렇게 하루에 한 겹씩 차곡차곡 내 마음속의 너를 싸매어 놓으면, 그 여인네를 맞이할 때 쯤이면 내가 너를 그리 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첫날밤을 보내며 너를 떠올리어 마음아파하 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를 어떻게 해보겠다거나 그에게 마음을 알리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것으 로 만들겠다거나 그런 적도 없었다. 이 현실을 수긍하고 맞춰서 살겠다고 벌써 다짐을 하고 또 한지 오래였기에 이제와 새삼스레 너와 내가 단 둘이지 못하여 서럽다거나 그런 것도 아 니었다. 헌데.. 종운은 차라리 려욱이 혼례를 치르고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지금 이보다 훨 씬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안지 못할 이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안고 싶지 않았


다. 평생.. 그 누구도 품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종운은 장자였다. 아니, 장자일 뿐만이 아니라 독자였다. 나는... 너의 축복을 받으며, 끝까지 너를 사랑하며,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 * *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였다. 그 일대에서 가장 풍채 좋은 기와집을 자랑하는 김대감 댁에서 큰 경사가 있었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평소 굳게 닫혀있던 대문은 오며가며 구경하는 사 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대문 안쪽에는 바로 널찍한 앞마당이 있었는 데 그 곳에서는 혼사가 치러질 예정이라 병풍과 작은 탁상 등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덕 팔을 비롯한 머슴들은 모두 오며가며 음식을 나르고 곳곳을 기다란 비로 쓸고 하느라 분주 히 움직였다. 곧 꽃가마가 당도할 시간이었다. 구경꾼들은 연지 곤지 곱게 찍고 고운 한복 차려입은 소문 난 미녀라던 새색시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어 너도나도 대문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그들 은 모두 그런 절색을 안사람으로 맞이하는 이 댁 아드님을 부러워했다. “너도 그렇느냐.” “...예?” 이제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본래 자신이 쓰던 방에 마지막으로 들어앉아 신랑이 입는 푸른 한복을 입고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종운이 곁에 조용히 앉아있는 려욱에게 물었다. 전날 까지만 해도 저보다도 더 들떠서 종운에게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던 려욱이었다. “너도 저 밖의 이들처럼 내가 그리 부러우냐?”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절색의 미모와 뛰어난 글 솜씨를 가진 아주 참한 분이신 것을요.” “...그러냐.” “......” 종운은 려욱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의 이 기분은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그리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이 김종운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려욱의 안색이 미묘하게 좋지 않은 것이 자신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긴장감과 신기함 때문이라 생각하며 종 운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아직 ‘나’ 만으로 남아있을 동안 려욱을 더 눈에 담아두고 싶 었으나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태어나 오직 세 가지 경우일 때만 눈물을 보여야 한다는 사내로 태어나 그런 모습을 비출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경하드립니다, 형님.” “...고맙다.” 계속해서 몇 마디 주고받다 끊어져버리는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곁에 앉아 서로 다른 시간을 흘려보내며 려욱과 종운은 그렇게 있었다. “도련님, 아가씨 오셨답니다. 나오셔야겠어요.” “...그래, 곧 나가마.” 밖에서 악기 소리가 크게 난다 싶더니 그게 꽃가마가 당도하여 그랬던 모양이다 . 려욱은 상 기된 얼굴로 얼른 일어나 종운의 옷이 구겨지지는 않았나 잠시 눈으로 살폈다 . 수년간 열고 닫았던 미닫이문을 열자, 마지막으로 종운의 매무새를 살펴주려고 정가댁이 달려와 여기저 기 털고 펴고 한다. “됐다. 괜찮으니 가보시게.” “...형님, 새색시에게 처음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더 늠름하게 하고 가셔야지 않겠습니까.” “됐대도, 됐네 하지 마시게.” “......” “...나가야겠다. 려..욱이 너는 아버님께 가 있거라. 가면 수현이도 있을 게다.” “....예.” 종운은 마루를 지나 마당까지 나왔다. 반듯한 돌 위에 놓인 새신랑이 신는 새 신발이 곱게 놓여있었다. 양 발에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와, 아직 마루 위에 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려욱을 바라봤다. 려욱아... “......” “......” “도련님.” 종운과 려욱이 말없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는데 정가댁이 고개를 숙이며 종운을 재촉했다. “그래, 가자. 내..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선 안 되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보였던 려욱을 그대로 뒤로한 채 종운은 걸음을 서둘렀다 . 저곳 에 서서 이 앞으로 가지 아니할 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곳에 서서 하염없이 너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냥 그리 너의 눈만, 코만, 입만.. 그렇게 있고 싶다. 그리.. 해도 되는 것이라면.. 마음은 저기 바로 저곳, 려욱의 곁에 두고 돌아서며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마음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아프다는 것이라고, 내 몸이 다시 저리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담고 싶다 말하는 거라고. 다시는 이 내 몸에 담을 수 없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그 통증에 쏟아지려는 서러움을 이를 악 물고 참아낸다. 평생토록 감내해야할, 동무보다도 더 가까워


져야할 그런 아픔이니까.

려욱은 멀어져가는 종운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보다가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바랬던 손가락이 그제야 다시 붉은 살빛으로 돌아온 다. 지난 나날들 동안 려욱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웃음이 이제는 모두 지워져있었다. 저곳에는 갈 수가 없으리라. 가서 또다시 그런 웃음을 띠며 진정으로 그가 행복하길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형님.. 나의.. 김종운. 무거운 발을 겨우 옮겨 고운 검정색 비단 신을 신고 종운이 갔던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 걸음을 돌렸다. 려욱의 곁에는 나란히, 종운의 마음이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빈둥빈둥할 일 없이 침대를 뒹굴 거리며 추억속의 그 이름, 슬램덩크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이놈아!” 집구석에 처박혀 빈둥거리며 노는 내가 한심해 보였는지 엄마가 밥을 지으시던 주걱으로 내 허벅지를 찰싹! 하고 때렸다. 밥풀이 붙어서 그런지 더 찰지게 때려진 느낌이다. 아, 아파라 “악! 엄마! 아파!” 내가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들고 있던 주걱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하고 깊게 내쉰다. 그런 엄마를 한참 쳐다보다가 “엄마 한숨 쉬면 복 나가.” 라고 작게 말 하자, “이미 나갈 복은 다 나가서 더 나갈 것도 없다!” 라며 혀를 쯔쯔 하고 차신다. 엄마, 나도 내가 한심한 거 알아요…. 그렇다. 난 요즘 좋은 대학, 흔히들 말하는 스카이를 나와 봤자 지방대학 출신 학생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청년실업자중 한명이다. 나도 이래 뵈도 인-서울 대학 출신인데 말이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아까 내 방에서 나가신 뒤로 계속 한숨을 내쉬고 계신 엄마의 등살에 못 이겨 우선 밖으로 도망치듯 나오긴 했는데… 젠장. 갈 곳이 없다.

“준수야.” “이자식이 웬일로 낮술이야.” 집에서 내가 이렇게 살다가 뭐가 될까 하고 고민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니 술이 쓰게만 느껴 진다. 그러게 엄마, 나 진짜 이렇게 살다가 뭐가 될까…. “임마 넌 좋겠다.” “왜 또.” “너 이번에 그 회사 입사 됐다면서.” 준수랑 나랑 똑같이 입사 지원서를 냈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똑같은 회사 에 똑같은 경력을 가지고, 똑같은 토익점수를 받았는데 준수는 붙고 나는 떨어졌다. 염병, 부러운 자식. “아… 힘내라 혁재야. 너도 곧 좋은 소식이 있겠지.” “그 좋은 소식이 언제 올까나, 참….” 이제 점심시간이 끝난다며 자기는 들어가 봐야 한다며 미안하다는 준수를 보내고 나니, 난 또 혼자다.

***

“엄마.” “왜 이놈아.” “나 입사 지원서나 내보려고.” 준수와의 만남이 있고 며칠 뒤, 이렇게 살다간 무엇도 되지 않고 그냥 알바만 하다가 늙어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엄마한테 말을 해봤다. “어디에?” “잡지사에.”


“잡지사?” “그럼 어떡해, 내 경력이라곤 거기서 일했던 사회부 기자밖에 없는데.” 방년 27세,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름 직업도 있는 막 사회인이 된 이혁재였다. 그 직업이 뭐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꽤 큰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였다. 이런 경력이라면 잡지사에서도 날 연예부 기자로 뽑아주지 않을까 싶다. “잘해봐.” “응, 엄마 미안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할 게 아니라 니 인생한테 사과나 해라.” 한 달 전,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신입사원들과 늙은 이사님들이 해고되었는데 그 피해자중 하나였던 나에게 엄마는 큰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내가 실수해서 잘린 게 아니었으니까.

“후- 하-” 그래도 나름 이름 있는 잡지사여서 그런지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내 인생에는 봄이 찾아오는 거겠지. 잘하자 이혁재. 넌 잘할 수 있어! 이력서를 내고는 대기 중인데, 줄이 장난 아니게 길다. 게다가 혹시나 물어볼 영어 질문을 위해 영어로 달달달 말하는 사람들, 그 외에 매우 당당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내가 이 길 수나 있을까. 경쟁률이 5:1이라던데…. “38번 이혁재씨 들어오세요.” “네? 네.” 드디어 내 차례다. 계속 괜찮다며 자기 최면을 걸었는데도 면접관들을 보니 속이 미식거리 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느낌이다. 떨지 말자 이혁재, 넌 할 수 있어! “음… 예전에 신문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군.” “네.” “사회부 기자…. 뭐 특종 같은 거 쓴 적 있나?” 헐. 트, 특종…? 특종은 없는데…. 미치겠다. 식은땀이 흘러서 죽을 것만 같다. 누가 나 좀 살 려줘! “네? 특종… 특종은 아니지만 단독취재를 한적 있었습니다.” “누구?” “ㅊ, 처... 청와대 비리입니다.”


간신히 작년 기억들을 더듬어 단독취재를 했던 것을 기억해 내었다. 후- 긴장하지 말자 이 혁재. 근데 왜 저기 젊은 면접관은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내 이력서나 보라고! 날 태워버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면접관의 팻말을 보니… 이동해? 그래 이동해 당신! “비리… 무슨 기사였죠?” 이동해가 나한테 물었다… 왜 너가 물으니까 더 긴장이 되는 거지…. “처, 청와대 대변인의 ㅂ,비리…였습니다.” 미치겠다 이혁재! 왜 말을 더듬어! 말을 더듬고 나니… 아까 전만 해도 오 꽤 대단한 사람이군 하던 눈빛들이 뭐야 이 덜떨어 진 남자는 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하… 젠장. “아… 그때 그 기자가 자네였군.” “네….” “토익점수도 높은데….” 드디어 영어질문이 나오나보다. 으익 끔찍해. “우선 알겠습니다.” 영어질문이 나올까 손을 꽉 쥐고 긴장하는 내 모습을 보던 이동해가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말을 한다. 엄마… 설마 나 또 떨어진 건가. 알겠다는 말에 나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도 아닌가보다. 진짜, 어제도 마셨는데 오늘 또 준수랑 술판을 벌여야겠다. 더러운 세상.

“다녀왔습니다~” “어머! 혁재야 너 술 마셨니?” 인사불성 상태까진 아닌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걸 보니 아무래도 많이 마시긴 했나보다. 제 걸음을 찾지 못하고는 비틀비틀 거리며 현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나를 보고는 깜짝 놀 라서 술을 마셨냐고 묻는 엄마를 보니… 괜히 눈물이 났다. “엄마…. 우리 예쁜 엄마….” “얘가 왜이래 또.” 엄마를 끌어안고는 엄마… 하고 중얼거리니 이런 내가 안쓰러운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데… 결국 눈물이 나고야 말았다. “흐으…. 우리엄마…. 미안해, 너무 미안해….” “아들….” 다 큰 아들이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와서는 추태를 부리는 모양이 얼마나 한심할까…. 괜히 이런 생각까지 들자 더 우울해 지고 말았다. “흐어엉- ” “….” 몇 년 만에 안아보는 엄마인지. 군대 간 2년을 제외해도 엄마 허리를 잡고 이렇게 많이 울 어 본적은 태어나서 처음일 거다. 어릴 땐 눈물이 없었다는데 다 커서는 왜 이러는 건지.

“아흐 - ” 눈을 떠보니 내 침대 위다. 어젯밤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던 것 까진 생각이 나는데 그 이후로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설마 필름이 끊긴 건가?! “아들- 깼어?” “아, 응.” 깨질 듯한 아픔을 느끼며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들 어오셔서 괜찮냐며 안부를 물어보신다. 어제 엄마를 부여잡고 펑펑 울어서 그런지 엄마가 내게 좀 다정다감해 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건…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꿀물 좀 마셔.” “아, 고마워 엄마.” 꿀물은 언제 타신 건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게 건네주며 마시란다. 속이 울렁거려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정성을 생각해서- 한모금. “다 잘 될 거야.” “...” 꿀물을 한참 마시고 있는데 뜬금없이 엄마가 다 잘 될 거라며 응원을 하시는데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시던 꿀물을 내려놓고 엄마만 멍하니 쳐다봤다. “이제부터 다 잘 될 거야.”


“엄마….” “아이고, 아니다. 엄마가 아침부터 주책이었어. 쉬어-” 엄마께서 자신이 주책이라며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더니 이내 뒷모습을 보이며 뒤돌아 서시는 모습을 보니 엄마의 뒷모습이 이렇게 초라했었나 싶을 정도로 엄마의 뒷모습은 옛날 과는 달랐다. 괜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그쳤던 눈물이 다시 흐를 것만 같은 느낌에 눈을 꾹 - 감았다.

***

“엄마!!!” “응? 왜 그래?” “나! 나! 붙었어!” “응?” 붙었다며 환호성을 지르는 나를 ‘얘가 왜 이러지’ 하는 눈빛과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호들 갑을 떠는 걸까’ 하는 궁금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엄마는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채시고는 함께 기뻐해주셨다. 그랬다. 드디어 그렇게 갈망하던 잡지사의 합격자 발표명단이 나왔는데 내 이름이 맨 위에 당당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들! 축하해!” “응, 엄마. 앞으로 효도할게!” 앞으로 엄마에게 잘하겠다며 한참 호들갑을 떠는 나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시던 엄마의 눈에 이내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을 지우시려고 그러시는 건지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 는 엄마를 바라봤는데, 목이 메였다. “엄마아….” “아유, 왜 자꾸 눈물이… 눈에 뭐가 들어 갔나봐.” 눈에 뭐가 들어간 모양이라며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는 엄마를 보니 나까지도 눈물이 나오려고 콧등이 시큰해지자 울고 계시는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앞으로는 내가 진짜 앞집 려욱이네 아줌마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할게.” 앞집 려욱이네 아줌마는 나와 학창시절 라이벌이었던 려욱이네 엄마신데 려욱이가 대기업에 취직한 뒤로 그렇게 콧대가 높아지셔선 엄마를 항상 작아지게 만든 분이였다. 내가 김려욱 이기고 만다!

내가 취직한 것을 빌미로 동네잔치라도 벌일 모양이신 엄마를 보니 내가 괜히 쑥스러워졌 다. 27살에 취직한 게 뭐가 자랑이라고 이렇게 많이도 차리신 건지…. “아, 엄마 뭘 이렇게 많이 했어.” “우리 아들 취직했는데 엄마가 이 정도는 차려야지!” 쑥스러운 일이 아닌 자랑스러운 일이 분명한데 괜히 몸이 베베 꼬이면서 손끝을 만지작거리 게 된다. 쑥스러워서 괜히 애꿎은 손끝만 만지작거리는데. “혁재엄마-!” 라는 아줌마만의 특유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현관에서 울렸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어머 혁재야- 얘기 들���어. 축하한다 얘.”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아줌마들이 우르르 들어오셨다 . 엄마 도 대체 몇 분이나 초대를 한 거야! 한 분, 두 분, 세 분… 엥? 일곱 분? 엄마와 나 둘이 살기 때문에 일부러 방이 2개만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었는데 이 좁 은 집에 일곱 분, 아니 엄마와 나까지 합하면 총 9명이 있으려니 좁고, 여름이여서 너무 더 웠다. 더 고민인건 9명이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상이나 있으련지 ….

왁자지껄,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이 분위기. 아까 엄마와 환호성을 질러서 그런지 머리가 띵- 한 게 영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 “엄마….” “그렇다니까~ 종운엄마는 뭐 들은 소식 없어?” “엄마아….” 아줌마들과 떠드시느라 내 목소리를 못 들으신 건지 점점 어질 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더


는 못 참겠어서 소란스러운 틈을 타 내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여전히 밖의 소리 때문에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방문을 닫아서 그런지 조금 조용해진 것 같아 한결 평안해졌 다. ‘♬♪♩’ 어디선가 익숙한 벨소리가 들려 주머니를 뒤져보았더니 새로 산 신형 휴대폰 , 내 핸드폰이 울고 있었다. 발신자는… 누구지? “여보세요?” “이혁재씨 핸드폰 되나요?” “그런데요?” 누구지? 이 늦은 시각에…. "이솔잡지 연예부 팀장 이동해입니다.” 아- 그때 그 이글아이군. “아, 네” “합격자 통보 받으셨습니까?” “네” 합격자 확인하려고 전화한 거였구만. 난 또 오보된 거라고 하는 줄 알고 괜히 쫄았었네…. “첫 출근은 8/1일 부터이고 아침 8시까지 출근입니다.” “네.” “참고로 늦으실 때마다 월급에서 감봉되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네.” 뭐야, 지각하면 감봉이야? 이런, 앞으로 아침 6시 반엔 일어나야겠구만. 이런 저런 고민과 들뜸으로 잠을 자려는데…. 잠깐, 8월 1일이면 내일이잖아?! 어머나! 내일 뭘 입어야 되지? 이런!

아침에 헐레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는 정장을 입은 나를 보니… 너무 어색하다! 괜히 혼자 쑥스러워져서는 얼굴을 붉히며 피식 웃고는 지하철을 탔다. 으- 사람지옥이군. 얼마나 지하철을 타고 갔을까, 회사가 보였다. 아- 저번엔 면접을 보려고 왔는데 이젠 정식 직원으로 만나는구나! 반갑다 회사야!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속인사를 하고는 뿌듯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회사 앞에 서있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직 7시20분이니까 뭐,” 시간체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타는데, 지하철에 이어 두 번째 사람 지옥이다. 내 부서가 있을 7층에 언제 오나 하며 기다리다가 7층에 도착해 내리려니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봐요! 나 신입이여서 내려야 되요! 차마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잠깐만요- 를 말하려던 차에 누군가 내 손목을 덥 썩 붙잡고는 끌어당겼다. “엄마야!” “...” 엄마야- 하고는 얼떨결에 끌려 나오긴 했는데… 아까 손은 누구였지? 손의 행방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저- 멀리 걸어가는 이동해 팀장뿐. 설마 저 이글아이가 날 꺼낸 건가?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며 얼른 부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8시가 되려면 시간이 남아서 그런지 부서 안에는 팀장과 한 사원이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네?” 업무를 보고 있던 사원에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인데 자리를 아냐고 물어보려 톡톡 쳤더니 서류를 보던 눈을 걷고는 네? 하며 물어보는데 사람이 참 선량하게 생겼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인데요, 혹시 자리가 어딘지 아세요?” “아… 죄송한데 저도 신입사원이여서요.” 이런, 그 선량한 사람역시 신입사원이여서 내 자리를 모르는 건데 자리도 못 찾고 멀뚱멀뚱 서서 부서를 둘러보고 있자 팀장실에서 이동해 팀장이 나왔다. 이크, 첫날부터 잔소리 듣는 건가. “이혁재씨라고 했나요?” 자기 자리도 모르냐며 잔소리 들을까 잔뜩 쫄아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꽤 친절한 목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팀장을 바라봤는데… 생긴 것도 잘생겼다. “아, 네” “이혁재씨 자리는 박정수씨 옆자리입니다.”


아, 아까 그 선량하게 생긴 남자가 박정수인가보군. “안녕하세요. “아, 여기셨나 봐요.” 신입이여서 할 일이 많은 건지 아까부터 계속 서류를 보던 눈을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고개를 돌려 아는 척을 해온다. 생긴 것만 착한 게 아니라 속까지 착한 거였군. “연예부 신입사원 이혁재라고 해요.” “저도 신입사원이에요. 제 이름은 박정수에요, 나이는 27이구요.” 미리 묻지도 않았는데 친히 알려주다니. 낯가림이 심한 나에겐 매우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저도 27살이에요! 말 놔도 될까요?” “그래, 나도 그게 편해.” 어떻게 들으면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말 놔도 되냐는 내 물음에도 살풋 웃으면서 자신도 그것이 편하다며 말하는데, 성격이 좋게 느껴져서 그런지 목소리도 예쁘게 들리는 것 같다. 히힛. 좀 일찍 와서 그런지 할 일이 없어지자 내 책상에 놓기 위해 구매한 책꽂이와 볼펜 , 펜 꽂 이들을 꺼내 배치하였다. 그렇게 혼자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게 눈에 띄었는지 업무를 보던 정수가 나를 보고는 “정리하나보네?” 하며 미소를 지었다. “응, 어제 급하게 사느라 좀 바빴었어.” “나도 그랬었는데 헤헤.” 나만 그렇게 통보한 게 아니라 다른 사원들도 그렇게 통보를 한 건지 정수도 통보 받고 바 로 다음날이 출근일이란 걸 알았다고 말했다. 무슨 회사가 이래? “정수야, 넌 근무한지 얼마나 됐어?” 내심 궁금했다. 정수가 자신도 신입사원이라고 하긴 했지만 신입사원도 신입사원 나름이니 까. 반년이 되도 신입사원인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혹시 몰라, 정수도 나처럼 완전 초짜일 지. “나? 한… 두 달 된 거 같은데?” 역시, 정수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나 혼자 완전 초짜 신입일까 걱정했는데 정수도 두 달 밖에 안됐으니 …. 근데 그럼 막내는 누가 하는 거지? 아, 또 내가 막내가 되는 건가.


“정수야, 여기 막내는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너지.”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막내는 너다. 라고 알려주는 정수가 내심 얄미웠다. 억울해! 겨우 두 달 차인데…. 정수와 한참 얘기를 하다가 무심코 팀장실을 봤는데… 팀장이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뭐지? 잘못본건가? 설령 봤다고 한들 그냥 시끄러운 신입이구나 했을 것 같은 데, 뭐 별 뜻 있겠나.

어느새 8시가 다되어 간다. 이제 부서 직원 분들이 들어올 시간이 다 돼서 그런지 괜스레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 나를 정수가 알아챘다는 듯이 “너무 긴장할 거 없어.” 라며 어 깨를 두어 번 두드려줬다. 후- 하- 괜찮아, 긴장 풀자 이혁재! 그 때, 뚜벅뚜벅하며 누군가 부서내로 들어왔고, 나보다 두 달 더 다닌 정수는 익숙한 말투 로 “오셨어요.” 라며 반겼다. 방금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모르는 나는 정수를 멀뚱히 쳐다 보고 정수가 알려주기만을 기다리는데 정수가 아차! 하는 눈빛으로 내게 “저분은 조대리님 이야. 나이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리신데 대리시니까 대리님이라고 불러야 돼.” 라며 알려주 었다. 조대리… 기억해야겠다. 근데 진짜 본명은 뭐지? 조대리님의 자리를 파악한 뒤 아직 비어있는 두 자리를 보며 누굴까 상상하고 있는 찰나에 “안녕하세요- ” 라는 하이톤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역시 ‘누구지…’ 하는 눈빛으 로 그 여자를 보는데 그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크! “어머, 신입사원이신가 봐요.” “아, 네….” 굵은 펌을 한 그녀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나를 모른 체 하지 않고 꽤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워 함박웃음을 짓다가 문득 팀장실을 보았는데 팀장이 마치 똥 씹은 표정 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 혹시 이 여자, 팀장 여친인 건가?! “성함이… 혁재씨?” “네? 네….” “정수연이라고 해요. 혁재씨랑 같은 사원이니까 편하게 대해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나를 향해 관심을 보일 때 마다 힐끗힐끗 보이는 팀장의 얼굴은 찌푸려져만 가고, 그 표정을 읽은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팀장의 눈치만 살살 보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이거이거, 누구한테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거야?


몇 분이나 눈치를 본걸까 드디어 마지막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아침부터 다들 열심히 하네~” “김대리님 오셨어요?” 굉장히 예쁘장하게 생긴 한 남자가 능청을 부리며 부서내로 들어오자 그런 그가 반가운 듯 이 수연씨는 방긋방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혹시 팀장 표정이 또 찌푸려졌나 싶어 팀장실을 흘깃 봤는데 자기 표정이 언제 구겨졌었냐는 듯이 이내 무표정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 뭐야…. 김대리님이 들어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업무를 보던 팀장이 팀장실에서 나와 사원들을 한 번 주욱- 둘러본다. 그러더니 내게 손짓을 하는데, 나보고 오라는 건가? “오늘 새로운 신입사원이 들어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번에 연예부에 새로 들어온 27살 이혁재라고 합니다. 편하게 혁재씨 라고 불러주세요.” 내 소개를 하는 거니까 당연히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뿐인데 너무 뚫어지게 쳐다들 보시니 까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우 더워.“이번엔 한분 한분 혁재씨한테 소개 좀.” 내 짤막한 소개를 끝내자마자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원 분들에게 소개를 하라며 시키는데, 나 혼자 부서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으니 뻘줌하다. 팀장님, 나 자리에 앉아서 하 면 안 돼요? “우선 조대리부터 소개해줘요.” “안녕하세요. 전 26살 조규현이이에요, 편하게 규현씨 아님 조대리라고 불러주세요.” 조대리, 편하게 규현씨 아님 조대리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왠지 저 남자에겐 그렇게 하면 안 될 것만 같은 포스가 느껴진다. 엄마 얘 무서워. “안녕, 우선 난 연예부 분위기메이커 김희철이라고 해, 나도 대리니까 김대리나 희철씨 둘 중에 아무렇게나 불러.” 김대리님, 잡초색의 머리가 눈에 띄는 정말 분위기 메이커스러운 남자였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머리색을 할 수가 있지? 당신 같은 남자, 연예부기자보다는 연예인 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 “어머, 제가 마지막인가 봐요. 혁재씨는 제 이름은 아니까, 나이는… 음… 혁재씨보단 어려 요. 그러니까 편하게 수연씨- 라고 불러주시면 되요.”


마지막 수연씨까지 소개가 끝나고 나니 이제 팀장의 소개가 있어야하는데…. 이 남자 어디로 간 거임?! 한참 팀장의 행방을 찾으려 부서를 둘러보는데 팀장이 그새 어딜 갔다 오는 건지 한 서류뭉 치를 들고는 부서로 들어오고 있다. “이혁재씨, 잠깐 팀장실로 들어오세요.” 하…. 드디어 업무 시작인건가. 아까 팀장이 들고 있던 서류뭉치는 아마 내거겠지? 라는 생각을 하자 급격히 컨디션이 다 운되는 느낌이었다. 뒷골이 좀 땡기는 거 같기도 하고. “팀장님….” “아, 이거 이혁재씨 업무에요.” 혹시나가 역시나. 이 많은 서류를 언제다 처리하나 싶은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눈꼬 리가 축 처지는 느낌이다. 팀장은 그런 내가 불쌍하다는 표정이고. 팀장이 건네준 업무덩어리들을 들고 나오면서 축 쳐진 내 어깨가 불쌍해보였는지 팀장실로 들어가던 김대리님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원래 신입은 다 그런 거야 라며 팀장실로 쏙 들 어가 버렸다. 김대리님은 제 딴엔 위로하신 거 같은데 오히려 내게는 김대리님의 그 말이 독이 되어버렸다. “어휴- ”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한숨을 내쉬며 업무를 훑어보고 있는데…. 배우 최시원 인터뷰? 이게 뭐야! 난 아직 신입인데 이 톱스타를 인터뷰하라니! -배우 최시원이라고 한다면 작년에 데뷔를 했는데 데뷔작의 파워가 너무 강력해 신인임에 도 불구하고 거의 정상급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연기계의 샛별이라 불리는 남자다. 인기도를 급으로 치자면 송중기 정도?그런 남자를 내가, 이혁재가, 이솔신문 연예부 신입기자가…! 이 회사가 날 엿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암담해져왔다. “정수야….” 이제 곧 취재를 나갈 예정인지 여러 가지 노트와 그 밖의 필기구 녹음기 등을 챙기며 카메 라맨을 부르는 정수를 내가 애타게 부르자 정수가 응? 하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왜 그래?” “있잖아… 너 최시원 인터뷰 한적 있어?”


과거, 최시원 인터뷰의 경력이 있냐고 묻는 내게 ‘무슨 소리야, 난 아직 신입인데.’ 라며 내 말이 우스개 소리인줄 알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는 정수에게 나는 ‘나도 신입인데 취재하게 생겼어.’ 라는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댔다.

***

최시원 인터뷰 하는 날 D-5

최시원 인터뷰가 5일밖에 채 남지 않았다! 최시원에게 해야 할 기본적인 질문들 및 취재도구, 카메라맨 등 다 준비는 해놓았건만 최시 원이라는 이름아래에 난 이미 기가 죽어버린 건지 ‘최시원’ 이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두 근거려 심장박동이 급격히 증가해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래서 인터뷰가 가능이나 할까…. “이혁재씨” 팀장이다. 회사에 나온 지 약 일주일가량이 지난 지금 이동해팀장은 심심하면 날 부른다 . 내가 무슨 당신 심심풀이땅콩으로 회사 다니는 줄 아냐! 저번에 한번은 점심식사시간임에도 점심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휴게실에서 테이크 아웃커피를 손에 들고는 쪽쪽 마시고 있는데 이동해 팀장이 들어와서는 ‘혁재씨는 입맛이 고급인가 보군요.’ 하며 피식- 하며 비웃고는 블랙커피를 손에 들고 유유히 나갔다. -신입사원은 테이크아웃커피도 못 마시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혹시 댕강 짤리는 건 아닌가 싶어 간이 작은 나는 엄두도 못낸 채 그 말을 속으로 삭히며 가라앉혀야 했다. 또 한 번은 사내식당 점심식사 메뉴가 시답잖기에 정수에게 ‘나가서먹을래?’ 라고 물으며 지갑을 손에 들자 팀장 녀석이 다가와서는 ‘오늘은 이혁재씨가 쏘는 겁니까?’ 라고 큰 소리 로 말해 부서사람들에게 점심을 사주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생각해보니 너무 괘씸하고, 혹시 내가 팀장에게 미운털이 박힌 건가 싶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신입 첫날 내가 수연씨하고 얘기해서 그런 ���가? 아닌데 희철씨랑 수연씨랑


대화할 땐 멀쩡하던데…. 아님 그때 테이크아웃 커피를 안 사줘서 그런 건가? 설마 그런 일 로 삐질 만큼 쪼잔한 건 아닌 거 같던데…. 아…! 정말 난 팀장에게 미운털 박힌 건가 하는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며 팀장실로 들어갔는데, “팀장님 부르셨어요?” “아, 거기 앉아 봐요.” 뭔 얘기를 하려고 날 앉히는 건가. 설마 최시원보다 더 유명한 사람을 인터뷰해야한다고 말 하려는 건 아니겠지. “최시원씨 인터뷰가 5일 남았나요?” “네.” “어디서 하는지 내가 안 알려줬던 거 같은데, 아직 모르고 있죠?” “네? 네….” “인터뷰는 오전 10시에 최시원씨 기획사 앞 커피숍에서 할 겁니다. 아마 최시원씨는 매니저 랑 단 둘이 올 거니까 너무 긴장하진 말아요.” 팀장 역시 나 같은 초짜가 최시원같이 유명한 배우를 인터뷰하는 게 조금 불안했는지 내게 더 자세하고 상세하게 알려줬다. 나도 불안해 죽겠어요 팀장니임. “혹시 저 혼자 가는 건가요…?” “아니요, 이번엔 저랑 이혁재씨 둘이 갑니다.” 뭐?! 둘이? 게다가 날 싫어하는 팀장이랑? 오, 지져스. 망했다 라는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팀장의 표정이 구겨지고 말았다. 흐미 , 표정관리 해야지! “그럼 카메라맨은….” “카메라맨은 필요 없습니다. 사진은 기본에 있는 최시원씨 화보로 대체하기로 했으니까요.” 뭐야. 그럴 바엔 팀장은 왜 가는 거지. 이번에도 팀장이 같이 간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내 표정을 읽고선 팀장이 대답했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진 마요. 나도 시간이 남아서 혁재씨랑 같이 가는 게 아니니까.” 왠지 이 인터뷰…, 벌써부터 불안불안하다.

최시원 인터뷰 D-Day


“이혁재씨 준비 다 됐습니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물었던 질문 또 묻고, 챙긴 물건 또 확인하고. 초짜인 나보다 팀장이 더 난리다. 정신 사나워 죽겠네! “팀장님 이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D-40분이다. 최시원의 기획사와 조금 떨어진 만큼 이젠 출발 할 때인데 정신 사납던 팀장이 이내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가야죠. 출발합시다.’ 라며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 다.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팀장이 도시남자의 향기를 물씬 풍기며 정장 바지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며 삐빅- 하고 소리를 냈는데, 팀장의 차 키에 반응한 차는… 신형 아우디였다. “설마 저 차… 진짜 팀장님 차에요?” “네, 뭐 문제 있습니까?” 혹시나가 역시나… 팀장이 국회의원 아들이라는 소문이 진짜인가 싶어서 내가 팀장을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 보자 팀장이 쑥스러웠는지 ‘타기나 해요.’ 하며 조수석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확실히 외제차여서 그런지 내부부터가 다르구나…. “팀장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 “팀장님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거… 사실이에요?” “아…. 네.” 역시! 그런 집안이 아니고서는 27살 잡지사의 일개 팀장이 이런 외제차를 살 수가 있겠는 가, 앞으로 팀장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다는 헛된 생각이 마음속 깊숙이 부터 떠올랐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조금은 어색하고 뻘줌한 기류가 팀장과 내 사이에 흘렀다. 물론 팀장 은 운전하느라 내가 식은땀을 흘리던지, 다리를 떨던지 관심이 없겠지만 … 내가 게이이긴 해도 아무남자한테나 이런 감정을 느끼진 않는데. 아 - 아마 내가 최시원 인터뷰 때문에 과 민반응 한 걸 거야. 응, 그렇지 않고서야 팀장한테 이런 감정을 느낄 리가… 팀장, 가만 보 면 턱선도 날카롭고 콧대도 높은 게… 꽤 잘생겼다. 아아, 드디어 내가 미친 건가. 속으로 내가 미친 거 같다며 나를 가라앉히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팀장이 운 전을 하며 “왜 그래요.” 라며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는다. 뭐지, 왜 난 이 남자를 보며 갑자 기 두근거림을 느끼는 거냐고! 여자들은 운전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던데 내가 갑자기 여자로 변하기라도 한 건가. “팀장님, 여자 몇 명이나 사겨 보셨어요?”


“네?” 갑자기 묻고 싶었다. 팀장은 여자도 많이 사귀어 봤을 거 같은데. 하긴 저 얼굴에 여자가 없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상한 말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 물음이 팀장도 기가 막혔는지 네? 라며 되묻는데… 진짜 심장이 미쳤나보다. 저런 팀장도 잘생겨 보이니, 참 나. “여자 몇 명 사겨 보셨냐구요.” “한… 10명 정도… 갑자기 그걸 왜 물으시는 거죠?” 생각 외로 적다. 난 적어도 스무 명은 될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에이 뭐야. 팀장이랑 내가 사귀면 내가 손해겠구나…. 어머! 내가 미쳤나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혁재! “팀장님은 여자 진짜 많을 거 같았는데 의외네요.” “그런가요?” “네, 처음 봤을 때 여자 여럿 울렸을 거 같다고 예상했었거든요.” “음 … 저 나름 순정남인데, 혁재씨는 몇 명이나 사겨봤습니까.” “전 세 명밖에 없어요~” 물론 그 세 명이 다 남자이긴 하지만, 괜히 여자친구가 남자친구한테 난 남자 사귄 적 몇 번 없어~ 라는 멘트가 된 것 같아 이상했다. 분위기도 괜히 민망해진 거 같기도 하고 …. 나만 이상하다고 느낀 게 아니라 팀장도 조금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다 왔네요.” “이혁재씨 먼저 내려요, 전 주차해야 돼서요.” “아, 그럼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혹시라도 연예인이 기자보다 먼저 와있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곤란하니 내가 먼저 올라갔는 데… 이런, 연예인이 먼저 와있었다. “어머, 먼저 와 계셨네요.” “아, 이솔잡지 이혁재 기자… 맞죠?” 내 이름을 최시원이 불러줬다! 대박! “네- 실물이 훨씬 더 조각이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우선 어색한 기류를 없애려고 최시원씨 칭찬을 간략하게 했는데, 더 어색해진 것만 같다. “음… 우선 인터뷰 하기 전에 뭐 시킬까요?” “네, 전 카페모카요.”


최시원, 카페모카 좋아하는구나! 메뉴판도 안보고 카페모카를 시키는걸 보니 …. 그럼, 난 달 달한 내 사랑 카라멜마끼야또~ “저기, 카페모카랑 카라멜마끼야또 한 잔 주세요.” 주문을 하고 오는 나를 최시원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혁재씨, 제가 뭐 하나 알려드릴까요?” “네?” “저… 사실 게이에요.” 이 남자…! 내가, 이 이혁재가! 드디어 한건 잡았구나! “네?” “근데, 이걸 왜 말한 거냐면 저 혁재씨한테 첫 눈에 반한 거 같아서요.” 내가 게이이긴 해도 이런 적극적인 남자는 처음이다. 게다가 만난 지 5분밖에 안된 사이에 이렇게 대놓고 내게 관심 있다고 말하니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아… ” “혁재씨는 저 어때요?” 대담하기까지 하다. 대낮에 이런 카페에서 대놓고 자긴 어떠냐고 묻는다니, 이 남자 정말 배우 맞기는 한 거야? “저… 사실 저도 게이이긴 하지만 전 시원씨 같은 남자는 좀 부담스러워서… 죄송해요.” “푸흡, 저 혁재씨랑 사귀자는 말 한적 없는데요?” 뭐야 이 남자! 날 놀린 건가!? 방금 물은 말은 무슨 뜻으로 물어본 건데! 어?! 최시원이 놀린 말에 혼자서 온갖 생각을 다하며 죄송하다 대답한 게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 개진 느낌으로 최시원씨 앞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니 저 밑에서 이동해팀장이 올라온다 . 팀 장니임- 이 사람이 저 놀려요. “그럼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냥, 정말 저 같은 남자 어떤지 물어본 거예요. 기분 나빴어요?” “됐어요.” 최시원이 말장난 좀 걸었다고 내가 너무 금세 틱틱 거리는 거 같다. 나도 모르게 틱틱 거린 말투가 툭 하고 튀어나와서 좀 당황했지만 최대한 난 멀쩡하다는 모습을 유지하려고 포커페 이스를 맘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이솔잡지사 이동해기자라고 합니다.”


“아니에요, 덕분에 혁재씨랑 좀 즐거웠습니다. 최시원이라고 합니다.” 뭐? 뭐가 즐거워? 난 하나도 안 즐거웠거든 이남자야!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최시원 을 쳐다보자 최시원은 팀장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게 눈길을 주며 능글맞게 웃었다 . 변 태 같은 놈! 그런 최시원을 내가 짜증난다는 듯 쳐다보고 있자 이동해 팀장이 날 째려본다. 당신은 왜 날 째려보는 건데! “여튼, 팀장님까지 오셨으니 인터뷰를 좀 시작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자기가 언제 날 열 받게 했냐는 듯이 나를 향해 윙크까지 한다. 너 연예인만 아니었어봐! 진짜 내가 한 대 때렸을 거야! 연예인이라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한참을 이번 영화와 드라마 차기작에 대해 인터뷰를 하자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 다. 다음 스케줄을 위해서 이만 가야하는 최시원에게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라는 형 식적인 인사를 건네자 최시원은 전혀 형식적이지 않게 내게 자신의 명함을 주며 자기가 나 중에 연락하면 받아달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래도 최시원은 언제까지나 연예인이었기에 난 그의 명함을 버리지 않고 내 지갑에 넣어두 려는 순간, 이동해팀장이 그 명함을 뺏어 최시원 앞에서 보란 듯이 찢었다. 그리고는, “죄송하지만 사적인 관계는 사절입니다.” 라며 내 손목을 잡고는 끌고 내려갔다. 웃기는 남잘세! 자기가 내 애인도 아니고 말이야! 어이가 없다는 내 표정을 싸그리 무시하고는 나를 차 안에 구겨 넣고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오늘 처음 만났어요. 그건 그렇고 팀장님! 그래도 그렇지 연예인이기 전에 사람한테 그렇 게 무시를 주는 거 솔직히 좀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뭐 잘못했습니까?” “최시원도 사람인데 어쩜 그래요!” “최시원 만날 거면 차라리 나랑 만나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자기랑 만나라니, 이동해 팀장님. 그거 얼마나 위험한 얘긴지 알고 계 세요? 당신은 노멀이잖아, 난 진짜 게이라구요! 당신이랑 만나라면 만날 수도 있는 그런 남 자에요. “이동해 팀장님, 뭘 모르시나본데” “이혁재씨 게이인거, 알고 있었습니다.”


뭐?! 어떻게? 설마 내 뒷조사 까지 한 건가. 아니, 아님 이동해 팀장도 게이인가, 설마 그 런 건 아니겠지. “어떻게…!” “저번에 홍대 바에 갔다가 이혁재씨를 봤을 뿐입니다.” 헐. 진짜 사실이었다. 무슨 게이 나라에 온 것만 같다. 최시원도 게이, 이동해도 게이, 나도 게이. 꿈과 사랑이 자 라는 게이월드 뭐 이런 건가. 아님 몰래카메라로 게이페스티벌 뭐 이런 건가. “지, 진짜 그게 사실이에요?” “난 동성애자이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

안될 이유라기보다도 당신 같은 잘난 남자가, 어디 내놓아도 부럽지 않을 그런 남

잔데…. 솔직히 내가 여자는 아니지만 당신같이 능력 있는 남자를 게이로 살게 하기엔 너무 아까운거 같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전 게이바에서 이동해팀장님 만난 적 없는데요?” “만나지 않았으니까요. 단지 바텐더랑 얘기하는 혁재씨를 봤을 뿐입니다.” 아마 바텐더를 얘기하는 건 영운형을 얘기하는 거 같다. 내가 자주 가는 홍대 바 바텐더로 유명한 형인데 내가 게이로써 첫 사랑이기도 한 영운형. “아….” “여기서 솔직히 다 말해도 됩니까.” “네? 네…” “전 이혁재씨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그렇구나… 가 아니라 뭐? 첫눈에 반했다고? 나한테? 이 남자 알면 알수록 점점 무서워지 는 것 같다. 아니, 첫눈에 반했으면서 여태껏 고백도 안하고 뭐했데. “첫눈에 반했으면서 왜 고백도 안했어요?” “이혁재씨는 … 절 별로 안 좋아하셨으니까요.” 이거이거, 꽤 소심한 구석도 있는 게 귀여운 거 같다. 사귀게 되면 잘 골릴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요?” “이혁재씨, 나랑 사내연애 해볼래요?” 꽤 대담한 구석도 있는 거 같고, 적당한 재력과 적당한 능력, 그리고 과하게 잘생긴 얼굴. 이 남자, 보면 볼수록 끌리는 거 같다. 나 이혁재, 드디어 3년 만에 사랑을 다시 시작해 보


는 건가?

***

♬♩♪ 회사에 보고해야 할 프레젠테이션을 훑어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 이동해팀 장과 사내연애를 시작한지, 최시원과 인터뷰를 하고 헤어진 지 딱 일주일이 지난 점심때였 다. “여보세요?” “혁재씨! 나 기억해요?” “최…시원씨?” “어! 기억하네요? 히히” 나 같은 일개 연예부 기자가 최시원같이 유명한 연예인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임에도 불 구하고 최시원은 내가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게 좋은지 히히 라며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웃 음으로 답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혁재씨 오늘 점심 비어요?” 점심… 이동해랑 먹기로 했는데…. “아, 같이 먹으려구요?” “네, 예약도 다 해놨어요.” 이를 어쩐다! 예약도 해놨다니, 약속을 거부하기도 허락하기도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우선 알겠어요.” “그럼 그때 만났던 카페 있죠? 거기로 12시 반까지 나와요.” 그래도 연예인과의 약속인데 연예부 팀장이 허락해주겠지 라는 미안하고도 난감한 마음을 가지고 팀장실로 들어가자 이동해 팀장이 활짝 웃으며 왔냐며 반겨준다. 당신이 그렇게 웃 으면 난 더 미안해진다구요…. “팀장니임….” “뭐야, 왜 그래. 뭐 잘못한 거 있어?”


내가 며칠 안 되는 연애를 하면서 느낀 건데 이 남자, 날 파악해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는 거 같다. “네…. 오늘 급한 약속이 생겨버려서….” “점심?” “네….” “그럼 나랑 약속은 저녁으로 미루지.” “진짜, 괜찮으세요?” “나 그런 거로 쉽게 삐지는 남자 아니야.” 자신은 그런 걸로 쉽게 삐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봐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요. 벌 써 얼굴에 나 삐짐 이라고 써놓고 안 삐지기는 무슨. “팀장니임- 삐지지 마요.” “나 그런 거로 안 삐진다니까요?!” 이봐이봐, 삐질 줄 알았어. 팀장이 삐지면 나오는 습관이 괜히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데 지금이 딱 그렇다. 크큭 아 이팀장 귀여워서 어쩜 좋아. “팀장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좋을 대로 하세요.” 이 남자, 진짜 삐졌다. 연애 이후로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선 말을 놓았었는데 진짜로 삐졌 을 때 나오는 존댓말까지 나왔다. 아 이를 우째. “팀장님….” “이만 나가보세요.” 이젠 거들떠도 안보고 서류에 푹 파묻혀서는 나가랜다. 이팀장 삐진 모습을 두고 내가 어떻 게 나갈쏘냐! 두 주먹 불끈 쥐고 팀장에게 볼 뽀뽀를 했다. “쪽-” 하는 ���망하면서도 귀여운 소리가 팀장실을 가득 메우자 이동해팀장은 어지간히도 놀랬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나 이혁재, 이래 뵈도 게이바에서 까칠하기로 유명한데 이동 해 팀장이랑 사귄 뒤로 인격체가 바뀌었나보다. “무, 무슨…!” “팀장님 삐지지마요!” 나 역시도 이동해 팀장만큼 놀래고 부끄러웠나보다. 뽀뽀하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이 렇게 후다닥 뛰어나오는걸 보니, 부서에서 팀장실 내부가 안 보이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최시원씨!” 12시 반까지 되려면 아직 5분이나 남기고 도착했는데도 약속장소에는 최시원이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남자 모양새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언제까지나 유명한 배우였기에 차마 큰소리로 부르진 못하고 슬그머니 다가와서 귀에 대고 최시원씨! 하고 외쳤다. “어? 왔네요!” 손에는 또 뭘 들고 온 건지 한손엔 핸드폰, 다른 한손엔… 장미꽃? “웬 장미꽃이에요?” “아, 이거 혁재씨 주려구요, 혁재씨랑 장미랑 잘 어울리거든요.” 이런 남자가 게이라니, 우리나라 여성이 알면 땅을 치며 후회할 소리다. 원래 장미 같은 선 물은 여자한테 주는 건데…. “아 … 고마워요, 향이 좋네요. 우선 날 위해 샀다니 고맙게 받으며 향을 맡았는데 싱싱해서 그런 건지 장미 특유의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향 좋다.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고맙다고 하니 최시원씨도 보조개가 패 인 웃음으로 답했다.

장미꽃을 들고 최시원씨가 안내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는데,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라 는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 최시원씨가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날 최시원씨라고 부를 거예요?” “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시원아,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음….” 갑작스레 호칭을 바꾸라니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만 같았다. 최시원씨가 나보다 두 살 더 어리던데…. 시원아 라고 부르기엔 너무 편한 것 같고. “시원아, 이건 너무 편하잖아요.” “난 혁재씨가 날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시원씨가 날 먼저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럼 저도 편하게 대할게요.” 먼저 편하게 대하라며 웃으면서 권하자 뭔가 맘에 걸린다는 표정으로 잠깐 인상을 찡긋 했 다가 이내 풀고는 내게 말했다. “그럼 둘이 같이 말 놔요.”


“가, 같이요?” 이 남자…. 방송에서 보는 거랑은 완전 차원이 다르게 뜬금없다. 물론 내게 편하게 대해준 다면야 난 좋지만, 그래도 연예인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이래도 되나 싶다. “그럼 내가 먼저 말 놓지 뭐, 혁재형!” “… ㅅ,시. 음… 시원아” 시원아- 한 마디 하기가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다. 어리긴 해도 확실히 연예인이라서 그런지 포스가 느껴진다고 할까나. ㅅ,시원이… 팬들은 말 잘 놓던데…. 왠지 그들이 존경 스럽게 느껴진다. “근데, 너 배우가 나 같은 일반인한테 말 놔도 돼?” “뭐 어때, 앞으로 친해질 건데. 그치?” 하…. 시원이랑 있으면 왠지 이동해팀장 몰래 바람피우는 느낌이다. 아마 지금 내가 시원이랑 점 심 먹느라 자신의 약속을 깬걸 알게 되면 뒤집어 질지도. 이런 저런 고민과 걱정으로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시원이가 어디 안 좋아 ? 불편한가 ? 라며 내 안색을 살핀다. 응 시원아… 나 지금 불안해. 불안해서 다리까지 떨고 있자 시원이 가 큼지막한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며 ‘열은 없는데?’ 라고 한다. 이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시원ㅇ… 헐, 망했다. 이동해 팀장이다. “이혁재?” 헐, 이번엔 얼굴까지 알아봤다. 아오! 내가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생각해보니 여긴 이 동해 팀장이랑 연인으로써 첫 데이트를 한 곳이다. 이혁재 니가 드디어 간이 배 밖으로 나 왔구나. 사귄지 일주일 만에 바람피우는…이 아니라 난 바람은 안 폈지. 맞아, 내가 최시원 이랑 연인사이도 아니고? 난 떳떳하다구! “아… 팀장님, 점심식사 하시러 오셨나 봐요.” 어색하게 웃으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옆에 있는 최시원을 위아래로 쓰윽 훑어본 다. 그리고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날 향해 몸을 튼다. “둘이 점심 먹으러 왔나보지?” “아… 네.” “최시원씨, 제가 그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동해 이 남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앞으로 이동해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지기 까지 한다. 제발 내 기자인생만큼은 지켜주세요. “뭘 말하시는 거죠?” “사적인 관계는 사.절. 이라고.” 이팀장 눈에서 내가 신입사원 면접 보러 갔을 때의 그 이글아이가 되살아나는 거 같았다. 그런 이동해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최시원은 자신의 큰 키를 이용해 이동해를 내리깔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서 죽어나는 건 나 혼자였다. “둘 다 그만ㅎ…” “형, 이 사람이랑 무슨 관계야?” “이혁재, 최시원이랑 무슨 관계야?” 둘 다 그만하라며 손을 내뻗으려는 차 둘이 동시에 날 쳐다보며 서로 무슨 사이냐고 물었 다. 한사람씩 물어봐! “음….” “...” “...” “이동해 팀장이랑은 애…인 관계고,” “...” “...” “시원이랑은 좋은 형 동생 사이에요.” 두 사람의 눈치 아닌 눈치를 보며 조근조근 말하자 이동해가 ‘우리 이런 사이거든?’ 이란 초딩스러운 눈빛으로 자신보다 키가 큰 최시원을 쳐다봤고, 최시원은 ‘혁재형이랑 나랑 말 도 놨거든?’ 이라며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비추었다. “팀장님 - ” “혁재씨는.” “...” “회사 끝나고 봅시다.” 하… 좇됐다, 진짜. 오늘 일진이 왜이래 진짜아- 오늘 나 죽이는 날이냐!

나 혼자 어색함에 휩싸여서는 꾸역꾸역 점심을 먹고 최시원은 나중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 었다. 난 나중에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

회사에 들어와서는 보이지도 않는 팀장실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찔끔찔끔 업무를 보다보니 어느새 퇴근시간, 7시가 다 되었다. 이제 이동해팀장이랑 얘기할 시간이 다가온 건가. “오늘은 이만 하죠, 다들 수고하셨어요.” 이팀장이 퇴근시간을 알리는 멘트를 날리자마자 나는 팀장이랑 둘이 얘기하기가 겁나 빛의 속도로 서류을 챙겼다. 걸음아 나 살려라. “아, 이혁재씨는 잠깐 남으세요.” 빛의 속도로 서류를 챙기는 날 본건지 이팀장은 내게 남으라며 손짓을 했다 . 그런 나를 보 고는 부서사람들은 ‘혁재씨 오늘 야근인가봐… 어쩜… 그럼 수고해!’ 라며 내 어깨를 톡톡 두어 번 두들기고는 우르르르 빠져 나갔다. 연애 전 사귀게 되면 잘 골릴 수 있다고 다짐했 던 내 바램은 어디로 도망을 간 건지 연애한 뒤로 난 이동해한테 잡혀 사는 거 같다. “이혁재, 우리도 퇴근하자” 이제야 자기가 봐야할 서류를 다 챙긴 건지 검은 가죽 서류가방을 들고는 뚜벅뚜벅 걸어 나 온다. 평소엔 멋있게만 느껴졌던 저 걸음이 오늘따라 무섭게 보인다면 그건 내 착각인걸까. “티, 팀장니임- ” “왜 그래?” 입만 웃고 눈은 정색을 하며 날 쳐다보자 이동해 얼굴이 화가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 해씨… 나 무서워요. “동해씨이-” “우선 나가서 말하자고.” 내가 징징대며 부서 밖으로 못나가고 있자 결국 ‘개’정색을 하며 나오라고 짜증을 낸다. 아, 오늘은 결국 그 필살기를 써야 하는 건가. 그 필살기란 이동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인데, 내가 고백 받은 첫 날 이 말을 했더니 아주 흐물흐물 거리면서 미치는 말이었다. 그 말은… “오빠-” 였다. “...” 평소 같으면 재잘재잘 말했을 때인데 오늘은 이팀장이 무섭게 보여서 그런지 입도 굳었나


보다. 입이 자석마냥 딱 닫혀서는 도통 열리지를 않는다. “동해씨…” “내가 최시원이랑 사적으로 만나지 말랬지.”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자마자 내 목덜미를 휘어잡고는 거친 키스를 한다 . 첫 키스를 이 렇게 하게 될 줄이야…. 윽, 아무리 내가 미워도 입술을 잡아 뜯지는 말라고! “흐읏- ㅈ,잠깐만 숨!” “시끄러.” 얼마나 많이 했으면 이런 고도의 기술이 나올 수가 있는지 키스를 하다가 흐응 - 하는 비음 까지 흘러 나왔다. 아, 부끄러워 죽겠다고! “악!” 한참을 농도 짙은 키스를 하다가 호흡 곤란 때문에 숨이 막혀 등을 쳐도 반응이 없어서 결 국 이동해의 아랫입술을 콱! 하고 깨물어버렸다. 너무 세게 물었는지 이동해도 악! 하며 내 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니까 나도 숨 좀 쉬고 하자고! “코로 숨 쉬라고!” “안 쉬어지는 걸 어떡하라구요!” 아니, 내가 키스를 못해서 코로 숨을 못 쉬겠다는데 코로 숨을 쉬라고 강요하면 나더러 어 쩌라는 건지. 키스 못해서 더럽게 미안하다! 사실 지금 이동해팀장 차에 타고 있는 이유가 싸우려고 탄 게 아니라 오늘 점심 일에 대해 서 해명을 하려고 탄 건데, 소리만 버럭 지르고 차에서 내려버렸다. “야, 어디가!” “버스타고 갈 거다! 왜!” 나도 어지간히 성질이 났었는지 한 번도 이동해한테 말을 놓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 차장을 나가면서 버스를 타고 갈 거라며 반말로 소리를 질렀다. 그니까 누가 호흡곤란 일으 키랬냐고! 주차장을 도망치듯 벗어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멀뚱히 서 사람들에게 섞인 채로 기다리는데 익숙한 외제차 한 대가 와서 드라마처럼 내 앞에 섰다. 이동해 차잖아? “야, 셋 셀 동안 타라” “싫거든요!” “하나,”


“...” “둘” “...” “셋” “아씨!” 이게 연애가 맞는지 아님 앙숙관계인지 분간이 안 간다. 지난 일주일간 부서사람들과도 친 해졌는데, 아니 심지어 그 무뚝뚝하던 조대리와도 친해졌건만 같이 연애를 하는 이동해와도 아직까지 서로 얼굴만 봐도 으르렁 거리기 바쁜 것 같다. 이 밉상! 속으로 온갖 욕을 다해도 결국 이동해가 셋- 할 때 차를 타긴 탔지만 … 내가 진 것 같다. 아니지, 내가 진 게 아니라 져준 거야. 암- 그렇고말고. “어디로 갈래” “뭘요.” “왜 또 존댓말이야.” “그럼 뭐라 해요.” 온 점으로 딱딱 끊는 듯한 말을 주고받자 이동해가 짜증이 난건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 다. 아니, 화낼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소리를 질러? “아깐 말 놨잖아!” “ㄱ,그…그건 화나서 그런 거잖아요!” “최시원한테도 말 놨잖아!” “...” “애인한테는 존댓말이냐!” 이 소심함, 레스토랑에서 반말 쓰는 걸 또 들었는지 차안에서 완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데… 아, 마음이 약해진다. “아니이… 그게 아니라아- 걔랑도 오늘 처음 말 놨어요….” 내 특유의 말투 나왔다. 미안하면 나오는 말 끝 늘이기. 이동해도 이 버릇 알 텐데. 버릇을 고치든가 해야지, 원. “풉” “왜! 왜 웃어요!” “야, 너 완전 웃겨. 그리고 말 놓으라고.” “나 안 웃겨요! …가 아니라 나 안 웃기거든?!” 또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쓰려다가 이동해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걸 눈치 채고는 금 세 ‘가 아니라-’ 라며 말을 돌렸다. 말을 돌린 나를 보더니 빙긋 웃고는 우리 혁재 말도 잘


듣지- 라며 내 앞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 쓰담쓰담 거린다. 내가 니 애완동물이냐! 이번에 잘못 자른 내 뱅 앞머리가 귀엽다는 듯, 천성적으로 붕 띄워진 머리를 쓰담쓰담 거 린다. 앞머리를 빨리 기르든가 해야겠구만. “이혁재, 어디갈래? 집, 레스토랑, 호텔, 영화관.” 뭐야 중간에 아무렇지 않게 넣어 놓은 호텔은! 이 변태! “호텔이 거기 왜 들어가!” “뭐야, 뭔 생각을 한 건데. 난 호텔 커피숍 말한 건데?” 헐…. 혼자 변태됐다. 아니 말할 거면 정확히 말하던가! 한 단어만 덩그러니 떨구어 놓으면 이상 한 게 당연하지! “음… 동해씨 집으로 가자.” “집?” “응, 집 궁금했거든.” 별게 다 궁금하다는 눈빛을 내게 보내며 달리던 길에서 U턴을 해서는 자신의 집으로 간다. 오, 진짜 가는 건가! 두근두근 거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와는 정 반대의 곳에 있는지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 는 오피스텔이었다. 확실히 집안이 빵빵하긴 하구나. 나도 부족할 것 없이 사는데, 오피스 텔이 너무 고급으로 보여서 그런지 괜히 기가 죽는 것 같았다. “동해씨, 혼자 사나 봐요?” “쓰읍- 또 존댓말” “아, 근데 동해씨라고 부르면 자연스레 존댓말이 튀어 나와요.” 동해씨- 가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여서 그런지 동해씨를 먼저 말하면 뒤에 반말쓰 기가 영 불편해 작게 투덜거렸더니, 이 남자 어처구나 없는 제안을 한다. “그럼 어차피 동갑이니까 반말해. 이동해- 이렇게.” “ㅎ,헛소리 마요! 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뭐 어때, 회사 밖에서도 일할 거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 그냥 말해봐. 야- 라고.” 야- 라고 했다가 갑자기 너 해고야! 이러는거 아니야? 혹시 내가 피해 입을까 두려워 말을 놓지도, 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얼른 말하라며 이동해가 재촉한다. 자기한테 반말


쓰는 게 뭐가 좋다고 자꾸 재촉하는 건지. “ㅇ, 야...” “잘하네!” “아씨, 너무 불편해요.” “뭐 어때. 처음이여서 그런 걸 거야, 좀 쓰다보면 편해질 걸?” 하여튼 팔랑귀. 이동해가 좀 더 쓰다보면 편해질 거라는 속임에 ‘그런가?’ 하고 금세 넘어 간 것 같다. 아 씨,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동해ㅆ…가 아니라… 야아-” “왜?” “나 방 구경 좀 해도 되ㅇ…?” 또 또 존댓말. 이건 진짜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다. 습관을 넘어서서 ‘본능’. 이동해는 뭘 만드는 건지 부엌에서 나오질 않아 혼자 거실에 있기 뻘줌해 방 구경 좀 해도 되냐고 작게 물었더니 그래도 된다는 표시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우와-” 이동해 방에는 이동해가 만든 건지 엄청난 양의 책들이 있었는데 겉모습만 보기엔 일밖에 모를 사람 같은데 이런 취미가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한 책장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만 쭈욱- 있는걸 보니 이 남자 취향이 베르나르베르베르인가보다. 난 파울로 코엘료가 좋 던데…. “동해야…?” 끔찍할 정도로 어색한 목소리로 꾸역꾸역 동해야 라고 불렀더니 그런 내 목소리가 듣기 좋 은 꾀꼬리라도 되는 것처럼 부엌에서 뭘 만들던 이동해가 활짝 웃으면서 나왔다 . 옷 좀 갈 아입고 하지, 저러다가 정장에 음식 튀면 어쩌려구…. “뭐 만들고 있었어?” “아, 비밀.” 뭘 만드냐는 내 물음에 쑥스럽게 웃더니 ‘비밀’ 하며 짧게 말하고는 나보고 정 심심하면 TV 라도 보라며 소파에 털썩 앉혀놓고 ‘조금만 기다려~’ 라며 자기 혼자 부엌으로 쏙 들어갔 다. 뭔가 굉장한 요리를 만들 거 같은 느낌. 큭큭 한참을 소파에 앉아 멍하니 티비만 보고 있는데 부엌에서 고소한 크림향이 났다 . 어 ! 크림 소스스파게티인가보다! 뭐야, 몰래 만들 거면 향도 안 나게 해야지. “다 만들었어! 이리와!”


부엌에 들어간 지 약 30분 만에 만든 크림소스 스파게티는 생각보다 꽤 그럴듯하게 보였 다. 이 남자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웃긴 거 같다. 처음 면접관으로 만났을 땐 이 남자랑 이런 사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 그게 겨우 2주전 일이라니, 맙소사. “오- 당신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었어요.” “또, 존댓말!” “아 진짜! 반말 불편해요!” “하… 그럼…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네? 풉, 으하하항!” 가위바위보라니, 이 남자 사귄 이후로 지나치게 의외인 모습을 많이 보이는 거 같다. 면접 관일 때의 눈빛은 이글이글거렸는데 그런 눈빛은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요즘의 눈빛들은 부 드럽기 그지없는 내 앞의 크림소스스파게티 같은 눈빛뿐이다. “뭐야, 왜 웃어.” “아, 아니에요…. 후회안하죠?” “어, 한다. 가위 바위 보!” 아싸!!!!! 난 보자기, 이동해는 주먹이다. 자기가 진 걸 알고는 ‘남자는 주먹이잖아!’ 라고 소리치는 데, 내가 주먹으로 내라고 했냐? 주먹 낸 니가 바보지~ 얼레리 꼴레리~ “그럼 전 존댓말 쓸 거예요.” “아 씨….” “자, 스파게티 식겠어요. 얼른 먹어요.” 승리에 찬 얼굴로 포크를 들고선 얼른 먹으라고 권하자 날 찌릿 - 하고 째려본다. 째려보면 어쩔 건데요. 얼씨구? 눈빛으로 잡아먹겠다?

***

저녁을 먹고 둘이 같이 소파에 나는 앉아있고, 이동해는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었는데 그 때 내 핸드폰이 띠링띠링 울리기 시작했다 ♪♩♬ “여보세요.”


“혁재야, 너 오늘 야근이니?” 아차, 엄마한테 연락하는 걸 잊고 있었다. 이건 내가 마마보이여서가 아니라 단지 날 기다 리실 혼자계신 엄마가 걱정되었던 것 뿐. “아, 엄마. 응, 나 오늘 야근이야.” “그래? 아이구, 진작 연락 좀 주지. 저녁식사도 다 차려놨는데….” 아…. 엄마한테 너무 죄송해진다. 내가 너무 엄마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나보다. 지금이라도 갈까? “엄마, 나 늦을지도 몰라요. 먼저 주무세요.” “응, 그래.” 지금이라도 갈까? 하는 마음은 통화를 하다가 이동해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생각이 들 었었냐는 듯이 쏙- 들어가 버렸다. 이런 남자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가겠어. “누구야? 장모님?” “얼씨구, 누구 맘대로 장모님이에요?” “너랑 결혼할 거니까-” 사귄지 겨우 이주일 되었으면서 장모님이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 동해의 결혼 발언을 듣자마자 ‘웃기시네!’ 라고 할 뻔 했지만 그랬다간 괜히 틀어질 것만 같 아 하려던 말을 쑥 집어넣고 입을 꾹 다물었다. “동해씨” “응?” “만약에… 내가 다른 남자랑 바람나면….” “...” “어떻게 할 거예요…?” “… 바람피우기만 해봐.” “...” “대답 안하냐.” “… 이동해씨도” “...” “… 바람피지마요.” “...” “… 피기만 해봐.” 내 딴엔 굉장히 진지하게 말한 건데 이동해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다. 내가 우습냐고! 왜 웃어! 라며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건만 이동해는 갑자기 내 얼굴을 폭 끌어당기더니 이내 입을 맞췄다.


“읍!” 오래 갈 것 같아서 눈을 꾹 감았더니 이내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떼어진다. 아… 응? 뭐야 , 나 방금 아쉬워 한 건가? 아쉽다는 느낌을 받은 건 내 착각인걸까. 자꾸만 이동해 입술에 눈이 가기도 하는 게… 착 각은 아닌 거 같다. 나 진심으로 이 남자가 좋은가봐. “이동해씨” “응?” “나 한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요.” “...” “나,” “...” “동해씨가 좋은가 봐요.” 갑작스런 내 고백에 놀랜 건 이동해도 마찬가지인지 이동해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감미롭게 보이던 눈웃음은 사라지고 커다래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놀래기는…. “다시말해봐.” “싫어요…” “얼른.” “부끄럽다니까요.” “안 말하면.” “...” “잡아먹을 거야.” 자, 잡아 먹는다고?! 이 남자가 못하는 말이 없어!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진짜야 얼른.” “...” “어허!” “...” “하나” “...” “두울” “...” “세..ㅅ” “조, 좋아해요!”


미치겠다 이 남자! 하여튼 주책이야! 내가 그런 소리를 왜 해서… 괜히 했다. 차라리 그냥 나 혼자 속으로 생각만 할 걸 그랬나보다. “내가 다음부터 이런 얘기 하나봐라.” “사랑해.” “네?” “나도 답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이동해씨…” 갑작스럽다. 이런 고백 익숙하질 않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괜히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다. 두근거리는 건가? 아닌데…. “이동해씨” “왜에.” “심장이 간질거리는 거 알아요?” “간질?” “응, 두근거리는 건 아닌데 심장을 긁지도 못하고 그냥 간질간질 하는 거요.” “아….” 심장을 긁을 수 있다면 아마 긁었겠지만 긁을 수 없으니까, 간질간질… 마치 심장박동이 너 무 빨리 뛰어서 간질거리는 것 같다. 아 맞아, 너무 빨라서 간질거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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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만 가봐야겠어요.” “벌써?” “열한시에요, 집에 가면 열두시구.” “그런가….” “그래요. 내일 만나면 되잖아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게.” “네?” 데리러 가? 너무 멀 텐데? 게다가 정 반대 방향이고…. 이동해네서 우리 집까지 오려면 적어도 6시엔 일어나야 할 텐데… 내가 너무 피곤하게 하 는 건 아닌가. “피곤할 거예요.”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요, 회사에서 만나요.” “...” 또 또 저 표정, 입을 일자로 꾸욱 다물고선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저 표정만 하면 난 어떻 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기 보다는 괜히 약해진다고 할까? “그 표정 짓지 말라구요.” “...” “ㅇ,아... 알겠어요.” “내일 7시까지 갈게.” “…알겠어요.” 결국 졌다. 난 항상 이 남자한테는 약한 거 같다. 남한테 쉽게 져주고 양보하는 성격이 아 님에도 사랑해서 그런 건지 이동해한테는 한발 물러서는 게 당연한 것만 같다. “잘자요.” “못 데려다줘서 미안해.” “괜찮아요. 얼른 자요.” “응, 아 잠깐만.” 이제 집에 가려고 오피스텔의 엘리베이터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잠깐만 이라며 날 붙잡는 데…. “...!” “굿나잇 키스.” 굿나잇 키스… 이동해씨, 나 두근거리는 거… 이거 사랑 맞죠? 이동해는 이미 웃으면서 들어갔는데…. 난 한참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내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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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요?” “응, 얼른 타.” 벌써 몇 주째, 항상 아침7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이동해는 언제 온 건지 우리집 아파트 앞 에 신형 아우디를 주차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남잔지 참 잘났다.


“굿모닝 키스.” “네?” “얼른 해줘.” 굿모닝 키스를 해달라고 입술을 쭈욱 내미는데 괜히 짓궂은 장난을 쳐보고 싶었다. 눈을 감은 채 기다리는 이동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동해 입술위에 손가락을 얹고는 가만히 있었다. “풉” “...?” 내 손가락이 입술인지 알았는지 가만히 눈을 감다가 손가락이 입술위에 올라가자마자 입꼬 리가 슬며시 올라가는데 웃음을 참다가 결국 풉 하고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놀린걸 알아버린 이동해는 눈썹사이를 찡그리며 나를 내려다보는데 , 또 그 표정이다. 입술 꾹 다물고 빤히 쳐다보는, “아, 알겠어요. 다시 해줄게요.” 한참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쪽 하고 입술에 해주니, 꾹 다물던 입술을 풀고는 슬며시 풀고는 씨익 하고 웃는다. 으이구. “아, 동해씨. 오늘 나 약속 있어요” “무슨 약속?” “ㅊ, 친구랑요….” 사실 친구가 아니라 시원이랑 약속이었다. 저번에 이동해가 명함을 찢어버린 후에 결국 내 가 내 명함을 주었더니 이내 연락을 하며 저녁을 사겠다고 하는 거다.

-최시원과 문자 내용 [혁재형, 저 시원이에요^^] [아, 웬일이야?] [내일 저녁 시간 되요?] [저녁? 응, 왜?] [내일 저녁에 나랑 데이트 할래요?] [음.. 알겠어. 내일 회사 끝나고 문자할게] [네]


시원이가 친구는 맞으니까… 난 절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다! 바람 피지도 않았어! “이혁재” “네?” “바람피우는 거면.” “...” “죽는다.” ㅇ,이… 이 남자, 혹시 독심술 쓰는 거 아니야? “바, 바람이라뇨!” “그니까 피지마.” “안 펴요!” “믿는다 이혁재.” 사귄지 약 한달. 믿는다는 이동해의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시원이와의 약속이 맘에 걸린다. 바람피는 것도 아닌데도….

***

[시원아, 나 끝났어!] 회사가 끝난 뒤 이동해랑 인사를 하고는 회사를 나서자마자 시원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번에 갔던 레스토랑에 갈라나? [형, 그럼 제가 회사 앞으로 갈게요^^] 회사 앞? 안되는데… 이동해한테 들키면… 아니지, 난 이동해 몰래 바람피우는 게 아니니 까!

한 10분을 기다린 걸까, 낯선 빨간색 외제차가 내 앞으로 오면서 클랙션을 울렸다. 최시원? “형!” 역시, 근데 빨간색이라니… 취향이 참 독특한 거 같다. 설마 내부도 빨간 건 아니겠지.


“근데 우리 어디로가?” 안에 들어가면서 한번 주욱 훑어봤는데… 호피무늬 시트가 좀 눈에 띄긴 했지만 그 외에는 멀쩡한 내부였다. 다행이군, 빨간색이었으면 눈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바요” “바?” “네, 홍대에 아는 형이 하는데 갈 거예요.” “아…” 홍대 바로는 나도 많이 아는데… 연예인이니까 좀 다른 곳에 가겠지-? 라는 바램은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최시원이 데려온 바는 영운형이 하는, 나와 이동해 가 첫 만남을 가진 그 홍대 바였다. “여기?” “네, 아는 형이 바텐더로 있어요.” 설마 니가 아는 형이 내가 아는 영운형이 아니겠지? “형!” “오, 최시원. 오랜만이다.” 헐, 영운형이다. 아 미치겠네. 임마! 난 이 형이랑 ‘첫사랑’을 했었다고! “어? 이혁재?” “아, 형… 안녕?” 날 알아본 영운형이 최시원과 일행이라는 게 의외였는지 반갑다는 얼굴로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하… 민망하다…. “최시원이랑 아는 사이였어?” “응, 내가 혁재형 좋아해.” 뭐?! ‘어쩌다…’라고 말하려던 내 말을 쏙 들어가 버리고는 최시원은 실실 웃으며 자기가 짝 사랑 한다며 대답했다. 최시원, 너 아직 술도 안마셨는데 왜 그래. “그래? 이혁재 계 탔네.” “ㅇ,아… 아니야!” “뭐가, 혁재형 나 진짜로 형 좋아해요” 뭐라고?! 난 지금까지 날 보면서 관심이 있다는 둥 좋아한다는 둥 말하는 최시원이 장난치 는 건 줄로만 알았다. 근데… 진짜라니. 오 마이 갓이다. 니가 날 좋아하는 게 되면 난 지


금 바람피는 거야! “최션, 넌 진토닉?” “응” “혁재야 넌 깔루아 밀크?” “응” 최시원도 이곳에 어지간히 많이 와봤나 보다. 최시원한테 자연스레 진토닉? 이라고 묻는걸 보니, 영운형은 웬만큼 많이 마신 사람이 아니고선 이런 말을 안 하는데 …. “혁재형” “응?” 영운형이 칵테일을 만들어준 뒤 자신은 다른 손님을 받아야한다며 휙 사라진 뒤에 최시원과 내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만 흘러 괜한 칵테일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최시원이 불쑥 말 을 걸었다. “형 이동해씨랑 사귀는 거… 진짜에요?” “응? 응…” “음…” “...” “그럼” “...” “나랑 바람필래요?” 이런 당돌한 놈을 봤나! 대놓고 나한테 바람을 피자고 하다니, 임마 나 이동해씨랑 연애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됐거든 “야… 나 연애한지…” “그게 뭔 상관이에요.” “...” “나 꽤 괜찮은 놈이에요.” “...” “이동해씨에 비해 떨어지는 남자 아니라구요.” “최시원….” “나 어때요?” 야… 최시원이 이렇게 말해도 흔들리면 안 되는데…. 날 쳐다보는 최시원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계속 맘이 흔들린다. 이러지 말아야 돼. 이혁재 안 돼. “시원아”


“네” “바람 말고,” “...” “이런 말 이기적이게 들리겠지만.” “...” “나 힘들 때마다 옆에 있어주는 건 안 될까?”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내가 이동해랑 멀어져 힘들 때, 그때 날 잡아줘. 그땐 바람이 아 니라 진짜 연인이라도 괜찮아. “알겠어요.” “미안해…” “기다릴게요, 언제든지 와요.” “고마워.” 이동해씨, 당신 나한테 잘 해야 돼. 나 안 그러면 시원이한테 넘어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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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원과 그런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니라니깐!” “바람이라도 난건가보지?” “아니라고! 왜이래 진짜!” “그럼 지갑 안에 최시원이랑 사진은 뭔데” 사건의 발단은 최시원과의 데이트였다. 언제 찍었었는지 나랑 최시원이랑 둘이 다정하게 웃 으며 폴라로이드 속에서 마치 연인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진이 내 지갑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정 못 믿겠으면 최시원이랑 연락을 해보던가!” “핸드폰.” “자요!” “… 뭐야 이건.” 안 그래도 굳어졌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면서 내게 핸드폰을 던지다시피 건네주는데… 뭐 야 이건?! 최시원 번호가 단축번호 1번으로 설정 돼있다. 분명 최시원을 만나기 전까진 단 축번호 1번은 이동해였는데….


“오해에요! 난 이런 적 없어요!” “...” “진짜라구요! 믿어줘요!” “...” 믿어달라는 내 외침이 들리지 않는 건지 이내 이동해는 뒤돌아서 간다. 앞으로 영원히 앞모 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 마냥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 믿는다면서! 위선자야!” “...” 위선자라며 울부짖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 계속 걸어가던 걸음이 멈추고 뒤돌아선다. “...” “흐읍… 진짜 아닌데….” “이혁재” “...” “일어나.” “흐으… 아니라구요… 나 믿어줘요….” “...” 믿어달라며 무릎을 꿇고 이동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는데… 너무 서럽다 . 미친 듯이 서 럽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동해를 사랑했던 건가. “혁재야” “...” “우선 일어나.” “흐읍…” “최시원이랑 만나고” “...” “다시 생각해보자.” “뭘 다시 생각하자는 건데!” “...” “대답해.” “… 우리사이, 다시 생각해야겠다.” 믿었던 그가… 다시 생각하자고 한다….


***

“흐으… 이동해가….” “형, 취했어요.” “으흑… 시원아….” 이동해와 그렇게 헤어지고 열흘 ���, 결국 시원이를 불렀다. 미칠 듯이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서.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이동해’ 이 세 글자에 자꾸만 다시 새어나온다. 도무지 눈물샘이 말 을 듣질 않는다. “형, 이제 집에 가요.” “으흡,”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는데… 여… 여긴…. “동해씨?” 동해씨 오피스텔이었다. 최시원… 여긴 어떻게 알았지. “깼어?” “네….” “꿀물, 마셔.” 필름이 끊긴 건지 시원이한테 했던 말을 끝으로 기억이 없다. “동해씨….” “어” “혹시 어젯밤에 내가 무슨 말 했어요?” “아… 아니.” “...” “오늘 회사에 병가 냈으니까 좀 더 자.” “네….” 이상하다, 며칠 전 그렇게 끝낸 사이치고는 지나치게 정상적인 대화가 오가는 것 같다. 뭔 가 있다. 어젯밤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했기에….


“동해씨.” “어” “솔직히 말해줘요.” “...” “어젯밤, 내가 뭐라고 했었어요?” “...” “...”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미안해요” “어젯밤 1시 쯔음에 최시원한테 전화가 오더군.” “...” “혁재형이 많이 취했으니 데리러 와달라고, 자기는 데려갈수 없다면서.” “...” “그래서 최시원이 알려준 bar로 갔더니 웬걸, 니가 최시원 등에 업혀서는 인사불성 상태로 돼 있는 거야.” “...” “근데 이혁재, 너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아?” “…네.” “어떤 곳인데.” “우리… 처음 만난 곳” 미치겠다. 뭔가 있을 것 같다는 내 느낌이 정확했다. 진짜… 혹시라도 내가 해선 안 될 말 을 한건 아닌가. “기억하긴 하나보지. 여튼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나.” “무표정으로… 데려왔겠죠.” “아니.” “...” “최시원한테 한 대만 맞으라고 했어.” “...” “너랑 나, 이렇게 어색한 사이로 만든 게 최시원이니까. 그래서 한 대만 맞으라고 했어.” “그래도 연예인인데…!”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최시원이 먼저 말하더군, 미안하다고. 이혁재가 너무 좋아서, 그래 서 잠깐 미친 거라고.” “...” “한 대만 맞으라니까 또 순순히 볼을 내어주더군.” “...” “그리고 널 차에 태우고 가려고 하는데.” “...” “니가 울면서 나한테 그러더라고” “...” “내가 원망스럽다고, 미워 죽겠다고. 자기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서 너무 화가 난다고.”


“...!” 하…. 미쳤구나 이혁재. 내가 정말…. 해야 될 소리가 있고 하면 안 될 소리가 있는데, 그걸 구분을 못하고 그렇게 말하다니. “근데” “...?” “그렇게 날 원망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더군.” “...” “내가 너무 미운데도, 놓지를 못하겠다고. 자기가 혼자가 되면 받아준다는 최시원이 있는데 도 이동해를 못 놓겠다고.” “…동해씨” 진심이다. 동해씨가 이 얘기를 하자 비로소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 마냥 영영 안 돌아 올 것만 같던 필름도 돌아왔다. 근데 중요한건 이 진심이 동해씨한테 전해질까, 내 마음을 동해씨가 알아줄까. “그렇게 내 앞에서 말을 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놓겠냐.” “...” 최시원과의 그 사진 일은 내 칵테일 한잔으로, 정확히 말하면 취중진담 한마디로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근데,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다.

***

“이혁재, 가자.” “네? 어딜요?” 퇴근시간, 부서 사람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는 듯 사라진 뒤 이동해가 팀장실에서 나오며 다 짜고짜 가자며 팔을 끌어당겼다. 어딜 가자는 거야? “동해씨, 어디 가냐니까요?” “바” “네?!” “홍대 바” “거긴 갑자기 왜…?”


한참을 이동해 차를 타고 달렸을까, 익숙한 간판과 익숙한 입구가 보였다. “내려.” 덤으로 이동해의 굳은 얼굴도. “동해씨 여긴 갑자기 왜…?” “최시원 만날 거야.” “네?” “너네 둘,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그냥 두기 찝찝해.” “...” “여기서 완전히 정리해.” “동해씨” “최시원이랑 너랑 그냥 형 동생 사이라는 거, 그건 니 얘기에 불과해. 최시원은 안 그렇잖 아.” “...” “최시원 마음, 여기서 정리하라고 해.” “...” 여긴 왜 온 건가 싶었더니 최시원과 관계를 정리하라며 끌고 온 거였다. 시작한 게 없어서 정리할 것도 없는데…. “안녕하세요.” “아, 안녕.” “여기로 부른 이유, 넌 대충 짐작하고 온 거겠지.” 인사를 마치자마자 최시원에게 대뜸 짐작 하냐며 말하는 이동해를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 로 최시원이 쳐다봤다. “이동해씨,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요.” “...” “내가 혁재형을 짝사랑하긴 했는데, 그건 짝사랑뿐이어서 더 정리할 것도 없어요.” “니 마음.” “...” “접으라는 소리야.” “…이미 다 끝났어요.” “...” “혁재형이 이동해씨 때문에 울면서 술 마실 때.” “...” “그때 다 끝났어요.” 아….


나는, 내가 아픈 것 때문에… 시원이가 상처 받을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내 푸념을 들어줄 상대는 시원이 뿐이라… 시원이가 받을 상처는 미처 생각도 못했었다. “시원아….” “형, 전 괜찮아요.” “...” “나 이렇게 일찍 마음 접은 거 후회 안하게.” “...” “형은 웃으면서 연애해주면, 그게 나한텐 답인 거예요.” “…미안해.” “미안하긴…. 여튼 난 스케줄 때문에 먼저 일어날게요.” “잘 가.” 시원이가 내게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흔드는데… 그 미소가,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갔는데, 오히려 더 슬퍼보였다. “동해씨” “응” “우리, 앞으로 시원이가 자기 상처받은 거 후회 안하게.” “...” “한번 미친 듯이 사랑해 봐요.” “각오해. 사랑 그거, 진짜로 미친 듯이 할 거니까.” 웃었다. 시원이가 그렇게 가고, 시원이가 부탁한데로 행복하게 연애하자며 다짐하고 웃었 다.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게…

§ -번외-

그렇게 연애한지 어느덧 2년째, 말단 사원이었던 내게도 어느새 ‘대리’라는 명칭이 붙었고, 이팀장이던 이동해는 어느새 이 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막여우를 닮은 신입사원이 한명 더 들어왔다. 남자 신입사원이 들어와 환호를 해준 건 우 리 부서 내 유일한 여사원 수연씨 뿐. 대게 ‘연예부’ 라고 하면 여자 기자들이 많을 거라 예 상함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이상하게 남자 기자가 훨씬 더 많다. 난 어차피 애인이 있으 니 상관없지만 말이다. 신입사원이 들어온지 열흘쯤 됐을까, 목석같던 조대리님, 아니 이젠 조팀장님과 이성민씨와 약간 이상한 오로라가 풍기는 것 같다. 연예부 기자 2년 동안 늘은 건 글 솜씨가 아닌 눈치 뿐이니 사내연애쯤 쉽게 캐치할 수 있어진 것 같다. 사내커플 제2호가 생기는 건가.

또, 바에 놀러 가면 만날 솔로라며 징징대던 영운형에게 내가 정수를 소개시켜줬더니 둘이 언제 친해진 건지 이젠 주말 데이트 약속까지 잡는 것 같다. 둘이 오래오래 지지고 볶고 잘 사겨라!

그리고, 최시원. 시원이는 바에서 그렇게 헤어진 뒤 약 3개월간 연락이 뜸 하다가 우리 연예부 자칭 마스코 트 김대리님, 아니 김과장님. 여튼 김희철씨와 인터뷰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둘이 인터뷰 를 하고나서 내게 최시원이 문자를 보냈는데…. [형, 나 이번엔 진짜 내 사람을 만난 거 같아요. 오늘 인터뷰 해준 기자 누구에요?] 얼씨구, 얘는 아무래도 기자랑 결혼할 운명인 것 같다. 날 보고도 좋아한다느니, 그래놓고 이번에 또 김희철씨를 보고 이러니…. 자꾸 나한테 소개팅 시켜 달라 하는데, 임마! 나 김과장님이 랑 안 친하다고!

마지막,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동해씨. 최시원과의 지갑 사건 이후로 한동안 잠잠 하는가 싶었더니 얼마 전엔 이동해 때문에 싸웠 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동해 옷깃의 입술자국 때문에. 약 5개월 전부터 이동해와 나는 동거를 시작했는데, 동거를 한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만 취상태로 집에 들어오더니 침대에 풀썩- 하고 쓰러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자더라도 옷은 벗고 자야할 것 같아서 이동해 옷을 벗겨주려던 찰나. “이거 뭐야!!!!!” 이동해 와이셔츠, 정확히 하면 옷깃을 멱살 잡듯이 잡고는 사정없이 흔들자, 내 악에 받친 소리와 몸의 흔들림 때문에 술이 깬 건지, ‘왜 그래.’ 하며 자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


로 나를 쳐다보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내가 이 자국 뭐야!!! 라고 하자 ㅁ, 무슨 자국! 하며 얼른 자신의 옷깃을 확인하고 는 날 향해 돌아서는데…. “혁재야… 저건 오해야….” 라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더 큰 소리로 오리발 빼는 거냐!!! 라고 하자, 결국 이실직고 를 하며 회사 상사들과 노래방에 갔더라고 털어놓는 거다. 회사만 아니었어봐, 넌 그날로 너 죽고 나 살자다. 알았냐!?

벌써 29살.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이 시점에 우리들, 아니 나와 이동해실장은 나름 행복하고 즐거운 연 애 겸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종종 속상할 때가 있긴 해도, 이만하면 우리 나름 괜찮게 사 는 거 아닌가? 히힛. 앞으로 어떤 일이 다가올지 몰라도, 나 이혁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까지나 이동해의 연인으로 사는 걸 ‘맹세’합니다.


온통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웅성웅성한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들은 소리로는 하프타임인지 광고가 들리는 듯하다. 뭐 챙기랴- 사랴- 우물쭈물 하다 보니 벌써 전반전이 끝난 것 같은 데. 아씨, 사람들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자기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와서 응원하는 거 내 의지가 아니었단 말이야. 이리저리 치이면서 삐뚤어진 빨간 뿔 머리띠가 짜증나 머리에서 빼내고는, 어서 자리에 앉으려 혁재형과 동해형을 찾으려고 주위를 휙휙 살폈는데, “…뭐야..” 없다. 아니 없다, 없다고. 집에서 보자고, 아님 하다못해 음식점이라도 가자고 애원하던 나 를 (“규현아, 이런 날은 나와서 즐겨야지.”, “응, 그렇지. 이 머리띠 한 번 해봐. 으이구, 귀 엽네.” ㅡ 이런 식으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면서) 끌고 나온 장본인들이 없다고. 방금까지 옆에 있었는데? 대체 어디 간 거야! 이렇게 사람 많은데 왔으면 동생 하나쯤은 챙길 줄 알 아야지. 안 그래? 속으로 두 사람을 욕하고 씹고 원망하며 주위를 배회하면서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다. 진짜 그림자도, 머리카락 한 올도 안 보인다. 그 인간들 응원용품이란 용품은 모조리 두르고 다녀서 근처에 있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디 간 거야, 그 사이에!! “전화 안 받기만 해봐.” 안 받으면 나 다음 월드컵 때까지 삐뚤어질 테다. 단단히 각오하며 전화를 걸어봤지만, 최 신 댄스곡 한두 번 듣고 짜증나서 폴더를 거칠게 닫았다. 에라이, 이 사람들이 진짜 . 지금 일부로 이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둘 다 징하게도 안 받는다. 짜증남이 도를 넘어서자


금세 체념으로 바뀐다. 할 수 없지, 뭐. 이미 나온 이상, 나 혼자라도 제대로 놀아 보겠으. 다시 폴더를 열어 두 사람에게 문자를 보낸다. [ 나중에 봅시다 ] 진짜 나중에 볼 거야, 그럴 거라고. 내가 평소에 조금 막대하기는 했지만, 이게 뭐야. 이게! 평생을 괴롭혀 주겠어. 형들에게 복수할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 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역시 우글우글. 포기하고 빈정대던 생각을 버리니 이 북 적함도 꽤나 열정적으로 뜨겁게 느껴진다. 손에 들고 있던 반짝반짝 거리는 머리띠를 다시 끼고서 자리를 찾으러 뒤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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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 규현이 어디 갔어?” “뭐? 규현이 어디 간댔어? 어디 갔어, 얘가.” “야. 찾아야 겠다. 이제 후반 시작하잖아.” “동해야, 폰 들고 왔어?” “나 집에 두고 왔는데? 설마 너도 없어?” “바보야!! 그런 건 니가 챙겼어야지!!!” “내가 왜 챙겨!! 니가 챙겨!!!” 빨간색 선글라스를 끼고 빨간 티에 응원슬로건을 어깨에 걸친 남자와 , 뺨에 태극기 문신과 빨간 티를 입고 응원막대를 든 남자가 광장 구석에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다 . 경황으로 봐서는 규현이 그토록 찾았던 그 두 사람인 듯한데, 어째 점점 그들의 이야기는 동생의 행 방이 아니라 개인적인 말싸움으로 치닫는 듯하다. 어느새 규현은 점점 뒷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이 한 구석에서 투닥 거리고 있을 때 광장에 위치한 커다란 전광판에서는 광고가 끝나고 다시 월드컵 현장이 중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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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후반전 시작했네. 아씨, 제대로 보지도 못했잖아. 왔다갔다 거리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자리로 앉기 시작했다. 늦게 도착하기도 한데다 헤매기까지 해서 자리가 없어 보인다. 일부 로 이 뒤까지 올라왔는데.. 조금 더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니 어떤 남자 옆에 빈자리가 있 어 보인다. 혹시 자리가 있는 건가?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쪽팔려, 혼자서


이게 뭐야. “여기 자리 있어요?” “…혼자 왔어?” “네.” 저 인간은 왜 반말 짓거리야. 뚱한 얼굴로 보고 있자니 무심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멀 쩡하게 잘생긴 사람이 싸가지가 없네. 빨간 티에 애매한 금발을 한 남자는 고개를 까닥했 다. 뭔 뜻이야, 그건 또. 가만히 있으니 한마디 한다. “뭐해? 안 앉고.” “아, 예.” 그 고개까딱이 앉으라는 뜻이었어? 처음부터 말로 하면 될 것이지 왜 헷갈리게 그러는 건 지, 참. 그닥 유쾌하진 않은 기분으로 자리에 앉다가 그만 생각하던 걸 무심코 말로 흘려버 렸다. “참 싸가지 없다..” “…뭐?” “아니에요.” 무심코 나온 말에 당황해서 옆을 봤지만, 남자는 뭐라 말 했냐는 듯 되물을 뿐이라서 아니 라며 살짝 웃어주었다. 싸가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실례니깐. 솔직히 말해서 후환이 두려웠기도 하고. 남자가 싱겁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픽 웃었다. “월드컵 날 왜 혼자야, 친구 없어?” 웃고는 다시 뻔뻔한 얼굴로 묻는다. 주위가 응원소리로 시끄럽지만 바로 옆에 있는 터라, 들리기는 들렸다. 귀 옆에서 아주 잘~. 근데 그러는 당신도 혼자인 것 같은데? 장난 하냐 는 얼굴로 보니 (잘못 말하면 맞을 것 같았기에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친구란 새끼들이 나 버리고 갔어― 라며 인상을 구긴다. “어? 저도 형들이 저 버렸는데.. 상황이 같네요.” “이것도 인연 아니겠어? 푸하하핫.. 어? 어어.. 야, 골이다!!!!!!” 갑자기 주위가, 아니 동네가 뒤집어지듯 사람들의 소리가 울렸다. 와아아아아!! 하는 함성소 ���가 서울을 뒤흔드는 듯하다. 박지성 결국엔 한건 해내는 구나!! 감격하며 박수를 치고 소 리를 질렀다. 아씨, 진짜 나 캡틴 팬 할래. 이열치열이라고 후끈하게 일어선 붉은 물결은 열대야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이래서 형들 말대로 월드컵은 나와서 즐겨야 하는 구나. 옆에서 그 남자도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아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나를 덥석 끌어안는다. “야!!! 골이래, 골!!!!!!”


“알거든요!!!!!!!!!” 즐겁게 깔깔 웃으며 신나하니 안긴 사람도 괜히 신난다. 그리고는 안았던 팔을 풀고 어깨동 무. 사람들의 함성이 잦아들고 응원의 소리가 커졌다. 오오오오오오오~ 가사도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하나된 목소리는 신나고 또 흥겨웠다. 우리도 방방 뛰면서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다시보기 했던 박지성의 골 장면이 지나가고 다시 경기장면이 화면에 띄워졌다. 사 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아 대~한민국을 외쳤다. 나도 자리에 앉아, 오면서 사온 콜라를 비닐봉지에서 꺼냈다. 형들 거 까지 세 개 있는데 이 남자 하나 줄까? 평소 같았으면 방금 처음 본 사람과 안고 놀고 안 그랬겠지만, 오늘따라 뭔가 많이 풀어진 것 같은 괜히 그런 느낌. “콜라 드실래요?” “진짜? 고마워, 잘 먹을게.” 잘 먹겠다며 사양 없이 콜라를 받아든다. 보통은 예의상 한 번 쯤은 거절해주던데 말이지, 참 솔직하고 뻔뻔하네. 그래도 고마워하는 눈치에 그닥 나쁘게 느껴지진 않는다. 반대로 솔 직하게 당당하게 느껴진달까? 쨌든 싸가지는 없지만 털털해서 분위기 메이커일 듯하네. 아 직 시원한 콜라 캔을 딴 후 한 모금 들이켰다. 크하- 입안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탄산에 절 로 감탄이 나온다. 콜라를 홀짝홀짝 먹으며 경기를 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지이이이잉지이이이잉- 하는 진동이 느껴진다. 아놔, 누구야. 형들인가? 클립을 열고 받아보니 [안녕 하세요, XXXX입니다. 상대방과 연결시켜드릴 테니 전화를 받으시려면 아무키나 눌러주세 요~] 라며 친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인간들이 이거 수신자 부담 전화 아니야, 두고 보자고. [규현아~ 미안해!!!! 이거 받아봐!!!!!!!!] 간절하게 들려오는 혁재형의 목소리에 어이없이 웃으며 아무키나 띡 눌렀다. 이 인간들이 어디서 이제야 연락하는 거야? 게다가 수신자부담? 귓가에서 기계음이 연결해드리겠다며 솰라솰라 거린다. 그리고 연결되는 소리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진짜 나만 두고 어디 갔어!!!!!! 에라이, 나쁜 놈들아!!!!” [ 아니, 규현아. 미안하긴 한데 니가 사라진 거잖아!!!!!! ] [ 야!!!!!! 이혁재!!!!!!! 닥치고 사과나 해!! ] 전화기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형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음성지원이 되니 영상까지 저절 로 그려지는 영상지원 서비스-. 평소에도 맨날 저러는데 정말 징하다, 징해. 초딩들 같으 니. 속으로 비웃으며 한소리 하려고 했지만, 그러고 보니 이거 내가 돈 내는 거잖아? “쨌든 쫌 있다 집에서 보고, 지금 어디에요?” [ 여기?? 전광판 앞으로 나와 보면 공중전화기 있어!!! 거기야!!! ] “그럼 갑니다. 기다리세요, 또 사라지지 말고.”


이 인간들이 휴대폰도 안 들고 와서 이 난리야, 난리는. 휴대폰을 뚝 끊어 바지주머니에 집 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컴컴한 여기에서 그 인간들 어떻게 찾지, 진짜. 게다가 이 주변에 공중전화 한두 개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일으켜 뻐근한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스트레칭 해준 다음에, 짧은 만남이었지만 신기했던 옆자리 남자에게 눈인사를 했다. ‘갈 거야?’ 입모 양으로 묻는 남자에게 끄덕 고갯짓을 해 보인다. ‘재밌었어요, 갑니다.’ 남자를 따라 입모양 으로 말하고는 뒤를 도려고 하는데, 빨간 티가 당겨진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내 티셔츠를 붙잡은 채로 다른 한손으론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낸다. 뭐하는 짓인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자니 휴대폰을 잠깐 동안 만지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어준 다. 그리고는 내 엉덩이를 툭툭. …음? 뭐, 엉덩이 툭툭…?

“뭐하는 짓입니까!!!!!!!!!” “시끄러, 잘 가~.” 꽥꽥거리며 발악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사람들의 짜증 섞인 눈초리와 그 사람의 능글거리 는 소리뿐. 변태야, 저 사람. 분명히 확실해. 그래도 친히 손까지 흔들어 주길래 가볍게 목 례를 하고 빠져나왔다. 좌석 뒤쪽에서 전광판까지 내려가면서 그 사람이 내 폰에 뭔 짓을 했나 궁금해 뒤져보니 다름 아닌 전화번호 저장. 이름에는 ‘희님’ 이라는 이해가 불가능한 말을 갖다 붙여놓으셨다. 대체 저장은 왜 한 거야. 문자라도 해라 이 말인가? 아씨, 이 남 자 무서워. 의아함에 불안해하며 규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형들 이나 찾아서 괴롭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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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현은 바쁜 일상에 한동안 잊고 있던 남자, 희님이라는 사람의 번호의 존재를 거의 까먹고 있었다. 한 번씩 생각나기는 했지만, 뭐라고 문자라도 해야 될지 고민 돼 접어두었던 희님 의 번호는 아르헨티나전이 치러질 그 날 점심에야 다시 상기되었다. 그래, 서울은 좁은데 다시 만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왜 연락 안했냐며 갈궈질 것 같아. 큰마음 먹고 희님한테 문 자를 보냈다. [ 저 그리스전 때 그 사람인데요, 번호 맞으시죠? ] 보내고 나니 ‘뭔가 이상한가?’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냥 보내지 말 걸 그랬나. 문자를 보내고 1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답문이 날라 왔다. 희님이란 남자한텐가? 아님 다른 사람? 플립을 열고 받은 문자메시지함에 들어가자 희님한테서 문자가 왔다고 찍 혀있다. 우와, 진짜 답장속도 빠르네.


[ 우리 같이 월드컵 보자. 전에 거기로 나와. -희님 ] 번호 맞냐는데 무슨 소리야. 그러고 보니 오늘 아르헨티나랑 월드컵이 있는 날이네? 뭔가 아침부터 빨간 티셔츠 입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더니 그 때문이었구나. 흠, 이거 가야 돼 말 아야 돼. 솔직히 꽤 재밌었던 거는 사실인데 그래도 그 때 잠깐 처음 봤잖아, 근데 그렇게 따지면 번호도 받고 문자도 받았는데? 고민에 빠져있는데 다시 한 번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 내빼면 죽는다, 뭐 먹게 돈도 들고 와. -희님 ] …아, 예. 갑니다. 갈게요. 뭔가 내 신상에 위협이 생길 것 같아.. 예스하고 승낙하고 말았 다. 근데 이걸 또 누가 알았어. 이 싸가지 없고 뻔뻔했던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 생각날 사 람이 될 줄을 말이야. 어쨌든 그때의 나는 생각 없이 알겠다며 대답하고는 곧 답장을 보내 는 희님의 문자를 의도적으로 씹었다. [ 엉덩이 귀엽더라ㅋㅋㅋ -희님 ] 이 사람, 안 되겠구만. 역시 변태가 맞는 거였어.. 성추행 범으로 확 신고해버릴라. 규현이 중얼거리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은근히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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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희님이 나를 끌고 간 곳은 근처 치킨집이었다. 하도 찾아도 없길래 광장 뒤편에서 전 화를 걸어보았었다. 그런데 전화 받자마자 느닷없이 뒤 좀 돌아보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 니 아주 유유히 희님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흰색 티에 회색의 긴 베스트를 입고 왔 었는데, 확실히 무난하기는 한데 저 사람이 입으니깐 겁나 튀어 보여. 역시 사람은 잘생기 면 다인가 봐. 규현이 속으로 남자의 미모를 불만 섞인 목소리로 씹어대었다. 잘생긴 사람 만 뽀대나는 더러운 세상, 쳇. 남자가 가까이 오자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 희님은 또 느닷없이 규현의 손을 잡고 치킨 집으로 이끌었다. “사람이 느닷없네..” “뭐라 궁시렁 대는 거야?” “아니에요.” 결국 규현은 희님의 손에 이끌려 고소한 닭 냄새 폴폴 나는 작은 음식점에 자리 잡게 되었 다. 동네에 한두 개쯤 있는, 가끔 아버지들이나 맥주 마시러 올 것 같은 상당히 허름해 보이는 이곳은 월드컵인데도 불구하고 한가했다. 가게주인으로 보이는 더벅머리 아저씨는 테이블에


메뉴판 하나 올려두고는 카운터로 가서 자리를 잡고는 배를 벅벅 긁으며 월드컵 감상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여기서 치킨 뜯어먹고 그랬는데.. 진짜 오랜만에 동 네 치킨집 와본 것 같아서 규현은 싱글 웃으며 메뉴판을 들어보았다 . 후라이드 치킨, 양념 치킨, 반반 치킨, 닭강정, 맥주.. 닭강정도 있네? 이런 곳에서도 팔았구나―. 오랜만에 닭강 정이나 뜯어볼까. 항상 형들과 닭강정 쟁탈전으로 다툴 만큼 규현은 닭강정을 꽤나, 많이 좋아했다. “저는 닭강정 먹을래요. 그쪽은 뭐 드실 거예요?” “그쪽이라니, 내 이름은 김희님인데?” “……아 진짜. 그럼 저는 조규님입니까??” 순간 저 사람이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진짜 이름이 ‘김희님’ 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 2-3초쯤 멍 때리고 있다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지만, 저 희님은 깔 깔거리며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아 진짜, 사람 쪽팔리게. 왜이래!! “됐구요, 뭐 드실 건데요?” “아저씨! 닭강정이랑 반반 하나 주세요~.” “아.. 진짜….” 능글맞게 슬쩍 주문을 하는 희님의 모습에 황당함과 함께 웃음이 새어나왔다 . 생각보다 많 이 웃기고 재밌고 신기한 사람인 것 같아, 월드컵이 끝나더라도 연락해볼까…. 라는 마음이 생길 것도 같았다. 같이 닭을 뜯으며 월드컵을 보면서 열광하고, 웃고, 욕도 하고, 즐긴 시 간들이 왠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았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에게 4:1이라는 엄청난 점수 차로 진 것이 한참동안 열 받기도 했지만, (둘이서 심판도 까고, 선수도 까고 신나게 털었다.)

오늘 하루 미련 없이 참 재미있었다. 나이지리아전 때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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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 흘러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평소와 같이 집에서 형들과 예능프 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저번 그리스전 때 날 버리고 간 님들 편치 않을 거라며 저주하 던 규현도 지금은 꽤나 풀렸던지 동해와 혁재를 꾹꾹 찌르며 다른 프로 보자고 시위하고 있 었다. 아예 넘어가는 동해와 혁재와는 달리 시큰둥한 얼굴로 두 사람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 던 규현이 반응이 없자 단념하고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령구한테 놀아달라고 해야지. 휴대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두 통 와있었다. 진동을 못 들었나본데 누구지? 키패드를 눌러 문자들을 열어보자 먼저 려욱의 문자가 보였다. 같이 놀자고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대충. 다른 문자도 뭔지 열어보자 이번에는 내심 기대했던 김희님의 문자였다, 그러나 바라던 내


용이 아니어서 문제였지만. [ 이번 월드컵은 같이 못 볼 것 같아. 4년 뒤에 브라질에서 보자.

-희님 ]

이게 뭔 뻘소리래? 어제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전화해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그랬는데? 무 슨 일이 있나? 괜히 걱정되어서 그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없는 전화번호라며 종 알종알 거리는 휴대폰을 닫고선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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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16강 진추울!!!!!!!!!!!!! 오오오오!!!!!” “그래도 16강은 진출했네, 아르헨티나 때문에 간당간당했는데.” “뭐 반응이 미지근해, 임마!!!!! 대~한 민국!!!!!!!! 유후~!!” “귀 울려, 시끄러!!!!! 좋긴 한데 잠 온단 말야….” 려욱은 꺅꺅거리고 방방 뛰며 16강 진출을 자축하고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규현은 소파에 쓰러져 시끄럽다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규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희님인가 뭔가는 갑자기 사라지고, 자려는데 김려욱 이 자식은 쳐들어와서 이 난리고. 규현이 이런 꼴에 처 하게 된 사연은 뭐 별 거 아니었다. 저녁은 몰라도 새벽은 불가능해… 라며 곯아떨어진 단순한 두 형들 덕분에 규현은 피곤하게 보지 말고 자야겠다―. 라 생각하며 자기도 보지 않고 자기로 마음을 먹었다. 규현은 분명히 편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이도 닦고 세수도 하고 개운하게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리고는 이불위에서 뒹굴 거리며 ‘김희님이랑 보면 재밌는데 저 인간들이랑은 너무 피곤하 단 말이야. 근데 진짜 그 사람은 어디로 뜬 거야? 괜히 짜증나네. 이건 뭐 차인 것도 아니 고.’ 괜히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었다. 형들도 잠들고 불도 다 끈 이 고요한 상황에 갑자기 덜컥ㅡ. 하고 열리는 현관문은 규현에 게 큰 긴장감을 심어주었다. 혹여나 도둑 일까봐 혁재의 야구방망이까지 손에 든 규현은 살 금살금 거실로 나와 야밤의 침입자를 덮쳤다. 그러나 그 수상한 야밤의 침입자는 다름 아닌 려욱이었다던, 뭐 단순한 이야기였다.

경기가 끝나고, 창밖의 하늘마저 밝아오는 새벽녘이 되서야 힘든지 소파위로 몸을 던지는 려욱이었다. ‘쪼그만 게 체력도 좋아요..’ 규현이 스르르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려 욱의 뒤통수를 한대 후려갈겼다. ‘칭찬으로 받아듣겠다.’ 려욱은 중얼거리고는 금세 취침모 드로 들어서는 듯하였다. ‘김려욱..’ 규현이 나른하게 묻는 소리에 려욱이 살짝 눈을 떠 규


현을 바라보았다. 쟤는 뻗어서는 안 쳐 자고 뭐하는 짓이여. ‘뭐.’ 라고 대답해주니 규현이 천천히 우물거린다. ‘브라질까지 얼마 하냐?’ 얘 뭔 소리야. 억지로 깨워가며 월드컵을 보게 했더니 미쳤나? 브라질 가서 테러하려고? 려욱이 개소리 말고 자라며 규현의 허벅지를 발 로 찍었다. 그렇게 두 친구는 밝아오는 새벽에 잠이 들었다. 조규님이 김희님을 찾으러 브라질로 건너갔는지의 여부는 아직 4년 뒤의 일. 한동안 규현의 빨간 티셔츠는 희님을 향한 마음과 함께 옷장 속에서 묵혀있을지도 모르겠 다.


술에 흠뻑 취해도 와인에 취한다면 낭만적이지 않을까? 그 꽃 같은 향기를 가져 분위기를 조금 더 돋우고,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로제 와인. 무엇으로 생산하느냐에 따라 색과 맛 이 다르며, 생산 국가에 따른 냄새나 맛은 매혹적이다. 프랑스 와인은 깊고 풍부한 느낌이 있는 반면에 이탈리아 와인은 그 나라의 대표적 음식인 피자나 파스타에 잘 어울리는 강력 한 정열의 맛. 자신이 죽는 순간 까지도 와인을 마시며 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민에게 있어 와인이란, 단지 예찬만을 위한 술이다. 한국은 막걸리, 일본은 전통 사케, 독 일은 맥주. 각자의 나라에는 각자의 전통주가 있기야 하지만 모든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각광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술은 와인. 얼마 전에 처음 와인에 맛을 들여 너무나도 얄팍한 지식 을 가졌지만 성민은 와인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신설 와인 영업부가 생긴 것은 hit 였다. 신설 와인 영 업부원을 모집한다는 홍보 포스터가 벽면 곳곳에 붙어있어 바로 가서 신청을 하고 ,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쾌재를 불렀다.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이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간다면 좋 은 것 아닐까? 성민은 와인 공부를 하기 위해 퇴근 하자마자 와인 관련 서적을 찾으러 서 점에 들른다. 꽤 오랜만에 학구열에 불탔다. 많다면 많을 수도 있는 스물여덟이란 나이에 공부를 자처하 는 것은 정말 낯선 기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제는 공부에서 손을 떼버리겠다는 결심을 했었는데 지금 공부를 하려고 책을 고르고 있다니, 기가 차기도 하지만, 뿌듯하기도 하고. 성민은 일단 프랑스 와인을 공부해 보고자 ‘김XX 소믈리에가 말하는 프랑스 와인’ 1, 2, 3 권을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순간 와르르,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롤 업 팬 츠에 검은색 카디건을 입은 한 짧은 머리의 키 큰 남성이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제 발 근 처에 떨어진 여러 권의 책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책을 여러 권씩 손에 집어 들어 계산대로 가서 내려놓고, 또 떨어진 책들을 들고 와 계산대에 놓는다. 바지 뒷주머니 에서 지갑을 꺼내고 그 지갑 안에서 카드를 꺼내 ‘전부 계산 해 주세요.’ 라 한다. 헉. 딱 보기에도 십만 원은 넘어갈 것 같은 양의 책인데 한꺼번에 계산하다니. 그저 쥐꼬리 만 한 월급이나 받고 사는 이 시대의 샐러리맨 중 한 명일뿐인 성민에게 있어서 그런 짓은 놀랍고도 신기하며, 그저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저렇게 많은 책을 살 정도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는 거잖아. 급 시무룩해져 성민은 고개를 떨궜다. 그러 다 다시 고개를 들어 이제부터 열심히 벌어서 노후대비 하면 된다고 생각한 성민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계산대에 가 책 세 권을 내려놓는다. 옆을 슬쩍 보니 아까 그 문제의 남성은 아 직도 안 가고 책만 싸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손목시계를 보며 작게 노래를 부른다. “지구는 두웅그으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아며언..”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오게엤네에. 유치원 시절, 누구나 불러봤던 노래를 갓 스 물 넷? 다섯 정도 된 것 같은 사내가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는데 그 어느 누가 이상하게 쳐 다보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순수하게 생기기도 했고, 카디건을 벗고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는다면 잘생긴 유치원 남자 선생님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온화하 기도 했다. 얼굴은 하얗고, 빨간 입술은 오물오물. 넋 놓고 사내를 바라보고 있다가 “육만 구천 원입니다.” 하는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한다.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말쑥한 양복 차림을 한 보기만 해도 훈내 나는 외모의 키 큰 사 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옆에 서서 당연하다는 듯이 두 묶음의 책 봉지를 혼자 다 들고서 남 자에게 생글생글 웃어준다. 남자도 히히, 하고 웃으며 공짜 책갈피를 서너 개 정도 집어 양 복 사내를 따라 서점을 쏙 나가버린다. 성민 또한 공짜 책갈피 하나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서점을 나왔다. 부우웅, 하는 부드러운 고급 차종의 엔진소리. 고개를 돌리자 검은 색 세단 이 도로 위를 부드럽게 질주했다. 성민은 분명 그 둘이 탄 차일 거라 확신하며 또 다시 인 민 루저의 쓴 잔을 마시며 고개를 떨군다.

“석훈이형 되게 훈남인 거 알아요?” “그래서 별명 경희대 훈남이었잖아.” 소믈리에 이석훈, 소믈리에 조규현. 금색 명찰을 가슴팍에 찬 석훈과 규현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으히히, 한다. 함께 와인 공부를 했던 만큼 소믈리에 자격증 시 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소믈리에 돼서 돈 많이 벌고 그러겠다는 규현의 당찬 포부에 석훈은 그저 웃기만 했지만 석훈 또한 그만의 포부가 있었기에 비웃지는 않았 다. 그랬기에 둘은 가슴팍의 이 금색 명찰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이 와인바만 금색인데, 여기 취직하길 잘 했어.”


“응. 쌍으로 들어온 것도 잘 됐고.” “아무튼 명찰 진짜 예쁘다.” “반짝 반짝 빛나요, 막.” 그리고, 형도요. 규현은 입 안에서 ‘형도요’ 라는 말을 씹어 삼키고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석훈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 하지만 좋아하는 건 비밀이에요, 형은 애인이 있으니 까. 규현이 석훈에게 자신의 포부, 그러니까 소믈리에 되면 돈 엄청 많이 벌어서 저 멀리 이민 가있는 엄마랑 누나를 한국으로 데려온다는 그런 소망을 말했을 때, 석훈은 규현에게 ‘나도 돈 많이 벌 거야.’ 하고 뒤이어 ‘연주랑 결혼 하려면 돈 정말 많이 필요하니까.’ 라고 말했 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줄만 알았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남자는 여자와 사랑을 해야 맞는 거구나, 하고 규현은 또 한 번 뼈저리게 냉혹한 현실 을 느꼈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의 여자는 자신의 학교 선배. 처음엔 그냥 호감이었는데, 점점 커지는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다. 키는 저보다 작았지만 왠지 규현보다 훨씬 큰 이미 지라서 포근한 형이기도 했고, 또... 와인 말고도 내가 열망하던 것이기도 했고. 거울을 보 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미칠 듯이 가슴을 뛰게 만들어서, 혹시 손님에게 와인을 따라드릴 때 형의 얼굴이 생각이 나버려 엎지르는 것 아니냐는 상상도 했다. 조심, 또 조심하며 와인 을 따라서 여태까지는 그런 적 없었지만. 어쨌든 규현은 다시 수줍게 웃으며 목에 맨 리본 넥타이를 다시 한 번 다듬고 생글생글 웃 었다. 석훈의 어깨를 괜히 팍팍 치고는 ‘나가요, 형!’ 한다.

‘어떻게 해서든 소믈리에 자격증을 가진 한 사람을 캐스팅 해 와라’ 는 자신이 속해 있는 와인 영업부의 정재민 팀장이 성민에게 내린 첫 번째 임무. 와인에 대해 안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소믈리에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캐스팅 한단 말이냐고 . 성민이 정재 민 팀장에게 차강재 씨도 있지 않느냐고, 왜 저만 시키느냐고 불평을 해대니 ‘차강재 씨에 게는 좀 더 특별한 임무를 줄 겁니다.’ 하며 성민의 시선을 회피했다. 저 망할 놈들. 둘이 친구라면서요? 그럼 친분으로 먹고 들어온 거네, 사장한테 꼬지른다! 라던가 그런 짓도 하 고 싶은데 두 사람 다 185를 넘어가는 거인인데다가 성민은 비교도 되지 않는 잘 생긴 외 모의 소유자들이라서, 그냥 쫄아서 가만히 있는 것. 까짓것 소믈리에 한 명 구하면 되지!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성민이기에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으흐… 와인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오!” 와인 영업부에 들어간 것은 좋았다. 왜? 대체 왜 나지? 정재민 팀장은 나보다 와인 더 많 이 아니까 소믈리에 한두 명 정도는 알 것 아냐! 물론 소리 없는 발악은 결코 화를 식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길거리 한 복판에서 소리를 빽 지를 수야 없잖은가. 성민은 사 악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정재민 팀장과 차강재를 상상했다. 게다


가 둘 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든. 이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하극상이 일어난다 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성민이기에 억울함을 참고, 눌러 참고, 또 참는다. 하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주어진 특별한 임무 덕에 며칠 동안은 출근하고 나서 남 들 다 일할 때 성민만은 탁 트인 공기 마시며 밖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 물론 이 시간에 정장까지 잘 차려입은 청년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실업이다 뭐다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 겠지만 성민은 한시라도 빨리 소믈리에를 자신의 회사로 데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없고, 일단은 사람도 직업 보고 찾는다고 와인이 가득한 와인바를 가보기로 한다.

와인바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종류의 와인 냄새가 성민의 코를 찌른다 . 사람들은 시간도 많 은지 와인바를 꽉꽉 채웠고, 성민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 잡고 와인 한 병 open해서 마시고 싶은 심정. 하지만 일 해야지 돈을 벌지! 성민은 얼마 전에 마주쳤던 부자 청년을 떠올리고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진다. 어서오세요, 하고 직원 중 한 명으로 보이는 사람이 성민에게 인사를 한다. ..어?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성민은 빨리 뇌를 굴려 생각해 낸다. 아! “부자 청년?!” “네?” “아, 아니요!” 방금 생각하기까지 했으면서 왜이래 이성민! 성민은 조금 바보 같다고 느낄 수도 있는 얼굴 로 아하하, 웃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다. 그러고선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곳, 부자청년의 가슴팍에 매달린 금색 명찰. ‘소믈리에 조규현’이다. 헐. 그 부자청년이 소믈리에였다니! 하 지만 성민은 의외로 일이 쉽게 해결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 부자청 년, 아니, 규현은 자꾸 웃는 성민, 그러니까 자기 딴에는 처음 보는 손님이 저를 보고 샐샐 웃으니 이상한 생각도 드는데, 그래도 자기도 돈은 벌어야 하니까 웃으며 자리로 안내를 한 다. “메뉴판은 여기 있습니다. 와인은 뭐로 하시겠어요?” “어, 그, 그러니까.. 여기, 이 와인으로 할게요.” “아, Buehler White Zinfandel(뷸러 화이트 진판델)말씀하시는 거죠?” “예, 예에!” 이왕 시킨 김에 모르는 와인도 테이스팅 해보자는 생각에 성민은 웃었다 . 하지만 , 너무 무 식한티 내는 거 아냐? 나름 와인 영업부 사원인데 말이지. 성민은 규현이 와인을 가지러 가 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한숨을 쉬었다. 자아, 그럼 어떻게 저 잘생긴 부자 청년을 꼬아낸담? 성민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 정재민 팀장에게 전화를 건다. -왜.


“팀장님, 저 소믈리에 찾았거든요.” -찾기는 쉽지. 와인바만 가면 널린 게 소믈리에인데. “아씨! 근데 어떻게 데려오느냐고요!” -..비밀인데, 회장님한테 말씀 드렸더니 소믈리에 데려오기만 하면 원래 받던 돈의 약 1.5 배를 준다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너랑 나보다 월급 더 많이 받는 거지. “어! 진짜요?” -응. 내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차강재씨에게 하는 건 보긴 많이 봤다만. 하지만 차마 그 말까지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 어서 성민은 저 멀리 규현이 와인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아, 와인 나오네요. 먼저 끊겠 습니다.’ 한다. 먼저 끊을 용기가 있었으면 그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만, 어쨌든 성민은 먼 저 전화를 끊고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둔다. “뷸러 화이트 진판델 나왔습니다.” “아.” “이 진판델은 따로 디켄팅이 필요가 없는 와인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원하신다면 디켄팅 해 드리고 있습니다. 디켄팅 해드릴까요?” “아뇨, 따로 필요하지는 않다고 하니..” “그럼 open하겠습니다.” 규현은 코르크 마개를 따 킁, 하고 한 번 맡아보더니 Bouchonne(부쇼네;불량 코르크로 인 해 변질된 와인을 일컫는 용어)가 아닌 것에 싱긋 웃더니 성민의 앞에 있는 와인 잔에 와인 을 약간 따른다.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살짝 벌려진 입술, 조명으로 인한 몽환적인 분 위기가 뿜어져 나오는 규현에 성민은 처음과 다르게 잠시 두근거린다. 규현이 와인을 다 따 르고 성민을 보는데 자신의 얼굴을 보며 멍하니 있는 성민에 잠시 당황하고 ‘손님 ?’ 한다 . 성민은 그제야 규현에게서 눈을 떼고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다. 아, 아차! 성민은 자신의 본분이 뭔지 머릿속에서 잠시 지워버린 채로 와인을 마시다 보니 벌써 와인의 2분의 1을 다 마셔버린 후다. 와인의 맛이 너무나 달콤하기도 하고, 성민은 잠 시 동안 혀끝에 아직 남아있는 진판델의 맛에 감탄을 하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제 눈에 띄는 키 큰 사내, 그러니까 규현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는 싶은데 좀 소심해서... 성민은 결 국, 규현을 ‘저기요!’ 하고 부른다. 규현은 뒤 돌아보고는 성민을 향해 걸어온다. “예, 손님.” “아, 저, 저기, 혹시 JK 그룹 아시나요?” “예. 알고 있죠.” “그게요, 저희 JK 그룹에서 와인 영업부를 개설했는데, 저희 회사 직원이 돼 주실 수 있으 신가 해서요. 아, 무, 물론 여기서 받으시는 월급보다는 더 많이 드려요!”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 가게는 캐스팅 받는 것은 허용이 되지 않아서요.” “아니, 한 번만 생각을 좀 해주시고 대답을 하시지..! 아무튼, 아니 그래서, 제발.. 어떻게 안 될까요..? 저희가 정말 너무 급해서요.”


성민의 절박함이 느껴지기는 했는지 규현은 한숨을 포옥, 쉬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명함만 받아두겠습니다. 결정은 차후에 해도 되는 거겠죠?” “예!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손님, 이 이상 시끄럽게 하시면 영업 방해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단 가능성은 보인다. 친해지는 거야 점차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하면 되는 거고, 일단 성민은 규현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기를 바라야만 하겠지. 성민은 끊이질 않는 웃 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와 버린다. 근데 있지, 나 자꾸 두근거려. 그 규현이라는 사람 자꾸 생각나. 심장 박동 수는 점점 세 진다.

“♬♩♪♩♬♩...”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콧노래. 규현은 바닥 대걸레질을 하다 말고 자꾸만 콧노래를 부 르는 석훈을 쳐다본다. 그런 규현은 개의치 않고 그냥 노래만 흥얼거리는 석훈에 규현은 조 금 서운하기도 하였으나 석훈이형 좋다는 게 뭐야. 규현은 석훈이 좋으면 그냥 저도 좋다는 소녀스러운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콧노래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 결국 영업시간이 다 끝나갈 때까지 규현은 석훈의 콧노래를 계속해서 들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싶었지만 물어보면 석훈은 ‘으항항항항’ 하며 완전 기뻐하며 깨방정 떨 것 같아서... 규현은 석훈과 함께 라커 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후, 석훈에게 물었다. “형.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싱글벙글 이에요? 좋은 일 있어요?” “음흐흐, 티 나니?” “사장님이 보너스라도 줬어요?” “그건 아니고. ...규현아. 나 드디어 연주랑 결혼한다.” “어?” 나, 드디어 연주랑 결혼할 수 있다고! 해맑은 얼굴로 규현에게 사실을 고하는 석훈. 깜짝 놀란 규현은 사실이 믿기��� 않는다는 듯, 눈만 껌뻑거리다가 이내 자신도 웃으며 ‘진짜? 진 짜야?’ 한다. “언제 돈 다 모은 거야? 아니, 언제 하는데요?” “얼마 안 남았어. 식장이랑 드레스랑 다 결정해둬서 일주일 후야.” “와, 형! 진짜 축하해요!!” “축하해줘서 고마워.”


쑥스럽게 웃으며 고맙다는 석훈. 아, 잔인하다. 난 몇 년 전부터, 당신이 연주 누나와 사귀 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마음은 단 1%도 석훈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연소하여 재가 되어버린다. 석훈이 한 마디, 한 마디 뱉을수록, 숨을 쉬면 쉴수록 벌레가 심장을 좀먹는 느낌. 언젠가는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미 래에 너무 빨리 도달하여 숨이 가쁘다. 쓰러질 것 같다. 규현은 끝까지 석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석훈을 먼저 라커룸 밖으로 내보낸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밀려오는 슬픔. 억장이 무너진다. 온 몸이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소리 내어 엉엉 울지는 않기로 하자. 아직 석훈은 밖에 있고, 눈이 부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래도 눈물이 흐른다. 어떻게 해, 나.

성민이 규현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7일 후. 석훈의 결혼식 날. “여보세요?” -...규현입니다. “아, 예, 규현씨!” 기다리던 규현의 전화를 받은 성민은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십대 소녀마냥 규현의 목소리 에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성민은 신나했다. -혹시, 제 집으로 와줄 수 있으신가, 해서요. “네? 무슨 일로..”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옷 좀 골라줬음 해서요. “아, 그, 금방 갈게요! 주소가 어딘데요? ..네. 예. 그럼 끊겠습니다.” 뚝. 규현과의 통화를 마친 성민은 부리나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 후,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마이를 입고 집을 나선다.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어 규현이 불러준 주소로 향한다. 엔진도 주인의 들뜬 마음을 아는지 부드럽게 질주한다. 끼익, 규현이 불러준 장소, 그러니까 규현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한 성민은 차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 열려 있으니 들어오라는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는 규현의 목소리에 성 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규현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휑한 집 안의 공기에 깜짝 놀란 성 민은 규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방 안에서 나오는 규현.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대충 수트라도 입고 갈까, 해서 아는 형한테 빌려오긴 했는데 보다시피 좀 커서.” “...아.” 규현은 빌려왔다는 수트의 마이를 입어보았는데 마이가 좀 크긴 크다 . 하지만 조금밖에 안 커서 그냥 입고 가도 될 텐데. 규현은 입기 싫어하는 눈치라서 ‘어쩌지..’ 한다.


“그럼 제 마이 입어보세요. 맞으면 입고 가시구..” “그래도 되는 겁니까?” “사이즈 몇 입으시는데요?” “95, M이요.” “조금 크긴 한데 원래 마이는 크게 입어야 하니까.” 뻥이다. 마이를 크게 입어야 한다는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규현이 저에게 고마운 마음이라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규현은 성민이 준 마이를 받아들고 입어보았다. 여전히 좀 크 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맞으니까. 규현은 성민에게 작은 머리를 조아려 고맙다 하고 화장실 로 쏙 들어가서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를 쫙 말리고 나온 후, 청첩장으로 보이는 카드를 손 에 든다. “나가요. 차 가지고 오셨어요?” “네. 가지고 오긴 했는데..” “그럼 차는 제 차 타고 가죠.” 그 검은 세단? 밖에 세워둔 제 차와는 정말 비교도 되지 않아 부끄럽다. 속으로 불안해하며 규현을 따라 밖으로 나가 규현의 차 앞에 서는데 이게 뭐? 그 검은색 세단 아니고 그냥 색 만 같은 소나타다. 어디다 수리라도 맡긴 건가. 성민이 의아해 하는데 규현은 차 문을 열고 먼저 운전석에 올라탄다. 성민도 조수석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맨다. 규현은 성민이 안전 벨트를 맨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건다. 그리고 청첩장을 입에 물고 기어를 조절한 뒤, 오른 손을 조수석 쪽에 기대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폭풍후진’ 을 한다. 성민은 저보다 더 운전 실력이 뛰어난 규현에게 새삼 감탄을 한다. “성민씨는 식장에 들어오시지 말고 그냥 차 안에 계세요. 밥 안 먹고 그냥 나올 거니까.” “그럼 점심은 어떻게 하시려구요?” “제가 사도록 하죠. 뭐 좋아하세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함께 밥 한 번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규현의 차 같은 건 아웃오브안중. 왠지 꿈에도 그리 던 연인 같은 상황이어서 성민은 기뻐했다. 정작 규현은 그럴 생각은 없어 뵈지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게 되니까 성민은 긴장이 탁 풀린다. 이십 분쯤 달렸을까, 성민의 눈에 띄는 ‘XX결혼식장’ 이라 쓰인 간판. 드디어 다 온 건가, 성민은 규현의 얼굴을 돌아보는데 왠지 싸늘하다. 이 상황에서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아서 성민은 그저 창밖만 내다본다. 끼익. 차가 멈추고, 잠시 냉기가 흐르더니 규현은 성민에게 말을 건다. “금방 나올 겁니다. 심심할 것 같으면 CD라도 듣고 계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얼른 다녀오세요.” “네. ..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정말 금방 다녀오겠다는 얼굴의 규현. 그냥 짝짝 박수만 치고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여서 성 민은 ‘축하 많이 해주고 나오세요..!’ 한다. 그러자 규현의 얼굴이 더욱 더 어두워지는가 싶 더니 이내 웃음기를 띤 얼굴로 알았다 하고 차 안에서 빠져나가 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결국 심심해 죽을 것 같다. 성민은 의자를 뒤로 젖혀보기도 하 고 손으로 톡톡톡 소리도 내어 자신이 작곡 실력이 뛰어나다는 발견을 하기도 한다 . 그렇게 계속 심심함을 떨쳐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도중, 달칵, 하고 차 문이 열리고 규현이 들어온 다. “오셨어요? 축하는 잘 하ㄱ...” “성민씨.” “예?” “저, 성민씨 다니시는 회사 들어가겠습니다.” “에, 예에? 정말요?!” 규현은 대답을 하지는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왜 갑자기 그러는지는 성민은 알 수 없 었지만 일단 규현이 제 회사로 들어 와준다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 성민은 와하하 웃기도 하면서 규현의 손을 꼭 잡고 위 아래로 흔들고 연신 “감사합니다!!” 만 외쳐댄다. 규현은 그 런 성민의 모습에 조금 웃었지만.. 글쎄, 규현이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했는지는.....

규현이 성민과 함께 회사에 다닌 지도 벌써 한 달. 규현은 이미 회사에 적응해서 사원들과 종종 농담도 하고, 즐겁게 지냈다. 성민보다 와인 경험이 더 많은 규현은 이따금씩 와인 영 업부 사원들에게 와인 관련된 상식들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타닌... 아로마.. 빈티지.. 도 멘.. 샤토 등. 처음 들어온 사원들은 ‘와아, 신기해’ 등의 반응을 보이며 열심히 공부도 한 다. 물론 성민도 예외는 아니다. 배울 것은 너무나 많아서, 성민은 항상 규현이 가르쳐준 것을 필기할 노트를 가지고 다닌다. 말하자면 열혈 학생. 규현은 그런 성민이 참 좋은 사람 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조금 귀엽기도 하고. “성민씨. mariage(마리아주)라고 알아요?” “네? 마리아.. 뭐요?” “M, A, R, I, A, G, E. 마리아주. 결합, 결혼이라는 뜻인데 와인과의 마리아주, 그러니까 다른 음식과 와인의 결혼... 어울리는 조합인데, 가장 유명한 마리아주는...” “어어! 잠시만요오..!” 열심히 규현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는 성민. 참 세상에 저렇게 열심인 학생도 없겠다 싶어 서 규현은 웃으며 성민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화들짝 놀란 성민은 손에서 연필을 떨어트리 고 움찔, 한다. 심장이 쿵쾅쿵쾅. 어... 얼굴이 뜨거워. 새빨개진 것은 아닌가 하고 성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다 받아 적고 그러는 겁니까?” “아, 네에! 계속 불러주세요.”


규현이 정색을 하자 성민은 당황하여 바닥에 떨어진 연필을 주워 금방 필기를 준비한다 . 아 이고, 심장 떨어지겠다, 여러 의미로. 규현은 그런 성민을 보며 씨익, 웃는다. “가장 유명한 마리아주는 루이 자도 샤블리라는 와인과 굴이에요. 와인 관련 만화 ‘신의 물 방울’ 이라는 데도 나왔고요. 아니면 대체적으로 화이트 와인과 생선 요리, 레드 와인과 육 류. 이 정도는 알죠?” “네! 알고 있어요.” “그럼 순대하고 제일 잘 어울리는 화끈한 맛의 와인은 알아요?” “... 순대하고요?” “응. 순대.” “..음... 잘 모르겠는데.” “바로 ‘레드 트럭’ 이라는 와인이에요. 받아 적으세요. 나중에 시험 볼 겁니다.” “에엣...?!” 정말 그 말을 믿고 당황하면서도 바로 받아 적는 성민. 저 나이에 학구열에 불타기 쉽지 않 은데 말이지. 규현은 성민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는데, 지금은 수업중이니까요. 칭찬은 수업 다 끝나고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규현은 그저 씨익, 웃는다. 으아아, 입 찢어지겠 다아!

“잠깐 좀 나갔다 올까요?” 규현은 조금 헤식은 얼굴로 열심히 타자를 치는 성민에게 말을 걸었다. 으아 , 야근은 정말 싫어어..! 끙끙대며 가끔 머리도 쥐어뜯고 하면서 뇌를 수건 짜듯이 쭉 짜내 온갖 글을 써 야만 하는 성민이 안쓰럽기도 했고, 규현 역시도 하루 종일 와인 냄새만 맡고 살았다가 이 제는 종이 냄새만 맡는 신세가 되어버려 약간의 두통이 오기도 했고. 성민과 함께 밤샘 야 근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놀면서 밤새거나 일 하면서 밤새거나 그게 그거지 . 꽉꽉 막혀서 머 리 아픈 것 보다는 차라리 한 번 쉬었다가 나중에 좀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규 현은 성민의 옆에 서 모니터 화면을 꺼버린다. 규현의 말도 못 듣고 타자만 치던 성민은 화 들짝 놀라 규현을 올려다본다. “왜 이래요?” “나갔다 오자니까요?” “아.. 못 들었어요. 죄송해요.” “됐습니다. 그냥 나갔다 오죠.” 냉랭한 규현의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는 여전히 온기를 가졌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었다. 성민은 웃는 규현의 얼굴에 뭔가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말없이 의자를 뒤로 끌어 벌떡 일어난다. ‘그럼 가죠.’ 성민은 규현의 팔을 이끈다. 막상 회사 밖으로 나오니 갈 곳은 없어서 어색하게 걷기만 하는 성민과 규현 . 이 야심한 밤 에 직장 동료 둘이서 갈 만한 곳은 뭐 포장마차나 술집이라던가 그런 곳 말고는 어디가 있


겠느냐마는 규현과 성민은 좀 다르지 않나? 두 사람이 좋아하는 술도 그냥 술이 아니니까. 규현은 문득 마시고 싶던 와인이 생각이 나 성민의 손을 덥석 잡는다. 순간 누군가.. 그래, 그 누군가도 오랜만에 보고 싶고. “와인바 갈래요? 아는 사람이 하는 곳이 있어요.” “아는 사람이 영업하는 곳 가면 DC해줘요?” “글쎄요. 못 본지 꽤나 오래 되어서. 그래도 가까워서 한 15분 정도만 걸으면 됩니다.” “그럼 거기 가요.” 규현은 성민의 손을 잡은 채로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걷는다. 워낙 키가 큰 규현이라 규현 보다 조금 더 작은 성민이 따라가기엔 약간 벅찬 속도였지만 그래도 와인 마시러 간다는데. 성민은 와인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Seller' 규현은 제 눈앞에 보이는 와인바의 간판만 보아도 심장이 무너질 지경이다. 셀러라니, 자신 이 직접 이 와인바를 선택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 부근에서 가장 가까운 와인바는 여 기밖에 없지 않은가. 약 이주일 전, 석훈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결혼식 때는 그냥 가버려서 서운했었다는 둥, 언 제 한 번 만나서 이야기도 하자는 둥의 말 따위를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니고 있었던 와 인바를 그만두고 연주랑 와인바를 새로 차렸다는 이야기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대체 어떻 게 내가 그 사람을 볼까.. 이석훈,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줄로만 알았던 셀러의 고급스러우면서도 단아한 인테리어 . 딸랑 , 도어벨 소리가 들리자마자 손님을 반기는 셀러의 주인장, 이석훈. 보고 싶었지만 볼 자신이 없었던 석훈이형. 그리고 규현의 얼굴을 마주하자 활짝 펴지는 그의 표정. “규현아, 너 엄청 오랜만이다!” “으응, 오랜만이에요.” “바빴어? 게다가 너,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 “회사일이 다 그렇지, 뭐. 근데 형, 우리 이렇게 계속 밖에다 방치해 놓을 거예요?” “아아, 아! 미안. 들어와. 규현이 친구 분..? 도 들어오시고.” 둘이 되게 친한가보네.. 성민은 약간의 질투심이 생겼다. 내가 그렇게 규현씨한테 좋다고 그랬는데 규현씨는 이 형이라는 남자에게는 헤실헤실 웃었다. 나만 싫어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는데 나한테 행동하는 거 보면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름 규현에게 소중 한 사람들 중 한명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저 남자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의 관심도 주 지 않고 있던 것 같다. 물론 성민만의 생각일지도 있겠다만.. 한 번 생각한 건 풀지 않으면 정말 끝까지 갈 수 있으니까. 언젠가는 규현씨한테 나 어떻게 생각하냐고 당당하게 물어볼 테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이렇게 생각하는 성민이었다.


“형. 사람들 눈에 안 띄는 자리로 좀 줘요.” “그럼.. 여기가 좋겠다.” 석훈은 제일 구석진 자리를 골라주고는 와인 메뉴판을 들고 오려다 만다. 알만하다. 석훈의 추천이 없어도 규현은 좋은 와인을 골라낼 수 있을 테니. 규현은 잠시 심각한 얼굴로 고민 하더니 이내 입을 연다. Il Baciale Monferato Rosso, 라고. 어? 석훈은 당황한 얼굴로 규 현에게 반문했다. “Il Baciale Monferato Rosso(일 바치알레 몬페라토 로쏘).” “있긴 한데.. ...규현아 그거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야. 형이 내 앞에 이 사람이랑 나, 중매 좀 서달라고.” Il Baciale Monferato Rosso. ‘중매쟁이’ 라는 뜻을 지닌 와인으로, 커플 와인이라는 이름으 로 유행했던 와인이다. 주로 소믈리에가 잘 어울리는 두 남녀를 상대로 중매쟁이가 되어 중 매를 서주며 주는 와인. 그런데, 규현은 분명 ‘내 앞의 이 사람’ 이라 했다. 성민은 분명 얼 굴선도 곱고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어느 모로 보나 남자인데..? 석훈은 약간 혼란스러운 듯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고 잠시 생각하더니 하아, 한숨을 쉬고 Yes, 그런다. 잠시 뒤, 석훈은 굳은 얼굴로 와인 한 병과 디켄터, 그리고 손수건을 가져온다. 손에 손수 건을 덮고 그 상태로 병을 잡아 ‘Open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코르크 마개를 따 한 번 맡아보더니 디켄터에 조심스럽게 따르고 찰랑찰랑, 소리가 나게 흔든다. 쪼르���, 와인 잔에 와인을 약간 따른다. 석훈은 손이 약간 떨리는 듯 했지만 프로정신을 발 휘하여 열심히도 따른다. 때 아닌 친한 동생의 커밍아웃에 약간의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 듯했다. 물론, 동생의 커밍아웃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겠지. 하지만 석훈은 모른다. 규현이 얼마나 자신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앓았는지. “그럼, 둘이 좋은 시간 보내.” “응. 고마워요.” 그래도 멋있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석훈. 규현은 석훈이 돌아서자 고개를 돌리고 와인 잔을 바라본다. 성민은 대체 규현이 무슨 생각인지, 아까 그 사람은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몰랐을 텐데, 중매를 서달라는 규현의 행동은 분명 석훈을 당황시키기에 분명했다. 말없이 규현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드는 규현에 흠칫한다. 아이고,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는 성민이 귀여워 규현은 쿡쿡 웃는다. “이 와인은 커플들에게 인기가 참 많아요.” “..네. 근데 규현씨, 왜 우리 먹을 와인을 커플 와인으로 고르시고..” “성민씨랑 잘 해보고 싶어서요.” “ㅇ, 예, 에에?” “성민씨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표정에 다 드러나요. 나 너 좋아


해, 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는 성민. 으흐흠, 정말 귀엽단 말이야. 규현은 와인잔을 손에 들고 성민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혼자 한 모금 들이켜 버린다. 마셔요, 성민씨도. 규현의 말에 성민도 그제야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다. 그러다 뭔가 씹기라도 하고 싶었는지 앞에 놓인 크래커를 한 입 베어 문다. 규현은 그런 성민을 관찰이라도 하는 듯 계속 보고만 있다가 다 시 한 모금을 들이킨 뒤, 입을 연다. “아까 그 사람은 나랑 제일 친한 형이에요.” “아, 그렇게 보였어요.” “그리고.. 내가 참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에?” “이름은 이석훈. 근데 지금은 결혼했어요. 사실 다니던 와인바 그만 둔 것도 형 결혼해서였 고. 그리고 저 아내분이랑도 엄청 친해요. 학교 선배였거든요. 아, 물론 형하고도 학교 선후 배 사이였고요. 형이랑은 같은 과였어요. 포스트모던 음악학과. 나 원래 노래 부르던 애였 는데, 안 어울리죠? 흐흐.” “아, 아뇨! 언제 한 번 규현씨 노래하는 거 들어보고 싶어요!” “고마워요.” 노래라.. 규현이 노래를 부른다면 어떨까? 성민은 그 소프트하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좋 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포모과는 실기로 들어간다던데 얼마나 잘 불렀으면 합격했을까? 정통발라드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성민은 자신이 나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심산으로 머릿속으로만 선곡표를 짠다. “그런데 형이랑 나랑, 갑자기 와인이 좋아져서, 그렇게 열망하던 가수라는 꿈도 버리고 소 믈리에 하기로 맘먹고, 집안 사정 때문에 엄마랑 누나가 외국에 있는데, 돈 많이 벌어서 누 나랑 엄마 데려오려고 했었구요. 근데 회사 다니니까 팀장님이 보너스도 많이 줘서 누나랑 엄마 데려오기는 순탄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는 성민씨한테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요.” 난 정재민 팀장이 시켜서 한 것밖에 없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재민 팀장에게도 고맙다. 정재민 팀장이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다면 규현과 나는 만날 수 있었을까? 못 만났을 것이 다에 한 표 던진다. “항상 포기는 쉽더라구요. 꿈도, 사랑도. 석훈이 형한테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연인이 있 었으니까. 내가 가질 생각은 전혀 안 했었어요. 형도 내가 좋아하는 건 몰랐을 겁니다. 나 여자들한테 인기 많았거든요. 여태까지 사겼던 사람도 다 예쁜 여자였어요. 하지만 난 양성 애자는 아니에요. 사랑을 한 것뿐이고, 그 상대가 남자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 “그 상대가 성민씨니까. 이번에 포기는 어려워요. 성민씨는 좋은 사람이라서 말이죠.” 좋아해. 그러니까 내 사랑을 받아줘, 라는 의미가 담긴 것 같은 규현의 강아지 같은 눈망울


을 보고 있자니 성민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혼자 삽질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나 혼자 밤 마다 끙끙대며 앓을 일도 없다는 것. 샐샐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입술을 앙 깨물고 성민은 규현을 바라본다. 그래봤자 성민은 기분이 표정으로 다 드러나니까. 찡긋한 코, 축 늘어트 린 눈꼬리와 눈썹. 정말 귀엽다니깐. 규현은 다시 한 번 쿡쿡 웃는다. “내가 오늘 음식과 와인의 마리아주 알려줬죠?” “네. 루이 자도 샤블리랑 굴의 마리아주. 어.. 순대하고 트럭도.” “큭큭. 잘 기억하고 있네요.” “신기한 마리아주를 잘 알려 주셔서.” “성민씨랑 나도 마리아주였으면 좋겠어요.” 한 마디로,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되고 싶어요. 그 말에 성민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 개를 푹 숙이고, 규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나 좋아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규현은 속삭이듯 말한다. 성민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진다. 부끄러워 몸이 자꾸만 움츠러든다. 고개를 들어 규현과 눈을 맞추자 규현은 싱 긋, 웃는다. 지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부드러운 선율의 현악. 그러나 지금 성민에게는 그 음악 마저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규현만 보이고, 규현만 들린다. 규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흑백 이라도 되는 듯한 착시현상도 인다. 성민은 결국 푸흐흐, 하고 웃어버린다. 그제야 성민은 귀에 다른 것들이 들리고,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 달콤한 혀끝의 느낌도 되살아난다. 그 래, 그와 나를 이렇게 만들어준 것은 다, 이것. wine. 앞으로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은, wine.


딸랑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맑은 종소리. 종소리가 들리자, 나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내가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손님을 반기자, 그도 싱긋 웃으며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빵을 고른다. 잠시 후, 그 손님의 손에 들린 빵은 초콜릿이 듬뿍 든 소라 빵. 손님들이 없을 때 가끔씩 배고프면 빵이 있는 코너에서 돌아다니다 결국 소라 빵을 집고는 하는데. 다른 손님들은 달아서 싫어하는 건지 - 다른 빵이 좋은 건지 - 아무튼 나와 비슷 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손님을 만나니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계산을 하러 온 , 앞에 있는 그 에게 말을 걸었다. “800원입니다. 소라 빵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그쪽도 좋아해요?” 그가 1000원짜리 지폐를 한 장 주면서 되묻는다. 그럼요- 저 무지 좋아해요. 라고 답해주 자 내가 녹아버릴 만큼 예쁜 미소를 짓는다. 다음에 또 올게요. 방금 전 그의 미소가 카메 라에 찰칵! 하고 찍힌 듯 나의 머릿속에 남아버린다. 내가 또 멍하니 있자, 나가려던 그가 종운의 눈앞에서 손을 휙휙 젓는다.


“저기요? 저기요오-” 결국 종운의 어깨를 살짝 툭툭 치자, 그제야 종운이 놀라면서 앞에 있는 그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이 불러도 대답도 안하게. 살짝 입술을 내밀면서 묻는 그 때 문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되나? “ㅇ..왜..왜요?!”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갑자기 말도 더듬거리고.” 나 지금 당신 때문에 아픈가 봐요. 그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면서 내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 나는 심장이 정말 터질 것 같아 그의 손을 살짝 쳐 냈는데, 그는 또 그게 기분이 나빴는지 손님한테 서비스가 이게 뭐냐면 서 부르면 대답도 안 하고 멍 때린다고 막 악을 쓴다. 나는 그게 또 귀여워서 풋- 하고 웃 어버렸더니 이젠 또 비웃었다고 난리다. “와- 손님이 왕. 몰라요?! 여기 서비스 별로네-” “엥?! 아니에요! 전 가신 줄 알고. 딴 생각 좀 했더니, 하하.” “아니, 그럼 손님이 가는데 왜 ‘안녕히 가세요-’ 라든지 ‘또 오세요-’ 라든지, 인사는 왜 안 하는 건데요?” ‘안녕히 가세요.’ 손수 90˚로 인사하는 그를 보며 또 풋- 하며 웃으니, 그가 또 비웃었어! 하며 이젠 그냥 나가버린다. 이번엔 다음에 와서 인사 안 했다고 잔소리 할 것 같아, 내 은 근한 미소를 보여주며 또 오세요- 라고 말하며, 주책맞게 손까지 흔들어줬다. 오늘따라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심심한 종운이 휴대전화 게임을 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손 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참 종운이 게임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 리는 진동 소리. 종운의 휴대전화는 그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진동 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놔두고 갔나.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아까 그가 서있던 자리로 갔는데, 그 자리에 휴대 전화가 떨어져 있었다. 아기자기 하게 꾸며져 있는 휴대전화를 주워 폴더를 열어서 배 경화면을 보았다.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한 남자 둘이 활짝 웃고 있었다. 종운은 그 사진을 보고 살짝 실소를 터뜨렸다. “아…. 놔두고 갔나보네.” 그 때,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왔던 그가 나에게 와서 흥, 뭘 봐요-! 그러면서 휴대전화를 홱 하고는 채 가버린다. 그 모습에 또 귀여워서 핏 하고 웃었더니 또 언제 들었 는지 비웃지 마요! 그러고는 문에 달려있던 종이 떨어질 정도로 닫고 나가버린다. 그리고 종운은 내일 또 오겠지 라는 근거 없는 예상을 하면서 다시 손님맞이에 열중한다.


***

-성민이형. 왜 전화 안 받았어. “어, 규현아. 아까 내가 칠칠맞게 빵집에 폰 떨어뜨리고 나와서 못 받았어. 미안, 미안.” -아…. 걱정했잖아. 집 앞에 있으니까 빨리 와. 아까 전, 빵집에서 휴대전화를 채 오니까 바로 전화가 온다. 내 연인 규현이었다. 서둘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까 그제야 규현이 한시름 놓으며 걱정했다고 한다. 집 앞으로 가니 규현이가 그 긴 팔을 흔들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계속 기다리는 규현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빨리 뛰어가니까 흔들던 팔로 나를 살포시 안아주고 나를 보고 동화 속에서 나온 왕자님처럼 미소를 지어주었다. “헥. 헥. 규현아. 미안, 미안.” “괜찮아. 힘들게 왜 뛰어와.” 규현이와 한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그냥 헤어졌다 . 별 다르지 않 은 데이트였다. 집 앞의 가로등에서 규현이와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 물쭈물 거린다. 보다 못한 성민이 답답했던지 왜? 라고 규현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냐고 물 어보는 성민 때문에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본다. “너 아까부터 계속 우물쭈물 거렸잖아. 뭐 말할 거 있어?” 그가 ‘들켰다’라는 표정으로 성민을 쳐다본다. 왜, 왜- 라고 계속 재촉하는 성민 때문에 어 쩔 수 없다는 듯이 규현이 털어 놓는다. 나 유학 가. 규현의 말을 듣고 성민은 조각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가냐고, 왜 날 두고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평소 에 공부도 잘하고, 전교 1,2위를 다투고 모든 방면에서 우월했던 규현이 유학을 간다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인데. 간다는 걸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꼭 가야 돼?”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의 미래를 생각해서는, 유학을 가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그에게 화가 났다. 어쩐 지 아까 데이트를 하면서 오늘 따라 말도 없거나 더듬고, 내가 부르면 못 듣고 깜짝깜짝 놀 라는 것이 - 아까 낮의 빵집 남자처럼 - 수상하였지만, 오늘 그냥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고 넘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떨어지면서 집으로 뛰어 들어가 버 렸다. 우리 집이 그다지 높은 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규현의 애절한 외침은 가볍게 무시 한 채 계단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형? 형! 형! 전화할게. 꼭 받아!”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엎드려서 펑펑 울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울었는지도 기억 안 나고,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오열했는지도 기억 안 난다. 규현이가 잘 되면 나도 좋고, 규현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 할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다음 날, 하루 종일 멍만 때리고 있다가 저번에 봤던 빵집 남자가 생각나서 빵집으로 갔다. 왜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이 우울한 마음을 달래 줄 것만 같고 잘 웃겨줄 것만 같아서. 빵집으로 향했다.

***

딸랑몇 주 전에 서너 번 왔었는데 - 이젠 완전 단골이지만 - 항상 올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준 다. 처음 왔을 때랑 똑같은 소리가 나고, 유리 창문으로 종운을 보니 그때처럼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그리고는 그 특유의 은근한 미소를 보여주며 어서 오세요- 라고 말하는데, 날 보지 못한 듯하여 풉! 하고 웃어버렸다. 그제야 나를 보고 어?! 라고 반응을 한다. “나 놀다가도 되요?” “…네에-?!” 당황했다 이 남자. 어쨌든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빵은 계산 할 테니까 걱정하지마라고 말하 고선 소라 빵이 있는 그곳으로 갔다. 소라 빵 하나를 집어서 앙 하고 물려는 순간, 빵집 남 자가 나타나 내 빵을 한 입 먹었다. “이씨, 뭐에요!! 악 내 빵!!” 내가 으아아악 거리면서 내 빵 어쩔 거냐고 빵집 남자에게 떼를 쓰자 , 호탕하게 웃으면서 빵 하나 더 줄 테니까 그만 하라고 한다. 우는 아이 달래는 거 같잖아. 괜스레 민망해지고 그래도 빵 하나 더 받고 돈 굳었단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그에게 히히- 웃어 보이니까, 그 도 싱긋 웃어준다. “저기요- 이름이 뭐에요?” “김종운이요. 왜요?” “언제까지 저기요, 저기요- 하면서 불러요. 그리고 친해지고 싶었고요. 전 이성민이에요.” 구석 한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종운씨가 앉았다. 손님도 없 어서 그런지 심심했나보다. 종운씨랑 대화를 하면서도 규현이가 걱정 되는지 탁자 위에 내 휴대전화를 놓고 힐끔힐끔 쳐다본다. 전화가 안 오는 규현에게 삐질 대로 삐져서 휴대전화 를 꺼버리고 종운씨랑 이야기만 계속 했다.


“오늘 왜 온 거에요?” “…이씨, 손님이 빵 먹으러 온 것도 안 돼요?” 애인이랑 싸웠는데, 그 애인이 남자라고 사실대로 말해버렸다면 종운씨의 눈빛이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눈빛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더럽다’라는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눈빛 일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사실대로 말하진 못 하고, 그냥 빵 먹으러 왔다는 식으로 대충 둘러대 었다. “종운���. 막 뛰어 놀고 싶은데, 우리 놀면 안 돼요?” “네? 왜 하필 저랑요?” “에이- 내가 아까 말 했잖아요. 종운씨랑 친해지고 싶다고.” “…그럼 우리 노래방 갈래요? 뛰어 놀고 싶다면서요.” 노래방에 가자는 종운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뛰어 놀고 싶었기도 하고, 우울한 마음을 털어내고 싶어서. 일도 다 못하고 나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종운씨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놀아준다고 하니 고 맙기도 하다. 그렇게 종운씨와 온 빵집 근처의 한 노래방. 난 처음에 노래를 잘 안 불러서 종운씨 먼저 부르라고 했더니 자신은 댄스곡은 못 부른다고 나한테 슬쩍 마이크를 주었다. 처음에 노래 부르기는 죽어도 싫은 나는 그럼 발라드라도 괜찮다고 하였다. “뛰어 놀고 싶다면서요. 초반부터 발라드 불러서 분위기 축 쳐져도 되요?” “괜찮아요. 나중에 내가 댄스곡 불러서 분위기 띄우면 되죠. 나 처음에 노래 부르는 거 싫 어해요.” 히히- 하며 웃어주니까 종운씬 내 성원에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쥐면서 외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자신의 애창곡인 것 같다. 그러자 화면에 뜨는 글씨들. 휘성의 ‘전할 수 없는 이야 기’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종운씨가 불러주니 또 색달랐다. 「나 너를 사랑하나봐.  아주 오래전부터 이말 전해주고 싶었어.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오늘도 네 주위를 하루 종일 맴돌고 있어.  이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혹시 네가 알아 줄 수만 있다면  Someday I'll show you all my mind.  항상 내가 있었다고. 언제나 너 머물러 지내는 곳엔,  Just let me cry for you tonight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그것도 모르는 널 위해-


언젠간 나를 보면서  웃어주던 네 모습 떠오를 땐 너무 좋았어.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는데 마치 내 맘 알아주는 것만 같아  Someday I'll show you all my mind  항상 내가 있었다고 언제나 너 머물러 지내는 곳엔  Just let me cry for you tonight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그것도 모르는 널 위해  (제발 내 미소 그대가 느껴 와 주면 좋을 텐데)  내 사랑이 너에게 부담일까 걱정스러워  (Someday I'll show you all my mind)  항상 내가 있었다고 언제나 너 머물러 지내는 곳엔  (just let me cry for you tonight)  아무 말 못하는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그것도 모르는 널 위해  내 맘도 모르는 널 위해」 종운씨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박수를 치면서 앙코르를 외치니 그가 하하 하고 웃으면서 의자 에 앉는다. 진짜 가수해도 되겠어요. 그는 또 쑥스러운지 아니에요- 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 이후로 종운씨와 나는 번갈아 가면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종운씨와 헤어지고 꺼놨던 휴대전화가 생각이 나서 주머니 속에 있 던 잠자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열심히 자고 있던 휴대전화를 깨우니 엄청난 진동이 온다. 문자이던 전화이던 다 규현에게서 온 것이었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선 규현에게서 온 문 자들을 쭉 살펴보다가, 한 문자 내용에서 손이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규현이가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었지, 언제 떠난다고는 아직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형….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 지금 떠나야 할 것 같아.」-규현이♥ 7월 19일 1:13 p.m. 진짜 미쳤다. 나도 미쳤고, 조규현도 미쳤다. 둘 다 미쳤다. 지금은 오후 1시 30분. 최소한 규현이는 2시 비행기 일 것이다. 종운씨랑 놀다보니까 이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나 보 다. 그 자리에서 그냥 막 뛰었다. 뛰다가 택시 하나를 잡아서 공항으로 갔다. 규현이에게 전화를 걸면서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규현이는 전화도 받지 않고 어디 있는 지도 모르겠다. 괜히 왔나 싶어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힘들어서 공항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 다. 고개를 푹 숙이니까 나도 모르게 닭똥 같은 눈물들이 뚝뚝 떨어졌다. 주머니에선 진동 이 오는데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조규현일 것이 분명하니깐. 몇 분을 그렇게 울었을까. 눈물이 조금 멈추자 눈앞에 보이는 검정색 운동화. 고개를 들어서 그 신발의 주인을 보니 달려왔는지 헉, 헉 거리면서 날 보고 있는 규현이 보였다.


“…성민이 형. …헉, 헉. 왜 전화 안….” “빨리 가.” 규현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빨리 가. 라면서 규현에게 냉정하게 대하였다.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바보같이 울어버리면 규현이는 안 갈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입술을 깨물어가며 울음을 삼키고는 계속 냉정하게 대했다. “나 때문에 예쁜 여자랑 못 논 2년 동안 미안했고, 이젠 나 찾지 마.” “…형.” “미국 가서 예쁜 여자 만나서 잘 살고.” “형!” 잘 지내, 내 사랑. 미안해, 규현아. 그대로 규현이를 등지고 뛰어서 공항을 빠져나왔다. 다 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엔 기사 아저씨에게 방해가 될까봐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참는다고 엄청 고생했다. 집에 와서 쉴 새 없이 계속 울었다. 누구에게 전화가 오든 문자가 오든 그냥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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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폐인 생활만 했다. 계속 규현이를 잊자고 딴 생각 했는데, 어떤 생각을 해도 그와 이어지는 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갑과 휴대전 화만 챙겨들고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렇게 소주 몇 병을 시키고는 나 혼자 한 잔, 두 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나인데, 5잔 마신 것도 진짜 많이 마신 것이다. 벌 써 취했는지 혼자 술주정도 하다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그냥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종운씨 번호나 받아 놓을 걸.” 말이 꽤 잘 통했던 종운씨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에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짓고 , 규현과 친했 던 친구이자 나의 후배인 려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려욱아-” -어! 형 웬일이에요. …형, 술 마셨어요? “응- 려욱아 여기로 좀 와.” -알았어요. 더 마시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착한 려욱이는 내 전화에 바로 오겠다고 했다. 려욱이가 오자마자 난 그에게 술을 퍼부었 고, 그는 나 때문에 조금 씩 마시는 것 같았다. 조금 후 그가 힘겹게 입술을 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에게 말하기가 조금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형. 규현이 미국 간 거 알죠.”


“…….” 그냥 아무 말 않고 려욱이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이고, 공항에서 울었던 것처럼 소리 없이 울었다. 그래도 눈치 빠른 려욱이에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 나에게 와서 등을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이 너무 따스해서 그에게 안겨서 펑펑 울어버렸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울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는지 깨보니까 집이었다. 또 려욱이가 나 때문에 수고를 했네. 머리가 너무 지끈거려서 잠시 누워 있다가 전화가 오기에 덜 뜬 눈으로 누구인지 확인도 안하고 받 아버렸다. 당연히 려욱이라고 생각하고. “여보세요.” “…….” “누구세요?” “……형.” 규현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규현에게 화를 내었 다. 사실 나는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가 나를 이렇게 찾으면 난 그가 더 싫어질 뿐이 다. “나 찾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내 목소리는 알아듣네?” “…나 좀 그만 내버려둬. 나 같이 쓸데없는 거 필요 없잖아. 그만 찾으란 말이야!! 그렇게 하는 거 나한테 집착인 거 몰라?” 내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다. 규현이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그를 잊기 위해선 빨리 번호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번호를 바꾸러 가는 길에 빵집에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종운씨가 어서 오세요. 하면 서 반겨줄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그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 내가 종운씨 - 하고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 일단 빵부터 고르자는 생각으로 집게와 쟁반을 들고 소라 빵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망설임 없이 소라 빵 하나를 집고, 다른 여러 가지 빵을 집었다. 쟁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계산대로 갔는데 계산대에도 종운씨가 없어서 계속 두리번거렸 다. 종운씨- 하고 한 번 더 부르니까 아무 말 없는가 싶더니 웍!! 하고 날 놀래켰다. “악!! 뭐에요! 놀랬잖아요! 어디 있었어요?!” “쩌어기-” “근데 왜 불러도 대답 안 했어요? 내가 몇 번이나 불렀는데….” “바보 같이 나 못 찾길래 내가 놀래켜 줄려고 했죠.” 저기- 라면서 탁자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엄청 가까이 있었다. 성 민씨 바보에요? 왜 옆을 지나가면서도 날 못 찾아요. 종운씨 때문에 민망해져서 얼굴이 빨


개졌다. 그것 때문에 괜히 종운씨에게 계산이나 하라고 성질을 부렸다. 2700원입니다. 라는 종운씨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천 원짜리 3장을 그에게 주었다. 종운씨- 라고 내가 눈 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면서 부르자, 그가 왜요? 라면서 날 쳐다본다. 나 번호 바꾸러 갈 건데, 같이 가주면 안 돼요? “바꾸고 나서 번호 가르쳐 주면 같이 가줄게요.” …ㄴ,네?! 내가 왜 당황하면서 말까지 더듬었는지 모르겠다. 종운씨는 그냥 나와 번호를 교 환하고 싶었을 뿐일 텐데. 왜요, 싫어요? 라고 물어보는 종운씨 때문에 더 당황 했을 지도 모르겠다. 얼른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가르쳐 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했다. 번호를 바꾸고 나서 종운씨와 번호 교환을 했다. 난 그를 ‘빵집남자’ 라고 저장했는데, 종운 씨는 날 왜 그렇게 저장하냐고 난리다. 그럼 종운씨는 어떻게 저장했는데요? 라고 그의 휴 대전화를 보려고 하는데 그가 휴대전화를 숨기고 보여주질 않는다. ‘빵집단골손님’ 이라고 저장 해 놓은 거 아냐? 쉽게 포기 하고, 다음에 몰래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전화번호부 잠가놨으니까 볼 생각 하지 말라고 한다. 내 생각을 읽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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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방학도 막바지를 달리고 있다. 부모님은 다 지방에 계시고, 동생도 지방에서 공부하는 바람에 나는 혼자서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번 방학에는 워낙 바빠서 지방에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친구들이랑 여행도 못가고 집에 쓸쓸히 박혀있었는데, 나를 반기는 문자가 왔다. 「성민씨, 우리 놀러 갈래요?」-빵집남자 8월 20일 3:45 p.m. 재빨리 회신 버튼을 누르고는 어디로 가냐고 문자를 보냈다. 어디로 갈까요? 라고 다시 나 에게 묻는 답장이 오는 종운씨. 종운씨 가고 싶은 곳이요. 라고 보낼까 하다가 바닷가...?! 라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종운씨가 조금 후에 좋다고 내일 어떠냐고 답장이 왔다. 나야 원래 한가한 사람이라서 언제나 가능하기에 종운씨에게 가능하다고 답장을 보냈다. 하루 동안 잠시 갔다 오는 거니까 갈아입을 여분 옷이랑 간식 같은 것만 챙기고, 종운씨의 차를 기다렸다. 조금 후에 빵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종운씨가 타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운 바다로 갔다. 생각해보니 매일 나 때문에 일도 못하고 나오는 것 같아서 종운씨에게 미안했다. 아, 종운씨에겐 더 좋은 건가. 어느 새 바다에 도착했다. 도시에서만 생활해서 탁 트인 바닷가가 공기도 좋고 피로가 싹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종운씨가 주차를 다 했는지 어느 새 내 옆으로 와서 나와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둘 다 경치만 감상하고 있는데 종운씨가 그 정적을 깼다. 좋아요? 하고 그가 은근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매일 봤지만 저


미소는 되게 사람을 끌어 들이는 것 같다. 나도 그냥 종운씨를 보고 씩- 웃어주었다. “그거 알아요?” “뭘요?” “성민씨, 되게 잘 웃는데. 그 웃음, 진짜 억지로 웃는 것 같고 씁쓸해 보이는 거.” “…….” 난 웃는다고 웃었는데 그게 티가 났었나 보다. 신경 쓰인 건가? 갑자기 바닷가 쪽으로 뛰어 가며 성민씨-! 하고 나를 부른다.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고 그가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 보 았는데 근처로 가자마자 바닷물을 튀긴다. 물을 맞은 나는 씩씩 거리면서 종운씨에게 똑같 이 물을 튀겼다. 본격적으로 종운씨와 나의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으아아악!! 김종운!!” “뭐요? 김종운?!” “아아악!! 하지 마요! 미안해요!” “내가 왜요- 싫은데요-” 점점 종운씨의 실체가 들어나는 것 같다. 종운씨는 초딩이었다. 종운씨 너무 유치해요- 성 민씨도 만만치 않은 거 알죠? 하면서 계속 물을 뿌리는 종운씨. 이건 물놀이가 일방적으로 내가 당하고 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물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종운씨 근처도 가지 못했 다. 이게 무슨 물놀이야, 재미없어. “그만해요! 진짜 눈 따가워요.” “알았어요.” “왜 말이랑 손이랑 달라요! 그만 하라니까요!” 내가 그만 하라고 하니까 말은 착하게 알았다고 하는데, 손은 계속 나를 향해 물을 뿌리고 있다. 그제야 물을 뿌리던 손을 멈추고 날 보며 괜찮으냐고 물어보는데, 누가 괜찮겠냐 구 요! 안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종운씨가 내게 다가오자마자 그대로 복수를 시작했다. 아까 나의 상황처럼 이번엔 종운씨가 앞이 안 보여서 내 근처에도 오지 못 하는 것 같다 . 호탕하 게 웃으면서 종운씨를 보는데, 반응이 없다. 뭐가 잘못 됐나? 그냥 웃으면서 장난치지 마요 - 물 더 뿌릴 거에요! 라고 해도 반응이 없다. 괜히 무서워져서 물을 뿌리던 손을 멈추고 그를 보니까 날 보며 씨익- 웃고 있다. 성민씨 눈 감아 봐요- 응? 뭐지? ...눈 감으라고 감 아버린 나도 진짜 바보다. 갑자기 내 몸이 뜨더니 바닷물 속으로 풍덩. 아이고, 말도 잘 듣 는다. 이성민. 수영을 개헤엄도 못 하는 나로선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빨리 일어났다. 종 운씨가 날 안아서 바닷물 속으로 빠뜨린 거였다. 일어나니까 종운씨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이스! 를 외치고 있었다. “이씨, 너무해요!!” “으하하하! 성민씨 지금 너무 웃긴 거 알아요? 물 먹은 병아리 같아. 으하하하.” “으아, 하지 마요.”


쪽팔려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계속 종운씨는 웃고 있고. 차마 화낼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그냥 웃으면서 물을 뿌렸다. 그렇게 계속 물놀이만 하다가 춥기도 하고 이제 점점 해도 지는 것 같아서 종운씨에게 잠시 쉬다가 가자고 했다. “나 혹시나 싶어서 긴 팔 옷 들고 왔는데, 줄까요?” 아무래도 종운씨는 너무 자상한 것 같다. 입을 열면 입이 덜덜 떨릴 것 같아서 입을 꼭 다 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기 입으려고 들고 온 것 같긴 하지만, 이런 자상한 모습에 쿵쾅쿵 쾅. 내 심장이 반응 하는 건가? 얼굴은 제 멋대로 빨개지고,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덜 덜 떨 뿐이다. 종운씨가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우리는 바 닷가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술 한 잔만 들어가도 술주정을 할 만 큼 술이 약하다. 술을 마시기 전에 조심스럽게 종운씨에게 주량을 물어봤더니, 걱정 말라면 서 적당히 마신다고 그랬다. 왜 안 가르쳐 주는거야! 내가 괜히 많이 마실까봐 그런가. 여 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적당히 마시는 종운씨를 앞에 두고, 술을 마셨다. 예상은 적중했다. 종운씬 잘 마셨다. 보기에도 잘 마시게 생겼네! 그런데, 내 입은 술만 마시면 왜 이렇게 주인 말을 안 듣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지 모르겠 다. 이것도 술버릇인가? 어쨌든 내 입은 종운씨 앞에서 규현이에 대해 쫑알쫑알 얘기 하고 있었다. 이미 좋아하던, 사랑하던 마음은 없앤 지 오래다. 내 머릿속에 그 녀석은 이제 나 쁜 놈 만으로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종운씨에게 조규현 얘길 꺼내니, 살짝 표정이 일그러 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술이 취한 지금으로선 앞이 잘 안 보여서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잘 모르겠다. 내 술주정도 다 받아주고 종운씨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것 투성이다. 다른 애들 - 비록 내 친구들 이긴 하지만 - 그 녀석들 이었다면 내 입을 막아버리고 자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종운씨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들어주고, 빈 술잔만 채워준다. 나 혼자만 얘기 한 것이 이제 야 민망해서 내가 화제를 전환해버렸다. “종운씨. 소라 빵 좋아한다고 그랬죠오-” 술만 마시면 말꼬리도 늘어나는 거, 이것도 술버릇이다. 아직 종운씨한텐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안 보여줘도 되는데. 민망해 죽겠다. 말꼬리를 늘리는 날 보고 피식 웃어 보이 곤 네. 라고 대답한다. “어어! 이 사람 보자보자 하니깐 매-일! 비웃어!” “풉! 성민씨가 귀여운 걸 어떡해요. 그리고 비웃는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도 풉 하면서 비웃었잖아-!! 징징 거리면서 종운씨한테 비웃었다 고 난리를 치니까 계속 웃어댄다. 그렇게 웃긴가. 내가 아무리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 어도 종운씨한테 들어본 건 처음 인 것 같다. 괜히 또 얼굴만 빨개지고 목소리만 민망해서 더 커지고 있다. 본론이나 말하라는 종운씨 때문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왜 소라 빵 좋아하는지 알아요?” “음…, 왜요?” 꼭 김 종운같이 달콤해서. 차마 내 고백은 말하지 못했다. 아마 나 지금은 종운씨 좋아하는 지도 몰라요. 종운씨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종운씨가 날 데리고 다시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는 작은 벤치 에 둘이 걸터앉았다. 그리고 서로 앞만 보고 있었다. “성민씨.” 고요한 정적을 깨고 종운씨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나 혼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어버렸다. ㄴ,네?! 라고 대답하자 그가 씩- 웃더니 성민씨. 하면서 나를 한 번 더 부른 다. “왜요- 불렀으면 말을 해요.” “아니에요.” “헐, 뭐에요 싱겁게. 갑자기 아니라고 그러면 더 궁금해지잖아요.” “…….” “왜 그렇게 뜸을 들여요. 종운씨 매일 보면 뜸 많이 들이는 거 알죠?!” “…….” “빨리 말 해봐요, 고민 있어요?” 분명 술은 취했지만, 종운씨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잠시 후의 그의 말 에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아도 취해서 깨지지 않던 내 술기운은 그의 말에 확 깨어버렸다. “내가 성민씨 옆자리 해도 되요?” “……?!” 진심인지 묻고 싶었다. 꿈은 아니겠지. 이건 분명히 고백이었다. 종운씨 몰래 볼도 꼬집어 보고, 눈물은 흐르는데도 웃음이 났다. 기쁨의 눈물인 건가. “…싫어요?” “……흡, 흑….” 종운씨에게 또 우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입술을 꽉 깨물면서 참았는데도 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싫으면 우리 원래 친했던 것처럼 장난으로 받아쳐요. 울지 말구요.” “…….”


“싫다면 싫다고 말해줘요. 상처 받을까봐 그래요? 나 상처 안 받을 테니까. 성민씨가 제대 로 말해줘야지 내 감정도 빨리 접죠. 확실히 말해줘요. 나 안 헷갈리게.” “…….” “…….” “흡…흑,…좋아요.” 난 그 말을 하고 나서 바로 종운씨를 껴안아 버렸다. 나 이제 상처 안 받게 보듬어줘요. “성민씨, 내가 아침에 와서 성민씨 웃음 씁쓸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지금 대답을 해버리면 목소리도 다 갈라져서 추해보일 것 같았다. 그냥 종운씨를 껴안은 채 로 위로 고개를 들어서 그를 보았다. 내 눈을 보면서 그는 그의 조그마한 손으로 나의 머리 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듯해서 살며시 눈을 감고 그가 이야기 하는 걸 들었 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떤 표현을 써도 표현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성민씨 억지로 말고, 진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할게요.” “…….” “사랑해요.” “나도, 나도 사랑해요.”

소라 빵으로 이어진 우리의 Love Story. -The End.


“아니라고!!!” 날카로운 정수의 외침이 텅 빈 운동장을 메아리치며 점차 사라져 간다. “맞대니까! 걔가 봤대!” “아니면 어떡할 건데!!!” “아니면... 아닌 거지, 뭐..” 한참을 씩씩거리며 영운에게 소리 지르던 정수가 숨을 가라앉히며 ‘확정지을 것도 없으면 서..’ 하고 분이 덜 풀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정수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한 발 물러 서 줬던 영운이 이내 정수를 따라가며 정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걔가 사진도 찍어서 보여줬었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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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능의 늪에 빠지는 기간의 스타트가 시작됐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늪에도 빠졌다.


입학식 날 작년과 다를 바 없이 북적북적한 반을 터덜터덜 걸어가 빈자리에 앉았는데 그 녀 석이 있었다. “어! 영운아 너도 이 반이구나!” “어? 어.. 안녕.” 작년, 두림고 축제인 장미제의 꽃이라 불리는 남장여자, 여장남자 페스티벌에서 2-3반 반대 표 여장남자로 나왔던 그 녀석. 그러고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선 굽이 높은 구두 또한 많이 신어본 듯한 포즈로 당당하게 무대를 휘저으며 꽃 왕관을 쓰 고 걸어 다녔었지. 그때 두림고 여자애들이 그렇게 못생겨 보일 수가 없었다. 하긴 그게 당연한 거다. 꽃 왕관을 쓰고는 무대를 도도하게 걷던 박정수의 모습을 보면 ‘아 -’ 하고 감탄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일명 두림고 여 신으로 불리는 정수연이 감탄을 했었으니 남자애들이 안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지나치게 얇아서 비바람이라도 부는 날엔 똑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허벅지하며 싸이월드 글자색 #FFFFFF 같은 새하얀 피부 톤이라니... 게다가 그 몸매에 가슴 뽕까지 과도하게 집 어넣어서 적어도 C컵이 될 법한 가슴을 달고는 미니스커트를 잡아 내리지도 않고 아주 자 연스럽게 걸었었던 박정수. 그랬다. 그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본 후로부터 그 녀석만 보면 자꾸 그때가 생각나 혼자 얼굴이 벌게 지는 나였다.

근데 그런 녀석이 내 옆에 있다니. 내 아들놈이 섰다는 건 이미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눈치 챘었고 혹시 나 혼자 얼굴이라도 벌게지진 않았나 싶어 일부러 박정수의 활기찬 인사에도 싱겁게 ‘어어 안녕’ 이라고 대답하 고는 일찍이 엎드려 있는 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어디라도 아픈가 싶어 ‘영운아 어디 아파..?’ 하고 내 팔을 조심스레 흔들며 묻는 녀석의 모습이란... 마음 같아선 납치해서 우리 집에 데려다놓고 키우고 싶은 심정이 다. 하지만 그랬다간 법적 처벌을 받기에... 하... 오늘 또 내 아들놈만 죽어나게 생겼다.


입학식이 끝나고 동해 녀석의 기다리라는 말도 무시한 채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외가 쪽 사촌인 이혁재가 엄청난 스피드로 뛰어왔다. 아무리 여리여리해 보인다 해도, 인라인부여서 그런지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다. 그 스피드로 뛰어와 내 등짝을 짝 하고 때리는 파워 역시 예사롭지 않다. “아!!!” “왜 혼자 가냐 왕따 김영운!?” “난 혼자 집에도 못가냐!” “너 우리 동해는 어디다 버려둔 거야!” 그렇다. 이혁재는 이동해를 고1때부터 짝사랑 중이였다. 처음 이혁재가 이동해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조금 놀라긴 했지만 , 정수가 슈주의 남팬이 라는 얘기를 듣고는 나도 정수와 공통주제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팬픽을 너무 많이 봐서 그 런지 게이라고 징그럽다거나 혐오스럽긴 커녕 같은 게이 한 명이 더 생겼다는 생각에 동질 감을 느껴 기쁘기 까지 했었다. “야 이혁재.” “어?” “너... 이동해 좋아하잖아.” “어어.. 왜?” “그거... 이동해도 알아?” “아니 몰라. 왜 이놈아!” “아, 아니 그냥 남자가 남자 좋아하면 어떤 기분인가 싶어서..” “너...혹시..” “어?! 뭐, 뭐가?” “너..!” “왜!” “너 남팬이지!” “뭐?” 난 혹시 이혁재가 내가 정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했을까봐 쫄아 있었는데 고작 하는 얘기가 ‘너 남팬이지’ 라니... 하긴 눈치는 무슨, 개념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혁재한 테 내가 뭐가 무서워서 쫄았단 말인가. 내 방 벽면에 슈퍼주니어 브로마이드가 붙여져 있던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레 저렇게 날 쫄게 하는 이혁재가 괜히 얄미워졌다. “야! 왜 혼자가!” “몰라 니 혼자가.” “왜! 야! 이모한테 이를 거야!” “어쩌라고!” 만날 저런다. 뭐만 하면 ‘이모한테 이를 거야!’ 라며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이혁재라니.. 계집


애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한두 번 놀래는 것도 아니고 매번 저 방법을 써먹다니, 매번 느 끼는 거지만 참 한심한 놈이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다 . 그래서 다시 걸어보 자 몇 번의 신호음도 흐르지 않았는데 ‘오빠!’ 하고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오빠! 저 2학년 김하은인데요.” “아..” “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네?” “그니까 저랑 사겨주세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나...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이런 전화는 당황스럽고 어이없기 짝이 없다. “여보세요.” “네 오빠!” “저기 죄송한데요.” “말 놓으셔도 되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한데.” “...” “저.. 제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 “여하튼 그래서 못 받아들이겠네요. 죄송합니다.” “누구에요!” “네?” “누구냐고 그 년!!!” 2학년 김하은이라고 했던가... 이 자식은 뇌를 어디에 팔아먹었나.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큰 목소리로 ‘누구냐고!!!’ 라 며 소리를 빽빽 지르는 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저기요.” “네 오빠.” “남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네?!” “알겠냐? 뇌 없는 저능아야?”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내가 누굴 좋아하든 저랑은 상관없는 인물인데 저딴 식으로 막말을 해대는 놈 때문에 결국 마지막엔 저능아라는 속어를 내뱉었다. 아... 이미지관리 해야 되는데... 내가 수도 없이 들어오는 고백을 마다하자 어느 샌가 부터 내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 었다. 그래서 옆 여학교 예쁘기로 소문난 애랑 한 번 잤더니 금세 그 소문이 없어지긴 했지 만.. 별로 느낌이 안 좋았던 건 사실이다.

슈퍼에 가려고 내려가는데.. 정수다. “어! 영운아 안녕!” “아..정수야 안녕.” “너 여기 살아?” “응.” “난 옆 동인데!” “아 그래?” 자신의 옆 동에 산다는 게 뭐가 그리 신기하고 좋은지 헤헤거리며 내게 말하는 게 정말 너 무 귀여워 보였다. 솔직히 정수가 옆 동에 사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가 정수를 좋 아한다는 걸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 역시도 모르는 척 하고는 얼른 다른 화제로 얘기를 돌렸다. “아 맞다 정수야.” “응?” “너 좋아하는 가수 누구야?” “나? 왜?” “그냥.. 너 슈퍼주니어 좋아한댔지?” “응! 특히 영운이!” 정수가 ‘영운이!’ 라고 하는 바람에 순간 날 말한 건가 싶어서 눈이 반짝했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슈퍼주니어 멤버 얘기중이란 걸 알아채고는 ‘아- 강인’ 했다. 정수가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는 건 정수의 집이 어딘지 알기 전부터 알던 사실 . 정수가 슈퍼 주니어를 좋아하는 걸 모르면 두림고 간첩이란 말이 돌 정도니 그래서 ‘나도 남팬이다 ’ 라 는 정수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말을 꺼낸 거였다. “난 이특 좋던데..”


“너도 슈퍼주니어 좋아해?” “응.” “와 진짜! 난 나 혼자 남팬인지 알았어!” “아니야 우리학교에 은근 남팬 꽤 있을 걸?” “너도 남팬이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나중에 우리 공방 뛰자!” “어 그래.” “영운아 나 학원 도착해서! 헤헤 내일 학교에서 만나~” “응. 잘 가.” 정수와 얘기했다. 얘기했다는 그 자체로 가슴이 두근거려 정신을 못 차리겠다. 두근두근두근 나사 하나 빠진 로봇마냥 휘적휘적 걷는 모습을 생각하니 우습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 방비 적인 애였을까. 정수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정수... 정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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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운!” 누군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에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벌떡 하고 일어났다 . 혹시 담임 이 부르는 걸까봐 깼더니.. 권유리다. “뭐야.” “크크큭 김영운 너 지금 진짜 빙구처럼 보여.” “뭐라고?” “빙구같ㄷ..” “...” “알겠어 미안해 안할게 됐지?” 평소 빙구 같다는 말이면 질색을 하는 영운이기에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을 보고 빙구 같다고 말하던 유리가 영운이의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야 근데 김영운.” “뭐.” “너...진짜로.”


“어.” “박정수 좋아해?” “뭐?!” “아, 아님 말고!” “누가 그래?” “어?” “누가 그랬냐고!!!” “아! 왜 소리를 질러!” “빨랑 불어 권유리” “아 진짜... 말하면 안 되는데..” “얼른!” “기, 김종운이 알려줬어!” “이런 망할..” “야! 내가 말했다고 하지마!” “아오 진짜!” 애초부터 김종운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아오 진짜! 김종운의 주둥아리를 꿰매 ���릴까 보 다!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내가 절 믿고 말한 거구만 정말..! 혼자 씩씩 거리고 있는데 정수가 도도도도 뛰어오더니 의자에 털썩- 하고 앉는다. 왜 그런 가 싶어서 교실 문을 봤더니 정수가 들어온 지 10초도 안 되서 담임이 들어온다. “아 힘들어 죽겠다.” “크큭.” “왜 웃어~!” “너 얼굴이 사과 같아.” “뭐, 뭐야!” “아니야 아냐~ 귀여워서. 크큭.” “놀리지 마!” 정말 사과같이 새빨개져서는 말하는 게 말하는 사과를 보는 기분이었다. 사과가 아니라 석 류인가? 미녀는 석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근데 영운아.” “어?” “너 아침에 왜 그렇게 짜증난 얼굴이었어?” “어? 어 그게..” “?” “아..” “너... 혹시...” “어?!”


정말 정수가 알아챈 건가 싶어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너.. 변비야?” “뭐?!” 변비라니..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침자습시간에 큰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내 ‘거 기 누구야! 소리 지른 사람 복도로 나가!’ 라는 담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나가자 그것도 웃긴지 킥킥거리며 웃는 정수 . 김재중이 저랬으 면 정말 때려주고 싶었을 텐데 정수여서 그런지 마냥 귀엽기만 하다. 다음날 아침 정수가 오기 전 먼저 저 멀리서부터 영운을 보고선 어제의 정수가 도도도 달려 오던 것과는 달리 우다다다다 하는 소리. 지원이 될 기세로 달려오는 권유리를 보고는 놀란 영운이 ‘으워어어’ 거리면서 도망치려했지만.... 곧 잡히고 말았다. “김영운 도망가지 말고 이 사진 좀 봐봐.” “뭔데?” 유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이유는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을 보아하니 연예인 같은데...

최시원?!

“야 대박이지.” “말도 안 돼..” 얼이 빠진 듯한 영운이 뭐라 뭐라 혼자서 힘없이 중얼거리며 아이돌가수인 슈퍼주니어의 사 생을 뛰고 있는 유리가 보여준 사진을 뚫어지게 보았다. 사진 속엔 슈퍼주니어 시원이 어떤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클럽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는 ‘헐..’ 이라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영운이었다. “야 이거 정수한테는 보여주지 마.” “왜?” “정수 이거 보면 쇼크 먹어.” “퍽이나.” “진짜야 보여주지 마.” “보여주래도 안보여 줄 거거든?” 이 와중에 정수를 챙기는 영운을 보고는 유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박정수가 그렇게 좋냐?” “어?”


“너 몇 년째냐?” “뭐가- ” “짝사랑!” “어?” “너 몇 년째 짝사랑이냐고!” “나? 나.. 1년 반 정도 됐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정말 의구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하긴 슈퍼주니어의 남팬인 정수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이유로 영운이 안티에서 팬으로 바뀌었으니 그런 얘기가 나올 만도 하다. “음...” “어?!” “솔직히 말하자면... 다 좋아.” “그럼 고백을 해! 이 답답아!” “근데... 정수는 강인을 좋아하잖아..” “너 그거 알아?” “뭐가?” “연인끼리는 O형이랑 A형이 제일 잘 맞는대- ” “그래?” “그래는 무슨 이놈아!” “왜 또!” “박정수 혈액형은 아냐?” “ㅎ,혈액형..?” “...” “...” “아오 답답해!” “...” “A형이라고!”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무슨! 그 점을 이용하라고 이 답답한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 다.” “...” “어쩜 박정수랑 안 친한 내가 더 많이 아냐고!” 유리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정수가 슈퍼주니어 강인을 좋아한다며 자신은 고백할만한 상 대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린 영운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다고 그런 영운을 바라보 기만 할 유리가 아닌지라 버럭 화를 내며 영운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멍청아! 너 진짜 강인오빠랑 닮았어! 정수는 너 좋아한다니까?!” “설마.. 말도 안 돼.” “진짜야! 한번만 나 믿어봐!” “널..?”


“뭐냐.. 그 못 믿겠다는 얼굴은.” “아, 아냐. 근데 뭘 어쩌겠다는 건데.” “그니까..” 자신을 한 번만 믿어보라며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을 하며 유리가 영운의 귀에 대고선 중얼중 얼 말을 한다. 그런 유리의 말을 듣고는 ‘오.. 권유리..’ 라며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은 영운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수야!” 일요일 오후 1시. 화창한 날씨 아래 두 장의 표를 들고는 손을 흔드는 영운을 향해 정수가 달음박질을 하며 뛰어온다. “진짜네!” “것 봐. 오빠만 믿으랬지.” 영운이 들고 있던 표를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수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짓던 영운이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말했다. “박정수.” “아이씨... 응?” “너한테 표 줄 테니까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 “뭐? 수행평가 해 와라 뭐 이런 건 싫어.” “응.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 이거야.” “...” “...” “...” “정수야...?” 그랬다. 유리가 말해준 방법은 슈퍼주니어 4집 컴백에 맞춰서 인기가요 공개방청권을 구해 서 소원으로 연애를 걸으라는 거였다. 하지만 정수는 쉽게 응하지 않고 멍- 한 얼굴로 얼어 붙어 계속 영운의 얼굴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정수가 이상해 보였는지 함께 정적을 이어가던 영운도 ‘정수야...?’ 라며 조심스레 정 수를 불러봤지만 여전히 정수는 멍- 한 얼굴이었다. “진심이야 김영운?” “응?” “진심이냐고..” “다, 당연하지..”


“야.” “어?” “나 한번만 꼬집어주라.” “왜?” “잔말말고 빨리.” “...” 느닷없이 자신의 볼을 내밀며 꼬집어보라는 정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본 영운이 정수 의 애기같이 맨질맨질한 볼만을 멍하니 보고 있었더니 정수가 얼른 꼬집어보라며 재촉을 하 기까지 한다. “세게!” “...” “악! 진짜 아파!” “아, 아팠어?” “아니 별로...” “근데 정수야.” “어.” “대답 안 해줄 거야?” “아...” “...” “음...” “니가 싫으면 거절해도 상관...” “싫은 게 아니라..” “... 부담스러워?” “아니...” “...” “너무... 좋아서...” 예상외의 대답이어서 너무 놀랐는지 안 그래도 컸던 영운의 눈이 더욱 동그래져 정수를 쳐 다보았다. 그리고는 정수도 자신의 직설적인 대답에 놀란 건지 영운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영운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둘 다 바보같이 눈만 커져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하항항항.” 인기가요 컴백무대에 맥을 추스르지 못하는 정수를 붙잡으며, 호탕하게 웃는 정수를 보던 영운이 흐뭇하게 웃었다.


인기가요 가기 전 정수의 예상외의 대답 때문에 좀 어색해진 탓에 둘 다 생각에 잠겨 있었 다. 정수는 정수대로 영운은 영운대로 깊은 생각을 했는데 인기가요 공방하나로 어색은 무 슨. 둘 다 들떠서 맥을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인거다. 정수는 슈퍼주니어를 봐서, 영운은 그 런 정수가 예뻐서. “정수야.” “으응~?” “있잖아.. 내가 고백했을 때..” “응.” “무슨 생각했었어?” “나? 나는...” “...” “그냥 즐거웠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고백 받으니까.” “설마 내가 같은 남팬이어서 좋은 건 아니지?” “뭐 그런 것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김영운이어서 좋은 것도 있고...” “강인이어서 좋다고?” “아니! 두림고 3학년 2반 김영운이어서 좋다고!” “... 고마워.” “뭐가?” “고백 들어준 거.” “... 나도 니가 좋아서 그런 건데 뭐” 쑥스러운지 온몸을 배배 꼬면서 영운에게 말하는 정수를 바라보던 영운은 그런 모습마저도 예쁜지 정수를 품에 폭- 안았다. 영운의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건지 아까처럼 눈을 땡그랗 게 뜨고는 영운을 바라보자 영운이 정수의 머리칼에 머리를 부비적거린다. “근데 정수야..” “응?” “내가.. 사실 안티라면 어떨 것 같아?” “네가? 에이, 설마~” “아...” 자신이 팬이 아니라 사실 정수 너 때문에 팬인 척 한 거라 말하려던 영운이 정수의 반응에 당분간 이 고백은 미뤄둬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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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김영운!!! 이거 봐!!!” “뭐?”


“나 어제 사생 뛰면서 건졌어!” “뭔데?” 고3인데 수능준비는 무슨. 슈퍼주니어가 4집 미인아로 컴백을 했다고 한동안 쉬던 사생을 다시 뛰기 시작한 유리가 급하게 자신의 핸드폰을 부여잡고 영운에게 뛰어왔다. 사진을 보니 슈퍼주니어 시원이 어떤 여자와 클럽에 들어가는 사진.

오 마이... 아마 이 사진을 정수가 봤다면 유리의 핸드폰을 들고선 파르르 떨며 ‘아니야!’ 라고 소리 지 르며 내던졌을지도 모른다. “야, 이거 진짜 최시원이야?” “그렇다니까? 야 내가 사생을 몇 년째 뛰는데 멤버 한 명 못 알아보겠냐?” “헐...”

“정수야..” “응?” 하굣길에 오늘 아침에 유리가 보여준 사진에 대해 슬쩍 말을 하려고 정수에게 말을 붙여보 는 영운을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수였다. “최시원 말이야.” “응.” “걔 여자관계 복잡해?” “아니? 야, 걘 주님, 주님 하는데 설마~” “아, 그래..? 아니던데..” “뭐가?” “아니. 누가 나한테 최시원이 여자랑 팔짱끼고 클럽 가는 걸 봤다고 해서.” “누가?” “아, 그냥 아는 엘프가.”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해. 최시원은 그런 애 아니야. 알지도 못하는 게 누굴 욕해?” 졸지에 알지도 못하는 엘프가 된 유리는 sm앞에서 귀를 긁적거리며 ‘누가 내 욕을 하나..’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닌데... 걔가 봤댔어.”


“아니라고!!!” 날카로운 정수의 외침이 텅 빈 운동장을 메아리치며 점차 사라져 간다. “맞다니까! 걔가 봤데!” “아니면 어떡할껀데!!!” “아니면... 아닌 거지... 뭐.” 한참을 씩씩거리며 영운에게 소리 지르던 정수가 숨을 가라앉히며 ‘확정지을 것도 없으면 서..’ 하고 분이 덜 풀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정수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한 발 물러 서 줬던 영운이 이내 정수를 따라가며 정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걔가 사진도 찍어서 보여줬었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아직 연애 초기인 만큼 정수에게 민감한 얘기는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영운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연애하면서도 연애 같지 않다는 생각이 불쑥 든 영운이었 다. “정수야.” “왜.” 아까 일로 한층 날카로워진 정수의 목소리가 영운에게 홱-! 하고 돌아온다. “우리 연애하면서 애칭도 안 정할 거야?” “애칭?” “어. 다른 애들은 여보 자기 뭐 이런 식으로 부르던데.” “애칭...” “...” “애칭은 무슨 애칭이야, 그냥 이름 부르자.” “왜. 우리도 좀 남들처럼 연애답게 좀 해보자.” “정 하고 싶으면 너가 정하든가.” 생긴 건 굉장히 세심하고 민감한 여성처럼 생긴 정수는 예상외로 사고방식은 뼛속부터 남자 였다. 뭐 그럼 어때, 아무리 그래도 생긴 건 보호본능 일으키게 생긴 귀염둥이인데. “우리 애칭 너구리랑 오리하자.” “오리?” “응 너 오리 닮았잖아.” “야!” “큭큭, 진짜 닮았다.” “왜 너 혼자 귀여운 거 하는데!” “너구리가 귀여워?” “응..” “그럼 넌 사슴 하던가.”


“사슴?” “응 꽃사슴.” “...” “싫어?” “아니, 기다려 봐. 너 애칭 정하는 중이야.” “난 뭔데?” “음..” “응?” “악어.” “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 1순위. 흐항항항.” 영운에게 악어라는 별명을 지어주고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특유의 7옥타브 웃음소리를 내 면서 웃는 정수를 보며 영운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내가 싫어?” “응? 아니~ 왜? 큭큭.” “근데 애인 애칭이 니가 제일 싫어하는 동물이 뭐냐.” “흐항항. 귀엽잖아.” “뭐?” “미녀와 야수 같고.” 정수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즉, 자신은 미녀고 영운은 야수다 뭐 그런 거 같은데... “내가 야수야?” “당연하지~ 그럼 내가 야수 할까?” 와이셔츠를 풀어 헤치며 자신의 우락부락한 복근과 비슷한 근육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정수 와 그에 비해 지금의 정수의 몸과 같이 여리여리한 몸체를 보호하며 꺅 소리를 지르는 자신 의 모습이라... 상상하던 영운이 이건 영 아닌지 또 한 번 이맛살을 찌푸렸다. “으항항. 니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응.” “그러니까 넌 악어야.” “뭐?” “흐항항항항.” 영운을 악어라고 놀리는 게 재밌는지 흐항항 거리며 웃던 정수가 자신의 아파트로 쏙 들어 가며 ‘내일봐 악어~’ 라며 도도도 뛰어 들어간다. 그게 귀여운지 ‘악어..’ 라고 중얼거리며 영운이 피식 웃었다.


그럼 앞으로 난 야수인 만큼... 근육이나 키워볼까.

벌써부터 앞서 나가 음흉한 생각을 하는 영운이 ‘오~ 미녀!’ 라는 헛소리를 하며 자신도 자 신의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언제부터 정수가 저렇게 고양이가 되었는지, 언제부터 영운이 저렇게 밝힘증 환자가 되었는 지는 몰라도 둘은 둘이 연인이라는 그 자체로써 너무 행복한 상태다.

사슴과 악어 미녀박정수와 야수김영운의 연애 이야기.

사슴과 악어 THE END -


“안녕하세요 슈퍼주니어입니다. 우리는 슈퍼주니어에요.” “우리는 엘프에요.” 최대 규모로 이뤄진 콘서트는 그 어떠한 열기보다도 대단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 그러한 무대의 주인공은 어느새 10주년이나 된 슈퍼주니어였다. 신화 다음으로 가장 장수한 아이 돌 그룹으로써 그 어떠한 그룹보다도 사건사고가 많았던 이들이 오늘 7월 21일 8번째를 끝 으로 마지막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무대 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면 서도 애써 모르는 척 콘서트를 즐기겠다면서 방방 뜨면서 웃고 있는 멤버들 사이로 휠체어 에 앉아 있는 규현이 자신의 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슈퍼주니어의 막내온탑 조규현입니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 막 슈퍼주니어쇼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콘서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 上 *

방안 가득 햇살이 스며들었다. 새하얀 커튼 사이로 비추는 햇살, 방 한가둔데 놓인 새하얀


침대 그리고 그 침대에 잠이 든 두 사람의 인영.......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두 개의 싱글 사이즈의 침대를 붙여놓은 공간에 세 사람이 나란히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슈퍼주니어의 현실이었다. 어찌되었든 오랜만에 쉬는 휴일이니 달콤한 잠에 빠 져 깨어날 줄 모르는 이 공간의 주인인 듯한 세 사람은 한참을 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더 란다. 이 공간 안에 들어서는 누군가만 아니었다면 한참을 아니 저녁때까지 잠에서 헤어 나 오지 못하였을 이들을 깨우는 것은 이특이었다. 이곳과 정반대로 시끄럽기 그지없는 거실과 는 딴판으로 이 시대의 아니 한 시대의 아이콘, 막내온탑의 실질적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막내들이 머물러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하건만 이특은 여전히 조심성이라고는 아니 잠에서 덜 깬 듯 노크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는 그 표지판을 본척만척 문을 벌컥 열어버리는 이특은 바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문 앞에서 언제 일어났는지 아니면 이특을 놀려 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인지 무표정한 기범이 턱하니 그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놀라서 나자 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란 듯 숨을 들이켰던 순간에 사래가 들려버려 서 한참을 콜록거리는 이특을 비웃기라도 하듯 려욱은 침대위에 앉아서 일명 조규현 썩소라 고 불리우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막내들의 놀림감이 된 이특은 늘 있었던 일 인 듯 겨우 진정된 듯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기범에게 하극상이라 면 화를 내려고 하지만 기범을 총애하는 희철, 아니 희님 때문에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 그나마 제일 만만한 려욱에게 버럭질을 선사하였다. "빨리 나와서 밥 먹어." 뒤돌아 나가려는 찰나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려욱을 향해 바라보았다. 그리고 려욱의 옆에 아니 침대와 침대가 합쳐진 그곳에 삐죽하니 나와 있는 머 리 하나 그리고 곧 이어서 그게 누구인지 확인하는 듯 이특은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리고 려욱을 향해 뭐냐고 눈짓을 하자. 마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그 말 참으로 시크하 기 그지없었다. "조규현 처음 봐요 정수형." 시크하게 이 인물이 그것도 려욱의 품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인물이 규현임을 깨닫는 순간 히스테리처럼 발악을 하려는 그 순간, 어느 순간 뒤에 왔는지 소리 지르려는 이특의 입을 턱하니 막으며 담담하게 말하는 기범의 말에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형이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요." "그....그....그게 아니라. 왜 저 녀석이 이곳에 있느냐 말이지." "시원이형이 어제 하루 종일 CF 촬영 때문에 못 들어온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데리고 있 었죠 뭐." 대답하는 려욱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신동에게 1인분 더 해야겠다고 기범과 려욱의 방문을 닫으며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던 려욱은 여전히 품안으로 파고들 듯 잠이 든 규현을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마치 깨어지기 쉬운 유리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흔들림에 조금씩 눈을 뜨는 규현의 모습은 더욱더 말라 있었다. 그러 한 규현을 보면서 한숨을 몰아쉬듯 바라보다가 일어나자는 듯 손을 잡아주자 그제야 침대에


서 일어나 앉는 모습이 꼭 조규딩이라는 별명답게 초딩스러운 면모를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안타깝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안타까움에 규현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에도 여전히 그 과거에 슈퍼주니어의 명성을 그대로 내보이듯 소란스럽게 아침 겸 점심을 맞이하 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방문 밖에서 그대로 소음이 되어서 들려오는 듯 키득거리며 웃어 보이고는 방문 한 켠에 접어두었던 휠체어를 침대까지 끌고 와서는 규현이 조심스럽게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며칠 새에 몸이 움직이는 것이 힘겨운 듯 조금은 벅차오르는 숨소리가 제법 거칠어지려는 찰나에 휠체어 한쪽에 두었던 산소 호흡기를 건네고는 조심스 레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이는 광경에 려욱과 기범 그리고 규현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중요한 손님이 라도 온 듯 한 줄로 주르륵 서서는 규현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꼭 놀이동산에 서 퍼레이드를 하는 듯한 모양새에 조금은 벅찬 숨을 내쉬며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무척이 나 만족스럽다는 듯 신동의 '밥 먹자.' 라고 말을 하자 무엇이 그리 좋은지 '와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따라나서는 은혁과 동해의 모습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러한 모습에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규현의 휠체어를 어느새 낚아채서는 끌고 가는 희철에게 조심하라고 타 박을 주는 이특의 표정은 걱정스러웠다. "규현아! 시원이는 어쩌고 이곳에 왔어?" "시원이 형 촬영 갔어요. 그래서 왔는데... 내가 온 거 싫어요 희철이형?" "아니... 우리 막내랑 있으니깐 좋지. 왜 저 좁은 곳에 있었어 이 형아 방으로 오지." 다정스레 머리를 쓰다듬으며 식탁까지 데려다 주고는 그 옆자리를 차지하듯 턱하니 앉아서 는 싱글거리며 웃어 보이는 희철의 표정 역시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 가수로써의 생명을 갉 아먹는 병 아닌 병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가수가 되어서 멤버들과 함께 아니 우리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며 무대를 누비고 다녔을 텐데.. 아니 어쩌면 이 렇게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건만 안타까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크한 듯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변함이 없는 듯 종종 팬 들을 위해서 만들어준 노래는 규현이 없는 슈퍼주니어 아니 규현의 목소리가 담겨있지 않은 슈퍼주니어의 앨범에 그대로 실려 있고는 하였다. 그것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어쩌면 평생 한이 될 듯한 그 사실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시원이 녀석, 그렇게 돈이 좋은가? 우리 규현이를 내버려두고 가다니 말이야." "에잇 규현아 이 엉아한테 시집와라. 내가 더 잘 해줄게." "은혁이 너랑 결혼했다가는 규현이 힘들어서 못살고 도망갈걸." "큭큭큭큭큭큭 원숭이가 사람을 탐하다니 그건 말도 안된다거." "아!!! 진짜 형.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이동해 너도 만만치 않거든." 여전히 투닥 거리는 형들을 보자니 참 좋아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지만 방 송일 때문에 늘 바쁘기 그지없는 형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없었다 . 일부러 스케줄 하는 곳을 따라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못 보는 얼굴들이니 세세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몫으로 준비된 묽은 죽과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들이 따로 차려지고 그것을 보며 당연하다는 듯 따로 차려지고 그러한 신동의 센스에 고맙다 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막 아침 겸 점심을 먹으려는 찰나에 들려오


는 벨소리에 현관문에 가까이 있던 려욱이 귀찮다 라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인터폰으로 누 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 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음을 확인하고 제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찮아 보였는지 다시는 저런 일을 시키지 말아야 겠다 라면서 저들끼리 농담을 지껄이면서 하하하 거리며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유쾌해 보였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음이 무척이나 진중한 그답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새 식탁 앞에 도착해서는 조심스레 규현의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이 금세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단진 손을 가 진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에 규현 역시 제 어깨위에 올려진 손을 마 치 앞으로 끌어내리듯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왔냐 라는 작은 인사를 건네었다. "어디 안 아팠어?" "응, 형은 촬영 잘 했어요?" "아니.... 너 보고 싶어서 촬영도 제대로 못했다." 느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시원을 보며 모두들 헛구역질을 하듯 욱욱 거리거나 혹은 희철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시원의 등짝을 시원스레 때려버리는 것으로 그만하 라는 듯 말하자 그것에 익숙하다 라는 듯 제몫으로 놓여진 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 그리 고는 맛있다 라는 듯 신동에게 엄지손가락을 척하니 내밀고는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마치 저기 저들과는 딴 세상이라는 듯 이 소란스러운 식탁 앞에서 유유자적 식사를 하는 사람은 규현, 려욱, 기범이 전부라면 전부이니 말이다. "조용히 해.. 큐혀니 죽 먹자나." "괜찮아요 한경 형." "크래도....밥 머그느데 떠드르면 아니되자나." "아니되자나가 아니라 안 되잖아 라니깐." "히철!! 그르지마." "뭘 또 그르지마야 그르지마가." 시비 걸 듯 그렇게 말하는 희철을 받아주는 이는 한경뿐이 없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식사 시간은 달그락거리며 어느새 죽 그릇을 다 비운 규현의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끝을 맺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식사시간은 멤버수가 많다보니 더욱더 길어지는 듯해서 조금은 오랜만에 일어나는 일이라 규현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치 당 연하다 라는 듯 함께 식사를 마친 기범과 려욱은 여전히 어수선한 식탁을 벗어나 규현의 휠 체어를 끌어다가 작은 정원으로 인도하면서 어느새 자기가 잘났다 라는 듯 자랑질을 시작한 형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규현이 없는 그 공간에는 늘 그러하듯 공허하고 안타까운 분위기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콘서트 잘하자.” 점점 우울하기까지 한 식탁 앞에서 리더이자 가장 형인 특이가 동생들에게 말했다 . 그리고 그 순간 모두들 하나같이 마지막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준 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모두가 그러하듯 그 순간을 기억해 내려는 듯 말이다.

* 中 *

-조규현씨 그리고 보호자 분 들어오세요. 온통 새하얀 그리고 다양한 의료서적들이 널려 있는 공간 안에 삐그덕 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권해진 자리에 앉았다. 몇 년 전 사고 이후로 쭈욱 자신의 주치의를 했던 의사 를 다시 보게 된다 라는 것은 그다지 기쁜 일만은 아니기에 조금은 굳은 듯 굳어져 버린 입 가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한 규현과 보호자로 함께 따라온 매니저는 지난번 받은 건강검진의 결과가 나왔기에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온 이유기도 했다. 비교적 정기적으로 받은 검사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역시 별다른 이상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저 마음 놓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제 눈앞에 보이는 의사는 제법 심각 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점점 불안감이 언습 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멈칫거리듯 혹은 주저하듯 권해진 자리에 앉고는 말없이 의사가 어서 빨리 결과를 말해주었 으면 하는 바램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1초 2초 3초 그렇게 길지 않는 시간이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에 맞춰서 툭툭 몰려오는 지독한 불안감에 어쩌면 더욱더 힘들었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조규현씨, 얼마 만에 정기검진 받는지 아십니까?" "아마도 1년쯤 넘었던 거 같은데요." "흐음 1년하고 2개월 정도 지났다는 거 아시죠. 으음 검진에서 조금 안 좋은 결과가 나왔습 니다. 폐동맥 협착이라고 해서 폐에 흐르는 혈관 즉 동맥이 협착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만. 근래 들어서 움직이는 게 힘들다거나 혹은 숨이 가쁜 현상이 있었을 듯한데. 어떠셨습니 까?" "그런 증상은 중이염 때문에 열이 나서 그리고 감기기운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요. " "그다지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관찰이 필요한데다가 규현씨 같은 경우는 기흉 이 두 번 정도 일어난 경력이 있다 보니 더욱더 주의가 요망됩니다." "그럼 지금 활동하는 거에 이상은 없습니까?" "아 그건 이따금씩 몸이 무기력해지거나 혹은 숨을 쉬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가수활동에 지 장은 있겠지만 그다지 심한 경우가 아니시기 때문에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몸에 대한 밸런 스가 불안정하니 처방한 약을 타서 정기적으로 복용하시면 됩니다. 혹시 외국에 나가시게 되시면 한 번 더 오시는 거 잊지 마시구요. 그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무심한 듯 내뱉는 말에는 조금은 안도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큰 일이 아니라는 생 각에 무엇보다도 그 안일한 생각이 커다란 절망에 빠지게 할 거라고는 매니저도 규현도 생 각치도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다행이라면서 규현의 등을 툭툭 치면서 씨익 웃 어주고는 이미 다음스케줄로 이동해 있는 멤버들이 있는 방송국으로 향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힘에 부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매니저가 차를 빼오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 다. 가수에게 폐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정작 폐 쪽에 이상이 생겼 으니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규현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려는 몇 몇 여자들을 발견하고 어느새 씌워져 있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어느새 정문 앞에 당도 한 차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마음이 이렇게 불안한 것인지 모르겠다면 서 조수석에 앉아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안전벨트를 매고는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여파 때문인지 잠깐이라도 선잠을 자는 듯 두 눈을 감아 내렸다. 그러한 규현을 힐끔 쳐다보며 매니저는 방송국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안심한 듯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을 흥얼 거리며 느긋하게 운전을 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 커다란 사단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쾅. 쾅. 쾅.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규현과 매니저가 탄 차는 한순간에 뒤집어지면서 몇 십 미 터 앞까지 미끄러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 고 싶지 않다 라는 듯 규현과 매니저는 또 한 번의 사고를 당했다. 방송국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던 멤버들은 동시에 왠지 모를 한기가 끼쳤다 . 갑작스러운 한기에 제각각 몸을 쓰다듬거나 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으 나 곧 별거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에 다시 제각각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시원은 출발했다면 지금 도착했어야 할 시간에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규 현이 걱정스러워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러한 시원의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신동과 희철이 곁에 다가갔다. “헤이 마시원!! 니 애인 안와서 걱정 되서 전화 하냐?” “팔불출!! 불출시원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너 규현이랑 자봤냐?” “에이 형! 설마 우리의 마시원께서 큭큭큭큭.” 신동과 희철의 장난에 멤버들도 하나둘씩 다가와서는 그 장난에 참여하려고 하는 그때에 여 전히 단조로운 음만이 들리는 핸드폰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원은 매니저 핸 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 그러한 시원과 별개로 여전히 장난을 치기 좋아하는 멤버들은 그러한 시원에게 ‘의부증’ 이라고 놀리는 것에 재미가 들린 듯 자신의 타이틀곡의 가사를 의부증으로 개사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 그러한 멤버들과 별개로 점점 굳어져만 가 는 시원의 표정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안절부절 못하는 시원이 이상하다 라는 듯 희철이 놀리다 말고 툭툭 건드리자 시원은 한가 득 인상을 찌푸리면서 핸드폰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다급한 듯 문이 벌 컥 열리면서 들어오는 또 다른 매니저의 안색을 보고 무엇인가 직감적으로 안 좋은 일이 생 겼을 깨달았는지 멤버들은 서서히 웃고 있던 입가를 굳힐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큰.....일....났....어.. 하아.. 하아...하아..”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무척이나 다급한 듯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채 이어지지 못하자 답답한 듯 옆에서 매니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려욱이 생수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매니저는 그것조차도 받을 정신이 없 다 라는 듯 자신이 방금 전 들은 내용을 멤버들에게 전했다. “규현이가 교통사고가 났단다.” 그 한마디에 모두들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놀란 듯 눈을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고서는 믿을 수 없다 라는 듯 매니저를 바라보았 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듯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규현이 상태는요?” “아직 모른다고 지금 병원으로 후송중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규현의 두 번째 사고는 일어났다. 모두들 음악방송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고 황급 히 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방송으로 대대로 슈퍼주니어의 규현의 사고소식을 전하고 있었고 라디오를 통해서 전해지는 규현의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미 병원 응급실에 모여 있는 기자들이 하나같이 조금이라도 빨리 소식 을 전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곳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뒷문 을 통해서 들어가려는 듯 차를 돌려서 지하주차장으로 빠졌다. 차안에서는 이미 초상을 치룬 듯 침울하기만 했다. 간간히 마음 약한 멤버들이 - 이특, 려 욱, 성민, 은혁, 동해가 - 울음을 터뜨리다 못해서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로 울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을 위로하듯 등 언저리를 토닥거리는 다른 멤버들 역시 눈가에 가득 눈물이 고 여서 어서 빨리 자신들의 소중한 멤버이자 동생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차가 멈춰 서자 누 구랄 것도 없이 차문을 열고 이미 도착한 회사직원의 안내를 따라서 규현이 있는 곳으로 달 려갔다. 그리고 수술실 앞에서 대기하던 규현의 부모와 더불어서 회사간부들이 심각한 듯 혹은 좌절한 듯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전히 우느라고 정신없는 이특을 대신하여 강인이 물어오자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 가 지금 현 상황을 멤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되풀이하듯 알려주었다. “이제 막 수술실에 들어갔다. 정확한 상태는 아직 말씀 해 주시지 않았지만 폐 쪽에 이상이 있는 듯 해 지난번 규현군의 주치의가 수술에 들어가셨다고 하는데 나와 봐야 정확한 상태 를 알 수 있을 듯하니깐 너희들은 숙소에 가서 기다리도록 해라.” 고위직 관계자의 말에 희철이 반발하듯 이곳에 있겠다고 말해봤지만 방해만 된다면서 숙소 로 돌아가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뒤돌아 나섰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규현의 소식만 기다려 야 할 자신들의 처지에 더욱더 눈물이 나는 듯 잘 울지 않던 기범이조차도 눈물이 글썽이면 서 부탁해보지만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이들 때문에 돌아서야만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안. 침묵만 가득한 차안은 더 이상 침울 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였


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자 병원에서처럼 삼삼오오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있는 팬들의 모습에 뭐라고 말할 수조차도 없어 그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애써 숨기며 아무런 말 없이 숙소로 들어갔다. 며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조금씩 차도가 있다 라는 소식조차도 없이 그저 수많은 기계에 몸을 의지한 채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규현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많은 놀란 것은 시원이었다.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안 된다면서 중환자실 안에 들어가려고 발악하는 시원을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 그러한 시 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달 가까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한 달 하고 하루가 지났을 때.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규현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라는 듯 가장 많이 규현의 곁에서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은 시원이었다. 오늘도 역시 시원은 규현의 손을 꼭 움켜잡고는 어서 깨어나라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기도를 올렸다 . 자신이 열렬하게 믿으라고 주청했던 주님이 제 소원이 아니더라도 이 별을 닮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속살거리듯 기도하였다. “하느님, 저희의 사랑이 죄라고 하신다면 그 죄를 당연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 들이자 별인 이 아이만은 데려가지 마세요. 제가 그 원죄를 달게 받겠으니 제발 이 아이만 은 살려주십시오. 하느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제 아이를 제발 살려주세요.” 수없이 되 뇌이듯 많은 기도를 드렸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일어날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는 규현으로 인해서 더욱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그 러한 시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찰과상으로 가득했던 얼굴은 조금은 상처가 아물어 가 는 듯 드문드문 보이는 상처들이 안쓰러운 듯 특히 메말라 있는 입가를 바라보다가 시원은 마지막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거칠기만 한 규현의 입술에 온기라도 전해주고 싶어 살풋 규현의 입을 머금었다. 스르르 감기는 두 눈에 오랜만에 자신의 연인과 하는 입맞춤에 좋아 해야 하지만 정작 깨어나지 못하는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규현의 얼굴 을 적셔간다. 그리고 쉼 없이 쓰다듬던 규현의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이면서 어서 깨어 나라고 달싹이는 시원의 어깨는 한없이 떨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떨어져 규현의 얼굴을 바라보자 보이는 창백한 제 연인을 바라보며 자신이 흘린 눈물에 적셔진 것을 보고 화장실에 걸려 있는 수건을 가져가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순간 움찔하듯 움직이는 규현의 손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시초인 듯 그렇게 몇 번을 움 직이다가 더 이상 움직임도 없이 다시 본래의 굳은 듯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다만 움 직였다 라는 증거인 듯 손 안에 엉켜있는 이불만이 대신할 뿐이었다. 1인 특실이 있는 13층은 어쩐 이유인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세 명 이라는 장정들이 제각각 떠들고 있으니 어찌 소란스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모두들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기쁘다 라는 듯 한곳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모여든 공간 안에는 조 금은 힘에 겨운 듯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체 앉아서 웃고 있는 규현의 모습이 보였다. 더욱 더 마른 듯 아니 희철보다도 더 말라버린 두 달 동안이나 영양제와 다른 약물들로 버텼기에 더 이상 마를 수 없을 정도로 말라버린 규현의 안색은 그것과 상반되게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듯하였다. 간간히 힘에 겨운 듯 규현의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시원에게 기댄다거


나 혹은 침상에 누워서 눈을 감는다거나 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자신이 누워있는 동안에 벌 어진 일들을 세세하게 말해주는 멤버들이 있어서 힘겹지만 웃을 수 있었다. “김규!! 이 형님의 심장을 몇 번이나 떨어뜨렸는지 그 죄를 니가 알렸다.” “큭큭 형!! 형 같은 강심장이 무슨?” “왜이래? 나 감수성 예민한 남자야.” “희님!! 그런 말해도 아무도 안 믿거든요.” 오랜만에 보는 장난 상대는 아무래도 희철로 당첨된 듯 이리저리 동생들에게 까이듯 장난을 받아주면서 간간히 웃고 있는 규현을 힐끔 바라보면서 더욱더 심하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 다. 본래 희철이라면 그런 장난 따위 일체 받아주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들 때문에 웃고 있 는 듯 한 규현으로 인해서 참아내고 있는 듯 아니면 정말로 기뻐서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형들을 보며 웃는 규현을 시원은 안쓰러운 듯 더욱더 좁아져 버린 어깨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괜찮냐고 눕지 않겠냐고 옆에서 챙겨주는 씀씀이에 규현은 괜찮다 라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미나게 자신을 위해서 웃기는 행동이나 말을 해 보이는 형들을 위해 서 더욱더 웃어보였다. 수술은 수차례 진행되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규현은 수차례 수술로 인해서 죽을 고비를 맞이하거나 혹은 정말로 심장이 멈춰버리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 이겨 내었다. 비록 큰 소리로 웃는 것도 그리고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 어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제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형과 제 목숨보다도 소중 한 연인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어떠한 말을 들어도 말이다. 하지만 형들은 제 연 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규현군의 건강상태는 비교적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체력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될 겁니다. 아직 면역력이 약한데다가 폐 쪽의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노래를 부른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 겁니다 . 통원치료를 하면서 더 욱더 나아지겠지만 지금 현 상태로는 불가능 할 겁니다. 주변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규현군의 현 상태는 간난 아기라고 봐도 무방할 터이니..” “그렇다면 집에서 통원 치료하는 것보다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병원에 있다 보면 더욱더 면역력이 약해질 겁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는 것도 하 나의 방법일 것이고 약물치료와 재활치료를 병행 할 생각입니다만 환자가 낫고자 하는 의지 가 강한 만큼 아마도 지난번처럼 잘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 많았어요 규현군.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수고해 봅시다.” 악수를 청하는 의사에게 손을 마주잡고는 규현은 웃어보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보다도 더 한 충격을 받은 듯한 이특과 희철 그리고 시원으로 인해서 잠시 멍하니 진료실에 있어야 했 지만 규현이 혼자 휠체어를 끌고 문 앞에 서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시원이 먼저 규현 의 휠체어를 끌어주면서 밖으로 나섰다. 어찌 보면 가수로써의 생명은 끝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규현은 아무렇 지도 않아보였다. 그러한 규현을 말없이 바라만 보던 희철과 이특은 점점 멀어지는 시원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이건 슈퍼주니어의 최대의 위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머지 멤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있는 이특과 희철은 한 숨을 내쉬면서 시원의 뒤를 따랐다. 형들이 뒤처지는 사이 시원은 휠체어를 끌면서 규현에게 말을 건네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글쎄... 아마도 사고 나던 날 알았던가? 나도 잘 기억은 안 난다. 헤헷” “나한테 말해줬어야지. 나한테라도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형은 그동안 바쁜 일 있어서 나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었잖아. 그리고 괜히 형 걱정시킬까 봐 싫었어. 미안해 형.” “그래도...그래도... 알려줬어야지.” “미리 알아서 뭐하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벌어진 일인데.” 괴로운 듯 혹은 슬픈 듯한 음성으로 괜스레 규현을 탓해보지만 그것은 규현의 잘못이 아님 을 잘 알기에 그저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음성은 가득 슬픔이 묻어 나와서 더욱더 시원을 안쓰럽게 만들었다. 그러한 시원을 알기라도 하듯 손을 뒤로 뻗어 휠체어의 손잡이 를 잡고 있을 시원의 손을 조심스레 끌어다가 자신의 어깨를 안을 수 있도록 한 뒤에 그의 귓가에 가득 괜찮다고 속삭이는 음성 역시 슬퍼하듯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 下 *

울부짖는다 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수없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미 수차례의 수술을 했지만 결국은 죽어버린 폐세포를 살릴 길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 하지만 규현은 좌절 하지 않았다. 노래를 할 수 없다면 노래를 만들면 된다면서 슬퍼하는 형들을 위로해 주는 이 역시 규현이었다. 그렇게 규현이 가수로써의 생명력이 끝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쯤에 슈퍼주니어와 기획사간의 계약이 끝이 났다. 그리고 마치 순차적인 듯 슈퍼주니어 해체라는 기사말머리가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에 상처받는 듯한 팬들이 있었 지만 슈퍼주니어는 해체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화 하였다. 그리고 슈퍼주니어는 기획사를 차렸다. 오로지 슈퍼주니어만을 위한 기획사를 차려졌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 기획사의 사장은 멤버들이었다. 기존에 자신들을 위해서 일해 주었던 매니저 형들과 코디들을 불러다 가 자신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은 해체라는 말 대신 함께하는 것을 택하였고 그것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들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운명이 맞물려 돌아가듯 그 들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슈퍼주니어라는 이름으로 하는 마지막 콘서트를 준 비하고 있었다. 가수로써 서게 될 규현이를 위한 배려와 그리고 뒤이어서 연인을 위해서 연 인이 머물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서 슈퍼주니어를 비공식적으로 탈퇴한 시원을 위한 마지막 콘서트였다. 수없이 많은 노력들을 해나갔다. 춤을 출 수 없는 규현을 배려하여 규현이를 위한 움직이는


돌출무대나 혹은 모든 팬들이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무대를 만들고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를 가장한 그들의 즐거운 장난인 여장무대를 꾸미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부를 노래들을 선 곡하면서 그들은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그 콘서트를 ���든 이들에게 각인시키고 싶다 라는 욕심에 더욱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서서히 가까워져만 가는 날짜에 처음으로 열었던 그 콘서트만큼이나 떨렸다. 콘서트가 열리기 전날. 규현과 시원은 한방에 넓은 침대위에 제 몸을 누이고 있었다. 시원의 널은 품에 안겨있는 규현은 편안하여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였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였던 것이리라. 그러한 규현을 알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여전히 마른 제 연인을 품에 안은 시원은 다독이듯 규현을 품에 안았다. “형! 나 너무 떨린다.” “나도 떨려.” “우리 잘 할 수 있을까?” 졸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떨림을 가장한 안타까움을 내보이면서 더욱더 시원의 품 에 안겨드는 그 모습이 퍽이나 어린아이 같다고 하면 아마도 규현은 시원의 등짝을 때리면 서 자신은 어린애가 아니라고 투덜거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 그저 말없이 품에 안겨있는 연인의 등을 토닥이면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하기 위해 가진 노력 을 다 하는 중이었다. 3시간이 넘는 콘서트를 버티기 위해서는 한숨 자는 게 도움이 될 것 이기에 더욱더 그 일에 열중을 하였다. “그래 잘 할 수 있을 거야.

형들이 있고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냥 마

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끝이라고 생각해 규현아.” “.....................” “규현아... 자니?” 등 언저리를 토닥이는 시원의 일정한 움직임에 결국 졸음이 가득했던 두 눈이 감긴 것을 확 인하자 시원은 조심스레 규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고는 오로지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규현아 사랑해.” 잠결에 그러한 시원의 음성이 들렸는지 입가에 맺힌 미소가 퍽이나 이뻐 보여서 픽하니 웃 어 보이며 더욱더 깊숙하게 안아보았다. 다음날 아침.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거실과는 반대로 평온하기까지 한 침실에서는 여전히 덥지도 않은 지 품안에 규현을 품고 자는 시원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거실 에서는 저 신혼부부의 방을 누가 들어갈 것인가를 놓고 가위 바위 보를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하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인원사가 되다보니 몇 번이나 해서 겨우 꼴찌를 정하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경씨 되시겠다. 불안한 듯 안절부절 못하며 ‘히철 어떠케’ 라고 연신 말 하는 폼이 믿을 수 없다 라는 듯 결국 총대를 맨 것은 한경의 친구이자 욕 선생이라고 알려 져 있는 희철 되시겠다. 노크를 해야 할 듯해서 헛기침을 하면서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에 벌컥 문이 열리고 조금은 부스스한 모습을 하고 나오는 시원과 딱 마주쳤다. “이......일...어났냐.” “네! 하두 시끄럽게 해서 어디 잘 수나 있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딱 멈춰 서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러 개의 시 선들을 향해 엄포하듯 경고를 내렸다. “규현이 자게 냅두세요. 어제 하루 종일 피곤했거든요.” 오해의 소지를 마구마구 만들어 내고는 쏙하니 화장실에 들어가 버리는 시원을 두고 모두들 제각각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신혼부부(?)의 방에 들어가기에는 비위가 그리 좋지 않기에 그것은 포기하였고 정작 궁금함을 참지 못한 신동이 닫혀진 규현과 시원의 방 문을 열려고 하는 그때에 또다시 문이 벌컥 열리면서 부스스한 모습을 하고 나오는 규현과 마주했다. 그렇게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규현을 향해 신동은 어색하게 ‘안녕 규현아’ 라 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한 신동의 한심스러운 자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쪽 입꼬리 를 올리며 ‘네’ 라고 시크하게 말하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이들 신혼부부에게 농락당한 멤버들은 화가 나서 주체 못하겠다 라는 듯 씩씩 거리 고 있었다. 어느 평범한 일상과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이미 수십만 명이 밀집해 있는 콘서트장 밖과는 상관없이 대기실 안에는 숙연하기까지 하며 고요하기만 했다. 모두들 제각각 자신이 하게 될 개인기를 연습하거나 혹은 멘트를 적어둔 종이를 읽으면서 혹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들고 지인과 통화하거나 게임을 한다거나 하는 등 이 긴장감을 잊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규현은 그러한 형들을 시원 의 품에 안겨서 지켜보고 있었다. 손을 꼼지락 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규현의 손을 귀 엽다 라는 듯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제 손으로 끌어당겨서 더욱더 편안하게 안겨질 수 있도 록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것을 아니꼬운 듯 바라보던 려욱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 다. “이 바퀴벌레 커플들아 애정행각 좀 작작해.” 버럭 화를 내는 려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더욱더 시원의 품에 안겨 들어서는 긴장한 마 음을 애써 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화아아아악 불빛이 번쩍하면서 다양한 특수효과로 인해서 더욱더 멋진 군무를 추기 시작한 멤버들이었 다. 그러한 멤버들을 감춰진 특설무대에 서서 바라보는 규현의 시선은 자신도 저곳으로 당


장 달려가서 부르고 싶다 라는 사실이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과 함성소리 그리 고 비명소리에 어울려져서 하나의 화음이 되는 듯 그렇게 뿌듯함이 밀려왔다 . 그리고 드디 어 자신의 파트가 되자 특설무대로 튕겨 나오듯 그렇게 나와서는 노래를 부르고 몇 소절 부 르고는 그대로 서서 간간히 멤버들과의 화음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한 규현을 향해 열렬하 게 환영하듯 함성을 질러주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콘서트는 중반에 치달았다. 너무나도 뜨거운 열기를 식힐 타이밍인 듯 멤버들은 하나둘씩 규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특유의 인사말을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슈퍼주니어입니다. 우리는 슈퍼주니어에요.” “우리는 엘프에요.” “하하하하 오랜만에 그 인사말을 들으니깐 더욱더 실감이 나네요. 모두들 즐거우셨어요!” “네에~~ 까아아아아아아” “많은 준비를 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젠 거의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아!! 이렇게 우리 꽃잎들과 헤어지기 싫은데 말이죠 흐흐흐흐.” “희철씨 싫다는 사람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닙니까?” “왜 이러세요 신동씨. 저 이렇게 우는 거 안보이십니까?” 희철과 신동의 만담으로 자지러지듯 웃어 보이는 팬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두 눈 가득 담아 내는 규현이 눈에 띄었는지 간간히 규현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글썽해서는 소리를 지르는 팬들이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규현은 아무런 말없이 스탠드부터 전부 다 보려고 애 쓰는 듯 주변을 바라보았다. “아! 우리 규현씨 할 말이 있는 듯한데. 한 말씀 올리시죠?” “하하하 어떻게 아셨어요? 이특씨.” “다 아는 수가 있죠. 자아 합죽이가 됩시다.” “합” 순식간에 정리하듯 고요하게 규현의 말소리를 들으려는 듯 침묵을 지키는 팬들이 이쁘다 라 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한 규현의 웃음에 간간히 울음을 터뜨리는 팬들은 이미 예상하 고 있는 듯 보였다. 더 이상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말이다. “으음...... 사랑합니다...사랑해요......으흑....” 이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울먹이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입모양으로 말하는 팬 들을 보는 순간 말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식간에 터지는 울음은 막을 수 없다 라는 듯 단 한 번도 슈퍼주니어를 하면서 약한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 규현이 가장 먼저 눈 물을 보이자 다른 멤버들 역시 하나둘씩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한 멤버들에 오열하듯 눈물 을 터뜨리면서 ‘울지마. 울지마. 울지마.’ 라고 외치는 팬들의 외침에도 멤버들은 어느 순간 부터 규현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하나둘씩 눈물을 흘 린 얼굴을 수습하듯 스텝이 건네주는 휴지로 각자 눈물을 닦거나 다른 멤버들의 눈물을 닦


아주었다. “흠흠, 우리는 절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일 뿐이에요. 저희 믿으시죠 여러분.” “네에에에에에.” 눈물을 닦으면서도 이쁘게 대답하는 팬들을 향해서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 팬들을 위해 만 들어 둔 규현의 자작곡이 조심스레 흘러나왔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지 않고 하나하나 팬들 을 담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규현을 대신해서 멤버들이 하나같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음절 한 음절에 담긴 규현이 팬들을 향한 마음을 그리고 멤버들에 대한 사랑을 내보이는 그 가사에 더욱더 눈물을 터뜨리는 팬들이었다. 몇몇 팬들은 실신한 듯 경호원에게 업혀서 실려 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한 이들을 걱정 스레 바라보기도 하고 규현은 일일이 되도록이면 많은 팬들과 악수를 나누고 눈물을 닦아주 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새 규현의 손은 팬들의 눈물로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 나가 는 중이었다. 콘서트가 막바지를 달려가고 있는 그때에... 규현은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난 당신 정말 용서 못 해.” “알고 있습니다.”   구석에 이끼가 가득 꼈는지, 아니면 비가 와서 습기가 가득한 건지. 방 안의 눅눅함은 종운 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운의 얼굴에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 지 않았다. 굵은 쇠창살로 가로막힌 조그마한 창 안으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비가 벽에 기댄 기범의 어깨를 적실 때까지도 영운의 ‘알고 있습니다.’ 하는 말 후에는 쏴아아-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 외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괴롭다... 종운은 머리가 깨질 것 같 았다. 힘이 빠지는지 아크릴판으로 된 칸막이에 퉁 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줘…….”  

겨우 몇 시간 새였다. 망할 살인마에게 부모님, 남동생이 전부 시체가 되어 바닥에 피가 낭 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시키는 장면이 종운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가족 들을 죽인 범인은 온 몸에 피를 묻힌 채로 날이 선 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아무것도 든 게 없는 공허한 눈으로, 종운을 바라보며 말했더란다. ‘신고 좀 해줄래요?’ 라고, 손에 쥐었던 가방 끈을 놓아버리는 종운에게.


종운은 순식간에 아무도 말릴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살인마를 덮 치고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그의 얼굴에 주먹으로 난타 질을 했다 . 가족들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가 코와 입에서 흘러도 살인마를 향한 종운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 퍽 , 퍽 하 는 살과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와 종운의 발악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온 옆 집 주민이, 처음 에는 집안 곳곳에 뿌려진 피를 보고 놀라고, 그 다음에는 길 가다 가끔 마주치면 살갑게 인 사했던 꿈 많은 청년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에 놀라 또 다른 옆집 주민을 불러 종운을 살인마에게서 떼어냈다. 그제야 종운과의 거리가 멀어진 살인마는 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아져 있던 무선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그런다. ‘제가 사람 셋을 죽였습니다. 여기 주소는….’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술술 서술해 내는 저 끔찍하고 이질적인 행 동에 종운은 발악하고, 발악했다. 정확히는 그가 결코 낯선 이가 아닌, 가끔 마주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인, 그 것도 옆집인 김영운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더, 화가 났다. 장례를 치르고서 종운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남는 것이래야 봤자 학교…친구들…그리고 제 가족과 함께 좁지만 그래도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집뿐. 소식을 들은 아파 트 주민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 교수님들, 종운의 친족들이 조문을 하고 갔었 다. 모두 눈물을 흘리거나 안쓰러운 얼굴로 종운에게 위로의 말을 넌지시 건넸지만 들은 둥 마는 둥, 종운은 수북이 쌓인 하얀 꽃들 앞에 나란히 세워진 세 사람의 영정사진만을 멍하 니 바라보기만 했다. 보고 싶겠구나, 그 썩을 노무 새끼는 잡혔니, 이런 일을 당하다니 참 안타깝다, 등의 껍데기뿐인 말들은 필요 없었다. 아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종운의 머 리에는 영운의 ‘신고 좀 해 달라’ 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만이 맴맴 돌았다. “죽이고 싶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를 그 곳에서, 그 상황에서 들었다는 것이 종운을 더 괴 롭게 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범행을 자수할까 …차라리 도망 쳤으면 더 좋았을걸.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더 마음이 편했을 걸 …. ‘죽이고 싶다’가 아닌, ‘죽고 싶다’로 종운의 마음이 점점 옮겨갔다. 외로우니까…보고 싶으니까…더 이상 살고 싶 지 않으니까. 종운에게는 전부였던 가족이 사라지니까. 그리고 종운은 영운을 찾아갔다. * “선배.” “응.” “안 무너지고 잘 버텼네요.”   종운의 조그마한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보고도 기범은 모른 척 해주었다 . 선배 자존심 꽤 세니까 이럴 때는 손 잡아주면 도리어 역정 낼 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존


심 운운하기에는 선배가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 기범은 종운의 작은 손을 잡지도 못하고 저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결코 가만히 두고 볼 수만도 없는 노릇. ‘밥이나 먹으러 가죠.’ 기범은 이내 손톱까지 물어 뜯어버리는 종운의 손을 낚아채고 큰 길로 걸어갔다. 그 틈을 타 종운의 손을 꽉 잡는다. 난 안 놓을게. 난 너 놔두고 절대 못 죽어. 기범의 미간이 그 누구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진다. 큰 길로 나와 기범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종운을 제 쪽으로 끌고 와서는 한 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가죠, 선배’ 한다. 기범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일반 음식 점. 종운은 별로 밥 생각은 없었지만 기범이 배가 고프다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기범과 함께 음식점에 들어섰다. 상에 팔을 기대고 TV를 뚫어져라 보고만 있던 직원이 딸랑, 하는 도어벨 소리가 들리자 바로 고개를 돌리고 ‘어서 오세요’ 한다.   “이 쪽으로.” 결코 친절하지는 않은 것 같은 건성으로 하는 손짓에 시선을 뒀다. 단 둘이서만 앉을 수 있 는 테이블. 기범은 의자를 빼 종운을 앉히고 맞은편에 자신도 앉���서 벽면에 붙은 메뉴판을 본다. 기범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난 오므라이스’, 하고 ‘선밴 뭐 드실래요?’ 한다.   “나도 오므라이스 먹을게.” “그럼 오므라이스 둘이요.” “주문 받았습니다. 오므라이스 둘, 맞지요?” “예.”   무표정으로 주문서에 체크를 하고 직원은 주문서 한 장을 찢어 주방에 보낸다 . 자작자작 볶 는 소리나 치이익, 하는 뭔가 굽는 소리라던가 계속 나더니 곧 이어 직원이 오므라이스 두 접시를 들고 온다. “오므라이스 둘 나왔습니다.”   오므라이스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더니 맛있게 드세요, 하는 형식적인 대사가 이어 지고 기범은 종운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건넨다. 종운은 기범에게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받 아서 오므라이스를 한 술 퍼 입에 넣었다. 그걸 지켜보던 기범도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둘 다 아무런 말없이 밥만 먹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종운이 캑캑거리며 컵에 물 을 따라 마신다. 하지만 그래도 목이 메는지 계속해서 가슴을 치며 물을 따라 마신다. 그러 다 사레라도 들렀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기범은 종운을 바라보다 종운의 눈에 그렁그 렁 맺혀있는 눈물을 발견했다. 빤히 바라보는 기범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기범을 올려다보며,   “미안.”  


그런다. “뭐가요?” “너 밥 먹는데 더럽게 기침했잖아.” “흐흣, 그거야 선배 사레 들러서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왼 손으로 얼굴을 괴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는 기범은 꽤 예뻤다. 종운은 그런 기범을 제 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배?” “화장실 좀 다녀올게. 계속 먹고 있어.” “…얼른 다녀오세요.” “그래.”   종운은 살포시 웃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뜬다. 왜 그러지? 조금 조급해 보이는 종운의 걸 음에 기범은 살짝 의아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아까 전의 종운이 보였던 눈물과, 급 체와, 목 메임을 생각한다. 설마…설마. 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자존심 강한 선배이기 에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오늘은 종운의 자존심이 꽤 많이 등장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 안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물소리에 가게 사장은 조금 언짢았지만 손님에게 뭐라 할 권리는 없어서 다운 된 기분을 안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행인 것이, 물소리에 종 운의 흐느낌이 묻혔다는 것. 녹색 티셔츠는 이미 젖은 지 오래. 귀도 빨갛고, 코도 빨갛고, 눈도 빨갰다. 가는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서로 달라붙어있다. 종운은 숨이 차는지 세수를 하기 위해 틀었던 수도꼭지를 잠그고 허억, 허억 힘겹게 숨을 몰아쉰다. 수건은 있을 리가 없어서 손으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려 물을 닦아냈다. 그래도 찝찝한지 티셔츠의 배 부분을 올려 얼굴을 닦는다. “병신…머저리…바보냐 진짜?” 거기서 왜 괜히 엄마 얼굴은 떠올려서는 기범이 앞에서 사레 들르고 그러냐. 으응? 괜히 또 울컥한 종운은 다시 수도꼭지를 틀어 얼굴이 다 아프도록 빡빡 세수를 한다 . 아파. 아파 . 근데 마음이 더 아파서 잘 못 느끼겠는 걸? 잠을 자다가도 피를 철철 흘리며 살려 달라 외치는 가족들 꿈을 꿔 좋지 않은 정신으로 깬 다. 그 장면은 가히 토악질이 나올 만큼 생생해서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해대다 정말 변기에 얼굴 처박고 죽고 싶은 심정. 길을 가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 다리가 휘청 할 때도 있다. 강의를 듣다가도 유혈이 낭자한 집 안이 생각난다. 차라리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걸. 충격으로 병신 됐으면 더 좋았을 걸. 그러면 당연히 무표정한 얼굴로 경찰을 불러 달라 했던, 종운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녀석, 김영운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주님, 어떡하죠? 난 절대 김영운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 자식 존재 자체가 없었더라면, 하고 저주하고 또 저주해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결코 저 의 손으로 처리할 수가 없어서, 그러나 사형수인 그가 죽는 생각은 이골이 나서, 더 이상 생각도 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가 죽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도 있다는 것이 더욱 저 주스럽다.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머리라도 쥐 뜯으며 왜 죽였냐 묻고 싶지만, 그가 죽 는 것은 싫어. 사람 죽인 사람이 죽는다는 게 싫다니, 기범이 들었으면 참으로 기함할 노 릇. 선배 바봅니까? 하고 종운의 머리라도 한 대 칠 일. 정말로 바보 같은 제 심리에 종운 은 아아,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다 문득 돌아본 곳에는 수건걸이에 버젓이 뽀송뽀송한 수건이 걸려 있어 다시 한 번 탄 식을 내뱉는다. 아, 염병.   수건으로 얼굴을 싹 닦았지만 역시나 머리의 물기는 어쩔 수가 없어서 종운은 기범에게 문 자를 보낸다. [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너 혼자 먹고 와]하고. 문자를 받은 기범 은 어이없다는 표정과, 아하핫, 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고, “드디어 바람 맞았다….”   하고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 약간의 돈을 놔두고 가게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단 영운의 근처에는 단지 찍찍대는 쥐새끼와 사진 몇 장 뿐 , 같은 방의 사람들은 모두 일반 명찰을 달아 영운이 괴물이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서 서로 수근 대 기만 한다. 언제 우리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몰라, 왜냐하면 저 새끼는 사람을 셋이나 죽였 다잖아. 그 소리를 듣고 그들을 흘낏 쳐다본 영운에 사람들은 다시금 벌벌 떤다.   수녀님께서 찍어다 주신 사진 몇 장, 그 사진의 주인공은 모두 종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살짝 웃는 얼굴. 모두 저번에 봤던 남자와 함께 찍혔다. 그 남자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데… 혹시, 사귀는 사이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이내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살짝 젓는다. 손가락으로 살짝 사진을 쓸어보는 영운의 얼굴엔 약간의 수줍음이 서려있었다. * 어느 샌가 하늘에 가득 자리 잡은 어둠이 거리를 꿀꺽 삼켰다. 이제는 가을이라고 휘오오오 찬바람이 몰아치는 소리가 창가를 때렸다. 그 누구나 와하하 하며 웃고 즐길법한 개그프로 에도 웃지 않는 종운. 아마 가족이 죽었던 자리에서 TV를 본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어서가 아닐까? 결국 TV를 꺼버리고 리모컨을 저 멀리로 던지고서 소파에 누워버린다. 이래서 내 가 거실로 안 나오려고 했는데. 종운은 울컥, 하고 삐져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급하게 닦아 버리고 과제를 하기 위하여 소파에서 일어나 컴퓨터 책상 앞에 앉는다. *  


“오늘이 49제입니다.” 조금은 차분해진 얼굴로 그가 오랜만에 영운을 찾아왔나 했더니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오늘 이 49제입니다.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 기리는 것. 배울 거 다 배우고 지금 이 생활을 하 고 있는 영운이기에 49제가 무언지 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영운의 표정은 도무지 변화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더니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네. 물론 기대 따위 하지도 않았지만… 종운은 허탈감에 쌓여 하하, 하고 웃었다. 하지만… 기범이 보기에는… 그의 표정은 좀……. “그러시구나. 난 하도 시간이 빨리 가서 49제인 줄 몰랐지.” “무슨 생각 들어요?” “무슨 생각 들길 바래요?” 조롱하는 듯한 그의 어조에 종운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밝게 웃으며 무슨 생각이 들길 바라 냐는 영운의 물음은 치기가 오를 듯, 그러나 약간의 화가 나. 하지만 이건 뭔가 다른 열 받 음이야. 맘만 먹으면 언제든 이 아크릴판을 깨부수고 영운의 멱살을 잡을 수 있었다. 사형수 만나러 다니시는 교회 수녀님께 부탁해서 같이 따로 만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왜 죽였냐 새끼야 하고 오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인간적인 짓은 취미가 아니라서 이기도 하고, 왠 지, 영운에게는 더욱 그러기도 싫었다. 분노에 휩싸여 그와 종운을 가로막고 있는 이 판이 라도 때려도 되는 처지인데도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막 분노하고 당신 죽여도 마땅한 처지잖아?” “…….”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도 다시 오는 이유는 병신같이 당신 죽지 않길 바래서야. 그 뿐이 야.” 영운에게서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눈은 커지고, 입술을 꼭 깨물고서 바들바들 떤다. 미련하게도 그가 날 믿어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벅찬 감동이 차오른다.   울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끕, 끄윽, 끄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수감자 들 모두가 영운이 무서워서라도 빨리 죽기를 바랬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진실이 그 에게서 가까이 있지만 너무 멀기도 했다. 우는 영운에 놀란 종운과 기범은 놀라 커다래진 눈을 하고 오직 영운만을 바라본다. 뒤에서 자기 할 일만 하고 있던 교도관도 끅끅거리며 눈물 콧물 다 쏟아내는 영운의 행동에 고개를 들고 영운을 쳐다본다. “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죽지 않길 바란다니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 죽는 건 정말 싫어…김영운 당신 안 죽었으면 한다고!”   이번엔 종운이 눈물이 흘러넘치려는 눈을 한다. 하지만 기어코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새빨


개진 눈, 울지 않으려 앙 다문 입술. 그런 그가 너무 안쓰러워 영운은 수갑을 차 찰강거리 는 소리를 내는 손을 들어 아크릴판을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죽잖아.” “…….” 그리고 그제야 흐르는 종운의 눈물, 다시 한 번 떨궈진 영운의 고개. * 그게 무슨 병신 같은 말이었단 말인가. 수감소에서 나와 결국 끄허엉 하고 목 놓아 울어버 리는 종운에 기범은 기함했다. 자기 가족 죽인 사람 안 죽었으면 한다니, 미련한 김종운. 이제는 화까지 나려고 한다. 정말 미친 소리 들을만한 행동이었는데 왜 화가 안 나겠냐고. 후, 후우, 하, 정말. 연신 같은 말만 내뱉는 기범에 종운은 고개를 들어 ‘기범아?’ 부른다. 하지만 기범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자신의 대사를 읊는다.   “방금 그 행동은 정말 화가 나요.” “…….” “바보 같은 선배…혹시 선배 김영운 그 자식 좋아해요? 예? 사랑해요?”   자신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기범은 빠르게 말을 뱉어낸다 . 하지만 종운 에게서의 대답은 없었다. 시발, 선배 정말 좋아하는 거야? 정말? 그래? 순식간에 카오스. 그냥 선배 열 좀 받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게 바로 지뢰였다니 . 기가 찬다. 아니 , 이제는 어이마저 상실. 기범은 젠장, 하고 짧게 욕설을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좋아했는지도 모르지….”   종운의 말을 끝으로 기범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아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좋아했 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니. 그럼 나는 정말 승산이 없어져 버리는 거잖아. 종운은 텅 비어버 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기범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그럼 내가 선배 좋아했던 건 알아요?” “…응.” “시발 그럼 나 혼자 지랄 한 거네? 같이 있다 보면 언젠가는 나 봐줄 거라는 생각은 아예 없어져야 한다는 거잖아. 혼자 나 게이네 뭐네 하면서 미친 짓 한 거냐고!!” 여전히 종운은 말이 없다. “…미안.” “……하, 정말.” 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고 말없이 종운을 계속해서 응시한다 .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해줄 말이 없는 종운은 다시 한 번 기범에게 미안하다 한다.


“저 한동안 선배 얼굴 못 볼 것 같은데.” “…….” “마음 정리 되면 다시 보러 올게요.”   하고, 기범은 종운에게서 멀어져 간다.   *   교도관들이 쏜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 우와왕아브베베베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남발 하며 공원 운동장을 질주하며 공을 잘도 뻥뻥 차는 갓 스물이 된 것 같은 청년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이 무더운 더위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열정은 불과 몇 년 전의 자신을 보 는 듯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저럴 때 있었는데 말이지, 하며 영운은 김 수감이 전 해준 아이스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죽기 싫다는 맘도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만 빼고선. 아니, 자신에게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같은 방 수감자들 빼고서는 꽤 평화롭고 순 탄한 나날이니까. 지금 먹고 있는 아이스바도 달고 맛있고. 마지막 남은 한 입이 아까워서 혀로 살살 핥아먹는 묘미도 있고. 결국엔 다 먹어버리고선 남은 나무 막대를 살짝 쥐고선 달랑달랑, 움직여도 보는데 저도 모르게 땅에다 글씨를 쓴다. [내가 아니야] 물론 억울한 마음은 있다. 당연히 가슴 한 구석이 시린 맘도 있지. 하지만, 모자를 푹 눌러 썼지만 얼굴이 다 드러났던, 손과 볼에 피는 덕지덕지 묻히고서는 헉헉거리며 울고 있던, 자괴감에 빠진, 자신의 복부를 벤 소년의 표정이 잊히지가 않아서 영운은 고개를 숙이고 입 술을 꽉 깨물며 자신에게 배드 터닝 포인트를 주었던 소년을 만난 날을 떠올렸다.   헥헥 거리며 ‘지각이다!’ 소리를 지르고 헐레벌떡 뛰어가는 종운을 보며 영운은 배시시 미소 를 지었다. 그가 지각한다는 것이 보기 좋은 것이 아니고, 지각하여 약간 헐렁한 모습도 보 인다는 것이 보기가 좋다. 귀엽잖아? 영운은 헤헤, 하고 개죽이 웃음을 지으면서 자동차 열 쇠 구멍에 키를 꽂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유유히 차를 몰아 아파트 밖을 빠져나간 다. 그 날은 동창회 날이어서 꽤 멋지게 잘 차려입고 나갔었던 것 같았는데. 길에서 그를 만난 다면 추리닝의 후줄근한 모습이 아닌 젠틀한 옆집 남자의 모습으로 활기차게 안녕, 하고 인 사하며 내가 봐도 멋진 내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친구와의 트러블이 불거져서 열이 받아 먼저 동창회 장소에서 벗어나 버린 게 화근이었다. 거칠게 차를 몰아 집으로 가버렸던 영운은 항상 닫혀 있었던 그의 집의 문이 웬일로 열려있 는가 해서 들여다봤던 건 그의 미스테이크. 푹,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는 것을 본 것도 그의 미스테이크. 검은 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쓴 그 소년과 눈이 마주쳤던 것 또한 미스테이크.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것 같은 앳된 소년이었다. 단순한 좀도둑이었지만 단숨 에 강도가 되어버린 것인지 그의 손에는 피로 얼룩진 금품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켜 감옥을 가는 것이 두려웠던지 소년���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영운에게 달려들었다. 미처 막


을 새가 없던 영운은 그대로 소년이 휘두르는 칼에 배를 베어 버렸고 , 소년은 그대로 도망 쳤다. 잡을걸. 과다출혈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소년 잡을걸. 겁에 질린 소년의 얼굴이 떠올라 차라리 내가 잡혀가고 말지 하는 미련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정말 곰 같은 발상 . 땅에 떨어 진 칼을 쥐고 종운의 가족이 있는 자리로 가 얼굴이며, 손이며, 온 몸에 피를 묻혔다. 발견 한 누군가가 나를 신고해 버리게. 하지만 종운이 발견한 것은 오차였다. 물론 잡혀간다면 언제든 종운과 마주할 수 있는 처지 이지만 발견하는 것은 다른 주민이었어야만 했다. 그래야지만 그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끝까지 영운을 외면했다. 타락한 것은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리 도록. 친구랑 싸우지 말 걸, 혹은 그 소년을 잡을 걸. 그랬다면 이렇게 그에게 미움 받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에게 나는 그냥 옆집 사내였거나 영웅으로 남았었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었을 텐데. 하지만 계속 그 소년의 얼굴이 떠올라 영운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 남아있다, 배의 칼 맞은 흉터가.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보여주지도 않을 생각이다. 그러다 문득 저를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봤던 종운의 싸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 그리고 화가 난 얼 굴로 상반되는 말을 내뱉던 종운의 얼굴 또한. - 난 당신 정말 용서 못 해. -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도 다시 오는 이유는 병신같이 당신 죽지 않길 바래서야. 그 뿐이 야.   “후…으흐흣, 흐으으읏…….”   고개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낮게 흐느껴 운다. 영운과 가까이서 청년들의 축구를 감상하고 있던 교도관 중 한 명이 영운의 흐느낌을 듣고 무슨 일이냐며 달려온다 . 또 그 교 도관이 영운에게로 가는 것을 본 다른 교도관들도 영운에게로 향한다. 다수의 교도관들이 한꺼번에 당황한 얼굴로 영운에게 달려가는 것을 본 축구를 하던 청년들과 그 것을 감상하 던 수감자들 또한 영운에게로 간다.   “이봐 8517, 왜 그러는 거야!” “8517!!” “김영운씨!! 왜 그래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길 바라지도 않는, 안타까운 나의 일방적인 로맨스. 갖고 싶 은 그를 절대 갖지 못하는 내 마음을 당신들은 알까.   *


“규현아. 사형수는 꼭 죽어야만 하냐?” “당연한 거 아니야?” “…왜?”   어이없음, 이라는 글씨가 규현의 앞머리 위에 쓰여 있는 듯했다. 그런 규현의 표정을 읽은 기범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시로 어깨를 약간 들썩였다. ‘바보 같기는.’ 규현은 기범의 이마 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아, 하고 기범이 이마를 문지르자 규현은 읽고 있던 소설책 ‘혈의 누’를 내려놓고 기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사형수라는 죄수는 언제 죽을지 몰라. 위에서 ‘이 사람 죽이자’하면 바로 그 다음 날 목 매 달아서 교수형으로 사형되는 거라고. 그리고 죄가 크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냐 구. 사형수는 죄가 커서 사형수야. 그런 사형수가 죽지 않는 천재지변은 결코 일어나지 않 아. 혹시 아는 사람이 사형수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다행이야. 난 네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게 싫거든.” “무슨 의미?” “보, 보기 싫다는 것뿐이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   새치름한 규현의 모습이 약간 귀엽다고도 느꼈다.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확 덮어버리는 버릇 이 또 나왔다. 푸른 색 카디건이 예뻤다. 규현에게 정말 잘 어울렸달까. 카디건 벗고 위에 와이셔츠만 입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기범은 눈을 내리깔고 규현이 읽고 있던 ‘혈의 누’를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이인직 작품. 1910년대. 개화기.” “나약했던 우리나라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지.”   다시 책을 손에 쥐고 열심히 정독하는 규현. 어느새 열중해 버리는 규현에 기범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수재. 그 순간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수 트를 쫙 빼 입은 남자의 모습에 규현은 해맑게 웃는다.   “창민아! 와줬네?” “너 비 맞으면서 가는 꼴은 못 봐서.” “으히히히, 징글맞아 임뫄아!”   규현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는 창민. 어찌나 규현이 창민의 이야기를 해대던지. 좀 방황하 던 시절 의지가 많이 되었었다던 친구. 집에서 같이 자기도 했고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자란 사이라던가. 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민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창민 또한 기 범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 창민이 왔으니 가 보겠다며 창민에게 팔짱을 끼고 강의실에서 나가는 규현. 또, 또 저 친한 사람들한테 끼는 팔짱 버릇 나왔다. 자신에게도 갑자기 팔짱을 꼈다가 깜짝 놀라 너무 밀쳐내 규현을 울게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다신 생각하지 않고 싶은 기억, 다시 말해 ‘ ㅎㄷㄷ’ 이다.


규현과 창민이 강의실에서 나가고, 창밖으로 땅을 가를 듯 세차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가르 며 매연을 쏟아내는 차를 바라봤다. 뒤 창문에서 보이는 실루엣은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 는 것을 짐작케 했지만 기범은 신경 따위 쓰지 않았다. 저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면 축하한다 며 박수라도 쳐 줄 심산이다. 지금 자신도 같은… 비슷한, 동성을 사랑하고 있으니. 규현이 읽던 ‘혈의 누’. 주인공 옥련은 일제의 억압을 받던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가족과 헤 어지고, 수많은 역경을 겪는다. 하지만 그녀는 10년 만에 다시 가족과 만나고 구완서와 결 혼을 하는 등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뜻하지 않게 가족과 헤어진다…. 뜻하지 않게 가족이 살해당하여 혼자 남는다. 수많은 역경 을 겪는다…. 가족을 죽인 이를 사랑하는 등의 괴로움, 그리고 머릿속에 수 없이 지나가는 생각들. 규현이 읽었던 책 때문에 기범은 기어이 종운이 다시 생각이 나버렸다. 마음이 정 리되면 다시 보러 간다는 말이 계속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른다. 아니 , 결코 지킬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약속이었겠지. 울던 종운과, 고개를 떨구어 버렸던 영운의 얼굴이 떠올라 기범 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하, 하고 힘없는 소리를 낸다. 미안해요, 종운선배.   * 며칠 째 태양조차 못보고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소나기인 줄로만 알았던 세찬 비는 결국 때 아닌 장마로 이루어 졌고, 비가 그치는가 싶으면 구름이 잔뜩 낀 상태에서 벗어나질 않 고 보는 이로 하여금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아무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여도 그 렇지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는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나지 않았던가. 창밖에는 사람들은 거의 다니지 않고 차만이 서로 물을 튀겨가며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종운 역시 택시를 타고 영운이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로 향했다 . 비는 왔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 보일까 싶어 잘 차려입고 오긴 왔는데 영운에게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렇 게 입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교도소로 향하는 내내 영운과 어떤 말을 할지 고 민했다. 날씨? 생일? 키가 몇이냐던가. 아니면…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어요? …아아, 마 지막 것은 없던 이야기로 치자!   막상 영운의 앞에 앉으니까 할 이야기는 너무나 많았다. 과 동기가 어제 저한테 뭐라 그랬 느니, 요즘 안 심심하려고 애완동물을 육지거북이로 샀는데 더 심심하다던가, 요즘 날씨가 왜 이러느냐며 불평도 하고. 영운은 종운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간간히 ‘흐 흣’하는 웃음소리나 ‘그래서요?’, ‘그 다음은요’ 하는 등의 추임새를 넣어 대화를 더 기쁘게 만들었다.   “영운씨는 키가 몇이에요?” “반올림해서 180이요.” “에에이, 반올림 하면 나도 180이다.” “그럼 나 180, 종운씨도 180 하죠.”


간간히 농담도 하며 비는 내리지만 아크릴판을 부드럽게 흐르는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러다 문득 다운된 분위기가 되면 종운이 먼저 말을 걸어 화제를 돌리고 , 기분 좋게 이야 기 하고. 일부러 좋지 않은 주제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안쓰러운 그의 모습에 영운은 마 음 한 구석이 짠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이야기 할 것은 해야 할 것. 영운은 웃으며 말을 하 는 종운의 말을 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과 교수가 얼마나 깐깐한지 과제를…….” “종운씨.” “…예.”   영운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이미 대충 분위기로 봐서는 다 알겠다. 당사자가 직접 꺼내기 도 쉽지 않은 내용. 하지만 영운은 쉽게 꺼내는 이야기. 왜일까? 왜 영운은 그다지도 쉽게 자신이 범행을 쉽게 남에게 알릴까? 종운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한 번 더 저를 부 르는 낮고 굵은 그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일부러 대화 주제 바꾸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내가, 종운씨… 가족, 죽, 였잖…아요.”   흔들리는 눈으로 종운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는 영운의 갈 곳 없는 눈동자는 이내 불안한 지 서로 만지작거리는 두 손으로 향했다. 그와 상반되게 참착하게 그런 그의 두 눈을 바라 보고 있던 종운은 다시 입을 연다.   “그래서 저보고 영운씨 죽여 달라고요?” “…….” “그런 거 아니잖아요. 그럼 그냥 제가 말하는 거에 반응만 해줘요. 예?” 고개를 한 번 끄덕.   “의문이 하나 들어요.” “…무슨?” “과연 당신이 내 가족을 죽였을까, 안 죽였을까.” “…….” “당사자라면 결코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를 영운씨는 잘도 꺼내죠. 너무나도 쉽게 범행 을 말해요. 당신은 얼마든지 그 때에 도망칠 기회가 있었잖아요. 시간은 널럴했고, 몸을 씻 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집이 바로 옆집인데도 그러 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과연,” “…그만.” “당신은, 누군가를 덮어주기 위한 미련한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내가 죽였든 안 죽였든 간에 나는 죽어!!!” “……영운씨!” “내가 사실을 구구절절이 늘어놓는다 해서 여기 새끼들이 날 믿어줄 것 같아? 천만에. 못


들은 걸로 하고 날 죽일 날짜를 자기네들끼리 정하는 거지. 안 억울하냐고? 물론 억울해.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 나를 미워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당신은 죽이지 않았어. 종운은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생각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당 신’ 이라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들어 흥분한 영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운은 자신이 말 하다가도 아차, 싶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종운과 눈을 맞추다 눈을 피해버린다. 그런 영운 이 조금… 귀엽기도 해서, 종운은 나지막이 영운의 이름을 부른다.   “영운씨.” “…….” “김영운씨 나 좀 봐요. 예?”   간곡한 부탁에 고개를 살짝 든 영운은 종운의 얼굴을 보고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희열과 기쁨을 느낀다. 양 볼이 수줍게 물들어 옅게 웃는 종운의 얼굴을 보고. *   구름이 꼈긴 꼈지만 더 이상 비가 올 하늘은 아니어서 종운은 손에 들었던 우산을 다시 우 산꽂이에 꽂아둔다.   밤새 이루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영운 또한 지금 나와 같은 마음 일까, 생각하며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 부채로 얼굴도 부쳐보고 냉장고를 열어 얼굴에 찬 바람을 쐬어보기도 하고. 하지만 일시적이었을 뿐, 또 다시 금세 얼굴은 뜨겁고 가슴은 계 속 뛰어서 진정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 바보 같기는. 하지만 종운은 웃었다.   오늘도 볼 그를 생각하며.   *   며칠 내내 비만 왔던 터라 오랜만에 보이는 해는 정말 반가웠다. 운동장이나 흙이 있는 모 든 곳들이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더웠던 여름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하느 님의 은총이라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였던 김 수감도 막상 해가 뜨니 기분은 좋았다. 그래 도 이제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꽤 시원하지 않겠어? 딸아이가 왜 그렇게 가을을 선호했었 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었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김 수감은 옷을 갈아입고 자신과 같은 수감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 ‘굿 모닝~’ 하고 수감들과 간수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무언가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김 수감의 목소리에 흠 칫 놀라며 김 수감에게로 시선을 던진다. 안쓰럽다는 듯한 눈을 하는 그들에 왠지 김 수감 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설마! 김 수감은 사형 일정 서류를 찾아 뒤적인다.


*   비가 그치니 참… 별 일이 다 있구나. 종운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자신이 왜 이러고 있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 해 본 적 없었는데. 그 래도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좋아하네 어쩌네 운운하던 둘이었는데. 생각 외로 슬프진 않았다. 오로지 사형 명단에 오른 ‘김영운’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바라봤 다. 이거 교도관들이랑 김영운이랑 짜고 나 속이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냐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영운의 죽음에,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다가와 믿기지도 않는 그런 상황에 종운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종운은 간수 중 한 명이 일러준 곳으로 갔다. 사형수들이 묻히는 교도 소의 공동묘지, 라던가.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보기 좋게 규칙적으로 십자가를 세워두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십자가들 중에서 영운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걷고, 걸었다. 가로로 걷고, 세로로도 걷고. 그러다 맨 구석지에 위치한, 흙을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땅을 보았다. 가까이 걸어가 십자가의 뒷면을 보니 역시나, 적혀진 ‘김영 운’. 그의 이름.   약간 봉긋하게 솟아있는 흙 아래에 영운이 있을 것이라 상상했다. 아, 드디어 나와 당신이 아크릴판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벅찬 감동………? 아냐, 그렇지 않아. 감동이 아니야. 이 마음이 감동이었다면 과연 지금 나는 왜 눈물을 흘 리고나 있을까. 어째서 엉엉, 주변 이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서럽게 울고 있을까. 한 십 분 정도를 끅끅대며 울었을까, 종운의 눈가는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이 손수건을 건 네고 싶을 정도였다. 모두가 종운에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종운은 시선을 거부하고 영운 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입술에 한 번도 입을 못 맞춰봤어요. 그 옛날 당신의 손도 잡아본 적 없구요....... .........지나가다 고개만 까딱거리면서 인사해서 정말 미안해요.... 나는... 부끄러워서 그랬 어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쓸어보고,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다. 십자가가 영운이라도 되 는 양 종운은 조심스럽게 팔에 힘을 풀어 십자가에 머리를 기댔다.   “병신같이 영운씨 마지막 가는 길 못 봐서, 배웅 못 해서 미안해요.”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종운은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서 뒤를 돌아 십자가에 등을 기대고 손으로 영운이 밑에 있을 흙을 어루만진다. 바보같이 미련하기만 했던 사람. 좋아한 다고 말 해줬었다면 함께 갈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몸을 돌려 십자가와 마주하고 종운은 또 한 번 그에게 속삭인다.  


“사랑해요.”  

*

당신과 나의 조우가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통에 처박히지 않길. 그 또한 나와의 조우가 소중 했다 생각되길.  

1997년 9월, 소중했던 그와 나의 조우를 기억하며.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한 펜션 주차장에 여러 대의 차가 줄줄이 들어서고 있었다 .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가을 시즌엔 이런 광경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어서인지 주변 펜션 주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드는 차들을 신기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이 일행이 묵을 펜션은 그 근방에서 가장 큰 별채를 가지고 있는 고가의 펜션이었는데 평소엔 비싼 가격 탓에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이들이 오는 날엔 항상 별채 하나가 꽉 차고도 넘칠 정도였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손수 다 꾸민 실력 좋은 안주인이 방에서 나오며 차에서 가장 먼저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이가 서른은 훌쩍 넘은 남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 다. “지훈씨, 오랜만이네? 이번엔 좀 늦었어. 난 2주 전쯤에 올 줄 알았었는데..” “하하, 죄송합니다. 날짜를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좀 빠듯하게 연락 드렸는데 바로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상 신세지네요.” “어머 무슨 소리야, 지훈씨네가 묵어가면 우리가 좋지. 안에 싹 준비해뒀으니까 얼른들 들 어가 봐.” 아주머니의 말에 예의바르게 대답을 한 지훈은 함께 차를 타고 온, 짐을 꺼내느라 트렁크에 머리를 쑥 박고 꼬물대고 있는 규현에게 다가가 등을 톡톡 건드렸다. 쿵“으악!! 아 아파라.. 에? 왜요?” “가방 얼른 챙겨서 가자고. 뭐 떨어뜨렸어?” “아니에요. 가요, 가요- 가면 돼.”


고개를 황급히 들다가 뒤통수를 차에 박은 규현 때문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지훈이 물었다. 규현은 부루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황급히 손으로 막으며 지훈이 돌아섰다. 하지만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을 규현은 놓치지 않았다. 궁시렁 궁시렁 투덜대면서도 커다란 가방을 끌어안고 규현은 잘도 지훈을 따라 들 어간다. 그는 이 어색한 2박 3일간 열릴 모임에서 아는 유일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전부 지훈을 통해 얘기를 들었을 뿐 실제로 만나거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머쓱 한 느낌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규현은 자신과는 나이터울이 많이 지는 편 인 지훈을 동아줄 마냥 꽉 붙잡고 따라다녀야만 했다. “규현아, 난 이 방에 짐 놔뒀으니까 너도 저기 놓고 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랑 방 써볼 래? 그래도 괜찮아, 어색해하지 말고.” “아... 아니에요 전 그냥 형이랑... 아무래도..” “짜식, 숫기 없기는.” 지훈이 주춤하며 대답하는 규현의 머리를 헝클며 픽 웃는다. “저..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아, 미안.” “죄송합ㄴ...” 문간에 서서 지훈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삐딱하게 서서 규현의 머 리에 손을 얹고 있던 지훈이 먼저 비키며 사과를 했다. 규현도 따라서 사과를 하는데 그가 쌩하니 지나가버린다. 키는 약 178cm쯤 될까, 마르고 다부진 몸매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쌍꺼풀 없이 긴 눈매를 내리 깔아서 쭉 뻗은 긴 속눈썹 아래 짙고 까만 동공이 살짝 보인 것도 같 았는데. 규현은 스쳐 지나가는 그의 옆모습에 순간 말을 잃었다. 어딘가.. 묘하다.

“뭐? 내일? 뭐야,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 가방을 방에 두고 나오는데 투정이 섞인 말소리가 들렸다. 규현은 쭈뼛대며 그 소리가 나는 쪽을 힐끔 쳐다봤다. 부스스한 머리를 꽤 맵시 있게 왁스로 멋을 내고 청바지에 검은색 폴 로 티를 입은 그가 눈을 내리깔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의외였다, 그가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쌍꺼풀 없이 긴 눈과 앙 다물어진 입술만으로는 그가 꽤나 단호한 사람으로 보였고 다른 이들이 우스갯소리를 할 때 모든 사람들이 다 웃어도 혼자만은 포커페이스로 눈길을 돌리는 것으론 그가 꽤나 싸늘 한 사람처럼도 보였거늘, 지금 이 곳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혼자 전화를 붙잡고 수화기에 애교 있는 말투로 투덜거리는 그라니, 완전히 상상 밖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무리 속에서도 유독 튀는 그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꽤나 대단한 사람이겠 지.


“알았어. 그러면 도착하자마자 연락해. 나? 어쩔 수 없잖아, 니가 없는데. 됐어, 걱정 안 해 도 돼.” 여전히 애교 섞인 말투로 통화를 하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방이 재밌는 얘기라도 했 나보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동그랗게 휘어지며 초승달모양이 되었다. 그는 참 아름답 게도 눈웃음을 짓는 사람이었다. “알아. 걱정 말라니까. 내가 누구야. 그럼. 응. 하하, 알았어. 그래, 가서 잘 하고. 응. 응.. 나 미움 안 받게 좋게 말씀드려줘.” 단편적으로 들리는 그의 대답만으로는 그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 전화를 받는 몸짓 하나만으로도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정체 모를 씁 쓸함이 들었다. “그래. 나중에 전화할게. 응, 응.” 조금은 바보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서서 한없이 그를 보고 있는데 전화 통화를 마친 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다가 저를 멀뚱히 보고 있는 규현을 눈치 챘다. 규현은 순간 수십 가지 고민을 했다. 생판 모르는 사이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알아갈 사람이 니까 먼저 인사를 할까, 아니면 그냥 지나치다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려 버릴까, 그냥 눈 마 주친 거에 대한 예의 정도로 끄덕이기만 할까. 하지만 규현이 그 고민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가느다란 그의 눈이 더 가느다랗게 접히며 이마 에 주름이 팼다. “뭘 봐?” “......” 그것이 규현과 그의 첫 공식적인 대화였다.

아까부터 부엌에서는 계속해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태원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한성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함께 모이지 도 않던 규현은 염치없이 따라와서 일만 늘리고 도움을 주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자꾸 주방 근처를 기웃거렸다. 마찬가지로 주방 쪽에는 재능이 전혀 없어서 거실에 앉아 한창 티비를 보고 있던 지훈이 한 성의 부탁으로 주인댁에서 채소 몇 가지를 받아와서 건네주다가 냉장고 옆에 딱 달라붙어 서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구경하고 있는 규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여기 있으면 오히려 방해 돼. 이리 와, 나와서 너도 티비나 보자.”


“그렇지만.. 제가 너무 도움도 안 되는 것 같고 해서..”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와. 애들 소개시켜 줄 테니까.” 지훈이 호쾌하게 웃으며 규현을 잡아끌었다. 규현은 마지못해 끌려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 아봤다. 덥지 않은 날씨인데도 구슬땀을 흘려가며 뜨거운 부엌에서 일을 하는 그들에게 너 무 미안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창가 쪽에 길게 놓인 소파 위에 혼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서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이 한창인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가 눈에 띄었다. 규현을 충분히 무 안하게 만들고도 남는 ‘뭘 봐’ 라는 말을 툭 던져두고 그 후로는 규현을 완전히 무시해주는 그가. “다들 인사해. 알지? 내가 매일 말했던. 잘생겼지?” “아.. 반가워요. 최준형입니다.” “이름이 조규현 맞나? 반가워요. 난...” 지훈의 곁에 몰려 앉아있던 몇 사람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규현은 한 사람씩 손 을 꽉 잡아 악수를 해가며 그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꾹꾹 새겨 넣었다 . 정작 이름이 너무도 궁금한 그는 요지부동,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이 모임에도 나름대로의 무리가 갈리나보다. 워낙 소수자들의 무리 속에서 또 그 중 일부만 참석한 모임이라 2박 3일 함께 지낼 사람들은 다 너무도 친하고 잘 알아서 혼자서만 이방 인일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도 따로 노는 사람, 무리들이 있었고 눈치가 빠른 규현은 곁눈질 로도 그 구도가 대강 파악이 됐다. 역시 지훈과 한성을 주로 한 사람들이 모임의 60% 이상 을 차지했지만. 문득 그는 어떤 무리에 속하는지 그게 궁금했다. 아까부터는 계속 혼자 있는 모습을 보였는 데, 설마 달랑 혼자 왔으려고? “형. 저기.. 저 사람은.. 누구에요?” 티비 소리가 꽤 큰데도 혹시나 목소리가 들릴까봐 지훈에게 몸을 바짝 기울여서 숨죽이며 규현이 물었다. “누구? 아, 김종운?” “아.. 이름이 김종운이에요?” “어. 왜, 관심 있어?” “예에?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재밌다는 얼굴로 관심 있냐고 묻는 지훈에게 얼른 손사래를 치며 규현이 고개를 돌렸다 . 정 곡을 찌르는 그 질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이미 아닌 척 해도 소용없었겠지만 지훈에 게 완전한 확신만은 주지 않고자 딴청을 피운다. 지훈은 그런 규현이 귀여워서 소리죽여 웃었다. 볼부터 귀까지 다 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 아닌 척 하긴. 솔직한 녀석. 그런 순수한 점이 규현의 매력이었으나 지훈은 규현이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길 바랬다. 규현에게 좋은 사람이 아닐 텐데 저 녀석은.. 규현이 곁눈질로


종운을 흘끔거리는 걸 안타까운 얼굴로 보며 지훈이 생각했다.

한 상 차려진 음식을 다 먹고 다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눴다. 이 모임은 조금 특 이했다. MT처럼 온 여행 겸 모임 겸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했었건만 이건 뭐 사람들끼리 단 합은 안 되고 결국 친한 사람들끼리 놀자 뭐 그런 것인가? “이상하지? 하지만 우린 원래 이래. 적어도 낮에는.” 지훈이 규현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넌지시 말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규현이 금방 적응하 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지훈의 말에 들어있는 미묘한 단어 선택을 골라내며 규현이 반문했다 . 역시 눈치 좋은 녀 석. 지훈은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의도를 정확히 잡아내며 되묻는 규현의 머리를 또 쓱쓱 쓰다듬는다. “낮에는 우리끼리 뭘 하겠어 솔직히. 점심 먹고, 적어도 저녁때까지는 서로 눈치 보면서 간 보고 그런 거야.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해도 그 때는 그냥 사람으로서 알아보고자 했 었다면 지금은.. 알잖아.” “그럼 밤이 되면..” “작업 들어가는 거지 뭐. 그럴 목적으로 모인 거니까 우린.” “...형은 한성 형이..” 규현이 의아하게 갸웃거렸다. 규현이 알기로는.. 지훈은 솔로가 아닌데? “아, 뭐. 우리는 그냥 주최자? 그런 입장으로 온 거야. 항상 그렇게 하니까. 여기서 만난 커플로의 본보기도 보여줄 겸, 뭐 그런 거랄까. 솔직히 너도 우리 보면서 여기서 괜찮은 사 람 만나서 우리처럼 잘 지내면 좋겠다, 싶지 않냐?” 옆에 앉아서 과일을 깎던 한성이 끼어들며 말했다. 지훈보다 몇 살 아래인 한성은 지훈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었는데도 둘이 잘 지낸다는 것이 너무 신기한, 그런 사람이었다. “......딱히..” 규현의 시원찮은 대답에 한성의 얼굴이 뾰족해졌다. “뭐냐 조규현. 이제 나는 편하다 그거야?” “하하하- 야 날 세우지마. 규현이 놀라잖아.”


규현이 버벅 대며 대꾸를 못하자 지훈이 웃으며 둘 사이를 막았다. 사실 한성이 편해진 것 은 사실이다. ‘지훈형이랑 친한 동생이라며? 얘기 많이 들었다.’ 라는 인사말로 스스럼없이 규현을 대해주지 않았던가. 한성이 흘겨보던 눈을 돌리자 규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때, 예고 없이 지 훈이 말을 꺼낸다. “근데, 규현이 이 자식 김종운한테 관심 있는 거 같던데?” “..김종운?” “어.” “에엑!! 형!!!” 한성이 번적 고개를 들었다. 규현은 깜짝 놀라며 서둘러 지훈의 입을 틀어막았는데 한성이 오묘한 눈초리로 규현을 쳐다본다. 왜, 왜... 왜 그러는 거야. “야, 조규현. 꿈 깨. 저 자식 애인 있어.” “...알아요.” “뭐야, 아는데 왜 저런 자식한테 관심이 있냐? 더 나은 애들 많아, 소개시켜줄게. 그러려고 온 거 아니냐.” “규현이 너, 김종운 애인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그에겐 애인이 있다는 한성의 말에 미련퉁이처럼 ‘알아요.’ 하고 대답했다. 지훈이형은 왜 그걸 말해가지고 사람을 바보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아주 작은 원망이 들었다. 다 알고 도 호기심을 놓지 못하는 내가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훈은 규현의 대답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며 규현을 본다. “아까.. 통화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애인이랑 하는 거 같았어요.” “아는데 왜..” 지훈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묻는데 한성이 말을 중간에 자른다. “아 뭐, 알고 말고 간에. 그냥 신경 꺼. 애인도 있고, 없어도 굳이 소개시켜줄 만큼 우리가 저 자식이랑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 애인분은 왜 안 오셨대요?” 어떻게든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얘기의 초점을 그 애인에게로 돌리며 규현 이 물었다. 지훈은 그런 규현의 의중이 빤히 보여서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그가 듣 고자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해준다. “걔는 원래 이런데 안 좋아한대. 그래서 이번에도 안 온 모양이야.” “근데 진짜 웃겨. 쟤도 그래, 이럴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와? 뭐하자는 플레이야 진짜.”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로 한성이 말했다. 규현은 너무도 직선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그


의 말에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규현이 무슨 말로 대꾸를 해줘야할지 대답을 쉽사리 찾지 못 하고 곤란해 한다는 걸 눈치 챈 지훈이 한성을 옆구리로 쿡 찌르며 핀잔을 준다.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친구를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까칠하게 말할 필 요가 뭐 있냐?” “친구? 친구 좋아하시네, 그런 거 없어 여긴.”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한 한성은 그에 대한 얘기는 더 나누기도 싫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 났다. 규현은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어색하게 앉아있는 지훈에게서도 시선을 피했다. 한 성과의 대화에선 그의 역성을 들어주는 듯 했으나 사실은 지훈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것을 규현은 알 수 있었다. 상관없다 누가 그를 좋게 생각하건 말건. 하지만 다른 이들 을 통해서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규현은 그의 이름만을 달 랑 받아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알고 싶지만 쉽사리 알 수 없는 어딘가 신비한 그가 규 현의 호기심을 더더욱 자극했다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규현이 종운과 다시 한 번 말을 하게 된 것은 그날 밤, 다른 사람들 모두 술이 거나하게 취 해서 대부분 쌍쌍이 노느라 바쁘고 남은 사람들은 눈이 반쯤 풀려 지루해하던 그런 조용한 때였다. “여기, 앉아도 됩니까?”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열면 있는 하얀색 발코니용 벤치에 앉은 규현이 유난히도 캄캄한 밤 하늘을 보며 별을 세볼까- 할 무렵,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잊히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물었 다. “아.. 네. 앉으세요.” 얼떨떨하게 종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규현이 옆으로 움직여 종운이 넉넉하게 앉 을 공간을 내주었다. 십초, 이십초, 삼십초.. 그렇게 자꾸만 시간이 흘러가는데 고요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졌 다. 규현은 내심 초조해서 몸을 들썩거렸다. 그냥 안으로 다시 들어갈까, 아니면 말을 걸어 볼까, 어떻게 하지.. “이름이..?” 그때 너무나 놀랍게도 규현의 옆에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잠잠히 있던 그가 말을 걸었 다. 규현은 교장선생님 앞에 불려간 어린 학생처럼 얼른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대답했 다.


“조규현입니다.” “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전에 뵌 적 없죠?” 매섭게 규현을 쳐내던 아까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온화했다 . 술을 마셨기 때문인 지 하얗게 빛나는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에 취해서인지, 규현 은 자신만큼이나 몽롱한 종운의 말투를 들으며 손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처음’ 이라고 말한 것에, 아까 전 꽤나 쌀쌀맞던 대화와 문 앞에서의 잠깐의 조우를 포함시킨 것인지 아닌지 규현은 아주 잠깐 3초정도 고민했다. “네. 처음이에요. 생각보다.. 재밌네요.” 종운이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그때도 이곳이 재밌다는 생각을 했었을까 라는 의구심을 곱 게 접어 머리 깊숙이 넣어놓고 규현이 흐뭇하게 대답했다. “안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이제 온 걸 보면.” “...네?” 종운은 혀가 살짝 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한 규현의 발음이 귀여워서 피식 - 하고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물음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물어도.. 되는 걸까요? 라는 얼굴을 하 고. “아... 그런.. 건 아닌데.. 오기가.. 불편했거든요. 이렇게 많이.. 있는 곳에 잘 가지도 않고 그래서.”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정말.. 아주 우연찮은 계기로 지훈형이랑.. 아웃을 하게 됐거든요. 형이 자꾸 오라고 와보 면 좋다고 꼬드겨서 MT 오는 기분으로 왔어요.” “아아... MT 맞죠 뭐.” 규현의 말에 대답을 한 종운이 눈 꼬리가 동그랗게 접히도록 웃었다. 두근. 두근. 저 표정.. 매력적이다. “근데 의외네요. 어느 정도 오래 됐으면 다른 사람들 찾아볼 법도 한데, 왜 안 그랬어요? 혼자 외롭지 않나? 아.. 뭐 다른 의미라기 보단, 동질감을 가진 사람들끼리 말도 잘 통하는 법인데..”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싶을 정도로 종운은 자꾸만 규현에게 질문을 했다. 그의 호 기심이 자신을 향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그저 새로 본 얼굴에 대한 호기심인지 구별이 되진 않았지만 규현은 전혀 싫지가 않았다. 저녁 내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비슷한 질문을 받고 지훈형의 중매 - 중매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달리 적절히 표현할 방법도 없다. 그는 지난 몇 시간동안 정말 마담뚜 의 역할을 너무도 제대로 해냈다 - 에 떠밀려 사람들과 꽤나 사 적인 질문까지 주고받아야만 하는 자리는 너무나도 짜증났었는데 상대만 바뀌었다고 이렇게 나 사람 마음이 달라지다니.


“규현씨는, 아.. 규현씨라고 불러도 되죠? 아직 나이도 모르고 해서.. 규현씨는 지훈씨가 여 기 오자고 안 그랬으면 아직도 저 밖에서 나 홀로 삶을 살고 있겠네요.” “그랬겠죠. 아마도.. 저는.. 모르겠어요. 그냥.. 저 하나만으로도 적응이 쉽게 안 됐는데 여 러 사람이 모인데 가면 안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꽤 보수적인가보네.” 종운이 부르는 ‘규현씨’ 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호칭이었다. 조규현, 규현아, 조규, 규, 뀨, 규현군, 규현선배, 규현오빠, 규현이형 등등 수많은 호칭으로 불리며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는 그 어느 것도 저만큼 완벽하게 대답을 하고 싶게끔 만든 호칭이 없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규현씨’ 는 정말이지.. 하루 종일 듣고 싶다. “그런 건지.. 부모님이 보수적인 편이시긴 해요. 그러니까.. 아마 저도 그런 면이 있겠죠.” “근데도 용케 살아는 있네?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세요?” “에이, 당연히 모르시죠. 그런 건... 종운..씨네 부모님은 아시나요?” “아, 뭐.. 그런데, 내가 이름을 말해준 적이 있나요?” 종운이 규현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규현은 아차 싶어서 얼른 머리를 굴렸다. 뭔가 변명거 리가 될 만한 것은 없을까, 아까 말해주셨잖아요- 하고 넉살을 떨어볼까, 지훈형이 사람들 이름 다 알려줬어요― 하고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댈까, 어쩔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규현은 표정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어서 얼굴에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종운은 시시각각 변하는 규현의 얼굴을 가만 보고 있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그를 본 이래로 가장 시원하게 웃는 거였다 이게. 규현은 상당히 뿌듯했다. 얼굴이 빨갛지는 않지만 숨결에서 느껴지는 알콜 향으로 보아 꽤 나 취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는 종운이, 술기운 때문이더라도 자신으로 인해 크게 웃었다 는 건 너무도 즐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아까 전에 애인과 통화할 때도 이렇게 크게 웃지는 않았잖아. 규현은 어느새 게임도 되지 않는, 전적으로 규현에게 불리한 경쟁을 마음속으로 시작해버렸다. 현재 스코어는 1:0, 아직까지는 규현이 승자였다. “규현씨 그럼 연애는? 설마 한 번도 안 해보거나 그런 건....” “...하하.. 어릴 때 여자친구가 있던 적은 있는데.. 알고 나서부터는..” “아아.. 그렇구나. 전 또.. 모임 같은 데 안 나오면 사람은 어떻게 만나나 했더니... 규현씨 몇 살이에요?” “전 스물일곱.” “그 나이 될 때까지 누구 만나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의 입장에서는 꽤나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것이었겠지만 규현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 다. 그래, 당신은 애인도 있는데 나는 연애 한 번 못해보다가 결국 관심을 가진 게 애인이 있는 사람인거지.. 방금까지 사탕을 문 것처럼 달던 입속에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아.. 미안해요. 저.. 난 그냥 궁금해서...”


쑥스러운 듯 웃던 규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식는 것을 보며 종운이 얼른 사과를 한다. “아니에요. 그냥.. 일 하느라 바쁘게 지내다 보니 잊고 지냈었던 거 같아요.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랬구나.” 규현은 우물쭈물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가만히 규현을 보고 있는 종운의 시선이 마치 거짓 말을 하면 금방 알아볼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해서 조심 또 조심, 그에게 심중을 들키지 않 으려 애쓰며. 종운은 규현에게 그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그의 눈이 조금 전 보다 더 몽롱해져 있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크게 내쉬고는 술기운을 떨치려는 듯 눈을 깜빡깜빡 몇 번 움직인다. “저.. 애인분이랑 어디서 만나셨는지.. 여쭤 봐도 되나요? 아.... 아까 형들이 알려주셔 서....” 그냥 궁금했다. 왠지 싸늘했던, 한없이 차가워보였던 처음의 모습과 달리 규현에게 편히 말 을 거는, 아주 약간 취기가 올라 귀엽기도 한 종운에 대해서. 한사코 그에게는 관심 가지지 말라던 지훈과 한성의 말은 뒷전으로 미뤄버리고 호기심에 굴복해버린 것이다 . 그들이 종운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 규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도 하필.. 궁금함을 넌지시 표현한다는 것이, 호감 이 지나치게 앞섰는지 규현이 가장 신경 쓰고 있던 그의 ‘애인’에 관해 불쑥 물어버리고 말 았다. 종운은 먼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규현을 봤다. 규현은 종운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아요? 하고 물어보려다 가 입을 다물었다.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일 테니. “그 녀석은.. 고등학교 후배였어요. 고등학교 때 한창 방황을 좀 했었는데, 그 때부터 계속 쫓아다니면서 챙기려고 들더라구요. 그땐 그게 너무 싫어서,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찮고 짜 증나서 정말 못되게 굴었는데.. 뭐.. 이렇게 됐네요. 하하.” 종운의 웃음소리가 맑게 퍼졌다. 규현은 흘끔 곁눈질로 종운을 봤다. 그의 얼굴은.. 뭐랄까. 행복한 표정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표정이겠지. 고등학교 때부터, 그가 밀어냈는데도, 그렇 게 옆에 있어주었다는 그 사람에 대해 조금씩 얘기를 풀어내는 종운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규현은 난생 처음으로 세상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것이 어떨 때 쓰는 표현인지 절감했다. 내 앞에서, 당신을 너무 늦게 만나서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내 앞에서, 그렇게 행복한 듯이 얘기하지 말아줘.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은 찝찝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머리는 새집이 되어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는데 옆에서 규현과 꼴이 비슷한 한성이 부스스한 상태로 일어나더니 규현을 툭툭 치며 물었다. “조규현, 너 어제 언제 잤어?” “새벽 세시쯤이요. 다들 먼저 주무시던데요?” “아, 나는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지훈형은 하여튼 여기만 오면 나한테 술을 못 먹여서 안달이야. 술 먹여서 뭘 하려고 그러나 몰라.” 한성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지훈은 벌써 일어나서 아침 운동 하겠다고 펜션 주변을 한 바퀴 뛰러 갔단다. 규현은 한성의 말에 대한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지훈이 왠지 안쓰 러워져서 ‘뭔 짓을 하려면 형이 하지 지훈형이 하겠어요?’ 라며 장난을 건다. “자식이.... 잘 아네. 그래서 형은 나랑 있을 때 절대로 술 안 먹잖아. 큭큭큭” 한성은 어제 지훈이 했듯이 팔을 뻗어 규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다. “아 하지마요. 안 그래도 머리 떴구만..” “어차피 씻으러 갈 건데 뭘 그러냐?” 막내동생뻘인 규현이 귀여웠는지 어제보다는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한성이 픽 웃는다 . 게다 가 이젠 ‘먼저 씻을래? 난 너 씻고 나오면 들어갈게.’ 따위의 형다운 말도 제법 한다. 규현 은 괜찮다고 먼저 씻으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아직 이불 속에 돌돌 말려서 잠들어있는 종운 이 누운 쪽을 흘끔 쳐다본다. “그럼 그래도 되요? 저 빨리 씻어요. 금방 나올게요.” “...어, 천천히 나와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규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던 그 자리를 불편하게 쳐다보며 한성이 대답했다. 규현은 얼른 세면도구와 수건 등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가 깨기 전에 얼른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겠다. 그래서 어제처럼 그가 말을 걸어오면 오늘은 취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와 조금 더 즐겁게 얘기해보리라.

“그래서?” “그러니까, 오늘은 형이 좀 애를 잘 챙기라고. 형이 바쁠 땐 내가 챙길 테니까. 안 그럼 쟤 완전 말려들어, 알어?” “...알어. 근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지가 좋다는데 뭘 어떻게 하냐고.” “아 그럼 뜯어말려야지! 형은 조규현이 그때 그놈 짝 나는 거 보고 싶어? 미쳤어 진짜?” 샤워를 마치고 뽀송뽀송한 느낌이 좋은 타월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데 한성의 흥분한 목소리


가 들렸다. 그 상대는 방금 돌아왔는지 목소리가 숨 가쁜 지훈이었다. 그때 그놈 짝 나는 거.. 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어떤 짝이 난다는 거야? “아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못 그러게 잡아놓으면 될 거 아냐.” “애초에 형이 걔를 여기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됐어. 차라리 다음에 우리끼리 갈 때 괜찮은 애들 몇 명만 딱 뽑아서 가지, 왜 하필 저 자식 오는 데를 데리고 와서 그래!” “내가 뭐 쟤가 올 줄 알았냐? 막판에 말 바꿨는데 어떡해 그럼!” “조규현 간수를 잘 했어야지!! 형은 조규현이 딱 걔랑 비슷한 거 모르겠어? 그런 스타일이 잖아! 게다가 쟤는 걔보다 더 잘생겼지, 스타일 좋지, 게다가 그놈보다 더 순진하기까지 하 지!” “알았다고!” 한성의 다그침에 짜증이 난 얼굴로 확 돌아서던 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규현을 발 견하고는 ‘규..규현아.’ 하고 말을 더듬는다. 굳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아도 본인의 얘기 를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규현은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생겼지만 지금 당 장은 듣지 않기로 했다. 무슨 얘기이든 간에 종운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얘기들 하고 계세요?” “별 거 아니야. 다 씻었어? 형, 먼저 씻을래? 운동했으니깐.”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묻는 규현의 질문에 한성도 대강 둘러대며 말했다. 규현 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그가 자신이 밉거나 해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걱정 하는 거겠지.. 하지만 무슨 일인지, 왜 그들이 그에 대해 그렇게 걱정하는 것인지, 그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설마 자기 앞가림 하나 못할까봐? 애인도 있다는 그에게, 그래서 사실은 다른 마음으로 다가가서는 안 되는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그건..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다쳐도 괜찮아. “..아니야. 너부터 씻어. 난 잠시 규현이랑..” “알았어 그럼. 금방 쓰고 나올게.” 지훈이 손으로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면서 그렇게 대답하자 한성은 냉큼 알겠다며 먼 저 들어가 버린다. 또.. 그에게는 다가가선 좋지 않다는 그런 충고를 하려는 것일까. “규현아. 있지..” “형, 그런 거 아니에요. 형들이 뭐 걱정하시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걱정하실 필요 없 어요. 나 그 사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라구요.” “....너랑 비슷한..” “얘기하지 마세요. 알고 싶지.. 않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규현은 속으로 스스로를 한참 비웃었다. 조규현 거짓말 늘었다 진짜. 아니라고 절대 할 수 없는 그 애매한 감정, 알지도 못하는, 행복한 듯이 얘기하는 그 애인


과의 되지도 않는 경쟁을 혼자서 하며 점수를 매기는 그 유치함, 그를 자꾸만 보고 싶고 자 꾸만 얘기하고 싶고 자꾸만 더 알아가고 싶은 그 욕심. 빠져도 단단히 빠졌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실은 아주 조금 ‘그 때 그놈’ 이라고 지칭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 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듣는 순간 종운을 전과는 달리 보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 다. 지훈과 한성이 정말로 자신에게 현실을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것이라면, 지금은 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콩깍지가 씌었다 해도 좋아, 지금 내 눈에 비치는 그의 이미지가 마냥 좋다고. 규현이 단호하게 잘라내는 바람에 지훈은 또 다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규현의 저 눈, 그게 어떤 눈인지 알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무언가 하나만을 파고드는 저 눈.. 남녀세계와는 또 다른 이곳에서 저런 눈을 한 사람들은 항상 지나치게 상처를 받곤 한 다. 그것은... 지훈이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먹히지 않는다 는 것도 알았다. 진정으로 훗날 땅을 치고 후회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순간에만큼은 무 엇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한성에게 또 한 소리 톡톡히 들을 것을 알면서도 지훈은 더 이상 규현을 설득하려는 것을 포기했다. 한성이라면 그가 듣기 싫어해도 끝까지 얘기해서 그를 말리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규현이 후회하는 일은 없도록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성과는 뼛속까지 너무나도 다른 지훈으로서는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고 후에 규현 이 상처를 받으면, 그 옛날 자신이 아팠던 그 때에 자신을 달래주었던 사람처럼 규현을 달 래주는 것만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성이 나와서 지훈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바깥으로 나가 천천 히 산책을 하고 있는 규현을 턱으로 가리켰다. 한성의 책망하는 눈빛이 지훈에게 꽂혔다. 지훈은 잠시 죄책감 어린 시선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도 의견을 굽히지는 않았다. ‘내가 말 해?’ 라며 곧장 달려 나갈 기세의 한성을 급히 붙잡으며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그냥.. 규현이가 스스로 이겨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지금은.” “...형은 무책임해. 그거 알어? 완전 무책임해.” “......알어.” “걔도 우리 책임이었어 그때.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더 말렸더라면 그러지 않을 수 있었어.” 한성의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 때 그.. 그 아이..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때는 우리가.. 너무 그 상처를 가볍게 여겨서 그랬던 거야. 이번에는... 아니야 절대.” “장담해? 절대 그렇게 안 되리라고, 장담 하냐고.” “...내가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게 하리라고는 장담해. 무슨 방법을 쓰든.. 다시는 그렇게 되 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그냥..”


지훈의 얼굴이 고통으로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한성이 그를 당겨서 안 았다. 땀 냄새 나- 하며 피하려는 지훈을 꽉 잡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잘 지켜보고 있다가.. 지켜주자 우리가.”

한성과 부엌 팀이 아침으로 해장국을 끓일 동안 규현은 지훈과 합세해서 이불정리도 하고 어제 벌였던 술판의 정리도 했다. 그렇게 크게 놀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꽤 깔끔하게 시작했던 술자리가 생각보다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어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며 쓰레기를 치우 고 쓸고 닦고 한 후에야 펜션이 원래대로 정돈 되었다. 한숨 돌리고 섰는데 한성이 얼른 밥 드세요~ 라고 외친다. 기다란 테이블 곳곳에 밥그릇과 국그릇이 죽 늘어져 있었다. 빨간 빛깔을 띤 국이 상당히 매워 보이는데도 다들 좋다며 얼 른 앉았다. 어젯밤 꽤 많은 술을 마셨던 규현도 살살 속이 쓰려오던 찰나여서 얼른 지훈을 따라 곁에 앉는다.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들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탐색하듯 주변을 살폈 다. 한참 전부터 종운을 보지 못했다. 씻고 나온 후에도 지훈과 한성이 펜션 안에 있어서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지도 못했었다. 잠은 잘 잤을까. 어제 그는 많이 취한 듯 했는데.. 몸은 괜찮은 걸까? “우와~ 정말 잘 먹을게요. 진짜 맛있겠다! 역시.. 우리 이렇게 여기 와서 얻어먹기만 해서 어쩌나.” “자자 다들, 맛있게 먹고 재밌게 놀다 가라는 뜻으로 열심히 만든 거니까 재밌게 놀다 가기 나 해. 아 그리고, 설거지는 니들이 해!” 저쪽에서 큰 소리로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자 한성이 대답하며 설거지를 니들이 하라 농담 조로 말한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규현도 그의 말에 숟가락을 들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있었던 잠시간의 고민은 고이 접어두고 유쾌한 마음으로 국을 한 숟갈 뜨는데, 테이블 저편 규현과는 거의 대각선으로 앉은 자리에 있는 종운이 보였다. 그는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여전히 웃지도 않고 묵묵히 밥만 먹고 있었다. 규현 은 순간 너무나 반가워서 다른 사람들과 다 함께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종운씨! 하고 외칠 뻔했다. 맑게 웃는 얼굴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도 왠지 고개를 들어 규현을 보고 함 께 웃어줄 것만 같았다. 규현은 그래서 국을 한 숟갈 떠놓고 입에도 대지 않은 채 그를 계 속 쳐다봤다. 눈 한 번만 마주치면 돼, 그거면 된다구. 규현의 마음이 그에게 닿은 것일까, 시선을 느낀 종운이 밥을 먹다 말고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 그러다가 저 멀리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규현을 발견한다. 규현은 종운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활짝 웃었다. “아..” 규현의 입에서 순간 탄식이 터졌다. 규현과 눈이 마주친 종운이 규현의 웃는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무심히 고개를 숙여버렸던 것이다. 넌 누구냐? 란 얼굴로.. 규현의 눈동자가 당황스 럽게 움직였다. 뭐지, 왜 그러는 거지..


“규현아, 왜 그래?” 지훈이 앉은 자리에서는 종운이 다른 사람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지라 한 쪽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이상해서 팔꿈치로 규현을 건드리며 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성도 밥을 크게 한 입 떠서 먹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규현을 쳐다본다. “아.. 아니에요. 형, 잘 먹을게요.” 얼른 한성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지훈은 규현의 시선이 거둬지고 난 후에도 규현이 보던 그 쪽을 계속해서 흘끔흘끔 쳐다봤다.

“형, 설거지..” “됐어. 넌 이번엔 손님으로 온 거니까 일 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도 좀 해 보고 그래. 어제 한성이가 한 말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여기서 친구도 많이 만들고 그래. 나도 여기 있는 애들이랑 대부분 다 친군데 뭐. 한성이 그 자식은 자기도 딴 애들이랑 친구 로 지내면서 그러는 거야 그냥. 원래 표현이 좀 격하잖아.” 어제 종운에 대해 삐딱하게 말하던 한성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는지 지훈이 규현을 토닥거리 며 말한다. “김종운은.. 아까 아침식사 하고 나서 밖에 나갔어. 걔 여기 오면 항상 뒤에 있는 계곡에 가니까 그리로 가보던가.” ‘그래도 미안한데..’ 라고 하면서도 규현이 눈으로 여기저기 찾는 것을 보다 못해 지훈이 그 렇게 말했다. 규현은 종운의 행방을 알려주는 지훈을 의아하게 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말리 려고 하더니.. 이제는 또 밀어주는 거야?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냥 니가 너무 애타게 찾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내가 너가 걔 좋아하는 거에 대해서 찬성한다고 생각하지는 마. 난 계속 반대야. 걔는 애인 도 있고,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그래도 니가 좋다면..” “......” “가봐.” 규현의 등을 툭툭 두 번 치고 지훈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걔는 애인도 있고,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라고 하는 지훈의 목소리가 귓가에 반복재생이 된다.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헤 어지지도 않을 거야. 헤어지지도.... 헤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정으로 궁금했다. 왜? 왜 어째서 그렇게 확신 하면서 헤어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 하는 거야? “여기 계셨네요. 뭐 하고 계셨어요?”


펜션 뒤쪽에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쭉 걸으니 물이 제법 흐르는 계곡이 나왔다. 날씨가 쌀쌀해져가는 이런 때엔 감히 물가에 나와서 물을 건드려 볼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어서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벌레들이 간간히 우는 소리 등 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고요했다. 규현은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얼마 를 그렇게 걸었을까, 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훈의 말대로 저 멀리 커다란 돌 위에 앉 아 한 손엔 핸드폰을 꼭 쥐고 흐르는 물을 가만히 보는 종운이 있었다. 규현은 인기척을 일부러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한참을 물에 빠질 듯이 그렇게 보던 종운이 그 소리를 듣고 규현을 쳐다본다. 규현은 아침에 그가 시선을 피해버렸던 것도 있고 해서 눈은 맞추지 않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냥.. 저는 계곡에서 물 흐르는 걸 보면 좋거든요. 여기까진 왜 오셨어요?” “저도 물이 좋아서요. 여기 계곡 있다는 얘기 듣고 보려고 왔어요.” “아..” 종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계곡을 바라본다. 투명한 물속 동글동글한 자갈돌들이 비쳐 보였다. “물이 맑아요. 다른 곳은 이렇게까지 맑지 않은데.. 여기만 유독.” 종운이 ‘여기만’ 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했다. 그의 눈은 햇살이 잔잔히 부딪히며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을 향해 있었다. 규현은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한다. “..계곡을 좋아하시나 봐요. 많이 다녀보셨어요?” “......” “......” “네, 머리가 복잡할 때는..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서요.” 종운이 피식 웃었다. “물을 보고 있노라면 잔뜩 엉켜있는 생각들이 풀어지는 것 같거든요. 물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잖아요. 규현..씨는 자주 다녀보셨어요?” “아... 아니요. 어릴 땐 가족들과 자주 다녔었는데 크고 나서부터는 거의.. 어딜 훌쩍 혼자 떠나지도 못하거든요 잘.” 규현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종운이 그런 규현의 얼굴을 가만히 계속해서 쳐다봤다. 규현 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귓불까지 화끈거린다. 왜 저렇게 빤히 보는 걸 까. “규현씨.” “예?” “여기 진짜 왜 왔어요?”


“왜.. 왔냐구요? 지훈이형이..” “아니, 여기 펜션 말고. 지금 여기. 나.. 왜 따라다녀요?” “......” 덜컹. 심장이 한 차례 내려앉는다. 그랬나, 그렇게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드러났 나. 그는 모르길 바랬는데.. 애인도 있잖아- 라는 지훈의 말에도 규현은 아랑곳 않았다. 그 의 애인과의 유치한 경쟁을 할 지언정 나는 그를 애인에게서 뺏어올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 니었고 그럴 작정도 아닌데 그에게 내 호감을 들켜 부담을 주려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니 까. 그랬는데.. 그냥 그렇게 알아지는 거였어? “나 규현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그리고 그 분들 말대로, 저랑 엮여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충고 그대로 따르는 게 좋을 거 예요.” “....형들.. 얘기 들으셨어요?” 문득 아침에 지훈과 한성이 큰소리로 나누던 대화가 기억났다.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자신 도 다 들린 대화였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과음으로 늦은 시각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고는 하나 그 때 방 안에서 자는 줄 알았던 사람들 중 모두가 전부 잠이 들어 있었던 것도 아니 었을 테고.. 어쩐지 아침을 먹기 전에 함께 정리를 하면서도 저를 마주치면 유난히도 어색해하던 몇몇 얼굴들이 기억났다. 그래서였나, 그렇게 그걸 다 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그리고 그 얘기 를.. 종운씨도 다 들었다 이거지? 미리 눈치 채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몰랐을까. 그때는 그저 지훈과 그런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에만 너무 신경을 썼었던 모양이다. 멍청이.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원래 사람은 자기 얘기가 나오면 그걸 그렇게 귀신같이 알아듣는 다네요.” “...저.. 형들이.. 종운씨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됐어요, 모르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규현씨 말인데요, 규현씨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한테 그렇게 쉽게 다가가는 거 아니에요. 이번엔 내가 충고하죠. 제 곁에 얼쩡대지 마 세요, 조규현씨만 다치니까.” 규현이 버벅대며 상황을 바꿔보려고 애쓰는데 바위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탁탁 털며 종운이 말했다. 그의 눈이 규현을 뚫을 듯이 똑바로 쳐다봤다. 종운의 눈은 표정이 없을 때는 너무 나도 매서웠다. “무슨 상황을 모른다는 거야..” 종운의 발걸음소리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고 있던 규현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지훈과 한성이 말하던 ‘그때 그놈’, 그게 무슨 얘기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째서, 종운이 그렇게 쌀쌀맞게 얘기하며 그런 쓸쓸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규현의 호기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밤이 깊어져가는 시각, 방에서는 한창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규현은 지훈, 한성의 곁 에서 다른 사람들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어젯밤 호감을 느끼고 진도를 좀 뺐다는 몇 사람들 의 얘기를 듣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쪽에서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술잔을 기 울이던 종운이 몸을 일으켰다. 종운은 어제 규현과 앉았었던 그 벤치에 앉았다. 그는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을 한 번 보 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한 번 켜보고 그런다. “맥주 하나 드실래요? 방금 꺼내 와서 시원한데.” “......” “그러지 말고 하나 드세요. 술 섞이는 거 싫어서 그러세요?” “...조규현씨.” “규현이요. 조규현이라고 하지 말고, 규현이라고 하세요. 그리고 전 아직 종운씨 나이 모르 는데, 여쭤 봐도 되요?” 언제 나왔는지 규현이 차가운 기운이 서린 맥주를 종운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드세요. 차가울 때 마셔야 맛있잖아요. 전 이 브랜드가 좀 쓴 맛이 강해서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이것밖에 없더라구요.” 일본 브랜드인 A사의 맥주 캔을 따자 푸슉 하는 시원한 소리가 난다. 규현은 크게 몇 모금 삼켰다. 씁쓸한 뒷맛이 강하게 남는 것이 오늘따라 싫지가 않다. 아주 예전에 ‘오늘따라 술 이 달다.’ 라면서 왜 그렇게 쓴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 었는데, 지금이라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이런 게 바로 술이 달다는 거구나- 하고. “고마워요.” 손에 들린 맥주를 따며 종운이 대답했다. 그도 한 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아주 잠깐 찡그리 고는 만다. 당신도 오늘.. 술이 쓰지 않나요? “얼른요. 나이만 알려줘요.” “..스물아홉이에요.” “아~ 한성형보다 한 살 어리시구나. 전 동갑인가 했었는데.” “네.” 짤막한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종운을 슬쩍 보았다. 그는 묵묵히 규현이 손에 쥐어준 맥주를 마신다.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알아요. 다른 마음 가지고 뭐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애인도 있는 거 알면서 나쁜 놈이네. 그런 거죠?” “...그런 거 아ㄴ..” “저 그런 생각으로 이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종운씨를 더 잘 알고 싶을 뿐이에요. 형들은 그래요, 종운씨는 이렇다, 종운씨는 저렇다 그렇게 저한테 말해줘요.” 규현은 종운의 대답을 못들은 척 하며 말을 이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도 모르겠 다. 그저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다. 나 그렇게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밀어내지 말라고. 종운은 규현의 말에 맥주를 한 모금 크게 삼켰다. 형들에게 듣는 이야기, 직접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전 싫어요. 형들이 본 종운씨랑 내가 보는 종운씨는 다를 거예요. 형들이 보는 나 랑 종운씨가 보는 내가 다른 것처럼. 그렇죠? 그러니까 나는 종운씨한테 자꾸 이렇게 말을 거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나는 끝까지 이럴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종운씨 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 “당신이 아끼는 당신 사람,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종운씨를, 그냥 조금만 더 알게 해줘요.” 종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왜, 어째서, 싫은 소리 듣고 주변에서 다 말리는데도 이렇 게까지 하는 거야. “규현씨만 다쳐요- 그런 소리 또 하기만 해요. 다쳐도 상관없다고 할 거니까. 종운씨가 좋 아서 상관없다는 그런 유치뽕짝 로맨스소설 같은 얘기 아니에요.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어진 거는 못 하면 병나는 성격이니까, 다쳐도 어쩔 수 없는 것뿐이에요.” 규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종운은 벤치 한 가운데에 앉아있던 것을 은근슬쩍 옆으로 비켜 앉았다 . 슬쩍 그가 미소 짓 는 것을 본 것도 같다. “바보 같아요 규현씨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종운씨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아요. 아직 잘은 모르지 만.” 규현은 종운의 옆에 앉으며 아하하 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종운이 규현을 흘끔 보더니 조금 씩 따라 웃는다.


* * *

“뭐야, 왜 안 내려?” “아아 내리기 싫어요. 여기 너무 따뜻해!!” “다른 사람들 기다리겠다. 얼른!” 조수석에 아예 눌러 붙을 것 같은 규현을 차에서 쫓아내며 종운이 피식 웃었다 . 으아 추 워!! 하며 규현이 뒷좌석 문을 열고 벗어놨던 코트를 얼른 걸친다. 차 안에선 덥다고 그렇 게 끙끙대며 벗어놓더니 이젠 또 춥다고 저러는 것 봐. 하여튼, 조규현. 지난 가을 찾았던 가평 펜션을 또 다시 찾아온 감회는 상당히 새로웠다. 종운은 매번 이 곳 에 올 때마다 주차장에까지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가 너무도 좋았다. 그가 흐뭇하게 웃는 데 규현이 ‘어?!’ 하며 놀란 척을 한다. “또 뭐야, 너 시답잖은 농담 하면 죽는다.” “...그럼 말 안 할래요.” 전혀 맞장구 쳐주지 않으며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종운에게 겁을 먹고는 규현이 얼른 꼬리 를 내린다. 종운이 ‘역시 쓸데없는 농담 하려는 거였어.’ 라며 쯧쯧 혀를 차자 규현은 딴청 을 피운다고 트렁크 안에 머리를 쑥 박고 짐을 꺼내려고 낑낑댄다. 팔다리도 길쭉한 것이 왜 저렇게 가방은 못 꺼내는 거야, 대신 꺼내려고 규현의 코트 뒷자락을 잡아 끌어내는데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규현이 악! 괴성을 지른다. “아우 아파. 아아.. 아이씨 트렁크가 왜 이렇게 낮은 거예요. 아파 죽겠네.” “니가 바보인거지. 너 거기 매번 부딪히잖아. 나이는 어디로 먹은 거야? 거꾸로 한 살 먹었 냐?” 종운이 웃음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스키장엘 갔을 때도 저기 머리를 박았던 규현이 떠올랐 다. 그때도 똑같은 소리를 하더니 이번에도 역시.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걸 뭘 또 다 기억을 매번 하시고 그래요. 그러 지 마세요 좀.” 종운의 정확한 지적에 규현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종운은 일부러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쾌하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주차장 안을 가득 메운다. 종운의 차를 따라 줄줄이 도착한 다른 차들에서 내리던 사람들이 실로 처음 보는 종운의 커 다란 웃음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지훈의 차에서 가방을 꺼내던 한성도, 시동을 끄고 차키 를 뽑아서 나오던 지훈도 입을 반쯤 벌리고 규현과 종운을 쳐다봤다. 규현이 양 볼이 상기 된 채로 종운의 팔을 주먹으로 한 대씩 때리며 웃지 말라고 하는데 그래도 종운이 웃음을 멈추지 않자 빛의 속도로 방을 향해 돌진해 들어간다.


지훈은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한성을 돌아봤다. 그 역 시 지훈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니네들,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냐니요. 그냥 친구라니까요?” “....조규현, 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 하고 앉았냐? 내가 그랬지, 이딴 거에 친구는 없 다고.” “하지만 형은 나랑 친구 아니에요? 나랑 친구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친구이고 지훈형이랑은 사귀고..” “야 이 정신 빠진 자식아! 그거랑 지금 니네 그거랑 같냐?!”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투로 말하던 규현의 머리를 한 대 빡 소리 나게 때리며 한성이 짜 증을 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커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한 번씩 이쪽을 돌아봤다. 규현은 혹시라도 계곡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종운이 벌써 돌아와서 버럭 대는 한성을 보진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어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지훈도 놀라서 한성의 입을 얼른 막으며 눈치를 준다. “아 그러니까. 생각해봐라, 너 저 자식이랑 맨날 붙어 놀았지? 저 자식 애인이 지금 쟤가 너랑 이러고 놀러 다니는 건 아냐? 너네 저번 주에 스키장도 둘이 갔다 왔다며? 지훈형한 테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기가 찼는지 알아?!” 한성이 속삭이면서도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다 알려주려고 눈을 크게 뜨고 버럭 댔다. 이쪽 을 흘끔거리던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중 지훈 , 한성과 더 친 한 편인 몇몇은 규현의 눈치를 보다가 규현과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던지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던지 하는 것이, 한성이 왜 이러는 건지 상황을 다 아는 모양이었다. 규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깐요- 아무리 말을 해도 한성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고, 한성의 반응을 보니 이해를 다 해주는 듯하 던 지훈의 심중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도 혹시 한성과 얘기할 때는 사실 정말로 규현 이 이해가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 상황이 그렇게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규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봐. 니가 쟤 애인이야. 근데 김종운이 지 좋다던 어떤 녀석이랑 친구 먹었다고 하고 돌아오더니 뻔질나게 그 자식이랑 여행도 다니고 놀러도 다녀 . 엄청 친해지 고 말이지. 너 그럼 어떨 거 같냐?” “......” “난 지훈형이 그러면 그날로 주먹다짐이거든? 그 애인이란 놈은, 너랑 그러고 다니는 거 알 기는 한다냐?” “...아 진짜 왜 그래요. 그런 거 아니래도요! 괜히 그렇게 이상한 거처럼 몰아가지 마요 좀. 그러면 종운씨는 진짜 곤란해요. 나랑 상황이 다르잖아.” “몰아가면 곤란한 관계는 뭐 있는 관계 아냐? 형은 그렇게 생각 안 해?”


한성이 잠자코 듣고 있던 지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규현의 시선도 한성에서 지훈으로 옮겨 갔다. 지훈이 규현과 눈이 마주치자 난처한 표정으로 한성을 흘끔거리며 쳐다본다. “형도 그렇게 생각해요? 형도 그게 그렇게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냐구요.” “...규현아, 니가 나쁜 의도로 만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김종운도 그냥 너랑 노는 게 재밌 으니까 별 생각 없이 그러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남들 눈엔 그게 그렇지 않 을 수도 있잖냐. 남들 눈을 왜 신경 쓰냐고 그러지만, 한성이 말대로 니가 김종운 애인 입 장에서 한 번 생각해봐. 그 입장에서 상처 받을 거 같지 않아?” “차라리.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김종운이 그래 아싸리 그 애인이랑 헤어지고 너랑 사귀겠 다고 하면 이렇게까지 안 뜯어말려. 그 애인은 빨리 알아서 제 갈길 가면 되는 거고 너네는 너네대로 됐고. 하지만 지금 그거 아니잖아. 니들은 말하자면 잠만 안 잤지 마음으론 이미 바람 다 핀 사이라고! 너는 김종운이 너를 진짜 그냥 동생처럼 내 동생- 하면서 보는 줄 아 냐? 너 이대로 가봐라 어디, 그러다간 너도 그때 그놈처럼 되는 거야!” “야!!!” 지훈이 소리를 확 질러 한성의 말을 끊으며 그를 어이없게 쳐다봤다 . 한성은 그제야 얼른 입을 다물며 규현의 시선을 회피한다. 하지만 규현은 이미 한성이 한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 이 다 들어버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뭐라는 거야 대체. 그때 그놈처럼 된다니, 또 그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규현아, 얘 말 신경 쓰지마. 우리가 하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니가 좀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는 거야. 너도 걔랑 너무 친해지면 니 마음이 니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때 니가 받는 상처는 어떻게 할 거야. 안 그래?” “......” “나나.. 한성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 김종운도 너를 그냥 동생으로만 챙기는 것 같아 보이 지는 않아.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너도 기본적으로 걔한테 호감이 있었고 걔도 너한 테 마음이 생기는 것 같고, 그러다보니 너랑 있으면 자연스럽게 서로 챙기게 되겠지. 하지 만 내가 그 때도 말했듯이, 김종운 쟤는 지 애인이랑은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헤어질 놈이야. 그걸 니가 잘 기억을 해야 돼, 안 그러면 너.. 저 자식한테 상처받게 돼.” “.....무슨....” 규현은 이해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왜 그 애인이랑은 절대 헤어지 지 않는다는 거야. 지훈과 한성은 종운에 대해 내가 모르는 뭐를 아는 거지 대체? “김종운이 널 좋아한다는 것 같다는 거도 솔직히 말해줄까 말까 생각을 많이 했어. 그 자식 이 그런 거 아니라면 우리가 괜히 헛다리짚는 거고 해서. 그런데 오늘 보니 맞던데 뭐.” 한성이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규현은 혼란스럽기도 하고 짜증도 나서 인상을 찡그리고 두 사람의 말을 계속 들었다. “맞기 때문에 더더욱 말을 해주는 거야. 우리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너도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었을 거야. 티가 나니까.” “맞기 때문에.. 말해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아니.. 예전에 무슨 일 있었죠? 그래 서 이러는 거죠? 뭔지 말해줘요, 네?” “조규현, 이 말이나 똑바로 들어. 그 자식이 널 좋아하더라도, 그 자식이 너한테 아예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야. 그 자식은 절대로 그 애인 놔두고 안 와. 니가 우리 말 껌으로 듣는다는 건 내가 전부터 알아 봤는데, 너 형이랑 내가 하는 말 우습게 흘 려듣지 마.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우리 말 믿어. 우리가 진짜 동생처럼 생각해서 하 는 소리니까.” 지훈과 한성이 재차 강조했다. 종운은 자신의 애인을 버리고 조규현에게 절대로 오지 않는 다. 그러니, 그가 규현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결국 그 정도로 끝이다. 그걸 잘 새겨놓고 있으라고? 충고인지 경고인지조차 헷갈리는 그 말들을 들으며 규현은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런.. 엿 같은 조언이 다 있어.

실은 알고 있었다, 종운이 자신을 그저 동생처럼 친구처럼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 은. 종운이,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 어느 가을 날, 별이 무수히 떠있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규현과 나란히 앉아 웃음을 나누던 그 날부터. 자신이 느낀 것을 그가 전혀 느끼지 못한다 고, 그래서 나만 애가 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가 규현에게 다른 감정이 단 1% 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종운도 무언가를 느끼기 때문에 규현이 곁에 있으 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아주 잠시라도 눈길을 안 줄 수가 없어서. 함께할 때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만이었다. 항상, 그와 있을 때마다 늘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울릴 지도 모를 그의 핸드폰에 온 신경이 곤두서서, 나와 있다가 그 사람이 부르면 그 사람에게 한 걸음에 달려가 버릴까봐.. 그래서 언젠가, 그가 그 사람 의 전화를 받지 않던 그 때부터, 아니 그가 규현 몰래 한쪽 구석에서 핸드폰을 꺼버리던 그 날부터 규현은 시시때때로 덮쳐오는 죄책감에 허덕대야했다. 그의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겠 다 약속했고, 그의 사람이 그를 필요로 할 때 그를 붙잡지 않겠다 다짐했고, 그를 욕심내지 않겠다 장담했다. 그런데 규현은 그 어느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그가 이렇게 있는 것이 라고 인정해버리고 싶지 않고 내가 그를 밀어냈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자신의 사람에게 상처 를 주지 않아도 됐���다는 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고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이 그를 더 가까이 두기 위한 거짓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싶지 않다. 그 무엇도. 펜션을 나와 계곡으로 통하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 길의 끝에, 차갑게 얼어버린 계곡물 을 바라보며 규현의 마음에 피어있는 것보다 조금 더 크고 힘겨울지도 모를 죄책감을 잊으 려 애쓰는 종운이 있겠지.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모두 풀어낸다고 하면서, 사실은 죄책감 을 모두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어, 규현아? 왜 여기까지 왔어. 춥지 않아?”


“네, 괜찮아요.” 장갑도 없이 차가운 바람을 그대로 다 맞은 규현의 두 손을 꽉 잡아주며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작은 편인 종운의 손으로는 규현의 두 손을 모두 감싸기는 어려웠지만 종운에게 서 전해지는 그의 온기가 쓸쓸하게 얼어붙어있던 규현의 마음까지 모두 다 녹여주는 듯했 다. 규현이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곧은 두 손을 쓱쓱 비벼 손바닥으로 종운의 손을 감쌌다. 그 래도 규현의 손은 택도 없이 차갑다. “손이 차면 마음이 따뜻한 거라던데..” 종운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심각해 보이는 규현을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손이 따뜻하면 마음이 차가운 거예요? 종운씨는.. 가슴이 차가운 남자인가 그러 면?” 일전에 가요차트를 구경하다가 발견했던 노래제목을 인용해서 규현이 말하자 종운은 단호하 게 고개를 내저으며, “아냐. 반대가 성립한다고 하진 않았지.” 라고 한다. 규현은 그 말에 큭큭 웃는다. “추운데 왜 나와 가지고.. 나도 이제 들어가려고 했어. 저기 보이지? 물이 정말 많이 얼었 어. 그래서 물소리가 잘 안 들려.” “그러면 얼음 깨보면 되잖아요. 왜 여기서 얼음만 보고 있었어요. 아까부터 계속 그러고 있 었던 거예요?” “아니. 저 안쪽은 물살이 세서 얼음이 얼어있지 않더라. 거기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어.” “아..” 손이 차갑다고 정말 마음이 따뜻한 걸까, 지금 이 마음은 춥기만 한 것을. 제 마음의 쓸쓸 함이 종운에게까지 옮겨갈까봐 규현은 잡고 있던 종운의 손을 놓아주었다 . 따뜻했던 손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그를 놓아버리면 이렇게 더 추운데.. 발끝에 차이는 돌들을 내려다 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자박자박 자갈돌을 밟는 소리가 빨라진다. 그를 두고 이렇게 돌아서 면 안 아플 거라고 누가 그래? 그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누가 그러냐 고. 거짓말쟁이들. 이렇게 아픈데, 그냥 돌아서면 이렇게 마음이 시린데. 종운이 앞서 걷는 규현이 곁에 다가와서 그의 손을 슬쩍 다시 잡는다 . 규현의 입꼬리가 올 라가며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규현은 그날 오후와 저녁시간을 모두 종운의 곁에서 그와 얘기하고 장난치는데 할애했다. 한성이 그런 규현을 볼 때마다 못마땅한 얼굴을 대놓고 드러냈기 때문에 지훈은 규현에게 열 번도 넘게 사과를 해야 했다.


“너도 한성이가 왜 그러는지 알잖아. 너 아껴서 신경 쓰는 거니까 이해를 좀 해줘, 응?” “...한성형이 신경 써주는 건 알지만, 그렇게 좋지 않게 보는 건 싫어요. 제가 결정할 문제 잖아요, 형이 상관할 일이 아닌데..” “너도 그렇게 말하지 마. 한성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 그거 참 서운한 말인 거 알어? 한성이는 널 진짜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니가 다칠까봐 그러는 거라고. 너도 그 러는 거 아니야 진짜.” 지훈이 규현을 나무라며 말했다. 규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복잡해요. 모르겠어요 저도 잘. 이젠 정말.. 형은 그렇게까지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한성형은..” “나는.. 이미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 나랑 한성이의 생각 차이야 그건. 한성이는 지금이라도 널 말려서 마음을 돌리면 니 가 상처를 덜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아니야. 나는 그게 니 결정이니까 그 때문에 니가 죽을 만큼 아프든 말든 그건 니가 감수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 . 그때 가서 힘들 어하면 술도 사주고 챙겨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길로 가지 말라고 필사적으로 널 뜯어말릴 생각은 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더 냉정한 걸 수도 있지만.” “......” “......” ‘그건 그렇네요.’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규현이 또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가지고 땅이 꺼지겠냐며 핀잔을 주는 지훈의 얼굴도 편해보이진 않는다. 규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뭐가 어떻게 꼬였는지 어떻게 된 건지 시작을 했던 것이 잘못 인지 애초에 그를 본 게 잘못인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잘못인걸까.. 나는 지금 아무 욕심도 없이.. 있는 것이 맞는 건가...

술자리에 합류하는 대신 규현은 종운과 함께 계곡으로 갔다. 밤에 물가에 가는 손님들을 위 해 설치해놓은 노란 램프가 두 사람이 걷는 길을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 규현의 손끝을 꼭 잡고 그를 잡아끌며 한참을 물길을 따라 걷던 종운이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에 멈춰 섰다. “올라 앉아. 물에 빠지지 말고.” 규현이 올라갈 수 있게 손을 받쳐주며 종운이 말했다. 하지만 규현은 고개를 저었다. ‘서있 는 게 더 편해요.’ 라고 말하자 종운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종운은 잡고 있던 규현의 손을 놓고 돌 위로 쉽게 올라가서 앉았다. 규현의 손을 다시 잡으 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규현은 그에게 손이 잡히지 않도록 팔을 뒤로 뺀다 . 종운은 그가 장 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왜 그래-’ 하고 웃으며 규현의 팔을 잡으려고 몸을 더 앞으로 뻗 었다. “좋아해요. 저.. 종운씨 좋아해요.”


규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웃으며 규현 쪽으로 몸을 기울였던 종운이 멈칫한다. 규현은 초 조한 얼굴로 종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규현의 때 아닌 고백에 종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방금 전가지 규현에게 미소를 짓 고 있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리더니 한 일자로 굳게 다물어진다. 초승달 모양으로 동그랗 게 휘어졌던 눈가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 나왔다.. 김종운 특유의 그 매서운 표정. “그래서?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종운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날아들었다. 한겨울의 계곡물보다 다 차가울 것만 같은 그의 말 에 가슴에 비수 하나가 깊숙이 꽂혀버린다. 이럴 줄 몰랐던 거냐 조규현.. 아니잖아. 알고 시작한 도박이었잖아. 그렇게 나를 보지 마. 바라는 것 없이 당신에게 그저 알려만 주고 싶었는걸.. 너무나도 차가워서, 그를 처음 봤던 그 날 사납기까지 했던 그 눈빛보다도 더 매서워서 심 장이 싸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규현이 입을 열었다. “바라는 거.. 없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정말..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신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난 당신이 좋으니까.” “그러면? 그러면 나한테 왜 얘기했어? 바라는 게 없다면 말하지도 말았어야지.” “알아주기만을 바랬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거, 그저 한 때의 호감만이 아니었다는 거..” “......내가... 몰랐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아니라 는 거 너도 알았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얘기해버리면, 어떻게 해?” 규현은 종운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아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이 맞아서 가 아니라, 그저.. 틀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정할 수는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는 현 실, 나는 내가 주장하는 대로 아주 욕심을 버리고 순수하게 그를 대하지는 못했던 것이었 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 “......” 떨리는 목소리로 규현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정말 모르겠어서, 어떻게 하는 것 이 맞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나 힘들어요.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면 나 그대로 따를게요. 자신의 절박함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규현은 종운의 대답을 기다렸 다. 종운은 규현의 눈을 피했다. 그를 보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아슬아슬하 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규현이 갑자기 한 쪽 손을 쑥 잡아당겨버린 거다 . 그래서 나는 이제, 이곳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규현, 너 때문이야. 종운은 원망 섞인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와 함께했던 즐거웠던 시간들, 잠시 동안 내가 나이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순간들, 그걸 니가 다 깨버렸어. 침묵이 사방을 감싸 안았다. 죽음보다도 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규현과 종운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열 개쯤 생겨버린 그 순간, 종운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 * *

규현은 무겁게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지낸 것도 벌써 일주일째, 매일 찾아와서 규현을 귀찮게 하는 지훈과 한성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샤워기를 켜놓고 그 아래 서있는 것조차도 버거워서 벽을 지탱하고 선 규현 위로 차갑게 쏟아져 내리는 물이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쭉 타고 흘렀다. “미친놈아!!! 너 얼어 죽을래?!! 이 새끼가 왜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있어!” 언제 들어왔는지 인기척도 없던 한성이 헐레벌떡 샤워실로 뛰어들어 물을 끄며 소리 질렀 다. “......” “형! 형!! 이리 좀 와 봐, 이 새끼 방에 데려가야겠어. 얼른!!” 옷도 벗지 않고 차가운 물에 푹 젖은 규현을 샤워부스에서 끌어내며 한성이 지훈을 부른다. 지훈은 규현에게 먹이겠다고 바득바득 이것저것 장을 보던 한성이 쥐어준 수많은 재료들을 식탁 위에 던지듯이 뿌려놓고 달려왔다. 찬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입술이 파랗게 질린 규현 을 보고 지훈이 흐흡- 하고 숨을 삼켜버리는 소리를 낸다. “형 이 새끼 옷 좀 벗겨봐. 아 왜 청바지를 입고 샤워를 하냐 미친 새끼가. 저 새끼 때문에 우리만 아주 그냥.. 아 진짜!!!!” 한성이 버럭 화를 낸다. 규현을 부축하느라 다 젖은 니트가 축축하게 엉겨들어서 지훈이 규 현의 셔츠 단추를 푸는 동안 스웨터를 냉큼 벗었다. “내가 이 새끼 이렇게 된다고 했지? 조규현, 내가 너한테 그랬어 안 그랬어? 너 못 버틴다 고 했지? 그러니까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너 그때 뭐랬어, 아파도 괜찮다 고, 김종운 그 새끼 때문이면 다쳐도 괜찮다고 했어 안 했어!!!” “......” “한성아, 지금은 그만 해라. 애 아프잖냐.” “형도 그래, 그렇게 물렁하게 대하니까 애가 이래도 되나보다 저래도 되나보다 하잖아! 형 은 조규현 뒤치다꺼리까지 해주고 싶어?!” “...한성아.”


지훈이 엄한 목소리로 한성을 불렀다. 그는 일부러 못 듣는 척 하며 규현의 티를 우악스럽 게 벗겨낸다. 한성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규현을 더 오래 알았던 것은 자 신이지만 그런 자신보다도 한성이 더 많이 규현을 아낀다는 것을. 예전에 옆집 살았던 꼬마 랑 비슷하게 생겼어- 라며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즐거워하던 한성이 눈에 선했다. 말은 저 렇게 해도 나보다 지가 더 속상하면서.. 아픈 애한테 왜 모질게 하냐 핀잔이라도 주고 싶지 만 규현이 아픈 것이 정말로 제 가족이 아픈 것처럼 속상해서 저러는 것이라는 걸 알아서 지훈은 묵묵히 한성을 거들었다.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다른 이들이 붙잡을 겨를도 없이 규현의 손을 끌고 나갔던 종운이 그때보다 훨씬 굳은 얼굴로 혼자 돌아왔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그저 규현은 잠시 밖에 있 는 거라고, 곧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 가져왔던 짐을 모조리 챙겨 인사도 없이 나갈 때도 혹시 규현이도 같이 돌아가는 건가, 우리가 뭐라고 했 다는 걸 규현이 종운에게 얘기를 한 건가 생각하며 곤란해지겠는 걸- 정도의 안일한 생각 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종운이 트렁크에 짐을 집어넣고 운전석문을 쾅 닫았을 때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한성을 의아하게 보며 무슨 일이냐 묻지 말았어야 했다. 종운이 급 후진을 하며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뭔가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렸었으니까. 한성과 앞 다투어 계곡을 따라 달렸다. 한참을 달렸을까, 커다란 바위에 등을 대고 주저앉 아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던 규현을 발견했다. 노란 불빛이 그의 얼굴을 더 창백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한성은 규현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느껴졌는지 당기 는 대로 끌려오는 규현의 어깨를 세차게 몇 번이고 흔들어댔었다. 그 때 규현이 뭐랬지. ‘나 안 죽었어 바보형.’ 그랬던가.. “죽으려고 그래? 그럼 차라리 옥상 가서 뛰어내리지 그래! 그게 여러 사람 고생 안 시키고 빠르잖아! 아니면 약이라도 쳐 먹던가 이 새끼야!!” “한성아!” “너 똑바로 해. 너 니가 다쳐도 된다고 했으면, 다쳐도 거기서 살아나 보란 말이야! 너 버 리고 간 그 새끼가 니 목숨을 걸 가치가 있어?! 지 살겠다고 너 놔두고 간 놈 때문에 뭣 하 러 니 몸을 축내!” “...죽으려고 한 거 아니에요. 형들 올 때가 돼서 씻으려고 한 건데.. 깜빡했어요.” 한성이 소리 지르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규현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냥 씻으 려던 거뿐인데.’ 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씻으려면 옷이나 벗고 씻어! 깜빡할게 따로 있지, 미쳤어 너 진짜?!” “그러게요. 왜 그랬지.. 자다 일어나서 잠결에 그랬나?” 하하 하고 웃는데 지훈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금방 바스라질것처럼 웃냐 조규현. “아 일어나야지. 씻고 나갈게 밖에 계세요. 나 괜찮아요, 정말.”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나가서 밥 하고 있을 테니까 형은 얘 제대로 씻는 거 확인하고 나와. 알았지?” 한성도 같은 걸 느꼈겠지. 아니라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 같지 않은 얼굴로 계속 괜찮다고만 하며 둘을 내보내려고 하는 규현의 말을 무시하며 한성이 말 했다. 알았으니 나가있으라고 하며 지훈이 한성의 뒤로 문을 닫았다. 샤워부스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표정 없는 인형처럼 있던 규현이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살짝 웃어 보인다. “제가 애예요? 부끄럽게..” “부끄러운 걸 알기는 해? 얼른 옷이나 벗어. 빨리 하고 나가자. 다 큰 녀석 데리고 이게 뭐 냐?” “그러니까.. 나가래두..” 규현이 엉성한 손놀림으로 바지 버클을 풀며 ���했다. 물에 젖은 옷가지는 자꾸만 살에 감겨 들어서 기운 하나 없이 축 늘어진 규현이 벗어내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그런 규현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지훈은 옆에 벗어놓은 셔츠와 반팔티를 비틀어서 물기를 꼭 짜낸다 . 그걸 세면대 에 얹어놓고 규현을 지나쳐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따뜻 해질 때까지 물 온도를 맞추고는 샤워기를 위에 걸어놓고 나온다. 규현은 옷을 벗다 말고 샤워부스의 유리면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너 내가 바지도 벗겨주리? 빨리 벗어. 그리고 들어가서 씻어. 너 씻고 나올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일 테니까.” 규현에게 엄포를 놓으며 지훈이 말했다. 규현은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런 사 소한 동작 하나에도 기운이 하나도 없다. 바지를 겨우 벗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씻기 시작하는 규현을 확인하고 화장실 문에 기대어 섰는데 밖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 씨발 이 자식!!’ 하는 한성의 외침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야?”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나와 지훈이 물었다. 한성은 어제 죽을 끓여놓고 갔던 냄비의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저 새끼 어제 그 죽 몇 숟갈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어. 미친놈, 진짜 굶어 죽기라도 할 작 정이야 뭐야?” “......” “걔 씻어? 왜 애 놔두고 나왔어. 얼른 다시 들어가.” “그 사이에 애 안 죽어 멍청아.” “미친놈 죽던가 말던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 있을 때 죽으면 귀찮아져서 그러는 거뿐이지.” “...지가 생각하는 것만큼 말하면 참 예쁠 텐데, 꼭 말 그따위로 하지.” “시끄러.”


걱정 가득한 얼굴이면서 입은 험해가지곤. 한성이 화내는 걸 보며 지훈이 생각했다. 다시 문을 닫고 들어오자 머리를 감고 있는 규현이 보였다. 자식, 좀 박박 감고 나올 것이 지. 어제 죽만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한성의 말이 떠올랐다. 기운이 없기도 하겠지. 일주일동안 하루에 죽 몇 숟갈씩 먹어가지고 어디 숨 쉴 기운이나 있겠어. “형.. 저 타월 좀..” 한참을 이어지던 물소리가 그치고 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얼른 큰 타월을 문틈으 로 넣어줬다. 규현이 꼼지락대며 타월을 몸에 두르는 걸 보곤 욕실 문을 연다. “나가서 갈아입을 옷 가져다 줄 테니까 여기 있어. 물기 잘 닦고. 아프기만 해봐 그냥.” 흐흐 하고 규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제 잘못인 것 같다. 따뜻한 죽을 한 그릇 내밀자 오늘도 규현은 몇 숟갈 뜨다가 만다 . 하지만 한성은 그거 다 먹을 때까진 죽어도 안 돌아간다며 억지로라도 한 그릇을 다 먹게 만들었다. 지훈이 보기엔 죽보다는 미음에 더 가까운 그 멀건 죽을 먹는 것조차도 그렇게 힘겨운지 겨우겨우 그릇을 비운 규현이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한성은 그릇에 바닥이 보이자마자 냉큼 가져가 설거지를 해놓고는 분주히 움직였다. 한참을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은 규현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씹지 않아도 되는 것들 밖에 없었다. 그런 것만이라도 필요할 때 찾아 먹으라고 냉장고 가득 채워 넣으면서도 한성은 그 게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다. 내일 오면 또 저 냄비는 그대로고 냉장고도 변함없 겠지. “저녁엔 저거 다시 덥혀서 먹고. 더 챙겨주고 싶지만 나도 레스토랑 가봐야 하고 형도 일 밀렸다니까 어쩔 수가 없네. 밤에 전화할 테니까 꼭 받아, 알겠어?” “알았어요.” “추우면 보일러 좀 높여. 너 아까 보니까 열 좀 있더라. 밤에 비 온다니까 어디 싸돌아다니 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구요. 내가 어딜 가겠어요. 걱정 말아요.” 힘없이 웃으며 규현이 말했다. 한성은 그 대답이 못미더운지 한참을 더 잔소리를 늘어놨다. 축축 늘어지는 규현을 침대에 눕혀 이불을 꽁꽁 둘러매 놓고 지훈과 한성은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지훈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땅 꺼지겠다. 왜 그래?” “그 날, 우리가 그렇게 애한테 닦달만 안 했어도.. 그렇게 안 됐을 거야.” “...그래서 형은 지금, 우리가 그걸 그냥 놔뒀어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은, 그냥 애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던 게 나았지 않냐 하는 거야. 아니면 조 금 덜 혼란스러울 때 얘기하기만 했어도..” “누구 좋으라고? 그러다가 서로 정 깊어지면? 그러면 그때는 덜 힘들어했을 거 같아?”


“......” “형도 설마 시간이 더 지났으면 김종운이 규현이한테 왔을지도 모른다 어쩐다 그 소리 할 거 아니지? “......” 한성의 어이없는 물음에 지훈은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성이 코웃음을 쳤다. “형 김종운 몰라? 그 자식 처음 봐? 왜 그래! 그 자식이 전에 어떻게 했는지 형은 똑똑히 봤잖아! 걔는 뭐 규현이처럼 안 그랬어? 걔는 뭐 규현이보다 덜 잘했는지 알아? 걔한테도 규현이한테 하는 것처럼 똑같이 했었어! 그 자식 그때는 지금보다 더했어! 걔한테는 완전 간도 빼줄 것처럼 굴었다고!” “...김종운이 변할 수도 있었잖아.” “하! 형 미쳤어 진짜? 걔가 변했으면 지금 이러고 갔겠어? 규현이가 좋아한다고 말 하자마 자 뒤도 안 보고 도망가는 것 좀 보라고! 애 거기 놔두고 애가 죽어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 는 새끼가 변하긴 뭘 변해! 그 자식은 평생 가도 그래!” “......” “그거 때문에 죄책감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거라면 그러지 마. 규현이 걔, 더 상처받기 전에 이렇게 된 게 차라리 잘 된 거니까.” 한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훈은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정말일까, 정말로 김종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주차장에서 규현과 장난치며 웃던 종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종운이 누군가를 애 틋하게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떻다 했었어도 지금처럼 편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은 본 적이 없 었다. 좋게 보내오지만은 않은 시간, 실망하고 분노하고 그렇게 지내왔기에 종운과 가깝지 않을 뿐 지훈은 종운을 상당히 오랫동안 봐왔다. 한성보다 더 오래. 근 8-9년이 되는 세월 동안 처음 본 그 웃음은 종운에게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뭐해? 빨리 와. 나 레스토랑 늦어 이러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내리지 않고 멍하니 잊는 지훈을 한성이 재촉했다. 지훈은 방금까 지 했던 생각을 한성에게 절대 들키지 않아야겠다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규현은 지난 일주일동안 편집장 외에는 지훈, 한성밖에 전화가 오지 않은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폴더를 열었다. 화면에는 아주 평범한 사진이 설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본 규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흰 눈이 덮인 나뭇가지들, 겨울철에는 쉽게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겨울 절경일 뿐이었지만 저 사진은 규현 자신이 직접 찍은 거였다. 얼 마 전 스키장에 갔을 때 종운과 리프트를 타고 눈 덮인 산을 가로질러 올라가며.. 근래 들어 가장 잽싼 움직임으로 규현이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가만히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일방적인 결정 따위는.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사 귀어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니고 애인이랑 헤어지라고 떼를 쓴 것도 아니잖아 . 그런데 어떻


게, 어떻게.... 한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영상과 영하를 오가는 바깥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약간 도톰할 뿐인 후드티를 껴입으며 현관으로 달려 나간 규현은 급하게 신을 신고 문을 나섰다. 닫힌 문에서 띠리링 하며 도어락이 잠기는 소 리가 난다. 종운은 늦은 시각도 아닌데 벌써 사방이 어둑해진 것을 보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 예약 해놓 고 기다릴 테니 늦으면 안 된다던 녀석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 집에 들러 처리해야 할 일들을 빨리 해놓고 나서면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 계 산하며 차에 올라탄다. 시동을 켜고 벨트를 맸다. 반나절가량 지하에 세워둔 탓인지 가죽으 로 된 시트에 닿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차가웠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반 정도 왔을 때 후두둑 하고 앞 유리에 커다 란 물방울 몇 개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겨울비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소나기가 흠뻑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급히 와이퍼를 켜며 빨간불 앞에 멈춰선 종운은 곤란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봤다. 뒷좌석 바닥에 우산이 하나 굴러다니던 것 같긴 한데.. 차를 세우자마자 실내등을 켜고 뒷좌석을 살폈다. 구석구석 고개를 빼고 보기도 하고 손바 닥으로 바닥을 더듬기도 한다. 그러다가 무언가 묵직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종운은 뛸 듯 이 기뻐하며 우산을 꺼냈다. 비는 아직도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기에 맞았다간 쫄딱 젖을 거야- 문을 조금 열어 우산을 먼저 펼쳤다. 그 찰나에도 쏟아지는 빗방울이 종운의 바 지에 커다랗게 얼룩을 남긴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튀어 바짓단도 흠뻑 젖었지만 종운은 신 경 쓰지 않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 찰박찰박 질척하게 이어지던 발걸음소리가 끊어졌다. 종운은 빗물이 구두 밑창을 조금씩 덮 어가는 것도 모른 채 미동 없이 섰다. “너.. 여기 왜 왔어.” “......” “내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여기 왜 왔어.” 겨울비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가 조금씩 잦아든다. 종운 은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사이로 규현을 바라봤다. 어느 곳 하나 젖지 않은 데가 없다.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머리에도, 속눈썹에도, 코끝에 도 물방울이 맺힌 규현이 딱딱 부딪히는 이를 꽉 깨물며 몸을 움츠렸다. 규현은.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조규현.” “규현아. 그렇게 불러요 내 이름. 조규현. 그렇게 부르지 말고.” 추워서 따닥따닥 부딪히는 이 사이로 규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깊게 잠겨 있었다. ‘종운씨!’ 하고 항상 부르던 그런 밝은 목소리가 아니다.


“종운씨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대로 그렇게... 더 이상 당신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싫 어서 왔어요.” “......”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려고 했어요 나. 나타나지 말라고 해서.. 그러려고 했어요. 정말이에 요.” “......” “그런데... 그건 싫어졌어. 그대로 그렇게.. 당신 말대로 해준다고 내가 당신을 보지 못하는 건 싫어졌어요.” 눈꺼풀을 타고 흐른 빗방울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규현의 눈동자 앞으로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왜 왔냐고 그런 말 말고.. 그렇게 아무 대답도 안 하고 섰지 말고, 나한테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종운씨. 네?” “......” “나한테.. 정말 할 말 없어요? ......나는요... 할 말이 너무 많아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집에 있었어요. 나.. 종운씨가 보고 싶은데 보러 갈 수도 없고 연락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종운의 시선이 흔들렸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함을 느끼며 종운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 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규현이다. 비를 맞으며 저렇게 서있는 사람은 규현.. 그가 맞다. “나.. 오늘 아침엔 모르고 찬물로 샤워를 해버렸어요.. 그래서.. 형들한테 엄청 혼났어요. 바보라고.. 멍청하다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깜빡해버린 거 있죠. 그냥.. 깜빡...” “......” “종운씨.. 나... 당신이 그리워서 그랬나 봐요. 나... 지금은 괜찮아. 당신을 보니까.. 나 괜 찮은 것 같아요.” 우산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규현의 눈에서 또르르 굵은 방울 하나가 볼을 타고 흘렀다. 웃는 거니 너.. 조규현. 너 웃어? “조규현.” 종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술이 떨리고, 눈동자가 떨리고, 우산을 잡은 손까지 떨린다. 묵 직한 돌덩이가 목을 꽉 막아버린 것 같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아. “규현아.” “......” “니가 자꾸 그러면 내가 곤란해. 내가 그랬지. 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나한테 관심 갖지 말 라고 그랬잖아. 니가 그러면.. 내가 널 대하는 게 더 힘들어져. 그걸 왜 모르니?” “모르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잘 안 돼.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


데..” 규현의 눈동자가 슬프게 웃었다. 꽉 깨문 아랫입술에 종운의 시선이 멈춘다. “규현아.. 제발... 이러지 말자. 네가 원하는 걸 너는 어차피 가질 수 없어.”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요. 다 아는 것처럼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요. 나는 뻔한 사람 아니에요. 속이 비치듯이 보이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 “...나한테.. 내가 뭘 원하냐고 물어본 적이라도 있어요? 나한테..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당신을 가지고 싶냐고 물은 적 있어요?” “......” “없으면서. 모르면서.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규현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규현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들이 규현의 것인지 빗물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종운은 그의 목소리에서 물기를 찾아내려 귀를 기울였 으나 빗방울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밤에도 들을 수 없는 것들은 있었다. 그의 얼굴을 한 번만 쓸어보면, 딱 한 번만 쓸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얼굴에 따 뜻한 온기가 묻어있다면 그는 지금 많이 아픈 거라고, 마음이 너무 시려서 그 마음을 녹이 려고 따뜻하게 눈물짓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종운은 주먹 쥔 손을 펴지 않았다. 한 손에는 우산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자신 의 심장을 쥐고 그 손이 펴지는 순간 나는 흔들리는 거라고, 그러니 그 손을 굳게 쥐고 펴 서는 안 된다고. “하아....” 길게 내쉬어지는 한 가닥의 숨소리만을 남긴 채 규현은 그대로 쓰러져 내렸다.

* * *

“응.. 그래. 응.. 미안해. 비도 오는데 기다리게까지 하고.. 응. 아니야, 괜찮아. 응. 응...” 규현은 묵직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는데.. 머리가 울려서 잘 모르겠다. 지훈형인가.. 아니면 한성형인가..? “아, 성진아 나 지금 전화 끊어야 할 것 같아.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응. 그래. 응, 너도 잘 자−” 고개를 뒤척이는데도 너무나 힘이 든다. 다시 감겨버리려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했다. 흐


릿하게 보였던 것들이 모��� 검은색으로 가려졌다. 으음.. 하고 불편한 신음소리를 내는데 목도 너무 아프고.. 아... 나 감기 걸렸나. 지훈형이 걸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쩌지. 서서히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는데 따뜻한 손이 이마를 짚는다. “아... 따뜻해...” 규현이 나른하게 말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손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규현의 이마를 만지고 이불을 더 꼼꼼하게 덮어준다 . 포근하 게 감싸이는 섬유의 감촉을 느끼며 규현은 잠이 들었다. 규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주변이 모두 깜깜하기만 했다.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깜 깜한 공간..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더듬더듬 손을 움직이는데 무언가 축축한 것이 툭 하고 손 위로 떨어졌다. 깜짝 놀라며 손을 움직이던 규현은 보들보들한 그 감촉에 조물조물 그것을 만져본다. 아... 물수건..? 규현이 움직이는데 몸에 감겨있던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우리 집 이불은 이렇지 않은데.. “일어나지 마. 누워 있어.” 어둠 속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린다. 규현은 상체를 일으키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종운..씨...?” “....그래, 나야.” “...종운..씨.....?” “응, 왜.” “....아...” 종운의 이름을 재차 불러보고서야 규현은 저것이 종운이구나 한다. 나... 종운을 찾아왔었구 나. “일어나지 말라니까. 조규현 진짜 말 안 듣지?” 기어이 몸을 일으키자 침대와는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던 종운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슬리퍼가 바닥을 쓰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추고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램프가 탁 - 소리 를 내며 켜진다. 노란 불빛과 함께 종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의자를 침대 가까이 당겨서 앉는다. “좀 어때. 머리는 괜찮아?” “아... 네..괜찮아요.” “어디 봐.” 종운이 팔을 뻗었다. 조금은 뜨겁다 느껴지는 손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종운은 말없 이 규현이 잡고 있는 물수건을 가져가 테이블 위에 놓인 대야에 담갔다. 그 옆에는 얼음이


하나도 없는 얼음통도 나와 있고 여러 종류의 약도 흩어져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얼핏 잠결에 누군가 이마를 짚은 것 같았는데. 그것도 종운이었나 보 다. 규현은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픈데 나온 거냐, 나오니까 아픈 거냐.” “...에?” “원래 아팠는데 그냥 나온 거냐고. 비 오는데 우산도 없이.” “아... 아까.. 열이 조금 난다고 하긴 하던데..” “......” “......” “아하하. 별 거 아니에요.” 무표정으로 빤히 보는 종운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그의 눈이 가늘어진다. “형들한테 전화 번갈아가며 열 통은 왔다. 안 받으려고 하다가 니가 아픈데 그냥 나와서 걱 정하는 걸까봐 전화 받았어.” “....아..” “지훈형이 너 깨면 새벽에라도 전화하라고 하더라.” “......” “응, 정한성 화 엄청 났어. 지훈씨는 별로 안 그런 것 같았지만.” 형들에게 전화가 왔다고 하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는 것 좀 보라지. 규현이 묻고 싶었 던 것을 대답해주며 종운이 핸드폰을 규현의 손에 쥐어줬다. 핸드폰 액정에 AM 0:34 라고 찍힌 시간을 한 번 보고 침을 꿀꺽 삼키는데 목이 너무 아프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 지 훈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종운은 규현이 핸드폰을 귓가에 대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야를 들고 일어났다 . 화장실 세면 대에 물을 따라버리고 대야는 바닥에 엎어놓은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지훈과 통화할 때 뒤 에서 ‘뭐야, 조규현 그 새끼 김종운한테 갔대?!! 이 미친 자식이!!’ 라며 있는 대로 화를 내 던 한성이, 규현이 쓰러졌다고 비를 맞았는데 많이 아픈 것 같다고 하니 애 일어나면 먹이 라고 친히 끓이는 방법까지 알려준 죽이 냄비에 가득 담겨 있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가장 작게 해놓고 나오자 거실에서도 규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네.. 제가 내일 전화할게요. 네? 아.. 한성형이 너무 시끄럽 게 해서 하나도 안 들려.” 면박을 주는 것도 같고 퉁명스럽기도 한 그 목소리에 종운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 분명 규현 은 입을 삐죽 내밀고 핸드폰을 붙들고 툴툴대고 있겠지. “알았다구요. 내가 언제 잘못 안 했대요? 아 혀엉..”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바보 조규현.


“그래요. 응. 아, 몰라요 잠깐 나갔는데.. 죽?” 지훈이 규현에게 죽 얘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찮게 설명할 게 하나 줄었네. 종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가에 기댔다. “고맙다고 전해줘요. 네.. 바보 같은 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라고도 좀 전해요. 내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어린애에요?” “어린애보다 못하지..” 종운은 규현의 말에 혼잣말로 대답했다. 눈을 감으면 바로 그 아찔한 상황이 재연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정 신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보여주려고 그러나, 일주일 새 너무도 마른 규현이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지며 쓰러지는데, 종운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우산이고 뭐고 다 내던 지고 규현을 들쳐 업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열은 나지 몸은 다 젖어서 침대에 눕힐 수도 없 지.. 정신없었던 저녁시간을 떠올리면 규현을 몇 대 쥐어박아도 모자란다. “나쁜 자식. 사람을 걱정시켜도 그렇게 걱정시키냐.” “걱정 많이 했어요?” “그래. 그럼 너 같으면 내가 그렇게 쓰러지는데 걱정 안 하겠냐?” “나는 걱정 하지 당연히.” 중얼중얼 대답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규현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뭐야, 너 언제 나왔어?” “방금. 무슨 생각을 하느라 사람이 나와도 몰라요?” “아무것도 아니었어. 통화는 다 했어?” 종운이 얼른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규현이 씨익 웃는다. “내 생각 했구나. 나는 종운씨 걱정 당연히 하죠. 종운씨가 만약 그랬다면.” 자식이 다 알면서.. 종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규현의 눈이 순간 너무 진지해져서 종 운은 그를 툭 치려다가 멈칫한다. “나한테 물어봐요.” “...뭘?” “내가.. 원하는 게 뭔지.” “......” “조규현은 뭘 원하는지,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 대화를 전부 기억하는 걸까. 빗물에 젖은 입술로 말하던 그,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그. 규현아. 나는 니 말들을 모두 기억하는데.. “....니가.. 원하는 건... 뭔데?” “......” “......” “나는... 그냥 종운씨 옆에만 있고 싶어요. 사랑으로서 남지 말라고 하면 그럴게요. 애인과 행복한 모습 지켜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종운씨 삶에서 그렇게 잘라 내지만 말아요.” “......” “가장 중요하지 않아도 되요. 당신에게 있어서 제일 안 중요한 사람이 되어도 돼. 종운씨 의... 기억 속에 남기만 하면 좋겠어요..” “......” “이것도..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거예요?” 규현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렇게 종운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목구멍에 돌덩 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숨이 막히면서 뒷목이 뻑뻑해진다. 뱃속에서 꿈틀대던 통증이 서서히 올라와 심장이 뻐근하게 아프다. 가슴이.. 너무나도 먹먹하다. 종운은 저도 모르게 규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아까 전, 그렇게 비를 맞으면서까지 저를 보 러 온 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었다. 그때도 이렇게 하고 싶었는데.. 눈에, 볼 에, 입술에.. 춥지 말라고, 아프지 말라고 이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종운의 손이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열이 끓어올라 몇 번이고 만져봤던 너의 이마, 지금도 아직 열이 있구나.. 눈썹. 정말 진하다. 눈썹이 짙으면 미남이라더니 맞는 말인가.. 쌍꺼풀 깊은 것 봐. 속눈썹.. 길다. 이러니까 물이 맺히지.. 곧게 뻗은 코, 보드러운 볼, 붉은.. 입 술.. 종운의 손가락이 규현의 입술을 따라 동그랗게 움직였다. 손가락 세포 하나하나가 모 두 살아서 그의 감촉을 느끼고 있나보다. 전기가 통하듯이 찌르르한 느낌이 든다. 종운은 입술을 조금 달싹였다. 손을 움직여 그의 볼을 감싸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 속으로 크게 벌어진 그의 동공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모습도. 이런 기분이었구나, 첫키스의 설렘이라는 것이..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진다. 종운은 무언가에 끌리듯 그에게 다가섰다. 손을 내려 그의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로는 규현의 등이 맞닿은 벽을 짚었다. 두 눈이 파르르 떨리다가 사라진다.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가까 워졌을 때 종운도 눈을 감았다. 규현이 내쉬는 숨결에선 규현의 냄새가 났다. 아이 같고, 어딘지 모르게 풋풋한.. 그리고 종운은, 모든 것을 잊었다. 침대의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불을 허리까지 덮었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곤두 서게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좋았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종운의 핸드폰이 초록색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종운은 팔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폴더를 여는 순간 자신의 치부 가 낱낱이 다 드러나 버릴 것 같아 두렵다. 폴더를 열어 문자함을 확인했다. 역시.. 성진에 게서 온 문자였다. 전화를 기다리다 먼저 잔다는 내용의 문자를 눈으로 훑고 그대로 핸드폰 을 덮어버렸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다시 올려놓으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으응..’ 하며 규현이 뒤척이는 소리 가 들린다. 종운은 화들짝 놀라며 팔을 움츠렸다. 몸을 돌려 종운의 쪽을 향해 누운 규현이 베개에 얼굴을 몇 차례 비비더니 다시 잠잠해진다. 이불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어깨가 추워 보여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그러자 규현이 잠결에 배시시 웃 는다. 가만 보니 자다가도 참 잘 웃는다 조규현. 웃음이 헤퍼, 안 되겠어. 규현의 볼을 손가 락으로 꾹 누르며 쿡쿡 웃은 종운이 몸을 뒤척여 다시 침대에 누웠다 . 오른손을 옆으로 뻗 자 규현의 손이 잡힌다. 종운은 따뜻한 규현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종운이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햇살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지개를 하려고 팔을 쭉 뻗 었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손! 어젯밤 잡았던 규현의 손.. 종운의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곱게 정돈된 침대시트는 겨울아침의 한기를 머금고 있기 까지 하다. 언제 일어나서 어디로 간 건지, 밤에도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던 녀석인데.. 그러다가 눈 뜨자마자 규현의 걱정부터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종운이 어이없게 웃음을 터 뜨린다. “어디야?”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속에서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을 때 종운이 다짜고짜 물었다. -내가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을 하세요. 아침부터 ㄴ..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종운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말을 끊는다. “장난치지 말고. 어디냐고.” -집이에요. “집? 어디?” 종운이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는데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종운씨네 집 말고 내 집. 종운씨 방금 내가 거기 숨어있는 줄 알고 찾았죠?“ “......” 귀신이네 이거. -나도 일은 해야잖아요.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못했는데, 곧 마감이라 좀 서둘러야 해 서.. “그럼 깨워서 데려다달라고 하지. 너 언제 간 거야? 아침에 약은 먹었어? 열은 어때?” -한 번에 하나씩만 좀 얘기해요. 종운씨 자는데 일부러 깨우기 싫어서 그냥 왔어요. 해 뜨


기 전에 왔고, 졸릴까봐 약은 아직 안 먹었어요. 열은.. 잘 모르겠어요. 와서 종운씨가 재줄 래요? “...출근해야 돼.” 종운이 단답형으로 얼른 대답하자 규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알았어요. 오라고 안 해. 그렇게 너무 정색하면서 싫은 티내면 내가 너무 서운하잖아요. “......” -있다가 저녁때 시간 있어요? “저녁? 저녁때 왜?” -그냥. 규현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답했다. 종운은 잠시 망설였다. 어제 성진과의 약속을 일방적 으로 깨고 연락도 하지 못했는데. 딱히 오늘 만나자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오늘 연락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때 나오는 종운의 버릇이었다. “잘 모르겠는데, 있다가 봐서 연락해줘도 돼?” -그래요. 곤란하면 무리해서 시간 낼 필요 없어요 종운씨. 규현의 목소리가 또 진지해졌다. 이상한 녀석. 그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변화시키는 무언가 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연락 줄래요? 오늘 시간 안 될 것 같으면 나도 다른 날 하려고 했던 것들 당겨서 해놓게. 설마.. 이대로 나 영영 안 볼 건 아니죠? “..아니야. 알았어, 점심때까진 확답 줄게.” -고마워요. 그럼 종운씨 오늘 일 잘 하고.. “......” -...끊을게요. 규현은 종운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던 규현의 존 재감을 끊어내며 종운이 핸드폰을 덮었다. 무언가 더 말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규현은 말 을 잇지 않았다. 종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 지금은.. 그게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나를 믿지 못하냐고 물을 처지도 아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나라도 그럴 거야. 확답도 주지 못한 채 자기 좋을 대로만 하는 나 같은 사람 나도 믿지 않는 걸. 따뜻한 물줄기가 온 몸에 번진 한기를 좇아주었다. 규현과 함께 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추 운 날씨인 줄 몰랐는데. 열이 나던 규현을 꼭 붙잡고, 그가 난로라도 되는 양 그렇게 지냈 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종운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빨아서 널어두었던 규현의 옷이 생각났다. 비를 흠뻑 머금어서 차갑던, 비를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추운 겨울날 입기엔 지나치게 얇던 그 옷이. 샤워를 서둘러


마치고 나왔는데 눈에 띄는 건 어제 규현에게 갈아입혀 놓았던 자신의 옷. 깨끗하게 정돈되 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다. 하여튼 조규현. 사람 걱정시키는 데는 도사지. 다 말랐는지 확인도 해보지 못했던 그 옷을 입고, 추운 아침에 말도 없이 그냥 간 거냐.. 종운은 한숨을 푹 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 다. 두 통의 문자를 차례대로 보내곤 핸드폰을 손에 꽉 쥐었다. 미안하다.

“누군데 그렇게 실실 웃어?” “아.. 아니에요.” 규현이 웃음을 싹 거두며 말했다. 이른 아침 집에 돌아오며 지훈에게 연락을 했었다. 집에 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그랬더 니 더 걱정이 됐는지 규현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물기가 다 마르지도 않은 머리로 헐레벌��� 들어선 지훈은 혼자였다. ‘한성형은요?’ 하니 ‘걘 너 꼴 보 기 싫어서 안 온대.’ 라며 여과 없이 그대로 말해준다. 그런데도 규현은 아하하 그래요? 하 고 쉽게 넘겨버렸던 것 같다. 오늘은 무엇이든 다 즐거웠다. 아직.. 즐거워해선 안 되는지도 모르지만. 지훈이 규현의 열도 재보고 약도 챙기는데 핸드폰이 한 번 짧게 진동을 한다 . 퇴근하고 집 에 데리러 갈 테니 있다 보자는, 이모티콘 하나 없는 간결한 문자에도 웃음꽃이 저절로 번 졌다. “..얘기는 해봤어? 어떻게 하겠대?” 규현의 표정을 봐서는 상황이 잘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어제 이 집을 나서며 종운에게 걸었 던 약간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진 걸까? “......” “왜 대답이 없어? 제대로 얘기 안 해봤어?” “...네.” 숨기려 해도 드러나던 웃음기가 사라지는 걸 보며 지훈이 물었다. 설마하니 했더니, 이거 진짜 한성이 말대로 답도 없는 자식들이잖아? “그럼 어제 가서 뭐했어? 얘기하러 간 거였잖아. 아니야?” “...그렇죠. 얘기는.. 좀 하긴 했는데..” “그래서 김종운이 뭐라는데. 설마.. 대답 안 했는데 그걸 그냥 안 듣고 왔단 말이야?” 지훈이 어이없게 물었다. 규현은 입을 어물거리다가 얼굴을 확 붉힌다. 대답을 듣지 않으려 고 안 들은 건 아니라구요. 잠시 기억 저편에 묻어두려 했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한 일들이 지훈의 물음에 다시금 떠오른다. 스스로 느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초현실적이기까


지 한 그 생소한 감각들.. 규현의 얼굴이 빨갛게 차오르는 걸 보던 지훈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지금 여기 한성이가 있었으면 너한테 아마 쌍욕 해줬을 거다. 너 진짜.. 내가 보자보자 하 니까. 미쳤어?” “......” “대답은 안 듣고, 일만 치고 와?! 이게 진짜!” ‘이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하며 지훈이 짜증을 낸다. 한성의 복장 터짐이 지금에서야 이 해가 된다. 한성은 이걸 알면 거의 죽겠지. 저 얼굴 보라지, 지가 무슨 새색시인줄 알어? “너, 그래놓고 걔가 또 끝내고 가면 그땐 어쩔 거야? 그건 생각 안 해봤냐?” “...해봤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괜찮다고? 그게 괜찮아?” “...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 했어요. 내가 느끼는 거 다 솔직하게 얘기 했어요. 그리고 어 제도.. 내가 싫은데 그런 것도 아니고. 마지막 선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울며불며 하진 않을 거예요.” 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지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식탁에 마주앉은 규현은 정말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래도 괜찮아요 저래도 상관없어요 그런 거냐 정말. “미쳤어, 둘 다.” “......” “그런 자식 좋다고 하는 너나, 애인 뻔히 있으면서 너랑 놀아나는 종운이나. 그래, 잘 됐어. 차라리 이렇게 된 김에 애인이랑 헤어지라 그래 그럼. 안 헤어지겠다고 하면 확 다 말해버 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해.” 지훈이 에라 모르겠다- 하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규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그게 동생한테 해줄 조언이에요? 애인이랑 안 헤어지면 확 일러버리라고?” “너, 니가 뭐라 그랬어. 가서 넌 그냥 친구로라도 옆에 있겠다고 했지? 근데 그 자식은 너 한테 손댔잖아! 그럼 앞으로 그 자식이 너랑은 친구로 지내겠다고 결정을 해도 또 언제 손 댈지 모르는 거 아냐? 아예 만나던가 아니면 그냥 얼굴도 안 보고 살던가, 그럴 거 아니면 니네 사이에 어중간한 결정은 없어 이제.” “...그게 왜 또 그렇게 되요. 그렇지 않아요.” “않긴 뭐가 않아? 너, 니가 그렇게 안 지낼 거라고 해도 걔 주변에 있으면 그 애인도 결국 눈치 채. 완전 바보도 아닐 텐데 그걸 모르겠어?” “......” “내가 그랬지. 바람피지 말고 아예 거길 깨려면 깨고 말려면 말아야 된다고. 니넨 이미 그 선을 넘었어, 답이 없다고.” 그는 너무도 단호하게 말했다. 규현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저녁엔 제대로 얘기해. 걔가 어중간하게 굴면 선을 그으라고. 니가 그렇게 이래도 좋 고 저래도 좋아요, 니 뜻대로 하세요- 하니까 걔가 애매하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 냐!” “......” “어쨌든.. 가서 또 상처받고 오지나 말어 멍청아.” 지훈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의 걱정하는 말투를 듣곤 규현은 고개를 열심히 끄 덕인다. 아침 먹자며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늘어놓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지훈이 내민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이 아무거나 다 먹고 싶었다. 규현이 자의적으로 뭔가를 먹는 걸 보며 지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마음의 병이었다 그거지.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종운이다. -밑에 있어, 내려와. “네 금방 가요.” 간결한 통화를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머리는 괜찮은지 옷은 이상한 데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식탁의자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집을 나 서며 코트에 팔을 한 쪽씩 끼워 넣었다. 사람이 비쳐 보이는 엘리베이터 문에 마지막으로 전신을 비춘 후 아파트를 나섰다. 규현이 사는 라인 바로 앞쪽에 종운의 차가 세워져 있었 다. 규현은 얼른 달려가 조수석문을 연다. “오늘은 따뜻하게 입고 왔네.” “네? 아.. 네에. 추우니까.” 규현이 웃으며 말했다. 규현을 대충 훑어본 종운은 별다른 대꾸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규 현은 얼른 안전벨트를 맸다. “어디 가는 거예요?” “생각해둔 데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가는 데로 그냥 가.” 종운이 그렇게 말하고 만다. 규현은 종운이 한 번만 웃었으면 좋겠어서 계속 힐끔힐끔 그를 곁눈질한다. “얼굴 닳아, 그만 봐.” “......종운씨 가만 보면 진짜 왕자병. 잘생겨서 본 거 아니에요.” “그럼, 안 잘생겼는데도 너무 좋아서 봤어?”


꽤 뻔뻔한 말투로 그렇게 대꾸하는데 할 말을 잃은 규현이 어이없는 얼굴을 하자 종운이 큭 큭 웃는다. 뭐야 정말. 입을 삐죽대면서도 규현이 따라 웃는다. 오늘 들어 처음 본 웃음인 걸. “그래요. 너-무 좋아서 봤다.” 규현이 능청스럽게 말한다. 사실을 이렇게 농담처럼 말해야 하는 것이 씁쓸하긴 하지만.. 이런 농담을 할 수라도 있는 것에 감사해야한다. “고맙다.” “..네?” “너-무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규현은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하여 얼른 되물었다. 하지만 종운 은 장난인 듯 다시 말해버린다. 지훈과 했던 얘기들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제대로 결론을 내라고?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줄 아나. 그거야 종운이 부담스러울까봐, 그러지 않으면 아예 보지도 않으려고 할까봐 무슨 선택을 해도 난 괜찮아요 그러는 거지. 진심으론..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지 않는 사람 이 어딨어. 규현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무슨 일 있어? 아직 몸 안 좋아?” 종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표현은 안 해도 걱정 많이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물음에 마 음이 따뜻해진다.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약은 먹었어?” “네, 아까 아침에 지훈형이 와서..” “...지훈씨가 또 뭐라고 안 그래?” 지훈의 얘기를 하자 종운이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그동안 종운과 엮이는 것에 대해 나 무라고 혼내고 화내고 그랬던 것이 그도 신경 쓰인 모양이다. “뭐... 항상 하듯이 그런 거죠. 신경 안 써요.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인 거니까..” “......” “종운씨도 신경 쓰지 마요. 종운씨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진짜.” “......” 종운은 규현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종운은 지훈과 한성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규현이 모르고 있다면 그가 앞으로도 알지 않길 바란다. 철없던 때에 했던 실수였다.


그래.. 그것뿐이었어. 종운은 한적한 삼청동 뒷길에 차를 세웠다. 규현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린다. 종운이 ‘아는 사람이 하는 데야.’ 라고 조그맣게 말한다. 꽤 으리으리한 주택가가 밀집되어있는 지역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 레스토랑이 있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와 철조물이 그대로 노출된 디자인의 도시적 느낌이 물씬 나는 건물이었는데 짙은 색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펼쳐지는 실내는 상당히 아늑하다. 규현이 한 번 빙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 어둑한 조명과 벽면에 길게 걸려있는 반짝이는 불빛이 어 우러져서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조금.. 독특하지? 내가 아무나 데리고 오는 데는 아니고...” 종운이 거기까지 말하곤 어색하게 웃는다. 실내를 구경하느라 두리번거리던 규현이 종운을 본다. 그는 규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다른 곳을 보는 체 하고 있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규현의 얼굴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며 종운의 이름을 불렀다. 종운은 그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게 누구야? 김종운 아냐?”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 이쪽은 조규현.” “아아, 반갑습니다, 전 진세훈이에요. 종운이.. 친구?” 진세훈이라 자신을 소개한 그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단어를 고르 는 게.. 규현은 그의 물음에 대한 종운의 대답이 궁금했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에게 뭔지. 하지만 종운은 유연하게 질문을 피해간다. 규현은 잠자코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우리 조금 조용한 데서 식사하고 싶은데.” “아, 그래그래 물론이지. 이쪽으로 들어와.” 그가 손짓을 하며 자리를 안내한다. 종운이 규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종운이가 여기 누구랑 같이 온 건 정말 오랜만인데. 종운이랑 되게 친하신가 봐요.” 규현과 종운이 테이블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메뉴판을 내어주며 세훈이 말했다 . 규현은 그 의 말에 슬쩍 웃기만 한다. 종운이 메뉴판을 훑어보다 물었다. “내가 아무거나 주문해도 괜찮아?” “네, 그럼요.” “그럼 있지, 이렇게 하고 이거.” 메뉴판을 보며 이것저것 짚은 종운은 세훈이 저 멀리에 갈 때까지 딴청을 피운다 . 규현을


떠보기도 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는 것을 봐서는 세훈도 종운의 성향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데.. “쟤가 원래 좀 이것저것 잘 물어봐. 그냥 무시해도 돼.” 종운이 미안한 듯 말했다. 세훈의 질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규현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이었는데 규현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한다. 자꾸만 딴생각을 하는 것 같은 규현을 앞에 앉혀놓고 종운은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을 했 다. 주로 두 사람 사이에 대화를 끌어 나가던 건 규현이었는데 그가 저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게다가 이렇게 마주앉아서 대화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질문.. 왜 대답 안 했어요?” “응? 무슨 질문?”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쿨하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더 신경이 쓰여서 규 현은 기어코 그걸 묻고 말았다. “나랑 친구냐는 거. 나랑 친하냐는 거..” “아.. 그냥 세훈이가 원래 그렇게 의미 없이 잘 물어. 그런 거 일일이 대답 안 해도 괜찮아 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종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규현이 못마땅하게 대꾸를 하려는데, 그 때 세훈이 쟁반에 따뜻한 물 두 잔과 식기를 가지고 들어온다. 테이블 세팅을 해주는 동안 그가 자꾸만 규현 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저 화장실 좀..”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해서 일부러 더 딴청을 피우던 규현이 결국은 자리에서 일어난 다. “복도에서 왼쪽으로 가면 돼.” 위치를 알려주는 종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불편하게.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눈초리가 불편했다. 종 운이 누구랑 같이 잘 안 온다는 얘기를 듣고 이곳은 정말 그의 말대로 ‘아무나’ 데리고 오 는 곳이 아닌가보다 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은 아닐 테지. 존재를 잊으려고, 기억하면 내가 잘못한 게 되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애인이 떠올랐다. 그와 왔었을까. 그래서 저렇게 쳐다보는 건가? 혹시 그 애인이랑 헤어지고 나랑 연애라도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 차가운 물에 손을 헹구고 볼에도 몇 번 찍었다.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오늘 편하게 종운과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바늘방석 같은 저 자리에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그래서? 쟤 만나느라 요즘 성진이한테 연락 안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성진이가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야, 어제도 너랑 약속 있었는데 니가 파토 냈다고 성진이가 이미 다 일러 바쳤어. 뭐야, 너 바람난 거야?” “아니라고. 좀! 애 듣겠다.” “화장실 갔잖아. 빨리 말해봐. 무슨 사이야?” 최악이다 정말. 이런 대화를 엿듣고 싶진 않았는데.. ‘성진’ 은 종운의 애인 이름인가. 이제 이름은 아는군.. 심드렁한 얼굴로 규현이 생각했다. 저 사람은 종운의 애인과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이인가보다. 그래서 아까 그런 이상한 얼굴로 쳐다봤구나. 진짜 애인은 자주 못 만난다고 연락도 잘 안 온다고 그러는데 웬 다른 놈이랑 나타나니까. “그냥 친한 동생이야. 어제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랬던 거야, 성진이가 그 얘긴 안 해?” “몰라. 그런 시시콜콜한 건 안 물어봤어. 근데 너 걔한테 신경 좀 써라. 아무리 오래 됐다 지만 너네 서로 너무 방치하는 거 아니냐?” “...신경 쓰고 있어. 근데.. 표현이 잘 안 될 뿐이지.” “그러면 다행이고. 하긴, 십년이 다 되가는데 아직도 깨가 쏟아지면 그건 좀 심한 건가?” 세훈이 웃으며 말했다. 종운이 세훈을 따라 소리 없이 웃는다. 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이런 대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친한 동생이야.’ 맞 는 말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다시는 연락해선 안 됐던 사람이니까 그가 ‘친한’ 동생이라고 표현한 것에라도 기뻐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제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근데 너 성진이 자식한테는 말 하고 왔냐? 자기 안 데리고 온 거 알면 섭섭해 할 텐데.” “아... 아니 말 못 했어. 섭섭해 할 수도 있으니까 너도 말 하지마. 다음에 한 번 데리고 올 게.” 세훈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정말 그게 전부야? 하는 얼굴로. 종운은 못 본 척을 하며 물 을 한 모금 마신다. “너.. 아, 뭐. 이건 내 상관할 바가 아니긴 한데.. 내가 니 친구니까 무슨 상황이 오면 니 편이기는 하다만, 성진이 걔 여린 애다. 그건 나보다 니가 더 잘 알잖아?” “진세훈 그만 해. 그런 사이 아니고 성진이한테 상처 줄 일 없어, 나 그런 거 안 해. 알잖 아.” “...그래. 그렇지 너.” 종운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훈은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이 놓인 공간과 복도를 단절시켜주는 짙은 색상의 휘장 뒤편에 서있던 규현이 뼈마디 가 아스러질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듣지 말았어야 할 대화인데..


“어, 왔어? 세훈이는 식사 가지러 갔어. 그것만 가져다주고 걔는 다시 밖에 나가 있을 거 야. 신경 쓰였지? 미안해.”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못해 다시 화장실로 돌아갔던 규현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번 더 하고 나왔다. 자리에는 종운 혼자만 앉아있다. 규현이 주위를 살피는 눈치를 보여서 종운이 설명하듯 말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몸에도, 마음에도, 머 리에도..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음식 괜찮을 거야. 성격이 좀 모나서 그렇지 솜씨 하나는 좋아.” “네. 종운씨가 데리고 온 데니까 괜찮겠죠 뭐.” 억지로 웃어 보이며 규현이 말했다. 종운도 그를 따라 함께 웃는다. “한성형도 성격은 그래도 요리는 정말 잘 하잖아요. 뭐 하는지 몰랐으면 전혀 매치 안 됐을 건데.” “아.. 정한성?” 종운이 그 이름을 성까지 붙여 말하더니 약간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를 낸다. 그걸 듣는 순간 규현은 미칠 듯이 한성과 지훈이 보고 싶어졌다. 형.. 나.. 정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진짜.. 내가 미쳤나봐. “아무튼. 아.. 고마워.”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세훈과 다른 직원 하나가 접시가 여러 개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 온다. 직원이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옮겨놓을 동안 세훈은 또 묘한 눈으로 규현을 훑었다. 이 번에는 규현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봤다. 언짢은 규현의 눈초리가 세훈을 아래위 로 훑는다. 피식. 도전적인 규현의 눈길에 세훈은 웃음이 나왔다. 종운이 곤란한 얼굴로 세훈과 규현을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훈도 지지 않고 규현을 쳐다본다. “아.. 저기. 세훈아, 나 규현이랑 따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결국 보다 못한 종운이 세훈에게 말했다. 그때까지 규현을 빤히 보던 시선을 거두고 세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맛있게 먹어라. 규현씨도요.’ 하고 형식적인 인사말을 건네 고 나오며 세훈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운을 따라 들어와 마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있기에 웬 어수룩한 놈이 끼어서 저러나 했더니. 생각보다 그리 만만치 않은 놈이네 저 녀석. “...미안.” 종운은 세훈의 행동에 다시 한 번 사과를 한다.


“뭐가요?” “저 녀석이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원래 다 그렇게 대해. 너를 싫어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 야. 그래도 미안해, 불편하지?” “...괜찮아요.” 규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물컵을 집어 들었다. 불편한 것이야 당연하지. 당신의 애인 을 알고, 그 애인과 친하고, 당신이 애인이 아닌 나와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당 신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하니까. 그게.. 맞는 거지만 나는 너무 힘들잖아. 마음은 다르다는 것이 빤하게 보이는 대답. 저를 신경 써서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종운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저런 모습이 좋은 거다, 저렇게 순수하면서도 착한 모습 이. “오늘은.. 왜 보자고 한 거야?” “말했잖아요. 그냥이라고. 아무 일 없이 그냥 보고 싶어서 보자고 하면 안 돼요?” 그의 질문 하나하나, 그와 나누는 대화,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다 나를 밀어내기 위한 것 같다. 그래서 규현은 의도했던 것보다 날을 세워서 대꾸를 한다. 나는 마음이 아픈데, 그것도 모르면서 왜 더 상처를 주려고 해요. “그런 말이 아니라..” “됐어요. 미안해요. 내가 좀 신경이 쓰여서..” “......” “아. 정말..” 규현이 신경질적으로 컵을 내려놨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게 되지를 않는다. 지훈의 말이 맞다. 이제 와서는 그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말이 쓸모가 없다. 어제 그렇게 쉽게, 예상치 못했던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소녀도 아니고 다 큰 남자 주제에 어째서 이렇게 그 한 번으로 감정의 변화가 이렇게나 큰지 . 규현은 저도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왜, 나를, 당신도 그렇게 원했으면서. 나만을 원하지는 않아? “규현아..” “..그냥이라는 거, 거짓말이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 할 말이 있어서 그랬어요.” “......” “..나랑 할 얘기 없어요?” “......” 종운은 대답이 없다. 규현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듯이. 종운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미안해.” “......”


“......” “어떤 게 미안한데요?” 규현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가웠다. 저런 규현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규현이 종 이냅킨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식기들 중 하나를 집었다. 그리곤 끼이익. 귓가를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그릇 위를 움직인다. “뭐가 미안한데요? 나랑 할 얘기가 없어서 미안해요? 나랑은 용건이 있어야만 보는 것처럼 말한 게 미안해요?” 잠시 끊긴 규현의 말, 그 순간에 종운을 보는 규현의 눈. 이상한 위화감에 종운이 눈을 깜 빡일 때, 그릇을 포크로 긁는 소리도 한낱 달콤한 멜로디처럼 들리게 해버릴 싸늘한 규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것도 아니면. 결국, 나는 당신에게 버려질 사람이라는 게 미안해요?” “?!!” “‘성진’ 이라고 했던가요, 그 애인이? 상처를 줄 수 없는, 여리신 그 애인분이?” “......” “그 애인은, 종운씨가 어젯밤에 뭘 했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알고 종운씨도 아는데. 그 사 람은 모르겠죠?” 종운의 입술이 벌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조규현, 너.. 듣고 있었니? “알아야..겠죠?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 “그렇잖아요. 말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규현답지 않다. 이런 건 규현 같지 않아. 따뜻한 아이잖아 넌. 이렇게 말하는, 이런 얘기 하 는 사람이 아니잖아. 종운의 눈빛이 흔들린다.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잖 아 규현아. 저런 규현은 생소했다. 종운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네가 누군지 더 이상 모르겠어. 라고. “얘기하세요. 나랑 종운씨만 사실을 알고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모든 결정이 내려 진다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다, 전부 말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해.”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이 전혀 없는 얼굴, 텅 빈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 갑자기 변해버린. 조규현. 검은 휘장에 조금 흔들리며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세훈은 방금 전 들은 대화를 되새 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사이 아니긴. 멍청한 자식.”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비밀로 하는 것이 그를 덜 아프게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얘기하 는 것이 덜 아프게 할지. 숨길 수 있다면 숨기고 싶은, 하지만 언젠가 다른 이를 통해 알게 될 일이라면 차라리 지금 얘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그 일을. 종운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실수였어. 그렇게 말하라고 마음 속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찰나의 실 수였어. 내가 잠시 분위기에 이끌려서 그랬던 거야, 너무 미안해. 종운의 손이 급하게 담배 를 찾았다. 실수가 아니었다. 실수일 수도 있었지만, 오늘 성진에게 연락하지 않은 채 규현 을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던 순간 그건 실수가 아닌 게 돼버렸어. 실수가 아니었어.. ‘말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규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말할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떨어뜨려 놓기라도 하겠다고. 자기가 가질 수 없으면 남도 가질 수 없다 고.. 하지만 종운은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규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가 아 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조규현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 규현이는 그런 아이가 아 니야. 그럴 수 없을 거야..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에 종운은 평안을 찾는다. “거짓말일 것 같아요? 내가 말 못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걸어볼래요?” 도전적으로 말하는 규현은 이런 말을 듣지 않아야 하는 아이였다.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나를 곤란하게 하는 말들, 나를 상처 입히는 말들을 하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아픈 눈을 하고 있니. 종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넌.. 하지 못할 거야. 니가 그 애에게 상처를 주면, 난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너를 정말로 다시는 보지 않을 테니까.” “......” “......” “그럼.. 나는요? 나는 뭐에요?” 이미 상처를 다 받은 나는요? 왜.. 놀라지 않아요? 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데, 왜 변명하지 않아요? 바람은 피지 말라고 했던가요, 지훈형. 알고 보니 이것 도 바람피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그런 줄 알았었는데, 그거 아니었나 봐요. 나는 그냥.. 단 한 번의.. “이럴 줄.. 모르고 시작한 거 아니었잖아. 그래도 좋은 거 아니었어?” “...그게 종운씨 대답이에요? 내가 다 알고 시작했으니까.. 내 탓이라는 거?” “......” “내가.. 만만했어요? 당신이 좋으면 난 뭐든 좋아요- 그러니까 내가 바보 같았어요?” “......”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를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말아요.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마요. 규현의 눈이 흔들린다. 아프 다. 이런 말을 꺼내야 했다는 게 아프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아프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으려고 그를 구석에 몰아붙이면서 더 아픈 말들을 듣는 내가 너무 . 아파 . “그러면 차라리 나랑 자지 말지 그랬어요. 나를 원한다는 듯이 그러지 말지 그랬어요. 나.. 오해했잖아. 당신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이럴 거면, 결국 이렇게 할 거면.. 욕 심 부리지 말았어야 했잖아요.” “......” “친구로만 남기기엔 아까웠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친구로만은 남기 싫 다니까 내가 미워요?” “...규현아.” “당신이.. 잘못 했잖아.” 규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아왔던 것들이 해일처럼 몰아친다. 그렇잖아.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너무도 비현실적이라서, 내가 상상했던 현실에선 당 신과 나의 이런 모습은 없었기에,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시작을 내가 했고, 잘못된 선택도 내가 했다. 그래서.. 모든 걸 내가 감수하려고도 했다. 그가 나를 버려 도, 나를 두고 다시 애인에게 돌아가더라도, 내가 다 알고 시작한 거니까. 하지만.. 이제는 억울해. 나도 당신을 가졌어, 나도 가졌잖아. 나에겐 십년이라는 시간이 없지만 나도 당신 의 마음을 가졌어. 그랬잖아. “나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아니, 아끼기라도 했다면.. 말해요. 제발.” 규현의 목소리에 기어이 물기가 묻어난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규현을 보지 않으려고 종 운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 *

“세훈형한테 들었어. 누구였어?” “...뭐가.” 종운이 침대 위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온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다. 너무나도 공허한 마음, 그 마음과 함께 전부 아픈가보다. 옷도 벗지 않고 이불을 들춰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데 성진의 손이 종운의 어깨를 잡는다. “옷은 벗고 자. 벗어 얼른, 걸어놓을게.” “......” 묵묵히 성진이 하라는 대로 따라했다. 코트를 벗고, 니트를 벗고, 양말도 벗어놓고..


“핸드폰은?” “......코트 안에.” “잘 자−” 성진이 한참 옷장 앞에서 옷을 걸더니 옷장 문이 닫히고 곧이어 방문도 닫힌다. 드디어 혼 자다. 드디어.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길게 한 줄기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다.

‘종운씨-’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걸 듣고 있노라면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이제는 너무 오래 전의 기억이 되어 그의 말투, 얼굴, 표정, 그 어느 하나도 제 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느낌, 그의 느낌 하나만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몽글몽글한 따뜻함. 그가 나를 부를 때면 저 가슴 깊숙이까지 느껴지던 달콤함은 생각만 해도 황홀했었 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의 곁을 맴돌았다. 너무 지쳐서, 그의 손길을 받으며 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어른스럽지 못한 처사라는 것은, 그를 잃고 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그렇게 하지만 않았어도 그를 그렇게 보내지는 않을 수 있었는데. 너무 뒤늦게 알아버 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어디 다녀왔어?” “친구 만난다고 했잖아. 넌 언제 왔어?” “방금.” 지친 표정의 종운이 대답 없이 외투를 벗었다. 의자에 걸쳐놓는데 성진이 달려와 금방 옷을 집어 든다. ‘내가 걸어놔 줄게.’ 그는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자꾸만 뭔가를 하려고 든다. 네가 없어도 이 집은 잘 굴러가.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는다. “어느 친구 만나고 왔어? 내가 아는 친구야?” “니가 모르는 친구야. 집에 좀 가, 나 쉬고 싶어.” “나 소개시켜주면 안 돼? 형 친구들 나도 만나고 싶어.” 짜증이 솟구친다. 내 친구들을 네가 왜 만나- 그렇게 매정하게 쳐내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그가 내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이유 같은 건 사실 없는데. 그냥 싫다. “집에 가라고.” “소개시켜준다고 하면 집에 갈게.” 성진이 애교를 부리며 종운을 안으려고 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애교를 부리고 뭔가를 얻 어내려는 그 방식. 목을 끌어안는 손을 탁 쳐내며 인상을 구긴다.


“형은 내가 안는 게 싫어?” “피곤하다고 했잖아. 제발 사람 말 좀 들어. 내가 하는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내가 언제 그렇댔어? 형 왜 그래? 요즘 이상해.” “니가 자꾸 피곤하게 구니까 그렇잖아. 피곤하다는데 왜 자꾸 엉겨 붙어?” “...엉겨 붙는다고? 형은 내가 형한테 엉겨 붙는 것 같아?” “하아-” 주먹을 꽉 쥐었다. 싫어 죽겠다. 짜증나 죽겠다. 그런데도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 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말. 성진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종운을 본다. 그의 이유 없는 짜 증, 그것이 나날이 반복되고 심해지고. “미안해. 내가 미안한데. 어차피 내일 보기로 했잖아. 나 지금 정말 피곤하니까 좀 가.” “......” “......” “알았어. 그러면 나 지금 갈게. 대신.. 내일은 하루 종일 나랑만 있는 거야, 응?” “니 마음대로 해.” 종운이 귀찮은 듯이 말했다. 그러자 성진은 만족스럽게 웃는다.

“너.. 내 핸드폰 뒤졌어?” “뒤진 거 아냐. 형이 없는데 전화가 와서 급한 걸까봐 받은 것뿐이야.” “왜 남의 전화를 허락도 없이 받아?” “...형 전화잖아. 형이 남이야?” 성진은 또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매번 똑같은 저 얼굴. “왜? 내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었어?” 미심쩍은 목소리로 성진이 물었다. 종운은 흠칫 놀라면서도 아닌 척 짜증을 계속 낸다. “니가 보면 안 될 건 없었지만, 니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 건 있었어. 나한테 온 전화를 니가 왜 받아?” “급한 일일까 봐 그랬다니까? 형 저번에도 급한 전화 놓쳤잖아. 혹시 이번에도..” “놓쳐도 내가 놓쳐! 상관하지 마.” “형은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뭐?” “형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 성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슬픈 표정. 눈물이라도 뚝뚝 떨길 것 같은 표정.


“내가.. 하정현 전화라도 받을까봐? 그래서 혹시나 내가 무슨 소리라도 할까봐?” “?!! 너..” 종운은 성진의 입에서 나온 그의 이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째서 그가 정현을 아는 걸 까. 그 많은 이름들 중에서 왜 하필 하정현을 고른 걸까. 왜 그를.. 종운의 얼굴이 불안감으 로 물들었다. 그런 종운을 보는 성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눈동자에 눈물이 서서히 차오른다. “그래. 하정현 전화였어. 하정현이 형 찾으려고 전화 했더라.” “......” “난 그 사람은 모르는 줄 알았어. 우리 만나는 거, 몰라서 형한테 그러는 줄 알았어. 알면 더 이상 그런 연락 안 오겠지 그렇게 생각했어.” “......” “그래. 그래서 내가 그랬어. 형은 나랑 만나니까 이런 식으로 연락 그만 해달라고. 형이 아 직 얘기 못했나 보라고. 근데..” “걔.. 알고 있더라? 형이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형이랑 만났대.” “......” “그게 나라는 걸 알면서도 만났대.” “......” “진짜.. 나쁘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또. 또. 투둑 툭 툭. 둘, 셋, 넷.. 방울방울 방울져 떨 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성 진은 종운을 계속 바라봤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러기를 수십 번 반복했을 때쯤 종운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 “안 그럴게 성진아. 미안해..” “......” “그러니까 정현이한텐 이제 그만 연락해. 다시는 만날 일 없을 테니까.” 종운이 어린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로 성진에게 말했다. 세상이 두 쪽이라도 난 듯이 우는 성진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당겨 안았다. 남자치고 작은 체구의 성진이 팔 안에 꼭 안긴다. 토닥토닥.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렸다. 성진이 얼굴을 묻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정현아, 제발 전화 좀 받아. 제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벌써 다섯 통째 전화를 하고 있는데 정현은 받지를 않는다. 화가 많이 난 걸까. 상황을 설명하려고 해도 전화를 받아야 하지. 아, 정말.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 초조하게 왔다갔다 거리는데 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며 보니 커다란 티셔츠 하나만을 입고 베란다 문에 삐딱하게 기대 선 성진이다. 얼른 폴더를 접어 주머니에 핸드폰 을 넣었다. “일 때문에. 오늘 못 나간다고 말하려고. 너 몸도 안 좋은데 내가 나가면 좀 그렇잖아.” “...그래? 그럼 오늘 형이 나 간호해주는 거야?” 종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대자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던 성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응.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천진한 얼굴로 웃으며 종운에게 두 팔을 벌린다. 종운은 그가 자신을 끌어안도록 가만히 내 버려뒀다. 연락이 되지 않는 정현을 생각 속에서 지우려고 애쓰며.

종운이 정현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 급한 일이 있다는 지훈의 연 락을 받고 나갔을 때였다. “김종운, 너 뭐 하는 놈이야?” 종운을 본 한성이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화를 낸다. 평소에 한성과 썩 잘 어울리지 않는 편 이었던 종운이 그를 무시하고 지훈에게 물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 “너 뭐 하는 놈이냐고 이 개자식아!!!” “무슨 일이냐구요.” 지훈은 대답 없이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한성이 버럭 화를 내며 그의 옷깃을 더 꽉 쥐었 다. 이상한 분위기에 종운이 눈을 가늘게 뜬다. 너도나도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미루는 사 람들, 불같이 화내는 한성, 입만 벙긋거리면서 운을 못 떼는 지훈. “...정현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설마. 하정현,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렇지? 그래서 내 연락 못 받은 거 아니지? 그 냥 안 받은 거지? 내가 미워서 그런 거지? “종운아, 저기..” “......”


“정현이가 지금 병원에 있는데...” 곤란한 얼굴로 지훈이 하는 말을 들으며 종운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 하정현 , 이 멍청 한 자식아. 너 뭘 한 거야.

“너. 걔가 너 찾을 때 왜 안 갔어. 한 번만 오라고 걔가 그렇게 사정사정을 했는데 왜 안 갔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종운은 대꾸 없이 절을 하기 전 단추를 풀었던 검은 정장 재 킷의 단추를 다시 채웠다. “애가 죽겠다는데, 한 번만 보면 살 것 같다는데 너 왜 안 갔어. 왜, 니 일 깔끔하게 해결 됐으면 싶어서 그랬냐? 하정현이 그냥 죽어버리길 바랬었어?!!” “정한성!!” 종운에게 덤벼드는 한성을 지훈을 비롯한 몇 사람이 뜯어 말린다. 얼굴은 상기되어있고 많 이 운건지 코끝이 빨갛다. “형은 화나지도 않아요?!! 하정현이 죽었어요!! 하정현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하정현이 죽었다고!!!! 저 새끼 때문에!!!” “한성아..” “저 새끼가 오기만 했어도 하정현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한성아. 제발 한성아. 이러지마.” 지훈이 겨우 한성을 뜯어 말린다. 종운은 그런 그들을 표정 없이 바라봤다. “너!!! 너는 여기서 백 번 절하고 통곡해도 모자라 이 새끼야!!!!! 그딴 식으로, 가식적으로 예의 차릴 거면 여기 뭣 하러 왔어?!!! 누가 오랬어 이 개새끼야!!!!!!” 반쯤 지훈에게 안겨서 등 뒤로는 준형을 두르고 한성이 소리 질렀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주 저앉은 모습으로도 그는 분한지 끝까지 외친다. “김종운, 그만 가라. 와줘서 고마운데.. 니가 오래 있을 데가 아닌 것 같다.” 한성을 토닥이며 지훈이 말했다. 이제는 지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한성, 한성의 뒤에 앉아 종운을 노려보고 있는 준형, 그들을 보며 수근 대는 많지 않은 조문객들. 종운은 그들을 한 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가운데 놓인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봤다 . 사진 앞에 몇 송이 놓인 하얀 국화꽃들이 그렇게나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발걸음을 돌려 나가는데 ‘저 새끼 누가 부른 거야? 형이야? 왜 불렀어!’ 하는 준형의 말소리가 들린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종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세한 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욕하고 비난 하던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계속해서 들린다. 잘했다는 거 아니야. 지금 누구보다 내가 싫


은 건 바로 나라고. 손에 꼭 잡고 있으라고 쥐어주고 간 생명줄을 허무하게 바람결에 날려 버린 기분, 그걸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건 나잖아. 미안해.. 하정현.

“형, 형!!” “?!!” 종운이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세찬 숨결이 뱉어져 나온다. 종운은 숨을 몰아쉬며 컴컴한 방을 둘러봤다. 부스럭대며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더니 램프를 켠다. 노란 불빛이 사방 을 비추자 한결 이 순간이 현실답다. “무슨 꿈을 꾸기에 그러는 거야? 어, 형 괜찮아? 형 울었어??” 성진이 놀라며 종운에게 가까이 다가앉는다. 종운은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흥건하게 배 어나오는 눈물이 손바닥을 타고 흐른다. 어째서 울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슬픈 감정에 흠 뻑 취해 남은 울음이 자꾸만 소리 없이 터져 나온다. “안 좋은 꿈 꾼 거야?” “......” “괜찮아. 이제 괜찮아 형.” 성진이 종운을 안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종운은 성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하다. 왜 우는 지도 모르는데 자꾸만 눈물이 난다. 울음을 삼키며 온 몸을 떠는 종운을 성진이 안 타까운 얼굴로 더 세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 “......” “괜찮아.” 성진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아. 모든 게 다 괜찮아. 하고. 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아 성진아. 괜찮지 않은 것 같다 나. 이번만큼은. 내가 괜찮지 않 아..

* * *

규현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답지 않던 그, 나답지 않던 나,


그렇게 대면했던 그 날 이후로 새로운 만남인 듯 그와 나는 서로를 경계한다. “보고..싶었어요.” 규현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충분히 뜸을 들였다. 다음엔 무슨 말을 할까, 오랫동안 생 각하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단어를 고르고 또 하나 더 고르고. “그렇게 그냥 가버려서 죄송했어요. 그 때, 제가 너무 과했어요.” “......” “종운씨 곤란하게 해드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괜찮아.” 종운도 말을 한다. 그 날의 일을 하나씩 하나씩 사과하는 그에게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니 가 미안할 것이 뭐가 있어. 전부 다 맞는 말이었던 것을. 네 말이 다 맞았어. 단지, 그것이 너무 내 눈앞에 바로 들이밀어져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어. “잘 지내셨어요? 마르신 것도 같고.” “그런가. 너도 조금 말랐다.” 규현답지 않은 극존칭, 거기에 종운은 지극히 종운다운 단답형으로 대답을 한다. “......” “......” 본론이 나와야 하는데..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는데 아직 서론도 다 마치지 못했다. 정말로 묻고 싶은 얘기, 정말로 해주고 싶은 말들, 그런 것들은 빙 둘러 언급하지 않고 자꾸만 의 미 없는 대화로 시간을 채운다. 이 대화가 모두 끝날 때까지 너와 마주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좋겠지. “제가.. 드린 말씀. 생각 해보셨어요?” “......” “하하. 아.. 종운씨가 그렇게 계속 말을 안 하면 제가 조금 무안한데..” “......” “저는 사실. 대답 들으러 나온 거니까..” 종운의 입술이 동글게 말렸다. 저것이 내가 아는 규현이었다. 어색한 몸짓에 몸 둘 바를 모 르는 표정, 허술한 손놀림까지. 트렁크에 머리 박고도 매번 같은 대사를 하며 엉뚱하기 짝 이 없는 바로 그 조규현. 너였다. “규현아. 나는.. 성진이에게 그 날의 일들 말하지 않았어.” “......” “앞으로도.. 말하지 않으려고 해.”


“......” “규현이 니가.. 말 할 거니?” “......” “......” “...아니요. 말하지 않을 거예요.” “왜...?” “종운씨가.. 그러지 않길 원하니까.” 규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까맣고 맑은 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종운을 바라본 다. 죄책감이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굵은 송곳으로 가슴을 찔러대는 그러한 통증을 속으로 삼키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규현도 함께 아련하게 미소 지 었을 때, 종운은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어째서 그는 그렇게 맹목적이고 하나밖에 모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순수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할까. “미안해.” 내쉬는 숨결에 그 말이 새어나와 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 서 쓰게 웃으며 종운이 그렇게 속삭였다. 규현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 는 그 사과에 규현은 아무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활짝 웃지도 않는, 그렇다고 울지도 않는 규현의 얼굴을 한참을 마주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한 곳에 고정된 듯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로 흔들림이 없던 눈동자가 서서히 움직인다. 머 리. 이마. 눈. 코. 입. 손. 그의 시선이 다시 종운의 것과 마주쳤을 때 규현은 입술을 움직 여 가지런한 이가 하얗게 들어나도록 활짝 웃었다. 오른쪽 턱 쪽에 살짝 생기는 보조개에 종운의 시선이 머무른다. 지난 날 규현이 잘 때, 살짝 입을 맞춰 본 그의 보조개.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응.” “종운씨.” “응.” “종운..씨.” “응..” “..종운..씨.” “...응, 규현아.” “...사랑해요.” 뒤돌아 걷는 그를 보며 속삭인다.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