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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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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년을 회고하며'의 45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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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선교협력국


제25호

한국에서의 "#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나의 자서전적 회상 제25호에서 나는 1962년부 1965년까지 시기에 주로 치중하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내가 지난 24호에서 쓴 것을 다시 읽어본 후에 나는 몇 가지를 첨가할 필요를 느꼈다. 그 첫 번째는 “향나무집 식구들” 텔레비전 프로그램 의 극본을 33차례에 걸쳐 집필한 극작가 주태익 선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현재 서울에 위치한 중앙루터교회 주대범 장로의 부친이다. 그는 1959년 11월에 처음 방 송한 루터란아워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이것이 인생이다" 의 극본을 써 수상을 하기 리머 선교사 부부와 딸 켈리와 아들 마이클; 1966년 3월.

도 한 뛰어난 작가였다. 주태익 씨는 텔레비젼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같은 수준의 재능 과 전문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64년과 1965년 당시 초기 시대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녹화하는 일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들은 서울에 있는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기획되고 사전 녹화되었는데, 비디오 테이프에 녹음된 이 프로그램은 서울에 새로운 설립된 중앙/동양 텔레비전 방송국과 또한 부산에 있는 새로운 “네트 워크” 지방 방송 국을 통해서도 방영될 것이었다. 홍콩에서 수입한 암펙스(Ampex) 상표의 비디오 테이프는 당시에는 최고 수준의 테이 프였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30분짜리 프로그램을 위

왼쪽부터: 한국루터란아워 라디오 다큐멘터 리 프로그램 극작가, 그리고 텔레비전 시리 즈 “향나무집 식구들” 33회분의 희극을 집필 한 주태익 씨,한국루터란아워 창설자이며 책 임자였던 지원용 박사, 서울 기독교방송 (CBS) 프로듀서 홍석진 씨; 1960년 3월.

해 약 5cm (2인치) 넓이의 비디오 테이프를 담는 큰 릴을 사용해야 했다. 내가 기억하 기로는 은색 금속 릴의 둘레는 약 1피트에 달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비디오 녹화 과정에 있었다. 당시 하드웨어 장비로는 녹화 중 한 중간에 멈추고, 그 곳 장면을 수정한 다음 이어서 녹화를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했 다. 결과적으로 중간에 실수가 있거나 “NG” 혹은 “No Good”이 발생하면, 30분짜리 프로그램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여기에 따른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녹화될 이야기를 전개할 때, 극작가는 모든 배우들 이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신경을 써야 했고, 카메라가 계속 돌아갈 때 한 세트에서 다른 세트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각본을 계획하고 쓸 때 실제로 이러한 사항 들을 고려해야만 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이런 일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맨 왼쪽에 김남 씨가 주태익 씨와 이경배 장로, 그리고 리머 선교사와 함께 앉아 있다. 김남 씨 의 극본 “어떤 크리스마스”가 1972년 한국루터 란아워가 수여하는 크리스마스 특별 드라마 1 등상과 상금을 받았다. 김남 씨는 계속해서 훌 륭한 극작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극작가 주태익 선생은 라디오 드라마 극본의 경우 이미 상당히 전문성을 인정받았지 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우에도 뛰어난 평을 받았다. 그는 라디오 극작가로써뿐 아니 라 텔레비전 극작가로서도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우리 KLM의 텔레비전 선교를 위해 참으로 복된 존재가 되어 주었다.


연세대 한국어학당 2년 과정을 졸업한 후, 나는 KLM 텔레비전 선교에 시간을 더 많 이 낼 수 있었다. 동시에 어학 가정교사를 통해 어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내가 지원상 목사 신학공부 과정 중 두 과목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을 때 이렇게 계속한 어학 공부 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루터교 선교부(KLM)가 직면해야 했던 도전들 가운데 중요한 것 은 어떻게 한국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라는 선교 주태익 씨, 선교사 리머, 그리고 지원상 총회장 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여자와 앉아 있 다. 테이블에는 한국루터란아워가 상금을 걸고 주최한 특별한 시즌 텔레비전 극본 경선에 제출 한 원고들이 쌓여 있다; 1970년 가을.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교회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한국 선교 현장에 늦게 도착 한 교회였다. 1880년대 선교를 시작한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 약 75년이나 늦은 후였다. 앞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루면서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에 집중하며 한 국 교회 전체를 위해 “플러스”가 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우리 는 한국 내 다른 교회들과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아직 전체 인구의 95%에 달 하는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보다 큰 맥락의 기독교의 노력을 강화하고 지 원하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KLM 차원에서 “옳은 것을 행하려는 노력”과 관련된 어려움과 좌절들은 개인적인 차 원에서도 느껴졌다. 내가 미국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회 선교국으로부터 받은 근본적

복구되기 전의 수원성 모습; 1964년

인 소명은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었고, 때문에 언어를 배우는 일이 첫 번째로 주어진 임무였다. 그러나 언어 공부를 마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가? 나는 당시 한국적 상황에서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를 극대화 하고자 한 KLM의 원 래 선택에 대해 재고할 생각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KLM은 매스 커뮤니케이션 선교 를 한국루터란아워(KLH)의 다큐멘터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하 였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의 후속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기독교 통신강좌는 대단한 성

복구되기 전의 수원성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 1964년

공을 거두었다. 컨콜디아사를 설립하고 도서 출판 선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단지 책들만 취급하지 않고 “새생명”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더 의미 있는 일도 발전 시켰다. 텔레비전 선교는 또 다른 새로운 혁신적인 복음 전도 방법이었다. 그리고 우 리는 그 텔레비전 선교를 위해 미국 미주리 시노드와의 밀접한 관계 가운데서 그들의 경험과 전문성과 자료들을 잘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의 모든 선교들을 우리는 한국루터교 선교부(KLM)의 “A 어프로치”(A 접근방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선교 프로그램들은 놀라울 정도의 긍정적인 반 응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다음에 천국에 가면 KLM의 A-어프로치 방식의

복구되지 전의 수원성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또 다른 사진; 1964년

선교들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된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 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선교 활동들은 한국 전체 교회를 위해 엄청난 축복이 되었 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 방식은 직접적으로 혹은 우선적으로 루터교파에 속한 지역 루터 교회 설립과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 교회 개척 선교를 KLM은 “B-어 프로치”라고 불렀다. 사실 B-어프로치가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할 때 생 각되는 전통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특별한 선교 지역에 외국 선교사들이 파송되면 그 들은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성령이 그 복음 선포와 더불어 역사함

능이리 마을 회관;1964년

으로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역 교회를 형성한다. 곧 자국 의 목회자들과 다른 교회 사역자들을 양육하는 지도자 훈련이 필요하게 되고, 그들로 인해 그 지역의 교회가 성장하고 한 교파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KLM의 “A-어프로치” 선교 방식은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분명 그러한 우 리의 선교 활동들을 축복하셨고, 그 활동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다른 교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도 직접적으로 큰 혜택을 입었다. 또한 내가 믿기로는 다른 교파의 많은 지도자들이 한국루터교 선교부가 하는 사역과 그 사역 마을 회관 앞에 서 있는 소년들; 1964년

방식을 크게 존중하고 가치 있게 여겼다. 한국루터교 선교부는 A-어프로치와 B-어프로치 선교 방식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 다. B-어프로치가 대부분 선교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이었 다. 선교사들을 파송한 선교 본부와 지원 교회들은 물론 특별히 새로운 교인들, 새로 세워진 교회들, 수세자들, 매주 예배 참석 인원 등과 같은 통계 숫자를 듣고 보고 싶 어 한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 KLM은 그런 특정한 숫자나 보다 전통적인 선교에 대한

회관 내부 모습. 벽에 창호지 위에 쓴 찬송가 가사와 조그만 교습용 사진이 붙어 있다; 1964년

보고에 대해서는 말할 것 별이 없었다. 한국말로 예배를 드리는 유일한 교회는 지원 용 박사가 한국에 돌아와 선교팀에 네 번째로 합류하고 5개월이 지난 후인 1959년 에 서울 시내에 세워진 임마누엘 교회였다. 지역 교회를 세운 주된 목적은 물론 선교 사 가족과 특별히 선교부에서 일하는 직원들 가족들이 예배를 드릴 지역 루터교회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임마누엘 루터교회는 한국말로 예배를 드렸는데, 나와 내 아내는 미군 채플에서 설 교를 맡는는 등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 그 임마 누엘 교회에서 나는 내 딸 켈리에게 1963년 5월에 세례를 주었다. 또한 그 교회에서

마을 회관에서 리머 선교사 성경공부와 예 배를 인도하고 있다; 1964년

나는 한국말로 하는 첫 번째 설교를 하였다. 물론 원고 설교, 즉 쓰여진 원고를 읽는 설교였다. 그때는 내가 한국어 학당의 제6단계를 졸업한 후인 1963년 8월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복음 전도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기독교통신강 좌(CCC)를 수료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바틀링 목사와 도 로우 목사도 KLM 선교 초기에 그런 비슷한 선교 활동들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 는 큰 도시보다 시골 지역을 전도하기를 원했다. 그때 당시의 선교에 대해 많았던 비 판의 하나는 선교가 주로 큰 도시에만 집중되고 시골 지역지들은 경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6년 10월 6일 루터대학교(신학원) 부설 루터 연구소가 주최한 루터강좌 때 찍은 사진. 맨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이 손규태 박사이다. 오른 쪽으로부 터 박일영 총장, 엄진섭 루터연구소 소장, 지원용 박사, 초빙 강사 제임스 네스팅엔 박사(Dr. James Nestingen). 이 때가 매년 단기 과정으로 루터대학 교를 방문하였던 지원용 박사의 마지막 한국 방문 이 되었다. 네스팅엔 박사는 루터와 종교개혁 전문 가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학자였다

기독교통신강좌 직원들의 협력과 도움으로 나는 수료한 학생들 등록카드 사본을 입 수했다. 특별히 경기도 수원 지역의 시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등록 카드였다. 그 카드에는 많은 신상 정보들이 있었다. 그것은 컴퓨터로 정리된 것들이 아니었지만, 어떤 마을에 통신강좌 수료생들이 많았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 수첩 일 기를 보니까 나는 그런 시골 지역 전도 방문을 1963년 11월부터 매주 단위로 수행

종로 태화관 예배실에서 찍은 손규태 박사의 결혼 사진; 1964년 8월 8일.

하였다. 그런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나의 한국어 공부를 개인적으로 계속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파트 타임 한국어 가정교사와 함께 하였다. 나는 그를 용산 삼각지에 서 아침 8시 30분 경에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차를 타고 시골 지역으로 가서 기독교 통신강좌를 통해 연결된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 사람들은 한국루터란아워의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다큐멘터리 라디오 방송을 듣고 기독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여 기독교 통신강좌 과정에 등록했던 사람들이었다.


나의 한국어 가정교사로 나와 함께 시골 전도에 갔었던 사람은 손규태 씨였다. 그 당시 그는 신학생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나의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면 서 작은 수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처음 정해진 곳 없이 기독교통신강좌 수료생들을 방문했던 전도 여행에 나와 함께 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능이리라는 한 마을에 정기적 으로 매주 일요일 아침 마을 회관에서 모인 모임을 위해서도 나를 도와 주었다. 그 마을 자갈로 덮여 있었던 한 한국 시골길의 모습; 1964년

에서 매주 모인 주일 아침 방문은 1965년 1월까지 1년 여 동안 계속되었다. KLM이 지 원용 목사 후임으로 나를 왕십리 교회 책임 목사로 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십리 교회는 한국에서 두 번째 세운 지역 루터교회로서 지원용 박사가 창립하였다. 새 로운 임무를 맡게 된 이후 나의 지역 루터교회 활동과 목사로서의 사역 전반은 왕십리 교회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고, 그 사역은 1966년 6월, 내가 일 년 동안 첫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떠날 때 존 하디 선교사가 나의 뒤를 이어 왕 십리 교회의 "책임목사"가 되었다. 한국어 개인교사로 나를 도와주었던 손규태 씨는 내가 1966년 6월에 미국으로 휴가를

한국 농촌의 초가집 모습; 1964년

떠난 후에 KLM 정규직원으로 얼마 동안 근무를 하였다. 그리고 후에 독일에 있는 한 유 황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한 농부; 1964년

명 대학의 한 유명 교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런 소식들은 내게 큰 기쁨이 되었 다. 2006년 10월 루터대학교 부설 루터연구소에서 주최한 루터강좌에서 강사 제임스 네스팅겐 박사 강연하였을 때 두 논찬자 중 한 사람이 손규태 교수였다. 내가 그때 그를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사진첩에는 손규태 박사가 서울 YMCA 근처, 기독교서회와 종로서적 빌딩 건너편 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가졌던 그의 결혼식 사진이 있다. 그리고 나는 또한 그가 루터강 좌에 참석했던 중앙루터교회에서 찍은 그의 사진도 간직하고 있다. 덧붙여서 흥미로운 일은 나의 개인 한국어 교사로 도와주었던 사람들 이외에도 당시 KLM 선교사들의 개인교사들 대부분 혹은 상당수가 신학공부를 하던 학생들이었다. 그 리고 그들 중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 대학에서 공부를 해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나의 개인교사 손규태 박사 외에도 도로

황소를 이용 해 논을 갈아 모심기를 준 비하고 있는 모습; 1964년

우 목사를 도왔던 김 박사라는 사람이 있었고, 바틀링 목사를 도왔던 민 박사, 라우어 선 교사를 도왔던 박 박사를 기억할 수 있다. 그 사람들 모두 여러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나 혹은 다른 중요한 교회의 지도자들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통신강좌 수료생을 접촉하고자 하였던 나를 안내해 주고 도왔던 손규태 박사와 나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었다. 마을들을 돌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방문한 후에 우리 는 특별히 가능한 대상자들이 많고 주일날 모임을 갖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추수하는 모 습을 지켜보 든 두 소녀; 1964년

지는 한 마을을 지정하였다. 그 능이리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그 마을의 사람들은 마 을 회관에서 모임을 갖는 일을 허락해 주었다. 그 장소는 보잘 것 없었고 모임 장소로는 근사하지도 그럴 듯하지도 않았다. 주일 아침 모임에는 주로 나 혼자 갔다. 나는 미리 기도문과 성경 공부 자료를 준비해 갔 다. 성경 공부는 주로 성경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나는 그 이야기에 관한 포스 터나 큰 사진을 함께 가지고 갔고, 또 따라 부르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찬송을 골랐다.

한 소녀가 등에 전통적인 한국 방식으로 어린 동생을 업고 있 다; 1964년 여 름

찬송을 위해 나의 한국어 개인교사가 창호지 위에 검정색 마커로 가사를 써 주었다. 그 것을 나는 회관 벽에 붙여 사용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찬송가”였다. 주 중에 는 나와 나의 개인교사 둘 다 전도 방문을 하였다. 여러 번 우리는 그 마을에서 점심에 초대를 받곤 하였다.


기독교통신강좌 수료생들을 처음 접촉하는 모임을 주선할 때 우리는 주로 수원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 마을에서 사람들과 접촉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시도한 진지하고도 신중한 전도 활동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 국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 환경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 황소로 모심기를 준비하는 모습; 1964년

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개방적이었고, 그리고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들은 또한 대단히 관대하여서 우 리가 그 마을에 조금 오래 머물게 될 경우 우리를 그들 집에 초청하여 점심을 대접하곤 하였다. 나 자신 미국의 위스컨신 목장에서 태어나 자랐다. 때문에 한국 농촌이 어떠한지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 운 일이었다. 그때는 1960년대였기 때문에 당시 한국 농촌은 근대화나 기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모심기는 손으로 일일이 해야 했고, 추수할 때도 손으로 벼를 베어야 했다. 벼를 타작할 때나 까부를 때는 특별한 도구들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근육을 사용해서 일을 하였다. 모를 심기 전에

공동으로 모심기를 하는 모습; 1964년 봄

논을 갈아 엎을 때는 황소를 이용했다. 그러나 추수 과정의 대부분은 전기 모토나 가솔린 엔진들의 도움 을 받지 못했다. 나는 당시, 특별히 능이리 마음을 방문했을 때 찍은 흑백 사진과 칼라 슬라이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 리고 그때 농사를 지을 때 한국 농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도구들과 장비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 가 많았다. 손잡이가 긴 도리깨를 사용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다른 특별한 도구를 사용할 때 리듬 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거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도구들은 쉽게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었다.

추수 때가 되면 낫으로 벼를 베었 다. 이 낫은 한국어의 첫 자음 “ㄱ”자 모습을 하고 있다; 1964년

그러나 그런 한국 시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볼 수 있는 가장 뜻있고 두드러진 모습의 하나는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 일하는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모심기할 때 단 한 사람만 논에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황소에게 쟁기를 달아 쟁기질을 할 때는 물론 한 사람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일들은 사람 들이 함께 협력하여 함께 돕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공동으로 모심기를 하는 모 습; 1964 년봄

나는 기독교통신강좌를 이용해 그러한 식으로 전도 여행 방식으로 농촌을 방문하였던 일에 대해 재미있 었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농촌을 방문하였던 일은 기독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우리의 선교 노력의 결과를 이용할 수 있었던 뜻 있는 경험이었다. 내 개인적으로 그런 기회들은 나의 한국어를 보다 유창하게 말하고 싶었던 나의 소망과 한국의 문화와 관습을 보다 폭 넓게 배우고 싶어 했던 나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데도 중요한 기회가 되어 주었다.

특별히 친절 했던 이 할머 니가 고무신 을 한 쪽만 신고 키질은 하고 있다; 1964년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26호를 기대해 주세요

한 여인이 다른 방식으로 타 작을 하고 있다; 1964년 발로 밟아 작동을 하는 타작기를 이용해 여러 사람이 함께 타작 을 하고 있다; 1964년

이 젊은 사람은 능숙하게 도 리깨를 다루고 있다. 도리깨 는 잘못 다루면 다칠 수 있는 위험한 도구이다; 1964년

한 할머니가 깨 수확을 돕고 있다; 1964년남부

다시 돌아온 응답하라1961 제25회  
다시 돌아온 응답하라1961 제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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