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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타인을 만나려 하는가?

만남과 관계형성 사회적 존재라는 우리 인간은 늘 누군가를 만난다.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때로는 상처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좀 있고 싶다”라고 말이다. 현대 사회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지니고 있은 의무마저 더해져서 그 삶의 무게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SNS 가 발달하면서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해지고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사람들은 나 혼자 있다는 고립감을 생각보다 오래 견디지 못한다. <출처: gettyimages>

그런데 그 연결이 만약 사라진다면? 즉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 고립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크다.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의식주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로 펜션에서 홀로 어떻게(또 얼마나) 지내는가에 대한 실험을 방송한 바 있다. 처음에는 최소 일주일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참가자들은 채 이틀이 지나기 전부터 외로움을 토로하며 때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실험 참가를 중도에서 포기하기도 한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이 옆에 없다는 사실은 이만큼 힘든 것이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기에 해당되는 감각이 없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헬렌 켈러(Helen Leller)가 남긴 말은 타인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설명해 준다.

“Being deaf was worse than being blind because…blindness isolated her from things, but deafness isolated her from people.”(듣지 못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행하다… 왜냐하면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들로부터 나를 고립시키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나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Helen Leller)


태어나서부터 줄곧 작은 방에 갇혀 지내다가 1970 년 13 세의 나이로 미국 LA 에서 발견된 지니 와일리 <출처: Wikipedia>

실제로 헬렌 켈러는 후일담을 통해 자주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음이 가장 괴로웠노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극히 일부지만 살아가면서 타인을 전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행동과 말이 엄청나게 기이할 수밖에 없다. 유명한 예가 태어나서부터 줄곧 작은 방에 갇혀 지내다가 1970 년 13 세의 나이로 미국 LA 에서 발견된 지니 와일리(Genie Wiley)이다. 이후 집에서 탈출한 지니는 사회복지 시설에 맡겨졌고 각계각층의 노력이 뒤따랐지만 끝내 정상적인 언어와 행동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형무시설의 수감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피하고 싶은 내부처벌은 독방이다. 왜냐하면 이 독방에서는 극단의 불안으로부터 오는 공포 심지어는 환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왜 우리는 끝없이 사람들을 만나기 원할까? 그렇다면 나에게 먹을 것이나 집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사람을 우리는 끝없이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말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공통적인 사항이 있다. 바로, 만남과 관계가 감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싶어할까? <출처: gettyimages>

인간에게는 다양한 감정 즉 정서들이 있다. 정서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행복과 기쁨과 같이 경험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슬픔이나 불안처럼 그 반대인 것들도 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정서든 나 혼자만으로는 혹은 나와 인간 아닌 다른 대상과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고 적절하게 느끼기가 어렵다. 이는 대부분 다른 인간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서를 제대로 발달시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정서와 정서의 공유인 공감을 통해서 한 문화 내에서 이전 세대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받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엄마가 화내는 모습을 보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아가게 되며,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양한 정서를 경험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 사회나 집단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역할을 인식하게 된다. 정서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예이지만 무연민, 무공감, 무정서인 상태가 지속되면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단적 인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상대적인 역할을 맡고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삶의 불확실성을 해소해간다. <출처: gettyimages>

더욱 중요한 점은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부의 중요한 욕구들이 아주 잘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불확실함을 줄여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본 캐스트에서도 몇 번 언급한 바 있지만 불안을 참으로 싫어하는 인간은 불안을 극대화하는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본능적으로 피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타인들과 같이 있으면서(더 정확히는 타인과 의사소통을 계속 해나감으로써) 그 불확실함이 상당부분 해소가 된다. 왜냐하면 이른바 상대적 역할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나보다 많이 어린 아동과 함께 있으면 나의 역할은 ‘보호자’이고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과 함께 있으면 ‘안내자’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정해진다. 따라서 불확실한 세상에서 할 일들과 생각해야 할 것들이 분명해 지는 상황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우두커니 있을 때 우리가 문득문득 나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궁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상대적 관점에 기초해 자신을 평가하거나 위치를 잡으려 하는 것에 익숙한 인간에게 타인의 존재는 불확실함을 제거해 주는 좋은 판단의 잣대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이 지닌 이른바 ‘포함의 욕구’도 만남과 관계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가려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상반된 욕구가 있다.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또 행동하려고 하는 욕구와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보호받고 또 지지 받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포함의 욕구는 당연히 후자에 해당된다. 물론 한 인간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강한 소망의 이유는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앞으로 본 캐스트를 통해 인간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과 각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들, 그리고 관련되어 생각해 볼만한 여러 가지 현상들에 관한 심리학적 이야기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개관적 확률보다 느끼는 확률에 의존

확률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우리는 늘 확률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꼭 숫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 ‘거의’, ‘다소’, ‘약간’ 등 수많은 부사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대상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확률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고 또 파악한다. 그리고 이렇게 판단한 확률을 기초로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또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집에 도둑이 들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면 보안업체 서비스를 신청하기도 하고 우리 회사의 신제품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확률이 낮다고 생각되면 무언가 보완 작업을 하거나 출시를 미루기도 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얼마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무수히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확률 판단은 얼마나 정확할까? 그런데 인간의 확률 판단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일기예보처럼 엄청나게 발달된 시스템과 슈퍼컴퓨터의 힘을 통해 나오는 숫자화된 확률 정보를 가지고서도 우리는 내리지 않는 비에 괜히 가지고 나온 우산을 귀찮아하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로 우산 없이 비 내리는 거리를 허둥지둥 뛰어다니기도 해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사실, 정확한 확률 추정은 신의 영역에 해당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우리가 판단한 확률에 근거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심리학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판단이나 추정 중에 확률에 관한 것만큼 취약한 것이 없다.

기대가치가 동일하다는 논리는 주관적 확률 앞에서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출처: gettyimages>

그 중 대표적인 예 하나가 “결합된 사건이 만들어 내는 확률에 대한 과대추정”이다. 가령 큰돈을 잃을 확률이 1/64 게임 한 번을 할 때보다 1/4 의 확률인 게임을 세 번 해서 같은 것이 나왔을 때 그만큼의 돈을 잃을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 큰 긴장감을 느낀다고 한다.1) 후자도 어차피 1/4 을 세 번 곱하기 때문에 결국은 1/64 인데도 말이다. 역으로 당첨확률이 1/64 인 게임을 한 번만 하는 것보다는 1/4 인 게임을 세 번 연속해서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한 마디로 작고 구체적인 무언가가 결합되면 더 강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기회와

그에 따른 확률을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50 만원 당첨확률이 25%인 복권 2 장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100 만원 당첨확률이 25%인 복권 한 장을 가질 것인지를 고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전자의 2 장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자에서는


2 번이고 따라서 작은 무언가라도 더 건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안전하다고 느끼며, 기대가치가 동일하다는 논리는 별 설득력이 없게 된다.

실제 확률과 우리가 느끼는 확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추상적인 1/64 이 쪼개져 여러 개의 1/4 로 구성되면서 각각의 1/4 은 구체적이면서 피부로 더 잘 와 닿으며 따라서 더 두렵고 무언가 더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의 1/64 보다는 세 개의 1/4 로부터 느끼는 감정의 총합이 더 크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명한 보안 전문가인 Bruce Schneier 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유명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무언가를 막는다는 것은 철저히 위험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대상이 지니는 위험 그 자체의 객관적 측면보다는 그 대상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대처방식과 정도가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위험 인식에 작용하는 편향 요인’들이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막는다는 것은 철저히 위험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존한다. <출처: gettyimages>

원시시대에는 어떤 대상의 실제 위험의 확률 혹은 정도와 사람이 실제 느끼는 정도가 상당부분 일치했다. 호랑이, 늑대, 여우, 그리고 다람쥐의 실제 위험 확률이 그것들을 인간이 보는 순간 느끼는 주관적 위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대상이든 극단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너무나도 귀엽고 앙증맞은 소형차라도 시속 100km 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오면 치명적인 살인무기이며, 정말 작은 알약 하나라도 잘못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신이 아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주관적 느낌을 통해서 실제 위험의 확률을 추정해야만 한다. 상당한 불일치가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항공기 여행은 자동차 여행보다 더 위험한가?


비행기 사고와 같이 드물고 장엄한 위험은 운전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인 위험보다 더 크고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출처: gettyimages>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의 결과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실제 통계자료가 알려주는 것과는 정반대로 향하게끔 하곤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 사고와 같이 드물고 장엄한 위험은 운전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인 위험보다 더 크고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론에서 비행기 사고와 관련된 기사를 볼 때 마다 비행기를 탑승하는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이를 방지하거나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통계 자료들은 여행객 1 인당 사망자 수가 자동차에서 훨씬 더 높다고 말해 주고 있다. 범죄도 마찬가지이다. 끔찍한 성범죄나 살인은 대부분 친숙하거나 잘 알고 있는 주위의 인물에 의해 주로 저질러지지만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또한 자기 의지로 시작하고 따라서 자신이 상방부분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스카이다이빙이나 흡연의 위험은 과소추정되는 반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되는 테러나 자연재해의 공포는 오히려 과대추정되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보안 전문가인 Bruce Schneier 는 이러한 주관적 확률의 과대/과소 추정이 인터넷 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즐겁고 행복한 내용들로 주로 채워져 있는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걱정이 극단적으로 감소하여 평상시보다 자신의 중요한 정보를 더 쉽게 흘려 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대단히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들이기보다는 대부분 우리의 일상생활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보다 계단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로 인해 결국에는 죽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총기에 관한 위험에는 어떻게든 대비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집 계단에 깔려 있는 낡아 미끄러워진 카펫에 대해서는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도 미국인들과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위험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확률을 ‘느낌’에만 의존해서 보려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그럴 것 같은 것과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은 그 느낌이 정말 맞는지 한번쯤 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확률의 판단에 사용하는 근거들 중 상당수가 그 대상의 실제 확률과 무관하거나 독립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 2013.07.22.

주석 1 Cohen J., Chesnick E. I., Haran D. (1971), Evaluation of compound probabilities in sequential choice. Nature, vol. 232, pp. 414 – 416.


내가 해봐서 안다는 생각의 함정

생생한 상상에 지배당하는 인간 돌이켜 보면 주위에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다. “내가 해 봐서 안다” 혹은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러이러하니 내 말을 따라라” 등. 대부분 자신의 예전 경험을 강조한 말들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도 인간이 저지르는 다양한 실수와 오류의 함정들과의 연관성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한 것이 이른바 ‘내 생각 속에서 생생한 것’이 실제 세상에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착각이다. 즉, ‘생생함의 노예’가 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생함의 노예?

영어에서 K 로 시작하는, 즉 K 가 첫 번째 자리에 오는 단어와 K 가 세 번째 자리에 오는 단어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출처: gettyimages>

재미있는 실생활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영어에서 K 로 시작하는, 즉 K 가 첫 번째 자리에 오는 단어와 K 가 세 번째 자리에 오는 단어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전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정답은 후자이다. 이 당황스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다. “정말? 그런 단어가 그렇게 많아? 어디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렵사리 떠올리는 단어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어려운 단어들이다. 예를 들어, acknowledgment 와 같은 단어이다. ask, cake 혹은 bakery 와 같이 평소에 잘 쓰이고 쉬운 단어들이 오히려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렵게 생각할수록 어려운 단어가 그나마 더 빨리 떠오르는 것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영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더 나아가 영어 원어민들일수록 이런 틀린 대답의 빈도가 더 높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영어에서 [ing]로 끝나는 단어가 더 많을까요? 아니면 끝에서 두 번째 문자가 n(즉, _n_)인 단어가 더 많을까요?”라는 질문에도 무심결에 ing 로 끝나는 단어가 더 많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한다. 그런데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의 경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1)


주석 레이어창 닫기 외부 세상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건 간에 나한테 쉽게 머리에 떠올라 생생하면 우리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gettyimages>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틀린 대답을 할까? 잘못 선택한 답이 내 머릿속에서 더 생생하기 때문이다. 생생함? 이것은 무엇인가? 전적으로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다. 외부 세상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건 간에 나한테 쉽게 머리에 떠올라 생생하면 우리는 그것이 정답이고, 더 많고, 혹은 더 올바르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무조건 정답이라는 것이다. 물론 틀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 생생함이 어떤 판단을 할 때 내가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잣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성은 많은 경우 확률적 상식을 뒤집는 판단에 다다르도록 우리를 내몬다. 사람들에게 물어본다.2)

주석 레이어창 닫기주석 레이어창 닫기“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면 핵전쟁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이 질문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시큰둥하다. “에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겠어요?”라는 정도이다. 그런데 다음 질문에는 양상이 달라진다.

“미국과 러시아간에는 핵전쟁 의도가 없었지만, 이라크, 리비아, 이스라엘 또는 파키스탄과 같은 제 3 국의 행동에 의해 양국 간에 오해가 발생하여 전면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일단 사람들의 반응부터가 달라진다. “오호,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네요.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조심해야겠어요”와 같은 반응이 가장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첫 번째의 경우에서보다 두 번째의 경우에 핵전쟁의 발발 확률 추정을 더 높게 한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의 경우는 두 번째를 완벽히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도 어찌 되었던 간에 첫 번째의 전면 핵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두 번째의 시나리오가 훨씬 더 구체적이며 따라서 더 생생한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법정공방에서 간단히 말을 하면 될 것을 변호사들이 굳이 “선혈이 낭자한”이라든가 “두 눈을 부릅뜨고”와 같은 표현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재판부나 배심원들로 하여금 가능한 최대로 생생한 그림을 그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혹은 “내 경험에 의하면”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나의 생생한 경험을 이 세상 모든 경우에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면서 말이다.


꽤 많은 의견 충돌의 현장을 보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의 충돌인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갈등 당사자들이 지니고 있는 ‘생생한 경험과 기억의 충돌’인 경우가 허다하다. <출처; gettyimages>

따라서 내 머릿속에서 생생하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게 해주는 이점이 있지만 그 대가로 틀린 판단이나 남의 생각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과일반화의 오류를 치르게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이 생생함의 노예라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우리 주위의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에 보다 지혜롭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의견 충돌의 조율’이다. 꽤 많은 의견 충돌의 현장을 보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의견의 충돌인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갈등 당사자들이 지니고 있는 ‘생생한 경험과 기억의 충돌’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의견은 그 생생한 경험과 기억의 결론으로서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그 결론이나 의견을 왜 상대방이 고집하느냐가 중요한데 고집스럽게 꺾지 않는 이러한 강경한 의견들은 대부분 그것들을 뒷받침할만한 개인적인 경험이나 에피소드들이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견 자체를 맞대고 싸워봤자 별 소용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원인이 아닌 결과를 놓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견 뒤의 에피소드를 보자

상대방의 의견은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경험한 에피소드는 보다 너그럽게 이해를 해 줄 수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나의 에피소드도 상대방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해를 해 줄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의견을 만들어 낸 뿌리인 각자의 생생한 기억과 경험을 들어봐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은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경험한 에피소드는 보다 너그럽게 이해를 해 줄 수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나의 에피소드도 상대방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이해를 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에피소드들 모두 얼마든지 인간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쉽게 납득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의견은 세상에 많지 않아도, ‘아...그럴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생생한 경험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과 그 자리에서 바로 의견을 조율하기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각자 생각의 ‘결과’ 자체만을 놓고 무언가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장소나 환경을 옮기거나 바꿔보면서 상대방의 개인적인 과거경험을 차근차근히 들어보면서 왜 상대방이 그 의견에 최종적으로 도달했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물론 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를 위한 시간을 아까워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의견 충돌 혹은 충돌 이후의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데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생생함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생생함을 역이용’하여 보다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느냐. 대화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부분이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풀어나갈 수 있는 세상사의 궁금증일 것이다. 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 2013.07.01.

주석 1 Tversky, A., & Kahneman, D. (1973). Availability: A heuristic for judging frequency and probability. Cognitive Psychology, 5, 207–232. 2 Tversky, A. and Kahneman, D. (1983). "Extension versus intuitive reasoning: The conjunction fallacy in probability judgment". Psychological Review 90 (4): 293–315.


최적이 아니라 이유대기 쉬운 것을 선택한다.

이유 기반 선택 인지심리학자들은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상대비교를 통한 차이, 그리고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에 기초한 차이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종류의 차이점을 우리는 곧잘 혼동하기 때문에 ‘차이(즉 변화)’를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결과를 받아 들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 두 가지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같다’ 혹은 ‘비슷하다’는 느낌에서부터 출발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아래를 보자. 어떤 쌍이 서로 더 유사한가?

‘데스크탑 PC 와 고양이’ 간의 차이점? 둘의 비교 자체가 약간 황당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출처: gettyimages>

사람들의 반응은 ‘뭐 이런 걸 물어보나’ 싶을 정도의 코웃음이다. “당연히 데스크탑 PC 와 노트북이 서로 더 유사하지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쌍 A 에서보다는 쌍 B 에서 차이점을 더 많이 볼 수 있겠네요?”라고 말이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겠죠”라고 대답한다. 정말 그럴까? 결과는 대부분 정반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2 분을 드릴테니 둘 간의 차이점을 최대한 많이 써보시죠”라고 주문을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데스크탑 PC 와 노트북’ 간의 차이점들을 어렵지 않게 써 내려간다. 크기, 사양, 형태 등 그 측면들도 다양하다. 그런데 같은 시간을 주고 사람들에게 ‘데스크탑 PC 와 고양이’ 간의 차이점을 써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약간 당황해 하면서 쉽게 써 내려가지 못한다. 딱히 비교할 만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꽤 흥미로운 역설이다. 왜냐하면 더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대상들로부터 차이점을 더 많이 그리고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더 가깝고 유사한 관계에 있는 대상들로부터 차이점을 더 강하게 느끼고 따라서 갈등을 겪는 일도 많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차이를 우리나라와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의 사이에서 더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한 예일 것이다. 한 마디로


공통점이 많이 존재할수록 그 공통점에 기초한 차이, 그리고 더 나아가 비교를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통점이 많이 존재할수록 비교를 더 쉽게 할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그렇다면 비교가 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나의 판단과 결정에 좋은 ‘이유’ 혹은 ‘구실’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심리학자들은 바로 이점에 주목을 하고 있다. 연구를 종합해 보자면 사람들은 최적의 것 혹은 질적으로 다른 장점을 지닌 무언가를 선택하기 보다는 비교가 쉽고 따라서 내 결정의 이유를 쉽게 말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선택의 본말이 전도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우리 자신과 주위에서 이렇게 ‘이유를 가장 잘 댈 수 있을만한’ 것을 선택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내 선택이나 결정이 누군가에게 의해 언젠가는 평가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상대비교를 위한 차이와 질적인 차이 자, 그렇다면 다시 데스크탑 PC, 노트북, 그리고 고양이의 예로 돌아가보자. 데스크탑 PC 와 노트북 사이에는 키보드, 스크린, CPU, 하드 디스크 등 다양한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통점들에 기초한 크기, 해상도, 용량 등의 차이들이 쉽게 눈에 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들은 이른바 ‘상대비교’를 하기 쉬운 측면들이다. 하지만 데스크탑 PC 와 고양이 간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렵사리 떠올린 차이점들은 대부분 질적인 차이들이다. 인공물과 생명체 등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비교를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이유-기반 선택’의 경향은 개인보다는 집단일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집단 구성원들 간의 반목과 대립을 줄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출처: gettyimages>

재미있는 것은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하는 염려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상대비교에 집착하고 따라서 상대비교에서 우위에 있는 대상이나 인물을 선택하려는 경향을 더 강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이유-기반 선택’이라고 부른다.1)

주석 레이어창 닫기왜냐하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유’를 말하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염려가 적은 경우에는 질적인 차이점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이제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끌리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와 염려를 크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구입했을 때 그 가격이 적절했느냐 보다는 구입할만한 좋은 이유가 있었는가가 훨씬 더 판단하거나 생각하기가 쉬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2)

주석 레이어창 닫기어찌됐던

간에 종합해 보면, 여러 모로 사람들은 대상 자체보다는 그 이유에

집착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물론 이유도 판단을 내리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겠지만 그 이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측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택의 이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상이나 인물을 덥석 선택해 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기반 선택’의 경향은 개인보다는 집단일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3) 왜냐하면 집단 구성원들 간의 반목과 대립을 줄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집단이나 조직 내에서 토론이나 협상 이후에 오히려 반목과 대립이 더 심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이제 분명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각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질적으로 다른 무엇일 때 더 크게 나타난다.

주석 레이어창 닫기그렇다면

이때 무언가 대안이 필요한데 이 대안들은 언어적으로 매우 유창하게

설명이 되는 것일수록 더 잘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즉 이제는 상대비교가 쉬운 측면들이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택이나 결정의 책무가 주어진 사람들은 이러한 이른바 ‘말로 표현하기 쉬운 이유’를 자꾸 찾아 헤매기 십상이다.4)

주석 레이어창 닫기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이 끌리는 선택


소비자들은 이유를 잘 댈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끌리는 것’이나 ‘꽂히는 것’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결론적으로 말(즉 이유)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좋은 것들을 우리가 자주 놓치고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신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회의는 그 제품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로 표현해야 하며 따라서 말하기 쉬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이유를 잘 댈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끌리는 것’이나 ‘꽂히는 것’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말은 인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 전달의 수단이지만 그렇기에 의미 자체에 인간을 지나치게 집착시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게도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유’이다. 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 2013.05.27.

주석 1 Shafir, E., I. Simonson, A. Tversky. (1993). Reason-based choice. Cognition 49 11–36. 2 Hsee, C. K. (1999). Value-seeking and prediction-decision inconsistency. Psychonomic Bulletin and Review. 6 555–561. 3 Barber, B., Heath, C., & Odean T. (2003), Good Reasons Sell: Reason-Based Choice Among Group and Individual Investors in the Stock Market, Management Science, Vol. 49, No. 12, 1636–1652. 4 Lerner, J. S., Tetlock, P. E. (1999). Accounting for the effects of accountability. Psychological Bulletin, 125, 255–275.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해 판단할 때 그 대상에만 집중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이 대상에 대한 느낌을 결정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왼편의 가운데 작은 사각형과 오른편의 가운데 작은 사각형은 같은 색과 같은 밝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왼편보다는 오른편의 것이 보다 더 어두워 보인다. 눈치가 빠른 독자들께서는 벌써 눈치를 채셨겠지만 주위(즉 맥락)의 밝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 인간이 색을 지각하는 양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마트에서 A 와 B 두 개의 물건 중 고민에 빠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상황이다.

A 와 B 두 물건의 비교

A 는 품질이 B 보다 좋고 B 는 A 보다 가격경쟁력이 좋기(즉 저렴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무엇을 골라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으며 따라서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진열대에서 A 와 B 곁에 있는 제 3 의 브랜드인 C 가 눈에 들어온다. 사실 C 를 구매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C 로 인해 A 와 B 간의 우열이 더 쉽게 가려진다. 아래와 같은 상황이다.


C 물건이 추가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와 같은 상황이 되면 먼저 번의 상황에서보다 더 쉽게 B 를 선택한다. 아마도 이런 과정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A 와 C 사이에서는 품질과 가격 이 두 종목에서 각각 1 승 1 패다. 그런데 C 는 B 와의 관계에서 가격과 품질 모두에서 진다. 즉, C 로 인해 B 는 왠지 보다 더 상대적으로 우월한 종합전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많은 사람들이 B 를 선택하고 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우스운 일이다. 일단 C 를 선택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A 와 B 를 비교하는 데 있어서 C 라는 존재가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좀 이상한 일이다. A 와 B 간의 비교는 C 와 무관하게 진행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양자대결로 압축시키면 우열의 차이가 나지 않는데 가장 열등한 제 3 의 대안이 추가되면서 1 등이 더 쉽게 가려지는 경우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꽤 자주 발생한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의 연구, 조사 혹은 관찰에 의하면 몇몇 기업에서는 이를 마케팅에 의도적으로 종종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순서만 바뀌어도 맥락이 바뀐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 대해 판단할 때 그 대상에만 집중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이 대상에 대한 느낌을 결정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출처: gettyimages>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은 판단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과 분위기에도 생각의 자원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맥락과 분위기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맥락과 분위기는 아주 사소한 변화로도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차이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안을 제시하는 순서만 바꿔도 맥락은 크게 바뀐다.

1)


주석 레이어창 닫기두 종류의 백과사전이 있다. 둘 모두 중고이지만 보관상태와 내용의 양에 있어서 상이하다. - 백과사전 A : 거의 새 것이며 10,000 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 백과사전 B : 표지가 찢어져 있으며, 20,000 개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무언가를 따로 따로 보기 시작하면 상대비교가 어려워진다. . 하지만 두 대상을 동시에 놓고 보면 이제 상대비교가 더 용이해 지기 시작한다. <출처: gettyimages>

재미있는 것은 두 사전을 따로 따로 즉 하나씩 보여주고 난 뒤 고르라고 하면 A 를 더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다. 순서와 상관없이 A 가 더 선호된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 이 사전(A)는 아까 것보다(B) 더 보관상태가 좋은데? 이걸로 사야겠네.” 혹은 “중고책 서점에서 이렇게 깨끗한 책 사기가 쉽지 않은데 운이 좋군?” 등이다. 그런데 두 사전을 동시에 보여주고 고르라고 하면 B 가 더 많이 선호된다. 이제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식이다. “어차피 중고니까 낡은 것이야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겠어?” 재미있는 불일치이다. 어떤 경우에는 보관상태를 더 우선시 하고 어떤 경우에는 수록된 내용의 양을 더 우선시했으니 말이다. 첫 번째는 주관적이고 따라서 질적인 차이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양적인 차이이다. 무언가를 따로 따로 보기 시작하면 상대비교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질적으로 두드러진 무언가가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두 대상을 동시에 놓고 보면 이제 상대비교가 더 용이해 지기 때문에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에 더 민감해지게 된다. 순서의 형태에 변화를 주면서 맥락이 바뀌고 이렇게 바뀐 맥락은 두 대상을 비교할 때 어떤 측면에 더 주의를 기울이냐 하는 근본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관점의 변화, 생각의 변화 우리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봄’이라는 뜻이다. 처지란 무엇인가? 관점이다. 따라서 맥락의 변화와 일맥상통한다. 실제로 이러한 맥락의 변화는 생각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필자가 늘 말씀 드리지만, 무언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인간이라고 해서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다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맥락의 변화는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의 변화를 위해 맥락의 변화를 슬기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문제나 이슈 자체에만 집중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받았으며 미국 University of Texas - Austin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국제학술논문지에 Preference and the specificity of goals (2007), Selfconstrual and the processing of covariation information in causal reasoning (2007) 등을 발표하였다. 발행 2013.04.22.

주석 1 Hsee, C. K. (1996). The evaluability hypothesis: An explanation for preference reversals between joint and separate evaluations of alternatives.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67, 247-257.

인간은 왜 타인을 만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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