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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길

최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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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획자

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최다영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 시대에

가능한 아프리카 TV의 운영방식은, 그의 순수한

‘행복’이란 단어는 언어로의 환원을 거부하고

태도를 냉소하듯 우리의 리얼한 삶의 조건들이

싶을 만큼 초현실적이다. 요즘은 누군가에게

존재 했음을 과시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을 디디고

“행복하니?”라고 묻는다는 건 서로의 웃픈 현실을

서면 다듬어 지지 않은 시멘트 조각들은 발아래

공유하기 위한 행위 정도로 해석된다. 작가가 전시

바슬바슬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가 관객인 우리에

제목으로 선택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어느덧

의해 사라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마치 미술 작업은

기성세대가 된 미술가의 자아도취적 설교일까

갈등과 망각의 연속이며, 이에 반복되고, 기록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시를 준비하며 읽었다던

닳아버리고, 누적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듯, 수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의 책 『행복의 정복』

없는 반복의 과정을 통한 작업의 결과물은 시크하게

중 궁극적 행복에 다다르는 비법들과는 거리가 멀기

공간으로 환원되어 방치된다.

때문이다. 최기창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이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직시하는데 있다. 이것은 미술에

기관들이 드러나 있다. 자신의 미술 작동법을

대한 자조(自照)적인 서사이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연구한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다. 정면의

있는 미술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Brainstorming›(2015)은 수없이 ‘나 < 너 < 우리

서계동 236-22 번지의 좁은 공간에 들어섰을 때

‹행복으로 가는 길›과 연결된 벽에는 신체

< 나 < 너 < 우리 < 나 < 너 < 우리’가 반복되고, 옆

마주하게 되는 ‹행복으로 가는 길›(2015) 작업은

벽의 ‹세 개의 심장›(2015)에는 ‘나’, ‘너’, ‘우리’가

장시간에 걸쳐 제작된 ‘바닥’이다. 그가 전시 공간

격리된 채로 반복된다. 작가의 진술에 따르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몇 날 며칠을 써내려 갔던 필사의

‹Brainstorming›은 작업 중 작가에게 가장 영향을

과정이 배어 나온다. 그의 눈에 포착된 오늘의 문제적

미치는 자아와 타자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논리적

뉴스는 한 글자 한 글자 수를 놓듯이 시멘트 위에

사고 체계와 흐름을 설명하고 있으며, ‹세 개의

새겨진다. 양생이 끝난 바닥 위에 그는 다시 시멘트를

심장›은 각각의 요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개어 부운 뒤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신체리듬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업들과

새겨나가는데, 이 행위는 전시 기간 중에도 계속된다.

연장선상에 놓이는 2층의 작업 ‹Muse›(2015)는

모든 것이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무엇이 문제라고

앵무새의 동선에 따라 반응하는 방울을 달아놓고

조차 말하기 힘든 ‘지금’을 살아가는 미술가의

새의 움직임의 불연속적인 소리를 따라다닌다. 새장

‘사회수련법’으로 보인다. 한시적 퍼포먼스가 아닌

속에 앵무새가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이겠는가 마는

지속적 진행되는 이 작품의 작업 과정은 아프리카

불규칙적으로 (어쩌면 규칙적으로) 들려올 방울

TV를 통해서도 송출된다. 이 방송을 알리기 위한

소리는 작가적 사고 과정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특별한 홍보도 마케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전시장 벽 한 켠에 링크 주소가 적혀있다. 누군가가 ‘정치인과

은유하고, 논리와 직관의 반응 속도 사이에 우연치 않게 발견되는 알고리즘적 일치가 ‘무엇’ 즉 작업

예술가는 사랑을 먹고 살아간다’라고 했었는데,

탄생의 포인트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최기창은 사랑을 얻는데 관심 있다기보다는 이를

‹세 개의 심장›과 마주하고 있는 또 다른 벽에는

시청할 ‘당신’들에게 집중한다. 작가-관객 사이의

흐릿한 실루엣을 남긴 얼굴 - 작가는 이것을 살아갈

시차와 묘한 긴장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때 아주 긴요한 표정이라고 묘사함- 은 감탄사 ‘하-’,

서로의 관계성을 다시 사유하려는 데에 그의 숨의

‘하-’, ‘하-’ 로 감싸여 있다. 그리고 ‹밝은 얼굴›(2015)

의도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돈을

맞은편에는 ‹하›(2015)라는 제목의 곡 악보가

내고 별 풍선을 쏴 줘야만 동영상 기록물들이 유지

걸려있다. 상형문자처럼 보였던 ‘하-’, ‘하-’, ‘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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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로 치환된다. ‘지칠 때까지’ 부르도록 요구하는

무기력한 내면과 직면하게 한다. 그나마 가장

이 곡의 악보는 일정한 박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행복에 가까운 희망적인 이미지는 나머지 공간에

두 마디마다 하나씩 음을 쌓다가 다시 그 음들을

놓여있는 아이들이 만든 불의 형상 ‹잔불›(2015)에서

덜어간다. 메이져 화음과 마이너 화음을 번갈아

발견된다. 일견 순수한 욕망으로 보이는 이 불들은

음이 쌓거나 덜어내도록 구성된다. 11개 음이 거의

우리의 노예적 욕망의 불사름을 저지 하는 듯

하나의 커다란 소리로 뒤엉키는 중반부의 최고조

보인다. 플라톤의 동굴 속 죄수들이 그림자를 보고 진짜 세상이라고 믿게 만든 입구의 ‘불’을,

지점은 이내 해소되어 단일 음이었던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곡은 최기창 작가가 만든 미술 노동을 위한 음계들로 일종의 ‘노동요’이다. 상상력으로

작가는 아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잔불을 가져다

들어야 할 이 노동요는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예술가의 역할은 진짜 세상이 어떤가를 알려주고자

가 말도 하고 귀도 들리는데 아름다움과 심오한

한다. 하지만, 최기창은 여전히 묵묵하고 차라리

사상에 대하여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동시대

사그라드는 잔불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무작위’와 ‘반복’을 통해 일치와 불일치의

그 무엇을 말하지 못하는 동시대 미술인에게

위태로운 경계를 오가며 작업해왔던 최기창의

이별을 고하는 제례악 악보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업은 여전히 이번 전시에서도 내밀하게 배어있다.

불구하고, 불러보고 싶다면 각오를 해야 한다. 혼자

다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 과정이 작가의 몸으로

부르기에 한계가 있거니와, 같이 불러 줄 사람이

‘발화’ 된다는 점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노동은

있다고 하여도 지칠 때까지 일치와 불일치의 과정을

‘반복’의 작업정신이 도치된 상태, 즉 (일반적인)’작업

반복해야 하니 시작과 끝을 감당할 각오가 필요하다.

정신’의 반복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최기창

이렇듯 최기창의 작업에서 감지되는 예민함은

작가가 주변의 반복적 현상들에 대해 집중하고

인식과 감각의 다층적 연구이자 실험으로 지속되어

그에서 발견되는 우연성에 의지했었다면, 이번에는

왔던 연속 작업 ‹Interviewee›(2015)에서도

미술가인 자신과 미술 행위에 집중한 채 주변을

발견된다. 관객의 등장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이

덤덤히 응시한다. 자신의 신체 기관과 사회의 관계

작업은 관객이 피실험자로서 의자를 인식하면서부터

사이에서 몸으로 체화되어 나오는,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무작위 선택에 따라 골라진 분절된

순서가 뒤바뀌고 그로 인해 반복에는 운율이

단어들로 조합된 문장은 인, 적성검사에 나오는

생겨난다. 그 운율은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미술’을

질문과 흡사하다. 관객은 앉아있는 시간만큼

적나라하게 벗겨냈으며, 이는 지금 (한국)미술계가

무의미한 질문을 받게 되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이런

임의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 경위를 추적해 보려는

검사에 반작용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는 관객들은

듯 시종일관 차분하고 매끄럽다. 어쩌면 미끄러지듯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기 위해 소리에 집중한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할 수

사실 피실험자의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작업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상태이기에 미술가 최기창은

외면하거나 무뎌지면 된다. 불가항력적 시스템

몸으로 발화하고, 일치와 불일치가 교차하는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인식과 감각에 무뎌짐을

지점들을 운율 삼아 차라리 말을 하지 않기를 선택한

강요 받는 순간과 교차된다. 작가가 제안하는

지도 모르겠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연극적 무대는 더 효율적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어느 글에선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을 향해

노예화시키는 피실험자들에게 이 순간을 집중하게

끊임없이 글쓰기로 말을 걸어야 하며, 예술은 결국

하고 있으며, 자신과 마주한 어두움 속에 반사되는

침묵한다’고 했었던 것처럼.

Brainstorming,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인들에게 썼던 편지처럼, 무엇을 말을 하고 싶어도

놓는 것을 선택하였다.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던


세 개의 심장,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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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2015, 악보

밝은 얼굴,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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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ee, 2015, 의자, 센서, 스포트라이트, 스피커, mp3 플레이어

Muse, 2015, 새,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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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불, 2015, 스티로폼, 석고, 아크릴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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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와 ‘노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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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강홍구

헬 조선에서 예술 하기

최기창의 이번 작업은 ‘노가다’와 ‘노오력’ 두 가지로

사고 할 때 나를 중심으로 해서 너, 우리로 나아가는

그가 바닥에 쓴 뉴스들은 자신이 생산한 것은

그는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말들이

이루어져 있다. 노가다는 시멘트 모르타르를 만들어

과정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나, 너,

아니다. 당연히 외부에서 주어진 정보들을

하나의 큰 교훈이며 꼭 그렇지는 않지만 밝은

벽과 바닥 천정에 바르고 글씨를 쓰고, 지우고

우리라는 세 개의 대명사는 그 함의가 단순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대부분

미래를 향하는 어떤 계시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쓰는 행위를 비롯한 작품의 제작 방식을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낱말들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거나 우리 사회의 욕망의 갈등과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 과정, 교류를 통해 우리의

뜻한다. 노오력은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개념적인

초등학교 일학년 국어 교과서 첫머리에 실린 적이

파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것을 쓴다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교환되고, 그럼으로써 무언가

지향점이자 어쩌면 미술이라는 이름의 예술 활동이

있었다. 1973년 교과 과정 개편의 결과였는데

것은 개인적인 행위이고 바닥에 쓰였다 사라진다.

얻을 수 있다고 애써 주장한다. 물론 내게는 그것이

보여주는 허망함과 막막함을 압축해 보여주는데 딱

아시다시피 이때는 유신시절, 박정희와 김재규와

뉴스는 끝없이 사라지고 생산되는 것이다.

반어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기교이다.

맞는 요즘의 유행어이다.

차지철이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있던 시절이다.

용산구 서계동이라는 알듯 하나 낯선 동네 작은

그 이전의 국민학교 일학년 국어 교과서의

바닥을 마주 보는 천정에는 콘스탄틴 브랑쿠시가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절망이 기교를 낳은' 것이다.

했다는 말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전시장에서 벌어지는 그의 전시, 혹은 작업은 헬

첫머리는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영희야

노예처럼 일하라’가 쓰여 있다. 그 말은 브랑쿠시

최기창은 그의 작업들을 아프리카 티브이를 통해

조선의 젊은- 사실은 막 중년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놀자, 바둑아 놀자’ 따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시절의 예술가에 대한 관념 혹은 이상을 보여준다.

중계한다. 사실 나는 그것까지 챙겨 볼 여력은 없다.

미술가가 뭘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대한 비난이 이런 저런 글들에 등장했었다. 희미하게

그러나 창조성과 예술가의 중요성을 믿었던 시절을

더 정직하게 말하면 1인 미디어에 대한 흥미는

그 사건을 우리는 개념미술, 프로세스 아트의 한

기억나는 예를 들자면 미국은 ’Go, Stop’등의 공공적

지배하던 왕과 신이라는 개념은 예술계에서

많지만 별로 땡기지가 않는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흐름 따위로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작업의

내용이,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깃발, 깃발, 우리의

언급은 생략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쩌면 1인

결과만큼이나 허망한 일이다.

깃발 일장기’ 등의 애국적인 내용이 초등학교 일학년

사라지고, 지금은 단지 노예만 남은 시대인 듯 보인다. 그 노예들이 하는 일이 바로 ‘노오력’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데 우리나라는 개새끼 따위와

노오력은 노가다고 노가다는 노예들의 일이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는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최기창이 무엇을 의도했건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구체성과 전체성이라는 오래 된 자로 잰다면 그가 하는 작업의 구체성은 신체에서 오고, 그 신체성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몸을 통해

그래서인지 아니면 유신의 폭압 아래 애국심

너무 비관적인가?

미디어야 말로 미술이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일 수도 시멘트 한 포대는 40kg이다. 최기창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무게를 다시 실감했고, 모르타르가

남김없이 폭로하는 기능을 한다. 인간은 주체와

따위를 제고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는지 알

이성에 관해 끊임없이 담론을 만들지만 사실은 늘

수 없지만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그러나 최기창이 만들어 낸 노동요 ‹하›(2015)와

않는다는 사실은 재확인 했다고 한다. 줄기찬

신체성의 한계에 갇혀있다. 그리고 미술 작품이란

내용이 국민학교 일학년 국어 교과서 첫머리에

‹Muse›(2015), ‹잔불›(2015), ‹Interviewee›(2015)

노오력을 통해 그는 작업들을 진행시키고 그러는

아무리 개념적이라고 해도 신체를 매개하지 않고는

실렸었다.

등을 보면 이 비관론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는

동안 시멘트는 더 말을 잘 들을 테고 그는 요령을

사실을 알게 된다. 노동요 ‹하›는 단순하고

터득할 것이다. ‘요오령’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제작될 수 없다. 최기창은 그의 작업을 신체를 통한 노오력과 노가다로 밀어 붙인다.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벽과 천정에 붙지

아마도 최기창은 그 교과서로 국민학교 일학년을

반복적이고 무의미하고 거의 신음에 가깝다. 조용한

요령은 헬 조선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머릿속에 남아, 아니

비명이자 침묵이고 노래이다. 이 모순적 표현이

만약 타고난 금수저가 아니라며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최기창이 벽과 천정과 바닥에 모르타르를 바르고

몸에 육화되고 각인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가능한 까닭은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노동이란

최기창은 금수저를 타고 났을까? 모르긴 해도 아마도

그리고 써가는 과정을 포함한 모든 작업들은 그가

이데올로기는 동시에 노력하면 아니, ‘하면 된다’라는

게 내용이 없는 단순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오력과 노가다로 미술을

의도하는 전체성이 어디에 이르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호에 집약되어 있었다. 구호와 말들은 한편으로는

아무리 화음을 쌓아도 무의미하고 절망적이다.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방식은 다르지만 대한민국의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회 전체인

인간의 몸과 마음에 찍혀 무의식을 이루고 다른

‹Muse›는 어떤가? 알 수 없는 가상의 신호들은

많은 미술가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 끝에 무엇이

것 같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에 관한 듯도 하며,

한편으로는 전시장 바닥의 뉴스들처럼 새로운 것들로

‹Interviewee›에서도 되풀이 된다. 그 되풀이는

있든 간에.

국가와 인간들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덮여 사라진다.

노동요처럼 공허하다.

작업이 행복에 관한 것이며, 밝은 미래가 보이는

최기창이 그린 드로잉들, 뇌, 심장, 미소는 그가

마지막으로 ‹잔불›이 남는다. 잔불은 타다 남은

어떤 과정인 것처럼 얘기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불이다. 미술학원 아이들이 만들었다는 잔불은 이제

하나의 위장일 것이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생존방식의 기초이다. 뇌는

다 타버린 미술의 역사가 남긴 흔적처럼 보인다.

이데올로기와 의식을, 심장은 육체와 신체성을,

이 잔불들을 보고 믿고 쬐며 아이들은 다시 예술,

그림에는 ‘나, 너, 우리’라는 글씨가 반복해서 쓰여

전시장 벽에 뇌와 심장이 그려져 있다. 뇌

미소는 사회적 생존방식 혹은 긍정의 가면이자

미술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일까? 최기창 자신은

있다. 그 글씨들은 우리가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알리바이 이거나 자기 위안의 수단이다.

그렇게 믿고 있을까?


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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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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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길, 2015, 시멘트 위에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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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신 분들

……여러 가지 이유와 정황이 있었지만, 서너 차례의

서문, 진행 그실험실 최다영, 김자연

시도에도 불구하고 기성의 전시장에서 전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행복에 관한 재질문의 계기는

전시리뷰 강홍구

‘전시 가능한 장소’를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작업의 외적 영역에 덧대어지는 이미지를 최소화하고 싶었고,

전시촬영 손준호

결국, 서울역 뒷동네의 봉제공장으로 사용되던 주차장을 3개월 정도 임대했다. 제약이 없다시피

행복으로 가는 길

영상촬영, 편집, 장비대여 라이스 랩 류석주

Muse

방울제작 스튜디오엔트로피 이정은 헤드디자이너

한 전시 가능 장소를 얻은 것만으로 이미 나의 심장과 뇌는 또 뛰고, 어떤 흥분의 작용을 시작했다. 그 반응을 시각화한 결과물이 덤덤하거나 지루해 보이는 것은 행복이 무엇인지 따지거나 정의하는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새장부품제작 황동산업 최종선 사장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갈등의 해결과 새로운 갈등의 생성 사이, 그 중간 지점들을 연결 지어보면 행복의

조류자문 싸이펫 김용태 사장

동선이 파악 가능하다’는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하에 보면 ‘행복으로 가는 길’은 행복을 ‘향해’ 혹은 ‘얻기

잔불

잔불제작 아트지온 미술학원 김문준 원장, 권나현, 김다현, 김한나, 문별, 박종현, 봉재원, 신동한, 안나형, 이상록, 이승우, 이원재, 이채빈, 장휘림, 장휘우, 정시윤, 정재민, 제고은, 제민규, 조유림, 황유강, 황유하

화성, 악보자문 청화피아노 오샛별 원장, 서혜윤

위해’ 가는 통로라기 보다 행복과 ‘더불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여정에 가깝다. 문뜩 문뜩 느꼈던 그 흐뭇한 기시감과 복잡하게 얽힌 어제와 오늘의 사건들 사이 사이에서 맛 본 짜릿한 순간들은 지금도 나를 밝은 내일로 이끌고 있다. 최기창 an-artist@hotmail.com

Interviewee

사운드 디자이너 Twangsta @ 여울목 센서, 조명자문 정지현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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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서계동 236-22 2015. 11. 5 (목) – 12. 6 (일)

아프리카TV 생방송 일정 http://afree.ca/kichang2015 11월 11일(수) 12:00–16:00 11월 18일(수) 12:00–16:00 11월 25일(수) 12:00–16:00

Kichang Choi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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