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녹유> 7월 (2016)

Page 1

© akzent magazin

똑똑똑, 녹유 2016년 7월

녹유 소개

Pro Longo maï의 이상(理想) Longo maï의 40년 녹유 당원 인터뷰 녹유 모임 후기 *

유 럽 당 원 모 임


똑똑똑, 녹유

펴낸 곳 편집/

디자인

녹색당 유럽당원 모임

김도화(http://dofafolio.me)

뉴스레터 편집팀

김인건, 정지은, 김도화

전자우편

kgreens.eu@gmail.com

홈페이지

http://eu.kgreens.org

펴낸 날

2016년 7월 10일

Copyright © &lt;똑똑똑, 녹유&gt; 2016 All rights reserved.



4


녹유(녹색당 유럽당원 모임) 소개

녹색당 유럽당원모임은 한국 녹색당을 지지하고 녹색 정치를 함께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유럽 지 역 당원모임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탈핵, 생명, 평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아직도 산재해 있습니다. 녹색당의 의제들은 자연이라는 커다란 유기체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이 살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 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시민들에게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유럽에서는 생태적 지혜를

바탕으로 에너지 전환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흐름들과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으며,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해 나가는 각국의 녹색당과 유럽 녹색당이 있습니다. 이 곳의 성공 적인 경험을 한국 녹색당과 함께 나누며 국제연대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고자 합니다.

홈페이지: http://eu.kgreens.org

이메일: kgreens.eu@gmail.com

5


Pro Longo maï의 이상(理想) 번역: 정지은

http://www.prolongomai.ch

Basel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단체 Pro Longo maï는 1974년부터 후원 단 체로서 교외 지역에서의 자치 공동체들의 설립, 구성 그리고 후원을 지원하 고 비슷한 목표 설정을 가진 시민단체와 청년 프로젝트를 후원한다. Pro Longo maï는 공익 단체로 승인받았다. Longo maï 공동체

Longo maï 운동은 농업과 수공업으로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유럽 9개의 공동체의 네트워크이다. 이 자치 관리라는 생각은 68운동의 유토피아로 소 급해 올라간다. Longo maï 설립자들은 이 생각을 협동조합과 공유지 같

은 공동경제의 이전 형태들을 가지고 결합했고 19세기 초기 유토피아 사

상에서 영감을 받았다. 첫 번째 공동체는 1973년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Forcalquier에 있는 300헥타르의 휴한지에서 설립되었다. 200명의 Longo maï 성인 구성원과 그들의 아이들은 자급자족을 위해 그리고 판매를 위한

유기농에 기반을 둔 농산물 생산과 축산업, 전통적인 방법으로 지역 원료를 가공하고 그 가공품을 지역의 망에서 직접 판매하는 것으로 생활의 토대를 두고 있다.

Longo maï - 다른 어느 한 길

Longo maï는 경계를 넘어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시골 지역에서 생활하는 공동체의 경험이다. 동기

단기적인 이익을 향한 질주는 우리의 세계를 파괴한다. 자연은 피해를 본다. 인류는 생존의 기반을 잃는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하고 생각의 방

식을 바꾸어야 한다. Longo maï는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작고 실천적 인 움직임 안에서 제시한다.

미래의 세대들이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뜻을 같이하고 생태적인 새로운 삶 의 방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6


공동체의 구조

-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각각의 협동조합은 농업, 가축 사육, 수공업, 지역에서 나는 원료의 가공 그리고 그 생산품의 직접적인 판매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로 인한 수익은 공동의 현금 보관함으로 들어온다.

개개인의 임금을 포기하는 것은 모두를 위한 수단으로 그리고 서로 간의 도움과 연대가 중심을 이룰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한다. 각각의 공동체는 자치적으로 관리한다.

모두에게 관련된 것을 의논하고 함께 결정한다. 논밭과 농장은 공유재산이다. 우리의 공동체가 생겨날 즈음에 지역 주민의 연대의 망이 사람들과 함께 한 공동작업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하고 있었다. 활동영역

-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 교외에 있는 휴경지의 재경작 • 청년들을 받아들여 교육

• 땅 투기에 반대하는 경지 구매

• 어떤 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청년들을 위한 구조적 도움 • 지역의 자립을 위한 후원 • 유기농의 다양성 보존

독일 Hof Ulenkrug, Mecklenburg-Vorpommern, 1995년부터

구동독에서 유럽 시민 포럼 활동은 독일 북동쪽에 이 농장의 근원을 형성 하였다. 농민의 생활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토지를 공동체에 양도

하라는 요구가 그 당시 요구 중 하나로 요청되었다. 이 요구는 한 번도 실 현되지 않았다. 우리 농장은 그사이에 베를린 북부에서 지역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장소 그리고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익숙한 지역 곡물 품종의

생산은 농업에서 거래망의 확장을 위해 종자의 다양성과 종류의 다양성 보존으로 이끌었다.

7


Longo maï의 40년 번역: 김인건

Werner Ryser, Akzent Magazin, Juni 2013

3 세대와 하나의 프로젝트

시작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꿈이었다. 자신의 상상을 따르는 삶에 대한 꿈, 민주적인 계획, 자치, 자발적 조직을 통한 삶에 대한 꿈. 그것만큼 중요했던

것은 연대적 개입에 대한 의지였다. 타자의 가치와 유토피아를 위한 개입. 무엇이 그것으로부터 탄생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네트워크이다. 그리 고 이 네트워크에는 유럽, 우크라이나,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의 농업 공동체, 수공업 공동체가 속해있다.

1972년 12월 18일에서 2일 바젤에서 „유럽 청년공동체 형성을 위한 회 의“가 개최되었다. 스위스의 급진민주주의 직업교육생 조직인 히드라와 오

스트리아 공산당에서 제명된 청소년 단체인 스파르타쿠스가 이 회의에 청 년들을 초대하였다. 10개국의 청년들이 이 부름을 따랐다. 그들은 조합의

형태로 조직된 공동체를 꿈꿨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출신의 인간들의 자유 롭고 자치적인 공동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환상이 떠올랐다. 자급 농업, 수공업 생산, 노동분업의 파기가 핵심어였다. 그들은 „

자신들의 힘을 온전히 다해 유럽 청년공동체의 이상을 현실화하기로 결정 했다.

바젤에 위치한 대표 협회 „Pro Longo maï“의 Hannes Reiser는 이미 그

때부터 함께 했다. „우리는 시작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강도높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우선 19세기의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을 공부했습니다. 푸리에, 생시몽, 카베.

그 다음 우리는 초기 기독교공동체와 키부츠운동과 마주했지요. 우리는 이 모든 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고유한 입장을 만 들었지요.“

대화 대신 개간(Roden statt reden)

작은 무리가 이상을 실현할 한 뙈기의 땅을 찾기 위해 유럽의 절반을 가로 지르는 여행을 했다. 그리고 프로방스 지방의 언덕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다

양한 국가에서 온 30명의 직업교육생과 대학생들은, 농부의 아들 한 명과,

8

몇몇 노동자 가정 출신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은 중


산층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작은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기 위

해 시민으로서의 이력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Thomas와 Nicky Busch 형제는 바젤에 집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팔았 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 유산을 받았다. „공유재산은 우리 공동체의 기초

였습니다“, Hannes Reiser가 덧붙여 말했다. 그 돈으로 황폐해진 농가 와 300헥타르의 땅을 샀다. 그 땅은 Durance 강의 계곡의 위에 위치한

Forcalquier 시의 옆에 있는 Limans라는 작은 동네에 있었고, 여러 개의 폐허들을 가지고 있었다.

1973년 6월 버려진 농가의 무너진 벽들, 파묻힌 우물, 병든 떡갈나무로

우거지고 이끼가 낀 토지를 상상해보라. 그것은 폐허를 다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물을 발견하고, 땅을 일구고, 밭과 정원을 만들어 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은 농가를 구입하는데 이미 사용되었다. 살

을 태우는 태양 아래 사람들은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일을 시작 했다. 젊은 개척자들은 가장 먼저 농가를 운영하는 것이, 가축을 기르는

것이, 수공업 일을 하는 것이, 국가의 관료주의와 싸우기 위해 장부를 만 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배워야했다.

그들은 지역 농부인 Pierre Pellegrin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그는 장 지 오노에 대한 책을 썼다. Manosque 출신의 작가 장 지오노는 자신의 작 품에서 자연과 연결된 프로방스 농부들과 목동들의 삶을 이상화 했고,

1930년대에 문명 비판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생각을 품고있는, 그들과 같 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그들처럼 „Longos(이 글에

9


서는 Longo maï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Longos라고 부른다“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어요. Pierre Pellegrin는 우리를 입양하다시피 했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양을 키우는 것과 경작을 하 는 것에 대해 가르쳤어요. 그의 아내는 우리를 정원에서 가르쳤지요.“라고 Hannes Reiser가 말했다.

당연히 후퇴가 있었다. 완전한 자족이라는 원래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목표는 새롭게 설정되었다. 이제 목표는 생산과정에 대한 통제였다. 생산물 의 재배와 개량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유통과 판매까지. 예를 들어 그런 식

으로 1976년부터 Briancon의 Chantemerle마을의 방직공방에서 그 지역

품종의 양 10,000마리로부터 나온 양털이 스웨터, 남방, 이불, 직물, 그리고 다른 양털상품으로 만들어졌고 판매되었다. 유사한 모델이 채소, 열매, 그리 고 다른 농촌생산물에서도 실현되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시장의 가판대나

통신판매를 통해 판매했다. Hannes Reiser는 이것이 생산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의 창출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초기부터 이 운동에는 이름이 있었다. „Longo maï“, 이것은 프로방스

10

지방의 안부인사이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배가 없는?

Longo maï 2013: 이상주의와 함께 시작된 이것이 지금은 약 200명의 성인과 그들의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유럽 5개국 8개의 농업,

수공업, 소규모 공업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거기에다 우크라이나와 코

스타리카에서 두 개의 프로젝트가 추가되었다. 또한 자체적인 라디오방 송국이 있다. 바젤에 있는 사무실 „Pro Longo maï“도 하나의 공동체이 다. 이 전체는 기업연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네트워크이다. 각각의 공동

체들은 독립적이다. 쓰여진 법도 없고, 임금 노동도 없다. 규정되어야 하 는 것은 총회를 통해 의견 일치를 볼 때까지 논의된다. 재산은 공동의 것 이다. 그것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재단인 „유럽 농촌기금(Europäische

Landfonds)“로 들어간다. 공동체에서 살며, 일하고 있는 „Longos“는 사 용 권리를 갖고 있다. 당연히 긴급한 돈은 Longo maï에서도 중요한 역

할을 한다. 유럽의 각 나라에는 농총경제보조금이 있다. 각각의 농가들

은 그것에 신경을 쓴다. 바젤로부터 성금운동이 벌어진다. 해마다 약 2백 만 스위스 프랑의 기부금이 들어온다. 공동체는 어떤 프로젝트에 이 돈

을 쓸지를 결정한다. „매해 두 번 국제공동체 모임이 있습니다.“, Hannes Reiser는 조직의 형태를 설명했다. „거기에서 모든 신청들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세대가 자신만의 농장을 건설하기 원할 때요. 누군가

11


지원을 받기 원하면, 그것은 모든 공동체로부터 부담되어져야만 합니다. 왜 냐하면 그런 프로젝트가 의미하는 것은 농가들이 그것을 위해 제약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분명해지다: 기초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Longo maï의 기본원칙 중 하 나이다. „우리는 사회와 결별했고, 지배가 없는 공간을 만들기를 원했습니

다“, Hannes Reiser는 그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삶은 힘들었고, 거기에 또 다시 우리의 고대적 행동양식과 같은 공동체에서의 삶이 나타났습니다.“ 그 리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좌파 투쟁에서도 위계질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 니었지요.“

자명한 것: Longo maï처럼 휴한지의 경작이나 자족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

트에는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다. 노동은 분배 되어야만 하고, 노동 과정이 조직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숨겨진 위계와 권위적 구조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기초민주주의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인지되기 가 쉽지 않다.

초기에 Longo maï는 여론에서 호의를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나치게 이 상화 되었다. 그 후 공동체는 1979년 12월부터 1980년 2월 사이에 거친 언 론의 공격을 당했다. 500개 이상의 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논평에서,

그리고 국내와 국외에서,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경제적사기이고, 종교분파 라고 비난했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에게 무고한 혐의를 씌었다. 그들이 젊은

12

이들을 심리적으로 위협했고, 강제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주장들 중 많은 것


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고, 여러가지가 틀린 것이었다. 그것들은 훗날 법적 판결을 통해 철회 되어야만 했다.

젊은 „Longos“의 수 많은 부모들이 공동체를 변호했다. 또한 작가 Friedrich Dürrenmatt와 Adolf Muschg이 이 공동체들을 옹호했다. 오 늘 날, 거의 1/4세기가 지난 후에도 Hannes Reiser는 여전히 신문들의

무절제한 비난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신문들은 기사를 통해 자신들끼 리 격해졌고, 그 기사를 통해 6년 전에 이상과 함께 시작한 이 프로젝트

를 위협했다. „우리는 그 당시 젊었습니다. 평균 25살이었지요. 분명 우 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만 했어요“, 그는 이야기를 정리했다. „우리에게는 경영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어요. 우리는 또한 잘못된 투자를 했어요. 거

기에다 우리는 매우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했어요. 그 다

음에 사람들을 알아차렸지요. ‚흠, 그 공동체도 이상적인 것은 아니군요.‘ 그것이 아마도 결과이겠지요. ‚그래도 그들이 나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그는 다시 한 번 이 사건들을 숙고했다. „이 언론활동에 대한

일종의 반사작용으로 권위적인 구조가 확정되었어요. 그런 권위적인 구 조는 명백히 존재 했었지요. 그러나 가족들이 생겨나자 모든 것들이 조용 해졌습니다. 창립 후 40년 동안 우리는 기초민주주의의 이상에 근본적으 로 가까워졌습니다.“ 연대와 참여

협동 속에서 생산되는 농업 생산물만큼이나 이민자, 독재의 희생자, 경제 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여도 중요하다. 칠레에서 피노첸

트 정권에 의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이 살해를 당하고 좌 파세력들이 억압을 당하자, 이미 1973년 Longo maï는 스위스에서 약 2000명의 난민들의 입국과 체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Longo maï가 남프랑스지역에서 가뭄을 겪고 있는 농부들을 위한 도움

을 조직했던 „가뭄 행동“과 연결하여 사람들이 1978년 „유럽산악지역 을 위한 위기기금“을 만들었다. 이 기금은 재정지원을 통해 인구의 이

동을 막고, 황폐해진 산악지역의 재개척을 지원했다. 1979년 Longo

maï는 코스타리카에 휴경지를 구입해서 „Finca Sonandor“를 만들 었다. 이 곳은 이웃나라 니카라과에서 내전을 피해 온 사람들이 피난

처였다. 지금은 이곳에서 350명의 성인과 아이들이 커피, 사탕수수, 과

일, 채소, 가축의 생산품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신으로 1982년 C.E.D.R.I(„Europäische Komitee zur Verteidigung der Flüchtlinge

und Gasarbeiten난민과 외국인노동자의 옹호를 위한 유럽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것의 창설은 터키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럽의

13


국가들이 이 새로운 난민들에게 자신들의 국경을 닫기 시작하자 이루어졌 다. 그때부터 C.E.D.R.I는 수많은 운동들을 이끌었다. 거기에는 난민들의 수

용과 그들에 대한 법률상담, 독재에 대한 개입,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다 사 법부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과의 국제적 연대 운동, 난민과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훗날의 귀향과 관련한 교육 또한 포함된다. 또한 안달루시아 지방의 들에서 일하는, 대부분은 아프리카 출신인 사람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에 대 한 감각적 캠페인도 조직되었다. 오늘날 스위스에서는 „Sanspapiers“(유 효한 체류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주자)를 위한 참여가 중심에 있다.

Longo maï는 또한 유럽시민기금(EBF)에도 참여했다. 이것은 1989년 장벽 이 무너진 다음 생겨났다. „그것은 거의 필연적인 발달이었습니다“, 이것이

Hannes Reiser의 생각이었다. „EBF는 동유럽과의 교류 속에서 생겨났습 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유럽의 다른 절반을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EBF 의 틀 안에서 Longo maï는 우크라이나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지역에서 탈출한 병사들을 위한 캠페 인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처지의 발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서유럽의 지자 체와의 후견 관계를 장려했다.

Longo maï의 활동가들은 인권에 대한 의무감을 느낀다. Hannes Reiser

의 생각에 Longo maï는 단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만 고려하는 것이 아 니다. Longo maï는 그만큼이나 전쟁, 부당한 시스템, 거대 기업의 경제 권 력에 의해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에도 초점을 두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기를(Möge es lange währen)

정치적으로 좌파로 정의되고, 이익을 추구하는 성과주의 사회를 부정하고, 자주적으로 살기를 원하고, 그리고 난민들을 위해 참여하기를 원하는 공동 체는 특수한 관찰에 노출된다. 1979/80년의 언론 활동과 같은, 미디어 측의 관찰 뿐만 아니라, Longo maï는 과거에 정부 당국의 관심 또한 끌었다. 이 미 Longo maï가 창설되던 1973년, 여전히 68년 파리에서 있었던 혼돈의

두려움을 간직한 프랑스의 관청은, 프로방스 지방의 휴경지를 다시 경작 가 능한 상태로 만들기 원했던 6명의 „Longos“를 추방했다. 활동가들의 아나

키스트적 과거는, 그들이 미래에도 법적 틀 안에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는 예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법률적 수단을 통해 이 결정에 저항했다.

4년 후 추방은 법적으로 다시 무효화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불편한 일이 있 었다. „1980년대에 연방정부는 우리에게 모든 카드를 들이밀었습니다. 입 으로 말해진 우리의 근본주의는 우리를 의심스럽게 만들었지요“, Hannes

Reiser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건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냉전의 시기

14

동안 주류에서 떨어져 나간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킨 수천의 사람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이곳 국가보안경찰의 관심을 받았다. 또한 1989년 11월 Longo maï에 반대하여 있었던 프랑스 경찰의 행 동이 수포로 돌아갔다. Longo maï가 쿠르드족 테러리스트를 숨겨주

고 있다는 풍문은 내용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실상 최상의 경우는

Longo maï의 사람들이 시골의 구조 속으로 통합되는 것이었다. 두 명의

„Longos“는 30년 동안 Limans 지역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예 전에 Longos였던 한 명은 이웃 Forcaliquier 시의 시 의회에서 지역 문

화사업 책임자로 있다. 모든 혐오와 적대에도 불구하고 Longo maï는 살 아남았다. 그 사이 개척세대는 신망 있는 백발이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노령연금을 받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젤이나 다른 곳의 공동체에

서 살고 있다. 그 사이 30대가 된 2세대 중 많은 사람들은 외부 세계에 거 처를 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머물렀다. 그리고 Hannes Reiser의 아들이 보여준 예처럼 유사한 프로젝트를 Longo maï의 네트워크 외부에서 실 현시킨 사람들도 있다. „

„그 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Limousin지역의 농가를 사기 위한 돈을 스스 로 모았어요“, 자랑스럽게 아버지가 이야기했다. „지금 그들은 양을 키우 고 있고, 농장을 합니다. 그리고 가구 공방을 운영하지요. 그들은 우리와

같은 철학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완전히 상관이 없지요.“ 혹 이 것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직이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어떻게

사람들이 작은 단위에서 공동 경제를 건설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생각과

15


노하우가 살아남는 것입니다. „Longos“ 중 제3세대는 아직 기초단계이다. 그들은 공동체들 속에서 성장 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세계화 시대에도 작은 기초민주주의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공동체는 공동의 재산 으로서 이익을 목표한다. 그리고 정치, 경제 권력과 욕망의 희생자들과 연대 한다.

유토피아? 이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분업 성과사회도 아직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야 겨우 200에서

300년이다. 40년 전에 Longo maï를 만들었던 활동가들은 오늘날에도 대 안적 형태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 공동체는 그들이 스스로 부 여한 이름 그대로, 그들이 실현한 것이 더욱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희망할 수 있다.

16


17


녹유 당원 인터뷰

“명상하기 제일 좋은 때는 실은 새벽이 아니라 해질녘. 나는 노을에 숨죽이며 경탄하는 저녁의 사람이다.”

18

정세연

(Freiburg)


본인이 하고 싶은 본인 이야기, 소개 부탁합니다. 나는 자기 색깔이 뚜렷한 사람이고 싶고, 그래서 늘 자기 정체화에 에너지 를 많이 쓰는 편이다. 나를 나타내는 명사들을 나열해본다. 페미니스트, 환

경 사회학 연구자, 커뮤니티 조직가, 성 소수자, 칼럼니스트, 생활공예가 등. 나는 이것들을 그냥 주어지는 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

하고 소통해야 유지되는 가변적인 정체성이라고 본다. 가령 칼럼을 써야 칼 럼니스트고, 뭘 계속 만들어야 공예가라 불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성 소수자 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한 개인의 성적지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정 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된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이다.

곱씹어보면 내가 나고 자란 가족, 동네, 학교 등은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중

산층, 혹은 그 이상에 도달하고자 열렬히 지향하나, 그것이 쉽지 않아 열심

히 경쟁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한국사회가 대체로 그렇게 ‘평범함,’ ‘남들 하 는 만큼은’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내 주변은 더 그

랬다. 나도 순진한 마음으로 그 경쟁에 열심히 참여하다 십 대 끝 무렵 이미 거기 지칠 대로 지치고 신물이 났다. 그게 지금 삶 전반에서 진보적 성향을 밀고 나가는 강력한 동기가 된 것 같다. 매 순간 의심하고 회의하고 불평한

다. 왜 그렇게 살아야 돼?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는 걸 직접 증명하는 게 (그 것도 정말 재미있어 보이게) 내 삶의 목표다.

요즘 가장 본인의 관심거리 내지는 제일 많이 하는 생각 같은 게 있나요? 균형. 몸과 정신의 균형. 신념과 실천의 균형. 일과 놀이의 적절한 비율. 뻔

한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온종일 글 쓰고 나면 다음 날은 아크로 요

가나 하이킹을 가고, 복잡한 이론을 가지고 씨름하다 점심때 학교식당에 가

면 일종의 액티비즘으로 음식을 새로 안 받고 남들 식판에 남은 거로 끼니 를 때우는 식이다. 태양광패널, 스마트폰, 크라우드펀딩 같은 현대문명을 누

리지만, 보름달 뜨는 밤과 24절기도 기념한다. 앞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갖 더라도 50-70%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창작활동을 해나갈 계획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한 가지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장인형’이 되고 싶었고 그게 잘 안 되어서 자괴감이 들었는데, 사실 나는 타고나기를 관심과 열정이 다방면으 로 뻗는 ‘잡다한’ 사람이다. 균형이 새삼 키워드가 된 까닭이다. 다양한 활동 을 균형 있게 해나가면서 그것들 간의 시너지를 누리는 것이 나에게 건강하 고 행복한 삶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


녹색당 가입에 동기나 계기가 있었나요? 2012년 환경재단에서 잠시 몸담던 때, 녹색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녹색당의 처음 순간에 함께했다는 것이 뿌듯하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크게 한 일은 없으나 책임감은 좀 느끼고 있다. 대학 초반에 민주노동당 당원으

로서 정당정치, 진보정치판에 대해 조금 배웠다. 지금보다 대한민국 정치판 이 여러모로 훨씬 짠내났었는데, 정치, 정치인, 정당들의 구조나 생리가 어

떠한 제 나름대로 예민하게 관찰했던 것 같다. 민노당이 분열되고 다른 당

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은 건 대안이 없어서였다. 내게 중요한 생태주의, 생 활정치, 페미니즘을 오롯이 담을 의지 (역량은 고사하고)가 있는 당의 부재. 내가 느끼기에 녹색당은 정당으로서의 꼴이나 경험치는 부족할지라도 조직 과 사람이 참신했다. 가부장제나 운동권의 구습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사람들의 기운이 맑고 평화로웠다.

녹색당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양한 입장 중에서 본인에게 특히 중요하게 다가오는 입장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전체론적 관점에서 ‘시민의 삶’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큰 방향성이 동의

한다. 당의 의제나 공약에 아직 한국 현실에서 일어나 본 적 없는 것들이 꽤 있는데, 나는 그게 미래지향적 정치라고 본다. 이미 있는 것, 예전부터 해오 던 것만 사골국처럼 우려내는 정치는 그저 기득권의 무궁한 영화를 위한 것

인데, 기득권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수도, 될 생각도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 겐 정말 암담하고 설득력이 없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위한 정책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이 문제들을 말할 때 사용되는 대명사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야 하는 데 아직 녹색당도 거기까지 못 갔다. 장애인, LGBT, 나아가 자연과 동물들

이 아직은 거리감 있는 철저히 타자로 인식되고 있다. 내 주변엔 없지만 어 딘가에 존재하고, 당장 내 생활에 밀접하진 않지만 중요하고, 혜택받은 ‘우 리’가 나서서 소외된 ‘그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식의 접근 말이다.

그런데 ‘그들’에서 ‘우리’로 관점을 이행하자는 것은 결코 일차원적인 감정 적(공감) 대응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철학적으로 치열한 고민과 개념 재

정립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널리 퍼뜨리는 어려운 과정이다. 그러면서

제도와 정책 속에 그 정신이 깊숙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사실 나도 동물권/

동물복지에 대해서는 아직 고민이 부족해서 생각이 막연하고 태도도 애매 한 상태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 총선 때 비례대표 1번 황윤 후보가 했던

20

말들은 방향성은 좋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신념을 어떻게 소통하고 구현할 것이냐는 부분에서는 한계를 자주 보였다고 생각한다.


녹색당 당원으로서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오는 9월에 프라이부르크에서 녹색당 유럽모임 총회를 열기로 했다.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와 몸짓이 들리고 보이는 워크숍 형태로 큰 틀을 짰다.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를 슬슬 들어가는데 이 행사를 많은 이들과 즐

겁게, 의미 있게 치러내고 싶다. 평소 성격대로 일단 으쌰으쌰 일은 벌였는 데…. 뭐 어떻게든 잘 되겠지! 많은 분의 참여를 욕망한다.

21


녹유 모임 후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5월 녹평모임 후기

다(후쿠시마 5년, 반핵에서 탈핵으로’-이헌석).

오월의 어느날, 베를린 곳곳에 살고 있는 분들

않고 어떻게 이 사건을 기억하고 또 행동할 수

안녕하세요^^

이 모여 녹색평론 모임을 가졌습니다. 라이프찌 에서 정지은 당원님도 물론 함께했습니다.

이번 녹색평론 147호는 &#39;농업&#39;을 주제로한 텍스

트들이 많았는데, 생각보다 우리가 &#39;농&#39;에 대해 나눌 이야기가 참 많았구나 느꼈습니다. 그 중

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삶과 철학(‘그가 거기 있었네 장일순의 삶 -김정남&#39;) &#39;생명존중&#39;과

&#39;협동&#39;, &#39;자유&#39;와 &#39;평등&#39; 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들 사이의 협동

과 자유, 평등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무생물

의 관계에서까지 가능한 생명존중, 협동, 자유, 평등. 참 어렵지만 상상하면 참 기분 좋아지는

타국에 나와있는 우리가 미디어에 지배당하지 있는지 고민해보았습니다. 농민 혹은 누구라도 부당한 국가 권력행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하여, 국가 혹은 책임있는 해당기관에서 국민

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 권리

를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시민으로서 혹은 한

개인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다는 인식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같은 소리를 찾으려고 노력

해 보는 것, 타자화 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 용 기와 끈기를 갖는 것. 본질을 보는 힘을 기르는

것 등 정말 깊은 사유의 속에 나오는 의견들을 들으면서 참 감사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개념이었습니다. 다만 상상에 그치지 않고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또 자정에 가까워

습니다. 남을 덜 해치는 방법으로 살아가되 나

원님을 비롯하여 새로 모임에 참석하신 이윤지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는가 이야기 해보기도 했 로써 사는 것, 차별에 대한 예민함을 가지고 사 는 것, 땅이 갖는 가치를 보고 경험하면서 사는 것.. 등등

이번 모임에서는 독자들이 읽어온 텍스트를 중

심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욱 좋 았습니다.

백남기 선생님께서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 기 시위 중 경찰의 무법한 진압으로 의식을 잃 으신지 반년이 지났고(‘백남기 농성장 90일의

기록-유문철’), 세월호 사고는 2년을 훌쩍 넘었 습니다(‘세월호 2년, 책임도 이로도 없었다-박

진).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 이후 5년이 흘렀습니 22

졌지요. 멀리서 라이프찌에서 오시는 정지은 당

님, 이재원님 그리고 정보경 님, 그리고 멋진 공 간을 제공해주신 이옥련 선생님과 우리 모임의 감초 서다혜님, 이보란님^^ 감사합니다.


프랑크푸르트 소풍 후기! (5월 28일 모임)

프라이부르크 에이르와 야라 5월 모임 후기

데, 저희 프랑크푸르트 지역모임에서는 어제(28

부르크 근처 켄찡엔에 위치한 수목원에 다녀

베를린에서도 활발한 모임 소식이 들리는 가운

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만나서 잘 먹고 잘 놀 았습니다!

본래는 &quot;우리도 날좋을때 소풍도 좀 가보자!&quot; 며 만하임에 있는 공원에서 뛰놀아볼까 하 였지만, 비가온다는 야속한 일기예보만 믿고

Laudenbach 두 당원이 사는 집에 모여서 비는

언제 오나 기다리며 소풍날을 만끽했답니다. 그 래도 다들 소풍온 기분으로, 소풍 도시락과 간

식 고대로, 근황들 나누다 좋아하는 음악들도 나눠듣고, 게임도 하고 참 재미지게 놀았습니

다. (명절같았다는 진실애님의 후기도 함께 전 합니다.ㅎ)

저녁즈음부터는 유럽 녹색당이 할 수 있는 일 에 대한 생각과 고민들도 나누고, 앞으로 녹평 모임 외에 녹색당 지역모임에서 다뤘으면 하는

주제들 가닥도 잡아보고요. 멀리 Stuttgart에서

오신 송윤지님, 하이델베르그 진실애님, 프랑크 푸르트 아람님, 서영님, Hattersheim 낙규님, Laudenbach댁 수빈 인건이 함께했습니다.

5월에는 구성원 중 영교씨의 추천으로 프라이

왔습니다. 다같이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탄 후 가볍게 산책하듯 걸어 도착했어요. 입구에

는 Iris 꽃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다양하게 있었

고 날이 엄청 좋아서 더 이뻐보였습니당!. 곳곳 에 주인 아저씨와 그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이 직접 만든 조각상들로 꾸며져있고 나무로 만 든 의자와 책상, 대나무로 만든 조명 등을 보고

다들 감탄했습니다. 수목원은 크게 대나무 숲과 온실, 목공 작업실 그리고 휴식 공간 이렇게 나

뉘어져 있었고 아저씨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

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Gemüse Baum! 나뭇잎을 먹어보니 간이 되어 있는 야채...느낌? 굉장히 신기했어요. 공짜로 맥주도 얻어먹고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그 곳에서 어릴적 부터 여가시간을 보낸 청년과

아저씨의 따님(?)과 대화도 재미있게 나누고 오 랜만에 강아지, 고양이와 힐링하는 시간도 가졌 습니다.

원래는 다른 일정도 계획했었는데 교통편이 좋

지 않아 다음 번으로 미루고 상아씨 병문안 겸

토론 겸해서 다음 일정으로 대체했습니다. 토론

주제는 &#39;동성커플의 입양&#39;이었고 각자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미국 게이커플 아래에서 건강하고 화목하게 잘자란 아이의 사례, 그들이

어떤 이유로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지 궁금하 다는 의견, 사회적 시선으로는 긍정적으로 생각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보았을 때는 모

유수유와 관련해 엄마와의 친밀감을 게이커플 이 어떻게 대신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의문점 등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23


녹색당 유럽모임 소식지 &lt;똑똑똑, 녹유&gt;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