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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과 동학농민군 고창읍성과 관련된 동학농민군의 기록은 1894년(고종 31년) 4월 8일로, 동 학농민군이 성내에 진격하여 관군을 물리치고 관아와 형옥을 소각하고 일시 에 점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1899년 4월 22일 흥덕 민란을 일으킨 동학농민군의 후예인 영학당 (英學党) 사건이 있었다. 영학당의 수계장인 최익서(崔益瑞)가 농민군 400 명을 이끌고 흥덕, 무장의 관아를 무혈입성하고 광주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 보로 고창읍성을 점령하고자 일본군과 새벽 3시에 전투하였다. 그러나 비가 억수같이 내리자 이들의 주무기인 화승총을 쏠 수가 없어 포기하고, 알뫼장 터(난산)로 갔다. 그곳에서 재정비를 하려고 했는데, 일본군이 끝까지 따라 와 포위한 뒤 공격을 하여 알뫼장터(부안면 난산)는 피로 얼룩졌다. 고창읍성이 축성된 것은 조선전기이다. 그러나 고창읍성이 석성으로 축조되 기 전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단지 고창읍성이 생기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모양성이라는 성이 있었다. 그것이 토성이건 석성이건 아마 존재하였을 것 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1455년(세조 원년)호남지방에 나주진관을 두었다. 고창읍성은 나주진관에 속한 속읍으로 나주가 서남지방을 총괄하는 진관이 었다. 나주진관의 연계산성인 정읍의 입암산성까지 이어져 있다. 그런데 중 종10년에 법성에 창을 두었다. 그 이전에는 영산창이 서남부의 조창역할을 하였으나 왜구의 잦은 약탈로 법성포로 창을 옮기게 된 것이다. 법성에 창 을 설치하면서 그곳에 창을 방어하는 법성창성을 만들었다. 법성창의 후배 위 산성들이 입암산성과 연계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간에 무장읍성이 있 었으나 무장읍성은 입암산성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래서 만든 성이 바로 고창읍성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고창읍성이 들어가 있다. 즉 고창읍성은 법 성창성을 지키기 위한 후배위 산성인 것이다. 조선시대 성곽은 30-40리를 넘겨서 홀로 된 산성이 있으면 안 되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성이 있어야 한다. 무장읍성과 입암산성은 30리가 넘었다. 무장읍성을 호위하는 산성이 바로 고창읍성이다. 무장읍성보다 고창읍성이 훨씬 크다. 무장읍성을 먼저 쌓고, 고창읍성을 나 중에 쌓았다. 고창읍성의 축성(단종 원년)은 세조까지 8년이 걸렸다. 감독 은 송지민(宋芝玟)이 하였다. 축성연대와 감독관을 밝히는 내용이 동문 옹 성 벽에 새겨져 있다. (癸酉所築監董 宋芝玟) 고창읍성은 무장읍성보다 규 모를 크게 하였고, 옹성을 만들었다. 무장읍성은 성문만 있었다. 고창읍성


을 성곽박물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고창읍성에서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있다. 정유재란 당시 고창현감이었던 장흥인 문희개(文希凱)라는 사람이 있었다. 1596년에 부임해서 정유재란을 맞이하였다. 그의 흔적은 현재 전라남도 지방문화재(富春亭, 望君臺 등)로 지정되어 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그는 끝까지 싸우다가 부상당해 끝까지 버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읍지와 선조실록에는 기읍퇴파(棄邑 退罷)라 하여, 왜적이 쳐들어옴에 성을 버리고 달아나 파직이 되고 잡혀서 법으로 다스려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고창읍성에는 3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고창읍성은 읍성이면서도 읍을 둘러싸지 않고 산성화하였다. 평지성 과 산성의 철충형 성이다. 둘째, 성문에 옹성이 부설되어 있다. 그러나 남문에는 산의 주령이 내려와 그곳에는 성문을 둘 수 없었다. 고창읍성은 남쪽에서 내려오는 주령이 장태 봉(將台蜂, 108m)을 이루고, 그 봉우리에서 분기되어 적을 소(小)자 모양의 산세를 이루었다. 고창읍성은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게 있다. 셋째, 성 밖에 외성이 없고 내성만이 있는 홑성이다. 대부분의 성들은 외성 대신에 해자를 파 방비하였다. 고창읍성의 축성하기 위해 전라도와 제주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원이 되었 다. 그리고 그들은 성을 축성한 그곳에 축성한 지역의 이름을 시작과 끝에 기록하였다. 그것이 고창읍성 축성에 대한 기록이다. 고창읍성에는 치성이 여러 개 있다. 동남치, 남치, 서남치, 서치, 서북치, 북치 등이다. 고창읍성은 이지사천(二池四泉)으로 수량이 풍부하였다. 성면적은 5만 천백 이십 평이다. 성곽은 샘이 있어야 한다. 물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 다. 그런데 고창읍성은 못이 두 개나 되고 샘이 네 개가 있다. 호남읍지에 는 고창읍성은 12정천이 있었다고 하나, 다른 읍지에는 二池四泉으로 기록 되어 있다. 샘은 길영천, 객사 옆, 대밭, 고창읍성의 우백호로 과거 고창여 중 가사실 마당 등 4곳에 있었다. 객사 옆의 샘은 막아버렸는데, 계속해서 물이 나오니 살렸다. 우백호의 기슭에 있는 샘은 막아 그 흔적이 사라졌다. 고창읍성의 대밭은 유영하 스님이 조성하였는데, 1940년대 일본의 일제강점 기 때였다. 유영하스님은 문수사 주지로 있다가 모양성 안에 절을 만들었 다. 그러면서 그곳에 대밭을 조성한 것이다. 대는 흥덕의 박주양씨댁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다. 대밭의 샘물은 건수가 아니고 생수여서 물이 좋다. 지 금도 대밭에는 옹달샘이 있고, 콘크리트로 만든 뚜껑이 있다. 길영천(吉靈泉)은 건수로 비가 오면 수량이 많고, 건기 때는 수량이 줄어드


는 전형적인 건수다. 길영천은 1970년대 고창읍장이었던 정길수씨가 만들었 다. 동문에는 옹성이 있다. 누각을 1976년 복원할 때, 등양루(登陽樓)라 이 름을 지었다. 진서루는 1970년대 후반 누각 연혁기에 서문은 서쪽을 진압해 야 한다는 뜻으로 진서루라 하였다. 공북루는 누각이 남아 그대로 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면서 이름이 없어진 동문만 이름을 짓고, 진서루는 그대로 둔 것이다. 샘은 풍화루에서 동쪽으로 반듯이 올라가면 우백호 산등성이에서 물이 나온 다. 옛날 객사 뒷마당에 있었다. 고창여중에서 그 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 후 샘을 메워 버렸다. 객사 옆의 샘은 막았으나, 옆으로 터져 나와 지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옛날에는 객사가 동쪽에 있었다. 여학교의 동쪽 교 사 자리에 객사 마당에 샘이 있었다. 현재의 객사는 조선후기에 세운 것으로, 전 객사는 지금 객사의 동북쪽에 있었다. 장청은 본래 내아의 부속실로 원래는 5칸이었다. 풍화루를 들어가야 내아가 있다. 동헌은 동학농민군이 불을 내 당시 사령청을 임시 동헌으로 썼다. 지 금으로 말하자면 임시청사이다. 사령청을 개조하여 동헌을 쓴 것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 중이 그곳에 살아서 건물이 남았던 것이다. 사령청자리에서 고창고보 수업도 하였다. 작청은 원래 9칸 집이다. 성벽의 아래 넓이는 2m, 중간이 1.4m, 위가 80cm 로 축성되었다. 공북루 앞에서 3.1운동의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그때 박동 차씨가 선언문을 가지고 왔다. 고창읍성은 부분적으로 여러 번 무너졌다. 원형이 보존된 것은 고창청년회 의 역할이 컸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인 김승옥, 신기업, 은규선 등 당시 쟁쟁한 청년들의 활동 때문이다. 이들은 나이 또래가 비슷하고, 갑신정변 전후에 태어났다. 은규선은 고창양명학교 1기생으로 이 단체의 행동파였다. 김승옥씨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신기업씨는 이들을 따라 다녔다. 1910년 후 김승옥은 노동운동을, 은규선은 경술합방 당하던 해에 양명소학교를 졸 업하였다. 고창에서 가장 먼저 신교육을 받았다. 양명보통학교는 은규선씨 의 아버지인 은성봉씨가 1907년에 설립하였다. 설립인가는 구대한제국정부 에서 해준 것이다. 사립양명보통학교가 무장보통학교보다 더 빨랐다. 사립 양명학교는 경술합방 이후 고창공립보통학교의 모태가 된 것이다.



고창읍성과 동학농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