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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군의 숙영지 사포와 후포 고창군 흥덕면 소재지에서, 22번 일반국도 부안로에서 분기한 면도 103호 선을 따라 줄포 방향으로 2km쯤 가면 서해바다와 인접한 사포리 사포마을이 나온다. 사포는 서해의 곰소만을 향하는 서향이고, 지형적으로 배가 정착하 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흥덕현의 전세곡과 대동미를 거둬 사창에 보관했다가 경창으로 보냈던 사진포(사포리)는, 바닷물을 고아 소금 을 만드는 큰가마[鹽盆, 염분],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 물 속에 나무를 둘러 꽂아 물고기를 들어오게 하는 울[漁箭. 어전], 상선이 모여드는 곳이다. 조 선 정조 23년(1799)에 암행어사 유경은 정읍 등 인근지역의 전세(田稅)를 운송할 수 있는 장소로 이곳을 꼽았다. 1920년 사포와 후포에서는 일본인 상선, 한국인 객주, 미곡상인 들을 중심으로 어물과 미곡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일대의 경제에 큰 영향을 행사한 일본인이 독립단 의병에게 피살되자 신변에 불안을 느낀 일본인이 줄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뒤 줄포항은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융성하였고, 1961년부터 1987 년 사이에는 곰소항이,

1988년 이후에는 격포항이 번성하였다. 사포마을은

풍수적으로 게구멍형국[蟹穴]이라 하여 마을 어귀에 할아버지 입석과 500m 간격을 두고 할머니 입석을 세워 고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수령이 많고 큰 나무로는 당산나무인 느릅나무 한 그루와 이일송이 있다.

<사진 1> 사포마을


<사진 2> 사포마을 표지석 사포마을에는 천연 암반 해수탕이 있고, 조선조 때 대동미를 보관하고 운 송했던 해창터와 창샘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봉 기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숙영지가 있다. 동학농민군은 부안면의 굴치를 넘어 알뫼장에 도착하고, 이어 흥덕관아를 점령한 후 이곳 사포에 도착하였다. 사포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배를 대기 편리한 천혜의 항만 을 갖추고 있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 로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국방전략상 호남내륙으 로 통하는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조선조 때에는 첨사(僉使) 가 주둔하여 해안경비를 담당하였다. 또한 호남내륙의 수산물과 고창지역 세미인 대동미를 운송하는 포구이기도 하였다. ‘사전후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포가 먼저 번창하고 후포는 그 뒤에 형성된 마을이다. 초항기 에는 바닷가 해변에 모래가 많아 사진포(沙津浦), 사진포(沙鎭浦 )라 하였 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주항, 회목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포 리’라 하고 흥덕면에 편입되었다.


<사진 3> 흥덕현 지도 사포리는 흥덕면의 서북부에 있는데, 마을의 동쪽은 신송리와 치룡리에 이 웃하고 서쪽은 서해의 곰소만이다. 방장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신림저수지에 서 멈추어 농업용수로 활용되고, 동출서류의 물줄기는 유유히 곰소만의 서 해바다로 흘러간다. 갈곡천을 사이에 두고 서남방향은 부안면이고 서쪽의 곰소만은 부안군과 경계를 이룬다. 고려 건국 초기 12곳의 해안지역에 조창 이 설치되었다. 고창, 무장, 흥덕현의 인근에는 영광의 법성면 고 법성마을 의 부용창과 부안의 안흥창(줄포)이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고부군에 속했지 만 흥덕감무가 고창현의 감무를 겸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고창지역의 세곡은 영광의 부용창보다는 흥덕현 사진포에서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 전라도에는 영산창과 덕성창 두 곳이 있었는데, 영산창은 지금의 나주 택촌마을로 27개 고을의 세곡을 거두었다. 고창은 흥덕, 무장과 함께 영산 창에 조세를 납부하였다. 세조 때 법성포에 조창을 설치하고 39척의 조운선 을 두면서 고창, 흥덕, 무장 등 15개 고을의 세곡을 거두어 매년 3월 15일 이전에 법성포를 출발하여 황해도 연안과 한강을 통해서 4월 10일 안으로 경창(京倉)에 납부하였다. 1658년(효종 9년)에는 정태화의 건의로 해안지역 부터 각종 곡물을 미곡으로 통일하여 바치는 대동법이 실시되자 초기에는 대동미를 사진포에 납부하였는데, 그 뒤 흥덕의 사진포(사포의 해창) 또는 법성포로 몇 차례 변동이 있었다. 고창현에는 대동저치미(儲置米) 145.2석, 상납미 734석을 풍흉에 가감하여


2월에 흥덕사진포에 바치면 3월에 싣고 부안 금모포, 칠산, 변산, 군산포를 거쳐 경창에 도착하는데 9일이 소요되었다. 한 고을의 세곡을 두 곳에 납부 하는 폐단을 시정하고자 전세와 함께 대동미도 법성포에 납부하였던 것을 1788년(정조 12년) 장성과 고창의 대동미를 흥덕의 사진포로 봉납케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호남 도신의 장청에 따라 장성과 고창의 대동미를 법성 조창으로 봉납하지 말고 흥덕 사진포로 봉납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 다”고 함―『조선왕조실록』25권 첫 번째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 나 현재는 마을 어귀에 위치한 선착장으로 추정되는 암반, 창생, 창터가 그 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1894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열기 위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독일 의 농민전쟁,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 인도의 세포이 난과 함께 근대 이행기 에 전개된 민중항쟁이었다. 이는 동아시아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사적 의의 가 있는 사건이다. 이 민중항쟁의 중심에 고창이 있었다. 1894년 3월 20일 무장포고문을 선포한 동학농민혁명군은 ‘보국안민창’이 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말을 타거나 걸어서, 나팔을 불거나 북을 두드리 며, 총을 쏘면서 진격하였다. 무장관아를 점령하고 동진하여 전봉준 장군 출생지인 고창현 산내면 죽림리 당촌(현 고창읍 당촌)에 이르러 대소간들이 지어준 음식으로 점심을 마치고, 길을 재촉하여 화시봉을 우회한 서산 모퉁 이길 사실터 고갯마루(서해안고속도로 고창고인돌상하휴게소)를 넘어 흥덕 고을의 운양과 사창길로 들어섰다. 석양에는 후포에 사는 김부잣집의 주선 으로 후포, 사포에 이루는 장사진을 이루어 머물렀다. 23일 정오에는 줄포 신부잣집의 협조로 줄포장에서 3,000상의 국밥으로 점심을 마치고 같은 날 밤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2~3일을 거친 3월 25일 백산으로 진을 옮겨 창의소 를 차리고 백산봉기 기틀을 마련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사포리 일대에서 숙영하면서 음용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포의 창샘과 후포의 용 샘, 그리고 동학농민군 진격로 표지석이 있다. 사포마을 안길에 들어서니 공터 맞은편에 마을회관이 있고, 왼편으로 창샘이 있다. 농민군이 출발 첫 날 이곳에서 하룻밤 새우잠을 잘 때 후포의 용샘과 더불어 3,500여 농민군 (고창1500 무장1300 흥덕700)이 활용했을 우물이 2곳 있는데, 이 우물은 큰 뚜껑을 덮어쓴 채 지금도 남아있다. 농민군이 사포와 후포에 들이닥친 과정을 수록을 통해서 살펴보면 “二十 四日到付 興德縣公兄夕狀馳告 內今月二十二日夕時量 不知何許人數千名 擧旗


鳴鼓吹羅放砲或騎或步 自高敞界來到本縣沙後浦止宿” “24일 도착한 흥덕현 공형(공문서 수발자)이 저녁 무렵 말을 타고 달려와 고하기를 22일 저녁 무 렵 알 수 없는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총을 쏘아대 면서 혹은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고창 경계로부터 도착하여 본 현 사포, 후포에서 자고 다음날 부안 줄포로 떠나겠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1) 동학농민혁명군 숙영지 1894년 3월 봉기 초 고창 일대의 동향 흥덕 공형이 낸 문장을 보면, “동 학도 3,000여 명이 말하는 바로는 고부 문장을 낸 날, 고창현으로부터 와서 흥덕현 후사포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으며, 부안 줄포로 전진하여 고부군으 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기록인 수 록(隋祿)에서 사포와 후포 일대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숙영하였음을 뒷받침 해 준다. 2) 창샘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 터가 남아 있다. 한 곳은 김소희 생가 가까이에 있 고, 또 하나는 마을회관 남쪽으로 20여m 떨어진 거리에 있다. 현재 음용수 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하단부에는 활석을 원형으로 쌓고 그 위에 고른 장대 석을 올려놓았다. 다시 그 위에 장대석을 결구하여 세워 쌓았다. 창샘이라 부르는 이 우물은 조선조 대동미를 보관하던 창고 옆에 자리하고 있다. 동 학농민혁명군이 무장기포지를 떠나 고부로 향하던 1894년 3월 22일 이 지역 일대에서 숙영하면서 음용수로 활용한 우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창샘 터


3) 천연 암반 해수탕 흥덕면 사포리 사포마을 해변에 노출된 암반에다 가로 1.3m, 세로 2m, 깊 이 0.3m의 욕조를 파서 욕장으로 쓰고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풍우를 막을 수 있도록 건물을 세우고 시멘트 구조로 욕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정 확히 언제부터 천연 암반 해수탕을 이용했는지 고증할 수 없으나 암반의 마 모상태로 보아 수백 년은 된 듯하다. 탕 주변에 불구덩이를 만들어, 인근 부안면 수강산에서 산출되는 유황분이 다량 함유된 화강암을 장작불로 2~3시간 가열시킨 후, 욕조에 채워놓은 해 수에 붉게 달구어진 돌덩이를 차례로 집어넣어서 해수를 뜨겁게 함과 동시 에 유황분이 해수에 녹아들게 한다. 욕수의 온도가 섭씨 40˚ 내지 55˚ 정 도로 유지케 한 후 약쑥을 욕수에 적시어 몸을 적신 다음 탕조에 들어 전신 욕을 하게 된다. 이 해수탕욕의 시기는 음력 4월8일부터 5월 단오절까지를 춘절기로 하고 추기는 봄에 말려놓은 약쑥을 사용해 같은 방법으로 해수욕 을 즐긴다. 해수욕을 하면 피부병은 물론, 신경질환, 산후통, 부인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개인 준비물로는 추리닝, 양말, 수건이 필요하다. 입욕시설은 4인 기준하여 3개소가 있으며, 1개소 이용료는 60,000원이다. 해수탕을 가든과 함께 운영하고 있어 백숙, 옻닭, 메기탕 등 식사도 할 수 있다.

<사진>


<사진> 해수탕

4) 이일송(二一松) 변함없이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는 꿋꿋한 절개와 의지를 나타내며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사포마을 뒤편 주항으로 가 는 길에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한 그루 로 보여 ‘이일송’이라 불린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 청나라 상인 ‘청송(靑松)’과 주막집 딸 ‘명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다. 누에, 소금, 쌀과 더불어 3백으로 유명한 법성은 중국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진 포구였다. 법성으로 입항한 청나라 젊은 상인 청송은 비단 을 사는 일보다 칠산어장에 나아가 바다낚시를 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죽도 앞에서 바다낚시를 하던

청송은 갑작스럽게 파도가

일자, 파도를 피하여 사포에 들어와 주막에서 묵게 되었다. 주막에 머무는 동안 주항에서 빚은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기거나 해수탕에 들려 해수찜을 즐기곤 하였다. 그는 ‘명주’라는 아름다운 주막집 딸에게 반해 그녀를 흠 모하며 사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그녀 생각뿐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사연을 명주 어머니 인 주모가 모를 일이 없었다. 주모는 청송의 이러한 마음을 명주에게 전한 다. 명주도 청송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둘은 달 밝은 밤이면

마을 뒤

언덕에서 사랑의 밀회를 즐긴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청송은 명주에게 고향 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들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청나라가 있는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둘이 소나무가 되어버렸다고 한 다.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을 속삭이면서 서 있는 소나무 이일송(二一松)은 그날의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이면 마을


의 평온과 가정의 소원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소나무에 그넷줄을 매 달아 그네를 타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사진> 이일송

<사진 > 이일송

동학농민군이 건넜던 갈곡천(葛谷川) 방장산 자락에 위치한 갈촌과 세곡에서 흐르는 내[川]라서 붙여진 이름이 다. 갈곡천은 신림면 신림리 가평리에서 발원하여 신림저수지를 지나 부안 면과 흥덕면을 경계하며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지방 2급하천으로, 유입면적 은 46.84㎢, 하천의 길이는 15.77㎢로 유역의 형상계수는 0.19이다. 하천의 좌우 안을 따라 11.2㎢의 농경지가 발달해 있다. 용복천, 덕화천, 세곡천, 자포천, 사실천, 운양천, 오룡천(부안면 상등리에서 합류하는 지방 2급하 천), 장고천이 갈곡천으로 합류한다.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한 시설에는 보 11개소, 낙차공시설 2개소가 있다. 갈곡천에는 235종의 동식물이 서식하


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인 황새와 매, 그 리고 2급인 검은 목두루미 등 7종이 하구에서 월동하며 말똥구리들의 서식 지이기도 하다. 갈곡천은 아름다운 갈대길을 따라 10리 길을 흘러 서해의 곰소만으로 간다.

<갈곡천 전경> 갈곡천 주변에는 청동기시대ㆍ원삼국시대ㆍ삼국시대 이후에 해당하는 것들 로 11개소의 19기 지석묘, 3개소의 고분군, 6개소의 유물산포지 그리고 1개 소의 산성과 민속자료인 입석 2개가 확인되었다. 시대별로는 선사시대 유적 인 11개소의 지석묘 유적과 옹골마을 유물산포지, 원삼국시대의 유적지로는 사포리 옹관과 뱃말마을 유물산포지이며, 그 나머지는 삼국시대~조선시대 이후의 유적으로 구분된다. 유적 대부분은 소하천인 갈곡천 주변지역에 있 었는데, 대개 구릉성 산지로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이 구 릉은 개간 및 경작으로 인해 파손 정도가 심한 상태였다. 흥덕면 후포리 사 포마을 옹관묘 유적은 전북지역에서 사례가 늘고 있는 옹관묘 유적과 비교 자료가 됨은 물론 영산강 유역 옹관고분과의 관계 등 원삼국시대의 묘제 연 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는 갈곡천이 내륙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해 상로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근래까지 갈곡천을 따라 배들이 왕래하였다.


<사진 8>


동학농민혁명군의 숙영지 사포와 후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