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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義)가 살아 있는 풍요의 땅 - 흥덕면 송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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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와 역사 송암을 굽어보다 방장에서 흩뿌려진 듯한 작은 맥들이 서해로 끊기는 듯 이어오다가 곰소만

을 앞두고서 멈춰버린 곳, 성봉 배풍(培風). 배풍에서 오던 길을 따라서 굽어다보니 군데군데 나지막한 산들이 기름진 평야를 머금고서 풍성함을 자랑하고 흥성함을 예 감한다. 흥성(興城)이라는 흥덕(興徳)은 갑오・을미개혁 이후에는 흥덕군이었다. 식민지 시대인 1914년에는 무장군과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병합되었다. 그러면서 현내면(県 内面)과 북면(北面)이 합해져 흥덕면이 되었다. 당시 흥덕면은 동사리(東沙里), 흥덕 리(興徳里), 교운리(校雲里), 오호리(五湖里), 치룡리(峙竜里), 사포리(沙浦里), 후포 리(後浦里), 신덕리(新徳里), 신송리(新松里), 석우리(石隅里), 하남리(下南里), 용반 리(龍盤里) 등 12개의 법정리였다. 그리고 면의 중심지는 동사리였다. 1935년에 사 천리(沙川里)와 석교리(石橋里)가 편입되고, 1973년에는 제하리(堤下里)가, 1986년 에는 송암리(松岩里)가 편입되면서 현재 16개 법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배풍에서 다시 방장을 바라다보니, 흩뿌려진 작은 맥들은 배풍에 와 닿기도 전에 매봉[鷹峰]에서 머무른다. 매봉은 주변의 낮은 구릉과 기름진 평야를 아우르니, 그곳 이 바로 송암(松岩)이다. 송암은 매봉과 그 아래의 빈월산에서 나는 물이 배풍을 향 해 동출서류하는 형국이다. 송암의 중심지 종송리를 향하다가 송암교 못미처 오른편으로 약 1km 지점에 야동 (冶洞)이 있다. 송암교를 건너면 곧바로 종송리 동구다. 동구에는 두 갈래 길이 있 다. 왼편은 송암의 뒷산인 송산(松山)으로 오르는 언덕길이다. 송산의 등치 왼편은 여곡, 등치를 따라 곧바로 가다보면 매봉과 아래 빈월산리가 나온다. 다시 송암의 동 구 오른편 갈래 길은 종송리와 용암리를 거쳐서 임리로 향하는 길이다. 이렇듯 현재


종송리를 중심으로 야동과 용암에서 빈월산까지, 그 획이 자못 크다. 제법 울창한 소나무숲인 송산(松山)은 종송리의 배산이다. 종송리의 좌향은 동남 향 또는 남향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방장산을 앞에 둔다. 마을의 임수는 송암제(松岩 堤)다. 송암제를 중심으로 오른편의 안산(案山)과 둥글재(등구치), 왼편의 매봉이 마 을의 균형을 다잡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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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암리 앞들. 멀리 매봉이 보인다.

유래와 지명

송암의 주요 자연부락은 종송리다. 원종송리라고도 하는 종송리에 사람이 살기 시 작한 것은 1400년쯤. 조선 건국 초기에 장흥고씨(長興高氏) 장령공(掌令公) 고직(高 直)이 입향해, 큰아들 철산(哲山)은 지금의 여곡에, 작은아들 철성(哲成)은 지금의 종송에 각각 들어가 살았다. 마을 앞의 큰 바위에 새겨진 ‘고려곡(高麗谷)’은 조선 건국 초기에 고려를 잊지 못 한 장흥고씨 일가가 새긴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들어와 살 당시에 지금의 종송리와 여곡 모두를 ‘고려곡’이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려곡(高麗谷)이라는 글자가 마모돼, 1892년에 후손 고순진(高舜鎮)・고예진(高禮鎮) 형제가 ‘고려곡선적(高麗谷先蹟)’이 라는 글자를 다시 새겨 넣었다. 고순진・고예진 형제가 바람을 막기 위해서 마을 주변에다 소나무를 심으면서 ‘고 려곡’을 ‘종송(種松)’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송암교를 건너기 전의 오른편 야동까지를 모두 일컬어 ‘종송리’라 하였다. 종송리 잿등 너머는 여곡 또는


. 속동이라는 곳과 함께 여곡이라 하고, 행정구역상 ‘제하리’에 속한다. 참 고로, 여곡은 고려곡을 줄여서 여곡이라 했다는 설도 있고, 깊고 한적한 곳이라는 의 미인 ‘고라실’이 ‘고려실’로, 그리고 ‘려실’이 ‘려곡’으로 변칭됐다는 설도 있다. 마을의 안산과 안산과 맞닿아 있는 둥글재[또는 登亀峙]가 품은 마을이 용암(龍 岩)이다. 용암을 월암이라고도 하는데, 매봉 아래의 빈월산리(賓月山里)와 용암리가 통합돼, 월암리(月岩里)가 되었다. 따라서 월암리는 종송리와 함께 송암의 한 축을 이룬다. 현재 송암의 행정구역은 송일(松一)과 송이(松二)로 나누어진 종송리와 월 암리로 대별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송암은 흥덕현 일남면(一南面)이었고, 갑오・을미개혁 이후에도 흥덕 군 일남면이었다. 한때 일남면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종송(種松)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제내(堤内), 빈월(賓月), 칠현(七玄), 용암(龍岩), 야동(冶洞) 등의 자연촌과 병합하였다. 그때 중심 마을인 종송의 송과 용암의 암자를 취해 ‘송암’이라 하고, 신 림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에 다시 흥덕면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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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과 자연 인문 환경

송암의 주요 촌락인 종송리(種松里)는 제내촌(堤内村)・부귀촌(富貴村)・불무골 [冶洞]・서냥당[城隍堂]등으로 구성된다. 월암리는 용암리(龍岩里)와 산직골[山直 洞], 그리고 빈월산(賓月山, 손들메 또는 손달메) 등으로 구성된다. 송암의 주변에는 뒷산인 송산과 안산 및 둥글재가 자리한다. 인근 산 중에 가장 높다는 매봉산은 빈월산리를 품고 있다. 빈월산의 안산인 꽃봉[花峰] 바로 옆이 매 봉산이다. 매봉을 추령(鶖嶺)이라고도 한다. 송암리의 인구는 2008년 11월, 120세대 242명으로, 흥덕면 전체 인구의 약 6%를 차지한다. 한때 종송리에는 초등학교(당시 신림관립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광복 직 후에 폐교되었다. 송암의 ‘가택신 신앙’과 ‘성주고사 제물상’은 학계에서도 관심을 갖는 중요 민속자 료다. 성주상 아래에다 지푸라기를 놓고 상 위는 쌀을 담은 밥그릇에 촛불을 밝히고, 촛불 뒤에 떡시루와 청수를 올려 놓는 제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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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지 종송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장흥고씨가 1400년대에 들어와 살았던 세거지다. 여기에 광주반씨(光州潘氏)와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외에도 전주최씨(全州崔氏), 상 산김씨(商山金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종송리에서 여곡으로 가는 잿등 왼편 송산의 소나무숲 언저리가 장흥고씨가 처음 살았던 곳이다. 흥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약 2.5km 지점에 위치한 종송은 남서향에 동출서류 형이며, 원종송리에는 현재 약 57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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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암마을(원종송) 모습

종송리 입구에는 송암 경로당이 있다. 입구에 있던 큰 규모의 미곡방앗간은 사라 지고, 고추를 빻거나 떡을 만드는 작은 방앗간만이 남아 있다. 산업화에 따른 전통적 농업이 쇠퇴한 데 따른 것이다. 송암제 둑에는 마을의 당산나무인 버드나무와 소나 무가 있다. 송암제 옆에는 1885년에 건립한 만취정(晩翠亭)이, 1946년에 관립학교 건물을 뜯 어다가 지은 모정과 나란히 서 있다. 만취정과 모정 바로 옆에는 수령이 150여 년 된 소나무 8그루가 있다. 종송리 입구에는 ‘고려곡바위’와 ‘애국지사 고순진(高舜鎮)・고예진(高禮鎮) 선생 추모비’와 관련한 현충시설이 있다. 고려곡바위에 나오는 송석정(松石亭)은 파정되었 다. 송석정 터는 원래 고려곡바위가 있던 송산 언저리로 추정된다. 송암의 들머리를 기름지게 하는 마을 앞 송암제를 장태제(蔵台堤 또는 丈太堤)라고도 한다. 이외, 지명으로는 웃골과 고르메골이 있다. 웃골은 송암제 위의 골짜기 논을 말하 며, 고르메골은 종송리 앞들 너머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쪽조골은 매봉 가는 쪽의 공동묘지 골짜기를 말하며, 부귀촌골 역시 송암 동구에서 송산으로 오르는 뒷골을


. 벌이들은 안산 너머의 들이고, 마다리들은 송암교(마박교)에서 종송리 앞들 사이의 들이다. 만취 고순진과 송천 고예진이 태어났던 곳은 송암리 379번지다. 남도식 일(一)자 형 목조의 정면 7칸 모퇴인 고시청(高時清)의 집은 증손 고석상(高錫相)이 현재 거 주하고 있다. 고시청의 가옥에는 면암 최익현의 문집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 수십 권과 면암연보(勉菴年譜), 그리고 송천 고예진의 문집 송천집(松川集)등이 소장돼 있다. 종송리 한 중심부에는 1947년에 세워진「문절공해여재반선생 문장공석암반선생 추모비(文節公海旅斎潘先生 文壮公石菴潘先生 追慕碑)」가 있다. 광주반씨(光州潘 氏) 입향조와 관련된 비로 보인다. 앞의 비문은 송천 고예진이 지었다. 광주반씨 입향조 관련 비 바로 아래에는 최근에 건립한 모정과 그 옆의 돌로 된 정자(井字) 우물이 있다. 우물의 정자석에「유사 고언국 임술 오월 일(有司 高彦国 壬戌 五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고언국이라는 사람이 유사(有司)가 되어 임술년 (1862) 5월에 이 우물을 만들었거나, 또는 정비했다는 표식으로 보인다. 마을 뒤의 부 귀촌은 옛날 부자가 살았던 터로 알려져 있다. 터에는 기왓장과 주춧돌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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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을 중심의 정자(井字)우물

서냥당의 야동

마을 뒷산이 불무(풀무의 방언으로, 쇠를 달구거나 쇳물을 녹여 땜질할 때 사용하


도구)와 같다 하여 ‘불무골’인 원래 야동(冶洞)은 1790년대에 여양진씨(驪陽陳 氏)가 들어와 살았다. 흥덕면 소재지로부터 동남쪽 2km 지점인 야동은 남향에 서출 동류 형이다. 야동 마을회관이 있는 곳을 서냥당[성황당]이라 불렀다. 서냥당에 1910년경 전주 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원야동과 서냥당을 ‘야동’이라고 불렀 다. 서냥당은 한때 개화지[開花地, 또는 개지터]라고도 불렀다. 주변에 항상 꽃이 피 어 있다고 하여, 개화지라 했다고 한다. 고창에서 흥덕면 소재지에 이르기 직전에 오 른편 도로가의 마을이 서냥당이자 개화지다. 전주이씨 외 상산김씨(商山金氏)가 살 고 있다. 마을 노인들은 전주이씨가 들어오기 전부터 서냥당에는 솥쟁이(冶匠. 솥을 때우 는 야장쟁이를 말함)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노인들의 유년기에 많이 나왔다 는 솥 조각들을 가지고서 추정한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남서쪽 약 150m 떨어진 도 로가가 옛날 성황당 자리였다고 한다면,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야말로 솥쟁이들이 살았던 ‘야동(冶洞)’이 아니었을까. 다른 고장의 지명 야동(冶洞) 역시 솥쟁이들의 거주지였다. 서냥당 앞은 망골이다. 망골 남쪽 등치를 방구등(소고와 비슷하게 생긴 북을 말 함)이라 한다. 방구등 서쪽 끄트머리 도로가에 성황당의 흔적인 돌무더기가 있었 다. 서냥당 북쪽 골은 텃골이다. 텃골에서 기왓장이 나왔다는 전언으로 보아, 사람 이 살던 곳으로 추정된다. 텃골 북쪽 등치는 불무산이다. 불무산 언저리가 바로 원 야동이다. 야동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고총지(古塚址)와 고대 유물의 산포지가 있다. 옛 이름이 서냥당인 야동에는 현재 약 14가구가, 원야동에는 1가구가 거주한다. 주변에 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가 늘고 있고, 소규모 공장도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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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14

4> 야동마을 전경. 원래 마을이름은 ‘서냥당’이었다.

빈월산의 월암 행정구역개편 당시에 용암리의 암자와 빈월산리의 월자를 따서 ‘월암리’라

하였다. 용암리는 흥덕면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빈월산리는 약 3.5km 지점 에 위치해 있다. 남북향에 남출북류 형인 용암리는 1730년대에 전주이씨 완풍대군(完豊大君) 후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낸 원방(元芳)이 말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은 용처럼 생긴 바위 2개가 있었는데, 이를 ‘용바우등’이라 했다. 용바우등 과 관련한 전설이 있다. 1998년 군도 확・포장 공사 때 용바우등은 땅에 묻혀져 버 렸다. 용암마을을 에워싼 둥글재 등치에는 9개의 바위가 나란히 박혀 있다. 이를 구 암(亀岩 또는 九岩)이라 부르는데, 구암은 구룡(九竜)을 의미한다. 용암은 용과 관련 이 깊은 마을임이 분명하다. 용암 뒷등인 둥글재의 원래 이름은 등구치(登亀峙)였다는 설이 있다. 거북이가 오 르는 형국이라 해서 등구치라 했다는 곳은 장흥고씨의 문묘 자리. 그러나 둥글재의 뒷등이 둥글다 하여 둥글재 또는 둥글치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산직동은 장흥고씨 문묘의 ‘산직’이가 살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 용암의 서쪽에는 벌이등[蜂嶝] 과 똥뫼(또는 뚝뫼)가 있다. 현재 용암리에는 2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데, 주로 전주이씨와 행주기씨(幸州奇氏) 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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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용암마을 뒤 둥글재의 ‘구암’. 너머에는 귀암리가 있다.

[鷹峰山]을 추령산(鶖嶺山)이라고도 한다. 매봉산 옆은 빈월산리의 안산인 꽃봉[花峰]이다. 매봉산에는 절터골이 있고, 절터골 바로 아래에 장흥고씨 제실이 있 다. 매봉산이 굽어보는 마을이 바로 빈월산리다. 빈월산리는 1689년에 형성된 마을이다. 남향에 동출서류 형이다. 동복오씨(同福呉 氏)와 경주이씨, 창녕조씨 등 10여 가구가 현재 살고 있다. 주변은 인삼밭과 고들빼 기 농장이 있다.

<사진 6> 빈월산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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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역사 용바우등 전설


전해지는 용바우등에 관한 전설이다. 마을 장골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무꾼이 있었다. 어느 날, 젊고 아름다 운 여자가 나타나 나무꾼에게 대뜸 아내로 받아달라는 간청을 하는 게 아닌가. 당황 해 하던 나무꾼은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청은 너무도 간곡하였 다. 나무꾼은 마지못해 여자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날로 여자는 병든 시어머니를 지 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그 때문인지, 나무꾼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어느 날 밤에 나무꾼의 어머니가 변소를 갔다 오던 길에 방문에 비친 아들과 도란 도란 얘기하는 며느리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가. 며느리 는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작은 용(龍)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정신을 바짝 차렸 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며느리의 마음씨가 너무도 착하고, 며 느리의 정성으로 병도 나았기에, 며느리가 용이라는 사실을 아들에게 얘기하지 않았 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속 깊은 마음을 안 며느리는 감동하였다. 나무꾼과 사람이 된 용과 시어머니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 다.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느리인 용을 향해 하늘이 명한 것이다. 며느리는 남편과 속 깊은 시어머니를 두고서 하늘로 올라가기가 싫었다. 며느리가 하늘의 명을 계속해서 거역하자, 하늘은 나무꾼과 시어머니를 바위로 만들어 버리기 로 하였다. 결국은 나무꾼과 시어머니는 마을을 지키는 바위가 되었고, 며느리는 하 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나무꾼과 시어머니가 바위로 변하면서부터 마을의 이름은 ‘용 암(龍岩)’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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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용바우등’이 묻힌 곳은 조립식 건물 측면 도로가이다.

상징, 고려곡바위 395번지에 고려곡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원래 마을 뒷산인 송산 자락에

있던 것인데,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장흥고씨 고직(高直)이 1365년에 조선 태종의 부름을 피하여 영광에서 이곳 송산으로 은거하였다. 그리고 고려를 잊 지 말자는 뜻에서 이곳을 고려곡(高麗谷)이라 하였다. 현 송암리와 제하리의 여곡이 모두 고려곡(또는 고려실)으로 불렸다. 더불어, 송산 등치의 큰 바위에다가 ‘고려곡 (高麗谷)’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500여 년의 세월이 지남에 자획이 희미한 것을 15세 손 고순진・고예진 형제가 이 바위에다「고려곡선적 만취정 고순진 송석정 고예진(高麗谷先蹟 晩翠亭 高舜鎮 松石亭 高禮鎮)」이라고 다시 새겨 넣었다. 고려곡바위에 나오는 송석정(松石亭)은 바위 바로 옆에 건립되었으나 파정되었고, 만취정(晩翠亭)은 송암제 옆에 마을 모정 과 나란히 서 있다. 전에는 만취정의 현판과 시판에 제영(題詠)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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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려곡바위

당산제 309번지의 송암제 제방의 버드나무에는 현재도 짚으로 꼰 줄이 감겨져

있다. 제방 위의 나무는 두 종류로, 버드나무와 소나무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 된 버드나무의 수령은 217년(2009년 현재), 높이 16m, 둘레 6.5m다. 전해오는 얘 기로는 버드나무(할머니) 당산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심었 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버드나무 수령은 약 400년은 되어야 한다. 송암제를 축조하면서 당산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일부러 둑을 쌓았다고 도 한다. 당산제(堂山祭)를 동제(洞祭)라고도 한다. 일종의 마을 공동체 행사다. 제를 지내 는 장소는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된 사당, 또는 입석이나 당 산나무다. 제사 중에는 일종의 오락행사인 굿을 하며, 제사 음식과 술을 마을 구성원 들이 함께 나눠 먹는다. 송암리의 당산제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을 공동체 행사였다. 20년 전만 하여도 마을 주민들은 풍물을 하면서 집집으로 다니며 마당굿・정지(부 엌)굿・장광(장독대)굿 등을 했다. 이때 집주인은 나락이나 쌀, 돈 등을 내놓았고, 이렇게 걸립(乞粒)한 재물로 정월 대보름 행사를 준비하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집집의 남자들은 볏짚 한 다발씩을 마을 앞 광장으로 가지고 나와 줄을 꼬았다. 이


여자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마을 주민 모두는 잔치를 벌였다. 신이 난 남녀노소 모두는 농악을 치며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씩을 돌았다. 줄을 메고 마을을 도는 행사는 8년 전부터 중단되었다. 마을에 사람이 없기 때문 이다. 단지 남녀가 줄다리기 삼세판을 하였다. 여자가 이겨야 마을이 태평하고 우순 풍조(雨順風調)하다 하여, 줄다리기는 남자가 한 번 이기고, 두 번은 여자가 이긴다. 할아버지 당산나무(소나무)에 감을 줄은 멘 남자들과 할머니 당산나무(버드나무) 에 감을 줄은 멘 여자들이 당산나무 앞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굿을 친다. 굿을 치면 서 마을 사람들은 재난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녕과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 어, 줄을 당산나무에 감는다. 이러한 당산제는 마을 축제로 승화되어 매년 성대히 치 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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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송암의 당산나무. 버드나무로 할머니를 상징한다.

유물의 산포지 야동

야동의 구릉지는 고대 유물이 산포돼 있는 곳이다. 학계의 조사 결과, 고대 유물이 산포된 지역은 세 군데. 그 첫 번째는 야동 마을(서냥당) 남측에 위치한 구릉(방구 등)이다. 마을 진입로 하단부와 방구등은 ‘경질타날문토기편(硬質打捺文土器片)’과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 등의 유물이 나온 곳이다. 두 번째 지역은 야동 마을(서냥당) 북측, 즉 동서로 뻗은 나지막한 능선이다. 현재


정상부는 송림이 조성되어 있고 하단부(텃골)는 개간되어 밭과 축사로 이용되 고 있다. 이곳에서는 ‘옹관편’과 ‘연질토기편’, 그리고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 되었다. 이외,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고총지(古塚址)가 있다. 세 번째는 용암리 서측 구릉 해발 31m의 동서로 뻗은 저평한 능선이다. 구릉 정 상부의 남사면과 북사면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경질타날문토기편’과 ‘경질토기편’, ‘연 질토기편’ 등이 있다.

4.

시대정신과 위인들

1)

고덕붕의 충절과 고여흥의 학문

고덕붕(高徳鵬, 1552~1626년)의 자는 남익(南翊), 호가 여곡(麗谷)이다. 장흥고 씨로, 고려곡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창의격문을 작성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진영에 합류해 왜군과 맞섰다. 고경명이 순국하자 채홍국 (蔡弘国) 등 92명의 동지와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그 맹주가 되어 왜군과 싸 웠다. 부안의 호벌치(胡伐峙)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에 조정은 여곡을 승정원좌승 지(承政院左承旨)로 증직하였다. 1988년에는 혈맹단 옆에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 고, 여곡을 배향하였다. 여곡 고덕붕의 손자 고여흥(高汝興, 1617~1678년)의 자는 빈거(賓挙), 호가 요은 (閙隠)이다. 요은은 어려서부터 비범해 내장사의 승려 계묵(戒黙)을 찾아가 글을 익 혔다. 어려서 모친을 여읜 요은은 계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논산의 미 촌(美村) 윤선거(尹宣挙)를 찾아가 공부했고, 명재(明斎) 윤증(尹拯)과도 교우하였 다. 저서로는 요은집(閙隠集)4권이 있다. 처음에는 창효사(彰孝祠)에 배향되었다가 지금은 옥제사(玉堤祠)에 배향돼 있다.

2) 고순진의 위국 충정 고순진(高舜鎮, 1863~1938년)의 자는 의경(義卿)이요, 호가 만취(晩翠)다. 송암 리 379번지에서 가선대부 고시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문인(門人)으 로, 1906년 면암 의거 당시에 항일 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인쇄하여 팔도에 포고하 기도 하였다. 1914년에는 논 80두락 값을 내어 무기와 군량미 및 거액의 군자금을 대한독립의군부에 헌납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 1973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국가 및 각계의 지원을 받아서 서울 장충단 공 원에 ‘한국 유림의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에는 만취를 비롯한 137인의 위국 지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제567호)이 추서 되었다. 송천은 만취의 아우이자, 나라가 위태하자 위국 충절을 행동으로 옮긴 동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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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 현충시설인 ‘만취’와 ‘송천’의 추모비

실천과 후학 양성에 진력한 고예진

(1)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들다 송천 고예진(高禮鎮, 1875~1952년) 역시 송암리 379번지에서 고시청(高時清)의 4남으로 태어났다. 족형 수남(秀南) 고석진(高石鎮)의 문하에서 경서와 주역을 독파 하였고, 수남의 인도로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 였다. 송천과 수남, 그리고 고제만 등은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 죽기로 결심하고 단식하던 충청도 청양의 면암을 찾았다. 여기서 송천은 호남에서 거의할 것을 말하 니 면암이 이에 동의하였다. 곧바로 호남의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거 의에 동참할 것을 권하니, 돈헌도 쾌히 찬동하였다. 1906년 2월에는 임병찬, 고석진 등과 함께 태인 무성서원에서 면암을 옹립, 호남의병 창의소를 설치했다. 송천은 거의(挙義) 연락 동원책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거의를 위해 장형인 만취 고순진에게 부탁해 조총 10여 정을 구입하여 면암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1906년 윤 4월 18일 면암이 이끈 의병 부대가 순창으로 진격할 때 진위대(鎮衛 隊)에 막혀, 면암 이하 12명의 간부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송천도 전주 감옥에 투 옥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방면되었다. (2) 대한독립의군부의 실무를 맡다


1914

임병찬(林炳瓚)과 고석진 등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서 대한독립의군부(大

韓独立義軍府)를 결성하였다. 대한독립의군부에 가담한 송천은 ‘종3품 통훈대부 독립 의군부 총무국 서기관’이라는 칙명을 받았다. 송천은 김제구, 김진기, 김건, 강종호 등과 함께 흥덕군 대표로, 그리고 총무국 실무진으로서 독립의군부 조직을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대한독립의군부란, 1914년 고종의 밀명을 받은 임병찬이 비밀리에 조직한 독립운 동 단체다. 1914년 5월에 전국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돼, 대한독립의군부는 해체 되고야 말았다. 이때 송천은 독립의군부 참모관으로 맹활약을 하다 붙잡혀 심한 고 초를 겪었다.

(3) ‘

’에 서명하다

1919년 3월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송천은 대한 독립 운동의 취지를 담은 독립 청 원서를 지어, 전국의 유림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같은 해 3월 23일에 한국 유림 대표 137인이 서명한 일명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족형 고석진, 장형 고순 진 및 족질(族姪) 고제만과 함께 연루돼,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이란, 1919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탄원서를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관련자들은 국외로 망명하거나 감옥에서 순사한 자가 많았다. 그 137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송천이다.

(4) 도동사 건립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다 1928년 8월에는 만취 고순진의 도움과 고창 유림들의 협찬을 얻어서 신림면 가평 리에 도동사(道東祠)를 건립하고, 면암과 수남을 배향하였다. 송천은 도동사에서 독 서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52년 음력 10월 12일 향년 7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1962년에는 송천의 학풍과 위국 충절을 기리기 위해 도동사에 면암, 수남과 함께 배향하였다. 1963년에는 제자들과 지방 유림들이 송천의 유고를 정리해 송천집 (松川集)4권을 발간하였다. 1973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국가 및 각계의 지원을 받아서 서울 장충단 공원에 ‘한국 유림의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를 건립하였다. 이 비에는 송천을 비롯한 137인의 위국 지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부는 송천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제123


)을 추서했다. 1986년 5월 5일에는 송암의 두 선생(만취와 송천)의 숭고한 도학 과 위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도내의 기관 및 전국의 유지들이 송암의 동구에다 7척 의 두 비를 세웠다. 1987년 8월 15일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식에 송천에게 내린 고종 황제의 칙명장이 전시되었다. 송천의 문하에는 고제언(高済彦), 신의성(慎義晟), 유종성(柳鍾声), 원용하(元容夏), 반동식(潘東植), 김기택(金基沢), 유종태(柳鍾泰), 신사범(慎思範), 남대희(南大煕), 고광철(高光哲) 등 수백 인이 있다.

<

5.

오늘

1)

조직

11> 고석상이 소장하고 있는 면암선생문집

송암리는 행정을 보조하는 이장(송일의 반인곤, 송이의 박명자, 월암의 기준서 등) 과 새마을 지도자(송일의 정병종, 송이의 이종은, 월암의 이성섭 등), 부녀회장(송일 의 최선임, 송이의 이동순, 월암의 유금자 등) 외 개발위원장이 있다. 이처럼 공적인 조직은 행정과 마을 공동체 간의 가교 역할을 한다. 이외 노인회는 행정의 간접 지 원을 받아서 마을 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노인회와 함께 경로당으로는 송일경로당 (최규형), 송이경로당(이종은), 월암경로당(이광섭), 빈월산경로당(오달상) 등이 있


.

2)

성균관 부관장의 도덕성 회복 운동

송천 고예진의 손 고석상(高錫相)은 최근 성균관(成均館) 부관장에 선임되었다. 2009년 4월 7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의 대성전에서 열린 신임 부관장 선임 고유례 (告由礼)에서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송암의 고석상이 선정, 선임패를 전달받았다. 고 유례는 성균관이 임원을 임명하거나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 대성전에서 거행하는 유 교의 중요 의식이다. 고석상은 흥덕향교 전교를 역임하는 등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国)으로서의 자부 심 회복과 현대 사회 및 미래 사회에 적용 가능한 윤리 도덕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인륜오상(人倫五常)이 위태한 오늘날에 군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질서를 바로잡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고석상은, 선대의 충의 정신을 본받는 일과 이를 확산 시키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고석상은 25년 간 공직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불우이웃을 돕거나 노인들을 위로하 였다. 더불어, 청소년들의 학업을 돕는가 하면 이들의 선・효행 및 생활 예절을 장려 하였다. 한때 ‘경로애향화합축제’를 열어서 송암의 출향인들과 함께 노인 위안 잔치 및 장수 노인과 효부, 선행자 등을 발굴하여 기리기도 하였다.

<

12> 고석상 성균관 부관장.

면암집과 면암연보, 송천집 등을 들어 보이고 있다.


3)

안식처, 낮은울타리의 집 동구에서 여곡과 빈월산으로 가는 송산 등치에 1986년에 세워진 대한예수

교 장로회 송암교회(목사 임철재)가 있다. 바로 옆은 ‘낮은울타리의 집’이다. 장애우 의 안식처라는 푯말이 보인다.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장애우가 된 성직자 임준택, 박 재생 부부가 설립한 교회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소외된 장애우들 을 ‘작은 예수’로 섬기겠다는 임준택, 박재생. 장애우들의 공동체 ‘낮은울타리의 집’은 45평의 아담한 벽돌집이다.

4) 친환경 농법과 고들빼기, 그리고 축산 송암에는 벼농사 외 복분자와 고들빼기, 인삼 등이 재배되고 있다. 최근에는 재배 작 물 품목별 모임인 ‘작목반’이나 ‘연구회’, 그리고 ‘영농법인’ 등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고들빼기 연구회와 고들빼기 작목반은 이 지역 특산인 양질의 고들빼기를 생산한 다. 송암의 고들빼기는 잎이 짧은 반면 뿌리가 길고 곧을 뿐 아니라 향이 진한 게 특징이다. 비옥한 황토에서 생장하며, 아울러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송암 고들빼기는 전국 최고의 가격을 받기도 한다. 고들빼기 연구회는 고들빼기를 한 철 일시적 공급을 지양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시기에 출하를 맞추는 재배 방식을 궁구한다. 더불어 가공과 포장을 해, 소비자가 찾 을 때마다 신선한 상태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도 강구 중이다. 이외, 오디 연 구회는 무공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해 고품질의 오디를 생산하고 있다.

<

13> 송암의 고들빼기

(사진은 ‘농민신문’에서 빌려옴)

선진수도 연구회를 중심으로 친환경 고품질 쌀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제하리 여곡에는 친환경 유기농 단지가 있는데, 송암의 37호(38ha) 농가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벼베기 전에 자운영을 갈아 지력을 높이고 벼가 성장할 즈음에는 우렁이를 방


. 이른바 우렁이농법이다. 이외, 오리농법, 쌀겨농법 등 친환경 재배 기법을 채 택한 농가가 점점 늘고 있다. 이들 농가를 중심으로 무농약・무비료 농업, 라이젠농 법, 스테비아농법 등 다양한 농법으로 생산한 쌀을 소포장 단위로 시판도 하고, 학교 급식으로도 납품한다. 원종송과 야동에 축산업 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 송암의 한우 농가는 모두 7호 정 도, 약 150두를 사육한다. 이들 축사에서는 양질의 육우를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 야 동에 대규모 축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 도움 주신 분 • 고석상(高錫相, 72세, 성균관 부관장) • 이재남(李在南, 70세) • 이문영(李文英, 86세) • 이성섭(李成燮, 72세) • 이영선(李永先, 76세) • 김기주(金基柱, 75세)

○ 참고문헌 • 戸口総数 高敞郡古邑誌影印本 興城誌 興城文献録 松川集 湖南誌 全国邑誌 越智唯七 編, 新旧対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称一覧(上) 越智唯七 編, 新旧対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称一覧(下) 朝鮮総督府 編, 地方行政区域名称一覧

• 저서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바르게살기운동 고석상, 바르게살기운동 흥덕면위원회, 2008.


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편, 고창군, 2009(고창군이 1982년 발행한 것

을 재발행). 高敞文化 21집 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8. 2001 가을착수 경지정리사업예정지구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서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편, 2001. 高敞의 얼 고창교육청 편, 고창교육청, 1983. 고창의 숨결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1998. 高敞의 脉 이기화 편저, 고창문화원, 1991.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편, 고창문화원, 2003. 高敞郡誌 고창군지 편찬위원회, 1992, 2009.

• 고창군청(www.gochang.go.kr/) 고창관광(www.gochang-tour.com)

• 신문 농민신문(2009.11.18), 국민일보(2006. 3. 6) 고창신문(2009. 4.14), 고창코리아(2009.10.12)

충의가 살아 있는 풍요의 땅(흥덕면 송암리)  

2012-2018『한국의 유산』발굴·조사사업!! [제공] 한국지식재산관리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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