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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고적과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성송면 암치리 박채주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 암치리는 고창읍에서 국도 23호선을 따라 서남쪽 영광 방면으로 약 7㎞정도를 가면 「웅비 성송(雄飛星松」이라 쓰인 웅장한 표지석(뒷편은 “살맛나는 星松”, 옆면은 “2007. 12월 성송면민 일동 –사진)이 세워진 삼거리에 도달한다. 오른쪽 4차선은 대 산 영광으로 가는 우회도로이고 왼쪽 2차선으로 가면 성송면 소재지(면사무소·파출소· 우체국·농협 등이 위치)를 지나게 되는 바, 직진하게 되면 오른쪽에 성송체육회관(판 정리 36-7)이 보이고 앞으로 가면 농협 주유소가 있다. 주유소 앞의 삼거리 갈림길에 서 표지석에 나타난 ”장성·고산 성지“쪽으로 약 700m가면 바로 우측에 성송면 암치 리 백토마을이 있고 암치재를 향하여 전방 좌측에 암치마을을 접하게 된다. ⚬ 백토마을에는 성송초등학교가 있으며 앞산을 보면 석재를 채취하는 석산이 산을 벽처럼 깎아내린 경관을 볼 수 있다. ⚬ 암치리는 성송면 11개 법정리 중 하나이고 행정 분리는 암치와 백토 2개이다. 본 래 무장군 성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흥리 덕암리 무송리 일부와 원송면의 금사리 일부를 병합하여 암치리라 하여 고창군 성송면에 편입되었 다. ⚬ 암치마을은 뒷산이 칠성산 고개를 넘어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으로 통하는데 그 고개에 바위가 많이 깔려 있어 암치(岩峙 )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 중엽 청주한씨가 터를 잡아 한씨 일촌으로 약 400년간을 自作一村을 이루어 살아왔는데 한씨들이 떠 날 무렵 이조 중엽에 영광에 살던 진주강씨들이 이주해와서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많 았고 큰 부자도 나오게 되어 융성하게 되자 각처에서 빈민들이 모여 크게 번창했다. 이러한 연유로 1950년 대에는 행정구역이 암치마을은 암치·운암 분리로 구분되어 이 장이 따로 활동하였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농촌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두 행정리가 암치마을로 통폐합되어 이장이 1명이 되었다.(마을사진) ⚬ 한편 백토마을은 임진왜란 때 영광에서 진주강씨가 들어와 마을 터를 잡았으며 그 뒤에 진주정씨 전주이씨 등이 이사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산이 옥녀봉인데 (사진) 마치 옥녀가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형국이라 하여 베도트말(베에 날실줄을 감 는 기구)에 비유하여 마을 이름은 “베토말”로 부르다가 점차 변성되어 “베토물”, “백 토물”, “백토”로 변천되었고 자연부락으로는 백토 금사 제부랑산이 있다. 백토마을 역 시 백토·금사 분리로 이장이 2명이었으나 지금은 1개 행정리가 되었다.(마을 전경사 진) 2. 마을의 자연환경 ⚬ 암치리는 암치마을을 기준으로 뒷산은 구황산, 옆산은 고산(해발 526m), 앞산은


옥녀봉으로 3면이 산으로 울타리를 하고 있고 서쪽 방면만 가까이 산이 없어 골짜기 같은 지형으로 바람이 강하게 부는 지역이라서 다른 마을에 비하여 비닐 하우스 시설 이 비교적 없다고 한다. ⚬ 암치리의 동쪽은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남쪽은 대산면과 경계하는 성송면에서 최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촌으로 옛날 옛적 농촌처럼 특용작물 없이 논과 밭에 서 얻어지는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 구황산은 노령산맥의 끝줄기에 있으면서 이시메등까지 연결되어 법성포까지 뻗었 다. 구황산에 얽힌 이야기는 구황산 줄기에 명당이 있어 그 곳에 묘를 쓰면 아홉분의 임금이 탄생한다 하여 九皇山 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그 명당 터를 찾지 못하여 묘를 쓴 사 람이 없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산의 정기를 꺾어야 한다며 쇠말뚝질을 하였다는데 발견되지 않 고 있다.

⚬ 옥녀봉은 고산 줄기로 옥녀봉귀봉(玉女峰貴 峰 )엔 옥녀의 거울인 곳에 羅氏의 선산 이 있고 옥녀의 화장품인 분곽엔 姜氏의 선산이 있으며 옥녀의 음기(飮器)인 고씨골엔 북을 상징하는 鄭氏의 선산이 있다.(옥녀봉의 등산로 안내판과 옥녀봉 사진)

⚬ 백토(白土)에서 송산으로 통하는 고개를 옛날 도승이 산세를 극찬하여 재 이름을 도찬치 (道讚峙)라 했는데 지금은 되챙재로 부르고 있다. 3. 마을의 인문환경과 산업

⚬ 암치리는 고인돌군이 풍부한 지역이므로 청동기시대부터 마을터가 좋고 살기 좋 은 곳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진주강씨 문중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 된 점으로 봐도 소문으로 전하는 마을터가 좋다는 것을 믿게 된다. 암치리에서 태어 나 크고 작은 벼슬을 한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에 와서 면내에서 부자 마을로 평받지 않는 것은 벼슬을 한 사람의 인품이 겸손하고 검소할 뿐 아니라 청렴하여 백성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결과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 암치리는 석산개발 사업체가 있는 것 외엔 어느 농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암치 마을과 백토마을 앞은 지방하천(암치리 232번지선과 163번지선)이 흐르고 있어 마을 운치를 한층 맑게 하고 있다. ⚬ 또한 군에서 마을하수도 사업을 시행하여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산속의 아름다운 마을이라 할 수 있다.(암치리의 옛지도; 사진) 1) 융성기의 암치리

⚬ 8.15해방 이전 일제 강점기 때는 암치리가 성송면 행정의 중심지 즉 면 면소재지 였었다. 당시엔 성송면사무소 지서 초등학교가 모두 암치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면 소 재지가 된 연유는 암치리가 면내에서 먼저 마을이 형성되기도 하였지만 교통도 편리 했기 때문이라 한다. ⚬ 당시에는 면사무소와 지서가 암치 마을에 위치하였으나 그 후 성송초등학교가 있 는 백토마을로 이전하였으며 6.25동란이 끝날 무렵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면사무소 와 지서는 학천마을로 이전하였다. 면사무소는 남양홍씨 제실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


문에 지서는 위치가 좋지 않다하여 지서는 강성욱(전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역임) 의 부친 증원(甑遠)이 부지를 희사하여 현재의 파출소(판정리55)로 이전하였고 면사무 소는 판정리 축동 마을로 옮겼다가 80. 11. 26 지금의 성송면 사무소 건물이 준공되 자 자리잡게 되었다. ⚬ 이렇듯 면 소재지가 옮겨지고 행정기관과 치안센터가 3-4차례 옮겨다닌 예는 많 지 않은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당시 이 두 기관이 위치한 암치마을과 백토마을의 부지 는 주민이 살고 있는 일반 주택지이다. 2) 마을의 인구와 성씨 분포(2011년 6월말 현재) ⚬ 인구수 10세

20세

30세

40세

50세

60세

70세

80세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하

이상

암 치

12

3

4

11

8

13

17

8

76

백 토

6

5

3

3

5

13

21

32

88

청주

진주

밀양

광산

진주

전주

창원

한씨

강씨

박씨

김씨

정씨

이씨

황씨

기타

12

13

5

4

2

2

5

42

백 토 1 ⚬ 직업별 가구수

25

2

6

2

18

56

마을

연령

⚬ 성씨별 가구수 마을

성씨

암 치

마을

직업

2

비 고

농업

회사원

암 치

40

2

42

3

백 토

56

56

1

(다문화가정)

3) 암치리의 유적 ⚬ 고산성지(高山城址) 성송면 상금리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산(高山·鼓 山 ) 정상 부근 에 위치한다.(성송면 암치리 산 164; 사진) 동국여지승람 무장조에는 고산성 石築周入 千一百尺中有三泉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무장읍지(1958년) 성곽조를 보면 高山城在高 山石築周圍八千一百尺內有二 泉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문헌으로 볼 때 이곳에 있는 성지가 옛 고산 성터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성지는 파괴가 심한 편으로 문지와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한편 고산 성지의 축조연대에 관하여는 문헌비고 성곽조 에 世傳 三 國 時代라고 되어 있으나 이와 관련된 유물은 확인할 수 없었다.(전북대 학교 박물관 1984. 고창지방 문화재 지표 조사 보고서;이하 유적 출처 동일) ⚬ 암치리선각석불좌상(岩峙里線刻石佛坐像)


암치제 서측 야산 중턱(해발 250m)에 위치하고 있는 선각석불좌상이다(암치리 산 84번지)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평탄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는 이곳은 예전에는 友林亭 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불상은 타원형 판석에 윗 부분은 보주형(宝珠 形)으로 다듬어 신광형태로 만들고 평평한 앞 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지닌 석불 좌상을 얼굴에서부터 신체 아래 부분에 이르기까지 선각으로만 처리하여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보인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가 남아 있으며 코와 입은 완전히 마멸되었 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說法印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왼손은 불분명하다. 법의는 通扁으로 몇가닥의 단순한 수직 옷 주름을 새겼을 뿐이다.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로 2002.11.15.지정;사진) ⚬ 암치리 유물 산포지 1. 성송으로 가는 23번 국도 동측에 위치(성송면 암치리 564-4; 사진)하고 있는 유적 은 현재 농경지이며 구릉의 북측 또한 농경지이다. 사면은 완만한 편으로 정상부에 비하여 삭평이 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로 구릉의 남서 사면에서 경질토기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 암치리 유물 산포지 2. 장성으로 가는 893번 지방도로 남측에 위치한다.(암치리 162-1;사진) 유적은 저평 한 구릉대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능선을 따라 진주강씨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경작 으로 인해 삭평 유실이 심한 편이다. 유물은 주로 남서측 중단부와 하단부에서 개배 석검병부편 타날문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 강대식 고택(姜大湜 古宅) 성송면 암치리 317번지(사진)내에 한말에 승지(조선조 승정원에 달려 왕명의 출납 을 맡아보는 정3품 당상관)를 지냈던 姜大湜의 고가로써 그의 아버지 晩圃 姜淵秀가 건축하였다. 집은 7칸 모퇴겹집으로 중앙 4개의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주초는 덤벙주 초이며 팔작지붕의 홑처마 건물로 규모는 30평 정도이다. 대문은 솟을 대문이며 고택 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는 기와가 얹혀져 있다. 구조면에서 다양한 건축미를 자랑하 고 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한 직손 강성욱이 고택에서 생활하고 있 다. ⚬ 수사공 강응환 가전유물(水使公 姜膺煥 家傳遺物) 성송면 암치리 319번지(사진)내 위치한 건물은 수사공 강응환의 각종 유물을 보존 하고 있었다. 강응환은 영조11년(1735년) 본 마을에서 태어나 36세때 무과에 급제하 여 한동안 말직에 있다가 정조2년 44세때 내직으로 들어간 이후 그 이듬해에는 경상 도 칠원현감으로 부임하였고 이후 대구영장을 거쳐 함경도 고령진병마검절제사 평안 도 창성도호부사 동래수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를 수사공이라 부르는 까닭은 말년에 경상좌도 수군절제사(정3품)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우국충군의 일념으로 주 어진 업무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평안도창성부사 재직 당시에는 압록강 연변 일대의 세밀한 군략지도를 만들었으며 동래부사 재직시에는 영남 해안 일대의 군략지도를 만 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는 이 지도를 각각 3부씩 작성하여 1부는 국


왕에게 올리고 1부는 관아에 비치하게 하였는데 그 일부인 고려중요처도 청북변성도 가 현재 문화재로 지정(지방유형문화재 제130호 89.1.9)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로 지정되어 전해 내려오는 그의 상반신 초상화(사진)는 정조 19년(1795년) 그가 궁 중에 들어가 국왕을 뵈웠을 때 우국충군의 인물임을 알고 정조가 친히 궁중의 화공을 불러 그리게 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가전 유물은 보관 관리상 어렵고 도난 위험도 있어 국립전주박물관과 고창 판소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암치리 지석묘군 1. 암치리에서 장성으로 가는 지방도 893번 도로변의 암치제 동측에 있다. 이들 지석 묘의 원래 위치는 암치제 제방 하단부였으나 발굴조사된 후 이곳으로 이전·복원하였 다. 상석이 가장 큰 1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훼손된 상태이다. 상석의 평면형태 는 판석형 반원형 부정형 등이 있으며 지석은 주형지석이 보인다. 상석의 무게는 113 톤이나 되는 1기를 제외한 기타는 2.6~12톤 정도이며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 홍도 마제식부 등으로 알려져 있다.(암치리 204; 사진) ⚬ 암치리 지석묘군 2. 암치리 남측 바닥에서 5기가 확인되었다. 상석은 모두 위치가 이동된 것으로 보이 며 지석 등은 보이지 않는다. 상석은 대부분 괴석형과 부정형으로 골짜기를 따라 분 포된다. 지변에 이와 동일한 석재들이 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지석묘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알 수 없다.(암치리 227;사진) ⚬ 암치리 지석묘군 3. 암치제 북측 제방 바깥쪽의 논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에 2기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분포하고 있다. 1호 지석묘는 상석 형태가 판석형으로 크기는 545*360*130㎝이며 2 개의 주형지석이 확인된다. 2호 지석묘의 경우 상석 형태는 판석형으로 크기는 430*360*130㎝이며 지석은 3개가 확인된다.(암치리 204-1;사진) ⚬ 암치리 지석묘군 4. 장성으로 가는 89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암치마을을 지나 200m정도 가면 북동쪽 으로 유적이 위치하며 재실 1동이 위치한다. 현재 지석묘는 10여기로 상석의 형태가 훼손되지 않은 것은 3~4기이며 대부분은 위치가 이동된 것이다. 상석의 형태는 괴석 형이 많으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단면형태는 장방형 방형이 주를 이룬다. 현재 농 경지로 이용되고 있어 이후에도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암치리 184;사진) ⚬ 암치리 지석묘군 5. 장성으로 가는 지방도 893번을 따라가면 운암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뒤편에 유적 (암치리 64-7;사진)이 있다. 현재 유적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있으며 지석묘가 위치한 지역은 밭이다. 지석묘는 산 능선을 따라 일렬로 분포하고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 방 형 괴석형 등이며 지석은 2기를 제외하면 보이지 않는데 주로 지형지석이다. 밭과 논 민묘의 조성에 의해 대부분이 훼손되어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 암치리 지석묘군 6. 성송초등학교를 지나 도로 동쪽에 위치(암치리 341;사진)해 있는 송림농원 내에 6


기의 지석묘가 동서방향으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열지어 있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 부정형 등이며 6기의 지석묘 중 1기만이 3개의 주형지석이 모서리에 받쳐져있다. 기 타 지석묘의 경우 대부분 송림 조성 당시 본래의 위치에서 이동되면서 훼손되었을 것 으로 보인다. ⚬ 암치리 지석묘군 7. 성송으로 가는 국도 23번을 따라가다 우회도로와 만나는 지점(암치리 산 9-18;사 진)에 위치한다. 현재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동쪽은 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 석묘는 2기로 아래에 민묘가 있다. 지석묘의 상석 형태는 부정형으로 지석이 1기에서 만 보이며 단면형태는 방형에 가깝다. 민묘의 조성으로 인해 위치가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 암치리 지석묘군 8. 백토마을 뒤편으로 들어가는 소로 남측에 인접(암치리 산50-4;사진)하여 지석묘 5 기가 있다. 현재 이곳은 민묘군이 조성되어 있으며 조금 떨어져 성암교회가 있다. 상 석의 형태는 판석형 장방형 방형 등이며 지석은 2기에서 확인되며 판석을 이용하였 다. 그러나 원래의 지석은 훼손되고 후에 받쳐 놓은 것으로 보이며 2기는 민묘조성 당시 상석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4) 전설 ⚬ 황소바위와 메기북 수사공 강응환이 평소 기르던 소를 암치제 밑 황소바위(사진) 부근에 풀을 뜯어 먹 으라고 메어놓고 석양이면 소를 데리러 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소를 데 리러 갔었는데 소의 몸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머리만 남아 있었던 바 이상한 일이 라고 고민하면서 소가 없어진 연유가 궁금했다. 다음날 아침 같은 곳에 소를 메어놓 고 지켜보니 큰 메기(물고기)가 소를 잡아 먹으려고 접근하는 것을 보고 활 16발을 쏘아 메기를 잡았다. 어찌나 메기가 큰지라 메기의 가죽(껍데기)으로 북을 만들었다. 그 북은 직경이 47㎝정도 되는 것으로 수사공 사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북의 가죽은 구경꾼들이 조금씩 조금씩 찢어갔으며 현재는 약간의 가죽과 몸통만(사진) 보존되고 있다. 5) 당산제 암치마을 당산제는 정월 대보름 날에 지낸다. 정월 열나흘 새벽이 되면 마을 입구 와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대나무 사이에 왼 새끼를 연결하여 금줄을 치고 황토흙 도 띄엄띄엄 뿌려 놓는다. 제관으로 선정된 자는 제사일 3일전부터 일체의 바깥 출입 이 금지되며 외부인과 접촉도 단절되었다. 제일 당일에는 제관은 목욕재계를 하였으 나 현재는 이러한 복잡한 의례 절차는 거의 생략되고 500년 정도 된 당산나무(사진) 에 옷을 입히기 위하여 풍물굿을 울리며 줄감기를 하였으나 이마저 5년전부터 생략되 게 되었다. 이는 농촌 인구가 줄고 노령화되면서 젊은층이 줄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장이나 개발위원장이 제관 역할을 하며 당산나무에 제물을 바치고 참여자 모두 재배 하는 것으로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6) 효열비 ⚬ 백토마을 앞 광장 지방하천 쪽에 밀양박씨의 효열비(사진)가 세워져 있는 바 그 공적은 대락 다음과 같다. ⚬ 효열부 밀양박씨는 규정공의 후손 가선대부 동식(東植)의 따님으로 17세에 진주 인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인 영인(永仁)의 무매독자인 덕암 姜益秀와 결혼하였으나 계 묘년 10月 7日에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군 나이 22세 박씨부인은 21세였다. ⚬ 그 후 孤兒를 잘 가르치며 키우고 있던 중 시모가 중풍으로 쓰러져 일체 거동을 못하게 되자 3년동안 시봉하고 시부 또한 노구풍질로 방안에 드러눕게 되자 6년 동안 을 수족이 되어 식사를 수저로 떠 먹임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내는 등 청상과부(靑孀 寡婦)로 살면서 지극정성으로 모시다 61세로 계미 11月 23日에 생을 마감하였다. 비 문은 韓山人 李正圭가 찬하였고 비는 손자인 士遠 洙遠 형제가 세웠다. 4. 암치리의 걸출한 인물 1) 역사적 인물 ⚬ 강필주(姜弼周) 자는 대로(大老)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진주이니 문량공 희맹(希孟)의 후손으로 호 란창의(胡亂倡儀) 시언(詩彦)의 아들이다. 광해13년(1621년) 출생하여 7세에 글을 짓 고 29세에 진사를 하고 3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박사 시강원필선 공조좌랑을 거쳐 보령군수로 나가 치적을 올려 현종으로부터 표리(表裏:안안팍옷감)를 하사 받았 는데 권간(權奸)의 작용으로 벼슬을 그만 두자 성송면 암치로 옮겨와 살았고 동호에 정자를 지어 유지(遺趾)가 전한다. 뒤에 조정에서 함양군수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 가지 않았으며 사부(詞賦)와 시율(詩律)로 세상에 알려졌다. 심석 송병순(宋秉珣)이 序 하여 송암집이 간행되고 농암 김창협(金昌協)이 묘지를 지었다. ⚬ 강민저(姜敏著) 자는 내숙(來叔) 호는 모산(茅山) 본관은 진주이니 문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군수 필 주의 아들이다. 효정5년(1651년) 암치에서 출생했다.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문인으로 숙종20년(1694년) 인현왕후의 복위를 상소하고 이듬해 다시 영신의 목을 벨 것을 상 소하면서 언사가 몹시 강경하여 진도로 유배되었다. 3년뒤 죄가 풀려 돌아와서는 세 상과 인연을 끊고 삼연 김창흡(金昌翕)등과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사복사정(司 僕寺正)에 추증되고 모산문집이 전하며 포암 윤봉조(尹鳳朝)가 묘지를 지었다. ⚬ 강만저(姜萬著) 자는 개숙(皆叔)이고 호는 치재(癡齋)이며 본관은 진주이니 송암 필주의 아들이고


모산 민저의 아우이다. 효종6년(1655년)에 출생하여 숙종7년(1681년) 27세 때 「제외 구최공문 祭外舅崔公文」을 지었고 숙종27년(1701년) 47세 때 「치옹자서 癡翁自序」를 지었다. 숙종31년(1705년) 51세 12월에 백씨 모산공이 세상을 떠나자 「제백씨모사제 문 祭白氏茅山祭文」을 지었다. 영조6년(1730년) 76세 12월에 「경술세제일 庚戌歲除 日」 시를 지었다. 졸년은 미상이고 저서로 「치재집(癡齋集)」 2권 1책이 있다. 치재가 세상을 떠난 뒤 문집을 발간할 때 송변순의 서문이나 강천수의 발문을 보면 “치재는 정훈과 사우의 지도로 덕과 학문이 조숙하였고 세속 사람들과는 달리 출세나 공명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신병 때문에 시골집에서 은거하며 경전에 잠심하고 고결 한 성품을 기르면서 자칭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으로 호를 ”치재(癡齋)“라 했으니 참 으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문예의 재주가 넉넉하고 뛰어나 누구나 미칠 수 없는 능 력이 있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고 한 것은 겸손한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시의 내용으로 보면 성당 때의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시를 차운한 것이 많고 우리나라의 포은 정몽주 도은 이승인 사암 유숙들의 시를 차운하고 있어 그의 시적 수준이 높음을 알 수 있다. ⚬ 강응환(姜膺煥) 자는 명서(名瑞) 호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물기재(勿欺齋) 본관 은 진주이니 문량공 희맹의 11代 손으로 숙종 때 함양군수를 지낸 필주의 증손되는 柱復의 둘째 아들로서 영조11년(1735년) 암치리에서 출생했고 천품이 비범하고 재예 가 절인(絶人)하여 경국제세의 포부를 안고 병술 천문 지리 음양 산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일찍이 무호가(武豪歌)를 지어 “大丈夫 生天地間하여 大丈夫를 하랴하고 人間萬事를 歷歷히 헤어보니 글읽기 글쓰기는 腐儒의 할 일이요 밭갈기 논매기는 農 夫의 할 일이라 우리의 하올 일은 聖賢師의 말을 따라 禮, 樂, 射, 御, 書, 數 중에 셋째를 따르리라” 즉,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쓸모없는 선비들이나 할 일이요, 밭을 갈 고 논을 매는 일은 농부들이 할 일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文 중에서 세 번째인 射(활쏘기)를 익혀 武人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대장부의 포부를 피력하고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때는 평시라 무인의 기개를 펼 기회가 없었다. 내직 으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외직으로 칠원현감(漆原縣監) 대구영장(大丘營將) 고령진병마첨절제사(高嶺鎭兵馬僉節制使) 창성도호부사(昌城都護 府使) 동래수사(東萊水使) 등을 지냈는데 대구영장으로 있을 때는 육지요승(六指妖僧) 을 붙잡아 정조의 칭찬을 받고 창성부사로 있을 때는 강변 7읍(邑)의 형세를 그려 조 정에 올려 요새지를 수비할 것을 말하고 연노궁(連弩弓)을 만들어 연읍(沿邑)에 비치 하였으며 동래수사로 있을 때는 영남해안일대의 군략지도를 만들어 만약의 사태에 대 비케 하였다. 저서로 「물기재집(勿欺齋集」 칠원정적(漆原政蹟) 「내영정적(箂營政蹟:강 응환이 경상좌수사 재임시에 엮어놓은 280면에 달하는 책으로 부임 때부터 임기 만 료시까지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비롯 각종의 공문서와 공적 성격을 띤 글 모음 집:1997,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국역)」이 있고 정조가 하사한 영정(사진)과 함께 「천북변성도(綪北邊城圖)」 「고려중요처도(高麗重要處圖)」라 제(題)한 2폭의 대형지도


가 전주박물관과 고창 판소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강응환 가전유물 전시관 입 구에 신도비·묘비(사진)가 건립되어 있다. 신도비문은 2000여 字의 한자로 되어 있으 나 전라북도 금석문화대계(全羅北道 金石文化大系 3券. 2009. 12)에 한글 번역되었 다. 신도비 바로 좌측에 한글로 번역된 또 하나의 신도비를 2011년 7월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다음은 한글 번역된 신도비이다. 유조선국가선대부행동래수군절도사물기재강공신도비명병서

우리 조선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낮추어 갑과에 올라 집안을 일으킨 자가 아니 면 비록 큰 깃발을 쳐들고 수백만의 군사를 거느린다 해도 도리어 쓸쓸히 푸른 나귀 를 탄 벼슬만도 못하다. 이 때문에 선비는 때에 따라 변통하지 않고 한 권의 책을 지 키며 죽을 때까지 부숴진 벽과 차디찬 등불 앞에서 중얼중얼 읽으며 부모님의 구업을 잃지 말아야 한다하니 어찌 그렇게도 고집을 부리고 가릴 줄을 모르는가 나는 말위 (군사를 의미하는 듯) 무리 속에서 영조 정조 연간에 불세출의 호걸스런 인사를 알았 으니 옛 동래수군절도사 강공이 바로 이 사람이다. 공이 어찌 참으로 글자를 모르는 호걸스런 선비이겠는가 아마도 공부자(孔夫子)의 대일통(大一統)의 의리(공자의 춘추 대의를 이름)를 강명한 자일 것이다. 영릉(효종의 능)의 군신간의 뜻(북벌정책에 이름) 에 감동되어 무호를 노래해 자기 뜻을 보여 말하기를 “남경을 바라보고 흐르는 눈물 저절로 나니 대명정통에 군당이 몇백년간 없었네 효정성주의 충의를 펴지 못하고 화 양동 늙은 대신(송시열을 지칭함)의 웅장한 뜻 이루지 못하였으니 제나라 양공의 9대 의 원수를 누가 갚을까 나 또한 갚고 싶다네”하였으니 개연히 자임하고 나선 중책이 이와 같았다. 이어 병법이나 전책 이를테면 육도삼략 지휘방략 기문팔문 생사계휴를 배워 정밀히 관통하고 기묘하게 해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기후를 점칠 줄 알 아 “나라 일을 다스리는 자는 비바람을 미리 모르면 안된다”하였다. 마침내 영조 경 인년에 무과에 발탁되었으며 7년이 지나 처음으로 부장에 제수되고 정조 무술년에 인 의에 전직되고 다음해에 감찰로서 칠원현감으로 나아가 칠정이 다스려지고 온갖 폐지 되었던 것이 모두 다시 일어났다. 1년여에 작은 일로 어사에게 탄핵을 당해 아뢰었으 나 성명(聖明)에 힘입어 파직되지 않았다. 이때에 만기가 두 번 이르렀지만 조정에서 는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이 더 연임해주기를 원해 그대로 따랐고 보리 추수전 진휼 정사가 이루어졌는데 관찰사 이문원 공이 “칠원이 70여 주 가운데 으뜸이다”라 포장 해 아뢰었고 이에 따라 전조에서는 “옷 안감 바깥감을 내려주는 은전에 합당하다”하 였으나 “옷 안감 바깥감의 은전을 베풀기 보다는 차라리 자목(字牧: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직임을 다시 베푸는 것이 낫다”고 비답(批答)하여 준직으로 제수하라는 명 을 내렸다. 2년 후에 어머니 병환으로 떠났다. 이어 초계군수에 제수되었다. 칠원의 옛날 환미를 마감하지 못해 귀양 2년에 걸렸으나 용서 받았다. 다음해에 통정에 올라 충장공이 되었다. 이어 대구영장에 제수되어 교화를 먼저하고 토벌해 붙잡는 것을 뒤 로하자 도적들이 양인이 되어 감옥이 거의 비었다. 만기가 되자 병조에서 신영장에 차임하였으나 상께서 그가 떠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빨리 다시 돌아와 맡도록 명하 게 되었다. 이때에 손가락이 여섯인 요망한 중이 용병에 정밀하고 또한 축지법을 써


서 지리산 금강산에 조석으로 출몰하고 참란한 꾀가 도에서 벗어나 날짜를 정해놓고 전장을 일으키겠다 하였다. 상은 걱정이 되어 문무신으로 누가 요망하고 흉악한 자를 진멸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묘당에 묻자 모두 공으로 대답하였다. 공은 즉시 명을 받 들고 독려해 붙잡고 그의 당여까지로 다 붙잡아 장계로 아뢰었다. 이어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 상이 심히 기뻐하며 이르기를 “나라에 둘도 없는 나의 팔 다리같은 신하 다 서반에는 어찌하여 정승이 없을까”하였으니 서반이란 우리 조선에서 무반을 일컬 으니 아마도 공을 무상에 의망하려는 임금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공은 감당할 수 없 다 사양하고 공을 도신에게 돌렸다. 무신년에 고령첨사에 전직되자 나라 곡식을 덜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하고 하늘에 빌어 전염병을 물리쳤다. 이에 상께서는 어사의 포 개로 인품과 치적이 모두 합당한 자로 가장한다는 분부를 내렸다. 경술년에 창성부사 로 옮겼다. 창성은 오랑캐 땅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망루와 목책을 세우고 여뇌 까지 만들어 예상 밖의 일에 대비하였다. 옛일에 감동되어 노래하기를 “백두산에서 물이 흘러 압록강이 되었는데 크고 큰 천지에 경계를 나눈 건 어쩐 일인가 아 어느 누가 요동 옛 땅을 회복할 건가”라 하였다. 임자년에 동래수사로 옮겼다. 동래는 일본 과 접경지역이어서 기찰하고 방어하는 것이 전쟁터와 같았으니 공은 신의로 저들을 대하자 저들 또한 감복하여 수은공(강항의 호 간양록을 지음)의 풍도가 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진영의 군졸들이 서로 혼잡하여 계통이 없이 이제 폐단이 쌓여 고질병이 되었다. 공이 마음을 다해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부사에게 저지를 당해 그렇게 하지 못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갑인년에 만기로 벼슬이 바뀌었다. 다음 해 초 하룻날에 진하사로 입사하니 상이 화상 그리기를 명하고 있어 가선으로 품자로 올리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해 7월 14일에 집에서 작고하니 태어난 날로부터 첫 회갑이 되는 해였 다. 묘는 고창군 성송면 고산 동쪽 기슭 봉명당 병좌 언덕에 있다. 공은 타고난 자품 이 강하고 굳세고 엄격하였으며 충성이나 효도가 모두 지극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임 금과 어버이는 두 가지 윤기가 아니니 임금이 섬기는 마음은 어버이 섬기는 데서 비 롯된다”하였다. 일곱 여덟살 다박머리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셔 상을 치루기를 성인처 럼 하였으며 뒤에 아버지가 병환이 들자 손가락 피를 드려 하루 낮밤의 목숨을 연장 하기도 하였다. 또 임금님을 사랑하는 일념은 음식을 먹을 때도 순순히 중얼거리는 말은 오직 우리 임금님(吾君) 두 글짜 뿐이었다. 그래서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 는 것은 비록 옛날 사랑하는 아버지 자애로운 군왕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 다. 육전 주군조 20권 중 상에 “은혜를 기록하고 덕을 칭송한 비가 이르는 곳마다 벼 나 삼처럼 늘어져 있다”하였으나 공은 자랑하지 않고 가자나 상전은 반드시 남에게 양보하였다. 일찍이 시구에 “누 대가 큰 나무에 의지하는 것은 공을 기약해서가 아니 라네”하였는데 바로 자기 자신을 견준 것이다. 그의 지조는 냉철했다. 창고에 남은 물 건이나 환모(還耗:환곡을 환수할 때 쥐나 참새 등의 손실을 예상해서 石마다 10분의 1일 더는 일 또는 그런 곡식)는 곤궁한 사람을 돕거나 공사의 쓰임에 보탰으며 도적 들의 장물은 언제나 본주인에게 돌려주고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사는 집 수칸이 비바람도 가리지 못해 어떤 객이 희롱하기를 “그대가 벼슬살이를 한 지가 1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집 한 칸도 경영하지 못했으니 자손을 위한 계책이 소홀한 것이 아 닌가”하자 공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좋은 집을 주니 청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남의 어려운 일을 급히 도와주는 것이 그의 풍모였다. 어느 날 길에 한 내교(內轎)가 있는데 말이 죽어서 가지 못했다. 즉시 자기집 소로 호송해 주었다. 또 어느 날에는 객을 만났는데 저녁 내내 잠을 자지 못해 묻자 객은 “小吏는 모郡의 포리인데 운명이 조석에 달려있어 그럽니다”하자 마침 서울에 갈 노자 70금이 있었는 지라 즉시 가져다 그에게 주었다. 그는 절대 마음을 속이지 않았다. “가장 속여서는 안되는 것이 하늘이요 군왕이요 마음이다”면서 속이지 말라(勿欺)는 말로 그의 재호 를 삼았으니 공은 증자의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勿自欺)는 취지를 깊이 터득했다 할 수 있다. 아! 나는 공의 평생의 자취를 돌아보고 서로 세상을 달리 해 살며 보지 못 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 성조(聖祖 효종을 이름)께서 심관에서 오랫동안 볼모가 되어 오랑캐들이 기예의 장단점 그리고 장상들의 능력을 다 알았고 두려워 할 만한 자는 없으니 다만 구왕(九王)만은 꺼렸는데 그 구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 일 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서 송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의 시호)과 큰 계획을 결정하되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친히 징벌하여 곧바로 관외로 내 달라고 이정익(李貞翼: 효종 때 북벌을 위해 훈련대장을 맡았던 이완의 시호) 주사(舟師)는 지름길로 내질을 습격 토록 하여 열에 칠팔은 공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상께서 붕어(崩御)하여 그 계획을 미처 시행해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성조를 구천(句賤 춘추시대 월의 임금으로 오의 합려와 싸워 이겼으나 합려의 아들 구천에게 사로잡힘)의 거짓이니 연광(延廣 오대시대 진나라사람 경연광 진의거란에 대해 칭신 을 반대하다가 도리어 거란에 잡혀 자살하고 진도거란에 망함)의 미친 짓이라 헐뜯고 혹은 문정공을 실천하지도 못할 공언이니 성공할 수 없는 고상한 논이라 헐뜯는다. 아! 애통하도다 공은 이미 그럴 능력을 갖추었으니 여기에 기회만 주어졌더라면 당시 군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애석하게 그렇게 하지도 못했으니 무호한 가락이 어찌 고상한 논이니 성공할 수 없었다는 헐뜯음을 면할 수 있으랴 아! 백세 뒤에 논하는 선비는 그의 뜻있는 일은 볼 수 있지만 기회의 이불이 (利不利)는 논할 겨를리 없으리라 이것이 구천에 있는 그의 한을 위로할 수 있을까 공은 휘가 응환(膺煥) 자는 명서(命瑞)다. 진주강씨는 먼 옛날부터 대를 이어왔다. 우 리 조선조에는 대민공(戴愍公) 석덕(碩德)과 문량공 희맹이 모두 문장과 경술로 세상 에 드러났다. 문량의 아들 사평(司評) 학손(鶴孫)이 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아 영광 에 귀양와서 자손들이 이어 여기에 살았다. 다섯 대 전하여 휘 시언(時彦)은 삼란(三 亂)에 창의하여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휘 필주(弼周)를 낳으니 필선(弼善)으로 청백 이 알려졌다. 휘 민저를 낳으니 인현왕후가 사저를 물러나자 포의(布衣)로 항거 소장 을 올려 수상을 베도록 하니 그의 곧은 명성이 온 세상에 퍼졌다. 사복시정에 추증되 다. 휘 이빈(爾彬)을 낳으니 효성으로 복호(復戶:戶役을 면제해 주는 것)를 받았다. 좌 부승지에 추증되다. 휘 주복(柱復)을 낳으니 은거하며 뜻을 구하여 사우들이 칭송하였 다. 호조참의에 추증되다. 이상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의 귀함 때문이다. 비(妣)


는 문화유씨 통덕랑 수제의 따님이다 계비(継妣)는 청송심씨 통덕랑 희순의 따님인데 두 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다 배(配)는 장택고씨 시중의 따님인데 또한 정부 인이다. 묘는 고창군 아산면 북죽촌 유좌다. 2남이니 재회(在禧) 재호(在浩)요 측출(側 出)은 남 재유(在裕) 재순(在純)이다. 재희는 통덕랑으로 연안 김재명에 장가 들었으나 기른 아이가 없고 달성 서진수의 딸에게 장가 들어 3남을 두니 치회 길회 예회인데 모두 통덕랑이요 3녀는 송기대 안

전광노이다 축출남은 문회다 재호는 정묘년에

무과로 통영우후를 거쳐 흥해군수로 나갔다 풍양 조봉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 으니 기회(棋會)요 1녀는 측출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지금 글을 요구 하는 자는 공의 후손인 비서승 대식과 참봉 대술이다. 두 분은 나와 친한 사이지만 나의 글이 빈약해서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시를 읊고 예를 논하는 진산강씨 고가에 이름 난 대부 조민공 이름 난 손자 문량이 태어나셨네 공은 우뚝하게 태어나셔 아름다운 복 이으셨으니 묘년의 문예 어디까지인 지 헤아릴 수 없었다네 무호의 노래 어찌 그리고 격양되었을까? 영릉의 잣나무는 암 울하고 화양동엔 구름만 에워싸였네 중원의 온갖 일 누가 다시 담당할꼬 호방 무과에 오른 공께서 멀리까지 떨치기를 바랏지 자신은 갖추었지만 때가 되지 않아 안타깝게 변방수령을 지내다 길이 유한(遺 恨)을 알고 이곳으로 돌아가셨네 그래도 공의 춘추 대외는 일월처럼 밝으셨으니 공의 이런 찬사 부끄럽지 않고 나의 말 과장이 아니지 신미년 칠월 하완에 통정대부비시원승원임규장각직각시강관 은진 송규현 근찬하고 오세사손제릉참봉 대직 근전하며 후학 영광후인 김한희 근서하다 계유년 윤오월 상완 에 오세손 통정대부 비서승 대식이 삼가 세우다. *神道碑 :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큰 길가에 세우는 비석 ⚬ 강인회(姜寅會) 자는 태화(太和) 호는 춘파(春坡)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사평(司評) 학손(鶴孫)의 후 손이고 재형(在衡)의 아들이다 순조7년(1807년)에 암치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한번 배우면 잊지 않았고 15세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두루 읽 었다. 노사 기정진(奇正鎭)이 학덕으로 이름나자 18세에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고 26 세 때 스승곁으로 이사하여 30여년을 조석으로 스승 모시고 학문에 정진하여 대유(大 儒)가 되었다. 철종13년(1862년)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 왕이 좋은 의견을 구하자 삼정책문(三政策問)을 지어 올렸으니 전부(田賦) 군적(軍籍) 환곡(還穀)이다. 이밖에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인재를 등용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예의염치를 장려해야 한다 는 것을 구구절절 토로했다 효가 지극하여 3년을 시묘하고 계모는 친모처럼 섬겨 계 모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평생동안 벼슬이나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고 산림처 사로 지내면서 많은 후진을 길러 냈으니 박용태(朴容泰) 기용연(奇容衍)이 대표적인 문제자이다. 1880년에 졸하고 동몽교관에 추증되었으며 춘파유고(春坡遺稿)가 간행되 었다. -춘파유고목록序(崔 煥)

詩 : 오언절구 등 90수

書 : 5편

雜著 : 6편

서 : 6편


記 : 5편

祝文 : 2편

祭文 : 6편

附錄 : 노사선생기고

⚬ 강천수(姜天秀)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 본관은 진주이니 문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춘파인 회(春坡寅會)의 손자이다. 철종14년(1863년) 출생하여 송사 기우만 문하에서 경전을 습득하고 백가서(百家書)를 섭렵하여 학문이 깊고 문장이 유려했다. 35세 때 종숙 백 천(柏川) 해영(海永)이 공을 맞이하여 암치리에 서숙(書塾)을 개설하여 제자를 가르치 게 하였다.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는 산에 올라 통곡하기 여러 날에 마침내 세상사에 뜻을 끊고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니 배우는 사람들로 언제나 서숙은 가득했고 만 년에는 문제자들이 공의 학덕을 사모하여 암치 서쪽 계곡위에 정자를 지어 거산정사 (巨山精舍)라 편액(扁額)하고 노년유휴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인품이 괴걸하여 학처럼 우뚝했고 붓을 들면 물 흐르듯 하여 윤색하는 법이 없었다. 평소에 말하기를 노사선 생(蘆沙先生)의 외필(猥筆)과 납양사의(納凉私議)는 학술의 대가다 더할 말이 없다 하 였고 「송사문집(松沙文集)」을 비롯 강문(姜門)의 「은휴집(恩休集)」 「치재집(癡齋集)」 「모산집(茅山集)」 「물기재집(勿欺齋集)」등을 교감(校勘) 간행하였다. 유고 4권이 발간 되었으며 손자 姜境이 살고 있다. -거산유고목록<券之一> 詩 429수 <券之三> 記 38편 <券之四> 碑 4편 추록 2편

<券之二> 詩 68편 序 29편 跋 11편 墓碣銘 23편

上樑文 11편 墓表 16편

부록: 行狀(배성수)

祭文 8편 行狀 10편

告祝 2편 傳 3편

墓碣銘 尹丁鍑

⚬ 강대식(姜大湜) 자는 영진(營振)이고 호는 석계(石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니 고종15년(1878년) 암치 리에서 출생했다. 거산 강천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경기전 참봉 비서감승을 역임하 였다. 강대식은 소문난 부자로서 성송면 암치리 주변 농경지는 물론 전남 영광군 홍 농읍 장성군 삼계면에까지 농토를 갖고 있는 3천석 부자였지만 타고난 성품이 온유할 뿐 아니라 후덕하여 빚을 내려 오는 사람에게는 직접 호주머니를 털면서까지 굶주린 자들에게 기근을 해결해 주었으며 대흉년이 드는 무자 갑자년에는 소작료를 받지 않 는 등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 후에도 소작인들에게 많은 보살핌을 베풀었 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소작인들이 거짓으로 토지매매증서 또는 자기 소유가 될 만한 서류를 갖고 와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여도 아무런 확인 절차 없이 모두 개개인의 의 견을 존중해주는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강대식은 현재의 암치저수지를 사재로 축조 하였으며 당시 면장이던 강장수가 공적비를 세웠으나 증축 공사시 훼손되어 주민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성송암치학교를 건립하기도 했으며 고창고보 설립에 도 크게 공헌하였다. 거산 강천수는 이러한 공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공덕비문 을 썼다.


성송학교 주 대식 기념비(星松學校主大湜記念碑)

임신년(1932년) 봄에 성송면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대체로 사립학 교를 공립학교로 전환한 것이다. 공립학교는 구비할 수 있지만 사립학교는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생도 수십명이 기약없이 모여 서로 함께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덕 은 작아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고 선생은 작아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작 지 않고 커진 것이 있겠는가 지난 모년에 승선 강대식씨가 수만원의 금전을 출연하여 이 학교를 처음 세웠고 해마다 훌융한 선생 5,6명을 초빙하여 월급을 많이 주어 고무 하였다. 그리고 침랑 강대직씨가 교장으로 재임하니 이때 가까운 곳의 사람은 힘을 기울이고 먼 곳에서는 달려와서 배으니 그 재목에 따라 취직하여 세상에 쓰인 사람이 손꼽을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고창읍에 사립중고등학교를 세움에 온 군내 사람이 힘을 모아도 오히려 어려움이 많으니 승선이 두 곳에 힘을 썼으나 성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듣자하니 그가 사립학교를 공립으로 옮기고 오로지 고등학교에 힘을 썼지만 진심은 끝이 없으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금 이 학교를 공립으로 바꾸는 날에 이 사실을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몇 대 후에는 흩어지고 없어질 것이니 이 학 교의 이루어진 내력의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승선의 사람에게 미친 선한 아 름다움도 또한 묻어버리고 전함이 없지 않겠는가 서둘러 비석에 나타내어 그 타고난 좋은 덕을 온전히 하는데 게으름이 없어야 할 것이니 어찌 오늘에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하니 모두가 ”그렇다“하고 마을의 강대승(姜大承)에게 맡기고 그 문 답의 시말을 생각하여 거산 늙은이에게 알려왔으니 이해 여름 상순이다(거산유고 제4 권 비(碑)편에서) ⚬ 강대직(姜大直) 자는 응현(應賢) 호는 이온재(而溫齋) 본관은 진주이니 문량공 희맹의 후손으로 물 기재 응환의 5대손이다. 고종26년(1889년) 암치에서 출생했다. 인품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으며 기국(器局)이 커서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았고 일의 주선에는 아무도 따르지 못하는 역량을 지녔다. 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광무8년 독립의군부 종사관에 서임되어 군자금을 모금하여 의군을 도왔고 뒤에 상해 임시정부 에 자금을 여러차례 보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사종형 대식과 함께 암치학교를 설립하 고 고창고보 설립에도 공이 많았으며 당시 고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나라일이 그릇되매 세상사를 멀리하고 열운정(悅雲亭)을 지어 지기우(知己友)와 자연을 즐기다 가 45세에 조졸하니 사림(士林)이 개탄했다. 유고가 있다. ⚬ 강대극(姜大克) 강대극(1895-1986)은 자가 자익(子益)이고 호는 허당(虛堂)이며 본관은 진주이니 춘 파인회(春坡寅會)의 증손이고 거산 천수의 아들이다. 춘파공은 노사 기성진의 고제이 고 거산은 가학을 계승했으니 허당도 노사의 연원이라 본다. 고종32년(1895년)에 장 성의 장산리에서 태어 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따라 암치마을로 이사하였고 부친이 그 곳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을 교도하자 허당도 가학으로 공부하였다. 허당은 어려서부


터 성품이 청백하고 지조가 견실하였으며 매일 배우는 문장을 모두 암송하고 생활에 실천하니 당시 족형인 승지 대식과 함께 참봉대직이 특별히 촉망하며 가문을 드러낼 후손이라 칭찬했다. 비록 집안이 빈한했으나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문객이 있 으면 성심껏 대접하였으며 자손의 교육도 엄격하였다. 그리고 위선사업에도 솔선하였 으니 1950년 6.25전란으로 문량공 선조의 재실 연성재(蓮城齋)가 소실되자 종친들과 전후 10여년을 전념하여 중건하였고 문량공의 시문을 수집하여 “연성지(蓮城誌)”를 편집 간행하였다. 1986년에 졸하니 향년 80이고 유고가 자손에게 전하고 있다. 2) 근현대 인물 ⚬ 강택수(姜澤秀 : 1906.6.19.~1970.12.19.) 암치리 백토마을 출신으로 1960년 7월 29일에 전국 233개의 선거구에서 총선거인 의 84.3%가 참여한 가운데 제5대 민의원 선거와 더불어 초대 참의원 선거가 실시 되 었던 바 고창군의 경우 강택수 후보가 민주당의 공천을 얻어 제1선거구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1위 당선되어 참의원 부의장으로 피선된 소선규의원에 이어 차점자로 당선되 는 영광을 안았다. 강의원은 일본 동양대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 교장을 역임하였 으며 후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고 있다. ⚬ 강장수(姜長秀 : 1906.6.4.~1950.3.6.) 암치리 백토마을에서 출생하여 일제강점기 말에 성송면장을 역임(昭和10년8月7日~ 昭和13년5月31日)하였으며 강대식이 암치저수지를 축조하도록 많은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강대식의 공적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 었으며 한국 민주당 고창군당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백토마을에 딸 강정희가 살고 있 다.(사진) ⚬ 강대삼(姜大三 : 1896.1.4.~1971.1.4.) 암치리 백토마을에서 출생하여 제1대 성송면장(1941.3.7.~1945.8.15.)을 역임한 강 대삼은 성품이 온화하고 면민을 부모처럼 섬겼다고 한다. 재직중 일화는 일제강점기 인지라 하루는 주재소(지금의 파출소) 일본인 소장이 거산 강택수의 상투를 잘라 버려 야 한다고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자고 하자 재치있게 먼저 마당에 도착 방문을 열어 보고 아무도 없다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후손은 서울에 서 지내고 있다. ⚬ 강대형(姜大衡 : 1916.3.12.~1949.12.20.) 백토마을 출신으로 제10대 성송면장으로 재직(1961.7.1.~1961.8.13.)했다. ⚬ 강성욱(姜聲昱) 1935년 6월 20일 암치마을에서 출생한 강성욱은 제8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 거인단으로서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1972년 12월 15일 실시된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기능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지역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소위 말하는 유정희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인바 고창군의 경우 15명 대의원 정수를 놓고 36명이 경합하여 2.4대 1의 경쟁을 보였다. 제1대 통일추체국민


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강성욱 의원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수사공 강응환의 후손이다. 5. 마을에 있는 기관과 시설 1) 성송초등학교 암치리 389-1번지에 소재(백토마을)한 성송초등학교는 마을 단위 기관이 아니고 면 단위의 교육기관이다.(사진) <성송초등학교 연혁> · 1918. 4. 1. 암치사립학교 설립 · 1923. 5. 10. 성송공립 보통학교 인가 · 1981. 3. 1. 성송 병설 유치원 인가 · 1996. 3. 1. 성송초등학교로 명칭 변경 · 1999. 12. 25. 학천초등학교 통폐합 · 2008. 9. 1. 제28대 김민주 교장 부임 · 2011. 2. 11. 제84회 졸업(연 6395명) 암치학교 기념비 성송초등학교 옛날의 정문(지금도 아홉계단을 올라서 학교 운동장으로 진입 가능) 좌측 담장 옆에 세워져 있는 비석은 학교가 설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다. 비수는 옥개형의 지붕형태를 하고 있으며 철봉으로 보호하고 있다.(사진) 비석 전 면에는 “松立 岩峙學校 紀念碑”라 刻字되어 있으며 建立年代는 일제강점기인 壬申春 代(1932년)라 되어 있으며 강천수의 유고집에 “성송학교주 대식 기념비”라 하여 소개 하고 있다.(역사적인물 강천수 편 참고) 고창의 항일 학생 운동에 고창 암치보교도 참여하다

일제하 조선학생들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 속에서 함양된 애국심과 책임있는 지성 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비운에 빠진 민족과 국가를 구하여야 되겠다는 결심하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각 방면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동맹휴학 비밀결사 학생 단체의 조직 문화계몽운동 가두시위를 통하여 민족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발전시 키기도 하였든 바 고창암치보교(高敞岩峙普校)도 참여하였다. 성송면 백토마을에 위치 한 사립암치보통학교 학생 5,6학년 80여명은 1923년 9월 5일부터 동맹휴학을 하였 다. 그 이유는 이 학교 주무교원 상원독신(桑原篤信)이 과음하여 수업 중 반주정으로 학습할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부정한 행위가 많기 때문에 이 같은 무자격한 선생에게 수업을 받음은 막대한 손실일 뿐 아니라 모교를 위하여 통탄할 바라고 분개하여 교원 을 바꿔달라는 진정서를 교장에게 제출하고 상원독신의 밑에서는 절대로 수업을 받지 않겠다며 수업을 거부하였다.(동아일보 1923. 9. 28.) 2) 성암교회


1994. 5. 31. 설립된 대한기독교 장로회 소속으로 성송면 암치리 16-2번지에 위치 하고 있으며 건물은 26평이고 신자들은 30여명이다. 담임목사는 신언창님이시다. 3) 마을회관과 모정 암치마을과 백토마을에는 각각 마을회관과 노인당 모정 등이 있다. 이러한 시설들 은 거의 마을 중심부에 있어서 주민들이 접근 이용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특히 백토 마을의 모정은 주위의 노거수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어 여름철엔 주민의 아름다운 피서처 또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사진) 6. 마을조직과 행사 1) 마을의 구심체 마을

구분

이 장

새마을

개발

지도자

위원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암 치

박종연

강맹열

강동화

정허자

전금순

백 토

강종원

강성환

황선대

오화숙

강대수

농협 대의원

청년회장

홍순애 강동화 강복남 정재원

2) 미풍양속(효도관광 및 단합관광) ⚬ 암치마을은 해마다 어버이 날이 되면 주민들이 노인들을 모시고 관광버스를 대절 효도관광을 실시하고 있는 바 격년제로 한 해는 관광 한 해는 마을회관에 전 주민이 모여 마을회 주관으로 노인 위안 잔치를 하고 있다. 소요경비는 출향인사들의 도움과 마을기금을 활용하고 있으나 전(前)에는 청년회에서 추석 때 주민 노래자랑을 개최 이때 발생되는 금액으로 실시하였다. 또 백중(음7월 보름)과 복날(초복·중복·말복)을 마을의 쉬는 날로 지정 효도잔치처럼 개최하고 있다. ⚬ 백토마을 또한 봄철을 이용 3~4월에 1박2일로 주민 화합을 위한 관광을 실시하 고 있는 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실시하고 소요경비는 마을기금과 가구별로 약간 씩 갹출하기도 하며 희사자가 있을 땐 합하여 충당하고 있다. ⚬ 도움 주신 분(무순) · 박종연(암치이장, 45) · 강종원(백토이장, 58) · 강경(암치, 향토사학자, 80) · 강성욱(암치, 전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77) · 강동화(암치, 개발위원장, 69) · 강학수(백토, 향토사학자, 82) · 황선대(백토, 개발위원장, 64) · 홍성의(성송초등학교 교무주임)


· 최지은(성송면사무소 근무) ⚬ 참고문헌 · 모양성의 얼(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 민선4기 군정백서(고창군. 2010) ·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회. 2009) · 전라도 무장현 지역 학술 연구(전북역사문화학회. 2009) · 이기화의 고창이야기(고창문화연구회. 2011) · 래영정적(부산광역시사 편찬위원회. 1997) · 국역 거산유고(강성창. 2008) · 고창의 유학(고창군. 1996) · 고창지방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 고창의 마을 유래(고창문화원. 2003)


풍부한 고적과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성송면 암치리[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