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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생가 당촌마을 당촌마을 입구에는 수백년 된 괴목들이 숲쟁이를 이루고 있었으나 근대화 물결 속에 거의 사라지고 몇 주만 옛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는 당촌마을 남 쪽으로는 고창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마을 앞으로는 북에서 남으로 발달 한 골짜기가 발달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논과 밭으로 개간되었다. 또한 남 에서 북으로 흐르는 고수천이 당촌의 남쪽에서 고창천과 합수하면서 마을은 늘 범람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을의 위치가 범람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지만, 농토는 홍수 시 늘 하천이 불어 넘치는 범 람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당촌마을은 북서쪽의 차가운 바람을 직접 맞는 지역이며, 남쪽으로는 고창천과 고수천의 합수에 의해 범람의 위험성과 하천 으로 인한 습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지역은 여름의 계절풍의 직접적인 피해지역이 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당촌마을은 북쪽과 남쪽의 열악한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 하여 좋은 터전으로 만들 생각에서 비보(裨補)숲인 숲쟁이를 조성하여 마을 을 보호하였다. 이렇게 당촌은 마을의 허한 부분을 숲으로 조성하여 마을의 전면을 외부로 열려지지 않게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연환경이 척박한 가운데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당촌 사람들은 마을 곳곳에 비보로서 숲을 조 성했던 것이고, 조성된 숲은 당산이 되었다. 이를 보통 당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촌마을은 고창천변과 마을 앞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졌고, 주변의 낮은 구 릉지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졌다. 마을 뒤로는 깊은 골짜기를 따라 ‘바위백 이골’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이 발달해 있고, 또한 ‘죽림제(물부과)’가 있어 논 농사에 적합하다. 들판이름이 ‘바위백이돌’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마을 주변 으로 수많은 고인돌이 있었던 같다. 하긴 마을 뒤로 송암과 죽림리는 세계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는 고인돌 군락지임을 생각할 때 이곳 또한 당연히 고 인돌이 널리 분포되었을 것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고인돌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당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백호(白虎)의 터라 전한다. 백호는 실제 흰털을 가진 호랑이로, 동북아시아권의 신화나 민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을 의미 한다. 특히 한국과 만주와 시베리아의 동북지역에서는 백호를 상서로운 영물 (靈物)로 여겨왔다. 동북아시아의 풍수지리나 설화 등에서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 전주작(前朱雀) · 북현무(北玄武)로 불리는 하늘의 사신(四


神)이다. 사신은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청룡은 동 쪽, 백호는 서쪽, 주작은 남쪽, 현무는 북쪽의 수호신이다. 즉 백호는 풍수용 어(風水用語)로 주산(主山)에서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를 말한다. 좌청 룡과 우백호 중 안쪽에 있는 것을 내청룡과 내백호라 부르고, 밖에 있는 것 을 외청룡과 외백호라고 한다. 여기서 청용과 백호는 명당의 혈(穴)을 호위 (護衛)한다. 이렇게 청룡과 백호가 서로 어울러져 명당 주변을 여러 겹으로 감싸야 한다. 또한 백호를 그린 백호기는 임금이나 천자가 거둥할 때 사용되 었다. 조선시대 백호기는 대오방기(大五方旗)의 하나로 가운데 진영의 오른 편에 세워 우군(右軍)을 지휘하는 데에 쓰던 군기(軍旗)이다. 당촌마을 사람들은 백호의 정기를 받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 봉준과 같은 지도자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라 믿고 있다. 마을 앞의 장고 부와 바위백이골 사이의 산등성이 허리는 몰래등이라 부르는 능선상의 재가 있는데, 이를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말무덤은 일제강점기 이곳에 일본인 과 조선인이 서로 묘를 쓰려고 다투는 과정에서 일본 순사의 말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순사는 그 조선사람을 읍내의 숲쟁이로 끌고 가 공개적으 로 태워 죽였다는 이야기가 고로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전봉준장군에 대해 증언을 해줄 마을 사람은 한 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러나 전봉준장군이 당촌을 떠날 때 즈음인 13세 때 지은 시 ‘백구(白鷗)’가 있어 당시 마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스스로 모래밭에 마음껏 노닐 적에 흰 날개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 날 홀로 섰네. 부슬부슬 찬비는 꿈결같이 오는데 때때로 고기잡이 돌아가면 언덕에 오르네 수많은 수석은 낯설지 아니하고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는지 머리 희었도다. 마시고 쪼는 것이 비록 번거로우나 분수를 아노니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치 말아라. 이 시를 통해 전봉준장군이 살아간 곳은 넓은 들판이 있었고, 큰 하천변에 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고창천과 고수천의 합수지역인 당촌마을은 풍부한 먹이가 있어 당촌 당숲과 마을 인근의 죽림의 넓은 대밭 및 소나무 숲에는 늘 백로와 왜가리들이 서식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 고창천변은 백로와 왜 가리들의 중요한 먹이 공급지가 되어 많은 새들이 살고 있다. 전봉준장군은


어린 시절 마을 뒷산에 올라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고창천변의 모래사장에 서 새들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삼정<전정(田 政)·군정(軍政)·환정(還政)>의 문란으로 피폐한 조선의 백성들을 생각하였다. 어린 전봉준은 자연을 보면서 배고프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는 백로를 보 면서 물고기들에게 너무 근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는 자연의 모습에서 배 가 부르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 간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배고프고 없는 자 들을 쥐어짜 재산을 빼앗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었다. 당시의 이런 현실 을 어린 전봉준은 꼬집고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 장군 생가 당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