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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염의 사등마을1)

1.

특성

1)

형성 북서부에 위치한 심원면 사등마을은 조선시대 무장군에 속했다가 일제강

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창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월산리는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등리와 화산리, 그리고 도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심 원면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심원면은 현재 고전, 주산, 도천, 월산, 연화, 하전, 용기 등의 10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월산리는 마산, 월산, 사등 등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등마을 은 바다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등’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모래가 많 아서 붙여진 이름이므로, 다른 이름으로 ‘모랫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마을의 유래 삼국시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당시 선운사 계곡의 산적 무리를 교화하고 생계수단으로 소금 굽는 방법을 전수해 준 것을 계기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 다. 그 시기에 소금을 굽던 포구라는 이름을 따서 ‘검단포’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 후 현재와 같이 ‘검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소금의 생산과 판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마을이 부유해지자 검단선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선운사에 보은염을 시주하게 되 었다고 전해진다. 사등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검당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이 이동한 마 을로 바다모래가 쌓여 등성이를 이룬다고 하여 붙여졌다.

3) 마을의 지형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으로서, 사등마을 남쪽 선운산 방향으로 ‘당산뫼’라 불리는 해발 36m 정도의 낮은 산이 있다. 마을의 남쪽은 선운산이 둘러싸고 있고 북쪽은 1)

자료는 「선운사 검단선사와 보은염 학술조사 연구보고서」(한양대학교 미래문화연구 소 고창군, 2009. 8)에서 발췌한 것임.


면하고 있는 배산임수형 입지구조라고 볼 수 있다. 토지는 대부분 벼, 복 분자 등을 재배하는 논밭 등으로 이용되고 있고 새우와 장어 등을 양식하는 양식장 이 마을 곳곳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서쪽으로 선운산에서 발원한 월산천이 서해 곰소만으로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 는 풍천이 곰소만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는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독특한 서 식환경을 형성하여 고창군의 대표 특산물이자 향토음식인 풍천장어의 유래가 된 하 천이다. 1936년 간척공사를 착수하여 천일염을 만들어 왔고, 과거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해리염전(심원면 만돌리와 해리면 동호리를 잇는 간척지에 위치)이 있었다. 고창의 소금은 심원면에서 96% 이상이 생산되고 있으며 고창의 특산물인 심원소금은 희고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 월산리 사등마을은 염전에서의 화염생산이 중단된 채로 화염과 관련된 우수한 역 사문화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반면, 인근 갯벌을 활용한 하전리는 2003년 해양수산부 어촌체험마을 조성사업지로 선정되어 ‘갯벌체험안내센터’를 신축 하고 현재 활발히 운영 중이며, 만돌리 역시 천일염소금체험과 고기잡이, 조개잡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4)

변화

마을 이동 전에는 검당에 300호 정도가 거주하였으나 1898년 해일 이후 지금의 사등으로 마을이 이동하였다. 현재 농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벌막으로 사용되었으 나 검당과 사등 사이를 성토하여 현재는 벼를 재배하는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5) 생업환경 (1) 농업 주요 생업은 논농사와 복분자 재배이다. 1960년 말부터 간척사업이 시작되어 마을 주민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으며, 주민 대부분이 지속적으로 논과 밭의 경작면적을 늘려가고 있다. 마을 안쪽은 주로 쌀이 재배되며, 해안가의 밭 에서는 여러 종류의 밭작물이 경작된다. 재배 작물로는 보리, 고추, 복분자 등이다.


(2)

물때 일시적으로 꼬막이나 동죽 등을 채취했으나 지속적인 생계방식이 되지 못하

였다. 1960년대 이후 사등마을 앞 바다에서 잡히던 어종들이 거의 사라졌고 마을 뒤 의 갯벌은 양식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어업이 주요 생계방식이 되지 못하고 있 는 점이 특징이다. 소금은 경제적 부가가치가 높게 인식되어 있는 반면 어업은 비중 을 적게 두고 있다. 마을의 생활과 생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물때는 조류의 세기를 숫자로 등급화한 것으로 조석현상을 반달로 파악하여 음력으로만 표현한다. 사등마 을의 물때 명칭은 인천 등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7물때 식이다. 01일, 02일, 03일, 04일, 05일, 06일, 07일, 08일, 09일, 10일, 11일, 12일, 13일, 14일, 15일,

16일 17일 18일 19일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26일 27일 28일 29일 30일

일반적 명칭 턱사리 한사리 목사리 어깨사리 허리사리 한꺽기 두꺽기 선조금 앉은조금 한조금 한매 두매 무릎사리 배꼽사리 가슴사리

사등의 7물때식 일곱마 여덟마 아홉마 열마 한개끼 두개끼 아조 조금 무심 한마 두마 서마 너마 다섯마 여섯마

(3) 복분자 재배 1960년부터 고창군 선운산 주변에서 야생 복분자를 채취하여 술을 빚어 관광객에 게 장어와 함께 시음・판매하기 시작했다. 1990년도에 고창군 농업기술센터 실증시 범소에서 식재하여 실증하였으며, 1993년도에 심원면 일대에 복분자 식재 비용을 보 조하여 식재하였다. 이후 복분자 공장이 설립되어 관련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2004년 농림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등록되었다.

6) 생활권 전통적으로 심원면에 5일장이 서지 않아, 인근의 해리장과 무장장을 주로 이용한 다. 전체 주민의 대부분이 사등 인근의 고창읍이나 무장・공음・해리 지역과 통혼을


있으며, 최근에는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도시로 나가서 결 혼하는 예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마을 출신 중 네 명의 여성노인이 친정동 네에 정착해 살고 있어 주목된다. 심원면 연화리 및 월산리에 있는 시설로는 심원초등학교・심원중학교・심원파출 소・심원농협・심원우체국・심원수협지소・심원보건지소・심원종합복지관이 있으며, 그 외 의료시설 및 각종 여가문화생활은 대부분 고창읍내에서 이루어진다. 여가문화 생활권으로 크게 해안권역(하전・사등・만돌리 등)과 내륙권역(고창읍・선운산도립 공원 등)으로 나눠진다. 사등마을 주민의 생활권역은 약 30분 거리의 고창읍까지 포함하고 있고, 일대 선 운산도립공원을 비롯한 주변 관광지가 여가 문화권에 속한다. 사등마을의 마을 활성 화 계획에 있어 적극적으로 주변의 자원과 생활권내 전문가 및 주요기관과 연계방안 을 수립하여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7) (1) 당산제 사등마을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마을 공동 제사로서 전북지방 당산제의 3가지 유형(유교식 제의형, 줄다리기형, 혼합형) 중 혼합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정월 초 이튿날 모셨으나 한국전쟁 후 할아버지 당산의 당집이 허물어지면서 중단되었다가 1986년 갯벌에 나간 마을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고로 인해 다시 모시게 되었고, 이 때 제의 날짜를 정월 보름으로 옮겼다. 당산 신으로는 할아버지 당산(마을 은행나무)과 할머니 당산(마을 느티나무)이 있 다. 제를 모시는 제관은 생기복덕을 봐서 깨끗한 사람이 섣달에 선정되는데, 제관으로 선정되면 제사를 모시기 3일 전부터 근신하게 되는데 금기 사항이 매우 까다로웠다. 제물은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고 정성껏 차리는데, 보통 돼지머리, 시루떡, 삼실과 (대추, 밤, 감), 과일(사과, 배), 나물 등을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으로 나눠 따로 장만한다. 제물은 제를 모시기 전날 해리장과 고창장을 이용하였으며, 제주가 제물을 사러가면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제관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 렸으나 현재는 금줄만 친다. 제사 비용은 예전엔 마을 공동으로 충당했으나 현재는 희사받은 금액으로 충당하고 있다. 샘제를 마친 후 새벽닭이 울면 모셨는데, 현재는 정월 보름으로 옮겨서 정월 보름


모시고 있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모시며 제관이 삼헌관을 겸하며 아헌이 끝 난 후 원하는 사람이 절을 올린다.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드시라는 의미로 멧밥 두 그릇을 올린다.

(2) 마당밟기는 한 해 동안의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의례로서 당산제와 함께 진행 된다. 날짜는 음력 정월 14일부터 15일까지 행해진다. 예전에는 마을의 모든 집에 다 들어가 굿을 쳤으나 현재는 장어음식점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굿을 청하면 당산제 전에 마당밟이를 해주고 희사금을 받는다. 포수가 거둬들인 쌀과 돈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되는데, 보통 악기를 새로 구입하거나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된다. 구성은 영기2, 꽹과리2, 북1, 징2, 장구3, 소고1, 포수1이다. 포수는 가면을 쓰고 걸립을 위한 가방을 메고, 끈이 달린 대나무를 든다. 예전에는 종이로 만든 가면을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종이탈 가면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제물로는 상 위에 쌀을 담을 함지박을 올려놓고 돈을 꽂아두면 포수가 함지박의 쌀을 가방에 담고 돈은 대나무 끈에 매달아 두는 것으로 대신한다. 걷어 들인 쌀과 돈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사용된다.

(3) 샘제 사등마을에서는 샘제를 음력 정월 초이튿날 저녁에 모셨으나, 지금은 상수도 개발 로 인해 모시지 않고 있다. 샘제를 ‘물끗기’, ‘물때끗기’라 부르기도 한다. 샘제는 마 을의 우물물로는 사람들의 식수가 부족하여 매년 큰 산의 옹달샘에 가서 제를 모심 으로써 한 해 동안 먹는 좋은 식수가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샘제는 마을 인근에서 가장 큰 산속 옹달샘에서 제를 모시기 때문에 주변 마을끼 리 서로 먼저 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등마을도 하전마을과 서로 먼저 하려고 실갱이 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는 샘제를 모실 때 샘 안에 밥이 떨어져 있으면 제 모실 때 좋지 않기 때문이다. 샘제를 모시는 사람을 ‘화주’라 한다. 정월 초이튿날 저녁이 되면 화주는 먼저 목 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두루마기에 갓망구를 쓴다. 그리고 화주는 제물을 들고 물이 좋다고 하는 ‘양산제’ 옹달샘에 올라가 샘 앞에서 간단하게 제물을 차려놓 고 제를 모신다. 그리하여 제를 모시고 나면 밥을 샘물에다 던지고 그 물을 옹기에


긴 막대기에 걸치고 양쪽에서 둘이 메고 내려온다. 옹기는 몸통은 크고 주둥이 가 작은 것으로 한다. 옹기를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며 물이 옹기에서 질질 세어 나 오도록 솔잎으로 주둥이를 막는다. 이는 산 속의 샘물이 마을의 샘물에 연결되도록 일부러 흘리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와 마을 샘 가운데에 옹기를 걸쳐놓 으면 거꾸로 있는 상태여서 자연스럽게 물이 빠진다. 그리고 화주는 옹기를 샘에 걸 쳐놓은 상태에서 간단하게 술잔을 올린다. 그리고 나서 당산나무에 가서 제를 모신 다. 사등마을에서는 여느 마을과는 달리 당산제와 함께 샘제를 모시고 있다. 특히 샘 제를 모시는 것은 식수가 귀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종교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현재는 상수도 개발로 인해 식수가 예전에 비해 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 에 자연 모시지 않게 되었다. 과거 샘제를 모실 때는 당산제보다 더 크게 생각했으 나, 지금 샘제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에 대한 제의적 비중이 높아졌다 할 것이다.

(4)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 보름에 행하나 7월 백중에 행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줄 쌈’, ‘줄땡기기’ 등으로 불리며, 당산제와 함께 연행된다. 줄 두 개를 연결하여 쌍줄 을 만들었으며 남녀로 편을 나눠 경기를 하였는데, 여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당산제가 중단된 후에도 줄다리기는 일정 기간 지속되었다. 마을에서 걷은 짚으로 만든 줄을 이용하여 줄다리기를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전 부 한 곳으로 모여 참가한다. 줄은 아침에 마을 청년들과 아이들이 각 집을 돌면서 걷은 짚으로 엮는데, 수확의 정도에 따라서 걷는 짚의 양도 각기 달랐다. 예전에는 줄의 끝부분에 젖줄을 달았으나 주민들이 줄어들면서 점차 원줄만 만들게 되었다. 또한 동네에서는 쌀과 나물 등을 각출하여 먹을거리를 장만한다. 줄다리기의 순서는 줄드리기 → 줄당기기 → 출 처리로 진행된다. 줄다리기는 보 통 3판으로 진행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이유로 남자편이 이기지 못 하도록 노인들이 회초리로 때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8) 여류명창 진채선의 고향 진채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이후 수많은 여성명창이 등장하는 전례가


인물이다. 진채선은 조선후기 판소리 명창이었던 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아 음 률과 가무에서뿐만 아니라 판소리에도 뛰어났다. 진채선의 고향이 바로 사등마을이다. 진채선의 할아버지가 검당포에 들어와 단골 과 혼인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단골무당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소리를 익혔으며 당 시 집안이나 무계(巫界)의 선생으로부터 뛰어난 소리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신재효의 문하에서 당대 명창이었던 김세종으로부터 소리를 사사받고, 1867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 때 대원군의 눈에 들어 운현궁에 기거하여 명성과 영화를 누 렸던 인물이다. 진채선의 생가터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630번지로 사등마을 내에 있다. 군청을 통해 현재 사등마을 내에 진채선 생가터가 정비되어 있으나, 실제 진채선의 생가는 왼쪽 옆의 주택 자리였다고 한다. 생가터에 대한 자료나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생가 복원 자체에 한계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방치되어 있는 생가터 주변을 정비한 것으 로 추정된다. 현재 군청 소유의 토지로 나무와 잔디, 벤치 등으로 정비되어 소공원화 가 되어 있다.

9)

가꾸기

화염과 당산제를 비롯한 세시풍속 및 소리와 무속문화 보존・계승을 목적으로 문 화역사마을가꾸기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등 문화역사마을가꾸기 추진위원회(고창 문화원)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공간계획연구실을 중심으로 고창 사등문화역 사마을가꾸기 사업에 대한 학술조사가 끝났고, 그것을 바탕으로 설계 및 사업이 계 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2.

보은염

1) 화염법의 전래 검단선사는 선운사에 와서 이곳 주민들에게 화염(火塩, 煮塩-구운 소금)법을 처음 가르쳐준 은인으로 전해온다. 검단선사가 일러준 제염법은 전통적인 소금 제조법인 화���(火塩, 煮塩)방식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금은 주로 해안지방에서 바닷물을 달 이고 볶아서 생산했다. 소금생산 방식에는 화염방식과 천일염 방식이 있다. 화염은


염도를 높인 뒤 끓여서 얻는 소금이며, 화염(煮塩), 전오염(煎熬塩), 육염 (陸塩), 토염(土塩)이라고도 부른다. 천일염은 1907년 이후 일본 사람들이 주안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태양염(太陽塩), 청염(清塩), 천염(天塩)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중국은 기원전 6000년 경 산시성(山西城)에서 소금 호수인 윈칭호(運成湖)를 통해 소금을 생산하였다. 소 금 생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800년경이며, 해염(海塩)의 생산과 무역에 대 한 기록은 기원전 1000년 전 하(夏)나라 때부터다. 바닷물을 오지항아리에 담아서 그것을 끓이고 졸여서 소금 결정으로 만든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방법은 로마제국 이 남유럽 전역에 퍼뜨린 기술이다.2) 조선시대 제염법은 바닷물을 직접 끓이는 방법(함경도 강원도)과 염밭을 만들고 함수(鹹水)를 모아 솥에 끓이는 방법을 썼다. 대부분의 해안지방에서 행해졌던 제염 법은 ‘염밭조성 채함과정-전오과정’을 거친다. 소금의 주 생산지였던 서남해안에서는 염분 함량이 높은 함사(鹹砂, 鹹土)를 얻기 위해, 조금 때 써레를 이용하여 갯벌을 몇 차례 갈아엎어, 갯흙을 햇볕에 노출시켜 염분이 높은 함사를 만든다. 이 흙을 섯 등으로 운반하여 함수(간수)를 모은 뒤 솥에 끓이는 화염법(煮塩法)을 썼다. 고창지방은 곰소(줄포)만을 사이에 두고 무안현, 무장현, 흥덕현 지역에서 소금생 산이 활발했다. 이곳은 넓은 갯벌이 펼쳐 있고, 밀물과 썰물의 간만 차이가 크며, 산 지가 발달하여 연료의 공급이 원활해서 소금 만드는 3박자를 고루 잘 갖춘 천혜의 적지였다.3) 이 지방 전래의 소금 만드는 법은 전통 화염의 생산방식으로 일본의 천일염 제조 법이 들어온 1907년 이후 19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다. 그 당시 이 고을 사람들이 모르는 화염 생산방법을 검단선사는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설화 속에서 그가 처음 이 마을에 나타난 행색은 스님이 아니라 다소 허름하고 낯선 노인으로 묘 사되고 있다. 그는 이 고장 출신이 아니고 떠돌이 사람이므로, 이곳 사람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선진 소금 기술을 어디선가 배워서 알고 있거나 스스로 터득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소금기술뿐 아니라 종이와 숯 도자기 굽는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화염업이 발달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지형의 조건이 소금 굽기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소금을 생산한 기록은 검단선사의 2)   마크쿨란스키, 이창식 역, 세종서적, 2003, 29쪽. 3) 조선시대소금생산방식, 조선시대화염생산방식」김일기, 신서원, 2006, 11-56쪽.


(塩井)에서 비롯된다. 염정(塩井)은 속칭 약수(薬水)라고 하며, 검당포(黔堂浦)에서 바다를 향해 약 2리 되는 지점에 있다. 그 물이 희고 짜서 현지인들이 조수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가 길 고(桔橰, 두레박틀)로 길어다 소금을 굽는다. 햇볕에 쪼이고 여과하는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검당(黔堂)이 유일하다.4)(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무장현 산천) 다른 곳은 염밭을 갈고 섯구덩이를 만들어 함수를 길어다 구워서 소금을 만들었으 나, 검당포의 염정 바닷물은 천연적으로 염도가 높아 바로 길어다 가마에 구워 소금 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른바 해수 직자법(直煮法)인데, 갯벌이 발달하지 못한 동해안 (이원, 경흥, 부령, 회령, 종성, 경성)에서는 연료・시간・노력이 많이 소요되더라도 대부분 이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수다사(水多寺)는 검단선사(黔丹禅師)가 머물던 곳이다. 또 그 아래의 검단포(黔 丹浦)에 있는 염정(塩井)은 검단선사가 판 것이라고 전해지니, 이름이 있는 땅에는 반드시 그 유래가 있다.(도솔산선운사지「도솔산대참사고사」) 소금생산에 사원과 승려가 관련된 기록은 중세 유럽과 일본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원이 지역의 문화 경제의 중심이었던 시기에는 사원에서 소금을 생산하 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검당 마을도 선운사 검단선사와 관련이 있다.5) 선운사 는 인근의 사찰을 관리하는 총섭(総摂)이 주재하고 있어서 조선시대까지도 사찰에서 소용되는 소금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였다. 절에 소금을 바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검단선사가 염정을 만들어 소금을 처음 생산했다는 마을은 검단선사의 이름 을 따서 검당마을(사등마을)이라 불렀다.

도솔암을 지어야 하는데 거기가 산적들 소굴이죠. 그래서 그 산적들을 그냥 나가 라고 하면 안 되니까 소금 만드는 그 일을 가르쳤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라도 먹고 살아라. 그래서 산적들을 저기 안쪽에 바위 있는 데다가 검우바위라고 있어요. 고 부 분에 뭐가 있냐면, 고 부분에 샘을 하나 가르쳐 준 거예요. 그게 짠물이 나는 샘이었 4) 조선시대소금생산방식,「호남지역의 화염업」홍금수, 신서원, 2006, 165쪽. 5) 스코트랜드 Aldhamer라는 이름의 소어촌에 수도승이 찾아와 소금 생산법을 도입하였고, 이를 계기로 마을 이름을 Salt Priestone/Saltpreston/prestonpans 등 소금과 관련지어 불 렀다고 한다(위의 책, 144쪽). 일본 시오가마시(鹽竈市)에는 소금 만드는 법을 처음 가르 쳐준 노옹신(老翁神)을 모시는 시오가마진자(鹽竈神社)가 있고 이 신사의 이름을 따서 도 시 이름이 지어졌다(鹽竈神社 東北歷史博物館, 2007, 5-6쪽).


거여. 그 물을 길러다가 끓이기만 하면 되았어, 소금이.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공 평하지 못하단 말이야. 그래서 그 샘물을 없애 버렸다고. 그래 가지고 여기다 인자 힘없는 사람 먹고 살게끔 딱 그 지점을 만들어 준 거야. 저 섯구덩이 파가지고 이렇 게 해가지고 가까운데 길러다 해라. 그래 나와 가지고 부지런하면 먹고 사는 거지. (주길선, 남, 65, 사등마을문화역사마을추진위원장)

검단선사가 소금 굽는 방법을 일러준 동기는 이 고을에 횡행하는 산적 또는 해적 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설화에서 검단선사는 선운산을 중 심으로 기거하던 산적들에게 소금 제조법을 가르쳐 생활의 안정을 가져온 것으로 전 승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이들이 산적이 아니라 유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6) 이 지방은 삼한 시대의 마한지역이며 온조가 백제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토착 세력이 밀려서 이곳 선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충돌을 빚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그러므로 산적으로 표현된 이들은 실상 생계의 터전을 잃은 양민일 뿐 도적떼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검단선사는 생활의 터 전을 잃고 떠돌던 유민들의 생활안정을 가져오게 하고 이들을 불법으로 바르게 이끌 어 선량한 백성들로 교화시킨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마을 사람들의 구술을 종합하면 갯벌에 마치 분화구처럼 된 우물을 만들고 소금 물을 가두어 염도가 높게 되면 이 짠물을 길어다 솥에 굽게 했다는데 힘센 사람들 이 독차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밀려나 불만이 높아져서 검단선사가 염정을 없애버 렸다. 대신 염밭을 갈아서 섯등에서 함수를 모아 소금을 굽는 방법을 다시 일러 주 었다. 갯벌은 넓게 펼쳐 있으므로 부지런한 사람은 염밭을 많이 갈아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근면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 검단선사가 만들었다는 염정(塩井)은 대동여지도(1861, 철종12년)에도 표기되 어 있다.

6)

, 남, 75, 전 고창문화원장.


[

1] 대동여지도에 염정(鹽井)으로 표시된 사등마을

옛날 300여 호가 살았으나, 1898년(戊辰年) 해일로 피해를 입어 해안에 서 더 안쪽으로 퇴각하여 현재의 사등(모랫등)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뻘의 퇴적으 로 수심이 얕아지고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해안선이 바다 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실 정이다. 검당은 현재 80여 가구로 화염생산이 중단되면서 쇠퇴현상을 보여주고 있 다. 제방이 축조되고 간척으로 인해 해안선이 바뀌면서 벌막이 있던 자리는 농지로 바뀌었으나,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이 지역에 벌막은 6개, 솥은 8개가 있었다고 한다.7) 염정은 월산리 사등 앞 갯벌에 있었으며, 지금은 메워져서 형태는 남아있지 않다. 검단선사는 이들 도적들에게 소금 굽는 법을 일러주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열어주어 생활의 안정을 가져오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검단선사에게 보은하는 뜻으로 봄・가 을에 ‘보은염’을 바치는 풍속이 이어졌다. 이곳의 화염생산은 한국전쟁 후 해리 천일염전이 조성된 이후 쇠퇴하다가 1950 년대 말까지도 명맥을 이어왔으나, 1997년 소금 수입 자유화로 외국의 값싼 소금이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생산비가 많이 드는 전통 화염업은 단절되고 말았다.

2)

이운의식

검단선사가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이곳 사람들은 생활의 안정을 7) 군산대 박물관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 1996.


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되었다. 소금 생산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마 을 사람들은 선사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가을로 절에 소금을 갖다 바 쳤는데 이를 보은염(報恩塩)이라 불렀다. 검단선사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 도 ‘검단리’라고 하였다.

이 아래 개태사가 있으니 검단선승이 마음을 연마하며 수도하던 도량이요, 그 아 래 바닷가에는 검단리가 있으니 선승이 처음 염정(塩井)을 만들고 여기에서 소금을 구워 사중에 돌아가며 바치게 하였다. 그 법이 이어져 내려와서 아직도 소금을 직접 갖다 바치는 규례(規例)가 전해오고 있다.8)

그런데 3년 뒤에 씌어진 약재산인(樂斎山人)이라는 사람이 쓴「호남 송사현 도솔 산 선운사 승적 발문」에는 스님들로 하여금 소금을 사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의 해구에 있는 검단리의 염인들은 이 절에 소금을 가져와서 승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질하여 사도록 한다. 그 연고를 물으니 옛날에 검단이라는 선사가 처음 염 정을 만들어 굽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에 소금을 이 절에 보내는 것이 전해오는 관습 이 되었다고 하였다. 18세기에 와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관습이 사라져 소금 값을 받고 소금을 절에 팔았다는 의미가 된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말질을 하여 가져가게 했다고 한 것은 무상으로 제공했다고 해석할지 야박하게 팔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지 불분 명하다. 선운사가 창건 이래 임진란 등으로 황폐하여 가시덩굴을 걷어내고 오두막집 한두 채를 엮어 겨우 풍우를 면하였다 하니 보은염 풍속이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있 으며, 뒤에 무상으로 소금을 제공하지는 않았으나 옛 풍속을 회상하여 후한 값으로 소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9)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산문을 닫고 열기 를 반복하고 소금 굽는 후손들도 바뀌다 보면 처음처럼 보은염을 공양하는 풍속도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조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승려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천시되던 시절에 보은염을 드리는 풍속이 이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8)   도솔산선운사창수승적기」 선운사, 20쪽. 2003.2. 9) 是寺也已經桑滄之變 累歷星霜之換 凋廢殘觖之餘 再三中興(위의 책, 24쪽). 哀哉 自倭人 捲還之後 戊申己酉年之間 衲子數十輩 稍稍而進 傷感名刹之焚破 因與合謀 剪 棘誅茅 構禪廬一二所 僅蔽風雨(위의 책, 25쪽).


행해지고 있는 보은염 의식은 옛 문헌에 보은염을 바쳤다는 기록을 통해서 ‘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2005년에 복원한 사업이다. 이 의식에서는 단절 된 화염생산 방식을 재현하고 그 소금을 선운사에 공양하는 의식을 전통문화 가꾸기 사업의 하나로 복원하여 진행하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방 마다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축제화함으로써 문화 경제 관광의 진흥을 꾀하는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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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은염 이운의식 행렬 모습

<사진 2> 선운사에 도착한 행렬을 맞이하는 스님

이곳의 전통 화염생산 방식은 다른 지방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소금 창시 신화를


있다는 측면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해외의 사례에서도 전통문화와 연계 한 축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선운사 보은염이야 말로 문화적으로 충분한 의의를 갖는 다. 한 예로 일본의 경우 미야기현 시오가마시(宮城県 塩竃市)는 소금 만드는 방법 을 처음 가르쳐준 신을 모시는 시오가마진자(塩竃神社)에서 해마다 7월 4~6일을 전 후로 성대한 축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곳은 해조류를 뜯어다가 소금물을 걸러서 소 금을 굽는 신사(神事)를 재연하고 있다. 이 ‘조염소신사(藻塩焼神事)’와 ‘어부신사예 제(御釜神事龋祭)’는 현(県)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고창의 보은염 행사도 소금생산의 기원을 말해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므로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함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검단선사와 보은염의 사등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