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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최초의 사액서원이 있었던 동산리(東山里) -성내면 동산리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이병열(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1. 마을 유래와 위치 동산리(東山里)는 본래 흥덕군 이동면의 지역으로 동산 밑이 되므로 동산이라 하였다. 1914 년 부군동폐합령에 의해 동(同)면의 구평리, 내동산, 외동산, 월봉촌, 한정리, 안유리 등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동산리라 해서 고창군 성내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동산리의 법정리는 동산리이며, 자연취락으로 외동산(外東山)과 내동산(內東山), 새터, 구평(九平, 龜坪) 등이 있 다. ‘내동산’은 방등산을 되돌아본다는 ‘뒷동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동산리의 본 마 을이다. 그리고 내동산 발로 우백호의 등선을 넘어 서남쪽으로 새터마을이 있다. 그러나 현 재는 새터와 내동산이 서로 붙어 있다. 새터의 서북간으로 ‘서낭댕이’등이 있고, 그 북쪽 으로‘구름웃잔등’ 등성이가 있으며, 그 서북간으로 외동산 북쪽 잔등 너머에 ‘숫돌바위 터’가 있다. 숫돌바위터 남쪽으로‘군정청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외동산마을 바로 남쪽 앞 능선(외동산의 우백호) 아래에 ‘동산서원터’가 있다. 동산서원터 남쪽 앞에는 ‘솟대 청터’가 있고, 그 서남간으로 ‘군정청터’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군창터’가 와전된 듯하다. 군창터에서 동쪽으로 새터 쪽을 향해 가다보면 중간쯤에‘통치골터’가 자리하고 있다. 또 통치골 남쪽 앞 잔등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려장등’이다. 고려장등은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찾아 든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수백개소의 고려자기 가 도굴당하였다 한다. 또한 내동산 앞에 있는 마을회관의 남쪽 잔등에는 조선조 이전으로 추정되는‘절터’자리가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서 절 이름조차 기억해 낼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기왓장, 멧짝(맷돌) 그리고 기둥 초석으로 보이는 돌 수십 개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을 김상준 옹이 정원에 옮겨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동산리는 동쪽으로 월성리와 양계리, 서쪽으로 동림저수지, 남쪽으로 옥제리와 월산리, 북 쪽으로 신성리와 접하고 있다. <사진 1> 동산의 마을 표지석

2.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는 노령산맥의 끝 줄기가 서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리다가 우뚝 멈 춰선 곳에 있다. 즉 방등산에서 북쪽 줄기로 이어내린 맥이 서북간으로 10여 리를 달려오다 그 지맥이 힘차게 용틀임하면서 다시 뭉쳐 산 형태를 갖추어 방등산을 되돌아보는 형국이 다. 땅의 표면은 해발 27m이며, 국도 22호선의 서북쪽에 인접해 있고, 마을의 북쪽과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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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동림저수지와 맞닿아 있다. 동산리와 접해 있는 동림저수지는 국내에 도래하는 겨울철새 중 개체수가 가장 많은 가창오리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가창오리뿐만 아니라 청둥 오리, 흰뺨검둥오리, 쇠기러기, 큰기러기 등 수많은 철새들의 서식지라고 한다. 농어촌공사 는 동림저수지 일대 169㏊가 사업지구로 선정되면 자체조달 및 민간자본 1579억 원을 투입, 골프장(27홀, 136㏊)과 전원주택(150세대, 22㏊), 수상레포츠시설 및 팬션단지(11㏊)를 조 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동림저수지는 고창군과 정읍시의 중간에 위치해 교통여건이 양호하 고 인근에 내장산, 변산반도, 선운산 등이 있어 관광휴양 시설 적지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러한 시설들이 들어서면 철새나 자연환경은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다. <사진 2> 동산마을 항공사진(다음지도) 가마소 : 덕너보 밑에 있던 가마 모양의 소. 동림저수지 축조로 침수됨. 고려장등(고려장산등) : 새터의 서쪽, 통치골 남쪽 앞 동서로 길게 뻗은 잔등. 50∼60년 전 도굴꾼들이 이곳에서 자주 도굴해 갔다고 전함. 의성김씨의 선산. <사진 3> 고려장등 전경 군정청터 : 외동산마을 뒤 북쪽 잔등 넘어 숫둑(돌)바위터 남쪽에 있었음(새터의 서쪽, 통 치골 서쪽 동림저수지 가에 있었음). 군창터 : 외동산마을 앞 남쪽 솟대청터가 있었던 자리에서 서남간의 동림저수지 가에 있었 다. 전설에 의하면 본래는 군자창의 별청이 있었던 자리인데 약칭으로 군창터라 부른 것으 로 추정됨. 깃대바위 : 옛날에 군대기를 세우던 기단석(지금 김상준 씨 정원에 보관 중). 대롱보 : 마당께보 위에 있던 보로 동림저수지 축조로 침수됨. 덕너보 : 내동산 북쪽에 있던 보로 대롱처럼 길었다고 함. 동림저수지의 축조로 침수됨. 동림저수지(東林貯水池) : 고창군 흥덕면과 성내면 일대의 농지를 관개하는 동림저수지는 관개면적 1674㏊에 유당 면적 4420㏊, 저수량 995만㎥를 도내 최대의 농업용 저수지이다. 동림저수지에서 관찰된 조류 종은 큰기러기,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큰고니, 괭이갈매기, 노랑턱멧새, 뿔논병아리, 왜가리, 중대백로, 황조롱이, 멧비둘기, 백할미새, 딱새, 참새, 까치 등 15종이다. 이 중 큰기러기가 가장 많이 관찰되며, 큰고니와 큰기러기는 환경부 지 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멸종위기 II급에 속함. 동산제(東山堤) : 내동산의 동쪽에 있는 저수지. 서원터 : 외동산마을 바로 남쪽 앞에 있는 터. 솟대청터 : 새터의 서북쪽으로 외동산마을 남쪽 서원터앞에 있었음. <사진 4> 솟대를 세웠던 기단석 통치골 : 새터의 서쪽 고려장등 북쪽 뒤에 있었음. 숫둑(돌)바위터 : 외동산마을 북쪽 잔등 넘어 군정청터의 북쪽 저수지 가에 있었음(옛날 농 사지을 때 숫돌 대용으로 낫을 갈던 큰 바위). 무도리(武道場, 무드리) : 내동산에서 동남간으로 22번 국도에 연결되는 마을 길 왼쪽 논 들, 양생지 동쪽에 있는 들. 마릿등(말훈련장, 모릿들) 또는 마등평(馬嶝坪) : 내동산에서 동남간으로 22번 국도에 연결 되는 마을길 왼쪽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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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개 : 내동산에서 동쪽으로 뚫린 마을길에서 구동으로 이어진 농로 사이의 굽은 목에 있 었음. 마부간 : 마당개 터 앞 농로 건너편 남쪽에 있었음. 배들잇재 : 내동산 어귀에 있는 고개로 내동산에서 옥재리로 가는 재. 내동산이 풍수설에서 행주형(行舟形)이라 하는데, 이곳으로 배가 들어오는 것과 같이 되었다고 함. 쇠얏등(씨앗등) : 내동산의 동쪽 마을길에서 구동으로 이어진 농로 북쪽에 있는 잔등. 삿갓재(笠山峙) : 내동산마을 뒷산 주봉에서 북쪽으로 내려간 주령. 굽두리 : 삿갓재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의 밑자락으로 내동산의 동북간방에 있음. 서낭댕이 : 새터마을의 서북간으로 옛날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으 로 서낭을 모셔놓은 신당으로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추 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로, 그 곁에는 보통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 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신(俗信)이 있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 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 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파거나 헐지 않는 금기가 있다. 구름웃잔등(嶝) : 서낭댕이가 있던 자리에서 북쪽으로 조성된 등성이. 자래등(嶝) : 동산리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모양이 자라와 같이 되었다고 함. 자래보(洑) : 장다릿보 밑에 있던 보. 장다릿보(洑) : 외동산 앞에 있던 보로 동림저수지로 침수됨. 질갓보(洑) : 동산에서 신성리로 가는 길가에 있는 보. 천리보(洑) : 마릿들 옆에 있는 보. 홀애비터와 홀애미터 : 새터마을에서 서북간으로 고려장터와 통치골 쪽의 등성이 바로 너머 에 구한말까지 구정리 마을 터가 있었으나 모두 없어지고 홀아비 사는 터와 홀어미들이 모 여 살던 곳이 되었는데, 그 흔적도 없어지고 지금은 이곳이 공동묘지 터가 되었음. 양승지(양생지) 집터 : 전설에 의하면 양승지가 사는 터에서 북쪽 잔등 너머로 부잣집 터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동산리라고 한다. 따라서 양승지가 살았던 집터는 동산리 앞 남쪽 잔등 너머인 지금의 토등 바로 북쪽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논이지만 바닥을 빈지돌로 쌓았던 흔적과 돌로 쌓은 샘 터의 흔적으로 보아 이곳이 양승지 집의 우물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농업용수 관정으로 사용되고 있다. 승지는 조선조 때 승정원에 딸려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직의 당상관 벼슬을 말한다. 조선시대라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될 법한데, 전혀 알길 없는 옛날로 추정하고 있다. 고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마 고려시대 중 어수선할 때 인 충렬왕대 이후의 종5품 시절의 승지가 아니었을까 함. 용교천: 동산리의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용교리 628번지에서 흘러나와 동산리와 양계리 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동림저수지에서 합수되어 고부천(지방2)으로 흐름. 총 길이는 6 ㎞임. 강정천 : 동산리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대흥리 441번지에서 출발하여 동림저수지에 합수된 후 고부천(지방2)으로 흐르는 소하천. 총길이는 4㎞임. 퇴등 : 퇴등은 마을모양이 토끼의 형국이라 하여 퇴등이라고 칭함. 국도22호선에서 서쪽으 로 동산리로 들어오는 입구 능선을 말함. <사진 5> 퇴등과 동산리로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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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산리의 자연취락 언제 어느 때 누가 마을의 터를 잡았는지,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전래지명 등으로 대강 추정은 해 볼 수 있다. 동산리에서 백제시 대의 토기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설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지역의 지명 유래나 이곳에 세거하고 있는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검토해 보면,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군사기지와 관련이 깊은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림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고부천변에는 눌제(訥堤)라는 고대에 축조된 제언이 있었다. 눌제의 창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국내 삼대제(三大堤)의 하나로서 호서(湖西)·호남(湖南)이라는 지방명칭도 여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지금의 고부면 관청리에서 줄포(茁浦)로 가는 도로가 옛 눌제둑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산천조(山川條)」에 눌제천(訥 堤川)이 있고, 「고적조(古蹟條)」에는‘눌지재군서금폐위전(訥池在郡西今廢爲田)’이라 하 여 당시에는 제방이 폐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언은 삼국시대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 로 짐작된다. 따라서 눌제 상류인 동산리는 넓은 충적지가 있어 사람들이 농사짓기에 좋았 던 곳이었기 때문에 눌제보가 축조되기 이전부터 마을이 이미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내동산(內東山) 성내면 동산리 동산마을이다. 마을 명칭은 새뫼에서 동산으로 바뀌었다. 마을이 흥덕의 동쪽에 있고 마을 뒤에 있는 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았다 해서 동산이라 칭하였다. 마을의 입향은 의성김 씨 16세(世) 태정(兌精)이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당쟁에 밀려 흥덕 오호리로 유배되 어 왔다가 이곳 동산마을에 정착하였다. 현재까지 16대를 이곳에서 세거를 하고 있다. 진주정씨 는 26세(世)인 만록(萬祿)이 훈학(訓學)을 요청받아 이곳에 정착하였다. 김해김씨는 시중(侍中) 의 13세손(世孫)인 응귀(應龜)가 영광 군서면 매산리에서 큰 부자로 살다가 피할 수밖에 없는 입 장이 되어 신평리로 옮겨 살았는데, 동림저수지의 축조로 수몰되자 동산마을로 이거해서 세거하 고 있다. 마을의 앞으로는 용교천이 흘러 동림저수지와 만나고 서쪽으로는 반등산의 줄기가 마을 의 주산(主山)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남향이고, 당산은 마을의 허한 곳인 동쪽에 있어 마을의 비보경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진 6> 내동산마을 전경 2) 새터(새태) 내동산이 남서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새로 조성된 마을을 새터라고 하였다. 반등산의 줄기가 동림저수지 앞에 멈추는 내동산의 주산(主山)에서 갈라져 나온 내동산의 내우백호(內右白 虎) 능선부터 그 너머에 터를 잡은 마을이다. 새터는 의성김씨의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각 성바지 마을이다. 내동산과 새터는 내동산의 우백호의 능선을 따라 나눠진다. <사진 7> 새터마을 전경 3) 외동산(外東山) 내동산의 뒷잔등 서북쪽 넘어 동림저수지 가에 자리하는 마을로 일명 ‘밧동산’이라고도 불렸다. 즉 외동산은 원래 동산의 밖에 있다 하여 밧동산으로 불리다가 외동산으로 바뀌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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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내동산은 외동산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성내면 소재지에서 약 1km의 거리에 있다. 마을의 산세는 동남쪽에서 뻗어오는 반등산의 줄기가 외동산에서 멈춘다. 외동산은 서쪽으 로는 동림저수지와 접하고 마을의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가 남쪽과 북쪽을 감싸고 있 는 형국이다. 외동산의 풍수적 결함인 서쪽의 허함을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마을의 서쪽에 수백 년 된 당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외동산은 동래정씨들의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림 저수지가 축조되자 농토를 잃은 외동산의 주민들이 내동산이나 다른 마을로 마을을 떠나자 외동 산은 점점 작아져 현재 다섯 가구만 남아 있다. 동산서원은 외동산의 우백호 줄기의 끝부분에 있 었다고 한다. 지금도 동산서원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기와편들이 나온다고 한다. <사진 8> 외동산마을 전경 4) 구평(九坪, 龜坪) 외동산 옆에 있던 마을로 동산리 동쪽 시기동에 이르는 구평교 못가서 논들이 있는데 이곳 에 구한말까지 40여 호가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거북 모양이라 하여 귀평 또는 구평으로 불렸다. 마을이 성내면소재지 부근의 들판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어 늘 도둑 이 끊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지금은 국도 22호에서 성내로 들어가는 옛 길의 다리 이름만 구평교로 남아 있다.

4.풍수와 마을 이야기 전언에 의해, 고려초기의 명신이었던 강감찬(姜邯贊)장군이 983년(성종 3년)에 대과급제하 기 이전 977년(경종 2년) 30세 때 흥덕현감으로 있으면서 관내 풍수지의 현장답사 시에 다 녀갔다고 전한다. 그 이후 숱한 풍수지리 학자들이 동산리의 당산지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사가시인의 한사람으로 정조대에 전라관찰사를 지낸 유명한 이서구(李書九)도 동 산리의 마을 뒷산이 동쪽으로 우뚝 솟아 있어 양서지의 기운이 넘쳐나는 곳으로 비유해 주 었으며 호남지와 전국명당록 등에도 올랐다고 한다. 조선중기의 풍수의 대가인 남사고도 이 곳을 둘러보고 조용한 피난지로 내세워 주었는데, 외동산 입구에 있다는 보검출리(寶劍出 厘) 터는 박씨(朴氏) 들이 이미 썼다는 설이 있고, 장군태좌(將軍台坐) 터는 아직도 오리무 중으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풍수적인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전래지명들이 장 군대좌를 에워싸고 있는 무성한 지명들이 명당 터임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마을에 사는 고로들 말에 의하면 한때는 5백여 세대에 42 성(姓)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동산리에 거주했던 주류 성씨들은, 의성김씨 후손 중에 조선조 중종 때 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당쟁에 밀려 흥덕 오호리(五湖里)로 유배되어 왔다 가 이곳 동산리의 장군태좌 명당 터에 매료되어 동산마을에 정착하여 16대를 세거해오고 있 으며 그 뒤를 이어 진주정씨 26세손인 만록이 훈학의 요청으로 장성에서 이곳에 정착 10여 세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파평윤씨, 광산김씨, 평강채씨, 평산신씨, 김해김씨 등이 입향하여 살았는데 김해김 씨는 시중공파의 13세손인 응귀(応龜)가 영광 군서면 매산리에서 큰 부자로 세거해 오다가 피할 수 없는 딱한 입장이 되어 신평리로 이거해 왔었는데 수몰지구가 되어 이곳 동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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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옮겨와서 지금까지 누대를 세거하고 있다. 묘 쓰고 구대 좌수가 난 의성김씨 왜 그런고니 우선 저 고창에 고동이란 디가 있어. 고창 우게 거 가먼 당신 소점이 있는디 지금 거그도 묵어 있어. 시방 여 바로 고창 행교 뒤여. 시방 거그도 당신 소점인디 거그는 묵어 있고. 그런게 나는 여기 가서 의성김씨 선산이 있어. 그러믄 저짝으가 밭이 있는데 거 가 아조 걍 외막이여. 저 외밭이여. 언제나 외가 잘된다고 그런게 거다 원두막을 딱 도로변 이고 헌게 지놓고 그전에는 고창서 줄포 댕기는 시장질인디 거가 장제라고는디요. 이만헌 고개 보고 거기를 인제 감서 본게 거 원두막이 있은게 본게 맥이 한 간디가 있어. 참 특수허다고는 못 보지만 기도 괜찮단 말여 근게, “에라 이것 원두막에 올라가지고 쉬어가깁시다.” 헌게, “아 열 번이나 쉬어가십시오.” 히서 원두막으 앉었는디 말도 없이 참외를 몇 개를 따다가 대접을 혀. “보아허니 거 행역에 시장헐 것 같습니다. 그런게 깎어 자쇼.” 금서 집어 준단 말여. 아 글 안히도 시방 말만 잘히도 줄 챔인디 아 걍 고맙게 허거든. 근 디, 외를 자시고는 가들 안히여. 그러니까 도란도란 얘기도 허고, 이 얘기 저 얘기 허고 그 날 종일이 되얐던지 뭔 반양이 되얐던지 지내다가, 지내가는 사람이 이토록 대접을 받어서 참 대단히 고맙다고. 그러나 혹시 지내가는 사람 믿고 질 가는 사람 말 듣고라도 뫼 한자나 쓸라냐고. 아 일러주시믄 쓰고 말고요. 그런게 바로 원두막 있는 저짝이여. 시방 진틀진틀 허요. 거 가믄 걍 요새 사람은 뫼 쓰라고먼 거그 물날 것 같다고 안 쓰지. 거그다 일러 줌 서 서울 사람이 씨먼 구대 신사가 나는디 시골사람이 씨먼 구대 자손 헌다. 그리서 의성김 씨들이 거그 쓰고서 말이자믄 구대 좌수가 났다고 헙니다. 그서 시방 누구 집인고니 김주열 이라고 뭣이냐 김주섭이 국무총리 최고비서로 삼 년 몇 개월 지낸 사람 지금 신탄진인가 어 디 저 전매청으가 있거든. 그사람네 선산이여, 바로. 그서 그랬든지 저리서 그랬든지 그 사 람들이 수도 많고 괜찮헌 모양이오. 근디 여 성내면 동산리서 살아요. 예 그서 내 이 근방 의 와서는 그 뫼 한자리를 서로 앉이먼 그런 논란만 하지라오. 박주부 소담이라. 한국전쟁 중 동산리 한 여인의 아픈 이야기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이 휴전을 한 지도 이미 60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성내 동산리 에는 좌익과 우익의 말 못할 사연들이 많았다. 한 마을에서 같이 살다가 좌․우익으로 만나 평생을 산 사람들, 서로가 만나면 한국전쟁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역사였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전쟁 이야기는 회피하는 분위기이다. 현재 80세를 넘기신 많은 고로들은 3번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기미가요, 인 공시절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 지금은 동해물가 백두산의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동산리에는 남편이 좌익으로 활동을 하다가 끌려가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고 평생 두 자녀를 키우던 우리의 보통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성내 동산으로 시집왔다. 가정을 꾸려 첫째를 낳자마자 남편은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전쟁터로 끌려갔 다. 얼마 후 일본이 패망하자 그녀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남편은 좌익에 깊이 물들어 있어 좌익의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얼 마 후 그녀의 남편은 군경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 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녀는 동네 사람의 잘못된 말로 인해 흥덕지서에 15일간이나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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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천추의 한을 품고 산 그녀는 방장산으로 어디로 어린 아들을 안고 피해 다녔다고 한 다. 현재 86세인 그녀는 지금까지 홀로 두 자녀를 키우고 살았다고 한다. 최연소 고교지원자 김귀동 올해 서울시내 고교입시지원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11세의 김귀동(金貴童, 고창군 성 내면 동산리 162번지)군은 이날 상오 8시쯤 형 귀재(貴在)씨(21)의 손을 잡고 중앙대학교부 속고교에 도착, 평균 16세의 형뻘 되는 수험생들 틈에 끼여 수험번호 4210번을 달고 열심히 답안을 쓰고 있었다. 『경향신문』 1973년 01월 23일 기사. 동산리 홍수 : 홍수에 밀려온 토사를 밀어내는 농민들. 1963년 07월 05일 『동아일보』 사 진기사. <사진 9> 동산리 홍수 기사가 난 『동아일보』 사 진 고창군 첫 노지 벼 수확 : 전북 고창군 성내면 동 산리 윤명중(60) 씨가 26일 지역에서 처음으로 벼 수확을 했다. 지난 4월 29일 3만 3천㎡에 조생종 ' 운광벼'를 심은 지 120일 만이다. 윤씨는 "잦은 비 와 일조량 부족으로 작황이 좋지 않아 수확량은 지 난해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추석을 앞두고 햅쌀을 수확하게 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최영수 기자) 2011년 8월 26일 수박박사 김종일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에서 생산된 명품수 박 한통이 경매에서 23만5천원에 낙찰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고창군은 지난 10일 서울 롯데백화점 강남에서 진행한 제2회 고창군 우수농특산물 출시전 경매에서 동산리 주민 김종일 씨가 키운 수박 '탑2호'가 23만5천원에 낙찰됐다고 13일 밝 혔다. 탑2호는 소비자 대표, 농업 전문가, 수박 육종농민 등 의 판매현장 평가에서 당도 14.2브릭스(brix), 무게 9kg에 내ㆍ외피 색깔이 뚜렷하고 식미도(먹는 맛)가 뛰어나 경매에 서 최고가에 팔렸다. kan@yna.co.kr. 2011년 6월 13일 <사진 10> 2011년 고창군 첫 노지 벼 수확 연합뉴스

5. 동산서원(東山書院)과 향약사업 1) 동산서원의 유래와 배향인물 동산서원은 조선조 후기 영조 5년(1729년)에 당쟁에 의한 정치적인 이유로 철폐되었던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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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외동산마을 앞에 있었던 동산서원은 1721년(경종 1년)에 흥덕뿐 만 아니라 인근 여러 고을 선비들의 정성으로 세워졌었으며, 일명 ‘백강서원’이라고도 한 다. 이 서원은 당초 문정공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영의정)를 주벽으로 하여 그 아들 문 간공 민서(文簡公 敏叙)를 배향하고 손자인 문정공 관명(文靖公 觀命, 좌의정), 충민공 건 명(忠敏公 健命, 좌의정), 충장공 원남(忠莊公 元男)을 추배하였다. <사진 11> 동산서원 터(대나무 밭) (1) 주벽(主壁): 이경여(李敬輿, 1585~1657)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 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고, 목사 이수록(李綬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년)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 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였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 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년) 부제학·청주목 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양성의 방책을 상주하였고, 이어 형조판 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함으 로써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 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 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 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년(효종 1년)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현 성내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 호는 문정(文貞)이다. (2) 배향(配享) : 이민서(李敏敍, 1633~1688)는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서하, 영의정의 경여의 아들이다. 송시열을 사사하였고, 1650년(효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 정언, 시평,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초에 수찬으로 있 을 때 허적을 탄핵하다가 병조좌랑에 전직되었고,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후 호조참의를 거 쳐 광주목사로 있을 때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승지,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공조, 이조, 병조, 호조의 참판을 거쳐 1683년(숙종 9 년) 강화부유수가 되고 예조, 호조, 이조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한 뒤 지돈령부사가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많은 시문을 남겼으며 김수항, 이서하, 남구만 등과 교유가 깊었다. 나주의 서하사와 흥덕 동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서하집』 17권과 『고시선』, 『김장군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籣)이다. (3) 추배(追配): 이건명(李健命, 1633~1722)은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다.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인 그의 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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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포제(寒圃齊), 영의정 경여의 손자로 1684년(숙종 10년) 진사시에 입격된 후 1886년에 춘 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설서, 수찬, 교리, 정랑, 응교, 사간을 거쳐 1698년(숙종 24년) 서 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1717 년(숙종 43년) 종형 이잉명(李礽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정유년독대 직후 우의정에 발탁되어 왕자 연잉군(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았으며 숙종의 국상에 총 호사로서 장례를 총괄하였다. 경종이 즉위되면서 좌의정에 승진하여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세자 책봉에 진력하였으나 소론의 미움을 받아 1722년(경종 2년)에 노론이 역모한다는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 땅 뱀섬 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청나라에 주청사로 갔을 때 경종의 위증을 발설했다는 죄목을 들어 소론의 탄핵으로 유배지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재상으로 있을 때 양역문제에서 감역론(減役 論, 군포 2필을 1필로 감하자는 주장)과 결역전용책(結役轉用策, 수령이 사용으로 쓰고 있 는 전결잡역가를 전용하여 감필에 따른 부족재원을 보충하자는 주장)을 내세워 뒷날 영조 때의 균역법 제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시문에 능하고 송운체에 뛰어났다. 1725년(영 조 1년) 노론 정권하에서 신원되었으며 과천의 서충서원과 성내의 동산서원, 나주의 서하사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제집(寒圃齊集)』 10권이 전해지 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이 다. 유록(緌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여(敬輿)이고, 아버지는 판서 민서(敏敍)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좌의정 두표(斗杓)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 격, 이듬해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고, 공조정랑을 거쳐 함열현감이 되었다. 1698년 알성문과에 급제, 전조랑(銓曹郎)ㆍ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조ㆍ병조ㆍ예조 등의 참판을 거 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며, 이듬해 신임사화 때 아우 건명(健命) 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극형을 받자, 이에 연좌되어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에 이르렀다. 외직에 있을 때 민은(民隱)을 잘 보살폈고, 시폐(時弊)의 시정책을 촉구하는 상소를 많이 올렸다. 또한, 묘당에서는 임금의 융숭한 예우를 받았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응제문(應 製文)ㆍ반교문(頒敎文)ㆍ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겼다. 성내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봉 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집』 15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원남(李元男, 1588~1655) : 조선중기의 의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전라도 고창(高 敞)에서 출생하였다. 태종의 첫 번째 서자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의 7세손이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를 당하자 김장생(金長生)이 의병을 모집할 때, 자원하 여 많은 군량을 바친 공을 인정받아 사옹원참봉(司饔院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출사하 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도 창의(倡義)를 도모하였으나, 1637년 1월 화의 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통탄해 하며 충청남도 임천(林泉)에 은거하여 시서(詩 書)를 즐기며 생을 마쳤다. 그의 후손은 현재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계양리(桂陽里)에 세 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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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산리의 향약사업 교풍회(矯風會) 운영 동산리는 매년 설날 아침이면 계명 초에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었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세배 일순을 하면 동네가 커서 여러 날이 걸리게 되었다. 어른을 모신 집에서는 정월 한 달 동안 세배 오는 손님맞이에 큰 곤욕을 치 르게 되었다. 세배가 아무리 좋은 세시풍속이고 미풍양속이라지만 그 많은 손님 접대로 인 해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살림에 적잖은 폐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폐를 없애고 이를 시정하고자 동산리는 동네 일촌의 남녀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합동세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이는 향약의식을 개선하는 뜻으로 1910년 경술합방이후 마을 의 수장격인 정사진 옹이 시작하였다. 정사진 옹은 교풍회를 조직 운영하자고 제의하자 전 주민이 일치가 되어 교풍회를 창립하였다. 그 교풍의 뜻을 받든 사업의 첫째가 바로 합동세 배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둘째 사업으로는 동네 이웃 간 화목과 질서를 선도하였다. 마을에서 남녀 간 풍기문란 사례 가 있으면 임원 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검토하여 훈계하는 것이다. 마을사람 서로간의 다툼 이나 불미한 사례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등 규칙을 엄히 정하였다. 이러한 규약은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의 화합과 친목의 교풍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렇게 교풍을 세워 마을을 지키다 보니 가난한 빈민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교풍 회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정월대보름 때까지 걸궁풍물을 치고 집집마다 돌도록 하였다. 이 렇게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거두어 드린 쌀과 돈은 보름날까지 마을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 여 가난한 이웃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였다. 또한 당산할머니의 옷도 입혀드리고(줄 을 틀어 당산에 감아 드리고) 나머지는 기금을 마련하는 데 보탰다. 이러한 마을의 교풍은 교풍회의 주도하에 매년 정월 때마다 지금까지 위의 미풍양속을 계승해 왔었다. 교풍회를 창설 주도했던 정사진 옹은 생전에 동네를 찾아오는 빈객들을 정성스럽게 자기 집 에 초대하여 넉넉히 쉬어갈 수 있도록 접대했다. 그의 이러한 적선은 널리 인근에 알려져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운영되고 있지 않다. 역대 교풍회장은 다음과 같다. 초대 정재일, 2대 김갑수, 3대 윤두칠, 4대 김상준이다. 진흥회(振興會) 정사진 옹은 일제강점기에 ‘진흥회’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아 전답을 장만하여 가난한 농 가 구제에 앞장섰다. 그는 진흥계 또는 진흥회라 불리는 이 모임을, 마을의 단합과 청소년 들의 선도 및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25년 진흥촌을 만들 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진흥회는 지금도 계원이 40여 명이 있으며, 이 계의 활동기금 은 일제강점기에 모금한 기금으로 조성된 부동산 임대료로 운영이 되고 있다. 당시 출자한 자금으로 아회정(雅會亭)을 짓고 진흥계를 운영하였다. 진흥회의 재산은 임야가 1500평(동 산리 산 39번지)이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임대료로 쌀 696근(년 55만원 정도)이 나온다고 한다. 이 임야는 일제강점기 때 마을 사람인 문평기복(文平基福, 창씨 개명한 문씨) 외 2인 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2011년도에도 진흥회원 25명이 1박2일로 마을의 단합을 위한 여행 을 다녀왔다고 한다. 초대 진흥회장은 정사진 옹이며, 현재는 윤병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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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산제 동산리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할머니를 받들기 위해 매년 당산에 옷 을 입히고 당제를 올리는 전래 민속행사가 있다. 당산제를 지내면 마을이 항상 아무 일 없 이 지내며, 또 외부에 나가 있는 마을 주민이 건강하고 무사하다고 한다. 당산나무를 꺾는 다든가 베면 반드시 무슨 해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산은 원래 신목이 신체로 동산화표 옆에 있는 느릅나무이다. 당산의 효험은 마을을 보호 하며, 제관은 30대 이상, 부정이 없는 부인 가운데 택한다. 당산제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 은 30대 이상의 부정이 없는 부인들로 미혼자는 참석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제의절차는 먼저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술을 먹지 말아야 하며, 부정한 것을 안보고 접근도 하지 않아 야 한다. 제의 시간은 음력 2월 1일 오후 6~9시로 연 1회 지낸다. 제상은 술과 삼실, 양초, 떡, 밥, 돼지머리를 놓는다. 제비는 각 호구당 백미 1.5되 정도를 낸다. 금전으로는 5,000 원 내외이다. 음력 정월 15일은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 농악을 즐기고 남녀구분 줄다리기를 한 뒤 그 줄을 당산나무에 입히는데, 지금은 할머니당산 옆의 동산화표라는 조형석에 감고 있다. <사진 12> 마을 모정 옆에 있는 할머니당산 1) 당산할머니 옷 입히기 동산리에서는 매년 정원 보름날에 당산할머니 옷을 갈아입힌다. 옷은 볏짚으로 동아줄을 틀 어 청룡과 백룡에 각기 고를 메었다. 청룡은 동편, 백룡은 서편에 감아 놓았다가 저녁 대보 름달이 떠오르면 달빛 아래에서 남녀노소 없이 모여 굿을 한바탕 친다. 그리고 청룡과 백룡 을 일자로 마주보게 뻗쳐 놓았다가 줄을 메고 합배 식을 올린다. 그리고 난 후 마을 사람들 은 열렬하게 굿을 치며 줄을 밀고 당긴다. 이렇게 합배식이 끝나고 나면 줄을 할머니 당산 에 메고, 풍물패의 뒤를 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서 줄을 당긴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 편과 여자 편인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삼세판 줄을 당겨서 남자편이 이기면 흉년이 들고 여자편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며 즐겁게 당기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도 동산리의 당산 제를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에 와 줄 굿을 구경하였다. 이렇게 줄 굿이 끝나면 마을 사람들 은 당산에 줄을 매고 할머니 옷을 입힌 후 광장으로 돌아온다. 관장에서는 동네 사람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굿에 맞추어 다 함께 춤을 추고 놀고 간다. 이렇게 일 년 중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흥겹게 노는 날은 당산할머니 줄 감는 날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1944년 정월 초에 동네에 산고가 들어 부정하다 하여 당산할머니 줄 을 안 감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동네 사람 꿈에 당산할머니가 나와서 “내 옷을 안 입히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고 노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그 해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12명이 죽어나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당산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지 않아 지 골(신(神)이나 부처에게 거슬리는 일을 저질러 당하는 벌)을 맞은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마을 사람들이 더욱 치성을 드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산 줄 감는 일에 정성을 다 드렸다. 동네 사람들은 이 일을 자기 일로 알고 서로 다투어 줄 굿을 올려야 사는 것으 로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당산할머니에게 잘못하면 벌을 받아 죽는 것으로 알고 있 다. 일제 때 마을 사람들이 징병이나 징용에 끌려갔어도 모두 무사귀환을 한 것을 보고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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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 당산할머니에게 더욱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2) 2월 1일 (하레드렛날) 당산제 지내기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할머니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매년 2월 1일(하레드렛 날)에는 남녀 모두 몸을 정결히 하였다. 또한 올해 농사도 콩과 같이 잘 여물어 풍년이 들 도록 기원하는 뜻으로 콩과 나락 및 미영씨(목화씨)를 함께 볶아서 마당에 설치해 놓은 나 락 벼눌(벼나 보리,밀 등의 곡식을 베어 묶은 단을 모아서 쌓아 놓은 큰 무더기를 일컫는 다) 속에 넣어두었다. 마을 여자들은 당산제를 모실 곡식과 제물 대를 거출하는 데 궂은 일 이 있는 집(상고든집, 상가집)은 제외하고 깨끗한 집을 돌면서 마련했다. 제관은 깨끗한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을 선정하였다. 한 사람은 제관을 맡고 다른 한 사람은 집사를 맡는다. 그리고 당산에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줄을 친다. 집사는 깨끗한 제 사 음식을 자기 집에서 정성껏 장만하고, 제사 후 동네 사람들이 먹고 마실 음식은 지정된 다른 집에서 각기 장만하였다. 장만한 제물은 집사 보조원 3명에 의해 음식을 백지로 덮고 당산 앞에 진설한다. 제관은 절을 4배로 올리면서 그해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재 앙과 잡귀는 물리쳐 달라고 빌면서 마을 모든 가호의 대주 이름을 대면서 준비해 둔 소지를 태워 올린다. 굿은 안치고 엄숙하게 제사를 모신 뒤 드려 놓은 줄을 당산에 감아 옷을 입혀 드린다. 지금은 천년이나 묵었다는 당산나무는 고사해 없어지고, 그 옆에 느릅나무를 길러 보존하여 오지만 당산할머니의 옷을 갈아입히는 의식만은 죽은 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행해 지고 있다. 나무는 이 마을에 살다가 고창으로 간 심씨가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7. 마을현황 1) 동산리의 기관과 시설 성내면예비군면대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583-4. 전화번호 063-562-3113 고창으뜸특산품직판장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583-4 전화 063-564-8120 주찬양기도원 : 성내면 동산리 539-2. 전화번호 063-564-3366 동산산업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동산길 24에 있음. 대산애드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에 있는 회사로 전에는 구슬 베개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간 판을 제작하고 있음. 청송농원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에 있는 조경업을 하는 농원. 동산 노인회관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내동산에 있는 마을회관. 내동산의 마을회관은 마을 사람들의 기부금을 받아 1993년 10월 12일에 건립하였다. <사진 13> 동산 노인회관 내동산 모정 :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8월 13일 건립하여 지금까지 마을사람들의 쉼터 역 할을 하고 있음. 외동산 모정 : 2011년 4월 외동산의 당산나무 옆에 세움. <사진 14> 외동산 모정과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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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평교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의 다리

2) 동산리의 인물 정사진(鄭士珍, 1879~1939.2.18) : 일제강점기인 1925년도에 일제는 농촌을 개발하려는 목 적으로 농업진흥회을 세웠는데, 고창군 성내면은 정사진이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그는 호세판출이 곤란한 동산리 24호의 호세를 대납하였다 한다. 그는 동산마을의 교풍회와 진흥 계를 조직하고 많은 사비를 들여 후학양성을 위한 아회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불우한 이웃이나 유랑하는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김상준(金相俊, 1928.02.03~현재) : 그는 동산리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마을의 대소사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다. 또한 곰소만 일대의 고창지역 간석지 개간 토지를 측량․설계하는 일도 하였다. 그는 동림저수지의 만수위가 높아 마을의 많은 농가들이 수해를 자주 입자 동 진농조의 조합장(당시 엄병근 조합장)에게 동산리의 피해 사실을 알려 조합장이 동림저수지 의 수위를 2자나 낮추게 해 주었다고 한다. 60년대 새마을운동 바람이 전국적으로 불자 그 는 마을의 초가를 슬레트 집으로 고칠 수 있게 하고, 마을길을 넓혀 동산리의 취락구조 개 선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마을에 놀이터를 만들고, 얼마 전에는 사비를 들여 동산화 표라는 조형석의 당산을 세웠다. 또한 2006년 2월 그간 소장하고 있던 근현대의 539점의 자 료를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당시 측량비는 평당 5원, 문서등록 수수료는 3,000원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 15>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받은 인수증과 감사장 김주섭(金柱燮, 1940~현재) :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 18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주사범 학교와 경기대학교 행정외교학과,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경력으로는 정무장 관실 정무비서관(서기관), 보건복지부 공보관(부이사관), 국무총리 정무수석비서관(차관보 급), 민자당(한나라당) 고창지구당 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입후보, 한국담배판매인회 중앙회 회장을 역임. 윤희중(尹熙重, 1941.09.15~현재) : 공주사대 물리교육과를 졸업한 후, 줄포고, 해리중, 정 읍고, 전주여고, 군산상고 교사. 대전 목원대학교 교수 재직하다가 2007년 2월 퇴임. 황조 근정훈장 수여. 윤성중(尹聖重, 1959.06.25~현재) : 전북대학교 농대와 서울대 대학원 졸업 후 미국 미네소 타주립대학 박사학위 받고 현재 전북대학교 작물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 중. 김종택(1959.5.22~현재) : 성내초와 성내중, 전주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현재 현대건 설 상무이사로 있음.

3) 동산리의 인구변화 동산리의 2002년 이후 인구변화는 대체로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러나 2008년 마을의 인구가 갑자기 큰 폭으로 증가를 했다가 다음 해인 2009년에는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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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1월 30일) 동산리는 남녀 총 135명(남성 69명, 여성 66명)이다.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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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산리의 성씨별 현황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사망한 남 편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 대상자는 2010년 흥덕면․부안면․신림 면․성내면 까망의 전화번호부를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성내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 와는 차이가 있다. 전화번호부상에 부부가 함께 나온 경우 남편 쪽 본관만을 기록하였다. 확인이 안 된 본관은 성씨만 기록했으며, 다문화가정은 남편의 본관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중복하여 합계에 계산 을 하지 않았다. 동산리의 성씨분포는 다음의 표와 같다.

성씨 김

마을 씨

9

4

4

3

3

2

2

2

1

1

1

1

1

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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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산

13

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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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산리의 문화유산 (1) 동산아회비(東山雅會碑) : 아회정은 동산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고자 마을 주민인 정사 진을 중심으로 지금부터 130여 년 전에 설립한 서당이다. 아회정에서는 매년 성내면의 유림 들이 모여 잔치도 하고, 이곳에서 시와 글을 짓는 경연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연대회의 상 은 많은 양의 한지를 주었다고 전하다. 현재 아회정은 25년 전에 사라졌으나 그 터는 남아 있다. 비는 구름웃잔등의 숲 속에 남아 있다. 1988년 음력 7월에 세웠다. <사진 16> 동산아회비 전경 (2) 주막 터 : 동산리는 동림저수지가 축조되기 전 장성사람들이 줄포로 생선을 사기 위해 왕래를 하던 길목에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당시에 이 마을에는 두 곳의 주막이 있었 다고 한다. 한 곳은 22번 국도에서 동산리로 들어오는 입구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구름 웃잔등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3) 동산화표(東山華表)와 할머니당산 : 2005년 동산마을에 거주하는 김상준 씨가 사비를 들여 마을 모정 옆에 조형석의 당산을 세웠다. 당산에는『東山華表』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 다. 내동산마을은 풍수적으로 동쪽이 허(虛)한 마을이다. 동쪽의 허한 곳을 비보(裨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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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세웠으며, 당산의 체(體)는 조형석이다. 바로 옆에 느릅나무의 할머니당산이 있다. 구 체적으로 느릅나무 당산이 할머니당산이라면 조형석은 할아버지당산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 까 싶다. <사진 17> 동산화표와 할머니 당산 (4) 외동산 당산나무 : 외동산마을은 풍수적으로 서쪽이 허(虛)하다. 허한 서쪽을 비보하기 위해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의 체는 팽나무이다. (5) 효행비(孝行碑) : 의성김씨인 김정기(金正基)의 효행비이다. 김정기는 김진흥(金鎭興) 과 전주이씨의 아들이다. 비는 단기 4311년(서기 1978년) 11월에 봉산(鳳山) 이재건(李在 健) 근찬(謹撰), 족손 주섭(柱燮) 근서(謹書), 손 형락(亨洛) 근수(謹竪). 비는 서낭댕이로 부르며, 새터로 들어가는 삼거리의 왼쪽에 있다. 義城金公正基孝行碑. <사진 18> 효행비 전경 (6) 열행문(烈行門) : 정신원(鄭信源)의 배우자인 김해김씨의 열행비이다. 김해김씨는 자익 (子益)의 딸, 신원(信原)은 종묵(鍾黙)의 아들. 비는 4320년(서기 1987년) 정묘년 여름 거 창(居昌) 신사범(愼思範) 찬서(撰書)하였다. <사진 19> 열행문 전경 (7) 석정 문효자 여묘 기적비(石汀文孝子廬墓紀蹟碑) : 성내면 동산리 동산 입구에 있는 비 로 문제중(文濟衆) 공(公)이 이승을 떠난 뒤[歿後]인 36년 갑자(1984년) 10월일에 화산(花 山) 권용현(權龍鉉) 찬(撰), 고흥 유태석(柳泰錫) 근서(謹書), 호산(壺山) 송성용(宋成鏞) 전면(前面) 서(書)하였다. 문제중(文濟衆, 1878년∼1949년) :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다. 자는 성보(聖甫), 호는 석정 (石汀)이고,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출생하였다. 면수재(勉修齋) 문자수(文自修)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생원 문영경(文永璟), 증조부는 문선휴(文先休), 조 부는 문윤환(文允煥)이며 아버지는 문재순(文載淳)이다. 외조부는 가선대부에 오른 담양전 씨(潭陽田氏) 전치기(田致基)이다.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과 지극한 효성으 로 이름났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석정유고(石汀遺稿)』가 있다. <사진 20> 석정 문효자 여묘 기적비 전경 (8) 절 터: 내동산 마을회관의 남쪽 등성이(지금은 벚나무 밭)터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절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1990년대 초에 구슬공장을 짓는 중에 이 터에 묻혀 있었던 기왓장, 돌멧짝 등과 깨진 기왓장과 자연 기단석 10여 개가 나와 김상준가에 보존되어 있다. <사진 21> 절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기와

6) 동산리의 산업 동산리는 인근 마을에 비해 농토가 적다. 마을의 대표적인 농업은 비닐하우스 수박이다. 현 재 8가구가 수박농사를 짓고 있으며, 대부분의 농가는 논농사를 하고 있다. 일부 농가는 복 분자나 고추농사 등을 짓고 있다. 특히 동산리의 수박은 한국 최고의 맛과 품질로 그 우수 성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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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2> 수박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전경

7) 동산리의 역대 이장 윤병학 : 1983. 1.1 ~ 1989. 12.30 김봉환 : 1990. 1.4 ~ 1991. 12.31 윤용중 : 1992. 1.1 ~ 2001. 12.31 윤명중 : 2002. 1.1 ~ 2003. 12.31 윤용중 : 2004. 1.2 ~ 2005. 12.31 윤명중 : 2006. 1.2 ~ 2007. 12.31 윤병기 : 2008. 1.1 ~ 2010. 12.31 윤용중 : 2011. 1.1 ~ 2011. 12.현재

도움 주신 분 김상준(1927년생, 동산리) 윤병학(1937년생, 동산리) 윤병길(1943년생, 동산리)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신증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추진회, 1971. 『전북의 여각․충효열비』전북향토문화연구회, 2000. 『한국의 마을제당. 제5권, 전라북도편』국립민속박물관, 2001.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1317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 1935년 06월 09일 『동아일보』 1963년 07월 05일 『동아일보』 사진 기사. 1973년 01월 23일 『경향신문』 2011년 08월 26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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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 동산리(교정)  

2012-2018『한국의 유산』발굴·조사사업!! [제공] 한국지식재산관리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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