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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려시대의 고창 나. 고려왕조의 성립 개성지방의 호족 출신인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 것은 918년이 었다. 왕건은 원래 여러 대 동안 개성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해상활동을 영위하여 호족으로 등장한 가문의 출신으로 처음에는 궁예의 휘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있다가 궁예가 실정으로 민심을 잃게 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 (卜智謙) 등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타도하고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리하 여 고려는 태봉을 대신하여 후삼국의 하나가 되고 이후 후백제와의 격심한 쟁패전을 벌이 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신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서 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겨우 경주 일원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후삼국의 쟁패전은 고려와 후백제 와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의 견훤(甄萱)은 지방의 일개 무장 출신에 불과하여 후일을 내다보는 지략이 부족하였고 반면 왕건은 송악(松嶽) 지방을 근거로 한 확고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지략이 출중하여 날로 민심을 모으게 되어 후백제 와의 쟁패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왕건은 930년에 고창(古昌 : 현재 경북 안동)싸움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고 안동 부근의 30여 군현의 항복을 받았으며, 934년에는 다시 운천(運川 : 현재 충남 홍성) 을 정벌하여 견훤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웅진(熊津 : 현재 충남 공주) 이북 30여 성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쟁패전은 결판이 나게 되었다. 대세가 이와 같이 기울게 되자 후백제에서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나 935년 3월에 견훤의 장자 신검(神 劍)이 부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정권을 탈취하는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해 6월

에는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항복하게 되었다. 대세가 이와 같이 되어 고려의 승리가 확실하게 되자 이해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은 스스로 고려에 귀순하게 되었으며 다 음 해(936) 왕건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쳐서 신검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반세기에 걸친 후삼국의 전란을 수습하고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왕건은 후백제를 평정하자 후백제의 도성인 완산에 들어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백성을 어루만져 각기 편안히 직업에 종사케 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다. 고려 초의 정치상황과 왕권강화 이와 같이 고려가 후삼국시대의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 지만, 그것은 대립된 두 왕국을 흡수하였음을 뜻할 뿐이었다. 후삼국시대의 사회적 지배세 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족의 존재는 여전하였다. 호족의 협조를 얻어서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 왕건으로서는 호족과의 연합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앙집권적인 형태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지방장관은 중앙정부로부터 임명되어 파견되 지 못하였고, 여전히 지방의 호족들이 독자적으로 일정한 영역을 지배해 나갔다. 그러므로 중앙정부는 이 호족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전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를 일컬어 호족연합정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은 대체로 성 종(982)이 즉위하여 중앙집권적인 개혁을 추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통일이라는 것도 지방 호족들의 향배(向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야만 하는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건국 초의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임춘길 (林春吉)․진선(陳瑄) 등 수많은 반역사건은 모두 이러한 지방 호족세력들이 불안정한 왕실 에 대하여 도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형편이 이와 같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고려 초기의 수십 년 동안은 왕실이 호족에 대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각 지방에 대한 호족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들과 공존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력한 호족의 일부를 포섭하여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거나 또는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거나 상호 견제케 하여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함으 로써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다만 반역을 도모하는 호족은 부득이 이를 숙청하는 현상 유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태조의 호족정책에 잘 나타나고 있 다. 이러한 정책으로는 먼저 결혼정책을 들 수 있다. 태조 왕건은 호족 세력의 이탈방지와 왕실세력의 기반을 강화할 목적으로 결혼정책을 취하 여 지방호족의 딸을 29명이나 후비(后妃)로 맞이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선 각지 의 호족과 깊은 관련을 맺어 호족들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그들 부인에게서 태어난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다시 결혼케 함으로써 호족들 간에 혈연적 유대관계 를 맺게 하여 서로가 불신 반목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녀를 신라 경순왕, 즉 김부(金傅)에게 출가시킴으로써 지방 호족 출신인 고 려 왕실이 신분과 실력면에서 신라 왕실과 대등하게 상승되어 지배체제의 권위를 갖게 되 었다. 다음으로 왕건 태조는 사심관(事審官)제도와 기인(其人)제도를 실시하였다. 사심관이란 건 국 직후 태조가 민심의 안정과 신라․후백제에서 귀부(歸附)한 세력을 회유키 위한 지방 출 신의 귀족 공신을 출신지역에 임명한 향직(鄕職)으로서 지방민의 신분사정(身分査定), 부역 (賦役)의 조달, 풍속의 교정, 부호장(副戶長) 이하 향직의 추천 감독을 그 임무로 하였다. 태조가 이러한 사심관제도를 전국에 확대 실시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중앙 행정력이 지방 에까지 침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도에 거주하는 호족 출신의 지배층을 통하여 간접적인 지방통제를 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또한 기인제도란 지방 호족, 향리의 자제를 상경시켜 시위(侍衛)의 임무에 종사케 하는 일 종의 인질제도로 태조가 향리나 토호를 회유 견제하고 그 지방사정에 관한 고문에 대비케 하기 위해 신라의 상수리제도(上守吏制度)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호족들의 인질이 기인 이었고 따라서 기인을 보내어 태조를 섬기는 호족이라 하더라도 그 호족이 지니고 있는 독 자적인 세력기반은 왕권에 의하여 전혀 침해를 받지 않고 있었으며 또 왕실은 이를 묵인함 으로써 왕실의 안녕과 질서의 유지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태조의 융화정책은 신라와 후백제에서 귀순한 왕족․귀족 및 지방호족에 대해서도 계 속 적용되었다. 이는 그들의 전통적인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왕조의 권위 를 과시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특히 후백제의 견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상 부(尙父) 로 삼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견훤의 아들 신검의 죄도 용서하 였다. 이와 같이 왕실이 호족들과 타협하여 현상을 유지하며 호족들을 포섭하여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은 대체로 태조에서부터 2대 혜종을 거쳐 3대 정종 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 었는데 이것은 고려왕조가 이들 호족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성립됐다는 공로를 인정함이기 도 하지만 왕실에서 이들을 억압하려 하여도 이들을 한꺼번에 제어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현상을 유지하면서 이들을 제어할 힘을 기를 준비기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제 4대 광종 때에 이르러 왕실의 지위가 안정되고 세력이 커져서 호족들을 제어할 어느 정도의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자 광종은 과감한 세력이 커져서 호족들을 제어할 어느 정도의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자 광종은 과감한 왕권 강화책을 시행하여 왕권에 거부․도전


하거나 왕권에 지지․복종하여 왕실에 협조․충성하는 왕권 산하의 귀족으로 전신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하거나 하는 두 가지 길밖에 없게 되 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왕권 중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광종 때부터 본격화하여 그 다음 왕인 5 대 경종 때에 대체로 마무리되고 6대 성종 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성립되게 되어 비로소 중앙집권제도가 확립되니 이때에 이르러서야 고려는 명실상부한 중앙집권적 왕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지방제도는 성종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라. 지방제도의 정비와 고창 고려 초기의 지방 형편은 전국의 각 지방이 대부분 그 지방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유력한 호족들에 의하여 분할․정유되어 있으며, 고려정권은 이들 호족들을 연합하여 성립시킨 것 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이들 지방에 간섭하여 지방제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릴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고려 왕조가 건국 이래 가장 역점을 두어 온 정책의 하나는 지방 세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나아가서는 중앙의 행정력을 전국 각 지 방에 효과적으로 침투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제에 대한 집권층의 관심은 우리 지방관제의 정비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제의 정비는 단시일에는 불가능하였고, 오랜 시일에 걸쳐 점진적으로 정비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940년(태조 23년)에 여러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 을 처음으로 고쳤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제도의 개편은 당시 고려가 고려 자신의 영역을 유지․확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그 지방의 가장 유력자로 하여금 그 지역을 통치케 하고, 또 주․부 등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전국적인 지방형편의 특징으로서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관의 파견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 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최승로(崔承老)가 성종에게 올린 그의 봉사문(封事文)에서 “우리 성조(聖祖)께서 후 삼국을 통합한 뒤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저 초창(初創)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 로워 겨를이 없었다.”(고려사 권93 최승노전)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태조가 지방관을 설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위에서 최승로는 새 왕조의 초 창기여서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사실은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극도로 빈약한 반면 지방의 호족세력이 강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조 연간에 지방에 대한 시책은 서경(西京)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에 대한 지방 관제의 정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정적(民政的)인 성격을 가진 외관은 성종 연간까지에도 지방에는 상주하지 않았으나, 군 사적인 임무를 띤 외관은 일찍부터 지방에 상주하고 있었다. 918년(태조 원년) 9월에 태조 는 평양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당제 왕식렴(堂弟 王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廣評侍 郞 列評)을 파견하였다. 한편 남쪽으로 후백제와의 관계로 931년(태조 13년)에는 천안도호 부(天安都護府)를 설치하여 대승 제궁(大丞

弟弓)을 도독부사(都督府使)로 삼고 원보 엄식

(元甫 嚴式)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그리고 936년(태조 19년) 9월 후백제 견훤왕의 아들 신검이 마성(馬城 : 지금의 금마)의

태조 진중(陣中)에 나와 항복하자 태조는 전주성에 입

성하여 주민을 위로하고 군기를 엄중하게 하여 민심을 안도케 하고 돌아갔다. 동시에 후백제를 통일한 태조는 후백제의 수도였던 완산(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태조 23년(941)에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군사적인 거점에는 고려 중앙군의 일부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책임자로서 군사적인 외관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일찍이 전주 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것은 고려 초의 불안한 정세 속에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점을 감안 하여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태조 때 설치된 도호부는 짧은 기간을 존속하였을 뿐이었고 따라서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전주에 설치하였던 안남도호부는 4년 후에는 다시 전주로 개칭하고 안남 도호부는 왕년에 백제 중방성(中方城)이 자리했던 고부로 옮겼다.


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과 정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들 역시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책을 강구할 수는 없었다. 이때에도 왕권은 적대세력에 의하여 몹시 불안한 형편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두 왕의 재위기간이 매우 짧아서 그 경륜을 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종 때에 이르면서부터는 점차 지방에 대한 중앙에서의 통제가 체계를 잡아가게 되었으니 그 단적인 예로서 광종이 즉위한 후에 처음으로 지방의 각 주현에서 바치는 세공 물(歲貢物)에 대한 액수를 정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금유(今有)․조장(租藏)의 직제를 두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금유나 조장이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일종의 임시직으로서 그 임 무는 주로 조세의 징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실질적으로 광종 때에 이르도록 고려의 지방행정은 서경과 대도호부, 기타 북 부의 여러 진(鎭)을 제외하고는 중앙으로부터의 상주관(常駐官)의 파견이 없었으며, 다만 각 지방의 호족들로서 조직된 반자치기구에 일임되다시피 하였고 필요에 따라 수시로 금 유․조장이라는 징수관원이 파견․순회하였을 뿐이다. 1) 지방제도의 정비과정 고려왕조는 호족들과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일면 호족연합정권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 로는 왕권강화에 주력하였다. 왕권강화의 제도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광종으로, 광 종은 956년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제정하여 호족들의 노비화된 양민들을 해방시켜 호족들의 경제적․군사적 세력기반을 축소시키고 양민의 수를 증가시켜 국가의 수취원을 확 보하였다. 또한 958년(광종 9년)에는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 제를 실시하여 귀족들과 지방호족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층에 새로운 왕실 지배세력을 형성 하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왕권의 강화와 관계있는 중앙집 권체제를 마련하였다. 광종의 이와 같은 대 호족정책은 최승로(崔承老)의 상서문(上書文)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 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종 때의 지방제도의 정비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하 였던 것이다. 성종이 지방관제의 정비에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983년(성종 2년) 2월이었다. 고려사 백 관지 외직조에 의하면 이때에 처음으로 전국에 12목을 설치하는 한편 금유․조장의 직제를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12목은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청주․공주․진주․상 주․전주․나주․승주(昇州)․해주․황주였다. 이 12목의 설치는 성종 원년 6월의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건의에 의한 결과였다.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서에서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책 의 일환으로 지방관을 설치하되 일시에 파견이 어려우면 우선 10여 곳의 주․현만이라도 파 견하여 지방의 통제를 꾀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2목이 설치된 지역은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지방, 그리고 충청․전라․경상도지방에 한하고 강원도지방이 제외되었다. 이것은 성종 2년의 12목이 전국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통할하 는 완전한 지방관제는 되지 못하였지만 부분적이나마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 미치기 시작 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12목의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였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다가 986년(성종 5년) 8월에 비로소 처자를 거느리고 부임하게 하였다. 또한 987년 8월에는 12 목에 경학박사․의학박사 각 1명씩을 보내어 지방교육을 담당케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인재를 천거토록 하였으며, 993년(성종 12년)에는 양경(兩京)과 함께 12목에


상평창을 설치하여 물가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주․부․군․현․역로(驛路) 에 공수시지(公須柴地)를 지급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성종대에는 지방제도가 꾸준히 정비되어 지방행정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던 것이다. 성종은 이러한 지방관제의 강화를 바탕으로 14년에 당나라의 10도제(道制)를 모방하여 10 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때에 전국을 관내도(關內道)․중원도(中原道)․하남도(河南道)․강남도 (江南道)․영남도(嶺南道)․영동도(嶺東道)․산남도(山南道)․해양도(海陽道)․삭방도(朔方道)․패서 도(浿西道) 등으로 나누었으나 이 10도제는 당시 지방관제의 최고 단위이기는 하였지만 이 것이 행정구획이라기보다는 순찰 또는 감찰 구획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도에 상주하 는 도의 장관이나 도의 행정을 맡아보는 행정기구는 설치되지 않았다. 성종 14년 단행된 지방관제의 정비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로 의 개편으로, 성종 2년에 설치된 12목에 절도사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방행정에 있어서 군사적인 면이 크게 강조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목(牧)’을 파하여 ‘군(軍)’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표는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다.

(牧)

楊州

(

)

군(軍)

左神策軍

좌신책군(

)

목(牧)

정해군(

)

상주

(

)

(

)

(

)

(

)

(

)

우신책군

광주

봉국군(

)

전주

충주

(

)

나주

(

)

승주

(

)

황주

청주 공주

定海軍 귀덕군 歸德軍 순의군 順義軍 진해군 鎭海軍 곤해군 袞海軍 천덕군 天德軍

진주

해주

奉國軍 창화군 昌化軍 전절군 全節軍 안절군 安節軍

군(軍)

이러한 성종 14년의 지방관제의 정비 내용은 그 뒤 1005년(목종 8)에 지방관제에 대한 재 정비작업이 추진되어 12절도사, 4도호부와 동서북계방어진사(東西北界防禦鎭使)․현령(縣 令)․진장(鎭將)만을 두고 그 나머지 관찰사․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자사(刺使)는 모두 혁 파하였다. 이는 고려의 지방관제가 군사적 성격에서 벗어나 민사적(民事的)인 성격으로 전 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지방관제는 성종조와 목종을 거쳐 현종 때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전개 되었는데, 1018년(현종 9)의 지방관제의 정비로서 지방관제의 기본구조가 갖추어졌다는 점 에서 이때의 지방관제 정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 그 개편의 내용은, 같은 해 2월에 여러 도의 안무사(按撫使)를 없애고 4도호 8목과 56지주군사(知州郡事)․28 진장(鎭將) 20현령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고려의 지방관제는 4도호․8목을 중심으로 그 밑 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56개의 주․군, 28개의 진, 20개의 현으로 편성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중앙의 행정력이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군․현의 단위에까지 직접 침투하게 되었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전국의 각 지방이 중앙의 일원적인 통제 아래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일부 지역만이 중앙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된 것이지만, 이때의 지방관 제가 정해지므로 고려의 지방관제의 기본구조가 마련되었다 할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지방제도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5도 양계로 변천되어 고려 후기까지 계속 되었는데, 이때는 전기의 지방제도와는 달리 도(道)가 중간적 기구로 등장하여 주․현을 통


괄하게 되었다. 양광(楊廣)․경상․전라․교주(交主)․서해도의 5도와 동계․북계의 양계 밑에는 3 경 8목 15부 12군 335현 29진의 주․부․군․현이 있었다. 현종조에 그 골격이 갖추어진 지방제도는 이후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 기본구조는 유 지되었다. 2) 지방관제의 내용과 고창 고려 지방관제의 특색은 군현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군현제의 운영은 전국의 모든 군과 현에 외관(外官)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읍(邑)에만 외관을 두고 외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을 속군(屬郡)․속현이라 하여 큰 읍이 관할토록 하였다. 이러한 지방제도 하에서의 ‘고창’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우선 감무제(監務制)의 시행과 군 현제의 변천과정에 대해 살펴보면, 정도전의 삼봉집』에서는 고려시대 군현제의 변천과정을 두 시기로 나누어, 3유수(留守) 8목 4도호 의 시대와 그 후에 대도호부․목 등을 더하는 시대로 나누고, 앞의 경우는 제도적 융성기로, 뒤의 경우는 제도적 붕괴기로 각각 파악하였다. 그는 이에 대한 시대 구분의 구체적 기점 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려사 지리지 등에 의하면 고려 중기의 무신집권기부터 각 지방 에 대도호부․목 등이 증가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군현제 변천의 기점을 무신 집권기로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고려사에 보면 1108년(예종3)부터 각 작은 현(屬邑) 감무(監務)를 두기 시작하여 창 왕 때에 이르기까지 이르렀으며, 한때 현령․감무를 안집별감(安集別監)으로 고치기도 하였 으나 뒤에 다시 원래대로 하였으며, 그 품계도 7품 이하에서 5․6품으로 올렸다는 것이다. 예종대의 감무제 시행이 고려시대의 군현조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파악해 보기 위 해서 그 이전의 조직체계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군현제의 변천과정 중에서 정도전이 말 한 3유수, 8목, 4도호로 정비된 것은 현종대이다. 특히 1018년(현종 9)에 지방제도의 기본구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고려사 지리지 에서 각 지방의 속군 ․속현을 대부분 이때부터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 9년 2월조에 상주 외관의 수를 정비한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3경은 빠져 있으나 성종대부터 이미 서경 ․ 동경 등이 성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조직의 정비가 곧 정도전이 말한 3유수 즉 3경 ․ 8목 ․ 4도호의 제도이다. 이 3경 ․ 8목 ․ 4도호의 관 내에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 등을 분속시키고, 또 그 밑에 각기 속읍을 설치한 제도 이다. 이때의 상주 외관의 수는 모두 119읍이 되는데, 995년(성종 14)에 전국 10도의 주현 이 총 584읍이고 보면, 고려 군현제도 아래서의 속읍의 수는 전체의 약 5/4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영은 예종대부터 시작된 현령 ․ 감무의 파견으로 인해 속읍은 이 제 외관이 상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의 지방행정에 있어 그 중심은 4도호부 ․ 8목으로, 전라도는 전 주목과 나주목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전주목은 오늘날의 전북지방의 통할체이고, 나주목 은 전남지방의 통할체인데, 성종 14년에 전주 ․영주(瀛州 ) ․ 순주(淳州) ․ 마주(馬州) 등의 주 현으로 강남도라 하고, 나주 ․ 광주 ․ 정주(靜州) ․ 승주 ․패주(貝州 ) ․ 담주(潭州) ․ 낭주(朗州) 등 의 주현으로 해양도(海陽道)라 하였다가 현종 9년에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 하고 2목 2부 18군 82현으로 하였다. 오늘날의 고창은 전주목의 관할이었으며, 고창의 서부지역은 당시에는 나주목의 관할로서 장사현과 무송현은 영광군의 속현이었다가 1417년(조선 태종 17)에 두 현을 합하여 무장 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의 고창  

2012-2018『한국의 유산』발굴·조사사업!! [제공] 한국지식재산관리심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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