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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혈동맹의 호국성지, 용반리 조용호

흥덕면 용반리 하남리

용반리 신덕리

후포리

신송리

1. 용반리 위치와 유래 사포리

고창군 흥덕면에 속하는 법정리의 하나로, 마을의 지형이 용이 서려 있는 형국이므로 용

치룡리 교운리 오호리 흥덕리 석교리 사천리

반(龍盤)이라 하였다.

동사리

리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보면, 조선조 말기에 용반리는 흥덕군의 북면에 속했다. 1914년

제하리 송암리

3월 1일 조선통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내남당(內南塘) 대양(大陽) 용반, 관동(冠洞), 동신기(東 新基),

회화정(回化亭), 외남당(外南塘), 중남당(中南塘), 오정(五丁) 각 일부, 부안군 건선면의 신

흥, 신정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반리라 하고 흥덕면에 편입하였다. 용반리는 흥덕면의 북서부에 있다. 2013년 6월 현재 면적은 2.75㎢로 밭 1.25㎢, 논 0.61

㎢이며, 총 87가구에 169명(용반 57세대 113명, 남당 30세대 5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용반리ㆍ남

당리 2개의 행정리와 남당・대양・시게배미(일명 시기배미ㆍ동림나드리)・용반・재내・참샘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남당은 대양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양은 용반 북쪽에 있는 마을 로 뒤에 옥녀봉이 있고, 앞으로 옥녀의 세숫대야가 있어 붙인 이름이다. 시게배미는 용반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석우리 동림으로 드나드는 어귀이므로 동 림나드리라고도 한다. 남당은 대양 서쪽, 재내는 용반 서쪽 방죽 안, 참샘골은 용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남당 뒤에는 임진왜란 때 채홍국(蔡弘國)・고덕붕(高德鵬) 등 92명의 의사가 혈 맹했다는 혈맹단(血盟壇, 일명 술무덤, 술무덩, 숫무덩, 맹무덤)이 있다.

흥덕면 용반리 ― 343


문화유적으로 남당 회맹단과 모충사 유물산포지가 있고, 용반리는 부안군 줄포면과 경계 하고 있으며 국도 23호선, 오른쪽으로는 군도 7호선, 왼쪽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난다.

3) 남당(南塘) 흥덕면소재지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부안군 방향으로 8Km 지점에서 동쪽으로 1Km 거 리에 남당마을이 있다. 1504년경 조선조 중종 때 죽산안씨가 처음으로 들어왔으며 이어 평

1) 용반(龍盤)

강채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흥덕면 소재지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줄포 방향으로 4Km쯤 거리에서 우측 농어촌도로

남당마을은 열두남댕이로 불리다가 1900년대에 남댕이로, 이후 1945년부터 남당으로 개

1Km 거리에 용반마을이 있다. 1600년대에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바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은 풍수

다가 승천했다는 바위가 전해오는데 이 때문에 처음에는 ‘용바위섬’으로 불리다가 1940년

적으로 칼의 형국이며 남향을 하고 있다.

경 용의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하여 ‘용반’이라 불리게 되었다. 1804년경 조선 순조 초에 청도

자연부락으로는 남당과 대양마을이 있다.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후 동래정씨, 연안이씨가 들어와 살았으나 인근

대양은 남당의 남쪽에 위치하여 마을 뒤

석우리로 일부가 이사하면서 지금은 각 성씨가 살고 있다. 문경송씨가 들어와 살 때에는 15

에는 옥녀봉이 있고 마을 앞에는 옥녀가

호 정도였으나 그 뒤로 번창하여 숙종 23년 입촌한 연안이씨와 문경송씨가 주호를 이루고

세수할 때 사용하였다는 대양(대야)이 있다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용반, 재내가 있다.

하여 대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용반 보건진료소, 천주교 용반공소, 고창산립조합 조경수 유통센터, 고창부안 축협에서 운영하는 최첨단 한우가축시장이 있다.

남당마을 전경

줄포면 신정마을과 접한 남당의 작은 마을 뜸에는 4가구 6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뒷편에 위치한 남당 회맹단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방 출신인

야수 채홍국 등 92인이 같은 해 9월 18일 남당마을에 모여 단을 쌓고 삽혈동맹을 한 곳으 로, 호국의 성지이다. 남당회맹 호남창의의 의려장이었던 야수 채홍국 의사의 충정을 기리어 새워진 모충사는, 호국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호남창의 열사들의 넋을 위로하고 못다한 한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회맹단 기적비 건립 때 이곳에서 장검 5자루, 투구구슬, 화살촉, 관옥 등이 출토되었으며 1933년 실시된 간이조사에서 고분으로 규명되었다. 신리의 남원골과 남당의 논골을 남북으 용반마을 전경

용반마을 표지석

로 두고 작은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데 고분은 능선의 끝부분에 해당된다.

2) 재내

4) 대양(大陽)

용반재(도로) 넘어 북편에 위치

남당마을 남쪽에 있는 대양마을에는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형국의 옥녀봉(玉女峯,

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41.5m)이 있다.

다. 마을의 북쪽에는 대양제, 용봉

내려와 목욕을 하고, 용반 서쪽에 있는 주막에 들러 과객과 어울어져 술을 마시곤 했다. 어

석골이 위치하고 남서방향에는 강

느 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주막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옥녀는 주막으로 달려가

첩골이 있다.

신선의 술시중을 들었다. 신선의 고고함과 외모에 반한 옥녀는 신선을 꾀어 용추에서 만나 재내마을 전경

344 ― 고창의 마을 제5집

그 아래 용추가 있어 다른 곳보다 물이 맑고 시원하여 옥녀봉의 옥녀는 매일

자고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칠월 칠석 한나절 두 사람은 옥녀봉 아래 용추에서 만

흥덕면 용반리 ― 345


맹단 술무덤 맹무덤 술무덤 바우배기 하남리의 바우배기 술무덤 숫무덤, 맹단, 맹무덤이라고도 불림. 남당 뒤에 흙으로 쌓은 당으로, 임진 왜란 때

채홍국, 고덕붕 등 92인의 의사가 혈맹했다 함 시계배미 시기배미, 동림나드리라고도 불림. 용반 동남쪽 큰길가에 있는 작은마을 옆 길 대양마을 전경

옥녀봉 전경

건너에 후포리의 시계배미가 있으며 석우리 동림으로 나가는 어귀가 됨. 시기배미 시계배미

나 목욕을 하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때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신 선이 정도의 길을 가지 않고 속세미인과 만나 사랑을 하다니, 하늘이 노하여 심한 바람과

옥녀봉 대양리 뒤에 있는 산이다. 모양이 옥녀가 머리를 풀고 있는 것 같다고 함용춧-골 :

대양 서쪽 옥녀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 용추가 있었으며 다른 곳보다 물이 좋음

번개가 치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을 내려 옥녀봉이 불타면서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찬새암 참샘골에 있는 샘, 물이 썩 차고 맛이 좋음

죽어 농바위가 되었단다. 그 뒤 옥녀봉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

용반제 용반마을과 혜화정 사이에 있는 소류지

이 되어버렸다. 세월은 흘러 옥녀봉 일부는 농경지로 경작되었으나 구릉의 형태를 간직하고

대양제 대양마을 앞들 재내마을 아래에 있는 소류지

있다. 마을은 맑고 시원한 물을 간직하고 있어 옥녀가 세수할 때 사용하던 대야가 있다고 하여 대양이라 부르다가 대양(大陽)이 되었다 한다.

2. 자연환경과 지명

3. 마을의 인문환경 1) 남당 회맹단 o 종 목: 고창군향토문화유산 제4호

1) 자연환경

o 지정일: 2004년 6월 8일

대양마을 뒤쪽에 옥녀가 머리를 풀어헤친 모양의 옥녀봉이 솟아 있고 대양 서쪽 옥녀봉

o 소재지: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아래에 용추골, 용반 동남쪽에 계덕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예전 과객들이 쉬어가던 술집이

o 시 대: 조선시대

명 찬시암)이 있는데 물이 썩 차고

남당 회맹단은 혈맹단이라고도 하며, 채홍국(蔡弘國) 등 고창 지역 300여 명의 선비들이 구

있었던 과갯등, 과갯등 북쪽 구석에서 구석등 등의 산등성이가 있고, 참샘골에는 찬새암(일 맛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지명 개덕골 용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과갯등 용반 서쪽에 있는 등성이로, 전에 과객들이 쉬어가는 과객집(술집)이 있었 다고 함 구석등 과객등 북쪽 구석에 있는 등성이 동림나드리 시계배미

346 ― 고창의 마을 제5집

국의 기치로 호남의병을 창의하고자 삽혈동맹(歃血同盟)을 하고 쌓은 맹단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여 92명의 의사(義士)와 5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단(壇)을 쌓은 뒤 백마(白

馬)의

피를 마시며 다섯 가지의 맹약을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혈맹(血盟)을 하였다.

이들은 혈맹단 앞에서 훈련도 하고 군량을 모집하여 출병을 하였으며, 순천까지 적을 추

흥덕면 용반리 ― 347


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올렸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다시 창의한 뒤 출전(出戰)을 하

여 배풍령(培風嶺), 장등원(長嶝原)을 거쳐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23일간의 격전 끝에 장렬하

지에 증직되었다. 남당 회맹단은 남당마을 오른쪽에 높이

게 순국하였다. 혈맹단은 전국 유일의 충혈(忠血)이 깃든 곳으로, 유림과 유족들이 뜻을 모

10m, 직경 20m의 왕릉 모양 구릉으로, 그 앞

아 이곳에 기적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에 기적비가 서 있고, 앞쪽에 채홍국 등 의병을

채홍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이고, 본관은 평강으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이며 채치의(蔡致義)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29)에 부안에서 출생하였고, 흥덕 남당마을에 이거(移居)하였다. 채홍국은 키가 컸으며, 힘이 출중하였고, 말타기와 활쏘

기에 능숙하여 충의대절(忠義大節)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의에 격분하여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과 더불어 창의하였고,

모신 모충사가 자리 잡고 있다. 모충사는 재 실과 강당, 정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24년 4월에 흥덕마을 선비들이 흥덕면 행

희맹단 기적비

정마을에 모충사를 건립하여 순절한 의병들의 넋을 위로하였으며,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 倡義碑)’를

세워 의병들을 추념하였다. 남당 회맹단 앞에는 1964년에 고창 군민들이 뜻을 모

금산에서 싸우던 고경명이 전사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8월 1일에 흥덕 남당마을

아 세운 ‘임진창의남당 회맹단 기적비(壬辰倡義南塘會盟壇紀績碑)’라는 기적비가 있다. 현재 남

에서 다시 창의하여 고덕붕, 조익령, 김영년 등과 함께 혈맹을 하고 서해안으로 출병하여 사

당마을에 있는 모충사는 1986년 고창군에서 건립하였다. 남당 회맹단은 2004년 6월 8일 고

수함으로써 이웃 고을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에 권율이 위로의 서신을 보내 칭송하였다.

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군량 400석을 모아 200석은 기효증(奇孝曾)을 시켜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고 100석

은 경상도의 곽재우(郭再祐) 군중에 보냈다. 적이 순천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하

<<<삽혈동맹 (揷血同盟)으로 의병 창의 (倡儀)>>>

여 석보(石堡)에서 대파하여 이 공적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되었다. 또 정유

1592년(선조25) 4월 13일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봉대장으로 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임

재란에 창의하여 적을 흥덕 배풍령에서 맞아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진왜란이 시작되어 조국이 왜병의 발굽 아래 짓밟히는 치욕스런 수모를 당하게 되자 전국

23일간 전투 끝에 아들 채명달, 채경달과 함께 분전하였음에도 세 부자 모두가 순국하였다.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속속 들고 일어나 구국의 대열은 줄을 잇기 시작했다. 호남지방에서도

이에 셋째 아들 채영달이 부형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고경명(高儆命)과 유창로(柳彰老) 등이 담양에서 봉기하여 동년 7월 9일에 금산 전투인 칠백의

내려졌다.

鎰),

1872년(고종9)에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의 증직과 함께 정려(旌閭), 복호(復戶)가

고덕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초명은 덕봉(德鳳),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본

관은 장흥으로 고응진(高應軫)의 아들이다. 1552년(명종7)에 고창군 신림면(현 흥덕면 제하리) 고

려곡(高麗谷)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금산에 달려가니 족형(族兄) 고

사(七百儀士)의 장렬한 전투에 참가했다가 모두 전사하였으며 나주에서 창의한 김천일(金千

송제민(宋濟民), 장성 남문(南門)에 의병청을 설치한 김경수(金景壽), 김제민(金齊閔) 등 의병

봉기의 기치가 곳곳에서 나부낄 때 이 고장에서도 1592년 9월 18일 흥덕 고을 북면(北面) 남

당에서 채홍국(蔡弘國)을 비롯 92명의 선비들이 삽혈동맹(揷血同盟)으로 의병소(義兵所)를 설치 하여 구국전선에 나섰다.

경명이 이미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장 채홍국 등과 함께

이때의 동맹편제(同盟編制)는 다음과 같다.

모여들었다.

의병소 제임록(義兵所 諸任錄)

흥덕 남당에서 혈맹을 맺고, 맹주장(盟主將)에 추대되어 군기(軍紀)를 정돈하자 많은 의병이 의병을 인솔하여 왜적을 격퇴하고 적을 잡아 죽이지 않고 석방을 유인하는 책략을 역이용

하여 크게 이겨 순천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침범하자 맹주장

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부안 호벌치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1893년(고종30)에 승정원좌승

348 ― 고창의 마을 제5집

△ 의병장(義兵將) △ 부장(副將)

△ 맹주장(盟主將)

채홍국(蔡弘國)

이대준(李大俊)

고덕붕(高德鵬), 이대영(李大榮)

흥덕면 용반리 ― 349


△ 참모관(參謀官)

조익령(曺益齡), 채우령(蔡禹齡) (懸監)

△ 군기도감(軍器都監) △ 부장(部將)

김경덕(金景德) (懸令) 채홍조(金弘祖)

△ 전량도감(典糧都監) △ 금장(禁將)

이민복(李敏復) 이번(李蕃)

△ 점정도감(點丁都監)

△ 부점(副點)

△ 돌격장(突擊將) △ 부격장(副擊將) △ 선봉(先鋒)

임기(林機)-(奉事) 채명달(蔡命達)-(主簿)

△ 후초장(後哨將)

임대수(林大樹) 오몽서(吳夢瑞) 이시화(李始華)

△ 감포관(監浦官)

△ 부봉(副鋒)

김경장(金景章) (進士)

△ 쟁고관(錚鼓官)

△ 서사도감(書寫都監) △ 부사(副寫)

△ 수화관(水火官)

△ 부사(副射) △ 종사관(從士官) △ 시포도감(矢炮都監) △ 좌대관(左隊官)

350 ― 고창의 마을 제5집

채곤(蔡琨), 채이달(蔡利達), 김이명(金以鳴) 채장(蔡璋) 채홍무(蔡弘武), ���인발(李寅發)

박경덕(朴慶德), 채심(蔡堔), 김대진(金大振)

이득춘(李得春), 허득천(許得天)

채인달(蔡仁達), 김홍영(金弘寧), 정대열(丁大悅)

채홍서(蔡弘緖), 최명동(崔鳴東) 이익성(李益盛) 김영(金榮)

이들은 임진 8월 11일 열읍(列邑)의 사람들에게 흥의토적(興義討賊)의 격문을 발송하고 활

동을 개시하여 동년 10월 6일 법성진(法聖鎭)에 병량(兵糧) 4백석을 내게 하여 3백석은 의곡장

이민덕(李敏德)

의 혈전을 도왔다.

채봉(蔡鳳) (直長)

사동(木寺洞), 순천(順天)의 쌍암(双岩) 주암(侏岩), 남원 순창의 적성강(赤城江) 적치(賊峙) 등을

채상(蔡瑺) (生員)

기효증(奇孝曾)과 향사부감(餉士副監) 채명달로 하여금 용만(龍灣)의 행재소(行在所)에

보내고 100석은 영남의 곽재우(郭再佑)의 병장에게 보내고 각종 병기(兵器)를 공급하여 그들 그리고 창의 의병대는 정읍의 천원(川原), 장성의 사거리(四街里), 담양(潭陽) 곡성(谷城)의 목

오송수(吳松壽) (進士) 임추(林樞) 김상추(金尙秋)

전전(轉戰)하여 크게 전과를 올리고 11월 18일 귀환하였다.

배수의(裵守儀)

열들은 다시 향리로 돌아와 각기 생업에 종사하였다.

윤전수(尹典壽), 채영달(蔡榮達), 이작(李綽) (奉事)

이성춘(李成春) (參奉), 조익수(曺益壽), 탁상(卓祥)

이번아(李蕃衙), 채영(蔡英), 채인달(蔡寅達), 임세장(林世章)

(義穀將)

이민부(李敏敷) (參奉)

△ 습사도감(習射都監)

△ 부감(副監)

이인영(李寅榮), 채영달(蔡永達)

박영동(朴榮東), 채대향(蔡大享), 채중달(蔡仲達)

채대임(蔡大臨), 나기인(羅起寅), 최유청(崔有靑), 김응태(金應兌)

△ 조련도감(操鍊都監) △ 부감(副監)

김영무(金英武)

오봉수(吳封壽) (奉事) 주번길(朱蕃吉) (懸監)

최언심(崔彦深) (參奉)

△ 전초장(前哨將)

채경달(蔡慶達)-(判事) 윤흥은(尹興殷) (生員)

△ 우대관(佑隊官)

김수인(金守仁)

△ 조군향사도감(調軍餉士都監) 김영년(金永年) △ 부감군(副監軍)

채덕량(蔡德良), 김방필(金邦弼), 임세무(林世茂)

임대일(林大一), 나기종(羅起宗), 최치원(崔致元), 전시춘(田始春) 김헌(金攇), 임계원(林啓元), 김이진(金以振)

박치덕(朴致德), 오필수(吳弼壽), 강재팔(姜載八)

채구(蔡球), 채대원(蔡大元), 황득중(黃得中), 허섭(許燮)

김상동(金尙同), 채홍업(蔡弘業), 전시추(田始秋), 채홍우(蔡弘宇)

이듬해인 1593년(선조26년) 1월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왜병이 물러감에 따라 이들 3백여 의 그러나 왜군은 4년 후인 1597년(선조30년) 1월 15일에 15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 해옴으로

써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켜 한반도를 또다시 불바다로 몰아넣었다. <<<정유재란 때 재규합 용전(勇戰)>>>

1월 27일 채홍국 등 옛 의병 동지들은 다시 남당 회맹단에 모여 창의의 횃불을 밝혀들고 재동맹하였다. 이때 재동맹에 가담한 의열들은 다음과 같다. △ 통덕랑(通德郞)

박이점(朴爾點)

흥덕면 용반리 ― 351


△ 사복시정(司僕寺正)

△ 진사(進士)

△ 진사(進士)

△ 사과(司果)

△ 만일사(萬日寺)

△ 각수암(覺羞庵) △ 선불암(仙佛庵) △ 대암(大菴)

한계상(韓繼常) 송수익(宋受益)

송수명(宋受命)

정만(鄭慢) 채홍주(蔡弘周) 김안국(金安國) 강혹성(姜或成)

채치정(蔡致貞) 곽방욱(郭邦郁) 장돈(張潡) 채이달(蔡以達)

문익빈(文益斌) 박경득(朴慶得) 이세번(李世蕃) 이영발(李英發)

이무(李琳) 성래길(成來吉) 최봉언(崔鳳彦) 안지환(安知煥)

남유진(南有津) 배종의(裵從義) 곽재상(郭載祥) 채성장(蔡成章)

경시우(景時禹) 엄능간(嚴能幹) 승만세(承萬世) 채충량(蔡忠良)

민우적(閔佑適)

주지 승(僧) 각심(覺心)

4월 15일에는 왜군들이 흥덕 남당의 장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해 채홍국이 직접 나서 이들을 급습하였다. 이곳의 지세가 장등을 에워싸고 넓은 들판이어서 피아간에 밀치고

닥치는 이전구투(泥田狗鬪) 속에 이튿날인 16일에는 채우령과 부점 이시화가 전사하고 17일 에는 감포관 이익성이 전사하여 그의 아들 이무가 왜적을 베어 이를 복수하였다. 18일에는 조련부감 임추가 적에게 잡혀 무참히 죽고 19일에는 오몽서 김귀복이 전사하고 20일에는 참모관 조익령이 적에게 잡혔는데 채홍국이 이를 구출하려고 추격하다가 적의 칼 에 찔려 조익령과 함께 분사하고 말았다. 21일에는 채홍국의 아들 돌격장 채경달과 부감군 임기, 사과 정만이 전사하였으며 22일에

는 쟁고관 박영동, 좌대관 채구, 수화관 최유청, 김정립(金廷立) 등이 전사하고 23일에는 최후 의 보루인 부감군 채명달, 종사관 전시춘, 임세무 등이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배풍령에서 장등원 그리고 호벌치에 이르는 남당 회맹 의열은 초전엔 적으로 하

승(僧) 보규(普規)

여금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연전연승을 기록했으나, 워낙 중과부적인데다 병기마저 달려

승(僧)

하고 말았다.

세존(世尊) 승(僧) 관심(觀心) 윤심(允心)

피비린내 나는 혈전과 일진일퇴의 격전 끝에 3백여 명의 의열들이 모두 처절하게 순절(殉節) 채홍국 의려장도 경달 등 그의 아들 3형제와 조카들까지도 이 혈투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들이닥친 왜군을 맞이한 채홍국의 흥성 의병들은 그 러나 쓰라렸던 임란의 기억을 상기하여 의기는 더욱 충천하였고 구국의 일념에 불타 있었다.

정유년 3얼 23일에 왜적이 흥덕에 쳐들어와 살육을 심히 한다는 황득중(黃得中)의 급보를

듣고 먼저 와 있는 영암(靈岩)과 해남(海南)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싸우니 이때 배풍령(排風嶺)

에서 부장 채홍조 등이 전사하고 계속된 다음날(24일) 전투에서도 부사 이작과 승만세 부감 김영 등이 분사하였다.

25일에는 왜적이 일단 퇴각 하였는데 4월 4일에 왜적이 부안(扶安)을 침략하여 온다는 정

보를 듣고 부안에 이동하여 위번동(蝟蟠洞)에서 진을 치고 9일 동안이나 탐색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4월 14일에 적이 돌격하여 왔다.

비극을 맞았었다. 이충무공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을 고비로 1598년(선조31년) 11월에 왜적의 철수가 끝남으로써 임진왜란의 막은 내리게 되었다.

모충사(慕忠祠) 건립 넋을 위로

이후 조정에서는 이들 3백여 흥성창의 의열들의 공훈(功勳)을 인정하여 채홍국 의려장에게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그의 아들 경달에게는 훈련원정(訓練院正)을 맹주장 고덕붕에게는 참의 (參議)를

추증(追贈)하였고 흥덕면 남당 회맹단에는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여 호벌치 싸움

에서 기일(忌日)도 알 수 없이 가버린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또한 1924년 4월 20일에 는 일제 치하를 무릅쓰고 흥덕, 고부, 부안 등 향리의 뜻있는 유림(儒林)들이 이들을 추념하

전투중에 김필선(金弼善)이 왜장에게 붙들려 가슴을 찔리고 코를 베이어 죽음을 당하자 조

고자 흥덕읍에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倡義碑)를 건립하였으며 1964년 8월 15일에는 고창

여 적진을 교란하고 시포도감 김헌은 칼을 빼어 왜군 두 놈을 베어다가 분에 못이겨 그 간

세워 흥성창의 의열들의 호국충정(護國忠正)과 구국의 귀감(龜鑑)을 길이 전승하고 있다. 한편

을 내어 씹었다. 동시에 맹주장 고덕붕, 조련부감 오송수, 전량도감 이번 등도 이에 합세하

이곳 회맹단 기적비 건립 때 맹단에서 장검 5자루와 투구구슬, 화살촉, 관옥 등이 발굴되어

였는데 수화관 나기인 등 16명의 의열들이 전사했다.

현재 전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익단(曺益斷) 최언심 등이 이를 추격하다가 전사하고 채홍국과 참모관 채우령이 다시 추격하

352 ― 고창의 마을 제5집

군민이 추모의 뜻을 새겨 회맹단에 「임진창의남당 회맹단기적비」(壬辰倡義南塘會盟壇紀蹟碑)를

흥덕면 용반리 ― 353


1924년에 설단으로 야수를 항사해 오다가 1988년 국도비와 사림의 성으로 맹단의 옆 신

2) 모충사(慕忠祠) 사우란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을 모셔두고 연 수차에 걸쳐 제향을 행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명칭은 곳에 따라 향현사ㆍ향사ㆍ이사ㆍ영당ㆍ별묘ㆍ세덕사ㆍ유애사ㆍ생사

실 강당을 건립하였다. 야수 및 4위와 동의사 121위를 동서로 종향하였다. 형태는 3칸 건물로 맞배지붕이고, 겹처마이고 앞에 묘정비가 있다. 평강채씨 야수공 종중 에서 관리하며 제사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당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우의 발생은 인간의 보편적 의지인 선조와 선현의 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 며, 특히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주자학 전래 이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우가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여말에 전래된 『주자가례(朱子家鱧)』에서 비롯

되었다. 즉, 여말 주자학을 수용한 정몽주 등의 제창으로 인하여 가묘(家廟)의 제도가 성립 하게 되었으며, 기타 생사영당(生飼影當)과 일반 사우 등 여러 가지 사묘(飼廟)가 발생하였던

3) 유물산포지 (1) 용반리 유물산포지 1

흥덕면 용반리 774-3번지에 위치한 원삼국시대 유물산포지로, 남당마을 남측에 위치한 다. 북측은 부안군과 경계를 이루며 남측은 용추골로 불리는 곳에 위치하며 동측은 남당마 을과 덧논골이 위치한다. 구릉은 해발 41.5m로 저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용관편, 경질타날문토기편, 경질토기편 등이다.

(2) 용반리 유물산포지 2

흥덕면 용반리 1010번지에 위치한 유물산포지로,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예 촌에서 남당으로 가는 312번 지방도에 연접한 구릉으로 수원백씨 세장비, 하남교회, 삼오노 인정이 위치하고 서측으로는 대양마을로 이어지는 소로가 개설되어 있다. 대양마을 동측으 남시마을 당산나무

의사를 모신 명위현판

로는 덧골논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는데 유물산포지는 덧논골 동측의 구릉 사이와 남당마 을의 구릉에 위치한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편, 연질토기편, 타날문토기편 등이다.

것이다. 물론 삼국시대에 있어서도 유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지닌 선조봉사(先祖奉祀)의 관습 이 있었다.

(3) 용반리 유물산포지 3

즉 삼국시대부터 이미 왕실에서는 선왕의 유령을 봉사하는 종묘제도가 있었고, 그중 가

흥덕면 용반리 18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이다. 행정마

장 조직적으로 발달된 것으로 신라의 칠묘제를 들 수 있다. 또한 일반 사우의 경우에도 이

을 서측 구릉으로 남당마을과 덧논골이, 남측은 예촌마을과 용반제가 위치한다. 구릉은 해

미 신라시대에 다수 존재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발 25m의 지평한 지역으로 흥덕에서 북측으로 뻗어올라간 능선의 말단구릉이다. 수습된

『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에는 김유신의 사우가 신라시대에 건립되어 춘추

유물은 경질토기편, 연질토기편, 청자편 등이다.

로 제향되었으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초에 소재관으로 하여 치제케 할 때 까지 국가적으 로 봉사되었음을 볼 수 있다.

(4) 용반리 유물산포지 4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 있는 모충사는 평강채씨 야수 채홍국, 장흥고씨 여곡

흥덕면 용반리 1076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 유물산포지는 예촌마을 구릉으로 동측으로

고덕붕, 청주한씨 사복시정 한계상, 야수의 장자 훈련원주부 채명달, 차남 이자훈련원정 채

는 말등들, 서측으로 대양마을과 남당마을, 남서측으로 용반마을과 용반제가 있다. 예촌마

경달을 모신 사우이다.

을, 남서측에 해당되며 동측으로 돌출된 구릉사이에 형성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토기

354 ― 고창의 마을 제5집

흥덕면 용반리 ― 355


편, 경질타날문토기편 등이다.

치료 서비스 제공을 통해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수준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용반 보건진료소는 흥덕면의 신덕, 주항, 대촌, 상연, 신송, 노통, 석우, 용반, 예촌, 행정,

(5) 용반리 유물산포지 5

남당 동 11개 마을을 관할지역으로 마을 건강원 11명과 운영협의회 이종회 회장, 김옥진 진

흥덕면 용반리 806-1번지에 위치한 삼국시대 유물산포지이다. 용반마을의 남측 구릉으로

료소장이 협심하여 인근 지역주민의 보건의료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동측은 동림 저수지가 서측은 23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해발 32.4m의 저평한 지역으로 흥덕에서 뻗어내린 가지능선의 일부이다. 수습된 유물은 경질타날문토기편, 옹관편 등이다.

(2) 마을회관(경로당)

마을회관은 경로당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이웃집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4) 마을의 시설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주민들이 본인에게 크고 작은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마을의 관

(1) 용반 보건진료소

심사에 대하여 회의하고 토론을 하여 의사를 결정하는 장소이기도하다. 경로당 운영비는 정

‘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하농특법)’ 제 1조에 의하면, 보건진료소는 농어

부의 지원금과 자체자금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을 난방비 등 에 지출하고 있다.

촌 등 보건의료 취약지역의 주민들에게 보건의료를 효율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국민의 의료

경로당에는 친목을 도모하고, 취미생활을 누리는 데 필요한 넓고 쾌적한 공간이 마련되어

균점과 보건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용반 보건진료소는 흥덕면 용반리 천주교

있으며, 경제적인 생활을 위한 재사회화 또한 경로당이 수행해야 할 역할임을 감안했을 때

용반공소 앞에 터를 잡아 1980년 개소하였으

소일거리를 할 수 있을만한 공간이기도 하다.

나 시설이 노후화되어 용반안길 63에 1,404㎡

경로당 이용에 있어서의 주가 되는 활동이

부지에 건축물 156㎡를 신축하여 건강증진을

화투나 TV시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교

위한 물리치료 및 의료장비를 갖추고 2007년

류의 장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7월 10일에 신축 이전하였다.

여러 대중매체를 구비하고, 치매예방에 효과

2000년, ‘모든 인류에게 건강을’ 목표로 내 용반보건진료소

가 있는 놀이들을 마련하고 있다.

세우고 이에 접근 방안은 일차 의료가 열쇠라

아울러, 특히 혼자가 된 노인이나 신체활동

는 것에 의견을 보았다. 농특법을 공포하고 이

이 부자유스러운 노인들의 영양섭취를 위해

를 근거로 1981년부터 전국 농어촌 등 의료 취약지역에 보건소를 설치하여 보���진료원으로 하여금 근무하게 하였다.

경로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경로당에의 참여를 확대시키려면, 무엇보다

보건진료원은 지역사회 주민과 함께 그 마을에 거주하면서 주민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하기

노인 스스로의 참여의지 및 의욕과 왕성한 활

위하여 일차보건의료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그 지역사회

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로당 역시 저소득계

의 지역진단을 통해 보건진료소 사업을 계획, 수행, 평가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층의 노인들이 따분히 소일하거나 한담하는

그 결과 지난 20여 년 간 보건진료원의 활동은 농어촌 벽지주민의 의료 이용의 접근성을

용반마을회관

남당마을회관

장소로서 거의 유명무실한 시설에 가깝다는

높임으로 보건의료 요구 충족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질병예방과 건강증진을 위한 지역

이미지에서 벗어나 접근성이 용이한 노인여가시설로서 복지센터의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

사회 주민의 보건교육, 응급환자의 신속처리 및 후송, 추후관리, 노인건강 관리, 성인병 관

양질의 여가시설로 활용이 요구된다.

리, 환경위생 관리, 가족의 건강문제, 지역 내 학교 아동의 건강관리 등 질병예방 및 1차적

356 ― 고창의 마을 제5집

또한, 생활정보에 둔감한 농촌 지역의 노인들이 경로당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에 필

흥덕면 용반리 ― 357


요한 지식을 서로 공유할 수 있고, 비치된 서적이나 그 외 매체 등을 통해 시사나 경제에 대

(4) 고창군 산립조합 조경수 유통센터

한 부분까지도 제공받을 수 있는 생활정보센터로의 역할도 수행한다. 경로당 프로그램을

흥덕면 용반리 739-1번지에 위치한 산립조

개발하고 그 외 따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경제 경로당 프로그램을

합 조경수 유통센터는 2009년 4월 20일 착공

개발하고 그에 따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적절히 배치해야 한다. 경제활동과 관련된 소득

하여 2010년 11월 30일 완공하였다. 조경수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노인들이 겪는 또 다른 고충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생산포지 기반조성사업은 면적 120,698㎡에

하며, 실버맞춤형 건강 체조 프로그램 등 건강관리 프로그램과 지도자를 제공하여 노인으

국비 500백만 원, 지방비 200백만 원, 자부담

로서 보내는 여생이 보다 건강하고 활기찬 하루들이 될 수 있도록 건강증진센터로 활용하

503백만 원 등 1,203백만 원을 투자하여 기반

고 있으며 농악 등 다양한 취미 프로그램과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경로당 본래의 기능

조성사업, 판매센터 건립, 비닐하우스, 대형관정, 자재창고 등 시설을 하였다.

에 부합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용반 경로당은 2001년 10월 11일 건축(73.2㎡)하여 회원은 41명이며 회장은 이칠영이다. 남

당 경로당은 2002년 10월 5일 건축(69.69㎡)하여 회원 수는 24명이며 회장은 노희영이다.

조경수 유통센터

우량하고 건실한 묘목을 직접 생산하여 조경수 농가에 공급하고 외국산 및 불량묘목 공 급으로 인한 생산농가 피해예방에 사업의 목적을 두고 있다. 조림수종을 선정할 때는 그 지방의 특색과 환경에 맞고 종실, 수액, 용제 등 앞으로의 경 영목적에 맞는 수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조경수는 수목의 형태나 특성을 잘 알아서 수

(3) 모정

형, 성질, 용도, 관상적인 특징 등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한편 노동력이 적게 들고 식재

모정은 여름철에 마을 주민이 더위를 피하여 휴식하기 위하여 세운 마을의 공유ㆍ공용건

후 제초관리에 손쉬운 방법을 택하려면 1년생 묘를 식재하지 말고 활엽수는 2~3년생 묘목

물로 여름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방이 없이 마루로만 구성된,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모정은

으로 키가 1~2m, 침엽수는 2~3년생 묘목으로 30~50cm이상의 묘목을 식재하는 것이 유리

지역에 따라 분포의 정도가 다르며, 명칭도 모정・시정・우신각・농정・농청・양정(凉亭) 등 여

하다. 특용수는 열매도 따먹으면서 특산품(향토술)을 개발하는 데 좋은 원료가 될 수 있는

러 가지로 불리고 있다.

수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여름철 마을 주민의 휴식처로 마을의 공유재산이지만 대체로 남자만이 사용하는 남성 집 단의 전유물이며, 남성 중에서도 일하는 일꾼이 주로 이용하는 정자이다. 논농사 위주의 농업을 하며 마을의 촌락공동체적 성격을 갖고 있는 모정은 여름철 주민 의 휴식공간이며 대화의 장이기도 하다.

용반모정과 수호신 보호수

358 ― 고창의 마을 제5집

(5) 최첨단 한우가축시장

고창부안축협에서는 흥덕면 용반리 산15번지에 최첨단 전자경매 시스템을 갖춘 한우가축 시장을 2012년 7월18일 개장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한우가축시장은 총사업비 10억 1600만원으로 대지 7,95㎡, 건물 1,020㎡ 규모이며, 소독

2008년 건립한 용반모정 주변에

시설과 식당 및 휴게시설 등 편익시설을 갖추

수령 200여년 노거수 감나무가 마

고 있다. 송아지, 임신우, 비육우를 포함하여

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가을이면 주

일일 최대 거래 두수는 240두이다.

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주황색으로

최첨단 전자경매시스템 도입으로 출하주, 성

잘 익은 감이 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별, 정액번호, 내정가격, 소의 종류 등 관련정

있다.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라 하여

보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축산농가들이 편리하

1992년 2월 입석 ‘수호비’를 세웠다.

게 거래할 수 있다. 매월 18일과 28일 2회 열리

한우가축시장

흥덕면 용반리 ― 359


는 최첨단 한우가축시장은 최근 FTA 체결 및 사료 값 상승으로 어려움을 격고 있는 축산농 가에 전자경매가축시장 개장을 계기로 거래질서가 투명하게 확립되고 고창군의 우수 혈통의 한우의 혈통보전 및 우수품질의 개량을 촉진하여 농가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79년 5월 4일 창립한 교회로 고창군 기독 교연합회 참여하는 기성교단이다. ‘행복하여 서로 섬기는 교회’를 표어로 주일 낮 예배는 오전 11시, 오후 찬양예배는 오후 1

5) 종교시설

시30분, 수요기도회는 오후 8시에 있다. 담임

(1) 천주교 용반공소(公所)

목사는 김대성이다.

공소에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며, 공소 교우들의 본당신

부를 대리하는 공소회장(公所會長)을 중심으로 성찬의 전례가 빠진 미사 형식의 공소예절(公 所禮節)이 행해진다.

공소 교우들은 공소들 유지하기 위해 현금

을 내는데 공소전(公所錢)으로 불렀으나 현재

하남성결교회

(3) 연봉재(蓮峯齋)

흥덕면 용반리 815-4번지에 위치한 연봉재 는, 경주김씨 세환공 종중 재실로 1985년 4월 건물을 짓고 건립기념비를 세웠다. 제사는 금

는 교무금제도로 대체되었다. 본당 신부의 공

부도사공 김곤(金鯤)으로부터 5대조이며 제사

소방문은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있는데, 신

일은 매년 4월 둘째주 일요일이다.

부 방문 때 집행되는 성사가 주로 판공성사(判

천주교 용반공소

功聖事)이었기

때문에 각각 ‘봄판공’, ‘가을판공’

연봉재

4.마을의 인물과 행적

이라고 불렀다.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공소는

1799년(정조23) 이전에 설립된 것이다. 이승훈(李承薰)이 평택현감 재직 때 설립된 평택본당의

1) 인물

대추리공소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첫 모습은 공소였으며, 한국천주교회 200년

(1) 채홍국(蔡弘國)

의 반 이상이 공소시대였으므로 천주교회의 모태가 바로 공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소

고창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채홍국의 본관은

신자수・공소전례・공소사목활동・공소재정 등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현재의 공소는 옛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흥덕면 용반길 65에 위치한 천주교 용반공소는 대지 149㎡, 건축면적 93.72㎡, 붉은벽돌 조 1층 주택 93.72㎡이다. 1992년 12월9일 재단법인전주구천주교회유지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처음에는 고창성당에서 운영하다가 줄포성당으로 이관되었는데,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현재는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용반마을에서 체조교실 등 여가 시설로 활용 하고 있다.

평강(平康)이고,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이

다. 고려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 公)

채송년의 후손으로, 예조판서을 역임한 채충

경(蔡忠敬)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채치의(蔡致 義)이다.

채홍국은 1534년(중종29) 부안에서 태어나 장성

한 후에 흥덕 남당촌으로 이주했다. 천성이 너그 럽고 강직했으며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니 고

(2) 하남성결교회

흥덕면 용반길 149에 있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소속의 기독교회이다.

360 ― 고창의 마을 제5집

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

란이 일어나 선조의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으로

채홍국

흥덕면 용반리 ― 361


피난을 하자, 채홍국은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으로

씨를 시험할 때 화살이 백 보 거리의 황귤을 적중시킴에 상감이 탄복하여 말 한 필을 하사

갔다. 이후 고경명이 패전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고

하고 무안현감을 제수하였다.

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20여 명의 가동(家僮)과 세 아들 채명달(蔡命達)·채경달(蔡慶達)·채영달(蔡英達)을 거느

리고 군량미 13석, 병철(兵鐵) 115근을 가지고 채우령(蔡禹齡)을 비롯한 종족 30여 명 및 마을 사람 60여 명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울 것을 맹세하며 각자 피

를 나누어 마시는 이른바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의려장이 되었다. 이에 본관 수령 나척

(羅惕)이 이들에게

군량미를 조달해 주었으며, 수원에 있던 도원수 권율도 그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였다.

왜적이 순천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홍국은 급히 의병을 거느리고 순천 석보(石堡)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여 적병 수십 명을 참살했다. 당시 사람들이 적전지였던 이 고개를 둔월 치라 불렀다. 순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선조가 특별히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격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또 다시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뜻을 같이 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

에 전일에 숙맹(宿盟)을 했던 92명의 동지 외에도 30명이 합세했고 의승(義僧) 5명도 가담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평에 우거하였는데, 창의사 김천일의 격서를 받아 보고 곧장 의 병을 창솔하여 제봉 고경명장군을 좇아 금산전투에서 온힘을 다하여 적을 치더니 고경명이 패하여 산화함에 흩어진 의병을 거두어 귀환하였다. 9월 족숙 채홍국과 그를 믿고 따르던 92의사와 더불어 남당리에 모여 축단하고 삽혈동맹 하니 집에 있는 가동 25명을 인솔하여 이에 합병하고 흥덕 싸움과 호벌치 전투에서 싸웠으 나 무수하게 참살만 당하였다. 처음 진격하여 순천 석보창에 이르러 접전을 하였으나 종일토록 살상을 입은 수만 늘었

었다. 정유년(1597)에 또다시 회맹한 창의 의병들은 흥덕 북쪽에 있는 장등원 싸움에서 참혹 함이 너무 많고 기세가 꺾이어 힘이 다 빠지게 되어 마침내 적탄에 순절하고 말았다.

뒷날 선무원종훈으로 녹훈되고 병조참판을 증하였다. 동맹록의 서문은 승지 유광천(柳匡

天)과

사간 고정헌(高廷憲)이 지었다.

흥덕 출신이나 무안현감을 지낸 연유로 호남절의록 작성시에는 무안으로 수록되었다.

으며, 멀리 영암과 해남 등지에서도 달려와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부안 호벌치에서 치열한

2) 마을의 입향조

전투를 하여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들이 개미떼같이 달려들자, 이른 아침부터 해질

(1) 용반리 연안이씨

무렵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활을 계속 쏘았다.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 적병이 단검을 가지고

연안이씨의 시조는 무(茂)이며 파조는 원발(元發)이며 용반리에 입향조는 이여재(汝材, 1594∼

돌진해 오자, 채홍국은 맨손으로 대적하여 적병을 뒤에서 부둥켜 안았으나 적의 칼날이 그 의 가슴에 꽃혔다. 아들 채경달이 이 위급한 사항을 보고 달려와 지원했으나 이미 때가 늦 었다. 결굴 채명달, 채경달, 채영달까지 모두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유발이 행장을 짓고 정범조가 비문을 지었다. 1872년(고종9)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사

제(賜祭)하고 복호(충신·효자·열부 등에게 노역과 전세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되었다. (2) 채우령(蔡禹齡)

채우령의 자는 숙원(叔元)이며 평강채씨 강평공 송년(松年)의 후손으로 참의를 지낸 경(卿) 의 손자이다.

지조가 곧고 용력이 뛰어나 1582년(선조15) 무과에 급제하였다. 훈련정(訓練正)으로서 활솜

362 ― 고창의 마을 제5집

1629)이다.

서울 명륜동에서 승석(承奭)의 아들이 11형제를 데리고 부인 의령남씨가 노란을 예견하고

남하하여 고수면 평지리에 살았는데 그 후손의 일부가 흥덕면 용반리에 입향하여 10세를 세거하고 있다. 입향세계를 보면 여재(16세) - 만춘 - 익후 - 세근- 광훈- 강- 우현- 풍구- 병하 - 상령 이다.

(2) 남당 평강채씨

평강채씨의 시조는 송년(松年)이며 파조는 충경(忠敬)이며 남당에 입향조는 채준(蔡准, 1471∼

1530)이다.

부안군 부안읍에 거주하였는데 중종 때 흥덕면 용반에 이주하여 그 후손이 17대를 세거

흥덕면 용반리 ― 363


하고 있다. 입향세계를 보면 9세 준 - 치의 - 홍국 - 명달 - 응시 - 항 - 세구 - 시문- 득윤 - 응찬

도움 주신 분 송기선 (오디연구소장)

- 순공 - 홍권 - 유영 - 동윤 - 일묵 - 규준 - 연석이다.

송재숙 (고추연구회장) 김옥진 (용반 보건진료소장)

5. 용반리의 현황

노희영 (남당 노인회장) 송준선 (용반 이장)

1) 마을의 인구

남선옥 (남당 이장)

용반리에는 85세대 169명이 살고 있는데, 용반 55세대 113명, 남당 30세대 56명이 거주하

채명목 (재내 주민)

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구 추이를 보면 용반은 2010년 62세대 118명으로 가장 많고 현재는 57세

참고문헌

대 11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당은 2005년 32세대 59명으로 가장 많고 현재는 30세대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56명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지명총람』Ⅱ 전북판, 한글학회, 1981. 『모양성의 얼』, 고창학술문화연구회, 2009.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2) 연���별 인구수 마을 용반 남당

2004

(세대수 / 상단 남, 하단 여)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47

55

52

59

52

56

53

58

57

60

55

60

62

63

59

55

54

52

47 30

55

55

27

54 32

63

26

59 29

60

26

62 28

65

25

55 28

58

25

57 28

59

25

53 26

56

30

52 29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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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32

30

30

32

29

2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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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8

28

28

28

28

27

29

28

32

3) 마을의 구심체

2013 07.11 57 55

『전북전래지명총람』, 유재영, 민음사, 1993.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2005. 『고창충의사』, 고창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58

『고창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28

57 30

27

31

30

29

『고창전자문화대전』고창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2013. 1. 1현재

마을명

이 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개발위원장

용 반

송준선

새마을지도자 이채영

김영자

이칠영

송재숙

남 당

남선옥

이방우

한영례

노희영

노희영

고창군 리의 하부조직운영에 관한 조례에 의거 분리에 이장과 반장을 두고 일선행정에 주 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주민을 참여시켜 향토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분리에 새마을개발위 원회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 노인회장원이 마을의 기반조 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장은 리를 대표하며 지역주민의 의견을 수렴 행정기관에 반영, 마 을 발전을 위한 자주적이고 자율적 업무를 처리, 지역주민 간 화합단결과 이해 조정에 관한 사항, 지역주민의 편익증진과 봉사를 임무로 하고 있다.

364 ― 고창의 마을 제5집

흥덕면 용반리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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