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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천

주진천

대산천

무장

4-13-046 4-13-047

옥산리 419번지선

무장면 옥산리 837답 〃

가라천

무장

옥산리 주진천(지방2)합류점

무장면 옥산리 800-1답

무장면 옥산리 510-1답 무장면 강남리 1412답

3.00

700

715

백석면(白石面) : 목우리(牧牛里) 옥산리(玉山里) 덕림리(德林里)

n 석곡면(石谷面)(8) 1914년 이후 삼인리(三仁里) : 무장군 탁곡면(托谷面) 삼인리(三仁里) 중촌리(中村里) 강정리(江亭里) 일부 성산리(星山里) : 동군 계룡리(溪龍里) 성기리(性基里) 봉산리(鳳山里) 죽산리(竹山里) 월성리 (月星里) 궁월리(弓月里) 각 일부 학전리(鶴田里) : 동군 매사리(梅査里) 학전리(鶴田里) 두월리(斗月里) 장화리(長化里) 제내리 (堤內里) 월성리(月星里) 궁월리(弓月里) 백석면(白石面) 방축리(方築里) 각 일부 남산리(南山里) : 동군 남산리(南山里) 용장리(龍庄里) 흥룡리(興龍里) 도봉리(道峰里) 고창군 (高敞郡) 대아면(大雅面) 주진리(舟津里) 각 일부 강남리(江南里) : 동군 장두리(獐頭里) 강남리(江南里) 낙양리(洛陽里) 덕산리(德山里) 흥룡리(興 龍里) 안동리(雁洞里) 백석면(白石面) 송정리(松亭里) 각 일부 목우리(牧牛里) : 동군 백석면(白石面) 월평리(月坪里) 목우리(牧牛里) 송정리(松亭里) 탁곡면 (托谷面) 강정리(江亭里) 각 일부 옥산리(玉山里) : 동군 가라리(加羅里) 대산리(垈山里) 죽림리(竹林里) 신월리(新月里) 송정리(松亭 里) 덕림리(德林里) 대제면(大梯面) 성동리(城東里) 각 일부

옥산리(玉山里) : 분[分] 신월(新月) 월봉(月峰) 대산(大山) 가라(加羅) 자[自] 옥산동(玉山洞) 신월(新月) 월봉(月峰) 죽림(竹林) 대산(大山) 가라(加 羅) 반월등(半月嶝) 백암(白岩) 기[其] 월봉산(月峰山) 치매바우 옥산저수지(玉山貯水池)

n 정백현(鄭伯賢 1869~1920) 그의 자는 백현이고 호는 약봉(藥峰)이다. 동학의 법호는 진암(眞菴)이고 휘는 근영(根永)이 며 관향은 진주이다. 고종 6년(己已) 10월 23일 고창군 와공면(瓦孔面) 예전리 상례(上禮)마을(현 高敞郡 孔音面 禮田里)에서 월재(月齋) 정만원(鄭萬源)과 순천(順天)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 명민하여 집안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 특 히 부친 월재가 생부 종우(鍾佑)의 계하를 벗어나 아들 없는 당숙 종현(鍾顯)의 양자로 정 해져 있던 터라 성장하기까지 백현은 주변의 세심한 배려 하에 건장하게 자랄 수 있었다. 여덟 살 때인 1876년 4월부터 와공면 군유리(群儒里)에 사는 집안 숙부 죽사(竹史) 정학원 (鄭學源)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 유명한 「오랑캐


」 시를 거침없이 읊었으니 벌써 상당한 수준의 학식과 분별력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며 이 후 청년기에 이를 때까지 과거 준비에 희망을 두고 몰두하였다. 영특한 재기와 재빠른 동작으로 항상 무리 중에 중심자리를 지켜 장차 선비가 행해야 할 도리를 스스로 찾아 깨닫고 제반 일을 챙겨냈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던 1888년(고종 25) 고창군 대아면(大雅面) 남촌(南村 : 현 雅山面 木洞里)에 사는 야헌(野軒) 나길순(羅吉淳)의 넷째 딸 성녀(姓女)와 결혼하였는데 신부의 나이가 세 살 위인 스물세 살이었다. 그해 섣달에 장남 시묵(始黙)이 태어나 가문의 번영과 화평을 누리며 부족함이 없는 삶이 었다. 시묵은 갑오년에 태어난 동생과 함께 어린 나이에 전쟁의 와중에 휩싸였지만 연좌제 (緣坐制) 그 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배경의 연줄이 있었기에 멸문의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인 1893년(고종 30) 8월부터 손화중(孫華仲) 접주의 연계로 은밀하게 동학농 민혁명 모의에 가담이 된다. 봉기 이전부터 핵심세력과 내통하였고 그가 이주해 와서 살았 던 굴정동(屈井洞 : 현 孔音面 新垈里 九井마을)이 천안전씨 백헌공(柏軒公=文孝公)파 후 손들의 세거지가 되고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 전봉준 장군과는 일찍이 의기가 투합되었고, 손화중 접주와 이 마을 전씨 문중의 천거로 농민군 지도부의 핵심요원으로 떠오르게 된다. 26세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맞게 된 그는 1894년 새해벽두에 둘째 아들 연묵(淵黙)을 얻게 되면 서 기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혁명의 준비기간에도 주변의 천거로 녹두장군을 수행해 왔지만 주로 밤길을 이용 이동하던 전장군을 호위하는 데는 그의 건장한 체구는 안성맞춤이었다. 폭 넓 은 학식과 필력 그리고 침착한 그의 성품과 민첩하고 힘이 장사인 그의 몸매는 천부적인 비서감 이었다. 그해 3월 25일 백산봉기에서 동도창의대장소(東徒倡義大將所)의 창의 조직 때 그는 송희옥 (宋喜玉)과 함께 동도대장의 비서로 발탁된다. 더욱이 송희옥은 녹두 장군과의 척분 비서 로 발탁되어 대내적인 수행임무에 그치지만 그는 상시 수행과 대외적인 총비서의 막중한 역할을 갖게 되어 이때부터 창의문(倡義文) 격문(激文)등 각종 대외문서의 작성과 통문(通 文)의 수발과 회신을 챙기는 일을 전담하고 주요 전략회의에도 필참하곤 하였다. 그는 농민군 지휘부의 유일한 문사로서 전봉준 장군을 밀착 수행하면서 전투상황을 점검, 보고 하는 한편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와중에서도 극비업무를 잘 수행하고 보좌역을 성실히 수행하였 다. 그해 11월 동학농민군의 결전장이었던 공주(公州) 우금치(于今峙)전투에서 처절하게 참패를 당한 후, 농민구은 전주, 남원으로 빠지는 동부 퇴로와 태인, 순창, 광주로 집결하는 중부 퇴로 그리고 만경, 부안, 고창, 영광에 이르는 서부 퇴로의 세 갈래 방향으로 퇴각로를 정 하여 패주하였는데 그는 큰 실의를 안고 중부 퇴로를 택한 녹두장군과 헤어져 서부퇴로를 따라 황급히 고향으로 찾아 들어 피신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역적으로 몰릴 것을 대비하여 가족의 안전을 위해 양조부(養祖父)가 살던 무장면(茂 長面) 옥산리(玉山里) 가라실로 이사하고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홀로 고창 신촌(莘村)에 사 는 친구 봉정범(奉正範)의 집 골방에서 은신하며 바깥 동정을 살폈다. 녹두장군이 원평․태인 전투에서까지 패배하게 되자 몇 남지 않은 휘하 장졸에게 명한 대로 그는 바로 상경을 준비하게 된다. 이로부터 3개월 만인 1895년(고종 32) 1월 극비리에 가 까스로 한성 땅에 잠입하게 된다. 한편 집에서는 2월 10일 그의 부친(鄭萬源)이 연좌제로 인해 고부(古阜)관아에 끌려가 모 진 고문 끝에 처형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무장 집강(執綱)을 지낸 양부(鄭鍾顯)의 영향을


받아 느지막이 동학에 입도하여 손화중 대접주와 연을 맺었으며 농민전쟁과 아들 백현의 뒷바라지만 하다 47세를 일기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27세에 한성에서 지난날의 벗들을 찾아다니며 급변하는 시국에 대처할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시와 술로서 정분을 두텁게 하였다. 그때 그는 동학농민군으로서의 행적을 숨겼고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철저히 위장하였다. 그때 한성은 동학농민군 잔당들의 잠입설로 인해 일본군과 관헌들이 민가를 들쑤시고 다니 는 판국이라 여간한 형편이 아니면 피신을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는 귀향 을 극력 만류할 정도로 이전부터 깊은 관계의 우정들이 있어서 재기를 도모하는 데 큰 힘 을 얻고 있었다. 그의 항야 체류 견문록에 의하면 피신하면서 고락을 함께 한 선비들로 신길휴(申吉休)․기휴 (箕休) 형제(海等坊 도唐里 거주)와 임홍제(任弘帝 : 호는 蘭坡, 鍮洞 거주) 그리고 금사(錦 史)라는 아호로 통하고 있는 극진한 벗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당시 세도가의 자제들로 서 그를 비호하는 데 큰 몫을 해낸 친구들이었다. 그는 연줄을 찾아 서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글 잘하는 덕분으로 당대의 젊은 명사 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판서를 지낸 신헌구(申軒求), 참판을 지낸 이근용(李根容), 이중 하(李重夏) 등과 어울렸다. 이들은 왕래하는 서찰이나 시문 등 격조 있는 글발에 대한 능 통한 해석과 회신을 해야 할 때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자기네의 단문을 보충하는 데 그를 유효하게 활용하곤 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석이나 야유회를 활용하곤 하였다. 또한 이들은 주석이나 야유회를 즐기면서 약봉에게 시문과 시작(詩作)을 배우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이 름을 바꾸고 시문의 솜씨를 발휘해 이들과 아무런 의심 없이 문사(文士)대접을 받을 수 있 었다. 이러는 동안 그의 고향 집에서는 1896년(建陽元年) 12월 14일에 모친인 순천박씨마저 부친의 뒤 를 따라 숨을 거두었으나, 영문을 모르는 그는 서울에서 고향소식만을 애타게 귀 기울일 뿐이었 다. 1897년(건양 2) 29세가 되면서 숙부 명원(明源)의 천거로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세워질 성수전(聖壽殿)의 별유사(別有司)가되어 공사를 지휘하는 감독일을 맡아 현장을 내왕하기도 하였다. 그 후(海州)관찰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왜냐하면 서울 친구 이은용(李垠鎔 : 侍從으로 있었는데 그의 祖父는 前領相 興仁君 李升 應이요 父親은 判書를 지낸 李在兢이다)의 아버지 이희하(李凞夏)가 1897년 5월에 때마침 무장군수로 부임하게 되어 약봉에게는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기 때 문이었다. 그의 나이 29세 때 이렇게 해서 고향집을 찾아올 수 있었던 그는 군수의 비호를 받아 별 탈 없이 지낼 수는 있었지만 부모님의 타계와 아내의 위중한 병세를 보고 비통한 심사로 이웃과 어울리기를 꺼려 종일토록 침묵하다가도 멀리서 찾아오는 옛 동지들과는 곧잘 밀담 을 나누었다. 1901년(光武 5)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고 가세가 기울자 6월에는 아산면 주진(雅山面 舟津)마을로 이사했다. 그가 35세가 되던 1903년 10월에는 지금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오정동(梧亭洞) 집으로 다시 옮기고 팔연정(八然亭)을 짓고 그곳에 칩거하면서 여생토록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1909년 2월 17일 아내 안정나씨(安定羅氏)까지 47세로 하직하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픈 세


월을 보내다가 1920년 1월 3일 일제 침략의 마수가 우리 금수강산을 짓밟아 온 지 10년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그는 동학농민봉기 26년만 인 향년 52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 났다.

1918년 1:5만 고창지형도



옥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