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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고성 아래 집성촌의 마을, 중월리

지가 발달해 있다. 그러나 중월리는 태봉의 깊은 구릉성 산지의 내부에 있어 충적지를 개간한 논은 거의 없다.

-아산면 중월리-

중월리 전체가 구릉성 산지에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골과 수렁을 이용한 논농사가 발달하였 다. 1990년대 초 경지정리하기 전 상복과 중복의 골은 수렁이 발달해 있어 수랑배미라고도 불렀 이병렬(고창문화연구회 사무국장)

다. 수렁은 충적지의 들판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구릉성의 낮은 산지들 사이로 많이 나타나 는 습지지형이다. 이 수렁은 지표면 가까이 흐르던 지하수가 땅위로 올라오는 현상으로 깊이는 보통 어른 배꼽을 넘지 않아 늪보다는 훨씬 얕다. 천수답이 대부분일 때 수렁배미는 값이 비쌌으나 농업 용수의 발달로 찬 지하수가 일 년 내내 솟아나는 수렁논은 싼 땅이 되었다. 수렁이 많은 이곳 주민 들은 수렁 한 가운데에 나뭇가지 등을 꼽아 수렁이 있음을 표시해 빠지지 않게 하였고 한다. 수렁에

1. 중월리의 역사와 위치

빠지면 여성들이나 아이들은 혼자 빠져나오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렁논은 가뭄이 들면 물

중월리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으며, 삼한시대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 인 고분이 중월리 입구의 봉덕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삼한시대 마한의 모로비리 국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예지리토성이 마을 뒤에 있다. 중월리 270~2번지는 삼국시대부터 조 선시대까지의 유물인 분청사기편과 기와편, 경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중월리 138번지에 있는 삼한시대의 옹관묘와 토광묘는 물론이고 백제시대의 석관묘 등이 발굴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부터 중월리에 사람들이 거주하여 지역문화를 꽃 피운 것은 이 일대가 구릉 성 산지가 널리 발달해 있다는 점, 마을 앞으로는 조금 나아가면 주진천이 만들어 놓은 넓은

이 늘 넘쳐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 겨울엔 논에서 살던 미꾸라지나 드랭이의 서식지이다. 이런 지형은 농업용수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살기가 좋은 자연조건이었다. 그러나 기계화에 의한 농업의 발달은 수렁이 가지는 한계로 인해 농사에 많이 불리하게 되기 도 하였다. 현재 수렁배미는 경지정리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중월리의 지형은 대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마을 주변으로 5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발달되어 있다. 관개 시설로는 북서쪽에 상갑소류지(중월리 222번지), 동쪽에 중복소류 지(중월리 143-1번지)가 있다.

충적지를 개간한 넓은 벌(부리, 비리)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 주진천을 따라 뱃길이 발달해 있다는 점, 마을 뒤에 예지리토성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역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러한 자연환경이 예지리토성을 주변으로 청동기시대 세계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는 고인돌을 축 조할 수 있었으며, 봉덕리 일대에 마한의 분구묘가 발달하게 한 요인이었다. 중월리는 본래 고창군(高敞郡) 대아면(大雅面)의 지역으로,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따라 월산리(月山里)·월명리(月明里)·신월리(新月里)·상복리(上卜里)·중복리(中卜里)·신사리(新 巳里)·상당리(上堂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중복과 월산의 앞 글자를 따서 중월리라 하여 아산면에 편 입시켰다. 중월리(中月里)에는 중복(中福)과 상복(上福)의 행정리가 있고, 자연취락으로 중복(中 福)·상복(上福)·신월(新月)·월명(月明)·월산(月山)·후동(后洞) 등이 있다. 중월리는 동쪽으로 고수면 우평리, 서쪽으로 주진리, 북쪽으로 봉덕리와 상갑리, 남쪽으로 고 수면 예지리 등과 접하고 있다.

2. 자연지명과 전래지명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는 호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와 목포 유달산으로 뻗는 영산기맥이 구황산 500m)에서 갈라져 나와 고수면 평지리와 두평리의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발달하다가 부곡 리 증산을 이루고 멈추었다가 다시 남산리와 우평리를 지나 태봉(110.8m)을 이룬다. 태봉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주진천과 고창천에서 멈추었다. 중월리는 태봉을 중 심으로 한 구릉성 산지의 중앙으로 깊은 골이 발달했다. 주변이 대부분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개간한 밭농사가 발달했다. 중월리의 입지는 태봉을 중심으로 크게 서쪽과 남쪽으로 주진천, 동쪽으로 고수천, 북쪽으로

<그림> 중월리 항공사진(다음지도)

도산마을 앞에서 고수천과 합수한 고창천이 흐르고 있다. 주변은 고창에서는 가장 넓은 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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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봉 : 아산면 중월리 산 63-1번지로 아래는 시정등이라 부르고 있음.

양솔밭 : 소나무와 잡목을 키우던 곳으로 아산면 중월리 526번지의 밭.

북등 : 아산면 중월리 산 110번지의 구릉성 능선.

수랑골 : 아산면 중월리 답 818번지의 주위로 논에 수렁이 많았다고 함.

쌍고봉 : 아산면 중월리 전 205-1번지 일대로 마한시대의 고분이 두 개 있음.

양바리골 : 아산면 중월리 답 580-3번지의 골.

풍수골 : 아산면 후동 앞의 골을 말함.

발매낭갓 : 아산면 중월리 전 712-2번지 주위의 임야.

참샘골 : 아산면 중복 앞의 골.

약샘골 : 아산면 중월리 전 712-1번지 옆에 물이 매우 차가웠다고 함.

소금쟁이골 : 아산면 풍수골 옆에 있는 골로 전설에 의하면, 소금장수가 물을 마시려다가 빠

북살매 : 아산면 중복마을 북동쪽 구릉 중월리 110번지 일대

져 죽어 이를 소금쟁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함.

뒤어마리 : 북살매 북쪽들 아산면 중월리 793 일대

큰요골 : 상갑소류지 부근의 답 952-960 일대의 골.

금동 : 뒤어마리 북쪽 구릉 아산면 봉덕리 213 일대 (봉덕리 경계)

작은요골 : 상갑소류지 부근의 답 964-968 일대의 골.

생밑(성밑) : 태봉과 작은 태봉 아래 아산면 중월리 11번지 일대

대추나무골 : 아산면 중월리 전 4-1번지 일대의 골.

꿩방(뒷동) : 중복마을 뒷동산 아산면 중월리 118번지 일대

장골 : 아산면 중월리 전 737-3번지 일대의 골.

짱짝골 : 아산면 중복에 있는 골의 이름.

만석골 : 아산면 중월리 답 850번지 일대의 골. 만석등 : 아산면 중월리 산 34-1번지 일대의 능선. 모릉골(건등) : 아산면 중월리 답 882-883번지 일대의 골. 나모골 : 아산면 중월리 답 867-893번지의 골.

3. 중월리의 자연취락

대사골 : 아산면 중월리 산 35번지 일대의 골. 함정재 : 아산면 중월리 전 40-2번지 일대의 능선.

1) 중복(中福)

와가리골 : 아산면 중월리 전 715-1번지 일대의 골. 비석등 : 아산면 중월리 전 708-1번지 일대의 능선.

아산면 중월리 중복마을은 아산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거리에 있다. 마을은 1779년(정조

비석골 : 아산면 중월리 답 618번지 일대의 골.

3년)대에 밀양박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중복은 처음 화양동(華養洞)으로 부르

비석거리 : 중월리 중복 마을입구 전 356번지 상에 있는 밀양박씨 양오공추모비의 비석이 있

다가 1890년 복죽(卜竹)으로 개명했다가 한일합방초기에 중복(中伏)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1940년경

는 곳.

중복(中福)으로 글자를 바꾸어 썼으며, 밀양박씨의 집성촌이다.

송림동 : 아산면 중월리 산 61번지 일대.

마을의 남쪽으로는 동서대로와 녹두로가 지나가고 있고, 녹두로에서 중월1길을 따라 들어오다 중복

함박등 : 아산면 중월리 전 710번지 일대의 능선. 어느 시대의 한정승의 부인 묘가 있었다고

길을 따라 들어오면 중복이다. 마을의 남동쪽으로는 삼한시대의 예지리토성과 태봉(110.8m)이 있다.

함.

중복마을의 수계는 남쪽의 예지리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를 지나 주진천과

육거리 : 아산면 중월리 산 60-6번지 위의 길로 여섯 갈래의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오거리만

바로 합수한다. 또한 수계(水系) 자체가 워낙 짧고 물이 부족하여 충적지(沖積地)의 발달은 미약하

남아 있음. 이곳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함.

다.

도방골 : 육거리 옆의 아산면 중월리 502-1번지의 밭으로 고수면과 경계.

마을의 산계는 예지리토성(태봉의 옆 능선상에 있는 삼한시대의 토성)에서 발달해 북쪽으로 여러 갈

원석골 : 고수와 경계로 육거리에서 고수로 가는 곳에 있는 골. 고수 땅으로 고수면 예지리

래로 발달하였다. 예지리토성의 가운데 부근에서 발달한 능선은 남쪽과 북쪽으로 발달하였는데, 남

산 33-1번지.

쪽으로 발달한 능선상의 서쪽으로 마을이 입지해 있다. 이 능선은 아산면 중월리와 봉덕리의 수계

짱째골 : 아산면 중월리 36-4번지의 일대의 골.

가 만나는 곳에서 멈추었다.

가재골 : 가재가 살고 있어서 불렀던 골로 아산면 중월리 답 444-1번지.

중복마을을 중심으로 좌청룡과 우백호는 미약하나마 나타나고 있다. 즉, 예지리토성의 가운데 부근

월명 : 아산면 중월리 답 466-1번지.

에서 남쪽으로 발달한 능선의 서쪽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으며, 이 사이에 중복마을이 위치해 있

담안골 : 아산면 중월리 472-3번지 일대로 최부자가 담을 많이 쌓아서 그렇게 불렀다고 함.

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으로 중복마을의 가옥은 대부분 서향과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원상복 : 아산면 중월리 495번지 일대.

아산면 중복길 40번지대의 가옥들은 서향이 많으나 북향도 많다. 이는 같은 마을이지만 주산이 다

정촌 : 아산면 중월리 452번지로 우물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음.

르기 때문이다. 마을입구에는 양오공추모비가 있다.

나비등 : 아산면 중월리 217-1번지의 밭으로 용계리의 아산댐을 쌓을 때 나비등의 흙을 사용

<그림> 중복마을 전경

하였음. 원풍정(願豊亭) : 아산면 중월리 497번지 위에 있었던 정자로 풍년을 원한다는 현판이 있었다 는 정자임.

2) 상복(上福)

쌍은정 : 아산면 중월리 대지 487번지 뒤의 나무 사이에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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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면 중월리 상복마을은 아산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거리에 있다. 마을은 1303년에 전

<그림> 복죽(卜竹)으로 기록된 1918년 지도(이 지도에 의하면, 卜竹이라는 지명이 1918년도까지 기

주최씨가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은 주변에 대나무가 많고 태봉산의 능선이 뻗어

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산면의 면소재지는 봉덕리에 있었으며, 봉덕리의 동그라미가 면소재지

내려 산세가 좋아 형성되었다. 상복은 아산면 마을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다.)

상복은 농사짓는 들이 좁지만 동서남북으로 있는데, 농사를 지어 마을을 향하여 올라가는 지형이라 하여 상복(上伏)으로 칭했다. 복죽(卜竹)는 1918년 일제강점기 고창지형도(1:5만지형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최소한 1918년까지는 복죽(卜竹)으로 부르다가 그 이후 복을 짊어지고 위로 올라

3) 후동(后洞)

간다하여 상복(上福)으로 개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복마을의 수계(水系)는 남쪽의 예지리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를 지나 고창

아산면 중월리 후동마을은 아산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거리에 있다. 마을의 설기연대는

천과 바로 합수한다. 예지리토성의 능선은 북쪽으로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서당촌과 봉덕리 고분군

1303년 전주최씨가 설기하였으며, 지금도 전주최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후동마을은 풍

의 능선으로, 다른 하나는 상갑마을의 능선을 이룬다. 봉덕리 고분군으로 발달한 능선과 중복으로

수형국으로 왕후가 나올 명당터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후동마을의 수계(水系)는 남쪽의

발달한 능선 사이의 예지리토성 바로 아래에 작은 구릉의 능선 사이에 상복마을이 입지해 있다. 동

예지리토성에서 북쪽으로 발달하다가 봉덕리와 상갑리를 지나 고창천과 바로 합수한다. 예지리토성

쪽은 중복마을(중복길 40번지~50번지)이다. 상복마을의 좌청룡은 후동마을 앞까지 발달한 능선이고,

의 산계(山系)은 북쪽으로 발달하였는데, 하나는 서당촌과 봉덕리 고분군의 능선으로, 다른 하나는

우백호는 중복마을로 발달한 능선이다. 대체적으로 상복마을의 수구(水口, 破口)가 열린 형국이며,

상갑마을의 능선을 이룬다.

또한 수구가 북쪽에 있어 풍수적인 결함이 많은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을에는 수구에 해당

후동1길 마을은 우백호가 후동2길 마을 배후의 능선이고, 좌청룡은 마을의 북사면의 능선이다. 후동

되는 부분에 비보풍수(裨補風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상복1길의 마을은 향이 동쪽으로 되어 있

2길 마을의 수구(水口)는 내청룡이 막아주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비보(裨補)가 필요한 마을

어 상복2길의 마을보다 가옥배치에 있어 유리하다. 즉, 가옥배치는 상복1길의 경우는 동향이다. 그

이다. 후동 2길 마을의 가옥배치는 산계의 영향으로 동향과 동남향 및 남향이 대부분이다. 후동 1길

러나 상복2길의 가옥배치는 주산(主山)의 영향으로 대부분 서향과 서북향 및 북향이 대부분이다. 상

마을의 가옥배치는 대부분이 남향이나 일부는 동향도 있다.

복마을 주위로는 36개의 골이 존재하여 평생 농사를 지어도 골의 이름을 재대로 외우는 사람이 많

후동2길 마을은 봉덕리고분군으로 발달하는 능선 중간의 동사면에 입지해 있으며, 후동1길 마을은

지 않다고 한다. 그 만큼 중월리 자체가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골이 발달한다.

위 능선의 동사면의 골에 입지해 있다. 후동2길 마을의 좌청룡은 중복의 우백호에 해당하고, 좌청룡

<그림> 상복마을 전경

은 봉덕리고분군으로 발달한 능선이다. 또한 내청룡이 마을의 북쪽으로 작게나마 발달해 있어 겨울 철의 시베리아의 대륙성기후를 막아 주는 형국이다. <그림> 후동마을 전경

4. 성씨들의 중월리 입향 1)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중월리 상복 입향 상복의 전주최씨는 1400년대 중반인 성종조에 진(津, 1423~1491)이 입향하였다. 진은 세종조에 원종공신에 훈하고 공조참의를 지냈다. 공은 아산 중월리 상복으로 입향하였다가 현재까지 그 후손이 세 거하고 있다. 중월리에 가장 먼저 입향한 전주최씨는 입향의 역사는 깊으나 그 후손들이 이곳에 번성하 지 못하고 대부분 고창이나 외지로 떠나버렸다. 그 결과 현재 중월리 중복 7가구와 상복 4가구 등 11가 구만 남아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중월리의 전주최씨 시조는 균(均)이고, 파조는 ���지(誠之)이다. 2) 강릉유씨(江陵劉氏)의 중월리 상복 입향 중월리 상복의 강릉유씨는 1590년 유한량(劉漢良, 1567~1634)이 무장현감직을 인연으로 해서 공의 아들 (셋째) 세영(世瑛)이 아산 중월리 상복으로 입향하였다가 현재까지 그 후손이 18세를 세거하고 있다. 중 월리 강릉유씨는 상복 30가구와 중복 5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의 강릉유씨 시조는 전(筌)이고, 파 조는 한량(漢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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瑛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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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21世

22世

23世

26世

濟玉

仲柱

光俊

在圭

潤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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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월리의 인물 1) 유붕석(劉鵬錫, 1882 ~ 1952) 유붕석의 본명은 목여(穆汝)이고, 초년에는 일종(一鍾), 자는 문석(文錫), 호는 오정(梧亭)으로

3)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월리 중복 입향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한국의 최대 민족종교인 보천교의 60방주 중 24절

밀양박씨 양오공(陽梧公) 서봉(瑞鳳)은 세조 계미년(1463년)에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경상도 관찰사를

기의 곡우(穀雨)에 해당하는 방주였다. 그가 보천교의 방주가 됨으로써 중월리 상복의 많은 강

지냈다. 양오공은 무오사화에 노친(老親)의 사우(師友) 족숙이 대화를 입자 일가에 화가 미치게 되자 노

릉유씨들이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하였다. 보천교의 차경석은 조선이 독립하고 대시국(大時國)

친을 모시고 가족을 데리고 밀양을 떠나 전남 무안 등지를 표박(漂迫)하다가 고수면 추산봉 아래 산양동

건립 시에는 자신이 왕위로 오를 것이라 말하였다. 교주가 천자(天子)로 등극한 다음 각 교도

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초내리와 장두리에서 17대째 내려오고 있다. 중월리 중복의 밀양박씨는

는 모두 계급에 맞게 각각 부윤군수(府尹郡守) 등에 임명한다하여 많은 헌금을 받았다. 1919

정조 3년(1779년대)에 사일(師一, 1734~1803)이 동생 사의(師義)와 함께 고수면 장두리에서 아산면 중복

년 차경석은 교도를 모두 관할하고 포교하기 위해 60방주제를 조직하고, 1920년 말에 이르러

으로 입향하여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 밀양박씨는 중복에만 32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의

완성하게 되었다. 즉 교주 직하에 방주 60명을 두고 방주 각 한 명 아래 6임(六任)이라는 사

밀양박씨 시조는 혁거세(赫居世)이고, 파조는 은산부원군 영균(永均)이다.

람 여섯 명을 두고, 6임 각 한 명 아래 12임(十二任)이라는 사람 12명을 두고, 12임 각 한 명

46世

47世

允樞

瑞鳳

(고수입향)

(초내입향)

54世

55世

48世

松南

56世

57世

49世

50世

挺林

(내창입향)

純 59

58世

師一 (중복

性興

致五

鳳鉉

永善

입향)

51世

60世

炳珣

52世

53世

起華

(초내입향)

61世

相基

62世

鍾述

아래 8임(八任)이라는 사람 여덟 명을 두는 조직이다. 그리하여 8임으로 있으려면 40명의 신 도를 모집한 사람에게 맡게 하고, 그 40명 신도 가운데서 또 15임(十五任)이라는 사람 15명을 두었다. 이러한 방대한 보천교 조직에서 유봉석은 그 핵심인 60방주였다. <그림> 보천교의 방주로 기록된 일제강점기의 일본 자료

63 世

2) 유주(劉柱, 1901 ~ 1972)

유주의 본명은 주(柱)이고, 초년에는 영주(永主), 자는 영만(永萬), 호는 정재(正齋)로 아산면

중월리 상복에서 보천교의 60방주인 붕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전주의 풍남문의 단청을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3) 최현식(崔玄植, 1923 ~ 2011)

4) 장택고씨(長澤高氏)의 중월리 중복 입향

최현식 선생은 192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에서 태어난 최현식은 1977년 정읍갑오동학혁명

중월리 중복의 장택고씨는 1700년대 중반 경 한범(漢範, 1726~1777)이 영암군 목동에서 아산면 중복으

기념사업회장, 1991년 정읍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혁명

로 입향하였다가 가족이 역병으로 거의 몰살당하였다. 살아남은 가족은 오향곡(午向谷)으로 피해 겨우

인물사료 탐구’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등이 있다. 최현식은 동학혁명사 자료발굴에서부터

절사(絶嗣)는 면하고 현재까지 공의 후손이 10세를 세거하고 있다. 중월리의 장택고씨 시조는 말노(末老)

역사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스스로 발로 뛰어 동학사를 정리한 사학자로 동학사를 정리하였

이다. 현재 장택고씨는 중월리에 세거하고 있지 않다.

다. 그는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장, 향토문화연구소장, 전라북도문화재전문위원 등을 역임했 으며, 장한 전북인상(1981년), 전북대상(1989년), 전북의 어른 상(2005년) 등을 수상했으며 지

15世

漢範

16世

17世

18世

19世

난 2011년 타계했다.

克滿

宗煥

時雲

弼鎭

4) 박세근(朴世根, 1945 ~ 2013년 12월 현재) 박세근은 고창중고를 거쳐 군산교대를 졸업한 후 우석대 석사과정을 마쳤다. 박세근은 고창초 등에서 최연소 교장으로 재직한 후 고창교육청 장학사와 장학관 및 교육장, 폴리텍대학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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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평상교육연수원장 등을 지냈다.

유을종(전 고창향교 전교), 유차종(전 고창향교 전교, 부읍장), 유원영(1933~2013년 12월 현 재, 중등교장), 유현종(1922년생, 전 행정사무관), 유남주(1959~2013년 12월 현재, 전북은행지

5) 박천기(朴天基, 1950 ~ 2013년 12월 현재)

점장), 유자연(1970~2013년 12월 현재, 서울도시철도공사 과장), 유동현(1977~2013년 12월

박천기는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서 태어나 고창중·고와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

현재, 변호사), 유남현(1981~2013년 12월 현재, 치과의사), 유택형(1969~2013년 12월 현재,

다.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초임으로 발령 받은 후 대검찰청 수사사무관을 거쳐 춘천지검 수

삼성전자 상무이사), 유영곤(1953~2013년 12월 현재, 중등교장), 유영우(1965~2013년 12월

사과장(검찰서기관), 부산고검 총무과장(검찰부이사관), 부산고검 사무국장(검찰이사관) 등을 역

현재, 공학박사), 유훈영(1941~2013년 12월 현재, 전 중등교감), 유연식(1956~2013년 12월

임하였다.

현재, 전 해양경찰청 총경), 유종환(세무서 사무관, 1968~현재), 유낙종(1933~2013년 12월 현 재, 예비역대령), 유찬식(1938~2013년 12월 현재, 마을에 공적이 많음), 유종식(1953~2013.12

6) 박세기(朴世基, 1954 ~ 2013년 12월 현재)

월 현재, 전 지적공사 고창지사장), 유철규(1975~2013년 12월 현재, 고창군청), 유규식

박세기는 아산면 중월리 중복에서 태어나 고창고와 경기대 행정학과를 중퇴하였다. 그는 7급

(1959~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감), 유창식(1963~2013년 12월 현재, 선거관리위원회), 유태

으로 공채되어 공직을 시작하여, 내무부 행정주사, 행정사무관, 서기관을 거쳐 현재 고충처리

환(1970~2013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유광진(1957~2013년 12월 현재, 선거관리위원

국 민원조사기획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회), 유환숙(1958~2013년 12월 현재, 고창농협 모양지점장), 유진영(1973~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사), 유정자(1972~2013년 12월 현재, 선운산농협), 유근상(1970~2013년 12월 현재, 산

7) 강병원((姜炳遠, 1971 ~ 2013년 12월 현재)

업통상부), 최창식(1947~2013년 12월 현재, 전 전북도청), 최창석(1970~2013년 12월 현재,

강병원은 1971년 아산면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나 서울 대성중·고, 서울대 농경제학과를 졸업

전북도청), 유숙현(1967~~2013년 12월 현재, 서울시 초등교사), 유창규(1969~2013년 12월 현

하였다. 그는 1994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재, 공학박사 경희대교수),

민주당 노무현대통령후보 수행비서, 참여정부 대통

령비서실 행정관 근무,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등을 지냈다.

유현미(1976~2013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유창용

(1978~2013년 12월 현재, 경기도 초등교사), 유맹화(1964~2013년 12월 현재, 전 초등교사), 유형선(1961~2013년 12월 현재, 보험사 전무), 유철승(1967~2013년 12월 현재, 예비역소령,

8) 알리고 싶은 중복 사람들

대한체육진흥공단), 유철상(1974~2013년 12월 현재, 전 중앙일보기자, 상상출판사대표), 유철

중복사람들에서는 중복에서 태어나 각계각층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중복인을

주(1978~2013년 12월 현재, 전주불교신문), 유중환(1963~2013년 12월 현재, 진선상사 대표),

올렸다. 조사는 마을주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선정기준은 특별히 없다.

유병호(1955~2013년 12월 현재, 서울맹아학교), 유일주(1950~2013년 12월 현재, 전 고창군

박영두(1864~1915, 전 아산면장), 박장근(1896~1950, 전 아산면장), 박윤근(1903~1974, 전 아

청), 유희주(1966~2013년 12월 현재, 대한지적공사), 유준영(1966~2013년 12월 현재, 수원시

산면부면장), 박병천(1930~2010, 전 고창부군수), 박동기(1955~2013년 12월 현재, 이학박사,

청), 유득식(1957~2013년 12월 현재, 서울소방서), 유영호(1933~2013년 12월 현재, 전 초등

익산보건소장), 박병원(1915~2004, 전 아산면의회의장), 박종태(1953~2013년 12월 현재, 전

교사), 김양섭(~2013년 12월 현재, 성균관유도회 아산유도회장), 김영남(~2013년 12월 현재,

아산면장), 박춘기(1937~ 2013년 12월 현재, 전 아산면장), 박종오(1964~ 2013년 12월 현재,

엘지화학), 유준동(1970 ~ 2013년 12월 현재, 이학박사, 한국마사회), 유희숙(1971~2013년

광주 동구청 사무관), 박병엽(1918~2002, 전 아산면장서리), 박헌기(1944~2013년 12월 현재,

12월 현재, 부산시청), 유두승(1980~2013년 12월 현재, 서울시청), 유창기(2013년 12월 현재,

전 관세청 사무관), 박민기(1953~2013년 12월 현재, 광진구청 서기관),

전주시청), 최정아(1972~ 2013년 12월 현재, 중등교사) 등등

박생기(고창군청), 박

철기(1956~ 2013년 12월 현재, 김제폴리텍대학 교수), 박팽기(1958~2013년 12월 현재, 초등 교장), 박귀기(1960~2013년 12월 현재, 고창군청 사무관), 박상은(1975~ 2013년 12월 현재, 성형외과의사), 박연근(1980~ 2013년 12월 현재, 안과의사), 박병삼(1924~2013, 전 중등교 장), 박연기(1961~2013년 12월 현재, 공학박사, 연구원), 박남기(1940~2013년 12월 현재, 전

6. 마을현황

한일은행 지점장), 박준기(1944~ 2013년 12월 현재, 전 은행지점장), 박재기(1973~2013년 12 월 현재, 공학박사, 연구원), 박신기(1978~2013년 12월 현재, 서울대 성형외과의사), 박순재

1) 중월리의 기관과 시설

(1952~2013년 12월 현재, 초등교장), 박다래(1982~ 2013년 12월 현재, 변호사), 박진기 (1975~ 2013년 12월 현재, 안면도 한의사), 박진성(1979~ 2013년 12월 현재, 변호사), 최태

중복마을회관 : 중복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회관은 군의

조(1972~ 2013년 12월 현재, 광주시청 사무관), 유세영(1929~졸, 전 아산면장), 박동기(박사),

지원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으로 1999년 12월 12일에 건축되었다. 부지는 박병국과 박갑

김효례(군민의장 수상) 등등

기가 기증하였으며,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323-16번지에 있다. <그림> 중복마을회관 전경

9) 알리고 싶은 상복 사람들 상복 사람들에서는 상복에서 태어나 각계각층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상복인을

중복마을모정 : 중복마을 모정은 단기 4322(1989)년 10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중복마을 입구

올렸다. 조사는 마을주민들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며, 선정기준은 특별히 없다.

마을화관 옆에 있다. 아산면 중월리 222-4에 있다.

- 9 -

- 10 -


<그림> 중복마을모정 전경

2009

97

187(6)

102

85

2010

99

198(6)

106

92

2011

96

180(6)

95

85

2012

95

171(6)

95

76

2013. 12월

99

177(6)

100

77

중복마을우물 : 중복마을의 공동우물은 암반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이다. 우물은 현재 마을회관 건물 아래에 콘크리트 덮개로 덮여 있으나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는다. 상복마을회관 : 상복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상복마을회관은 군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 4천 3백만으로 2004년 5월 29일 준공하였다.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354-1에 있다.

3) 중월리의 성씨별 거주 현황

<그림> 상복마을회관 전경

성씨는 문중의 성을 따라 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된 독거여성노인인 경우는 사망한 남편

상복마을우물 : 상복마을의 공동우물은 세 곳이 있는데, 두 개는 열려 있고 하나는 덮개로 덮 어 있다고 한다. 마을의 우물은 중월리 426-1번지와 296번지 및 495번지에 있다.

의 성씨나 자녀들의 성씨를 중심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조사는 201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의 전화 번호부를 보고 마을 주민들에게 확인하여 진행하였다. 따라서 아산면사무소의 인구현황과 실제 거주자와 는 차이가 있다. 조사결과 중복의 가구 중 밀양박씨가 전체의 52.4%, 상복은 강릉유씨가 전체가구의

상복마을모정 : 상복마을 모정은 단기 4322(1989)년 10월 11일 건립되었으며, 상복마을 입구 에 있다. 아산면 중월리 355-2에 있다. <그림> 상복마을모정 전경

68.1%로 전형적인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중월리로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입향한 전주최씨는 중복과 상 복에 나누어 분포하고 있는데, 입향한 역사로 볼 때 가구 수가 너무 적다. (1)

후동마을회관 : 후동마을회관은 마을사람들의 공동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후동마을회관은 군과 주민 및 출향인의 헌성금으로 건축되었다.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후동1길 14-2번지에 있다.

성씨별 거주현황

중복마을의 2013년 8월 현재 성씨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성씨별 분포는 밀양박씨 32가구, 전주최씨 7가구, 강릉유씨 5가구, 진주정씨 4가구, 평산신씨 2가구, 청송심씨 2가구, 나주오씨 2가구, 울산김씨, 남원윤씨, 광산정씨, 장수황씨, 광산김씨, 고흥류씨, 행주기씨 등이 각각 1가구씩 있다. 중복마을은 밀양 박씨가 전체의 52.4%가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밀양박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주최

<그림> 후동마을회관 전경

씨 11.8%, 강릉유씨 8.1%로 밀양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들이다.

후동마을우물 : 후동마을의 공동우물은 후동1길과 후동2길 두 곳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하여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는다.

2) 중월리의 인구변화 중월리의 2003년 이후 총인구수와 세대수는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이다. 2003년대 초기 중월

◦ ◦ ◦ ◦ ◦ ◦ ◦

밀양박씨 강릉유씨 평산신씨 나주오씨 남원윤씨 장수황씨 고흥류씨

32가구 5가구 2���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 ◦ ◦ ◦ ◦ ◦ ◦

전주최씨 진주정씨 청송심씨 울산김씨 광산정씨 광산김씨 행주기씨

7가구 4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리의 인구변화는 다음의 그래프와 같다. 중월리는 2003년 240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매년 감 소하고 있다. 아래 그래프는 2003년부터 2013년 12월 현재까지 중월리의 인구변화이다.

(2) 상복마을의 성씨별 거주현황

중월리의 인구증가율을 보면, 2013년 12월 현재 2003년보다 약 26.3%의 감소율을 보였는데,

상복마을의 2013년 8월 현재 성씨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성씨별 분포는 강릉유씨 30가구, 전주최씨

이는 매년 2-3%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의 표는 중월리의 10년간의

4가구, 광산김씨 2가구, 경주김씨 2가구, 진주강씨, 전주이씨, 청도김씨, 원주변씨, 김해김씨, 파주염씨

인구변화를 보여주는 표다.

등이 각각 1가구씩 있다. 상복마을은 강릉유씨가 전체의 68.1%가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강릉 유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전주최씨는 9%로 강릉유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년도

세대수

총인구수

남자

여자

2003

103

240(6)

120

120

2004

103

229(6)

117

112

2005

102

232(7)

117

115

2006

100

205(6)

104

101

2007

99

200(6)

104

96

2008

100

196(6)

103

93

- 11 -

◦ ◦ ◦ ◦ ◦

강릉유씨 광산김씨 진주강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30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 ◦ ◦ ◦ ◦

전주최씨 경주김씨 전주이씨 원주변씨 파주염씨

- 12 -

4가구 2가구 1가구 1가구 1가구


4) 중월리의 문화유산

뜻으로 단목(檀木)인 이팝나무를 심고 단음이라는 호(號)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팝나무는 약

중월리의 문화유산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을 비롯하여, 삼한시대의 토성과 토기편 및 옹관

230여 년 전에 심은 것이 된다.

묘, 백제시대의 석관묘, 조선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중월리는 삼한시

<그림> 중복이팝나무

대의 고성인 태봉산성 아래 있어 역사적으로 이른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강릉유씨, 전주최씨, 밀양박씨 등이 입향하면서 이들

(6) 중월리 당산나무

성씨를 중심으로 유적과 유물이 분포하게 되었다.

중월리에는 두 개의 당산이 있다. 하나는 후동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으로 신체가 자연석인 할 아버지와 느티나무인 할머니 당산 두 주가 있다. 다른 하나는 중복마을모정 옆에 있는 당산으

(1) 중월리유물산포지

로 신체가 자연석인 할아버지당산과 신체가 버드나무인 할머니당산이 있다.

이 유물산포지는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270~2번지에 있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

이 중월리 당산은 중월리 전체가 하나의 깊은 골로 중월리 마을 자체가 북동쪽으로 크게 열린

이 출토되며 후동마을 남측에 위치한다. 해발 45m의 단독구릉으로 평야 가운데 돌출되어 있

형국이다. 즉 중월리의 좌청룡과 우백호의 끝자락에 각각 마을 당산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다. 구릉의 북사면은 강릉유씨묘역으로 이용되어 삭평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정상부는 평탄한

중월리의 좌청룡의 능선 우측사면에 입지한 후동마을의 입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이 자

대지로 개간되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수습된 유물은 다량의 분청사기편과 기와편, 경질토

리 잡고 있고, 우백호의 능선 좌측사면에 입지한 중월마을의 입구이자 우백호의 끝자락에 할

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을 세운 것이다. 과거에는 중복과 후동을 연결하는 숲정이가 있었을 것

경위도좌표 : N 35°25′51.3″, E 126°38′19.5″

으로 추정되나 확인은 안 되었다. (2) 중월리 유적(中月里 遺蹟)

<그림> 후동마을 당산

<그림> 중복마을 당산

중월리 유적지는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 138번지에 있는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토취장 예정지역으로 1982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조사결과 백제

(7) 염수재(念修齋)

토기요지 1기, 판석으로 축조한 백제석관묘 1기, 옹관묘 1기, 破甕蓋土壙墓 2기 등이 확인되

아산면 중월리 중복길 33-1번지에 있는 밀양박공 경한(慶漢)과 배인 유인 함평노씨 이하의 세

었다. 마을 주민들은 유적이 위치한 이 야산을 죽은 나비등, 작은 요골이라고 부른다. 圓光大

천의 분묘를 모시는 재실이다. 이곳에는 재숙소가 없어 손 성흥이 여러 해 노력하였으나 이루

學校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84, 『高敞 中月里 文化遺蹟調査報告書』 경위도좌표 : N 35°26′

지 못하고 광무 8년 후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기와 전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을 건립하였다.

10.0″, E 126°38′22.0″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편액하고 현곡 류영선이 기(記)를 지었다. 시제일은 음력 3월 초열흘 날이다.

(3) 중월리 지석묘

<그림> 염수재 전경

중월리 중복마을(중월리 39번지) 동쪽에 지석묘 1기가 자리한다. 즉, 중복마을회관에서 동남 쪽으로 300m가량 올라가면 능선 중단부에 민묘구역과 축사의 경계에 지석묘 1기가 자리하고

(8) 영모재(永慕齋)

있다.

아산면 중월리 상복2길 7-3번지에 있는 전주최씨 덕능참봉 광연(廣淵)의 재실이다. 공은 어머

지석묘의

상석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며,

장축은

남~북

방향이다.

규모는

328×216×68cm 내외이며 지석은 보이지 않는다.

니상을 당하매 초당을 지어 이곳을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 공은 이곳에

<그림> 중월리 지석묘

평생을 지내며 조석과 삭망으로 제를 지내니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가 사람 을 보내어 문안하고 효행이 알려져 선조 7년 덕능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로부터 4백년이 지나

(4) 예지리토성

후손들이 뜻을 모아 유허지에 영모재를 세우고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영모당 앞에는

중복마을의 남측 야산에 위치한다. 해발98m로 고수면 예지리와 아산면 중월리의 경계를 이 룬다. 인근에서는 태봉산으로 불리 우고 있다. 현재 태봉산 정상부에는 소로가 나 있으며 민

영모당최공유허비가 있다. <그림> 영모재 전경

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정상부는 평탄한 편으로 주변에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으며 서측에 중복마을방향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다량의 경질타날문토기편과 기

(9) 죽림재(竹林齋)

와편이 수습되었다. 또한 『文獻備考』 山川條에 “古城峰 在西十五里 一峰特出大野中 土壘橫繞

아산면 중월리 후동2길 14-1번지에 있는 강릉유씨 죽림당공의 재실이다. 재실 앞에는 죽림당

峰腰”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으로 보아 토성이 존재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유허비가 있으며, 강릉유씨 28세인 죽림당공 성렬(成烈) 흥집(興集)의 세계도가 있다. 재실

<그림> 예지리토성 전경

은 기와(양철)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시제일은 음력 3월 5일이다. <그림> 죽림재 전경

(5) 중복이팝나무 아산면 중월리 49-1번지에 있는 중복마을의 이팝나무이다. 이 나무는 양오공의 7대 손인 사

(10) 영사재(永思齋)

일(師一)이 정조 3년(1779)에 고수면 장두리에서 아산면 중복으로 이거하면서 박달(朴達)이란

아산면 중월리 상복1길 16번지에 있는 강릉유씨 낭천공(浪川公) 세영(世瑛)의 14대 손을 모시

- 13 -

- 14 -


는 재실이다. 재실은 기와(양철)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시제는 지내지 않고 있

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다수 보관하고 있다. 특히 그의 증조부인 유재풍(劉載豊)에 관

다. 상복은 강릉유씨와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최초로 삼대종숭모비를 건립하여 오석산의 삼대

한 자료이다. 1910년(융희 4년) 7월 30일에 탁지부(度支部)의 공전영수원(公錢領收員, 구한말

종비와 같은 뜻으로 세분 선조님을 추모하고 종파 자손들의 16위 위패를 모신 제각을 세웠다.

면의 세금 부과와 징수를 담당한 하급관리)으로 선정한 공문서가 남아 있다.

<그림> 영사재 전경

유도근씨는 일제강점기에 도산공립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는 해방되지 직전인 1944년(昭和 19 년)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직전까지 도산공립국민학교의 부급장 임명장, 상장 등을 가지

(11) 백원재(百源齋)

고 있으며, 또한 1949년도의 졸업장, 일본적십자사회원증, 적십자사비 영수증 등도 소유하고

아산면 중월리 상복1길 45-8번지에 있는 강릉유씨의 재실이다. 재실은 기와(양철) 전면 4칸

있다. 이들 자료는 우리 민족의 일제치하의 생활사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백원재는 총회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시제는 지내지 않는다.

다. 해방 전까지의 기록은 모두 창씨개명이 이루어져 유도근씨의 경우 성이 유(劉)씨 아닌 문

<그림> 백원재 전경

천(文川)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방 후에야 비로소 본래의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유도근 씨는 1949년도에 도산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장 뒤에 일제강점기의 욱일승천기가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해방 후에도 일제강점기의 물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엿볼 수 있다.

5) 중월리의 이야기 중월리는 풍수적으로 명당터로 알려져 있어 고창과 인근의 부자들이 마을 뒷산에 묘를 잡았다

<그림> 탁지부 공전영수원증

가 옮기곤 하였으며, 상복에는 보천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림> 1949년 해방 후에도 사용된 졸업장 뒷면

<그림> 일제강점기 도산공립초등학교 상장

(1) 귀인출동의 명당터 중월리에는 풍수적으로 귀인출동(貴人出動) 명당이라 불리는 혈이 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는

6) 중월리의 산업

귀인이 출동하니 북치고 쌍나발을 불며 쌍교목을 타고 봉덕에서 잔치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

중월리는 주변이 구릉성 산지이기 때문에 밭농사를 많이 하고 있다. 마을의 대표적인 농업은

명당의 혈은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그 효력이 떨어진다는 설이 있어 많은 부자들이 이곳에 묘

밭농사인 복분자, 고추, 깨와 같은 작물이다. 중복에는 한우(박종환)를 사육하는 농가와 양계

를 썼다가 오래지 않아 이전하곤 하였다고 한다.

장인 상복농장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부안군 줄포의 만석군으로 알려진 신세원이라는 사람이 1940년대에 중 월리 전 308 부근에 묘를 썼고, 대산의 정세환도 그의 증조모의 묘를 중월리 전 407번지, 조 선후기 강응환선생 부인의 묘도 있었다. 또한 성송면 암치리의 강승기와 하오산의 전주이씨

7) 중월리의 역대 이장

등의 묘 등이 있었으나 이들의 묘는 세월이 흐른 뒤 모두 중월을 떠나 다른 곳의 명당을 찾아

중월리의 상복과 중복의 역대 이장들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명단은 아산면사무소의 협조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루어졌으며, 누락된 기간과 명단은 아산면의 기록에서 확인하지 못하였다. 상복

(2) 선도배미와 보천교 중월리 상복의 큰요골에는 선도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이 논은 보천교 신도인 유양세씨의 부 친이 보천교를 다니면서 논농사를 짓던 곳이다. 유양세씨의 부친은 봄부터 겨울까지 논을 깨 끗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면서 소가 논을 갈다가 똥을 싸면 삽으로 똥을 퍼 버리면서까지 관리 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정성 드려 재배한 쌀은 보천교의 본산인 정읍 입암에 보냈다고 한 다. 특히 중월리 상복마을에는 보천교의 60방주인 유붕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보천교를 믿 고 따랐다고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홍종철씨의 영향을 받은 중복은 신교육을 받아 많은 학자와 공직자를 배출

이장명 유영원

중복 재임 기간

~ 1971. 12.31

이장명

재임 기간

박병훈

~ 1971. 12.31

유영원

1972. 1.1 ~ 1972. 9.30

박병직

1972. 1.1 ~ 1975. 6.10

유병환

1972. 10.1 ~ 1974. 6.6

박병직

1975. 6.10 ~ 1975. 12.31

최창식

1974. 6.6 ~ 1975. 6.10

박병직

1975. 6.10 ~

최창식

1975. 6.10 ~

박병직

유영모

~1979. 3.1

~1979. 3.1

박병직

1979. 3.1 ~ 1980. 2.29

유영모

1979. 3.1 ~ 1980. 2.29

박병직

1980. 3.1 ~ 1980. 12.31

유영모

1980. 3.1 ~ 1980. 12.31

박병직

1981. 1.1 ~ 1981. 12.31

유영모

1981. 1.1 ~ 1982. 12.31

박병직

1982. 1.1 ~ 1982. 12.31

유영모

1982. 1.1 ~ 1982. 12.31

박병직

1983. 1.1 ~ 1984. 12.31

유영모

1983. 1.1 ~ 1984. 1.1

박병직

1985. 1.1 ~ 1986. 12.31

(3) 유도근(劉道根, 1933~ 2013.12월 현재)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자료들

유환곤

1985. 1.1 ~ 1985. 10.30

박병직

1987. 1.1 ~ 1988. 12.31

유도근씨는 1933년 중월리 상복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생활상을 조

김양섭

1985. 10.30 ~ 1986. 12.31

박병직

1989. 1.1 ~ 1990. 12.31

한 반면, 상복은 보천교의 영향으로 한학과 유학을 배워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1901년생인 유영만(유주령)은 이곳 상복출신으로 채색화가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붕석으로 보천교의 방주로 알려져 있으며, 경상도 출신의 방주인 배모씨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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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식

1987. 1.1 ~

유병준

~ 1988. 12.31

박병직

1991. 1.1 ~ 1992. 12.31

박병직

1993. 1.1 ~ 1994. 12.31

강대정

1989. 1.1 ~ 1990. 12.31

박종호

1995. 1.3 ~ 1996. 12.31

강대정

1991. 1.1 ~ 1992. 12.31

박종호

1997. 1.8 ~ 1998. 12.31

유영모

1993. 1.1 ~ 1994. 12.31

박종호

1999. 1.4 ~ 2000. 12.31

유영모

1995. 1.3 ~ 1996. 12.31

박왕기

2001. 1.3 ~ 2002. 12.31

유창식

1997. 1.8 ~ 1998. 12.31

박왕기

2003. 1.4 ~ 2004. 12.31

유창식

1999. 1.4 ~

박왕기

2005. 1.3 ~

유요환

~ 2002. 12.31

박종환

2010.1.2 ~ 2013. 12.31

유요환 유요환 김영표

2003. 1.4 ~ 2004. 12.31 2005. 1.3 ~ 2010.1.2 ~ 현재

박왕기

2014.1.2. ~ 현재

도움 주신 분 박상기(89세, 중복토박이) 박춘기(37년 생, 전 아산면장) 박종환(54년 생, 전 중복이장) 유영모(39년 생, 상복토박이) 유도근(33년 생, 상복토박이) 유요환(48년 생, 상복토박이) 김양섭(38년 생, 상복토박이) 유덕환(60년 생, 상복토박이) 참고문헌 『고창군지』, 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고창군의 지석묘』, 군산대학교 박물관, 2009 . 『고창의 마을유래』, 고창문화원, 2003. 『고창 성씨의 입향유래』, 고창문화원, 2007.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화유적분포지도 고창군』,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5. 『한국의 자생풍수2』, 민음사, 최창조, 1997. 『한국지명총람11 전북편』, 한글학회, 1981. 보천교 일반 秘전라북도 大正 18년(1929년) 6월 조선총독부 자료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1491 http://www.namdotoday.com/detail.php?nu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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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