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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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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훈련거부, 또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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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정부의 보이지 않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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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외치다! 다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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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비평과 그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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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훈련거부, 또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

지난 1월 10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이례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법원이 예비군 훈련거부자에 게 무죄판결을 선고했던 것. 비록 1심이지만, 무려 13년 만에 내려진 무죄판결이었다. 즉, 예비군 훈련거부자에 대한 무죄판결이 13년 만에 다시 내려진 것이다. 필자가 활동하던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의 최근 이슈는 바로 이 예비군 훈련거부이다. 불 과 2년 전만 해도 예비군 훈련거부는 개개인들에 의해서 조용하게 이루어지던 개인적 활동 이었지만, 최근 들어서 예비군 훈련거부는 이를 지지하는 몇몇 평화단체들 사이에서 떠오르 는 병역거부 운동이 되었다. 사람들은 징병제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지만, 예비군 훈련 거부 운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생소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비군 훈련거부는 그 동안 양심 적 병역거부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요소는 아주 간단하다. 현재의 예비군 훈련거부는 문자 그대로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는 사회운동이다. 예비군 통지서가 나온 사람이 예비군 훈련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행위, 군 복무를 마쳤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에 의해 예비군 훈련 받기를 거부 하는 행위이다. 그 이유는 다양하다. 각자가 군 복무 도중 느꼈던 부당함이 예비군 훈련을 통해 다시 떠올랐기에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고, 군 제대 이후 신념이 달라지면서 예비군 훈 련을 거부했던 사람들도 있다. 혹은 기존의 전면적인 양심적 병역거부가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일단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지만, 뒤늦게나마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는 심정으로 했던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 유는 다양하다. 핵심은 예비군 훈련거부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의 일종이라는 점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을 시민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현대 국가의 시스템을 거부하는 행위 전반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비군 병역거부 역시 양심적 병역거부의 일종으 로 볼 수 있다. 병역거부를 위해 난민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2016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진행된 참가자들의 퍼포먼스


예비군 훈련거부, 또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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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병역 전반을 거부하는 직접적 병역거부만큼이나 예비군 훈련거부도 비판의 대상이 되 고 있다. 누구는 좋아서 예비군 훈련을 받는 줄 아느냐는 토로부터, 국가 안보를 생각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이 본격적으로 예비군 훈련거부 운동을 시작했던 이후, 필자에게 예비군 훈련거부에 대한 사회적 반응들은 정말 의외였다. 군복무를 현역으로 마친 사람들이 시도하는 병역거부 운동이었기에 지지받기 쉬울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양심적 병역거부이든, 예비군 훈련거부이든 간에, 항상 무조건 옳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온전히 합당한 태도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병역거부 전반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 합의 들은 필요하며, 병역거부를 비판하는 쪽의 논리도 일면 타당한 부분은 있다. 특히 예비군 제 도의 경우, 어떤 의미에선 현역 징병제 이상으로 국가 안보의 실질적인 작동방식, 국방력의 근간이기에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시각들은 매우 다양하며, 필자가 이 글에서 이러한 복잡한 상황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러나 우리나라의 예비군 제도는 우리나라의 징병제가 그러하듯이, 노골적인 군국주의 국가 를 제외할 경우 전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 하고 싶다. 외국에서는 이미 양심적 병역거부 전반과 관련해서 다양한 방식의 대체복무제도들이 마련 됐었던 예들이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 독일이나 북유럽에서 군 제도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고, 이를 통해 각국의 징병제 및 예비군 제도들이 변화했음을 생각해보면, 현재 우리 가 가지고 있는 예비군 제도를 보완하고 변화시키는 일은 불가능한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비군 훈련과 관련한 대체 복무제도의 도입 역시 미리 닫아놓아야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자신은 직접적 병역거부자로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기에 예비군 병역거 부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다만 필자 자신이 살면서 느껴온 군대 의 부당함이, 실제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크게 다가왔을지는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데로, 예비군 훈련거부 역시 다른 병역거부의 여러 방식들처럼 사회적으 로 큰 지지를 얻지 못하는, 외로운 소수의 싸움이다. 다만 직접적 병역거부처럼 실형을 살게 되는 것도, 망명이나 난민이 돼서 한국 땅을 다시는 못 밟게 되는 것도 아니며, 상대적인 비 난의 수위도 적은 편이기에 다른 병역거부에 비하면 개개인의 부담은 크지 않은 게 아니냐 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예비군 훈련거부가 확산되길 바라는 내 개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안타깝게도 예비군 훈련거부 역시 다른 병역거부만큼이나 사회적인 부담이 크다. 어떤 면 에선 더 심각하다고 볼 여지도 있다. 우선 예비군 훈련을 거부했을 경우, 이는 법적으로 단 순 훈련불참으로 취급된다. 훈련불참에 따른 벌금은 계속해서 누적되며, 계속해서 빠질 경우 가중처벌 대상으로 분류되면서 벌금 액수도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될 경 우

실형 선고를 받을 수도 있으며, 게다가 예비군 훈련을 ‘소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부했

던 훈련이 계속해서 다시 통보된다. 따라서 예비군 훈련 거부자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 사 회적 어려움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수년 동안 수십 차례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조사를 받고, 수십 차례 재판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까지의 판결은 대부분 유죄판결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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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판결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계속되는 유죄판결은 수 십 번의 벌금 고지서를 의미한다. 처음엔 몇십만원 수준으로 시작하지만, 고지서가 쌓이다보 면 벌금 액수는 어느새 몇 백만 원에서 몇 천만 원이 훌쩍 넘어가버린다. 이쯤 되면 일상생 활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노역형을 통해 벌금을 납부하는 방식을 통해도, 1년 이상의 금고형을 사는거나 마찬가지의 액수가 벌금으로 부과된다. 금수저에 속하는 상위계층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예비군 훈련거부자들은 평범한 계층의 사람들이 며, 그들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벌금은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다. 그들 이 예비군 훈련거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처벌은 반복된다. 국가 방위의 신성함이란 담론 앞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유엔 산 하 자유권위원회는 자유권규약 제14조에 관한 일반논평 제32호에서 “군복무에 대한 거듭된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역거부자를 반복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후속적인 거 부가 양심에 근거한 동일한 항구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라면 동일한 범죄에 대한 처벌에 해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 우리나라의 경우 다행히(?) 직접적인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서는 반복적인 처벌을 하지 않지만, 예비군 훈련거부자들에 대해서는 반복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비군 훈련 거부자에 대한 처벌은 헌법상 보장되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현역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볼 수 있다. 국가 안 보의 목적이 국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있음을 떠올린다면, 국가 안보를 이 유로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헌법 의 관점이 아닌, 보편인권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실제로 국제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와 마찬가지로 예비군 훈련거부 역 시 양심의 자유로 인정받는다. 유엔은 한국 정부에게 예비군 훈련 거부자를 포함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1) http://www.withoutwar.org/?p=13003&ckattemp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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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인식변화, 제도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 몇 년 동안 법원을 중심으로 대체복무제의 필요성이 조심스럽게 요구되고 있는 정도이다. 예비군 훈련과정에서 겪는 황당한 불합리함은 악명이 높다. 예컨대 이런 문제들. 종종 불거 져 나오는, 말도 안 되는 저질의 식사들은 어찌 보면 애교 수준일지도 모른다. 예비군 훈련 장에서 이루어지는 ‘정훈’들의 상당수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도저히 인정 될 수 없는 수준의 가치관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이 예비군만의 문제인지는 회의적 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예비군 훈련이 가지는 총체적인 문제점들은 징병제가 가지는 근본 문제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현역 군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비군 훈련의 부 당함을 참고 넘긴다. 군 복무 당시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예비군은 예비군 나름대로의 참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들이 과연 합당하며,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군 복무를 마쳤다고 해서, 군대의 이 데올로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바라보는 예비군 훈련거부 운동, 그리고 예비군 훈련거부를 지지하는 운동은, 군 복 무 이후 군대를 거부하는 적극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물론 이 또한 지금 현재 상황에선 모 두가 동참하기는 어려운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지지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 지 않을까? Written by 강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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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정부의 보이지 않는 어둠

내 마음 속의 대통령, 그 이름 ‘버락 오바마’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추문이 불거지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 면 다음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대다수의 전망 때문인지, 연일 SNS에서 퇴임한 전 대통령의 이름이 짙은 향수 속에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탈권위와 소통, 정치적 올바름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전임 대통령. 이쯤 되면 누 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마음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분’이 있을지 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이 떠올리는 ‘그 분’이 아니라 ― 사실은 이미 제목을 보고 눈치 챘을 테지만 ― 미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국회의원이나 외국의 국가수반 등 권력 앞에서 ― 실질적으로 누가 지구상에서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 굴하지 않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 고 싶다는 아이에게는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모습에서, 그의 후임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영부인이 비를 맞든 말든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모습과 대조적으로 아내인 미쉘 오바 마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모습 등을 보면서, 누군가는 ‘예전에 한 번 가져본 적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잃어버린 대통령’과 오버랩 되는 무언가를 느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게 된다. 심지어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반 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자 오바마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를 지지하며 나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에서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고 있는 듯하다. 아뿔싸. 심지어 이 분,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요새 말로 ‘힙하고 쿨한’ 대통령이었는지, 그의 행정부가 그렇게 좋기 만 한 곳이었는지, 잠시 환호를 멈추고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없을지 조심스레 반문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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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통령사에 길이 남을 역대 최고의 전쟁광은? 이쯤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샛길로 벗어나 보도록 하자. 당신이 아는 미국 대통령 중 역대 최고의 전쟁광이 누구인지 묻고 싶다. 머리를 굴려보면 여러 사람이 떠오를 테지만 가장 최 근의, 근 10여년의 행적을 톺아보라고 조언을 드리면 아련히 떠오르는 한 남자가 떠오를지 도 모르겠다. 악의 축, 대량살상무기, 외과수술과 같은 정밀 타격, 주옥같은 말을 만들어내며 자신들이 수행하는 전쟁을 감히 “성전”이라고 대중 앞에서 표현하던 남자. 2013년 3월 5일 작고한 베 네수엘라의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로부터 지옥의 유황불 냄새가 나는 사람이라며 비난받은 네오콘의 수장, 대를 이어 이라크를 폭격한 미국의 43대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는 과히 ‘전 쟁광’이라는 수식어가 지나치지 않을만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소말리아에 폭탄을 퍼부었다. 그렇다 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성적표는 과연 어떨까? 노벨평화상 수상 자인 그를 북한 공인 “불망나니”이자 “인간추물”인 부시 전 대통령과 견주어 본다는 건 일견 무례한 처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파키스탄, 소말리 아는 물론 예멘과 리비아, 시리아 등 7개국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심지어 2009년 1월 20일 부터 2017년 1월 20일까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8년 동안 미군은 단 하루도 전쟁 을 멈춘 적이 없었다.

2016년 한 해 동안 투하한 미군의 폭격 추이 (단위: 회)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예멘 소말리아 파키스탄 합계 출처:

Defense

department,

12,192 12,095 1,337 496 34 14 3 26,171 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

Operation

Inherent Resolve 분석자료 http://www.inherentresolve.mil/News/Strike-Releases/ 작년만 해도 미군은 오마바 전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7개국에 총 26,171 차례의 폭격을 가 했다. 영국의 매체 가디언지의 분석을 인용하자면, “미군은 그들이 교전중인 해외의 적이나 민간인들을 향해 지난 한 해 동안 매일 72회씩, 매 시간마다 3차례씩 폭격을 가했음을 의 미”한다. 미군은 2015년보다 3,057발의 폭탄을 더 투하했으며, CFR의 분석에 따르면 총 24,287회, 79%의 폭탄을 퍼부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경우 집속탄 등의 사용으로 실제 투하된 폭탄의 양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또한 전쟁을 종결 짓겠다고 확언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2015년에 비해 공습이 390회나 더 증가했다. 실제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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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아프가니스탄에는 8,400명 가량의 미군이 주둔하며 전쟁을 수행했었다. 또한 2011년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축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에 의한 리비아 공습 횟수 역시 매년 꾸 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 7개 국가에 퍼붓는 폭장량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미국이 자국과 전 세계의 안전을 위 해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 중이지 않느냐?”며, “이 세상에서 전쟁을 아예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당신을 위해 오마바 전 대통령에 대한 조금 더 충격적인 진 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2013년에 이르기까지 오바마 전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에서 드론을 통한 공습 작전에 대한 어떤 정보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부고 발자에 의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미군은 소말리아와 리비아,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습작 전에 드론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내부 고발 이후, 오바마 정부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 리비아 에서 드론에 의한 오폭으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최소 64명에서 최대 116명으로 추산한다 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의 드론 폭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는 The 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에 따르면 해당 기간 동안 최소 380명에서 최대 801명까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며, 이 수치는 최소 추계로도 미국 정부보다 6배 이상 높은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2016년까지 기간을 확대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449명에 서 최대 963명이며, 이 중 유아 사망자는 최소 98명에서 139명에 이른다.

드론 오폭으로 인한 사망 누계* (단위: 명)

민간인 사망 (최소/최대) 유아 사망 (최소/최대)

파키스탄

예멘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257/643

65/101

3/12

124/207

66/78

8/9

0/2

24/49

출처: Drone Team, The Bureau of Investigative Journalism. https://www.thebureauinvestigates.com/category/projects/drones/ *확인된 피해만 집계. 이외의 추산 통계치는 BIJ 홈페이지 참조 요망. **아프가니스탄은 2015-2016년, 나머지 3개국은 2009-2016년까지. 또한 내부고발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는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게 시물 등을 근거로 국적을 불문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테러리스트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했다. 이를 통해 미국 정부는 2013년에 469,000명의 잠재적 테러리스트 명단을 작성했고, 이중 오 직 4,900명만이 법원에 의해 기각 당했다. 이 과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고, 해당 명단에는 이미 사망한지 오래 전인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이 한참 동안 삭제되지 않은 채 올라가 있기도 했다. 한편 2011년 10월 14일, Abdulrahman al-Awlaki는 야외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드론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오폭이 아니었다. Al-Awlaki는 그의 아버지가 알카에 다의 아라비아 반도 조직책 중 한 명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정과 테러리스트일 듯한 이름 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고, 결국 ‘버락 후세인 오바마 주니어’ 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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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령의 직접적인 암살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16세였던 Abdulrahman al-Awlaki는 무고한 예멘계 미국인이었다.

그래도 “오바마 님이 최고시다”는 당신에게 다시 미국의 현 대통령인 드럼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도록 하자. 지난 1월 2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반 이민 행정명령의 대상 국가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 리비아, 소 말리아, 수단, 예멘 등 7개국이다. 당신의 기억력이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더 좋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매우 신중하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잠 재적 테러위험 국가 7개국 중 오바마 전 대통령이 폭격을 자행한 나라가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시켜주고 싶다. 물론 어떤 과오 때문에 정치인이 세운 공적들이 빛을 바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 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의도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명백히 자행된 참상에 서 눈을 돌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한 번쯤 스스로에게 자문 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우연히 그들은 무슬림 국가에서 무슬림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매일 폭탄 세례를 받고, 생존 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고, 당신 역시 그저 우연히 그런 위험에서 한발짝 비켜선 채 태어났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다시 태어나는 방법 같은 건 없으니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며 애써 현실을 내세운다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무감각한 당신이, 아마도 오바 마 전 대통령을 흠모하는 만큼 도널드 트럼프를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을 당신이 미국의 현 대통령과 얼마나 결이 다른 사람인지 한 번쯤 고민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감히 이야기해보고 싶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오바마 전 대통령이 ‘쿨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도 그러한가? 아니면 여전히 그는 당신 마음속의 영웅인가? 오늘도 SNS에 흠모의 글을 끼적이고 있을 당신께 정말이지 이런 질문을 올리고 싶은 밤이 다. Written by 박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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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외치다! 다 같이! 세계여성공동행진_서울(WOMEN'S MARCH ON SEOUL) 후기

전 세계적인 여성 인권 행사로 ‘세계여성공동행진’이 서울에서도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지인에게 전해 들었을 때 가슴이 설렜다. 처음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 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2017년 1월 21일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기 위한 ‘워싱턴여성행진’을 기획하였다고 한다. 행진 취지에 찬동하는 전 세계 40여개 국가와 80여개 도시가 동시다발적인 참여의사를 밝히면서 ‘세계여성공동행 진’으로 발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디지털성범죄아웃(DSO)’이라는 단체가 연대의사를 밝 혀 서울에서 공동행진을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DSO 측은 단체 위주가 아니라 개 인과 단체가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방침 하에 ‘서울여성행동 기획 단’을 모집했고, 그렇게 모인 기획단이 ‘세계여성공동행진_서울’을 주관한다고 했다. 나는 기 획단에는 참여하지 못 했지만 소식을 들은 날부터 이 공동행진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동행진 당일 오후 두 시,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 수많은 여성들이 모여들었다. 기획단에 게서 호랑이 핫팩과 물, 풍선, 각종 스티커,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피켓 등을 받고, 행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엘리베이터 근처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여 다섯 명씩 대열을 맞추었다. 참여자 중에는 외국인도 많아서 기획단은 ‘길 막지 않게 엘리베이터 옆으로 이동 해주세요’와 ‘플리즈 무브 어라운드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외치곤 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옆에는 기획단이 마련해놓은 포스트잇에 응원 메시지를 적어서 붙일 수 있게끔 준비된 공간 이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낙태죄 폐지를 위한 공동행동’의 깃발을 든 분이 서있었고 ‘낙 태’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기 위한 전시물이 게시되어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와 예의 엘리베이터 사이에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가 영업 중이었고 반 대편에도 토스트 등을 파는 푸드트럭 세 대가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일찍 도착한 참가자들 은 따뜻한 음료를 마시거나 간식을 사먹으면서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공동행진이 시작 되자 일부 참가자들이 빈 종이컵 또는 마시다 만 음료가 담긴 종이컵을 주변에 그냥 내려놓 고 가버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버려진 종이컵들이 역 주변 한구석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어 느 외국인 여성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컵도 슬쩍 두고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약간 씁쓸 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기획단이 대형 쓰레기봉투를 여럿 준비해 와서, 쓰레기를 길 가에 그대로 방치해두지 않고 얼른 치울 수 있었다. 기획단이 대형 쓰레기봉투를 수레에 매 달아서 끌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개인적으로 무척 보기 좋았다. 내가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에 선두는 먼저 출발했고, 나와 일행은 대열 중후반부 쯤에 합 류했다.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의 깃발이 조금 더 앞줄 어딘가에서 펄럭이 던 걸 본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가부장제에 반대한다’, ‘여성을 성적대상화하지 말라’, ‘낙 태죄를 폐지하라’, ‘성폭력피해생존자에 대한 무고의 의심을 거둬라’ 등 여러 가지 이슈를 담 은 피켓들이 많아서 행진하는 틈틈이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행사명은 세계여성 공동행 진이었지만 참가자는 여성으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고 젠더와 무관하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공동행진을 하기 위하여 도로 한 차선을 통째로 이용했고, 경찰도 협조적인 편이었다. 사실 나는 앞 사람을 정신없이 따라가기만 했고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돌 예정인지 제대로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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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 강남역 10번 출구를 시작점으로 그 부근을 십자가형으로 행진하는 루트였다.

그러다 보니 서너 번 정도 길을 건너서 되돌아와야 하는 행진루트가

있었는데, 딱 그 시점이 우리 행진의 실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이미 건너편 도로로 넘어가서 앞장서고 있는 선두 대열을 보며 사람이 엄청 많다 고 놀란 다음,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서 마구잡이로 달려가다가, 등 뒤로 미처 쫓아오지 못한 후발 대열을 보며 줄이 엄청 길다고 또 한 번 놀랐다. 500명 정도 가 사전신청을 했다고 들었는데, 실제 참가자는 2,000여 명이었다고 하니, 일렬로 행진할 때 는 앞뒤로 끝이 가늠되지 않을 만도 했다. 행진 중간부터는 하얀 눈송이까지 떨어져 내려서 정말 장관이었다. 대열 중간 중간에서 기획단이 구호 제창을 주도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끼어 있는 위치가 애매해서 앞쪽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따라해야 할지 뒤쪽에서 들려오는 구호를 따라해야 할 지 헷갈렸다. 게다가 구호가 굉장히 많고 내용도 길어서 한 번에 듣고 따라 하기에는 어려 움이 있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구호를 무작정 따라서 외치다 보니 차츰 반복되는 패턴을 알 수 있었고,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는 자연스럽게 구호를 따라 외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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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자유와 평등’, ‘여권이 인권이고 인권이 여권이다’, ‘우리 는 인간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부터 시작해서 ‘싸우는 퀴어가 나라를 정의롭게’, ‘싸우는 장애 인이 나라를 바꾼다’, ‘노동자에게 평등한 나라를 원한다’ 등에 이르기까지 구호가 정말 다양 해서 좋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 이건 내 꺼야!’라는 구호는 외칠 때마다 통쾌했다. 구호 제창을 주도하던 분 중에 아주 사근사근한 말씨를 사용하는 분이 있어서 때때로 ‘우리를 무 시하기엔 우린 너무 강해요~’, ‘우리 몸은 우리 꺼에요~’라고 응용된 버전의 구호가 들려오 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원어민 발음으로 ‘MY BODY MY  CHOICE!’, ‘WOMEN'S RIGHTS ARE EQUAL RIGHTS’라는 영어 구호가 들려오기도 했다. 괜히 영어 구 호를 따라하려다가 혀가 꼬여서 ‘우먼스 라이츠스 아 이퀄스 라이츠(?)’라고 외친 적이 한 번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로 되돌아와 행진이 끝났을 때가 네다섯 시 사이였다. 정확히 시간을 확 인해본 것은 아니지만 약 두 시간 삼십 분 정도 행진을 했던 것 같다. 행진은 시작했을 때 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마무리가 되었다. 선두 대열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의 경우 에는 따로 무슨 공지를 해주지 않아서 약간 얼떨떨해 하다가 각자 알아서 해산하는 분위기 였다. 여럿이서 온 경우에는 해산하기 전에 서로 인증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각자 준비해 온 피켓 문구를 기자나 다른 참가자가 허락 받고 찍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행진이 즐거웠던 만큼 마지막 공동 행동이나 전체 참가자의 구호 동시 제창 없이 흐지부지 끝난 것은 아쉬웠 지만 예상 밖으로 참가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뭔가를 더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 다. 당일에는 워낙 참가자도 많고 다들 바빠 보여서 따로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세계여성공동행 진_서울을 준비하고 이끌어준 기획단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공동행진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점도 고마웠고, 핫팩이며 물이며 행진 에 필요한 것들을 여러모로 챙겨주셨을 뿐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행진 내에서 차별 또는 폭 력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행진 지침을 마련해서 나눠주시는 등 섬세한 배 려가 느껴져서 참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이후 나는 우연히, ‘워싱턴여성행진’에 참여한 인도계 미국인 여성과 만났다. 그 분은 워싱 턴에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공동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쌍둥이 동생과 함께 미국 국내선 비행 기를 타고 워싱턴에 다녀왔다고 했다. ‘워싱턴여성행진’에는 52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고 들었다. 내가 서울에서 공동행진에 참여한 이야기를 하자 그 분은 무척 반가워 하면서 ‘한국에서도 여성과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다니 다행 이다. 내 고향(아마도 인도를 말하는 듯 했다)은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여성 및 소수자 인권 에 대한 범세계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한국에 비해 훨씬 다양한 인종과 출신 국가, 종교관 등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기 때문일까?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인권 개념은 나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확장된 것 처럼 느껴졌다. 미국인인 동시에 인도인으로서 정체화하고 있는 그 분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각각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사실 을 실감했다. 나와 그 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지만, 한편으 로 그 분은 미국에서 ‘유색인종‧힌두교도‧채식주의자’라는 소수자로서도 살아가고 있었고 그 런 여러 가지 정체성을 하나의 자아로 통합하고 있었다. 반면에 아직은 단일민족주의가 남 아있는 한국에서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살아온 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만 유독 부각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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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후기를 쓰고 보니, 내가 ‘세계여성공동행진_서울’에서 다양한 구호를 외칠 수 있 어서 좋았다고 쓴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여성 인권’에 관한 구호와 ‘퀴어‧장애인‧노동자의 인권’에 관한 구호를 구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내가 해당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혹은 가지고 있더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자체도 누군가에 비해 일종의 권력적 우위에 있다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퀴어‧장 애인‧노동자를 타자화했던 것은 아닌지 부끄럽다. 언젠가 지인이 ‘소수자의 인권과 여성의 인권은 결코 별개가 아니다. 소수자 중에 여성이 있고 여성 중에 소수자가 있기 때문이다’라 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새삼 가슴에 되새긴다.

위싱턴 여성행진 ‘세계여성공동행진’은 이처럼 나에게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주었고 성찰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 공동행진에 함께 한 참여자들에게서 참 많은 용기를 얻었고, 전 세계 여성들이 다 같이 공동행진을 할 수 있어서 무척 자랑스러웠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계속 인권에 대하 여 고민하고 행동하는 나 자신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구호를 외치며 후기를 마치고자 한다. ‘누구에게도 차별 없는 세상을!’ Written by 익명의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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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기고문의 의견은 본지의 공식적 입장과는 다소 상반될 수 있습니다.

게임 비평과 그 어려움.

비평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을 뜻한다. 가령, 이러한 의미에서 만약 문학 비평을 말한다면, 어떤 시나 소설 등의 특정한 문학 작품을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 평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마찬가지 로 게임 비평을 논한다면, 어떤 게임이 좋은 게임인지 나쁜 게임인지 평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무엇을 평가한다는 것에는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 즉 비평가의 특정한 관점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냐에 따라 사람들마다 동일한 작품 에 대해서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가령, 최근에 논쟁이 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풍자화인 『더러운 잠』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부정한 대통령을 잘 풍자한 훌륭한 예술 작품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 은 여성의 몸을 혐오적으로 표현한 인격 모독적인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어떤 관점을 우선시하냐에 따라 동일한 작품에 대해서도 평가는 갈린다. 하지만, 모든 비평이 동일하게 취급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평가의 특정한 관점이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데 부당한 측 면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고 그 비평을 훌륭하지 못한 것으로, 말장 난하듯이 말하자면, ‘비평’을 또 다시 평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작품을 평가했 을 때, 우리는 잘 된 비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위의 질문을 게임 비평에 대해서 적용하여 생각해보자. 특정한 게임을 어떤 관점 혹은 기 준에서 비평을 했을 때,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질문이지만, 글쓴이가 오랫동안 고려했던 하나의 대답은 바로 ‘재미’였다. 이는 복잡한 추론에 기대어 나온 결론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직관에 의존한 대답이었는데, 게임을 하는 목적 자체가 ‘재미’이므로 어떠 한 방식으로든 플레이어에게 ‘재미’를 줄 수 없다면, 좋은 게임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게임 비평과 관련하여 글쓴이가 이런 단순한 주장을 내세울 때 여러 의문과 반박을 맞이했지만, 그 모든 질문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재미’는 정말 게임을 평가하는 합당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일까? 직관적인 대답의 한계는, 그것이 언뜻 일리 있어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설명해야 할 것 을 아직 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직관에 의존한 글쓴이의 주장에 대한 직관적인 반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재밌는 게임이 누군가에게 재미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 가?” ‘재미’를 게임 비평의 기준으로 삼을 때의 난감한 점은 ‘재미’라는 것이 상당히 주관적 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사실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논하기도 어려워진다. 각 자에게 ‘재미’있는 게임은 좋은 게임이고, ‘재미’없는 게임은 나쁜 게임이라고 정리되기 때문 이다. (앞으로 진행될 논의를 미리 말하자면, 글쓴이는 ‘재미’가 게임 비평의 최우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독창성’이란 것도 어느 정도는 고려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쓴이가 부족한 탓에 글이 난삽하게 읽힌다면, 그건 ‘재미’와 ‘독창성’ 둘 사이 를 왔다 갔다 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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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게임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의 비평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을 구분하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지만, 적어도 대중 예술을 비평하는데 있어서 ‘재미’와 같은 단순한 기준을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도 다른 장르와 같이 대중 예술의 관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면, 비평에 있어 어떤 새로운 기준이 고려될 수 있을까? 대중 예술을 비평할 때와 마찬가지로 게임을 비평한다고 했을 때, 글쓴이에게 떠오르는 새로운 기준으로 ‘독창성’이 떠오른다.1) 그렇다면 게임을 비평하는데 있어서 ‘독창 성’을 고려 해보는 것은 어떨까? 독창적인 시도를 한 게임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요리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맛이 충족되고 나면, 재료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따져보고 기존과는 다른 색다 른 맛을 이끌어냈는지 이야기 해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맛있는 요리가 그 사람의 타고난 입맛 때문에 맛없게 느껴질 수 있다. 가령, 오이를 먹지 못하는 어떤 사람 에게 오이가 주재료가 되는 기발한 요리를 해준다고 해도 끔찍할 뿐일 것이다. 매우 억지스 럽지만 게임에 비유하자면, 모니터 화면에서 보여 지는 시점에 멀미를 느껴 FPS(First Person Shooter)나 레이싱 게임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게임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 지일 것이다. 하지만, FPS나 레이싱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그래서 그런 종류의 게임을 찾는 사람에게 늘 비슷비슷한 게임과는 차별화되면서 어느 정도 ‘재미’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새로 나온 게임이 있다면, 그 게임의 ‘독창성’을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독창성’을 고려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왜 냐하면, 오늘날 게임 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성공한 게임들이 ‘독창성’과는 거리가 멀 어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 글쓴이가 상당히 재미있게 한 게임이 있었는데, 미국 게임 회사인 블라자드社에서 2016년 5월 24일에 출시한 『오버워치』라는 게임이다. 이 게임 은 여러 게임 관련 매체로부터 94개의 상을 받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세계적으로

1) 예술의 평가 기준으로서 ‘독창성’이 왜 고려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선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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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000만 명이 플레이 했다고 알려져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게임이다. 하지만 『오버워 치』는 동시에 출시 이전부터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게임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오버워치』의 표절 논란을 해결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만약에 『오버워치』에서 시도된 많은 것들이 기존 의 게임에 있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가깝다면, 적어도 ‘독창성’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오버워치』가 많은 상을 받은 것에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독창성’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상을 준다면, 글쓴이가 생각하기엔 많은 상 을 받지 못한 것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게임이 있다. 바로 나이안틱社의 『포켓몬 GO』 이 다. 기존의 몇몇 게임 회사가 현실적인 가상을 만들기 위해 그래픽 부분에 투자할 때, 『포켓 몬 GO』는 역으로 현실에 가상을 덮어씌웠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이슈를 만들어내며, 증강현 실게임이라는 장르의 새로운(위치변경) 가능성을 보여준 『포켓몬 GO』가 고작 2개의 상을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일이다.

‘독창성’을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할 때 『포켓몬 GO』가 많은 상을 받지 못한 것은 상당히 유감스런 일이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게임을 비평할 때 ‘독창성’만 고려한 다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글쓴이가 자주 즐겨하는 게임 중 하나는 스포츠 인터렉티브社의 『풋볼 매니저』이다. 축구팀의 감독이 되는 시뮬레이션 게임인 『풋볼 매니저』는 매년 새로운 작품을 발매하지만, 사실 큰 틀에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세세하게 들어간다면 전작에 서 몇몇 부분들이 수정되거나 변경되어 이전 작보다 플레이어에게 더 즐거운 체험이 될 수 있도록 노력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분과 관련하여 그 시리즈의 팬들은 더 나아졌는 지 안 좋아졌는지 평가할 것이다. 가령, 매치 엔진이 개선되어 이전보다 패스 축구를 구현하 기 좋아 졌다던가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세세한 개선점 에 불과하지 큰 틀에서 보자면 독창적인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풋볼 매니저』는 『오버워치』처럼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게임이 아니라 게임 을 좋아하는 축구 팬들에게 주로 소비되는 게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제조게임이 라는 악명(?)이 있을 정도로 매니아들 사이에선 상당히 인기 있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비록 ‘독창성’에 측면에서 보자면 그 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소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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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존재하는 게임들에 대해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풋볼 매니저』는 우리나라에 한정한다 면 매년 1~2만장 정도 팔리는 스테디셀러지만, 후속작이 나올 때마다 꾸준히 몇 백만 장씩 파는 메가 스테디셀러인 작품들이 있다. 메가 스테디셀러의 가장 유명한 예는 닌텐도社의 슈퍼마리오 시리즈이다. 많이 팔린 게임이 좋은 게임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이야기 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공감을 얻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스테 디셀러들이 플레이어에게 주는 ‘재미’에 대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분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게임 비평의 기준으로 ‘재미’가 다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글쓴이는 앞에서 ‘재미’를 게임 비평의 기준으로 삼을 때 가지는 한계를 지적했다. ‘재미’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이라는 객관적 평가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며, 각 자에게 ‘재미’있는 게임이 좋은 게임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분명히 ‘재미’는 어떤 부분에 있어선 주관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선호하는 취향의 게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취 향이 성립한다는 것으로부터 개개인이 느끼는 ‘재미’가 전혀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 지는 않는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분명히 개개인이 좀 더 선호하는 취향의 맛이 있을지 모른 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많은 사람들에게 기피되는 어떤 맛이 누군가는 굉장히 선호할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맛은 많은 사람들에게 맛있다는 공감을 일으켜 그것을 자주 찾게 된다면, 그 맛을 낼 수 있는 식당은 맛집이 될 것이다. 나는 게임의 ‘재미’라는 것 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떤 개인은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

영허즈번드 형제는 영국에서 무명 선수였으나 풋볼 매니저를 통해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필리핀 축구대표팀 관계자들에 의해 필리핀 대표팀에 합류했고 이들은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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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게 한 게임을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게임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것은 각자가 전혀 색다른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일정 부분 공유되며 공감할 수 있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재미’론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사면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많이 팔렸지만 외면을 받은 게임들도 상당히 많았다. 글쓴이의 생 각엔 아마도 그러한 게임들의 특징은 게임성이 높았던 전작 시리즈 덕분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치가 상당히 높아서 많은 관심을 얻고 팔렸던 경우라고 생각한다. 판매량으로 보자면 상당히 흥행한 게임 일지라도, ‘재미’를 주지 못했다면 낮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게임에 대해 상당히 ‘재미’있게 플레이 했다고 공감할 수 있다 면, 그 게임은 좋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은 도대체 개인들이 느끼는 ‘재미’란 도대체 무엇 인가이다. 지금까지 글쓴이는 게임 비평에 있어서 ‘재미’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 장하면서, 정작 게임에서의 ‘재미’가 무엇인지 전혀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글 쓴이는 이 지점에서 게임 비평의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느끼 는 ‘재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앞으로 글쓴이가 할 논의는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나 내 용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시험 삼아 해보는 논의에 불과하다. 게임을 일종의 종합 예술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쓴이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조 금 회의적이지만, 이러한 의견이 게임이 가진 성격을 잘 지목하는 지점이 있다면, 게임이 상 당히 많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의 내러티브(narrative)를 구성하는 텍스트, 그리고 시각적인 효과와 음악 효과 등이 게임 비 평의 중요한 요소들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만으로 게임은 평가 될 수 없다. 게임은 다른 예술 장르와는 크게 구분되는 두 가지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게임의 고유한 두 가지 특성은 첫째는 규칙 설정하기, 둘째는 매개물을 이용한 조작감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특성은 각각 독립적으로 분석되지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에게는 상호 연관적으로 나타난다. 글쓴이의 생각엔 이 두 가지 특성을 고려하여 게임 비평을 할 때 일차적으로 ‘재미’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재미’가 충분히 고려되었다면, 이후엔 ‘독창성’의 측면에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규칙(Rule)없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제시된 규칙 안에서 임의로 부여된 목표나 (게임에 따라선) 플레이어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다양한 게임 규칙이 나타날 수 있다. 사실상,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게임 규칙은 무한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생각하기엔 모든 규칙이 동등하게 평가받을 이유 는 없다. 특정한 규칙 안에서 플레이어가 게임을 할 때, 다수에게 그 규칙이 다른 규칙보다 ‘재미’있다고 느껴졌다면 그 게임은 좋게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게임의 규칙은 ‘재 미’를 위해서 개선이 되거나 규칙 변경이 제안되기도 한다. 이 글이 암묵적으로 고려하고 있 는 비디오 게임의 사례는 아니지만, 최근 축구에서 제기된 오프사이드 룰 폐지와 같은 것이 재밌는 사례가 되겠다. 온라인 게임에서 게임 밸런스를 조정하거나 새로운 캐릭터를 출시하 는 것도 플레이어의 ‘재미’를 위해 게임의 규칙을 개선하거나 변경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 다. 게임은 영화와 달리 화면에 나타나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플레이 어는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화면을 실시간으로 인지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작해야 한다. 이러한 조작은 화면을 송출하는 모니터와 플레이어를 매개하는 매개물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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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이루어진다. 키보드나 마우스, 게임 패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게임에 따라 플레이어는 숙련이 요구되는 어려운 조작을 요구받거나, 반대로 아주 간단하고 쉬운 조작을 요구 받는 다. 중요한건 그러한 조작감이 특정한 게임의 ‘재미’와 관련하여 어떻게 작동하는지 비평해 볼 수 있다. 또한 닌텐도社의 Wii 리모컨과 같이 기존의 매개물과는 다른 조작감을 제공할 경우, 그 매개물이 가진 독창적인 시도에 대해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게임을 비평하는데 있어 ‘재미’와 ‘독창성’이 고려되어야 하고, 이 두 가지를 게임의 규칙 설정 및 조작감과 함께 살펴볼 때 구체적으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글쓴이의 생 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게임 비평론은 플레이어의 게임 체험에 대한 일종의 실험 관찰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어떠한 규칙 설정을 설정 했을 때 우리는 좀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글쓴이의 전략은 우리가 실제로 어떠한 규칙을 선호하는지 살펴보자는 것 이 대답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호는 어느 정도 개인차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글쓴이는 친구들과 함께 보드게임인 『뱅!』을 한 적이 있다. 『뱅!』은 아무리 못해도 네 명이 있어야 성립하는 보드 게임인데, 이 게임을 셋이서 한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괜찮 다고 평가되는 삼인 규칙을 참고하여 게임을 진행 했지만,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게임이 계속 진행되었다. 어느 한 쪽이 너무 유리하게 끝나는 게임이 계속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그 상황을 ‘재미’있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다. ‘재미’있는 상황이 되기 위해선 어느 직업을 가지든 최대한 동등하게 싸울 필요가 있었다. 게임이 끝날 때마다 친구들과 의논하여 규칙 을 수정하여 다시 시작했다. 계속 진행되자 적어도 우리 세 명에겐 합당해 보이는 규칙이 완성되었다. 글쓴이는 셋이 아니라 다수가 되었을 때도 최대한 ‘재미’를 줄 수 있는 규칙에 대해서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규칙과 그렇지 않은 규칙에 대해 서 평가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지금 들고 있는 예는 특정한 규칙이 설정된 뒤에 개선하 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최초의 설정된 규칙도 마찬가지로 평가 될 수 있다. 그렇 기 때문에 이러한 영역에서 비록 어려울 지라도 게임 비평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Written by 전장호


20 이음저널 CONNECT

No. 10 2017. 02. 15 발 행 인

박재우

편 집 장

박재우

기획위원

강길모 강현수 김신석 김태훈 박상훈 박원진 박재형 백가을 오은영 윤이반 이미림 이민기 이일구 임지윤 전장호

편집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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