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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 어떤 소설들 - 정서윤 Chapter 1. B-Cut - 서민정 Chapter 2. 어두운 풀은 내일도 자란다- 곽상원 Chapter 3. 돛대-매너 - 김윤섭 Chapter 4. 기울어진 방 - 최희승 Chapter 5. 의혹의 바다생물 - 이주원 Chapter 6. 도시의 유령 - 권혜경 Chapter 7. 내일없는오늘 - 조민아 Chapter 8. 공간의 기억: 시간의 조각 -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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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획글(서문)
‘사람들은, 이런 걸 소설이라고 한단다.’ 이 전시는 한 권의 책이자 여러 명의 작가들이 써 내려간 소설의 모음집이다. 이 이야기들은 마치 시간을 멈춰 놓 은 듯 한적한 남산의 전시 공간 한 자락에 내려 앉았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방을 하나하나 지남에 따라 여덟 개의 장면을 마주하고, 여덟 편의 소설들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상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작품을 ‘쓴’ 작가들이 회화, 조각, 설치,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시각예술 가들이라는 점일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관심사, 그리고 철학을 주제로 삼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여덟 명 의 작가들-곽상원, 권혜경, 김윤섭, 김정은, 서민정, 이주원, 조민아, 최희승-은 어떤 계기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되 었고, 전시에 관한 대화를 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이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다. 대화의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들이 갖고 있는 개별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각기 다른 그들의 작업들이 여덟 개의 장면(scene)들을 보여준다 는 전제 아래, 이것이 제시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가능성을 전시 방식을 통해 구현해보기로 했다. 본디 시각예술과 문학이 예술(藝術)이라는 이름 아래 본질적으로 하나이되, 삶에 대한 통찰이 ‘물질과 형태’를 빌 어 표현되느냐 ‘문자’를 빌어 표현되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임을 걸 상기해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다. 이 과 정에서 그들은 보여주기 방식에 견고함을 더하고자 기획자인 정서윤에게 또 한 명의 작가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 다. 그는 작가들이 제시한 여덟 개의 소제목들과 공간에서 보게 될 장면들을 단서로 상상력을 더해 짧은 호흡의 소설(conte/mini fiction)로 창작함으로써 아홉 번째 작가가 되었다. 보여주기 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시도는 작품이 놓이게 될 The 3rd Place 남산의 공간적 특수성과도 적절히 맞물 리는 지점이 있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은 직육면체 모양의 작은 방들이 입구들을 통해 서로 연결되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새다. 작가들은 분산된 공간에서 보여지는 여덟 가지의 다른 장면들이 우리의 삶을 닮은 무수한 이야기들이 쓰여지는 단서가 되기를 바랐다. 앞과 뒤도, 원인과 결과도, 읽는 순서도 정해져 있지 않은 여 덟 개의 장면이기에 무한한 이야기가 따로 또 얽히며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다락방 한 켠에서 뜻밖에 발견한 낡은 선집 속 이야기를 들춰보는 것만큼 설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때로 는 의도치 않게 펼친 책 한 권, 그 속의 낱개의 소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세상보다도 더 커다란 세계를 마 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란 숨가쁘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허락 하는 동시에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제공하는 선물과도 같을는지 모른다. 전시는 여덟 작가의 작품들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제시함으로써 삶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 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보게 될 소설들은 어디에선가 일어날 수 있을, 또는 이미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이야기 이며, 누군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바로 오늘의 일화일 수도 있는 ‘어떤’ 사건과 장면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방문하는 관람객이라면 그 누구든 환영 받는 독자인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 공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전시를 통해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작은 즐거움 한 조각을 얻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5
정서윤
Chapter 0. 어떤 소설들 정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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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작품 사이사이에 수록된 글은 참여작가 8명이 제시한 제목과 작품을 토대로 『어떤 소설들』의 저자 정서윤이 개인의 상상력을 더해 창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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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B-CUT 서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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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per_ 22.7 x 20 x 1.4 cm_ concrete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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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alin For Names_ concrete, wood, plastic nametag_ 40 x 40 x 50 cm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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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e Name_ Digital Printing_ 54.7 x 42.0 cm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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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그 장면을 처음 본 순간, 그는 비로소 자신이 눈을 떴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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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UT Drawing 4pcs Installation view_ Acrylin on paper_ ę° 30 x 40 cm_ 2016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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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어두운 풀은 내일도 자란다 곽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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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풀은 내일도 자란다_ 210 x 145 cm_ 장지에 아크릴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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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운이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늘 불행을 달고 다녔고, 친구 들은 그에게 ‘21세기 불운의 청년’이라 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 저께 그는 주차를 하다 옆에 서있던 이웃의 차 문을 긁었고, 어제 아침 학 교 가는 길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세차를 하거나 빨 래를 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 안 좋은 일은 그의 주변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오늘 점심 학생식당에서 먹던 국에서 다리를 살포시 접은 파리가 나왔을 때, 그는 아무 말 없이 젓가락으로 파리 를 건져낸 후 식당을 나왔다. 짜증이 샘 솟았지만 이런 일로 항의하 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한 일들은 이전 에도 많았고, 앞으로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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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 있을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자취방 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저녁으로 고기 를 굽던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불 행한지에 대해 긴 시간 이야기하다가 고기를 태워버리고 말았다. 시 커멓게 딱딱해진 고기는 맛이 없었다. 저녁 식사는 결국 라면으로 변경됐다. 그는 그 날의 불행을 만 회하고자 다음 날 새벽까지 열심 히 공부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알람 소리를 못 들어 시험에 지각 하고 말았다. 다행히 시험은 낙제는 면했으나 그가 투자한 시간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날 밤 웅 덩이에서 시커먼 풀이 구물구물 솟아나는 꿈을 꾸었다. S는 우울했다. ‘왜 나는 이다지도 운이 없을까. 불행의 여신은 왜 나를 그냥 지나치지를 않는 걸까.’ 그 는 4년간 온갖 불행을 견 디며 천신만고 끝에 졸업을 했다. 학점은 형편 없었다. 취직을 하기 엔 학점 이 턱없이 부족했다. S는 취직 준비를 하는 동안 대기업에 여러 번 입사 지원을 했지만 낙방에 낙방 을 거듭했다. ‘나는 되는 게 없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 다. 학점은 나빴어도, 공부를 못했어도, 사업으로 성공한 모범 사례 들이 많지 않았던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 라고 하지 않던가. 그는 청년사관학교의 청년 스타트업 지원사업 공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잘 될까?’그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질 문했다. 한 달 뒤, 1차 서류 심사에 합격한 그는 2차 인터뷰를 준비했다. 2차 인터뷰는 관계자 미팅 및 사업계 획에 대한 발표였다. 하지만 자 신에게 사업가의 재능이 있기는 한 것인지 S는 의구심이 들었다. 안 될 것 같은데.’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인터뷰 시간이 다가 왔을 때 아니나다를까, USB에 저장 해온 파일은 열리지 않았고 당황 한 그는 외워온 발표문을 까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인터뷰를 하고 나오는 S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젠장, 왜 내 인생은 늘 이 모양일까.’행운은 이 번에도 그를 빗겨갔다.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그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원망 어린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빨간 불이 초록으로 바뀔 때 그는 길을 건너기 위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 때, S는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성과 영화처럼 조우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 긴 생머리 의 청순 한 그녀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S의 옆을 스쳐갔다. 꿈에 그 리던 이상형을 만났다는 생각에 S의 가 슴은 고동쳤다. 그 날 이후 S는 일주일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더 그녀를 마주쳤 다. 그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고, 두 사람은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 었으며,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다. 숫기가 없어 연애는 생각도 못했 던 그는, 바로 그녀야말로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인근 B 여대 영문 과 3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물 일곱 살에 찾아온 첫사랑은 젊은이의 심장 에 불을 질렀다. 그는 며칠씩 고민 끝에 자신의 생일을 맞아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자 신의 마음을 대변할 붉고 싱싱한 장미꽃도 한 다발 샀다. S는 그녀의 학교 정문 앞에서 미래의 여자 친구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 그녀에게 며칠 전 네 살 연상의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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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도, 학교 생활도, 사업도, 연애도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으니 그는 죽을 맛이었다. 그는 이틀간 집에서 식사도 거른 채 게임 에만 몰두했다. 두문불출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S의 휴대폰 벨 소리 가 울렸다. ‘띠리링.’ 문자를 확인한 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청년 스타트업 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되었사오니, 신분증을 지참하고 내 일 오전 10시까지 센터에 방 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아, 드디어.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에게도 행운의 여신은 분 명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각난 첫 사랑을 제외하면 그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지독한 불행들이 근 한 달여 간은 없었지 않은가. 그는 샤워를 하고 깨끗이 면도를 했다.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이 그의 마음을 따사롭게 비추는 듯했 다. 이젠 성공한 사업가가 되는 길만이 남은 것 같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신발을 신고 점심식사를 하 러 나가려는 찰나, S의 휴대폰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였 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청년사관학교입니다. S 씨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아까 문자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S의 들뜬 목소리에 청년사관학교 사업 담당자가 미안함이 잔뜩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어머, 어떡하죠. 급한 마음에 바로 전화 드렸어요. 저희 전산 실수로 합격 문자가 잘못 가버렸네요. 혼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21세기 불운의 청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터덜터덜 문을 나 22
섰다. 어두운 풀은 내일도 무럭무럭 자라리라.
Chapter 3. 돛대 - 매너 김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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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이하 맛세이 금지_ sky blue 45.4 x 53.3 cm_ oil on canvas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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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이하 맛세이 금지_ blue 65.6 x 80 cm_ oil on canvas_ 2017 billiards pool_ 72.5 x 90.7 cm_ oil on canvas_ 2017 당구장 옷걸이_ 53.3 x 45.4 cm_ oil on canvas_ 2017 score board_ 45.4 x 53.3 cm_ oil on canvas_ 2017 큐걸이의 정석_ 45.6 x 65 cm_ oil on canvas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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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오늘 하루도 열심히 굴렀다. 아, 물론 내가 스스로 구른 것은 아 니야. 뒤에서 자꾸 콕콕 찌르니까 어 쩔 수 없이 구르는 것이지. 매일 똑 같은 장소를 종횡무진 하며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게 내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니까. 스스로 하는 일 없이 편히 산다고? 무슨 말씀을. 원치 않는데도 남한 테 등 떠밀려 사는 것만큼 피로한 일은 없다고. 그래도 내가 나와 비슷한 다른 이들을 들이받으며 내 는 소리에 나를 찾는 누군가의 스트레스가 풀린다면 내가 구르지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 굴러 주는 것일 뿐이지. 나는 점박이 흰 공이야. 사람들은 참 사연이 많아.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에 오는 사람들을 보 면 20대부터 40대 아저씨들 까지 다양한데, 저마다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 젊은 친구들, 그 중에서 도 남자 여자 같이 온 팀들은 주로 밝은 분위기 속에서 게임 을 하고 말도 많이 하는 편이야. 그런데 어떤 아저씨들은 저녁 7시 쯤 떼로 몰려와서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세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치기도 하더라니까. 그럴 때는 고요해서 좋기도 하지만 조금 심심하기도 하지. 어떤 날은 몹시 화가 난 사람들이 내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해. 하나 알려주자면, 그런 사람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해. 이 미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내기를 걸다가 점수가 잘 안 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거든. 저번에 굉장히 실력 좋은 30대 청년이 왔었는 데,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화 가 나서는 나한테 온갖 욕을 하면서 화풀이를 하지 뭐야. 나도 기 분 상해서 그 녀석이 날 쳤을 때 구 르다 말고 빨간 공 앞에서 딱 멈 춰버릴까 했다니까. 물론 그냥 해본 소리야. 그래도 이 정도는 다행 이라구. 일주일 전에는 어떤 20대 여자는 내 동료 흰 공을 던진 적 도 있어. 그 땐 빨간 공 쌍둥이랑 나 랑 모두 겁을 좀 먹었지. 나는 빨간 공을 들이받아야 하는 팔자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빨간 공들과 형 제처럼 사이 좋게 지내거든. 사람들이랑은 달리 말이야. 흰 공이랑 은 늘 경쟁하는 사이지만 우리끼30 리는 서로 약속했어. 게임의 결과에 따라 서로 미워하지 말자고. 어차피 우리는 사람들의 욕망에 따 라 움직이는 거니까.
우리 세계에서는 들이받는 일도, 들이받히는 일도 빈번해. 그래 서 언뜻 이곳의 규칙을 알게 되면 살 벌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알고보면 여긴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온정 넘치는 곳이야. 요즘 사람들은 80살도 넘게 산다던데, 여기서는 한 판이 끝나는 데 잠깐이면 돼. 아주 속도감 있지. 그리고 내 경험 에 의하면, 여기서 게임은 실제 사 람들의 삶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전개 되기도 해. 직급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실력과 감 좋은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곳이지. 그래서 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여기를 자 주 찾는 게 아닐까 해. 백미는 마지막 남은 10점을 처리하는 시간이야. 이 때는 사람들 간의 온정 넘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어. 예의를 지키는 시간이지 만, 사실은 대리만족의 시간이지. 삶이 그렇듯 게임도 너무 빨리 승 부 가 나면 재미 없는 법 아니겠어? 현실에서는 뒤만 쫓기에 급급한 삶이라도 여기에서는 상대에게 관 용을 요구할 수 있어. 상대방이 착 한 사람이라거나 지루한 걸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정 도 는 봐 줄거야. 그렇지만 착각하지마. 그렇다고 일부러 져준다거나, 현실에서도 게임처럼 봐주지는 않을 거니까. “사는 게 무슨 게임인 줄 알아?” 라는 얘기가 괜히 있는 건 아니잖아.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로 가끔은 다른 사람들 형편을 봐줄 여유 가 생길 수도 있을 테지. 그날따라 컨 디션이 좋아서 게임이 잘 풀린 다면, 상대편보다 우위에 있다는 즐거움을 한껏 누려. 이 때만큼은 나 이도 직급도 무엇도 필요 없이 승자는 당신이야. 게임의 세계는 냉정하니까 말이야. 마지막 남은 스 코어가 생각대로 잘 처리되지 않 아도 잠시는 여유 부려도 괜찮아. 그 정도는 상대방에 대한 매너로 쳐 준다구. 게임은 조금 더 시간을 유보하고,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재미있어지겠지. 그것이 바로 돛 대-매너. 내가 있는 곳에서만 통하는 훈훈한 모습이야. 내가 너무 긴 시간 혼자 떠들었네. 들어보니 어때. 우리의 세계와 당신 세계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고 생각하지 않아? 물론 나 는 내가 있는 곳이 더 경쾌하고 따듯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당신 도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들이받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날 찾아와. 난 기꺼이 내 등을 내줄 거 고, 당신은 나를 통해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게임에서 이겨야겠지만 말이야. 자,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됐어. 다음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네. 이 밤늦은 시각 에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니 까. 즐거운 시간이었어. 또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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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기울어진 방 최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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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방_ fabric, electric air pump, timer power switch and mixed media_ dimensions variable_ 2017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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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방_ fabric, electric air pump, timer power switch and mixed media_ dimensions variable_ 2017 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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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건너뛰나 했건만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보도 블럭을 어김없이 빗방울이 스르 륵 적셨다. J가 사는 아파트는 몹시 낡았지만 육중하고 튼튼한 1960 년대 아파트였고, J는 그 중에서도 2층에 있는 작은 원룸에 지 내고 있었다. 같은 모양 아파트 건물 네 채가 입 구(ᄆ)자를 형성하 고 있어 입주민들만 드나들 수 있는 중정(中庭)을 품고 있었다. 이 정원 은 이따금씩 지름길을 찾아 정원 보도블럭을 가로지르는 사람들 이나 뜬금없이 우는 새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이 정원을 향해 창이 난, 6-7평 정도 넓이에 카펫이 깔린 조용한 공간이 그녀가 먹고, 자고, 공부하는 공간이었다. 침대는 방넓이에 걸맞지 않은 크기로 공간 의 3분의 2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는 데, 접으면 소파로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쳐 접 지 않은지 오래였다. 부엌은 별도의 공간 없이 방의 한 구석에 한 사람 이 드나들 만한 너비 정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블라인드는 1년 전쯤인가 자동식으로 견고하게 수리되 어 아침에 일어나 굳이 열지 않는 이상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지리한 장마는 어두운 방을 더 어둠침침하게 만들었다. 타지에서 J의 일상은 눅눅했다. 대학원생 신분인 J에게는 간간 이 있는 수업이 그나마 정해진 일과였 는데, 그녀는 수업이 끝나면 매번 다른 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길에 있는 수많은 옷가게와 대형 마트를 하나씩 들렀고, 가끔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발견하면 한 장소에서 두 시간씩 시간을 보냈다. 빈곤 하게 짜인 일상 스케줄로 인해 그녀는 나날이 허공에 떠있는 것 같 은 기 분이었다. 이러한 감정은 밖에서 무언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거 나, 구매욕을 해소하는 것으로써 일시 적으로나마 해소되었다. 이따금 마트에서 1+1로 생필품을 끼워 파는 행사를 하면, 그녀는 횡재를 외 치며 예정에 없던 구매를 했다. 자취 3년차, 스스로 살림꾼이라고 기특해하는 J의 집에는 물건들이 어지러이 쌓여갔다. 그녀는 외출하고 나면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방 에 있으면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상기하며 곱씹어야 했 으므로. 고요하고 어둑한 방 안에 가만히 있다 보면 생각의 줄기가 머릿속을 첨벙거리며 휘저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 더라도 외출을 나섰다. 밖에서 끄는 시간은 점점 많아졌다. 그래도 가끔 사흘 정도씩은 밖에 나가지 않고 방 안에 머물러 있기도 했 다. 그럴 땐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은 TV를 벗삼아 하루를 보냈고, 가끔 노트북으로 다운로드 받아놓 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거나 SNS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렇게 며칠 흐르 고 나면 J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단조롭게 느껴져 마치 세상에 홀로 존 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 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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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도 방을 편하게 느끼는 때가 가끔 있었다. 그녀는 가 끔씩 기분 전환을 위해 지방으로 여행 을 가곤 했는데, 사나흘 정도 집을 떠나 관광을 한 후 집에 돌아올 때는 자신도 모르게 ‘아, 내 방이 다.’라며 안심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후 하루가 지나 면 J의 일상은 이전과 같았다. 어디로 가든 그녀는 마음의 평안이 갈급했다. J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친구들과 함께라 면 이 권태가 해소될 것 같았다. 주 변에 사는 친구들은 J와 비슷한 처지의 대학원생들이었으므로 저녁 시간에는 종종 만나 이야기 꽃을 피웠다. 다른 친구의 자취방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 기울이며 음악을 듣고 같이 영화를 감상했 다. 음악은 주로 가볍고 경쾌한 아 이돌 가수들의 노래를 선호했으며, 영화는 불법으로 내려 받은 히 어 로물들이 감상의 대상이었다. 많은 생각을 들이지 않아도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들과 적당히 화려 한 눈요기거리가 좋았다. 평소에는 일 반인인 영웅들이 위기가 닥치면 영웅이 되어 악당을 일망타진 한다 는 진부함은 영화 초입부터 긴장도를 떨어뜨리곤 했지만, 앞으로 일 어날 일들이 해피엔딩이라 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처럼 마음 편한 내용도 없었다. 친구들도 J와 마찬가지로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보상받는 듯했다. 친구들과 J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중에는 J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많은 고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학원에 오기 전에 겪 었던 직장에서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려주곤 했는데, 대학을 졸업 하 자마자 대학원에 진학해 사회경험이 없던 그녀에게 그것은 흥미로 운 간접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들 이 전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세상이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에선 왠지 김이 새 곤 했다. 고학력에 저임금, 남녀 차별문제, 그리고 공공연히 자행되어 왔던 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 로 J는 그들이 자신보다 더 경험이 많고 많은 인맥을 갖고 있다 는 사실에 은근한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을 만난 후면 소화제를 찾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한 날, J가 그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다 첫새벽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텅 빈 방은 작아져 있었다. *** 그 날 이후로 방의 크기는 매일매일 달라졌다. 처음 그 변화를 감지했을 때 J는 그것이 눈의 착각이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착각 이든 아니든 그 변화는 명백한 것 –이라고 적어도 그녀는 느꼈다. 집 이 작아진 날에는 도서관에서 집에 들어오는 길 식료품점에서 구 입해 놓은 와인을 혼자 홀짝홀짝 들 이켰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 를 받고 크게 화가 난 날 홧김에 한 병을 전부 마셔버린 적도 있었는 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방이 조금씩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름졌다 펴졌 다를 반복했다. 방은 마치 살아있 는 듯했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서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 믿었지만 비단 그때뿐만은 아니었다. 왜 방이 쪼그라드는 것 인지 알 턱은 없었으나, 분명 그 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현 상은 아닐 것이다. 며칠을 관찰한 끝에 그녀는 방이 원래 크기로 부 터 작아졌다 다시 돌아오기는 하지만 더 커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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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J는 방이 작아졌을 때 그 안에 갇히거나 짓눌리지 않기 위한 방법을 터득했다. 첫 번째 방법 은 집안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모두 치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물건 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인‘호더스(holders)’ 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자신의 작은 집이야말로 크기에 걸맞지 않게 물건들 로 잔뜩 채워져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일 먼저 정리한 것은 입지 않는 옷이었다. 학 교나 도서관에 갔다가 한 번씩 들러서 사온 옷들은 옷장 안을 다 메 우다 못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 한 켠에 접힌 채로 쌓여 있었다. 그녀 는 중고거래나 친구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조금씩 양을 줄여갔다. 그 다음은 책이었다. 그녀는 가끔 지 적 호기심을 충족한다는 명목으 로 전공과 관련된 이론서들을 열렬히 검색하고 구매했는데, 대부분 은 앞부분만 읽다가 결국 방치되기 일쑤였다. 때로는 자기계발서와 같은 교양서적들도 있었다. 성공 을 위한 전략, 대화의 기술, 상처받 지 않는 법에 대한 책들을 과감히 버렸다. 두 번째 방법은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J는 외출의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수업이 없 는 날 그녀는 방 안에서 고독을 마주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것이 답답하고 밖의 공기를 쐬 거나 쇼핑을 하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혔지만 그 때는 정리하고 남은 책들을 읽거나 메모장에 혼자 뭔가를 끄적이며 생각을 정리했 다. 작아진 방에서는 특히나 행동반경을 최소화해야 했기에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최대한 많이 개발했다. 예를 들 면 가만히 앉아서 사색을 한다거 나, 라디오를 듣는다거나 하는 것들 이었다. J는 이전처럼 친구들을 만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다. 가끔 씩 여전히 친한 친구들을 만나곤 했지만 매일같이 밤을 새며 노는 일은 없었다. 주름졌던 벽은 조금씩 예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듯 보 였다. 방 곳곳 주름 틈새에 낀 찌꺼기들을 정리하며 그녀는 하 루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흘러 J는 그 동안의 대학원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약 2년간의 생활을 정리하며 그녀는 더 큰 공간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방은 아직도 여전히 움직이기를 반복했지만 이전처럼 급 격히 수축하거나 팽창하지는 않았다. 천장 한 쪽은 10센티 정도 아래로 무너진 것처럼 내려온 채 고 정되어 있으며, 바닥의 카펫은 시간이 지나면서 군데군데 얼룩져있었다. 하얀 벽은 그 동안 반복된 운동으로 인해 쭈글쭈글한 주름 자국이 역력했는데, 벽은 색소가 침 착된 피부처럼 누런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짐을 정리하며 벽 을 어루만졌다. 유리창을 통해 하얀 햇살이 방안으로 쏟아졌고 정 원 에서는 새들이 이따금씩 짹짹거렸다. ‘이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군.’ 그녀는 생각했다. 이삿 짐은 간소해서 용달 트럭 한 대면 충분했다. 짐을 다 싣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집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을 망설이듯 서서 바라보다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렸 다. 문을 닫고 나오려는 순간 그녀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반듯하 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떠나는 주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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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방_ fabric, electric air pump, timer power switch and mixed media_ dimensions variable_ 2017 installation view 38
Chapter 5. 의혹의 바다생물 이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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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슴_ 폴프로프 오염_ 돌연변이(비디오 스틸)_ 비디오_ 02분32초_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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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슴 화석_ 동물 두개골 외 혼합재료_ 가변크기_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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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만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에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나타나기도 이전, 그러 니까 아마도 중생대에서도 우리가 쥬라기와 백악기로 기억하는 그 때쯤 탄생한 생물들이 있었다. 그 것 들은 공룡처럼 위용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군집을 형성하며 오랜 시간 비밀스럽게 생존해 왔다. 그들은 깊은 산 속, 호수, 바다에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만 아주 이따금씩 자신들의 존재를 보 여주곤 했다. 인류가 출현한 이후에도 그들은 다른 종들과 달리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시간이 흘러 전세계 각지 로 흩어진 그들은 어쩌다 눈 덮인 산에서 목격되는 경우엔 ‘예티’, 큰 호수에서 형체가 목격되면 네시, ‘싱크홀 샘’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그들은 매번 각기 다른 모습들로 발견되며 무성한 소문 들을 만들어냈고, 나타나지 않을수록 존재감을 발산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은 대단해서 그들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는 곳이면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과학자들도 그 들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탐사와 연구를 거듭했다. 전문가들은 기자회견과 학술지를 통해 무수한 가 능성에 대해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그들은 더 욱 몸을 숨겼으며, 아직 발견 되지 않은 의혹의 생물들은 숨을 죽이고 살았다. 심해에 살던 그들 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르륵. 그러던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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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도시의 유령 권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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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5월의 어느 하루, 도시의 유령 H는 커피숍의 야외 테라 스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엇 이 그리들 바쁜지 하나같이 종종걸음들이다. 투명한 파일 케이스를 옆 구리에 낀 채 하이톤의 목소리로 통화하며 지나가는 여대생, 서류 가방을 한 손에 들고 급히 뛰어가 며 택시를 타는 아저씨, 몹시 소중 한 듯 작은 봉투를 꼬깃꼬깃 접어서 옆으로 맨 크로스백에 넣으며 은행 건물을 빠져나오는 허리가 등나무처럼 굽은 할머니, 그리고 H 또래의 -아마도 한 달 전쯤부터 그곳에서 치안을 담당했으리라- 친절하게 할머니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깔끔하게 각 잡힌 제복의 20 대 후반의 사내까지. 벌써 한 시간째 H는 그곳에 앉아서 구경 중이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상의 시나리오를 써본다. 목소리 톤이 높은 여대생은 지금 막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빠져 나와 친구와 함께 새로 생긴 이탈 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고 약속을 잡는 중이고, 서류 가방을 든 아저씨는 거래업체에 발주한 물품의 수량이 잘못된 것을 보고 받자마자 점심 먹을 틈도 없이 헐 레벌떡 회사로 들어가는 것이다. 은행에서 나오는 할머니는 그간 김 밥을 팔며 꾸준히 저축한 돈을 인출해서 내일 모레면 찾아올 손주 들 에게 용돈 삼아 주기 위해 봉투에 넣고 누가 볼세라 가방에 넣은 것 이고. 아니, 어쩌면 이 할머니 는 안타깝게도 보이스 피싱에 당한 걸 지도 모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할머니의 시선은 오히려 그 런 것 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바로 옆에 국민 의 지팡이 경찰은 그 문을 열 어준 게 아닌가. 내일이면 인터넷 기사 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릴지도 모른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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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유령 installation view Three Blocks_ Painting installation_ Acrylic, Enamel on Canvas, Plastic chain_ 45.5 x 38 x 10 cm (3 in a set)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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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유령 installation view Wall with stripes2_ Acrylic_ Enamel on Canvas_ 35 x 27cm_ 2016 Wall Tiles_ Acrylic_ Enamel on Canvas_ 27 x 22 cm_ 2017
70대 할머니, 10년간 알뜰살뜰 모은 3000만원 신종 보이스 피싱 사기 로 몽땅 날려 유령이 혼자 키득거리며 웃는다. 이 도시에서 유령으로 생활한 지도 벌써 4년차. 그는 혼자 노는 법도, 사소한 것으로부터 재미를 발견 하는 능력도 충만하다. 예전 기 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단연코 즐거운 놀이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풍경을 보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시나리오 놀이가 지루해진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린 다. 테라스 옆의 옆 자리에는 한 커 플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으며, 커피숍 내부에도 몇 개의 빈 테이블을 제외하면 손님들이 모두 자 리 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중 누구와 눈이 마주친다거나 인사 를 건넬 일은 없다. 어차피 이미 이런 삶에는 익숙하니 별로 상관은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테라스 자리로부터 연 장 되어 있는 보도블럭에 멈춘다. 그리고 길 맞은 편에 있는 건물의 담 벼락으로 이어진다. 담벼락에 는 전단이 붙었던 흔적이 덕지덕지 있 고, 전단 귀퉁이는 찢어진 채로 미처 떨어지지 않아 그대로 붙 어있 는 모양새가 마치 폐허 같은 인상을 준다. 그 아래에는 공사장에서 나 볼 법한 구조물들과 벽돌 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데, 왜 저기 저렇게 덩그러니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곳 저곳 가보지 않 은 곳 이 없었는데, 유령으로 지내며 오늘에서야 저런 것들이 있었나 하고 H는 은근히 놀란다. 하지 만 어차피 저런 것들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으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는 한참 동안을 벽 돌에서 눈길 을 떼지 못한다. 기억을 곱씹던 그에게 엄마 손을 붙잡고 저 멀리서부터 오는 아 이가 눈에 들어온다. 7-8살쯤 되어 보 이는, 어깨까지 오는 길지 않 은 머리를 양 갈래로 곱게 땋은 여자아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이 천진 해 보이는 아이는 엄마와 연신 눈을 마주친다. ‘아, 저 아이 분 명 며칠 전에도 여기를 지나갔었지.’ 라 고 H는 생각한다. 아이는 행복한 표정으로 엄마를 올려다보며 재잘거린다. 아이가 천천히 고 개를 돌 린다. 그리고 이내 이쪽을 바라본다. H는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착각일 것이다. 어차피 그 의 존재를 알아 차린 이는 4년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손가 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엄마를 향해 뒤를 돌아보며 뭐라 말하며 오는 데, 아마도 뭔가를 것을 발견한 듯하다. 그러나 엄마는 길거리에 있 는 좌판 상인과 잠시 이야기하느라 아이의 얘기를 듣지는 못한다. 그러다 아이의 발걸음은 H 앞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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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 오빠 여기 또 있어. 그저께도 여기 있었는데” “......” 놀란 H의 입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그를 알아본 것 일까. 순간 H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오빠야, 울어? 왜 울어. 울지마” ‘어떻게 된 거지.’ 까닭 모를 눈물이 도무지 멈추지를 않는다. 그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릎에 파묻은 채 한동안 말 없이 흐 느낀다. 아이는 잠시 당황한 듯 눈썹을 실룩대다가 한 손으로 그의 등을 살살 어루만진다. 마치 자기보다도 어린 동생을 달래듯이. 아이의 손길이 닿자 그는 그 동안 너무나도 절실히 누군가가 자 신을 알아봐주길 바랐다는 것을 깨닫 는다. 너무나도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신을. 그렇다. 그는 죽지 않았다. 4년 전, 이 도시로 흘 러 들어온 이후 그는 혼자였다. 그도 처음에는 꿈을 갖고 있었고, 이 곳에 녹아 들기를 희망했으며, 도시 의 구성원이 되고 싶었으리라. 그 러나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 환경, 분위기 속에서 이곳의 사람이 되 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인 자신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듯했고, 도시와 그의 거리는 좁혀 지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을 마주하 지 않고자 스스로 유령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래야 상처받지 않 을 수 있었으니까. 아아, 그는 살아있다. 한참을 울다 그는 고개를 든다. 아이를 바라보며 그는 엷은 미 소를 짓는다. 아이의 엄마가 뒤에서 아이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잠시 이야기에 정신을 판 사이 아이가 보이 지 않아 놀란 모양이다. 아이 는 몸을 돌려 엄마가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 엄마 손을 붙잡은 아이 는 흘끗 뒤를 돌아본 뒤 손을 가볍게 두세 번 흔들더니, 곧 엄마와 함께 멀리 사라진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H는 잠시 동안 서 있다 가 아이가 사라진 반대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그 날 이후, 더 이상 도시에 유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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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내일없는 오늘 조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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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ape with_ 장지에 혼합재료_ 116 x 78 cm_ 2017
escape with us_ 장지에 채색_ 45.5 x 53 cm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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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epin‘ on(1)_ 장지에 채색_ 65 x 53 cm_ 2017
keepin‘ on(2)_ 장지에 채색_ 65 x 53 cm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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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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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대학교 후배이자 회사 후배였던 K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 히 아름답고 총명했다. 그녀와 나는 학생일 때 자주 오던 카페에서 만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함께 이 야 기하며 정보를 나누곤 했다. 우리는 같은 직종을 희망했기에 이야 기가 잘 통했다. 그녀와 나는 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20대 때 몸이 부서져라 일했고, 건강에 무리가 오는 바람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3 년 만에 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2년 뒤 오늘, 우리는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K는 얼 마 전에 대기업 계약직 입사 시험을 준 비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 는 면접에서 면접관으로부터 받은 질문이 적잖이 굴욕인 모양이었다.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반쯤 눈을 내리 깐 채 턱을 괴고 앉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면접관의 질문이었다. “희망 연봉이 어떻 게 돼요? 전에는 얼마 받으셨고?” 옆에 다른 지원자들도 줄줄이 앉 아 있는데 그 같은 질문을 하니, 눈치가 보여도 너무 보였다는 것이 다.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녀는 조 심스럽게 전 직장에서 받은 급 여 액수를 이야기했다고 했다. 경력직으로 면접 보는 것이지만, 그보 다 더 많이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내게 직장에 꼭 붙어있으라고, 누구나 힘든 것 아니겠느냐며 면접 보러 다니며 수입도 없이 있는 것보다는 육체 고단해도 뭐라도 하는 것이 낫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연신 물을 들이켰다. “선배, 나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무슨 얘기야?” “다른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낮은 가격에 날 고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는 거 말이야. 그 땐 중고 경매상품이 된 것 같았다구.” 일순간 그녀의 눈이 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가슴 한 구석이 먹먹했다.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촉망 받는 인재였으니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넌 잘 될 거야’라고, 으레 할 법한 그런 위로의 말을 여러 번 해주었다. 마음을 추스리는 데는 여 행이 제격이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5월에는 기분 전환하러 제주 도 여행을 생각 중이니 그 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 는 자신이 지원했던 회사에 불합격 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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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나를 아직 써주는 데가 있으니 얼마 나 다행인가. 여전히 일을 하고, 다달이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고, 적 금도 들 수 있고. 매일 죽네 사네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나름 운 동으로 체력을 관리하고 있으니. 회 사 빌딩 지하1층에 위치한 커피 숍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진하게 주문했다. 직원들에게만 주는 30% 할 인혜택도 받고, 샷도 추가하고, 캬라멜 시럽도 뿌렸다. 쿠폰에 적 립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호사 를 누리는 기분을 선물하고 싶 어졌다. 어깨에 왠지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 다음 달에 있 을 행사 준비를 위해 한 달 정도 야근은 기꺼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털썩 소파에 주저 앉았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이다. 오늘은 몹시 피곤했지만, 왠지 특별한 하루 아닌가. 기운 없던 후배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곱씹어보다 문득, 스스 로가 너무 역하게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 다. 이내 나는 다시 깊은 숨을 내 쉬었다. 여행 같은 건 지금은 너무 사치일 수도 있다. 나중에 더 여 유가 생기면 언젠가는 갈 수 있을 테니 당분간 미루는 것이 좋다. 비록 어제 잠을 잘 못 이루었고, 상 사로부터 욕을 들었고, 일주일 동 안 매일 야근을 했지만 그런 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그저 오 늘 하루만 잘 버텨내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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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공간의 기억 : 시간의 조각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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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맵핑: #1 시간의 조각들 (2015.10/ 2015.11/ 2015.12/ 2016.01/ 2016.02)_ 우레탄경질, 우레탄페인팅_ 가변설치(5 in set_15 x 10 x 6 cm_ 8 x 9 x 7 cm_ 7 x 5 x 5 cm_ 8 x 9 x 6 cm_ 2 x 2 x 6.4 cm)_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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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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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일까. 유리창을 가리고 있는 흰색 있는 커튼, 그리고 화병에 꽂힌 알록달록한 꽃, 책장과 책상, 옷장이 방에 있는 전부였다. 몸을 일으켜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 본다.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누군지, 여긴 어딘지. 자꾸 생각을 하려고 애쓰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이마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른다. 분명 어 느 날 잠이 들었을 거고 나는 지금 일어난 것일 텐데 이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나는 누구일까? 언뜻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니 벽에는 누가 붙여놓은 것인지 는 모르겠지만 별자리 그림들이 즐비하다. 아 니, 이게 별자리가 맞나? 잘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선을 이어 놓은 흔적들이 검은 그림 위에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숫자들. 나는 우주 과학을 좋아하던 사람이었 을까? *** 아직은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책상 위에 놓인 책들과 지갑 속에 있던 신분증 등을 통해 내가 33살 이며, 인테리어와 관련 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족에 대한 건 아직 잘 모르 겠다. 그리고 컴퓨터 속에서 발견한 사업자 등록증을 보니 아마도 나는 프리랜서인 것 같다. 가방 속을 뒤지다 수첩을 한 권 발견 했다. 그곳에는 날마다 내가 이동했던 지점들과 그곳에서의 감상들이 메모 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일부 터 수첩에 적힌 것처럼 이곳 저곳 을 가보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내일부터 나는 내가 가는 곳 들을 상 세하게 기록해볼 것이다. *** 첫째 날. 행선지는 종로다. 종로에 있는 L 서점 안을 한 바퀴 돌며 두 시간 가량을 서성였다. 이곳에서 사뭇 기 분이 좋은 것을 보 니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걸어서 을 지로로 향했다. 이곳 은 정신이 없다. 빵빵거리는 차들과 북적이는 사 람들. 나는 붐비는 것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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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째. 오늘은 다른 곳을 가보려고 한다 . 목표는 강남역 일대다. 수많은 영어학원들과 성형외과 의 원들. 화장품 가게들이 즐비했다 . 큰 대로변에서 골목 안으로 접어드니 안쪽은 그래도 조금 덜 복잡 한 것 같았다. 나는 골목 안에 위치한 사진관에 들러 증명사진을 찍었 다 . 사진을 보아도 내 얼굴은 낯설기만 하다. 이곳은 정신 없는 동네 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는 않다 . 선릉역으로 이동해 수첩 속에 적 혀 있던 의문의 주소로 찾아갔다 . 상가 건물 2층, 작은 홍보 대행사 로 보이는 이 회사와 아 마도 나는 같이 일을 했던 것 같다 .
* 7일째. 동대문에 있는 D 플라자에 다녀왔다. 우주선을 닮은 그 곳에서 열리고 있는 어린이 디자인 박람회에서 아기자기한 가구들을 보았다 . 그리고 종로 5가에 위치한 광장시장에 들렀다 . 시장에서 유 명하다는 빈대떡을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린이 용 가구를 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아직 혼자인 걸까 .
* 16일째. 매일 밖으로 나가고 있다 . 처음엔 힘들었지만 매일 걷 다 보니 점점 익숙해진다 . 오늘은 약 간 북쪽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 광화문에서부터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경복궁을 지나 서촌 지역을 걸었다. 경복궁 역 근처 카페에 들려 잠시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이 기분이 좋다. 서촌의 한 갤러리에 들 어가서 어느 회화 작가의 개인전을 보았다 . 전시를 보는 것은 재미 있다.
* 24일째. 오늘 다시 종로를 찾았다 . 인사동 일대에서 하염없이 걸었다 . 길을 걷다가 전화를 한 통 받 았다. 모르는 번호여서 한참을 망설이다 받았는데 , 전화기 너머 상대방은 자신이 나의 어머니라고 했다.
* 33일째. 오늘도 나는 걷는다. 이렇게 걷다 보니 조금씩 나에 대 한 단서가 잡히는 것 같다 . 나는 매 운 음식을 좋아하고, 운동 신경이 매우 뛰어나다 .
*** 내가 깨어난 후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점점 내가 좋아하 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고,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이 걸으면서 조 금씩 명확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직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남긴 흔적들이 모여 점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아마 이 세계는 끝내 완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움직임에 따라 시간의 두께는 쌓이고, 이렇게 매일 쌓이는 시간의 끝에 나는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 고 남은 날도 나의 걸음은 이어진다. 이 기록은 계속될 것이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그래서 마침내 세계 속 온전한 나 자신을 만 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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