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호

Page 18

칼럼

광주학생독립운동 제77주년을 맞이하여 민 명 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35회)

본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지배에 항거하여

1984년 학생의 날을 부활 하였으나 평범한 학생

광주에서부터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광주

의 날로 강등되어 그 거룩한 의미가 점점 퇴색되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로 77주년이 되었

어 가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었는데 알고 계시는

다.

바와 같이 그동안“학생의 날” 이 지난 2월 9일

1929년 11월 3일은 일본 명치왕의 탄생기념일

국회 본회의에서‘학생독립운동기념일’ 로 제정되

인 명치절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음력 10월 3일은

어 한층 위상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국조 단군이 개국하신 개천절이었다.

기념식을 정부가 주관하여 성대하게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개천절에 신사 참배를 강요당했으니 민 족적 울분이 솟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참배를

이와 같은 성과는 오로지 그동안 회원님들의

거부하던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충돌하고 성

관심과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되어

진회, 독서회, 소녀회 등 학생 비밀 조직과 신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회, 근우회 등 사회 단체의 지원과 참여가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으로 확산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 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의 학생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

들이 주축이 된 항일시위에서 비롯되어 전국 곳곳

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 농민, 학생운동의

에서 시위나 동맹휴학 등의 형태로 계속되어 전국

성장 등 국내외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이루

적으로 194개 학교가 참가하였고, 참가 학생수는

어져 일어난 것이다.

무려 54,000명으로 당시 우리나라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

투쟁했던 거국적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의 결과 1

과 함께 3대 민족운동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4·

천 5백여명이 구속되고 3천여명이 퇴학이나 무기

19혁명과 5·18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자랑스

정학을 당하는 등 커다란 희생을 치르기도 하였

런 우리 민족의 유산입니다. 이 자랑스런 유산을

다.

미래의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계승하고 선열들의 애국, 애족 정신을 승화시켜 나라사랑 정신을 가

1954년 국회에서 학생의 날을 제정 하였으나 얼룩진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1973년 3월 유신정 권때 학생의 날이 폐지 되었다가 11년이 지난

16 제42호 동창회보

슴깊이 새기도록 우리 모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야 할 때다.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