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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NONIA

Contents

Editor’s Preface₩₩₩₩₩₩₩₩₩₩₩₩₩₩₩₩₩₩₩₩₩₩₩₩₩₩₩₩₩₩₩₩ Thomas Timpte, OSB Discretio in St. Benedict’s Rule ₩₩₩₩₩₩₩₩₩₩₩₩₩₩₩₩₩₩₩₩ Sakakuchi Kokichi The Other Side of Leadership ₩₩₩₩₩₩₩₩₩₩₩₩₩₩₩₩₩₩₩₩₩₩₩₩₩₩ Joan Chittister The Superior’s New Identity ₩₩₩₩₩₩₩₩₩₩₩₩₩₩₩₩₩₩₩₩ Josepha Chang OCSO Tradition of Hospitality in Benedictine Life Today ₩₩₩₩₩ Jonas Lee OSB Benedict and the Future of Europe ₩₩₩₩₩₩₩₩₩₩₩₩₩₩₩₩₩₩₩ Rowan Williams Life of Saint Macrina ₩₩₩₩₩₩₩₩₩₩₩₩₩₩₩₩₩₩₩₩₩₩₩₩₩₩₩₩₩₩₩ Gregory of Nissa Ad Virginem ₩₩₩₩₩₩₩₩₩₩₩₩₩₩₩₩₩₩₩₩₩₩₩₩₩₩₩₩₩₩₩₩₩₩₩₩₩₩ Evagrius Ponticus Gnostikos ₩₩₩₩₩₩₩₩₩₩₩₩₩₩₩₩₩₩₩₩₩₩₩₩₩₩₩₩₩₩₩₩₩₩₩₩₩₩₩₩₩₩₩Evagrius Ponticus Collationes Abbatis Sereni = Coll. VII, VIII ₩₩₩₩₩₩₩₩₩ Joannes Cassianus Constitution of the Benedictine Union of Korea

Vol. 32, 2007 Summer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단편들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표지 설명 : 가르치는 그리스도(이콘, 마케도니아, 1653)


11. 편집 서언₩₩₩₩₩₩₩₩₩₩₩₩₩₩₩₩₩₩₩₩₩₩₩₩₩₩₩₩₩₩₩₩₩₩₩₩₩₩₩₩₩₩₩₩₩₩₩₩₩5 진 토마스 12.“성 베네딕도 규칙”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 ₩₩₩₩₩₩₩₩₩₩7 사가구지 고기지, 황춘흥 다미아노 옮김 13. 리더쉽의 또 다른 면: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 ₩₩₩₩₩₩₩₩₩26 조안 치티스터, 한정희 프랑카 옮김 14. 장상됨의 새로운 정체성 ₩₩₩₩₩₩₩₩₩₩₩₩₩₩₩₩₩₩₩₩₩₩₩₩₩₩₩₩₩₩₩₩₩34 장혜경 요세파 15. 환대 전통과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53 이연학 요나 16. 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 ₩₩₩₩₩₩₩₩₩₩₩₩₩₩₩₩₩₩₩₩₩₩₩₩₩₩₩₩₩₩75 로완 윌리암스, 조성옥 에노스 옮김 17. 성 마크리나의 생애 ₩₩₩₩₩₩₩₩₩₩₩₩₩₩₩₩₩₩₩₩₩₩₩₩₩₩₩₩₩₩₩₩₩₩₩₩₩₩92 닛사의 성 그레고리오, 장영주 예로니모 옮김, 허성석 로무알도 주해 18. 동정녀에게 준 권고₩₩₩₩₩₩₩₩₩₩₩₩₩₩₩₩₩₩₩₩₩₩₩₩₩₩₩₩₩₩₩₩₩₩₩₩₩14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19. 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152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10. 세레노 아빠스의 둘째 담화 ₩₩₩₩₩₩₩₩₩₩₩₩₩₩₩₩₩₩₩₩₩₩₩₩₩₩₩₩₩173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11. 한국 베네딕도회 협의회 회칙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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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독자 여러분도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이번 코이노니아 32호를 한참 준비 하는 와중에 지난 4월 6일 성금요일 밤에 왜관 수도원은 뜻밖의 변을 당하였 다. 그날 화재로 본인의 모든 원고도 숯과 연기로 변했다. 그런데 이번에 낼 코이노니아 32호의 원고만은 이미 뛰쳐나왔던 방에 다시 올라가서 노트북과 함께 살릴 수 있었다. 가시아노 담화의 원본도 타버렸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에 번역을 이미 마쳤다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언제나처럼 앞부분에 여러 가지 논문을 싣고 뒷부분에는 고전문헌을 실었 다. 우선 베네딕도 성인의 특징으로 알려진 분별력에 대한 연구를 우리 원로 인 황 다미아노 신부가 일본 말에서 번역하였다. 그 다음에 베네딕도 다운 리 더쉽에 대한 두 가지 고찰이 나오는데 하나는 미국 베네딕도회 수녀들 가운데 현대의 저자로 가장 알려진 조안 치티스터(Joan Chittister) 수녀의 것이며 또 하나는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장 장 요셉파 수녀가 쓴 것이다. 특 히 번역문이 아니고 자신의 신념과 경험에 의해 저술한 글이기 때문에 더욱 기쁘게 실었다. 이 요나 고성 올리베따노의 수도원장의 현대에 대한 강의도 이론이 아니고 현대의 상황에 맞는 고찰로 우리 모두에게 많은 반성 거리와 자극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 31호에 이어 다시 캔터베리 대주 교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의 강의를 두었다. 로마 성 안셀모 (Sant’Anselmo) 대학에서 베네딕도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한 강좌인데 그 가 베네딕도 성인의 사상을 얼마나 깊이 파악하는 지에 대해 다시 놀랐다. 그 리고 그 사상의 시사성을 부각시키는 특별한 통찰력이 있는 것 같다. 윌리암 스 대주교는 본래 교부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강의의 제목이“베네딕도와 유 럽의 미래”이기 때문에 과연 동양인들에게 필요한 말인지 물어볼 수도 있겠지 만 베네딕도의 시간 개념, 순종과 참여의 사상에 대한 그의 고찰은 세계화 시 대인 오늘 우리 상황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학적 소 질이 있는 그의 문장을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올리베따노회 에노스 수 녀의 솜씨로 지난번보다 작업이 더 만족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번에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대 수도승 세계에 많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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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 세 가지 문헌을 실었다. 하나는 성녀 마크리나의 생애인데 4-5세기에 생긴 수도승 문학 가운데 여성에 대한 것으로 우리의 흥미를 끌 수 있다. 마크 리나 성녀는 바실리오, 닛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 세 성인들의 누나로 그 할머니 마크리나와 함께 그 성인 가정 가운데서도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남동생들의 스승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생활의 이론가와 가시아노의 스승인 에바그리우스의 간단한 글 뒤에는 다시 가시아노의 두 개의 담화를 실었다. 이번에는 본문 가운데서 상 당한 부분을 생략했다. 그 이유는 그 내용이 현대의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다 고 생각했고, 가시아노 담화집 전체의 번역계획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가시아 노의 담화집은 분량이 서로 다른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 번역으로 제 1 권의 10개의 담화를 모두 한국말로 옮기는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1984년 (코이노니아 제 8집)에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본인은 가장 중대한 몇 개의 담화만 번역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순서 없이 세 권 중에 시사성 있다 고 생각한 것을 종종 번역했다. 그러나 반응이 좋은 것을 보고 1991년 이후 에 좀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으며, 오래 살면 전체를 마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가시아노의 독일어 완역은 1880년경에 나온 것으로 구하기 어려워서 본인 학생 시절에 라틴어 본문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도 서실 밖에 없는 교부 전집(Migne Patrologia Latina) 한 권을 개인 방에 가 지고 왔더니 도서관 책임 신부의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뒤에 프랑스어 와 영어 완역이 나와서 가시아노의 지극히 길고 지나치게 풍부한 문장을 옮기 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시아노에 대해 코이노니아 선집 6권, 249-250쪽 의 역자 서론(코이노니아 8집 76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끝으로 한국 베네딕도회 협의회 회칙을 덧붙였다. 1980년경에 처음 자발적 으로 시작된 이 모임의 성격은 이제 특히 이 시몬 아빠스의 주도에 의해 더 분 명해졌다. 글을 제공한 분들과 번역에 수고한 분, 인쇄를 맡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형제자매 가운데 이런 저런 기회에 했던 강의나 번역한 글을 편집인에게 보낼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다. 2007년 6월 중순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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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규칙” 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1) 사가구지 고기지 황 춘흥 다미아노 옮김

Ⅰ. Discretio의 의 의의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관해서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규칙 에 관해 듣지 못한 것도 역시 많지만, 그런 것들은 너무 전문적인 것이어 서 덮어두고, 규칙의 내용 중에 성 베네딕도의 정신의 핵심이 되는 몇 가 지를 골라 살펴보도록 하겠다. 베네딕도의 유일한 전기 작가인 교황 대 성 그레그리오는 593년 내지 594년에 쓴 대화집 제2권 36절에서“그는 (베네딕도) 수도승들을 위해 분별(discretio)에 있어 탁월한 규칙을 저술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베네딕도를 가장 잘 이해했던 교황은 규칙 의 기본적 정신을“분별”이라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 리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이 말이 지닌 함축성 과 수도 규율 안에서 갖는 그 뜻을 철저하게 알아 밝힐 필요가 있다. 대화집 2권 36절의 말씀은 아래와 같은데 이는 규칙서 내용의 설명이 다.“그분은 수도승들을 위해 규칙서를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로 저술하셨다”2). 라틴-한글 사전의 discretio: 1, 구별, 식별, 판별, 준별. 2, 사려분별, 신중. ‐‐‐‐‐‐‐‐‐‐‐‐‐‐‐‐‐‐‐‐‐‐‐‐‐‐‐‐

1) 이것은 일본 동경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상지대학교 중세사상연구소가 펴낸“성 베 네딕도와 수도원 문화” 에 실린 사가구지 고기지 교수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2) 그레고리오 대종“베네딕도 전기” , 교부 문헌 총서 11(분도출판사),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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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규칙”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

Ⅱ. Discretio의 의 역사 (1) 고 전 적 전 통 Discretio라는 말을 방금 단순히 분별(分別)이라고 번역했지만 그 의미 는 매우 넓고, 그리스 로마적 예지와 그리스도교 정신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 안에서 보는 그 사용을 음미 하기에 앞서 근본적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다. 어원적으로 볼 때 discretio는 원래‘끊다, 가르다, 채로 쳐서 거르다, 구별하다, 결정하다, 감각적으로 여러 성질을 식별하다’와 같은 의미를 포함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윤리학에서 일반적으로‘선과 악을 구별하다’,‘참된 것과 거짓을 식별하다’의 뜻으로 쓰이던 말이다. 그러나 discretio 내지 discernere는‘측정하다, 제한하다, 적당하게 하다, 조화를 주다’의 뜻도 가지고, 객관적인 균형과 질서에 절도와 중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요구로서 종교, 도덕, 철학, 문학, 의학, 정치학, 미술 등 모든 영역에 불가결의 요소였다.“무엇이든지 도를 넘지 말라.”분별이란 상황 을 파악하는 통찰과 예감과 함께 따뜻하고 적극적인 선의, 온화하고 안정 된 감정과 행동에로 이끄는 힘을 가진 것이다. 성 베네딕도를 비롯해 그 리스도교 저작가의 discretio의 개념 안에는 중용과 절도를 근간으로 한 네 개의 중추덕이 집약된 고전적 윤리사상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추덕이란 현명, 정의, 불굴, 절제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인간의 노력의 소산인 자연덕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discretio 개념 안에는 은 총의 도움을 받아 더 높은 완성에 달한 초자연적 덕이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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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성서적 계 통 구약성서 안에는 discretio 개념이 적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 문학 안에는 discretio의 덕을 가리키는 곳이 여럿 있다. 특 히 부에 대해서 잠언은“부가 야훼에 대한 외경이나 가족화합과 함께 하 지 않으면 결코 행복의 씨가 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또 급하게 재산을 만들려 하지 말라고 전한다. 왜냐하면“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자는 벌 받지 않고는 못 견디기”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한다.“가난하게 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야훼가 다 뭐냐?’라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 30,8-9). 여기서 보는 것도“무슨 일이든 도를 넘지 말라”이다. 집회서에는 이런 말도 있 다.“하느님은 당신 정의를 자애 깊은 중용으로 부드럽게 해서, 죄인에게 인내를 보이시고, 벌을 주어, 그들이 통회할 때를 주셨다.”(집회 12,10).

(3) 신약성서적 전 통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와 discretio의 결합은 신약성서에 있어 한 층 더 뚜렷해진다. 이사야서에 있는 야훼의 종의 온정과 자애에 관해 “(그는)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하 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하며”(42,3)라는 표현을 마태오 12,20은 그리 스도의 예표라고 해석하고 있다. 에제키엘서에 있는 바와 같이“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고, 그가 그 길에서 돌아서 살기를”(33,11) 원하 고 계신다. 그리스도는“온유한 사람은 땅을 약속 받으리니”(마태 5,5)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당신을 거부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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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며 그들을 태워버리기를 원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지나침을 징계하신다 (루카 9,55). 사도 바오로는 중용의 정신을 장려한다.“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몫에 따라 건전한 생각을 품으시오.”(로마 12,3). 바오로의 이러한 일반적 원리는 그리스적 중용 의 정신을 초자연적 질서 안에, 즉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은총에 따라 더 정확하게 더 유연하게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여 러분의 친절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기 바랍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습 니다.”(필립 4,5) 그리고“때를 선용하시오. 소금으로 맛을 내듯 말을 하 여 언제나 호감을 주도록 하시오. 여러분도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아 두어야 합니다.”(콜로 4,5-6)라는 그의 말은 비 그리스도인과 접촉할 때의 discretio를 선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또 바오로는“먹을 것 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사 람들을 몰락과 파멸로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여러 가지 욕심에 떨어집니다.”(1티모 6,8-9)라고 해서 의식에 있어 discretio 를 약간 금욕적 색채로 묘사하고 가르치지만, 또한“이제부터는 물만 마 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티모 5,23)라고 해서 수도생활에 있어서도 중용의 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 나 특히 바오로한테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는 대목에서 “어떤 이에게는 영을 식별하는 은사가”(1코린 12,10)라��� 발언이 있다. 이것은 인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영을 똑바로 보고, 그것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나 악마한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 리키고 있다. 더구나 그 능력 자체가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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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인간의 사려분별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예수가 가르친 윤리가 단지 형식적 금욕주의가 아니며 향락주의나 범용한 중도주의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성령을 통하여 밝혀지는 하느님의 의지에의 절대적 순종에서 성립된다고 하면, 이 바오로의 한 마디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와 수도의 뿌 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4) 교 부 적 수도원적 전 통 수도원 전통 안에서 특히 살아난 것은 바오로의 이 발상이었다. 수도제 도의 조상 사막의 안토니오의 친구였던 성 아타나시오는 안토니오의 영 을 식별하는 재능을 칭찬하고 있다. 수도자는 기적을 향할 능력을 꼭 필 요로 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도 영을 식별하는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가 마음의 불안이나, 천사로 변해서 나타나는 악마와 싸우기 위 해서는 유혹과 거룩한 발상, 좋은 영과 악한 영을 분별해야 한다. 영혼의 지도자인 포이멘은 똑똑히 말하고 있다. 또한 안토니오의 격언으로서 전 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많은 사람이 금욕 그 자체를 비난하 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구체적 상황에 맞지 않는 그 무분별, 무계획, 무사려한 강행을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원장 포이멘은 말한다.“많은 사람이 늘 도끼를 가지고 있다. 그런 데도 어떻게 나무를 찍어 넘길지를 모른다. 다른 사람은 찍어 넘기는 데 에 익숙해 있어서 단지 몇 번 찍어서 넘어뜨린다.”이 도끼야말로 discretio이다. 그것은 수도자가 많은 경우에 그 갖가지 상황을 파악하는 세세한 식별이라고 해도 좋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두 가지 있다. 첫째 이야기는 수도자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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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통상적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고기가 나온다. 사람들 은 그것을 먹는다. 그런데 포이멘은 그것을 먹지 않는다. discretio를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후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당신은 포이멘이지 요? 왜 그런 일을 했습니까?”그는 답했다.“실례를 용서하시오. 당신들 이 고기를 먹어도 아무도 어떤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먹으면 아주 많은 수도자가 보고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그들은 유감스 럽게 생각하고 말할 것입니다.‘포이멘이 고기를 먹고 있다. 그런데도 우 리는 먹지 않는다’고.”거기서 모든 사람들은 그의 discretio를 칭찬했다 고 한다. 둘째 이야기는 세 명의 수도자가 수도원장 아킬라스에게 그가 손으로 만든 그물을 청한다. 아킬라스는 처음 두 사람에게는 거절하고 셋째 수도 자에게 그물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평판이 나쁜 수도자였다. 아킬라스는 일부러 까닭이 있는 자에게 수제(手製)의 그물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먼저 두 사람은 원장이 짤 시간이 없었겠다고 생각해서 별로 섭섭해하지 않지만, 셋째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청이 거절되었다고 매우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discretio는 많은 행동의 가능성 안에서, 상황에 따라 최선의 것을 식별하는 능력이다. 또 엄격함과 관용을 구체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요한 카시아노는“어떤 것도 discretio에 의하지 않고는 완전할 수 없고, 완성되지 않고, 또 성립되지도 않는다. 왜 냐하면 모든 덕의 어머니, 수호자, 지도자이기 때문이다.”라고까지 찬미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수도생활에 있어서의 이 덕의 귀중함을 인식하고“나는 모든 덕 중에서 정점과 수위를 보존하는 discretio의 탁월함과 은혜에 대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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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여러분을 위해 논하고, 그 뛰어난 것의 효용을 증명하고 싶습니다.”라 고 했다. 그는 discretio의 역할은 양 극(極)에서 같은 거에 놓고, 중용이 라는 덕으로 인도하고, 올바른 정도의 범위를 넘는 여정을 멀리하는 동시 에, 영적 즐거움이나 이환을 일소하는 것이다. 카시아노는“양 극은 같 다.”라는 격언에 호소해서, 과도한 단식과 폭식, 불면과 타면 ─ 게을리 자는 것 ─ 은 같은 모양으로 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카시아노는 discretio를 사도 바오로의 전통에 따라“영적식 별”이라는 의미로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중용을 존중한다고는 하지만 외 적, 양적 기준에서 중간을 이끌어 내는 평범, 범용 같은 것은 결코 아니 다. 또한 단지 숙련이나 재빠름이나 타개하는 기술도 아니고, 배려에서 생기는 판단과 결의와 행동이다. 이런 뜻으로 discretio는 범용한 덕이 아 니고,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어디서나 파악되는 것도 아니며, 하느님의 선 물로서 또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현명한 생각의 선물에 가까운 것으로 봐도 된다. 성령은 마음의 빛으로서 영혼의 속을 비추고, 우리 마음이 판단의 헷갈림, 무지의 밤에 갇히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이 은총의 길은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솔직히 마음을 여는 것, 즉 겸손이다. 참된 discretio는 겸손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카시아노는 이 사상을 요약해서 말한다.“discretio는 복음서에서 육체의 눈, 빛, 등불이 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세주의 말씀에 따르면‘몸의 등불은 눈이다. 눈이 맑으면, 당신의 전신이 맑지만, 흐려져 있으면 전신이 어둡다.’”(마태 6,22-23) 그와 같이 discretio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해야 할 모든 행위 를 꿰뚫어보고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discretio의 개념과 역사는 첫째로는, 그것이 중용과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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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는 자연적 요소와 상황에 따라 영을 식별하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 이라는 초자연적 요소의 종합에서 성립되어 있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는, 그러한 discretio의 조용한 숙고 없이는 참으로 올바르고 조화 있는 내적, 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모든 사회관계는 가족이든 다른 공동체이든, 교육과 일과 친구 사귐에 있어서, 권위와 자유 에 기초한 올바른 질서의 기준을 discretio에서 얻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의 규칙서는 이러한 개념을 이어 받아 그 훌륭한 결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Ⅲ.“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 있 는 아빠스와 분 별 베네딕도는 머리말과 73장으로 된 그의 규칙서 안에서 discretio라는 말을 세 번만 사용하고 있다. 제 70장에서 그는“아빠스로부터 권한을 받 은 사람이 아니면, 어린 사람을 처벌하거나 혹은 분별없이 어린이들에게 화를 내거든 규칙에 정한 벌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처벌 의 지나침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고 이 조금 앞의 문장에서‘처벌은 언제 나 정도와 이치에 맞게 할 것이다(cum omni mensura et ratione)’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베네딕도는 처벌에 대해서 죄의 올바른 객관적 통찰과 거기에 대한 유효적절한 처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결코 냉정함과 사 랑을 결한 거친 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규칙서 제 64 장은 아빠스의 선출에 대한 중요한 장인데, 여기서 두 번 discreti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아빠스는 분별있고 절도 있어야 하며,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하여야 한다. 즉,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 루에 죽어버릴 것이다.”(창세 33,13). 따라서 모든 덕의 어머니인 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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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모든 일에 있어 베네딕도는 카시아노의 생각 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베네딕도가 그것을 특히 아빠스의 덕 으로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서는 아빠스의 규칙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수도원 안에 있어 최고의 장의 지위와 재량 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즉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은 아빠스가 그것에 의지해 자기 수도원을 다스려 가기 위한 지침이고, 그 내용은 그의 의향 이 수도원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것으로 이상을 삼고 있다. 매일의 수도 일정의 편성에 있어서도 빈틈없이 정해져 있는 규칙에 따라 통치해야 한 다. 그렇더라도 규칙의 모든 규정을 획일적이고 법률조문보다는 훨씬 유 연성이 풍부하고 아빠스의 분별력에 의한 재량에 맡겨져야 할 면이 극히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규칙에 있어서의 아빠스의 지위와 책무를 더 깊이 규명할 필요 가 있다. 제 63장에 있어 수도원의 참된 아버지는 그리스도라고 똑똑히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원의 전 존재와 행동은 그리스도를 중심 으로 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눈에 보이는 대리자는 아빠스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 아버지(Abba)요 주님으로 임명되었다. 규칙은 아빠스 보다 중요한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그것은‘존경할 장로, 성별 되 다’라는 일반적인 뜻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극히 깊은 것이다.) 이 말의 어원은 물론 아람어 Abba이지만, 그리스도의 시 대에는 친밀함이 스민 육친의 아버지라는 뜻이어서, 천상의 아버지에 대 한 경외의 생각에서 유대인들은 그것을 피하고, 별로 쓰이지 않던 Abi라 는 말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자신과 천상 아버지와의 연결에 의해,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과 친밀함 그리고 소박함을 가지고 일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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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규칙”에 있어서의 discretio의 이념

Abba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뜻을 알아차린 유대인들 때문에 죽 음을 당하셨다. 이 참으로 하느님이시오 또한 참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모든 사람도 천상의 아버지를, 다음에 그리스도를, 더 나아 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수도원장도 그 신성 때문에 경외의 대상이면서, 그 인성 때문에 친밀함의 마음을 가지고 부르는 명칭인 것이다. 규칙은 두 번이나 아빠스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말한다. 그는 신앙 의 눈만이 언제나 이 내용을 인정하고 덧붙여서 말한다. 신앙에 의해 비 추어진 이성이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한다. 수도원의 참된 주인이요, 아버지이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의 임명에 의해 장상에게 한 순종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이라고 한다. 또 장상의 명령은 하느님으로부 터 직접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빠스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개념 은 이중의 오해에 노출될 위험에 처해있다. 첫째는 초자연적 의미에서 합 법적 소명과 임명에 의한 것으로 판단해서, 그가“그리스도의 대리자”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완전히 인간적인 평가 밖에 놓는 태도이다. 이와 같 은 극단은 수도원적 전통에서의 이탈이다. 전부터 수도자는 그들의 지도 자인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한테서 개인적인 덕과, 성성, 및 성도들 의 공동체를 지도하는 능력과 적성이 요구되는 동시에 아빠스직에의 초 자연적 의미에서 합법적 임명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베네딕 도에 의하면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개인적 성성과 통치에의 적 성도 뗄 수 없는 것이다. 규칙서 제 7장은“우리는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말하고 있다. 너의 사사로운 뜻을 피 하라”고.“당신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고 구하기 때문이다. 수도승들은“하느님의 뜻”을 언제, 어디서든 이룰 수 있다.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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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히 수도승들은 아빠스보다 훨씬 더 쉽게 하느님의 뜻을 채울 수 있다. 이것은 규칙이 당연한 것으로 전하는 태도이다. 이에 대해 아빠스는 무조 건의 권능을 가지지만, 또 무조건의 책임도 져야 할 입장에 있다. 그는 하 느님의 뜻의 인식과 실행에 대해서 수도원의 거의 모든 짐을 져야 한다. 규칙은 다섯 번에 걸쳐 그 점을 지적하고, 아빠스는 가장이 양 무리에 너 무 적은 이익만을 남길 때, 목자가 벌 받을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규 칙서 2장과 64장은 아빠스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64장은 특 히 품위 혹은 행위와 현명한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아빠스를 임명하라 고 한다. 즉 이것은 discretio를 가능하도록 하고 보장하는 지적이며 도덕 적인 전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빠스에게는 자신 뿐 아니라 수 도원 전체에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특히 discretio가 요구되기 때 문이다. Discretio는 사람들을 옳게 인도하고 다루는 기술이다.“그는 지 배하기보다는,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알아야 한 다.”(64,8) 명석한 통찰과 올바른 지시가 본질적 사명인 것이다. 각자에 게 잘 맞도록 지시해야 한다.“녹을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64,12) 따라서 아빠스는“때에 따라 엄격하게도 하고, 준엄한 스승과 어진 아버지의 정을 드러내야 한다.”고 규칙서 2,24에서 말한다. 베네딕도에 의하면“이상적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개인적 성성 과 통치에의 적성을 겸해서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아빠스에 대해 수도승 들은 안정된 보장과 성실한 이해자라는 감정을 가지기에 이를 것이다. 그 들은 필요한 모든 것은 가부장한테 기대해야 한다(33,5). 따라서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에게 아빠스에게 무조건적 복종할 것을 요 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멋대로의 생각이나 권세욕에 의한 지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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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기초에 두고 있다. 물론 수도승들은 사사로운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에 대해서 재빨리 또 자발적으 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따르는 것이지만, 아빠스는 강한 책임의 식과 명석한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과의 따뜻한 접촉 안에서 명령을 내릴 것이다. 따라서 그는 최종적인 결정은 스스로 할 것이지만, 수도승의 충 고도 구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 가장 좋은 예가 규칙서 68장“어떤 형제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다면”에 나 와 있다. 이것은 베네딕도의 discretio가 가장 아름답게 나타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Ⅳ. RB 전반에서 보 는 Discretio “성 베네딕도 규칙”은 특히 아빠스의 필수품으로 기록된 것이다. 따라 서 그의 주요 덕목으로서 나타나��� 것이 Discretio이다. 그런데 이제 규 칙 전체의 기본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은 별도로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아 빠스와의 직접적인 결부를 상정하지 않아도, 규칙 전체를 일관해서 흐르 는 Discretio를 파악하는 것은 가능하다. 또 베네딕도가 Discretio를 특히 아빠스에게 강하게 요구하지만, 수도승 전원에게도 그것을 원한 것은 당 연하다. 적어도 이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실베스텔 프리 에리아스(1456-1523)는“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찬양해서 말하고 있 다. 이전의 동방 여러 규칙에 비해“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로마적 예지 의 특색과 서구의 도덕적 절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대 성 그레고리오 가 밝힌 Discretio의 걸작이다. 또 실용에 있어, 비판자들이 밝히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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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처럼, 그것은 건강한 인간의 이성과 관용, 참된 인간적 따스함과 도리 에 맞는 절도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시민적 교화를 받은 로마인의 법에도, 어떤 시민 사회 안에서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 든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 그레고리오, 토마스 아퀴나스 (1225-1274), 피렌체의 안토니우스(1389-1459) 등은 이 규칙이 직접 성령에 의해 저자에게 불어넣어졌다고 한다. 모든 교황과 군주들은 그 Discretio 때문에 이 규칙을 충분히 칭찬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 찬사는 의복과 음식, 금욕, 청빈과 기도의 배분, 권위와 자유의 조화 등 개개의 점을 음미할 때 옳다는 것이 인정된다. 의복은 수도원의 위치 한 지방의 상태, 기후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55장). 식사에 대하여서도 자연히 많은 식품을 생산하는 장소에서는 풍부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 소에서도 언제나 두 접시는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를 먹을 수 없어도, 다른 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39장). 노동이 심한 경우에 식사는 그만큼 넉넉해야 한다. 식탁봉사자와 식당에서 책을 읽는 낭독자는 식사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간단 한 음식을 취할 것을 허락해야 한다(38장). 이와 같은 다정함과 호의는 불평과 기력상실의 위험이 있는 경우에 특별히 나타날 것이다. 규칙은 참 된 제자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금욕을 실천해야 한다라는 원리에 있어서 는 그 이전의 수도규칙과 같다. 그도 원죄를 범해서 하느님께 등을 돌린 인간을 하느님께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모습에로 되돌아가 도록 교육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태만의 불순종에 의해 멀어졌던 분에게 근면과 순종에 의해 되돌아 와야 한다(머리말). 그렇지만 그는 이“주님 을 섬기는 학원”에 각 개인이 유일한 균등 목적을 위해 초대되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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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거기에서 공동생활의 조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음을 다하기는 하 지만,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기계적 획일성을 만들려고는 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그 개성에 따라 영혼을 구한다는 공동목적에 매진해야 했다. 각 사람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인간으로 교육하는 것이 베네딕도의 목표였다. 그는 극단의 금욕적 이상에 빠져 자기기만의 결과 에 떨어지는 악한 폐습을 이미 수비아코에서부터 시작된 수도승들의 지 도에 있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수덕적 노동에 수도승을 묶어놓고, 마음의 정화를 차츰 증거하고, 내적 생활에 있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깊이를 더해가도록 바랐다. 이 기본노선과 그것을 상황에 따라 추진해 가 는 심적 태도를 그는 Discretio에 구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는 늘 초심자를 위한 단순한 규칙을 썼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73장). 특히 동방 수도제도에서 자주 보는 무의미하고 비인간적 금욕의 과격함 을 그는 피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머리 말). 죄를 뉘우치기 위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사슬, 그리고 같은 뜻을 가지 고 사용되던 밧줄, 자신의 몸을 스스로 매질하는 편태, 과도한 단식 같은 것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수도승은 여유가 많은 생활에 빠지지 말고 과도하지 않게 정해진 단식을 사랑하고, 포도주에 빠지지 말고, 과 식(過食)이나 지나친 잠에 떨이지지 말고, 게으르지 않고, 나아가 지금은 통회의 업으로 된 노동에 언제나 종사해야 한다.“그러나 결점을 고치거 나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공정한 이치에 맞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 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이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라(머리말 47-48).”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수도승에게 요구한 생활양식은, 당시의 경건한 그리스도 신자의 생활태도와 본질적으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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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것이 아니다. 초기에는 극히 소박한 신자들의 순수하고 복음적인 영성생활이 바로 수도생활이었다. 그러다가 수도생활의 시조라고 불리는 성 안토니오가 사막으로 가서 극기의 은수생활을 하자 일반신자 생활과 수도생활을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베네딕도는 입회를 원하는 사 람에게 어떤 거칠은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위로에 찬 약속을 가지고 받 아들인다. 그렇지만 그는 이와 같이 모든 회원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될 금욕을 가능한 한 견디어낼 만한 것으로 하는 한편, 개인이 아빠스의 허 락을 받고 엄격한 길을 가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제49장). 베네딕도의 Discretio는 자기 영혼을 위해 전념하고자 수비아코에 은둔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침묵에 대한 사랑을 권했다. 그러 나 그는 언제나 침묵이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고 단지 많이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도록만 했다(6장). 더구나 엄격한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손님 이 있을 경우에는 접대의 역할을 명령받은 수도승이 손님과 이야기하기 를 허락하고 있다(42장). 베네딕도는 매일의 일과에 대해서는 절도를 잘 정하고 있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긴 시간 연속할 경우에는 피로 를 낳는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번갈아 하는 것은 모든 수도승들에게 있어 단지 피로를 피하기 위한 것 뿐 아니라 전인적인 인격을 육성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 문이다. 베네딕도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교대로 배치하고, 그 위에 충분한 잠에 의해 피로를 회복하도록 도모했다. 그의 현실에 따른 인간관에 근거한 훌륭한 Discretio에 의한 배려이다. 그는 동방적인 규정을 배척하고 기도는 짧게 하라(제20장)고 말하고, 성령이 명하시는 때에만 연장하라고 말한다. 즉 하루 일곱 번의 공동기도를 끝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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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성령의 지시를 받은 개인은 혼자서 기도하기를 연장하면 된다. 여 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특별한 행동을 취하는 경우의 기준은, 단지 길고 짧은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맡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불 평이 생기지 않도록 배려되어 있다. 손님이 많을 경우 주방 책임자에게는 보조원을 주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직무에 대해서도 같다. 그리고 약한 자도 도움을 받도록 정해져 있다(제34장). 물론 병자와 약한 자는 노동의 배당에서 참작되어야 한다(제48장). 규칙도 여러 가지 예외를 고려하고 있지만 특히 수도원의 용무로 여행 중인 수도승이 성무일도를 바치지 못하거나, 거주의 규칙을 바꾸어야 할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제50장).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이것이야말 로 최선의 행동이라는 것이 베네딕도의 생각이다. 또 그는 결코 완강하거 나 사리에 어긋나지 않다. 여행하는 어떤 수도자가 수도원을 방문해서 얼 마동안 지난 후 그 수도원의 생활방식에 대해 이유 있는 비난을 할 때, 아 빠스는 하느님이 그를 이 목적으로 보내시지 않았나 하고 충분히 고려하 여야 한다(제60장). 베네딕도는 밖에서의 자극으로 생기는 생활의 긴장 을 열매 있는 것으로 하는 기술도 터득했다. 노인, 어린이, 병자에 대한 규칙의 가르침은 사려에 넘친 discretio의 멋진 묘사이다. 어린이와 노인에 대하여 규칙은 신중한 규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인간의 본성은 노인과 어린이들에게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지 마련이기 때문이다.”(제37장). 실로 예리한 심리적 통찰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특히 병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배려해야 한다. 아빠 스는 병자를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배려해야한다(제36장). 병자는 쾌적한 방, 목욕의 기회, 좋은 음식, 그리고 특히 경건하고 충실해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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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할 줄을 아는 간호자를 필요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베네딕도는 히 스테릭하고 불만이 많은 병자도 흔히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병자에 대 해서도 인내해야한다고 한다. 베네딕도는 자연적 질서를 넘는 권위에 의해 수도승들을 교육하기를 희 망했다. 그래도 그는 이 권위가 엄격하고 가혹하게 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사랑과 관용에 의해 완화되기를 희망했다. 이것은“주님을 섬기는 학원”에 새로 입회하려는 사람에 대해 엄격한 교사로서 뿐 아니라 호의와 애정에 찬 아버지로서 말을 걸고 있는 것에서 밝혀졌다. 그가 윗사람과 아래 사람을“아버지”와“아들”이라는 친밀한 사이에 놓는 것으로 양자의 대립은 사라지고, 권위와 자유가 접근했던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정도로 거만하지 않도록 명령을 내리는 것처 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아빠스도 그와 같이 행동한다. 다른 장상 특히 경리담당자(당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한다.“수도 승들 중에서 한 사람을 당가로 뽑아야 한다. 그는 지혜롭고 완숙한 인격 을 가진 자로 절제 있고, 많이 먹지 않으며, 거만하거나 부산떨지 않으며, 낭비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그는 만일 어떤 형제가 부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경멸적으로 다루어서 상처를 입히지 말고,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친절한 말은 값비싼 선물보다 낫다.”(지혜 18,17)고 기록되어 있기 때 문이다. 거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형제들에게 정해진 음식을 주어야 한다(제31장). 이 충고를 베네딕도는 수도원의 모든 임원들이 지킬 것을 원하고 있다. discretio는 특히 벌칙(제23-30장)에서 나타나있다. 이것은 규칙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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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베네딕도가 정도가 넘는 일이 없 도록 신중을 기해서 썼기 때문이다. 그는 무의식이나, 망각이나, 경솔함 에서 생기는 잘못에는 결코 벌을 주지 않는다. 다만 악의에서 생긴, 그래 서 중대한 죄만을 특히 다루고 있다. 불순종한 자, 거만한 자, 고의로 규 칙을 무시한 자에 대해서 한 번 이어서 두 번 장상으로부터 경고를 받고, 그래도 고치지 않을 경우 공적으로 또 모든 이 앞에서 교정을 요구받는 다. 도덕적 영향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점점 더 강하게 미쳐야 할 일이 다. 이렇게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죄인은 공동의 업무 ─ 미사 성제, 전례기도 ─ 에서 배제된다. 그런데 베네딕도는 현명하게도 이러한 벌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자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한다. 거칠고 둔한 자에게는 체벌을 명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죄의 경중에 따라 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공동생활에서 떨어져 있는 죄인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아빠스 는 병든 회원이 치유되도록 열심히 배려하여야 한다. 그가 스스로 죄인을 되돌리는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경우에는 이해심이 깊은 장로를 보내어 죄 인을 극도의 슬픔이나 자포자기에서 구해 회개에로 인도하도록 해야 한 다. 그 위에 이와 같은 도덕적 개선을 목표로 하는 권고나 질책이나 공동 생활에서의 추방이라는 처벌은 인내 깊게 재차 되풀이된다. 그래서 정신 적 치유의 가능성이 한계에 달했을 때 비로소 병든 한 마리 양이 무리 전 체에 병을 옮기지 못하도록 수도원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이 벌칙 전체를 통해 공통된 정신은 첫째로 죄인을 때려눕히는 것이 아 니라 개인 및 수도원의 질서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뜻으로 창조적 및 건 설적인 것이다. 둘째로 죄의 정도와 벌을 받는 자의 이해에 응해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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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죄인에 대한 벌하는 자의 애정에서 생기는 상세한 마음 씀이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서 discretio가 찬란한 빛 을 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은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일관해서 discretio 정신에 의해 파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첫째로는 discretio가 수 도원을 무조건으로 통제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의 지도 정신이 기 때문이다. 또 둘째는 아빠스가 의지할 규칙의 주요 조항 하나 하나의 기초가 베네딕도의 discretio, 즉 인간과 세계에 있어서의 조화와 질서의 원인인 중용과 절도의 이념 및 각 순간에 그 상황에 따라 성령의 작용하 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식별하는 정신적 능력에서 이루어진다. 전자는 그 리스-로마의 고전적 정신의 유산이고 후자는 성서와 교부들에 뿌리를 갖 는 수도제도의 전통에 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쪽은 자연적 예지 의 소산이고, 다른 쪽은 실천생활에 있어 사람을 이끄는 초자연적 성령의 선물이다. 이 양쪽의 종합 위에 discretio는 수도제도의 전통에서 인계되 어서, 전체를 꿰뚫는 정신에까지 개화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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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또 다른 면 :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1) 조안 치티스터 한정희 프랑카 옮김

“리더에게 있어서의 마지막 과제는 무엇일까?”이에 대해 월터 리프만 (Walter Lippman)은“어떤 일을 계속하고자하는 확신과 그 의지를 공동 체의 다른 이들에게 남겨 두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 은 우리를 일깨워준다. 하지만 문제는“어떻게”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이다. 미국 경영간부들은 수천 달러 씩을 지불하며“리더십 트레이닝”에 관한 주말 워크샵에 참가하고 있다. 그 메뉴는 공식적인 내용들로서, 목표 설 정, 그룹토의 테크닉, 고용 및 평가 절차, 역할 규정, 인사정책, 상호소통 기술 등이다. 이를 위한 자료들은 통계 자���와 측정 도구 및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중요하며 흥미롭기도 하다. 이는 또한 효과적이고 타당 성이 있으며 모두 다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 완전하지는 않다. 이러한 내용들은 위대함을 고취하지 않으며 정신에 생명을 불어넣 지 못할뿐아니라, 지금 이행되고 있는 같은 내용을 수행하도록 다음 세대 를 이끌 수 있는 신념과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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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제: Joan Chittister: THE OTHER SIDE OF LEADERSHIP : BENEDICTINISM (AIM Bulletin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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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을 가져다 줄뿐이다. 경제적 결과를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자 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을 위해서 즉, 자신의 내면에로, 동시에 자 신을 넘어섬에로 나아가게 하는 모델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이익을 지향하는 리더십에서 부족한 것은, 능숙함 그 이상의 것을 약속 하고, 정신적인 실체를 가져다주며, 조직체계뿐아니라 마음을 형성하는 삶의 철학이다. 바로 거기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이 자리하는 곳이며, 바로 그 자리에 서 생산성이나 이익에 대한 관심보다는 공동체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베 네딕도회의 리더십이 하나의 삶의 길이 되는 것이다. 베네딕도회 리더십 은 단순히 그 어떤 것이 이행되기 위한 길 그 이상이며, 그것은 경쟁과 비 용효과, 조직의 성공에 여념이 없는 세상 안에서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길이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단순히 잘 닦여진 리더십 테크닉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 관한 문제이다. 베네딕도회 모델에 있어서의 리더십은 성공 그 이상의 것 그리고 생산 그 이상의 것에 관심하는 태도, 즉 사람, 일, 지혜, 권위, 관계 그리고 자아에 대한 태도의 성숙을 요구한 다. 그러기에 우리는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 눈부 시도록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이유를 공동체의 삶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지도자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위대한 남녀 아빠스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탄생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또한 이 리더십이 실패할 때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조직체 계나 건물들, 재정, 날질서, 규율에 보다 더 관심A하고 돌보느라, 오히려 그러한 외적인 내용들이 수도승 각자의 수도생활의 질에 미치는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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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또 다른 면 :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

간과하는 잘못된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공동체에서 야기되는 결과는 헤아 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아무리 그 공동체가 잘 질서 잡혀 있고, 관리되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상관없이 수도승 개개인의 성장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세상 안에서의 수도 생활의 역할이 중요치 않 게 될 때, 공동체의 핵심은 이미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에 그 근본을 둔다. 그것 은 모든 수도승들이 그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해주며, 또 한 다른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 주변 세 상과 함께 하느님의 창조적 현존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 을 뜻한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종교적이거나 또는 세속적이거나간 에 주변의 그 무엇과도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요구한다. 그것은 윤리적으 로 확실하고 영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는 단지 잘 단련된 삶을 위한 헌신 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아닌 사람을 위한 에너지와 창조 중심 신학에의 헌신을 요구한다.

사람 베네딕도회 리더십은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을 공동체를 위해 쓰일 하 나의 자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공동체는 일을 위한 단체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인적 자원의 조화, 즉 각 개인으로부터 끌어내어져야 하고 또 존중되어야 할 인적 선물들의 멋진 조화로 이해된다. 공동체 안 에 그 어느 것도 수도생활에 필요치 않은 기술도 없고, 가치없는 재능을 가진 수도승도 없으며, 수도생활을 거스르는 쓸모 없는 재주라는 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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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도자에게는 수도승 개인의 성장과 공동체 전체의 성장 그리고 그들 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발전을 위하여 이러한 인적 선물들을 계발하고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

노동 내가 젊은 수녀였을 당시에는 노동, 특히 청소라는 노동이야말로 우리 를 가장 소모시켜서 육체의 일이든 영혼의 일이든 다른 일은 불가능하였 다. 청소 이외의 모든 일은 이미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마루를 쉬지 않고 쓸고 닦는 끊없는 반복 후에도 다만 부차적인 것으로만 행해졌었다. 그 후에 조금씩 조금씩 일에 대한 태도가 서서히 변화되어갔다. 리더십은 단 련을 위한 노동을 넘어서 인간 발달을 위한 일로 우리를 이끌었다. 성규 에 정의된 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베네딕도회의 노동은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 아무 생각없이 육체적 노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보 다 전인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이 세상을 좀 더 거룩하게 하는 데 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 베네딕도회의 노동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작은 한 부분을, 우리가 그 자리에 있기 전보다 좀 더 열린 세상, 좀 더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좀 더 무조건적인 연민으로 가득차고 지금보 다 좀 더 기도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데에 더욱 가치를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지 청소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베네딕도회의 모델에서 일은 바로 그 시간의 성사가 된다. 나환자를 치 유하시고, 죽은 이를 생명으로 일으키신 그분의 모범에 따라‘하느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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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또 다른 면 :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

일’인 기도로부터 솟아나는 마음으로 행하여지는 바로 그 순간의 성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끝마쳐질 수 없는 과제라고 하더라도, 베 네딕도회 리더십의 역할은 공동체의 시야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공동 창조를 위한 지속적인 과제를 향해 들어 높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지혜 ‘리더십’ 이란 말과‘경영’ 이란 말은 동의어가 아님에도 자주 혼돈되고 있다. 관리는 그 당시의 주어진 과업들을 돌본다. 리더십은 그 시대의 지 혜를 공동체 안에 불어넣어 북돋운다. 무엇보다 리더십은 다른 이들 안에 있는 지혜를 인식함으로 이루어진다. 참으로 좋은 리더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아직 답을 얻지 않은 것에 대해 다른 이에게 묻고 공 동체의 지혜를 듣는다. 레이번(Rayburn)은“만일 어떤이가 다른 사람들 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지도자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다른 이들더러 자신을 따르라고 요청할 수도 없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좋은 지도자는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을 잘 따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 의 제한된 경험을 뛰어넘어 공동체의 다른 이들의 통찰에 자신이 맛 닿을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야한다.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는 성규 3장의 의도 와 의미를 깊이 인식해야할 것이다. 성규 3장3절에서 분명하게 말하듯, “아빠스는 어떤 중요한 일이 결정되어야할 때 공동체 전체를 가장 젊은 사람을 포함하여 소집할 것이다”그는 다른 이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 을 가로막지 않으며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성령의 활동하심을 찾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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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가장 깊은 관심들을 간과하거 나 임의로 다루지 않는다. 베네딕도회의 리더십은 단지 투표의 힘에만 의 존하지도 않는다. 투표는 결과를 획득하기가 쉽다. 하지만 함께에의 헌신 은 공동체에서 제기되는 가장 진지한 물음들에 대한 조심스러운 숙고를 요구한다.

권위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은 총회 또는 참사회의 기능을 중심으로 세워진 다. 규칙서에서 요구하는 것은 한 개인의 말을 듣는 군대 스타일이 아니 다. 베네딕도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기능은 한 마디로 일 개인으로 집중되 는 교회적 군주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비젼, 공동체 적 해답, 공동체적 통찰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네딕도회 의 지도자는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우선적인 물음들에 민감해야하며,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공동체가 찾을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해 주어야만 한다. 수도승 공동체의 지도자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저절로 그들 자신 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권위’가‘겸손’에 대한 대치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는 그들 자신 의 한계를 알고 있다. 바로 그러한 눈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의 탤런트를 볼 수 있게 되고, 현재 공동체에 제기되는 질문들을 풀어가는데 그리고 미래의 비젼을 찾는데에 다른 이들을 환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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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또 다른 면 : 베네딕도회 정신에 비추어

관계 수도승 공동체의 참된 지도자는 공동체 안에 있는 똑똑한 형제들 또는 그들 자신보다 더 영리한 이들로인해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 은 그들 자신이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총회 안에서 경고의 종을 울려줄 사람, 그들 자신의 어두움 안에 빛을 비추어줄 사람, 공동체가 결정한 내 용이 실행 가능해지기 위해 필요한 재능을 가져올 사람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의해 오히려 힘을 얻는다. 베네딕도회의 권위는 다른 이 들의 지성, 관심, 생각, 질문과 경고들에 열려있다. 권위주의자들은 주위 에 흔하지만 가장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리더십은 공동체 전체의 탤런트 들을 생기로 피어나게 하는 하느님 선물이요 은총이다.

자아 공동체의 모든 개개 회원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들 각 사람 의 삶에 목적이 있으며 자아의 충만함에 이르기 위한 권리와 책임을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음을 아는 것, 이는 두 가지의 길, 즉 공동체를 자아의 성장에로 이끌어가는 길 또는 이와는 달리 생산적인 결과를 위해 공동체 를 관리하는 길 사이에 있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베네딕도회 지도자의 역할은 조직 체계를 위하여 공동체 회원들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의 몫은 공동체 그 자체를 전 인류를 위한 하느님 뜻의 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수도 공동체 전체의 창조성을 위해 회원 개개인 삶의 영적인 차원, 심리적인 차원을 성장시키는 데 있다. 한 남자 베네딕도회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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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물은 적이 있다.“당신들이 가지고 있던 포도 농장은 어떻게 된 것입니 까?”대답인즉,“우리가 처음 포도 농장을 시작했을 때는, 우리 형제들이 포도를 눌러 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과 함께 그 어느 때부 터인가 포도가 우리 형제들을 짓눌러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공동체 에서 포도 재배를 멈추기로 결정한 때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공동체 그 자체의 성장을 위한 것이지 일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야말로 베네 딕도회의 리더십에서 기꺼이 배워야할 교훈이다. 베네딕도회의 지도자들 자신은 충만한 인간애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공동체 그 자체를 귀기울여 듣고, 다른 이들의 재능을 존중하며, 수도 공동체가 사랑 가득 한 환대로써, 자원을 돌보는 청지기의 몫으로써 또한 모든 이를 위한 정 의와 공동 창조를 위한 삶의 표지가 됨으로써 주변 세상에 선물이 되도록 공동체 삶의 질이 성장될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리더십의 몇 가지 요소들은 기업의 리더십을 위한 보증 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내용들은‘들으라’는 베네딕도회의 가르침에 깊이 간직되어온 것들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인격과 성장에 대 한 존중과 다른 이의 생각에 대한 리더십의 개방성이야말로 많은 이에게 좋은 선물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낼 수 있음을 뜻하며, 이로인하 여 베네딕도회 리더십에서는 일을 계속할 의지와 확신을 회원들 안에 남 겨 놓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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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성 베네딕토는 아빠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빠스는 수도원 안 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리어진 다.”오늘날 한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이 베네딕토의 말씀이 공동체 회 원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빠스 자신조차 그가‘그리스도의 대리 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 공동체 수도자들과 원장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면 그것은 이 문장의 말대로 아빠 스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명확한 자의식을 지니고 그의 삶 안 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가 세상 정치 나 경제 분야의 리더십을 대리하고 있다면 혹은 리더십에 대한 자의식 자 체가 분명치 않다면 그는 분명코 수도원 안에서 진정한 리더십의 봉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고 공동체 회원들 또한 그런 아빠스를 하느 님의 뜻으로 신앙 안에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체 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공동체 회원들 또한 아빠스가 지닌 약점 때문에 그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보는 것이 어려워지면 스스로도 수도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도의 대리자의 역할은 장상과 수도자 양쪽 모두에게 도전과 희망이라는 두 가지를 제시해 주는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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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안에서 리더십에 관한 논의는 오히려 수도원 안에서보다 더 활발하며 때로 는 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리더십의 형태를 탐구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세상의 리더십에는 수도공동체의 리더십과 공통점도 있을 것이지만 세상의 리더십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도 많으리 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대치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대리 자로서의 리더십은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근간으로 삼는 공동체에 나타나 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아빠스가 바뀔 때면 공동체 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의 아빠스의 모습은 오늘날 수도원들에서마저 상실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성 베네딕토가 그렸던 아빠스의 모습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 리가 그리는 모습은 분명 다른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 베네딕토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표현한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용어가 말해주듯이 장상의 리더 십과 권위의 원천은 예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서 공동체 삶,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다. 성 베네딕토는 스승의 규 칙 저자나 다른 고대 규칙 저술가들과는 달리 많은 부분을 세세히 규정하 기보다 아빠스의 식별과 판단에 맡기고 있다. 또한 규칙서 안에서 보는 아빠스의 공동체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은 너무도 뚜렷하다. 그렇다면 이 는 고대 로마사회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왕 의 모습인 아빠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세워진 수도원들의 집회 실 모습을 보면 아빠스의 모습을 이러한 왕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RB 2,31),“각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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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RB 2,32) 하라는 베네딕토의 말은 아 빠스가 로마 시대의 왕의 모습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 든다. 이것이 진정 왕의 모습일까? 오히려 신하 내지는 노예의 모습이 아 닌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참으로 다른 모습의 왕일 것이다. 또 27장 “아빠스는 파문받은 형제들을 위해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가?”를 일독하 는 것만으로도 아빠스의 리더십은 고대 황제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 베네딕토가 염두에 두었던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상의 예수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아 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성서 안에 예수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때 자신의 모습 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명쾌한 자료를 지니고 있다. 공관 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고 묻는다. 이미 자화상에 대한 어떤 확고한 상을 지닌 사람의 질문인 듯한 인상을 준다.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등의 풍문을 전하 자 예수는 다시 제자 자신들에게“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 니까?”고 묻는다.“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는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는 이를 부정하지 않으시지만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에 수정을 가한다. 즉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베 드로가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리자“사탄아 물러가라”는 강한 표현까지 쓰 시며 그의 그리스도상을 수정하신다. 이 강한 표현은 자신의 정체성을 제 자들에게만이라도 올바르게 알리고자 하는 예수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 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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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어느 누가 자신의 자화상을 이런 모습으로 그릴 수 있는가? 예수는 대체 어떤 분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언제부터 이러한 자신의 자화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예수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위와 같이 보고 있었다면“그리스도의 대리 자들”의 모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서는 그리 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I . 예 수 의 그리스도로서의 정 체 성 1-1. 예 수 의 출 생 ─ 낯 선 자(타 자)로 이 세 상 에 오 심 예수의 출생을 전해주는 복음의 말들은 말구유, 헤로데에게 쫓겨 피난 감, 목동들, 이방인인 동방박사 등 당시 유대인들이 그렸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멀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 황제의 통치로부터 구해줄 강력한 힘을 지닌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있었다. 아씨 리아로 인한 이스라엘 강제거주와 바빌론 유배, 희랍인들의 잔인함을 경 험하고 이제 다시 거대 왕국 로마와 마주 선 유대민족은 그 험난한 역사 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더욱 힘차게 자신들의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갈망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예수의 출생은 너무도 초라하고, 힘없고, 영예롭지 않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것이란 아 무것도 없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복한 가정에서 평화롭게 태어났음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탄생이라면 가능한 한 그것을 숨기려 한다. 예수의 탄생은 그렇게 숨기고 싶은, 누구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방식 의 탄생이었다. 즉 낯선 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 힘의 논리로 이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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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할 왕-그리스도가 아니라, 힘없는 그리스도, 초라하고 매맞고, 침뱉 음 당하며, 마침내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마저 버림받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낯선 자의 모습은 이미 출생에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방식, 하느님의 무력함의 논리이다.

1-2. 예 수 의 정체성에 대 한 확 립 리더의 자질은 건강한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건강한 자아를 지닌 사람은 타인에게 생명을 주고 그의 인격을 강화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는 곧 좋은 관계 를 맺는 능력으로 이어지며, 좋은 관계는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바탕에 있는 존재론적 외로움을 치유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생명이 통하고 풍요 롭게 해준다. 예수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가난하고 초라한 민중들의 길고 긴 행렬에 동참하신다. 세례를 받고자 했다는 것은 나자렛 시골 마을의 평범한 목수로 살아가던 청년 예수의 마음 안에 무엇 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는 성전에서 가르칠 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 들에게“사실 요한이 와서 너희들에게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 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마태 21,32)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청년 예수는 누구나 거부하고 싶어했던 낯선 자들인 세 리나 창녀들보다 더 낮추어진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즉 의로운 길을 열 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상적인 물음을 해결하려 하거 나, 고통에 찬 인간 세상을 힘으로 바꾸고자 했던 열혈당에 입당한 것이 아니라 의로운 길, 하느님의 길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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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 려오고,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외아들이라는 알림의 소리를 들었다. 즉 하늘이 열려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에게로 자신의 온 마음을 열고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비둘기 모양으로 내린 성령을 통해 그는 이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 사랑으로 이 역사의 종말적 다스림을 시작하시는 분임을 알아들었고 예수는 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 셨다. 이 예수의 깨달음은 하느님이 하늘 저 높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 금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으며, 이 하느님의 사랑의 통치 가 앞으로 찾아야 할 무엇이 아니라 자신 안에 실현되고 있음을 받아들이 는 온전한 수동성의 체험이었다. 이 하느님 아빠의 사랑의 체험은 예수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엄청난 체험이요 사건이었다. 이 체험은 그 를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게 했으며, 그분의 나라를 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한다. 밭에서 귀한 보물을 발견한 이가 모든 것을 팔아 그 밭 을 산 이의 비유는 다름 아닌 예수 자신의 체험이었다. 세례 때의 이 엄청 난 체험은 예수의 앞날의 모든 방향을 새롭게 잡아주었다. 이 때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 즉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모든 사명의 중심이 되었다. 이 때 알아들은 자신의 정체성 즉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사실과 하느 님의 사랑의 종말적 다스림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한 것이었는지 예수로 하여금 곧바로 40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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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의 사 명 ─ 하느님 나 라 예수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는 기쁜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뗄 수 없는 관계 즉 한없는 사랑의 아버 지-아빠이신 분이 이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소식이기 때문 이다. 즉 먼저 제공되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과 평화이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고, 우는 자, 온유한 자, 의에 굶주린 사람들, 세리, 창녀들에게 이미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고 있음을 보고, 기뻐하며, 선포 하신다. 루가 복음에 따라 예수의 첫 설교는 다음과 같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읽으시고“이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예수는 천명하셨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당신이십니 까?“라고 묻게 하였을 때, 예수는“너희는 가서 보고 들은 대로 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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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눈먼 이가 보고 … 가난한 이가 복음을 듣는다.“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이 대답에서 표현하신 대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 미 이 지상에 와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예수 자신이 이미 하느님 나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선포 할 사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영원한 현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살았 던 것이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하느님의 외아들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으 나 사람들은 그의 말씀과 치유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 자신에게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권위를 느꼈다.

3. 예수의 권 위 예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매우 놀랐는데 그것은 그분이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 다.(마태 7,28)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병이 낫고, 닫힌 입과 눈, 귀가 열 리며, 마귀는 쫓겨났다. 사람들은 여기서 새로운 권위를 보고 놀랐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오 사가는“그분은 몸소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말한다.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다툴 때에도 예수는 엄한 권위를 내세워 그 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누가 첫 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이 가운데서 말째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이 말씀대로 사신 예수께서는 십자가 형을 받기 전에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다. 또한 배반할 뜻을 품은 유다를 배신자로 들추거나 탓하시지 않고“가서 네가 할 일을 하라.”고 하신다. 이러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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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안의 예를 들자면 몇 페이지로도 부족할 것이다. 스스로 어떤 권위도 주장하지 않은 나자렛 시골 사람에게서 제자들과 군중, 심지어 반대자들 조차 어떤 비할 바 없는 권위를 느꼈다. 역설적으로 반대자들은 이 권위 가 두려워 그를 없애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청중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놀랐을 때 그가 지닌 사회적 지위나 명예가 주는 권위나 자신이 스스로 메씨아로 자처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과 예수 자신에게서 풍기는 권위의 힘을 느꼈기 때문에 경탄하였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자신의 삶과 온전히 일치하여 어떤 갭이나 모순도 없었다. 또한 하느님께 파견받은 자로서 철저하게 파견한 분의 뜻을 실천 한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권위는 곧 파견하신 분 즉 하느님의 권 위였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한량없이 영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겨주셨습니다.”(요한 3,34-35)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이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요한 5,19) 인간의 병고를 떠맡을 수 있었던 것,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사랑의 하느님의 뜻을 너무도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 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는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랑 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일치하며 그 뜻이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데 자신 의 모든 삶을 바쳤고, 이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런 권위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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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자유로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었고, 벗을 위하여 사랑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권위였다. 이런 예수 안에서 제자들과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그분의 뒤를 따르기를 갈망한다.

Ⅱ 그리스도의 대 리 자 = 그리스도를 닮 은 자로서의 정 체 성 수도규칙 안에 vices라는 단어는 주인이 집을 비울 때 그 주인의 자리 를 대신한다든가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 고 한다. 즉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주 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면 주인의 뜻을 잘 알아 야 한다. 아마도 자신의 주인과 너무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주인의 뜻을 알아듣고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을 닮은 면이 많 거나 그의 사고와 비슷하다면 주인이 뜻하는 바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더욱이 그가 주인을 사랑한다면 마음으로부터 그의 뜻을 실행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선출된 장상은 무엇보다 먼저 그 리스도의 모습을 뒤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전까지 그가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이젠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 이유는 많은 이들의 구 원과 공동체 건설이 그의 손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이 막중한 책임 앞에 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범한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해 가 는데 투신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이것은 장상으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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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종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정체성의 혼란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이 막중한 임무에 비해 자신의 힘의 실제적 인 무력함을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 혼란 속에서 사랑의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하는 장상은 복되다. 그는 이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제3의 힘, 무력함의 힘을 알고, 참된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게 된다.

1-1. 낯 선 자로서의 장 상 ‘낯선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익숙한 것’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먼 저 생각해 보자. 좋은 환경, 뛰어난 능력, 좋은 가문, 학력, 명예, 지위, 이런 것들은 누구나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건강, 부, 뛰어난 외모, 전문 능력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으로써 매스미디어는 이런 것들을 우상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 다. 그러므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힘없고, 가난하고, 무력하고 이름없는 존재이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으며, 더럽고 무시당하고 버려진 상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처음부터 호감을 느끼지 않는 다. 죄인과 세리와 창녀, 나병환자들은 예수 시대에 사람들이 만나기조차 꺼려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보라, 예수는 이런 사람들을 친구로 삼았으 며 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았다. 또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서 어느 누 구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은 낯선 자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버 림받은 자로 세상을 떠난다. 장상은 공동체의 위나 꼭대기에서가 아니라 한복판에 낯선 자로 서 있 는 자이다. 즉 힘의 논리가 아닌 하느님 나라의 논리, 사랑의 논리로 삶을 살아가는 이다. 그는 공동체 멤버들의 고뇌와 약함, 자기모순, 공동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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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부정적인 경향 안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와있음을 볼 줄 아는 자이 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이들을 공동체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일에 투신한다. 낯선 이로 이 세상에 머물렀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힘으로써가 아닌 사랑으로써 타 인을 섬기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힘의 논리 아래 있는 자신의 약함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기에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 고 그들과 함께 도전의 모험을 감당할수 있다. 낯선 자는 낯선 자를 알아 보는 법이다. 이런 이에게서는 저절로 권위를 느끼게 된다. 자신을 하느님의 대리자 로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논리에서 오는 권위를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매력까지 느끼게 된다.

1-2.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 들 딸로서의 장 상 예수는 자신의 아빠-아버지가 우리의 아빠-아버지가 되게 하셨다. 우리 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다. 이것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겠지만 사랑으로 이것을 체험하고 깨달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장상은 이같은 맥락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하느님 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명백히 체험하였고 또한 계속 체험해가는 자이다. 이것은 장상의 힘과 기쁨과 영감의 원천이다. 그는 이제 인간의 힘,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사랑 의 논리로 형제들을 인도한다. 어느 정도 다른 형제 자매들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자신의 사랑을 통해서 체험케 한다. 하느님을 자신의 아빠로 아는 기쁨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닮은 자가 되게 한다. 이 체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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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을 모든 방향에서 새롭게 해줄 것임에 틀림없다. 바꿔말하면 힘의 논 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가 다스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볼 줄 아는 시각, 감각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약함, 부족함, 성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바로 그 자신 안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형제들의 약함과 부족함을 이해 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의 약함 안에 하느님 나라가 와있음을 보게 된다. 형 제, 자매의 약함뿐 아니라 공동체의 모순과 불행스런 사건 안에서도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장상은 하느 님의 자녀됨의 기쁨을 살아가는 이다

2 . 그리스도의 대 리 자 ─ 기 쁜 소 식 을 전 하 는 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장상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이다. 얼마나 많은 장상들이 기쁜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더 많이 전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교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도원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중요한 핵심 테마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수도생활과 수행생활이“동격” 으로 이해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여러분의 의로움이 율사들과 바리사 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넘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것입니다.”산상수훈을 처음 접할 때 그 철저함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함으로써 더 열망하는 사람에게 산 상수훈은 그저 놀라거나 감탄할 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윤리요, 자신이 실제로 살아야 할 지침이다. 또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는 그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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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매일의 십자가와 다가오는 삶의 고난을 기쁘게 수 용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의 무질서함을 절제로 이끌어 간다.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2000년 전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러하였듯이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말을 선포하는 내면의 영으로부터의 치솟음, 영에서 나오는 소식인 것이 다. 억압과 속박, 눈멀음을 경험하고 있는 이웃에게 오늘날 기쁜 소식이 란 과연 무엇일까를 진정으로 고뇌하며 자신이 또한 이와 같은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할 때 성령은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심리적, 육체적, 영 적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식이다. 문자로서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기쁜 메시지이고 이를 듣는 사람과 말하는 장상 양쪽 모두에게 예수의 현존과 성령의 일하심을 체험케 한다. 공동체가 그리스도 대리자인 장상을 통해 이 기쁜 소식에 접할 때 공동체 에는 일치의 씨앗이 생기고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된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지금 이 보잘 것 없는 공동체와 연약한 수 도자들 각자 안에 그리고 장상 자신 안에 …. 지금 이 고난의 세상 안에서 열심히 수행, 고행을 하도록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수도자 들을 촉구, 장려하는 것이 장상의 역할이 아닐까? 혼란 속에서 어두운 터 널을 통과할 때일수록 공동체는 장상의 기쁜 소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낙관주의는 지금 있는 어려움, 고통이 이제 곧 잘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어려움이나 고통이 해소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어려움이나 고통 자체 안에 이 미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현 틀피스트회 총장 돔 베르나르도의 서간, 강의, 글들안에서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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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아틀라스 7형제들의 장례식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7형제들1)이 남긴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They followed Jesus to the end, in the absolutely radical living of the Gospel. 그들은 복음을 무조건적으로 철저하게 살아가는 삶 안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다. They plunged into his mystery, to the point of being totally transformed by him. 그들은 예수님에 의해 온전히 변모되기까지 그분의 신비 안으로 뛰어들었다. They lived together, died together and went together into eternal Life. 그들은 함께 살았고, 함께 죽었으며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다. They shared in their intimate communion with the universal Church and their own local Church. 그들은 보편교회와 자신들의 지역교회와 친밀한 친교를 나누었다. They were in deep solidarity with the men and women of today. 그들은 오늘날의 남자, 여자들과 깊은 연대감 안에 있었다. They discerned the signs of the times and the nature of contemporary challenges. 그들은 시대의 표징과 현시대의 도전의 특징들을 식별하였다. ‐‐‐‐‐‐‐‐‐‐‐‐‐‐‐‐‐‐‐‐‐‐‐‐‐‐‐‐

1) 1996년 회교도들에게 살해된 트라피스트회원,“아틀라스 수도원의 형제들” (불회 출 판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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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enriched our partimony from a specific cultural context. 그들은 특수한 문화적 상황 안에서 우리의 유산을 풍요롭게 하였다. They sealed with their blood their openness and commitment to interreligious dialogue. 그들은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자신들의 개방성과 헌신을 자신들의 피로써 증 명하였다. “ ( How far to follow”p. 47)

이것은 우리의 아틀라스 7형제들의 삶의 요약이자 동 베르나르도 자신 의 가르침의 요약이며 또한 예수의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 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장상의 권 위 공동체에서 선출된 원장이 수도규칙과 회헌에 준하여 공동체를 다스리 고 있는 한 어느 누구도 그의 권위를 문제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위는 어떤 것일까? 수도 공동체 회원들이 아빠스 를 신뢰하고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믿을 수 있는가는 법적인 권위만 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아빠스가 제시하는 방침이나 비젼을 수도자들이 억압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로이 자신의 것으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공동체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고 이 이상이 공동체를 하나 로 묶어준다. 또한 이런 신뢰가 있을 때에만 수도자들은 아빠스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한다. 이런 공동체는 움직임에 있어 기민하며 모두가 의견을 자유로이 내어놓을 수 있으므로 신중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각 개인이 지닌 가능성과 공동체의 역량을 끌어냄으로써 공동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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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은 풍요롭고 윤택해지고 영적으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성장을 체험 하게 된다. 즉 아빠스는 어떤 특별한 일을 유능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 라 공동체 한복판에서 구심점이 되어 준다. 아빠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 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각 멤버가 제 역할을 하고, 제 목소리를 내게 하는 섬기는 자의 역할이야말로 사람들이 권위를 느낄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아빠스뿐 아니라 공동체 회원들 서로 간에 생명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약점과 장점을 통해서 성장해 간다. 상호존경 과 아낌없는 헌신, 자유로이 선택한 추종은 이런 공동체의 특징이 된다. 반대로 장상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수도자 개개인은 훌륭할지 모르나 공 동체 전반에서 의 움직임은 반대에 부딪치게 되고 뜻을 모으기가 어려워 져서 공동체와 수도자들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어렵게 된다. 그러면 각 회원들과 공동체는 자신이 가진 힘과 역량을 발전시키기는커녕 제대 로 사용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아빠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어떤 불이 익 내지는 관계의 어려움이 예상될 때 수도자들은 그 앞에서“네”라고 하 지만 뒤돌아서서는 불만을 토하고 엉뚱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이런 문 제가 겹겹이 쌓이게 되면 공동체는 급속히 불안한 분위기에 빠지게 되어 신뢰를 잃게 되고 영적 인간적 성장에까지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생 길 수 있다. 즉 아빠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의 권위가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심력이 약해질 때 인간은 서로 섬기기보다 좋은 자리를 탐내고, 타인의 약점은 공격의 대상, 불편을 초래하는 걸림돌이 되며 성령의 바람은 더 이상 불지 못하여 사랑의 분위기를 상실하고 만 다. 의심과 불안, 자기 안에 갇힘, 개인주의, 불평이 이러한 공동체의 특 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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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순히 교회가 인정하는 합법적인 권위의 문제가 아니라 아빠스의 인품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빠스의 통치 형태 는 그의 총체적인 인간됨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와 만남 안에서 양육된 한 인간의 참된 통합은 그 사람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무리 없이 그분께로 인도할 수 있는 힘을 받는다. 이런 권위는“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 이 지상에서 이루어 지게 한다.

Ⅲ 맺음말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현 재 에 충실하며 미 래 를 향 해 열 려 있 는 장 상

위의 고찰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장상의 모습이 떠오른 다. 즉,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장 상의 모습이다. 인간이 모인 곳은 어디서나 비록 둘이 있더라도 권위가 문제시 된다. 어느 누구도 권위를 무시하고 살 수 없지만 한 공동체의 장 상의 권위는 많은 이들을 한 방향으로 인도해 가는데 있다. 그러므로 장 상 자신은 물론, 공동체 회원들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중대한 문 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 사람의 통치형태는 그 사람의 인품의 총집합이다. 그 는 과거의 기억과 영향력의 엄청난 힘을 경험하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걸어온 행복과 불행 이 모두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깨달아 알고 있 다. 그러므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 과거에 연연 한다 하여 그 과거에 어떤 변화도 줄 수 없으며, 오히려 오늘을 어떻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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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가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충실히 오늘을 살아갈 때 알 수 없는 미래는 그저 무섭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것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를 향 해 열려있는 가능성이 된다. 이 가능성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연유된 것이고 이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여기, 자신과 우리들 안에 있음을 즉, 하느님 나라가 이미 오고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장상을 가진 공동 체는 복되다. 이런 공동체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오심을 이미 보여주는 산 위의 마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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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전통���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 이연학 요나

서언 수도승 생활에서 환대 전통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은‘환대’주제에 대한 전문 적이고 독창적인 식견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만남’혹은‘관계’라는 우리 시대의 큰 명제에 비추어 베네딕도회의 환대 전통을 한 번 더 읽어 보고, 그 바탕 위에서 오늘의 우리 수도생활을 비추어보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습니다.

I . 규 칙 서( 5 3장 과 6 6장)

1. 문학적 구조 53장의 구조는, 1-15절과 16-20절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습니 다. 앞부분이 크게 보아 환대의 그리스도론적 측면을(환대의 신학적 본 질) 이야기한다면, 뒷부분은 거기 토대를 두고 환대의 실제적 요소들을 다룬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먹고, 자고, 이야기하기).

2. 내적 구조 : 경계-긴장 그런데 53장이나 66장에서 환대의 부인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강조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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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어떤 경계-긴장이 발견됩니다.“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이해 주었다”(마태 25장)는 주님 자신의 심판 기준(‘나그네=주 님’이라는 등식)에 따라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 당위성이 여러 모로 강조되지만, 동시에 손님 환대가 수도승 생활에 누가 되게 하지 않 아야 한다는 끊임없는 노심초사가 엿보입니다. 예컨대 53장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영접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지만, 담당자 말고는 손님들과 얘기하지도 말라는 금령으로 끝납니다. 여러 군데서 이 런‘갈지자 걸음’의 행보가 엿보입니다. 3-4절“온갖 사랑의 친절로써”와 “평화의 입맞춤”끝에 5절에는“악마의 속임수 때문에 기도를 바치기 전 에는 이 평화의 입맞춤을 하지 말 것이다”하십니다. 9절“하느님의 법을 읽어준 후에 온갖 친절을 드러낼 것이다”하고는 10절에서 장상을 제외 한 형제들은 금식 관례를 깨지 말 것을 명합니다. 16절 손님들을‘먹이 는’것도 문제입니다. 그들을 배려하여 따로 주방(식탁?)을 마련하라고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게 마련인 손님들로 말미암아 형제들이 불 편을 겪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요구합니다.‘재우는’것도 문젭니다.“침 대를 충분히 마련”하여야 하지만,“하느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형제” 가 객실을 맡아 돌보라고 규정합니다. 마지막으로 23-24절의‘대화’와 관련한 베네딕도 성인의 염려는 위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이런 긴장의 구 조는 66장에도 그대로 관찰됩니다.

3. 떨어져 나오기 이런‘긴장’은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를 위시해서 이전의 회 수도승 생활 교부들에게서도 한결같은 것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 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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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사실상 선배들의 노선에 서 계신 것이지요. 드 보귀에 신부님은 53 장과 66장이 이전 수도 규칙서들의 노선을 잘 종합해 주는 탁월한 모범이 라고 말씀하십니다.“세상에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와 환대는 동일 한 사랑의 두 표현으로서, 전자가 그리스도를 뒤따름(Sequela Christi)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 영접의 표현이다.”1) RB에서 손님을 영접하 되 손님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세상’까지 함께 영접하지 않아야 한다는 노심초사가 분명히 엿보입니다. 손님의 도래로 말미암아 손님이 성화되어야지 수도승들이 속화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드 보귀에 신부님은 수도승 생활의 외적 표현으로서의‘떨어져 나오기 (separatio)’에 대해 말하면서“여기서 말하는‘떨어져 나오기’는 단지 신체적으로 멀리 떨어져야 한다거나 외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 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본질적인 절연, 다시 말해 죄 를 포기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자세의 표지요 방편일 따름이다”라고 덧 붙입니다.‘영적으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n spirituelle)’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이해된‘떨어져 나오기’의 정신은 진정으로 영적인 환대와 병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도승 생활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산 위의 마을’이나‘등경 위의 등불’처럼 빛나게 되는 조건이라 고 합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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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de Vogüe, Commentaire doctrinal et spirituel, La Règle de Saint Benoiˆt t.VII, in SCh 187, Paris 1977, 365 2) 위의 책,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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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떨어져 나오기’와‘다름’ 그런데 실상 RB 자체를 들여다보면‘세상에서 떨어져 나오기(separatio)’란 개념이 이론적으로 정리되어 수도승 생활의 요체로 제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어 자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규칙서 전체를 살 펴보면 오히려 공동체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잘 접목되어 있다 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53장에 수도원에 손님들이 끊어지는 날이 없는 법이라 했고, 57장(수도원 기술자들)에도 보면 자급자족의 원칙에도 불 구하고 외부 세계와 경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64장에 보면 수도원 주변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수도원에 어떤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 하게 나옵니다(64,3-4 :“수도승들이 자기 악습에 찬동하는 인물을 아빠 스로 세웠을 경우 주변(주교, 이웃 아빠스들, 신자들)은 이를 막아야 한 다”).3) 후대의 어떤 문헌들에 나오는 염세적 태도(이른바‘세상혐오contemptus mundi’)가 RB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체로 보아, RB에 나타난 수도승 공동체를 결정짓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나 절연이라기보다는 그 사는 방식이 세상과‘다 르다는 점(굋質性, différance)’에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과 다름, 그것은 무엇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을 배 타적으로 그리고 전폭적으로 선택한다는 점, 그 삶에 전적으로 투신한다 는 사실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다름’은 세상으로부터 공동체 를 떨어뜨려 놓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 안의 아주 유니크한 자리에, 아주 각별한 어떤 자리에 위치시킵니다.4) 즉“점점 덜 세속적이되 점점 세상 ‐‐‐‐‐‐‐‐‐‐‐‐‐‐‐‐‐‐‐‐‐‐‐‐‐‐‐‐

3) Bertrand Rollin, Vivre aujourd’hui la Règle de Saint Benoiˆt, Bellefontaine 1983, 310 4) 위의 책,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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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더 깊이 현존하는(minus de hoc mundo, plus in hoc mundo)”그런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수도승 문헌은 아니지만 <디오그네투스에게> 라는 아주 오래된 교부 문 헌은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를 영혼과 육신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웅변적으로 잘 말해준다고 봅니다. 영혼이 육신 안에 있되 그에 속하지 않듯,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에 살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5) 영혼이라면 육신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육신 밖에 있다면 이미 그 몸은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를 세속화시키는 것은 사람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 닙니다. 손님들이 세속이라는‘병균’을 옮기는 숙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세속화시키는 것,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의 예수님‘유언기도’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 안에 있되 세 상에 속해있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요한 17,14-16 참조). 수도승 전통 일각의 어떤 염세적 관점에 따라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세상 안에 있 지 않음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사실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세속적일 수 있 습니다.6) 자신을 신비화 시키고 특권 계층으로 만듦으로써 사실에 있어 서는 대단히 교묘한 속물이 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복음적 의미로‘세상적’이 되어가지 않으면 공동체는 점점‘세속적’이 되어갑니 ‐‐‐‐‐‐‐‐‐‐‐‐‐‐‐‐‐‐‐‐‐‐‐‐‐‐‐‐

5) 서공석 역, 신학전망 20(1973), 75-86 참조 6) 말년의 토마스 머튼 일기는 특히 당대 자기가 속한 수도승 생활의 모습을 두고 이런 괴로운 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영국 교회의 수장인 R. Williams가 최근에 머튼에 관해 한 강연 하나가 머튼의 가장 뚜렷한 영적 면모들 중 하나를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R. Williams, “il coraggio di non tacere”, in <Thomas Merton solitudine e comunione>, Bose 2006, 103-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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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상의 수많은 조직들처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세력 확 대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바깥’으 로 나가겠다고 하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유는 간 단합니다.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도 이것은 일고의 가 치도 없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기, 다시 말해 세상과는‘다르게 존재하기’가 관건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투쟁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수도승 생활은 그런 영적 투쟁의 여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 니까. 한 마디로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지, 반대로 세상에 속 하되 마치 세상에 있지 않은 듯 처신하는 것의 교묘한 세속성에 대해 많 이 경계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환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규칙서가 보이는‘경 계’는, 마치 손님과 함께 세상도 묻어 들어오리란 듯이 단순히 봉쇄구역 을 지키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결국 우리가 원해 살고자 선택한 복음 정 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사이를 식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II. 同 궋 의 수 도 승 영 성 이처럼 경계해야 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우리가 그 일부인 세상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정신이고 보면, 손님 안에서 단순히 우리 봉사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만나야 한다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깊은 복음적 통찰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53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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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의 구조(1-15절)를 다시 한 번 살피고 싶습니다.‘손님=그리스도 의 현존’이라는 등식이 3번에 걸쳐 명확하게 등장하는데, 한 번은 1절이 고, 다른 한 번은 한 중간인 7절이며, 나머지 한 번은 제일 마지막의 15 절입니다. 첫째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이 찾아오는‘모든’손님 안에 있다 는 사실을 강조하고, 둘째 것은 그 손님 ─ 그리스도께 온몸으로 흠숭해 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마지막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 안 에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들 안에 더욱‘강하 게’현존하신다고 표현해볼 수 있을까요? ─ 고 강조합니다. 손님들 안에 서 그리스도를 뵙는 눈은 일상의 모든 것에 감추인 깊이를 천착하는 관상 적 시선, 다시 말해 만사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만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뵙는 영적 시선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체험, 그것도“하느님께서 보낸 사람”혹 은 하느님의 현존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체험은 사람에게 깊은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아픔과 기쁨에 동행하시느라 힘 겨운 나그네살이를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영성에서 무슨 개인적 성취를 위한 일이 될 수 없고(도를 튼다고 표 현하든 성인이 된다고 표현하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과 동행하는 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 님, 끝까지 사람과 함께 계시느라 사람을 위해 죽으신‘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한 정점으로서 수도승 생활 이 지닌 부인할 수 없는 사명이 있다면 결국은‘동행’이란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동행’영성의 가장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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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 표현이 바로 환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동행’의 실천을 위해서는 중요한 영적 식별이 가동되어야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환대를 강조하 되 반드시 어떤 단서를 붙인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저는 수도승의‘동 행’에 필요한 이 식별의 원리, 다시 말해 위에서 이야기한‘그리스도인의 다름’에 대해 논어의 한 구절이 잘 표현해 준다고 봅니다. 바로‘和而겘 同’이란 표현입니다.7) 감옥이라는‘대학’에서 漢學을 닦은 신영복 교수는 이 和를 연대성 혹 은 공존으로 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다양성이 소멸되지 않은 상 태에서 한데 어울리는 것. 반면 同은‘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흡 수합병’이 논리의 전형적 귀결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곧 지배의 논리이 고,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논리입니다. 한 마디로 和는 다양성을 인정하 고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의 원리임에 반하여 同은 차이와 다양성을 견디 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8) “화합하면서도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는다”쯤으로 풀 수 있을‘和而겘 同’은 어떤 면에서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 정식을 상기시킵니다.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유일무이한 위 격 안에 결합되되“혼동되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도 않는 방식으로”결합 된다(이른바‘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고 가르쳤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따른 수도승의 환대에도 이 표현을 적용시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승이 손님-세상을 맞이함은‘同’이 아니라 ‘和’입니다.‘和而겘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근본적 모호함(ambi‐‐‐‐‐‐‐‐‐‐‐‐‐‐‐‐‐‐‐‐‐‐‐‐‐‐‐‐

7)“君子和而겘同, 小人同而겘和.”<논어>, 子걟 편 8) 신영복, <강의>, 돌베게 2004, 160-16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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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s)을 잊어서는 안되고, 무분별한 환대-접대로 말미암아 수도승이 세 속화될 위험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부화뇌동’,‘同而不 和’로서의 환대이겠지요.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복음적 환 대가 아니라 단순히 세상의 정신과 동화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세상과 수도승, ���리고 손님과 수도승의 관계는‘和而겘同’의 관계에 있어야 가장 베네딕도 성인의 정신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친교 (koinonia)’의 이치를 실로 너무도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 다. 나아가, 아까 말씀드린 그리스도인의‘다름’에 대해서도 뛰어나게 설 명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和而겘同’이 수도승이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III. 환 대 의 修 궋 그리스도인의‘다 름’을 구성하는 환 대 영 성 의 요소들 이런 맥락에서 환대의 修궋的 측면을 한 번 다음과 같이 나름으로 정리 해 보았습니다. 어떤 것은 진정한 환대를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것 일수도 있고, 어떤 것은 환대의 왜곡된 형태에 대한 지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환대에 뒤따르는 실천적 노력의 요소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 쨌든 이런 점들이 감안된‘동행’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우리의‘다름’ 을 형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이라고 믿습니다.

1 . 수 도 형제들끼리의 환 대 “공동체가 방문객에게 보여주는 환대는 구성원 상호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환대의 연장이다.”9) 논리적으로도, 형제들 상호간에 먼저 서로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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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환대가 실천되지 않으면서 외부에서 오는 손 님들에게 그런 환대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공동체 안에 참 된 친교를 향한 노력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 사이의‘화이부동’으로서의 친교가 끊임없이 함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 기와 다른 점이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 자기와 다른 점을 제거 하거나 자기에게 흡수합병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 서로의 다른 점이 공동 체의 풍요로움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가 되는 분위기… 한 마디로“형제 는 짐이다”는 사실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사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 이 중요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형제는 짐이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짐이 된다.‘이 교도’에게는 타인이 짐이 되지 않는다. 이교도는 타인이 자기의 짐이 되는 것 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형제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지 않 으면 안된다. 짐이 될 때에만 타인은 내가 길들일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형제 가 된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의 친교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십자가의 친교이고, 거기서는 누구나 타인의 짐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느끼 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적 친교가 아닐 것이다. 그 같은 친교를 짊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10)

나아가 형제에 대한 이런 수용은 형제의 악과 죄를 수용하는 지경에까 지 가야 한다고 본회퍼 목사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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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첸치니, <헤르몬 산의 이슬처럼>, 성염 역, 바오로딸 2000, 26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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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자유를 감당하기도 어렵지만 타인의 죄를 감당하는 일은 더욱 힘들 다. 죄에서는 하느님과의 친교가 무너지고 형제들과의 친교가 무너지기 때문 이다. 그렇지만 이 짐을 감당할 줄 아는 데서 진정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드러난다. 죄인을 멸시하지 않고 인내할 줄 안다는 것은 그를 멸망할 사람으 로 간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말이며, 용서를 통해서 그와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적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견뎌주시고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죄의 용서를 통 해 죄인들을 견뎌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의 죄 를 견뎌줄 수 있으며 따라서 그를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 인에게 허락된 은총 중의 하나이다. 공동체에서 저질러진 죄치고 구성원 각 자가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 죄가 과연 있을까? 약한 형제를 위한 기도와 전 구에 성실하지 못했음을, 형제적 봉사와 형제다운 충고와 위로를 등한히 한 잘못을,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신의 영적 태만을 반성하고, 이런 것으로 자신 과 공동체와 형제들에게 손해를 끼쳤음을 반성하지 않아도 될까?11)

공동체 내부에서 형제들끼리의 이런 환대와 결속이 튼튼하지 못하면 환 대는 많은 경우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도피 가 되어 버립니다. 공동체에서 형제관계가 힘든 사람이 도피처로서 자기 를 위해 손님을 찾고, 손님에게 유난히 잘해주는 경우가 여기 해당합니 다. 이 경우는 당연히 공동체나 형제들에 대해 하지 않으면 더 좋은 말을 손님에게 쏟아 붓게 됩니다. 그리하여 손님을 사유화(私有化)합니다. 손 님을‘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국은 공동체의 다른 형제들로부터 ‐‐‐‐‐‐‐‐‐‐‐‐‐‐‐‐‐‐‐‐‐‐‐‐‐‐‐‐

11)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위의 책, 269-270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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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유리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예가 사실 많습니다. 결국, 달리 말씀드린다면 환대를 위한 공동체적 노력과 시스템 정착이 중요하지만, 환대는 시스템 보다는 공동체의 분위기-스타일에 달린 것이 라는 사실입니다. 형제들 서로가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있다면 당연히 그 공동체는 환대하는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다름의 수 용 환대는 근본적으로‘타자(他者)의 타자성(他者性)’과 맺는 성숙한 관 계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다른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혹은 두려 움(xenofobia)이 있는데, 동일한 라틴말 hostis가‘적’도 되고‘이방인’ (객-손님)도 동시에 뜻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적으로서의 이방 인이 손님이 되던 바로 그 날, 다시 말해 인간 공동체가 형성되던 바로 그 날, 문명은 결정적인 진일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12) 환대는 모든 참된 사랑이 그러하듯 본질적으로 위험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적인 거 처를 갈라놓는 경계선을 뛰어넘고 안전보장을 위해 설치해놓은 수많은 방책들을 때로 포기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참된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이 웃을 그 타자성과 함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 삶의 자리를 내어놓을 수 있는 자세, 이웃이 내 삶에 개입되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 는 자세… 이웃의 들어옴이‘침입’으로 느껴져야 한다면, 이웃의 존재가 위협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붉은 신호등일 것입니다. 손님은 익숙한 내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어떤 존재입니다. 그의 다름이 참으로 내 집에 수용될 때, ‐‐‐‐‐‐‐‐‐‐‐‐‐‐‐‐‐‐‐‐‐‐‐‐‐‐‐‐

12) J. Daniélou, Pour une théologie de l’hospitalité, in Vie Spirituelle, t.85, 1951,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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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받아들여지고 거부되지 않을 때, 손님을 맞는 주인들이 손님을 불 편해하지 않을 때 참된 환대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 손님으로 해서 맞아 들이는 사람 중 누군가가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환대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환대가 손님에게 깊은 의미에서의‘집’을 제공 하는 것이라면, 사실 그것은 손님을 가족으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다는 것을 뜻합니다. 손님은 한 가족으로 맞아들여질 때 최상의 환대를 체험합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에 근본적으로 열려있는 자세가 없다면 환 대도 불가능하거니와 사실상 참된 의미에서의‘관상’(하느님의 진면목을 알아뵙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요한복음)가 예수님을 근본적으로‘이방인’으로 묘사하고, 이‘낯선 분’의 자리를 하 느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계시의 자리로 삼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 다.13)‘이방인’이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가 쓰는 말도 모르는 그 런 존재를 일컫는데, 결국 예수님은 완전한 이방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당혹스런 낯섦 혹은 타자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 위 에서 자신과‘다른 이들’, 자신의 생각과 전통과 체험에‘낯선 이들’을 맞아들임으로써만 하느님과 그 나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다름’이 수용되지 않고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때 우리는 ‘클라우수라’혹은‘수도승다움’을 빙자하여 사실상 관계의 거절과 단절 ‐‐‐‐‐‐‐‐‐‐‐‐‐‐‐‐‐‐‐‐‐‐‐‐‐‐‐‐

13) 요한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나자렛, 갈릴래아 등), 사실 그분이 하늘로부터,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들에게“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8,34)라고 답답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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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同’의 정신을 밀어붙여 상대 방에게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거하여 나와 흡수통일 시키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 손님으로 받아들 일 수 있다는 자세가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사람들의 이 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기 보다, 사람들에게 늘‘한 말씀’을 주는 사람으로 처신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3 . 주기보다 받 기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참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체험할 때는 우리가 무엇인가를‘해 줄 때’보다도 들어줄 때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루가 10장의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는 환대 맥락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면 같습니다. 마르타는 사람들을 환대하려고 애쓰며 분주한 인 물입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하고 베풀 어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손님(주님)도 자신도 그리 만족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오히려 손님에게 무엇인가 받 고 있는 모습입니다. 손님이 자기에게 뭔가를 주도록 허락해드린다고 할 까, 지극한 수용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 가장 큰 것을 드린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마리아는 받을 줄 아는 자세로 자신을 두었기에, 다시 말해‘섬김’ 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신 분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시란 사실을 알았기 에(끝까지‘섬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마르타와는 달리) 오히려 주님으 로 하여금‘집’에 있다고 느끼게 해 드리는 듯 보입니다. 받는 게 주는 것 보다 많은 경우 더 어렵고 더 중요하지요. 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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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관대하면 되지만, 받기 위해서는 가난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여러 번 읽고 기도하면서 이 단락이“준다고 설쳐대지 말라. 사 실 받는 것이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란 메시지를 숨기고 있음을 점점 더 깊이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사실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성부 앞에 서 계신 성자의 모 습의 신령한 거울 같습니다.“아드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말씀이시다. 그 분은‘사랑하시는 분’의‘사랑받는 이’이시다. 아버지께서 샘처럼 솟아나 신다면 그분은 그 솟아남을 수용하고 환대하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우 물이시라면 그분은 두레박이시다. 아버지께서‘무상’(無償)이시라면 그 분은 감사이시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사랑받는 분 이시다. 아드님은 사랑하는 것만이 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받음 역시 신 적인 것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거저 주는 것도 신적이지만 감사히 받는 것도 신적이다. (…) 말씀은 주도권을 잡지 않는다. 말씀은‘환대’(수용) 이다. 말씀은 무상으로 주는 분이 아니다. 말씀은 감사히 받는 분이다. 말 씀은 (아버지의‘무상으로 주심’에 대한) 응답이다. 무상으로 주시는 분, 주도권을 쥐신 분은 말씀의 원천이신 침묵(성부)이다”(브루노 포르테). 손님 앞에서 그가 자기 자신일 수 있도록 침묵하고 경청하는 자세 역시 우리 형제들 상호간에 훈련하는 만큼만 손님들 앞에서도 실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가장 간절한 꿈은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그분의 강생 때부터 좌절되었습니다.“방에는 들어갈 데가 없었다”(루가 2,7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환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객들을 위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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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초사하는 것보다도, 우리 안에 이런 그분의 빈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일, 우리 중심을 그분을 위해 비워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는 우리가 때로 손님에게 시혜자로 자처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그리고 손님을‘지나치게’배려하고 위해주려는 자세의 위험에 대 해 반성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엔조 비앙키는 또 수도승 환대에서 손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선물’임을 알아듣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바 있습니 다.14) 엔조 수사님은 RB나 회 수도승들의 앞선 규칙서들에서 이런 관점 이 부재한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만, 사실 53장을 잘 읽으면 손님은, 특 히 우리를 더 불편하게 하는 손님(순례자, 가난한 이)이 그리스도의 현존 을 마치 더 많이 담은 것처럼 제시되는데, 그리스도의 더 강한 현존(그런 말이 가능하다면)이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외래 수도승에 대해 말하면서도 (61,4 :“만일 그가 이치에 맞게 또 사랑에서 나온 겸손을 가지고 무엇을 비평하거나 지적하거든 아빠스는 바로 이것 을 위해 주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이 아닌가 현명하게 숙고해 볼 것이다”) 그 비슷한 것을 느껴볼 수 있는 것이 아닐지요.

4. 무소유 ─ 가 난 온 땅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 입니까? 53장에서 성 베네딕도께서 손님들을 두고 그리스도의 현존이라 며 그렇게 극진히 묘사하는 것이 하나의 문학적 과장이라면 몰라도, 그것 이 그렇지 않을진대,15) 손님 안에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께서 현존 ‐‐‐‐‐‐‐‐‐‐‐‐‐‐‐‐‐‐‐‐‐‐‐‐‐‐‐‐

14) 엔조 비앙키,“수도생활에 있어 성숙의 구조들” , 코이노니아 선집 1, 381-38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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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계신다면 정작 주인은 누구이고 손님은 누구인지요. 그런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이 역시 이 땅에서는 손님일 수밖에 없습 니다. 라틴말 hospes는‘나그네’도 뜻하고 나그네를 맞는 주인도 동시에 뜻한다는 사실이 참 성서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손님들에게 환대를 제공한다고 해서 뭘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일도 참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 몸마저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 님의 것이라면, 우리 수도원과 그 안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 래서 하느님의 집(domus Dei)이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 집’혹은‘우리 집’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이게 어떻게 우리 거야. 다 하느님 꺼지.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야지.”이런 말을 할 수 있 는 수도자가 몇이나 될까요? 의외로 수도자들이 개인 것에는 욕심이 없다 고 해도 자기 공동체의 것에는 큰 집착에 사로잡히는 수가 많은 것 같습 니다. 땅과 돈 등에 관련된 분쟁들이 더러 있지 않습니까. 수도자가 가난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기도그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는 사실, 처지가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가난으로 고통받으십니까. 보십시 오. 우리도 사실 가난합니다. 보십시오. 우리도 열심히 노력할 뿐, 인간관 계로 또 경제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여기에“그러나 우리는 행복합 니다”란 말을 덧붙일 수 있다면, 우리를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을 가장 큰 희망과 힘을 얻고 갈 것입니다. ‐‐‐‐‐‐‐‐‐‐‐‐‐‐‐‐‐‐‐‐‐‐‐‐‐‐‐‐

15) 고대 교부들의 전통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은 축성된 성체를 말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진짜 몸’ (Corpus verum)은 형제들의 살아있는 몸과 그 친교를 뜻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Henri de Lubac, <Catholicisme. Les aspects sociaux du dogme>, Paris 19833, 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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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교회 안에는 교구나 수도원을 막론하고 피정집이 너무 많아 대체로 운영이 잘 안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 현상일까요. 피정집이 많다는 것하고 복음적 환대의 공간이 많다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수도원들, 특히 베네딕도 수 도원들이야말로 복음적 환대의 자리가 되어주어야 할 곳이 아닐지요. 경 제적 수익과 아무 관련없이 운영되는 환대의 집,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하느님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기도와 인정(人情) 의‘집’이 교회 안에 너무 드물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5. 진 실 있 는 그대로 때로 우리는 사람들의 기대와 좋은 인상에 우리를 끼워 맞추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과장해서 우리의 부족함과 결점을 나타낼 필요는 없 지만,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길 필요도 없다고 믿습니다. 봉쇄 수도원 이나 수도승 생활에 특히 자기 홍보,‘자기 신비화’의 유혹이 있다고 느 껴질 때가 있습니다. 봉쇄 수녀원의 경우 지금도 많이 존재하는‘철창’이 그렇고, 구라파의 베네딕도 수도원들의 사진에 자주 등장하지만 수도승 입네 두건을 덮어쓰고 대중의 이미지에 각인되려고 하는 모습도 그런 유 혹에 노출된 모습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 지만, 상징이 너무 비대해지면 실상과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느낌, 어딘 지 진실이 결여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도 이상적일 수만은 없고, 그런 것을 손님들에게 시시콜콜 떠벌일 필요는 결 코 없지만, 그렇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출 일만도 아니라고 봅 니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참된 상호 환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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픈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볼 수 없을까요?“우리도 힘들지만 늘 새로 시작하며 늘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며 삽니다”, 이런 마음 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손님들이 우리에게 갖고 있는 ‘깨끗하고 거룩한’이미지에만 집착하고 거기 우리 모습을 끼워 맞춘다 면, 손님들이 우리를 만날 때 우리의 이미지와 만나지 우리 실상과 만나 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관계는 잠시의 경탄을 불러는 일으킬지언정 오 래 가지도 못하고, 환대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입니다.

6 . 종말론적 대 망 의 증 언 위에서 말한 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손님 즉 나그네라는 사실의 자각 은 우리 수도자들이 가장 고유한 증언인 종말론적 기다림의 자세를 깨우 쳐준다고 생각합니다. 손님들에게 우리 독신 생활 자체가 이 세상은 영원 하지 않다는 것, 우리의 고향은 여기가 아니라‘저 위’라는 것, 우리는 하 느님 나라의 충만한 도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이 우리처럼‘촌구석’에 살며‘쓸데없이’삶을 낭비하는 것을 보면 서 충격을 받는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저들은 왜 저렇게 살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좀‘깨게’만들 수 있다면, 그 건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티모시 랏클리프 신부님이 베네딕도회 아빠스님들에게 하 셨다는 말씀을 되씹어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성공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요, 선두에 서지 않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 게 승진없는 인생은 뜻이 없는 것입니다 (…) 수도승들은 무엇이 되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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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도승들의 삶이 외적으로 분명하 게 내세울 그럴듯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밀스럽게 자신을 감추 시는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당신을 드 러내십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 세상은 장터입니다. 모든 이가 사람들 의 주의를 끌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자신들이 팔고있는 물건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 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종일토록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웨이브, 컴퓨터, 유명한 해변에서 보내는 환상적인 휴가, 신제품 비누 등 등. 세상은 종교마저도 이 장터로 나와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소리쳐야 한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까지 아주 좋은 상품처럼 스 스로를 이 진열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 주에는 요가, 다 음 주에는 아로마 요법, 이런 것들 사이에 그리스도교도 섞여 진열되어 “나도 있다”하고 판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6) 이 첨단의 자본주의 시대에 종교와 영성도 사실 이미 상품화 되어 있고,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쩌면 각 수도회의 카리스마와 수많은 영성 프로그 램들이 상품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강력한 신흥 종교들의 도전에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구매력 있는 상품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프로그램 신제 품 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 자체가 이미 복 ‐‐‐‐‐‐‐‐‐‐‐‐‐‐‐‐‐‐‐‐‐‐‐‐‐‐‐‐

16) 티모시 랏클리프,“하느님의 빈 자리” , 코이노니아 선집 3, 409-421에서 띄엄띄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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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그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그것이 아닐까 하는 사뭇 괴로운 의혹입 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작아지고 사라져버리라고 초대하는데, 자본 주의는 끊임없이 커지고 증식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라고 밀어붙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조국에 살면서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을 참습니 다. 타향 땅이 그들에게는 조국과 같고 모든 조국이 타향과 같습니다. (…)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있으되 육신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17)

Ⅳ. 결 론 ‘환대’와 관련된 이 모든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다름’을 구성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다름’이야말로 우리를 세상 바깥이 아니라 세상 안의 특정한 자리, 세상에는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 위치시키며 세 상 사람들과 동행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다름’의 철저함에 수도 승 생활의 본질이 달렸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례와 서원을 통해 그리스도 를 전폭적으로 뒤따르겠다고 결단을 내림으로써 이‘다른’삶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환대의 객체가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면, 환대의 주체, 즉 내 속에서 손님을 참되게 환대할 수 있는 참된 주체 역시 하느님 자신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손님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 는다면, 그런 내 모습 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뵙는다고 할 것입니다. ‐‐‐‐‐‐‐‐‐‐‐‐‐‐‐‐‐‐‐‐‐‐‐‐‐‐‐‐

17) <디오그네투스에게>, 서공석 역, 위의 책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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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전통과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

사람이 사람을 환대할 때는 사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입니 다.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 생각도 꼭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나름대로 살펴본 환대는 수도승 생활에 부수적인 그 무엇 일 수가 없습니다. 수도 생활이 내부적으로 튼튼해진 후에라야만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은 영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좀 어폐가 있을 것입니 다. 오히려 환대의 수행과 더불어 우리의 수도승 생활도 튼튼히 성장한다 고 해야 하지 않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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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1) 로완 윌리암스 조성옥 에노스 옮김

우리는 성 베네딕도를 유럽의 수호성인이라 불러왔습니다. 이것은 서유 럽에서 로마가 몰락한 후 새로운 게르만 왕국들이 일어서던 당시,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무질서했던 시기에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들이 종교에 초점을 맞춘 문화의 어떤 통일성을 지켜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부 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유럽의 미래를 위해서 도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서가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할 근거가 있겠는지요? 거의 세속화된, 도덕적으로 혼란스럽고 각양각색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유럽 대륙에서 이 거룩한 규칙서가 아직도 공동의 삶을 위한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규칙서 는 단지 고고학적 가치만 지닌 옛 문헌이 아니라 거기에 삶의 뿌리를 둔 수많은 공동체들 안에서 마치 성경 말씀처럼 계속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수도승들과 수녀들의 공동생활을 위해 규칙서가 제시하는 내용들은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서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본 구조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은 베네딕 도회 봉헌자로 살고자 하는 놀라운 수의 사람들과 또 정기적으로 베네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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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 Rowan Williams가 2006년 11월 21일 로마 St. Anselmo에서 했던 강의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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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비전을 새롭게 하는 이들을 통해서 증명 되고 있습니다. 베네딕도회 워스 수도원(Worth Abbey)의 생활을 보여주 는 텔레비전 시리즈는 영국에서 예상을 넘은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몇 달 동안 수도원 안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경험 했던 다섯 남자는 공동체의 특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베네딕도 공동체의 이러한 특성들을 오늘날 유럽 국가들의 삶에도 적용 할 수 있겠는지 질문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보존되어야 하는 문화가 있다면, 규칙서의 어떤 부분들이 우리가 지키고 성장시켜야 할 문화의 가 장 본질적인 것들을 지적하고 있는지요? 좀 달리 표현해서, 규칙서에서 찾을 수 있는 정치적 미덕들은 무엇이며, 특별히 이러한 미덕들을 현재 유럽대륙의 지정학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읽어낼 수 있겠는지요? 이런 질 문을 따라가다 보면 성 베네딕도를 변화무쌍하고 문제 많은 우리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문화 주류의 어떤 부분에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하 는지 지적해 주면서 현대 유럽의 위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 한 세 가지 주제를 규칙서 안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시간의 의미 와 그 용도(the use and the meaning of time), 둘째 순종(obedience), 셋째 참여(participati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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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의미와 사 용 우선, 시간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 자세히 명시된 하루 일과는 노동 과 공부와 기도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하나의 율동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생산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수세 기 후 아빌라의 데레사 역시 그랬지만,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이 자신들의 노동이 아닌 그 어떤 것에 의지하는 것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 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이가 일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습 니다. 하지만 노동이 전부는 아닙니다. 수도원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영적 으로 성장하는 곳이며 그래서 성찰을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수도 원은 공동생활의 모든 정신과 방향이 수도생활의 가장 중심에 있는 중대 한 일, 곧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로 계속 돌아서야 하는 장소입니다. 노동은 중요하고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규칙서 48장 에 나오듯 수도원의 모든 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장상은 여러 가지 조건과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각 사람에게 맞는 일을 결정해야 합니다. 수도원의 모든 이가 다 ���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계를 위해 없어선 안 될 기본적인 일만큼 다양한 기술과 솜씨 또한 필요한 법입니 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추수하는 것같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도승 생활은 애긍에 의지하여 무위도식하면서 자신을 살피는데나 끝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그런 생활이 절대 아닙니다.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빛으로 나아가는‘자아’는, 많은 위 기와 한계들이 응답을 촉구하는 물질세계 속에 살고 있는‘자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도승의 정체성은 우선적으로 생산자와 다릅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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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정신은 자신을 의식하는 한편, 자신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해, 곧 찬양받으셔야 할 분에게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은‘마 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RB 머리말) 하느님 현존 안 에서 기쁨을 느끼며 의식적인 자아가 확장되고 성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하 여 존재합니다. 하루 리듬의 균형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우리 의식을 이끌어줍니다. 오늘날 유럽과 북대서양 지역에서 우리는 일과 쉼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양쪽 다 비인간적이고 강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풍토 속에서 살 고 있습니다. 시간은 그 안에서 일하든지 소비하든지 아무런 구분 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의식됩니다. 노동은 하루나 주간의 리듬을 따르지 않습 니다. 간혹 정신없는 놀이 때문에 산발적으로 중단되기는 하지만 거의 24 시간 쉬지 않는 사업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뭔가 만들거나, 아니면 우리가 원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대신 추측해 주는 오락산업 들의 장단에 맞춰 수동적으로 즐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광고나 대중 소설들이 계속 주입시키는 메시지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기인하는 영적 삶과 가정생활의 긴장은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 안 에서 희미하지만 영향력 있는 불안의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베네딕도 회원들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 고 사용했는지를 기초로 유럽 문화의 미래에 대한 어려운 질문의 방향을 적절히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된 문화는 활동과 회복의 리듬이 필요합니다. 영국의 탁월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코르넬리우스 에른스트 (Cornelius Ernst)는 의미 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인류가 속해 있는 세상이 인류에 속한 세상이 되어가는 전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문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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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만들거나 아니면 놀거나 하는 무대 이상의 것입니다. 문화는 인간다 움을 키워내는 환경이어야 합니다. 기억과 지성, 사랑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산 과정이나 경제의 전체 구조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지성적인지 또 인간적인 환경을 유지하도록 되어있는지 질문해 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적인 환경이란 자기관찰의 습 관과 자기이해의 가능성들을 키워주는 환경을 뜻합니다. 지성과 상상력 의 키가 클 수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베네딕도가 독서(Lectio)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합시다. 그분이 생각한 독서의 목적은 자기이해와 겸손, 그리고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수도승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개발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하느 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유혹과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죽을 수밖에 없 는 존재, 그러나 섬김 안에서 은총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 재로 말입니다. 이렇듯 공부가 바르게 수행되는 삶을 위해 노동이 있듯이, 공부는 하느 님 앞에 있는 자기를 의식하며 개인적인 인간 성숙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 는 하나의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규칙서가 지향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귀 결이며 절정인 기도와 찬양으로 이끌어주는 바탕입니다. 노동과 공부로 성장한 제자, 자신을 의식할 줄 알고 지성을 갖추고 상상력이 풍부한 제자 는 하느님을 고백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밖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임을 압니다.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가 명확해지므로 무익한 자기 몰두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은 하느님을 즐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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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규칙서의 영향을 받은 문화는 그 목적과 가치가 생산이나 교 환에만 있는 경제 활동들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가 떠받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기업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성장과 지성과 의식이 자라는 환경을 돕고 있는지 질문해 야 합니다. 더 광범위하게 이것은 유럽 국가들이 경제적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유럽 공동체가 유럽 내의 경 제적으로 약한 국가들의 가입을 허락하는 것이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 라 사이의 협력 모델이 될 수 있겠는지, 또 교육과 연구 분야에까지 퍼져 있는 기능주의에 저항해서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의 내적 자원을 인간 교 육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 사용할 수 있겠는지, 그리고 말 그대로 우리의 물질적인 환경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현재 절박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경 문제들은 단지 생존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들이 가득 쌓여있는 창고 이상의 것으로 이해하는 우리 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 리의 지성과 노동을 통해 어떤 의미로는 우리 소유가 된 이 세상을 단지 우리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기쁨으로 관상해야할 그 무엇으로 이해하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으로 공간과 관상적 경탄, 계획하거나 청하지 않은 것을 받을 필요에 대한 문제입니다. 베네딕도회의 시간 구조는 균형을 염두에 두도록 짜여있습니다. 우리는 뭔가 만들어내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인간 활동과 성장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 생산을 보지 못하는 문화 속에 살며 이 균형을 놓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 대두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목적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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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에 관해 질문할 능력이 있는 문명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 렇게 할 수 있는 사회만이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해서든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기 위해서든, 개인의 본능과 자기보호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 들 곧‘시민’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곧 영 원히 살 수 없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사랑을 위해 창조된 존재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순종 저는 지금 서로 의지해야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은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베네딕도 정신의 둘째 범주 순종과 연결됩니다. 규칙서, 특히 5장을 보면 수도승들에게 순종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자세를 준비하는 훈련입니다. 여기 서의 순종은 조직화된 공동생활에서 오는 실제적인 문제들과 이것이 아 빠스에게 위임하는 특별한 요구들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는 점에서 사막 수도 전통의 순종, 즉 제자가 스승에게 복종하는 그것과 다릅니다. 아빠스는 공동체의 필요와 수도원의 보편적인 사명을 잘 식별 해야 합니다. 수도승 한 사람이 아빠스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빠스와 전체 공동체 사이의 상당히 복잡하고 미묘한 과정을 거친 결과에 승복하는 것 입니다. 규칙서의 놀라운 특성 하나는 순종에 관해 우리가‘거울효과’(mirror effect)라 일컫는 것입니다. 아빠스는 공동체 각 회원들의 은사와 독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온갖 주의를 다해 보살펴야 합니다(RB 2,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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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에게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규칙에 순종할 뿐 아니라 (RB 64) 모든 형제들에게 모범적으로 순종하도록 불리운 사람입 니다. 순종이 자신의 뜻에 침묵하는 것이라면 아빠스는 무엇보다도 바로 이 침묵의 모범으로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기 힘든 공동생활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수도승들 각자는 삶을 나누 고 서로 의지하면서 자신들의 선함을 그리고 그들이 활짝 피어나고 있음 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단독적 권위 행사에는 어떤 기회도 주지 않도록 수도원 행정을 조직하는 방법을 기술한 규칙서 21장(십인장에 대하여)과 65장(수도원 원장에 대하여)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규칙서 3장의“주께서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주신다”는 유명한 구절은 71장의 권고 즉 공동체 안에서 후배가 선 배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순종과 서로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대위법적 효 과로 상호 순종의 그림에 놀랍고도 중요한 전망을 더해줍니다. 규칙서가 그리고 있는 공동체는 어떤 식으로도 개인의 뜻에 지배되는 단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규칙서의 권고들은 권위에 복종할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권위는 현대적 의미에서 대표는 아니지만, 체계적으 로 공동체 내의 경험과 여러 성격의 다양함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하 는 권위입니다. 베네딕도회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 회원을 받아들이는 순 서를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위계질서에 따라 정하지 않습니다. 아 빠스가 달리 지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수도원의 서열은 우선적으로 입회 날짜에 따라 정해지는 법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들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은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 교육정도나 나이 같은 외적인 요건 들이 아닙니다. 달리 표현해서, 어느 누구의 의견도 그가 재산이 적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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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회적 신분이 낮다는 등의 이유로 공동체 안에서 무시되거나 함부로 취급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사회적 역사적 요건들로 가 치를 매기지 않습니다. 오직 공동체와의 서약만이 한 회원이 자신의 소리 를 낼 수 있는 권리의 기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우리 대륙과 문화를 향해 던지고 싶은 질문들 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지요? 첫째, 규칙서에 표현된 다양성의 가치에 관 한 것입니다. 다양성은 여러 형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너 그러운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규칙서 는 공동선과 같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래서 개개의 다양하고 독특한 전망은 도전을 받을 수 있음을 분명히 전제합니다. 베네딕도회의 순종은 이런 전제를 기반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힘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 어떤 형태로든 개인이나 그 룹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적 싸움을 단호히 거절하고, 아빠스의 권 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애착할 수 있는 위험을 막아주는 균형과 억제의 도구들이 있습니다. 권위의 역할은 모두가 서로의 피어남과 거룩함을 위 해 일하는 공동체를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은사들이 서로 협조하게 하 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현장에서 지역 언어나 관습 등 다양한 문화의 가치를 진지 하게 평가하고, 동시에 전문적인 특수 계층이나 지역 공동체의 경제를 주 도하는 이들이 권위를 독점하는 추세를 그대로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획일화시키려는 관료적 힘에 반드시 저항해야 합니다. 국제적 안건들과 토의들은 물질적으로 덜 가진 이들에 게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최근 몇 십년간 유럽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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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가 지역 자치를 강조한 것은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라 봅니다. 이것은 국가 주권이라는 현 시대를 제압하고 있는 강력하고도 완고한 개념이 문 화의 실제적 다양성과 개별 지역이 요구하는 자유의 필요성을 충분히 보 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베네딕도회 비전의 영향을 받은 유럽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들 과 소수자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현재 상 황에서는 지레 겁을 먹고 이주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요구됩니 다. 자신들을 받아준 사회의 시민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있고 또 시민권을 얻고 싶어 하는 이주민 그룹들의 소리는 그들보다 역사가 길고 정치적 경 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들의 권리만큼이나 전체 공동체 안에서 중시되 어야 합니다. 서로 관계를 맺는 한 사회 안에서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이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해선 안됩니다. 규칙서가 말하는 순종의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 권위는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국가와 초국적 그룹들의 요구 사이에서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 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단순한 환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이방인들의 요구와 그들의 선물을 통합할 수 있 습니다. 시민의 신원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이런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슬람 시민 정신과 그리스도교나 서구 사회의 시민 정신은 서로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한 가정입 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관념적으로 비종교적인 자유주의자로부터 가장 철저한 무슬림 근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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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을 이성적으 로 세속화된 다원주의와 단순한 신정(神政) 사이의 불가피한 단절로 여기 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경계를 넘어서서 시민의 정체성 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갈지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길은 분명 열릴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 안의 다양성이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수 준에 이르렀다고 포기해 버리는 대신, 베네딕도회적인 태도, 곧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다양성들로부터 보편적인 시민 목표를 끌어낼 수 있겠는 지 질문하도록 우리를 안내할 것입니다. 규칙서 안에서 아빠스는 그 자신이 공동���의 기본 가치들을 모범적으로 살고, 소속된 이들의 다양한 필요와 관심을 존중하고 돌보는 능력을 갖출 때에 형제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단체이든 유럽 정치 공동체들의 결속과 상호이해를 추구하는 단체라면, 그들 역시 규칙서가 그리는 아빠스다운 미덕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곧 권위가 그 자체로 요구하는 신중한 경청의 태도를 보여주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규칙서가 장상에게 기대하던 것처럼, 권위 를 가진 이가 스스로 자신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정직해야 한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파벌이나 이해관계 사이의 어색한 평화를 유 지하는 방법이 아니라 각 집단들의 이익과 계획을 넘어서는 창조적 탐색 을 계속하는 길입니다. 故 길리안 로즈(Gillian Rose)가 자신의 정치철학 에서 정리한 헤겔 학파의 통찰을 빌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 즉 그들의 존재가 우선 위협이나 골칫거리로 느껴지기 쉬운 낯선 이들과 아직 충분 히 관계를 맺어보지 않았다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익이나 계획에 대한 모든 섣부른 자기 설명은 필연적으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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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나 정치는 언제나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에 관한 것으로, 대립이나 경 쟁이 아니라 공동의 언어와 비전을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의 관계를 발전 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비전은 낯선 이들과 충분히 만나보기 전에 는 알 수 없는 비전입니다.

참여 이제 규칙서의 세 번째 주제, 참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미 보았듯이, 아빠스의 의무 중 하나는 각 사람의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회원이 공동체의 일상적인 일에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일을 잘 하지 못해도 아주 적당한 적임자가 아 니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몸이 아프거나 수도원의 다른 중요한 일에 투입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주방 일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RB 35). 수도원 안에서 모든 사람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특정 한 소임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생활을 위해 책임을 지는 자로서의 존 엄성도 부여 받습니다. 공동체 안의 누구라도 타인에게 기대어 살거나 아 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마치 하숙생이나 자선의 대상처럼 취급된다면 그런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소임을 나누 는 일은 각 회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다는 표시이며 이 요구들은 진지 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권위를 이해하는 베네딕도회 정신 의 본질입니다. 노동은 단지 물리적 조건들을 만들어내서만이 아니라 노 동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성을 도모하는 것이기에 인간적이고 지 성적인 생태 환경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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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역 사회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개별적 으로 일할 수 있도록 확실히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제적 자원을 늘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소수자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태학적 표현으로는 인간적 문화적 차원에 서‘다양성 보존’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디언 보호구역 같이 소수자들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호의적인 중앙 권력에만 속 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중앙집권적이며 비인간적인 관료정치의 힘 에 맞서기 위한 자원을 제공해 줄 문화적 논쟁 같은 것들이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다양성 보존’ 이 실천되고 퍼져나가게 하는 발판이 되어야만 합니다. 불리한 입장에 처 한 사람들이 유럽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꼭 같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지원의 목적은 응급조치로 파국만 면하 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 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글로벌 시장경제 시대에 계속 대두되는 도덕적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경제적 독립을 행사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값싼 노동력과 천연 자원의 공급처로 영원히 종속적으로 살아야 하는 힘없는 소수민족 집단들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규칙서를 보면, 생명 력 있는 공동체는 능동적인 회원과 수동적인 회원으로 분리되지 않습니 다. 베네딕도는 수동적인 삶이 강요되는 것은 영혼에 해롭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조급하게 그리고 무신경하게 강요되고 있는‘세계화’는 필연적 으로 경제적 약자들을 만들어내고, 이런 사회 구조는 결국 갖가지 파괴적 행위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테러리즘을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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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깊은 좌절과 시민 존엄성이 폭력적으로 박탈되고 있는 부패하고 타 락한 사회의 자기 파괴적 악순환 같은 것이 그 결과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세계화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독재 정권이나 가난한 나라의 경제적 부패 또한 경시할 수 없는 원인입니다. 그러나 힘겹게 견뎌내고 있는 지역 시장들을 개방하라는 강력한 압박과, 구호물자 공급의 성급한 중단, 생필품 조달마저 위협하며 세계 경제의 흐름이 요구하는 온갖 불리 한 조건들을 무조건 따르라는 압력 등은 새롭게 일어나는 약소국가들에 게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고, 정의롭고 신뢰할만한 정부가 자리 잡는 것 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서서히 선진국 정부들과 많은 경제 기구들이 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을 짓누르는 지불 불가능 한 부채를 탕감해주려는 국제적 움직임들은 이런 파괴적 악순환에서 빠 져 나오려는 중대한 시도라고 봅니다. 공동체를 섬기고 유지하기 위해 노동에 참여하는 모든 이는 공동체로부 터 지원과 보호를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홀로 고통 받거나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기도 합니다. 유럽 국가 들은 사회복지 규정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민의 존엄성이 중요하다는 신념만큼은 최근 몇 십년간 유럽의 공통된 비전이 되어 왔습니다. 시민 존엄성은 그간 국가의 직접적인 도움이나 국 가와 자선 단체 간의 협조 등 공공 지원을 통해서 유지되어왔습니다. 이 런 노력들이 경제적 압력 앞에서 줄거나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한 국가가 요구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신용 관계와 모든 이에게 보장된 존엄성의 차원에서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말 입니다.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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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주제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세속적 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물질적이고 실제적 인 중대성들이 다른 모든 자유의 기초가 되는 영적 자유를 보장하고 지탱 해 주겠는가 하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이런 말씀들을 드렸습니다. 베네 딕도 규칙서는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토마스 머튼 이 게쎄마니 수도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미국의 단 하나 진정한 도시를 발견했다고 감격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유럽 에 공헌한 바는 그동안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문명의 자취가 보존 된 특별한 장소로 후퇴한 삶, 마치 문화유산보관소 정도로 비추어져 왔습 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적극적 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델로 베네딕도 정신이 보여준 긍정적인 역할을 놓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도서관의 사서이기 이전에 공 동체를 세운 분들이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단지 문명을 보존하는 역할뿐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정치적 미덕들로 중세 암흑시대만큼이나 야만스럽게 인간성이 상처 입게 될 우리 미래에도 유럽 문명을 지키고 새 롭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규칙서에 나타난 정치사상은 베네딕도가 새롭게 창조해낸 어떤 것 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그리스도 몸의 정치의 구체적인 예라고 하는 것 이 옳겠지요. 상호 섬김, 모든 이들을 위해 각 사람에 주어진 특별한 선물 들에 대한 존중, 무엇보다도 우리가 관상적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는 확신을 그 중심에 두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인간학입니다. 그 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규칙서의 비전은 천재적인 정치 감각을 가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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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와 유럽의 미래

떤 개인이 만들어낸 이상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에 대해 예수님 과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것에 대한 성찰입니다. 규칙서는 최소한 두 가 지를 특별히 질문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창조된 목적인 기쁨을 향해서 가 장 자유롭게 성장하게 하는 삶의 리듬은 어떤 것인지, 완전한 물질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인들의 평범한 삶 안에서 찬미의 우선적 중요성 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또한 어떤 형태의 권위가‘분노를 넘어선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지 묻습니다. 권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약함과 한계에 대한 두려움, 저 멀리 계신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우 리 자신의 무능함에서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말입니다. 규칙서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하느님께 바칠 의무와 공동생활의 의무가 서로 갈등하지 않 도록, 내적인 일과 바깥 일 사이의 균형을 찾으며 자기를 의식하고 마음 을 넓히기 위해 애쓰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난 사 람이나 유능한 이들을 전문가로 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몸의 정치 를 실제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권위에 대해서 일의 필요성과 관상의 필요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베네딕도는 바로 이런 문 제들에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정치 체제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천착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현대나 포스트모던 사회는 좋든 나쁘든 공공연히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투 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이해를 고려할 때, 시장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 종교가 사적인 영역으로 추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인간 정체성과 자의식에 대한 탐구를 가 능한 한 시야 밖으로 치워야 할 부끄러운 소일꺼리 정도로 축소시킵니다.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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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서의 정치사상은 어떻게 하면 국가나 사회가 초월적인 것의 가능성 을 증거하는 행위나 제도들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 하도록 도전합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기라고 부추기는 세상 이 의미 없고 시시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대신 우리에게는 봉사와 흠숭을 통하여 올바른 관점에서 노동과 창조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자기 이 해와 자기 헌신의 깊은 수준들이 있다는 생각을 지키라는 숙제이기도 합 니다. 규칙서는 일과 성찰과 기쁨이 서로 어우러지는 인간 공동체들이 존 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스스로 순종을 실천하면서 순종을 요구하 는 권위만이 합법적인 권위로 인정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이가 지키는 법에 대한 순종과 사람이나 상황의 특수성에 주의를 기울이 는 더 넓은 차원에서의 순종이 있습니다. 규칙서는 국가나 연방의 헌법 내용 같은 것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 러나 우리는 규칙서 안에서 우리 세계에 팽배해 있는 힘의 논리를 향해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던져야 할 질문을 명확하게 해줄 정치적 미덕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호성인들은 마스코트 같은 어떤 것이 아닙 니다. 그들은 국가와 단체들, 그리고 각 개인에게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복음의 도전을 더 날카롭게 이해하게 해주는 하느님 나라의 친 구들입니다.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을 혼란에 빠진 오늘날의 유럽을 위한 바로 그런 수호자로 재발견해야 하겠습니다. 숨 막히는 오늘날의 정치 현 장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으며 영을 위한 진정한 작업장을 창조할 방도 들을 우리는 수호성인의 규칙서로부터 더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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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마크리나의 생애1) 거룩한 마크리나의 생애에 관한 닛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의 편지 장영주 예로니모 옮김 허성석 로무알도 주해

해 제 1 . 문학유형과 중 요 성 『마크리나의 생애』는 그녀의 동생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저술되 었는데, 저술 연대는 대개 빨라도 380년 후반이거나 늦어도 382-383년 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의 문학유형은 서간 형식으로 된 성인전기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철학적 삶의 모델에 대해서 다루는 일종의 철학적 전기이며, 한 여성의 생애에 대한 그리스도교 최초의 전기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자 기 누이의 생애에서 그가 다른 작품들 안에서 설명하는 금욕적이고 영적 인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해설을 뽑아내고 있다. 중 심주제는 여성들 역시 철학적 삶에 참여하여 완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이다. 다시 말해 여성도 철학적 삶을 통해 여성의 조건과 인간 본성을 극 복하고 천상적 삶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 작품의 역사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갖는다. 예컨대 바 ‐‐‐‐‐‐‐‐‐‐‐‐‐‐‐‐‐‐‐‐‐‐‐‐‐‐‐‐

1) 우리말 번역을 위해서는 Grégoire de Nysse, Vie de Sainte Macrine, Intro., Trad., Commet., Notes et Index, Pierre Maraval, Source Chrétiennes 178: Cerf, Paris 1971에 실린 불어 번역본을 사용하였고, 해제는 같은 책 21-34, 90-103쪽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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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우스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역사 혹은 더 일반적으로 그들 가문 의 역사, 4세기 그리스도인 삶이나 전례의 역사, 자주 수도승생활의 역사 자료로 이 작품을 이용하곤 한다. 이러한 이용은 이 작품의 한 측면에 국 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한 가정의 삶, 더 나아가 4세기 소아시아의 한 주 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에 관해 많은 귀한 가르침을 제공해준다. 동 시에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코루스(A. Chorus)의 다음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우리는『마 크리나의 생애』를 고대의 가장 훌륭한 성인전기라고 부를 수 있다.”2)

2. 철학의 이 상 그레고리우스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이상은‘철학’의 이상이 다. 그가 서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마크리나는 바로 철학을 통해서‘인간적 덕행의 절정에’도달하였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은 점차 이런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유스티누스에게 있어 참된 철학은 그리스도교 교의인 계시진리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철 학이란 용어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만일 당신이 철학을 실 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과 당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소?”3) 즉 참된 철학은 신앙을 통해 고무된 윤리적 삶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 파도키아 교부들은 이 용어를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에 통합하였다. 그들 은 자주 독자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철학에 매우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 ‐‐‐‐‐‐‐‐‐‐‐‐‐‐‐‐‐‐‐‐‐‐‐‐‐‐‐‐

2) A. Chorus, Het beeld van de mens in de oude biografie en hagiografie, Den Haag 1962, 184.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교리교육』III, XI, 7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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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여기서는 철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마크리나의 생애』에서 는‘철학’을‘수도승생활’과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철학이란 단어의 이런 의미는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모나코스(monachos), 프론티스테리온(phrontèristion)과 같은 전문 용어들은 다음 사 실을 잘 증언해 주고 있다. 즉 마크리나는 확실히 수도승적 환경 안에서 자기 이상을 실천했다는 사실이다. 바실리우스에게 있어 당시 그리스도 인 삶의 이상이 모든 세례자에게 제시되었고 수도승생활은 그것의 보다 더 완전한 실현일 뿐이었다. 이 점에 관해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형의 견 해와 비슷하다. 즉 철학의 이상은 수도승생활에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 인 삶의 완전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철학적 이상의 일반 특성들을 그것이 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수도승적 가치들로부터 구분할 필요가 있 다. 그러나 마크리나에게 있어 철학과 수도승생활은 사실상 일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 철학적 이상의 일반적 특성 이 일치는 그레고리우스로 하여금‘철학적’전기를 위해 서간 형식을 선택하는 것을 쉽게 해주었다. 그는 한 인물의 생애 이야기를 통하여 철 학적 이상을 조명해 나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특성은 진보에 대한 것이다. 완전함이 지속적인 진보로 이루어진다는 이 주제는 그레고리우스의 핵심 주제로서『마크리나 의 생애』에서 자주 나타난다. 즉 만일 마크리나가 덕의 정점에 도달했다 면, 그것은‘부단히 덕에 나아가는’(10) 삶을 통해서 이다. 그의 철학은 ‘그것이 드러내는 선이 증가함에 따라 보다 큰 순수함으로 부단히 나아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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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1) 그레고리우스는 이 진보를 가능케 했던 마크리나 생애의 몇몇 사건들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나우크라시우스의 죽음, 엠멜리아의 죽 음, 바실리우스의 죽음, 페트루스의 사제서품(14) 등은 그녀에게 있어 덕 행에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마크리나의 생애』는 마크리나의 철학적 삶은 사실상 욕정들로부터의 자유를 통해 관상에 바쳐진 천사적 삶이며 또한 사랑이라는 점을 제시한 다. 그레고리우스는 마크리나를 천사와 비교하면서 우리를 본문 여기저 기서 볼 수 있는 또 이후 수도승 전통 안에서 중요한 주제가 될‘천사적 삶’이라는 주제로 안내한다. 천사적(12; 15), 천상적(15), 비물질적(5; 11) 이란 형용사들은 모두 마크리나가 감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동 시에 영적이고 이성적인 고차원적 실재들(18)에 대한 관상에로 나아갔음 을 표현하고 있다. 그레고리우스는‘본성을 초월해 고양된’(1) 자기 누이 에 대해 말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마크리나는 관상을 통하여 천사들처럼 되었다. ‘철학적 상승’이란 말에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다. 마크리 나의 마지막 기도와 최후 탄원의 전례적 문맥은 전체 여정의 그리스도교 적 의미를 표현한다. 즉 육체의 욕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경외심으로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그리고 하느님 앞에 흠 없이 되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었다(24). 철학적 이상의 추구는 그리스도를 향한 신비적 상승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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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도승적 이상의 구체적 특성 이것들은 마크리나의 이상적 모습에서 나오는 주요 특성들이고 그의 여 정, 즉 고차원적 실재들에 대한 관상을 위해 감각으로부터의 점진적 자유 의 주요 단계들이다. 이 일반적 특성들은 마크리나와 그의 가족 구성원 중 몇몇(나우크라시우스, 바실리우스, 엠멜리아)이 채택한 삶의 양식 안 에서 그리고 그들이 살고자 했던 수도승적 가치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표 현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서‘순결하고 흠 없는 삶의 양식’(2)인 동정성의 동기들이 많이 언급된다.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약혼자가 죽자 여전히 젊었던 마크리나는 동정을 지키려는 결심이 확고했다(5). 동정성의 선택 은 그녀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마크리나의 결심의 일부로 나타났다. 그 결심은 세상에서 멀리 물러나 영혼의 통합과 관상을 가능케 하는 고독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또 다른 특성은 가난이다. 이것은 정결한 삶에 방 해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이다(6). 이것은 보다 큰 자유의 한 요소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나우크라시우스와 바실리우스의 경우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데, 곧 당시 사회에서 부유한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포기이다. 그것은 또한 호화로운 생활 관습을 끊고 시종들에게 봉사받기를 포기하는 것(7)이기도 하다.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동등해지려는 자발적 의지도 포함된다. 이런 평등성은 손 노동의 채택과 노예들과의 공동생활 선택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7). 특 히 손노동은 가난한 삶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선택한다. 마크리나는 사 람들의 봉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노동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20). 동시에 손노동은 보다 더 가난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련하 게 해준다. 그레고리우스는 나우크라시우스(8)와 페트루스(12)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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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리나(20)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 노동은 동정성과 고독 혹은 가난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관상을 위한 자유를 얻는데 있다. 마크리나와 그 동료 들의 주된 일과 포기의 목적은 신적 실재들에 대한 묵상, 끊임없는 기도, 부단한 하느님 찬양(11)이었다. 마크리나의 생애 최후의 날들은 관상과 기도를 위한 이 열망에 어긋나지 않았다.

3) 영적 스승 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그레고리우스는 마크리나를 완덕의 길을 가르치 는 지도자와 조언자로 제시하고 있다. 장 다니엘루 신부(P. J. Daniélou) 는 자기 논문의 결론에서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 관상과 사도직을 결합 하는 깊은 관련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크리나는 우리에게 자기 말과 행동 을 통해 어머니, 바실리우스, 그레고리우스, 페트루스 그리고 동정녀와 과부들의 교육자로 제시된다. 이것이 곧 철학적 삶의 풍부함이다. 즉 고 대의 현자처럼 그리스도교 성인은 증거자이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여전히 증거하기를 바라고 있다(1).

본문 서문 1. 이 글은 형식상 서간문입니다. 두서(頭書)만 보더라도 누구나 이것 이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량으로는 편지가 아니 라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저는 당신이 요청 하신 내용을 편지에 담아 보내드리기에는 그 주제가 훨씬 더 광범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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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당신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우리가 가졌던 만남을 잊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확신합니 다. 그때는 제가 서약한 바에 따라 육(肉)안에 오신 주님 강생의 자취를 바로 그 현장에서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무렵이었고, 안티오키아 근 처를 지나가던 차에 마침 저는 당신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지적인 당신께서(ton Intelligence)4) 많은 이야기 거리를 꺼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만남에는 대화가 끊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대화중에 유명한 한 인물을 생각해냈고 곧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성을 초월해 고양된 사람을 그의 성(性)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한 여 인에 대해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 한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진술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는 아무 것도 의존하지 않고 대신 우리가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만을 그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중에 언급했던 그 동정녀 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문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그와 관련된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되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는 저와 다른 형제들처럼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 다. 그는 바로 우리 어머니의 태에서 처음으로 발아한, 말하자면 부모님 께서 앞으로 거두시게 될 열매들 중에서 맏물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의 훌륭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어떤 유익이 되리라고 판단하셨습니다. ‐‐‐‐‐‐‐‐‐‐‐‐‐‐‐‐‐‐‐‐‐‐‐‐‐‐‐‐

4) 이 표현은 당시 서신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정중한 양식 중 하나로서 지적 혹은 윤리 적 자질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경칭을 나타내는 표현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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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철학(philosophia)5)을 통해 인간적 덕행의 절정에까지 다다른 이 여인이 침묵 속에 묻힘으로써, 오는 시대에 그러한 존재가 잊혀져버려 아무에게도 그가 알려지지 않고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어떠한 유익도 주 지 못하게 되지 않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 순명하여 그의 이야기를 단순하고 꾸밈없이 가능한 한 간결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출생 2. 그 여인은 마크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동정녀였습니다. 한편 이전에 우리 집안에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또 다른 마크리나가 계셨는데, 그 는 바로 우리 친조모였고 박해시대에 여러 번에 걸쳐 힘껏 싸워서 그리스 도를 증거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분의 이름을 따서 아이에 게 마크리나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이름으 로, 지인들은 그를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출생 전에 있었 던 한 발현 덕분에 그에게는 비밀스레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의 어머니에게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그러한 덕이 있 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특히 순결하고 흠 잡을 데 없이 살기를 원해서 기꺼이 결혼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부모를 모두 여읜데다, 그 때는 외모의 우아함이 한창 물이 올라있었고, 미모에 대한 명성도 자 자해서 많은 이가 그와 혼인하고자 하였습니다. 게다가 미모 때문에 연정 으로 불타오른 사람들이 그를 납치하려고 벼렸기에 그는 자진해서 어떤 ‐‐‐‐‐‐‐‐‐‐‐‐‐‐‐‐‐‐‐‐‐‐‐‐‐‐‐‐

5) 고대에는 철학이 오늘날처럼 하나의 사변적 학문이 아니라 지혜를 얻기 위한 일종의 금욕적 삶의 한 양식을 뜻했다. 따라서 여기서‘철학’혹은‘철학적 삶’ 이라고 할 때 ‘금욕생활’또는‘수도승생활’ 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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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약혼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사에 반해서 어떤 난폭한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도사 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품 있는 행실로 명성이 자자했고 평판이 높았던 한 남자를 택해서 자기 삶의 보호자로 삼았습니다. 그 후 그는 첫 아기를 낳게 되었고, 우리가 이야기한 그 여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기를 거의 다 해산하여 산고가 끝나갈 무렵에 그는 잠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마치 아직 태중에 있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 다. 그러자 어느 인간보다 더 위엄 있는 용모와 몸가짐을 한 인물이 나타 나서 그의 태중에 있던 아이를‘테클라’라고 불렀습니다.‘테클라’는 동 정녀 중에서도 그 생애가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 차례 반복된 후에 발현은 그쳤습니다. 그는 순산을 하였고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본 대로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비밀스레 불렸던 그녀 의 이름에 대한 내력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발현은 단순히 아이의 이름 을 짓는데 있어 지침을 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삶이 어떠할 것 인지 미리 일러주려고 했고, 아이가 그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살았던 그 런 삶을 택하여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 같습니다.

교육 3. 아이는 자랐습니다. 아이에게는 유모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더 자주 아이를 자기 품에 안아 젖을 물렸습니다. 유년기가 지났을 때 아이는 사 람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쉽게 배워 익혔습니다. 이렇게 아이 가 배우는데 두각을 나타내자 그의 부모는 아이를 교육시키기로 결정했 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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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육이 대부분 시 작품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세속적 교육관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주제를 이루 는 여성들의 비극적 정열, 희극의 외설 이나 트로이의 불행 원인들, 이를 테면 여인들의 부적절한 이야기로 얼룩진 시들을 통해 온순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그는 정말로 수치스럽고 부적합 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성서에 담긴 모든 내용을 아이의 교과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어린아이가 오히려 더 쉽게 성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겼고 특별히 솔로몬의 지혜서, 그 중에서도 윤리적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내용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는 시편을 어느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모두 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중 정해진 때 에 시편의 각 구절을 모두 암송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가사 일을 시작할 때나 끝낼 때, 휴식을 취할 때나 식탁에서 물러날 때, 잠자리 에 들 때나 밤중에 기도하러 일어날 때,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그는 한순 간도 곁에서 떠나지 않는 변함없는 친구처럼 시편과 함께 했습니다.

정혼 4. 아이는 커 가면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하였고 특히 양털 가공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냈습니다. 그러는 중에 청춘의 꽃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 기 시작하는 나이인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소녀의 미모는 어떻게든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감추려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 었습니다. 그 지역을 통틀어도 그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비할 만큼 경이로 운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화가의 손으로도 그의 아름 다움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일을 솜씨 좋게 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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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체 모습을 모사하여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과업을 이루려고 시도하 는 데까지 이른 재간으로도 그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와 결혼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이 그의 부모에게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주의 깊고 바른 분별력 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는 친척들 중에서 좋은 가문이 출신으로 행실이 바르기로 이름난 한 젊은이를 자기 딸의 배필로 점찍었는데 그 사람은 이 제 막 학업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의 혼기가 찼을 때 아버 지는 바로 그 젊은이를 배필로 정해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젊은이에 게는 마음을 부풀게 하는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변론을 하여 자신의 언변을 드러내고, 연설가로서의 자기 명성을 소 녀의 아버지에게 결혼선물로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질투가 이런 밝은 희망을 앗아갔고 죽기에는 아까운 나이였던 그를 삶에서 낚아 채 가버렸습니다.

동정의 결 심 5. 소녀는 아버지의 결정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 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위해 정해진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버렸을 때, 그는 아버지의 결정으로 했던 정혼으로 자신은 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에게 예정되어 있던 운명이 그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처럼 그때부 터는 동정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은 나이에 비해 너무나 확 고해서 사람들의 짐작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미모는 널 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그와 결혼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부모는 그에게 자주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뜻대로 정혼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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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그것으로 족하고 또 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담을 꺼내는 것은 온당하 지 않을 뿐더러 합법적이지도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출생과 죽음 이 단 한 번 있는 것처럼 결혼도 단 한 번 있는 것이 사리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신의 배필로 정해준 그 사람이 죽지 않았 다고 확고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위해 살았던 그 사람이 부활 에 대한 희망으로 여정 중에 있으며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 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여정 중에 있는 자기 배우자를 배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크리나와 어 머 니 이러한 논거로 마크리나는 자기를 설득하려는 모든 사람을 물리쳤습니 다. 그는 이런 고귀한 결심을 지키는데 있어 유일한 보호막이 있다고 생각 하였는데, 그것은 늘 어머니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는 다른 자식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자기 태중에 품고 있었지만 마크리 나는 늘 꼭 품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계속해서 태중에 그를 배고 있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있어서 딸과 함께 하는 삶이 짐스러 운 것이거나 무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딸의 주의 깊은 보살핌을 받는 것 은 그에게 있어 많은 하인의 시중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모녀는 서로 간에 유익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영혼을 돌보고 딸은 어머니의 육신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딸은 그에게 요구되는 온갖 가사 일을 하면서도 특별히 어머니를 위한 식사를 손수 마련했습니 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그에게 주업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후에 전례 봉사를 도왔고 남은 시간엔 손수 일을 해서 어머니를 봉양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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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살고자 했던 삶의 방식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어머니가 짊어져야 하 는 모든 짐을 함께 나누어 졌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부양해야 하는 네 아들 과 다섯 딸이 있었고, 재산이 세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까닭으로 세금을 세 수령에게 각각 납부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상태에서 그런 상황은 어머니에게 온갖 괴로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마크리나는 이 모든 일에 있어 어머니와 함께 걱정하고 그녀의 슬픔의 무게를 덜어드리 면서 어머니와 고생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 다. 그가 어머니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눈은 끊임없이 그 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그것을 장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삶 의 모범이라는 경탄할 만한 방법으로 어머니에게 같은 이상 ─ 저는 이것 을 철학의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에 이르는 방향을 제시하였고 점차로 어머니를 영적이고 순수한 삶으로 인도해나갔습니다.

바실리우스 6. 어머니가 각자의 처지와 의향에 따라 마크리나의 자매들에게 적합한 혼인을 성사시켰을 때, 마크리나의 동생 대(大) 바실리우스가 오랫동안 수사학을 연마하고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마크리나는 그가 자신의 언 변에 대한 자부심으로 지나치게 우쭐거리고 모든 고관을 업신여기며 귀 족과 지방관들에게 거드름을 피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크리 나는 바실리우스를 그렇게도 빨리 철학의 이상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 하여 바실리우스는 세상의 명예를 마다하고 자신의 언변이 가져다준 영 예를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가난과 덕행으로 나아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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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애도 없는 삶의 채비를 갖추어, 손노동을 하면서 고되게 살아가는 삶으로 도망자처럼 달아나버렸습니다. 바실리우스의 삶과 행실로 인해서 그의 이름은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곳에 알려졌고 그의 명성은 덕행으로 유명했던 모든 이를 능가해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긴 설명 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다시금 마크리나 에게로 돌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수도원처럼 변 화 된 가 정 7. 마크리나는 세속적인 삶의 그럴듯한 구실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린 후에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 귀부인과 같은 행색을 버리고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하인들의 수발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설득했습니다. 이것 은 어머니가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그의 곁에 살고 있던 동정녀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게 함으로써 노예와 하녀들을 자기 자 매 또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로 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여담으로 이 일에 관한 짧은 다른 일화들을 덧붙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것들을 이야기하느라 이 동정녀의 고매한 인품이 더 잘 드러나 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우크라시우스(Naucratius))의 삶 8. 네 남동생들 가운데 대(大) 바실리우스 다음으로 태어난 둘째는 나 우크라시우스였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타고난 재능과 아름다운 용모, 힘과 순발력 그리고 일처리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스물한 살 이 되었을 때, 대중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펼쳐보 였을 때 극장 안에 있던 모든 청중은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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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이끌려 지기 수중에 있던 모든 것을 천히 여겼고 억누를 수 없는 갈망으로 인해 고독하고 가난한 삶에로 나아갔습 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하인 중 하나인 크리사피우스는 주인과 같은 방식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고 한결 같은 애정으로 그를 따랐습니다. 나우크라시우스는 이리스 근처의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이리스는 폰투스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인데, 이 강은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하여 우리 고장을 가로질러 흑해로 흘러듭니 다. 그는 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데서 무성한 숲으로 덮이고, 산을 둘 러 우뚝 솟은 절벽에 있는 한 동굴 속에 숨겨진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도시의 소란을 멀리하고, 힘을 쏟아 부어야 했던 제국의 병역과 법정의 변론으로부터 떨어져 살았습니다. 이렇게 삶의 주변에서 사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몸소 병들고 가진 것 없 는 노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자기가 원한 삶의 방식에 어울리는 일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모든 사냥 기술에 관해 능숙했 던 그는 사냥으로 노인들에게 먹을 양식을 마련해주는 한편 사냥의 고단 함으로 자신의 젊은 혈기를 다스려나갔습니다. 한편 그는 어머니가 어떤 것을 자기에게 명할 때마다 기꺼이 순명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이중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다잡아갔던 것입니다. 자신의 젊은 혈기를 다스리 는 고된 노동과 어머니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그는 신적 계명을 지키면서 복되게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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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크라시우스의 죽 음 9. 5년 동안 그는 이렇게 철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이런 삶의 방 식이 어머니에게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는 절제로써 삶 을 꾸려가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데 전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버겁고 비극적인 시련이 어머니를 덮쳤 고 우리 가족 모두를 불행과 비탄 속에 빠뜨렸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적들의 흉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나우크라시우스가 어느 날 별안 간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병치레가 잦지 않았던 그였기 때문에 가 족들은 이런 불행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이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아야하는 납득할 수 있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날 자기가 보살피고 있던 노인들의 양 식을 마련하러 사냥을 나갔던 나우크라시우스는 그의 동료인 크리사피우 스와 함께 시체가 되어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머니는 당시 멀리 계 셨는데, 그 곳은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걸어서 사흘 걸리는 거리에 있 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어머니에게 가서 그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 해서 알렸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덕에 있어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러나 다른 어머니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모정은 강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일순간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의 감각은 마비되고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통으로 이성을 잃은 어머니는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은 명문가 출신의 운동선수처럼 이 비극적인 소식이 가한 충격으로 땅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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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련 앞 에 서 마크리나와 어머니의 태 도 10.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마크리나의 덕은 빛을 발했습니다. 고통에 직면하여 흔들림 없이 온전한 정신으로 자신을 곧추 세우고, 어머니의 약 함을 받치는 버팀목이 되어 그를 슬픔의 심연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였습 니다. 마크리나의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는 어머니의 마음에 용기를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고통에 휩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리하여 어머니는 고통 앞에서도 울부짖거나 겉옷을 찢거나 하지 않았고, 불행에 대해 탄식하거나 구슬프게 곡소리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 는 더 이상 여인네들의 저급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는 침묵을 통하여 모정의 충동을 잠재우고 스스로의 숙고와 딸이 병을 치 료하는 방법으로 제시했던 권고를 통해 그것을 몰아내버렸습니다. 이렇 게 마크리나라는 동정녀의 한없이 위대한 영혼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역시 인간적인 정으로 어머니처럼 고통스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 다. 죽음이 그렇게 앗아 가버린 것은 바로 자기 형제, 더구나 그가 가장 사랑하는 형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리나는 숙고를 통하여 육정을 극복하고 어머니 역시 모정을 극복하여 고통을 이겨내도 록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행실로써 모범을 보이며 인내와 용기를 갖도록 어머니를 이끌었습니다. 부단히 덕에 나아갔던 그의 삶은 어머니에게 세 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슬픔에 빠져있기보다는 자기가 받은 축복을 향유 하는 기쁨을 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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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사에서의 수도승생활 11. 어머니는 자녀들의 양육에 대한 책임과 교육과 혼인에 대한 부담에 서 벗어나자 사람들을 세속적인 삶으로 끌어들이는 주된 빌미가 되는 재 산을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한편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크리나라는 동정녀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머니를 이런 종류의 철학적이 고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마크리나는 어머니가 익숙해져 있던 호사스런 것들을 버리게 하여 자신과 같은 정도의 겸손을 지니도록 어머니를 이끌어 동정녀들의 무리(공동체)와 같은 수준에 맞추 어 생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모든 계급적인 특권을 거부 하고 그들과 동등한 처지의 사람으로서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잠자리 에서 자고, 같은 생계 수단으로 그네들과 같은 삶을 살도록 ���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마크리나와 그의 어머니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철 학이 너무나도 고결하고 밤낮의 행실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 하도 거룩 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죽음으로 육신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이 삶의 근심에서도 해방되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그런 근심들로부 터 해방되고, 세상의 모든 헛된 것에서 멀어져 천사의 삶을 닮아가게 되 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분노, 시기, 증오, 거만 혹은 그와 비슷한 것 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명예나 영화, 야망이나 자부심 그리고 그와 비슷한 모든 헛된 것에 대한 욕망을 물리쳤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들에게 있어 쾌락이란 바로 금욕이었고, 영화란 사람들에게서 잊히 는 것이었습니다. 부유함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것은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의 몸에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털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또 노동이라는 것은, 이런 삶에서 사람들이 힘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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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여 해야 하는 어떤 일 ─ 그것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적 실재에 대한 묵상과 계속되는 기 도, 모든 시간에 걸쳐 고르게 배분되어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찬송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묵상과 기도와 찬송,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노동 인 동시에 휴식이었습니다. 인간적 속성과 영적 속성의 경계선에 놓인 이 러한 삶의 모습을 인간의 말로 어찌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격정 으로부터 해방된 그들의 본성은 인간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들도 육체 안에 한정되어 감각기관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이었기 때문 에, 천사와 영적 실재의 본성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차이가 극히 적은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면서도 영적 존재를 닮아 육체의 무게에 짓눌려 쓰 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은 육체의 부담에서 벗어나 천상으로 고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높은 곳에서 천상의 지배 자들과 함께 거닐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러한 삶을 살았고 그 들의 덕행은 시간이 감에 따라 더욱 자라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철학 은 그것이 드러내는 선이 커져감에 따라 부단히 보다 큰 순수함으로 나아 갔기 때문입니다.

세바스테(Sebaste))의 페투르스 12. 마크리나에게는 또 다른 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마크리나가 삶의 숭고한 이상을 실현해 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페투르스였습니다. 그의 탄생으로 우리 어머니의 모든 산고는 끝이 났습니다. 그는 우리 부 모님의 막내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에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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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이라는 명칭과 고아라는 명칭을 동시 에 받게 되었습니다. 페투르스가 태어나자마자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서 이야기해온 그의 큰누님이 유모에게서 몸소 그를 받아 돌보았습니다. 마 크리나는 아주 높은 수준의 소양에 이르도록 페투르스를 가르쳤고 어렸 을 적부터 거룩한 학문을 연마하도록 그를 훈련시켜, 한가함으로 인해 헛 된 것들에 정신을 팔지 않도록 했습니다. 마크리나는 그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었습니다. 아버지, 스승, 교사, 어머니, 온갖 좋은 것들에 대한 조 언자였던 마크리나로 인해 페투르스는 소년기가 채 지나기 전, 아직 아동 기가 한창인 어린아이 때부터 철학의 숭고한 이상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타고난 재능 덕분으로 온갖 수작업을 솜씨 좋게 해냈습니다. 자신을 꼼꼼히 가르치는 스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 분의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습득할 수 있는 일들을 그는 훌륭히 해냈습니다. 세속적인 학문을 배워 익히는 것을 하찮게 여긴 그에게는 온 갖 좋은 지식을 적절하게 가르쳐 줄 누님이라는 선물이 태어나면서 주어 졌습니다. 페투르스는 자기 누님을 모든 선행에 있어 모범으로 삼고 언제 나 누님의 행실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덕행에 있어 서 진보하였고 덕의 뛰어남으로 말하자면 그는 대(大) 바실리우스에 견주 더라도 손색이 없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천사의 삶을 사는 누님과 어머니에게 삶의 조력자가 되었고, 그들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그들의 선행이 널리 알려져 도처에서 많은 사람이 그들이 은거하고 있던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페 투르스의 수고 덕분에 그들에게 그처럼 많은 양식을 댈 수 있었고 쇄도하 는 방문객들로 인하여 사막이 마치 도시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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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 음 13. 행복한 노년을 맞은 어머니는 얼마 후 하느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두 자녀의 팔에 안겨 세상을 하직한 것입니다. 그가 자녀들에게 남긴 축 복의 말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함께 있지 아니한 자 녀들도 다정하게 떠올리면서 자녀들 중 그 누구도 축복에서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의탁한 자 녀는 바로 그녀의 임종 때 함께 한 자녀였습니다. 두 자녀는 침대 한쪽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각각의 손을 잡고 하느님께 이러한 마지막 말씀을 올렸습니다. “주님, 당신께 제 고통의 열매 중에서 맏이와 열째를 바칩니다. 여기 맏 물인 저의 첫째입니다. 그리고 열째인 저의 막내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법(계명)에 따라 당신께 바치는 봉헌물이고 당신의 것입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 여기 있는 저의 맏이와 막내를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어머니는 분명하게 자기 딸과 아들을 가리켰습니다. 축복을 모두 마치고 나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그들에 게 자신을 아버지의 무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분부대로 어 머니를 묻고 나서 그들은 한층 고양되어 철학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삶을 거슬러 부단히 싸우면서6) 나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후 에 이룬 진보는 그들이 초기에 보여준 덕행을 능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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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구절은 영적 투쟁 혹은 욕정들을 거스른 싸움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영적 투쟁 이란 주제는 그레고리우스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표 현, 즉‘자기 삶을 거스른 싸움’ 은 그레고리우스에게 별로 익숙치 않은 표현처럼 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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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투르스의 사제수품과 바실리우스의 죽 음 14. 이 무렵 가장 위대한 성인들 중 한 분이었던 바실리우스는 체사레아 의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전례를 통하여 몸소 페투르스를 축성하여 그를 사제직에 올렸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더 경건하고 더 거 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페투르스가 사제직을 받음으로써 그들 은 철학에 더욱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8년 후, 온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바실리우스는 사람들을 떠나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바실 리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고향과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마크리나가 이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엄청난 상실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진리의 적들에 의해 저질러진 그 비극에 어 떻게 그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황금은 몇몇 도가니를 거쳐야 순수하게 정련된다고들 합니다. 첫 번째 도가니에서 제거되지 못한 불순 물들은 두 번째 도가니에서 걸러지고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맨 마지막 도 가니에서 금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이 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순금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것이 모든 도가니를 거쳤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도가니를 거쳤다면 더 이상 걸러 낼 불순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크리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 습니다. 영혼이 굳건하고 순수하게 정련되기 위하여 그의 고결한 마음은 계속되는 불행의 공격으로 야기된 온갖 시련의 도가니를 거쳐야 했던 것 입니다. 그 시련이란 무엇보다도 나우크라시우스 죽음과 그 뒤를 이은 어 머니의 죽음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 집안 모두의 자랑이었던 바실리우스 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크리나는 불행의 공격에도 쓰러 지지 않았고 결코 굴하지 않는 운동선수처럼 의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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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가 마크리나를 찾 아 감: 예언적인 꿈 15. 그 슬픔을 겪은 지 아홉 달 남짓 되었을 무렵 안티오키아에서 주교 회의가 열렸는데 당신과 저는 여기에 참석하였습니다. 한해가 다 가기 전, 우리가 서로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저 그레고리 우스는 마크리나를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박해로 인해 그 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디서나 그것을 감내해야했고, 이단자의 괴수들에게 쫓겨나 고향을 등져야 했습니다. 박해로 그를 만나지 못했던 8년 아니면 그보다 조금 모자란 듯 보이는 기간이 제게는 아주 길게 느껴 졌었습니다. 그를 찾아가는 여정의 대부분을 여행하고 나서 하루 길을 남 겨두었을 때 저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불길 한 예감이 들게 하는 환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저는 손에 순교자 의 유물을 들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치 태양빛을 직접 반사하 도록 놓여 있는 깨끗이 닦인 거울의 표면에서 나오는 것 같은 빛이 유물 로부터 쏟아졌고 제 눈은 그 빛나는 섬광 때문에 멀어버렸습니다. 그 밤 에 그러한 환시가 세 번이나 제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 꿈에 감춰진 의 미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환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 태의 추이를 주시하는 동안 저는 제 영혼이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마크리나가 천사의 삶과 같은 천상적 생활을 하고 있던 은수 처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먼저 저는 시종들 중 한명에게 동생 페투르스 가 집에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동생이 사흘 전에 저를 마중하러 집을 떠났다는 그의 말을 듣고 저는 동생과 제가 길이 엇갈렸다고 생각했습니 다. 그다음에 저는 위대한 마크리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마크리나가 병 중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황급히 남은 길을 달려갔습니다. 앞으로 닥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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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에서 일어나 저를 심히 동요시켰던 것입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안 니 사 도 착 16. 제가 거기에 이르렀을 때 저의 도착 소식이 공동체에 알려졌고, 모 든 사람이 저를 마중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것은 방문객을 존경심으 로 맞이하기 위한 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동정녀 무리는 성당 옆면에 있 는 그들의 자리에 정렬하여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 도와 강복이 끝날 무렵, 이들은 강복을 받기 위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기 울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 각자의 거처로 물러가 그들 중 누구도 우 리와 함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의 사모(師母)는 함께 나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안내하여 위대한 마크리나가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문이 열리고 저는 그 거룩한 처소로 들어 갔습니다. 마크리나는 병으로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대 나 요 위가 아니라 흙바닥에 놓인 판자에 깔린 거친 부대 위에 누워있었 습니다. 그리고 다른 판자 하나가 그의 머리에 괴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목을 비스듬히 받치고 편하게 목을 가눌 수 있도록 하는 이를테면 베게였 던 것입니다.

첫 번째 만남 17. 마크리나는 문 가까이에 있던 저를 보고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습니 다. 하지만 제게로 뛰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미 열 때문에 체력이 소진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손으로 땅을 짚고 침상에서 일어나 경의를 표하면서 저를 맞으려 애썼습니다. 저는 뛰어가 엎드린 그를 껴안 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워 전과 같이 자리에 누였습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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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손을 올리고 기도했습니다.“당신께서는 저에게 다시금 은총을 풍성히 내려주셨습니다. 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의 원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당신 종으로 하여금 이 여종을 찾아오게 하셨습니다.”그는 제 가 애통해 할까봐 신음소리를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또 가쁜 숨을 감추려 애면글면했습니다.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 였습니다. 그가 먼저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우리에게 이런 저런 질 문을 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대 바실리우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이야기를 하였고 제 마음은 슬픔 으로 미어지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의 슬픔 에도 흔들림 없이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고차원의 철학 이야기로 이끌어 다양한 주제로 전개시켜 갔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하면서, 시련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섭리를 보여 주었으며, 자기 장래에 대해서도 말해 주 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말을 듣는 저의 영혼은 고양되어 인간의 본성을 벗어버리고 그의 가르침에 인도되 어 천상의 성소 안에 자리를 잡은 듯 느껴졌습니다.

욥 과 같 은 마크리나의 모 습 18.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온 몸을 덮고 있던 상 처가 곪아 터져서 고름이 몸 전체에 흘러내린 고통을 겪은 욥이 깊은 성 찰을 통하여 고통이 자신의 분별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였고, 육신 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욥은 활기가 넘쳤고 보다 거룩한 주제에 대한 이야 기를 계속했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마크리나에게서 같은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열은 그의 모든 힘을 소진시켜버렸고 그를 죽음의 목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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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마크리나는 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몸의 원기를 생생하게 회복하였고, 그의 영혼이 자유로이 천상적 실재를 관상하는데 육신의 쇠약함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 영혼의 본성 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리고 우리가 육 안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인간 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또 인간이 어떻게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졌고, 죽 음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새 생명으로 우 리를 이끄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할 때, 마크리나는 참으로 천상에로 고양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무한정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다면 저는 그 가 한 모든 말을 차례로 풀어놓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할 때, 마크리나는 성령의 힘에 감도된 듯 보였습니다. 그의 말은 모든 점에 있 어 명료하고 논리정연 했을 뿐만 아니라 난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샘 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비탈을 흘러내려가듯 그에게 서는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휴 식 을 취 함 19. 마크리나는 대화를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형제여, 여독으 로 피곤하실 터이니, 지금은 당신이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저에게 있어 서는 그와 만나 그의 거룩한 말을 듣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휴식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바랬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전적으로 순명하기 위해 그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근처 정원에서 저를 위해 사람들이 마련한 곳을 발견하고 나무 덩굴 밑 그늘에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다가올 슬픈 일에 대한 예감으 로 마음이 뒤숭숭해서 편히 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목격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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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전에 꿈에 나타난 환시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 니다. 꿈에서 제가 참으로 보았던 것은 죄에서는 죽었지만 지금은 그 안 에서 현존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빛나는 거룩한 순교자의 유해였던 것입 니다. 저는 저의 이러한 생각을 전에 제가 꿈 이야기를 해준 사람 중 하나 에게 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다가올 슬픈 일을 예견하 면서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마크리나는 우리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 는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소식을 전해왔는데, 우리를 격려하여 믿음을 잃지 않게 하고 그에 대해서 보다 나은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 다. 그것은 마크리나가 자신의 상태가 좋아졌음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 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지만 그것은 단 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어떤 운 동선수가 상대편을 추월하고 경기장의 결승선에 거의 이르러 심판관석에 가까워졌을 때 승리자의 월계관을 보고 마치 그가 이미 그것을 얻었고, 그의 승리가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선포된 것처럼 기뻐하는 것처럼, 마크 리나도 그러한 느낌으로 활기에 넘쳐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은 이미 뽑 힌 이들을 위해 천상에 마련된 상급을 향해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심판관이 신 주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라는 사도의 말씀에 머물러 있는 그에 대해서 더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별에 안심이 되어 우리를 위해 차려진 음식들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위대한 마크리나는 우리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써서 다양하고 맛있는 식 사를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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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만남 20. 마크리나는 우리가 홀로 지내며 시간을 허비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 문에, 우리는 곧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젊었을 적부터 회상하면서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적 사건의 내력을 진술하듯이 모든 일을 차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우리 부모님의 삶에 관한 추억과 제가 태어나기 전과 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그는 부유했던 부모님의 삶이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높은 평판과 칭 송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 느님의 자애에 경의를 표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친 조부모님들께서는 그 리스도를 고백하여 재산을 몰수당하였습니다. 또 외조부께서는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들의 재산은 나뉘어져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덕분에 집안 의 재산은 불어나 당시 누구도 그보다 재산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 재산이 다시 자녀들의 수에 따라 아홉 등 분으로 나누어지고 난 후에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계속 불어나 각 자녀가 받은 몫이 분배되기 전의 부모 재산보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마 크리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분배된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차 지하려하지 않고 신적 계명에 따라 그것을 사제의 손에 맡겼습니다. 하느 님의 도우심으로 마크리나는 삶에서 계명을 실천하였고 그에 따라 자신 의 손을 놀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 고, 사람들의 기부나 봉사를 안락한 삶의 방편으로 삼아 그것에 기댄 적 도 없었습니다. 구걸하러 오는 사람들을 그냥 되돌려 보내지 않았으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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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자신은 사람들의 자선을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크리 나가 한 선행의 작은 씨앗을 당신 은총으로 자라게 하시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처 한 상 황 에 대 한 마크리나의 의 견 21. 저는 마크리나에게 제가 겪고 있었던 어려움들에 대해 털어놓았습 니다. 먼저 믿음 때문에 발렌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추방당한 것과 이어서 교회안의 혼란 때문에 논쟁과 싸움에 휘말리게 된 것을 이야기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은 하느님의 선물 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영혼의 배은망덕을 구제하지 않 으려 합니까? 당신은 우리 부모님의 처지와 자신의 입장을 비교해보지도 않으려 합니까? 실상 이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가 귀족 가문 출신으 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자랑 거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아 버지는 그 당시 높은 학식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명성이 주 (州)의 법정에까지 떨치지는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수사학에 있어 다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망이 폰투스 밖으 로는 뻗어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고장에서의 명성에 만족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러 도시와 민족과 주에 이르기 까지 명망이 높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당신을 대표로 파견하고 또 다른 교회들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고 질서를 바로 세우도록 당신을 부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한단 말입니 까? 당신은 그처럼 큰 은총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우리 부모님의 기도가 당신을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이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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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 당신의 생각대로 헤아려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없거나 혹은 있어도 극히 미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마 지 막 날 에 마크리나가 삶 을 정 리 함 22. 마크리나가 이런 말을 하는 동안 저는 하루가 길어져 우리가 계속 그의 감미로운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성가대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는 저녁 기도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위대한 마크리 나는 저를 성당으로 보낸 후에 다시 기도 안에서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 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그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그를 보았을 때 저 는 그날이 마크리나가 육신 안에서 지내는 삶의 마지막 날이 될 것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미열 때문에 그에게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의 약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를 비탄에 젖게 만드는 죽음의 예감을 잠시나마 잊게 하려고 다시 한 번 아름다운 말로 우리 마음의 고통을 없애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거 칠게 헐떡이는 숨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복 잡한 감정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음 성을 들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고 우리 집안 모두의 자랑이었던 그가 세상 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하는 저의 마음은 슬픔으로 미어지는 듯 했습 니다. 저의 이런 인간적인 심정에 대해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 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모습을 보고 제 마음은 고양되어 그가 일 반적인 자연 법칙을 초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생의 마지 막 순간에 이르러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마크리나가 어떤 신묘한 체 험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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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마지막 숨에 이르기까지 숭고한 정신으로 그가 선택했던 이 삶에 대해 처음부터 깊이 묵상할 뿐이었는데, 이것이 저에게는 그가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습 니다. 마크리나는 마치 육신 안에서의 삶과 관계가 없어 육신에 묶여있거 나 육신으로 인해 격정에 휘말리지도 않는, 그래서 그에게는 마음의 평정 이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한 천사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인간의 모습 을 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저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의 정배에 대한 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명백히 드러내 보였습 니다. 마크리나는 자기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다 그 정배를 감추어 두 고 그를 살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사랑하는 정배께로 향하도록 재촉하는 갈망을 털어놓고, 육신의 사슬이 끊어지는 그 때에 한 시바삐 그에게로 달려가 그와 함께 있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여태까 지도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삶의 쾌락에도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자신 의 정배를 향해서 달려왔었습니다.

생 애 마지막 순 간 23. 날이 다 저물어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에도 그의 열정은 사그라질 줄 몰랐고, 오히려 그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거세게 그를 자신의 정배께로 재촉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정배의 아름다움을 더 강렬하게 주시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곁에 있던 우리에게 더 이상 아 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직 그분께만 시선을 고정시켜 그분만을 바라보았 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침상을 돌려 동쪽을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우 리에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이야기할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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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습니다. 그분께로 손을 들어 간청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그 래서 우리는 그 말을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그 의 기도를 옮겨 적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느님께 이르렀고 하느님께서도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크리나의 기 도 24.“주님, 저희에게서 죽음의 두려움을 거두어 가신 분은 바로 당신이 십니다. 당신은 저희를 위해 이승살이의 마지막이 참된 삶의 시작이 되게 하셨 습니다. 당신은 저희 육신을 잠시 동안 잠들게 하시고 마지막 나팔 소리에 다시 깨어나게 하십니다. 당신은 손수 지으신 우리 인간을 땅에다 두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 신께서는 이 땅에 우리 인간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고 그 때 당신은 우리 안의 죽음과 추함을 불멸과 아름다움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몸이 되시고 죄인이 되시어 우리를 저 주와 죄에서 구해내셨습니다. 당신은 용들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 입에서 우리를 건져내셨고 불순종의 구렁에서 우리를 끌어 올리셨습니다. 당신은 지옥문을 부수시고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를 무력하게 만 드신 후 우리에게 부활의 길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문장(紋章)으로 거룩한 십자가의 표지를 주셨고 이로써 적들을 멸하시고 우리 목숨을 지켜주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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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다. 영원하신 하느님, 어머니의 태 안에서부터 저는 당신을 향하여 비상하였고, 제 영혼이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한 것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는 제 몸과 영혼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제 곁에 빛의 천사를 보내주시고 그가 손수 저를 새 생명의 땅으로 인 도하게 하시어 거기에서 성조들의 품에 안겨 안식의 샘을 찾게 하소서. 당신은 번쩍이는 불 칼을 부수셨고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당신 자 비에 의탁하였던 사람을 낙원에 들게 하셨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여주십시오. 저 역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당신을 경외하여 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당신의 심판 을 두려워한 저입니다. 어떤 심연도 당신께서 저를 택하시지 못하도록 저와 당신 사이를 갈라 놓을 수 없으며, 어떠한 시새움도 당신을 향한 제 길에 방해가 될 수 없습 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저의 죄는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나약 함으로 말미암아 저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의 죄를 용서 하시어 생기를 되찾게 하시고, 제가 육신을 벗어버린 후에 제 영혼이 티나 주름 없는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소서. 또한 제 영혼이 당신 면전의 분향처럼 나무랄 데 없고 순결한 상태로 당신 손에 받아들여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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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리나의 죽 음7) 25. 이 말을 마치자 마크리나는 자기 눈과 입술과 가슴에 성호를 그었습 니다. 그는 열 때문에 입이 점점 타들어가 발음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습니 다. 목소리도 점차 사그라져서 우리는 그의 입술과 손놀림을 보고 그가 기 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누군가 등불을 가져왔 습니다. 마크리나는 눈을 떠 빛을 응시했는데, 그 빛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 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내적 열망에 따라 입술을 움직여가며, 마음으로 그리고 손짓으로 자신의 원을 채울 뿐이었습니다. 성호를 긋기 위해 손을 얼굴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감사기도가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기 도를 마치면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삶과 기도를 동시에 마감하였습 니다. 그는 숨도 쉬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마크리나 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제게 했던 청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제가 손수 자 신의 눈을 감겨주고 시신을 관례대로 수습해 장례를 치러주기를 원했었습 니다. 그의 청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저는 고통으로 마비 된 제 손을 그의 거룩한 얼굴로 가져갔습니다. 저는 그의 눈을 감길 필요 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잠이 든 것처럼 그의 눈꺼풀이 단아하게 눈을 덮 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입은 꾹 다물어져 있었고, 손은 단정하 게 포개져 가슴 위에 놓여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미 바른 자세를 취하 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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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크리나의 사망일과 관련해서 논란이 많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틸몽(Tillemont) 과 디캄(Diekamp)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틸몽은 그녀의 사망일을 379년 11 월이나 12월로 보고 있다. 디캄은 379년 12월 혹은 380년 1월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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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들의 슬 픔 26. 제 눈앞에 전개되는 상황들과 제 주위에서 들려오는 동정녀들의 슬 픈 탄식으로 제 마음은 곱절로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침묵 속에서 슬픔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는 마크리나로부터 혹시라도 꾸지람을 듣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그들은 그에 대한 경외심으로 괴로움을 가슴에 담아두고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 오열을 억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울음소리라도 내어 분부 받은 것을 어기고 자신들의 스승을 슬프게 할까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면의 불이 마음을 태우고 있어 침묵으로도 고통은 잠재워지지 않았습니 다. 갑자기 더 이상은 억누를 수 없는 애끓은 울음이 터져 나왔고 제 정신 도 걷잡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넘쳐흐르는 비탄의 격류에 휩쓸린 것처럼 제 정신은 고통에 사로잡혀,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슬픔으 로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들이 탄식하는 까닭 은 합당하고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적 애착이나 인 간적 교분 상실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엄습 한 불행이 주는 괴로움 때문에 우는 것과도 전연 달랐습니다. 그들은 마 크리나의 죽음으로 자신들이 하느님 안에 있는 희망과 영혼의 구원으로 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울부짖고 신음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꺼져버렸습니다. 우리 눈의 빛은. 치워져버렸습니다. 우리를 이끌던 등불은. 이제 없어져버렸습니다. 우리 삶의 안전은. 치워져버렸습니다. 불멸의 보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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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버렸습니다. 우리 일치의 끈은. 이제 무너져버렸습니다. 심약한 이들의 보루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약자들의 위로는. 당신과 함께 했을 때, 밤은 우리에게 순결한 당신 삶의 빛으로 낮과 같 이 빛났습니다. 하지만 지금 낮조차 우리에게는 암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마크리나를 어머니 혹은 양어머니라고 부르면서 다른 이들보다 더한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기근이 들었을 때 길에서 해 매고 있던 이들로서 마크리나가 거두어 먹이고 지도해 순결하고 흠 없는 삶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가 그 들 을 진 정 시 킴 27. 저는 그들이 내던져져 있던 슬픔의 심연으로부터 제 자신을 다시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저에게는 마치 그 가 곡소리로 주변이 어수선해진 것을 나무라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동정 녀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그를 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도 침착하고 점잖게 처신하라고 가르친 그의 유훈을 기억하십시오. 이 신 적인 영혼은 몸소 여러분에게 눈물로 기도할 것을 명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그 때 뿐 이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비 탄의 신음소리를 내는 대신 모두 한목소리로 시편을 노래해야합니다.”저 는 곡소리가 사그라지도록 더 큰 소리로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저는 그들에게 근처에 잠시 물러나 있도록 명했습니다. 하지만 마크 리나를 생전에 돌보았던 몇몇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있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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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아나(Vetiana))와 의 대 화 28. 그들 중에 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으로 젊어 서부터 부와 가문, 미모와 기품으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고위층에 있던 한 남자와 결혼해서 잠시 동안 그와 함께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합은 그가 아직 젊었을 때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위대한 마크리나를 독신생활의 보호자와 지도자로 삼고 대부분의 시간을 동정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서 거룩한 삶을 배웠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티아나였고, 그의 부친 아락시우스(Araxius)는 원로원 의 원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지금은 시신을 잘 단장해야할 때이므로 이 순 결하고 흠 없는 육신에 깨끗한 수의를 갖추어 입히는데 어떠한 군소리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성인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 는 것이 성인께서 합당하다고 여겼을 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대답하였 습니다. 저는 바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하느님의 마음에 흡족히 드는 것을 마크리나도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람파디아(Lampadia))와 의 대 화 29. 동정녀 성가대8)를 이끌던 여부제 중 하나인 람파티아도 거기에 있 었습니다. 그는 마크리나가 자신의 장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 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것에 대해 묻자 ─ 그 리하여 그는 우리의 논의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 그는 눈물을 흘리면 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

8) 이들의 고유 역할은 장례식 때 찬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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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께서는 순결한 삶, 그 자체로 자기를 단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 니다.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살아계셨을 때의 예복이었고, 그분이 돌아가 신 지금은 수의입니다. 몸을 치장하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그분께서는 생전에 아무것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고, 현재의 상황에 대비해서 남겨두 신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신을 단장하고 싶어도 지금 여기에는 그것을 위해 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창고 안을 살펴보면 장례를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찾을 수도 있 지 않겠습니까?” “어떤 창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분께서 가지셨던 전부를 보고 계십니다. 외투와 머리 수건과 발에 신겨진 닳은 신발, 이것들이 그가 누렸던 부와 재산 전부입니다. 당 신께서 보고 계신 것 이외에 감추어둔 상자 안에 있거나 비밀의 방 안에 보관 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부를 쌓아둘 오 직 한 곳, 즉 천상의 보물 창고만을 알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쌓아두시고 지상에는 어떠한 것도 남겨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제가 물었습니다. “장례를 위해 제가 준비한 것을 내놓는 것이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는 제게 자신은 마크리나가 그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두 가지 이유에서 당신의 그런 예우를 받 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제직의 거룩함에 대해 늘 공경하는 마 음을 가지셨습니다. 또 당신과의 혈연을 각별히 생각하셔서 동생이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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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것을 거절할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당신께 손수 자신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청하셨던 것입니다.

마크리나의 십자가와 반 지 30. 이런 결정을 하고 나자 일단은 거룩한 시신을 고운 아마포로 감싸 야 했습니다. 우리는 일을 분담하였고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도 록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시종 한 사람에게 명하여 의복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던 베티아나가 손수 성인의 머리를 단장하 고 나서 자기 손을 마크리나의 목으로 가져가면서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성인께서 목걸이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뒤에 있는 잠금 고리를 푼 다음, 손을 뻗어 제게 철로 된 십자가와 같은 금속으로 된 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두 개가 모 두 가는 줄에 끼워져 항상 그의 가슴 위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베 티아나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유품을 나누어 가집시다. 당신은 십자가를 간수하시오. 나는 반지를 물려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가 반지의 인장위에도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저는 반지를 물려받 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제게 다시 말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 유품을 택하시는데 있어서도 현명하시군요. 반지의 테두리 는 비어 있고 거기에 생명나무의 한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반지의 겉에 새겨진 십자가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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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리나의 기 적 31. 바야흐로 이 순결한 육신에 수의를 입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위 대한 마크리나의 분부에 따라 제가 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와 함께 위 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부인이 제 곁에서 그 일을 함께 했습니다. 그가 제 게 말했습니다. “성인께서 하신 위대한 기적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묻히도 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그는 마크리나의 가슴 한 부분을 드러내 보이며 제게 말했습니다. “거의 알아 볼 수 없는 희미한 흉터가 피부에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것이 보이십니까? 그 상처는 작은 송곳에 긁힌 자국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등불을 제게 보여준 그 부위로 가까이 가져다 대 었습니다. “그 곳에 그런 희미한 상처가 있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놀랄만한 것입 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그가 다시 말했습니다.“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기념으로 그 의 몸에 남겨진 것입니다. 어느 날 몹쓸 병이 그 부분에 도졌습니다. 종양 을 째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 병이 심장 가까이 까지 퍼진다면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의술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말 하면서, 자주 그에게 의사의 진찰을 받아보자고 간청도 해보고 애원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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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습니다. 그러나 마크리나는 자기 몸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 여야 한다는 것을 병보다도 더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손수 어머니의 시중을 든 후에 그는 성당으로 가서 치유의 하느님 발치에 엎드려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 러 땅을 적셨는데, 그는 눈물로 젖은 흙을 자기 병의 치료제로 사용했습 니다. 그의 어머니가 낙담한 나머지 다시 한 번 의사에게 가자고 애원했 을 때, 그는 어머니께 병이 도진 부위에 어머니의 손으로 성호를 긋는 것 으로 충분히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가 병 든 부위에 성호를 긋기 위해서 손을 그의 가슴 위로 가져갔고 그 때 그 성 호는 효력을 나타내어 종양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그가 덧붙였습니다.“끔찍한 종기가 있던 곳에 작은 흉터가 생겨 끝가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흉터가 제 생각에 하느님의 신적 인 개입에 대한 기념이 되었고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감사의 동기와 이 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크리나의 염 습 32. 우리가 모든 일을 마쳤을 때, 시신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로 꾸 며져 있었습니다. 여부제는 동정녀들이 마치 신부처럼 단장된 마크리나를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다시 한 번 제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그가 말했습니다.“당신의 어머니에게 받은 어두운 색의 외투 한 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성인의 거룩한 아름다움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수의의 화려함에 가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옷을 입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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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견해를 수긍하여 외투를 마크리나에게 입혔습니다.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혔어도 그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름다움은 번쩍이는 빛처럼 솟아나오는 것 같았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신적 권능이 라는 은총이 그의 육신에 더해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꿈에서 보 았던 바로 그 모습 이었습니다.

시 신 둘레에서 시 편 을 노 래 함 33. 우리가 그러한 준비로 분주한 동안 주위에서 동정녀들이 애통해 하 며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온 근방에 퍼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근처에 살고 있 던 모든 사람들이 그 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들의 수가 하도 많아서 현관은 더 이상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밤새 마크리나의 주위에서 순교자들의 축일에 부르는 찬미가를 노래하였습니다. 새벽이 되었을 때 는 근처 온 지역에서 온 남녀의 무리는 흐느껴 우느라 시편을 노래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불행에 마음이 미어졌지만 그 와중에 도 저는 할 수 있는 한 그의 장례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치 러낼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밀려드는 사람들을 남녀로 구분하여 여자는 동정녀들의 대열에, 남자는 수도승들의 대열에 합류시켰습니다. 저��� 사람들이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가 성가대의 노래에서처럼 통일되고 리듬감 있고 조화로우며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선율로 어울러져 균일하 게 나올 수 있도록 조율하였습니다. 날이 조금 더 밝자 이 외딴 곳 주위는 밀려드는 사람들의 무리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사제와 함께 온 그곳의 주교 아락시우스는 장례 행렬이 천천히 앞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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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아가도록 지시했습니다. 먼 길을 가야하는 우리가 갑작스럽게 이동 할 경우 군중에 의해 길이 막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동시 에 모든 사제에게 시신을 운구하도록 명했습니다.

장례 행렬 34. 이런 결정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 다. 저는 시신이 놓인 들것 앞에 섰고 아락시우스를 제 맞은편으로 불러 거기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들것 뒤에는 고위 성직자 두 사람을 위치시 켰습니다. 저는 알맞은 속도로 천천히 길을 열어 가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장례행렬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들것 주위로 몰 려들었고 그 성스러운 광경을 보고 또 보려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더디게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들것의 양편에서는 길게 열 지은 처녀들과 수많은 부제들과 하위 성직자들이 손에 초를 들고 대열을 이루 어 걸어갔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전례에 있어서의 행렬과도 같아 보 였고, 우리는 세 소년이 찬미가를 부르는 것처럼 행렬의 선두에서 후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목소리로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은수처에서 부모님 의 유해가 안치된 거룩한 순교자 성당까지는 7~8 스타디움(stadium)9)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거리를 가는 데는 꼬박 한나절이 걸렸습니다. 우리를 따라왔던 사람들의 무리가 계속 늘어나서 우리가 원 하는 만큼 행렬은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당 안으로 들 어가서 우리는 들것을 내려놓고 기도를 바쳤습니다. 우리의 기도로 말미 ‐‐‐‐‐‐‐‐‐‐‐‐‐‐‐‐‐‐‐‐‐‐‐‐‐‐‐‐

9) 1 스타디움은 625자, 189.375 미터이다. 따라서 7~8 스타디움은 대략 1.33-1.52 킬로 미터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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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아 사람들은 다시 탄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가 그쳤고 동정녀들은 마크리나의 거룩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마크리나를 안치하기로 하였던 부모님의 무덤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그때 동정녀들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더 이상 우리가 그의 거룩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울부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정녀들도 그와 함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한 소란으로 분 위기가 어수선해져서 거룩하고 정연하게 시편을 노래할 수 없었고 곳곳 에서 터져 나오는 오열로 인해 들리는 것은 오직 동정녀들의 울부짖는 소 리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렵사리 손짓으로 조용히 할 것을 명했고, 선창자가 주도하여 교회에서 부르는 귀에 익은 기도를 노래하자 사람들 은 마음을 가라앉혀 다시 기도 하였습니다.

매장 35. 기도가 끝나자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금하 는 신적 계명을 어기게 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렇게 말했습니다.‘부모님의 육신은 분명 썩어서 녹아내렸을 것이고,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고 혐오스럽게 변했을 터인데, 만일 부모님의 시신에서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러한 수치가 드러나게 된다면 어떻 게 내가 (성경에 적힌) 그러한 저주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이러한 것 을 생각하니 노아가 자기 아들에 대해 가졌던 분노가 제게 미치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바로 지금 제가 해 야 하는 일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의 덮개가 열리고 우 리 눈앞에 드러난 부모님의 시신은 이미 관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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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진 깨끗한 아마포로 덮여진 상태였습니다. 부모님의 시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아마포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지역의 주교 와 저는 들것에서 마크리나의 거룩한 시신을 내려 어머니의 시신 곁에 놓 은 다음 그들을 위해 공동기도를 바쳤습니다. 사실 두 사람 모두는 평생 을 한 마음으로 죽은 후에라도 자신들의 육신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또 죽 음이 생전의 친교를 깨뜨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의 귀 환: 어 떤 군인과의 만 남 36. 예법에 따른 모든 장례 절차를 다 마치자 저는 다시 돌아가야 했습 니다. 저는 무덤 위에 엎드려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서 그처럼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생각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 이 무너진 채로 귀향길에 올랐습니다. 길을 가던 중에 고위층 군인 한 사 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세바스토폴리스라고 불리는 폰투스의 작은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지휘관이었고 거기서 자신의 병사들과 함 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을 지날 때 그는 정중하게 저를 맞았습니다. 그는 저의 불행을 듣고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는 우리 집안과 친교와 교 분을 통해 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제게 마크리나가 행한 기적에 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여 소개 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울음을 그치고 다시 대화를 시 작하였습니다. 그가 제게 말했습니다. “자 들어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한 선이 인간의 삶에서 사라져 버렸는 지요.”그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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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리나를 방문했던 이 야 기 37.“어느 날 저와 저의 아내에게는 덕행의 학교(phrontistèrion)10)를 방문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생겼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축복 받은 사 람이 한 평생을 보내는 곳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는 전염병에 걸려 눈이 아픈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병 때문에 눈동자 주 위의 각막이 두꺼워지고 하얗게 변해서 그의 모습은 끔찍하고 비참하였 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처소로 들어갔을 때, 저와 저의 아내는 서로 떨 어져 저는 그 곳에서 철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남자들을, 제 아내는 그런 여인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신의 형제인 페투르스가 남자들의 거처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는 동정녀들의 거처에서 성인을 만 났던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우리는 이제 그 은수처를 떠날 때라 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떠날 채비를 하였을 때 사람들이 양편에서 우리를 다정히 만류하였습니다. 당신 형제가 저를 철학적 식탁(수도승들 의 모임)에 자리 하도록 초대했고, 하느님께 축복 받은 사람도 제 아내를 떠나보내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 딸을 자기 무릎에 앉히고 그들에 게 (철학적) 식탁을 마련하여 철학의 풍요로움을 제공하기 전에는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이를 어루만지면서 자연스럽 게 그 눈에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병든 눈을 보고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저의 청 하나를 들어주시고 저희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 면 그런 당신의 호의에 대한 성의 표시로 제가 보답을 하겠습니다.”소녀 의 어머니는 그 보답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

10) ’ 프론티스테리온’ (phrontistèrion)이란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타나는데, 그 에게 있어 이것은 스크라테스의 학교를 비꼬아서 나타내는 말이다. 이 철학 용어는 수도승 문학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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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약이 있습니다.”위대한 마크리나가 말했습니다.“그 약은 눈 병을 치료하는 특효가 있습니다.” 마크리나가 그러한 약속을 했다는 소식이 동정녀들의 거처에서 제게 전 해졌습니다. 우리는 곧 떠나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초조해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기적 38. 융숭한 대접을 받고 우리 마음은 흡족해졌습니다. 위대한 페투르스 가 몸소 우리의 시중을 들었고 우리 마음을 흥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마크리나는 온갖 예를 갖추어 저의 아내를 떠나보냈습니다. 우리 의 귀향길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여행 중에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남자들의 거처에서 본 모든 것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그 역시 자신 안에 아무것도 남겨두 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아주 작은 것에 이 르기까지 세세하게 묘사하면서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듯이 순 서대로 이야기를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마크리나가 눈병 치료약을 약속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야기를 멈추고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어떻게 그가 우리에 게 했던 약속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했던 그 안약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 나요!” 저는 그런 부주의함에 괴로워하면서 누군가에게 곧장 되돌아가서 마크 리나에게 치료약을 청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때 유모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우연히 자기 어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 아내는 아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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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제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부주의함을 더 이상 탓하지 마세요.” 그는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약속된 것을 완전히 받았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참된 약을 말입니다. 치유는 다름 아닌 그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 는 우리를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나타냈습니다. 아이의 눈은 신적인 치료제로 치유되어 더 이상 어떤 병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 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아이를 들어 제 품에 안겼습니다.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놀라운 기적들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손으로 소경들을 다시 보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 운 일이겠습니까? 오늘 하느님의 여종이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치유의 기 적을 행하였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매한가지입니다.”이 말을 하고나서 흐느낌으로 그는 목이 메었고, 눈물이 쏟아져 더 이상 말 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 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맺음말 39. 저는 마크리나와 함께 살았고 그에 관계된 세세한 일까지 알고 있 는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들은 이야기들 또 그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이 이 야기에 덧붙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은 스스로가 경험한 범위에서 이야기 전개의 신빙성을 판단하고, 듣는 자 신들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빈정거리고 진실과는 거 리가 먼 거짓이라고 의심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근이 들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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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놀랄만한 수확을 거두어들인 것과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는데도 곡 식이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전이나 후에도 항상 같은 양이 유지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 려 합니다. 이 외에 훨씬 놀라운 일들 이를테면 병의 치유, 구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참된 예언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믿기 어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정확하게 검증한 사 람들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적게 부여받고 반대로 자신 안에 믿음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풍부한 은사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극히 부족하고 하느님의 선물 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떠한 해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저는 더 이 상 마크리나가 행한 위대한 기적들을 열거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마크리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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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에게 준 권고』 (Ad Virginem)1)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해제 『동정녀에게 준 권고』는 56개의 격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들 역 시 회수도승생활에 적용된 권고들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어 원본으로 보 존되어 왔고, 그레스맨(H. Gressmann)이 감수하여 번역 출판하였다. 이 것은 시리아어와 아르메니아어로도 전해지고 있으며, 윌마르트가 라틴어 번역본을 출판하였다. 수많은 사본이 현존하는『수도승들에게』2)와는 달 리 이 작품은 불과 몇 개의 필사본 안에 보존되어 왔다. 이 작품은 에바그리우스가「서간」7에서 말하고 있는“정결한 여집사 세베라(Severa)”에게 준 권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에바그리우 스는 그녀에게「서간」20을 보냈던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에바그리우스 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저는 당신이 진보하셔서 기쁩니다. 사실, 당 신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루가 9,62 참조), 또 부패하 기 쉬운 세상과 지나가는 사물들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정의의 월계관을 받고 또 당신이 선행으로 찾고 있는 신랑 그리스도를 보 ‐‐‐‐‐‐‐‐‐‐‐‐‐‐‐‐‐‐‐‐‐‐‐‐‐‐‐‐

1) 본문 번역과 주해를 위해서 Evagrio Pontico, Per conoscere lui, Int.,trad.,not., Paolo Bettiolo, Edizioni Qiqajon 1996, 132-143쪽에 실린 이태리어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2)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은「코이노니아」29집(2004년 여름), 182-208쪽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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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서 훌륭히 싸우고 있습니다(2디모 4,7-8). 사실상 이것이 선행으 로 우리 주님을 찾는 참된 탐구입니다. 사실 악행을 행하며 정의를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동료를 미워하면서 애덕을 추구하는 사람도 없고, 거짓말을 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을 찾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 곧 참된 신앙과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계명 을 준수하는 것(1고린 7,19)입니다. 자, 우리가 당신에게 보낸 책은 어느 것이 이런 종류의 행위인지 당신에게 가르쳐 줄 것이며, 좁고 험하지만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길(마태 7,14 참조)을 당 신에게 알게 해 줄 것입니다.”세베라는 늙은 멜라니아(Melania)의 예루 살렘 공동체의 수녀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 1.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를 사랑하실 것이다. 그분을 섬겨라. 그러면 그분이 네 마음을 비추어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어머니처럼 네 어머니를 공경하고 너를 낳으신 분의 노 년을 무겁게 하지마라.

3. 네 어머니의 딸들처럼 너의 자매들을 사랑하여라. 그러면 너는 평화 의 길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루가 1,79b).

4. 태양은 떠오르면서 네 손에 있는 책을 보고 제2시 이후에는 너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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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본다.

5. 끊임없이 기도하고(1데살 5,17 참조) 너를 낳으신 그리스도를3) 기 억하라.

6.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라. 이는 네 영혼 안에 상(像)이 떠오르지 않 게 하여 기도할 때 너에게 장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7. 너는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사람을 멀리하라. 그러면 너는 치욕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8. 증오심과 분노를 멀리하라. 그러면 네 안에 원한이 없을 것이다.

9.‘오늘은 먹고 내일은 먹지 않으리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는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하면 네 육체에 해를 끼치고 네 위장에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10. 고기를 먹는 것은 좋지 않으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바람직하지 ‐‐‐‐‐‐‐‐‐‐‐‐‐‐‐‐‐‐‐‐‐‐‐‐‐‐‐‐

3) 그리스도께서는 상황에 따라 아버지일수도 또 어머니일수도 있다. 양자의 영을 소유 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요(로마 8,15), 우유와 연한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어 머니이다. 사실 사도 바울로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2고린 13,3 참조)는 에페 소 신자들에게 지혜의 신비들을 계시하시면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지만(에페 3,119 참조), 고린토 신자들에게는 마실 우유를 주시는 어머니이시다(1고린 3,2 참조). 에바그리우스의 체계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아들이 될 필요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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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 그러나 연약한 이에게는 이런 것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11. 오만한 동정녀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나태하게 생활하는 동정녀 는 신랑을 보지 못할 것이다.

12. 너는‘시녀가 나를 실망시켜서 그녀를 벌하리라’고 말하지 않을 것 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딸들 가운데 몸종은 없기 때문이다.

13. 헛된 담화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떠돌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멀리하라.

14. 너는 술 취한 자의 축제를 모르고 이방인의 혼인잔치에 가지도 않 을 것이다.4) 실제 이렇게 하는 모든 동정녀는 주님께 불결하다.

15. 주님의 말씀으로 네 입을 열고 네 혀로 잡답하지 말라. ‐‐‐‐‐‐‐‐‐‐‐‐‐‐‐‐‐‐‐‐‐‐‐‐‐‐‐‐

4) 아마도 여기서 에바그리우스는 단순히 초대받은 동정녀가 자기 공동체에서 나가지 않도록 권고하려는 것 같다. 이집트로 성지순례를 가려는 세베라(Severa)의 의향에 대해서 에바그리우스는 「서간」7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나는 정결한 여집사 세베라 의 뜻을 칭찬했지만, 그 실행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그녀가 힘들게 오랜 여행을 하여 어떤 유익을 얻게 될지 모릅니다. 반면 나는 우리 주님 덕택에 그 녀와 그녀의 동행인들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 성덕으로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여행하지 못하게 하 「서간」8에서도 비슷한 동기가 다시 반 기를 바랍니다.”멜라니아(Melania)에게 보낸 복된다.“당신 자매와 딸들에게 오랜 여행을 하지 말 것이며 또 무분별하게 황폐한 장소에 가지도 말라고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사실 세상에서 멀어진 모든 영혼에게는 무관한 일입니다.”그렇다 하더라도‘혼인 잔치에 가다’ (문자 그대로는‘혼인 잔치 에 들어가다’ ) 라는 표현은 마태 22,2-13에서 추론가능하다. 그리고 에바그리우스는 매우 여러 번 인식의 혼인잔치에서 자리를 얻게 해주는 의복에 관해서 묵상하였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악령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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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어라. 그러면 그분의 오른손이 너를 일으 킬 것이다(시편 117,16a 참조).

17. 곤경에 처한 가난한 이를 물리치지 말라. 그러면 네 등잔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마태 25,1-13 참조).5)

18.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하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찾지 말라. 왜냐하 면 사람의 영광은 들풀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은 영원히 남는다(이사 40,6-8 참조).

19. 주님은 온유한 동정녀를 사랑하신다. 성 잘 내는 동정녀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20. 유순한 동정녀는 자비를 입을 것이며 거역하는 동정녀는 매우 어리 석다.

21. 주님은 불평하는 동정녀를 파멸시키시고, 감사하는 동정녀는 죽음 에서 구원될 것이다.

22. 비열한 웃음과 경멸적인 무시: 모든 어리석은 동정녀는 이러한 것 들에 연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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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조: 43장, 53장, 『그노스티코스』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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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자기 옷을 꾸미는 자는 절제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24. 속된 여인들과 함께 거주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네 마음을 흩뜨려 올바른 의지를 무력화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5. 밤중에 눈물로 주님을 위로하여라. 그러면 아무도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너는 은총을 입게 될 것이다.

26. 여행에 대한 갈망과 타인의 주거에 대한 욕심은 영혼의 상태6)를 망가뜨려 그 결심을 꺾는다.

27. 충실한 동정녀는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지만, 불충한 동정녀는 자기 그늘도 피할 것이다.

28. 시기는 영혼을 고갈시키고 질투는 영혼을 삼켜버린다.

29. 연약한 자매를 업신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30.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은 네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실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공동의 소유이다(사도 2,44; 4,32). ‐‐‐‐‐‐‐‐‐‐‐‐‐‐‐‐‐‐‐‐‐‐‐‐‐‐‐‐

6) ’ 상태’ (katastasis): 이 용어는 귀오몽(Guillaumont)이『프락티코스』43장에 대한 자 신의 주해에서 해석하는 바처럼 에바그리우스 안에서 자주 갖게 되는 그 긍정적 의 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즉, 단순한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평화와 평정 상태로 알 아들어야 할 것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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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너는 남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 것이며(2데살 3,11 참조), 네 자매 의 불행을 기뻐하지도 말 것이다.

32. 궁핍한 동정녀들을 도와주고 너의 탁월함을 자랑하지 말라.

33. 주님의 교회 안에서 네 입에서 어떤 말도 나가게 하지 말 것이며(1 고린 14,34-35 참조), 네 눈을 들어 올리지도 말 것이다(시편 131,1a 참조). 사실 주님은 네 마음을 아시며 네 모든 생각을 살피신다(사도 1,24 참조).

34. 네게서 모든 악한 생각을 던져버려라. 그러면 네 적들이 너를 슬프 게 하지 못할 것이다.

35. 네 마음으로 시편을 노래하고 네 입에서 혀만 놀리지 말 것이다.

36. 어리석은 동정녀는 돈을 사랑할 것이고, 현명한 동정녀는 자기 빵 조차 내어줄 것이다.

37. 불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운 것처럼 상처받은 동정녀의 영혼 을 치유하기란 쉽지 않다.

38. 악한 생각에 네 영혼을 넘기지 말라. 이는 악한 생각이 네 마음을 오염시켜 너에게서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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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에게 준 권고

39. 근심은 무겁고 아케디아는 저항하기 힘들지만, 하느님을 향한 눈물 은 이 둘보다 더 강하다.

40. 배고픔과 갈증은 악한 욕망을 잠재우고, 적절한 철야는 정신을 정 화한다.

41. 애덕은 분노와 증오심을 막아주고 선물은 원한을 누그러뜨린다.

42. 자기 자매를 몰래 험담하는 자는 신랑(그리스도)에게서 거부당할 것이다. 그녀는 신랑의 집 문에서 부르짖겠지만 거기에 듣는 자는 없을 것이다.

43. 자비심 없는 동정녀의 등불은 꺼질 것이며, 그녀는 자기 신랑이 오 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마태 25,1-13 참조).7)

44. 돌 위에 떨어지는 유리는 깨지며, 남자와 접촉하는 동정녀는 결백 한 상태로 있지 못한다.

45. 온유한 신부가 성 잘 내고 뻔뻔스런 동정녀보다 더 낫다.

46. 사람의 말을 웃음으로 끌어내리는 자는 자기 목에 밧줄을 감는 자 와 비슷하다. ‐‐‐‐‐‐‐‐‐‐‐‐‐‐‐‐‐‐‐‐‐‐‐‐‐‐‐‐

7) 참조: 17장, 53장, 『그노스티코스』7장.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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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금으로 된 홈 속에 있는 진주처럼 동정녀는 정결함으로 가려져 있다.

48. 악령들의 노래와 피리는 영혼을 이완시켜 영혼의 아름다운 긴장을 풀어버린다(코헬 7,7b 참조). 치욕스럽게 되지 않도록 항상 영혼을 보호 하라.

49. 웃기는 동정녀들에게 기쁨을 느끼지 말고 숙덕대는 동정녀들과 함께 즐거워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을 저버리셨기 때문이다.

50. 식사하는 네 자매를 경멸하지 말고 네 극기에 자만하지도 말라. 사 실 너는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또 그분 앞에서 뽐낼 자가 누구 인지도 모른다.

51. 자신의 창백해진 눈과 소진된 육체를 애처로워하는 자는 영혼의 아 파테이아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52. 극기는 무겁고 정결은 달성하기 어렵지만, 천상 신랑보다 더 감미 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53. 동정녀들의 영혼은 조명될 것이지만, 불결한 자들의 영혼은 어둠을 보리라(마태 25,1-13 참조).8)

‐‐‐‐‐‐‐‐‐‐‐‐‐‐‐‐‐‐‐‐‐‐‐‐‐‐‐‐

8) 참조: 17장, 43장, 『그노스티코스』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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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에게 준 권고

54. 나는 사람들이 그릇된 교리로 동정녀를 타락시켜 그의 동정성을 헛 되게 하는 것을 보았다. 너, 딸아, 주님 교회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어떤 이방인도 결코 너를 설득하지 못하게 하라.9)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 셨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그것들에 대해 기뻐하신다(잠언 8,31b 참조). 악을 행할 수 없는 천사도 없고 본성상 악한 악령도 없다. 사실 하느님은 이 둘 모두를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육체와 이성 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 역시 죄 없이 낳음을 받으 셨다(에페 4,15). 그분은 식사를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사람들 에게 허깨비로 나타나시지 않았다. 죽은 이들이 부활할 것이고 이 세상은 지나갈 것이며 우리는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다(1고린 15,44 참조). 실제 로 의인들은 빛을 상속받을 것이고 악인들은 어둠속에 살게 될 것이다.

55. 동정녀의 눈은 주님을 뵈올 것이고 그녀의 귀는 그분 말씀을 들을 것이다. 동정녀의 입은 자기 신랑에게 입맞춤할 것이며(아가 8,1b 참조), 그녀의 후각은 그분 향유 내음에로 달려갈 것이다(아가 1,4 참조). 동정 녀의 손은 주님을 애무할 것이며, 정결한 몸은 기꺼이 받아들여질 것이 다. 동정녀의 영혼은 월계관을 받을 것이고 자기 신랑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그녀에게 영적인 의복이 주어질 것이며, 그녀는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축제를 열 것이다. 그녀는 꺼지지 않는 등불을 켤 것이고 등잔에 기 ‐‐‐‐‐‐‐‐‐‐‐‐‐‐‐‐‐‐‐‐‐‐‐‐‐‐‐‐

9) 결론부의“실제로 의인들은 상속받을 것이다...” 을 제외하고 뒤에 오는 구절들은 그 레스맨(Gressmann)이 출판한 책의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단지 라틴어 판과 시리아어판에서만 나타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구절들은 이 장의 본문에 되 돌려져서 창조와 섭리, 악의 기원, 그리스도론, 종말론과 관련된“주님 교회의 가르 침” 에 대한 짧은 요약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에바그리우스는 그리스도 가현설, 영지 주의, 아리우스파의 가르침들을 비판하고 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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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마태 25,1-13 참조). 그녀는 영원한 부를 받고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

56. 딸아, 너를 위해 이 권고를 한 것이니, 네 마음으로 내 권고를 지켜 라. 너를 보호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흠숭하올 삼위일체를 잊어버 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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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7담화: 영혼의 변덕과 악령들에 관하여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세레노(Serenus) 아빠스는 높은 성덕과 절제를 지닌데다가, 자기 이름 이 표현하는 맑은 평온함을1) 풍겼다. 우리는 이분을 다른 분들보다 더욱 공경하고 탄복했기 때문에 열심한 이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어서, 이분의 담화를 이 소책에 기록하기로 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분의 덕성은 품 행으로만 드러날 뿐 아니라 얼굴에도 빛났다. 그리고 정결에 대한 하느님 의 특별한 선물을 받아서 세레노는 잠에서조차도 육체의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인간 본성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 느님의 은총으로 이 지극한 육신의 순결을 얻었는지에 대해 먼저 설명해 야 할 것 같다.

II 세레노 아빠스는 우선 마음과 영혼의 내적 정결을 얻기 위하여 밤낮으 로 기도를 바치고 꾸준히 단식과 밤새움에 열중하였다. 이에 기도의 응답 을 얻어서 자기 마음속의 육적인 욕정의 모든 불길이 꺼진 것을 보고는 순 결에 대한 달콤한 맛에 자극되는 것처럼 정결에 대한 더 큰 갈증을 느끼게 ‐‐‐‐‐‐‐‐‐‐‐‐‐‐‐‐‐‐‐‐‐‐‐‐‐‐‐‐

1) 라틴어 serenus는“평온하다,맑다” 는 뜻이다.


요한 가시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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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더욱 열심히 기도와 단식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하느님 의 선물로 자기 속사람에게 주어진 이 욕정의 소멸이 겉사람의 순결에까 지 도달하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젖먹이라도 느끼는 자연의 단순한 충동조차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노 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과분하게 받은 선물에 대한 경험을 바탕 으로 하여 그런 것도 마찬가지로 얻어 보겠다는 열성으로 불타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런 육신의 자극을 훨씬 더 쉽게 뿌리째 뽑아 없애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근거로 생각되었던 것은, 육신의 충동이 어떤 때라도 약이나 칼을 사용해 인간의 기술로도 없앨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보 다 차원이 높고 인간의 노력과 열성으로 얻어낼 수 없는 정신의 순결을 이 미 선사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세레노는 이 간청을 시작한 뒤에 지치지 않 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밤에 일어나는 현시 가운 데 어떤 천사가 와서 그의 아랫배를 열어서 불타는 살덩어리 같은 혹을 창 자에서 떼어버리고는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에 붙인 후에 이렇게 말했다: “보시오, 그대 육신을 충동하는 것이 잘려나갔소. 충실히 요청한 몸의 영 구적인 순결을 오늘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시오.”이 유명한 분에게 특별히 허락된 하느님의 은총에 관해 이 정도로 간단하게 말하고 싶었다. 나머지 위대한 분들과 공유하는 덕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 없 다고 생각한다. 사실 만일 이분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따로 한다면, 다른 분들에게는 그런 덕행이 없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지극한 열망으로 불탄 나머지, 사순절에 그분을 찾아갔다. 세레노 아빠스는 지극히 평온하 게 우리 속사람의 상태에 대해 알아보고 광야에 오래 살아서 마음이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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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나 깨끗해졌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푸념을 터뜨렸다.

III 아빠스님께서는 우리가 광야 속에서 고독하게 산 시간을 바라보실 때에 속사람의 완성에 이미 도달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그 렇지 않습니다. 그 경험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오직 우리가 무엇이 부족 한지 배웠을 뿐, 우리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식 으로 얻은 지식은 우리가 원했던 안정된 순결이나 굳은 확신을 얻게 하지 는 못했고, 오히려 더 많은 혼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을 뿐입니다. 사 실 학문마다 매일같이 공부하고 실습하는 목적은 초보자의 어설픈 지식 으로부터 확고하고 안정된 전문지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 람들이 처음에 막연하게 알았거나 전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므로, 그 학 문 분야에서 탄탄한 걸음으로 전진하여 그 안에서 넉넉하게 전혀 어려움 없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는 그와 전혀 달리, 이 순결을 얻는 데에 힘을 쓰면서 얻은 것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 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이유가 한 번도 없을 만큼 참 회해도 제가 벗어나야 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고생만 하는 것 같습니 다. 그러니 최고의 가치를 알아도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이 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 끼는 동안에도 우리 정신은 우리도 모르게 벌써 방향을 바꿔 더욱 무섭게 그 전과 같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일상의 분심잡념들이 우리 정신을 끊임없이 사로잡아 이리저리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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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절망하고, 우리에게는 이 수행이 소용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매순간 에 날래게 쫓아다니는 생각들로 말미암아 빗나간 마음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나 영적인 관상에로 다시 돌아오게 해도 마음을 거기에 고정시 키기 전에 그것은 즉시 도망쳐 버립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우리 정신이 원했던 지향에서 벗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떠났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고를 아주 강한 의지로 묶어봅니다. 그러나 그 시도 가 운데서도 그것이 뱀장어보다 더 날래게 마음에서 빠져나갑니다. 날마다 이런 고된 경험을 하면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했음을 볼 때 우리는 너무 낙심하여 우리 자신의 탓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탓으로 마음이 이와 같은 방황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IV 세레노 아빠스 :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확실한 정보를 얻기 전에 어떤 일의 본질에 대해 조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고 외람된 짓이다. 헤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자기 몸이 물에 떠 있을 수 없는 것을 보고, 아무도 물에 떠 있을 수 없다고 하겠느냐? 그런 의견이 있다면 자기 경험에 바탕 을 둔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 면 다른 사람들이 아주 쉽게 물에 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 이 목격하여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항상 움직이고, 또 많이 움직이는 것이 우리 정신의 본성이다. 그 점에 대해 지혜서는 이렇게 말한다:“흙으로 된 이 천막이 정신을 짓누릅 니다”(9,15 라틴역). 따라서 우리 정신은 본질상 한 순간도 한가하게 쉬 지 못한다. 움직이고 몰두할 수 있는 자료를 미리 준비해놓지 않으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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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신은 반드시 타고난 방랑기질로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되어있다. 그것은 오직 오랜 단련과 매일 계속되는 습관으로만 달라질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대들은 헛수고만 했다고 하는데, 이런 훈련은 가능하다. 점차적으로 정 신이 어떤 자료를 기억에 남겨야 하는지 경험에 의해 배우게 된다면, 그 는 지치지 않고 그 내용을 두루 생각하고 그 안에서 꾸준히 머무를 수 있 는 힘을 얻는다. 이렇게 되면 우리 정신은 분심을 일으키는 원수의 해로 운 자극을 내쫓을 수 있고, 원하는 상태에 계속 지낼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방랑을 인간의 본성이나 창조주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올곧게 만드셨지만 그들은 온갖 생각에 빠졌다”(코헬 7,29;70인역)는 성경말씀이 옳다. 그러니 우 리 생각들의 성질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이는“좋은 생각은 그것을 아는 이에게 가까이 가며, 지혜로운 사람이 그것을 찾는다”(잠언 19,7;70인 역)는 말과도 같다. 우리 지능과 노력으로 가능한 것을 우리가 찾지 못한 다면, 그것은 본성의 탓이 아니라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나태나 부주의로 돌려야 한다. 시편에서도 같은 뜻으로 이렇게 말한다:“복되어라 당신께 힘을 얻는 자. 주님, 그는 마음속에 올라갈 것을 두었나이다”(시편 84,6; 70인역). 그러므로 양쪽은 우리 책임이다. 올라가는 것, 즉 하느님께 대 한 생각과, 내려가는 것, 즉 세속과 육정에 대한 생각을 두는 일은 모두 우리 재량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다스릴 수 없다 면 주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습니 까?”(마태 9,4)라고 꾸짖으시지 않았을 것이고 예언자를 통해“내 눈앞 에서 너희의 악한 생각을 치워버려라”(이사 1,16 라틴역), 그리고“언제 까지나 네 안에 악한 생각을 품어두려느냐”(예레 4,14)고 따지시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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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들을 다스릴 가능성이 없다면 심판 날에 행업과 마찬가지로 생각의 성질에 대해 문책을 당할 이유가 없지만, 주님 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신다:“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와 함께 그들의 행동과 생각을 모으러 온다”(이사 66,18 라틴역). 끝으로 우리 생각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느님이 사람들 의 숨은 속을 심판하실 그날에 생각들이 엇갈려 서로 고발하거나 변호할 것이다”(로마 2,15-16)라는 복된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 저 무서운 심 판에서 생각들의 증거에 따라 단죄되거나 변호될 리가 없다.

V 이런 면에서 복음에 나오는 백부장의 모습이 우리에게 완성된 정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사실 닥치는 대로 자기 생각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기 재량대로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나쁜 생각을 아무 어려움도 없이 쫓아내는 덕성과 항구함은 그 백부장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표현된다:“저 역시 권력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아래에도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병사들이 있고 또 하라는 대로 하는 종도 있습니다”(마태 8,9). 우 리도 영적인 백부장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격정과 악습에 맞서 용감히 싸워 그것들을 굴복시키고 우리 지시와 판단을 따르게 하는 것이며 육신 의 욕정을 꺼버리고 방랑하는 생각들의 무리를 이성의 지배아래 두는 것 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님의 십자가라는 구원의 깃발을 들고 잔혹한 원 수들의 군대를 우리 마음의 영역에서 쫓아낼 수 있으면 우리도 위대한 승 리의 공덕으로 영적인 백부장의 계급으로 승진될 것이다. 탈출기에서도 모세가 그것을 신비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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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대장, 십인대장을 세우게”(탈출 18,21). 우리도 그러한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명령하는 권리와 능력을 지니게 될 것이니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생각들이 우리를 끌고 다니지 못할 것이고 우리에게 영적 즐거움을 주는 생각들을 우리는 간직하고 그 속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나쁜 생각들에게 가라고 하면 가고 좋은 생각들에게 오라하면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 종인 육신에 정결과 절제에 관한 지시를 내리면 대꾸도 없이 순종하여 욕정의 충동을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정신을 섬길 것이다. 이 백부장의 무기가 무엇이며 이 투쟁의 훈련을 위하여 무엇을 준비해 야 되는지에 대해 복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자:“우리 무기는 육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능한 것이다”(2코린 10,4). 그러니 그 무기 는 육체적이고 쇠약한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하느님의 능한 것이라 함으 로써 그 성질을 지적한 것이다. 그 다음에 사도는 어떤 투쟁을 위하여 그 것을 써야 되는지 말해준다:“어떤 요새라도 무너뜨리고 궤변을 무찌르며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또한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곧바로 모든 불순종을 처벌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2 코린 10,4-6). 이 점들을 하나하나 다룰 필요가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 로 미루고, 지금은 오직 주님의 전쟁에 참여하고 복음적 백부장들의 하나 로서 투쟁하려고 할 때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할 무기들의 성격에 대해 설 명하겠다. 사도는“믿음의 방패를 잡고 악한자의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도록 하 라”(에페 6,16)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 올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늘나라 를 기대함으로써 치열한 욕정의 흉기를 막아내는 것은 믿음이다. 사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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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사랑의 갑옷을 차리라”(1테살 5,8)고 한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가슴 의 급소(急所)를 싸주어서 죽을 상처를 주는 혼란으로부터 보호하며 원수 의 돌격을 꺾어서 마귀의 화살이 내적 인간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모든 것을 견디 기”(1코린 13,7)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는“구원에 대한 희망을 투구로 삼으라”(1테살 5,8)고 한다. 투구는 머리를 방어하는 것이다. 우리의 머 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유혹과 박해 가운데서 앞으로 받 을 상급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그 머리를 억척같은 투구처럼 둘러막아야 하며 무엇보다 그분께 대한 믿음을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 다른 어떠한 지체를 잘라도 우리는 허약하게나마 살아남을 수 있지만, 머리가 없으면 아무도 짧게 조차 살아갈 수 없다. 그다음에 사도는“하느님의 말씀인 영 의 칼”(에페 6,17)을 언급한다. 그것은“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꿰뚫으며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판단한 다”(히브 4,12).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찾을 수 있는 모든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갈라놓고 잘라버린다. 이런 무기들을 차리고 있으면 누구나 적들의 모든 습격을 방어할 수 있 어서, 굴복하여 포로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사슬로 얽매어 악한 생각들의 나라로 끌고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네가 어찌하 여 남의 나라에서 늙어가느냐”(바룩 3,10)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대로 개선한 승리자로 자기가 원하는 생각들의 땅에 굳건 하게 설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육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한 무기라 불렀던 그 무기를 이 백부 장이 무슨 힘과 용기로 가지게 되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임금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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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들을 영적 군대로 모집하면서 친히 말한 소리를 들어보고, 그 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는지 보아라. 그분이 말씀하시기를“나약한 자 는‘나는 용사다’라고 말하라. 인내하는 자는 투사가 되어라”(요엘 4,10; 70인역)고 한다. 그러므로 인내하는 자, 나약한 자가 아니라면 주님의 전 투에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 은 복음에 나오는 우리 백부장으로 하여금“나는 약할 때에 강하다”(2코 린 12,10)와“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완성된다”(2코린 12,9)라고 자신 있게 말하게 한 나약함이다. 그 약함에 대해 어떤 예언자는“너희 가운데 가장 연약한 이도 다윗 집안처럼 될 것”(즈카 12,8;70인역)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내하는 사람만이 이 투쟁을 할 수 있다. 그것은“여러분은 하느 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해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 10,36)라고 말한 그 인내이다.

VI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결합해야 하며, 결합할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우 리 의지를 억제하고 세속의 욕망을 끊을 때에 스스로 경험할 수도 있지 만, 주님께 큰 신뢰를 두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올리는 분들에게서도 배 울 수 있다.“내 영혼이 당신께 붙어있습니다”(시편 62,9),“주님, 당신 계명에 붙어있습니다”(시편 118,31),“하느님께 붙어있는 것이 내게는 좋습니다”(시편 72,28),“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코린 6,17). 그러므로 우리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마음의 생각들로 인하여 지쳐서 게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자기 땅을 가꾸는 이 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한가함을 좇는 자는 가난으로 배부르기”(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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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9) 때문이다. 또는 치명적 절망으로써 이 수행을 계속할 의향이 꺾 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사실“모든 노고에는 이득이 생기는 법 이지만 안일하게 고생 없이 지내면 궁핍해질 뿐이다”(잠언 14,23;70인 역). 또“괴로움 받는 사람은 스스로 수고하여 멸망을 막는다”(잠언 16,26;70인역). 그리고“하늘나라는 힘써야 하며 힘���는 사람들이 그것 을 잡아챈다”(마태 11,12).2) 실은 수고 없이는 어떤 덕행도 얻을 수 없 다. 마음의 엄청난 참회 없이는 아무도 그대들이 원하는 정신의 안정함에 오를 수 없다.“인간은 수고를 하기 위해 태어난다”(욥5,7라틴역).“완전 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기”(에페 4,13)위해 언제 나 뜻을 더욱 굳히면서 깨어 있어야 하며 끊임없이 열심히 수고해야 한 다. 그런데 지금부터 이미 그 충만한 경지를 사고와 묵상의 대상으로 삼 아 현세에서 미리 맛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장래에 그 경지에 이를 수 없 겠다. 그리스도의 귀한 지체로 제정되었으니 이 육신에서 이미 그분의 몸 과 하나 될 결합의 보증금을 소유해야 한다. 그 경지에 들어갈 사람은 한 가지만 그리워하고 목말라하여 언제나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을 한 가지 목표를 향하도록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장래에 성인들이 누릴 복된 생 활에 대한 보증을 현세에서부터 차지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것이다”(1코린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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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 원문의 뜻은 분명치 않다. 200주년 성서에는:“하늘나라는 힘에 눌리고 있습니 다. 힘 쓰는 자들이 그것을 강탈합니다.” 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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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V I I3) 제르마노 : 너무도 많은 적수들이 우리 정신을 둘러싸서 정신이 원치 않는 곳에, 아니 정신이 본질상의 불안정으로 쉽게 빠지게 되는 곳에 끊 임없이 몰아가지만 않는다면 정신의 변덕스러움을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게 무수하고 힘세고 무서운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니 천상의 신탁(神託)같은 아빠스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 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나약한 육신으로 그들에게 저항할 수 있다고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VIII 세레노 아빠스: 사실 원수들이 우리에게 언제나 함정을 놓으려고 한다. 인간 내부의 투쟁을 경험하는 누구나 이 점을 의심할 수는 없다. 한편 그 들은 우리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죄악을 범하도록 자극을 주지만 우리를 죄악으로 몰아붙이지는 못한다. 그들이 권유하는 능력과 함께 강요하는 권세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들이 우리 마음에 박으려고 하는 무슨 죄든지 전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얼마든지 자극하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승낙하는 힘과 자유가 있다. 그들의 권세와 공격을 두려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에 있 는 하느님의 보호와 도움을 잊지 말자.“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세상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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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부터 가시아노는 귀신( “영” )들의 본질과 역할을 논하기 시작한다. 고대에서는 우리가 심리적인 작용으로 생각하는 많은 일들을 귀신들의 활동으로 설명하였다. 그 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세레노 아빠스 같은 원로들의 말씀을 우리도 가끔 보게 되는 현상과 경험을 묘사하는 말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런 경험에 대처하는 방법과 태도는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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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들보다 크시기 때문이다”(1요한 4,4).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그분의 도움은 우리를 대적하는 그 무리의 전력보다 훨씬 더 힘세고 격렬 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착한 일을 권하실 뿐 아니라 착한 일을 도와주 고 그것을 하도록 우리를 밀어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본의 아니게 또 는 우리도 모르게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일도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자유의지로 동의하지 않고서 아무도 그에게 속아 넘 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사실을 코헬렛에서 이렇게 표현한 다:“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곧바로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아 들들의 마음은 악을 저지를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코헬 8,11;70인역). 다시 말하면 각자가 악을 저지르는 까닭은 닥쳐오는 악한 생각에 즉시 저 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대항하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을 피 할 것입니다”(야고 4,7)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IX 제르마노 : 그런데 영혼과 악령들이 서로 너무 치밀하게 맞물려 악령들 이 영혼에게 붙어있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악령들은 우리도 모르게 영혼에게 말하고 그들 이 원하는 것을 불어넣으며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선동할 수 있 고, 영혼의 생각과 움직임을 모두 똑똑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우리 정신 사이에 너무 긴밀한 일치가 생겨서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그들 의 충동질로 생기는 것과 우리 의지로 생기는 것을 거의 구별할 수 없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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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X 세레노 아빠스 : 영이니까 영에게 자기도 모르게 결합되며 내키는 대로 무엇을 설득시킬 수 있는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은 과연 놀랄 일이 아니다. 인간들 사이에 본질의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영들의 상호 관계도 마찬가 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에 대해 내리는 정의(定義)가 그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로 혼합되거나 한쪽이 다른 쪽을 전부 차 지할 정도로 하나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런 것은 유일하게 육 신이 없고 단순한 본질을 가진 하느님만이 능히 하실 수 있다.4)

꺋X I 제르마노 : 그런데 귀신들린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이 논증은 잘 맞 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귀신의 감도로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말하고 행합니다. 그래도 그들의 영혼이 악령들과 하나 된다고 할 수 없 겠습니까? 사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악령의 도구처럼 되어서 본성을 떠나 고 악령들의 동작과 감정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와 행동 과 의지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악령들의 것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꺍X I I 세레노 아빠스 : 귀신들린 사람들의 경우는 내가 위에서 설명한 내용에 반대되지 않는다. 그들이 더러운 귀신의 영향으로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자기가 모르는 것을 억지로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악령들의 침입을 당하지 않는다는 ‐‐‐‐‐‐‐‐‐‐‐‐‐‐‐‐‐‐‐‐‐‐‐‐‐‐‐‐

4) 고대의 교부들은 흔히 천사들과 귀신들도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육신을 지니고 있다 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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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감도를 받아서 자기가 행하고 말하는 것을 전혀 모르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을 알고 나중에 기억한다. 악령의 그런 감도를 옳게 이해해야 한다. 악령은 영혼의 본질 속에 들 어가거나 영혼과 하나 되어 그것을 옷처럼 입음으로써 환자라는 옷을 통 해 말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악령들이 절대로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현상들이, 영혼이 탈이 나서 생긴 것이 아니라, 몸이 약해져 서 생긴다는 것을 명백하게 관찰할 수 있다. 더러운 영은 영혼의 힘이 들 어있는 지체들에 침입하여 그 지체를 엄청난 무게로 억누름으로써 이성 의 능력을 고약한 어두움으로 덮고 가로챈다. 그런 일이 술이나 고열이나 지나친 추위, 또는 그밖에 외부에서 닥쳐오는 건강상 문제로도 일어난다 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복된 욥의 육신을 해칠 허락을 받은 마 귀가 그런 일을 일으키지 못하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금지하셨다:“좋 다, 그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목숨(70인역:‘영혼’)만은 남겨두어 라”(욥 2,6). 다시 말하면“그 영혼의 보금자리를 약화시켜 그를 미치게 하지 말라. 너의 무게로써 그 마음의 중심을 졸라 죽임으로 너를 반대하 는 그의 이성과 지혜를 파묻지 말라”는 것이다.

XIII - XIX 생 략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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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기서부터 가시아노의 가르침은 너무 혼란스럽다. 그가 악령들의 본성과 여려 종류 들에 대해 내세우는 이론을 현대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악령들에게 각각 어떤 전문분야가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성격에 따라서 한 악령이 특정한 욕구 를 일으킨다는 설을 납득하기 어렵다. 번역자 생전에 방대한 저술활동을 했던 가시 아노의 담화 가운데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으로 넘어가기 위해 제 7담 화와 제 8담화 중 상당한 부분을 생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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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XX 악령들이 모두 같은 정도로 맹렬하지도 않고 같은 세력과 악성을 가지 고 있지 않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초보자와 연약한 사람들은 우 선 약한 영들과 투쟁하게 된다. 그런 놈들을 이기고 난 뒤에 점차로 더 강 한 놈들이 그리스도의 선수를 대적한다. 우리가 더 많은 힘을 얻고 인간 적으로 성장하는 정도에 따라 싸움이 더욱 어려워진다. 본래 어떤 성인이 라도 그렇게 많은 강한 원수들의 악질을 당해내거나 그들의 흉계에 대적 할 수도 없고 그들의 잔인함과 사나움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리스도를 우리 싸움의 인자한 심판으로 모시고 있으니 그분이 상대자들 의 힘을 조정하여 영들의 지나친 공격을 물리치고 견제하시고“시련과 함 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실 것이다”(1코린 10,13).

XXI -XXIV 생 략 XXV 귀신이 붙은 사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악령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으로 그들에게 눌리지 않아도 그들의 악습과 욕정 에 연루되어서 마음으로는 악령들의 소유가 되는 사람들의 경우다. 그것 은“누구에게 굴복하는 자는 그의 종이다”(2베드 2,19)라는 사도의 말씀 과 같다. 그런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병에 빠져 있다 는 것은 악령들의 노예가 되어도 그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들도 아주 가벼운 잘못 때문에 육체적으로 사탄에게 나 심한 질병에 넘겨졌던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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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날에 그들에게 가장 미소한 허물이나 흠이라도 발견되기를 원치 않 기 때문에, 이렇게 그들의 모든 더러움을 녹여버리신다. 이와 같이 예언자 또는 하느님 친히 말씀하신대로 하느님께서는 불에 달군 금이나 은처럼 되어 이미 처벌로 정화될 필요가 없게 된 그들을 영복에 보내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씀과 같다:“나는 너의 쇠찌꺼기를 깨끗이 녹이고 너의 불순물을 모두 없애버리리라 … 그 다음에 너는 정의의 도읍, 충실한 도성이라 불리리라” (이사 1,25-26),“은과 금이 도가니에서 단련되듯 주 님은 마음들을 시험하신다” (잠언 17,3),“금과 은은 불로 단련되고 사람 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집회 2,5),“주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견 책하시고 당신이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에게 매를 드신다” (히브 12,6).

XXVI 그런 것을 열왕기 상권에 나오는 예언자의 경우에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느님의 사람은 단 한 번의 불순종으로, 그것도 자기 계획이나 고의로 한 것이 아니라 남의 꾀에 빠져 저지른 불순종의 탓으로 곧 사자 에게 잡혔다. 그 이야기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다:“그는 바로 주님의 말씀을 어긴 하느님의 사람이다. 주님께서 그를 사자에게 내어 주시어 그 에게 하신 말씀에 따라 사자가 그의 뼈를 부수어 죽이게 하셨다”(1열왕 13,26). 그 사건에서는 조심 없이 범한 실수에 대한 보속과 더불어 그 예 언자의 덕행에 대한 공로를 엿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를 일시적으로 형리에게 넘기셨지만 사나운 맹수는 삼키려는 욕구를 눌러 자기에게 넘겨진 시신에 전혀 입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이 진리의 명백한 증거를 볼 수 있는데, 갈라무스(C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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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라고 하는 광야에 살던 바울로와 모이세 아빠스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우선 바울로 아빠스의 이야기를 하겠는데, 그는 바네피시(Panephysis) 읍에 가까운 광야에 살았다. 이 지방에 염분이 많은 물이 들어와 서 광야가 된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북풍이 불때마다 여러 웅덩이 의 물이 주위의 모든 땅을 덮어버린다. 그래서 옛날에 바로 그러한 까닭 에 모든 인구들이 떠나버린 낡은 동네들은 섬들처럼 보인다. 이제 바울로 아빠스는 그 광야의 고요함과 침묵으로 말미암아 지극한 마음의 순결, 여 자의 얼굴 뿐 아니라 여자의 옷마저도 보일 것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순결로 발전하였다. 그가 어느 날 같은 광야에 사는 아르케비우스(Archebius) 아빠스와 함께 다른 원로의 암자에 갈 때에 우연히 어떤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에 바울로 아빠스는 여자의 나타남으로 충격을 받아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 형제를 방문하겠다는 결심을 제쳐놓고 자기 암자로 도로 달려갔다. 얼마나 빨리 도망갔는지, 사자나 무시무시한 용 앞에서도 아무도 그렇게 빨리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아르케비우스 아빠 스가 결심한대로 저 원로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길을 계속하자고 큰 소리 로 아무리 간청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도망친 것이 정결과 순결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행동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었으며 올바른 수행과 규율의 한 계를 넘은 것이다. 그는 참으로 해가 되는 여성들과의 친분만이 아니라, 이성의 모양까지도 저주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즉 시 벌을 받았다. 그의 온 몸이 마비상태에 빠져 자기 몸의 어떤 지체도 움 직일 수 없게 되었다. 팔다리뿐만 아니라 혀와 귀의 감각도 상실되어 말 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것으로는 움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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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형태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엔 남 자들의 정성으로 그의 병을 도저히 간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들의 주의 깊은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수녀원으 로 모시고 갔더니 이제 몸짓으로도 청할 수 없는 음식을 여자들이 그에게 부어넣게 되었다. 그는 근 4년간 즉,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리적인 필요 를 포함한 모든 일에 수녀들의 섬세한 시중을 받아야 했다. ���러나 전혀 움직일 수도 감지할 수도 없을 만큼 몸의 지체들이 모두 마비되었지만 그분의 덕행은 은혜로운 힘을 발했다. 산다기보다 죽었다 고 해야 할 그의 몸에 댄 기름을 병자들에게 발라줄 때 그들은 즉시 모든 병에서 낫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도 주님께서 당신 사랑의 안배로 그의 모든 지체들을 쓰지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명백하 게 드러났다. 그는 순결의 증거와 공덕의 표시로 치유의 은사를 성령의 권능으로 받은 것이다.

XXVII 그리고 위에서 말한 대로 이 광야에 머물던 모이세 아빠스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잘못 때문에 곧 벌을 받은 일 이 있었다. 그는 마카리오 아빠스와 토론하다가 어떤 선입견 때문에 조금 딱딱한 말을 사용했었다. 그러자 그는 특별히 흉악한 귀신에 들려 그 귀 신이 그에게 사람들의 똥을 먹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정화시키기 위 해, 다시 말하면 순간적인 잘못의 때가 그에게 남지 않기 위해 이 채찍을 내리셨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치유가 얼마나 빨리 되었는지, 그리고 그 치유가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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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리오 아빠스가 즉시 그를 위하여 기도에 들어갔더니 기도를 다 마치기 전 에 악령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XXVIII 이런 일들을 보면 여러 가지 유혹을 당하거나 저런 악령들에게 들린 사 람들을 미워하거나 멸시하지 말아야 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사실 우 리는 두 가지 진리를 꼭 믿어야 한다. 첫째,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 무도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수 없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 신 모든 것, 그것이 현재로는 슬픈 일로 보이든지 기쁜 일로 보이든지 간 에, 그 모든 것은 그분이 가장 사랑스러운 아버지와 가장 인자한 의사로 서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련을 받는 것은 교 육상으로 비천해 짐으로써 세상을 떠날 때 깨끗한 상태로 영원한 생명에 바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주 가벼운 벌을 받을 수 있기 위하여 엄한 교 사들에게 넘겨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사도의 말씀대로“영은 주 님의 날에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현재로서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을 멸 망에 부친다”(1코린 5,5)는 일이다.

XXIX 제르마노 :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을 멸시하거 나 무서워할 뿐 아니라 우리 지방에서는“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 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복음 말씀대로 그들에 게 계속 성체를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아빠스님 은 그들이 유익한 정화를 위하여 그런 시련을 통해 비천함을 체험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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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 세레노 아빠스 : 이것은 올바른 지식, 그보다도 올바른 믿음의 문제이 다. 조금 전에 내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 과 하느님이 모든 것을 영혼들의 이익을 위해 안배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전혀 멸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을 우리들 의 지체들로 보아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할 것이다.“한 지체가 고 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니”(1코린 12,26) 우리는 그 들을 지극한 연민으로 깊이 동정할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지체들이니 우 리는 그들 없이 완성에 전혀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 리의 조상들도 우리 없이 약속의 성취를 얻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점에 대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리고 이 모두가 믿음을 통 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 해 더 좋은 것을 내다보시어, 우리 말고 그들만 완전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 11,39-40). 그리고 그들에게 성체를 거절했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가 능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매일 성체를 모시게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대는“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는 복음말씀을 잘못 적용한 것이 다. 성체는 악령의 음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정화와 보호를 이루는 것이다. 사람이 성체를 모시면 성체가 그 사람의 지체 속에 숨어 있는 귀신을 불로 태우다시피 하면서 쫓아낸다. 사실 얼마 전에도 우리는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아빠스도 그런 식으로 치유되었던 것을 보았 고, 그전에도 그런 일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귀신들린 사람이 천상 약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을 원수가 보게 되면, 그에게 더욱 심하게 덤벼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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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첫째 담화

이다. 사람이 영적인 치료를 오래 받지 않을수록 악령이 그를 더욱 무섭 게 더욱 자주 공격할 것이다.

XXXI,1 그런데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히 생각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온 갖 죄악과 난잡한 짓을 범하더라도 마귀의 침입을 알아차릴 수 있는 표징 이 전혀 없는 사람, 자기 행동에 마땅한 시련과 자기를 고칠 수 있는 채찍 질을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시대의 빨리 지나가는 치료를 얻 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현세의 벌은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다. 그래 서 그들은“완고하고 뉘우칠 줄 모르는 마음으로 진노의 날, 하느님의 의 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날 진노를 쌓고” (로마 2,5)있다. 그때에“그들의 구 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을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 66,24).

XXXI,2 - XXXIV 생 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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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둘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8담화: 악의 세력에 관하여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우리는 주일 전례에 참여하고 성당에서 나온 다음에 우선 원로의 방에 가서 화려한 식사 대접을 받았다. 그는 절인 소금물에 기름 한 방울 정도 넣는 일상의 습관과는 달리, 그날에는 소금물 대신에 소스를 만들어 거기 에다 보통보다 더 많은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수도승들이 매일 식사 때에 넣는 한 방울의 기름은 맛을 더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기름의 양이 하도 적어서 그것이 입을 적시거나 목구멍을 지나가기에도 부족하 다. 그 기름을 넣는 목적은 교만을 피하고 자만심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 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격한 극기 때문에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부풀어 오르게 되어 있다. 사실 아무도 볼 수 없는 데서 남모르게 극기를 할수록, 극기를 하는 사람이 더욱 미묘하게 끊임없이 교만의 유혹을 당한 다. 그 뒤에 원로는 소금과 각 사람을 위해 올리브 세 개를 놓았고, 어떤 바구니에서 갈아놓은 콩을 제공했더니 우리는 각각 세 개를 취했다. 그리 고 각 사람을 위해 자두 두 개와 무화과 한 개를 주었다. 그 광야에서는 그 양을 넘는 것을 죄로 간주한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약속받은 대로 우리 문제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기 시작했더니, 원로는 이때까지 미룬 질 문을 다시 해 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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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노 아빠스의 둘째 담화

II 제르마노 : 복된 사도 바울로가 다음과 같이 열거하는 인간의 적수의 종 류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우리가 싸울 상대는 피 와 살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권력과 권세의 악신들, 이 어두운 세계의 지 배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입니다” (에페 6,12). 또는“천사도 주권도 권세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 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 8,38-39). 이렇게 다양하고 큰 미움으로 우리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이 어디에서 생겨났습 니까? 하느님께서 이런 세력들을 일부러 만들어서 저 여러 가지 계급과 신분에 따라 인간과 싸우게 하셨다고 믿어야 합니까?

III 세레노 아빠스 : 우리를 가르치고 지도하기 위해 성경의 말씀 가운데 어 떤 내용은 상당히 명백하여 영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 다. 그런 경우에 어두움 속에 가려진 심오한 뜻이 없을 뿐 아니라, 전문적 인 해석이 필요 없이 누구나 그 소리와 글자의 의미를 그 표면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다른 말씀은 어두운 신비들로 가득 덮여 있어서 그 말씀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요구된다.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이렇게 안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 선, 만일 하느님의 신비들에 대한 영적인 이해가 가려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 즉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이 그것을 꼭 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서 덕행 과 지혜와 관계없이 게으른 사람이나 열심한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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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질 것이다. 또 이러한 안배로써 이해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져서 같은 신앙을 가진 교우들 사이에도 안일한 사람들의 나태함을 책할 수 있고, 노 력하는 사람들의 열성과 부지런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마땅히 훌륭하고 열매를 잘 맺은 밭에 비교할 수 있다. 거기서 나는 것 중에 사람들이 삶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것도 많기는 하 지만, 어떤 것들은 먼저 뜨거운 불 위에 얹어 익힘으로써 본래의 딱딱함을 없애지 않고서는 인간의 음식으로 적당하지 않거나 해롭다. 그리고 어떤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는 것이다. 즉, 날것으로 먹을 수도 있지만, 불로 요리하면 더욱 몸에 좋은 것도 있다. 끝으로 많은 것들은 가축이나 짐승, 또는 야생동물과 새들의 먹이로 좋지만,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것 들이다. 이것들은 불을 사용하지 않아도 본래의 거친 상태로도 동물들의 목숨과 건강에는 좋은 것들이다. 이제 성경이라는 풍요로운 낙원에서도 그런 체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 다. 어떤 때에 글자의 의미 자체가 단순하고 명확해서 더 숭고한 해석이 필요 없고 사람들이 그 글귀의 소리만 들어도 풍부한 영양분을 누릴 수 있 다.“들어라 이스라엘, 네 주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다” 나“네 주 하느님 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으로 사랑하여라” (신명 6,4-5 라틴역)라는 말씀들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을 우의적(allegorica)으로 해 석해서 부드럽게 만들고 영적인 불로 검토하지 않고서는 무사하게 내적 인간의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그대로 섭 취한다면 이익보다 손해를 보기 쉽다. 예를 들어“허리는 동여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야 합니다” (루가 12,35)와“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 라도 칼을 사시오” (루카 22,36)라는 말씀과“자기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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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마태 10,38) 라는 말씀들이 그런 것이다.“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올바로 자식이 없는” (로마 10,2) 지극히 엄격한 몇몇 수도승들이 그 말을 너무 단순하게 알아들은 나머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그것을 언제나 어깨 에 메고 돌아다님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이익을 주기는커녕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구절은 자연스럽게 또 필수적으로 이중의 해석, 즉 역사적인 해석과 우의적인 해석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그런 구절들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도 영혼에게 생기를 주는 즙을 제공할 수 있다.“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 편 뺨마저 돌려대시오” (마태 5,39)와“이 고 을에서 박해하거든 저 고을로 피하시오” (마태 10,23)라는 말씀, 그리고 “완전해지려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 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마 태 19,21)라는 말씀들은 여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이 밭은“가축을 위하여는 풀을” (시편 103,14) 낸다. 성경 의 들은 그런 식량, 즉 순수하게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 하다. 이런 부분은“주여, 사람과 짐승을 구원하시나이다” (시편 35,7 라틴 역)라는 말씀대로 내용을 그 깊이대로 완전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단순한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그들은 그런 말씀을 통해 자기 신분과 이해력에 맞 게 활동생활1)의 일들만을 더 활기 있게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을 뿐이다. ‐‐‐‐‐‐‐‐‐‐‐‐‐‐‐‐‐‐‐‐‐‐‐‐‐‐‐‐

1)“활동생활” (vita actualis):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의 이론에 따라 가시아노는 영성의 길을 두 단계로 나눈다. 첫째 단계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 악습을 고치고 덕 을 닦는 과정, 즉 활동생활(그리스어: praktike)이다. 둘째 단계는 하느님의 것들을 깊 그노스티코스(Gnostikos)” :코 이 이해하는 관상생활(그리스어: theoretike)이다. 참조:” 이노니아 31집 171-173쪽;가시아노 담화 1,7-8장,13장: 코이노니아 20집 186이하(= 선집6, 172쪽이하);담화 14:코이노니아 27집 201쪽이하(=선집6, 298쪽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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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성경에서 아주 명백하게 표현하는 말씀에 대해 우리도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그 뜻을 밝힐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깊이 연구하고 묵상할 자료를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성경에 삽입한 가려진 말씀들이 있다. 성령 께서 뜻하신 바대로 오직 소견과 추측으로만 알아낼 수 있는 그런 대목에 우리는 서서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겠다. 그런 구절의 뜻을 주장하거 나 받아들이는 것은 설명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재량에 달려있다. 가끔 한 가지 일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오더라도 양쪽 입장이 이치에 맞는 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신앙에 대한 손해 없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중립의 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양쪽 견해가 신앙 에 반대되지 않으니 한 가지 주장에 그대로 찬성하지도, 그것을 거부하지 도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요한 안에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하면서도 그가 다시 주님의 재림의 선구자로 온다고(마태 11,14 참조) 하는 말을 들 수 있다. 황폐의 흉물(마태 24,15)에 대한 말도 그렇 다. 여기서 예루살렘 성전에 세웠다는 제우스의 우상을 생각할 수도 있고, 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교회 안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외 에도 그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를 예루살렘 함락으로 성취된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고, 세말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반대되지도 않고 첫째 설명을 받아들인다고 둘째 설���을 헛된 것으 로 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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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이제 그대들이 물어본 문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다루지도 않았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들이 어떤 이들에게 애매하게 보이더라도 삼위일체 신앙에 어 긋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견해를 잘 조절해서 찬성할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정도로 주장해 보겠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은 그저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성경의 명백한 증거로 뒷받침할 수 있다.

VI 성경이“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매우 좋더라” (창세 1,31)고 하시니 하느님이 본질상 나쁜 것을 창조하셨다고 절대로 하지 말자.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서 귀신들을 그대로 창조하여 각각 악성(惡性)의 계급에 따라 항 상 사람들을 기만하고 멸망시키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셨다고 한다면, 우 리가 성경 말씀을 반대하여 하느님을 악의 발기인과 창조자로 비난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본성으로 나쁜 존재, 언제나 악 속에 머물러 마음을 좋게 바꿀 수도 없는 존재들을 창조하셨다는 비난 이 되겠다. 그러므로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귀신들의 다양성이라는 이유 에 대해 성경에서 찾아낸 가르침을 밝히도록 하겠다.

VII 이 유형만물 이전에는 하느님께서 하늘의 영적인 존재를 창조하셨다. 이 들은 창조주의 은혜로 큰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무(無)로부터 창조되었다 는 것을 스스로 알고 마땅히 하느님께 영원히 감사하고 끊임없이 찬양을 드리게 되어있다. 이 점을 의심하는 신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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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심으로부터 창조활동을 처음 시작하셨다고 생 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이전에 무수한 세대 동안에 하느님이 기획과 배려함이 없이 한가하게 지내면서 선하신 은혜의 대상이 없어서 당신 관대 함을 실행하지 못한 채 외롭게 지내셨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견해를 가진다면, 그것은 무량하고 시작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그분의 위 엄에 대해 너무 천박하고 알맞지 않는 생각을 품는 일이다. 주님 자신도 저 세력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별들이 만들어질 때 나의 모든 천사 들이 나를 큰 소리로 찬미했다” (욥 38,7 70인역). 천사들이 별의 창조를 보았다면 그들이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다는‘한처음’ 보다 먼저 창조되었 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가시적인 이 모든 조물이 무로부터 발생 하는 것을 볼 때 탄복하여 큰 소리로 창조주를 찬미했다는 것이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 다” (요한 1,3)는 말마따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만물을 창조하 신 근원2)이라고 말하지만, 모세가 창세기에서 시간의 근원에 대해 말할 때에 그 근원은 역사적 의미 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 다.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의 연령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말 하는 시간의 근원 이전에 우리는 하느님이 그 모든 천상 세력을 창조하셨 음을 의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로)는 그들의 서열을 이렇게 열거했다.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도다. 보이는 것과 보 이지 않는 것, 권좌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 아,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도다” (골로 1,16). ‐‐‐‐‐‐‐‐‐‐‐‐‐‐‐‐‐‐‐‐‐‐‐‐‐‐‐‐

2) 라틴어 principium은 시작이라는 뜻도 되고 근원이라는 뜻도 되어서 이 대목을 한국 어로 정확히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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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에제키엘과 이사야의 애가(哀歌)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저 세력들 가운데서 몇몇 으뜸되는 존재들이 떨어졌다. 그들에게 속한 티 로의 으뜸 또는 새벽에 뜨던 루치펠3)에 대한, 눈물을 흘리게끔 만드는 애 가를 우리는 잘 안다. 전자(前者)에 관하여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이렇 게 말씀하신다:“사람의 아들아, 티로 임금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 그에게 말하여라.‘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완전함의 본보기로서 지혜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서 살았다. 너는 홍옥 수와 황옥 백수정과 녹주석과 마노 벽옥과 청옥과 홍옥과 취옥 온갖 보석 으로 뒤덮였고 너의 귀걸이와 네가 걸친 장식은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네 가 창조되던 날 그것들이 모두 준비되었다. 나는 우람한 커룹을 너에게 보 호자로 붙여 주었다. 너는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 살면서 불타는 돌들 사이 를 거닐었다. 너는 창조된 날부터 흠 없이 걸어왔다. 그러나 마침내 너에 게서 불의가 드러났다. 너의 그 큰 장사 때문에 너는 폭행을 일삼으며 죄 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럽게 여겨 하느님의 산에서 쫓아냈다. 보 호자 커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너의 아름다움 으로 네 마음이 교만해지고 너의 영화 때문에 너는 네 지혜를 타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임금들의 구경거리로 내놓 았다. 너의 그 많은 죄와 부정한 장사로 너는 네 성소들을 더럽혔다’ ” (에 제 28,11-18ㄱ). 또 이사야는 후자(後者)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어찌하다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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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Lucifer은“샛별” ,“빛 지닌 이” 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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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떨어졌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네가! 민족들을 쳐부수던 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다니. 너는 네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지.‘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 과 같아져야지’ ” (이사 14,12-14).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저 지극히 복된 꼭대기에서 떨어진 이들은 이 둘만이 아니다. 저 용은 별들의 삼분의 일을 함께 휩쓸었다고 한다(묵시 12,4). 어떤 사도는 더욱 명백하게 이렇게 말 한다:“제 영역을 지키지 않고 떠난 천사들을 큰 날에 심판하시려고 영원 한 사슬로 묶어 어둠 속에 가두어 두셨다” (유다 1,6). 그리고“너희는 여 (시편 81,7)고 우 느 인간처럼 죽어가리라. 여느 대관4)처럼 쓰러지리라” 리에게 하신 말씀은 많은 으뜸(principes)들이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일까? 이런 근거로 저 악한 세력들의 다양함을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위 치는 그들이 본래 창조되었을 때의 위치를 반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천사들을 거꾸로 흉내 내어 고약함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계급 과 순서를 차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IX 제르마노 : 여태까지 우리는 마귀가 천사의 위치에서 떨어지게 된 범죄 의 이유와 단서가 특히 시기질투였다고 생각했고, 그 시기심 때문에 아담 과 하와를 교활하게 속였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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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라틴어로는 princip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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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세레노 아빠스 : 창세기를 읽어보면, 그것이 범죄와 추방의 발단이 아니 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성경은 인간을 기만하기 전에도 마귀에게 뱀 이라는 이름을 찍었다. 거기서 말하기를,“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 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창세 3,1)고 한다. 이와 같이 마 귀가 첫째 사람을 속이기 전에 이미 천사의 거룩한 위치를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이미 뱀이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받았을 뿐 아니라, 땅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교활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착 한 천사에 대해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복된 상태에 그대로 머무 르는 이들에 대하여“뱀은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은 가브리엘이나 미카엘에게 도저히 적용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착한 인간에게도 써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뱀 이라는 명칭과 짐승과의 비교가 천사의 위치가 아니라 범법자의 오명을 가리킨다는 것이 분명하다. 마침내 인간을 속이게 하는 동기는 그 이전의 추락과 관련된다. 다시 말 해 마귀는 하느님께서 최근에 땅의 진흙에서 빚은 사람을 자기가 떨어짐 으로 잃었던 영광으로 불러주실 것을 보고, 시기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교만으로 인한 첫 번째 몰락 ─ 그 일로 뱀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 다음 에 시기로 인한 두 번째 몰락이 뒤따랐다. 그때에 그는 아직 어느 정도 서 있을 수 있어서 인간과 대화하고 인간에게 무어라고 권고할 수 있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판결을 내려 그를 다행히도 맨 아래로 던지셨다. 이제 그는 높은 것을 쳐다보려고 몸을 일으켜 다닐 수 없고, 땅에 붙어 배로 기어 다 니면서 폐습과 악행의 흙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가 원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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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똑똑히 밝히고 마귀와 인간 사이에 우리에게 유익한 적개심과 불 화를 일으켜 주셨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마귀를 위험한 원수로 경계하니 그는 기만적인 친분을 내세워 그 이상 우리를 해칠 수 없게 되었다.

꺋X I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나쁜 조 언을 멀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속이는 자가 단죄되고 마땅한 벌을 받 지만, 꾀임을 받은 자는 그보다 좀 더 가벼운 벌을 받기는 해도, 그것을 면 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여기서 똑똑히 분간할 수 있다. 속임을 당한 아담 에게는 얼굴에서 나는 땀과 노동의 수고라는 언도만 내려진 것이다. 사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의하면,“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1티모 2,14) 불행스럽게도 속은 여인에게 동의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저주를 직접 맞은 것은 자기가 아니라, 열매를 제대로 못 내게 되는 땅이었다. 그러나 설득시 킨 여인은 많은 탄식과 고통과 슬픔을 얻게 되었고, 영구히 (남자의) 지배 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범죄의 창시자인 뱀은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 결론으로는 그릇된 조언에 대하여 극진히 조심해야 한다. 조언을 준 자가 먼저 벌을 받지만, 속아 넘어가는 자도 범죄와 같이 처벌도 면할 수 없다.

XII - XVII 생 략5) ‐‐‐‐‐‐‐‐‐‐‐‐‐‐‐‐‐‐‐‐‐‐‐‐‐‐‐‐

5) 여기서부터 세레노, 또는 가시아노는 귀신들의 종류와 활동 분야와 방법에 대한 설 명에 들어가는데 성서학과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현대인의 눈에는 너무 이상야 릇하게 보인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 우리 세계관과 달라서 일부 내용은 세레노 나 가시아노의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은 날아 다니는 귀신으로 우글거린다고 생각하고 그 귀신들이 인간들과 여러 가지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문제 ─ 예를 들어 악령들이 인 간의 여성과 살을 섞었는지의 문제 (창세 6,2 참조) ─ 같은 것은 우리의 관심을 일 으키지 못하고 그 설명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한가지 에피소드 만 번역하고 끝맺는 말에 넘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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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II 악령들이 서로 다름에 대하여는 두 철학자들의 사건을 통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 둘은 마술을 통하여 귀신들의 태만함도 경험했고, 그들의 힘과 사나운 악질도 자주 겪었다. 그 철학자들은 복된 안토니오를 무식한 문맹으로 업신여긴 나머지 성인을 더 크게 해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 기 마술과 악령들의 사기를 통해 성인을 암자에서 내쫓으려고 그에게 가 장 고약한 영들을 들여보냈다. 그들은 안토니오를 하느님의 종으로 보는 사람들의 큰 무리들이 매일 그를 찾아오는 것을 보고, 시기로 멍들어서 그 를 그런 식으로 공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토니오 성인이 가슴과 이마에 십자표를 긋기도 하고 간절한 기도에 열중하기로 했더니, 그 독한 악령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아무 효과도 없이 그 철학자들에게 돌 아갔다. 이들이 성인에게 더욱 힘센 영을 보내어도, 그 영들도 헛수고를 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이들은 승리를 거둔 그리스도의 용사에게 그보다 더욱 힘센 영을 보냈지만 또다시 실패하였다. 이래서 고도의 마술을 동원 해서 시도한 그 많은 책략들의 결과는 끝에 가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위 대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하게 된 것이다. 두 철학자들이 생 각할 때에 저와 같은 사납고 힘찬 귀신들을 해와 달에 보냈더라면 그것들 을 어둡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성인을 다치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잠시라도 자기 수도원에서 쫓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XIX 두 사람은 탄복한 나머지 즉시 안토니오 아빠스를 찾아가 몰래 시기했 다는 것과 음모를 꾸미고 무섭게 공격했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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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성인이 그들에게 언제 자기를 공 격했는지 알아보니, 바로 그 날에 생각 중에 특별히 가혹한 자극들에 시달 렸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복된 안토니오는 우리가 어제의 담화 가운데 주장한 것을 뒷받침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생각과 영적 관상을 모두 빼앗아 가기 전에는 귀신들이 사람의 마음이나 몸에 침입하 거나 누구의 영혼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더러운 귀신들이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 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놈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으로 신자들의 성덕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고, 악한 사람들의 제물(祭物)이나 주문(呪文) 에 넘어가 어떤 친지처럼 그들의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때 문에 바리사이들이 착각해서 우리 구세주께서도 그런 요술로 귀신들에게 명령을 내리셨다고 생각하고,“귀신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 아낸다” (루카 11,15)고 했다. 그들은 잘 알고 있던 자기들의 요술쟁이들 의 관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베엘제불의 이름을 부르고 그가 좋아 한다고 여기는 제물을 바침으로 그의 측근이 되어서 그가 지배하는 귀신 들에 관한 권한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XX - XXV,5 생 략 XXV,6 우리가 거의 이틀 밤을 새면서 논설을 계속했는데, 벌써 동이 트기 때문 에 이를 끝맺을 때가 다가왔구나. 그래서 나는 이 담화의 쪽배를 문제들의 깊은 바다에서 끌어내어 침묵의 안전한 항구에 정착시키고자 한다. 성령 의 감도가 우리를 그 속에 아무리 깊이 인도하더라도 우리 눈앞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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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시야가 펼쳐질 것이다. 솔로몬의 말씀대로“존재하는 것은 멀리 있으 며 심오하고 심오하니 누가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오?” (코헬 7,24) 그러 므로 주님께 기도하여 그분께 대한 두려움과 스러질 줄 모르는 사랑을 굳 게 지켜주시라고 간청하자. 그 사랑은 우리를 모든 일에 지혜롭게 만들며 마귀의 화살로부터 우리를 언제나 오전하게 보호할 갓이다. 이 두려움과 사랑이 우리를 보호할 때 우리는 죽음의 덫에 빠질 리가 없다. 완전한 사람과 불완전한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볼 수 있다: 완전한 사람 들 안에서는 더 확고하고, 더 성숙한 애덕이 꾸준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 문에 그들은 더 단단하게, 더 쉽게 성덕에 머무를 수 있지만, 불완전한 사 람들 안에서는 애덕이 더 약하며 더 쉽게 식기 때문에 그들은 더 빨리 더 자주 죄악의 사슬에 얽매이게 된다.

이 말씀들을 들을 때 우리는 너무 감동하여, 원로의 암자에 왔을 때 느 꼈던 것보다 이제 떠날 때에 느끼게 된 그 가르침의 충만에 대한 마음의 갈증이 더욱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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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칙 한국 베네딕도회 협의회

제 1 장 : 협의회 제1조(명 칭) 본 회의 명칭은‘한국 베네딕도회 협의회’(The Benedictine Conference of Korea)라고 칭한다(이하‘협의회’ 라 칭함).

제2조(회원자격) ① 정회원 : 한국의 남녀 베네딕도 수도회들을 정회원으로 한다. ② 특별회원 :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도회를 특별 회원 으로 받아들인다. 특별회원은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에 초대되며, 협 의회에서 결정한 사항에 참여하기를 원할 경우 이를 배제하지 않는다. ③ 새로운 회원의 가입은 협의회 장상 모임에서 결정한다.

제3조(목 적) ① 베네딕도회 영성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삶을 나누고, 수도회 상호간 의 친교를 도모한다. ② 각 수도회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베네딕도 회원으로서의 협력을 증진시킨다. ③ 베네딕도회원으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분별하 고, 공동으로 응답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유지한다. ④ 외국의 각종 베네딕도회 기구 및 협의회들과 서로 협조한다(베네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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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회 총연합, BEAO 등).

제4조(구 성) ① 회장 및 비서 : 협의회 회장은 3년 임기로 장상모임에서 선출되며, 협의회를 공식적으로 대표한다. 회장은 협의회 운영을 위하여 각 수도회 장상들의 협조를 받아 필요한 사항을 조정한다. 협의회 비서는 회장이 임 명한다. 비서는 회장을 도와 각종 연락업무와 문서관리를 담당한다. ② 장상 모임 ③ 한국 베네딕도회 수도자 모임 ④ 전문 위원회

제5조(재 정) ① 협의회 사무 및 연락업무를 위한 비용은 회장이 속한 공동체에서 부 담한다. ② 한국 베네딕도회 수도자 모임 개최를 위해 소요되는 비용은 주최 수 도회에서 부담한다. ③ 전문 위원회 운영과, 그 활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제반 비용은 각 공 동체에서 분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공동체별 분담 비율은 위 원회에서 결정한다. 단 장상모임의 결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안건은 회 장에게 보고하여 장상모임에서 그것을 결정토록 한다.

제 2 장 : 장상 모임 제6조(구 성) ① 협의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각 수도회의 최고 장상들로 장상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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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구성한다. 장상이 새로 선출될 경우 새 장상이 그 역할을 수행한다. ②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중에 정규적인 모임을 가진다. 장상이 참 석할 수 없을 경우 그 대리인을 참석토록 한다.

제7조(임 무) ① 협의회 운영에 관한 공동 책임을 진다. ② 결의한 사항을 이행하는 책임을 진다. ③ 협의회 회장을 선임한다. ④ 공동으로 논의할 안건이 있을 때 적절히 대화하고 협력한다.

제 3 장 : 한 국 베네딕도회 수 도 자 모 임 제8조(주 최) 협의회는 매년 5월 둘째 화요일과 수요일에‘한국 베네딕도회 수도자 모임’ (이하‘모임’ 으로 칭함)을 개최한다. 모임은 회원 수도회가 번갈아 가며 주최한다.

제9조(준 비 및 자 료 의 이 관) 모임을 주최하는 수도회는 제반 준비와 연락을 담당하며, 모임을 마친 후 한 달 이내에 관련 문서들과 자료들을 정리하여 다음해 모임을 주최하 는 수도회에 이관한다. 또한 모임에 대한 자료들과 회의록 등을 각 수도원 에 배부하여 모든 회원들이 적절한 방법으로 이 모임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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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0조(모 임 의 내 용, 진 행 및 기 록) 모임 첫날은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강의나 나눔 혹은 친교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하며, 둘째 날은 각 공동체 보고, 전문위원 회 보고, 공동 관심사 논의 등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날 모임은 회장이 진 행하며, 주최 수도회에서 기록을 담당한다. 회장은 차기 모임의 장소를 결 정하고, 논의할 주제를 결정하거나 제안을 받은 후 모임을 종료한다.

제1 1조(참 가 자) 모임에는 각 수도회의 장상(혹은 장상을 대리하는 자), 모임 진행을 위 해 필요한 수도자, 장상이나 공동체가 지명한 적정 수의 수도자가 참가한 다. 10명 이상의 수도자들로 구성된 분원이나 예속 수도원의 경우 장상의 결정에 따라 1-2명의 참가자를 모임에 참여시킬 수 있다. 가급적 참가자 들을 다양화하여 베네딕도회 전체의 친교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한다.

제 4 장 : 전 문 위원회 제1 2조(전문위원회의 설 치) 협의회 산하에 전문 위원회를 두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활동케 한다. 필요한 경우 전문위원회의 대표자는 매년 한 차례 한국 베네딕도회 수도 자 모임에서 그 활동을 보고한다.

제1 3조(양성위원회) 각 수도회의 양성책임자와 그 보조자들로 구성되며, 정기적인 회합을 갖고 양성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다.


한국 베네딕도회 협의회 회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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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4조(전례위원회) 베네딕도회적인 전례에 관한 연구와 거행, 전례서에 관한 공동의 관심 사를 나눈다.

제1 5조(출판위원회) ‘코이노니아’편집과 출판에 관한 제반 사항을 책임지며, 베네딕도회 수 도생활에 관한 서적의 출판을 위해 서로 협력한다.

제 5 장 : 부칙 제1조 : 본 회칙은 2005년 7월 11일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부터 시 행된다. 제2조 : 본 회칙의 개정은 장상 모임의 결정에 의하며, 회장에 의해 선 포되고, 적절한 방법으로 공포되어야 한다. 제3조 : 정회원과 특별회원은 다음과 같다. 제3조 : 정회원-대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제3조 : 정회원-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3조 : 정회원-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가나다 순) 특별 회원-엄률 시토회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녀원

2005년 5월 10일 현재


KOINONIA

Contents

Editor’s Preface₩₩₩₩₩₩₩₩₩₩₩₩₩₩₩₩₩₩₩₩₩₩₩₩₩₩₩₩₩₩₩₩ Thomas Timpte, OSB Discretio in St. Benedict’s Rule ₩₩₩₩₩₩₩₩₩₩₩₩₩₩₩₩₩₩₩₩ Sakakuchi Kokichi The Other Side of Leadership ₩₩₩₩₩₩₩₩₩₩₩₩₩₩₩₩₩₩₩₩₩₩₩₩₩₩ Joan Chittister The Superior’s New Identity ₩₩₩₩₩₩₩₩₩₩₩₩₩₩₩₩₩₩₩₩ Josepha Chang OCSO Tradition of Hospitality in Benedictine Life Today ₩₩₩₩₩ Jonas Lee OSB Benedict and the Future of Europe ₩₩₩₩₩₩₩₩₩₩₩₩₩₩₩₩₩₩₩ Rowan Williams Life of Saint Macrina ₩₩₩₩₩₩₩₩₩₩₩₩₩₩₩₩₩₩₩₩₩₩₩₩₩₩₩₩₩₩₩ Gregory of Nissa Ad Virginem ₩₩₩₩₩₩₩₩₩₩₩₩₩₩₩₩₩₩₩₩₩₩₩₩₩₩₩₩₩₩₩₩₩₩₩₩₩₩ Evagrius Ponticus Gnostikos ₩₩₩₩₩₩₩₩₩₩₩₩₩₩₩₩₩₩₩₩₩₩₩₩₩₩₩₩₩₩₩₩₩₩₩₩₩₩₩₩₩₩₩Evagrius Ponticus Collationes Abbatis Sereni = Coll. VII, VIII ₩₩₩₩₩₩₩₩₩ Joannes Cassianus Constitution of the Benedictine Union of Korea

Vol. 32, 2007 Summer


코이노니아3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