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제 11권 제 2호(통권 68호)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2014┃3·4월호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과 주민들(1885)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병영공사에 동원된 섬사람들에게 후한 품삯을 지급하고 의술도 베풀었다.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하나

빛과 열쇠 중동지방의 어느 밝고 넓은 광장에서 한 젊은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 었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수피즘의 도사(道師)가 물었다. “젊은이는 무 엇을 찾고 있소?” “열쇠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어디 나도 같이 찾아볼까?” 도사는 젊은이와 함께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쇠는 없었 다. 한참 후에 도사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젊은이는 어디서 열쇠를 잃었소?” “예, 바로 저희 집에서 잃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집에서 잃은 열쇠를 왜 여기 이 광장에 와서 찾고 있는 거지요?” “아, 네, 여기가 우리 집보다 훨씬 밝으니까 요…”라고 젊은이는 대답했다. *

*

*

이 짧은 이야기는 수피즘(Sufism)에서 ‘참된 지식을 찾는 길’을 가르치기 위해 서 인용되는 일화(逸話)들 중의 하나이다. 수피즘은 이슬람의 주류를 이루는 종 파 중의 하나로 신비주의적인 철학이 그 특색이며,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 반까지 중동지방 특히 페르시아에서 성행했다. 수피즘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 여 하나의 교단(敎團)으로 성립시킨 사람은 11세기 이란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알 가잘리였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도사들의 밑에서 고행을 하면서 진리 를 배우고 터득한 지식을 열심히 노트에 기록해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 그의 그 귀한 노트도 도둑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황급히 도둑의 뒤를 쫓아가서 다른 것은 다 가져도 좋으나 그 노 트만은 꼭 돌려줄 것을 간청했다. 도둑은 이까짓 종잇조각이 뭐가 그리 중요하 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안에는 귀한 지식이 들어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도둑은 “도둑맞을 수 있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다.”라고 껄껄 웃으면서 그 노 트를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알 가잘리는 이 말을 神으로부터의 메시지로 받아들 이고, 참 지식은 읽고 외고 써놓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속에서 찾아 이 해하여 실생활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가르치기 위해서 인용되는 일화 중의 하나가 「빛과 열쇠」라고 한다. 이 짧은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들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많 은 문제는 그 원인이 나에게 있는데도 엉뚱한 곳에서 해결코자 방황할 때가 얼 마나 많은가? 두고두고 음미하고 반추해 볼 만한 귀한 교훈이다. ┃ 2 ┃ 씨앗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둘

강태공 드리운 채 한가롭게 낚싯대 를낚시를 낙으로 즐기는

사람을 ‘강태공’이라 부른다. 사실 강태 공은 중국 주나라의 정치가로서 실존 인물이다. ‘여상’이라는 본명이 강태공으로 불 리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주나 라 여(呂)지방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 났지만 그의 대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 어 생활이 몹시 궁핍했다. 그래도 천하 를 다스리리라는 꿈을 안고 실력을 쌓 았으나 백발이 될 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결 국 친정으로 돌아갔다. 아내마저 떠난 여상은 낚시에 전념했 다. 그가 살던 동네에 있는 웨이수이 강 에서 그는 미끼도 끼지 않고 곧은 낚싯 대만 드리운 채 몇 시간을 보냈다. 그곳 에서 귀한 인연을 만날 것을 알았지만 정확한 때를 몰라 늘 한 자리에서 낚시 로 소일하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여상은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군 대와도 같은 힘찬 소리였다. 그러자 곧 당시 주나라 왕이던 서백의 모습이 물 위에 비쳤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 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가난으로 찌 든 얼굴의 여상을 본 서백은 한눈에 그

가 찾던 귀인임을 알았다. 그날 서백은 사냥을 하러 가기 전에 점괘를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선왕인 태공이 왕을 보필할 신하가 나타나리라 고 예언하는 점괘가 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까지 하나하나 또렷이 그려 주었는데 그가 바로 여상이었던 것이다. 여상을 보고 놀란 서백은 몇 마 디 말을 건네고 됨됨이를 파악한 뒤 여 상을 즉시 최고의 자리에 임명했다. 여상은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 으로 주나라 서백을 보필하며 나라를 통치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병법과 인 재 등용법, 그리고 군왕의 도리와 나라 를 통치하는 일까지 친아버지처럼 서백 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가 쓴 <육도> 라는 책은 인재를 판별하는 데 있어 정 치가들 사이에 대표적인 지침서가 되 었다. 명재상 강여상의 성공에는 두 가지 비결이 있다. 뜻을 세우고 기회가 올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와 그 소 망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2014. 3-4월호 ┃ 3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셋

채명신 장군이 평생 숨겨둔 비밀 적장(敵將)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한국 베트남전때군 주월(駐越)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육군 중장 채명신 장군이 본인 의 유언에 따라 지난 11월 28일 建國 이 후 처음으로 장군 묘역이 아닌 국립서 울현충원 2번 병사 묘역에 안장되므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불과 5 일 뒤 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이 밝혀지자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 였다. 채명신 장군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용기와 신의와 숭고한 인정이 넘 치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채 장군이 돌아가시기 6개월 전 고인 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중앙일보 기자에게 일생 숨겨둔 비밀을 토로했는데, 지난 12월 3일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됨으 로’ 세상에 알려졌다. 6‧25 발발 후 채 장군이 적 후방에 침 투, 후방을 교란하고 요인 암살과 병참 부대 습격을 주 업무로 하는 한국군 최 초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 사령관으 로 활동할 때 일이다. 1951년 3월,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 던 조선공산당 제2비서이자 대남유격 부대 총사령관이었던 길원팔(吉元八) ┃ 4 ┃ 씨앗

중장이 어디에 숨어있다는 첩보를 입수 했다. 25세인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 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 을 급습했다. 채 장군(이북 출신)은 그 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사투 리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 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적들을 전원 사살하고 이어 세포위 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 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 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 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놈 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 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 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 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 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 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 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 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 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 받은 내 총으로 죽고싶 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있 던 10대 남녀 전쟁고아를 거둬달라는 부탁도 함께했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 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 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 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 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뒤통수 를 쏠 것이라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 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 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 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 바른 곳 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 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 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 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여기서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비밀, 적장 길원팔이 마지막 자결하면 서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던 10대 남녀 전쟁고아 두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 을 했고,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 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채 장군은 이 약속을 어떻게 지켰느냐 하 는 문제이다. 채 장군과 길원팔의 만남은 비록 짧 고도 극적인 순간이었지만 채 장군에게 는 깊은 인상과 많은 감동을 주었으므 로 그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정성껏 기르기로 작정했다. 여자아이는 전쟁 통에 숨졌으나 남자 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채 장군에겐

유일한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 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 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 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 다. 이때 채 장군의 나이는 25세 아직 미혼이었다. 그래서 채 장군은 이 고아 를 동생으로 입적시켰다.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사실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 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갔다. 서 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 를 받은 뒤 서울 유 명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년 전 은퇴했 다. 채 장군의 자녀 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 라고 불렀다. 동생 채 교수(76) 는 이번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 소를 지키며 조문객 들을 맞아 동생의 도리를 성실히 감당 했다. 2014. 3-4월호 ┃ 5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넷

넉넉히 이기리라 말씀의 씨앗은 생명이 있어 내 마음 밭에서 싹이 나고 말씀은 내 안에서 믿음이라는 열매를 거둔다. 믿음의 사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장에서 던진 물맷돌 하나가 골리앗의 머리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믿음을 증거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까 그 사랑에서 끓을 수가 있을까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누가 우리를 이길 수가 있을까

언제나 연약한 나를 날마다 성령님이 도우시면 넉넉히 이길 수 있으리라.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한다면, 나도 항상 승리할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으리. 골리앗의 머리를 깨뜨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 위해 주시므로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살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므로 내 뜻대로 안 돼도 감사하며 살리라. 승리는 내 것이라 찬양하며 살리라

2013.10.1. 로마서 8장을 읽고 임진곤 목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 6 ┃ 씨앗


이달의 말씀

천군 천사 (왕하 6:14~23)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도단에 우거할 때 아람군대가 엘리사를 위대한 잡겠다고 밤에 몰래 기습하여 도단 성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다.

수종 들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 이 사실을 보고 기겁을 하고 엘리사에게 고했 다. 엘리사는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 고 하나님께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히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하였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니, 그들의 눈이 다 어두워졌다. 계속 포위망을 압박해 오면 천군 천사들에게 떼죽음을 당 할 수밖에 없으므로 엘리사는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접근하지 못하게 눈을 어둡게 한 것이다. 엘리사는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눈을 뜨 게 하고, 먹고 마시게 한 뒤 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내용이 본문에 나와 있다.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천군 천사가 엘리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람군대 는 그 사실을 볼 수 없었지만 엘리사의 사환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정반대 로 기독교 역사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천군 천사를 보지 못했는데, 원수들 이 본 사례도 많다. 1967년 6월 5일 일어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은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 로 시작되었다. 상대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13개국 연합군이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고 이스라엘은 국토의 4배를 얻었다. 6일 전쟁 때 일어났 던 기적담 가운데 그 한 가지를 여기 싣는다. 6일 전쟁에 참전했던 이스라엘군의 한 병사는 전쟁 중에 부대를 잃고 방황하 다가 아랍군 부대로 잘못 들어갔다. 수천 명의 아랍군 병사들이 이 병사를 보고 모두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을 했다. 낙오병은 수천 명의 아랍군 포로를 이끌고 본부대로 돌아왔다. 이들을 맞은 이스라엘부대는 매우 놀랐다. 아랍병사들을 모 두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장교 몇 사람을 불러 사연을 캐물었다. 장교들은 대 답하기를 “이스라엘 병사 한 명 뒤에는 수천 명의 천군 천사들이 아람군대를 향 해 총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하여 모두 두 손을 번쩍 들었다고 했 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군대와 싸웠지만, 천군 천사를 맞아 싸워보지 않 았기 때문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병사 들이 전한 것이 아니라 아랍병사들의 증언인 것이다. 이스라엘 낙오병은 천군 천사를 보지 못했지만, 아랍병사들은 모두 보았던 것이다. - 이 노 균 목사 -

2014. 3-4월호 ┃ 7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다섯

김요석 목사 독일유학 간증기 김요석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부까지 10년 동안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나병 환자들의 집착촌인 전남 영암군 도포면 영화교회에 서 10년 가까이 사역하다가 한국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중국 나환자 수용 소를 찾아갔다. 강제로 수용된 나환자들은 모두 중증환자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데, 그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섬기고 있다. 가히 성자라 말할 수 있다. 다음 기사는 김요석 목사가 미국 한인교회에서 한 간증을 녹취한 것이다.

나는 70년대 초까지 약 10년 간 독일에서 공 부했다. 그 당시 유럽에는 사회 주의신학 해방 신학 막스주의 신학이 휩쓸고 있을 때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아니 하고 하나님도 성령도 다 부인하고 성 경을 단순히 학문적으로만 연구했다. 기 독교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를 독재에 서 해방, 가난에서 해방에 두고 부정부 패와 싸우는 것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 았다. 칼 막스야 말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대선교사라고 치켜세웠다. 너무나 실망 스러워 가톨릭 신학교를 찾아가 몇 강좌 를 들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신학 사회주의신학으로 선회해서 가난 과 싸우고 독재와 싸워야 한다고 많은 젊은 신부들이 남미 등지로 가는 것을 ┃ 8 ┃ 씨앗

보았다. 한번은 유명한 신약교수가 마가복음 강의를 하는데, 유명세 때문에 수강생이 1,500명이나 모여들었다. 신학과 학생뿐 만 아니라, 다른 과 학생, 대학원 학생들 도, 심지어 졸업한 학생, 이미 박사과정, 목사과정을 마친 자들도 있었다. 강당에 서 앉아서 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강의를 멈추고 성경을 번쩍 들고 하는 말이 “여 러분 가운데 이 성경을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 있습니까?” 그 많은 수강생 가운데 어느 한 사람 손 드는 사 람이 없었다. 그때 저가 구석에 있다가 손을 들었 다. 교수가 나를 쳐다보더니 독일 학생 같이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라서 “당신 어디서 왔소?”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분이 하 는 말이 “한국은 아직도 샤머니즘 원시 종교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무조 건 믿는 모양인데 당신이 여기서 신학 을 잘 배워보면 아마 믿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뒤


대중을 향해서 “여러분들은 이 성경 껍 데기 두 장만, 앞뒤 가죽으로 된 두 장 이외는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용 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데 모두 조용했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 니가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옆방에 있 는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혹시 독 일어를 잘 몰라서 그렇게 된 줄 모르니 너에게 한 번 더 확인 받고싶다. “그 교 수님이 이렇게 물었고 나는 이렇게 대답 한 것이 맞느냐?” 이 친구 대답하지 않 고 가만히 나를 한참 측은하게 쳐다보더 니 하는 말이 “자네 진짜 성경을 하나님 의 말씀으로 믿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는 안 믿느냐?” 했더 니 그 친구 하는 말이 “나는 안 믿는다” “그러면 자네는 왜 신학을 공부해서 목 사가 되려고 하느냐” 그 친구 대답이 “아! 목사 직업이 좋지 않은가 좋은 직업 을 가지기 위해 신학을 선택했다.” 나는 어릴 때 신학과 목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한 다고 생각했는데 직업 운운하니까 매우 놀랐다. 독일에는 국립대학의 중심학부에 신 학부가 있다. 신학부에 제일 우수한 학 생이 입학하고 신학부에서 공부를 못하 면 의학부나 법대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신학부 학생은 자부심이 대단 하다. 학문적으로는 아주 높은데 가슴은 아주 차다. 목사는 국가의 아주 높은 고

급 공무원이다. 그다음 시간에 교수님은 나에게 하는 말이 “당신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 로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는 데, 그렇다면 당신이 증거를 대보아라.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대 라. 하나님의 존재가 실존적이라는 것을 증거해 보라” 내가 “어떻게 대야 하는 가?”고 반문했더니 교수님 하는 말씀이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하나님과 한 번 대면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 이 어떻게 생겼더냐? 흑인이던가. 백인 이던가. 당신처럼 황인종이던가?” 그다 음 계속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을 만났 다면 악수 한번 해보았는가? 그렇다면 그 손이 차던가. 따뜻하던가? 저는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 보라고 당신 괜히 고집으로 믿는다”고 질타를 했다. 나는 그 이후 그 교수님과 계속 접촉 을 하고 반문을 하고 논쟁을 벌였다. 나 는 이런 풍토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마 치고 귀국했다. 나는 이곳에서 목회한 지 불과 며칠 만에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체험하지 못했던 예수님과 악수도 했고 또 훗날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 당신이 하 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보 았는가? 하나님과 악수해 보았느냐? 내가 아무 말도 못 했던 두 가지 질문에 하나님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2014. 3-4월호 ┃ 9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여섯

국내 첫 여성 은행장 탄생

권선주 기업은행장 만에 여성 은행장을 선임했다. 은행권에서 권선주 기업은행 은(57)52년 은행장은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은행권의 뿌리 깊은

남성 중심 문화를 극복하고 가는 곳마다 ‘여성 최초’란 수식어를 만들어냈다. ‘여 성 공채 1기’ ‘최초 1급 승진’ ‘최초 지역 본부장’ ‘최초 부행장’ 등 승진 때마다 최 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권 행장은 경기여고와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1978년 기업은행 공채 17기 로 입행했다. 당시 여성은 ‘여행원’이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공채를 하던 기업은 행이 남녀 구분 없이 대졸자 공채 직원을 선발한 것은 그 해가 처음이었다. 권 행장을 포함해 4명의 여성이 입행했지만, 나머지 3명은 모두 결혼 후 퇴직했다. 입행한 지 35년 만에 수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권 행장은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지만,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35년 간 기업은행에서 근무한 그의 좌우명은 ‘인내’다. 그는 “은행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은 참고 견뎌내는 힘이 강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짱이 두둑한 일벌레라는 평을 듣지만, 가정에서는 현모양처다.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성의 아내로 살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침밥을 챙겨주곤 했다. 매일 새벽 5시 이전에 일어나 가족들이 아침을 먹는 모습을 봐야 하루가 든든했 다. 그는 단 하루도 출근하기 싫었던 적이 없었고 은행에 다닐 수 있다는 걸 고 맙게 생각하면서 다녔다고 하였다. 첫 아이를 낳고는 한 달만에 복직했고, 둘째 아이를 낳을 때는 출산 전날까지 출근했다. 서울 광장동 워커힐 지점에서 일하던 차장 시절에는 칼을 든 남성을 상대할 정도로 담력이 크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의 인생 이 망가지는 일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어요?”라며 설득해 내보냈다. 직급이 높 아질수록 저녁 회식 자리는 늘어만 갔다. 묘수를 짜낸 것이 술잔을 최소화하는 일이었다. 술자리를 가지더라도 늘 1차에서 마무리했다. 술도 제법 마시게 됐다. 그는 “소주 폭탄주로 10잔까지 마셔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 다”고 했다. 그는 단 1분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으며 집에 있을 때나 직장에 있을 때 우선 순위를 정해서 일을 한다고 했다. 첫 여성 행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 31:10)

┃ 10 ┃ 씨앗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일곱

42세 사시(司試)에 도전, 58세 성취

16전 17기의 주인공 오세범 변호사 년 1월 1일 당년 42세의 오세범 씨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 1997 었다. 1차에만 8번 떨어졌고, 2차 도전 9회만에 합격, 칠전팔기(七顚

八起)가 아니라 총 16전 17기의 새 역사를 기록했다. 장장 16년간 검은 머리가 반백이 될 때까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전력질 주하여 마침내 꿈을 이룩한 의지의 사나이다. 지난 1월 20일 경기 고양시 일산 동구 사법연수원 대강당에서 개최된 43기 사 법연수원 수료식. 786명의 수료생 대표 오세범! 자신과 동갑인 최병덕 사법연수 원장 앞에서 “법조인으로서 겸허한 자세로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겠습니다.”라 고 선서를 하자, 강당 안을 채운 수료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대 언어학과 74학번인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학 자의 길을 걷길 원했다. 하지만 서울대에 들어간 지 한 달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고 ‘유신철폐’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선배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외면 하기 힘들었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1977년 4학년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 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오 씨는 곧장 기 술학원에 등록했다. 학생운동 전력과 서울대 중퇴 학력으로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정년도 없고 사람들 눈치도 안 보는 기술을 배워 볼 요량이었다. 고압가 스 냉동과 보일러 관리 자격증을 땄다. 1984년 보일러공으로 경기 화성시의 제 약회사에 들어간 오 씨는 민주화 항쟁 이후 노조 결성 붐이 일던 1987년 회사에 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오 씨는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직접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했다. 2년간 소 송을 준비하며 노동법 지식을 쌓아 갔다. 결국, 패소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김칠 준 변호사를 만났다. 오 씨는 김 변호사의 소개로 법무법인 다산의 노동법 전담 사무장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내일신문 업무기획실장으로도 4년간 일했 다. 하지만 언론사 간부는 자기 적성에 맞지 않아 옛날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한 일이 좋아서 사시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장애인, 철거민, 여성차별, 가정폭력처럼 돈은 안 돼도 약자를 위한 소송 을 맡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

2014. 3-4월호 ┃ 11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여덟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일본군 위안부 소녀像’에

美하원 외교위원장이 참배

31일 미국 연방 하원의 지난 1월 에드 로이스 외교위원장이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최근 타계한 일본군 위안부 피 해자 황금자 할머니의 영정이 마련된 분향소에 무릎을 꿇고 조의를 표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수십만 소녀 를 강제로 끌고가 성 노예로 저지른 천 인공노할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이 범한 추악한 죄악상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일러주고 있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일 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이어 해외 ‘위안 부 소녀상’이 처음으로 세워진 곳은 미 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市이다. 글렌데일은 한국 교민이 특별히 많이 사는 곳도 아니다. 미국의 하고많은 도 시 가운데 글렌데일市가 위안부 소녀상 을 건립한 사연은 이렇다. 글렌데일은 미국에서 아르메니아인 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다. 20만 주민 가운데 절반이 아르메니아인이다. 터 키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는 1차 세계대전 때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부터 ‘종족 말살’에 버 금가는 수난을 당했다. 무슬림 국가인 오스만튀르크는 기독교도인 아르메니 아인들이 눈엣가시였다. 오스만튀르크 는 아르메니아가 반란을 꾀한다는 구실 로 아르메니아인을 100만 명 이상을 학

살했다. 어느 작가는 그때의 참상을 보 고 ‘지구 상의 모든 죽음이 거기 있었 다.’고 썼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살길을 찾아 전 세계에 흩어졌다. 쓰라린 비극 을 가슴에 안고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일본위안부 같은 침략자 만행을 보는 심정은 남달랐던 것이다. 글렌데일시 가 소녀상 옆에 세운 ‘평화의 기념비’에 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2차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끌려가 성 노예로 학대 당한 20만 여성의 희생을 기린 다. 인권을 짓밟는 모든 만행이 다시는 일어 나지 않기를 우리는 간절히 소망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녀상’과 ‘평화 기념비’를 통해 그들 뼛속 깊이 자리 잡 은 분노를 다른 민족의 아픔에 대한 연 민과 공감으로 표현했고 인류 보편의 인권에 대한 갈망으로 승화시켰다. 이 런 아픔과 분노의 국제적 연대가 퍼져 간다면 일본의 뻔뻔한 역사 왜곡 같은 것은 설 땅이 없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15) ┃ 12 ┃ 씨앗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 아홉

추신수 연봉 7년간 1억 3000만 달러 아시아인으로 최고의 연봉, 스포츠 재벌에 오르다 연습 벌레 악바리 추신수 야구 선수가 지난해 12월 22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과 7년간 1억 3000만달러(약 1379억 원)에 계약했다. 이는 박찬호(40·은퇴)가 2002년 텍사스 와 계약했던 한국인 최고액(5년 6,500 만 달러)은 물론 일본인 스즈키 이치로 (41·뉴욕 양키스)가 2007년 시애틀 매리 너스와 계약했던 아시아인 최고액(5년 9000만 달러)도 뛰어넘었다. 추신수가 받은 연봉을 평균하면 1년(197억 원) 1개 월(16억 원) 1일(5390만원) 1시간(224만 원) 1분(3만7000원)이나 되는 엄청난 금 액이다. 추신수가 내년부터 2020년까지 받게 될 1억 3000만 달러는 대당 2만 달러에 수출하는 쏘나타 6500대의 가격에 해당 한다. 한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수출품’ 으로 인정받았다. 추신수는 지난 12월 19일 뉴욕 양키스 가 제시한 7년간 1억 4000만 달러(약 1478억 원)의 계약을 거절했다. 뉴욕은 지방세률이 높고 텍사스는 지방세가 없 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뉴욕 양키스보 다 더 받는 셈이 된다. 경제적인 측면만 이 아니라 3자녀를 기르는 환경문제 그 리고 무엇보다도 우승할 수 있는 팀을 택한 것이다. 추신수는 부산 수영초등학교에서 야 구를 시작했고 부산중 - 부산고를 거치

는 동안 늘 최고이었지만 개인훈련을 가 장 많이 하는 악바리였다. 2001년 고교 를 졸업하자 롯데 자이언츠가 신인 1순 위로 그를 지명했지만 미국으로 떠났다. 연봉 1000만 원으로 마이너리그에서 프 로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동료와 같은 방을 써야만 했다. 2003년 추신수는 부인 하원미(31)와 함께 ‘단칸 방’ 생활을 했다. 월세 700달러인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빌려 다른 선수 부부가 방 하나를 쓰고, 또 다른 선수는 거실에 서 잤다. 화장실과 부엌은 함께 사용했 다. 2007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 으면서 1년을 쉬었다. 하원미 씨의 든든한 내조의 힘을 얻은 추신수는 2008년 부단한 노력으로 자리 를 잡아갔다. 2009년 2010년 2년 연속 으로 ‘3할 - 20(홈런) - 20(도루)’을 기 록하며 주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활 약을 발판으로 2010년 중국 광저우 아 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 병역 혜택 을 받았다. 2011년 상대 투수로부터 왼손 엄지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한때 슬럼프에 빠 졌지만,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무섭게 재기해 작년에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해 154경기에서 21홈런, 20도루, 107득점, 112볼넷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1번 타 자로 우뚝 섰다가 오늘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2014. 3-4월호 ┃ 13 ┃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소개

『씨앗』문서선교지는 매호 25,000부를 발행하여

주로 병원과 교도소, 그리고 교회 등지에 배부되고 있다.

『씨앗』지가 배부되는 병원 및 교도소(전 교도소) 지역

병원명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서울대학병원 서울아산병원 강북삼성의료원 국립경찰병원 국립의료원 건국대의료원 서울적십자병원 원자력병원 안남병원 이대부속목동병원 인제대상계병원 인제대서울백병원 한국보훈병원 한양대학병원 고려대구로병원 신일병원 중앙대용산병원 시립동부병원 서울의료원 태릉성심병원 서안복음병원 대한병원 기독병원 시립보라매병원 서울현대병원 삼성서울병원 경희의료원 순천향대학병원 부산 병원선교회 고신의료원 수영한서병원 침례병원 좋은삼선병원 세일병원 일신기독병원 부산백병원 센텀병원 좋은강안병원 해운대백병원 강동병원 부산부민병원

┃ 14 ┃ 씨앗

부수 지역 500 500 300 300 200 200 200 200 200 200 100 100 200 200 100 200 2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200 200 100 1,000 200 100 200 100 200 100 100 100 100 200 100 200

병원명

인천 사랑병원 부평새림병원 인천기독병원 인천적십자병원 인천의료원 노인전문병원 대전 대전중앙병원 을지대학병원 충남대학병원 건양대학병원 대전선병원 신탄진한일병원 대전성심병원 대전기독병원 울산 양승학비뇨기과 울산대학병원 광주 광주기독병원 광주병원 전남대학교병원 경기 뉴고려병원(김포) 분당서울대학병원 샘안양병원 신천연합병원 아주대학병원 한양대구리병원 시화병원 인제대일산백병원 고려대안산병원 안산중앙병원 굿모닝병원 의정부의료원 축령복음병원 이천금강병원 분당차병원 남양주우리병원 국립암센터(일산)

부수 지역

병원명

『씨앗』지 후원자 부수

300 대구 계명대동산의료원 1,000 100 1,000 영남대의료원 200 1,000 경북대병원 200 300 칠곡경북대병원 100 100 대구의료원 100 200 가야기독병원 100 곽병원 100 100 애락보건병원 200 100 드림병원 200 100 대구보훈병원 200 100 경북 아세아정형외과 200 100 100 경주동산병원 100 200 한동대선린병원 100 100 안동성소병원 100 경상병원 100 100 영천영대병원 200 경남 마산국립병원 진주경상대학병원 창원병원 진주반도병원 마산연세병원 400 창원세광병원 400 200 200 강원 원주기독병원 100 200 전남 영광기독병원 국군함평병원 100 200 200 전북 전주예수병원 아산정읍병원 100 100 100 충남 단국대학교병원 100 100 충북 충주건국대부속병원 충북대학병원 100 청주의료원 100 청주한국병원 100 100 100 100

구분

씨앗 후원자

개인 임진곤 목사·강호중 장로 심일청 원장·이상익 변호사 한휘옥 권사·심예지 박사 심예욱 선생·이한호 장로 김경희 권사·하동수 장로 남은주 권사·서인교 집사 김세태 집사·한순희 집사 정한옥 집사·강현숙 권사 민병호 선생·정선경 선생 이동호 님 ·안석봉 집사 탁진순 님 ·김성희 사모

100 100 100 100 100 100

단체 부산중앙교회 예본교회(가락동) 병원선교회(부산) 계명대동산의료원 영남대의료원 경북대병원 울산대학병원 영애회 신성장로교회 공산교회(나주) 전원교회(김해)

100

수시 최진호 집사

100 100 200 100 200 200 200 100 100

병 원

전국 병원 111개처 ➲ 총 20,400부

교 도 소

총 51개 소. 각 50부 ➲ 총 2,550부


들수록 인간의 삶이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너무 나이가 나 귀한 인생이기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도움

을 주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이 책자를 만들게 하였다.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나름대 로 터득한 삶의 지혜와 훌륭한 인물들의 교훈을 모아 월간지 『씨앗』 을 발간한 다.(2005년 부터 격월간 발행) 이 소책자가 인생의 참된 목적을 깨달으며 고된 인생살 이에 위로와 격려가 되며, 또한 끝없이 도전해 가도록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이상 바 람이 없겠다. 모쪼록 이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기를 기원한다.(2003. 12) ┃ 이노균 목사 ┃ 고교 졸업을 앞두고 폐결핵으로 쓰러져 4년간 요양을 하면서 주님을 영접했다.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흥해중학교에서 근 십년 간, 대구 성광중·고등 학교에서 십년 가까이 교직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장로 장립을 받았으며, 또한 고려대학 교 교육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중반 주님의 부름을 받고 1980년 총신신대원에 입학하면서 대구 서문교회 교육전도 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다. 나이 50이 가까워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86년 부산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0년 뒤 남천동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립하고 이전을 했다. 1998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Fuller신학교에 수학하여 2000년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 하였다. 2002년 12월, 정년을 수 년 앞두고 조기은퇴 하였다. 그리고 2004년 1월부터 문 서선교지 『씨앗』 을 발간하고 있다.

구 독

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 주소로 연락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안 내

(‘씨앗’지는 비매품이며, 우편요금은 본인 부담)

▶주

소 : 우편번호 339-882 세종시 조치원읍 정리 91-6 성모안과 이노균 목사

▶연 락 처 : FAX. (041)868-0031 ● 휴대폰 016-831-6080

『씨앗』 지를 통해 “문서선교에 함께 동참할 후원자”를 찾습니다. 후원방법

✿ 돕는 방법 : 1구좌 (매월 10,000원) ※형편에 따라 여러구좌로 후원할 수 있습니다. ※수시로 형편에 따라 후원해도 좋습니다.

▶은행구좌 : 농협 749-12-552162 이 노 균 신한 804-06-649525 이 노 균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씨앗’지 - 구독을 원하는 기관이 많습니다.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저서로는 『부산중앙교회 50년사』 , 『알기 쉬운 소요리 문답 해설』 , 『한눈으로 보는 구약 성경』 , 『한눈으로 보는 신약성경』 ,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해설』 , 자서전 『날로 새 로워라』 등이 있다.


뉴욕의 수돗물

•용기를 얻고 도전을 받는 이야기 『씨앗』 / 발행인 이노균 / 2014년 3월 3일 / 미남인쇄사 051) 502-0763 / 비매품

J.D. 록펠러(1839~1937)

뉴욕에서는 임대 아파트나 집을 빌려서 사는 경우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 물론 건물이나 집을 소유하면 수도세를 내지만 매우 저렴하다. 미국의 석유왕인 록펠러가 많은 재산을 기증해 뉴욕 시민이 수도세를 내지 않도록 정수 시설과 운영비를 부담 했고, 사후에도 록펠러 재단이 대신 내주 기 때문이다.

씨앗2014 3 4(68호)수정  

a

Read more
Read more
Similar to
Popular now
Just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