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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Ⅰ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 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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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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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여성의 삶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아직도 상황을 주도하는 주체 적이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 특히 남성에 따른 종속변수일 경우가 많다. 그런 데 이 책의 주인공은 철저히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살 아왔다. 지금 70대에 이르는 4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지 몰랐 던 간에 격동기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대부분의 농촌 출신들은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현장에 투입이 되어 소위 공순이가 되어 60 년대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하는 길에 초석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에서 서울에 살았고 특별한 여건에서 일반적으로 가는 길을 걷지 않고 예외 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기에 다른 어느 누구와도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던 삶을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5,000만 한국인 중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 이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나 업적 을 이룬 것이 아닌 평범한 인생이지만 마치 타임캡슐에 보관할만한 독특한 이야기이다. 돈, 기술, 가문, 학력 이 모든 것들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인격 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녀의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뼈대는 어려서 어머 니로부터 받은 가혹하다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유교적 훈련이었다. 흔히 유 교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억압과 굴레를 씌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고 그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글의 주인공은 유교적 바탕이 개인의 인격 안에 내재화 되었을 때 본인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어떻게 3개의 조국을 가 진 코스모폴리턴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냉정한 아버지 같은 나라 한국, 따뜻한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 전생에 살았 던 것 같은 그리스 3 나라의 삶이 있다. • 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작가 - 지성수
[들어 가는 글]
아마도 4살 때쯤이다. 우리 집은 영천 근처 서대문 형무소가 보이는 언덕 위 한옥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훤칠하게 키가 큰 노인임에도 살결이 마치 갓 태어난 남동생의 피부처럼 고왔고 부인도 귀품이 있어 보이는 미인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이 특이한 부부는 젊었을 때 조선 왕조가 망하 고 궁궐이 폐쇄되면서 궁에서 쫓겨난 내시와 궁녀 출신이었다. 그들이 궁에 서 쫓겨날 때 퇴직금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그 집에 세를 들었 던 것으로 보아서 집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 집에 세 를 들었던 것은 아마도 할아버지와의 인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할아버지가 이씨 조선 마지막 군대였던 궁을 지키는 별기군 출신이었기 때문 에 어떤 형태로든 궁에서 근무하던 부부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 버지의 살림을 그 집에 차려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는 것이다. 그 런데 이상한 부부는 궁에서 나온 지가 오래되었어도 궁중 법도를 따지며 살 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런 기억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일 때문이었다. 한 번은 엄니가 옥색 마고자를 고이 차려 입은 내시에게 아침 인사로 “진지 드셨습니까?” 하고 묻자 궁녀 출신의 부인이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 야. ‘수라 저으셨습니까?’ 해야지.”라고 했다. 이런 소리를 들은 후에 엄니는 아버지에게 “자기 남편이 무슨 상감마마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라고 하면서 불평을 했다.
저자 - 이영재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5
[차례] ChapterⅠ
1. 소풍 길처럼 떠난 피난길 행복한 피난 생활 아버지의 죽음 후 식모와 같은 원피스를 입다. 성당에 미친 엄니 대한민국 대법원 철 없는 판단
2. 세상 속으로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귀여운 뇌물 엉터리 교주 사랑도 아닌 것이 무용수의 길로 월남 전선으로 ‘I am Korean’이라는 주문
• 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차례] ChapterⅡ 3. 탈출 모색 구사일생 그리스 청년과의 재회 낮 선 나라에서의 결혼 악명 높은 그리스 시집살이 우유 전쟁 전생의 나라 그리스
4. 양부모 같은 나라 미국으로 격투 끝에 첫 가게를 열다 스쳐가는 인연, 머무는 인연 빨갱이와 미 제국주의자 직원이라기 보다 가족 나의 엄니와 나의 자식들 신앙의 미로에서 길을 잃다. 오해가 평화를 가져오다. 헤어질 때는 깨끗이
5. 손톱에 인생을 걸다. 며느리와 사위의 결혼 하나님에게 대들다. 온라인 세상에서 길을 찾다. 네일 협회와의 동행. 진상 손님들 그리스인의 오지랖
•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7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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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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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매동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난리가 터지고 피난을 떠나야 했다. 나는 엄니가 깨소금을 주먹밥 위에 골고루 뿌리는 것을 보고는 소풍을 가는 줄 알고 앞집에 사는 내 또래의 동무에게 “우리는 시골로 소풍 간다. 너희는 어디로 소풍을 가 니?”라고 물었다. 어린 내 눈에는 동네 모든 사람들이 음식 보따리를 이고, 지고 단체로 소풍을(?) 가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길은 내 평생 사라질 수 없는 기억 속의 행진이었다. 서대문 영천에서 외가댁이 있는 용인까지 요즘이야 차로 가면 2시간 거리이지만 국도를 따라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은 아주 먼 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이 나서 걷기 시작했지만, 점점 다리가 아프고 힘 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고, 엄니와 나 4살짜리 남동생과 같이 길을 떠났는데 동생이 엄니에게 업어 달라고 징징 울어대기 시 작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개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지고 있는 엄니는 동생을 업어 줄 수가 수 없어서 내가 동생을 업으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업 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동생은 악착같이 내 작은 등에 매달리고 나는 너무 힘이 들어 둘이서 함께 엉엉 울어 버렸다.
날이 어두워져서 우리 식구들은 무조건 어느 민가를 찾아 들어갔는데 그 집에 는 이미 마루뿐만 아니라 부엌, 마당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인이 사람이 들 어갈 공간이 더는 없다고 하자 엄니가 “이 어린 애들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또 저도 홑몸이 아닙니다.”라고 사정을 하니까 소 외양간을 가리키며 그곳이라도 괜찮다면 자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소 없는 외양간에서 하룻밤을 자야 만 했다. 냄새가 고약했지만,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생각할 사이도 없 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 1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있던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다 빠져나가고 우 리만 남아 있었다. 엄니가 빈 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아마도 예의 바른 엄니가 지 난밤을 지내게 해준 보답으로 그랬던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또다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틈만 나면 내 등에 매달리려고 폴짝폴짝 뛰고 나는 귀 찮고 힘이 들어 동생을 피해 뛰다 보니 피난길이 잡기 놀이가 되어 버렸다. 몇 날을 동냥 잠을 자고 먹을 것도 떨어져 가는데 엄니는 남동생에게만 뭔지는 알 수 없는 것을 먹이고 엄니와 나는 길가에서 만나는 우물물을 마셔가면서 걸었 다. 무슨 풀 뿌리인지 모를 것을 씹으라고 주셨는데 달착지근한 맛이 나기는 했 지만 배는 한 없이 고팠다. 길 가는 중에 운이 좋으면 마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민가에 들려 밥을 얻어먹기도 하며 드디어 며칠 만에 완전 거지꼴이 되어서 외 가에 도착했다
그렇게 고생 고생을 해가면서 외가에 도착해서 외가에서 보낸 그 해 여름은 어 른들에게는 힘이 들었겠지만 내게는 나름 신나는 시간이었다. 외할머니와 함께 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다가 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참외 수박을 찾아 내서 할머니에게 “여기 있다. 여기도 있다.”하고 마구 불러대던 재미가 좋았다. 또 넓은 밭에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목화 꽃송이, 짙은 보라색의 도라지 꽃들, 또 동글동글한 모양의 양귀비꽃들……. 그 사이 사이를 깡충깡충 뛰어다니거나 빙 글빙글 돌다가 꽃 속에 넘어지면 할머니는 남의 꽃밭을 망친다고 야단을 치셨 지만, 할머니는 엄니처럼 무섭지가 않고 온화하셔서 또다시 꽃 속을 휘젓고 다 녔다. 왕눈이 소도 있고 오리 식구들, 빨간 눈의 토끼도 있었다. 또 건넛방엔 누 에 벌레들이 삼 층 침대 위에서 뽕잎을 요로 깔고 꿈틀꿈틀 느릿느릿 춤을 추는 듯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뽕밭에 가서 자주색으로 잘 익은 오디를 혀가 검붉 게 물들도록 맛있게 먹었다.
오리 떼들을 바로 집 앞에 있는 개천으로 몰고 가는 일이 매일 아침 내가 해야 •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1
하는 일이었다. 어미 오리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뒤를 새끼 오리들이 종종 일 렬로 줄을 지어서 따라가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뒤뚱뒤뚱 어미 오리 흉내를 내 다가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없으면 또 어미 오리 흉내를 내곤 했다. 할머니는 내게 버선을 만드는 법 양말을 꿰매는 법 등 바느질을 하 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해서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멀지 않은 곳에 시내가 있어서 매일 시골친구들과 가서 물장난을 치며 놀다가 맑은 물밑에 있는 소라를 잡아오면 할머니가 된장을 푼 아욱 국 속에 넣어 끓여 주셨다. 소라 꽁지를 따고 쭉 빨면 된장에 간이 밴, 부드러운 속살이 입안에서 사 르르 녹는 듯했다. 지금도 중국 상점에서 소라를 보게 되면 그리운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아련해진다. 가을에는 외삼촌과 같이 할머니네 야산에 밤 을 따러 갔었다. 기다란 장대로 나무에 붙어 있는 밤을 내려치면 밤송이들이 우 르르 떨어졌다. 어떤 때는 내 머리 위로 떨어지기도 했는데 외삼촌이 일부러 재 미로 그런다는 것을 알아서 아픈 것을 참았다.
어느 겨울날 동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동네의 고무래 정씨 일가들이 다 모여서 심각하게 의논을 하는데 엄니가 “나는 더는 피난 못 가요. 여러분들이나 어서 서둘러 떠나세요.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겠어요. 길에서 아이를 낳다 객 사하는 것보다 집에서 편히 있을게요.” 라고 하자 외할머니가 “그럼 나도 남겠 다.” 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소달구지에 산더미처럼 짐을 쌓고서 떠나는 외삼촌 과 아버지 및 문중 남자들의 등을 떠밀었다.
6.25 난리 통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 때는 아버지가 계셨다. 나 도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비장한 분위기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버 지와 외삼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시골친구들이 남 • 1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순이만 남고 다 떠났어도 할머니네 집엔 재미있는 놀 거리가 많아서 심심하지 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마 동네 사람들이 두 번에 걸쳐서 피난을 갔었나 보다. 처음 용인에 도착했을 때도 친구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몇 명 남지 않았었다. 그 래도 가을까지는 그 몇 명 안 되는 아이들과 재미있게 지났는데 겨울에 한 번 더 피난을 가고 동네가 거의 비니까 남순이와 나만 남은 것이다.
그 전에는 비행기가 떴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남순이네 집 안방에 서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앉아 있는데 ‘쾅!’ 하는 대포 소리에 창호지가 찢어질 정도로 집이 흔들려서 이불 속에 한참을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런데 보통은 구들장 때문에 방바닥만 따듯하고 방의 공기는 차가운 법인데 등이 뜨뜻했다. 이상해서 이불을 걷고 방문을 열어 보니 대문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나갈 수 가 없어서 우리 둘이 손을 꽉 잡고 겁에 질려 우는데 밖에서는 ‘남순아! 영재야! “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도와주세요. 나갈 수가 없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불 길이 점점 나무로 된 담에 번져서 열기가 더해지는데 누군가가 “이불, 이불을 덮 고 나와라.” 하고 소리를 질러서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도저히 무 서워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도 ‘아무 것도 안하 고 있으면 불에 타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또 불길을 뚫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득 이불에 물을 뿌리고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부엌에 들어가서 물통의 물을 이불 위에 마구 뿌려서 이불을 뒤지어 쓰고 둘이 손을 꽉 잡고 뛰쳐나왔다. 다행히 나는 버선발에 솜 바지를 입 고 있어서 아무데도 화상을 입지를 않았지만 남순이는 자기 집이라서 버선을 신지 않고 있어서 맨발로 뛰어나왔기 때문에 발에 화상을 입어서 한참 동안 고 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에 폭탄이 떨어져서 집은 형 체도 없이 날아가고 가까이 있는 집들까지 불에 타서 남순네는 대문과 울타리 가 탄 것이었다. 미군이 부잣집 굴뚝에서 연기 나는 것을 보고 인민군들 밥을 해 준다고 판단하 •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3
고 폭격을 해서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날아갔다고 했다. 그 러나 사실은 집주인들은 이미 피난을 가고 난 뒤라서 다른 피난민들이 하룻밤을 묵으며 밥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집에서 불을 땔 수가 없어서 밥을 못하고 밖에서 불을 지펴 조그만 냄비에 밥을 끓였다. 그러다 정찰기가 아주 낮게 떠서 날아가면 할머니가 숟갈로 먹는 시늉을 했다. 그 말이 정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이후로 다른 폭격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서 전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닌 것 같다.
겨울이 되고 어느 날 밤에 방문이 덜커덩 열며 총부리를 겨눈 중공군이 들어왔 다. 중공군은 ‘남자! 남자!”라고 소리를 쳤고 외할머니가 출산한 지 며칠 안 되어 누워 있는 엄니와 옆에 누인 여동생 아기를 가리키며 “아기! 아기 낳어! 아기!”하 고 소리치자 중공군은 그냥 나가버렸다. 아마도 중공군들은 후퇴하면서 남자가 있으면 데려가려고 했던 것 같다.
밤새도록 총소리와 대포 소리가 그치지 않더니 날이 밝자 이번에는 미군이 들 어왔다는 소문으로 마을이 뒤숭숭했다. 마을에 들어온 미군은 폭격을 당하지 않 고 남아 있는 집 중에서 제일 큰 집이었던 할머니 댁에 잠시 본부를 차렸다. 나는 처음 보는 미군들이 너무 신기해서 건넛방과 마루에 차려진 사무실에 드나드는 미군들을 쳐다보는 것으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미군이 떠날 때 장 교 중 한 사람이 나를 귀엽게 생각했던지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엄니가 완강 하게 반대를 했다. 그 후 살면서 힘들 때는 ‘엄니가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미국에 가서 훨씬 잘 살았을 터인데……’ 하고 원망한 적도 있었다.
마을에 묵었던 미군이 어디론가 떠나간 다음 엄니와 동네 사람들은 미군이 텐 트를 치고 있던 곳 의 가서 미군이 땅을 파서 묻고 간 C 레이션 등을 가지고 왔 다. 소고기 통조림, 과일 통조림 등등 그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우리에게 황홀한 • 1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먹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서 낮에는 집 안 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며 생활해야 했다. 방공호 안에서 내가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할머니가 고무신을 주면서 그 안에다 오줌을 누라고 했 다. 더는 비행기가 뜨지 않아서 안심하고 집 안에 들어와 따뜻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갑자기 아프기 시작 했다. 드러누울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아파 앉아 서 이불로 등받이를 해서 쪽 잠을 자다가도 조금만 기침을 해도 자지러졌다. 약 을 구할 수가 없어서 애를 태우던 할머니가 C 레이션 상자 안에서 커피를 뜯어 서 맛을 보더니 씁쓰름하니까 “미국에도 한약 비슷한 것이 있구나. 맛도 약해서 아이들이 먹어도 좋겠구나.” 하시면서 커피를 한 대접 타서 주셨다. 그걸 다 먹고 3일 동안 꼬박 잠을 자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할머니는 “미국 약이 우리나 라 약보다 나쁘구나. “라고 하셨다.
서울이 수복되자 집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나섰지만, 서울은 아직 아무나 들어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일단 안양으로 가서 한 동안 살다가 영등포를 거쳐서 서울 집으로 왔다. 난리 통에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고 피난하러 다니느 라고 정상적으로 공부를 못했다. 그런데도 4 학년에 편입되어서 동창들이 모두 나보다 한두 살 위였다. 당시에는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조 건 나이대로 학년에 편입되고 선생님이 ‘월반할 사람?”하고 물어서 손들 들면 무 조건 학년을 올려 주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교통편은 효자동 종점에서 시작되는 거리였지만 사직동을 시작으로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으로 옮겨가며 살았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 에 남고 어린 시절에 추억거리가 많은 곳은 단연 사직동이었다. 이사를 자주 다 녔지만 손수레 한 대면 충분한 짐이라 이사를 하기에도 쉬웠던 것 같다. 사직동 에서도 역시 한 채의 집에 네 가정이 살고 있었는데 집 뒷마당에 쪽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바로 사직공원이라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일 공원으로 인왕산으 •
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5
로 또는 산을 넘어 자하문 밖 세검정까지 넘어가서 놀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 게 남아있다.
전쟁이 끝나고도 엄니는 방학이면 외갓집으로 보내 주셨다. 그때는 서울 운동 장 (지금의 동대문야구장) 앞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는데 용인으로 직접 가 는 버스가 없어서 수원으로 가서 다시 용인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엄니가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나를 수원에서 용인으로 가는 버스에 태워 달라고 부탁 을 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 길이 포장되지 않아서 덜컹덜컹 뛸 적마다 엉 덩이가 공중에 올라갔다 떨어졌다 해서 할머니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엉덩이가 얼얼했었다.
내가 도착하면 할머니는 이미 엿을 만들어 놓고 계셨다. 커다란 가마솥에 감주 를 졸이면 불그스름한 조청이 되고 또 조청이 줄면 엿이 되는데 미리 준비해 놓 은 볶은 콩가루를 상 위에 엷게 깔고 그 위에 물엿을 부어서 식히면 딱딱한 엿이 됐다. 미리 조청을 자그마한 단지에 덜어 놓고 인절미 떡을 찍어 먹을 수 있게 하 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검은 콩을 볶아서 엿이 굳기 전에 함께 섞어서 엿 강정 을 만들어 겨울 방학 동안 먹을 간식을 넉넉히 준비해 두셨다. 그뿐인가? 밥 지을 때 고구마를 아궁이 불에 넣어서 구워 주시기도 하고 배추 꼬랑지 한 광주리를 광에다 짚으로 덮어 놓고 겨울 밤 출출할 때마다 먹던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여름 방학 때는 할머니가 심어 놓은 참외, 수박, 옥수수를 쪄서 먹었지만 제일 재미가 있던 것은 누에고치를 구경하면서 먹는 것이었다. 누에가 고치가 되면 할머니는 마당에서 풍로에 불을 지펴, 물이 끓는 큰 냄비에 누에고치 하나하나 를 넣어 명주실을 뽑아내었다. 물레방아처럼 생긴 작은 틀을 돌리면 실이 감기 는 게 신기했고 실이 다 끝나면 번데기가 톡 튀어나왔는데 나는 할머니 옆에 쪼 그리고 앉아 고소한 번데기를 받아먹고 또 다음 고치에서 실이 다 나올 때를 목 • 1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빠지게 기다렸었다. 그렇게 뽑은 실로 베틀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 할머니가 요 술쟁이같이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도리질을 치게 되지만 그 때는 번데기뿐만 아니라 메뚜기, 개구리 고기도 맛있게 먹었었다.
전쟁 중에 집 밖에 나와 서서 있어야 할 경우에는 할머니가 이불을 들고나오셔 서 엄니가 왜 이불을 들고나오시냐고 물었을 때 “나는 늙었으니까 죽어도 괜찮 지만 어린 영재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비행기가 뜨면 할머니는 이불을 내 몸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려 주셨다
할머니는 70살이 넘어서 착한 며느리가 해주는 아침밥을 드시고 그 자리에서 아무런 고통도 없이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영재 가 할미한테 무심하구나” 하셨다는데 왜 그 때 달려가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주 지 못했던가를 생각하면 후회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냉정한 엄니에게서는 느끼 지 못한 사랑을 할머니에게서 대신 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내 삶 이 고달프다고 할머니께 소홀했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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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길처럼 떠난 피난 생활 17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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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아버지가 남긴 가위
Chapter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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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가위 나는 아버지가 기술을 배운 나사점(양복점)의 일본인 주인이 주고 갔다는 무쇠 가위 하나를 가보로서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 가위를 가지고 중앙청 서쪽 옆 문 앞에 ‘호산나 라 사’라는 양복점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구정 다음 날 아침, 보통 때처럼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온 다 음 세수를 하면 드릴 수건을 준비 하고 있었다. 매일 야단만 치는 엄니 보다 항 상 내 편인 아버지가 더 좋았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 그런 데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앗!”하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두 손으로 머 리를 감싸고 비틀거리셨다. 나는 세수도 못 하고 방에 들어가 눕는 아버지를 걱 정스럽게 쳐다봤다. 그런 나에게 엄니는 학교 가기 전에 양복점 기술자 아저씨 를 아침 식사를 하자고 불러오시라 했다. 엄니의 심부름을 한 다음에 학교에 가 기는 갔지만 온종일 불안해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해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 다. 보통 때 같으면 선생님의 말씀을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모범생이었지 만 그날은 화장실 청소 당번인데도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하니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코를 골며 주무시는 아버지를 둘러싸 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데 왜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거지…….’하 고 의아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나는 남동생과 장난을 치다가 잠이 들었는데 누 군가가 깨워서 아버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 쉬시 더니 뚝 숨이 끊겼고 동시에 큰어머니의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 소리, 엄니 의 통곡에 영문도 모르는 나도 덩달아 울음이 터졌고 그 후로는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입관해서 관을 밖에 내어놓았는데 엄니가 관 위에 합장한 손 을 얹고 사진을 찍으셨다. 그런데 그 광경을 쳐다보는 8살 먹은 남동생이 잔뜩 심통이 난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모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나중에 우연히 • 2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그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까 동생은 그때 엄니가 사 진을 찍는 모습이 정말 싫었다고 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관 앞에서 사진을 찍 었던 엄니도 그 광경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8살짜리 동생도 모두 이상했었다.
더 이상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건을 들고 서서 아버지를 기다릴 일도 없어 지고 아버지가 밤마다 부르던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노래 에 소질이 있어서 항상 노래를 부르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가 명곡이었 다.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아버지가 어디서 그 많은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 다. 나는 아버지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밤에 애들 방으로 가 라고 해도 가지 않고 부득부득 부모님 방에서 자면서 아버지의 발 밑에 누워 냄 새 나는 아버지의 발을 잡고 자야 편했는데 더는 그럴 수가 없어서 허전함이 밀 려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다음 해에 풍문여중에 입학했다. 성적이 풍문 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학교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지만, 집안이 어려워졌기 때문 에 공사를 하던 큰아버지가 교장을 알고 있어서 장학금을 탈 수 있을 것이라며 풍문으로 보냈다. 풍문여중 시절의 유일한 기억은 문선명 부인이 된 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학자는 어린 나이에도 고고하고 아름다 워서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가 풍문 을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해서 학자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한 번은 엄니 앞으로 봉투가 두꺼운 편지가 왔다. 이상한 생각 이 들어서 햇볕에 비춰보았더니 봉투 안에 종이가 분홍색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바늘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분명히 엄니에게 온 편지였는 데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 인쇄로 된 연애편지이었다. 분명히 ‘정규월’이라는 엄니에게 연애편지가 인쇄물로 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궁금한 것은 •
아버지가 남긴 가위 21
엄니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다시 붙인 다음 엄니가 답장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 신경을 곤두세워 감시를 시작했 다. 엄니는 몇 번이나 답장을 쓰다가 말다가 했다. 나는 마치 선생님이 숙제검사 를 하듯이 매일 같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오늘은 얼마나 썼나 하고 몰래 서랍 속 에 넣어둔 쓰다가 만 답장을 가슴을 졸이며 읽어 보곤 했다. 그러다가 거의 완성 된 편지를 보고 안도하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웬일인지 실망이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혹시 엄니가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 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딱 잘라서 구애를 거절하는 것이어서 마치 연애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가슴 졸이며 읽었는데 싱겁게 결론이 나버렸던 탓이다.
그런데 나중에 고교를 졸업한 후 어느 날 신문에 ‘용인 처녀 정규월에게 바치 는 글’이라는 문구로 책 광고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그 날 떨리는 마음으로 신문을 가지고 가서 엄니에게 보여주면서 비로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수가 있었다. 물론 6 년 전에 편지를 뜯어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엄 니에 대하여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이 풀릴 수 있는 순간이어서 호기심을 가지고 바짝 대들었다. 엄니는 마음속에 아무 감정이 없는 듯이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니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무당집 아들이 있었는데 커서는 자연히 양반집인 엄니네 집과는 교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엄니가 결혼해서 나를 낳고 고향에 갔 는데 무당집 아들이 찾아와서 언젠가 엄니를 만나면 사랑을 고백하고 고향을 떠 나리라 마음 먹고 엄니가 친정 집에 올 날을 기다렸었고 했단다. 그는 그 후 고 향을 떠나서도 결혼 하지 않고 살았는데 무당 엄마가 임종하면서 점 찍어 놓은 처녀가 있으니 결혼을 하라고 해서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 이다. 그 사람이 안양에서 인쇄소를 하면서 엄니에게 편지도 보내고 시조로 된 책까지 내게 된 것이었다. • 2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ubs.Online 2020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파란 원피스의 교훈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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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원피스의 교훈 어린 4 남매를 데리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양복점을 맡아서 하시게 되면서 집에 는 일하는 식모를 두게 되었다. 그때는 배가 고픈 시절이라 시골에서는 밥만 먹 여 주어도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 하러 오는 어린 여자아이가 많았다. 엄니는 나 보다 2살 많은 명자라는 식모에게 2살이던 막내 여동생을 돌보는 일과 살림살이 를 맡기고 양복점에 출근은 하셨다. 그러나 성당에서 초상이 나면 모든 일을 제 쳐 놓고 달려가셔서 염을 하고 수의를 갈아 입히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셨다. 엄니는 죽은 사람이 조금도 무섭지 않고 사체에서 나오는 오물도 더럽게 느껴지 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시신을 만지고 오면 오히려 몸이 가볍고 건강해 진다고 했는데 아마도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가는 사람을 잘 보내드린다는 믿음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양복점 일은 재단사 아저씨에게 맡겨놓고 성당 일에만 열심을 내다가 보니 자연히 재단사가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재단사 가 그 동안 우리 집의 단골손님들이었던 중앙청 직원들의 외상 대금을 몽땅 받 아서 사라져 버렸다. 엄니는 부득이 양복점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복점의 문을 닫게 되자 외할머니가 용인에 있는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양 복점 자리에다 미제물건을 팔도록 해주셨다. 가게가 중앙청 옆 문 바로 앞에 있 었고 중앙청 옆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공보실 건물이 있었다. 당시에는 동시녹 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영화가 촬영 후에 녹음을 따로 해야 해서 배우들 이 녹음을 위해서 공보실로 와야 했다. 왜냐하면 녹음 시설이 공보실밖에 없었 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유명한 영화배우들도 우리 가게에 많이 드나들어서 장사 는 잘 되는 편이었다. 깜찍하게 예뻤던 배우 엄앵란이 황정순 씨와 팔짱을 끼고 와서 미제 껌이나 초콜릿을 샀었고 또 김의향이라는 아주 예쁜 배우도 왔었다. 그러나 엄니는 여전히 성당에 초상이 났다 하면 성당으로 달려갔다. 가게는 중 •
파란 원피스의 교훈 25
학교 1학년이던 나에게 맡기거나 우리 집에서 유학 중이던 대학생 외삼촌에게 맡기거나 심지어는 식모에게도 맡겼으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어느 날은 엄니가 명자 것과 내 것으로 파란 원피스 두 벌을 만들어 오셨는데 나는 식모와 같은 옷을 입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식사 시간 때 물심부름은 꼭 나를 시키셨다. 내가 싫어서 꾸물거리는 사이에 명자가 일어서서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면 엄니는 명자는 앉아 있으라고 하고 나에게 “물을 가져 오지 못하고 왜 꾸물꾸물 대냐?”고 야단을 치셨다. 여름이면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엔 정말 일어나기 싫었다. 하지만 엄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불만만 쌓여 갔다. 나는 엄니가 왜 딸과 식모를 똑같이 취급하시는지, 아니 오히려 식모 인 명자를 더 배려해주고 예뻐해 주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자가 나보다 더 잘 하는 것도 없고 또 눈도 사팔뜨기였는데, 나는 눈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니가 명자를 자식으로 삼고 싶은 것 같지는 않은데 나에게는 한없이 무뚝뚝한 분이 명자에겐 부드럽게 미소까지 띠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니가 그렇게 하니 자연히 명자도 자기가 딸인 양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밥하는 일 외에는 청소나 요강 비우는 것까지도 나와 반반씩 하자고 해서 기가 막혔다.
그런 사실을 엄니에게 일러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아 참고 지내자니 명자에 대한 미움만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명자의 보따리를 호기심에 풀어 봤더니 그 속에 껌과 초콜릿 젤리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동 네에서는 그런 물건이 우리 집밖에 없었기 때문에 엄니가 명자에게 가게를 맡 기셨을 때 훔친 물건이 틀림 없었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드디어 명자가 호되 게 야단맞는 꼴을 보겠구나 하고 고소한 생각이 들어서 엄니에게 얼른 일러바 쳤다. 더욱이 명자가 얄미운 것은 명자가 방문에 구멍을 뚫고 맞은편 방에 세를 들어 사는 대학생들을 훔쳐 보는 것이었다. 나는 틀림없이 명자가 대학생들의 • 2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환심을 사기 위해서 초콜릿을 갖다 바쳤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예리하게 추리를 했다. 그런데 세상에! 잔뜩 기대했는데 엄니는 명자를 앉혀 놓고 “네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랬겠니? 그럴 네가 아닌데……. 이 다음부터는 먹고 싶으면 아줌 마에게 얘기해.”라고 조곤조곤 타이르시는 것이 아닌가?
나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어서 눈물이 푹 쏟아졌다.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1시간은 족히 야단을 맞았을 터인데 명자에게는 나긋나긋하게 단 몇 분 만에 끝내다니? 혹시 내가 정말로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는 아닌가? 사실 엄니와 나는 얼굴도 닮지 않았잖아? 저럴 수가 없어. 엄니는 내 엄니가 아니야. 별 생각이 다 들어서 뒤쪽 마당 문을 열고 사직공원으로 나가서 한참을 울었다.
명자가 미워서 학교 갔다 집에 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꾀를 낸 것이 아이 들의 머리를 해주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한 울타리 안에 세를 들어 사는 순자에 게 머리를 예쁘게 해 주겠다며 부지깽이를 연탄불에 달궈서 꼬불꼬불하게 만들 어 주었다. 순자는 거울에 비친 어른 같은 모습을 보고 좋아했는데 시장에서 돌 아온 순자 엄마가 야단치는 바람에 머리를 감아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평소 에 머리를 한 번 감기려면 애를 먹이던 순자가 고분고분 머리를 감으니까 순자 엄마가 앞으로 자주 머리를 감으면 1 달에 한 번 머리를 볶아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셨다. 그렇게 순자는 첫 번째 단골이 되었다. 순자의 머리를 보고 동네 아이 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많이 하다 보니 제법 기술이 늘어서 마음 놓 고 하다가 그만 한 아이의 머리를 태워 버렸다. 그 아이의 엄마가 와서 야단을 치는 바람에 한창 인기가 있던 무료 미용실(?)은 강제 폐업을 당했다. 그 동안 미 용실 운영으로 바쁜 바람에 명자와 부딪칠 시간이 적어서 마음이 편했는데 아 쉽게 끝났다. 나는 명자와의 신경전을 피하고자 이번에는 책이나 읽어야 하겠 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면 책만 붙들고 있었다. 책은 원래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동화전집인 ‘떡 배 단배’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졸업할 때 •
파란 원피스의 교훈 27
는 이광수 전집을 끝냈다.
어느 일요일 명자가 사촌 언니네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엄니가 명자는 서 울 지리를 잘 모르니 같이 갔다 오라고 하셨다. 싫었지만 엄니 말씀이 하나님 말 씀 같았던 때라서 명자를 따라서 같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욱 질색하고 팔짝 뛸 일은 명자와 똑같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가라는 것이었다. 주소와 약도 를 받아 들고 길을 나섰는데 모처럼 외출을 하는 명자는 신이 나서 자꾸 말을 걸 어왔다. 나는 그것도 싫고 식모와 같은 원피스를 입은 것이 창피해서 대꾸도 하 지 않고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걸었다.
그런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사촌 언니 집은 예상외로 부잣집이 었다. 사촌 언니가 명자를 보더니 매우 반가워하며 내 눈에도 진수성찬으로 보 이는 밥을 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부잣집 마님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명자를 식모라고 무시해 온 것이 속으로 조금 켕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니까 사촌 언니는 매우 아쉬워하면서 명자에게 용돈까지 주었다. 더욱 놀란 것은 명자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촌 언니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사양을 했지만 꼭 받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받기는 받았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건 뭐지?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 가 아닌가? 명자가 어떻게 돈을 나에게 줄 수 있을까? 그 동안 나 혼자만 명자를 미워한 것일까? 나 같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 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올 때처럼 명자와 나란히 걷지 못하고 올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뒤에 떨어져서 걸었다.
그 후부터 명자가 식모가 아니라 언니같이 느껴져서(사실은 명자가 2살이 많았 다.) 전과는 다르게 사이 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홀로 사시던 명자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갔는데 새 부인이 착한 사람이어서 명자를 딸 같이 잘 돌봐 • 2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주겠다며 데려가서 우리 집을 떠났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용돈 사건을 생각에 해보니 엄니가 평소에 교육을 그렇 게 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 날 우리가 엄니의 방침 때문에 같은 원피스 를 입었던 것처럼 명자는 항상 나와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명자의 사촌 언니가 볼 때도 명자가 우리 집에서 딸과 똑같이 대우를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명자는 엄니가 가르치는 데로 나와 똑같이 요강을 비워 야 하는 일처럼 용돈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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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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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성당에 미친 엄니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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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미친 엄니 엄니의 태만에도 불구하고 미제 물건장사는 그럭저럭 장사가 됐는데 얼마 떨 어지지 않은 곳에 경쟁 가게가 생겼다. 엄니는 여전히 성당에 일만 생겼다 하면 가게를 내팽개치고 달려나가고 그들은 부부가 열심히 일하니 결과는 뻔한 일이 었다. 엄니의 광신적인 신앙 때문에 가게가 폐업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남동생 이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서 명동 백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에 같은 성당에 다니셨던 김홍섭 판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알기도 하시거니 와 아버지의 대부이기도 하셨던 김홍섭 판사님은 “너는 장녀이니 이제부터 엄 니를 도와야 한다.”고 하시면서 대법원에 사환으로 취직을 시켜 주셨다.
양복점을 폐업하고 선물 가게도 실패하고 남동생의 병은 점점 심해져서 집안 형편이 급격히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우리는 방 두 개짜리 전셋집에서 방 하나 짜리 월셋방으로 옮기고 또 월세방도 좀 더 싼 곳을 찾아 이사를 자주 하게 되 었다. 처음에 남동생이 입원했을 때까지만 해도 외갓집과 큰댁에서 동생의 수 술비를 보태 주어서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했지만, 그 뒤부터는 나의 쥐꼬리보 다 더 가느다란 월급에 의지하는 생활이 되었으니 끼니 걱정이 최대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당연히 나의 월급봉투에서 조금이라도 돈이 비는 경우에는 엄니에게서 벼락이 떨어졌다. 구내매점에서 국화빵을 팔았는데 팥을 잔뜩 넣은 따끈따끈한 국화빵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서운 엄니도 잠시 잊어버리고 외상 장 부에 달고 사 먹었다.
구내매점과 구내식당이 모두 경리과와 연결 되어 있어서 월급날, 매점과 구내 식당의 외상값이 공제되어 나왔다. 월급봉투에 기재된 외상 기록 탓에 월급날만 되면 엄니에게 한 차례 야단을 맞아야 했다. 엄니는 그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의 흉, 큰 댁에 대한 서운함 등 한풀이를 1시간 또는 2시간 동안 내게 쏟아 부었 • 3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박아 놓고 죽을 죄를 지은 죄인처 럼 앉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 자세까지 꼬투리를 잡힐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머리를 숙인 체 잠들어 있을 때가 많았다.
엄니는 귀한 양반 집에서 태어나 호강 하면서 자랐고 당시 시골에서 대부분의 여자는 학교를 보내지 않을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심상소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인물만 훤한 아버지에게 시집 와서 호강하기는커녕 술만 취하면 주먹을 휘두르 던 결혼생활이 지옥 같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엄니 얼굴이 어릴 때 구박하던 계모 얼굴로 보여서 엄니를 때렸다고 한다. 나를 낳고 도저히 못 살 겠기에 나를 떼어놓고 친정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젖을 찾아 울고 있을 나 를 생각해서 발길을 돌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지지 못 하고 평생 고생만 하고 산 것이 원통해서 한이 맺혔다고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를 닮은 것조차 싫다고 하셨다. 내가 조금 더 큰 다음에 어느 날 또 아버지 원망 을 퍼 붙기에 답답해서 “도대체 엄니처럼 똑똑하시고 집안도 좋은 친정이 있는 데 왜 이혼 하지 않고 사셨냐?”고 여쭈었더니 아버지가 술만 깨면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면서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을 해서 불쌍해 산 것이 결국 세월을 허 송했다는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일생이 결정된다면 엄니는 아버지를 만나서 운명이 판가름 났고 나는 김홍섭 판사를 만나서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 다. 나는 법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야간이 있는 동구여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 지만, 덕분에 나는 한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대법원에서 어린 눈으로 격동 하는 60년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성당에 미친 엄니 33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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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대한민국 대법원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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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
대한민국 대법원의 음산한 이야기가 시중을 떠돌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이 오 손도손 아기자기 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무려 반세기 전인 60년대였다. 몇 해 전 70대 여성의 자서전을 써 준 일이 있는데 그녀는 60년대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 니면서 5년간 대법원의 사환(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으로근무했었다. 사법부가 시끄러운 지금, 그녀의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의 대법원은 어땠었는지 시간 여행을 해보자.
내가 가장 나이 어린 사환으로 대법원에 근무할 때 대법원장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가인 김병로 원장이었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었고 민족의 미래를 개탄하며 소석(小石)이던아호를 ‘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 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하였다. 이따금뵙게 되는 대법원 장님이 퇴청 하실 때 눈에 띄인 것은 영감님께서 구두 대신 검은 고무신을 신으 • 3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셨다는 것이었다.검은 두루마기 역시 반드르르하지 않은 무명천이라서 어린 나 는 속으로 ‘저렇게 높은 분께서 왜 비싼 옷과 멋있는구두를 신지 않으실까?’ 하 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김홍섭 판사님도 역시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한번은 판사님 댁에 심부 름을 갔는데 집도 작았고 반찬도 우리 집과 별반 다름이 없어서 더욱 존경스러 웠다. 한참 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정치 깡패 이정재와 임화수가 다른 죄수 들과 굴비 엮이듯이 엮여 오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죄수인 이정재의 하 얀 비단 한복을 입은 모습이무명옷의 대법원 원장의 모습과 무척 대조되었다. 당시에는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그리고 법원 행정처가 모두 한 울타리 안 에 모여 있어서 구내식당, 구내병원,구내 목공소, 구내매점, 심지어 원예사까지 있었다. 목공에겐 법원 안에 기거할 수 있는 관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자녀들이 원하면 사환으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사환에도 임시사환, 정사환으로 직급이 있 었고 봉급에도 차이가 있었다. 출근부에 올라 있는 이름 순서대로 진급이 되는 터라 출근부만 보면 자기의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사환들의 세계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문화가 있어서 지방법원 사환은 뛰고, 고 등법원 사환은 걷고 대법원 사환은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지방법원은 사환 한 명이 여러 판사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지만, 대법원에서는 대법관 한 분만모시 면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 었다.
대법관 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청소와 커피 끓이는 일, 그리고 판결기록을 서기 실로 보내서 정서하도록 하는 일,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 대법관님 점심 주문, 판결문을 다른 대법관실에 회람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온종일 대법관님과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생활하니까 매사에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조용할 수밖에 없 • 대한민국 법원 37
었다. 대법관님은 점심을대부분 구내식당에서 시켜 드셨는데 토스트 두 장에 따 듯한 우유 한 잔, 아니면 설렁탕 한 그릇 뿐이었다. 매주 화요일에 대법관회의가 있을 때만 일식집에서 도시락을 주문해서 드셨는데 음식을 깨끗하게 남겨서 서 기나 비서들까지 내게 아부(?)해서 남은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법원에도 군인이 들어와 법원 내의 모든 행정업무를 군대 시스템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내가 군인들이 근무하는 방에 배치되었다. 그 방에 여유 있는 한량 같이 생긴 중령과 백범 김구 선생의 젊은 모습처럼 둥 근 테 안경과 대머리 같이 보이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흡사 로봇같이 정확 히 일만 하는 대위 한 명과 나,셋이 근무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 는 일본 순사 같기도 한 대위는 출근을 하면 먼저 전화로 부모님께문안 전화를 짧게 하고 근무 시작을 했다. 법원으로 파견을 나온 것을 보면 법무관이었을 것 이고 당시 가정집에 전화가 있는 집은 매우 드물었던 시대이고 보면 대단한 집 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처음에 법원에 들어와서 착수한 일들은 군 미필자를 색출해서 군에 보 내고, 부정 부패한 공무원 찾아내기,모든 문서를 현대화 시키기였다. 예를 들어 세로쓰기 문서를 가로쓰기로 전환하기, 한자를 한글로 전환 등등의 일도 있었다.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대위는 나에게 ‘누가 민원인 접촉을 많이 하는지? 외식을 자주 하는지?’ 등의 직원들의 동향을 물었다. 대위가 왜 묻는지 그 이유를 몰랐 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모든 것을 말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 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군인들은 나에게 들은 자료를 가지고 직원들을 숙청하 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중령과 대위 단 둘이서 하는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매 일 야근을 해야 했다. 근무가 끝나면 통금시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군인 지프 를 태워줬다. 시청 앞부터 효자동까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텅 빈 광화문 거리 • 3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를 질주하는 느낌은어린 나이에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박 정희가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할때, 그날의 그 기분이 떠올 려지면서 그 발표가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6년간의 나의 법원 생활에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10년간 대법원장을 했던 민복기와의하찮은 인연이었다. 당시 법원 행정처 차장 이었던 민복기가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너를 보면 10년 전에 먹은 오징어가 다시 올라온다.”고 심하게 나무랐다. 어른만 보면 인사를 하는 어린 10대 소녀였던 나로서는 자기가 눈길을 주지 않아서 인사를 할 기회를 놓친 것인데억울하지만,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행정처 장님이 인사 잘한다고 특별히 나를 지목해서 처장실로 옮긴때였는데 차장님에 게 인사를 안 한다고 찍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그 시대 내 또래의 사람들이 전혀 접할 수 없는 세상인 법원을 통하여 세 상을 배웠다. 법원 안에서 많은 일을보고 겪었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충격적 인 일들도 있었다. 그 중에 순간적으로나마 충격을 받은 일은 한국의 소비자 운 동의 대모였던 여기자 정광모 씨를 본 일이었다.
한국일보 법원 출입 기자였던 정광모 씨는 빨간 재킷에 바지를 입고 당시로써 는 보기 드물게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고 남자 기자들처럼 기자실 문을 발로 차 고 들어오기도 했다. 원래 기자라는 직업이 안하무인으로 건방을 떠는것부터 배 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젊은 여기자의 당돌한 행동은 법원에서도 주목거리가 되 었다. 한 번은 기자실에 보낼 문서가 있어서 들렸는데 정광모 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면서 자세가 잘못되었는지 손으로 가랑이사이의 국부를 툭 치면서 “아이고 내 보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그만 기절할 뻔했 다. 젊은 여자가 남자 기자들 사이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중학교 여학생 이었던 나는 머리에 전기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 대한민국 법원 39
판단을 넘어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임시사환에서 정사환이 되는 순서에서 뒤에 들어온 애가 나보다 먼저 진 급이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쪼르르 김홍섭 판사님께 달려가 울면서 자초 지종을 일러바쳤더니 판사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책 한 권을 주셨다.
“나도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너도 이번만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될 거 야. 내가 쓴 이 책이 조금이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때 주신 ‘무상을 넘어서’ 라는 책을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그만 한국을 떠나며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어디론가 없어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환이 고교를 졸업하면 큰 탈이 없는 한 대부분 임시 서기보 자리나 촉탁, 여 자는 타자수로 진급이 되었다. 그러나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환에서 정식 직원으로 승진된다고 해도 사환 출신의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나는 평생 이 직장에서 ‘사환 출신’의 꼬리표를 달 고 근무하고 싶지는 않았다.더구나 그 즈음 사환을 채용할 때도 공개 시험을 도 입해서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정식으로 법원 공무원이되는 것이 아니고 공개채용이 아닌 특채로 사환에서 진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한 편으로 는 내 실력으로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어서 나 스 스로 나의 가치를 검증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법원을 그만두었다.
법원을 그만둔 몇 해 후, 친구의 일로 법원에 갈 일이 생겨서 나에 대해서 신경 을 많이 써 주셨던 계장님을 찾아갔더니 점심을 사주시겠다며 고급 그릴로 데려 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너무 비싼 데 왔네요.” 했더니 그 분은 “항상오는 단골집 이야.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어. 왜 기다리지 않고 그만두었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밥은 잘먹었지만 돌아오면서 ‘봉급이 그렇게 갑자기 뛸 수가 없는 데, 군인들이 들어서고 난 뒤에 공무원들이 더 부패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 4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서 씁쓸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뇌물을 받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첫 번째 뇌물은 전도관 박태선 장로 공판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엄니 또래의 아 주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복도를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학생, 여기 근무해요? 나 ㅇㅇ법정 방청권이 긴히 필요한데 얻어 줄 수 없어요?” 하는 것이아닌가? 그 애절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나로선 얻기 쉬운 방청권을 몇 장 얻어다 드렸더 니 신앙촌 카스텔라를 한보따리 안겨줘서 얼떨결에 받았다. 두 번째 뇌물은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변호사들로부터 이따금 용돈을 받은 것 이다. 토요일쯤엔 가끔 변호사들이 들려서 일찍 퇴근하니 극장이나 가라고 용돈 을 조금씩 줄 때가 있었다. 그 용돈을 받은 뒤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호사가 부 탁한 대로 그 기록을 맨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 변호사는 자기가 담당 한 사건의 판결을 조속히 끝내고 싶어서 내게 돈을 주었던 것이다. 대법관님은 내가 놓은 재판기록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판결문을 쓰도록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힘을 써 본 셈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엄격한 대법원에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 미 8군 무대의 무용수가 되 었어도 그 버릇이 변하지 않아서 나이 어린 단원들에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이 어린 단원 둘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늦게 들어와서 춤도 잘 추지 못하는 주제에 혼자서 교 양 있는 척한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쫓아 나가 “야! 이 년들아! 평 생 욕이나 먹고 살아야 시원하겠냐?” 하고 뺨따귀를 갈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 는 태도를 바꾸어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원 래 무용단은 동작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하고 말이 짧고거칠었다. • 대한민국 법원 41
엄격한 가정과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철저하게 예의와 질서 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 있는 나에게 마치 군대 같은 무용단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 세상이어서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농담으로 너무 저속 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약해 보이는 사람을 존중하기 보다는 무시하는 경향 등 법원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환경이 정말 싫었 다. 법원에서는 대법관님 한 분만 잘 모시면 아무문제 없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어린 급사의 신분이지만 높은 분들도 반말을 하지 않아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이다. 나라가 거꾸로 돌아가던 시절의 대법원 이야기다. 해도 60년 전, 나름 품격 있 었던 대법원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라 전체를 후진 기어 넣 고 달리게 만든 대법원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과연 지금이 나아졌다고 얘기 할 수 있을까.
• 4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ubs.Online 2020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Pubs.Online
철 없는 판단 세상의 파도에 실려 법원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되어서 생각했던 대로 사장, 과장, 나 너무 단출해서 허전하게 느껴지는 작은 회사에 손쉽게 경리로 취직이 되어서 조용한 법원에 비해서 매일 손님이 북적거리고 바쁜 것은 좋았다. 내가 하는 업무는 사환 때나 별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정직원이라는 것에 나름 자부감도 느꼈다. 손님 차 대 접, 전화 받기와 간단한 장부정리 등등의 어렵지 않은 업무에 봉급도 나쁘지 않 았고 얼마 안 있으면 나를 도울 보조 직원도 뽑겠다고 하니 열심히 일해야겠다 는 다짐으로 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기쁘기만 했다.
한 달이 지나자 이 직장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장 님에게 물어보면 아버지같이 인자한 얼굴의 사장님은 웃으면서 “아직 신입사원 에겐 알려 줄 수 없는 큰 사업이니……. 이 양은 자기 일만 해.”라고 하는 바람에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한데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가 항상 보아오던 단 정한 모습의 법원 직원들과는 대조적으로 무언가 불안해 보이고 어쩐지 촌스러 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월요일 아침 출근을 했는데 사무실 앞에 많은 사람이 몰 려 있었다. 출근하는 나를 보자마자 내 팔을 꽉 잡고는 “네 사장 놈 어디 있냐?”고 문초를 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에게 “그 놈 집 알지?” “ 너도 한 패거 리지?” 하고 중구난방으로 여러 목소리로 다구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을 헤치고 사무실 안에 들어가 보니 모든 서랍이 열려 있고 종이들이 바닥에 나 뒹굴고……완전히 난리 판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 벼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몸이 후들후들 떨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사장과 과장이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융자를 해준다고 맡겨 놓은 땅이나 집문서를 저당 잡혀 돈을 • 철 없는 판단 45
빼내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라고 이야 기를 해도 그들은 나를 일당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가장 무섭게 만 든 것은 그들이 경찰서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엄니를 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 4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고무래 정씨인 엄니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니는 가문 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강한 분이었다. 엄니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아버님 성 함이 어찌 되는가?”를 묻고는 양반 성씨를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을 대하는 자 세가 틀려서 나를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조차 쌍놈티 가 난다고 해서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
“양반은 냉수를 먹고도 이빨을 쑤신다.” 라는 말처럼 아무리 우리가 가난했어도 엄니는 가난한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언제나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 고 말씨나 행동에 품격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말대꾸를 한 번도 해보 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엄니 앞에 앉을 때는 항상 무릎을 꿇고 앉도록 교육을 받았다. 나로서는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 가 없는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는 혹시 엄니가 친엄마가 아니냐고 묻기까 지 했을 정도였다. 내겐 엄니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섭고, 또 한 편으로는 싫었던 분이었다.
사정이 이러한 형편이니 나로서는 경찰서 보다는 엄니가 더 무서울 수밖에 없 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차라리 감옥에 보내 주세요. 엄니한테 가면 저는 죽어 요.” 하면서 엉엉 울며불며 사정을 했더니 그들 보기에도 딱해 보였는지 그대로 돌아갔다. 아! 이제 난 어쩌지? 오늘 밀린 월급 두 달 치와 보너스까지 탈 거라고 엄니에 게 자랑하고 왔는데…….’ 나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흡사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가버린듯한 사무실 구 석에 털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도 하고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없는 웃 음이 나오기도 했다. •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47
그러나 무작정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사무 실에서 나왔다. 춥지도 않은 데 몸이 떨렸다. “어떻게 집에 가지? “하는 생각뿐이 었다. 낙담하고 실망하고 화를 낼 것이 틀림이 없는 엄니의 얼굴이 떠올라서 도 저히 집으로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하고 고민을 하다가 가 장 친한 친구인 초희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날 받은 충격에, 앞으로의 걱정, 엄 니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듯 한데다가 온종일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발걸음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 려 지나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법원에서의 사환 생활이 얼마나 행복 하고 평화로웠던가?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초희네 집에 들어서자 평소와 전혀 다른 내 몰골을 보고 초희는 깜짝 놀랬다. 그러나 나는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할 틈도 없이 방바닥에 쓰러져 며칠 동안 지 독한 몸살을 앓아 누웠다. 당시 초희가 결혼 후 임신을 해서 집에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초희와 나는 학교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졸업식 때문에 친하게 되었다. 당시 졸업식은 꽃다발을 들고 사진 찍고 식구들과 함께 중국집 에 가서 자장면을 먹거나 형편이 좀 더 좋은 집이면 탕수육, 잡채 정도를 더 시 켜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졸업식날 시장 바닥처럼 붐비던 학교 운동장이 학생 들과 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후 초희와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엄니는 잠깐 들려서 싸구려 꽃과 점심값을 주고 성당 교우 초상집에 간다고 졸 업식이 끝나자마자 힁하게 가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초희도 나와 비슷한 이 유로 혼자 남아 서성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둘이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시켜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졸 업식 날 부모로부터 바람맞은 서운함은 사라져 버리고 통하는 친구를 얻게 된 • 4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기쁨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중국집을 나온 다음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그 동안 말로만 듣고 선망하던 종로 2가에 있던 음악 감상실 ‘디쉐네’에 가보기로 했다. 교복을 입은 채로 “우린 이제 졸업했으니까 학생이 아니야 “ 하며 들어갔는데 컴 컴해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졸업 축하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박수도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입장료에 포함된 홍차를 마 시며 그 당시 유행하던 경음악 green field, 톰 존슨의 디라일라, 폴 앵커의 오 캐 럴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었다. 디쉐네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공 허한 우리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어준 보금자리였다. 우리 집보다는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았던 초희는 어려서부터 후일 국립 무용단 단장이 된 송범씨에게 발 레를 배웠는데 기량이 뛰어나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졸업 후 그 당시엔 발레 전공자들이 설 무대가 거의 없어서 결국 패티 킴, 현미가 소속되어 있었던 미 8군 전속 연예 기획사 ‘화양’ 에 무용수로 스카우트 되었다.
• 의도 하지 않았던 가출 49
귀여운 뇌물 엉겁결에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출까지 한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감히 엄 니에게 연락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엄니 역시 초희네 집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찾 을 수가 없었다. 한 편으로는 일부러 무서운 엄니의 존재를 잊어버리려는 자기 최면의 방법으로 연락을 끊고 살았던 면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 생이 다시 시립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음은 말로도 글로도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발길은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침대 에 누워서 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표정 역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원망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이었으리라.
“엄마는?”
“부엌에”
동생과 단 두 마디를 나누고 환자 가족이 공동으로 쓰는 부엌을 찾아갔더니 무 엇인가 씻고 있는 엄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두려움 때문에 발 길을 돌리려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엄마!”라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선 엄니는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다가와서 말없이 나를 끌어 앉았다. 그리고선 “밥 먹었니?” 라고 물으셨다.
법원에 있을 때는 시간이 많아서 구내 도서실에서 책을 빌려 많이 읽었다. 사 실은 대법관님이 내가 책을 붙들고 있을 때면 미소를 보내 주시기 때문에 읽지 않아도 책상 위에 늘 책을 놓고 있었다. 법원 구내 도서실에는 법률 서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계, 자유문학, 현대문학 등의 교양서적과 전국각지의 신문들, 각 대학의 간행물들이 배달됐고 심지어는 우리나라 초창기 시대의 신문까지 다 • 5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양한 간행물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옛날스럽고 촌스러 운 일제 강점기 때의 신문 문체였다. 예를 들자면, “최승희의 무용 발표회가 ㅇ ㅇㅇ 에서 있다더라.”, 혹은 “김 말똥이가 효자라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더라.”하 는 식이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교양을 쌓기 위한 시간을 보내자고 초희와 약속을 해서 없는 돈을 털어가며 문화 행사를 찾아다녔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최초 오페라인 춘희 를 보고 감동을 받고 크고 작은 무용 발표회에도 거의 빠짐없이 섭렵했다. 덕수 궁에서 피카소 전시회가 있어서 내 형편으로는 거금을 지급하고 봤지만, 도대체 내 눈에는 마구 난장판으로 물감으로 떡 칠을 한 그림 같지도 않은 물건이 왜 세 계적으로 유명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추상화에 눈이 떠진 것은 그때로 40년이 지나서였다.
후에 미국에서 아들의 여자 친구가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개최한 전시회에 갔 었다. 2,000스퀘어 정도 되는 넓은 공간의 반을 나누어 전시장과 교실로 쓰고 있 었다. 학생들과 학원 선생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우리는 아들 친구의 작품을 보기 위하여 간 것이기 때문에 대충 성의 없이 훑어보다가 학원 선생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추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그 동안 추상화를 볼 때마다 늘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어서 난감했 는데 그날은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추상화는 화 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어떤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이해 할 것 같 은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난생 처음 커튼이 열리고 무대가 펼쳐지는 듯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 안에 산과 들, 계곡, 하늘을 나는 천사인지 사람인 지 여러 가지 사물들이 들어 있어서 몇 날을 보아도 실증 나지 않을 것 같은 심 • 귀여운 뇌물 51
정이었다. 흡사 옛날 중국 그림 속에 많은 사람의 각기 다른 삶을 촘촘히 그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림 안에서 각가지 삶의 모습들이 보여서 보이는 그 림에 따라서 내 감정의 변화가 변화무쌍했다. 그때 꽁지머리에 긴 앞치마를 두 른 전형적인 화가 모습의 백인도 아니고 동양인도(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캐나 다 원주민이었다.) 아닌 화가가 ‘제 그림을 열심히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느낌이 있으신가요?” 라고 물었지만 혹시 내가 느낀 것들이 화가의 생각과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일까 봐 말은 못하고 웃기만 했었다.
쇼 일정이 있는 저녁 시간엔 초희의 일터인 미 8군 영내에 가서 재미있는 쇼도 보고 또 미군 부대에서 주는 햄버거와 감자튀김도 얻어먹었는데 그땐 아직 햄 버거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이어서 당시로서는 대단한 음식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우리는 남들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특권층(?) 생활을 했던 셈이다. 초희는 내가 법원에 다니는 걸 자랑스러워해서 단원들에 나를 펜대 잡 는 직업에 종사한다고 소개를 했다. 그래서 단원들은 나를 펜대 잡는 초희 친구 라고 불렀다
하루는 쇼를 마치고 공연단을 태운 버스가 부대 정문을 통과하려는데 미군 장 교가 버스를 세웠다. 미군 장교 하나가 버스에 올라오더니 영어를 할 줄 아는 단 장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단장은 뒤를 보면서 “누가 이불 받았어요?”라고 물었다. 모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불을 찾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없는데요? 이불을 어떻게 숨겨요?”라고 했더니 단장이 “덮는 이불이 아니고 미 달라 이불!” 이라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한 가수가 “내가 받았는데…… 나는 그 사람이 팁을 주는 줄 알았어요.”라고 했다. 사실 공연 팀은 미 8군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 었지만 아무도 달러화를 볼 일도 만질 일도 없었기 때문에 달러를 이야기하는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내용을 알고 보니 미군은 그날이 동료의 생일이라 밴드 마스터에게 생일 축하 • 5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노래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2불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수는 무 슨 뜻인지도 모르고 “OK. Thank you!”를 남발했던 것이다. 미군 입장에서는 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도 연주도 해주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떠나가니까 화 가 나서 버스를 세운 것이었다. 화가 난 미군이 돌려받은 달러를 박박 찢더니 가 수의 얼굴에 뿌리고 ‘깟뗌” 하고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내렸다. 아무 관계도 없는 나마저도 얼마나 무안하고 창피한지, 그날 나는 영어를 모르면서도 영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귀여운 뇌물 53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ubs.Online 2020
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사랑도 아닌 것이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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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교주 사기꾼들에게 걸려 혹독하게 시련을 당하고 나서 초희네로 피신하고 보니 다 른 수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초희 어머니에게서 받는 특수 종교 훈련이 었다. 당시 50대 중반의 초희 어머니는 무학이었지만 계룡산에서 도를 닦고 인 왕산 중턱에 자기만의 교회를 차리고 있는 신흥종교의 교주였다. 예로부터 인 왕산 일대에 소수종교 시설이 모이는 이유를 풍수학계에서는 ‘인왕산의 영험한 기운’ 때문이라고 했다. 초희 어머니는 인왕산 기슭에 30 평 정도의 건물에 교회 를 꾸며 놓고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신앙을 전파하고 있었다. 초희 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싫어해서 반발했지만 식객으로 있는 내 처지에서는 초 희 어머니가 하는 일에 고분고분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나는 교회 안 에 있는 쪽 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희 어머니가 하는 모든 예배에 자동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가끔 아주머니들이 몇 사람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예배 행사에 청중은 나 하나 뿐일 때가 많았다. 가장 우습고도 기가 막혔던 일은 어느 날 초희 어머니가 마치 놀라운 것을 발견이나 한 듯이 호들갑을 떨면서 자 기가 지난 밤에 지구가 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 라고 혼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예수와 결혼을 했다고 하면서 자기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 게 했다. 초희 어머니는 자기 딸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으니까 순순한 나를 제자 로 삼을 작정으로 나를 세뇌시키려고 했다. 남의 집에서 무작정 신세를 지고 있 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더욱 초희네 집에 오래 있으면 안 되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희네 집을 떠날 방법을 열심히 탐문 하던 끝에 드디어 기회가 왔다. 원주 1 군 사령부에 가서 문관시험을 치고 합격해서 호원동에 있는 1군 사령부 경리부 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경리부대에는 나 외에 3명의 여성 문관이 있었다. 그 • 5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런데 내가 받는 5급 공무원 월급이 호원동에서 자취생활을 하기에도 어려울 정 도로 부족했다. 경리단은 돈을 지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특권이 있었 고 특권이 있는 곳에는 부수입이 있게 마련이다. 마땅히 지출해야 할 돈을 주면 서도 업자들에게 받는 부수입도 있었지만 말단 직원인 나에게까지 그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더는 생활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중령인 부대장에게 내 형편을 이야기했다.
때마침 당시 군의 보험을 담당하고 있는 대한교육보험이 퇴계로에 있었기 때 문에 내 사정을 딱하게 여긴 부대장은 나를 교육보험으로 옮겨주었다. 막상 대 한교육보험에 가보니 정식으로 입사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직원들과 나처럼 낙 하산으로 온 직원들과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면접을 볼 때 담당 자가 이력서에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데 내 나이를 물었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기에는 스물셋의 나이가 너무 많은 듯해서 대답하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나빴다. 낙하산을 타고 입사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런 이유로 낙하산 직원들은 교육을 시킨 다음에 대기 발령을 냈다.
• 엉터리 교주 57
사랑도 아닌 것이 아무리 배가 고픈 시절이라도 젊은 시절 낭만이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암울하기만 했던 내 청춘에도 남 들처럼 활기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내 삶의 밑바닥에 언제나 깔렸던 낭만이라 기 보다는 신앙 같은 사랑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인으로 변해서 종로 라사에 가서 투피스 정장을 맞추어 입고 금강 양화에 가서 하이힐 을 사서 신고 머리 스타일도 단발머리에서 파마로 바꾸었을 때이다.
디쉐네를 드나들던 어느 날 뒤 좌석에서 “누님 삼고 싶습니다.”라고 쓰인 쪽지 가 왔다. 돌아보니 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른 대학생이었다. 이 아저씨(?)들이 나를 보고 ‘누님이라고?’.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래.” 라고 써서 쪽지를 돌려줬다. 내가 몇 살로 보이냐고 물었더니 스물두 살이나 세 살로 보인다고 했다. 그 때 나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하기는 그때 나는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노숙해 보 였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가볍게 보이는 애송이들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서 나이가 들통 나고 말았다. 내가 자기들 보다 어린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세 명 의 남자 중에 두 명이 자주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 중에 경희대학교에 다니는 의사의 아들보다는 성균관 대학에 다니는 가난한 찬의 글이 더 마음에 들어서 찬이와 더 많은 편지를 나누게 되었다.
단 둘이 만나는 일 없이 항상 음악 감상실 안에서만 같이 만나다가 어느 날 찬 이와 둘이서 길을 걷게 되었다. 찬이가 문득 말했다. “앞으로 우리가 결혼하면 어떨까?” 갑작스런 찬이의 말에 조금 설레기는 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도 그가 좋았지만 우리 집 형편을 알면 실망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 • 5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문이었다. 만난 지 약 3개월 정도 되던 때쯤 삼청공원에 갔을 때 장난기 섞인 마 음으로 찬이가 나를 얼마큼 좋아하는지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리 그만 만나.”라고 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찬이는 내 손 등 위에 뜨거운 눈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 없이 가버렸다. “이건 아닌데…….”
나는 적어도 찬이가 “왜?” 라고 묻든지 아니면 “그럴 수가 없다.”고 잡을 줄 알았 다. 나는 ‘날 별로 좋아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삼청공원에서 옥 인동 집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걸었다. 헤어지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는데 경솔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나에 대한 찬이의 마음이 겨우 이 정도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광화문 거리에서 우연히 찬이와 마주쳤다. 그때 찬 이의 옆에 예쁘장한 여자가 있었고, 나도 동료 남자와 함께 걷고 있던 참이었는 데, 순간 우리는 서로 놀라서 멈춰 섰고 둘 다 그들을 떨쳐 버리고 다방에 마주 앉아 그냥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때 나는 그가 많이 나를 좋아했었고 나 역시 그를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을 서로의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 는 또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둘이서만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어 서 서로 좋아하느니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도 없었다. 그냥 만나서 얼굴을 보 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찬이가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데 식구들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 한 것이라는 것을 전 것 눈치를 채지 못하고 갔다. 사실 당시 내 형편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식구들과 만난 다음날 만나서 찬이가 머뭇 머뭇 하면서 “누나가 그러는데 영재가 어두워 보인데…….”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 듣고 싶지 않아서 아니, 더 듣는 게 두렵기도 해서 “됐어. 그만 해.” 하고는 다방을 뛰쳐나왔다. 그것이 그와의 두 번째 결별이었다. • 사랑도 아닌 것이 59
그러나 그 뒤로 찬이는 남자에 대한 기준이 되어서 누굴 만나든 찬이와 비교 를 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있던지 머리에서 찬이가 떠나지 않 았다. 찬이 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지배했던 것이 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쉽게 다가오는 남자들에 대하여 스스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남자에 대하여 육체적으로 끌 림을 받을 때 조차도 마음속의 찬이가 거부하게 만들었다. 찬이에 대한 나의 이 런 생각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 터 40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였다. 친구를 통하여 찬이가 중풍을 맞았다는 충격 적인 소식을 들었는데 그 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찬이가 중풍을 맞은 사실을 나 에게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역시 나처럼 오랫동안 나를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현실 이 아닌 환상적인 존재로 만들고 지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난 후 10년 에 한 번 꼴로 만나게 되는 우연이 생기기도 하고, 또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기 도 했지만, 마음속의 우상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우상이 나에게는 쉽게 흔들리 지 않고 자신의 품격을 지키는 것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지금도 이따금 좋은 글을 보내주고 있다.
찬희와 헤어지고 허전해 할 때였다. 친구와 함께 모 대학 축제에 갔다가 그 당 시 인기가 높았던 영화배우 토니 커티스를 닮은 미남 파트너를 만났다. 그러나 나는 원래 안경을 쓰고 비썩 마른 지적인 모습을 풍기는, 요즘 말로 하면 초식 남 스타일을 좋아했었다. 그래도 그 남학생과 몇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도무지 진실성이 없어 보여서 다음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저녁에 집에 왔더니 그 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서 엄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집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마당발인 자기 어머니 를 졸라 며칠 동안 수소문을 해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엄니는 남학생이 어머니 를 모시고 온 것에 이미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고 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 60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그때 마침 나는 대한 교육 보험회사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때 우연히 친척 집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고 아 이들도 몰려들어서 한창 과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우선 그 집에 들어가 동생들 과외 공부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의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급 경 찰 공무원 출신이신 아버지, 남편보다 4살이나 연상인 수단 좋은 어머니, 또한 초등학교 6학년 여동생, 4학년 남동생이 대가족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 고 있었다. 엄니는 그 집의 형편이 우리보다 훨씬 좋으므로 마음속으로는 결혼 이 성사되기 바랐다. 결혼을 전제로 그 집에 들어가서 과외공부를 가르치고 조 부모가 맡아 하던 살림살이도 맡아 해주고 장래에 시어머니 될 분의 사업 장부 까지 정리해 주는 만능 며느릿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집 식구들도 나에 대하 여 만족해 했고 나 또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그치지 않는 바람기와 도박 습관이었다.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보고, 애원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온갖 머리를 다 써서 그의 바람기를 막으려 하다가 내가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여러 번 멀리 숨어 버리기도 했다. 그 때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찾아와서 빌고 또 빌고, 끝이지 않은 악순환의 연 속이었다. 견디다 못해 미칠 지경이 되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았더니 그 의 그런 행동은 병이기 때문에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 었다. 아직 결혼 전이지만 없던 일로 하기에는 그 집 식구들과 이미 끈끈한 정 이 들어버렸고, 그 집의 여유로운 생활도 포기하기에 아쉬웠다. 그러나 그 상태 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파괴되어 버릴 것 같아서 모질게 마음을 먹고 그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사랑도 아닌 것이 61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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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무용수의 길로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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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의 길로
그런 때 미 8군 무대에서 이미 상당한 경력을 쌓고 있었던 초희가 무용을 해 보라고 했다. 한 번도 춤을 추어 본 적도 없었고 이미 나이가 먹어 몸도 굳어 버린 내가 춤을 춘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 의 여지가 없어서 초희에게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춤에 대한 기본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그저 초희의 동작 하나하나를 열심히 따라 했다. 캉캉, 촬스 톤, 하와이안 댄스 등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연습을 했다. 남보다도 운동신 경이 둔했던 뻣뻣한 몸을 가지고 몸살이 날 정도로 맹연습했다. 무용에 전혀 소질도 경험도 없었던 나를 개인 레슨을 시키는 일은 초희의 입장에서는 짜증 이 날 정도로 힘이 들었겠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초희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했지만, 남들이 틀린 짓을 하는 것도 두고 보지 를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게 나에게만은 한없이 관대했다. 그러면서도 독점욕이 있어서 내가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면 나는 너 밖에 친구가 없는데 너는 왜 다른 친구가 필요하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꺼리는 까탈스러운 성격의 친 구였지만 죽을 때까지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야겠다는 맹세를 하게 만든 사건 이 있었다. 그것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림으로 내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내가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초희는 몸을 풀고 조산원에 입원해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친구가 해산해서 문병을 가는데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것 이 없었다. 춤꾼인 초희는 평소에 운동량도 많았지만 대식가여서 한 번은 고 구마 한 관을 쪄서 둘이서 먹었는데 초희가 나보다 더 많이 먹을 정도였다. 초 희가 입원실에서 아기를 옆에 눕혀 놓고 미역국을 먹으려는데 그만 내 배 속 • 64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초희는 미역국 한 숟가락을 먹고서는 입맛이 없어 서 못 먹겠다며 나에게 먹으라며 그릇을 내밀었다. 젖이 나오기 위해서는 산 모가 잘 먹어야 하는 것인데 배고픈 친구에게 미역국을 양보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양을 해도 초희는 한사코 먹으라고 강요를 해서 마지못해 미역국을 받 아 들은 나는 초희가 눈치 채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미역국을 먹었다. 초희와 나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아마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내 성격 이 초희를 편하게 해주는 면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생활 하고 있어서 서로 간에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를 테면 우리는 ‘법조인과 연예인의 만남’ 같은 것이어서 그 또래의 다른 친구들 보다는 서로 대화거리 가 많았었다. 실제로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법원 생활 6년 동안 19금 이 야기에서부터 고전까지 다른 친구들이 접할 수 없는 온갖 자료들을 많이 접 했기 때문에 이야기 거리가 많은 편이었다. 무용이 웬만큼 몸에 익을 무렵 초희는 8 군 무대에 마침 빈 자리가 생기자 나 를 추천했다. 무용단에서는 내가 초희의 친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초희와 비 슷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줄 알고 받아드렸을 것이다. 드디어 피눈물까지 는 아니지만 몇 달 동안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는 첫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습과 실전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쇼의 시작을 알리는 요란한 시 그널 음악에 맞추어서 뜨거운 조명불빛 아래의 무대로 뛰어 나간 순간 그만 “꽈당!” 하고 넘어져 버렸다. 평소에 초희네 방에서 남들이 들을까 보아 녹음 기도 크게 틀지 못하고 맨발로 연습을 했는데 갑자기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 고 분장을 하고 화려한 무대의상을 걸치고 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것 이다.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일어서기는 했지만 도로 들어갈 수도 계속 따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뒤이어 들려오는 미군들의 야유하는 휘파 람 소리, 폭소, 박수 소리 등이 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어 첫 스테이지 • 무용수의 길로 65
내내 무대 위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하는 바람에 다른 무용수들 까지 제대로 춤을 출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간신히 순서를 마치고 분장실로 나와서 너무 창피해서 비싼 택시를 타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던 잊을 수 없는 첫 무대 경험이었다. 그러나 첫 날의 낭패에 대해서 초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다시 무교동에 있던 극장식 식당인 월드컵에 소개를 시켜주었다. 무용계는 밖에서 볼 때는 화려하게 보였는데 수입도 적었고 화려하지도 않 았으며 오히려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무용계에서는 이따금 다른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서 전혀 심심치가 않았다. 그 중에 하나 가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게이들을 볼 수 있었던 일이다. 내가 가까이서 본 게이만 해도 여러 명이었다. 곱상한 20대의 무명가수와 미남인 30대, 평 범한 아저씨같이 생긴 40대, 또 명동에서 무대의상실을 하는 50대(?) 원장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게이는 40대 아저씨 무용단 단 장이었다. 광주 나이트클럽에서 단기간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경비를 절약하 기 위해서 여관집 커다란 방에 무용수 전원이 함께 자야 했다. 평소에도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성스러운 말투와 행동으로 단원들에 웃음을 주었는데 그는 이상하게 욕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 무 욕이나 하면 안 되고 ‘년’ 자가 들어가야만 좋아했다. 예를 들면 “야! 이 년 아 이리 좀 와.” 하면 몸을 비트는 듯한 종종걸음으로 “이년아 바빠 죽겠는데 왜 불러?” 하면서 냉큼 오지만 “단장님” 하고 부르면 대꾸도 잘해 주지 않아 서 거의 모두 그렇게 불렀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분 위기였기 때문에 그의 옆에는 항상 그와 욕 따먹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북적 거렸다. 공연 첫날 밤이 되어서 잠자리를 정해야 하는데 그가 제일 차가운 윗 목으로 가서 이불을 몸에 돌돌 감고 누웠다. 그래서 왜 이불을 돌돌 말고 자 • 6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느냐고 했더니 “네 년들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다.”라고 했다. 짓궂은 단원 한 명이 “ 야 이년아 너 안 건드릴 테니 내려와서 같이 이불 덮고 자자. “ 하니까 “어머머? 저 엉큼한 년, 싫어 이 년아 징글맞아 네 년들은.”이라고 했다. 그의 말투나 몸짓이 TV에서 보는 개그맨들의 연기 이상으로 웃겨서 모두 배꼽을 잡게 하였다. 그런 모습이 더욱 재미가 있어서 몇몇 단원들이 짓궂게 윗목으 로 가서 짐짓 단장의 몸을 더듬는 척하면 “저리 못 가? 이 미친년들아!” 라고 진짜로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러서 우리는 모두 자지러졌다. 그러나 미남인 30대 무용수는 절대로 표시를 안 내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는 아무도 그가 게이라는 걸 몰랐다. 그는 외국 배우처럼 잘 생기고 항상 책을 읽고 있어 모두가 그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함께 공연하던 고전 무용 단장과 결혼을 했는데 얼마 안 되어 이혼했다. 신혼여행에서도 손만 잡고 잠 을 잤고 동생이라는 남자아이를 집에 자주 데리고 와 한 방에서 늦도록 함께 있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한번은 친정에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밤에 몰 래 집에 와서 방문을 열었더니 둘이 나체로 누워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엄격한 대법원에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모 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비록 거친 딴따라 세계에 들 어 왔지만, 그 버릇이 변하지 않아서 나이 어린 단원들에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연 습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이 어린 단원 둘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 다. 그들은 내가 늦게 들어와서 춤도 잘 추지 못하는 주제에 혼자서 교양 있는 척한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쫓아나가 “야! 이년들아! 평생 욕이 나 먹고 살아야 시원하겠냐?”하고 뺨따귀를 갈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태 도를 바꾸어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원래 • 무용수의 길로 67
무용단은 동작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하고 말이 짧고 거칠었다. 엄격한 가정과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철저하게 예의와 질 서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 있는 나에게 마치 군대 같은 무용단의 분위기는 완 전히 딴 세상이어서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농담으로 너무 저속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약해 보이는 사람을 존중보다는 무시하는 경 향 등 법원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환경이 정 말 싫었다. 처음 몇 년간은 철 없이 떠난 법원의 주위를 맴도는 꿈을 꾸고는 했었다. 법 원에서는 대법관님 한 분만 잘 모시면 아무 문제 없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도 있었고 어린 급사의 신분이지만 높은 분들도 반말을 하지 않아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었다. 거칠고 강한 척하는 사람이 더 대우를 받는 연예계 분위기 는 나에게는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마도 든든한 초희의 울타리가 없었 다면 며칠을 못 버티고 포기 해버렸을 것이다. 보수는 공무원 시절보다는 조 금 나았지만, 연예계의 분위기는 마치 나에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항 상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무용수 세계의 분위기는 바깥 세계에서 생각하듯이 전혀 문란하거 나 퇴폐적이지 않은 나름의 분위기가 있었다. 가끔은 나훈아, 김세레나, 혜은 이, 정훈희 등의 스타들이 함께 출연해서 그들을 가까이서 보는 재미가 있었 다. TV에서 청초했던 혜은이의 모습이 푸짐해진 요즘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당시 모든 연예인의 꿈은 8군 무대로 진출하는 것이었지만. 뒤늦게 무용을 배운 나는 8군 무대 진출 첫날에 망신을 떨고 일반무대에 서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워낙 기초가 닦이지 않은 실력이라 항상 논총을 • 6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받았다. 그래도 일단 순서를 외우기만 하면 나름대로 눈에 띄지 않게 각색을 해 춤을 추어서 몇 명 되지는 않지만 팬이 생길 정도로 제법 인기도 있었다.
• 무용수의 길로 69
인간의 삶은 다양하다. 그러나 5000만 한국인 가운데 이런 삶은 산 사람은 없다. 이 책은 지극히 평범한삶이지만 광복, 6, 25 전쟁, 5,16 쿠데타, 월남전, 유량극단, 국제결혼, 미국 이민, 네일 산업 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 여인의 이야기 이다. 그녀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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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조국을 가진 여자 이야기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저자 이영재 월남 전선으로 - ‘I am Korean’이라는 주문
ChapterⅠ
ISBN 978-89-413-86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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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전선으로 6, 70년대에는 누구나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쳤었 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혹은 브라질로 집단 이민의 길을 찾 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 노동자들은 중동 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심지어는 월남 참전 초창기에는 막연한 외국에 대한 선 망, 돈을 벌어야겠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이 지원했었다. 사실 나는 내성적 이고 차분하지만, 생각은 개척적이라 소위 말하는 ‘조용하게 사고를 치는 형’ 이다. 집이나 일이나 답답해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한국을 떠나 갈 수만 있다 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어느 날 초희가 서독 광부로 갔다가 캐나다에 정착한 오빠가 가족들을 초청 했다고 하면서 나도 같이 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내 가 초희네와 같이 캐나다로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일단 해외로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월드컵과 제주도 관광호텔 두 군데를 왕복하면서 일을 하다가 드디어 월남에 파병된 국군을 위한 위문공연단에 낄 기회가 왔 다. 한 번 나가면 한 달 이상 월남에 있는 각 부대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는 위 문단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수입도 나았다. 위문단은 동대문 스케이트 장 옆 건물에서 맹연습해서 박재란, 김세레나, 이미자. 조미미, 한명숙, 남성 남, 송해, 이상해 등등과 더불어 69년도부터 3년간 매년 한 달씩 월남에 파병 된 부대들을 위해서 순회공연을 했다. 부대를 옮겨 갈 때마다 우리가 탄 차 앞과 뒤에서 APC(무장경호 차량)가 호 위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사해야 할 때가 많아서 C 레이션을 먹었는데 갖가지 깡통에 든 음식이지만 먹을 만했다. 연대급까지 순회공연을 했었는데 가장 반가운 것은 한식으로 차려주는 음식과 에어컨디션이 있는 잠자리를 제 • 72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공해주는 부대였다. 숙소 어디에서나 커다란 도마뱀이 벽으로 천장으로 마구 돌아다녀서 처음에 는 놀래서 소리를 쳤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어느 날 밤 잘 때 이 불 속에서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길래 손을 넣어 잡고 보니 도마뱀이어 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한 비위가 약한 나는 월남 음식이나 물을 마시지 못 해 이따금 외출해서 목이 마를 때는 길거리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과일 중 에 코코넛을 사서 그 물을 마시고는 했지만 그것 마저 없으면 목이 아무리 말 라도 부대에서 주는 물 외엔 마시지 못하던 것이 가장 힘이 들었다. 1971년도 이미자 씨와 같은 팀으로 월남 위문 공연을 가게 되어서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 무용팀은 항상 화장하고 있었지만, 이 미자 씨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수첩에 무언가를 항상 썼는데 아마 일기를 쓰 는 것 같았다. 또한 어린아이 같이 어리광도 많이 부려서 밴드 마스터가 아빠 처럼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 유명 가수 같지 않게 겸손하고 자연스럽고 인물 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듯 밉상이 아니고 귀엽게 보였다. 방문한 부대마다 그녀를 귀빈처럼 대우해줘서 꼭 부대장 옆에 앉게 했는데 식사가 끝나고 군 인들이 노래를 청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수는 밴드 없이는 노래는 부르지 않는 법이어서 그것만은 절대 사양했다. 가까이서 우리의 편의를 봐주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무용담(?)을 들려 주었 다. 잔인한 베트콩들의 한국군을 생포해 피부를 벗겨 나무에 거꾸로 메달아 놓은 것을 보며, 눈이 뒤집혀서 똑같은 수준의 복수를 안 할 수가 없었노라고. 그 당시에는 그 어린 사병이 영웅심에서 꾸며낸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다. 사이공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의 사령부에서 사복을 입은 키가 훤칠한 군인 • 월남 전선으로 73
이 예쁜 상자를 주면서 주소를 물어 보았다. 우리 단원들에게 그런 일들이 종 종 있었기에 상자를 받아서 숙소에 와서 열어보니 반지가 들어 있었다. 여자 가 없는 전장에서 더욱이 이국에서 잘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환상을 품을 수 가 있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이었기에 그 반지를 돌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 군인은 훗날 귀국해서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서 무척 당황 스러웠다. 다행히도 마침 엄니가 집에 계셔서 앞 뒤 전후 사정을 모두 들으시 고 난 다음에 군인을 잘 타일러서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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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Korean’ 이라는 주문 월남 순회공연에서 경험을 쌓은 후 드디어 초창기 기획사의 원조 격인 김 루 미씨가 모 여대 무용과 학생들로 구성한 유럽순회 공연 팀에 낄 수 있는 기회 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떠나고 보니 순회공연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된 공연장소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술집을 전전하면서 공연을 하는 것이 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나서 대원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외국에서 어린 무용수들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용단의 실체는 공연 후 손님들의 좌석을 찾아 다니면서 술을 얻어먹게 해서 매상을 올려주는 것이 었는데 될 수 있으면 비싼 술, 예를 들면 샴페인을 터트리게 하는 것이었다. 손님 테이블에 가서 “술 한잔 주시겠어요?”라며 술을 사게 하는 것인데 술집 사장은 강요는 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술을 많이 파는 대원은 칭찬을 하고 못 파는 대원에게 눈치를 주는 방법을 썼다. 이런 방법은 술을 한 잔도 못 먹는 나 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가 없어서 궁리 끝에 수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술을 받 아 마셨다가 수건으로 입술을 닦는 것처럼 하면서 뱉어내는 방법을 썼다. 손 님의 테이블로 가는 순서도 될 수 있으면 뒤로 미루었다가 맨 나중에 마지 못 해 가곤 했다. 단장은 단원들에게 손님들이 무례하게 행동하면 “우리는 접대 부가 아니라 artist이다”라고 주장하라면서 나름 자긍심을 심어 주기는 했지 만 결국 오십 보 백 보였다. 한 번은 못 먹는 술을 먹은 내가 졸려서 잠깐 손님에 기대어 잠이 들은 것을 보고 술집 사장이 단장에게 내가 그 남자와 잠을 잤다고 했다. 평소에 우리가 artist임을 강조하는 단장이 나에게 와서 남자와 잠을 잤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손님과 동침했다는 말로 알아 듣고 펄쩍 뛸 수 밖에 없었다. 사장에게 가서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내가 언제 남자와 잠을 잤느냐고 따졌다. 그러 • ‘I am Korean’ 이라는 주문 75
면서 “I am Korean”을 외쳤다. 내가 왜 “I’m Korean!”을 외쳤을까? 아마도 ‘한국 여자는 정조 관념이 강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동포에게 속아서 잠시 이 더러운 소굴에 있지만, 우리는 술집 여자가 아니야. 아티스트야. 내가 왜 모르는 외국 놈과 몸을 섞냐?”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는 데 영어로 할 수가 없으니까 불쑥 튀어 나온 말이 I’m Korean’이었던 것이다. 아무 효험도 없는 것이지만 그 때부터 “I am Korean”은 나에게는 급할 때마 다 나오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사장이 내가 조는 것을 보았다고 한 것이 피차 에 객지에서 영어를 고생 시키는 처지이다 보니 오해가 생긴 것이다. 영어 때 문에 생긴 해프닝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대원들의 영어 실력이 모두 형편이 없어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영어는 머리 를 짜내어 억지로 만들었다. 손님들의 테이블에 앉아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할 말을 생각하다가 누군가가 “Do you want to make a love with me?”로 하기로 하자고 했다. 다행히도 용기 있는 대원이 처음 그 말을 사용했을 때 손님 중에 영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고나 사용 하느냐?”고 해서 그 뜻을 알고는 혼비백산 했던 일도 있었다. 그녀 의 의도는 “내가 당신을 좋아해도 될까요?” 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붉 어진다. 당시 무용단은 북한식으로 완전 통제된 가운데 운영이 되어서 개별 행동은 전혀 허락되지 않았고 호텔 외부로 나갈 일이 있을 때는 3인 일조가 되어야만 나갈 수가 있었다. 제일 나이가 많았던 나만이 예외적으로 쇼핑을 할 일이 있 으면 잠깐씩 외출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 번은 현지 안내원과 같이 쇼핑을 가기로 했는데 안내원이 호텔 로비에서 방으로 전화 해서 “Are you ready?” 라고 묻는 것을 ‘Are you lady?’로 알아듣고 일동이 “이것들이 사람을 어떻 • 76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게 보는 거냐? 우리가 lady가 아니면 뭐라는 말이야? ”며 씩씩대던 해프닝도 있었다. 첫 공연이 열린 베이루트에서 사장이 호텔에서 내게 살짝 자기 방으로 오라 는 쪽지를 주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이 어리고 예쁜 학생들 을 두고 왜 사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였나? 아니면 내 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춤으로 따지자면 스무 살도 안 된 학생들의 춤은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냥 예쁘고 귀여운 춤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단원들보다 춤을 익히기까지 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지만 일단 순서를 숙달하고 난 뒤에는 춤을 반 박자 느 리거나 엇박자로 추어서 춤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나의 감 정을 담아냈었다. 군무에서 튀는 행동은 금기였고 학생들이 나의 춤 동작에 대하여 불평을 해도 단장은 그것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그대로 하도록 내 버려두었다. 춤으로서는 늦둥이고 인물로도 다른 풋풋한 학생들에게 뒤처지 는 내가 센터에서 춤을 추는 것이 혹시 사장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나를 호텔 방으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 되었고 불쾌해서 무시해 버렸다. 사장은 그 다음 날도 또 오라고 했지만, 여 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 후 단장이 어떤 말을 하던 끝에 나에게 “사장이 너는 믿어도 된다”고 하더라.”고 해서 “뭘 믿어도 된다는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 냥 웃기만 했었다. 사실 당시에 나는 춤을 추면서도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무 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왜 춤을 추고 있는가? 과연 춤으로 내 인생을 개척할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춤사위에 그런 감정이 실릴 수밖 에 없었을 것이다. • ‘I am Korean’ 이라는 주문 77
베이루트에서 한 달간 공연하다가 내전이 터져서 사이프러스로 갔다. 사이 프러스를 거쳐서 그리스로 왔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점차 시간이 흐르자 단 원 중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 오히려 그런 자리를 즐기거나 행동이 지나치 거나 술에 취해서 자세가 흐트러져서 해롱거리는 단원들도 생기기 시작한 것 이다. 때마침 인솔 교수는 더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한국으로 돌 아가버렸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일행 중에 나이가 제일 많았던 나로서 는 누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막냇동생 같은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느 껴져서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조용하고 온순한 내 성격으로서는 나서서 충고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유난히 행동이 안 좋은 학생 하나를 불러서 그 러면 안 된다고 충고를 했다. 그런데 상대방도 술에 취한 탓인지 오히려 “언 니가 무엇인데 간섭을 하느냐?”고 덤벼들었다. 나도 못 먹는 술이지만 조금 이라도 술을 먹은 상태에서 어렵게 꺼낸 말에 말대꾸하니까 순간적으로 흥분 을 했었던지 어린 학생의 뺨을 후려 갈겨버렸다. 학생들이 모두 놀라고 순식 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어 버렸지만 나는 내친 김에 아예 앞으로 학생들을 감 독하는 군기반장 노릇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후부터 매일 저녁 그 날의 일과에서 눈에 벗어나게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 으면 불러서 “네가 술집 여자야? 창녀야?” 하고 혼을 내주었다. 이렇게 되니 까 분위기는 많이 잡혀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지만, 학생들은 나를 무섭게 생각해서 단장에게 나와 함께 일을 못하겠다고 불평을 했던 모양이다. 대부 분이 나에 대하여 불만을 품었지만 그 중에는 내가 연장자로서 책임감을 느끼 고 감독을 하는 진심을 이해해 주는 학생도 있었다. 하루는 한 학생이 단장이 학생들의 불만을 듣고 나를 테헤란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약속 하는 것을 들었 • 78 아무도 살아 보지 못한 삶
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우리 팀은 대학생들로 키도 고만고만한 어린 팀인 것 에 비해서 테헤란 팀은 키도 크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오랫동안 외국 생활로 다져진 멤버들이니 내가 가면 적당히 몰매를 맞게 해서 확실히 기를 죽여 놓 겠다고 했다는 말까지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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