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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의 허전한 등에 ‘good’이라는 도장을 찍어주 고 싶은 단순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을 도망치고 싶을 만큼 사납고 비바람 부는, ‘파인’하지 않은 젊음이 지만,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네들의 욕심까지도 무릎에

영적독서

하느님 체험하기 토마스 그린 신부

난 상처처럼 안타깝고 예쁠 터이니까요. 사실 ‘아임 파 인’이란 말처럼 영성적인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좋든 싫 든 모두 언제나 아임 파인입니다. 언제든 도망치는 죄 인일지라도. 당신 보시기에, 보시기에 좋은 상처들이니,

*이번 호부터 토마스 그린 신부님의『하느님 체험하기』가 번역, 연재됩니다.

‘굿~’일 밖에요.

Experiencing God The Three Stages of Prayer By Thomas H. Green, S.J.

1부 하느님 알아가기 마음과 가슴 열기와 만남 ‘기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두 가지로 정의 를 내릴 수 있다. 첫 번째 정의는 하느님께 마음과 가 슴을 여는 것으로써 이것은 머리와 가슴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이해, 정서, 감정 그리고 의지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의 인격 적인 만남이다. 이것은 더 체험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러 나 이 두 번째 정의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이 그곳에 함 께 계시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을 오히려 낙담시 킬 수 있다. 자신의 기도가 메마름으로 들어갈 때는 만 남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 게 된다. 24

25


만일 기도가 메마름으로 달리고 있다면, 첫 번째 정

래에서 기타를 치고 있고, 수지벨이 눈을 반짝이며 발

의 즉 하느님께 마음과 가슴을 여는 기도에서 더 용기

코니에 나타나면 그는 뛰는 가슴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 비록 내가 하느님을 만

의 복사본을 꺼내서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하는 말을 읽

나고 있다는 것은 볼 수 없더라도 마음과 가슴은 열고

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수지벨은 어떻게 생각하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이 것이 만남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는가? 로미오의 말들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허만

내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는 진실 로 마음과 가슴을 둘 다 하느님께 열고 있는지 살펴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한 경우에는 첫 번째 정의가 더 위안을 줄 것이다. 첫

자신의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수지벨은, “맙소사 허 만, 네 자신의 말을 해. 난 네 말이 듣고 싶어! 난 셰익 스피어와 결혼하려는 게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염경기도의 문제이다. 주님께서도 그 소녀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정의는 기도가 사람

럼, “네 자신의 말을 해 보아라! 나한테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은 그만 읽고 우리 서로 대화를 해보자”라고 말 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 부

사이의 만남(encuentro)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끄럽고 불안정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기도 체험은 내가 혼자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이 초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말이 서

과 나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툴더라도 허만 자신의 말이 수지벨에게는 훨씬 더 좋은

번째 정의의 약점은 우리가 행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

것처럼 자신의 말로 두 사람 사이를 표현하는 게 훨씬 좋다. 그들 자신의 사랑과 그들만의 경험을 표현하는 말

염경기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도는 염경기도를 의미하고, 그것은 하느님께 말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하느 님께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성찰을 위해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우 리에게 제공되어 그것을 읽는 기도가 우리의 전통이 되 어 왔다. 사실 그것이 좋은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상의 방법이 아닌 예를 들어보자.

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허만은 말만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염경기도의 위험은 우리 가 말하는 것으로써만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염경기도 에는 실제로 두 가지의 위험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말 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남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말하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는 것이다. 염경기도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염경기도의 장점도 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염경기도를 통해서도 관

26

허만이란 소년이 수지벨이란 소녀와 사귄다고 가정

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테레사 성녀의 말

해 보자. 허만은 좀 수줍고 말이 없으며 수지벨한테 무

처럼 염경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해 생각이

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로

주어지면 관상의 절정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테

미오와 줄리엣을 베낀다. 허만이 수지벨의 집 발코니 아

레사 성녀는 생각하지 않고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은 아 27


만일 기도가 메마름으로 달리고 있다면, 첫 번째 정

래에서 기타를 치고 있고, 수지벨이 눈을 반짝이며 발

의 즉 하느님께 마음과 가슴을 여는 기도에서 더 용기

코니에 나타나면 그는 뛰는 가슴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 비록 내가 하느님을 만

의 복사본을 꺼내서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하는 말을 읽

나고 있다는 것은 볼 수 없더라도 마음과 가슴은 열고

는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수지벨은 어떻게 생각하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고, ‘이 것이 만남이다’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는가? 로미오의 말들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허만

내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는 진실 로 마음과 가슴을 둘 다 하느님께 열고 있는지 살펴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한 경우에는 첫 번째 정의가 더 위안을 줄 것이다. 첫

자신의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수지벨은, “맙소사 허 만, 네 자신의 말을 해. 난 네 말이 듣고 싶어! 난 셰익 스피어와 결혼하려는 게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염경기도의 문제이다. 주님께서도 그 소녀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정의는 기도가 사람

럼, “네 자신의 말을 해 보아라! 나한테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은 그만 읽고 우리 서로 대화를 해보자”라고 말 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 부

사이의 만남(encuentro)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끄럽고 불안정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기도 체험은 내가 혼자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이 초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말이 서

과 나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툴더라도 허만 자신의 말이 수지벨에게는 훨씬 더 좋은

번째 정의의 약점은 우리가 행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

것처럼 자신의 말로 두 사람 사이를 표현하는 게 훨씬 좋다. 그들 자신의 사랑과 그들만의 경험을 표현하는 말

염경기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도는 염경기도를 의미하고, 그것은 하느님께 말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하느 님께 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성찰을 위해 다른 사람이 쓴 것이 우 리에게 제공되어 그것을 읽는 기도가 우리의 전통이 되 어 왔다. 사실 그것이 좋은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상의 방법이 아닌 예를 들어보자.

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허만은 말만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염경기도의 위험은 우리 가 말하는 것으로써만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염경기도 에는 실제로 두 가지의 위험이 있다. 첫째는 자신의 말 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남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말하는 것으로 끝내고 만다는 것이다. 염경기도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염경기도의 장점도 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염경기도를 통해서도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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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이란 소년이 수지벨이란 소녀와 사귄다고 가정

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테레사 성녀의 말

해 보자. 허만은 좀 수줍고 말이 없으며 수지벨한테 무

처럼 염경기도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해 생각이

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로

주어지면 관상의 절정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그러나 테

미오와 줄리엣을 베낀다. 허만이 수지벨의 집 발코니 아

레사 성녀는 생각하지 않고 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은 아 27


무 소용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자신이 하는 말 에 무슨 마술의 주문을 외듯이 생각 없이 하느님께 말 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영신수련을 하려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신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종속시키고 포기하는 것이라고 권고한다. 사실 간혹 이런 혐오와 고초는 열정에서 온다기보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믿는 그 안에 은밀히 뿌리박힌 교만이나, 자기가 뛰어나고자 하는 야망, 또는 위안을 탐닉하는 자기 사랑에서 온다. 그러므로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저자 소개 Thomas H. Green, S.J. ·뉴욕 아퀴나스대학 철학과, 신학과 수학 ·포담대학 교육학 석사학위 취득 ·의학 석사 학위 취득 ·노트르담 대학 자연철학 석사 ·현재 필리핀 마닐라 San Jose신학교에서 영적지도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의탁해야 하며, 그가 받는 무미건조함은 자신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느님께 대한 겸손과 종속의 마음이야말로 종종 기도를 잘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한다.

·Atenco de 마닐라대학 철학과, 신학과 부교수

영신수련 지침서 44-45 쪽

저서 · 『샘이 마를 때』 · 『밀밭의 가라지』 · 『세상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 장터의 어둠 · 『영적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리더십』

『영신수련 지침서』 정한채 옮김 / 도서출판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 2011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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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먼지를 뚫고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먼저 먼지 속으로 한참을 가셨을 당신의 시간이 오늘 새삼 부럽고, 아득하고 그러합니다. 그리고 1년이란 이 짧은 시간을 보내고 보니 선배들이 아주 크게 느껴집니다. 캄

영적독서

하느님 체험하기 토마스 그린 신부

보디아에 있는 선배들, 제병영 신부님을 비롯해서 인돈 형, 인근 형, 경용 형, 태진 모두 어떻게들 살아낸 것인 지 점점 더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먼지 속 으로 깊이 들어오셔서 생을 펼치시는 주님의 부활을 진 심으로 축하합니다.

1부 하느님 알아가기 하느님과의 만남은 기술이 아니다

도는 마음과 가슴을 하느님께 여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체험의 핵심은 하느님

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가장 어 려운 점은 듣는 것을 배우고 잠심하는 것을 배우는 것 이다. 사실 사람들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요가 같 은 명상법이 큰 도움이 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을 만나는 기술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나는데 기술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다.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적당한 장소 나 방법을 배우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마 술적이고 또 그 이상의 말을 하는 데는 좋을지 모른다. 마술의 포인트는 하느님을 조종하는 것이다. 마술과 미 신은 우리가 하느님을 조종할 수 있도록 의도하는 것들 이다. 그래서 그것이 좋은 종교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조차도 숫자와 올바른 기술 을 찾아내는 데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다. 또 예전 에는 대사를 얻기 위하여 성당 문지방에 서서, 한 발 은 문 안쪽에 들여 놓고 다른 한 발은 밖에 두고 서 있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발을 들여 놓고 자기가 원하 는 것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나서 발을 빼고 다시 또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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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넣곤 하였다. 그들이 성당 안에 차분히 앉아서 하느

고요하게 하더라도 고요함이 하느님을 만들어 낼 수는

님을 만났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없다. 기술이 하느님을 말씀하시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종교 안에 들어오면서 사람

오히려 기술은 듣기 위한 내 자신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들은 성당 문지방에 서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으로

다. 여전히 말씀을 하고 안 하고는 하느님께 달렸다.

하루를 소비하였다. 그런 것은 미신을 키우는데 아주 좋

일단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두 번째로 할

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람들을 교 회에 오도록 하기 위한 좋은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숫자

일은 ‘라디오’가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상태가 좋 고 잘 맞춰진 라디오가 필요하다. 그것은 기도에서 정화

의 신비한 매력이 도입되면서 어찌된 일인지 일그러졌다.

의 기술에 해당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

‘라디오 수신기’가 되는 방법이다. 제일 먼저 질문해 봐 야 할 것은 들을 수 있게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는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종종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는 올바른 방법을 어떻게 찾을 것 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에

두 번째는 수신기의 상태가 좋고 잘 맞춰져 있는가이다.

서 중요시한 점의 하나는 실제로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

고 기능을 잘하는 수신기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

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만남의 주님

기 위해 라디오의 비유를 든다. 이런 것들에서 모든 정

이시다.

화의 기술들이 오는 것이다.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의 문

고요한 것 외에 기도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잘 맞춰지

제는 기도준비에 있고 이 준비를 잘 하지 못한다면 묵 기도를 잘하기 위한 순서

상을 제대로 하는 데에는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영적 지도자들은 기도의 기술에 대하여 말한다. 그

생각한다.

렇다면 그 기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디오를 비유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아는 사람들에게 익숙

로 들어보자. 말하���면 내가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우선 좋은 수신기가 필요하다. 만약 라디오가 없거나 고

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첫째 주간’을 통과하지 않고서 ‘둘째 주간’으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주간에

장이 났으면 방송국이 아무리 좋은 방송을 하더라도 음

서 얻은 자아 인식은 둘째 주간에서 그리스도로 채워지

악을 들을 수가 없다. 내가 라디오를 한 대 가지고 있

도록 우리를 내어 놓는 정화의 체험이다. 그것은 다 소

다고 가정하자. 잘 듣기 위해서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진된 죽은 흙으로 채워진 화분의 흙을 먼저 버리지 않

일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고는 단순히 새 식물을 그 화분에 다시 심을 수가 없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

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우는

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심하는 것이다. 거기에

작업인 첫째 주간 없이는 주님으로 채워지는 일은 있을

라디오의 비유가 적용되는 부분이다. 기초 단계에서 요

수 없다. 자아 인식을 통한 정직한 자기 직면 없이는 하

가나 선禪과 같은 기술들과 예수호칭기도는 우리의 마음

느님을 만날 수 없다.

을 고요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마음을 28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29


여 넣곤 하였다. 그들이 성당 안에 차분히 앉아서 하느

고요하게 하더라도 고요함이 하느님을 만들어 낼 수는

님을 만났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없다. 기술이 하느님을 말씀하시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종교 안에 들어오면서 사람

오히려 기술은 듣기 위한 내 자신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

들은 성당 문지방에 서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으로

다. 여전히 말씀을 하고 안 하고는 하느님께 달렸다.

하루를 소비하였다. 그런 것은 미신을 키우는데 아주 좋

일단 우리의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두 번째로 할

지만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 사람들을 교 회에 오도록 하기 위한 좋은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숫자

일은 ‘라디오’가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상태가 좋 고 잘 맞춰진 라디오가 필요하다. 그것은 기도에서 정화

의 신비한 매력이 도입되면서 어찌된 일인지 일그러졌다.

의 기술에 해당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종

‘라디오 수신기’가 되는 방법이다. 제일 먼저 질문해 봐 야 할 것은 들을 수 있게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는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종종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는 올바른 방법을 어떻게 찾을 것 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에

두 번째는 수신기의 상태가 좋고 잘 맞춰져 있는가이다.

서 중요시한 점의 하나는 실제로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

고 기능을 잘하는 수신기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

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만남의 주님

기 위해 라디오의 비유를 든다. 이런 것들에서 모든 정

이시다.

화의 기술들이 오는 것이다.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의 문

고요한 것 외에 기도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잘 맞춰지

제는 기도준비에 있고 이 준비를 잘 하지 못한다면 묵 기도를 잘하기 위한 순서

상을 제대로 하는 데에는 실제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영적 지도자들은 기도의 기술에 대하여 말한다. 그

생각한다.

렇다면 그 기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디오를 비유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아는 사람들에게 익숙

로 들어보자. 말하자면 내가 좋은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우선 좋은 수신기가 필요하다. 만약 라디오가 없거나 고

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첫째 주간’을 통과하지 않고서 ‘둘째 주간’으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첫째 주간에

장이 났으면 방송국이 아무리 좋은 방송을 하더라도 음

서 얻은 자아 인식은 둘째 주간에서 그리스도로 채워지

악을 들을 수가 없다. 내가 라디오를 한 대 가지고 있

도록 우리를 내어 놓는 정화의 체험이다. 그것은 다 소

다고 가정하자. 잘 듣기 위해서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진된 죽은 흙으로 채워진 화분의 흙을 먼저 버리지 않

일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고는 단순히 새 식물을 그 화분에 다시 심을 수가 없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우

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우는

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심하는 것이다. 거기에

작업인 첫째 주간 없이는 주님으로 채워지는 일은 있을

라디오의 비유가 적용되는 부분이다. 기초 단계에서 요

수 없다. 자아 인식을 통한 정직한 자기 직면 없이는 하

가나 선禪과 같은 기술들과 예수호칭기도는 우리의 마음

느님을 만날 수 없다.

을 고요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마음을 28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29


클레멘트라고 몹시 마른 친구가 있는데 토토 약을 자기

영적독서

도 좀 먹어야겠다고 농을 할 정도로 좋아져서 나타났습

하느님 체험하기

니다. 토토의 귀환이 올해 저의 부활체험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 잠시 사라짐으

토마스 그린 신부

로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지요. 그 러고 보니 그 만이 아닙니다. 묵묵히 함께 해주고 있는 가장 큰 힘들, 특히 저와 함께 같이 파견되어 지금껏 살 아내고 있는 건동 수사님과 제 주위의 고마운 이들이 선을 지키며 느리게 걷고 있는 게 제 부활입니다. 왜냐 하면 제가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늘 그렇듯이 끊임없이

1부 하느님 알아가기

새치기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잠시 뒤처져 있다가 결국

자아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은 숨을 헐떡이는 제게 다가와 등에 손을 얹어주거든요.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에서 영신 수련의 첫째 주

토토처럼 튼튼하게 살까지 쪄서 말이지요. 그 따뜻하고

간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자아 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

두툼한 손길이 부활의 인사이고 평화이리라 믿습니다.

법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보속, 양심성찰(혹은 의식

모두에게 이 느릿한 삶의 평화가 가득하시길. 실패하고

성찰), 그리고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내는 작업이다.

뒤처지고 병든 모든 느림보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보속 부활은 밟히고 새치기 당한 이들과 함께 느리지만

오늘날 우리는 보속을 사순 시기에서 재발견할 수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걸어오시는 당신의 느린 인사이리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서 훨씬 선택적이고 자발적이

라 믿습니다.

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이후 보속에 대한 강조가 유연성을 갖게 되었는데, 우리가 성숙해 가면서 유연성은 우리 삶에서 보속이 사라지기보다는 그 가치 를 더 해 가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속이 더 개인적인 결정의 문제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도록 한다. 보속은 정화의 방법이지 목적 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속 그 자체를 즐기시지 않는 다. 진짜 목적은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방법은 필요하다. 길버트와 설리반이 가르치듯이 보속에서 매우 중요

26

27


한 것 가운데 하나는, 벌은 죄에 적합해야 한다. 자신에

리는 것으로 인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게 적절해 보이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보속은 우리의 삶

다! 당신의 의지력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당신이 하

을 정화시키는데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새처럼 식사를

기 쉬운 일을 통해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많

하는 사람에게 단식은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

은 것들을 배운다. 당신이 성숙해진다면 당신의 이기심

것은 도움이 되는 좋은 보속이 아니다. 단식을 해야 하

과 자기기만 수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느냐고 물어보던 수녀님들을 피정 지도한 경험이 있는데 자기들은 먹는 것을 특별히 즐기는 편이 아니라고 인정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하였다. 아마 그 수녀님들에게는 먹는 것이 단식보다 오 히려 더 나은 보속일 것이다. 한 수녀님은 나의 이야기 를 들은 후 좀 더 보속해야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먹기 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음식은 그녀에게 좋 은 보속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독서는 어 떻겠어요?”라고 하였다. 그건 내가 그녀를 잘 몰랐기 때 문에 그저 방법을 궁리해낸 것뿐이었다. “오, 저는 독서 를 좋아해요.” “그렇다면 수녀님한테는 매일 신문을 점 심식사 후까지 읽지 않는 것이 좋은 보속의 방법이 되겠 군요”라고 했더니 “그건 너무 끔찍하네요! 그곳에선 내 가 누구보다도 아침에 신문을 제일 먼저 읽어요”라고 하 는 것이었다. “그럼 좋아요. 당신의 호기심을 제일 강하 게 하는 것에 좋은 보속 방법이 있겠네요. 수녀님은 정 보가 필요하군요. 그러나 점심때까지 기다렸다가 신문을 읽어도 당신이 하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라 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아주 도전이 되는 보 속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후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 보속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가를 말하였 는데 그것은 그녀의 본능적인 갈망을 통제하는 방법이 되었다고 한다. 보속은 정화의 중요한 부분이고 또한 자아 인식의 중요한 방법이다. 당신은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깨뜨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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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 가운데 하나는, 벌은 죄에 적합해야 한다. 자신에

리는 것으로 인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게 적절해 보이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보속은 우리의 삶

다! 당신의 의지력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당신이 하

을 정화시키는데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새처럼 식사를

기 쉬운 일을 통해서도, 하기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많

하는 사람에게 단식은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

은 것들을 배운다. 당신이 성숙해진다면 당신의 이기심

것은 도움이 되는 좋은 보속이 아니다. 단식을 해야 하

과 자기기만 수용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느냐고 물어보던 수녀님들을 피정 지도한 경험이 있는데 자기들은 먹는 것을 특별히 즐기는 편이 아니라고 인정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하였다. 아마 그 수녀님들에게는 먹는 것이 단식보다 오 히려 더 나은 보속일 것이다. 한 수녀님은 나의 이야기 를 들은 후 좀 더 보속해야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먹기 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음식은 그녀에게 좋 은 보속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독서는 어 떻겠어요?”라고 하였다. 그건 내가 그녀를 잘 몰랐기 때 문에 그저 방법을 궁리해낸 것뿐이었다. “오, 저는 독서 를 좋아해요.” “그렇다면 수녀님한테는 매일 신문을 점 심식사 후까지 읽지 않는 것이 좋은 보속의 방법이 되겠 군요”라고 했더니 “그건 너무 끔찍하네요! 그곳에선 내 가 누구보다도 아침에 신문을 제일 먼저 읽어요”라고 하 는 것이었다. “그럼 좋아요. 당신의 호기심을 제일 강하 게 하는 것에 좋은 보속 방법이 있겠네요. 수녀님은 정 보가 필요하군요. 그러나 점심때까지 기다렸다가 신문을 읽어도 당신이 하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라 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아주 도전이 되는 보 속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후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 보속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가를 말하였 는데 그것은 그녀의 본능적인 갈망을 통제하는 방법이 되었다고 한다. 보속은 정화의 중요한 부분이고 또한 자아 인식의 중요한 방법이다. 당신은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깨뜨 28

29


영적독서

받으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도와주는 일에 일생을 바치

하느님 체험하기

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다.

토마스 그린 신부

곳에 보낼 때 오늘 당장 그 불법거주지를 변화시킬 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학생들이 미래에 사업가라든가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 길에서 만나는 걸 인을 모른 체하고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하는 인식 의 훈련 때문에, 지금의 노출로, 의식화로 그들은 매일의

1부 하느님 알아가기

삶에서 이런 일들에 민감해질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양심성찰 혹은 의식성찰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아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법

것은 바로 그들의 세속과 사회에 대한 경험과 연관되기에 그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양심성찰 이기심과 자기기만의 실제를 깨닫는 것은 두 번째 유

사람들을 가난에 노출시켜 그들의 일상 삶 안에서 그

형의 정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정화의 둘째 수단으로

러한 것들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양심성찰도

양심성찰 또는 의식성찰이라고 부르는 것과 긴밀히 연관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날 하루 우리 안에 일어났던 일들

되어 있다. 내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를 쓴 이후

을 우리 앞에 펼쳐보기 위해 날마다, 주로 저녁에 성찰의

내 마음에 들어온 이미지는 노출 또는 의식화의 형태였

시간을 보낸다. 성찰은 나 자신을 고요하게 하고, 그 고

다. 오늘날 이곳 필리핀은 사회정의 분야에서 의식화 또

요함 속에서 여유 있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는 노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그것들을 판단하는 것인데 되도록이면 하느님의 빛으로

서도 대학생들을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노출

하루 동안 어디에서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고 그분이 말

시키는 것이 점점 더 보편화 되고 있다.

씀하실 때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보는 일종의 감성

대학에서 학생들을 빈민가나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훈련이다.

곳에 보내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그들이 도움을 주기

26

위해서 그곳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학생들이

물론 성찰의 목적이 실제로 하루를 평가하는 것은 아

사도직을 하러 갈 때 본래의 목적이 사람들을 위해 일을

니다. 그 목적은 내일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 더 민감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그다지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날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는 것이 주

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 말씀 하셨는가를 돌

된 목적이라면 별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들은 배

이켜 보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오늘 마주쳤던 사람을 통

우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이다. 그들이 일단 사제 서품을

해 하느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나? 내가 길가에서 본 가난 27


영적독서

받으면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도와주는 일에 일생을 바치

하느님 체험하기

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다.

토마스 그린 신부

곳에 보낼 때 오늘 당장 그 불법거주지를 변화시킬 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학생들을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학생들이 미래에 사업가라든가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 길에서 만나는 걸 인을 모른 체하고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하는 인식 의 훈련 때문에, 지금의 노출로, 의식화로 그들은 매일의

1부 하느님 알아가기

삶에서 이런 일들에 민감해질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양심성찰 혹은 의식성찰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아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법

것은 바로 그들의 세속과 사회에 대한 경험과 연관되기에 그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

양심성찰 이기심과 자기기만의 실제를 깨닫는 것은 두 번째 유

사람들을 가난에 노출시켜 그들의 일상 삶 안에서 그

형의 정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정화의 둘째 수단으로

러한 것들을 보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양심성찰도

양심성찰 또는 의식성찰이라고 부르는 것과 긴밀히 연관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날 하루 우리 안에 일어났던 일들

되어 있다. 내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를 쓴 이후

을 우리 앞에 펼쳐보기 위해 날마다, 주로 저녁에 성찰의

내 마음에 들어온 이미지는 노출 또는 의식화의 형태였

시간을 보낸다. 성찰은 나 자신을 고요하게 하고, 그 고

다. 오늘날 이곳 필리핀은 사회정의 분야에서 의식화 또

요함 속에서 여유 있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면서

는 노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그것들을 판단하는 것인데 되도록이면 하느님의 빛으로

서도 대학생들을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노출

하루 동안 어디에서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고 그분이 말

시키는 것이 점점 더 보편화 되고 있다.

씀하실 때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보는 일종의 감성

대학에서 학생들을 빈민가나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훈련이다.

곳에 보내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그들이 도움을 주기

26

위해서 그곳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학생들이

물론 성찰의 목적이 실제로 하루를 평가하는 것은 아

사도직을 하러 갈 때 본래의 목적이 사람들을 위해 일을

니다. 그 목적은 내일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 더 민감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그다지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날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는 것이 주

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 말씀 하셨는가를 돌

된 목적이라면 별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들은 배

이켜 보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오늘 마주쳤던 사람을 통

우기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이다. 그들이 일단 사제 서품을

해 하느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나? 내가 길가에서 본 가난 27


한 이, 눈먼 이를 통해 하느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나? 오 늘 내가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를 통해 어떻게 말씀하 셨나?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나?”라는 질문을 한 다 음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나?”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성찰은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응답 둘 다 돌아보는 것이 어야만 한다.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당신의 팔을 펼쳐 미래를 맞아들이세요 .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앤소니 드 멜로

28

29


습니다. 부스라에 있는 폭포는 이단 폭포였는데 아랫단

영적독서

에 있는 폭포가 더 높아보였습니다. 떨어진 물이 깨어

하느님 체험하기

져 바람에 날아가는 모습이 흡사 용이 하늘을 날아오 르는 듯했습니다. 한참을 물보라 날리는 모습을 보다가

토마스 그린 신부

어찌되었던지 원한을 갖고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이 안 식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했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 갈 래마다 영혼들의 하소연이 들리는 듯 했고, 한참을 떨어 져내려야 폭포 밑의 물에 섞여 들어갈 수 있는 그 모습 은 흡사 세상의 한 많은 사연을 품고 유명을 달리한 영

1부 하느님 알아가기

혼의 춤마당 같았습니다. 간절한 기도로 억울한 영혼을

자아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위로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사제인가?’라고 되묻습 니다.

양심성찰과 고해성사

이제는 고무농장이 들어서면서 대규모의 산림이 훼

고해성사 또는 오늘날 화해성사라고 불리는 성사는

손되고 그 자리에 고무나무가 심어지고 있습니다. 부스

하느님과 우리, 우리와 죄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죄는 단

라 사람들도 그 농장에 갑니다. 아침에 수많은 트럭이

지 악으로써만이 아니라 질병으로써 다루어져야 한다고

이들을 실어 나릅니다. 이렇게 그들의 산은 고무나무 농

생각한다. 우리의 삶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죄가 있다. 우

장이 되어갑니다. 나중에 고무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염

리가 적의나 악의를 품고 있을 때는 사실 화해하여야 하

될 물은 부스라 폭포의 원혼들에게 후손들의 편치 않는

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러나 열심인 사람의 삶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옥구슬의 웃음소리에 솜사

경우는 상당히 드믄 일이다.

탕 같은 말씨. 나는 그들이 그립고, 개발논리로 잃어가 는 부스라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이경용 드립니다.

그런 삶에 존재하는 것은 병으로써의 죄이다. 즉 로 마서 7장에서 말하는 죄의 유형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이 런 형태의 죄는 열심인 사람들의 일상에서 매우 보편적 이고, 성스러운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야고보

26

* 약간의 휴식을 갖고 다시 후원회 회원님들과 나눔을 통해 만나

성인은 올바른 사람도 하루에 일곱 차례의 죄를 범한다

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글을 쓸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 하였다. 올바른 사람이 그 정도이다. 그러므로 연약함

후원회원님들을 만나는 마음으로 저의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

으로의 죄, 병으로써의 죄는 열심인 사람의 삶에서조차

당분간 캄보디아의 다양한 천주교 공동체(본당)들을 중심으로

아주 흔한 것이다. 우리가 아프면 화해가 필요한 것이 아

나눔을 할까 합니다.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니라 치유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죄를 두 가지 측면 27


에서 보아야 한다면 고해성사나 화해성사도 두 가지 측면 에서 보아야 한다. 만약에 악의였다면 고해성사로 용서를

을 다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소위 내가 ‘세탁물 목록’ 접 근법이라고 부르는 고해가 실제로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받아야 하지만 병이라면 고해성사로 치유를 받아야 한다.

않는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된

늘 똑 같은 죄를 지으면서 반복해서 고해성사를 보러 가

잘못부터 알아내는 것이 좋다. 치유받기 위해 온 것부터

야 하는가? 만약에 내가 나쁜 의지로 지은 똑같은 죄로

말하고 난 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시기를 청 합니다. 그러나 이 성사를 통해 특별히 여기, 그분께 응

고해성사를 보러 간다면 그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져 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병으로써의 죄, 즉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경우라면, 다시

답할 필요를 느끼는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보

말해서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죄라면

다 건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고해성사를 보러 가는 것은 이치에 잘 맞는다. 여기서 의사의 비유를 들어보려 한다. 당신이 아프면 의사한테 가는데 다 치유될 때까지 계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속해서 간다.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제가 지난 주일에 왔는데 이번 주일에도 여전히 아파요. 그러니 다시 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의사를 믿는 다면 치유될 때까지 기꺼이 계속 갈 것이다. 양심성찰이나 화해성사는 두 가지 모두 같은 방식으 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 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응답에 실패한 것이 병 때문이라면 나 자신을 아주 참을성 있게 대해야 하며, 하 느님께 돌아오도록 기꺼이 노력해야 한다. 악의로 죄를 짓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되지만 오히려 내가 원 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아주 겸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확실히 불가능 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께 더욱 더 의탁해야 한다. 이것이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고해성사를 할 때 자신이 치유되어야 할 것들의 목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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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보아야 한다면 고해성사나 화해성사도 두 가지 측면 에서 보아야 한다. 만약에 악의였다면 고해성사로 용서를

을 다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소위 내가 ‘세탁물 목록’ 접 근법이라고 부르는 고해가 실제로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받아야 하지만 병이라면 고해성사로 치유를 받아야 한다.

않는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된

늘 똑 같은 죄를 지으면서 반복해서 고해성사를 보러 가

잘못부터 알아내는 것이 좋다. 치유받기 위해 온 것부터

야 하는가? 만약에 내가 나쁜 의지로 지은 똑같은 죄로

말하고 난 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치유해 주시기를 청 합니다. 그러나 이 성사를 통해 특별히 여기, 그분께 응

고해성사를 보러 간다면 그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져 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병으로써의 죄, 즉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행할 수 없는 경우라면, 다시

답할 필요를 느끼는 여기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보

말해서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형태의 죄라면

다 건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고해성사를 보러 가는 것은 이치에 잘 맞는다. 여기서 의사의 비유를 들어보려 한다. 당신이 아프면 의사한테 가는데 다 치유될 때까지 계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속해서 간다. 당신은 의사에게 가서, “제가 지난 주일에 왔는데 이번 주일에도 여전히 아파요. 그러니 다시 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 의사를 믿는 다면 치유될 때까지 기꺼이 계속 갈 것이다. 양심성찰이나 화해성사는 두 가지 모두 같은 방식으 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나는 어떻게 응답했는 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만약 응답에 실패한 것이 병 때문이라면 나 자신을 아주 참을성 있게 대해야 하며, 하 느님께 돌아오도록 기꺼이 노력해야 한다. 악의로 죄를 짓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되지만 오히려 내가 원 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무능함에 아주 겸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확실히 불가능 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주님께 더욱 더 의탁해야 한다. 이것이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고해성사를 할 때 자신이 치유되어야 할 것들의 목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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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의 상태에 이르려고 하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생각

영적독서

이 많아지면서 유혹도 심해졌습니다.

하느님 체험하기

나중에 프놈펜으로 옮겨와 입원치료를 계속했습니

토마스 그린 신부

다. 프놈펜의 검사결과는 장티푸스에 뎅기열까지 검출되 었다는 것입니다. 뎅기열은 잠복기가 있고 초기 발병 때 에는 잘 검출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시엠립 병원 에서 이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세 번째 뎅기열을 앓았습니다. 한번 걸린 사람은 걸리기도 쉽다

1부 하느님 알아가기

니 앞으로 뎅기 모기를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보

자아인식을 위한 세 가지 방법

다는 이런 병원균을 이겨낼 수 있도록 자기 관리를 하 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휴식과 적당한

상상력

운동. 영적인 측면에서도 나를 좀 더 비우고 차분하게

지금까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기술과 정화의 기술에

기도 생활에 마음을 두는 것, 이것이 나쁜 영으로부터

관해 알아보았는데 마지막으로 이냐시오식 묵상, 즉 상상

나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고열로

력을 이용하는 묵상에 관한 기술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생각이 많아지고 유혹이 심해졌던 유쾌하지 않은 기억

이것 역시 기도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아

을 되짚으며, 나의 마음에 하느님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

가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만나려고 하는

으면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 관한 사전 지식과 실제로 그 사람을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내려는 생각, 하느님의 자리

만나는 것의 차이와 같다. 그 사람에 관해 얼마나 많이

를 내가 차지하고자 하는 허망한 욕심, 그런 생각이 마

알든 그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

치도 열병의 고열처럼 내가 하느님이 되려는 부질없는

서 알게 되는 것과 같지 않다. 즉 사람에 대해 연구하는

객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데는 기술이 필요해도 만남에는 기술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하느님일 때 더욱더 그러한데 하느님은

여름입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특히 영혼이 병들지 않도록 나를 더 돌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만남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 어떤 것을 알아간다고 하는 의미를 명 확히 하기 위해 앞서 말한 라디오의 비유를 좀 더 이야

캄보디아에서 이경용 드립니다.

기 하려 한다. 라디오를 들으려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 과 동시에 잘 정비되고 잘 작동하는 기계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그것들이 정화에 대한 논의였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묵상의 단계는 좋은 음악 감상 코스와 같���.

24

25


마음을 얼마나 고요하게 하였든 라디오가 얼마나 잘 작

예수님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분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동하든 당신이 그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클래식 음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알기 위해서다. 우리

악을 잘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배워 익

는 그분께 맞춰져 있지 않으면 그분을 진실로 사랑할 수

히는 취미이고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없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좋은 음악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 나의 비유와 꼭 같다. 기도생활의

내가 좋아하는 피정 지도방법 중의 하나는 헨델의 메

첫 단계에서는 실제의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맛 들이는

시아를 들려주는 것이다. 언젠가 수녀님들을 피정 지도하

것이다.

면서 그 음악을 들려주었다. 소프라노가 “나는 나의 구세 주가 살아계심을 아네” 를 부르고 있는데, 나이 많은 수녀

2 부 앎에서 사랑하기로

님 중 한 분이 내게 다가와서 “저 가수가 같은 걸 서른여 덟 번 반복한 걸 아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피정

기도는 성장이고 기도는 삶 자체이다. 살아있는 것은

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그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그 수

무엇이든 성장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변화한다. 기도생활

녀님은 앉아서 같은 노래구절이 반복되는 횟수를 세고 있

도 정지해 있을 수 없고 변화하는 어떤 역동적 전망을 지

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단지 지루한 되풀이였을 뿐, 메

니고 있다. 이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으로부터 하느님

시아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을 사랑하도록 움직여 가는, 기도 안에서 성장의 역동성

수녀님이 메시아에서 같은 가사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문

을 말하려 한다.

제를 느끼는 것은 익숙한 구절이나 기도를 수없이 반복 하는 기도의 삶에서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준 다. 왜 반복하는가? 반복은 기도에 더 깊게 들어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화하는 것 외에 기도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알아가기’란 일종의 ‘음악감상’ 강좌를 들으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말

우리가 하느님을 지칭하는 방식을 관찰해 보면 기도 하는 삶의 성장 양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그분’ (he)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쩐지 하느님이 바로 근 처에 혹은 옆방에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하느님의 존재는 믿지만 직접 인격적으로 체험은 하지 못한 분이란

히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접해야 하는 이유이다. 단지 음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하느님은 아마도 ‘그분’ 이라고 생각된다. 즉,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고

악감상 강좌가 실제로는 좋은 음악을 즐기는 것 이상이

적어도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래서 많은

아니듯이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이 그들의 삶 에서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자면 하느님이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엄밀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기도생활의 초기 단계에서는 성경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6

그분, 그대 그리고 당신

‘그분’으로 남아 계신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대’ (thou-you의 고어, 극존칭) 27


마음을 얼마나 고요하게 하였든 라디오가 얼마나 잘 작

예수님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분은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동하든 당신이 그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클래식 음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알기 위해서다. 우리

악을 잘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배워 익

는 그분께 맞춰져 있지 않으면 그분을 진실로 사랑할 수

히는 취미이고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없는데 이것은 음악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좋은 음악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한 나의 비유와 꼭 같다. 기도생활의

내가 좋아하는 피정 지도방법 중의 하나는 헨델의 메

첫 단계에서는 실제의 하느님에 대한 감각을 맛 들이는

시아를 들려주는 것이다. 언젠가 수녀님들을 피정 지도하

것이다.

면서 그 음악을 들려주었다. 소프라노가 “나는 나의 구세 주가 살아계심을 아네” 를 부르고 있는데, 나이 많은 수녀

2 부 앎에서 사랑하기로

님 중 한 분이 내게 다가와서 “저 가수가 같은 걸 서른여 덟 번 반복한 걸 아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피정

기도는 성장이고 기도는 삶 자체이다. 살아있는 것은

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그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그 수

무엇이든 성장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변화한다. 기도생활

녀님은 앉아서 같은 노래구절이 반복되는 횟수를 세고 있

도 정지해 있을 수 없고 변화하는 어떤 역동적 전망을 지

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단지 지루한 되풀이였을 뿐, 메

니고 있다. 이제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으로부터 하느님

시아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을 사랑하도록 움직여 가는, 기도 안에서 성장의 역동성

수녀님이 메시아에서 같은 가사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문

을 말하려 한다.

제를 느끼는 것은 익숙한 구절이나 기도를 수없이 반복 하는 기도의 삶에서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준 다. 왜 반복하는가? 반복은 기도에 더 깊게 들어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화하는 것 외에 기도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알아가기’란 일종의 ‘음악감상’ 강좌를 들으려는 것과 같은 것으로, 말

우리가 하느님을 지칭하는 방식을 관찰해 보면 기도 하는 삶의 성장 양식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그분’ (he)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쩐지 하느님이 바로 근 처에 혹은 옆방에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며 하느님의 존재는 믿지만 직접 인격적으로 체험은 하지 못한 분이란

히 말해서 우리가 성경을 접해야 하는 이유이다. 단지 음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하느님은 아마도 ‘그분’ 이라고 생각된다. 즉,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고

악감상 강좌가 실제로는 좋은 음악을 즐기는 것 이상이

적어도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래서 많은

아니듯이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이 그들의 삶 에서 그렇게 많은 역할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자면 하느님이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엄밀

기도라고 할 수 없다. 기도생활의 초기 단계에서는 성경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주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6

그분, 그대 그리고 당신

‘그분’으로 남아 계신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대’ (thou-you의 고어, 극존칭) 27


가 될 때 그 관계는 인격적인 것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 을 맞대면 할 때는 그 사람을 ‘그대’라고 한다. 만약 하느 님이 ‘그대’라면 그 관계는 인격적이긴 하지만 종과 주인

는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매를 맺어 성숙해졌 으며 완전한 자기 내어주기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본 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함께 자라고 함께

과의 관계이다. 만약 하느님이 ‘당신’ (you)이라면 동등 한 관계로 친구로서 얼굴을 맞대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관

지내야 한다.

계이다. 왜 사람들이 ‘그대’를 선호하는 것일까? 구약에서 ‘그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내었다. 이것은 상호간의

장 단계를 이루는 진행 과정을 살펴보겠다.

책임과 의무라는 규정된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 대부분

이제부터 기도생활면에서 우리의 내적 삶의 여러 성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은 그런 관계를 선호하는데 하느님이 우리의 친구이고 또 동등하다면 쉴 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 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개의 계약, 즉 구약에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와 신약에서의 친구 관계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 하여 너무 많이 요구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종 의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친구가 되는 것은 희생이 크다. 친구에게 “나는 내 책 임을 다 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는 쓸모없 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 하 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의미하신 것은 우리가 공식적인 의무를 이행했을 때 우리는 단지 종이 하는 일, 즉 해야 할 일만을 완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해 야만 하는’ 것 그 이상을 할 때까지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단지 종일뿐이다. 그 구절에 서 이 둘을 대비해 놓으신 이유가 그 까닭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그대’라고 칭하는 것은 더 공식적인 인격적 관계를 갖게 하지만 친구 관계라는 면에서는 ‘당신’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당신’ 또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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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될 때 그 관계는 인격적인 것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 을 맞대면 할 때는 그 사람을 ‘그대’라고 한다. 만약 하느 님이 ‘그대’라면 그 관계는 인격적이긴 하지만 종과 주인

는 ‘사랑하는 이’라고 부르는 것은 열매를 맺어 성숙해졌 으며 완전한 자기 내어주기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라고 본 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함께 자라고 함께

과의 관계이다. 만약 하느님이 ‘당신’ (you)이라면 동등 한 관계로 친구로서 얼굴을 맞대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관

지내야 한다.

계이다. 왜 사람들이 ‘그대’를 선호하는 것일까? 구약에서 ‘그대’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내었다. 이것은 상호간의

장 단계를 이루는 진행 과정을 살펴보겠다.

책임과 의무라는 규정된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 대부분

이제부터 기도생활면에서 우리의 내적 삶의 여러 성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은 그런 관계를 선호하는데 하느님이 우리의 친구이고 또 동등하다면 쉴 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 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개의 계약, 즉 구약에서의 종과 주인의 관계와 신약에서의 친구 관계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 하여 너무 많이 요구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종 의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친구가 되는 것은 희생이 크다. 친구에게 “나는 내 책 임을 다 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성경에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나서 ‘저희는 쓸모없 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 하 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의미하신 것은 우리가 공식적인 의무를 이행했을 때 우리는 단지 종이 하는 일, 즉 해야 할 일만을 완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해 야만 하는’ 것 그 이상을 할 때까지는 친구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단지 종일뿐이다. 그 구절에 서 이 둘을 대비해 놓으신 이유가 그 까닭인지 모른다. 하느님을 ‘그대’라고 칭하는 것은 더 공식적인 인격적 관계를 갖게 하지만 친구 관계라는 면에서는 ‘당신’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당신’ 또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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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하느님 체험하기 토마스 그린 신부

2 부 앎에서 사랑하기로 성장의 세 단계 기도 삶의 성장은 ‘하느님 알아가기’ , ‘앎에서 사랑으 로’ , ‘사랑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의 세 단계를 거쳐 얻 어진다. 또한 이 세 단계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에 서 ‘그대’와 ‘당신’을 거쳐 ‘사랑하는 분’으로 만들어 가는 길이다.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과 우리의 인격적 관계, 개 인적 만남은 ‘그대’의 차원, ‘당신’의 차원 그리고 ‘사랑하 는 분’의 차원에서 매우 다를 것이다. 개인적 만남은 이 세 단계를 거치면서 깊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 세 성장의 단계 중 어디에 있는지는 기도 의 원의가 무엇인지 자문해 보면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 계인 알아가기에 있다면 통찰을 얻기 위해, 깨달음을 얻 기 위해 기도한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 느님을 알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 내 자신을 내어 드리는 약속을 하기 전에 내가 약속하려는 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둘째 단계(이 장의 주제)의 초점은 하느님을 좀 더 체험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하느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보다 사랑 안에 하느님과 함께 머물고 우리의 삶을 나누며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이때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 26


존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 안 계신 것 같 으면 매우 불안해한다. 아직 첫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하 느님의 현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의 부재 또 한 느끼지 못한다. 어떤 이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부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설적 이지만 부재는 실제로는 현존의 한 형태이다. 기도 삶의 셋째 단계는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 기로’의 단계이다. 이 셋째 단계의 기도는 하느님께 기쁨 을 드리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기도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화이므로 우리는 변화될 필요가 있다. 당신과 사랑하는 이와의 우정은 동 등할 때 가능하다. 하느님은 내가 성화되어야 나에게 사 랑하는 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앞서가려 하고 하 느님과의 관계를 실제 관계보다 앞질러 가서 너무 빨리 친숙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직 상대방을 잘 모르는데 지나치 게 친숙해지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약간 방어적이거 나 밀어내려고 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을 자유롭 게 내어 줄 때까지는 소유 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느 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느 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는 어느 정도 동등한 수준에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진실로 사랑하며 산다면 우리는 그분처럼 되어야 하고 그분의 가족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매우 점진적인 성장 과정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로잡으신 다음 “네가 갈망하는 나와의 일치를 이루려면 내가 너를 성화시킬 수 있도록 나에게 내맡겨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 원한다면, 통찰과 체험을 얻고 변화를 원 27


한다면 하느님께로 다가가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모 든 목표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그분’에서 ‘사랑하는 분’ 으로 대하게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기와 듣기 기도생활의 셋째 단계에서는 성화 또는 변화의 작업 이 시작된다. 이 변화의 기본적인 형태는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의 움직임이다. 앞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그들 의 교회 전통에서 기도는 주로 말하는 것과 청원기도였 음을 발견하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가톨릭 신자들도 기도를 입으로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어 떻게 듣는지를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 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의 의미조차 모른다. 우리는 두 렵고 부끄럽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계 속 말을 한다. 여러분은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될 때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당신이 계속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아 챈 적이 없는가? 우리는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침 묵이 아주 편안하다. 계속해서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 리가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보지 않기 때 문에 불안함과 어색함은 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불안해한다. 더구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더 확 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할 때 아주 말이 많고 잘 듣 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침묵 을 두려워한다. 감성기도, 체험기도(둘째 단계)는 말하기와 듣기의 다리 역할을 한다. 내게 영적 지도를 받는 사람들과 피 정자들이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앎, 체험, 변화 28


의 단계나 생각, 느낌, 변화라는 각각의 단계는 순차적인 가 아니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가? 각 단계는 왔다 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의 어떤 시기에 한 가 지 정서 또는 한 형태의 체험이 우세하더라도 다른 정서 나 체험 형태를 배제하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 어서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것이 주요 관점인 초기의 기 도 삶에서도 어떤 감동을 체험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기도를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샘이 마르는 단계에 있더라도 가끔 감성적 기도를 할 때가 있고 통찰을 얻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체험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메마름은 계속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계들은 명확하고 뚜렷하게 구분되 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다른 곳으로 겹쳐지는 단계로 정의하고 싶다. 통찰을 얻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감성 적으로 다가가 어느 때인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 지게 될 것이다. 비록 감성적인 것이 지배적인 때라도 통 찰의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이 단계들을 정확하게 구분 지으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아 는 게 중요하다. 감성의 단계가 하느님께 말하는 것과 하 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와 같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감성적 기도라고 말할 때는 우리의 기도가 더 경건하 고 느낌이 강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고 짧은 성경 구절만으로도 오래 지속될 때를 의미한다. 내가 기도생활 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성경 의 많은 페이지를 계속 읽을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 주 짧은 몇 줄을 읽어도 기도하기에 충분하다.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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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겠다는 생각 등등, 긍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영적독서

그래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

하느님 체험하기

다. 경험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배운 교훈입니다. 같은 혜택을 기대하면서도 싼 비행기표를 바랐던 것이 잘못이

토마스 그린 신부

었습니다. 그래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서비스를 받으면서 스스로를 ‘싼 존재’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정도의 서비스를 원한다면 그만한 비용을 요구할 것이 고, 싼 비행기표는 정상적인 가격인 것입니다. 싼 비행기표. 우리의 영적 영역을 경제논리나 잣대로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많이 헌금 했으니 복을 많이 받는다는 생각은 결코 동의할 수 없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진보를 위해서는 지 불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지불하셨던 당신의 수난과 죽음. 나의 목숨도 그렇고 나 의 영적인 가치도 결코 싼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2 부 앎에서 사랑하기로 하느님의 실재: 관상기도를 위한 준비 예수회의 윌리엄 콘리 신부는 영적 지도의 목적은 관 상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지도자의 기본적이고 중 심적인 역할은 관상기도를 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콘리 신부가 의미하는 관상기도는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 거나 환시를 보거나 신비스런 소리를 듣거나 주변에 장미 가 없는데도 장미 향기를 맡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십자

정상적으로 지불해야 할 몫도 결코 작지는 않을 것입니

가의 성 요한이 주장하듯 진정한 관상은 초자연적인 현

다. 이를 간과함으로써 스스로를 ‘싼 것’으로 만들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관상은 예수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실재가 되는 순간,

캄보디아에서 이경용 드립니다.

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콘리 신부가 말하는 하느님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실재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 다. 또한 그는 영적지도는 실제로 관상 전과 관상 후의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관상 전, 즉 하느 님이 피정자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기 이전 단계의 사람 을 영적지도하는 지도자의 역할은, 주님을 가리키던 세례 자 요한처럼 지도를 받는 자가 어디쯤 있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든가 이미 만났다거나 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피정자가 일단 관상기도가 되면, 즉 하느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시게 되면,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달라 지게된다. 체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체험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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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가 되어야한다. 거짓 소리가 있기 때문에 해설자가 필

는 수동성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감정적 기도에 자연히

요하다. 하느님인 듯이 소리 내는 악마가 있고 예수 그리

있는 능동성도 있다. 감정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

스도를 흉내 내려는 자도 있다. 사도 바오로가 자주 강조

대로 다시 한 번 만남을 가지려고 체험의 분위기를 만들

하듯이 선을 가장한 악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 전과

거나 결심을 굳게 하고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행위를

관상 후의 영적지도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한다.

종종 아주 로맨틱한 사람들은 그들 환상 속에서 자 신만의 하느님을 만들어내고 만나지도 않은 자신의 이미

26

하느님께 내어드리기를 배우기

지로 만들어 낸 신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한다.

사람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 더욱 의존적으로 됨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인간에

에도 여러 면에서 아직 상당히 서로를 조종하려 든다. 이

대한 사랑이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든 더 현실적인 사

것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이 근본적으로 욕구이기 때문이

랑을 말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위한 힘든 작업을 해서

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성으로 체험할 때 여지없이 하느님

확고해지고 우리 발이 굳건히 땅을 디디고 우리 마음이

을 조종하려 들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을 만들어

열정으로 타오르면 내가 아는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 자신

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감성이 욕구이기 때문

을 드러내신다.

이다. 그러므로 감성에 관해 직시하여야 한다. 우리의 감

흥미롭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즉 하느님이 개인적

성은 자주 조작될 수 있고 이러한 일은 실재하는 그분,

으로 실재하실 때 기도는 더 수동적이며 다소 덜 능동적

우리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 할 때

이 된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실제로 존재하게 되고 내게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 이상, 아니 사실은

능동적이며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각본을 쓰고 내가 연

그만큼도 하느님을 지배할 수가 없다.

극을 창조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이 단계에서 주님은 좌지우지하고 조작하려는 우리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시작과 끝 그리고 주인

시도를 점차로 없애신다. 감성적 기도 단계에서까지도 상

공을 통제하는 나는 전적으로 능동적이고 조종할 수 있

황을 조정하려는 우리의 시도, 우리의 느낌대로 하려는

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내게 실재가 되면

시도, 감정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그치게 하셔서 점차로

피할 수 없이 나는 더 수용적이 되는데 내 친구의 기분

좌절하게 된다. 사물을 조정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점차로

상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일단

그치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가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시게 되면 우리는 더 수용적

침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키기 시작하는 주님의 면

이고 조종을 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가 성장하면 하

밀한 계획이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마음을 고

느님은 ‘말하기에서 듣기’의 체험으로 점차 우리를 옮아가 게 하신다.

요하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기도가 더 감성적인 단 계에서 잠심한다는 것은 기도의 개념과 틀, 즉 수련 초

그러나 감성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능동적이

기에 배웠던 공식적인 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인

다. 이 기도에는 한편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의 수용성 또

데 성숙의 둘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고요하 27


설자가 되어야한다. 거짓 소리가 있기 때문에 해설자가 필

는 수동성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감정적 기도에 자연히

요하다. 하느님인 듯이 소리 내는 악마가 있고 예수 그리

있는 능동성도 있다. 감정적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

스도를 흉내 내려는 자도 있다. 사도 바오로가 자주 강조

대로 다시 한 번 만남을 가지려고 체험의 분위기를 만들

하듯이 선을 가장한 악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 전과

거나 결심을 굳게 하고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행위를

관상 후의 영적지도는 크게 달라져야 한다.

한다.

종종 아주 로맨틱한 사람들은 그들 환상 속에서 자 신만의 하느님을 만들어내고 만나지도 않은 자신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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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내어드리기를 배우기

지로 만들어 낸 신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한다.

사람들의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 더욱 의존적으로 됨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인간에

에도 여러 면에서 아직 상당히 서로를 조종하려 든다. 이

대한 사랑이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든 더 현실적인 사

것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이 근본적으로 욕구이기 때문이

랑을 말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위한 힘든 작업을 해서

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성으로 체험할 때 여지없이 하느님

확고해지고 우리 발이 굳건히 땅을 디디고 우리 마음이

을 조종하려 들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을 만들어

열정으로 타오르면 내가 아는 하느님은 결국 하느님 자신

내는 방법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감성이 욕구이기 때문

을 드러내신다.

이다. 그러므로 감성에 관해 직시하여야 한다. 우리의 감

흥미롭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즉 하느님이 개인적

성은 자주 조작될 수 있고 이러한 일은 실재하는 그분,

으로 실재하실 때 기도는 더 수동적이며 다소 덜 능동적

우리를 만나시는 하느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 할 때

이 된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실제로 존재하게 되고 내게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 이상, 아니 사실은

능동적이며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각본을 쓰고 내가 연

그만큼도 하느님을 지배할 수가 없다.

극을 창조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이 단계에서 주님은 좌지우지하고 조작하려는 우리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시작과 끝 그리고 주인

시도를 점차로 없애신다. 감성적 기도 단계에서까지도 상

공을 통제하는 나는 전적으로 능동적이고 조종할 수 있

황을 조정하려는 우리의 시도, 우리의 느낌대로 하려는

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이가 개인적으로 내게 실재가 되면

시도, 감정을 조종하려는 시도를 그치게 하셔서 점차로

피할 수 없이 나는 더 수용적이 되는데 내 친구의 기분

좌절하게 된다. 사물을 조정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점차로

상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일단

그치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가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실재하시게 되면 우리는 더 수용적

침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키기 시작하는 주님의 면

이고 조종을 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가 성장하면 하

밀한 계획이다. 앞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마음을 고

느님은 ‘말하기에서 듣기’의 체험으로 점차 우리를 옮아가 게 하신다.

요하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기도가 더 감성적인 단 계에서 잠심한다는 것은 기도의 개념과 틀, 즉 수련 초

그러나 감성기도를 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능동적이

기에 배웠던 공식적인 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인

다. 이 기도에는 한편으로 누군가를 만날 때의 수용성 또

데 성숙의 둘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고요하 27


지 않게 만드는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앉히는 단계에서처럼, 정화는 더욱더 하느님의 일이고 우

못하고 초기에 배운 기도대로 하려고 애쓰며 평생을 보낸

리가 해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

다. 감성적 기도단계에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주님 이 자유롭게 오고 ���심을 방해하는 모든 기술과 모든 틀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과 모든 개념들을 놓아 버리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커다란 자유를 체험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면 관계 자체는 그에 맞도 록 나아가야 한다. 이미 조작되고 예상된 구조로 관계를 조정할 수는 없다. 어떤 관계든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고요하게 된다는 것은 그 상황에 적절히 맞도 록 기도의 틀과 기술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기 대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 어떤 때는 기도의 틀 을 정말 무시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초보자 일 때 배운 기도의 형식을 무시한다면 어쩌면 나는 주제 넘고 성의가 부족한 것이고 헤맬지도 모른다. 반면에 내 가 만약 형식에 매달리면 하느님이 관장하시는 것을 방해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도의 처음 10분 내 지 15분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 시간 이 지나도 자신이 잠심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이미 익숙한 기도 방법에 따라 기도하거나 성찰하면 될 것이다. 하느님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관장하 실 기회를 먼저 드렸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주도 권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방해하거나 제한하지 않도록 흘 러가게 맡기는 것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성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정화는 더 욱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정화는 실제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써 변화의 단계인 셋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은 기본적으로 정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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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게 만드는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앉히는 단계에서처럼, 정화는 더욱더 하느님의 일이고 우

못하고 초기에 배운 기도대로 하려고 애쓰며 평생을 보낸

리가 해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든다.

다. 감성적 기도단계에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주님 이 자유롭게 오고 가심을 방해하는 모든 기술과 모든 틀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과 모든 개념들을 놓아 버리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커다란 자유를 체험한다. 일단 하느님을 알기 시작하면 관계 자체는 그에 맞도 록 나아가야 한다. 이미 조작되고 예상된 구조로 관계를 조정할 수는 없다. 어떤 관계든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고요하게 된다는 것은 그 상황에 적절히 맞도 록 기도의 틀과 기술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기 대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 어떤 때는 기도의 틀 을 정말 무시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초보자 일 때 배운 기도의 형식을 무시한다면 어쩌면 나는 주제 넘고 성의가 부족한 것이고 헤맬지도 모른다. 반면에 내 가 만약 형식에 매달리면 하느님이 관장하시는 것을 방해 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기도의 처음 10분 내 지 15분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고 그 시간 이 지나도 자신이 잠심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이미 익숙한 기도 방법에 따라 기도하거나 성찰하면 될 것이다. 하느님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관장하 실 기회를 먼저 드렸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주님의 주도 권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방해하거나 제한하지 않도록 흘 러가게 맡기는 것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성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정화는 더 욱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정화는 실제로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써 변화의 단계인 셋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은 기본적으로 정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 28

29


영적독서

많은 피정자들이 진정한 감성적 기도와 기도라는 환

하느님 체험하기

상의 차이에 대해 질문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떤 사

토마스 그린 신부

만난 건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다음과

람이 그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을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것 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거는 우리가 그분을 원할 때는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앞의 1부와 2부에서 기도의 기초 개념으로 만남, 성 장 그리고 관계를 논의하였다. 그것들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기본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로 말하는 기도에서 듣는 기도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기도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일어나는 기도로 이끄신다는 것을 말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에는 기본적인 세 단계 가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첫째 단계는 ‘알아가는’ 단계로 우리가 매우 능동적으로 묻고 탐구하는 단계이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을 연구하고 삶에 관해 의문을 가지며 하느님은 어떤 분 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능동적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기도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단계로

실이다.”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분은 우리가 기 대하지 않을 때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 리가 만약 각본을 쓴다거나 공상을 한다거나 하면, 우리 가 원할 때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수도꼭지 를 트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대로 하느님을 오고 가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말 하느님이시고 내 자신의 상상이 아 니라는 것의 가장 좋은 증거는 내가 마음대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 안에서는 하느님은 조작 을 거부하시고 어떤 기술 혹은 기교를 부려도 내가 꼭 원 할 때 오시지 않는다. 감성적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실제로 체험하기 시작하 면 기도는 더욱 수동적이 된다. 이는 하느님이 더욱더 관 계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도 매우 적극적이

기도가 훨씬 감성적이 된다. 나는 이것을 ‘수동적 기도’와 ‘능동적 기도’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더 감성적 기도 단

고 우리의 감성과 결심을 조작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기

계로 볼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즉 말하는 기도에서 듣는

에 같은 장소에 다시 가려고 한다. 만약에 해질 무렵 나

기도 사이로 가는 다리로 볼 수 있다. 이 ‘앎에서 사랑으 로’ 넘어가는 단계인 감성적 기도의 핵심은 정확하게 우 리가 상상해서 만들어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는 인격적 실재로써의 하느님 혹은 예수님 체험이다. 24

안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원하지 않을 때는 계신다는 사

도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게 되면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 무 밑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기도를 하다가 하느님 체 험을 했으면, 다음 날도 같은 시간, 같은 나무 밑에 앉아 똑같은 형태로 다리를 꼬고 앉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 한 것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감정이 많이 개입되는 감성 적 기도는 적극적이고도 수동적이며, 또 수용적이면서 조 25


영적독서

많은 피정자들이 진정한 감성적 기도와 기도라는 환

하느님 체험하기

상의 차이에 대해 질문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떤 사

토마스 그린 신부

만난 건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을 때 다음과

람이 그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정말 하느님을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 자신이 아니고 하느님이라는 것 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거는 우리가 그분을 원할 때는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앞의 1부와 2부에서 기도의 기초 개념으로 만남, 성 장 그리고 관계를 논의하였다. 그것들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기본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로 말하는 기도에서 듣는 기도로,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기도에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일어나는 기도로 이끄신다는 것을 말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도에는 기본적인 세 단계 가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첫째 단계는 ‘알아가는’ 단계로 우리가 매우 능동적으로 묻고 탐구하는 단계이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을 연구하고 삶에 관해 의문을 가지며 하느님은 어떤 분 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능동적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기도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단계로

실이다.”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분은 우리가 기 대하지 않을 때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 리가 만약 각본을 쓴다거나 공상을 한다거나 하면, 우리 가 원할 때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수도꼭지 를 트는 것처럼 우리의 의지대로 하느님을 오고 가게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말 하느님이시고 내 자신의 상상이 아 니라는 것의 가장 좋은 증거는 내가 마음대로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기도 안에서는 하느님은 조작 을 거부하시고 어떤 기술 혹은 기교를 부려도 내가 꼭 원 할 때 오시지 않는다. 감성적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실제로 체험하기 시작하 면 기도는 더욱 수동적이 된다. 이는 하느님이 더욱더 관 계를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도 매우 적극적이

기도가 훨씬 감성적이 된다. 나는 이것을 ‘수동적 기도’와 ‘능동적 기도’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더 감성적 기도 단

고 우리의 감성과 결심을 조작하려고 계속 노력한다. 기

계로 볼 수 있다고 제시하였다. 즉 말하는 기도에서 듣는

에 같은 장소에 다시 가려고 한다. 만약에 해질 무렵 나

기도 사이로 가는 다리로 볼 수 있다. 이 ‘앎에서 사랑으 로’ 넘어가는 단계인 감성적 기도의 핵심은 정확하게 우 리가 상상해서 만들어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는 인격적 실재로써의 하느님 혹은 예수님 체험이다. 24

안계시고 우리가 그분을 원하지 않을 때는 계신다는 사

도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게 되면 그 다음에는 같은 시간 무 밑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기도를 하다가 하느님 체 험을 했으면, 다음 날도 같은 시간, 같은 나무 밑에 앉아 똑같은 형태로 다리를 꼬고 앉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 한 것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감정이 많이 개입되는 감성 적 기도는 적극적이고도 수동적이며, 또 수용적이면서 조 25


종적이기도 하다는 요점을 집약해서 말해준다. 그런 이유

정화는 기도의 삶에, 어쩌면 우리의 나머지 생애에 가장

에서 감성적인 기도는 단지 말하고 청하는 청원 기도자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훨씬 더 정화시

매우 능동적인 기도와 관상으로 들어간 사람의 매우 수

키는 변화로, 실질적으로 이 지상에서 우리의 삶 전체는

동적인 기도 사이의 일종의 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기도의 삶이 주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수 있다.

성화의 과정이다. 감성적 단계인 둘째 단계를 통해 정화는 더욱더 중요

관상: 정화되는 변화

해지는데, 이는 성화가 이 시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인 관상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이다. 둘째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체험은 우리를 변화

단계에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시킨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한다. 즉 사람을 만나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걱정거리나 외적인 방해

는 것이 다르고 일하는 것도 다르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들로부터 자신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정화로 인해 이 시기의 기도는

데, 이때는 가슴이 많이 열려있고 분심은 별로 방해가 되

훨씬 더 하느님의 일이고 내가 하는 것은 줄어든다. 고행,

지 않기 때문이다. 잠심은 기도의 틀을 개의치 않고 기술

성찰, 고해성사와 같은 행동들이 첫째 단계에서는 필수적

들을 놓아 버리고, 상황을 지배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하

인 것이었으나 이 셋째 단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다르게 보

느님을 조종하려고 하는 방법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알고 교리와 어느 정도의

그런 형태의 잠심이 여기서는 필요한 것이다. 즉 사물을

윤리신학을 알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지배하려는 본능을 고요하게 하고, 친숙한 것에 대한 갈

이 표준에 맞춰서 점검하고 고해성사를 하든지 양심성찰

망,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위험보다는 늘 친숙한 길을

을 하고 우리자신을 평가한다. 이 초기 단계에서 평가를

택하려는 욕구를 가라앉히는 것 등에서 고요해진다. 그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주시하라. 만일 하

리고 또 이 단계에서는 성경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바뀌

느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고 깊어져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는 대신, 하느님이 실제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를

주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한다. 다음

발견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아주 다를 것이다. 매일

단계들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성경에 꽤 친숙해진다. 성경

저녁 양심성찰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내 자신을 평가하는

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되고, 우리가 알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하루를 보셨는가를 알

있는 하느님에 대해 복음사가들이 말하는 것들을 들음으

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루를 지낸 것을 어떻게 보

로써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도록 움직여진다. 그래서 성경

는 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은 초기에서처럼 묵상이나 관상보다는 기억하는 연습으 로 더 이용된다.

26

기도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정기적으로

어떤 면에서 성장의 셋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앞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오면서 했던 그

의 단계가 넘어오고 깊어지는 것이며, 그런 것으로 보아

많은 고해성사 때 하느님이 무엇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27


종적이기도 하다는 요점을 집약해서 말해준다. 그런 이유

정화는 기도의 삶에, 어쩌면 우리의 나머지 생애에 가장

에서 감성적인 기도는 단지 말하고 청하는 청원 기도자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기도는 우리 자신을 훨씬 더 정화시

매우 능동적인 기도와 관상으로 ���어간 사람의 매우 수

키는 변화로, 실질적으로 이 지상에서 우리의 삶 전체는

동적인 기도 사이의 일종의 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기도의 삶이 주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수 있다.

성화의 과정이다. 감성적 단계인 둘째 단계를 통해 정화는 더욱더 중요

관상: 정화되는 변화

해지는데, 이는 성화가 이 시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셋째 단계인 관상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이다. 둘째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체험은 우리를 변화

단계에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시킨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기 시작한다. 즉 사람을 만나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걱정거리나 외적인 방해

는 것이 다르고 일하는 것도 다르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들로부터 자신을 고요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정화로 인해 이 시기의 기도는

데, 이때는 가슴이 많이 열려있고 분심은 별로 방해가 되

훨씬 더 하느님의 일이고 내가 하는 것은 줄어든다. 고행,

지 않기 때문이다. 잠심은 기도의 틀을 개의치 않고 기술

성찰, 고해성사와 같은 행동들이 첫째 단계에서는 필수적

들을 놓아 버리고, 상황을 지배하기 위한 모든 방법과 하

인 것이었으나 이 셋째 단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다르게 보

느님을 조종하려고 하는 방법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알고 교리와 어느 정도의

그런 형태의 잠심이 여기서는 필요한 것이다. 즉 사물을

윤리신학을 알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지배하려는 본능을 고요하게 하고, 친숙한 것에 대한 갈

이 표준에 맞춰서 점검하고 고해성사를 하든지 양심성찰

망,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위험보다는 늘 친숙한 길을

을 하고 우리자신을 평가한다. 이 초기 단계에서 평가를

택하려는 욕구를 가라앉히는 것 등에서 고요해진다. 그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주시하라. 만일 하

리고 또 이 단계에서는 성경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바뀌

느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고 깊어져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는 대신, 하느님이 실제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를

주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성경을 이용한다. 다음

발견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아주 다를 것이다. 매일

단계들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성경에 꽤 친숙해진다. 성경

저녁 양심성찰 안에서 해야 할 일은 내 자신을 평가하는

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되고, 우리가 알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하루를 보셨는가를 알

있는 하느님에 대해 복음사가들이 말하는 것들을 들음으

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루를 지낸 것을 어떻게 보

로써 마음은 주님을 사랑하도록 움직여진다. 그래서 성경

는 것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은 초기에서처럼 묵상이나 관상보다는 기억하는 연습으 로 더 이용된다.

26

기도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정기적으로

어떤 면에서 성장의 셋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앞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오면서 했던 그

의 단계가 넘어오고 깊어지는 것이며, 그런 것으로 보아

많은 고해성사 때 하느님이 무엇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27


지 물어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해 보았을 때 사람들의 대 답은 늘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하느님께 내가 무엇을 고백하기를 원하시는지 물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훌륭하게 듣는 자 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건 퍽 신선한 충격이 될 것

아프리카 소말리아

난민캠프 돕기

이다. 그러므로 능동성과 수동성 간에 움직임이 있고 말 하기에서 귀 기울이기 간에 움직임이 있으며 그 움직임은 정화를 수반한다. 정화는 그릇을 비운다는 의미에서 부

예수회 심유환 신부님이 일하고 있는 소말리아 난민캠

정적인 측면이고, 반면에 변화는 새 삶으로 채우기 위해

프는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 1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모여

그릇을 연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이다. 이 둘은 함

살다 보니 가족이나 공동체 그리고 소속집단으로부터 폭

께 간다.

력을 당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많은데 이들을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보호하는 임시피난처를 신부님이 소속되어 있는 JRS(예수 회 난민 봉사단)에서 맡고 있습니다. 특히 신부님은 이들 난민의 미래를 위해 교육 및 장학 사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전기가 없는 난민캠프에서 학생들 이 밤에도 공부할 수 있도록‘태양열 랜턴’을 보급하고 있 고, 특히 장애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선발하여 시내의 수녀 원에서 운영하는 기술학교에 보내 이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장학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들 모두를 돕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원자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후원자 여러분들의 소중한 나눔이 아프리카 소말리아 난민들의 미래를 밝혀줄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도움을 주 실 분들께서는 기쁨나눔재단의 아프리카 후원계좌로 보내주 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기쁨나눔재단 아프리카 후원계좌 계좌번호: 우리은행 1006-501-342107 예 금 주: (재)기쁨나눔 문 의: 28

29


영적독서

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느님께서 저를 완성

하느님 체험하기

시켜 주셔야 해요.” 이만해도 좋지만, 아직도 기본적으로 는 자기중심적이고 충분히 성장한 것은 아니다.

토마스 그린 신부

사랑은 성장하는 것이며, 스물다섯에 견실하고 적절했 던 것이 일흔다섯에도 적절하지는 않다. 성숙함이 있어야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관상기도: 성화 지금까지 성장의 세 단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느 님을 알기, 하느님 체험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으 로 변화하기이다. 마지막 단계인 셋째 단계를 좀 더 자세 히 말하자면 이 단계는 사랑하기(체험과 감성)로부터 진 실로 사랑하기(관상)로 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변화 혹은 성화의 단계로 불릴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된다.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여, “너희가 하느님임을 모르느 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인 성화는 거의 우 리의 이해력이나 상상력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은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이 라고 말했는데 그 특성을 더 설명하자면 그것은 깊고 성 숙된 사랑과, 스물다섯 먹은 남녀가 “당신이 나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할래요”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라 하겠다. “당신이 나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 키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할래요”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자 기중심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나는 하느님이 나를 충족 시켜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해요. 나는 가르멜의 관 상가가 되고 싶어요. 왜냐하면 하루 종일 기도하는 것이 나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것 도 성장한 것이긴 하다. “제 힘으로는 저 자신을 실현시 24

한다. 젊은이가 “당신이 나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사랑해” 라고 했다면 일흔다섯쯤 되어서는 “당신을 사랑하오. 당 신이 만족하니 그것이 나의 행복이요. 당신의 기쁨이 나 의 기쁨이야. 그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고”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 행복을 찾으려면 나한테서 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나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 생 각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이며,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하 느님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쁨을 드 리게 되는 것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기도의 셋째 단계는 기본적으로는 아직까지 감성적이 고 자기중심적인 영성에서, 좀 더 타인 중심적인 영성으 로 옮아가는 단계이다. 우리의 이타적인 감정조차 감정만 의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다. “나는 봉사함으로 써 내가 만족한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칭찬받기 때문에 또는 스스로 의로움의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에 봉사합니 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본적인 관심이 느낌이나 감정이 라면 거기엔 어느 정도 이기적인 자아가 있다. 우리 사랑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자아를 주님께서 정 화시켜주신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 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하게 셋째 단계의 목적이다. 기도의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첫째 25


영적독서

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느님께서 저를 완성

하느님 체험하기

시켜 주셔야 해요.” 이만해도 좋지만, 아직도 기본적으로 는 자기중심적이고 충분히 성장한 것은 아니다.

토마스 그린 신부

사랑은 성장하는 것이며, 스물다섯에 견실하고 적절했 던 것이 일흔다섯에도 적절하지는 않다. 성숙함이 있어야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관상기도: 성화 지금까지 성장의 세 단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느 님을 알기, 하느님 체험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으 로 변화하기이다. 마지막 단계인 셋째 단계를 좀 더 자세 히 말하자면 이 단계는 사랑하기(체험과 감성)로부터 진 실로 사랑하기(관상)로 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변화 혹은 성화의 단계로 불릴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된다.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여, “너희가 하느님임을 모르느 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인 성화는 거의 우 리의 이해력이나 상상력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은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이 라고 말했는데 그 특성을 더 설명하자면 그것은 깊고 성 숙된 사랑과, 스물다섯 먹은 남녀가 “당신이 나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할래요”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라 하겠다. “당신이 나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 키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할래요”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자 기중심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나는 하느님이 나를 충족 시켜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해요. 나는 가르멜의 관 상가가 되고 싶어요. 왜냐하면 하루 종일 기도하는 것이 나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것 도 성장한 것이긴 하다. “제 힘으로는 저 자신을 실현시 24

한다. 젊은이가 “당신이 나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사랑해” 라고 했다면 일흔다섯쯤 되어서는 “당신을 사랑하오. 당 신이 만족하니 그것이 나의 행복이요. 당신의 기쁨이 나 의 기쁨이야. 그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고”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 행복을 찾으려면 나한테서 나가야 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나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 생 각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시는 것이며,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하 느님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쁨을 드 리게 되는 것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기도의 셋째 단계는 기본적으로는 아직까지 감성적이 고 자기중심적인 영성에서, 좀 더 타인 중심적인 영성으 로 옮아가는 단계이다. 우리의 이타적인 감정조차 감정만 의 수준에서는 어느 정도 이기적이다. “나는 봉사함으로 써 내가 만족한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칭찬받기 때문에 또는 스스로 의로움의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에 봉사합니 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본적인 관심이 느낌이나 감정이 라면 거기엔 어느 정도 이기적인 자아가 있다. 우리 사랑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자아를 주님께서 정 화시켜주신다.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한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행 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하게 셋째 단계의 목적이다. 기도의 삶을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첫째 25


단계에 1년 혹은 2년을 보내고, 둘째 단계로는 3,4년(어

고, 50년의 성장을 거치면서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을 찾

쩌면 5년)을 보내지만, 셋째 단계는 아마 50년쯤 걸리리

는 것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진실로 사랑하기

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기도

로 인도되어 갈 때,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계가 주된 단계가 된다.

분은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장하려는 열망이 너무 지나쳐서 하느님을

어둠 속에서도 편안함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둘째 단계 또는 첫째

러한 것은 단지 텅 비움을 위해, 머리를 비우는 법 등을

단계에서 50년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배우는 동양의 훌륭한 전통과 어떤 유형의 현대 수련 방

어딘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장

법에서 내가 직면하는 문제다. 나는 그것이 하느님을 뛰

한다면, 셋째 단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넘어 앞서려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

셋째 단계에서 기도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 영적인 메

느님께서 하실 때까지 스스로를 비우지 말아야 한다. 그

마름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영적 어둠도 마찬가지다. 우

리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할 때는 저항하지 말라.

리는 어둠 속에서 편안하게 머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신비이다.

어두컴컴한 성당에 들어갈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의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게 하

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주 불안하다가도 어둠에 익숙

라. 생각을 비우지 말라. 선이라든가 요가를 몰랐던 모든

해지면 그곳이 편안할 수 있다. 좀 전에 불안했다는 것조

위대한 영성가들과 서구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스승들

차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적인 어둠이나 메마름

모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편안해 질

주장한다. 즉, 하느님께서 이끄실 때까지 능동적이어야 한

수 있다. 몇 분 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

그리고 좋은 영적 지도에 의해서. 이 단계에서 우리 기도

기 시작하면, 비록 우리 대부분은 ���것이 이상하고 어떻

의 삶이 올라가는 것이 내려가는 것이며, 검은 것은 흰

게 해야 좋을지 몰라 버티기는 하겠지만, 저항하지 말아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의 반대로 될 수

야 한다.

있기 때문에 좋은 영적 지도를 받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

우리가 물에 빠지게 되면 하느님께서 건져 올리실 때

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좋은 영적 지도자는

를 기다리면서 자기 자신이 물에 가라앉도록 놔두지는 않

아니며, 비록 기도에 관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는다.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헤엄치고, 주님이 이끄셔서

이 도움은 되지만, 보통 개인적인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건지실 때, 그때는 첨벙거리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

이때 지도자는 증세를 읽고 징후를 점검하여 어떤 일이

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까지는 겸손하게 기본적인 기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의사 같은 전문적인 진

방법으로 기도를 하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면 그렇게 하

단이 필요하다.

시도록 기꺼이 내맡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는 것으로 진전하 26

뛰어넘어 앞서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27


단계에 1년 혹은 2년을 보내고, 둘째 단계로는 3,4년(어

고, 50년의 성장을 거치면서 자신을 충족시키는 것을 찾

쩌면 5년)을 보내지만, 셋째 단계는 아마 50년쯤 걸리리

는 것으로부터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진실로 사랑하기

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기도

로 인도되어 갈 때,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을 이루시는

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이 단계가 주된 단계가 된다.

분은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장하려는 열망이 너무 지나쳐서 하느님을

어둠 속에서도 편안함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둘째 단계 또는 첫째

러한 것은 단지 텅 비움을 위해, 머리를 비우는 법 등을

단계에서 50년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배우는 동양의 훌륭한 전통과 어떤 유형의 현대 수련 방

어딘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장

법에서 내가 직면하는 문제다. 나는 그것이 하느님을 뛰

한다면, 셋째 단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넘어 앞서려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

셋째 단계에서 기도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 영적인 메

느님께서 하실 때까지 스스로를 비우지 말아야 한다. 그

마름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영적 어둠도 마찬가지다. 우

리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할 때는 저항하지 말라.

리는 어둠 속에서 편안하게 머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신비이다.

어두컴컴한 성당에 들어갈 때가 있는데, 처음에는 의자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게 하

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주 불안하다가도 어둠에 익숙

라. 생각을 비우지 말라. 선이라든가 요가를 몰랐던 모든

해지면 그곳이 편안할 수 있다. 좀 전에 불안했다는 것조

위대한 영성가들과 서구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스승들

차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영적인 어둠이나 메마름

모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고

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편안해 질

주장한다. 즉, 하느님께서 이끄실 때까지 능동적이어야 한

수 있다. 몇 분 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

그리고 좋은 영적 지도에 의해서. 이 단계에서 우리 기도

기 시작하면, 비록 우리 대부분은 그것이 이상하고 어떻

의 삶이 올라가는 것이 내려가는 것이며, 검은 것은 흰

게 해야 좋을지 몰라 버티기는 하겠지만, 저항하지 말아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의 반대로 될 수

야 한다.

있기 때문에 좋은 영적 지도를 받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

우리가 물에 빠지게 되면 하느님께서 건져 올리실 때

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좋은 영적 지도자는

를 기다리면서 자기 자신이 물에 가라앉도록 놔두지는 않

아니며, 비록 기도에 관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는다.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헤엄치고, 주님이 이끄셔서

이 도움은 되지만, 보통 개인적인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건지실 때, 그때는 첨벙거리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

이때 지도자는 증세를 읽고 징후를 점검하여 어떤 일이

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까지는 겸손하게 기본적인 기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의사 같은 전문적인 진

방법으로 기도를 하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면 그렇게 하

단이 필요하다.

시도록 기꺼이 내맡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는 것으로 진전하 26

뛰어넘어 앞서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이

번역_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27


시소폰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빈나이 신부는 캄 보디아에서 서품을 받은 캄보디아 교구 신부입니다. 학 생들과 드린 미사에서 빈나이 신부는 물신과 달신에게 감사하는 행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

영적독서

하느님 체험하기 토마스 그린 신부

다, 물과 달을 누가 만들었는가라고. 학생들에게, 우리 가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은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별로 느낌이 없는 듯 합니다. 자신이 매순간 감각으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물 과 달,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보이지 않을 하느님. 사실 사람들에게 창조주보다 도움이 될 창조물에 더 쉽게 마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음이 가나 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도 매일 나에게 일어나는 필요에 더 마음이 가 있는 우리들입니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기

다. 일상의 것이 나쁘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은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

그 뿌리에 닿아있는 하느님과 나의 삶 속에서 함께 하

니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만나기로 하셨다

는 것이 필요하다는 느낌입니다.

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람을 사진이나 책을 통해서 아는 것과 직접 만나는 것을 통해 아는 것과의 차이와 같다.

야밤에 본 물축제의 서민들 놀이 때문에 생각이 많

하느님께서 우리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를 원 하시는 때가 온다. 어려운 점은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시지

아졌습니다.

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하느님을 캄보디아에서 이경용 드립니다.

만날 수는 없다. 우리의 이해력도, 상상력도 오직 유한한 것만을 파악할 수 있다. 하느님이 직접 우리의 영혼을 만 나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한한 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에 멍해지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 이 표현하였다. “그것은 대양을 물잔에 넣으려는 것과 같 다. 유리 물컵에 말이다. 5대양의 물을 물잔에 부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잔에 하느님을 담을 수는 없다. 하느님 은 대양이고 우리의 마음은 물잔과 같다. 그 안에 도저 히 맞춰 넣을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직접 만나 기 시작하면 우리의 상상력, 이해력, 감각은 무너져 버린

24

25


다. 그렇기 때문에 어둔 밤, 마른 샘, 무지의 구름이나 믿

서 둘째 단계인 느낌으로 옮아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셋

음의 기도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표현들은 실

째 단계에서 기도는 주로 의지에 자리하게 되고 느낌이

제로 하느님이 영혼을 직접 만나시는 때에 쓰는 말이다.

나 머리는 비워지게 된다. 이해력과 상상력은 우리 의지

그러나 의지만은 예외로 잠재적이나마 인간의 능력 가운

와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데 무한하다. 의지는 무한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유

해력과 상상력은 마치 어른들의 파티에서 주의를 끌고 싶

일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다른 능력들, 곧 상상

어 하는 아이들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일찍 자러 보내는

력, 이해력, 감각 등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것들은 도움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의 대화를 망쳐놓기 때문이

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도는 매우 메마르고 공허해 보인

다. 하느님과 우리 의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

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이미지나 그림을 통해서 만나지

해력과 상상력은 파악할 수 없으므로 그것들에는 큰 의

않으시고, 그들이 파악할 수 없는 직접 만남을 가지신다.

미가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일어난다. 첫째,

그래서 하느님과 의지의 참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상이란 단어는 너무나 많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기

‘잠자리’로 보내진다. 잠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해력과 상상력은 쉬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때문에 혼동되는 용어이다. 나는 관상을 좀 더 수동적인

께서 이들을 쉬게 하셔서 의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의미로 이해하며,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의미했던 것 이라고 생각한다. 관상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해력과 상상력을 ‘잠 자게’ 하는 것은 수동적 기도생활의 초기에 더 자주 일어

이 직접 우리와 만나시고 모든 것을 이끄신다. 그러므로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능력은 무너지고 기도하는데 더 이상 도움이

점차 하느님께서는 이해력과 상상력을 깨어 있도록 놓아

되지 않는다.(이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두시는데, 비록 이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제

불렀는데, 우리의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더 이상 혼자 무

외되더라도 말이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계속 쉬게 하신다

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이 안 계 신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과 이미지에 익숙

두 번째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우에는 주님

해져 있는데 이제 그것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기 때문

이 상상력과 이해력을 쉬게 하시는 경우 우리가 그저 태

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 까

만하거나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잘 되고

닭에 좋은 영적 지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있는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 두 번째 경우는 하느님이 이

단계의 초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혼자서

해력과 상상력을 그대로 깨어있게 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는 결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모욕 하는 것 같기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어른되기-의지 우리의 기도가 성장하면 기도는 첫째 단계인 머리에 26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기 도생활의 이 단계에서 분심을 무시하는 것이 분심과 싸 27


다. 그렇기 때문에 어둔 밤, 마른 샘, 무지의 구름이나 믿

서 둘째 단계인 느낌으로 옮아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셋

음의 기도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표현들은 실

째 단계에서 기도는 주로 의지에 자리하게 되고 느낌이

제로 하느님이 영혼을 직접 만나시는 때에 쓰는 말이다.

나 머리는 비워지게 된다. 이해력과 상상력은 우리 의지

그러나 의지만은 예외로 잠재적이나마 인간의 능력 가운

와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데 무한하다. 의지는 무한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유

해력과 상상력은 마치 어른들의 파티에서 주의를 끌고 싶

일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다른 능력들, 곧 상상

어 하는 아이들 같다. 그래서 아이들을 일찍 자러 보내는

력, 이해력, 감각 등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것들은 도움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어른들의 대화를 망쳐놓기 때문이

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도는 매우 메마르고 공허해 보인

다. 하느님과 우리 의지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

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이미지나 그림을 통해서 만나지

해력과 상상력은 파악할 수 없으므로 그것들에는 큰 의

않으시고, 그들이 파악할 수 없는 직접 만남을 가지신다.

미가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중에 하나가 일어난다. 첫째,

그래서 하느님과 의지의 참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상이란 단어는 너무나 많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기

‘잠자리’로 보내진다. 잠자리로 보내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해력과 상상력은 쉬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때문에 혼동되는 용어이다. 나는 관상을 좀 더 수동적인

께서 이들을 쉬게 하셔서 의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의미로 이해하며,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의미했던 것 이라고 생각한다. 관상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해력과 상상력을 ‘잠 자게’ 하는 것은 수동적 기도생활의 초기에 더 자주 일어

이 직접 우리와 만나시고 모든 것을 이끄신다. 그러므로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능력은 무너지고 기도하는데 더 이상 도움이

점차 하느님께서는 이해력과 상상력을 깨어 있도록 놓아

되지 않는다.(이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두시는데, 비록 이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제

불렀는데, 우리의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더 이상 혼자 무

외되더라도 말이다. 하느님께서 이들을 계속 쉬게 하신다

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이 안 계 신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과 이미지에 익숙

두 번째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우에는 주님

해져 있는데 이제 그것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기 때문

이 상상력과 이해력을 쉬게 하시는 경우 우리가 그저 태

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 까

만하거나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잘 되고

닭에 좋은 영적 지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있는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 두 번째 경우는 하느님이 이

단계의 초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혼자서

해력과 상상력을 그대로 깨어있게 하시는 것으로, 우리는

는 결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모욕 하는 것 같기 때문에 큰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어른되기-의지 우리의 기도가 성장하면 기도는 첫째 단계인 머리에 26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기 도생활의 이 단계에서 분심을 무시하는 것이 분심과 싸 27


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기도생활 초 기에는 기도할 때 이해력과 상상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분심과 싸울 필요가 있다. 분심과 씨름하고 집중하도록 분투해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분심과 싸운

오로지 당신만의 영광을 위하여

다면 주님과 일치된 의지는, 마치 집에 손님이 있는 동안 소란스럽게 하는 아이들을 나가 있으라고 야단치는 어머 니처럼 된다. 아이들을 계속 훈계하느라 그녀와 손님 사

주님,

이에는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다. 가끔 어머니가 아이들

보잘것없이 떨어지는 낙엽 하나가

을 무시해 버리면 오히려 아이들이 훨씬 더 말을 잘 듣게

당신의 열매를 맺기 위한 작은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된다. 비록 아이들이 어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소란

저를 그 보잘것없는 낙엽이 되게 하소서.

스럽게 굴더라도 어머니가 모른 체하고 어른들의 대화를 계속해 나가면, 아이들은 진정하고 저희들 스스로 즐기거

주님,

나 조용해진다. 그러나 계속 훈계를 한다면, 엄마의 관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누군가가 패배해야 한다면,

을 끄는 법을 알아채고는 더욱더 무질서하게 된다. 아이

이 몸을 택하여 주시고,

들에게 주의를 기울일수록 행동은 더 엉망이 되는데, 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남김없이 희생될 수 있도록

이들은 관심을 끌고 싶어하고 또 어떻게 하면 관심을 끌

저를 도우소서.

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주님이시여, 세 번째 가능성은 주님과 의지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저를 위해 당신께서 계시지 마옵시고

이해력과 상상력에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면 위안을 받게

당신을 위해 제가 있게 하시어,

된다. 즉 느낌과 이해력, 상상력, 감각에 하느님이 함께하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하여,

시는 충만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넘쳐흐름은 매우 부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제가 있게 하소서.

적인데 우리가 그것을 기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찾아다 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기도의 핵심은

사랑하는 주님이시여,

아니다. 기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의지 안에

제가 원하는 곳에 저를 두지 마옵시고,

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의지를 통해 점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저를 있게 하소서.

차적으로 다른 능력들도 변화시키고 성화하실 것이다.

아멘. 출처 : '기도의 사도직' 기도문 모음

28

29


고 받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 있다

영적독서

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

하느님 체험하기

이었습니다. 하루의 시간을 마치고 그 단체 사람들과 헤어질 때,

토마스 그린 신부

몸이 건장한 학생이 포옹을 해달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 친구의 마음에 무엇인가 남겨져 있었나 봅니다. 언젠가 마주 앉아 그 남겨져 있는 것의 의미에 대해 허심탄회 한 대화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갖가지 상황에 있는 사람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 지만 우리의 기억은 서서히 삶속에 스며듭니다. 그래서

3부 사랑하기에서 진실로 사랑하기로

갖가지 사연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이 너무나 소중합니 다. 맺음말 기도가 메마르게 느껴지는 셋째 단계에서 고요에 이 캄보디아에서 이경용 드립니다.

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요에 이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고 자동적으로 빠르고 쉽게 고요해질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좋은 징표다. 이 시기에는 좋은 징표가 필요한데, 메마름과 하느님 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인해 실망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고요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징표이다. 둘째로, 비록 기도가 아주 공허하게 느껴지더라도 깨어 있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 된 다는 것이다. 앞에서 처음으로 텅 빔으로 들어가기 시작 하면 우리의 기능이 둔해져서 쉽게 잠들게 된다. 나는 그 런 사람들에게 걱정 말고 그냥 자고, 잠이 깨면 기도하 라고 말해준다. 중요한 것은 지루함을 지나 보내고 텅 빈 공백에 익숙해져서 그것 때문에 지루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그것이 지나가게 내버려 둘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잠이 오면 자고 깨어있을

26

27


때 기도하면 비록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잠자지 않

쓰는 복음이 된다. 이 시기에 복음사가들은 인도자나 스

게 되며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승이라기보다는 우리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우리가 성장

것이다.

해 감에 따라 성경에 대한 감각이 변하여 전에는 다가오 지 않았던 구절들에 깊이 감동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실 제로 아무 것도 없다. 기도를 할 때 가장 큰 보속 중의

끝으로,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하 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만약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라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고 부른다면 거기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 하는 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다. 그렇게

그 외에도 유연해야 하고, 틀을 따르지 않고 사는 것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내가 오랫동안 함께

배워야 하며, 구명보트 없이 하느님이라는 바다에 떠 있

해왔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과 나는 서로 온전히 자유

는 법을 배우는 보속이 있다. 인생의 모든 구명보트는 장

롭게 되어 하느님께 완전히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애물이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 없이는 너무 불안하다면

말한다. 셋째, 내가 온전히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있는

괜찮다. 하지만 구명보트에 매달려 있는 한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단 거룩하게 되기보다 사랑하기에

바다에서 뜨는 법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다.

더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으려

하나는 얌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장은 모든 틀,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들, 익숙한 기 도의 형식 등으로 가로막힌다. 우리가 매달리고 있는 모

고 하기보다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체험을 하기 시작 했기 때문이리라.

든 것들이 우리의 유연성을 제한하고 하느님께서 일하시 는데 장애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적으로 안전함을

번역_ 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찾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아주 큰 보속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셋째로, 기도에서 아주 큰 보속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평가하려는 유혹,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틀 에 한 번씩 확인하려는 노력과 계속해서 불안해 하는 것 에 대한 저항이다. 불안감은 실제로 성장을 막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가끔 성장 은 고통스럽다. 하느님은 우리의 성장을 기뻐하시지만, 사 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위협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 지난해 3월부터 게재해 온 가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 체험하기’

이 시점에서 기도는 다섯 번째 복음, 우리 자신의 삶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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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기도하면 비록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잠자지 않

쓰는 복음이 된다. 이 시기에 복음사가들은 인도자나 스

게 되며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승이라기보다는 우리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우리가 성장

것이다.

해 감에 따라 성경에 대한 감각이 변하여 전에는 다가오 지 않았던 구절들에 깊이 감동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의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실 제로 아무 것도 없다. 기도를 할 때 가장 큰 보속 중의

끝으로,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하 느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만약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라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고 부른다면 거기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 하는 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다. 그렇게

그 외에도 유연해야 하고, 틀을 따르지 않고 사는 것을

부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내가 오랫동안 함께

배워야 하며, 구명보트 없이 하느님이라는 바다에 떠 있

해왔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과 나는 서로 온전히 자유

는 법을 배우는 보속이 있다. 인생의 모든 구명보트는 장

롭게 되어 하느님께 완전히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애물이다. 그것이 필요하고 그것 없이는 너무 불안하다면

말한다. 셋째, 내가 온전히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있는

괜찮다. 하지만 구명보트에 매달려 있는 한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일단 거룩하게 되기보다 사랑하기에

바다에서 뜨는 법을 배울 수는 없을 것이다.

더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으려

하나는 얌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성장은 모든 틀,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들, 익숙한 기 도의 형식 등으로 가로막힌다. 우리가 매달리고 있는 모

고 하기보다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체험을 하기 시작 했기 때문이리라.

든 것들이 우리의 유연성을 제한하고 하느님께서 일하시 는데 장애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적으로 안전함을

번역_ 최혜정 제노비아 / 애틀랜타 한국순교자성당

찾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아주 큰 보속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을 내려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셋째로, 기도에서 아주 큰 보속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평가하려는 유혹,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틀 에 한 번씩 확인하려는 노력과 계속해서 불안해 하는 것 에 대한 저항이다. 불안감은 실제로 성장을 막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가끔 성장 은 고통스럽다. 하느님은 우리의 성장을 기뻐하시지만, 사 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위협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 지난해 3월부터 게재해 온 가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하느님 체험하기’

이 시점에서 기도는 다섯 번째 복음, 우리 자신의 삶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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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체험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