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


아디는 아시아 곳곳의 인권침해 및 분쟁지역에서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많은 활동가와 피해자를 지원합니다.


4


p ro l o g u e 세계 3대종교의 성지이자 1400년동안 다양한 문화와 삶을 간직하고 있 는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의 분쟁으로 인해 우리에겐 테러와 폭력의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분쟁지역에서 인권평화활동을 하는 아디 는 폭력과 갈등의 프레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을 느끼기 위해 '2018 아디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을 진행하였습니다.

7명의 다양한 참가자(기자, 사진가, 다큐멘터리 감독, 활동가, 대학생, 교 사 등)들은 총 11박 13일(2018. 9. 20.~10. 2.)동안 팔레스타인의 주요 마을과 도시, 난민촌과 현지단체 사무실을 방문하고, 마을주민, 현지활동 가, 피해가족 등을 만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기를 통해 아디와 모든 참가자들은 여행중에 느낀 소감, 과 다양한 경험을 관심있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자 하고 "팔레스타인의 모 습을 제대로 전달해 달라"라는 현지친구들의 요청에 응답하려 합니다.

아디 활동가 이동화

5


이동

베들레헴

헤브론

예루살렘

라말라

파사일(요르단밸리)

6

인천 - 베이징 - 텔아비브

Ibdaa센터 방문 데이쉐 난민캠프, 분리장벽 실태조사 올리브 피해 농장 인터뷰

헤브론 올드시티 투어 유대인 불법 정착촌 H2 지역 방문

올드시티 투어 현지 활동가 인터뷰 예루살렘 주변 정착촌 상황 설명 라말라 이동 후 ‘Stop The Wall’ 대표 자말 인터뷰 BDS 운동 본부 방문 (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분리 장벽과 정착촌 사이에 위치한 가옥 방문 피해 가족 인터뷰 Fasayil 마을 방문 점령촌으로 인한 수자원 피해 현황 파악 요르단강 주변 군사 기지 인근 현장 방문 바르달라 마을 안 텐트 취침 캠프파이어

나블루스

현지 전통 음식 만들기 프로그램 참여 현지 인권단체 ‘탄위르’ 방문 요셉 박사로 부터 팔레스타인 인권현황 청취

나블루스

팔레스타인 여성연합 나불루스지부 방문 에스마트 박사 인터뷰 발라타 난민캠프 방문 세바스티야 고대 도시 투어

쿠파 카둠

쿠파 카둠 금요집회 참여 부린 마을 방문. 불법 정착촌 피해상황 청취

나블루스

나자하 대학 기념 행사 참석 에스마트 박사 인터뷰

나블루스

틸 마을 방문 올리브 피해 농가 방문 및 피해 지역 방문 텔아비브로 이동

텔아비브

휴식 및 활동 정리 밤 비행기로 이동 (텔아비브 - 베이징 - 인천)


7


Bethlehem

베들레헴

예루살렘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서안지구 도시.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의 결과 요르단이 점 령하였으나, 1967년에 6일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오슬로 평화 협정에 따라 1995년 이스 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도시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그 해 12월 21일 군대를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안보를 이유로 도시 안으로 종종 진입한다.


Dheisheh Refugee Camp 데이쉐 난민캠프

Bethlehem, West Bank 베들레헴, 서안지구

1949년 만들어진 다이쉐 난민캠프는 면적 1평방킬로미터에 16.000명의 난민들이 거주한다. 난민들은 서 예루살렘과 서헤브론의 45개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며 캠프 내에는 물과 전기, 교육 시설이 매우 부족하다.

Separation Wall 분리 장벽

Bethlehem, West Bank 베들레헴, 서안지구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 정부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테러 공격 차단을 명분으로 2002년 2월부터 요르단강 서안에 건설 중인 장벽. 이스라엘은 '보안장벽'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이를 '분리장 벽'이라고 부른다.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 참호와 감시탑에 둘러싸여 생활기반을 상실하게 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분리장벽의 적법성 여부를 가려주도록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요청했고, 2004년 7월 9일 ICJ는 분리장벽이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지나치게 침해한 것으로 국제법에 어긋나며, 철거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9


이연정 #출발 팔레스타인으로 가는길은 쉽지 않았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출국하는 새벽까지 쌓인 일들이 가로막았고, 둘째는 악명높은 이스라엘 항공의 보안검색이었다. 환승하는 베 이징에서 역시나 명성대로 10팀도 안되는 한국여행객들을 두시간이 넘도록 붙잡아 두고 모든 짐을 수색하였다. 그건 그나마 괜찮았다. 더한 것은 스토리체크라는 명목으 로 생전 처음 본 항공사 직원에게 나의 사생활을 줄줄이 말해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방문목적, 직업, 직책, 여권을 낱장으로 보면서 전에 갔던 나라는 무슨일로 갔는지 가족은 몇 명인지, 맥락도 없이 끝도 없는 질문들을 받아내고 결국 한시간이 나 늦게 출발해서 겨우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산다는 것이 팔레스타인 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한 모두의 삶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아주 조 금 맛볼수 있는 시작이었다.

#정착촌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성지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검문소. 예배 시간이 다가와서 그런건지 갑자기 사람들을 한번에 통과시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그래봤자 모스크 앞에서 다시 한번 검문을 했다. 기도시간이라 관광객은 들어갈수 없 어서 모스크를 패스하고 정착촌지역으로 이동해서 나가기로했다. 정착촌이라해도 우리가 지날 수 있는 길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역과 접해있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유 령같은 거리일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도시를 가면 이런 풍경이 펼 쳐질까? 팔레스타인 어느 곳을 가던지 사람들이 많아서 복작이던 거리를 불과 백여 미터 앞에두고 적막하고 고요한 이곳의 거리를 지나려니 많은 생각이 오갔다.

#완전무장

몇 안되는 유대인 관광객을 위해 그 몇배의 해당하는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보호 를 하며 팔레스타인 상점들이 가득한 거리를 내려온다 이후 성지를 지날 때 마다 익 숙하게 보아온 모습이다. 세바스티a야에선 권총을 허리에 찬 이스라엘 사람을 군인 이 보호하며 지나가는 걸 본적도 있다. 처음에 그 광경을 보고는 너무 놀랐다. 시청이 나 광화문 같은 곳도 아닌 우리동네 시장에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신분 증보고 사람들 살핀다고 생각해봐라. 무슨 생각이었는지 한참을 앞질러 촬영을 하였 다. 관광객인 내가 먼저 촬영하다가 얻어걸리라는 느낌으로 영상을 찍고 있는데 역시 나 나를 발견한 군인들은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것 같았다. 콩닥콩닥 심장은 쪼그라 들지만 선수치며, 나오라고 나는 다른거 찍고 있는데 너희들이 지나가서 나를 방해 하는거라고 하고 다른 앵글로 흥정하는 모습을 찍으니 확인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때 완전무장한 군인들 앞에 서는 기분이란 아무리 당당하려해도 두려웠다.

#추석 10

추석 전날 퇴거명령을 받은 베두윈마을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는 자기집


을 보여주겠다며 따라오라 했다. 아이가 데려간 곳은 바닥에 타이어만 있는 언덕이었 다. 이곳이 너의 집이냐고 다시 물었고 아이는 확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기가 나 의 집이라고 타이어를 가르켰다. 다시 자세히 보니 타이어위에 색칠을 해서 팔레스타 인 국기를 만들어 놓았다. 아이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데려간 것일까? 내 가 무엇을 할수 있을것인가? 그 언덕위에서 유목인들의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정착 촌으로 지고 있는 노을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이곳 팔레스타인에서도 밝은 보름달이 떴다. 팔레스타인과 미얀마의 로힝야에게 평화가 찾아오기를 추석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유난히 달이 밝은 날이었다.

#활동가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우리는 절대 돈이 필 요하지 않다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연대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인한 생명력 을 드러내면서도 다정하고 따듯했다. 우리나라에서 올리브올리브란 영화에도 나온 와엘은 우리가 방문하기 한달전에도 이스라엘에 잡혀갔다 나왔음에도 여전히 활발 하게 활동중이었고, 각 지역의 난민캠프에서 만난 젊은 활동가들과 자원봉사자들에 게선 저항의 열기가 여전함을 느낄수 있었다. 1차 인디파다때 이스라엘을 향해 돌을 던지던 칼리드와 자말은 최근 점령이 변화되어가는 양상을 모니터하고 대응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시간 저항해도 좋아지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운동에 대 해 쉽게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풍경에 가려진 사람들 마지막날 텔아비브 해변은 지나가는 개와 비둘기도 행복해보였다. 우리나라에 10분 의 1 크기의 작은땅 누구에겐 이스라엘이라 불리우는 팔레스타인, 그 작은 땅 어느곳 은 중동에 유럽을 옮긴듯한 여유로움이 가득하고, 한곳에선 독립과 삶을 위한 치열함 이 함께 펼쳐지는 땅. 자전거와 퀵보드가 달리는 도로, 서핑을 하기에 적당한 파도가 있는 해변, 시원한 바람과 수평선으로 떨어지는 태양, 버스킹으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흐르는 모래사장, 어두운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배구경기 이 모 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내 눈앞에 아름다운 것들이 보일 때, 이 풍경에 가리워 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는 이방인일뿐이다. 잠깐 그곳에 가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정 확하게 알수 없다. 다만 정착촌에 둘러싸인 노을진 언덕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활동가 칼리드만 뚜렷하게 사진처럼 남아있다. 나는 과연 칼리드처럼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들어갈 용기가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만 어쩐지 답을 할수 없었 다.

11


Hebron 헤브론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남부에 위치한 헤브론.  팔레스타인인 약 165,000명과 유대인 약 800명이 거주하며 이 중 유대인은 불법 정착촌에 거주한다. 13


W e s t e r n W a l l 통곡의


유대 민족의 신앙의 상징이자 전세계 유대인의 순례지인 통곡 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 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 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황금돔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15


칼란디아 검문소는 예루살렘과 서안지구 북쪽 사이에 위치하고 팔레스타인의 경우 허가증이 필요 하다. 1명씩 검문소를 통과하게 하여 아침 저녁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는 검문소 통과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Qalandia Checkpoint 칼란디아 검문소


Grassroots Movement

18


In Palestine's Office 팔레스타인 풀뿌리 저항운동 사무실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불법 점령촌과 분리장벽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운동

19


하캄의 집 라말라


분리장벽과 정착촌 사이 마지막으로 저항하고 있는 하캄의 집이다. 주변의 집들은 모두 파괴되어 추방당했다.

Haqam's House Ramallah


22


1974년 하캄씨는 라말라 북부에 있는 알-잘라준(Al-Jalazun)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난민 2세대 다. 그의 아버지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와 난민이 되었다. 1977년까 지 난민캠프에서 거주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합법적으로 땅으로 매입하여 1978년 집의 1 층을 지었다. 같은 해 이스라엘 정부 측으로부터 건축 중지와 퇴거명령을 받았으나 소송을 진행 하여 집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옥상 증축과 개조는 불허됐다. 1979년부터는 집 뒤편으 로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카라반 3-4개가 설치되었고 유대인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7년 결국, 이스라엘 정부의 승인으로 베이트 엘(Beit El) 정착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3년 부터는 정착민들이 돌을 던지며 공격을 해 차와 옥상의 태양광 전지가 파손되기도 했다. 그들의 공격은 하캄씨의 집 출입구에 분리장벽이 건설되면서 멈췄다. 하킴씨가 이야기한다. “정착촌 건설과 분리 장벽 건설로 우리는 매일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어요. 이스라엘 군인들 은 우리 땅을 몰수하고 우리를 쫓아내려고 해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하캄의 누나는 “이 집에 오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어요. 군인들에 의해 집 출입이 거부되기도 하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어요. 집에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계세요. 편찮으시면 라말라의 큰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군인들이 나가는 걸 막아서서 출발이 늦어질 때가 많아요.” 그의 9살 된 딸 마리엠에게 언제가 가장 무섭냐고 물었다. “가장 무서웠을 때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집 앞에 왔을 때와 학교에 최루탄을 발사했을 때에요.”

23


Khan Al Ahmar

칸 알 아흐마르


Bedouin's village 2018년 9월 5일 이스라엘 대법원이 아랍 유목 민족 베두인의 마을을 철거하려는 정부의 계획을 승인했다. 베두인 마을은 동예루살렘과 유대 인 대규모 정착촌 말레 아두민 사이에 있는 E1 불법 정착촌 안에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거주지 사이 국유지에 불법으로 마을이 조성됐 다면서 주민들을 12㎞ 떨어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해왔다. 하지 만 유엔(UN)과 유럽연합(EU)은 이러한 행위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반대 해왔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8개국은 이스라엘에 베두인 마을인 칸 알 아흐마르 마을의 철거 계획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현재 잠정 보류 상태다.

베두인 마을


26


북동쪽 요르단 계곡 방 예루살렘에서 향으로 차를 타고 20여분을 달리 면 칸 알 아흐마르(Khan Al Ahmar)라 는 베두인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이스 라엘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9월 23일 퇴 거 명령이 발부되었다. 인근 판잣집을 강 제로 해체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 으며 2명의 활동가가 경찰에 체포되었 다. 정착촌을 반대하는 활동가들에 따르 면 180여명이 거주하는 이 마을을 철거 하려는 이유가 Ma'ale Adumim 정착촌 과 Mishor Adumim 정착촌을 연결하는 동시에 E1정착촌을 확장하기 위해서라 고 한다. 한편, 이스라엘 정부의 철거 계 획에 대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 등 유

럽 8개국은 계획 철회를 촉구했다. 이에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철거 계획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마을에서 만난 나페사 크위스(Nafesa Khwise, 65세)여사는 말한다. “나는 여기서 오래전부터 지냈고 우리 아이를 낳고 자란 곳이에요. 어디론가 가 라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강 제 퇴거는 인근 정착촌을 짓기 위함이고, 이 결정을 한 네타냐후 총리는 나쁜 사람 이에요. 여기는 우리의 땅이고 역사에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에요. 그들은 우리 를 테러리스트라고 하지만 우리 땅을 빼 앗은 그들이 테러리스트에요. 누구도 우 리에게 여길 빼앗을 수 없어요.”

27


Fasayil Village Jordan valley

파사일 마을 요르단 밸리

28


파사일 마을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군대와 정착민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대부분이 B지역과 C지역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의한 행정 적 제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시설들이 대부분 요르단계곡 에 수자원 점령을 위해 전략적으로 거주하기에 군사시설 인근지역을 안 보지역으로 설정하여 그 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을 강제 퇴거하는 방식 을 취하고 있다.

29


Camping B a rd a l ra vi llage

캠핑 바르달라 마을

30


31


박 희수

9월 20일에서 10월 1일, 약 12일 간의 팔레스타인 여정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줬다. 여행의 초점이 사람인만큼 현지인과 팀 7명은 조화롭게 어울렸다. 언론에 나온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매우 처참했으나 언론에 나온 것만큼 그 사람들은 전혀 불쌍한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웃음과 희망, 극복, 연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언론에 나온 모습처럼 상황이 굉장히 심각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 배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집과 땅을 잃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군이 툭 하면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잡아가거나 집을 부수고 심지어 총을 쏴 사람을 죽 이기까지 한다. 나도 팔레스타인의 현 상황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검문검색 을 통과할 때 실탄총을 소지한 이스라엘군이 검사를 했고 나는 위협과 공포를 느 꼈다. 만약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면 그 공포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스 라엘의 폭력은 일상 곳곳에서까지 침투해있다. 피해지역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랑 친해지게 됐다. 아이들이 살갑게 받아주면서 노는동안 아이들이 “저기 있는 장 벽에서 이스라엘군이 서 있다가 총을 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갑자기 정착촌 방 향으로 돌을 던지면서 “우리는 이스라엘군을 볼 때 이렇게 돌을 던져요.”라고 말했 다. 나도 같이 돌을 던졌는데 그렇게 던지면 안된다고 나에게 던지는 방법까지 알 려줬다. 아이들도 인식하고 말할만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게 됐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택한 방식은 좌절이 아닌 연대와 극복의지였다. 금요집회에서 가장 크게 느꼈다. 금요집회 당시 이스라엘군은 무장해서 최루탄을 쐈지만, 현지인들이 저항한 수단은 팔레스타인 국기와 돌멩이, 타이어였다. 이스 라엘군에 비하면 굉장히 초라한 수준이고 흡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처럼 보인 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와 해방을 위해 그 초라한 것들을 들고 굳건히 저항했다. 그 모습에서 존경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게다가 내가 최루탄 연기를 쐬어 고통스러 워할 때 도와주면서 격려했다. 시위가 끝났을 때 어질러진 도로를 정리하면서 서 로 웃으면서 격려하고 박수를 보냈다. 어쩌면 그들의 저항 행위는 말한 것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하지만 나는 그 들이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현지 활동가들에게 물어봤다. 한 활동가는 ‘이러한 현실을 미래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식민 지배 속에서 누구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다른 활동가는 ‘절망 32


스러운 상황에서 서로 연대하고 웃고 돕는 게 마법과도 같은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들의 답변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이 계속해서 저항하는 원동력은 ‘더불어 살고 연대하며 진심으로 원하는 자유와 평화’였다. 게다가 이 원동력을 발판으로 주체적으로 나서서 이스라엘에 뼈아픈 반격을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BDS운동이다. BDS 운동은 이스라엘 정착촌과 직접적으로 관 련된 기업들을 대상으로 불매나 보이콧 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전 세계 여론을 이 끌어 이스라엘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며 이스라엘도 이 운동을 이란 핵위협만큼으 로 느끼고 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NGO 활동에는 단순히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현지인이 앞장서서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류도 많다.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이다. 단순한 ‘체험’ 수준으로 갔던 여행이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경험 이상의 배움과 성장을 이루어서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중한 기회 를 준 분들은 같이 여행했던 여섯 분들(캡틴 샐림, 지혜를 주신 김은아 누나, 답없 는 저와 친구가 된 이연정 누나, 많은 깨달음을 준 조진섭 형님, 어머니같은 사랑으 로 팀을 많이 조력하셨던 남은경 선생님, 나에게 많은 힘이 되고 고마웠던 이선정 누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팀원분들 답없던 저 참으시고 챙기시느라 늘 미안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만났던 많은 팔레스타인 하비비(지하드 라 만, 칼리드, 라시드, 운전기사 니달, 와엘, 나세르 등등....)들에게도 너무나도 고맙습 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정말 사람냄새나고 희망과 미래가 보이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33


요세프 박사 Dr. Yosef 경제와 법률을 전공한 그는 나자대학에서 교수 은퇴 후탄위르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Activists in Nablus 나블루스의 활동가들 Wael 와엘 나블루스 현지 활동가로 탄위르 단체를 만든 장본인.

34


Dr.Esmat 이스마트

박사

이스마트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팔레스타인 여성연합 나블루스 대표.


Balata Refugee Camp 발라타 난민 캠프

Nablus, West Bank 나블루스, 서안지구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야파지역(현 텔아비브)의 난민들에 의해 조성된 발라타 난민캠프. UNRWA(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가 운영하고 있고 초기 5000명 수용규모의 캠프였으나 현재는 31000명이 1/4 제곱킬 로미터에 거주하고 있으며 캠프 내에는 2개의 남학교와 2개의 여학교가 있다. 의료시설은 1개 뿐이며 의사는 시간당 100명에 가까운 환자를 돌보고 있다.


Sebastia 고대 청동기, 철기, 비잔틴, 로마제국의 유적지인 세바스티야는 인근에 정착촌이 있어서 이스라엘의 군인이 상주 경비를 하고 있다. 세바스티야는 유대인들의 주요 유적지이기도 해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보호 아래 관광을 온다.


세바스티아


남은경

나의 과거, 현재, 미래와 사람을 잇는 멋진 시간여행

8월 말 갑자기 아디의 팔레스타인 평화 여행을 참가 하게 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아직도 뜨거운 분쟁지역으로, 100만 이상의 난민이 발생한 폭력과 갈등의 땅이지 만 3대 종교의 성지가 있는 곳으로 평화와 공존의 가능성이 있는 팔레스타인. 예 수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NGO활동가로 첫 발을 내딛은 지 28년. 지금은 생명평 화아시아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팔레스타인의 방문은 가슴이 두근거 리는 일이다. 게다가 97년 한 달 간의 인도여행 이후 20년 만에 가는 해외여행에 다, 가족 없이 오롯이 혼자 떠나는 첫 여행이니 그 기대감이란...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사람이다. 우선은 함께 여행 한 7명을 얻었다. 몇 번의 팔레스타인의 여행 경험으로 12일 동안 팔레스타인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배우게 한 여행 인솔자 아디의 셀림.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사진이 주는 놀라움을 알게 한 진섭님, 매일의 인터뷰 일정을 영상촬영하고도 우리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밤늦게 까지 들어준 연정 님, 여행에서 가장 큰 웃음과 잔소리와 걱정과 사랑을 나눈 희수님, 아이와 사람을 너무 좋아하며 여행의 피곤함을 깨워가며 일정을 세세히 기록해준 선정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사람과의 소통을 이끌어주고, 좋은 프로그램도 알려준 은아님, 여행 회계를 맡으며 긍정적인 생각으로 여행의 활기를 넣어준 바로 나 은경까지. 함께 여행하며 엄청나게 분노하고, 슬퍼하다가도 함께 깔깔깔 웃고, 즐거워하며 지치지 않는 수다로 12일의 여행을 멋지게 마친 7명의 사람을 얻었다.

여행에서 만난 이스라엘 사람은 팔레스타인의 차량 번호판의 색깔을 달리해서 이 동을 통제하고, 검문소에서 주민증을 검사하여 출입을 통제하며, 지하수의 이용을 막기 위해 관정을 통제하고, 이스라엘 정착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팔레스타인 자 치지역 내에서 이스라엘 군인을 주둔시키고,

장벽을 설치하여, 땅과 도로의 이용을 제한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무단으로 정착촌을 만들어 지역민을 위협하는 파렴치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사람은 하나같이 친절하며, 유머가 있 고, 이스라엘이 공권력을 이용하여 위협하고, 체포 구금하여도 그것에 굴하지 않 40


고, 끝까지 저항하고, 조직하는 이들이었다. 베들레헴 난민촌의 실상과 베들레헴 장벽의 실상과 피해상황을 소개해준 지하드, 라말라에서 장벽설치반대운동과 이 스라엘제품불매운동의 국제적 연대활동을 소개 해준 자말, 칼리드, 마후무드 그리 고 발라탸 난민켐프에서 만난 마리얌과 피해지역에서 만난 주민들, 이스라엘의 물 통제로 농장의 황폐화를 알려주고 멋진 캠프파이어까지 준비해 준 요르단 밸리의 라쉬드, 4일 동안의 일정을 함께하며 나블루스의 멋진 야경과 올리브 농장의 피해 상황을 잘 알려준 탄위르의 와엘과 나세르, 팔레스타인의 여성조직 활동을 잘 소 개해준 에스매트 교수, 그들이 했던 말과 몸짓, 눈빛, 웃음을 잊지 않겠다.

팔레스타인 난민이 집으로 돌아가고, 지중해 바다에 갈 자유가 주어질 때 까지, 팔레스타인 평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 연대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평화 여행은 나의 과거, 현재, 미래와 사람을 잇는 멋진 시간여행이다.

41


Kuf r Qaddum

Friday's Demonstration

42


쿠파 카둠 마을은 나블루스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2003년 마을 인근 불법 정착촌 건설로 쿠파 카둠 마을과 나블루스를 잇는 도로를 봉쇄한 이후, 마을 사람들 중심으로 금요일 점심 기도가 끝나면 집회가 시작된다.

쿠파 카둠

수요 집회

43


44


김은아

분노가 들끓은 순간 시작된 나의 평화 여행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고 하면 쉽게들 묻습니다. ‘한국에 비해 땅 덩이가 얼마만해? 인구는 몇 명 정도야? 수도가 어디야?’ 기본적인 정보 사항에서부터 말문이 막히는 나라, 바로 팔레스타인입니다. 가자지구와 서안 지구 거주민 수만을 이야기할 것인지, 동예루살렘과 이스라엘 각지의 인구까지 합한 인 구로 이야기할 것인지 아니면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지에 퍼진 난민 인구까지 고려할 것인지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저 가볍게 질문을 건넸을 친구에게, 그 질 문에 대한 답을 위해 70년이 넘도록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서부 터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일단 직접 가보고 싶었습니다. 아디와 함께한 10박 13일의 여행에서 저는 삶 속에 침투한 점령의 실체를 봤습니다. 매일 마시고 씻는 물, 일터나 친구네 집으 로 향하는 길목, 그리고 가족 대대로 살아온 나의 뿌리와도 같은 집 모두 당장 내일 부터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그들의 삶을 봤습니다. ‘lying by omission’이라는 표 현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답변을 피하고 생략함으로서 간접적으로 거짓말을 하 는 것입니다. 텔 아비브의 호텔에 비치된 관광 안내 지도나 <타임아웃 텔 아비브> 같은 잡지를 볼 때마다 팔레스타인의 그늘은 아주 철저히, 전략적으로 배제됐습니 다. 공항 내 ‘이스라엘 특산품’ 상점에 진열된 대추야자가 어떤 땅에서 어떤 물을 먹고 자랐는지 이야기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예루살렘과 헤브론의 일터로, 병원으로, 모스크로 향하기 위해 칼란디아 검문소에 서너시간 씩 줄을 서는 팔레스타인들의 삶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30분이 면 도착할 ‘성스러운’ 예루살렘에 도달하는 것이 도전적인 하루 일과가 되버린 이 들의 무력감은 잘 회자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략적인 은폐는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고, 그래서 보고도 믿기 어려운 현실을 유지시키고 물리적, 연대적 고립 을 초래합니다.

그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꿋꿋하고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최루가스 정도는 소매로 눈물을 쓱 한번 훔치고 다시 돌멩이를 쥐어 드는 쿠파르 카둠의 아이들, 이스라엘군이 파괴한 마을을 재건하며 연대 운동을 조직하는 청년 라시드Rashid, 여러 번의 수감 생활에도 여전히 가장 순수한 미소로 ‘인터내셔널’ 들을 맞이하고 시위 현장을 이끄는 와엘Wael, 해외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뒤 다 시 자유를 옥죄는 조국으로 돌아와 교육과 액티비즘에 힘쓰는 대학 교수 이스맛 46


Esmat 등을 만났습니다. 관광지의 한 상점에서 점원이 이스라엘 상표가 붙은 플 라스틱 생수병을 건네자 BDS 에 동참하고 있으니 아랍어가 적힌 제품으로 달라고 강단있게 말하는 운전사 니달Nedal도 만났습니다.

만나기만하면 늘 환영의 커피와 차를 권하던 이들은 평화와 정의 중 무엇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내는 비극 을 다시 한번 설명해주며 당당히 연대를 제안했습니다. 추방, 사망 등의 통계에 적힌 700만명, 150만명, 60명이라는 숫자로 불리던 이 들에게도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이름과 돌아갈 순 없지만 찬란하게 빛나던 고향 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가족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할 때 마다 슬프기 보다 분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점령, 몰수, 통제라는 단어없이 올해 담근 올리브 절 임이나 최근 다녀온 이웃 나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음에 화가 치밀었 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점령 중단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원동력을 넘 어 지구상 언제, 어디에서라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 까요. 아디평화여행이 제게 준 정의로운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이번 여행이 제게 남긴 메시지이자 다음 여정의 시작점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47


Till Village 48


나블루스 북서쪽 차량으로 30분거리에 있는 마을. 마을에 사는 노만씨는 올리브 농사를 짓는다. 올 8월, 농 장 주변에 네군데 정착촌에 거주하는 50여명의 정착민들이 50여명의 군인들의 보호 아래 그의 농장에 들 어와 150여 그루의 올리브 나무에 불을 지르고 훼손했다. 현재 농장을 진입하기 위해서는 올리브 수확시 기에만 한시적으로 출입증을 발부받아 출입이 가능하고,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은 출입이 거절된다.

틸 마을 49


조진섭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되었다. 오래전부터 메시아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약속했다는 그 땅으로 갔다. 그리 긴 여정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카메라 뒤에 숨어 이미지를 구하고 기삿 거리를 찾아 기웃거리면 그만이었다. 묘한 여정이었다. 함께한 이들과 함께 만난 이들. 제각각의 사람들과 함께했고, 제각각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Y가 간다고 해서 따라갔다. 예전에 가자 지구에 가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지구의 화약고라 불리는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각자 분리 독립 에 성공한 발칸 반도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진행 중인 화약고 이스라엘이다. 인구밀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가자 지구는 몇년째 완전히 봉쇄되었고, 서 안지구는 아이들 땅따먹기하듯 좁아지고 있다. 엄청난 장벽과 불법 점령촌, 검문 소.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히틀러에게 당한 유대인들의 학습효과가 아닐까. 엄청난 장벽 안에는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자부심은 그들이 이야기를 들 음과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부러웠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믿었지만, 그 단어를 지구 반대편에서 언어가 다른 그들을 보며 생각날 줄 은 몰랐다. 카메라 뒤에 숨어 목격한 것은 그들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사랑이었다. 자말을 가진, 칼리 드를 가진, 와엘을 가진 팔레스타인이 부럽다. Y가 이야기했다. “해지는 쪽을 바라보며 우리는 걸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들은 찬란한 패배를 또 한번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게 자격이 있다면 찬란하게 패배하는 그곳의 목격자가 되고싶다. 비겁한 승리보단 찬란한 패배에 박수를 보낸다. S가 이야기했다. “찬란한 패배…. 그건 너무 슬프잖아.” 나에겐 원하는 것을 노력하 면 언젠가 꼭 가질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은 없다. S는 다시 이야기했다. “그냥 이 대로 살게 해주면 안 될까?” 동감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현실적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부로 내뱉을 수 없다. 내게 친구가 되어준 그 들을 위해 나는 그들의 찬란한 패배를 함께 할 것이다. 가해자들의 왕인 다윗이 그 러했듯, 열심히 돌은 던지면 골리앗을 이길지도 모른다. 실은, 져도 괜찮다. 내가 봤으니 괜찮다. 그들의 패배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우리는 목격했고, 그곳에 있었 다. 매주 금요일마다 그들은 패배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봤고 기록했다. 50


늘 비겁한 승자들만이 써 내려간 역사를 찬란한 패배자가 되어 써 내려가는 그들. 내가 그들을 기록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용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 만 그들의 돌팔매질은 충분히 아름답다.

2000여 년 전 신이 된 그는 사랑하라 했다. 2000여 년이 흐른 지금, 남은 것은 장 벽과 검문소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된 것인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인간은 잘못이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만든 신의 탓이다.

51


52


J a f f a 야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텔아비브는 이스라엘 말이고 원래 이름은 야파(Jaffa)이다. 우리는 야파에 갔다. 여유롭게 물놀이하며 한가롭 게 낮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인과 외국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지되어 이곳, 야파에 태양이 지고 있다. 아무리 어둠이 몰려와도 다시 태양은 뜬다. 자명한 사실이다. 팔레스타인 여행 모집의 주제는 세계평화여행이였다. 앗살라무 알라이쿰은 아랍어 인사말로서 ‘당신에게 평화를’이라는 뜻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앗살라무 알라이쿰!

53


이선정

집 근처에 산책로가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나무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산책로 에서 다시 집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 바로 옆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는 은행나무 가 존재한다.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마지막 관문인 계단은 조금 가파르고 계단 수가 많았다. 10월이면 은행잎이 노란색으로 물들어갔다. 아침에 떨어진 은행잎 을 저녁에 주워 책갈피로 쓰기도 했다. 꼬리꼬리한 은행 열매가 익어가는 내음이 나면 누구에게나 은행열매를 나누어 주었다. 때로 은행나무 밑에서 쉬기도 하고 어리광도 피우고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기도 했다. 몇 년 전 비가 적잖이 오 던 날이었다. 하늘에서는 마른 번개가 번쩍였다. 멀리서 집 주위를 바라보다 그만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무들이 있던 그 자리 그대로 한 그루씩 쓰러져있었다. 내 눈 에는 나무들이 흰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비가 와서... 내 눈에... 헛 게 보이는 건가.....으...은행나무는?...’ 미친 듯이 달려갔다. 수십 그루가... 아니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나무들이 베어져 있었다. 하늘에서 번개에 번쩍였고 눈에도 섬광이 일었다. 왜?.... 누가?.... 여기 저기를 찾았다. 드디어 아파트 주변에 플랑카드를 보았다.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주변 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우르릉 쾅 천둥소리가 났다. 가슴에서도 불꽃이 일어 나고 폭발하는 굉음과 빛이 퍼져나갔다. 은행나무를 껴안고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은행나무에게 몇 마디 더 속삭이고 저린 발 을 절뚝이며 집에 돌아왔다. 며칠 감기몸살을 앓았다. 휘청거리며 나가보니 나무 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멍하니 바라보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공사는 착착 잘도 진행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로는 확장되었다. 한 차선은 주차 장이 되어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싶을 만큼 많은 차들이 빼곡히 세워있다. 나무들 이 있던 자리 역시 산책로가 넓어졌고 돌의자와 나무 의자들 그리고 잔디밭이 조 성되고 꽃이 심어졌다. 또 다시 몇 년이 흘렀다. 팔레스타인 세계평화여행에 합류하였다. 여행 막바지 이 스라엘에 의해 올리브 농가를 피해받은 팔레스타인 분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한 대로 이동해야 해서 자유일정을 할 사람은 하고 나는 사정해서 함께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스라엘에 의해 불태워지고 절단된 올리브 농가를 보러 54


갈 수 있다고 했다. 택시로 이동하는데 번역하시 분까지 해서 모두 탈 수 없었다. 올리브 나무를 보고 싶었지만 혼자 있으면 걱정되는 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와 함 께 있기로 했다. 나중에 사진으로 올리브 농가를 보았다. 축구장만큼 드넓은 공간이었다. 찬찬히 올리브 나무를 만져보았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분들의 소중한 자산이자 역사이자 삶 그 자체이다. 올리브오일, 올리브비누 뿐만 아니라 김치가 지역마다 다양하게 절이듯이 시장에 가면 올리브를 다양하게 절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올리 브 나무는 이스라엘 군사와 점령촌 사람들에 의해 순식간에 불태워지고 잘려나갔 다. 탄위르 단체에서도 인상깊은 사진을 보았다. 전방에 올리브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할머니 위에 있는 탱크 사진이었다. 올리브 나무사진을 더듬거리자 몇 년 전 그 일이 기억 속으로 소환되었다. 이제 다시 한국이다. 일상에 치여 감기 몸살을 앓았다. 늘 그렇듯 명상을 한다. 명 상 중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불에 타버린 올리브나무들, 가지가 잘려진 올리브 나무들과 베이진 수십 그루의 나무와 은행나무가 빙 둘러 서서 함께 손을 잡고 웃 으며 춤을 추고 있다. 그 뒤에는 지중해 바다의 파도가 넘실거렸고 하늘에는 석양 이 지고 있었다. 수많은 구름에 가려있어도 지고 있는 태양은 온 세상을 영롱히 물 들였다. 그들은 나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한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 지으며 나아 간다.

55


56


e p i l o g u e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있습니다. 무관심, 편견, 무기력함, 패배의식.... 저 역시 제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직접 보고 알 수 있었습니다. CNN에서 말하는 테러리스트가 알자지라(Aljazeera)에서는 전사라고 부르고 있고 CNN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만 보여줄 때 알자리라에서는 이스라 엘이 팔레스타인 마을을 폭격하는 장면을 내보냅니다. 무관심은 CNN 방송이 보내는 장면만으로 팔레스타인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설령 실태를 봐도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이건 안돼. 어쩔 수 없어. 라고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속단하기는 이릅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시 는 여러분들의 부드럽고 강인한 힘을 느꼈습니다. 일주일 뒤면 철거당하는 마을에서 도 아이들은 우리를 향해 웃어주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알아갈수록 우리의 역 사와 비슷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 김구, 안중근, 윤봉길을 우리는 열사이 자 독립운동가라고 부르지만 일본 제국주의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렀습니다. 그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하셨을까요? “실패할 게 뻔해. 우리에게 독립은 오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시고 폭탄을 던졌을까요? 또한 우리가 독립을 이룬 것은 이 분들과 함께 역사에 남겨지지 않았지만 이름 모를 수많은 분들이 함께 염원하고 행동했기에 가능 했다고 봅니다.

제가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팔레스타인의 보도를 봤을 때 그런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세요. 우리나라에도 독립열사가 있었듯이 팔레스타인에도 많은 독립열사가 있음을 기억해주세요.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것처럼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도래할 것임을 떠올려 주세요.

긴 글 읽어주신 당신,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선 정

57


보고서 디자인 및 사진

조진섭


Profile for donghwa0912

2018 아디 팔레스타인 평화여행 여행기  

2018 9. 20.~10.2. 7명의 참가단이 만든 팔레스타인 평화여행기록

2018 아디 팔레스타인 평화여행 여행기  

2018 9. 20.~10.2. 7명의 참가단이 만든 팔레스타인 평화여행기록

Advertisement